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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2/철학

예술작품의 근원

by FraisGout 2020. 5. 28.

1 . 거기에서부터 그리고 그것에 의해 하나의 사태가 그것이 무엇인 바 그것과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는 바 그것으로 있게 되는 그러한 거기가 곧, 여기['예술작품의 근원'이라는 표제]에서 언급되고 있는 근원이라는 낱말이 지니고 있는 의미이다. 어떤 것이 무엇인 바 그것과 어떻게 존재하는 바 그것을 우리는 그 어떤 것의 본질이라 칭한다. 어떤 것의 근원이란 그 어떤 것의 본질의 유래이다. 예술작품의 근원에 대한 물음은 예술작품의 본질유래에 대해 묻는다. 통념에 따르면, 작품은 예술가의 활동에서부터 그리고 예술가의 활동에 의해 발원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에 의해 그리고 어디에서부터 예술가는 그가 그인 바 그 사람으로 존재하는가? 작품에 의해서이다. 왜냐하면 한 작품이 대가를 추켜 올린다는 말은 곧 그 작품이 비로소 예술가를 예술의 한 대가로서 출현시킨다는 것을 일컫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작품의 근원이다. 작품은 예술가의 근원이다. 하나가 다른 하나 없이는 있을 수 없다. 그렇지만 그 둘 가운데 어느 하나가 일방적으로 다른 하나를 지탱하고 있지는 않다. 예술가와 작품은 각기 그 자체로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상호관련에 있어 어떤 제 삼자에 의해서, 즉 거기에서부터 예술가와 예술작품이 제각기 자기의 고유한 이름을 갖게 되는 바로 그러한 것, 즉 예술에 의해 존재한다.

2. 작품이 예술가의 근원이듯이, 이와는 다르게 예술가도 필시 작품의 근원이며, 이와는 또 다르게 예술은 그만큼 분명 예술가와 작품 둘 다 모두의 근원이다. 그런데 과연 예술은 하나의 근원일 수가 있는가?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예술은 주어져 있는가? 예술, 그것은 아직은 거기에 아무런 현실적인 것도 더이상 상응하지 않는 그런 일개의 낱말일 뿐이다. 어쩌면 그것은, 유일하게 예술에 의해서만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바 그것을, 즉 작품과 예술가를, 우리가 그 안으로 집어 넣기 위한 일종의 집합표상으로 통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설령 예술이라는 낱말이 하나의 집합표상 그 이상을 지칭하다고 하더라도, 예술이라는 낱말로써 의미되는 것은 오직 작품과 예술가의 현실성을 바탕으로 해서만 있을 수 있다. 아니면 사태는 뒤바뀌어 놓여 있는가? 작품과 예술가는, 예술이 그것들의 근원인 한에서만, 주어져 있는 것인가?

3. 결정이 어떻게 내려지든지 간에, 예술작품의 근원에 대한 물음은 예술의 본질에 대한 물음으로 된다. 하지만 예술이 도대체 존재하는지가 열린 채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기에, 예술의 본질을 우리는, 예술이 의심의 여지없이 현실적으로 전개되는 그러한 곳에서 발견하도록 시도할 것이다. 예술은 예술-작품 속에 현성하고 있다. 그런데 예술 작품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존재하는가?

4. 예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작품에서부터 끄집어 내어질 수 있어야 한다. 작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오직 예술의 본질에서부터만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누구라도 쉽게 우리가 원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차릴 것이다. 통상적인 사고는 이러한 순환이 일종의 논리학에 대한 위반이라는 이유로, 그 순환을 피할 것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예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눈앞에 있는 예술작품들을 비교 고찰함으로써 이 예술작품들에서 추출해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고찰에서 우리가 실제로 예술작품들을 밑바탕에 놓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예술이 무엇인지를 애초부터 알고 있지 않는 한,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예술의 본질은 눈앞에 있는 예술작품들에서 여러 특징들을 주워 모은다고 해서 얻어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고차의 개념들에서부터 연역한다고 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연역 또한, 예술작품으로 우리가 간주하는 그것을 그 자체로서 우리에게 제시해 주기에 충분해야 할 그런 규정들을 애초부터 이미 시야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들로부터, 아니 오히려 눈앞의 것들에서부터 주워 모으는 작업도, 그리고 원칙들에서부터 연역적으로 도출해내는 일도 여기서는 똑같은 방식으로 불가능하며, 설령 그러한 일들이 실행된다 해도 그것은 일종의 자기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5. 그러므로 우리는 원환의 도정을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일은 그 어떤 부득이한 미봉책도 아니요 어떠한 결함도 아니다. 사유가 일종의 손작업이라는 사실을 가정해 본다면, 이러한 길에 발을 들여 놓는다는 것은 사유의 강건함이요, 이러한 길에 매달린다는 것은 사유의 확고함이다. 작품에서 예술로 향하는 주요 발걸음 및 예술에서 작품에로 향하는 발걸음만이 하나의 순환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시도하는 모든 각각의 발걸음들이 이러한 원 안에서 순환한다.

6. 예술작품 속에서 현실적으로 전개되는 예술의 본질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현실적인 작품을 찾아내어 작품이 무엇이고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작품에서 묻기로 한다.

7. 예술작품은 어느 누구에게나 낯설지 않다. 건축물과 조각품들이 공공장소에, 교회에 그리고 집 안에 설치되어 있는 것을 사람들은 발견한다. 박물관과 미술관 안에는 아주 상이한 시대와 민족들의 예술작품들이 보관되어 있다. 우리가 작품들을 현실적으로 적나라하게 바라볼 경우, 그리고 이때 우리에게 아무것도 꾸며대는 게 없을 경우, 작품들이 그밖의 다른 사물들과도 다를 바 없이 자연스럽게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림이 마치 한 자루의 사냥총이나 또는 하나의 모자처럼 벽에 걸려 있다. 한 점의 회화, 예컨대 한 켤레의 농부의 신발을 묘사한 반 고흐의 회화가 한 미술관에서 다른 미술관으로 옮겨 다닌다. 작품들은 마치 루르 지방산 석탄이나 슈바르츠발트산 목재처럼 운송된다. 출정 중에는 횔덜린의 송가가 마치 다른 병기들처럼 병사들의 배낭 속에 함께 꾸려 넣어졌다. 베토벤의 현악 사중주 곡의 악보들이 마치 지하실 속의 감자처럼 출판사 창고 안에 쌓여 있다.

8. 모든 작품들은 이러한 사물적 차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물적 차원이 없다면 그런 작품들이란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작품에 대한 이러한 매우 거칠고 피상적인 견해에 채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술작품에 대한 그러한 표상들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아마도 화물 운송업자 또는 박물관 안의 청소부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작품들을 체험하고 향유하는 사람들이 작품들을 대하는 것과 같은 식으로 그렇게 작품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평판있는 심미적 체험이라 할지라도 예술작품의 사물적 차원을 무시한 채 지나치지는 못한다. 건축작품 속에 석조가 있다. 목각작품 속에는 목조가 있다. 회화 속에는 색조가 있다. 언어작품 속에는 발설적인 것이 있다. 소리예술 속에는 음조가 있다. 예술작품 속에는 사물적 차원이 너무나 확고하게 있어서 심지어 우리는 차라리 다음과 같이 거꾸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건축작품이 돌 속에 있다. 목각작품이 나무 속에 있다. 회화가 색 속에 있다. 언어작품이 음성 속에 있다. 음악작품이 소리 속에 있다. 그것은 자명한 것이라고 사람들은 항변할 것이다. 분명히 그렇다. 그러나 예술작품에서의 이러한 자명한 사물적 차원이란 무엇인가?

9. 아마도 예술작품에서의 자명한 사물적 차원을 추적하여 묻는 일은 불필요하고 혼란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예술작품은 사물적 차원을 넘어 또 다른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작품에서의 이러한 다른 어떤 것이 예술적인 것을 이루고 있다. 더욱이 예술작품이란 일종의 제작된 사물인데, 그러나 이것은 순전한 사물 자체와는 또 다른 어떤 것, (알로 아고레우에이)를 말한다. 작품은 다른 것을 공공적으로 알린다. 즉 작품은 다른 것을 드러낸다. 작품은 비유(Allegorie)이다. 제작된 사물과 함께 또 다른 어떤 것이 예술작품 속에서 한데로 데려와진다. 한데로 데려온다 함은 그리스어로 (심발레인)이라 일컫는다. 작품은 상징(Symbol)이다.

10. 비유와 상징은, 예술작품의 식별을 위한 시각이 오랫동안 움직여 온 그 궤도의 윤곽표상을 내준다. 하지만 다른쪽을 드러내는 작품에서의 이러한 한쪽, 다른쪽을 함께 한데로 데려오는 이러한 한쪽, 그것은 곧 작품 속에서의 사물적 차원이다. 예술작품 속에서의 사물적 차원은 마치, 그 속으로 그리고 그것 위로 다른 어떤 것과 본래적인 것이 구축되어 있는 그런 하부구조(Unterbau)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예술가가 작업 중에 본디 만들어 내는 바 그것은 작품에서의 이러한 사물적 차원이 아닌가?

11. 우리는 예술작품의 직접적이고 온전한 현실성을 적중시키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오직 그렇게 해서만 우리는 작품 속에서 현실적인 예술을 또한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작품의 사물적 차원을 시야에 데려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의 사물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명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그런 다음에만, 과연 예술작품이 하나의 사물인지, 그것도 거기에 또 어떤 다른 것이 덧붙여지는 그런 사물인지가 말해질 수 있으며,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혹 작품은 근본적으로는 어떤 다른 것인지 그리고 결코 하나의 사물은 아닌가 하는 점이 결정될 수 있다.

 

 

 

 

사물과 작품

 

 

12. 사물이 하나의 사물인 한, 사물이란 진실로 무엇인가? 이와 같이 우리가 물을 때, 우리는 사물의 사물존재(사물성)에 대해 배우기를 원하는 것이다. 문제는 사물의 사물적 차원을 경험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오랫동안 사물이라는 명칭을 갖고서 거론해오고 있는 그런 존재자 모두가 속한 범위를 알아야 한다.

13. 길가의 돌과 밭 위의 흙덩이는 일종의 사물이다. 항아리와 길가의 우물은 일종의 사물이다. 그런데 항아리 속의 우유와 우물의 물의 경우는 어떠한가? 하늘의 구름과 들판의 엉겅퀴, 가을 바람에 떨리는 잎새와 숲 위를 맴도는 매가 명칭상 옳게도 사물들이라 일컬어진다면, 저 항아리 속의 우유와 우물의 물 또한 사물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야말로 사실상 사물이라 지칭되어야 마땅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앞에서 열거된 것들과 같은 식으로 그렇게는 자기를 내보이지 않는 것, 다시 말해 나타나지 않는 그런 것에다가도 사람들은 심지어 사물이라는 명칭을 갖다 붙인다. 자기를 나타내지 않는 그와 같은 하나의 사물, 즉 일종의 "물 자체"는 칸트에 따르면 예컨대, 세계 전체요, 그런 사물들은 심지어 신 자신이기도 하다. 물 자체와 그리고 나타나는 사물들, 즉 도대체 존재하는 일체의 존재자는 철학의 언어에서는 하나의 사물이라고 일컬어진다.

14. 비록 오늘날 비행기와 라디오가 가장 가까운 사물들에 속한다 해도, 만일 우리가 궁극적인 사물들을 사념할 경우, 이때 우리는 전혀 다른 것을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궁극적 사물, 그것은 곧 죽음과 심판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여기서 사물이라는 낱말은 단적으로 무가 아닌 각각의 모든 것을 지칭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 따르면 예술작품 또한, 그것이 도대체 존재하는 어떤 것인 한, 하나의 사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물개념은, 사물의 존재양식을 띤 존재자를 작품의 존재양식을 띤 존재자와 구별하여 경계짓고자 하는 우리의 의도에 있어서는, 적어도 직접적으로는 아무런 도움도 못 된다. 그밖에도 우리는 신을 하나의 사물이라고 일컫기를 거듭 망설인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들판 위의 농부를, 증기기관 앞의 화부를, 학교 안의 선생님을 하나의 사물로 여기기를 망설인다. 인간은 결코 사물이 아니다. 우리가 설령 과중한 숙제에 눌려 있는 한 어린 소녀를 보고 '아직 너무 어린 것(Ding)'이라고 부르기는 해도, 그건 단지, 여기에 인간존재가 없음을 우리가 특정한 방식으로 아쉬워한 나머지 차라리 사물의 사물적 차원을 이루고 있는 바 그것을 발견한다고 우리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숲 속 공터에 있는 노루, 풀 숲의 딱정벌레, 풀 줄기까지도 우리는 하나의 사물이라고 이름부르기를 주저한다. 우리에게는 망치와 구두, 손도끼 그리고 시계 따위가 오히려 하나의 사물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일종의 순전한 사물은 아니다. 우리가 일종의 순전한 사물이라고 우리가 여기는 것은 다만 돌, 흙덩이, 하나의 나무토막 등이다. 자연의 생명이 없는 것과 그리고 사용되는 것의 생명이 없는 것, 즉 자연사물과 사용사물이 곧 통상적으로 그렇게 지칭되는 사물들이다.

15. 이와 같이 모든 것이 하나의 사물로 통하는 (Ding = res = ens = ein Seiendes) 그런 가장 넓은 영역에서부터 우리는, 그리에로 순전한 사물들의 좁은 구역이 되돌려 데려와지는 그런 최고이며 궁극적인 사물들까지도 보고 있는 것이다. "순전한"(blo )이라는 말은 여기서는 일단 다음을 의미한다 : 단순히 사물일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닌 그런 순수한 사물. "순전한"이라는 말은 이와 동시에 다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 거의 경멸적이나 다름없는 의미에서 그저 겨우 사물인 것. 심지어 사용사물까지도 배제된 그러한 순전한 사물들이 본래적인 사물들로서 간주된다. 이제 이러한 사물들의 사물적 차원은 어디에 성립하는가? 그러한 순전한 사물들에서부터 사물의 사물성(Dingheit)이 규정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물의 사물성의 규정은 우리로 하여금 사물적 차원 그 자체를 특징지을 수 있도록 해 준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거기에 또 어떤 다른 것이 숨어 있는 그런 작품의 거의 구체적인 현실성을 특징지을 수 있을 준비를 갖추게 된다.

16. 이제 잘 알려진 사실로서 통용되는 것은, 이미 고대로부터 존재자가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 제기되자마자 사물들이 그 사물성에 있어서 표준적인 존재자로서 항상 거듭 전면으로 대두되곤 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좇아 우리는 존재자에 대한 전승된 해석들 속에서 미리 사물들의 사물성에 대한 경계구분을 접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가 사물의 사물적 차원을 독자적으로 찾아 나서는 헛된 노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는 사물에 대한 이러한 전수된 앎만을 명시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물이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들은, 사람들이 그 배후에서 물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아무것도 더이상 추정해내지 않고 있다는 식으로, 익숙해져버리고 말았다.

17. 서양 사유의 진행 속에서 지배적으로 오랫동안 자명하게 되어버렸고 오늘날에 와서는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사물의 사물성에 대한 그러한 해석들은 세 가지로 총괄될 수 있겠다.

18. 하나의 순전한 사물에 대한 예로서 다음과 같은 화강암 덩어리가 있다. 그것은 단단하고 무겁고 연장되어 있고 묵직하고 울퉁불퉁하고 거칠고 다채롭고 부분적으로는 뿌옇고 부분적으로는 광택이 난다. 이렇게 열거된 것 모두를 우리는 그 돌을 보고 식별해낼 수 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그 돌의 특성들을 지식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그러한 특성들이 의미하는 것은 그 돌 자체에 특유한 바 그것이다. 그 특성들이란 곧 그 돌의 속성들이다. 사물들은 속성들을 지니고 있다. 사물이라고? 지금 우리가 사물을 생각할 때 우리는 무엇을 사유하고 있는가? 명백히 사물은, 특성들을 모아놓은 것만도 아니고 또한 속성들을 모아서 쌓아 놓아 이로써 결집이 비로소 생겨나게되는 그런 것도 아니다. 사물이란, 어느 누구도 그렇게 알고 있다고 믿고 있듯이, 그 둘레에 속성들이 모여 있는 그런 것이다. 그러하다면 이때 사람들은 사물의 핵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스인들은 이것을 (토 히포케이메논)이라고 불렀어야 했다. 사물의 이러한 핵심적 차원은 그리스인들에게는 물론, '밑바탕에 그리고 항상 이미 눈앞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특성들은 그러나 (타 심베베코타)라 일컬어지는데, 그것은 곧, '그때그때마다 눈앞에 놓여 있는 것에 또한 항상 이미 붙어서 거기서 함께 나타나오는 바 그것'이다.

19. 이러한 명명들은 결코 임의적인 명칭들이 아니다. 그러한 명칭들에서는 여기서는 더이상 내보여져 있지 않은 그것, 즉 현전성이라는 의미에서의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근본경험이 이야기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들에 의해 사물의 사물성에 대한 그 이후의 표준적인 해석이 근거지어지게 되며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서양의 해석이 확정지어지게 된다. 이러한 해석은 그리스 단어들이 로마적-라틴적 사유 안으로 건네어 받아들여지면서부터 시작된다. (히포케이메논)subiectum(숩옉툼)으로 된다. (히포스타시스)substantia(숩스탄씨아)로 되고, (심베베코스)accidens(악씨덴스)로 된다. 이렇게 그리스 명칭들이 라틴어로 번역된 것은 결코, 아직 오늘날까지도 그런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그런 사소한 사건이 아니다. 도리어 외관상 축자적인 것으로 보이는, 그러니까 보존적인 것으로 보이는, 그러한 번역의 배후에는 그리스인의 경험이 하나의 다른 사유양식에로 옮겨 놓여짐이 은닉되어 있다. 로마인의 사유는 그리스 단어들이 말하고 있는 바 그것에 상응하는 동일근원적인 경험이 없이, 즉 그리스 낱말이 없이, 단지 그리스 단어들만을 건네받고 있을 뿐이다. 서양사유의 기반 상실성은 이러한 번역과 더불어 시작된다.

20. 사물의 사물성을 우유성들을 가진 실체로서 규정하는 일은, 익숙한 견해에 따를 경우, 사물에 대한 우리의 자연적인 시각에 적합한 것같이 보인다. 사물들과의 익숙한 행동관계, 즉 사물들에 대해 거론하고 사물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이 사물에 대한 저 통상적인 견해에 맞추어졌다는 사실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단순한 발언문장은, (히포케이메논)에 대한 라틴어 번역 -- 그것은 이미 변경된 해석을 일컫는다 -- 인 주어(주체, Subjekt)와 그리고, 그 안에서 사물로부터 특징들이 발언되는 그러한 술어에서부터 성립하고 있다. 어느 누가 과연 이러한 사물과 문장 사이의, 문장구조와 사물구조 사이의 단순한 근본연관들을 뒤흔들어 놓는 일을 감행하고자 하겠는가? 그럼에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 단순한 발언문장의 구조(주어와 술어의 연결)가 과연 사물의 구조(실체와 우유성의 합일)의 반사된 상이란 말인가? 아니면 그런 식으로 표상된 사물의 구조조차도 문장의 골격에 따라 투사되어 있단 말인가?

21. 인간이 발언에서 사물을 파악하는 방식을 사물 자체의 구조 위에다 옮겨 나른다는 사실보다도 더 자명한 사실은 무엇인가? 하지만 겉보기에는 비판적이면서도 그러나 꽤 성급한 이러한 생각이 미리 납득시켜 주지 않으면 안 될 점은, 어떻게 이러한 문장구조를 사물구조 위에다 옮겨 나르는 일이 사물이 이미 드러나게 되지 않고서도 가능하냐 하는 것이다. 문장구조와 사물구조 중에 어느 것이 일차적인 것이고 표준적인 것인가 하는 물음은 지금 이 시점에서는 결정나 있지 않다. 더욱이 물음이 과연 이러한 형태로 도대체 결정날 수 있을지가 의문으로 남는다.

22. 근본적으로는, 문장구조가 사물구조의 투사에 대해 결코 표준을 부여하지 않으며, 이 사물구조가 저 문장구조 속에서 단순히 반영되지도 않는다. 문장구조와 사물구조 이 양자는 그 둘의 유형과 그 둘 사이의 가능한 상호연관에 있어 하나의 공통적이고 더 근원적인 원천에서부터 발원한다. 어쨌든 사물의 사물성에 대해 맨 먼저 언급된 해석, 즉 특성들의 담지자로서의 사물은 그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그 해석이 행하는 것처럼 그렇게 자연적이지는 못하다. 우리에게 자연적으로 나타나오는 바 그것은 추정컨대 단지 오랜 습성에 의해서 길들여진 것일 뿐이며, 그러한 습성은, 이러한 습성이 발원해 나온 저 비습성적인 것을 망각해 버린 상태에 있다. 그렇지만 저 비습성적인 것은 한때는 일종의 낯선 것으로서 인간들을 엄습했었고 사유를 놀라움으로 데려 갔었다.

23. 익숙한 사물해석에 대한 확고한 기대는 그저 피상적으로만 근거제시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밖에도 이러한 사물개념(특성들의 담지자로서의 사물)은 순전하고 본래적인 사물에만 적용되기보다는 오히려 각각의 모든 존재자에 다 적용된다. 그렇기에 그 개념의 도움으로는 사물적인 존재자가 사물적이지 않은 존재자로부터 결코 두드러지게 부각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물들 주변에 깨어 있는 체류'가 모든 숙고에 앞서 이미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 주고 있다. 즉 이러한 사물개념은 사물의 사물적 차원을, 즉 저 '자생적인 것'(Eigenw chsige)'자기 안에 머무르는 것'(Insichruhende), 적중시키고 있지 못하다고. 아직도 가끔 우리는 다음과 같은 느낌(Gef hl)을 갖는다. 즉 오래 전부터 이미 사물의 사물적 차원에 폭력이 가해져 왔으며 그리고, 이러한 횡포에 사유가 관여하고 있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사유가 더욱 더 사유적으로 되도록 하기 위해 애쓰지 않고 그대신 사유를 끊어버릴 것을 다짐하고 있다는 그런 느낌 말이다. 그러나 유일하게 사유만이 결정권을 쥐도록 허용되어 있다면, 이 경우 사물에 대한 본질규정에 있어 훨씬 더 확실한 느낌은 무엇이야 한단 말인가? 그래도 어쩌면 우리가 여기서 그리고 이와 비슷한 경우에 느낌 또는 기분(Stimmung)이라 부르는 바 그것이 더 이성적(vern nftiger)인지도, 즉 더 인지적(vernehmender)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이성보다도 존재에 대해 더 열려 있기 때문인데, 이성은 그동안 ratio(라씨오)로 되면서 합리적인 것으로 오해되어버리고 말았다. 이 경우에, 사유되지 아니한 합리적인 것이 낳은 기형아로서 비-합리적인 것(Ir-rationalen) 쪽으로 몰래 눈길을 보냄이 기묘하게도 도움이 됨직도 하다. 그렇지만 익숙한 사물개념이 어느 때이건 각각의 사물들 모두에 들어 맞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개념은 사물을 붙잡으려고 손을 뻗침에 있어, 현성하는[본질적으로 있는] 사물을 파악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덮친다.

24. 그러한 덮침은 어쩌면 피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분명 그러한 덮침은 오직 다음과 같은 식으로만 피해질 수 있다. , 사물이 자기의 사물적 차원을 직접적으로 내보일 수 있도록 우리가 그 사물에게 흡사 하나의 자유로운 장(Feld)을 보장해 주는 식으로 말이다. 사물에 대한 견해와 발언에 있어 사물과 우리 사이에 끼어들 수 있음직한 그 모든 것이 미리 치워져야 한다. 그러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는 잘못 놓여 있지 않은 사물의 현전에 우리 자신을 내맡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매개없이 사물과 만나게 해줌을 우리 측에서 비로소 요구할 필요는 없으며, 더욱이 그것을 우리 측에서 마련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벌써 오래 전부터 일어나고 있다. 시각, 청각 그리고 촉각이 전달하는 바 그것에 있어서, 즉 색조, 울림, 껄끄러움, 딱딱함과 같은 감각들에서 사물들은, 전적으로 문자 그대로 이해하건대, 우리의 신체에 다가 온다. 사물이란 (아이스테톤)이다. 그것은 감각들을 통해 감성의 감관들 속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이에 따라 나중에 다음과 같은 개념이 통례화되는데, 이 개념에 따르면 사물이란 감관 속으로 주어진 것의 한 다양성의 통일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이러한 통일이 과연 총합으로서 파악되는지 아니면 전체성으로서 혹은 형태로서 파악되는지는 이러한 사물개념의 결정적인 특징에서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

25. 이제 사물의 사물성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이보다 앞서 행해진 해석과 마찬가지로 어느 때나 올바르며 입증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이미 그 해석의 진리를 의심해 보기에 충분하다. 만일 우리가 찾고 있는 바 그것, 즉 사물의 사물적 차원을 온전히 고려해 본다면, 이 사물개념은 다시금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 것이다. 결코 우리는, 그 개념이 꾸며대는 것처럼, 그렇게 사물들의 나타남 속에서 예컨대 울림이라든가 소음과 같은 감각들의 쇄도를 우선적으로 그리고 본디 청취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굴뚝에서 내뿜는 기적 소리를 들으며, 세발 엔진의 비행기 소리를 들으며, 아들러 승용차의 소리와 직접 구별해서 메르체데스 승용차의 소리를 듣는다. 일체의 감각들보다는 사물들 자체가 우리에게는 훨씬 더 가깝다. 우리가 듣는 것은 집안에서 문이 덜커덕거리는 소리이지 결코 음향적인 감각들이나 또는 그저 순전한 소음도 아니다. 순수한 소음을 듣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사물들로부터 떨어져서 소리를 들어야 한다. 즉 우리는 우리의 귀를 사물들로부터 떼내어, 다시 말해 추상해서 들어야 하는 것이다.

26. 지금 언급된 사물개념에는 사물에 대한 덮침이 놓여 있기는 커녕, 오히려 사물을 우리와의 최대의 가능한 직접성에로 데려오려는 과도하게 고조된 시도가 놓여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감각에 맞게 받아들여진 것을 사물의 사물적 차원으로서 그 사물에 대해 지정하는 한, 하나의 사물은 결코 저 직접성에 이르지 못한다. 사물에 대한 첫번째 해석이 사물을 마치 우리의 신체로부터 격리시켜 그것을 우리의 신체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뜨려 놓는 반면에, 사물에 대한 두번째 해석은 사물을 우리의 신체에 너무 가깝게 밀착시킨다. 이 두 해석들에서 사물은 사라져 버린다. 아마도 그 두 해석들의 과도함을 피하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사물 자체는 그것의 '자기 안에 머무름'(Insichruhen)에 있어 그대로 놔두어져야 한다. 사물은 그것의 고유한 완강함(Standhaftigkeit)에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러한 일은 마치 세번째 해석이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해석은 처음에 언급됐던 다른 두 해석들과 마찬가지로 고대에 처음으로 지칭된 것이다.

27. 사물들에게 그 지속적인 것과 핵심적인 것을 내주는 것이자 동시에 사물들의 감각적 쇄도의 양식인 색조, 울림, 딱딱함, 묵직함까지도 야기시키는 바 그것은, 곧 사물들의 질료적인 것이다. 사물을 이렇게 질료( , 흴레)로서 규정함에 있어서 이미 형상( , 모르페)이 함께 정립되어 있다. 한 사물의 지속적인 것, 즉 안정성(Konsistenz), 한 질료가 한 형상과 결속하고 있다는 사실에 성립한다. 사물이란 일종의 형상지어진 질료이다. 사물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사물이 그것과 더불어 그 보임새( , 에이도스)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러한 직접적인 모습(Anblick)을 증거로 끌어들인다. 질료와 형상의 종합과 더불어 마침내, 자연사물들과 사용사물들에 똑같이 잘 드러맞는 사물개념이 발견됐다.

28. 이 사물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예술작품에서의 사물적 차원에 대한 물음에 대답할 수 있도록 만든다. 작품에서의 사물적 차원은 주지하다시피, 그것으로 작품이 이루어져 있는 질료이다. 질료란 예술가가 형상을 부여하기 위한 밑받침이며 장(Feld)이다. 그런데 이렇게 명백하면서 잘 알려진 확정을 우리는 즉각 제출할 수도 있었다. 무슨 의도로 우리는 이것 말고 다른 현행 사물개념들을 경유하는 그런 에움길을 돌아서 오는가? 그 까닭은, 사물을 형상지어진 질료로서 표상하는 이러한 사물의 개념도 우리는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9. 그러나 바로 이러한 질료-형상이라는 개념쌍이 우리가 움직여야 할 그러한 영역 내에서 통용되고 있지 않는가? 물론 그렇다. 질료와 형상의 구별, 그것도 온갖 다양한 변종들에 있어서, 그러한 구별은 모든 예술이론들과 미학을 위한 단적인 개념도식이다. 이러한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은 그러나, 질료와 형상의 구별이 충분히 근거제시되어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지도 않으며, 그 구별이 근원적으로는 예술과 예술작품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지도 않다. 그뿐만 아니라 이러한 개념쌍이 효력을 미치는 영역도 오래 전부터 이미 미학의 분야를 훨씬 넘어서 손을 뻗치고 있다. 형식과 내용은, 그 아래로 모든 것과 개개의 것이 데려와질 수 있는 그런 범세계적 개념들이다. 게다가 만일 형상이 합리적인 것에 귀속되고 비-합리적인 것에는 질료가 귀속된다고 한다면, 만일 사람들이 합리적인 것을 논리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비합리적인 것은 비논리적인 것으로 간주한다고 한다면, 만일 형상-질료 개념쌍에다 주체-객체 연관이 또 결합된다고 한다면, 이때 표상은 그것에 아무것도 거역할 수 없는 일종의 그런 개념역학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셈이 된다.

30. 그러나 질료와 형상의 구별에 있어 사정이 그러하다면, 어떻게 우리는 또한 그 구별의 도움을 빌려 순전한 사물들의 특별한 영역을 그 나머지 존재자들과 구별해서 파악해내야 한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료와 형상에 의거한 이러한 특징지음은, 만일 우리가 이러한 개념들의 확장과 공백만이라도 메꾼다면, 아마도 그 규정효력을 되찾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 이러한 일은, 그 개념들이 존재자의 어떤 구역 내에서 그것들의 참된 규정효력을 충족시키는지를 우리가 아는 것을 전제로 한다. 존재자의 그러한 구역이 순전한 사물들의 영역이라는 것은 지금까지는 단지 하나의 가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개념 결합틀이 미학 내에서 풍부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언급함으로써 차라리 다음과 같은 사상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질료와 형상은 예술작품의 본질에 대한 전래된 규정들이며 또한 거기에서부터 비로소 사물에 역으로 옮겨적용되었다고 하는 사상 말이다. 질료-형상-결합틀은 그 근원을 어디에서 갖는가? 사물의 사물적 차원에서인가 아니면 예술작품의 작품적 차원에서인가?

31. 자기 안에 머무르는 화강암은 하나의 규정된 그러나 반듯하지 않은 형상을 취하고 있는 질료적인 것이다. 형상이란 여기서, 하나의 특별한 윤곽, 즉 한 덩어리의 윤곽을 그 결과로 갖는 질료 부분들의 공간적인 장소적 분산과 배치를 의미한다. 그러나 한 형상 안에 놓여 있는 질료는 또한 항아리요, 도끼요 신발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는 한 질료분산의 결과가 비로소 윤곽으로서의 형상이 되는 게 아니다. 거꾸로 형상이 질료의 배치를 규정한다. 이 뿐만이 아니다. 형상은 심지어 다음과 같이 질료의 그때마다의 종류와 선택까지도 앞서 지시해 보인다 : 항아리를 위해서는 불투과적인 것, 도끼를 위해서는 충분히 단단한 것, 신발을 위해서는 질기면서 동시에 유연한 것. 여기서 전개되고 있는 형상과 질료의 얽힌 관련은 더 나아가 애초부터, 항아리, 도끼, 신발이 그것을 위해 쓰이는 바 그것에서부터 조정되어 있다. 그러한 용도(Dienlichkeit)는 항아리, 도끼, 신발의 양식을 띤 존재자에 결코 추후적으로 지정되지도 얹혀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용도는 그런 존재자 너머 어디에선가 목적으로서 둥둥 떠다니는 어떤 것도 아니다.

32. 용도란, 그것으로부터 이러한 존재자가 우리에게 일견되고, 다시 말해 번득거리고 이로써 이 존재자가 현전하며 그래서 이 존재자가 도대체 존재하게 되는 그러한 근본특징이다. 그러한 용도에는 형상부여가 근거할 뿐만 아니라 또한 형상부여를 통해 정해진 질료선택과 이로써 질료와 형상의 결합틀의 지배가 근거한다. 그러한 지배 아래 종속되어 있는 존재자는 항상 일종의 제작의 산물(Erzeugnis)이다. 산물은 어떤 것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서 제작완료된다. 따라서 존재자에 대한 규정들로서 질료와 형상은 도구(Zeug)의 본질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도구라는] 명칭은 특별히 사용과 쓰임을 위해 제작된 것(Hergestelltes)을 지칭한다. 질료와 형상은 결코 순전한 사물의 사물성에 대한 근원적인 규정들이 아니다.

33. 도구, 예컨대 신발도구는 제작완료된 것으로서 마치 순전한 사물처럼 자기 안에 머물러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화강암처럼 저 '자생적인 것'(Eigenw chsiges)은 지니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도구는, 그것이 일종의 인간의 손에 의해서 산출된 것인 한, 예술작품과의 한 근친성을 내보인다. 그에 반해 예술작품은 그것의 자족적인 현전(selbstgen gsames Anwesen)에 의해 오히려 다시 '자생적인' 그리고 '아무것에로도 강요되지 않는'(zu nichts gedr ngten) 순전한 사물과 비슷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작품들을 순전한 사물들에 산정해 넣지 않는다. 보통 우리 주위의 사용사물들이 가장 가깝고도 본래적인 사물들이다. 이와같이 도구는 그것이 사물성(Dinglichkeit)에 의해 규정되는 까닭에 절반은 사물이긴 하나 그럼에도 그 이상이며, 이와 동시에 도구는 절반은 예술작품이면서도, 도구에는 예술작품의 자족성이 없는 까닭에, 그 이하이다. 그러한 일종의 열거하는 배열이 허락된다고 할 경우, 도구는 사물과 작품 사이의 한 독특한 중간 위치를 점하고 있다.

34. 그러나 질료-형상-결합틀 -- 이것에 의해 우선 도구의 존재가 규정된다 -- 은 각각의 모든 존재자의 직접적으로 이해가능한 구성틀로서 쉽게 내주어진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제작하는 인간 자신이 거기에, 즉 도구가 존재 안으로 나오는 방식에, 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구가 순전한 사물과 작품 사이의 한 중간 위치를 점하는 한, 도구존재(질료-형상-결합틀)의 도움을 빌어 도구적이지 않은 존재자, 즉 사물들과 작품들 그리고 결국에는 모든 존재자까지도 개념파악하는 일이 암시되고 있다.

35. 질료-형상-결합틀을 각각의 모든 존재자의 구성틀을 위해 견지하려는 경향은 그런데도 다음과 같은 사실에 의해 또 하나의 특별한 동기를 받아들인다. , 애초부터 하나의 신앙, 즉 성서적 신앙을 바탕으로 해서 존재자 전체가 창조된 것으로서, 다시 말해 여기서는 제작된 것으로서 표상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신앙의 철학은 신의 모든 창조적 작용이 수공업자의 활동과는 다르게 표상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확신시켜줄 수는 있다. 그렇지만 만일 동시에 또는 아예 애초부터 성서해석을 위한 토마스 철학의,신앙에 바탕을 둔 앞선 규정에 좇아 창조된 존재물(ens creatum)이 질료(materia)와 형상(forma)의 통일에서부터 사유되고 있다고 한다면, 이때 신앙은 일종의 철학에서부터 해석되고 있는 셈인데, 이 철학이란 그 진리가 존재자의 비은폐성에 기인하는 그러한 철학이며, 이러한 진리는 신앙에 바탕을 둔 세계와는 다른 양식을 띠고 있다.

36. 신앙에 바탕을 둔 창조사상은 이제 전체로서의 존재자에 대한 앎을 위한 주도권마저도 상실해버릴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낯선 철학으로부터 빌려와서 일단 단초잡혀진 모든 존재자에 대한 신학적 해석, 즉 질료와 형상에 따른 세계의 직관만은 그래도 남아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일은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가운데 일어난다. 근세의 형이상학은, 중세적으로 각인된 형상-질료-결합틀에 함께 기인하는데, 이러한 형상-질료-결합틀 그 자체는 (에이도스)(흴레)의 파묻혀 버린 본질을 단어들 속에서만 겨우 상기해낼 뿐이다. 이렇게 해서 질료와 형상에 따른 사물에 대한 해석은, 그것이 중세적으로 남든, 아니면 칸트적-초월론적으로 되든지 간에, 익숙하고 자명하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저 해석은 사물의 사물성에 대해 언급된 다른 해석들에 못지않게 사물의 사물존재에 대한 한 덮침( berfall)인 셈이다.

37. 우리가 본래적인 사물들을 순전한(blo ) 사물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사이에 이미 사태의 정황이 엿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순전한"(blo )이라는 말은, 용도와 제작의 성격을 '벗겨냄'(Entbl ung)을 의미한다. 순전한 사물은 도구의 한 양식이다. 비록 그것이 그 도구존재가 제거된 그런 도구라 하더라도 말이다. 사물존재는 도구존재가 제거되고 난 뒤에도 여전히 잔류하고 있는 바 그것 속에 존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잔류물(Rest)은 그것의 존재성격에 있어 제대로 규정되어 있지 않다. 일체의 도구적 차원을 빼내버리는 길 위에서 과연 사물의 사물적 차원이 언젠가는 나타나게 될 것인지가 의문으로 남는다. 이와 같이 질료-형상-결합틀을 실마리로 삼는 사물해석의 세 번째 방식 또한 사물에 대한 한 덮침으로서 판명된다.

38. 사물성을 규정하는 세 가지 거명된 방식들은 사물을 특성들의 담지자로서, 감각다양성의 통일로서, 형상지어진 질료로서 개념파악한다. 존재자에 대한 진리 역사의 진행 속에서 저 언급된 해석들은, 지금은 간과되고 있는지 모르지만, 서로서로 더욱 긴밀하게 결합되어 왔다. 이러한 결합 속에서 그 해석들은 그 해석들 안에 이미 마련되어 있는 확장을 더욱 강화해 왔기 때문에, 그 해석들은 사물과 도구와 작품에 똑같은 방식으로 적용된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그것에 의거하여 사물, 도구 그리고 작품에 대해 특별하게 사유하기보다는 오히려 모든 존재자에 대해 일반적으로 사유하는 그런 사유방식들이 저 사물해석들에서부터 자라나온다. 오랫동안 익숙해져버린 이러한 사유방식은 존재자에 대한 모든 직접적인 경험을 앞서 붙잡는다(vorgreifen). 이러한 앞서 잡음은 각각의 모든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숙고를 붙들어 저지한다. 이렇게 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나타난다. , 지배적인 사물개념들은 사물의 사물적 차원에 이르는 길뿐만 아니라 도구의 도구적 차원에 이르는 길 그리고 비로소 올바르게 작품의 작품적 차원에 이르는 길을 우리에게서 차단해 버린다.

39. 이와 같은 사실이야말로, 무엇 때문에 이러한 사물개념들을 앎으로써 이러한 앎 속에서 그 개념들의 유래와 무제약적인 월권과 심지어 그 개념들의 자명성의 가상까지도 숙고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데 대한 이유인 것이다. 이러한 앎은, 우리가 사물의 사물적 차원과 도구의 도구적 차원 그리고 작품의 작품적 차원을 시야와 낱말에로 가져오려는 시도를 감행할 때 더욱 절실해진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오직 한 가지만이 필요한데, 그것은 저 사유방식들의 앞서잡음(Vorgriff)과 덮쳐잡음( bergriff)을 멀리하여 사물을 예컨대 그 사물존재에 있어 그 자체로 내버려 두는 일이다. 존재자를 단지 그것인 바 그러한 존재자로 존재케 해주는 일보다 더 쉬워 보이는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아니면 우리는 이러한 과제와 더불어 가장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는가? 특히 존재자를 그것이 존재하는 그대로 존재하게 해주는 그러한 '앞서가짐'(Vorhabe), 어떤 검토되지 않은 존재개념을 위해 존재자로부터 등을 돌리는 그런 저 무관심에 대해 반대를 표명할 때 말이다. 우리는 존재자에로 향해야 하고 그 존재자 자체에서 그것의 존재에 대해 사유해야 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존재자를 그것의 본질에 있어 그 자체로 내버려 두어야 한다.

40. 사유의 이와 같은 노력은 사물의 사물성을 규정하는 데에서 가장 커다란 저항을 발견하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저 언급된 시도들의 실패는 그밖에 달리 어디에 그 이유를 갖는단 말인가? 눈에 띄지 않는 사물은 끈질기게 사유로부터 벗어난다. 아니면, 순전한 사물의 이러한 '스스로를 삼가하고 있음'(Sichzur ckhalten), 이러한 '자기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아무것에로도 강요되어 있지 않음'(in sich beruhendes Zunichtsgedr ngtsein)이 다름아닌 바로 사물에 속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저 낯선 것(Befremdes)과 그리고 사물의 본질 안에 '닫혀 있는 것'(Verschlossenes)은 사물을 사유하려고 시도하는 그런 사유에게는 친숙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사정이 그렇다면, 이때 우리는 사물의 사물적 차원에 이르는 길을 억지로 강행해서는 안 된다.

41. 사물의 사물성이 유별나게 말해지기가 어렵고 좀처럼 말해질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한 가지 틀림없는 전거가 곧, 이미 암시됐던 사물의 사물성에 대한 해석의 역사이다. 이러한 역사가 부합하는 운명이란, 그것에 따라 서양의 사유가 지금까지 존재자의 존재를 사유해 온 그러한 운명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러한 사실을 단지 확인만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에서 동시에 하나의 눈짓을 받아들인다. 사물해석 가운데 질료와 형상을 실마리로 하여 발생한 해석이 하나의 특별한 우세를 획득했다는 사실은 과연 우연인가? 이러한 사물규정은 도구의 도구존재에 대한 하나의 해석에서부터 유래한다. 이러한 존재자, 즉 도구가 특별한 방식으로 인간의 표상에 가깝다. 왜냐하면 도구는 우리의 고유한 제작행위에 의해 존재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그 존재에 있어 친숙한 존재자, 즉 도구는 동시에 사물과 작품 사이의 한 독특한 중간 위치를 갖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눈짓을 좇아 우선 도구의 도구적 차원을 찾아보기로 한다. 어쩌면 거기로부터 사물의 사물적 차원과 작품의 작품적 차원에 대한 어떤 것이 우리에게 피어오를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사물과 작품을 성급히 도구의 변종으로 만드는 일만은 피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직 도구로 존재하는 방식 속에서나마 본질역사적인 구별들이 전개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은 도외시하기로 한다.

 

 

42.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길이 도구의 도구적 차원에로 이끄는가? 우리는 도구가 진실로 무엇인 바 그것을 어떻게 경험해야 하는가? 지금 필요한 진행은 반드시, 통상적인 해석들에 의한 덮쳐잡음을 즉각 다시금 수반하는 저 시도로부터 분명히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러한 시도에 대해 우리가 가장 잘 안전을 보장받게 되는 경우는, 우리가 하나의 도구를 어떠한 철학적 이론 없이 단순히 서술할 때이다.

43. 우리는 예로서 하나의 통상적인 도구, 즉 한 켤레의 신발도구를 선택하기로 한다. 그것을 서술하기 위해 실지로 이러한 사용도구의 양식을 띤 현실적인 몇 켤레의 견본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신발도구에 대해 모르고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도 일종의 직접적인 서술이 문제가 되고 있기에 쉽게 예를 들어 보여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러한 도움이 되기 위해서라면 일종의 그림적 서술(eine bildliche Darstellung)로도 충분하다. 이러한 그림적 서술을 위해 우리는 신발도구를 여러 번 그린 적이 있는 반 고흐(Van Gogh)의 잘 알려진 회화 한 점을 선택해 보기로 한다. 그런데 그 회화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신발에 무엇이 속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것이 꼭 나무나 인피(靭皮)로 된 신발이 아니라면, 거기에서는 가죽으로 된 밑창과 윗 가죽이 발견되는데, 그 둘은 실과 못으로 서로 꿰메어져 있다. 그와 같은 도구는 발을 감싸는 데에 쓰인다. 그 용도가 밭일을 하기 위한 것이냐 아니면 춤을 추기 위한 것이냐에 따라 질료와 형상은 달라진다.

44. 그와 같은 정확한 보고내용은 단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만을 해설해 놓고 있을 뿐이다. 도구의 도구존재는 도구의 용도 안에 성립한다. 그러나 이 용도 자체는 어떠한가? 우리는 용도로써 이미 도구의 도구적 차원을 파악하고 있는가? 그러한 파악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우리는 쓰이는 도구를 그것의 쓰임에서 탐색해야 하지 않겠는가? 밭 위에서 일하고 있는 농촌 아낙네는 신발을 신고 있다. 여기서 신발이 비로소 그것이 무엇인 바 그것으로 존재한다. 농촌 아낙네가 작업 도중에 신발에 대해 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또는 신발을 심지어 덜 바라보거나 겨우 그것을 감지하는 것조차 덜 하면 할수록, 신발은 더욱 더 진짜 그것이 무엇인 바 그것으로 존재한다. 농촌 아낙네는 신발을 신고 서 있기도 하고 걸어 다니기도 한다. 이렇듯이 신발은 현실적으로 쓰이고 있다. 이러한 도구사용의 우위에서 분명 우리는 도구적 차원과 현실적으로 만난다.

45. 이와는 반대로 만일 우리가 그저 대략적으로만 한 켤레의 신발도구를 떠올리거나 아예 그림으로만 순전히 그 속에 있는 공허하고 사용되고 있지 않는 신발을 바라보는 한, 우리는 도구의 도구존재가 진실로 무엇인지를 결코 경험하지 못 한다. 반 고흐의 회화를 보아서는 일단 이 신발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우리는 확인할 수 없다. 농촌 아낙네의 이러한 신발 켤레 주위에는, 무엇을 위해 그리고 어디에 이 신발이 속할 수 있는가 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아무것도 없고, 단지 어떤 불특정한 공간만이 있을 뿐이다. 그 신발에는 적어도 그 신발의 사용만이라도 지시해줄 수 있는 그런 밭이나 들길의 흙덩이는 달라붙어 있지 않다. 한 켤레의 농부의 신발일 뿐 더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46. 닳아 삐져나온 신발도구의 안쪽 어두운 틈새로부터 노동을 하는 발걸음의 힘겨움이 굳어 있다. 신발도구의 옹골찬 무게 속에는, 거친 바람이 부는 가운데 한결같은 모양으로 계속해서 뻗어있는 발고랑 사이를 통과해 나아가는 느릿느릿한 걸음걸이의 끈질김이 차곡차곡 채워져 있다. 가죽 표면에는 땅의 축축함과 풍족함이 어려 있다. 해가 저물어감에 따라 들길의 정적감이 신발 밑창 아래로 밟혀 들어간다. 대지의 침묵하는 부름, 무르익은 곡식을 대지가 조용히 선사함 그리고 겨울들판의 황량한 휴경지에서의 대지의 설명할 수 없는 거절이 신발도구 속에서 울리고 있다. 빵을 안전하게 확보하는 데 대한 불평없는 근심, 궁핍을 다시 넘어선 데 대한 말없는 기쁨, 출산이 임박함에 따른 초조함 그리고 죽음의 위협 속에서의 전율이 이러한 신발도구를 통해 스며들어 있다. 대지에 이러한 도구가 귀속해 있고 농촌 아낙네의 세계 안에 이 도구가 보호되어 있다. 이러한 보호된 귀속함에서부터 도구 자체가 그것의 '자기 안에 머무름'(Insichruhen)에로 일어선다.

47.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우리는 필시 그림 속의 신발도구에서만 바라볼 수 있으리라. 이에 반해서 농촌 아낙네는 단순히 신발을 신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단순한 착용이 그렇게 단순하다면 말이다. 농촌 아낙네가 늦은 저녁에 고되면서도 건강한 피로 속에서 신발을 벗어 놓을 때마다 그리고 이미 먼동이 트기 이전 아직 어두울 무렵에 신발을 다시 잡을 때마다, 또는 휴일날 신발 곁을 무심히 지나칠 때마다, 그녀는 관찰하거나 뚫어지게 바라보지 않고서도 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더욱이 도구의 도구존재는 도구의 용도 안에 존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용도 자체는 도구의 한 본질적인 존재의 충일함 속에 머물러 있다. 우리는 그것을 신뢰성(Verl lichkeit)이라 칭하자. 도구의 신뢰성에 힘입어 농촌 아낙네는 이러한 도구를 통해 대지의 침묵하는 부름에 내맡겨져 있고, 도구의 신뢰성에 힘입어 그녀는 그녀의 세계를 확신한다. 세계와 대지는 그녀 그리고 그녀와 더불어 그녀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자들에게 오직 그렇게 거기에, 즉 도구 안에 존재한다. 우리는 "오직"이라고 말하면서 이때 혼미 속에 빠진다. 왜냐하면 도구의 신뢰성이 비로소 단순한 세계에 대해 그 세계의 '포근함'(Geborgenheit)을 내어 주고, 대지에게는 그 지속적인 쇄도의 자유를 지켜 주기 때문이다.

48. 도구의 도구존재, 즉 신뢰성은 모든 사물들을 각기 그것들의 방식과 범위에 따라 자기 안에 밀집된 채로 견지한다. 도구의 용도는 그럼에도 단지 신뢰성의 본질귀결일 뿐이다. 도구의 용도는 이러한 신뢰성 안에서 진동하고 있으며 이러한 신뢰성이 없이는 용도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개별적인 도구는 마모되고 소모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사용행위 자체 또한 소진(Vernutzung) 속으로 빠져들고, 닳아빠지고 통상적으로 되어 버린다. 이렇듯 도구존재는 황폐화(Ver dung)에 이르게 되어 순전한 도구로 가라앉아 버린다. 도구존재의 그러한 황폐화란 곧 신뢰성의 소멸(Hinschwinden)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멸 -- 이것으로 말미암아 사용사물들에 저 통상성이 권태스럽게 채근해 든다 -- 은 차라리 도구존재의 근원적인 본질을 증명해보이고 있는 것일 뿐이다. 이때 닳아빠진 도구의 통상성이 그 도구에게는 마치 배타적으로 고유한 것인 양 유일한 존재양식으로서 전면에 밀려들어온다. 아직은 적나라한 용도만이 지금 드러나 보일 뿐이다. 그러한 용도는 마치 하나의 질료에 하나의 형상을 각인하는 그런 순전한 제작행위 가운데 도구의 근원이 놓여 있는 것같은 인상을 불러 일으킨다. 그렇지만 도구의 진짜 도구존재에 있어서 도구는 더 먼 곳으로부터 온다. 질료와 형상 그리고 이 양자의 구별은 한층 더 깊은 근원에서 온다.

49. 자기 안에 머무르는 도구의 고요(Ruhe)는 신뢰성 안에 존속한다. 그러한 신뢰성에서 비로소 우리는 도구가 진실로 무엇인지를 알아차리게 된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우리가 처음에 찾고 있었던 그것, 즉 사물의 사물적 차원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본디 그리고 유일하게 찾고 있는 그것, 즉 예술작품이라는 의미에서의 작품의 작품적 차원에 관해서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50. 아니면 우리는 지금 뜻밖에도 작품의 작품존재에 대해 어떤 것을 마치 부수적으로 이미 경험한 것은 아닌가?

51. 도구의 도구존재는 발견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현실적으로 눈앞에 놓여 있는 하나의 신발도구를 서술하거나 설명함으로써 그랬던 것은 아니며, 신발제작 과정을 보고함으로써도 아니며, 또한 이곳 저곳에서 눈앞에 발견되는 그런 신발도구가 현실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관찰함으로써도 아니라, 단지 우리가 반 고흐의 회화 앞으로 데려와짐으로써 그랬다. 반 고흐의 회화가 말해 준 것은 이것이다. 즉 작품 가까이에서 우리는, 갑자기 통상 우리가 있던 곳이 아닌 어떤 다른 데에 있게 된다.

52. 예술작품은 신발도구가 진실로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었다. 만일 우리의 서술이 일종의 주체적 행위로서 그 모든 것을 그런 식으로 그려내어 집어 넣었다라고 우리가 생각하고 싶어할 경우, 이는 최악의 자기 착각일 것이다. 여기에 어떤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이것 뿐이다. , 작품 가까이에서 우리가 경험한 것은 극히 일부이며 경험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너무나 거칠고 너무나 직접적으로 말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작품은, 우선은 그렇게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하나의 도구가 무엇인 바 그것을 단지 더 쉽게 예를 들어 보여 주는 데에만 도움이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품에 의해 비로소 그리고 오직 작품 속에서만 도구의 도구존재가 제대로 나타나게 된다.

53. 여기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 작품 속에서 무엇이 작용하고 있는가? 반 고흐의 회화란, 진실로 도구가, 즉 한 켤레의 농부의 신발이 무엇으로 존재하는 바 그것을 열어보임(Er ffnung)이다. 이러한 존재자는 그 존재의 비은폐성 안으로 튀어 나온다. 존재자의 비은폐성을 그리스인들은 (알레테이아)라고 일컬었다. 우리는 진리를 말하면서 이러한 진리라는 낱말 곁에서 덜 충분히 사유하고 있다. 존재를 그것이 무엇인 바 그것과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는 바 그것으로 열어보이는 일이 작품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이때 이러한 작품 속에서는 진리의 한 발생(Geschehen)이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54. 예술의 작품 속에서 존재자의 진리가 작품 속으로 정립되었다. "정립함"(Setzen)은 여기서, '서 있음'(Stehen)에로 데려옴을 말한다. 하나의 존재자, 즉 한 켤레의 농부의 신발이 작품 속에서 그 존재자의 존재의 빛 속에 서게 된다. 존재자의 존재가 그것의 빛남의 지속(St ndige)에 이른다.

55. 그렇다면 예술의 본질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 '존재자의 진리가 스스로를 작품 속으로 정립함'(Sich-ins-Werk-Setzen der Wahrheit des Seiendes) 그러나 이제까지 예술은 그럼에도 미와 아름다움에 관련되어 왔을 뿐 진리와는 관련이 없었다. 그와 같은 작품을 산출해 내는 공작인들을 사람들은 도구를 제작해 내는 수공업적인 장인들과 구별해서 미술가들이라 일컫는다. 미술에 있어서 아름다운 것은 예술이 아니다. 오히려 예술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불리워지는 까닭은, 예술이 미를 산출해 내어 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해서 진리는 논리학에 속한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미학( sthetik)에 자리를 잡고 있다.

56. 아니면 '예술이란 곧 진리가 스스로를 작품 속으로 정립함이다'라고 하는 문장과 더불어 과연 '예술이란 곧 현실적인 것의 한 모방이자 묘사이다'라고 하는 저 운좋게 극복된 생각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닌가? 물론 눈앞의 것을 재현해내는 일은 존재자와의 일치, 즉 이러한 존재자에 대한 맞춤을 요구한다. 중세는 adaequatio(아데콰씨오)를 말하고 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호모이오시스)를 말하고 있다. 존재자와의 일치가 오랫동안 진리의 본질로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저 반 고흐의 회화가 눈앞에 놓여 있는 한 켤레의 농부의 신발을 그대로 모사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그와 같은 일이 그 회화에서 성공했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 회화가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그 회화가 현실적인 것에서부터 하나의 모상을 끄집어 내어와 이것을 예술가가 생산하는 하나의 생산물 속으로 옮겨 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57. 이렇듯 작품에서는 그때그때마다 눈앞에 놓여 있는 개개의 존재자를 재현해내는 일이 문제되고 있기 보다는,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사물의 일반적인 본질을 재생해내는 일이 어쩌면 문제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대체 이러한 일반적인 본질이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존재하기에, 예술작품은 그러한 일반적인 본질과 일치하게 되는가? 도대체 하나의 그리스 신전은 어떤 사물의 어떤 본질과 일치하는가? 건축물 속에서 신전의 이념이 표현되고 있다고 하는 그런 불가능한 소리를 어느 누가 주장할 수 있는가? 그런데도 그와 같은 작품 속에서는, 만일 그것이 하나의 작품이라고 한다면, 진리가 작품 속으로 정립되어 있다. 아니면 횔덜린의 송가 라인을 상기해 보자. 여기서 무엇이 시인에게 앞서 주어져 있고 그것이 어떻게 그 시인에게 앞서 주어져 있길래, 이로써 그것이 이때 운문 속에서 재생될 수 있는가? 비록 이러한 송가와 그와 비슷한 운문들의 경우에서는 이제 어떤 이미 현실적인 것과 예술작품 사이의 한 모사관계에 관한 사상이 공공연하게 포기되고 있긴 해도, 마이어(C.F.Meyer)의 시, 로마의 분수가 띠고 있는 그런 유형의 작품을 통해서는 그래도, '작품은 모사한다'라고 하는 저 견해가 겉으로는 아주 잘 확인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58. 로마의 분수

 

솟아올라 내리부어지는 물줄기

대리석 물받침을 둥글게 채우고,

너울처럼 대리석을 타고 흘러

두번째 바닥에 고인다.

가득 불어난 두번째 물받침,

넘실대며 세번째로 넘쳐흐른다.

제각기 받으며 또 내주고

다시 흘러들며 다시 머문다.

 

 

59. 그럼에도 여기에서는, 어떤 현실적으로 눈앞에 있는 하나의 분수가 시적으로 모사되어 있지도, 로마에 있는 한 분수의 일반적인 본질이 재현되어 있지도 않다. 그러나 진리가 작품 속으로 정립되어 있다. 어떠한 진리가 작품 속에서 발생하고 있는가? 진리가 도대체 발생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역사적일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진리는 무시간적이고 초시간적인 어떤 것이라고.

60. 우리는 예술작품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 예술을 예술작품에서 현실적으로 발견하기 위해서 예술작품의 현실성을 찾고 있다. 작품에서의 가장 가까운 현실적인 것으로서 사물적인 하부구조가 입증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물적인 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전승된 사물개념들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전승된 사물개념들은 사물적 차원의 본질을 빗겨지나가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배적인 사물개념인 '형상지어진 질료로서의 사물'은 일단 사물의 본질에서부터가 아니라 오히려 도구의 본질에서부터 따온 것이다. 더군다나, 오래전부터 이미 도구존재가 존재자의 해석에 있어서 하나의 특별한 우위를 고수해 오고 있다는 사실도 내보여졌다. 그 사이에 특별히 고려되지 않았던 도구존재의 이러한 우위는 다음과 같은 눈짓(Wink)을 보냈다. 즉 도구적 차원에 대한 물음을 새롭게, 그것도 익숙해져버린 해석들을 피해서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61. 도구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하나의 작품을 통해 말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작품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바 그것이, 즉 존재자를 그 존재에 있어 열어보임(Er ffnung), 즉 진리의 발생사건이 마치 손바닥 안에 있는 것처럼 환히 드러났다. 그러나 만일 이제 작품의 현실성이, 작품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바 그것 이외에 다른 아무것에 의해서도 규정될 수 없다고 한다면, 이때 현실적인 작품을 그 현실성에서 탐색하고자 하는 우리의 의도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작품의 현실성을 우선 저 작품의 사물적인 하부구조에서 추정했던 한, 우리는 실패하고 만 셈이 된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숙고에 있어 한 가지 주의할만한 성과 앞에 서 있다. 만일 그것이 성과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면 말이다. 일종의 이중적인 점이 다음과 같이 분명해진다.

62. 첫째, 작품에서의 사물적인 것을 파악하기 위한 수단, 즉 지배적인 사물개념들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63. 둘째, 우리가 저 지배적인 사물개념들을 가지고서 작품의 가장 가까운 현실성으로서 파악하고자 했던 바 그것, 즉 사물적인 하부구조는 그러한 방식으로는 결코 작품에 속하지 않는다.

64. 우리가 작품에서 그와 같은 것사물적 하부구조을 겨냥하자마자, 뜻밖에도 우리는 작품을 일종의 도구로서 간주해 버린 셈이 되었는데, 우리는 이 도구에다가 그밖에 예술가적인 것을 함유하고 있을 그런 상부구조를 더 승인한다. 그러나 작품이란, 거기에 그밖에 또 하나의 심미적인 가치가 얹혀져 그것이 거기에 부착되는 그런 도구가 결코 아니다. 그와 같은 것은 작품이 아니다. 마치 하나의 도구가 단지 본래적인 도구성격만을, 즉 용도와 제작만을 결여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순전한 사물이 아니듯이 말이다.

65. 작품에 대한 우리의 물음설정이 뒤흔들리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작품에 대해 물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쯤은 사물에 대해 그리고 반쯤은 도구에 대해 물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물음설정은 우리가 처음에 전개시켰던 그러한 물음설정이 결코 아니었다. 지금 뒤흔들리고 있는 물음설정은 미학의 물음설정이다. 애초부터 미학이 예술작품을 고찰하는 양식은 모든 존재자에 대한 전승된 해석의 지배 아래에 서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익숙한 물음설정의 뒤흔들림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존재자의 존재를 사유할 때 비로소 작품의 작품적 차원이, 도구의 도구적 차원이, 사물의 사물적 차원이 우리에게 더욱 더 가까이 온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 비로소 시야를 여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명한 것을 둘러치고 있는 울타리들이 허물어지고 익숙한 가상적 개념들이 치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하나의 에움길을 지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에움길은 동시에, 작품에서의 사물적 차원에 대한 하나의 규정에로 인도할 수 있는 길 위로 우리를 데려온다. 작품에서의 사물적 차원이 부인되어버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물적 차원은, 그것이 이미 작품의 작품존재에 속하는 한, 작품적 차원에서부터 사유되어야 한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이때 작품의 사물적 현실성에 대한 규정에 이르는 길은 사물을 거쳐 작품으로가 아니라 오히려 작품을 거쳐 사물로 인도한다.

66. 예술작품은 그 나름의 방식으로 존재자의 존재를 열어보인다. 작품 속에서는 이러한 '열어보임', 다시 말해 탈은폐함이, 다시 말해 존재자의 진리가, 발생한다. 예술작품 속에서 존재자의 진리가 스스로를 작품 속으로 정립했다. 예술이란 '진리가 스스로를 작품 속으로 정립함'이다. 진리 자체가 무엇이기에, 그것은 때때로 예술로서 발생하는가? 이렇게 스스로를 작품 속으로 정립함이란 무엇인가?

 

 

 

 

작품과 진리

 

 

67. 예술작품의 근원은 예술이다. 그러나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은 예술작품 속에서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애초부터 작품의 현실성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에 성립하는가? 예술작품들은, 비록 전혀 상이한 방식들에서이긴 하지만, 대체로 사물적 차원을 내보인다. 작품의 이러한 사물성격을 통상적인 사물개념들의 도움으로 파악하려 했던 시도는 실패했다. 그 까닭은 이러한 사물개념들이 사물적 차원을 붙잡아 내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우리가 작품을 그것의 사물적 하부구조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 하나의 '앞서 잡음' 속으로 밀어넣기 때문이다. 그러한 앞서 잡음은 우리가 작품의 작품존재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한다. 작품의 순수한 '자기 안에 서 있음'(Insichstehen)이 분명하게 내보여지지 않는 한, 작품에서의 사물적 차원은 결코 결정될 수 없다.

68. 그럼에도 작품이 언젠가는 그 자체에 있어 접근될 수 있는가? 이러한 일이 성공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작품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인 그런 것과의 모든 연관들에서부터 작품을 벗겨내옴으로써 작품으로 하여금 유일하게 자기에 대해 그리고 자기에게 기인하게 해줄 필요가 있다. 그런데 예술가의 가장 고유한 눈길이 이미 그리로 쏠려 있다. 작품은 예술가에 의해 그 순수한 '자기 자신 안에 서 있음'에로 해방되어 있어야 한다. 여기서는 오직 위대한 예술에 대해서만 언급할 수밖에 없겠는데, 바로 그러한 위대한 예술에 있어서 예술가는 작품에 비하자면 단지, 창작을 행하는 가운데 작품의 생성을 위해 자기 자신을 죽여야 하는 그런 통로와 거의 다를 바 없이, 상관없는 어떤 것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69. 정말 그렇게 작품들이 미술관과 전시관에 세워져 있고 내걸려 있다. 그러나 작품들은 그것들 그 자체인 그런 작품들로서 그 자체로 이곳에 존재하고 있단 말인가? 아니면 그것들이 이곳에서는 오히려 예술사업의 대상들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작품들은 공공적인 그리고 사적인 예술향유를 위해 접근될 수 있도록 마련된다. 공공기관은 작품들을 관리하고 보호하는 일을 맡는다. 미술 전문가와 미술 비평가는 작품들을 놓고 분주히 씨름한다. 미술품 거래상은 시세를 따진다. 미술사 연구는 작품들을 한 학문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다중적인 분주함 속에서 과연 작품들 그 자체와 만나고 있는가?

70. 뮌헨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에기나 사원의 입상들", 가장 훌륭한 교정본에 수록돼 있는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작품으로 존재하는 작품들로서 그것들이 원래 속해 있던 본래의 공간에서부터 벗어나와 있는 것들이다. 설령 그것들이 지닌 품격과 그것들이 불러 일으키는 감명이 여전히 매우 위대하며 그것들의 보존상태가 여전히 매우 훌륭하고 그것들에 대한 해석이 여전히 아주 믿을만 하다 할지라도, 그렇게 박물관 안으로 옮겨 놓는 일은 작품들을 그것들의 세계로부터 빼앗아 간 셈이 된다. 설령 우리가 예컨대 파에스툼 신전을 찾기 위해 그 신전이 세워져 있는 장소를 방문한다거나, 밤베르크 성당을 찾기 위해 그 성당이 있는 광장을 방문함으로써, 작품들의 이식을 지양 또는 삼가하려고 애쓴다 할지라도, 지금 앞에 놓인 작품들이 원래 속해 있던 세계는 붕괴되어 있는 것이다.

71. 세계의 박탈과 세계의 붕괴는 결코 더이상 되돌려질 수 없다. 그 작품들은 이제 그것들이 그것으로 존재했던 그것이 더이상 아니다. 비록 우리가 거기서 만나는 것이 작품들 그 자체라 하더라도, 작품들 그 자체는 기재의 것들이다. 전승과 보존의 영역 내에서 작품들이 우리에게 기재의 것들로서 마주 선다. 이제부터 그것들은 단지 그와 같은 대상들로만 남게 된다. 하지만 우리에게 작품들이 마주 서 있다고 하는 것은 아직은 저 이전의 자기 안에 서 있음'의 한 귀결이지 그것은 더이상 이러한 '자기 안에 서 있음' 그 자체는 아니다. 이러한 '자기 안에 서 있음'은 작품들에게서부터 달아나 버렸다. 비록 예술사업의 활기가 최고도로 증가하고 모든 것이 작품들 자체를 위해 촉진되고 있다 할지라도, 예술사업은 모두가 언제나 작품들의 대상존재에까지만 미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들의 대상존재가 작품들의 작품존재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72. 그러나 작품이 모든 개개의 한 연관으로부터 벗어나 있을 때에도, 작품은 여전히 작품으로 남는가? 작품이 연관들 속에 서 있다는 사실이 곧 작품에 속하고 있지는 않는가? 물론 그렇다. 다만 물어야 할 게 있다면, 어떠한 연관 속에 작품이 서 있는가 하는 것이다.

73. 하나의 작품은 어디에로 속하는가? 작품은 작품 그 자체를 통해서 열려보여지는 그러한 영역에만 유일하게 작품으로서 속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열려보임에서, 그리고 오직 그러한 열려보임에서만 작품의 작품존재가 현성하기 때문이다. 앞에서우리는, 작품 속에서 진리의 발생사건이 작용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반 고흐의 그림을 언급한 것은 이러한 발생사건을 명명하기 위한 시도였다. 그리로 눈길을 던지는 가운데, 진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진리는 어떻게 발생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생겨 나왔다.

74. 지금 우리는 작품 쪽으로 시선을 향한 가운데 진리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렇지만 물음 속에 존속하는 그것에 우리가 좀더 친숙해지기 위해서는, 진리의 발생사건을 작품 속에서 새로이 드러내 보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시도를 위해 의도적으로 하나의 작품이 선택되어 있다. 그것은 묘사를 행하는 예술에는 산입되지 않는 작품이다.

75. 일종의 건축작품, 즉 하나의 그리스 신전은 아무런 것도 모사하는 것이 없다. 그것은 갈라진 바위계곡 한가운데에 단순히 서 있을 뿐이다. 그 건축작품은 신의 형상을 에워싸서, 그것을 은닉된 채로 열린 주랑들을 통해 성스러운 구역 안으로 들여보낸다. 신전을 통해 신이 그 신전 안에 현전한다. 신이 이렇게 현전함 그 자체가 곧 그 구역을 하나의 성스러운 구역으로서 확장함이자 경계지음이다. 신전과 그 구역은 그러나 무규정적인 것 속으로 둥둥 떠다니는 것이 아니다. 신전작품은, 그 안에서 탄생과 죽음, 재난과 축복, 승리와 굴욕, 존속과 쇠망이 인간 존재에게서 그의 역운의 형태를 얻어내는 그런 저 궤도들과 연관들의 통일을 비로소 짜맞추면서 동시에 자기 주위로 모은다. 이렇게 열린 연관들이 전개되면서 확장된 범위가 곧 이러한 역사적 민족의 세계이다. 그러한 세계에서부터 그리고 그 세계 속에서 그 역사적 민족이 비로소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자기자신에게로 되돌아 온다.

76. 건축작품은 바위지반 위에 머물러 서 있다. 이렇게 작품이 '그 위에 머무름'은 바위에게서부터 바위의 완강하고도 아무것에로도 강요되지 않는 그런 지탱의 어둠을 끌어 내어온다. 건축작품은 그것 위로 휘몰아치는 폭풍을 견뎌내며 서 있고 그렇게 비로소 폭풍 자체를 그 위력에 있어 내보인다. 석조의 광채와 빛남은, 비록 태양의 은총에 의해서만 빛나기는 하나 그것은 대낮의 빛과 하늘의 아득함, 밤의 캄캄함을 비로소 나타나게 한다. 건축작품의 확실한 솟아오름은 허공의 보이지 않는 공간을 보이게 해준다. 그 작품의 확고부동함은 밀어닥치는 바다의 파도를 막고 서서 자기의 그 고요함에서부터 파도의 광란을 나타내게 해준다. 나무와 목초, 독수리와 황소, 뱀과 귀뚜라미가 비로소 그것들의 부각된 형태 속으로 들어가 그것들이 무엇인 바 그것으로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솟아나옴과 피어오름을 초기에 그리스인들은 그 자체와 전체에 있어서 (퓌지스)라 불렀다. 동시에 퓌지스는, 인간이 그 위에다 그리고 그 안에다 자신의 거주의 기초로 삼는 그것을 밝힌다. 우리는 그것을 대지라 지칭한다. 여기서 이 낱말이 말하고 있는 바 그것으로부터 어떤 퇴적된 질료덩어리를 떠올린다거나 일종의 혹성을 단지 천문학적으로 떠올리는 일은 멀리 견지되어야 한다. 대지란, 피어오름이 모든 피어오르는 것을, 그것도 그 자체로서, 거기에로 되감싸버리는 그것이다. 피어오르는 것 속에서 대지는 '감싸는 것'으로서 현성한다.

77. 신전작품은 서 있으면서 한 세계를 열어보이고 동시에 이 세계를 대지 위로 되돌려 세우는데, 이때 대지는 세계가 그 위로 되돌려 세워지는 정도에 따라 그 자체가 비로소 고향의 근거로서 솟아나온다. 그러나 인간들과 동물들, 식물들과 사물들은 결코, 현전하는 것에 장차 또 추가될 그런 신전에 대해 적절한 주위환경으로서 일시적으로 서술되기 위한 불변하는 대상들로서 눈앞에 있거나 그런 것으로서 알려져 있는 그런 것들이 아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뒤바꾸어 사유할 때 우리는 존재하는 것에 보다 더 가까이 이르게 된다. 물론 이러한 사정은, 어떻게 모든 것이 다르게 우리에게 향하는지를 일별할 수 있는 눈을 우리가 애초부터 가지고 있다고 가정할 때 그렇다. 자기를 위해 수행되는 순전한 뒤바꾸기는 아무것도 내주는 것이 없다.

78. 신전이 서 있는 가운데 비로소 신전이 사물들에게 그것들의 모습을 그리고 인간들에게는 비로소 그들 자신에 대한 전망을 내준다. 이러한 시야는, 작품이 하나의 작품으로 존재하는 한, 신이 그 작품에서부터 떠나버리지 않은 한, 열린 채로 남는다. 경기에서 이긴 승리자가 신에게 바치는 신의 조각상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인간이 그것에서 신이 어떻게 보여지는지를 보다 쉽게 알기 위한 모상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신 자신을 현전케 해주어 신 자신이 존재하게 되는 하나의 작품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언어작품에도 해당된다. 비극에서는 아무것도 연기되거나 상연되는 것이 없고, 오히려 옛 신들을 대항해 새로운 신들이 싸움을 벌인다. 언어작품이 민족의 말함 속에서 피어남으로써, 그 언어작품이 이러한 싸움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민족의 말함이 다음과 같이 변화된다. , 이제 개개의 본질적인 낱말이 이러한 싸움을 이끌어 나가, 무엇이 신성하며 무엇이 신성하지 않은지, 무엇이 위대하며 무엇이 천박한지, 무엇이 장하며 무엇이 비겁한지, 무엇이 고결하며 무엇이 약삭빠른지, 무엇이 주인이고 무엇이 노예인지(참조, 헤라클레이토스, 단편.53)에 대해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다.

79. 작품의 작품존재는 그러면 어디에 성립하는가? 방금 대략적으로나마 충분히 암시된 것을 지속적으로 조망하는 가운데 우선 작품의 두 가지 본질특징들이 한층 더 뚜렷해질 것이다. 이때에 우리는, 오래 전부터 잘 알려져온 작품존재의 피상적인 것으로부터, 즉 작품과의 우리의 익숙한 행동관계에다 하나의 발판을 내주는 그런 사물적 차원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80. 하나의 작품이 어느 박물관 안으로 옮겨져 보관되거나 어느 전시장 안에 배치될 때, 사람들은 이를 두고 '작품이 진열된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진열(Aufstellen), 하나의 건축작품을 세워낸다든가, 하나의 입상을 건조한다든가, 축제 때 비극을 무대에 올린다고 하는 의미에서의 '건립'(Aufstellung)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이러한 '건립'은 봉헌하고 찬송한다는 의미에서의 '건립'이다. 여기서 '건립'은 더이상 순전한 배치를 의미하지 않는다. 봉헌한다 함이란, 작품적으로 세워내는 가운데 성스러움이 성스러움으로서 열려보여지고 신이 그의 현전성의 열린 장 안으로 불리워 들여진다고 하는 의미에서의 '성스럽게 함'을 뜻한다. 봉헌함에는, 신의 품위와 광채에 대한 찬양으로서의 찬송함이 속한다. 품위와 광채란, 그것들과 나란히 또는 그것들 배후에 그밖에 또 신이 서 있는 그러한 속성들이 아니라, 오히려 품위 속에서, 광채 속에서 신이 현전한다. 이러한 광채의 반조(返照) 속에서, 우리가 세계라 지칭했던 그것이 빛난다. 다시 말해 환히 트이게 된다. 건조함이란, 그것으로서 본질적인 것이 지침을 내리는 그러한 널리 지시하는 척도라는 의미에서의 올바름을 여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어째서 작품을 건립한다는 것이 일종의 봉헌하면서 찬송하는 건조인가? 그 까닭은 작품이 그 작품존재에 있어 이러한 '봉헌하면서 찬송하는 건조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작품이 일종의 그러한 식의 건립함에 대한 요구에 이르는가? 그 까닭은 예술작품 자체가 그 작품존재에 있어 건립하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작품으로서 작품이 건립하는 것은 무엇인가? 스스로 솟아 오르면서 작품은 하나의 세계를 열어보이고 이렇게 열려보여진 세계를 전개하며 머무름 가운데서 견지한다.

81. 작품존재란 하나의 세계를 건립한다는 것을 일컫는다. 그러나 그것, 즉 하나의 세계란 무엇인가? 하나의 세계가 무엇인지는 신전을 언급하는 자리에서 암시됐었다. 세계의 본질은 우리가 여기서 걸어가야 할 그런 길 위에서만 제시될 수 있다. 더욱이 이러한 제시는, 본질 쪽으로 향한 시선을 우선적으로 현혹시킬지도 모르는 그런 것으로부터 방어하는 데에 한정된다.

82. 세계란, 셀 수 있거나 셀 수 없는 또는 잘 알려져 있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그런 눈앞의 사물들의 순전한 축적이 아니다. 세계는 그러나 단지 상상된, 즉 눈앞의 것의 총합에 덧붙혀서 표상된 하나의 틀도 아니다. 세계는 세계화한다. 그리고 세계는 우리가 그 가운데서 고향같은 평안한 믿음을 갖고 있는 그런 포착가능하고 인지가능한 그것보다 더 존재적이다. 세계는 결코, 우리 앞에 놓여 있어 직관될 수 있는 그런 하나의 대상이 아니다. 세계란, 탄생과 죽음, 축복과 저주의 궤도들이 우리를 존재로 밀어뜨려 붙들어 두는 한에서 우리가 그 밑으로 예속되어 있는 그런 영구히 비대상적인 것이다. 우리 역사의 본질적인 결정들이 내려져 우리에 의해 떠맡아지고 포기되고 오인되고 다시금 물어지는 바로 거기에서, 세계가 세계화한다. 돌은 세계가 없다. 식물이나 동물도 마찬가지로 세계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식물과 동물은, 그것이 놓여 있는 주위환경의 보이지 않는 쇄도에 속한다. 이에 반해서 농촌 아낙네는 그녀 자신이 존재자의 열린 장 안에 체류하기 때문에 하나의 세계를 갖는다. 도구는 그 신뢰성에 있어 이러한 세계에 대해 하나의 고유한 필연성과 가까움을 내준다. 한 세계가 열림으로써 모든 사물들이 그것들의 겨를과 분주함, 멂과 가까움, 넓음과 좁음을 받는다. 세계가 세계화하는 가운데, 신들의 가호하는 은총이 거기에서부터 선사되기도 하고 거절되기도 하는 저 터전이 모아진다. 신의 부재의 숙명도 세계가 세계화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83. 하나의 작품이 작품으로 존재함으로써, 이 작품은 저 터전을 (공간)마련한다. (공간)마련한다 함은 여기서는 특히, 열린 장의 트임을 자유로이 내어주고 이 트임을 그 윤곽들에 맞추어 넣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맞추어 넣음'(Ein-richten)은 이른바 '건조'(Er-richten)에서부터 현성한다. 작품은 작품으로서 한 세계를 건립한다. 작품은 세계의 열린 장을 열린 채로 견지한다. 그러나 한 세계를 건립함은 단지 작품의 작품존재와 관련지어 여기서 언급해야 할 한 가지 본질특징일 뿐이다. 또다른 한 가지 본질특징과 이에 속한 것을 우리는 비슷한 방식으로 작품의 피상적인 것에서부터 드러내어 보이도록 시도하기로 한다.

84. 하나의 작품이 이런 또는 저런 작품질료 -- , 나무, 청동, , 언어, 소리 -- 에서부터 산출될 때이쪽으로 앞에 데려와질 때, 사람들은 작품이 거기에서부터 이쪽으로 세워져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작품의 작품존재가 일종의 세계의 건립에서 성립하기 때문에, 작품은 봉헌하며-찬송하는 건조라는 의미에서 일종의 건립을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작품은 또한 '이쪽으로 세움'(Herstellen)을 필요로 하는데, 왜냐하면 작품의 작품존재 자체가 '이쪽으로 세움'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은 작품으로서 그 본질에 있어 이쪽으로 세우면서 존재한다. 그러나 작품은 무엇을 이쪽으로 세우는가? 우리는 이것을 우리가 피상적인 그리고 통상 그런 식으로 불리워지는 작품의 '이쪽으로 세움'[제작함]을 뒤좇아 밟아 나갈 때 비로소 경험하게 된다.

85. 작품존재에는 한 세계의 '건립'이 속한다. 이러한 규정의 시야범위 안에서 사유해 보건대, 사람들이 이밖에도 작품에서의 작품질료라 부르는 바 그것은 어떤 본질인가? 도구는, 용도와 사용가능성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에, 거기에서부터 도구 자신이 성립하는 바 그것, 즉 질료를 자신의 쓰임에서 얻어낸다. 돌은 도구를, 예컨대 도끼를, 제작하는 가운데 이용되고 소모된다. 돌은 용도성 안에서 사라져 버린다. 질료가 더 잘 그리고 보다 더 적합하게 사용되면 사용될수록, 그 질료는 더욱 더 저항력을 상실한 채 도구의 도구존재 안에 가라앉아 버리고 만다. 이와는 반대로 신전-작품은, 그것이 한 세계를 건립함으로써, 질료를 사라져 버리게 하지 않고, 오히려 가장 잘 솟아나오게 하며, 그것도 작품의 세계의 열린 장 안에서 솟아나오게 한다. , 바위는 그 지탱과 머무름에로 오게 됨으로써 비로소 바위가 되며, 금속은 그 번쩍임과 반짝거림에로 오게 됨으로써 비로소 금속이 되고, 색조는 그 빛남에로 오게 됨으로써 비로소 색조가 되며, 소리는 그 울림에로 오게 됨으로써 비로소 소리가 되고, 낱말은 그 말함에로 오게 됨으로써 비로소 낱말이 된다. 이 모든 것들은, 작품이 자기를 돌의 육중함과 무게에로, 나무의 딱딱함과 유연성에로, 청동의 단단함과 광채에로, 색조의 빛남과 어둠에로, 소리의 울림에로, 낱말의 명칭력에로 되돌려 세움으로써 솟아나온다.

86. 그리에로 작품이 자기를 되돌려 세우는 거기와 그리고 이러한 '자기를 되돌려 세움'에 있어 작품이 솟아나오게 하는 바 그것을 우리는 대지라 지칭했었다. 그것은 '솟아나오면서-감싸는 것'이다. 대지란 '아무것에로도 강요되지 않은 채 수고없이 지칠줄 모르는 것'이다. 대지 위에 그리고 대지 가운데에 역사적 인간이 자신의 '세계 내에 거주함'의 지반을 놓는다. 작품이 하나의 세계를 건립함으로써, 작품은 대지를 이쪽으로 세운다. '이쪽으로 세움'(Herstellen)은 여기서 낱말의 엄밀한 의미에서 사유되어야 한다. 작품은 대지 자체를 한 세계의 열린 장 안으로 밀어내고 견지한다. 작품은 대지를 하나의 대지로 존재하게 해준다.

87. 그럼에도 왜 대지의 '이쪽으로 세움'은 작품이 자기를 그 대지에로 되돌려 세우는 방식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가? 대지가 무엇이기에, 바로 그와 같은 방식으로 대지는 비은폐된 것 안에 이르는가? 돌은 묵직하게 있으면서 자신의 무게를 알린다. 그러나 이러한 무게가 우리에게 묵직하게 안겨오는 반면에, 그 무게는 동시에 자기에게로 침입해들어오는 모든 것을 스스로 거부한다. 우리가 바위를 여러 조각들로 깨뜨려 부숨으로써 우리가 그 무게에로 침입을 시도해 본댓자, 바위는 그 파편들에서도 결코 어떠한 내부나 열린 것을 내보이지 않는다. 즉각 돌은 다시금 그 파편들의 묵직함과 육중함의 변함없는 둔중함 속으로 스스로 물러나 버리고 만 상태이다. 만일 우리가 돌을 저울 위에 올려 놓아 이러한 묵직함과 육중함을 다른 식으로 파악해 내려고 시도할 경우, 이때 이러한 시도는 우리가 그 무게를 단지 어떤 중량계산에로 가져오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매우 정확하게 보이는 돌에 대한 이런 규정은 하나의 수치로 남는다. 그러나 묵직함은 우리에게서부터 빠져나간 상태이다. 색조는 번쩍거리며 오직 빛날려고만 할 뿐이다. 우리가 색조를 합리적으로 측정하면서 파동 수로 분해할 때, 색조는 이미 사라져 없어진 상태이다. 색조가 자기를 내보이는 경우란 오직 그 색조가 비탈은폐적으로 그리고 비설명적으로 머물러 있을 때일 뿐이다. 대지는 자기에게로 밀고 들어오는 저 침입이 그렇게 대지 자신에게서 분쇄되도록 한다. 대지는 그저 계산적인 것에 불과한 저 집요함을 일종의 파괴로 탈바꿈시킨다. 설령 이러한 파괴가 지배와 진보의 가상을 자연에 대한 기술적-과학적인 대상화의 형태로 자기 앞에 날라 내온다 할지라도, 이러한 지배는 그럼에도 일종의 '원함의 무력함'으로 남는다. 대지가, 온갖 열어밝힘에 직면해서 물러나 버리는, 다시 말해 지속적으로 닫힌 채로 견지되는 그런 본질상 열어밝혀질 수 없는 것으로서 유지되고 보존되는 곳에서만, 대지는 대지 자체로서 환히 밝혀져 나타난다. 대지의 모든 사물들, 전체로서의 대지 자체가 서로 조화로운 울림(Einklang) 속으로 흘러들어간다. 그러나 이러한 '흘러들어감'(Verstr men)은 어떠한 '지워버림'(Verwischen)도 아니다. 여기서는 각각의 현전하는 것을 그것의 현전에 있어 경계짓는 그런 경계지움의 그 자체에 기인한 흐름이 흘러든다. 그러므로 자기를 닫아버리는 사물들 각각에 있어서 공통된 것은 '자기를 모름'(sich-nicht-Kennen)이다. 대지란 본질적으로 '자기를 닫아 버리는 것'(Sichverschlie endes)이다. 대지를 이쪽으로 세운다 함은 곧, 대지를 '자기를 닫아 버리는 것'으로서 열린 장 안으로 데려옴을 일컽는다.

88. 작품이 자기 자신을 대지에로 되돌려 세움으로써, 작품은 대지를 이쪽으로 세우는 일을 수행한다. 대지의 '자기를 닫아버림'은 그러나 어떠한 획일적이고 경직되게 드리워져 머무름도 아니고, 오히려 '자기를 닫아버림'은 단순한 방식들과 형태들의 고갈될 수 없는 충일함 속으로 전개된다. 분명 조각가는, 석공이 그 나름의 양식에 따라 돌을 다루듯이, 그렇게 돌을 사용한다. 그러나 조각가는 돌을 소모해버리지 않는다. 조각가가 돌을 소모해버리는 경우는, 단지 작품이 실패하는 그런 곳에서나 특정한 방식으로 해당될 뿐이다. 분명 화가 또한 색조질료를 사용한다. 그렇지만 그는 색조가 소모되어버리는 식으로가 아니라, 오히려 색조가 비로소 빛남에로 오는 식으로 색조를 사용하는 것이다. 분명 시인도 낱말을 사용한다. 하지만 시인은 통속적인 연설가나 글쟁이들이 낱말들을 소모해버릴 수밖에 없는 그런 식으로가 아니라, 오히려 낱말이 비로소 진정 하나의 낱말이 되며 그러한 낱말로 남아 있게 되는 식으로 낱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89. 작품 속 어디에도 일종의 작품질료와 같은 것은 본디 존재하고 있지 않다. 더욱이 도구를 본질규정하는 데 있어서 거기에서부터 도구가 성립하게되는 바 그것이 과연 질료라는 특징규정에 의해 그것의 도구적인 본질에 있어 적중되고 있는지는 한층 더 의심스럽게 남아 있다.

90. 한 세계의 건립과 그리고 대지의 이쪽으로 세움은 작품의 작품존재에 있어 두 가지 본질특징들이다. 그것들은 그러나 작품존재의 통일 안에 함께 속하고 있다. 이러한 통일을 우리는, 우리가 작품의 '자기 안에 서 있음'을 숙고하고 '자기에게 기인함'의 저 완결된 유일한 고요를 말하려고 시도할 때, 찾아나서기로 한다.

91. 지칭된 본질특징들로써 이미 우리는 설득력 있는 어떤 것을 식별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그러한 특징들로써 우리가 작품 속에서 식별한 것은 오히려 어떤 발생이지 결코 어떤 고요는 아니다. 그런데 만일 고요가 운동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고 한다면, 도대체 고요란 무엇인가? 고요는 분명 운동을 자기로부터 배제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 운동을 포함하는 반대이다. 오직 움직여진 것만이 정지할 수 있다. 그때그때마다 운동의 양식에 따라서 고요의 방식도 다르다. 한 물체의 순전한 장소 이동으로서의 운동에 있어서는 고요란 당연히 운동의 극단적인 경우일 뿐이다. 만일 고요가 운동을 포함하고 있다면, 이때 운동의 한 내밀한 밀집인, 그러니까 가장 최고의 운동성인, 그러한 하나의 고요가 있을 수 있겠는데, 이는 운동의 양식이 일종의 그러한 고요를 요구한다는 점을 가정해 보면 그렇다. 그런데 이러한 양식을 띠고 있는 게 있다면, '자기에게 기인하는 작품'의 고요가 그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작품존재에서의 발생의 운동성을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일에 성공할 때, 우리는 이러한 고요에 가까이 오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묻는다. 작품 자체 속에서 한 세계의 건립과 대지의 이쪽으로 세움은 어떤 연관을 내보이는가?

92. 세계란, 한 역사적 민족의 역운에 있어서 단순하고 본질적인 결정들의 그 멀고 먼 궤도들이 스스로를 여는 열려 있음이다. 대지란, 지속적으로 자기를 닫아버리는 것과 그런 식으로 감싸는 것이 아무것에로도 강요됨이 없이 솟아나옴이다. 세계와 대지는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면서도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 세계는 스스로 대지 위에 근거를 삼으며, 대지는 세계를 뚫고 솟아난다. 하지만 세계와 대지 사이의 관련은 결코, 아무것에 관련되지 않는 대립된 것들의 공허한 통일로 위축되어 버리는 법이 없다. 세계는 대지 위에 머물면서 이 대지를 높여 주려고 노력한다. 스스로를 여는 것으로서 세계는 어떠한 닫힌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대지는 그러나, 감싸는 것으로서 그때그때마다 세계를 자기 안에 묶어두고 간직해 두려고 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93. 세계와 대지의 맞선대립은 일종의 투쟁이다. 물론 우리는 투쟁의 본질을 불화나 다툼과 혼동하고 그래서 그 투쟁을 단지 교란과 파괴로서만 알게됨으로써, 투쟁의 본질을 너무나 경솔하게 변조시켜 버리고 만다. 그렇지만 본질적인 투쟁에서는, 싸움을 벌이는 것들 가운데 하나가 다른 하나를 그 본질의 자기고수에로 끌어올린다. 그렇지만 본질의 자기고수란 결코 어떤 우연적인 상태에 대한 강경한 자기주장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고유한 자기존재의 유래의 은닉된 근원성 안으로 자기를 내맡김이다. 투쟁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자기 위로 떠받친다. 이래서 싸움은 더 격렬해지고 더 본래적이 되어 그것이 무엇인 바 그것이 된다. 투쟁이 점점 더 격렬하게 자립적으로 자기를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싸움을 벌이는 것들은 한층 더 유연하게 단순한 자기귀속의 밀접성 안으로 풀려난다. 대지 자체가 그것의 '자기를 닫아버림'의 해방된 쇄도에서 대지로서 나타나야 한다면, 대지는 세계의 열린 장없이 지낼 수 없다. 모든 본질적인 역운이 전개되는 광대함과 궤도로서 세계가 결정된 것 위에 근거를 삼아야 한다면, 세계도 다시금 대지로부터 훨훨 떠나갈 수 없다.

94. 작품이 한 세계를 건립하고 대지를 이쪽으로 세움으로써, 작품은 이러한 투쟁의 야기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의 야기는, 작품이 그 투쟁을 김빠진 타협에로 누그러뜨리고 중재하기 위해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투쟁이 하나의 투쟁으로서 남아 있기 위해서 그 투쟁의 야기가 일어나는 것이다. 한 세계를 건립하고 대지를 이쪽으로 세우면서 작품은 이러한 투쟁을 수행한다. 작품의 작품존재는 세계와 대지 사이의 투쟁의 격돌에서 성립한다. 밀접성의 단순함 속에서 투쟁이 그것의 최고 점에 이르기 때문에, 투쟁의 격돌에서는 작품의 통일이 발생한다. 투쟁의 격돌이란, 지속적으로 자기를 강조하는 작품의 운동성의 밀집이다. 그러기에 투쟁의 밀접성에서는 '자기 안에 머무르는 작품의 고요'가 그 본질을 갖는다.

95. 작품의 이러한 고요에서부터 비로소 우리는 작품 속에서 무엇이 작용하고 있는지를 살펴 볼 수 있게 되었다. 예술작품에서는 진리가 작품 속으로 정립되어 있다는 점이 지금까지도 여전히 일종의 앞서 잡은 주장으로 남아 있었다. 어느 정도로 작품의 작품존재에서 진리가 발생하는가? 다시 말해 이제 어느 정도로 세계와 대지의 투쟁의 격돌 속에서 진리가 발생하고 있는가? 진리란 무엇인가?

96. 진리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앎이 얼마나 빈약하고 무딘가 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이러한 근본낱말의 사용에 그냥 내맡겨 버리는 그런 우리의 부주의한 태도가 보여준다. 진리를 대개 사람들은 이러 저러한 진리로 의미한다. 그것은 참된 어떤 것을 뜻한다. 그와 같은 것은 한 문장에서 밖으로 말해지는 하나의 인식일 수가 있겠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의 문장만을 참되다고 부르지 않고, 하나의 사태도, 즉 가짜 금과 구별되는 진짜 금도 참되다고 부른다. '참된'이라는 말은 여기서는 진짜인 것, 즉 현실적인 금, 그 정도를 일컫고 있다. 여기서 현실적인 것을 일컫고 있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그와 같이 현실적인 것으로서 우리에게 여겨지는 것은 '진실로(진리 안에) 존재하는 것'(das in Wahrheit Seiende)이다. 현실적인 것에 상응하는 바 그것은 참되고, 진실로 무엇인 바 그것은 현실적이다. 원이 다시 닫혔다.

97. "진실로"(진리 안에/in Wahrheit)란 무엇을 일컫는가? 진리란 참된 것의 본질이다. 우리가 본질을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사유하는가? 그러한 것으로 통상 여겨지고 있는 것은, 거기에서 모든 참된 것이 일치하는 저 공통적인 것이다. 본질은, 다수적인 것에 똑같이 타당한 그런 일자를 표상하는 유적-일반적 개념 속에 나타나 있다. 이러한 똑같이 타당한 본질(에센씨아[essentia]라는 의미에서의 본질성)은 그러나 단지 비본질적인 본질일 뿐이다. 어떤 것의 본질적인 본질은 어디에 성립하는가? 아마도 그것은, 존재자가 진실로(진리 안에) 무엇으로 존재하는 바 그것에 기인하고 있을 것이다. 한 사태의 참된 본질은 그 사태의 참된 존재에서부터, 즉 그때그때마다의 존재자의 진리에서부터 규정된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본질의 진리가 아니라 오히려 진리의 본질을 찾고 있는 중이다. 한 가지 기이한 꼬임이 내보여지고 있다. 이러한 꼬임은 그저 하나의 기이함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아니, 더욱이 그것은 그저 개념장난의 공허한 억지일 뿐인가? 아니면 -- 일종의 심연인가?

98. 진리란 참된 것의 본질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것을 그리스 낱말을 상기해 봄으로써 사유해 보기로 한다. (알레테이아)란 존재자의 비은폐성을 일컫는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진리의 본질에 대한 한 가지 규정인가? 우리는 낱말사용의 순전한 변경을 -- 진리 대신에 비은폐성을 -- 사태의 한 특징규정을 위해 내놓고 있지는 않은가? 진리의 본질이 부득이하게 비은폐성이라는 낱말에서 말해지도록 도대체 발생할 수밖에 없는 바 그것을 우리가 경험하지 않는 한, 분명 그러한 낱말사용의 변경은 일종의 명칭교환으로 머물고 말 것이다.

99. 그러한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그리스 철학에 대한 갱신이 필요하지는 않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갱신은, 설령 이러한 불가능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못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 철학의 은닉된 역사는 그 시원 이래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성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 철학은 알레테이아라는 낱말에서 번쩍이는 진리의 본질에 합당하게 머물러 있지 않으며 또한 진리의 본질에 대한 자신의 앎과 말함을 점점 더 진리의 한 파생적인 본질에 대한 논의 속으로 잘못 옮겨 놓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알레테이아로서의 진리의 본질은 그리스 사유에서 그리고 정확하게는 그 뒤를 계승한 철학에서 사유되지 않은 채 남는다. 사유에게 비은폐성은 그리스 현존재 속에 가장 깊이 은닉된 것이면서 동시에, 이전부터 현전하는 것의 모든 현전을 규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100. 그럼에도 왜 우리는, 그동안 여러 세기 이래로 우리에게 친숙해 있는 진리의 그런 본질을 사용하지 않는가? 진리는 오늘날 그리고 오래 전부터 사태와의 인식의 일치를 뜻하고 있다. 그렇지만 인식함과 그리고 인식을 형성해 내면서 발언하는 문장이 사태에 맞출 수 있기 위해서는, 이보다 앞서 사태 자체가 문장에 대해 구속력을 지닐 수 있기 위해서는, 도리어 사태 자체가 그 자체로서 내보여져야 한다. 만약 사태 자체가 은폐성에서부터 튀어 나와 서 있을 수 없다고 한다면, 만약 사태 자체가 비은폐된 장 안에 서 있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떻게 사태는 스스로를 내보여야 한단 말인가? 문장은, 그것이 비은폐된 것에로 향함으로써, 다시 말해 참된 것에로 향함으로써, 참이게 된다. 문장의 진리는 언제나 그리고 언제나 오직 이러한 올바름일 뿐이다. 데카르트 이래 확실성으로서의 진리로부터 출발하는 비판적 개념들은 단지 올바름으로서의 진리에 대한 규정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에게 익숙한 진리의 이러한 본질, 즉 표상함의 올바름은 존재자의 비은폐성으로서의 진리에 그 성패가 달려 있다.

101. 우리가 여기서 그리고 그밖에 다른 곳에서 진리를 비은폐성으로서 파악하고 있다면, 이때 우리는 단지 한 그리스 낱말의 단어적인 번역에로만 도피하고 있는 셈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하고 그러기에 유익한 올바름이라는 의미에서의 진리의 그런 본질에게는 경험되지 않은 것으로서 그리고 사유되지 않은 것으로서 밑바탕에 놓여 있는 바 그것을 숙고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다음과 같은 자백을 실토하곤 한다. 즉 한 발언의 올바름(진리)을 입증하고 개념파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는 이미 개방되어 있는 그 어떤 것에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는 실제로 회피될 수 없다고 한다. 우리가 그런 식으로 말하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진리를 언제나 올바름으로서만 이해하고 있는 셈인데, 비록 이러한 올바름은 아직 하나의 전제를 필요로 하는 것이기는 하나, 그 전제라는 것은 결국 우리들 자신이 만든 것이다 -- 어떻게 그리고 어째서 그러한지는 아마도 하늘이 알고 있을 것이다.

102. 그러나 우리는 존재자의 비은폐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존재자의 비은폐성(존재)이 우리를, 표상함에 있어 우리가 항상 비은폐성 안에 그리고 다음에 놓이게 되는 그런 본질에로 규정한다. 그것에로 하나의 인식이 향하는 그것만이 이미 어떤 식으로건 비은폐되어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이러한 "어떤 것에로 향함"이 움직이고 있는 그런 전체 영역과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그것에게 사태에로의 명제의 정합이 드러나는 그것도, 이미 비은폐된 것 안에서 전체로서 일어나야 한다. 만약 그 안으로 모든 존재자가 우리에게 들어서고 거기에서부터 존재자가 물러나는 저 밝혀진 곳(Gelichtetes) 안으로 이미 존재자의 비은폐성이 우리를 데려다 놓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일체의 올바른 표상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될 것이며, 또한 우리는 우리가 향하는 그 어떤 것이 이미 개방되어 있다고 일단 전제할 수도 없을 것이다.

103. 그러나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 어떻게 진리가 이러한 비은폐성으로서 발생하는가? 하지만 이에 앞서 더욱 분명히 말해져야 할 것은, 이러한 비은폐성 자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104. 사물들이 그리고 인간들이 존재한다. 선물과 제물이 존재하며, 동물과 식물이 존재하고, 도구와 작품이 존재한다. 존재하는 것은 존재 안에 서 있다. 신 차원적인 것과 반()신적인 것 사이에 드리워져 있는 감추어진 숙명이 존재를 통해 들어온다. 존재하는 것 가운데 많은 것을 인간은 제 마음대로 다룰 수 없다. 인식된 것은 얼마되지 않는다. 잘 알려진 것은 그저 대략적인 것으로 남아 있고 잘 다스려지고 있는 것은 불확실한 것으로 남아 있다. 존재자는, 그것이 아주 얼핏 그렇게 보일지는 모르겠으나, 결코 우리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요 더욱이 우리의 표상물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존재자 전체를 하나로 고찰해 볼 경우, 이때 겉으로 보기에 우리는 도대체 존재하는 것 모두를, 비록 아주 거칠게라도, 다 파악하는 셈이다.

105. 그리고 그럼에도 존재자 너머로, 그러나 존재자로부터 벗어나서가 아닌 오히려 존재자 앞에서부터 어떤 다른 것이 또 발생한다. 전체로서의 존재자 한복판에서 하나의 열린 자리가 현성한다. 일종의 밝힘(Lichtung)이 존재한다. 그 밝힘은 존재자에서부터 사유해 보건대, 존재자보다 더 존재적이다. 이러한 열린 한가운데는 그러기에 존재자에 의해 에워싸여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마치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무(/Nichts)처럼, 밝히는 중심 자체가 모든 존재하는 것을 휘감고 있다.

 

 

106. 존재자가 이러한 밝힘의 밝혀진 곳 안으로 들어서서-밖으로 나와 설 때에만, 존재자는 존재자로서 존재할 수 있다. 오직 이러한 밝힘만이 우리 인간에게 우리 자신이 아닌 그 존재자에로의 통로와, 우리 자신인 그 존재자에로의 접근을 선사하고 보장해 준다. 이러한 밝힘에 힘입어 존재자가 특정한 정도와 변화하는 정도에 있어 비은폐되어 있다. 그럼에도 오직 밝혀진 곳의 여지 안에서만 존재자는 은닉되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만나게 되고 함께 마주하게 되는 그런 각각의 존재자는 동시에 언제나 은폐성 안으로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현전의 이러한 기이한 상반성을 유지한다. 그 안으로 존재자가 들어서는 그 밝힘은 그 자체로는 동시에 은닉이다. 은닉은 그러나 존재자 한복판에서 이중적인 양식으로 전개된다.

107. 존재자에 대해 우리가 그것이 존재한다 라고만 겨우 말할 수 있을 때, 저 일자를 비롯해서 우리와 가장 쉽게 마주치는 외견상 가장 사소한 것을 제외하고는 존재자는 우리에게서 자기를 거부해버린다. 거부로서의 은닉은, 비로소 그리고 단지 인식의 그때마다의 한계만은 아니고, 오히려 밝혀진 곳의 밝힘의 시원이다. 그러나 은닉은 이와 동시에, 물론 그 양식은 다르겠지만, 밝혀진 곳의 내부에도 있다. 존재자가 존재자 앞에 끼어들고 하나가 다른 하나에 베일을 씌워 가리워버리며, 전자가 후자를 덮어 흐리게 하고, 소수가 다수를 호도하며 개별적인 것이 모든 것을 부정해버린다. 여기서 은닉은 저 단순한 거부가 아니다. 실로 존재자가 나타나기는 하나, 존재자는 그것이 존재하는 바 그것과는 다르게 자기를 내어 준다.

108. 이러한 은닉은 위장이다. 만일 존재자가 존재자를 위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존재자를 잘못 볼 수도 잘못 다룰 수도 없을 것이고, 길을 잃어버리지도 길을 잘못 갈 수도 없을 것이며 마침내 결코 잘못 가늠하는 일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존재자가 가상으로서 속인다는 사실은, 우리가 스스로 착각할 수 있다는 데 대한 조건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109. 은닉은 거부일 수 있거나 아니면 다만 위장일 수 있을 뿐이다. 과연 은닉이 거부인지 아니면 위장인지에 대한 확신을 우리는 결코 곧바로 갖지 못한다. 은닉은 자기 스스로를 은닉하고 위장한다. 이 말은 다음을 뜻한다. 즉 존재자 한복판에서의 열린 자리, 즉 밝힘은, 지속적으로 막이 오른 채 그 위에서 존재자의 놀이가 상연되는 그런 고정된 무대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밝힘은 오직 저 이중적인 은닉으로만 발생한다. 존재자의 비은폐성, 그것은 그저 눈앞에만 있는 어떤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일종의 발생사건이다. 비은폐성(진리)은 존재자라는 의미에서의 사태의 한 속성도, 명제의 한 속성도 아니다.

110. 존재자에 가장 가까운 주변에서 우리는 고향같은 믿음을 갖는다. 존재자는 친밀하고 신뢰스럽고 안온하다. 그런데도 밝힘을 통해 일종의 지속적인 은닉이 거부와 위장이라는 이중의 형태로 끌어 당기고 있다. 안온한 것은 근본에 있어서는 안온하지 않다. 그것은 섬뜩하다(un-geheuer). 진리의 본질, 다시 말해 비은폐성의 본질이 일종의 거절(Verweigerung)에 의해서 두루두루 전개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거절은, 마치 모든 은닉을 쓸어버린 순전한 비은폐성이 곧 진리인 양, 그렇게 결핍이나 결함인 것은 결코 아니다. 진리가 그러한 순전한 비은폐성일 수 있다면, 진리는 더이상 진리 자체가 아닐 것이다. 비은폐성으로서의 진리의 본질에는 이러한 거절이 이중적인 은닉의 방식으로 속하고 있다. 진리는 그 본질상 비-진리(Un-wahrheit)이다. 어쩌면 의아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그 말이 암시하고 있는 것을 신중하게 나타내 보자면, 그것은 이렇게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 밝힘으로서의 비은폐성에는 거절이 은닉의 방식으로 속하고 있다. '진리의 본질은 비-진리이다'라는 명제를 이와는 반대로, '진리란 근본적으로 오류이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 명제는 다음을 의미하고 있지도 않다. 즉 진리는 결코 그것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변증법적으로 생각해서 그것의 반대급부이기도 하다고 말이다.

111. 거부로서 은닉하는 거절이 비로소 일체의 밝힘에게 지속적인 유래를 지정해 주고, 그러면서도 위장으로서 은닉하는 거절이 일체의 밝힘에게 현혹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 준엄함을 지정해 주는 한에서, 진리는 진리 자체로서 현성한다. 은닉하는 거절과 더불어 진리의 본질에 있어 반드시 언급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은, 진리의 본질에 있어 밝힘과 은닉 사이에 성립하고 있는 맞선대립이다. 그것은 근원적 투쟁의 상호대립이다. 진리의 본질은 그 자체에 있어 원초 투쟁이다. 이러한 원초 투쟁에서는 그 안으로 존재자가 들어서고 거기에서부터 존재자가 자기를 자기자신에로 되돌려 세우는 그런 저 열린 한가운데가 쟁취된다.

112. 이러한 열린 장은 존재자 한복판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언급했던 하나의 본질성향을 내보이고 있다. 열린 장에는 한 세계와 대지가 속한다. 그러나 세계는 단순히 밝힘에 상응하는 열린 장이 아니요, 대지는 은닉에 상응하는 '닫혀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란, 거기에 모든 결정들이 따라가는 그런 본질적 지침들의 궤도를 밝힘이다. 각각의 결정은 그러나 마음대로 처분하지 못하는 것, 은닉된 것, 현혹시키는 것에 근거한다. 그런 게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의 결정이 아닐 것이다. 대지란 단순히 닫혀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닫아버리는 것'으로서 솟아나는 바 그것이다. 세계와 대지는 각기 그 자체에 있어 그것들의 본질에 따라 투쟁 중에 있고 투쟁가능하게 있다. 오직 이러한 것들로서만, 세계와 대지는 밝힘과 은닉의 투쟁 속으로 들어선다.

113. 진리가 밝힘과 은닉의 원초투쟁으로서 발생하는 한에서만, 대지는 세계를 뚫고 솟아나고, 세계는 대지 위로 자기를 근거짓는다. 그러나 어떻게 진리는 발생하는가? 우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 진리는 드문 본질적인 방식들로 발생한다고 말이다. 진리가 발생하는 이같은 방식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작품의 작품존재이다. 한 세계를 건립하고 대지를 이쪽으로 세우면서 작품은, 그 속에서 전체로서의 존재자의 비은폐성, 즉 진리가 쟁취되는 그런 저 투쟁의 격돌로 존재한다.

114. 신전이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진리가 발생한다. 이 말은, 여기서 어떤 것이 올바르게 표현되고 재현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체로서의 존재자가 비은폐성 안으로 데려와지고 그 안에서 견지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견지한다(Halten) 함이란, 근원적으로는 보호함을 일컫는다. 반 고흐의 회화 속에서 진리가 발생한다. 이 말은, 여기서 어떤 눈앞의 것이 올바르게 모사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신발도구의 도구존재가 개방됨에 있어, 전체로서의 존재자가, 즉 대립항쟁 중에 있는 세계와 대지가, 비은폐성 안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115. 작품 속에서 진리가 작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일종의 참된 것만이 작품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게 아니다. 농부의 신발을 나타내 보이고 있는 그림, 로마의 분수를 이야기하고 있는 시는, 만약 이 그림과 이 시가 각기 어떤 것을 알리고 있다면, 이러한 개별적 존재자가 이것으로서 존재하는 바 그것을 알리고 있기도 하겠지만, 이에 못지 않게 그 그림과 그 시는 오히려 전체로서의 존재자와 관련해서 비은폐성 자체를 발생케 하고 있다. 신발도구가 보다 더 단순하게 그리고 보다 더 본질적으로 솟아나면 솟아날수록, 분수가 보다 더 치장없이 그리고 더 순수하게 그 본질에 있어 솟아나면 솟아날수록, 이것들과 더불어 일체의 존재자가 더욱 더 직접적으로 그리고 더욱 더 받아들이기 쉽게 더욱 더 존재적이 된다. 바로 이와 같은 식으로, 스스로를 은닉하는 존재가 밝혀져 있다. 그러한 식의 빛은 그 빛남을 작품 속으로 맞추어 잇댄다. 작품에로 맞추어 잇대어진 빛남이 곧, (Sch nes)이다. 아름다움이란 비은폐성으로서의 진리가 현성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116. 지금 진리의 본질이 몇몇 관점들에 따라 더욱 더 두드러지게 파악되긴 했다. 이에 따라 작품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바 그것이 더욱 더 투명해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드러나 보인 작품의 작품존재는 작품의 저 가장 가깝고도 강압적인 현실성, 즉 작품에서의 사물적 차원에 대해서는 아직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해주고 있지 않다. 더욱이 우리는 작품 자체의 '자기 안에 서 있음'을 가능한 한 순수하게 파악해내고자 하는 배타적인 의도에서 마치 이러한 의도 너머로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사실을 완전히 간과해 버린 것처럼 보인다. , 하나의 작품은 언제나 하나의 작품으로,-- 그럼에도 이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 하나의 '작용된 것'(Gewirktes)으로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 말이다. 만일 작품을 작품으로서 눈에 띄게 해주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작품의 '창작되어 있음'(Geschaffenheit)에 해당한다. 작품이 창작되는 한, 그리고 그것에서부터 그리고 그것에서 창작행위가 창작을 행하는 그런 하나의 매개물을 이러한 창작행위가 필요로 하는 한, 저 사물적 차원이 또한 작품 속으로 오게 된다. 이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유독 다음과 같은 물음이 남아 있다. ,'창작되어 있음'은 어떻게 작품에 속하는가? 이 점은 다음과 같은 이중적인 사항이 해명되어 있을 때에만 밝혀질 수 있다.

117. 1. 여기서 '창작되어 있음'과 창작은 제작과 '제작되어 있음'과 구별해서 무엇을 일컫는가?

118. 2. '창작되어 있음'이 어느 정도로 작품에 속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디까지 작품의 작품존재를 규정하는지가 유독 거기에서부터만 비로소 가늠될 수 있는 작품 자체의 그런 가장 내적인 본질이란 어떠한 것인가?

119. 창작이 여기서는 언제나 작품과 관련해서 사유되고 있다. 작품의 본질에는 진리의 발생이 속한다. 애초부터 우리는 창작의 본질을, 존재자의 비은폐성으로서의 진리의 본질에 대해 그 창작이 맺고 있는 연관에서부터 규정하고 있다. 작품에 '창작되어 있음'이 귀속하고 있음은 오직 진리의 본질에 대한 한층 더 근원적인 해명에서부터만 밝혀낼 수 있다. 진리와 그 본질에 대한 물음이 되돌아 온다.

120. '작품 속에서 진리가 작용하고 있다'고 하는 명제가 어떠한 공허한 주장으로도 머물러 있지 않아야 한다면, 우리는 진리와 그 본질에 대한 물음을 한번 더 물어야 한다.

121. 지금에야 비로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더 본질적으로 물어야 한다. 어느 정도로 진리의 본질에는 하나의 작품과 같은 것에로의 성향이 놓여 있는가? 진리는 어떤 본질이기에, 진리는 작품 속으로 정립될 수 있고, 혹은 진리로서 존재하기 위해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 심지어 작품 속으로까지 정립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인가? 그런데 우리는 '진리의 작품 속으로의 정립'을 예술의 본질로서 규정했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제기되는 물음은 다음과 같다.

122. 진리가 무엇이기에, 진리는 예술로서 발생할 수 있고, 혹은 예술로서까지 발생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어느 정도로 예술은 주어져 있는가?

 

 

 

진리와 예술

 

 

123. 예술작품과 예술가의 근원은 예술이다. 한 존재자의 존재가 거기에서 현성하는 그런 본질의 유래가 근원이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예술의 본질을 현실적인 작품에서 찾고 있다. 작품의 현실성은 작품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그것, 즉 진리의 발생에서부터 규정되었다. 이러한 발생사건을 우리는 세계와 대지 사이의 투쟁의 격돌로서 사유하고 있다. 이러한 격돌의 밀집된 운동 속에서 고요가 현성한다. 이러한 고요에 작품의 '자기 안에 머무름'이 근거한다.

124. 작품 속에서는 진리의 발생사건이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작용하고 있는 그것은 그럼에도 작품 속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이미 현실적인 작품이 저 발생의 담지자로서 전제되고 있는 셈이다. 눈앞에 있는 작품의 저 사물적 차원에 대한 물음이 즉각 우리 앞에 다시 서게 된다. 그렇다면 결국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사실이 확연해진다. , 우리가 아무리 작품의 '자기 안에 서 있음'을 그토록 열심히 탐문한다 해도, 작품을 일종의 작용된 것으로서 받아들이는 일에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한, 우리는 작품의 현실성을 놓쳐 버리고 말 것이라고. 작품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가장 자명한 듯하다. 왜냐하면 작품(Werk)이라는 낱말에서 우리는 작용된 것임(Gewirktes)을 듣기 때문이다. 작품의 작품적 차원은 예술가에 의한 작품의 '창작되어 있음'에서 성립한다. 이렇게 가까이 놓여 있으면서 모든 것을 해명해주는, 작품에 대한 이러한 규정이 지금에야 비로소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이 의아하게 보일 것이다.

125. 그러나 작품의 '창작되어 있음'은 분명 창작의 진행에서부터만 개념파악될 수 있다. 이렇듯 예술작품의 근원을 적중시키기 위해서는 우리는 사태의 강박 아래서 오히려 예술가의 활동성을 조사해 들어가는 일에 동의해야 한다. 작품의 작품존재를 순수하게 작품 자체에서부터 규정하려는 시도는 실행불가능한 것으로서 입증된다.

126. 지금 우리가 작품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창작의 본질을 따라 밟아 나갈 경우, 오히려 우리는 처음에 농부의 신발 그림에 대해 그리고 그 다음에 그리스 신전에 대해 이야기됐던 바 그것을 우리의 앎 속에 간직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127. 창작(Schaffen)을 우리는 일종의 산출함(이쪽으로 앞에 데려옴)으로서 사유한다. 그러나 산출함은 도구를 제작해 냄이기도 하다. 물론 수공업은, 이상한 말장난처럼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어떠한 작품도 창작하지 않는데, 설령 꼭 필요한 것으로 존재하는 그런 수공업적 생산물을 우리가 공장제품과 구별할 때에조차도 그렇다. 그렇다면 무엇에 의해 창작으로서의 산출함이 제작의 방식에 의한 산출과 구별되는가? 작품의 창작(Schaffen)과 도구의 제작(Anfertigen)을 우리가 글자소리에 따라 쉽게 서로 구분지어내는 만큼이나, 산출함의 그 두 방식들을 각기 그것들의 고유한 본질특징들에 있어 추적하는 일은 그만큼 더 어렵다. 가장 가까운 인상을 좇아서 보자면, 우리는 도공의 활동, 조각가의 활동, 가구공의 활동 그리고 화가의 활동에서 동일한 행동관계를 발견한다. 작품창작은 그것 자체에서부터는 애초부터 수공업적인 행위를 요한다. 위대한 예술가는 수공업적인 기량을 가장 높이 평가한다. 그는 완벽한 솜씨에서부터 발휘되는 그의 꼼꼼한 손질을 요구한다. 그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손작업에 있어 부단히 새로운 숙련을 위해 노력한다. 사람들은 종종 이미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충분히 지적해 왔다. , 예술의 작품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갖고 있었던 그리스인들은 수공업과 예술에 대해 (테크네)라는 낱말을 똑같이 사용하며 수공업자와 예술가를 (테크니테스)라는 똑같은 이름을 갖고서 지칭한다는 것이다.

128. 그러한 까닭에 창작의 본질을 그 수공업적인 측면에서부터 규정하는 일이 마치 상책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사태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경험을 지칭하는 그리스인들의 그러한 언어사용에 대한 지적은 분명 우리로 하여금 심사숙고하게 만든다. 수공업과 예술에 대해 테크네라는 똑같은 낱말로써 그리스인들에 의해 곧잘 행해졌던 그러한 지적을 언급한다는 것이 아무리 통례적이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그러한 지적은 그럼에도 뒤틀리고 피상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테크네는 수공업도, 예술도 의미하지 않으며 더군다나 오늘날의 의미에서의 기술적인 것을 전혀 의미하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즉 테크네는 도대체 결코 실천적인 수행의 한 양식을 의미하고 있는 게 아니다.

129. 테크네라는 낱말은 오히려 앎의 한 방식을 지칭한다. 앎이란 봄(Sehen)의 넓은 의미인 '본 적이 있음'(gesehen haben)을 일컬는데, 이는, '현전하는 것을 하나의 그 자체로서 받아들임'을 말한다. 앎의 본질은 그리스 사유에게 있어서는 (알레테이아), 다시 말해 존재자의 탈은폐에 기인한다. 이러한 탈은폐가 존재자와의 모든 각각의 행동관계를 지탱하고 주도한다. 테크네란 그리스적으로 경험된 앎으로서, 이러한 앎이 현전하는 것 그 자체를 은폐성에서부터 고유하게 그 보임새의 비은폐성 안으로 앞에 데려오는 한에서, 일종의 존재자를 산출함(이쪽으로 앞에 데려옴)이다. 테크네는 결코 어떤 만듦의 활동을 뜻하는 게 아니다.

130. 예술가가 일명 (테크니테스)인 까닭은, 그가 또한 수공업자이기도 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까닭은, 작품의 '이쪽으로 세움'뿐만 아니라 도구의 '이쪽으로 세움'(제작)도 존재자를 애초부터 그 보임새에서부터 그 현전에로 앞으로 오게 하는 그런 저 산출함(이쪽으로 앞에 데려옴)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은 자생적으로 피어오르는 존재자, (퓌지스) 한 가운데에서 일어난다. 예술을 테크네로서 지칭함은 결코, 예술가의 행위가 수공업적인 것에서부터 경험된다는 것을 찬성하여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작품창작에서 마치 수공업적인 제작처럼 겉으로 보여지는 바 그것은 다른 유형의 것이다. 이러한 유형의 행위는 창작의 본질에 의해 규정되고 있으며 창작의 본질에 의해 두루두루 조율되고 있고 이러한 창작의 본질 안에 또한 보유되어 머물러 있다.

131. 수공업을 실마리로 삼지 못한다면, 무엇을 실마리로 삼아 우리는 창작의 본질을 사유해야 하는가? 창작해야 할 것의 관점에서부터, 즉 작품의 관점에서부터 사유하는 길밖에는 달리 또 무슨 길이 있겠는가? 작품이 창작의 이행에서 비로소 현실적이 되고 그래서 작품이 그 현실성에 있어 이러한 창작에 의존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창작의 본질은 작품의 본질로부터 규정된다. 설령 작품의 '창작되어 있음'이 창작과 하나의 연관을 맺고 있다 할지라도, '창작되어 있음' 또한 창작과 마찬가지로 작품의 작품존재에서부터 규정되어야 한다. 어째서 우리가 처음에 그리고 줄곧 작품만을 다루어 오다가 마지막에 와서야 비로소 '창작되어 있음'을 시야에 데려오는가 하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는 더이상 놀라운 것이 못 된다. '창작되어 있음'이 만일, 그것이 작품이라는 낱말에서부터도 울려나오듯이, 그렇게 본질적으로 작품에 속할 경우, 이때 우리는 지금까지 작품의 작품존재로서 규정될 수 있었던 바 그것을 한층 더 본질적으로 이해하기를 시도해야 한다.

132. 작품 속에서 진리의 사건이 작용하고 있다고 하는, 작품의 본질에 대해 획득된 그런 경계규정의 관점에서부터 우리는 창작을 '하나의 산출된 것 안으로 밖으로 솟아나게 함'이라고 특징부여해 볼 수 있다. 작품이 '작품이 됨'은 진리의 생성과 발생의 한 방식이다. 그러한 본질에 모든 것이 놓여 있다. 그러나 진리가 무엇이기에, 진리는 창작된 것과 같은 것 속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가? 어느 정도까지 진리는 그 본질의 지반에서부터 작품에로의 성향을 갖는가? 이러한 점이 과연 지금까지 해명된 진리의 본질에서부터 개념파악될 수 있는가?

133. 은닉이라는 의미에서의 '탈은폐된 것이 아직 아님'(Noch-nicht/Un-)의 유래영역이 진리에 속하고 있는 한에서, 진리는 곧 비-진리(Un-Wahrheit)이다. 진리로서의 비-은폐성(Un-verborgenheit) 안에는 동시에 일종의 이중적인 방해(Verwehren)라는 다른 '-'(Un-)가 현성하고 있다. 진리는 밝힘과 이중적인 은닉의 상호대립 속에서 그 자체로서 현성한다. 진리란, 그 안에서 그때마다 하나의 방식으로 열린 장(das Offene)이 쟁취되는 그런 원초투쟁인데, 존재자로서 자기를 내보이고 빠져나가는 그 모든 것이 그러한 열린 장 안으로 들어서고 거기에서부터 스스로 물러난다. 언제 그리고 어떻게 이러한 투쟁이 터져 나오고 발생하건 간에, 싸움을 벌이는 것들, 즉 밝힘과 은닉이, 이러한 투쟁을 통해 서로 갈라져 비켜선다. 이렇게 해서 투쟁공간의 열린 장이 쟁취된다. 이러한 열린 장의 열려 있음, 다시 말해 진리는, 그것이 스스로 그의 열린 장 안으로 스스로를 맞추어 넣을 때에만 그리고 그런 한에서만, 그것이 무엇인 바 그것으로, 즉 이러한 열려 있음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기에서 열려 있음이 자신의 입지와 지속성을 취하게 되는 이러한 열린 장 안에서 그때그때마다 하나의 존재자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열려 있음이 열린 장을 차지하는 가운데 이러한 열린 장을 열린 채로 유지하고 견지한다. 여기 도처에서 등장하고 있는 '정립함'(Setzen)'차지함'(Besetzen)이라는 말은, 비은폐된 것 안에 세워 놓음을 의미하는 (테시스)라는 그리스어의 의미에서부터 사유되고 있다.

134. '열려 있음이 열린 장 안으로 스스로를 맞추어 넣음'에 대한 언급과 아울러 사유는 여기서는 아직 풀어 헤쳐 보일 수 없는 그런 하나의 영역을 건드리고 있다. 단지 다음과 같은 점만을 추가하자. 존재자의 비은폐성의 본질이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 자체에 속한다면(참조, 존재와 시간, 44), 이 존재 자체는 자기의 본질에서부터 열려 있음('거기'의 밝힘)의 놀이-공간을 발생케 하여 이 놀이-공간을 그 안에서 각각의 존재자가 자기네 방식대로 출현하는 그러한 것으로서 내어온다.

135. 진리는, 진리 자신을 통해 스스로를 여는 그런 투쟁과 놀이공간 안에 스스로를 맞추어 넣는다는 식으로만, 발생한다. 진리란 밝힘과 은닉의 맞선대립이기에, 그 진리에는 여기서 '맞추어 넣음'이라 지칭된 그것이 속하고 있다. 그러나 진리란, 처음에는 별들 가운데 그 어느 곳에 그 자체로 눈앞에 있다가 그 다음에 추후적으로 존재자 가운데 어딘가 다른 곳으로 넣어지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일은 이미, 그럼에도 존재자의 열려 있음이 비로소 하나의 어떤 장소와 그리고 현전하는 것에 의해 채워진 장소의 가능성을 내주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열려 있음의 밝힘과 그리고 열린 장 안으로 맞추어 넣음은 서로 공속한다. 그것들은 똑같이 진리발생의 한 본질이다. 이러한 진리발생은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적이다.

136. 진리를 통해 열려보여진 존재자 속에 그 진리가 스스로를 맞추어 넣는 그런 본질적인 한가지 방식이 곧, '진리가 스스로를 작품 속으로 정립함'이다. 진리가 현성하는 하나의 다른 방식은 국가를 창건하는 행위이다. 진리가 빛남에로 오는 또 하나의 다른 방식은, 단적으로 하나의 존재자로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존재자의 가장 존재적인 것(Seiendestes)으로 존재하는 바 그것의 가까움(N he)이다. 진리가 스스로의 지반을 놓는 또 하나의 다른 방식은 본질적인 헌신이다. 진리가 생성하는 또 하나의 다른 방식은, 존재의 사유로서 이 존재를 그 물음의 가치에서 명명하는 사유자의 물음던짐이다. 이에 반해 학문은 진리의 어떠한 근원적인 발생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미 열려진 하나의 진리영역을 그때그때마다 구축하는 것이요, 그것도 그 영역의 범위 내에서 가능적이고 필연적인 올바름에 따라 내보여지는 그것에 대한 파악과 근거제시를 통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학문이 그 올바름을 넘어 진리에로, 다시 말해 존재자를 그 자체로서 본질적으로 드러냄에로 다가갈 때 그리고 그렇게 다가가는 한에서, 그것은 곧 철학이다.

137. 스스로를 존재자 속으로 맞추어 넣음으로써 비로소 그렇게 진리가 생성한다고 하는 점이 곧 진리의 본질에 속하기 때문에, 진리의 본질에는 존재자 한복판에서 스스로 존재적이 되려는 그런 진리의 한 탁월한 가능성으로서 '작품에로의 성향'(Zug zum Werk)이 놓여 있다.

138. 작품 속으로 진리를 맞추어 넣음이란, 일찍이 있어 본적도 없고 이후에도 결코 더이상 생겨나오지 않을 그런 하나의 존재자를 이쪽으로 앞에 데려옴(산출함)이다. 산출함(이쪽으로 앞에 데려옴)이 이러한 존재자[이쪽으로 앞에 데려와야 할 예술작품]를 열린 장 안으로 세워 놓음으로써, 데려와야 할 것[이쪽으로 앞에 데려와야 할 예술작품]이 비로소, 그 안으로 그것[예술작품]이 솟아나오는 그 열린 장의 열려 있음을 밝힌다. 산출함이 존재자의 개방성을, 즉 진리를, 제대로 데려올 경우, 산출된 것(이쪽으로 앞에 데려와진 것)은 하나의 작품으로 존재한다. 그러한 산출함(이쪽으로 앞에 데려옴)이 곧 창작이다. 이러한 데려옴(Bringen)으로서 창작이란 비은폐성과의 연관 내부에서는 오히려 일종의 받아들임(Empfangen)이요 꺼내옴(Entnehmen)이다. 그렇다면 이때 창작되어 있음은 어디에 성립하는가? 그것은 두 가지 본질규정들을 통해 해명되리라 본다.

139. 진리는 스스로를 작품 속으로 맞추어 놓는다(richtet). 진리는 오직 세계와 대지의 맞선대립 속에서 밝힘과 은닉 사이의 투쟁으로서만 현성한다. 진리는 이러한 세계와 대지의 투쟁으로서 작품 속으로 맞추어 놓여지기를 원한다. 투쟁은 고유하게 산출해야 할 하나의 존재자에서 제거되어서는 안 되며 그 속으로 순전히 숨겨 넣어져서도 안 되고, 오히려 이러한 존재자에서부터 곧바로 열려보여져야 한다. 이러한 존재자는 그러기에 자기 안에 투쟁의 본질성향들을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다. 투쟁 속에서는 세계와 대지의 통일이 쟁취된다. 하나의 세계가 스스로를 열음으로써, 이 세계는 한 역사적 인류에게 승리와 패배, 축복과 저주, 지배와 예속을 결단하도록 한다. 피어오르는 세계는 바로 아직 결정되지 않은 것과 척도가 없는 것을 나타나도록 하며 그렇게 해서 척도와 결정돼 있음의 은닉된 필연성을 열어보인다.

140. 그런데 하나의 세계가 스스로를 열면서 대지가 뚫고 솟아나온다. 대지는 모든 것을 지탱하고 있는 것으로서, 자신의 법칙 속에 감싸간직된 것으로서, 그리고 지속적으로 자기를 닫아 버리는 것으로서, 자기를 내보인다. 세계는 자신의 결정되어 있음과 자신의 척도를 요구하며 존재자를 세계 자신의 궤도의 열린 장 안에 이르게 한다. 대지는 배태하고 돌출하면서 자기를 닫힌 채로 유지하려 하고 모든 것을 자신의 법칙에 맡겨버리려고 애쓴다. 투쟁은 결코 순전한 심연을 벌리어 놓음으로서의 균열이 아니라, 오히려 투쟁은 투쟁벌이는 것들의 자기 귀속함의 밀접성이다. 이러한 균열은 맞서 대립하는 것들을 합일적 지반에서부터 그것들의 통일의 유래에로 합쳐서 찢는다. 그것은 밑바탕 균열(Grundri )이다. 그것은 존재자를 밝힘의 솟아오름이라는 근본성향들을 나타내는 위-균열(Auf-ri )이다. 이 균열은 맞서 대립하는 것들을 파멸시켜버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척도(Ma )와 한계(Grenze)의 맞선대립을 합일적인 '둘레 균열'(Umri )에로 데려온다.

141. 진리는 산출해야 할 하나의 존재자 속으로 스스로를 투쟁으로서, 그것도 오직 투쟁이 이러한 존재자 속에서 열려보여진다는 식으로만, 다시 말해 이러한 존재자 자체가 균열에로 데려와진다는 식으로만, 맞추어 넣는다. 균열이란, '위 균열''밑바탕 균열', '관통 균열''둘레 균열'의 통일적인 전체 성향이다. 진리는 스스로를 존재자 속에, 그것도 이 존재자 자체가 진리의 열린 장을 차지한다는 식으로, 맞추어 넣는다. 이러한 '차지함'(Besetzen)은 그러나, 산출해야 할 것(이쪽으로 앞에 데려와야 할 것), 즉 균열이, 열린 장 안으로 뚫고 솟아오르는 '자기를 닫아 버리는 것'에 스스로를 맡겨놓는다는 식으로만 일어날 수 있다. 균열은 돌의 잡아끄는 무거움에로, 나무의 말없는 단단함에로, 색조의 어두운 작열에로 스스로를 되돌려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대지가 균열을 자기 안에 되돌려 받아들임으로써 균열이 비로소 열린 장 안으로 내세워지게 되며 그래서 열린 장 안으로 자기를 닫아버리는 것으로서 그리고 보호하는 것으로서 뚫고 솟아 오르는 그것 속으로 균열은 세워진다. 다시 말해 정립된다.

142. 균열에로 데려와지고 그래서 대지 속으로 되돌려 세워진, 그리고 그로써 확립된 투쟁이 곧 형태(Gestalt)이다. 작품의 '창작되어 있음'이란, 진리가 형태에로 '확립되어 있음'(Festgestelltsein)을 일컫는다. 형태란, 그것으로서 균열이 자기를 맞추어 잇대는 결합틀(Gef ge)이다. 맞추어 잇대어진 균열이 곧, 진리의 빛남의 맞추어 잇댄 자리(Fuge)이다. 여기서 형태(Gestalt)가 일컫는 바 그것은, 작품이 위로 세워지고[건립되고] 이쪽으로 세워지는 한에서 그것으로서 작품이 현성하는 저 '세움'(Stellen)'몰아-세움'(Ge-stell)에서부터 지속적으로 사유되어야 한다.

143. 작품창작이 일어나는 가운데 균열로서의 투쟁이 대지 속으로 되돌려 세워져야 하고, 대지 자체는 '자기를 닫아 버리는 것'으로서 이쪽으로 앞에 세워지고 유용되어야 한다. 이러한 유용(Brauchen)은 그러나 대지를 하나의 질료로서 소모하지도 남용하지도 않고, 오히려 대지를 바로 그 자체에로 해방시킨다. 대지에 대한 이러한 유용은 일종의 대지와의 작용(Werken)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겉으로는 마치 질료에 대한 수공업적인 사용같이 보인다. 그래서 작품창작도 수공업적인 활동으로 여겨지는 인상이 유래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공업적인 활동은 결코 작품창작이 아니다. 오히려 작품창작은 진리를 형태에로 확립하는 데 있어 언제나 대지의 유용으로서 남아 있다. 이에 반하여 도구의 제작은 결코 직접적으로 진리의 발생을 이루어낼 수 없다. 도구의 제작완료되어 있음은 곧 하나의 질료가 형상지어져 있음이며, 그것도 사용을 위한 준비로서 형상지어져 있음이다. 도구가 제작완료되어 있음이란, 이러한 도구가 자기 자신 너머로 떠나 보내져 용도 속으로 사라져 버린 채로 있다는 것을 일컫는다.

144. 작품의 창작되어 있음은 그렇지가 않다. 이러한 사정은 여기에 끌어들여야 할 두번째 표식에서부터 해명된다.

145. 도구의 '제작완료되어 있음'과 작품의 '창작되어 있음', 그것들이 하나의 '산출되어 있음'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서 함께 서로 일치한다. 그러나 작품의 창작되어 있음은, 이 창작되어 있음이 창작된 것 안으로 함께 창작되어 들어와 있다는 사실에서, 다른 모든 산출함과는 다른 독특함을 갖는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정은 개개의 산출된 것 모두와 어떤 식으로건 생성된 것들 모두에도 해당되지 않는가? 개개의 산출된 것 모두에는 -- 도대체 어떤 것이라면 -- 산출되어 있음이 분명 함께 주어져 있다. 그러나 확실히, 작품에 있어서는 '창작되어 있음'이 창작된 것 안으로 고유하게 창작되어 들어와 있고 그래서 그 '창작되어 있음'이 창작된 것에서부터, 즉 그렇게 산출된 것에서부터 고유하게 앞으로 돌출되어 나온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우리는 '창작되어 있음'까지도 작품에서 고유하게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146. '창작되어 있음'이 작품에서부터 솟아나옴은, 작품이 한 위대한 예술가에 의해서 만들어져 있다고 하는 사실을 작품에서 알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창작된 것이 한 기량있는 자의 활약으로서 입증되고 그래서 활약하는 자가 공공적인 명성에로 부각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개가 만들었음'이 널리 알려져야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단순한 "사실이 있다"(factum est)가 작품 속에서 열린 장 안으로 견지되어야 한다. , 존재자의 비은폐성이 여기서 발생되었으며 이러한 발생된 것으로서 비로소 발생한다는 이러한 사실, 즉 도대체 그러한 작품이 있고 오히려 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고 하는 이러한 사실이 견지되어야 한단 말이다. 작품이 이러한 작품으로서 있다는 사실에 의한 충격과 그리고 이러한 눈에 띄지 않는 타격의 부단함이 작품에 있어 자기 안에 머무름의 지속성을 이룬다. 예술가와 그리고 작품생성의 과정과 내막이 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바로 그 곳에서 이러한 충격이, 즉 이러한 '창작되어 있음'"사실"(Da )이 가장 순수하게 작품에서부터 솟아나온다.

147. 마음대로 처리가능한 그리고 사용 중인 상태에 있는 그런 도구에도 실로, 그것이 제작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이 속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도구에서는 밖으로 나타나기는 커녕, 오히려 그 반대로 용도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하나의 도구를 손에 쥐고서 보다 잘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예컨대 그런 하나의 망치가 있다는 사실은 더욱 더 눈에 띄지 않은 채로 남아 있게 되고, 그 도구는 더욱 더 전적으로 그 도구존재에 머물게 된다. 도대체 우리는 개개의 모든 눈앞의 것(Vorhandenes)에서, 그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 챌 수 있다. 그러나 눈앞의 것이 있다는 이러한 사실이 알아 차려지게 된다 하더라도, 그렇게 되자마자 그것은 통상적인 것의 양식에 따라 망각된 채로 남는다. 그런데 존재자가 있다는 이 사실보다 더 통상적인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에 반해 예술작품에서는 존재자 그 자체가 있다는 이 사실이 바로 놀라운 것(비통상적인 것)이다. 작품의 '창작되어 있음'이라는 존재사건(Ereignis)이 예술작품 속에서 단순히 뒤이어 울려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품이 이러한 작품으로서 있다는 사실로서의 존재사건적 차원이 작품을 자기 앞으로 내어 던져서 작품을 그것 자체에로 지속적으로 내던져져 있게 한다. 더 본질적으로 작품이 스스로를 열면 열수록, '작품이 있고 오히려 없지 않은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에 대한 유일회성이 더욱 더 빛나게 된다. 이러한 충격이 보다 더 본질적으로 열린 장 안으로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작품은 더욱 더 낯설어지고 단독적이게 된다. 작품을 산출함(이쪽으로 앞에 데려옴)에는 이러한 "작품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내어놓음(Darbringen)이 놓여 있다.

148. 작품의 '창작되어 있음'에 대한 물음은 우리를 작품의 작품적 차원과 그리고 이로써 작품의 현실성에로 더 가까이 데려가야 했다. '창작되어 있음''투쟁이 균열에 의해 형태로 확립되어 있음'으로서 드러났다. 이때 '창작되어 있음' 자체는 작품 속으로 고유하게 창작되어 들어와 있고 그래서 저 '사실'(Da )의 적막한 충격으로서 열린 장 안으로 서게 된다. 그러나 '창작되어 있음'에서도 작품의 현실성이 다 길어 내어지고 있지는 않다. 이와는 반대로 작품의 '창작되어 있음'의 본질에로 향한 시선은 분명, 지금까지 말해진 모든 것이 그리로 분투해 나아가는 그곳을 향해 지금 발걸음이 이행해야 할 바로 그 입지에 우리를 앉혀 세울 것이다.

149. 형태로 확립된 작품이 보다 더 단독적으로 자기 안에 서 있으면 서 있을수록, 인간에 대한 작품의 그 모든 연관들이 보다 더 순수하게 풀려난 것처럼 보이면 보일수록, 그러한 작품이 있다는 사실의 충격이 한층 더 단순하게 열린 장 안으로 들어서고, 한층 더 본질적으로 섬뜩함이 맞닥뜨려지며 지금까지 평온하게 나타나던 것이 넘어뜨려진다. 그러나 이러한 다중적인 충격들은 아무런 폭력적인 것도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작품 자체가 그것 자체를 통해 열려보여진 존재자의 열려 있음 안으로 보다 더 순수하게 밀어뜨려져(entr cken) 있으면 있을수록, 작품은 더욱 더 단순하게 우리를 이러한 열려 있음 안으로 밀어내며(einr cken) 그리고 이와 동시에 우리를 통상적인 것에서부터 밖으로 떼어 밀어내기(herausr cken) 때문이다. 이러한 밀어냄(Verr ckung)을 따른다 함이란, 작품 속에서 발생하는 진리에 머물기 위해서 세계와 대지에 대한 통상적인 연관들을 변화시키고 장차 모든 익숙한 행위와 평가, 지식과 관점을 자제한다는 것을 일컫는다. 이러한 머무름의 자제함(Verhaltenheit)이 창작된 것을 비로소 작품이 그것인 바 그것이게 한다. '작품을 하나의 작품으로 존재하게 해줌'을 우리는 작품의 보존(Bewahrung)이라 명명하기로 한다. 보존에게 비로소 작품은 그것의 '창작되어 있음'에 있어 현실적인 것으로서, 다시 말해 지금은 작품적으로 현전하는 것으로서 주어진다.

150. 창작됨이 없이 도대체 하나의 작품이 존재할 수 없고 그래서 본질적으로 작품은 창작하는 자를 필요로 하듯이, 보존하는 자 없이는 창작된 것 자체 또한 존재적이 될 수 없다.

151. 그러나 한 작품이 보존자를 찾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도 이 보존자가 작품 속에서 발생하는 진리에 상응하는 식으로 그렇게 직접적으로 찾지 못한다고 해서, 이는 결코 작품이 보존자없이도 작품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일컫는 게 아니다. 작품이 하나의 작품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할 경우, 작품이 보존자를 간절히 기다리며 그 작품의 진리 안으로의 보존자의 귀의를 획득하고 그 귀의를 학수고대하는 그때에도 그리고 바로 그때에 작품은 언제나 보존자와 연관되어 머물러 있다. 더욱이 작품이 그 속으로 빠져 버릴 수 있는 그런 망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그 망각은 아직도 일종의 보존함인 것이다. 망각은 작품을 먹고 살아간다. 작품의 보존이란, 작품 속에서 발생하는 존재자의 열려 있음 안에 들어섬을 일컫는다. 보존의 '안에 서 있음'(Inst ndigkeit)은 그러나 일종의 앎(Wissen)이다. 그렇지만 앎은 어떤 것에 대한 순전한 배움과 표상함에서 성립하지 않는다. 존재자를 참되게 아는 자는 그가 존재자 한가운데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152. 여기서 언급된 원함 -- 이러한 원함은 하나의 앎을 비로소 적용시키거나 애초부터 그러한 앎을 결의하는 그런 원함이 아니다 -- 존재와 시간의 사유의 근본경험에서부터 사유되고 있다. 일종의 원함으로 머무는 앎과 일종의 앎으로 머무는 원함이란, 실존하는 인간이 존재의 비은폐성 안으로 자기를 탈자적으로 관여시킴이다. 존재와 시간에서 사유된 결단되어 있음(-폐쇄되어 있음, Ent-schlossenheit)은 어떤 한 주체의 결단된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현존재를 존재자에 사로잡혀 있음에서부터 존재의 열려 있음에로 개방시킴이다. 그렇지만 실존에 있어서 인간은 어떤 내부에서부터 비로소 어떤 외부로 나가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존의 본질이 곧, '존재자의 밝힘의 본질적인 갈라짐(Auseinander) 안으로 나가서서 들어섬'이다. 앞서 언급됐었던 창작에 있어서나 지금 언급된 원함에 있어서도,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서 정립하는 주체와 추구하는 주체의 실행과 행동에 대해서는 사유되고 있지 않다.

153. 원함이란, 작품 속으로 정립된 것인 존재자의 열려 있음에게 자기를 내맡기는 '실존하면서 스스로를 넘어서 감'( bersichhinausgehen)의 냉철한 결단성(-폐쇄되어 있음)이다. 이와 같이 '안에 서 있음'은 자기를 법칙에로 데려온다. 작품의 보존이란, 앎으로서, 작품 속에서 발생하고 있는 진리의 섬뜩함 안에 냉철하게 서 있음이다.

154. 원함으로서 그것이 작품의 진리 안에서 향토적이게 되고 그렇게 해서만 하나의 앎으로 머무는 이러한 앎은 작품을 이 작품의 '자기 안에 서 있음'에서부터 빼내어버리지 않으며, 작품을 순전한 체험의 범위 안으로 끌어내지도 않고, 작품을 일종의 체험유발체의 역할 속으로 떨어뜨려 놓지도 않는다. 작품의 보존은 인간들을 자신들의 체험에로 개별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인간들을 작품 속에서 발생하고 있는 진리와의 공속성 안으로 밀어뜨려, 그렇게 해서 '서로를 위한 존재'(F reinandersein)'서로 더불어 있는 존재'(Miteinandersein)를 비은폐성과의 연관에 의거한 '-존재의 역사적인 나가섬(Ausstehen)'으로서 근거짓는다. 보존이라는 방식에서의 앎은 작품에서의 형태들, 작품의 질과 매력 그 자체에 관한 저 취미적인 전문지식과는 전적으로 거리가 멀다. '본 적이 있음'으로서의 앎은 일종의 '결정되어 있음'(Entschiedensein)인데, 이것은 곧, '작품에 의해 균열에로 맞추어 잇대어진 그런 투쟁 안으로 들어섬'이다.

155. 작품에 대한 올바른 보존의 방식은 유일하게 작품 자체에 의해 비로소 함께 마련되고 앞서 윤곽지어진다. 보존은 각기 상이한 영향범위, 영속성, 명민함을 가진 서로 상이한 앎의 단계에서 일어난다. 작품이 순전한 예술적인 향유를 위해 제공되는 한, 작품이 작품으로서 보존 가운데 서 있다는 사실은 아직 증명되고 있지 않은 셈이다.

156. 섬뜩함에로의 저 충격이 익숙한 것과 전문가적인 것 속에 사로잡혀 버리게 되자마자, 이미 작품들을 둘러싸고 예술사업이 시작되었다. 아무리 주도면밀한 작품의 전승이라든가 작품의 복원을 위한 과학적인 시도도 결코 더이상 작품존재 자체는 획득하지 못하고 단지 그것에 대한 기억만을 획득할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억이라 할지라도 아직 그것은 작품이 거기에서부터 역사를 함께 형성하는 그런 하나의 자리를 작품에게 제공할 수는 있다. 이에 반하여 작품의 가장 고유한 현실성은 오직, 작품이 이 작품 자체를 통해 발생하는 진리 안에 보존되는 거기에서만 배태되기에 이른다.

157. 작품의 현실성은 작품존재의 본질에서부터 본질특징들에 있어 규정되어 있다. 지금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시초의 물음을 다시 받아들일 수 있다. , 작품의 직접적인 현실성을 보증해야 할 작품에서의 저 사물적 차원에서는 사정이 어떠한가? 그 사정은 다음과 같다. 즉 우리는 이제 작품에서의 사물적 차원에 대해 더이상 물음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에 대해 우리가 물음을 묻는 한, 우리는 작품을 즉각 그리고 애초부터 최종적으로 일종의 눈앞의 대상으로 간주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우리는 결코 작품에서부터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 측에서 물음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우리 측에서 물음을 던질 경우, 우리는 작품을 하나의 작품으로 존재하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작품을 우리에게 어떠한 상태이건 야기시켜야 하는 그런 대상으로서 표상한다.

158. 그런데도 대상으로서 간주된 작품에서 마치 익숙한 사물개념이라는 의미에서의 사물적 차원같이 겉으로 보여지는 바 그것은, 작품에서부터 경험하자면, 작품의 대지적 차원이다. 대지가 작품 속으로 돌출한다. 왜냐하면 작품은 그 속에서 진리가 작용하고 있는 그러한 것으로서 현성하기 때문이며, 진리가 스스로를 하나의 존재자 가운데로 맞추어 넣음으로써만 진리는 현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자기를 닫아 버리는 것'으로서의 대지에서는 열린 장의 열려 있음이 자기의 최고의 저항을 발견하고 그럼으로써 열려 있음은 그 안으로 형태가 확립되어야 하는 자신의 그러한 지속적인 입지의 자리를 발견한다.

159. 그럼에도 사물의 사물적 차원에 대한 물음에 관여해 나가는 일은 과연 헛된 짓이었는가? 전혀 그렇지가 않다. 비록 사물적 차원에서부터 작품적 차원이 규정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이와는 반대로 작품의 작품적 차원에 대한 앎에서부터 사물의 사물적 차원에 대한 물음이 올바른 길 위로 데려와질 수가 있다. 만일 저 고대로부터 익숙한 사유방식들이 사물의 사물적 차원을 덮치고 전체로서의 존재자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지배에로 가져가, 이 지배가 그 해석을 진리의 근원적인 본질에 대해 눈멀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지배가 도구와 작품에 대한 본질경험에 대해서는 무력하게 남아 있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그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160. 사물의 사물성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속성들의 담지자에로 향한 시선이나, 감각적으로 통일 안에 주어진 것의 다양성에로 향한 시선도, 심지어는 도구적 차원에서부터 얻어진, 자기에게 표상된 질료-형상-결합틀에로 향한 시선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사물의 사물적 차원의 해석을 위해 척도와 비중을 부여하는 앞선 시선은 대지에 속한 사물의 귀속성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아무것에로도 강요되지 않은 채 지탱하면서 자기를 닫아버리는 것'으로서 대지의 본질은 그러면서도 그것이 오직 한 세계 안으로 돌출하는 가운데에서만, 즉 세계와 대지의 맞선대립 가운데에서만 드러난다. 이러한 투쟁은 작품의 형태로 확립되어 있으며, 이러한 작품을 통해 개방된다. 도구에 해당되는 다음과 같은 사실, 즉 우리가 도구의 도구적 차원을 작품을 통해 비로소 고유하게 경험한다는 사실은, 사물의 사물적 차원에도 해당된다. 우리는 사물적 차원을 결코 곧바로 알지 못하며 그래도 도대체 안다 해도 다만 비규정적으로만 알 뿐이다. 그래서 작품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간접적으로 다음과 같은 점을 제시해주고 있다. , 작품의 작품존재 안에서는 진리의 발생사건이, 즉 존재자를 열어보이는 일이 작용하고 있다.

161. 그러나 작품이 사물적 차원을 열린 장 안으로 적합하게 밀어 넣을 경우, 작품은 그 작품 측에서, 그것도 그 작품이 창작되기에 앞서 그리고 이러한 창작됨을 위해 대지와의 사물의 한 연관 안으로, 즉 자연과의 한 연관 안으로 데려와져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우리는 그렇게 최종적으로 이의를 제기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사정을 틀림없이 알고 있었던 한 사람, 즉 알브레히트 뒤러(A.D rer)는 그럼에도 저 유명한 말을 한다. "참으로 예술은 자연 안에 숨겨 있기 때문에, 그것[예술]을 거기에서부터 밖으로 찢어 끄집어 내올 수 있는 자가 그것[예술]을 갖는다". '찢어 끄집어 낸다'(rei en) 함이란 여기서는, '균열을 밖으로 끌어내온다'는 것과 펜촉을 갖고 균열을 판 위에다 긋는다는 것을 일컫는다. 그러나 우리는 즉각 다음과 같은 반대물음을 들고 나온다. , 만약 균열이 균열로서, 다시 말해 균열이 애초부터 척도와 무척도의 투쟁으로서, 창작하는 기획투사에 의해 열린 장 안으로 데려와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균열이 밖으로 찢어 끄집어 내어져야 하는가? 분명, 자연 안에는 일종의 균열, 즉 척도와 한계 그리고 이에 결부된 '이쪽으로 앞에 데려올 수 있음'(산출할 수 있음), 즉 예술이 숨겨 있다. 그러나 이와 마찬가지로 분명한 사실은, 자연 안의 이러한 예술이 근원적으로는 작품 속에 숨겨 있기 때문에, 그러한 예술은 작품을 통해 비로소 개방가능해진다는 것이다.

162. 작품의 현실성을 찾는 노력은, 현실적인 작품에서 우리가 예술과 그 본질을 발견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예술의 본질에 대한 물음, 즉 예술에 대한 앎의 길이, 비로소 다시금 하나의 지반 위로 데려와져야 한다. 물음에 대한 대답은, 모든 진실한 대답들이 그렇듯이, 단지 물음의 발걸음이라는 기나긴 연속 중에 마지막으로 발길을 내딛는 극단적인 시도일 뿐이다. 모든 각각의 대답들은, 그 대답들이 물음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한에서만, 대답으로서 효력을 유지한다.

163. 작품의 현실성이 작품의 작품존재에서부터 우리에게 한층 더 뚜렷해졌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본질적으로도 더 풍부하게 되었다. 작품의 '창작되어 있음'에는 창작자와 똑같이 본질적으로 보존자가 또한 속하고 있다. 그러나 작품이란 곧, 창작자를 그의 본질에 있어 가능케 하고 그의 본질에서부터 보존자를 필요로 하는 그런 것이다. 만일 예술이 곧 작품의 근원이라고 한다면, 이때 이 말은 다음을 일컫는다. 즉 예술은 작품에 본질적으로 공속하고 있는 것, 즉 창작자와 보존자를 그 본질에 있어 발원케 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 자체는 무엇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정당하게도 하나의 근원이라고 지칭하는가?

 

 

164. 작품 속에서는 진리의 발생사건이, 그것도 한 작품의 방식에 따라 작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애초에 예술의 본질이 '작품 속으로의 진리의 정립'으로서 규정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규정은 의도적으로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첫째로 다음을 말하고 있다: 예술이란 스스로를 맞추어 넣는 진리를 형태에로 확립함이다. 그것은 '존재자의 비은폐성을 이쪽으로 앞에 데려옴(산출함)'으로서의 창작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작품 속으로의 정립'은 동시에 다음을 일컫는다. '작품존재를 궤도 안으로 그리고 발생에로 데려옴'. 이것은 보존으로서 발생한다. 이렇듯 예술이란, 작품 속에서 진리를 창작하는 보존이다. 그렇다면 예술이란 곧 진리의 한 생성(Werden)이요 발생(Geschehen)이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Nichts)에서부터 생겨 나온단 말인가? 실제로 그렇다. 만일 무로써 '순전한 존재자가 아님'이 의미되고 있고 이때 존재자가 저 통상적으로 눈앞에 있는 것으로서 표상되고 있다면 말이다. 그러한 통상적인 눈앞의 것은 나중에, 작품이 거기에 서 있게 됨으로써, 그저 추정적으로만 참된 존재자로서 밝혀지게 되고 뒤흔들리게 된다. 눈앞의 것과 통상적인 것에서부터는 결코 진리를 읽어 낼 수 없다. 오히려 열린 장을 열어보임과 존재자를 밝힘은 오직, 내던져져 있음에서 도래하는 열려 있음이 대응투사됨으로써만 일어난다.

165. 존재자의 밝힘과 은닉으로서의 진리는, 이 진리가 시작(詩作)됨으로써, 발생한다. 모든 예술은 존재자의 진리의 도래를 발생케 하는 것으로서 그 자체 본질에 있어서는 시작(詩作 / Dichtung)이다. 거기에서 예술작품과 예술가가 함께 머무는 그런 예술의 본질이란, '진리가 스스로를 작품 속으로 정립함'이다. 예술의 시작하는 본질에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이 일어난다. 즉 예술이 존재자 한복판에서 하나의 열린 자리를 펼쳐, 이러한 열린 자리의 열려 있음 안에서 모든 것이 그전과는 다르게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를 향해 자기를 던져오는 존재자의 그런 비은폐성을 작품 속으로 정립한 대응투사에 힘입어서, 모든 통상적인 것과 기존의 것이 작품을 통해 비존재자가 된다. 이렇게 비존재로 되는 통상적인 것과 기존의 것은 존재를 척도로서 내어주고 지켜주는 능력을 상실했다. 이때 기이한 사실은, 작품이 기존의 존재자에 대해 어떠한 방식으로도 인과적인 작용연관들을 통해 작용을 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품의 작용은 일종의 작용을 가함에서 성립하지 않는다. 작품의 작용은 작품에서부터 발생하는 존재자의 비은폐성의 한 변화에, 다시 말해 존재의 변화에 기인한다.

166. 시작(詩作)은 그러나 결코 어떤 임의적인 것을 멋대로 생각해내는 것도 아니요 비현실적인 것을 순전히 표상하고 상상하기만 하는 식의 멋대로의 비약도 아니다. 밝히는 대응투사로서의 시작이 비은폐성에서 풀어헤쳐서 형태의 균열에로 앞으로 던지는 바 그것은 곧 열린 장인데, 시작이 이러한 열린 장을 발생시킴으로써, 이제 열린 장이 비로소 존재자 한복판에서 이러한 존재자를 빛남과 울림에로 데려온다. 작품의 본질에로 그리고 이 작품과 존재자의 진리의 발생사건과의 연관에로 본질적인 시선을 던지는 가운데 생겨나는 의문이 있다면 그것은, 시작의 본질 -- 이것은 동시에 대응투사의 본질을 말한다 -- 이 과연 상상과 구상력에서부터 충분히 사유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167. 폭넓게 경험되긴 했어도 그 때문에 규정되지 않은 채로 지금 경험된 시작(詩作)의 본질이 여기서는 이제 비로소 숙고해 보아야 할 물음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서 확고하게 견지되었으리라 본다.

168. 만일 모든 예술이 본질에 있어서 시작(詩作)이라고 한다면, 이 경우 건축예술, 조형예술, 음성예술은 시()로 소급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순전히 자의적이다. 만약 우리가 시를 언어예술이라고 하는 이렇게 쉽게 오해될 수 있는 칭호를 통해 특징지어도 괜찮다고 한다면, 저 언급된 예술들이 언어예술의 변종들이라고 우리가 여기는 한, 저 언급된 예술들이 시로 소급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시는 단지 진리를 밝히는 대응투사의 한 방식, 다시 말해 이러한 넓은 의미의 시작(詩作)의 한 방식일 뿐이다. 그렇지만 언어예술, 즉 좁은 의미의 시작(詩作)은 예술들 전체 가운데에서 하나의 탁월한 지위를 갖고 있다.

169. 이러한 사정을 살펴 보기 위해서는, 단지 언어에 대한 올바른 개념만이 필요할 뿐이다. 통념적으로, 언어는 전달의 한 양식으로서 간주되고 있다. 그것은 담화와 합의, 즉 일반적으로 이해전달을 위해 쓰인다. 그러나 언어는 꼭 전달해야 할 바 그것에 대한 발설적이고 문서적인 표현이지만도 않고 일차적으로도 그러한 것이 아니다. 언어는 개방가능한 것과 감추인 것을 그렇게 의미된 것으로서 비로소 낱말과 문장에 실어 계속 내보낸다기 보다는, 오히려 언어는 존재자를 하나의 존재자로서 비로소 처음으로 열린 장 안으로 데려온다. , 식물, 동물의 존재에서처럼 어떠한 언어도 현성하지 않는 그와 같은 곳에서는, 존재자의 어떠한 열려 있음도 그리고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 것과 공허한 것의 어떠한 열려 있음도 존재하지 않는다.

170. 언어가 처음으로 존재자를 명명함으로써, 그러한 명명함이 존재자를 비로소 낱말과 나타남에로 데려온다. 이러한 명명함은 존재자를 존재에서부터 그것의 존재에로 임명한다. 그러한 말함(Sagen)은 일종의 '밝히움을 대응투사함'인데, 거기에서는 무엇으로서 존재자가 열린 장 안으로 들어오는지가 말해 알려진다. 대응투사한다 함이란, 그것으로서 비은폐성이 자기를 존재자 그 자체 안으로 보내는 그런 하나의 던짐(Wurf)'풀어 내어옴'(Ausl sen)이다. 대응투사하는 '말해 알림'(Ansage)은 곧, 존재자가 그 안에서 자기를 숨기고 물러나 있는 그런 모든 침침한 혼란과의 결별로 된다.

171. 대응투사하는 말함은 곧 시작(詩作)이다. 즉 그것은 세계와 대지에 관한 이야기요, 세계와 대지의 투쟁의 놀이공간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래서 신들의 그 모든 가까움과 멂의 처소에 관한 이야기이다. 시작(詩作)이란 존재자의 비은폐성의 이야기이다. 그때그때마다의 언어는, 그 속에서 역사적으로 한 민족에게 그 민족의 세계가 피어오르고 대지가 닫혀버린 것으로서 보존되는 그런 저 말함의 사건이다. 대응투사하는 말함이란, 말할 수 있는 것을 마련하면서 동시에 말할 수 없는 것 그 자체를 세계에로 데려오는 그러한 말함이다. 그러한 말함 속에서는, 한 역사적 민족에게 그 민족의 본질개념들이, 다시 말해 세계-역사에로의 그 민족의 귀속성의 개념들이 앞서 각인된다.

172. 시작이 여기서는 하나의 아주 넓은 의미에서 그리고 동시에 언어 및 낱말과의 아주 밀접한 본질 통일에서 사유되어 있기에, 과연 예술이, 그것도 건축예술에서부터 시에 이르기까지의 그 모든 방식들에서, 시작의 본질을 길어내고 있는지가 열린 채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173. 언어 자체는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시작(詩作)이다. 그러나 이제 언어란, 그 속에서 인간들에게 그때마다 존재자로서의 존재자가 비로소 열어밝혀지는 그런 사건인 까닭에, (), 즉 좁은 의미의 시작은 본질적인 의미에 있어 가장 근원적인 시작이다. 시작이 곧 원초 시이기 때문에 언어가 시작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가 시작의 근원적인 본질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시가 언어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건축과 그림은 이에 반해 언제나 이미 그리고 언제나 오직 말함과 명명함의 열린 장 안에서만 발생한다. 이러한 말함과 명명함의 열린 장에 의해 건축과 그림이 철저하게 지배되고 이끌려진다. 그러기에 건축과 그림은, 진리가 자기를 작품 속으로 맞추어 놓는 그런 고유의 길들과 방식들로 머문다. 건축과 그림은 존재자의 밝힘 내부에서의 각기 고유의 한 시작인데, 이때 다만 이러한 존재자의 밝힘은 이미 그리고 전혀 주목되지 않은 채로 언어 속에서 발생되어 있다.

174. 예술이란 '작품 속으로의 진리의 정립'으로서 곧 시작(詩作)이다. 작품의 창작만이 시작적인 것이 아니라, 그 고유한 방식에 있어서만큼은, 작품의 보존도 마찬가지로 시작적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작품이 하나의 작품으로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경우란 오직, 우리가 우리 자신을 우리의 통상성으로부터 밀어뜨려 작품에 의해 열려보여진 것 안으로 밀어냄으로써 우리의 본질 자체를 존재자의 진리 안에 서 있음에로 데려오는 때이기 때문이다.

175. 예술의 본질은 시작(詩作)이다. 그런데 시작의 본질은 진리의 설립(Stiftung)이다. 설립을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삼중적인 의미로 이해한다: 선사(Schenken)로서의 설립, 정초(Gr nden)로서의 설립, 시원(Anfangen)으로서의 설립. 설립은 그러나 오직 보존에서만 현실적이다. 그러므로 설립 개개의 한 방식들에는 보존의 한 방식이 각기 상응한다. 예술의 이러한 본질골격을 우리는 지금 단지 몇 줄에 걸쳐서만 드러내보일 수 있을 뿐인데, 그것도 작품의 본질에 대한 앞에서의 특징규정이 이에 대해 하나의 첫번째 지시를 제공하는 정도에 한해서만 그렇다.

176. '작품 속으로의 진리의 정립'은 섬뜩함을 맞닥뜨리며 이와 동시에 평온함과 그리고 사람들이 평온하다고 여기는 바 그것을 넘어뜨린다. 작품 속에서 열려보여지는 진리는 결코 기존의 것에서부터 확보되어서도 도출되어서도 안 된다. 기존의 것은 그것의 배타적인 현실성에 있어 작품을 통해서 반박된다. 예술이 설립하는 바 그것은 그러기에 결코 눈앞의 것과 처분가능한 것을 통해 상쇄될 수도 메꿔질 수도 없다. 설립은 일종의 넘쳐 흐름( berflu )이요 선사함(Schenken)이다.

177. 자기를 작품 속으로 형태로서 세우는 그런 진리를 시작(詩作)하는 대응투사는 또한 결코 공허와 비규정된 것 속으로 이행되지도 않는다. 진리는 작품 속에서는 오히려 미래의 보존자들에게, 다시 말해 한 역사적 인류에게 내던져져온다. 그렇지만 내던져져온 것은 결코 어떤 자의적으로 추정된 것이 아니다. 참답게 시작(詩作)하는 대응투사란, 그 안으로 현존재가 역사적인 현존재로서 이미 내던져져 있는 그곳을 열어보임이다. 그것은 대지이며 그리고 한 역사적 민족에게 있어서는 그 민족의 대지, 즉 그 위에서 그 민족이 그 민족 자기 자신은 아직 은닉된 채로 이미 자신이 무엇인 바 그 모든 것과 함께 체류하고 있는, 그러한 자기를 닫아버리는 지반이다. 그런데 그 민족 자신이 무엇인 바 그 모든 것이란, 존재의 비은폐성에 대해 현존재가 맺고 있는 연관에서부터 전개되는 그 민족의 세계이다. 그러기에 인간에게 함께 주어져 있는 모든 것이 닫혀진 지반에서부터 대응투사에서 위로 끌어올려 내와져 고유하게 이 지반 위에다 정립되어야 한다. 이렇듯 지반이 지탱하는 지반으로서 비로소 정초된다.

178. 그와 같이 '끌어올려 내옴'(Holen)이기에, 모든 창작함은 일종의 '길어올림'(Sch pfen)인 것이다(물을 원천에서부터 퍼올린다). 물론 근대의 주관주의는 창조적인 것을 즉각 독재적인 주체의 천재적 수행의 의미로 잘못 해석한다. 진리의 설립은 자유로운 선사라는 의미에서의 설립이자, 이와 동시에 이러한 지반을 놓는 정초라는 의미에서의 설립이다. 시작하는 대응투사가 자신의 선물을 결코 익숙한 것과 기존의 것에서부터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시작(詩作)하는 대응투사는 무()에서부터 온다. 그렇지만 무를 통해 내던져져 온 것이 다름 아닌 역사적 현존재 자신의 아직 보류되어 있는 사명인 한에서, 시작하는 대응투사는 결코 무에서부터 오지 않는다.

179. 선사와 정초는, 우리가 일종의 시원이라고 지칭하는 바 그것의 비매개성을 자체 안에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원의 이러한 비매개성은, 즉 매개될 수 없는 것에서부터의 도약이라는 독특함은, 시원이 오래 전부터 그리고 철저히 눈에 띄지 않게 앞서 준비된다는 사실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사실을 포함하고 있다. 참다운 시원이란 도약으로서 언제나, 그 안에서 모든 도래하는 것이, 비록 어떤 숨겨진 것으로서이긴 하지만, 이미 건너뛰어져 있는 그런 하나의 앞선 도약(Vorsprung)이다. 시원은 종말을 이미 은닉된 채로 간직하고 있다. 참다운 시원은 당연히 태고적인 것의 시발적 차원을 결코 갖지 않는다. 태고적인 것은, 선사하고 정초하는 도약과 앞선 도약이 없기에, 언제나 미래가 없다. 태고적인 것은 자기에게서부터 아무것도 계속해서 떠나 내보낼 수 없다. 왜냐하면 태고적인 것은 자기가 거기에 붙들려 있는 바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간직하고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180. 시원은 이에 반해서, 항상 섬뜩함, 다시 말해 평온함과의 투쟁의 열어밝혀지지 않은 충일을 품고 있다. 시작(詩作)으로서의 예술은 진리의 투쟁의 야기라는 세번째 의미에서의 설립, 즉 시원으로서의 설립이다. 전체로서의 존재자가 존재자 자체로서 열려 있음 안으로의 정초를 요구할 때는 언제나, 예술은 설립이라고 하는 그의 역사적 본질에 이르게 된다. 서양에서는 예술이 처음으로 그리스 정신에서 일어났다. 장차 무엇이 존재라 일컬어지는지가 결정적으로 작품 속에 정립되었다. 그런 식으로 열려보여진 전체로서의 존재자는 그 다음에는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존재자로 변화되었다. 이 일은 중세에 일어났다. 이러한 존재자는 근세가 태동하고 경과하면서 다시금 변화되었다. 존재자는 계산적으로 지배가능하고 꿰뚫어 볼 수 있는 대상으로 되었다. 매번 그때마다 하나의 새롭고 본질적인 세계가 돌출돼 나왔다. 매번 그때마다 존재자의 열려 있음이, 진리가 형태로 확립됨으로써, 존재자 자체 속으로 맞추어 넣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매번 그때마다 존재자의 비은폐성이 발생했다. 존재자의 비은폐성은 스스로를 작품 속으로 정립하며, 그러한 정립을 예술이 온전히 수행해 낸다.

181. 예술이 일어날 때, 다시 말해 하나의 시원이 존재할 때는 언제나, 역사 속으로 하나의 충격이 다가오고 역사가 비로소 또는 다시금 비롯한다. 여기서 역사란, 어떤 모종의 그리고 어쩌면 보다 중대한 것인지도 모르는 그런 시간내재적인 사건들의 순서가 아니다. 역사란, 한 민족을 그 민족과 함께 주어져 있는 것 안으로 밀어뜨리는 것으로서, 한 민족을 그 민족에게 과제로 주어져 있는 것 안으로 밀어뜨리는 것이다.

182. 예술이란 '작품 속으로의 진리의 정립'(Ins-Werk-Setzen der Wahrheit)이다. 이 문장 속에는 하나의 본질적인 이중성이 숨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진리는 정립함의 주체[주어]이자 동시에 객체[목적어]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체[주어]와 객체[목적어]는 여기서는 부적합한 명칭들이다. 그러한 명칭들은 이러한 이중적인 본질을 사유하는 데 있어 방해가 되며 또한 이러한 일은 더이상 여기서의 고찰에는 속하지 않는 과제이다. 예술은 역사적이며 그리고 역사적인 예술로서 예술은 진리를 작품 속에서 창작하는 보존이다. 예술은 시작(詩作)으로서 일어난다. 이러한 시작이란 곧, 선사, 정초, 시원이라는 삼중적 의미에서의 설립이다. 예술은 설립으로서 본질적으로 역사적이다. 이러한 사정은, 예술이 시대의 변천 속에서 무수히 다른 시대와 나란히 출현하기도 하고 이때 변화하다가 사라져 변화하는 볼거리를 역사학에게 제공한다고 하는 그런 피상적인 의미에서의 역사를 예술이 갖는다는 것만을 일컫고 있는 게 아니다. 예술이 역사의 지반을 놓는다고 하는 그런 본질적인 의미에서 예술은 역사이다.

183. 예술은 진리를 발원케 한다. 예술이란 설립하는 보존으로서 작품 속에서 존재자의 진리를 도약시킨다. 어떤 것을 도약시킴, 즉 설립하는 도약에서 어떤 것을 본질유래에서부터 존재에로 데려옴, 이것이 근원(원초-도약)이라는 낱말이 의미하는 것이다.

184. 예술작품의 근원, 다시 말해 창작하는 자와 동시에 보존하는 자의 근원, 다시 말해 한 민족의 역사적 현존재의 근원은 예술이다. 그러한 까닭은, 예술이 그 본질에 있어 하나의 근원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즉 예술은 진리가 존재적으로, 다시 말해 역사적으로 되는 하나의 탁월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185. 우리는 예술의 본질에 대해 묻고 있다. 어째서 우리는 그렇게 묻고 있는가? 과연 예술이 우리 역사적 현존재에 있어 하나의 근원인지 아닌지, 과연 그리고 어떠한 조건들 아래서 예술은 근원으로 존재할 수 있고 또 근원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보다 더 본래적으로 묻기 위해서 우리는 그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186. 그와 같은 숙고는 예술과 예술의 생성을 강요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숙고적인 앎은 예술의 생성을 위한 임시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불가피한 예비이다. 오직 그와 같은 앎만이 작품에 대해 공간을, 창작하는 자들에게는 길을, 보존하는 자들에게는 입지를 마련해 준다.

187. 다만 서서히 자라나올 수 있을 뿐인 그와 같은 앎 속에서 다음과 같은 점에 대해 결정이 내려진다. 과연 예술이 하나의 근원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렇다면 예술이 하나의 앞선 도약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아니면 예술은 단지 하나의 추가물로만 남아 있어야 하고 그래서 일종의 상투적이 되어버린 문화현상의 하나로서만 그저 동반될 수 있을 뿐인지.

188. 우리 현존재에 있어 우리는 역사적으로 근원에 있는가? 우리는 근원의 본질을 알고 있는가, 다시 말해 거기에 주목하고 있는가? 아니면 예술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있어서 우리는 아직도 그저 지나가 버린 것에 대한 교양적인 지식에만 머물러 있는가?

189. 이러한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위해 그리고 이에 대한 결정을 위해 하나의 틀림없는 표식이 주어져 있다. 시인 횔덜린 -- 그의 작품의 진가를 독일인들이 알아볼 수 있을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 -- 이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언급한 적이 있다.

 

 

190. "근원 가까이에 거주하는 이는

그 자리를 아주 어렵게 떠난다."

 

<방랑>, 전집 제(Hellingrath) 167.

 

 

 

후 기

 

 

191. 앞에서 행한 숙고들은 예술의 수수께끼에 다가가고 있다. 수수께끼, 그것은 곧 예술 그 자체이다. 가까이 요구되고 있는 것은, 수수께끼를 푸는 일이 아니다. 수수께끼를 보는 일이 과제로 제기되고 있다.

192.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하나의 독자적인 고찰이 시작된 때와 동일한 시기 이래로 사람들은 이러한 고찰을 미학적 고찰이라 부르고 있다. 미학은 예술작품을 일종의 대상으로서, 그것도 (아이스테시스)의 대상, 즉 넓은 의미에서의 감각적 받아들임의 대상으로서 간주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러한 '받아들임'을 체험이라 부르고 있다. 인간이 예술을 체험하는 양식이 예술의 본질을 해명해 주어야 한다고 한다. 체험은 예술적 향유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예술창작을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결정적인 원천이다. 모든 것이 체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험이라는 것은 어쩌면, 그 안에서 예술이 죽어 없어지는 그런 요소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죽음은 수 세기를 요할 만큼 서서히 일어나고 있다.

193. 그러나 사람들은 불멸의 예술 작품들이라든가 영원한 가치로서의 예술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렇듯 사람들은 그와 같은 것을 일체의 본질적인 사정들에서 정확하게 고려하지 않고 있는 언어로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언어는, 정확하게 고려함이 결국에 가서 사유함이라 불리워지게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유 앞에서의 불안보다 더 큰 불안은 어떤 것인가? 불멸의 작품들과 예술의 영원한 가치에 대해 운운하는 말은 과연 하나의 내용이라든가 구성요소를 갖고 있는가? 아니면, 이렇게 아직 반쯤만 사유됐을 뿐인 그런 이야기 방식들은, 인간으로부터 위대한 예술이 그 본질과 함께 죄다 물러나 버린 그런 한 시대에 존재하는 것들인가?

194. 서양이 점유하고 있는 예술의 본질에 대한 가장 방대하면서도 바로 형이상학에서부터 사유된 숙고인 헤겔의 미학 강의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있다.

195. "우리는 예술을 더이상, 진리가 스스로 실재를 마련하는 최고의 방식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WW.X,1, 134) "사람들은 아마도, 예술이 점점 더 상승하여 자기를 완성시킬 것이라고 희망할 것이다. 그러나 예술의 형식은 정신의 최고의 욕구가 되는 것을 그쳐버렸다". (같은 곳, 135) "이 모든 연관들에서 예술은 그 최고의 규정의 측면에 따라 우리에게는 지나가 버린 것으로 존재하고 그런 것으로 남아 있다". (X,1, 16)

196. 헤겔이 이러한 구절들에서 내리고 있는 판결을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점을 들어 피할 수는 없다. 즉 헤겔의 미학 강의가 1828년과 1829년 사이 겨울학기 동안 베를린 대학에서 마지막으로 행해진 이래로 우리는 수많은 예술작품들과 예술경향들이 새로이 생겨나는 것을 목격해 왔다는 점 말이다. 이러한 가능성을 헤겔은 결코 부인하고 싶어 해본 적이 없다. 유일하게 다음과 같은 물음이 남아 있다. 예술은 아직도, 우리 역사적 현존재에게 결정적인 진리가 발생하는 본질적이고도 필연적인 방식인가, 아니면 예술은 더이상 그런 것이 아닌가? 그런데 만일 예술이 더이상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때 왜 그것이 그러한가 라는 물음이 남는다. 헤겔의 문장에 대한 결정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문장의 배후에는, 이미 발생한 존재자의 진리에 상응하는, 그리스인들 이래의 서양의 사유가 서 있기 때문이다. 그 문장에 대해 결정이 내려지는 경우란, 이러한 존재자의 진리에서부터 그리고 이 진리에 대해 결정이 내려질 때이다. 그 때까지는 헤겔의문장은 타당한 채로 남는다. 오직 그러한 이유에서 다음과 같은 물음이 불가피하다. 즉 그 문장이 표명하고 있는 진리가 과연 최종적인 것이지 그리고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지.

197. 어떤 때는 더욱 분명하게 또 어떤 때는 그저 대략적인 것에서부터만 우리를 엄습하는 그와 같은 물음들은 오직 우리가 애초부터 예술의 본질을 사유할 때에만 물어질 수 있다. 예술작품의 근원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면서 우리는 몇 발짝 발걸음을 시도해보기로 한다. 중요한 것은 작품의 작품성격을 시야로 데려오는 일이다. 근원이라는 낱말이 여기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진리의 본질에서부터 사유되어 있다.

198. 지금 언급되고 있는 진리는, 사람들이 이러한 명칭 아래서 알고 있는 바로 그것에, 그리고 사람들이 비인식이론적인 행동관계의 가치들에 대한 명칭들로 간주되는 미()와 선()을 인식과 학문과 대립구별하기 위해 이러한 인식과 학문에 대해 하나의 성질로서 부여하는 바로 그것에는 부합되지 않는다.

199. 진리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의 비은폐성이다. 진리는 곧, 존재의 진리이다. 아름다움이란, 이러한 진리 옆에 나란히 앞에 나타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진리가 스스로를 작품 속으로 정립할 때, 진리가 나타난다. 나타남 -- 작품 속에서 진리의 이러한 존재로서 그리고 작품으로서 나타남 -- 이 곧, 아름다움이다. 이와 같이 미는 진리가 스스로 발생함에 속한다. 미는 즐거움에만 관련되어 있지 않으며 즐거움의 대상만도 아니다. 미는 그러면서도 형식에 기인한다. 그러나 그 이유는 오직, forma(포르마)가 일찍이 존재자의 존재자성으로서의 존재에서부터 밝히워졌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존재가 (에이도스)로서 발생했다. (이데아)(모르페)에 잇대어진다. (시노론), (모르페)(흴레)의 합일된 전체, (에르곤)(에네르게이아)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현전성의 이러한 방식은 ens actu(엔스 악투, 작용된 존재물)actualitas(악투알리타스)로 된다. actualitas(악투알리타스)Wirklichkeit(현실성)으로 된다. 현실성은 대상성(Gegenst ndlichkeit)으로 된다. 대상성은 체험(Erlebnis)으로 된다. 서양적으로 규정된 세계에 현실적인 것으로서의 존재자가 존재하는 방식 속에는, 아름다움이 진리와 맺고 있는 독특한 협력관계가 은닉되어 있다. 진리의 본질변천에는 서양 예술의 본질역사가 상응하고 있다. 예술에 대한 형이상학적 개념이 예술의 본질 속으로 손을 뻗치고 있다고 가정해 본다면, 서양 예술은 체험에서부터도, 홀로 취해진 아름다움에서부터도 개념파악되어서는 안 된다.

 

 

 

 

보 탬 말

 

 

200. 주의깊은 독자에게라면 52쪽과 59쪽에서 한 가지 본질적인 어려움이 밀어닥칠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짐작을 통해서 일어난다. "진리를 확립함"이라는 낱말과 "진리의 도래를 발생하게 해줌"이라는 낱말은 결코 조화될 수 없을 것같이 보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확립함"에는, 도래를 방해하여 막아버리려는 그런 '원함'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서 "발생하게 해줌"에서는 '자기 순응'과 그래서 마치 자유롭게 내주는 그런 '원하지 않음'이 고지되고 있다.

201. 만일 우리가 '확립함', 논문의 원문 전체를 관통해서 의미되고 있는, 다시 말해 "작품 안으로 정립함"이라는 주도규정에서 의미되고 있는 그런 의미로 사유한다면, 어려움은 해소될 것이다. "세움" "정립함"과 함께 "놓아둠"이 또한 공속하고 있는데, 이 세 가지 모두는 아직 라틴어인 ponere(포네레)에서 단일적으로 의미되고 있다.

202. "세움"을 우리는 (테시스)라는 의미로 사유해야 한다. 그래서 49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해지고 있다. "여기 도처(!)에서 등장하고 있는 '정립함'(Setzen)'차지함'(Besetzen)이라는 말은, 비은폐된 것 안에 세워 놓음을 의미하는 (테시스)라는 그리스어의 의미에서부터 사유되고 있다." 그리스적인 의미에서의 "정립함"이란, 예컨대 '입상을 서 있게 해줌으로서의 세움'을 말하며, 이는 '놓아둠', '제물을 밑에 놓아둠'을 말한다. '세움''놓아둠', '비은폐된 것 안으로 이쪽으로, 현전하는 것 속으로 앞에 데려옴', 다시 말해 '앞에 놓여 있게 해줌'의 의미를 갖는다. '정립함''세움'은 여기 어디에서도, '근세적으로 개념파악된 도발하는 자기(자아-주체)에 대해 마주세움'을 뜻하고 있지 않다. '입상이 서 있음'(다시 말해, 바라보는 빛남의 현전), 객체라는 의미에서의 대상이 서 있음과는 다른 것이다. "서 있음"(참조, 21)이란 빛남의 지속성이다. 이에 반해서, 칸트와 독일 관념론의 변증법 내에서의 정립, -정립, 종합은 일종의 의식의 주체성의 범위 내부에서의 세움을 의미한다. 헤겔은 이에 따라 -- 그 자신의 입장에서부터 당연하게도 -- 그리스어 (테시스)'대상을 직접적으로 정립한다' 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이러한 정립은 헤겔이 보기에는 아직 진실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직 반정립과 종합을 통해 매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참조, <Hegel und die Griechen>(헤겔과 그리스인들),Wegmarken,1967)

203. 그렇지만 만일 '그 빛남과 현전 속에 앞에 놓여 있게 해줌'이라는 (테시스)의 그리스적인 의미를 우리가 예술작품 논문을 위해 시야에 간직할 경우, '확고히 세움'확립에서의 "확고히"는 결코 '빳빳하게', '움직이지 않게', '안전하게'라는 의미를 가질 수 없다.

204. "확고히"는 다음을 말한다 : '윤곽지어진', '한계에 내맡겨진'( , 페라스), '둘레균열에로 데려와진'(51쪽 이하). 그리스적인 의미에서의 한계는, 현전하는 것을 빗장으로 잠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쪽으로 앞에 데려와진 것 자체로서 현전하는 것을 비로소 빛남에로 데려온다. 한계는 비은폐된 것 안으로 자유로이 내준다. 그리스적인 빛 안에서 이 빛의 둘레균열을 통해 산()이 그 솟아오름과 머무름 속에 선다. 확고히 하는 한계란 곧, 머무는 것 -- , 움직여짐의 충일 속에 머무는 것 -- 인데, 이 모든 것은 (에르곤)이라는 그리스적 의미에서의 작품에 해당한다. 에르곤작품"존재"가 곧, (에네르게이아)이다. 이 에네르게이아는 현대의 "에네르기"로서 점점 더 운동을 무한히 자기 안으로 모으고 있다.

205. 이와 같이 '진리를 "확립함(확고히 세움)"'이 올바르게 사유될 때, 그것은 "발생하게 해줌"에 결코 역행되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이러한 "해줌"은 어떠한 수동성도 아니고, 오히려 그것은 (테시스)라는 의미에서의 최고의 행위(참조,강연과 논문모음집1954, 49) , 이 논문의 55쪽에서 "실존하는 인간이 존재의 비은폐성 안으로 자기를 탈자적으로 내맡김"이라고 지칭되고 있는 그런 "작용함""원함"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진리를 발생하게 해줌'에서 "발생"은 밝힘과 은닉 속에서, 더 정확하게는 그 둘의 합일 속에서, 전개되는 운동, 즉 스스로를 은닉함 -- 이로부터 모든 '스스로를 밝히움'이 거듭 유래한다 -- 의 밝힘의 운동이다. 이러한 "운동"은 심지어 '이쪽으로 앞에 데려옴'이라는 의미에서의 "확고히-세움"(확립)을 요구하는데, 이때 '데려옴', '창작하는(길어 올리는) 산출함이쪽으로 앞에 데려옴'"비은폐성과의 연관 내부에서는 오히려 '받아들임'이며 '꺼내옴'"이라는 점에서, 51쪽에서 언급되고 있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206. 지금까지 논의된 것에 따른다면, 52쪽에서 사용되고 있는 "Ge-Stell"몰아-세움이라는 낱말의 뜻은 다음과 같이 규정된다 : '이쪽으로 앞에 데려옴', '이쪽으로 앞에 도래하게 해줌''둘레균열'( , 페라스)로서의 균열 속으로 밀집함. 이와 같은 식으로 사유된 "Ge-Stell"몰아-세움에 의해서 Gestalt형태라는 (모르페)의 그리스적인 의미가 해명된다. 나중에 현대 기술의 본질에 대해 명시적인 주도적 낱말로서 사용된 "Ge-Stell"닦달이라는 낱말은 사실상 이제 저 Ge-Stell몰아-세움에서부터(서가와 조립에서부터가 아닌) 사유되어 있는 셈이다. 저러한 연관은 일종의 본질적인 연관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존재역사적인 연관이기 때문이다. 근대기술의 본질로서의 Ge-Stell닦달은 그리스적으로 경험된 '앞에 놓이게 해줌', (로고스)에서부터, 즉 그리스어인 (포이에시스)(테시스)에서부터 유래한다. Ge-Stell닦달의 닦아세움에서는, 다시 말해 지금의 경우 '모든 것을 안전하게 세움에로 도발적으로 요청함'에서는, ratio reddenda(라씨오 레덴다)의 요구가, 다시 말해 (로곤 디도나이)의 요구가 너무나 당연하게 표명되고 있기에, 지금 Gestell닦달에서의 이러한 요구는 무제약적인 것의 지배를 떠맡고 있으며 그리고 '앞에-세움'표상함이 그리스적인 '받아들임'에서부터 '안전하게 세움''확고히 세움'에로 모아지고 있다.

207.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Fest-stellen'확립/확고히 세움'Ge-Stell'몰아-세움이라는 낱말들을 들을 때, 한편으로 우리는 'Stellen'닦아세움'Gestell'닦달이라는 근대적인 뜻은 의미에서부터 물리쳐버려야 한다. 그럼에도 이때 우리가 다른 한편으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근대를 규정하고 있는 Ge-Stell닦달로서의 존재가 존재의 서양적인 역운에서부터 유래하여 철학자들에 의해 고안되지는 않고 오히려 사유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도록 사유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참조,강연과 논문모음집, 28쪽과 49) 그리고 어느 정도로 그러한가 하는 것이다.

208. "맞추어 넣음"(Einrichten)"존재자 속에 진리가 스스로를 맞추어 넣음"에 대해 48쪽의 짧은 구절에서 주어지고 있는 규정들을 논의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로 남아 있다. 다시금 우리는 "맞추어 넣는다"를 근대적인 의미와 기술강연의 방식에 따라 "조직하다"(organisieren)'제작완료하다'(fertigmachen)로서 이해하지는 말아야 한다. 도리어 "맞추어 넣음"50쪽에서 언급된 "작품에로의 진리의 성향", 즉 진리가 존재자 한복판에서 그 자신이 작품적으로 존재하면서 존재적으로 되려는 성향을 생각한다(50).

209. 어느 정도로 존재자의 비은폐성으로서의 진리가 다름아닌 존재자 그 자체의 현전, 다시 말해 존재(59쪽을 보라)를 뜻하고 있는지를 우리가 고려해 본다면, 이때 '존재자 속에 진리가, 다시 말해 존재가 스스로를 맞추어 넣음'에 관한 이야기는 존재론적 차이(참조,동일성과 차이1957, 37쪽 이하)라는 질문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건드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기에 다음과 같은 점이(<예술작품의 근원>, 49) 조심스럽게 말해지고 있다 : "'열린 장 안으로 열려 있음이 스스로를 맞추어 넣음'에 대한 언급과 아울러 사유는, 여기서는 아직 풀어 헤쳐 보일 수 없는 그런 하나의 영역을 건드리고 있다". 그렇지만 <예술작품의 근원>이라는 논문 전체는 의도적으로 드러나지 않게 존재의 본질에 대한 물음의 길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 예술이 무엇인지에 대한 숙고는 전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직 존재에 대한 물음에서부터 규정되어 있다. 예술은 문화성취 영역으로도, 일종의 정신의 나타남으로도 간주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술은, 거기에서부터 "존재의 의미"(참조,존재와 시간)가 비로소 규정되는 그런 존재사건(Ereignis) 안에 속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은 그 물음에 대해 본 논문에서 어떠한 대답도 하고 있지 않는 그런 물음이다. 마치 그러한 대답인 양 보이는 것은 물음을 위한 지침들이다.(참조, <후기>의 첫 문장들.)

210. 59쪽과 64쪽에 해당하는 두 개의 중요한 지시들이 이러한 지침들에 속한다. 그 양 구절들에서는 일종의 "이중성"이 문제삼아지고 있다. 64쪽에서는 일종의 "본질적인 이중성""작품 속으로의 진리의 정립"이라는 예술의 규정과 관련해서 언급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진리는 한번은 "주체[주어]", 다른 한번은 "객체[목적어]"이다. 이 두 특징규정들은 "부적합하게" 남아 있다. 진리가 "주체[주어]"라고 할 경우, 이때 "작품 속으로의 진리의 정립"이라는 규정은 곧, "진리가 스스로를 작품 속으로 정립함"을 말하는 셈이 될 것이다(참조, 59쪽과 25). 이렇듯 예술은 존재사건에서부터 사유되고 있다. 존재란 그러나 인간에게 말건넴이요, 이러한 인간이 없이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예술이 동시에 '진리를 작품 속으로 정립함'으로서 규정되는데, 여기서 이제 진리는 "객체[목적어]"이며 예술은 인간에 의한 창작이며 보존이다.

211. '작품 속으로의 진리의 정립'의 또 다른 이중성은 예술과의 인간의 연관 내부에서 생겨 나오는데, 58쪽 밑에서 그것은 창작과 보존으로서 지칭되고 있다. 58쪽 이하와 46쪽에 따르면, 예술작품과 예술가는 "모두" 예술의 본질적인 것에 기인한다. "작품 속으로의 진리의 정립"이라는 칭호 -- 이 속에서는 누가 또는 무엇을 어떠한 방식으로 "정립"하는지가 규정되지 않은 채로 그러나 규정가능하게 남아 있다 -- 속에는 존재와 인간본질과의 연관이 은닉되어 있는데, 그러한 연관은 이미 이러한 표현양식에서는 부적합하게 사유되고 있다. 이는 존재와 시간이래로 나에게 명확해지고 나서 여러가지 표현양식들 속에서 언어에로 압박해 들어오고 있는 하나의 어려움이다.(마지막으로 <존재물음에 대하여>와 본 논문 49쪽의 "오직 이 점만이 눈치채어져 있을 뿐이다 ... " 를 참조할 것.)

212. 그렇다면 여기서 성하고 있는 의문스러움은 논의의 본래적인 장소에로, 즉 그곳에서 언어와 시작(詩作)의 본질이 건드려지는 그리에로, 모아지고 있는 셈이다. 언어와 시작, 이 모든 본질은 다시금 오직 존재와 말함의 공속성에로 향한 관점에서만 건드려진다.

213. 하나의 불가피한 곤경으로 남는 게 있다면 그것은, 외부로부터 자연스럽게 이 논문에 빠져드는 독자는 우선 사유해야 할 것의 말해지지 않은 원천영역에서부터 끈질기게 사태연관들을 표상하지도 해석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 자신에게도 곤경으로 남는 것이 있다. 그것은 각기 상이한 단계의 길 위에서 그때마다 꼭 형편에 맞는 언어로 이야기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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