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문화의 장과 아비투스: 삐에르 부르디외의 문화론
1. 들어가는 말
한국에서 부르디외 연구는 알튀세르, 푸코, 데리다, 라캉과 같은 현대프랑스 사상을 주도하는 동시대 이론가에 대한 연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진하게 이루어 지고 있다. 아마도 그의 연구가 지독하게 집요하고 진지한 작업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그 안에 그리 선정적이거나 논쟁적인 주장들이 별로 드러나지 않아서 읽는 사람들에게 별로 매력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다른 말로 하자면 첨예한 논쟁에만 익숙해 있거나, 새로운 이론에 감각적으로 '부하뇌동'하고, 상대적으로 실증적인 연구작업에 대해 높은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우리의 지식인 담론에서 부르디외는 공부한 만큼 별로 건질 것이 없는 재미없는 사회학자로 이해되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동시대 현존하는 최고의 사회학자이자 문화연구자로서 부르디외가 우리의 이론지형에서는 그 이름에 걸맞게 활발하게 논의되지 못하고, 몇몇 문화연구자들에게서나 그의 개념들이 간간히 인용되는 정도에 그치고 있는 점은 어떤 점에서는 그의 연구의 성격이 가지는 독특함이 분과학문주의에 치우치는 우리의 이론지형에 수용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겠다. 부르디외는 사회학이 포괄할 수 있는, 혹은 사회학과 연관될 수 있는 거의 모든 영역들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사회학의 이론적인 타당성에 대한 논의에서 출발하여 그의 연구분야는 언어의 사회적 기능과 사회 제도의 생성메커니즘에 대한 탐구에서 부터, 문학, 음악과 같은 예술장르들, 패션과 기호와 같은 개인의 일상생활의 취향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의미체계들에 대한 포괄적인 분석을 시도한다. 분과학문위주의 연구에 메여있는 우리의 지식생산의 지형에서 부르디외는 사회학분야에서 조차도 연구영역이나, 연구방식, 그리고 사회이론과 사회비평 사이의 입장에 있어 아주 모호한 사람으로 남게된다. 그가 이론가인지 비평가인지, 사회학자인지 문화연구자인지가 모호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사실은 우리의 분과학문 체제의 특수한 효과에서 비롯된 상당히 불편부당한 선입관이다.
그러나 최근에 통합적인 학문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사회계급의 사회적 지위의 분화와 그것의 문화적 의미들이 강조되면서 부르디외 식의 연구가 중요하다는 의견들이 제출되고 있어 그에 대한 관심이 부쩍 증가되는 추세에 있다. 또한 최근에 문화연구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개념 중에 부르디외의 개념들, 가령 장(champ, field), 아비투스(habitus), 취향/성향(taste/disposition), 상징적 자본(symbolic capital)과 같은 개념들을 간간히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 그러한 개념은 그의 전반적인 이론적 체계를 충분히 이해해서 사용되기 보다는 거의 습관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어떤 점에서는 간단한 명제로 이해할 수 있을 것같은 그러한 개념들은 사실은 동시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부르디외의 존경할만한 실증작업과 엄밀한 이론적 논리성 속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사회학적인 개념의 엄밀성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 최근의 문화연구에서 부르디외 개념의 도입은 그래서 조심스럽게 사용될 필요가 있다. 부르디외가 말하는 아비투스와 장, 취향이란 개념은 문화현상 분석에 몰두하는 문화연구자들이 자칫 간과하기 쉬운 사회계급론이나 자본의 시장적, 상징적 재생산 구조와 생성 메카니즘을 아주 집약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부르디외의 연구가 사회에 대한 경험적인 실증주의 탐구 이상의 정치적이고 계급투쟁적인 의미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경험주의와 실증주의의 분석을 사적유물론의 사회적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토대로 삼으려는 부르디외의 문화사회학은 "이데올로기의 생산을 순수한 내적 분석에 종속되는 자족적이고 자생적인 총체로 취급하는 기호론적(관념론적) 환상에 빠져들지 않"고, "동시에 이데올로기적 생산물들을 그것들이 봉사하는 계급의 이익으로 환원시키는 조야한 환원주의"를 피한다. 부르디외는 사회의 지배적/피지배적 다양한 양식들이 어떻게 경제적, 문화적 활동 속에서 재생산되고 있는가를 밝혀내고, 그러한 재생산과정에서 형성된 상징권력과 상징자본이 사회구조 내에서 어떻게 배치되고 사회계급들을 구별시키고 있는지를 분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동시대 이론가들 보다도 맑스주의의 기본입장들을 더 엄격하게 유지하고 있어 보인다. 부르디외의 사회학은 역사 유물론이 현실에서 전개되는 구체적인 과정을 새로운 방법론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본 글은 부르디외의 전체작업을 소개하는 데 의의를 두기 보다는 부르디외의 중요한 개념들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논의들을 정리하는 정도의 수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개념들이 우리시대의 문화를 연구하는 데 어떠한 독특한 특장이 있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그리고 한가지 덧붙이자면, 본 글은 부르디외의 개념들이 우리가 많이 거론하고 있는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의 개념들과 어떤 유사성과 변별성이 있는지를 따지고자 하는데, 가령 부르디외의 아비투스와 개인의 취향이란 개념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주체의 개념과 어떤 변별성을 갖는지, 그리고 장이라는 개념이 요즘 문화이론에서 많이 거론되는 '지형', '환경'이란 개념과는 또 어떤 변별성이 있는지를 비교 검토해 보고자 한다.
2. 사회학의 이론적 실천
부르디외의 사회학은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을 통해 발전해왔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주관주의는 그 자신의 사회를 연구 대상으로 하며 그 결과 관찰자 자신이 참여자기 되는 사회학의 한 경향이다. 반면에 객관주의는 개별 행위자의 즉각적인 경험을 넘어서 사회적 행위의 관찰가능한 규칙성, 즉 사회적 사실을 규명한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에서 구조를 물신화하고 행위주체를 구조의 담지자 혹은 운명지워진 대로 따르는 단순한 실행자로 취급하는 경향을 띤다. 주관주의는 인간행동의 사회적 결정요소를 인지할 수 없는 반면, 객관주의자들은 지식인들이 특히 빠지기 쉬운 무지에 굴복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상징 권력의 행사자 특유의 이데올로기이다. 즉 객관주의자들은 모든 인간 실천을 결정하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조건을 인지하는 데 실패하고 구조와 그것의 논리를 이상화하는 실패를 저지르기 쉽다.
부르디외는 객관주의의 오류의 대표적인 전형을 인류학자들로 본다. 인류학자가 자신의 연구대상과 맺고 있는 특별한 관계는 관찰자로서의 자신의 상황이 그로 하여금 실천에 대한 어떤 해석적인 표상으로 이끌게 하고 모든 사회적 관계들을 의사소통적인 관계들(더 정확히 말하자면 탈코드화하는 작동들)로 환원시키는 것만큼 이론적인 오류들의 재료를 그 안에 담게 된다. 인류학자가 대상에 대한 자신의 관점에 내재된 한계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남아있는 한, 그는 행위자에게 강제된 행동의 표상만을 선택한다고 비난을 받게 된다. 그는 대상을 객관화시키기 위해 거리를 두고 물러나 있게 되면서 실천적 활동을 관찰과 분석과 표상의 대상으로 구성해 버린다. 부르디외는 객관주의적인 지식의 한계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이차적 단절에 의해서만 객관적 지식으로부터 얻은 이득들을 그에 합당한 실천과학으로 통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객관주의적 추상성에 대한 비판적인 단절(그 단절은 자신들의 실천을 외부로부터 이해하려는 객관적인 혹은 객관화시키려는 관점들에 대한 의문들을 수행하고, 대신 스스로를 실천들의 성취의 운동 바로 그 안에 위치지움으로써 실천들의 발생적 원칙들을 구성한다)은 객관적 구조들과 구조화된 성향들(그 성향들 안에 구조들이 현실화되고 성향들은 다시 그 구조를 재생산한다)사이의 변증법적인 관계의 과학을 가능케 한다. 부르디외는 이러한 단절을 사회학에 있어서의 실천이론을 구성하는 관건임을 주장하는 셈이다. "실천의 이론과, 실천의 엄격한 과학의 전제조건인 모든 실천에 내재한 지식의 실천 양식의 이론은 사회세계를 개인의 의식과 의지와는 독립된 객관적 관계의 체계로 구성하기 위해서 객관주의가 구성해야하는 문제틀들을 새롭게 반전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단절적 사고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은 가령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생산양식과 실천적 지배권의 기능과정에 대해 탐구할 준비만 되어 있다면 사회과학이 그토록 덧에 걸리기 쉬운 객관주의와 주관주의 사이의 양자택일의 반복들을 피할 수 있게 된다"
결국 부르디외에 있어 실천이론은 객관주의의 한계를 그 객관적 상황을 가능케하는 생성구조, 즉 생산양식에 대한 실천적 개입을 통해 해소하려는 기획을 가지고 있다. "부르디외는 사회학을 인간실천을 결정하는 사회적 조건들에 대한 과학으로 정의한다"는 지적은 이를 염두에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사회학자는 투쟁의 장을 그 대상으로 삼는다는 특수성을 지닌다. 그리고 그 장이란 계급투쟁의 장일 뿐아니라 과학적 투쟁의 장이 된다. 부르디외는 사회학의 요구와 실천적 입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사회학은 어느 누구도 요구하지 않는 진리를 생산하기 위해 자율권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사회학은 대학의 학과라는 지위가 보장해 준 제도적 자율권을 올바로 행사함으로써 인식론적 자율권의 조건들을 발견할 수 있고 또 아무도 사회학에 진정으로 요구하지 않은 것, 즉 사회에 대한 진리를 제공하고자 시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회학적으로 불가능한 학문, 사회-논리적으로 가려진 채 남아있어야 할 어떤 것의 베일을 벗겨낼 수 있는 이 학문이 오로지 목적에 대한 속임수로부터 태어날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과학으로 하나의 사회학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이러한 독창적인 부정행위를 재생산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과학적인 사회학은 사회-논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아야 할 일종의 사회적 실천입니다.
부르디외가 구상하는 사회학의 실천은 그런 점에서 크게 두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첫째는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조의 능동성과 행위자들의 사회적 조건들을 발생적인 관점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말은 사회적 행위자들이 사회 구조 안에서 어떻게 계급투쟁을 벌이고 있는가를 사회학이 항상 주시할 필요가 있다는 말과 같다. 둘째는 사회학이 새로운 대상과 그 대상을 접근해 들어가는 새로운 방법론을 발견해야 한다는 점이다. 가령 사회학이 하나의 과학으로 끝임없이 독창적인 자기부정을 수행해야 한다는 주장은 대학의 구조 속에서 '민족학'(ethnology)과 사회학을 구분하려는 제도적인 폐해가 발견된다는 그의 발언에서도 드러난다. 부르디외는 비학교적인 방식으로 이 둘을 동시에 병행하려했던 점이 자신의 작업을 가능하게 했다고 말하는데, 혈족관계들을 규정하는 계통학의 분류체계(민족학적 관점)와 사회계급의 문제(사회학적 관점)를 동시에 제기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회학이 끝임없이 수행해야할 독창적인 자기부정의 한 방식인 것이다.
3. 아비투스와 장, 그리고 구조
부르디외에게 있어 아비투스와 장의 개념은 개인의 실천과 그 실천들이 생성한 사회적 세력관계를 지칭한다. 다만 아비투스는 우리가 실천의 담지자로 상정했던 '주체', 혹은 실천적 담지자를 구성하는 사회적 조건으로 간주했던 '주체화 양식'이란 추상적 개념에 비해 구체적인 개인의 감각과 행동을 지시한다(그는 아비투스를 논의하면서 '주체'라는 말 대신에 거의 '개인'이란 개념만을 사용한다). 또한 장이란 개념이 사회적 세력관계들을 지시하지만 그것은 애초부터 대립을 미리 상정하는 단순한 양진영의 세력관계가 아닌 아주 다양하게 얽혀있고 구조화되어 있는 세력관계를 말한다. 따라서 장들 간의 관계는 모순/대립관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차이의 관계, 혹은 장들간의 위상적 관계가 함께 존재한다. 가령 '사회 세력들의 장'은 정치의 장, 경제의 장, 문화의 장과 같은 사회적 심급으로 구조화되는가하면. 지배계급의 장, 피지배계급의 장처럼 계급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아비투스는 개인의 일정한 행동 속에서 내면화되고 육화된 성향체계를 지칭한다. 그러나 개인의 성향체계로서의 아비투스는 윤리학에서 말하는 체계적인 도덕심이나 양심과는 구별된다. 그것은 윤리학과는 대립적으로 윤리적 차원의 성향과 실천적 원리가 객관적으로 체계화된 총체를 지시하기 위해 사용되는 에토스(ethos)와 유사하다. 아비투스의 개념은 또한 아비튀드(habitude:습관)라는 개념과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아비튀드'는 무의식적으로 반복적이고 기계적이고 자율적인 것으로, 또한 생산적이라기보다는 재생산적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비투스는 대단히 생성적인 어떤 것이다.
아비투스란 획득한 것으로서 영구적인 성향의 형태아래 지속적으로 신체에 구현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개념은 그것이 개별적 역사와 관련된 역사적인 무엇인가에 의거하고 있다는 것과 본질주의적 사유방식(촘스키식 어휘인 언어능력의 개념과 같은 것)과 대립되는 발생론적 사유방식을 가집니다.
아비투스가 개인의 습관과는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 실천적인 감각과 행동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부르디외는 {구별짓기}(The Dictintion)에서 개인들의 문화적 기호의 차별들이 어떻게 사회계급들의 차별을 재생산하고 있는가를 실증적으로 조사/분석 하면서 "아비투스가 객관적으로 객관적으로 분류가능한 실천들의 발생원리인 동시에 실천들의 분류체계"라는 점을 지적한다. 아비투스는 분류가능한 작품과 실천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과 이 실천과 생산물들을 구별하고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가령 학력자본과 혈통자본의 차이에 따라 문화를 향수하는 대상이 달라지게 되고, 어떤 예술품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게 되는 것은 개인의 아비투스가 각각의 성향의 차이에 따라 분류해내려는 실천들을 발생시키는 원리라는 것을 예증해 준다. 그래서 상이한 생활조건은 상이한 아비투스를 생산하고, 그렇기 때문에 상이한 아비투스에 의해 생성된 실천은 차별적 격차 체계의 형태로 생활조건 안에 객관적으로 각인된다. 계급 조건에 내재해 있는 자유와 필요, 그리고 위치를 구성하는 차이를 체계적으로 표현하는 실천-발생체계로서의 아비투스는 각 조건의 차이가 분류되는 동시에 그 차이를 분류하는 실천들 간의 차이의 형태로 포착하고 파악한다 아비투스의 분류체계는 생활방식을 결정하는 개인의 취향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취향은 사물을 명확하고 구별적인 기호(記號)로 변화시키고, 신체의 물리적 질서 안에 각인된 차이를, 상징적 질서로 끌어 올린다. 이 실천 속에서 한 계급의 조건은 각각의 실천을 사회적 분류도식으로 파악함으로써, 분류적 실천으로서 즉 계급의 상징적 표현으로서 스스로의 의미를 드러낸다.
이렇듯 개인의 취향이 계급대립의 상징적 표현으로 스스로의 의미를 드러내면서 아비투스는 취향에 의한 구체적인 실천의 장을 형성하게 된다. 아비투스가 생산하는 실천은 그 실천들의 발생적 원칙이 생산되는 객관적 조건들 내에 내재한 규칙성 등을 재생하는 실천인데, 바로 규칙성의 구체적인 형태 중의 하나가 개인의 취향이다. 말하자면 취향을 재생산하는 과정이 아비투스의 실천과정이 된다. 이때 이러한 실천이 제대로 설명되기 위해서는 아비투스 생산의 사회적 조건을 정의해주는 객관적 구조가 이러한 구조의 특정 상태를 표현하는 국면과 연결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실천을 변형시킬 수 있는 '국면'은 아비투스와 객관적 사건 사이의 변증법적인 관계 속에서 구성된다. 가령 계급투쟁이라는 국면은 개인의 아비투스가 계급투쟁을 야기시키는 사건과 맞닿을 때 구성되는 것이다.
장이란 공시적으로 파악할 ?, "입장들의 구조화된 공간"으로 드러난다. 장에는 장의 일반적인 법칙이 있다. 부르디외는 그 법칙을 장의 전유와 배제의 법칙으로 간주한다. 가령 국가에 관계된 변수들에 따라 권리 주장자와 지배자 사이의 투쟁과 같은 그 특유의 메커니즘이 갖가지 다른 형태를 띠고 나타나긴 하지만, 모든 장에는 입회권의 빗장을 부수려고 애쓰는 신참자와 독점을 옹호하고 경쟁을 배제시키는 지배자 사이의 투쟁이 있다. 하나의 장은 다른 장들의 고유한 이해관계와 목표로 환원될 수 없다. 하나의 장이 가동되기 위해서는 게임의 목표와 그 게임을 행할 사람들, 다시 말해 게임의 내재적인 법칙과 목표 등에 대한 인식과 인정을 함축하는 아비투스를 지닌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장의 구조는 투쟁에 참여한 주체자 혹은 제도들 사이의 역학관계, 이전의 투쟁을 통해 축적되어 이후 그 전략의 방향을 결정짓는 특정 자본의 분배관계의 상태이다. 장에서 발생하는 투쟁들은 해당 장의 특징을 나타내는 합법적인 폭력의 독점을 다시 말해 특정 자본의 분배구조의 전복, 혹은 보존을 목표로 삼고 있다.
부르디외는 장에서 발생하는 전복과 보존을 위한 투쟁이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장의 특성 중에는 잘드러나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하나의 장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인 이해관계, 다시 말해 그 장의 존재 자체와 관련된 모든 것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적대관계에 참춰져 있는 객관적인 공모가 이루어진다. 그 공모는 명시적으로 합의한 것이 아니라 구조화된 장에서 무의식적생산된 것이며, 그래서 장의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함께 공모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부르디외는 장의 형성과 장의 재생산은 바로 이 망각된 공모의식이 구조화되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본다.
사람들은 투쟁이란 마땅히 투쟁해야 할 것, 자명한 것 속에 억압되어 있는 것, 지배견해에서 유기된 것, 다시 말해 게임 규칙, 목표 그리고 사람들이 게임을 행하고 게임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미처 알지도 못한 채 은연중에 받아들이고 있는 그 모든 전제들 등, 그 장 자체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적대자들 사이의 합의를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투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장에 따라 제법 완벽하게 게임 목표의 값어치에 대한 믿음을 만들어 내는 데 이바지함으로써, 그 게임의 재생산에 기여한다.
한편으로 부르디외는 장과 기구와의 차이를 설명한다. 그는 기구라는 개념은 가장 위험한 기능주의를 제도입하며 몇가지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계획된 끔찍한 기계와도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한가지 특별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부르디외가 학교제도, 정부, 교회, 정당 등을 기구가 아니라 장으로 보고 있는 점이 알튀세르가 위의 심급들을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 간주하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하는 점이다. 장에서는 서로 다른 힘을 지닌 행위자들과 기관들이 그 게임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특수한 이윤을 차지하기 위해 그 게임공간을 구성하는 규칙에 따라 투쟁하고 있다. 장을 지배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도록 그 장을 작동시킬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조건에서는 장이 기구로서 기능하게 된다. 부르디외는 지배자들이 피지배자들의 저항과 반발을 무마시킬 수 있는 수단을 가지게 되면 그 장은 기구가 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하급성직자, 투사 민중계급들이 그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을 때 그리하여 모든 움직임이 위로부터 곧장 아래로 향하고 지배효과가 장을 구성하고 있는 투쟁과 변증법이 사라질 정도로 강력할 때, 장은 기구가 된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부르디외는 학교나 교회나 정당 가족 등을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 간주했던 알튀세르와 그리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아 보인다. 장이 기구가 되는 것은 지배계급이 그 장을 완전히 장악할 때인데, 알튀세르에게 있어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역시 지배계급의 생산관계를 재생산하는 착취의 이데올로기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학교나 교회나 정당, 가족 등을 애초부터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 규정했던 알튀세르의 논의와는 다르게 부르디외는 어떠한 사회의 층위들이 하나의 지배적 수단을 위한 국가적 장치로 전락하기 이전에 하나의 투쟁의 공간을 구성하는, 즉 하나의 장을 형성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점에서 차이점이 드러나 보이는 것 같다. 이 점은 한편으로는 실천적 시민사회 영역을 인정하지 않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론이 갖는 한계점들을 부르디외가 설명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알튀세르가 ISA론을 구성할 때 의도했던 바는 "ISA가 계급투쟁, 그것도 격렬한 형태를 띠기 일수인 계급투쟁의 목표이자 현장일 수 있다...... 피착취계급들의 저항이 ISA의 모순을 이용하거나 투쟁을 통해 ISA 내의 유리한 전투진지를 정복해 버림으로써 거기에 자신의 표현수단과 기회를 발견하는 것"을 보자는 것인데, 이는 계급투쟁의 공간으로서의 장의 개념과 그리 다르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더 눈여겨 보아야할 차이점은 부르디외의 장의 개념과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개념이 계급투쟁과 혁명의 순간에서 어떤 형태로 작동되는가하는 점이다. 부르디외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 이에 대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장과 기구의 차이는 혁명 속에서 잘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회질서를 획득하기 위해 정부기구를 점령하고 주요 조직의 프로그램을 바꾸는 것으로 충분한 것처럼 행동합니다. 실상 정치의 의지는 그 정치적 왜도가 왜곡되고 역전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히 복잡한 세계인 사회의 여러 장들의 논리를 고려해야 합니다. 정치적 행위는 그것이 기구, 다시 말해 피지배자들이 투사나 군인이 되어버린 조직체와 관련될 때에만 바라는 결과를 얻으리라고 획신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기구는 사람들이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장의 어떤 상태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호명된 주체와 취향화되고 성향체계화된(아비투스화된) 개인 간의 차이에서도 발견된다. 아비투스는 개인의 취향 안에 구조화된 혹은 내재화된 체계라면 알튀세르적 의미에서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외부에 존재하는, "하나의 기구 및 그 실행들 속에서 존재하는" 외부의 물질적인 체계의 일부이다.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인 개인을 구체적인 주체로 호명한다"는 말은 이데올로기가 개인을 주체로 전환시키는 외부의 기제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에 비해 아비투스는 개인의 일상생활 속에서 스스로 갖게되는 개인의 내적 성향들이다.
부르디외는 결국 아비투스와 장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사회구조의 생성원칙에 대해 발생론적인 관점을 취한다. 가령 아비투스의 이론은 목적론이냐 메커니즘이냐의 양자텍일을 벗어나 실천과학의 가능성 확립을 겨냥하는 이론인 것이다. 아비투스는 '상황'에 의해 이루어지는 직접적인 결정과 관련된 실질적인 자율성의 원리인 것이다. "객관적 체계들을 개인의 역사와 그룹의 역사 외부에 이미 구성된 총체성으로 전환시키면서 그 객관적 체계들을 실체화하려는, 구조의 실재론을 피하기 위해서는 통계학적인 규칙성과 대수학적인 구조에서 이렇게 관찰된 질서의 생산 원칙, 즉 실천이론의 구성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는 지적은 사회구조를 실천적 발생의 원리로 보려는 이론적 구성이다. 아비투스와 장의 개념은 그의 이러한 발생론적 사회실천이론을 구제화하는 개념인 것이다.
4. 상징/문화자본과 상징/문화권력
부르디외는 자본을 단지 경제적 자본으로만 간주하지 않는다. 자본은 개인 물질적 부를 축적하는 수단만이 아니라 개인이 생활양식과 그 생활양식의 터전, 그리고 다른 생활양식과 맺는 관계까지 포괄한다. 가령 개인의 예술적 취미와 생산들은 문화적 자본으로, 개인의 학력, 혈통, 사교 등은 사회적 자본으로, 그리고 개인들의 생활양식과 터전이 다른 것들과 맺는 관계는 상징적 자본의 형태로 나타난다. 사회자본의 개념을 구성하는 것은 곧 이러한 특수한 종류의 자본이 축적되고 전이되고 재생산되는 논리를 분석하는 수단과, 어떻게 이 특수한 종류의 자본이 경제자본으로 변형되는지, 또 거꾸로 어떤 노동의 대가로 경제자본이 사회자본으로 전환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수단과, 클럽 또는 아주 단순하게는 가족 등 이러한 종류의 자본이 축적되고 전이되는 중요한 장소와 같은 제도들의 기능을 파악하는 수단 등을 생산하는 것이다.
사실 부르디외의 주저작인 {실천이론의 윤곽}과 {구별짓기}는 개인의 아비투스와 장의 구조 속에서 상징자본과 문화자본이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설명한 것이다. 상징자본의 작동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르디외는 두가지 유의미한 작업을 시도했는데, 하나는 언어시장의 구조를 밝히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알제리의 '카빌레'(Kabyle) 사회의 일상생활 형태를 분석한 것이었다.
부르디외는 언어적 표현이란 언어적 아비투스와 언어시장이 결합된 것이라고 말한다. 즉 언어적 아비투스는 그것이 사회적 조건의 산물이라는 사실과 단순한 담론의 산출이 아니라 하나의 상황, 즉 어떤 시장이나 장에 맞추어 조정된 담론의 산출이다. 그런 점에서 언어적 아비투스는 촘스키적 '언어능력'과는 구별된다. 촘스키에 있어서 언어능력은 개인이 이미 타고난 언어적 자질을 말하는 것인데, 사실 언어능력은 어떤 상황에 의해서 구성된 것이다. 어떤 언어적 자질을 부여받아 언어적으로 용인가능한 상황에 이르는 것은 언어에 내재된 규칙뿐만 아니라 하나의 언어시장에 내재하고 있는 직관적으로 통제된 규칙에 단어들을 일치시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언어시장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담론을 평가하고 인정하며 그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수신자를 위해 담론을 산출할 때마다 존재한다. 언어시장은 대단히 구체적이면서도 동시에 대단히 추상적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그것은 다소 공식적이고 의례적인 일종의 사회적 상황이며, 하위의식적으로 지각되고 평가되며 무의식적으로 언어적 생산을 방향짓는 많은 특성들을 지닌 사회의 위계질서에서 어느 정도 상층부에 위치한 대화자들 전체이다. 추상적으로 보면 언어시장이란 언어적 생산에 대한 가격형성 법칙의 일정한 유형이다. 가격형성법칙이 있음을 상기하는 것은, 바로 개별적인 언어능력의 가치가 그것이 실현되는 개별적인 시장에 더 정확히 말해 서로 다른 생산자들의 언어적 생산물에 부여되는 가치가 정해지는 관계의 상태에 달려있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언어능력의 개념은 언어적 자산이란 개념으로 대치된다. 언어적 자산이라고 말하는 것은 언어적 이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언어적 자산이란 언어적 가격형성의 메커니즘에 대한 지배력, 자신에게 이득이 되도록 가격형성 법칙을 작동시키고 특정한 잉여가치를 선택할 수 있는 힘이다.
부르디외는 언어적 자산을 소유해서 특정한 언어적 잉여가치를 추출해내는 힘이 바로 상징적 자본의 권력형태임을 보여준다. 그 일례로 부르디외는 베아른 시의 시장의 취임연설에 대해 언급한다. 새로운 베아른 시의 시장은 그 지방 출신인데, 그는 취임연설을 베아른어로 하면서 대중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부르디외는 중앙의 지배 엘리트가 하찮은 베아른어로 연설한 것이 바로 언어적 자산을 행사하는 상징적 권력의 전형적인 형태임을 지적한다. 즉 시장이 베아른어로 취임연설을 해서 대중들에게 감동을 준 것은 그가 표준 프랑스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다는 언어적 자본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베아른 지방의 농부가 베아른어로 말했다면 대중들은 특별한 감동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감동의 근원이 베아른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베아른어를 아주 특수하게 사용할 수 있는 지배 엘리트의 언어적 상징 자본 때문이다.
부르디외는 한편으로 언어시장이 구조화되는 세력관계들을 다음과 같은 도표를 통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universe of the undiscussed(undisputed)
+-----------------------------------------------+
| doxa |
| |
| opinion |
| hetero- ortho- |
| doxy doxy |
| |
| |
+-----------------------------------------------+
universe of discourse(or argument)
이 도표는 특정한 시장과 장의 특성이 투쟁 속에서 채택될 수 있는, 각기 다른 전략들의 관계를 나타난 것이다. 거대 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기존질서를 자명하게 받아들이는 지배사상(doxa)을 보존하려는 전력을 가지고 있고, 자본이 별로 없는 사람들은 그 지배사상을 전복하려는 이단, 혹은 비정통 사상(heresy:heterodoxy)을 생산하려는 전략을 가진다. 논의되지 않은 것이 담론의 장으로 들어감으로써 이교적 사상은 지배계급들이나 그룹들이 침묵을 깨고 정통사상의 방어적 담론을 생산하도록 부추키게 되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또한 카빌레 지방의 선물 교환제도를 분석하면서 그것이 개인들의 성향들을 유지하려는 일종의 상징자본의 교환행위이자 상징 권력의 작동방식임을 이끌어 낸다. 선물교환은 일종의 게임의 형식이다. 게임의 이론에서 훌륭한 선수는 자신의 적대자가 가장 좋은 전략을 식별해내는 방식을 항상 미리 전제해놓는 사람이며, 자신의 행동을 그에 맞게 행하는 사람이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명예를 위한 게임에서 도전과 응수는 각각의 선수들이 그의 적대자가 동일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을 가정하면서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게임을 잘 벌이는 것을 암시해준다. 선물은 선물을 받는 사람에 대해서 선물한 사람의 명예를 높이는 도전이다. 선물과 도전은 상대방을 약올리는 것, 즉 응답에 대한 약올리기이다. 선물을 받는 사람은 교환의 수고에 갖히게 되며, 최초의 행동이 부여준 약올리기에 반응해서 어떤 행동을 선택해야 한다. 그는 교환을 연장시킬 수 있으며 교환을 파기할 수 있다. 명예의 관점에서 복종하여 그가 교환을 선택한다면 그의 선택은 그의 적재자의 최초의 선택과 동일하게 된다. 그는 게임하기를 동의하며 그것은 영원히 지속된다. 왜냐하면 응수는 그 자체로 도전이기 때문이다.
부르디외는 이슬람 문화를 지켜나가는 카빌레 사회의 형태들이 체계적인 분류와 위계실서 속에서 움직이게 되는데, 이 뷴류체계와 위계질서 체계가 그 사회 내의 경제적 가차와 명예와 권위를 축적하는 상장적 자본의 형태가 된다고 말한다. 우기가 되면 마을 남자들은 금요일날 집단기도회가 끝난 후에 회의를 갖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침에는 마을에 남아있는다. 그리고 아침 시간이 끝나는 에도하(eddoha)의 시간이 되면 사람들은 들판에 나가 일을 한다. 저녁식사는 남자가 집에 돌아와 옷을 벗자마자 일찍 준비가되고, 밤이 되면 이슬람 사원에서 기도하길 희망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이 집안에 있는다. 이렇게 사회질서의 의무를 지키는 것은 자신들의 생활리듬을 존경하는 것이며 그것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가령 다른 사람들이 휴식을 취할 때 일을 한다거나 다른 사람들이 들판에서 일을 할 때 집에서 쉬고, 다른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을 때 거리를 배회하는 행동들은 사회적 질서가 인정하지 않는 의심을 받을 행동이다. 부르디외는 카빌레 사회가 집단적 리듬을 이토록 엄격하게 요구하는 이유는 시간의 형식들과 공간의 구조들이 단지 세계에 대한 그룹의 표상만을 구조화할 뿐아니라, 그룹 그 자체를 표상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가령 남성과 여성이 각기 다른 시간과 장소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남성과 여성의 세계를 분류하고 위계질서화하는 것을 보장하는 방식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모든 기존질서라는 것은 그 자신의 자의성을 자명하도록 생산하는 것이다. 이러한 효과를 생산하는 메카니즘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숨겨진 것이 객관적 기회들과 행위자들의 열망 사이의 변증법, 즉 객관적 계급들과 내면화된 계급들, 사회구조들과 정신 구조들 사이의 상응점이다. 이것이 기존질서를 제거할 수 없는 가장 고착적인 토대가 된다. 객관적 계급들을 재생산하는 분류체계들, 즉 생산관계에서 성과 나이와 위치에 의한 분화체계들 자신들이 토대를 두고 있는 자의성에 대한 오인(misrecognition)을 굳게 지킴으로서 권력관계가 재생산되는 데 특수한 공헌을 한다. 객관적 질서가 주관적인 조직 원칙들과 일치할 때 자연세계와 사회세계는 자명해 진다. 이러한 경험을 부르디외는 '지배적 사상'(doxa)이라고 불렀다(164쪽).
결론적으로 카빌레 사회의 선물교환제도와 일상생활의 형식을 통해서 부르디외는 상징적 자본이 행사되는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데 그 목적을 둔 것이다. 상징적 자본은 명예와 권위를 축적하는 전략이며 권위와 명성의 형식으로서의 상징자본은 사회 내에서 가장 귀중한 축적형식이다(179쪽). 상징적 자본의 전시는 자본을 자본으로 느끼게 하는 메카니즘의 하나가 된다. 상징자본은 물질적인 이익보다 큰 의미를 지닌다. 가령 잃어버린 땅을 찾는 것, 받은 모욕에 대해 복수를 통해 명예를 되찾는 일은 단순히 선물을 받는 물질적 행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행위자가 상징적 자본을 옹호하려는 이해관계는 상징적 자본의 형태를 추구하고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구성하는 경제적 질서의 규칙성에 각인된 공리계를 집착하는 것과 불과분의 관계이다(182쪽). 사회의 경제력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도 상징적 자본은 단순한 부보다 더 크게 작용한다. 부르디외는 경제력이란 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와 경제적 관계들의 장, 즉 특수한 이익을 가진 행위자들의 신체 발전과 분리될 수 없는 구성의 장 사이의 관계임을 강조한다.
부르디외는 이러한 상징적 자본과 상징적 폭력에 대한 모든 저항 운동들은 자명해 보이는 것, 그래서 문제시되지 않는 것,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을 문제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예술 가정사 등등 사회적 실천행위의 전 영역을 정치적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한다면 엄청난 억압의 악순환에 직면하게 되며, 중요한 것은 상징적인 지배에 저항할 수 있는 무기의 보급을 확보하는 일임을 강조한다.
5. 문화연구 방법론으로서의 부르디외 사회학
부르디외의 문화사회학은 미디어 분석을 중심으로하는 영국의 문화연구와는 다른 지점에서 문화적 실천을 제시해 준다. 부르디외의 문화사회학은 다양한 문화의 장과 개인들을 전유하는 좀 더 폭넓은 의미에서의 사회계급론이며, 새로운 계급투쟁의 실천들을 담고 있다. 레이먼드 윌리암즈는 부르디외의 문화학의 정치성에 대해 1) 계급투쟁과 그 투쟁 내에서 상징적 투쟁의 위치에 대한 유물론적 이론을 언명했으며, 2) {구별짓기}와 같은 저서에서 보여주듯이 순진한 대중주의 노동자주의에 빠지지 않고, 노동자 계급의 문화적 가치와 열망에 대해 생색내지 않고 가치평가했으며, 3) 상징권력의 문제에 초점을 두면서 생산양식에 의해 결정되는 객관적 사회적 조건들과 계급과 계급분파들의 의식과 실천 사이에서의 특수한 모순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가능하게 했다고 평가한다. 겉으로 보기에 부르디외의 계급분석은 {구별짓기}에서 분석되는 외형적인 틀이 말해주듯이 이미 예정된 결론을 도출하는 분석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체로 {구별짓기}에서 도출해내는 통계자료에 대한 결론들은 학력자본과 혈통자본 그리고 자본의 소유에 따라 선택하고 알고 있는 예술작품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식이다. 그러나 부르디외가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은 실증조사의 결과가 아니라 조사의 과정에서 발견되는 사회계급들의 작동형태에 관한 것이었다. {구별짓기}는 사회계급과 취향이 작동시키는 체계들 사이의 관계를 경험적으로 확립하려 했다는 언급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계급분석은 사회계급들 간의 모순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들여다 보는 작업을 수행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문화연구에서 거의 부재하다고 할 수 있는 문화학에서의 계급분석은 부르디외의 작업을 통해 구체화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부르디외의 사회학은 아비투스와 장의 개념이 말해주듯이 개인의 문화적 취향과 그 취향이 구조화되어 있는 장을 강조하는데, 그런 점에서 주체형태 분석과 제도분석은 그의 분석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부르디외는 개인의 취향을 분석하기 위해서 의상과 음악 미술과 같은 문화적 유산들을 구체적으로 연구했으며, 장으로서의 제도를 분석하기 위해 학교제도와 검열제도 그리고 스포츠와 같은 볼거리로서의 제도적 장치들에 주목했다. 문화연구 방법론으로서 부르디외의 사회학은 한편으로는 정교한 계급투쟁과 계급론을 구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의 구조와 발생을 말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증작업을 병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부족한 방법론적 시각을 넓혀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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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이리가레이의 성적 차이의 윤리 [철학 강의]
* 윤소영 지음, 『알뛰세르를 위한 강의 ;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를 위하여』, 공감 1996
지난 세미나 시간에.. 혹은 그 이전부터도 마찬가지고.. 어느 점에선 철기군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혹은 나에게 상기를 시켜주었던 것이 있는데.. 바로.. 크리스테바와 루쉬-이리가레이Irigaray, Luce간의 차이점이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론 이리가레이에 더 관심이 가는 관계로.. 이런 정리글을 주저리주저리 써대는 것이고.. 암튼.. 철기군에 의해 우리가 접해들은 이리가레이의 주요 테마.. ‘여성적’ 글쓰기... 본인은 그것을 정치적인 관점에서 사고할 것이며, 우선은 아주 기본적인 이해 수준에서 윤소영 교수의 설명에 기대어 그녀를 이해하고.. 전유할 것이다. 세미나 시간의 주된 논지-철기군의 그것도 그렇고-는 과연 여성적인 무언가가 따로 존재하기나 한 것인가라는 지점이 아닐까 싶은데.. 그것은 무의식에서 바로 발현되는 무언가-본인이 계속 주장하던- 역시나 가능한가라는 문제와 접합되리라 생각한다.
윤소영 교수는 알뛰세 특히 발리바르의 ‘인권의 정치’를 계속해서 이론적 지형 속에 틈입시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알뛰세를 위한 강의』中 5장 ‘이리가레이의 성적 차이의 윤리’에서도 마찬가지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의 윤리’의 교량 역할을 하는 것은 ‘대중의 공포/ 대중에 대한 공포’(p.183)라는 테제라고 그는 설명하고 있다. (‘대중의 공포’란 대중이 자기한테 행해지는 온갖 상징적인 폭력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수동적인 태도를 갖는다는 것. 이런 대중의 수동적인 태도가 능동적인 태도로 전화되는 과정에서 근본적인 민주주의가 형성되지만, 그런 진정한 민주화과정에서 나타나는 대중의 자연 발생성, 특히 대중 자신의 상징적 폭력이 나타난다. 이것은 하나의 공포의 대상이며 이번에는 거꾸로 ‘대중에 대한 공포’가 나온다는 것이다.) 위의 문제설정은 ‘여성의 폭력/ 여성의 공포’로 환유 가능하다고 윤소영 교수는 보고 있다.
그 다음으로 꼭 이해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주체화양식’이라는 개념(p.186)인데, 윤소영 교수는 근대 정치이데올로기, 세계론이 갖는 한계는 주체화양식을 단일한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며, 주체화양식이 다면적multilateral-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낙관적인 의미의 다원적pluralistic과는 구별되는-일 수 있고, 또 이 때문에 해방의 과정도 또한 다면적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역시 윤소영 교수의 논리를 따라가면서 우리 역시 쉽게 환유할 수 있는 것은, 여성이 주체화되는 양식 역시 다른 형태를 띄기 때문에, 이전의 좌파에서 말하는 노동자의 해방과정으로는 절대 환원될 수 없는 여성의 해방이라는 과정 역시 다른 평면 위에 놓여있다-지식, 인종 등등의 영역과 관련된 다면적인 주체화와 해방의 과정들이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 논리-라는 것입니다.
이리가레이는 따라서, 프로이트나 라깡 학파에서 이전까지 견지해온 하나의 주체화양식-외디푸스 컴플렉스를 중심으로 한-을 ‘로고스-팔루스 중심주의’-데리다도 비슷한 방식으로 라깡을 비판하고 있죠?-라고 비판합니다. 이어서 이리가레이는 법적으로 규정되고 포섭되는 의미의 권리가 아닌, 의무 없는 권리-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개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역능(역능의 개념에 대해서는 제가 지난번에 설명한 바 있습니다), 즉 잠재력을 직접 발휘하는 것-의 차원에서 ‘여성권’을 제기합니다(p.190).
왜 여성의 권리가 따로 존재하는가..? 그것은 남성과 여성은 주체화양식 이전에 분명히 다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이리가레이는 이전의 섹스sex나 젠더gender와는 달리 장르genre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리가레이에게 장르, 류, 일반성은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인간의 유적 본질, 일반적인 본질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인간을 남성으로 환원하는 그런 남성적인 관점에 포섭될 수 없는 여성의 독자적인 본질, 그러면서 그런 독자성이 또한 동시에 인간의 유적 일반성을 갖는 그런 본질이 있다는 것이죠(p.193).
상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전까지는 언어적 상징이 단지 하나의 상징만을 인정해왔기 때문에 문제가 있었으며, 오히려 두 개의 언어, 두 개의 상징, 두 개의 법칙, 따라서 두 개의 문법이 있다고 합니다. 이와 더불어 이리가레이는 ‘parler-femme'라는 개념을 제시하는데, 이것은 ‘말하는 여성’과 ‘여성으로서 말하기’라는 뜻을 동시에 갖는다고 합니다(p.194). 이것은 이전의 포스트주의자들이 흔히 사용해온 ‘동일자와 타자’ 테마에 대한 비판적 함의를 지니기도 하는데, 그녀는 동일자와 타자를 설정하는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며, 그 둘간의 대립이 아닌 존재론적이고 인간학적인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p.199).
다만, 우리가 세미나에서 이리가레이에 대해 오해해온 바가 있는데, 이러한 그녀의 ‘여성권’이든, ‘여성적 글쓰기’든 간에.. 그것이 모든 상징 체계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점에서 저와 이리가레이 역시 분기점을 갖는데, 그것에 대해선 나중에 설명하고..
정신분석학의 지평에 서 있는 학자들이 상징을 거부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것은 언어학이든 정치학이든 마찬가집니다. 윤소영 교수가 들뢰즈를 비판하는 것도 그 지점인데, 상징, 혹은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죠. 이전의 상징체계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여하한 의미에서든 다른 대당할 수 있는 상징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해방, 모든 정치는 개인적인 동시에 집단적인 것으로, 이 둘 간의 접합은 조직과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제기하고, 모든 조직은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하고, 이데올로기 없는 조직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그런데, 들뢰즈같은 사람은 정신분석학에서 논의하는 상징이나 가상의 개념을 거부하기 때문에, 역시나 그것에 필수불가결하게 의존하는 조직 역시 거부하게 되며, 결국 들뢰즈를 따른다면, 어떠한 해방적 조직 운동도 불가능하며, 그야말로 노마드적인 밴드 또는 무리들 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이죠(p.190). 이에 대한 저의 입장 역시 다른 자리를 빌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여튼, 이리가레이는 『나, 너, 우리 : 差異의 文化를 위하여』Je, tu, nous : toward a culture of difference에서 ‘나’라는 여성과 ‘너’라는 남성 사이의 새로운 교통양식을 모색함으로써 그 둘이 말하자면 ‘우리’로 결합 또는 재결합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적인 유대를 형성하고자 시도하는 것이고 이를 단적으로 ‘사랑’으로 부른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전의 정신분석학의 상징 개념이 ‘외디푸스적’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것은 서양의 문화와 역사에 의해 유추된 것이기 때문에, 정신분석 자체의 상징 대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양의 문화와 역사 자체를 해체함으로써 ‘비외디푸스적’인 상징성 개념이 구성되도록 해야한다는 전략을 사용한다고 합니다(p191). 물론, 이 ‘비외디푸스적’ 상징 개념은 외디푸스적 상징의 보편성 자체를 해체한다는 점에서 ‘前외디푸스적’인 상징 개념과는 구별되는 것이죠(p.192). 따라서, 우리가 이전에 이리가레이가 마치 남성과는 완전히 대당되는 여성적 글쓰기만을 강조함으로써 여성들을 정신병자로 몰아가는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는 크리스테바에 기댄 철기군의 비판은 많이 희석이 될 것 같습니다. 또한, 이리가레이의 전략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조한혜정 교수를 중심으로 한 “또 하나의 문화”와도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이리가레이에 대해 간단하게 저와 구별되는 점을 언급하고 넘어가죠. 우선, 이리가레이는 단지 ‘두 개의 상징, 혹은 언어’를 전제하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윤소영 교수가 ‘다면성’에 대해 논하면서 제기한 논리를 따라간다면, 당연히 주체화양식-상징체계에 포획된다는 것으로 환유 가능한-은 다면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가레이는 그녀의 장르genre개념에서 단지 기존의 남과 여라는 이분법적인 성적 구분 틀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리가레이에게 질문을 던져보죠.. 그렇담 동성애자는 어떠한 장르에 속하느냐고..? 이것은 이리가레이가 분명히 이론적으로 혼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리가레이는 스피노자를 따라 각각 다른 성적 ‘차이’difference가 있음을 강조하는 동시에, 상징에 대해 논하는데, 이 두 개념은 쉽게 연합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존재론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것과 다른 주체화양식을 다면적으로 갖는다는 것은 엄격히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주 조야하게 구별한다면, 인간은 선천적인 특성을 갖고 있느냐, 아님 후천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냐의 문제로 귀착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존재론적인 차이들이 있지만, 현재는 남근-중심적인 하나의 상징체계, 혹은 주체화양식이 압도적이라 그것에 의해 다른 역능의 발현 가능성들이 억압받고 있다고 얘기하면 쉽게 넘어갈 수 있겠죠. 그러나, 여전히 이리가레이는 그러한 존재론적인 차이들에 있어, 남과 여라는 대당개념을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생물학적인 성적 차이론과 차이를 갖기 어렵습니다.
물론, 이리가레이는 여성이라는 주체는 이미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얻어지는 것이고,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이라고 하더라도 여성권의 옹호에 앞장서는 사람은 분명히 여성의 언어, 상징으로 들어올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동시에, 자신이 여성이라는 자각 없이 남성적 질서에 기생하는 사람들은 여성이라 보기 어렵다고 얘기하죠. 이런 식의 얘기는 또, 여성의 상징 체계가 근본적으로 따로 존재한다는 그녀의 설명과는 다소 빗나가는 논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스피노자의 역능이나 존재론적인 차이론과도 엄연히 다른 것이구요..물론, 말장난같아 보이겠지만, 그것들은 분명히 철학적인 엄밀함을 결여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상징의 문제로 돌아가겠습니다. 윤소영 교수는 발리바르의 등에 업힌 채, ‘인권의 정치학’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다면적인 주체들간의 ‘교통과 연대’(!!)를 핵심으로 얘기하죠. 그러면서 그는 상징이나 전통적인 의미의 이데올로기 개념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또한, 분명히 이전의 레닌, 혹은 스탈린주의적 맑스주의 ‘당’ 개념도 포기하지 않는 것 같아보입니다. 다면성과 다원성을 구별하면서, ‘다원주의’의 대전제는 다원성의 수렴가능성이라는 낙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월러스타인의 ‘반체계적 운동’이라는 것이죠. 다면성이 수렴될 수 있기 위해서는 실천 과정에서 연대와 교통, 나아가 ‘지도와 조정’-이에 주목합시다-이 필요하고 그러면서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이데올로기 형태와 조직 형태가 요구된다(p.186)는 것입니다. 이전의 맑스주의에는 이러한 이데올로기(동시에 상징)에 대한 연구가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당 개념이나 국가 개념도 존재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냥 당의 혁명 완수가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의 성립인 양 해석되었다는 것이죠.. 이것은 맑스주의 전반에 대한 또 다른 담론을 요하므로, 어쩔 수 없이 넘어가겠습니다. 저도 이에 대해 아주 할 말이 많죠..
하지만, 결국 이것은 전통적인 맑스주의 당개념과 구별점을 갖기 어렵습니다. 알뛰세의 유명한 테제를 떠올려보죠. 이데올로기가 주체를 호명한다는 것... 우리는 상징 체계, 혹은 이데올로기를 통해서만이 내가 주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알뛰세든, 발리바르든, 윤소영 교수든간에 현실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도 반드시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을 수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존적인 의미에서도 이데올로기 개념을 결코 버릴 수 없는 것이겠죠? 우리는 윤소영 교수가 다면적인 주체화양식에 대해, 그리고 그것들에 정초한 다면적인 해방양식에 대해 주장한 것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것의 교통과 연대를 위해서는 그것을 조직할 수 있는 새로운 무언가-그것은 분명히 현재의 운동 수준에서는 당을 요할 것입니다. 알뛰세가 끝까지 프랑스 공산당(PCF)에 남아있으려 한 것은 이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죠?-를 요합니다.
그러나, 당이든, 아님 발리바르주의자들이 말하는 위의 조직 역시 새로운 주체를 양식화하게 마련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주체화양식들이 이데올로기라면, 당 역시 당내 이데올로기를 가지며, 다면적인 해방양식을 추구하는 운동 주체들 역시 결국 그러한 조직적인 틀 내에서 새롭게 주체화-당으로 포획되는-를 겪기 마련입니다. 쉽게 말하면.. 입당선서하면서.. 그것으로 우리는 우리만의 해방양식을 묻어두는 것이죠..
제가 하고자 하는 얘기를 이 자리에서 다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세미나 시간에 계속적으로 기존의 상징체계에서 탈주할 수 있는 해방양식을 탐구할 것을 주장해왔습니다. 그것은 이리가레이가 말하는 여성으로서 말하기와도 아주 일부분 타협점을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나아가 ‘차이’를 넘어설 것을 계속해서 주장해왔습니다. 다면적인 주체화양식이 있음은 분명히 인정합니다. (물론, 그것마저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여전히 남근-중심적인, 혹은 현재로서는 자본주의적인 주체화양식 이외에는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죠.. 따라서, 우리가 이미 그러한 하나의 주체화 상징 체계 내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식의...)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여전히 ‘존재론적인 차이 이전의 단성성’과 ‘무의식의 역능적인 발현과 표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평면 내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전혀 다른 의미에서의 교통과 연대를 논할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나중에 더 자세히 얘기할 자리가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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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신 자유주의의 본질 [철학 강의]
실현 과정에 있는, 무한 착취의 유토피아
<< 신자유주의의 본질 >>
(L'essence du neoliberalisme)
--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순수-시장의 논리에 방해가 될 소
지가 있는, 집단적 구조물들을 파괴하는 프로그램이다 --
삐에르 브르디외(Pierre Bourdieu)(프랑스 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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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이 글은 르몽드 디쁠로마띠끄 1998년 3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다소 난
삽하지만 신자유주의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요약되어 있다고 생각됩
니다. 그래서 다소 난삽한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번역.전재합니다. 편집
사정상 두 번에 나누어서 실을 예정이며, 이번 호에는 그 전반부를 싣습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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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자유주의 유토피아는 순전한 허구, 현실에 대한 과도하고 그릇된 추
상에 의거한 순전한 허구(신고전파 경제이론)를 이론적 기초로 하고 있다
경제라는 세계는, 오늘날의 지배적인 담론이 그러했으면 하고 바라고 있
는 것처럼, 정말로 순수하고(불순물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도 완전무결한
(완벽하게 잘 굴러가는) 질서인가? 그리고 이 질서는 [돌아가는 실상이 투
명하게 외부에 알려지기만 하면] 그것의 귀결을 능히 예견할 수 있다는 논
리(이것은 신고전파 경제학의 논리인데 : 역주)를 가차없이 펼쳐 보여주는
가? 그리고 잘잘못에 대해 상벌을 가하는 방법에 의해서―시장기능의 자동
적인 작동에 의해서든 또는, 그보다는 조금은 예외적으로, 국제통화기금
(IMF)이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같은 자신의 무장한 팔뚝들과 그 무장한
팔뚝들이 강요하는 정책들, 예컨대 노동력 가격(임금)의 저하, 공공지출의
삭감, 및 노동의 유연화 등을 매개수단으로 해서든―제반 잘못들을 제때에
바로바로 처벌함으로써 교정하는가? 과연 경제라는 세계는 참으로 그처럼
이상적인 질서인가?
경제라는 세계는 [그처럼 이상적인 질서이기는커녕 오히려] 실제로는 신
자유주의라는 하나의 유토피아, [우리들이 최근에 경험하고 있는 바와 같
이] "정책 프로그램"(신자유주의 사상의 원조인 하이에크가 이야기하는 바
와 같은 '자생적인 질서'라기보다는 지극히 '인위적인 전략'인 : 역주)으로
전환된 하나의 유토피아, 그것도 자신이 내세우는 경제 이론(신고전파 경제
이론 : 역주)의 도움을 받아서 자기자신을 현실에 대한 과학적인 묘사인 양
착각하는 지경에까지 이른(거짓 이데올로기화한 : 역주) 하나의 유토피아를
실행에 옮긴 것일 뿐이지는 않은가?
이 변호론(신고전파 경제이론)은 수학 공식의 형태를 띤 순전한 가공물이
다. 그것은 애시당초부터 가공할 정도의 추상화(抽象化)에 기초하여 만들어
진 하나의 허구이다. 그것은 '개인주의적 합리성'과 동일시되는 부류의 합
리성을 사유(思惟)의 엄밀하고도 엄격한 기준으로 삼음으로써, 합리적인 지
향들이 나오게 되는 경제적.사회적인 제조건들(처지로서의 조건들 : 역주)
과 그러한 지향들을 실행에 옮기는 데 있어서 그 제약조건이 되는 경제적.
사회적인 구조들을 [모조리] 괄호 속에 넣어버리는, 가공할 만한 추상화에
기초하고 있다.
[이 변호론이 얼마나 현실에 대한 과도하고 그릇된 추상(抽象)인지는] 간
단한 예로서 교육제도만을 생각해 보면 충분하다. 오늘날 사람들은 생산자
를 생산함(노동자를 키워내는 데 : 역주)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재화와 용
역을 생산함에 있어서도 체계적인 교육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시기, 바로
그런 시기에 행해지는 교육에 대해서 결코 "명실상부한 제도교육"으로 셈해
주지 않고 있다(교육과 노동을 절대적으로 분리시키는 추상화를 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공고생의 산업연수는 교육이기보다는 임금노동에 가깝다.
반면, 신제품 생산을 위한 신기술 습득 과정은 노동이기보다는 교육에 가깝
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기술혁신이 빠르게 진행되는 시기에 있어서는 노동
과 교육을 절대적으로 구분짓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 역주).
이러한 따위의 태생적인 결함, 즉 "순수이론"이라는 왈라스(주1)류(流)의
신화 속에 내재하고 있는 결함으로부터 자연히 경제학의 제반 부족점(한계)
과 잘못된 점(오류)들이 생겨나고 있다. 그리고 경제학 자신을 파멸로 이끄
는 옹고집이 생겨나고 있다. 오늘날의 경제학은 그처럼 고집스럽게 '경제
고유의 논리' 즉 경쟁에 기초하고 있고 효율성을 담지하고 있다고 자칭하는
'경제 고유의 논리'와 형평(衡平)의 원칙에 복종하는 '사회적(사회복지적
또는 사회연대적) 논리' 사이에 자의적이고 독단적으로 대립관계를 상정하
고서, 그 자의적으로 상정한 대립관계에 악착같이 집착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그와같은[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절대적으로 구별하고 대립시키
는] 대립관계는, 오로지 경제학 자신의 존재 그 자체에 의해 [마치 현실적
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자의적이고 독단적으로 상정(想定)됨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한 대립관계는 이처럼 허구적으로 고안된 것
일 뿐이다.
그런데 원천적으로 탈(脫)사회화되고 탈(脫)역사화된 이 "이론"은 오늘
날,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스스로가 "참으로 되는" 즉 경험을 통한 검
증으로 자신이 진리임을 입증할 수 있는 수단들을 지니고 있다. 과연 신자
유주의 담론은 여타의 담론들과 확실히 차원이 다르다. 에르벵 고프망에 따
르면(주2), 이 이론은 피신처에서의 정신병적 담론이 그러한 것과 같은 식
으로 하나의 "억센 담론"이다. 이 담론은 매우 강력하고 또 논파하기가 어
렵다. 왠고 하니, 이 담론은 자신이 그것의 현상 유지에 기여하고 있는, 힘
-관계의 세계(이성적 관계에 대비되는 의미에서, 힘을 가진 자가 장땡인 세
계 : 역주)의 모든 힘들―기득권적인 것들―을 자기 편으로 삼고 있기 때문
이다. 이 담론은 특히 경제관계를 지배하고 있는 자들의 경제적 선택에 일
정한 방향(약육강식을 가차없이 추구하는 : 역주)을 부여함으로써, 그리고
그 힘-관계들에게 자기 자신의 고유한 힘 즉 고유하게 상징적인 힘(정당화
하는 이데올로기 : 역주)을 첨가해 줌으로써, 그 힘-관계들의 세계가 현재
의 상태 대로 유지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인식(認識)에 대한 이 과학적인 프로그램(이데올로기임에도 불구하고 과
학의 외양을 띤 사고체계 : 역주)은 오늘날 인식에 대한 프로그램에 멈추지
않고 행위에 대한 정책 프로그램으로까지 즉 전략으로까지 전환되고 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에 의거하여 이 "이론"―이 이론이란 다름아닌 "방법론
상의 집단주의를 파괴하는(방법론상의 개인주의만을 강요하는 : 역주) 프로
그램"이다―이 현실화되고 원할하게 작동되는 제조건을 창출하는 것을 목표
로 하는 엄청난 "정치적, 정책적인 노력"(겉으로 보기에 순전히 부정적, 파
괴적이기 때문에 도처에서 거부되고 있는)이 경주되고 있다. 즉 집단체(국
가, 노동조합, 계급, 민족 등 : 역주)를 파괴, 해체시키고 개인을 원자화시
키려는 엄청난 정책적 노력들이 경주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 '순수하고 완전무결한 시장'이라는 신자유주의 유토피아
를 향해 나아가는 이 움직임은 금융에 대한 탈규제 정책에 의해서 그 실현
이 가능하게끔 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정책수단들(그러한 정책수단
들 가운데 가장 최근의 것으로는 '다자간 투자협정'이 있는데, 이 협정은
민족국가들에 대항해서 외국인 기업들과 그들의 투자를 보호하는 것을 그
사명으로 하고 있다)을 동원한 변혁적이면서 "파괴적인"―이렇게 파괴적이
라고 말하는 것이 적확하다―활동들을 통해서 그 실현이 달성되고 있다.
신자유주의 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가는 이러한 움직임은, 순수-시장의 논
리에 대해 방해물로 될 소지가 있는 "모든 종류의 집단주의적 구조물들을
문제시하는 것"을 그 목표로 삼고 있다. 이렇게 문제시되는 집단주의적 구
조물로는, 그 운신의 폭이 부단히 좁아지고 있는 '민족'이 대표적이다. 또
노동집단들(함께 일을 하는 사람들의 단위 : 역주)도 공격의 주요한 목표물
이 되고 있는데, 노동집단들은 예컨대 임금과 근속기간을 개개인의 능력에
따라 개인별로 결정하는 것 및 그 결과로서 수반되는 노동자의 원자화를 겪
고 있다. 또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 낸 집단체들
즉 노동조합, 사회운동단체, 협동조합들이 목표물이 되고 있다. 심지어 가
족이라는 집단주의적 구조물조차도, 연령계층에 따라 시장이 분단적으로 구
성되는 것을 통해서, 소비에 대한 자신의 [집단주의적] 통제권의 일부분을
잃어가고 있다.
2.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궁극적인 기초는 실업, 불안정 및 해고위협이
라는 구조적인 폭력이다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은, 자신의 사회적 힘을 자신이 그 이해관계를 대변
하고 있는 사람들―즉 주주들, 금융 투기꾼들, 산업가들, 자유방임을 확고
하게 하기 위하여 그것을 조금 포기하는 쪽으로 개종한 보수주의적 또는 사
회민주주의적인 정치인들, 그리고 바로 자기들 자신의 절멸을 교사하는 정
책들을 강요하는 데 너무나도 열중하고 있기 때문에, 기업계의 간부들과는
달리, 그 정책들이 초래할 후과(後果)들에 대해 혹시 자신들이 그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을까(즉 자신들이 희생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위험을 추
호도 느끼지 않고 그러한 정책들을 밀어부치고 있는 금융계의 고위관리들―
의 정치.경제적 힘으로부터 끌어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은 총괄적으로 상호작용하여 경제와
사회현실 사이에 단절을 조장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현실사
회에다 이론에서 묘사하는 것과 같은, 다시 말해서 일종의 논리기계의 모양
을 가진, 경제체제 즉 경제 주체들의 움직임에 대한 일련의 강제적인 구속
(절대적으로 순응해야만 하는 제약 : 역주)인 것처럼 나타나지는 경제체제
를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다.
금융시장의 세계화는, 정보기술의 발달과 결합됨으로써, 자본의 이동성을
전례가 없을 정도로 높아지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금융시장의 세계화는]
또 자신들의 투자에 대해 단기-고수익을 얻기를 바라는 투자가들에게 거대
기업들의 수익성을 상시적으로 비교해 볼 수 있는 가능성과, 또 상대적인
실패에 대해서 결과적으로(주가의 하락을 통해서) 처벌을 할 수 있는 가능
성을 제공해 주고 있다.
한편 기업들 그 자체는 이같은 항상적이고 항구적인 위협 아래 놓여 있
다. 따라서 기업들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신속하게 시장의 요구에 적응하
지 않으면 안 되게 되고 있다. 그리고 시장은, 기업들로 하여금 이른바 "시
장의 신뢰를 잃지 않을까"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단기-고수익을 얻고자 하는
주주들의 지지를 잃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 떨게 만듦으로써 자신들의 의지
를 "경영자들"에게 강요할 수 있는 능력과, 금융적인 지휘.감독을 통해서
경영자들에게 [경영에 관한] 기준과 원칙을 정해 주는 능력, 및 일자리, 고
용 및 임금에 관한 경영자들의 정책을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능
력 등을 점점 더 키워가고 있다.
이와같이 해서 '유연성'의 절대적 지배가 구축되고 있다. 그리고 시한이
정해진 고용계약(계약직) 내지는 임시직 일자리와 "사회복지 계획"의 수혜
가 교대로 반복되는 노동관행이 정착되고 있다. 그리고 심지어 동일한 기업
체 안에서조차도 임금관계의 개인주의화를 통해서 자율적인 지사 또는 지점
들 사이에서,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도록 강제된 작업반들 사이에서,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개개인들 사이에서 경쟁이 제도화되고 나아가 정착되고 있다.
임금관계를 개인주의화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개인별로 업무성
과의 목표를 정해 주는 것, 개인별로 인사고과를 하는 것, 상시적으로 인
사고과를 하는 것, 개인별로 차등 임금인상하거나 또는 개인의 능력과 업적
에 따라 상여금을 수여하는 것, 및 개인별로 경력을 관리하는 것 등이 있
다. 이러한 방법으로는 또 "책임화" 전략도 있다. 이 전략 하에서는 자신의
상급자에게 강하게 종속되어 있는 단순한 봉급생활자이면서도 자신의 업무
로서 책임맡고 있는 판매, 생산, 지점, 상점 등에 대하여 마치 "독립적인
사업주"인 것처럼 무한책임을 부여받고 있는 부류의 간부들로 하여금 필연
적으로 자율적인 자기-착취로 나아가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또 "참여적
경영" 기법도 있다. 이 기법 아래서는 봉급생활자들의 "관여"(업무) 범위를
간부들의 직무 범위를 훨씬 넘는 데까지 확장하는 "자율 통제"가 요구되고
있다(작업 현장의 팀제가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 역주).
이것들은 말하자면 '이성에 입각한 복종' 기법 같은 것인데, 책임지는 직
위에 있는 간부들뿐만 아니라 그 밖의 일반적인 노동자들의 경우에도 일 속
에서 정신적.육체적 에너지를 초과투입하도록 강요함으로써, 또 화급하고
절박한 상황 속에서 일하는 것을 강요함으로써, 제반 [인간적인] 기준 내지
규준들과 집단적인 연대를 약화시키거나 절멸시키는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
다.(주3)
위계질서의 모든 층위에서 만인(萬人)에 대한 만인(萬人)의 투쟁―이런
세계에서는 사람들은 불안정, 고통 및 스트레스 속에서 일과 직장에다 자신
의 소속감을 구하고 그것에 집착한다―이 벌어지는 다윈주의(생물의 세계처
럼 인간의 세계도 적자생존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주의.주장 : 역주)
세계의 실천기관(오늘날의 기업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 역주)은, 불
안정이 만들어내는 "불안 분위기"로부터 방조(傍助)를 받지 못한다면 그처
럼 완벽하게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위계질서의 모든 층위에서 그리고
특히 간부직들 가운데에서―그것도 최고위층에서까지도―보여지고 있는, 불
안정화와 만성적인 실업의 위협에 의해서 순치된 산업예비군이 존재하지 않
는다면 결코 그처럼 완벽하게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틀림없이 그럴 것이
다.
자유라는 휘장 아래 펼쳐지고 있는 이 경제질서의 궁극적인 기초는 결국
이 질서가 암암리에 내포하고 있는 실업, 불안정 및 해고위협이라는 "구조
적인 폭력"인 것이다. 즉 개인주의적인 미시경제 모델이 "조화롭게" 작동하
기 위한 전제조건은 대중들의 질병 상태, 즉 실업자라는 산업예비군의 광범
위한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 폭력은 사람들이 노동계약("계약 이론"에 의거하여 교묘하
게 합리화되고 있는 반면에 실제적으로는 계약―대등한 당사자간의 거래―
이라는 의미를 잃을 정도로 되어버린)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도 또한 영
향을 미치고 있다. 즉 기업의 담론은 시간상의 보장을 일체 사라지게 만듦
으로써(일자리의 3/4은 계약직이고, 전체 고용 가운데 불완전 고용이 차지
하는 비중은 부단히 증가하고 있으며, 개인해고{대량 정리해고만이 아니라}
는 더 이상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는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사람들로 하
여금 매 순간순간 새롭게 자신의 소속처를 획득해야 하게 되어 있는 시기
에, 신의, 성실, 협력 및 기업문화라는 말들을, 그러한 상황이 요청하는 것
만큼 결코 쓰지 않았다. [신의, 성실, 협력과 같은 것들이 매우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는 시기에 그런 것들을 강조하는 대신에 폭력적인 수단들을 마
음껏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지금, 신자유주의 유토피아가 어째서 실제의 현실
속에서는 일종의 폭탄(사람을 지옥으로 보내는 기계장치)으로 구현되어 버
리기 쉬운지를 생생하게 경험하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이렇게 "파괴하는 무
기"가 될 수밖에 없는 필연법칙은 지배자들 자신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즉 지난 시기에 마르크스주의(현실 사회주의를 의미한다 : 역주)가 그러
했던 것처럼―신자유주의는 이렇게 그 지배자들의 존립까지 파괴한다는 점
에 있어서는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점이 많은데―이 유토피아는 어마어마한
신뢰 즉 "자유무역 신념"(자유무역에 대한 신
을, 금융인들이나 대기업의
주인들처럼 사실상 자유무역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자유무역 신앙을 가질만
한 처지에 있는 : 역주)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사람들 즉 자본주의체제의
지배자들 일반에게도 신앙으로 삼으라고 교사하고 있는 것이다.
즉 신자유주의라는 유토피아는 정부 고위관리들이나 정치인들처럼 자신들
이 존재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자유무역에서 끌어내고 있는 사람들; 경제
적 효율성이라는 미명 아래 시장의 권력을 신성화하는 사람들(대표적으로
경제학자들 : 역주); [개인주의적] 합리성의 모델에 입각해서, 개인적인 이
윤 극대화를 순전히 사적으로 추구하는 자본 보유자들을 난처하게 만들 수
있는 행정적 또는 정치적 장벽들을 철폐하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예컨대 시
민운동단체들 : 역주); 민족국가로 하여금 노동시장을 필두로 모든 시장에
대하여 모든 규제를 철폐하고, 재정적자와 인플레이션을 절대로 금하고, 공
공 서비스를 전면적으로 사유화하고, 공공적.사회적 지출을 삭감하는 등등
을 하면서, 경제의 주인들에게 복무하기 위하여 경제적인 자유라는 그들의
요구에 복종하라고 설교하는 사람들(예컨대 지식인들 : 역주) 등에게도 자
유무역 신앙을 교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지배자들 자신의 자멸을
교사하고 있는 것이다!!]
(주)
1) 프랑스 경제학자인 오귀스트 왈라스(Auguste Walras, 1800-1866)는
'부의 본성과 가치의 원천에 대하여'(De la nature de la richesse et de
l'origine de la valeur)(1848)의 저자이다. 그에 따르면 이론은 순수하다.
그는 수학을 경제학 연구에 적용하고자 시도한 개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2) Erving Goffman, '피난처, 정신병의 사회적 조건에 관한 연
구'(Asiles, Etudes sur la condition sociale des malades mentaux), 미뉘
(Minuit) 사 편, 파리, 1968.
3) 이 모든 것에 관해서는 '사회과학 연구 기록'(Actes de la recherche
en sciences sociales) 두개 호에 실려 있는 다음의 글에서 상세한 설명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하나는 "노동에 있어서의 새로운 지배 형
태"(Nouvelles formes de domination dans le travail)(1 및 2)로서, 제114
호, 1996년 9월호와 제115호, 1996년 12월호에 실려 있다. 다른 하나는 가
브리엘 발라스(Gabrielle Balazs)와 미셸 삐알루(Michel Pialoux)의, "노동
의 위기와 정치의 위기"(Crise du travail et crise du politique)의 서론,
제114호, p 3~4.인데 여기에서 아주 전문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3. 신자유주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원리로 하는 다윈주의를
인간생활의 최고의 규범으로 치켜세우고 있다
경제학자들은 진정으로 신자유주의를 경배하는 사람들(초국적 자본 및 매
판자본 : 역주)과 반드시 경제적.사회적 이해관계를 함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자들은, 경제학이라는 학문 분야에서 신자유주의
유토피아에 대한 신앙을 생산 및 재생산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고자 하
는 특유의 관심을 지니고 있다. 아니, 그것에 지대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
다.(그래야만 지배층의 호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역주)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이 '수학적 합리성'이라는 외관을 씌운 유토피아의
경제적.사회적 효과에 대하여 자신들의 심정이 편하든 편하지 않든 그것에
상관함이 없이 이렇게 [신앙을 생산 및 재생산] 하고 있다. 경제학자들은 자
신들의 생활 전체로부터 분리되고, 특히 존재하고 있는 그대로의(머리 속에
그린 것이 아니라 : 역주) 경제적.사회적 세상현실에 대한 자신들의 지적인
구성물―대개의 경우 매우 추상적이고, 순 이론적이며, 공리공론적이지만―
들 전체로부터도 분리된 상태에서 이론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들은 무엇보
다도 특히 '논리의 사물'과 '사물의 논리'를 매우 혼동하는 경향에 빠져 있
다.(논리적으로 정합적이면 정합적일수록 사물들간의 물질적 연관--사물의
논리--을 정확히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 역주)
경제학자들은, 경험을 통한 검증을 받을 기회가 사실상 전혀 없는 모델들,
역사상 존재해 온 여타의 과학들―경제학자들은 [당연하게도] 이러한 부류의
과학들에서 자신들의 수학놀음이 지니고 있는 바와 같은 수정같은 투명성과
순수성을 확인하지 못한다―이 획득한 지식들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게끔
만드는 [최신형의] 모델들, 대개의 경우 [그것을 만들어 내는] 자신들조차
그것의 진정한 필연성과 심오한 복잡성을 깨달을 수가 없는 [오묘한] 모델들
을 믿고 있다.
이렇게 신자유주의 모델을 신봉하면서 경제학자들은 하나의 어마어마한 경
제적.사회적 변화에 참여하고 있으며 또 그것에 협력하고 있다. 그런데 이
어마어마한 변화는, 비록 이러한 변화의 결과들 중의 몇몇은 그들 경제학자
들로 하여금 소름이 끼치게 만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경제학자들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언짢게 만들지는 못하고 있다. (경제학자들은 사회당에
회비를 낼 수도 있고 사회당이 집권하고 있는 경우에는 당의 대표자들에게
사려 깊은 자문을 제공할 수도 있다)
왜 그런고 하니, 이런 '부작용'들에 관해서는 경제학자들은 흔히 "투기성
거품"이라고 부르는 것에다 모든 탓을 돌릴 수가 있기―몇몇 경우에는 그같
이 투기성 거품에다 탓을 돌리기가 명백히 곤란함을 무릅쓰고서--때문이다.
반면에 이 엄청난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으로의] 변화는 경제학자들이 자신의
일생을 바쳐 다듬어내고 있는 '극단적으로 합리적인'(마치 정신병의 몇몇 형
태들이 그러한 것처럼) 무모순(無矛盾)의 유토피아를 현실화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토피아가 현실화되고 있는 판에 그 정도의 사소한
문제들에 괘념하겠는가? : 역주)
그렇지만 세상은 세상이지 유토피아가 아니다. 찬란한 신자유주의 유토피
아의 현실에의 적용은 즉각적으로 여러가지 효과들을 가져오고 있으며, 그것
들은 지금 이미 가시화되고 있다 : 경제적으로 가장 선진적인 사회들에서,
불행에 처한 사람들의 비중이 점차 커져가고 있으며 소득격차가 비상하게 증
가하고 있다 ; 그리고 상업적(영리추구적) 가치들을 침투시키고 강요함에 의
해서 영화, 출판 등 문화 생산 분야에서 자율적인 영역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 뿐만 아니라, 그리고 특히나, 지옥기계(신자유주의 질서 : 역주)의
효과들을 거부할 수 있는 집단적인 심급(審級)들 모두를 파괴하고 있다. 그
리고 이렇게 파괴되고 있는 집단적인 심급들 가운데 제일선에 위치하는 것이
"공공성"이라는 관념과 결부된, 보편성 있는(만인 공통의) 가치들 모두를 수
탁.보관하고 있는 존재인 국가, 바로 민족국가이다 ; 그리고 경제와 국가의
상층부에 또는 기업들 속에 등 도처에서 이같은 부류의 다윈이즘 정신--다윈
이즘은 '승리자'를 [무조건] 예찬하는 정신으로서, 고등수학과 '탄력성 있는
도약'을 본떠서 (사물들의 연관성은 무수하면서 극도로 복잡하고, 변화는 우
연적이면서 비약적이라고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 역주) 만들어져 있다--
이 강요되고 있다. 그런데 이 [사회적] 다윈이즘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
쟁'과 '냉소주의'를 모든 인간행위들에 관철되는 [최고의] 규범으로 치켜세
운다.
사람들은, 이 정치-경제 체제가 만들어 내는 놀랍도록 엄청난 고통이 더욱
심해지게 되면, 훗날의 언젠가에 지옥의 심연으로 향해 나아가는 이 과정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어떤 운동이 출현될 것으로 믿으며 그 때까지 참고 기다
릴 수 있을 것인가? 사람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실로 기이한 역설에 직면해
있다.
[도대체 어떤 역설에 직면해 있는 것인가?] 이 새로운 질서―이 질서란 자
유롭지만 고독한 개인들로 구성된 질서이다―을 현실화하는 과정에서 부딪치
게 되는 난관들은 오늘날 경직성과 의고(擬古)주의에 그 탓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직접적이고 의식적인 간섭은--그러한 간
섭이 국가로부터 나오는 것인 한에는, 그 간섭의 수단과 방법이 어떠한 것이
든 불문하고--다짜고짜로 불신받고 있으며, 따라서 순수하고 익명적인 메커
니즘 즉 시장(사람들은 시장에 대해서 그것 또한 이해관계들이 각축하는 공
간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에 이익이 되게끔 없애버리라고 독촉받고 있
다.
반면에 [삶이] 불안정화된 주민들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음에도 불
구하고 이 [신자유주의적인] 사회질서가 혼돈상태에 빠져서 와해되어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은 실은, 지금 무너져 내리고 있는 과정에 있는 구 질서의 제도
들과 그 제도들의 집행자들, 사회적으로 일하는(사사로운 취미로 자기 집을
짓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닌 : 역주) 모든 범주의 노동자들의 모든 종류의 노
동들, 그리고 또 가족적인 것이든 여타의 것이든 막론한 모든 형태의 사회적
연대들, 등이 없어지지 않고 살아남아 있거나 확고부동하게 존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로의 이행은 사람들이 감각으로 느끼지 못하는, 따라서 인식하
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마치 대륙 표면의 이동이, 장
기적으로 볼 때 극히 무시무시한 그것의 효과들을 사람들로 하여금 [당장에
는] 눈치채지 못하게 하면서, 진행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무시무시한] 효과들은 역설적이게도 신자유주의로의 이행이 요즈음 들
어서 불러일으키고 있는 바, 구 질서를 방어하는 세력들의 저항들에 의해서
도 또한 가리워지고 있다. 이 방어세력들은 구 질서가 지니고 있는 자원들
(예컨대 화폐발행 및 통화량 관리 : 역주)로부터 힘을 길어내고 있으며, 옛
적부터 전래되어 오던 연대들로부터 힘을 길어내고 있다. 또 아노미 상태로
의 추락으로부터 현 사회질서의 상당한 부분을 보호하고 있는, 사회[복지]적
인 자본(이 자본은 재충전되고 갱신되지 않을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쇠퇴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의 고갈은 오늘내일 당장 발생하지는 않는다)의 비축
분(예컨대 사회보장기금 : 역주)으로부터 자신의 힘을 길어내고 있다.
4. 민족국가의 역할을 보존하는 것은 수구 보수가 아니다
그런데 바로 이 "보존"(conservation)하는 힘들―이것은 너무나 쉽게 보수
주의(conservative)적인 힘들로 취급되고 있는데―은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새로운 질서의 구축에 대해 '저항'하는 힘이기도 하다. 나아가 이 힘은 [현
존질서를] 전복시키는 힘으로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만약 사람들이 모종의
타당성 있는 희망을 간직할 수 있다면 그것은 국가기구들 속에 그리고 그와
동시에 국가기구의 집행인들(특히 예컨대 말단 공무원들과 같이 그 기구들에
극히 밀접히 부착되어 있는 사람들)의 지향 속에 다음과 같은 창조해 내는
힘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것들 속에는 얼핏 보아서는 사
라져버린 구 질서와 그것에 부수하는 "특권들"에 대해 단순히 방어적인 것으
로 보이지만―마치 사람들이 [지배자들의 사주에 따라] 이 저항들에 대해 즉
각 방어적이라고 그것을 비난하게 될 터인 것처럼―시련을 견디어 내고 결국
새로운 질서―이 새로운 질서란 이기주의적인 이해관계와 사적 이윤욕을 추
구하는 것을 유일한 계율로 삼지 않는 질서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질서는
그런 것들(이기주의적인 이해관계와 사적 이윤욕 : 역주) 대신에 집단적으로
구상되고 승인된 목적들의 이성적인 추구를 지향하는 집단체로 대체시키는
질서이다―를 발견하고 건설해 내고자 애쓰게 되어 있는 힘들이 존재하고 있
는 것이다.
사회운동단체, 노동조합, 정당과 같은 집단체들 가운데서 어째서 국가―민
족국가 또는 유럽연합과 같은 초(超)민족적인 국가(세계국가를 향한 중간단
계인)는 더더구나―에 대해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지 않을 것인가? 이런 국가
들이야말로 금융시장에서 실현된 이윤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그것에 과세
를 징수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특히 금융시장이 노동시장에 대해 행사
하고 있는 파괴적인 작용을 방어할 수 있다.
국가는 노동조합들의 도움을 받아서 '공공적인 이해관계'―이 공공적인 이
해관계는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든 바라지 않든 간에, 비록 산술적인 기장(記
帳)에 있어서 이러저러한 오류를 지니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 대신에 (지
난날 "식료.잡화 상인"이 흡사 그러했던 것처럼) 사람들이 쉽게 셈할 수 있
는 [고등수학이 아닌 산술의] 모습(새로운 신앙인 신자유주의는 이렇게 셈할
수 있는 모습을 갖추는 것에 대해 인간 성취의 최고의 형태라고 이야기하고
있다)으로부터 결코 이탈하지 않을―의 구상과 방어를 조직할 수 있기 때문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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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오늘날 %20 형이상학이 무엇인가 [철학 강의]
오늘날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형이상학의 자기 이해에 대한 세 가지 고찰
막스 뮐러
1. 글머리에
다음의 생각들은 1984년 10월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에서 개최된 독일 철학회 총회에서 행한 첫 번째 공개 강연의 내용이다. 공개 강연에 이어 독일 철학회의 각 "철학 분과"에서는 "형이상학에 대한 물음"이라는 일반 주제로 네 개의 분과 강연을 가졌으며, 그에 이어 철저한 토론도 가졌다. 네 개의 분과 강연은 다음과 같다. 울리히 호메스(U. Hommes)의 "기쁨은 진리이다. 현대 과학의 형이상학에 대한 도전에 대하여", 루드거 호네펠더(L. Honnefelder)의 "초월적 또는 초월론적 형이상학의 가능성에 대하여", 얀 베크만(J. Beckmann)의 "형이상학과 비판", 그리고 헤르만 베스트호프(H. Westhoff)의 "기독교적 실존 의식 ㅡ 페터 부스트(P. Wust)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서" 등이다. 이 강연들은 결국 형이상학적 사유의 독특함을 정당화하기 위해 시도한 가능한 네 가지의 체계적 모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형이상학적 사유는 개별 과학에 대립되는, 초월론적 방법과 비판주의에 대립되는 형이상학적 사유의 독특함을 대변하고 있다. 마지막의 강연은 "기독교적 철학"에 직면한 형이상학적 사유와 관련된 내용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기독교적 철학을 "나무로 된 쇠", 즉 그 자체가 모순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네 개의 분과 강연에 앞서 행한 다음의 나의 강연 내용은 위의 형이상학적 사유와는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2. 세 가지 형이상학의 자기 이해
"오늘날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하는 다음의 고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형이상학적 사유를 둘러싼 철학 또는 비철학 분야의 반대자들과의 논쟁이 아니다. 형이상학적 사유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사유가 존재한다는 사실의 정당성에 반론을 제기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형이상학의 자기 이해에 관한 것이지, 형이상학의 가능한 자기 변론에 관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물음은 역사적이다. 싸움을 전개하려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이 싸움터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여기에서는 그때마다의 역사적 형이상학의 근본 의도를 단순히 기술하고 묘사하려고 시도할 뿐이다. 그러한 의도가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있었는지는 없었는지는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의도들을 성찰하면서 그때마다의 형이상학은 그때마다의 자신의 자기 이해에 이를 것이다. 형이상학의 자기 이해는 유럽 사상사의 흐름에서 그때마다 상이하게 파악되어 왔는데 ㅡ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형이상학"은, 유럽 밖에서는 그것과의 모든 유비에도 불구하고, 어느 곳에서도 발생하지 않았던, 우선은 유럽만의 핵심적인 문제이다 ㅡ 여기서는 그러한 형이상학 행로의 세 지점이 기술될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형이상학의 행로가 오늘날 어디까지 이르렀나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의 자기 이해가 자기 자신의 성찰 속에서 사유의 다른 모든 방식과 계획적으로 두드러지게 구별되는 첫 번째 사상가는(우리는 여기서 서양 사상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는 형이상학을 하나의 새로운 앎으로 추구(episteme zetumene, 추구되는 새로운 앎)하였으며 동시에 그 이전에는 그러한 방식으로는 있어 본 적이 없는 어떤 것으로 관철시켜 나갔다.
그 다음 우리가 형이상학의 자기 이해를 찾을 수 있는 두 번째 사상가는 임마누엘 칸트이다. 그에 따르면 형이상학적 탐구는 인간 그 자체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칸트에서 그의 본래의 주제는 형이상학적 탐구 자체 ㅡ 그는 이것은 "자연 성향으로서의 형이상학"이라 부르고 있다 ㅡ 도 아니며 그러한 자연 성향을 갖춘 인간(형이상학적 동물로서의 인간)도 아니다. 그에게는 삶의 형태로서의 형이상학이 문제가 아니라 학문의 형태로서의 형이상학이 ㅡ 그 이전에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그러했던 것처럼 ㅡ 또한 학문적 인식 방법으로서의 형이상학이 문제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방법은, 즉 (자연 성향으로서의 형이상학이라는) 형이상학적 욕구가 자신의 목표 ㅡ 따라서 학문이 되려는 목표, 즉 "학문으로 대두될 수 있는 모든 미래의 형이상학을 위한 서설" ㅡ 에 도달하기 위해 택한 길은 잘못된 길이었으며, 그 길은 안전하고 확실한 학문적인 인식으로 이끌지 못하고 형이상학을 단지 끝없는 논쟁에 휘말려들게 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길은 ㅡ 칸트에 따르면 ㅡ 서로 상반되는 형이상학의 다원성으로 인해 그저 우리를 혼란스럽게만 만들었을 뿐이다. 칸트에게도 영원히 포기될 수 없는 형이상학은 자신의 새로운 자기 이해에 바탕을 둔 새로운 길이 그에 의하여 놓아져야만 했다. 우리는 이 길을 나중에 간단히 특징지을 것이다.
우리가 형이상학의 자기 이해와 관련하여 논의하게 된 세 번째 사상가는 마틴 하이데거이다. 그는 처음부터 언제나 철학을 형이상학과 동일시하였으며, 일생을 통하여 시종일관 철학을 형이상학으로 이해하였다. 그가 마침내 오늘날 형이상학이 종말에 도달한 것으로 보았을 때, 그것은 그에게 곧 철학의 종말이었다. 철학 또는 형이상학의 이 같은 종말은 완성(끝을 맺음)인가 아니면 끝장(파멸)인가? 서양 사람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형이상학이 각인되어 있으며 그래서 형이상학은 서양의 역사로부터 분리해 낼 수 없다. 그렇다면 이 형이상학은 극복되어야할 어떤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그것에 이별을 고하고 잊어버려야 하는가? 그러한 잊어버림 속에서 우리는 형이상학을 속시원히 떨쳐 버릴 수 있을까? 아니면 프로이트(S. Freud)가 상기시키고 있듯이 잊어버린 것이 하나의 새로운 통제할 수 없는 힘을 얻어 우리에게 덮쳐 오는 것은 아닐까? 이로써 우리는 하이데거를 넘어서 하이데거에서 유래된 하이데거 이후의 "현금"(Heute)의 한가운데 서 있는 셈이다. 우리 시대의 형이상학은 자기 이해에 대한 물음은 ㅡ 물론 역사는 되풀이 될 수 없으므로, 이 자기 이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도 아니고 칸트의 그것도 아니며 또 단순히 하이데거의 그것일 수 없지만 ㅡ 만일 형이상학이 실제로 서양 인간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라면(그리고 이를 넘어서 모든 인간의 본질 유형들과 유비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면), 우리로 하여금 그 자기 이해를 정리, 작업해 내어 파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사유의 첫 번째 단계인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자기 이해로 넘어가 보자.
3.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자기 이해
오래 전(제 1차 세계 대전 직후)에 쿠르트 징거(K. Singer)의 저서{창시자 플라톤} (Platon der Gr nder)이 주의를 끌었다. 여기에서는 플라톤을 형이상학의 창시자로서 지칭하고 있다. 소피스트의 실증주의에 반대한 싸움에서 플라톤은 타당한 본질을 단순한 사실과 대립시켰으며, 그것만이 인식과 지속적인 자세를 가능하게 하는, 의무를 부과하며 변하지 않는 규범의 형태를 순전히 견해와 그때 그때의 적응만을 허용하는 되어 감과 대립시켰다. 이러한 서술은 옳다. 그것은 하나의 돌출 또는 징거가 말하듯이 "창시" 즉 삶의 창시이며, 여기서 삶은 사건들의 흐름에 대하여 자신을 자립적인 것이라 주장한다. 실제로 그것은 형이상학에서 감각적 자극에 대해 정신이 처음으로 의식하고 본래적으로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자연의 흐름 위로 자신을 정립하는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시작된 것을 성찰하고 그러한 "사건"의 밑바탕에 놓여 있는 의식의 방식을 동시에 하나의 철학 분과로 파악하려 시도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이며, 그에 와서야 비로소 그것이 관철되었다. 그가 계획적으로 추구하고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관철시킨 새로운 앎의 방식의 자기 이해 ㅡ 이 앎의 방식이 아주 나중에야 비로소 "형이상학"이란 이름을 얻게 된다 ㅡ 는 그 주제가 다음과 같이 윤곽지어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존재자 그 자체에 통용되는 앎을 추구하였다. 따라서 그것은 이것 또는 저것에 대한 특수한 앎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적으로 모든 것에 언제나 통용되는 것, 즉 모든 존재자에게 공통적인 것을 말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가 찾은 것 또한 바로 이 점이다. 즉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존재자는 그 자체에서 그것이 무엇인 그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자체에 있어서"라는 말은 나 또는 너에게 또는 우리들의 특별한 소망, 목표, 의도와 관련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순수한 "앞서 주어짐"(Vor-Gabe)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자체로 있다는 것"과 그것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이러한 "앞서 봄"(Vor-Sicht)은 그것을 오히려 나와 우리들로부터, 그리고 나와 우리들의 주관성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 그것을 "분리된 것", 즉 "절대적인 것"(absolut)으로 본다. 압솔베레(absolvere)는 떨어져 나옴을 의미한다. 그것은 나에 대해 비록 상관적이기는 해도 상대적인 것으로 관찰될 수 없다. 모든 시야는 하나의 관련이다. 여기서는 "자유롭게 내어 주는 관련"이다. 모든 것을 포괄하고 모두가 관련되는 자유롭게 내어 줌의 능력은 단지 정신, 이성, 누스(Nous)에게만 있을 뿐이다. 이 정신은 모든 것을 듣고 받아들일 수 있는데. 그 까닭은 그것이 나와 너의 이성이 아니라 어떠한 특수성과 개별성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런 이성이기 때문이다. 이 이성만이 우리들 안에서 유일하게 모든 것을 결합시키고 있으며(활동의 이성) 또한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을 내주기도 한다(수용의 이성). 따라서 그 이성은 최고의 활동성과 수동성의 역설적 통일성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형이상학은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볼 때 역설적인 이성의 앎이지, 특정한 것을 사실에 맞추어 숙고하여 파악하는 오성의 앎( , ratio)이 아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목표로 하고 있는 앎은, 한편으로는 (신과 같이) 정신 또는 이성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다만 정신 이성을 "갖고 있을" 뿐인, 다시 말해 정신 이성에 참여하고 있을 뿐인 유한한 인간의 앎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유한한 존재자에 대한 앎으로서, 오직 이러한 유한한 존재자 모두에 (따라서 그 총체성에 있어서) 대한 앎이다. 그러므로 이 앎은 절대적이며 유한한 앎이다. 이 앎은 추상적 앎으로, 그 모든 앎의 단계에서 유한한 것으로 머물게 된다. 그것은 추상을 통해서, 즉 많은 것을 생략해 버림으로써 이루어진다. 모든 것에 타당하기 위하여,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을 규정할 수 있기 위해 무수한 구체성을 포기해야만 한다. 이러한 추상적 개괄은 아직 구체적인 통찰(intuitus)은 아니다.
이렇듯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서 형이상학을 존재론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또 그것을 묘사시키고, 제한시키는 추상적 의미의 절대적이고 총체적인 학문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절대성"은 단지 "존재자" "그 자체"와 관련되고 있는 "분리"(Absolvenz)를 뜻하고, "총체성"은 단지 외연적 . 양적이고 추상적인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괄을 뜻한다. 최후의 위대한 아리스토텔레스계 학자이며 서양의 고전 형이상학가인 헤겔(G.W.F. Hegel)은 비로소 정신의 발전사({정신 현상학})에서 순수 현실과 순수 가능의 동일성으로서의 아리스토텔레스 식의 역설적인 이성의 "공허"(이 역설은 모든 것을 덮치는 비구체적인 덮침과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의 자세를 동시에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마침내"(단순히 양적 . 외연적 . 추상적일 뿐 아니라, 또한) 질적 . 내연적 . 구체적 전체 앎의 완성에 도달하게 된다. 지금까지 항상 인간의 유한성의 한계에 머물러야 했던 형이상학의 자리에 헤겔은 절대적 앎에 대한 논리학을 갖다 놓고 그것을 인간의 인간성의 극복으로, 즉 사유에서 인간성의 지양으로 이해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 지양이 신 안에서 실제로 현실적으로 일어난다고 이해했다. 우리 자신도 정신적 존재이기 때문에 이러한 신성에 접근해 갈 수는 있지만 결코 그것에 도달할 수는 없다. 이 접근은 특히 인간적 . 형이상학적 이론에서 이루어지며 이 이론은 노에시스 노에세오스( , 사유의 사유)라는 신적인 정신의 관조를 향해 간다. 그러나 이 접근의 운동은 결코 "시민 생활"(J. Ritter가 모범적으로 서술하였듯이)이라는 포기될 수 없는 토대를 떠날 수는 없고, 실천적 . 정치적 현존재(그리고 윤리학, 경제학, 정치학 등에 대한 그의 반성)라는 토대와의 결속을 간단히 융해시켜 버릴 수 없으며, 결코 지상의 현존재를 신적인 정신의 관조 때문에 등한시하지 않았다. 형이상학은 정치학을 전제한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자기 이해는 이러한 유한성의 지양될 수 없음 속에 머물러 있다. 그렇지만 사유가 갖는 신적인 자율성과 신적인 것에 대한 불변의 앎 그리고 이 앎에서의 신적인 현전성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적 형이상학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신적인 것은 유토피아적 미래의 기획 투사가 아니며, 그것은 여기에 있는 현실이며, 세계의 한 가운데에 있으며, 그 자체로서 우리의 존재론적 앎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불가결의 것이다. 모든 것에 해당되고 관련되는, 따라서 모든 것을 자신의 로고스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모으고 있는 "이다/있다"(ist)라고 말함은 모든 것에 대해 "이다/있다"고 말하는 발언 속에서, 모든 것에 대해 똑같은 정도로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다/있다"는 그 자체 결코 단지 한 가지 형태(univok)로만 통용되지 않고 그것은 그것의 명백한 유사성에서도 항상 또한 비교될 수 없는 다의성을 내포하고 있다. "Ist"에 있어서의 이 둘의 결합을, 즉 그 안에서 말해지고 있는 차이와 동일성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유비"라고 불렀다. "이다/있다라 말함"은 "유비적인 말함"( )이다. 거기에서는 의미 깊은 다의성이 지배적이다. 다의성이 의미하는 바는, 모든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비슷한 방식으로 고찰하는 존재론의 "이다/있다"에는 항상 더 또는 적게 "있다"는 차이가 포함되어 있으며 그것이 함께 의미되고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 있다"는 감각적인 제약 속에서 만나질 수 있는 것의 그 자리에 있음만을 의미할 뿐 아니라 또한 모든 현전성 존재와 의미의 가능하고 현실적인 모든 현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무엇으로 있다"의 무엇은 형상으로서의 본질, 바라볼 수 있는 고정된 윤곽으로서의 본질, 봄(바라봄)에서 항상 이미 보아진 것으로 남아 있는 규범적인 원초 현상으로서의 본질을 의미할 뿐 아니라, 형상 중의 형상, 그 자체 형태가 없는 그러한 "형상 중의 형상"까지를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테이온( , 신성)처럼 플라톤의 아가톤( , 좋음)도 척도란 없으며 그러기에 척도가 된다. 그것의 실제의 현재는 모든 것이 그 존재성에서 이 척도에 재어져서 우리에게 인식 가능한 것으로 놓이게끔 한다. 이러한 척도는 "나타나거"나 "생각되거"나 "들을 수 있는"(노에인 [ ]은 듣는다는 의미가 있다)데 이성으로서의 정신은 일차적으로 그리고 우선적으로 이 최고의 척도를 척도로 받아들인다.
이 척도는 최고 존재자이며, 이 존재자는 그 자체 더 이상 어떤 다른 척도 아래에도 놓여 있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최고의 존재자(Summum ens)로서 그 자체가 척도이며, 존재하고 있는 다른 모든 존재자에게 척도를 제시하며 앞서가고 있다. 의미를 부여하는 이러한 신적인 것과의 연결 속에서만 모든 것을 포괄하는 존재론적인 "이다/있다라고 말함"이 참으로 "발언"될 수 있다. 이렇게 해서만 "이다/있다"의 발언이 모든 단순한 형식을 넘어서 내용적인 것, 즉 충만되고 가득 찬 것이 된다. 존재의 발언(Ist-Aussage)은 그것의 형식적 공허에서 해방된다. 이제야 비로소 모든 존재자 그 자체에 대한 물음으로서의 존재론은 무차별한(중립적인) 권태에서 자유롭게 된다.
신학과 신적인 것에 대한 로고스와의 연결 속에서 비로소 무차별한 "모든 것"이 구별된 "우주"가 된다. 척도가 되는 존재자와의 구별에서 드러나고 있는 존재 안에서의 이러한 등급이 비로소 추상적 . 절대적 존재론을 위계 질서적인 형이상학으로 만든다. "위계 질서적"이라 함은 개개의 존재자가 모두 "바로 그 자체"에 속하는 것이 된다. 등급은 바로 이 자체 존재를 구성하는 참으로 절대적인 규정이다. 자시 말해 척도가 되는 것에 대한 학설(신학)과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에 대한, 즉 자체 존재에서의 존재자에 대한 학설(존재론, 이 칭호는 후대의 것이며 17세기 두이스부르크 대학 교수인 클라우베르크가 처음 사용하였지만, 그 사실 내용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이다)은 둘 다 내면적인 동일성을 갖고 있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존재론적 . 보편적 . 절대적 고찰이 이 고찰에 내재적인 척도를 제시하고 있는 위계 질서적인 신학과의 이 내면적인 동일성 속에 있다고 보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유래하는 중세의 그리스도교적 형이상학과 세속화된 형태의 근세의 지류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자기 이해에서 등급에 대함 물음이 갖는 결정적인 역할은 ㅡ 뷔르츠부르크(W rzburg)의 하인리히 롬바흐(H. Rombach) 교수는 1983년 예술 사학자인 마르틴 고제브르흐(M. Gosebruch)를 위한 논문집에서 이에 관해 결정적인 것을 서술하고 있다 ㅡ 여태까지의 통상적인 학술 견해와는 다르게 다음의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최고의 존재로서의 신을 표본으로, 모든 세계 내의 유한한 존재자의 척도로 제시하고 있는 토마스의 다섯 가지 신 존재 증명에서의 네 번째인 신에 이르는 길은 내용적으로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에게로만 소급되어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인 사상에서 신적인 척도가 항상 이미 현존하는 근본 바탕이라는 것에 대한 성찰로서 그리스도교적 창조 형이상학이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그 모든 인과적 움직임에서부터의 증명들보다 앞서 있다. 그리고 네 번째 것은 본래 첫 번째 자리에 놓았어야 했을 것이다. 바로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적 형이상학의 이해에서 신적인 것의 목적론적 증명 제시는 모든 원천의 증명에 앞선 모든 운동의 과정이자 동시에 최종 목표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추구한, 후에 "제 1철학"이라 칭한 형이상학에 대한 다른 규정들은 여기서 우리가 설명한 자기 이해에 아무런 문제없이 끼워 넣어질 수 있다. 예컨대 자연학에 대한 구별 같은 것인데, 여기에서는 세계 내에서의 되어 감과 되어 감의 운동들을 (변화, 예를 들어 와 로서) 설명하고 있다. 이와는 다르게 형이상학은 존재를 현실태와 현실 이행으로서, 그렇게 되어 있음과 존재해 왔음( )으로서 견지해 왔다. 존재자가 지금 여기에 있기 위해서, 항상 이미 거기에 존재해야 하는 어떤 것을 견지하고 있다. 또는 논리학을 "도구"(Organon)라 구별해서 규정하는 것도 여기에 속한다. 이 논리학은 올바르지 않고 틀릴 수도 있는 말함과 판단함의 올바름에 관여한다. 그러나 형이상학은 자기 이해의 유명한 표현에서 얘기되고 있듯이 존재자 자체의 진리를 위한 노력이다. 그리고 이 진리가 모든 것에 통용되는 개방성으로서 이렇게 이미 드러나 있는 것에 대한 올바른 말함을 가능하게 한다.
형이상학을 모든 존재자 그리고 동시에 최고의 존재자라는 척도에 대한 보편적 . 절대적인 앎이라 보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적 형이상학의 이해를 하이데거는(이로써 고전 형이상학의 현대적 타당성을 역사적으로 제한시키며 어느 정도까지는 역사적으로 "지양"하고 있다) 존재적이라 칭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서 개별의 존재자들을 넘어서 존재자 전체에로 향한, 그리고 그 범위 내에서 본질과 존재성을 보는 시야 역시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러한 존재자의 "모든 것"과 최고의 존재자, 즉 신에 분리될 수 없이 고정되어 있다. 이 두 가지("모든" 것과 "신")가 출발점이자 동시에 종착점이며, 존재론적 . 신학적 형이상학이라는 고전적 형태가 다루는 본래적인 주제로 남아 있다. 그들에게 서로 서로를 위한 공간을, 그들의 세계 구성을 위한 공간을 주고 있는 것이, 즉 존재 자체(와 그의 시간 자체)가 더 이상 논구되지 않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하이데거는 존재 망각이라는 용어로 특징짓고 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유형의 형이상학(그의 삶의 말미에는 종종 모든 형이상학)이 존재를 망각하고 있는 것으로 증명, 제시해 보인다. 이 강연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이 유형을 다시 언급하게 될 것이다.
4. 칸트 형이상학의 자기 이해
우리는 이제 유럽 형이상학의 자기 이해에서 그 다음의 커다란 단계로서 칸트의 사상을 간단히 소개하도록 하자. 그의 사상은 의식적으로 그리고 명백하게 그 이전의 모든 형이상학 이해와 처음으로 근본적으로 구별되고 있다.
칸트에게서 "형이상학"이 포기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은 비판 이전의 "교의적" 칸트, 따라서 그의 첫 번째 비판인 {순수 이성 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이 출간된 해인 1781년 이전의 칸트에게 통용될 뿐 아니라 또한 "비판적" 칸트에게도, 따라서 {순수 이성 비판}에 의해 근거 제시된 초월 철학의 칸트에게도 통용된다. 그의 부정은 형이상학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고 전수된 학문의 형태에 대한 것이다. 그러한 학문의 형태로서는 형이상학의 정당성과 확실성이 변론될 수 없다. 칸트에서 형이상학이 포기될 수 없음은 형이상학 자체에서 유래한다. "자연 성향으로서의 형이상학"을 단적인 사실로서 전제하고 한 번도 문제로서 지기하지 않은 점이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아마도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물음이 제기된 것은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뿐이다. 자연 성향으로서의 형이상학에서 필연적으로 흘러나오는 물음들에 대해 형이상학이 추구해야 하는(그렇지 않을 경우 물음이라는 의미가 없다) 대답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앎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전제되고 있는 것은 앎이 의식과 연관 속에 서 있을 때만 ㅡ 앎은 이 연관 내에서 자신의 타당함을 변론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확실한 것이 된다 ㅡ 앎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칸트에게는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에 대한 변론이 문제가 되고 있다.
그는 이러한 확실성을 변론해야 하는 학문성이 여태까지의 모든 형이상학에는 전혀 비판적으로 시도도 되지 않았거나 또는 결여되어 있다고 본다. 이것에 대한 외적인 징표를 칸트는 전통 형이상학 상호간의 해결 될 수 없는 논쟁에서 보고 있다. "해결될 수" 없었던 것은 소위 앎의 체계라고 하는 것의 합법성과 비합법성을 위한 명백한 기준이 지금까지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이 합법화가 특히 중요한데, 왜냐하면 형이상학이(그것의 총체적 . 절대적 . 보편적 .선험적 성격에 있어) 인간의 유한성과 어떤 모순 관계 속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위에서 보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형이상학이 처음부터 모든 것에 대한 어떤 규정을 바라고 경험되어야 할 개개의 것들의 구조 ㅡ 이 구조는 경험에 앞서 이미 알려져 있고 확정되어 있어야 한다 ㅡ 를 원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또한 어떠한 유한자도 경험할 수 없고 파악할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신적인 것, 절대적인 것에 대해 명백한 확실성이 주장될 수 있기를 바란다면 ㅡ 이러한 요청들이 지금까지 형이상학이 요구해 온 것들인데 형이상학은 그 요청들을 채울 수 없고 그 약속을 이행할 수 없다.
1785년에 나온 {학문으로서 대두될 수 있는 모든 미래의 형이상학을 위한 서설}(Prolegomena zu einer jeden k nftigen Metaphysik, die als Wissenschaft wird auftreten k nnen)은 이렇게 칸트의 이론적인 형이상학의 자기 이해를 윤곽 짓고 있다. 이 형이상학은 자기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의심들을 씻어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어떤 형이상학인가? 이 형이상학은 모든 것이 개별적으로 경험되기 이전에 이 모든 것을 넘어서는 초월자(Transzendenz)에 근거하고 있지 않고, 오히려 초월성(Transzendentalit t)에, 즉 나에게 대상으로서, 객체로서 맞은 편에 서 있어야 하는 모든 것에 대한 경험의 가능 조건들로의 소급에 근거하고 있다. 어떤 것이 그 자체에 있어 무엇이냐 하는 것은 관심거리가 아니다. 나에게서 분리되어서는 또 우리와의 접촉이 없이는 그 어떤 것이란 어둠 속에 놓여 있고, 어둠 속에 머물러 있고, 우리의 경험적 세계 밖에 있으며, 따라서 인식 불가능하다. "사유될 수 있는 것"은 칸트에 의하면 사유될 수 있기 때문에 "인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분리되어 있는 것, 따라서 절대적인 것은 우리와 상관이 없다. 그것은 우리와의 접촉 ㅡ 칸트에 따르면 이 접촉은 오직 감각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ㅡ 은 감정 촉발이다. 우리의 그것과의 접촉은 객체화, 대상화라 불린다. 이 둘의 공동역할(즉 감정 촉발의 대상화)이 비로소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데, 경험 가능한 것의 총체성을 자연이라 부른다. 그래서 경험과 관련하여 칸트는 "자연과 가능한 경험은 완전히 하나이다"({프롤레고메나}, 36정)고 하였다. "선험적 종합 판단"(즉 "자연"에 대한 본래적인 형이상학적 판단)에 대한 최상의 근본 명제는 "경험의 가능 조건은 동시에 경험 대상의 가능 조건이다"는 것이다.({순수 이성 비판}, B. 197). 이 문장은 전혀 문제가 없는 듯이 보이는데, 그 까닭은 경험의 대상들, 따라서 경험 가능성에서 경험 가능함 그 자체는 경험하는 주체의 경험할 수 있음에 의해 조건지어지기 때문이다.
고전적 . 존재론적 형이상학과 비교해 볼 때 이러한 초월(론적) 형이상학의 자기 이해에서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자연(Physis)은 이제 더 이상 그 자체에서 생성되는 것(Phyein=Wachsen) 또는 스스로에서 자라 나오는 것 ㅡ 이 속에 자연 존재로서의 우리들도 포함된다 ㅡ 으로서 이해되지 않는다. 감각적으로 경험 가능한 것의 총괄 개념으로서의 자연은 이제 감각적 지각을 연구하는 자연 과학의 상관 개념으로 이해되며, 이 자연 과학은 일차적으로 뉴턴의 고전적 물리학이다. 이 물리학이 유일하게 가능한 학문적 물리학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것의 근본 바탕이 곧 자연 형이상학의 주제이다. 경험 가능성, 대상성, 대상화에 의해 적용 받는 객관성과 현상성 등은 다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대상들의 전체에 대한 선험적인 파악은 초월자를 앞서 잡거나 덮쳐 잡지 않고도 파악되며 그래서 그것은 주체성에 앞서 놓여 있는 가능 조건들로의 소급에서 확실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칸트는 그가 계획한 자연의 초월(론적) 형이상학(이것은 실제에서 단지 자연 과학들이 형이상학일 뿐이다)에 관해서 대단히 낙관적이다. 개별 자연 과학들이 무한히 진보, 발전할 수 있고 확대되어 나가기 때문에 경험의 무제한성 속에서 완성될 수 없는 반면 자연의 초월(론적) 형이상학(Transzendentalmetaphysik der Natur)으로서의 형이상학은 완성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순수 이성 비판}(A XX)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즉 {순수 이성 비판}에서) 제시하고 있는 개념들에 의하면, 형이상학은 이제 모든 과학들 중에 유일한 학문으로서 그러한 완성을, 그것도 짧은 시간에 그리고 적은 일치된 노력으로서도 약속할 수 있다. 그래서 이제 후대에게는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러한 체계는 그 폭에서 반도 못 미쳤지만 여기 이 비판보다 훨씬 더 풍부한 내용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만 칸트는 그것을 제공하지 못했으며 유고는 단편으로만 남아 있다. 따라서 칸트는 자기의 형이상학 ㅡ 그에게서는 모든 것이 이것을 향해 흘러 들어오고 있다 ㅡ을 주체성으로의 초월론적인 소급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 초개별적이고 초경험적인 주체성은 그 안에 대상적 관련에서의 대상적 가능 조건들을, 따라서 자연 과학의 대상들로서 모든 경험 가능한 대상들의 단일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방금 말한 바와 같이 자연 형이상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은 자연 과학 및 그것의 상관 개념인 자연 과학의 형이상학이 되어 버렸고, 앞서 잡음과 초월(Transcensus)은 거슬러 올라감 즉 소급이 되어 버렸고, 존재자의 존재성의 자리에 대상들의 대상성이 들어섰고, 존재 및 자체 존재의 진리는 주관적 가능 조건들에서의 대상적 관련들에 대한 경험의 확실성과 올바름이 되어 버렸다. 남아 있는 것은 이러한 앎의 선험성과 그것의 보편적 총체성인데, 그것도 이제는 감각적 경험과 현상에 제한되어 버렸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상승된 것은 확실성의 정도와 초월성과 보편성의 근거에 대한 통찰이다. 이러한 자기 이해의 협소함과 거기서 이해되고 있는 형이상학에 대한 반대들은 우리들 논의의 마지막 단원인 다음 단원에서 소개될 것이다.
이러한 초월론적 . 현상적 자연 형이상학은 칸트의 전체 형이상학이 아니며 그의 본래적이고 핵심적인 형이상학은 더더구나 아니다. 칸트에 의하면 "자연 형이상학"이 그것에게 자리를 비워 주어야 하는 본래적이고 결정적인 형이상학은 {도덕 형이상학}(Die Metaphysik der Sitten)이다. {프롤레고메나}가 자연 형이상학의 계획을 초안했듯이 {도덕 형이상학의 정초}(Grundlegung der Metaphysik der Sitten)는 도덕 형이상학의 윤곽을 초안하고 있다. 따라서 자연 형이상학 옆에 자유 형이상학이 등장하며 그것의 칭호인 "도덕 형이상학"은 본래 "도덕성의 형이상학"이라 불러야 했을 것이다. 그 까닭은 도덕 자체가 경험적인 현상으로서 초월론적 주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초월론적 도덕성에서 경험적 도덕으로 옮아감이 거의 간과되고 있다. 그 까닭은 여기서는 아무런 대상성도 없고, 경험적 도덕을 위한 어떠한 객관적 구조도 선험적으로 유추해 낼 수 없으며, "도식화"를 통해 중재하여 적용시킬 수도 없고, 오직 자유가 양심에서 스스로 절대적 . 사실적으로 요청되고 있음을 직접 경험할 뿐이기 때문이다.
자유는 절대적 요청 아래에서만 비로소 자유로서 경험되며, 무조건적인 것에 대해 요구된 결단으로서 경험된다. 개개인은 모두 이 자유 앞으로 내세워지게 되고 아무도 그것을 회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에게, 또 어떠한 상황에서도 통용되기 때문에 그것은 오직 형식적으로 보편적이고 항상 타당한 내용이 없는 "준칙"들로 표현될 구 있다. 정언적 명령은 자신의 내용 없음 속에서 범주적(kategorisch)일 수 있는 바로 그 때문에 정언적(kategorisch)이다. 행위하는 자에게 그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하지만 그 절대적 확실성 속에서 어떠한 내용적인 진리나 올바름도 그것 (정언적 명령)에서 사라진다. 오직 가능한 단적인 보편화만이 (개개인이 모두 내 처지에서 서게 되면 똑같이 행동해야 된다는) 보편적인 타당성을 단적으로 확실한 것으로 보장할 뿐이다.
자유 형이상학은 자연 형이상학과는 다르게 내용이 없으며 비대상적이고 순수 형식적이다. 다시 말해 가능한 객체들과 연관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초월론적 자연 형이상학과는 다르게 자유 형이상학은 무상관적으로, 다시 말해 여기서는 "본체론적으로" 절대적으로 타당하다. 그것은 초월론저인 주체로부터 발생되지 않고, 초월론적 . 경험적 주체성을 향해 발생하고 있다. 여기서는 주체가 객체를 구성하지 않고 그 자체가 주체로서 초객체적인 것, 초현상적인 것 자체에 의해 구성되고 있다. 따라서 고전적 . 형이상학적 의미로서 "그 자체로서의 그 자체를" 뜻한다. 자립적이고 신적인 정신과의 관련에서 그 자체인 참된 존재자에 대한 형이상학은, 무조건적인 규율과의 관련에서 자기 자신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는 자유 형이상학에 의해 해체된다. 그로써 어떤 새로운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윤리적인 것의 새로운 의미가 드러날 뿐이다.
5. 하이데거 형이상학의 자기이해
이제 우리 고찰의 마지막으로 현대의 전형적인 형이상학적 자기이해의 마지막 단계인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형이상학 이해를 다루고자 한다.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하이데거는 일생동안 철학을 단적으로 형이상학과 같은 것으로 간주했다. 형이상학과 결별해야 한다고 믿었을 때 그는 동시에 철학에서도 떠났다. 그는 사유하는 "회상"으로서의 "존재의 사유"에서 사유의 한 새로운 방식을 시도했다. 이 사유는 자신의 독특한 엄밀함을 가져야 하며, 또한 동시에 철학과 개별과학의 저편에 놓여 있다. 그렇지만 하이데거는 그때까지는 자신을 형이상학자로 이해했다.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에서부터 떠나면서도 자신을 형이상학자로 이해했다는 사실은, 출간된 책들에서 어느 정도 이미 드러나고 있다. 1929년 그의 유명한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의 취임 강연 제목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였다. 제 2차대전 직후 쓰여졌고, 프랑스에서 처음 출판된 그 강연의 머리말은 프랑스어로 "La remont e au fondment de la metaphysique(형이상학의 밑바탕에로 소급해 감)"이라 되어 있다. 이 말은, 형이상학을 극복하려는 모든 절차는 그 밑바탕에로의 소급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며, 여기서의 밑바탕은 하이데거에 있어서 더 이상 초월론적 해석으로서나 실존론적 해석으로서도 주체성이 될 수가 없다. 86세의 사상가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즉 1975년에 이 책자의 제 11판이 발간되었다. 그는 1975년 10월에 견본 하나를 다음과 같은 글귀로 증정하면서 나에게 보냈다. "새로운 것은 없다. 그렇지만 새롭게 사유해야 한다. 막스 뮐러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며 인사드린다. 마르틴 하이데거로부터". 따라서 "1975년에도 형이상학은 새롭게 사유되어야 할 것이다." 수 많은 형이상학 강의들 중에서 그는 니마이어(Niemeyer) 출판사에서 {형이상학 입문}을 출판했다.(1953) 전집 출판에서 지금까지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이 발간되었다. 이 책을 그는 70년대의 오이겐 휭크(Eugen Fink)에게 헌정했고 그를 위해 보탬말을 썼다. 이미 그 전(1929)에 그의 핵심이 되는 철학-역사적 논문은 구성 양식상으로는 아마도 위대한 작품일 것이다. 즉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가 그 책이다. 이 책의 증보판인 제 4판의 견본을 1973년 하이데거는 나에게 또 한번 "진심으로 감사하며 인사드린다"라는 글귀와 함께 보내왔다. 하이데거, 그는 결코 형이상학적 전통을 떠날 수 없음을 알고 있었고 이것은 모든 그의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을 넘어서기를 원했지만 그는 이 원함을 주관적인 자기의 원함으로 느끼지 않고 오히려 그 자신이 표현했듯이, "역운", 즉 역사적인 과업, 그가 좇아야 할 "소명"으로 느꼈다. 한 젊은 고등학생으로서의 그가 이미 어떻게 이 역사적인 과업을 느꼈는지를 그는 자주 묘사했고 기술했다.
(1) 후에 프라이부르크 대주교가 된 콘라드 그뢰버(Conrad Gr ber)는 콘스탄츠시 주임신부로서, 그 곳의 국립 고등학교를 다니는 젊은 메스키르히 고향사람에게 프란츠 브렌타노(Franz Brentano)의 저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의 존재자의 다양한 의미에 대해서}를 선물로 주었다. 하이데거는 이것이 그 자신에게 결정적인 이정표였다고 말한다. "좁은 의미의 사상가(사유자)는 많은 사상들을 갖고 있지 않고 끊임없이 오직 하나에 대해서만 깊이 사유한다"라고 그는 자주 말했다. 그가 일생동안 깊이 사유해온 이 하나의 사상은 그에게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우리가 단적으로 모든 것에 대해서 예외없이 말하고 있는 인간의 '이다/있다'라는 말함 속에서 그 '이다'(있다)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모든 것을 단적으로 '이다/있다' 안에서 상이하게 함께 끌어들이고 있는 이 신비스러운, 유비적인 동일성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러므로 존재론은 바로 그의 실존의 문제이다.
그런데 그것은 어떤 존재론인가? 그리고 하이데거는 이 삶의 과업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형이상학의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방식으로 내려지고 있다. "형이상학은 존재자 자체와 존재자 전체를 거슬러 올라가서 탐구하기 위하여, 존재자를 넘어서서 캐묻는 물음이다." "모든 존재자를 넘어서서" 거기에 또 무엇이 있단 말인가? 취임 강연에서 말하기를, "아무 것도 없다" 또는 "무"(das Nichts)가 있다. 무와 존재, 이것들은 비록 "주어지고 있지만" 또한 동시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존재자로서는 없는 것이지만 존재자가 아닌 것으로는 있다는 말이다. 헤겔은 이미 그의 논리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무엇을 갖고 철학을 시작해야만 하는가?"). 순수 존재와 순수 무는 같은 것이다. 모든 존재자를 넘어서 무와 존재에로 들어서는 이 넘어섬을 하이데거는 "초월(Transzendenz)"이라 부른다. 이것은 인간존재에 속하는 하나의 시도로서 넘어섬의 사건을 뜻한다. 형이상학은 현존재에 있어서의 근본사건이며, 그것은 현존재 자체이다. "현존재", 이것을 그는 "세계-내-존재"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점점 더 강하게 되어가는 그의 사상의 "역사화" 속에서 차츰 차츰 하나뿐인 세계란 있을 수 없고 오직 세계들이라는, 역사적 세계들이라는 다수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존재이해가 이제는 여러 다른 세계들에서의 "'이다/있다'라고 말함"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와 함께 세계역사들의 이 역사성이 하이데거의 자기이해에 있어 부분적으로 열려 있고 부분적으로는 감춰진 채 남아있는 문제가 되는데, 이 문제에서부터 하이데거 사유의 실존은 결코 빠져 나올 수 없었다. 그가 이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문제가 그를 찾은 것이다. 어쨌든 그는 이 사건을 나중에는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2) 나는 여기서 사유에 있어서의 그의 길을 기술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몇몇 외적인 이정표만을 암시하려 한다.
ⓐ 그의 본래적인 계획 - 교수임용 자격논문 작성 때까지만해도 - 은 신학자들에게나 비신학자들에게도 똑같이 철학함을 중재할 수 있는 그러한 철학 교수직의 주임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즉 나중에 소위 "국가와 교회를 위한 교수"라는 교수직을 얻기위한 것이었다. 이 의도는 1919년에 완전히 포기되었다.
1919년 1월 9일자의 카톨릭 교의학 교수 크렙스(Engelbert Krebs)에게 - 이 사람이 하이데거의 계획을 그때까지 결정적으로 북돋아 주었었다 -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역사적 인식의 이론까지를 포용하는 인식이론적인 통찰들이 나로 하여금 카톨릭주의의 체계를(손으로 쓴 Text에서 이 점을 밑줄로 강조하고 있다.)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여 주었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사상과 형이상학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물론 이것들은 새로운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1)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적 자기이해와 관련해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여기서 그는 "카톨릭주의"를 "체계"라고 파악했다. 이 예전의 형이상학은 신스콜라학파의 형이상학을 말하며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교의 교의학에 의해 변형된 것이다. 그리고 이 교의학은 또한 그 형이상학에 의해서 상호간의 제한 규정 속에 근거지워지고 있다. 이에 반해 하이데거에 있어서는 이미 그리스도 사상은 당시 교회의 견해와는 다르게 결코 체계가 아니며 역사이다. "인간과 더불어 신의 역사 그리고 신과 더불은 인간의 역사, 역사학적으로 해석하여야 할 하나의 역사이다." 그리스도교 사상의 이러한 해석과 더불어 새로운 역사형이상학(Geschichtsmetaphysik)의 사건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둘(즉 새로운 종교성과 새로운 형이상학)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는 이 순간(즉 1919년) 열려있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자로서 머물러 있다. 그러나 형이상학자로서도 그는 이제부터 그 발자취가 메타역사학자이다. 나는 여기에서 새로 시작된 포기될 수 없는 형이상학의 방식을 그렇게 부르고 싶다.(하이데거 자신은 이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 형이상학은 하이데거에 있어서 계속적으로 인간의 안간성에 속하는 것이며 그래서 그는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에서 그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형이상학 안으로 옮겨 놓을 수 없는데, 그 까닭은 우리가 실존하고 있는 한 우리는 이미 항상 형이상학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말하기를(Phaidros 279a) '인간이 존재하고 있는 한, 어떤 방식으로건 철학함이, 즉 형이상학이 일어나고 있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결코 번복하지 않았다.
(3) 하이데거의 사상전개와 자기이해에 있어서 두 가지 과정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방향을 정한 고전적 형이상학을 통한 과정이고, 다른 것은 후설에 의해 창시된 현상학을 통한 과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후설은 같은 방식으로 그의 스승인 셈이다. "과정(Durchg nge)"이라는 이 말은 하이데거 자신이 택한 말이다. 예수회의 리챠드슨(P. William J. Richardson)이 그의 방대한 하이데거 책 "Through Phenomenology to Thought(현상학을 통해서 존재의 사유에로)"를 하이데거에게 보내어, 그 책에 삽입할 아름다운 시 "라이헨아우에서의 저녁 산책"을 부탁하면서 편지를 띄웠을 때, 하이데거는 제목을 정하는 데 있어 고집을 세우기를, 제목에 원래 "--에서 --에로"라고 되었던 것을 "--을 통해서"로 바꾸기를 주장하였다. 이 말은 그가 그의 자기이해에 있어 현상학도 형이상학도 포기하지 않았음을 뜻하며, 그것이 하나의 같은 길이며, 이 길은 그 둘을 통과해서 하이데거 자신을 이끌어 가고 있고, 그 자신도 결코 그 길을 떠나지 않았으며 그 길에 머물러 그 길을 자신의 길로서 간직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는 이 같은 길을 계속 걸어갔다.
(4) 이 길 위에서의 계속된 걸음은 우선 하이데거를 두 가지 부정에로 이끌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첫번째 부정은 현상학의 바탕에서 칸트와 초월철학(Transzendental-philosophie)에 대해 내리는 비판이다. 이 비판은 이중의 뜻이 있다. 이 비판은 우선 칸트의 이론적 초월형이상학(즉 자연형이상학)에로 향하고 있다. 이 형이상학의 밑바탕에는 현상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너무나 협소한 경험개념이 깔려 있다. 경험은 여기서 항상 감정촉발에 근거한 감각적 경험일 뿐이다. 즉 충동에 대한 저항의 경험이다. 반면 경험의 풍부함에 대한 전체 맥락, 즉 예술적, 정치적, 정서적, 존재론적 경험이 형이상학의 바탕으로서 도입되어야 하고, 거기에서부터 이제는 자연대상들의 경험가능 조건들만이 연역되지 말고 오히려 역사적 세계 자체의 가능조건들이 다시 경험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칸트의 자유형이상학에도 너무 협소한 자유개념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자유가 여기서는 윤리적인 자율성, 도덕적인 결단으로만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자유가 그 전체의 폭에 있어서 고찰될 때, 비로소 - 즉 다원적인 "창조성"에서부터 시작하여 우리가 존재자를 자유롭게 내어주는 것으로서의 "내맡김(Gelasseneheit)"과 모든 재촉에서의 해방까지를 포함해서 - 역사적 자유형이상학이 가능해진다. 이 형이상학은 책임지우는 규율을 무조건적인 자유의 규범이라고 도덕적으로 볼 뿐 아니라 또한 역사적으로 그리고 모든 영역에 있어서(따라서 윤리적인 영역뿐 아니라 또한 정치적 예술적 영역까지도) 다양해야만 하는 관여함(sich-Einlassen)의 가능조건들을 이해하면서 사유할 수 있다.
고전적 아리스토텔레스적 존재-신론 - 이것은 존재자를 그것 자체에로 자유롭게 내어주는 내맡김(단순한 대상적인 대상화 대신에)을 알고 있다 - 에 대해서 하이데거는 우리가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존재망각"이라는 이의를 제기하고 거기서부터 자신의 "존재사유"를 끌어올려야 한다고 보고 있다. 하이데거가 출발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물음의 방향은 모든 유한한 존재자와 신적인 존재자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이것들이 결합되어 우주를 구성하고 있다. 그런데 그 물음의 일어남의 공간(그리고 일어남의 시간) 자체는 분명한 것으로 눈 앞에 파악될 수 없다. 존재, 시간, 세계 등은 존재자들이 아니며 그러기에 세계내부적 시간적 존재자들에 의해서 설명될 수 없고, 오히려 그 반대로(이것이 "전향"을 말하는 것이다) 시간, 존재, 세계등이 "그 자체"에서 이해된 뒤에 시간, 존재, 세계들에서부터 비로소 눈길이 존재자들에로 향해야만 한다. 인식이란 오직 그것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것들 자체는 그들의 진리를, "예전"의 형이상학을 극복함에서 사유의 새로운 방식을 찾아내어 준비해야 하는 그 이해 속에 갖고 있다. 우리는 시간, 존재, 세계 등을 존재자가 아닌 것으로, 그렇지만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할 때에만 그 자체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이해에서, 이 존재이해가 "존재자처럼" 존재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주어지고 있는 것까지를 포함한다는 것이 이해될 때, 즉 그 존재이해에서 존재가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면서 우리로 하여금 비로소 존재자를 인식하게끔 해준다는 것이 이해될 때 존재는 그 자체에 있어 이해되는 것이다.
(5) 존재, 시간, 세계와 같은 것은, 그 안에 이미 들어서 있음 및 그것들과 친숙해 있음과 더불어 구별과 거리, 일정한 "물러섬"이 따를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이 말은 다른 세계들과 다른 시대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독특한 존재이해와 더불어 생성되는 것이지, 어떤 필연적인 순서 속에, 계속적이거나 변증법적인 "전개" 속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의미하고 있다. 그들의 출생은 각기 다른 운명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운명은 그들에게 나름대로의 새로운 자유에서 떠맡을 것을 호소한다. 존재, 시간, 그리고 그것들의 내어줌, 그때그때의 세계 등등은 존재하는(sind) 것이 아니고, 하이데거가 말하고 있듯이, "주어지고 있는"(es gibt) 것인데, 이 말은 그것들 안에서 역사적으로 개개의 존재자는 모두 나름대로 다른 존재자이며, 그것들 안에서 시간은 나름대로 다른 역사적인 시간으로서 개방되고 있다는 것을, 존재는 우리에게 역사적으로 나름대로 다른 형태로 결단하도록 자신을 내주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잊혀진 "주어지고 있다(es gibt)"가 비로소 이것 또는 저것으로 하여금 각기 다른 존재의 의미로 존재하게끔 해 준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단초를 잡기는 했지만 유럽 이외의 세계들과의 비교를 통해 이것을 상세하게 설명하기까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는 서양의 존재이해의 커다란 시대들을 구별지어 처음으로 메타역사학적인 기술을 시도했다. 이 "내어줌(Geben)"과 "주어지는 것(Gaben)"이 다시 기억(an-gedacht)된다 해도, "Es(그것)"는 아직 사유되어야 할 것으로 남아있다. 이 사유되어야 할 "Es"는 원칙적으로 파악될 수 없는 신비이며, 이것은 바로 그 자신의 파악될 수 없음 속에서 잊혀짐을 벗어나서 신비로서 보존되고 존중되어야 한다. 이러한 "테두리" 안에서 비로소 모든 존재자의, 유한한 존재자의 아니 유한한 존재자 그 이상이 나름대로 다르게 "등장"할 수 있다. 즉 사물들의, 인간들의, 신들의 등장, 그리고 그것들 안에서 나름대로의 시간공간 및 나름대로의 다른 존재의미를 통해서 "Es"의 신비가 드러나고 있다. 즉 "Es"는 감추어져 있음 속에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인다.
(6) 이 모든 것("주어지고 있다[es gibt]"라는 사건)이 역사다. 역사 또한 존재자가 아니며, 역사 그 자체는 자신의 근거들에서부터는 자신의 참된 존재가 인식될 수 없다. 그것은 대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올바른 판단들 속에서 명백하게 파악될 수 없고 연역적으로 그것의 가능 조건에 있어 확실하게 파악될 수 없다. 역사는 "이해된다"고 우리는 말했다. 그것의 방법은 해석학이다. 그 시대 그 시대의 세계내부적인 역사가 있고 그것과 더불어 세계내부적인 해석학이 있다. 해석학의 방법적인 출현과 관련하여 우리는 19세기에서는 쉴라이어마허(Schleiermacher), 뵈크(Boech), 드로이젠(Droysen), 딜타이(Dilthey) 등을 그리고 20세기에서는 요아킴 바하(Joachim Wach),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Hans-Georg Gadamer) 등을 들 수 있다. 역사 또는 세계내에서의 역사들 외에도 다양하고 나름대로의 다른 "존재의 떠오름"과 "존재의 짐"으로서의, 또는 의미이해인 존재이해의 출생과 죽음으로서의 역사 자체, 아니 차라리 세계들의 여러 역사들이 주어져 있다. 하이데거의 견해는 명백하지 않은 "존재의 역사"에 대한 그의 "미래적인" 사유의 자기이해에 있어 각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존재이해와 세계이해를 다른 것과 구별지어 파악해야 하는 그러한 해석학에로 넘어가는 듯이 보인다. 개개의 커다란 시대와 세계의 "있음"(ist)은 모든 것을 의미하며 개개의 다른 "여기"와 "저기"를 뜻한다. 끊임없이 번역과 전수의 전이가 필연적이다. 이해는 여기에서 언제나 "유비적"이다. 그런데 예전의 표현양식을 빌어 낯설은 것 속에로의 감정이입에 있어서도 해석과 의미부여에 있어서의 불합치를 결코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차이는 항상 동일성에 비해 더 큰 것으로 존립해 있고, 유비적인 이해에서도 아직 남아 있는 낯설음이 더 지배적이고 결코 완전히 극복될 수 없다 "Quanto maior similtudo tanto maior dissimilitudo(유사함이 크면 클수록 또한 그 만큼 차이점도 크다)"라고 1215년의 라테란 공의회는 신학적인 형이상학의 표현방식을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자기자신에로 되던져짐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독특한 동일성은 다른 것과의 경계를 의식하고 이제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이해된다. 이제 비로소 역사적인 자기이해가 힘을 펴기 시작한다.
칼 라너(Karl Rahner)는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있은 80회 생일 축하식에서 가진 마지막 강연에서 그의 스승 에리히 프르치바라(Erich Przywara)의 유비이론이 자신의 "신비의 신학"의 본래적인 핵심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전(全) 유비이론은 "존재의 유비"를 1500년 동안을 통한 분배의, 배당의, 비례의 유비로서 더 날카롭게 전개시켰다. 그러나 칼 라너는 "역사적 유비"와 그에 속하는 개념을 아직까지 우리에게 정리작업해 주지 못하고 있다. 하이데거 역시 못하고 있다. 그는 현대 "인간의 자연 성향으로서의 형이상학"을 우리의 시대에 맞는 형태로서 그러한 "메타역사학"에 아주 가깝게 이끌고 왔다. 그는 범주적 개념과 실존론적 개념을 구별하면서 이 메타역사학을 준비했다. 그는 이를 위해 몇몇 근본 낱말들(예컨대 "사건")을 찾아냈으며, 그로써 우리 형이상학의 자기이해가 가야 할 길의 방향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그 이상은 못했다. 이 가야할 길의 방향은 참된 존재자 전체에 대한 존재론 및 이 존재자 전체가 자기를 계시하는 신적인 것으로서의 최고 존재자에 대해 갖는 관계의 존재론으로서의 고전적 고대 형이상학에서 출발하여, 자연현실에 대한 그리고 윤리적 자유의 절대적 확실성에 대한 판단들의 정당성의 가능조건들을 확실히 해야 하는 초월론적 형이상학의 중간지점을 거쳐, 세계 역사적 해석학의 메타역사학의 현대에 이르기까지 뻗치고 있다. 참된 것의 앎(고전적 형이상학)에서부터 인식과 행위에 있어 정당한 것으로 변론된 확실성(초월철학의 형이상학)을 거쳐 역사적 진리의 유비적 이해(역사학)에 이르기 까지의 길 말이다. 이러한 과정에 대한 반성에서 형이상학은 오늘날 자신의 자기이해를 찾아야 한다. 과연 그렇게 하고 있는가?
(7) 이 모든 것을 다시 한번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결국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에 있어 오직 세 가지 원칙적으로 상이한 문제제기의 방식들만을 확인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중세의 그리스도교적 형이상학을 거쳐 헤겔의 세속화된 형이상학에 이르기까지의 고전적 고대 형이상학의 주제와 그것의 연속을 "존재와 정신"이라는 표제어로 부를 수 있다. 칸트에 의한 초월론적 형이상학에로의 결정적인 변형은 "객관성과 주관성" 또는 "대상성과 주체성"이라는 핵심 주제로 특징지울 수 있다. 하이데거와 그 후의 현상학적으로 규정된 오늘날의(현상학 이후의) 형이상학은, 만일 그것이 자기자신을 완전히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메타역사학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그것의 과제는 (역사학적) "의미와 (역사적) 자유"의 해석에서 찾아져야 한다. 메타역사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은 의미형이상학(Sinnmetaphysik)이며 자유형이상학이다. 존재와 정신, 객관성과 주관성, 의미와 자유의 이 세 가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마도 현대에서 자기자신을 서양의 형이상학 사상에서부터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상사는 진보의 의미로서도 또 퇴보의 의미로서도 "전개"가 아니며 그것은 단순히 우리의 "역사"이다
물음은 아직 남아있다. 이러한 마지막 해석과 더불어 하이데거 형이상학의 자기이해가 적중되었는가, 다시 말해서 이해되었는가? 이것은 대답 안 된 채 남아있다. 어쨌든 여기에서도 이해함과 이해 못함이 아주 가까이 서로 결부되어 있다. 이것은 불충분함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모든 해석의, 모든 해석학의 유비성에 근거하고 있다. 또 물음을 던져야 할 것은 "나 막스 뮐러가 그의, 즉 하이데거의 길을 나의 길에서부터 보고 있고 나의 길을 그의 길에서부터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2) 이것은 물론 긍정되어야 한다. 그럴 경우 비록 두 길이 같은 길들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원함의 내용에서가 아니고 그 방향에 있어서의 동일성은 있을 것이다. 동일성은 주장하는 존재들의 일치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정신의 움직임의 방향이 일치해 있는 데에 있다. 그리고 아마도 이 방향이 오늘날의 많은 철학하는 "동반자"와 "동시대인들"의 형이상학적 원함의 자기이해에 대해 대변적인 형태로 그 일치를 가능케 하고 있을 것이다.
* 각 주 *
1. 참조 B. Casper, "Martin Heidegger und die Theologische Fakult t Freiburg 1909 - 1923", in: Freiburger Di zesan-Archiv, 100.Bd.(1980) 534 -541.
2) 천재적인 스승과 모방하는 제자와의 거리를 분명히 의식하면서 이 말을 한다.
* 이 글은 막스 뮐러의 글 "Was ist Metaphysik - heute? Drei Betrachtungen zu ihrem Selbstverst ndnis"(in: Philosophisches Jahrbuch 92 [1985], 52 - 67)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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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문화의 장과 아비투스 [철학 강의]
문화의 장과 아비투스: 삐에르 부르디외의 문화론
1. 들어가는 말
한국에서 부르디외 연구는 알튀세르, 푸코, 데리다, 라캉과 같은 현대프랑스 사상을 주도하는 동시대 이론가에 대한 연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진하게 이루어 지고 있다. 아마도 그의 연구가 지독하게 집요하고 진지한 작업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그 안에 그리 선정적이거나 논쟁적인 주장들이 별로 드러나지 않아서 읽는 사람들에게 별로 매력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다른 말로 하자면 첨예한 논쟁에만 익숙해 있거나, 새로운 이론에 감각적으로 '부하뇌동'하고, 상대적으로 실증적인 연구작업에 대해 높은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우리의 지식인 담론에서 부르디외는 공부한 만큼 별로 건질 것이 없는 재미없는 사회학자로 이해되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동시대 현존하는 최고의 사회학자이자 문화연구자로서 부르디외가 우리의 이론지형에서는 그 이름에 걸맞게 활발하게 논의되지 못하고, 몇몇 문화연구자들에게서나 그의 개념들이 간간히 인용되는 정도에 그치고 있는 점은 어떤 점에서는 그의 연구의 성격이 가지는 독특함이 분과학문주의에 치우치는 우리의 이론지형에 수용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겠다. 부르디외는 사회학이 포괄할 수 있는, 혹은 사회학과 연관될 수 있는 거의 모든 영역들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사회학의 이론적인 타당성에 대한 논의에서 출발하여 그의 연구분야는 언어의 사회적 기능과 사회 제도의 생성메커니즘에 대한 탐구에서 부터, 문학, 음악과 같은 예술장르들, 패션과 기호와 같은 개인의 일상생활의 취향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의미체계들에 대한 포괄적인 분석을 시도한다. 분과학문위주의 연구에 메여있는 우리의 지식생산의 지형에서 부르디외는 사회학분야에서 조차도 연구영역이나, 연구방식, 그리고 사회이론과 사회비평 사이의 입장에 있어 아주 모호한 사람으로 남게된다. 그가 이론가인지 비평가인지, 사회학자인지 문화연구자인지가 모호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사실은 우리의 분과학문 체제의 특수한 효과에서 비롯된 상당히 불편부당한 선입관이다.
그러나 최근에 통합적인 학문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사회계급의 사회적 지위의 분화와 그것의 문화적 의미들이 강조되면서 부르디외 식의 연구가 중요하다는 의견들이 제출되고 있어 그에 대한 관심이 부쩍 증가되는 추세에 있다. 또한 최근에 문화연구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개념 중에 부르디외의 개념들, 가령 장(champ, field), 아비투스(habitus), 취향/성향(taste/disposition), 상징적 자본(symbolic capital)과 같은 개념들을 간간히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 그러한 개념은 그의 전반적인 이론적 체계를 충분히 이해해서 사용되기 보다는 거의 습관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어떤 점에서는 간단한 명제로 이해할 수 있을 것같은 그러한 개념들은 사실은 동시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부르디외의 존경할만한 실증작업과 엄밀한 이론적 논리성 속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사회학적인 개념의 엄밀성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 최근의 문화연구에서 부르디외 개념의 도입은 그래서 조심스럽게 사용될 필요가 있다. 부르디외가 말하는 아비투스와 장, 취향이란 개념은 문화현상 분석에 몰두하는 문화연구자들이 자칫 간과하기 쉬운 사회계급론이나 자본의 시장적, 상징적 재생산 구조와 생성 메카니즘을 아주 집약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부르디외의 연구가 사회에 대한 경험적인 실증주의 탐구 이상의 정치적이고 계급투쟁적인 의미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경험주의와 실증주의의 분석을 사적유물론의 사회적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토대로 삼으려는 부르디외의 문화사회학은 "이데올로기의 생산을 순수한 내적 분석에 종속되는 자족적이고 자생적인 총체로 취급하는 기호론적(관념론적) 환상에 빠져들지 않"고, "동시에 이데올로기적 생산물들을 그것들이 봉사하는 계급의 이익으로 환원시키는 조야한 환원주의"를 피한다. 부르디외는 사회의 지배적/피지배적 다양한 양식들이 어떻게 경제적, 문화적 활동 속에서 재생산되고 있는가를 밝혀내고, 그러한 재생산과정에서 형성된 상징권력과 상징자본이 사회구조 내에서 어떻게 배치되고 사회계급들을 구별시키고 있는지를 분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동시대 이론가들 보다도 맑스주의의 기본입장들을 더 엄격하게 유지하고 있어 보인다. 부르디외의 사회학은 역사 유물론이 현실에서 전개되는 구체적인 과정을 새로운 방법론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본 글은 부르디외의 전체작업을 소개하는 데 의의를 두기 보다는 부르디외의 중요한 개념들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논의들을 정리하는 정도의 수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개념들이 우리시대의 문화를 연구하는 데 어떠한 독특한 특장이 있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그리고 한가지 덧붙이자면, 본 글은 부르디외의 개념들이 우리가 많이 거론하고 있는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의 개념들과 어떤 유사성과 변별성이 있는지를 따지고자 하는데, 가령 부르디외의 아비투스와 개인의 취향이란 개념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주체의 개념과 어떤 변별성을 갖는지, 그리고 장이라는 개념이 요즘 문화이론에서 많이 거론되는 '지형', '환경'이란 개념과는 또 어떤 변별성이 있는지를 비교 검토해 보고자 한다.
2. 사회학의 이론적 실천
부르디외의 사회학은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을 통해 발전해왔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주관주의는 그 자신의 사회를 연구 대상으로 하며 그 결과 관찰자 자신이 참여자기 되는 사회학의 한 경향이다. 반면에 객관주의는 개별 행위자의 즉각적인 경험을 넘어서 사회적 행위의 관찰가능한 규칙성, 즉 사회적 사실을 규명한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에서 구조를 물신화하고 행위주체를 구조의 담지자 혹은 운명지워진 대로 따르는 단순한 실행자로 취급하는 경향을 띤다. 주관주의는 인간행동의 사회적 결정요소를 인지할 수 없는 반면, 객관주의자들은 지식인들이 특히 빠지기 쉬운 무지에 굴복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상징 권력의 행사자 특유의 이데올로기이다. 즉 객관주의자들은 모든 인간 실천을 결정하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조건을 인지하는 데 실패하고 구조와 그것의 논리를 이상화하는 실패를 저지르기 쉽다.
부르디외는 객관주의의 오류의 대표적인 전형을 인류학자들로 본다. 인류학자가 자신의 연구대상과 맺고 있는 특별한 관계는 관찰자로서의 자신의 상황이 그로 하여금 실천에 대한 어떤 해석적인 표상으로 이끌게 하고 모든 사회적 관계들을 의사소통적인 관계들(더 정확히 말하자면 탈코드화하는 작동들)로 환원시키는 것만큼 이론적인 오류들의 재료를 그 안에 담게 된다. 인류학자가 대상에 대한 자신의 관점에 내재된 한계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남아있는 한, 그는 행위자에게 강제된 행동의 표상만을 선택한다고 비난을 받게 된다. 그는 대상을 객관화시키기 위해 거리를 두고 물러나 있게 되면서 실천적 활동을 관찰과 분석과 표상의 대상으로 구성해 버린다. 부르디외는 객관주의적인 지식의 한계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이차적 단절에 의해서만 객관적 지식으로부터 얻은 이득들을 그에 합당한 실천과학으로 통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객관주의적 추상성에 대한 비판적인 단절(그 단절은 자신들의 실천을 외부로부터 이해하려는 객관적인 혹은 객관화시키려는 관점들에 대한 의문들을 수행하고, 대신 스스로를 실천들의 성취의 운동 바로 그 안에 위치지움으로써 실천들의 발생적 원칙들을 구성한다)은 객관적 구조들과 구조화된 성향들(그 성향들 안에 구조들이 현실화되고 성향들은 다시 그 구조를 재생산한다)사이의 변증법적인 관계의 과학을 가능케 한다. 부르디외는 이러한 단절을 사회학에 있어서의 실천이론을 구성하는 관건임을 주장하는 셈이다. "실천의 이론과, 실천의 엄격한 과학의 전제조건인 모든 실천에 내재한 지식의 실천 양식의 이론은 사회세계를 개인의 의식과 의지와는 독립된 객관적 관계의 체계로 구성하기 위해서 객관주의가 구성해야하는 문제틀들을 새롭게 반전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단절적 사고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은 가령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생산양식과 실천적 지배권의 기능과정에 대해 탐구할 준비만 되어 있다면 사회과학이 그토록 덧에 걸리기 쉬운 객관주의와 주관주의 사이의 양자택일의 반복들을 피할 수 있게 된다"
결국 부르디외에 있어 실천이론은 객관주의의 한계를 그 객관적 상황을 가능케하는 생성구조, 즉 생산양식에 대한 실천적 개입을 통해 해소하려는 기획을 가지고 있다. "부르디외는 사회학을 인간실천을 결정하는 사회적 조건들에 대한 과학으로 정의한다"는 지적은 이를 염두에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사회학자는 투쟁의 장을 그 대상으로 삼는다는 특수성을 지닌다. 그리고 그 장이란 계급투쟁의 장일 뿐아니라 과학적 투쟁의 장이 된다. 부르디외는 사회학의 요구와 실천적 입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사회학은 어느 누구도 요구하지 않는 진리를 생산하기 위해 자율권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사회학은 대학의 학과라는 지위가 보장해 준 제도적 자율권을 올바로 행사함으로써 인식론적 자율권의 조건들을 발견할 수 있고 또 아무도 사회학에 진정으로 요구하지 않은 것, 즉 사회에 대한 진리를 제공하고자 시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회학적으로 불가능한 학문, 사회-논리적으로 가려진 채 남아있어야 할 어떤 것의 베일을 벗겨낼 수 있는 이 학문이 오로지 목적에 대한 속임수로부터 태어날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과학으로 하나의 사회학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이러한 독창적인 부정행위를 재생산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과학적인 사회학은 사회-논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아야 할 일종의 사회적 실천입니다.
부르디외가 구상하는 사회학의 실천은 그런 점에서 크게 두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첫째는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조의 능동성과 행위자들의 사회적 조건들을 발생적인 관점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말은 사회적 행위자들이 사회 구조 안에서 어떻게 계급투쟁을 벌이고 있는가를 사회학이 항상 주시할 필요가 있다는 말과 같다. 둘째는 사회학이 새로운 대상과 그 대상을 접근해 들어가는 새로운 방법론을 발견해야 한다는 점이다. 가령 사회학이 하나의 과학으로 끝임없이 독창적인 자기부정을 수행해야 한다는 주장은 대학의 구조 속에서 '민족학'(ethnology)과 사회학을 구분하려는 제도적인 폐해가 발견된다는 그의 발언에서도 드러난다. 부르디외는 비학교적인 방식으로 이 둘을 동시에 병행하려했던 점이 자신의 작업을 가능하게 했다고 말하는데, 혈족관계들을 규정하는 계통학의 분류체계(민족학적 관점)와 사회계급의 문제(사회학적 관점)를 동시에 제기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회학이 끝임없이 수행해야할 독창적인 자기부정의 한 방식인 것이다.
3. 아비투스와 장, 그리고 구조
부르디외에게 있어 아비투스와 장의 개념은 개인의 실천과 그 실천들이 생성한 사회적 세력관계를 지칭한다. 다만 아비투스는 우리가 실천의 담지자로 상정했던 '주체', 혹은 실천적 담지자를 구성하는 사회적 조건으로 간주했던 '주체화 양식'이란 추상적 개념에 비해 구체적인 개인의 감각과 행동을 지시한다(그는 아비투스를 논의하면서 '주체'라는 말 대신에 거의 '개인'이란 개념만을 사용한다). 또한 장이란 개념이 사회적 세력관계들을 지시하지만 그것은 애초부터 대립을 미리 상정하는 단순한 양진영의 세력관계가 아닌 아주 다양하게 얽혀있고 구조화되어 있는 세력관계를 말한다. 따라서 장들 간의 관계는 모순/대립관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차이의 관계, 혹은 장들간의 위상적 관계가 함께 존재한다. 가령 '사회 세력들의 장'은 정치의 장, 경제의 장, 문화의 장과 같은 사회적 심급으로 구조화되는가하면. 지배계급의 장, 피지배계급의 장처럼 계급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아비투스는 개인의 일정한 행동 속에서 내면화되고 육화된 성향체계를 지칭한다. 그러나 개인의 성향체계로서의 아비투스는 윤리학에서 말하는 체계적인 도덕심이나 양심과는 구별된다. 그것은 윤리학과는 대립적으로 윤리적 차원의 성향과 실천적 원리가 객관적으로 체계화된 총체를 지시하기 위해 사용되는 에토스(ethos)와 유사하다. 아비투스의 개념은 또한 아비튀드(habitude:습관)라는 개념과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아비튀드'는 무의식적으로 반복적이고 기계적이고 자율적인 것으로, 또한 생산적이라기보다는 재생산적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비투스는 대단히 생성적인 어떤 것이다.
아비투스란 획득한 것으로서 영구적인 성향의 형태아래 지속적으로 신체에 구현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개념은 그것이 개별적 역사와 관련된 역사적인 무엇인가에 의거하고 있다는 것과 본질주의적 사유방식(촘스키식 어휘인 언어능력의 개념과 같은 것)과 대립되는 발생론적 사유방식을 가집니다.
아비투스가 개인의 습관과는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 실천적인 감각과 행동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부르디외는 {구별짓기}(The Dictintion)에서 개인들의 문화적 기호의 차별들이 어떻게 사회계급들의 차별을 재생산하고 있는가를 실증적으로 조사/분석 하면서 "아비투스가 객관적으로 객관적으로 분류가능한 실천들의 발생원리인 동시에 실천들의 분류체계"라는 점을 지적한다. 아비투스는 분류가능한 작품과 실천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과 이 실천과 생산물들을 구별하고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가령 학력자본과 혈통자본의 차이에 따라 문화를 향수하는 대상이 달라지게 되고, 어떤 예술품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게 되는 것은 개인의 아비투스가 각각의 성향의 차이에 따라 분류해내려는 실천들을 발생시키는 원리라는 것을 예증해 준다. 그래서 상이한 생활조건은 상이한 아비투스를 생산하고, 그렇기 때문에 상이한 아비투스에 의해 생성된 실천은 차별적 격차 체계의 형태로 생활조건 안에 객관적으로 각인된다. 계급 조건에 내재해 있는 자유와 필요, 그리고 위치를 구성하는 차이를 체계적으로 표현하는 실천-발생체계로서의 아비투스는 각 조건의 차이가 분류되는 동시에 그 차이를 분류하는 실천들 간의 차이의 형태로 포착하고 파악한다 아비투스의 분류체계는 생활방식을 결정하는 개인의 취향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취향은 사물을 명확하고 구별적인 기호(記號)로 변화시키고, 신체의 물리적 질서 안에 각인된 차이를, 상징적 질서로 끌어 올린다. 이 실천 속에서 한 계급의 조건은 각각의 실천을 사회적 분류도식으로 파악함으로써, 분류적 실천으로서 즉 계급의 상징적 표현으로서 스스로의 의미를 드러낸다.
이렇듯 개인의 취향이 계급대립의 상징적 표현으로 스스로의 의미를 드러내면서 아비투스는 취향에 의한 구체적인 실천의 장을 형성하게 된다. 아비투스가 생산하는 실천은 그 실천들의 발생적 원칙이 생산되는 객관적 조건들 내에 내재한 규칙성 등을 재생하는 실천인데, 바로 규칙성의 구체적인 형태 중의 하나가 개인의 취향이다. 말하자면 취향을 재생산하는 과정이 아비투스의 실천과정이 된다. 이때 이러한 실천이 제대로 설명되기 위해서는 아비투스 생산의 사회적 조건을 정의해주는 객관적 구조가 이러한 구조의 특정 상태를 표현하는 국면과 연결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실천을 변형시킬 수 있는 '국면'은 아비투스와 객관적 사건 사이의 변증법적인 관계 속에서 구성된다. 가령 계급투쟁이라는 국면은 개인의 아비투스가 계급투쟁을 야기시키는 사건과 맞닿을 때 구성되는 것이다.
장이란 공시적으로 파악할 ?, "입장들의 구조화된 공간"으로 드러난다. 장에는 장의 일반적인 법칙이 있다. 부르디외는 그 법칙을 장의 전유와 배제의 법칙으로 간주한다. 가령 국가에 관계된 변수들에 따라 권리 주장자와 지배자 사이의 투쟁과 같은 그 특유의 메커니즘이 갖가지 다른 형태를 띠고 나타나긴 하지만, 모든 장에는 입회권의 빗장을 부수려고 애쓰는 신참자와 독점을 옹호하고 경쟁을 배제시키는 지배자 사이의 투쟁이 있다. 하나의 장은 다른 장들의 고유한 이해관계와 목표로 환원될 수 없다. 하나의 장이 가동되기 위해서는 게임의 목표와 그 게임을 행할 사람들, 다시 말해 게임의 내재적인 법칙과 목표 등에 대한 인식과 인정을 함축하는 아비투스를 지닌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장의 구조는 투쟁에 참여한 주체자 혹은 제도들 사이의 역학관계, 이전의 투쟁을 통해 축적되어 이후 그 전략의 방향을 결정짓는 특정 자본의 분배관계의 상태이다. 장에서 발생하는 투쟁들은 해당 장의 특징을 나타내는 합법적인 폭력의 독점을 다시 말해 특정 자본의 분배구조의 전복, 혹은 보존을 목표로 삼고 있다.
부르디외는 장에서 발생하는 전복과 보존을 위한 투쟁이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장의 특성 중에는 잘드러나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하나의 장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인 이해관계, 다시 말해 그 장의 존재 자체와 관련된 모든 것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적대관계에 참춰져 있는 객관적인 공모가 이루어진다. 그 공모는 명시적으로 합의한 것이 아니라 구조화된 장에서 무의식적생산된 것이며, 그래서 장의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함께 공모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부르디외는 장의 형성과 장의 재생산은 바로 이 망각된 공모의식이 구조화되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본다.
사람들은 투쟁이란 마땅히 투쟁해야 할 것, 자명한 것 속에 억압되어 있는 것, 지배견해에서 유기된 것, 다시 말해 게임 규칙, 목표 그리고 사람들이 게임을 행하고 게임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미처 알지도 못한 채 은연중에 받아들이고 있는 그 모든 전제들 등, 그 장 자체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적대자들 사이의 합의를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투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장에 따라 제법 완벽하게 게임 목표의 값어치에 대한 믿음을 만들어 내는 데 이바지함으로써, 그 게임의 재생산에 기여한다.
한편으로 부르디외는 장과 기구와의 차이를 설명한다. 그는 기구라는 개념은 가장 위험한 기능주의를 제도입하며 몇가지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계획된 끔찍한 기계와도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한가지 특별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부르디외가 학교제도, 정부, 교회, 정당 등을 기구가 아니라 장으로 보고 있는 점이 알튀세르가 위의 심급들을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 간주하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하는 점이다. 장에서는 서로 다른 힘을 지닌 행위자들과 기관들이 그 게임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특수한 이윤을 차지하기 위해 그 게임공간을 구성하는 규칙에 따라 투쟁하고 있다. 장을 지배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도록 그 장을 작동시킬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조건에서는 장이 기구로서 기능하게 된다. 부르디외는 지배자들이 피지배자들의 저항과 반발을 무마시킬 수 있는 수단을 가지게 되면 그 장은 기구가 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하급성직자, 투사 민중계급들이 그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을 때 그리하여 모든 움직임이 위로부터 곧장 아래로 향하고 지배효과가 장을 구성하고 있는 투쟁과 변증법이 사라질 정도로 강력할 때, 장은 기구가 된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부르디외는 학교나 교회나 정당 가족 등을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 간주했던 알튀세르와 그리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아 보인다. 장이 기구가 되는 것은 지배계급이 그 장을 완전히 장악할 때인데, 알튀세르에게 있어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역시 지배계급의 생산관계를 재생산하는 착취의 이데올로기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학교나 교회나 정당, 가족 등을 애초부터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 규정했던 알튀세르의 논의와는 다르게 부르디외는 어떠한 사회의 층위들이 하나의 지배적 수단을 위한 국가적 장치로 전락하기 이전에 하나의 투쟁의 공간을 구성하는, 즉 하나의 장을 형성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점에서 차이점이 드러나 보이는 것 같다. 이 점은 한편으로는 실천적 시민사회 영역을 인정하지 않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론이 갖는 한계점들을 부르디외가 설명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알튀세르가 ISA론을 구성할 때 의도했던 바는 "ISA가 계급투쟁, 그것도 격렬한 형태를 띠기 일수인 계급투쟁의 목표이자 현장일 수 있다...... 피착취계급들의 저항이 ISA의 모순을 이용하거나 투쟁을 통해 ISA 내의 유리한 전투진지를 정복해 버림으로써 거기에 자신의 표현수단과 기회를 발견하는 것"을 보자는 것인데, 이는 계급투쟁의 공간으로서의 장의 개념과 그리 다르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더 눈여겨 보아야할 차이점은 부르디외의 장의 개념과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개념이 계급투쟁과 혁명의 순간에서 어떤 형태로 작동되는가하는 점이다. 부르디외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 이에 대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장과 기구의 차이는 혁명 속에서 잘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회질서를 획득하기 위해 정부기구를 점령하고 주요 조직의 프로그램을 바꾸는 것으로 충분한 것처럼 행동합니다. 실상 정치의 의지는 그 정치적 왜도가 왜곡되고 역전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히 복잡한 세계인 사회의 여러 장들의 논리를 고려해야 합니다. 정치적 행위는 그것이 기구, 다시 말해 피지배자들이 투사나 군인이 되어버린 조직체와 관련될 때에만 바라는 결과를 얻으리라고 획신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기구는 사람들이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장의 어떤 상태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호명된 주체와 취향화되고 성향체계화된(아비투스화된) 개인 간의 차이에서도 발견된다. 아비투스는 개인의 취향 안에 구조화된 혹은 내재화된 체계라면 알튀세르적 의미에서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외부에 존재하는, "하나의 기구 및 그 실행들 속에서 존재하는" 외부의 물질적인 체계의 일부이다.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인 개인을 구체적인 주체로 호명한다"는 말은 이데올로기가 개인을 주체로 전환시키는 외부의 기제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에 비해 아비투스는 개인의 일상생활 속에서 스스로 갖게되는 개인의 내적 성향들이다.
부르디외는 결국 아비투스와 장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사회구조의 생성원칙에 대해 발생론적인 관점을 취한다. 가령 아비투스의 이론은 목적론이냐 메커니즘이냐의 양자텍일을 벗어나 실천과학의 가능성 확립을 겨냥하는 이론인 것이다. 아비투스는 '상황'에 의해 이루어지는 직접적인 결정과 관련된 실질적인 자율성의 원리인 것이다. "객관적 체계들을 개인의 역사와 그룹의 역사 외부에 이미 구성된 총체성으로 전환시키면서 그 객관적 체계들을 실체화하려는, 구조의 실재론을 피하기 위해서는 통계학적인 규칙성과 대수학적인 구조에서 이렇게 관찰된 질서의 생산 원칙, 즉 실천이론의 구성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는 지적은 사회구조를 실천적 발생의 원리로 보려는 이론적 구성이다. 아비투스와 장의 개념은 그의 이러한 발생론적 사회실천이론을 구제화하는 개념인 것이다.
4. 상징/문화자본과 상징/문화권력
부르디외는 자본을 단지 경제적 자본으로만 간주하지 않는다. 자본은 개인 물질적 부를 축적하는 수단만이 아니라 개인이 생활양식과 그 생활양식의 터전, 그리고 다른 생활양식과 맺는 관계까지 포괄한다. 가령 개인의 예술적 취미와 생산들은 문화적 자본으로, 개인의 학력, 혈통, 사교 등은 사회적 자본으로, 그리고 개인들의 생활양식과 터전이 다른 것들과 맺는 관계는 상징적 자본의 형태로 나타난다. 사회자본의 개념을 구성하는 것은 곧 이러한 특수한 종류의 자본이 축적되고 전이되고 재생산되는 논리를 분석하는 수단과, 어떻게 이 특수한 종류의 자본이 경제자본으로 변형되는지, 또 거꾸로 어떤 노동의 대가로 경제자본이 사회자본으로 전환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수단과, 클럽 또는 아주 단순하게는 가족 등 이러한 종류의 자본이 축적되고 전이되는 중요한 장소와 같은 제도들의 기능을 파악하는 수단 등을 생산하는 것이다.
사실 부르디외의 주저작인 {실천이론의 윤곽}과 {구별짓기}는 개인의 아비투스와 장의 구조 속에서 상징자본과 문화자본이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설명한 것이다. 상징자본의 작동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르디외는 두가지 유의미한 작업을 시도했는데, 하나는 언어시장의 구조를 밝히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알제리의 '카빌레'(Kabyle) 사회의 일상생활 형태를 분석한 것이었다.
부르디외는 언어적 표현이란 언어적 아비투스와 언어시장이 결합된 것이라고 말한다. 즉 언어적 아비투스는 그것이 사회적 조건의 산물이라는 사실과 단순한 담론의 산출이 아니라 하나의 상황, 즉 어떤 시장이나 장에 맞추어 조정된 담론의 산출이다. 그런 점에서 언어적 아비투스는 촘스키적 '언어능력'과는 구별된다. 촘스키에 있어서 언어능력은 개인이 이미 타고난 언어적 자질을 말하는 것인데, 사실 언어능력은 어떤 상황에 의해서 구성된 것이다. 어떤 언어적 자질을 부여받아 언어적으로 용인가능한 상황에 이르는 것은 언어에 내재된 규칙뿐만 아니라 하나의 언어시장에 내재하고 있는 직관적으로 통제된 규칙에 단어들을 일치시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언어시장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담론을 평가하고 인정하며 그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수신자를 위해 담론을 산출할 때마다 존재한다. 언어시장은 대단히 구체적이면서도 동시에 대단히 추상적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그것은 다소 공식적이고 의례적인 일종의 사회적 상황이며, 하위의식적으로 지각되고 평가되며 무의식적으로 언어적 생산을 방향짓는 많은 특성들을 지닌 사회의 위계질서에서 어느 정도 상층부에 위치한 대화자들 전체이다. 추상적으로 보면 언어시장이란 언어적 생산에 대한 가격형성 법칙의 일정한 유형이다. 가격형성법칙이 있음을 상기하는 것은, 바로 개별적인 언어능력의 가치가 그것이 실현되는 개별적인 시장에 더 정확히 말해 서로 다른 생산자들의 언어적 생산물에 부여되는 가치가 정해지는 관계의 상태에 달려있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언어능력의 개념은 언어적 자산이란 개념으로 대치된다. 언어적 자산이라고 말하는 것은 언어적 이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언어적 자산이란 언어적 가격형성의 메커니즘에 대한 지배력, 자신에게 이득이 되도록 가격형성 법칙을 작동시키고 특정한 잉여가치를 선택할 수 있는 힘이다.
부르디외는 언어적 자산을 소유해서 특정한 언어적 잉여가치를 추출해내는 힘이 바로 상징적 자본의 권력형태임을 보여준다. 그 일례로 부르디외는 베아른 시의 시장의 취임연설에 대해 언급한다. 새로운 베아른 시의 시장은 그 지방 출신인데, 그는 취임연설을 베아른어로 하면서 대중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부르디외는 중앙의 지배 엘리트가 하찮은 베아른어로 연설한 것이 바로 언어적 자산을 행사하는 상징적 권력의 전형적인 형태임을 지적한다. 즉 시장이 베아른어로 취임연설을 해서 대중들에게 감동을 준 것은 그가 표준 프랑스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다는 언어적 자본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베아른 지방의 농부가 베아른어로 말했다면 대중들은 특별한 감동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감동의 근원이 베아른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베아른어를 아주 특수하게 사용할 수 있는 지배 엘리트의 언어적 상징 자본 때문이다.
부르디외는 한편으로 언어시장이 구조화되는 세력관계들을 다음과 같은 도표를 통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universe of the undiscussed(undispu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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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oxa |
| |
| opinion |
| hetero- ortho- |
| doxy doxy |
| |
| |
+-----------------------------------------------+
universe of discourse(or argument)
이 도표는 특정한 시장과 장의 특성이 투쟁 속에서 채택될 수 있는, 각기 다른 전략들의 관계를 나타난 것이다. 거대 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기존질서를 자명하게 받아들이는 지배사상(doxa)을 보존하려는 전력을 가지고 있고, 자본이 별로 없는 사람들은 그 지배사상을 전복하려는 이단, 혹은 비정통 사상(heresy:heterodoxy)을 생산하려는 전략을 가진다. 논의되지 않은 것이 담론의 장으로 들어감으로써 이교적 사상은 지배계급들이나 그룹들이 침묵을 깨고 정통사상의 방어적 담론을 생산하도록 부추키게 되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또한 카빌레 지방의 선물 교환제도를 분석하면서 그것이 개인들의 성향들을 유지하려는 일종의 상징자본의 교환행위이자 상징 권력의 작동방식임을 이끌어 낸다. 선물교환은 일종의 게임의 형식이다. 게임의 이론에서 훌륭한 선수는 자신의 적대자가 가장 좋은 전략을 식별해내는 방식을 항상 미리 전제해놓는 사람이며, 자신의 행동을 그에 맞게 행하는 사람이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명예를 위한 게임에서 도전과 응수는 각각의 선수들이 그의 적대자가 동일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을 가정하면서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게임을 잘 벌이는 것을 암시해준다. 선물은 선물을 받는 사람에 대해서 선물한 사람의 명예를 높이는 도전이다. 선물과 도전은 상대방을 약올리는 것, 즉 응답에 대한 약올리기이다. 선물을 받는 사람은 교환의 수고에 갖히게 되며, 최초의 행동이 부여준 약올리기에 반응해서 어떤 행동을 선택해야 한다. 그는 교환을 연장시킬 수 있으며 교환을 파기할 수 있다. 명예의 관점에서 복종하여 그가 교환을 선택한다면 그의 선택은 그의 적재자의 최초의 선택과 동일하게 된다. 그는 게임하기를 동의하며 그것은 영원히 지속된다. 왜냐하면 응수는 그 자체로 도전이기 때문이다.
부르디외는 이슬람 문화를 지켜나가는 카빌레 사회의 형태들이 체계적인 분류와 위계실서 속에서 움직이게 되는데, 이 뷴류체계와 위계질서 체계가 그 사회 내의 경제적 가차와 명예와 권위를 축적하는 상장적 자본의 형태가 된다고 말한다. 우기가 되면 마을 남자들은 금요일날 집단기도회가 끝난 후에 회의를 갖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침에는 마을에 남아있는다. 그리고 아침 시간이 끝나는 에도하(eddoha)의 시간이 되면 사람들은 들판에 나가 일을 한다. 저녁식사는 남자가 집에 돌아와 옷을 벗자마자 일찍 준비가되고, 밤이 되면 이슬람 사원에서 기도하길 희망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이 집안에 있는다. 이렇게 사회질서의 의무를 지키는 것은 자신들의 생활리듬을 존경하는 것이며 그것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가령 다른 사람들이 휴식을 취할 때 일을 한다거나 다른 사람들이 들판에서 일을 할 때 집에서 쉬고, 다른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을 때 거리를 배회하는 행동들은 사회적 질서가 인정하지 않는 의심을 받을 행동이다. 부르디외는 카빌레 사회가 집단적 리듬을 이토록 엄격하게 요구하는 이유는 시간의 형식들과 공간의 구조들이 단지 세계에 대한 그룹의 표상만을 구조화할 뿐아니라, 그룹 그 자체를 표상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가령 남성과 여성이 각기 다른 시간과 장소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남성과 여성의 세계를 분류하고 위계질서화하는 것을 보장하는 방식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모든 기존질서라는 것은 그 자신의 자의성을 자명하도록 생산하는 것이다. 이러한 효과를 생산하는 메카니즘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숨겨진 것이 객관적 기회들과 행위자들의 열망 사이의 변증법, 즉 객관적 계급들과 내면화된 계급들, 사회구조들과 정신 구조들 사이의 상응점이다. 이것이 기존질서를 제거할 수 없는 가장 고착적인 토대가 된다. 객관적 계급들을 재생산하는 분류체계들, 즉 생산관계에서 성과 나이와 위치에 의한 분화체계들 자신들이 토대를 두고 있는 자의성에 대한 오인(misrecognition)을 굳게 지킴으로서 권력관계가 재생산되는 데 특수한 공헌을 한다. 객관적 질서가 주관적인 조직 원칙들과 일치할 때 자연세계와 사회세계는 자명해 진다. 이러한 경험을 부르디외는 '지배적 사상'(doxa)이라고 불렀다(164쪽).
결론적으로 카빌레 사회의 선물교환제도와 일상생활의 형식을 통해서 부르디외는 상징적 자본이 행사되는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데 그 목적을 둔 것이다. 상징적 자본은 명예와 권위를 축적하는 전략이며 권위와 명성의 형식으로서의 상징자본은 사회 내에서 가장 귀중한 축적형식이다(179쪽). 상징적 자본의 전시는 자본을 자본으로 느끼게 하는 메카니즘의 하나가 된다. 상징자본은 물질적인 이익보다 큰 의미를 지닌다. 가령 잃어버린 땅을 찾는 것, 받은 모욕에 대해 복수를 통해 명예를 되찾는 일은 단순히 선물을 받는 물질적 행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행위자가 상징적 자본을 옹호하려는 이해관계는 상징적 자본의 형태를 추구하고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구성하는 경제적 질서의 규칙성에 각인된 공리계를 집착하는 것과 불과분의 관계이다(182쪽). 사회의 경제력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도 상징적 자본은 단순한 부보다 더 크게 작용한다. 부르디외는 경제력이란 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와 경제적 관계들의 장, 즉 특수한 이익을 가진 행위자들의 신체 발전과 분리될 수 없는 구성의 장 사이의 관계임을 강조한다.
부르디외는 이러한 상징적 자본과 상징적 폭력에 대한 모든 저항 운동들은 자명해 보이는 것, 그래서 문제시되지 않는 것,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을 문제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예술 가정사 등등 사회적 실천행위의 전 영역을 정치적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한다면 엄청난 억압의 악순환에 직면하게 되며, 중요한 것은 상징적인 지배에 저항할 수 있는 무기의 보급을 확보하는 일임을 강조한다.
5. 문화연구 방법론으로서의 부르디외 사회학
부르디외의 문화사회학은 미디어 분석을 중심으로하는 영국의 문화연구와는 다른 지점에서 문화적 실천을 제시해 준다. 부르디외의 문화사회학은 다양한 문화의 장과 개인들을 전유하는 좀 더 폭넓은 의미에서의 사회계급론이며, 새로운 계급투쟁의 실천들을 담고 있다. 레이먼드 윌리암즈는 부르디외의 문화학의 정치성에 대해 1) 계급투쟁과 그 투쟁 내에서 상징적 투쟁의 위치에 대한 유물론적 이론을 언명했으며, 2) {구별짓기}와 같은 저서에서 보여주듯이 순진한 대중주의 노동자주의에 빠지지 않고, 노동자 계급의 문화적 가치와 열망에 대해 생색내지 않고 가치평가했으며, 3) 상징권력의 문제에 초점을 두면서 생산양식에 의해 결정되는 객관적 사회적 조건들과 계급과 계급분파들의 의식과 실천 사이에서의 특수한 모순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가능하게 했다고 평가한다. 겉으로 보기에 부르디외의 계급분석은 {구별짓기}에서 분석되는 외형적인 틀이 말해주듯이 이미 예정된 결론을 도출하는 분석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체로 {구별짓기}에서 도출해내는 통계자료에 대한 결론들은 학력자본과 혈통자본 그리고 자본의 소유에 따라 선택하고 알고 있는 예술작품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식이다. 그러나 부르디외가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은 실증조사의 결과가 아니라 조사의 과정에서 발견되는 사회계급들의 작동형태에 관한 것이었다. {구별짓기}는 사회계급과 취향이 작동시키는 체계들 사이의 관계를 경험적으로 확립하려 했다는 언급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계급분석은 사회계급들 간의 모순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들여다 보는 작업을 수행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문화연구에서 거의 부재하다고 할 수 있는 문화학에서의 계급분석은 부르디외의 작업을 통해 구체화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부르디외의 사회학은 아비투스와 장의 개념이 말해주듯이 개인의 문화적 취향과 그 취향이 구조화되어 있는 장을 강조하는데, 그런 점에서 주체형태 분석과 제도분석은 그의 분석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부르디외는 개인의 취향을 분석하기 위해서 의상과 음악 미술과 같은 문화적 유산들을 구체적으로 연구했으며, 장으로서의 제도를 분석하기 위해 학교제도와 검열제도 그리고 스포츠와 같은 볼거리로서의 제도적 장치들에 주목했다. 문화연구 방법론으로서 부르디외의 사회학은 한편으로는 정교한 계급투쟁과 계급론을 구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의 구조와 발생을 말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증작업을 병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부족한 방법론적 시각을 넓혀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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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 부르디외 비판 [철학 강의]
6부 부르디외 비판 [철학 강의]
1. 프롤로그
뤽 패리, 알랭 르노는 『68사상과 현대 프랑스 철학』(아래 『68사상』)이라는 책에서 부르디외를 알뛰세에 대한 비판을 수행해낸 프랑스 맑스주의자로 볼 것을 제안 뤽 패리, 알랭 르노,『68사상과 현대 프랑스 철학』, 인간사랑
필자는 단지 (1),(2),(3)의 제목만을 끌어들였을 뿐, 뒤에 나온 부르디외의 비판은 본인에 의해
재구성된 것임을 밝혀둔다. 뤽 패리와 알랭 르노는 ‘부르디외’와 ‘알뛰세’간의 대척점을 소개한
뒤, 그의 반증 불가능성을 포퍼적인 관점에서 비판하고 있으나 그것은 부르디외의 기본적인 이론
을 건드리지 못한 실패한 논평이라고 생각한다.
한다. 부르디외는 알뛰세나 발리바르를 겨냥해 알뛰세의 (1)이론주의, (2)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 (3)조야한 물질주의라는 세 가지 측면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1)은 알뛰세의 ‘이데올로기→과학’이라는 인식론적 절단 테제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것이며, 부르디외는 오인/인식, 허구/진실, 이데올로기/실재의 이분법적 구분을 폐기한다는 점에서 설명될 수 있고, (2)는 알뛰세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론에 나타난 기능주의, 혹은 「모순과 중층 결정」의 경제 결정론적인 측면, 나아가 “주체 없는 과정” 테제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고 할 것이다. (3)은 속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 경제적 희소 자본의 점유 투쟁만이 아닌 상징적 소유권 투쟁의 측면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부르디외의 알뛰세주의에 대한 비판글이 번역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68사상』의 설명에만 기대어 부르디외를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의 (1), (2), (3)에 설명된 부르디외의 이론들은 분명히 그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필자는 부르디외의 알뛰세 비판은 당연히 적절하지 못한 것이며, 부르디외의 이론들은 알뛰세와 유사성을 가질 수 있으며, 오히려 그는 알뛰세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아래에서는 부르디외의 이론을 개괄 부르디외의 주저작으로는 단연 『구별짓기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을 꼽을 것이나, 이론적인 정리
를 위해서 본인은 『상징 폭력과 문화 재생산』에 더 의존했음을 밝힌다. 개념어들의 경우엔, 『구별짓
기』의 용어해설이나 부르디외, 『강의를 위한 강의』에서 도움을 얻었고, 아티클로는 현택수 교수의
「문화의 장과 아비투스」와 이경묵의 「부르디외를 읽는 다른 방법」등을 통해 부르디외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한 뒤, 그의 중요 개념들을 중심으로 알뛰세와 어떤 점에서 유사하며, 어떤 점에서 부르디외는 한계점을 지니는지를 논하도록 하겠다.
2. 상징폭력과 문화재생산
부르디외 이론의 중심 축은 그의 저서의 제목과도 같이 “상징 폭력과 문화 재생산”(원제, Language and Symbolic Power)이라고 할 수 있다. 위 테마에는 오인을 통한 인식, 합의, 공모, 위임, 정당화, 제도화, 검열, 구분짓기 등의 개념이 녹아 들어가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은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총체적인 구조의 측면을 갖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부르디외의 설명은 위의 과정들을 일관된 것으로 쉽게 풀어내고 있다. 본 절에서는 위의 과정을 『상징 폭력과 문화 재생산』 삐에르 부르디외 지음, 최종철 옮김, 『상징폭력과 문화재생산』, 새물결, 2절에서 부르디외의 재생산
과정을 설명하기 인용되는 문구들은 각주로 처리하지 않고 쪽수만 병기하도록 한다.
이라는 텍스트를 중심으로 정리하도록 하겠다.
상징 권력(폭력)은 항상 재생산을 통해 존속한다. 상징폭력은 인식과 오인의 독특한 혼합으로 특징 지워지는 사회재생산의 효과적인 매체이다. 그것은 의사소통을 통해 행사되는 지배형태가 아니다. 그것은 지배가 오인misrecognition되고 또 정당한 것으로 인식recognition 그 외 ‘오인을 통한 인식’과 관련된 부르디외의 언급으로는 p. 92, 101, 214, 232를 참조하라.
되는 방식의 의사소통을 통한 지배의 행사인 것이다(p.70). 이런 상징적 지배는 외적 압력에의 수동적인 복종도, 지배적인 가치의 자발적 선택도 아닌 일종의 공모를 전제한다(p.51). 사회 재생산은 해당 사회에서 지배적인 가치 혹은 규범과 관련된 일종의 합의consensus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p.73). 이러한 합의와 공모를 통해, 사회의 대변집단으로의 위임procuration이 이루어지고(p.182), 이러한 정당성 획득의 과정을 통해 지배집단은 공식적인(보편적) 권위와 직함이라는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보증된 상징자본을 얻게 된다(p.303). 이것은 곧 합법적인 상징 폭력이다(p.301).
지배집단은 이러한 상징권력을 유지, 재생산하기 위해, 자신들의 상징이 정당하고 보편적인 것임을 강조 “지배계급에 의해 채택된 이데올로기적 입장은 자기 계급의 지배가 정당하다고 하는 계급적 확
신을 계급 안팎에 다시 강화시킴으로써 지배를 재생산해내고자 하는 전략이다”(p.98 각주4).
“상징 권력의 전문가들―원시사회의 시인들, 예언가들, 정치가들―이 의지하는 가장 보편적인 전략들
중 하나는, 단어들이 전체 집단의 신념의 저장소이기 때문에 전체 집단에 의해 가치가 부여된 단어들을
전유함으로써 상식common sense을 자신들의 편에 두는 것이다”(p.297 각주7)
하며 제도화 의례rites of institution를 제정한다. 이 제도화 의례는 제도적 경계선의 자의적 속성을 부인하는 한편, 그것을 정당한 것으로 혹은 그에 상당하는 것으로 용인하게끔 함으로써 자의적 경계를 신성화(사회적으로 인지, 승인)하거나 혹은 정당화하는 경향을 가진다. 이러한 경계는 ‘구분선’을 만들어낸다. 제도화 과정은 사회적 속성을 자연적인 속성인 양 만드는 사회적 마술행위와도 같다(p.198~201). 이러한 구분선은 ‘정통’과 ‘이단’의 구분, 검열 등의 형태로 나타나며, 이러한 검열은 표현에의 접근통로와 표현형태를 동시에 통제함으로써 표현―형식 부과를 통해 형식을 결정할 뿐 아니라 내용도 결정(p.230)―을 지배하는 장field의 구조 자체이다(p.228).
이러한 제도적 행위는 어떤 개인에게 그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즉 그에게 그의 정체성을 부과하는 식으로 의미화 작업(p.203)을 하는 것이고, 차이를 자연화하고 그것을 아비투스habitus의 형태로 만들어 주입함으로써 ‘제 2의 자연’이 되도록 한다(p.206). 구분선(분리의 선)은 계급 취향과 같은 지속적인 성향을 주입한다(p.207). 제도화적 행위에 의해 생산되는 진정한 기적은 (의례를 통해) 신성화된 개인들이 그들의 존재가 정당화되었다고 또 그들의 존재는 어떤 목적에 봉사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게 만든다는 점이다(p.211).
3. 아비투스, 오인, 상징 폭력
아비투스는 ‘구조화하는 구조이면서 구조화된 구조이며, 행동과 인지 판단의 성향체계’이다. 부르디외는 아비투스에 상반되는 두 가지 측면이 내재함을 명확히 한다. 첫째, 과거의 사회적 조건에 의해 형성된 아비투스는 현실 속에서 적극적으로 표현되고 수정된다. 즉 행위자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항상 발명해 낸다. 특정한 상황 속에서 그들의 행동은 예측될 수 없으며, 이에 행위자는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전략’을 전개한다. 둘째, 아비투스는 개인들의 실천을 한계 짓는다. 각 행위자들은 아비투스를 지니고서 각각의 상황에 맞닥뜨리며 미래에 대한 전망을 지니고 전략을 전개하지만 이러한 전략은 이미 결정되어져 있는 노선을 따른다 이경묵,「부르디외를 읽는 다른 방법 - 관계?전략?시간 그리고 반역」,『학회평론』, p.5
.
이것은 그가 칸트주의와 뒤르껭(구조화하는 구조), 레비-스트로스류의 구조주의(구조화된 구조), 그리고 베버나 맑스와 같이 상징을 단지 지배의 도구로 보는 관점들 맑스주의 이론적 전통에 있어서 상징, 이데올로기의 문제들이 지배계급의 의도적 조작에 의한 허
위의식으로 다루어진 측면을 부정할 수 없다. 국가 역시 그와 비슷한 운명을 겪었으며, 알뛰세나 발리
바르는 맑스주의의 위기를 이데올로기, 국가 이론의 부재에서 찾는다. 이에 대한 국내 학자의 설명으로
는 윤소영,『알튀세르를 위한 강의』,공감을 참고하라. 이러한 한계를 최초로 넘어선 것은 안토니오 그
람시라고 할 수 있으며, 그의 ‘지배’와 ‘동의’ 개념, 헤게모니 이론 등은 맑시즘적 이데올로기론에 커다
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람시 역시 이러한 이데올로기 개념에 내재한 물질적인 측면을 보지
못하고 관념적인 접근에 머물렀다고 한다면, 그것을 전유하고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을 논한 사람으로는
단연 알뛰세라고 할 것이다.
에 대해 비판하면서 만들어낸 종합적 시도라 할 수 있다. 부르디외는 객관적 구조와 역사적 행위간에 또는 경제적 구조와 개인의 실천간에는 변증법적인 상호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할 수 있다 뤽 페리, 알랭 르노, 『68사상과 현대 프랑스 철학』, 인간사랑, p.240
. 이러한 아비투스의 개념은 일부 학자들에 의해 ‘애매모호하다’는 비판을 받지만, 필자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오히려, 인식의 문제이다.
“오인하지 않으면 인식할 수 없다”라는 테제는 근대 인식론 전통 전체를 전복시키고자 하는 부르디외의 시도를 엿보게 한다. 근대 인식론에서는 경험론이든 합리론이든간에,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적인 구분을 전제로 둘 사이의 직관과 이성, 혹은 경험을 통한 ‘오인없는 인식작용’의 가능성을 믿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위에서도 잠시 언급된 바와 같이, 인식/오인, 이데올로기/실재 등의 이분법을 무화시키려는 부르디외의 의도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것은 역시 위에서 잠시 살펴본 바와 같이 알뛰세의 인식론적 절단 개념에도 해당되는 비판이라고 부르디외는 간주하지만, 그것은 알뛰세에 대한 오해이며, 그것은 밑에서 다시 설명하도록 하겠다.
“모든 행위자(지배자든, 피지배자든)는 장에 들어가, 게임에 참가하는 순간 오인한다. 특정 사회 구성원들이 공통의 인식체계를 공유하고 있다는 말은 뒤집어서 모두 비슷한 방식으로 오인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현대의 사회공간은 상이한 룰에 따라 움직이는 장들의 집합이요 행위자는 장에 따라 다른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다. 모두는 그가 활동하는 장에 따라 조금씩 달리 인식한다. 이 상이한 인식이 오인이다. 장마다 검열과 공모의 방식이 각각임을 떠올린다면 이는 당연한 일이다. 물론 오인은 강제나 억압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오인을 통하여, 행위자들은 그가 보유한 자본을 어떻게 사용해야 이득을 얻을 수 있는지를, 어떤 것이 자연스러운 것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다. 오인은 행위자로 하여금 장에서 실천할 수 있게 해주며, 모든 행위자는 장에 들어가기 위해 그 장의 질서를 승인하는 것이다” 이경묵,「부르디외를 읽는 다른 방법」, p.11
.
그러나, 부르디외에게 있어 오인과 인식은 같은 단계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에 주목하자. 장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곧 오인하고, 오인의 체계 내에서 인식행위가 이루어진다. 모든 인식이 행위자가 속해 있는 장의 상태 그리고 그가 보유한 자본과 아비투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것은 상징폭력이 유지되고 재생산되는 한 끊이지 않는 체계이다. 왜냐하면, 지배자든 피지배자든 그러한 공모와 합의를 통해 정당화시킨 상징체계의 틀 내에서 사유하며, 그 안에서 자신들의 이득을 위한 전략마저 도출해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르디외에게는 오인과 인식은 같은 진리가를 갖고 있다고 할 것이다. 오인과 인식의 구별을 명확히 하지 않는다면, 기존의 정통 상징자본들에 대항하는 이단적인 상징의 출현은 어떻게 설명이 가능한가?
알뛰세는 『맑스를 위하여』서문 「오늘」에서 맑스의 지적 발전에 있어서의 인신론적 절단에 대해 논하는데, 이것은 이데올로기적인 단계에서 과학적인 단계로의 문제틀의 변화를 함축한다 알뛰세는 자신이 자끄 마르땡으로부터 문제틀의 개념을 빌려왔고, 하나의 과학적 분야의 성립과 더
불어 전개되는 이론적 문제틀의 변화를 사고하기 위해 ‘인식론적 절단’의 개념을 가스똥 바슐라르로부
터 빌려왔다고 밝힌 바 있다. 루이 알튀세르,『맑스를 위하여』, 백의, p.30~31
. 그러나 이것은 이전의 헤겔주의적 맑스주의, 혹은 경험주의에 대한 반전략으로써 선언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비판하고자 한 소련 과학 아카데미의 ‘두 개의 과학관’과 구별되기 어렵다. 그들은 부르주아 과학과 프롤레타리아 과학을 구별하며, 전자를 허위와 보수적인 것으로, 후자를 진실을 담지한 것으로 대립시켰는데, 이것은 엉터리 실험들에도 프롤레타리아 과학이라고 이름붙여 우상화하는 희화화를 낳았다. 그러나, 알뛰세는 이러한 초기의 자신의 입장을 자기 비판하면서 철학을 “이데올로기에서의 계급 투쟁”으로 재정의한 바 있으므로, 이전의 이데올로기/과학의 구분은 알뛰세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정 계급에게 진실이 담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각 계급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인정받기 위해 투쟁할 뿐이다. 이것은 부르디외가 말하는 상징투쟁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알뛰세는 「자기 비판의 제 요소」에서 자신의 인식론적 절단 테제가 과학 및 이데올로기 일반이
라는 사변적 대립의 형태로 진리 및 오류와 비교, ‘단절’을 합리주의적으로 해석한 것이었음을 비판했
다. 인식론적 절단, 혹은 문제틀의 개념이 더 비판을 받았던 것은, 그것이 물질적인 노동과도 같이 정신
내에서 순수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사유 내 실천이라고 간주함으로써, 과학을 계급투쟁과 무관한 하나
의 독자적인 실천으로 만들어버리는 이론주의로 흐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알뛰세의 자기 비판
이 1972년에 이루어진 데 반해, 『상징 폭력과 문화 재생산』의 불어 원본이 1982년에 출간된 것을 고
려한다면, 부르디외는 알뛰세보다 10년 이상 뒤쳐진 것이라 할 것이다.
.
두 번째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필자는 스피노자-맑스주의를 전유할 것을 제안한다. 오인과 인식은 (부르디외의 생각과는 다르게)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스피노자는 인식의 장르의 세 수준을 언급하는데, 그것은 “상상 / 인식, 혹은 공통통념 / 직관지,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이다. 이에 대해 알뛰세는 『철학과 맑스주의』 루이 알튀세르 지음, 서관모?백승욱 편역,『철학과 맑스주의 ; 우발성의 유물론을 위하여』, 새길
中 독특한 유물론적 전통 ‘스피노자’ 부분을 참조하라. 그의 스피노자에 대한 초기 아티클인 「스피노자
에 대하여」는 루이 알튀세르 지음, 김석민 옮김,『마키아벨리의 고독』, 새길에 실려있다.
에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상상은 세계의 본질 자체, 세계의 모든 결정들의 내적 연관을 구성한다. 이처럼 제 1종의 인식 따라서 상상은 직접적 생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부르디외가 말하는 장field과 스피노자에 기댄 알뛰세의 생활세계, 그리고 전자의 ‘오인, 인식’과 후
자의 ‘상상’은 과연 얼마나 구별되는 것일까? 부르디외의 이론은 독창성을 갖춘 새로운 문제틀이라기
보다는 이전의 이론들을 절충하는 성격을 띄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아비투스를 설명하면서 그가
시도한 ‘구조화하는 구조’와 ‘구조화되는 구조’의 융합에서도 드러난다.
. 그것은 세계가 상상과 분해불가능하고 분리불가능할 정도로 상상이 세계를 관통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다음에 주목하라. “제 1종의 인식은 결코 하나의 인식이 아니라(상상은 인식이 아니다), 우리가 상상의 지배 아래서 인지하는, 즉 살아가는(인지는 그 자체로 삶의 하나의 추상적 요소다), 그대로의 직접적인 세계이다”.
오인에 대한 어떠한 청산 없이 새로운 인식을 기대할 수 없다. 단순히 오인을 통한 인식, 정당화 의례, 구별짓기, 문화 재생산을 통한 계층 간의 취향들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만을 부르디외가 행하고 있다는 것은 오히려 이러한 그의 이론적 맹점에 기반한 것이 아닌가? 스피노자-맑스주의에서 말하는 ‘상상’의 개념이란 생활세계 그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미신 같은 정통 이데올로기이므로, 우리가 장에 들어갈 때 그것의 영향을 받고, 그것의 체계 내에서 생활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이데올로기망은 완전한 것이 될 수 없고, 항상 변경을 갖게 마련이다 스피노자-맑스주의의 실질적인 발전은 발리바르에 의해서 수행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스피노자
의 상상을 넘어서는 인식에 대한 발리바르의 이론에 대한 윤소영 교수의 강의로 다음을 덧붙인다.
“스피노자가 ‘첫 번째 종류의 인식’이라고 부르는 것이 미신 같은 이데올로기입니다. 그런데 이데올로
기는 경제적인 착취와는 구별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아주 특수한 폭력 또는 권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
다.…이 같은 폭력을 지양하는 절차를 탐구하는 것이 바로 스피노자의 민주주의 또는 민주화의 이론이
고 그 핵심 개념이 곧 교통이지요.…토론과 논증을 통해 서로 합의할 수 있는 ‘공통의 통념’common
notion이 만들어지는데, 이것이 ‘두 번째 종류의 인식’입니다. 이제 비로소 ‘인식다운 인식’, ‘최초의 적합
한 인식‘을 통해 미신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셈이죠” - 윤소영,『알튀세르를 위한 강의』,공감, p.113
. 정통 권력에 대항하는 이단적 권력이 아닌 이러한 변경에서 새로운 자율성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4. ‘자본’capital 과 ‘장’field
이경묵씨는 부르디외의 이론틀을 (<Habitus><Capital>) + Field = Practice와 같이 도식화하고, 여기서 괄호 안에 묶여 있는 것은 과거의 조건하에서 형성되어 있는 주관적 성향체계와, 축적되어 있는 자본의 상태이며, 성향과 자본을 지닌 행위자가 현재의 조건과 만나는 것이 현재의 실천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경묵, 「부르디외를 읽는 다른 방법- 관계?전략?시간 그리고 반역」, p.4
. 그러나, 필자는 자본은 오히려 장과 함께 작동하는 현재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본은 그 분배 정도에 따라 우리의 과거를 결정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유동하며 우리를 구분짓고 상징 체계에 종속시키는 현재적인 작동체계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본의 여러 계열들, 경제자본, 문화자본, 사회자본, 상징자본 경제자본-재화와 용역을 생산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돈과 물질적 대상/ 사회자본-집단과 사회적
망 속의 위치와 관계/ 문화자본-비공식적 대인 관계의 기술, 습관, 태도, 스피치, 스타일, 학력/ 상징자
본-다른 세 자본의 수준과 배열에 있어서의 차별적 소유를 정당화하는 수단
은 상대적인 자율성이 아닌, 모두에 물질성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이경묵씨는 주장하는데, 이것은 다분히 알뛰세를 겨냥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알뛰세의 이론을 구조주의에 묶어두고 곡해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알뛰세의 “구조적 인과성”, “중층결정”, “모순의 불균등 발전” 등은 오히려 부르디외를 예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알뛰세의 구조적 인과성은 사회의 전체구조가 국지적인 구조를 결정하고 이러한 국지적 구조가 자신의 구성 요소들을 결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구조는 그 자체로는 가시적이지 않으며 각 요소들을 통해 그 자신의 ‘효과’로서만 드러나는 “효과성”을 지닌 채 작동한다. 따라서, 그것은 기계적 인과성과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또한,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라는 각각의 층위(심급, instance)는 상대적인 독자성을 전제로 전체의 구조 속에 분절되어 있으며, 그것들은 복합적으로-구조적으로-불균등하게 발전하고 결정된다. 오히려, 알뛰세는 정치, 경제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 역시 물질성을 갖는다고 설명 루이 알튀세르,「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아미엥에서의 주장』, 솔 p.110~115에
있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테제Ⅱ ; “이데올로기는 물질적 존재를 갖는다”를 보라. 이에 덧붙여, 이데올로기
의 현실성, 혹은 물질성에 대해 논하는 것은「스피노자에 대하여」,「독특한 유물론적 전통」등을 참조
하라. 알뛰세의 이데올로기론이 철저히 유물론적인 입장에 근거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은 당연하다.
한 바 있으니, 부르디외, 혹은 이경묵씨의 알뛰세를 겨냥한 부르디외 ‘자본’ 개념의 차이는 희석되고 만다.
또한, 부르디외의 설명 중에 자본의 ‘전환전략’이라는 것이 있는데, 각각의 독자적인 자본들은 다른 자본의 형태로 전환(자본a → 자본b, c, d)하여 상징권력를 위해 복무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알뛰세는 모순의 ‘전화’라는 개념을 통해 이미 설명한 바 있다. 과연 부르디외는 알뛰세의 설명과 어떠한 구별점을 갖는 것인가?
부르디외는 “상징자본”이 다른 세 자본의 수준과 배열에 있어서 차별적 소유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는데, 그것이 다른 자본들의 불평등을 은폐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알뛰세는 상부구조(정치, 이데올로기)들의 상대적 자율성과 고유한 효력과 동시에 생산양식(경제적인 것)에 의한 최종층위에서의 결정 루이 알튀세르,「모순과 중층 결정」,『맑스를 위하여』, 백의, p.130
을 논한 바 있는데, 각각의 모순들을 조절해주는 것 역시 경제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을 경제결정론이라고 비판할 수는 없다.
오히려, 부르디외는 “각각의 장들이 고유한 논리와 위계를 지니고 있는 반면에, 자본의 종류들 간에 형성된 위계와 서로 다른 자산들 간의 통계적 관계는 경제적 장이 다른 장들에게 그 구조를 부과하는 경향이 있다” 삐에르 부르디외, “사회공간과 ‘계급들의 발생”,『상징폭력과 문화 재생산』, 새물결, p.287
, 또는 “사회공간은 다차원적 공간이며,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장들의 열려진 집합이다. (여기서 필자는 자본과 장은 불가분의 관계임을 이미 위에서 전제한 바 있다) 이 장들은 그들의 기능작용과 변형에 있어서 다소 강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경제적 생산의 장에 종속된다” 위의 책, p.309
고 직접 말하고 있다. 반면, 알뛰세는 “생산은 결정적 요소이지만, 오직 ‘최종층위에서만’ 그러할 뿐이며, 처음에도 마지막에도 ‘최종층위’의 고독한 시간은 결코 오지 않는다” 루이 알튀세르,「모순과 중층결정」,『맑스를 위하여』, 백의, p.130, 132
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과연 누가 더 경제 결정론에 가까운가?
5. “사회공간”과 “전략”
부르디외는 상징폭력과 문화재생산의 논리 속에서 구조화되는 구조의 측면에 관련된 설명만을 하는 듯이 보이다가도, 그에 대한 자신의 전략을 무리 없이 해내고 있다. 그것은 그가 ‘구조화하는 구조’라는 여지를 남겨두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한다면 무리일까? 여하튼간에, 그의 전략은 다분히 상징권력을 벗어나는 데에 집중되고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인에 기초한 상징을 부과하는 권력이 해체되는 것은 그것의 자의적인 성격을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즉 객관적인 진실을 밝히고 믿음을 해체하는 것 말이다. 이론적 담론Heterodox discourse은―그것이 겉으로만 확실하고 자명해 보이는 정통의 의견을 파괴하고, 억견doxa을 허구적으로 재복원하려는 것을 분쇄하고, 동원하는 힘을 중립화시키는 한―피지배계급들의 잠재적 권력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동원과 전복의 상징권력을 가지고 있다(p.102 각주8) ‘정통’, ‘이단’, ‘억견’ 등의 개념에 대해서 본 글에서는 깊게 논의하지 않았으나, 『상징폭력과 문화
재생산』, p.56~60 ‘언어시장’ 부분에 상세하게 설명이 되어있다.
. 이단적인 질서전복은 이 세계에 대한 표상을 변화시킴으로써 변화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표상들은 이 세계의 현실을 만들어내는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사회세계는 그 세계를 자연세계로 간주하는 일상적인 세계관에 역설적인 세계관, 유토피아, 프로젝트나 프로그램 등을 대립시킴으로써 변화될 수 있다. 이단적 질서전복은 이러한 변화의 가능성을 이용한다(p.215). 상징적 혁명은 사회적 정체성을 재전유하기 위한 조건인데, 지배적인 명명법을 수용할 경우 그들은 (주관적으로도) 사회적 정체성을 재전유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그들이 자신들의 지식수단으로 얻을 수 있었던 지식의 한계 내에 박탈당한 채 갇혀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경제적-문화적 조건을 전유하는 것이 필수적이다(p.219). 정당성 문제는 문제제기 가능성으로부터 또한 일상적 질서를 당연시하는 억견과의 단절로부터 제기된다(p.305)."
그의 전략은 다분히 대항-상징의 틀에서 논의되고 있다. 그것은 부르디외가 경제자본, 문화자본, 사회자본, 상징자본을 독자적인 것으로 구분하면서, 동시에 상징자본에 가장 큰 비중을 두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결국, 부르디외는 여타의 자본을 둘러싼 투쟁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은데, 이것은 그의 상징자본-환원론에서 기인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자본과 관련된 투쟁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때문인가? 비록 중간에 지식의 한계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경제적-문화적 조건’을 전유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상징자본 내에서의 투쟁을 위한 기초이지 그것 자체로는 마치 투쟁의 심급을 이룰 수 없는 듯이 비치기까지 한다. 이것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데, 그것은 알뛰세가 비판받았던 ‘이론주의’라는 멍에를 부르디외도 그대로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적 토대를 둘러싼 현실적인 투쟁과 분리 가능한 상징투쟁의 독자성에 대한 강조는 이러한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또한, 3절에서도 논한 바와 같이, 부르디외가 오인과 인식에 대한 애매모호함을 해소하지 않는다면, 그의 ‘이론적異論的 담론의 생성 가능성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답할 수 없을 것이다.
본래부터 자율성을 가진 결정에서 벗어난 순수한 자유란 존재하지 않고, 단지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의식적으로 결정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경묵, 「부르디외를 읽는 다른 방법 - 관계?전략?시간 그리고 반역」, p.21
라고 이에 대해 답한다면, 그것은 너무도 순진한 생각이다. 개별적인 의식의 전환으로 전체의 장이, 갖가지 고정된 제도화 의례들이, 그것에서 파생되는 각종 구별지음과 나에게 또 다시 체화되는 아비투스들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은 이론적 낙관주의에 불과하다. 자본이, 그리고 장이 끊임없는 상징적, 물적 투쟁의 공간이자 세계라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의식의 전환에 더해 물적 토대에서의 지원이 필요하며, 그것은 피지배계급―오히려 상징, 혹은 자본에의 접근 배제를 대가로 토대에 대한 교란과 탈구, 타격에 접근 가능성을 지닌―의 조직과 공통 통념을 요한다. 이것을 둘러싼 부르디외의 한계는 아래에서 보다 자세히 논의될 것이다.
전략상의 난점은 그의 계급관에서도 드러난다. 그가 고정된 계급이나 계급의식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것 부르디외의 다음의 언급에 주목하라. “‘의식의 자각’과 ‘계급의식’이라는 형이상학, 인격화된 통일체
의 집합의식에 대한 일종의 혁명적 사유(cogito)에 종지부를 찍기 위하여, 우리는 단지 실천의 현재적
계기로부터의 이러한 형태의 거리가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든 사회적-경제적 조건들을 검토할 필요가 있
다.”(『상징폭력과 문화재생산』, p.295, 각주 6)
은 충분히 수용 가능한 문제이다. 계급은 실제로 고정된 ‘실체’도 ‘실재’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르디외의 그것은 너무 나아간다. 그는 계급들을 ‘유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유사한 조건에 위치하고 있으며 유사한 유형의 상황에 종속되어 있어서, 유사한 성향과 이해관심을 가지고 유사한 실천을 생산하며, 유사한 자세를 취하는 온갖 기회를 가지는 행위자들의 집합’(p.289)이라고 설명한다. 이에 덧붙여, 상징재생산의 순환과의 단절이라는 문제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다양한 장들 내에서의 위치들 간의 상동성에 근거하여 (그리고 또한 지배자와 피지배자간의 관계에서 불변하거나 대등한 보편적 요소가 존재하기 때문에) 다소 지속적이고 항상 다소간 의식적인 오해에 기반하는 연합이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p.309).
부르디외는 계급의 문제를 취향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다. 포스트-포드주의, 혹은 탈-산업사회론, 정보 사회론에서 말하는 ‘계급의 설정 불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부르디외는 시대의 흐름으로 인정하고 있는가? 경제적인 계급 설정의 불가능성에 착목하여, 그는 계층, 그리고 취향, 상징에 대한 분석―실천이 아닌 세계에 대한 해석―이라는 직분에 만족하고 있는 것인가? 취향이 반드시 계급을 거론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각 개인들에게 환원 불가능한 것임은 쉽게 인지할 수 있다. 취향은 취향의 문제이지, 그것이 현실 변혁의 토대로 전화되는 데에는 다른 기제를 필요로 한다. 계급의식의 개념, 혹은 물적 토대에 근거한 계급간의 차이 개념을 부정함으로 인해 부르디외가 설정하는 계급 동맹은 결국 얼치기 동맹에 그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러한 동맹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항상 같은 바리케이트 안에 머물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알뛰세 역시 계급은 독립적으로 실재한다고 보지 않았다. “계급 투쟁은 계급에 우선하며”, “계급은 계급투쟁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이 과정을 역전시켜, 형성되지도 않은 계급에 기반하여 투쟁의 전선에 나가기도 전에 취향을 통해 동맹 세력을 재단함으로써 고립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6. 에필로그
본 글은 『상징폭력과 문화재생산』에 대한 서평에서 시작되었으나, 부르디외 이론 전반에 대한 고찰을 목적으로 하였다. 부르디외는 전 지구적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항하는 지식인으로써 중요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 그의 필적과 실천들의 중요성에 대해서 모두 곱지 않은 시선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본 글은 철저히, 그의 이론 체계 내에서의 긴장을 들추어낸 것 뿐이며, 이미 15년이 지난 텍스트이므로, 현재의 부르디외의 생각과 당연히 그것을 동일시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다만, 필자는 이러한 작업들을 통해 부르디외의 사상적 궤적을 쫓아가며, 그것을 전유하고 소화하는 것 뿐이다. 상징이나, 이데올로기, 국가의 문제에 대해 기존의 맑시즘이 적절한 이론적 대응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부르디외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에 대한 한 걸음으로서 부르디외의 이론은 다시 곱씹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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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부 부르디외 읽기 [철학 강의]
7부 부르디외 읽기 [철학 강의]
부르디외 읽기 [철학 강의]
논?단■━━━━━━━━━━━━━━━━━━━━━━━━━
부르디외를 읽는 다른 방법
- 관계?전략?시간 그리고 반역
이경묵
인류학과 대학원 석사과정
1. 소위 ‘비판적’ 부르디외
서점 한쪽을 차지하고 있던 온갖 ‘post’들의 열풍이 지나갔다. 아직도 그런 책들 많이 나와요! 라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눈여겨 보면 이론의 토착화라고 하기엔 이르나 각 이론의 눈으로 현실을 조망하거나, 현재의 지적 풍토에 대해 비판하는 시도들을 찾아내기 어렵지 않다. 그 중에서도 두드러지는 것은 한국에서의 프랑스 담론의 수용양상에 대한 비판의 소리들, 문화적 담론이 쏟아지고 넘쳐나는 상황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들 몇몇 프랑스 이론의 수용양상에 대한 지적들은, 이론 자체에 대한 이해를 결여하고 있다. 그 한 예로 김성기는 ?불란서제 담론의 그늘?(『패스트푸드점에 갇힌 문화비평?, 민음사)에서 현재 한국 내의 프랑스 담론들이 ‘무장해제된 소비용 사상’ 이라는 주장을 펴는데, 그 근거로 부르디외의『구별짓기?가 제시된다. 즉 저자는, 新중간계급분파가 새로이 도입된 사상?음악?직업을 선호하면서 스스로의 실천에 자유, 탈주 등의 의의를 부여하지만 체제 비판을 적극적으로 펼치지 못하며 개인의 영역으로 후퇴하는 성향을 보인다는 부르디외의 분석을 그대로 한국 상황에 적용한다. 프랑스 이론의 유입을, 건강한 비판정신의 종말을 보여주는 사회변화의 표지판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부르디외의 분석을 실재론적으로 이해한 오류이다 (주10 참조). 특정 계급의 성향체계에 의해 실천이 발명되는 것은 분석의 출발점이지, 실천을 분석하는 선험적 가정이 될 수 없다. 위와 같은 이해는 특정 철학 혹은 사상이 비판의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고 반대로 특정 사람들에 의해 ‘소비’될 수도 있다는 비결정성을 참아내지 못하는 조급함에서 기인한다.
이다. 탈주?욕망?해체 등의 단어를 창백한 쁘띠 부르주아의 속성과 연결시키거나, 텍스트 속에선 이성, 국가, 가족까지 척척 해체하면서 현실정치의 기획에는 왜 그리도 무기력한가를 쏘아붙이는 논조들.
이러한 反프랑스 담론의 목소리 사이에서 ‘프랑스 사회학자’인 삐에르 부르디외(P. Bourdieu)가 눈에 뜨인다. 포스트사조가 한 걸음 물러서는 시기와 맞물려 부르디외가 번역되고 읽히기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우연일까. 혹은 그의 저작들이 지니는 깊이나 의의가 최근 들어 판명된 것일까. 아니다. 모든 것은 사회적이다. 부르디외 자신이 문화생산의 장에 대한 분석에서 보여주었듯, ‘유행’은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장들 사이에서 특정한 이익을 획득하려는 전략들이 만나서 만들어진다. 부르디외 소개는, 이를 통해 얻어지는 차별적 이득과 떨어져 있지 않을 것이다. 일단 그의 저작에선 해체?담론?욕망 등의 낱말은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그의 분석 작업 속에서 사용되는 오인(misrecognition), 상징폭력(symbolic violence) 등의 개념은 얼핏 보기에도 지극히 ‘정치적’이요 ‘비판적’이다. 포스트주의자들이 제기했던 여러 논지들을 소화한, 정치?사회이론을 꿈꾸어 왔던 독자들에게, ‘문화’에 주목하면서도 충분히 ‘비판적’인 그의 이론은 시장성을 지니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에 걸맞게, 현재까지 이루어졌던 대부분의 부르디외 소개는, 아비투스(habitus), 상징폭력(symbolic violence), 문화자본(cultural capital) 등의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지배구조의 재생산 과정을 고찰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부르디외의 분석에 의해, 자본주의 사회가 경제적 토대로부터 어느 정도 상대적 자율성을 지닌 문화적 도구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과, 지배계급이 상징폭력을 통해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피지배계급에게 주입시킨다는 사실 등을 폭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좀더 나아가 그의 계급분석은 ‘경제자본이 급격하게 문화자본으로 전환되어 계급사회가 정착되기도 전에 신분사회로 정착되는’ 한국사회의 굳건한 보수화를 비판하는 근거로, 그리고 ‘아직 일반적으로 경제자본이나 기타 문화/상징자본으로 전환되거나 은폐되는 단계에까지 이르지 못하였으며, 단순한 교환에 머물러 있는 그래서 경제자본의 과시가 매우 직접적이고 노골적이며, 소비재 이외의 문화적 재화로의 전환은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한국의 후진성을 설명하는 데에도 사용된다. 정일준 편역,『상징폭력과 문화재생산』역자서문 참조. 그러나 과연 부르디외의 분석을 신분사회화되는 자본주의나 경제자본의 타 자본으로의 전환, 은폐로 요약할 수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그의 분석은, 특정한 계급이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지배를 공고히 해 나아가거나, 자신들의 경제적 부를 은폐하기 위해 문화자본이나 상징자본을 축적한다는 식의 설명과 반대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즉 문화자본을 보수화의 징표로, 상징자본을 지배관계의 은폐로 연결시키는 것은 오류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문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물론 위와 같은 소개와 기획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계급투쟁의 일상으로까지의 확장, 지배의 재생산 방식에 대한 분석, 그리고 타 사회의 이론을 한국사회에 적용하는 것은 중요한 주제일 것이다. 그러나, ‘유행’으로서의 부르디외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명백한 한계를 지닌다. 유행이 지난 몇 년 후의 독백을 예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계급적 차이가 먹고, 마시고, 듣는 모든 곳에 존재하며 이에 ‘문화’가 계급투쟁의 초점이 된다는 것이나 각각의 계급이 상이한 경제자본, 문화자본, 사회자본, 상징자본을 지니고 있기에 상이한 생활양식을 지닌다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닌가. 자기성찰적인 독자라 할지라도 잠시 동안의 씁쓸한 자책이나 반성―예를 들어 내가 * *한 유형의 영화(異性, 음악, 스포츠 등등)를 좋아하는 것도 쁘띠 부르조아적 아비투스를 가졌다는 말이군, 역시 난 계급상승을 위해 몸부림칠 수밖에 없는 것인가...,―에서 멈추어 설 것이다. 게다가 물리적?강제적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상징’폭력을 폭로하는 것이, 지배자들의 놀라운 정치감각에 혀를 내두르며 안타까워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 민중 생존권 박탈이란 외침도 시큰둥해진 분위기에서 상징폭력 분석이 지니는 힘은 얼마나 초라한가.
위의 독백은 부르디외의 이론을 계급개념의 확장, 일상에서의 계급투쟁, 아비투스의 사회학, 문화재생산이론 등의 방식으로 이해했을 때 닿게 되는 종착역이다. 그 명명이 ‘비판적’이라는 호의적인 형용사를 사용하고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는 명백히 오독인데, 부르디외를 이미 낡아 버린 이전의 도식과 기준에 끼워 맞추고 있기 때문이요, 현실분석에 현실옹호라는 멍에를 씌우는 ‘마술’을 부리기 때문이다. 그 마술이 진행되는 과정을 하나씩 짚어보자. ①부르디외는 마르크스와 베버의 사회학을 연결시켰다. 또한 사회적인 것을 강조하는 뒤르껭 전통 위에 서 있기도 하다. 경제, 문화, 사회, 상징자본이라는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협소했던 계급개념이 확장되었다. ②그의 작업은 사회 계급의 상황과 연관된 ‘문화’에 집중된다. 계급투쟁이 경제부문 이외에 문화, 예술, 학문의 장을 비롯한 일상생활의 영역에까지 확장됨을 밝힘으로써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계급투쟁에 대한 분석이 가능하게 되었다. ③부르디외는 아비투스라는 독특한 개념을 사용하는데, 이는 개인과 구조 사이를 매개하는 개념이다. 이를 통해 각 개인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구조’로부터 만들어졌지만 일부분 거기에서부터 벗어날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④그러나 현재까지의 그의 작업은, 지배구조가 재생산되고, 지배가 보다 교묘해지는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는 성공하고 있는 반면, 행위자들이 진정 새로운 장, 구조를 만들어내는 역동성을 긍정하고 있지는 못하다. 이러한 독해는 부르디외를 기존의 쟁점들―생산수단의 소유 여부로 갈라지는 계급, 계급 양극화, 결정론과 자유의 대립, 지배구조를 뒤엎는 계기로서의 혁명―에 의지하여 이해하고 평가한다. 이런 구도라면 그의 분석에서 재생산을 넘어서는 역동성을 발견할 수 없음이 당연하며, 교묘한 경제결정론자라는 비난도 어색하지 않다. 그러나 특정 사상은 그 자체의 문제의식과 시각에 의거했을 때에만 이해되고 반박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얼핏 보기에 어색하지 않은 위의 독해방식에 반대하여, 부르디외를 이해하는 새로운 잣대로서 시간, 관계 그리고 전략 개념을 제시할 것이다.
2. 도구와 분석들
부르디외의 실천이론은 아비투스, 장(場), 그리고 자본이라는 개념을 필요로 하는데, 이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Habitus><Capital>) + Field = Practice. 여기서 괄호 안에 묶여 있는 것은 과거의 조건하에서 형성되어 있는 주관적 성향체계와, 축적되어 있는 자본의 상태이다. 즉 성향과 자본을 지닌 행위자가 현재의 조건과 만나는 것이 현재의 실천이다. 행위자들의 실천은 그것을 산출하는 원리(아비투스)를 만들어내었던 과거의 조건들에 의해 결정되며 또한 과거의 실천들의 결과로 이미 만들어져 있는 장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분석은 실재를 둘러싸고 그것을 규정지으려는 행위 자체가 사회적 투쟁의 대상이요, 지배와 피지배가 지속되는 과정 속에서 상징권력이 작동함을 밝혀낸다. 행위자들은 장에 편입되어 게임에 임하는 순간, 오인(misrecognition)함으로써 인식(recognition)하는데 이는 지배의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2-1. 도구들 : 아비투스(habitus), 자본(capital), 장(field)
아비투스(habitus)는 ‘구조화하는 구조이면서 구조화된 구조이며, 행동과 인지 판단의 성향체계’이다. 아래 표 이는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上』, p.280. <그림 8 ; 생활조건, 아비투스 그리고 생활양식>을 축약한 것이다.
에서 이전의 생활조건에 의해 구조화되며, 생성도식?지각도식?평가도식을 만들어냄으로써 실천을 구조화하는 아비투스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분류가능한
실천과 작품의
생성도식 체계
객관적으로 분류가능한
생활조건1
생활조건의 구조상의
위치
(구조화하는 구조)
아비투스 1
(구조화되고
구조화하는 구조)
분류 가능한 실천과 작품
분류되고 분류화하는 실천의체계, 변별적기호(복수형태의 취향)
지각도식과
평가도식 체계
(단수형의 ‘취향’)
같은 도식이 이어짐
생활조건 n에서의 지각도식과 5평가도식 체계
부르디외는 아비투스에 상반되는 두 가지 측면이 내재함을 명확히 한다. 첫째, 과거의 사회적 조건에 의해 형성된 아비투스는 현실 속에서 적극적으로 표현되고 수정된다. 즉 행위자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항상 발명해 낸다. 특정한 상황 속에서 그들의 행동은 예측될 수 없으며, 이에 행위자는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전략’을 전개한다. 둘째, 아비투스는 개인들의 실천을 한계짓는다. 각 행위자들은 아비투스를 지니고서 각각의 상황에 맞닥뜨리며 미래에 대한 전망을 지니고 전략을 전개하지만 이러한 전략은 이미 결정되어져 있는 노선을 따른다. 개개의 전략들은 그것을 산출하는 원리(아비투스)를 만들어내었던 과거의 조건들에 의해 결정되며, 또한 과거의 실천들의 결과로 이미 실현되어 있는 조건인 장과 만남으로써 이루어진다. 아비투스는 인간본성, 합리성, 기본욕구 등과는 상이해서 개별 실천들을 결정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특정한 조건하에서 실천들이 드러날 방향은 결정한다. 즉 결정하지 않는 듯 느슨하게 결정한다. 이런 이유로 특정한 개인의 아비투스를 a와 b와 c라고 규정내릴 수 없다. 아비투스는 어린 시절에 상당부분 형성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항상 수정되는 데다가, 특정한 장과 만남으로써만 작동되기 때문이다. 물론 아비투스는 모든 실천을 방향지운다. 별 뜻 없이 행하는 제스추어나 일견 무의미하게 보이는 동작은 실상 사회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 및 평가원리가 신체에 새겨져 발현되는 것들이다. ‘순수함’이란 없다. 무엇인가를 좋아하는 것, 특정한 모임이 왠지 부담스러운 것, 누군가 앞에 서면 말을 제대로 못하는 것 등은 분명 사회적이요 아비투스로 설명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무서운 ‘결정성’에도 불구하고 아비투스가 선험적으로 ‘결정짓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아비투스는 행위자가 어느 장에서 어떠한 실천을 할지를 예측할 수 있도록 하는 규칙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a, b, c라는 아비투스만으로는 A, B, C 라는 실천의 출현을 예측할 수 없다.
위와 같이 정리한다면, 아비투스는 구조와 개인 사이를 매개하는 개념이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특정 계급의 생활조건 즉 객관적 조건의 산물로서의 아비투스는 분명 ‘이미 조건지워진 그 생산의 조건에 내재되어 있던 바’를 만들어 낸다. 개인적인 것보다는 명백히 사회적이고 객관적인 조건에 방점을 찍어두고 있기 때문에 부르디외는 ‘재생산 이론가’ ‘경제결정론’ ‘온전히 복구되지 못한 주체의 자율성’ 등의 지적을 받는다. 또한 아비투스는 특정한 실천을 명확히 결정짓지 못한다. 아비투스가 매개개념이라면 이는 개인과 구조 사이에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블랙박스가 되는 셈이다. 아비투스가 구조와 개인을 매개하려는 개념이라면, 너무 느슨하면서도 너무 결정적이라는 이상한 모양이여서, 적당히 절충해 놓았다는 비난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부르디외가 사용하는 ‘자본’은 경제자본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즉 경제자본 이외에 문화자본, 사회자본, 상징자본으로 갈라진다. 이를 두고 맑스의 자본 개념의 오용, 비물질적 부분에 대한 경제논리의 확장 혹은 상부구조의 자율성 인정 등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그는 경제자본과 비경제자본 사이의 관계를 반영이니 상대적 자율성이니 하는 추상적 차원에서 규정내리지 않는다. 새로운 자본 개념은 특정 장에서 이윤을 얻어낼 수 있는 원천이라면 무엇이든 포괄한다. 물질 대 비물질이라는 식의 분류는 의미를 지니지 못하며 흔히 상부구조나 이데올로기와 연결되던 언어?태도?연줄(흔히 말하는 빽) 모두에 물질성이 부여되는 것이다. 각각의 자본과 그들 상호간의 관계를 살펴보자. 이러한 자본들, (1)경제자본(재화와 용역을 생산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돈과 물질적 대상), (2)사회자본(집단과 사회적 망 속의 위치와 관계), (3)문화자본(비공식적 대인 관계의 기술, 습관, 태도, 스피치 스타일, 학력 등), (4)상징자본(다른 세 가지 자본의 수준과 배열에 있어서의 차별적 소유를 정당화하는 수단)은 서로 전환되지만, 항상적으로 관철되는 원칙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에선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언명은 충분치 않다. 자본간의 전환은 특정 장 내에서 특정 방식으로 어느 정도까지만 가능하다. 부르디외는 각 행위자들이 자신이 지니고 있는 하나의 자본을 다른 자본으로 바꾸려고 하는 전략에 ‘전환전략’이라는 이름을 붙이는데, 자본의 전환율은 해당 장의 논리, 지배의 방식, 행위자의 전략을 변화시킨다. 특정 장에서 특정한 자본은 현저히 높은 혹은 낮은 전환율을 보이는데, 예를 들어 학위의 과잉은 학력자본(문화자본의 일종)의 경제적 자본으로의 전환율을 떨어뜨려 ‘학력 인플레이션’을 야기할 수 있다. 그 결과 고학력 실업자가 생기고, 노동분업이 증대하며, 기존 직업에 대한 정의가 변화할 수 있다. 상세한 설명은『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上』, pp.220~237 참조.
또 다른 예로, 갑작스레 경제자본을 얻은 졸부는 어딘가 모르게 점잖은 부르조아지와는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그는 골프를 배울 수는 있어도 필드에서 이동하는 동안 나누는 고상한 이야기에는 끼지 못할 것이며, 음악회에 가서는 끊임없이 쏟아지는 졸음과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즉 그들은 취향(문화자본의 일종)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식견 있는 부르조아는 그가 떼돈 벌어 갑자기 끼어든 신참자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이와 반대로 ‘문화귀족’들(문화자본의 총량이 큰 부르조아지들)은 갑작스레 땅부자가 된 졸부들―이들은 자본의 총량 면에선 문화귀족들과 필적하지만 자본의 구성과 사회적 궤도 면에서 상이하다―에게 ‘교양없는 것들’이라 욕함으로써 자신을 구별시킬 수 있는데, 이는 쉽게 배울 수 없는 예법, 관습, 품위있는 매너, 말씨, 상식 등의 문화자본이 상징자본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신보다 바로 위에 위치한 계급(분파)을 따라잡으려는, 그리고 바로 아래의 계급(분파)에게 따라잡히지 않으려는 싸움에서 자신을 구별시킬 수 있는 수단이 상징자본이다. 이는 그것이 통용되고 인정되고 있는 장 밖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부인된(denied), 오인된(misreconized) 자본이다. 물질적인 특성은 그것이 다른 것들과 관계맺음으로써 상징적 혹은 구별적 특성을 획득하는 바, 이러한 상징투쟁 과정에서 승리하여 권위를 획득하는 자본이 상징자본이 된다.
이와 같은 네가지 유형의 자본의 분배와 관계가 사회내의 객관적 계급 구조를 결정한다. 사회의 전체적인 계급 구조는 다양한 집단들이 소유하는 자본의 총량을 반영한다. 지배계급은 가장 많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상징적 자본을 소유할 것이다. 중간계급은 이러한 형태의 자본을 보다 덜 소유할 것이고 하층계급은 이러한 자본을 가장 적게 가진다. 그러나, 계급구조는 단순히 총량으로만 환원될 수 없는데, 각각의 계급 안에는 (1)자본의 구성과 배열 (2)자본을 소유하게 된 사회적 기원과 시간의 양에 의해 구별되는 분파가 있다. 각 계급 내에는 지배분파와 피지배분파가 존재한다.
아비투스가 지각?평가?행동이라는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 구조의 형태로 개인들의 육체 속에 각인된 역사적 관계들의 총체라면, 장(Field)은 어떤 권력(혹은 자본)의 형태들 속에 뿌리박힌 다시 말해 역사적으로 형성된 객관적 관계로 이루어진다. 장은 특정한 방식의 게임이 벌어지는, 그리고 그 안에서의 구성원들에 의해 공유되는 룰을 지니고 있는 공간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행위자들이 자신들이 지닌 자본을 확대 혹은 유지시키려 경쟁하는 공간이다. 부르디외는 장을 일종의 ‘자본의 분배구조’라고 설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각 장마다, 분배구조의 위치에 놓여지는 자본은 상이하다. 예를 들면 권위, 지식인의 위세, 정치권력, 물리적 힘과 같은 자본들의 가치는 하나하나의 장에서 자신의 가치를 새롭게 자리매김된다. 그 대표적인 예로 ‘예술의 장에서의 자본은 뒤집혀진 경제자본’ “예술의 장은 경제적 장을 구성하는 규칙들을 피하거나 전환함으로써 규정되는 장이므로, 이 장에서의 이해관계는 일반적 의미에서의 경제적 이해관계로 환원되지 않는 이해관계라고 볼 수 있다. 그래도 이것은 분명히 이해관계이며, 사람들은 이것을 위해 다른 사람들과 갈등이나 경쟁관계에 놓이게 된다.” In Other Words p.110.
이다.
모든 장은 신참자에 대해 ‘검열’ “검열이란 특정한 언어적 코드를 위반하는 것을 지적해내고 또 그것을 억압하기 위해서 마련되었던 어떠한 심급에서의 법적 절차가 아니라, 표현에의 접근통로와 표현형태를 동시에 통제함으로써 표현을 지배하는 장의 구조 자체이다. 이 구조적 검열은 장의 제재수단들을 통해 행사되며, 여러 종류의 표현들의 가격이 형성되는 일종의 시장으로서 기능 한다. 다시 말해 구조적 검열은 권위를 부여받는다.” ?검열과 형식의 부과?,『상징폭력과 문화재생산』, p.228.
을 행한다. 장에 들어간 사람은 즉시 어떤 구조, 즉 자본의 분배구조 하에 놓인다. 신참자는 언제 어떤 말을 해야 할 것인지, 지금 이 자리에서 특정한 행동을 해도 좋은지 나쁜지를 알 수 없다. 그것이 비판의 소리이든, 혹은 장의 논리에 충실히 따르는 것이든지 간에 특정한 장 내에서의 실천은 곧 게임의 규칙을 익히는 것이 된다. 결국 행위자는 스스로가 말하는 것, 특정 순간 적절한 것, 말로 표현해서는 안되는 것을 학습한다. 그러나 장은 ‘검열’임과 동시에 ‘공모’이기도 하다. 장에 참여한 모든 행위자는 기본적인 이해관계, 다시 말해 그 장의 존재 자체와 관련된 모든 것을 공유한다. 비록 장 내에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적대관계가 존재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는 공모가 있다. “사람들은 투쟁이란 마땅히 투쟁하여야 할 것, 자명한 것 속에 억압되어 있는 것, 지배 견지에서 유기된 것, 다시 말해 게임규칙, 목표, 그리고 사람들이 게임을 행하고 게임에 참가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미처 알지도 못한 채 은연중에 받아들이고 있는 모든 전제들 등, 그 장 자체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적대자들 사이의 합의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장들의 몇 가지 특징?,『혼돈을 일으키는 과학?, p.130.
검열과 공모는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데, 장의 신참자가 장 내부에서 객관적으로 허락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채는 실천적 감각을 갖추는 순간 검열은 눈에 띄지 않는 가장 완벽한 것이 될 것이다. 행위자는 이전에 자신의 말과 실천을 검열했던 모든 것을 자연스러움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미 내면화된 게임의 룰은 그를 자유롭게 하는 동시에 영원히 제한할 것이다. 이제 검열은 공모되고, 공모는 영원한 검열 하에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이―장 내에서 검열과 공모가 연결되었다고 하는 파악― 장의 안정성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즉 검열과 공모에 의한 장에의 편입이, 피지배자의 고통과 지배자의 한가로움을 가져온다는 언급은 거짓이다. 모든 행위자들이 검열에 응하고 공모하는 것은 단지 투쟁하기 위해서이다. 실천을 통해 감각을 쌓아 가는 행위자들은 자신이 지니는 이해에 의하여 자본을 확장하려는 투쟁을 벌인다. 이 투쟁은 어떠한 자본, 어떠한 실천이 구별적 이득을 얻어낼 수 있는가의 문제, 장이 유지되는 가장 기본적인 규정을 둘러싸고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이에 끊임없는 상징투쟁이 벌어진다. 경제적 생산의 장, 문학의 장, 예술의 장, 철학의 장, 정치의 장 등 모든 장은 항시 투쟁의 공간이다. 각기 다른 룰에 따라 움직이는 장 속에서 지배자가 피지배자들의 전략을 완벽하게 봉쇄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으며, 평형상태는 언제나 일시적이다.
2-2. 분석들: 오인(misrecognition) 그리고 상징폭력(symbolic violence)
오인은 일견 올바르지 않은 인식을 말하는 듯 보인다. 부르디외를 비판하는 여러 논자들은 오인, 상징폭력 개념의 애매모호함, 혹은 불완전성에 대해 지적한다. 이러한 시각에 의하면 오인은 이데올로기와 같으며 이는 허위의식이다. 과학적 인식, 다시 말해 올바른 인식 과정을 거치지 않은 개인들의 인식은 오염된 허위의식이다. 이러했을 때 각 주체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호명된 주체이기에 수동적이며, 이에 부르디외의 이론은 재생산 혹은 지배를 설명할 뿐 생산 혹은 저항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그 중의 하나인 젠킨스의 설명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상징폭력은 부르디외에 의한다면 상징 그리고 의미들의 체계를 부여한다. 이는 특정한 집단이나 계급들에게 이를 ‘권위’로 받아들이게 한다. 이러한 상징폭력의 관철은 오인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바, 권력관계가 그 자체의 객관적인 모습으로 비추어지지 않고 특정한 ‘권위’로서 받아들여지는 과정이 오인의 과정이다.” Pierre Bourdieu, p.104. 여기서 젠킨스 역시 오인과 상징폭력을 은폐와 기만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피지배자는, 지배자가 알지만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오인을 올바른 인식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부르디외의 설명을 따르자면, 모든 행위자는 장에 들어가 그 게임에 참가하는 순간 오인한다. 내깃돈이 되는 자본을 확장하기 위한 실천은, 지배자든 피지배자든 마찬가지로 오인에 의한다. 만일 오인하지 않는다면 인식할 수 없다. 오인없는 인식은 없으며 모든 인식은 오인이라는 명제는 부르디외를 이해하는 가장 힘겨운 부분이다. 여기서 오인에 ‘mis-’ 가 붙는 것은 옳은 것과 그릇된 것이라는 구분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식이 행위자가 속해 있는 장의 상태 그리고 그가 보유한 자본과 아비투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장, 자본, 아비투스는 실천을 도출하는데 그 실천들은 순수하거나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판단 즉 실천감각에 의한 것이다. 인식은 일정한 범위 내에서 고정되며 현존하는 질서의 승인에 다름 아니다. 행위자는 실천하기 위해 오인하며, 승인한다.
모든 형태의 메커니즘에 맞서 사회세계의 일상적 경험은 인식이라는 점을 재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듯이, 수많은 계급의식화 이론이 제시하는 최종 결론, 즉 의식은 자발적으로 발생한다는 환상과는 정반대로 시초의 인식은 오인(misrecognition)인 동시에 머리 속에서 성립되는 질서의 승인(recognition)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도 마찬가지로 아주 중요하다.
『구별짓기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上』, p.282.
고정된 인식인 오인은 권력관계에 대한 승인에 의지한다. 상세히 설명해 보자. 먼저 장 내에는 지배와 피지배관계에 따라 자본이 불평등하게 분포되어 있다. 여러 자본들은 그 분배상태와 타 자본과의 관계 속에서 각각 구별적 이득을 부여받는다. 자신의 위치를 유지 혹은 상승시키려는 행위자는 장의 상태, 자신이 보유한 자본에 따라 실천한다. 즉 불평등이 상존하며 그에 따른 상이한 전략들이 계속된다. 만일 행위자가 이러한 불평등한 힘의 관계가 없는 곳에서 실천한다면 그때엔 오인을 인식으로 (혹은 상호인지로) 고쳐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는 없다. 사회전체의 오인에서 벗어나 완전히 상이한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행위자를 떠올려보자. 그는 추방되어 아무 일도 할 수 없거나 미쳐버릴 것이다. 특정 사회 구성원들이 공통의 인식체계를 공유하고 있다는 말은 뒤집어서 모두 비슷한 방식으로 오인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현대의 사회공간은 상이한 룰에 따라 움직이는 장들의 집합이요 행위자는 장에 따라 다른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다. 모두는 그가 활동하는 장에 따라 조금씩 달리 인식한다. 이 상이한 인식이 오인이다. 장마다 검열과 공모의 방식이 각각임을 떠올린다면 이는 당연한 일이다. 물론 오인은 강제나 억압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오인을 통하여, 행위자들은 그가 보유한 자본을 어떻게 사용해야 이득을 얻을 수 있는지를, 어떤 것이 자연스러운 것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다. 오인은 행위자로 하여금 장에서 실천할 수 있게 해주며, 모든 행위자는 장에 들어가기 위해 그 장의 질서를 승인하는 것이다.
이렇게 특정한 질서를 승인하고 오인한 결과, 장 내에서 특정한 구별짓기의 방식이 존속된다. 오인하는 자는 지배당하는 자뿐만이 아니다. 지배자든 피지배자든 모두가 오인한다. 이처럼 게임에 참가하면서부터 그 순간 오인하는 것이라는 설명은, 오인에 대비되는 인식, 허구에 대립되는 진실, 이데올로기에 대립되는 실재라는 대립을 무너뜨린다. 특정한 장의 구조적 효과로서 빚어지는 룰은 항상 그 이외의 가능성을 닫아놓으려 한다. 지배자들조차 이미 닫혀진 가능성을 제 스스로 열 수 없다. 제멋대로인 것은 없다. 상징권력이 자의적(arbitrary)인 것이라는 설명에서 유념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완전한 제멋대로가 아니요, 여러 가능성 중에 고정되어진 하나의 방식이라는 점이다. 자신을 구별시킬 수 있는, 오인된 자본인 상징자본 또한 그 장의 상태에 따라 결정된다. 즉 모두는 특정한 관계 속에서 게임하며 그 관계는 누군가의 것으로 소유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상징권력은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니라 관계의 산물이다. 상징폭력의 행사는 통상적인 폭력―특정한 대상에게 가하는 물리력―과는 상이하다. 상징폭력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작동하며, 특정한 오인을 만들어내는 형식에 의지하여 작동한다. 이와 같은 분석은 사회가 물리적 폭력, 강제에 의해서 뿐 아니라, 동의와 공모에 의해서 유지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즉 오인이나 상징폭력은, 집권자의 악랄함이나 비윤리성에 대한 폭로를 위한 도구가 아니다. 피지배 계급은 기만당하고 속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기꺼이 속고 있다. 이제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인 것이 아니라 피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상징권력에 의한 지배는 스스로 기꺼이 지배당하기를 갈망하는 지배이다. 즉 상징폭력, 상징 권력에 의한 지배는 이제 더이상 지배가 아닌 지배이다. 피지배자 또한 지배하며 지배자 또한 지배당한다. 그러나 이러한 언급이 사회 내에 모든 불평등이 사라졌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설명의 의의는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깨끗이 갈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데 있다. 상징폭력은 분명 폭력이며 상징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다시 말해 상징체계는 단순히 중립적인 인식의 도구에서 멈추어 서지 않는다. 행위자가 말하기의 기술을 익히고 사용하게 되는 것은 학교교육에서 이루어지는 상징폭력에 의해서이다. 상징폭력은 언제 말하고 언제 침묵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나는 잡담을 나눌 때는 지도부와 조합, 그리고 지부들 사이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복잡하게 분석하던 그 화자들이, 내가 그들에게 여론조사에서 제기하는 유형의 문제를 제시하자마자 완전히 당황하여, 실제로 상투적인 대답 외에는 아무 말도 못한다는 사실에 부딪히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 질문들은 그들에게 참 거짓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게끔 말하는 방식을 채택하도록 요구하는 것들이었습니다. 학교 제도는 언어를 가르칠 뿐만 아니라, 사물과의 관계, 존재와의 관계, 완전히 비현실화된 세계와의 관계와 관련이 있는 언어와의 관계도 가르치는 것입니다.
?말하기의 의미?,『혼돈을 일으키는 과학』, p.126.
이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피지배계급에게 부과하기 위해 상징폭력이 사용된다는 표현은 기각되어야 한다. 상징권력은 직접적인 행동이나 굴종을 지시하고 명시하는 것이 아니요, 권력자의 한없는 부정축재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합법적인 것은, 지배적이면서도 그 자체로서는 인정받지 못하며 다만 암묵적으로만 인정받는 제도나 행위 또는 관습 속에 있다. 상징권력은 명확히 가시적이고 명확한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암묵적인 것이며 숨겨진 곳에서 나온다. 즉 상징권력은 뚜렷하게 볼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특정한 자본의 분배상태로부터 그리고 그 상태를 유지(혹은 역전)시키려는 전략들로부터 나온다. 권력이 말하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자들로 하여금 보고 말하게끔 하는 것이다.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폭력이 상징폭력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교묘함이 아니라 권력의 질적인 변화이다. “(지배양식의 변화는) 억압 대신에 유혹을 공권력 대신에 공적 관계를 권위 대신에 선전을 강경수단 대신에 온건한 수단을 내세움으로써 규범을 주입하기보다는 욕구를 부과함으로써 피지배계급의 상징적 통합을 추구 (하는 것이다).”『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上』, p.254. 괄호 안은 필자.
또한 일상생활 속에서 벌어지는 계급투쟁 즉 상징투쟁은 각 계급별로 상이한 생활조건에 따른 괴리감에서 시작되는 싸움이 아니다. 언제나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으로 하여금 “역시 돈만 많은 인간들이란....” 이라는 질시 이외에 “역시 저 사람들은 다르긴 달라”라는 감탄사 또한 이끌어내려 해왔다. 그러나 이를 두고 이데올로기를 통한 은폐나 속임수라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지배/피지배 관계의 존속은 특정한 장 내에서 행위자들 모두가 참가하도록 하는 그럴듯한 게임이 지속되는가에 달려 있다. 즉 상징투쟁은 끊임없이 계급이라는 빈자리가 만들어지고 행위자들 모두가 그 자리를 획득하려 하는 투쟁을 의미한다. 지배는 피지배자가 지배자의 행위를 용인하는 식이 아니라, 장에서 벌어지는 게임의 룰에 동의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즉 장 내부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모두가 인정하는 상징자본이 있어서 지배자도 피지배자도 그것을 손에 넣기를 원한다면 하나의 질서가 유지될 것이다. 물론 평온한 경주가 계속된다고 해도 변화는 피할 수 없다. 특정한 자본이 널리 퍼져, 분배구조가 변화하고 더 이상 구별적 이득을 가져오지 못하게 될 때 새로운 상징자본이 등장하고 장의 논리가 변화할 것이다. 물론 이러할 경우 현재의 지배계급이 가장 유리하다. 그는 현재 상징자본으로 오인되고 있는 자본을 이미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전환전략을 구사함이 용이할 것이다. 물론 지배계급 또한 변화하는 장의 논리를 감지하지 못한다면 계급탈락한다.
피지배자는 장의 참가자 모두가 가져야 할 것들을 가지려 하기 때문에 그리고 남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자신도 가지려고 하기 때문에 지배당한다. 즉 뒤처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에 뒤처진다. 이러한 과정에서 상징권력은 무엇인가 획득하기를, 공부하기를, 열심히 하기를 끊임없이 부추긴다. 그 지배는 아주 세련된, 피지배자가 열심히 자신을 지배당하게 해달라고 기꺼이 안달하는 지배이다. 이렇게 해서 상징폭력은 교묘함이나 보다 더 허구적이라는 형용사로는 충분히 이해될 수 없는 지배상태의 유지를 설명한다.
3. 재생산에서 생산으로: 관계 그리고 시간
부르디외가 새로운 장 혹은 구조가 만들어지는 진정한 변혁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떠올려 보자. 이러한 시각은, 부르디외의 도구들과 분석 결과가 날카롭다는 사실은 수긍하지만 변화나 생산에 대해선 미흡한 것으로 평가한다. 이제 각 행위자들이 자율성의 발현, 변혁의 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한 또 다른 이론의 출현을 기다려야 한다. 부르디외는 아래와 같은 고민과 함께 폐기처분되는 것이다.
실천이 아비투스가 구성된 과거의 사회적 조건들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다면, 행위자들이 기꺼이 지배받기를 원한다면 변화 혹은 변혁의 가능성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또한 행위자들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상징폭력에 의해 오인하고 무의식적으로 지배의 논리에 맞추어 실천한다면 구조가 아비투스를 만들고 그 아비투스가 또 구조를 만드는 순환은 어디서 끊어질 것인가.
그러나 그의 모든 개념과 분석이 관계와 시간을 도입하고 있음에 주목한다면 재생산은 생산과 다르지 않다. 아니 재생산:생산, 정태적:역동적이라는 식의 대립항은 허구이다. 이 대립항은 진정한 새로움을 희구하며 새로움을 바람직한 것으로 추켜 세운다. 그러나 새로움이나 변화란 바람직한 것일까? 혹은 지배자들에게 위협적일까? 아니다.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새롭게 모습을 바꾼다. 문제는 그 새로움이 항상 이전의 것들과 뒤섞이고 포섭된다는 점에 있다. 부르디외는 장의 상태에 따라 상징자본이 변하며, 전환전략의 성패에 따라 지배자가 교체되는 모습을 그려낸다. 또한 순수한 피해자 혹은 가해자는 없으며, 항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투쟁은 지배/피지배 관계 안에서의 자리바꿈이라는 것이 폭로되었다. 마찬가지로 가치체계의 전도는, 과거를 현재로 그리고 현재를 미래로 연결시키는 방식, 즉 말 그대로 살아가는 방식이 변했다는 이상의 의미가 아니다. 해방의 도래가 아닌 것이다. 가치체계의 전도 후에도 상징권력은 장 안에서의 행위자들을 길들이고 기꺼이 지배당하게 할 것이요, 아비투스는 실천의 방향을 결정지을 것이다. 불평등은 사라지지 않는다. 게다가 운명은 기계적이고 가시적인 방식이 아니기에 배제나 차별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레 갈라진다. 그러나 이는 선별의 과정이다. 아비투스나 오인 개념은 자연스러운 것이라 받아들여지는 모든 것들이 타협과 희망, 저항과 승인이 뒤섞여 있는 과정임을 밝혀낸다. 궤적은 반복된다. 모든 것은 새롭지만 영원히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3-1. 관계로서의 계급, 사회공간
부르디외에 의하면 계급은 실체가 아니다. 계급이 실체가 아니라는 지적은 그것이 관계적임을 의미한다. 즉 계급은 사회공간에서의 ‘위치’를 의미할 뿐, 어느 특정한 개인을 명명할 수 있는 정형화된 특징이나 속성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계급투쟁이 ‘문화’로까지 이어졌다는 지적은 애매하다. 부르디외의 계급분석은 지배계급이 자신의 부를 은폐하고 과시하기 위해서 그럴싸하게 보이는 사치품을 사들이는 일을 폭로하는 작업이 아니다. 즉 그의 분석을 특정한 계급 성원들에게 특징적으로 관찰되는 실천의 양상을 규정 내리고 a라는 실천=A라는 계급이라는 공식부르디외는 In Other Words에서 이와 같은 독해법을 ‘실재론적’ 이라 칭하고 반대한다. 실재론적 독해는 계급과 개별 실천과의 관계를 고정시키기에 취향의 분석을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든다. “내가 상징적 질서의 자율성을 간과하면서 그것을 단순한 사회질서의 반영으로 환원시키고 있다는 비난은, 『구별짓기』에서의 분석을 실재론적으로 독해하는 데서 기인한다. (중략) 어떤 실천의 의미는 필연적으로 구별적이고 차별적이며, 골프와 舊 부르조아지간의 관계는, 입장들의 공간과 골프라는 행위의 가치가 평가되는 지위들의 공간사이의 관계를 매개로 하여 설정되는 것이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어떤 체계에 대한 動學이 靜學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pp.113~114.
을 도출하는 작업으로 이해해선 안된다. 구별짓기는 계급이나 실천들에 하나씩의 속성을 부여하고 낙인을 찍는 작업이 아니다. 위와 같은 독해는 어떠한 상황에서 왜 그러한 효과들이 나타나는지에 대한 분석을 선언으로 대체하는 오류를 범한다. 실천은 행위자들이 전개하는 전략이요, 그 위치는 항상 유동적이다. 마찬가지로 계급은 실재하지 않는다.“사회적 공간으로부터 나뉘어질 수 있는 계급은, 비록 그들이 개인들을 실천적 집단들, 가족들, 클럽들, 결사체들 그리고 심지어 노동조합 또는 정치적 운동들로서 구성할 가능성을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실재 집단들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 공간과 계급들의 발생?,『상징폭력과 계급재생산』, p.291.
계급은 사회공간 위에서의 위치요, 빈자리로 남아 있어서 주인이 정해져 있지 않다.
사회계급은 단 하나의 특징에 의해서는 규정되지 않으며 여러 특성들(성별, 나이, 출신계급이나 출신종족 등)의 총합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으며, 인과관계 즉 조건지우고 조건지워지는 관계를 맺고 있는 기본 속성(생산관계상의 위치)을 중심으로 짜여진 일련의 속성들에 의해 규정되지도 않는다. 모든 관여적 속성들간의 관계구조에 의해 규정되는데, 이 구조가 각각의 속성과 각 속성이 실천에 행사하는 효과들에 고유한 가치를 부여한다.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上』, pp.183~184.
물론 모든 것이 관계적이라는 말은, 사회적 위치들 그리고 실천들의 속성의 가변성을 잡아내기 위한 것이지만 상대성이나 불확실성과 연결되지는 않는다. 각 행위자들의 실천은 특정한 장 내에서 일정한 속성을 획득한다. 이 속성들 간의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구별적 가치가 생겨나며, 이 구별적 가치에 의해, 사회공간 내에서의 위치가 객관적으로 결정된다.이러한 객관성은 부르디외가 자본의 양과 구성에 방점을 찍고 있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계급을 구성하는 요인이 모두 똑같은 정도로 서로에게 의존하는 것은 아니며, 그것들이 구성하는 체계의 구조는 가장 중요한 함수적 비중을 갖는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자본의 양과 구성은 다른 요인들 (나이, 성별, 주거 등)이 실천들을 결정하는 방식에 구체적인 형식과 가치를 부여한다.”『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上』, pp.185~186.
또한 관계적 성격은 상동성(homology)이라는 개념을 끌어온다. 사회가 상이한 장들의 집합이요, 각 장이 각기 다른 게임의 룰을 지니고 있음에도 장들 간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계급을 분석할 수 있는 것은 상동성 덕택이다. 사회공간은 ‘장들의 열려진 집합으로서의 다차원 공간’이다. 자율적인 룰에 의지하는 장들 간의 상동성은, 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자본주의하에서 존재하는 특정한 장이 돈과 상관없는 완전히 자율적인 공간이라는 환상에 맞선다. 분명 장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들 간에는 위계가 있다. 경제적 생산의 장은 분명 다른 장들을 종속시킨다. 부르조아지 혹은 쁘티 부르조아지, 프롤레타리아트 각각의 실천 또한 그들이 사회공간 내에서 ‘점유’하고 있는 위치에 의해 상동성을 지닌다. 다양한 실천들 속에 존재하는 상동성에 의해 특정 계급 아비투스를 지닌 행위자들은 장을 달리하고 있다 해도 자기편을 구분해낼 수 있다. 이들은 똑같은 ‘물건’을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이러한 해석은 관계로서의 계급을 망각한 것이다― 실천의 ‘생성원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타 계급의 성원과 자기 편을 분류해낼 수 있는 것이다.
상이한 장의 고유한 논리에 따른 재해석을 거쳐 구조화하는 구조(modus operandi)가 생산한 구조화된 산물(opus operatum)로서 나타나는 특정한 행위자의 모든 실천과 작품은 의식적으로 논리적 일관성을 추구하지 않아도 서로 객관적 조화를 이루며, 의식적인 협정 없이도 같은 계급의 성원들 사이에서는 객관적으로 화음을 낼 수 있다.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上』, p.282
이제 각기 다른 장 속의 행위자들은 상이한 이해관계에도 불구하고 연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각 장에서의 특정한 룰과 이해관계에 따라 실천하는 행위자들은 장들 간의 상동성에 의해 장의 경계를 넘어 적과 동지를 식별할 수 있다. 즉 계급동맹이 가능해진다.“상징재생산의 순환과의 단절이라는 문제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다양한 장들 내에서의 위치들 간의 상동성에 근거하여 (그리고 또한 지배자와 피지배자간의 관계에서 불변하거나 대등한 보편적 요소가 존재하기 때문에) 다소 지속적이고 항상 다소간 의식적인 오해에 기반하는 연합이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식인과 산업노동자간의 위치의 상동성―전자는 산업과 무역의 우두머리들과 상대하는 권력의 장에서 위치를 점하고 있는데, 사회공간 내에서 산업노동자들에 의해 점해진 위치들과 상동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점―은 모호한 연합의 근원이다.” ?사회공간과 계급들의 발생?,『상징폭력과 문화재생산』, p.309.
여기서 중요한 점은 상동성을 동일성(Identity)과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혼동은 돈 많은 자가 정치의 장에서도 학문의 장에서도 예술의 장에서도 지배자라는 파악으로 이어질 것이요, 다차원 공간으로서의 사회를 돈 있는 자와 돈 없는 자들 간의 싸움터로 환원시킬 것이다. x라는 행위자와 y라는 행위자는 언제나 바리케이트의 같은 쪽에 있다는 식의 계급동맹은 논리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가능하지 않다.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된다. 會者定離. 상동성 개념에 의해 특수한 상황하에서 상이한 장을 가로지르는 계급투쟁이 항상적인 원칙에 따르지 않고도 즉각적이며 일시적이지만 객관적으로 벌어진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상동성을 동일성과 구분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은 계급투쟁이 일상생활까지 확장되었다는 이론상의 발전이 아니다. 계급투쟁은 본래 상징투쟁이었다. 관계로서의 계급간의 투쟁은 상징투쟁이다. 계급 양극화 모델의 폐기에 이은 중산층 이데올로기의 확산, 직업의 세분화니 정보사회니 하는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나, 화합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말은 모두가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반복된다. 누구나 계급간의 불평등이 상존함을 알고 있고 불만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계급지배가 지속된다. 권력구조의 유지를 둘러싼 수수께끼는 모두가 지배계급이 되고자 하는 전투에 참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악의 원천이 한 줌의 자본가들이라면 계급투쟁은 동일성의 문제이리라. 그러나 상동성에 의지한 계급투쟁은 사닥다리를 오르고자 하는 모든 행위자들 간의 공모에 의해 진행된다. 계급투쟁의 전선은 어떤 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즉각적으로 그리고 행위자들의 어느 정도의 안정된 이익 확장을 위해 그어졌다가 사라진다. 이러한 편가르기는 끝나지 않으며 전투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여기서 상징투쟁을 둘러싼 두 가지의 함정을 피해가자. 먼저, 상징투쟁은 ‘가치관들의 싸움’이 아니다. 만일 사회가 그 물적 토대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맞추어 위험하기도 하고 혹은 안정적이기도 하다고 주장한다면, 사회공간을 단지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공간으로 파악하는, 자유주의적 환상에 빠지는 셈이다. 각 행위자가 보유하고 있는 자본의 분포는 불평등하기 때문에 상징투쟁은 가치관과 의견의 차이 등의 점잖은 단어와는 거리가 먼 치열한 투쟁이다. 동시에, 상징투쟁을 진짜 투쟁이 비경제적인 문화 혹은 상징의 영역까지 확장된 것으로 이해해서도 안된다. 만일 사회공간은 소위 객관적이라서 상징, 담론 등은 경제구조와 비교했을 때 부차적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사회적 사실과 사건을 ‘물상화’시키는 셈이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투쟁들은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 혹은 남에게 가할 수 있는 물리력을 획득하려는 것으로 환원시킬 수 없다. 오히려 모든 투쟁들은 상징투쟁이다. 행위자들이 방어하고자 하는 동시에 탈취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위치’이다. 부르조아지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의 담지자로 행동하지만 동시에 자신 이외의 이들로부터 (비단 프롤레타리아트 뿐 아니라 자신과 같은 계급으로 분류되는 이들에게도) 인정받아야 한다. 상징투쟁은 ‘물질’과의 연관성 속에서만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물질성’을 지닌다.
3-2. 전략 그리고 자율성
부르디외의 ‘전략’은 주체를 부정한다. 합리적 선택이론을 비롯한, 주관주의적 입장과 객관주의적 입장 양자 모두에 반대하는 부르디외는 주체(subject) 대신에 행위자(agent) 개념을 사용한다. 각 행위자는 계산된 목표를 계획적 혹은 의도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닌 실천적 감각을 통해 즉각적인 실천을 행한다. 실천은 특정한 아비투스를 지닌 행위자에 의해 채택되는 전략이다. 전략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자본의 상태와 자신이 속한 장의 상태에 의해 방향지워진 일종의 노선이 전개되는 것인데, 먼저 재생산할 자본의 크기와 구조에 의해 결정되고, 재생산도구들의 상태―상속에 관한 관습과 법의 상태, 노동시장의 상태, 학교제도의 상태 등―에도 좌우된다.
아비투스의 지체현상은 주체 없는 전략을 설명하는 명확한 예가 될 것이다. 누구도 세상이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무지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에 의해 부과된 이데올로기가 그들의 눈을 가리고 현실을 은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행위자들은 스스로 상황을 파악하고 실천한다. 부르디외는 ‘학력인플레이션’에 의한 여러 현상들을 분석하면서 아비투스의 지체현상을 언급하고 있다. 아비투스의 지체현상은 이미 가치하락된 학위의 소유자들이 공모하여 학위를 그들 스스로 신비화시키는 것이다. 즉 가치하락된 학력자격에다 객관적으로는 인정되지 않는 가치를 부여한다. 학력의 가치하락이 행위자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히리라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학위를 취득한 행위자는 그것을 부정하기보다는 그 위에 더 많은 것을 덧붙이고 신비화하기도 한다. 대학졸업장 만으로 취직하기 힘들 때, 그는 그 위에다 영어회화, 어학연수, 심지어 창의력, 비판정신, 패기, 운 등의 조건을 쌓아올릴 망정 자신이 획득한 ‘문화자본’을 부정하지는 않는 것이다. 혹자 曰, “요즘 아무리 대학 나와도 취직하기 힘들다고 해도, 대학 물먹은 사람과 아닌 사람들 뭐가 달라도 달라.” “대학시절은 나에게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 보는 시각을 주었다.” 등등, 이러한 모든 개인적집단적 오인의 효과들은 환상이 아니라 실질적인데, 개인적집단적 전략들을 조정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 속에 이미 각인된 아비투스를 지니는 개인들은 각각 자신의 상태―자신이 지니고 있는 자본, 그들이 속한 장―에 따라 실제상황을 재조직하며, 이에 기꺼이 상황을 오인한다. 물론 부르디외는 아비투스의 지체현상에 의한 오인을 잘못된 인식 혹은 오류라 주장하지 않는다. 아비투스의 지체현상은 모든 개인들이 오인하며, 그것이 자신의 성향과 자신이 보유한 자본에 따라 고정된 면에서 다른 모든 이들의 오인과 다를 것이 없다. 오인이 올바름과 대비되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에 그 고정된 혹은 승인하는 방식이나 정도에 따라 수많은 오인이 있을 수 있으며 실천은 예측 불가능하다. 행위자는 자신이 지니는 자본, 자신이 속한 장의 상황에 따라 오인한다.
이처럼 이미 정해진 객관적인 노선들의 전개로서의 전략개념은 각 행위자의 실천이 주관적 기대와 객관적 기회 사이의 불확실하고 불균형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행위자는 구조의 담지자 혹은 특정한 본질의 수행자가 아니다. 그는 끊임없이 예측하며, 투자한다. 이러한 예측과 투자가 실천을 결정짓는 핵심적인 부분이요, 이 때문에 행위자는 실천감각에 의해―하나의 본질로는 해명될 수 없는 ―실천을 계속한다. 개인 혹은 특정 집단은 전략을 이용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자본을 보존하거나 증대시키며, 자신의 사회공간 위에서의 위치를 유지하거나 개선하려 한다. 아비투스는 자신을 생성시킨 과거의 조건을 현재 상황과 연결시키는데, 이 작업은 변화에 대해 방어하려는 양상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자신이 지니고 있는 자본과 현재 상황에 따라 놀라운 변신을 이끌어 낼 수도 있다. 물론 그 놀라운 변신조차도 정해진 노선들의 전개이다. 놀라운 속도로 변화하고 탈바꿈하지만 정해진 궤도를 겪는 사회, 아비투스에 의한 자동적인 조정이 이루어지는 장, 각 행위자들이 모두 노력하고 변화하려 열심인 모습이 부르디외가 주체없는 전략을 통해 설명하는 현대이다. 변화와 진보, 안정과 보수가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서 주체없는 전략이라는 표현도 그리 어색하지만은 않다.
주체의 부정은 인간을 허수아비로 전락시키는 것일까? 부르디외는, 주체를 부정하고 즉각적인 실천감각에 의한 전략 개념에 의지한 분석이 인간의 자율성을 침해한다는 지적에 대해 아래와 같이 답한다.
사회의 법칙에 대한 지식의 발전이 지각된 필연성의 정도를 고양시킨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사회과학이 진척되면 될수록 그 만큼 더 ‘결정론’이라는 비난을 자초하게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중략) 알려지지 않은 법칙은 하나의 자연이고 운명입니다. 그러나 알려진 법칙은 자유의 가능성으로 나타납니다.
?문제의 대상이 된 사회학자?,『혼돈을 일으키는 과학』, pp.59~60.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고 떠올려보자. 무슨 일을 해도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면 그것은 자유로움이다. 반대로 모든 것이 비결정 상태라고 하면 행위자들은 무엇이든 결정짓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결정은 ‘자유’와, ‘비결정’은 ‘조바심 혹은 기존가치에의 종속’과 연결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언급이 결정과 비결정에 대한 새로운 정의내리기를 시도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를 통해 자유의지 대 결정이라는 대립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대립항에 의지해 이루어지는 작업은 얼마나 많은가. 그 대표적인 예로, 아주 중립적이며 점잖은 말투로 억압되고 눌려 있는 주체들 속에 자율성이 살아 있다는 충고의 말을 수없이 들어왔다. 본래 자율성을 지닌 존재들이니 자유로우라고? 결정에서 벗어난 순수한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세계 내에서 말 그대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곳에도 없다. 오히려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결정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결정론은 자유를 위한 조건으로 변모한다. 아비투스는 결정되어 있는 동시에 자유롭기도 한 주체를 설명하기 위한 매개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행위자가 어떻게 결정되어 있는가를 말함으로써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한다.
3-3. 시간 그리고 가치체계의 전도
재생산. 사회가 개선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면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가 구미에 맞는 개인들을 찍어내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면 그 메카니즘은 무엇인가. 전술했듯, 지배구조가 재생산된다는 것은 변화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방식의 오인이 계속되고 행위자들이 같은 궤적을 따름을 의미한다. 즉 불평등한 자본의 분배의 유지와 그의 재생산은 행위자들이 특정한 가치체계를 공유하고 있을 때 가능하다.“바로 뒤에서 자신을 뒤쫓고 있는 사람들과 거리를 유지하고, 앞서 달리고 있는 사람들과의 차이를 위협할 수 있을 때에만이 자신의 위치, 희소가치, 서열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 앞에 뛰고 있는 집단이 지금 소유하고 있으며, 나중에 언젠가는 자신들이 손에 넣게 될 것을 소유하려고 열망할 때만 그럴 수 있다.”『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上』, p.267.
가치체계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선행자가 이미 지나간 자리를 뒤쫓는 후발자는 그를 따라잡을 수 없다. 마치 제논의 역설과도 같이 두 걸음 다가서면 한 걸음 물러나고, 한 걸음 다가서면 반 걸음 물러나고. 그렇다면 영원히 반복될 이 저주받은 게임을 멈추기 위해서는, 다른 길을 가야 한다. 다시 말해 가치체계의 전도가 필요하게 된다. 부르디외는 변혁을 위해서는 객관적 기회에 묶여 있는 주관적 기대를 풀어내야 함을 지적한다.
주관적 기대와 관련한 객관적 기회의 갑작스런 감퇴는 이전에 피지배계급들이 암묵적으로 받아들였던 지배계급의 목표에 대한 동의의 단절을 초래해 그 결과 진정한 의미의 가치체계의 전복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上』, p 267.
이 알쏭달쏭한 말을 풀어보자. 부르디외는 주관과 객관을 넘나드는 작업을 계속해서 진행해 왔다. 먼저 주관적인 기대는 객관적이기도 하다. 이는 자신의 몸 안에 각인되어 있는 아비투스가 구조화된 구조라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즉 아비투스는 이전의 사회적 조건에 의해 만들어진다. 주관적 기대가 변화한다는 말은 지금 자신의 내부에서 존재하며 작동하는 객관적인 것을 조정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또한 객관적 기회는 주관적이기도 한데―아비투스는 구조화하는 구조이기도 하다―각 행위자들이 자신의 주관적 기대와 연결시키지 않는다면 개개인의 실천의 결과물인 객관적 기회들은 만들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객관적:주관적이라는 구분은 사회적:개인적이라는 대립항과 연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열쇠는 아비투스가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의 간격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데에 놓여 있다. 아비투스는 미래로 이어지는 현재의 과거이다. 몸에 각인되어 있는 생성도식을 만들어낸 과거의 생활조건과 무의식적인 실천적 감각이 펼치는 실천이 만들어내고 있는 현재의 조건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개인과 구조라는 식의 공허한 간격이 아니라 ‘시간’인 것이다. 행위자들은 과거를 현재 속에 간직하고 있으며 미래 또한 품고 있다. 그러나 과거는 행위자가 기억하는 부분만이 남아 있으며, 미래는 현재의 실천에 의해 실현될 수 있을 만큼만 존재할 것이다. 전략을 통해 행위자는 현재 속에 뒤엉켜져 있는 과거와 미래를 재구성한다. 앞에서 설명했던 아비투스의 지체현상은 과거를 그대로 현재와 미래에 투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아비투스가 과거?현재?미래를 조정하는 한 예이다. 특정 장에서의 행위자의 실천은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자신이 지니고 있는 자본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를 순간 결정하는 행위이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이용 가능한 과거와 예측할 수 있는 미래를 연결시키는 것이다. 이 연결은 여러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에 행위자의 실천은 기계적으로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발명된다. 그러나 이 실천의 발명이 행위자의 판단에 비교적 안정적인 전략―자본의 상태와 장의 상태에 의해 이미 방향지워진 노선―에 의지하여 그 테두리내에서 반복될때 지배는 고착화된다. 가치체계의 전도, 새로운 장의 출현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속에서 과거를 미래와 연결시키는 새로운 방식이 등장했음을 말한다. 오인의 극복은 은폐되어 있는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꿈꾸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가 구상하는 (그에게 구상하도록 하는) 특정한 미래를 버릴 때, 불확실성에 자신을 내맡길 때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하나의 오인에 뒤를 이은 또 다른 오인의 출현이다. 그것이 혁명이든, 생활공동체의 건설이든, 창업이든 간에, 이는 새로운 게임이 시작되는 것이다. 물론 전도의 과정은 힘겨울 것이다. 사회내에 온존하는 불평등한 자본의 분배구조, 장의 논리를 바꾸는 작업의 지난함은 지배자들의 방해뿐 만이 아니라 스스로와의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부르디외는 ‘가치체계의 전도’를, 이미 익숙해진 모든 것들이 혐오(嫌惡)로 변하고, 자명한 것들은 모두 불확실해지는, 고통스러운 과정으로 스케치하고 있다.
개연적인 관계들에 대한 인식이 이들에 대한 승인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도록 주어진 것에의 애착을 중단해야 한다. 이리하여 운명애는 오디움 파티 즉 자신의 운명에 대한 증오로 전변된다.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上』, p.396.
여기서 앞에서의 언급, 행위자를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결정하고 있는 것들을 폭로하는 것이 자유의 조건으로 변모한다는 ‘결정과 자유의 역설’을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이 결정되어 있음을 알 때 자유는 가능하다. 또한 자유는 결정된 것에서 벗어난 비결정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익숙한 모든 것들을 떠남으로써, 이미 있었으되 보지 않았던 것을 봄으로써 미래를 다른 모습으로 결정하려는 시도이다.
변혁은 특정한 하나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말로는 설명될 수 없다. 사회는 끊임없이 변동한다. 계급관계의 본질이나 특정한 계급적 실천의 속성은 없다. 모든 것은 관계적이며 기존의 모든 것들은 파괴되고 다시금 세워진다. 이렇게 끊임없는 생산을 재생산으로 보이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스스로 발명한 새로운 실천을 기존의 것들(사물화된 역사인 장, 자신이 보유한 자본을 안정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전략 등)에 포섭시키는 행위자의 성향이다. 아비투스는 이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며, 변혁은 사건의 해결이나 모순의 종결이 아니라 어긋남을 통한 새로운 게임의 시작을 의미한다.
4. 진리와 반역
부르디외는 소위 말해지는 비판적 분석가가 아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두 가지이다. 첫째 부르디외에게 붙여진 소위 ‘비판적’이라는 형용사가, 이론이 비판적일 수 있는 조건을 몇 가지로 정의내리고, 특정한 방법론이나 관점에 대해 A는 현실옹호이고 B는 비판이라는 식으로 낙인찍는 방식에 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묘해지는 지배방식에 대한 폭로, 인간 자율성의 복구, 재생산 이론가로서의 한계 등의 평가는 부르디외의 작업과 연결되기 힘든 기준을 사용한 것이다. 둘째, 부르디외는 소위 비판적 학문들에 대해 강하게 반발한다. 사실 ‘부르디외는 무엇을 위해 작업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그 이유는 소위 비판적 이론이 갖추고 있는 폭로―비판―개선으로 이어지는 미래에의 청사진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돌이켜보자. 자신의 분석에 비판 혹은 진리라는 낱말을 붙이기를 거부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다. 오히려 비판적이여야 한다는 것은 요즈음 학자들이 갖추어야 하는 덕목이다. 이제 이론은 균형 외에도 변화를, 안정뿐 아니라 저항도 설명해야 한다. 사회과학이 사회를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하고 만들어가려는 사회공학으로 출발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여전히 사회과학은 사회를 올바르게 만들어갈 수 있는 도구로서의 진리에 다다르고자 한다. 진리라는 이름으로 사회를 질책하는 것은 모든 지식인?학자의 꿈이요, 이를 위한 도구로서 사회분석을 사고하는 것도 뿌리깊은 바램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배경 속에서 비판은 본래의 의미를 잃었다. 이제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 약간은 비판적이여야 하며, 비판력은 하나의 덕목으로 타락했다. 부르디외는 비판할 수 있는 그리고 비판해야만 하는 사람으로서의 학자?지식인이라는 위상을 문제로 삼는다.“지식인은 구속도 뿌리도 지니지 않는 환상 속에서 있지 않다. 어쩌면 그것은 지식인들이 지니는 직업적인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자유로운 지식인들을 어떻게 해방할 것인가??,『혼돈을 일으키는 과학』, p.88.
특정한 실천은 비판적일 수 있으나, 비판적 지식인?비판적 관점?비판적 이론은 없다. 자칭 타칭의 비판적 지식인은, 특히 학문함을 사회변혁과 연결시키려는 지향을 지녔다면 더욱 더, 사람들에게 의미를 부여해주거나,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공해주거나 투쟁을 (객관적 정세에 따라선 침묵을) 선동하고 조직하기를 기대한다. 억압받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대신 말해주거나―이를 위해 특정 구조나 사회의 희생자들을 상정한다―혹은 억압의 상황 속에서도 능동적으로 삶을 개척하는 이들을 고무한다―이를 위해 각 주체들을 자율성과 창의성을 지닌 주체들로 규정한다.
부르디외는, 현실을 보다 잘 설명해줄 수 있는가를 둘러싼 경쟁에서 도출되었던 모델들을 거부한다. 이러한 이론적 논리(logical logic) 대신에 실천논리(practical logic)가 등장한다. 이론적 논리(logical logic)의 테두리내에서 사회과학자는 객관적인 관찰자로서 행위자들의 실천을 설명해 왔으며 자신이 연구대상과 맺는 관계에서 나오는 특수한 원칙을 연구대상인 행위자들의 것이라고 파악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려왔다. 그러나 이론적 논리(logical logic)는 세계에 대한 특정한 관계에 불과한 것, 엄밀히 말해 연구자 자신의 시선에 비추어진 세계를 그 ‘세계 자체’인 것처럼 속여 왔던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작업의 도구이자 결과인 이론은 진리를 향한 순수한 실천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사회내에 관철되는 규칙이 있어서 행위를 예측할 수 있다거나 행위자들의 자율적인 행위들의 총합이 사회를 구성한다는 식의 설명이다. 이러한 입장들은 그 연구작업 자체가 현 상황을 고정화시키고 중립시키는 이론화 효과를 발휘한다. 올바른 방법론 혹은 모델이란 학계에서의 구별적 이익을 낳는 상징자본에 불과하다.
이렇게 본다면 비판적 혹은 엄밀한 방법론이라는 구별적 이익을 획득한 이론은 학계의 상황에서 결정되며, 학문함은 학문의 장에서 특정한 학계의 관행(게임의 룰)에 따라 정해진 전략을 구사하는 실천에 다름아니다. 학자들 또한 오인한다. 물론 그는 특정한 이념에 기댐을 통해서, 때때로 억압받는 자들을 위해 혹은 개인들의 능동성이나 소외된 자들의 역사를 대신 써줌을 통해 기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이미 입밖에 내는 것이 허락된 진리를 말하고 그것에 기대어 서는 승인일 뿐이다. 한때 비판적이었던 입장들이 어느덧 대학 내의 학과나 수업이라는 진열장 속에 얌전히 들어앉는 쇠락의 과정을 보라. 어느 순간 반역의 역할을 담당했던 진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상징폭력이 행사되는 수단으로 복무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지식인의 발언권이 그가 비판했던 부조리한 상황이 그에게 부여해준 위임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챌 때에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에 대한 사유의 독점을 열망하는 사람들(지식인)은 사회학적으로 사유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런데 내가 볼 때는, 그 게임(사회를 말하는 적절하고도 정당하며 합법적인 방식을 강제하기 위해 투쟁하는 영역 즉 학문의 영역)에서 무엇이 행해지는지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는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 이로운 사람들, 다시 말해 지식인들과 대변인에게 자신의 이익을 옹호 해달라고 위임한 사람들은 질문을 제기할 수단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또한 이러한 위임으로부터 혜택을 입는 사람들이 질문을 제기하는 데에서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하기 때문에 더더욱 필요합니다. 지식인들이 사실상의 위임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신중히 고려해야 합니다.
?지식인들은 게임의 규칙에서 벗어나 있는가??,『혼돈을 일으키는 과학』, p.80.
학자는 승인함으로써 오인하고 그래서 인정한다. 이제 학계는 그 자체로 분석되어야 하며, 학자는 특정한 사상을 전파함을 멈추고 끊임없이 자신의 오인을 또 다른 오인으로 대체해야 한다. 그 자신이 발언할 수 있는 조건의 파괴. 끊임없이 이어져야 할 오인. 이 과정에서 오인을 올바른 인식으로 대체할 수는 없다. 학문의 장에서 유행이 바뀌고 새로운 사조가 등장하는 것은 특정한 오인이 다른 것으로 대체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학자가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 하는 일은 그 견딜만한 속도의 사이클을 가속화시키는 일뿐이다. 지금은 온당한 것으로 보이는 가치체계를 전도시키는 일. 위임의 권리를 포기하는 일. 자연스러운 변화나 바람직한 발전의 시간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물론 한번의 제대로 된 일탈이 그를 계속 비판의 땅에 머무르게 할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헛된 바램이다.
사회내에 상존하는 억압과 불평등은 항상적인 투쟁과 저항을 야기시킬 것이다. 그러나 모든 투쟁과 저항이 봉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행위자는 이미 객관적 현실과 공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 분석은 이러한 양 측면 모두를 긍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분석자는 사회의 특정한 부분을 고치고 개선하기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도 자기 자신 이외의 사람 또는 이념에 의해 해방될 수는 없을 것이요, 지식인들은 누군가를 해방시킬 진리를 만들어 낼 수 없다. 저항이라는 개념이 일회적인 혁명으로 모든 분야에서 일시적인 변화를 이루어낼 수 없다는 의미에서 중요하다면, 학자의 현실 분석 또한 하나의 저항으로 의의를 부여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분석은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이는 또 다른 모습의 지배를 유지시키는 수단이 될 것이다. 이러한 쳇바퀴 돌기와도 같은 반복 속에서 부르디외는 자신의 작업의 의의를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각자에게 고유의 수사학을 수립하는 방법을 제공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이 진정한 대변인이 될 수 있는 방법,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방법을 제공한다는 것은 분명 모든 대변인들의 야망일 것입니다. 그들이 만약 자신은 사라지기 위해 일한다는 계획을 스스로에게 부과한다면, 아마 그들은 현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될 것입니다. 이번만은 정말 꿈꿀 수 있습니다. ?말에 저항하는 방법?,『혼돈을 일으키는 과학』, p.27.
지식인은 사라지기 위해 일해야 한다. 해방이 스스로의 과업이듯 지식인은 자신 이외의 누구도 해방시킬 수 없다. 그 대신 현존하는 지배/피지배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임권을 파괴하기 위해 일하기, 사라지기 위해서 일한다는 지향은,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확정지우며 상징폭력을 생산하는 지식인의 위상을 떨쳐내기 위한 기획, 변혁을 위한 기획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식인은 특정한 권력관계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그 속에서 자리매김된 자신의 위치를 변화시키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그것에 진리라는 이름을 붙일 순 없다. 모든 분석은 누군가에 의해 저항을 위한 도구로 채택될 수 있을 망정, 따라야만 하는 교시나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식인의 이론이나 분석은 다른 모든 이들의 실천과 다를 것이 없는 하나의 실천에 불과하다.
이제 서두에서 밝혔던, 소위 ‘비판적’ 부르디외에 대한 반론을 정리해보자. 부르디외는 계급개념을 확장하여 일상생활이 계급투쟁의 전장임을 천명한 것이 아니다. 계급분석은 문화 혹은 일상생활에서 갈라지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상이한 취향과 그 취향에 따라 나타나는 전형적인 실천을 구분하여 일람표를 만들어내는데에 멈추지 않는다. 물론 그는 문화를 권력의 문제로 바라본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가 확장되어 문화를 포섭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까지 정치를 바라보던 시각, 다시 말해 지배자들의 손아귀에 있는 권력이나 지배의 수단만을 문제로 삼는 시각으로 일상을 바라보아서는 안된다. 지배자들의 생활양식을 폭로하는 일, 즉 A라는 음악 = 부르조아지, B라는 음악 = 프롤레타리아트 라는 공식은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지배의 도구가 폭로되어 스스로를 구별시켜주지 못할 때가 되면, 지배계급은 이미 또 다른 도구를 마련할 것이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지배의 비밀을 쫓는 숨바꼭질 대신에 부르디외의 분석은 상징투쟁이 벌어지는 양상을 분석한다. 계급투쟁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관계 속에서 각자의 위치를 점하기 위한 투쟁 즉 상징투쟁의 과정이다. 이 상징투쟁은 경제?정치?문화 등의 칸막이쳐진 영역 모두를 포괄한다. 부르디외의 자본 개념은 실천이 일어나는 장 속에서 자신의 자본을 확장하고 상징자본을 규정내리며 획득하려는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을 분석하기 위한 도구이다. 이는 고정된 계급 행위자들이 독점하고 있는 비밀스러운 ‘무엇’을 폭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쫓고 쫓기는 급박한 경주는, 누가 앞에 있으며 그가 무엇을 지니고 있는가를 만천하에 폭로하여 끝나지 않는다. 행위자들은 이미 불평등함을 알고 있다. 특정 장 내에서만 인정받는 자본인 상징자본과, 모든 행위자들 사이에서 공유되어 장을 유지시키는 게임의 룰이 무엇인가를 밝힘으로써 지배/피지배를 설명할 수 있다. 지배자의 억압과 피지배자의 고통이라는 대비로 계급투쟁을 설명할 수 없다. 나름대로 자신의 위치를 상승시키거나 고수하려는 각각의 실천과 전략들의 결과로 지배는 계속된다. 눌린 자를 자각시켜야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의 노력, 적극성이 어떻게 굴절되고 있는가, 그의 불만, 분노를 포함하는 인식이 어떻게 공모하고 있는가가 문제이다.
구조와 개인 사이를 매개한다는 설명을 고집한다면, 아비투스는 절충 개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즉 결정론의 시각에서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시각에서도 만족스럽지 않다. 아비투스는 자유와 결정론이 대립하는 틀내에서는 자리매김될 수 없다. 구조화된, 구조화하는 구조인 아비투스는, 미래와 이어지는 현재의 과거로서, 끊임없는 변화가 질서 속에 포섭되는 과정을 고찰하기 위한 도구이다. 행위자가 주관적 기대와 객관적 조건을 연결하고 불확실함에 투자하는 순간에 실천감각이 작동한다. 실천감각의 작동은 즉각적이다. 아비투스에 의한 실천의 조정은 무의식적인 것이기 때문에, 한없이 자유롭고 규칙에 얽매이지 않은 듯한 곳에서 가장 완벽한 지배는 지속된다. 이와 같은 분석은 아비투스의 자연스러움을 거북하게 한다. 이 불쾌한 분석, 아비투스의 결정론은 이미 결정된 것들을 밝혀냄으로써 지배의 순환을 끊고 새로운 게임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자유의 조건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고찰되는 변혁이 흔히 말하는 진정한 변혁이나 해방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밝혀두어야 겠다. 변혁은 단지 새로운 룰에 의한 게임의 시작을 의미한다. 아비투스는 엄청난 격동조차 삼켜버리며 그 지배는 영원하다. 행위자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에게 각인된 과거의 조건을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연결시킨다. 부르디외가 말하는 변혁은 끊임없는 이어져야할 어긋남, 항상 미완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일탈 이상이 아니다.
오인, 상징권력 개념은 이데올로기나 지배의 교묘한 속임수를 폭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만일 지배상태가 사회내의 구조적 모순을 은폐한다면 올바른 인식을 위한 방법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옳음과 그름을 명확히 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내올 수 있는 올바른 인식은 있을 수 없다. 오인이나 상징권력은 관계 속에서 나오며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행위자 모두가 실천하기 위해 자신의 마주하는 상황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승인하며 그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모든 인식은 오인이다. 상징권력은 가시적인 형태로 명령내리고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숨겨져 있고 암묵적이기에 효과를 지닌다. 이러한 파악을 통해 완벽한 수혜자나 완벽한 피해자란 없으며 모두의 공모에 의해 장 안에서의 게임이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과정은 불평등한 자본의 분배상태, 지배/피지배 상황 등에 대한 암묵적 승인을 포함한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한 행위자의 실천을 지배상태에 대한 일관되고 완벽한 저항이나 옹호 중 하나로 깨끗이 갈라놓을 수 없다. 모든 인식이 오인이며 언제나 미완성이라는 사실은, 변혁(저항)이 고착화된 하나의 지배상태의 한 측면 대한 반대일 수 있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새로운 지배를 용인하고 공고히 하는 상징권력으로 작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나의 오인에 이어 나타나는 또 다른 오인은 장에서 벌어졌던 모든 전략들의 결과이며 이미 현실 속에 배태되어 있다. 또한 전략의 결과로 변화된 또 하나의 현재 속에서 과거의 비판은 상징폭력의 기반으로 변모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부르디외의 분석 속에서 진정한 변화, 변혁을 위한 조언을 찾으려 한다면 헛수고이다. 그가 말하는 반역은 그 앞에 놓인 것이 무엇이든간에 그것을 넘어서는 실천과 스스로가 꿈꾸는 특정한 미래에서 벗어나는 고통스러움을 의미한다. 해결해야 할 문제점과 그 이후 도달하게 될 저쪽 편, 그리고 그 이행의 방법을 찾아 낼 수는 없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비판하고자 하는 그리고 반역을 꿈꾸는 기존의 바램을 반역한다. 오히려 그의 분석은 숨가쁘게 도착한 종착점에 다시 출발선을 그어놓는다. 비판 혹은 진리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 이 점이 그의 분석에 ‘비판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이기 힘겨운 이유이자, 그에 대한 독해가 다른 길을 가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참고문헌>
P. Bourdieu, 1994,『혼돈을 일으키는 과학』, 문경자 역, 솔.
― , 1995,『상징폭력과 문화재생산』, 정일준 편역, 새물결.
― , 1995,『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上』, 최종철 역, 새물결.
― , 1990, In Other Words : Essay toward a Reflexive Sociology,
Stanford Univ. Polity Press.
― , 1990, The Logic of Practice, Stanford Univ. Polity Press.
R. Jenkins, 1992, Pierre Bourdieu , London; New York: Rout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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