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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2/철학

철학과 라이프니츠

by FraisGout 2020. 5. 28.

1rd LESSON
198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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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의 주요 개념 : 포함과 공가능성  


개념 창조로서의 철학과 라이프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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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념은 사유의 흐름에서 채취된 특이성들의 체계. 철학자는 개념들을 제작하는fabriquer 사람. ---- 일종의 내면적 독백(사유하는 모든 이의 내면적 독백)으로서의 보편적 사고 흐름. 
(2-2)그것은 철학을 진리 탐구[찾기]로 정의하는 문제가 아니다. 진리는 언제나 우리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개념들의 체계에 종속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비철학자들에 대한 철학자의 중요성? --- 
(2-3)나는 칸트의 이름을 그의 삶에서가 아니라 칸트라고 싸인된 특정한 개념 유형에서 확인[재인식]한다. --- 네가 필요를 느끼는 개념들에 이러저러한 철학자가 싸인했다고 말하는 위치에 있다면, 그때 너는 칸트주의자, 라이프니츠주의자 등이 된다. 
(2-4)---- 우리는 국부적으로 [한 철학자의] 제자일 수 있다, 이러저러한 점에서만. --- 개념들은 정신적 서명들이다. 그러나 이것이 머리 속에 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개념들은 삶의 방식이기 때문에. ---- 활동은 반성적 차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창조 활동에 의해 정의된다.  
(2-5)이 개념 혹은 저 개념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개념은 살아 있는 것이다. 그것은 네발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움직인다. 그것은 색과 같고 소리와 같다. 개념은 살아 있어서 개념에서 가장 먼 것으로 보이는 것, 즉 외침[비명]과 무관하지 않다. 
어떤 면에서 철학자는 노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외치는 사람이다. 네가 외칠 필요가 있을 때마다 너는 일종의 철학에의 호소appel로부터 멀리 있지 않은 것이다. 개념이 일종의 외침, 일종의 외침의 형식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개념을 필요로 한다는 것, 즉 외칠 무언인가가 있다는 것. 우리는 이 외침의 개념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는 수천 가지 것들을 외칠 수 있다. 외치는 누군가를 상상해 보라 : “모든 것은 이유를 가져야 한다.” 이것은 아주 단순한 외침이다. 나의 정의로 개념은 외침의 형식이다, 우리는 “yes, yes”라고 말할 일련의 철학자들을 즉각 본다. 이들은 로고스의 철학자들과 구별되는 정념, 파토스의 철학자들. 예컨대, 키에르케고어. 
(2-7)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위대한 합리주의 전통에 속한다. --- 그는 질서의, 치안[도시행정/질서유지/경찰]police의 철학자. 특히, police라는 단어의 첫 번째 의미, 즉 도시의 질서정연한 조직화의 의미에서. 그는 질서의 견지에서만 사유한다. 그러나 아주 이상하게 이런 질서의, 질서를 기초지으려는 취향 속에서, 그는 우리가 철학에서 목격한 것 중 가장 광적인 개념 창조에 몸을 맡긴다. 존재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흐트러진disheveled 개념들, 가장 풍부한[무성한]exuberant 개념들, 가장 무질서하고 가장 복잡한[복합적] 개념들을.   

(3-1)두 종류의 철학자들이 있다. 두 극. 아주 냉정한sober 개념 창조에 종사하는 철학자들과 광분한[격노한] 철학자들. 전자는 다른 것과 잘 구별된 특정한 특이성의 수준에서 개념을 창조한다. ----
(3-2)후자에게 있어, 각 개념은 특이성들의 집합[전체]를 주파한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언제나 다른 개념들이 있어야 한다. 광적인 개념 창조. 전형적인 예는 라이프니츠. 그는 결코 새로운 것을 창조하지 않았다. 
(3-3)그는 독일어의 개념으로서의 능력에 대해 반성한 최초의 철학자. 독일어는 탁월하게 개념적인 언어이므로, 그것이 위대한 외침의 언어일 수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다양한 활동―그는 모든 것에 종사한다―, 위대한 수학자, 위대한 물리학자, 훌륭한 법학자, 많은 정치 활동, 언제나 질서를 위해서au service de. 그는 멈추지 않는다, 그는 아주 수상[응흉]하다. 라이프니츠의 스피노자 방문. ---- 기회주의자. 
(3-4)그는 일종의 악마적 유머를 가졌다. 그의 체계는 피라미드적이다. 라이프니츠의 거대한 체계는 여러 수준을 갖는다. 이 수준들 중 어느 것도 틀리지 않다, 이 수준들을 서로를 상징화한다, 라이프니츠는 활동과 사유를 거대한 상징화로 생각한 최초의 위대한 철학자. 
(3-5)그러므로 이 모든 수준들은 상징화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가 잠정적으로 절대자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크든 작든 가깝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저작 자체의 일부를 이룬다. -- 그는 자신의 모든 체계를 특정 수준에서 제시했다. 그의 체계가 다소 수축되었거나 다소 이완된 수준들로 만들어진다고 상상해 보라. --- 이 수준들은 라이프니츠의 텍스트[구절] 자체의 일부를 이룬다, 그것은 중요한 주석의 문제를 만든다. 우리가 우선 이 구절이 어떤 체계의 수준에 상응하는지 감지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라이프니츠의 구절에 의존할 수 없다. 
(4-1)예컨대, 영혼과 신체의 합일 문제와 영혼들 서로 간의 관계 문제. 이것은 체계의 두 수준. ----
(4-2)내가 제안할 것의 각 부분들에 타이틀을 붙이고 싶다. 주된 1)은 “사유의 괴짜”. ---- 게임 이론과 개연성 이론. --- 그는 자신이 동시에 존재해야 하는 것으로 제시하는 게임 아카데미를 상상. 왜 동시에 존재해야 하는가? 우리가 이 제도를 보기 위해서, 혹은 그것에 참여하기 위해서 자리하는 관점에 따라서, 그것은 동시에 과학 아카데미의 섹션이자, 동?식물원이자, 세계  박람회장이자, 도박하는 카지노이자, 경찰 통제 enterprise일 것이기 때문에. 그는 이것을 “사유의 괴짜”라고 불렀다. 
(4-3)내가 너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이야기는 라이프니츠 철학의 중심적인 점들 중 하나를 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마치 또 다른 세계에 대한 묘사인 듯이 이야기한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또한 ‘사유의 괴짜’를 형성하게 될 주요 명제들에 번호를 매긴다.  


동일성 원리 
(4-4) A) 사유의 흐름은 아주 특수한 특징을 갖는―그 원리는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원리들 중 하나인 동시에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알려 주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유명한 원리를 실어 온다[초래한다]. 그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것은 공허하다vide. 그 유명한 원리는 동일성 원리. 동일성 원리는 고전적 정식, <A는 A이다>를 갖는다. 그것은 확실하다. 내가 파랑은 파랑이고 신은 신이라고 말한다면, 그를 통해 나는 신이 실존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내가 확신한다는 의미에서. 여기에는 오로지 다음과 같은 것만이 있다 : 내가 <A는 A이다>라고 말할 때 나는 어떤 것을 생각[사유]하는가, 생각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동일성 원리가 실어 오는[초래하는] 것을 말해 보자. 그것은 환위reciproque 명제의 형태로 제시된다. <A는 A이다>는 주어A, 동사 ‘이다’, 속성 혹은 술어 A를 뜻한다. 주어와 술어의 환위성[상호성]이 있다. <파랑은 파랑이다>와 <삼각형은 삼각형이다> 등은 공허하고 확실한 명제들이다. 그것이 전부인가? 모든 자기-동일적 명제는 속성이나 술어가 주어와 같은 것이고 주어와 환위되는 명제이다. 다소 보다 복잡한[복합적인], 즉 동일성 원리가 환위 명제만은 아닌 명제를 결정할 수 있는 두 번째 경우가 있다. 더 이상 술어의 주어와의, 주어의 술어와의 환위성만이 있지는 않다. 내가 <삼각형은 세 변을 갖는다>고 말한다고 자정해 보자. 이것은 <삼각형은 세 변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삼각형은 세 각을 갖는다>는 자기-동일적 명제이다, 환위적이기 때문에. <삼격형은 세 변을 갖는다>는 환위적이지 않다. 주어와 술어의 동일성은 없다. 사실 <세 변>은 <세 각>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논리적인 필연성이 있다. 이 논리적 필연성은 네가 하나의 도형을 구성하는 세 각을, 그 도형이 세 변을 갖지 않는다면, 생각할concevoir 수 없다는 것이다. 환위성이 아니라 포함inclusion이 있다. 세 변은 삼각형에 포함된다. 내속 혹은 포함. 
(4-5)마찬가지로, 내가 <물질은 물질이다>라고 말한다면, <물질은 물질이다>는 환위 명제 형태의 자기-동일적 명제이다. 주어는 술어와 동일하다identique. 만일 내가 <물질은 연장된다>고 말한다면, 이것 또한 자기-동일적 명제이다, 나는 연장을 도입하지 않고서는 물질 개념을 사유할 수 없기 때문에. <연장은 물질 안에 있다>. 이것은 내가 연장을 채우는 어떤 것, 즉 물질 없이도 연장을 사유할 수 있는 한에서 그만큼 덜 환위 명제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환위 명제가 아니라, 포함 명제이다. 내가 <물질은 연장된다>고 말할 때, 이것은 포함에 의해 자기-동일적인 명제이다. 
(5-1)그러므로 두 종류의 자기-동일적 명제가 있다 : 주어와 술어가 하나의 동일한 것인 환위 명제와 술어가 주어 안에 담겨 있는 내속 혹은 포함의 명제.  
내가 <이 페이지는 앞면과 뒷면을 갖는다>고 말한다면---, <A는 A이다>는 공허한 형식이다. 동일성 원리의 보다 재미있는 언표를 찾는다면, 나는 라이프니츠의 방식으로 동일성 원리는 <모든 분석 명제는 참이다>라고 언표된다고 말할 것이다. 
‘분석’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가 이미 본 예에 따르면, 분석적 명제는 술어나 속성이 주어와 동일한 명제이다. 예컨대 <삼각형은 삼각형적이다>와 같은 환위 명제 혹은 <삼각형은 세 변을 갖는다>와 같은 포함의 명제. 술어는 네가 주어를 떠올릴concevoir 때, 술어가 이미 거기에 있는 정도로 주어 안에 담겨 있다. 그러므로 주어 안에서 술어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분석으로 충분하다. 여기까지 라이프니츠는 독창적 사상가로 부상하지 않는다. 


충족 이유의 원리
B) 라이프니츠는 아주 기괴한 외침의 형태로 부상한다. -- 우리가 얘기하는 모든 것은 철학이 아니라 前-철학이다. 이것은 아주 엄청난 철학이 그 위에 세워질 영토terrain이다. 라이프니츠가 도래해서 말한다 : OK, 자기-동일적 명제는 확실한 모델을 제공한다. 왜 확실한 모델인가? 네가 주어에 주어 자체와 일체를 이루는, 혹은 주어와 뒤섞이거나 이미 주어 안에 담겨 있는 어떤 것을 귀속시킨다면, 분석 명제는 그 언표 자체로 참이다. 네 자신을 속일 위험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분석 명제는 참이다>. 
라이프니츠의 전-철학적 천재성의 일격은 ‘환위[역]을 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새롭고 그럼에도 아주 단순한 어떤 것이 거기서 시작된다, 거기에서 사유를 시작해야 했기 때문에. “거기서 사유를 해야 했다”는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을 필요로 해야 했다는, 그것이 그에게 긴급한 어떤 것에 응답해야 했다는 것을 뜻한다. <모든 분석 명제는 참이다>라는 동일성 원리의 환위[역]는 무엇인가? 환위[명제]는 많은 문제들을 제기한다. 라이프니츠는 부상하여 말한다 : <모든 참인 명제는 분석적이다>. 
동일성 원리가 진리의 모델을 제공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어려움에 빠지는가 : 그것은 참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것도 사유하게 만들지 않는다. 동일성 원리는 무언가를 사유하도록 강제할 것이다 ; 그것은 역전되고 뒤집어질 것이다. 너는 <A는 A이다>를 뒤집으면 <A는 A이다>가 나온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원리의 역전을 막는 형식적 정식화에서는 <A는 A이다>가 나온다. 그러나 네가 원리를 뒤집든다면, <모든 분석 명제는 참인 명제이다>에 귀착될 철학적 정식화에서, <모든 참인 명제는 필연적으로 분석적이다>는 무엇을 뜻하는가? 네가 참인 명제를 정식화할 때마다 그것은 분석적이어야 한다(그리고 이것은 외침이 있는 곳이다!),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것[참인 명제]은 속성이나 술어의 명제로 환원될 수 있다, 그것은 술어나 속성의 판단(하늘은 파랗다)으로 환원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분석적이다, 즉 술어는 주어와 환위적이거나 주어 개념 안에 담겨 있다? 이것은 자명한가? 그는 이상한 트릭(drule de truc)에 착수한다, 그리고 그것은 취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필요해서이다. 그러나 그는 불가능한 트릭에 종사한다 : 사실 그는 이 과업[임무]에 도달하기 위해서 완전히 미친[정신나간] 개념들을 필요로 한다. 모든 분석 명제가 참이라면, 모든 참인 명제는 틀림없이 분석적이어야 한다. 모든 판단이 속성의 판단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하지 않다. 그것을 보여 주는 것은 쉽지 않다. 그는 환상적인 조합적 분석에 착수한다. 
(6) 왜 그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성냥갑이 테이블 위에 있다>, 나는 이것을 판단이라고 말할 것이다. “테이블 위에”는 공간적 결정이다. 나는 성냥갑이 “여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는 무엇인가? 나는 그것이 위치결정localization의 판단이라고 말할 것이다. 다시 나는 아주 단순한 것들을 반복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논리학의 근본적인 문제들이었다. 그것은 겉보기에 모든 판단은 술어나 속성의 형태[형식]를 갖는다고 시사하는 것일 뿐이다. 내가 <하늘은 파랗다>고 말할 때, 나는 주어 하늘, 속성 파람을 갖는다. 내가 <하늘은 저 위에 있다> 혹은 <나는 여기 있다>고 말할 때 “여기”―공간적 위치결정―는 술어와 동일시될 수 있는가? 나는 <나는 여기 있다>의 판단을 <나는 금발이다> 같은 유형의 판단으로 형식적으로 환원할 수 있는가? 공간 상의 위치결정이 질이라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2+2=4>는 보통 관계 판단이라고 불리는 판단이다. 혹은 내가 <삐에르는 폴보다 작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두 항들 간의 관계이다. 물론 나는 이 관계를 삐에르에게 정향할 수 있다 : 내가 만일 <삐에르는 폴보다 작다>고 말한다면, 나는 <폴은 삐에르보다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주어는 어디 있고, 술어는 어디 있는가? 이것이 논리학이 있은 이래로 철학을 괴롭혀 온 문제. 속성의 판단은 모든 가능한 판단의 보편적인 형식인가 아니면 다른 판단들 중 하나의 경우인가? 나는 <폴보다 작다>를 삐에르의 속성으로 다룰 수 있는가? 그것은 확실하지도 분명하지도 않다. 아마도 우리는 판단의 상이한 유형들을 구별해야 할 것이다 : 관계 판단, 시-공관적 위치결정의 판단, 속성의 판단, 실존의 판단. 만일 내가 <신은 실존한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것을 <신은 실존적이다>의 형식으로 형식적으로 번역할 수 있는가―“실존적”은 속성이므로? <신은 실존한다>는 <신은 전능하다>와 같은 형식의 판단인가? 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신이 실존한다면, 그렇다>라고 덧붙임으로써만 <신은 전능하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신은 실존하는가? 실존은 속성인가? 확실하지 않다. 
따라서 <모든 참인 명제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분석적―자기동일적― 명제여야 한다>는 관념을 제안으로써, 라이프니츠는 자신에게 아주 어려운 과업을 부여한다 ;  어떤 방식으로 모든 명제들―관계를 언표하는 명제, 실존을 언표하는 명제, 위치결정을 언표하는 명제―이 속성의 판단으로 환원될 수 있는지를, 그리고 ‘실존하다’와 ‘~와 관련을 맺다’가 주어의 속성의 등가물로 번역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에 착수한다.     
무한한 과업. 라이프니츠가 그것에 도달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로부터 어떤 세계가 출현하는가? ---
동일성 원리의 역[환위]는 무엇인가? 동일성 원리는 <모든 참인 명제는 분석적>이라는 것 그리고 그 역inverse, 즉 <모든 분석적 명제는 참이다>는 아니다.**** 라이프니츠는 다른 원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것은 역[환위] : <모든 참인 명제는 필연적으로 분석적이다>. 그는 그것에 아름다운 이름을 준다 : 충족 이유의 원리. 왜 충족 이유인가? 왜 그는 자신이 자신의 것인 외침의 한 복판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모든 것은 진정 이유를 가져야 한다. 충족 이유의 원리는 다음과 같이 언표될 수 있다 : 주어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시공간의 결정이든, 관계의 결정이든, 사건이든―, 주어에게 일어나는 것, 즉 우리가 그것에 대해 참되게 얘기하는 것, 다시 말해 주어에 대해 얘기되는 모든 것이 주어 개념N 안에 담겨 있어야 한다.
(7)“개념N”이라는 개념N은 본질적일 것이다. “파랑”이 하늘의 개념N 안에 담겨 있어야 한다. 왜 충족 이유의 원리가 있는가? 이유는 개념N 자체이기 때문에, 개념N이 그에 상응하는 주어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한에서.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이유를 갖는다. 
이유는 주어의 개념N이다, 이 개념이 그 주어에 대해 참되게 얘기되는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한에서. 이것이 충족 이유의 원리이다, 정확히 동일성 원리의 환위[역]인 원리. 추상적 정당화를 찾기 보다, 나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어떤 기괴한 세계가 탄생하는지를 묻는다. 아주 기괴한 색깔들의 세계. 라이프니츠라고 싸인된 그림. 모든 참인 명제는 분석적이어야 한다 혹은 더 나아가서 네가 주어에 대해 참되게 얘기하는 모든 것은 주어의 개념N 안에 담겨 있어야 한다. --- 
“개념N”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라이프니츠라고 싸인된 것이다. 헤겔적인 개념C의 개념이 있듯이, 라이프니츠적인 개념의 개념이 있다.  


라이프니츠적 세계 : 충족 이유의 첫 번째 측면 
C) 어떤 세계가 출현하는가? 거기로부터 라이프니츠는 정말로 환각적인 개념들을 창조할 것이다. ---- 라이프니츠의 우주에는 일종의 개념적 광기가 현전. --- 
진리는 종합 판단의 그것이라고 말한 칸트는 라이프니츠와 대립된다. 그들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 그것은 벨라스케스가 지오토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
모든 참인 명제는 분석적이어야 한다, 즉 주어에 어떤 것을 귀속키고 속성이 주어의 개념N 안에 담겨 있어야 하는 것. --- 예) <케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넜다> 
이것은 명제이다. 그것은 참이다. 다른 명제 : <아담은 죄를 지었다>
최고로 참인 명제. 라이프니츠가 기본[근본]적 예로 선택한 이 명제들은 사건적 명제들. 그는 자신에게 쉬운 과업을 부과하지 않는다. 그는 말하고자 하는 것 : 이 명제가 참이라면 술어 “루비콘 강을 건너다”는 케사르의 개념N 안에 담겨 있어야 한다. 케사르 자체가 아니라 케사르의 개념N 안에. 
(8)주어의 개념N은 주어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 즉 주어에 대해 참되게 얘기되는 것을 담고 있다. 
<아담은 죄를 지었다>에서, 죄는 특정한 순간에 아담의 개념N에 속한다. “루비콘 강을 건너다”는 케사르의 개념N에 속한다. 라이프니츠는 그의 가장 중요한 개념들 중 하나인 내속의 개념을 제안한다. 어떤 것에 대해 참되게 얘기되는 모든 것은 그 어떤 것의 개념N에 내속한다. 
이것이 충족 이유의 첫 번째 측면 혹은 그것의 전개. 


충족 이유와 필요 원인 
D) 그것을 말할 때, 우리는 이제 멈출 수 없다. ----- 네가 명제 c, 즉 <네가 주어에 귀속시키는 모든 것은 그 주어의 개념N 안에 담겨 있어야 한다>를 다시 취한다면, 바로 그 순간에 너는 주어의 개념N 안에 네가 주어에 참되게 귀속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세계의 총체성 또한 집어[쑤셔] 넣지 않을 수 없다. 
왜? 충족 이유의 원리와 같은 것이 아닌 유명한 원리, 즉 인과성의 원리에 의해서. 인과성 원리는 무한하게a l'infini 간다. -- 이것은 아주 특수한 무한이다, 그것은 미규정적으로a l'indefini 가기 때문에. 즉 인과성 원리는 <모든 것은 원인을 갖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모든 것은 이유를 갖는다>와는 다른 것이다. 원인이 사물[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제 차례에서 원인을 갖는다, 등등. 마찬가지로 모든 원인은 결과를 갖고 이 결과는 제 차례에서 다른 결과들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원인과 결과의 미규정적인 계열이다. 
충족 이유와 원인 간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원인은 충분하지 않다. 인과성 원리는 필요한 원인[필요 조건]을 상정하지만, 충분한 원인[충분 조건]은 상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필요 원인과 충분 이유를 구별해야 한다. 그것들을 구별해 주는 것은 한 사물의 원인은 언제나 다른 사물이라는 점. A의 원인은 B이고 B의 원인은 C이고 등등. 원인들의 미규정적 계열. 충족[충분] 이유는 전혀 다른 것이다. 한 사물의 충족 이유는 그 사물의 개념N이다. 그러므로 원인이 사물과 다른 사물의 관계를 표현하는 반면에, 충족 이유는 사물과 그것 자체의 개념N의 관계를 표현한다. 그것은 투명하다limpid. 

D) 특정 사건이 케사르의 개념N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면, “루비콘 강을 건너다”는 케사르의 개념N 안에 포함되어 있다. 너는 어떤 의미에서 멈출 수 없는가? 원인에서 원인으로, 결과에서 결과로, 바로 그 순간에 세계의 총체성은 특정 주체의 개념N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 이것은 아주 묘해진다. 각 주체의, 혹은 각 주체 개념N의 내부로 이행하는[지나가는] 세계가 있다. 사실 “루비콘 강을 건너다”는 원인을 갖는다, 이 원인 자체는 다양한multiples 원인을 갖는다, 원인에서 원인으로, 원인의 원인으로, 원인의 원인의 원인으로. 거기로 지나가는passer 것은 세계의 모든 계열, 적어도 선행하는 계열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루비콘 강을 건너다”는 결과들을 갖는다. 내가 큰gors 결과들에 머무른다면, 로마 제국의 창설. 로마 제국은 제 차례에 결과들을 갖는다. 우리는 로마 제국에 직접 의존한다. 원인에서 원인으로, 결과에서 결과로, 전체 세계가 특정 주어의 개념N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고서는, 특정 사건이 특정 주어의 개념N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9)철학의 횡-역사적인 특징. 1980년의 라이프니츠주의자. -- 
이 주어[주체]는 전 세계를 담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것은 더 이상 내속이나 포함의 개념이 아니라 표현 개념이다. 주어의 개념N은 세계의 총체성을 표현한다. 
그 자신의 “루비콘 강을 건너다”는 앞뒤로 무한하게 연장된다s'etend, 원인과 결과의 이중적 작용에 의해서. 그러나 그때, ---- 우리는 세계의 총체성을 담고 있거나 표현하는 것은 각각의 주어[주체] 개념N이라고 말해야 한다. 즉, 여러분 각각과 나는 세계의 총체성을 표현하거나 담고 있다. --- 그것은 복잡해진다. 왜? 커다란 위험 : 만일 각각의 개별 개념N이, 각각의 주어[주체] 개념N이 세계의 총체성을 표현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유일한 주체, 보편적 주체만이 있고, 너, 나, 케사르는 이 보편적 주체의 외관apparences일 뿐임을 뜻한다. 세계를 표현하는 하나의 유일한 주체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왜 라이프니츠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는가? 그는 선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자기 반박을 뜻할 것이다. 그가 충족 이유의 원리를 가지고 그 이전에 한 모든 것이, 그때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가? 내 견해로 이것은 개념과 개체의 최초의 위대한[중요한] 화해였다. 라이프니츠는, 개념과 개체가 서로에게 적합해질 개념의 개념을 구축하는 중이었다. 왜? 
개념이 개체에까지 간다는 것, 그것은 왜 새로운가? -- 개념은 무엇인가? 그것은 일반성의 질서에 의해 정의된다. 다수의[여러] 사물에 적용되는 표상이 있을 때 개념이 있다. 그러나 개념과 개체를 동일시하는identify 것(개념과 개체가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행해진 적이 없다. -- 
언제나 구별되었던 것은 일반성에 소급되는 개념의 질서와 특이성에 소급되는 개체의 질서였다. 더욱이 그러한[특이한] 개체가 개념에 의해 포착[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고유 명사는 개념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개”는 개념이지만, “Medor”는 개념이 아니다. 모든 개들chiens의 견성(犬性)caneite이 있다, 그러나 모든 Medor들의 medorite는 없다. 
라이프니츠는 개념들이 고유명사라고, 즉 개념들은 개별 개념N들이라고 말한  말한 최초의 사람이다. 
그러한 것으로서의 개체(의) 개념이 있다. 그러므로 라이프니츠는 그 명제로 선회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 참인 명제는 분석 명제이므로 ; 그러므로 세계는 하나의 유일하고 동일한 주체(보편적 주체) 안에 담겨 있다. ****** 그는 할 수 없었다, 그의 충족 이유의 원리는 주어 안에 담겨 있는―그러므로 참인 것, 주어에 귀속될 수 있는 것―, 개별 주체의 자격으로 주어[주체] 안에 담겨 있는 것을 함축했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는 자신에게 일종의 보편적 정신을 부여할 수 없었다. 특이성에, 그러한 것으로서의 개체에 고정된 채로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실, 이것은 라이프니츠의 독창적인 점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에게 영속적인 공식 : 실체(그에게는 실체와 주체[주어] 간에는 차이가 없다)는 개별적이다. 
(10) 그것은 케사르라는 실체, 너라는 실체, 나라는 실체 등등이다. 그 스스로 세가가 그 안에 포함될 보편적 정신을 내세우는 길을 막기 때문에, 나의 작은 d)에서 긴급한 문제... 다른 철학자들은 보편적 정신을 내세울 것이다. --- 개별적 실체의 환원불가능성. 
각각의 실체(그보다는 각각의 실체적 개념N, 각각의 주어 개념N)는 세계를 표현하므로, 너는 언제나de tout temps 세계를 표현한다. ---그러나 그때 자유는 어떻게? -- 반론 : 케사르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케사르의 개념N 안에 포함되어 있다면, 전체 세계가 케사르의 보편적 개념N 안에 포함되어 있다면, 그때 루비콘 강을 건넘으로써, 케사르는 펼치기(derouler, expliquer, deplier)만할 뿐인가. 그러므로 사건으로서의 “루비콘 강을 건너다”는 언제나 케사르의 개념N 안에 포함되어 있던 어떤 것을 펼치는 일을 할뿐이다. 이것은 진짜vari 문제이다.  
특정한 해에 케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넜다, 그러나 특정한 해에 그가 루비콘 강을 건너는 것은 언제나 그의 개별 개념N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 개별 개념N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영원하다. 날짜가 기입된 사건들의 영원한 진리. 그러나 그때, 자유는 어떻게? 모든 사람이 그에게 달려든다. 기독교 체제하에서 자유는 아주 위험한 것이다. --- 자유는 그에게 꽤나 우스운 것이다. 당분간 이것을 내버려두자. 
한 주체를 다른 주체와 구별짓는 것은 무엇인가? ----- 


투시주의(=관점주의) 철학 
E) 하나의 개별 실체를 다른 개별 실체와 구별짓는 것. 특정한 방식으로 그것은 환원불가능해야 한다. 각각의 개별 개념N 각각의 주체 개념N은 세계의 총체성을 포함하고, 그 총체적 세계를 표현해야 하지만, 특정한 관점에서 그래야 하기 때문에. 거기서 관점주의[원근법주의] 철학이 시작된다. 너는 “관점”이라는 표현은 진부하다고 말할 것이다. 철학이 개념을 창조하는 것이라면, 개념을 창조하는 것은 무엇인가? 대체로 말해 이것은 진부한 공식이다. 위대한 철학자들은 각자 그들이 눈짓하는 진부한 공식을 가지고 있다. 철학자로부터의 눈짓---- 관점 이론을 만드는 것은 무엇을 함의하는가? 그것은 언제든 만들어질 수 있는가? 라이프니츠가 특정한 순간에―투사 기하학을 만든 바로 그 순간에― 최초의 위대한 이론을 만든 것은 우연인가? 그것이 모든 종류의 원근법[투시법]―미술, 건축 등― 기술이 정교해지는 시대가 끝날 무렵issue이라는 것은 우연인가? 회화에서의 투시법과 투사 기하학. --- 라이프니츠가 이로부터 전개하고자 했던 것은? 그는 개별 개념N이 세계의 총체성을 표현하되, 특정한 관점에서 그렇다고 말하고자 한다. 
(11)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 그것은 개별 개념N을 개체로 구성하는 것이 관점임을 보여주는 것에 그를 종사시킨다. 주체는 관점에 대해 이차적이다. 따라서 관점은 거기에 자리하는 것보다 더 심오하다. 
니체와의 연관성. 니체는 “나의 철학은 투시주의이다”라고 말한다. 투시주의가 모든 것이 주체에 상대적이라고 말하는 것인지 애도하는 것은 진부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
나를 나로 만드는 것은 세계에 대한sur 관점이다. 라이프니츠는 멈출 수 없다. 그는 관점 이론―관점이 주체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관점에 의해 구성된다는 이론―에까지 가야 한다. 19세기에 헨리 제임스는 투시주의를 통해 소설의 테크닉을 갱신. 주체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 관점이 아니라, 관점에 의해 설명되는[펼쳐지는] 것이 주체.  주체들의 충족 이유로서의 관점의 분석, 여기에 주체[주어]의 충족 이유가 있다. 개별 개념N은 관점이고, 그거 하에서 개체는 세계를 표현한다. 그것은 아름답고 시적이기까지 하다. ---- 
라이프니츠 : “모든 개별 실체는 전체 세계와 같고, 신의 거울 혹은 각 실체가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전 우주의 거울 같다. 도시가 그것을 응시하는 자의 상이한 위치situation에 따라서 다양하게 표상되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우주는 실체들이 있는 만큼 여러 차례auntat de fois 증식된다. 신의 영광은 --의 모든 상이한 표상들에 의해 그 수만큼 복제[이중화]된다. 모든 실체가 무한한 지혜의 특징과 신의 전능의 특징, 그것이 수용할 수 있는 만큼의 한계들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에서 나는 새로운 관점 개념이 개체 및 개별 실체 개념보다 더 심오하다고 주장한다. 본질을 정의하는 것은 관점이다. 개별적[개체의] 본질. 우리는 각각의 개별 개념N에 관점이 대응한다고 믿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복잡해진다, 이 관점은 개체에게 탄생에서 죽음까지 유효할vaudrait 것이므로. 우리를 정의하는 것은 세계에 대한 특정한 관점이다. 
니체는 이 관념을 재발견할 것이다. 그는 라이프니츠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니체가 라이프니츠로부터 취한 것이다. 관점 이론은 르네상스 시대의 관념이다. 쿠자누스는 관점에 따라서 변하는 초상화portraiture를 언급했다. 이탈리아 파시즘 시대에, 아주 묘한 초상화. 정면에서 보면 무솔리니를 재현[표상], 오른 쪽에서 보면 그의 사위를 재현, 왼쪽에서 보면 왕을 재현. 
(12)수학에서 관점 분석, 수학의 챕터가 분석 위치situs란 이름 하에 상당한 진보를 이루게 한 것은 라이프니츠. 그것은 투사 기하학과 연결. 일종의 본질성essentiality, 주체의 객관성[대상성]objectity이 있다, 그 객관성은 관점이다. 구체적으로 모든 사람은 그의 고유한 관점에서 세계를 표현한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라이프니츠는 가장 이상한 개념들 앞에서 후퇴하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그의 고유한 관점에서”라고 말할 수 없다. 내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는 관점을 이전의[선행적] 주체에게 의존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이다. 그러나 이 관점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라이프니 : 우리들 각각은 세계의 총체성을 표현한다, 그는 모호하고 혼동된 방식으로 표현할 뿐이다. ‘모호하고 혼동되게’는 세계의 총체성이 개체 안에 있지만, 미소petite 지각의 형태로 있음을 뜻한다. 라이프니츠가 미분 계산의 발명자 중 하나라는 것은 우연인가? 이것들은 무한하게 작은 지각들, 다시 말해 무의식적 지각들이다. 나는 모든 세계를 표현하지만, 모호하고 혼동되게, 아우성clamor처럼 표현한다. 
미소 지각 혹은 무의식[적 지각]은 의식의 미분과 같다. 그것은 의식 없는 미소 지각이다. 라이프니츠는 의식적 지각을 통각apperception이라고 부른다. 
통각은 의식적 지각이고, 미소 지각은 의식에는 주어지지 않는, 의식의 미분이다. 모든 개체는 세계를 모호하고 혼동되게 표현한다. 그렇다면 하나의 관점을 다른 관점과 구별하는 것은 무엇? 거꾸로 내가 명료하고 변별적으로 표현하는 세계의 미소한 몫portion이 있다. 그리고 각 주체, 각 개체는 그에게 딸린 자신의 미소한 몫을 갖는다. 어떤 의미에서? 내가 명료하고 변별적으로 표현하는 세계의 이 몫을 다른 모든 주체들도 표현하지만, 모호하고 혼동되게 표현한다는 의미에서. 
나의 관점을 정의하는 것은, 모호하고 혼동된 세계의 소음[웅성거림] 속에서 명료하고 변별적인 표현의 제한된 지대를 지키는garder, 일종의 투사기projector 같은 것이다. 네가 아무리 어리석고, 우리가 아무리 하찮을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미소한 트릭[요령/비결]을 갖는다. 해충조차 그의 작은[미소한] 세계를 갖는다 : 그것은 많은[중요한]grand 것을 명료하고 변별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그의 미소한[작은] 몫portion을 갖는다. 베케트의 등장인물들은 개체들이다 : 모든 것이 혼동된 것이고, 소음[웅성거림]들이다, 그들은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넝마들이다 ; 세계의 거대한grand 소음이 있다. 그들이 아무리 가련할지라도, 그들은 그들에게 딸린 작은 지대를 갖는다. 위대한 몰로이가 “나의 재산들”이라고 부르는 것.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작은 책을 가지고 있고, 1 미터의 광선 속에서 작은 갈고리를 가지고, 그는 트릭들, 그의 재산들을 끌어당긴다. 그것은 그가 표현하는 명료하고 변별적인 지대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리의 지대는 더 크거나grand 덜 크다. 그것 역시 확실치 않다. 그러나 결코 같은 것은 아니다. 관점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호하고 혼동되게 표현된 세계의 총체성에 대한, 한 개체에 의해서 명료하고 변별적으로 표현되는 세계의 범위region의 비율이다. 그러한 것이 관점이다. 
라이프니츠가 좋아하는 메타포 : 너는 바다 근처에서 파도들을 듣는다ecouter. 너는 바다를 듣고ecouter, 한 파도[물결]의 소리를 듣는다entendre. 나는 한 파도의 소리를 듣는다entendre. 즉 나는 통각을 갖는다 : 나는 한 파도를 구별한다. 그리고 라이프니츠는 말한다 : 네가 서로에 대해 미끄러지면서[스치면서], 미소 지각들의 대상을 이루는, 각각의 물방울 소리에 대한 미소한[작은] 무의식적 지각을 갖지 못한다면 너는 파도를 듣지entendre 못할 것이다. 모든 물방울의 소움[웅성거림]이 있고, 너는 너의 작은 명료성의 지대를 갖는다, 너는 이 무한히 많은 물방울들의, 이 무한한 소음의 부분적 결과resultante를 명료하고 변별적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너는 그것을 너에게 딸린 작은 세계로, 너에게 딸린 너의 재산[특성]으로 만든다. 
각각의 개별 개념N은 그것의 관점을 갖는다. 이 관점에서 그것은 그것이 표현하는 세계 전체[집합]로부터 정해진[일정한]determined 몫의 명료하고 변별적인 표현을 채취[추출]한다. 두 개체가 주어질 때, 너는 두 가지 경우를 갖는다 : 그들의 지대는 절대 소통되지 않고, 서로를 상징화하지 않는다―직접적인 소통은 없다, 유비가 있다고 생각할 수는 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서로 말할se dire 아무 것도 없다 ; 혹은 그것들은 겹쳐지는 두 원과 같다, 작은 공통의 지대가 있다, 거기서 우리는 무언가를 함께ensemble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라이프니츠는 동일한identiques 두 개별 실체는 없다, 같은 관점을 갖는 혹은 같은 명료하고 변별적인 표현의 지대를 갖는 두 개별 실체는 없다고 강력하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라이프니츠의 천재성의 일격 : 내가 갖는 명료하고 변별적인 표현의 지대를 정의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세계의 총체성을 표현하되, 그것의 축소된 몫, 유한한 몫을 명료하고 변별적으로 표현할 뿐이다. 내가 명료하고 변별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내 신체와 관계 있는 것이다. 이 신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명료하고 변별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나의 신체를 촉발하는/변용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루비콘 강의 이행passage을 명료하고 변별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것은 케사르의 신체와 관계하기 때문이다. 나의 신체와 관계하는, 전 우주를 덮는cover 이 소음에 기초해서 나만이 명료하고 변별적으로 표현하는 어떤 것이 있다. 

F)도시 이야기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상이한 관점들이 있다. 이 관점들은 거기에 자리잡는 주체에 선재하지 않는다. 그 순간에 관점의 비밀은 수학적, 기하학적이다. 심리학적이 아니라. 적어도 심리-기하학적이다. 라이프니츠는 심리학의 인간이 아니라 개념N의 인간이다. 그러나 도시는 관점 외부에 실존하지 않는가? 그러나 표현된 세계에 대한 이야기에서, 세계는 그것을 표현하는 관점 외부에 실존을 갖지 않는다 ; 세계는 그 자체로[자기 안에서] 실존하지 않는다. 세계는 유니크한, 표현된 것이다. 
전체 세계는 각각의 개별 개념N 안에 담겨 있지만, 이 포함 안에서만 실존한다. 그것은 외부에 실존을 갖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라이프니츠는 종종 관념론의 편에 있을 것이다 : 자기 안의 세계는 없다, 세계는 그것을 표현하는 개별 실체들 속에만 실존한다. 그것은 모든 개별 실체들에 공통적인, ‘표현된 것’이다. 그것은 참된 문제이다! 
이 실체들을 구별하는 것은 그것들이 모두 같은 세계를 표현하되 같은 명료하고 변별적인 몫을 표현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체스와 같다. 세계는 실존하지 않는다. 그것은 표현 개념의 복잡성complication이다. 이 마지막 난점을 제공하는 것. 다시 모든 개별 개념들N이 같은 세계를 표현해야 한다. 그래서 그것은 묘하다―모순적인 것, 즉 불가능한 것(A는 A가 아니다)을 결정하도록 해 주는 동일성 원리 때문에. 그것은 모순적이다. 예컨대, 사각의 원. 사각의 원은 원이 아닌 원이다. 동일성 원리에서 출발하여, 나는 모순의 기준을 가질 수 있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나는 2+2가 5가 될 수 없음을 중명할 수 있고, 원이 사각형일 수 없음을 증명할 수 있다. 반면에 충족 이유의 수준에서 그것은 훨씬 더 복잡하다. 왜? 죄인이 아닌 아담,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은 케사르는 사각형의 원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죄인이 아닌 아담은 모순적이지 않다. 자유를 구제하기에 나쁜 상황에 위치해서 그가 어떻게 자유를 구제하려고 시도하는지를 느낄 것. 이것은 전혀 불가능하지 않다 : 케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았을 수 있다, 반면에 원은 사각형일 수 없다 ; 여기에 자유는 없다. 
그래서 다시 라이프니츠는 또 다른 개념을 발견해야 한다, 그의 모든 미친 개념들 중에서 이것은 가장 미친 개념일 것이다. 아담은 죄를 짓지 않았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충족 이유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진리는 동일성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진리와 같은 유형이 아니다. 왜? 동일성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원리는 <모순적인 것은 불가능하다>와 같은 것이고, 반면에 충족 이유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진리는 가능한 모순적인 것을 갖기 때문에. 죄 짓지 않는 아담은 가능하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이 본질들의 진리라고 불리는 진리와 실존의 진리라고 불리는 진리를 구별하는 것이다. 실존의 진리는 <모순적인 것들이 가능하다>와 같은 것이다. 어떻게 그는 <아담이 한 모든 것은 아담의 개별 개념N 안에 영원히 담겨 있다>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이 아닌 아담은 가능했다>를 동시에 주장할 수 있는가? ------ 그는 말한다 : 케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은 것이 가능한 것처럼, 죄인이 아닌 아담은 완전하게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자기 안에서는] 가능하지만 불공가능하기 때문에. 
이 때 그는 아주 이상한 논리적 개념인 불공가능성을 창조. 
실존의 수준에서, 한 사물이 실존하기 위해서 가능한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또한 그것이 무엇과 공가능한지를 알아야 한다. 
죄인 아닌 아담은 실존하는 세계와 불공가능하다. 그 자체로는[그 자신 안에서는] 가능할지라도. 아담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세계가 있었다는 조건에서. 세계의 개별 개념N에의 포함과 다른 것이 가능했다는 사실은 갑자기 공가능성 개념N에 의해 화해된다. 죄인이 아닌 아담은 다른 세계에 속한다. 그러나 그 세계는 선택되지 않았다. 그것은 실존하는 세계와 불공가능하다. 그것은 실존으로 이행하지 않은 다른 가능한 세계들과 공가능할 뿐이다. 
왜 그것이 실존으로 이행한 세계인가? 라이프니츠는 신의 세계 창조를 설명. 그것은 게임 이론. 신은 그의 지성 속에서 무한히 많은 가능한 세계들을 생각했다[떠올렸다], 이 가능한 세계들은 서로 공가능하지 않다, 신은 최선을 선택하기 때문에. 신은 가능한 세계들의 최선을 선택한다. 그리고 가능한 세계들의 최선이 죄인인 아담을 함축한다는 것이 발견된다. 왜? 그것은 끔찍할 것이다. 논리적으로 재미있는 것은 논리적 가능성의 영역sphere보다 제한된 논리적 영역을 지기하기 위한, 공가능성이라는 적절한[고유한] 개념의 창조. 실존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가능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것은 또한 실제 세계를 구성하는 다른 것들과 공가능해야 한다. 
모나드론으로부터의 유명한 공식에서, 라이프니츠는 개별 관념이 문도 창도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정확히 도시의 메타포가 된다. 문도 창도 없다는 것은 출구ouverture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왜? 외부exterieur가 없기 때문에. 개별 개념들N이 표현하는 세계는 내부interieur 세계이다. 그것은 개별 개념들N 안에 포함된다. 개별 개념들은 문도 창도 없다, 모든 것은 각각의 개별 개념N 안에 포함된다, 그리고 모든 개별 개념N에 공통적인 세계가 있다. 각각의 개별 개념N이 포함하는 것, 즉 세계의 총체성을, 개별 개념은 반드시 그것이 표현하는 것이 다른 것들이 표현하는 것과 공가능한 형태로 포함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경이로운 세계이다. 주체들 간에 직접적 소통이 없는 세계. 케사르와 너, 너와 나 사이에 직접적 소통은 없다. 그리고 각각의 개별 개념N은 그것이 표현하는 것이 다른 것들이 표현하는 것과 공통의 세계를 형성하는 방식으로 프로그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라이프니츠의 마지막 개념들 중 하나 : 미리 확립된 조화. ‘미리 확립된’은 프로그램된 조화이다. 그것은 정신적 자동기계의 관념이다. 동시에 17세기 말 위대한 자동기계의 시대. 
각각의 개별 개념N은 정신적 자동기계와 같다, 즉 그것이 표현하는 것은 그것에 내부적이다, 그것은 문도 창도 없다 ; 그것은 그것이 표현하는 것이 다른 것이 표현하는 것과 공가능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 1-2
2rd LESSON
198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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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 분석이란 무엇인가 : 실체, 세계, 연속성  


이 두 번째 패러그래프의 목적은 첫 번째 패러그래프의 두 가지 주요 개념인 포함과 공가능성을 보다 정확하게 분석하는 것. 
우리가 마지막으로 끝난 지점에서 우리는 두 가지 문제에 직면했었다 : 첫 번째는 포함의 문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한 명제가 참이라면,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술어predicate나 속성은 주어 개념N 안에 담겨 있거나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았다. -- 아담이 죄를 지었다면, 그때 죄는 아담의 개별 개념N 안에 담겨 있거나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일어나는 모든 것, 귀속될 수 있는 모든 것, 주어에 대해 술어화되는 모든 것은 주어의 개념N 안에 담겨 있어야 한다. 이것은 술어화predication의 철학이다. 그런 이상한 명제에 직면할 때, 우리가 이런 종류의 라이프니츠적 도박gamble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즉각 문제들에 부딪힌다. 특정 개별 개념N, 예컨대 아담이나 케사르에 관계되는 어떤 사건―“케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넜다”, “케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다”는 케사르의 개별 개념N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을 가정하다면, 우리는 라이프니츠를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말하면, 멈출 수 없다 : “루비콘 강을 건너다”와 같은 하나의 유일한 것이 케사르의 개별 개념N 안에 담겨 있다면, 그때 결과에서 원인으로, 원인에서 결과로, 세계의 총체성이 이 개별 개념N 안에 담겨 있어야 한다. 실제로, “루비콘 강을 건너다”는 그 자체 원인을, 즉 그것 역시 개별 개념N 안에 담겨 있어야 하는, 원인을 갖는다, 등등. [원인들로] 올라가고 [결과들로] 내려가면서 무한하게. 바로 그 순간에, 대체로 ‘루비콘 강을 건넘’에서 파생되는 로마 제국, 로마 제국의 귀결들suites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케사르의 개별 개념N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각각의 개별 개념N은 그것이 표현하는 세계의 총체성으로 팽창된다. 그것은 세계의 총체성을 표현한다. 여기에 점점 더 이상해지는 명제가 있다. 
(2)철학의 역사에 달콤한 순간들이 있고, 가장 달콤한 순간들 중 하나는 그 귀결들consequences의 끝에까지 밀어 부쳐진 합리주의가 일종의 정신착란(광기의 정신착란)을 발생시키고 그것과 일치할 때.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일종의 행렬, 행진―여기서 이성의 끝까지 밀어 부쳐진 합리성과, 정신착란은 같은 것, 그러나 가장 순수한 광기의 정신착란―을 목격한다.        
그러므로 술어가 주어 개념N 안에 포함되는 것이 사실이라면, 각각의 개별 개념N은 세계의 총체성을 표현해야 하고, 세계의 총체성은 각각의 개념N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것은 라이프니츠를 비상한 이론―퍼스펙티브의 철학 혹은 관점의 철학에서 최초의 위대한 이론―으로 이끈다, 각각의 개별 개념N은 세계를 표현한다고 세계를 담고 있다고 얘기될 것이므로. 그러나, 보다 심오한 특정 관점으로부터, 관점의 개념N에 소급되는 것이 주체성이지 주체성에 소급되는 것이 관점이 아니다. 이것은 철학에서 많은 귀결들을 가질 것이다. 니체의 투시주의 철학의 창조--- 
?첫 번째 문제 : 술어가 주어 안에 담겨 있다고 말할 때, 이것은 모든 종류의 난점들, 다시 말해 <관계는 술어로 환원될 수 있는가?>, <사건들은 술어로 간주될 수 있는가?>등의 문제를 제기.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자. 우리는 라이프니츠의 것과 다른 개념 좌표의 집합으로부터만 라이프니츠에게 오류를 줄 수 있다. 참인 명제는 술어가 주어 안에 담겨 있는 명제이다. 그것이 본질의 진리의 수준에서 뜻하는 것을 우리는 잘 본다. 형이상학적 진리(신에 관한)이든, 수학적 진리이든, 본질의 진리. 내가 2+2=4라고 말하면, 그것에 대해 논의할 것이 있지만, 나는 라이프니츠가 맞는지 틀린지의 문제와 무관하게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을 즉각 이해한다. ------ <2+2=4>는 분석 명제이다. 분석 명제는 술어가 주어 안에 혹은 주어 개념N 안에 담겨 있는 명제이다, 즉 그것은 자기동일적 명제 혹은 자기동일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있는 명제이다. 술어의 주어와의 동일성. 실제로 라이프니츠는 말한다 : 나는 유한한 절차들의 계열을 통해서, 유한 수의 조작 절차들을 통해서, 4(그 정의에 의해)를 2+2(그 정의에 의해)가 동일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어떤 방식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나는 어떻게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이 뜻하는 것을 대체로 이해한다 : <술어는 주어 안에 포함된다>는 조작들의 집합을 통해서 내가 하나와 다른 하나의 동일성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 라이프니츠는 12로 나눠지는 모든 수는 6으로 나눠진다는  것을 증명. 
(3)19-20세기 논리학에서 이런 유형의 증명이 다시 등장(러셀). 라이프니츠의 증명 : 12로 나눠지는 모든 수는 2X2X3으로 나눠지는 수와 동일. 반면에 그는 6으로 나눠지는 수는 3X2로 나눠지는 수와 같다는 것을 증명. 
이것을 통해 그는 무엇을 밝혔는가? 
그는 포함을 밝혔다, 2X3은 2X2X3에 담겨 있기 때문에. 
수학적 진리의 수준에서 우리가 상응하는 명제가 분석적 혹은 자기동일적이라고 말할 수 있음을 이해하게 해 주는 예. 즉 술어는 주어 안에 담겨 있다. 그것은 내가 일련의 정해진 조작들(유한한 계열의 정해진 조작들)을 행할 수 있음을 뜻한다. 나는 술어의 주어와의 동일성을 증명할 수 있다 혹은 술어의 주어 안에의 포함이 떠오르게 만들 수 있다. --- 

그것은 본질들의 진리. 술어의 주어 안에 포함은 분석에 의해 증명되고 이 분석은 유한한 조건에 응답, 즉 그것은 제한된 수의 정해진 조작들을 포함.  

그러나 내가 아담이 죄를 지었다고 혹은 케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더 이상 본질의 진리에 소급되지 않는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날짜가 기입된다. <케사르는 지금 여기서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실존에 소급된다. 케사르가 실존하는 한에서만 케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너기 때문. 2+2=4는 모든 시간 모든 장소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본질의 진리를 실존의 진리와 구별할 근거가 있다. 
본질의 진리 못지 않게 실존의 진리의 경우에도 술어는 주어의 개념N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아담이 특정한 장소 특정한 시간에 죄를 지을 것이다>는 영원히 주어 개념N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 이것은 실존의 진리이다. 
그러나 같은 방식으로는 아니다. 본질의 진리와 실존의 진리 간에는 어떤 큰 차이가 있는가? 실존의 진리의 경우 술어는 주어 안에 담겨 있어야 한다. “죄인”은 아담의 개별 개념N 안에 담겨 있어야 한다 : 죄인이 아담의 개별 개념N 안에 담겨 있다면, 아담의 개별 개념N 안에 담겨 있는 것은 세계 전체이다. 우리가 원인들을 거슬러 올라가고 결과들을 따라 내려간다면, 그것은 세계 전체이므로, 너는 “아담이 죄를 지었다”가 분석 명제여야 한다는 것을 이해한다. 이 경우 그것은 무한한 분석. 분석은 무한하게 간다. 
그것은 무엇을 뜻할 수 있는가? “죄인”과 “아담”의 동일성 혹은 “루비콘 강을 건넌 자”와 “케사르”의 동일성을 중명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계열의 조작이 필요하다.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라이프니츠는 아주 형식적이다 : 너, 우리, 사람은 그것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질의 진리의 연역에 위치하기 위해서 우리는 경험을 기다려야 한다. 그렇다면 그는 왜 분석적 진리에 대한 이 모든 이야기를 제시하는가? 그는 덧붙인다 : 그러나 무한한 분석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신의 지성 안에서 행해진다. 

(4)한계를 갖지 않는 신, 무한한 신이 무한한 분선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를 만족시키는가? 우리는 행복하다. 그러나 언뜻 보기에 우리는 라이프니츠가 무엇에 대해 말하는지 궁긍해 한다. 나는 우리의 최초의 어려움이 <무한한 분석이란 무엇인가?>임을 강조할 뿐이다. 모든 명제는 분석적이다, 무한한 분석에 소급되는 우리의 명제들의 전체 영역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희망적이다 : 라이프니츠가 미분 계산 혹은 무한소 분석의 위대한 창조자라면, 틀림없이 이것은 수학에 있다, 그리고 그는 철학적 진리와 수학적 진리를 구별한다, 따라서 그것은 모든 것을 뒤섞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가 형이상학에서 무한한 분석의 관념을 발견할 때 그가 발명한 계산 유형(무한소 분석의 계산)과 관련하여 어떤 공명이 있다. 
따라서 나의 최초의 어려움 : 분석이 무한하게 나아갈 때, 술어가 주어 안에 포함되는 방식mode은 무엇(어떤 유형)인가? 죄인과 아담의 동일성이 무한한 분석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하는 순간, 어떤 방식으로 “죄인”은 아담의 개념N 안에 담겨 있는가? 
정해진 유한성의 조건 하에서만 분석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무한소 분석은 무엇을 뜻하는가? 

?두 번째 문제. 본질의 진리와 실존의 진리의 두 번째 차이. 본질의 진리는 모순이 불가능한 경우, 즉 2+2가 4가 아닌 것은 불가능하다. 왜? 일련의 유한한 절차를 통해서 4와 2+2의 동일성을 증명할 수 있다는 단순한 이유로. 그러므로 2+2=5는 모순적이고 불가능한 것으로 증명될 수 있다. 죄인이 아닌 아담, 죄를 짓지 않았을 아담을 나는 죄인의 모순항으로 취할 수 있다. 그것은 가능하다. 고전 논리학의 위대한 기준에 따라서 내가 2+2=5라고 말할 때 나는 아무 것도 사유할 수 없다 ; 나는 불가능한 것을 사유할 수 없다. 내가 사각형의 원을 말할 때 아무 것도 사유할 수 없는 것처럼. 그러나 죄를 짓지 않았을 아담에 대해서는 사유할 수 있다. 본질의 진리는 우발적인 진리라고 얘기된다. 
케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았을 수 있었다. 라이프니츠의 대답은 감탄할 만하다 : 그것은 실존하는 세계와 공가능하지 않다. 죄인이 아닌 아담은 다른 세계를 감싸고 있다. ---- 신은 아담이 죄를 지은 세계를 선택했다. --- 
왜 신은 이 세계를 선택했는가? 이 수준에서 공가능성의 개념N은 이상해진다. 두 사물이 공가능하다고, 다른 두 사물이 불공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죄인이 아닌 아담은 우리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에 속한다, ---- 공가능성의 관계. 이것은 무한한 분석이 무엇인가와 같은 물음이지만 같은 측면을 갖지는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꿈을 끌어낼 수 있다. 우리는 여러 수준으로 이 꿈을 꿀 수 있다. 너는 꿈꾼다, 너를 궁전으로 들어가게 하는 일종의 마법사가 있다 ; 이 궁전은 Apollodorus의 꿈. Apollodorus는 여신을 만나고, 이 여신은 그를 궁전으로 인도한다, 이 궁전은 여러 개의 궁전들로 이루어져 있다. 라이프니츠는 상자들을 담고 있는 상자를 좋아했다. 그는 설명했다, 물 속에는 많은 물고기들이 있고 물고기 안에는 물이 있고 이 물기의 물 안에는 물고기의 물고기가 있다. 그것은 무한한 분석이다. 미로의 이미지가 그를 부추긴다. 그는 끊임없이 연속적인 미로에 대해 말한다. 이 궁전은 피라미드의 형태를 갖는다, 피라미드의 최상층부에서, 거의 꼭지점 가까이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는 인물을 본다. 바로 아래에서 나는 다른 장소lieu에서 다른 것을 하는 같은 인물을 본다. 다시 그 아래에서 같은 인물이 다른 상황에 있다, 마치 각각의 궁전에서, 공통적 선분을 갖는 등장인물들로, 모든 종류의 연극 작품(완전히 다른)이 동시에 상연되고 있는 듯이. 그것은 라이프니츠가 신정론(신의 정의)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책.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각각 수준에서 그것이 가능한 세계라는 것. 신은 피라미드의 꼭지점에 가장 가까운 극단적 세계를 실존으로 이행하도록 선택한다. 그것을 선택하기 위해서 그는 어디를 향했는가? 나중에 ---- 그러나 우리는 신이 특정한 세계를 선택했다는 것을 이 세계가 죄인 아담을 함축한다고 말했다 ; 다른 세계에서, 동시적인 모든 것은 다른 것들variant이다, 우리는 다른 것을 생각할[떠올릴] 수 있고, 매번 그것은 하나의 세계이다. 그것들 각각은 가능하다. 그것들은 서로와 불공가능하다, 하나의 세계만이 실존으로 이행한다. 그런데 그것들 모두는 전력을 다해 실존으로 이행하려 한다. 라이프니츠가 신의 세계 창조에 대해 제안하는 비젼은 매우 자극적이 된다. 신의 지성 안에 모든 세계가 있고, 그것들 각각은 가능태le possibel에서 실존태l'existent로 이행하려는 야망pretention에 시달린다presser. 그것들은 그것들의 본질에 따라서, 실재성의 무게를 갖는다. 그것들이 담고 있는 본질에 따라서, 그것들은 실존으로 이행하려는 경향을 띤다. 그리고 이것은 그것들이 서로와 공가능하지 앗기 때문에 가능하지 았다 ; 실존은 댐과 같다. 하나의 조합만이 통과할 것이다. 어떤 것? 최선의 것. 
도덕 이론에 의해 최선이 아니라 게임 이론에 의해 최선. 라이프니츠가 통계학과 게임 계산의 창시자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 
이 공가능성의 관계는 무엇인가? 오늘날 유명한 저자는 라이프니츠주의자. 오늘날 라이프니츠주의인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두 가지를 뜻한다. ---- 하나는 직업의 필요성에 의해, 다른 하나는 비-전문적인 방식으로. 철학자일 수 없는 사람들. 그의 비명과 철학자의 개념 간의 친화성familiarity. eg) 니체와 스피노자. 로렌스와 스피노자. 클라이스트와 칸트. 이런 종류의 소통은 무엇인가? 스피노자는 많은 무식한[교양없는] 독자들을 뒤흔들었다... 보르헤스와 라이프니츠. 보르헤스는 언제나 두 가지를 말한다 : 실존하지 않는 책과 xxx. 그는 실제로 탐정 소설을 좋아한다. ?허구들?의 ?두 갈래길의 정원? , 유명한 신정론의 꿈. 
(6) ?두 갈래길의 정원?은 무한한 책, 공가능성들의 세계. 미로에 몰두하는 중국인 철학자의 관념은 라이프니츠의 동시대인들의 관념. 말르부랑슈의 유명한 텍스트에 중국인 철학자와 토론이 있다. 라이프니츠는 동양에 매료된다. 때로 공자를 인용. 보르헤스는 라이프니츠의 사유에 부합하는 일종의 카피를 만들었다, 본질적 차이를 가지고 : 라이프니츠에게 특정한 방식으로 죄를 짓는 아담(다른 방식으로 죄를 짓는 아담, 죄를 짓지 않는 아담)을 포함할 모든 상이한 세계들, 그는 이 모든 무한한 세계들을 서로에 대해 배제한다. 그것들은 서로와 불공가능하다. 그러므로 그는 고전적인 이접[연언]의 원리를 보존한다. 이 세계 아니면 어떤 다른 세계. 반면, 보르헤스는 이 모든 불공가능한 계열들을 같은 세계에 위치시킨다, 그는 결과들의 증식multiplication을 허용한다. 라이프니츠는 불공가능한 것들이 하나의 동일한 세계의 부분을 이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왜? 나는 두 가지 난점을 언표할 뿐이다 : 첫째, 무한한 분석은 무엇인가? 둘째 이 불공가능성의 관계는 무엇인가? 무한한 분석의 미로와 공가능성의 미로. 
대부분의 라이프니츠 주석가들은 공가능성을 모순의 원리에 정위한다. 그들은 죄인이 아닌 아담과 우리 세계 간에 모순[논리적 불가능성]이 있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의 편지에 따르면,  그것은 이미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죄인이 아닌 아담은 그 자체로는 모순적이지 않고, 공가능성의 관게는 논리적 가능성의 관계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에. 
단순한 논리적 모순을 발견하는 것은 다시 한번 실존의 진리를 본질의 진리로 환원시키는 것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가능성을 정의하는 것은 어렵다. 

무한 분석이란 무엇인가? -- 라이프니츠의 텍스트들을 조심해야 한다. 그것은 언제나 서신교환자들에게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그의 꿈을 다시 취한다면, 나는 그것을 변화시켜야 하고, 꿈의 변형태는, 같은 세계 내부에조차, 명료함 내지 모호함의 수준들―세계가 이러저러한 관점에서 제시될 수 있는―이 있다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인지를 알아야 라이프니츠의 텍스트를 판단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의 첫 번째 종류의 텍스트, 거기서 그는 모든 명제에서 술어는 주어 안에 담겨 있다고 말한다. 술어는 현실적으로든 잠재적으로든 담겨 있을 뿐이다. 이 포함, 이 내속은 현실적이거나 잠재적이다. <케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넜다>와 같은 유형의 실존 명제에서 포함은 잠재적일 뿐이다, 즉 “루비콘 강을 건너다”는 케사르의 개념N 안에 담겨 있지만 잠재적으로 담겨 있을 뿐이다. 두 번째 종류의 텍스트 : 죄인이 아담의 개념N 안에 담겨 있는 무한 분석은 미규정적 분석이다, 즉 나는 죄인에서 다른 항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그리고 나서 또 다른 항으로... 마치 죄인 = 1/2 + 1/4 + 1/8 + … 인 듯이. 이것은 어떤 지위를 줄 것이다 : 나는 무한 분석이 잠재적 분석, 즉 미규정적인 것l'indefini으로 (나아)가는aller 분석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을 말하는 라이프니츠의 텍스트들이 있다. 특히 ?형이상학에 대한 담론?에서. 그러나 ?형이상학에 대한 담론?에서 라이프니츠는 찰학자가 아닌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자기 체계의 총체성을 제시?제안한다. 나는 첫 번째 구절과 모순되는 또 다른 텍스트를 선택한다. 보다 학문적인 텍스트인 ?자유에 대하여?에서 라이프니츠는 “잠재적”이란 단어를 사용하지만 아주 이상하게도 그는 이 단어를 실존의 진리가 아니라 본질의 진리에 대해 사용한다. 
(7)이 텍스트는 본질의 진리와 실존의 진리가 “실존의 진리에서는 포함이 잠재적”이라고 하는 것만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잠재적 포함은 본질의 진리의 경우이므로. 사실, 본질의 진리는 두 가지 경우로 소급된다 : 술어와 주어의 동일성이 증명되는 순수하고 단순한 동일성 ; ‘12로 나눠지는 모든 수는 6으로 나눠진다’와 같은 유형의 포함의 추출degagement. 후자의 경우에 대해서 라이프니츠는 잠재적 동일성을 추출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무한 분석이 잠재적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것을 미규정적 분석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미규정적 분석은 그것이 내 인식의 결여에 의해서만 무한한 분석이라고, 내가 그 끝에까지 이를 수 없다고 말하는 것에 해당[귀착]하므로. 그렇기 때문에 신은 그의 지성으로 끝bout에까지 이를 것이다. 앞에 얘기한 분석이 이것인가? 아니다. 미규정적인 것은 그에게 실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라이프니츠가 이것을 말하고자 했을 리 없다. 거기에는 양립불가능하고, 시대착오적인 개념들N이 있다. 미규정적인 것은 라이프니츠의 트릭[비법/요령]이 아니다. 엄격하게 정의된 미규정적인 것은 무엇인가? 미규정적인 것과 무한한 것 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미규정적인 것은 내가 언제나 하나의 항에서 다른 항으로 멈춤 없이 이행해야 한다는―그러나 내가 도달하는 다음 항은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이다. 어떤 것이 실존하게 만드는 것은 나의 고유한 절차이다. 만일 내가 1 = 1/4 + 1/8 + … 이라고 말한다면, 이 …(등등)이 선재한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매번 그것이 솟아오르게 만드는 것은 나의 절차이다, 다시 말해서 미규정적인 것은 내가 부딪히는s'oppose 한계를 끊임없이 뒤로 밀치는repousse 절차 속에 실존한다. 아무 것도 선재하지 않는다. 미규정적인 것에 어떤 지위를 부여한 최초의 철학자는 칸트이다. 이 지위는 미규정적인 것은 그것을 관통하는parcourt 연속적인[계기적인] 종합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집합[전체]에 소급된다는 것. 즉 미규정적 계열의 항들은 하나의 항에서 다른 항으로 가는 종합에 선재하지 않는다. 
라이프니츠는 이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더욱이 미규정적인 것은 그에게 순전히 관례적인 것 혹은 상징[기호]적인 것으로 보인다. 왜? 17세기 철학의 가족 유사성l'air을 이루는 것을 말한 저자가 있다. 메를를 퐁티. ---- 그는 이 철학자들에게서 믿어지지 않는incredible 것은 무한성으로부터, 무한성에 따라서 사유하는 순진무구한innocent 방식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고전주의 세기. 이것은 철학이 여전히 신학과 뒤섞여melee 있었던 시대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지적이다. 17세기에 철학이 신학과 뒤섞여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그 순간에 철학이 무한자에 따라서 사유하는 순진한 방식과 분리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해야 한다. 
미규정적인 것[미규정성]과 무한한 것[무한성] 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미규정적인 것은 잠재적이라는 것이다 : 사실 다음 항은 나의 절차가 그것을 구성하기 이전에 선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무한성은 현실적인 것이다, 무한성은 현실태(en acte)로만 존재한다. 그렇다면 모든 종류의 무한들이 있을 수 있다. 파스칼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끊임없이 무한들의 질서를 구별하는 세기이고, 무한들의 질서들에 대한 사유는 17세기 전체에서 근본적이다. 이 사유는 19세기와 20세기에 정확히 무한 집합 이론과 더불어 우리 머리 위로 다시 떨어진다. 무한 집합으로 우리는 고전 철학의 기초[기저]에서 작동한 어떤 것을 재발견한다. 특히 무한들의 질서들의 구별 : 이것은 분명 파스칼, 스피노자, 라이프니츠―모든 수학적 장치를 무한 및 무한들의 질서의 분석에 종속시킨―를 포함. 어떤 의미에서 하나의 무한들의 질서가 다른 것보다 더 크다고[중요하다고]grand 말할 수 있는가? 다른 무한보다 더 큰 무한은 무엇인가, 등등..? 무한성으로부터 그러나 전혀 혼동스럽지 않은 방식으로―모든 종류의 구별들이 도입되므로― 사유하는 순진무구한 방식.   
(8)실존의 진리의 경우에, 라이프니츠의 분석은 분명 무한하다. 그것은 미규정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그가 ‘잠재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내가 소묘하려고 하는 이 해석에 근거[이유]를 제공하는 형식적[공식적] 텍스트가 있다. ?자유에 대하여?의 한 구절. 거기서 라이프니츠는 말한다 : “술어 죄인이 개별 개념N 아담에 포함되어 있음을 분석하는 것이 문제일 때, 신은 분명 해결의 끝fin이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 끝을 본다.” 그러므로 다시 말해, 신에게조차 이 분석에는 끝이 없다. 그러면 너는 그것은 신에게조차 미규정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미규정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분석의 모든 항들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이 미규정적이라면, 모든 항들이 주어져 있지 않을 것이고, 그 항들은 [절차에 따라서] 하나씩 주어질 것이다. 그것들은 선재하는 방식으로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무한 분석에서 우리는 어떤 결과resultat에 도달한다 : 무한히 많은 무한히 작은 요소들이 주어져 있고, 너는 무한히 작은 요소들의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의 이행을 갖는다. 우리는 그런 무한에 대해서, 현실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무한히 작은 요소들의 총체성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너는 우리가 이때에도 끝에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 본성상[너의 지성의 결핍에 의해서가 아니라] 끝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무한 집합이기 때문에. 요소들의 총체성은 주어져 있고 너는 하나의 요소에서 다른 요소로 이행한다, 그러므로 너는 무한히 작은 요소들의 무한 집합을 갖는다. 너는 한 요소에서 다른 요소로 이행한다 : 너는 무한한 분석을 수행한다, 즉 너에게도 신에게도 끝이 없는 분석을. 
이 분석을 수행한다면 너는 무엇을 보는가?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신뿐이라고 가정해 보자. 너는 너 자신을 미규정자l'indefini로 만든다faire, 왜냐하면 너의 지성은 한계지워져 있으모르, 그러나 신은 자신을 무한으로 만든다. 분석의 끝은 없기 때문에 신은 분석의 끝을 보지 못하지만, 분석을 수행한다. 더욱이 분석의 모든 요소들이 현실적 무한 속에서 그에게 주어져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죄인”이 아담에게 연결된다는 것을 뜻한다. 죄인은 하나의 요소이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주어진 무한히 많은 다른 요소들에 의해 아담의 개별 개념N에 연결된다. 그것이 실존하는 세계 전체, 즉 실존으로 이행한 공가능한 세계 전체이다. 우리는 거기서 아주 심오한 어떤 것을 건드린다. 내가 분석을 수행할 때, 나는 무엇에서 무엇으로 이행하는가? 자는 죄인 아담에서 요부[유혹녀] 이브로, 요부 이브에서 악마 뱀으로, 사과로 이행한다. 이것은 무한한 분석이고 죄인이 아담의 개별 개념N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무한한 분석이다. 무한히 작은 요소는 무엇을 뜻하는가? 왜 죄는 무한히 작은 요소인가? 왜 사과는 무한히 작은 요소인가? 왜 “루비콘 강을 건너다”는 무한히 작은 요소인가? 너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한다? 무한히 작은 요소는 없다, 그래서 무한히 작은 요소―우리는 이것을 말할 필요가 없다―는 두 요소들 간의 무한히 작은 관계를 뜻한다. 그것은 요소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 두 요소들 간의 무한히 작은 관계, 그것은 무엇일 수 있는가? 무한히 작은 요소들의 문제가 아니라 두 요소들 간의 무한히 작은 관계가 문제라고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가? 그런데 ?내가 미분 계산의 관념이 없는 누군가에게 말한다면, 너는 그에게 그것이 무한히 작은 요소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옳았다[이유/근거를 가졌다]. ?만일 아주 모호한 인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는 이것들이 유한한 요소들 간의 무한히 작은 관계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미분 계산에 아주 박학한 사람이라면, 나는 그에게 다른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존의 진리의 수준에서 술어가 주어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증명해 나가는 무한한 분석은 동일성의(잠재적인 동일성일지라도) 증명에 의해서 진행되지 않는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다른 공식을 갖는다 : 동일성은 본질의 진리를 지배하지만, 실존의 진리는 지배하지 않는다. 언제나 그는 대립을 말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누구에게 그것을 말하는지를 물어라. 그때 그것은 무엇인가? 실존의 진리의 수준에서 그가 관심을 갖는 것은 술어와 주어의 동일성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의 술어에서 다른 술어로, 다시 하나의 술어에서 다른 술어로 계속 이행한다는 것이다. 무한 분석의 관점에서, 즉 연속성의 최대치(의 관점)로부터. 
다시 말해 본질의 진리를 지배하는 것은 동일성지만 실존의 진리를 지배하는 것은 연속성이다. 그리고 세계란 무엇인가? 세계는 그것의 연속성에 의해 정의된다. 두 불공가능한 세계를 분리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두 세계 간에 불연속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공가능한 세계를 정의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계가 할 수 있는 공가능이다. 최선의 세계를 정의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가장 연속적인 세계이다. 신의 선택의 기준은 연속성일 것이다. 모든 서로서로 불공가능한 세계들(그 자체로는 가능하지만) 중에서, 신은 최대치의 연속성을 실현하는 세계를 실존으로 이행하게 만들 것이다. 
(9)왜 아담의 죄는 최대치의 연속성을 갖는 세계 안에 포함되는가? 우리는 아담의 죄가 가공할 연결[접속/합언]을 갖는다고, 계열의 연속성을 보증하는 연결이라고 믿어야 한다. 아담의 죄와 그리스도의 육화와 구원Redemption 간에 직접적 연결이 있다. 연속성이 있다. 시공간의 차이를 가로질러[넘어서] 서로 쟁여지기s'emboiter 시작할 계열(들) 같은 것이 있다. 다시 말해, 본질의 진리의 경우에 나는 포함을 보게 만들 동일성을 증명했다, [실존의 진리의 경우] 나는 두 요소들 간의 무한히 작은 관계에 의해 보증되는 연속성을 증언할 것이다. 내가 두 요소들 간의 무한히 작은 관계를 지정할 수 있을 때 그 두 요소들은 연속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무한히 작은 요소의 관념에서 두 요소들 간의 무한히 작은 관계의 관념으로 이행했다, 그것은 충분하지 않다. 보다 큰 노력이 요구된다. 두 요소들이 있으므로 두 요소들 간의 차이가 있다 : 아담의 죄와 이브의 유혹 간에, 차이가 있다 ; 연속성의 공식은 무엇인가? 우리는 연속성을 사라지는 경향을 띠는 한에서의 차이의 소행l'acte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연속성은 사라지는 차이이다. 
이부의 유혹과 아담의 죄 간에 연속성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둘 간의 차이는 사라지는 경향을 띠는 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본질의 진리는 동일성 원리에 의해 지배되고, 실존의 진리는 연속성의 법칙에 의해―즉, 사라질 차이들에 의해― 지배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죄인과 아담 사이에서 너는 논리적 동일성이 아니라 연속성(하나 혹은 여럿의 사라질 차이들)을 증명할 수 있다―증명이라는 단어는 그 의미를 달리할 것이다. 무한한 분석은 사라질 차이들을 통해 수행되는operant 연속적인 것에 대한 분석이다.         
그것은 어떤 상징, 즉 미분 계산 혹은 무한소 분석이란 상징에 소급된다. 그러나 뉴튼과 라이프니츠가 미분 계산을 발전시킨 것은 동시적이다. 그리고 사라질 범주에 의한 미분 계산의 해석은 라이프니츠의 고유한 것이다. 논리적이고 이론적인 골격armature은 라이프니츠의 저작과 뉴튼의 저작에서 아주 다르고, 사라질 차이로 간주[생각]된 미분의 테마는 라이프니츠에게 고유한 것이다. 더욱이 그는 그것에 크게 의존한다, 그리고 뉴튼주의자들과 라이프니츠 간에 커다란 논쟁이 있다. 우리의 이야기는 보다 정확해진다 : 이 사라질 차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미분 방정식은 근본적이다. 미분 방정식 없는 물리학은 없다. 오늘날, 수학적으로 미분 계산은 무한자에 대한 고려를 일소했다. 더 이상 무한자의 문제가 아닌 미분 계산의 공리적 지위는 19세기말에 시작. 그러나 우리가 라이프니츠의 시대에 위치한다면, 너 자신을 수학자의 자리에 두어라 : 상이한 멱의 크기와 양―그 변수가 상이한 멱인 방정식, 예컨대 axº+y―에 직면한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너는 제곱의 양과 quantite a la puissance를 갖는다. 그것들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는가? 여러분은 통약불가능한 양에 대한 이야기를 안다. 거기서 17세기에 상이한 멱의 양들은 이웃하는 부호mot voisin를 받아들였다 : 그것은 비교할 수 없는 양들이다. 모든 방정식 이론은 17세기에 이 근본적인 문제와 충돌한다, 가장 단순한 대수학에서조차 : 미분 계산은 무엇에 복무하는가[도움이 되는가]? 미분 계산은 상이한 멱의 양들의 직접적 비교로 나아가게proceder 해 준다. 더욱이 미분 계산은 오직 거기에만 복무한다. 미분 계산은 네가 비교할 수 없는 것에, 즉 상이한 멱의 양들에 직면할 때, 그 적용의 수준을 발견한다. 왜? axº+y에서, 어떤 수단들로 네가 dx와 dy를 추출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축어적으로verbally, 관례에 의해서 dx 혹은 dy가 무한히 작은 양―x나 y에서 더해지거나(+) 빼진(-) 것이라고 가정되는―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제 거기에는 발명이 있다! 무한히 작은 양은 고려되는 양의 가장 작은 변이variation이다. 그것은 관례에 의해 지정될 수 없다. 그러므로 x에서의 dx=0는 그것에 의해 x가 변할vary 수 있는 가장 작은 양이다. 그래서 그것은 0과 같다. y에 대해 dy=0로 마찬가지. 사라지는 양의 개념N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변이 혹은 차이이다. dx 혹은 dy ; 그것은 어떤 주어진 혹은 주어질 수 있는 양보다 더 작다. 그것은 수학적 상징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정신나간 것이다. 그것이 조작적이라는 의미에서. 무엇에 대해? 여기에 미분 계산의 상징체계에서 가공할 것이 있다 : x에 대해 dx=0(지정불가능한 x의 양 혹은 y의 양이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차이, 가장 작은 증가분accroissement)는 무한히 작다. dy/dx가 0과 같지 않다는 기적. 더 나아가서 dy/dx는 완전하게 표현가능한 유한한 양을 갖는다. 
이것은 상대적일 뿐인 값이다. dx는 x에 대해 무이고 dy는 y에 대해 무이지만, dy/dx는 어떤 것이다. axº-by+c와 같은 예에서 너는 비교할 수 없는 양인 xº과 y를 갖기 때문에. 만일 네가 미분 관계를 고려한다면, 그것은 0이 아니다. 그것은 정해진다, 혹은 정해질 수 있다. dy/dx 관계는 너에게 비교불가능한 양(상이한 멱의 양)을 비교할 수단을 제공한다. 그것은 양의 탈포텐샬화를 수행하기operer 때문에. 그래서 그것은 상이한 멱의 비교불가능한 양과 대면할 직접적 수단을 제공한다. 그때 이후로 모든 수학, 모든 대수학, 모든 물리학은 미분 계산의 상징체계symbolism 속에 기입될 것이다.. 물리적 실재와 수학적 계산의 이런 종류의 상호 침투를 가능케 만든 것은 dx와 dy의 관계이다. 
“Justification of the calculus of infinitesimals by caculs of ordinary algebra”라 불리는 세 페지의 짧은 노트. -- 라이프니츠는 특정한 방식으로 미분 계산이 발견되기 이전에 이미 기능하고 있었다고,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다르게 행할 수 없었다고(가장 평범한 대수학의 수준에서조차) 설명한다. 
x는 y와 같지[동등하지] 않다. 그것은 문제의 구성의 소여 자체와 대립할contrary 것이므로. 그러한 한에서 이 경우 너는 x/y=c/e이고 c=0, e=0라고 쓸 수 있다. *** 
이것들은 무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절대적 무는 아니다, 그 각각은 무이다. 
이것들은 무이지만 미분 관계를 보존하는 무이다. 그러므로 c는 e와 같아지지[동등해지지] 않는다, 그것은 x와 비례적이고 x는 y와 같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낡은 미분 계산의 정당화이다. 그리고 이 텍스트의 관심은 그것이 가장 쉽고 평범한 대수학을 통한 정당화라는 것이다. 이 정당화는 미분 계산의 특수성을 문제삼지 않는다. 
(11)그 아름다운 구절 : “그러므로 현재의 경우에, x-c=x일 것이다. 이 경우가 일반 규칙에 포함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c와e는 절대적 무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함께 raison de cx a xy 혹은 전체 사인 내지 반지름radius과 탄젠트(c각에 해당하는) 사이에 있는 것을 유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각이 언제나 같은 값을 유지한다고 가정했다. 왜냐하면 이 점c, e, a가 일치하는 경우로 환원되는 이 계산에서 c, C와 e는 절대적 무라면, 하나의 무가 다른 것과 같은 값을 가질 때, c와 e는 같아지고 등식 혹은 유비 x/y=c/e가 x/y=0/0=1이 되는 것처럼, 때문에. 다시 말해 우리는 부조리[불합리]일 x=y를 갖는다.” 
“그래서 우리는 대수학적 계산에서 차이들에 대한 초월적transcedent 계산(즉 미분 계산)의 흔적을, 그리고 몇몇 학자들을 주저하게 만든 그것의 특이성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    
정확히 이런 방식으로 나는 정지가 무한히 작은 운동이라고, 혹은 원이 그 변들이 무한하게 증가하는 다각형의 무한한 계열의 극한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이 모든 예에서 비교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꼭지점에 의해 상반되는 두 개의 유사한 삼각형의 극단적 경우로서 하나의 삼각형만이 있는 경우를 고려해야 한다. 라이프니츠가 이 텍스트에서 증명한 것은 어떻게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하나의 삼각형이 꼭지점에 의해 상반되는 두 개의 유사한 삼각형들의 극단적 경우로 간주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거기서 너는 우리가 “잠재적”에 우리가 찾고 있던 의미를 주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다. 나는 나의 두 번째 도형(단 하나의 삼각형만 이 있는)의 경우에, 다른 삼각형들이 거기에 있지만 그것은 오직 잠재적으로만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잠재적으로 거기에 있다, 왜냐하면 a는 a와 구별되는 e와c를 잠재적으로 담고 있기 때문에. 왜 e와 c는 그것들이 더 이상 실존하지 않는데도 a와 구별되는가? 왜냐하면 그것들은 항들이 사라졌는데도evanouis 계속 실존하는 관계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정지는 운동의 특수[특정]한 경우, 즉 무한하게 작은 운동으로 간주될 것이다. 나의 두 번째 도형, xy에서 나는 그것이 삼각형 CEA가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삼각형이 그 말의 공통적[흔한] 의미에서 사라진disparu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지정될 수 없다는 것과 그럼에도 그것은 완전하게 결정된다는(이 경우에 c=0, e=0이지만, c/e는 0과 같지 않기 때문에) 것을 함께 말해야 한다. 
c/e는 y/x와 같도록 완전하게 정해진 관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정해질 수 있고 정해진다. 그러나 지정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정지는 완전하게 정해진 운동이다, 그러나 지정될 수 없는 운동이다. 마찬가지로 원은 정해질 수 없는, 그러나 완전하게 정해진 다각형이다. 
너는 “잠재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본다. “잠재적”은 더 이상 “미규정적”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고 거기서 라이프니츠의 모든 텍스트는 복구[회복]될 수 있다. 그는 악마적 저작을 행했다 : 그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서 잠재적이라는 단어를 취해서 그것에 매우 엄격한 새로운 의미acceptation를 부여했다. 그는 다른 텍스트들에서 그것을 말할 뿐이다 : 그것은 더 이상 “미규정적인 것으로 감”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정될 수 없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해진”을 뜻한다. 
그것은 매우 새롭고 동시에 매우 엄격한 잠재성 개념이다. 그러나 이 다소 신비스러운 표현이 처음에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기술과 개념을 가져야 했다. 그것은 c와 e가 o과 같아지기 때문에 지정될 수 없다. 그렇지만 c/e, 즉 0/0은 0과 같지도 1과 같지도 않고, y/x와 같기 때문에 완전하게 정해진다. 
더욱이 그는 실제로 교수의 천재성을 가졌다. --- 그는 어떤 미분 계산 개념N도 전제하지 않았다. 
(12)세계에 연속성이 있다는 관념, 그것을 라이프니츠가 요구하는 것보다 더 신학적인 것으로 만드는 주석가들이 있다. 그들은 무한한 분석이 신의 지성 안에 있다고 말하는 데 만족한다. 그리고 그의 텍스트에 따르면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미분 계산으로 우리는 우리의 지성을 신의 지성과 동등하게 만들 고안물artifice을 갖는 것이 아니라―이것은 불가능하다―, 미분 계산은 신의 지성(미분 계산의 상징체계 덕분에 접근할 수 있는)에서 일어나는 것에 대한 잘-기초지어진 근사치approximation를 수행[조작]할 고안물을 제공한다 ; 왜냐하면 결국 신 또한 같은 방식으로는 아니지만, 상징에 의해 조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연속성의 근사치[접근값]는 하나의 경우가 주어질 때, 연속성의 최대치가 보증되는, 극단적이고 상반되는 경우는 처음 정의된 경우에 포함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그러한 것이다. 
너는 운동, 다각형을 정의한다, 그것은 거의 중요하지 않다. 너는 극단적이거나 상반되는 경우를 고려한다 : 정지, 각을 결여하는 원. 연속성은 파생적인[외래적인]extrinseque 경우―운동과 상반되는 정지, 다각형과 상반되는 원―가 본래적인 경우의 개념N 안에 포함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길의 설립instauration이다. 
파생적인 경우가 본래적인 경우의 개념N 안에 포함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을 때 연속성이 있다. 
라이프니츠는 그 이유를 보여주었다. 너는 술어화[귀속]의 공식을 발견한다 : 술어는 주어 안에 포함된다. 
나는 모든 운동들을 포괄하는recouvre 운동 개념C을 “본래적인 경우”라고 부른다. 이 첫 번째 경우와 관련하여 정지를, 혹은 모든 다각형들과 관련하여 원을 혹은 조합된 모든 삼각형들과 관련하여 유니크한 삼각형을 파생적인 경우라고 부른다. 나는 모든 미분 상징체계를 함축하는 개념, 즉 일반적인 본래적 경우에 대응하는 동시에 또한 파생적인 경우를 포함하는 개념을 구성하는 데 착수한다. 만일 내가 거기에 도달한다면, 나는 진정으로 정지는 무한하게 작은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치 내가 나의 유니크한 삼각형이 꼭지점에 의해 대립되는opposes 두 개의 유사한 삼각형들(그 두 삼각형 중 하나는 지정불가능하게 될 것이다)의 대립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바로 그 순간에 다각형에서 원으로의, 정지에서 운동으로의, 꼭지점에 의해 대립되는 두 개의 유사한 삼각형에서 하나의 유일한 삼각형으로의 연속성이 있다. 
19세기 중반 Poncelt가 발명한 투사 기하학, 그것은 라이프니츠적. 연속성의 공리에 기초 : 직선에 의해 두 점에서 절단된 원호를 취한다면, 그 직선이 올라가게 만든다면, 그것이 원을 떠나는 순간이 있다(어떤 점에서도 더 이상 원과 접촉하지 않는). Poncelet의 연속성 공리는 탄젠트의 경우를 극단적인 경우로 다룰 가능성을 주장한다, 즉 그것은 점들 중 하나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두 점 모두 여전히 거기에 있다, 그러나 잠재적으로. 그것들 모두가 원을 떠날 때, 두 점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점들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그러나 둘 모두 잠재적으로. 이것은 정확히 투사의 체계, 소위 투사적 체계를 허용하는 연속성의 공리이다. 수학은 그것을 통합적으로 유지할 것이다, 그것은 가공할 기술이다. 
그 안에는 코믹한 어떤 것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라이프니츠를 전혀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거기서 다시 주석가들은 아주 이상하다. 처음부터 우리는 실존의 진리가 본질의 진리 혹은 수학적 진리와 같은 것이 아님을 보여 주는 것이 문제인 영역에 빠져 있었다. 그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라이프니츠의 천재성으로 가득 찬(그러나 우리를 그처럼 내버려 두는**) 아주 일반적인 명제를 가지고 : 신의 지성, 무한한 분석―그리고 그때 그 모든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질의 진리가 어떤 방식으로 수학적 진리로 환원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문제일 때, 라이프니츠가 말하는 것에서 설득력 있는 것은 전부 수학적이다. 그것은 우습다, 아니라고? 
전문가인 반대자는 말할 것이다 : 너는 실존의 진리의 환원불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이 환원불가능성을 순전히 수학적 개념들N만을 사용해서 정의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뭐라고 대답할까? 모든 종류의 텍스트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내가 미분 계산이 실재를 지시한다고 말하게 했다. 라이프니츠는 대답한다, 나는 결코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미분 계산은 잘-기초지어진 관례이다. 라이프니츠는 미분 계산이 상징체계symbolic system일 뿐이라는 것, 그것이 실재를 소묘하지[그리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실재를 다루는 방식을 지시한다는 것을 유지한다. 이 잘-기초지어진 관례는 무엇인가? 그것이 관례인 것은 실재와 관련해서가 아니라 수학과 관련해서이다. 바로 거기에 하지 말아야 할 오해가 있다. 미분 계산은 상징체계이다. 그러나 실재적 실재와 관련해서가 아니라 수학적 실재와 관련해서이다. 미분 계산의 체계가 허구인 것은 수학적 실재와 관련해서 이다. 그는 또한 “잘-기초지어진 허구”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것은 수학적 실재와 관련해서 잘-기초지어진 허구이다. 다시 말해 미분 계산은 고전적 대수학 혹은 산술의 관점에서는 정당화될 수 없는 개념들C을 동원한다. 그것은 분명하다. 무가 아니고 0과 같은 양들, 그것은 산술적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것은 산술적 실재성도 대수학적 실재성도 갖지 않는다. 그것은 허구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미분 계산이 실재적인 어떤 것도 지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미분 계산이 수학적 실재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허구이다, 그러나 정확히 그것이 허구인 한에서 그것은 우리가 실존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만든다. 
다시 말해 미분 계산은 수학과 실존태의 일종의 합일이다. 즉, 그것은 실존태의 상징이다. 그것이 실존의 실재(성)을 탐구하는 수단인 것은, 그것이 수학적 진리와 관련해서 잘 기초지어진 허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는 “사라지는”과 “사라지는 차이”라는 단어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본다. 그것은 관계의 항들이 사라졌는데도 관계가 계속되는 때이다. c와 e가 사라졌는데도 관계c/e는 a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너는 미분 계산을 통해 연속성을 구축했다. 
라이프니츠는 다음 같이 말하기 위해 더 굳건해진다fort : 신의 지성 안에서 죄인이라는 술어와 아담의 개념N 간에는 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라. 신이 세계를 창조한 때 정도로 사라지는 차이에 의해 연속성이 있다, 신은 계산을 했을 뿐이다. 무슨 계산! 분명 산술적 계산은 아니다. 
그는 이 토픽에 대해서 두 설명 사이에서 동요한다. 그러므로 신은 계산함으로써 세계를 창조했다. 신은 계산한다, 세계는 창조된다. 
놀이꾼jouer으로서의 신의 관념은 어디에서나 발견될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신이 놀이함으로써 세계를 창조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것을 말했다. 그것은 별로 흥미롭지 않다. Heraclitus에 의한 텍스트가 있다. 거기서는 실제로 세계를 구성한 놀이꾼 아이가 문제이다. 그는 놀이한다, 무엇을? 그리스인들과 그리스 아이들은 무슨 놀이를 하는가? 다양한 번역들이 상이한 놀이를 제공한다. 그러나 게임에 대해 설명할 때, 라이프니츠는 그것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두 가지 설명을 갖는다. 타일깔기pavage의 문제―건축학적 문제와 수학적 문제 모두에 걸치는―에서, 표면이 주어질 때, 어떤 형상[도형]으로 그것을 완전하게 채울 것인가? 보다 복잡한 문제 : 네가 사각형의rectangular 표면을 취해서 그것을 원들로 타일하고자 한다면, 너는 그것을 완전히 채우지 못한다. 사각형carre으로 너는 그것을 완전하게 채우는가? 그것은 측정에 달려 있다. 사각형들rectangles로? 동등한가 부등한가? 그 다음, 네가 두 도형을 가정한다면, 그것 중 어는 것이 공간을 완전하게 채우도록 조합되는가? 만일 네가 원들로 타일하려 한다면, 어떤 다른 도형으로 빈 공간들을 채울 것인가? 혹은 너는 전체를 채우지 않는 데 동의한다... 너는 그것이 연속성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본다. 네가 그것을 모두 채우지 않는다고 결정한다면, 어떤 경우에, 어떤 도형들로, 어떤 상이한 도형들의 조합으로 너는 가능한 최대치를 채우는데 성공하는가? 그것은 통약불가능성을, 그리고 비교불가능성을 작동시킨다. 타일깔기의 문제는 라이프니츠를 열광시킨다.     라이프니츠가 신은 모든 가능한 세계들 중 최선을 선택해서 존재하게 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가 말하기 이전에 라이프니츠를 앞서간다. 모든 가능한 세계들 중 최선은 라이프니츠주의의 위기였다, 그것은 18세기의 일반화된 반-라이프니츠주의였다 : 그들은 모든 가능한 세계들 중 최선에 대한 이야기를 지지할 수 없었다. 
볼테르는 옳았다. 그들은 분명 라이프니츠에 의해 충족되지 않은 철학을 요청했다. 특이 정치의 관점에서. 따라서 그는 라이프니츠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경건한 절차에 착수한다면, 실존하는 세계가 가능한 세계들 중 최선이라는 것에 의해 라이프니츠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아주 단순한 것 : 다수의 가능한 세계들이 있다, 그들은 서로와 공가능하지 않을 뿐이다, 신은 최선을 선택하고 최선은 가장 적게 고통을 겪는 세계가 아니다. 합리주의적 낙관론은 동시에 무한한 잔인성이다, 그것은 누구도 고통을 겪지 않는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원의 최대치를 실현하는 세계이다. 
만일 내가 감히 비-인간적인 메타포를 사용한다면, 원이 다각형의 변용에 지나지 않을 때, 원이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정지가 운동의 변용에 불과할 때, 정지의 고통을 상상해 보라. 그것은 연속성의 최대치를 실현하기 때문에, 세계들 중 최선일 뿐이다. 다른 세계들은 가능했지만, 그것들은 연속성을 덜 실현했을 것이다. 이 세계는 가장 아름다고, 가장 조화롭다, 이 냉혹한pitiless 구절의 무게 아래서 유니크하게 : 그것은 가능한 최대의 연속성을 효과화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것이 살과 피를 대가로 이루어지더라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신은 정의로울―즉, 최대치의 연속성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멋쟁이이기 때문에 세계를 변화시키고자varier 한다. 그래서 신은 이 연속성을 감춘다. 그는 자신의 길[경로]을 감추기 위해서 그가 다른 곳에 위치시키는, 다른 선분들과 연속적이어야 할 어떤 선분을 둔다. 
우리는 재회할se retouvre 위험이 없다. 이 세계는 우리의 희생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분명하게 18세기는 라이프니츠의 이야기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타일깔기의 문제를 본다 : 최선의 세계는 형태figures와 형상(形相)이 최소한의 공허void를 남겨 두면서 시-공간의 최대치를 채울 세계이다. 
라이프니츠에 의한 두 번째 설명―여기서 그는 훨씬 더 강력하다 : 체스 놀이. 그리스의 놀이를 언급하는 Heraclitus의 구절과 체스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언급 사이에는 두 놀이 사이에 있는 모든 차이들이 있다―“신이 놀이한다”는 공통의 공식이 그것이 일종의 지복이라고 믿게 할 수 있는 바로 그 순간에 두 놀이 사이에 있는 차이가. 라이프니츠는 체스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체스판은 공간이고 말들은 개념들이다. 체스에서 최선의 수coup, 수의 최선의 집합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해진 값을 갖는 정해진 수nombre의 말들이 최대치의 공간을 장악하거나tenir 점유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졸[말]들을 그것들이 최대치의 공간을 통어하는commander 방식으로 위치시켜야 한다. 
이것은 메타포일 뿐인가? 여기서 다시 일종의 연속성 원리가 있다 : 최대치의 연속성. 타일깔기의 메타포에서처럼, 체스의 테타포에서도 무엇이 작동하지 않는가? 두 경우 모두에서, 너는 집적소에 대한 언급을 갖는다. 그것들은 가능한 세계들이 정해진 집합소에 육화되기 위해서 경쟁하는 듯이 제시된다. 타일깔기의 경우에, 그것은 타일이 깔리는 표면이다 ; 체스의 경우에 그것은 체스판이다. 그러나 세계의 청조의 조건들에 선행적인 집합소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존으로 이행하는 세계가 그 자체로(그 자신 안에서) 최대치의 연속성을 실현하는, 다시 말해 가장 큰 양의 실재성 혹은 본질을 담고 있는 세계라고 말해야 한다. 가장 큰 양의 실존이 아니라 연속성의 상espece 하에서 가장 큰 양의 본질을 담고 있는 세계가 실존할 것이므로 나는 실존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연속성은 사실 정확히 가장 큰 양의 실재성을 담는 수단이다.  
여기에 철학으로서 가장 아름다운 비젼이 있다. 
이 패러그래프에서 나는 <무한 분석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답했다 나는 아직 N공가능성이란 무엇인가>에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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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rd LESSON
1980.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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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처음부터 제기한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양식bon sens이 철학에 대해서 형성하는 이 이미지, 일종의 토론의 장lieu으로서의 이 이미지는 무엇인가? 무엇을 뜻하는가? 적어도 과학에서 우리는 우리가 무엇에 대해 말하는지 아는 데 비해, 사람들이 서로 논쟁을 벌이고, 서로 싸우는 일종의 철학적 분위기. 우리는 철학자들이 모두 동일한 것을 말하거나(동의하거나), 대립되는 것을 말한다고 말한다. 동의하지 않는 두 철학자는 무엇을 뜻하는가? 몇몇 분과들을 가로지르는 것의 특정한 상태로서의 논쟁, 나는 과학이나 예술에 있는 것 이상으로 철학에 논쟁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다른 철학을 비판하는 철학은 무엇인가? 이 비판의 기능은 무엇인가? 라이프니츠는 이 예를 제공 : 철학자들의 대립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들의 이 대립과의 관계 또한 평가해야 한다. 그 관계는 등가적이지 않다. 아마도 다른 것보다 더 심오하거나 더 결정적인 것이 있을 것이다. 네가 대립들의 조직화에 실패한다면rater, 너는 논쟁에 있어서의 문제를 이해할 수 없다. 
인식의 관점에서 라이프니와 칸트의 첫 번째 대립. 나는 라이프니츠가 말하게 한다. 라이프니츠의 명제 : 모든 명제들은 분석적이고, 인식은 분석적 명제에 의해서만 이루어질porceder 수 있다. 분석적 명제는 명제의 두 항 중 하나가 다른 하나의 개념concept 속에 담겨 있는 명제. 이것은 철학적 공식. 우리는 이 수준에서 논의할discuter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예감할 수 있다. 왜? 이미 함축된 어떤 것이, 즉 특정한 인식 모델이 있기 때문이다. 전제되는 것, 그러나 과학에서도 역시 전제들, 전제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특정한 인식 관념 즉 인식하는 것은 개념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식에 대한 정의. 우리는 인식에 대한 정의를 갖는 것에 만족한다, 그러나 왜 다른 것이 아니라 이것인가? 
다른 쪽에서 칸트가 출현하여 말한다 : 종합적 명제들이 있다. 종합적 명제란 항들 중 하나가 다른 항의 개념 안에 담겨 있지 않은 명제. 그것은 외침cri인가, 그것은 명제인가? 라이프니츠에 반해서 그는 말한다 : 종합적 명제들이 있고, 종합적 명제들에 의해서만 인식이 있다. 대립은 완전한 듯하다. 거기서 수많은 질문들이 나온다. 이것은 무엇을 논의하는 것을 뜻하는가? 무엇을 눌러 이기는 것**--** 그것은 증명가능한가. 그것은 모순 없이 수용가능한decidables 명제들의 영역인가? 칸트의 정의에 천착한다면 그것 역시 특정한 인식 개념을 함축하며, 이 인식 개념은 라이프니츠의 것과 매우 다르다는 것이 발견된다. 인식이 종합적 명제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고 말할 때, 두 항들 간에 종합이 있다. 라이프니츠적 인식 개념이 더 이상 형성될 수 없다고 말하는 누군가. 
그는 반대로 인식하는 것은 개념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 인식하는 것은 [개념에 대해] 다른 것을 긍정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하나의 개념을 벗어나는 것이다. 어떤 개념에 다른 것을 귀속시키거나 그 개념에 대해 다른 것을 긍정하기 위해서 개념을 벗어나는 활동acte은 종합이라고 불린다. 다시 말해 인식하는 것은 언제나 개념을 넘어서는[빠져 나오는]deborder 것. 인식하는 것은 넘어서는depasser 것이다. 작동 중인se jouer 모든 것을 이해할 것. 첫 번째 개념에서, 인식하는 것은 하나의 개념을 갖고 그 개념 안에 담겨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 거기서 나는 인식은 정념 혹은 지각perception의 모델인 특수한 모델을 모델로 한다고 말한다. 인식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무언가를 지각하는 것이다 ; 인식하는 것은 포착하는apprehender 것이다 ; 그것은 인식의 수동적passif 모델이다, 비록 많은 능동성들이 그것에 의존한다고 할지라도. 
반대로 다른 경우에, 그것은 다른 것을 긍정하기 위해서 개념을 벗어나는 것, 능동적acte 인식 모델이다. 
나는 두 가지 명제(라이프니츠의 명제와 칸트의 명제)로 되돌아간다. 우리가 심판관arbitre처럼 있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두 가지 명제 앞에 있다, 그리고 말한다 : 나는 무엇을 선택하는가? 첫 번째로 내가 그것들은 모순 없이 수용가능한가decidable?라고 말할 때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그것이 사실의 문제임을 뜻할 수 있다. 하나 혹은 다른 하나에 이유를 주는[옳다고 인정하게 만드는] 사실들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분명히 그런 것이 아니다. 철학적 명제들은 어떤 면에서 사실들의 검사verification에 의존할justiciable 수 없다. 이 때문에 철학자는 언제나 두 가지 문제를 구별했다―그리고 특히 칸트는 이 구별을 다시 취한다. 
이 구별은 라틴어로 다음과 같이 정식화된다 : quid facti와 quid juris. 그리고 만일 철학자가 권리를 가지고 해야 한다면, 이는 그가 권리의 문제라고 얘기되는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나의 두 가지 이율배반적인 명제들(라이프니츠의 명제와 칸트의 명제)이 사실상의de fait 대답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는 사실에 있어, 문제는 없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종합의 현상들인 현상들과 만나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가장 단순한 판단들 속에서 종합을 수행하는 데 나의 시간을 보낸다. 예컨대 나는 이 직선은 검다고 말한다. 
내가 직선 개념 안에 담겨 있지 않은 어떤 것을 직선에 대해 긍정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 모든 직선이 검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직선이 검다는 것은 분명히 경험 속에서의 마주침이다―나는 미리 그것을 말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경험 속에서 검지 않은 직선들을 만난다. 그것은 종합이다 ; 후험적이라고 불리는, 즉 경험 속에서 주어지는 종합. 따라서 사실의de fait 종합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를 지배하지는 않는다. 왜? 인식을 구성하지 않는다는 매우 단순한 이유로. 그것은 경험의 약관portocole이다. 인식은 경험의 약관들을 그리는tracer 것과는 다른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인식하는가? 한 명제가 권리에 의거할 때 우리는 인식한다. 한 명제의 권리를 정의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보편성과 필연성. 내가 직선이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가는 최단 경로라고 말할 때, 나는 권리의de droit 명제를 끌어낸다. 왜? 나는 최단 거리임을 알기 위해서 각각의 직선을 재 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직선은 사전에, 아프리오리하게, 즉 경험과 독립하여,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의 최단 경로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직선이 아니라 것이다. 따라서 나는 명제가 인식의 명제를 구성한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직선이 최단 경로임을 재인식하기 위해서 경험을 기다릴attend 필요가 없다, 반대로 나는 경험을 결정한다determine, 왜냐하면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의 최단 경로는 경험 속에서 직선을 그리는 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모든 직선은 필연적으로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의 최단 경로이다. 그것은 프로토콜의 명제가 아니라 인식의 명제이다. 아프리오리한 명제. 거기서 우리는 라이프니츠와 칸트 간의 갈라짐partage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가 : 그것은 분석적 명제인가 종합적 명제인가? 
칸트는 매우 단순한 것을 말한다 : 그것은 필연적으로 아프리오리한 종합 명제이다. 왜? 네가 직선은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의 최단 경로라고 말할 때 너는 직선 개념에서 벗어난다.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의 최단 경로라는 것은 직선 안에 담겨 있지 않은가? 라이프니츠가 그것은 직선 개념 안에 담겨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자명하다. 칸트는 아니라고 말한다. 유클리드 정의 이래로 직선 개념은 모든 점이 동등한[동위적인]ex aequo 선이다. 너는 그로부터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의 최단 경로를 끌어내지 못한다. 너는 그것에 대해 다른 어떤 것을 긍정하기 위해 개념을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확신하지 못한다. 왜 칸트는 이것을 말하는가? 칸트는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의 최단 경로는 가장 짧은 선과 다른 선들(끊어진 선이나 곡선)과의 비교를 함축하는 개념이라고 대답한다. 나는 비교를, 직선과 곡선들과의 관계를 전제하지sous-entendre 않고서는, 직선이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의 최단 경로라고 말할 수 없다. 칸트가 그 안에 종합이 있다고 말하는 데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 너는 곡선 개념에 도달하기atteindre 위해서 직선 개념을 벗어나지 않을 수 없다. 직선들과 곡선들의 관계 속에서 너는 말한다.... 그것은 종합이다, 따라서 인식은 종합의 조작이다. 
라이프니츠는 이것에 의해 방해받는가? 아니다, 그는 네가 직선이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의 최단 거리라고 말할 때 너는 정신 안에 곡선 개념을 가져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직선이 곡선의 극한limite으로 간주되는 미분 계산의 창조자이다. 극한으로의 processus가 있다. 이로부터 라이프니츠의 테마 : 그것은 분석적 관계이다, 그것은 무한한 분석일 뿐이다. 직선은 곡선의 극한이다, 정지가 운동의 극한인 것처럼. 우리는 전진하는가? 그때, 때로 우리는 난관을 벗어날 수 없다, 때로 그들은 동일한 것을 말한다. 그들은 동일한 것을 말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이는 라이프니츠가 무한 분석이라고 부르는 것이 칸트가 유한한 종합이라고 부르는 것과 동일한 것임을 뜻한다. 그것은 말의 문제일 뿐이다. 이 퍼스펙티브에서, 이 계단stade에서, 우리는 그들이 본성의 차이를 수립하는데 동의한다고 말했다. 유한한 분석과 무한한 분석 간의 하나, 분석과 종합 간의 다른 하나. 이것은 결국 동일한 것이다 : 라이프니츠가 무한한 분석이라고 부르는 것을 칸트는 유한한 종합이라고 부른다. 
너는 양식bon sens의 관념을 본다. 철학적 논쟁dispute은 풀 수 없는inextricable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느 것이 옳은지avoir raison 결정할 수 없고, 동시에 어느 것이 옳은지 아는 것은 아무런 중요성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동일한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양식bon sens은 유일하게 좋은 철학은 나의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비극적 상황. 만일 양식이 철학 자체가 하는 것보다 더 잘 철학의 목적들buts을 실현한다면, 철학을 하려고 애쓸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라이프니츠와 칸트 간의 이 일차적인 거대한 대립은 사실상의 것이 아니므로―그것은 보다 심오한 대립을 향해 그 자신을 넘어서기 때문에― 일종의 분기점bifurcation을 찾아라. 그리고 만일 우리가 더 심오한 대립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다. 이 두 번째의 더 심오한 대립은 무엇인가? 
식별불가능성 원리의 이름 아래 라이프니츠주의의 위대한 명제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다시 말해 모든 차이는 최종 심급에서 개념적이라는 것. 모든 차이는 개념 속에 있다. 만일 두 사물이 다르다면, 그것들은 단지 수, 형상figure, 운동에 의해서 다른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개념이 동일한 것이 아니어야 한다. 모든 차이는 개념적이다. 이 명제는 라이프니츠의 이전 명제의 전제? 만일 이 점에 관해서 그가 옳다면, 만일 모든 차이가 개념적이라면, 우리가 그 차이를 인식하는 것은 개념들을 분석함으로써이다, 왜냐하면 인식하는 것은 차이들에 의해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만일 모든 차이가 최종 심급에서 개념적이라면, 우리에게 차이를 인식시키는 것은 개념의 분석이다. 우리는 어떤 무리한 수학적 과업 속에서 이것이 라이프니츠를 이끄는지를 본다. 그 과업은 형상들figures 간의 차이들, 수들 간의 차이들이 개념들에 있어서의 차이들에 소급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라이프니츠의 두 번째 명제와 대립하는 칸트의 명제는 무엇? 거기서 다시 그것은 묘한 트릭. 칸트는 매우 이상한curieuse 명제를 끌어낸다 : 만일 네가 너에게 제시되는 세계를 주시한다면regardez, 너는 그것이 두 종류의 환원불가능한 결정들로 이루어져compose 있다는 것을 볼 것이다 : 너는 언제나 하나의 사물의 무엇임에 상응하는 개념적 결정들을 갖는다, 나는 개념은 사물의 무엇임의 표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너는 이 결정들을 갖는다―예컨대 사자는 포효하는 동물이다― 이것은 개념적 결정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너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결정을 갖는다. 칸트는 자신의 위대한 트릭을 진수시킨다 : 그는 더 이상 개념적 결정들이 아니라 시공간적 결정들이라고 말한다. 시공간적 결정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물이 지금 여기 있다는, 사물이 왼쪽이나 오른쪽에 있다는, 사물이 이러저러한 방식을 한 공간을 점하고 있다는, 사물이 한 공간을 그린다는decrive, 사물이 일정 시간 지속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네가 아무리 멀리 개념들의 분석을 밀어부친다고 해도, 너는 개념들의 분석을 통해서는 결코 이 시공간적 결정들의 영역에 도달하지 못한다. 너는 개념의 분석을 무한하게 밀어부칠 수 있지만, 개념 속에서 이 사물이 왼쪽에 있는지 오른쪽에 있는지를 고려하는 결정을 발견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그 자신은 처음 보기에 매우 설득력 있는 예들을 든다.  두 손이 있다고 해 보자. 두 손이 정확히 동일한 특징들을 갖지 않는다는 것, 동일한 모공의 분포를 갖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사실, 동일한idengiques 두 손은 없다. 그리고 거기에 라이프니에 대한 문제point가 있다 : 두 가지 사물이 있다면, 그것들은 개념에 의해서 달라야 한다, 그것은 식별불가능성의 원리이다. 
칸트는 사실상en fait 그것은 가능하지만, 아무런 중요성도 갖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이것이 어떤 이익도interet 없다고 말한다. 토론discussions은 결코 참과 거짓을 경유하지 않는다, 토론이 경유하는 것은 : 이것이 이익이 있는가[흥미로운가] 아니면 진부한 것platitude인가? 광인un fou은 사실상의 문제 아니다, 그것 역시 권리상의 문제이다. 그것은 틀린 것을 말하는 누군가가 아니다. 절대적으로 광적인 이론들을 완전하게 발명한 많은 수학자들이 있다. 그들은 광적이다, 왜? 그들이 틀렸거나 모순적이기 때문에? 아니다. 그들은 거대한enorme 수학적 개념 장치appareillage를 가공[사용]manier한다는 사실에 의해서 그렇게 결정된다. 예컨대 어떤 이익[관심/흥미]도 없는 명제들을 위해서. 
칸트는 라이프니츠에게 말한다 : 당신이 기공들의 차이를 갖는 두 손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아무런 흥미[이익]도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사실상이 아니라 권리상 생각할 수 있기 때문, 당신은 두 손이 정확히 동일한 기공들의 분포, 동일한 특질들의 흔적을 갖는 동일인물에 속한다고 [권리상] 생각할 수 있기 때문. 그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적이지 않다, 비록 그것이 사실상으로는 실존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칸트는 말한다, 매우 이상한 어떤 것이 있다 : 네가 너의 분석을 아무리 멀리까지 밀어부친다고 해도, 이 두 손은 동일하거나 혹은 놀랍게도 두 손은 포개질 수 없다.*** 이것은 유명한 역설, 포개질수 없는 비대칭적 대상들의 역설이다. 너는 절대적으로 동일한 두 손을 갖는다. 너는 급격한radical 유동성의 정도를 갖지 위해 그것들을 자른다. 너는 그것들을 일치시킬coincider 수 없다. 너는 그것들을 포갤 수 없다. 왜? 왼쪽과 오른쪽이 있기 때문에. 나머지 모든 것은 절대적으로 동일할 수 있지만, 왼손과 오른손인 하나가 있다. 이것은 개념의 질서로 환원될 수 없는 공간적 결정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분석을 멀리 밀어부치면 너의 두 손의 개념은 엄격하게 동일할 수 있다, 그러나 왼쪽에 있는 하나와 오른쪽에 있는 하나가 있을 것이다. 어떤 조건에서 너는 두 형상figures을 포개는가? 형상들의 차원에 보충적인 차원을 이용하는disposer 조건에서.... 네가 두 평면 형상[도형]을 포갤 수 있는 것은 제3의 공간적 차원이 있기 때문이다. 두 개의 부피들, 만일 4차원을 이용한다면 너는 그것들을 포갤 수 있다. 공간의 질서의 환원불가능성이 있다. 동일한 것이 시간에도 적용된다 : 시간의 질서의 환원불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네가 개념적 차이들에 대한 분석을 아무리 멀리 밀어부친다고 해도, 차이의 질서는 언제나 개념들과 개념적 차이들에 외부적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시-공간적 차이들일 것이다. 직선으로 되돌아가자. 종합의 관념, 우리는 그것이 라이프니츠와의 말의 문제가 아님을 깨닫는다. 만일 우리가 분석-종합의 차이에 멈춘다면, 우리는 그것을 발견할 수단을 갖지 못한다. 
우리는 말의 논쟁discussion과는 다른 것을 찾는 중이다. 칸트는 말한다 : 네가 분석에서 아무리 멀리 나가더라도, 너는 환원불가능한 시-공 질서를 가질 것이다. 개념의 질서로 환원불가능한. 다시 말해 시간과 공간은 개념들이 아니다. 두 종류의 결정들이 있다 : 개념들의 결정과 시-공간적 결정. 직선이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의 최단 경로라고 말할 때 칸트가 말하고자 한 것은? 그것은 종합 명제라는 것.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이것 : 직선은 개념적 결정이지만,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의 최단 경로는 개념적 결정이 아니다, 그것은 시-공간적 결정이다. 둘은 환원불가능하다, 너는 결코 하나를 다른 하나로부터 연역할 수 없다. 둘 간의 종합이 있다. 
그리고 인식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식하는 것은 개념적 결정들과 시-공간적 결정들의 종합이다. 여기서 그는 시간과 공간을 개념(논리적 개념)으로부터 떼어 내는arracher 중이다. 이 조작을 그가 미학Esthetique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우연인가? 미학의 가장 거친 수준에서조차, 가장 알려진 말 : 예술 이론, 논리적 개념과 관련하여 이 시간과 공간의 해방은 미학적이라고 얘기되는 모든 분과의 기저base에 있지 않은가? ** 
너는 이 두 번째 수준에서 칸트가 어떻게 종합을 정의하는지 본다. 그는 종합이란 내가 개념들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것을 긍정하기 위해서 모든 개념에서 벗어나는 활동acte이라고 말한다. 인식하는 것은 종합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념-외적인extra-conceptuel 무언가를 긍정하기 위해서 모든 개념을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eg. 직선은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최단 경로. 칸트의 이 두 번째 명제와 첫 번째 명제의 차이는 무엇인가? 칸트가 이룬 진보. 인식하는 것은 종합을 수행하는operer par 것이라고  말할 때, 칸트의 첫 번째 정의는 종합적 명제들을 제출하는emettre 것이다, 칸트의 첫 번째 명제는 이것으로 환원된다 : 인식하는 것은 개념 안에 담겨 있지 않은 어떤 것을 그 개념에 대해 긍정하기 위해 그 개념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수준에서 나는 그가 옳은지 알 수 없다. 라이프니츠가 도래하여 무한한 분석의 이름으로 내가 한 개념에 대해 긍정하는 것은 언제나 그 개념 안에 담겨 있다고 말한다. 더 심오한 두 번째 수준 : 칸트는 인식하는 것은 다른 개념과 같은 어떤 것을 긍정하기 위해서 한 개념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인식하는 것은 모든 개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리고 개념 일반의 질서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것을 긍정하기 위해서, 한 개념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매우 흥미로운 명제. 그것은 모순 없이 수용가능한가decidable? 하나는 모든 차이는 최종 심급에서 개념적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너는 개념 일반의 질서에서 벗어나는 개념에 대해 아무 것도 긍정할 수 없다. 다른 하나는 두 종류의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개념적 차이와 시공간적 차이가 ; 그 결과 인식하는 것은 어떤 개념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것, 즉 시간과 공간에 관련된 어떤 것을 긍정하기 위해서 한 개념을 벗어나는 것이다.  
XXX (7) 그의 명제가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전통적인 정의를 급진적으로 변화시켜야 했다. 그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제공한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칸트와 라이프니츠의 대립. 우리는 세 번째 층palier에 도달한다. 이 대립은 우리가 라이프니츠의 명제들과 칸트의 명제들이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시간-공간 속에 분포한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면, 흥미intert를 결여한다. 라이프니츠가 말하는 시간-공간 : 시간과 공간의 모든 결정들은 개념적 결정들로 환원될 수 있다 ; 칸트가 말하는 시간-공간 : 시-공간의 결정들은 개념의 질서로 절대적으로 환원불가능하다. 사유가 진동하는vacille 순간임을 느껴라. 오랫동안 공간은 어떤 면에서 공존의 질서로 정의되어 왔다. 공존 혹은 동시성의 질서. 그리고 시간은 연속[계기]의 질서로 정의되어 왔다. 그런데 라이프니츠가 이 매우 고대적인 개념을 자신의 용어로까지, 일종의 절대적인 공식화로까지 밀어부친 것은 우연인가? 라이프니츠는 덧붙인다, 그리고 형식적으로 그것을 행한다 : 공간은 가능한 공존들의 질서이고 시간은 가능한 연속들의 질서이다. 그리고 가능하다고 덧붙이면서, 그는 왜 절대l'absolu로까지 밀어부치는가? 이것은 그의 공가능성 및 세계 이론에 소급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그는 오래된 시간-공간 개념을 포획한다, 그리고 그는 자기 고유의 체계에 그것을 이용한다. 처음 보기에 이것은 나쁘지 않은 듯하다. XXX 칸트를 거북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칸트는 말한다. 한편으로 나는 공간을 공존들의 질서로 정의할 수 없고 다른 한편으로 시간을 연속들의 질서로 정의할 수 없다. 왜? 이것은 시간에 속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공존은 시간의 양태이다. 시간은 계기[연속]하는 것뿐만 아니라 동시적인 것 또한 일어나는se passe 형식이다. 다시 말해 공존 혹은 동시성은 시간의 양태이다. 
오랫동안 동시성의 이론인 유명한 이론이 있었다. 그것의 기본적 측면들은 동시성을 시간의 견지에서 사유하는 것. XXX 칸트는 동시성이 공간이 아니라 시간에 속한다고 말한 최초의 인물. 
개념들의 질서에 이미 혁명이 있다. 다시 말해 칸트는 시간은 세 가지 양태를 갖는다고 말한다 : 그 자체를 통해 지속하는 것, 즉 영속성permanence이라고 불리는 것 ; 그 자체 안에서 계기하는 것, 즉 연속[계기]라고 불리는 것 ; 그 자체 안에 공존하는 것, 다시 말해 동시성 혹은 공존이라고 불리는 것. 
나는 시간을 연속들의 질서에 의해 정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연속은 시간의 한 양태일 뿐이기 때문, 그리고 나는 다른 것들에 비해 이 양태를 특권화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결론 : 나는 공간을 공존들의 질서에 의해 정의할 수 없다, 공존은 공간에 속하지 않기 때문. 
만일 칸트가 이제 고전적인 시간-공간 정의를 갖는다면, 그는 라이프니를 비판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내가 공간을 공존들의 질서로, 시간을 연속들의 질서로 정의한다면, 그때 시간과 공간이, 최종 심급에서, 연속[계기]하는 것과 공존하는 것, 다시 말해 개념의 질서에서 언표가능한 어떤 것으로 소급된다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에. 더 이상 시-공간적 차이들과 개념적 차이들 간의 차이는 없다. 사실 연속들의 질서는 연속하는 것에서 그 존재 이유를 얻는다. 공존들의 질서는 공존하는 것[공간을 채우는 사물]에서 그 존재 이유를 얻는다. 바로 그 순간에 모든 차이들에 대한 마지막 말은 개념적 차이이다. 
칸트는 다른 시간-공간 개념을 제안하지 않았다면, 라이프니츠에 의해 절대에까지 밀어부쳐진 고전적 개념들과 단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개념은 가장 별나고 가장 친숙한 것. 공간은 무엇인가? 공간은 하나의 형식이다. 이것은 공간이 실체가 아님을, 그리고 그것이 실체들로 소급되지 않음을 뜻한다. 내가 공간은 가능한 공존들의 질서라고 말할 때, 가능한 공존들의 질서는 최종 심급에서 공존하는 사물들에 의해 설명된다. 다시 말해 공간적 질서는 공간을 채우는 사물들[혹은 실체들]의 질서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 칸트가 공간은 형식이라고 다시 말해 실체가 아니라고 말할 때, 이는 공간이 그것을 채우는 사물들에 소급되지 않음을 뜻한다. 형식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공간은 외부성의 형식. 그것 하에서 우리에게 외부적인 모든 것이 우리에게 일어나는arrive 형식. 그것은 또한 그것 하에서 자기-자신soi-meme에 외부적인 모든 것이 일어나는 형식. 거기서 그는 전통에 있어서의 도약을 다시 행할 수 있다. 전통은 언제나 공간을 partes extra partes, 즉 다른 부분에 외부적인 공간의 일 부분으로 정의해 왔다. 그러나 공간의 한 특징일 뿐인 것, 여기서 칸트는 그것을 공간의 본질로 만들기 위해서 취한다. 공간은 외부성의 형식이다, 다시 말해 그것 하에서 우리에게 외부적인 것, 자기-자신에게 외부적인 것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형식이다. 만일 공간이 없다면, 외부성은 없을 것이다. 
시간. 칸트는 대칭적인 정의를 제공. 시간은 내부성의 형식.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첫 번째로 그것은 내부에서, 우리의 내부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arrive 것의 형식이다. 그러나 이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사물들은 시간 속에 있다, 이는 사물들이 내부성을 갖는다는 것을 함축한다. 시간은 사물이 자기-자신에게 내부적인 방식이다.  
비교. 나중에 시간의 철학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시간은 철학의 주요 문제가 될 것이다. 오랫동안 그렇지 않았다. 고전 철학을 취한다면, 시간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철학자들이 있다. 그들은 별난 사람들처럼 보인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 고전 철학의 주요 문제는 연장의 문제이고 특히 사유와 연장의 관계 문제이다.    
고전적이라고 얘기되는 철학이, 영혼과 신체의 합일이라고 하는 특수한 관계 하에서, 상응하는 문제―사유와 연장의 합일―에 큰 중요성을 부여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따라서 사유가 사유에 가장 불투명한 것[사유를 통과시키지 않는 것], 즉 연장과 맺는 관계. 
어떤 면에서, 몇몇은 일종의 문제틀의 변화로부터 근대 철학을 출발시킨다, 거기서 사유는 더 이상 연장이 아니라 시간과 대면하게affronter 된다. 사유와 시간의 관계 문제는 끊임없이 철학을 뒤흔든다. 마치 사유가 대면하는 진정한 것이 공간의 형식이 아니라 시간의 형식인 듯이. 
칸트는 이런 종류의 혁명을 일으켰다 : 그는 시간과 공간을 개념의 질서에서 떼어냈다, 왜냐하면 그는 시간과 공간에 절대적으로 새로운 두 가지 결정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 외부성의 형식과 내부성의 형식을. 라이프니츠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 ; 칸트는 18세기. 둘 간에 큰 시간 차는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모든 것을 개입시키야 한다 : 과학적 변동mutations, 뉴튼적 과학, 정치적 소여들. 개념들의 질서에 어떤 변화가 있을 때, 사회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없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그것은 다른 시간-공간을 함축했는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일상적 삶의 변동들이 있었다. 철학적 개념들의 질서는 자기 나름으로 그것을 표현한다. 비록 그것이 앞지르지는[미리 점치지는]devance 않는다고 해도. 
다시 한번, 우리는 라이프니츠-칸트의 일차적 대립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모순 없이는 수용불가능하다고indecidable 생각한다. 인식이 무한한 분석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명제와 인식이 종합적 명제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명제.** 후퇴해야 한다. 첫 번째 후퇴, 나는 두 가지 반테제적 명제를 갖는다 : 모든 결정은 최종심급에서 개념적이다, 그리고 칸트의 명제 : 개념의 질서로 환원될 없는 시-공간적 결정들이 있다. 일종의 전제를 발견하기 위해서 다시 후퇴해야 한다, 즉 라이프니츠-칸트의 대립은 시간과 공간이 동일한 방식으로 정의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하는 함에서만 유효하다. 공간은 우리를 외부에 개방한다는 이 묘한 관념―고전 철학은 결코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공간과의 실존적 관계이다. 공간은 외부에서 우리에게 오는 것의 형식이다. 만일 내가 예컨대 시와 철학의 관계를 찾는다면 이것은 무엇을 함축하는가? 그것은 열린 공간을 함축한다. 만일 네가 공간을 외부성의 환경으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열린 공간이다, 그것은 닫힌 공간이 아니다. 라이프니츠적 공간은 닫힌 공간, 공존들의 질서이다. 칸트의 형식은 우리를 x에 개방시키는 형식, 분출eruptions의 형식이다. 그것은 이미 낭만주의적 공간이다. 그것은 미학적 공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념의 논리적 질서에서 해방되었기affranchi 때문이다. 돌발irruptions의 형식이기 때문에 낭만주의적 공간이다. 개방의 공간. 
하이데거같은 후대의 철학자들에게서 개방의 테마. 하이데거는 릴케에 의거. 독일 낭만주의의 개방 개념. 하이데거가 칸트에 대한 책을 쓸 필요를 느낀 이유. 동시에 시인들은 리듬적 가치 혹은 미학적 가치로서 개방의 테마를 발명. 동시에 학자들은 과학적인 종류로서 그것을 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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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문제point. 칸트는 자신을 끝까지 밀어부친 저자에 속하지 않는다. 칸트의 끝까지 까는 것은 칸트가 아니다. 독일 낭만주의의 위대한 철학자들인 포스트-칸트주의자들이 있다. 그들은 칸트를 끝까지 밀어부침으로써 이 이상한 것을 경험한다 : 라이프니츠로의 회귀를. 
칸트 철학이 고전 철학 및 라이프니츠 철학과 동시에 관련해서 초래하는 심오한 변화들. 우리는 시간-공간과 관련해서 첫 번째 변화를 보았다. 이번에는 현상 개념과 관련해서 두 번째 변화가 있다. 오랫동안 현상은 무엇에 대립되었는가? 현상은 흔히 외관으로 번역된다. 그리고 외관들은 감각적인 것이다. 외관은 무엇과 구별되는가? 그것은 doublet를 형성한다, 그것은 상관적인 본질 개념notion과 짝을 이룬다. 그리고 플라톤주의는 외관과 본질의, 감각적 외관들과 가지적 본질들의 이원성을 전개한다. 그로부터 유명한 개념이 나온다 : 두 세계 개념. 두 세계, 감각적 세계와 가지적 세계가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감각sens과 우리의 신체에 의해서 외관들의 세계의 수인인가? 
칸트는 현상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리고 독자는 오래된 외관 개념notion을 칸트의 단어로 위치시키려고 할 때 이것은 작동하지marche 않는다는 인상을 갖는다. 현상의 수준에서 시간 및 관간에서만큼 중요한 혁명이 있지 않은가? 칸트가 현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는 그것에 보다 과격한violent 의미를 지운다 : 우리를 본질과 분리시키는 것은 외관이 아니다, 그것은 apparition이다. 나타나는 한에서의 나타나는 것. 왜 그것은 이전의 혁명과 직접 연결되는가? 나타나는 한에서의 나타나는 것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할 때 -한에서는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필연적으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이전 테제들과 직접 접합된다. 그것이 동일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만일 내가 apparition이 관계를 맺는 이중체doublet를 찾는다면? 우리는 두 세계가 있는 정도로 외관이 본질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apparition은 무엇과 관계를 맺는가? 그것은 조건과 관계를 맺는다. 나타나는 어떤 것은 그 apparition의 조건들인 조건들 하에서 나타난다. 나타나는 것이 그것 하에서 나타나는 조건들. apparition이 나타나게 하는 것. 현상이 본질에 소급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apparition은 apparition의 조건들에 소급된다. 달리d'autres 말하면 apparition은 의미sens에 소급된다. doublet는 apparition과 apparition의 의미. 현상은 그 본질과 관계를 맺는 외관이 아니라 그 조건 혹은 의미와 관계를 맺는 apparition으로 사유된다. 새로운 청천벽력 : 이제 나타나는 것과 나타나는 것의 의미에 의해 구성되는 단 하나의 세계만이 있다. 나타나는 것은 외관의 배후에 있는 본질들에 소급되지 않는다, 나타나는 것은 나타나는 것의 apparition을 조건짓는 조건들에 소급된다. 본질은 의미로 대체된다. 개념은 사물의 본질이 아니라, apparition의 의미이다. 이는 철학에서 완전히 새로운 개념, 그로부터 새로운 분과, 즉 현상학의 이름으로 철학의 규정determination이 출발. 현상학은 현상들을 본질들에 소급되는 외관들로 간주하는 대신에, 조건들 혹은 의미들에 소급되는 apparitions으로 간주하는 분과. 현상학은 네가 원하는 만큼 많은 의미를 띨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이 통일성, 즉 그것의 최초의 중대한 계기를 가질 것이다, 그것은 칸트와 함께일 것이다, 칸트는 현상 개념을 변화시켰기 때문에, 현상을 외관들의 분과의 대상으로 만드는 대신에 현상학의 대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현상학을 창시했다고 주장. 현상학이 자율적 분과로 전개되는 최초의 중대한 계기는 정신 현상학이라는 제목을 붙인 헤겔. 그런데 그 말은 아주 별난 것이다. 정신 현상학은 두 세계의 소멸disparition을 고지하는 위대한 책이므로, 단 하나의 세계만이 있다. 헤겔의 공식 : 장막[커튼] 뒤에는 아무 것도 볼 게 없다. 철학적으로, 이는 현상이 그 배후에 본질이 있는 외관이 아님을 뜻한다 ; 현상은 그 apparition의 조건들에 소급되는 apparition이다. 단 하나의 세계만이 있다. 바로 그 순간에 철학은 배후에 있는 신학과의 연결끈attaches을 끊어 버린다.         
현상학의 두 번째 계기는 apparition과 의미 이론에 의해서 현상학을 갱신하는 후설의 계기. 그는 현상학에 고유한 논리학의 형식을 발명한다. 사태는 이보다 더 복잡. 
단순한 도식 : 칸트는 appariton-apparitiondml 조건들 혹은 appariton-의미의 대립을 위해서 외관과 본질의 단순한 대립과 단절한 사람. 그러나 어떤 것과 완전하게 분리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칸트는 낡은 대립의 무언가를 보존한다. 그에게는 묘한 트릭이 있다 : 현상과 물 자체의 구별. 칸트에게 현상-물 자체는 낡은 appariton의 무언가를 보전한다. 그러나 칸트에게 정말로 새로운 측면은 다른 개념notion 쌍, appariton-appariton의 조건들에 있어서의 conversion이다. 그리고 물 자체는 appariton의 조건이 아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두 번째 correctif, 플라톤에서 라이프니츠까지, 단지 외관들과 본질들이 있을 뿐이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플라톤에게는 그가 잘 근거지워진 외관―우리에게 본질을 감추지만 어떤 면에서는 본질을 표현**―이라고 명명하는 매우 묘한 개념notion이 나타난다. 외관과 본질의 관계는 매우 복잡한 관계, 라이프니츠는 그 관계를 묘한 방향으로 밀어부치려고 시도 : 그는 이 관계를 symbolisation 이론으로 만든다. 라이프니츠의 symbolisation 이론은 야릇하게[특이하게] 칸트의 혁명을 예비. Le phenomene symbolise avec l'essence. 이 symbolisation의 관계는 외관과 본질과의 관계가 아니다. 
현상 개념의 수준에서 새로운 전복bouleversement. 이것은 시간-공간의 전복과 곧바로 연결[연쇄]된다. 마지막으로 주체성의 수준에서 근본적인 전복. 
거기서 다시 묘한 역사. 이 주체성 개념은 언제 출발하는가? 라이프니츠는 고전 철학의 전제들을 끝까지 밀어부친다. 천재성genie과 정신착란delire의 길에서. 라이프니츠와 같은 관점에서, 우리는 많은 선택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창조의 철학들이다. 창조의 철학들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무신론자들조차 신을 경유할 정도로, 신학과 특정한 동맹[결연]을 갖는 철학들이다. 이것은 분명 말의 수준에서 작동하지joue 않는다. 그것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신에서 출발하게 만드는 신학과의 동맹. 그것들의 관점은 기본적으로 창조설의 관점. 그리고 창조설과는 다른 것을 만드는[행하는], 다시 말해 창조설에 관심이 없거나 다른 것에 의해서 창조 개념concept을 대체하는 철학자들조차, 창조 개념에 입각해서 창조와 싸운다. 어쨌든 그들이 출발하는 것은 무한이다. 철학자들은 무한으로부터 사유하는 순진무하군 방식을 가졌다, 그들에게는 무한이 주어졌다. 무한이 있었다. 도처에 무한이 있었다, 신과 세계에. 이것은 그들이 무한소 분석과 같은 트릭을 만들게 했다. 무한으로부터 사유하는 순진무구한 방식은 창조의 세계를 뜻한다. 그들은 아주 멀리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끝까지 가지는 못했다. 주체성. 이 방향을 밀어부치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앙상블이 필요했다. 그들은 왜 주체성의 발견의 끝까지 나아갈 수 없었는가? 그렇지만 그들은 아주 멀리 나아간다. 데카르트는 유명한 개념을 발명한다. 주체성 혹은 사유하는 주체의 발견. 사유가 주체에 소급된다는 발견. 사유하는 주체 관념, 그리스인들은 이들이 무엇에 대해 말하는지 이해하지조차 못했다. 라이프니츠는 그것을 잊지 않는다 ― 라이프니츠적 주체성이 있다. 그들은 이 주체성의 발견의 끝까지 갈 수 없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탐구에서 아무리 멀리 나아갈지라도 이 주체성은 창조된 것으로만 상정될 수 있을 뿐이라는 매우 단순한 이유로, 이는 그들이 무한으로부터 사유하는 순진무구한 방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유한한 주체로서의 사유하는 주체는 신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만 사유될 수 있다. 주체에 관계된 사유는 창조된 것으로만 사유될 수 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사유하는 주체가 실체라는 것을, 그것이 chose(Res)라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연장된 사물이 아니다, 데카르트가 말하듯이 그것은 사유하는 chose이다. 그것은 une chose inetendue이다, 그러나 그것은 une chose, une substance이다, 그리고 그것은 창조된 사물들의 지위, 창조된 실체의 지위를 갖는다. 
이것은 어렵지 않다, 그들은 신의 자리에 사유하는 주체를 두기만 하면 된다, 자리를 바꾸는permuter 것은 아무 흥미도interet 없다. 바로 그 순간에, 유한한 사유하는 주체들이 그것과 관련해서 창조된 실체들인, 무한한 사유하는 주체에 대해 말해야 한다. 우리를 거북스럽게 하는 것은 없다. 따라서 그들의 힘, 무한에 입각해서 사유하는 순진무구한 이 방식은 그들을 주체성의 출입구[문]porte까지 데려간다, 그리고 그들이 이 문을 지나는franchir 것을 막는다. 
칸트의 데카르트와의 단절rupture은 어디에 있는가? 칸트의 코기토와 데카르트의 코기토 간의 차이는? 칸트에게 사유하는 주체는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chose pensant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순수한 형식, 나타나는 모든 것의 apparition의 형식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것의 appariton의 조건이다. 
새로운 청천벽력. 칸트는 사유와 시간-공간과의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는데 몰두한다. 순수한 형식, 텅빈 형식 ― 거기서 칸트는 splendide해 진다 : 그는 그것은 가장 궁핍한pauvre 사유라고 말하는 데까지 이른다. 단지 그것은 무언가에 대한 모든 사유의 조건이다. ‘나는 생각한다’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타나는 어떤 것에 대한 모든 사유의 조건이다, 그러나 그 자체는 모든 appariton을 조건짓는 텅빈 형식이다. 이것은 매우 혹독한severe 세계, 황량한desert 세계가 된다. 사라진 것은 신적인 것, 무한한 것이 거주하는[머무는] 세계이다, 그것은 인간들의 세계가 된다. 사라진 것은, 낭만주의의 문제일 전혀 다른 문제 대신에 창조의 문제, 근거의 문제이다. 근거fondement 혹은 지반fondation의 문제. 이제 교활한rusee, 청교도적인, 사막성의 사유가 이루어진다. 그 사유는 묻는다, 일단 세계가 실존하고 나타난다고 말하고 나면, 어떻게 그것을 근거짓는가? 
창조의 문제는 추방된다, 이제는 근거의 문제가 도래한다. 신에 대한 담론을 붙잡은tenir 철학자가 있다면 그것은 라이프니츠. 이제 철학의 모델은 fondateur 영웅이 된다. 세계를 창조한 자가 아니라 실존하는 세계를 근거짓는 자. 
fondateur.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타나는 것의 조건을 조건짓는 자. 모든 것이 거기에 연결된다. 시간-공간 개념notion에서의 변화, 주체 개념notion에서의 변화. 순수 형식으로서의 사유하는 주체는 나타나는 그대로의 세계와 나타나는 그대로의 세계에 대한 인식을 근거짓는 acte일 뿐이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기획이다. 
내가 고전주의 예술가와 낭만주의 예술가를 구별하려고 했던 해가 있다. 고전주의와 바로크는 동일한 기획의 두 극이다. 고전주의 예술가는 환경les milieux을 조직화[유기화]하는, 어떤 면에서는[특정한 방식으로] 신의 상황situation 속에 있는 사람들. 고전주의 예술가는 환경을 조직화함으로써, 그리고 끊임없이 하나의 환경에서 다른 환경으로 이행함으로써 끊임없이 창조를 재개한다. 그는 대기에서 대지로 이행한다, 그는 대지와 물을 분리한다. 창조에 있어서 신의 일besogne. 그들은 신에게 일종의 내기를 건다 : 그들은 XX . 낭만주의는 언뜻 보기에 덜 광적이다, 그들의 문제는 근거의 문제이다 ; 그것은 더 이상 세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대지의 문제이다 ; 그것은 더 이상 환경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영토territoire의 문제이다. 대지의 중심을 찾기 위해서 자기 영토를 떠나는 것, 그것은 근거짓는 것이다. 낭만주의 예술가는 창조하기를 거부했다, 왜냐하면 훨씬 더 영웅적인 과업이 있기 때문, 이 영웅적 과업은 fondation. 그것은 더 이상 창조와 환경이 아니다, 그것은 : 나는 나의 영토를 떠난다. 엠페도클레스. 근거는 le sans fond에 있다. 셀링의 포스트-칸트주의 철학 전체는 이런 종류의 풍부한 개념, fond, fondement, sans fond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가곡은 언제나 이것이다 : 영웅에게 붙어있는hante** 영토의 흔적, 그리고 영웅은 떠난다s'en va, 그는 대지의 중심을 향해 떠난다part, 그는 떠난다deserte. 대지의 노래. Malher. 영토의 chansonnette와 대지의 chant 간의 팽팽한 대립. 
음악적인 영토-대지의 doublet, 그것은 철학에서 현상-apparition과 appariton의 조건들인 것의 정확한 대응물. 왜 그들은 창조의 관점을 포기하는가?  
왜 영웅은 창조하는 누군가가 아니라 근거짓는 누군가인가, 왜 그것은 최후의 말이 아닌가? 서구 사유가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하는se prendre pour Dieu 것, 창조의 견지에서 사유하는 것에 다소 진력을 낸 계기가 있다면, 거기에는 맹아germe가 있어야 한다. 영웅적 사유의 이미지는 여전히 우리에게 적합한가? 그것은 유한하다.** 사유하는 실체의 자아의 형식으로의 대체의 막대한 중요성. 사유하는 실체는 여전히 신의 관점이었다 : 그것은 유한한 실체이지만, 무한자에 입각해서 창조된,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었다. 
반면에 칸트가 사유하는 주체는 une chose가 아니라고 말할 때, 그는 창조된 chose를 잘 이해한다 ;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것의 apparition을 조건짓는 것은 형식이다, 다시 말해 근거의 형식이다. 그는 무엇을 하는 것인가? 그는 유한한 자아를 일차적 원리로 세운다. 
이것을 하는 것은 놀랄 만하다. 칸트의 역사는 reforme에 많이 의존한다. 유한한 자아는 진정한 근거이다. 여기서 일차적 원리는 유한성이 된다. 고전주의 사상가들에게 유한성은 결과consequence이다, 그것은 무한한 어떤 것의 제한이다. 창조된 세계는 유한하다, 그것은 제한되기 때문이다. 유한한 자아는 세계와 세계에 대한 인식을 근거짓는다, 왜냐하면 유한한 자아 자체는 나타나는 것을 구성하는 근거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세계의 근거는 유한성이다. 무한과 유한의 관계는 완전하게 뒤집힌다basculent. 유한자는 더 이상 무한자의 제한이 아니다, 무한자는 유한자의 초월depassement이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초월하는]se depasser 것은 유한자이다. 자기-초월auto-depassement 개념notion이 철학에서 형성되기se former 시작한다. 그것은 헤겔을 관류하여, 니체에까지 도달한다. 무한자는 이제 유한성의 초월의 현동acte과 분리될 수 없다, 유한성만이 그 자신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변증법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은 무한이 변형되는 조작l'operation de l'infini a s'y transformer, 현동acte―이것에 의해 유한성이 세계를 구성하거나 근거지음으로써 자신을 초월하는―이 되는 중이거나 된 무한자이다. 여기서 무한자는 유한자의 현동에 종속된다. 
이로부터 무엇이 파생되는가? 피히테는 칸트와 라이프니츠의 이 논쟁에 대한 본보기적인 페이지. 피히테가 말하는 것 : 나는 A는 A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단지 가설적 명제일 뿐이다. 왜? 그것은 A가 있다는 것을 전제[함축]하기sous-entend 때문이다. 만일 A가 있다면 A는 A이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다면 A는 A가 아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롭다, 왜냐하면 그는 동일성 원리를 파면시키고destituer 있기 때문이다. 그는 동일성 원리는 가설적 규칙이라고 말한다. 이로부터 그는 자신의 위대한 테마를 제출한다 : 가설적 판단을 넘어서 그가 명제적thetique 판단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가설을 넘어서 테제these로. 만일 A가 정말로 있다면 왜 A는 A인가, 왜냐하면 결국 명제 ‘A는 A다’는 최종 원리나 최초 원리가 아니기 때문. 그것은 더 심오한 어떤 것에 소급된다, 즉 그것이 사유되기 때문에 A는 A라고 말해야 한다. 즉 사유하는 choses의 동일성을 근거짓는 것은 사유하는 주체의 동일성이다. 그런데 사유하는 주체의 동일성은 유한한 자아의 동일성이다. 따라서 일차적 원리는 ‘A는 A이다’가 아니다, 그것은 나와 같은egal 나이다. 독일 철학은 마술적 공식 ‘나와 같은 나’의 책들livres을 방해할encombrera 것이다.** 왜 이 공식은 기괴한가? 그것은 종합적 동일성이다, 왜냐하면 ‘나와 같은 나’는 자신을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것의 조건으로 생각하는penser 자아의 동일성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유한성의 종합인 종합이 있다, 즉 사유하는 주체, 일차적 자아,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것의 형식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동등하게 나타나야 한다, soit 나와 같은 나. 유한한 자아의 종합적 동일성은 신의 무한한 분석적 동일성을 대체한다. 
나는 두 가지 것을 종결짓는다 : 오늘날 라이프니츠주의자인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칸트는 급진적으로 새로운 일종의 개념적 앙상블을 절대적으로 창조.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철학적인 개념적 좌표coordonnees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좌표의 경우에, 칸트는 어떤 의미에서 모든 것을 갱신한다, 그러나 그가 이끄는 것에는 해명되지 않은 많은 트릭이 있다. 예 : 나타나는 것으로서의 현상 자체의 현상의 조건 간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사유하는 자아, 유한한 자아는 현상의 apparition을 조건짓고, 근거짓는다. 현상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 조건지움의 관계는 무엇인가? 다시 말해, 그것은 나타나는 모든 것의 apparition을 조건짓는 인식의 형식이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조건지워진 것과 조건 간의 관계는 무엇인가? 조건은 형식이다. 칸트는 매우 난처해한다. 그는 그것은 이성의 사실이라고 말한다. 문제가 권리상의 상태로 상승될 것을 요구한 그, 여기서 그는 그 자신이 factum이라고 부르는 것을 내세운다 : 유한한 자아는 그에게 나타나는 것이 apparition의 조건들에 부합하도록 구성된다. ** 칸트는 조건지워진 것과 조건의 이 일치가 우리 능력들의, 즉 우리의 수동적 감성과 우리의 능동적 사유의 조화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한다. 칸트는 무엇을 하는가? 그것은 비장하다pathetique : 그는 등 뒤에서 우리를 신으로 만드는 중이다. 이 조화를 보증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자신은 말한다 : 신의 관념이라고. 
포스트-칸트주의자들은 무엇을 하는가? 포스트-칸트주의자들은 칸트가 천재적이라고 말하는 철학자들 ; 그러나 우리는 조건과 조건지워진 것의 외부적 관계에 멈출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이 사실 관계에 멈춘다면, 즉 조건지워진 것과 조건의 조화가 있다면, 우리는 조화의 보증자로서 신을 부활시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칸트는 외부적 조건지움conditionnement의 관점에 멈춘다, 그는 진정한 발생의 관점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어떻게 apparition의 조건들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의 발생적 요소들인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칸트가 지나쳐 버린laisse de cote 칸트적 혁명들을 진지하게 다루어야 한다. 즉 무한은 스스로를 초월하는 한에서의 유한성의 현동이라는 것. 칸트는 이것을 지나쳐 버렸다, 왜냐하면 그는 무한자를 무한정자로 환원하는데 만족했기 때문이다. 강력한forte 무한자 개념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고전주의적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무한자l'infini가 강력한 의미에서 무한자un infini―그러나, 자신을 초월하는, 자신을 초월함으로써 apparitions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으로서의 유한성의 현동인 한에서의 무한자―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는 조건의 관점을 발생의 관점으로 대체하는 것.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은 라이프니츠로 회귀하는 것. 그러나 라이프니츠의 그것과는 다른 기반bases 위에서. 포스트-칸트주의자들이 요구하는 그대로의 발생을 행하기 위한 모든 요소들이 라이프니츠에게 잠재적으로 존재한다. 의식의 미분 관념, 바로 그 순간에 의식이 무의식 속에 잠겨야baigne 한다. 그리고 사유의 무의식 자체가 있어야 한다. 고전주의자들은 사유를 초월하는 것은 오직 신뿐이라고 말했다. 칸트는 유한한 자아의 형식으로서의 사유가 있다고 말했다. 거기서 사유에 나타나는 것의 미분적인 것들을 담고 있는 사유의 무의식을 지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 조건에 입각해서 조건지워진 것의 발생을 수행하는 무의식을. 이것은 피히테의 위대한 과업, 헤겔에 의해 다른 기반 위에서 다시 취해지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극한에서 라이프니츠를 재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따라서 나는 철학을 개념들을 창조하는 활동activite으로 정의한다. 개념들을 창조하는 것은 예술만큼 창조적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것처럼 개념의 창조는 다른 창조 양식들과의 상응 속에서 행해진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개념을 필요로 하는가. 그것은 물질적materielle 실존이다. 개념들은 정신적 동물들betes이다. 개념들에 대한 이런 종류의 호소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낡은 개념들은 새로운 개념 좌표에서 다시 취해진다는 조건에서 쓸모 있다. 철학적 감성sensibilite이 있다. 그것은 개념들의 앙상블의 consistance를 평가하는 기술이다. 그것은 작동하는가marche? 이것은 어떻게 기능하는가? 철학은 그 밖의 것reste과 분리된 역사[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가 창조하는 것에서 초월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창조하지 않는 것에서 초월된다. 우리의 동시대 철학에서 무엇이 일어나는가? 나는 철학자가 낭만주의적 방식으로 자신을 영웅 fondateur로 생각하기를 멈추었다고 믿는다.  
근대성에서 근본적인 것, 이는 낭만주의 파산. 횔덜린과 노발리스는 우리에게 기능하지 않는다, 우리의 새로운 좌표의 틀[배경]cadre에서만 기능. 우리는 스스로를 영웅으로 생각하기를 끝냈다. 철학자와 예술가의 모델은 더 이상 세계의 등가물을 창조하려 하는 한에서의 신의 모델이 아니다. 전혀 다른 것. 파울 끌레의 텍스트, 거기서 그는 이전 화가들과의 차이를 그가 어떻게 보는지 말한다. 우리는 더 이상 모티브로 갈 수 없다. 일종의 연속적인 flux가 있다, 이 flux는 비틀림torsions을 갖는다. 그 다음 flux는 그런 식으로 지나가지 않는다. 화가의 좌표는 변했다. 라이프니츠는 무한한 분석 ; 칸트는 유한성의 거대한 종합. 오늘날 우리는 신디사이져의 시대에 있다 ; 그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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