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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2/철학

철학강의 2

by FraisGout 2020. 5. 28.

1부 마르틴 하이데거에서 '존재의 문제'와 '신의 문제'에 대하여


                                  에머리히 코레트(Emerich Coreth SJ)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20년 전 1976년 5월 26일에 죽었다. 그러나 그의 필생의 철학적 작업은 그 시대의 정신적 삶은 물론 그 시대를 넘어 오늘날까지도 의미심장하게 그리고 다양하게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이데거는 우리들에게 사유의 중요한 동인들을 주었다. 그러한 동인들을 꼽자면, 무엇보다도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 물음', '현존재' 분석론, 역사적-해석학적 사유에 바탕한 '이해에 관한 이론', '시간 비판' 등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하이데거의 심오하고 고집스런 사유가 남긴 업적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그의 사유를 뒤돌아보는 일에는 칭찬의 말도 필요하지만 또한 그의 사유를 일깨운 비판적 문제들도 필요하다. 우리가 여기서 다루어 보고자 하는 것은 하나의 중요한 문제, 아니 아마도 '중심 문제', 말하자면 하이데거의 사유와 형이상학, 특히 '신의 문제'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하이데거는 전통 전체의 형이상학을 "존재-신-론"(Onto-theo-logie)으로 이해한다. 이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하이데거가 아니라 칸트이다. 칸트는 이 말을 좁은 의미로, 즉 존재론적 '신 증명'과 관련해서만 사용했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그 말을 따온 이유는, 서양에서 형성된 형이상학의 전체적 특성을 가리키기 위함이었다. 하이데거가 비록 형이상학을 바로 이러한 "존재-신론적 구성틀"에서 결정적으로 거부하고 있긴 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형이상학의 본질을, 형이상학이 --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 스스로를 이해하는 바대로 그렇게 꼭맞게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가장 먼저 하이데거가 존재론으로서의 형이상학에 대해 취하고 있는, 즉 '존재 문제'에 대해 취하고 있는 관계를 다룰 것이며(1), 다음으로 신학으로서의 형이상학, 따라서 '신의 문제'에 대한 관계를(2), 그리고 세 번째로 존재와 '신적인 것' 사이의 관련을, 특히 하이데거의 ≪철학에의 기여≫(Beitr gen zur Philosophie)에 따라 살펴볼 것이다(3).


        1. 존재의 문제

1.1 하이데거가 처음부터 모든 형이상학을 비판적으로 거부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하이데거 자신은 형이상학적 문제를 수용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형이상학이라는 낱말을 그 제목으로 달고 있는 그의 초기 저술들에서 알아볼 수 있다. 예컨대 프라이부르크 취임 강연인 <형이상학은 무엇인가?>(1929), 단행본인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1929) 그리고 강의록인 ≪형이상학 입문≫(1935) 등이 그러한 저술들에 속한다. 하이데거의 주저인 ≪존재와 시간≫(1927)에서 이미 '존재의 문제'가 물어지고 있다면, 보다 정확히 말해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문제가 물어지고 있다면, 이러한 문제는 형이상학적 사유 전통에서부터 유래된 것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듯이, 형이상학적 사유에서 비록 '존재 문제'가 잘못 제기되거나 가리워져 있을지라도, 그리고 존재가 "망각되어" 있을지라도 말이다.
하이데거는, 자신이 "기초 존재론"(SZ 13)이라 지칭한 ≪존재와 시간≫에서, 형이상학에 대한 '근거 제시'에로 곧바로 이어질 수 있는 방법적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문제는 인간적 '현존재'(Dasein)에게 물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자들 가운데 "존재 이해"(Seinsverst ndnis)로써 두드러진 존재자는 오직 인간뿐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것을 인식할 때면 언제나, 또 다만 그것에 대해 묻기만 하거나 그것을 다루기만 할 때조차도 언제나, 나는 그것을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서, 즉 "존재자"로서 이해한다. 나는 내가 "존재한다"('있다')라고 "얘기할"(Ist-Sagen) 때 그것으로써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즉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먼저 알고 있어야만 한다.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이해하는 것은 현존재에게만 고유하게 속해 있는 "선행적 존재 이해"를 전제한다.
"실존론적 분석론"(SZ 13)은 (그 당시엔 여전히) 후설의 현상학에서 유래된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지만(SZ 33쪽 이하), 그러나 그것은 해석학적 해석으로 확장되어 있었다. 이 분석론에서 인간적 현존재의 실존론적 '존재 구성틀'의 구조들은 단계적으로 해명되어야만 한다. 이 분석론에서는 동시에 초월론적-철학적 '거슬러 올라 감' -- 즉 "선험 탐구"(Aprioriforschung)(SZ 50) -- 이 칸트적 의미에서, 그것도 그 당시까지 여전히 생생히 살아있었던 신칸트주의적 의미에서까지 실행되고 있다. 현존재의 '존재 구성틀'의 현상들은 그것들의 "의미와 근거"(SZ 35)에 따라, 즉 그것들의 선행적 가능 조건들에 따라 물어져야만 한다. 그렇게 하이데거는, "존재의 의미"를 제시하기 위해, '존재 이해'의 근원적 구성을 인간적 현존재의 근거에서 해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일은 형이상학에 대한 새로운 근거 제시와 통할 수 있는, 또는 통할지도 모를 단초이다. 형이상학은, 선행적 또는 근원적 '존재 이해' -- 이것이 비록 존재자에 대한 우리들의 행동관계를 조건짓고 있는 존재에 대한 비주제적 앎일지라도 -- 에 대한 반성에서가 아니라면 달리 어디에서 근거제시될 수 있겠는가?
1.2 그러나 하이데거에서 이러한 단초는 어떤 다른 방향에로 이끌린다. 존재는 시간 속에서 또는 시간으로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우리는 불안과 염려에 의해 규정된, '존재 가능'에 대한 지속적 '기획 투사' 속에 살고 있다. 즉 이해를 통한 존재자와의 왕래라고 일컬어진 우리들의 "세계"를 형성해 주는 고유한 '존재 가능성들'을 기획투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 속에서 우리는 존재를 無(Nichts)로서, 즉 "내던져져 있음"에 대한 경험 속에서, '있어 왔음'('지나가 버렸음')의 無['더 이상 있지 않음']로서, 또 '빠져 있음'의 현상에서, 현재의 無['지금 있지 않음']로서, 그리고 우리 현존재를 철저히 조율하고 있는 "죽음에로의 존재"(Sein zum Tode)에서, 미래의 無['아직 있지 않음']로서 경험한다.
존재의 無性(Nichtigkeit)은, 프라이부르거 대학 취임 강연인 <형이상학은 무엇인가?>에서 더욱 농후해진다. 존재의 의미는 무 속에 가라앉는 것처럼 보이고, 존재 그 자체를 무로서 입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존재는 무 속으로 들어서 있음을 뜻한다"(32). 덧붙임글(Nachwort)에서(1943), 하이데거는 無를 "존재의 너울"(Schleier des Seins)로서 해석한다(51). 그러나 여기서 의미되어 있는 無는 '완전히 공허한 無'가 아니라 오히려 존재자의 '아님'(das Nicht, 否定), 즉 존재자에 대립된 '다른 것'(타자)이다. 그러나 "이러한 無는 본디 존재로서 있어온다"(45).
따라서 많은 이들이 하이데거의 초기 철학을 궁극적으로 허무주의(Nihilismus)로서 이해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후에 국가 사회주의의 희생양이 되었던 알프레드 델프(Aflred Delp)는 자신의 책 ≪비극적 실존≫(Tragische Existenz)(M nchen 1935)에서 매우 비판적으로, 그 당시 많은 주목을 끌면서 하이데거의 허무주의와 대결을 벌였다. 다른 측면에서, 하이데거의 확실한, 그러나 일면적 추종자인 사르트르(Jean Paul Sartre)가 쓴 ≪L'etre et le n ant≫(존재와 무, Paris 1943)는 완전한 허무주의, 즉 '비극적으로 영웅적인 결단성'을 견디어 내야만 하는 "부조리한 현존재"를 대표하는 책이다. 그fj나 이러한 허무주의는 결코 하이데거에 근거한 것일 수 없다. 그것은, 하이데거 자신이 후에 말하듯이, 하이데거와는 "아무런 공통점도" 갖고 있지 않다.
1.3 그러나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으로부터 점점 더 많은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강의는 비록 1935년에 행해졌지만, 출판은 그보다 훨씬 후에야 이루어졌던 ≪형이상학 입문≫ 이래로 그러하다. 그 이후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에 대한 신뢰를 더 이상 공언하지 않으며, 오히려 언제나 거듭해서 그리고 점점 더 날카롭게 서양 전체의 형이상학을, 그것이 "존재 망각"(Seinsvergessenheit)에 지배되어 눈멀어 있다고, 즉 형이상학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하이데거가 사물 또는 대상으로서 이해한 존재자뿐이라고 비난한다. 반면 존재는 존재자의 근거로서 "망각되고", 존재자의 순전한 '존재자성'으로서 오해되며, 심지어 존재에 대한 문제조차 물어지지 않는다고 말해진다.
전체 형이상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거부는 어떤 특정한 학파나 방향을 형성하는 것도, 또 그것이 철학의 한 개별 분과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은 "철학의 이제껏의 전체 역사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다. 형이상학에 따른 전체 역사는 존재의 망각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다. 형이상학에 대한 이러한 이의가 이해하기 여렵긴 하지만, 그것은 결코 이제까지의 철학자들에 대한 "비난", 즉 '존재 망각'이 마치 지금까지의 철학자들의 탓으로 돌려지는 '거절'(Versagen)과 같다는 비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문주의 편지"에서 뚜렷하게 된 것처럼, 그러한 '거절'은 전통 철학자들에게 운명적으로 다가온 '존재의 역운', 즉 '존재 망각'의 시대가 그 속으로 "내던져져" 있는, 그래서 단지 존재자만을 나타나게 하는 그러한 '존재의 역운'인 것이다(≪인문주의에 대한 편지≫ 75쪽 이하 참조).
그러나 하이데거의 이의는 다음과 같이 계속 된다. 형이상학적 사유는, 존재자를 계산하여 지배하기 위해, 즉 근대 기술에서 그 완성된 모습을 드러낸 것과 같이, 존재자를 인간의 지배하에 두기 위해 존재자를 대상화한다. 근대 기술의 [본질로서] '이쪽으로 세워진', "몰아 세우기 틀"(Gestell)은 존재를 "그릇되이 세우며"(verstellen), 따라서 그것은 허무주의에로 이끌려 간다. 기술이 형이상학적 사유에서 유래된 것인 한, 허무주의 또한 자신의 근원을 형이상학에 둘 수밖에 없으며, 더 나아가 허무주의는 형이상학의 본래적인, 그러나 지금껏 숨겨져 온 본질, 즉 존재 그 자체가 無와 같기 때문에, 형이상학 자체가 허무주의라는 사실을 드러낸다(≪숲길≫ 245쪽).
하이데거는, 순수하게 물질적인, 근본에 있어 맹목적인 '진보에의 믿음'과 기술의 무제약적 지배에 대해 비판적으로 경고하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 가운데 한명이었다. 물론 우리는 하이데거에서도 역시 출구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렇게 과학적으로-기술적으로 지배된, 인간을 무겁게 위협하는 세계가 그 정신적 근원들을 근세(Neuzeit)의 철학적 사유 속에, 즉 여기서 형이상학이라는 말 아래 함께 의미되어 있는 사유 속에 두고 있다는 것은 옳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전통 전체에서 나타나는 모든 형이상학에 적중되는가?
그러나 서양 철학의 비중이 플라톤 이래 형상적(eidos-haft), 본질-철학적 특성에 놓여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즉 서양 철학에서 일차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것은 본질(essentia) 또는 사물의 '그러함'(Sosein)이었지 결코 존재(esse)가 아니었다. 플라톤에서 '참인 존재'는 "이데아"가 된다. 이러한 사상은 특히 모든 플라톤적-신플라톤적 '사유 방식'들 속에서 계속 작용하고 있으며, 근세 합리론에서도 여전히, 다름 아닌 헤겔의 관념론에서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후설이 '순수 형상적 학문'이라 정의한, 그리고 바로 그것 때문에 하이데거의 반발을 불러일으킨 현상학에 대해서도 또한 명시적으로 타당하다.
전체 형이상학을 '존재 망각'으로 판결한 것은 즉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비판자들은 대개, 하이데거의 이의가 부분적으로는 정당하지만, 그러나 모든 것에 타당한 것은 아니며, 적어도 존재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었고, 또 존재와 존재자를 구별했으며, 더 나아가 존재에 관한 중요한 형이상학을 전개했던, 위대한 '존재 사유가'인 토마스 폰 아퀴나스(Thomas von Aquin)에게는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우리는 단지 두 비판가, 즉 유명한 ≪존재와 본질≫(L'etre et l'essence, Paris, 1948)의 저자인 에띠엔느 질송(Etienne Gilson)과 비슷하게 널리 알려진 책 ≪토마스에서부터 하이데거에 이르는 형이상학의 운명≫(Das Schicksal der Metaphysik von Thomas zu Heidegger, Einsiedeln, 1959)의 저자인 구스타프 지베르트(Gustav Siewerth)만을 언급하기로 한다. 질송은 토마스의 '존재 이론'을 펼쳐보여, 그 이론이 다른 모든 일면적 본질주의와 달리 매우 타당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하이데거의 제자인 지베르트는 그것을 넘어 형이상학이 '존재 망각'에로 몰락해 온 역사, 즉 '존재 문제'가 이미 후기 스콜라 학파에서 그리고 근세 철학에서 망각되어 있다가, 하이데거에 와서야 다시 대두되기까지의 역사를 전개하고 있다. 이 둘은, '존재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하이데거보다 더 잘 그리고 더 깊게 알고 있었던 철학자로 토마스 폰 아퀴나스를 꼽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옳다. 그러나 우리는 "존재"라는 말에 대한 토마스와 하이데거의 이해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하이데거에게 문제가 된 것은, 존재자의 내적 원리로서의 존재, 즉 존재자를 "존재케" 하고, 유한한 세계를 넘어서서, "존재 그 자체"의 '근원적으로 순수한 현실성'(Aktualit t)(ipsum esse in se subsistens [스스로 존립하는 자체 존재])에 근거하는 '존재의 작용'(actus essendi bei Thomas)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따라서 토마스도, 하이데거에 따르자면, 존재를 존재자의 "존재자성"(Seiendheit)으로 오해하는 "존재자적" 사유에 속하는 것이지, 존재자 저편의 존재 자체에로 밀고 들어가는 "존재론적" 사유에는 속하지 않는다.
하이데거에게 "존재"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 즉 포괄하며, 역사적으로 지배하는 '존재의 근거', 다시 말해 자신을 숨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드러내는, 현존재에 가까이 다가오거나 아니면 현존재로부터 멀어지면서, '존재의 역운'을 정해 주는 '존재 근거'이다. 하이데거에서 이해된 존재는 형이상학적 '존재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 즉 하이데거가 어느 정도 정당하게, 형이상학은 "존재"를 (그것의 의미에서) 결코 숙고하지 않았고, 따라서 '존재 망각'에 빠져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만일 존재 그 자체가 '존재의 역사'로 해석된다면, 고전적 전통의 의미에서 이해된 형이상학에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은 거의 열려 있지 않게 된다. 즉 그 길은 막혀 있다. 이로써 신에로 이른 길, 신에 대한 인식과 신에 대한 이해에로 이르는 길 역시 파묻혀져 있는가? 아니면 신에로 이르는 사유의 '접근 통로'가 하이데거에 의해 가능한 것은 아닌가?

2. '신 문제'

2.1 전쟁 이후 시기의 저술들에서 하이데거는 "신과 신들에" 관해 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실은,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적 '존재 이해'에 가까이 다가가고, 심지어 그리스도교적 신앙에 문을 열고 있다는 견해를 일깨우거나 강화했다. 하이데거는 보다 이전에, 그의 철학이 무신론(無神論, Atheismus)이라는 비난에 대해, <근거의 본질에 관하여>(1929)라는 글에서, 현존재를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로서 해석함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신에로 나아갈 수 있는지, 아니면 없는지의 문제에 대해 긍정적으로도 또 부정적으로도 결정할 수 없다"(≪숲길≫, 39)고 강조했다. 이러한 문제가 단지 물어질 수만 있기 전에도, 우리는 가장 먼저 "현존재에 대한 충분한 개념"을 획득해야만 한다(같은 곳). 모든 것은 열린 채로 있고, 신에 대한 문제는 결코 물어질 수 없다.
하이데거는 후에 '신 문제'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말한 바 있다. "인문주의 편지"(1947)에서 하이데거는 다시 무신론의 비난을 물리친다. "신의 현존에 대해서도, 그리고 또한 신의 '존재하지-않음'에 대해서도 전혀 결정되어 있지 않다"(≪인문주의≫, 101). 따라서 하이데거의 사유는 "결코 유신론에 대해 찬성하려 하지 않았다. [그의] 사유는 무신론적이지 않듯이 또한 유신론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무차별적 태도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유로서의 사유에게 정립되어 있는 한계들을 존중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고, 더 나아가, 사유에게 '사유해야만 하는 것'으로서 주어진 것을 통해, 즉 존재의 진리를 통해 주어진 것이다"(≪인문주의≫, 75). 여기서 진리(비은폐성)는, 스스로를 우리들에게 열어 보이거나 또는 우리들에게서 스스로 달아나는 존재, 즉 스스로를 숨기거나 또는 스스로를 드러내는 존재의 '역사적으로 운명적인 섭리'를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의 힘 밖에 놓인다.
왜냐하면 "인간은 존재 그 자체에 의해 존재의 진리 안으로 '내던져져' 있기 때문이다, [...] 그것도 존재자가 존재의 '빛'(Licht) 속에서, 존재하는 그 존재자로서 나타나기 위해서 말이다. 존재자가 나타나는지, 나타난다면 어떻게 나타나는지, 신과 신들, 역사와 자연 등이 존재의 '밝은 터'(Lichtung) 속으로 들어와, 현존하고 부재하는지,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그러한지 등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존재자의 다가옴(Ankunft)은 존재의 보냄(Geschick)에 기인한다. 그리고 인간에게 남은 문제는, 인간의 본질이 이러한 보냄에 상응하는지, 즉 그것에 적합한지 하는 것이다"(≪인문주의≫, 75쪽). 많은 문제를 던지고 있는 이러한 글은 얼마나 파국적인가!
모든 것은, 우리가 적합하게 그것의 섭리에 순응해야만 하는 존재의 보냄에 의해 결정되는가?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결정과 책임에서 면제되어 있는가? '존재의 보냄'이 예컨대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나 스탈린(Stalin)을 일컫는 것이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그러한 '보냄'에도 단지 적합하게만 응답해야 하는가? 그러한 보냄의 섭리에 순응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 대항했던 사람들은 역사적 과제에 보다 잘 그리고 보다 올바르게 응답했던 것은 아닌가? 그리고 신이 멀리 떠나 버린 "궁핍한 시대"(d rftige Zeit)에 신에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신앙을 또한 철학적으로 근거 제시하며 증거하는 것 역시 역사적 과제일 수 있지 않은가? 이러한 과제에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바 그것에 "빠져 버리는 것"과는 반대로, 우리들의 시대에 대한 "본래적" 연구가 놓여 있는 것은 아닌가? 시대의 정신 또는 몰정신(沒精神, Ungeist)에 반대해서, 즉 포스트모던적 유행에 반대해서, 형이상학에게 죽음을 선고하고, 그때 하이데거를 증인으로 끌어들이는 일이 점점 더 많이 나타나고 있지는 않은가?
존재 또는 비존재, 신 또는 신들, 이 모든 것은 하이데거에서 열린 채로 있다. 모든 것은 존재의 '보냄'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신 문제'에 대해 결코 무차별적인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오히려 '신 문제'를 전제한다. 왜냐하면 "존재의 진리에 대한 문제에서부터 사유하는 사유는, 형이상학이 물을 수 있는 것보다 더 시원적(始原的)으로(anf nglicher) 묻기 때문이다. 존재의 진리에서부터 비로소 '聖스러움'(das Heilige)의 본질이 사유될 수 있다. '성스러움'의 본질에서부터 비로서 신성(神性, Gottheit)의 본질이 사유되어야 한다. 神性의 본질이 비추는 빛 속에서야 비로소, '神'이란 낱말이 무엇을 명명(命名)해야 하는지가 사유되고 얘기될 수 있다...만일 인간이, '신 문제'가 오로지 그 속에서만 물어질 수 있는 바로 그 차원(次元, Dimension) 속으로 사유해 들어가기를 그만둔다면, 인간은 현재의 세계사 속에서 도대체 어떻게, 神이 가까이 오는 건지 아니면 멀리 달아나는 건지를 진지하게 그리고 엄밀하게 물을 수 있어야 하는가?"(≪인문주의≫, 102쪽). 그러나 이러한 차원은, "존재의 '열림터'(das Offene)가 밝혀져 있지 않고, 밝혀지면서 인간에게 가까이 있지 않다면, 닫혀진 채로" 있을 것이다"(≪인문주의≫, 103쪽).
2.2 비슷한 표현들이 ≪숲길≫(1950)에서, 특히 <'신은 죽었다'(Gott ist tot)라는 니체의 말>(193-247쪽) 그리고 "궁핍한 시대에 무엇을 위한 시인인가?"는 횔덜린의 말과 관련된 <무엇을 위한 시인인가?>(248-295쪽) 등에서 여러 차례 반복된다. 거기에 릴케(Rilke)과 관련된, 그러나 사태적으로 다른 곳들과 일치하는 짧은 글이 나온다. 즉 "'구원받지 못함'으로서의 '구원받지 못함'(Unheil[멸망])은 우리에게 구원(救援, das Heile)을 느끼게 한다. '구원적인 것'(Heiles)은 '聖스러움'(das Heilige)을 부르면서 [우리들에게] 눈짓한다. '성스러운 것'(Heiliges)은 '神스러움'(das G ttliche)을 묶어 놓는다. '신적인 것'(G ttliches)은 신을 가깝게 한다."(≪숲길≫, 294쪽). 시인들은 "'세계의 밤'(Weltnacht)의 깜깜한 어둠 속으로 도망간 신들의 흔적을 '죽을 자들'에게 가져다 준다." 다시 말해 "궁핍한 시대의 시인들"은 "'聖스러움'을 '노래하는 사람들'"이다(같은 곳).
이로써 하이데거 자신 역시, '세계의 밤'의 캄캄한 어둠 속 멀리에서 '성스러움'을 예감하고, 그것을 노래부르면서 [우리들에게] 눈짓하는 "궁핍한 시대의 시인들" 가운데 드는 셈이다.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내면서 숨기듯이, 하이데거의 진술들 또한 신탁(神託)같이 어둡다. 하이데거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그러나 모두가 그가 낸 수수께끼에 매달려 있는, 존재의 진리를 신화적이고 시적인 언어의 베일로 감싸는 그러한 고독한 사유가이려 하는 것 같다.
이러한 사실로써 우리는 무엇을 얘기할 수 있는가? 우리는 "신의 결여(缺如)"(Fehl Gottes)에 의해 규정된 "궁핍한 시대"에, 그리고 '신적인 것', 즉 "신 또는 신들"이 멀리 물러나 버리고 마는 "세계의 밤"(Weltnacht) 가운데 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신을 멀리했을지도 모를 인간들의 '탓'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힘으로는 바꾸어 놓을 수 없는, 역사적인 '존재의 보냄'(Seinsgeschick)이다.
우리들에게는 '신적인 것'에 대한 경험이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신의 결여"를 통해, 정확히 말해, "명백하고 뚜렷하게 인간들과 사물들을 자신에로 불러모으는" 하나의 신의 "결여"(≪숲길≫, 248쪽)를 통해 규정되어 있는 "세계의 밤"이다. 하이데거는 -- 휄덜린과 더불어- - , 오래 전에 "달아났던" 고대 그리스의 신들을 생각하며, 또 그리스도교적 믿음의 신도 생각한다. 그러나 이 신 역시 멀리 "물러나" 버렸다. 왜냐하면 현대 세계에서 믿음은 더 이상 인간의 '공유 재산'이 아니기 때문에, 따라서 그것은 우리들의 세계에 어떠한 통일성도 주지 못하고, 또 우리들의 세계를 통일적으로 간직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신이 멀리 달아나 버렸던가? 아니면 인간들이, 이러한 세계에 마음을 빼앗겨, 신으로부터 달아나 버렸던가?
하이데거는 '세계의 운명'(Weltgeschick)이 바뀌기를, 그래서 '신적인 것'이 되돌아와 우리들에게로 다시 가까이 와 스스로를 계시하기를 배제하려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러한 것을 원하고 그리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구원받지 못함'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리고 '세계의 밤'이 어두워지면 어두워질수록, '구원'이 다가오는 소리는 더욱더 커진다. "'구원받지 못함'으로서의 '구원받지 못함'은 우리에게 구원의 흔적을 느끼게 한다"(≪숲길≫, 294쪽). 가장 커다란 궁핍은, '구원받지 못함'을 알지 못하는 "궁핍한 것이 없음"(Notlosigkeit)이다. 궁핍을 알아듣는 자만이, '구원받지 못함'이 뒤바뀐다는 것, 그래서 '신적인 것'이 자신의 가능적 도래지(到來地, eine St tte seiner m glichen Ankunft)를 발견한다는 것을 기다릴 수 있고, 그것을 준비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즉 현대적 '존재의 운명' 아래서는, 신과 '신에 대한 인식'이 철학적 사유의 과제는 아니라고 한다.
형이상학은 금지되어 있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자에 대한 "대상적" 사유이기 때문이고, 또한 그것은 신 또는 '신적인 것'을, 비록 최상의 존재자로서이긴 하지만, 존재자로서 그리고 물건으로서 또는, 비록 '근원-사물'(Ur-sache[原因], causa prima[제일 원인])로서이긴 하지만, 사물로서 사유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이러한 사유는 "존재를 잊어 버렸거나"[존재 망각] 또는 "존재를 떠나버렸기"[존재 이탈] 때문이고, 따라서 형이상학은, "존재 그 자체가 無이기" 때문에(≪숲길≫, 244쪽), 근본에 있어 허무(虛無)주의(Nihilismus)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이 이렇게 된 까닭은, 하이데거가 단호히 거부하고 있는, "형이상학의 存在-神-論적 구성틀"에 있다. '신적인 것'의 되돌아옴의 '사건'은, 그것을 위한 '때'(die Zeit)가 "존재의 역사상" 무르익고 있다면, 형이상학적 사유를 통해서는 일어날 수 없고, 오직 '존재의 운명'이 방향을 바꿈으로써만 가능하다. 존재는 언제 그 방향을 바꿀 것인가? 존재는 스스로를 어떻게 내보여야 하는가?
2.3 하이데거가 신과 '신적인 것'에 관해 말하기 시작했을 때,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그리스도교적 '신 이해'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래서 그리스도교에로 단지 한 걸음만이라도 내디딜 필요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결코 함께할 수 없었던) 그러한 기대를 품었던 사람들은 결국 실망하고 말았다. 하이데거는 '신에 대한 믿음'에로는 한 발짝도 내딛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하이데거의 거부는 이전보다 더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또한 신의 절대적 존재에 다다르기 위해, 하이데거에서의 "존재"를 형이상학적 '존재 개념'의 의미로 해석하려 했던 사람들조차 점점 더 분명하게 반박되었다. '存在는 이름없이 일어난다'(anonymes Seinsgeschehen)는 것을 주장하는 하이데거와 그리스도교에서 믿어지는, 영원히 무한한, 살아있는 그리고 인격적인 神 사이에는 근본적인 그리고 한없이 깊은 대립이 존립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사람들은, 만일 하이데거가 옳게 이해되었다면, 그가 결코 그리스도교적으로 해석되거나 형이상학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하이데거가 "존재"라는 말로써, 또 "존재 자체"라는 말로써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교적 '신 이해'와는 결코 통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아니 그의 사유 속에서는, 사람들이 그의 사유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신을 위한 어떠한 자리도 비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했다.

3. 존재와 신

3.1 이러한 주제는 하이데거가 죽은지(1976) 한참 후에야 ≪철학에의 기여≫(Beitr ge zur Philosophie, 1989)의 출간을 통해 보다 분명하게 논의되었다. 펴낸이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그 책을 이미 1936-1938년 사이에 썼다고 한다. 하이데거는 그 책을 출간하지 않았다. 그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그가 이 책 또한 출판을 위해 유고에서 제외시켰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책을 지금 ≪존재와 시간≫ 이후의 두 번째 주저라고 칭찬하는 것은 매우 지나친 것이다. ≪철학에의 기여≫는 주저가 아니며, 결코 완성된 "작품"도 아니며, 오히려 기획들과 '사유 실험'들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며, 사적으로 쓰여진 것이고, 너무 많은 반복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으로 어두운, 신화적이고 시적인 그리고 예언적인 정열을 담고 있다.
그러나 ≪철학에의 기여≫는, 여기서 전개된 사유 방식에서 유래된 후기 저술들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가 될 수도 있다. 그것과 관련하여 내가 그 책으로부터 길어올릴 수 있는 것은, 단지 일관된 또는 해명의 폭이 보다 넓어진 몇몇 측면들뿐이다.
이미 오래 전에 하이데거는 자신의 사유의 "전회"(轉回, Kehre[돌아가기])를 어둡게 암시한 바 있다(≪인문주의≫, 72쪽 참고). 그 이후로 이러한 전회가 언제 일어났고, 또 그 전회가 본질적으로 어디에 서 있는지와 관련된 많은 해석과 수수께끼가 있어 왔다. 지금 우리는 그 전회가 ≪철학에의 기여≫가 실제로 쓰여질 때쯤(1936-1938) 해서 일어났다는 것, 따라서 사람들이 이제껏 추측했던 것보다 훤씬 이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전회"가 본래적으로 사유의 '방향 전환'이나 심지어 사유의 '전도'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다 이전에 이미 그 소질로서 갖고 있던 바의 '근본 특징들'이 이제 보다 뚜렷이 그리고 보다 날카롭게 전개되는 것임도 알고 있다.
이제까지 사람들은 전회를 가장 단순히, 존재가 더 이상 인간적 현존재와 그의 '존재 이해'에서부터 해석되지 않고, 오히려 거꾸로 현존재가 존재 그 자체로부터, 존재가 "현현(顯現)하는 곳"(Da des Seins)으로서, 즉 "존재가 밝아 오는" 장소(Ort der Lichtung des Seins)로서 이해된다고 도식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이데거의 후기 저술들이 알려 주는 바처럼, 이러한 "전회"에서 '근본적으로 존재-역사적인 사유'에로의 '방향 전환'이 수행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이데거는 ≪철학에의 기여≫에서 자의적인 언어로써, 용어들의 철학적 사용법을 피해서, '사건'(Ereignis)으로서의 '존재'에 관해, 존재의 진리의 다가옴에 관해, 신들의 달아남과 다가옴에 관해, "마지막 신의 '스쳐 지나감'"에 관해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말은 그리스도교적 '신의 믿음'을 명시적으로 거절하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곧바로 모든 그리스도교적 철학에 대한 거부인 것이다. 하이데거가 여기서 "그리스도교적"이란 말을 사용한다면 -- 이러한 일은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 , 그것은 언제나 단지 그 말을 비판적으로 거절하는 가운데 그것과 거리를 두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일 뿐이다. 우리가 시적 언어의 깊고 어두운 의미에 눈멀지 않기 위해선, 하이데거가 얼마나 원칙적으로 모든 "그리스도교적인 것"을 거부하는지에 주목해야만 한다.
그러나 ≪철학에의 기여≫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근본에 있어 이러한 정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이다. 즉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형이상학에 대한 거절, 곧 서양적 사유, 특히 그리스도교적 사유의 전통 전체에 대한 거절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로써 이성적인 그리고 사태적으로 논증하는 모든 철학에 대한 거절이기도 하다. 이러한 철학의 자리에 신화적-예언적 사유가 들어선다. 하이데거는 -- '로고스'로부터 신화에로 -- '뒤로 거슬러 오르면서'(im Sprung zur ck), 초기-그리스적 사유에로 '뒤돌아가면서'(im R ckgang) "다른 시원"을 놓고자 한다. '다른 시원'은, 말하자면 존재를 진리의 '사건'으로서 내보이는 '존재-역사적' 사유를 일컫는다.
3.2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는 존재자의 존재도 아니고 또 신의 "존재 자체"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존재 망각'에 빠져 있는 형이상학과 관련된 것들이다. 하이데거에서 존재 그 자체는, 그가 '존재 그 자체'라는 말을 말하거나 그것을 지시하는 한, '이름없는(anonym), 비인격적인 힘'으로서, 즉 모든 것을 지배하고, 우리에게 우리가 "적합하게 응답해야만" 하는 역사적 운명을 정해 주는 '힘'(Macht)으로서 사유되어 있다(≪인문주의≫, 75쪽). 하이데거에서의 '존재 그 자체'는 근본에 있어 고대 그리스에서의 "모이라"(Moira[운명]), 즉 인간과 신들을 다스리는, 벗어날 수 없는 "아낭케"(ananke[필연성])이다. 하이데거는 또한 불교와 같은 동아시아의 사상들 속에서 자신의 사유와의 친밀성을 발견하고자 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먼저 오랫동안, 그가 언제나 거듭해서 되짚어 보곤 했던 초기-그리스의 사유가들, 예컨대 아낙시만드로스,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등과 더불어 사유했다. 이러한 사유가들에게, 모든 사유와 이해의 마지막 지평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는 운명적인 '존재의 역사'의 근원이 놓여 있다. "신과 신들"이 나타나는지, 그리고 나타난다면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존재의 운명 속에 근거한다"(≪인문주의≫, 75쪽).
이와는 달리 ≪철학에의 기여≫의 많은 진술들에서는 '신적인 것', 신 그리고 신들이 '존재'의 지평 속으로 들어올 수 없는 듯이 보인다. 다시 말해 '신적인 것'의 "본질"은 존재를 넘어서 있거나, 보다 낫게 말해, 존재 밖에 있다(≪철학에의 기여≫, 244쪽). 그러나 神性(Gottheit)은, 우리들에게 가까이 다가오기 위해, 존재를 "필요로 한다"(같은 책, 243). 이것은 마치 존재가, 자신의 진리를 현존재 속에서 "떠오르게" 하기 위해, 현존재를 "필요로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존재는, 그것이 신들의 신과 '神들이 되는' 모든 것(alle G tterung)이 필요로 하는 바 '그것'으로서 인식될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위대함에 다다른다"(같은 책, 243). 그러므로 존재는, 신성에 의해 "필요해져 있기" 때문에, "사이"(Zwischen)(같은 책, 244)로서 입증되며, 말하자면 존재는 존재자와 신들의 사이에서 "신들에 의해 필요해진 것이고, 존재자로부터 빼앗아 온 것이다"(같은 곳). "존재는 존재자보다 결코 더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신들보다 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신들은 결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같은 곳). 존재는 "存在하지" 않고, 오히려 "있어온다"(west). 신들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들은 존재보다 더 많이 또는 더 적게 존재하는 것인가? 이러한 명백한 모순들에서 우리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냉정히 묻는다면, 이때 이미 형이상학적 사유가 재발하는 것인가?  논리학은 사실 하이데거에서 단지 형이상학의 기형적 잔재에 불과하며, 따라서 형이상학과 함께 "극복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은, '신적인 것'에 관해 그 어떤 것도 진술할 수 없다는, 순수하게 부정 신학적인 표현인가? 만일 신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無로서 "있어오는가?" 그렇다면 "존재와 무는 동일한 것"인가?(같은 책, 266쪽 이하 참고).
3.3 여기서 우리가 이해하는 "전회"는 사유의 '방향 전환'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것은 하이데거에서 오히려 '존재의 일어남' 그 자체에서의 "사건"(Ereignis), 즉 스스로를 숨기는 진리'에서의, 존재의 '밝아짐'과 '물러감'에서의, 신들의 가까움과 멂 그리고 다가옴과 달아남에서의, 마침내 "마지막 신의 스쳐 지나감", 즉 마지막 신의 '가까이-다가옴'과 동시에 '멀리-달아남'에서의 "사건"이다. 한편에서 다른 편에로의 방향 전환은 언제나 일어난다. 그것은 "사건"이다. "존재는 '사건'으로서 있어온다"(같은 책, 256). '사건'은, 어떤 것이 "발생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건'은 신을 인간에게 맡기는 것( bereignet)이고, 인간을 신에게 넘겨주는(zueignet) 것이다(같은 책, 280쪽). '전회'는 끊임없는 '전도'(顚倒, Umkehr), '전향'(轉向, Abkehr) 그리고 '회귀'(回歸, Wiederkehr)를 의미하며, 따라서 하나 속에서 둘 다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존재와 무는 동일한 것인가"?
하이데거는 "마지막 神의 스쳐 지나감"을 알리고 있다. 이로써 신에 대한 문제, 즉 하나의 신이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많은 신들이 존재하는지가 오랫동안 결정되지 못하고 만다. 아니 한번도 결정되지 못했다. 신들은 세어질 수 없다(같은 책, 293쪽 참고). "신들의 많음(Vielheit)은 수(Zahl)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같은 책, 411쪽). 또 마지막 신은 "계산적 규정에서 벗어나 있으며"(같은 곳), 따라서 유일신론(Monotheismus), 범신론(Pantheismus) 그리고 무신론(Atheismus)의 저편에, 즉 도대체 모든 "신론"(Theismus)의 저편에 놓여 있다. 신의 죽음과 더불어 "모든 신론도 사그라진다"(같은 곳). '마지막 신'은 "가장 극단적인 멂" 속에 있고, 그리고 동시에 "유일 무이한 가까움" 속에 있지만(같은 책, 412), 그러나 그 神이 무엇이고, 또 어떻게 가까워지고, 또 어떻게 스스로를 내보이는지 등은 여전히 어둡기만 하다. 우리는 단지 그 '마지막 신'이 역사적으로 "스쳐 지나감"을 기대하기만 하거나, 아마도 그것을 희망하고 준비하기만 하면 된다. 신 또는 신들, 존재 또는 비존재 등, 이 모든 것은 잠정적으로 열린 채로 남는다.
3.4 결론하여 나는 단지, 앞의 내용들을 다시 정리하면서, 몇몇 비판적 물음을 던지고자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이데거의 업적 전체가 논란에 부쳐지는 것은 아니다. 분명 하이데거는 사유의 중요한 동인들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존재와 시간≫에서, 이미 '존재의 문제'라는 단초를 통해, 현존재의 분석론, 이해에 관한 이론, 역사적-해석학적 사유, '시간 비판' 등등을 통해 그러했다. 그러나 우리들의 주제, 즉 형이상학과 특히 '신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진지하고 어려운 많은 문제들이 남겨져 있다.
형이상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은 서양 철학의 전통 전체에 해당된 것이다. 그로써 하이데거는, 서양 철학에서 획득된 개념들, 원리들 그리고 방법들 모두를 포기하려는 것인가? 하이데거가 신과 신들에 대해, 그리고 그것들의 달아남과 다가옴에 대해 알려 주는 것은 분명, 다시 되풀이될 수도 있고 검증될 수도 있을 현상학이나 다른 어떤 사태적 방법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그것은 단지, 사유의 어떠한 이성적 매개도 배제하고, 어떠한 논리적 '근거 제시'도 내던져 버리는 직접적 경험만을 요구할 뿐이다. 그것은 철학인가, 아니면 신화론인가?
하이데거는, "다른 시원"을 놓기 위해, 유대적-그리스도교적 믿음까지를 포함한 철학의 전통 전체를 뛰어넘으려 한다. 그러나 이때 하이데거는 다른 방식으로, 즉 '존재의 사유'에로 번역된 채, 바로 이러한 전통의 내용들, 즉 신의 계시, '구원의 역사'[그리스도 수난사]로서의 역사, '구원을 가져다 주는' 신의 다가옴 등의 개념들을 그리스도교적 전승에서 넘겨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구약의 유대적 전승에서부터도 "신의 스쳐 지나감"(Pascha, 逾越節[국경을 넘어감])을 넘겨받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하이데거 자신은 신성에 의해 또는 '존재의 운명'에 의해 예언의 사명을 짊어진, 마지막 신의 예언자로서 행동하지 않는가?
신 또는 '신적인 것'에 관한 하이데거의 이야기는 초기 그리스 시대의 신들에 대한 신화적 믿음에로 되돌아가고 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그 신"(der Gott) 또한 "신들" 가운데 단지 하나일 뿐이다. 여러 신들이 가능하다는 것은 '하나의 신'의 절대성을 이미 지양한 것이며, 따라서 이 '하나의 신'은 존재하는 것도,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보다 고차의 힘들이 거주하는 애매한 영역에로 날아가 버리고 만다. 또한 하이데거가 말하는 "마지막 신"도, 우리가 사유를 통해 도달할 수 있고, 비록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개념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적 믿음의 '하나의 그리고 유일한' 神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런데도 하이데거는 '신적인 것'을 동경하고 있다. 그는 '신 문제'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로써 하이데거는 우리 시대의 한 증인이 된다. 신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신과 종교적 경험에 대한 깊은 동경은 살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동경은, 만일 그것이 참된 것이라고 한다면, 이성적 사유의 반성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만일 누군가 자신이 믿는 바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애매한 신앙인이 되고 싶지 않다면,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근거 제시'하기 위해, 그리고 그것을 해명하고 심화시키기 위해, 우리가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그 차원에서 철학적 사유를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에서 "존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인가? 형이상학에게 존재는 하나의 이름없는, 역사적으로 지배하는 '운명의 힘'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자의 모든 "존재의 현실성"의 원리이다. 그러나 "존재 그 자체"는 존재의 무제약적이고 무한한 충만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절대적 '존재 근거', 즉 그리스도교적으로 이해해, 역사 속에서도 작용하고, 우리들 속에 살아 있는, 살아계신 인격적 신이다.
우리가 믿어도 좋은 신은, 하이데거의 "'그 신' 또는 신들"보다 그리고 오지도 있지도 않은 "마지막 신"보다 그 이상이며, 그것도 무한히 그 이상이며, 보다 더 위대하고, 보다 더 존엄하며, 보다 더 확신할 수 있는 신이다. 하이데거의 사유는 신에게로 가지 않고, 신에게로 통해 있지 않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이제 나지막한 소리로 마지막 물음을 던지면서 이 강연을 끝맺고자 한다. "마지막 신"에는 어떤 마지막 흔적, 즉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에서처럼 "알려져 있지 않은" 신에 대한 어떤 기념-비(紀念碑, Denk-mal)(행 17:23)가 숨겨져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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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수수께끼의 하이데거 [철학 강의]
수수께끼의 하이데거

게르트 헤프너(Gerd Haeffner)

      -  내   용  -

1. 들어가는 말
2. 하이데거와 정치
3. 하이데거와 종교
4. 수수께끼의 하이데거


1. 들어가는 말

1889년 9월 26일, 즉 100년 전에 마르틴 하이데거는 탄생하였다. 1976년 5월 그는 명을 달리 하였다. 탄생 백주년 기념일이 그의 작품을 되돌아보고 거기에 대해 평해 보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많다. 하이데거가 죽은 지도 이제 13년이 지났다. 지난 13년은 전집의 출간으로 인해 그의 저술적 현존이 오히려 그의 생애의 마지막 십수년보다 더 두터웠다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그렇지 않아도 조용히 떨어져서 살며 공적인 토론에 관여하지를 않았기에 그의 죽음은 철학적인 영역의 사건보다는 오히려 사적인 영역의 사건이었다. 그의 작품은 일부분만이 - 비록 많은 부분이긴 하지만 - 출간되었다. 그 작품의 수용은 아직 많은 물음들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 세계관적인 관점에서 하이데거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논란이 되고 있다. 도리어 그 대립이 전보다 더 첨예화된 듯 싶기까지 하다.
벌써 그의 작품의 의의를 평가할 수 있을까? 하이데거를 단적으로 철학의 고전작가들의 대열에 낄 수 있는가? 아니면 혹자가 표현하듯이 그의 영향력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의 요란스러운 떨그럭거림임이 입증되었을 뿐인가?
이렇듯 그 논란은 한 철학에 대한 총체적인 판단의 문제가 된다. 그의 철학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을 그 철학의 미로를 노력하여 헤매 보지도 않고 몇 마디의 쉬운 말로써 요약해버릴 수 있을까? 달리 표현해, 철학에 사유하면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들어갈 수 있다면, 그것은 곧 거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철학이 아니라는 징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의 "결과들은" 단순히 이야기해서 전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결과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로 인도한 그 길을 가 보아야 한다. 그외에도 만일 우리가 그토록 쉽게, 무엇이 남게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지를 갈라놓을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참된 것과 가치있는 것의 척도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척도를 내용적으로 그때마다 새롭게 규정할 뿐 아니라 그 형식적인 의미에 있어서까지 물음을 제기해야 하는 것이 곧 철학적 정신의 특징이 아닌가? 즉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는 무시간적으로 존립하는 것인가 아니면 역사에서부터 표현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만 이런 식의 정보제공은 좋은 의미로 관심을 가졌던 비전문인을 불쾌하게 만들어 버릴 소지를 다분히 갖고 있다. 그런 식의 대답은 분명 철학자를 그의 행위의 의미에 대한 절박한 물음으로부터 보호해줄 수는 있겠지만 그 의미를 확신시켜줄 수는 없을 것이다. 분명코 철학 안으로 파고들어가는 것은 몹시 어렵다. 그러나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철학에서부터 다시 통상의 인간적인 더불어 있음 안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숙명적인 경향을 철학자들에게서 일반적으로 많이 관찰할 수 있긴 해도, 특히 그러한 경향을 우리는 하이데거와 그를 대단한 인물로 간주하는 사람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자리에서 이 글의 필자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기록자나 관찰자의 한 계단 높은 자리를 떠나서 위험부담을 안고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야 겠다. 하이데거의 작품에 대해 흥미와 공감을 지니고 있는 사람의 하나로서 필자는 앞에서 언급한 비난을 즐겨 받으려 하지 않는다. 그는 저항해야 할 것이다. 나는 물음을 제기해야 한다.
밖에서부터 내게 들려오는 비판적인 물음들을 나는 귀여겨 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물음들이 대개는 나 자신의 내부에서 들려오는 회의의 반향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얼마나 상이한 감정의 목욕을 하이데거가 내게 베풀었던가: 그의 사상적인 위력에 압도당해 느낀 환희 - 그의 언어와 사유스타일이 지니고 있는 완고함에 대한 언짢음, 그가 전개하고 있는 다른 사상가에 대한 해석의 풍요로움이 던지는 매혹 - 그의 해석의 억지와 일면성에 의한 현혹 등이 그것이다. 이것보다 더 나쁜 것은 자명함의 느낌의 변화무쌍한 목욕이다. 여태까지 매료당해 감추어져 있는 사태를 밝게 끄집어 내고 있는 길들을 좇아 왔는데, 금세, 상황에 따라서는 사흘 뒤에, 거기서 보았다고 여겼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아마도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물음일 것이다. 이미 얼마나 많은 나의 생애의 시간과 에너지를 하이데거의 작품을 연구하는 데에 - 그런데도 아직까지 그 작품의 전부가 출간된 것도 아니다 - 투자한 것을 생각할 때에, 나는 가끔 나자신에게 "내가 이것을 책임질 수 있을까?" 하고 묻게 된다. 더군다나 내가 그렇게 존재하기를 바라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며 신부로서는 그러한 물음이 회피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철학공부를 하는 것 자체가, 페터 부스트(Peter Wust)의 나를 불안스럽게 만드는 말에 의하면, "십자가에 못박힌 그분의 면전에서" 최고도의 문제가 있는 사치일 진대, 그 전집이 백권이 넘는다는 그러한 사상가를 배운다는 것은 더 말할 여지가 없지 않겠는가! 철학적 논증의 자리에는 너무나도 유치한 "그래 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라는 물음이 깊숙히 뒷문을 통해 파고든다.
하이데거를 붙잡고 오래 씨름하면 할수록 물론 그만큼 더 많이 그를 알게 된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었던 조야한 오해들이 풀려나간다. 그러나 또한 똑같은 정도로 새로운 문제들이 자라나온다. 보다 심오한 이해의 문제와 참다운 소화의 문제가 그것이다. 그것들은 처음에는 거의 눈에 띠지 않는 문제들이다. 이해하기 몹시 어려운 하이데거가 수수께끼의 하이데거가 되어버린다.
이 수수께끼를 나는 이 글에서 부분적으로 매우 주관적인 방식으로, 그것이 어떻게 나에게 엄습해 왔는지를 기술하려고 한다. 이때 본래의 철학적인 내용이 뒤켠으로 밀리게 되는 대가를 치루는 것을 나는 감내한다. 그 철학적 내용은 어차피 기술하거나 이야기하며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함께 사유하며 뒤좇아 사유하면서만 접근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 작업을 다른 곳에서 이미 여러 번 하였으니1) 여기서는 안 해도 무방하리라. 그 대신에 여기서는 한번 그렇지 않을 경우 간과되고 있는 정서적인 것, 외적인 것, 개인적인 것을 표현하는 것을 독자들이 용인해주기를 바란다. 하이데거의 사상과의 씨름의 바로메터를 비추어주고 있는 거울에서 아마도 독자는 하이데거라는 인물의 어떤 면을 인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 가지 관점에서 그것을 고찰해 보도록 하자. 제삼 제국에 대한 하이데거의 입장표명은 내개는 처음 그의 사상과는 거의(전혀) 무관한 하나의 정치적인 오류로 보였다. 오늘날 그 연관은 더욱 복잡하고 더욱 어렵게 엉켜 다루기 힘든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와는 다르게 하이데거의 그리스도 사상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가 그의 사상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그리스도인의 노력에 오히려 결실이 되고 있는가, 아니면 궁극적으로는 그 노력을 동요시키는가 하는 물음은 오래동안 나의 관심을 끌어 왔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물음을 던져 본다: 단순하고 투명하다가도 금세 다시 어두어져 버리는 하이데거의 그 무지막지한 작품의 스타일은 어떠한 유형의 사상가의 모습을, 인간의 모습을 감추며 드러내고 있는가?

2. 하이데거와 정치

특히 지난 몇달 동안 대중을 사로잡았던 그 주제부터 다루어 보기로 하자. 즉 철학자 하이데거가 국가사회주의와 연관이 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특히나 그의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총장 재임기간 동안 말이다.(1933년 4월 21일부터 1934년 4월 23일까지의 기간) 최근의 연구조사들은 하이데거의 국가사회주의와의 연관이 지난 몇년 동안 - 하이데거 자신의 기록에 의한 것뿐만은 아니지만 - 간주되어 왔던 것보다는 훨씬 더 밀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에 기여했다. 새로운 자료들을 세상에 공표한 빅토르 파리아스의 책은 지금까지 어느 정도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프랑스의 대중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얻었지만, 그 책은 동시에 그 해석에 있어서 강력한 심문자적인 편견에 사로잡혀 있으며 때때로 역사학적인 신빙성에 못 미치는 점도 많이 포함하고 있다.( Heidegger et le nazisme, Paris 1987. 독일어판: Heidegger und der Nationalsozialismus, Frankfurt 1989) 역사학적으로 매우 신중하고 풍부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 그러나 전체적인 평가에 있어서 오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경제학자이며 역사학자인 후고 오트의 책 {마르틴 하이데거. 그의 전기를 만들어 가며}(Martin Heidegger. Unterwegs zu seiner Biographie, Frankfurt 1988)가 있다.
그 자료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30년대 초기에 이미 하이데거는 그 당시 국가사회주의적으로 변화되어 버린 독일 대학생 단체와 접촉을 가졌다. 국가사회주의적 전임강사들의 그룹의 하나가 하이데거를 총장으로 선출하려고 계획적으로 작업하고 있었다. 하이데거는 총장으로서 청년들에 의해 전개되고 있는 역동성에 힘입어 전체 독일 대학교의 생활을 개혁하는 것을 주도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했다. 이를 위해 하이데거는 다른 국가사회주의적 총장들(프랑크푸르트, 키일, 괴팅겐 대학교의)과, 나치 대학생 연합과, 프러시아 문화성의 고위직과 밀접한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다. 학생들 앞에서의 선동과 강연에서 하이데거는 자신을 히틀러와 동일시하는 파렴치한 언행들을 행하였다.
하이데거가 그의 개혁의 노력으로 떠올리고 있는 것을 그는 1933년 5월 27일 그의 총장취임 강연에서 묘사하였다. 이 강연을 그 당시 그의 친구인 야스퍼스와 불트만은 축하하였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그 프로그램을 시행하는 데에 실패하였다. 외적인 요인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열거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사적인 국가사회주의"가 당에서 아무런 지지를 받지 못했다. 동료들은 재래의 아카데미적인 생활이 그렇게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고 바꿀 수도 없었다. 아무튼 그들은 그 의미를 올바르게 통찰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문화성과의 대단치도 않은 갈등이 표출되자 하이데거는 총장직에서 자진 사퇴하게 된다. 비록 이 사퇴가 그 자체로 국가사회주의로부터의 탈퇴의 귀결인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 당시에 하이데거의 당에서부터의 이탈의 과정은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하이데거는 형식적으로 1945년까지 당의 일원으로 남아 있었을 뿐 아니라 1934년 이후에도 때때로 정부의 관료들과 좋게 함께 일하였고 "보다 나은" 국가사회주의의 의미의 발언들을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을 대하고 우리들은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1) 그 당시 하이데거는 인간으로서 무슨 죄를 저질렀나? 2) 1945년 이후 그는 1933/34년의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 고백하고 있는가? 3) 하이데거의 나치에의 관여와 그의 철학과는 어떤 밀접한 연관이 있는가?
첫째 물음에 대해: 하이데거는 유태교적 자유주의의 대도시문화의 지성에 대해 공감을 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반유태주의자는 아니었고 더더구나 종족차별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적지 않은 수의 유태 제자들을 두고 있었다. 그들 중 몇몇에게는 상황이 심각해지자 외국에서 자리를 잡는 것을 도와주기까지 하였다. 1933년 이후 그들에게, 특히나 자신의 스승인 후설에게 공적인 지지를 표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 그의 비겁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을 위해 그는 아무 것도 행하지 않았다. 그가 학부의 신념에 찬 가톨릭 신자들을 영향력있는 자리에서 잘라 버리려고 시도했을 때, 이것은 그가 반동적인 힘이라고 여겼던 교회에 대한 그의 거부감의 귀결이었다. 오트가 입증하려고 시도하였듯이, 하이데거가 한 동료를, 즉 화학자 슈타우딩거(Staudinger)를 그의 평화주의 때문에 고발하였다는 것, 그를 처음에 해직하겠다고 - 실제로 해직시키지는 않았지만 - 위협하였다는 사실은 하이데거의 당시의 전기에 있어서 가장 어두운 점이다. 한편으로 그 사실과 관련지어 그가 형벌을 받아야 할 어떤 짓을 저질렀다고 비난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잘못은 간과한다 하더라도 - 그것을 사람들이 철학자에게서 기대하기를 바라는 전형적인 모범이라고 인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둘째 물음에 대해: 하이데거가 1945년 이전에도 그후에도, 한번도 공적으로 그가 그 당시 국가사회주의에 입당한 사실에 대해 아무런 입장표명이 없었다는 것은 하나의 현혹스러운 사실이다. 물론 그러한 간격을 둠이 실제에 있어서는 이미 오래전에 일어났다고 전제할 수도 있을 것이다. 1936년에서 1938년 사이에 쓰여진, 그러나 1989년에야 비로소 출간된 {철학에의 기여}라는 책은 이 점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예컨대 1936년 이후의 강의록들에 기재되어 있는 (물론 해설을 단) 주석들도 그 점을 보여주고 있다. 1945년 이전에 명확한 공적인 단절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당이 그러한 처사에 대해 어떤 보복적 조치를 그와 그의 가족에게 취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왜 나중에도 아무런 분명한 잘못의 인정을, 아무런 공적인 - 사적으로는 인정하였다 - 수정을 하지 않았는가?
그의 침묵에 대해 다양한 해석의 시도가 제시되었다: 하이데거는 시초의 좋은 단초들이 나쁘게 변형돼 버린 것에 대해 하등의 책임감을 느끼지 않았다든가 또는 그는 그러한 일들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Gadamer)2) 식의 해석 말이다. 하이데거는 추가적인 국가사회주의 판결과 더불어 그 사실의 통상적인 도덕적 억압에 박차를 가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러한 일은 하등의 작업상의 사고가 아니라 단지 후기 유럽 근세 특히 현저한 증후였었을 것이겠기에 말이다. 그 증후는 오늘날 모든 자연적인 것과 전수된 것을 무한정으로 뿐 아니라 허무주의적으로 소모해 버리고 있는 데에서 드러나고 있다.(데리다)3) 하이데거 자신은 1948년 1월 그의 제자 허버트 마르쿠제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1945년 이후에 고백하는 것이 나에게는 불가능하였다. 왜냐하면 나치 추종자들은 아주 구역질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신념의 변동을 고지하였는데, 나는 그들과 전혀 공통적인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4) 이 모든 것이 맞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만족스러울 수는 없다. 자존심도 어떤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물음은 무엇보다도 이 침묵이, 도덕적인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 그것이 그의 사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동료시민에 대한 그의 입장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기자신이나 젊은 청소년들이 그의 사상에 의해 영향받도록 내버려두는 것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은 분명 제기해야 할 것이다.
이로써 세번째 물음을 건드렸다. 하이데거의 철학적 사상과 그의 일시적인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찬성 사이의 연관은 얼마나 밀접한가? 그의 사상에 반대하는 적대자들은 그 연관이 밀접하다고 보고 거기에서 사상가로서의 하이데거를 전부 불신해 버릴 수 있는 가장 인상적인 수단을 발견하고 있다. 비슷한 방식으로 하이데거의 작품이 이해하기에 너무나 어렵다고 여기거나 그것과 씨름할 시간을 갖고 있지는 못하면서도 그러면서도 나름대로 입장을 표시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간단한 판단의 절차를 따라 이런 식으로 처리해 버린다: 나치였던 사람의 철학이 어떻게 좋을 수가 있는가. 이와는 반대로 그의 친구들은 오랫 동안을 그러한 연관을 부정하거나 무시해 버리려고 시도하였다. 물론 초기뿐 아니라 후기에도 하이데거의 제자이며 친구인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는 이러한 외면의 정책에 반대한다. 하이데거의 정치적인 실수가 그의 사상과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토록 유명한(중요한) 사상가에 대한 그런 식의 변호가 얼마나 모욕적인가 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5) 그래서 이제 물음은 더욱 뜨겁게 달아오른다. 하이데거로 하여금 일시적으로 유럽의 문화의 혁신(쇄신)에로 이끌게 될 그러한 정치적인 힘을 국가사회주의에서 발견하게 되리라고 희망하게끔 만든 하이데거 자신의 동기는 무엇인가?
이 동기들은 부분적으로는 그의 개인적인 태도와 연관이 있을 것이고 부분적으로는 그의 사상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시골의 소도시의 가난한 집안의 자식이었다. 그는 장인(직공)과 농부의 가족 출신이다. 그는 이러한 주위환경에 결속된 채 남아 있었다. 여기에서부터 국가사회주의 속에 들어있는 사회적인 계기가 그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즉 정신노동자는 수공업자들을 인정해주어야 하며 그들과의 접촉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하이데거는 결코 사회주의적 국제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민족적으로 생각하였다. 히틀러가 "베르사이유의 치욕"을 씻어버리고 오스트리아를 독일제국에 병합시켰을 때, 이것은 하이데거를 기쁘게 하였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보다 사적인 태도가 문화비판적인 시대진단과 연결이 된다. 하이데거는 유럽문화가 오래 전부터 심각한 위기에로 치닫고 있으며, 이 위기가 19세기와 20세기에서 두드러지고 있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즉 철학적으로 독일 관념론의 종말 이래의 형이상학의 몰락이 그렇고, 정치적으로 제일차 세계대전과 그에 뒤이은 예전 유럽의 붕괴가 그렇다. 유럽문화의 변두리지역이 이제 세계의 흐름과 위대한 이념들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미국에서와 소련에서는 정신부재의 대중문화의 변형체 외의 어떤 다른 것도 볼 수 없었다. 예전의 이념 위에 구축되었던 유럽이 다시 한번 동일성을 발견하려면 자신의 근원에로 소급해 올라가야 한다.
통상적으로 사람들은 유럽의 두 원천을 그리스의 문화와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본다. 그리스인의 탁월함은, 그들이 놀라움 속에 경험한 현실의 압도적인 위력을 물음과 앎에의 의지로 대처했다는 데에, 그들이 인간적인 삶의 방향모색과 형성을 방법적으로 얻은, "자율적" 인식의 토대 위에 놓으려고 감행했다는 데에, 우리가 기술, 윤리학, 자연학이라고 부르는 그곳에 놓으려고 감행했다는 데에 성립한다. 그러나 물론 하이데거가 보기에는 철학과 과학의 역사가 지금까지 거기에서 양분을 취해 온, 그리스인들이 정리해 놓은 근본개념들은 오늘날의 변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기에는 충분치 못하다. 그래서 이미 우리는 1919년에 분명하게, 그리스의 시원적인 사상가들에, 즉 처음에는 플라톤에, 그리고 누구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에, 그리고 나서는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에 비견할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상의 시작을 찾아나선 그의 욕심을 확인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확신에 의하면 철학적인 통찰에서의 이러한 문화의 새로운 시작에는 독일인들에게 핵심적인 역할이 주어질 수 있다. 어떤 북유럽적인 특징 때문에도 아니고 지리적인 중심위치 때문에만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독일의 철학적인 전통과 그 언어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사유는 실제적으로 뿐 아니라 전적으로 의식적으로도 독일 언어의 가능성에서부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때 이러한 가능성의 한계가 흔히 너무 멀리 나아가고 있다. 하이데거는 상호간의 번역가능성의 토대를, 그리고 그로써 유럽 철학언어의 국제성의 토대를, 즉 중세와 초기 근세의 라틴어 용어를 - 비록 민족주의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 사유의 민족적 특징으로 대체시키려고 시도한다.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언어의 도움으로 근원적으로 사유하였다. 이러한 근원성이 라틴어로의 번역에 의해, 그로써 로마계 언어로의 번역에 의해 덮어져 버렸다. 그래서 이 언어들은 사상적인 새로운 시작에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반면에 (어느 정도 아직까지 소비되지 않은) 독일 언어의 정신에서부터 나온 철학함은 - {존재와 시간}에서 시도된 것과 같이 - 아마도 그러한 새시작에 무엇인가를 기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자체 특별히 나치적인 것은 아닌) 국가시회주의적인 구호인 "피와 흙"(혈통과 대지)에서 출발할 경우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피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 "흙"(토양)은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때 물론 그것을 지리적 생물학적으로 이해하지 말고 역사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다른 민족들과 자연을 순수 형식적으로 지배하는 데에 활용하기 위해 한 민족이 역사적으로 성장하여 온 힘을 체계적으로 조직하여 착취하는 것을 (이것이 갈수록 점점 더 제삼 제국의 구성요소가 되어 가자) 하이데거는 곧 허무주의적이라고 거부한다. 이때 니체의 예언자적인 통찰인 "힘에의 의지"와의 논쟁적 대결이 하이데거의 안목을 날카롭게 만들어 주었다.
사유가 갖는 언어의 정신과의 말접한 결속과 독일어로 사유하는 철학 - 다시 말해 우선은 자기자신의 철학 - 의 역사적인 소명에 대한 추정을 하이데거는 나중에도 확고하게 견지하였다. 민족정신과 같은 낭만적인 사상을 상기시키는 이러한 이데아가 유럽 전체를 위한 "독일" 사상가의 지배의 의미가 아니고 봉사의 의미를 뜻한다 해도 다음과 같은 비판적인 물음을 던질 여지는 있다. 즉 다른 언어의 정신에서부터도 합당하고 포기될 수 없는 철학함의 방식들이 발원해 나왔으며 발원해 나올 수 있지 않는가? 유럽 공동체가 자신들의 그리스도교적인 근원 - 이것이 또한 동시에 그 공동체들을 보편적인 책임감에로 확고하게 묶어주고 있다 - 에로 소급하여 결속된다면, 그 여러 상이한 민족적인 목소리들이 여전히 화음을 이룰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하이데거는 20년대 후반부터 그리스도교에게 하등의 "역사를 각인하는 힘"을 신뢰하여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하이데거와 그리스도교 사상"에로 넘어가기 전에 정치의 주제를 마무리지으면서 우리는 이와 같은 물음을 제기해야 겠다: 그 당시 히틀러를 위해 입장을 표명하도록 만든 그 계기가 그의 전 철학을 염두에 둘 때 하이데거의 사상에 있어서 얼마나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내가 방금 한 것과 같이 접근가능한 하이데거의 발언의 전체 중에서 국가사회주의의 동기와의 가까운 유사성을 드러내고 있는 그러한 발언들만을 뽑아내어 그것을 함께 모아 놓으면, 물론 사람들은 그러한 사람이 오늘날까지 (계속 증가의 추세로) 거의 모든 문화권에 독자들을 - 늙거나 젊거나를 막론하고, 좌익이나 우익이나를 막론하고 - 두고 있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며 머리를 휘두르게 될 것이다. 아마도 사람들은 파리아스와 오트의 책을 읽고 그러한 인상을 더욱 강하게 받을 것이다. 그 이유는 거기에 많은 것이 (파리아스에 있어서는 적지 않은 것이) 고의적으로(치우치게) 각본화되어 아마도 하이데거의 책임을 덜어줄만한 자료들은 많이 배제해 버렸다는 데에 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책들에서는 그리고 이 글에서도 - 그 글의 성질상 부분적으로 어쩔 수 없이 - 하이데거의 철학함이 부재하거나 그저 변두리에만 나타나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철학함이, 그것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어떤 사람도 감동시키는 위력과 근원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그러한 주제적인 집중력과 물음을 제기하는 공격의 폭을 지니고 있어 사람들이 제삼 제국의 많은 표어들과 비슷한 음향을 띤 귀절들을 만나게 되기까지 오래 동안 그것과 씨름을 해야 한다. 또한 사실 그러한 귀절도 있다. 그러한 귀절들은 산재되어 있고 그 수는 전체를 감안할 때 극히, 정말로 극히 적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독자들에게 그 귀절들은 그들을 고통스럽게 넘어트리는 도상의 걸려넘어지는 돌이 되고 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공정하려고 한다면, 길을 그 길 위에 놓여 있는 걸려넘어지게 하는 돌을 갖고 규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이데거의 사상은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희망을 가능케 했던 또는 아무튼 그 희망을 재빠르게 막지 못했던 그러한 특징들을 간직하고 있다.
지난 2년간의 토론을 통해 일반 대중들에게 인간 마르틴 하이데거가 어떠한 약점들을 갖고 있는지, 그의 사상이 어떤 위험 아래에 서 있었는지 등이 과거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이러한 위험들은 결국에 가서 그가 제기하는 물음들과 분리시킬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하이데거에 대한 요젭 로반(Joseph Rovan)의 다음과 같은 현명한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철학자가 밝혀낸 그 세력(힘)들은 빛의 세력들이기도 하지만 어둠의 세력들이기도 하다. 즉 천국적인 세력인가 하면 지옥의 세력이기도 하다. 그는 실존의 심연에 대한 우리의 통찰을 열어주었다. 그 자신 스스로 빠져든 심연에 대한 통찰을. 그의 사상과 작품은 국가사회주의와 내적인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 국가사회주의는 또한 - 무엇보다도 - 악마적인 것의 현현이었다. 그렇지만 또한 그의 사상은 유럽의 근세가 세상에 내놓은 사상 중 가장 멀리 그리고 가장 깊히 파고든 사상이다. 그의 사상은 그들도 하이데거처럼 독일인들이었던 헤겔, 마르크스, 니체의 사상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는 그들처럼 애매모호함 투성이의 심오함을 열어밝혔다."6)
여기의 언급에서부터 하이데거의 작품에로의 올바른 통로가 귀결되어 나온다. 위에서 말한 위험은 독자들에게 경우에 따라선 숙명적이 될 수도 있다. 만일 독자가 아무런 자기나름의 지탱점이 없이(함부로) 전적으로 하이데거의 개인적인 사유의 운동이었던 바로 저 "근원적인 물음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된다면. 이 지탱점은 삼중의 형태를 가져야 한다: 자기나름의 물음, 비판적인 사유에 있어서의 훈련,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격성에 터한 확고함 등이 그것이다.
하이데거 자신은 자신의 뿌리를 - 그가 다른 더 본질적인 관점에서 뿌리뽑힌 자였을 때 - 더욱 더 모국어, 조국, 역사 등에서 찾았다. 하이데거는 1917년 이후 자신의 청년시절의 믿음에서부터 멀어졌다. 그는 그로써 생겨난 공백을 - 아마도 1933/34년의 시도를 제외한다면 - 거부할 수도 없었고 다른 대용품으로 채워넣을 수도 없었다.


3. 하이데거와 종교

   나는 개인적으로 하이데거의 작품에 감추어져 있지만 강력하게 현존하고 있는 종교적 물음에 대해서 하이데거의 정치적 입장에서 귀결되어 나오는 문제들보다 더 일찌기 더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왔다. 내게도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 형이상학적인 신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에서 나는 신학과 믿음의 현재화를 위한 기회가 놓여 있지 않을까 자문하여 보았으며, 동시에 이러한 비판이 사유와 믿음의 골을 전혀 건너지를 수 없는 것으로 만들게 되지는 않나 걱정을 하였다.
   그 모든 비교될 수 없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이데거와 그의 독자인 나 사이에 어떤 보이지 않는 결속의 느낌이 드는 것을 허용했다. 하이데거는 1909년 2주 남짓(9월 30일-10월 13일) 펠트키르히의 티지스에 있는 예수회 수련원의 수련생이지 않았던가? 그 당시 수련원은 폴 드 샤스토네이(Paul de Chastonay) 신부의 관장 아래 있었다. 그 집에 속한 신부 중의 한 분으로는 루페르트 마이어(Rupert Mayer) 신부도 있었다. 하이데거와 같이 수련원에 있던 동료 수련생 중 몇몇은 내가 아직도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수사들이다. 예를 들어 스콜라학자 수련생인 빌헬름(A. Wilhelm)과 푀겔레(O. V gele), 보쉬(O. Bosch), 퀴젤(J. Kuisel) 수사 등이 그렇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이름만 알고 있었다. 후에 신부가 된 카(Kah), 크론제더(Kronseder), 콘스탄틴 노펠(Constantin Noppel), 루돌프 폰 모스(Rudolf von Moos) 등이 그렇다. 아마도 하이데거는 심장병 증세 때문에 수련원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의 대주교에게 신부지망생으로 지원을 하였으며, 우선은 또다시 건강상의 이유로7) 이 길을 포기하고 수학과 철학으로 방향을 바꾸기 전까지 2년 동안은 스콜라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나중에야 하이데거는 교회와의 밀접한 결속을 스스로 끊는다. 그의 친구이며 동료인, 신부이며 강사인 엥겔베르트 크렙스(Engelbert Krebs) - 이 사람이 1917년 3월 엘프리데 페트리(Elfriede Petri)와의 하이데거의 결혼식을 주례하였다 - 는 나중에 이야기하기를, 하이데거는 개종의 의사를 갖고 있는 그의 개신교 처를 가톨릭 신앙에로 인도하려고 시도하면서 그 자신의 신앙이 올바른 토대가 없음을 깨달았다고.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추정컨대 로마 교황청에서 하달된 "근대주의"에 대한 폐쇄정책을 대하고 느낀 실망스러운 답답함이 어느 정도 작용을 하였을 것이고, 그것이 아마도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의 그리스도교 철학 교수직에 걸었던 그의 희망이 무산되자 더욱 강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분명 다른 어떤 것이다. 신학생으로서 여전히 드러나게 통합적 보편적인 가톨릭주의를 대변하고 있었던8) 하이데거가 이제는 후설과 딜타이의 학파에서, 그리고 또한 루터, 파스칼, 키에르케고르 등의 철학을 대하면서 매우 예민하고 비판적이고 거기에다가 자신의 능력을 자신하게 되는 정신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제 하이데거는 좁은 교의주의와 질서유지정책적인 동기에서 미리 정해져버린 경직된 형이상학의 사슬로 인한 압박을 특히 예민하게 느끼게 되었다. 1919년 1월 하이데거는 크렙스에게, 그가 그동안 얻은 인식의 본질에 대한, 특히나 인식의 역사성에 대한 통찰이 그로 하여금 "가톨릭주의의 체계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고 쓰고 있다. 이때 그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사상과 형이상학이 - 물론 새로운 의미로 알아들어서 -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9) 하이데거는 일생동안 가톨릭 교회에서 떨어져 나오지는 않았지만 이제 개신교의 감정에 가깝게 서게 된다. 1923년부터 1928년까지 마르부르크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하이데거는 자주 개신교 신학자들과, 특히 그가 친구로서 가까이 지내고 있던 루돌프 불트만과 지속적으로 심도있게 토론을 하였다.10) 언제 왜 비교의적인 그리스도성과의 이러한 공감이 그리스도교 사상 자체에 대한 본질적으로 거리감을 둔, 아니 부분적으로 불친절하기까지한 태도로 (이 태도는 30년대 중반 경에 확인할 수 있다) 바뀌었는지는 명확하게 파악할 수가 없다. 바젤의 친구들인 오버벡(Franz Overbeck)과 니체(Friedrich Nietzsche)에 대한 하이데거의 심취가 아마도 거기에 어떤 작용을 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어쨌거나 하이데거에게는 그 두 사람에게서처럼 그리스도교 사상은 문화를 각인하는 힘을 다 쇄진해 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기에도 예수회 신부들이 하이데거의 세미나에서 함께 연구할 수 있었고 그의 주목을 받는 것이 가능하였다. 나에게 처음으로 하이데거에  대한  흥미를 심어준 나의 은사인 로츠(Johannes B. Lotz) 신부가11) 그 자리에 있었고(1934-36) 칼 라너(Karl Rahner) 신부도 있었다.12) 그 시절의 다른 세미나 참석자로는 스페인의 예수회 신부인 페르난도 후이도브로(Fernando Huidobro)가 있다. 그는 "군단"의 제4 중대의 종군신부가 되기 위해 학업을 중단했다. 하이데거는 1936/37년 겨울학기의 세미나에서 참석자들에게 후이도브로 신부가 그에게 시민전쟁 중에 써보낸 편지를 읽어 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 신부에게 1936년 성탄절에 책자 하나와 편지를 보냈다.13) 후이도브로 신부가 1937년 4월 12일 전사하자 하이데거는 4월 21일 동료수사인 로츠에게 애도의 편지를 보냈다. 전쟁 이후 오래전에 알았었던 예수회원과의 관계들이 많이 재개되었다. 로츠 - 1953년 뮌헨에서의 기술에 대한 강연을 계기로 - 와의 관계가 그렇고 오토 팔러(Otto Faller) - 이 사람은 하이데거가 프라이부르크 신학교의 기숙사 시절에 알고 지내던 사람으로서 이제(1951-56)는 북부 독일 관구의 관구장이다 - 와의 관계가 그렇다. 새로운 접촉들이 50년대와 60년대에 생기게 된다. 예를 들어 {하이데거. 현상학을 통해 존재의 사유에로}(1963)의 저자인 미국 예수회 신부 리차드슨(William J. Richardson)이 그렇다. 하이데거는 한번도 그런 적이 없는 일을 그에게 해준다. 즉 그의 책에 긴 서문을 써준다. 내가 1971년 2월 박사학위를 마치고 프라이부르크로 그를 방문했을 때, 그는 우리의 예수회 "철학 대학"의 연구들에 대단한 흥미를 보여주었다. 그 대학은 그때 이자탈의 풀라흐에서 뮌헨의 한 가운데에로 이사를 해온 참이었다.14)
   종교철학적인 주제에로의 하이데거의 접근을 특징짓고 있는 바 그것과, 스콜라적인 풍토에서 사회화된 독자에게 하이데거의 수용을 어렵게 만들고 있는 바 그것은 형이상학적 신학의 거부이다. 더 나은 말로 말한다면, 이러한 거부의 이유가 사람들이 형이상학적인 신학의 오랜 전통을 염두에 두고 기대하였을 그것만큼 그렇게 명확하고 상세하게 기술되고 있지 않다는 바로 그 사실에 있다. 흔히 그 논증도 제시되기보다는 오히려 암시되었을 뿐이다. 예를 들어 하이데거가 이렇게 말한다 할 때15), 즉 "철학에 있어서 사실에 합당한 신에 대한 이름"이 그렇게 불리우는 그 "자체 원인"(Causa sui) "앞에서 경외심으로 무릎을 꿇지도 음악을 연주하지도 춤을 추지도 않는다"고 할 때, 이 발언에 대해 아무런 근거제시가 주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그 의미도 열려 있다. 이 발언은 예컨대 토마스 아퀴나스 추종자나 또는 젊은 하이데거를 높이 평가했던 헤르만 쉘(Hermann Schell)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다른 예를 든다면,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적 신학의 역사를 형이상학적 단초의 필연적인 귀결로 간주하였고 그래서 문제가 많은 근세에서의 신적인 것의 기능에서 (라이프니츠와 헤겔에게서는 은닉된 채, 니체에게서는 드러난 채) 형이상학적 신학 그 자체의 내적인 진리를 읽어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내적인 귀결이 어떠한 종류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근세 사상가들의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칸트 등등) 신학이 좀더 동정적인 해석을 허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은 논의되고 있지 않다. 또 다른 예를 든다면, 하이데거는 언제나 거듭 "신" 또는 "신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직접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고 으레 다른 사람들, 특히나 횔더린의 표현방식을 이런 저런 방식으로 취하면서 그렇게 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에게서 그러한 이야기가 어떠한 실재의 연관을 갖고 있는지는 명확하지가 않다. 신 또는 신들에 대해 순전히 만들어진 것을 인용하는 식으로와 "확신에 차서" 이야기하는 두 가지의 분명한 가능성 외에 어떤 제삼의 이야기 방식이 있는가?
아무튼 명백한 것은 하이데거가 철학자들의 "신"을 불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철학자들에게서 그렇게(신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바 그것은 하이데거가 보기에는 - 예를 들어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그렇듯이 - 신학적인 대화를 철학적인 문맥에로 옮겨서 사용한 결과이거나 또는 -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이 그렇듯이 - 전혀 옳지 않은 방식으로 그 이름을 지니고 있다. 이때 그 이름은 전적으로 종교적인 문맥을 벗어나 특정한 천문학적인 현상의 최종원인으로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스피노자에서의 "신 혹은 자연"도 그렇고 헤겔의 "신"이라고 불리우는, 그렇지만 그 종교적인 의미가 극도로 애매한 "절대자"가 그렇다. 이러한 입장표명 뒤에는 한편으로 칸트의 그것과 유사한 이성비판적인 숙고가 감추어져 있다. 다른 편으로 그것들은 종교적인 것의 규정들로서 이 종교적인 것을 형이상학적인 것이나 또는 도대체 모든 형태의 지식에서부터 완전히 구별짓는 그러한 규정들이다. 여기에서 하이데거는 오버벡의 학문과 믿음의 엄격한 분리16), 슐라이어마허의 종교적인 것의 윤리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에로부터의 날카로운 구별17), 그리고 아마도 루돌프 오토의 책 {성스러움의 의미}에 나오는 종교를 전율스러운 것과 황홀스러운 것으로서의 성스러움에 대한 경험으로 규정짓고 있는 것 등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다.
   방법론적인 귀결은 "신"이라는 낱말의 의미는 종교적인 경험에서부터 이해되어야 하지 그 역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그것은 (예컨대 플라톤, 안셀무스, 데카르트, 피히테에서와 같이) 철학함의 행위 자체에서 귀결되어 나올 수 있는 탈자적인(무아의) 경험을 본디 그안에서 신이 나타나는 그러한 어떤 것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적인 것의 앎의 대변자로서 하이데거는 오직 불리운자만을, 역사적으로 상황지어진 가운데 성스러움의 초월적 힘에 의해 사로잡힌 증인만을 염두에 두고 있을 뿐이다.18) 그러한 사람들로서 하이데거에게 중요한 인물은 키에르케고르, 니체 그리고 횔더린이다. 그들은 전부 특히나 근세 세계에서의 성스러움의 현존보다는 오히려 부재에 대한 증인들이다. "자기 시대의 운명에 맞갖은 유일한 사람인" "종교적 저술가"인19) 키에르케고르는 하이데거를 특히 {존재와 시간}이 출간되는 해까지 동반한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는 문장으로 우리 시대의 종교적인 근본분위기를 말로 표현한 사상가이다.20) 횔더린은 "성스러운 이름이 결여"되어 있는 세기에 이 결여를 끝까지 견뎌내고 하늘과 땅의 새로운 화해의 전망을 유지해준(열어준) 시인이다.21)
   그리스도교의 신앙에 대한 하이데거의 입장은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애매모호한 채로 남아있다. 하이데거 자신은 아마도 20년대 말에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근대의 세계를 여전히 각인할 수 있었던 그러한 신적인 것의 가까움의 형태를 보는 것을 포기하였다. 그의 {철학에의 기여}(1936-38년)의 끝의 한 장에서 그리스도교 사상을 거슬러 기획투사된 신에 대한 사상이 표현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가다머가 "민족종교"22)에 대한 꿈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 등장하고 있다. 나중에 하이데거가 그래도 다시금 그리스도의 신앙에 대한 가능한 미래를 눈 앞에 그리고 있을 때라도, 그것은 기껏해야 다음과 같은 조건 아래에서일 뿐이다. 즉 사람들이 우선 사유하면서 철두철미 기술에 사로잡힌 사유형태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그러한 근대 세계의 본질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조건이 그것이다. 이때 그 사유형태는 또한 나름대로 우리의 임의에 의해 생겨난 것도 아니고 또 우리의 임의에 의해 제거해 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어쨌든간에 옛 것을 통합시키는, 종교적 의미의 새로운 방식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남아있는 것은 신적인 것이 스스로 자신을 그 스스로에서부터 새롭게 경험하도록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분야에서의 인간의 노력이란 것은 무기력할 뿐 아니라, 의미에 반하기 때문에 오히려 반생산적이다. 우리 모두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가난을 배우는 일이다.
   하이데거의 사유는 계속해서 그의 신학적인 유래에 의해 각인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유래를 한번도 부인하지 않았으며 그것에 대해 어떤 끝나버린 것이나 치워버려야 할 것처럼 외면하지도 않았다. 그의 유래는 그의 삶 그리고 그의 사상에 있어서도 아픈 면이다. 사람들은 종교적인 것이 문제가 될 때, 하이데거에게는 폭력과 부드러움이 아주 가까이 같이 놓여 있는 것같은 인상을 받는다. 그는 그의 생애의 오랜 동안을 교회적인 의미로 신심있게 지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종교적인 충동이 없이 그의 사상은 생겨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종교적인 충동 없이는 그의 사상을 이해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분명 신앙심있는 탐구자와 탐구하는 무신앙자와의 대화를 계속 이끌어 나가는 것은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아주 오랫 동안 신학은 형이상학적으로 연구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마치 그 옷을 다른 옷을 입을 수 있었는데도 입었듯이 그렇게 해온 것은 아니다. 형이상학적인 해석 속에서 비로소 믿음도 밝아지고 그때마다 현재적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에서 잘 관찰할 수 있다. 오늘날 신학은 형이상학적 소외에서부터 벗어났음을 뽑내고 있는 듯 하다. 거기에 실제로 좋은 어떤 것이 있을 수도 있겠다. 단지 사람들이, 흔히 볼 수 있듯이, 개념에서부터의 해체 대신에 이제 일종의 역사적인 실증주의를 갖다 놓지 않기만 한다면 말이다. 이 실증주의도 하이데거가 보여주고 있듯이 형이상학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것은 우리가 오늘날 어느 다른 사상가에서가 아니라 바로 하이데거에서 배울 수 있는 과제이다. 신속한 매개, 쓸만한 것과 장애가 되는 것의 유용한 분리 등을 거기에서는 물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러한 대화를 위해 사람들은 아주 오랜 끈기가 필요하다. 그러는 동안에 어느 누구도 무인의 나라에서는 살 수 없는 것이기에 보존되어 온 전통을 내던져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전통은 아직 현재가 아니다.


4. 수수께끼의 하이데거

   하이데거의 텍스트와 씨름을 하기 시작한 이래 나는 그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을 뿐 아니라 또한 나와 알게 모르게 지속적으로 대화를 하고 있는 그 뒤에 서 있는 인물의 윤곽도 잡아보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리고 또한 그의 제자들이 그를 받아들인 방식에서부터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를 알고 있었던 사람들의 체험적 증언에서부터도 내가 내게 만들어 놓은 그 그림을 보충하려고 애썼다. 그것은 아주 흥미로운, 아니 수수께끼의 인물의 모습이었다.
   첫째로 하이데거 자신의 자기자신의 사상에 대한 기이한 관계맺음을 들 수 있다. 그는 그의 사상을 자신의 소유로서가 아니라 도리어 자신을 그 사상의 소유로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편으로 그가 그의 사상을 담고 있는 것을 관리하는 방식 역시 기이하다.
   게오르크 피히트(Georg Picht)의 통찰이 독자들도 감지할 수 있는 바를 기막히게 묘사하고 있다. "어떻게 인간 하이데거를 묘사할 수 있을까? 그는 번개가 치는 마을에서 살고 있다... 사유의 임무에 의해 흡사 얻어맞은 것 같은 의식, 그의 기념비적인 명확성 그리고 정신의 위대한 전략 등은 매개되지 않고, 갑자기 농부의 심원한 지략과 언제나 깨어 있는 불신에로 뒤바뀔 수도 있는 그러한 무방비 상태, 예민한 감정, 연약함 등과 나란히 놓여 있다. 삶이 그에게 끼친 상처는 끝내 아물지를 않았다."23) 1919년 하이데거는 앞에서 언급한 크렙스에게 쓴 편지에서 이러한 임무를 종교적인 표현을 빌려 "내적인 소명"이라고 묘사하였다. 이러한 임무와 관련지어 또한 우리는 하이데거가 1951/52년 {사유란 무엇인가?}(사유는 무엇을 명하는가?) 라고 물음을 던지며 그로써 무엇보다도 (그에게) 무엇을 사유하기를 명하는지를 (지시하다, 촉구하다의 의미로) 묻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명령(하달)은 그의 삶의 어느 특정 시기에서는 너무나 멀리 나가 사유가 하루의 특정한 정해진 시간에 그야말로 그를 덮쳐 오는 것처럼 이해될 지경이었다.24)
   이러한 사상의 자기이해(자명성)에서부터 비로소 우리는 또한 하이데거가 자신이 쓰고 말한 낱말을 "관리하는" 태도와, 그리고 그와 더불어 청중과 독자에 대한 그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하이데거가 개인적인 대화에서 이야기하는 방식과 그의 강의와 저서에서 이야기하는 방식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한편으로 대화에서는 단순함, 용어사용에서의 자유로움이 보이고 있고, 그 중간쯤 강의 스타일이 놓인다 할 수 있고, 다른 편으로 강연과 저서에서는 극단적으로 응축된, 용어에 있어 정화주의적이고, 때로는 화려하고 갈고 다듬은 말들이, 아무튼 대단히 인위적으로 구성된 말들이 보인다. 그리고 이것과 전적으로 다른 것은 말해진 것과 침묵되고 있는 것과의 관계이다.25) 인쇄되기에 충분한 원고들을 20년 또는 30년 동안 발표하지 않고 놔두고 있는 그는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그것도 출판해줄 출판사를 찾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원고를 이해할 만한 시간이 가까워올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서라니 말이다.
   내가 1971년 그의 저서 중 어떤 저서에서 그가 문제삼고 있는 그것이 가장 집중적으로 표현되고 있느냐고 물었을 때 하이데거는 {사유란 무엇인가?}라는 강의록을 댔다. 그래서 나는 다른 책을 댈 것으로 기대했다고 하면서, 예를 들어 {강연과 논문모음집}의 가운데 실린 글들을 지적하였다. 갑자기 수줍어진 듯한 목소리의 그의 대답은 놀라웁기도 했고 전형적으로 그다운 대답이기도 했다. "물론 그것도 나에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지. 그래 그것이 본래 중요한 것이지." 하이데거는 그것을 그렇게 직접 대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또한 {동일성과 차이}이기도 하단다. 거기에서 그는 "고양이를 자루에서 가장 멀리 꺼내 놓았다. 그러나 그것도 전부는 아니지"! 말없이 간직하고 있는 순진함에, 수수께끼 속에 포장하는 지혜에 때때로 너무나도 인간적인 경제적 계산이 섞여들기도 한다는 것은 하나의 기적일까? 그래서 나에게는 하이데거와의 씨름이 시작된 이래 언제나 거듭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되어 왔다: 하이데거는 독자에게 개방되어 있는가? 그는 언제나 솔직한가?26)
   둘째로 제자들과 독자들에게 미친 그의 영향에 대해서도 무언가를 말해야 겠다. 하이데거의 강의는 그 당시 몹시 매혹적이었고 그의 저서들는 오늘날도 아직 그 매력을 잃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사자의 날카로운 발톱을 느낀다. 그의 청중들에게 하이데거는 사상가적인 자연의 사건과 같이, 화산의 폭발과 같이, 강력하고 위압적으로 압도해 왔다. 그의 물음의 대단히 비상한 힘에 압도당해, 또는 다른 종류의 함께 떠내려가는 듯한 급류 속에서 제자들은 마치 쇠사슬에 묶인 듯이, 그 모든 부유해짐 속에서도 (아니 오히려 바로 그때문에) 자신이 자유롭지 못함을 발견하였다. 하이데거의 가까운 제자들에게서 우리는 그러한 압도적인 힘에 반응을 보이고 있는 모든 다양한 태도를 찾아볼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위험을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그는 그의 학생들에게 언제나 거듭 그에 대해서 그들 자신의 물음과 존재의 자립성을 유지할 것을 촉구하였다. 많은 하이데거화되고 있는 신학자들에게도 그러했다. 그러나 그들은 물론 그의 인격성에서, 그의 데몬에서 도주할 수가 없었다.
   끝으로 하이데거의 사상과 참다운 관계를 갖는 데 대한 어려움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야 겠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칸트와 같은 고전 철학자들에게 통용되는 것, 즉 그들에 의해 다루어지고 있는 문제는 오직 오래 지속되는 노력에 근거해서만 비로소 열어밝혀진다는 이것은 하이데거에게도 그대로 탁월한 의미에서 적용된다. 그의 충실한 제자이며 친구인 쟝 보프레(Jean Beaufret)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고백하였다: 오랫 동안을 그는 이제 조금 더 노력하면 하이데거를 이해하게 되겠지 하는 희망 속에 살아 왔다. 그러나 이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항상 다시 예기치 않은 새로운 어떤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서부터 하이데거가 사유하고 있는 그 문제들이란 실제에 있어서는 보이지 않는 배후에 남아있는 그러한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텍스트만을 읽어서는 그 밑바탕에 놓여있는 문제제기를 파악하는 데 성공할 수 없다... 독자들에게 있어 주된 어려움은 처음부터 도대체 하이데거가 이야기하고 있는 그것의 이해를 위한 통로를 찾아야 한다는 거기에 있다. 그 까닭은 그가 전수된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전수된 언어는 청중 내지는 독자의 주목을 하이데거가 바로 그 주목을 거기에서부터 돌려놓으려는 바로 그 방향으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27)
   하이데거의 "사상"은 더이상 고전 "철학"처럼 가르칠 수 있는 명백한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그의 사상은 초기의 작품에서는 무엇보다도 방법론적인 숙고의 형태를 - {존재와 시간}도 이것에 다름 아니다 - 취하고 있다. 그런데 이 형태 자체가 이미 본래적인 인식함의 한 형태여야 한다. 나중에 그 사상은 근본적으로 스스로을 하나의 물음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물음은 더 "사실"에 맞갖은 물음을 준비하는 데에만 그 의의를 갖고 있다. 그래서 하이데거 사상과 가능한 한 관계를 맺을 수 있기 위한 결정적인 조건은 그 자신이 (넓은 의미의) 형이상학적인 물음에 의해 압박을 받고 있는가 아닌가이다. 그런데 그들의 전통이 - 그것이 고전 형이상학의 전통이든 또는 비판적 합리주의의 전통이든 또는 좌익 헤겔주의의 전통이든 교회의 구조의 전통이든 - 계속해서 그들에게 확고한 바탕을 의미하고 있는 그러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하이데거는 위험한 반동분자(퇴폐분자)이다. 그런가 하면 그들에게 있어 진리는 어쨌거나 아무런 의미가 없고 철학에서도 그저 새로운 것만을 찾아서 동분서주하며 장사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에게 하이데거는 매우 흥미있는 현상이겠지만 결국에 가서는 미친 사람일 것이다.28) 오직 - 전통의 내부나 밖에 서 있으면서 - 우리가 오늘날 처해있는 그 심각한 위기를 느낀 그러한 사람들만이 하이데거의 추구를 규정하고 있는 그 분위기를 함께 나눌 것이다. 오직 그들만이 함께 물음을 던질 수 있다.


* 이 글은 헤프너(Gerd Haeffner)의 글("R tsel Heidegger", in: Stimmen der Zeit 207 [1989], 651 - 666)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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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하이데거의 생애와 사상 [철학 강의]
하이데거의 생애와 사상

李基相(韓國外國語大學校/哲學)

1. 들어가는 말

1976년 5월 26일 마르틴 하이데거가 별세하자 독일 중부지방의 유력 일간지인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Frankfurt Allgemeine Zeitung) 은 이런 기사를 내보냈다: "이 사람 마르틴 하이데거 안에 세계 철학사의 모든 지혜가 집결되어 있으며... 그가 남겨놓고 간 어마 어마한 작품은 그의 독자들을, 지금까지 어느 다른 철학 문헌이 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깊이 물음의 심연에로 휘몰아 넣을 것이다". 파리의 세계적 일간지인 {르 몽드}(Le Monde)는 이미 하이데거의 생시에 더 높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 신문은 하이데거를 한 마디로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라고 천명했고, 이로써 그를 사르트르, 야스퍼스, 비트겐슈타인, 마르쿠제 등등의 유명한 철학자들 위에 군림시켰다.
그런가 하면 1987년 빅토르 파리아스의 책 {하이데거와 나치}가 프랑스에서 출간되어 하이데거가 철저한 나치추종자이었음을 주장하자, 프랑스 지성계에는 핵폭탄이 터진 것과 같은 회오리가 일어났다. 온 프랑스가 경악하여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듯 했고 어느 유력 일간지는 "하일 하이데거!"(Heil Heidegger!) 라는 제목아래 이 "사건"을 다룰 지경이었다.
왜? 하이데거의 무엇이 이토록 프랑스를 감탄과 경악의 상반된 감정 속으로 몰아넣었는가? 무엇이 그를 그토록 유명하게 만들었는가? 그리고 또 무엇이 그토록 프랑스 지성인들을 실망을 넘어 분노하게끔 만들었는가? 여기의 짧은 글에서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상세하게 다 다룰 수는 없다. 여기서는 우선 간략하게 하이데거의 삶의 여정을 살펴보고, 그의 대표작이며 20세기의 최고의 걸작품의 하나인 {존재와 시간}을 근간으로 삼아 그의 전기 사상의 대강을 윤곽지어 보기로 한다. 


2. 하이데거의 삶의 여정

마르틴 하이데거는 1889년 9월 26일 바덴(Baden)주, 주민 4천 가량의 작은 마을 메스키르히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요한나 하이데거는 농부집안의 출신이고, 그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하이데거는 메스키르히에 있는 바로크풍의 성 마르틴 성당의 성당지기이다. 봉급이 워낙 적어서 프리드리히 하이데거는 자주 술창고를 지키는 일을 해야만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었다.
여섯살이 되어 마르틴 하이데거는 초등학교에 들어간다. 그의 총명함을 본 마르틴의 부모는 그를 계속 공부시키고 싶어하지만 성당지기의 봉급으로는 도저히 무리임을 알고 안타까워 하였다. 고맙게도 메스키르히 본당 주임신부가 장학금을 주선하여 주어, 마르틴은 콘스탄츠에 있는 김나지움에 갈 수 있게 된다. 얼마 안 있어 마르틴은 프라이부르크에 있는 김나지움으로 옮긴다. 이렇게 재능이 있는 소년 하이데거가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되는 데에는 모종의 약속이 선행하고 있었다. 즉 교회는 하이데거에게 장학금을 보장해 주어 공부를 하게끔 해주는 대신, 하이데거는 김나지움을 졸업한 뒤 신부(神父)가 되기 위한 수업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이 그것이다. 하이데거 자신 신부가 되기를 원했다.
1903년에서 1909년까지 6년간의 김나지움과정을 마친 뒤, 하이데거는 약속대로 신부가 되기 위한 수업을 받기 위해 포알베르크(Voralberg)의 펠트키르히(Feldkirch)에 있는 예수회에 수련생으로 입회한다. 그러나 청년 하이데거는 단지 14일 동안만 예수회 수련생일 수 있었을 뿐이었다. 건강상의 이유로 하이데거는 예수회의 학자신부가 되는 꿈을 포기해야 했다. 그 후 그는 일반신부가 되기 위해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신학공부를 한다. 그러나 그것도 건강 때문에 용납되지 못한다. 2년간의 신학공부를 마치고 1911년 하이데거는 이제 오로지 철학에 전념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김나지움 시절에 이미 하이데거는 많은 철학책들을 즐겨 탐독하였다. 이를 안 주임신부 -- 후에 프라이부르크 교구의 주교가 된 -- 콘라드 그뢰버는 그에게 프란츠 브렌타노(Franz Brentano)의 박사학위논문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존재자의 다양한 의미에 대하여}를 선물로 준다. 결과를 놓고 볼 때, 이 책이 하이데거를 "존재를 둘러싼 거인들의 싸움터"에 초대한 셈이 되었다. 사상적으로 처음 영향을 준 사람은 폭넓은 철학지식을 겸비한 프라이부르크대학 교의학 교수인 브라이크(C. Braig)였다. 하이데거는 그의 강의와 저서({존재에 대하여} 1896, {사유에 대하여} 1896, {인식에 대하여} 1897)에 깊이 빠져 들었다. 그 다음 그는 리케르트(H. Rickert)의 신칸트주의와 후설의 {논리 연구}를 만나게 된다.
1913년 하이데거는 {심리학주의에 있어서 판단에 관한 학설}이라는 박사학위논문을 제출한다. 2년 뒤 리케르트의 지도아래 교수임용자격논문 {둔스 스코투스의 범주론과 의미론}을 완성한다. 이 논문에서 하이데거는 신칸트학파와 후설의 범주론의 도움을 받아, "일반 의미론"에 관한 중세 철학의 이념을 다시 복원시켜 보려고 시도한다.
1917년 하이데거는 프로이센 장군의 딸인 엘프리데 페트리와 결혼을 한다. 1919년 그는 사강사가 되면서 동시에, 1916년 괴팅겐에서 프라이부르크대학교로 초빙되어 온 후설의 연구조교가 된다. 하이데거는 후설이 행한 "초월론적 현상학"에로의 전환을 뒤따르지 않고 후설의 {논리 연구}의 여섯 번째 연구을 계속 거듭하여 근원적으로 해석하였다. 동시에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해석하는 데에도 현상학적 방법을 활용한다. 20년대에 들어서면서 하이데거는 그가 전수받은 가톨릭 신앙과 논쟁적인 대결을 벌린다.
1923년 겨울학기에 하이데거는 마르부르크 대학에 부교수로 초빙되어 간다. 그 당시 마르부르크 대학에서는 나토릅(P. Natorp)과 하르트만(N. Hartmann)이 강의를 주고 있었고, 곧 하이데거와 친구 사이가 된 불트만(R. Bultmann)도 있었다. 1927년 후설이 편집하고 있는 잡지 {철학 및 현상학 탐구 년보} 제 8 집의 별책부록으로 {존재와 시간} 제일부가 출간된다. 이 책으로 인하여 하이데거는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유명해진다. 사람들은 그 책에서 하나의 거대한 체계적인 연구작업이 성공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거기에서 무엇이 문제가 되고 있는지는 대체로 인식되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그 작품을 키에르케고르와 야스퍼스 노선의 실존철학의 하나라고 보았고, 어떤 사람은 칸트와 피히테 식 단초의 변형으로 보기도 했다. 그 저서가 "존경과 우정으로" 헌정된 당사자인 후설은 감탄과 혐오가 교차되는 기분으로 그 작품을 받아들였다. 어쨌든 후설은 하이데거가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자기 후임이 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27년 겨울에 하이데거는 마르부르크 대학의 정교수가 되지만 1928년 겨울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초빙을 받아들여 후설의 후임으로 오게 된다.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교수취임강연을 시작으로 조용한 학문연구의 시절이 열리게된다.
그러나 평온한 탐구와 교수의 일상생활은 하이데거가 1933년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의 총장으로 선출이 되어, 제삼 제국 총통의 원칙에 따라 대학교를 새로 조직하라는 임무가 부여될 때 깨지고 만다. {독일 대학의 자기주장}이라는 총장취임강연에서 하이데거는 "지식의 임무"를 "노동의 임무"와 "방어의 임무"와의 단일성에서부터 파악할 것을 호소한다. 그리고 오직 이 지식의 임무만이 한 민족의 역사적 현존재에 "날카로움"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밖의 공적인 강연에서 하이데거는 다소 국가사회주의적으로 들리는 입장들을 대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히틀러 나치당의 극단적인 국가주의나 민족주의를 지지하지는 않았다. "토착(대지에 굳건히 뿌리를 내린) 민족"을 외치고 독일인 고유의 특성과 노동자들의 핵심적인 역할에의 용기를 부르짖는 국가사회주의적 운동에서 아마도 하이데거는 그가 희망해온 새로운 시작을 추정한 듯 싶다. 여기에 또한 대다수의 많은 다른 대학교수들처럼 하이데거도 전문 정치 경제적 상황분석에 대한 시각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이 분명 또한 큰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어쨌거나 하이데거는 당정책에 대한 이견과 바덴주 문화성과의 불화로 취임 일년 뒤인 1934년 2월 총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난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하이데거는 거의 책을 출간하지 않는다. {존재와 시간}의 제이부도 (오늘날까지) 출간되지 않고 있다. 몇 개의 소책자만이 발간될 뿐이다. 그중 하나는 {플라톤의 진리에 대한 학설}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의 본질에 대하여}이다. 그 외에도 횔덜린의 시에 대한 해설을 발표하였다. 프랑스 연합점령군은 1945년 하이데거에게 강의를 금지시켰다. 프랑스에 있는 많은 학자들의 탄원으로 1951년 강의금지가 해제되긴 하지만, 하이데거는 한 학기 강의를 한 다음 은퇴한다. 그후에 하이데거는 몇 권의 책을 출간한다. 그중 몇몇은 30년대의 강의록들이고 몇몇은 논문과 강연집이다. 전후 하이데거는 가장 많이 인용되고 읽히는 철학자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후 새마르크스주의와 언어분석철학의 영향이 고조되자, 그의 영향력도 서서히 퇴색하기 시작한다. 1976년 5월 26일 하이데거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장례식은 그의 유언대로 그의 고향인 메스키르히에서, 그의 동향친구이며 제자인 벨테(B. Welte) 신부의 주관 하에 가톨릭 식으로 조촐하게 치루어진다. 타계하기 얼마 전부터 하이데거는 그 스스로가 구상한 80권 가량의 전집간행을 추진하여 발간하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45권 가량의 전집이 발행되었다.


3.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과 기초 존재론

그의 주저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누구나 자명하게 알고 있다고 여기고 있고, 철학자들도 너무나 자명해서 물음의 여지마저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바로 그 "존재"(있음)의 의미에 대해서 물음을 던진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지금까지의 전 서양 철학의 역사는 "지속적으로 눈앞에 현재"하고 있는 것만이 참된 의미의 존재로 지칭될 수 있다는 주장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이렇듯 (본래의) "존재의 의미"는 언제나 지속적 현재라는 이념의 지평 안에서 파악되어 왔다. 그런데 "현재"는 시간의 한 양태가 아닌가? 존재의 해석에 끼어든 이 시간은 도대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존재"와 "시간"의 관련은 무엇인가?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해결의 실마리를 하이데거는, 다양한 존재자와의 관계 속에서 이미 나름대로 "존재를 이해"하고 있으며,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 그 자신 철두철미 "시간적인" 존재인 인간 현존재 -- 현존재는 존재를 이해하며 존재하는 한에서의 인간을 지칭하는 하이데거의 독특한 표현이다 -- 에서 찾는다. 이렇게 존재의 의미를 묻는 존재물음에 존재를 이해하며 실존적으로 존재하는 인간 현존재가 문제를 푸는 열쇠로서 등장한다.
학문도 인간 현존재가 존재자와 맺는 관계맺음의 한 양상이다. 존재자에 대한 이론적 개념적 관계양상이 곧 학문인 것이다. 개개의 학문은 자기가 다루는 존재자 내지는 존재영역을 바르게 인식하여 그 존재자에 대한 정확한 이론적 개념적 정립에 이르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식의 학문적 관계맺음 이전에 이미 인간 현존재는 학문에서 다루고 있는 존재자와 이런 저런 관계를 가져왔다. 학문이전의 일상생활에서 인간은 이미 이렇게 존재자와 일정한 존재연관 속에 들어서 있으며, 그 안에서 그는 이미 항상 그가 관련을 맺고 있는 그 존재자를 이해하고 있다. 모든 학문은 결국 인간의 일상적 존재관련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존재이해"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모든 학문은 그 학문에서 다뤄지고 있는 존재자가 이미 드러나 있음(개방돼 있음), 이해돼 있음을 전제하며, 그렇게 이미 주어져 있는 존재자를(positum) 그 사실연관에 있어 개념적으로 규정 설명한다. 이렇게 주어져 있는 존재자를 다루는 학문이 곧 실증과학(positive Wissenschaft)이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개별과학일 수밖에 없다. 개별과학은 자기가 다루는 존재자의 존재양식, 존재내용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식을 제공하지 못한다. 이를 위해서는 학문이전의 그 존재자와의 왕래 양상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 현존재의 존재자와의 관련에서부터, 거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개념이전의 존재이해"에서부터 우리는 존재자의 존재양식과 존재내용을 탐구해내어야 한다.
존재자의 존재를 이론적 개념적으로 규정하려고 시도하는 모든 노력을 넓은 의미로 "존재론"이라 할 때, 이 존재론 자체를 근거제시, 정초하려는 노력은 "기초 존재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초 존재론에서는 따라서 존재론 자체의 가능근거를 구명하고 있다. 존재론이 인간 현존재의 존재이해에 그 가능근거를 갖고 있다면, 기초 존재론에서 제일 먼저 문제시해야 하는 것도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이 "개념이전의 존재이해"일 것이다. 이 존재이해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존재를 이해하고 있는 인간 현존재의 존재를 해명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하이데거는, 발간된  {존재와 시간} 제일부에서 현존재에 대한 현상학적 실존론적 분석을 전개한다.


4. 인간 현존재의 실존성

철학사를 통해 인간은 객관주의-주관주의, 실재론-관념론의 도식적 분류를 넘어서 항상 특수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인간의 존재는 다른 존재자와는 전적으로 구별되는 것으로 항상 강조돼 왔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인간을 생각할 때 "이성적 동물"(animal rationale)이라는 전통적인 정의를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다. 이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에 대한 정의인 "               "(초온 로곤 에콘)을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고, 이 라틴어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현대에 와서는 많은 철학자들이 그것을 "이성적 동물"로 보다는 차라리 "언어의 능력을 갖춘 존재"로 번역하고 싶어한다. 어쨌건 위의 정의에서 보여지고 있는 것은, 인간은 동물은 동물이되 "이성"을 갖춘 빼어난 특출난 동물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있음이나 동물의 있음이나 그 있음(존재)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것은 둘 다 유한한 피조물로서 존재할 따름이다. 있음에는 구별이 없고 오직 그 본질에만 구별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고 있는 것도 그 있음이 아니고 그 본질, 즉 "이성"인 것이다. 이 "이성"이 철학사를 통해 다양한 양상으로 강조돼 왔다. 영혼, 지성, 정신, 사고, 주체, 의지, 인격 등등은 이성에 대한 여러 다른 호칭이거나 측면일 뿐이다.
만약 이러한 "이성중심의 인간"을 강조한 철학사가 잘못된 존재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인간을 인간으로서 특징짓고 있는 것이 본질로서의 이성이 아니고 다른 존재자의 있음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해 왔던 바로 그 "있음"(존재)에 있다고 한다면...? 인간과 동물을 구별짓는 징표가 이성이 아니고 "있음"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인간에 대한 정의를 더 이상 "이성적 동물"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도대체 인간의 있음에 맞갖는 합당한 개념을 발견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오랜 철학사를 통해 오도된, 여러 선입견으로 물든 "인간"이라는 개념을 그 "있음"에서부터, 아니 도대체 "우리" 모두가 그 존재자인 그 존재자를 그 존재자에 맞갖게, 아무런 전제없이 구명하기 위해 하이데거는 "인간"이란 개념을 -- 그리고 이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된 주체, 의식, 자아, 인격, 정신, 의지 등등의 개념들까지 포함하여 -- 포기해버린다. 우리가 지금 그 존재의 본질을 구명하려고 하는 그 존재자를 "거기에 있는 존재자", 즉 "현존재"(Dasein)라 부르자는 것이 하이데거의 제안이다.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만의 독특한 존재방식을 "실존"이라고 칭한다. 오직 인간만이 "실존"하고 있을 뿐이다. 실존은 일차적으로 인간이라는 현존재가 "존재하고 있다는 그 사실" -- 이것을 "현사실"이라고 부른다 -- 을 지칭한다. 그런데 인간의 이러한 적나라한 존재의 현사실은 나무 한 그루, 돌덩이 하나, 개 한 마리가 저기에 그렇게 있는 그러한 사실과는 질적(존재론적)으로 다르다. 인간의 있음은 그냥 그렇게 놓여 있음이나 눈앞에 있음이 아니라, 그 있음(존재) 자체가 떠맡아야 할 과제로 부과되어 있는 그러한 있음이다. 인간은 그 존재함에 있어 바로 이 존재함이 문제가 되고 있는 그러한 존재자인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떠맡아서 자신의 존재를 형성해나가며 존재해야 한다. 인간은 그가 지금 현재 무엇인 바 그것이 아니고, 그가 되기로 결심하고 되려고 노력하는 바 그것이다. 이렇듯 인간의 존재는 "가능존재"로서 인간의 있음은 폐쇄된 완료형의 "있음"이 아니라, 언제나 가능성에로 개방되어 있은 "할 수 있음"이다. 그리고 인간 현존재에게 그 존재함에 있어 문제가 되고 있는 바로 그 존재는 각기 "나의" 존재이다. 이렇게 하이데거의 "실존"개념에는 "각자 자기의 존재를 떠맡아 나름대로 자신의 존재를 존재해야 한다"는 현사실성, 존재이행(存在履行), 각자성(各自性)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이처럼 "있음"의 기술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은, 실존을 실존 이외의 다른 존재자들을 기술하는 개념을 갖고 특징지으려고 한다면 필연적으로 무리가 따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범주에 대비 실존을 위한 범주를 도입한다. 이 실존범주와 연관지어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그것이 종래의 "본질 형이상학"의 테두리를 벗어나기에 종래의 학문의 자명성의 기준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하이데거는 실존으로 규정지은 인간 현존재의 근본구성틀을 "세계-내-존재"라 명명한다. 하이데거는 "세계 내 존재"를 하나의 단일적인 현상으로서 볼 것을 거듭 강조한다. 여기서 그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세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실존범주로서의 "세계"는 무엇을 뜻하는가? 둘째, 세계 내에 "누가" 존재하고 있는가? 실존을 "자신의 존재"로 규정했기에, 세계 내 존재에서 자신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셋째, 세계 내에서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가 문제시되어야 한다. 현존재가 어떻게 존재를 이행해 나가고 있는지가 분석돼야 한다.


5. 존재자의 이해와 세계

하이데거의 현존재분석의 결과만을 간추려 본다면, 우선 "세계"란 흔히 생각해 왔듯이 존재자의 총체(집합체)가 아니다. 인간 현존재의 삶이 전개되는 그-안(das Worin)으로서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 인간 없이는 세계도 없다는 말이다. 물론 인간이 없이도 "자연"은 존재할 것이다. 세계가 인간의 세계로서 의미를 갖춘 의미연관의 맥락이기에, 우리는 세계 안에서 대하는 모든 존재자를 "...하기 위한 것으로서" 이해하고 있다. 우리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만년필을 만년필로서" 지각하는 것은 우리가 세계 내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만년필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눈이 빠지게 관찰하는 것도, 열어 보고 망치로 깨 보아 그것이 무엇으로 되었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화학기구의 도움으로 그 재료가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것도, 그 만년필에 의미를 주는 세계를 도외시한다면 모두가 다 쓸데없는 노력에 불과하다. 만년필이 아니고 어떤 역사적인 유물일 경우, 우리는 인간과 관련된 존재자의 "세계성"을 더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만년필을 갖고 노트에 글을 쓰는 그 사용연관사태를 떠나서 만년필의 존재를 알아보려는 노력은 애당초 빗나간 시도이다.
인간이 세계 내에서 만나고 있는 존재자를 하이데거는 인간과 무관한 무차별한 "사물"로 보지 않고, 인간의 손길이 닿아 있는 "도구"로 본다. 인간 현존재를 세계 내 존재라고 명명하듯이 도구를 하이데거는 "세계내부 존재자"라고 부른다. 우리가 세계 내에서 만나고 있는 도구로서의 세계내부 존재자는 우리의 일상적인 관심에서 "...에 도움이 되는", "...을 위하여 적합한", "...에 해가 되는", "...에 중요한" 등등의 성격으로 나타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도구의 독특한 성질을 "지시"라고 지칭한다. 도구는 "...을 위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그 지시를 도구전체성에서부터 받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망치를 갖고 못을 박고, 못에다 시계를 걸고, 시계를 보고 시간에 맞추어 학교에 간다고 할 때, 망치는 못을 박음을 지시하고 못을 박음은 시계를 걸음을 지시하고 시계를 걸음은 시간에 맞추어 학교에 감을 지시한다. 이런 식으로 도구는 도구의 사용용도에 따라 어떤 다른 것을 지시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용용도의 전체 맥락을 하이데거는 사용사태의 전체성이라고 부른다.
도구는 항상 다른 것을 위하여 존재하므로 지시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된다. 도구의 사용사태가 완결되려면, 어떤 한 존재자가 있어, 그 존재자는 더이상 다른 것을 지시하지 않고 그 자신을 지시해야 할 것이다. 현존재가 바로 그러한 존재자이다. 현존재는 그 존재함에 있어 각기 자신의 존재가 문제가 되고 있는 그런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그때마다 각기 자기자신을 위하여 존재한다. 다시 말해 자기자신의 실존 때문에 존재하고 있다. 이렇듯 "위하여의 연관"(Umzu-Zusammenhang)은 현존재의 "그-때문에"(Worumwillen)에 근거하고 있다. 이렇게 세계내부의 존재자가 각기 그때마다 의미를 부여받고 있는 이해의 지평은 인간 현존재의 삶이 이루어지고 있는 삶의 그곳으로서의 "세계"인 것이다.


6. 현존재의 이해와 자기존재

이제 우리는 자기자신의 실존 때문에 존재하고 있는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의 "주체성"을 살펴보아야 한다. 인간의 주체성을 지칭하기 위해 전통적인 철학에서는 흔히 "자아"(Ego, Ich)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이 경우 사고, 행동, 감정의 주체로서 "자아"를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행동과 체험의 변화 속에서도 그 다양성이 동일한 축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그것을 곧 "나"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이 "나"라는 주체의 주어져 있음보다 더 확실한 것이 무엇이냐고 데카르트와 후설은 반문한다. 그런데 과연 우리 일상의 현존에서 이 "나"라는 것이 삶을 수행해 나가고 있는 주체인가? 오히려 일상의 인간 현존재는 바로 자기가 그 주체가 아닐 때에 가장 큰 소리로 "그래 그것은 바로 나였어"라고 외치고 있지 않는가?! 하이데거는 이것이 인간 현존재의 존재양상에 기인한다고 설명한다.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인간 현존재는 각기 그때마다 나름대로 이렇게 또는 저렇게 자기의 존재를 이행해야 한다. 인간 현존재는 이미 항상 어떤 방식으로 자기의 존재를 존재해야 할지 결정하고 있다. 일상적 인간 현존재는 "남"이 하듯이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남들"이 하듯이 삶을 즐기며 영위하고 있다. 남들이 보고 판단하듯이 우리는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고 예술품을 비판한다. 남들이 하듯이 화를 내고 남들처럼 때때로 대중들로부터 물러나 가족들과 함께 주말을 보낸다. 이렇게 우리의 일상생활에 독재자처럼 군림하여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규정하고 있는 것을 하이데거는 "그들"(세인, das Man)이라고 칭한다.
일상생활의 현존재 안에서 우리는 고집스레 자신을 관철하는 주체를 찾기가 힘들다. 그 "남들" 속에서 "자아"라는 것을, 즉 현존재의 자아로서의 지속성은 찾을 수가 없다. 여기서 드러나고 있는 것은 결국 자아의 지속성을 어떤 것이 계속해서 눈앞에 있듯이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현존재의 자립성(Selbst ndigkeit)을 우리는 함께 더불어 있음 (Mitsein)이라는 인간 현존재의 존재방식에서 찾아야 한다. 일상성 속의 "남들"하고의 더불어 있음 속에서 과연 현존재가 어떻게 자기존재를 존재해 나갈 수 있고 나가야 하는지는 하나의 또 다른 중요한 문제이다.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있은 위에 너와 나가 같이 더불어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의 있음이란 항상 이미 더불어 있음이라는 사실을 하이데거가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7. 존재이행: 이해, 처해있음, 말

이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인간 현존재가 "어떻게" 세계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이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인간 현존재는 자기자신과의 관계, 다른 현존재하고의 관계 그리고 세계 안에서 만나는 여타의 모든 다른 존재자하고의 관계 속에서, 그가 관계하고 있는 존재자를 이해하면서 존재한다. 존재를 이해하면서 존재하는 이 존재방식이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특징짓고 있다. 여기서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 현존재의 존재이행형태로서 존재자를 존재가능에로, 존재자를 존재에로 기획투사(entwerfen) 내지는 자유롭게 한다는 의미이다. 존재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따라서 그 존재자의 존재의미를 안다는 말이며, 그 말은 세계라는 의미총체성의 무엇-때문에(Worumwillen)에서부터 존재자를 의미부여한다는 말이다.
존재자를 존재가능에로 기획투사하는 "이해"는 그러나 이미 항상 어떤 한 기분이나 분위기에 의해 상황지어져 있다. 처해 있는 상황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기획투사란 있을 수가 없다. 인간은 자기의 존재를 존재가능으로 이행해 나가야 하지만, 여기서의 그의 존재는 그가 이미 항상 존재해온, 존재를 떠맡아 왔던 그 존재인 것이다. "왜", "어디서"라는 질문을 던지기 전에 이미 인간 현존재는 근거를 알 수 없는 무근거의 존재를 현사실적인 것으로 떠맡았다.
처한 상황 속에서 존재자를 이해하는 기획투사는 또한 동일근원적으로 대화 안에서, 존재자의 존재를 다른 현존재자와 함께 더불어 나눈다. 대화 안에서 인간 현존재는 이야기되고 있는 존재자의 존재를 다른 현존재와 함께 같이 나누면서 자기자신도 드러내고 있다. 언어란 이러한 대화와 더불은 사건이 밖으로 말해진 것이며, 발언이란 존재자의 존재에 대해서 더불어 나누는 보여줌(제시)의 한 양상으로서 대화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8. 인간 현존재의 시간성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의 존재를 가능으로, 존재가능으로 파악하고 있다. 가능이란 것은 현재 만나고 있는 존재자에서부터 항상 새롭게 얻어내어, 자기 고유의 존재가능으로 만들기 위해 미리 앞서 가보는 식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의 결정적인 점에서 이 가능이란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 즉 현존재의 최종의 피할 수 없는 가능은 죽음인 것이다. 그러기에 현존재는 자기의 존재가능과의 관계에서 항상 늘 -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가 아닌가의 차이가 있을 뿐 - 이미 "이러한 절대적인 현존재의 불가능이라는 가능"에 관계하고 있다. 현존재가 그것으로써 자기의 존재가능의 가능성을 붙잡고 있는 앞서가 있음(das Sich-vorweg-sein)은 "죽음을 향한 존재"안에 가장 근원적인 구체성을 내보이고 있다.
인간 현존재는 자기의 존재가능의 가능성들에 관계함으로써만 존재하고 있다. 이 존재가능의 건너뛸 수 없는 가능성은 죽음이다. 이 말은 곧, 현존재는 자기자신의 죽음과 관계를 맺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그러나 결코 다음의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즉 현존재는 항상 뚜렷한 의식 속에서 자기자신의 이러한 피할 수 없는 가능성을 결단의 맘으로 직시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이데거는 오히려 그 반대를 강조하고 있다. "현존재는 보통의 경우 대개는 우선 죽음에로 향한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피해서, 은닉하면서 존재한다." "일상적인 죽음을 향한 존재"는 하나의 끊임없는 죽음에서부터의 도피이다. 죽음을 향한 존재는 오직 불안 속에서만 근원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기에, 죽음에서부터의 도피는 "죽음에 대한 끊이지 않는 안심"의 성격을 띠고 있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불안의 용기가 피어오르게 놔두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이 "도피"가 거기에서부터 피하려고 하는 그 "무엇에서부터"를 보여주면, "도망치고 있는 현존재가 어떻게 자신의 죽음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드러내 보여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죽음에서부터의 끊임없는 도피 역시 그것과의 한 관계이다. 이러한 식의 특수한 죽음을 향한 존재양식에서부터 현존재 존재이행의 한 특수한 양태가 유출돼 나오고 있는데, 이것을 하이데거는 "비본래성"(Uneigentlichkeit)이라고 칭한다.
죽음이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개별인간으로 만들고 있듯이 "죽음에로 미리 앞서 가봄"(Vorlaufen zum Tode)으로써,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그 존재가능이 어느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각자의 고유한 존재가능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아무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그의 죽음을 죽어줄 수 없듯이, 아무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그의 삶을, 존재를 살아줄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이 바로 나 자신의 죽음이듯이, 나의 삶 역시 나 자신의 고유한 존재인 것이다. 나는 죽음에 미리 앞서 가 보기로 결단함으로써, 나의 존재가능을 뚜렷하게 대신될 수 없는 나 자신의 고유한 존재가능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현존재가 자기자신의 "고유한"(eigenes) 존재를 이행하는 양태를 하이데거는 "본래성"(Eigentlichkeit)이라 칭한다. 죽음에로 결단을 갖고 미리 앞서 가 보는 것이 실존의 본래성을 위한 전제이다.
인간 안에서 그 인간을 특징짓고 있는 것으로 무한한 어떤 것, 절대적인 어떤 것, 필연적인 어떤 것을 찾았던 전통의 형이상학과는 다르게, 하이데거는 유한한 존재, 죽음을 향해 존재하고 있는 존재자, 개별자로서 상황에 얽매여 우연에 의해 규정되고 있는 존재자로서의 인간 현존재를 부각시킨다. 죽음을 향한 존재, 죽음을 미리 앞서 가 보는 존재로서의 인간 현존재는 나면서부터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피할 수 없는 존재가능으로서 죽음을 안고 존재에 내던져져 있다. 그래서 인간은 이미 태어남과 동시에 이미 죽기에는 충분히 늙어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시간성을 이러한 유한성 - 끝이 날 수 있음 - 에서부터 이해할 것을 주장한다.
인간 현존재는 유한하게 존재하고 있다. 인간 현존재는 그렇게 존재하면서 시간을 살고 있고 시간을 시간화시키고 있다. 시간적인, 유한한 존재자인 인간 현존재가 존재자와의 존재관련 속에서 이해하고 있는 존재가, 시간이라는 지평에서부터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여기에 근거하고 있다. 존재의 의미를 시간적, 초시간적, 무시간적(영원)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 그 외에도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존재가 시간의 의미로 파악되었다는 것은 인간 현존재의 유한성, 시간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근원적으로 논의되었던 것은 인간에 대해서가 아니며 존재일반의 의미에 대한 것이었다. 인간의 유한한 실존이란 이 목적에 이르는 통과점으로서만 고찰되어야 했다. 여기에서 시간이 인간 현존재의 이해가 행해지는 지평으로 입증되고 있다. 시간을 존재일반의 이해를 위한 매개물로서 표현할 수 있는지, 더 나아가서, 그 문제와 함께 "유한성으로 과연 존재 자체에까지 이를 수 있는지"라는, 그에 잇다른 질문과 함께 {존재와 시간}의 제일부도 막을 내리고 있다.



9. 존재의 역운(歷運)

하이데거 사상의 전기로 대변되는 {존재와 시간}에서는 존재를 이해하는 인간 현존재의 존재이해라는 원초적 사건(현상)에서부터 출발하여 존재일반의 의미를 해명해보려고 시도하였다. 그런데 {존재와 시간}이 발표된 후 얼마 안 되어 하이데거의 "존재에 대한 탐구"에 모종의 방향전환이 일어난다. 이제 하이데거는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존재의 드러남(진리)의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 존재를 이해하는 인간 현존재의 실존분석에서부터 스스로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감추는 "존재의 스스로의 보냄의 역사"에로 시야를 돌린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존재의 역운"(Seinsgeschick)을 간략하게 윤곽짓기로 한다.

가) 존재의 역사
철학에는, 다시 말해 존재의 사유에는 과학에서 의미하는 진보란 없다. 철학에서의 "진보"란 존재의 말건네옴에 항상 더욱더 깊이 사유가 응답하는 것을 뜻한다. 철학의 "진보"란 존재를 넘어서 다른 존재에로 넘어가는 것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존재 안으로 파고들어가 존재를 그 깊이와 충일에 있어 파헤쳐 드러내 놓는 데에 있다. 철학은 진보를 모른다. 그러나 철학은 역사적이다.
겉보기에 모순으로 들리는 이 명제를 합당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역사"라는 개념과 관련지어 존재적 역사와 존재론적 역사를 구별하여야 한다. 존재적 역사는 통상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바 그것이다. 다시 말해 존재자에 있어서 일어나고 있는 계속된 진행이니, 여기서는 하나의 존재자가 다른 존재자에로 넘어간다. 이와 반대로 존재론적 역사는 존재의 역사를 뜻한다. 이 역사는 존재가 스스로를 함께 나누는 방식이다.
존재의 이러한 알림은 세기적으로(epochal) 일어난다. "세기적"이란 낱말은 "     "(에포케)가 갖고 있는 두 가지 의미에 맞추어 이해되어야 한다.      (에포케)는 첫째 역사에 있어서의 시대적인 단원을 뜻한다. 존재의 알림에는 여러 상이한 단원, 단계가 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러한 존재의 알림의 제일 시기는 형이상학이다. 이로써 하이데거는 이미 존재의 알림의 제이 시기가 어떠한 형태로든지간에 존재물음의 쇄신과 함께 벌써 -- 존재론의 해체와 함께 -- 형이상학의 극복과 함께 이미 시작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에포케)는 둘째로 -- 액센트를 단어의 마지막 음절에 둘 때 -- 보다 근원적으로 이해되어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감춤(sich zur ckhalten)을 의미한다. 존재는 자기자신을 알림에 있어 자신을 전면에 부각시키지 않고 뒤편에 감춘다. "존재는 존재로서 동시에 그의 본질에 있어서는 자신을 이미 뒤로 빼돌려 감추면서 자신을 우리에게 보낸다." "존재의 역사는 자신의 본질을 우리에게 빼돌려 감추면서 자신을 우리에게 보내는 그러한 존재의 역운(Geschick)이다."
그렇다면      (에포케)의 이러한 두 가지 의미는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가? 만일 존재가 아무런 에포케를 행사하지 않아 도대체 자신을 빼돌려 감추지 않는다면, 존재는 아마도 한번에 자신을 전부 알려올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도대체 첫째 의미의 에포케가 있기 위해서는 두째 의미의 에포케가 있어야 한다. 존재는 항상 언제나 자기자신의 작은 일부분만을 알려주며, 모든 시대적 세기는 이러한 존재의 알려진 부분에 의해 특징지어 진다. "자신을 형이상학의 해당 시기에서 감추는, 그때마다 물러서 있음의 멀리에서 자신 안에 머물러 있는 존재의 이러한 자신을 삼감이 존재의 에포케로서 나름대로 그때마다 존재의 역사의 한 세기를 규정한다." 사유는 이러한 존재의 알림을, 보냄을 뒤따라 사유해야 한다. 이러한 뒤따라 사유함은 "따름"을 말한다. 즉 존재의 알림을 따르거나 또는 다르게 표현해 존재의 상이한 말건네옴에 응답함을 말한다. 존재적 역사에서부터 존재론적 역사를 구별하여 강조하기 위해서 하이데거는 그것을 더이상 "역사적"이라고 칭하지 않고 "역운적"이라고 부른다.
사유는 존재의 다양한 역운에 응답해야 한다. "우리가 존재의 '역운'이라는 말을 할 경우 우리는, 존재가 스스로 우리에게 말을 건네오고 스스로를 비추며 이렇게 비추면서 시간의 유희의 공간을 마련하여 주어, 그안에서 존재자가 나타날 수 있도록 함을 의미한다. 존재의 역운에서 존재의 역사는 하나의 과정과 진행에 의해 특징지어질 수 있는 그러한 사건을 모델로 삼아 생각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역사의 본질이 존재의 역운에서부터, 역운으로서의 존재에서부터 자신을 빼돌려 감추면서 자신을 우리에게 보내는 그러한 존재에서부터 규정되고 있다."

나) 존재의 역사와 그 응답
헤겔은 철학의 역사가 철학적으로 체계적으로 정리 작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철학의 역사는 변증법적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헤겔은 이렇게 철학을 그의 변증법이라는 체계 안으로 강제로 쑤셔 넣었다. 이것은 역사를 체계로 강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로써 철학의 서술 역시 철학적 견해들을 나열하여 얘기하는 것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이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철학자들이 무엇이라고 말했는가이지, 사실이 어떠한지, 존재와는 어떤 것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관심밖의 일이 되어버린다. 하이데거의 요구주장에 의하면 우리는 항상 철학함에 있어서 체계적 관점과 역운적 관점이 뗄 수없이 상호침투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철학은 위대한 사상가로 하여금 말하도록 만드는 방식으로 위대한 사상가와 대화하는 속에서 성취될 수 있다. 위대한 사상가의 작품에는 모두 존재의 알림이 그 철학자가 선택한 언어적 표현 속에서 울려오고 있다. 우리는 위대한 사상가와의 대화에서, 그 사상가의 작품 속에 침잔되어 있는 존재의 알림이 다시 흘러나올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횔덜린은 "우리가 대화인 그 이래 / 우리는 신들에 대해서도 안다"고 노래했다. 인간은 인간이라는 바로 그 특징 때문에 대화 속에서 존재한다. 대화란 다른 것이 아니고, 존재의 언어가 그에게 도달하고 그가 이 언어에 응답함을 뜻한다. 인간은 현존재이기에 대화는 인간의 근본상황에 속한다. "우리는 - 인간은 - 하나의 대화이다. 인간의 존재는 언어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이 언어는 대화에서 비로소 본래적으로 성사된다."
"이제 날이 튼다. 나는 목마르게 기다려 이제 오는 것을 보았다 / 그리고 내가 본 것은 성스러움이 나의 말이라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횔덜린의 이 싯말을 이렇게 해석한다. "'이제'란 성스러움이 옴을 지칭한다. 오직 이 옴만이 역사가 중대한 근본결단에 처하게 되는 '때'가 무르익음을 알게 되는 그 '시간'을 알려준다." 성스러움의 도래만이 우리가 도전을 받고 있는 때를 깨달은 순간을 알려주어, 우리로 하여금 응답하는 데에 있어 합당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제는 시간이 무르익어 역사가 중대한 근본결단을 내릴 때가 되었다. 중대한 근본결단은 다른 결단이 아닌 존재를 대면한 결단이다. 이 근본결단에 그 외의 모든 것이 달려 있으며, 그것은 그 이후 존재자에게 닥칠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

다) 형이상학의 극복
"절대적 형이상학은 마르크스와 니체에 의한 전복도 포함하여 존재의 진리의 역사에 속한다." 절대적 형이상학은 헤겔에 와서 그 종착점에 도달했다. 형이상학은 여기서 자기자신을 앎으로써 자기자신에 대해 투명해지는 절대적 앎에서 자기자신을 의식하게 된다. 절대적 앎에서 절대자는 자기자신에로 온다. 그렇기 때문에 형이상학은 헤겔에서 자기자신에 온 셈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의 이러한 자기자신에로 옴은 아직 완성되지 못했다. 다시 말해 형이상학은 헤겔에 와서 단지 그 종착점에 도달했을 뿐이지 아직 극복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헤겔에서 형이상학은 변증법 속에 꽉 막혀버렸고, 헤겔은 이 변증법을 넘어서려는 발걸음을 한 걸음도 떼어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절대적 형이상학은 마르크스와 니체에게서 커다란 변혁을 체험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아직 헤겔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는 셈인데, 예컨대 마르크스는 변증법을 넘어서 나올 수 없었으며 오히려 그안에 사로잡힌 채 남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체계를 이제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이룩된 변혁이란 마르크스가 강조점을 정신적인 것에서부터 물질적인 것에로 옮겨 놓은 데에서 성립된다. 헤겔에 있어 물질은 정신의 타자이다. 다시 말해 물질이 정신에서부터 이해되고 있다. 이제 마르크스에게서는 정신이 물질에서부터 이해된다.
니체에게서는 또 하나의 다른 과정을 관찰할 수 있다. 그에게서는 동일성의 계기가 대두되는데, 이 계기는 마르크스의 변혁의 밑바닥에도 깔려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는 물질의 우월 아래에서의 정신과 물질의 동일성이 강조되고 있다. 니체에게서 이 동일성의 요소는 같은 것의 늘 다시 되돌아옴(동일자의 영원 회귀)으로서 전개되고 있다. 절대자는 상대적인 것 안으로 용해되어 들어가 상대적인 것과 동일시되었다.
헤겔에 와서 형이상학은 자기자신을 개념 파악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와 니체에게서 형이상학은 자기자신을 부조리(비이성)에로 이끌었다. 다시 말해 형이상학의 불가능성이 분명하게 되었다. 헤겔에게서 자신의 최고의 가능성 안에서 나타났던 형이상학이 마르크스와 니체에게서는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우리는 어떤 철학을 우리가 그것을 그 철학자가 이해한 것보다 더 근원적으로 이해할 때에만 극복할 수 있다. 외부에서부터의 퇴치는 형이상학을 극복하기 위한 합당한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철학자들이 사유한 그것을 보다 더 시원적으로 사유함으로써, 다시 말해 모든 시원 중의 시원인 존재 자체에로 되돌려 놓음으로써만 형이상학을 극복할 수 있다. 시원에로 소급해 올라가 사유하는 것이 형이상학 극복의 본질을 이룬다. 하이데거가 이행하려는 것은 형이상학의 제거가 아니라, 형이상학을 그것의 근원에서부터 소급하여 다시 잡는 것, 다시 말해 존재의 알림과 보냄을 소급하여 다시 잡는 것이다.

라) 존재에 가까이
하이데거는 {인문주의에 대한 서한}에서 이렇게 말한다. "존재는 스스로를 인간에게 탈자적 기획투사에서 밝힌다. 그렇지만 이 기획투사가 존재를 마련하는 것은 아니다. 그 외에도 기획투사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던져진 기획투사이다. 그리고 기획투사함에서 던지고 있는 자는 인간이 아니라 존재 자신이다. 존재 자신이 인간을 그의 본질인 현존재의 탈존(Ek-sistenz)으로 보낸다." 따라서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이 눈앞에 그 자리에 그냥 그렇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신의 본질에 맞갖게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가 자신을 인간에게 기획투사에서 보내오기 때문에, 인간이 존재의 기획투사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의 역운(존재의 자신을 보내옴의 총체), 존재의 던짐은 그것으로 존재가 존재하고 있는 바 바로 그 존재의 밝힘으로서 일어나고 있다. 이 밝힘이 존재에 가까이 있는 것을 유지시켜 준다. 인간은 이러한 존재의 가까이에 거주한다. 인간은 그가 오늘 벌써 이러한 거주를 나름대로 경험하고 떠맡지 못하면서도 탈존하고 있는 자로서 "거기"의 밝힘 속에서 거주하고 있다. 현존재의 "거기에"가 바로 그것인 바 존재의 가까이는 "고향"이라고 칭해지고 있다. 인간의 고향은 존재의 가까이다. 인간이 이렇듯 존재의 가까이에서 떨어져 나와 그 가까이를 찾아가지 못할 때, 그는 고향을 잃은 상태에서 방황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거주의 고향은 존재에 가까운 곳이다."
이제 이러한 존재의 가까이에서 도대체 결단이 내려진다면 신 내지는 신들이 자신을 거부하고 나타나지 않아 칠흑같은 어둠이 그대로 지속될 것인지 아닌지 하는 결단이 내려진다. 여기서 결단은 두 가지의 성격을 갖는다. 첫번째 성격은 존재 자신이 인간에 대해 결단을 내린다는 의미이다. 존재는 특정한 방식으로 인간에게 스스로를 알려준다. 역사의 시간은 존재의 결단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나 존재가 특정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알려주었다 해서 인간 자신의 고유한 결단이 배제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제 비로소 그로 인해 인간의 결단이 가능케되는 것이다. 신 내지는 신들이 자신을 거절하고 밖에 있어 밤이 계속될지는 인간의 결단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이 결단은 이미 존재의 결단 자체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것이 겨우 비로소 신성의 본질공간인 - 그리고 이 신성은 다시 겨우 신과 신들을 위한 차원을 보장할 뿐이다 - 바로 그 성스러움을, 그보다 앞서 오랜 준비 속에 존재 자신이 스스르를 밝히고 자신의 진리를 경험한 연후에야, 비로소 나타나게 할 것이다." 하이데거는 성스러움의 차원과 신적인 차원은 논의하지 않고 논의할 수 없는 것으로 놔두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그보다 앞서 오랜 기간의 준비와 노력을 거쳐 존재를 밝히고 존재의 진리를 경험해야 한다. 다른 말로 말해 하이데거는 그가 이제 존재의 밝힘의 바로 그 시작에 서있음을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이제 먼동이 터오기 시작한다. "이제 날이 밝는다!" "이렇게 존재에서부터만 고향상실을 극복할 수 있다. 고향을 잃어 인간만이 방황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도 길을 잃고 많이 헤매었던 것이다."


10. 하이데거 철학의 영향

하이데거 사상의 영향은 막대했고 아직도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의 제자 중에는 많은 낯익은 이름들이 있으니, 이를테면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칼 뢰비트, 허버트 마르쿠제 등이 그렇다. 프라이부르크 시절에 그의 밑에서 공부한 사람으로는 또 막스 뮐러, 베른하르트 벨테, 칼 라너, 요한 밥티스트 로츠 등이 있다. 하이데거는 후설의 현상학 테두리에 있는 사르트르, 메를로 퐁티, 오이겐 핑크 등에도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일본의 유명한 철학자들이 그의 밑에서 공부하려고 독일에 왔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오늘날에 와서 그의 영향의 흔적을 우리는 많은 프랑스 철학자에게서 찾을 수 있다. 쟝 보프레, 앙리 비로, 미셸 푸코, 쟈크 데리다 등은 직 간접으로 그의 영향을 받았다. 비판이론의 대변가인 유르겐 하버마스도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철학의 흐름과 분과와 연관해서 볼 경우 하이데거는 실존철학, 현상학, 해석학, 존재론, 철학적 인간학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이데거의 사상적 영향은 철학의 테두리를 벗어나 타 학문에도 뻗쳤다. 의학 및 심리분석에도 (루드비히 빈스방거)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가톨릭 및 개신교 신학에도 (칼 라너, 루돌프 불트만, 폴 틸리히)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자연과학에도 (칼 프리드리히 폰 바이체커)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하이데거 사상의 수용과 비판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의 하나로 매우 불안정한 토대 위에 놓여 있다. 그 까닭은 무엇보다도 하이데거가 언어로 표현하고자 하는 그것, 즉 존재로서의 존재가 본질적으로 어떠한 언어적인 고착도 벗어난다는 그 사실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데거 자신도 명제로 잡을 수 있는 구속력 있는 주장들을 내세우고 있지 않다. 단지 배움 자체를 가르치고자 할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면서 그 자신 다양한 주장들을 함축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러한 주장들은 충분히 논쟁거리가 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이데거의 수용을 대단히 어렵게 만드는 것 중 다음의 사실도 그 하나이다. 즉 그 자체 충분히 분명하고 논증적으로 기술될 수 있는 많은 것을 하이데거 자신이 너무나 거창한 낱말이나 또는 단순한 암시로써 불투명하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독자는 쉽게 하이데거의 핵심적인 사상에까지 접근해 들어가지 못하는 위험에 빠지고 만다. 이런 면에 있어 아마도 하이데거 자신이 하고 있는 말, 즉 나의 사상을 위한 시간이 아직 성숙되지 않았다는 말은 일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때에 그의 거창한 시도의 한계도 분명하게 밝혀져야 한다. 그 자신이 나중에 인정한 오류의 길들뿐 아니라 그의 사상의 단초에 기인하고 있는 한계들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자주 그의 철학에서는 사회적인 주제에 대한, 상호인격적 차원에 대한 논의가 배제되어 있다고 지적된다. 그로써 현대와 같은 복잡한 사회에서 인간이 행위하는 인간으로서 구체적인 실재의 역사 속에서 살아가면서 부대끼는 중요한 문제들인 사회정의, 인권 등등에 대한 물음들이 전부 떨려져 나오고 만다. 그러한 물음들에 대한 배제는 자신의 사유가 내재적 필연적으로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으로는 묵인되기 어렵다.
어쨌거나 하이데거는 서양철학을 공부하는 철학도로서 힘이 들어도 한번은 꼭 정복해야 할 봉우리로 우리 앞에 우뚝 솟아 있다.
하이데거 철학이 철학사에 기여한 철학사적 의미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이론에 대한 실천의 우위 또는 삶의 맥락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학문
이미 하버마스가 옳게도 지적하였듯이 하이데거의 현상학 내지 실존철학이 현대사회에 기여한 가장 큰 공로의 하나는 "과학에 의해 식민지화되어 가고 있는 생활세계의 위기"를 깨닫게 해준 점이다. 이론이 그 발생론적 기반을 생활세계의 실천에 두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유래를 망각하고 자신이 추상해서 만들어낸 일면적인 시각을 유일한 시각인 냥 주장하고 자신의 척도가 유일한 의미척도인 것처럼 행동해오며 과학지상주의를 퍼뜨렸는데, 이것이 현상학에 의해 제동이 걸린 셈이다. 
2) 주체적 인간에 대한 새로운 구명 -- 실존적 신체적 인간
근세철학이 가장 확실한 기반인 "사유하는 나"에서 출발하여 인간주체를 <사유>에서부터 규정하여 인간의 다른 차원을 간과하고 있음을 꿰뚫어 보고 인간의 주체성을 새롭게 규정해야 할 과제로 제시한 것은 분명 실존철학의 공로일 것이다.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나> 그리고 칸트의 <행위하는 나>도 인간의 신체적인 면이 배제된 지성적인 차원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을 간파하고 인간을 <관계맺는 나>로 보게끔 만든 것은 바로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적 통찰이다. 유한보다는 무한을, 시간보다는 영원을, 개별보다는 보편을, 육체보다는 영혼을 선호하며 그것만이 철학의 이상적인 주제라고 천명하며 추구해온 전통철학이 따지고 보니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자신의 처지에서 벗어나 보려고 한 실존적인 몸부림임을 꿰뚫어 보게 된 것이다. 가장 확실한 것이 <나는 죽는다>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보편화시켜 <인간은 죽는다>로 만들고 그 보편적인 죽음 너머에서 철학함의 주제를 긁어모으느라 노력한 것은 결국 가장 자명한 진리인 <나의 죽음> 앞에서의 도피이며, 나의 신체를 외면한 결과일 뿐이다. <나>는 육체에서 해방된 사유로서의 주체도 아니고 순수의식으로서의 초월론적(선험적) 자아도 아닌 육체를 가진 존재로서 지금 여기 살고 있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바로 이 <나>인 것이다. 나는 바로 나의 육체(신체)이다. 육체의 발견이 실존철학이 이룩해 놓은 공로의 하나이다.
3) 상황에 내던져진 인간
사유 내지는 순수의식으로서의 <나>는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역사나 문화에 예속됨이 없이 대상을 자기 앞에 마주 세워 놓으며 대상을 구성하며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지만, 이제 육체를 가진 인간은 더 이상 그러한 영원과 보편 속을 떠다닐 수 없게 된다. 실존적 인간은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 언제나 상황 속에 내던져져 있는 존재이다. 그는 그가 원해서 그러한 상황 속에 존재하게 된 것도 아니고 또 그는 그가 만나는 대상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지도 못한다. 인간은 <세계 속의 존재>이며 그는 우선은 그가 관여해 본 적이 없는 그 <세계>에로 선택의 여지없이 내던져져 그 세계에서 통용되는 삶의 논리와 문법을 배우며 그 세계의 일원으로 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 <세계 속의 존재>인 인간이 무기력하게 주어진 상황에 운명적으로 떼밀리어 자신의 일생을 살아나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위대함은 자신의 상황을 떠맡아 거기에서 자신의 최대의 존재가능성을 길어 내올 수 있다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4) 시간적 . 역사적 인간
육체를 가진 인간은 무엇보다도 육체의 제약 속에 살 수밖에 없는 존재다. 육체를 감옥으로 생각하고 육체를 벗어난 순수한 영(靈)의 상태를 이상적인 본래적인 상태로 꿈을 꿀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러한 꿈도 결국 인간이 본질상 육체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꿀 수 있는 것이다. 육체가 갖고 있는 최대의 제약은 죽음이다. 그래서 실존철학자들은 한결같이 죽음을 인간을 규정하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로 간주한다. 그래서 인간은 -- 방식이 다를 뿐이지 -- 언제나 항상 명시적으로건 묵시적으로건 죽음과 관계를 맺으며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존재방식을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명명한다. 인간은 철두철미 <죽음을 향한 존재>이기에 그의 이러한 본질적 차원이 인간이 행하고 이룩해 놓은 모든 것에 각인되어 있다. 인간은 <끝을 향한 존재>로서 유한한 존재이기에 인간만이 자신의 종말과 관계를 맺으며 그 종말을 어쩔 수 없는 나의 불가능성의 가능성 또는 가능성의 불가능성으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삶의 끝을 마감할 수 있다. 인간만이 죽을 수 있는 존재이다. 죽을 수 있는 존재인 인간은 자신의 죽음에로 미리 앞서 달려가 미래에로 자신의 가능성을 기획투사하여 그 가능성 아래에서 자신의 존재가능성을 기획하여 현재를 살아나간다. 그러한 존재가능성 아래에서 과거의 현사실적 존재해 왔음을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로 떠맡아서 새롭게 반복하여 재해석하며 과거를 다시 잡을 수 있게 된다. 이렇듯 인간의 있음은 단순한 눈앞에 있음이 아니라 <과거를 떠맡고 미래를 기획투사하며 그 가능성 아래에서 현재를 존재해나감>으로서의 <시간적으로 있음>이다. 이러한 시간적 있음이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사건 내지는 생기>이며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나의 존재적 생기가 곧 나의 <역사>인 것이다. 나의 역사는 내가 그 세계에서 태어나 그 세계의 역사를 떠맡아서 존재하고 있는 그 민족적 역사의 한 부분이다. 어쨌거나 인간의 역사성은 바로 인간이 시간적으로 존재함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인간은 자신의 역사적 상황을 떠맡아 결단을 내려 새로운 역사적 지평을 열어나가야 할 임무를 띠고 있다.
5) 본래적 인간 -- 비본래적 인간
플라톤이 이데아(Idea)의 세계와 독사(Doxa)의 세계를 구분하였듯이 철학의 역사와 더불어 본래성과 비본래성의 구별은 항상 있어 왔다. 그런데 실존철학에서 본래성과 비본래성을 나누는 구별의 준거점이 과거의 어느 것하고도 다르다. 그것은 곧 실존철학이 발생하게 된 시대적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상황하고 뗄 수 없는 연관이 있다. 이제 인간은 이론적으로 형식적으로 주체이고 자유롭고 평등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실제적으로 그리 되기를 요구주장하기에 이르렀고 사회적 제반 여건도 그것을 위해 성숙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의식의 성숙의 열매가 <실존>이라는 개념 속에 농축되어 들어온 것이다. 실존은 한마디로 인간의 있음이 단순한 사실적인 눈앞에 있음이 아니라 과제로 부과되어 있음이기에 그 존재적 독특함은 곧 <존재해야 함>이며 그것도 각자 자신의 존재를 떠맡아 각기 나름대로 <자신의 존재를 존재해야 함>이다. 그래서 오로지 인간에게만 그 있음(존재)이 완성된 존재로 주어지지 않았으며 인간은 존재하면서 바로 자신의 존재(있음)가 문제가 되고 있는 그러한 존재자인 것이다. 인간에게는 지금 그가 무엇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무엇으로 존재하기를 결단내리고 있는가 하는 그의 존재가능이 결정적이다. 인간은 그가 결단내린 그 존재가능에 따라서 지금의 자신의 존재를 존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존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사실적 존재를 자신의 존재로 떠맡아(현사실성) 자신의 죽음에로 앞서 달려가 보아 자신의 존재가능성 아래에서 하나의 가능성을 택해서(기획투사) 결단을 내려 자기가 되기로 마음먹은 그 존재가능을 지금 여기서(결단의 순간) 실현해 나가며 존재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실존의 본래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인간은 우선 대개 결단을 내리지 않고 남이 자신에게 전해주고 있는 존재가능을 인수받아 거기에 맞춰 살아나간다. 이렇게 자기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을 결단내려 결정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그들(세인)이> 지정해 주는 존재가능을 아무 저항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사는 존재양태를 비본래적 양태라고 이름한다. 인간은 우선 대개 이러한 <그들의 세계> 속에서 안온함과 포근함을 느끼며 <그들>의 삶의 논리와 문법을 따라가며 살 때 정상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인간의 실존은 이렇듯 <그들>의 세계(사회성)와 <나>의 실존적 세계 사이의 긴장 속에서 그 긴장과 더불어 존재함을 말한다. 사회세계를 떠난 실존세계가 있을 수 없고 실존세계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세계가 있을 수 없음을 보고 있는 것이다. 현대 인간의 과제는 이러한 긴장을 어떻게 잘 풀어나가는가 하는 거기에 있는 셈이다.
6) 세계를 형성하는 인간
인간은 고립된 생각하는 자아가 아니라 <세계 속의 존재>이다. 세계를 떠난 인간을 생각할 수가 없기에 외부세계의 실재성을 증명해야 하는 것을 철학의 과제라고 생각했던 발상 자체가 <철학의 스캔들>이다.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자연세계, 사물세계, 인간세계의 한가운데 던져진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자기가 던져져 있는 그 세계의 법칙과 삶의 문법을 배우며 세계존재로서 성장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세계존재로서 존재하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세계를 구축해 나간다. 이렇듯 인간의 인간됨에는 <세계형성>이 본질적으로 속한다. 인간은 <세계>가 열어 밝히고 있는 존재의 빛 안에서 존재자를 발견하며 그 존재자를 <어떤 것으로서> 대하게 되는 것이다. 선행적인 <세계이해>없이는 구체적인 도구나 사물에 대한 이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인간이 그 안으로 내던져지는 <세계의 지평>은 고정된 크기의 어떤 것이 아니다. 인간은 이해의 지평을 확장해 나가면서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의 지평>을 넓혀 나간다. 이렇게 인간의 본질에 <세계형성>이 속하기에 인간의 세계는 시대적으로 문화적으로 각기 다른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다. 각기 다른 세계에 각기 다른 삶의 논리와 문법이 통용되어 왔고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특정의 세계에서 통용되어 온 삶의 논리와 문법을 유일한 세계의 논리와 문법으로 주장하는 오류를 저질러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이 <세계현상>에 주목하게 한 실존철학과 현상학의 철학사적 공로라 할 수 있다.
7) 이해의 지평(삶의 문법)을 묻는 인간
현상학과 실존철학에서 구명하고 있는 <초월론적 자아>는 내용이 없는 형식적인 <생각하는 자아>가 아니라 <세계를 형성하고 이해하는 해석학적 주체>인 셈이다. 인간의 독특함을 관계맺음에서 보고 이러한 관계맺음에서 자신이 관계맺고 있는 그것을 어떤 형태로든지 언제나 항상 이해하고 있음에서 보고 있는 것이 해석학적 주체의 본질특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이러한 관계맺음과 이해의 구조를 파헤쳐 구명해 보는 것에서 철학의 과제를 보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해석학적 탐구의 성과 중의 하나는, 대상을 구성하고 세계를 형성하는 이른바 <초월론적 자아>가 시원을 자기 안에 갖고 있는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그 역시 <구성된> 존재라는 것을 통찰한 데 있다. 따라서 이 <초월론적 자아>는 내용 면에 있어 그가 놓여 있는 역사적인 조건과 해석학적 상황에 얽매여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기에 형식적으로 우리가 동서양을 막론하여 구별 없이 <초월론적 자아>를 이야기하긴 해도 내용적으로 동양의 <초월론적 자아>가 서양의 그것과 결코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듯 초월론적 자아에 대한 해석학적 탐구는 각기 다른 문화권에 각기 다른 세계가 있으며, 그로써 또한 각기 다른 이해의 지평이 열어 밝혀져 있고 각기 다른 삶의 논리가 전개되고 있음을 통찰하게 하였다. 따라서 현상학과 실존철학이 그것을 수용하고 있는 우리에게 주체적으로 부과하고 있는 과제의 하나는 바로 우리의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존재의 사건>, <진리의 사건>, <세계형성의 사건>에로 눈을 돌려 우리 자신의 <초월론적 자아>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고 우리의 세계이해의 지평을 열어 보이고 그 세계에서 통용되어 왔고 통용되고 있는 삶의 문법과 논리를 밝혀내는 과제일 것이다.
이상이 우리의 논의와 연관지어 본 중요한 철학사적 의미들이다. 물론 여기서 열거한 것 외에도 <이성 자체에 대한 비판>, <과학의 환원주의적 태도 비판>, <주객도식의 탈피와 상호주관성의 발견> 등이 하이데거의 현상학과 실존철학이 철학사에 기여한 공로임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 하이데거 철학 연구를 위한 추천도서 목록 *

1. 마르틴 하이데거,《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까치 1998.
2. ----, 《현상학의 근본문제들》, 이기상 옮김, 문예출판사 1994.
3. ----,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독한대역본, 이기상 옮김, 서광사 1995.
4. ----, 《기술과 전향》, 독한대역본, 이기상 옮김, 서광사 1993.
5. ----, 《세계상의 시대》, 독한대역본, 최상욱 옮김, 서광사 1995.
6. ----, 《니체와 니힐리즘》, 박찬국 옮김, 지성의 샘 1996.
7. ----, 《셸링》, 최상욱 옮김, 동문선 1996.
8. 이기상, 《하이데거의 실존과 언어》, 문예출판사 1991.
9. 이기상, 《하이데거의 존재와 현상》, 문예출판사 1992.
10. 이기상(편저), 《하이데거 철학에의 안내》, 서광사 1992.
11. 오토 페겔러, 《하이데거 사유의 길》, 이기상/이말숙 옮김, 문예출판사 1993.
12. 한스 페터 헴펠, 《하이데거와 禪》, 이기상/추기연 옮김, 민음사 1995.
13. F.-W. 폰 헤르만, 《하이데거의 예술철학》, 이기상/강태성 옮김, 문예출판사 1997.
14. G. 스타이너, 《하이데거》, 임규정 옮김, 지성의 샘 1996.
15. 마이클 겔븐, 《존재와 시간 입문서》, 김성룡 옮김, 시간과 공간사 1991.
16. 발터 비멜, 《하이데거》, 신상희 옮김, 한길로로로 1997.
17. 이기상/구연상, 《<존재와 시간> 용어해설》, 까치 1998.
18. 이수정/박찬국, 《하이데거. 그의 생애와 사상》, 서울대출판부 1999.
19. 이기상, 하이데거 사상강좌 1, 《존재의 바람, 사람의 길》, 철학과 현실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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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하이데거의 작품과 세계관 [하버마스] [철학 강의]

하 이 데 거
그의 작품과 세계관

유르겐 하버마스

         < 내   용 >
1. 하이데거의 정치적 행적에 대한 재논의의 필요성
2. {존재와 시간}에 은닉돼 있는 이데올로기
3. 하이데거의 "전향"과 총장직 인수
4. 나치에 대한 하이데거의 실망과 그의 대처
5. 2차 대전 직후의 하이데거의 태도
6. 하이데거 사상의 수용문제


I.
(하이데거의 정치적 행적에 대한 재논의의 필요성)

   하이데거의 작품에 대한 훌륭한 해설을 겸비한 참고문헌서에서 프란첸(W. Franzen)은 "하이데거와 국가사회주의(나치)"라는 단원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그동안에 독일에도 '하이데거의 경우(사건)'에 대한 일련의 사실적 기고들이 있었다.[...] 그러나 경직되지 않은 개방된 토의는 아직까지, 하이데거 학파의 '진영'에서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이것은 1976년의 이야기다.1) 이러한 상황은 이제 바뀌었다. 여러 다른 사실과 더불어 1983년 (다시 공개된 총장취임 강연과 함께) 발간된 하이데거의 해명이 새로운 토론을 야기시켰다.2) 이 소책자에서 하이데거는 1945년의 시각에서 1933/34년 당시의 자신의 정치적인 행동을 변론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역사학자 오트(Hugo Ott)3), 수십년동안 하이데거 가까이에 서 있었던 철학자 페겔러(Otto P ggeler)4), 그리고 또한 (1940년에  기록된) 뢰비트의, 1936년 로마에서의 하이데거와의 만남에 대한 보고가5) 새로운 사실을 세상에 공개하였다. 여기에다가 그동안 계속 발간된 하이데거의 저서의 전집간행이, 여전히 완전하게 공개된 것은 아니지만, 30년대와 40년대의 강의와 저술에 대한 보다 나은 통찰을 가능케 하였다.6) 그럼에도 스페인어에서부터의 번역이라는 에움길을 통해 (프랑스어 판을 참조하여) 이제 우리에게도 하이데거의 정치적인 전기가 파악가능해 질 수 있었던 것은 칠레에서 온 동료철학자의 힘겨운 노력의 결실이다. 한 외국인의 시각에 의한 이질화는 여기 독일에서 프란첸이 관찰한 경직화에 대한 적절한 대답일 것이다. 그로써 설명가능한 간격이, 그 자체가 말해야 하는 이 작품(파리아스의 {하이데거와 나치})을 현실적인 독일의 맥락에 연관시키려는 나의 시도를 변론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대의 독일의 독자들에게는 이에 앞서 하나의 숙고가 매우 중요하다. 마르틴 하이데거의 정치적 행동에 대한 해명(규명)은 도매금식의 경멸(비난)의 목적으로 사용될 수도 사용되어서도 안 된다. 시대사의 한 인물로서의 하이데거는 다른 누구나와 같이 역사학자의 판단 아래에 놓인다. 여기 이 책에서도 해당인물의 행위와 처신이 중립적인(거리를 둔) 평가에 가까운 고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인 독재의 조건 아래에서 어떻게 행동할 수 있을지를 모르는 우리 후대사람으로서는 나치 시대의 행위와 처신에 대해서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을 삼가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친구이며 동년배의 동료인 칼 야스퍼스는 다른 입장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45년 말경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의 "정치 정화 위원회"가 야스퍼스에게 전문가적인 평가를 의뢰하였을 때 그는 하이데거의 "사유방식"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였다: 하이데거의 사유방식은 "그 본질상 부자유스럽고 독재적이고 의사소통불능이다".7)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하이데거뿐 아니라 야스퍼스 자신에게도 비슷하게 통용이 될 것이다. 야스퍼스는 그러한 판단을 내림에 있어 - 우리는 이것을 그의 셸링에 대한 저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 한 철학적 학설의 진리내용은 철학자의 정신상태와 삶의 시기에 반영이 되어야 한다는 엄격한 준칙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인물과 작품의 단일성에 대한 이러한 엄격한 견해는 사상의 자율성에는, 더더구나 사상의 영향사에는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8) 그렇다고 해서 철학적인 작품과 그 작품의 전기적인 생성의 맥락과의 밀접한 관련을 거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한 저작자가 그의 생존시에 자신의 발언의 예기치(의도치) 못한 귀결에 대해 어쩼든 반응을 보일 수 있었기에, 그가 짊어져야 하는 그 책임의 막중함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작품은 이미 오래전에 그 인물에서부터 벗어났다. 그래서 옳게도 슈내델바하(Herbert Schn delbach)는 독일 철학에 대한 자신의 기술을 다음과 같은 지적과 더불어 시작하고 있다. 즉 "오늘날의 우리의 철학함은 그 당시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논리 철학 논고}(1921), 루카치(Georg Lukacs)의 {역사와 계급의식}(1923) 그리고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1927)에서 발산되고 있는 자극들에 의해 결정적으로 규정되고 있었다."9) {존재와 시간}과 더불어 하이데거는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사상가의 등급에 올라서게 되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게오르크 미쉬(Georg Misch)같은 사람도 즉시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철학자의 "긴 호흡"과 그 "사상가적 능력"을 알아보았다. 실제로 하이데거는 근원적인 방식으로 경쟁이 되고 있었던 딜타이의 해석학과 훗설의 현상학을 하나로 변형.융합시켜, 막스 셸러의 실용주의적인 동기들도 수용하여 주체(주관) 철학을 역사화시키며 극복할 수 있었다.10) 이러한 사상의 새로운 단초는 하이데거가 아리스토텔레스식 형이상학의 고전적인 물음제기를 키에르케고르식의 실존변증법의 정열적인 동기로 점령(장식)하는 것처럼 보이자 더욱더 충격적이었다. 지금에 와서 보아도 그러한 새로운 시작은 헤겔 이래 독일 철학에 가장 깊은 단원을 형성해 놓았다.
   {존재와 시간}에서 관철된 세계구성적 자아의 탈초월론화(Detranszendentalisierung)가 그 유례가 없었던 반면, 나중에 시작된 니체와 연결된 이성비판은 이미 그전부터 기대했어야 했던 관념론적인 대칭물을 형성하였다. 즉 여전히 헤겔에 붙잡혀 있으며, 마르크스와 베버를 생산적으로 연결시키고 있는 사물화시키는 이성 내지는 도구적 이성에 대한 유물론적인 비판의 관념론적인 대칭을 형성해 내었다. 여러 다른 것 중 근세 사상의 존재론적인 전제들을 밝혀낸 개별분석에 있어서의 풍부함에 대한 대가로 하이데거는, 전체적으로는 사유될 수 없는 형식화되어버린 형이상학의 역사의 차원에로 시야를 축소시켜 버리는 희생을 치루었다. 사회적 삶의 맥락을 간과하는 이러한 추상은 하이데거로 하여금, 왜곡적인 시대해석을 사회과학적으로 걸르지 않고 수용하도록 만들었다. 실제의 역사가 "역사성"의 배후로 사라져버리면 버릴수록 그만큼 더욱 쉽게 하이데거는 그 당시에 퍼져 있는 현재상황의 진단을 소박하고 경솔하게 사용하게 되었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탈초월론화시키는 그리고 형이상학비판적인 사유의 운동으로써 독일의 대학교에서 단절되지 않은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물론 그의 작품은 비판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위치는 30년대와 40년대에 걸쳐 논박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식의 학파를 형성하는 영향력은 후의 60년대에까지 지속된다. 그러한 영향력의 무게를 페겔러는 {하이데거. 그의 작품의 해석에 대한 관점들}이라는 논문모음집에 잘 기록하여 하이데거의 80회 생일 기념으로 출간한다.11) 오래 지속된 독일의 잠재기 동안에 하이데거 학파는 60년대 초까지 지배적인 위치를 유지하였다. 그 다음에 분석적 언어철학(비트겐슈타인, 카르납, 포퍼)과 서구적 마르크스주의(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블로흐)가 독일 대학에서 다시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은 단지 뒤늦은 관계의 정상화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다.
   몇 세대에 걸친 제자들을 통한 학계에서의 영향력보다 더 의미가 깊은 것은 하이데거의 작품이 자립적인 학자들에 불어넣은 영감이다. 이 학자들은 개별적인 동기들을 붙잡아 자기자신의 맥락 속에 체계적으로 결실이 풍부하게 만들어 나갔다. 이러한 방식으로 초기의 하이데거는 누구보다도 사르트르와 메를로 퐁티의 실존철학 내지는 현상학적 인간학에 깊이 영향을 미쳤다. 독일에서는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에 그와 같은 영향을 미쳤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생산적인 사상형성은 나의 세대에도 계속되었으니 예를 들어 칼 오토 아펠, 미카엘 토이니센, 에른스트 투겐트하트 등이 그들의 사상형성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12) 하이데거의 이성비판은 프랑스와 미국에서 더 강력한 반향을 받았다. 예컨대 쟈크 데리다, 리차드 로티, 후버트 드레이푸스 등이 그렇다.
   한 작가의 의심쩍은 정치적 행동은 분명 그의 작품에 어떤 그림자를 던진다. 그렇지만 하이데거의 작품, 특히나 {존재와 시간}은 우리의 현대에 워낙 뛰어난 위치(가치)를 점하고 있어, 이 작품의 실체가 하이데거의 파시스트적인 참여라는 정치적 평가에 의해 50년이상이나 지난 지금에 불신을 받을 수 있다는 추측이 오히려 상식을 벗어난다.
   그렇다면 역사학적으로 거리를 둔 학문연구를 제외하고 어떠한 관심이 오늘날, 그것도 여기 독일에서, 하이데거의 정치적 과거를 문제삼도록 요청하고 있는가?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 사실이 무엇보다도 두 가지 관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다고 본다. 하나는 1945년 이후의 하이데거 자신의 자신의 과거에 대한 태도가 독일의 역사를 6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깊숙히 각인한 정신적 자세의 전형적인 표본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식의 정신적 태도를 형성하는 힘은 (소위 역사학자들의 논쟁이 보여주고 있듯이) 더 나아가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13) 의미의 변화를 거부해온 고집스러운 거부의 실천에서 드러나는 증후를 읽을 수 있기 위해서14) 사람들은 하이데거가 그의 죽음의 순간까지 몰아내려고 하고 미화시키고 위조한 그것에 대해 알아야 한다. 다른 하나는 독일에서는 나치 정권에 대해 맹목적이게끔 만든 모든 종류의 전승에 대해 비판적인, 아니 불신의 자기소화가 필요하다. 이것은 특히나 자신의 수사학적인 표현수단 깊숙이까지 자기 시대의 세계관적인 충격을 흡수해버린 그런 철학에 해당이 될 것이다. 한 이론의 진리내용이 사람들이 그 이론의 외적인 것과 더불어 연상하게 되는 그것 때문에 불신되어서는 안 되듯이, 전통적으로 위세를 떨쳐 오던 객관적 정신의 복합적인 형태가 전부 전적으로 자연보호 아래 놓여, 그 속에 사실적 세계관적인 동기들이 혼융되어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서마저 보호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15) 이 나라에서 스탈린주의와 연관되어 언제나 항상 이미 옳다고 여겨져온 것은 파시즘과 관련해서도 용인되어야 할 것이다.
   만프레트 프랑크(Manfred Frank)는 최근에 오늘날 프랑스에서 확산되고 있는 하이데거식의 이성비판의 다양한 변형들과 연관지어 독일의, 다시 말해 젊은 보수파 배경의 세계관적 증후군의 정리작업에 대한 물음이 아직도 결코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새 프랑스의 이론들이 많은 우리의 학생들에 의해 마치 구원의 소식인듯 받아들여지고 있다.[...] 내 눈에는 여기에서 젊은 독일인들이 프랑스적.국제적인 것에로의 개방이라는 구실 아래 제삼 제국 이래 단절된 자신들의 비합리주의적 전통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이고 있는 듯이 보인다."16) 파리아스의 연구를 보충하는 몇몇의 소견과 함께 나는 내가 다른 곳에서17) 이미 한번 제기한 바 있는 물음을 다시 수용하고저 한다. 즉 하이데거의 철학과 하이데거의 시대사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 사이에 어떤 내적인 연관이 존립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 그것이다.


 II.
({존재와 시간}에 은닉돼 있는 이데올로기)

   오토 페겔러는 1963년 {하이데거의 사유의 길}을 하이데거 자신이 비준한, 저자 자신의 자기이해를 반영하는 방식으로 서술하였다. 그런데 바로 이 가장 충실한 작가가 그로부터 20년 후에 회의를 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 우연적으로 뿐만이 아니라 - 그의 사상의 특수한 전개로 인해 국가사회주의의 가까이에 빠졌으며 그 가까이에서부터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한 것은 아닌가?"19) 그 후부터 페겔러는 작품의 역사가 지금까지 보아온 것보다 훨씬 더 가깝게 삶의 역사에서의 위기와 합쳐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관점을 취한다.
   페겔러는 우선 하이데거가 1917년경 개인적으로 겪은 종교적 위기를, 하이데거가 정치적으로 간여하게 되는 1929년의 보편적인 위기의 분위기와 구별한다. 하이데거가 1919년 자기자신이 원해서 가톨릭 신학자를 위한 철학 연수에서 이탈해 나올 때 그는 이러한 결정을 다음과 같이 변론하고 있다: "인식이론적 통찰들이 [나로 하여금] 가톨릭주의의 체계들을 문제시하도록 만들었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사상과 형이상학이 - 물론 새로운 다른 의미로 알아들어 - 그런 것은 아니다."20) 그리고 나서 만일 우리가 그 다음에 이어지는 개혁파적인 루터와 키에르케고르에의 하이데거의 몰두와, 그와 더불어 마르부르크에서의 불트만과의 만남을 함께 고려한다면, 어떤 동기에서 그리고 어떤 시각에서 하이데거에게 역사적인 사상을 형이상학과 매개하려는 문제가 제기되었는지를 납득하게 될 것이다. 방법적인 무신론의 태도가 결코 벌써 본래적인 그리스도교적 경험의 지평을 폐쇄해 버리는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는 개인적인 실존의 한계경험에 의존하고 있는 {삶의 현상학}을 추적한다. 역사의 경험은 구체적 개별자가 자신의 그때마다의 상황에서 하는 자기확인에서부터 발원해 나온다. 이러한 역사의 경험은 1) 훗설의 현상학적 방법의 해석학적 변형해석에 가깝고, 2) 형이상학적인 존재물음을 시간 경험의 지평에서부터 해석할 것을 필요로 하고, 3) 초월론적 자아의 생산의 활동이 현사실적으로 세계 안에 처해 있는 현존재가 역사적으로 상황지어진 삶에서 벌리는 기획투사로 변형될 것을 강요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와 3)의 연결이, 왜 하이데거의 관심이 인간의 실존의 구성틀 전반에 향한 채 남아있었는지에 대해, 그리고 동시대의 실존철학적 시도(야스퍼스)에서부터 그의 실존론적 존재론을 명확하게 구별할 것을 요구하는지에 대해 설명을 해준다. {존재와 시간}에서 수행된 현존재의 분석론은 어쨌든 실존적으로 뿌리를 둔, "세계-내-존재" 일반에 대한 하나의 이론으로 남아 있다. 이것이 언제나 거듭 주목되고 있는, 하나의 근본적인 역사학적 현존재의 요청과, (역사학적 경험 일반의 조건으로서) 고집스럽게 끝까지 견지되고 있는, 역사학적 과정 자체로부터의 역사성의 추상 사이의 대칭을 설명하고 있다.
   {존재와 시간}의 획기적인 업적은 하이데거가 의식 철학의 단초를 극복할 수 있는 결정적 논증적인 발걸음을 띠어놓았다는 데에 있다.21) 이러한 업적이 어떤 개인적인 삶의 위기와 갖는 동기유발적인 배경에 의해 밝혀질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이러한 생성의 맥락으로 인해 침해받지는 않는다. 물론 여기의 이 핵심적인 작품에 이미 저자가 붙잡혀 있는 시대정신이 반영되고 있다. 대중문명에 대한 교양있는 시민계층의 비판이 특히나 "그들"(세인)에 대한 시대진단적인 분석의 색채를 띠고 표현되고 있다. "공공성의 독재"에 대한 엘리트적인 불만은 20년대 독일 지성인의 공통적인 특징이었으며 이것은 비슷한 방식으로 야스퍼스, 쿠르티우스(E.R. Curtius)와 그밖의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독일 김나지움의 은닉된 교과과정에 새겨진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  우익이건 좌익이건 구별하지 않고 - 전 세대를 각인하였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에는 학자들의 엘리트적 자만심, 정신숭배주의, 모국어의 우상화, 사회적인 것의 전적인 경멸, 프랑스나 미국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형성된 사회학적인 관점의 결여, 정신과학과 자연과학의 분극화 등등이 속한다. 이 모든 동기들이 반성되지 않은 채 하이데거에게 있어 다시 나타난다. 좀더 특수한 것으로는 하이데거가 이미 그 당시 "운명"과 "역운"과 같은 개념에 불어넣은 기이한 함축적 의미들이다. 영웅적인 허무주의의 열정이 하이데거를 보수 혁명적 정신계의 사람들과, 슈펭글러와, 융거 형제와, 칼 슈미트와, 그리고 행동권과 결속시켰다. 한 철학자로서의 하이데거의 자기이해와 그의 본질적 철학 사상에 파고든 이러한 세계관적인 동기의 침투를 페겔러는 옳게도 처음으로 1929년에 확인하고 있다. 그때는 세계경제가 위기에 빠져 있는 시기이며 무엇보다도 바이마르 공화국이 몰락해가는 시기였다.
   만일 우리가 링거(F.K. Ringer)의 의미로 독일 지성인의 이데올로기를 이해한다면22), 우리는 독일 교수 하이데거의 지성인의 의식과 {존재와 시간}의 논증이 넘어서지 못한 한계 사이의 연관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식사회학적인 연구도 철학적 비판이 이미 보여준 것 이상을 보여주지는 못할 것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무변형의 근본구성틀을 장악함으로써 애초부터 역사성에서 실재의 역사에로 파고들 수 있는 길을 잘못 놓아 버린 셈이다.23) 그리고 나서 하이데거는 "더불어 있음"이라는 순전히 도출된 지위로써 사회화와 상호주관성의 차원을 놓쳐버렸다.24) 거기에다가 하이데거는 진리를 비은폐성이라고 해석함으로써 요청으로서 모든 순전히 지엽적인 기준척도들을 초월하는 타당성의 요청이 갖는 무조건성의 계기를 무시해버렸다.25) 마지막으로 그의 방법적인 유아론이 하이데거로 하여금 규범적 타당성의 요청과 윤리적 책임의 의미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하였다.26)이미 이러한 비판에서, 왜 "{존재와 시간}의 철학이 하이데거 자신에게는 물론 일련의 그의 가까이에 서있는 동료들과 제자들에게도 의심의 여지없이 파시슴을 반대하는 비판적인 잠재력을 마련해주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는지가" 두드러지고 있다.27) 그래서 프란첸은 다음과 같은 판단에 이르게 된다: "하이데거가 1933/34년 말하고 기술한 것 중 많은 것이 {존재와 시간}에 실려 있는 것에서부터, 비록 필연적으로 귀결되어 나올 수는 없다 해도 적어도 무리없이 귀결되어 나올 수는 있다."28)
   이러한 부정적인 설명이 덮지 못하고 있는 틈을 나는 다음과 같은 논제로써 메꾸고 싶다. 즉 1929년경 이래 이론의 세계관화가 시작되었다고. 그 이후 명확하지 않은 젊은 보수적 시대진단의 동기들이 철학의 심장에까지 밀어닥친다. 하이데거는 이제야 비로소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우익진영에 유명한 대변자들을 가졌으며 근원적(독창적)인 정신까지도 사로잡았던 반민주주의적인 사상에 자신을 개방하게 된다.29) {존재와 시간}에 내재적으로 있는 것으로 입증될 수 있는 그 결함들을 하이데거는 결함으로서 지각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하이데거는 그의 주위에 퍼져 있는 반서구적인 감정들을 함께 나누고 있었으며 계몽의 획일적인 보편주의에 대해 형이상학적인 사상을 더 근원적인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구체적 역사는 그에게 있어 순전히 존재적 사건으로, 사회적 삶의 연관은 비본래적인 것의 차원으로, 명제의 진리는 도출된 현상으로, 그리고 도덕성은 단지 사물화된 가치의 다른 표현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러한 선입견(편견)에서부터 {존재와 시간}의 혁신적인 단초의 수행에서 보이는 맹목적인 오점들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존재와 시간} 이후에야 비로소 독일 전통의 반문명적인 저류가(아도르노) 여기의 이 단초 자체를 도려내게 될 것이다.


III.
(하이데거의 "전향"과 총장직 인수)

   페겔러는 옳게도 1929년의 전기적인 전환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 시기에 세 가지가 함께 만나고 있는 셈이다. 첫째, 그 당시 횔더린과 니체가 다음의 수십년을 지배해야 할 저자로서 시야에 들어온다. 그로써 바로 저 신이교도적인 전환(neuheidnische Wende)의 길을 열게 된다. 이 전환은 그리스도교적인 동기들을, 원초적인 것에로 신화화시키는 소급 때문에 뒤켠으로 내몰게 된다. 하이데거는 그의 삶의 마지막에 가서 또 한번 자신의 희망을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어떤 한" 신에 걸어 본다. 페겔러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한다: "니체에서 히틀러에로의 길은 없었는가? 1929년 이래 하이데거는 니체와 더불어 위대한 창조자의 창조력으로써 비극적인 세계의 경험을 되찾아내고 그래서 역사적인 위대함을 되찾아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로써 이들 독일인에게서 그리스 사상의 시원을 되찾아와서 신화에 의해  변형 설립된 지평을  변화시켜  되찾아오려고 하지 않았는가?"31)
   둘째, 철학자의 자기이해가 바뀌었다. 다보저에서의 카시러와의 만남에서 하이데거는 괴테와 독일 관념론의 세계에 쌀쌀한 거절을 표현했다. 그것은 1929년 3월의 일이었다. 몇달 후, 7월의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의 교수취임 강연이 있은 후, 하이데거는 그의 스승인 후설과 단절하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하이데거는 그가 10년 전에 마지막으로 다룬 바 있던 그 주제를 다시 잡는다. 그는 "대학의 본질과 학술 연구"라는 강의를 개설한다. 그 당시 그는 이후로 다른 의미로, 전문적인 의미가 아닌 의미로 철학하기 위해 - 절박하다고 느껴지는 시대의 문제들을 직접 대면하기 위해 - 아카데믹한 철학과의 단절을 의식적으로 수행했던 듯이 보였다. 대학은 그에게 - 1933년의 총장취임 강연에서 잘 드러나고 있듯이 - 관습적이 아닌 방식으로 이끌어들여야 하는 쇄신을 위해 선호된 제도적인 장소로 제시되고 있다.
   셋째, 하이데거는 강단에서 젊은 보수파적 성분의 현대의 진단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한다.32) 1929/30년 겨울학기의 강의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에서 그는 슈펭글러, 클라게스, 레오폴트 치글러 등과 같은 저자들과 관련을 맺으면서 시민적인 빈곤의 경멸적인 정상성을 거슬러 대담한 현존재의 영웅주의를 맹세한다. "우리의 현존재에게는 비밀이 결여되어 있다. 그래서 모든 비밀을 자체 안에 지니고 있으며 현존재에게 그의 위대함을 부여해 줄 내적인 놀라움이 배제되어 있다."33) 그 다음의 몇년 동안 하이데거는 에른스트 융거의 저술들을, {전쟁과 전사}(1930)와 {노동자}(1932)를 연구한다.
   {존재와 시간}에서 나타나는 철학의 세계관화의 과정은, 단지 하이데거로 하여금 니체의 형이상학비판에 대해 감수성이 예민하도록 만든 위기의식에서부터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위기의식은 학술적인 쇠사슬에서 해방된 철학과 그의 자리인 대학에 최고의 위기에 구원자의 역할을 암시하고 집어들은 문명비판에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이외에도 밀어닥치는 세계관적인 동기들이, 미완성으로 머물고 만 작품 {존재와 시간} 자체에서부터 귀결되어 나온 문제의 상황과 함께 만나게 된다.
   실존론적 존재론은 초월론적인 단초로부터 멀리 추적되어, 그 존재론에 의해 밝혀진 구조들은 현존재 일반에 서술될 수 있을 정도이며, 따라서 그 구조들 자체가 일종의 초역사적인 특징까지를 견지하고 있을 정도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적 근본개념들을 근본적으로 시간화시켜야 한다는 요청을 해결하지 못했다.34) 1930/31년의 두 논문이 - 이 논문들은 나중에야 손질이 된 형태로 발간된다 - 이러한 요청을 해결하려고 시도한다.
   {진리의 본질에 관하여}와 {진리에 대한 플라톤의 학설}의 두 강연에서는 실존범주들이 현존재의 근본구성틀에서 풀려나와, 아주 먼데서 오는 과정의 결과로 변형된다. 그것들은 관념론적으로 찬미된 역사로부터 대두되며, 이 역사는 형이상학적인 근본개념들의 변화라는 수단을 통해 실재의 역사의 배후 또는 위에서 진행되고 있음에 틀림없다. 탈은폐와 은폐의 변증법은 이제 더이상 무변형의 존재의 가능성의 상호맞물림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이때 존재의 가능성은 개별인간에게 본래적 존재의 관점을 어쨌거나 연 채로 견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 그 변증법은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사유와 더불어 시작되어 세기적으로 "인류"에게 일어나고 있는 몰락의 역사로 생각되고 있다. 그로써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분석론이 거기에서부터 자신에게 자신의 본래의 생성의 조건을 확실히 할 수 있는 차원을 획득하게 된다. 이론은 루카치식의 헤겔.마르크스주의에서와 비슷한 방식으로 반성적이 된다. 물론 사회이론이 사회과학적인 탐구에 의해 접근가능한 구체적인 사회적 맥락에서 스스로를 파악하고 있는 반면, 실존론적 존재론의 사상은 숭고한 선행적인, 모든 경험적인 (궁극적으로는 논증적인) 파악까지도 벗어나 있는 근원의 영역에로 초월해 가고 있다는 본질적인 차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영역에서는 오직 철학만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기에 철학은 하등의 거리낌없이 과학적으로 검토되지 않은 시대진단과도 혼탁한 연관을 맺을 수 있다. 모든 역사에 앞서 놓여 있는 형이상학의 전개를 현대와 연관지어 시도하는 하이데거의 재구성은 다시 말해 언제나 항상 거듭 서약되고 있는 역사적 순간의 위기의식에서부터 조종될 수 있다. 즉 30년대 초반의 독일 상황에 대한 보수적.혁명적 해석에서부터 조종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오늘날 1930/31년의 두 텍스트와 더불어 실존론적 존재론에서부터 "존재역사적"인 사유에로의 전환이 이행되었다는 하이데거 자신의 회상적인 자기해석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적으로 맞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단지 몇몇의 단계를 거쳐 드디어 1946년의 {인문주의에 대한 서한}에 이르게 되는 바로 그 길만이 제안되고 있기 때문이다. 경청과 존재해방에 대한 열정, 인간을 존재의 목동이라고 보는 정적주의적인 이해, 언어를 "존재의 집"으로 풀이하는 논제, 그집 안에서 거주하며 인간은 실존하고 있고 인간은 존재의 진리를 보호함으로써 그 존재의 진리에 속한다.35) - 이 모든 것은 철학적 사유가, 1930년과 1945년 사이에 적응의 태세가 되어 있는 철학자에게 그의 전환을 명령한 바로 그 "세계의 역운"에 자신을 내맡긴 나중에 생긴 결과이다.
   30년대의 초반에는 "존재의 역사"라는 낱말만이 없을 뿐 아니라 그러한 개념조차도 없었다. 그 당시 철학적 구상에서 변화된 것은 결코 결단성과 기획투사와 같은 활동주의적인 상정이 아니다. 변화된 것은 단지 책임감을 갖고 떠맡은 자기자신의 삶의 역사라는 본래성의 척도에로의 방향잡음 뿐이다. 제거된 것은 실존철학의 개인주의적인 유산 속에서도 어쨌거나 간직되어 왔던 {존재와 시간}의 그 비판적인 계기이다. 그 당시 진리개념은 역사적인 도전이 집단적인 운명에 의해 흡사 인도되고 있는 것처럼 변형되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은 "역사적인 인류"이지 더이상 탈존하는 개별자가 아니다. 개별자로서의 우리가 아니라 대문자로 적은 우리가, 우리자신이 "독촉의 위기"와 "비밀의 성(盛)함"에 내맡겨져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때 결코 우리는 결단의 기회를 빼앗기고 있는 게 아니다. "오류가 인간을 철저하게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오류는 현혹시키면서 동시에 인간이 탈존에서 집어올릴 수 있는 가능성을, 인간이 오류 자체를 경험하고 현-존재의 비밀을 간과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를 현혹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함께 마련해주고 있다."36)
   1929년 이후 하이데거는 "전향"(Kehre)을 이행했는데 우선은 오직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이다. 하이데거가 1) 현존재의 분석론을, 몰락의 역사식으로 해석한 형이상학적 사유의 운동에 반성적으로 소급연관시킨다는 의미와, 2) 이러한 현대와 연관된 재구성 위로 과학적으로 걸러지지 않은 위기진단의 세계관적인 동기들이 흘러들어오게 내버려두었다는 의미와, 3) 진리와 비진리의 변증법을 자기자신의 고유한 현존재에 대한 개인적인 염려에서부터 풀려나와 단호히 그때마다의 공통적인 역사적 운명에 대처하기를 도전적으로 요청하는 사건으로 해석한다는 의미가 그것이다.37) 이로써 {존재와 시간}에서 실존론적으로 대충 윤곽지었던 자기성찰과 자기주장을 민족적.혁명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된 셈이다. 이렇게 이미 1933년 이전에 국가사회민주노동당(NSDAP)에 입당하기로 결정을 내린 하이데거는 "정권장악"을 자신의 현존재분석이 보지하고 있는 근본개념으로 정당화시킬 수 있었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된다. 즉 독일 운명에 대한 국가주의적인 특징을 부여, 집단주의적으로 변형해석된 "현존재"의 범주를 독일 민족의 현존재로 장식하고, 위기에 몸을 던져 새로운 것을 설립하게 될 - 그저 추종자들이 자신들을 내맡겨 훈육되기만 한다면 - "독일 운명의 지도자와 보호자"라는 매개적 역할의 인물들을 도입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이제 지도자는 진리를 작품 속으로 정립시키는 위대한 창조자들인 것이다.38) 그러나 지도자-추종자 관계는, "전체 민족이 자신들의 고유한 현존재를 원하는지, 아니면 그것을 원하지 않는지"에 대해,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형식적인 결단만을 구체화시킬 뿐이다. 지도자와 "우리 독일 현존재의 전적인 뿌리채의 전복"에 대한 하이데거의 선동은 - 물론 외설적으로 채색되어서이지만 - {존재와 시간}식의 개념의 의미론에서 다시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하이데거가 1933년 11월 11일 라이프치히에서  "독일 과학의 선거공표"에 대해 행한 강연이 그것이다. "자기책임의 무조건적인 요청에 대한 일사분란한 추종에서부터 서로서로 상대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그로써 또한 이미 하나의 공동체를 수긍하는 가능성이 비로소 자라나온다.[...] 이 무슨 사건이란 말인가? 민족은 자신의 현존재의 의지의 진리를 되찾아 얻게 된다. 왜냐하면 진리란 한 민족을 그의 행위와 앎에 있어 자신을 가지게 하고 밝게 하고 강하게 하는 바 그것의 개방성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진리에서부터 참된 앎의 의지가 발원해 나온다.[...]"39)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총장직의 인수와 총장취임 강연이 강요없이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그것은 또한 필연적으로 "바탕없고 힘없는 사유에 봉사할 수 있는" 학술적 철학으로부터의 하이데거의 결별에서부터, 전적으로 지성인의 전통에 서 있는 독일 대학에 대한 엘리트적 이해에서부터, 부끄럼없이 정신을 물신화 시켜버리고 자기자신의 철학함의 역할을 그저 오직 종말론적인 세계역운의 맥락에서만 보기를 허용하는 그러한 선교자적 자기판단을 물신화시켜버림에서부터 귀결되어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이데거가 지도자(총통)를 지도해 보려는 생각을 시사한 그점은 특히 독일 교수 특유의 황당무계함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들에 대해서는 오늘날 하등의 논쟁의 여지도 남아 있지 않다.


IV.
(나치에 대한 하이데거의 실망과 그의 대처)

  나치 통치 기간 동안의 하이데거의 철학적 발전을 특징짓고 있는 강의록들과 저서들이 아직까지 완전히 출간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의 저서 {니체} 두 권을 주의깊게 읽으면 하이데거가 자신의 애초의 정치적인 선택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결코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볼 수는 있다. 프란첸(1975/76)과 페겔러(1983/85/88)의 글들은 "하이데거 자신 30년대에는, 그가 추구해왔던 존재의 진리에 대한 결단을 정치적인 맥락에다 설정했다"는 느낌을 확증하고 있다.40) 그를 "국가사회주의의 가까이에" 빠지게 한 그의 사상의 방향은, 그가 "한번 다시 정말 그 가까이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방해하였다.41) 1935년과 1945년 사이의 그의 철학적 사유의 움직임은, 독특한 꿰뚫어 볼 수 없는 실망의 새김의 과정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 과정은 1930/31년의 텍스트들이 시작한 "전향"을 계속 이어나갔다. 이때 우리는 세 가지 관점을 구별해야 한다. 1) 이성비판의 형이상학역사적 전개, 2)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는 변하지 않은, 독일인을 "민족들의 심장"으로 보는 민족주의적인 평가, 3)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입장 등이 그것이다. 오직 이 세번째 관점 아래에서만, 존재역사의 구상이 비로소 처음으로 그 결정적인 형태를 획득하게 되는 그 결실이 풍부한 재배치(성향의 변경)가 귀결되어 나온다.
   1) 더욱더 심도를 더해가는 니체 - 니체는 공식적인 나치 철학의 권위있는 중심인물이다 - 와의 논쟁적 대결에 자극받아 하이데거는 이미 일찌기 주목하였던 "형이상학의 해체"를 잘 알려진 자신의 시대비판의 동기들과 완전히 혼융시켜 버릴 수 있는 관점들을 정리해 만들어 낸다. 존재를 망각한, 이론적으로 대상화시키는 플라톤의 사상은 (몇개의 단계를 거쳐) 근세에 와서 주체성의 사상으로 굳어져 버렸다. 이러한 "표상적" 사유에 대한 상세한 해명 분석은 이제 세계해석을 겨냥하게 된다. 그 세계해석의 지평에서부터 근대의 규정하는 정신적 위력이, 자연과학과 기술이, 발생되어 나오고 있다. 이러한 존재론적인 고찰방식에서 "기술"은, 항상 거듭 비판해왔던 실증주의 과학, 기술적인 발전, 산업적인 노동, 관료화된 국가, 기계화된 전쟁운영, 문화산업, 공공성의 독재 등등, 한마디로 도시화된 대중문명의 현상에서 스스로를 실천적으로 타당성있는 것으로 만드는 의지에의 의지의 표현이다. 이러한 대중시대의 판형에 금세 전체주의적 정치의 특징들이 (나치의 종족정책을 포함하여) 삽입된다. 그의 반유태주의 - 이에 대해서는 전후의 시기에도 증인들이 있다 - 는 흔한(통상적인) 문화적 타격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것이 어떠했건 간에 1935년 이래 하이데거는 정치적.사회적 실천을 성급하게 (경험적인 분석은 말할 것도 없고 단지 구별지어 기술해 보려는 시도마저도 해보지 않고) 몇몇의 전형적인 진부한 표제어(단어) 아래 포함해 버린다. 역운으로서의 기술에 대한 존재론화시키는 이야기는 (이때 역운은 비밀이며 보장이며 동시에 위험이어야 한단다) 강력한 본질개념을 갖고 도매금으로 모든 드러나는 존재적인 것을 헤집고 다닌다. 그렇지만 형이상학의 역사에 대한 혁신적인 시각에는 그러한 세계관적인 장치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만회되지 않고 있는 이성비판적인 통찰들이 열어 밝혀지고 있다.
   2) 하이데거가 1933년 이래 공적으로도 추종하였던 조악한 민족주의는, 횔더린에 의해 다소간 고양된 형태 속에서도 그의 사유의 불변항으로 남아 있다. 해석의 도식은 1935년 이래 확고하게 마련되어 있다. {형이상학 입문}에서 독일 민족은 그리스인의 후예로 형이상학적 민족이라고 특징지어지고 있다. 그러한 형이상학적인 민족에게서만 지구전체적 관계의 전환을 기대할 수 있다. 이미 오래전에 형성된 "중심의 나라"라는 이데올로기의 흔적 안에서 지형적인 중심의 위치는 독일인의 세계역사적인 소명을 위한 열쇠를 만들어 준다. "세계의 황폐화의 위험을 제어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하이데거는 오로지 "서양의 중심인 우리 독일 민족이 역사적인 파견을 떠맡는 데"에서 기대하고 있다.42) 이렇게 하이데거는 "존재에 대한 물음을 유럽의 운명과의 연관에로 끌어들이고 거기에서 지구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으로 본다. 이때 이 유럽 자신을 위해 우리의 역사적인 현존재가 그 중심임을 입증하고 있다."43) "유럽은 러시아와 아메리카 사이의 집게 속에 놓여 있다. 이들은 형이상학적으로 똑같다. 다시 말해 그들의 세계성격과 정신에 대한 그들의 관계를 볼 때 똑같다."44) 볼쉐비즘이 서구의 마르크스주의에서 생겨나왔기에 하이데거는 그 안에서 단지 - 더 고약한 - 아메리카주의의 한 변형체만을 볼 뿐이다. 페겔러는 하이데거가 구미가 당기게 강연하지는 못한 그의 미발표 원고의 한 귀절을 소개하고 있다. 이 귀절은 그 사이 이민을 떠난 카르납과 연관된 것이다. "그의 철학은 '수학적 과학성이라는 가식 아래 전수된 판단론을 극도로 진부하게 만들어 그 뿌리를 뽑아 버렸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종류의 철학이 '러시아의 공산주의'와 '내적 외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아메리카에서나 자신의 '승리를' 축하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45) 하이데거는 그의 해석을 1942/43년의 파르메니데스 강의에서도, 1943년 여름학기의 헤라클레이토스 강의에서도 여전히 반복하고 있다. 그때 그는 지구가 이미 "불길에 싸여 있고", "세계가 붕괴되어 가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오직 독일인만이 - 이들이 '독일적인 것'을 발견하고 유지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 세계역사적인 성찰에 이를 수 있다."46)
   3) 1934년 4월 총장직에서 물러난 하이데거는 몹시 실망하였다. 그는 이러한 역사적 순간이 흡사 그와 그의 철학에게 주어져 있었단 것처럼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쓰디쓴 종말에 이르기까지 국가사회주의의 세계역사적 중요성과 형이상학적 의의를 확신하고 있었다. 1942년 여름에도 그는 여전히 횔더린 강의에서 오해의 여지가 없이 "국가사회주의의 역사적인 유일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47) 다시 말해 이 국가사회주의는 그 시대의 허무주의와의 특별히 내밀한 관계 때문에 흡사 탁월한 듯 싶다. 그리고 하이데거가 국가사회주의의 존재역사적인 가치를 - 아마도 전쟁이라는 돌발사건 때문에 비로소 - 다르게 평가해야 함을 배웠을 때에도 그 사실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1935년에 국가사회주의적 움직임의 "내적인 진리와 위대함(크기)"에 대해 말할 때에는48) 사실 자체의 정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야 하는 특정의 현상의 양태들과 시행과 거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무튼 철학자는 어쨌거나 더 잘 알고 있다. 그는 국가(민족)적 혁명의 형이상학적 등급을 알고 있다. 비록 정치적인 지도자가 처음에 잘못된 철학자들에 의해, 크릭(Krieck)과 보이믈러(B umler) 등과 같은 철학자들에 의해, 자신의 본래적인 파견의 임무를 잘못 알았다 하더라도 아직까지는 모든 것을 잃은 것은 아니다. 그 당시 강의를 들었던 발터 브뢰커(Walter Br cker)는 상기하기를 하이데거가 "그" 운동의 내적인 진리와 위대함이라고 말했지, 텍스트에 나오듯이 "이러한" 운동의 내적인 운동과 위대함이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그리고 '그 운동'으로 나치 자체를, 오직 그것만을, 즉 국가사회주의를 지칭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나에게 잊혀질 수 없는 '그' 사람이었던 것이다."49) 이것이 맞는다면 1935년에는 아직 그 동일화가 단절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다음 페겔러는 1936년 여름학기의 셸링 강의에서의 한 귀절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귀절은 1971년 출간된 (얘기컨대 하이데거가 모르는 채로) 판에서는 지워져 있었다.50) "허무주의를 대항해 반대운동을 시작한 두 사나이,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둘 다 니체에게서부터 본질적으로 다르게 배웠다. 그러나 그로써 니체의 본래적인 형이상학적 영역이 아직 타당해지지는 않았다." 다시금 비슷한 시기에 로마에서 하이데거를 만난 뢰비트의 보고와 일치하고 있는 똑같은 그림이 귀결되어 나온다. 파시즘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소명에 대해 알고 있다. 물론 이들은 이 파견임무의 정확한 의미를 인식할 수 있기 위해 철학자(하이데거)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오직 철학자만이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진리를 작품에 정립한다는 것이 형이상학역사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할 수 있다. 그는 적어도 목표를 정확하게 자기 눈앞에 보고 있다. 즉 어떻게 이들 파시스트의 지도자들이, 그들의 민족의 영웅적인 현존재의 의지를 일깨우는 데에 성공하기만 하면, "고삐풀린 기술과 뿌리없는 보통인간들의 조직의 희망없는 광란"의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지를 보고 있다.
   나는 정확하게 언제 그 다음 단계의 실망의 소화작업이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추정컨대 전쟁이 시작된 후, 아니면 아마도 막을 길 없는 패배를 허탈하게 인식한 후에야 비로소였는지 모른다. {형이상학의 극복}이라는 글에서 (1936년 이후, 특히나 전쟁때에 쓰여진 것이다) 하이데거는 더욱 더 강력하게, 모든 모아둔 힘까지도 동원하고 있는 그러한 시대의 전체주의적인 특징들을 끈질기게 파고든다. 이제 비로소 1933년의 메시아적 돌출의 기분이 종말론적인 구원의 기대에로 획 바뀌어 버린다. 오직 그러한 가장 무서운 위기에서 구원의 힘(구원자)도 또한 자라는 것이다. 세계역사적인 파국에서야 비로소 형이상학의 극복의 시간이 도래하는 것이다: "이러한 몰락 이후에야 비로소  오랜 시간을 걸쳐  시초의  급작스러운 체류가 일어난다."51) 이러한 분위기의 고조와 더불어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평가도 다시 한번 변화한다. 1934년 이후 거리를 두던 태도는 이제 국가사회주의의 실천의 잘못된 외적 형태와 그것의 본질적인 내용을 구별하도록 하였다. 이제 하이데거는 국가사회주의 운동의 "내적인 진리" 자체를 건드리는 더 근본적인 전복을 꾀한다. 그는 존재역사적인 임무에 있어 새로운 역할분담을 꾀한다. 지금까지는 민족적 혁명이 그들의 지도자를 정상으로 하여 허무주의에 대한 하나의 반대운동을 나타내고 있었는데 반해, 이제 하이데거는 그 혁명은 하나의 특별한 특징적인 표현이라고, 따라서 저 숙명적인 기술의 역운의 단순한 증후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 혁명은 이 역운에 대해 한 동안 반대작용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대의 징표가 되어버린 이 기술은 "소모되기 위한 소비의 총체적 순환운동"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그리고 "'천부적인 지도자'란 자신의 본능적인 확실성에 근거하여 자신을 이러한 과정에 조종의 기관(도구)으로 제시하는 그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가차없는 존재자의 소비라는 사업의 진행 내부에서 존재부재의 공허를 안전하게 하기(지키기) 위해 봉사하는 최초의 고용자들이다."52) 이것과는 무관하게 독일인을, "무조건적인 허무주의를 역사적으로 구현시킬" 능력이 있는 "인류"라고 민족주의적으로 지칭하는 것은 그대로 남아있다.53) 바로 여기에 이제는 국가사회주의의 "유일함"이 성립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나치의 권력자들은 어느 정도 존재부재의 고위급 직원으로 형식화"되어 버린다.54)
   하이데거의 정치적인 참여와 하이데거의 철학 사이의 내적인 연관을 위해 내게는 다음의 사실이 아주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정권의 다른 지성적인 기수(선두주자)들과 비교하여 볼 때, 놀랍게도 망설이고 질질 끌며 국가사회주의의 운동으로부터 벗어나고 그 운동에 대한 가치평가를 바꾸게 되는 것이, 오로지 이 사실만이, 그의 사상을 교정하게끔 만들었다는 바로 그 사실 말이다. 이 교정의 사실이 하이데거가 전쟁 이후에 갖고 등장하는 바로 그 존재역사의 구상을 도대체 비로소 근거짓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이데거가 민족적 혁명이 어떤 새로운 독일 현존재의 기획투사와 더불어 기술의 객관적인 도전에 대해 하나의 대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는 동안은, 요청과 응답의 변증법은 여전히 {존재와 시간}의 활동주의적인 근본특성과 -- 민족적 혁명적으로 사유된다 해도 -- 일치될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가 이러한 희망을 포기하고 파시즘과 그의 지도자들을 병의 증후로 -- 전에는 그들이 이병을 치료해야 했다 -- 평가절하해야 한 다음에야 비로소, 이러한 자세의 변화 이후에야 비로소 근세적인 주체성의 극복은 그저 참고 견뎌야 하는 그러한 어떤 사건의 의미를 갖게 된다. 그때까지는 자기자신을 주장하는 현존재의 결단주의가 {존재와 시간}의 실존론적인 표현법에서 뿐 아니라 또한 30년대 작품들의 민족적.혁명적 표현법에서도 (약간의 강조점의 차이를 띠고) 일종의 존재를 열어밝히는 기능을 보지하고 있었다. 실망의 소화작업의 마지막 단계에서야 비로소 존재역사의 구상이 그 숙명론적인 형태를 얻게 된다.55)

 
V.
(2차 대전 직후의 하이데거의 태도)

   존재역사적인 숙명론은 예를 들어 1943년의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의 보탬말에서 이미 명확한 윤곽을 얻었다. 물론 전쟁이 끝난 후에 종말론적인 황폐한(참담한) 분위기가 다시 한번 사방에서 덮쳐온다. 종말론은 가까이 접근해오는 파국에 의해 규정된다. 이 파국은 프랑스 군대가 프라이부르크에 진입한 이래 우선 당분간은 모면되었지만 단지 예상할 수 없는 시기에로 연기되었을 뿐이다. 승리를 한 것은 본질적으로 유사한 세력인 아메리카와 러시아였으며 이들은 세계의 지배를 나누어 가졌다. 제 2차 세계대전은 하이데거의 눈으로 보건대 아무런 본질적인 것도 결정짓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철학자는 전쟁이 끝난 뒤에 제어하지 못한 역운의 그늘에서 고요하게 견디어 내기로 마음을 먹는다. 1945년 그에게는 오직 실망스러운 세계역사에서부터의 퇴각밖에 남은 것이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존재의 역사가 본질적인 사유자의 말 안에서 언어에 이르게 된다는 - 그리고 이러한 사유는 존재 자체에서부터 일어난다는 - 확신을 계속 고집하고 있었다. 하이데거는 15년 이상 동안을 자신의 사상이 정치적인 사건에 의해 숨을 죽이도록 만들어 왔다. 1946년의 {인문주의 서한}에서 하이데거는 이러한 사유의 움직임을 정리한다. 그러나 그 움직임이 생성되어 나온 정치적 맥락은 지워버려 - 역사적으로 자리가 없는 것이 되어버려 - 표면의 역사적인 실재와의 그 모든 연관들에서부터 벗어나 버리는 식으로 정리한다.
   {인문주의 서한}에서는 민족주의의 흔적들이 제거된다. 민족의 현존재의 공간은 고향으로 고양된다: "이 낱말은 여기서 본질적인 의미로 사유되었다. 애국적으로, 민족적으로 사유된 것이 아니라 존재역사적으로 사유되었다."56) 유럽의 심장에서의 (독일) 민족의 세계역사적인 파견의 임무는 그저 단지 문법적인 수준에서만 보지되고 있다. 그것은 계속해서 독일어의 형이상학적 탁월함 속에서 살아남는다. 하이데거는 독일어에서 예전이나 다름없이 여전히 그리스인의 유일한 단 하나의 합법적인 후계자를 보고 있다. 이 점은 {슈피겔 잡지와의 대담}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사람들은 횔더린을 이해할 수 있기 위하여는 독일어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半神", 창조적인 지도자의 중간왕국도 흔적없이 사라져 버렸다. 위대한 창조자는 시인과 사유자로 고양된다. 철학자는 흡사 존재에 직접적이다. 전에 정치적인 추종자였던 것이 이제는 모두 존재의 파견에 대한 경청(순명)으로 보편화되어 버린다: "오직 그러한 순응만이 떠받칠 수 있으며 묶을 수 있다."57)
   "본질화를 통한 추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조작(작업)의 도움으로 존재의 역사를 정치적.역사적 사건에서부터 분리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이것은 또한 자기자신의 철학적인 발전에 대해서도 괄목할 만한 자기형식화를 가능케 해주었다. 하이데거는 이제부터 자신의 문제제기의 연속성을 강조하며 존재역사라는 구상을 아직 완료되지 않은 {존재와 시간}에로 소급 투사시켜 반역적인 세계관적인 계기들을 씻어버리려고 노력한다. 이미 1930년에 행했다고 대는 전향은 "{존재와 시간}의 입각점의 변동이 아니다."58)
   하이데거는 인문주의라는 주제를,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연합군들에게와 다른 곳에서 제공되고 있는 참혹함의 그림들이 마지막 독일의 마을에까지 파고들은 그 시기에 다룬다. "본질적인 사건"이라는 말이 도대체 어떤 일정한 의미를 갖는다면, 유태인 멸종이라는 단일적인 사건이 이 철학자의 주목을 - 관여된 동시대인들의 주목이 아니더라도 - 끌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언제나와 다름없이 보편적인 것에 머물러 있는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인간이 "존재의 이웃"인 것이지 인간의 이웃인 것은 아니다. 그는 냉정하게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인격'이라고, 정신적.영혼적.육체적 존재라고 보는 인문주의적 해석"에 반대한다. 그 까닭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최고도의 인문주의적 규정이 아직까지 인간의 본래적인 품위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59) {인문주의 서한}은 또한 왜 도덕적인 평가가 도대체 본질적인 사유의 수준 아래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지도 설명하고 있다. 이미 횔더린이 "괴테의 단순한 세계시민"을 뒤에 남겨 두었다. 그리고 하이데거의 상기적이 되어버린 철학함은 이제 "윤리학"을 관통하여 지나가 그 대신에 "응당한 것"(das Schickliche)을 해석한다: "사유는 역사적으로 회상하면서 존재의 역운에 유의함으로써, 이미 역운에 맞갖는 응당한 것에 자신을 결속시켰다."60) 이 문장에서 이 철학자는 국가사회주의 운동의 "응당치 못함"(Unshicklichkeit, 세련되지 못함)의 기억에 부딪쳤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는 즉시 이렇게 첨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것을 말하기 위해 스스로 불화 속으로 모험해 들어가는 것은" - 존재는 언제나 그것 자체일 뿐이다 - "위험이다. 애매모호함이 위협하고 있으며 단순한 분쟁이 위협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그 이상 자기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말할 것이 없다. 그것은 또한 시종일관치 않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본질적인 사유의 존재의 사건에 대한 입장이 사유자를 오류에로 내앉히기 때문이다. 사유자는 모든 개인적인 책임에서부터 면제되는데, 그 까닭은 그에게 오류 자체가 객관적으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지성인에게만, 즉 비본질적인 사유자에게만 오류를 주관적으로 추궁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자체 아무런 의미가 없는 1933/34년의 총장직의 경우"에서 하이데거는 전쟁이 끝난 뒤인데도 단지 "학문의 형이상학적 본질상태에 대한 한 징후"를 보고 있다.61) 그는 "지구전체의 힘에의 의지라는 총체적인 운동 내에서 아주 미미하기에 미소하다고까지 지칭되어서도 안 되는 그러한 과거의 시도들과 조처들을 헤집는 것"을 "결실없는 것"으로 여긴다.62)
   하이데거가 자기자신의 행위에 대해 하고 있는 회고적인 평가를 일별하려면 그가 1945년 기록해놓은 {사실과 사상}이 그것을 보장해 줄 것이다. 그리고 또한 똑같이 사후에 출간된 {슈피겔 잡지와의 대담}도(Der Spiegel Nr.23, 1976,193-219) 일별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 대담에서 하이데거는 본질적인 것에 있어서 1945년의 진술을 반복하고 있다. 본질적인 사유의 객관적인 무책임성과 개인적인 개입의 도덕적 무차별성이라는 바로 그 전제 아래 이러한 자기묘사가 보여주는 미화시키고 있는 모습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차겁고 냉정하게 사실에 대해 변론을 하는 대신에 하이데거는 무면책 (무혐의) 증명서를 제시하고 있다. 이미 그는 총장취임 강연을 "반대"로 이해하고,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수행된 입당행위를 "형식적인 일"로 이해한다. 일 이년 뒤 그는 주장하기를 "1933년 시작된 대항은 계속 관철되었고 더욱 강해졌다".63) 자기자신의 나라에서 말 한마디 않으며 죽음같은 침묵을 지키고서 그는 자신을 "몰이사냥"의 희생자라고 본다. 분명 그의 총장시절에 있었던 "정화작업"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그것은 자주 목표와 한계를 넘어서 가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책임"에 대해서는 단 한번 이야기가 있었다. 그것도 "그 당시 이미 그토록 예언자적인 재능을 가져 그 모든 것이 오는 것을 보았으나" 그럼에도 "불행에 대항해 공격하기 위해서 거의 10년이나 기다린" 다른 사람들의 책임에 대한 이야기다.64) 그외에도 하이데거는 그 당시의 그의 전투적인 낱말들에 오늘날 전혀 잘못된 의미가 첨가되고 있다고 강력하게 항의하고 있다: "나는 '군복무(방위임무)'라는 낱말을 군대적인 의미로도 공격적인 의미로도 사용하지 않았고 오직 정당방위에서의 방위로 사용하였다."65) 후고 오트와 빅토르 파리아스의 연구는 면책의 여지를 남겨주는 사실들을 그렇게 많이 용납하지 않고 있다. 하이데거는 사후에 발간된 변론에서만 기만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1953년 {형이상학 입문}이라는 1935년의 강의록을 발간한다. 그 당시 나는 대학생으로서 {존재와 시간}에 너무나 사로잡혀 있었기에, 문체의 상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파시스트적으로 주입된 이 강의록을 읽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때에 나는 그 당시의 나의 느낌을 신문의 논단에 기재하였다.(FAZ, 1953년 7월 25일자) 그리고 이때 나는 "그 운동의 내적인 진리와 위대함"이라는 문장을 지적하였다. 무엇보다도 나에게 충격을 준 것은 하이데거가 1953년 - 내가 상정할 수 밖에 없었듯이 - 1935년의 강의록을 개정없이, 아무런 해설없이 출간했다는 그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하이데거에게 던졌다: "오늘날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수백만의 인간에 대한 계획적인 살해도 숙명적인 오류라고 존재역사적으로 이해가능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가? 그 살인은 그것을 책임능력을 갖고 자행한 그들의 사실적인 범죄가 아닌가? 그리고 전 민족의 나쁜 양심이 아닌가?" 하이데거가 아닌 레발터(Christian E. Lewalter)가 대답을 하였다.(Die Zeit, 1953년 8월 13일자) 그는 그 강의록을 나와는 완전히 다른 눈으로 읽었다. 그는 그것을 하이데거가 그 당시 히틀러 정권을 "새로운 구원의 징표로서" 파악하지 않고 오히려 형이상학의 몰락의 역사에 있어서의 "새로운 몰락의 징후"로서 파악했다는 사실에 대한 기록으로 이해했다. 이때 레발터는 그에 대한 근거로 괄호로 표시해 실은 텍스트의 보충문장을 끌어들였다. 그 문장은 국가사회주의의 운동을 "전체 지구적으로 규정된 기술과 서양 인간과의 만남"이라고 특징지었다. 레발터는 그것을 이렇게 읽었다: "나치 운동은 기술과 인간의 비극적인 충돌의 증후이다. 그리고 그러한 증후로서 그것은 '크기(위대함)'를 갖는다. 왜냐하면 그 영향이 전 서양을 넘어 이 전 서양을 몰락에로 쓸어넣으려고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67) 놀라웁게도 하이데거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함에 있어 레발터의 기사에 대한 독자의 편지의 형식을 빌리고 있다.68) "강의록에서(152쪽) 끄집어낸 문장에 대한 레발터의 해석은 모든 관점에 있어 정확합니다.[...] 당신이 인용하고 있는 것을 포함해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는 문장을 인쇄원고에서 지워 버리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읍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놔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그 문장들은 역사적으로 강의에 속하는 것들이고, 다른 편으로 나는 그 강의록의 그 언급된 문장들이, 사유의 기술을 배운 독자들에게는 전적으로 소화될 수 있는 것으로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추정하기로 하이데거는 나중에 결코 그런 식으로 처신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걸림직한 문장들은 삭제를 표시함이 없이 없애버렸을 것이다. 아니면 그가 이러한 출간의 절차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을까? 더욱 주목을 요하는 것은 하이데거가 레발터의 해석 - 이 해석은 나중의 자기이해를 잘못 1935년의 것으로 소급투사하고 있다 - 을 명확하게 비준하고 있는 바로 그 상황이다. 분명히 그 해석이, 하이데거 자신이 1953년 원고에 추가로 삽입한 그 삽입문에 의존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분명 하이데거는 이 괄호안의 추가문장을 (1953년 책의 "미리 일러두기"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명백히 근원적인 강의록의 구성요소라고 설명하고 있고 {슈피겔 잡지와의 대담}에서도 여전히 고집스럽게 이 기만적인 표현법을 주장하고 있지만 진실은 조금씩 조금씩 밝혀지기 시작했다. 프란첸은 1975년 주의깊은 텍스트의 분석에 근거하여 "과연 하이데거가, 그가 1953년 의도했다고 주장하는 그것을 실지로 의미했었는지"에 대한 의심을 더욱 굳혔다.69) 1983년 페겔러는 보고하기를, 쟁점이 되고 있는 곳의 원고의 쪽이 비어있다고. 그리고 페겔러 역시 괄호안의 문장을 나중의 추가문으로 여기지만 그것이 아직은 의도적인 조작에 의해 된 것은 아니라고 간주하고 있다.70) 마침내 파리아스의 책이 프랑스어 판으로 출간된 뒤에 라이너 마르텐(Rainer Marten)은 하이데거의 가까운 주변에서부터 그 과정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하이데거는 1953년 그 위험스러운 문장을 지워버리자는 그의 세 공동작업자들의 충고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괄호 안에 문제의 그 해설을 추가로 적어 넣었으며, 그래서 나중에 레발터의 해석과 하이데거의 연대기적으로 기만적인 자기묘사가 이 문장에 의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71)
   흥미롭게도 1953년의 논쟁에서는 철학적인 견해의 논쟁에서 볼 수 있는 본래적인 물음은 밑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하이데거가 나치의 끔찍한 범죄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 하이데거는 그 당시에도 그리고 그 후에도 아무런 대답을 주지 않았다. 우리는 그 물음도 아주 보편적으로 떨어져 나갔으리라 추측할 수 있는 좋은 근거들을 갖고 있다. "지구적으로 본 역사 내부에서 힘에의 의지라는 보편적인 지배"의 그늘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가 된다: "이러한 현실 속에 오늘날 모든 것이 서 있다. 그것이 공산주의건 파시즘이건 또는 세계민주주의이건."72) 1945년에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하이데거는 계속 거듭 반복하였다. 존재철학자의 모든 것을 평준화시켜 버리는 시야 아래에서는 유태인 말살도 하나의 임의로 바꿔 버릴 수 있는 사건으로 나타난다. 유태인의 말살이건, 독일인의 축출이건, 그것은 마찬가지다. 1948년 5월 13일 허버트 마르쿠제는 하이데거가 바로 그러한 것을 주장한 그 편지에 이렇게 대답하였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유태인의 절멸에 대해 말한 모든 것이, 만일 '유태인' 대신에 '동독인'이 놓인다면, 똑같이 연합군들에게도 적용된다고 쓰셨읍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문장과 더불어 인간들 사이에 그래도 아직 여전히 대화가 가능할 수 있는 그 차원의 바깥에, 즉 로고스(이성)의 바깥에 서 계신것이 아닙니까? 왜냐하면 오직 그러한 '논리적'(이성적)인 차원에서 완전히 벗어나서서만 하나의 범죄를 다른 사람들도 그 비슷한 것을 했다고 '파악'하여 같게 만들어 버림으로써 설명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수백만 인간을 고문하고 실험하고 학살한 것을 일단의 민족의 무리를 (이들에게는 아마도 몇몇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그러한 종류의 범죄가 전혀 저질러지지 않았읍니다) 강제로 다른 곳에 이주시킨 것과 같은 단계에 놓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읍니까?"73)


VI.
(하이데거 사상의 수용문제)

   하이데거의 국가사회주의에의 개입은, 우리가 안심하고 후대인의 도덕적으로 엄중한 역사적 판단에 맡겨도 된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이후의 하이데거의 변명해대는 행위, 그의 수정과 조작, 그가 공공연하게 고백했던 그 정권과 공적으로 거리를 두기를 거부하는 그의 태도 등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것은 동시대인으로서의 우리에게 해당이 되는 일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삶의 맥락과 역사를 함께 나누고 있는 한,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권리가 있다. 하이데거가 일종의 마무리로 계산하여 쓴 바로 그 편지 - 이 편지는 오늘날까지 학계에도 널리 퍼져 있다 - 는 한때 그의 제자였던 마르쿠제의 다음과 같은 도전에 대한 답변이었다: "우리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오래동안 당신에게서 한 마디가 나오기를 고대하고 있읍니다. 선생님을 분명하고 궁극적으로 그러한 종류의 동일시에서 해방시켜 줄 그 한 마디를, 일어났던 사건에 대해 선생님의 진실한 오늘날의 입장을 표현할 그 한 마디를 말입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러한 말 한마디를 지금까지 하지 않으셨읍니다. 적어도 한번도 사적인 영역을 벗어나온 적은 없읍니다."74) 이러한 관점에 있어서 하이데거는 그의 세대와 그의 시대에, 즉 은닉으로 특징지워진 아데나우어 시대의 분위기에 붙잡힌 채 남아 있는 셈이다. 그는 다른 사람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이 처신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의 주변에서 들려오고 있는 변명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즉 하이데거는 중상모략에 대해 강력하게 대처해야 한다든가, 어떠한 형태의 인정도 새로이 줏대없는 기회주의자의 징표로 이해될 것이라든가, 하이데거는 온당치 못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어떠한 가능한 설명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고 있다든가 식의 이야기들 말이다. 갈수록 점점 공적인 자리에서마저도 자신을 숨기는 그러한 인물에게는 차라리, 하이데거는 나치가 아니었기에 "카노사 갱"과 교류해야 할 하등의 이유를 보지 못하고 있다고 한  어느 친구의 보고가 가장 그럴듯하게 어울린다 할 수 있다.
   자기비판적인 태도, 즉 자기자신의 과거행적에 대한 개방된, 가차없는 반성은 하이데거에게, 그로서는 아주 하기 힘든 어떤 것을 요구한 것일 것이다. 즉 진리에 이르는 특권을 가진 사상가로서의 자기자신에 대한 이해를 교정하기를 요구한 것일 것이다. 하이데거는 1929년 이후 학술적인 철학에서 점점 더 단절되어 갔다. 전쟁 이후 그는 철학 저편에 있는, 도대체 논증 저편에 있는 사유의 영역에로 올라가 버렸다. 그것은 더이상 아카데미적인 직업신분이 갖는 엘리트적인 자기이해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자신의 인격에 짜맞춘 파견(사명)의식이다. 그러한 의식에는 자기자신의 잘못의 인정이, 더군다나 죄의 인정이 일치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동시대인으로서 하이데거는 그의 과거행적에 의해 뒤덮쳐 버렸고 황혼 속에로 내몰렸다. 왜냐하면 그가 모든 것이 다 지나갔을 때에 자신의 과거에 대해 입장을 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처신은 {존재와 시간}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비역사적이다. 그런데 하이데거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전쟁후의 정신상태에 시대전형적인 현상을 각인한 것은 그의 인격과 관련된 것이 아니고 그의 저서와 관련된 것이다. 한 작품의 수용의 조건은 그 저자의 처신과는 거의 무관하다. 이것은 아무튼 1929년까지의 작품에는 별 문제없이 해당이 된다.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까지 하이데거의 철학적 연구는 문제의 독특한 의미를 깊이 있게 추적하여, 지식사회학적으로 설명가능한, 생성의 맥락을 소급지시하고 있는 관심이 정당성의 맥락을 미리 앞질러 판단하지 않고 있다. 만일 우리들이 이 생산적인 시절의 사상의 자율성을 (하이데거는 1929년 이미 40세 였다) 하이데거의 나중의 자기합리화의 형식을 거슬러서까지, 연속성이라는 과정을 거슬러서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하이데거에게 일종의 적당한 호의를 베푸는 셈이다.
   처음에는 드러나지 않게, 그러다가 요란스럽게 등장한 세계관화의 과정이 시작되고 나서 하이데거는 물론 그가 그였던 과거의 창조적인 철학자로 남아 있게 된다. 1931년의 플라톤 해석과 더불어 시작되어 1935년과 1945년 사이 누구보다노 니체와의 논쟁적 대결 속에서 전개된 그의 이성비판에76) 우리는 오래 지속될 통찰을 감사하고 있다. 결실이 풍부한 데카르트 해설에서 그 절정에 이르고 있는 이 통찰은 흥미로운 계속을 위한 출발점과 최고도의 창조적인 새로운 단초을 위한 자극제가 되었다. 전쟁이후 철학계의 가장 중요한 쇄신인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이 이에 대한 좋은 예이다. 하이데거적 이성비판이 갖는 세계관적으로 명확한 영향력에 대한 폭넓은 두드러진 증인들로서 프랑스에서는 후기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 푸코의 지식의 형태에 대한 분석, 아메리카에서는 로티(R. Rorty)의 표상하는 사유에 대한 비판과 드레이퍼스(Hubert L. Dreyfus)의 생활세계적 실천의 연구 등을 지적할 수 있다.77)
   우리는 작품과 인물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근시안적으로 추론해서는 안된다. 하이데거의 철학적인 작품은 다른 철학자들의 작품처럼 그의 논증이 보이고 있는 힘의 자율성에 힘입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을 그 논증들에 관여시킬 때에만 - 그리고 이 논증들을 그것의 세계관적인 맥락에서 끄집어 낼 때에만 - 그럴 경우에만 물론 또한 창조적인 연결이 성공할 수 있다. 논증적인 실체(계기)가 더 깊이 세계관 속으로 가라앉아 버리면 버릴수록 인지하는 소화의 비판적인 힘에 대한 요청이 더욱 커진다. 이러한 해석학적 자명성은 그 평범함을, 수용하는 후학(후대)들이 다소간 그 작품 자체가 자신의 동기를 그것에서부터 연관되어 받고 있는 그 (같은) 전통 속에 서 있을 때에 상실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에서는 세계관적으로 감염된 사상을 비판적으로 소화시키는 일은 오직 우리가 하이데거의 경우에서부터 배우고 있는 그 내밀한 연관을 고려에 넣을 때에만 성공할 수 있다. 즉 한편으로는 하이데거의 정치적인 개입과 파시즘에 대한 그의 태도 사이에, 다른 한편으로는 그 개입과 정치적으로도 동기유발된 이성비판의 논증의 좁은 길 사이에 성립하고 있는 그 내밀한 연관 말이다.
   이러한 문제제기를 격분하여 타부화하는 것은 역생산적이다. 사람들은 사실의 실체에로 파고들어갈 수 있기 위해 하이데거가 자신의 역할과 연결시키고 있는 자명성, 태도, 요청 등을 멀리해야 한다. 위대한 사상가의 권위가 자신의 주위에 둘러치고 있는 방어적인 울타리는 - 위대하게 사유하는 자는 크게 잘못을 저질를 수 있다78) - 단지 논증들을 비판적으로 소화시키는 일을 등한시하게 하여 어떤 설명되지 않은 언어의 유희에로 사회화시켜버리도록 만들 뿐이다. 우리가 하이데거로부터 배울수 있는 조건은 독일에 깊게 뿌리내린 반서구적인 정신자세와 양립할 수 없다. 우리는 1945년 이후 그러한 정신자세를 다행스럽게도 끊어 버렸다. 이러한 정신자세가 모방적으로 동화된 하이데거 추종자와 함께 다시 살아나서는 안 된다. 여기서 나는 특히 "개념적인 사유보다 더 엄밀한 그런 사유가 있다"는 식의 하이데거의 제스춰를 의미한다. 이러한 몸짓에는 첫째, 몇몇의 소수에게만 진리에의 특권적인 통로가 열려 있고 그들만이 틀릴 수 없는 지식을 소유하고 있고 그들은 공적인 논증도 벗어나도 된다는 요구주장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한 권위적인 태도에는 둘째, 유효한 지식을 상호주관적인 검토와 인정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도덕과 진리의 개념들이 연결되어 있다. 그것에는 셋째, 철학적 사유를 학문이라는 동등한 업무에서부터 분리시키며 일상성밖의 것을 강조하여 의사소통적 일상의 실천에서부터 뿌리를 뽑아 버려 모든 이에 대한 동등한 존경을 파괴해 버리는 것이 연결되어 있다.
   파리아스의 {하이데거와 나치}가 프랑스에 출간되었을 때 그 반향은 실로 컸다. 파리아스 자신이 다양한 목소리의 반응에 관여되고 있다. 독일에서는 철학자들의 조합이 입장표명을 유보하고 있는 실정이다.79) 사람들은 일면 일리가 있는 근거를 대며 하이데거가 프랑스에서는 재빠르게 탈나치화되어 저항가로서까지 선전된 반면, "하이데거와 국가사회주의"라는 주제가 독일에서는 루카치, 뢰비트, 휘너펠트(Paul H hnerfeld), 크로코우(Christian von Krockow), 아도르노(Theoder W. Adorno), 알렉산더 슈반(Alexander Schwan)에서부터 후고 오트( Hugo Ott)에 이르기까지 심도있게 다루어져 온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80) 그렇지만 여기 독일에서는 비판의 영향력이 매우 빈약하다. 프란첸이 하이데거의 철학적 사상전개에 대해 묘사한 비판적 기술이나 최근에 후고 오트와 페겔러가 하이데거의 정치적인 개입에 대해 발표한 통찰들도 모두 전문가의 범위를 넘어서서 파고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파리아스의 이 책의 독일어 출간은 이 책이 보다 넓은 자료수집에 의거하여 하이데거의 정치적인 성장과정을 처음으로 전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만 정당화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프랑스어 판의 독일에서의 출판수용은 하이데거의 변론 - 이에 대해 후고 오트는 그 변론이 능란하고 전략적인 특징들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 이 여기 독일에서도  계몽의 필요가 있음을 일깨워주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니콜라스 테르툴리안(Nicolas Tertulian)의 세심한 연구를 복제하여 실어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만이(1988년 2월 2일자) 이러한 계몽에 기여했을 뿐이다. 이 책의 독일어판의 출간과 더불어 제 2 라운드의 토론이 불붙기를 소망한다. 이 토론은 미화시키는 변론에 의해81), 눈에 두드러지는 이데올로기 설계에 의해82), 모방하는 제스춰에 의해83) 또는 복수하려는 원한에 의해84) 지배되어서는 안된다.
   활성적인 토론에서는, 소년시절에서부터 하이데거의 종교적 위기까지를 다루고 있는 부분이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토론의 장기적인 시각에서는 이 부분이 결실이 있는 자극을 줄 수도 있다. 하이데거의 주저인 {존재와 시간}은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키에르케고르 등과의 심도있는 논쟁적 대결을 드러내보이고 있다. 그 책은 그 프로테스탄트적인 특징과 함께 칸트 이래의 독일철학 전통의 주된 흐름에 합류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중 많은 사람에게는 이러한 프로필 배후에 은닉되어 있는 하이데거의 교육과정의 가톨릭적 근원이 가리워져 있다. 파리아스는 정력적으로 남부독일적 오스트리아적 가톨릭주의 정신의 배경을 파헤친다. 이 가톨리주의의 로마교황당적인 변형태가 후기 19세기의 문화투쟁에서부터 생겨나온다. 이것과 더불어 후기 철학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의 빛이 비추이는 셈이다. 분명 후기 철학은 30년대에 흡사 공식적이 되어버린 새로운 이교도(사상)라는 전제 아래에 서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 아래에서 수행된 "형이상학의 해체"가 갖는 정치적 시대진단적 내용은 일종의 단호한 반근대주의의 전형들을 다시 살아나게하고 있다. 그러한 전형들을 청년 하이데거가 이미 문화투쟁에 의해 각인된 양친의 집과 학교에서 배웠을 것이다.
   파리아스의 책에 대한 방어적인 반응들은 물론 좁은 의미의 정치적인 전기와 관련된 것들이다. 우리는 그러한 전기를 한 유명한 철학자가 나치당의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을 묘사한 가차없는 상세한 보고에서 대하게 된다. 이 책에 의하면 이제 더 이상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위대한 사상가의 급진적인 태도를 한 지방출신의 급진화된 독일 교수의 놀랄만한 활동과 소시민적 명예욕과 분리할 수 없다. "참된 것은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강한자를 위한 것이다." 나는 이러한 숙명론적인 정열이 파리아스가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는 그 일별에 의한 것보다 더 효과있게 그 고상한 탈을 벗기게 될 수 있는 다른 길을 알고 있지 못한다. 파리아스는 우리에게 저 획일적인 시행, 저 고백과 선동적인 입당, 저 사적인 서한들과 간계, 저 핵심간부학교 건립을 위한 계획, 작은 아카데미 세계에서 펼쳐지고 있는 저 파벌싸움과 경쟁 등등에서 끈끈하게 따라나오는 결과들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파리아스는 하이데거와 히틀러의 말을 유치할 정도로 나란히 인용하여 열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의심스러운 방법이 이로운 계몽적인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 그럴 경우 그 방법은 심오한 철학 텍스트들과 나치 선전책자의 천박한 문장들 사이의 의미론적인 연관을 밝히 드러내준다. 조야한 반아메리카주의, 아시아적인 것에 대한 혐오, 그리스 독일적 본질이 라틴어로 인해 왜곡되는 것을 반대하는 투쟁, 이국적인 것에 대한 거부감과 센티멘탈한 고향 찬양 송가 -- 이러한 둔중한 요소들이 -- 그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든 횔더린의 옷을 입고 등장하든 -- 똑같은 각인하는 위력을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가르침을 파리아스는, 한 저자의 지성적인 등급이 후대인들로 하여금 그 유산을 전체로 구별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있다고 지금도 여전히 주장하고 있는 그러한 유언이행자들을 반대해 타당한 것으로 입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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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하이데거의 존재 사유 [철학 강의]

하이데거의 존재 사유 : 시간성, 내어나름, 존재 사건










1. 머리말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의 근거인 "시간성(Zeitlichkeit)"의 시간과 "내어나름(Austrag)", 존재와 인간을 "함께 속하게 하는 것"이자 존재와 시간을 하나로 묶는 "존재 사건(Ereignis)"은 하나의 동일한 물음만이 끊임없이 물어진 하이데거의 사유의 길에서 그때그때 사유된 존재의 사태들이다. 그 '하나의 동일한 물음'은 존재는 어디로부터 어떻게 열어 밝혀지는가, 존재는 어디로부터 어떻게 그의 고유함인 진리로서 머무는가를, 즉 존재 진리의 지평과 방식을 묻는 "존재의 의미" 또는 "존재의 진리"에 대한 물음이다. 이 글은 그러한 물음에 대한 응답 속에 숙고된 위의 세 가지 사태들이 상이함 속에서 어떻게 어울리는지를 찾으려 시도하는 글이다. 이러한 우리의 의도는 "시간성"과 더불어 "차이"의 근거로 사유된 "내어나름"이란 시간의 "사유되지 않은 본질"로서 그리로부터 내어지는 존재와 함께 "존재 사건"에 속한다는 점을 보여주려 시도하는 것으로 모아진다. 다음의 예비적인 논의를 통해 이 글의 의도는 명확해질 수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근본 특성(WdW, 201)", "본성(das Wesende)" (WiM, 17), 즉 존재로서의 존재를 "열어 밝혀짐", "감춰져 있음으로부터 밝게 드러남", "환히 자신을 밝히며 우리 가까이에 머묾", "탈은폐", 그렇게 숨김과 감춤 없이 밝게 드러나 있다는 뜻으로 "진리"로 사유한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존재는 존재자의 존재 근거인 어떤 무엇임으로서의 존재, 말하자면 명사적 존재가 아니라 그렇게 은폐와 어둠, 즉 비진리로부터 비은폐와 밝음에로 열어 밝혀지는 일어남, 사건으로, 말하자면 동사적 존재로 이해돼야 한다. 그러한 진리가 존재가 존재로서 있는(본재하는), 다시 말해 존재가 "비은폐된 존재 자체"(WiM, 18)로 밝혀지는 영역이란 의미로 존재의 의미다. 그래서 하이데거에게 "존재의 의미"와 "존재의 진리"는 동일한 것을 가리킨다(참조 WiM, 18). 하이데거는 그러한 진리, 탈은폐가 서구 시원의 그리스인들이 "Anwesen"이란 말로 이해하고 있는 존재의 본래적 의미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wesen"은 "머물다", "체류하다", "존속하다"란 의미를 간직하고 있으며, 접두어 "an"은 단순히 대상이 우리에게 접근한다는 뜻이 아니라 은폐와 어둠으로부터 우리에게로 환하게 드러남이란 의미에서의 '가까움'이다. 따라서 'Anwesen'의 존재란 자신을 환하게 밝히며 우리들 자신인 인간을 향하여 가까이에 머무는 머묾, 즉 탈은폐 혹은 진리다.
이처럼 존재가 본재하는 사태가 혹은 존재의 고유함이 진리이기에, 존재는 그 어떤 존재자와도 차이가 난다. 존재는 "존재가가 아님(das Nicht-Seiende)"(WiM, 45)이다. 그러나 존재자의 편에서 보면, 존재자는 그렇게 자신과는 전혀 다른 의미, 다른 방식, 즉 진리로 있는 존재 덕분에 비로소 "오히려 무가 아닌" 존재자로서 존재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예컨대 산과 한 채의 집은 존재 진리의 환한 밝음 안에서, 그것을 통해, 각기 산과 집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렇게 존재자와 관련해서 "존재하게 함"인 존재는, 마치 공간의 개방된 여지가 모든 가깝고 먼 사물들을 능가하듯이, 모든 존재자를 넘어서는 "단적으로 초월적인 것(das transcendens schlechthin)"(SZ, 38)이지만, 동시에 언제나 어디서나 한 존재자의 존재로서 존재자에 속한다. 존재자가 존재 덕분에 존재하는 "존재의 존재자"이듯, 존재는 언제나 존재자에 속하는 "존재자의 존재"다. 말하자면 존재는 그의 진리에서, 혹은 모든 존재자를 능가하는 초월에서 언제나 다만 존재자의 존재라는 자신의 자리를 떠나는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그러한 방식으로 존재와 존재자가 서로에게 속하는 "함께 속함", 즉 존재는 자신을 환히 열어 밝히고, 존재자는 그 밝음 안에 들어서서  하나의 존재자로 존재함으로써 하나를 이루는 "함께 속함"이 차이의 사태라고 말한다. 따라서 차이에서 물어져야 할 차이의 근거란 곧 두 상이한 존재와 존재자를 동시에 "하나로 묶는 것", "함께 속하게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그 "단일하게 하는 것"인 차이의 근거를 "시간성"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내어나름"으로 사유한다.
이렇게 존재자와 관련해서는 차이로 있는 존재는 인간과 관련해서는 동일성으로 있다. 존재는, 마치 빽빽한 숲 속에 빛이 들기 위해서는 빈터를 필요로 하듯, 자신의 환한 열어 밝힘을 위해 그 개현의 장소를 필요로 한다. 하이데거는 존재가 밝게 드러나는 그 진리의 장소를 인간의 사유함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그렇게 존재를 사유하는 존재 사유는 인간의 본질을 이룬다. 자신의 사유함을 통해 존재가 열어 밝혀진 진리로 있도록 하는데 인간의 본질, 그의 고유함이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존재의 진리를 지키는(h ten) "존재의 목자(Hirt)" ( H, 19, 29)다. 그 같은 방식으로 존재의 열어 밝혀짐, 존재의 진리에 대해, 다르게 말하면 존재와 인간의 관련에 대해 사유하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의 특성을 빛의 비유 안에서 서구 전통의 형이상학과 대조해 말하면, 전통 형이상학에서는 존재의 빛과 그 빛의 원천인 해(최고 존재자, 神的인 존재자를 가리키는)의 관련이 핵심 주제를 이루는 반면, 하이데거에게서는 빛 자체와 그 빛이 밝게 비추는 장소와 방식(인간, 인간의 사유함)이 중심 문제라고 하겠다.
존재의 필요로부터 인간은 존재를 사유하면서 존재를 향해 자신을 바치고 존재는  그 사유함에 열어 밝혀짐으로써 존재와 인간은 함께 속하며, 나아가 그렇게 동일한 존재 진리에서, 그것을 통해, 함께 속한다는 의미로 동일하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인간을 "함께 속하게 하는 것"을 "존재 사건"이라고 부른다. 존재와 인간은 "함께 속함"에서 서로의 고유함으로, 즉 존재는 ≫인간을 향해≪ 열어 밝혀진 진리로 인간은 ≫존재를 향해≪ 자신을 바치는 "존재의 목자"로 있기에, "존재 사건"은 존재와 인간을 고유하게 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하이데거는 또 다른 곳에서 "존재 사건"을 존재와 시간을 서로 향하게 하고 둘의 관련을 견지하는 사태로 사유한다.
이러한 간략한 예비적인 논의를 통해 존재의 진리란 존재가 존재자와 관련해서는 차이로, 인간과 관련해서는 동일성으로 있는 사태로 밝혀지고 있다. 말하자면 밝게 드러난 진리로서의 존재는 그 밝음 안에서 존재자를 비로소 하나의 존재자이게 하는 "존재하게 함"으로서 "모든 존재자보다 멀리 있지만", 우리에게로 환히 열어 밝혀짐으로써 "어떤 존재자보다 인간 가까이 있다"( H, 19). 존재가 열어 밝혀지는 존재의 진리가 이처럼 동일성과 차이가 하나로 속하는 진리 사태라는 점을 앞서 파악하면서 우리의 논의를 이끌 물음들로 다음과 같은 물음들을 제시한다. i) "시간성"과 함께 차이의 근거로 사유된 "내어나름"은 시간의 본질로 이해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내어나름"은 "시간성"으로 불려진 시간의 또 다른 이름인가? ii) "내어나름"과 "존재 사건"은 어떤 관련 안에 놓여 있는가? 이 두 가지 물음은 다음의 하나의 물음으로 불러 모여진다 : 그리하여 "내어나름"은 시간의 고유함으로서 그리로부터 내어지는 존재와 함께 "존재 사건"에 속하는가?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방식의 진행을 통해 이 물음들에 해명하기를 시도할 것이다 : 2. 차이와 시간성, 3. 차이와 내어나름, 4. 존재 사건과 내어나름, 5. 존재 사건에 속하는 시간-공간과 내어나름, 6. 맺음말.


2. 차이와 시간성

앞서 언급한 대로 존재는 인간의 사유함 또는 존재 이해 안에 열어 밝혀진 진리의 존재며 존재자는 존재의 그 열어 밝혀짐의 빛 안에서, 그를 통해, 비로소 존재자로서 드러난다. 존재자의  드러남에는 그것의 근거로서 존재의 열어 밝혀짐이 전제돼 있다. "존재의 비은폐는 언제나, 그 존재자가 현실적이든 그렇지 않든, 존재자의 존재의 진리다. 거꾸로 존재자의 비은폐에는 그때마다 이미 그 존재자의 존재의 비은폐가 놓여 있다" (WG, 15). 존재자와 그것의 전적인 타자인 존재 사이의 차이의 사태는, 이렇듯 존재자는 존재의 열어 밝혀짐에서 비로소 존재자로서 드러나는 동시에 존재는 언제나 존재자의 존재로서 존재자에 속함으로써, 존재자와 존재가 단일함을 이루는 "함께 속함"으로 이해돼야 한다. 그렇지만 하이데거의 초기 사유에서는 존재론의 기초 놓기란 관심 아래 이러한 차이의 사태보다는 열어 밝혀진 존재와 드러난 존재자 사이의 뚜렷한 차이가 우선적으로 사유되고 있다("존재론적 차이"). 이와 함께 차이는 존재를 이해하며 존재자와 관계 맺는(존재자를 드러내는), 인간 현존재의 초월에서 수행되는 "구별(Unterschied, Unterscheidung)"로 이해된다. 즉 차이는 존재 이해 안에 열어 밝혀진 존재와 그 존재 이해의 빛을 바탕으로 존재자와의 관계 맺음에서 드러난 존재자 사이의 "구별"로 파악된다. 그러나 이 "구별"은 존재를 이해하며 존재자와 관계 맺는 단일함 속에서의 그것으로서, 여기에는 이미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함께 속함"이 명확하게 사유되지는 않았지만 사유돼야 할 것으로 간직돼 있다.
하이데거가 "존재 이해와 존재자와의 관계 맺음의 직접적 단일함"(GP, 454), 그 둘의 "함께 속함"(GP, 466)으로 표현하는, 초월에 속하는 그러한 "구별"은 인간 현존재와 함께 개시된다. 왜냐 하면 인간 현존재는 바로 존재를 이해하며 존재자와 관계 맺는 초월을 자신의 "특출난 점"(WG, 15), "근본 구성 틀"(WG, 18)로 갖는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초월 안에 초월로서"(WG, 19) 존재하는 인간 현존재는 존재와 존재자의 구별을 수행하며 존재하는 존재자다. "존재와 존재자의 구별은 현존재의 존재 양식을 갖고 있으며 실존에 속해 있다"(GP, 454). 이렇게 보면 존재와 존재자 사이를 단일함 속에서 구별짓는 수행으로서의 차이는 그 근거를 인간 현존재의 초월에 두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인간 현존재의 "근본 구성 틀"인 초월은 아직 그러한 차이의 충분한 근거가 아니다. 아직 더 소급해 들어가야 할 그것의 근거가 남아 있다. 달리 말하면 존재를 이해하고 존재자와 관계 맺는 인간 현존재의 초월은 어디로부터 가능한가 하는 물음이 남아 있다.
우리는 이미 밝혀진 사실을 실마리로 삼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그 차이의 근거를 앞서 규정해볼 수 있다. 존재 이해와 존재자와의 관계 맺음이 하나로 함께 속한다면, 또는 그것이 각기 적중하는 열어 밝혀진 존재와 그 존재 진리의 빛 안에서 비로소 존재자로 드러난 존재자가 함께 속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둘 사이의 어떤 특정한 '사이에(das Zwischen)' 혹은 그 둘을 하나로 묶는 '와'의 영역을 전제하고 있는 셈이다. 이 '사이에' 또는 '와'로부터, 그것을 중심으로, 초월이 그리고 그 초월 위에서 (열어 밝혀진) 존재와 (드러난) 존재자를 단일함 속에서 구별하는 차이가 수행되고 있다. 그렇다면 '사이에'의 영역과 그것을 개방하는 것은 각기 차이가 전개되는 영역과 차이의 근거를 이룰 것이다. 이 경우 차이의 근거에 대한 물음은 이렇게 바뀐다 : 존재 이해와 존재자와의 관계 맺음 사이의 "사이에"란 어떤 영역이며, 그 영역을 열고 그리로부터 둘을 단일하게 함께 묶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를 이해하며 존재자와 관계 맺는, 인간 현존재의 초월은 그가 "근원적인 시간"(GP, 362)이라고 부른 "시간성"으로부터 가능하다. "시간성"의 시간은 간직함(旣在, Gewesenheit, Gewesen), 기대함(미래), 현재화함(현재)의 근원적인 단일함이다. 하이데거는 곧  간직함, 기대함, 현재화함의 단일함, 다시 말해 '간직하며 기대하는 현재화함'이 존재자와의 모든 관계 맺음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도구와 같은 존재자의 경우를 보자. 하나의 도구를 이 도구로서 규정하는 도구 성격은 "무엇 하는 데에", "무엇을 위해"란 그것의 "사용 사태(Bewandtnis)"(GP, 415)에 의해 구성된다. "사용 사태"가 하나의 도구 존재자가 그러한 존재자로서 무엇이며 어떻게 있는지(Was- und Wie-sein)를 구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용 사태"를 앞서 이해하는 "사용케 함(Bewendenlassen)", 곧 어떤 용도를 기대함인 "무엇 하는 데에 사용케 함" 속에서 ― 말하자면 "사용케 함"이 주는 "빛의 밝음"(GP, 416) 속에서 ― 도구와 같은 어떤 것과 만난다. 그러나 이 "무엇 하는 데에 사용케 함"은 언제나 동시에 "어떤 것을 가지고 사용케 함"이다. 도구와 같은 존재자를 사용하는 우리의 관계 맺음은 그와 같은 "어떤 것을 가지고 무엇 하는 데에 사용케 함"(참조 GP, 415), 즉 도구가 그러한 도구로서 현재화되는 ('∼을 가지고'를) 간직하며 ('∼하는 데에'를) 기대함으로부터 가능하다. 예를 들어 망치는 "그것을 가지고 망치질하는 데에 사용케 함" 속에서 이러저러한 무차별한 망치가 아니라 이 특정한 망치로서 현재화된다. 즉 이 특정한 망치로서의 망치와 만나는 관계 맺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이데거가 "시간성"으로 이해하는 간직함, 기대함, 현재화함의 단일함 또는 '간직하며 기대하는 현재화함'이다. 이러한 "시간성"의 단일함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손안의 가까운 도구인 망치는 다시금 무차별함 속에 잠기게 될 것이다. 망치와 같은 도구 존재자뿐만 아니라 존재자로서의 자기 자신 및 타인들과의 관계 맺음, 다시 말해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의 관계 맺음이 그와 같은 '간직하며 기대하는 현재화함'인 "시간성"으로부터 가능하다.
하이데거는 초월의 가능 근거인 '간직하며 기대하는 현재화함', 즉 기재, 미래, 현재의 단일함인 "시간성"은 "근원적으로 탈자적인 것(Au er sich)"(GP, 377)이라고 말한다. 즉 "시간성"은 자기 바깥에 "∼으로 빠져나감(Entr ckung)"(GP, 378)이란 성격의 "탈자"로부터 규정받는다는 것이다. "미래의 본질적인 점은 '자신으로 다가감(Auf-sich-zukommen)'에, 기재의 그것은 '무엇으로 되돌아(Zur ck-zu)'에 그리고 현재의 그것은 '무엇 곁에 체류함(Sichaufhalten bei)', 즉 '무엇 곁에 머물러 있음(Sein-bei)'에 놓여 있다. 시간성이 이러한 '무엇으로 향해', '무엇으로 되돌아', '무엇 곁에'에 의해 규정되는 한, 시간성은 자신 밖에 나가 있다"(GP, 377).  "시간성"을 특징짓는 자신을 넘어 '∼으로' "빠져나감"이란 "탈자"는 미리 기대하고 아직 간직하는 가운데 향하고 되돌아가며, 어떤 것을 현재화하는 단일함을 놓지 않고 붙잡는 견딤(aushalten, durchhalten)으로 진행된다. 이러한 견딤의 단일함 속에 "탈자"의 '∼으로(Wohin)'는 "지평"("본래적인 개방성", "개방된 여지")(GP, 378)을 연다. "시간성"의 "빠져나감"이 "지평을 개방하고 열린 채로 견지한다"(GP, 378). 그리하여 "탈자"의 단일함으로부터 규정받는, 미래, 기재, 현재의 근원적 단일함인 시간성은 "그 자체 탈자적-지평적"(GP, 378), "근원적인 탈자적-지평적 단일함"(GP, 429)이다. 이렇게 탈자적이자 지평적인 "시간성"을 바탕으로 존재를 이해하면서 존재자와 관계 맺는 초월이 가능하게 됨으로써 존재 이해 안에 열어 밝혀진 존재와 그 존재 진리를 빛으로 해서 드러난 존재자의 사이를 단일함 속에 구별하는 차이가 전개된다. 따라서 이 차이의 궁극적인 근거는 "시간성"에 있다.
초월의 근본 토대로서 초월에서 수행되는 차이의 근거인 "시간성"은, 초월에 존재 이해가 속해 있기에, 다시 말해 초월은 곧 존재자와 관계 맺으며 그것의 존재를 이해함이기에 존재 이해의 근본적 가능 조건 혹은 "도대체 존재와 같은 것이 그리로부터 이해될 수 있는 지평"(GP, 22)이라고 말해질 수 있다. 동시에 초월은 인간 현존재의 "근본 구성 틀", "존재"(GP, 452)를 이루는 만큼, 존재 진리의 지평인 "시간성"은 또한 인간이 그의 고유함, "특출난 점"을 얻는 영역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성"은 인간에 속하면서도 인간보다 근원적이다. 말하자면 "시간성"의 시간은 존재와 인간을 동시에 떠받치고 있다. Sein und Zeit의 1부의 제목, '현존재를 시간성에 근거하여 해석하고 시간을 존재에 대한 물음의 초월론적 지평으로 설명함'에는 이미 그러한 사태가 앞서 파악돼 있다.
이로써 앞서 제기한 물음, 즉 존재 이해와 존재자와의 관계 맺음 혹은 존재 이해 안에서 열어 밝혀지고 관계 맺음에서 드러난 존재와 존재자의 "함께 속함"의 중심인 '사이에', 그 둘의 '와'는 어떤 영역이며, 그 영역은 여는 것은 어떤 사태인가라는 물음은 다음과 같이 해명된다. '∼으로' 빠져나가는 탈자가 견딤의 단일함 속에 열어놓은, 탈자적 지평적 단일함의 "시간성"이 '사이에'를 이루며 그 '사이에'로부터 차이가 전개되고 있다. "시간성"에 대해 이러한 규정 속에 이해되고 있는 그것의 본질은 이후의 논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해질 수 있다. "시간성"이란 시간의 본질은 상이한 것을, 여기서는 존재 이해와 존재자와의 관계 맺음을, 단일하게 하는 데 있다. "시간성"의 시간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원이다. 원은 상이한 것의 어울림, 조화를 표현한다. 하이데거는 나중에 차이의 근거를 "내어나름"으로 사유하는 또 다른 곳에서 "내어나름"을 "원을 이룸(Kreisen)"(ID, 62)이라고 말한다.




3. 차이와 내어나름

하이데거의 앞선 사유의 길에서 열어 밝혀진 존재와 그를 통해 드러난 존재자 사이의 "구별"로 말해진 차이는 그 이후의 사유의 길에서, 무엇보다도 Identit t und Differenz에서 "내어나름"이란 차이의 근거에 이르게 되는 것과 함께, 뚜렷이 사유되지 않은, 그런 의미로 아직은 뒤로 물러나 있는 그것의 사태를 가까이에 생생하게 내보이게 된다. 하이데거는 여기서 '존재자의 존재', '존재의 존재자'에서의 소유격의 의미를 실마리로 차이의 사태와 그것의 근거로 진입해간다.
이에 따르면 존재는 언제나 존재자에 속하는 "존재자의 존재"며, 동시에 존재자는 언제나 존재와 관련된, 혹은 존재 덕분에 비로소 "오히려 무가 아니고 존재하는", "존재의 존재자"다. 이때 전자의 소유격은 목적격적인 소유격으로서 존재자를 존재하게 하는 존재를, 그리고 후자의 소유격은 주격적인 것으로서 존재 덕분에 존재하게 된, 존재에 속하는 존재자를 표현한다. 이러한 이중의 소유격을 통해 우선적으로 밝혀지는 것은 존재자(와의 차이에서)의 존재와 존재(와의 차이에서)의 존재자 사이의 차이란 서로에게 속함, "함께 속함"이란 점이다. 이러한 "함께 속함"으로서의,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는 이제 '존재자의 존재'에서의 목적격적인 소유격의 의미가 다음과 같이 밝혀짐으로써 사태 부합적인 내용을 펼쳐 보인다.
하이데거는 존재자의 존재란 "존재자를 존재하게 하는 존재(Sein, welches das Seiende ist)를 가리키며, 이때 'ist'는 타동의 의미, 이행, 넘어옴의 의미"(ID 56)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존재자(와의 차이에서)의 존재란 존재자를 "존재하게 함"이며, 이 "존재하게 함"은 존재자로 넘어오는 이행의 일어남이란 것이다. "여기서 존재는 존재자로 넘어옴의 방식으로 본재한다"(ID, 56) 그렇지만 존재자로 이행하는 이러한 존재의 넘어옴은 마치 존재자가 존재 없이 있다가 비로소 이 존재에 의해 관여되는 것처럼 그렇게 존재자 바깥에서 존재자로 들어서는 것이 아니다. 이 존재의 넘어옴은 존재가 언제나 다만 존재자에 속하는 존재란 그의 자리를 벗어나는 이행이 아니라, 스스로를 열어 밝히며 존재자를 넘어서 존재자로 이행하는, 혹은 "비은폐 안에 열려 펼쳐지며 비은폐된 것으로"(WhD, 144) 들어서는, 탈은폐하는 넘어옴이다.
한편, 이러한 탈은폐하는 존재의 넘어옴에서 존재자는 비로소 존재자로서 들어선다. 존재자를 넘어서 존재자로 이행하는 존재의 탈은폐가 존재자를 비로소 하나의 존재자로서 밝게 드러냄으로써 존재자이게 한다는 것이다. 존재자는 '존재자의 존재'인 존재의 탈은폐에서, 그것을 통해, 오히려 무가 아니고 존재하는 '존재의 존재자'가 된다. 이렇게 볼 때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의 넘어옴, 이행이란 존재의 탈은폐 혹은 존재의 진리로서, 존재자의 편에서는 "존재하게 함"의 사태다. "존재는 (존재자를) 넘어서 탈은폐하며 (존재자로) 넘어오며, 존재자는 그러한 넘어옴을 통해 비로소 그 스스로로부터 비은폐된 것으로서 도래한다(ankommen)"(ID, 56). 여기서의 "도래"란 비은폐 안에 "간수됨(sich bergen)", "그렇게 간수된 채 우리 가까이에 머묾(anw hren)", 그럼으로써 "존재자가 존재자로서 존재함(Seiendes sein)"을 말한다(ID, 56).
이와 같이 '존재자의 존재'인 존재는 존재자로 자신을 열어 밝히며 넘어오는 ≫동시에≪ 존재자는 그 존재의 열어 밝힘에서 '존재의 존재자'로 간수됨으로써, 존재와 존재자는 서로로부터 나눠지면서도, 번갈아 서로에게 향하며 함께 속한다. 이로써 앞서 두 가지 소유격의 의미를 통해 "함께 속함"이라고 미리 규정한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란, 탈은폐하는 존재와 그 존재의 탈은폐에서 존재자로서 들어서는 존재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서로로부터 갈라짐과 서로에게 향함의 단일함, 동시성의 사태로 드러나고 있다. 차이의 사태가 그와 같이 밝혀진다면, 그것을 인식의 실마리로 삼아 들어서야 할 차이의 근거 또는 '차이를 내는 것'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사태일 것이다. 우선 그 차이의 근거는 탈은폐하며 존재자로 넘어오는 존재와 그 존재의 탈은폐에서 존재자로서 들어서는 존재자 사이의 "사이에" 혹은 둘의 '와'를 이루는 "동일한 것(das Selbe)"이어야 한다. 존재의 넘어옴과 존재자의 도래의 중심인 그 '동일한 것'은 그리로부터 그리고 그리에로 그 두 차이나는 것을 단일하게 묶어주는 것이어야 한다.
하이데거는 그 "동일한 것"을 "사이-가름(사이-나눔)(Unter- Schied)"이라고 부른다. "사이-가름"이 탈은폐하는 존재와 도래하는 존재자가 그리로부터 서로로부터 나눠지면서도 ≫동시에≪ 서로에게 향함으로써 함께 속하는, 둘 사이의 중심인 "사이에"란 영역을 열어준다. 그러나 이렇게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서로로부터 나뉨과 서로에게 향함의 "사이에"로서, 그 둘을 동시에 "와"로써 묶는 "사이-가름"은 그 나뉨과 향함의 단일함, 동시성이 팽팽히 유지되도록 견지하는 "내어나름(Austrag)"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다. 존재의 넘어옴과 존재자의 도래란 두 상이한 것의 단일함, 동시성을 견지하는 "견딤(Aushalten)"(ID, 63)을 수행하는 "내어나름"이 "사이-가름"으로서 "사이에"의 영역을 밝게 트이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태 부합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 존재자를 넘어 존재자로 탈은폐하는 존재와 그 존재의 탈은폐에서 존재자로서 들어서는 존재자는, "내어나름"이 "견딤"의 단일함 위에서 "사이-가름"으로서 열어놓은 "사이에"'에서, 서로로부터 갈라지면서도 동시에 번갈아 서로에게 향함으로써 함께 속한다. "내어나름"에 의해, "내어나름"의 영역으로부터 존재와 존재자는, 마치 서로의 발을 잡고 돌 듯, 서로를 향해 번갈아 돌고 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내어나름"에 대해 "하나의 원을 이룸, 존재와 존재자가 서로를 향해 번갈아 돎"(ID, 62)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존재와 존재자의 단일함, "함께 속함", 즉 차이의 사태가 "내어나름"에 의해, "내어나름"의 영역("사이에")으로부터 전개되는 것으로 드러남으로써, 그러한 차이로부터 들어서야 할 그것의 근거 혹은 '차이나게 하는 것'은 "내어나름"이란 점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내어나름"을 차이의 최종적 근거로 사유하지 않는다. 그에게 "내어나름"은 아직 차이의 앞선 근거, "차이의 본질의 앞선 장소"(ID, 59)일 뿐이다. 이후의 논의에서 차이의 본질의 궁극적 장소는 "존재 사건"으로 밝혀지게 될 것이다.
"내어나름"에 의해 전개되는, 탈은폐하며 넘어오는 존재와 그 탈은폐의 밝음에서 존재자로서 들어서는 존재자의 단일함의 사태란 그렇게 자신을 열어 밝히며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간수하는, "밝게 트이며 간수함(lichtendes Bergen)"(WdW, 201)인 존재가 지배하는 사태다. 다시 말해 차이란 존재의 탈은폐 혹은 존재의 진리로서 전개되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와 존재자 사이에 팽팽히 전개되는 차이는 곧 "내어나름"의 영역으로부터, "내어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을 열어 밝히며 그 열어 밝힘에서 존재자를 드러내는 탈은폐의 존재가 내어지는 존재 진리의 사태인 셈이다. 따라서 차이에 대해 이렇게 말해야 한다 : "내어나름"이 탈은폐의 존재를 내줌으로써 그 탈은폐의 밝음에서 존재자로 들어서는 존재자와 존재의 단일함의 사태인 차이가 전개된다. 그렇게 본다면 "내어나름"은 존재자와의 차이로부터의 존재, 혹은 "존재와 존재자 사이에 지배하는 차이(Unterschied)"(WdW, 201)인 탈은폐의 존재가 내어지는, 존재 자신에 속하는 진리 방식과 지평이며, "차이로부터 사유된 존재"(ID, 57)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내어나름"의 방식으로 "내어나름"의 영역으로부터, 다시 말해 "내어나름"만큼 존재자와의 차이로부터의 존재, 즉 자신을 열어 밝히며 존재자를 드러내는 탈은폐의 존재가 내어진다는 이 같은 사실에는 뚜렷이 말해지지 않은, 그러나 사유돼야 할 다음의 사실이 함께 말해지고 있다. "내어나름"에서 내어진 탈은폐의 존재란 우리를 요구하며 관여하는, 우리에게로 열어 밝혀진 현존(Anwesen)의 존재, 그렇게 밝게 드러난 진리의 존재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그 존재는 존재자와 관련해서는 자신의 열어 밝힘에서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간수하는 "존재하게 함"으로서 "모든 존재자보다 멀리 있지만", 동시에 우리들 자신인 인간에게 내어진 현존의 존재로서 "어떤 존재자보다 인간 가까이" 머무는 존재다. 우리 가까이에 머무는 현존의 존재가 그처럼 "내어나름"의 영역으로부터 내어지는 만큼, 존재를 사유함으로써, 혹은 끊임없이 존재를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본질로, 즉 "존재의 목자" 혹은 "존재자에서 존재가 실현되는 틈새(Bresche)"(EM, 172)로 존재하는 인간 현존재 또한 그 "내어나름"의 영역에 들어서서 그것을 떠맡아야 한다. 우리들 자신인 인간이 그렇게 "내어나름"의 영역에 들어서서 그리로부터 내어지는 존재를 받아들임으로써 존재는 존재로서, 다시 말해 밝게 드러난 진리의 존재로 본재하며, 동시에 인간은 존재의 진리를 지키는(h ten) 목자(Hirt)로서의 그의 고유함을 얻는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우리는 결국 "내어나름"을 차이에서 지배하는 존재 자신의 지평과 방식이자 동시에 그리로부터 내어지는 존재를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이 그의 고유함에 이르는 영역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로써 '탈자적-지평적 단일함'인 "시간성"의 시간에 대한 규정을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앞에서 "탈자"의 단일함으로부터 밝게 트이게 된 "개방된 여지"인 "시간성"은 존재 진리의 지평을 이루는 동시에 차이를 수행하는 또는 존재자와 관계 맺으며 존재를 이해하는 인간 현존재의 "근본 구성 틀"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해진 바 있다. 우리는 이제 여기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그러나 하나의 물음으로 모여질 물음을 제시하고자 한다 : i) "시간성"의 시간에 대한 규정이 "내어나름"에서 다시금 동일하게 말해질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내어나름"의 영역인 "사이에'"를 앞서 "시간성"으로 불렀던 시간의 다른 이름으로, 그 '사이에'를 여는 "내어나름"을 시간의 본질로 보아야 하는가? ii) 또한 "내어나름"이 그처럼 존재자와의 차이에서의 존재가 내어지는 지평으로서 동시에 그 내어지는 존재를 받아들이는 인간이 들어서야 할 영역이라면, "내어나름"은 하이데거가 존재와 인간을 "함께 속하게 하는 것", 존재와 인간이 동일한 곳에 함께 속한다는 의미로 동일한 동일성의 본질 유래로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존재와 시간을 하나로 묶는 '와'로서 사유하는 "존재 사건"과 어떤 관련 안에 놓여 있는가? 우리는 나중의 두 번째 물음부터 해명을 시도하기로 한다. 이를 위해서는 "존재 사건"과 그것에 고유하게 속하는 사태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4. 존재 사건과 내어나름

존재와 인간은 서로의 본질로부터, 서로에게 속함의 방식으로, 함께 속한다. 존재는 자신을 열어 밝히기 위해 혹은 진리로서 본재하기 위해 그 열어 밝힘의 장소로서 인간의 사유함을 필요로 한다. 존재는 이 필요로부터 인간의 존재 사유를 자기의 것으로 사용하여 거기에 자신을 내맡긴다. 그렇게 인간의 사유에 내맡김으로써 존재는 존재로서, 즉 그의 고유함, "근본 특성"인 진리로서 본재한다. 숨김으로부터 자신을 환하게 드러낸 존재는 현존(Anwesen)의 존재로서 우리들 자신인 인간 가까이에(an) 본재한다(wesen).
존재의 진리는 또한 인간이 그의 고유함을 얻는 영역이다. 인간은 그의 사유함에서 밝게 드러난 존재의 진리를 통해 비로소 존재자 가운데서 존재자와 관계 맺을 수 있고, 그러한 존재자로서 도대체 존재할 수 있다. 그러기에 존재 사유는 인간에게 속하지만, 인간을 그의 본질에 이르게 한다는 의미에서 인간보다 근원적이다. 즉 존재 사유는 "인간의 속성으로서 인간이 갖는 한 태도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인간을 갖는 일어남(Geschehnis)이다"(참조 EM, 150). 인간 또한 그와 같은 그 자신의 내밀한 필요로부터 존재에 대한 탈자적 응대의 관련으로 있으며, 그 "응대의 관련"(ID, 18) 자체다. 따라서 인간의 사유함을 사용하는 존재의 "필요해서 사용함(Brauchen)"이란 단순히 이용하고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적인 사용함"으로서 인간의 사유를 "본질에 들어서게 함이며 본질에서 지킴(Wahrung)" (WhD, 114)이다. 때문에 존재의 요구는 인간에게는 강요나 폭력이 아니라 "존재의 목자", "존재의 이웃"( H, 29)인 그의 본질에 이르게 하는 호의며 선물이다. 그래서 "존재의 호의에 대한 메아리"(WiM, 49)로서의 존재 사유는 자신을 사유하도록 내주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본질에 이르게 한 것(존재)을 잊지 않고 끊임없이 간직하는 "지킴"과 그것에, 귀 기울이며 마음을 쏟는다는 의미로, 자신을 바치는 "감사함"으로서 수행된다(WhD, 79 이하).
존재와 인간은 서로를 향한 필요로부터 혹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내밀한 유한성으로부터 존재의 진리를 중심으로 ― 존재는 자신의 열어 밝힘을 위해 그 진리의 장소로 불러 세운(요구한, 필요해서 사용한, 자기의 것으로 삼은) 인간의 사유함에 자신을 내맡기고 동시에 인간은 사유함을 통해 그리에로 자신을 바침으로써 ― 서로에게 속하며, 그렇게 서로 속함의 방식으로 함께 속한다. 존재와 인간이 그리로부터 그리에로 함께 속하는 "동일한 것"인 존재의 진리를 하이데거는 "존재 사건"으로 부른다. 존재의 진리가 이렇게 호명됨과 함께 존재보다는 그를 위해 물러나 있는, 존재가 존재로서 있는 진리 자체, 탈은폐 자체가 또는 "함께 속함"보다는 "함께 속하게 하는 것"이 뚜렷이 사유된다. "존재 사건" 안에서, 그것을 통해, 존재와 인간은 ≫인간에게로≪ 열어 밝혀진 존재와 ≫존재를 향한≪ "응대의 연관" 또는 인간 본질에 대한 연관과 존재의 진리에 대한 연관으로서 함께 속하고, 그렇게 "동일한 것"에 함께 속한다는 의미로 동일하다. 그리하여 존재 사건이 존재와 인간의 '사이에', 둘을 하나로 묶는 '와'로서 존재와 인간을 "함께 속하게 하는 것", 다르게 말해 존재의 진리에 대한 연관인 우리들 자신인 인간이 그 안에 살고 있는 "가까움"( H, 20/21, 29, 37)인 "함께 속함"에 이르게 한다는 의미로 "저 가까움에서 가장 가까운 것"(ID, 26)이며, 동일성의 본질 유래를 이룬다.
이렇듯 "존재 사건"이 존재와 인간을 "함께 속하게 하는 것"인 만큼, 여기에는 다음의 사실이 함축돼 있다고 말해야 한다. 즉 차이의 앞선 근거로서 존재자와의 차이로부터 존재를 내줌으로써 차이를 전개하는, 동시에 그 내어지는 존재를 끊임없이 받아들이는 인간이 들어서야 할 "내어나름"과 "존재 사건"은 따로 떨어진 상이한 두 사태가 아니라 어떻게든 하나로 어울려야 한다는 점이다. Identit t und Differenz의 서론에서 밝히는 하이데거의 다음과 같은 말은 분명하게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동일성과 차이의 함께 속함이 이 글에서 사유돼야 할 것으로 보여진다. 차이가 얼마만큼 동일성의 본질에서 유래하는지는 존재 사건과 내어나름 사이에 지배하는 어울림에 귀기울임으로써 독자 스스로가 찾아야 한다"(ID, 8).
여기서 하이데거는 "내어나름"에서 전개되는 차이는 어떻게든 "존재 사건"에 고유하게 속하는 동일성의 본질에서 유래하며, "내어나름"과 "존재 사건"은 하나로 어울린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차이가 동일성과 함께 동일성의 본질 유래인 "존재 사건"에 속하는 한, "존재 사건"과 "내어나름" 사이의 어울림은, 차이를 전개하는 "내어나름" 또한 "존재 사건"에 속하는 방식의 어울림이어야 한다. 그와 같이 "내어나름"이 "존재 사건"에 속함으로써 "존재 사건"은 "차이의 본질의 앞선 장소"인 "내어나름"에서 멈출 수 없는 차이의 최종적인 본질 유래를 이룬다. 우리는 이로써 "존재 사건"이 동일성과 차이로서의 존재 진리라고 앞질러 확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는 아직은 보다 사태 부합적인 해명이 뒤따라야 할 주장으로 남는다.


5. 존재 사건에 속하는 시간-공간과 내어나름

앞서 "내어나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해진 바 있다 : "사이-가름"으로서 "사이에"를 열고, 그리로부터 존재의 넘어옴과 존재자의 도래 사이의 단일함을 견지함으로써 차이를 전개하는 "내어나름"은 존재자를 드러내며 우리에게로 열어 밝혀진 존재(현존)가 내어지는 지평과 방식인 동시에 그리로부터 내어진 존재를 받아들이는 인간이 들어서 떠맡아야 할 영역이다. "내어나름"이 그와 같이 우리에게로 열어 밝혀진, 우리 가까이에(an) 머무는(wesen) 현존(Anwesen)의 존재의 진리 장소("an")인 동시에 존재를 향해 열려 있는 인간 현존재(Dasein)의 "거기에(da)"를 이룸으로써 존재와 인간을 동시에 떠받치는 한, "내어나름"은 존재와 인간을 "함께 속하게 하는 것", 존재와 인간의 동일성의 본질 유래인 "존재 사건"에, 그것의 고유한 방식과 영역으로, 속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내어나름"이 "존재 사건" 밖에 놓인다면, 존재와 인간은 함께 속할 수 없고, 그 경우 존재는 열어 밝혀진 진리의 존재로서 본재하지 않으며 또는 비진리로서 아직 밖에 머물며, 즉 감춰지며, 인간은 그의 본질인 존재의 진리에 대한 연관 자체 혹은 "존재의 목자"로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차이의 본질의 앞선 장소"인 "내어나름"이 그처럼 "존재 사건"과 하나로 어울림으로써 동일성의 본질 유래인 "존재 사건"은 차이의 본질의 최종적인 장소다. 다시 말해 "존재 사건"은 존재와 존재자와 관련해서는 차이의 본질로서 "내어나름"의 방식으로 그리로부터 차이를 전개하고, 즉 자신을 열어 밝히며 존재자를 간수하는, "밝게 트이며 간수함"인 존재를 내주고, 존재와 인간과 관련해서는 동일성의 본질로서 존재와 인간을 함께 속하게 하는 존재의 진리 사태다. 이로써 우리의 논의를 이끄는 두 가지 물음 중 후자의 물음, "존재 사건"과 "내어나름"은 어떤 관련 안에 놓여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일정하게, 다시 말해 "내어나름"이 얼마만큼 "존재 사건"에 속하는지에 관해 해명한 셈이다. 그렇지만 "내어나름"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 사건"에 속함으로써 하나로 어울리는가? 우리는 앞서 "시간성"이란 시간의 성격에 대한 규정, 즉 존재 진리의 지평이자 인간이 그의 고유함을 얻는 영역이란 점이 "내어나름"에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제기한 우리의 첫번째 물음, "그렇다면 '내어나름'을 시간의 본질로 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명을 시도함으로써 여기에 답하고자 한다. 우리는 결국 이를 통해 다음의 물음을 묻고 있는 셈이다. "내어나름"과 "존재 사건" 사이의 관련이란 혹 "내어나름"이 시간의 고유함으로써 '그리로부터 내어지는 존재와 함께' "존재 사건"에 속함으로써 하나로 어울리는 관련인가? 이 물음에 결정하기에 앞서 우리는 다시금 "존재 사건"에 속하는 "내줌(Reichen)"의 "시간-공간(Zeit-Raum)"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하이데거는 여기서 자신을 열어 밝히며 존재자를 드러내는 존재의 진리를 존재의 보내줌(geben, schicken)으로, "존재 사건"을 "존재를 보내주는 것"으로 사유한다. 즉 "존재 사건"이 "Es gibt Sein"의 'Es'이며, 존재는 'Es'의 보내줌(geben)에 의해 "보내진 것"(Gabe)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Es"인 "존재 사건"으로부터 보내지는 존재, 즉 자신의 열어 밝힘에서 존재자를 드러내며 우리에게로 이른, 내어진 현존(Anwesen)의 존재는 어디로부터, 어떤 방식으로 내어지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이 바로 "내줌"의 "시간-공간"이다.
하이데거는 '탈자적-지평적 단일함'으로 사유하면서 "시간성"이라고 부른, 미래, 기재, 현재의 단일함의 "개방된 여지"를 이번에는 "시간-공간"으로 호명하면서, 그 "시간-공간"이란 시간의 본질, 다시 말해 "시간-공간"을 밝게 트이게 하는 것을 현존을 내주는 "내줌"이라고 말한다. 앞서 탈자적-지평적인 "시간성"을 자기 밖에 '∼으로' 빠져나감이란 "탈자"에 의해 밝게 트이는 것으로 사유한 하이데거는 이제 "우리에게로 이름", "우리를 관여하며 가까이 머묾"이란 의미의 현존을 내주는 "내줌"이 "시간-공간"의 시간을 열어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탈자의 "시간성"에서는 미래, 기재, 현재가 각각 "무엇에로 향해(Auf-zu)", "무엇으로 되돌아(Zur ck-zu)", "무엇 곁에(Bei)"로서 ≫∼으로≪의 탈자로부터 규정받는 반면(GP, 377), 여기서는 미래, 기재, 현재의 본질적인 점이 ≫우리에게로≪ 이르는 현존을 내주는 "내줌"에 있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현재에서 "우리에게로 이름", "관여함"이란 의미의 현존이 내어지며, 미래, 기재에서도 또한 그와 같은 의미의 현존이 내어지고 있다. '더 이상 현재가 아닌' 기재는 단순히 측량될 수 있는 시간의 흐름에서 과거 어느 시점에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고유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미치며, 관여하며, '아직 현재가 아닌' 미래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로-도래함(Auf-uns-Zukommen)"의 현존이 우리에게 내어진다(ZS, 13). 이러한 미래, 기재, 현재는 서로를 향해 자신을 내주는 방식으로 단일하게 어울려 있다. '아직 현재가 아닌' 미래는 우리에게로 이르면서 '더 이상 현재가 아닌' 기재를 내주며, 기재는 거꾸로 도래에게 자신을 넘겨준다. 이렇게 번갈아 서로에게 향하는 미래와 기재의 관련은 또한 동시에 현재를 내준다. 미래, 기재, 현재에서 서로를 향해 자신의 현존을 내주는 이러한 "내줌"으로부터 개방된 여지인 "시간-공간"의 단일함이 밝게 트이게 된다. "내줌"이 미래, 기재, 현재에서 그때마다의 그것들의 고유한 현존이 내어지게 하며, 그것들을 서로로부터 갈라지면서도 동시에 서로에게 향하게 함으로써 "시간-공간"을 여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내줌"이 열어놓은 "시간-공간"은 도래하는 것의 현존, 기재하는 것의 현존, 현재하는 것의 현존 등 모든 현존이 내어지는 지평을 이루게 된다. 다시 말해 자신의 환한 밝음 아래 존재자를 드러내며 우리에게로 이른, 우리를 관여하며 가까이에 머무는 존재가 "내줌"의 방식으로, 그리고 "내줌"의 "시간-공간"의 영역으로부터 내어지는 것이다. 또한 존재자와 관련해서는 "존재하게 함"("현존하게 함")인 존재 또는 존재자와의 차이에서의 존재가 그처럼 "내줌"의 영역으로부터 우리 가까이에 내어지는 만큼, 끊임없이 "현존의 관여"(ZS, 12)를 받는, 다시 말해 자신에게로 이른 존재를 받아들이는 인간은 그 "내줌"의 영역에 들어서 그것을 떠맡아야 한다 : "현존으로서의 존재에는 우리들 인간에게 미치는 관여가 알려지고 있다. 우리들은 이 관여를 받아들이고 떠맡음으로써 인간임의 특출함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 현존의 관여를 떠맡는 것은 내줌의 영역에 들어서 있음에 연유한다"(참조 ZS, 23/24). 그렇게 "내줌"의 영역에 들어서서 그리로부터 내어지는 존재를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은 그 자신의 특출함으로, 즉 존재를 지키는 자로 그리고 존재는 우리 가까이에 머무는 진리의 존재로 본재한다. 그리하여 "내줌"의 "시간-공간"이란 시간은 존재가 내어지는 지평인 동시에 인간이 그의 본질을 얻는 영역을 이룬다.
그렇지만 "내줌"의 시간 스스로가 존재를 내어주는 것은 아니다. "내줌"의 시간으로부터 내어진 존재는, 앞서 말한 바처럼, "존재 사건"이 "보내준 것"(Gabe)이다. "존재 사건"이 "내줌"의 방식으로, "내줌"의 영역으로부터 존재를 보내는 것이다. 존재가 그리로부터 보내지는 "시간-공간"을 여는 "내줌"은 다시금, "존재 사건"이 존재를 보내주는 지평과 방식으로서, "존재 사건"에 속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보내줌(geben, schicken)"은 "내줌"에서 그리고 "내줌"은 다시금 "보내줌"과 함께 "존재 사건"에서 연유한다. 그리하여 "Es gibt Sein"의 "Es"인 "존재 사건"의 "geben"은 존재의 "보내줌(schicken)"이자, 존재가 그리로부터 내어지는 시간의 영역을 밝게 트이게 하는 "내줌(reichen)"이다. "존재 사건" 안에서, 그것을 통해, 존재는 시간의 열려진 영역에 내맡겨지고, "내줌"의 시간은 존재가 보내지는 존재 진리의 영역으로서 바쳐짐으로써, '존재'와 '시간'은 그 "동일한 것"인 "존재 사건"에 함께 속한다. "존재 사건"이 존재와 시간을 "함께 속하게 하는 것", 말하자면 존재와 시간, 시간과 존재를 하나로 묶는 "와"로서 존재와 시간이란 "두 사실(Sache)을 서로 향하게 하고(zueinander halten), 둘의 관련을 견디는(aushalten) 사태(Sachverhalt)"(ZS, 4)다.



6. 맺음말

"존재 사건"에 속하는 "내줌"의 시간에 대한, 말하자면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 사건'으로 물음의 위치가 바뀐 사유의 길에서의 시간에 대한 하이데거의 사유를 이와 같이 논의하는 것을 통해 다음의 사실이 뚜렷해졌다. 즉 "내줌"에 의해 밝게 트이게 된 "시간-공간"의 시간은 존재자를 드러내며 우리 가까이 이른 존재가 그리로부터 내어지는 지평인 동시에 인간이 들어서서 떠맡아야 할 영역이다. 이로써 '탈자적-지평적 단일함'인 "시간성"과 "내어나름"의 '사이에'가 동일하게 보여주는, 존재와 인간을 동시에 떠받친다라는 성격이 "내줌"의 "시간-공간"의 시간에서 다시금 확인되고 있다. 이에 따라 앞서 제기한 우리의 물음은 다음과 같이 보다 긴박하게 물어질 수 있게 된다. "탈자"의 단일함에 의해 열린 '탈자적-지평적 단일함'인 "시간성"의 시간 또는 "존재 사건"의 "내줌"에 의해 밝게 트인 "시간-공간"의 시간과 동일하게 존재가 내어지는 지평이자 인간이 그의 본질을 얻는 곳으로 사유된 "내어나름"의 "사이에"'는, 하이데거가 사유의 길에서 그때마다 다르게 불렀던 시간의 다른 이름이며 "내어나름"은 "탈자", "내줌"과 함께 시간의 본질인가? 그리하여 "내어나름"은 시간의 고유함으로서 그리로부터 내어지는 존재와 함께 "존재 사건"에-그것의 고유한 방식과 지평으로서-속하는가?
우리는 여기서 확정적인 대답을 피한 채로 이를 여전히 물음으로 남겨 두고자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탈자"의 "시간성"과 "내줌"의 "시간-공간"에 대해 말해진 규정이 "내어나름"의 "사이에"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기에, "내어나름" 또한 마찬가지로 시간의 고유함이다라는 방식의 해명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물음의 사태 부합적인 해명을 위해서는 하이데거의 사유의 길에서 동일하게 물어진 하나의 물음인 존재의 의미, 존재의 진리에 대한 물음을, 그 동일함 속에서 변화를 동시에 그 상이함 속에서 견지되는 동일함을 놓지 않고 파악하는 철저함 속에서, 숙고하는 사유가 아직도 필요하다 :

"들어서서 오름이 길이라고 불린다면, 이 '길'에서는 언제나 '존재(Seyn)의 의미'에 대한 동일한 물음이, 오직 그 물음만이 물어지고 있다. 그 때문에 [길에 들어서 있기에] 물음이 서 있는 위치는 끊임없이 달라진다. 모든 본질적인 물음은, 그때마다 보다 근원적으로 물어지려면,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점진적인 '발전'이란 있을 수 없다. 이미 이전의 것에 이후의 것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 이전-이후의 관계란 더욱이 있을 수 없다. …… '변화'란 본질적이어서, 하나의 물음이 그때그때마다 그 물음의 위치로부터 철저하게 물어질 때만이 비로소 그 폭이 규정될 수 있다(BzP, 84 / 85).

우리는 그러한 사유에 우리의 물음에 대한 결정을 미루면서, "형이상학의 시기에 존재의 역사는 시간의 사유되지 않은 본질에 의해 철저히 지배되고 있다"(WiM, 18)라는 말을 함께 떠올리며, 하이데거의 다음과 같은 말이 말하고 있는 것에 귀기울인다. "오히려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를 그것의 본질의 앞선 장소인 내어나름에서 토의함으로써 존재의 역운을, 시원에서부터 그 완료에 이르기까지, 꿰뚫고 있는 어떤 것이 나타나고 있기조차 하다"(ID, 59 / 60).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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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m Wesen des Grundes(WG). Frankfurt a. M.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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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nf hrung in die Metaphysik(EM), 전집 제40권, Frankfurt a. M.         1983.
Beitr ge zur Philosophie(BzP), 전집 제65권, Frankfurt a. M.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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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it und Sein>(ZS) in Zur Sache des Denkens, 전집 제14권,         T bingen 1976,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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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상학} (철학과 현상학 연구 제12집), 한국현상학회편, 1999, 197-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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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 하이데거의%20예술작품의%20근원%20해설 [철학 강의]

           하이데거의 <예술작품의 근원> 해설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중간 시기를 오늘날 되돌아 볼 때, 우리 세기에 소용돌이쳤던 그 사건 와중에서의 이러한 짧은 휴지기가 혹자에게는 엄청난 정신적 결실의 한 시대로서 나타나 보일 것이다. 제 일차 세계 대전이라는 커다란 파국이 있기 이전에 이미 앞날에 대한 전조가 특히 회화와 건축예술에서 드러나 보여져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시대의식은, 일차 세계대전의 과학기술전(戰)이 문화의식 및 자유주의 시대의 진보적 확신을 넘어서 가져왔던 무거운 충격과 함께 대격변을 겪었다. 이 시기의 철학 내에서는, 19세기 후반 칸트의 비판적 관념론의 부흥에서부터 자라나와 군림하고 있던 철학이 일격에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는 사실에 일반적인 생활감정의 변화가 각인되었다. "독일 관념론의 붕괴"는, 파울 에른스트(P. Ernst)가 그 당시에 선풍을 불러일으켰던 한 책에서 그것을 선포했듯이, 오스발트 슈펭글러(O. Spengler)의 《서구의 몰락》을 통해 하나의 세계사적 지평 속으로 잠재워졌다. 지배적인 신칸트주의에 대한 비판을 수행했던 세력들은 두 사람의 강력한 선구자를 두고 있었으니, 플라톤주의와 그리스도교에 대한 니체의 비판과 그리고 사변적 관념론의 사변철학에 대한 쇠뢴 키에르케고르의 번쩍이는 공격이 그것이었다. 그것은 신칸트주의의 방법적 의식에 대립적인 태도를 취했던 두 개의 새로운 구호였다. 그 중의 하나가 삶, 특히 역사적 삶의 비합리성이라는 구호였으며 이에 해당하는 사람들로서는 니체와 베르그송, 심지어 위대한 철학사가인 빌헬름 딜타이까지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구호는 쇠뢴 키에르케고르의 저작들에서부터 울려 나왔던 실존이었다. 19세기 전반에 등장한 이 덴마크 사상가는 디데리쉬의 번역을 통해 비로소 독일에서 영향을 끼쳤다. 키에르케고르가 헤겔을 실존함을 잊고 지냈던 반성철학자라고 비판했었듯이, 사람들은 이제, 철학을 전적으로 학문적 인식의 한 정초 속으로 예속시켰던 신칸트주의 방법론의 자기 만족적인 체계의식을 비판하였다. 또한 관념론 철학에 맞서 키에르케고르가 한 사람의 그리스도교 사상가로서 출현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그의 출현은 곧,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이른바 변증법적 신학의 철저한 자기 비판이기도 했다.
자유주의적 문화숭배와 지배적인 강단철학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에 대해 철학적 표현을 부여했던 사람들 중에는 혁명적 천재인 청년 마르틴 하이데거가 있었다.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젊은 사강사로서의 하이데거의 출현은 일차 세계대전이 끝난 몇 년 동안에 참으로 신기원을 이룩하였다. 이곳에서 철학함의 본원적인 하나의 세력이 피어오르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강단으로부터 떵떵 울려나왔던 거북스럽고 거만하며 위압적인 언어를 궁지로 몰아냈다. 1923년에 하이데거가 마르부르크 대학으로 초빙되어 그리로 들어갔던, 동시대의 프로테스탄트 신학과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던 결실 있는 접촉으로부터 하이데거의 주저인 《존재와 시간》이 자라 나왔고, 이것은 1927년, 단번에 여론의 넓은 범위를, 철학을 넘어 일차 세계대전의 충격의 근저에까지 다가갔던 몇몇 새로운 정신들과 매개시켰다. 그 당시 사람들은 마음을 격동시킨 철학함의 연대성을 실존철학이라고 명명했다. 그것은 곧 비판적 열정, 즉 묵은 시대의 무사태평한 교양세계에 대한 격렬한 반항의 열정이었고, 갈수록 거세게 획일화 되어가는 산업사회와 그 사회의 모든 통신기술 및 여론형성으로 인한 모든 개별적 생활형태들의 균등화에 대항하는 열정이었다. 이러한 열정들은 하이데거의 체계적인 처녀작으로부터 동시대의 독자를 격렬하게 사로잡았다. '그들', '잡담', '호기심' 등과 같은 비본래성의 빠져있음의 형식들에 대해 하이데거는, 스스로 자기의 유한성을 자각하는 가운데 이 유한성을 결단적으로 받아들이는 현존재의 본래성의 개념을 맞대어 놓았다. 여기서 죽음이라는 태고적인 인류의 수수께끼와 더불어 철학적 숙고의 중심 속으로 옮겨졌던 실존적인 엄숙함(Ernst), 자신의 실존에 대한 본래적인 "선택"에로의 부름과 더불어 교양과 문화의 가상적인 세계를 붕괴시킨 중압감은 마치 일종의 잘 비호되고 있던 대학가의 평온 속으로의 습격과도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대학 세계의 한 과격한 문외한의 외침이 아니었으며, 키에르케고르나 니체의 풍을 따른 한 대담한 예외적인 실존의 외침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그 당시 독일 대학들 가운데 있었던 가장 성실하고 가장 양심적인 철학 학파의 학생, 즉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의 정초를 자신의 지속적인 목표로 추구했던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적 연구에 가담하고 있던 학생이었다. 하이데거의 새로운 철학적 기획 역시 "사태 자체에로!"라는 현상학적 구호 밑에 내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태란, 가장 깊숙이 은닉된, 물음으로서는 대개 망각된 철학의 물음인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었다. 이러한 물음을 묻는 법을 배우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의 존재를 종래의 형이상학을 통해 일종의 유한하고 항상 존재적인 존재로부터 그저-유한한 것으로서 이해하는 대신에 오히려 그것을 존재론적으로 적극적으로 규정하는 길을 걸어나갔다. 인간 현존재의 존재가 하이데거에게서 얻어냈던 존재론적인 우위는 그의 철학을 "기초 존재론"이라고 규정했다. 유한한 인간 현존재의 존재론적인 규정들을 하이데거는 실존의 규정들, 즉 실존범주들이라고 지칭했으며, 이러한 근본개념들을 그는 방법적인 결정을 가지고 종래의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인 눈앞의 것의 범주들에 대해 맞세웠다. 인간 현존재가 자신의 본래적인 존재를 고정 가능한 '눈앞에 있음'에서 갖지를 않고 오히려, 염려의 움직여짐 __ 이것을 통해 인간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에 있어 자신의 고유한 미래에 관계되어 있다 __ 에서 갖는다는 사실, 이것은 곧 하이데거가 존재의 의미에 대한 옛 물음을 새롭게 내세웠을 때, 그가 놓치지 않으려고 했던 바 그것이다. 인간 현존재는, 그가 자기 자신을 자신의 존재를 향해 이해한다는 사실로 인해, 탁월하다. 자신의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결코 멈추게 할 수 없는 그런 인간 현존재의 유한성과 시간성 때문에,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하이데거에 있어서 시간의 지평에서 규정되어 있었다. 학문이 곰곰히 재고 측정하면서 존재적인 것으로서 확정짓는 바 그것, 즉 눈앞의 것은, 모든 인간성 너머로 펼쳐지는 영원한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적인 시간성의 중심적인 존재확신에서부터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하이데거의 새로운 출발이었다. 그러나 존재를 시간으로서 사유하려는 그의 목표는, 《존재와 시간》이 곧바로 해석학적 현상학으로서 지칭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식으로, 가리워진 채로 남게 되었다. 왜냐하면, 자기이해가 이러한 물음의 본래적인 기초를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초에서부터 보자면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존재이해는 인간 현존재에 활동적으로 관여된 근원적인 존재이해의 한 빠져있음의 형식으로서 증명된다. 존재란 그저 순수한 현전성과 현재적인 눈앞에 있음이지만은 않다. 유한한-역사적인 현존재가 본래적인 의미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난 다음 세계기획투사에 있어서 손안의 것이 자신의 자리를 갖게 되며 마지막에야 비로소 그저-눈앞의 것이 그 자리를 갖는다.
자기이해의 해석학적인 현상으로부터는 그러나 이제 역사적이지도 않고 그저 눈앞에 있지도 않은 여러 가지 존재형식들은 어떠한 합당한 장소도 갖지 못한다. 단순히 고정 가능한 눈앞의 것일 뿐인 수학적 사태관련들의 무시간성, 우리 자신까지도 철저히 지배하면서 우리를 무의식에서부터 규정하는 그러한 스스로 자신의 범위 안에서 항상 반복하는 자연의 무시간성, 마지막으로는 모든 역사적인 간격들을 넘어 스스로 활모양으로 굽는 예술의 무지개의 무시간성은 하이데거의 새로운 단초를 열었던 해석학적 해석가능성의 한계들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였다. 무의식적인 것, 수, 꿈, 자연의 성함, 예술의 놀라움 __ 이 모든 것들은 마치 한계 개념들의 한 유형에 있어서처럼, 자기를 역사적으로 인지하는 그리고 자기를 자기 자신을 향해 이해하는 그런 현존재의 가장자리에서만 파악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하이데거가 1936년 몇몇 강연들에서 예술작품의 근원을 다루었을 때, 그것은 하나의 놀라움을 의미했다. 비록 이러한 연구업적이 1950년에야 비로소 《숲길》이라는 선집에 첫번째 작품으로 실려 출간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영향력이 파급되기 시작한 것은 이미 훨씬 이전이었다. 왜냐하면 오래 전부터 하이데거의 강의와 강연들은 도처에서 하나로 팽팽하게 긴장된 관심을 적중시켰으며, 순식간에 하이데거를 그 자신에 대해 아주 지독하게 풍자된 소문으로 데려갔던 광범위한 파급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예술작품의 근원에 대한 강연들은 일종의 철학적 선풍을 뜻했다. 이러한 철학적인 선풍이란, 예술이 이제는 자신의 역사 속에 있는 현존재의 자기이해의 해석학적 근본단초 속으로 편입되었다는 사실, 정말 예술이 심지어는 이러한 강연들에 있어서 __ 횔덜린과 게오르그의 시작적 믿음 __ 전체 역사적 세계화의 정초행위로서 이해되었다는 사실뿐만이 아니었다. 하이데거의 새로운 사유의 시도가 의미했던 본래적인 선풍이란, 이러한 주제에 있어 과감히 나타나오는 뜻밖의 새로운 개념성이었다. 거기에서 이야기되었던 것은 세계와 대지에 관해서였다. 이제 세계라는 개념은 예전부터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주도 개념들 가운데 하나가 되어왔었다. 현존재 기획투사의 연관전체로서의 세계는 인간 현존재의 염려의 모든 기획투사에 대해 선행적으로 있었던 지평을 형성했다. 하이데거 자신은 이러한 세계개념의 역사를 간략히 기술했고, 특히 이러한 개념의 신약성서적 인간학주의적인 의미를, 그가 이 개념 자체를 사용했던 식으로, 눈앞의 것의 총체라는 개념으로부터 분명하게 구분해 내어 역사적으로 합법화시켰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제, 이러한 세계의 개념이 대지라는 개념 속에서 하나의 대립개념을 유지시켰다는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그 안으로 인간의 자기해석이 생겨나는 그런 한계로서의 이러한 세계의 개념이 인간 현존재의 자기이해에서부터 명증적 직관에로 끌어올려질 수 있었던 데 반해서, 대지라는 개념은 마치 고작해야 시작(詩作)의 세계에서나 거주권을 가질 수 있을 그런 일종의 신화적이고 영지주의적인 원음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히 횔덜린의 시작(詩作)이었다. 그 당시 하이데거는 정열적인 기세로 횔덜린의 시작에로 달려들었고 여기에서부터 그는 대지라는 개념을 자신의 고유한 철학함 안으로 옮겨왔다. 그런데 어떠한 권리로! 어떻게 자신을 자신의 존재를 향해 이해하는 현존재가, 세계-내-존재가, 즉 모든 초월론적 물음의 출발점이, 대지와 같은 하나의 개념을 가지고서 하나의 존재론적인 관련 안으로 발을 내디딜 수가 있을까?
이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새로운 단초는 확실히 독일 관념론의 유심론적 형이상학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었다. 인간 현존재의 '자신을-자신의 존재로-향해-이해함'은 헤겔의 절대정신의 '자기-앎'이 아니다. 그것은 어떠한 자기기획투사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의 고유한 자기이해 속에서 다음의 사실을 깨닫는다. 즉 그것은 자기 자신의 주인도 아니고 자신의 고유한 현존재의 주인도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존재자 한가운데서 자기를 앞서 발견하고 그것이 자기를 앞서 발견한다는 식으로 그렇게 자기를 떠맡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던져진 기획투사이다. 그것은 《존재와 시간》의 가장 빛나는 현상학적 분석들 가운데 하나이며, 여기서 하이데거는 자기를 존재자 한가운데서 앞서 발견한다고 하는 이러한 실존의 한계경험을 처해있음으로서 분석했고, 처해있음, 기분에 대해서 세계-내-존재의 본래적인 열어밝힘을 지정해 주었다. 그러한 처해있음의 앞서 발견적인 것은 그러나, 인간 현존재의 역사적인 자기이해가 그리에로까지 밀고 나갈 수 있을 것의 가장 외적인 한계를 명백히 나타내 보이고 있다. 처해있음과 기분이라는 이러한 해석학적인 한계개념은 대지와 같은 그런 하나의 개념에로 이르는 어떠한 길로도 인도하지 않는다. 이러한 개념의 원리는 무엇인가? 어떻게 이 개념은 자신의 제시를 발견할 수 있는가? 예술작품의 근원에 대한 하이데거의 논문이 열어보이고 있는 중요한 통찰이란, '대지'가 곧 예술작품의 한 필연적인 존재규정이라는 사실이다.

예술작품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 어떠한 원칙적인 의미를 차지하고 있고 어떻게 이러한 물음이 철학의 근본물음과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철학적 미학의 개념 속에 놓여 있는 선입견을 통찰해 봄이 필요하다. 이러한 일은 미학이라는 개념 자체의 한 극복을 필요로 한다. 주지하다시피 철학적 미학은 철학의 분과들 가운데서 가장 뒤늦게 나온 것이다. 18세기에, 즉 계몽의 합리주의가 명확히 한정되는 시기에 비로소 감각적 인식의 자립적인 권리와 그리고 이로써 오성과 그 개념들로부터의 취미판단의 상대적인 독립성이 인정되었다. 그 분과의 명칭뿐만 아니라 그 분과의 체계적 자립성 또한 알렉산더 바움가르텐(A.Baumgarten)의 미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칸트가 그 다음에 자신의 세번째 비판인 판단력 비판에서 미학적 문제의 체계적인 의미를 확고하게 굳혔다. 그는 심미적 판단력이 오성과 도덕의 요청들에 맞서 고수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권리요청을 심미적 취미판단의 주관적 일반성에서 발견했다. 감상자의 취미는 결코 마치 예술가의 천재적 재능처럼 개념, 준칙 또는 규칙 등의 적용으로서 개념파악될 수 없다. 미를 두드러지게 해주는 바 그것은 한 대상에서 인식 가능한 특정한 속성들로서 입증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주관을 통해서 증명된다 : 상상력과 오성의 조화된 일치 속에서의 삶의 감정의 상승. 그것은 일종의 우리가 자연과 예술 속에서 미에 직면해서 경험하는, 우리의 정신적인 힘들의 총화의 활기요, 그 정신적인 힘들의 자유로운 놀이이다. 취미판단은 인식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것은 임의적인 것이 아니다. 이러한 사정에는 심미적 영역의 자율성이 그 위에서 근거지워질 수 있는 하나의 일반성의 요청이 놓여 있다. 사람들은 다음의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즉 계몽시대의 규칙신봉과 도덕의 확신에 맞서 예술의 자율성의 그러한 정당화가 하나의 커다란 수행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특히 독일의 발전 내부에서 그렇다. 그 당시 독일은 고전주의 문학의 시대가 바이마르 시(市)에서부터 미학적인 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바로 그 시점에 처음으로 도달해 있었다. 이러한 노력들은 칸트의 철학에서 자신들의 개념적인 정당성을 발견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미학을 심성능력의 주관성에서 근거놓는 일은 곧, 일종의 위험스러운 주관화의 시작을 의미한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주체의 주관성의 아름다움 사이에서 알려졌던 비밀스러운 합치가 칸트에게서조차도 아직은 당연히 규정적으로 되어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규칙을 능가하여 예술작품의 놀라움을 이루어내는 창작하는 예술가는 칸트에 의하면 일종의 자연의 총아로서 이해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은 대체로 자연질서의 의심할 수 없는 타당성을 전제하는데, 이러한 타당성의 기초란 곧 신학적인 창조사상이다. 이러한 지평의 혼융과 더불어 그러한 미학의 정초는 천재의 무규칙론을 계속적으로 형성해 가는 가운데 하나의 극단적인 주관화에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존재질서의 포괄적인 전체와는 더 이상 소급적인 연관을 맺고 있지 않는 예술은 현실성에 대해, 즉 삶의 투박한 산문에 대해 시의 미화시키는 힘으로서 대립된다. 이러한 시의 힘은 오직 그것의 심미적 영역에서만 이념과 현실성의 화해에 도달한다. 그것이 곧 셸링에게서 처음으로 발언되어 나오고 헤겔의 웅대한 미학에서 그 완성을 발견하는 관념론적 미학이다. 여기에서도 예술작품의 이론은 아직은 하나의 보편적 존재론적 지평 아래에 서 있다. 예술작품 속에서 유한과 무한의 조정과 화해가 도대체 성공하는 한, 그것은 철학의 종말에서 가져와야 할 하나의 가장 최고의 진리에 대한 담보일 것이다. 관념론에 있어서 자연이란 곧 근세의 계산적인 학문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자기를 의식한 정신 속에서 그 정신의 완성에로 고양되는 거대한 창조적인 세계 잠세력의 전개이듯이, 예술작품 또한 이러한 사변적인 사유가의 눈에는 정신의 한 객체화이다 __ 정신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완성된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를 직관하는 양식과 방식으로 정신이 나타남이다. 예술이란 낱말의 문자적인 의미에서는 세계-관이다.
만일 사람들이 하이데거가 그것에서부터 예술작품의 본질을 숙고하고자 착수하는 출발점을 규정하고자 한다면, 이제 다음과 같은 사실이 분명해져야 한다. 즉 절대적 진리의 비개념적인 이해의 보조수단으로서의 예술작품에다 하나의 탁월한 의미를 부여했던 관념론적 미학은 신칸트주의의 철학을 통과하는 동안 덮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배적인 철학적 움직임은, 일종의 목적론적인 존재질서의 형이상학적 지평을 __ 이 지평이 미감적 판단론에 대한 칸트의 서술 밑바탕에 놓여 있었듯이 __ 다시 획득함이 없이 학적 인식에 대한 칸트의 정초를 쇄신하였다. 그래서 미학적 문제에 대한 신칸트주의의 사유는 그 특유의 선입견에 내맡겨져 버렸다. 하이데거 논문에서 주제의 도입적 설명은 그 점을 명확히 반영하고 있다. 그것은 예술작품을 사물로부터 구별짓는 데 대한 물음과 함께 시작한다. 예술작품이 하나의 사물이자 그러면서도 또한 그 사물존재를 넘어 또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 즉 예술작품이 상징으로서 어떤 것을 지시하거나 또는 유비로서 다르게 이해해야 할 어떤 것을 가져온다는 사실은, 학적 인식의 체계적 우위를 통해서 주어져 있는 존재론적인 모델에서부터 예술작품의 존재방식을 기술하고 있다. 본래적인 바 그것은 곧 사물적 차원, 사실, 감관에 주어진 것이며, 이는 자연과학에 의해서 객관적 인식에 마주 세워 이끌려진다. 이에 반해서 그러한 사물적인 차원에 덧붙여지는 의미와 그 사물적 차원이 지니는 가치란 그저 주관적인 타당함에 의한 보충적인 파악형식이며, 그러한 의미와 가치는 또한 근원적인 주어져 있음 자체에 속하지도 않고 이러한 소여성에서부터 획득해야 할 객관적인 진리에 속하지도 않는다. 의미와 가치는 사물적 차원을 유독 그러한 가치의 담지자로 될 수 있을 그런 객체로서만 전제한다. 이러한 사정은 미학에 있어서는 다음을 뜻한다. 즉 예술작품은 그것의 일차적인 전경적 양상 자체에 있어서는, 상부구조로서의 본래적인 심미적인 형성물이 그것에로 끌어올려지는 일종의 하부구조의 기능을 갖는 하나의 사물적인 성격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니콜라이 하르트만(N. Hartmann)은 그런 식으로 심미적 대상의 구조를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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