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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2/철학

형이상에 대한 현대적 접근

by Frais Study 2020. 5. 28.

1. 들어가는 말: 존재에 대한 놀라움

왜 도대체 무(無)가 아니고 존재(자)인가? "도대체 왜 존재자가 있고 도리어 무는 없는가?" 하이데거는 그의 강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를 이 말로 끝맺고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 아니 이 우주는 온통 존재하는 것으로 충만해 있다. 과학자들은 이 우주가 대폭발하여 존재하기 시작한 태초의 시기까지도 계산해내고, 우주 안의 모래알의 하나에 불과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존재하게 된 지가 얼마인지도 그리고 이 지구상에 인간이 존재하게 된 지도 언제부터인지를 정확하게 계산해내며 기술과 과학의 승리라고 자부한다.
이 우주는 존재의 사건으로 시작되어 끊임없이 존재의 사건 속에서 존재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우리는 온통 존재하는 것에 둘러싸여 있으며 그야말로 존재사건의 한가운데에 존재하고 있다. 우주는 이렇게 존재사건의 와중에 놓여 있으며 존재신비의 한가운데 놓여 있지만 인간이 존재하기 전까지는 어느 존재도 이러한 신비를 경탄하지 못했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 인간 안에서 깨어난 시기를 철학탄생의 시기로 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존재자가 있다는 이 사실 또는 존재가 있다는 이 사실보다 더한 수수께끼가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존재에 대한 경이는 식어가고 모든 것이 일상의 자명함과 학문의 확실성 안에 편입되어 인간은 놀랄 필요 없이 자신의 세계에서 안정과 평안을 누리며 안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존재에 대한 망각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망각이기에 존재에 대한 회상을 통해 인간을 본래의 자기 자신에로 불러 세우고자 하는 것이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이 모색하고 있는 바라 할 수 있다.
어떻게 해서 존재에 대한 놀라움이 일상의 다반사가 되어버렸는가 하는 존재망각의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볼 때 그 밑바탕에는 언제부터인가 본궤도를 이탈한 서양의 형이상학에 대한 이해가 깔려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존재하는 것 전체를 인간의 이해 안으로 끌어들여 보려는 서양의 형이상학적 노력을 뒤밟아 보면서 그러한 시도가 갖고 있는 특징을 연구 조사하여 정리해보기로 한다. 거기에서는 무엇보다도 존재자 중심의 태도, 모든 것의 최종 근거를 구명하려는 근거해명의 의지, 신적인 존재로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신학적 요소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개념으로 장악하려는 학문적인 자세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존재자 중심이고 신학적이고 이론적인 형이상학적 추구에 의해 배제되고 제외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본다. 그것은 한마디로 존재의 범주 속에 들어갈 수도 없고 들어가서도 안 되는 무(無)이다. 
우리는 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마련해야 한다. 존재자 중심의 시각을 버리고 더 포괄적인 형이상학적 관점을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에 대한 경험에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무를 대면하게 되는 경험의 장은 이론적 태도에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존재함에서이다. 존재에 대한 놀라움 역시 이론적이고 학문적인 추론에 의한 경탄이 아니라 존재의 사건 한가운데서 존재하면서 느끼는 우리의 존재적 놀라움인 것이다. 우리는 불안이라는 근본기분을 통해 우리의 존재내부에 있는 무에로의 접근통로를 찾아보고 그로써 얻게 되는 존재사건에 대한 새로운 시각에 주목한다. 
존재자 중심의 태도를 버리고 이론적 해명의 의지를 버리고 존재 사건 자체에 마음의 눈을 열 때 우리는 지금까지 보지 않았고 볼 수 없었던 존재진리의 새로운 차원을 대하게 된다. 존재자를 눈앞에 현전케 하면서 자기 자신은 뒤로 물러서 숨기는 존재의 사건을, 현실을 박제(剝製)시키려고 대드는 모든 개념적인 노력의 저편에 놓여 있는 존재의 사건을, 명제의 진리만을 아는 학문적인 눈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진리의 사건을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자연에 대한 학문이기를 자처하는 자연과학이나 그 자연과학의 토대를 마련해준다고 뽐내는 메타-자연과학(형이상학, Meta-Physik)이 사실은 자연의 자연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자연을 계산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놓고서는 마치 자연을 다 설명한 듯이 뻐겼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현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지구 전체를 파국의 낭떠러지로 몰고 가는 생태계의 위협도 결과적으로는 그러한 잘못된 형이상학적 태도에서 기인했음을 통찰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참다운 형이상학이라면 이제부터라도 자연의 자연성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유치하다고 학문의 장에서 내몰은 하늘과 땅, 신적인 것과 죽을자를 새롭게 고찰해야 한다. 전수된 형이상학적 체계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그 체계가 안고 있는 생활세계적 지평과 그 한계를 밝혀내어 <형이상학 형성의 논리>에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서양의 형이상학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더욱 분명하게 인식하고 새로운 대안적 형이상학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란 변하지 않는 영원한 이념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주어지는, 역사와 문화 속에서 주어지는 선물임을 통찰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존재가 주어지는 역사적 사건(존재역운적 사건)에 눈을 돌려야 하며 그 사건의 법칙에 마음의 눈을 열어야 한다. 존재의 소리에 부름을 받은 형이상학적 인간이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이고 수행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지를 우리는 새롭게 구명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형이상학을 존재사건학으로 보는 하이데거의 획기적인 시각을 정리하며 그것이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한국의 지성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무엇인지를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2. 존재자 전체에로의 침입사건과 <형이상학>

<형이상학>하면 사람들은 흔히 고차원의 아주 난해한 학문, 무언가 우리의 감각적인 현실 세계를 넘어서 있는 것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을 떠올린다. 약간의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학문 중의 학문, 최고의 학문, 철학의 가장 중요한 한 분과라고 부언설명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학문 내지는 과학에 대해 좀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시켜 방법론을 들먹이는 사람이라면 물론 앞의 사람과 의견을 달리할 것이다. 한때 만학의 여왕이었을 뿐이지 지금은 구름 잡는 이야기나 하는 세계관 내지는 이데올로기일 뿐 결코 학문은 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할 것이다. 과학과 기술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이제 더 이상 이세상을 넘어선 저세상의 존재는 개인적인 믿음의 차원일 뿐이며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시공의 현실세계 저너머의 본체의 세계에 대한 논의는 황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헤겔의 사후 밀어닥치기 시작한 실증주의적 추세는 이렇듯 형이상학에게서 그 탐구의 주제 내지는 대상뿐 아니라 그 존립의 근거까지 여지없이 빼앗아버리며 형이상학을 학문의 대열에서 축출해버리려고 들었다. 이러한 형이상학 위기의 시대에 모든 학문 내지는 과학을 태동시킨 만학의 모후인 형이상학에게 박탈당한 예전의 지위를 되찾아 주려는 노력이 여러 차원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모색되었다. 하이데거도 제일 철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의 위상을 복원시켜 주려고 노력한 철학자의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복원>의 시도는 다른 사람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며 그 방법 역시 전무후무한 획기적인 것이다.
우선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을 통상 생각하듯 학문 중의 하나, 철학의 분과 중의 하나라고 보는 견해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라고 일축한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이 인간에게서, 인간 현존재와 더불어 일어나고 있는 하나의 근본적인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형이상학은 강단철학의 한 분과도 아니며 임의적인 착상의 한 영역도 아니다. 형이상학은 현존재에서 일어나고 있는 근본사건이다. 그것은 현존재 자체이다." 인간 현존재란 "그 존재와 더불어 존재자에로의 침입이 일어나고 있는 거기에(현장)"이다.  이러한 <침입>과 더불어 인간 자신인 존재자와 인간이 아닌 존재자가 드러날 수 있게 된다. 하이데거는 존재자 전체에로의 <침입>이라는 이러한 인간 현존재에서 일어나는 근본사건을 <형이상학적 원초사실>이라고 지칭한다.
이 근본적인 사건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이름에 힘입어 <형이상학>이라고 지칭되고는 있지만 사실 그 사건은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에도 있었고 서양의 문화권이 아닌 다른 문화권에서도 다른 형태로 일어났으며 또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세계형성의 존재인 인간이 자연 속에 존재하면서부터 어떤 형태로건 이와 같은 존재자 전체에로의 침입사건은 일어나고 있다. 이런 의미로 칸트가 말하는 인간의 <형이상학적 자연성향>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주장이다. 더 나아가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이라는 개념의 형성과정을 살펴볼 때 거기에서도 이러한 <형이상학적 원초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형이상학>이라는 개념과 <형이상학적 원초사실의 관계를 살펴보도록 하자.
하이데거에 의하면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형이상학>이라는 낱말은 원초낱말이 아니다. 다시 말해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인간 경험에서부터 그 경험의 표명으로 형성돼 전해 내려온 그런 원초적인 근본 낱말이 아니라는 얘기다. <형이상학>이란 표현은 그것이 비록 어떤 본래적인 것을 지칭하고 있기는 하지만 원초낱말은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 단어 "              "에로 소급된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                 "에로 소급된다.
1) 피지스와 <피지카> (자연과 <자연학>). 이 단어에서 흔히 <자연학>이라고 번역되고 있는 "      "라는 낱말부터 설명해 보기로 하자. 이 낱말에는 우리가 통상 "자연"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피지스(     )가 간직돼 있다. 독일어 번역인 "Natur(자연)"는 "태어남, 생성, 성장"을 뜻하는 라틴어 "natura - nasci"에서 유래한다.  이 라틴어의 의미는  또한  동시에 그리스어 "     ,      "의 근본의미이기도 하다. "     "는 성장하는 것, 성장, 그런 성장에서 성장된 것 자체를 의미한다. 우리는 여기서 성장, 성장함을 인간의 원초적 경험에서 일어나고 있는 아주 근본적이고 넓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말해 식물과 동물의 성장, 즉 순전히 고립된 독자적인 진행과정으로서의 식물 내지는 동물의 생성과 소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사계절의 한가운데에서 이 사계절의 변화에 의해, 낮과 밤의 변화의 한가운데에, 별들의 운행 한가운데에, 폭풍과 날씨에 의해, 천기의 용출에 의해 관장되고 있는 사건으로서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다 함께 어우러져 일어나는 것이 성장이다.
이러한 근원적인 의미를 감안하여 하이데거는 피지스(     )를 성장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존재자 전체가 스스로 자신을 형성하고 있는 전개"라고 옮긴다. 인간이 자기 자신 안에서 경험하고 있는 생식, 출산, 유년기, 성숙, 노년, 죽음 등과 같은 사건은 오늘날의 좁은 의미의 생물학적 자연진행과정이 아니라 인간의 운명과 역사를 자신 안에 함께 간직하고 있는 존재자의 일반적인 전개에 속한다.      는 이러한 전체적 전개사건이다. 그것은 인간마저도 감싸고 있으며 그래서 그 역시 어쩔 수 없이 그 아래 예속돼 있다. 인간은 자기를 둘러싸고 지배하고 있는 그 전개사건과 언제나 이미 나름대로 관계를 맺어 그에 대해 자기 스스로를 표명하고 있으며, 이 사건은 그러한 인간을 철두철미 지배하고 휘감고 있다. 인간은 그 사건이 아무리 수수께끼 같고 구체적인 면에 있어 어둡다고 해도 나름대로 이미 그 사건을 이해하고 있다. 인간은 그것을 그 자신에 가까이 있어 그를 지탱하고 있으며 존재하는 것으로서 그를 무겁게 누르고 있는 것으로서 이해하고 있다. 다시 말해 피지스로서, 성하는 것으로서, 존재자로서, 전체 존재자로서 이해하고 있다.
인간은 그가 인간으로서 실존하고 있는 한 언제나 이미 피지스에 대해, 그 자신 거기에 속하고 있는, 그 성하며 지배하고 있는 전체에 대해 나름대로 자기 자신을 표현해 왔으며 표현하고 있다. 사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식으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실존함이 이미 곧 성하며 지배하고 있는 것을 밖으로 표현함이다. 성하며 주재하는 존재자의 융성이, 다시 말해 그 질서와 규칙, 존재자의 법칙 자체가 밖으로 표현된다. 이렇게 밖으로 말해진 것은 말함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말함은 그리스어로 레게인(      )이고 밖으로 말해진 성함은 로고스(     )이다. 여기서 하이데거가 중요하게 강조하며 유의를 요하고 있는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즉 성하며 지배하고 있는 존재자의 본질에는 -- 그 안에 인간이 실존하고 있는 한 --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밖으로 말해지고 있다는 점이 속한다. 이러한 관계에 대한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파악에서는 필연적으로 밖으로 말해진 것도 이미 피지스 안에 들어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이 피지스에서부터 밖으로 말해질 수 없을 것이다. 이렇듯 피지스에는, 다시 말해 존재자 전체의 성함에는 로고스도 속한다.
그리스인들은 "낱말에로 끌고옴(레게인)"에 대한 반대말로 "크륍테인"(        ), 숨긴 채로, 은닉 속에 놔둠을 이해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레게인의 근본기능이 성하고 있는 것을 은닉에서부터 끌어내옴이라는 점이다. 레게인의 반대개념은 은닉함이다. 레게인이라는 근본개념의 근본의미는 "은닉에서부터 끌어내옴", 탈은폐이다. 탈은폐, "은닉에서부터 끌어내옴"은 로고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 로고스에서 존재자의 성함이 탈은폐되어 드러나게 된다. 헤라클레이토스도 이런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물의 성함은 그 자체 안에 자기를 숨기려는 경향을 간직하고 있다"(단편 123). 우리는 여기서 은닉과 피지스 사이에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그리고 동시에 피지스와 탈은폐로서의 로고스 사이에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반대개념인         과, 로고스가 말한 바 그것, 즉 알레테아(      ), 비은폐된 것 사이의 내적인 연관에 주목해야 한다. 통상 우리는       를 흔해빠진 단어 "참된 것"이라 번역한다. 인간에게 부여된 최상의 권한은 비은폐된 것을 말함이며 그와 동시에 피지스에 따라 행위함이다. 다시 말해 세계 전체의 성함의 사건과 운명에 순응하여 거기에 맞추어 행위함이다. 피지스에 따른 행위는 사물에 귀를 기울여 자기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이행된다. 이제 우리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원초낱말인 피지스가 서 있는 가장 내적인 맥락을 획득한 셈이다. 즉 성하는 것의 성함인 피지스와 이러한 성함을 은닉에서 끌어내오는 낱말인 로고스가 그것이다. 이 낱말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이 전부 소피아(     ), 즉 철학자들의 관심사이다. 달리 말해 철학은 존재자의 성함, 피지스에 대한 숙고인데 그렇게 해서 이 피지스를 로고스에서 밖으로 드러나게 말하기 위해서이다.
2) <피지스>의 근본의미의 이중성. 하이데거에 의하면 고대 그리스의 이러한 피지스의 근본의미는 -- 비록 그 이중성이 처음에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지만 -- 그 자체가 이미 이중적이다. 피지스, 즉 성하고 있는 것은 단지 성하고 있는 것 자체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성함에서 성하고 있는 것 또는 성하고 있는 것의 성함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성하고 있는 것과의 긴박한 대결에 가려서 이 성함이 결정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인간의 직접적인 경험에게는 바로 압도적으로 성하고 있는 것이 피지스라는 이름을 독점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천공, 성운, 바다, 대지 그리고 인간을 끊임없이 위협하며 동시에 또한 보호하고 거들어주고 지탱해주고 보살펴주기도 하는 그런 것 등이 전형적인 피지스로 전면에 부각된다. 이런 식으로 위협하면서도 지탱해주기도 하는 것은 인간의 도움 없이 그 자체 스스로 성하며 주재하고 있다. 피지스, 즉 <자연>은 이제 좀더 좁은 의미로 이해되고 있는데 그래도 아직은 근대 자연과학이 의미하는 자연개념보다는 넓고 근원적이다. 피지스는 이제 그 자체 스스로 항상 이미 현전하는 것, 항상 그 자체 혼자서 형성되며 사라지고 있는 것으로서 테크네, 기술, 발견, 제작에서 발원돼 나오는 인간적 작위와 구별되는 것이다. 피지스, 성하고 있는 것은 이제 이러한 강조된 좁은 의미로 존재자의 한 탁월한 영역을, 여러 존재자 중의 한 존재자를 지칭한다. 자연적 존재자(          )는 테크네(     )인 것, 즉 인간의 고유한 숙고에 의해 제작되고 산출되는 것과 대비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피지스는 이제 일종의 분야를 지칭하는 개념이 된다.
그러나 피지스라는 표현에는 동일근원적으로, 똑같이 본질적으로 모든 개개의 성하고 있는 것을 그것이 무엇인 바 그것이 되도록 하고 있는 그것으로서의 성함 그 자체가 함께 이해되고 있다. 이 경우 피지스는 더 이상 여러 다른 영역 중 한 영역을, 아니 도대체 존재자의 한 영역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존재자의 (자연)본성(die Natur des Seienden)을 의미한다. 자연은 이제 가장 내적 본질의 의미를 갖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자연의 본성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자연사물의 (자연)본성뿐이 아니라 모든 개개 존재자의 (자연)본성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정신 내지는 영혼의 (자연)본성, 예술작품의 (자연)본성, 더 나아가 사태의 (자연)본성을 말하기도 한다. 이 경우 피지스는 성하고 있는 것 자체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함 그 자체를, 사태의 본질 내지는 내적 법칙을 의미한다.
이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피지스의 이러한 두 의미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몰아내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둘이 나란히 함께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란히 함께 보존되고 있을 뿐 아니라 처음부터 피지스 안에 간직돼 있는 그 두 의미가 똑같이 본질적인 것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그래서 존재자 전체의 성함에 대해 근본적으로 묻고 있는 물음, 즉 철학에서도 그것이 관철되고 있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도 관철되고 있다.
3) 아리스토텔레스에서의 <피지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성하고 있는 것의 성함과 이 성하고 있는 것 자체는 은폐성에서 벗어 나오자마자 존재자로서 드러나게 된다. 이 존재자가 각양각색의 다양함과 풍부함 속에서 인간의 삶 속에 밀려들어오며 탐구의 관심을 자기에게로 끌어들여 인간으로 하여금 존재자의 특정한 영역과 분야에 관여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피지스 전체에 대한 물음과 더불어 동시에 이미 특정한 물음의 방향이 일깨워진다는 말이다. 특정한 앎의 길들이 취해진다. 이러한 철학함에서부터 우리가 나중에 학문 내지는 과학이라고 부르게 되는 개별 철학이 일깨워진다. 이렇듯 과학이 철학함의 양식들과 방식들이지 흔히 생각하듯이 그 반대인, 철학이 과학의 하나인 것이 아니다.
과학 내지는 학문에 대한 그리스어는 에피스테메(        )이다. 에피스타스타이(          )는 하나의 사태에 가까이 접근함, 그 사태에 정통해 있음을 말한다. 그럴 경우 에피스테메는 하나의 사태에 접근함, 그 사태에 정통함, 그 사태에 숙달함, 그 사태내용을 꿰뚫어 앎을 의미한다. 아리스테텔레스에서야 비로소 이 낱말은 넓은 의미의 <학문>이라는 결정적 의미, 즉 학문에서의 이론적 탐구를 의미하는 특수 의미를 얻게 된다. 상이한 분야에, 이를테면 천체에, 식물에, 동물 등등에 관여하는 학문들이 생겨나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피지스와 연관을 맺는 에피스테메는  곧 에피스테메 피지케(               ), <자연학>이다. 이 학문은 단지 여러 분야에서 사실들을 수집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근원적으로 이러한 전 분야 자체의 내적인 법칙성에 대한 숙고이다. 그래서 삶 자체가 무엇인지, 영혼이 무엇인지, 생성과 소멸이 무엇인지, 일어남 자체가 무엇인지, 운동이, 장소가, 시간이 무엇인지, 운동자가 운동하고 있는 그 빈 공간이 무엇인지, 이러한 운동이 전체적으로 무엇이며 제일 운동자는 무엇인지 등이 물음의 대상이 되었다.  이 에피스테메 피지케는 이러한 의미에서 피지스에 속하며 그리스인들이 <타 피지카(         )>라고 지칭한 그 모든 것을 대상으로 갖는다. 피지스에 대한 이러한 학문에서의 본래의 물음은 제일 운동자에 대해 묻는, 피지스라는 이러한 전체가 그 자체 이러한 전체로서 무엇인가를 묻는 최고의 물음이다. 피제이 온타(          , 자연 존재자)에서의 이러한 최종규정자를 아리스토텔레스는 테이온(     ), 신적인 것이라고 지칭한다. 따라서 존재자 전체에 대해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신적인 것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물음제기가 에피스테메 피지케에 할당되었다.
그러면 피지스의 두 번째 의미인 본질의 의미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성하고 있는 것의 성함은 이러한 성하고 있는 것을 존재자로 규정하고 있는 것, 존재자를 존재자로 만들고 있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 존재자란 그리스어로 온(  )이며, 존재자를 존재자로 만들고 있는 그것은 존재자의 본질이며 그것의 존재이다. 그리스인들은 이것을 우시아(     )라고 지칭한다. 이렇게 우시아는 아리스테텔레스에게 있어서 아직 존재자의 본질, 즉 피지스를 말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함께 발견할 수 있는 피지스의 두 가지 의미를 얻게 되었다. 그 하나는 존재자 전체로서의 피지스이고, 다른 하나는 우시아, 즉 존재자 그 자체의 본질성이라는 의미의 피지스이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 두 물음의 방향들이 피지스라는 단일적인 의미에 포함되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명시적으로 함께 포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거기에는 두개의 분과가 있는 게 아니라, 존재자 전체에 대한 물음과, 존재자의 존재, 그것의 본질, 그것의 (자연)본성이  무엇인가를 묻는 물음을 아리스토텔레스는 프로테 필로소피아(               ), 제일 철학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이러한 물음은 일차적인 의미의 철학함, 본래적인 철학함이다. 본래적인 철학함은 이러한 이중의 의미의 피지스에 대한 물음, 즉 존재자 전체에 대한 물음, 그리고 그와 동시에 존재에 대한 물음이다.
이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성함에서의 성하고 있는 것"이라는 피지스의 두 가지 근본의미의 전개과정이다. 거기에는 첫째 성하고 있는 것 자체, 즉 존재자가, 그리고 둘째 그것이 그것의 성함에서, 다시 말해 그것의 존재에서 취해지고 있다. 이러한 두 근본방향과 연관지어 피지스라는 표현이 두 가지 근본의미로 발전돼 나온다. 즉 좁은 의미의 자연학, 자연에 대한 탐구에서 접근되고 있는 방식에서의 존재자, 자연 존재자(          )로서의 피지스와, 우리가 오늘날 사태의 본성, 사태의 본질이라고 말할 때 사용하는 표현으로서의 두 번째 의미의 자연이 그것이다. 한 존재자의 존재 내지는 본질을 형성하고 있는 그것이라는 의미의 피지스는 곧 우시아(     )이다. 피지스의 이러한 두 의미에 있어서의 구별은, 즉 존재자 자체와 존재자의 존재의 구별은 그 구별의 역사와 발전에 있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그 정점에 이르게 된다. 그는 피제이 온타(자연적 존재자) 전체(첫 번째 의미의 피지스)에 대한 물음과, 우시아, 즉 존재자의 존재(두 번째 의미의 피지스)에 대한 물음을 함께 하나로 파악해 그 물음을 프로테 필로소피아, 제일 철학, 본래적 의미의 철학이라고 지칭했다. 본래적인 철학함은 이러한 이중적 의미에서 피지스에 대해, 즉 존재자 자체와 존재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철학이 존재자 자체에 대해 묻고 있는 한, 철학은 아무 임의의 사물을 대상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물음을 존재자 전체에로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자와 그 존재의 근본성격이 운동인 한에 있어서 근원적인 물음은 제일 운동자에로, 궁극의 마지막 운동자에게로 소급해 올라간다. 그리고 이 최종 운동자는 동시에 테이온, 신적인 것이라 지칭된다. 이때 거기에는 아무런 특정의 종교적 의미가 포함돼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듯 본래적인 철학함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이러한 이중의 물음이다. 즉 존재자 일반, 존재에 대한 물음이며 또한 본래적 존재자에 대한 물음이다.
4) 철학의 강단화.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22/21년에 죽는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의 철학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중성의 희생이 돼 버렸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 고대 철학은 그 최정점에 도달했고 그와 더불어 쇠퇴와 붕괴도 시작되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철학의 강단화는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강단화는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가? 생생한 철학적 물음이 죽어버리게 된다. 철학적 물음의 본래적인 얻어맞음(적중성)이 사라지게 된다. 한때 있었던 적중성이 인식에 이르고 그것이 밖으로 말해지자 그 과정은 더욱더 심해졌다. 밖으로 말해진 것만이 취해지며 다루기 쉬운 결과로, 사용 가능한 것으로 변형되어 누구나 배울 수 있고 따라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이래서 철학은 본래적인 철학함으로서 그것이 뿌리를 내렸던 철학적 토양에서 떠나게 된다. 뿌리를 이루었던 맥락이 전문과목들과 철학분과들 내부에서의 체계잡힌 정리정돈에 의해 대치된다. 이제 물음이 되는 것은 어떤 관점에 의해 이러한 풍부한 -- 더 이상 그 자체와 그 핵심에 있어 그 생생함이 장악되지 못한 -- 재료가 체계적으로 정리되는가일 뿐이다.
이러한 관점 아래 철학을 그 주제와 취급방식에 따라 강단 철학적으로 세 개의 철학분과로 나누게 된다. 그것이 곧 논리학, 자연학 그리고 윤리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도대체 저서를 몇 권 출간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그의 저작들이 원고나 강의초고, 강의기록의 형태로 보존되어 왔다. 기원전 1세기가 되어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전 자료를 한데 모아 학도들에게 접근 가능한 것으로 제공하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전체를 수집해서 정리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전체 자료를 그 당시 갖고 있었던 지평 아래, 다시 말해 논리학, 자연학, 윤리학이라는 세 분과를 실마리로 삼아 검토했던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수집한 사람에게는 전수된 자료 전체를 이러한 세 분과 안에 분류해 넣는 과제가 주어졌다.
그런데 수집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프로테 필로소피아, 즉 본래적인 철학함이라고 지칭한, 다시 말해 존재자 일반과 본래적인 존재에 대해 물음을 제기하고 있는 저작도 발견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의 정리자는 이 작품을 강단철학이 분류하고 있는 저 세 분과의 하나 안으로 집어넣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본래적인 철학이라고 지칭한 그 작품을 접하여 그것이 세 분과라는 확정된 체계 속에 속할 수 없게 되자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강단철학은 이와 같이 본래적인 철학함을 만나자 당혹감에 빠지게 된다.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일 철학에서 다루고 있는 물음들과 강단철학이 자연학에서 다루고 있는 물음들과는 일종의 유사성이 성립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일 철학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훨씬 더 넓고 훨씬 더 근본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따라서 그 저작을 아무 문제없이 자연학 속으로 정리해 넣을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자연학 옆에, 자연학 뒤에다 정리해 두기 위해 자연학 다음에 놓을 수 있는 가능성은 발견한 셈이다. "뒤에, 다음에"는 그리스어로 메타(    )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본래의 철학을 자연학 뒤에 [              (메타 타 피지카)] 놓았다. 이렇게 되어 본래의 철학은 이제부터는 <                 (타 메타 타 피지카)>라는 제목 아래 자리를 잡게 된다. 여기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점이다. 사람들은 본래의 철학을 그러한 제목으로 지칭함으로써 내용적으로나 특수한 문제점에 따라서가 아니라 저작을 외적으로 정리하려는 순전히 기술상의 고려에서 <타 메타 타 피지카>로 지칭했다는 점이다. 우리가 <형이상학>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당혹스러움에서 생겨 나온 표현, 당혹함의 징표, 내용적으로는 아무 것도 말하는 바가 없는 순전히 기술적인 제목일 뿐이다. <프로테 필로소피아>가 <타 메타 타 피지카>이다.
<메타(    )>라는 그리스어는 <뒤에, 나중에, 뒤따라>를 의미한다. 그것은 이 첫 번째 의미와 연관이 있는 또 하나의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내가 만일 하나의 사태를 추적해 그것을 뒤밟아 갈 때, 나는 하나의 사태에서 몸을 돌려 다른 하나의 사태에로 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의미에서의 전환인 셈이다. <어떤 것에서부터 떠나 어떤 것에로>라는 의미의 <메타>를 우리는 변화, 전환을 의미하는 "메타볼레(        )"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이데거를 따르면 "타 메타 타 피지카"라는 그리스어가 <메타피지카(Metaphysica)>라는 라틴어로 합성이 될 때, <메타>는 그 의미를 바꾸게 된다. 순전한 장소적인 의미를 띄었던 것이 "하나의 사태에서 떠나 다른 사태에로 몸을 돌림", "어떤 것에서 다른 어떤 것에로 넘어감"이라는 전환의 의미가 된다. <타 메타 타 피지카>는 이제 더이상 자연학에 대한 학설 뒤에 등장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피지카>에서 몸을 빼내 다른 존재자에로, 즉 존재자 일반과 본래적인 존재자에로 향하는 그것을 다룸을 의미한다. 이러한 태도의 전환이 본래적인 철학에서 일어난다. <프로테 필로소피아>는 이런 의미에서 <형이상학>이다. 개별 영역으로서의 자연에서부터, 도대체 그런 종류의 영역에서부터 몸을 빼내는 것은 개별 존재자를 넘어서 다른 것에로 넘어감을 말하는 것이다.
형이상학은 감각적인 것을 넘어서고 있는 것에 대한 인식을, 즉 초감각적인 것에 대한 학문과 인식을 지칭하는 칭호가 된다. 이것은 라틴어의 의미를 분석해보면 분명해진다. <메타>의 첫 번째 의미인 "뒤에, 나중에"는 라틴어로 "post"이고 두 번째 의미는 "trans"이다. 기술적인 칭호인 <형이상학>이 이제 <프로테 필로소피아>의 내용적인 지칭으로 바뀐다. 이러한 내용적인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은 이제 <프로테 필로소피아>에 대한 특정한 해석과 견해를 인수하게 된다. 제목의 이러한 전환은 결코 부차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그로써 본질적인 어떤 것이, 즉 서양에서의 본래적인 철학의 운명이 결정된다. 본래적인 철학의 물음은 애초부터 두 번째의 내용적인 의미의 형이상학으로 파악되어 특정한 방향과 특정한 단초 속으로 몰아넣어진다.
5) 자연-인간-언어.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정리해 보자.
인간이 존재하기 훨씬 전부터 이 우주 안에서는 끊임없이 온갖 형태와 종류의 사물들이 생성하고 소멸되는 존재발생의 사건이 전개되어 왔다. 인간의 출현 역시 그러한 우주적 존재전개사건의 일부분일 뿐이다. 인간은 그러한 존재발생의 사건 한가운데 내던져졌으며 처음에는 단순히 생존 본능적으로 그러한 우주적 자연 속에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우주역사의 어느 시점에 이르러 인간은 자신이 내던져져 있는 좁은 주위세계에 만족하지 않고 차츰 눈을 전체에로 돌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에게서 존재하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 깨어나기 시작한 시기이며 그러한 존재의 신비에 대한 설명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 시기일 것이다. 이것을 누군가는 우주론적 진화, 화학적 진화, 생물학적 진화에 이은 심리-정신적 또는 인식론적 진화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우주진화의 과정에서 우주는 인간의 존재자 전체에 대한 인식의 단계에 이르러 비로소 긴 잠에서 깨어나 자기자신을 의식하게 된 것이며 그로부터 우주 진화의 전개과정 자체가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는 것이다.
어쨌거나 여기에서 볼 수 있는 인간의 독특한 능력이 곧 인간의 형이상학적 자연성향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 하이데거의 생각이다. 그때부터 인간은 단순히 무기력하게 자연의 어느 곳에 내동댕이쳐져 거기에서 그가 그의 활동반경에서 마주치는 것들을 다루고 처리하며 사는 단순한 생물학적 존재가 아닌 것이다. 이제 인간은 자신의 관계맺음의 영역을 그가 그 자리에서 만나는 것들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 전체에로 확장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곧 하이데거가 말하고 있는 <존재자 전체에로의 침입사건>이다. 인간이 존재하고 있는 곳에서는 어디에서건 -- 깊이와 폭, 체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 이러한 원초적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이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유럽적인 철학의 운명이라는 것이 하이데거의 주장이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그러한 사건 자체를 형이상학적 사건이라고 부르게 되는 뒤바뀐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존재자 전체에 대한 유럽적인 대응투사에서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이 출현하게 된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차원을 구분해야 한다. 첫째, 존재자 전체의 발생사건 자체의 존재적 차원이 그것이다.(Physis) 인간도 이러한 전체의 발생전개사건의 한 부분일 뿐이다. 둘째, 그러한 존재발생사건에 둘러싸여 그 지배 아래 놓여 있으면서 그러한 전체로서의 존재사건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의 독특한 실존적 차원이다.(Dasein)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은 <말할 수 있는 능력의 생명체(               )>라는 규정을 받는다. 셋째, 그러한 말할 수 있는 능력의 생명체인 인간이 존재자 전체인 자연의 한가운데서 자연과 말하면서 맺는 로고스(언어)적 차원이다.(Logos) 이렇게 세 차원으로 나누긴 하였지만 이 세 차원은 언제나 뗄 수 없는 연관 속에서 함께 뒤섞여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인들이 존재자 전체의 발생사건으로 본 <피지스>라는 낱말에도 이미 이 세 차원이 함께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존재자 전체의 발생사건을 지시하는 존재적 차원을 표현할 뿐 아니라 이미 그 표현 자체가 그리스인들의 고유한 존재자 전체에로의 침입사건으로서 그들만의 독특한 실존방식의 발로이며 결과인 것이고, 그것은 또한 언어적 차원의 낱말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피지스>라는 낱말에서 단순한 낱말의 의미만을 보려고 해서는 안 되고 그 배경을 이루고 있는 존재적 차원과 실존적 차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있을 때 우리는 하이데거가 강조하고 있는 <피지스>의 근본의미에 함축되어 있는 이중성의 존재적·실존적 근거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생기(生起), 용출(湧出), 주재(主宰), 융성(隆盛), 화육(化育), 생육(生育) -- 자연의 생생화육(生生化育) -- 의 한가운데서 그러한 전체로서의 창조하는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과 관계를 맺으면서(노에인, 레게인) 그 자연을 로고스로 데려오려고 시도한다. 이때 인간은 이러한 생생화육하는 자연 전체를 생생하게 있는 그대로 로고스 안으로 데려오려고 하지만 일단 개념의 틀 속에 잡힌 자연은 특정한 관점에서 고정될 수밖에 없다. <피지스>는 이러한 자연의 생생화육이 인간의 말함에서 밖으로 말해진 로고스인 셈이다. 그리스인들에게 이러한 말함은 레게인으로서 그것은 낱말에로 데려옴을 뜻한다. 이러한 말함에 대한 반대말은 숨겨 있는 채로 놔둠, 은닉 속에 놔둠이다. 따라서 말함은 어떤 것을 은닉되어 있음에서부터 끌어 내옴, 곧 탈은폐를 의미한다. 
자연 한가운데에서의 인간의 자연과의 행동관계는 노에인과 레게인이다. 이 두 행동관계에서 우리는 이중의 은닉 내지 은폐와 관계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우선 노에인의 차원에서 인간은 그에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 전부는 아님을 알고 있다. 생생화육하는 자연과의 관계에서 그의 눈에 보여지고 있는 것이 생생화육하고 있는 자연사물들이지만 그것이 곧 자연사물 전체도 아니며 자연 그 자체는 더더구나 아님을 알 수 있다. 자연발생사건 자체에 비현전, 비현상의 차원이 있음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 다음 이러한 관계를 레게인의 차원에서 고찰해 본다면 우리는 거기에서 또 다른 의미의 은닉을 대면하게 된다. 여기서도 우선은 넓게 로고스의 지평 속에, 인간의 이해의 지평 속에 들어오지 않은 것을 전부 은닉 속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넓은 의미의 레게인은 이해의 빛 안에 데려옴을 말한다. 그렇지만 좁은 의미의 레게인 내지 로고스는 말로 밖으로 말함 또는 말해진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낱말 내지 개념 안으로 데려와진 것을 말한다.
자연의 용출과 생기에 둘러싸여 생생화육하는 자연의 힘 속에 놓여 있음을 느끼고 깨달으며 사는 인간은 자신의 삶이 이러한 자연에 따르는 삶이어야 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전체로서의 자연전개사건에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맞추려 노력한다. 이렇게 자연의 한가운데에서 존재하며 이러한 자연과 끊임없이 관계 맺으며 인간은 자신이 관계 맺는 자연을 알게 모르게 밖으로 말하게 된다. 그러면서 당연스럽게도 자신의 삶과 행위의 본과 지표를 그러한 자연에서 찾으려고 시도하게 된다. 여기에서 자연은 두 가지의 양태로 인간에게 주어지게 된다. 하나는 생생화육하는 자연의 힘이 표출되고 있는 자연사물에서 대자연의 위력을 느끼며 그것을 자연 자체인 냥 대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천차만별의 사물들에서 용출하며 융성하고 있는 자연 그 자체에 관심을 갖게 되는 방식이다. 자연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인간은 쉽게 그 자연 속에서 가장 압도적으로 위력을 과시하고 있는 특정의 어떤 것을 끌어들인다.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그것이 자연의 한 모습이지 자연 그 자체가 아님은 알고 있다. 바로 여기에, 즉 자연과 자연사물의 차이에 하이데거가 말하고 있는 존재와 존재자(존재사물) 사이의 차이인 존재론적 차이가 바탕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존재론적 차이는 단순한 개념 내지는 언어상의 차이가 아니라 사태에 뿌리를 두고 있는 존재사건 자체에서의 차이인 것이다. 아래에서는 이 존재론적 차이에 대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3. 존재론적 차이와 차이의 망각

하이데거가 의미하고 있는 존재론적 차이를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우리말의 일상적 사용에서 <존재>가 어떤 뜻으로 쓰이고 있으며 우리의 논의에서는 어떤 점을 유의해야 하는지를 알아두기로 한다.
<존재(存在)>는 <존재하는>, <존재하는 것>과 같은 표현 속에 자주 나타나는데, 이 경우 그것은 우리의 일상용어인 <있는>, <있는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존재>는 <존재함>, <있음>이 실사화(實辭化)된 경우이다. 그래서 오래 전에는 <존재>라는 개념 대신에 <유(有)>라는 개념이 철학용어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그것이 다양한 변형에 적당치가 않아 <존재>라는 개념에 자리를 내주고 망각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건 <존재하는>, 즉 <있는> 것은 전부 <존재>라는 포괄적인 개념 속으로 합류해 들어올 수 있고, 이러한 <존재>의 범주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그야말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이 개념은 가장 포괄적인 개념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에 적용이 되는 가장 초월적인 범주인 셈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되는 <무(無)>도 우리가 이렇게 글로 쓰고 그에 대해 말을 하고 있는 한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존재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경험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있음>의 의미 외에도 <존재>는 아주 중요한 다른 의미를 간직하고 있으니 그것은 곧 <이다>의 의미이다. 흔히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고 정의한다. 이 경우 우리는 인간에 대해 그가 이성적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인간으로서의 예의를 지키지 않고 멋대로 행위할 때, "그 사람은 야만적이다."라고 말하면서 야만적 존재로서의 그 사람의 못된 측면들을 자세하게 열거할 수 있다. 이렇듯 우리말의 일상적 사용에서도 어떤 것의 어떠함 내지는 무엇임을 서술하기 위해 사용되는 "∼이다"를 "무슨 무슨 존재"라는 용어로 바꾸어서 사용하기도 한다. 이 용법이 우리말에서는 자세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는 서술적 용법으로서의 <존재>의 의미이며, 영어, 독일어, 불어 등의 서구 언어권에서는 이러한 <연계사>로서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자명하게 <존재>의 의미 속에 포함되어 있다.
종합 요약하여 <존재>는 이와 같이 <있음>과 <∼임> 두 가지를 다 포함하고 있는 가장 포괄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일상적인 언어사용, 학문적인 논의와 주제탐구 등에서 이러한 두 가지의 의미의 <존재>개념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앞으로의 설명에서도 우리는 이 점을 꼭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해 <존재>라는 개념에는 <있음>과 <∼임>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함축되어 있으며 역으로 우리가 <있음>과 <∼임>을 이야기할 때에도 그 배경에는 <존재>에 대한 논의가 깔려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라는 개념을 뒤좇아 가 보기로 하자. 설명의 편의상 존재론적 차이를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나누어서 고찰하기로 한다.
1) 존재는 존재자가 아니다.
개념규정상 존재와 존재자가 어떻게 구별되고 있는지를 우리는 우선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규정하는 것이다. 
- 존재는 그 안에서 존재자가 -- 그것이 어떻게 논의되든 -- 언제나 이미 이해되어 있는 지평이다.
- 존재자에서 그것이 없는 것이 아니고 있는 것이라는 <있음>의 사실을 지칭한다.
- 존재자에서 그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그것이 무엇인 바 <그것으로 있음>, 즉 <무엇임>을 말한다.
-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게끔 하고 있는 어떤 내적 본질이다.
- 모든 존재하는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부를 수 있게 하는 공통의 근거이다.
하이데거가 열거하고 있는 <존재>의 다양한 경우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신은 있다. (Gott ist.) ⇒ 실제로 현존한다.
② 지구는 있다. (Die Erde ist.) ⇒ 끊임없이 눈앞에 있다.
③ 강연이 강의실에서 있다. (Der Vortrag ist im H rsaal.) ⇒ 행해지고 있다.
④ 이 사람은 슈바브지방 사람이다. (Dieser Man ist aus dem Schw bischen.) ⇒ 출신이다.
⑤ 이 잔은 은잔이다. (Der Becher ist aus Silber.) ⇒ 은으로 만들어졌다.
⑥ 농부가 들에 나가 있다. (Der Bauer ist aufs Feld.) ⇒ 머무르고 있다.
⑦ 이 책은 내 것이다. (Das Buch ist mir.) ⇒ 내게 속해 있다.
⑧ 그는 [이제] 죽은 사람이다. (Er ist des Todes.) ⇒ 내맡겨져 있다.
⑨ 붉은 색은 [배의] 좌현이다. (Rot ist backbord.) ⇒ 가리킨다.
⑩ 러시아에는 기근이다. (In Ru land ist Hungersnot.) ⇒ 사태가 벌어졌다.
⑪ 적군은 후퇴중이다. (Der Feind ist auf dem R ckzug.) ⇒ 물러가고 있다.
⑫ 포도밭에 포도혹벌레가 있다. (In den Weinbergen ist die Reblaus.) ⇒ 퍼져 있다.
⑬ 개가 마당에 있다. (Der Hund ist im Garten.) ⇒ 뛰놀고 있다.
⑭ 모든 정상에 / 고요가 있다.  ber allen Gipfeln / ist Ruh. ⇒ ??
이 모든 경우에서 다양하게 <있다> 내지 <∼임>이 말해지고 있지만, 거기에서 그것에 대해 이 있음(임)이, 즉 <존재>가 말해지고 있는 그것, 즉 <존재자>는 이 <있음>이 아니다. 어떻게 그렇게 다양한 경우 모두에 그처럼 다양하게 <존재>가 말해질 수 있는가? 각각의 경우에서의 다양한 존재의 뜻은 무엇이며, 그 모든 다양한 존재의 경우를 두루 꿰뚫고 있는 단일한 존재의 의미는 있는가? 있으면 그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쨌거나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다양한 종류의 존재자와 관계 맺으면서 이미 이러한 존재론적 차이를 이해하며 그 안에서 생활하고 있다. 우리는 존재론적 차이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2) 존재자의 존재, 존재의 존재자. 존재는 존재자가 아니지만 또한 존재자 없는 존재를 상상할 수 없다. 존재는 언제나 어디서나 존재자의 존재이며 존재자는 또한 언제나 존재의 존재자이다. 이러한 <존재자의 존재> 또는 <존재자에서의 존재>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태를 구분해야 한다.
첫째, <존재자의 존재>. 여기서 우리는 소유격을 주격 소유격이 아닌 목적격 소유격으로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 존재가 존재케 하는 바로 그 존재자의 존재를 말하는 것으로서 여기서의 주인은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이다.
둘째, <존재의 존재자>. 여기서의 소유격은 주격 소유격이다. 다시 말해 존재하게 되어 <존재>에 속하게 된 존재자를 말한다. 
이 두 경우 모두 우리는 <존재하는 존재자>라고 말할 수 있는데, 앞의 경우는 강조가 존재자에 쏠려 <존재하는 존재자>가 되고 뒤의 경우는 강조가 존재에 가해져 <존재하는 존재자>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 구분되는 존재와 존재자가 <존재자의 존재> 또는 <존재하는 존재>에서 서로 단일하게 모여지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존재자>와 <존재>는 하나의 동일한 사태인 <존재하는 존재자>가 이중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존재자는, 그 현재분사의 형태인 동명사에서도 드러나고 있듯이, 명사적 의미로 <존재하는 존재자>를 의미하며 또한 동시에 동사적 의미로 <존재하는 존재자>를 가리킨다. 이렇게 존재와 존재자는 뗄 수 없이 서로에게 함께 속해 있는데, 이러한 <함께 속함>은 서로 나눠짐으로써, 갈라짐으로써 단일하게 몪이는 것이다. <존재하는 존재자>에서의 존재와 존재자의 단일함은 서로 다른 것들, 나눠지는 것들의 단일함이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존재자의 존재는, 존재자로 존재하는 그런 존재를 말한다. 여기서 <존재하다>는 타동사적으로 <∼에로 넘어감>을 말한다. 존재는 여기서 존재자에로 넘어가는 방식으로 현성한다. 그렇지만 존재가 자기의 자리를 떠나서 존재자에로 넘어가 버리는 식은 아니다. 마치 존재자가 그전에는 존재없이 있다가 이제 비로소 존재에 의해 관여되는 식으로 말이다. 존재는 [존재자에로] 넘어가며, [존재자를] 탈은폐하며 [존재자에로] 건너가는데, 이때 존재자는 이러한 넘어옴에 의해 비로소 그 자체에서부터 비은폐된 것으로 도래하게 된다. 도래란 비은폐성 안으로 자신을 감싸 간직함을 말한다. 따라서 감싸 간직된 채 존속함을, 존재자로 존재함을 말한다. 존재는 자신을 탈은폐하는 넘어옴으로서 드러낸다. 존재자 그 자체는 비은폐성 안으로 자신을 감싸 간직하는 도래의 방식으로 나타난다."
<존재하는 존재자> 또는 <존재자의 존재>에서 우리는, 존재자에로 넘어가서 존재자를 탈은폐하고 있는 존재 -- 즉 탈은폐하는 넘어옴의 의미의 존재 -- 와, 존재의 탈은폐가 열어밝힌 비은폐성 안으로 자신을 감싸 간직하며 도래하는 존재자 -- 자신을 감싸 간직하는 도래라는 의미의 존재자 -- 라는 구분이 일어나고 있음에 유념해야 한다. 이러한 존재사건적 구분을 하이데거는 사이-가름(Unter-Schied)이라고 칭한다. 이 사이-가름이, 넘어옴과 도래가 서로 서로를 유지하면서 따로-갈라지며-서로-향하며 [갈라지며-다시-붙으며] 지탱되고 있는 바로 그 <사이>를 처음으로 내어주며 보존한다. "탈은폐하는 넘어옴의 의미에서의 존재와 자신을 감싸 간직하는 도래의 의미에서의 존재자는 동일한 것, 즉 사이-가름에서부터 그렇게 구분된[갈라진] 것으로 현성한다." 따라서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는 넘어옴과 도래함의 사이-가름으로서 그 둘의 탈은폐하며-감싸간직하는 내어나름이다."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이 자명한 사실에서는 이와 같은 <존재론적 차이>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자를 탈은폐시키며 자신은 숨기는 존재의 넘어옴이며, 비은폐성 속에 자신을 맡겨 그 안에 자신을 감싸버리는 존재자의 도래이다. 
이러한 차이가 일어나고 있는 존재사건에서 우리는 두 가지 차원의 사태를 구분해야 한다. 하나는 개별 존재자의 존재가 개별화되어 존재하게 되는 존재사건이며, 다른 하나는 그러한 개별 존재자의 존재가 존재사건 자체와 맺고 있는 연관이다. 
3) 존재자에서의 존재와 비-존재. 존재의 개별화를 설명하기 위해 하이데거가 끌어들이고 있는 핵심개념은 <현전(Anwesen)>이다. 존재가 구체적인 존재자에로 넘어가 그 존재자를 탈은폐하는 방식이 곧 현-전(An-wesen)인 것이다. 여기서 <wesen>은 동사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w hren의 의미로서 <머물다, 체류하다(bleiben, weilen, verweilen)>의 뜻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접두어 <an->은 그리스어     와 같은 말로서 <여기 가까이(여기에로, 이리에로)>를 가리킨다. 여기서 <an>은 "위로(auf)"와 "안으로(in)"의 의미를 띠고 있다. 따라서 <Anwesen>은 존재가 그 자리에서 현성하고 있음을 지칭하고 있다. <An-wesen(현-전)>은 "나타남(Erscheinen)", 즉 밝은 빛의 영역 안으로 "들어감(Eingehen)"으로서의 "올라옴(Aufgehen)" -- 꽃이 피어나는 것이라든가 태양이 솟아오르는 것처럼 -- 을 말하는 셈이다. 존재는 존재자에로 넘어가 거기에 <현-전>하게 되며, 그렇게 비은폐성 안에서 나타나게 되는 존재자는 그 자리에 <현전하는 것(현전자)>이 된다.
현전이 비은폐성 안으로 들어감을 의미한다는 데에서 현전이 비은폐성과는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비은폐성은 "비-은폐성"이며 그래서 자신의 유래를 "은폐성"에 두고 있듯이, 현전 또한 은폐성과 본질적인 연관을 맺고 있음에 틀림없다. 현전하는 것은 은폐성에서부터 벗어 나오는 것이고 비은폐성에 다다르자 금세 다시 은폐성을 향해 떠나가는 것이다. 비은폐성에 은폐성이 본질적으로 속하듯이 올라감(       )으로서의 현전에로 내려감(     )이 본질적으로 속한다.
비은폐성에 도착하자 벌써 은폐성에로 떠나가기 시작하는 현전자는 비은폐성 내에서 각자 자기 자신의 "기간(덧, 겨를, Weile)"을 가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전자는 "각자의 기간을 머무는 것(das Je-weilige)"이다. "각자의 기간을 머무는 것"을 하이데거는 "현재적(gegenw rtig) 현전자"라고 부르는데, 이때 그는 gegenw rtig에서 gegen이 "주체의 맞은 편"이 아니라 "비은폐성의 열린 구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현재적"이란 "비은폐성의 구역 내의 기간에 도착해 있는" 것을 뜻하게 된다. 다시 말해 현-재적인 것은 옴과 감 사이에 과도기적으로 머무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적인 것은 과도기적으로 머물면서 "아직 옴에 머물고 벌써 감에 머문다". 현전에는 본질적으로 이중적 "부재(不在, Abwesen)"가 속하는 것이다. 현전은 이러한 부재가 그의 본래적 힘을 발휘할 때 비로소 근원적으로 현성할 수 있다. 현전에 본질적으로 속하는 부재가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면 현전은 "존속의 지속성"으로 고정되게 된다. 본래 부재에 "잇대어져 있는" 현전을 지속적 현전성으로 이해하는 것은 벌써 플라톤의 이데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이러한 비본래적 존재이해는 현전의 근-원성을 항상 위협하고 있는 빠져있음의 경향성에서 비롯된다.
현전하는 것의 현전을 지속적인 현전성으로 이해할 때, 그 현전의 의미가 개개의 현전자에서 그것의 본래적인 존재와 비본래적인 존재를, 그것의 존재와 비-존재를 구분하는 척도가 된다. 이럴 경우 각자 자신의 기간을 갖고 그 기간 속에 머무는 현재적 현전자, 즉 부재에 잇대어져 있는 현전자는 참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올라감과 내려감, 현전과 부재의 와중에 놓여 있는 현실적인 존재자들은, 즉 감각에 비추어지는 구체적인 사물들은 본래적인 의미의 존재자들이라고 할 수 없는 현상 내지는 가상의 존재자들이고, 정신의 눈에 보여지는 사물의 이데아가 본래적인 존재로서 참으로 존재하는 것, 즉 지속적으로 현전하는 것이다.
실제적으로는 플라톤이래 본래적 존재와 비본래적 존재의 영역과 형태에 대한 구별이 정신(형상)과 감각(재료)의 분리와 등급매김으로 형성되었다. 통속적 플라톤주의에서는 그것이 두 세계 이론으로까지 발전되었다. 그렇지만 형이상학의 본질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세계와 감각적인 세계의 분리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도대체 "참으로 존재하는 그것과, 거기에 비추어 볼 때 참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를 구별했다는 바로 거기에 있다.
4) 차이의 갈라짐. 본래적인 존재와 비본래적인 존재의 구별은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차이의 귀결이다.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차이는 "형이상학의 본질 구조의 평면도(개요)"이다. "우리가 <존재>를 말할 때, 이것은 '존재자의 존재'를 말한다. 우리가 <존재자>를 말할 때, 이것은 '존재의 관점에 비추어 본 존재자'를 말한다." <토 온(to on)>이라는 그리스 낱말에서는 이 둘이, 즉 존재자(다시 말해 어떤 것이 그것인 바로 그것)와 존재(있음 그 자체)가 하나로 합쳐 있다. <존재하는>이라는 현재분사는 동사적 의미와 명사적 의미를 함께 포함하고 있다. 이때 동사적 의미에 우선권이 주어진다는 것은 이미 <현재분사>라는 낱말이, 다시 말해 참여(분유)형태가 증명하고 있다. 즉 어떤 것이 <존재자>라고 말해지는 이유는 그것이 <존재>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존재하는>은 널려 있는 현재분사 형태의 하나가 아니라 "모든 다른 가능한 현재분사 형태들을 자기 안에 끌어 모으고 있는" 원초-현재분사이다. "우리는 끊임 없이 갈래에서 말하고 있다."
<존재/존재자>라는 갈래는 언제나 이미 앞서 주어져 있다. 그것은 최초의 것이며 최종의 것이다. 그것은 없어져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인간의 형이상학적 자연성향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 해서 존재론적 차이가 일종의 "절대적 설명토대"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명명백백한 명증이 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우리가 그 <바탕>을 더욱 더 근원적으로 고찰하면 할수록 그 <바탕>이 더욱 더 낯선 것으로 보인다는 그 점이 입증하고 있다. 왜냐하면 "유한한 본질(존재)인 인간에게 그의 형이상학적 본성은 가장 덜 알려진 것이며 동시에 가장 현실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이 존재를 형이상학에 의해서 가능했던 것보다 더 근원적인 방식으로 고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그렇지만 형이상학의 본질을 더 깊이 파악하고 그에 따라 이성적 동물이며 형이상학적 동물이라는 인간에 대한 규정을 넘어설 수 있게 된다하더라도, 존재론적 차이는 퇴치되거나 거부되거나 개념파악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더 근원적인 점에 있어 물을 만한 것이 되며 그래서 그렇게 또한 어떤 방식으로건 확증되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 그것은 <존재>와 <차이>라는 이름을 부과한 그런 방식으로 나타난다.
존재론적 차이는 -- 존재에서부터 고찰할 때 -- <참여>라는 이름을 띤다. 존재자에서부터 볼 때, 그것은 <초월>을 말한다. 왜냐하면 존재론적 차이에서 존재자는 존재에로 "넘어서 갔기" 때문이다. 이 경우 "이 존재가 존재자의 본질로서건, 그것의 대상성으로서건 또는 자신 안에 고요히 머무르고 있는 신적 존재로서 이해되건" 상관이 없다. 초월의 측에서 볼 때 존재는 "단적인 초월"로서 나타난다. "초월"은 -- "존재"와 같이 -- 단지 하나의 형이상학적 명칭일 뿐 아니라 형이상학 자체의 본질이기도 하다.
<초월>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존재자를 넘어서 존재자를 두루 통과하여 존재에로 감이다. <형이상학>이라는 이름 자체가 말하고 있는 것도 사실 똑같은 것이다. 즉 존재자를 (ta physika를) 넘어서. 물론 이때 존재자로서 존재자를 되찾아오기 위해서이다. 존재자를 그 자체로서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존재자를 넘어서 존재에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만 존재는 존재자의 존재로 남아 있는다. 왜냐하면 존재는 그것이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에 연관된 채 남아 있을 때에만 존재 자체로 머물러 있을 수 있고 존재자에로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거꾸로, 존재자는 그것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여질 때에만 시야를 자기 자신을 넘어 위로 향하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초월이란 하나의 시원과 확정된 출발점을 가지고 있는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일종의 끝이 없는 순환운동이다. 즉 (언제나 이미) "잔류"(이었던)인 초월과, 동시에 전체에로의 되돌림인 참여, 존재에서의 존재자와 존재자의 존재. 존재자에 대한 모든 이론은 ("자연학"은) 존재에 대한 시각을 ("형이상학"을) 전제하고 있다. 모든 형이상학은 자연학, 다시 말해 존재자 그 자체에 대한 학문으로서 존재에 대한 앎이다. 그렇게 명명된 아리스토텔레스의 두 저작의 분리될 수 없는 통일성은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단지 이러한 본질적인 사태내용에 대한 풍부하고 범례적인 표현일 뿐이다.
5) 현전과 비은폐성(밝힘). 하이데거는 "시간"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의 본래적 의미가 "현-전", 즉 은폐성에서 비은폐성으로 올라가 들어가자 벌써 은폐성으로 떠나기 시작하는 그러한 "머뭄(Weilen)"에 있다고 파악한다. "열린 장으로 들어와 머뭄"을 의미하는 현-전이 항상 "이미 활동하고 있는 밝힘에 의존"함은 자명하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현전만 선행하는 밝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밝힘도 현전에 의존한다는 데에 유의해야 한다. 현전과 밝힘의 의존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활동하고 있는 밝힘 안으로의 현-전은 그것이 전제하는 밝힘 자체를 변하게 하기 때문이다. 현전에 의한 밝힘의 변화는 대개는 미미하여 쉽게 눈에 띄지 않지만 적어도 특별한 경우에는, 즉 특별한 존재자가 등장하는 경우에는 --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의 만남이나 어린아이의 탄생, 석유의 발견이나 동력엔진의 발명 -- 그것이 분명해진다. 이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아기의 탄생은 산모의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하게 한다. 아기의 탄생은 산모에게 모든 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새로운 세계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이다.
밝힘 안으로의 현전이 선행하는 밝힘 자체를 변화시킨다는 본질사태를 하이데거는 "현전 그 자체가 비은폐성을 가져온다"고 표현하고 있다. 열린 장을 여는 것, 즉 비은폐성을 변화시키면서 탈은폐하는 것은 현전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시간-놀이-공간을 변화시키면서 탈은폐하는 현전의 본질을 하이데거는 "현전하게 함(Anwesenlassen)"이라고도 명명한다. "현전자들의 관점에서 사유하면 현전은 현전하게 함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이제 이 현전하게 함을, 현전이 허락되는 한에서, 제대로 사유할 차례이다. 현전하게 함은 그것이 [현전자들을] 비은폐적인 장으로 데려온다는 데에서 자신의 고유함을 보여 준다. 현전하게 함은 탈은폐, 열린 장으로 보냄을 의미한다. 탈은폐에서는 줌(Geben), 다시 말해 현전-하게 함에서 현전, 즉 존재를 주는 줌이 일어난다." "현전하게 함"은 특별한 존재자,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 또는 예술작품의 현전이 존재자 전체를 특정한 방식으로 현전하게 하는 "사건"을 말한다.
존재자의 (세계내부적) 존재가 가지는 이와 같은 밝힘 또는 세계의 성격이 지각될 때에만 그 존재자는 자신의 고유한 근원적 풍부함을 드러낸다. 각가 고유한 방식으로 존재자 전체를 밝히고 "모으는"(logos) 이러한 존재자를 하이데거는 "사물(Ding)"이라 칭한다.
현전에서 일어나는 밝힘의 사건은 "이제까지 숨겨져 왔던 현전, 즉 존재의 한 근본특징"이다. 세계를 밝히는 현전의 본질이 서양철학사에서 처음부터 망각되어 왔다는 것은 "사물들이 도대체 아직까지 한번도 사물들로서 사유에게 나타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존재망각은 오늘날 우리의 기술시대에 이르러 그 극에 달하게 된다. 사물의 황폐화, 세계의 암흑화 그리고 인간들의 본질적인 고향상실은 벌써 "허무주의나 낙관주의같이 어린애 같은 범주가 우스운 것이 되어버린" 단계에 이른 것이다.
모든 존재자를 밝히고 모으는 존재의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하이데거에게는 이제 존재의 진리가 전체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존재의 진리에는 "부재에 감싸어진 현전"뿐만이 아니라 밝힘 자체도 속하는 것이다. 존재자의 존재는 본래 부재에 "잇대어져 있는" 현전과 은폐에 공속하는 밝힘으로 분화되어 있는 것이다. 존재자의 존재는 이러한 현-전과 밝힘의 "구별"이 생기하는 "존재사건"이다. 현전과 밝힘의 구별사건으로서의 존재는 존재와 시간의 근원적 관계 및 존재와 시간 각각의 진리에 관한 물음으로 전개되었던 존재 일반의 의미에 관한 물음에 대해 후기 하이데거가 제시하는 "임시적인" 답이다.
6) 존재론적 차이의 망각. 지금까지 고찰한 것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는 단순한 개념상의 차이가 아니라 인간 현존재가 관여되면서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존재사건 내지는 존재진리발생사건에 바탕하고 있는 독특한 존재적·실존적·언어적 차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러한 존재사건에 대한 놀라움이 <형이상학>이 되고 철학이 개념적 이해와 설명으로 체계화되고 학문이 발달되고 세분화됨에 따라 존재론적 차이가 망각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주장이다.
먼저 생생화육하는 능산적 자연 속의 그 모든 각양각색의 생기·소멸과 그 와중에 있는 자연사물들이 형이상학적인 관점에 맞추어져 보편적인 개념의 형태로 표현되며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 모든 자연사물들에서 용출하고 있는 자연의 편재는 <존재>라는 이름을 부여받게 되고 천차만별의 다양함 속에서 형태를 내보이고 있는 자연사물들은 <존재자>라는 개념을 받게 된다. 자연사물로서의 존재자가 그 생성·소멸·변화 속에 고찰되며 이러한 각양각색의 변이가 운동이라는 공통분모로 파악되면서 존재자는 곧 운동 중에 있는 것으로 보이게 되며, 존재자가 어떻게 해서 운동하게 되었는가 하는 운동의 근거 내지 원인을 묻는 물음이 철학의 근본물음으로 자리하게 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총괄하는 개념이 된 <존재자>가 <형이상학>의 주도개념이 되면서 형이상학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온 헤 온)"란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존재자를 존재자로 규정하고 있는 <존재>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보편적으로 공통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근거로 간주되기 시작한다. 생생화육하는 능산적 자연 한가운데에 존재하며 그 자연에 놀라면서 철학을 시작하게 된 인간은 처음에는 설명의 근거를 자연에 바탕한 다양한 현상들에서 찾기 시작하다가 점점 개념의 추상성과 보편성에 매료되어 구체적인 자연사건에서부터 눈을 돌려 사유의 통일능력에 현혹되게 된다. 그리되는 과정에서 존재론적 차이는 망각되고 존재가 곧 존재자이고 존재자가 곧 존재인 것처럼 혼용되기에 이른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번 앞에서 이야기한 존재자 전체로의 침입사건을 기억하는 것이 유익하다. 그때 우리는 생생화육하는 능산적 차원의 자연(Physis)과 그 한가운데 내던져져 있으며 그 자연과 관계를 맺는 인간 현존재(Dasein/noein, legein)와 그렇게 관계 맺으면서 그 관계를 말로 밖으로 말하는 로고스(Logos)를 구별하였다. 그러면서 이 세 차원이 뗄 수 없이 서로 뒤엉켜 있다고 말하였다. 그 말은 인간이 능산적 자연 속에 전적으로 수동적으로 내던져져 자연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대로 대응하며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전체로서의 능산적 자연이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비슷하게 주어지고 있지 않다. 무엇보다 전체로서의 자연이 인간에게 주어질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똑같은 자연도 그 안에 던져져 있는 인간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가 어떤 세계-내-존재인가에 따라 자연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그에게 주어진다. 인간은 시대와 문화권에 따라 각기 다른 세계 속에 처하게 되며 이러한 인간마다의 독특한 처해 있음이 그 인간의 고유한 해석학적 상황을 형성한다. 바로 이 각기 다른 해석학적 상황이 자연발생사건을 고유한 해석의 틀 안으로 데려오게 되며 그에 따라 자연은 각기 다르게 존재하게 된다. 해석학적 상황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리로 기획투사되는 이해의 지평은 그 세계에서 만나게 되는 존재자를 해석하는 개념의 틀을 앞서 규정하고 있다. 새로운 차원의 경험에 의해 이해의 지평이 넓어지고 개념의 틀이 확장되면 우리가 그 한가운데 처해 있는 자연도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때 개념의 틀이 일방적으로 이해의 지평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유연성 있고 사태에 맞갖은 개념의 틀은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 데 기여하게 된다. 개념의 틀이 확정되어 사태를 일방적인 시야와 해석에 고정시켜 버릴 때 인간현존재의 존재방식도 일면적이 되며 그에 따라 자연도 특정한 시각에서 나타나게 된다.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가 존재망각의 역사였다 라는 하이데거의 주장은 바로 이러한 세 차원이 서로 뒤엉켜 일어나고 있는 존재진리발생의 사건을 전체에서 고찰하지 못하고 특정의 차원을 부각시키면서 다른 차원은 등한시한 결과임을 의미하고 있는 말이다.
인간은 자연 한가운데에 살면서 이 자연을 이해하며 거기에 순응하며 살려고 한다. 이때 자연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설명하여 친숙한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인간은 추상화와 일반화의 방법을 끌어들이게 되며 원인과 근거를 찾아 나서게 된다. 그리하는 중에 이해될 수 없는 것과 설명될 수 없는 것을 낯설다는 이유로 차츰 멀리하게 된다. 친숙함 속에서 놀라지 않고 안정 속에 살기를 바라는 인간은 갈수록 더욱 더 이해와 설명의 시각으로 자연을, 존재하는 것 전체를 보게 된다. 이렇게 인간의 존재방식이 바뀌면서 존재자를 설명하는 개념의 틀도 바뀌며 그러한 시각 안에 고정되게 되고 자연도 그런 시각과 개념에 들어오는 것에 맞추어지게 된다. 
이러한 바뀌어진 인간의 자연을 대하는 방식을 하이데거는 표상하는 사유라고 칭한다. 표상하는 사유가 존재사건에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인간의 세계는 그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형성되어 가고 자연도 다른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존재하는 것은 표상하는 사유에게 주어지는 것, 그 사유의 앞에 현전하는 것이 되며, 존재자의 존재는 그렇게 현전하는 것의 현전성, 그 자리에 지속적으로 현전함인 지속적 현전성이 된다. 이해와 설명, 근거해명을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르게 사유하는 사유의 원칙이다. 이제부터는 존재사건도 이 사유원칙에 의해 파악되고 설명되어야 하며 그 원칙에 위배되는 것은 모순되는 것으로서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니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렇게 자연의 대상화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4. 표상하는 사유와 자연의 대상화

1) 형이상학의 로고스적 경향과 사유.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구별인 존재론적 차이는 물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현존재에게 주어져 있으며 현존재와 존재와의 연관을 규정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존재'를 말할 때, 이것은 '존재자의 존재'를 말한다. 우리가 '존재자'를 말할 때, 이것은 존재의 관점에서 본 존재자를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갈라짐(Zwiefalt)에서 말한다."  "갈라짐은 각기 이미 -- 비록 그것이 그 자체로서는 감추어져 있어도 -- 인간에게 제공되었다." 
인간 현존재에게 존재론적 우위를 마련해주고 있는 이 존재론적 차이는 사유에 의해 보존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보존이 두 가지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이행될 수 있다. 우선 보존이 동시에 일종의 "망각"인 그런 방식으로 이행될 수 있다. 이럴 경우 존재론적 차이는 사유가 그것을 요구하는 한에서만 그 자리에 있게 된다. 그런데 사유는 존재론적 차이에 대해 합당하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형이상학이 존재론적 차이를 보존해온 양식이다. 존재론적 차이를 보존하는 다른 방식은, 명시적으로 존재론적 차이의 본질에 대해 묻는 그런 사유에서 이행된다. 두 가지 보존방식이 다 각기 나름의 방식으로 존재를 사유하기 때문에, 그 둘은 바로 본질적인 사유의 두 형태인 셈이다. 이 둘은 그들 고유의 특징을 다른 것과의 차별화 속에서 획득한다. 따라서 형이상학이 풍부한 의미에서 존재-론이라고 명명될 수 있다면, 이 경우 이 형이상학의 본질은 우리가 그것의 말함의 특수한 양식을 다른 방식의 말함을 항상 염두에 두고 상세하게 분석할 때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형이상학을 그것의 말함에서부터 특징짓는 작업은, "존재와 사유"라는 형식이 형이상학의 전체 역사를 주도해온 사상을 표현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더욱 더 필수적인 것으로 보인다. 형이상학은 "존재자를 그것의 존재에서 표상함이 사유라고 이해"하고 있다. 다시 말해 존재자를 그것의 근거들에서부터 그리고 보편적으로 표상함이 사유라고 말이다.
사유의 형이상학적 근본성격은 표상함이다. 그로써 의미하고 있는 것은 "어떤 것을 생각해냄" 또는 관찰 가능한 의식내용을 재생산해냄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서 내보임,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 확정함"이다. 사유가 이런 성격을 갖게 되는 것은, 사유가 존재자를 그것의 존재에서, 다시 말해 앞에 놓여 있는 것을 그것의 (이러저러하게) 앞에 놓여 있음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유가 앞에 놓여 있는 것을 그 자체로서 그렇게 앞에 놓여 있도록 하기 때문에, 사유는 그리스어로 레게인 -- 이것은 근원적으로 "놓다", "모으다"를 뜻한다 -- 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존재"는 "그 스스로 하나의 특정한 외양 안에 놓임"을 말한다. 존재자는 밑바탕에 놓여 있는 것, 기체, 숩옉툼(주체)이다. 존재에 대한 이러한 규정은 대단히 다양한 변형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을 지탱해온 근본축이다. "존재자의 존재성(ousia)이 모든 형이상학에서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주체성이다." 그리고 이 점이 이미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리스적 형이상학의 시초에 해당되기에 근대 철학에서 주체성이라는 낱말과 사태가 사유의 중심으로 밀치고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거꾸로 존재를 앞에 놓여 있음, 사유를 앞에 놓여 있게 함으로 규정한 그리스의 영향은, 그 역사가 근세적인 전개에 이르기까지 고찰될 때, 비로소 제대로 분명해질 것이다.
표상하는 사유는 파르메니데스가 존재의 보전에 속하는 것으로 본 저 두 계기들의 합치에서부터 자라나온 셈이다. 다시 말해 노에인과 레게인에서부터 말이다.(파르메니데스 단편 6,1) 이때 노에인은 존재자를 단순하게 수용함(Hinnehmen)이 아니라, "활동적으로 주시하면서 현전하는 것이 하나의 현전하는 것으로서 그것의 외양(에이도스)에서 자신을 내보이도록 하는" 그러한 받아들임(Vernehmen)이다. 따라서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 규정하면서 만나는 것을 꿰뚫어-잡는, 꿰뚫어 보는" 그러한 받아들임이다. 비슷하게 레게인은 "밖으로 말하는 판단함", "어떤 것에 대해 어떤 것을 발언함", 레게인 티 카타 티노스(legein ti kata tinos)이다. 여기에 놓여 있는 매개 때문에 레게인은 또한 함께-정립함, 결합 또는 "문장"으로 특징지어지기도 한다. 그리스적으로 사유해서, 어떤 것이 앞에 놓여 있고 그래서 받아들여지며(인지되며) 그래서 다시금 발언될(밖으로 말해질) 수 있는 그러한 영역은 비은폐성의 영역이다. 따라서 표상함(앞에-세움)은, 이미 열린 데에 놓여 있는 것을 제대로 그 자체로서 앞에 놓여 있도록 하는, 그 자체 안에 서 있는 것을 제대로 그 자체로서 세워놓는 그러한 양식을 띠고 있다.
2) 표상하는 사유의 존재자를 앞에-세움. 그런데 근세 철학에서 이러한 영역의 성격이, 즉 열린 곳의 개방성이 본질적으로 변형된다. 열린 곳의 개방성이, 즉 "진리"가 이제는 더 이상 단순한 비은폐성의 성격을 띠지 않고 오히려 확실성의 성격을 띠게 된다. 이러한 빛 안에서 "존재"와 "표상함"도 다른 외양을 얻게 된다. 이제 표상함(앞에-세움)은 "어떤 것을 그 자체서부터 자기 앞에 세우며 그렇게 세워진 것을 그 자체로서 확보해 놓음"을 의미한다. 존재자의 존재성, 곧 존재자의 자체 안에 서 있음은 이제 그저 단지 마주서-있음(대상성)으로 경험될 뿐이다. "오직 근거제시하는 표상함에서 세워지게 되는 것만 존재자로서 통용될 수 있을 뿐이다." 바로 여기에서 들음의 의미인 받아들임이 이제 일종의 법정의 심문이라는 의미의 캐물음으로 변형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앞에-세움은 그 자신에서부터 그 자신에로 모든 만나는 것을 심문하여, 그것들이 앞에-세움이 확보하기 위해 자기 앞으로 데려옴으로서 자기 자신의 안정을 위해 요구되는 것을 체워주는지 어떻게 채워주는지를 캐묻는다.…… 앞에-세움은 존재자의 존재성에 대해 결정을 내리는 법정이 된다." 존재자는 더 이상 그것의 자체 안에와 자체에서부터라는 관점 안에, 다시 말해 그것의 주체[기체]성 안에 놓이지 않게 되며 오히려 존재하는 것으로 정립된 것으로, 즉 대상화함과 판단함 -- 이것은 이제 모든 객관적-정립의 원천으로서 본래적인 주체, 다시 말해 그 자신 안에 머무는 것이 된다 -- 의 객체로서 서 있게 된다.
형이상학은 "존재자를 그것의 존재에서 표상함이 사유라고 이해하는데, 이때 사유는 표상함을 개념의 일반적인 것 안에서 넘겨준다". 사유는 개념 아래, 보편성으로 표상함이다. 모든 것 일체에 대해 발언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것은 존재이다. 거꾸로 존재자의 존재는 이러한 방식으로 존재자에서 가장 보편적인 바로 그것이라 이해된다. 그리스의 형이상학에서 바로 그러한 것에 상응하는 것은 존재자의 존재의 잘 알려진 이름인 우시아(ousia)이다. 우시아는 "존재성을 말하며 이렇듯 존재자에 있어 보편적인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존재자에 대해 말하면서, 이를테면 집, 말, 인간, 돌, 신에 대해 말하면서 단지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라고만 말한다면, 이러한 가장 보편적인 것의 가장 보편적인 것이 최고로 보편적인 것, 즉 최고의 종(to koinotaton)이, 가장 '일반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최고로 보편적인 것과 구별해 볼 때, 즉 존재와 구별해 볼 때 존재자는 각기 그때마다 '특수한 것'이 이러저러하게 종지워진 것 개별자이다".
형이상학의 과제는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다시 말해 따라서 그것의 가장 보편적인 특징에서 제시해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들이 근본-특징들, 다시 말해 그것의 눈앞에 있음이 비로소 존재자를 그것의 존재에서 근거제시해주는(형식근거로서의 근거) 그러한 특징들이다. 그런데 존재자를 보편적인 것에로 기획투사하는 것은 표상하는 사유 내지는 발언의 독특함이다. "어떤 것을 어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말로 카테고레인(kategorein)이다." "존재자에 대한 통상적인 말함과 논함에서 언제나 이미 암묵적으로 함께 말해지며 이야기되고 있는" 그것은 "그 관점 아래 존재자가 존재자로서 말해지는" 가장 보편적인 관점들, 다시 말해 범주들이다. 그런데 범주들은, 로고스 아포판티코스(서술적 로고스)로서의 발언의 본질에 상응하게, 즉 "존재자가 그것 자체에서부터 자신을 내보일 수 있게끔 할 수 있는" 말함에 상응하게, 이러한 앞에-세움의 가장 보편적인 관점들일 뿐 아니라 또한 "현전하는 것 그 자체에 대한 본질적인 규정들, 다시 말해 존재자 그 자체의 성격들", 다시 말해 존재자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것의 방식이 범주들인 이 존재는 무엇인가? 이 존재는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 더 이상 규정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규정이 다 더 보편적인 것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존재"는 옳게도 실재에서는 상응한 어떤 것도 발견할 수 없는 -- 거의 아무런 의미가 없는 "내용이 텅빈 낱말"인 -- 순전한 낱말일 뿐이라는 인상을 준다. 우리는 존재개념의 공허함을 우리가 존재-일반에서부터 떠나 특수한 존재방식에로 향함으로써 채울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때 물론 우리는 이러한 존재방식들이 존재의 방식들로서 "우리가 이미 애초부터 존재를 그것의 본질에서 이해함"으로써만 인식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셈이다. 존재를 추상을 통해 얻은 개념으로 제시해 보려는 모든 시도가 바로 이러한 생각 앞에서 좌초하고 만다. "존재를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 해석함으로써는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해진 바가 없고 단지 형이상학이 존재의 개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그 방식만이 말해질 뿐"이라는 근거 있는 혐의만이 피어오를 뿐이다.
3) 로고스 중심의 존재해석의 역사. 지금까지 우리는 간략하게 인간 현존재에게 주어진 존재론적 차이의 갈라짐이 말함을 중시하는 존재-론적인 형이상학 전통 내에서 어떻게 <보존>되어 변형되어 왔는지를 살펴보았다. 이제는 이러한 로고스 중심의 존재해석이 불러온 다양한 차원의 변화를 좀더 자세하게 고찰해보기로 한다. 전통 형이상학은 존재론적 차이에 대한 경험을 차츰차츰 로고스의 차원에만 국한시키게 되는 이유로, 사유 자체에 대한 규정도 표상하는 사유, 개념적 파악, 대상적 인식으로 축소시키게 되며, 존재자도 앞에 마주 세워진 대상 내지는 지배의 의지에 의해 생산된 물품으로 되며, 존재도 내용이 텅빈 존재성에서 시작해서 대상성 내지 부품성으로 파악되며, 자연도 다양한 생산과 교환의 가치가 되어버린다.
서양의 존재 역사의 진행 속에서 존재는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데아>, <에이도스>, <이념> 등의 이름들로 들이닥치게 되었다. 그 결과, 서양 사유에 있어 존재 곧 이념으로 보는 이 같은 해석은 서양 사유 변화의 역사를 관통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타당한 것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계속해서 묻는다. 플라톤에게서 피지스, 즉 존재가 이데아로서 해석되어 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이데거에 따르면 실로 결정적인 것은 "도대체 피지스가 이데아로서 특징지어졌다는 점이 아니라, 오히려 이데아가 존재에 대한 유일한, 척도를 부여하는 해석으로서" 출현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피지스가 이데아로, 진리가 올바르게 향함으로, 로고스가 발언으로, 다시 말해 올바름으로서의 진리의 장소로, 그로써 또한 범주들의 근원으로, 즉 존재의 가능성들에 대한 원칙으로 되었으며, 그 결과 이제는 <이념들>은 물론 <범주들>도 척도를 부여하는 칭호로 되어 서양의 사유와 그 실천, 아니 삶 전체가 지금까지 그것 아래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이해하게 되었다. 즉 받아들임이 발언이라는 의미의 로고스에 의해 인수되었으며, 그 결과 이제 근원적인 받아들임이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서 규정함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판단하는 표상함이라는 지성 내지 이성의 능력으로 되었다. 우리는 "존재를 …… 익숙한 설명함의 재갈을 물려 잡아당기도록 부추겨져 있으며", 그래서 우리 모두는 수세기 이래로 존재자의 지배자인 듯한 이중의 올가미에 묶여 있다. "그 하나의 올가미는, 우리가 도대체 존재자에만 집착하고 존재 자체에는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행동 관계와 생각함을 얽어매고 있다. 다른 하나의 올가미는 이렇게 잘못 얽어매인 것을 한 번 더 옭아매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오로지 평가된 존재자만을, 이것이 현실적인 것일 때에만, 다시 말해 이것이 작용이 미친 것 또는 작용을 끼치고 있는 것, 그래서 이것에 의해 영향이 미칠 수 있거나 아니면 어떤 작용함의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일 때에만 존재자로서 승인하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인식에 전념하고 있는 사람들은 "한 학문의 확고한 장비를 배워 익혀 그 속에서 계속 작업을 해 나가는 것과, 아니면 마음[존재]의 진리에 귀기울여 단순히 그 진리를 말하는 것 중에 무엇이 더 쉬운지를 헤아려낼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의 것이 본질적으로 보다 어려운 것이다."
<존재>가 개개의 모든 학문적 탐구에게 스스로를 <대상>으로서, 그것도 가공, 생산, 재생해야 할 <대상>으로서 내보임으로써 과연 <존재>는 언제나 스스로를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종래의 철학은 형이상학으로서 <존재>를 끊임없이 대상적 존재자의 관점에서 사유하여 그것을 존재자로서 사유하며, 이로 인해 <존재>를 "개념적으로 붙잡아" 또한 학문에 "접근될 수" 있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이 점이 <존재>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시간에도 해당된다. <존재>도, <시간>도, 더 나아가 <차이>까지도 개념적으로 붙잡을 수 없다는 것, 다시 말해 존재에 대한 개개의 개념은 모두 아무리 버둥거려 보았자 언제나 이미 <너무 늦게> 등장한다는 점을 확정하게 된다면, 우리들 각자는 <존재>, <시간>, <차이>가 분명 우리 모두에 의해 경험되고는 있지만, 기껏해야 불충분하게 <개념 파악될> 수 있을 뿐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점은 다음의 사실을 말한다. 즉 그렇다면 또한 이제 더 이상 <개념 파악된 존재의 역사>는 더 이상 이제, 존재란 어떠한 개념 파악적인 서술로부터도 스스로를 <숨기>거나 <은폐>시킨다는 그 점에 의해 보호되고 있는 저 존재의 역사를 칭하는 이름으로 사용될 수 없다. <존재>는 존재자로서의 존재를 위해 자신을 <숨긴다>. 그래서 또한 이제 우리는 하이데거가 광범위하게 계획된 철학 고전 해석에서 근본적으로 바로 이 숨김의 역사를 뒤좇아 그려내거나 이해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4) 표상하는 사유와 현실. 표상하는 사유능력인 지성능력이란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현실적인 현실을 쪼개는, 즉 분석하는 일종의 프리즘이다. 결정적인 것은 우리가 교육으로 말미암아 그 사이에 우리 자신을 우리의 지성과 아주 동일시해 버린 나머지 거의 더 이상 지성을 문제삼을 수 있는 입장에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우리는 그저 지성이라는 망판용(網版用) 스크린을 통해서만 볼 뿐이며, 그래서 우리는 지성이란 본래 무엇인가 하고 묻게 될 경우에도 또다시 이 지성에 의해 각인된 하나의 대답을 하고 만다. 그러므로 대답은 예나 다름없이 여전히 저 밖에 서 있기 마련이다. 우리를 이끌고 있는 지성의 각인들은 이때 일차적으로 사회적 제약들의 산물들이며, 그러므로 전혀 우리 자신의 고유한 산물들이 아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본래적>이지 않다. 이 점이 대부분의 경우 우리에게 의식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들 각자가 거의 모두 사유에 관해 떠들어대고 있지만, 아주 드문 경우에만 우리는 우리가 분명 줄기차게 실행하고 있는 저 사유 자체가 무엇인지를 물을 뿐이다.
형식논리학에 따르면 <사유법칙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올바른> 사유의 네 가지 원칙들이 있다. 즉 동일률, 모순률, 배중률, 충분한 근거률 등이 그것이다. 이들 사유법칙들은 만일 사유가 올바르게 진행되어야 한다면, 그것이 의거할 수밖에 없는 규칙들이다. 달리 말해, <올바른> 사유가 의거해야만 하는 규칙들과 법칙들은 말 그대로 그저 상정될 수 있을 뿐 증명될 수는 없는 가정 위에 근거하고 있다. 이들 규칙들과 법칙들은 명증적이다. 즉 누구에게나 다소간 명백하거나 통찰 가능하다. 따라서 또한 그것들은 참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사유 자체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이들 사유법칙들을 갖고서는 그저 조건적으로만 경험할 뿐이다. 다시 말해 <올바른> 사유를 배울지는 몰라도, 사유 자체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경험하지 못한다.
분명 서양의 사유는 아주 특수한 관점 아래 서 있으며, 그런 나머지 그것은 또한 오직 이러한 관점 하에서 자신에게 열어 밝혀주는 그것만을 사유하고 개념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 밖에 머물러 있는 것은 모두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우리가 잘 알려진 사유의 네 가지 원칙들을 안중에 두게 될 바로 그때, 논리적인 사유는 분명 앞서 이미 윤곽잡힌 어떤 놀이규칙들의 테두리 속에서 행해진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이러한 놀이규칙들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이해 전달 체계의 총괄과 같은 어떤 것이다. 그래서 그것들이 없다면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의 말만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것들은 산업적-과학적-기술적 진보를 떠받치고 있는 토대이기도 하다. 이런 진보에 대해 사람들은 오늘날 그것이 근본적인 위기에 처해 있다고들 한다.
분명 네 가지 <사유의 원칙들>은 무엇보다도 현실을, 다시 말해 주지하듯이 끊임없는 <변화> 속에 처해 있는 그런 현실을 붙잡아 세우는 데, <확고하게 붙잡는> 데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어느 때나 계산할 수 있고 또 언제나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그런 <부품>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진기한 것은 근본명제들이 증명될 수도 또 그럴 능력도 없는 근본적인 이론적 인식이라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유의 원칙들>에 의거하여 사유하고 있는 그것은 <어떤 것>에 대해, <어떤 것>에 관해 발언하게 된다는 데에로 귀착된다. 따라서 여기서 언제나 우리는 <대상>과 연관된 사유, 말하자면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서, 따라서 <표상>으로서 <앞에 세우는> 그와 같은 사유와 관계하게 된다. 이 표상하는 사유는 무엇보다도 회피해야 할 모순이라는 원칙 내지 사유규칙을 따르고 있으며, 그로써 사유를 바로 이 언급된 사유규칙들 내지 원칙들에로 국한시키는 것을 따르고 있다.
사유를 오로지 개념적 사유, 또한 그로써 학문적 사유에로 국한시키는 것은 각각의 모든 관점에서 우리로 하여금 본래적 시간과,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겪고 있는 그런 경험의 직접성과 유일성을 저버리도록 이끌게 된다. 예컨대 존재에 관한 개념처럼 <'어떤 것'에 관한 개념>을 가질 때, 우리는 존재하는 것에다 우리만이 개념파악하고 있는 그런 특징을 서술하게 된다. 그러나 이 일은 결국 그저 존재 경험에 대한 제한에로만 이끌 뿐이다. 예컨대 존재가 속성 A, 말하자면 A라는 특징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이 말은 존재에겐 속성 非-A, 즉 非-A라는 특징은 없다는 것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존재란 <한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모순적이다. 존재가 <실재한다>는 확인조차도, 이 <실재>가 어떤 한 속성으로 개념파악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넘어 여전히 하나의 발언, 아니 하나의 판단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5) 대상적 의식과 존재의 대상화. 근세의 개념적 사유 속에서는 존재가 존재자로서, 다시 말해 경험의 대상으로서 나타난다. 존재자로 이해된 존재의 배후에는 무엇이 은폐되고 있는가? 도대체 무엇을 통해 존재가 존재자, 즉 대상으로서 우리에게 보여질 수 있는가? 매우 단순하게, 그리고 너무도 단순한 듯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하이데거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즉 존재 자체의 열림을 통해서, 그러나 대상화로부터는 스스로를 숨기고 있는 그런 존재 자체의 열림을 통해서이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만일 존재의 열림이 성하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면, 우리는 "대상의 현재에 대해, 다시 말해 전혀 대상의 대상성에 대해 물을 수조차 없었을 것이며, 또한 칸트의 사유에는 그의 {순수이성비판}의 단 한 명제도 말할 수 있는 가능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만일 열림으로서의 존재가 자신을 미리 앞서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면, "존재자는 현존재에게 대상적인 것으로서, 객체의 객체적인 것으로서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며, 그렇게 해서 자연으로부터 탈취 가능한 힘들의 부품수용과 부품확보를 계속적으로 시도하는, 자연에 대한 저 붙잡아 세움과 주문요청을 위해 이렇게 대상적으로 표상 가능하고 산출 가능하게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근세의 이성 안에서 성하고 있는 받아들임은 목표들을 이쪽에다 갖다 세우고, 규칙들을 세우며 수단(방법)을 옆에 세우고 자신을 행위(즉 실천)의 방식에 맞춘다." 이렇게 해서 "이성의 받아들임은 …… 오늘날 어디에서나 우선은 하나의 표상함(앞에 세움)인 이 같은 다양한 붙잡아 세움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우리들 각자는 삶이란 다의적이고 풀기 어렵다는 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확고한 범주들의 도움을 받아 삶을 끊임없이 의미들로 붙잡아매어 놓기를 원한다. 우리는 우리들 안팎에서 안전성과 확실성 및 자기정체 확인가능성들을 찾고 있지만,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존재하는 모든 것에 가치를 매기고 산정하는 자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우리가 사라지는 바로 그 순간, 모든 것은 그것이 존재하는 그대로 실재하게 된다. 말하자면 가치들은 더 이상 출현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의미들 내지 의미 함축성을 지닌 세계라고 이름하고 있는 그것은 우리가 <세계>라고 이름하고 있는 저 상상의 스크린에 투사한 우리 자신의 투영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근세의 존재이해와 자기이해에 따르면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은 오로지 '계산', '안전확보', '도발적 요구', 그리고 '뒤따라 놓는 고찰', '대상화' 그리고 마지막으로 '근거제시'에 자신을 맞추어 적응하고 있는 그러한 것의 '표상' 내지는 '표상되어 있음'에서만 일어난다. 어쨌든 간에 이 모든 경우에도 의도되고 있는 것은 인간 자신을 포함한 세계의 전체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배'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명백하게 바로 이러한 '표상하는', 모든 것을 '계산하는', '안전하게 확보하는', 모든 것을 '마음대로 처리하기를 바라는', '세계에 대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사유가 인간마저도 파괴해 버리고 마는 그러한 위험을 무릎쓰고서까지 추구된다.
6) 의지와 자연의 지배. 모든 표상과 모든 진술은 언제나 거듭 자연의 전체, 본래적으로 <창조적인> 자연(피지스), 능산적 자연과 비교할 때 단지 하나의 제한규정 및 대상화일 뿐이다. 그것은 개념적 파악 자체이지만, 그 파악은 개념적으로 파악될 수 없는 것, 오늘날에도 단지 소극적인 규정만 가능한 것에로 이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통일성>에의 욕구는 개념적으로 파악 불가능한 것에 선행한다. 그리고 이런 욕구는 또한 인간적 자기확실성에 이르기까지 안정성과 확실성에 대한 근본적인 욕구에서 나오며 여기서 일정한 만족을 경험한다.
자연(피지스, 능산적 자연)은 결코 남김없이 사물화될 수 없으며 결코 또한 남김없이 획일화와 기능화라고 하는 근대적 힘의 의지의 전망 아래에 -- 동시에 주관-객관의 양극화의 진행속에 -- 예속돼 버릴 수 없다. 획일화란 자연이 더 이상 그것의 다차원성에서, 즉 전체적인 존재의 충족 안에서 파악되지 못하고 처음부터 하나의 관점, 즉 힘의 관점 아래에 설정돼 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연을 도대체 자연과학적 탐구에 접근 가능하게 하고 기여할 수 있게 만든다. 자연이 이런 식으로 또한 마음대로 처리 가능한 것이 될 수 있는 한에 있어 그것은 인간의 절대성의 요구 아래 놓이게 되고 동시에 그의 목표설정에 맞게 잘 기능하도록 만들어진다. 대상화, 획일화, 기능화를 통해 앞서 주어진 자연(능산적 자연)은 결국 우리가 본 바와 같이 또한 계산 가능하고 지배 가능하게 된다. 이 과정의 끝에 이르면 이 자연은 산출 가능한 것 내지는 전적으로 인간 노동의 재료로 변형돼 버린다. 이런 식으로 해서 자연은 오늘날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 드러난다.
다음과 같은 전제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은 확고하게 남아 있다. 즉, 우리의 인식능력은 선험적인 구조를 보여 주며, 이 구조는 이런 혼돈을 질서, 형태, 조망에로 이끌며, 그래서 단순한 "감각의 재료"로부터 파악가능하고 인식 가능하며 조망 가능한 세계의 현상을 열어 밝히고, 산출하거나 만들어내며, 생산해낸다는 전제 말이다.
 우리의 "인식능력"의 결정적인 업적은 따라서 정확히 주어진 인상의 재료로부터 가능한 인식의 대상을 산출하고 만들어내고 생산하는 데에 있다. 이것은 다름 아닌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우리의 인식능력, 우리의 인식력(Erkenntniskraft)은 현실 자체는 아니지만 현실이 우리에게 의미있는 것으로서 -- 다시 말해, 전적으로 규정된 목적에 관련된 -- 나타나는 방식을 만들어 내거나 우리에게 '실재(Realit t)'로 되게끔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인식능력은 세계를, 우주를 그것이 '즉자·대자적으로' 있는 그대로 산출하거나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이 인식능력에게 특정한 목적설정 하에 또는 특정한 목적 때문에 주어지는 그 방식에 비례해서만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자연과의 왕래는 단순한 시각의 접촉(Blickkontakt)이 아니라 오히려 그 왕래는 자연과 자연의 수학적 . 물리학적 확실성을 추구하는 역사적 . 사회적 힘 사이의 상호 교환관계를 나타낸다. 이때 이러한 확실성의 추구에서 근본적으로 볼 때 바로 이러한 자연에서의 인간의 안전확보(Sicherung)가 문제된다. 다시 말해 자연 속에서 살기 위해 아니 살아남기 위해 모든 다른 생물체들에 대립하여 자연을 자기자신만의 것으로 확보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다.
따라서 늦어도 갈릴레이와 데카르트 이후로 인간은 자신을 절대적인 주체로서 자각한다. 즉  그 모든 가능적이기만 한 인식의 의심할 수 없는 기초로서 자각한다. 곧 이 주체에 대해 현존하는 모든 것이 인식의 목표로 맞세워지며, 다시 말해 객체(Objekt), 대상(Gegenstand)으로 된다. 하이데거는 언어가 낱말과 사물의 유명론적인 구별로써 이러한 경향을 예비했다고 말한다. 오컴의 형식주의는 "실재성 개념을 공허하게 만듦으로써 세계에 대한 수학적 해결 모색의 기획투사"를 비로소 가능하게 하였다.
이제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이것이다. 계산 가능성 자체가 주체에 의한, 따라서 자연을 거리를 두면서 계산 가능하고 계측 가능한 대상으로서 자신에 마주 세우는 인간에 의한 자연의 지배의 원리로서 나타나고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연을 갈릴레이식으로 계산가능하고 지배 가능한 것으로 단초삼은 것, 이것이 바로 새로운 이론이다." 다시 말해 근대 자연과학의 이론인 것이다. "이 이론의 특성은 실험의 방법을 가능하게 한 데에 있다."
합법칙적인 연관의 개념이 작용을 일으키는 곳에서 우리는 보통 의지에 관해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는 의욕은 개념에 따른 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것은 결국 다음과 같이 생각된 것이다. 의지는 의지로서 이미 결과된 것에 대한 처분권을 갖고 있었다. 혹은 달리 표현하자면, 앎은 이미 자신의 작용에 앞서 존재한다. 왜냐하면 의지는 이미 결과된 것이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 있거나 나타날 수 있게 되는 그 조건들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지는 이미 앞서서 결과된 것에 대해 인식하면서 처리하기에 의지는 또한 자기 자신도 처리하는 셈이 된다.
 따라서 우리가 자연과학자들에게는 자연 자체의 합법칙적인 작용 자체를 인식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 말할 경우 이것은 인식을 이끄는 전제들과 그 가능성들을 고려에 넣을 때 다음을 의미한다. 즉 거기에 대해 묻고 있는 그 법칙들은 의지에 의해 규정된 이성 안에서 이미 앞서 특징지어져 있으며 따라서 표상돼 있다. 아마도 좀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이미 "미리 프로그램돼 있다." 자연은 달리 말하자면 다소간 -- 계속해서 앞서의 용어를 사용한다면 -- 인간이성(그리고 인간본성)에 의해 표상된 의지의 합법칙성에 따라 작용한다. 그리고 의지는 자기자신에 대한 자신의 의지에 있어 -- 니체/하이데거가 보여주었던 바대로 -- 마침내 오늘날 자기자신마저도 압도하고 있다.
"인간이 관계맺고 있는 것은 어디서나 대상들, 즉 그의 앞에 던져진 것들(Ob-jekte)이다." 이로써 다음의 사실, 즉 인간은 "자신을 자기 자신 위로 세우면서 마주 서 있는 것을 자신에게 공급하여 세우는, 그래서 그것을 안전하게 세우는(확보하는)" 주체라는 사실이 표현되고 있다. 하이데거는 더 정확하게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인간은 오늘날 "대상들을 (무엇보다 자연과 역사를) 앞에 세우면서(표상하면서) 자신에게 가져오고, 이렇게 가져오는 가운데 대상들을 바라보며, 계속적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정돈하며, 정돈하는 가운데 정돈된 것을 인간인 그 자신에게 그때그때 지배된 것으로서, 즉 소유물로서 되돌려 세우는 생물이다."
존재와 존재자(과학적으로 이해된 '자연과 역사'를 포함하여)와의 차이는, 도대체가 어떤 것이 있고 오히려 무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에 대한 "근거"이다. 그런데 이 근거가 하이데거에 의하면 형이상학적 사유에서는 사유되지 않은 채, 망각된 채 남아 있다. 따라서 모든 관심이 오직 거듭 존재자에만, 이제는 '존재'로 격상된 이러한 존재자에만 매달려 있을 뿐, 우리가 그때그때마다 경험하고 개념 파악하는 존재자를 비로소 경험하고 개념 파악케 해주는 저 차원으로서의 존재에는 향하지 않는다.
유한한 본질로서 인간은 존재론적 차이를 자신의 세계 체류의 영역으로 삼고 있다. 이 존재론적 차이는, 우리가 <일어남>과 <역운>을 넘어 한 번 더 사유해 본다면,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사건>으로서, 말하자면 <존재의 사건>으로서 파악될 수 있다. 이때 이 존재의 사건이 하이데거에 따르면 다시 또 스스로를 존재자에 대한 차이로서 <증여하고 있는> 존재 자체이며, 그것도 <증여하는 자>로서의 이 존재의 사건이 동시에 또한 스스로를 <숨김>으로써 그 자체로서 그 자체 안에 머물러 있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증여하고 있는 존재 자체이다. 왜냐하면 자기-증여 속에서 스스로를 삼가고 있는 한에서만 존재는 존재자에게 이 존재자에게 증여된 것을 건네주고 그것을 그 존재자에게 고유한 것으로 남겨두어, 그래서 그 존재자가 그 자체 안에 거주하고 머무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5. 무(無)의 경험과 보존

앞장에서 우리는 인간 현존재에서의 형이상학적 원초사실인 존재자 전체에로의 침입사건을 전통 형이상학의 전개과정을 염두에 두고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인간 현존재는 어떻게든 이미 존재사건의 한가운데에서 존재를 이해하며 존재자와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존재이해는 오직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갈라짐인 존재론적 차이에서 가능한 것이며, 그래서 인간 현존재는 이미 어떤 형태로건 존재론적 차이 안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이 존재론적 차이를 보존하는 인간 현존재의 근본적인 관계방식은 두 가지, 즉 내어나름으로서의 보존과 망각으로서의 보존인데, 서양의 형이상학적 전통은 망각의 길을 걸어왔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주장임을 알아냈다. 존재망각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차이의 망각인 것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보존>의 방식은 형이상학이 로고스, 즉 말함의 차원에 중점을 두고 <존재>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는 한에서의 <존재-론>에 관심을 둔 데에 연유함을 드러내 보였다. 바로 여기에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비판하고 있는 서양철학의 로고스 중심적 경향, 이성 내지는 합리성 일변도의 생활방식, 존재자 중심의 태도, 현전 중심의 해석 등이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경향의 특색은 존재와 사유를 동일하게 보기 시작한 서양철학의 시원과 연관이 있다. 그것은 처음에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사건을 받아들이는 노에인과 그것을 밖으로 말하는 레게인이었는데, 그것이 차츰 밖으로 말함에 치중하게 되면서 사유도 말해질 수 있는 것과 말해진 것과 연관되어 고찰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존재사유능력도 어떤 것을 현전하는 것으로 앞에 세워 놓고 그것을 어떤 것이라 말하는, 표상능력과 판단능력의 차원에서 규정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협소화된 표상하는 사유의 특징은 그것이 원인과 근거를 찾아나서는 근거제시의 사유라는 점과, 추상화와 보편화라는 사유의 방법에 따르는 개념파악의 사유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근거제시와 개념파악의 밑바탕에는 개념으로써 현실을 장악하고 변화시켜 보자는 지배의 의지가 깔려 있다. 이러한 로고스 중심의 사유태도가 절정에 이르게 된 것이 바로 현대에서의 기술적·과학적 생활방식이다. 
사유의 중심이 존재사건에서 로고스로 옮아가고 근거제시와 개념파악에만 전념하게 됨에 따라 우리를 둘러싼 자연에서 일어나고 있는 존재진리의 사건도 그 빛 안에서 나타나는 것에 제한되고 만다. 개념으로 파악되어 밖으로 말해질 수 없는 <존재>와 <시간>, <차이>, 존재와 존재자의 <갈라짐>, <존재사건> 등은 불명확하고 모호하다는 이유로 사유의 전면에서 사라지고 명확하게 말해질 수 있고 확실하게 장악될 수 있는 것들만이 사유의 관심사가 된다. 개념파악하는 사유의 능력 밖에 있는 것은 없는 것(무[無])으로 간주되고, 표상하는 사유가 현전하는 것으로 앞에다 세워 놓을 수 없는 것, 즉 부재하는 모든 것이 다 무로 여겨지고, 그러한 사유에게 탈은폐되어 있지 않은 것, 즉 은폐와 은닉 속에 감싸여 있는 모든 것은 다 무로 취급된다. 이렇게 볼 때 <존재-론>으로서의 형이상학은 존재자가 아닌 것은 애초부터 그 뿌리부터 제거해 버리는 <무 제거의 역사>임이 드러난다. 전통 형이상학은 그 시작부터 <무의 봉기>를 가장 두려워했으며, 그래서 무의 반란의 기미가 보이면 가차없이 발본색원하여 제거해 버린 철저한 <존재자 중심의 역사>이다. 이러한 존재자 중심의 사유 태도를 우리는 현대에서의 학문적 내지 과학적 현존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장에서 우리는 존재론적 차이를 본래적으로 보존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이 요구되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서양 형이상학이 제거해버린 무에 대한 경험의 가능성을 새롭게 열어놓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 가능성을 하이데거의 강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를 좇아가면서 찾아보기로 하자.
1) 학문적 현존재. 로고스 중심의 사유태도를 대변하는 학문적 현존재의 방식을 자세하게 고찰하면서 거기에서 드러나고 있는 무에 대한 태도를 끄집어내 보자. 학문을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존재자 그 자체의 탐구를 위해서 존재자와 관계를 맺는다. 그의 이러한 존재자와의 관계 맺음은 동떨어진 고립된 관계 맺음이 아니라 그의 세계 관련 내에서의 한 연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세계-내-존재로서의 그가 그 안에 놓여 있는 그의 세계 관련이 그로 하여금 존재자 자체를 탐구하도록 하는 것이다. 학문의 이러한 특수한 세계 관련을 이끌고 있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염려 속에 자기존재가능을 기획투사하면서 학문을 수행하고 있는 인간의 실존적 태도이다. 여러 존재자 중의 한 존재자인 인간이 학문을 수행함으로써 존재자 전체에로 침입하여 존재자를 파헤쳐 드러내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이렇듯 학문을 하는 우리의 학문적 현존재는 <세계 관련, 태도, 침입>에 의해 각인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우리의 학문적 현존재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세계 관련이 향하고 있는 것은 존재자 자체이며, 그 밖의 아무 것도 아니다.
모든 태도를 이끌고 있는 것은 존재자 자체이며, 그 밖의 아무 것도 아니다.
침입에 있어 탐구의 논쟁이 다루고 있는 것은 존재자 자체이며, 그것을 넘어선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는 흔히 학문하는 우리의 자세를 이렇게 강조하곤 한다. 즉 "탐구되어야 할 것은 오로지 존재자일 뿐 그 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존재자일 뿐 그 밖의 아무 것도 아니다. 유일하게 존재자일 뿐 그것을 넘어선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번 깊이 숙고해 보아야 한다. 존재자 그 자체를 위하여 존재자를 탐구해야 한다는 학문정신을 강조하는 이 자리에 등장하고 있는 무(無, 아무 것도 아니다)는 순전한 우연의 결과인가? 아니면 그와 같은 자연스러운 말함 자체에 우리가 주목하지 못했던 어떤 <사건>이 자신을 알려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이렇게 물음을 던져 보아야 한다. "무는 어떻게 된 일이냐?"고. 
2) "무란 무엇인가?" 무에 대해 물음이 된다 하니까 즉시 우리는 이렇게 묻는다. "무란 무엇이냐?"고. 그러나 이렇게 물음으로써 우리는 무를 이러저러하게 존재하는 "무엇"으로 간주하고 있는 셈이다. 또 무가 이런저런 것"이다"(ist)라고 대답함으로써 무에 존재를 "서술"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그러나 이것은 통상적인 무에 대한 인식에 상반되는 태도이다. 따라서 무에 대한 물음뿐 아니라 그 대답도 다같이 자체 모순인 셈이다.
일상의 상식을 넘어서 지성에게 이 물음을 넘긴다면 지성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사유는 본질적으로 항상 어떤 것에 대한 사유일 수밖에 없는데, 무에 대한 사유란 그 자신의 본질에도 위배된다고. 지성은 무(無)란 존재라는 것 일체에 대한 부정으로서 단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지성은 무를 없는(아닌) 어떤 것, 따라서 부정(否定)된 어떤 것이라는 상위의 규정 아래에 놓는다. 그런데 상위개념인 부정은 인간의 특수한 지성 활동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된다. "아님이 있기에, 다시 말해 부정이 있기에 무가 있다는 말인가?"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 무가 있기에 부정과 아님이 있는 것은 아닐까?
무에 대한 물음제기도 대답도 자체 모순이라고는 하였지만 어쨌거나 지금 우리는 여기서 무에 대해 논의를 하고 있다. 어쨌든 간에 무에 대한 물음과 논의가 수행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물음과 논의는 그것이 갖추어야 할 기본 조건은 채우고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다시 말해 어떻게든지 무(無)가 물어질 수 있다면 이 무는 어떤 형태로든지 먼저 우리에게 주어져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는 무를 만날 수 있어야 한다.
무에 대한 물음은 무의 소여성(所與性 = 주어져 있음)을 전제한다. 무로써 무엇이 이야기되든지 간에 "어쨌든 우리는 무를 알고 있다". 실지로 무는 우리의 일상적 대화 속을 누비고 다닌다. 더 나아가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무에 대한 정의까지도 갖고 있다. 즉 "무는 존재하는 것 일체의 완전한 부정이다". 무에 대한 이러한 일상적인 이해가 무를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할 것이다.
무를 "존재하는 것 일체의 완전한 부정"이라고 했는데, 이 정의가 맞는다면 존재하는 것 일체는 부정될 수 있기 위해서 우선 먼저 주어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존재자 전체가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단 말인가? 일생을 학문에 매달려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란 고작 존재자의 극히 적은 일부분이 아닌가. 
그렇다. 지성적으로 존재자 전체를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어떤 형태로든 우리가 존재하는 것 전체 안에 놓여 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존재하는 것 전체는 어떤 형태로든 우리에게 밝혀져 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이 존재자 또는 저 존재자에 매달려 급급하게 살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렴픗 하게나마 우리는 존재하는 것 전체를 하나의 단일성 안에 붙잡고 있다. 우리가 존재자에 몰두해 정신을 팔고 있을 때에, 우리의 관심을 온통 존재자에 쏟고 있을 때에, 불현듯 우리는 반갑지 않은 "손님"을 대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갑작스레 모든 일이 다 귀찮고 성가시게 되는 "권태"의 내습과 더불어 일어난다. 우리의 현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지리함"에서는 단순히 이 일 또는 저 일, 이 책 또는 저 영화가 재미없는 것이 아니라 "이유 없이 누구에게 모든 것이 귀찮은" 것이다. "깊은 권태는 현존재의 심연 속에서 침묵하고 있는 안개처럼 이리저리 몰아치면서, 모든 사물들과 인간들을,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그 자신까지도 모두 기묘한 무관심 속으로 휘몰어 넣는다." 이때 이렇게 본래적인 지리함이 존재자를 그 전체에 있어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우리가 일차적으로 존재자 전체를 대면하게 되는 곳은 지성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기분"에 빠져 있는 "처해 있음"이다. 기분의 이러한 처해 있음은 그때마다 나름대로 자신의 방식으로 존재자 전체를 드러낼 뿐 아니라, 이러한 드러냄은 동시에 단순한 우연적인 발생이 아닌 우리 현-존재의 근본 사건이다. 그런데 기분은 그와 같이 우리를 전체로서의 존재자 앞으로 끌고 가는 바로 그 순간에 우리가 찾고 있는 무를 우리에게서 감추어 버린다. 
우리를 무 앞으로 데려다 줄 그런 기분 상태가 있는가? 있다. 그것은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불안"이라는 근본 기분 속에서 일어난다. 이때 우리는 불안을 특정한 대상에 대해 갖는 두려움과는 구별해야 한다. 불안 속에서는 "무엇인가가 누구에게 섬뜩하다". 우리는 꼭 집어서 누구에게 무엇이 섬뜩한지를 말할 수 없다. 그저 전체가 그 누구에게 전반적으로 그런 것이다. 모든 사물들이, 모든 일이, 우리 자신까지도 될 대로 되라는 무관심 속에 빠져 버린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일체의 것이 무의미 속으로 빠져나가면서 그것들이 우리를 향하여 돌아선다. 불안 속에서 우리를 엄습해 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존재자 전체의 뒷전으로 빠짐이다. 모든 것이 무의미의 심연 속으로 빠져 버린 순간 붙잡고 의지할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거기에 남아 있어 우리를 덮쳐 오는 것이란 단지 "아무 것도 없다"는 그것뿐이다. 다시 말해 불안이 엄습해 오는 순간 불안은 우리에게 무를 드러내 보여 준다.
"불안이 무를 드러낸다." 불안은 우리의 받침대를 무너뜨려 우리로 하여금 공중에 떠 있게 한다. 바로 여기에 우리 자신도 존재자의 한가운데에서 함께 우리의 손아귀를 미끄러져 빠져나간다는 사실이 일어나며 이 점이 바로 불안의 독특한 점이다. 불안에서는 근본적으로 '너에게' 또는 '나에게' 섬뜩한 것이 아니라 '그 누구에게' 그러한 것이다. 붙잡고 의지할 것이란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는 이 허공에 둥실 떠 있음이 모든 것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는 가운데 오직 순수한 현-존재(거기에 있음)만이 그 자리에 있을 따름이다.
불안이 무를 드러낸다는 것을 우리는 불안이 물러갔을 때 확인할 수 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질문에 우리는 생생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투명한 눈길로 "아냐 아무 것도 아니었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 그것 때문에 불안해 한 바로 그것은 '본래' 아무 것도 아니었다. 무 자체가 그 자체로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불안이라는 근본 기분과 더불어 우리는 현존재라는 사건에 도달하였다. 그 현존재 안에서 무는 드러날 수 있고 거기에서부터 무는 물어져야 한다." 무는 어떻게 된 일이냐고.
3) 무의 자리지기인 인간 현존재.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제 그가 의미하고자 하는 바를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일상의 인간은 <그들>의 논리에 따라 대중 속에서 집안 같은 평온함을 느끼며 유행 따라 이 존재자, 저 존재자로 몰려다니며 연실 '바쁘다'를 외치고 다닌다. 인간에게 고유한 존재이해의 사건에 주목할 수 있기 위해선 인간으로 하여금 그가 존재이해의 장(자리)임을, 즉 "현존재"임을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필요하다. 우리가 좇아 다니며 매달렸던 존재자, 우리에게 평온함을 안겨 주었던 <그들(대중)>의 품이 그 자명성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할 때, 그래서 나 자신까지도 포함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이 무의미의 심연 속으로 꺼져 들어가 친숙했던 그 모든 것이 낯설어(섬뜩해)질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이상 <그들>의 문법에 따르는 이성적 동물이 아닌, 받침대를 잃고 허공을 떠다니는 순전한 현-존재(거기에 있음)로 경험하게 된다. 우리에게 우리의 "현존재"를 깨닫게 해주는 것은 바로 무를 드러내 보여주는 불안이다.
근본 기분인 불안 속에서 무가 드러난다. 그러나 이때 무는 존재자로서 드러나는 것도 아니며 대상으로서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불안 속에서 무를 "존재자 전체와 함께" 대하게 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불안 속에서는 존재자 전체가 의미를 잃고 무의미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고 만다. 바로 거기에서 무가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즉 무는 무의미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전체로서의 존재자와 함께, 그리고 이 존재자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고 존재자 전체가 불안 속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도 아니고 무를 얻기 위해서 우리가 존재자 전체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불안은 근본적 처해있음으로서 본질상 어떤 것을 부정하는 두드러진 발언 행위와는 거리가 멀다. 부정을 갖고 무를 파악하려고 든다면 우리는 항상 한 발 늦게 도착하게 될 것이다. 무를 그러한 개념적 파악 이전에 이미 불안이라는 근본 기분 속에서 마주쳤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안에서 ∼로부터 물러서 피한다는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로부터 물러서 피함이 바로 무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무는 어떤 것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지 않는다. 무는 본질적으로 거부적이다. 무는 미끄러져 빠져나가는 존재자 전체를 전체적으로 거부하면서 가리키는데, 이것이 바로 무의 본질인 무화(無化, Nichtung)이다. 우리는 이 무의 무화를 존재자를 없애버림이나 부정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무화는 인간 측에서의 임의의 행동이 아니다. 무는 스스로를 무화시킨다. 무화작용은 미끄러져 빠져나가는 존재자 전체를 거부하고 가리키면서 그 존재자 전체를 지금까지는 숨겨져 있던 아주 낯선 형태 안에서 단적인 타자로 드러낸다.
이렇듯 불안이라는 근본 기분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늘상 대해왔던 존재자 전체의 일상적 의미를 상실해 버리고 그렇게 무를 마주한 뒤 그 존재자 전체를 그전과는 다른 전적인 타자로 경험하게 된다. 존재자 전체가 이제 비로소 <그들>의 독재적인 논리에서 벗어나 근원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이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존재자 그 자체의 근원적인 열려 있음"이라고 칭한다. 불안이라는 무의 밝은 밤에 우리는 비로소 존재자가 존재하고 무가 아니라는 놀라움을 경험하게 된다. 근원적으로 무화하는 무의 본질이 현-존재를 이제 비로소 처음으로 존재자 그 앞으로 데려오는 것이다.
오직 무가 근원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근거 위에서만 인간 현존재가 존재자에 접근할 수 있으며 존재자에 관여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인간 현존재가 본질상 존재자와 관계할 수 있고 관계하고 있다는 이 사실은, 이 현존재가 각기 나름대로 이미 근원적으로 드러나 있는 무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현-존재란 무 속으로 들어서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존재하면서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자와 관계를 맺는다. 이렇게 존재자와 관계를 맺으면서 인간은 각기 나름대로 어떻게든지 이미 그가 관계를 맺고 있는 그 존재자의 존재를 이해하고 있다. 물론 이때의 존재이해는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개념적 이론적 파악이 아닌 이론이전의(서술이전의) 존재이해이다. 이런 존재이해에 근거해서 인간 현존재는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고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사물 내지는 도구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한다면, 현존재가 무 속으로 들어서 머물러 있으면서 각기 나름대로 이미 존재자 전체를 넘어서 있기 때문에 존재자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현존재가 그 자신의 본질 근거상 존재자 전체를 넘어서 있기에, 다시 말해 초월해 있기에, 달리 말해 애초부터 앞서 무 속으로 들어서 머물러 있기에 존재자와 관계하고 자기 자신과도 관계할 수 있는 것이다. "무의 근원적인 드러남이 없이는 자기 자신으로 존재함도, 자유도 없다."
지금까지 말한 것에서 귀결되어 나오는 결론은 이렇다.
무는 대상도 존재자도 아니다. 무는 존재자의 곁에 달라 붙어 있는 어떤 것도 아니다. 무는 인간 현존재에게 비로소 존재자가 그 자체로 드러날 수 있게 해주는 바 그것이다. 흔히 생각하듯이 무를 존재자에 대한 대립개념으로 간주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무는 근원적으로 존재자의 본질 자체에 속해 있다. "존재자의 존재에서 무의 무화작용이 일어난다." 존재자에로 향했던 시각을 존재자의 존재에로 전환시켜 놓는 것이 바로 존재자 전체를 무의미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게 하면서 이 미끄러져 빠져나가는 존재자 전체를 가리키는 무의 무화작용인 것이다.
인간 현존재는 애초부터 무 속으로 들어서 머물러 있기 때문에 존재자와 관계할 수 있으면서도 대개는 이 가능조건에는 관심을 쏟지 않고 일상적인 배려 속에서 존재자에만 몰두하고 있다. 우리는 불안의 섬뜩함 속에 있기보다는 <그들>의 포근함 속에 안주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는 근원적인 불안이 피어오르는 여지가 보일 것같으면 즉시 일 찾아, 친구 찾아 나서 일상의 혼잡스러움과 잡담 속에서 불안이 드러내 보이려는 무로부터 도망가려 애쓴다. 이렇듯 우리가 일상적인 활동 속에서 더욱더 존재자에 몰두하면 몰두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존재자 자체가 미끄러져 빠져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그래서 더욱더 무에서부터 돌아서는 것이다. 
그런데 비록 모호하기는 하지만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무로부터의 이탈(돌아섬)이 어느 정도까지는 무의 가장 고유한 의미에 부합하는 셈이다. 다시 말해 이 무로부터의 도망이, 즉 무화작용을 하는 무가 우리에게 존재자를 가리키며 존재자에 몰두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자에 빠져 있는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무의 무화작용은 부단히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잘못된 방식이기는 하지만 끊임없이 우리들 현존재에서 일어나고 있는 무의 드러남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부정(否定, Verneinung) 아니고 다른 무엇이겠는가? 근원적으로 고찰해 볼 때 이 부정이 주어져 있는 어떤 것을 부정하기 위해 자기 안에서 "아님"을 끄집어내어 주어진 것에 덧붙이는 것이 아니다. 부정은 오직 그것에 어떤 부정할 수 있는 것이 먼저 주어져 있을 때에만 부정할 수 있을 따름이다. 부정될 수 있는 것과 부정되어야 할 것이 부정적인 것(아님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고찰될 수 있기 위해서는 사유가 이미 앞서 "아님"을 보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무가 부정을 통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부정이 무의 무화작용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아님"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부정은 단지 무화하는 관계맺음의 무화작용에 근거를 두고 있는 행동 관계의 한 방식일 뿐이다. 비록 "논리학"이 부정을 선호하여 그것이 우리의 사유를 속속들이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만이 유일한 무화하는 행동 관계가 아니며 주도적인 무화하는 행동 관계는 더더구나 아니다. "사유하는 부정의 단순한 사태에 상응함보다 저항의 완강함과 증오의 날카로움이 한결 더 바닥이 깊다. 거절의 아픔과 금지의 냉혹함이 한층 더 책임이 크다. 결핍의 쓰디씀이 한결 더 견디기 어렵다."
이와 같은 다른 무화하는 행동 관계의 가능성들을 우리는 단순히 부정의 유형으로 볼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아니다"와 부정 속에 말하여질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무화하는 행동 관계가 현존재를 속속들이 삼투하고 있음을 어둠에 쌓여 있는 무의 개방성이 입증하고 있다. 그런데 이 무를 근원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은 오직 불안뿐이다. 그러나 근원적인 불안은 대개 억눌려져 있어 나타나지 않는다. "불안은 거기에 있다. 그것은 단지 잠자고 있을 뿐이다. 불안의 숨소리는 끊임없이 현존재 전체를 파르르 떨게 하고 있다."
근원적인 불안은 현존재 안에서 어느 순간에라도 고개를 디밀 수 있다. 불안은 언제나 뛰어들 태세를 갖추고 있지만, 아주 드물게만 뛰어들어 우리를 동요 속으로 헤집어 놓는다. 바로 이 감추어져 있는 불안 때문에 현존재가 무 속으로 들어서 머물러 있게 되며 이것이 인간을 "무의 자리지기"가 되게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결심과 의지로써 우리 자신을 무 앞으로 데려갈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감추어져 있는 불안이 깨어나도록 하기 위해 불안에의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감추어져 있는 불안에 근거해서 현존재는 무 속으로 들어서 머물며 무의 자리지기가 된다. 무의 자리지기가 되면서 현존재는 존재자 전체를 넘어선다. 즉 초월의 사건이 일어난다. 그런데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은 그리스어 "메타 타 피지카"(              )에서 유래하는데, 이 "메타"가 나중에 존재자 그 자체를 "넘어서" 그 밖으로 나가는 물음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형이상학이란, 존재자를 그 자체 그리고 그 전체에 있어 파악할 수 있게끔 다시 소급해 잡기 위해 존재자를 넘어서는 것이다. 무에 대한 물음에서 이처럼 존재자를 그 자체 그 전체에 있어 넘어서는 사건이 일어난다. 
4) 형이상학과 무. 이제 전통 형이상학의 무에 대한 이해를 통해 무가 형이상학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고찰해 보자.
형이상학은 예로부터 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로부터 무가 생긴다"(ex nihilo nihil fit). 이 명제는 무 자체를 합당하게 문제 삼고는 있지 않지만, 무에 대한 나름대로의 관점에서부터 존재자에 대한 주도적인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고대의 형이상학은 무를 비존재자(= 존재하지 않는 것)의 의미로, 다시 말해 형태를 갖추지 않은 재료의 의미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이때의 재료는 자신을 형태가 있는 존재자로, 그래서 어떤 보임새(외양, 에이도스      )를 내보이고 있는 존재자로 스스로 형성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스스로를 형성하는 형성체가 존재하며 그것은 그 자체 스스로를 형상(形狀, 모습) 안에서 내보이고 있다." 이렇듯 고대 형이상학의 무에 대한 논의에는 존재자에 대한 견해와 이해가 함축되어 있다. 물론 고대 형이상학은 무 자체에 대해서와 같이 그러한 존재 해석의 근원이 어디에 있으며 그 권리와 한계는 무엇인지를 전혀 논의하고 있지 않다.
중세의 형이상학은 "무로부터 무가 생긴다"는 명제를 부정하며 "무에서부터의 창조 -- 피조물"(ex nihilo fit -- ens creatum)을 주장하는데, 여기에서는 물론 무가 다른 의미를 부여받는다. 이제 무는 본래적인 존재자, 최고의 존재자(summum ens), 창조되지 않은 존재자인 신에 대한 대립 개념이 된다. 다시 한 번 여기에서도 우리는 무에 대한 해석이 존재자에 대한 근본적인 견해를 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세의 형이상학에서도 존재와 무 그 자체에 대한 물음은 제기되지 않은 채 남는다. 
이상에서 드러나는 것은 무가 본래적인 존재자의 대립 개념이라는 사실, 즉 그것의 부정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무가 어떤 형태로든 문제가 될 때, 이런 대립 관계는 좀더 뚜렷한 규정을 받게 될 테고 그와 더불어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본래적인 형이상학적 물음이 제기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무는 존재자에 대한 막연한 대립자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존재자의 존재에 속하여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다음의 헤겔의 주장에서 읽을 수 있다. "순수한 존재는 순수한 무와 동일한 것이다"({대논리학} 제1권, WW III, 78). 이 명제를 우리는 이렇게 알아들어야 한다. 즉 존재와 무는 함께 속한다고. 존재 자체가 그 본질상 유한한데, 이것은 존재가 스스로를 무 속으로 들어서 머물러 있는 현존재의 초월 속에서만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존재 그 자체에 대한 물음이 형이상학 전체를 포괄하는 물음이라면, 무에 대한 물음도 형이상학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종류의 물음이라는 것이 입증되는 셈이다. 그렇게 볼 때 "무로부터 무가 생긴다"는 고대 형이상학의 명제도 존재 문제 자체를 적중시키는 하나의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즉 "무에서부터 모든 존재자로서의 존재자가 생긴다"(ex nihilo omne ens qua ens fit)는 명제가 그것이다. 현존재의 무 속에서 비로소 존재자 전체가 그 가장 고유한 가능성에 따라, 다시 말해 유한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에 이른다.
5) 현존재와 무. 우리는 지금 여기서 체험하고 있는 우리 현존재가 본질적으로 학문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고 특징지었다. 그런데 그와 같이 규정된 현존재가 무에 대한 물음에 직면하게 되면, 그 물음에 의해 우리 현존재가 의문스러운 것이 될 것은 당연하다.
학문적 현존재는 뛰어난 방식으로 존재자 자체와 관계하고 있으며 존재자 자체를 위해 존재자와 관계한다는 거기에 자신의 특출함을 갖고 있다. 그렇듯 우쭐하는 폼으로 학문은 무에는 관심이 없음을 천명하며 무를 포기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밝혀 보였듯이 그러한 학문적 현존재란 애초부터 무 속에 들어서 머물러 있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가능하다. 다시 말해 학문적 현존재는 무를 포기하지 않을 때에 비로소 그가 무엇인 바 그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무가 드러나고 있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학문은 존재자 자체를 탐구의 대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학문은 형이상학으로부터 실존하고 있을 때에만 자신의 본질적인 과제를 언제나 새롭게 획득할 수 있다."
오로지 현존재의 밑바탕에서 무가 드러나고 있는 바로 그 까닭에, 존재자가 아주 낯설게 우리를 엄습해 올 수 있다. 오직 존재자의 낯설음이 우리를 압박해 올 때에만, 존재자는 경이를 불러일으키며 놀라움의 대상이 된다. 그러한 놀라움 속에서 "왜"라는 물음이 튀어나온다. "왜"가 가능하기 때문에만, 우리는 특정한 방식으로 이유에 대해, 근거에 대해 물을 수 있고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우리가 물을 수 있고 근거를 제시할 수 있기 때문에만, 우리에게 탐구자의 운명이, 즉 학자의 소명이 주어진 것이다.
이제 하이데거의 강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의 최종 결론에 귀를 기울일 차례이다. 그것은 다음의 말 속에 담겨 있다.
"인간 현존재는 그것이 무 속으로 들어서 머물고 있을 때에만 존재자와 관계할 수 있다. 존재자를 넘어서는 사건이 현존재의 본질 속에서 일어난다. 그런데 바로 이 넘어섬이 형이상학 자체이다. 바로 여기에 형이상학이 '인간의 자연 본성'에 속한다는 사실이 놓여 있다. 형이상학은 강단 철학의 한 분과도 아니요 임의적인 착상의 한 영역도 아니다. 형이상학은 현존재에서 일어나고 있는 근본 사건이다. 그것은 현존재 자체이다. 형이상학의 진리가 이러한 심연의 밑바탕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 진리는 언제나 가장 깊은 오류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장 가까운 이웃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어떠한 학문의 엄밀함도 형이상학의 신중함에 미칠 수는 없다. 철학은 결코 학문이라는 이념의 척도로 측정될 수 없다."
철학은 인간 현존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바로 이 "형이상학"이라는 근본사건을 궤도에 올려놓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은 형이상학 안에서 자기 자신에 도달하며 자신의 명확한 과제를 부여받게 된다. 철학은 인간 현존재가 자신의 전체 존재 가능성 안으로 자신의 실존에 맞갖게 뛰어들 때에만 일어난다. 이러한 뛰어듦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첫째, 존재자 전체를 위한 여지를 마련할 것, 그 다음 무 속으로 자신을 해방시킬 것, 다시 말해 누구나 갖고 있는 우상, 누구나 으레 그리로 슬그머니 숨어 버리기 잘 하는 그런 우상들로부터 해방될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 속에 둥둥 떠다님이 자신의 존재를 포함해 존재자 전체를 들까불어 놓아 형이상학의 근본 물음에로 돌아오게 할 것이 그것이다. 그렇게 되면 무 자체가 강요하는 형이상학의 근본 물음을 던지게 될 것이다. "도대체 왜 존재자가 있고 무(無)는 없는가?" 
어디에서나 존재자가 우위를 차지하고 모든 그때그때의 "존재하다"(ist)를 자기 것으로 요구하고 주장하는 데 반해 존재자가 아닌 것은, 그래서 그런 식으로 이해된 무 즉 존재 자체로서 잊혀진 채 남아 있는 것은 어디서 오는가? 존재와는 본래 아무 상관도 없고(nichts) 무는 본래 본질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어디서 오는가? 이런 물음을 던지게 될 때 지금까지의 형이상학의 역사를 반성하게 되고 그 역사가 오로지 존재자(존재하는 것)의 주위만을 맴돌고 모든 존재하지 않는 것, 즉 무(無)는 배제해 버린 무에 대한 탄압의 역사였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6. 존재의 사건은 존재 주어짐의 사건

1) 존재의 역운. 존재가 [주어져] 있고 시간이 [주어져] 있다.(Es gibt Sein und es gibt Zeit.) 현재 내지 현전함으로서의 존재에는 근본적으로 볼 때 존재하는 것을 <탈은폐함>, 말하자면 <열린 장 안으로 데려옴>과 같은 어떤 것이 숨겨져 있다. 그런데 이러한 <탈은폐함>으로서의 존재 속에는 "일종의 줌이 일어나고 있다. 다시 말해 현전-하게 함에서 현전, 즉 존재를 주고 있는 그러한 줌이 일어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들로 하여금 존재를 대상으로서, 대상적인 어떤 것으로서 사유토록 하고 표상토록 했던, 말하자면 그렇게 사유토록 과제로 부과해 주었던 저 지평 내지 저 차원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존재를 비대상적으로 사유하는 일은 이제 존재를, 탈은폐함 속에 은폐된 채 활동하고 있는 줌으로서, 말하자면 <그것이 준다(Es gibt)>의 줌으로서 사유할 것을 요구한다. 하이데거의 말로 표현하자면,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존재를 현전함의 탈은폐로서 준다."
현전함 내지 현재가 합일시키는 유일자로, 이데아, 우시아, 에네르게이아로, 실체, 현실성, 지각, 단자로, 대상성으로, 자기 정립의 정립되어 있음으로, 니체가 보고 있는 권력에의 의지라는 의미에서 같은 것의 늘 되돌아옴 속에서의 의지에의 의지 등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보완해서 설명하고 있다. 플라톤은 일찍이 존재를 "이데아"로서, 그리고 이데아들의 "결합"으로서 표상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에네르게이아"로서, 칸트는 "정립"으로, 헤겔은 "절대 개념"으로서, 그리고 니체는 힘에의 의지로서 표상하였을 때, 이것들은 우연히 제출된 이론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존재를 준다[존재가 주어져 있다]>는 의미에서 존재 자체가 스스로를 주었던 데에 대한 응답들인 것이다.
존재가 이러저러한 존재로, 이를테면 이러저러한 대상 영역이나, 아니면 달리 표현해, 객관적인 눈앞의 대상 또는 손안의 대상으로까지 동일시될 수 있기 <이전에>, 존재가 스스로를 <밝히>거나 <탈은폐>시키고 있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어남>이, 아니 오직 이러한 <일어남>만이, 다시 말해 이 스스로 시간화하는 <역운>이 하이데거에 의해 언제나 새로운 시도로 그의 후기 작품 속에서 논의되고 있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그 안에서 존재가 주어지고 있는 그러한 역운은 시간의 건넴에 의존한다." 이때 시간은 가장 근원적으로 우리에 의해 사유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 자체 '그것이 준다'의 선물이며, 이 '그것이 준다'의 줌은, 현전성이 건네짐으로써(가능케 됨으로써) 그 영역을 보존한다.
시원적으로 캐물어진 <그것(Es)>을 하이데거가 줌의 양식에서부터 사유하여 이 줌(앞서 줌)을 역운(존재) 내지 <밝히는 건넴>(시간)으로 사유하고 있다면, "전자, 즉 역운이 다른 하나, 즉 밝히는 건넴에 의존하고 있는 한", 말할 것도 없이 또한 이 양자는 공속해 있는 셈이다. 하이데거는 이 공속을 마침내 다시 <존재의 사건(Ereignis)>이라고 이름한다. 따라서 "'그것이 존재를 준다', '그것이 시간을 준다'에 있어 주고 있는 그것(Es)은 존재의 사건으로서 확인된다."
2) 존재사건. 하이데거의 후기 사유에서는 <[존재]사건>이라는 개념이 핵심낱말로서 부각된다. 하이데거가 그 낱말로써 표현하고자 하는 바는 한 마디로 "그때그때마다의 역사적 세기에 인간 현존재에게 자기를 보내고 있는 존재파견(역운)의 사건"인 것이다.
먼저 <사건>이라는 개념으로써 하이데거가 부각시키고자 하는 사태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우리는 무엇인가 벌어지고 있다, 일어나고 있다,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로써 우리는 우리의 계획과 능력의 밖에서 우리의 자의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벌어지고 있는 어떤 일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도 <존재의 사건>으로써 우선은 이러한 인간의 자의와 처분권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간에게 닥쳐오고 있는 어떤 것을 지칭하려고 시도한다.
여기서 <사건>을 뜻하는 독일어 <Ereignis>는 어원학적으로 <Er ugni , er- ugen>에서 유래하는 낱말이다. <사건(Ereignis)>은 "어떤 것이 나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라는 의미에서처럼 눈, 순간, 눈앞에서 벌어짐 등과 연관되어 있다. 어떤 것이 나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벌어지며, 나의 눈에 띄며 드러난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어떤 것이 <탈은폐>되고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의 사건은 곧 <비은폐성의 사건>, <존재진리의 발생사건>인 것이다.
이러한 어원학적 의미에 벌써 (코로 냄새맡는 것과 같은) 눈으로 바라봄 그 이상의 결정적인 사실이 놓여 있는데, 그것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것 -- 그래서 거기에로 눈이 쏠리게 되는 그것 -- 의 나타남의 방식이다. " ugen"은 오늘날 짐승의 행태와 관련지어서 사용되는데, 이를테면 사슴이 꼼짝 않고 귀를 쫑긋 세우며 무엇인가를 주시한다. 번개가 칠 때 주시하며 그 번개를 감지한다. 다시 말해 사슴은 아직 보이지는 않지만 닥쳐올 위험에 신속히 대처하기 위해 꼼짝 않고 주시하며 기다린다. 따라서 이러한 꼼짝 않고 주시하며 기다림은 관찰하는 바라봄도 분명한 의도를 갖고 어떤 것을 눈여겨봄도 아니며, 어떤 것이 -- 이를테면 적이 -- 나타나기를 긴장 속에 안정을 확보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것이 -- 적이 -- 나타나면 재빨리 도망갈 태세를 갖추는 것이다. 그러므로 " ugen"에는 그 동물의 생명이 걸려 있을 수도 있는 그런 <어떤 것에 열려 있음>, <어떤 것에 태세가 되어 있음>의 구조가 놓여 있다.
아마 Er- ugni 로서의 <사건>에도 이와 비슷한 생명과 관련된, 적어도 사유와 관련된 결정적인 태세가 -- 횔덜린의 표현대로 구원의 힘이 -- 놓여 있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 어떤 것에 대한 태세가, 구체적인 위험이 실제로 있건 또는 없건 그에 상관없이, 깨어 있으며 그렇게 남아 있다는 점이다.
존재사건에서부터의 사유는, 사유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던 그것으로부터 규정되고 있다는 점이 그 특색의 하나이다. 사유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것, 은폐, 비밀, 레테, 모든 형태의 사유하며 다스리는 처분을 벗어나는 그것, 주목하며 기다린다는 의미로 회상해야 하는 그것, 꼼짝 않고 주시하며 기다려야 하는 그것이 하이데거 후기 사유의 결정적인 요소이다. 이제부터 바로 이 <은폐>가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사유의 <사실 자체>(관심사 자체)가 되기 때문이다. "벗어남이 곧 사건이다." "사건은 곧 벗어남이다." 빛 안으로 들어섬에 대한 반대운동으로서 벗어남(Sich-Entziehen)이, 탈은폐에서의 자기를 감춤과 은닉된 채로 남아 있음이 하이데거의 고유한 사건에 대한 해석이다.
사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다른 계기는, 사건이 번개같은 통찰과 같은 어떤 특별한 재주를 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용하고 차분하게, 나의 위치를 폭로시킬 수 있는 어떤 소리도 내지 않고 나를 돌발적으로 발견할 수도 있는 그것에 정신을 집중하여 깨어 있음을 의미한다.
세 번째 계기는 동물들이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매일같이 긴장 속에 주위를 주시하며 살고 있듯이, 회상하는 사유 내지는 <사려 깊은> 사유는 매일같이 사건에 대해 열린 채로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사건 속에서 경험될 수 있는 본질적이고 풍부한 존재 자체의 본질은, 어디에서든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논리학의 보편개념이나 수학적 <세계> 공식처럼 사유의 소유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상의 어원학적 고찰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존재의 사건>에서의 독특한 구조는, 존재의 자신을 내어줌과 인간 현존재의 거기에 맞갖은 대응투사이다. 하이데거는 그의 후기의 존재사유에서는 주체형이상학적 요소를 전부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존재의 이해로 해석된 존재의 기획투사도 이제는 "존재에 의해 발생되는 사건"으로 풀이한다. 즉 "발생하는 (존재의) 던져옴"에서부터 고찰하여 현존재적인 기획투사가 더 이상 그 자신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던져오는 존재의 진리의 소유에 속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렇기에 기획투사란 이제 일종의 발생된 대응투사인 셈이다. 존재의 <발생하는 던져옴>과 인간 현존재의 <발생된 대응투사>로 이루어진 전체, 즉 존재의 진리와 현존재가 그렇게 존재사건 발생적으로 규정되어 서로 함께 속해 있음을 하이데거는 존재사건이라고 명명한다.
3) 새로운 시원의 예비. 존재의 역운의 차원에서 볼 때 기술과 과학의 문명이 극으로 치닫고 있는 현대는 존재사건의 새로운 시원이 예비되고 있는 세기이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여섯 개의 존재진리의 발생영역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울림>의 영역에서는 "존재의 떠나있음"이 "존재자의 탈은폐의 방식으로" 경험된다. 다시 말해 사유의 경험에 존재의 진리가 스스로를 거부하는 것으로서 <울리기 시작>한다. 존재의 떠나있음으로 자기를 던져오는 바로 그 존재의 진리에 사유가 대응투사하면서 그 존재의 떠나있음을 그 자체로 드러내려고 시도할 때, "자기를 거부하는 존재의 진리"가 울려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존재의 떠나있음 내지는 존재의 망각이 지금까지의 서양적-유럽적 사유의 역사에서부터 경험될 때, 이 사유의 역사는 첫 번째 시원의 역사로서 존재의 사유에게 건네어진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존재발생사건의 두 번째 본질영역인 <건네는 놀이>라고 명한다. 첫 번째 시원의 역사는 존재자 그 자체에 대한 주도적인 물음을 통해서, 즉 존재자의 존재(자)성에 대한 물음을 통해서 규정되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서양의 형이상학적 사유의 역사가 첫 번째 시원의 역사로서 건네어질 수 있는 까닭은 오직, 거부된 존재의 진리가 울리기 시작함으로써 사유가 다른 시원에로 넘어가는 전이가 내보여지기 때문이다.
첫 번째 시원과 다른 시원을 사유하면서 서로서로 건네어지게 해줌으로써, 사유는 <도약>이 된다. 이 세 번째의 존재사건의 본질영역에서 비로소 사유는, 발생하는 존재의 본질에 발생된 대응투사로서 응해, 처음으로 존재사건을 명시적으로 열어보인다. 존재의 진리가 현성하여 발생하기 위해서 존재의 진리는 발생된 대응투사라는 현존재의 이행을 <필요로 한다>. 발생된 대응투사가 없이는, 존재의 진리의 현성이란 없다. 발생된 대응투사 그 자체는 -- 현존재에 대해 존재의 진리가 발생하면서 맺는 연관에서부터 발생되고 있기에 -- 존재에의 <귀속성>이라 칭해진다. 저 <필요로 함>과 이 <귀속성>이 <마주칠> 때, 존재의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도약으로서의 사유가 다른 시원의 사유를 위한 물음의 궤도를 놓기 위해 존재사건을 열어보였다면, 이제 사유는 <지반을 놓아> 새로운 시원을 위한 터를 닦아야 한다. 이때에도 발생하는 던져옴이 곧 지반놓는 던져옴일 때에만, 사유는 발생된 대응투사로서 지반놓으면서 응할 수 있다. 존재의 진리가 지반놓는 지반으로서 자기를 던져올 때, 던져옴은 자기를 지반놓으면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에 응대하는 현존재적인 지반놓기는 일종의 <지반다지기>로서 이행되는데, 이 지반다지기는 지반놓는 지반을 <현성하게 해줌>으로서 그 지반 위에 집짓기인 셈이다. <현성하게 해줌>이란, 자기를 던져오는 지반을 대응투사하는 떠맡음에서 그러한 지반으로서 받아들임을 뜻한다. 이 <지반 위에 집을 짓는다 함>은, 존재의 진리를 그때그때마다 탈은폐해야 할 존재자 속으로 보존되거나 감싸간직되도록 한다는 말이다. 진리의 현성이란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이렇게 존재의 진리가 존재자의 그때그때마다의 탈은폐성 속에 그리고 그러한 탈은폐성으로서 감싸간직됨을 말한다.
다섯번째의 본질영역으로서 <도래할 자들>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도래할 자들>이란 다른 시원의 미래적인 현-존재를 말한다. 이 미래적 현-존재는 존재의 진리라는 지반을 다지는 작업을 수행한다. 이러한 지반다지기에서 도래할 자들은 존재가 떠나버린 존재자를 그 본질성에로, 다시 말해 그때그때마다의 그 존재의 진리를 감싸간직하는 데에로 전환시켜 놓는다.
그런데 이 <도래할 자>들은 다른 시원의 <신적인 것>없이는 발생하지 않는데, 이 신적 차원의 것을 하이데거는 <마지막 신>이라고 이름한다. <마지막 신>이라고 불리워지는 이유는, 그 신이 신본질의 유일성에서부터 경험되는 가장 극단적인 신이기 때문이다. 신이 존재사건의 고유한 본질영역의 하나임을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존재사건은 인간을 신에게 맡겨줌으로써, 신을 인간에게 건네어준다." 존재사건은 신을 인간에게 건네어주고 인간을 신에게 맡겨준다. 이러한 <건네주고-맡겨주는 발생함>에 인간은 그의 발생된 대응투사에서 응대한다.
4) 존재사건과 침묵학. 형이상학적 사유의 언어는 <논리학>이었다. 다시 말해 존재자에 대한 정의를 제공하는 언어로서 그 자체 그저 존재자의 언어였을 뿐인 그런 <도구>이다. 이제 새로운 시원을 예비해야 하는 사유는, 존재 자체를 사건으로 사유해야 하는 회상적 사유는 형이상학적 사유의 방식을 떨쳐버려야 하며, 언어도 존재자에 대한 언어에서 <존재 자체에서부터의 말함>으로 변형시켜야 한다. 그리고 존재자도 유의미성의 전체성으로서의 세계가 아닌 사방으로서의 세계에서부터 온전하게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때의 나타남에는 바로 그 자리에서 내보여지고 있는 그것만이 속하는 것이 아니라, 나타나고 있는 것의 본질이 함께 두루 나타나며 두루 빛나며, 그로써 나타나는 것을 그것의 본질심연에서부터 끄집어 내오고 있는 그것도 속한다.
이러한 작업은 간단하지가 않다. 존재에서부터 말해오고 있는 것은 결코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가 어떤 정의도 벗어나 있으며 설명될 수 없음과 이해될 수 없음(= 은폐성)에 의해 특징지어지기 때문이다. 이해 가능성, 해석학은 이제 더 이상 철학적 사유의 목표가 아니다. 이해 가능성은 이제 하이데거에게 "사유의 파괴"를 의미하는데, 그 까닭은 이해 가능성이 모든 것을 지금까지의 표상의 범위 안으로 강제로 소급해서 쑤셔 넣기 때문이다. "자신을 이해하기 쉽게 만듦은 곧 철학의 자살행위이다."
이해 가능성의 포기, 지금까지의 형이상학적 사유의 실패는 달라진 언어의 기능에서 드러난다. 즉 이제는 존재자, 인간 또는 세계의 의미나 목적을 설명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존재는 모든 '목표'의 거부이며 모든 설명 가능성의 거절이다." "언어의 이러한 변형은, 우리가 존재 자체의 진리를 알지 못하기에 우리에게 아직 닫혀져 있는 바로 그 영역에로 밀고 들어간다." 진리가 언제나 "은닉의 밝힘"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렇다. "만일 진리의 본질이, 존재 자체의 자기를 숨김을 밝히는 것이라면, 앎은 이러한 은닉의 밝힘에 머무름이며 그로써 존재 자체의 자기를 숨김과의 그리고 이 존재 자체와의 근본연관이다." 앎은 누구에게나 전달해줄 수 있는 눈앞의 것에 대한 지식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어야 한다. 앎은 존재 자체의 심연이 그때마다 함께 울려나오도록 해야 한다.
존재 자체의 본질에서부터 고찰된 이러한 언어의 본질은 침묵임이 귀결되어 나온다. 침묵이 사건으로서의 존재 자체에 그나마 가장 가깝게 "응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침묵은 말함 내지 이야기함과는 전혀 다른 차원을 제시하려고 한다. 하이데거는 그것을 "침묵함의 사려 깊은 법칙성"이라고 이름한다. <침묵학(Sigetik)>은 존재 자체에 대한 사려깊은 사유의 영역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존재자의 영역에 대한 논리학보다는 더 높은 차원에 놓여 있다. "침묵은 어떤 논리학보다도 더 고도의 법칙을 갖고 있다." 따라서 <침묵학>의 고도의 법칙은 나타남의 온전한 전 현성함뿐이 아니라 은닉의 스스로를 밝힘에도 통용될 수 있는 그런 법칙이어야 할 것이다.
비은폐성으로서 성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이름 중에 결정적인 이름은 세계라는 이름이다. 이 이름은 그 안으로 비은폐성이 세워지는 건립구조를 칭한다. 세계에서 성하는 것은 따라서 비은폐성의 탈은폐하는 자기은닉의 사건이다. 우리가 비은폐성에 대해 그것이 "있다"고 이야기한다면, 이것은 물론 명확치 못한 이야기다. 존재와 그의 본질, 비은폐성과 세계는 존재자가 "있듯"이 그렇게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실로 여러 다른 존재자 중의 한 존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그것들이 "현성한다", "성한다" 라고도 말한다. <본질>은 이때 현존 속에서 자기를 은닉하고 있는 그 사건으로서 사유되어야 한다. 비은폐성의 발생 속에 은닉이 남아 있으면서 탈은폐에 속하기 때문에, 이러한 발생은 목적론적인 과정으로 사유되어서는 안 된다. 존재진리의 발생사건은 이렇게 탈은폐와 은닉이 분리될 수 없이 연결되어 일어나는 발생으로 보아야 한다.


7. 세계-사방의 거울놀이

이제 우리는 존재가 자신을 숨긴 채 내어주면서 존재자를 탈은폐시키고 있는 존재사건에서 드러나고 있는 본래적인 자연의 자연성 및 사물의 사물성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유되어야 할지를 살펴볼 차례이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설명 내지 이해의 근거를 찾으며 확실하게 앞에 세워놓아야 만족하는 표상하는 사유태도를 버리고 존재의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무근거의 심연 속으로 뛰어들 태세가 되어 있을 때, 다시 말해 언어적 이해의 차원이 아닌 존재사건 자체의 놀이에 우리 자신을 내맡길 때 새로운 존재의 열린 장 안으로 들어설 수 있음을 강조한다. 아래에서 하이데거의 이러한 세계-사방의 거울놀이에 대한 생각을 뒤좇아 보자.
1) 사물의 사물성. 우리는 사물의 사물성을 숙고할 때 -- 하이데거의  <사물>이라는 강연이 보여 주듯이 -- 오늘날 존재하는 모든 것이, 모든 사물이 절멸의 위협 속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원자폭탄은 지구 위의 모든 생명체를 없애버릴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모든 것의 파괴보다 더 섬뜩한 것은 오늘날 모든 것이 같은 모양의 간격 없는 획일화 속을 헤엄치며 다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 라디오 방송, 텔레비전, 교통 등은 거리를 없애고 있다. 그것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똑같이 가까이 끌어오지만 그러나 우리가 두드러진 의미에 있어서 "사물"이라고 부르는 그것의 가까움을 마련해 주지는 못한다. 사물들은 오히려 공허하고 가치 없고 그 대량성 때문에 의미 없는 것이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물들은 <무화>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사물이 단지 오늘날 무화되었는가, 아니면 하이데거가 묻고 있듯이 사물의 경험은 그 근원성에 있어 한번도 사유자적으로 근거제시되지 못했는가? 플라톤이 열어놓은 시각에서는 사물은 스스로를 보여주는 외양에서부터, 즉 <이데아>에서부터 사유되었다. 그러나 그로써 사물은 단지 그것이 "제작자에게 제작되어야 할 것으로 마주 서 있는" 그 관점에서만 사유될 뿐이다. 사물성은 밖에 서 있음(현전, 실체)으로 경험되었으며 이때 "밖에 서 있음"에 놓임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한번은 어디에서 유래해 나온다는 의미로 이쪽 밖에 섬이다. (이 때 그것이 스스로 나타남이든 제작됨이든 상관이 없다.) 또 하나는 밖으로 끄집어내어진 것이 이미 그 자리에 있는 것의 비은폐성 속으로 들어섬이라는 의미에서 이쪽에 섬이다." 근세철학에서 이 "밖에 서 있음"은 "마주 서 있음(대상)"으로 되었고, 이 마주 서 있음은 비은폐성 속으로 밖으로 나옴에서부터가 아니라 표상함의 마주 세움에서부터 사유되었다. 과학이 사물을, 예컨대 포도주가 담긴 단지를 대상으로 표상하면, 이 경우 과학은 모든 경험 가능한 것을 양적인 것과 측정 가능한 것으로 환원시키며 이러한 방법적인 추상에서 사물의 근원성은 포기해 버린다. 과학적 앎이 이론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사물의 근원적 경험으로부터 사유될 경우 여기서의 이론의 여지가 없음은 바로 "포도주가 가득 담긴 단지를 포기하고 그 자리에 액체가 퍼져 나가는 하나의 빈 공간을 설정"해야 하는 강압에 의해 성립되고 있다. "과학은 그것이 사물을 결정적인 현실적인 것으로 내버려두지 않는 한, 단지-사물을 아무 것도 아닌 어떤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사물을 그 근원성에서, 즉 단지를 단지로서 경험하려 한다면, 우리는 단지의 담는 공간을 물리학적으로 임의의 액체를 위한 임의의 텅빈 공간이나 또는 더 추상적으로 재료의 특정한 응집상태를 위한 텅빈 공간으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떻게 단지가 채워지는가 하는 이 물음을 다르게 살펴보아야 한다. 단지는 부어지는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리고 부어진 것을 간직함으로써 채워진다. 받아들임과 간직함은 쏟아 부음에서부터, 부음의 선사에서부터 규정되고 있다. 단지는 물을 선사하고 포도주를 선사한다. 물에는 샘이 머물러 있고, 샘에는 암석과 땅의 어두운 선잠, 그리고 또한 하늘의 비와 이슬도 머무르고 있다. 포도주에는 땅의 자양과 하늘의 태양이 머물고 있다. 단지는 죽을자의 목마름에 한 모금의 마실 것을 선사하고 그들의 단란함을 고조시켜 준다. 단지는 또한 따름(부음)을, 신들에게 봉헌되어 축제의 향연을 최고도에서 고요하게 만드는 제헌음료를 선사한다. 단지는 땅과 하늘, 신적인 것과 죽을자를 한군데 모은다. 그래서 단지는 <사물>이다. 단지는 사방을 그의 그때마다의 머무름에 머무르게 하고 그래서 그 넷을 그의 고유한 것 안으로 데려옴으로써 땅과 하늘, 신적인 것과 죽을자의 사방으로서의 <세계>를 일어나게 한다.
2) 사방으로서의 세계. 세계를 어떻게 사유해야 할지를 하이데거 자신은 이렇게 말한다. 세계는 땅과 하늘, 신적인 것과 죽을자의 사방이다. 땅은 "하천, 암석, 식물 그리고 동물을 돌보며 보호하면서 건립하며 떠받치고 있는 것, 자양분을 공급하며 열매를 맺게 해주는 것"이다. 하늘은 "태양의 운행, 달의 진행, 별들의 광채, 한 해의 계절들, 낮의 빛과 여명이며 밤의 어둠과 밝음이며 날씨의 은혜와 험함이며 구름의 노닐음과 에테르의 파란 천공"이다. 신적인 것은 "신성을 눈짓하는 심부름꾼[사자(使者)]이다. 이 신성의 은닉된 성함에서부터 신이 자신의 본질 속에 나타난다. 이 본질은 신을 현전하는 것과의 어떠한 비교에서도 빼낸다." 죽을자는 "인간들이다. 인간들은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죽을자라고 불린다. 죽는다는 것은 죽음을 죽음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음을 말한다." 죽음은 무의 관으로서 존재의 본질을 자신 안에 감싸고 있으며 그래서 존재의 은닉이다. 죽을자는 그가 존재의 은닉 속에 존재할 때 "존재로서의 존재와 본질적인 관계"를 가질 때, "죽을자"이다. 땅과 하늘과 마찬가지로 신적인 것과 죽을자도 결코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다른 것과 함께만 존재할 수 있다. 그것들은 오직 그 넷의 한데 어우러짐, 춤과 윤무에, 즉 세계놀이에서만 존재할 따름이다.
하이데거가 세계를 사방으로서 사유할 때 그는 가장 오래된 생각을 깊이 뒤따라 사유해 보는 것이다. 아직 신화적인 세계경험에 친숙해 있었던  인간은 세계를 땅과 하늘의 결혼식으로서, 그리고 자신은 신의 말건넴 아래 서 있는 죽을자로서 경험하였다. 플라톤은 아직 -- 그의 방식으로 -- 세계가 하늘과 땅, 신들과 인간들의 함께 있음으로서의 질서라고 하는 사상을 건드리고 있다(참조 플라톤의 {고르기아스} 507-508). 그 외에도 우리는 쉽게 여러 다른 문화권에서 많은 다른 증거들을 찾아낼 수 있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세계사상과 횔덜린의 신화적인 세계경험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횔덜린의 시가 하이데거로 하여금 세계를 신적인 것과 죽을자, 땅과 하늘의 사방으로서 사유하게끔 한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마 지금이야말로 신화의 가장 오래된 지혜를 사유에로 이끌고 올 때일 것이다. 사유가 이러한 시도를 감행한다면 사유는 독자적인 단초에서 신화 -- 사유에 대해 시원 이전의 지혜인 -- 가 무엇을 명명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전개해야 한다. 사유가 사유임을 포기하지 않으려면 사유는 실로 간단히 대답을 떠 넘겨받을 수는 없다. 하이데거가 어디에서, 어떤 구속성을 갖고 참다운 존재사건의 단초를 받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지가 않고 여기의 우리에게는 중요하지도 않다.
3) 세계-사방의 거울놀이. 하이데거는 땅과 하늘, 신적인 것과 죽을자, 이 넷의 단일성(holon,     )을 사방이라고 칭한다. <사방(Geviert)>이라는 독특한 하이데거의 이름부여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산맥(Gebirg)>에서와 같이 그것이 넷의 한데 모여 있음과 그 넷의 공속성(서로 함께 속해 있음)을 표현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사방에서 우리는 -- 마치 계곡이 없는 산을 생각할 수 없듯이 -- 어느 하나를 다른 셋이 없이는 사유할 수 없는 것이다.
넷 중의 어느 것도 다른 셋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으며, 그 각각은 거울의 반영의 방식으로 다른 것들과 결속되어 있다. 넷의 각각은 개개의 다른 것 안에서 거울에 비치듯이 비쳐 나온다. "넷의 각각은 각기 나름의 방식으로 다른 셋의 본질을 반사하고 있다. 이때 개개의 것은 각기 나름의 방식에 따라 넷의 한가지됨(하나로 포개짐) 안에서 자신을 자신의 고유함 안으로 되비치고 있다."
그런데 이 거울의 반사는, 다시 말해 넷의 통일 또는 넷의 한데 어우러짐은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가? 어떤 일정한 법칙에 따라 작동하고 있는가? 하이데거는 "거울놀이"에 대해 말한다. 그렇다면 세계의 법칙이 일종의 <놀이>란 말인가? 여기서 우리가 먼저 유의해야 할 것은, 여기서 <세계>라는 낱말이 이제는 더 이상 형이상학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 낱말은 자연과 역사를 포괄하는 세속화된 우주를 의미하지도, 신학적으로 표상된 창조의 세계를 지칭하지도, 단순히 현존하는 것의 총체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존재자가 그 안으로 들어서는 비은폐성은 그것이 스스로를 땅과 하늘, 신적인 것과 죽을자의 사방으로 설정함으로써 시간-놀이-공간의 역운으로서 세계의 건립구조에로 향한다. 비은폐성의 한 근본특징으로서의 은닉은 오직 자기를 닫음으로써만 나타나는 땅으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다른 근본특징인 탈은폐는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이 땅 위에 나가 서 있으며 그래서 땅을 열린 곳으로 끌어올리는 하늘에 의해서 제대로 보존된다. 세계는 땅과 하늘의 투쟁이다. 이 투쟁은 하나가 다른 것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밀접한 서로서로의 투쟁이다. 세계는 결코 "그 자체에 있어서"의 세계가 아니며 어느 누구를 "위한" 세계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존재자의 열려 있음의 사건이다. 인간은 그의 본질과 더불어 비은폐성의 사건을 위해 사용된다. 그러나 그에게만 진리와 세계의 전개가 있을 수 있는 그런 죽을 자로서 사용된다. 이때 죽을자는 전혀 다른 것, 즉 신적인 것의 말건넴에 자신을 집중시켜 모은다.
땅과 하늘, 신적인 것과 죽을자의 사방으로서의 세계는 그것의 밖에 놓여진 <근거>에서부터 설명될 수 없고, 그 구조계기의 하나를 모든 것을 근거놓는 것으로 사방 자체에서부터 빼내옴으로써도 설명될 수 없다. 세계에서 성하는 은닉하는 탈은폐는 그것을 위해서는 어떤 최종적인 근거도 안전하게 확보될 수 없는 그러한 무근거적인 근거놓음으로 남는다. 이렇게 해서 세계는 그 안에서 모든 근거놓음이 가라 앉아버리는 놀이이다. 세계는 일종의 <거울-놀이>로서의 사방이다. 이 거울-놀이에서는 개개의 것이 -- 죽을자와 마찬가지로 신적인 것이, 하늘과 마찬가지로 땅이 -- 여타의 것의 본질을 반사함으로써 스스로를 자신의 고유함에로 되반사한다. 이때 우리는 거울의 반사를 고유함에로 데려다주는 밝히면서 감춤으로 사유해야 한다. 거울의 반사는 오직 은닉의 근거 위에서의 밝힘일 뿐이고, 그래서 역운으로서의 사건이다.
세계는 땅과 하늘, 신적인 것과 죽을자의 무한한 관계로서, 그리고 그로써 존재의 사건으로서, 존재하는 것을 그것의 고유함에로 데려다준다. 세계의 경험에서는 그 안에서 고유한 것이 고유한 것으로서 있는 고유한 것에로의 귀의가 발생한다.
세계를 존재사건에서부터 사유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즉 사이-나눔에서부터, "세계와 사물의 중심으로서 그것들의 본질의 척도를" 재어주고 있는 사이-나눔에서부터 사유되어야 한다. 하이데거의 다음과 같은 말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땅과 하늘, 신적인 것과 죽을자의 한가지됨[하나로 포개짐]이 일어나고 있는 거울-놀이를 세계라 이름한다." 하이데거는 <놀이>라고 말함으로써 놀이에 함께 놀이함뿐 아니라 잘못 놀이함도 속하고 있음을, 법칙("마주침[Gegenschwung]")의 성공과 실패가 속하고 있음을, 더 근원적으로 말해 레테(    )가 알레테이아의 핵심부분으로 속하고 있음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레테가 모든 개개의 알레테이아를 두루 관통하고 있듯이 여기서 거울-놀이-법칙이 중심과 척도로서 세계를 두루 관통하고 있다.
놀이는 결코 놀이의 대상이 될 수가 없으며 표상하는 형이상학적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놀이함은 언제나 또한 함께 놀이함을 말하며 놀이 훼방꾼이 되지 않음을, 다시 말해 놀이의 규칙을 따름을 말하며, 따라서 놀이가 그 자체 잘 돌아가며 놀이 참석자들과 더불어 잘 행해지도록 신경씀을 말한다. 놀이가 끝나는 경우는 한 사람이 이기거나 지거나 할 때이다. 즉 이긴 자(또는 진 자)가 놀이를 다해 더 이상 놀이가 돌아가는 것을 놔두지 않는 경우이다. 그러나 완벽하면서도 동시에 끝이 없는 놀이는 아마도 그 놀이에 승자도 패자도 없는 그런 놀이일 것이다.
이것을 세계-사방의 거울-놀이에 적용시키면,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성취하려고 하려는 자가, 다시 말해 놀이를 일종의 목적연관으로 바꿔놓는 자가 놀이훼방꾼이며 방해자일 것이다. 그런 자는 놀이의 규칙을 지키지 않고 스스로 올바로 놀이를 함께 하지도 못하는 자들일 것이다. 함께 하는 놀이는 아무 것도 성취하려고 하지 않고 그저 균형 잡힌 놀이로 남아 있으려고 노력한다.
알레테이아에서의 레테라는 표현방식을 좇아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놀이에서의 놀이규칙, 또는 모든 개개의 사물에서의 거울-놀이로서의 존재사건이라고 말이다. 물론 이때 사물을 형이상학적으로 사유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사물로서의 사물이 무성적으로 남아 있다. 사물의 사물성이 은닉된 채, 망각된 채 남아 있다." 그래서 또한 사물에서의 사방의 (곧 세계의) 반사가 은닉된 채, 망각된 채 남아 있는 것이다. 죽을자의 체류가 "사방을 사물 속에" 보호해서 간직하는 것이다.
<사물의 사물성은 은닉된 채 남아 있다>는 말은 분명, 사물에서의 거울-놀이-법칙이 분명 세계의 중심과 척도를 사물 안으로 데려오는 그런 것이긴 하지만 사물에 대해 내용적인 발언을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사물을 투쟁적인 진리의 찢어짐으로 데려온다. 이때 이 진리는 자신의 온전한 밝힘과 은닉의 "마주침"으로써 사물을 사물로서 비로소 처음으로 그것의 거울반사처럼 놀이하는 척도와 법칙에서 내어나른다. <사물로서의 사물이 무성적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사물이 -- 존재사건의 차원에서 사유해 볼 때 -- 시간을 그것의 고유한 순간적인 시간-공간에서의 펼침에서 반영해 보이기 때문이며, 그래서 여기서 또한 "시간-놀이-공간"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사물에서 공간의 찢어짐으로 전개됨으로써 사물은 그것이 어떠한 해석에서도 보호될 수 있는 보호막을 받는 셈이다.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사물이 세계와 맺는 재연관이다. 사물은 이제 세계-사물이 되어 모든 해석을 거부하는, 내용이 없는 <로서> 안에 놓이게 된다. "사이 -- 이것은 마주하는 고유화에서부터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발원한다 -- 의 은닉을 밝힘 안에 세계와 대지의 투쟁이 서 있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의 시간-놀이-공간에서 비로소 고유화의 보존과 상실이 일어나고, 저 밝힘의 열린 장 안으로 존재자라고 불리우는 그런 것이 들어선다." 이렇게 투쟁을 보지하고 있는, 그 자체 구조지어진 존재자가 바로 사물로서의 사물이다. 물론 이때의 존재자는 형이상학적으로 표상된(앞에 세워진) 존재성에로 해석될 수 있는 그런 존재자가 아니다.
형이상학적 사유가 이중성에서 출발해서 존재성의 단일성을 지향해 나가는 반면, 존재-사유는 거꾸로 단일성에서부터, 세계(우주, 창조된 세계로서 해석된)의 단일성에서부터 출발하여 결코 매개될 수 없는 둘성(Zweiheit), 다시 말해 대지와 세계를 위해 놀이하는 시간-공간의 투쟁적인 긴장 안으로 되돌아간다. 바로 이 투쟁공간에서부터 존재사건이 자신을 인간/세계-대지/신적인 것으로 열어 보이는 것이다.
우리가 넷 중 하나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다른 셋을 함께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 넷의 하나로 포개짐을 생각하지는 않고 있다. 놀이의 법칙은 하나를 넷의 하나로 포개짐에서부터 끄집어 내오는 것을 막는다. 그런데 형이상학적인 어떤 것을 사유함은 신비적인 사유와는 달리 그렇게가 아니고서는 다르게 사유할 수 없다. 하나로 포개짐이 물어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하나로 포개짐의 보존과 돌봄은 어떠한 존재-발언(Ist-Aussage)도 금지하며 그것을 이런 저런 것으로 해석하는 것을 금지한다.
하이데거는 (사물의) 진리를 "자신을 숨기는 것을 위한 밝힘"이라고 규정하여 그리스어의 알레테이아와 구별지어 "은닉의 일어남"을 의미하고 있다. 이때 "은닉"은 단순히 부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더 근원적으로 현전의 온전한 시간-충일을 두루 나타나게 하고 있는 열려 있음과 밝힘을 말한다.
따라서 일어남, 그리고 다시 말해 길이-됨, 말이-됨은 일종의 그 자체에 있어 은닉에 의해 붕괴된 -- 마치 밝힘이 어떤 면에서는 숭숭 구멍이 뚫려 있는 것처럼 -- 일어남이다. 사물 -- 하나의 자리이며 일정한 공간을, 즉 사방의 거기에 있음을 위한 공간을 허락하고 있는 사물 -- 은 대상과는 달리 언제나 바로 그 자리에 눈앞에 놓여 있는 그것 그 이상이며, 그것은 자체 안에 빠져나감의 현상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지는 결코 일방적으로 인간의 착취의 대상이 아니며 언제나 그 이상이며 더 풍부한 어떤 것이다. 그렇기에 신은 언제나 최고의 세계 창조주, 지옥도 포함해 죄의 심판자이며 처벌자, 하늘도 포함해 구속자 그 이상인 것이다.
단지의 예를 들어 우리는 이러한 "은닉의 일어남"이 어떻게 드러나 거기에 있게 되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그 안으로 동시에 자신을 은닉하면서 존재자(즉 사물)가 -- 물론 가까이 놓여 있는 다루기 쉬운 사물들만이 아니다 -- 그때마다 들어서고 있는 그 열린 장은 실제로 마치 텅빈 중심과 같은 어떤 것이다. 이를테면 단지의 텅빈 중심처럼 말이다." 바로 이 텅빈 가운데가 어떤 표상 가능한 임의의 비어 있음이 아니며, 도대체 존재자가 아니며, 오히려 "규정하며-각인하는 것으로서 벽과 테두리의 둘러쌈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벽과 테두리들은 단지 자신의 열려 있음을 현성하도록 하고 있는 저 근원적인 열린 장 -- 이것이 그러한 둘러쌈(단지의 형태)을 자기 주변에 모아들이고 있다 -- 의 방사일 뿐이다. 이렇게 둘러싸고 있는 것에서 열린 장의 현성이 되반사되고 있는 것이다." 사물에서의 이러한 되반사는 따라서 열린 장이 나타나는 형태인 것이다. 다시 말해 열린 장은 그것이 일종의 되반사가 거기에 있는 한에서만 자신을 내보일 수 있는 것이다. 빛이 없이는 어떤 사물도 드러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되반사가 없이는 빛은 은닉된 채 어둠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아주 간단한 물리학의 법칙이라고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의미되고 있는 것은, 은닉되어 있음은 밝힘 안에서 그리고 자신의 되반사로서의 빛 안에서 극복될 수 있다. 빛은 오로지 자신의 되반사 때문에 빛일 수 있는 것이다.


8. 맺는 말: 존재의 사건에 내맡김

지금까지 우리는 형이상[적인 것]에 대한 현대적 접근의 대표적 예로서 하이데거의 존재사건에 대한 생각을 뒤밟아 보았다. 간략하게 이야기한 것을 되짚어 보자.
먼저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에서 획기적인 것은 하이데거가 학문적 논의로서의 <형이상-학>에서 그러한 논의를 가능케 해주고 있는 사태로서의 <형이상>과 그에 대한 인간의 실존적 관계 내지는 대응에로 관심의 초점을 옮겨 놓은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이 강단철학의 한 분과가 아니라 인간 현존재에서 일어나고 있는 근본사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어느 시대, 어떤 장소, 어떤 문화권에 존재하건 인간의 현존재와 더불어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존재자 전체에로의 침입사건이 곧 형이상학적 원초사건이라는 것이다. 형이상학을 이렇게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문화권에서의 특정한 인간의 대응 -- 학문적 내지 학술적 대응 -- 에 국한시키지 않고 인간이 애초부터 그 안에 던져져 있는 존재진리의 발생사건과 그것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 대응에서 형이상학에 대한 논의의 단초를 잡은 것은, 서양 문화중심의 독단적인 형이상학 이해의 울타리를 혁파하고 현금의 지구적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포괄적 철학 내지는 형이상학에 대한 이해의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형이상 -- 즉 존재사건 -- 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하이데거는 서양의 형이상학적 전통이 걸어온 길을 반성적으로 해체하며 재구성하고 있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서양에서 일어난 존재자 전체에로의 침입사건은 처음에는 존재진리의 발생사건 전체를 염두에 둔 굉장히 포괄적인 대응 속에 받아들여졌었다. 그러한 인간의 실존적 대응이 차츰 인간의 노에인(사유)과 레게인(말함)에 초점을 맞춘 맞세움으로 변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노에인은 현전하는 것으로 앞에 세워 받아들임이 되고 레게인은 말로 밖으로 말함이 되어 존재사건은 현전 중심, 로고스 중심의 시각에서 고찰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학문적 대응에서는 실존적 대응에서 그 차이가 간직되고 보존되어온 자연사물과 자연 사이의, 존재자와 존재 사이의 존재론적 구별이 흐려지고 잊혀지게 된다. <형이상학>이라는 명칭 자체가 이러한 존재론적 차이를 망각함으로 인해 생긴 부차적인 산물임을 하이데거는 밝히고 있다. 존재가 주어지고 있는 존재진리의 발생사건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존재에 대한 말함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는 존재-론은 그나마 존재론적 차이를 망각함에 따라 더욱 더 존재자에 매달리게 되고 명확하게 개념으로 파악해서 확실히 할 수 있는 것에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존재론적 차이를 망각하게 됨에 따라 형이상학의 존재론적 탐구는 더욱 더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이론적 확정에 매진하게 된다. 존재하는 것은 그 자리에 있는 것, 현전하는 것, 눈앞에 놓여 있는 것으로 한정되게 되며 그나마도 지속적으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참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되게 된다. 이렇게 존재가 <지속적인 현전>이라는 이념에 의해 규정되고 있는 한, 그렇지 못한 존재는 비존재 내지는 비본래적 존재자의 혐의 아래 놓이게 된다. 따라서 끊임없는 존재발생의 현장에 놓여 있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존재자들은 비존재 또는 비본래적인 존재자로 평가절하되고 정신적인 눈에 의해 통찰되고 보편적으로 파악되는 이념적인 차원이 유일하게 참된 존재의 영역으로 간주된다. 인간의 사유능력은 추상화와 보편화의 능력, 근거를 제시하고 원인을 규명하고 개념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지성능력이 된다. 이러한 지성에게 존재는 한낱 낱말인 순전한 개념으로 보편화되어 버리거나 단순한 추상화의 산물로 간주되기도 한다. 개념에 의한 존재론적 차이의 평준화로 인해 존재자는 그 근원이며 유래인 존재발생사건에서부터 떨어져 나와 단순히 현전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 자리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지 않는 것, 확인될 수 없는 것은 전부 근거가 없는 것, 이유나 원인이 없는 것은 모두 <무>의 심연 속으로 던져지게 되며, 이 <무>도 없는 것이기에 마땅히 망각되어야 할 것으로 단죄받게 된다. 이렇게 존재자 중심의 사유태도 속에서 <없는 것[무]>으로 단죄받는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먼저 현전하는 것이 항상 그것에 잇대어 있는 <부재>가 그 대표적인 것이고, 그 다음으로 온갖 형태의 <은닉>과 <은폐>가 그렇다. 존재가 주어지는 존재진리의 발생사건이 은폐를 찢고 비은폐성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존재사건임을 감안한다면 은폐와 은닉은 바로 존재의 유래인 셈이다. 존재자가 탈은폐되어 우리에게 현전하는 것으로 주어지고 있는 인식과 발언의 사건 그 밑에는 이러한 은닉과 탈은폐의 존재사건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리스 시대의 노에인과 레게인은 근세로 접어들면서 사유하는 주체가 현실을 근거지으면서 개념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현실을 앞에 세우는 표상함이 된다. 이러한 현실의 개념적 파악의 밑바탕에는 현실을 개념에 의해 지배하려는 의지가 깔려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근세의 주체 형이상학에서 드러나고 있는 표상적 사유와 지배에의 의지 사이의 뗄 수 없는 연관에 주목해야 한다. 근세에서 벌어지고 있는 존재자 전체에로의 침입사건의 특색은 한마디로 존재의 대상화와 수량화이다. 존재자 전체가 사유하는 주체와 연장된 객체로 나뉘어지고, 표상하는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객체는 모두 장소를 점유하는 객체로서 어떤 형태로든 다 수량화될 수 있다. 수량화될 수 있는 모든 객체는 수량화 속에서 반복될 수 있고 제어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생산될 수 있고 재생산될 수 있다. 이러한 존재의 대상화 의지 속에서 자연은 이제 얼마든지 인간이 원하면 언제든지 변화시킬 수 있는 지배의 대상이 된다.
이렇듯 존재론적 차이를 망각하며 진행되어온 서양 형이상학의 전개 속에 눈에 띄는 특징은 철저한 존재자 중심의 사유태도이다. 그 대표적인 태도가 과학적 내지 실증적 태도이다. 그러한 과학적 태도에서 관심이 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존재자뿐이고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관심의 영역 밖으로 내몰아버린 <존재자가 아닌 것[무]>이 반란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 현대에서 우리가 지구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지구파멸의 위협이라는 것이 하이데거의 생각이다. <무의 반란>에 제대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경험의 영역 밖으로 몰아버린 그 무에 대한 경험의 가능성을 되찾아내야 한다. 무에 대한 근원적 숙고는, 인간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에 존재에 대한 이해가 깔려 있고 이러한 존재이해는 존재론적 차이에 의해 가능한 것임을 통찰해야 가능한데, 인간은 바로 이 사실을 망각하고 눈에 보이는 존재자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이해를 잘 고찰해보면 알게 모르게 <존재자가 아닌 것[무]>에 대한 경험이 그 밑바탕을 떠받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그러한 사실을 직시할 때 <무의 자리지기>로서의 인간 현존재의 과제를 새삼 통찰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차이의 갈라짐을 끊임없이 내어날라야 하는 자신의 임무를 다할 때 인간은 무의 자리지기로서 동시에 <존재의 목동>이 되는 것이다.
존재론적 차이가 망각되며 전개되어온 서양의 존재역사는 그렇다면 서양 철학자들의 잘못에 기인하고 있는가? 이에 대해 하이데거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존재를 대상화시켜온 서양의 존재역사가 인간 측에서의 임의적 조작의 산물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 자신을 주어온 존재파견의 역사로서 존재의 역운이라는 것이 하이데거의 주장이다. 이러한 존재역운이 지구적 시대를 맞이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생각이다. 이제 우리는 개념의 현미경 속에 들어오는 것만을 존재라고 보던 좁은 시각을 버리고 존재자만이 학문적 탐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로고스 중심적 대응태도를 버리고, 존재가 주어지고 있는 존재발생사건 자체에 주목해야 하며 거기에 맞갖는 대응자세를 찾아야 한다. 그것은 더 이상 근거를 찾고 이유를 설명하고 이해를 추구하는 인간 중심의 <해석학>이 아니라 존재의 사건에 참여하여 존재의 말건네옴에 말없이 응대하는 <침묵[학]>일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가 관심 쏟아야 할 것은 설명되고 해석된 명시적인 존재역사, 즉 형이상학의 역사가 아니라 설명과 해석의 꺼리를 주고 자신은 숨겨온 존재숨김의 역사와 침묵적인 대응의 역사이다. 존재자, 현전, 탈은폐 등에만 관심을 쏟던 파헤침의 자세에서 무, 부재, 은닉 등에로 눈을 돌리는 <무의 자리지기>로서의 임무에 충실해야 할 때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존재자 중심, 현전 중심, 로고스 중심, 인간 중심의 서양 형이상학의 전개에 새로운 시원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존재역운의 새로운 시대에서는 무엇보다도 존재론적 차이와 무, 은닉 등과 그에 대한 경험적 접근 가능성이 새로운 관심으로 부각될 것이다.
존재사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마련하기 위해 하이데거가 눈을 돌린 곳은 로고스 이전 방식에서의 인간 현존재의 존재사건에 대한 실존적 대응투사이다. 학문 이전의 세계에서 인간 현존재는 어떤 존재의 빛 속에서 사물을 만나며 경험하는가? 존재가 스스로 자신을 내어주는 존재사건이 어떻게 하면 개념의 틀에 의해 왜곡되지 않고 경험될 수 있는가? 하이데거가 우리에게 주고 있는 답은 의외로 우리 동양인들에게는 매우 친숙한 세계-사방의 거울놀이이다. 인간 현존재는 땅과 하늘, 신적인 것과 죽을자의 어우러짐 속에서 존재사건을 접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땅과 하늘, 신적인 것과 죽을자, 이 넷은 존재가 주어지고 있는 열린 영역을 이루고 있는 존재놀이공간이며 이 세계공간이 오직 이 넷의 하나로 포개짐[한가지됨] 안에서만 열리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세계-사방이라는 칭호를 사용한다. 그리고 이 세계-사방이 전개되는 존재사건의 법칙을 근거제시에 의한 설명에서 찾으려는 인간 중심의 태도에서 빼내오기 위해서 세계-사방의 놀이규칙이라는 명칭을 부친다. 그 놀이가 다른 놀이가 아닌 거울놀이임을 강조하는 것은, 자신을 비우고 오로지 비추고자 하는 그것을 최대한 되비추고 있는 거울의 속성을 비유적으로 활용하여 땅과 하늘, 신적인 것과 죽을자 그 넷이 각기 자기 자신에 집착하지 않고 다른 셋을 되비추면서 존재사건이 벌어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인간은 죽을자로서의 자신 속에서 비추어 나오고 있는 존재의 빛을 볼 줄 아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 더 나아가 땅과 하늘, 신적인 것 안에서 반사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신이 떠맡아야 할 존재목동으로서의 소임을 찾아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끝으로 다른 문화적 전통 속에서 살아온 한국의 지성인들이 이러한 하이데거의 존재사건학에서 얻을 수 있는 귀결이 무엇인지를 정리해 보자.
먼저 철학 곧 서양철학, 형이상학 곧 서양 형이상학 하던 서양 중심의 형이상학적 이해의 틀을 탈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탈레스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철학 자체의 시원이 하나의 형이상학적 사건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그 사건은 단지 그리스적인 존재자 전체에로의 침입사건일 뿐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그것은 형이상학의 유일한 근원이나 유래일 수는 없으며 형이상적인 것에 대한 전형적인 탐구유형이 될 수도 없고 더 더군다나 존재사건 그 자체일 수는 결코 없다. 더 나아가 하이데거는 존재사건에 대한 유럽적인 대응투사가 너무나 로고스적이고 학문적이어서 존재와 차이, 무와 은닉을 애초부터 제대로 숙고의 대상으로 삼지 못하던가 제거해 버린 원천적인 무 제거의 역사였음을 비판하며 거기에 그러한 사유태도의 근원적인 한계가 있음을 밝혀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자 중심, 현전 중심, 탈은폐 중심, 인간주체 중심의 존재역사가 몰고온 위험을 현대의 우리가 처해 있는 기술과 과학의 시대의 최고의 위험으로 간주하며 그에 대한 대책을 촉구하고 있다. 표상하는 사유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은 전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규정하고 그것에 대한 숙고와 논의를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린 귀결이 현재 지구상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연파괴와 지구파손이며 이것은 그 동안 봉쇄 당했던 무가 벌이는 무의 반란의 현상임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제 우리는 존재와 무, 차이와 은닉에 대해 우리 자신을 열고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는 방식을 새롭게 배우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럽 중심의 사유태도에서 벗어나 다른 문화권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존재사건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열린 사유태도가 필요하다.
지금 우리는 하나의 지구, 하나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지구적 시대를 맞이하여 과거 어느 때보다도 서로 협심해서 현대의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지구적 위기에 공동으로 대처해 나가야 할 당위성을 깨닫고 있다. 여기에 유럽과는 다른 문화적 전통 속에서 살아온 한국의 철학자들이 해야 할 과제가 주어진다. 그것은 곧 동양 문화권에서 일어났으며 일어나고 있는 존재사건에 주목하여 그에 대한 여기 이 땅에서의 현존재의 대응방식을 연구하여 그 독특함을 천착해 내는 일이다. 서양이 자기중심적인 우월감 속에서 자신만의 전통을 고집하며 그 시각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형이상학적으로 존재자 중심, 로고스 중심으로 고찰해 왔다면, 일찍부터 서양문화의 침투 속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존재자 전체에 대한 시각을 바꾸어야 했던 동양인들의 열린 시야가 이제는 문제를 새롭게 보는 데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동양인들은 어쩔 수 없이 세계문화적인 시각 속에서 사물을 보고 판단하고 행위하며 살고 있는 셈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적 숙고이다. 우리의 전통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달라진 해석학적 상황과 이해의 지평에 대해 성찰하여 우리 시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존재이해의 틀을 만들도록 힘써야 한다. 거기에 분명 무(無), 공(空), 허(虛) 등의 비존재적인 것에 유난히 관심을 많이 쏟아 왔던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태도가 유럽인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존재에의 길을 열어줄 수 있는 가능성이 놓여 있다. 지금까지 <비논리적>이며 <신화적>이고 너무나 <애매 모호하다>고 학문적 논의의 장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많은 주제들이 실은 존재사건에 대한 참다운 대응방식에 관심을 두었던 선조들의 조심스러운 사유태도에 기인한 것임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존재발생사건에 대한 다른 시원적 대안적 대응투사방식을 찾는 현대의 지성인들에게 모종의 기여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를 할 수 있다.
현대에서 존재가 자신을 주고 있는 새로운 [존재파견의] 존재역운적 사건에 우리 자신을 열어놓고 열어놓은 채 우리 자신을 그 존재사건에 내맡겨야 한다. 그러면 형이상학적인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말건네오는 존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소리에 귀기울이면서 우리는 우리 시대에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존재의 요청에 응해 존재론적 차이를 맞갖게 내어나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하이데거의 존재사건학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도전적 요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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