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태초에 주석이 있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철학자는 죽어서 언어를 남긴다. 철학은 개념어로 짜여진 이야기이다. 탈레스가 서양철학사에서 최초의 철학자로 꼽히는 이유의 하나는 그가 남긴 이야기가 철학사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탈레스 이전에 있었을, 그러나 소실되고 만 많은 철학 이야기들의 운명에 견주어볼 때 분명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남아있는 가장 오랜 철학 이야기가 탈레스의 것이기에 서양철학사는 그가 남긴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이야기를 듣고 읽으면서 자랐다. 우리는 듣고 읽은 이야기에 대해 말하거나 쓴다. 우리는 또한 듣고 읽은 이야기를 모방해서, 혹은 잇대어서, 혹은 그와 다른 방향에서 이야기를 계속한다. 철학자들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철학자 몽테뉴는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어떤 다른 주제들에 관한 것보다 책들에 관한 책이 더 많다. 우리는 단지 서로에 대해 주석만을 쓸 뿐이다. Michel de Montaigne, Essays, trans. J. M. Cohen, Harmondsworth: Penguin, 1958, p. 349.
이는 우리 시대의 철학자들에게도 타당하다고 본다. 예컨대 무어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세계나 여타의 학문이 내게 철학적인 문제를 제기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나로 하여금 철학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했던 것은 다른 철학자들이 세계나 여타의 학문에 대해서 한 말이었다. G. E. Moore, "An Autobiography," in P. A. Schilpp (ed.), The Philosophy of G. E. Moore, La Salle, Ill.: Open Court, 1968, p. 14에 수록.
데리다는 아마도 “주석만을 쓸 뿐”인 철학자의 대표격일 것이다. 문제는 그의 주석이 주석 되는 책보다 훨씬 길다는 것일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종종 몽테뉴의 명제에 대한 대표적 반례로 간주되어 왔다. 그는 제도권 교육과정에서 논의되는 고금의 철학 이야기를 거의 읽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독창적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짜나간 천재(혹은 아마추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절반만 참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철학과 교육과정에 속한 철학 이야기를 읽지 않은 제도권 밖의 인물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그 이외의 많은 이야기들을 읽었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영향받았음을 시인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사유가 사실 재생산적일 뿐이라는 데는 일리가 있다. 나는 내가 하나의 사유 노선을 창안해내었다고는 결코 믿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다른 누군가에게서 그것을 얻었을 뿐이다. 나는 다만 그것을 명료화라는 나의 작업을 위해 즉시 열렬히 수용했을 뿐이다. Ludwig Wittgenstein, Culture and Value, ed. G. H. von Wright, trans. P. Winch, Oxford: Basil Blackwell, 1980, p. 19.
설령 이것이 사실이라 해도 이는 비트겐슈타인 자신에게 국한된 개인적인 경우가 아닐까? 예컨대 자신의 사유에 독창성이 없다는 자기 변명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이 문제를 유태적 정신의 한 특징이라고 보았다.
유태적 정신은 자그마한 풀 한 포기나 꽃 한 송이조차 생산해낼 수 없다. 유태적 정신의 방법은 오히려 남의 정신 속에서 자라난 작은 풀이나 꽃을 그려내어 그로써 포괄적인 그림을 기획하는 것이다. ---
다른 사람의 작품을 그 자신보다 더 잘 이해하는 것은 유태적 정신의 전형이다. 같은 책, p. 19.
이는 과연 데리다나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유태적 정신에게만 해당되는 말일까? (몽테뉴와 무어는 유태인이었는가?) 혹시 이는 철학자 모두의 운명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탈레스는 분명 최초의 서양철학자가 아니다. 그의 철학 이야기는 남의 철학 이야기에 대한 주석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탈레스의 것 말고도 다른 철학 이야기가 이미 있었음을 함축한다. 이를 일반화하면 우리는 결코 최초의 철학자를 만날 수 없다. 최초의 철학자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주석가이기 때문이다. 결국 태초에 있었던 말씀은--만일 그것이 철학적인 말씀이었다면--주석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누구, 혹은 무엇에 대한 주석이었을까?)
2. 이야기 속으로
철학은 시작도 끝도 없는 이야기이다. 철학 이야기가 본질적으로 다른 철학 이야기에 대한 주석이라면 말이다. 이 끝없이 펼쳐지는 이야기의 한 소절을 이어가다 사라지는 것이 철학자의 숙명이다. 공자는 이를 述而不作이라 했다. 철학자는 결코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지 못한다. 그는 다만 하나의 이야기에 다른 이야기를 덧댈 뿐이다. 그런 점에서 철학은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에서 계속되고 있는 대화요 비교이다.
김상환 교수는 ?철학(사)의 안과 밖?에서 데리다의 해체론을 데리다보다도 더 침착하고 더 아름다운 문체로 훌륭히 이어가고 있다. ?철학(사)의 안과 밖?은 우리 한국 철학계가 자랑스러워할 만한 성취일 뿐 아니라 김 교수 자신으로서도 ?해체론 시대의 철학? 이후 이룩한 빛나는 개가이다. 이를 좀더 논의해보기로 하자.
김상환 교수는 ?해체론 시대의 철학?에서 탈현대적 해체론의 철학사적 연역을 시도하면서 해체론이 철학사를 총량적으로 탈구성하지 못했음을 비판한 바 있다. ?해체론 시대의 철학?의 저자에 의하면 탈현대적 해체론은 “형이상학적 초월을 단일하게 규정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이제까지 철학사 안에서 태어났던 대부분의 철학과 마찬가지로 독단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김상환, ?해체론 시대의 철학?,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6, p. 236.
김 교수는 해체론의 형이상학 이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과거는 거기서 … 하나의 전경이나 그림이 된다. 다시 말해서 과거 전체가 “모두 하나”가 되어 어떤 단일성을 획득한다. 과거 전체가 어떤 하나의 규정성 밑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가령 하나의 철학이 자신의 새로움을 의식하자마자 기존의 철학 이론들은 모두 “하나같이” 오류로서 또는 불충분한 사유로서 현상한다. 현재가 도달한 높이의 관점에서부터 일종의 거대한 추상이 과거로 미치는 것이다. 이 거대한 추상 속에서 사상되는 것은 무엇보다 과거의 이론들간의 연대기적 거리와 시간상의 차이이다. 과거의 이론들이 속하는 각각의 특정한 역사적 상황이 시야 밖으로 사상될 뿐만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 그 이론들이 누리던 역동성 자체가 사상된다. 다만 과거 역사 전체는 일의적 규정성 밑에 놓이면서 거의 비시간적인 평면이 되고 어떤 비역사적인 논리적 체계로 변모된다. 과거의 역사 전체는 일목요연하게 뜯어볼 수 있는 어떤 정지된 그림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데리다가 자신의 해체 전략을 요약하는 대목에서 이런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같은 책, p. 216.
김상환 교수에 의하면 해체론이 형이상학에 설정하는 울타리는 “비시간적 단위로서의 어떤 사유 공간,” “외연의 범위” 같은 책, p. 217.
이고 해체는 일종의 “방법적 전략” 같은 책, p. 167.
이다. 이어서 김상환 교수는 해체론이 철학의 역사를 “단선적으로 해석하고 있지 않은가” 같은 책, p. 234.
하고 반문한다. 이러한 비판을 바탕으로 김 교수는 그 책에서 “형이상학의 “상”이 의미하는 형이상학적 초월의 다의적 의미를 역사적으로 재구성” 같은 책, p. 236.
하려 한다.
데리다의 해체론에 대한 김상환 교수의 비판은 타당한가? 사실 김 교수의 비판은 해체론에 가해진 많은 비판 중 하나의 전형에 속한다. 이에 대해 데리다는 자신이 철학 혹은 형이상학을 결코 동질적인 어떤 것으로 해석하고 있지 않음을 강조한 바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나는 또한 어떤 “단일한” 형이상학이 결코 존재하지 않음을, 여기서 “울타리”가 결코 어떤 동질적인 영역에 테를 두르는 순환적 제한이 아니라 보다 꼬인 구조임을 종종 언급해왔다. Jacques Derrida, "Le rerait de la metaphore," A.-T. Tymieniecka, The Phenomenology of Man and the Human Condition, Dordrecht: Reidel, 1983, p. 281에 재수록.
형이상학의 “울타리”는 선으로 이루어진 형태를 … 지닐 수 없을 것이다. 형이상학의 울타리는 무엇보다 어떤 원형이 아니며, 그래서 내면적으로 자기 자신에 동질적이고 따라서 그 바깥도 동질적일 수밖에 없는, 그런 동질적 영역을 테두리 짓는 원형이 아니다. 그 경계는 언제나 상이한 균열과 단층의 형태를 취하고 있고, 모든 철학적 문헌들은 그에 대한 배당의 자국 혹은 그 할당의 상처를 지니고 있다. Jacques Derrida, Positions, Paris: Minuit, 1972, p. 77.
형이상학을 동질적이고 단일한, 고유하고 동일한 어떤 닫힌 영토로 보는 것은 데리다가 비판하고자 하는 파르메니데스(예컨대 단편 5번, 8번) Kathleen Wright, Ancilla to the Presocratic Philosophers, Oxford: Blackwell, 1948, pp. 41-46.
나 헤겔(예컨대 ?정신현상학?, p. 585)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Phenomenologie des Geistes, ed. D. Johann Schulze, 2nd edition, Berlin: Duneker und Humbolt, 1841, p. 585.
등과 같은 이성중심주의자들의 해석이다. 영토의 안과 밖을 울타리로 확연히 구분하는 것도 데리다가 아니라 바로 그들이다. 데리다는 오히려 그들이 닫아놓은 영토에 구멍을 내고 흠집을 내어 그 틈 사이로 동질성에 이질성을, 단일성에 다수성을, 고유성에 타자성을, 동일성에 차이성을 접목시키려 한다. 그리고 그 계기는 영토 바깥으로부터가 아니라 바로 이성중심주의의 영토 안을 지배하는 논리의 균열로부터 찾아진다. 이 균열로부터 이성중심주의자들이 자신의 영토를 표시하려 쳐놓은 울타리의 해체가,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울타리 안팎의 경계가 무너지는 “초월”의 사건이 일어난다. 플라톤의 파르마콘과 루소의 보충/대리는 데리다가 이들 이성중심주의자들의 텍스트에서 찾아낸 균열의 좋은 예이다. 이에 관한 자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뉴턴 가버(Newton Garver)와 필자가 같이 쓴 다음의 책을 참조할 것. Newton Garver and Seung-Chong Lee, Derrida and Wittgenstein, Philadelphia: Temple University Press, 1994, 4장: 뉴턴 가버?이승종,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 서울: 민음사, 1998.
이들 텍스트의 해체를 통해 이룩되는 초월의 사건은 결코 단일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해체론은 “비시간적 단위로서의 어떤 사유 공간”에서 전개되는 “방법적 전략”으로만 보기 어렵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데리다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데리다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당신은 전략에 관한 말을 너무 많이 들었다. 전략은 내가 특히 언제나 종국에 가서 명백히 자기 모순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나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는 위험 부담을 안고 … 단지 이 전략이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만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과거에 아마 남용했던 말인 것 같다. Jacques Derrida, "The Time of a Thesis," tr. K. McLaughlin, A. Montefiore (ed.), Philosophy in France Toda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p. 50에 수록.
울타리에 대한 김상환 교수의 해석은 울타리를 공간적인 의미로만 해석한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우리가 만일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비시간적 단위로서의 어떤 사유 공간에서 전개되는 방법적 전략으로만 볼 때 우리는 변증법의 많은 중요한 의미를 놓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김 교수의 해석이 혹시 데리다의 해체론을 몰역사적 진공관의 “궁지에 몰아넣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은지 염려된다. 하이데거와 데리다에 있어서 울타리는 형이상학을 완결시키는 역사적 과정, 행위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시간적 단위로서의 역사의 울타리이기도 하다.
?철학(사)의 안과 밖?에서 해체론에 대한 비판은 자취를 감추었다. 오히려 김상환 교수는 해체론이 철학사를 얼마나 총량적으로 탈구성해냈는지(III장), 그리고 형이상학적 초월을 얼마나 다양하게 규정하고 있는지(IV장)를 서술하고 있다. 아울러 ?해체론 시대의 철학?에서 “순정한 형태의 철학”(p. vi)으로 묘사되었던 해체론은 ?철학(사)의 안과 밖?에서는 “숙명적 오염,” “이종교배,” “혼혈적 생성”의 철학으로 고쳐서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방향 전환은 데리다의 해체론을 더욱 정확하고 성숙하게 그려낸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것이다. 다만 전환과 그 사유가 명백히 언급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철학(사)의 안과 밖?에서 해체론은 여전히 “방법적 전략”(p. 7)으로, 그것이 해체하는 것은 “어떤 동일한 구조 전체”(p. 6)로 묘사되고 있다. 또한 해체론적 철학사관은 다음에서 보듯 여전히 공시적 관점에서만 해석되고 있다.
해체론은 … 간접적으로 철학사 전체와 관계한다. 그리고 이때 철학사는 그 문헌과 주제를 필연적 효과처럼 파생시키는 어떤 공시적 체계나 구조로서 설정된다. (p. 8)
이러한 관점에서 김상환 교수는 같은 논문에서 해체론을 “논리적 재구성”(p. 8)에 관여하는 “메타 철학”(p. 9)으로 규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해체론은 메타 철학이기에 앞서 과거와 현재의 실제 텍스트를 현장으로 삼고 그 텍스트의 해체를 근간으로 하는 철저한 작업의 철학이다. 김 교수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해체론에 관한 메타 철학적 논의들이 종종 공허하고 안이해 보이는 이유는 그 논의들에 텍스트라는 현장이, 그리고 텍스트 해체라는 작업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의들은 해체론을 미리 짜여진 방법적 프로그램이나 전략으로 보고, 정작 텍스트의 해체는 이 방법적 프로그램이나 전략을 연역적으로 적용시키는, 그래서 어느 텍스트에 대해서나 반복이 가능한 작업 정도로 간주한다. 그러나 데리다의 해체론은 개별적 텍스트에 대한 구체적 해체 작업에서 출발하여 이들 각각으로부터 철학에 관한 소위 메타적 논의를 간접적으로 수렴해내는 일종의 귀납적 과정이다.
?철학(사)의 안과 밖?에서 김상환 교수는 “해체론이 마지막에 가서 구하는 것”이 “구조가 아니라 울타리”(p. 8)라고 말한다.
구조가 해당 문헌을 총체적으로 재조직하는 질서라면, 울타리는 그 구조를 낳고 지배하는 형이상학적 사유의 질서, 나아가서 그 질서를 낳고 그 안의 형성에 개입하는 바깥을 표시한다. (p. 9)
이는 울타리가 구조보다 넓은 외연을 갖는다는 말로 풀이된다. 그런데 김상환 교수에 의하면 이 울타리보다 넓은 외연을 갖는 것이 있다.
“일반적” 텍스트는 흔적(차연)의 운동 전체에 대한 이름이고, 따라서 형이상학의 안과 밖을 표시하는 “울타리”보다 넓은 외연을 지닌다. (p. 15)
부등식은 이행적(transitive)이므로 우리는 “울타리가 구조보다 넓은 외연을 갖는다,” “텍스트가 울타리보다 넓은 외연을 갖는다”는 김상환 교수의 명제로부터 “텍스트가 구조보다 넓은 외연을 갖는다”는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그러나 김 교수의 글에 함축되어 있는 이러한 결론은 데리다의 다음과 같은 명제와 상충된다.
내가 텍스트라고 부르는 것은 소위 “현실적,” “경제적,” “역사적,” “사회-제도적”이라 불리는 모든 구조들을 뜻한다. Jacques Derrida, Limited Inc, Paris: Galilee, 1990, p. 273.
요컨대 데리다에 있어서 텍스트는 구조와 다르지 않다. 텍스트, 울타리, 구조를 외연적 넓이의 차이로 구분하는 김상환 교수의 견해가 데리다의 입장과 다르다는 것은 김 교수와 데리다가 이 문제에 대해 상이한 길을 걷고 있음을 뜻하는가?
3. 세상 밖으로
김상환 교수의 글을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의 하나는 안과 밖이다. ?해체론 시대의 철학?에서 김 교수는 형이상학적 사유에 울타리가 있을 뿐 아니라 그 울타리의 바깥도 있음을 “실감”하고, 형이상학의 본성에 대한 총체적 인식의 문제가 “형이상학의 “안”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한정하고 상대화하는 “바깥”의 관점에서만 비로소 물음으로 제기되고 해결”(p. 172)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철학(사)의 안과 밖?을 비롯한 ?해체론 시대의 철학? 이후의 여러 글에서도 일관되게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김상환 교수의 글에서 이러한 주장과 쉽게 부합되지 않는 데리다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예컨대 ?철학(사)의 안과 밖?에서 김 교수가 인용한 데리다의 명제를 모아보자.
… 모든 개념들은 우리가 여기서 문제 삼는 형이상학적 울타리 안에 사로잡혀 있다. 이 울타리가 우리의 담론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한에서, 우리는 그것 이외에 다른 것을 알지 못하며 그것 이외에 다른 것을 생산하지 않는다. (p. 8에서 재인용)
[어떤 것을 해체한다는 것은] 그것을 그 총체성 안에서 반복하면서 그리고 그것을 가장 확실시된 명증성 안에서 뒤흔들면서 [해체한다는 것이다]. (p. 9에서 재인용)
해체의 운동은 바깥으로부터 그 구조를 움직여놓지 않는다. 그 운동은 오로지 그 구조 안에 거주하는 한에서 가능하고 힘을 발휘할 수 있으며, 또 그런 한에서 정확히 충격을 가할 수 있다. (pp. 11-12에서 재인용)
체계의 힘과 작용력은 정확히 말해서 모든 위반을 규칙에 따라 “가짜의 출구”로 변형시켜버린다. (p. 16에서 재인용)
해체는 그것이 스스로 참여하는 갈등적이고 차별성을 띤 문맥들 밖의 어느 다른 곳에서 순수하고 본래적이고 자기 동일적인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그것이 행하는 것, 그것으로부터 행하여지는 것일 뿐이고 그것이 [사건으로서] 일어나는 곳에 있다. (p. 17에서 재인용)
이들 인용문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데리다(그리고 하이데거 이에 관한 자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이승종, ?하이데거의 고고학적 언어철학?, 한국하이데거학회 엮음, ?하이데거의 언어사상?, 철학과 현실사, 1998.
)에 의하면 서양의 개념어와 사유는 그리스적 의미의 이성적인 것이다. 철학사라는 울타리 바깥의 체험을 개념화하려는 시도는 따라서 숙명적으로 다시 이 이성적 개념어와 이성적 사유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철학사의 울타리 바깥에 있는 철학사, 개념적 사유와 개념적 언어의 울타리 바깥에 있는 개념적 사유와 개념적 언어가 불가능한 것이기에 울타리 바깥으로의 어떠한 외출도 그 외출이 개념어로 서술되는 순간 울타리 안으로 되돌려지게 마련이다. 이에 관한 자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이승종, ?동일자의 생애: 매체적 언어관에 관한 기록?, 김상환 외, ?매체의 철학?, 나남출판, 1998에 수록.
데리다가 볼 때 후설, 푸코, 레비나스의 철학은 안으로 되돌려진 외출의 대표적 사례이다. 이에 관한 데리다의 논의로 다음을 볼 것. Jacques Derrida, Speech and Phenomena, tr. D. Allison, Evanston: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73; "Cogito and the History of Madness" and "Violence and Metaphysics," Writing and Difference, trans. A. Bas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8에 재수록.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외출을 형이상학을 넘어서는 순수하고 단순한 절차로 이해한다면 그러한 외출은 없다. … 외출의 모든 제스처는 우리를 울타리 안쪽으로 다시 밀어 넣는다. Derrida, Positions, p. 21.
요컨대 철학사적 전통과 언어의 반복이 없이는 외출을 위한 출구는 마련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반복 안에서 출구란 없다.
데리다에게 울타리 바깥은 비개념적인 방식으로 등장한다. 예컨대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울타리 바깥의 희미한 빛을 언뜻언뜻 보여주는 빈틈을 지적해야 한다. Jacques Derrida, De la grammatologie, Paris: Minuit, 1967, p. 25.
이 빈틈에 해당하는 차연과 흔적은 데리다에 의하면 개념이 아니다. 개념은 의미를 결집하는 이성중심주의적 도구이다. 그러나 개념에 고유한 것으로 간주되어온 의미는 해체에 의해 산종된다. 이 산종을 가능케 하는 차연과 흔적이 개념일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 찾아진다. 빈틈으로 들어오는 개념 아닌 희미한 빛은 철학의 여백이다. 여기서 “희미한 빛”은 데리다에게 있어서 반드시 적합한 표현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백색 신화?에서 지적하고 있는 태양중심주의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여백은 바로 해체라는 틈내기에 의해서만 간접적으로 얻을 수 있을 뿐이다. 데리다가 의미하는 철학의 진정한 여백은 또 하나의 철학을 위한 자리가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김상환 교수를 좇아 “기존의 철학과 다른 유형의 철학” 김상환, ?철학(사)의 안과 밖?, p. 2.
으로서의 해체론의 자리로 간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데리다가 철학을 서양 철학사가 반복해온 “흔적의 환원” 같은 논문, p. 8.
작업과 동일시하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그 자리는 “철학이 불가능해지는 지점”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서양철학사의 각 시대를 주도한 담론은 이러한 지점을 때때로 남겨두고 있었다. 인식론이 주도적 패러다임이던 칸트의 시대에 인식의 영역 바깥에 놓여진 누메나(noumena)가 그 좋은 예이다. 언어철학이 주도적인 패러다임인 우리 시대를 이끌어 온 비트겐슈타인, 하이데거, 데리다에게서 우리는 동일한 제스처를 본다. 청년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한계 바깥에 말할 수 없는 것으로서 설정한 “신비스러운 것(das Mystische),” 하이데거가 끝없이 자신을 (개방하면서) 은폐하는 것으로서 설정한 “존재,” 그리고 데리다가 이름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한 “흔적”과 “차연”은 이들 언어철학의 거장들이 남겨 둔 마지막 카드이다. 이들은 언어철학이라는 담론으로 환원되지 않는 이 이름 아닌 이름들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칸트가 누메나에 대해서 그러했던 것처럼 이들은 이 이름 아닌 이름들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남기지 않았다. 아니 남길 수 없었다. 이 이름 아닌 이름들은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이야기되기를 거부하는 “취급 불가능자”이기 때문이다. 김상환 교수의 빼어난 글이 (혹은 김 교수가 인용하는 데리다의 텍스트가) 이 대목에서 신비스런 느낌을 주는 아쉬운 스케치에 그치는 까닭은 바로 이러한 저간의 사정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 하이데거, 데리다가 편찬한 서양 철학사에서 우리가 얻는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은 “취급 가능자”보다 “취급 불가능자”를 주목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그토록 경계했던 또 하나의 이분법, 또 하나의 중심주의(취급 불가능자 중심주의?)가 아닐까? “취급 불가능자”는 과연 자신을 “취급할” 다가오는 다음의 시대를 기다리고 있는가? 그 시대의 철학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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