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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2/철학

철학의 문화관

by Frais Study 2020. 5. 28.

 

1. 문화에 대한 철학의 관심

문화에 쏟은 철학의 관심은 문화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너무 적었다 할 수
도 있고 매우 컸다 할 수도 있다. 문화를 인간의 비유전적인 의식적 활동과 그 결
과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넓게 이해한다면 문화는 철학적 관심의 주된 대상이 될
것이다. 인간, 자연, 사회의 거의 모든 현상들에 대해서 철학이 관심을 가져왔고 
특히 언어, 종교, 예술, 기술 등 문화의 중요한 영역에 대해서는 집중적으로 반성
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은 좁은 의미
는 비교적 소홀했
다 할 수 있다. 즉 ‘중국 문화’, ‘인도 문화’처럼 경험적으로 기술될 수 있는 
개별 문화와는 다른 문화 일반을 철학적 반성의 주대상으로 취급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한국 역사’, ‘로마사’와 같은 개별 지역의 역사와는 다른, 역사 그 
자체를 철학이 역사철학이란 이름으로 다룬 것에 비하면 문화철학은 철학에서 그
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였다. 유럽, 특히 독일의 대학들에서 1차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 중간 기간에 문화철학이 상당한 관심을 끌었으나 문화철학이 주류 철
학의 중심부에 진입하지는 ?
2차세계대전 이후 철학 내적 상황과 주변환경의
변화로 문화철학에 대한 관심은 다시 약화되었다(Lemaire, 1976: 16-17). 그러나 
역사, 언어, 교육, 기술 등 다른 문제들을 취급하면서 문화에 대해서 부차적인 관
심을 기울이거나 간접적으로 문화 문제를 취급한 경우는 매우 많았다.
크게 나누어서 문화 문제에 대한 철학의 접근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현재 문화에
대한 긍정적 평가 혹은 부정적 비판이다. 루소의 『예술과 학문에 대한 담론』 (Di-
scours sur les arts et sciences, 1750)과 『불평등의 기원』(Discours sur l?ri-
gine
럊alit? 1754), 헤르더의 『또 하나의 역사철학』(Auch eine Philoso-
phie der Geschichte, 1774), 슈펭글러(Spengler, Oswald)의 『서양의 몰락』(Der 
Untergang des Abendlands, 1918-23) 등은 그런 문화비판이며 현상학자 후설은 그
가 심리학주의라고 부르는 물리주의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그것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는 현대 문화를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칸트는 합리주의를 비판하면서 그것이 가
져온 윤리적 상대주의를 걱정하였다. 하버마스(Habermas, J.)의 후기 자본주의 비
판도 그런 문화비판이라 할 수 있다. 헤르더의 경우와 ?
수의 예외를 제외하
고는 당 시대의 문화에 대한 평가는 거의 대부분 부정적이었으며 그것은 철학의 비
판적 성격을 잘 반영한다. 물론 이런 비판의 배경에는 비판자들의 문화관이 전제되
어 있
었다. 
둘째는 문화현상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방법론에 대한 논의다. 자연현상과는 다
른 정신현상으로서의 문화현상을 접근하는 방법은 자연과학 방법론과는 다른 방법
을 사용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제기되는 방법론을 논의한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
은 리케르트(Rickert, H.)의 『문화학과 자연과학』(Kulturwissenschaft und Natur-
wisse
1915)이며 딜타이(Dilthey, W.)와 하버마스도 문화과학 방법론 논의
에 많은 기여를 했다(이한구, 1995: 223-49).
셋째는 문화현상 그 자체의 본질, 가치, 발전 등에 대한 논의다. ‘문화’란 개념
을 주 대상으로 취급하기보다는 오히려 역사를 논의하면서 문화를 논의한 경우가 
대부분이며 헤르더, 칸트, 헤겔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 글에서는 주로 이 세 번
째 접근에 주관심을 기울이려 한다. 
문화의 본질에 관한 철학의 이런 유형의 관심은 19세기 후반 문화인류학이 출현함
으로 다소 복잡한 양상을 취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문화현
문으로 취급하
는 새로운 학문이 생겨났기 때문에 철학은 그 이상 문화에 대해서 반성할 필요가 
없거나 반성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태도가 생겨났다. 거기다가 철학 내부에도 어
느 정도 전문화현상이 일어나서 인간의 정신현상 전체라 할 수 있는 문화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을 철학의 학문성에 미흡한 것으로 보여진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로는 
주로 실증주의적으로 연구되는 문화인류학이 많은 철학적 문제를 제기함으로 철학
적 반성에 새로운 대상을 제공할 뿐 아니라 반성의 방향 전환도 자극하였다 할 수 
있다. 마치 물리학이 독립된 ?
 발전하므로 고전적인 자연철학이 사라진 대
신 현대의 과학철학이 태동되었을 뿐 아니라 철학적 사고 자체가 그 영향을 받은 
것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할 수 있다. 
최근까지 철학이나 문화인류학의 논의들에서 제시된 문화에 대한 정의들에 거의 
공통적인 요소들은 ① 문화는 자연현상과 다르다는 점(“non-genetic” ─Josseli-
ng de Jong), ② 문화는 인간에 의하여 생산된다는 사실(“acquired by man” ─ 
Tylor), 그리고 문화는 ③ 개인의 생산물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단위의 공동체의 산
물이란(“as a member of communit
Tylor) 사실이다. 따라서 문화에 대한 관
점은 자연관, 인간관, 역사 혹은 사회관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
다. 


2. 철학적 문화관의 변천

엄격하게 구분되지는 않지만 이제까지 문화를 보는 철학의 입장을 시대에 따라서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① 실체론적 문화관, ② 인본주의적 문
화관, 그리고 ③ 탈인간적 문화관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이 구분은 각각 그 시대
의 자연관 및 인간관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유기적 자연관을 유지하던 고대 
및 중세에는 실체론적 문화관이 지배적이었고, ?
活?일반화되고 인간
의 주체성과 창조성이 강조된 현대에는 인본주의적 문화관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영원불변한 자연도, 인간의 주체성도 모두 무시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서는 
탈인간적 문화관이 등장한다. 물론 현대에도 실체론적 관점을 다소 견지하는 사상
가들이 없지 않았고 최근에는 그런 관점이 좀더 강화되는 경향도 어느 정도 나타나
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현대의 지배적 문화관은 역시 인본주의적이었고, 
최근의 탈현대주의에서는 문화의 창조자로서의 인간이 뒷전으로 밀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 실체론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와 중세에 지배적이었던 실체론적 문화관에서는 문화를 
본래 주어진 실체의 구체적인 표현 혹은 발현 이상으로 보지 않는다. 따라서 문화
는 자연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고 다만 자연의 연장 혹은 이미 자연에 주어
진 것을 개발하고 발전시킨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이상적인 것은 자
연에 가능한 한 많이 순응하는 것이고 그래야만 모든 것이 순조롭고 평화로운 것이
다(順天者, 興). 자연에 거슬러 행하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것(逆天者, 亡)이므로 
자연과 다른 인공적인 것은 모두 열등?
한 것이었다. 인간에게 불을 훔쳐
다 준 프로메테우스, 인공날개로 하늘을 날으려 한 이카루스, 인공적으로 천둥소리
를 내려 하던 살모네우스가 모두 신들로부터 중벌을 받았다는 고대 그리스의 신화
는, 인간은 자연과 경쟁할 수 없다는 고대인들의 관점을 반영한 것이다. 
자연에 어느 정도 변화를 가하는 인간의 문화적 행위는 자연현상의 연장이거나 자
연을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데모크리투스는 거미가 옷 짜는 법을 가르쳤
으며, 제비가 건축술을 가르쳤다고 주장했다. 루크레티우스(Lucretius)는 사람은 
태양을 보고 요리?
珝▤?냈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기술
이란 “자연에 근거해서 자연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나아가든지”(농업에서처럼)
, “아니면 자연을 모방한 것이다.”(물레처럼)라고 주장하였다(Aristoteles, Phys-
ics, ii. 8, 199a; 호이카스, 1987: 67 참조).
고대 사회에서는 오늘 우리가 말하는 바 물질문화보다는 정신문화, 혹은 키케로 
가 표현한 바 ‘영혼의 문화’(cultura animi)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 
태도는 특히 플라톤의 교육(Paideia)관에 뚜렷하게 반영되었다(Jaeger, 1959: 6-7
). 플라톤은 궤변론자들
진 것으로서의 자연(physis)과 인위적인 것으로서의
법률(Nomos)을 구별하고 법률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약속에 의한 것으로 규정한 
것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하였다(Lemaire, 1976: 28-29). 프로타고라스의 “인간
이 만물의 척도로, 있는 것이라면 있는 것의 척도요, 없는 것이라면 없는 것의 척
도”란 주장이 대변하는 것처럼 사람을 만물의 척도로 본 궤변론자들이 아테네의 
젊은이들에게 교양교육을 시키는 것에 대해서 매우 걱정한 것이다. 궤변론자들과
는 달리 진정한 교육(Paideia)은 궁극적으로 자연에 의해 주어진 덕(arete)를
?알맞게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플라톤에게는 그런 교육을 책임지는 것은 철학이었다. 그는 Republic에서 철학자
와 시인은 다 같이 ‘모방자’(mimetes)이되 시인은 단지 겉으로 나타난 현실을 모
방하고 철학자는 참된 현실(이데아의 세계)을 모방한다고 생각하였다. 수학과 천문
학도 교육에 도움이 되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예비교육과정(propaideia)일 뿐 철학
처럼 존재 그 자체를 직관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런 교육관이 동시에 플라
톤의 문화관이었다. 생활에 필요한 도구나 전쟁에 사용될 무기, 혹은 생존을 위
작활동이 아니라 이데아의 세계를 모방하는 활동이 문화활동이고 그것을 가장 
잘 모방하는 것이 고급 문화인 것이다. 그러나 이상적인 문화는 개인의 활동에서
가 아니라 이상적인 국가(politeia)에서 가장 잘 나타나는 것으로 플라톤은 보았다
. 그래서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가장 이상적인 국가의 시민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 “국가(politeia)와 교육(paideia)의 관계는 그 시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희미하게 인식되었으나 플라톤의 저작에는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Jaeger, 1959: 272)
이러한 플라톤적인 문화관은
?상당한 기간 동안 계속되어 물질적인 것과 
관련된 경제활동과 신체노동은 cultura agri(농업)란 표현에서 보듯 전혀 문화와 
관계없는 것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매우 하급의 문화로 간주되었다(강영안, 1995: 
199). 그런 문화관은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도 답습되었으며 키케로
의 “영혼의 문화는 철학”(Cultura animi est philosophia)이란 생각에도 반영되
었다. 
무시된 것은 물질과 관계된 문화뿐 아니라 비록 정신적인 것이라도 문화현상 그 
자체가 열등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물질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것이 우위에
술보다는 철학이 우위를 점한다 하더라도 철학조차도 어디까지나 본질적인 것의 
모방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철학은 다른 것들보다 본질을 가장 가까이 
모방할 수 있기 때문에 우월한 것이다. 그래서 문화의 궁극적인 목적은 모방이 아
닌 실체 그 자체로 돌아가는 것이므로 문화활동은 곧 그것을 통하여 문화를 극복하
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수정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자취를 헤겔의 철학과 진
화론적 역사관에서 어느 정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문화관 혹은 역사관을 콜링우
드는 실체주의(substantialism)이라 불렀다(Col
od, 1946: 42 이하). 궁극적
으로 중요한 것은 실체이고 문화는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그 문화
를 창조하는 인간의 위치도 자연에 비해서 부차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는 것이
다. 그런 문화활동을 가능하도록 하는 동인(動因)도 이미 인간 본성에 주어진 욕구
혹은 의지(boulesis)이다. 그것은 육체의 하급 욕망(epithymia)과 구별되는 인간 
본성에 주어진 목적 지향적 경향이다. 따라서 자연의 일부인 인간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고급 욕망에 의하여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을 자연의 법칙에 따라 개발하여
자연에 주어진
달성하는 것이다. 

2) 인본주의적 문화관

고대와 중세시대의 실체론적 문화관은 유기적 자연관의 퇴조와 더불어 약화되고 
그 대신 인본주의적 문화관이 기계론적 자연관과 더불어 점점 더 지배적인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제 자연은 다만 문화의 질료를 공급하되 지배되고 이용되는 위치로
물러가고 실체 대신 인간이 문화창조의 주체로 등장하여 자유롭게 창조성을 발휘함
으로 스스로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으로 간주된 것이다. 서양에서는 종교개혁과 
그것이 가져온 자연관의 변화로 일어난 자연과학이 문화관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

이카스, 1987 참조) 동양에서는 소위 근대화과정에서 이런 문화관이 형성
되었다 할 수 있다. 
베이컨은 그 근본적인 변화의 분기점에 서 있었다 할 수 있다. 자연에 대한 그의 
유명한 발언, 즉 “순응하지 않고는 정복할 수 없다.”(Non nisi parendo vincitu-
r)는, 한편으로는 자연법칙의 확고한 위치를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에
순응하는 것은 과거에서처럼 단순히 그것에 복종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연법을 이용
하여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는 인간의 욕망과 오만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자연에
순응하는 문화가 아니라 자연
함으로 창조하는 문화관이 나타난다. 
칸트의 자연관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물론 유기적 자연관이 완전히 배제
된 것은 아니지만 칸트에게서 자연은 주체가 선험적으로(a priori) 주어진 개념들
을 통하여 인식될 수 있는 대상에 국한된다. 그 자체로는 무질서한 질료에 불과하
고, 주체가 질서를 부여해야만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정도로 그 위상이 낮아
졌다. 자연은 이제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을 포함하는 힘이 아니라 인간의 지능과 
창조성으로 조작할 수 있는 대상으로 취급된다.
이러한 그의 자연관은 바로 그의 문화관?
홱? “인간의 음식, 의복, 외부
로부터의 위험을 막기 위한 안식처, 보호수단(이런 것들을 위해 자연은 인간에게 
황소의 뿔이나 사자의 발톱, 개의 이빨 등과 같은 것을 주지 않고 단지 두 손만을
주었다), 삶을 즐겁게 해 주는 모든 오락, 또 인간의 통찰력과 재치, 심지어는 인
간 의지의 선량함까지도 전적으로 인간 자신의 작품인 것이다.”(칸트, 1992: 27) 
역설적이게도 이것이 바로 자연이 본래 의도한 것 같이 보인다고 하였다. “즉 만
일 인간이 가장 조야한 상태로부터 언젠가는 가장 정교한 기술의 발달과 사고방식
의 내적인 ?
까지 … 도달하게 된다면, 또 그렇게 됨으로써 행복을 창출해 
낼 수 있게 된다면, 이러한 공로는 전적으로 인간 자신의 것이며 단지 자기 자신
의 힘으로만 이룩한 것이 되도록 자연이 의도한 것 같이 보인다는 말이다.”(칸트,
1992: 27-28)
칸트보다 다소 늦게 활동한 헤르더는 칸트보다 훨씬 더 문화 그 자체에 대해서 관
심을 기울인 철학자로, 그도 문화를 인간 정신의 산물로 보았다. 그는 인간에게 본
성으로 주어진 특성을 무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칸트보다도 유기적인 자연관에 
오히려 더 충실했다. 그러나 그에게도 계몽주의의
품?강하게 작용했고 그
것이 그의 문화관에 잘 반영되고 있다. “인류, 곧 인간 정신이 이룬 업적이 얼마
나 대단한가! 이 땅의 문화! 어느 곳에서나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이나 가진 문화! 
… 아시아의 종교! 연대표와 정치체제 그리고 철학! 북유럽의 종교, 법률, 도덕, 
전쟁, 영광! … 중국과 일본의 정치!”(강영안, 1995: 203) 따라서 인간이 성취한
문화는 단순히 그 본성의 자연적인 발전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창조성의 산물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문화를 인간의 제 2 의 탄생으로 간주하였다. 
계몽주의 사상가였던 헤르더와 칸
?문화는 주로 인간에게 본래적으로 주어
진 특성과 능력의 개발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들도 고대와 중세의 문화관의 요소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개발함에 있어서는 인간의 
역할이 고전적 인본주의에 비해서 훨씬 더 강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인간에 
주어진 본성이나 능력보다는 그것을 개발하는 인간의 정신이 더 주목을 받는 것이
다. 그래서 문화에 있어서 인간은 개발되고 교육되는 대상의 위치에서 개발하고 교
육하는 위치로 바꿔지고 있음이 나타난다. 
이에 따라 문화의 개념에 눈에 뜨이지 않
가 일어남을 알 수 있다. 즉 과거
처럼 문화란 ‘인간에게’ 일어나는 변화가 아니라 ‘인간이’ 성취하는 변화란 것
을 함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 자신에게도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사실이
지만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이룩하는 변화요, 비록 인간이 직접적으로 자신을 교육
하는 것은 아니지만 철학, 종교, 예술, 제도, 심지어 전쟁 같은 것을 통하여 인간
이 스스로 창조한 것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이룩하는 것이다. 칸트는 인간이 자연을
떠나, 자연을 노동대상으로 삼을 때 비로소 인간의 내적 문화(즉 지성, 판단력 등 
자연적
 개발)와 외적 문화(인간 활동의 산물로서의 문화)가 가능하다고 보
았다(칸트, 1992: 61).
문화활동의 동기에 있어서도 칸트는 매우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이유를 제시하였다
. 인간이 문화를 창조한 것은 인간에게 본래 주어진 어떤 고상한 동기에서가 아니
라 오히려 인간 속에 있는 이기심, 적대심, 명예욕, 소유욕, 지배욕 때문이라고 보
았다. 타인과의 경쟁심과 투쟁, 자신의 명예욕과 지배욕, 소유욕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없었다면 문화는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불
화라든가 악의적인 경쟁심, 만족할
는 소유욕이나 지배욕을 있게 한 자연에
감사할지어다.”라고 하였다(칸트, 1992: 30). 이는 인간의 이기욕을 전제로 한 사
유재산 제도를 특징으로 하는 시민사회의 전형적인 문화관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은 후에 게엘런(Gehlen, A.) 등이 주장한 바 “결핍된 존재”(M둵gelwes-
en) 이론과 일맥상통한다. 즉,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서 육체적으로 더 결핍된 
존재로 태어나기 때문에 그 결점을 문화활동을 통하여 보충하려 한다는 것이다. 
문화적 생존 전략은 닫혀진 생물학적 전략과는 달리 다양하고 유연하여 동물보다 
우월한 위
려놓는다고 주장하였다(Gehlen, 1986: 33).
그것은 또한 스미스나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마더빌의 자유방임주의를 연상하
게 한다. 마더빌이 쓴 『벌들의 우화』(The Fable of the Bees)의 부제 “공적인 
이익이 되는 사적인 악”(private vices, public benefits)(Primer ed., 1962)이 
시사하듯, 개개인 인간에게 주어진 이기주의적 욕망이 오히려 사회 전체에 이익을
가져다 주고 문화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자유방임주의는 이미 칸
트의 문화철학에서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인본주의 문화관에서 문화는 점점 더
隔?외형적인 형태를 취한다. 철학, 
종교, 제도뿐만 아니라 과학, 기술, 종교적 상징, 예술작품, 건축, 토목공사 등도
문화에 포함된다. 그것들도 자연에 가해진 인간의 의식적인 변형 혹은 가감이거나 
자연적으로 주어지지 않았던 것을 창조한 것이라면 문화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것
이다. 특히 인간 의식에 의하여 물질에 가해진 변형은 고대문명에서 그 가치가 그
렇게 높이 평가되지 않았지만 현대에 와서 점점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인간의 적나라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은 전통적으로 강조된 내적 문화가 아니라 
주로 물
힘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물질문화가 꽃피게 된 것이다.
물론 물질에 가해진 변화도 어디까지나 정신적인 힘에 의한 것들이므로 물질문화
는 정신문화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물질문화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의식의 변화 혹은 정신의 세련화도 이루어지고 이룩된 물질의 변화도 정신적인 산
물이므로 그것들도 인간의 의식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 사실은 역사를 절대정
신의 자기발전과정으로 본 헤겔의 역사관에 의하여 이론적으로 체계화되었다. 

3) 탈인간적 문화관

인본주의적 문화관이 지배한 현대는 자연과학과 그?
과학기술에 의하여 
주도된 시대라 할 수 있다. 실체론적 문화관에서 중요시되던 실체와 이성은 현대 
자연과학과 과학기술의 눈부신 성공으로 말미암아 경험과 실험을 중요시하는 실증
주의적 사조에 의하여 조금씩 밀려나가고 영원불변하는 법칙과 사실에 의하여 보장
된다고 생각했던 진리와 객관성은 19세기 후반부터는 인식주체들의 합의(Intersubj-
ectivity)로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진리와 객관성을 포함한 모든 것은 인간의 작품
이요, 인간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제 문화는 자연에 주어진 가
능성의 자연적인 개발
라 어디까지나 위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창조물이요,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 뒤집어 쓴 미숙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신의 주인일 뿐 아
니라 자신이 창조한 문화의 주인이 되었다고 대견해 했다.
그러나 그런 문화관 속에는 이미 그 자체를 부정하는 요소가 배태되고 있었다. 그
것은 적어도 두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인식론적
요청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객관성과 보편성의 요구는 이성, 보편의지, 의식일반, 
절대정신, 초월적 의식을 내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런 것들은 이미 구체적인
개인을 넘어선
고 인간적인 것이라 하기가 어렵다. 데리다(Derrida)는 심리
학적 자연주의를 통렬히 비판하고 유럽의 인본주의 회복을 주창한 후설(Husserl)에
게서도 “인간 없는 의식을 상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Derrida, 1984: 133).
인본주의 문화관의 자체 부정의 또 다른 과정은 19세기부터 헤겔, 콩트, 마르크스
, 스펜서, 뒤르켕 등 사상가들에 의하여 인간의 사회성이 밝혀진 것이었다. 개개인
의 인간은 점점 창문이 없는 단자(單子, monad)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주위 문화에
의하여 영향을 받고 결정되는 존재요, 개개인의 의식과 활동으로 ?
수 없는 
‘사회적 사실’이란 것이 있다는 점이 설득력 있게 제시된 것이다. 따라서 문화
도 비록 인간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과거에 산 사람을 포함한 인간 공동체의
산물이지 개별적 인간의 산물은 아니며, 인간이 문화를 창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은 또한 문화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하게 인식되고 있는 것
이다. 개개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문화는 창조되고 구체적인 개인은 그것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독립된 형태를 취한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졌다. 즉 소외현상
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
간 활동의 생산품이 객관적인 존재형태
를 획득하여 그 생산자의 소원과 의도와는 독립적으로(그래서 자율적이 되어서), 
그리고 그것에 대항하여 기능하는” 현상이라고 샤프(Schaff, A.)는 소외를 정의
하였다(Schaff, 1976: 130). 마르크스도 “노동의 생산품이 그 생산자에 생소한 무
엇으로 변하여 생산자와 독립된 것으로 나타난다. 노동의 생산품은 곧 적대적인 형
태로 변신해 버린 노동 그 자체이며, 그것은 물질적인 것이다. 그것은 노동이 객체
화한 것이다.”라고 자본주의 생산관계에서의 소외를 기술했지만(Marx, 1964: 108)
그?
?노동의 생산품인 문화 전체에 대해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문화는 인간으로부터 독립되고 심지어 인간에게 적대적인 존
재로 나타날 뿐 아니라 그것은 인간을 결정한다는 사실도 인식되기 시작했다. 영원
불변한 실체로서의 자연이나 인간의 영혼 혹은 이성이 사라진 이상 인간을 인간으
로 만드는 영원한 본질이나, 모든 인간에게 항상 동일한 가치나 원칙 등은 더 이상
인정되지 않는다. 사람이 문화를 만들지 모르나, 이제 인간은 문화에 의하여 결정
되고 만들어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퍼?
溝?“그 사람의 생각이 곧 
그 사람”(Hartshorne et al. ed., 1933-58: 314; Baynes et al. ed., 1987: 34 
재인용)이라면, 그리고 한 사람의 생각이 그 사람이 살고 있는 문화에 의하여 결
정된다면 사람은 곧 문화에 의하여 결정된다 할 수 있다. 
만약 사람이 문화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사실이라면 과연 문화가 인간주체에 의
하여 창조된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어떤 의미에서 문화는 인간
이란 매개를 통하여 스스로 문화를 창조한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적어도 이것
이 탈현대주의 사상가들이 이끌고 있는 사?
袖甄? 어떤 의미에서 데리다가 
표현하듯 자연을 지배하고 창조적인 활동을 하는 “인간의 종말”이 도래하고 있
다 할 수 있다(Derrida, 1984: 125 이하).
이와 관계해서 언어는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이미 미드(Mead, G.)의 상징적 상호
작용론에서도 자아의 형성에 언어(verbal gesture)의 기능이 지적되었지만 특히 탈
현대주의자들은 주로 언어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퍼스는 “사람이 단어를 만
들고, 단어는 사람이 뜻하고자 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뜻할 수 없으며, 그것은 다
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람이 단어들이
 외부 상징들을 통해서
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단어들이나 상징들을 돌이켜 말한다면 “우리가 당신에
게 가르친 것 외에 당신은 다른 의미를 만들 수 없다. 당신이 어떤 단어를 당신의 
생각의 해석자로 사용할 때도 그럴 수밖에 없다. … 사람이 사용하는 단어나 표식
은 그 사람이다. … 그래서 나의 언어는 곧 나의 전체다.”(Derrida, 1984: 34) 라
고 했다. 언어에 의미를 부여하고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의 역할은 축소
되고 제거되는 반면 사용되는 언어가 중심으로 부상한다. 그래서 푸코는 “언어가 
지평선에 계속해서
灼蠻嗤?그럴수록 인간은 파멸되는 과정에 있다.”(Derr-
ida, ibid.)고 했다. 표현에 있어서 기의(signified)와 기표(signifier)의 존재론
적 구별이 사라지고 다만 기표와 기표와의 차이에 의해서만 의미가 결정된다고 주
장한다면(이정호, 1995: 23)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의 역할은 제로에 가
깝게 될 것이다.
물론 언어는 문화 전체를 대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언어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
의 입장은 문화의 다른 영역에서도 비슷할 수밖에 없다. 문화를 창조하고 문화를 
향유하는 문화의 주체로서의 인간은 물러가고 문화에
화창조의 매개 정도
의 역할을 감당하는 인간으로 서서히 대체되고 있다 하겠다. 
헤겔은 정신이 긴 여정을 마치고 다시 제자리를 돌아올 때는 자신의 모든 가능성
을 다 완성한 금의환향이라고 사색했다. 그러나 정신의 구체적인 화신이어야 할 인
류의 여정은 그렇게 영광스럽게 끝나는 것 같지 않다. 인간에게 위협과 경외의 대
상이었던 자연은 만신창이가 되어 기진맥진하게 되었고, 그렇게 만든 인간도 자신
의 생산품에 의하여 무용지물이 되고 있다. 


3. 문화의 가치

문화에 대한 철학적 반성에는 문화의 본질 못지않게 문화의
한 자리를
차지한다. 자연현상은 서술과 분석의 대상은 될 수 있으나 평가의 대상은 되지 않
는다. 자연현상을 선하다 혹은 악하다 할 수 없고 아름답거나 유용하다는 인간의 
평가는 그 현상으로부터 아무 반응을 받을 수 없으며 현상이 그 때문에 스스로 변
하거나 그 전과 다르게 작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화는 인간의 의식적인 활동의 
결과이기 때문에 인간현상이며, 인간의 모든 의식적인 활동은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고, 평가는 그와 비슷한 다른 활동에 영향을 끼치고 변화를 가져온다. 그러
므로 문화에 대한 반성에서 평가의 요
여되면 그것은 문화의 한 중요한 요소
를 등한히 하는 것이고 반성적인 사고가 가질 수 있는 핵심적인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문화인류학도, 비록 그 방법에 있어서는 철학과 다를 수 있지만, 문화현상을 서술
하고 분석한다. 그러나 문화의 가치를 설명하고 평가하는 작업은 주로 철학의 업무
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문화의 가치에 대한 고려는 “어떤 특정한 문화가 다른
문화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하다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과 관계되는 문화절대주
의 혹은 문화상대주의 문제와 “문화가 더 좋아지고 있는가?” 하는
 관계되
는 발전의 문제로 구분될 수 있다. 물론 해석학적 방법을 채택할 경우 문화인류학
도 문화의 가치를 전혀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개별과학으로서의 문화인류학은 어
디까지나 에스키모의 문화, 뉴기니의 문화와 같이 구체적인 문화에 관심을 기울인
다. 문화 일반 혹은 문화 그 자체의 가치 문제는 원칙적으로 철학의 업무요, 만약 
문화인류학이 이들 문제를 취급한다면 그것은 이미 철학적 작업을 수행하는 것으
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문화의 가치를 철학적 반성의 대상이 되도록 한 데는 문화인류
학의 공헌이
론 예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19세기 이전에는 일반적으
로 자기 문화의 우월성은 거의 자명한 것으로 수용되었다. 중국과 그리스가 그러했
으며, 특히 서양은 합리성을 핵으로 하는 유럽 문화 중심주의에 대해서 거의 의심
하지 않았다. 심지어 19세기 말 타일러의 진화론적 인류학도 유럽 문화가 진화의 
첨단에 서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았으며 시민 사회적 합리성이 보편적
가치란 것을 거의 자명한 사실로 전제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에 몇몇 문화인류학
자들이 가치 중립성을 강조하는 실증주의적 방법론을 채택함으로 ?
陸聆품?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거기에다 과거 서구 제국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이 
독립을 얻은 뒤 자신들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전통문화를 복
구하고 서양문화 중심주의에서 탈피하려고 노력한 것도 문화상대주의의 출현과 확
산에 상당한 공헌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의식적으로는 정치적 고려와
관계없이 순수 학문적인 고려에서 채택된 실증주의적 방법이 문화상대주의의 계기
를 마련해 주었다는 사실은 특이하다 할 수 있다(Lemaire, 1976: 18). 20세기 초반
이런 문화인류학의 연구경향은 인?
 국한되지 않고 윤리, 종교, 예술, 심지
어 철학 등 다른 영역에서 상대주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확산되
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도 문화인류학으로부터 적지 않은 자극과 추진력을 얻었다
고 볼 수 있다. 

1) 문화상대주의 문제

실체론적 문화관에서는 문화상대주의가 전혀 문제로 등장할 수 없었다. 우선 실체
론적 문화관은 문화 자체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절대적인 것은 실체
며 그것의 구체적인 표현으로서의 문화는 다만 상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을 뿐이
다. 그러나 상대적인 가치만 가지고 있다
?우리가 이해하는 의미로서의
상대주의적인 눈으로 문화를 본 것은 아니었다. 물론 고대 그리스 시대의 궤변론자
들은 불변하는 객관적 표준이나 이상을 거부하여 현대적인 의미로서의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상대주의는 즉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게 경종
을 울려, 인간이 만든 모든 제도(nomos)의 표준이 되는 이념 혹은 자연(physis)을 
상정함으로 극복되었다. 인간 중심의 궤변론은 고대 사회의 한 특이한 변종이지 
전형적인 것이라 할 수 없다. 문화현상은 비록 그 자체로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것은
하더라도 그것이 불변하는 실체의 발현인 한 결코 상대적일 수 없다.
영원하고 객관적인 기준과 목적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대 중국인이나 그리스인들은 어떤 문화가 가장 이상적이고 고급 문화
인가에 대해서는 물어 볼 필요가 없었다. 중국인들은 한 민족만이 진정한 문화를 
소유하고 그 외의 종족들은 모두 미개한 ‘오랑캐’였으며, 그리스인들은 자신들
을 제외한 다른 민족들을 모두 어린 아이처럼 유치한 ‘야만인’(barbaros)으로 취
급하였다. 실체론적 문화관에서 오늘 우리가 문제삼고 있는 문화상대주의는 있을 

騙駭?
그런 절대주의적 문화관은 인본주의적 문화관에서도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문화는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만들어 낸 산물이기는 하지만, 
칸트의 인식론에서 무질서한 경험에 질서를 부여하는 인식주체가 개인이 아니라 
의식일반(Bewu tsein berhaupt)인 것처럼 문화를 창조하는 인간도 자의적으로 창
조하고 행동하는 개인이 아니라 어떤 본성을 공유하는 종으로서의 인간이다. 비록 
인간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고 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 기울
이지만 인간은 어디까지나 이성을 가진 존
?이성은 궁극적으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추진력을 소유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근본적인 악이 있어 구체적
인 인간은 항상 애매한 존재로 남아 있지만, 인간은 이성의 원칙에 따라 행동해야 
하고 또한 행동한다고 믿었다. 그런 점에서 그도 다른 계몽주의 철학자들과 같이 
보편적 이성의 승리를 믿었고 근본적으로 낙관적이었다. 이성의 존재와 능력에 대
한 신임이 약해지기 전에는 어떤 종류의 상대주의도 자리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문화상대주의의 맹아는 이미 인본주의적 문화관에서 
찾을 수 있다고
있다. 문화는 실체 혹은 자연의 외적 표현 혹은 이상에 접
근하려는 과정이 아니라 인간의 창조적 활동의 산물로 보았다는 점에서 실체론적 
문화관보다는 문화현상을 다소 자의적인 것으로 본 것이 사실이다. 문화가 ‘인간
에게’ 나타나는 변화가 아니라 ‘인간이’ 주체가 되어 만든다는 점에서 문화는 
이미 어느 정도 인위적이고 가변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할 수 있다. 별 자체가 
움직이기 때문에 별의 위치가 아침, 저녁에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움직였
기 달라진다고 한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은 문화도 인간의 척도에 ?

게 평가될 수 있는 것, 즉 상대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더군다나 칸트는 문화
를 인간의 이기심, 적대심, 명예욕, 소유욕, 지배욕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과정에서
나온 산물이라고 본 점에서 문화를 다소 평가절하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상대주의가 본격적으로 태동된 것은 이데올로기의 시대라 불리우는 19세기
후반부터였다. 이성의 절대성에 대한 도전이 피히테, 니체, 쇼펜하우어, 키에르케
고르, 마르크스, 프로이트 등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성보다 의지,
힘과 이익에 대한 욕망, 성욕 등이 인간의 사고와
결정하며, 보편적이고 논
리적인 계산이 아니라 독특한 개인의 실존적 결단이 더 중요시되어야 한다는 주장
들이 나타나 이제까지 권좌에 앉아 있었던 이성의 권위에 도전장을 던진 것
이다. 
자연과 이성의 상대화는 그 동안 문화가 많이 발달했기 때문이라 할 수도 있다. 
문화란 그 자체가 인간의 자유와 창조성으로 자연에 인위적인 변화를 가하는 것을
함축하는 것이므로 문화가 발달한다는 것은 곧 문화현상이 실체 혹은 자연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따라서 점점 더 인위적이 된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 과정이 계속됨
에 따라 인간은 그
연에 의존하고 자연환경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창조한 문화물에 의존하고 인위적인 환경 속에서 살고 행동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이 심화되고 그 사실이 조금씩 인식됨에 따라 자연과 이성뿐만 아니라 
문화 자체와 문화를 창조하는 인간에 대한 상대주의적인 태도가 태동하기 시작했
다. 서구에서는 19세기에 이르러 인간이 문화를 창조할 뿐 아니라 인간도 문화에 
의하여 결정되고 지배당한다는 사실이 의식되기 시작했다. 즉 소외현상에 대한 인
식이 생겨난 것이다. 헤겔에 의하여 절대정신의 변증법적 자기 완성과정

는 현상으로 도입된 소외개념은 마르크스와 실존주의자들에 의하여 부정적인 의미
를 갖게 되었다. 즉, 인간이 생산한 문화적 현상이 그것을 창조한 인간의 의도와는
독립해서 작용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 의도에 역행하기까지 할 수 있으며, 바로 
그런 것이 우리의 문화적 특징을 이룬다고 본 것이다. 비록 마르크스나 키에르케
고르와는 전혀 다른 정신적 입장에 서 있었고 현대 문화에 대해서 그들만큼 비판적
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던 뒤르켕도 인간이 형성한 사회적 사실에 의하여 인간의 가
치관과 행동구조가 결정된다는 주장을 ?
年? 인간이 자연은 지배했지만 인
간이 만든 사회와 문화는 인간이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는 힘으로 커졌을 뿐 아니
라 인간이 오히려 자신의 산물에 의하여 지배당하는 상황에 이르렀음을 알려 준 것
이다.
물론 헤겔이나 마르크스처럼 문화 그 자체의 발전에도 자연에 못지 않은 법칙이 
지배하고 그 법칙에 의하여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믿는 한 소외현상이 바로 상
대주의를 뜻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런 역사주의(Historicism)는 다만 이론적인 
차원에 남아 있으면서 논리적인 설득력만 행사했을 뿐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에 의
하?
지 않았으며 앞으로 확증될 가능성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만약 문화
에 의하여 인간의 의식이 결정되고 그 문화가 다름 아닌 인간의 자의적인 판단과 
자유로운 창조의 결과로서 거기에 어떤 일관성도 없고 어떤 법칙도 작용하지 않는
다면 상대주의는 불가피하다. 즉, 소외현상은 사실로 인정하면서도 역사주의는 받
아들이지 않을 때 인간의 자의적인 문화활동, 그 활동의 결과인 문화에 의한 인간 
소외, 소외된 인간에 의한 문화활동이 반복됨으로 문화와 인간은 실체, 자연, 이
성의 지배에서 점점 더 멀리 벗어나 완전히 우연적이고 상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과 사상적 환경에서 자연과학의 가치 중립적인 방법을 사회 혹은
문화영역에서도 적용하려는 실증주의가 태동하고 20세기 초반 보아스와 말리놉스키
가 문화인류학 연구에 이를 도입하였다. 특히 비(非)서양 문화들에 대해서 엄격하
게 경험적이고 사실적인 과학적인 연구를 가능하게 위하여 문화 전체에 대한 선입
견, 문화들을 서로 비교하여 평가하는 것을 자제하였다. 그런 태도는 결과적으로 
어느 문화도 다른 문화보다 더 우월하거나 열등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
도록 유도했
遮陸聆퓔?강화하였다. 이런 경향은 1930년대에 특히 미국에서
크게 강화되어 허스코비츠는 서로 다른 문화를 비교 평가하는 것뿐 아니라 인류학
이 연구대상으로 삼는 특정 문화 안에서 실제로 기능하는 가치들에 대해서 언급하
는 것조차도 거부하였다. 허스코비츠가 회장으로 있었던 미국문화인류학회가 국제
연합의 “보편 인권 선언”제정을 강력하게 반대한 것은 문화상대주의에 대한 확신
이 얼마나 강했으며 동시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도 잘 보여 주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역설적인 발전이라 할 수 있다. 실증주의 그 자?
구의 
문화적 배경에서 출현하였고 전형적으로 서구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
고 그 방법론을 문화연구에 적용함으로 서구 문화 우월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
가 생겨나고 문화상대주의가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전통적인 서양 문화에 대
한 서양인들의 실증, 현대 서양 문화의 정신적 배경을 이루었던 기독교의 약화, 그
리고 무엇보다도 과거 식민지 국가들에 가한 압제와 착취에 대한 서양인들의 죄의
식 등이 문화상대주의 확산을 더욱 부채질한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최근 일본, 대
만, 한국 같은 비서양 국가들이 상당?
쩜?소유하게 되고 그들의 고유한 문
화에 대한 자긍심을 높힌 상황도 문화상대주의를 강화하는 데 적지 않은 공헌을 하
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화상대주의는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 모든 상대주의가 그
런 것처럼 문화상대주의도 이론적으로 일관성 있게 정당화하는 데 어려움이 있고 
그것은 단순히 논리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르메르가 양차 세계대전 중간 기간 동안에 상대주의를 주
장하는 문화인류학자들이 “자국 문화에 대해서는 비판적, 낯선 문화에 대해?
응적”인 태도를 취했고 그것은 비서양 사회의 모든 전통적인 것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독단적이고 보수적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은(Lemaire, 1976: 16
4-65) 흥미로운 관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현상은 과거 비서양 문화를 무
시한 것에 대한 죄의식의 자학적인 표현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문화상대주의는 
오히려 서구에서 더 강하게 주장되고 있고 과거 식민지였던 신생국들은 역으로 서
구에서 발생한 민주주의, 자본주의, 합리주의 사상과 제도를 열심히 수용하려고 노
력하고 있는 사실은 또 다른 역설이라 하지 않?
愎? 
그러나 문화상대주의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말할 것도 없이 윤리적 상
대주의다. 어느 시대에든지 상대주의가 나타나면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는 것이 윤
리적 상대주의였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은 바로 궤변론자들의 상대주의가 
가져오는 윤리적 무질서를 비판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으며 칸트도 흄의 철학이 
함축하는 윤리적 상대주의를 걱정하여 『순수이성비판』을 썼다. 
윤리는 인간이 짐승과 공유할 수 있는 자연현상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만 작용하
는 문화현상이며 문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
“?전형적으로 인간
의 문화현상이라면 윤리적 가치는 모든 가치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위
치를 점한다. 그러므로 문화에 대해서 반성하고 특정한 문화를 연구하면서 그 문화
에서 작용하는 윤리적 규범체계를 고려하지 않는 것은 문화의 핵심을 간과하는 것
이나 다름없다. 그런 연구가 전혀 쓸모없다 할 수는 없을지라도 윤리적 요소를 고
려하지 않고도 어떤 문화의 참 모습에 올바르게 접근할 수 있으며 그것을 정확하게
나타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윤리적 규범체계가 문화에서 아무리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하더?
증주의 방법을 채용한 문화인류학이 윤리와 관계해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상대주
의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오늘날 문화인류학이 당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거리가 아
닌가 한다. 
그런데 문제는 문화인류학이 그런 가치 중립적인 접근과 윤리적 상대주의를 얼마
나 일관성 있게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윤리적 상대주의는 특히 서로 다른
문화들이 서로 접촉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윤리적 갈등문제에 대해서 전혀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 한 문화가 창이 없는 단자(monad)와 같이 다른 문화와 전혀 아무
관계를 맺지 않고 독존할 수 ?
遮陸聆풔?그렇게 심각한 어려움을 야기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다른 문화들이 서로 만나고 교류한다면 어느 한 문
화의 윤리적 규범이 옳으며 우월한가에 대한 판단은 거의 불가피할 뿐 아니라 오히
려 그런 판단을 해 주는 것이 문화연구자의 한 중요한 의무라 할 수도 있다. 오늘
날처럼 정보통신과 교통기술이 발달되어 모든 사회가 매우 빈번하게 접촉하고 교류
하는 상황에서는 문화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 윤리적 규범들이 서로 갈등을 일으
키지 않을 수 없고, 많은 경우에 그 갈등들은 매우 심각할 수 있다. 식인종에게 ?
倂?선교사를 구출하기 위하여 식인종에게 위해를 가해야 하는지, 인도 남자와
결혼한 외국인 부인이 인도의 풍속대로 남편이 죽었다 하여 산 채로 화장당하는 것
을 거부해야 하는지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다른 민족들은 독일 문
화가 유대인 박해를 정당화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거나, 일본 문화에 침략성이 내재
해 있다 해도 이를 전혀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1940년대의 미국문화
인류학회가 국제연합의 보편적 인권선언을 반대하는 것이 책임 있는 태도였다고 주
장할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상대?
누구보다도 더 강력하게 주장하
는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 리욧타르나 데리다 등이 아우츠비치에서의 유대인 살육
에 대해서는 지극히 애매한 태도를 취한 것은 윤리적 상대주의가 가지고 있는 어려
움을 잘 대변하고 있다 할 수 있다. 
국제연합의 보편적 인권선언에 모든 사람이 동의하고, 인도의 과부 화장과 아우츠
비치 유대인 살육을 모든 사람이 심판한다면 문화적 상대주의는 수정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어떤 특정한 문화가 모든 면에서 다른 문화보다 더 우월하거나 열등하
다고 평가할 수 없을지라도, 각 문화가 가지고 있는 윤리
들은 보편적인 기
준에 의하여 평가되지 않을 수 없다. 기본인권과 평등한 자유가 보장되는 문화와 
그렇지 않은 문화, 인간이 다른 인간에 의하여 고통을 많이 당하는 문화와 적게 
당하는 문화, 자연환경을 보호하는 문화와 파괴하는 문화를 구별하지 않을 수 없
다. 비록 다른 분야에서는 보편적인 기준을 인정하지 않고 상대주의적인 입장을 취
할 수 있을런지 모르나 적어도 윤리적 행위에 있어서는 보편적 가치 기준을 전제하
고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보편적인 윤리적 가치를 어떤 특정한 형이상학적 전제에서 정당화하지 않는

라도 적어도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놀이의 규칙’ 정도로라도 인정
해야 할 것이다. 합의된 경기 규칙 없이는 두 팀의 선수가 농구 경기를 같이할 수 
없는 것처럼 오늘날 모든 사람이 원칙적으로 동의하는 행동 규칙이 없이는 전 인
류가 하나의 지구촌에서 같이 살고 활동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인권을 잘 보장하지만 심미적으로 후진된 문화가 있을 수 있고 환경은 잘 보
호하지만 약육강식의 무질서가 지배하는 문화가 논리적으로는 가능하다. 그러므로 
어느 한 문화 전체를 다른 문화 전체와 비교하여 그 하나가 다른
?더 우월
하거나 열등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어렵고 공정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한 문화의 어떤 한 요소를 그 문화의 다른 요소들과 완전히 분리해서 고려될 
수는 없다. 문화도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그 구성 요소들이 긴밀하게 연결되고 상
호작용을 계속하여 유기적인 통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화의 여
러 요소들이 윤리적 가치와 행위에 직접 혹은 간접으로 영향을 미치고 그것들과 관
계를 맺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윤리적으로 매우 열등한 문화가 다른 면에 있어
서는 아주 훌륭하다 하기는 그렇?
않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문화의 어떤 요
소가 윤리적 가치와 관계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것에 대한 보편적인 기준이 더 
확실하게 요구되고 그 기준에 의한 분명한 판단이 더 중요해질 것이고, 그 관계가
멀면 멀수록 상대적인 것으로 두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할 수 있다. 예를 들
어 정치제도는 미적인 가치보다 윤리적 가치와 더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으므로 미
적인 가치보다는 훨씬 더 보편적인 기준에 의하여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
므로 모든 문화의 예술작품이 동일한 미적 기준에 의하여 평가될 필요는 없을지 모
?
╂?혹은 정치적 이해가 문제되는 인간관계는 모든 사회에서 동일한 윤리
적 규범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한국인의 심미적 가치에 대해서 외국인이
그 우열을 논하는 것은 외람되나 ‘한국적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비판할
자격이 있다. 
상대주의는 통시적으로 공존하는 여러 문화의 상대적 가치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종시적으로 과거의 문화와 현대문화를 비교하면서도 주장될 수 있다. 이것은 다음
에 살펴볼 문화의 발전문제, 즉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문화가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과 관계되는 ?
과연 현대의 문화가 과거의 것보다 더
훌륭하거나 열등하다고 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초역사적인 근거와 기준이 있는가? 
만약 그런 것이 제시될 수 없다면 문화상대주의는 불가피한 것이다. 
이런 역사적 상대주의도 윤리적 규범과 관계해서 많이 논의된다. 부모를 순종하는
것과 같이 과거에 절대적이라고 주장되었던 도덕적 규범이 지금은 점점 무시되고 
있고 평등과 같이 오늘은 거의 자명하고 보편적인 것으로 수용되는 도덕적 원칙들
이 과거에는 거의 무시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상대주의가 반드시 윤리적 상대주?
灼求?것으로 이해
되어서는 안 된다. 윤리적 실재론자들이 주장하는 바 “윤리적 발견”(ethical dis-
coveries)(Gilbert, 1990: 29 이하 참조) 같은 현상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주목
할 가치가 있다. 비록 사람들의 도덕성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반드시 더 좋아진다
고 할 수는 없더라도 인류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과거에 미쳐 몰랐거나 역사
적 상황 때문에 억눌려 있었던 윤리적 가치들이 새로 발견되거나 들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노예제도, 남녀차별, 어린이 학대 같은 과거의 폐습들이 오늘날 비판되고 
고쳐지고 있는 것은
 예다. 과거에는 노예제도나 남녀차별이 정당화되었으
나 지금 비판되고 있다는 사실은 윤리적 상대주의의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윤리적 
가치의 보편성을 증거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 번 발견되고 수용된 보편적, 
윤리적 규범은 다시 무시되기 어렵다. 자연법 사상가들이 시사하는 것처럼 한 번 
발견된 윤리적 가치는 영원히 무시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는 없으나, 예를 들어 
앞으로 다시 노예제도가 등장하고 남녀차별이 정당화될 가능성은 그렇게 크지 않
다. 문화가 타락하여 그런 규범들을 충실히 지키지 않을 가능성은 배제할 ?

나, 그런 규범 자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윤리적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윤리와 예의를 구별하지 않은 경향
이 있다. 어원적으로는 영어의 ethics, morality가 각각 그리스어 , 혹은 라틴어 
mores에서 유래했고 그것들은 독일어의 Sitten과 마찬가지로 풍속, 관습을 뜻하는
것을 보아도 윤리가 예의와 마찬가지로 그 사회의 관습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취급
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인 과정을 통하여 서로 다른 용어를 사용할
만큼 인류는 윤리와 예의를 구별하여 왔고, 어느 정도 구별할 이유와
 충분
히 있다. 물론 양자 사이의 분명한 경계선을 긋기는 어려우나 일반적으로 말해서 
윤리는 보편화 가능성의 원칙 혹은 황금률이 동서고금에 다 존재하고 상통할 수 
있듯 어느 사회, 어느 시대에도 보편적인 행동규범을 뜻하고 예의는 특정한 시대,
특정한 사회에서만 통용되는 행동규범을 뜻한다 할 수 있다. 이런 구별은 순환정의
의 오류에 빠질 수 있으나, 양자의 차이는 단순히 보편성의 정도에만 국한되어 있
지 않다. 예의는 주로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한 행동규범인 반면
에 윤리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이?
 심지어는 생물학적 생존과 고통의 
위협처럼 심각한 문제에 있어서 갈등을 피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어른에
게 인사하지 않는 것은 무례하지만 비도덕적이라 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은 실례가 아니라 비도덕적이다. 즉, 어른에게 인사해야 하는 것은 시대와 장소
에 따라 가변적일 수 있으나 다른 사람에게 정직해야 하는 것은 보편적인 요청이다

필연적인 법칙에 의하여 생성 변화하는 자연과는 달리 문화는 자유의지와 자의적
인 창조성으로 생산한 것이므로 상대적이라 주장할 수 있다. 특히 윤리적 행위는 
자유의
┎求?것이므로 필연적인 자연과는 전혀 무관하고 따라서 전혀 상
대적인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런 상대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칸트는 자연
현상에 법칙을 제공하는 이론적 이성과는 다르나 역시 보편적인 실천이성을 상정하
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 그런 이성이 인정되지 않게 된 것은 윤리적 상대주의가
일반화된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적 산물이라도 인간이 육체를 가지고 있고 모든 인간에게 공통
적인 생물학적 본능이 있다는 사실과 여러 가지 정신적, 사회적 요소들이 그와 밀
접하게 관계되
는 사실 때문에 인간에게는 자연의 힘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
거나 자연의 법칙에 역행할 수 없는 요소들이 얼마든지 있다. 생존본능, 고통을 피
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본능 등은 생물학적 차원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것은 
문화창조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윤리적 규범에 중요한 바탕을 제공한다.1) 비록 
칸트가 제시하는 실천이성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인간에게 보편적인 생물학적 측
면들만으로 윤리적 상대주의는 상당할 정도로 극복될 수 있다. 윤리적 상대주의가 
극복된다면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문화상대주의도 어느 정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2) 문화발전의 문제

문화상대주의 못지않게 문화의 가치에 대한 논의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
은 문화가 발전하는가 하는 문제다. 물론 발전의 문제는 가치판단에 국한되지 않는
다. 비록 바람직한 가치와 이상적인 문화에 대해서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표준 혹은
목적이 있다 하더라도, 그 기준 혹은 목적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류 문화 전체 
혹은 어떤 특정한 문화가 실제로 발전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또 다른 질문으로 경
험적인 증거에 의하여 객관적으로 증명되어야 하는 사실의 문제다. 그러므로
?┫?문화상대주의보다 더 복잡하고 추상적인 역사철학의 문제이기도 하다.
실체론적 문화관에서는 진정한 의미로서의 문화발전이란 있을 수 없었다. 플라톤
에게나 원시 유교에서 황금시대는 과거에 있었고,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율곡(栗谷
)이 표현한 대로 치세(治世)에서 난세(亂世)로 타락하는 것을 뜻했다. 문화 그 자
체가 부정적인 것이므로 긍정적인 의미로서의 문화발전이란 있을 수 없다. 다만 실
체 혹은 본질적인 것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을 통하여 본질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
다고 생각되는 물질적인 것 혹은 육체적인 것으로?
신적인 것을 어느 정도 해
방시킬 수 있다는 데서 문화활동의 상대적 긍정성을 찾을 수 있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발전’은 인본주의적 문화관에서 비로소 인정되었다. 유기적
자연관은 약화되고 기계론적 자연관이 그 자리에 들어서게 되며 자연의 순환에 착
안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발전을 부정하는 순환론적 역사관은 후퇴하고 발
전을 인정하는 선적(linear) 역사관이 보편화되었다. 발전을 인정하는 문화는 아무
래도 발전을 인정하지 않는 문화에 비하여 더 빨리 그리고 많이 발전할 수밖에 없
다. 과거와 자연의 구속으로부
된 현대문화는 발전을 인정하지 않던 과거에 
비해서 훨씬 빠른 변화를 이룩하였다. 그 발전이 과연 바람직한 것이었는가 하는 
것은 논란거리일 수 있지만, 적어도 서양에서는 19세기 말까지 발전은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되었고 그 때의 진보(progress)개념을 대체한 현대의 발전(developmen-
t)개념도 그 긍정적인 함의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다.
발전(development)은 진보(progress)와는 다소 다르게 이해된다. 진보는 사회 혹
은 문화가 낙관적으로 변하는 것을 뜻하고 그것은 확실한 평가의 기준과 이상적인 
목적이 있음을 전제로 한?
나 발전은 확실한 평가의 기준의 존재나 낙관주
의를 반드시 함축하지 않은 것으로, 가치판단에 있어서는 다소 애매한 변화라 할 
수 있다. 
어원적으로는 발전은 진화론적 문화관이 함축하는 바와 같이 생물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즉 잠재적으로 주어진 가능성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현실적인 것으
로 나타나고 성숙해 가는 것을 뜻한다(Gusdorf, 1972: 39). 그런데도 불구하고 “?
像禍굼繭?말에는 16세기로부터 19세기까지 서구를 지배했던 ‘진보’2) 개념이 가
지고 있던 낙관적인 함의가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았다.3) 국제연합은
釉?
“발전연대”(decade of development)로 정하고 세계 빈국들의 경제발전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발전이란 말은 주로 경제적인 성장을 뜻하는 것으로 알려지게 
되고, 가난한 나라의 경제적인 성장은 긍정적인 것으로 수용되기 때문에 낙관적인
변화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남미에서는 1960-70년대에 일련의 종속이론가들이 
나타나 발전이란 경제적으로 강한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들의 자본가들과 결탁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여 그것을 ‘발전주의’(desarrollis-
mo)란 이름으로 비판한 일은 있었다. ?
 불구하고 발전은 일반적으로 바람직
한 변화라는 뜻으로 이해되고 있다.
오늘날 진보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발전이라는 개념이 널리 통용되는 데는 문화를 
포함한 사회의 여러 가지 변화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지 않으려는 현대인의 조
심스런 태도가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과학과 과학기술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
하고 삶의 방식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편리해졌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조심스런 태
도가 생겨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 핵무기나 화학무기의 개
발, 소외현상, 환경오염 등 몇 가지 치명적인 사건과
이 사람들의 생존과 건
전한 삶을 위협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들은 모두 사
람들이 만들어 낸 것들이고 따라서 문화적 산물들이다.
이런 현상은 16세기 이전까지 사람들이 문화가 진보한다는 생각을 갖지 못한 이유
와 비슷한 요소가 없지 않다. 과거에도 비록 느리기는 했지만 농업이나 예술 등 여
러 분야에서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고 많은 개선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
구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문화에 대해서 비관적인 태도를 가지도록 했던 가장 중요
한 이유는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이 도덕적으?
求?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
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요즘의 젊은 것들’에 대한 탄식은 기성세대에게 공통
점이었으며, 그렇게 판단할 근거는 어느 사회에서든지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인상은 플라톤으로부터 꾸준히 견지되어 온 역사철학적 관점, 즉 모든 변화는 곧 
타락을 의미한다는 사상을 계속 확인해 주었고(Bury, 1987: 28-29, 32 참조), 그 
때문에 문화적 비관주의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현대인이 고대 사회를 지배했던 극단적인 문화적 비관주의로는 돌아가지 않으면서
도 16
터 19세기까지 서양 사상을 지배했던 문화적 낙관주의에 대해서는 비
판적인 다소 애매한 입장을 취하는 것도 역시 거의 모든 영역에서의 눈부신 발전에
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도덕성에 과연 어떤 개선이 있었으며 문화의 다른 영역들의 
발전이 도덕성 제고에 어떤 공헌을 했는지에 대해서 확신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라
고 할 수 있다.
윤리적인 측면을 제외하면 문화가 어떤 형태로든 더 다양해지고 풍부해지며 사람
들의 선택 가능성이 커진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경험적 사실
일 뿐 아니라 동시에 논리적이기도 하다.
궁극적으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인간의식의 공동 생산물이다. 그런데 인간의 의식은 개인의 심리적 기억장치와 함
께 문자의 기록, 사회제도, 예술작품, 노동생산품 등 사회적 기억장치를 통하여 계
속 축적될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전산기, 녹음, 녹화 등 의식의 내용을 인간의 두
뇌 외부에 직접적으로 기억시킬 수 있는 수단들이 장족적으로 발전하여 의식의 축
적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쉬워지고, 많아지며, 다양해졌다. 따라서 후대에 사는 
사람은 그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가졌던 의식의 내용을 쉽게 알 수 있으며 그 
바탕 위에
것을 첨가하거나 그것들을 변형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후대인
은 항상 선대인보다 더 많고 풍부한 문화물을 소유하고 이용할 수 있으며 더 큰 선
택의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우리가 고대 성현들보다 훨씬 더 유식하다.”고 하
여 17세기 사람들을 놀라게 한 베이컨의 말은 사실 전혀 놀라운 주장이 아닐 뿐 아
니라 논리적인 사실이다. 개인과 사회에 정신활동의 내용이 기억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일진대, 이런 결론은 당연하다. 플라톤과 공자가 위대한 사상가들이었고 창조
적인 인물들이었지만, 그들이 가졌던 지식의 내용은 오늘 대학?
보다 훨씬 더
초라했을 것이다. 이용할 수 있는 의식의 산물에 관한 한 후대인은 항상 선대인보
다 항상 유리한 입장에 있다. 
그런 상황은 구태여 지식이나 경험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오늘날 대학생은 플
라톤이나 공자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을 정도로 큰 물리적인 힘을 행사할 수 있
고 자연의 구속으로부터 훨씬 더 자유로울 수 있다. 시간이 흐르고 인간의 문화적 
창조활동이 계속된다는 것은 곧 더 큰 물리적 힘이 축적되고 자연의 변덕과 위협
으로부터 더 많이 해방된다는 것을 뜻한다. 비록 개별 문화간에 정도의 차이는 있

것은 경험적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물리적 힘과 자유의 
증대는 앞에 지적한 의식활동의 결과가 계속 축적된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연결되
어 있으므로 논리적으로도 부정할 수 없다. 
이와 같이 다른 모든 분야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간이 선택할 가능성이 커지
고, 경험이 더 많이 축적되며, 더 큰 힘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 반면에 사람들의 
도덕성은 그와 비례해서 성장하는 것 같지는 않다. 물론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성
차별이 줄어지는 등 전반적으로 기본인권이 과거보다 더 존중되고 평등정신이 확산
되고 있는
실이나 동시에 사람들이 점점 더 이기적이 되고 살인과 강도, 강
간등의 강력 범죄들이 늘어나는 등 문화의 변화를 비관적으로 볼 근거도 얼마든지 
많이 나타나고 있다. 
거기에다 인간이 행사할 수 있는 물리적 힘이 커짐에 따라 비도덕적 행위가 가져 
올 수 있는 해악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커지게 되었다는 것도 심각한 문제가 아
닐 수 없다. 핵전쟁이 가져올 수 있는 결과는 창과 활로 전쟁하는 경우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인간이 그 동안 축적해 놓은 물리적인 힘은 너무 크기 때문에 한두 
사람이 저지르는 단 한 번의 실수로도
 인류가 성취해 놓은 모든 것과 인
류의 생존 그 자체를 끝내 버릴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증가하는 물리적 힘에
비례하여 인간의 책임의식도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는 없고(반 퍼슨, 1994: 237), 
그 힘을 항상 건설적으로만 사용하고 결코 파괴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리라는 보장
은 전혀 없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많은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이 많이 이루어지
는데도 불구하고 현대 문화 전체에 대해서는 비관주의적인 시각이 자라고 있는 것
이다. 최근에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환경오염도 자연이 가져온 재앙이 아니라 인
간의 문?
 결과라는 사실은 문화적 비관주의를 더욱 강화해 주고 있다.
자연은 어디까지나 사실의 영역이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자연의 
영역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 끼치는 영향력은 문화활동이 진행됨에 따라 점점 더
약해지고 있다. 처음에 인간의 생존을 보장해 주고 삶의 질을 결정하며 문화창조 
활동의 바탕과 자원이 되었던 자연은 이제 오히려 인간에 의하여 지배당하고 착취
당하다가 마침내 무력하게 되어 인간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에 
와서는 인간의 문화활동도 자연의 변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 ?
이용하
며 자연에 변형을 가하는 창조적(creative) 활동이 아니라 오히려 그 동안의 문화
활동이 만들어 놓은 찌꺼기와 소외로부터 다시 인간을 해방시키는 치유적(curative
) 활동으로 그 중심이 옮겨지고 있다. 자연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인간의 활동은 과
학적으로 설명되기보다는 윤리적으로 선택되고 정당화되어야 하는 성질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문화가 발전하는가, 않는가, 나아가서 인류가 생물학적인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이제 하나의 객관적 사실로 규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기보다 인류가 공동?
져야 할 선택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즉, 사실
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의 문제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적 문제란 것이다(반 
퍼슨, 1994: 229 참조). 그래서 앞으로 만약 인류의 종말이 온다면 이는 자연의 
재앙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윤리적 타락에 의한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윤리적 상대주의는 그 자체가 윤리적으로 무책임한 태도라 할 수 있다. 
과거 어느 때보다 인류의 윤리적 책임이 더 중요한 시점에서 어떤 윤리적 가치나 
규범도 절대적인 것으로 수용하지 않는 태도는 이제까지 창조해 놓은 문화의 보존
뿐 아니라 인?
건隙?생존에까지 큰 위험을 가져올 수 있다. 윤리와 무관한 
분야에서는 어떤 상대주의도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적어도 윤리와 그것과 직접 
관련되어 있는 분야에서는 상대주의가 하루 빨리 극복되어야 할 것이요, 생존을 
위한 인류 공동의 문화전략이 수립되고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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