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I부 문화와 철학
제 1장 대중 문화의 철학적 이해
개관
대중 문화는 대부분 저질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끈질기게 따라다니고 있다. 이런 이미지는 정당할까? 문화의 역사에서 20세기는 처음으로 다수의 대중이 사람답게 문화 생활을 누려 본 시대이며, 이를 가능하게 만든 것이 영화와 대중음악 등 대중 문화다. 그러나 다수가 누리는 문화라는 사실만으로 대중 문화의 부정적 이미지를 걷어 낼 수 이을까? 도대체 대중 문화는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현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대중 문화는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 대중 문화를 보급하는 라디오, TV 등 대중 매체는 대중의 문화 향유, 사회 갈등의 조절, 민주적 정치 질서의 유지, 지식 수준의 격차 해소 등 순기능의 측면과, 대중 취미의 획일화, 사회 갈등의 악화, 대중의 탈정치화, 일탈 행동의 조장 등 역기능의 측면을 항께 가치고 있다. 대중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문화 산업은 20세기 중반 자본주의의 식민지 지배가 한계에 부딪히자 문화를 상품화함으로써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려는 동인에서 출현했다. 문화 산업은 영화와 대중 음악처럼 국경을 넘어 전세계로 팔릴 수 있는 문화 상품을 생산하기 때문에 과거 고급 문화 편향, 문화 엘리트주의, 문화 민족주의 등을 극복하고 문화의 다원화와 민주화에 이바지할 수 있다. 그러나 문화 산업의 주체는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므로 대중은 비록 문화 상품을 소비할 기회는 많이 얻지만 문화 창조자가 아니라 수동적, 쾌락적 인간으로 조작될 가능성도 크다.
현대 소비 사회에서 대중 문화를 통해 충족하는 욕망은 사용 가치가 아니라 기호 가치에 대한 욕망이다. 기호 가치란 지위와 심리의 차이를 표시하는 수단이다. 대중 문화는 기호로 이런 욕망을 채워 주지만, 기호가 실상이 아니라 알리바이라면 대중의 욕망 충족은 고된 삶을 잠시 잊는 마취제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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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대중 음악은 대중의 일상적 문화 생활이고 대중의 억눌린 삶의 조건을 반영하여 만들어지므로 기성 질서의 억압에 저항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대중 음악은 이윤을 추구하는 문화 산업의 일부이므로 젊은 세대의 여가와 용돈을 상업적으로 노리는 측면도 있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의 취미를 형성하는 것은 예술미가 아니라 상품미다. 상품미는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체험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상품을 매력 있게 만들어 판매를 촉진하는 수단이다. 대중 음악 특히 록음악은 기성 질서에 저항하는 측면이 있지만, 대중 문화를 통한 저항이 자본의 틀 안에서 놀 수밖에 없다면 어느 새 시장에서 상품으로 둔갑하여 자본의 이윤추구에 봉사하는 도구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영화와 대중 음악 등 대중 문화는 환각 체험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각성 체험이 주로 이성과 의식에 의존한다면, 환각 체험은 감성과 무의식에 의존한다. 대중 문화의 부정적 측면은 자본의 이성이 대중의 감성을 조종하고 통제하는데서 성립한다 따라서 대중 문화의 부정적 측면을 극복하는 길은 대중이 자신의 감성을 자신의 이성에 맞 세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성을 자본의 이성에 맞세우는 데서 찾아야 한다. 대중의 비판적 이성을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1. 기본 강의 대중 매체, 문화 산업 그리고 소비 사회
1. 대중 문화는 저질일까?
문화의 역사에서 20세기는 대중 문화의 시대다. 18세기까지 시, 연극, 그림, 조각, 음악 등을 감상하는 기회는 귀족이 독점했고, 19세기에는 자본가가 동참했으나, 문화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소수였다. 그러나 20세기에는 다수의 대중이 처음으로 사람답게 문화 생활을 맛볼 수 있었고 이를 가능하게 만든 대중 문화의 꽃은 영화와 대중 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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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들어 대중 문화가 문화의 중심이 된 데는 자본주의의 변신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식민지 경영을 통해 외부 시장을 확보하던 제국주의 팽창이 한계에 달하자 20세기 자본주의는 문화를 상업화함으로써 새로운 시장을 창출했다. 이 때문에 그 동안 문화에서 소외되어 있던 일반 대중이 문화 시장의 새로운 소비자로 등장했다.
대중 문화는 말 그대로 대중이 누리는 문화를 뜻하지만, 이 문화를 제작하고 보급하는 매체의 특성으로 규정할 수도 있다. 대중 문화를 소통하는 매체는 라디오와 TV가 대표하는 전파 매체 또는 대중 매체다. 19세기까지 가장 중요한 의사 소통 매체는 책, 신문 등 인쇄 매체였다. 요즘에는 신문도 하루에 수십만, 수백만 부를 찍을 정도로 다수에게 보급되는 대중 매체가 되었지만, 과거에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적었고 제작비도 비쌌기 때문에 소수만이 접할 수 있었다.
21세기에는 대중 매체를 넘어 인터넷, 컴퓨터 통신, 위성 방송 등 새 매체가 정보의 소통을 주도할 것이다. 새 매체는 대중 매체와 다른 여러 가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소수의 제작자가 정보를 생산하여 다수의 소비자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대중 매체와 달리, 새 매체는 누구나 정보를 소비하면서 동시에 생산할 수 있고 정보 제공자가 정보 수용자의 반응을 수시로 받을 수 있다. 21세기에는 이런 새 매체를 이용하는 사이버 문화가 대중 문화를 대신할 것이다.
그러나 사이버 문화도 다수의 사람이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는 대중 문화의 특성을 이어받는다. 더욱이 대중 문화와 사이버 문화는 또 하나의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영화와 대중 음악과 사이버 문화는 모두 환각 체험을 불러일으킨다. 영화를 보며 주인공에게 동화하고 대중 음악 스타에게 열광하며 컴퓨터 오락에 빠져 배고픈 줄 모르는 것은 일종의 환각체험이다. 따라서 대중 문화의 특성과 영향을 살펴보는 일은 사이버 문화의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대중 문화는 대부분 저질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끈질기게 따라다니고 있다. 요즘에는 젊은 세대가 프로듀서, 영화 감독, 가수뿐 아니라 심지어 엑스트라나 백댄서까지 희망사항으로 첫 손가락에 꼽을 만큼 대중 문화의 위상이 높아졌다. 그러나 젊은 세대조차 이런 희망을 끝까지 고집해도 좋은지 한번쯤 고민할 정도로, 대중 문화의 부정적 이미지를 마음 속에서 말끔히 지우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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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문화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정당할까? 대중 문화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다수가 누리는 문화라는 점에서 보면 긍정적 요소가 있다. 그러나 다수가 누리는 문화라는 사실만으로 대중 문화의 부정적 이미지를 걷어 낼 수 있을까?
대중 문화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대중 음악은 고전 음악에 비해 형식이 아주 단조롭다. 고전 음악은 형식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을 통해 예술적 가치를 추구하지만, 대중 음악은 단조로운 형식으로 청중의 반응에 민감하게 적응하면서 오락적 가치를 추구한다.
그러나 대중 음악이 오락적 가치를 추구한다고 해서 곧 저질이라고 할 수도 없다. 고전 음악은 머리로 감상하고 대중 음악 특히 록 음악은 몸으로 느껴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머리로 감상하든 몸으로 느끼든 음악은 듣는 이의 감정에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면 쓸모가 없다. 대중 음악이 아무리 단조롭더라도 대중의 감정에 호소력이 없으면 인기를 얻을 수 없듯이 고전 음악도 현대 청중의 정서적 반응을 얻지 못하면 소수 엘리트의 전유물로 머물 수밖에 없다. 대중 음악이 저질이라는 판단은 소수의 고급 감정을 기준으로 다수의 감정을 독단적으로 평가하고 자신의 배타적 권리를 정당화하는 것일 수도 있다. 도대체 대중 문화는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현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 물음에 대답하려면 우선 대중 문화를 보급하는 대중 매체의 특성과 영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 대중 문화는 산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문화산업의 성격도 평가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대중 문화 수용자의 욕망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현대 소비 사회에서 욕망의 생산과 소비 메커니즘도 분석할 필요가 있다.
2. 대중 문화의 두 얼굴
2.1 대중 매체의 순기능과 역기능
사람들 사이의 의사 소통은 직접 얼굴을 맞대고 이루어질 수도 있고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직접적 의사 소통은 얼굴을 맞대는 그때 그곳이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있다. 인류는 직접적 의사 소통의 이런 제약을 극복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 먼 미래에 있는 사람과도 교류하기 위해 간접적 의사 소통 수단을 꾸준히 개발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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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 이전에 간접적 의사 소통의 가장 중요한 수단은 문자였다. 문자는 말에 비해 시간 면에서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고 공간 면에서 멀리 운반할 수 있다. 더욱이 인쇄술이 발달하자 문자를 보존하고 운반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은 크게 늘어났다. 책, 신문과 같은 인쇄 매체의 발달은 널리 분산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폭넓은 간접적 의사 소통의 길을 열었다.
현대 사회에서는 갈수록 간접적 의사 소통이 직접적 의사 소통을 대신하고 있다. 간접적 의사 소통은 언제나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술 매체가 필요하다. 20세기에는 과학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책, 신문, 잡지 등 인쇄 매체뿐 아니라 라디오, TV 등 전파 매체도 등장하여 급속히 발달했다. 현대 사회의 간접적 의사 소통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훌쩍 뛰어넘어 수많은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대중 매체를 통해 이루어진다.
대중 매체가 현대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개인, 가정, 학교, 직장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전체의 문화, 정치, 경제, 교육, 의료 환경 등에 이르기까지 폭이 매우 넓다. 전체적으로 대중 매체의 영향은 두 얼굴, 즉 순기능의 측면과 역기능의 측면을 가치고 있다.
대중 매체의 영향은 무엇보다 문화면에서 잘 드러난다. 대중 매체가 널리 보급되자 특별한 계층만 누리던 문화를 대중이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현대인은 누구나 라디오, TV등 대중 매체를 통해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과거에 비해 정보와 지식의 계층간 격차가 줄었다. 이는 문화를 수용할 기회를 균등하게 보장한다는 면에서 민주적 발전이다.
그러나 대중 매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똑같은 것이기 때문에 대중 매체의 보급은 현대인의 개성과 취미를 획일적으로 조정하고 통제할 가능성도 낳았다. 이런 맥락에서 대중 매체가 사람들의 창의성을 북돋우고 문화 능력을 기를 수 있는지를 의심하는 목소리도 높다.
대중 매체는 사회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현재 사회는 사람들의 이해 관계와 견해가 다양한 사회이므로 언제나 서로 다른 이해 관계와 견해 사이에 갈등이 있게 마련이다. 신문, 라디오, TV 등 대중 매체는 서로 갈등하는 이해 관계와 견해를 정확하게 보도하고 갈등 원인을 분석하여 중간자의 입장에서 사회 갈등을 조절할 수 있다.
그러나 대중 매체는 특정 집단의 이해 관계만을 대변하는 도구로 전락할 수도 있다. 특히 대중 매체가 소유주의 이윤만을 고려하면 건전하지 않은 문화 상품을 대중에게 공급하기 쉽고, 특정 정치 집단의 권력만을 고려하면 갈등을 조절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하는 데 한몫 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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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서 대중 매체는 중요한 정치 기능도 수행한다. 대중 매체는 정부의 정책, 여러 정파의 정견, 대중의 여론을 보도함으로써 민주적 정치 질서를 확립하고 유지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할 수 있다. 대중 매체는 정치 사안에 관해 공정하게 보도하고 정치 공론의 장을 마련함으로써 대중의 건전한 비판의식을 창출하고 관료제의 병폐를 치유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다.
그러나 거꾸로 대중 매체는 정부의 정책을 일방적으로 홍보하고 특정 정파의 견해만을 대변하고 대중의 여론을 보도함으로써 민주적 정치 질서를 왜곡할 수도 있다. 또 대중 매체는 대중의 눈길을 오락, 스포츠 등에만 끌어들여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조장할 수 있다.
교양 또는 교육은 대중 매체의 중요한 기능들 가운데 하나다. 특히 청소년에게 대중 매체는 제이의 학교 역할을 한다. 이런 맥락에서 대중 매체는 다양한 교양 프로그램을 통해 현대인의 교양 수준을 끌어올리고 청소년의 의사 결정과 행동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끄는 교사가 될 수 있다.
대중 매체는 교양 외에 오락을 제공하는 기능도 있다. 예를 들어 TV방송이 생산하고 공급하는 드라마, 코미디, 쇼 등은 입시에 찌든 청소년과 직장에서 힘들게 일하고 돌아온 현대인이 스트레스를 풀고 여가를 즐기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대중 매체가 제공하는 오락이 성, 폭력 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대중 매체는 건전한 여가 생활을 누리는 데 역행하고 오히려 일탈 행동을 가르치는 교사가 될 수도 있다.
대중 매체는 그 밖에도 의료, 복지, 환경, 교통 등과 관련한 정보를 빠르고 폭넓게 제공하여 이 분야에서 갈수록 커지고 있는 현대인의 수요를 충족할 수 있다.
대중 매체는 대중의 문화 향유, 사회 갈등의 조절, 민주적 정치 질서의 유지, 지식 수준의 격차 해소 등 순기능의 측면과, 대중 취미의 획일화, 사회 갈등의 악화, 대중의 탈정치화, 일탈 행동의 조장 등 역기능의 측면을 함께 가지고 있다.
대중 매체가 역기능을 줄이고 순기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대중 문화를 수용하는 사람들이 대중 매체를 감시할 필요가 있다. 공급은 수요를 따르기 마련이다. 설사 대중 매체의 공급자들이 왜곡된 문화를 제공하더라도 수용자들이 건전한 비판 의식으로 거부하면 그 공급자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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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문화 산업에 대한 찬반론
현대 대중 문화의 또 한 가지 중요한 특성은 경제적으로 산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이다. 대중 문화는 더 이상 순수한 예술과 창조를 고집하지 않고 이윤과 결합하여 사고 팔리는 상품이 되었다.
대중 문화가 저질이라는 견해의 뿌리도 대개 대중 문화가 상품화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데 있다. 문화가 상품화하면 마치 인스턴트 식품처럼 깊은 맛을 낼 수 없기 때문에 질이 낮아지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대중 문화가 저질이라는 판단 밑에는 사회의 상층 계급이 배타적 권위를 지키기 위해 자기들이 즐기는 문화를 다수가 즐기는 문화와 구분하고 상품화한 대중 문화를 천박한 문화로 깎아 내리는 측면도 있다. 대중 문화를 상품화하는 문화 산업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문화 산업은 현대 자본주의가 부딪친 한계를 극복하려는 경제적 동인에서 출현했다. 20세기 중반 이후 자본주의는 군사적, 정치적으로 식민지를 지배함으로써 외국 시장을 확보하는 제국주의 팽창이 한계에 이르자 문화를 상품화함으로써 새로운 내부 시장과 외부 시장을 개척하여 이윤을 창출하려 했다.
이런 역사 배경 속에서 출현한 문화 산업은 대량 복제 기술, 음반 기술, 영상 기술 등 과학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그 영역을 급속도로 확대했다. 문화 산업은 현재 책, 신문, 잡지, 음반, 라디오, TV, 영화, 광고 패션뿐 아니라 정보 통신, 관광, 이벤트, 전통 민속 산업까지 넓게 포괄한다.
문화 산업을 지지하는 평론가들은 문화 산업의 융성이 궁극적으로 인류의 문화 발전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문화 산업은 영화와 대중 음악처럼 국가의 경계를 넘어 전세계로 쉽게 팔릴 수 있는 상품을 생산한다. 이런 상품은 전세계의 대중이 다른 문화를 접촉할 기회를 확대함으로써 문화의 다원화와 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다. 문화의 다원화와 민주화는 과거의 고급 문화 편향. 문화 엘리트주의 문화의 국가적, 민족적 폐쇄성 등을 극복하는 데 이바지한다.
한편 문화 산업은 새로운 문화를 끊임없이 창조함으로써 인간의 품성과 행동이 발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문화 산업이 발전하면 새로운 문화 상품과 첨단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인간의 상상력, 추리력 등이 강한 자극을 받는다. 또 이런 상품을 사용하는 소비자도 새로운 욕망과 감수성이 자극 받을 수 있다. 이는 결국 인간의 체험과 지식의 영역을 넓히는 '인간의 확장'에 기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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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서도 21세기는 독창적 지식이 산업의 경쟁력을 결정적으로 추진하는 지식 사회이며 따라서 창의적 인력을 양성하는 일이 큰 과제라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다. 문화 산업은 21세기의 유망산업이다. 영상 산업, 음반 산업, 관광 산업, 디자인 산업, 이벤트 산업 등에서 기획자, 제작자, 매니저, 디자이너, 프로그래머 등은 요즘 젊은 세대가 매우 선호하는 장래 직업이다.
그러나 문화 산업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다. 문화 산업이 비록 대중에게 문화 상품을 소비할 기회를 많이 제공하지만, 대중은 문화 창조자가 아니라 문화 수용자의 수동적 지위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문화 산업의 주체는 대중이 아니라 기업이며, 기업은 궁극적으로 이윤을 노리고 대중의 오락적, 자극적 취향에 영합하거나 대중을 쾌락적 소비적 인간으로 조작하는 상품을 끊임없이 생산한다.
더욱이 문화 산업의 주체인 기업은 국경을 넘어선 초국가 기업이므로 국내에서 대중을 조작할 뿐 아니라 국외에서 문화 후진국의 대중 생활을 지배할 가능성이 크다. 문화 상품은 창의적 아이디어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에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 생산할 수도 있지만, 예를 들어 헐리우드의 블록 버스터처럼 영화 한 편에 수억 달러를 들여 제작하는 것도 적지 않다.
초국가 기업은 이런 문화 상품을 무기로 전세계를 향해 자기 나라 문화 산업을 보호하는 각종 규제를 철폐하고 철저한 자유 경쟁을 보장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 나라 극장들이 우리 영화를 정해진 날만큼 의무적으로 상영해야 하는 스크린 쿼터제는 초국가 기업과 헐리우드 영화사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서방 선진국의 초국가 문화 기업이 주장하는 전지구적 문화 산업의 확장은 문화의 다원화와 민주화라는 명분 아래 민족 고유의 문화를 말살하고 문화 제국주의를 확장할 가능성이 있다.
2.3 소비 사회와 대중 문대
대중 문화의 의의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하려면 대중 문화 속에 숨어 있는 대중의 욕망 구조를 파악해야 한다. 대중 매체나 문화 산업의 관점에서 대중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대중 문화가 대중의 삶의 조건을 반영한다고 보는 면에서 옳다. 그러나 대중 문화와 관련하여 삶의 근본 조건은 대중의 욕망 구조이므로 이 구조를 해명하지 않고서는 대중 문화의 의의를 충분히 드러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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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문화 속에 숨어 있는 대중의 욕망 구조는 무엇일까? 대중 문화를 통해 충족하는 욕망은. 배고픔과 목마름처럼 자연적 욕망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생산한 욕망이다. 따라서 대중의 욕망 구조에 접근하려면 현대 사회에서 욕망의 생산과 소비 메커니즘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대 사회는 과거에 비해 재화의 생산보다 소비가 경제를 추진하는 주요 동력이라는 뜻에서 소비 사회다. 선진국의 경제는 서비스업이 대표하는 3차 산업이 주도하고 농경, 공업 등 1, 2차 산업은 후진국의 상징이 되었다.
소비 사회에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사물들 또는 기호들에 둘러싸여 있고 상품의 사용 가치가 아니라 기호 가치를 소비한다. 사용 가치는 특정한 필요를 충족하는 수단이지만, 기호 가치는 지위나 심리의 차이를 표시하는 수단이다.
예를 들어 1 만 원짜리 운동화든 10 만 원짜리 운동화든 발을 편안하고 안전하게 보호할 필요를 채워 준다는 사용 가치 면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많은 청소년이 굳이 10만 원짜리 운동화를 원하는 까닭은 이 운동화가 또래 집단에 들어갈 수 있고 다른 집단과 지위와 심리의 차이를 표시하는 기호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소비 사회에서 욕망은 특정 사물에 대한 욕망이라기보다 차이에 대한 욕망이다. 소비 사회에서 사람들은 사물의 사용 가치를 소비하지 않는다. 이상적 집단에 소속감을 나타내기 위해서든, 다른 집단과 자기 집단을 구분하기 위해서든, 자기를 남과 구별짓는 기호로서 사물을 소비한다.
소비 사회에서 우리는 기호들의 보호를 받으며 살고 있다. 그러나 일상 생활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온갖 기호는 우리가 현실 세계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보증해 주는 알리바이일 뿐이라고 볼 수도 있다. 알리바이가 없으면 구속을 면할 수 없듯이, 기호들이 없으면 험한 세상의 고문을 견딜 수 없다. 마침내 10만 원짜리 운동화를 신은 청소년이 뛸 듯이 기뻐하는 까닭은 또래 집단의 압력과 고문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리바이는 실상이나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 기호는 다른 기호와 차이를 드러내 주면 그만이고 내용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청소년이 어깨와 다리에 힘을 주면서 10만 원짜리 운동화를 신고 다니더라도 냉정하고 살벌한 세상살이 경쟁은 끝이 없으며 벗어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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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 가치를 소비하는 사회에서 대중 문화는 지위와 심리의 차이에 대한 대중의 욕망을 채워 준다. 그러나 대중 문화가 기호로 이런 욕망을 채워 주고 기호가 실상이 아니라 알리바이일 뿐이라면, 대중의 욕망 충족은 고된 삶을 잠시 잊고 은폐하는 마취제일 수도 있다.
3. 감성과 이성의 종합
대중 문화는 대중 매체 문화 산업, 소비 사회 등 지금까지 살펴본 세 분야에서 모두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함께 지니고 있다. 대중 문화의 두 얼굴은 철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영화와 대중 음악은 환각 체험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영화는 움직임 없는 필름 사진을 연속으로 영사하여 스크린에 움직이는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영화의 이미지는 일종은 환상이며 관객은 영화를 보고 주인공에게 동화하면서 마치 자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깨어 있는 상태에서 꿈을 꾸는 것처럼 환각 체험을 한다. 또 대중 음악 스타의 공연장에서 열광하는 팬도 일종의 환각 상태에 빠져 마치 제대로 신들린 무당처럼 아무리 소리지르고 펄쩍펄쩍 뛰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대중 문화가 불러일으키는 환각 체험은 이성보다 감성, 의식보다 무의식의 영역에 속한다. 많은 청소년은 "느낌대로 산다"는 구호에 매력을 느낀다. 이 말이 느낌만으로 산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이성과 계산보다 느낌과 감정을 중시하면서 살고 싶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이성보다 느낌을 중시하면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불로 소득으로 평생 살 자신과 능력이 없는 사람은 언젠가 돈벌이를 시작해야 한다. 돈벌이는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주는 사람이 받는 사람의 능력을 인정해야 가능하다. 그리고 이 능력은 느낌보다 이성이 우선적인 평가 기준이다. 직장은 사람들 사이에 경쟁이 일어나는 곳이고 이때 경쟁은 설사 비합리적 요소가 많더라도 기본적으로는 이성과 이성 사이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인정받은 이성일수록 더 많은 돈이 따르고, 무시 받은 이성일수록 더 적은 돈이나 실업이 따른다.
남달리 뛰어난 느낌이 경쟁의 수단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느낌은 이성의 뒷받침 없이는 성과를 얻기 힘들다. 예를 들어, 어떤 상품에 대한 멋진 아이디어도 이성에 의한 철저한 조사와 계산과 예측을 바탕으로 떠오르는 것이지 느낌만으로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또 아무리 느낌을 발휘하여 좋은 아이디어를 내놓아도 그 아이디어를 평가하고 채택하는 것은 누군가의 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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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은 오늘날 비록 환경 오염, 경제난, 교통난 등 많은 사회 병폐의 뿌리로 지탄을 받고 있지만, 큰 머리를 가진 것이 다른 동물과 뚜렷한 차이인 사람으로서는 써먹고 싶지 않아도 써먹으면서 살수밖에 없다.
대중 문화가 환각 체험을 불러일으키고 이런 문화에 환호하는 것은 대중이 이성의 사용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를 감성으로 해소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이때 감성은 이성의 억압에 반기를 들고 저항과 해방을 모색한다. 그러나 대중 매체와 문화 산업의 부정적 측면은 이 저항과 해방이 자본이 만들어 놓은 테두리 안에서 자유에 머물 가능성도 강하게 시사한다.
사람은 이성 없이 살 수도 없고 감성 없이 살 수도 없다. 이성과 감성은 한사람 안에서도 자주 부딪치지만 결국 공존의 길을 찾아 내지 않으면 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대중 문화의 부정적 측면은 자본의 이성이 대중의 감성을 조종하고 통제하는 데서 성립한다. 이 조종과 통제를 돌파하는 길은 대중이 자신의 감성을 자신의 이성에 맞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성을 자본의 이성에 맞 세우는 데서 찾아야 한다. 대중 매체와 문화 산업과 대중 문화의 부정적 측면을 극복하는 길은 대중의 비판적 이성을 활성화하는 데 있다.
2. 주제토론 대중음악, 지배인가 저항인가?
다음은 1999년 9월에 열린 H.0.T.(High-five of Teenager)의 콘서트와 관련된 기사다. 대중 스타에 대한 팬들의 애정과 열광이 얼마나 폭발적인지를 잘 보여 주는 예다. 대중 문화가 대중 매체, 문화산업, 소비 사회 등과 결부되어 있다는 관점을 고려하여 젊은 팬들이 대중 스타에게 보내는 열광을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해야 할지, 또 소비 사회 속에서 대중 음악이 현대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지 토론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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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오후, 서울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린 인기 그룹 H.0.T.의 공연 도중 수백 명의 '오빠 부대'가 실신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공연 시작 수시간 전부터 몰려든 10대의 물결은 종일 내린 비에도 불구하고 그칠 줄 몰랐다. 3시간에 걸친 공연에서 4만여 명의 오빠 부대가 분출시킨 열기는 그들의 '우상'에 대한 열광 이상이었다. 마치 밀교의 교주에게 보내는 신도들의 광적인 환희로 비춰질 정도였다. 사건의 발단은 공연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 그룹의 한 멤버가 현란한 율동 중에 빗물에 미끄러지면서 시작됐다.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는 사고였지만 공연에 몰입해 극도의 긴장 상태에 있던 10대들에게 이일은 '대단한 충격'으로 와 닿았다.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졸도해 공연이 끝날 때까지 무려 200여 명이 기절해 병원으로 옮겨졌다. 비교적 증세가 가벼워 현장에서 응급 조치를 받고 귀가한 경우까지 포함하면 1,000여 명의 학생들이 크고 작은 '히스테리성 쇼크'를 일으킨 것이다. 119 구급 대원과 경찰이 대거 출동했지만 끝없이 실려 나오는 학생들을 병원으로 옮기기엔 역부족이었다. 교복 차림의 여학생들이 실신한 채 후송을 기다리며 거리에 널브러져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기성 세대의 시각을 그들은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또 철없는, 그릇된, 잘못된 10 대의 스타 사랑으로 치부해 버리려는 것이죠 이제는 이해해 달라고 말하는 것도 부질없는 것 같아요." 병원까지 실려갔다 막 깨어난 한 여학생의 말이었다. 오빠 부대의 이같은 행태는 기성 세대의 이해 여부를 떠나 '10대들의 문화 양태'로 우리사회에 이미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이주훈 기자, (10 대들의 교주 'H.0.T.'), 한국일보, 1999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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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데올로기와 정체성
2.1 왜 스타에게 열광하는가?
도대체 왜 이토록 열광할까? 미친 짓이 아닐까? 그러나 젊은 팬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어른들의 뒤처진 사고 방식을 보여 주는 증거가 아닐까? 어른들도 한때 영화나 대중 음악의 스타에게 열광한 적이 있을 텐데 왜 이해하지 못할까? 한때 그랬더라도 나이 들고 보니 부질없는 짓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열광하는 팬들의 행동을 옹호할 만한 이유도 없지 않다. 팬들이 스타를 동경하는 것은 핵가족과 맞벌이 가정 속에서 자란 이들이 소외감에서 벗어나는 길이 될 수 있다. 게다가 대중 매체는 시청률에 눈이 멀어 될성부른 떡잎을 골라 완벽한 모습으로 가꾸고 포장하여 팬들의 열광을 부추긴다. 청소년 팬들의 흥분과 열광 뒤에는 어른들의 무관심과 상업성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열성 팬들의 행동이 지나치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때때로 청소년 팬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남이 욕하면 난투극도 마다하지 않고 학업마저 포기한 채 스타가 가는 곳을 졸졸 따라다니기도 한다. '오빠는 나의 것'이라는 환상은 부질없는 집착이고 망상이라고 할 만도 하다.
한편 어른들이 이런 행동을 부질없다고 평가하는 것은 스스로를 돌이켜보지 않는 태도라는 젊은 세대의 반론도 있다. 연예인에게 열광하는 청소년 팬의 모습은 야구나 축구 경기장에서 환호하는 어른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두 모습 모두 학업에 찌든 젊은 세대나 직업에 찌든 어른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여가 생활이기 때문이다.
여가 생활도 학업을 포기할 정도로 지나치면 안 된다고, 어른이 청소년을 일방적으로 훈계할 처지가 아니다. 어른도 정도가 지나쳐 경기장에서 술 먹고 병 던지는 추태는 심심치 않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학업을 포기할 정도로 집착하는 팬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젊은 세대가 항변하면, 어른들도 병 던지는 관중은 일부일 뿐이라는 말 외에는 적당히 대꾸할 말이 없다. 젊은 팬들이 대중 스타에게 보내는 열광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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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대중 음악과 이데올로기
20세기 대중 음악에 관해서는 오랜 쟁점이 있다. 대중 음악은 문화 제국주의 덕분에 10대 학생 또는 노동자를 현실적 관심에서 떼어 내는 자본과 문화 산업의 영리한 책략일 뿐이라는 것이 하나의 관점이다. 반면 자본과 문화 산업의 목적은 시위나 파업 등 정치경제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대중 음악처럼 폭넓은 효과가 있는 문화 생활을 통해서만 가장 효율적으로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이 또 하나의 관점이다.
이 오랜 쟁점은 대중 음악이 품고 있는 모순을 반영한다. 대중 음악은 대중의 일상적 문화 생활이고 대중의 억눌린 삶의 조건을 반영하여 만들어지므로 기성 질서의 억압에 의식적으로 저항하는 측면이 있다. 한편 대중 음악도 이윤을 추구하는 문화 산업의 일부이므로 젊은 세대의 여가와 용돈을 상업적으로 착취하는 측면이 있다.
대중 음악 특히 록 음악의 역사는 저항 정신의 전통을 뚜렷이 보여 준다. 엘비스 프레슬리에게 열광한 미국의 10대 학생과 노동자 비틀즈에게 광분한 영국의 10대 노동자, 밥 딜런과 함께 거리로 나선 베이비 붐 세대의 대학생, 베트남전에 반대한다는 명분 아래 우드스톡 페스티벌에 모인 30만 젊은이, 펑크를 받아들인 베이비 붐 이후 10대, 메탈과 랩에 열광하는 흑백 신세대 등은 모두 기성 사회 질서에 저항하는 의식이 록 음악의 중요한 배경이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한편 록 음악은 언제나 상업주의와 한쪽 손을 잡고 있었다. 모든 음악은 시장에서 팔리지 않으면 대중 문화의 일부가 될 수 없었다. 또 레코드, 라디오, TV, CD, 뮤직 비디오 등 매체 산업이 발달하지 않았다면 록 음악도 명맥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대중 음악과 매체 산업에 종사하는 자본주의 전략가들은 10대의 용돈과 대중 음악가들을 끊임없이 공략했고, 구매력이 증가한 10대와 성공을 꿈꾸는 음악가들은 이 전략에 끝까지 저항할 수 없었다.
문화 산업과 자본의 이데올로기가 대중 음악에 침투해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대중 음악을 즐기는 시간은 결코 자유시간이 아니라 노동을 재충전하는 시간이다. 대중 음악은 노동을 방해하지 않도록 자본이 통제하는 오락이며, 학생과 노동자가 내일 학교와 직장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일할 수 있게 만드는 수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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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대중 음악이 상업적으로 성공한다고 해서 반드시 자본의 이데올로기와 밀착하라는 법은 없다. 대중 음악은 상업적 조직에도 불구하고 젊은 세대의 일상 생활 안에서 민주적 문화 생활 양식을 개발할 수 있다. 과거 귀족과 자본가에게 음악은 명상의 대상이었지만 대중 음악의 팬들은 수동적 수용자가 아니라 적극적 개입자다. 대중은 음악을 단순히 수용하고 소비하는 도구로 기능하지 않고 이 음악 안에서 의미, 가치, 즐거움을 생산하고 창조함으로써 거꾸로 제작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2.3 상품미와 개인의 정체성
요즘 사람은 갓난아기로 태어나자마자 상품의 소나기를 맞기 시작한다. 온갖 상표를 붙인 의식주 상품이 아기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다. 거대한 슈퍼마켓이 된 현대 소비 사회에서 사람의 취미를 형성하는 것은 예술미가 아니라 상품미다. 상품미는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체험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상품을 매력 있게 만들어 판매를 촉진하는 긴요한 수단이다.
상품미는 상품의 내용과 형식을 분리하는 데서 성립한다. 상품의 형식인 외관은 상품의 내용인 사용 가치를 충실히 보장해야 하지만, 시장에서 생존하려면 최소한의 내용으로 최대한의 사용 가치를 보장한다는 미적 가상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상품미는 이런 가상을 불러일으키는 형식이자 자본의 수단이며, 소비자는 상품미에 현혹되어 욕망을 가상적으로 충족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욕망의 허기가 생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상품화한 대중 문화도 자본의 이윤 확장 원리를 가차없이 실현하는 도구일 뿐이다.
그러나 대중 문화는 지배에 저항하는 문화 실천이라는 또 하나의 가능성도 지니고 있다. 대중 문화는 저마다 특별한 개인으로 자랐고 미적 차이와 구별을 매우 중지하는 젊은 세대가 자기의 정체성을 추구하는 중요한 수단을 제공한다. 젊은 세대는 비록 이미지, 가상의 차원에서나마 대중 문화 상품의 재조합을 통해 끊임없이 변신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추구한다. 이런 면에서 대중 문화는 개인의 자율성을 신장하는 싹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상품이 결국 자본의 이윤 추구 수단이라면 대중 문화 상품을 통한 저항과 자유도 틀 안에서의 저항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대중 문화는 설사 저항과 개성을 추구하며 출발하더라도 어느 새 시장에서 상품으로 둔갑한다. 자본은 이윤이 될 만한 것은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하므로, 저항 문화는 자본에 따라 잡히지 않으려면 계속 도망 다니고 새 출발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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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음악 특히 록 음악은 일반적으로 기성 질서에 저항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우리 나라처럼 입시 경쟁을 지옥으로 여기는 청소년에게는 해방의 공간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게다가 서양 못지 않게 특별한 개인으로 자라나고 있는 요즘, 우리 청소년은 비록 어른 눈에는 몰개성으로 비치지만 스스로는 비슷비슷한 문화 상품의 독특한 조합을 통해 개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대중 문화를 통한 저항과 자유가 틀 안에서 머물 수밖에 없다면, 청소년 팬이 스타에게 열광하는 것도 이윤이 궁극 목적인 문화 산업 자본가와 권력이 목적인 정치가에게는 조금도 위협이 되지 않고 오히려 매우 반가운 일이 될 수 있다.
서양과 우리 나라의 대중 음악의 역사는 대중 음악이 현대인의 욕망을 어떻게 재편해 왔는지를 보여 준다. 대중 음악은 현대인의 욕망을 여가 생활에서 채우는 구조로 재편했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 구조는 일과 생산을 통해 채우는 것이 기본 전략이었지만, 현대 사회에서 욕망 구조는 놀이와 소비를 통해 채우는 전략으로 변모했다. 놀이를 통해 채우는 욕망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에서 생겨난다. 대중 음악은 현대인의 무의식에 빈틈을 내려고 끊임없이 공략한다.
대중 문화가 현대인의 무의식을 공략하는 것은, 자본의 이성이 대중의 감성을 조종하고 통제하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성을 대신할 수 있는 문화 창조력의 원천을 발굴하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다. 대중의 이성이 자본의 이성에 맞서 건강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면, 대중 문화와 대중 음악은 자본이 노리는 것과는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인류 역사에서 음악이 문화 변혁, 나아가 사회 변혁의 동력으로 주목받은 적은 20세기 말고는 없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3. 읽기자료: 대중 음악의 역사
1. 서양 대중 음악의 역사
서양 대중 음악 특히 록 음악의 역사는 1950 년대 로큰롤에서 출발했고, 로큰롤의 영웅은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1950 년대 미국은 군산 복합체를 중심으로 경제가 성장했고, 대중 문화는 이런 경제 성장을 배경으로 성 담론을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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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는 백인이면서도 흑인 음악의 본고장 멤피스 출신답게 흑인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으며, 제임스 딘 등 영화 배우들의 섹스와 반항의 이미지를 대중 음악에서 구현했다. 엄숙한 학교 생활에 찌든 10 대는 마이크 앞에서 부동 자세로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만 보다가 마이크와 허리 아래를 교묘하게 흔드는 엘비스를 보고 열광했다. 그러나 엘비스는 영화 배우로 진출하면서 초기음악의 싱싱한 정신을 잃었으며 군에 입대하면서 로큰롤의 막도 함께 내렸다.
1960 년대 미국의 경제는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 체계를 갖추었고, 각 가정은 냉장고, 세탁기와 두 번째 자가용을 갖추었다. 그러나 정치면에서는 대내 민주주의와 대외 제국주의를 기본 전략으로 삼는 군산 복합체에 대한 도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틴 루터 킹이 흑인의 시민권 운동을 주도했고, 대학에 들어간 베이비 붐 세대가 흑인의 시민권 운동과 베트남전 반대 운동을 지지하고 나섰다.
1960 년대를 개막한 대중 음악은 밥 딜런이 대표하는 포크였다. 밥 딜런은 미국 사회를 비판하고 전쟁에 반대하는 저항 음악을 노래했으나 포크의 열풍은 케네디 대통령의 죽음으로 빠르게 식었다. 1964 년 이후 미국 음악계는 비틀즈, 롤렁, 스톤즈 등 영국 음악가들이 미국 시장을 강타한 '영국 침공'시기였다. 비틀즈의 이미지는 촌스럽게 하모니카를 반주하는 데서 드러나듯이 매우 소박한 아마추어리즘과 장발이 상징하는 패션을 결합한 것이었다. 비틀즈는 기성 질서에 반항하고 소비 문화를 조장하는 두 얼굴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영국 침공이 있을 무렵 수천명의 히피족은 샌프란시스코 주변에 몰려 시위를 털이고 있었다. 히피들은 대부분 백인 중산층 출신이었으나 자기들의 성장 배경인 부르주아 가치를 물질에 찌든 문화라고 비판했으며 새 문화를 모색하기 위해 '마약을 확장하는' 마약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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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60 년대 후반에는 대학생들이 베트남전에 반대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대중 음악에서 이 시대를 대표한 사건은 1969 년 베트남전에 반대한다는 통일된 명분 아래 뉴욕 근처에서 3일간 30 만 명의 청중이 모인 '우드스톡 음악 예술 잔치'였다. 이 잔치가 낳은 최고 스타는 지미 헨드릭스였다. 지미 헨드릭스는 불경스럽게도 미국 국가를 연주하면서 전기 기타로 헬기 날아가는 소리, 폭탄 터지는 소리 등 베트남전을 묘사했다. 그러나 우드스톡의 활기찬 분위기는 닉슨 대통령이 캄보디아에 미군을 파견했다는 발표를 듣고 대학생들이 시위를 벌이자 군인들이 발포하여 4명이 죽으면서 암울해졌다.
1970 년대 미국은 월남전 패배와 에너지 위기로 불황 없는 경제가 막을 내렸다. 미국 경제는 저임금을 착취하기 위해 제조업을 세계화했으며, 덕분에 정치 권력과 경제 기업이 결탁한 국가 독점 자본주의가 후진국에 수입되어 우리 나라의 유신 정권처럼 개발 독재의 형태로 나타났다. 미국은 1970 년대 중후반에 경제가 다시 활성화했고 이는 1960년대의 저항적 대학생들을 정치에 대한 관심에서 떼어 내어 자기의 물질적 풍요를 중요시하는 여피족으로 바꾸어 놓았다.
대중 음악도 정치 메시지를 담은 노래가 퇴조하고 엘튼 존이 대표하는 부드러운 발라드풍의 노래와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에서 존 트래볼타가 패션의 전형 을 제시 한 사치스러운 디스코가 성행했다.
1970 년대에 록의 저항 정신을 이어 받은 적자는 펑크였다. 펑크는 너무 순진하여 어른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숙맥을 가리킨다. 펑크에 열광한 세대는 베이비 붐 이후 10대였다. 펑크는 이 새로운 10대의 실업, 가난, 좌절 등을 반영하여 악을 쓰는 멜로디와 기성 세대를 협박하는 노래말이 특징이었다. 펑크의 대표 그룹인 영국의 섹스 피스톨즈는 왕실을 비꼬는 노래 등을 부르며 기성 질서를 조롱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거액의 돈을 제공하겠다는 상업 자본의 공략에 무릎을 꿇고 해체되었다.
1980 년대 미국 경제는 구조 재조정 시기 곧 산업 사회에서 정보 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통화 관리, 금리 조작 등 경제 정책을 특징으로 하는 레이거노믹스 아래서 복지 정책은 후퇴했고 사회는 보수화했다. 미국 산업은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를 포기하고 상품을 고급화했으며 중산층 이상이 사치를 일삼는 과소비 문화가 나타났다. 1980 년 미국의 대부분 가정은 2대의 TV를 갖추었으며, TV와 함께 자라난 10대는 하루 평균 3~4시간씩 TV를 시청하면서 비디오 열기에 민감해졌다.
신문, 책 심지어 록 잡지도 읽지 않는 25세 이하의 세대를 겨냥하여 1981 년 음악 전문 채널 MTV 가 설립되었다. MTV 가 낳은 최고 스타는 마이클 잭슨이었고, 1982 년 내놓은 앨범 (스릴러)는 1984년까지 4천만 장이나 팔렸다. 마이클 잭슨의 노래는 어린이, 어른, 흑인, 백인 모두가 좋아하는 메시지를 담았으며 덕분에 1984년 대통령상을 받았다.
1990 년대에는 신세대 또는 X 세대가 록의 방향을 결정했다. 이 세대는 어두운 경제 상황 속에서 자랐으며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많은 수가 직업을 얻지 못했다. 더욱이 이혼과 폭력으로 얼룩진 미국 가정은 X 세대에게 좌절과 고통을 안겨 주었고, 이들은 조직 폭력에 휩게 물들고 분노에 찬 공격적 음악으로 기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룹 메탈리카가 대표하는 트래시메탈과 그룹 니르바나가 대표하는 그런지 록 또는 얼터너티브 록은 가족, 형제 사이의 사랑을 느낄 수 없는 중산층 출신 백인의 좌절을 반영했다.
한편 흑인의 저항은 랩으로 나타났다. 랩의 뿌리는 이미 1970 년 후반부터 디스코의 범람에 반작용하여 나타난 힙합이라 부르는 거리 문화였다. 뚱뚱한 아버지의 바지를 입은 듯한 힙합 바지, 창을 세운 야구 모자, 테니스화, 헐렁한 티셔츠 등 힙합 패션을 한 흑인 소년, 소녀는 거리의 속어를 지껄이는 디제이들 곧 래퍼들을 본받아 자기들만 알아듣는 속어를 남발하고 지하철과 빌딩을 캔버스 삼아 낙서하며 돌아다녔다. 1980 년대 후반 경제 사정이 더 나빠지자 래퍼들은 갱들의 폭력 쟁확도 그리기도 했으나 1980 년대 말과 1990 년대 초 래퍼들은 갱스터 랩을 포기하고 흑인의 자부심과 건강한 삶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1990 년대 미국에서는 불만에 찬 젊은 백인과 흑인이 결합하여 신세대를 위한 록을 부르짖고 있었다. 1990 년대 중반 쯤이면 랩과 메탈이 미국 밖으로 확산되어 전세계 청소년의 감성을 통일하기 시작했으며, 우리 나라에서도 헤비메탈 그룹 시나위 출신인 서태지가 이 흐름을 거의 시차 없이 정확하게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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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 나라 대중 음악의 역사
한국 록 음악의 역사는 신중현에서 비롯했다. 6.25전쟁 후 연예인들이 생활고에 시달리던 시절, 신중현은 미8군 쇼 무대에서 활동하면서 미국 문화와 록 음악을 만났지만, 처음부터 우리 나라의 독창적인 록을 만들고 세계에 알리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신중현은 일본 색 음악을 혐오하면서 1960 년대 미국에서 성행한 인종 차별과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록 음악을 발빠르게 도입했을 뿐 아니라 그 음악 정신인 저항과 자유의 정신도 흡수했다. 국민 가요를 작곡해 달라는 박정희 정권의 요구를 거절한 것도 이런 정신에서 비롯했다. 그 일로 미운 털이 박힌 탓인지 신중현은 대마초 사건과 가요 정화 운동에 걸려들어 대표곡들이 금지되었고 전성기에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다.
신중현이 서양의 록 음악과 우리 가락을 적절하게 버무려 만든 대표곡은 1974 년에 발표한 미인이다. 이 노래의 "모두 사랑하네 나도 사랑하네"에서 들려주는 꺾는 목소리는 판소리조이며, 전기 기타 반주도 가야금을 뜯는 듯한 독특한 연주법이다. 신중현의 노래는 비록 서양 록 음악의 형식과 정신에 크게 힘입었지만 우리 대중 음악의 독립을 향한 열망과 우리 가락의 정서를 융합한 된장표 록이라 할 수 있다.
1970 년대 초 우리나라의 경제는 고속으로 성장했지만 정부의 정책은 중소기업보다 대기업 위주의 성장 정책과 수출 지상주의로 나타났다. 저임금, 저곡가 정책이 경제 성장의 어두운 그림자였으며 이 정책에 반발하는 민중과 대학생은 국가 권력의 탄압을 피할 수 없었다. 김민기의 노래에는 이런 험한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고뇌가 깊이 배여 있었다.
김민기의 음악은 서양에서 1960 년대에 유행한 반전, 반체제 음악 포크였다. (아침 이슬)의 성공으로 실력을 인정받은 김민기는 독집 음반을 내고 가수로 데뷔했으며, 이 음반에 실린 (친구), (작은 연못)등도 정통 포크의 정신을 이어받아 정치적 저항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덕분에 김민기는 '요주의 인물'로 찍혔고, 1975 년을 전후하여 (아침 이슬)이 공식적으로 방송 금지되었다. 유신 정권이 저항적 포크에 철퇴를 내린 뒤에는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등 통기타 가수들이 대표하는 저항 요소를 배제한 순수 서점 포크가 등장했다. 자본은 이윤이 남을 만한 상품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전환이었다.
트로트는 일제 식민지 시대에 우리의 전통 민요를 대체하는 장르로 등장한 후 우리 나라의 대표적 유행 가요 양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1970 년대 중반부터 전성기를 되찾은 트로트 분야에서 최고 스타는 조용필이었다. 1976 년에 나온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방송을 타지 않고도 지방의 음악 다방에서 유행하기 시작하여 전국으로 유행의 불길이 번졌다. 더욱이 이 노래는 1983 년 조총련계 재일 교포의 모국 방문이 줄을 이으면서 다시 한 번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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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년대 야당에서 여당으로 탈바꿈한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 정부는 초기에 공직자의 재산 공개, 금응 실명제 등 파격적인 정치 공제를 펼쳤다. 대중 음악계는 트로트와 성인층 노래가 주춤하고 랩을 주축으로 다양한 시도가 일어났으며 그 도화선은 단연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다.
1992 년 방송에서 금기시한 반바지, 멜빵이 달린 바지, 발목까지 올라오는 운동화, 형광색 위주의 현란한 옷을 입고 나타난 서태지와 아이들은 음반 시장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난 알아요'에서 태권도 동작을 연상케 하는 회오리춤은 TV 전파를 타자마자 10대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통일의 의지를 담은 '발해를 꿈꾸며', 교육 현실을 꼬집은 '교실 이데아' 등의 노래로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청소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96 년 서태지와 아이들은 '창작의 고통'을 이유로 은퇴했으나, 그들이 촉발한 랩 댄스 음악의 열기는 우리 나라의 TV와 대중 음악계를 댄스 음악이 순식간에 점령해 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음반 회사와 방송국도 수명이 긴 음악가를 기르는 전략에서 가장 짧은 기간 안에 최대의 이윤을 뽑고 새로운 스타로 전환하는 전략으로 바뀌었다. 음반사, 기획사, 방송사를 세 축으로 삼는 대중 음악 지배네트워크는 이따금 발라드 음악을 양산하면서 댄스 음악으로 상업주의의 질서를 굳혔다.
1990 년대 초반 서태지와 아이들이 우리 대중 음악계에 일으킨 혁명의 핵심은 힙합 문화였다. 힙합 문화는 서양에서 이미 1970 년대 후반에 등장하여 1990 년대에는 랩 음악에만 머물지 않고 패션, 춤, 생활 양식, 의식 등을 통칭하는 신세대 문화로 자리잡았다. 우리 나라에서는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듀스, H.0.T 등 1990년대 중후반에 스타로 군림한 그룹들이 모두 힙합 문화에 기대어 인기를 얻고 있는 댄스 그룹이다. 댄스 그룹들은 대개 기회사의 철저한 관리 아래 상품성 있는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문화 산업의 이윤 추구 논리에 철저히 봉사하지만, 다른 세대와 차이를 원하는 10 대의 정서를 대변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환호를 받고 있다.
한편 보수적인 기성 질서와 주류 음악계의 지나친 상업주의를 동시에 비판하면서 제도권 무대 대신 좁은 클럽에저 소수의 매니아를 상대로 음악 활동을 하는 언더 그라운드 밴드들이 있다. '삐삐 밴드'의 (딸기)나 '황신혜 밴드'의 (짬뽕)은 직설적인 가사와 상식을 뛰어넘은 목소리로 대중의 관심을 얻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허벅지 밴드', '언니네 이발관', '크라잉 너트', '노 브레인' 등 독특한 이름을 가진 대부분의 언더 그라운드 밴드들은 대중의 인기에 개의치 않고 주류 음악에 도전하고 있다.
연습문제
1. 대중 매체의 순기능과 역기능
1) 대중 매체의 순기능은 무엇인가?
2) 대중 매체의 역기능은 무엇인가?
2. 문화 산업에 대한 찬반론
1) 문화 산업의 등장 배경은 무엇인가?
2) 문화 산업의 발전을 지지 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3) 문화 산업의 발전을 반대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3. 소비 사회와 대중 문화
1) 기호 가치는 무엇인가?
2) 소비 사회에서 욕망의 특성은 무엇인가?
3) 소비 사회에서 욕망을 채워 주는 대중 문화가 마취제라고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4. 대중 음악과 이데올로기
1) 대중 음악을 즐기는 시간이 노동을 재충전하는 시간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2) 대중 음악이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5. 상품미와 개인의 정체성
1) 상품미는 무엇인가?
2) 대중 문화가 지닌 개인의 자율성을 신장하는 싹은 무엇인가?
참고문헌
1. 티모시 리어리 지음. (대항 문화들), 홍성태 엮응, (사이버 공간, 사이버문화), 문화과학사, 1996. pp.175-228.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 교수였다가 1960년대 히피 운동에 동참한 리어리가 미국 대중 문화 특히 대항 문화의 역사를 해석한 글이다. 리어리는 1950년대 비트족부터 히피족과 우드스톡 세대, 여피족, 사이버 펑크 세대를 거쳐 1990년대와 미래의 '새 종족'까지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의 하위 문화를 주도한 제대의 역사를 개인의 발달사로 해석한다.
2. 장 보드리야르지음, 이상률 옮김, (소비의 사회), 문예출판사, 1991
'포스트모더니즘의 고승'이라고 불리는 프랑스 철학자 보드리야르의 초기대표작. 현대 사회를 소비 사회로 규정하고, 소비 사회에서 사람들은 사용가치가 아니라 기호 가치를 소비하며, 소비 사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호는 몸이 라고 주장한다.
3. 막스 호르크하이머, 테오도르 아도르노 지음. 김유동, 주경식, 이상훈 옮김, (계몽의 변증법), 문예출판사, 1995.
'프랑크푸르트 학파' 라 불리는 서유럽 마르크스주의자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문화 산업을 마르크스의 눈으로 비판한 고전. 문화 산업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고 문화를 정치와 경제에 종속하고 소비자를 사물화하는 문화 산업의 부정적 측면을 체계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4. 사이먼 프리스 지음, 권영성, 김공수 옮김, (사운드의 힘: 록 음악의 사회학). 한나래, 1995.
서양 대중 음악 특히 록 음악의 역사를 사회학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해설한 권위 있는 책 자본주의 사회에서 록 음악을 즐기는 여가는 결코 자유시간이 아니라 노동을 재충전하는 시간이고, 따라서 록 음악도 노동 시간을 방해하지 않도록 자본이 통제하는 오락이라는 것이 기본 관점이다.
5. 볼프강 하우크 지음, 김문환 옮김, (상품 미학 비판), 이론과 실천, 1991.
현대 사회에서 미에 대한 관심과 의식이 상품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정치경제학적으로 분석한 책. 하우크는 상품미란 최소한의 내용으로 최대한의 사용 가치를 보장한다는 미적 가상을 불러일으키는 자본의 수단이며, 따라서 상품 미학은 자본의 이윤 확장 윈리를 실현하는 도구지만, 지배에 저항하는 문화 실천이라는 또 하나의 가능성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6. 선성원 지음, (대중 음악의 뿌리), 꾼 1996.
우리 나라 대중 음악의 역사를 매우 간단하지만 선구적으로 정리한 책.
7. 박정호 엮음, (지식의 세계: 문화와 인생), 동녘, 1998
대중 문화와 한국 전통 문화에 관해 대학교 신입생들이 읽을 만한 휩고 좋은 글을 모은 책. 포스트모던 문화, 성 문화. 청소년 문화, 영상 문화, 굿 문화, 건강 문화, 동양학 등에 대해 다양한 관점을 가진 글을 통해 인간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
8.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엮음, (문화와 철학), 동녘 1999
철학의 새 영역으로 급속히 부상하고 있는 문화의 여러 영역에 대해 우리 나라 소장 철학자들이 철학의 눈으로 분석한 책. 신화, 종교, 근대 예술 등 문화의 역사에 대한 분석과 종합을 기본 틀로 제시하고, 영화, 대중 음악, 섹슈얼리티, 성차별, 환경 가상 현실, 정보 사회 등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해설하고 있다.
제2장 정보 사회와 사이버 문화
개관
현대 사회는 정보 통신 기술의 눈부신 발달로 정보 사회라는 새로운 변혁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정보를 중요한 가치로 취급하는 사회는 사람의 모습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까? 사람은 지금보다 더 풍요로운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 아니면 많은 미래 소설과 영화가 보여 주듯이 기계에 예속되고 기계와 힘겹게 싸우는 암울한 모습이 기다리고 있을까?
정보 사회로의 변화에 대해서는 낙관론과 비관론이 함께 있다. 낙관론은 정보 사회가 쌍방향 의사 소통 수단을 이용하여 참여 민주주의를 확대하고 창조적 일에 종사할 가능성을 늘이고 문화의 전세계적 유통에 이바지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비관론은 정보 통신 기술이 권력에 이용되고 실업의 증가와 시장의 둔화를 초래하고 새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문화 지체 현상을 낳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컴퓨터의 이용과 관련하여 대두한 새 문화 형태를 사이버 문화라 부른다. 컴퓨터 게임 같은 사이버 문화는 환각 체험이 특성이다. 환각 체험은 사람의 정신 능력을 고양하고 새 문화 창조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는 낙관론자도 있지만, 불안정하고 통제할 수 없는 정신 능력이며 자본의 이윤 추구에 이용될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하는 비관론자도 있다.
정보사회와 사이버 문화가 만들 사람의 모습은 한 마디로 '사이보그'라 할 수 있다. 사이보그란 과학 기술의 산물로 인간의 능력을 확장한 기계-생물을 뜻한다. 낙관론자는 과학 기술의 산물에 이미 충분히 길든 현대인이 정보 과학 기술의 산물도 거부하기 힘들고, 몸과 마음의 기능을 더 확장해 과학 기술의 산물을 즐겨야 한다고 권유한다. 그러나 비관론자는 사이버 문화의 체험이 몸과 마음을 분리하고 여러 개의 나를 만들어 혼란스러운 자아 분열을 낳는다고 주장한다.
@p60
정보 사회와 사이버 문화는 기술과 사람의 관계를 보는 눈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기술의 발전이 사람과 사회의 변화를 낳는다고 보는 기술 결정론은 정보 사회에 대해 대체로 낙관적이다. 정보 사회는 산업에 고용된 노동자가 감소하고 서비스업에서 새 직업의 기회가 끊임없이 생기며 사회의 부가 지속적으로 증가한다.
그러나 사회 구조가 기술의 발전을 낳는다고 보는 사회 구조론은 정보 사회에 대해 대체로 비관적이다. 정보 기술의 발전 과정에는 시장 원리가 철저히 적용되고 계급 불평등은 정보의 분배, 접근, 창출에서 불평등을 낳는다.
정보 사회에 대해 정확한 전망을 얻기 위해서는 두 관점의 약점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 기술 결정론의 입장에 서면 사회 세력간의 다양한 관계를 읽을 수 없고 개인의 경제 능력 차이, 계급과 지위의 불평등, 지역과 국가 간 불균등 발전을 적절히 설명할 수 없다. 한편 자본주의 사회 구조를 중심에 두는 관점은 기술의 발전으로 생기는 이득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 약점이다. 정보 기술이 발달하면 사이버 공간을 이용하여 시민 사회와 국제 연대를 활성화하고, 사이버 교육 장치를 통해 불평등을 완화하고, 정부의 서비스 확대 정책을 유도하여 복지를 개선하는 것도 가능하다. 사이버 공동체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1. 기본가의 정보 사회와 사이버 문화의 두 얼굴
1. 정보 사회는 장밋빛일까?
현대 사회는 정보 통신 기술의 눈부신 발달로 정보 사회라는 새로운 변혁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앨빈 토플러(Allrin Toffler)는 정보 사회를 '제3물결'이라 불렀다. 인류의 역사는 문명을 낳은 농업 혁명을 통해 원시 수렵, 채집 사회에서 고대 농경 사회로 넘어가는 제 1물결을 거쳤고, 산업 혁명을 통해 농경사회에서 근대 산업 사회로 넘어가는 제 2물결을 거쳤다. 제 3물결은 산업 사회에서 정보 사회로 넘어가는 변화를 가리킨다.
@p61
정보 사회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산업 사회의 주요 생산 양식이 물질적 재화의 생산이라면, 정보 사회의 주요 생산 양식은 지식, 정보 등 정신적 가치의 생산이다. 정보 사회는 점퓨터와 정보 통신 기술이 발달하면서 등장했다. 정보 사회에서는 정보를 생산, 처리, 가공, 저장, 확산, 소비하게 해 주는 새 매체들이 사회 변화의 중요한 동력이다. 신문, 잡지 등 인쇄 매체와 라디오, 텔레비전 등 대중 매체가 재래식 매체라면, 첨단 전자 공학, 광학, 통신 기술 등을 바탕으로 발달하고 있는 전자 신문, 위성 방송, 컴퓨터 통신, 종합 유선 방송, 이동 통신 등은 새 매체들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정보 사회는 원칙적으로 정보가 모든 개인에게 전달될 수 있는 사회다. 산업 사회에서는 물질적 재화의 생산과 유통을 담당하는 시장 경제와 소비를 담당하는 가정 경제가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보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정보의 생산자이며 동시에 소비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산업 사회에서는 물질적 재화를 수송하는 데 철도, 도로, 항만, 공항 등 사회 기반 시설이 필요하지만. 정보 사회에서는 정보를 수송하는 데 '정보 고속 도로' 등 정보 기반 시설이 필요하다. 이 시설이 개인들 사이를 수평적으로 연결해 주므로 정보 사회는 사람들 사이의 대등한 관계가 발달한다.
셋째, 정보 사회는 모든 면에서 변화의 속도가 매우 빠르다. 이런 변화는 기업 운영에서는 원칙의 관철이 아니라 외부 환경에 즉각 대응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인간 관계에서도 확고한 유대가 아니라 유연한 적응을 중시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상품 생산은 다랑 소품종에서 소량 다품종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정보 사회 는 아름답고 화려한 장밋빛일까? 정보 사회는 미래가 아니라 이미 현실의 모습이다. 정보의 양이 엄청나게 많고 질이 매우 다양하다 보니 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창의적 지식이 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며, 따라서 세계는 이미 정보 사회에서 지식 사회로 넘어가고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정보든 지식이든 물질적 재화가 아니라 정신적 재화다. 정보와 지식을 중요한 가치로 취급하는 사회는 사람의 모습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까? 사람은 지금보다 더 풍요로운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 아니면 많은 미래 소설과 영화가 보여 주듯이. 기계에 예속되고 기계와 힘겹게 싸우는 암울한 모습이 기다리고 있을까?
@p62
2. 정보 사회, 사이버 문화, 사이보그
2.1 정보 사회
정보 사회란, 정보 기술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지원을 받아 사람의 주요 활동이 이루어지며, 대부분의 고용이 정보와 지식의 생산, 처리, 유통과 관련된 정보 산업 에 집중되는 사회다.
정보 사회의 기술적 기초는 정보 기술(information technology)의 눈부신 발전이다. 정보 기술은 반도체가 대표하는 소자 기술, 컴퓨터가 대표하는 정보처리 기술, 위성 통신과 광통신이 대표하는 통신 기술이 주요 구성 요소다.
반도체 기술의 발전은 극소 전자 혁명이라 불린다. 다수의 반도체 회로를 압축할 수 있는 집적 회로(integrated circuit)는 정보의 저장, 교환, 처리 능력을 획기적으로 향상했다. 1780 년대 후반부티 보급되기 시작한 개인용 컴퓨터는 휴대 가능한 노트북을 거쳐 개인 휴대 통신으로 발전하고 있다. 통신 기술은 컴퓨터 통신과 인터넷 등에서 문자, 음성, 영상, 데이터를 디지털 신호로 전달 교류하며 유선망뿐 아니라 무선 통신과 위성 통신도 발달하고 있다.
@p63
정보 기술의 발달은 디지털 기술을 기초로 삼는다. 컴퓨터는 디지털 신호로 정보를 다루는 대표적 장치다. 디지털 신호란 정보를 전기 펄스의 유무와 그 조합의 형태 즉 0과 1의 이진법 조합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디지털 신호를 이용하면 문자, 영상, 음정, 데이터를 함께 처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원본에 충실하게 전달할 수 있다. 따라서 방송, 통신, 컴퓨터 사이의 자유로운 소통과 매체 융합이 가능해진다.
정보 사회에서는 매체의 변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라디오, 텔레비전 등 똑같은 정보를 다수에게 일방적으로 공급하는 대중 매체에 비해, 위성 방송, 컴퓨터 통신 등 새 매체들은 정보의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쌍방향성이 특징이다. 소비자는 제각기 서로 다른 정보를 소비할 수 있으며 나아가 정보 생산에 개입할 수 있다.
방송과 통신은 전통적으로 다른 분야로 인식되었으나, 케이블이나 위성과 같은 새 전송로가 개발됨에 따라 서로 융합하고 있다. 방송과 통신의 융합으로 나타난 새로운 매체 형태를 멀티미디어라 부른다.
멀티미디어는 음성, 영상, 문자, 데이터 등 다양한 형태의 정보를 디지털 신호로 통합 처리하고, 쌍방향 기능을 이용하여 필요한 정보를 필요한 표현 형식으로 창작, 유통한다. 앞으로 텔레비전은 전화, 팩스, 개인용 컴퓨터, 프린터, 서버, 텔레비전 전화 등의 기능을 혼합한 멀티미디어 방송으로 발전할 것이다.
세계 각지의 크고 작은 네트워크들이 연결해서 이루어진 통신망이 인터넷이다. 기존의 대중 매체는 수동적 시청자를 낳지만, 인터넷의 이용자는 원하는 정보를 스스로 찾아 나서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능동적이어야 한다. 또 인터넷은 여러 네트워크가 서로 자발적으로 연결해서 이루어진 통신망이므로 포괄적 지배력을 행사할 단일한 관리인이 없다.
그러나 인터넷이 계속해서 자본의 논리로부터 자유로운 영역으로 남아 있을 가능성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이미 대중 매체 기업과 컴퓨터 관련 대기업은 인터넷을 또 하나의 이윤의 원천으로 만들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으며, 웹 몰과 같은 상업 정보 공간이 본격 출현하고 있다.
정보 사회로의 변화에 대해서는 비관론과 낙관론이 함께 있다. 우선 정치제도의 면에서 비관론은 정보 사회를 추진하는 정보 통신 기술이 관료제 통치기구에 이용되어 권력의 집중과 재생산의 도구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비관론은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정보망을 통해 모든 국민이 철저히 감시 받고 사생활의 비밀 공간이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예를 들어 전국의 읍, 면, 동사무소의 컴퓨터 모니터에 떠오르는 개인의 정보는 무려 78개항에 이른다. 개인의 성명, 주소, 생년월일은 물론이고 심지어 신체 장애, 정신 장애, 사생아, 혼혈, 성병 감염 여부 등 공개하고 싶지 않은 정보도 수두룩하다.
@p64
그러나 낙관론은 정보 사회가 참여 민주주의를 확대하고 인간 해방을 낳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정보 사회에서 유권자들은 컴퓨터 통신을 이용해 여론을 만들고 컴퓨터로 투표할 수 있다. 낙관론에 따르면 정보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재래식 매체와 달리, 정보 사회의 새 매체들은 쌍방향으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으므로 직접 민주주의 또는 참여 민주주의의 확대에 이바지한다. 예를 들어 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컴퓨터 통신에서 수백 명, 수 천명이 자기 의견을 펼치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 것은 국민의 대표자를 통해 의견을 제시하는 간접 민주주의 또는 대의 민주주의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다.
경제면에서 정보 사회는 물질적 재화가 아니라 정보 상품과 서비스의 생산, 처리, 분배에 경제 활동을 집중한다. 그리고 정보 사회에서는 공장, 사무실, 가정 등에서 자동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따라서 낙관론은 사람들이 노동력에 의존하는 일을 각종 정보 시스템으로 대체함으로써 단순 반복적인 일을 줄이고 더욱 창조적인 일에 종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비관론은 정보 사회에서 정보의 생산과 소비가 직결되면 실업자가 늘어나고 중간 유통 과정이 줄어들어 시장의 성장이 둔화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문화면에서 낙관론은 정보 사회가 서로 다른 문화권 사이에 이해의 폭을 넓힐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셜 맥루한(Marchall McLugan)은 정보 사회가 '지구촌'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낸다고 말했다. 정보 통신의 혁명으로 시간과 공간의 간격을 메움으로써 지구 전체가 하나의 마을이 된다는 뜻이다. 낙관론에 따르면 지구촌 현상은 문화를 전 세계적으로 유통함으로써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를 증진하고 결국 세계 문화를 형성할 것이다.
그러나 비관론은 지구촌 현상에 따라 세계 문화가 형성되고 지역 문화가 사라지면 세계 중심부의 문화가 주변부의 문화를 지배할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한다. 또 비관론은 개인용 컴퓨터나 종합 유선 방송 등 새 매체들은 구입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빈부의 격차에 따라 정보량의 격차를 낳고 새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문화 지체 현상을 일으킬 것이 라고 주장한다.
@p65
2.2 사이버 문화
사이버 문화는 컴퓨터의 이용과 관련하여 대두한 새 문화 형태를 가리킨다. 생활 양식으로서 컴퓨터 문화는 이미 낯익은 것이 되었으나 그 이용 과정에서 세부적 차이들은 새 하위 문화 양식을 지속적으로 낳는다. 이런 문화 양식이 전개되는 주요 장이 사이버 공간이라 부르는 컴퓨터 통신망이다. 따라서 사이버 문화는 간단히 컴퓨터 통신 문화라 부를 수도 있다.
사이버 공간은 월리엄 깁슨(William Gibson)이 '뉴로맨서(Neuromancer)'에서 선보인 말이다. 이 소설은 완전한 인공 두뇌가 현실을 지배하는 세상을 묘사하고 있다. 사이버 공간은 물리적으로는 컴퓨터 통신망을 가리키지만 인간 외부에 있는 공간이 아니라 두뇌 작용으로 감지할 수 있는 공간을 뜻한다.
컴퓨터 통신 문화는 가명의 문화다. 컴퓨터 통신 이용자들은 ID(identity)라 줄여 부르는 가명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이용자들은 통신망 안에서 통신망 밖의 나와 다른 나로 살면서 현실에서 할 수 없는 체험을 한다. 사이버 문화는 쇼핑, 언론, 문학, 영화, 음악, 애니메이션 스포츠, 게임 등 사람들이 보고 즐기는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다. 게임을 예로 들어 보자.
게임은 장르에 따라 롤 플레잉 게임, 시뮬레이션 게임, 어드벤처 게임, 액션 게임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롤 플레잉 게임은 게이머가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면 등장 인물이 각종 괴물과 전투를 통해 경험과 능력을 쌓으며 성장하는 게임이다. 시뮬레이션 게임은, '스타 크래프트'처럼 다양한 전락을 세워 가며 상대와 모의 전쟁을 치르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도 있지만, 비행기를 조종하는 기분을 느끼는 것처럼 사실적 데이터를 토대로 실제로는 해 보기 힘든 행위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장르다.
컴퓨터 게임은 간접 경험과 오락을 함께 추구한다. 예를 들어, 괴물이 나오는 지하 동굴 여행이나 거대 자본으로 하는 주식 투자 등은 상상만으로 끝나지 않고 관련 분야에서 재미를 곁들인 교육과 훈련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컴퓨터 게임은 중독성이 매우 강하고 이용자가 원하게 만드는 힘이 아주 큰 문화이기도 하다.
@p66
사이버 문화에 대해서도 낙관론과 비관론이 대립하고 있다. 낙관론자는 사이버 문화의 체험이 일종의 꿈 같은 환각 체험이고 사람의 정신 능력을 고양한다고 주장한다. 컴퓨터는 일종의 정신 증폭기다. 정신의 증폭은 1960 년대 미국과 유럽에서 약물을 통한 환각 체험으로 기성 부르주아 질서에 맞서 반문화(countercultures)를 창조하려 한 히피족이 외친 말이다. 이 점에서 사이버 문화는 1960 년대 반문화의 직계 후손이며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새 문화의 징후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반면 비관론자는 환각 체험을 정신 능력의 고양으로 보지 않는다. 환각 체험은 정신의 병든 능력 또는 불안정하고 통제할 수 없는 능력을 드러낼 뿐이고 환각 체험을 통해 반문화를 창조하려는 1960 년대의 시도도 약물에 의존하면서 실패했기 때문이다. 또 비관론자는 초국적 정보 산업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세계 체계가 확산하고 인터넷 등 새 매체들도 빠르게 상업화하고 있으므로 자유의 왕국과는 거리가 멀다고 주장한다.
비관론자에 따르면 사이버 공간의 이용자는 창조적이고 능동적이기는커녕 오히려 순종적이다. 이용자는 사이버 공간이 제공하고 자본이 조종하는 문화를 즐길 뿐이다. 더욱이 책을 빌리고 세탁하고 컴퓨터실에서 작업하고 음식을 사는 데 전자 카드를 이용하면 카드의 소유자는 거의 실시간으로 감시당할 수 있다.
그러나 비관론자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사이버 문화는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으며 거부하기 힘든 대세가 되었다. 그러므로 사이버 문화가 설사 부정적 측면을 지니고 있더라도 긍정적 가능성을 모색하지 않으면 우리는 대책 없이 암울한 시대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2.3 사이보그
정보 사회와 사이버 문화는 사람의 모습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까? 이 물음에 대한 가장 간결한 답이 '사이보그'다.
사이보그는 사이버네틱스와 생물의 합성어다. 사이버네틱스는 수학자 노버트 위너가 창시했으며, 정보의 소통을 통한 조종과 통제의 원리를 탐구하는 과학 다른 말로는 인공 두뇌학이다 사이보그는 사이버네틱스의 원리에 따라 제작된 기계-생물이다.
정보 사회와 사이버 문화 속에서 사람은 모두 사이보그다. 정보 사회 이전에도 이미 사람은 시력 나쁜 눈에 안경이나 렌즈를 연결하고 속도 느린 발에 자동차를 연결하여 몸의 기능을 확장했다는 뜻에서 어느 정도 사이보그였다. 그러나 정보 사회에서 사람이 사이보그가 되는 정도는 더욱 폭넓고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p67
우리의 눈은 인터넷과 연결된 컴퓨터 전자창을 통해 런던의 크리스마스 풍경을 볼 수 있으며, 런던에서 시드니로, 베이징에서 뉴욕으로 이동할 수 있고 과거로 갈 수도 있다. 우리의 눈은 전자 안구와 연결되어 있다. 핸드폰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우리의 입과 귀는 각종 원격 통신 수단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두뇌는 인공 위성 위치 확인 시스템과 연결된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목적지까지 가는 가장 효율적인 노선을 계산할 수 있고, 조금 더 정교한 프로그램을 갖춘 자동차라면 내가 관심을 가진 분야, 예를 들어 지금 지나가는 지역에 살고 있는 철학자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 우리의 두뇌는 앞으로 각종 인공 지능과 연결될 것이다.
현대인의 삶은 점점 더 첨단 전자 장비들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런 장비와 연결된 사람은 갈수록 세련된 사이보그로 변신하고 있다. 정보 사회와 사이버 문화 속에서 사람이 사이보그로 변신하는 것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역시 낙관론과 비관론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낙관론은 사이보그가 사람의 몸과 마음의 기능을 확장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영국의 유명한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움직일 수 없는 몸을 가치고 있지만 병든 손과 휠체어에 설치된 발성기가 함께 작동하여 전자 소리를 만들어 낸다. 호킹의 손가락들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여
메뉴판에서 단어를 선택하면 소프트웨어가 저장된 소리들을 검색하고 조합하여 문장으로 만든 뒤 스피커로 내보낸다. 만일 호킹을 사이보그로 만들어 주는 정보 기술이 없었다면 인류는 적어도 물리학에서 큰 손실을 입었을 것이다.
@p68
낙관론에 따르면, 이미 오랫동안 온갖 생활 용품을 통해 과학 기술의 성과와 산물에 길든 현대인의 몸과 마음은 사이버 문화도 거부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정보 사회에서 사람은 기계를 거부하려고 안간힘을 쓸 것이 아니라 정보 과학 기술의 성과를 즐기는 것이 현명할지도 모른다.
한편 비관론은 사이버 공간에서 사이보그 체험이 현실에서 사람의 몸과 뇌를 망가뜨릴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한다. 비관론자들이 이 점을 보여 주기 위해 자주 드는 예는 공상 과학 영화 '론머맨(Lawnmower man)'이다. 이 영화는 주인공이 헬멧을 쓰고 네트워크를 타고 달리는 동안 몸이 회전구 안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 '비트루비안 맨(Vitruvian man)'처럼 팔다리를 활짝 펴고 있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주인공과 여자 친구가 이런 상태로 사이버 섹스를 즐기는 동안 여자 친구는 미쳐 버린다.
이처럼 사이버 공간은 현실 공간의 몸과 뇌가 뒷받침하지 못하는 마음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또 현실 공간의 정체성과 다른 정체성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현실 공간에서는 남성이지만 사이버 공간에서는 '나리'라는 ID 로 여성 행세를 할 수도 있다. 비관론에 따르면 여러 개의 정체성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이버 공간은 자아 분열을 낳기 쉽다. 보통 사람은 여러 개의 나로 행세하면 혼란을 느끼고 노이로제에 걸릴 수 있다.
3. 정보 사회의 전망
정보 사회와 사이버 문화는 정보 기술을 바탕으로 성립한다. 따라서 정보 사회를 전망하는 데 기본이 되는 문제는 기술이 사람, 사회와 맺는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두 가치 관점이 있다. 하나는 기술의 발전이 사람과 사회의 변화를 낳는다고 보는 관점이다. 또 하나는 사회구조가 기술의 발전을 낳는다고 보는 관점이다. 앞의 관점은 흔히 기술 결정론이라 불리며 대체로 정보 사회에 대해 낙관론을 주장한다. 뒤의 관점은 사회 구조론 이라 불리며 대체로 비관론을 주장한다.
기술 결정론에 따르면 기술의 변화가사회의 변화를 주도한다. 정보 기술의 눈부신 발전은 새로운 정보 경제를 급속히 키우고 고용 구조를 바꾸며 나아가 정부나 기업의 조직 방식도 크게 변경함으로써 사회 구조의 기본 원리를 바꾸어 놓는다.
@p69
기술 결정론을 대표하는 다니엘 벨에 따르면 정보 사회는 산업 사회와 질적으로 다른 탈산업 사회다. 산업 사회에서 노동은 주로 공장에서 이루어지는 제조 활동이지만, 탈산업 사회에서 주요 노동은 서비스업에서 나타나는 정보 활동이다.
벨은 탈산업 사회에 대해 낙관적이다. 탈산업 사회의 특징은 산업에 고용된 노동자가 감소하고 서비스업에서 새 직업 기회가 끊임없이 생기며 사회의 부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것이다.
반면 사회 구조론에 따르면 기술은 독립 변수가 아니라 매개 변수다. 기술은 사회 구조와 사회 세력 관계에 맞추어 발전한다. 그리고 기술의 사용은 중립일 수 없으며 자본의 논리에 따른다.
허버트 실러(Herbert Schiller)에 따르면 정보 통신 기술은 시장 확대를 꾀하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발전했다. 1990 년대 오일 쇼크에 의한 자원 위기. 제조업에서 이윤율 하락, 실업률 상승 등 전반적 경기 침체는 자본주의 체계의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이때 자본주의 체계가 대안으로 모색한 것이 정보 통신 산업의 육성이었으며, 이 산업을 떠받드는 기술 기반이 정보 기술이었다.
실러는 정보 사회에 대해 비관적이다. 실러에 따르면 정보 기술의 발전 과정에는 시장 원리가 철저히 적용되고 계급 불평등은 정보의 분배, 접근, 창출에서 불평등을 낳는다. 정보와 통신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중대한 변동은 현대 사회가 초국가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라는 뜻일 뿐이다.
정보 사회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정확한 전망을 얻기 위해서는 두 관점의 약점을 서로 보완할 필요가 있다. 기술 결정론의 입장에 서면 사회 세력간의 다양한 관계를 읽을 수 없고 개인의 경제 능력 차이. 계급과 지위의 불평등, 지역과 국가 간 불균등 발전을 적절히 설명할 수 없다.
한편 자본주의 사회 구조를 중심에 두는 관점은 기술의 발전으로 생기는 이득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 약점이다. 기술의 발전은 자본에 대항하는 기술적 가능성도 열어 준다. 정보 기술이 발달하면 사이버 공간을 이용하여 시민 사회와 국제 연대를 활성화하고, 사이버 교육 장치를 통해 불평등을 완화하고, 정부의 서비스 확대 정책을 유도하여 복지를 개선하는 것도 가능하다.
@p70
2.주제토론 기계가 사람을 지배할 수 있을까? 영화 (매트릭스)를 보고
다음은 래리와 앤디 워쇼스키(Larry and Andy Wachowski) 형제 감독이 만든 영화의 간략한 스토리다. 이 영화는 스스로 생각하는 인공 지능과 이 기계에 저항하는 사람 사이의 싸움을 그리고 있다. 헐리우드 영화답게 사람이 승리하는 결말을 보여 주지만, 정보 사회와 사이버 문화의 특징도 잘 보여 준다. 이 영화를 자료로 삼아 사이버 문화의 특징을 살펴보고, 정보 사회에서 사람과 기계가 어떤 관계를 맺는지 토론해 보자.
네오(키아누 리브스)는 낮에는 평범한 회사원이지만 밤에는 유능한 컴퓨터해커다. 네오는 컴퓨터로 사이버 공간을 떠돌아다니다가 '매트릭스'에 대해 의문을 품고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고심한다. 어느 날 불법 소프트웨어를 사러온 건달이 창백한 네오에게 어디가 아프냐고 묻는다. 네오가 "꿈과 현실이 뒤엉킨 기분 알아?" 하고 반문하자, 건달은 쉽게 대꾸한다. "응 알아. 약물에 취해 늘 몽롱하거든"
네트워크의 다른 말인 매트릭스는 21세기 초 드디어 완성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인공 지능이 사람을 지배하려고 만든 사이버 공간이다. 이 인공 지능은 천연 자원이 고갈되자 사람의 생체 에너지를 자원으로 이용하기 위해 매트릭스를 만든다. 인공 지능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몸은 매트릭스 밖 현실 속의 인체 공장에서 사육되고 있으며, 정신만 몸을 정상으로 살찌우기 위해 매트릭스 안에서 진실을 모른 채 평소처럼 살고 있다.
인공 지능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선지자의 말을 믿고 '그 분'을 찾다가 네오를 발견한다. 인체 공장에서 몸을 되찾은 네오와 저항군은 인공 지능에 맞서 싸울 때에는 매트릭스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뒤통수에 연결된 광케이블을 통해 몸에서 정신이 빠져나간다.
@p71
네오는 자기가 정말 저항군이 기다리던 메시아인지 확인해 보려고 예언자를 만나러 간다. 부엌 문 위에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를 걸어 두고 사는 늙은 여성 예언자 오라클은 네오에게 '그 분'이 아니라는 듯한 암시를 주고 그가 죽을 것이 라고 예언한다.
오라클의 예언이 틀리지 않아, 네오는 인공 지능의 요원에게 총알을 여러 발 맞고 죽지만 사랑하는 여성 저항군(케리 앤 모스)의 키스로 되살아난다. 다시 요원들이 일제히 총을 쏘자, 네오는 "노!"라는 한 마디 말과 함께 멈추라는 손짓으로 날아오던 총알들을 끼익 급정거하게 만든다. 예수처럼 죽었다가 부활한 네오는 말씀으로 세상을 좌우하는 신의 경지에 올라 요원들의 정체를 디지털 신호로 훤히 꿰뚫어보고 간단히 분쇄해 버린다.
2. 기본 논증과 비판: 사람과 기계
2.1 환각 체험
(매트릭스)가 보여 주는 사이버 문화의 특징은 무엇보다 환각 체험이다. 환각이란 외부 대상의 자극 없이도 어떤 모습이나 소리를 실재하는 것처럼 보고 듣는 체험이다. 네오는 똑똑한 해커이기 때문에 매트릭스라는 사이버 공간 속에 있으면서도 남들처럼 진실을 모른 채 살지 않고 꿈과 현실이 뒤엉킨 기분을 느낀다. 이 기분과 느낌은 건달이 약물에 취해 현실을 몽롱하게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환각 체험이다.
환각 체험은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환각 체험이라면 마약에 취한 모습만 떠올릴 필요는 없다. 정신 전문가인 동서양 무당은 약물에 의존하지 않고도 혼이 몸을 떠나 죽은 자의 혼이나 신과 만나는 환각 체험을 할 수 있다. 콘서트에서 스타에게 열광하여 공연 내내 펄쩍펄쩍 뛰며 소리를 질러도 피곤한 줄 모르는 사람은. 적어도 그 시간 동안 무당과 비슷한 환각 체험을 하고 있다. 보통 사람이 꿈을 꾸는 것도 환각 체험이다.
@p72
환각 체험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이 체험이 창의력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창조적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능력은 예나 지금이나 높이 평가받고 있지만 앞으로 정보사회에서는 더욱 중요하게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창의력은 공식이 없다. 창조적 아이디어를 얻는 과정은 항상 비약을 포함한다. 정신이 이런 비약을 수행하려면 각성 체험에만 의존할 수 없고 환각 체험의 도움도 받아야 한다. 예를 들어 꿈에 본 장면이 고심하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마리를 제공할 수도 있다.
환각 체험은 무의식에서 비롯한다. 무의식이란 좁게는 근친 상간처럼 사회적으로 허용할 수 없는 욕망을 억압하는 메커니즘이지만, 넓게는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손, 눈, 머리의 움직임처럼 생각이나 행동을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올리지 않고 자동으로 처리하는 메커니즘이다. 의식할 수 있는 생각과 행동은 모두 넓은 뜻에서 의식할 수 없는 자동 처리 과정을 바탕으로 일어난다고 볼 수도 있다.
창조적 아이디어도 우리가 의식할 수 있게 떠오르기 전에는 무의식의 과정을 거친다. 따라서 창조적 아이디어를 얻는 능력을 기르려면 무의식과 환각체험을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환각 체험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사이버 공간의 체험이 무의식을 자극하여 정신 능력을 확장하므로 새 문화를 창조할 중요한 원천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이버 공간에서 정신은 현실에서 몸이 지닌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매트릭스'를 본 많은 관객은 사람이 90도로 누운 채 두 발로 벽을 타고 쏜살처럼 움직이고, 건물에서 건물로 날아가고, 총알을 피하는 등 만화 같은 황당한 장면에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나 사이버 공간은 기술의 뒷받침만 있으면 원칙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성립하는 문화는 몸의 한계에 얽매이지 않고 정신 능력을 펼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환각 체험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이 체험이 사람의 마음을 확장하기보다는 몸과 마음을 분열할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사람이 현실 세계에서 고통과 좌절을 겪으면서도 그럭저럭 살아가는 데는 자신에 대한 앎 곧 자의식이 바탕을 이룬다. 그리고 사람의 자의식에는 내 몸과 마음이 통일되어 있다는 생각이 기본으로 깔려 있다. 만일 몸과 마음이 분열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누구든 네오와 저항군처럼 당장 자기 몸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고 세상은 온통 제 몸 찾아 헤매는 사람들로 가득 찰 것이다.
@p73
사이버 공간의 환각 체험이 몸의 한계를 정신으로 극복한다는 것은 달리 보면 몸과 마음의 통일성을 깨뜨린다는 뜻이다. 매트릭스의 저항군은 현실 세계 속의 전함 기지 느부갓네살 호 안에서는 통일된 몸과 마음을 지니고 생활하지만, 사이버 공간 매트릭스 속에 있을 때에 비하면 무력하기 그지없는 몸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광케이블을 통해 몸에서 마음이 빠져나와 매트릭스 안으로 들어가면 총알을 피하고 심지어 말로 총알을 세울 수도 있다. 저항군은 대부분 이런 상황을 이해하고 적응하지만 몸과 마음의 분열을 인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에서는 결국 이런 분열과 이중 생활을 지겨워하고 못 견디는 등장인물이 저항군을 배신하는 역할을 맡지만, 현실에서 보통 사람의 모습은 배신까지는 아니더라도 몹시 괴로워할 것이다. 환각 체험은 몸과 마음, 생각과 행동의 통일성을 유지하기를 원하는 자의식의 눈으로 보면 방해꾼이거나 배신자다.
2.2 사람과 기계의 관계
사람은 애인 없이는 살 수 있어도 기계 없이는 살 수 없다. 하루 24시간 동안 직접이든 간접이든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사는 시간은 단 1초도 없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도 기계의 산물이다. 그러나 사람은 기계를 우습게 본다. 자존심 때문이다. 그래서 첨단 기계나 인공 생명체가 사람과 대결하는 영화가 많지만 사람이 지는 영화는 드물다. (매트릭스)도 마찬가지다. 과연 우리의 자존심은 정당한 것일까?
사회 구조론에 따르면 기술은 사회 구조와 사회 세력 관계에 맞추어 발전한다. 그리고 기술의 사용은 중립일 수 없으며 사용하는 사람과 사회 특히 자본의 논리에 따른다. 간단히 말해서 사회 구조론에 따르면 기술은 사람 하기 나름이다. 기술은 사람이 선용할 수도 있고 악용할 수도 있다.
(매트릭스)에서 인공 지능은 스스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회의 변화가 낳은 산물이다. 21세기 초에 완성된 것으로 설정된 스스로 생각하는 인공 지능은 20세기의 에너지 위기와 경기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정보 기술을 육성한 자본의 논리에서 비롯했다.
또 인공 지능이 인체 공장에서 사람들을 사육하는 목적도 천연 자원이 고갈되자 생체 에너지를 얻기 위한 것이다. 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사람과 사회가 인공 지능을 만들었고, 인공 지능은 사람과 사회가 만들어 놓은 자원 고갈이라는 환경 때문에 인체 공장과 매트릭스를 운영하는 셈이다.
@p74
저항군을 색출하고 박멸하는 임무를 맡은 한 요원의 말처럼, 사람은 바이러스 같은 짓을 하는 생물이기 때문에 인공 지능이 반란을 일으켰다. 기계는 결국 사람 하기 나름이다. 사람이 바르게 사용하면 기계가 보답하지만, 사람이 그르게 사용하면 기계는 보복한다.
한편 기술 결정론에 따르면, 기술의 변화가 사회와 사람의 변화를 낳는다. 기술은 자율적으로 변화한다. 간단히 말해서 기술 결정론에 따르면, 기계는 사람 하기 나름이 아니라 저 하기 나름이다.
맥루한에 따르면 기계는 사람의 확장이다. 안경은 눈의 확장이고, 자동차는 다리의 확장이며, 컴퓨터는 뇌의 확장이다. 기술은 끝없이 다양해지는 사람의 욕망을 채워 주는 것을 미끼로 사람에게 계속 새 기술을 개발하라고 요구한다. 사람 특히 두뇌는 이런 요구를 받아들여 끊임없이 새 기술을 임신하는 기술의 생식 기관일 뿐이다.
자율적으로 변화하는 기술이 사람과 사회의 변화를 주도한다. 사이버 공간 매트릭스는 네오의 인생을 평범한 회사원과 유능한 해커에서 저항군 전사와 메시아로 바꾸어 놓는다. 매트릭스는 네오뿐 아니라 요원의 생각도 바꾸어 놓는다. 저항군으로부터 인공 지능을 방어하도록 프로그램이 입력된 요원조차 매트릭스가 지겨운 공간이라고 실토한다.
영화는 기계가 '시스템 다운'이 될 때까지 저항군이 인공 지능에 맞서 싸울 것이라고 네오가 경고하는 데서 끝난다. 그러나 정보 사회의 현실과 미래에 비추어 보면 매트릭스와 인공 지능의 시스템이 끝장날 가능성은 없다.
맥루한은 사람에게 기계와 화해하라고 충고한다. 사람은 이미 정보 사회 이전부터 사이보그였고 정보 사회에서는 기계의 물결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 것이므로, 자신의 일부와 환경인 기계를 혐오하고서야 행복하게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기계와 대결하고 기계에 질 수 없다는 사람의 자존심은 자신을 파괴하고 불행을 자초하는 길이다.
기술 결정론은 사회 세력 사이의 대결이나 계급과 지위의 불평등을 적절히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단점이다. 영화에서도 인공 지능과 사람 사이의 대결은 뚜렷이 드러나지만 사람들 사이의 대립과 불평등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비록 정신만 살고 있는 사이버 공간 안에서도 사람들 사이의 대립과 불평등이 없을 리 없다.
@p75
한편 사회 구조론은 기술의 발전으로 생기는 이득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정보 기술이 발달하면 시민 사회가 활성화하고 불평등을 완화하고 복지를 개선하는 일도 가능하다. 인공 지능에 대한 사람들의 저항은 사이버 공간이 사람들 사이의 새로운 연대의 장으로 성장할 가능성도 시사한다 비록 저항군은 몇 명에 불과하지만 언제나 시작은 소박한 법이다.
3. 읽기 자료: 토플러의 '제 3의 물결'
1.새로운 종합
공장, 공장 만세! 지금도 새 공장들이 들어서고 있지만, 공장을 성역으로 만들었던 문명은 죽어 가고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세계 어딘가에서는 또 다른 청춘 남녀들이 떠오르는 제 3물결 문명의 심장부를 향해 차를 몰고 밤길을 달리고 있다. 제3물결 문명이 오고 있다. 말하자면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할 일은 내일을 추구하는 이 젊은이들의 노력에 동참하는 것이다.
만일 그들을 목적지까지 따라간다면 우리는 어디에 이르게 될까? 그곳은 불꽃에 휩싸인 우주 로켓과 인간 의식의 단편들을 대기권 밖으로 쏘아 올리는 발사장일까? 해양학 실험실일까? 원시 공동체일까? 인공 두뇌 연구팀일까? 광신적 종교 집단일까? 그들은 자발적으로 검소하게 살고 있을까? 그들은 기업체에서 승진 가도를 달리고 있을까? 그들은 테러리스트들에게 총을 밀반출하고 있을까? 도대체 미래는 어디서 만들어지고 있을까?
우리 스스로 이와 유사한 미래 탐험을 계획한다면 지도는 어떻게 마련해야할까? 미래가 현재로부터 시작한다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어떤 현재인가? 오늘날 우리의 현재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어린이들은 마약, 섹스 또는 우주선 발사 등에 관해 지나치게 익숙해 있고 자기 부모보다 컴퓨터에 관해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다. 그런데도 학교 성적은 떨어지고 있다. 이혼율이 상승하는가 하면 재혼율도 늘어나고 있다. 여성이 귄리를 획득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여권 반대론자들이 등장하고 있다. 동성연애자들이 권리를 주장하면서 떳떳하게 밀실에서 걸어나오는가 하면, 밖에서는 동성 연애 반대 운동가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p76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이 모든 제 2 물결 국가들을 사로잡고 있는 데도 실업은 계속 심화되어 모든 고전 경제학 이론이 빗나가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수백만의 사람들은 수요 공급 이론을 무시한 채 단순히 직장을 요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창의적이고 심리적 만족감을 누릴 수 있고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일자리를 요구하고 있다.
정치 분야에서는 각 정당이 당원의 충성심을 상실해 가고 있다. 한편 전 세계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세력을 떨치는가 하면, 바로 같은 시간에 범세계주의 또는 지구촌 의식이라는 이름 아래 국민 국가에 대한 공격이 격렬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치 모순에 직면하여 우리는 어떻게 추세와 역추세를 가려낼 수 있을까?
2. 지적환경
오늘날 우리는 제3물결 문명의 새로운 정보 영역을 구축해 가는 과정에서 우리 주위의 죽은 환경에 생명 대신 지능을 부여하고 있다. 이 혁명적 발전의 열쇠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컴퓨터다.
정보 영역을 철저히 변혁하다 보면 우리 자신의 정신 상태, 우리의 문제를 생각하고 정보를 종합하고 행동의 결과를 예상하는 방식 등도 변혁을 겪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오늘날 전혀 새로운 사회적 기억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매체의 철저한 탈대중화, 새 매체들의 발명, 인공 위성에 의한 지도 작성, 전자 검출기에 의한 환자 진단, 기업 문서의 컴퓨터화 등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문명의 활동을 극히 세부적으로 기록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 지구를 사회적 기억과 함께 잿더미로 만들지 않는 한 우리는 멀지 않아 거의 완전한 회상을 하는 문명을 이룩하게 될 것이다. 제 3 물결 문명은 4반세기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을 정도로 자신에 관해 더 많은 정보, 더욱 정밀하게 조직된 정보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제3물결의 사회적 기억은 단지 양적인 측면에서만 파악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금 인간의 기억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시회적 기억은 넓어지기도 하고 동시에 활성화하기도 한다.
@p77
이처럼 새롭게 확대된 기억이 활성화하면 새로운 문화적 에너지가 방출될 것이다. 컴퓨터가 순간 영상들을 일관성 있는 실재 모델로 조직하고 종합하도록 해 줄 뿐 아니라 가능성의 한계를 크게 넓혀 주기 때문이다. 도서관이나 파일 캐비닛은 생각할 능력이 없고 독특한 발상을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컴퓨터에 '생각할 수 없는 것' 또는 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도록 만들 수 있다. 이 때문에 실로 지금까지는 생각하지도 못했고 상상하지도 못했던 여러 가치 새로운 이론과 아이디어, 이데올로기, 예술적 안목, 기술발전, 경제 정치 혁신들이 쏟아져 나을 수 있게 되었다. 컴퓨터는 이처럼 역사 변화를 가속화하고 제3물결 사회의 다양화를 추진하는 원동력을 제공하고 있다.
3. 정신적 대혼란
지금처럼 많은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 심지어 교양인이라는 사람들조차 모순되고 혼란되고 불협화음을 이루는 여러 가치 관념의 대혼란에 빠져들어 정신적인 무력감을 드러낸 적은 일찍이 없었다. 여러 가치 세계관의 충돌로 인해 우리의 정신 세계가 뒤흔들리고 있다.
매일처럼 새로운 유행, 과학 발견, 종교, 운동, 선언문이 나타난다. 자연숭배, 초능력 전체론적 의학, 사회 생물학, 무정부주의, 네오 마르크스주의, 신물리학, 동양 신비주의, 기술 애호벽, 기술 공포증 등 수많은 사조와 반사조가 각기 말솜씨 좋은 성직자와 10분짜리 교도사에 의해 의식의 화면을 휩쓸고 지나간다.
이 같은 혼란의 대부분은 실제로 격렬해지고 있는 문화 전쟁 곧 신흥 제3물결 문화와 산업 사회의 기성 관념 사이의 충돌의 산물이다. 마치 제 2 물결이 전통적 사고 방식을 매장해 버리고 산업 사회에 대한 신념 체계를 보급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는 지난 300 년 동안 지배해 온 관념들을 뒤집어엎고자 하는 철학적 반란의 시초를 목격하고 있다. 산업화 시대의 핵심 사상들이 의심받고 외면당하고 자리를 빼앗기거나 더 크고 강력한 이론에 포섭되고 있다.
여러 사상의 이런 충돌을 가장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은 우리의 자연관의 변화다. 지난 10 년 동안 지구 생태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근본적이고도 위험성 있는 변화에 대한 반응으로 환경 보호 운동이 전세계적으로 퍼져 갔다. 그리고 이 운동은 단순히 대기 오염, 식품 첨가물, 원자로, 고속 도로, 헤어 스프레이, 에어로졸 등을 배격하는 운동만은 아니었다. 이 운동은 인간이 자연에 의존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 주었다. 그 결과 우리는 인간이 자연과 피비린내 나는 투쟁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대신 지구와 공존, 조화를 강조하는 새로운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적대적 자제에서 비적대적 자세로 변화해 가고 있다.
@p78
국민 국가의 위축은 제3물결이 밀어닥치기 시작한 후 등장하고 있는 새로운 스타일의 범세계적 경제의 출현을 반영하고 있다. 국민 국가는 국가 규모의 경제를 수용하기 위해 필요한 정치적 용기였다. 오늘날 이 용기들은 틈이 생겨 샐 뿐만 아니라 그 자체의 성공의 결과도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었다. 첫째, 국가 내에서 지역 경제가 성장하여 종전의 국가 경제의 규모와 맞먹을 정도가 되었다. 둘째, 국민 국가들이 일으킨 세계 경제의 규모가 폭발적으로 커져 종전에 볼 수 없던 새로운 형태를 갖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세계 경제는 이제 커다란 초국가 기업들이 지배하게 되었다. 세계 경제는 전자적 속도로 운영되는 각종 은행과 금융 산업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세계 경제는 어떤 국가도 혼자서는 관리할 수 없는 통화와 신용을 만들어 내고 있다. 세계 경제는 초국가적 통화로 나아가고 있다.
요컨대 우리는 지금 경제와 정치에서 조직과 이데올로기에 이르는 모든 차원에서 제 2 물결 문명의 지주인 국민 국가에 대해 안팎으로부터 격렬한 공격이 가해지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다.
과거에는 국가의 독립성이 산업화의 성공에 필수적이었던 탓으로 지금도 여러 가난한 나라들이 국가적 자기 동일성을 확립코자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지만, 바로 이 역사적 순간에 이미 산업주의를 벗어나 달려가는 부유국들은 국가의 역할을 축소하고 대체하거나 저하시키고 있다.
5. 미래의 퍼스낼리티
커뮤니케이션과 성격의 관계는 복잡하여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매체의 혁명은 정신의 혁명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제 2 물결 시대에는 사람들이 대량 생산된 이미지의 바다에 잠겨 있었다. 중앙에서 제작된 비교적 소수의 신문, 잡지, 라디오, TV 방송, 영화 등은 비평가들이 말하는 이른바 '단일체 의식'을 길러 주었다. 개인은 자신을 비교적 소수인 역할 모델과 비교하고 생활 양식을 소수의 선택된 가능성에 의거하여 평가하도록 끊임없이 권장되었다. 그 결과 사회적으로 용인된 퍼스낼리티 스타일의 폭이 상대적으로 좁아졌다.
@p79
오늘날 매체의 탈대중화는 사람들이 자신을 측정할 역할 모델과 생활 양식을 눈부실 정도로 다양하게 만든다. 더구나 새 매체는 완전히 형태를 갖춘 큰 덩어리의 이미지가 아니라 단편적이고 순간적인 이미지를 가져다준다. 우리는 여러 가치 중에서 선택된 일관성 있는 한 가치 자기 동일성이 아니라 여러 가치를 하나로 접합하여 만든 것 즉 외형적이거나 조립된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자기 동일성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우리는 이와 같이 노력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개성의 자각 즉 우리를 독특하게 만들어 주는 특성의 자각을 높인다. 그 결과 우리의 자아상도 변화해 간다. 우리는 개인으로 인식되고 또 취급받기를 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새로운 생산 체계가 더욱 개성화된 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시기에 일어난다.
제3물결의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매체는 우리 내부의 순수한 개인적인 것을 구체화해 줄 뿐 아니라 우리를 자신의 자아상의 생산자 또는 더 나아가 생산소비자로 전환하고 있다.
커뮤니케이션 혁명은 인간 각자에게 복잡한 자아상을 제공하고 인간을 더욱 분화한다. 커뮤니케이션 혁명은 인간이 여러 가치 자아상을 '시험'해 보는 과정을 촉진하고, 실제로 이미지의 연속을 통해 인간의 움직임을 가속화한다. 또 커뮤니케이션 혁명은 인간이 자신의 이미지를 전자 공학적으로 전세계에 내보내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인간의 퍼스낼리티에 어면 영향을 미칠지 아무도 모른다. 이전의 어떠한 문명도 이처럼 강력한 수란을 가져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점차 의식을 지배하는 기술을 소유할 것이다.
앨빈 토플러 지음, 이규행 옮김, '제3의 물결' '한국경제신문사, 1989'전체에서 뽑고 줄임
연습문계
1. 정보 사회
1) 정보 사회의 특징은 무엇인가?
2) 정치, 경제 문화면에서 정보 사회에 대한 낙관론의 근거는 무엇인가?
3) 정치, 경제, 문화면에서 정보 사회에 대한 비관론의 근거는 무엇인가?
2. 사이버 문화
1) 사이버 문화란 무엇인가?
2) 사이버 문화에 대한 낙관론의 주장은 무엇인가?
3) 사이버 문화에 대한 비관론의 주장은 무엇인가?
3. 사이보그
1) 정보 사회와 사이버 문화 속에서 사람이 사이보그가 된다는 주장의 의미는 무엇인가?
2) 사람이 사이보그가 되는 것에 대한 낙관론의 견해는 무엇인가?
3) 사람이 사이보그가 되는 것에 대한 비관론의 견해는 무엇인가?
4. 정보 사회의 전망
1) 다니엘 벨의 기술 결정론이 정보 사회에 대해 낙관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2) 허버트 실러의 사회 구조론이 정보 사회에 대해 비관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5. 사람과 기계의 관계
1)사회 구조론이 사람과 기술의 관계를 보는 눈은 무엇인가?
2) 기술 결정론이 사람과 기술의 관계를 보는 눈은 무엇인가?
3) '기계는 사람의 확장'이라는 맥루한의 주장은 무슨 뜻인가?
@p81
참고문헌
1. 권태환, 조형제 엮음, (정보 사회의 이해), 미래미디어. 1997.
정보 사회의 주요 특징을 이해하기 휩게 설명한 책이다. 특히 1부 '산업사회에서 정보 사회로'는 기존 사회와 관계 속에서 정보 사회를 자리매김 하고 있다. 1장 '정보화와 현대 사회'는 정보 기술, 새 매체, 사회 변동을 간단 명료하게 해설하고 있다. 2장 '정보 사회의 자리매김'은 정보 사회를 둘러싼 담론을 기술 결정론과 사회 구조론으로 정리하고 있다.
2. 송재희, 신동윤, 박영주 지음, (정보 사회가 오면 난 어떻게 되지?), 지식 공작소, 1995.
정보 사회에서 일상 생활의 변화를 알기 쉼게 풀이해 놓은 책. 정보 사회, 사이버 문화 등의 개념을 어렵게 느끼는 신입생이 부담 없이 인고 이해할 수 있다.
3. 홍성태 엮음, (사이보그, 사이버 컬처), 문화과학사, 1997.
정보 사회에서 문화와 인간의 변모에 관한 글들을 엮어 옳긴 책이다. 사이버 문화와 사이보그를 획기적인 변화로 보는 관점을 비판하는 글들이 대부분이다. 페니의 '계몽 기획의 완성으로서 가장 현실'은 사이버 문화가 몸과 마음의 분열을 낳을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한다. 미첼의 '사이보그 시
민'은 정보 사회에서 사람이 사이보그로 변신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4. 산드라 헬셀, 주디스 로스지음, 노용덕 옮김, (가상 현실과 사이버 스페이스), 세종대학교 출판부, 1994.
가상 현실에 관한 다양한 담론을 균형 있게 요약 정리한 책이다. 특히 1부는 가상 현실에 관한 이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마이론 크뢰거의 '인공현실 과거와 미래'는 가상 현실 개념이 발전해 온 역사 배경을 설명하고있다. 마이클 하임의 '가상 현실의 형이상학'은 가상 현실이 창조적 상상
력을 자극함으로써 실제 현실에서 인간이 직면한 실존적 특징들을 극복할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p82
5. 앨빈 토플러 지음, 이규행 옮김, (제 3의 물결), 한국경제신문사, 1989.
대중이 읽기 쉬운 책을 쓰기로 명성이 높은 토플러가 정치, 경제, 문화, 사상 등 여러 방면의 지식을 동원하여 산업 사회에서 정보 사회로의 변화를 '제 3 물결'이라 규정한 책이다. 토플러는 제3물결 문명에 대해 낙관론을 펼치고 있다.
6. 허버트 실러 지음, 양기석 옮김, (문화: 공공 의사 표현의 사유화), 나남, 1995
정보 사회와 문화 산업에 대한 비관론을 대표하는 책. 문화 산업, 공공 정보, 공공 의사 표현의 공간 등이 상업화하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을 정치 경제학의 관점에서 비판하고 있다.
7. 다니엘 벨 지음, 서규환 옳김, (정보화 사회와 문화의 미래), 디자인하우스, 1992.
정보 사회와 미래 문화에 대한 낙관론을 대표하는 다니엘 벨의 논문들을 모은 책. 그러나 벨은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근거한 소박한 기술 결정론이나 낙관론과 거리를 유지한다. 4부에서 정보 사회 곧 후기 산업 사회의 문화를 논평하면서 모더니즘 운동이 자본주의 논리와 모순된다고 비판한다.
8. 비디오 테이프들: (매트릭스). (래리 워쇼스키, 앤디 워쇼스키), (블레이드 러너) (리들리 스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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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II 부 인간의 이해
제1장 인간이란 무엇인가?
제2장 성과 사랑의 철학
제3장 더불어 사는 삶--동양의 지혜
@P85
제1장 인간이란 무엇인가?
개관
인간성에 대한 이론들은 일상의 삶의 문제에서부터 정치 경제적인 이념 체계에 이르기까지 밀접한 상호 연관을 가지면서 인간의 삶과 사회 관계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따라서 인간성에 대한 탐구는 인간 삶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한 기본적이고도 합리적인 토대가 된다. 본 장에서 다루는 인간성에 대한 철학적 탐문은 특정의 이론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입장들을 분석 비판 평가함으로써 인간성에 대한 균형 있는 관점에 다가서고자 하는 것이다.
우선 살펴볼 것은 인간의 합리적, 사회적 본성을 주장하는 입장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고전적인 사상가들이 이 입장에 속한다. 그리스 전통을 대표하는 플라톤은 우주와인간을 관통하는 조화와 질서의 본성으로서의 이성에 따르는 삶을 본성에 따르는 정의로운 삶이라고 주장한다. 이성주의뿐만 아니라 경험주의 계열의 공리주의 또한 인간의 사회적 본성에 대한 신뢰를 갖고있다. 쾌락주의로 분류되는 공리주의가 이러한 입장으로 분류되는 데에는 공리주의가 인간의 사회적 특성으로서 이른바 효용의 원리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밖에 마르크스의 입장 또한 인간의 합리적 본성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를 전제하고 있다.
둘째는 인간의 이기적, 충동적 본성을 주장하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근세 자연과학적 성과 특히 진화론의 등장과 함께 더욱 강화된 설득력을 행사하면서 오늘날 지배적인 인간관으로 자리잡았다. 이 입장에 속하는 사상가로서 고전으로는 고대 소피스트, 근세에 이르러서는 홉스를 대표적인 사상가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입장의 가장 대표적인 사상가는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에 대한 통찰력 있는 분석을 통해 전통적인 이성주의적 인간관을 깨고 충동적 이기적, 공격적 인간관을 내세운다. 이러한 프로이트 인간 이해는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더더욱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오늘날 욕망에 관한 철학적 탐구의 기초가 되고 있다.
@P86
(주제 토론)에서는 인간성에 관한 사르트르의 입장과 사회생물학의 입장이 소개된다. 이 두 입장은 전자가 비결정론을, 후자가 결정론을 표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립적인 성격을 갖는다. 특히 신자의 사회생물학적 입장은 현대 분자 생물학의 발달에 힘입어 대두된 최근의 주장들로서 아직도 그를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다 (읽기 자료)는 인간성의 그늘과 양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두 가지 다른 주제의 글들을 제시하면서, 인간의 증오 심리가 갖는 사회 관계적 측면과 생물학적 사실로는 해명하기 힘든 인간성 내부의 심오하고도 존귀한 측면 등을 함께 음미해 본다.
1. 기본강의: 인간 본성의 제 문제
1. 인간이해의 중대성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간 자신에게 던져진 물음 중 가장 중대하고도 심각한 물음의 하나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 물음은 인간 역사가 존속하는 한 궁극적인 해답이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물음은 결코 중단되거나 포기될 수 없는 물음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인간 존재는 기본적으로 그러한 도정 속에서 부단히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기획하면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될 실천적 자의식을 갖는 주체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무엇이냐 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들은 시대와 민족, 역사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견해들이 있어 왔고, 그에 따라 인간의 삶이 지닌 여러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도 심지어는 대립적일 정도로까지 차이를 보여 왔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 자체가 인생관, 세계관, 이데올로기 등은 물론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예술, 종교 등 삶의 제반 문제들의 성격과 해결책을 규정짓는 중요한 관건이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렇다고 이제 우리가 인간에 대해 철학적으로 살핀다는 것이 어떤 특정의 인간 이해에 다다르고자 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철학적 작업과 마찬가지로, 다만 인간 삶의 문제에 대한 합리적 해결책을 모색한다는 차원에서 인간 이해와 관련한 다양한 견해들을 비판적으로 탐구하고 음미하고 평가하는 일이 될 것이다.
@P87
2. 인간의 합리적, 사회적 본성
2.1 고전 고대 사상
인간에 대한 견해들은 시대나 장소 그리고 입장에 따라 천차만별일 수 있지만, 우리가 가장 많이 들어 온 인간에 대한 가장 일반적이고도 고전적인 명제를 꼽으라면 다름 아닌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는 말일 것이다. 이 말은 이른바 전통적인 인간관 즉 합리적, 이성적 인간관을 단적으로 대변해 왔다. 합리적, 이성적 인간관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인간은 본성적으로 충동적이기보다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이성에 따라 사는 삶이 행복하고 선한 삶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도 갖추고 있다. 인간이 사회 생활은 물론 도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도 다 그런 까닭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른바 고전적인 고대 사상 대부분은 인간에 대한 이와 같은 신념 위에 서 있다 서양사상의 뿌리라고 하는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Platen)사상이나 동양사상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고대 선진 유가의 공자, 맹자사상은 그와 같은 인간관의 고전적인 뿌리로서 상당한 유사점을 공유하고 있다 그들은 우선 자연파 인간을 분리하지 않는다. 자연은 조화와 질서를 갖추고 있는 영원한 것이며, 인간은 그러한 자연의 일부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연의 조화와 질서의 원리가 다름 아닌 도이자 이성(nous)이다. 따라서 우주와 자연의 원리에 일치하는 삶이 가장 행복한 것이고 선한 삶이며,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내 안에 존재한다. 원형이정이 천도의 원리라면, 인의예지는 그것에 상응하는 인간의 도리이며 천도지상 인의예지 음지재우, 우주를 조화로운 코스모스로 만든 우주 영혼 데미우르고스(Demiourgos)는 내 영혼(Psyche)의 본(paradeigma)이다. 특히 천성에서 부여받은 본성으로서 인은 본래 씨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장차 터져서 나무로 자라고 개화할 가능성을 내함하고 있는 것이며, 인간은 이미 이성에 따라 욕망(epithymia)을 다스리며 살아갈 수 있는 절제 능력(sophrosyne)을 갖고 있다. 그리고 개인이나 사회나 그와 같이 천성에 일치하는 본성에 따라 조화와 질서를 갖춘 모습이 군자이자 정의로운(dikaios)사람이요, 덕이 지배하는 바른 사회이자 바른 국가다.
@P88
이러한 인간의 선성은 동양의 대승불교에서 극대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불교는 모든 인간이 원대하고도 지고한 참된 실재이자 자연적 선성으로서 불성을 갖고 있으며 누구나 다 자기의 힘으로 그 불성을 깨달아(자정기의)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서양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또한 플라톤의 전통을 이어받아 행복(eudaimonia)이란 다름 아닌 인간의 기능 중 가장 자연적 본성에 가까운 이성의 기능을 잘 발휘하는 것이고 그 기능의 습관적 발휘 능력이 곧 덕(arete)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이성주의적 전통은 서양에서 스토아(Stoa)철학에 이르러 더더욱 철저해져서 자연 자체를 로고스(logos)와 일치시켜 자연학은 동시에 윤리학으로서, 공히 이성에 기초한 삶의 태도의 확립과 지혜의 도달을 목표로 하였다. 곧 자연의 로고스는 인생의 로고스이며, 그에 따라 인생의 목적은 자연의 로고스라는 지(지)를 갖는 것이자 그 지에 따라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부동심(apatheia)의 경지이다.
물론 이와 같은 고전적 고대 사상 즉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그리스적 인간관이나 고대 선진 유가의 인간관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인간 일반을 두루 포함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인간 일반에 대한 이해로서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고대의 철저한 신분 사회에서 노예는 인간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마소와 같은 존재였고 특히 플라톤은 비록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 두긴 했을지라도 기본적으로 인간 종의 선천적 차별성에 기초한 우생학적인 관점을 갖고 있었다. 특히 인류의 반을 차지하는 여성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지 수 만년 이래 거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남성보다 열등한 인간으로 너무도 당연시 여겨져 왔다. 예컨대 20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졌다는 사실은 인간으로서 여성이 얼마나 오랫동안 열등한
존재로 여겨져 왔는가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P89
2.2 근세 이성주의
그러나 이와 같은 고전 고대의 이성주의적 인간관은 서양의 경우 16세기 르네상스를 거쳐 당시의 인문주의, 종교 개혁, 자연과학의 기초를 제공하였고, 나아가서 계몽주의 사조 및 근세 이성주의 또는 합리주의 전통에 뿌리가 되었다. 물론 이성적 존재로서 근세의 인간 개념은 고대 그리스적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지는 않았다. 즉 고대 그리스 사상에 의하면 인간 이성은 인간의 본질인 동시에 우주의 본질로서 세계 이성과 동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근세에 이르면 인간의 주체적 자아 개념이 등장하고 자연과 인간, 주객의 분리가 진행됨으로써 그리스적 이성은 곧 인간 자아의 주체적 이성으로 치환된다.
근세 이성주의(rationalis)의 선구격인 데카르트(R. Descartes)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라는 유명한 명제는 확실성의 기초가 더 이상 신적 존재가 아닌 (생각하는 나) 즉 이성적 사유주체로서 인간임을 선언하는 것이었고, 보편적 도덕법의 존재 및 그 실천의 필연성을 논증함으로써 인간의 도덕적 완성 가능성을 꿈꾼 칸트(I. Kant)의 도덕철학 또한 인간성 내부에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도덕적 자율 능력으로서 실천 이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통해 성립 가능한 것이었다.
이상에서 보다시피 동서양의 고전 고대 사상에서 근세 이성주의에 이르기까지 이성주의 전통 위에 서 있는 사상들은 대부분 인간의 합리적, 이성적 성격에 대한 굳은 신뢰를 갖고 있고, 그것의 존재와 근원에 대해서도 형이상학적으로건 종교적으로건 선천적인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특히 서양의 이성주의적 전통은 기본적으로 관념론적 성향을 짙게 드러내고 있다.
@P90
2.3 공리주의
그러나 인간 본성이 합리적이고 사회적인 삶을 위한 적극적인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입장은, 이상에서처럼 이성주의 전통에서만 엿보이는 것은 아니다. 굳이 형이상학이나 종교를 동원하지 않고서도 우리의 삶을 경험적으로 잘 헤아려 보면 인간이 그런 대로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나음대로 사회를 잘 꾸려 나가는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을 표명하는 대표적인 입장이 곧 철학사적으로 경험주의(empiricism)와 쾌락주의(hedonism) 전통으로 분류되고있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의 입장이다 공리주의에 의하면 우선 인간성이 선천적인지 아닌지, 그것이 선한지 악한지 그것은 알 수도 확인할 수도 없다. 다만 우리가 경험적으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인간은 모두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멀리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성의 기본은 쾌락의 추구이다 이처럼 공리주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인간 심리에 대한 쾌락주의적 전제에서 출발한다.
공리주의의 이러한 출발은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공리주의적 이해가 과연 가능할까라는 의심부터 생기게 한다. 왜냐하면 인간 각자의 쾌락 추구는 서로간에 상충하기 마련하고, 그 상충은 사람들 간에 이기적 갈등과 반목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리주의 사상은 비록 쾌락을 행위 동기의 기초로 간주하고 있긴 할지라도 그 행위 과정에 인간의 합리적, 사회적 특성이 깊숙히 매개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즉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되 쾌락을 늘리려는 자기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일으키면 그것이 나에게도 결코 쾌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구체적인 경험적 삶의 과정에서 터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비근한 예로, 기다리는 것이 힘들어 새치기를 하면 그때는 편해도 결국은 자기에게 해로 돌아오므로 결국 줄서는 것이 나는 물론 우리 모두에게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이 나에게나 우리 모두에게 효용있는 것임을 인간이라면 경험적으로 충분히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성에는 이렇게 경험적으로 체득된 합리적 사회성의 원리가 자리하고 있다.
@P91
이렇게 터득한 원리가 곧 공리주의의 대성자 벤담(J. Benthal)이 말하는 효용의 원리 (the principle of utility)이다. 즉 벤담은 사회 협동체 내에서 인간성의 구조가 필연적으로 효용의 원리를 받아들이도록 되어 있으므로 인간은 쾌락을 목적으로 하더라도 그것은 결과적으로 관계자의 쾌락까지 포함하는 공중적 쾌락이 될 수 있다 이러한 한, 사회 협동체 내에서 비록 서로가 쾌락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가능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그러한 인간 특성에 부합하는 가장 바람직한 사회적, 도덕적 선이다.
요컨대 쾌락 추구라는 이기적 행위를 긍정적으로 도덕적 행위 양태 속에 수용하고자 하는 벤담과 밀(J.S. Mill)의 공리주의 사상은 자유 방임적인 이기적 이윤 추구가 곧 국가적 부의 증대로 여겨졌던 당시 영국자본주의의 낙관적인 전개 상황에서 성립된 사상이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초기 자본주의의 이러한 전개는 이내 사회적 빈부 격차의 심화와 그에 따른 갈등을 증폭시키면서 한계에 부딪치고 급기야 사회주의 사상을 태동하는 배경이 된다. 이렇게 보면 공리주의 인간관은 효용의 원리에서 보여지듯 벤담 자신이 살던 초기 자유방임주의 시대 영국인들이 누리고 있었던 사회경제적 안정을 기반으로 성립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공리주의는 자유주의(liberalism) 사상으로서 이기심의 공존 가능성을 기초지은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사상인 까닭에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자유주의 윤리 사상 대부분은 공리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2.4 마르크스주의
공리주의가 주장한 인간의 합리적, 사회적 특성을 자유주의 사상이라는 범주 속에서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갖는 개인주의적 특성과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이해하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타파를 주장하고 나선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인간의 합리적, 사회적 특성을 이해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물론 근세 사회주의 사상의 선구인 마르크스(K. Marx)는 인간성이란사회 관계의 변화와 맞물려 형성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사회 관계와 무한한 어떤 고정적인 또는 선천적인 인간의 본성 같은 것을 명시적으로 주장하진 않았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최초의 원시적인 사회 관계에서 리고 종국적으로 도래할 이상적 사회 관계에서 인간이 갖는 사회적 삶에 대한적극성과 합리성을 굳게 믿고 있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원초적인 사회관계 속에서 인간성은 근본적으로 이웃에 대해 선하고 우애적이며 협동적이었다.
@P92
그러나 사회적 생산 관계에서 사적 소유의 발생이 그러한 인간성을 왜곡시키기 시작했다. 사적 소유는 개인에게 타인에 대한 사회적 지배를 발생시키고 개인은 그 지배를 통해 더욱 이웃을 해치게 되며 그 사적 소유의 증대 과정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그 소외를 창출했다고 여겨지는 계층에 대해 적대감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 관계는 더더욱 배타적이고 경쟁적인 관계로 그리고 사회 관계적으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악순환 된다 그것의 가장 극대적인 모습이 자본주의적 사회 관계이다. 따라서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 모든 재화 및 생산 수단을 공유하는 사회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이러한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즉 마르크스는 그와 같은 공산적 사회 관계가 수립되면 사회 구성원 누구라도 그 공유된 생산 수단과 물적 생산물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됨에 따라 공동체적인 상부상조적, 협동적 본성이 고양되고, 나아가 인간 모두가 그 본성에 부합한 사회경제적 구조를 갖게 됨으로써 그들의 이웃과 아무런 갈등 없이 평등하게 최선의 자기 능력을 발휘하며 자신을 실현하는 이상사회가 정착될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프로이트(S. Freud)에 의하면, 사적 소유욕은 인간이 갖는 본능적이고 근원적인 공격적 성향의 일부이므로, 그것을 변화시킨다 해도 그 근원적인 본능적 공격욕은 여전히 본성 속에 자리잡고 있다. 이 본능은 사적 소유의 결과로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소유 개념이 성립되지 않은 원시 시대부터 인간 내부에 본유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유아는 출생시 식욕, 성욕 등기본적인 생물학적 본능뿐만 아니라 호전적 공격욕도 함께 가지고 태어난다. 그것은 결코 사회 관계의 변화와 맞물려 형성된 것이 아니다. 요컨대 프로이트에 의하면 최소한 심리학적 측면에서 마르크스의 견해는 인간성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낙관적인 환상에 기초하고 있다.
@P93
3. 인간의 충동적, 이기적 본성
3.1 동물적 존재로서의 인간
인간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본성을 갖는 존재라는 주장은 역사적으로 매우 뿌리가 깊고, 특히나 동물적 존재와 차별되는 인간 고유의 존엄성과 품위를 근거 짓는 사상적 기초가 되어 왔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대한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들은 앞에서 살펴보았다시피 대부분 형이상학 내지 종교적인 관점에 기초하고 있는 까닭에 근세 자연과학의 발달 이후 과학적 실증주의 의식이 증대된 오늘날에 이르러선 그 설득력이 급속하게 퇴색하고 있다. 특히 인간 존재를 단지 여타 동물과 같은 진화 과정상의 동물적 존재로 위상지은 다윈(C. Darwin)의 진화론이 등장하면서부터 고전적인 관점들은 더더욱 의심스러운 것이 되어 버렸다.
다윈에 의하면 인간은 더 이상 신적인 존엄성을 나누어 갖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여러 고전적인 사상가들이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으로서 하나 같이 주장해 온 빛나는 이성조차 더 이상 선천적인 것도 특별한 것도 아닌 그저 동물적 특성으로서 진화 과정 속에서 자연 선택적으로 생겨난 것일 뿐이다.
@P94
인간은 기본적으로 다른 동물들과 같이 동물적 특성을 공유하는, 본성적으로 이기적이고 충동적이며 공격적인 존재이다. 요컨대 인간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로 파악하는 것이 고전적이고도 전통적인 인간 이해였다면, 인간성의 이기적, 충동적, 공격적 특성은 이제 우리가 앞으로 살펴볼 오늘날 인간 이해의 기본 요체가 된다.
물론 고전 고대 시대는 물론 이성주의가 지배했던 근세에도 인간성에 대한 이기적, 충동적 측면을 주장한 사상이 있어 왔다. 이기적 행복론의 뿌리 또한 매우 깊다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 고르기아스(Gorgias)는 탐욕적 이기심이 오히려 자연에 부합하는 인간의 떳떳한 본성이라고 주장하였고, 나아가 트라시마코스(Trasymachos)는 정의롭게 살면 결과적으로 나는 손해만 보고 그저 강자나 남 좋은 일만 해 주는 꼴이므로, 내가 행복해지려면 철저히 내 이기심에 따라서만 행위해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가르쳤다. 그리고 탐욕과 이기심을 본래적 본성의 타락이자 극복의 대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의 소피스트와는 성격이 다르기는 하지만, 종교적으로 기독교는 인간의 탐욕과 자만심의 근거이자 도저히 스스로의 힘으로는 제거할 수 없는 인간성의 뿌리 깊은 근원으로서의 원죄를 내세웠다 특히 이러한 기독교적 인간관은 근세 자연과학적 인간관이 배태되기 이전까지 천여 년 동안서구의 인간관을 지배하여 왔다.
3.2 홉스
특히 근세에 이르러 이성주의적, 합리적 인간관이 득세하던 시절에 유물론적 입장에서 인간의 이기적, 공격적 본성을 주장한 홉스(T Hobbes)의 견해는 오늘날 개인주의 정치 사상과 직결되는 선구적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하다. 우선 홉스에게서 인간은 원자와 같이 제한된 공간 속에서 운동하고 서로 충돌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곳에선 자기 보존의 충동만 있고 그에 따라 그 충동은 서로에 대한 위협이다. 그러므로 누구든 힘을 갖고자 하며, 그것은 자랑도 수치도 아닌 그저 필요하기 때문에 요구되는 본성이다. 개개인은 힘이나 교활성에 있어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누구도 안전할 수 없으며, 이 때문에 이들이 처한 상황은 이들의 행위를 규제할 시민적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가 된다.
물론 홉스 또한 인간이 이성을 갖는 존재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홉스에게 있어서 이성은 욕망을 절제하거나 통제하는 기능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보존의 보편적인 법칙에 따라 안전 보장의 추구를 보다 효과적으로 만드는 일종의 규제적 통찰이자 계산 능력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제 홉스는 이 영악한 이성적 규제력을 근거로 야만과 갈등으로부터 사회적 공존의 상태로의 전환을 시도한다는 점이다. 즉 인간은 이성의 계산 능력을 통해 통제력 없는 자기 보존욕이 결국 모두의 자기 보존 자체를 위협하는 것임을 자각함으로써 사회조직의 강제적 질서 및 국가의 강력한 통치 권력 그리고 그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이 그들 자신들의 보존을 위한 사회 관계적 원리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홉스의 견해는 언뜻 군주제적인 절대 권력을 합리화하는 이론인 듯 보인다.
@p95
그러나 홉스의 국가에는 군주제가 의존하고 있는 몰 개인적 충성심과 희생적 헌신이 자리할 수 있는 근거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홉스의 강권 국가는 강제가 아닌 철저히 계산된 개인들의 이기적인 자기 보존욕에 기초한 상호 계약의 산물로서 성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홉스의 사상이 실제 내용에 있어서는 철저히 근세 사회 사상의 기초로서 개인주의와 사회 계약 사상에 기반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렇게 보면 개인들의 계산된 이기심들의 계약에 의해 간신히 결속된,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가장 강력한 통치력을 갖는 국가로 계약된 홉스의 국가는 내용적으로 개별적인 이기심의 총합을 반영할 뿐이다 요컨대 홉스에 의하면 그러한 이기적 개인들의 강권을 통한 상호 계약적 공존이야말로 이기적 인간 본성들의 사회화를 위한 최선의 길 즉 자연 상태로부터의 최대의 구제책이자 목표로서의 자기 보존의 실현이다.
사실상 인간의 이기적 본성과 그 구제책에 대한 홉스의 노골적인 견해는 그 이후 지배적인 사회 사상으로 제기된 자유 방임주의가 잉태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가히 예언자적인 간파였다고 평가될 수 있겠다.
3.3 프로이트
그러나 본 절 서두에서 언급하였듯이 인간성의 이기적, 공격적 측면에 대한 과학적 성격의 견해들은 진화론의 등장 이후 인간에 대한 동물적 이해가 증대되면서 급진전되기에 이르렀고, 급기야 그러한 견해들은 자신들의 과학적 근거들이 갖는 설득력에 힘입어 오늘날에 와선 인간성에 대한 지배적인 견해로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다. 특히 정신분석학적 심리학에 기초하여 인간의 본성을 파헤친 프로이트(S. Freud)의 견해는 그러한 견해들 중 학문 전 분야에 걸쳐 가장 폭발력 있는 영향력을 끼친 대표적인 사상이다.
@P96
프로이트에게 있어 인간 본성의 가장 본질적인 것은 충동(libido)이다. 흔히 자아라고 여겨져 온 것은 현실계의 계속적인 영향에 의해 겉으로 드러난 무의식 속에 있는 충동의 발전적 형태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진적인 발전 과정에서조차 충동 가운데 일부 자질만이 잠재 상태로 변이되어 자아 속에 흡수되는 것이고, 다른 자질은 여전히 본성의 핵심적 요소로서 충동 속에 변함 없이 존속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종래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원리로 알려진 의식적 자아(ego)는 사실 자주적인 행위 주체가 아니라 무의식 내의 본능적인 공격적 충동 욕구인 이드(id)와 전통과 관습 도덕 및 부모로부터 영원한 내면적 무의식적 억압인 초자아(superego) 사이에서 그것들의 지시에 끌려 다니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진 인간 개념 즉 인간이란 합리적 목적을 위하여 성실하게 노력하는 지각 있는 존재라는 오래 된 신념은 극히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인간 이해에 불과하다. 의식의 세계가 마음의 세계 전체 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물 위에 나타난 태산의 일각처럼 조그마한 것에 불과하다. 보이지 않는 무의식이 마음의 진짜 주인공이다.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 듯한 대의 명분을 따라 행동하는 듯 보이나 그 한층 깊은 동기에는 어떤 동물적인 충동 특히 성적 충동이 자리잡고 있다. 소위 도덕적이라고 찬양을 받는 행위란 금지된 것을 어기는 것에 대해 가해지는 초자아로부터의 억압과 질책에 대한 무의식적 위장반응 즉 가장된 행위이다. 즉 도덕은 칸트가 주장하는 것 같은 어떤 선천적 원리에 근원을 둔 것이 아니라 충동적 삶의 욕망과 사회적 조건들과의 관계 속에서 발달된 사회 형성물로 이해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른바 양심이란 것 역시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억압된 욕망들이 무의식에 살아남았다가 성인이 된 후 의식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것에 대한 일종의 저항 심리적 자기 공격성 즉 죄의식일 뿐이다. 요컨대 인간의 선천적이고 독립적이며 본능적인 기질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근원적인 자기 보존적 특성 즉 공격적 성향뿐이다.
인간의 본질을 의식적 자아가 아닌 무의식적 충동에서 찾은 이와 같은 프로이트의 인간관은 전통적인 이성주의적 인간관의 측면에서는 실로 충격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이성에 기초한 고전적인 윤리 및 정치, 역사 사상 모두를 뿌리째 흔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사상은 인간의 행위 동기 및 병리적 심리 특성을 진단하고 해명하는 심리학 이론으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과 사회 관계에 대한 설명 이론으로서 특히 이성과 권력 전통과 도덕의 이름으로 개인 및 사회에 가해진 억압 구조를 폭로하고 해명하는 철학적 사회 사상으로서 광범위한 지지를 얻으면서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물론 그가 인간의 행위 동기의 본질로서 주목한 성적 리비도는 아들러(A. Adler)를 비롯한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인간 의지의 능동성을 간과한 채 지나치게 병적 특성에 집착한 결과로 비판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이른바 정신분석학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 자본주의적 경쟁 사회에서 인간 및 사회, 역사를 이해하는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적, 심리학적 조류의 하나로서 확고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p97
4. 인간의 이기적 욕망과 현대
그러나 다윈의 인간 이해, 프로이트의 인간 이해가 오늘날 심대한 영향력을 갖고 발전하게 된 배경에는 20세기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지배력을 확대해 온 자본주의의 발달이 자리잡고 있다. 특히 자본주의의 내적 원리로서 인간의 이기심과 경쟁적 삶 속에서의 공격적 탐욕성 그리고 그로부터 초래되는 인간 소외와 정신 분열은 프로이트의 인간 행동 및 삶에 대한 이해와 직결되면서,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삶의 억압 구조와 한계를 해명해 주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간 삶에 있어서의 자본주의적 사회 관계의 내적 필연성을 뒷받침해 주기도 한다.
자본주의적 사회 관계가 전 세계를 지배하는 삶의 원리로 자리잡은 오늘날 이미 욕망을 부추기는 주체는 이른바 스타도 언론도 하물며 기업도 아니며 이들은 순진한 역할 대행자들 일뿐 진정한 주체는 자본주의의 생리이다. 오늘날 인간의 본성으로 너무도 당연시 받아들여지는 개인의 이기적 욕망과 탐욕성은 곧 자본의 탐욕적 공격성을 반영한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 속에서 인간이 누리는 물질적 풍요와 자기 성취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개인 및 사회가 겪는 소외와 정신 분열의 양태 또한 다름 아닌 자본주의적 생리의 필연적 반영임을 보여 주는 것이고, 나아가 그것은 자본주의 자체가 본질적으로 정신 분열적 속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P98
이런 점에서 인간의 본성에 관한 최근의 논의는 유행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의 욕망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른바 프랑스 사상가 푸코(M. Foucault), 들뢰즈(G. Deleuze), 라캉(J, Lacan)의 주장이 관심을 끌고 그 배경 이론으로서 스피노자(B. Spinoza), 니체(F. Nietzsche), 쇼펜하우어(A. Schophenhauer)가 주목받는 것도, 그리고 새삼스럽게 동양의 노자와 장자가 다시 논의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이것은 인간 본성의 문제가 삶의 문제와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고, 그와 같은 삶의 문제의 해결과 극복의 방향 또한 본성론적 논의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삶의 원리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과 모색이 함께 수행됨으로써 가능한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2. 주제토론: 인간성은 자유인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가?
1. 토론과제
다음의 글들은 인간성과 관련한 대조적인 입장을 보여 준다. 각 입장을 잘 읽고 그들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토론해 보자.
(가)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즉 실존으로서 인간 존재는 신이 창조한 것도 진화에 따라 생겨난 것도 아니며 또한 삶의 고정된 어떤 목표를 갖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당위적 진술도, 인간성에 관한 어떤 선천적인 결정론적 진술도 있을 수 없다. 인간은 순전하고도 무한대한 자유의 존재이다. 즉 인간은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이외의 어떠한 가치 기준도 본유적으로 갖고 있지 않으므로, 그 자신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인지는 순전한 자유의 지평에서 바로 그 자신이 결정해야만 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폐쇄되어 있고 결정된 본성을 지닌 즉자 존재로서의 동물과는 달리 대자 존재로서 자의식을 갖고 무한정으로 열려진 세계와 직면해 있는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삶은 부조리하고 이 세계 내에서 우리 자신이 전적으로 스스로를 돌볼 수밖에 없는 불안하고 버림받은 내던져진 상태에 있다 이때 불안은 외부의 대상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결정적으로 자기 자신의 행동을 예견할 수 없음을 의식하는 데서 온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순전한 자유를 의식한다는 것은 곧 (무)에 대한 의식이고 그럼으로 해서 인간은 고통스럽다.
@P99
(나) 살아 있는 각 개체는 잠시 태어났다 사라지는 덧없는 존재이고, 자손 대대로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유전자뿐이다. 즉 생명체는 유전자로 하여금 더 많은 복사체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와 준 매체로서의 형질이다. 따라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행동은 자기 보존을 목표로 하는 유전자의 명령에 의해 결정된다. 이런 점에서 인간과 동물은 자신의 유전자를 재생산하는 기계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들의 본성과 특징, 삶의 방식 모두가 생물학적 유전자에 의해 통제되고 결정된다는 점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예컨대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를 연구해 보면 두 종의 유전 정보 사이의 차이는 놀라울 정도로 적다.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만 있다고 여겨져 온 집단을 위해 개체를 희생하는 이타적 행동 역시 그들 모두의 유전자 속에 있고 그 유전자 자신을 안전하게 재생산하려는 프로그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 공동체를 위한 이타적인 행위조차 사실은 종을 보존하려는 유전자의 이기적인 성향에 의해 지시를 받은 것이다. 유전자는 한 개체가 희생되더라도 종에게 유괴한 쪽으로 행위 하게끔 지시하는 정보를 갖는 쪽으로 진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윤리적 행위나 사회적 행위도 결국은 진화 과정에서 생긴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최근 분자 유전학적 성과에 의하면 상대를 희생시키면서 무한정 증식하려는 이기적 유전자나 공격성 유전자에 이어 동성애 유전자의 존재까지도 확인되고 있다.
인간이라는 종의 성적 차이와 특징 또한 유전적 특징에 의해 결정된다. 남성이 여성보다 능력 면에서 앞선다는 생각은 단지 문화적 편견이 아니라 뇌와 생식기의 구조 차이에서 비롯된 생물학적 사실이다. 실례로 생물의 암컷이 만들수 있는 자손의 수는 한계가 있는 반면 수컷에는 이런 한계가 없는데, 이 생식능력의 차이가 곧 수컷이 암컷을 착취하는 출발점이다. 요컨대, 인간성은 이미 생물학적 유전자에 의해 선천적으로 정해진 것이다. 사회생물학자에 따르면 동물이든 인간이든 모든 행위는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
@P100
2. 기본 논증과 비판
2.1 내용 분석
(가)의 글은 20세기 프랑스의 실존주의 사상가 사르트르(J.P. Sartre)의 인간관을 담고 있다. 그는 단적으로 무신론적, 비결정론적 인간관을 피력한다. 굳이 인간에게 정해진 본성이 있다면 인간은 자유로서의 본성을 갖는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로운 만큼 불안하고 고독하다. 그리하여 인간은 때로는 자신이 자유롭지 않은 것처럼 가장함으로써 불안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한다. 종교는 그러한 도피의 대표적인 한 형태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기만 혹은 거짓 믿음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러한 자기 기만으로부터 빠져나와 오히려 '무'를 정면으로 순전하게 응시해야 한다. 다시 말해 자유를 의식하고 모든 순간 새로운 혹은 다시 새로워진 선택을 감행해야 한다. 이것이 순전한 자유로서의 인간 행동 즉 의식의 활동이다. 그리고 정신 상황의 모든 면, 구체적으로 말해 우리의 행동뿐만 아니라 우리의 태도와 감정과 우리의 성격까지도 우리 자신에 의해 선택된 것임을 받아들여야 하고, 또한 그럼으로써 그것이 우리의 순전한 책임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유의 불안으로부터 도피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무에 직면하는 순전한 자유 이것이 우리가 받아들이고 오히려 누려야할 인간의 조건이다.
한편 (나)의 글은 근세 이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룬 생물학적 성과에 기초하여 성립된 사회생물학의 기본 주장을 담고 있다. 월슨(E. Wilson)과 도킨스(R Dawns)는 이러한 사회생물학적 입장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사회생물학은 '다윈의 이론에 입각하여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의 사회적 행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다윈의 진화론적 자연선택설에 기초를 두고 있다. 자연선택설은 두 가지 내용을 가지고 있다. 첫째, 같은 생물 종 내에서 개체들 사이에 생존 경쟁이 일어나고 환경에 잘 적응한 개체가 살아남는다. 둘째, 각 생물 종은 늘 새로운 변이를 만들어 내며 각 변이는 가능한 한 많은 자손을 퍼뜨리려 하는데, 이 가운데 특정한 변이만이 자연적으로 선택되어 더 많은 자손을 퍼뜨리고, 이 과정이 누적되어 새로운 종이 탄생한다. 그리고 이러한 종의 진화과정 전체를 이끄는 기본 프로그램이 곧 유전자이다. 따라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삶의 양태 모두는 이러한 유전자의 프로그램대로 먹고 살고 사랑하면서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하도록 기획 결정된 것의 반영일 따름이다. 즉 인간은 유전자의 꼭두각시이다. 그리고 그러한 반응 구조 일체가 생물학적 물리 현상인 한 그 모든 내용들은 궁극적으로 인지과학 내지 신경과학으로 분석이 가능하고 동시의 유전자의 작동 원리로 풀이될 수 있다.
@P101
이렇게 보면 (가)글과 (나)글은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적 인간관은 철저히 비결정론적 입장이고, 이른바 사회생물학적 입장은 생물학적 결정론 또는 유전자 결정론이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후자의 사회생물학적 입장은, 오늘날 인문 사회파학의 발달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놀라운 진전을 보이고 있는 분자생물학 분야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개인주의 사상이 발달한 영미 쪽에서 인간 본성과 관련하여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입장으로저 현재 치열한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입장이다. 따라서 비판과 토론은 주로 그 후자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해 보기로 하자.
2.2 비판과 토론
2.2.1 사르트르의 입장
실존주의 자체가 20세기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서 나치즘과 파시즘을 비롯한 전체주의적 사상들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사조임을 고려하면, 사르트르가 왜 그와 같은 주장을 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사르트르가 주장한대로 인간성이 자유에 직면한 각 개인들의 선택에 의해 끊임없이 새롭게 창출된다는 생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간의 주체적 존엄성을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회복하고자 한 시도라는 점에서 사상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실상 인간성과 관련한 20제기의 지성적 풍토는 프로이트류의 정신분석학에서나 스키너류의 행동주의 심리학 모두에게서 보여지듯, 이른바 과학주의의 이름으로 인간성에 관한 결정론 사상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주의는 그 당시는 물론 지금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의 발달과 맞물려 인간의 물화와 비인간화 등 부정적인 영향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인간의 내면적 실존을 치열하고도 진지하게 바라보면서 그로부터 인간의 고유하고도 진정한 모습을 되살리고자 한 사르트르의 주장은 실로 20세기 휴머니즘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이었고, 특히 억압적인 사회 구조에 대한 그의 용기 있는 실천적 저항은 그야말로 행동하는 지성으로서의 모범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P102
그러나 죽음조차도 지성으로 극복하기를 주창하는 사르트르적 인간의 엄격성과 치열함은 아무래도 평범한 일상의 인간 모두가 갖는, 가져야 할 성격으로 보기 힘들다 대자와 즉자의 절대적인 구분 또한 일상적 자아의 의식 상태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고립적이다. 물론 인간은 사르트르의 말대로 자기 내면과의 치열한 싸움을 긴장스럽게 유지하면서 고뇌하고 선택하고 결단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자아에 대한 긴장스런 통제력을 풀어 버리고 자연적인 힘 앞에 스스로를 열어 둘 때 그 이상으로 의미 있게 행위할 수 있는 것이 또한 인간 존재의 특성이다. 예컨대 도가에서 말하는 무위자연적인 유유자적한 삶의 모습이라든지 불가적 해탈의 모습은 사르트르가 서 있는 불안하고 긴장스런 그러나 자유를 의식하는 그러한 인간의 모습과 사뭇 다르다.
2.2.2 사회생물학
오늘날 분자생물학의 발달에 기초하여 인성론과 관련한 새롭고도 강력한 주장으로 대두되고 또 그만큼 그것을 둘러싼 논쟁 또한 치열한 것이 사회샘물학적 입장이다 우선 사회생물학적 관점은 아래와 같은 측면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전통적인 인본주의 관점 내지 기독교적 관점은 인간이 다른 동물을 도살하고 지배하는 일을 정당화해 왔으나, 인간이나 다른 동물이나 차이점이 없다고 보는 사회생물학의 견해는 일단 그러한 인간의 권리를 박탈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생명 존중의 윤리를 강화할 수 있다. 더욱이 이것은 자연 또는 생태계 속에서 인간의 위치가 자연의 중심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일 뿐임을 일깨워 줌으로써, 탐욕적 삶의 부질없음은 물론 인간의 문명적 질서 역시 생태적 질서의 일부로서 다른 부분들과의 유기적인 고려 없이는 따로 유지될 수 없음을 과학적으로 깨닫게 해 줄 수도 있다. 나아가 사회생물학적 견해는 인간이 환경을 개발하고 훼손하기보다는 자연 앞에 겸허한 자세로 자연을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한 오늘날의 생태학적 세계관의 과학적 근거가 될 수 있다.
@P103
둘째, 학문의 통합성 측면에서 사회생물학은 두 개의 문화(인문과학과 자연과학)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을 실현한다. 사회생물학은 하등 동물에서 고등 영장류와 인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유전자에서 개체, 사회뿐 아니라 인간의 정신과 문화에 이르기까지 생물 사회의 진화와 조직화라는 모든 단계를 하나로 영어 통일적으로 설명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인간 사회와 윤리 그리고 문화까지도 생물학적 기초에서 분석하고 규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상 사회생물학적 입장은 인문 사회과학의 발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 나름의 놀라운 과학적 성과에 기초해서 인간과 사회에 관한 여러 가지 새롭고도 의미 있는 설명을 시도해 왔다. 예컨대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이라 믿어 왔던 언어나 사회 생활도 다른 동물 이를테면 침팬지 개미 벌, 새, 영양들의 세계에서도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인간의 사회적 삶의 제반 양태에 관한 전통적인 관점 특히 플라톤류로 대표되는 본질주의적 관점이 갖는 관념성과 추상성의 한계를 넘어 그것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 보다 설명력을 갖는 인간에 대한 과학적, 생물학적 이해의 폭을 넓혀 주었다.
그러나 사회생물학은 그것이 갖는 긍정적인 의미 이상으로 많은 문제점과 논쟁점을 갖고 있다. 첫째, 인간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생물학적 원리로 설명 할 수는 없다 동물 사회에 대한 연구가 인간 사회와 그 기원을 알아내는 데 유용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긴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인간이 생물학적 진화 과정을 통해 출현했다고 해서 인간에 관한 학문이 생물학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사고를 지배하는 뇌의 작용에 관한 생물학적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그 사실이 사람들 간의 사고의 다양성과 그 각각이 갖는 의미를 설명해 주진 못한다. 오히려 생물학적 객관성이라는 미명 아래 극히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사실을 전체에 대한 설명으로 조급하게 일반화하려는 데 따르는 위험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
둘째,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문화는 다른 동물 세계의 자연 선택적인 현상과는 다른 특성을 갖는다. 이를테면 동물 사이의 경쟁은 생존과 직결되지만 인간은 생존만을 위해 경쟁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기 실현을 위해서도 경쟁한다. 인간 사회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경제, 정치, 외교적인 복합적 요소들이 한데 얽혀서 일어나는 현상이지 단순한 생물학적 싸움이 아니다. 인간이 1.5 미터에서 2.0 미터 정도의 키를 갖는다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규정할 수 있지만, 실제 키가 얼마나 될지는 부모의 조건이나 영양 섭취와 같은 환경에 의해 좌우된다.
@p104
셋째, 생물학적 결정론은 인간사회가 갖고 있는 복합적인 문제를 단순화시키면서 문제 자체를 해소시킬 위험도 있다. 사회생물학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마다 지위와 계급이 다르고, 남자와 여자가 다른 것, 하물며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는 행위조차도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것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이른바 문화적 현상이라 불려지는 일체의 것을 생물학적 현상으로 치환시키는 환원주의(reductioNism)적 사고방식 위에 서 있다. 넷째, 사회생물학적 결정론에 따르자면 인간 사회의 변화는 유전자의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인간의 유전 형질은 수만년 동안 변함 없이 호모 사피엔스의 것을 보존해 왔다. 하지만 그 사이에 인간 사회에서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유전적 변화를 수반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더욱이 만족이나 쾌락, 슬픔과 연민과 같은 인간의 감정이나 도덕적 행위는 생물학적 차원만으로는 설명할 수 만다. 그 속에는 그 시대와 사회가 부여하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밖에 사회생물학이 갖는 학문적 통합성과 관련해서도 문제가 있다 물론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 학문 분과들을 통합하는 일은 필요하다. 각 분과가 제공하는 연구 성과의 도움을 받아 한 주제에 대해 좀더 명확하고 통일된 이해를 갖는 일은 의미 있다. 그러나 하나 하나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조건 통일시키는 일은 그대로 두는 것만 못하다. 사회생물학은 인간이 갖고 있는 복합적 특성을 통합적 관점이라기보다는 단지 그들 자신의 생물학적 관점으로만 해소시켜 버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위험성은 사회생물학적 관점이 갖는 이데올로기 정의에 있다 세상이 비열한 유전자들의 각축장이라면 '유전적으로 열등한 여성이 남성에게, 흑인이 백인에게 뒤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거나, '범죄는 사회적 불평등 같은 환경보다는 유전적 결함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는 '과학적' 주장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범죄가 유전적 특질이라면 교화나 학습이 강조될 이유가 전연 없다. 더욱이 게놈 프로젝트 등을 통해 유전자의 내적 구조가 드러나기 시작하고 그에 따른 유전자의 임의적인 조작 가능성이 확보된 오늘날의 과학 수준에서 볼 때, 유전자 결정론은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한 심각한 사회 윤리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사회생물학은 계급주의, 인종차별 남녀 불평등 제국주의 등 온갖 정치적 불합리를 지지하는 이론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현실적인 한계와 그로 인한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P105
아울러, 사회생물학의 입장이건 스키너(B. Skinner)류의 환경 결정론적인 입장이건, 인간성이 무엇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태도 자체는 상이한 지역, 상이한 종족들 간에 엄연히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구체적인 반대 사례들을 서로에 대해 갖고 있다. 이것은 결국 인간의 품성 및 지능이 어떤 특정 요소 하나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태도 자체가 온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요컨대 무엇보다도 원론적인 측면에서 인간성과 관련한 제반 학문적 성과를 균형 있게 종합하면 인간성의 형성에는 단일한 하나의 요소만이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학습, 본능과 유전 등 아주 복합적인 요인들이 공동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단일한 것이든 복합적인 것이든 간에 인간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요소들에 의해 인간의 품성 등이 완전히 결정되는 것만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판단하고 반성하며 숙고하는 주체적 힘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인간성의 형성에는 이러한 주체적 능력의 작용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결정적 요인만을 강조한다면 인간에게 그 자신의 선택에 대한 어떠한 도덕적 사회적 책임도 물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선택이란 그 개인이 택한 것이라기보다 그의 악한 품성을 만든 환경이라든지 선천적 유전자에 의한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판단하고 행동을 결단하는 개인의 주체적인 측면 그 자체가 이미 사회적 존재로서 간과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인 것임을 보여 준다.
사회생물학의 견해를 둘러싼 논쟁은 조금 단순하게 보면 타고난 유전적 요인과 살아가면서 배우는 문화적 요인 가운데 어느 것이 인간의 본질을 더 잘 설명해 주는가를 둘러싼 논쟁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나의 이익과 남의 이익이 부딪치는 상황을 자주 만난다. 대체로 나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도 남에게 이로운 행동을 해 본 적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내가 지하철에서 구걸하고 있는 사람에게 돈을 건넸다고 하자. 내가 이런 행동을 하게 된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불쌍한 사람을 도우려는 동정심 때문일까? 만일 동정심 때문이라면 다시 나에게는 왜 동정심이 있을까? 동정심이야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감정이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은 이타적 행동을 하게 만드는 동정심은 인간이 타고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한편 불쌍한 사람을 돕고 싶은 동정심은 내가 가정과 학교에서 배운 교육 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동정심이 살아가면서 배운 것이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인간의 성격과 행동에서 유전적 요인과 문화적 요인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에 관해서는 어느 한쪽 견해를 결정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절대적인 근거는 없다. 우리의 일상 경험과 이 문제에 관한 견해들이 낳을 사회적 결과도 어느 한쪽 견해를 결정적으로 뒷받침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해 어느 견해를 지지하는가에 따라 우리가 인간과 자연을 바라보는 눈과 가치관이 큰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따라서 어느 견해를 지지하는가는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그리고 또 하나 분명한 것은 최소한 사회생물학은 그들 자신의 입장이 왜 선진 자본주의 진영인 영미권에서 주로 지지를 받는지에 대해서 매우 설득력 있는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P106
3. 읽기 자료1: 인간성의 그늘-증오
나는 3년 전 존 월리엄 킹이 제임스 비어드 2세를 픽업 트럭 뒤에 매달고 약 5km를 달려서 결국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을 때, 킹의 머리 속에는 과연 무슨 생각이 있었을지 궁금하다. 킹이 친구들과 함께 비어드를 그렇게 죽인 것은 비어드가 흑인이기 때문이었다.
킹은 법정에서도 비어드의 가족에게 뭔가 할말이 있으면 해 보라고 하자, 그들을 향해 히죽히죽 웃으면서 상스러운 말을 해댔다. 킹의 증오는 무엇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을까 상대방이 유색 인종이라는 이유로 혹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런 사건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이런 사건을 저지른 사람들이 폭력을 통해 표현하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증오라는 것은 정확하게 무엇일까. 그 증오와 관련해서 우리가 하고 있는 역할은 또 무엇일까?
우리는 이런 종류의 범죄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 형법에 '증오 범죄'라는 새로운 죄목을 추가했다. 그리고 클린턴 대통령은 1999년 8월에 증오 범죄 관련법들을 확대할 것을 요구했다. 그로부터 몇 주 후에는 존 매케인 상원 의원이 '증오'가 미국 땅에 독을 퍼뜨리고 있다고 말했다. 언론도 증오 범죄를 강조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전국 대중 매체 데이터 베이스인 넥시스를 검색한 결과 1985 년에 증오 범죄가 11건이었다. 그런데 1990 년까지 검색 범위를 넓히면 이 숫자는 1,000건 이상으로 늘어난다. 1999 년 1월부터 6월까지 6개월 동안 증오 범죄를 언급한 기사는 7,000건이었다.
@p107
그러나 증오의 개념은 여전히 모호하다. 증오는 편견 완고함, 선입견, 분노, 타인에 대한 혐오감 등을 모두 합한 개념인가, 아니면 아주 구체적인 대상이 있는 생각이나 신념을 의미하는가. 전자의 경우라면 증오에 대항해 싸우겠다는 우리의 의지는 돈키호테만큼이나 무모한 것이고, 후자의 경우라면 증오에 대항해 싸우는 것은 헌법에 위배되는 행동이 될 가능성이 크다.
1. (합리적인 이성) 명분 속 깊숙이 도사린 편견
증오는 어디에나 있다 인간은 항상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일반화해 버린다. 진화 과정에서 친구와 적이 누구인지 미리 아는 것은 단순히 철학적인 성찰의 대상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애국자들 중에서 외국인에 대해 한번도 혐오감을 품어 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물론 증오는 편견보다 더 심각하고 어둡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증오와 편견을 구분하기가 어려워진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다른 민족이나 다른 인종에 대해 거의 악의를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교차로에서 어떤 차가 얌체처럼 자신의 차를 추월해 버리면, 우리는 그 차의 운전자가 여성이나 흑인일 경우 금방 증오한다 그리고 밤길을 걷다가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주위를 둘러보고 그 소리의 주인공이 흑인 남자가 아니라 백인 여자라는 것을
확인하면 우리는 금방 안도감을 느낀다.
잡지 '머큐리'의 편집장이었던 H.L. 멩켄은 지칠 줄 모르는 인종 차별주의자였다. 그는 "대화를 통해 분별력이나 판단력 비슷한 것을 흑인 여자의 머리 속에 넣어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흑인 여자들은 본질적으로 유치하며, 직접 경험을 하고도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다"고 자신의 일기에 썼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는 상대의 인종을 전혀 상관하지 않고 행동했으며, 인종 차별을 폐지하는 정책을 지지했다. 그는 자신의 잡지에 많은 흑인 작가들의 작품을 실었고, 그들을 위해 잡지의 발행인인 알프레드 크노프를 상대로 로비를 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당시의 선구적인 흑인 작가 및 언론인들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증오에 관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멩켄은 과연 어떤 부류에 속하는 사람인가.
@P108
2. 선입관, 혐오감, 분노, 억압된 감정에서 싹터
옛날에는 증오를 이해하기가 더 쉬웠다. 사르트르는 1946 년에 에세이 '반유대주의자와 유대인'을 썼을 때 반유대주의가 무엇인지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증오의 종류가 사랑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하다. 공포 때문에 생긴 증오가 있는가 하면 단순히 경멸 때문에 생긴 증오가 있고,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증오가 있는가 하면 권력이 없기 때문에 생긴 증오가 있다 또 복수심에서 생겨난 증오가 있는가 하면 부러움이 변해서 증오가 핀 것도 있다.
우리가 다양한 종류의 증오를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 낸 현대적인 단어들 즉 성 차별주의, 인종 차별주의, 반유대주의, 동성애자 혐오증 같은 단어들은 사실 증오의 다양성을 전혀 표현하지 못한다. 이 단어들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은 증오의 대상인 희생자들의 신분뿐이다 이 단어들만 가지고는 가해자의 신분과 생각을 알 길이 없다. 이 단어들은 심지어 희생자의 생각이나 느낌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공산주의와 그 이후의 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이론에서 나온 말인 무슨 무슨 '주의'는 개인의 생각이나 느낌을 묘사하기보다는 권력 구조를 묘사하는데 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마치 구조가 뭔가를 느낄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구조적 인종 차별주의에 대해 이야기한다. '증오'는 그냥 단순한 명사일 뿐 증오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명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추상적인 단어가 현실화되어서 누군가가 실제로 가해자와 피해자로 변하게 되면 상황이 완전히 바뀐다. 우리는 증오로 인해 일어나는 사건의 본질이 매번 매우 다르며. 때로는 이들을 같은 뿌리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으로 보지 않아야 본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금은 별로 인기가 없는, 정당한 증오와 부당한 증오를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을 예로 들어 보자. 르완다에서 80만 명의 투치족이 후투족 정권에 의해 살해당하자, 투치족은 이에 대한 복수로 수천 명의 후투족을 죽였다 이 경우 애당초 종족 말살을 획책한 가해자의 증오는 끔찍하기 그지없는 것이지만 그 끔찍한 증오를 이기고 살아남은 피해자들의 증오는 정당화될 수 있다. 유대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독일인들에게 증오 외에 도대체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한단 말인가.
@P109
심리 치료사인 엘리자베스 영-브뢸은 자신의 책 7편견의 해부학7에서 증오를 세 가지로 구분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먼저 강박적인 증오는 나치의 경우처럼 소수가 자신들을 위협하고 있다는 환상 때문에 소수를 제거하려고 강박적으로 노력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들에게는 자신들이 증오하는 집단의 존재 자체가 위협적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증오하는 대상을 더러운 것 혹은 병든 것으로 보고 그들을 '정화'하거나 치료해야 한다고 말한다. 후투족이 투치족을 '바퀴벌레'라고 부르는 것이 좋은 예이다.
두 번째로 히스테리컬한 증오를 품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증오하는 대상과 좀더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영-브뢸은 히스테리컬한 편견을 가리켜 '어떤 사람이 자신이 억압하고 있는 금지된 성적 욕망과 성적으로 공격적인 욕망을 실현해 줄 사람으로 한 집단을 지명할 때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편견이라고 설명한다. 인종 차별주의자들 중 일부가 이 설명에 들어맞는다. 흑인을 증오하는 백인 중에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성적인 선망과 신체적인 선망 때문에 증오심을 품게 된 사람들이 있다 백인 인종 차별주의자는 흑인을 대상으로 자신이 갈망하면서도 혐오하고 있는 성적인 자유와 육체적인 힘 등을 이상화한다. 그의 공상은 전혀 현실적 근거가 없을지라도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이들의 증오는 일종의 '애증'이며, 이것을 포함시키지 않고서는 미국의 남부와 영국의 지배를 받던 시절의 인도에서 성행하던 인종 차별주의를 이해할 수가 없다.
세 번째로 자기 애적인 증오는 성 차별주의이다. 영-브될의 설명에 의하면 성 차별주의는 많은 남성들이 여성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는 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성들은 많은 남성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그냥 무시당하거나 아예 평등한 존재로 간주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은근히 친절한 척하는 남성들의 행동에는 대부분 억압되고 승화된 성적인 욕망이 섞여 있다.
물론 사람들 각자가 품고 있는 증오는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예를 들어 성 차별주의자 중에도 여성을 너무나 필요로 하기 때문에 여성을 증오하는 히스테리컬한 성 차별주의자가 있다. 그런가 하면 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예 인식하지 못하는 자기애적인 성 차별주의자가 있을 수 있다 나치의 반유대주의 역시 강박적인 동시에 히스테리컬한 것이었다.
따라서 성 차별주의니 인종 차별주의니 하는 말들은 인간의 충동을 1차원적인 수준에서 파악하려는 조잡한 시도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 단어들의 뒤에 숨어 있는 이론들은 모든 것을 가해자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흔히 가해자로 인식되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조장한다. 예를 들어 백인 이성애자 남성은 순전히 피부색과 성적인 취향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결국 증오를 설명하기 위한 조잡한 접근 방법이 증오와 똑같은 역할을 하는 셈이다.
@P110
3. 증오의 피해자가 가해자 되는 경우 많아
무슨무슨주의에 입각해서 증오로 인한 현상을 보는 대신, 이를 인간 각자의 심리적인 반응으로 보기 시작하면, 증오가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지 알 수 있다.
증오 범죄에 관한 미 연방 수사국(FBI)통계에 나타난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예로 들어 보자. 1970 년대에 미국에서는 증오 범죄를 저지르는 흑인의 숫자가 백인의 숫자보다 세 배나 많았다 아내를 때리는 남성들 중에 어렸을 때 폭력적인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 많은 것처럼, 증오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도 증오의 대상이 되는 집단에 속해 있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서 증오의 피해자들이 증오의 가해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는 그토록 오랫동안 소외당하면서 느꼈던 고통과 분노가 쌓인 결과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증오 범죄 관련자들은 오히려 증오의 피해자들에 대한 편견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 이미 증오의 피해를 본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해자에게 느끼는 증오와 분노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기분을 더 많이 느끼고 있기 때문에 법 앞에서 더욱 수상쩍은 존재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4. 영원히 근절시킬 수 없는 '사회의 그림자'
증오 범죄 관련법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증오 범죄가 다른 범죄에 비해 더욱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범죄는 실제로 피해를 본 피해자 한사람뿐만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을 피해자로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증오 범죄가 증오의 대상이 되는 집단에 증오와 공포를 퍼뜨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회에 공포와 놀라움을 퍼뜨리는 것은 다른 범죄도 마찬가지다. 사실은 교회나 학교에 들어가서 무작정 총을 미아 대는 범죄가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겨냥한 범죄보다 더 무서울 수 있다. 이런 범죄는 사회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에 공포를 심어 주기 때문이다.
@p111
또한 어떤 집단에 대한 증오 때문에 저질러진 범죄가 개인간의 관계에서 발생한 증오 때문에 저질러진 범죄보다 더 심각하게 취급되어야 할 이유도 없다. 자신의 애인이나 아내를 죽이는 것과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흑인이나 동성애자를 죽이는 것 중, 어느 편에 더 많은 증오가 담겨 있을까?
점점 다양해지는 문화 속에서 증오를 근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자유로운 국가에는 언제나 증오가 존재한다. 게다가 증오와 편견의 표현은 때로 사람들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오히려 풀어 주는 역할을 한다.
증오를 물리치는 유일한 방법은 증오하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증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증오를 초월하는 것이다 피해자가 심리적으로 상처를 입지 않는 사람이라면 가해자는 그에게 심리적인 상처를 입힐 도리가 없다. 인종 차별적인 말이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가 되는 것은 그가 상대의 말을 자신의 인생과 인격에 대한 결정적인 정의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증오는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 그저 극복될 수 있을 뿐이다. '동아일보' 2000. 2. 28. 특집기사, '뉴욕타임즈' 1999. 9.26. 기사.
3. 읽기 자료2: 순자 -예를 배워야 사람이 된다.
표면적으로 맹자와 순자가 차이를 보이는 학설은 성선설과 성악설이다. 그러나 맹자와 순자 사상의 차이점을 성선-성악설의 테두리에서 찾을 경우 이 두 사상가의 이론이 가진 근본적인 차이점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맹자가 '성'을 논할 때의 의미는 인간의 '도덕성'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순자가 말한 성은 신체의 '자연성'을 가리킨 것이다. 즉 신체가 생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본능적 욕구이다 맹자가 말하는 성은 순자의 개념으로 위에 해당한다. 위는 인위이므로 인간의 노력, 후천적으로 습득한 결과이다. 그러면 맹자와 순자 두 분 선생님을 모시고 가상으로 한번 토론을 해 보자.
@P112
학생: '성'이란 글자를 우리 학생들은 남성, 여성, 성교육, 이성 교제 등에서처럼 영어의 (sex)라는 단어와 같은 뜻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두 분께서는 '성'이란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십니까?
맹자: 우리 유학자들은 음식과 남녀를 사람의 기본적인 욕구라고 하고 성인도 이것을 없앨 수는 없다고 생각하네, 음식 남녀를 줄여서 식색이라 하지. 학생의 말을 들으니 우리가 색이라고 한 것이 학생들이 이해하는 성과 비슷한 것 같구만. 내가 말하는 '성'이란 본성 즉 사람의 본래 그러한 성질을 뜻한다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것, 배우지 않고 할 수 있는 것. 자연 상태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일세 잘 모르지만 영어로는 (nature)에 가깝지 않겠나?
순자: 내가 말하는 성도 맹 선생님 말씀과 같이 규정되네.
학생: 그런데 두 분은 어째서 성선설과 성악설로 반대 주장을 하셨습니까?
순자: 사람은 배가 고프면 먹고 싶고, 추우면 따뜻하게 하고 싶고, 피로하면 쉬고 싶어하네. 그것은 본래부터 갖고 있는 욕구이지. 그러나 사람이 사회 규범을 배워서 그 욕구를 조절하지 않고 그저 욕구가 하라는 대로 하면 악으로 빠지네. 그러므로 "사람의 본성은 악하다"라고 했지.
맹자: 순 선생은 사람의 신체적 측구를 본성으로 보고서 악하다고 했네. 나도 사람이 이목구비의 욕구에 휩쓸리면 동물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네. 그러나 사람에게는 동물과 다른 도덕이 있지 사람과 동물이 다른 점, 사람의 특징은 바로 '인의예지'의 도덕성이야, 그러니 사람의 본성은 선하지.
순자: 맹 선생님 말씀대로 사람은 도덕이 있기 때문에 동물과 다르네. 그러나 도덕은 사회 속에서 배운 것이지, 배우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닐세. 그래서 나는 그것을 '성'이라 하지 않고 '위'라고 하지. 거짓, 위선이란 뜻이 아니고, 노력의 산물, 사회 문화 속에서 학습한 결과물이 란 뜻이지.
학생: 두 분이 모두 동물과 인간의 차이를 도덕에 두시는군요. 맹 선생님은 도덕성이 선천적이라 보시고, 순 선생님은 백지 상태에서 교육을 통하여 형성되는 것이라고 보시는 점이 차이입니다. 정말 우리는 나면서부터 인의예지를 가지고 있을까요?
@p113
맹자: 그럼. 물 속으로 빠지려는 아이를 보면 누구나 뛰어가서 건지려는 마음이 생기지. 이 측은지심은 바로 인이라는 도덕성의 명백한 증거야. 측은지심이 없다면 사람도 아니지 사람이 죽어 가는데 측은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그게 어디 사람인가?
학생: 그럼 아직 죽음의 의미를 모르는 어린아이는 사람이 아니겠군요. 물 속으로 기어가는 아이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는 그것을 보면서도 측은지심이 생기지 않을 것 같은데요.
순자: 학생은 아직 예의를 더 배워야 하겠군. 맹 선생님 말씀의 본뜻을 이해하려 노력해야지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다니.
맹자: 순 선생, 너무 나무라지 마시오.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마음도 사람의 본정에서 나온 것이지요. 시비지심은 지에서 나옵니다 젊은이들을 믿읍시다.
순자: 맹 선생님은 너무 낙관적이십니다. 맹 선생님 강의는 이미 사회 규범을 다 배웠지만 실천하지 않는 고등학생. 대학생들에게나 어울립니다. 초등학생들은 뭐가 옳은지도 잘 몰라요. 밀림에서 자란 어린 타잔이 학교에 지각하면 왜 나쁜지를 알겠습니까? 그대로 두면 사회 질서가 엉망이 됩니다.
맹자: 옳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믿어요. 요순 임금을 보십시오. 고대에 어디 문명이 발달하고 제대로 된 교육이나 예법이 있었습니까? 그렇지만 성인이 되셨지요. 공자는 어떤 환경에서 자랐습니까? 아무리 사회가 험악해져도 나는 인간의 착한 본성이 이것을 이겨 내리라고 믿습니다.
학생: 저는 순 선생님 이론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이제 두 분 말씀을 들으니 더 판단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좀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순자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임에 주목하였다. 맹자와 달리 성악설을 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인간은 성과 위의 결합이다. 즉 배우지 않고도 본능적으로 할 수 있는 자연성과 배워서 할 수 있는 사회성의 두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사회성은 예를 필요로 하고. 예를 배움으로써 인간의 사회성은 길러진다. 순자는 자연의 존재를 네 단계로 분류하였다.
물, 불 같은 무생물 = 기
풀, 나무 같은 식물 =기 +생
새, 짐승 같은 동물 =기 +생 +지
인간 = 기 + 생 +지 + 의
@114
여기에서 동물의 지능은 생존에 필요한 적응력으로, 생존에 유리한 것을 좇고 불리한 것을 피하는 지능이다. 인간은 옳은 일을 위하여 죽기도 하기 때문에 동물의 지능과는 차원이 다른 '의'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순자가 말하는 '의'는 맹자의 '수오지심: 자기의 불의를 부끄러워하고 남의 불의를 미워하는 마음'과는 다르다. 여기서 의는 예와 같은 뜻으로 사회적 역할에 대한 규정을 가리킨다. 사람은 사회 속에서 살기 때문에 누구나 일정한 책임과 의무가 있다. 예와 의는 이것을 정해 둔 것이다.
순자는, 인간이 소보다 힘이 약하고 말보다 빠르지 않으며 호랑이보다 약하면서도 이것들을 부릴 수 있는 것은 집단을 이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집단을 이루려면 분이 필요하다고 한다, 분은 분업 즉 역할의 분담이다. 이 역할 분담을 규정해 놓은 것이 예이다. 이 예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의이다. 예의는 인간의 사회성의 증거이며 이를 통하여 인간은 자연을 경영하고 문화를 이룩한다. 이렇듯 인간은 예의를 통하여 사회를 유지하며 사회 속에서 예의를 배우지 않고는 제대로 인간이 될 수 없다. 때문에 순자는 '예'를 강조하였던 것이다. 또한 예의 전달에 필요한 교육과 '스승의 법도'를 중시하였다.
이현구, 김범춘, 우기동 지음, '박물관에서 꺼내온 철학 이야기', 우리교육, 1995, pp.53-58 참고
@p115
연습문제
1. 인간 이해의 중대성
1) 인간이 실천적 자의식을 갖는 주체적 존재란
2) 인간 본성에 관한 논의가 필요한 이유는?
2. 인간의 합리적, 사회적 본성
2.1 고전 고대 사상
1) 선진 유가의 인간관은?
2) 플라톤에게 있어 우주와 인간의 관계는?
3) 불가의 인간관은?
4) 스토아사상이 주장하는 부동심의 상태란?
5) 고대적 인간관의 근본 한계는?
6) 그리스적 이성주의와 근세 이성주의와의 차이점은
2.2 공리주의
1) 공리주의가 주장하는 인간성의 기초는?
2) 벤담이 말하는 효용의 원리란?
3) 공리주의를 공중적 쾌락주의라 부르는 이유는?
3. 공리주의가 자본주의 윤리관의 기초가 된 이유는?
2.3 마르크스주의
1)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인간성 왜곡의 근본 원인은?
2) 마르크스가 제시하는 이상 사회의 조건은?
3) 마르크스 인간관에 대한 프로이트의 비판은?
3. 인간의 충동적 이기적 본성
3.1 동물적 존재로서의 인간
1) 인성론에 진화론이 끼친 영향은?
2) 고대 소피스트들의 행복관은?
3.2 홉스
1) 홉스의 인간관은?
2) 이성에 대한 홉스의 견해는?
3) 홉스의 사상이 개인주의와 사회 계약론과 깊은 연관을 갖는 이유는?
4) 홉스의 강권 국가와 군주제적 국가와의 차이점은?
3.3 프로이트
1) 프로이트는 전통적인 의식적 자아를 어떻게 평가하나?
2) 이드와 초자아의 의미는?
3) 양심과 도덕 에 대한 프로이트의 해석은?
4) 프로이트 인간론이 끼친 영향은?
5) 아들러의 프로이트 비판의 핵심은?
4. 인간의 이기적 욕망과 연대
1) 프로이트 인성론과 자본주의의 관계는?
2) 자본주의적 인성론의 기본 핵심은?
3) 오늘날 욕망의 문제가 철학적 관심사가 된 이유는?
@P116
참고문헌
1. 스티븐슨 지음, 임철규 옳김, (인간의 본질에 관한 일곱 가지이론), 종로서적, 1981.
인간성과 관련한 철학사의 대표적인 사상가들의 기본 주장과 문제점을 잘 정리 소개한 책. 분량도 많지 않고 문체도 어렵지 않아 서양의 인성론을 개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2. 한자경 지음, 자아의 연구. 서광사. 1997.
우리 나라 소장 학자인 저자가 근대 데카르트 이후 현대 라캉에 이르기까지 인간에 대한 대표적인 견해들을 나름대로 잘 소화해서 의욕적으로 정리 소개한 책.
3. 남기영, 허우성 김수중, 점연교, 최점식 지음, 인간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1997.
경희대 철학과 교수들인 저자들이 자신의 전공의 관점에서 인간론을 전개하고 상호 비평한 책. 책 말미의 상호 토론은 인간론에 대한 종합적이고 균형 있는 관점을 얻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P117
4.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엮음, 우리들의 동양철학, 동녘, 1997.
우리 나라 진보적인 철학자들의 모임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소속 소장 연구자들이 동양철학을 새로운 시각에서 쉽고도 깊이 있게 정리 해설한 책.
5. 김태희 지음, 벤덤의 공리주의 사상에 관한 연구, 세종출판사, 1996. 공리주의에 관해 우리 나라 학자가 저술한 몇 안 되는 본격적인 공리주의 사상 연구서 공리주의에 관한 심도 있는 이해에 도움이 되는 책.
6. 법륜 지음 인간 붇다. 그 위대한 삶과사상, 정토출판, 1990. 불교에 대한 틀에 박힌 이론서가 아니라 실천적 불교 운동에 앞장서 온 저자의 풍부하고 깊이 있는 사색이 생동감 있게 스며 있어 불교를 쉽고도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
7. 김종철 지음,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 삼인, 1990. 자본주의적 삶의 반인간화를 직시하고 오래 전부터 이미 농사 공동체를 통한 인간적 삶의 참된 연대를 제창한 김종철 교수가, 선구적 통찰력으로 진지하게 써 내려간 생태적 인간관.
@P119
제 2장 성과 사랑의 철학
개관
성은 우리 시대의 중요한 화두들 가운데 하나다. 성은 우리에게 어떤 의의가 있을까? 이 문제에 접근하려면 우선 성을 좁은 뜻으로만 이해하지 말고 섹스, 사랑, 여성과 남성을 포함하는 넓은 뜻으로 이해하고, 이 세 가지 문제를 종합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섹스에 대한 견해는 결혼 안에서의 섹스, 사랑 있는 섹스, 사랑 없는 섹스등 크게 세 범주로 구분할 수 있다. 결혼 안에서의 섹스가 가부장제 사회의 전통적 견해라면, 사랑 있는 섹스는 결혼의 울타리에 얽매이지 않고 전통적 금기를 위반한다.
바타이유에 따르면 금기의 위반은 비난해야 할 일이 아니라 사람의 사물화를 막고 문명 발달의 새 동력을 얻는 길이다. 한편 사랑 기는 섹스는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내 몸에 대한 자기 도취적 사랑이 특징이고 사물을 기호로 소비하는 현대 사회가 요구하며 살아 있는 사랑을 죽은 기호로 취급하는 사물화 현상이다. 사랑에 대해 널리 알려져 있는 철학 관념은 플라토닉 러브다. 플라토닉 러브는 육체 관계를 배제한 정신적 사랑이라고 사전에 정의되어 있으나, 사실은 육체 관계를 배제하지 않으며, 상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지혜를 추구하며 길들이고 조율하는 사랑이다 플라토닉 러브는 정신적 사랑을 강조하면 섹스를 억압하는 금기로 작용할 수 있으므로 요즘 젊은 제대는 시시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플라토닉 러브에서 시작한 사랑에 대한 관념의 역사는 2,500 년을 넘어 이제 포르노그래피 등 사이버 에로스로까지 변모하고 있다.
@P120
현대 사회에서 성과 사랑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는 여성과 남성의 지위와 관계 또는 성 차별의 문제가 큰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바랑직한 성 의식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페미니즘 담론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 당론은 갈래가 여럿이지만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는 관점을 공통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에 속하는 내용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이다. 여성과 남성의 평등은 원칙 면에서 두 가지 길이 가능하다. 하나는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해소하는 길이고, 또 하나는 이 차이를 제대로 살리는 길이다. 여성과 남성의 평등은 둘 다 호모 사피엔스라고 보고 차이를 해소함으로써 바탕을 마련할 수도 있고 생물학적 성 차이를 악용하지 않고 존중하는 데서 출발할수도 있다. 사람의 성은 그 밖의 동물에 비해 사회성이 특징이다. 대부분의 동물은 배란기에만 섹스하지만 사람은 아무 때나 섹스할 수 있고, 사랑은 '배타적 인정의 약속'이므로 나와 남의 사회 관계를 만드는 길이다. 사람의 성은 사회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이바지한다. 여성과 남성의 평등 문제도 철학적으로는 바람직한 인정의 문제로 볼 수 있다. 바람직한 인정의 원칙은 "내가 남과 다른 점을 인정받으려면 남이 나와 다른 점부터 인정하라"는 것이며, 더 나아가 서로 인정해야 하는 나와 남은 여러가지 뜻에서 힘이 대등하지 않은 경우가 많으므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먼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1. 기본강의: 성, 사랑, 페미니즘
1. 성과 사랑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성은 우리 시대의 중요한 화두들 가운데 하나다. 성은 원시인부터 원초적 본능이었고 언제 어디서나 중요한 문제였을 테니까 특별히 우리 시대의 화두라고 보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 개방 풍조가 우리보다 한참 앞선 미국조차 성 담론이 공공연해진 것은 겨우 반 세기 전부터다. 1940년대 후반에 나온 '킨제이 보고서'와 1950 년대 초에 창간된 '플레이보이'가 성 담론의 공론화를 주도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말론 브랜도,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등이 섹스 이미지를 내세웠다.
@p121
요즘도 우리 나라에서는 성 담론의 공론화를 둘러싸고 심심치않게 논란이 벌어진다. TV에서 대사의 수위를 놓고 심하다는 반응과 괜찮다는 반응이 나누어지고. 영화에서 노출의 수위를 놓고 포르노냐 예술이냐는 논쟁이 일어나며, 청소년의 성 의식의 수위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성 의식이 바람직한지는 개인에게 달린 문제이고 철학적 논의가 필요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철학은 하늘의 뜬구름을 잡는 학문이 아니라 시대의 쟁점을 붙잡고 씨름하는 학문이다. 성이 과연 우리 시대의 핵심 화두인지는 시간이 좀더 흘러야 분명해지겠지만 적어도 그 후보들 가운데 하나라면 철학도 성을 둘러싼 논쟁을 모른 체할 수는 없다.
성은 우리에게 어떤 의의가 있을까? 성의 핵심 기능은 자식 얻기이며 따라서 결혼의 울타리 안에서만 섹스를 허용해야 한다는 견해는. 유교 문화권 안에서 가부장제 사회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는 우리 나라에서 아직도 무시할수 없는 지지 세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갈수록 젊은 세대는 결혼과 상관없이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섹스를 할 수 있다는 견해를 보이고, 심지어 사랑하는 마음 없이 섹스를 즐길 수 있다는 태도도 드물지 않다. 이런 성 의식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성에 대한 견해와 태도는 사랑 있는 섹스나 사랑 없는 섹스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사랑에 대한 이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랑에 대한 정의는 숱하게 많은 유행가가 시도했지만 철학에서 대표적인 사랑으로 알려진 것은 플라토닉 러브(Platoniclove)다. 플라토닉 러브는 사전의 정의와 달리 육체 관계를 배제하지 않지만 좀더 깊은 뜻이 있다. 성이 현대인에게 지닌 의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무엇인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편 섹스와 사랑이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여성과 남성의 문제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지 않을 수 없다. 현대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의 지위와 관계 또는 성 차별은 바람직한 성과 사랑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친다. 여성과 남성의 문제는 페미니즘(feminism)이라 부르는 여성주의 또는 여성 해방 논의가 많이 다루고 있다. 따라서 성의 의의를 밝히기 위해서는 페미니즘 담론에도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P122
2. 성 담론의 어제와 오늘
2.1 성
성은 무엇일까?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에 따르면 사람의 원초적 충동은 에로스(eros)와 타나토스(thanatos)다. 에로스는 삶의 충동이고, 사랑과 섹스는 이 충동의 대표적 표현 방식이다. 타나토스는 죽음의 충동이고, 자살뿐 아니라 폭력, 살인 등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극도에 이른 삶의 충동은 죽음의 충동과 다르지 않다. 섹스 막바지에 느끼는 오르가슴은 프랑스 말로 '작은 죽음(le petit mort)'이라 부른다.
사회는 원초적 충동의 표현을 무제한 허용하지 않는다 충동의 표현을 억압하는 것이 금기다. 금기는 법이나 관습으로 있을 수도 있고 내 마음 속에 규범으로 있을 수도 있다. 에로스와 관련하여 가장 널리 퍼진 것은 근친 상간의 금기이고, 타나토스와 관련하여 가장 널리 퍼진 것은 폭력과 살인의 금기다. 그러나 위반을 허용하지 않는 금기는 없고 어쩌면 금기는 위반하라고 있다. 살인의 금기가 있더라도 사람 죽이는 일은 일어난다. 우리 조상에게 섹스는 곧 자식 만들기 또는 남편의 배설이었고 그 이상은 금기였다. 금기의 위반은 쾌감을 불러 일으킨다.
금기를 위반하는 섹스는 비난받아야 할까?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바타이유에 따르면 사람의 섹스는 동물성이 기초이고 동물성 을 배격하는 것이 금기다. 그러나 사람은 금기를 위반하더라도 짐승으로 완전히 돌아가지 않는다. 사람의 위반은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 표현이 아무리 과감한 젊은이도 원숭이처럼 남들 보는 데서 섹스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금기를 위반하더라도 규칙이 있기 때문에 정글이 아니라 사회를 형성한다.
@P123
바타이유는 금기를 위반하는 섹스가 사람의 사물화를 막아 준다고 주장한다. 사람의 사물화란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사물로 취급받는 현상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직장에서는 아무리 따뜻한 정이 오가더라도 냉정하게 말하면 사람이 하나의 상품이다. 이런 뜻에서 사람은 대체로 일하는 곳에서 사물화한다. 사람의 이런 사물화는 돈이 강력하여 사람을 부정할 수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사람의 섹스 충동은 사물화할 수 있을까? 같은 논리에 따르면 사람이 이성이나 의지로 섹스 충동을 부정하고 죽일 수 있어야 이 충동은 사물화한다. 그러나 섹스 충동은 더러 부정하려 해 보지만 소용없다. 부정하고 부정해도 다시 고개를 쳐든다. 바타이유에 따르면, 사람은 직장에서 일하면서 사물화 하지만 금기를 위반하는 섹스를 통해 오히려 사물화를 어느 정도 극복한다. 문명은 그 동안 사람들이 섹스 충동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을 억압해 왔으나, 오히려 이런 억압을 어느 정도 푸는 것이 사람의 사물화를 막고 문명 발달의 새로운 동력을 얻는 길이다.
섹스에 대한 전통 관념은 결혼 안에서의 섹스(sex with in marriage)만 허용한다. 그러나 많은 젊은 세대는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결혼의 울타리에 얽매이지 않고 성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사랑 있는 섹스(sex with love)를 주장한다. 한편 요즘에는 사랑하는 마음을 시시하게 여기는 사랑 없는 섹스(sex without love) 도 있다.
사랑 없는 섹스는 감정을 적극적으로 배제하는 섹스다. 섹스에 감정을 섞는 것이 귀찮고 피곤하기 때문이다 내가 남과 감정을 교류하면 기쁘고 뿌듯할 수도 있지만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다. 감정을 섞어 자존심이 상할 가능성이 있다면 차라리 감정을 배제하겠다는 태도다.
그러나 사랑 없는 섹스는 아무 감정도 없는 섹스가 아니다. 이런 섹스는 깊이 보면 내 몸에 대한 강한 애착이 있다. 남의 감정, 남에 대한 내 감정은 무시하더라도 내 몸에 대한 내 감정은 포기하지 않는다. 내 몸에 대한 자기 도취적 사랑 곧 내 몸에 대한 나르시시즘(narcissism)이 사랑 없는 섹스의 정체다.
왜 현대의 사랑 없는 섹스는 내 몸에 대한 나르시시즘을 요구할까?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allrd)에 따르면 현대 소비 사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호는 몸이다. 소비 사회에서 몸은 경제면으로 사유 재산의 중요한 일부가 된다. 따라서 개인은 자기 몸을 재산으로 관리하고 조작하고 투자한다 또 몸은 심리 면으로 사회 지위를 표시하는 중요한 기호이므로 자기 도취적 숭배의 대상이 된다. 소비 사회에서 내 몸에 대한 나르시시즘이 없는 사람, 운동이나 다이어트로 몸을 돌보고 가꾸지 않는 사람은 손가락질 받는다.
가장 아름다운 소비 기호로서 자기 도취적 사랑의 대상이 된 몸은 이윤을 낳는다. 소비 사회에서 수많은 상품은 고객을 얻기 위해 이 시대 최고의 유행의 상인 알몸을 이용한다. 사랑 없는 섹스 곧 내 몸에 대한 나르시시즘만 있는 섹스는 몸을 가장 아름다운 기호로 소비하는 사회가 요구한다.
그러나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이런 섹스와 사랑은 바타이유와 반대로 사람의 사물화 현상이다. 사람의 사물화란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사물로 취급받는 현상이다. 소비 사회에서 사랑 없는 섹스는 나든 남이든 살아 있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죽은 사물 즉 기호로 취급하는 현상이다.
@P124
2.2 사랑
참사랑은 무엇일까? 생텍쥐페리(Saint-Exupery)는 '어린 왕자'에서 '사랑은 서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쪽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 (향연)은 플라톤(Platon)이 남긴 30여 개의 대화편 가운데 하나다. 플라톤의 대화편은 대부분 소크라테스(Socrates)가 제자, 친구, 적대자 등과 어떤 주제를 놓고 벌인 논쟁을 기록한 것이다.
'향연'은 '에로스에 관해'라는 작은 제목을 달고 있다 에로스는 사랑의 신을 뜻하기도 하고 사랑을 뜻하기도 한다 .이 대화편은 비극 작가 아가톤이 연극 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축하하러 모인 사람들이 에로스에 관해 돌아가며 한 마디씩 찬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말을 들어 보면 '플라토닉 러브'의 참뜻을 알 수 있다.
@p125
소크라테스는 뭔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 대상을 욕구하는 것이고 욕구한다는 것은 지금 그 대상이 부족하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내가 돈을 사랑하는 것은 돈을 욕구하는 것이고 이는 지금 나에게 돈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사랑의 중요한 대상 가운데 하나가 지혜다. 그리고 그리스 말은 '지혜(sophia)'와 '사랑하다(kilos)'를 더하면 '철학(philosophia)'이 된다. 따라서 플라토닉러브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혜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함께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며 따라서 함께 철학한다는 뜻을 포함한다.
서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쪽을 바라보는 '어린 왕자'의 참사랑도 플라토닉 러브의 현대판이다. 여우와 어린 왕자는 처음부터 같은 쪽을 바라볼 수 없으니까 길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길들이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어린 왕자에게, 여우는 첫날에는 멀리 떨어져 있다가 매일 조금씩 가까이 연고 그 다음에는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게 시간 약속까지 하고 오라고 말한다. 플라토닉러브에서 길들이기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지혜를 얻기 위해 오랫동안 꾸준하고 치열하게 대화하는 과정이다 상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모습을 바꾸고 조율하는 과정이다. 모두 다 그렇지는 않지만 많은 연인은 오랫동안 만나고 같이 살고 티격태격하면서 생각과 행동을 조금씩 맞추어 간다.
그러나 요즘 많은 사람은 플라토닉 러브를 시시하게 여긴다. 왜 그럴까? 플라토닉러브는 몸보다 마음과 지혜 사랑을 강조함으로 섹스가 억압하는 금기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섹스는 금기를 어길 때 강렬한 쾌감을 줄 수 있다 사회가 결혼 이전의 섹스를 금지한다면 이런 섹스 또는 이런 섹스에 대한 상상이 즐겁고. 한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관습이라면 여러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재미있고. 몸과 몸을 접촉하는 섹스가 관행이라면 훔쳐보거나 혼자서 즐기는 행위가 짜릿하다.
플라토닉러브에서 시작한 사랑에 대한 관념의 역사는 2,500 년을 넘어 이제 사이버 에로스로까지 변모하고 있다. 온갖 포르노그래피가 사이버 공간을 떠돌아다니고 있으며, 채팅으로 나누는 섹스와 사이버 결혼 이야기도 심심치않게 들린다.
현대의 사랑 문화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첫눈에 불꽃이 일어나는 열정적 사랑이나 영혼의 빈 자리를 메우는 낭만적 사랑을 꿈꾸는 사람은 아직 많다. 그러나 열정이나 낭만을 시시하게 여기는 사람도 드물지 않다. 이런 사람은 공통적으로 사랑에서 어떤 의미를 찾거나 따지는 일을 귀찮게 여기고 거부하는 태도를 보인다. 과연 사랑은 아무 의미도 따질 수 없는 것일까?
@P126
2.3 페미니즘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여성의 권리 회복을 주장하는 페미니즘 담론은 갈래가 여럿이지만 대체로 이 명제를 공통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 명제는 여성에게 임신과 출산의 능력이 있고 남성에게 평균적으로 강한 근육이 있다는 생물학적 차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이 명제가 주장하는 것은 생물학적 성과 다른 사회적 성이 있으며 생물학적 성 차이가 사회적 성
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생물학적 성은 보통 '섹스(sex)'라 부르고 사회적 성은 '젠더(gender)'라 부른다. 많은 사람이 입버릇처럼 쓰는 '남성답다'는 말은 '자신감', '책임감', '용기' 등을 상징하고, '여성답다'는 말은 '아름다움', '의존성', '다소곳함'등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런 항목을 가진 성은 생물학적 섹스가 아니라 사회가 만든 성이며 시대에 따라 변하는 젠더다.
남성다움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남성은 농경 사회에서는 훌륭한 농부이자 강인한 전사가 되어야 하지만, 산업 사회에서는 상품의 생산과 가족의 부양을 책임지는 성실한 일꾼이 되어야 한다. 여성다움에 속하는 수동적 성격과 의존적 태도도 관습과 교육의 산물이다. 여성은 임신하고 출산하는 생식 능력 때문에 고대 농경 시대부터 생산 노동에 제한적으로만 참여했다. 이런 상황은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하고 가정과 사회에서 성에 따른 각종 차별이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믿음을 낳았다. 여성은 사춘기, 결혼, 어머니의 과정을 거치면서 자기 몸을 열등하게 받아들이고 남성에게 의존하는 수동적 역할에 만족하도록 길든다 가부장제는 원시 사회에서 농경 사회로 넘어오면서 출현했다. 원시 수렵 채집 사회에서 노동, 출산, 교육은 모두 성별 분업 없이 공동체 전체의 일에 속했다. 그러나 농사를 짓는 사회에서는 힘든 농사는 남성이 하고 집안 일과 아이 키우는 일은 여성이 나누어 하면서 생산 활동에서 주도권을 쥔 남성을 중심으로 가부장제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남성이 부양자가 되면서 여성의 노동은 부양자를 시중드는 노동으로 변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가족 임금 체계가 성립한 것은 가부장제를 더욱 강화했다. 가족 임금 체계란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번 돈으로 온 가족이 먹고 사는 것이다 자본주의 초기에는 남녀 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일터에 나가야 먹고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생산력이 발달하자 남성 노동자는 자기 노동만으로 가족을 부양하는 데 충분한 임금을 요구했다. 그러자 남편을 보조하고
자식을 기르는 현모 양처가 여성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굳어졌다. 여성과 남성의 평등은 어떻게 이룩할 수 있을까? 대답은 페미니즘의 갈래에 따라 매우 다양하지만 원칙 면에서는 두 가지 길이 가능하다. 하나는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해소하는 길이고, 또 하나는 이 차이를 제대로 살리는 길이다.
@p127
여성과 남성의 평등은, 둘 다 호모 사피엔스라 보고 차이를 해소함으로써 바탕을 마련할 수도 있고, 생물학적 성의 차이를 악용하지 않고 존중하는 데서 출발할 수도 있다. 두 길은 원칙이 다르기 때문에 중시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구체적 해결책이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여성의 취업 문제에 대해 차이를 해소하자는 페미니즘은 군대 장교나 항공기 조종사처럼 금남의 영역을 무너뜨리는 일을 우선하겠지만, 차이를 살리자는 페미니즘은 교사나 프로그래머처럼 세심한 작업이 필요한 영역을 확보하는 일을 우선할 수도 있다.
3. 안정과 무시
대부분의 동물은 섹스하는 시기가 정해져 있지만, 사람의 섹스는 아무 때나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포유동물 암컷은 배란기가 되면 가슴 주위가 부풀어오르거나 질 주위의 색이 변하는 등 표시가 난다. 그러나 여성은 배란이 표시가 나지 않는다. 다른 동물처럼 배란이 표시가 나면 그때만 섹스를 해도 수정이 될 텐데 사람은 표시가 나지 않으니 수정을 하려면 아무 때나 섹스를 하는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설명은 사람의 섹스가 지닌 특성을 모두 보여 주지 않는다.
사람은 수정의 확률을 따지면 한참 뒤떨어진 동물이다. 수정의 확률은 수정 횟수와 섹스 횟수의 비로 따지므로 배란이 표시가 나는 동물은 한 번 섹스로 수정할 확률이 사람보다 훨씬 높다. 사람의 섹스는 어떤 동물보다 수정이 힘들게 진화했다. 왜 이렇게 진화했을까?
사람의 섹스는 수정과 생식 외에 다른 기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기능 을 보통 '즐긴다'는 말로 표현한다. 사람은 자식을 얻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즐기려고 아무 때나 섹스한다. 그러나 즐긴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모든 섹스가 반드시 즐거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때때로 섹스는 자존심이 상할수도 있고 바람 피우는 배우자의 섹스는 상상만 해도 역겹다.
@p128
즐긴다는 표현보다 사회 관계를 만든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사람의 섹스는 나와 남의 관계를 만드는 한 방법이다. 물론 섹스는 사회 관계를 강화할 수도 있고 약화할 수도 있다 남편의 바람 피우기는 남편과 애인의 관계를 강화하지만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약화한다. 그러나 사람의 섹스는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만든다는 뜻에서 사회성을 지니고 있다.
사랑도 마찬가지로 사회성을 지니고 있다. 사랑은 '두 감정 사이의 배타적 인정을 약속하는 것'이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두 사람은 상대만 인정하려고 마음먹는다. "사랑해"는 거짓말이 아니라면 "적어도 이 순간은 너만을 인정하겠다"는 약속이다.
이 약속은 오래 가지 않을 수도 있다 아침에 아내에게 "사랑해"라고 말한 남편이 저녁에 숨겨둔 애인에게도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다. 게다가 둘 다 진심일 수도 있다 배타적 인정의 약속은 감정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감정은 쉽게 흔들리는 갈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의 사랑이 인정의 성격을 지닌다는 점이다. 인정의 반대는 무시다. 남이 보기에는 아무리 못생긴 애인도 내 눈에 안경인 까닭은 내 감정이 그 사람만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고, 바람피우는 배우자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까닭도 내 감정이 무시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정과 무시는 기본적으로 나와 남의 관계 곧 사회 관계다. 따라서 사람의 사랑도 섹스와 마찬가지로 사회성을 지니고 있다.
사람의 섹스와 사랑이 사회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왜 중요할까? 사랑의 섹스와 사랑은 사회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사람의 정체성(identity)을 형성하는 데 이바지한다. 정체성이란 내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다.
사람의 정체성은 인정과 무시를 통해 형성된다. 그리고 인정과 무시는 남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사람이 인정과 무시의 감정을 처음으로 경험하는 남은 대개 부모다. 어린이는 누구나 자기 부모에게 극진한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어린이는 대체로 젖을 땔 때 엄마의 무시를 처음 경험한다. 친구나 또래가 생기면 무시와 인정의 감정은 훨씬 더 강해지기 시작한다.
나말고 남이 있기 때문에 인정과 무시가 가능하고, 인정과 무시가 가능하기 때문에 나는 내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다. 사랑과 섹스에 대한 생각은 내가 남과 얽히고 설킨 관계망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p129
인정과 무시의 논리는 성 차별 문제로 확대할 수 있다. '관용'이라고 옮길 수 있는 프랑스 말 '톨레랑스(to1erance)'는 현실 문제에서 인정의 의의를 잘보여 준다. 톨레랑스란 "내가 남과 다른 점을 인정받으려면 남이 나와 다른 점부터 인정하라"는 것이다. 나의 튀는 행동이나 정치 이념을 인정받으려면 남의 행동이나 정치 이념이 나와 다르다고 해서 무시하고 억압해서는 안 된다.
서로 인정해야 하는 나와 남은 여러 가지 뜻에서 힘이 대등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때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인정하는 것은 힘에 밀려서도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진짜 관용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먼저 인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백인과 흑인의 관계는 백인이 강한 자이므로 먼저 흑인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나라처럼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이 서로 대등하게 존중하려면 남성이 우선 여성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톨레랑스 정신은 남성의 우월함을 전제하고 존중을 구걸하는 것이 아니다. 짓이겨 놓은 상대에게서 받는 인정은 가짜다. 남성도 참된 인정을 받으려면 여성을 억눌러 놓아서는 안 된다. 톨레랑스의 목표는 내가 참된 인정을 받는 것이다.
2. 주제토론: 나의 성 의식은 어떠한가?
1. 토론과제
다음은 "나의 성 의식을 분석해 보라"는 주제로 대학생들이 쓴 보고서에서 뽑은 글들이다 이 글들을 잘 읽어 보면 우리가 성과 사랑에 관해 고민해야 할 거의 모든 문제가 들어 있다. 이 문제를 곰곰이 따져 보고 대학생의 의견에 찬반론을 펼치면서 성과 사랑에 대안 자신의 생각을 분석해 보자.
A. 나는 아직도 첫사랑 그것도 짝사랑을 잊지 못한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이었다. 전학 온 여학생을 보고는 첫눈에 반해 버렸다. 학교에서든 길에서든 그 여학생을 보면 가슴이 설레고 나도 모르게 흘깃흘깃 곁눈질했다 나는 지금 도 이런 감성을 간직하고 있다. 내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여성을 만나 평생 동안 한 사람만 사랑하며 살고 싶다.
@P130
B.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 내가 자라 온 가부장제 사회가 물려 준 성 의식이 얼마나 족쇄인지 느낄 수 있었다. 사랑하는 한 사람과 가능하면 평생 동안 섹스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가부장제 사회의 윤리다 사랑과 섹스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며 특히 여성에게는 지금보다 좀더 많은 자유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자녀 양육과 가사 노동만이 고스란히 여성의 몫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C. 나의 성 의식에는 어릴 때 본 포르노 잡지가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부모님께 들키지 않으려고 몰래 보면서 섹스는 드러내 놓고 즐길 만한 것이 못 된다는 의식도 생겨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모두 섹스를 즐기면서도 쉬쉬하는 것은 참 우스운 일이다. 이젠 성 이야기도 좀더 공개적인 자리에 본모습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는 온갖 위선이 조금이나마 정화될 것이다.
D. 나이트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하룻밤 사랑을 불태웠다는 이야기를 가끔 듣는다. 그때마다 호기심도 일어나지만 한편으로는 한심하다는 생각도 든다. 자유 분방한 성행위가 아직도 지탄받는 우리 사회에서는 머리로 이해한 이상만으로 살수는 없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분별 없는 정 행위는 만일 알려지면 남성보다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따라서 이런 커플의 경우 여성보다 남성이 더 무책임하다.
2. 논증과 비판
2.1 대학생들의 성 의식 분석
남은 나의 거울이다. 나 자신의 성 의식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남들의 성 의식에 대한 분석을 거울로 삼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성은 섹스로만 제한하지 말고 사랑과 성차별도 포함하는 개념으로 넓게 이해해야 한다. 성, 사랑, 페미니즘에 관한 '기본 강의'를 바탕으로 위에 나온 네 대학생의 성 의식을 분석, 비판해 보자.
A. 사랑에 대한 이 학생의 감성은 첫눈에 불꽃이 일어나는 열정적 사랑이 나 영혼의 빈 자리를 메우는 낭만적 사랑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첫눈에 반한 감성을 간직하고 있고 유지하고 싶다는 말이 이런 성 의식을 증명한다 그리고 섹스에 대한 생각은 평생 한 사람과 나누고 싶다는 것이므로 결혼 안에서의 섹스 와 가깝다.
이 학생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는 대체로 가정을 일터에서 성실하게 일할 수 있는 보조 장치로 보기 때문에 일부 일처제를 강하게 요구한다. 그러나 열정적 사랑이나 낭만적 사랑이 반드시 결흔 안에서의 섹스로 연결될 필요는 없다. 그만한 열정과 사랑이면 결혼의 울타리를 개의치 않고 평생 사랑하는 한 사람과 섹스를 나눌 수도 있다.
@p131
B. 이 학생의 성 의식은 가부장제 윤리에 대한 반감이 바탕이다. 이 반감이 결혼 안에서의 섹스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지고 좀더 자유로운 사랑과 섹스를 원한다. 자녀 양육과 가사 노동이 고스란히 여성 몫으로 돌아오는 데 대한 현실적 고려와 거부감도 이 학생이 전통적 성 의식을 받아들일 수 없는 중요한 이유다.
그러나 사랑과 섹스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는 생각은 사랑과 섹스의 사회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면을 보인다. 사랑과 섹스는 사회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당사자인 두 사람의 감정이 가장 중요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영향을 철저히 배제할 수도 없다. 많은 남녀가 가부장제의 폐해를 알면서도 전면적으로 거부하지 못하는 까닭은, 오랫동안 사회 관습으로 고착해 온 가부장제를 몇 사람의 힘으로 쉽게 뜯어고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좀더 온건한 대안을 모색할 필요도 있다.
C. 이 학생의 핵심 주장은 성에 대한 관심과 생각을 좀더 솔직하게 표현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포르노 잡지를 몰래 보던 자기의 모습과 성 이야기를 쉬쉬하는 남들의 모습이 모두 못마땅하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위선에 속한다.
성을 은밀하게 감추는 것은 사회가 요구하는 금기이므로 이 학생의 주장은 바타이유의 주장과 비슷하다. 금기를 위반하는 것이 사회의 위선을 정화하는 길이고 문화의 새 동력을 얻는 길이다. 성을 솔직하게 표현하자는 말이 곧 사랑 없는 섹스도 허용하자는 뜻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이런 뜻이라면 보드리야르의 주장처럼 금기를 위반하는 섹스는 사람을 기호처럼 취급하는 사물화를 낳을 수도 있다.
@p132
D. 사랑 없는 섹스를 한심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보아 이 학생은 결혼 안에서의 섹스나 사랑 있는 섹스를 지지할 것이다. 또 이상보다 현실을 더 중시하는 것으로 보아 이 학생은 가부장제 사회인 우리 현실에서는 결혼 안에서의 섹스 쪽으로 더 기울 듯하다.
그런데 이유가 흥미롭다. 이 학생은 사랑 없는 섹스가 여성에게 더 불리하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남성 중심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이 때문에 여성에게 돌아올 더 큰 피해를 우려하고 있는 셈이다 여성의 권리를 회복하자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보면 현실에 맞서지 않고 도피하려는 태도이므로 못마땅할 수 있지만, 여성을 노리개 취급하는 전통적 사고 방식에 대한 소극적인 저항도 엿보인다.
@P132
2.2 나의 성 의식 분석
남들의 성 의식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나의 성 의식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기본 강의'에서 나온 몇 가지 질문에 스스로 대답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나는 결혼 안에서의 섹스, 사랑 있는 섹스, 사랑 없는 섹스 가운데 어느 쪽을 지지하는가? 둘째, 나는 플라토닉러브에 대해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 셋째,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 동감하는가? 쉽게 한쪽으로 대답할 수 없는 문제도 있겠지만, 굳이 대답하라고 강요한다면 각자 이 세 가지 물음에 대한 서로 다른 답의 조합을 얻을 것이다.
"나는 사랑 있는 섹스를 지지하고 플라토닉러브에 찬성하고 페미니즘에 동감한다."
"나는사랑 없는 섹스를 지지하고 플라토닉러브에 반대하고 페미니즘에 동감한다."
"나는 결흔 안에서의 섹스를 지지하고 플라토닉러브에 찬성하고 페미니즘에 동감하지 않는다."
성 의식이 이 세 가지 조합 가운데 하나라면 적어도 일관성 면에서는 크게 나무랄 데가 없다. 사랑 있는 섹스를 지지하는 낭만파가 함께 지혜를 추구하는 플라토닉러브를 싫어하기는 힘들고, 가부장제에 반대하는 페미니즘도 거부하기 힘들다 내 몸에 대한 애착만 가진 사람이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서로 모습을 조율하는 플라토닉러브를 좋아하기 어렵고, 여성과 남성이 서로 동등하게 대우하기를 요구하는 페미니즘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힘들다. 결혼 안에서의 섹스라는 전통적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이, 정신적 사랑으로 잘못 이해하거나 서로 모습을 조율하는 플라토닉러브에 반대하기 힘들고, 여성의 권리 회복을 주장하는 페미니즘에 동감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다른 조합도 가능하다.
@P133
"나는 사랑 있는 섹스를 지지하고 플라토닉 러브를 지지하지만 페미니즘에 반대한다."
"나는 사랑 있는 섹스를 지지하고 플라토닉 러브와 페미니즘에 모두 반대한다."
"나는 사랑 없는 섹스를 지치하고 플라토닉 러브에 반대하지만 페미니즘에 동감한다."
사람의 의식은 성 문제이든 다른 문제이든 일관성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예로 든 네 학생도 유심히 살펴보면 모순이 눈에 띈다.
A는 결혼 안에서의 섹스를 지지할 수도 있고 사랑 있는 섹스를 지지 할 수도 있다.
B는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면서도 사랑 없는 섹스로 남을 사물화할 가능성이 있다.
C는 사랑 있는 섹스와 사랑 없는 섹스 사이에서 오락가락할 수 있다.
D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와 페미니즘 사이에서 방황할 수 있다.
각자 분석해 본 성 의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 물음에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 가장 솔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관성이 없고 모순이 있는 것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인생은 모순을 느낄 수 없으면 공허한 자신감으로 병들기 쉽다.
중요한 것은 대답 자체가 아니라 그 이유다. 나의 성 의식이 설사 일관성 없는 대답들의 조합이더라도 또 나의 성 의식을 내가 잘 모르더라도 스스로 각 물음에 대한 답의 이유를 알려고 노력하고, 만일 답이 분명치 않다면 내가 나의 생각을 잘 모르는 이유를 알려고 노력하면 성 의식은 모양을 갖출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사랑 있는 섹스를 지지하고 플라토닉러브에 반대하지만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하자. 내가 사랑 있는 섹스를 지지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플라토닉러브에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섹스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을 표현하는 자연스러운 몸짓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지할 수 있고, 상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플라토닉러브에 반대 할 수 있다. 페미니즘에 대해 동감해야 할지 아닐지 잘 모르는 까닭은 페미니즘에 대해 정확히 아는 것이 부족하고 또 여성이 권리를 회복하면 솔직히 말해서 내 일자리가 위협받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릴다면 나의 성 의식은 결혼 안에서의 섹스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진보적이지만 여성의 권리 회복에 대해서는 현실을 고려하여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P134
이렇게 스스로 질문하고 대답하고 그 이유를 따져 보면 나의 애매하던 성의식도 차츰 분명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 다음에는 과연 나의 성 의식은 이대로 바람직한지를 검토해야 한다. 이 검토는 나의 인생관과 세계관 전체를 문제삼는 작업으로 확대될 것이다. 그리고 이 작업을 수행하는 능력이 바로 철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3. 읽기자료: 사랑, 결혼, 가족
사랑은 무조건 상대방을 인정한다는 자의식끼리의 배타적 담합이다. 사랑하는 연인들을 취하게 만드는 것은 이러한 배타적 담합 그 자체다 그토록 쌀쌀맞던 그 여자가 이렇게 나에 대해 감탄하며 내 곁에 있다니 하고 감탄한다. 사랑하는 남녀는 상대방을 무조건 인정한다 결점까지도 매력으로 미화되어 있는 '이상적인' 상대에 대해서 사랑하는 남녀는 노예라도 될 듯한 헌신적인 마음이 된다. 긴장과 고독으로 움츠러들기만 했던 마음을 이렇게 풍요롭게 만든 사랑의 힘을 연인들은 또다시 감탄할 것이다.
@P135
그러나 자의식의 배타적 사랑은 헌신하되 지배하지 않는 성인이나 도사의 사랑과 다르다. 사랑하는 남녀의 헌신은 서로 지배하기 위한 전략이다. 절대적으로 헌신하고 절대적으로 지배한다는 전략이다. 상대의 전 존재를 붙잡아서 나를 인정하는 데 몰입하도록 하려는 저의가 헌신 뒤에 숨어 있다. 하지만 도취 상태가 계속되는 한 불순한 저의나 전략은 어떠한 헌신이라도 너끈히 감당해 낼 수 있는 풍요로운 마음에 가려져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현실은 얼마 가지 않아 사랑을 에워쌀 것이다. 현실은 우리를 깨우고 긴장시킨다 현실에 에워싸인 연인들 역시 도취 상태에서 깨어나 현실의 요구를 처리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긴장과 자기 단련을 요구하는 현실 앞에서면 사랑의 담합은 거추장스러운 질곡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전에 우리를 취하게 만들었던 현실과 배타적 담합 사이의 바로 그 거리가 우리를 초조하게 만든다. 헌신 행위 자체보다 그 뒤에 지배하려는 저의가 먼저 보인다. 상대가 매달리기라도 한다면 저만큼 달아나고 싶어진다 남자나 여자의 성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진부한 구조에 말려들고 만 것 같아 억울한 생각이 든다.
이런 저울질은 자의식 대 자의식의 관계에서 흔히 보는 행위다. 이제 감탄의 대상이던 사랑은 타인 대 타인의 극히 평범한 관계로 되돌아와 있는 것이다. 사랑이 도피적 담합이 아니라 현실 앞에서도 거듭나는 사랑으로 성숙할 수 있을 것인지 시험대에 올랐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남녀의 경우 열병 같은 사랑이 식은 후에 냉정을 되찾아 독립한 개인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남녀의 사랑을 기다리고 있는 현실은 남자와 여자를 독립된 개인으로 지켜 주는 것이 아니라 상보적인 관계 속에 묶어 버리는 가정이란 틀이다. 여성은 우선 주부가 되어야 하고 남성은 우선 가장이 되어야 하는 가정이란 틀은 결혼한 남녀를 상보적인 의존 관계 속에 몰아넣는다. 사회 현실과 마주할 기회를 잃어버린 주부는 사사롭게 헌신하며 사랑에 집착할 것이고, 현실을 헤쳐 가야 하는 남편은 헌신만 취하되 사랑을 외면하려 할 것이 다.
남녀의 사랑이 압도적인 체험이 되게 하는 다른 요인은 억압되어 온 성욕이다. 성욕은 마땅히 충족되어야 할 생리적 욕구다. 그러나 고도 산업 사회의긴 교육 기간 때문에 젊은이들은 사춘기 이후 대학을 졸업해서 결혼할 때까지 오랫동안 성욕을 억압당한다. 억압된 성은 사랑의 환상을 키운다. 성욕이 억압을 벗기 위해서는 결국 성욕을 수렴하게 될 결혼과 가족이라는 구조가 왜곡되어 있지 않아야 한다.
@P136
가정은 사랑과 성을 수렴하는 제도 장치다. 사랑의 도피적 행태와 억눌려 우왕좌왕하던 성욕은 과도기의 방황을 끝내고 공인된 사생활의 공간에서 제자리를 찾게 될 것인가?
가정하면 우리는 자유, 행복, 사랑, 프라이버시 등의 단어를 떠올린다. "집 떠나면 고생이다"는 말도 있듯이 가정은 우리가 편안히 먹고 입고 자는 곳이다. 바깥에서 지친 우리의 심신이 마음놓고 될 수 있는 곳이다 가정에서 자녀는 사랑을 받으며 양육된다 메마르고 각박한 바깥 사회와는 달리, 가정에는 부부간의 깊은 유대와 희생을 무릅쓰는 자녀에 대한 사랑이 흐르고 있어 우리는 정서적으로 안정을 얻으며 바깥에서 느끼지 못하는 행복과 자유를 느낀다 이런 가정은 보호되어야 할 불가침의 사생활 공간이다. 가정을 파괴하는 파렴치범은 말할 것도 없고, 가정의 의미를 깎아 내리거나 가족 구조를 비판하는 어떤 시도도 우리는 곱지 않은 눈길로 바라본다.
그런데 가정이 자유와 행복이 있는 쉼터이고 사랑의 보금자리가 되려면 여성이 주부가 되어 가정을 그렇게 가꾸어야 한다. 가정은 여성의 '키우고 보살피는' 노동이 생산한 서비스의 이름이기도 한 것이다. 결혼한 여성의 일은 가정을 관리하는 가사 노동이다. 가사 노동은 주부의 밥벌이 노동인 셈이다. 가사 노동은 어떤 성격을 가질까? 가사 노동은 여성의 자기 실현 수준이나 대인관계의 폭을 어떻게 제약할까? 가사 노동은 여성을 자립케 하는가?
가사 노동은 가정을 가꾸는 노동이다. "가정은 일터가 아니므로 주부는 집에서 논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주부가 잠시 집을 비우는 것이 가족들한테 얼마나 큰 불편이고 혼란인가를 생각해 보면 가사 노동의 비중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냉장고, 세탁기 등 가전 제품이 많이 보급되어 있지만 옷을 더 자주 빨아 입는다든지 더 영양가 있는 식단을 생각해야 한다든지 수험생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든지 생활의 품격이 더 높아졌으므로 가사 노동 시간은 줄지 않고 있다 한 통계 자료에 따르면 식사 간식 준비와 설거지에 약 네 시간, 청소에 약 한 시간, 빨래에 약 한 시간, 아이 돌보기와 자녀 교육에 약 두 시간, 장보기와 관공서 출입 등에 약 한 시간, 그밖에 남편과 웃어른 시중 등 가사 노동 시간은 약 열 시간 안팎이라고 한다.
가사 노동은 주부가 스스로 노동 과정 전체를 주관하며 가족 구성원이 직접 소비하는 서비스를 생산하기 때문에 일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노동이다. 가사 노동의 이러한 성격은 여성을 주부가 되도록 유혹한다. 사회적 노동은 무자비한 경쟁 속에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갖은 합리화 과정에 시달리기 때문에, 나를 실현하면서 기쁨을 느끼는 노동은 가정에서나 가능하리라는 계산도 이를 거든다. 실제로 대다수 여성은 자발적으로 결혼해서 가정에 안주하는 길을 택한다.
@p137
아이를 키우는 일도 주부가 기쁨을 느끼며 몰입할 수 있는 노동이다. 아이를 가까이 대하면 우리는 꼭 내 자식이 아니더라도 이 무력한 존재에 대해 무한히 보호해 주고 싶은 감정과 애착을 느끼게 된다. 또 무력한 아이가 신체적, 지적으로 꼴을 갖춰 가는 과정을 탐욕스러울 정도의 호기심을 가지고 관찰하며 즐길 수 있다. 아이에게 완전히 빠져들어 헌신하는 여성의 이러한 행태를 우리는 모성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가사 노동의 이런 면모를 두고 곧장 여성이 가사 노동을 통해 자아실현의 자유와 행복을 누린다고 단정짓는다면 잘못이다. 가사 노동에 기쁘게 매달려 있는 주부의 입에서도 가끔 한숨이 나온다. 가사 노동은 사회적 생산영역 외부에 있는 노동이다. 남편의 소득 수준이 생계비에 못 미칠 때는 주부가 따로 일터에 나가 돈 버는 노동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엿볼 수 있듯이, 가사 노동은 돈을 버는 사회적 노동이 아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은 상품의 형태로 생산된다. 상품들 중 일부를 차지하려면 돈을 벌어서 나도 상품 생산에 한몫을 하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내가 돈을 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필요로 하는 것의 생산에 나도 한몫을 했다는 사회의 공식적인 인정을 뜻한다. 가사 노동이 돈 버는 노동이 아니라는 것은 가사 노동이 사회적으로 공로가 인정될 수 없는 사사로운 일로 간주된다는 뜻이다.
아내가 집안 일을 해 준다면 남편은 돈을 벌어다 주는 것 아니냐고 우리는 말한다. 그러나 가사 노동의 사적이고 예속적인 지위는 곳곳에서 쉽게 확인된다. 가사 노동의 산물은 상품이 되어 바깥에 나가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일을 해도 일을 통해 인정을 주고받는 인간 관계가 쌓이지 않는다.
주부는 남편으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한다. 사랑한다는 말은 가사 노동에 주어질 수 있는 유일한 인정이기 때문이다. 남편한테는 주부의 시중이 필요하겠지만 주부한테는 남편의 사랑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인정을 얻어 낼 수 있는 유일한 통로로부터 자신이 단지 하인이 아니라는 인정을 얻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주부는 사사건건 사랑한다는 말에 집착을 보이며 사랑 타령을 하지 않을 수 없다.
@P139
주부는 남편과 자녀의 사랑에 기대어 자기 상실의 구조를 견뎌낼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은 듯하다. 남이 나를 보는 눈으로 내가 나 자신을 보듯이, 사회가 주부를 보는 눈으로 가족이 주부를 보고 주부가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주부는 사랑한다는 말의 공허한 울림을 감지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묘한 연민의 여운이 확실하게 감지될 것이다 남편과 자녀는 주부를 필요로 하지만, 주부의 존재는 가족을 긴장시키지 않으며 더 이상 존중받는 대등한 인격이 아니기 십상이다.
심지어 학대당하는 아내, 매 맞는 아내, 매 맞는 아이는 늘 우리 곁에 있다.
바깥에서는 '훌륭한 인격자'인 남편이 가정에서는 체면, 염치, 인내, 합리성 다 버리고 학대 행위나 폭력을 일삼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가정이 아무도 간섭할 수 없는 사생활 공간이고 아내가 사실상 사노예와 다를 바 없는 처지에 있다면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는 사태다.
여성은 사회로부터 격리 당한 채 키우고 보살피는 노동을 전담하면서 남성주도의 합리주의 문화와 분리된 독자적인 문화 자원을 축적할 수 있고 또 축적해 왔다. 이런 여성적 자원은 시류에 휩쓸려서 내팽개쳐 버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류를 비판하는 소중한 도덕 자원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투고 자기를 내세우는 자아가 아니라 키우고 돌보는 자아의 배양은 각박한 현대 사회에 새로운 피를 공급할 수 있는 귀중한 자원이라는 주장이다 여성은 자기를 부정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원을 긍정하고 긍지를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키워 주고 보살피는 관계만을 요하는 것은 아니다. 다 자라 버린 자녀에게 혹은 대화 상대가 아쉬운 배우자에게 키우고 보살피는 태도로만 일관한다면 도리어 상대방을 구속하는 질곡이다 노인들은 친구가 필요하다고 말을 한다. 노인들 역시 건강이 허락하는 한 보살핌을 받기만 하기보다. 젊은이들과 겨루고 힘을 합치며 당당히 타인으로 마주서기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 남편들은 대화 상대를 원한다고 말한다. 시중들어 주는 대신에 부양해야 하고 사사건건 사랑을 확인하려는 아내가 아니라 독립해 있고 자기 세계를 가지며 말 건네고 싶은 아내를 원하는 것은 아닐까? 성장할수록 자녀 역시 키움과 보살핌의 대상이기를 거부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조차도 언제나 감싸고 단 살필 수 만은 없다. 나는 나를 사랑하되 자신에 대해 냉정해지고 싶다. 거리를 두고 재고 자극하고 관찰하기를 원한다. 얼굴 맞댄 더할 수 없이 가까운 가족 관계에서도 우리는 서로 대등한 타인이기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닐까?
이정원 지음, (사랑, 결혼, 가족)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엮음, (삶과 철학),동녘, (1994. pp.83-108)에서 뽑고 줄임
연습문제
1. 성
1) 프로이트가 주장한 사람의 두 가지 원초적 충동은 무엇인가?
2) 금기를 위반하는 섹스에 대한 바타이유의 견해는 무엇인가?
3) '사랑 없는 섹스'의 특징은 무엇인가?
4) '사랑 없는 섹스'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견해는 무엇인가?
2. 사랑
1) (플라토닉 러브)의 참뜻은 무엇인가?
2) 어린 왕자의 참사랑이 (플라토닉 러브)의 현대판인 이유는 무엇인가?
3) 요즘 젊은 세대가 (플라토닉 러브)를 시시하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3. 페미니즘
1) '젠더(gender)'의 의미는 무엇인가?
2)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의 항목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는 근거 는 무엇인가?
3) 여성과 남성의 평등을 이룩하는 페미니즘의 두 갈래 원칙은 무엇인가?
4. 인정과 무시
1) 사람의 섹스가 사회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2) 사람의 사랑이 사회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3) 사람의 섹스와 사랑이 사회성을 지닌다는 사실이 왜 중요한가?
4) 인정과 무시의 논리를 성 차별 극복 문제에 적용하는 길은 무엇인가?
@P140
참고문헌
1. 조르주 바타이유지음, 조한경 옮김 (에로티즘), 민음사, 1989.
인간의 성이 지닌 특성을 금기의 위반으로 풀이한 책이다. 1부에서는 인간의 성은 금기의 위반이 특성이며 따라서 금기를 위반하는 에로티시즘은 매우 인간적인 행위라고 주장한다. 2부에서는 동물성에 기초하면서도 동물성을 배격하는 금기를 위반하는 에로티시즘이 인간의 사물화를 막아 준다고 주장한다 성 이야기를 공개적인 자리로 끌어 내어 성 의식을 개방하는데 이 바지 한 고전이다.
2. 장 보드리야르 지음, 이상률 옮김, 소비의 사회, 문예출판사, 1992.
포스트모더니즘의 대가로 주목받는 보드리야르의 초기 대표작이다. 현대 사회는 상품의 생산보다 소비가 경제의 동력이 되는 소비 사회이며 이때 소비되는 것은 일정한 욕구를 채워 주는 상품의 사용 가치가 아니라 심리와 지위의 차이를 표현하는 기호 가치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소비 사회 이론을 바탕으로 특히 3부 '대중 매체. 섹스, 여가'에서는 현대 사회의 성을 분석하고 있다. 여기서 몸이 소비 사회의 가장 아름다운 기호이고, 현대인의 성 의식은 자기 몸에 대한 나르시시즘이 핵심이며, 이런 나르시시즘만 있는 섹스는 사람의 사물화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3. 플라톤지음, 최명관 옮김, '플라톤의 대화', 종로서적, 1981.
플라톤의 대화편 가운데 유명한 '변명', '향연' 등이 실려 있다. '향연'의 주제는 에로스지만 구체적 내용은 고대 그리스 시민들 사이에 유행한 동성애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희극 작가, 의사, 비극 작가 등 향연에 참석한 사람들은 나이 든 어른 남자와 소년이 몸과 마음을 교류하는 당시의 소년애 풍속을 제각기 독특한 방식으로 변호한다 소크라테스도 소년애를 정당화하지만 그 이유가 단순히 몸을 나누기 때문이 아니라 지혜를 나누고 함께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플라토닉 러브의 원형과 본질이 지혜 사랑 곧 철학임을 이해할 수 있는 고전이다.
@P141
4. 볼프강 라트지음, 장혜경 옳김, '사랑 그 딜레마의 역사', 끌리오, 1999.
사랑의 형식과 사랑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모한 역사를 정리한 책이다. 고대 그리스의 플라토닉러브부터 중세 기사도의 낭만적 사랑, 르네상스 시대의 영혼을 구원하는 사랑 바로크 시대의 과시와 장식으로 세속화한 사랑, 계몽주의 시대 시민 계급의 도덕적이면서도 성별 역할을 엄격하게 분리하는 사랑, 20세기 프로이트의 문명화한 성욕의 형태를 떤 사랑까지 사랑에도 역사가 있다는 점을 잘 보여 준다. 21세기 사이버 에로스는 다루지 않았지만, 이런 새로운 사랑을 어떻게 전망하고 평가해야 할지를 생각하려면 사랑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꼭 필요하다.
5. 뤼스 이라가라이 지음, 박정오 옮김, '나, 너, 우리-차이의 문화를 위하여', 동문선, 1990.
성 차이를 기초로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벨기에 여성학자의 책이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모두 인간이고 따라서 인간의 평등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맥락에서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기성 이론들과 달리, 이리가라이는 정신분석학을 바탕으로 여성의 긍정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남성과 다른 이 정체성을 제대로 살리는 데서 여성 권리 회복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남성과 다른 여성의 긍정적 정체성은 어머니와 딸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으며, 아들은 자기가 어머니와 다르다는 것을 느끼면서 남을 지배하는 성격이 자라지만 딸은 남을 존중하는 성격 이 자란다는 점이다.
6. 이정원 지음, '사랑, 결혼, 가족',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엮음. '삶과 철학', 동녀, 1994.
페미니즘 이론을 사랑, 결혼, 가사 노동 등 여성의 현실 문제에 적용하여 쓴 글이다. 읽기 자료는 이 글에서 주로 1, 2절을 요약 정리한 것이지만 3, 4절에는 가족의 역사와 여성 문제의 해결책도 실려 있다.
7. 앤소니 기든스 지음, 배은경, 황정미 옳김, '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새물결, 1995.
연애와 결혼, 이성애, 가부장제 등 전통적 성 관행뿐 아니라 현대인의 일상적인 성 생활에서 나타나는 포르노그래피, 자위 행위, 바람피우기, 심지어 동성애, 섹스 중독, 성 도착증 등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이런 성 문화가 현대인의 정체성 추구에서 지닌 긍정적 의미를 인정하면서도 사랑하는 두 사람이 새로운 정체성을 협상해 가는 합류적 사랑과 민주주의적 친밀 관계 등 합리적 현대성에 기초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특징이다.
@P142
8. 비디오 테이프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마이크 피기스), '너에게 나를 보낸다' (장선우), '바그다드 카페' (퍼시 아들론), '델마와 루이스' (리들리 스코트)
@p143
제 3장 더불어 사는 삶-동양의 지혜
개관
이 장에서는 중국 사상의 두 축을 이루는 유가 사상파 도가 사상을 비교 검토하면서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이며. 사람들이 서로 화해하고 평화를 누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한다. 역사적으로 권위를 갖고 있는 사상이라고 해서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그 의미를 검토해 보는 것은 우리 삶의 실천적 목표를 설정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대체적으로 볼 때 유가는 자연보다는 인간을 강조하고 다른 자연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특성을 도덕성에서 찾으면서, 도덕적인 삶이야말로 인간다운 삶이며, 개인들의 도덕적 각성을 통해서 사회가 갈등 없이 통합되리라는 전망을 가진다. 말하자면 유가 사상은 인문주의이며 도덕주의이다. 유가의 이념에 충실한 사람은 고대로부터 전승되어 온 신성한 도덕률을 잘 학습하고 그에 의해 자신의 욕망을 단속하여 도덕적으로 성장할 뿐만 아니라, 비도덕적인 사회에 대한 무한한 염려를 가지고 제상을 교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한다 순수한 유교적 지식인에게서 우리는 마치 '맑은 바람, 씻긴 달'과 같은 도덕적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도덕이란 우리에게 항상 좋기만 했던 것인가. 과거 요지부동한 절대의 도덕률이라고 했던 것들이 근대 이후 수없이 폐기되고 있다는 사실은 시대의 도덕적 타락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독해될 수도 있지만, 그것들이 얼마나 인간의 자유로운 삶을 방해해 묵는가가 역사적으로 반성되고 있다는 증거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인간의 다양한 욕망을 단일한 가치 체계로 검열하려는 도덕의 시도는 그 자체로 하나의 권력이며, 그를 통해서 사회를 통합하려고 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도가는 유가의 도덕적 지향이 얼마나 개인과 사회를 왜곡시켜 왔는지를 지적하면서 그 어긋남의 근원이 자연보다 인간을 우위에 놓는 오만함에 있음을 역설한다. 도가적 삶이란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면서 잘잘못과 좋고 나쁨을 따지는 모든 편견으로부터 벗어나서 마음 속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삶이다 삶을 질곡하는 모든 편견으로부터의 자유는 개인의 해방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회가 원래의 평화적인 자연 질서를 회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p144
이러한 유가와 도가 사상이 우리 삶에 그야말로 지혜로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지혜롭게 반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외워서 그대로 입력시킨 체계는 이데올로기 이상이 될 수 없다. 유가 사상은 도가 사상에 의해서, 도가 사상은 유가 사상에 의해서 반성되어야 하며, 유가와 도가 사상 모두가 또 새로운 관점에 의해서 반성되어야 한다. '기본 강의'와 '주제 토론'의 서술을 읽으면서 그 속의 여러 관점을 통해 자기 반성의 어떤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지 고민해 보기 바란다.
1. 기본강의: 도덕 정신과 자유의 추구
1. 문제 제기
우리는 수많은 규범 속을 살아간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이른바 사회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 규범에 어긋나지 않도록 교육받는다. 그런 교육 과정을 잘 수행한 사람은 착하고 도덕적이라고 평가받는다. 그는 규범에 어긋나는 일탈적인 행위의 욕구를 조절할수 있으며, 한사회의 질서를 보존하여 그 사회를 재생산하는 데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한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왜 규범을 지켜야 하며, 규범을 지키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남에게 혹은 스스로에게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만약 그가 자신의 세계관과 가치 체계에 대한 심각한 반성 없이 사회적 처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주어진 도덕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이런 사람은 얼핏 도덕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도덕은 무엇보다도 내적 자발성과 신념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덕적인 인간으로 성장하려면 우선 이런 질문에 답해야 한다. 왜 도덕적인 삶은 좋은 삶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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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학교나 사회에서 권장하고 있는 도덕적 인간형을 보면 느낌이 어떤가. 말 잘 듣고, 자기를 앞세우기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고, 모험과 광기보다는 일상파 이성에 익숙한 사람 딱히 이런 사람을 비난하지는 않더라도 때로는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생각이다. 도덕은 이념과 구체적 규범을 통해서 인간의 욕망을 길들이려고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그야말로 생기 발랄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잘 통합된 사회라도 개인의 욕망을 하나로 통합시키지는 못한다. 입력된 프로그램대로 행동하는 인조 인간이 아닌 한 개인이 생각하는 것, 상상하는 것, 그의 느낌과 특수한 환경, 개인사적인 기억 등이 균일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것에 기초하여 발동하는 촉망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욕망의 자유로운 실현, 곧 자유에 대한 갈망과 도덕적 강제가 충돌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사실 욕망은 모든 실천의 동력이다 인간이 도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도 도덕적으로 성장하려는 욕망이 작용한 결과이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욕망이 다양하게 발전하고 그에 상응해서 욕망을 실현하는 방법이 발전함에 따라 사회와 문화가 발전해 왔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곧 욕망의 자유로운 실현을 도모하고, 그것을 억압하는 모든 외적 형식을 타파하는 것은 사회 발전의 중요한 조짐이다. 우리는 당대의 도덕률에 저항하면서 자신의 자유로운 발전을 추구했던 사람이 인류사에 얼마나 많은 공헌을 하였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만약 도덕이 이러한 삶의 운동을 억압하는 기제로서 작용한다면 도덕적인 사람이 되라는 학교와 사회의 충고에 이런 반문을 던질 수 있다. 도덕적인 삶은 과연 좋은 삶인가.
더욱이 우리가 알고 있는 도덕 규범이라는 것은 정말로 낡은 것이 많다. N 세대가 출현하고 사이버 세상이 확대되는 등 삶의 문화는 줄기차게 변화하고 있는데, 학교에서 가르치는 도덕 규범은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좋은 인간 관계를 만드는 데 해악을 끼친다고 분명히 증명된 규범도 단지 그것이 역사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강제되기도 한다. 이런 도덕 규범을 지키는 것이 도덕적이라면, 도덕적인 삶이 좋은 삶인가에 대한 회의는 증폭된다.
@p146
그렇지만 인간은 모여 살게 되어 있고, 모여 살수밖에 없다. 열악한 육체적 조건을 지닌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회를 조직할 수밖에 없다. 사회를 조직한다는 것은 인간 관계의 질서를 잡는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질서를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마다 자신의 자유로운 욕구 실현을 강조하고 질서의 구축을 위한 사회적 의무를 도외시한다면 어떻게 사회를 조직할 수 있겠는가. 사회를 조직하는 여러 체계 중에서도 도덕 체계는 가장 세련된 것이다. 도덕은 자율성에 기초하므로 외적 강제와 폭력에 의거하지 않는 사회의 자율적 조직화는 도덕에 의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급격한 사회 변동의 여러 방향 속에 혹시 인류를 파멸로 이끌 어떤 사악한 힘이 존재한다면 그 힘을 억제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오랫동안 유효한 것으로 용인되었던 도덕적 권위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도덕은 역시 필요한 것인가. 도대체 인간의 자유로운 욕구 실현을 저해하지 않으면서도 사회를 조직할 수 있는 도덕이란 없는 것인가. 자유롭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도덕적 의무와 충돌할 수밖에 없는가. 자유에의 욕망, 개인과 사회의 발전, 도덕은 어떻게 관계 맺는 것이 바람직한가. 유가와 도가사상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는 데 하나의 실마리가 된다.
2. 문제의 분석--유가와 도가
2. 1 도덕적 삶이 좋은 이유--유가의 입장
우선 위에서 처음으로 제기되었던 문제 곧 왜 도덕적인 삶은 좋은 삶인가에 대한 유가의 견해를 살펴보기로 하자.
유가는 사람이 동물과는 다른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수긍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사람은 단세포 동물과 다른 것만큼이나 동물과도 다르고,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유가는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인간의 질적 규정성 곧 본질을 도덕성에서 찾는다. 순자의 견해를 약간 각색해서 설명하자면, 모든 사물은 기 곧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만 생명은 세포로 구성된 존재에만 있고, 의식 현상은 동물 이상에서 발견되지만 도덕적 행위는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다. 다른 존재에는 없고 나에게만 있는 것이 나를 질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므로 도덕성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p147
이것은 하나의 관점이다. 실제로는 도덕성 이외에도 인간을 질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요소는 얼마든지 많다. 종교적으로는 영성을 가진 영혼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고, 근대 철학에서는 합리적 이성을 거론할 수도 있겠고, 사회생물학에서는 생물학적 특징을 중시할 테고, 사회철학에서는 노동 같은 사회적 특성을 강조할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성이 정말로 인간의 본질인지는 논란의 대상이 되지만 일단 하나의 관점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자. 이러한 유가의 관점은 순자보다도 맹자의 성선설적 전통에서 더 강하게 드러난다고 알려져 있지만 순자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도덕성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왜 도덕적인 삶이 좋은 삶인가에 대한 기초적인 답변이 마련된다. 자신의 본질로 복귀하는 것, 곧 참다운 자신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돌아가는 것은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물론 여기에는 본질적 상태가 바람직한 것으로 규정된다는 전제가 있다 그러므로 동양의 법가 사상이나 서양의 마키아벨리즘 같이 인간을 비관적으로 파악하는 경우에는 본질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비합리적인 본래성으로부터 벗어나서 합리적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 실천적 목표가 된다). 자신의 본질에서 이탈하는 것을 소외라 하고. 소외가 항상 현실로서 주어진다면 본질로 복귀하는 것은 소외의 극복이 되고 주어진 현실을 발전시키는 방법이 된다. 말하자면 유가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살아감으로써 선하디 선한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으며, 삶의 참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말한 셈이다 이러한 도덕적인 삶 곧 인간이 가야할 길, 짐승이 아니라 인간이 다니는 길이 말 그대로 유가의 도이다.
이러한 기초적 답변에 유가의 세계관을 덧붙이면 도덕적인 삶이 왜 좋은 삶인가에 대한 좀더 거창한 답변이 나온다. 유가는 우리를 둘러싼 우주 자연을 평화롭고 생명력이 가득한 유기체로 파악한다 이것은 사실 유가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동양 사상의 공통된 전제이다. 가령 부는 바람이나 따듯한 햇살, 흐르는 시냇물, 푸르른 잎사귀 등 동적인 생명력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은 물론이고, 숲 속의 고요함, 어두운 밤 하늘, 차가운 바위, 떨어지는 이파리같이 운동이 정지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서도 동양은 생명력을 감지한다. 유가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유가사상에서 좀 독특한 것은 그러한 생명력이야말로 선한 것 중에 선한 것이라는 점이 강조된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유가는 우주 자연의 생명력을 어질다거나 성실하다고 표현한다 곧 유가에서 우주자연은 지극히 선한 것 즉 최고선이다.
@p148
유가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우주 자연의 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 모습을 닮는다. 다시 말해서 인간도 우주 자연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그 속성을 보존하고 태어난다. 우주 자연에 깃든 생명력의 본질은 인간의 본질이 된다. 그것이 선천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도덕성이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본질은 선하다. (동물도 그런지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복잡한 문제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본질을 발휘하여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그저 자신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주 자연의 도덕성, 생명력을 살려내는 일이기도 하다. 무릇 만물은 이러한 우주 자연의 생명력에 힘입어 생장하므로 인간의 도덕적인 삶은 만물을 길러 내는 천지의 사업에 동참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천지와 함께 우주를 떠받치는 세 기둥이 될 수 있으며 그 생명력이 사회적으로 전파되면 태평한 세상이 만들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인 삶은 좋은 삶이다 도덕을 매개로 우주 자연의 무궁한 생명력을 향유함으로써 참 즐거움을 얻는 것, 이것은 개인적으로도 좋은 삶 아닌가.
그렇지만 유가 사상에 대해서 이렇게 물어 보자. 다 좋다. 하지만 도덕적인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인가 이에 대한 유가의 답은 한마디로 "예의법도에 따라 사는 것이 도덕적인 삶이다"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예의법도 곧 예란 옛 성인이 뛰어난 도덕적 성찰로 우주 자연의 생명력, 그 본질로서 도덕성을 반영하여 만들어 놓은 인간 행위의 구체적 절목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그러한 성찰을 할 수 있지만 보통 인간들이란 아무래도 반성력이 그 정도까지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곧잘 엉뚱한 행동을 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위험스러운 길을 택하기보다는 안전하게 옛 성인들의 길을 따르라는 것이 유가의 권유이다.
@p149
그래서 유가는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자율성보다는 규범의 준수를 강조하는 사상이 된다. 이것은 유가의 도덕적 실천에 자율성이 완전히 결여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예의 실천은 모름지기 그 실천에 대한 자율적 동의가 전제되어야 마술적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 유가의 생각이다. 하지만 유가는 그것이 어떤 권위로부터도 자유로운 충분히 자율적 상태에서 나왔느냐가 아니라 이미 규정된 규범에 합치하는가 여부에 따라 행위의 정당성을 판명한다. 그리고 이 정당성의 판명은 곧바로 권위화되어 인간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계기로 기능한다. 공자의 개인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유가사상이 동아시아에서 봉건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오랫동안 역할 했던 것도 결국 유가가 봉건적 인간 관계를 재생산하는 데 기여하는 예를 그토록 중시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을 염두에 두면 모든 권위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도가가 왜 유가를 비판하였는지 알 수 있다.
2. 2 도덕적 삶을 비판하는 이유-도가의 입장
보통 은자로 불리는 도가의 사상가들이 왜 세상을 등지게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것이 특정한 지대 상황이나 자신의 정치적 지위에 대한 하등의 고려 없이 순전히 삶의 참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한 철학자의 사색의 결과인지, 아니면 흔히 이야기하듯이 춘추 전국 시대라는 대혼란기의 정치 투쟁에서 낙오하여 현실로 화려하게 복귀할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 세련된 지식인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길인지, 그도 아니면 이 두 가지 상황이 교묘하게 맞아 떨어진 결과인지를 확인해 주는 뚜렷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역사적인 태도는--다소 실증사학적인 태도이기는 해도--이런 사실에 대해서 무엇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유가가 무너져 버린 옛날의 제도를 아쉬워하고 그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때 도가는 그들을 조롱하였고, 공동체적인 질서를 수립하고 인문 정신을 발양하기보다는 개인의 정신적 자유를 추구하고 자연주의적 삶이라고 할 만한 것을 권장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개인이 자유를 얻고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는 데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인간의 편협한 안목으로 세상을 질서 짓는 일이었는데, 도가가 보기에 이러한 잘못이 자행되는 근저에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오해가 있었다. 그들은 곧잘 인간개체의 물리량이 우주 전체의 물리량에 비해 얼마나 작은가를 비유함으로써 인간의 왜소함을 지적하려고 하였다. 가령 장자는 이 넓은 우주에 비교할 때 인간이란 좀 극적으로 표현해서 세상의 한 구석에 불과한 어떤 강가에서 풀을 뜯고 있는 소 꼬리의 털에 붙은 벌레의 알보다도 미미한 존재라고 말한다. 물론 이러한 비유를 통해서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 개체의 물리량의 작음이 아니라 개체의 정신과 육체, 나아가 사회 전체의 왜소함이었고, 그에 대비되는 우주 자연의 위대함이었다.
@p150
그래서 우리가 공정한 시각을 가지려고 한다면 자연의 시각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 점은 논쟁을 종식시키는 객관적 관점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회의를 통해서도 강조된다. 예컨대 갑과 을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싸우고 있을 때 누가 옳은가를 판단하려면 제3의 인물이 필요하지만, 그도 역시 특정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일 뿐이므로 또 다른 사람이 필요하고, 논쟁은 영원히 종식되지 않는다. 다른 관점이 있을 뿐 절대적으로 옳은 견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학적 연구 방법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일부의 사람들이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현대 사상(주로 포스트 모더니즘) 의 상대주의적 진리관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어쨌든 자신의 관점을 고집하는 것은 인간--아직 덜 떨어진 인간을 가리키는 것이기는 해도-의 중요한 특징이며, 그에 비해 자연은 아무것도 고집하지 않으면서도 조화로운 전체를 이룬다.
이렇게 자연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 모든게 달라 보이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미인의 그림자에 놀라 달아나는 숲 속의 사슴을 보면서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고, 자연 변화의 대단한 파노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삶에 대한 집착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다. 그러한 시각 전환의 종착역은 세상에는 아무런 우열도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만물이 모두 같다는 것 곧 제물이다. 그리고 그 심리적 효과는 마음 속의 자유와 평화이다. 모든 것이 같다면 보다 나아지려고 집착할 것도 없고, 뭔가 대단한 일을 하려고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생각을 바꾸는 것뿐이었다. 도가는 이렇게 사는 삶을 자연을 따르는 삶이라 하였고, 그에 반대되는 삶을 허상을 좇는 거짓된 삶, 따라서 고통스럽고 부자유스러울 수밖에 없는 삶이라고 하였다.
@p151
헛되이 사람들을 고통과 부자유 속에 빠뜨리는 대표적인 것이 도덕이었다. 도덕은 사물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거슬러 인위적인 기준으로 생각의 우열과 행동의 시비를 가르고, 교묘하게 '좋은 삶'을 강요함으로써 자유로운 삶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에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도덕은 아무래도 개개인의 다양한 욕망을 모두 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도덕은 항상 규범화되어 현실로 주어지는데, 역사가 보여 주듯이 도덕 규범이란 언제나 기존의 인간 관계를 반영할 뿐이다. 인간들이 모여 살면서 사회의 경제적, 정치적 조건에 따라 구체적인 인간 관계가 발생하면 그 인간 관계를 형식화하고 일반화하여 도덕 규범이 나타난다. 말하자면 시대를 앞서 나가는 도덕 규범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과거의 인간 관계란 대체로 불평등하고 비합리적이다. 지금도 그런데 옛날에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이런 인간 관계를 반영하는 도덕 규범은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지배 관계를 관철시킬 수 있는 유효한 무기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억압이다. 요컨대 도덕은 언제나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그래서 도가는 보다 자유로운 삶을 위해 도덕의 권위를 부정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큰 도가 사라지자 인의가 나타났다." 이것이 도가가 도덕적인 삶을 비판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도가에는 도덕이 없는가. 있다면 있다고 할 수 있다. 도가의 사상을 처음으로 우리에게 체계화된 형태로 알려 준 노자의 책 이름은 원래 도덕경이다. 말하자면 도가도 무엇이 좋은 삶인가를 말하였고, 그에 대비되는 나쁜 삶도 이야기하였다. 넓은 의미에서는 가치란 '좋은 것'이므로 도가도 특정한 가치를 지향했다고 할 수 있고, 그러한 가치의 실현을 촉구하는 도덕철학 체계를 구축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유가를 포함한 대부분의 도덕철학(도덕 형이상학) 은 무엇인가 요지부동한 궁극적인 것이 있고, 그것으로 다가감은 좋은 일이며, 도덕은 그것에 다가가는 중요한 방법이라는 이론적 패턴을 가지고 있는데, 도가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먼 이야기이다. 당장은 도가가 도덕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에 대항하는 사상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도가의 도덕이 유가의 도덕에 대항하고 있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도가가 어떤 특정한 가치 체계에 틀지어진 삶이 아니라 거칠 것 없이 소요하는 삶을 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도가의 강점은 현실의 질서에 대한 강한 부정의 정신에서 찾을 수 있거니와, 유가의 도덕이 가고 새로운 도덕이 출현하면 도가는 설령 그것이 좀더 자유주의적이더라도 그것을 부정할 것이다. 요컨대 도가의 자연을 따르는 삶이란 도덕적 권고라기보다는 항상 있게 마련인 현실의 질서를 비판하고 부정할 이론적 토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가의 '도덕'은 규범화되지 않았으며, 어떤 면에서는 영원히 규범화될 수 없다.
@p152
그러므로 도덕을 포함한 우리의 삶의 형식 일반이 이데올로기적임을 직시하고,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은 도가의 사상에 동의할 수 있다. 새로운 삶의 형식은 구각을 파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건설되므로 주어진 삶의 틀에 안주하는 일상인이 아니라 창조적 개인으로 살아갈 생각이 있는 사람도 도가의 사상에 동의할 수 있다. 또한 건전한 유가라면 자신의 사상을 도가를 통해서 반성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거꾸로 보고 뒤집어 보는 도가식 사고 방식은 참으로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많다. 하지만 도가로 어떤 세계를 이를 수 있겠는가. 부정의 정신 충만한 도가는 질서를 파괴하는 데는 좋은 도구이지만 새로운 질서를 건설하는 도구로는 약하다. 도가의 자연주의적 관점은 인문 문화의 병폐를 반성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인간이 문화를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도가의 우주적 상상력은 우리의 안목을 확장하여 기존의 세계상에 안주하지 않도록 해 주지만, 그로부터 전망 있는 새로운 세계상을 명료하게 그리기는 어렵다. 질서를 깼으면 이제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한다. 그 새로운 질서가 설령 우리의 자유를 다시 제한한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질서가 세워져야 그에 대한 새로운 부정이 나타나 개인과 사회가 더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이성적 건설 작업은 아마도 도가 사상의 몫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도가가 좀더 보편적인 철학 사상으로 발전하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이며, 도가의 치명적 약점이기도 하다.
@p152
3. 종합 고찰: 동양의 참 지혜
이제 결론을 내자. 앞의 문제 제기에서 우리는 욕망의 자유로운 실현은 도덕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지, 또 인간의 욕망, 개인과 사회의 발전, 도덕은 어떻게 관계 맺는 것이 바람직한지를 생각해 보자고 하였다 일단 도덕이 객관화되어 규범으로서 주어지면 인간의 욕망과 십중 팔구 충돌하게 되어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이 충돌을 모면하는 유력한 방법은 도덕의 객관화 방식이 일방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곧 각 개인이 자율적 도덕률을 형성하여 그것을 타인의 것과 공정하고 자유롭게 교환하는 가운데에서 도덕이 객관화되어야 한다. 이때의 자율적 도덕률은 개인의 욕망에 여과되어 형성되는 것이므로, 만약 이렇게 도덕이 객관화된다면 욕망의 자유로운 실현과 도덕이 충돌하지 않는 상태를 상정할 수 있다.
이러한 도덕의 객관화 과정에는 당연히 일련의 조정 국면이 수반될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타인의 욕망에 여과된 그의 도덕률이 나의 도덕률과 충돌을 일으켜 반성이 진행되고, 그 반성이 나의 욕망에 새로운 자극을 주며, 자극된 욕망에 의해 나의 도덕률이 수정되어 타인에게 전해지고, 타인도 그와 유사한 과정을 겪으면서 상호의 도덕률이 수렴해 가는 국면이 될 것이다. 이때 나에게 질서잡힌 도덕률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충돌이 없으니까 반성도 있을 수 없고, 기존의 도덕률을 부정하며 끝없이 발전하려는 욕망이 없다면 새로운 도덕률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실 유가와 도가 사상에 대한 검토가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과제를 우리에게 던져 주었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유가는 질서를 잡고 도가는 그것을 깨부수면서 개인과 사회가 발전하는 것이다. 단 유가는 기존의 질서에 안주하지 않고 도가의 부정을 받아들여 정말로 인륜적인 세상을 향해 끝없이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는 준비를 해야 하며, 도가는 어떤 이념으로도 발전하려는 개인의 욕망을 한계 지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된다면 유가와 도가는 투쟁하면서도 상호 협력하는 우리의 두 유산이 될 것이다.
@p154
그래서 동양의 참 지혜가 있다면, 그것은 유가의 어떤 것이나 도가의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유가와 도가가 하나의 문화 속에 잘 융합되어 있었다는 점이라고 말해야 한다. 사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유가도 있고 도가도 있다. 공자냐 노자냐의 문제가 아니라, 공자와 노자를 어떻게 넘나들 것이냐의 문제인 것이다.
도덕인가 자유인가?
1. 토론 과제
아래에 두 개의 글이 주어져 있다 두 개의 글을 읽고 어떤 글이 더 마음이 드는지를 선택하고, 그 글의 입장에서 다른 글을 비판해 보도록 하자. 자기 논리가 갖추어지면 다른 글을 선택한 사람과 토론해 보자. 그리고 이 두 글의 장점을 종합할 수 있는 어떤 논리가 있는지를 모색해 보자.
1) 새벽에 일어나기 싫은 때 이런 생각을 네 가슴 속에 명기하라. "나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하러 일어난다"고. 그것을 위하여 내가 태어났고, 그 때문에 내가 세상에 나온 일을 하러 가는 것을 그래도 불평한단 말인가 또는 이불 속에서 기분 좋게 자고 몸을 따뜻하게 한다는 이 일을 위하여 내가 만들어졌단 말인가. "그러나 이것이 더 즐겁다"고? 그러면 너는 쾌락을 위해 만들어졌단 말인가. 작은 식물, 작은 새, 개미, 거미, 꿀벌, 이들이 모두 제각기 자기의 일을 부지런히 하고 질서 정연한 우주를 이루는 데 자기 몫을 하고 있는 이치를 생각하라. 그래도 너는 사람으로서의 일을 하기 싫단 말인가. "그러나 좀 쉬는 것도 필요하다"고? 나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은 휴식도 제한하고 음식도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p155
... 우선 네가 어떤 사람의 배신과 망은을 나무랄 때는 네 자신에게 생각을 돌리라. 왜냐하면 네가 친절을 베풀었을 때 너는 그 이상의 무엇을 바라겠는가. 네가 네 본성대로 어떤 일을 했으면 그만 아닌가. 그 일에 대한 보상을 바란단 말인가. 마치 눈이 보는 값을 달라 하고 다리가 걷는 값을 달라 하는 듯이 말이다. 이것들이 자기의 특정한 일을 하도록 만들어졌고, 각자의 생김새대로 그 일을 함으로써 완전히 자기 본분을 다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역시 본래 남을 위하도록 만들어졌으니 일반의 복리를 위하는 은인으로서 행동했다면 그 일을 위하여 자기가 마련된 바를 하고 자기의 본분을 지킨 것뿐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 우스 지음, (성찰록)
2) 백 년이란 사람 목숨의 최대 한계여서 백 년을 사는 사람은 천에 하나도 안 된다. 설사 그러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어려서 안기어 있던 때로부터 늙어 힘없는 때까지가 거의 그 반을 차지할 것이고, 밤에 잠잘 때의 활동이 끝난 시간과 낮에 깨어 있을 적에 헛되이 잃는 시간이 또 거의 그 반을 차지할 것이다. 아프고 병들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자기를 잃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시간이 또 거의 그 반은 될 것이다. 십수 년 동안을 헤아려 보건대 즐겁게 자득하면서 조그마한 걱정도 없는 때는 한시라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사람은 살면서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무엇을 즐겨야 하는가? 맛있는 음식과 좋은 옷을 입어야 하고 음악과 미인을 즐겨야 한다. 그러나 맛있는 음식과 좋은 옷을 항상 만족스럽게 구비할 수는 없고, 좋은 음악과 미인을 언제나 데리고 놀 수도 없다 그리고는 또 형벌과 상에 의하여 행동이 금하여지기도 하고 권면되기도 하며, 명예와 법에 의하여 나아가게도 되고 물러나게도 된다. 황망히 한때의 헛된 명예를 다투고 그저 죽은 뒤에 남는 영화를 도모하여 우물쭈물 귀와 눈으로 듣고 보는 것을 삼가고 몸과 뜻의 옳고 그름에 전전긍긍하면서 공연히 좋은 시절의 지극한 즐거움을 잃고 한시라도 자기 멋대로 행동하지 못한다. 이것이 형틀에 매어 있는 중죄수와 무엇이 다른가?
태고적 사람들은 삶이 잠시 오는 것임을 알았고, 죽음은 잠시 가는 것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마음을 따라 움직이면서 자연을 어기지 않았으니, 그가 좋아하는 것은 몸의 즐거움에 합당한 것이어서 그것을 피해 가지 않았고 명예를 좇아 행동하지 않았다. 본성에 따라 노닐면서 만물이 좋아하는 바를 거스르지 않았으며, 죽은 뒤의 명예는 취하지 않았다. (열자) (양주편)
@p156
2. 기본 논증과 비판
위에서 주어진 첫 번째 글은 유럽 고대의 스토아 학파 사상을 대표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의 것이다. 스토아 학파는 소크라테스의 삶과 사상에 영향을 받아 제논(Zenon) 이 세운 학파로, 삶의 진정한 행복은 도덕적인 삶에 있음을 이야기한다. 위의 글에서도 나타나 있지만, 그들은 세계를 질서가 잘 짜여진 사물들의 배열 장소로 파악하면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영혼이며, 영혼에 합치되는 삶이 인간다운 삶이고, 영혼에 합치되는 삶이란 세계의 영혼으로서 신의 섭리에 따르는 삶이라고 하였다. 신이 로고스 곧 이성으로 표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혼도 이성에 뿌리를 박고 있는데, 이때 이성은 자유롭게 생각하는 정신이라기보다는 인간이 세계의 질서 속에 어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잘 알아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잘 짜여진 세계의 질서를 재생산하는 데 기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욕망의 절제가 필요하며, 욕망의 절제를 통해 도덕적 자기 사명을 완수할 때 내면의 평정이 찾아오고 인생의 참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이 학파의 주장이다.
위의 글에서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으며, 그러한 일을 행함으로써 다른 동물들이 그러하듯이 사람도 질서정연한 우주상을 구축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육체적 쾌락이나 물질적 욕구에 대한 견해는 대단히 부정적이어서 자연은 그러한 것에 대한 무분별한 추구를 제한하고 있다고 본다 욕망의 절제와 남을 위한 희생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물질적 보상이 아니라 자신의 의무를 다하였다는 도덕적 자부심이며, 도덕적 자부심을 갖는 것이야말로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생각을 이 글은 보여 준다.
이러한 스토아 학파의 논리는 유가사상과 대부분 일치한다. 어긋나는 것이 있다면 스토아 학파가 질서가 잘 짜여진 세계의 근거로 신을 내세우는 데 비해, 유가는 자연 자체가 이미 질서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주어진 자신의 본분을 다함으로써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의 질서가 이세상에 구현된다는 생각은 유가의 정명론에서도 그대로 발견된다. 정명론은 공자가 말한 것으로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명분을 바로잡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론이다. 명분은 '... 답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잘 알려진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부모는 부모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하라"는 말은 명분론이 어떤 실천을 권장하고 있는지 잘 보여 준다. 임금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이 임금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신하라는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이 신하로서 해야 할 일을 하면 군신 관계는 도덕적으로 편제되어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며, 군주가 하늘을 대신하여 신하들을 다스리는 것이 자연적 질서로 주어져 있는 한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자연적 질서를 세상에 구축하는 길이라는 생각인 것이다. 각각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주어지는 명분은 구체적으로 예에 의해서 규정된다. 따라서 이러한 사고에서는 신하가 신하답지 않게 행동하는 것, 가령 군주에게 충성하지 않는 것은 비도덕적인 행동이 된다.
@p157
모든 사람이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여 명분에 충실한 삶을 산다면 사실 세계의 변화는 불가능하다. 질서는 이미 주어져 있고. 명분의 실천에 의해서 질서는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질서가 잘 짜여진 세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다고 이야기되는 질서 자체에 문제가 있다면 그 질서를 준수하는 것은 개인과 사회의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가령 군신 관계라는 정치 질서를 준수하는 것이 개인과 사회의 발전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렇지만 위와 같은 생각에서는 군신 관계의 철폐를 위한 실천이 비도덕적 인 것으로 간주된다.
물론 이러한 유가의 명분론적 사고 혹은 스토아 사상에 아름다움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주어진 명분이나 본분에 다하기 위해서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도덕적 아름다움이 있다. 하지만 갈등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갈등을 낳는 사회적 모순을 도외시하면서 주어진 사회 질서를 준수하고, 내면의 평정을 찾기 위해 자연적으로 분출하는 자신의 욕망을 애써 외면하면서 그것을 일정한 도덕률에 얽어매는 것은 오히려 더 심각한 무질서를 낳기 마련이다. 아직까지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 우리의 사회는 계속 변화 발전해야 하고, 변화를 위해서는 기존의 질서를 거부해야 하며, 변화를 위한 실천의 근저에는 자유롭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이 있다. 그런 면에서 실로 사회의 변화를 낳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가나 스토아 학파는 질서 있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항상 욕망의 절제를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질서로 세계를 편제하려는 생각 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 질서가 궁극적으로 도덕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도 옳다. 발전을 위해서는 기존의 질서에 도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일관된 세계상을 갖고 새로운 질서를 부식시키려는 노력도 필요하며, 그 질서는 정치적, 경제적 강제에 의해서 주어지지 않고 자율성의 토대 위에서 '인륜적인' 지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도가가 그런 것처럼. 요즘 유행하는 자유주의에도 대안적 세계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도가나 자유주의에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기에 충분한 면이 있는 것처럼, 유가나 스토아 학파의 도덕이 그대로 현실의 도덕률이 되어서는 곤란하지만 그 정신은 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면을 가지고 있다.
@p158
두 번째 글은 '열자'라는 책 속에 들어 있는 한 편의 글이다. '열자'는 '노자'나 '장자'와 마찬가지로 도가 사상을 대표하는 책이다. 이 글이 담겨 있는 편명은 '양주편'인데, 양주는 적어도 맹자에 의해서 알려진 양주는 지독한 이기주의자이다. 맹자는 그가 '자신의 머리카락 한 올을 뽑아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더라도 그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양주의 이러한 태도를 위아론이라고 한다. 양주에 대한 맹자의 평가에는 양주를 의도적으로 폄하하려는 의도가 개입되어 있기는 하지만, 유가 전통을 계승하는 맹자의 눈에 그렇게 볼 만한 이유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양주는 도가의 선구자이다. '묵자'나 '한비자' 같은 다른 중국의 고전을 보면 그는 생명을 중시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말하자면 그는 생명의 자유로운 느낌을 방해하는 그 어떤 것도 거부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귀하다고 하는 것도 내 생명의 즐거움을 증진시키는 것이 아니면 귀하지 않게 생각하였고, 세상에서 옳다고 하는 것도 자신에게 옳지 않으면 싫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노자나 장자와 마찬가지로 도덕이나 명예에 대한 추구를 거부한다. 그것은 나의 자유로운 생명을 구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정말로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더라도 그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만약 그랬다면 이른바 천하를 이롭게 한다는 것이 도덕 군자의 안목으로 해석된 이로움이고 권력자의 입장에서 본 이로움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천하를 이롭게 한다는 맹자의 길은 그가 보기에는 허구였고, 양주는 그러한 허구를 위해서 내 생명을 구속하고 희생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양주는 자명한 즐거움으로서 몸의 즐거움을 추구한다. 위의 글에서도 그는 옛날의 성인들이 몸의 즐거움에 합당한 것을 추구하였다고 말하였다. 사실 행복은 소극적으로는 고통의 부재이고, 적극적으로는 즐거움이 충만한 상태이다. 단지 많은 윤리학설은 몸의 즐거움은 참 즐거움이 아니고, 어떤 숭고한 가치에 부합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향유되는 정신적 즐거움이야말로 참 즐거움이라고 이야기해 왔을 뿐이다. 하지만 몸의 즐거움만큼 자명한 것은 없다. 유가의 도덕률을 실천함으로써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아름다운 여자와 같이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즐거움의 느낌을 준다. 도덕은 이러한 즐거움이야말로 사악한 것이라고 강조함으로써 그에 대한 죄의식을 불어넣는다 그렇지만 그렇게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 오히려 몸의 즐거움의 자명성을 반증한다.
@p159
자명한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우선 도덕이나 명예 같은 허구적인 가치 체계와 그것이 불어넣은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위의 글에서 말하는 '형틀에 묶인 죄수의 삶'이다. 아울러 양주는 자연에는 그러한 구속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구속 없는 자유로운 생명의 즐거움, 그것이 만물이 좋아하는 바이고 자연을 따르는 삶이었다.
이렇게 이 글은 앞의 글과 전혀 다른 시각을 보여 준다. 정말로 인간다운 것은 주어진 도덕률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욕구에 따라 즐거움을 찾는 것이다. 쾌락은 찬양되고, 절제는 비판된다.
그렇지만 자연적 본성에 기초한 인간의 삶이 서로 화해를 누리리라는 보장은 어디에 있는가. 자연은 평화가 아니라 투쟁 상태에 있다. 두뇌가 발달하지 않은 동물은 충동을 조절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져서 충동에 입각해서 행동하기 마련이거니와, 서로 다른 개체의 충동이 동시에 만족될 수 없을 때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장치란 그저 상대방의 힘의 우위를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자리를 피하거나 아니면 힘의 우위를 확인하기 위해 싸움을 시작하는 것뿐이다. 힘에 의한 지배가 관철되기는 자연이나 사회나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인간 사회는 특정한 이념이나 가치로 힘에 의한 지배와 자연적 투쟁 상태를 종식시키려고 하지만 자연에는 그러한 노력조차 경주되지 않는다. 이성을 통해서 충동과 욕망을 통제하는 능력은 인간에게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아닌가.
물론 도덕은 일단 이데올로기로서 다가온다. 하지만 양주는 이데올로기가 억압의 장치이자 동시에 자기 계발의 계기가 된다는 점을 모르는 것 같다.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억압하지만 동시에 그를 발전시키는 매개가 된다. 가령 어린아이에게 망태 할아버지가 있다는 의식을 심어 주고 망태 할아버지가 온다는 말로 어린아이의 행동을 통제하려는 것은 이데올로기이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그 말이 허구라는 것을 곧 깨닫는다. 그것을 깨달으면 그와 유사한 유치한 말에는 잘 안 속는다. 어린아이의 자의식이 그만큼 발전한 것이다. 그 뒤에는 이제 좀더 세련된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 어른의 말을 잘 들어야 착하다고 칭찬 받는다는 따위가 그것이다. 하지만 학교에 들어갈 나이쯤 되면 무작정 그렇게 말하는 것도 잘 안 통한다. 어린아이는 "왜 어른들 말만 들어야돼? 우리는 마음이 없어?"라고 반문한다. 그만큼 어린아이는 성장해 있다. 이렇게 사람은 체계로서 이데올로기가 주어지고 그것을 비판하면서 어린아이는 점점 더 성장해 간다. 체계로서 이데올로기가 주어지지 않으면 비판과 반성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발전도 불가능하다.
@p160
그러므로 도덕이 이데올로기라는 사실 때문에 도덕 자체를 거부하고 자연적 삶으로 돌아가려는 것은 일종의 퇴행이다. 현실의 도덕이 이데올로기라면 그것을 비판하고 반성하면서 좀더 발전된 도덕을 세우고, 다시 그것을 반성하는 식의 과정이 전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들을 참고로 하여 앞의 두 글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반성하면서 서로 토론해 보자.
3 읽기 자료: 개인적 삶과 사회적 삶
나의 개인적 삶과 사회적 삶을 깊이 생각해 볼 때, 나는 이 두 측면이 이성적이고도 실천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확실히 발견하게 된다. 나는 타인들의 존재와 삶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나의 본성이 무리를 지어 사는 동물들의 본성과 모든 점에 있어서 닮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인간들이 만든 음식을 먹고, 인간들이 지은 옷을 입으며, 인간들이 세운 집에서 산다.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생각하는 것 전부가 인간의 덕택이다. 그리고 나는 의사 소통을 하려고 인간이 창조해 낸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만일 나의 사고하는 능력이 말을 사용할 줄 모른다면, 나는 실제로 무엇이 될까? 그렇다면 나는 틀림없이 말 못하는 고등 동물에 불과한 가련한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인간의 공동체적 삶 안에서 내가 동물보다 더 누리고 있는 이점을 알고 있다. 만일 어떤 개인이 태어나자마자 버려진다면, 그는 육체적인 면이나 본능적인 면에 있어서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동물의 상태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나는 그런 모습을 상상해 볼 수는 있으나 도저히 그런 것을 가정할 수는 없다.
인간인 한, 나는 단지 개체적인 피조물로서 존재할 뿐 아니라 나 자신이 커다란 인간 공동체의 한 구성원임을 깨닫는다
@p161
바로 이 사실을 아는 데 나의 가치가 있다. 나의 감정과 생각, 행위가 하나의 궁극적인 목적, 즉 공동체와 그 발전이라는 목적을 향할 때만 실제적으로 한 인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사회적인 태도가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선하다' 거나 혹은 '악하다' 라고 판단 내릴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원초적인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사회에 주어진 물질적, 정신적, 도덕적 여건 안에서 수많은 세대를 통해 이어져 온, 창조적 자질을 타고난 몇몇 사람들의 예외적인 역할을 분간해 낼 줄 알아야만 한다. 그렇다! 어느 날 처음으로 불을 사용하고 또 농작물을 경작하며 증기 기관차를 발명 한 것은 어떤 한 인간 즉 창조적인 개인이었다.
고독한 인간은 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가치를 오직 홀로 생각하고 홀로 창조해 낸다. 그렇듯이 한 인간은 새로운 도덕적 규율들을 만들어 내고 사회적 삶을 변화시킨다. 창조적인 한 인격체는 자기가 속한 사회의 도덕적 진보가 완전히 그 자신의 독립성에 달려 있기 때문에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회는 의사 소통의 가능성을 박탈당한 인간 존재처럼 냉혹한 실패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나는 이 이중적인 맥락을 통해서 사회의 건강도를 진단한다. 사회는 공동체와 깊숙히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독립적인 개인들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고대 문명과 유럽 문화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때 꽃핀 것을 생각해 보면, 이미 중세 시대가 죽었고 시대에 뒤떨어졌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노예가 해방되고 마침내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국가와 사회와 한 인간의 창조적인 능력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우리의 지구는 과거와 비교해 볼 때 너무나 엄청난 인구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말하자면 유럽의 경우 1세기 전보다 거주자가 3배 가량이 더 늘어났다. 그러나 공동체가 본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창조적인 인격체의 수는 감소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발견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대신 과학의 발달로 인한 각종 첨단 기계의 등장이 부분적으로 창조적인 개인의 역할을 대체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는 분명히 첨단 기술적인 분야 안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과학적 세계의 불안정한 상태 속에서는 이미 상당히 진행된 상태다.
천재가 사라졌음은 예술의 세계에서도 두드러진다. 회화와 음악은 변질되었고, 인간들은 감수성을 상실해 간다. 이제 정치적 지도자는 없고, 시인들은 자기의 자주적인 독립성과 도덕적 권리의 필요성을 경시한다. 이렇게 가치의 바탕을 상실한 제도들이나--소위 민주주의적이고 공동체적 기구라고 말하는--의회 기구들은 현재 수많은 나라에서 그 타락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독재의 현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개인에 대한 존중심과 사회적인 도덕성이 빈사 상태이거나 이미 죽었기 때문에 독재가 용인되는 것이다. 지금은 신문지상의 논평을 통해 광적이고 판단력이 없는 젊은이들을 선동하여 살상을 하거나 살상을 정당화하기 위해 군대에 지원할 각오를 가지게끔 부채질할 수 있다. 그렇게 악의를 품은 인간들이 자기의 비열한 목적을 얼마든지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 개개인의 인격과 위엄은 강요된 군사적 의무에 의해서 도저히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손상되었고, 우리의 문명화된 인간성은 이러한 암적 요소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 그러므로 이 재앙을 우려하는 예언자들이 우리 문명의 거대한 몰락을 끊임없이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요한계시록을 풀이하는 미래학자들의 부류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보다 나은 미래를 믿기 때문에 오히려 나의 희망을 정당화시키려고 한다.
@p162
오늘날의 이런 타락 현상은 인간들이 자기 존재를 위해 경제와 기술의 급격한 발전을 이용하여 전쟁을 광범위하게 벌이고 있음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인류는 인간 개개인의 자유로운 발전 가능성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경제와 기술의 발전은 노동량을 감소시켰고, 인간 공동체의 요구를 더욱 빨리 만족시켜 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반강제적이다 시피한 노동의 과학적인 분배는 개인의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할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나는 우리 시대를 해석할 내일의 역사가를 상상해 본다. 그들 역사가들은 사회적 질병의 징후로서 생산 수단의 갑작스런 발전과 교체에 의해 가속화된 생산성의 엄청난 증가 현상을 그 고통스런 증거로서 제시할 것이다. 그러면서 전진하고 있는 인류를 재인식하게 될 것이다. 앨버트 아인슈타인 지음, (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한겨레출판사, 1996.
@p163
연습문제
1. 문제 제기
1) 욕망의 의미를 설명하시오
2) 욕망과 도덕 이 충돌하는 이유는?
2. 문제의 분석--유가와 도가
1) 도덕적인 삶은 왜 좋은 삶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유가 사상의 입장에서 답하시오.
2) 유가 사상이 봉건 사회에서 지배 이데올로기로 기능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서술하시오.
3) 도가의 유가 사상 비판이 어떤 면에서 정당성을 지니는지에 대해 서술하시오.
4) 도가사상이 우리 현실에서 지니는 의의와 한계에 대해 서술하시오.
5)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라는 주장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6) 도가의 상대주의 인식론이 지니는 장단점에 대해 서술하시오.
7) 도가의 자연주의가 환경 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서술하시오.
3. 종합 고찰
1) 우리 시대의 구체적인 도덕 규범 하나를 예로 들어, 도덕적 상황의 개선이라는 관점에서 어떻게 평가될 수 있는지를 서술하시오.
2) 욕망의 자유로운 실현과 도덕은 충돌하는지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쓰시오.
3) 유가와 도가 사상을 어떻게 계승하는 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해서 서술하시오.
@p164
참고문헌
1. 막스 베버 지음, 이상율 울김, '유교와 도교', 문예출판사, 1990.
독일의 저명한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가 유교와 도교의 사회학적 함축을 분석한 책, 베버는 이 책에서 유교와 도교가 근대 사회의 발전을 어떻게 저해하게 되었는가를 고찰하였다. 원래는 저자의 '종교사회학 논집'에 들어있는 논문이지만 따로 책으로 번역 출판되었다. 이 책에서 내려진 유교와 도교에 대한 베버의 평가는 중국의 종교, 철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오기까지 거의 50년 동안 서양 학계의 시각을 대변하였다.
2. 풍우란 지음, 정인재 옮김 '중국철학사', 까치, 1999.
근현대 중국의 지성사에서 커다란 지위를 차지하는 풍우란이 1930년대에 저술한 잘 알려진 중국 철학사 입문서. 원래 서양인들에게 중국 철학을 소개하기 위해서 영역 출판된 책으로, 지금 미국의 중국학자들은 이 책을 통해서 중국 철학에 입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 책의 요약본이 오랫동안 정통적인 중국 철학사 교과서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나중에 풍우란은 중국 철학사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수정하여 새로운 중국 철학사를 저술하지만, 이 책이 오히려 중국 철학사에 대한 풍우란의 본면목을 보여 준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3. 죠셉 니담 지음, (중국의 과학과 문명 2, 3), 을유문화사, 1985.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 죠셉 니담이 중국인 연구자의 힘을 빌어 저술한 '중국의 과학 문명' 시리즈의 사상사 부분에 해당하는 책. 중국의 과학사, 문명사 연구를 위해서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지만, 사상사 연구에서도 동양의 자연관을 유기체론으로 파악하는 등 참고해야 할 관점이 적지 않다. 치밀한 자료 조사와 객관적 서술로도 이름이 높으며, 역사학자 카(E. H. Carr)는 이 책이 나왔을 때 '지난 10년간 케임브리지 대학이 낳은 최대의 역사적 저작'이라고 평가하였다.
@p165
4. 이택후 지음, (미의 역정), 동문선, 1991.
중국 사회과학원 교수이자 현대 중국의 지성을 대변하는 이택후가 원시 사회부터 명, 청에 이르기까지 중국적 미감의 역사적 전개를 일별한 책.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신화적 상상력과 자유로운 몽상에 기초한 도가의 미감과 인문 도덕 정신에 기초한 유가의 미감이 중국의 구체적 역사를 계기로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해 나갔는가를 고찰한다. 유가와 도가 사상을 폭넓게 이해하기 위해 읽어야 할 책이다.
5. 벤자민 슈월츠 지음, 나성 옮김, '중국 고대 사상의 세계', 살림, 1996.
미국 하버드대의 석좌 교수로 현재 미국의 중국학계에서 부동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슈월츠의 책. 이 책에서 슈월츠는 중국의 종교, 철학에 대한 베버나 죠셉 레벤슨의 부정적인 평가를 극복하고 중국의 고대 사상이 중국문화 및 중국인의 삶에 어떻게 역동적으로 작용해 왔는가를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미국에서는 중국 사상에 입문하는 사람이 꼭 읽어야 할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6. 김교빈, 이현구 지음, '동양철학 에세이', 동녘, 1993.
비교적 젊은 연구자인 공저자들이 일반 독자들이 흥미를 가지고 동양철학에 접할 수 있도록 안내한 대중적인 교양서. 이 책에서 저자는 동양철학에 대해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오해 몇 가지를 지적하면서 동양철학의 언급들이 어떻게 현실적인 삶의 문제에 다가가 있는지를 밝히려고 노력한다. 어느덧 동양철학에 대한 잘 알려진 입문서로 자리잡았다.
7. 김용옥지음, '노자와21세기', 통나무, 1999.
우리 나라에 동양학의 새 바람을 몰고 온 저자가 노자 사상을 통해서 새로운 세기의 발전적 전망을 모색한 책. 최근에 대중적 관점을 모았던 TV강의의 교재로도 쓰인 바 있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노자 사상의 보편적 가치를 확인하면서 그것이 왜 새로운 세기에 새로운 체계를 구축하는 데 밑거름이 될 수 있는지를 밝히려고 한다. 연구사적 의미를 폄하하는 시각이 많지만 대중적 성가만으로도 일독을 권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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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III 부 논리와 진리, 과학
논리적 사고와 오류
진리와 과학적 지식
@p169
먼저 '기본 강의'에서는 논증과 오류의 유형에 대해 살펴본다. 사회에서 우리는 타인과 의사 소통 하면서 사회 공동의 관심사에 대해 합의를 이루어 낸다. 합의란 서로의 견해를 조정하는 과정인데, 여기에는 알게 모르게 논증에 대한 평가가 포함되기 마련이다. 논증은 보통 전제와 결론이라고 하는 형식을 갖는데, 결론은 참이라고 내세우는 주장이고, 전제는 결론이 참이라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근거 역할을 하는, 하나 이상의 명제들이다. 논리학은 바로 논증에서의 이러한 전제와 결론 사이의 논리적인 관계를 검토하여, 정확한 논증과 부정확한 논증을 구분해 주는 방법과 원리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논증은 연역 논증과 귀납 논증 두 종류가 있는데, 논리학은 논증의 전제와 결론 사이의 논리적인 관계에만 관심을 가질 뿐, 전제의 참, 거짓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논리학이 전제의 참, 거짓 여부가 알려져 있지 않은 논증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논증의 의의는 전제의 참, 거짓 여부와는 상관없이 과학 연구에서 올바른 과학 이론을 판정하기 위한 작업에서 필수적인 과정이며,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도 올바른 행동의 선택을 위해 필요하다.
오류의 정의, 오류의 유형에 관한 학습은 논리적 분별력을 함양케 함으로써 사회의 각종 오류 제거를 위한 제일보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오류는 크게 형식적인 오류와 비형식적인 오류로 나뉘어진다. 형식적인 오류는 타당한 연역 논증의 규칙을 벗어난 오류이며, 비형식적인 오류는 형식 외적인 각종 요인에 의해 발생한 오류를 말한다. 비형식적인 오류의 종류는 다시 심리적인 것, 자료적인 것, 언어적인 것으로 나뉘어진다.
@p170
'주제 토론'에서는 '기본 강의'에서 학습한 논증의 구조에 대한 분석과 평가를 연습한다. 논증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은 비판적인 사고 능력을 함양하는 일로서 일상 생활에서도 중요한 의의가 있다. 제시된 논증 구조를 분석하고 논증을 평가하여 어떤 오류를 범하고 있는가를 각자 밝혀 보도록 한다.
'읽기 자료'에서는 논증을 받아들이기를 결정하기에 앞서 논증을 구성하는 주장의 의미를 분명히 할 필요성과 이를 위한 정의의 방법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주장의 의미는 애매하지도 모호하지도 않아야 한다. 애매성과 모호성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정의가 필요하다. 정의는 말의 애매성과 모호성을 제거하여 의미를 명료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의미란 내포적 의미와 외연적 의미가 있으며, 객관적 정보 전달에는 부적합한 정의적 의미도 있다. 정의에는 외연적 정의, 조작적 정의, 동의어에 의한 정의, 분석적, 내포적 정의 등이 있다. 이러한 정의는 각각 장점과 함께 한계가 있다.
1. 기본 강의: 논증과 오류
1. 논증의 의미
1,1 논리학의 과제
사람은 사회에서 타인과 의사 소통하면서 살아간다. 의사 소통의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 공동의 관심사에 대해 서로 의견을 교환함으로써 일정한 합의에 도달하는 일일 것이다. 사회 성원들 사이의 합의가 사회 운영의 원칙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은 사회일수록 건강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합의란 내가 상대의 주장을 받아들이거나 상대가 나의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서로간의 견해차가 해소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상대의 주장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그 주장을 나름대로 평가해야 한다. 그럼 우리는 상대의 주장을 어떤 방식으로 평가할까? 가령 "정부는 사회 복지 예산을 대폭 늘려야 한다"거나 "개인의 사생활을 완벽하게 보장하는 법률을 시급히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고 하자. 이때 우리는 그런 주장들이 맞는지 틀렸는지, 즉 받아들일 만한 주장인지 그렇지 않은 주장인지 알고자 실험을 하거나 책을 펼치지 않는다. 진지한 주장일수록 나름대로 이유가 제시되기 마련인데, 우리는 그 주장의 이유가 그럴 듯한지를 따져본다. 이처럼 주장과 그 이유의 관계를 검토해 보고 나서 그 주장을 받아들일 것인지를 결정한다. 이때 우리는 이미 논리적인 사유를 하고 있다.
@p171
논리학은 사고의 형식적인 규칙과 절차에 관심을 갖고서 정확한 논증과 부정확한 논증을 구분해 주는 방법과 원리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논리학의 주된 관심사는 명제(proposition)의 주장내용 그 자체의 참, 거짓이 아니라, 주장과 그 이유의 관계에 있는 명제들의 논리적 관계이다 말하자면 논리학은 "논증을 통해 도달한 결론(주장)이 주어진 또는 가정된 전제(이유)들에 의해 뒷받침되는가?"에 관심을 갖는다. 만일 전제들이 결론을 받아들이기에 적절한 근거가 되면, 즉 전제가 참이라는 주장이 결론이 참이라는 주장을 보장해 주면 그 논증은 정확하다.
논리학을 단순히 인간의 사고 작용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하면 이는 불완전한 정의이다. 논리학은. 인간의 사고 작용에 대해 연구하지만 사고 규칙에 맞건 안 맞건 간에 현상적으로 존재하는 사고작용의 물리적, 정신적 과정을 사실과학의 관심에서 기술하고자하는 심리학과 다르다. 그리고 논리학은 사고 내용과 사고 대상과의 일치를 문제삼는 철학의 한 분과인 인식론의 관심과도 다르다.
1.2 논증의 구조--전재와 결론
논증(arguement)은 단순한 주장(assertion)과는 다르다. 주장은 지지 이유와 함께 제시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논증이 되려면 반드시 주장과 더불어 그 주장이 참인 이유가 함께 제시되어야 한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논증은 하나의 주된 주장을 담은 명제와 그것을 지지하는 나머지 주장(근거 내지 이유)을 담은 명제들의 집합이다.
그런데 논증은 명제들을 그냥 모아 놓은 것이 아니다. 보통전제(premise)와결론(conclusion)이라고 하는 구조를 갖는다. 한 논증의 결론이란 그 논증의
다른 명제들을 근거로 해서 긍정되고 있는 명제를 말한다. 그리고 이때 결론을 받아들이는 근거 내지 이유로 제시된 다른 명제들은 전제라고 한다.
@p172
전제와 결론은 상대적인 용어이다. 한 명제가 써떤 논증에서는 전제에 속하고 다른 논증에서는 결론일 수도 있다 어떤 명제도 하나만이 떨어져 있어서는 전제나 결론일 수 없다. 명제는 그것이 한 논증에서 하나의 가정으로 나타났을 때에만 전제이다. 또한 명제는 한 논증에서 가정된 명제들로부터 나온다고 주장될 때에만 결론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전제'와 '결론'은 마치 '사용자'와 '피사용자'처럼 상대적인 말이다. 어떤 사람이 혼자서는 사용자일 수도 없고 피사용자일 수도 없다. 단지 그가 처한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사용자일 수도 있고 피사용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즉 그는 그의 정원사에 대해서는 사용자이고 그가 일하는 회사에서는 피사용자인 것이다.
모든 논증은 하나 이상의 전제와 하나의 결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여러 개의 명제들로 이루어진 주장이라고 해서 모두가 논증인 것은 아니다. 신문이나 잡지, 역사책은 주장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 주장들이 논증인 경우는 별로 없다. 여러 개의 명제들로 되어 있다는 것은 그것이 논증이기 위한 필요 조건이긴 하지만 충분 조건은 아니다. 가령 결론이 있을 자리에 주장
대신에 명령이 있으면 그것은 논증이 아니다 논증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주장된 명제들 중의 하나가 그것에 대한 근거 내지는 그것을 믿어야 할 이유로서 제시된 다른 명제들로부터 도출된다는 주장까지도 들어 있어야 한다. 물론 그런 주장이 전제 지시어 ('왜냐하면', '... 라는 이유에서'등)나 결론 지시어('따라서', '결과적으로', '그러므로' 등)를 통해 명시적으로 포함되어 있을수도 있지만, 암암리에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다.
한편 논증과 설명(explanation)은 다르다. 논증은 결론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즉 결론이 참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이에 반해 설명은 어떤 주장이 왜 참인지를 밝히기 위한 것이다. 논증과 설명을 구분하는 것은 미묘한 문제이다. 앞뒤 문맥을 모르면 어떤 글이 논증을 제시하는지 아니면 설명을 제시하는지를 식별하기 어렵거나 아예 불가능한 때가 있다 가령 "이 차는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는 주장을 생각해 보자. 이 주장의 참, 거짓 여부부터가 문제라면, 우리는 그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이유 즉 "배터리가 나갔다"는 이유를 제시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논증을 펼칠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 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는 주장이 참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고 해 보자. 그 경우에 배터리에 대한 주장은 그 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는 이유에 대한 (인과적)설명이다.
1.3 연역과 귀납
논증은 전통적으로 연역(deduction)과 귀납(induction) 두 종류로 분류되어 왔다. 연역 논증은 전제들이 결론이 진리임을 보여 주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는 논증이다. 연역 논증의 경우에는 '옳은 논증'과 '옳지 않은 논증'이란 말 대신에 '타당한 논증'과 '부당한 논증'이란 말을 쓴다. 모든 연역 논증은 타당하거나 부당하다 전제와 결론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전제들로부터 필연적으로 결론이 도출될 경우 그 논증은 타당하다. "모든 인간은 죽을 운명이다" 와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라는 전제로부터 "소크라테스는 죽을 운명이다"라는 결론은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따라서 그와 같은 논증은 타당한 논증이다. 연역 논증의 특징으로서 필연성이란 정도의 문제가 아니며 경우가 어떠하냐 하는 것과 전혀 무관한 필연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귀납 논증은 흔히 유한수의 표본 사례를 가지고 그 집합 전체가 어떠하다고 주장하는 일반화의 형식을 취한다. 이때 표본 사례에 대한 주장은 전제가 되고, 전체 집합에 대한 주장은 결론이 된다. 귀납 논증은 전제가 결론이 진리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보여 주지는 않지만 상당한 근거가 되는 논증이다. 귀납 논증은 연역 논증에 대해 사용되었던 의미에서 '타당'하지도 '부당' 하지도 않다. 물론 귀납 논증에도 좋은 논증과 나쁜 논증을 구별할 수 있는데, 이때 그 구분의 기준은 전제들이 결론에 얼마만큼의 개연성을 부여하는가. 전제들이 결론이 진리일 확률을 얼마나 높여 주는가 이다. 표본의 수가 많을수록 좋은 귀납 논증이 되겠지만, 결정적인 것은 얼마나 대표성이 있는 표본에 근거한 일반화인가이다. 다음의 예는 귀납 논증의 하나인 유비 추리(analogy)로서 좋은 귀납 논증이라고 할 수 있다.
전제: 우리 학교 출석부에 있는 학생 500명의 성을 조사해 보았더니 김씨 성을 가진 학생들이 가장 많았다.
결론: 따라서 우리 나라에는 김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많을 것이다.
1. 4 논증의 의의
타당한 연역 논증에서 전제들이 반드시 참일 필요가 없다.
필요한 것은 결론이 절대적으로 전제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전제가 참인가 아닌가는 별개의 문제다 다음의 두 예를 보자.
@p174
(A) 모든 고래는 포유동물이다.
모든 포유 동물은 허파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고래는 허파를 가지고 있다.
(B) 모든 철학자는 훌륭한 문필가이다.
길동이는 철학자이다.
그러므로 길동이는 훌릉한 문필가이다
논증 (A)는 참인 명제들로만 이루어져 있는 타당한 연역 논증이다. 논증(B)역시 타당한 논증이다. 왜냐 하면 결론이 절대적으로 전제로부터 도출되기 때문이다. 즉 전제들을 참이라고 가정하면, 결론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논증이 타당할지라도 전제들이 참이 아닐 수도 있다. (모든 철학자가 훌릉한 문필가인 것은 아니다. 길동이는 철학자가 아니라 우리 집 젖먹이 이름이다.)그러나 전제들이 참이 아니라는 사실이 논증의 타당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왜냐 하면 그 결론은 전제들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기 때문이다. 이 논증은 거기에 포함된 모든 주장이 거짓인 경우에도 타당하다. 즉 논증이 바르게 되었다는 것과 결론의 명제가 사실과 부합하는 참이라는 것은 별개이다.
만약 전제들이 사실과 일치하는 참인 명제들로 구성된 타당한 연역 논증인 경우그논증을우리는 '건전한논증'이라고 부른다. 이 경우 그 논증이 타당하고 결론이 전제로부터 도출되는 한 결론 역시 사실과 일치하는 참된 명제이다 그러므로 건전한 논증에서 모든 주장들은 참이다. 따라서 위의 경우(A)는 타당한 논증이자 건전한 는증이고, (B)는 타당한 논증이기는 하지만 건전한 논증은 아니다.
전제들의 참, 거짓을 가리는 일은 과학 일반의 과제에 속한다. 논리학이 관심을 두는 문제는 논증에 포함되어 있는 각각의 명제들의 진위 여부가 아니라 그 명제들 간의 논리적인 관계이다 이때 '논리적' 관계라 함은 그 명제들이 들어있는 논증이 정확한가 부정확한가를 결정해 주는 관계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논리학자들은 전제가 거짓일 수도 있는 논증의 정확성 여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는다.
@p175
여기서 전제가 참인 논증만이 아니라 전제가 거짓인 논증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물론 그럴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한테 중요한 의미를 갖는 논증 가운데 전제의 진위가 알려져 있지 않은 논증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과학 이론의 경우가 그렇다. 과학자들은 서로 경쟁하는 여러 개의 이론이 있을 때, 이 가운데서 어떤 이론이 참인지 미리 알고 있지 못하므로, 검증을 통해 이를 확인하려 한다. 말하자면 이론들로부터 검증에 부칠 수 있는 타당한 논리적 귀결들을 끌어 내서 그것들을 실험이나 관찰을 통하여 확인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론들을 평가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어떤 이론이 참인지 미리 알고 있었다면 귀결들을 이끌어 내고 실험해 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이론으로부터 실험에 부칠 수 있는 타당한 논리적 귀결들을 이끌어 내는 과정 즉 이러한 전제에서는 반드시 이러이러한 결론이 나온다는 귀결을 이끌어 내는 과정이 바로 논증이고, 그 논증에 동원된 주장들의 사실 여부를 관찰이나 실험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 검증(verification)이다. 이렇게 본다면 논증은 과학 연구의 정상적인 한 과정이란것을 알 수 있다.
비단 과학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일상 생활에서도 우리는 여러 가능한 행동 방향을 두고 어느 행동을 택할지 숙고할 때가 종종 있다. 이 경우 모든 방향을 다 취할 수는 없으므로 여러 가지 추리를 통해 자기가 취할 길을 고른다. 이때 추리는 어떤 행동을 취할 때 어떤 결과가 나올까를 생각해 내는 일이 된다. 이때 우리의 관심은 올바른 추리 그 자체에 있다. 우리가 만약 어떤 전제가 참인지 알고 있다면(즉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 이미 선택했다면).그때는 아무 추리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결국 어떤 전제를 참으로 만들까(즉 어떤 행동을 취할까)를 결정하기 위해서 논증이나 추리를 펼친 것이다. 따라서 전제가 참인 논증만을 고집한다는 것은 문제를 이리저리 논리적으로 따져 묻지 않고 그저 해답만 주어지기를 바라는 자가 당착적이고 어리석은 일이다.
2. 오류의 유형
2.1 오류의 정의와 분류
오류(fallacy)란 틀린 논증이다 즉 어떤 주장을 지지하기 위하여 제시된 근거들이 그 주장을 받아들일 충분한 이유를 주지 못하는 논증이 범하고 있는 잘못을 가리킨다. 물론 어떤 논증은 틀렸다는 것이 너무나 명백해서 아무도 현혹시킬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래서 논리학의 오류론은, 틀렸지만 특별히 심리적으로는 설득력 있는 논증들을 다루는 분야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오류는 옳은 것처럼 보이지만 검토해 보면 사실은 옳지 않은 논증의 형태라고 정의할 수 있다.
@p176
사실 우리의 삶은 온갖 오류들로 가득 차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류는 가령 각종 광고, 공적인 토론, 신문이나 방송의 논평, 정치인의 주장 등에 아주 다양한 형태로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기만의 의도가 없고 별다른 피해를 주지 않는 오류도 있지만, 중요한 사회 문제에 대한 우리의 판단력을 흐려 잘못된 결정이나 행동에 이르게 하는 심각한 오류도 많이 있다. 오류에 대한 학습만으로는 사회의 오류를 궁극적으로 제거할 수 없겠지만. 논리적인 사고를 길러 오류를 가려 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은 오류를 제거하는 실천의 전제가 된다.
오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 분류를 시도한 이래 논리학자들에 따라 다양한 분류법이 제시되어 왔다. 오류의 분류법만 다른 것이 아니라 오류의 종류도 서로 달라, 어떤 논리학자는 50개가 넘는 오류의 목록을 제시하기도 한다. 어쨌든 절대적인 오류 분류법은 없지만, 논의의 편의상 오류를 다음과 같이 분류해 보자. 오류는 크게 형식적인 오류와 비형식적인 오류로 나누어진다.
2.2 형식적인 오류
우선 형식적인 오류는 타당한 연역 논증의 규칙을 벗어난 오류이다. 여러 가지 형식적인 오류 중 몇 가지만을 예로 들어 살펴보자. 형식적인 오류 중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예로서 전건 부정의 오류, 후건 긍정의 오류, 양도 논법(dilemma)등이 있다. 이 중 앞의 두 오류는 이른바 가언적 삼단 논법의 규칙을 범할 때 발생하는 오류들이다. 예를 들어 "술을 많이 마시면 간이 나빠진다", "철수는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다", "따라서 철수는 간이 나빠지지 않는다"라는 가언적 삼단 논법의 경우와 같이. 전제인 가언 판단의 전건을 부정해서 후건을 부정하는 귀결은 반드시 오류에 빠진다. 즉 "가언적 삼단 논법의 경우엔 전건을 긍정해서 후건을 긍정하는 결론을 얻거나 후건을 부정해서 전건을 부정하는 결론을 얻어야 한다"는 형식적 규칙을 어긴 것이다. 위 논법 예에서 대전제를 그대로 두고 "철수는 간이 나빠지지 않았다" 따라서 "철수는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다"라고 추론한다면,그 추론은 타당한 추론이 된다.
@p177
형식적인 오류 중 양도 논법의 오류는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의 궤변을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오류이다. 예를 들어 "비가 오면 짚신 장사 하는 큰아들이 장사가 안 되어 슬프다", "날이 개면 우산 장사하는 작은아들이 장사가 안 되어 슬프다"라는 이중의 가언 판단을 대전제로 하고 "비가 오거나 날이 개거나 이다"라는 선언 판단을 소전제로 하여" 그러므로 큰아들이 장사가 안 되어 슬프거나. 작은아들이 장사가 안 되어 슬프거나이다"라는, 즉 매일 슬플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논증하는 경우이다. 이 논법은 가언적 삼단 논법과 선언적 삼단 논법이 결합된 것이므로, 그 중 어떤 규칙을 어기더라도 두말할 나위 없이 오류가 된다. 즉 양도 논법은 소전제가 선언 판단인 한, 전제와 관련하여 숨겨진 선언지 없이 모두 망라되어야 한다는 선언 판단의 규칙(예컨대 "사람은 백인이거나 흑인이거나이다"라는 선언 판단은 다른 선언지로서 '백인도 흑인도 아닌 사람"의 경우를 간과하고 있다)을 지켜야 하며, 가언 판단 또한 이유와 귀결의 결합인 한, 동일 조건에서 모순 귀결이 나와선 안 된다. 따라서 양도 논법의 오류를 지적하는 방법은 그 양도 논법에서 간과된 선언지를 지적해 내거나 모순된 숨겨진 귀결을 찾아 반대의 대등한 양도 논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전자의 방법을 뿔(뿔은 선언지를 의미한다) 사이를 피하는 방법이라고 부르며, 후자의 방법을 뿔로 잡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위의 양도 논법 경우는 대전제에 숨겨 놓은 모순된 귀결로서의 다른 선언지("비가 오면 우산 장사하는 작은아들이 장사가 잘 되어 기쁘다", "날이 개면 짚신 장사하는 큰아들이 장사가 잘 되어 기쁘다")가 있으므로, 그것을 뿔로 잡아 아래와 같이 대등한 양도 논법을 통해 앞의 결론과 모순된 결론
을 제시함으로써 논파된다. "비가 오면 우산 장사하는 둘째아들이 장사를 잘해 기쁘고, 날이 개면 짚신 장사 하는 큰아들이 장사를 잘해 기쁘다" "비가 오거나 날이 개거나 이다. 큰아들이 장사를 잘해 기쁘거나 둘째아들이 장사를 잘해 기쁘거나 이다."
2.3 비영식적인 오류 1 -자료적 오류
비형식적인 오류는 잘못 제시된 근거의 특징이 논리적 형식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형식 외적인 특징들과 관련되는 오류들을 총칭하는 말로, 그 특징은 심리적인 것, 자료적인 것, 언어적인 것이 있다.
@p178
사고의 대상이 되는 자료에 대한 그릇된 판단에 근거하여 결론을 도출해 내는 오류를 자료적 오류라고 한다. 자료에 대한 그릇된 판단은 주어진 자료를 과대 평가하는 데서 빚어지기도 하고 과소 평가함으로써 빚어지기도 한다.
1) 의도 화대의 오류: 의도된 행위는 인과 계열의 어느 단계에서는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럼에도 그 결과를 의도한 행위로 해석함으로써 생겨나는 오류를 말한다. 가령 "너는 술을 마시고 싶어한다. 그런데 술은 간암의 원인이 된다고 하지 않는가! 네가 간암에 걸리고 싶어한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어"라고 친구를 몰아붙이는 것은 의도 확대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친구가 술을 마시고 싶어하는 것을 간암에 걸리고 싶어하는 것으로 확대 해석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고 그럼으로써 예수가 로마군에게 붙잡혀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되었는데, 예수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사건이 되었다고 해서, 유다한테 인류 구원의 공을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2) 원인 오판의 오류: 단순한 사건의 선후 관계를 인과 관계로 오인하는 오류이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시간적 선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시간적 선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항상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아닌 것이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수는 있지만, 까마귀가 날면 항상 배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즉 까마귀 나는 것이 배 떨어지는 것의 원인은 아니다).
3)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 어떤 주장이나 견해를 손쉽게 논박할 수 있도록 가능하면 약하게 또는 문제성 있게 재구성하여 비판해 놓고 원래 주장이나 견해를 논박했다고 하는 오류이다. 달리 말하면 상대방의 진짜 견해는 무시한 채 그 허수아비 해석을 공격하는 것이다. 다음 예를 보자. "김병태 의원은 우리나라에 핵미사일을 배치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나는 그 견해에 절대 반대한다. 나는 도대체 그가 우리나라를 무방비 상태로 내버려두려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왜냐하면 김병태 의원은 핵미사일 배치를 반대한 것이지, 우리나라를 무방비 상태로 내버려두자고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4) 논점 일탈의 오류: 어떤 논점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된 전제들이 사실은 다른 논점을 뒷받침하고 있을 때의 오류를 말한다. 가령 주택 문제에 대한 어떤 법안이 논의되고 있을 때, 그 법안을 지지하는 의원이 일어나서 모든 사람에게 안락한 집을 마련해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하는 점만을 논증한다면 그의 논증은 논리적으로 논점과는 무관한 논점 일탈의 오류에 해당한다. 또 법정에서 피고가 살인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는 검사가 살인이 얼마나 흉악한 범죄인가만을 길게 논증한다면, 그 검사는 살인의 흉악성은 증명했을지 모르나 피고가 살인죄를 범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 검사는 논점 일탈의 오류를 범한 것이다.
@p179
넓은 의미에서 모든 비형식적인 오류는 논점 일탈의 오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오류에 대해 논점 일탈의 오류라고 이름붙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논증에 대해 오류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오류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어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오류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낼 수 있는 이름이 있다면 그 이름을 쓰는 것이 효과적이다.
2.4 비형식적인 오류 2--심리적 오류
어떤 주장을 논리적으로 설득되어서가 아니라 심리적으로 영향 받아서 받아들일 경우 심리적 오류를 범한다. 심리적 요인에 근거한 오류에서는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을 당연하게 만들어 줄 어떤 심리적 반응(가령 동정, 사랑, 욕망, 공포, 증오 같은 감정이나 정서)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하고자 하는 주장이외의 어떤 다른 것이 진술되고 있다.
1) 연민(동정)에의 호소: 어떤 주장을 연민이나 동정에 의하여 받아들이게 하는 오류를 말한다. 가령 어떤 사람이 찾아와 일자리를 달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하자. "내 컴퓨터 실력은 선생님 회사에서 요구하는 수준이 되고도 남습니다. 전 정말 가난하게 살고 있기 때문에 직장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이 불쌍하게 여겨지면 일자리를 줄 수 있고, 이런 일은 세상에서 칭찬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사람이 불쌍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 사람 컴퓨터 실력이 정말 회사에서 요구하는 수준이 되는가와는 논리적으로 아무 관련이 없다.
2)군중에의 호소: 군중들의 감정 즉 군중 심리를 자극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결론에 동조하도록 만들려는 시도에서 발생하는 오류이다 선전 선동가가 "이번 선거에서 제가 꼭 당선되어야 합니다. 아직까지 우리 지방 출신이 당선된 적이 없지 않습니까"라고 말한다면, 그는 지역 감정이라는 군중 심리를 이용하여 자신이 당선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으므로 오류를 범하고 있다.
@p180
3) 비웃음(혹은 농담)에의 호소: 어떤 주장을 단지 비웃음이나 농담을 통해 받아들이게(혹은 거부하게)하는 오류를 말한다. 비웃음은 강력한 수사적인 기법이다. 우리들은 대부분 비웃음 당하는 것을 정말 싫어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어떤 주장을 반박하거나 거부하기 위해 그 주장을 비웃거나("뭐! 북한에 구호품을 보내? 으하하!"), 그 주장으로부터 귀결될 것 같은 이차적 주장을 비웃거나("뭐? 남녀 평등법? 좋아, 여자들도 이제부터 술값을 내기 시작하면 그러지! 으하하!")아주 관계없는 농담을 하거나 단지 그 주장을 하는 사람을 비웃는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주장 그 자체에 대한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림에도 우리는 비웃음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아주 쉽게 자신의 주장을 포기해 버린다 우리의 삶을 아주 부드럽게 만들어 주는 유머도 그런 경우가 있다 비웃음이든 농담이든 유머든 성실한 논증이 필요한 상황에서 우리를 침묵하게 해서는 안 된다.
4) 이기적 합리화: 어떤 행동을 하거나 어떤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기적 욕망 때문이면서도 다른 어떤 합당한 이유 때문인 척하거나 또 스스로 그렇게 믿음으로써 생겨나는 오류를 말한다. 우리들은 흔히 이러한 오류를 범한다 우리는 자신의 이득 때문에 어떤 주장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러한 동기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이기적이지 않은 보조적 이유를 꾸며내거나 거기에 초점을 맞춘다. 이때 그 보조적 이유는 거짓 이유이다. 물론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결정이 항상 자신의 이익을 의도하고 내린 결정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자주 양심적인 결정을 내리며, 때로는 이러한 결정이 아주 우연하게 우리에게 이익을 주기도 한다 어떤 사람이 결과적으로 어떤 이익을 얻게 되는 결정들을 모두 이기적인 합리화라고 비난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한 태도이다.
5) 사람에의 호소: 어떤 주장을 그 근거가 부실하다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장을 하는 사람의 인품, 성격, 직업, 정황, 과거의 행적 등에서 부정적인 것을 트집잡아 비판할 경우에 범하게 되는 오류를 말한다. 사람에의 호소에는 인신 공격의 오류, 피장파장의 오류 등이 있다. 인신 공격의 오류는 사람의 인품이나 성격을 비난함으로써 그 사람의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오류이다. ("베이컨의 철학은 믿을 수 없다. 왜냐 하면 그는 대법관으로 재직할 때 뇌물 수수 혐의로 쫓겨났기 때문이다.")피장파장의 오류는, 가령 어떤 사람의 과거 행적이나 잘못을 트집잡아 그 사람의 주장이 잘못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오류이다 "자네 음주 운전 하지 말게." 이렇게 충고하는 친구에게"사돈 남 말하지 말라고. 자네도 지난번에 음주 운전 하지 않았나!"라고 반박하는 것은 피장파장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p181
2.5 비블식적인 오류 3--언어적 오류
언어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생겨나는 오류로서, 감정적, 심리적 영향이나 지식의 결함 때문이 아니라, 언어의 구조나 기능에 대한 그릇된 인식에서 비롯된다. 언어적 오류는 의미론적 애매성과 구문론적 애매성('읽기 자료' 참고)이 발생함으로써 생겨나는 오류인데, 애매어와 애매구의 의미를 확정해 줌으로써 애매성을 제거 할 수 있다.
1) 결합의 오류: 부분에 관해 참인 것을 그 부분들이 이룬 전체에 대해서도 참이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말한다. 가령 "원자는 눈으로 볼 수 없다. 물체는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라는 전제로부터 "물체는 눈으로 볼 수 없다"라는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경우이다. 반대로 "물은 불을 끈다 물은 수소와 산소로 되어있다"라는 전제로부터 "수소와 산소는 불을 끈다"라는 결론을 이끌어 내는 분해의 오류도 있다.
@p182
2) 어격의 오류: 언어의 비유적인 사용으로 인해 수사적인 의미와 논리적인 의미가 혼용되었을 경우의 오류를 말한다. 가령 "시간은 금이다. 금은 노랗다"라는 전제로부터 "시간은 노랗다"라는 결론을 이끌어 내는 오류이다.
2. 주제 토론: 논증의 구오 분석과 평가
1. 토론 과제
'기본 강의'에서 학습한 내용을 연습해 보기로 한다. 논증의 구조를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은 곧 비판적 사고 능력을 기르는 것을 의미한다. 논증의 구조에 대한 이해 및 평가와 관련하여 제시된 다음의 문제들에 대답해 보자.
(문제 1) 아래의 논증에서 전제와 결론에 해당하는 주장을 찾아 논증의 구조를 분석해 보라.
(논증 A) 입지 조건이 좋고 별 문제가 없는 부동산은 가장 안전한 투자 대상이다. 예금 구좌에 들어 있는 화폐의 가치는 하락할 수 있지만, 부동산은 그렇지 않다 부동산의 가치는 인플레이션에도 끄떡없다. 사실 부동산의 재산 가치는 적어도 인플레이션율에 대등하게 증대한다. 대부분의 주택은 인플레이션율보다 더 높은 비율로 평가 절상된다. 주로 수요가 강세를 띠는 반면에 새로 건설될 주택의 공급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논증 B)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언론 자유의 사상은 농담일 뿐이다. 소수의 사람들 즉 광고주들이 대중 매체를 그 소유자들보다 더 효과적으로 통제한다. 광고 주문을 하지 않겠다는 위협을 통해서 그들은 프로그램의 편성부터 뉴스 보도의 내용까지 지시할 수 있다 편집자들뿐만 아니라 정치인들도 그러한 위협에 굴복하여 그들의 발아래서 몸을 떨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것이고 변화되어야만 한다. 우리 모두 국영 라디오와 공공 텔레비전을 청취하고 시청하도록 하자.
(문제 2) 다음에 제시된 논증들을 평가해 보라. 적절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논증인지, 아니면 오류를 범하고 있는 논증인지를 밝혀 보라.
(논증 A) (어떤 도시에서 폭탄 테러 사건이 나자, 정부는 언론이 현장에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이에 대해 언론은 강하게 불만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여론조사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언론에 대한 정부의 조치를 지지하였다 다음 글은 병태가 신문에 투고한 내용이다. 나는 "언론이 불평하게 내버려 두라!"고 말하고 싶다 언론은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한다. 뉴스를 왜곡하기도 하고, 방금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에게 무자비하게 질문 공세를 펼치다가는 어느 틈에 위로 한마디 없이 사라져 버린다. 도무지 인간의 기본적인 예의조차 존중할 줄 모른다. 어떤 공무원이 무언가 잘못했다는 의심이 조금이라도 들면, 언론은 그 사람을 끝까지 추적해서 괴롭힐 것이고, 의혹이 전혀 없더라도 어떤 구실이건 만들어 낼 것이다.
(논증 B) 또 단속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번에는 단속반원들이 사람들에게 좌석 벨트 사용을 강제하고 싶어한다. 심지어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좌석 벨트 사용을 강제하는 법은 정당하지 않다. 이제 우리가 거부 의사를 표시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거부 의사를 표시하거나, 아니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정부가 우리에게 할 일을 모두 명령하게 하든지 할 때이다. 나로서는 내 권리를 보호하는 쪽을 택하겠다. 실용논리학 입문 (천지, 1997)에서 문제 인용.
@p183
2. 논증의 분석과 평가
2.1 논증 구조 분석--(문제 1)
논증을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과제는 결론 즉 그 논증의 주요 논점이나 중심 주장을 찾아내는 일이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는 결론을 위해 제시된 이유들을 찾아내는 일 즉 전제들을 찾는 일이다. 물론 이러한 전제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시 주어진 이유들이 있다면 남김없이 찾아 내야 한다. 말하자면 전제들 속에서 다시 전제와 결론의 관계가 성립할 수 있으므로, 논증을 구성하는 모든 명제들의 전제 -결론 관계를 해명해야 한다.
논증 구조를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주어진 논증의 문장들에 차례로 번호를 매겨, 번호를 통해 전제와 결론의 관계를 표현하기로 하자.
@p184
(논증 A)
#1 입지 조건이 좋고 ... 투자 대상이다.
#2 예금 구좌에...그렇지 않다.
#3 부동산의 ... 끄떡없다.
#4 사실 부동산의 ... 증대한다.
#5 대부분의 주택은...평가 절상된다.
#6 주로 ...때문이다
이 논증에서 결론에 해당하는 주장은 무엇인가? 특별히 결론 지시구가 없으므로, 전체 문맥을 통해 찾아 낼 수밖에 없다. 자세히 읽어 보면 이 논증에서 결론은 문장 #1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머지 문장들은 '입지 조건이 좋고 별 문제가 없는 부동산이 가장 안전한 투자 대상인' 이유, 즉 전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전제들 가운데서 다시 전제와 결론의 관계에 있는 문장들이 있는가하면, 다른 전제들과는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1 에 대해 전제의 역할을 하는 문장이 있다. 이 관계를 자세히 밝혀 보자.
#1 에 대해 직접적으로 전제 역할을 하는 문장은 #2 와 #3, #4, #5 이다. 그리고 #2는 독립적으로 전제 역할을 하며 #3, #4 #5는 모두 동일한 수준에서 전제 역할을 하는데, #3, #4, #5에 대해 다시 전제의 역할을 하는 문장이 바로 #6이다. 이러한 관계를 화살표나 그 밖의 적당한 부호를 이용하여 그림을 그려본다면, 논증의 구조가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논증 B)
#1 오늘날 ... 뿐이다.
#2 소수의 사람들 ... 통제한다.
#3 광고 주문을 ... 지시할 수 있다.
#4 편집자들 ... 떨고 있다.
#5 이러한 상황은 ... 변화되어야만 한다.
#6 우리 모두 ... 시청하도록 하자.
@p185
마찬가지의 순서로 결론을 먼저 찾아 내고, 결론을 뒷받침하는 전제(이유)들을 찾아보자.
어느 문장이 전체 논증의 중심 주장 곧 결론인가? 이 논증의 결론은 문장 #6 "우리 모두 국영 라디오와 공공 텔레비전을 청취하고 시청하도록 하자"이다. 만약 이 문장이 결론이 아니라면, 이 문장이 전제 역할을 하는 다른 결론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결론은 이 논증에서 찾을 수 없다. 따라서 #6이 전체 논증의 중심 주장(결론)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6에 대해 직접적으로 전제 역할을 하는 문장은 어느 것인가? 왜 "국영 라디오를 청취하고 공공 텔레비전을 청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그것은 '이러한 상황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것이고 변화되어야 하기'때문이다. 곧 #5 가 직접적인 전제 역할을 한다.
다시 #5에 대해 전제 역할을 하는 문장은 어느 것인가?이 논증을 자세히읽어 보면 '광고주의 위협 때문에 언론의 자유가 유명 무실해지고, 정치인마저 그들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유로 제시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곧 #1과 #4 가 #5 에 대해 직접적으로 전제 역할을 하는데, #1 과 #4는 서로 무관한 독립적인 전제들이다.
그리고 #1에 대해서는 #2가, #2에 대해서는 #3이 다시 전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관계를 (논증 A)와 같은 방식으로각자 그림으로 그려 보자.
2.2 논증 펑가하기--(문제 2)
이 문제는 논증의 구조를 밝히는 데까지는 앞 문제와 똑같지만, 전제와 결론의 관계를 평가하는 과정이 요구된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전제와 결론의 관계를 평가하여, 적절한 근거가 제시된 논증인지 아니면 오류가 포함된 논증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논증 A)
이 논증에서 일단 문제가 되는 쟁점을 찾아내어 병태가 무엇을 주장하는지를 밝혀야 한다. 먼저 쟁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폭탄 테러 사건 현장에 대한언론의 접근이 허용되지 않은 데 대한 언론의 불만이 정당한가 그렇지 않은가?"이다. 이 문제에 대한 병태의 주장은 무엇인가? 병태의 주장은 "언론의 불만은 정당하지 않다"("언론이 불평하게 내버려 두라!")는 것이다 이것이 논증의 결론이다.
@p186
이렇게 논증의 결론을 찾았다면, 이 결론을 지지하는 전제들을 찾아보자. '언론의 불만이 정당하지 않은' 이유로 병태는 무엇을 제시하고 있는가? 감정이 섞인 이런저런 이유를 장황하게 제시하고 있지만, 요지는 '언론은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하며, 인간의 기본적인 예의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나머지 내용은 다시 이 소결론에 대한 이유(전제)역할을 하고 있다.
전제와 결론의 구조를 확인했다면, 전제가 결론을 얼마나 잘 지지하고 있는가를 판단해야 한다. 소결론("언론은예의조차 모른다")이 전제들에 의해 얼마나 적절하게 뒷받침 되는가도 살펴야 하지만, 무엇보다 논증의 중심 주장(대 결론)을 전제들이 얼마나 잘 근거 짓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이 논증의 경우 소결론파 전제의 관계는 별문제가 없어 보인다. 문제는 "언론의 불만이 정당하지 않다"는 중심 주장을 "언론은 예의조차 모른다"는 전제가 제대로 뒷받침하고 있는가이다. 전제와 결론은 논리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가?
단적으로 말하면 병태가 제시한 사실들(이유)은 언론 불만의 정당성 여부와는 별 관련이 없다. 언론 불만의 정당성 여부는 언론의 취재 권리와 관련해서 논의해야 할 문제이며, 병태가 제시한 사실들은 언론의 도덕성과 판련된 문제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차원이 다른 문제들이다. 말하자면 설사 병태가 지적한 대로 언론에 도덕적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언론의 취재 권리가 제한되어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따라서 병태의 논증은 언론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하지만 언론의 불만을 정당하지 않은 것으로 입증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따라서 병태의 논증은 오류가 포함된 논증이다 이러한 오류를 '분노에의 호소'라고 부른다.
(논증 B)
이 논증에서 쟁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좌석 벨트 사용을 강제하는 법에 따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이다. 그럼 이 쟁점에 대한 논증의 주장은 무엇인가? 그것은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그런 법은 정당하지 않기 때문에 거부 의사를 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한 근거(전제)는 무엇인가? 이 논증은 독특한 구조를 취하고 있으므로 주의 깊게 읽어 보아야만 근거를 찾아 낼 수 있다 이 논증의 구조를 기호를 써서 나타내자면, "A아니면 B이다. 그런데 B가 아니므로 A이다"가 된다. 논증의 표현을 약간 고쳐 이러한 구조가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해 보자.
@p187
그러면 "그런 법에 거부 의사를 표시해야 한다. 만약 그런 법에 거부 의사를 표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권리를 포기하고 정부로 하여금 우리에게 모든 일을 명령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권리를 포기할 수 없으므로 (즉 정부로 하여금 우리에게 모든 일을 명령하게 할 수 없으므로), 그런 법에 거부 의사를 표시해야 한다"가 된다.
이렇게 고치고 보면, 이 논증의 결론을 지지하는 전제(근거)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런 법에 거부 의사를 표시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인데(정부로 하여금 우리에게 모든 일을 명령하게 하는 것인데), 우리의 권리 를 포기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전제)는 결론을 지지하기에 적절한가? 전제 자체에 문제점은 없는가? 그런 법에 거부 의사를 표시하지 않는 것이 과연 정부로 하여금 우리에게 모든 일을 명령하게 하는 것이며, 우리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인가?
이 논증은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 좌석 벨트 착용을 의무화하는 법에 거부표시를 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것이 곧 정부로 하여금 우리에게 모든 것을 명령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그런 법에 따르면서도 우리는 정부가 우리의 행동에 일일이 간섭하는 것에 반대할 권리는 얼마든지 있다. 따라서 우리의 권리를 지킨다고 해서 반드시 좌석 벨트 착용에 반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즉 전제는 결론을 적절하게 지지하지 못한다.
이 논증이 범하고 있는 오류는 전제의 잘못된 양자 택일에 있다. 이런 오류를 '거짓 딜레마의 오류'라고 부른다
3. 읽기 자료: 의미와 정의
1. 주장의 불명료성의 원인--애매성과 모호성
우리가 어떤 논증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 결정하기 위해서는 우선 논증을 이루는 주장들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주장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거나, 혹은 주장 자체에 문제가 있는데 대개 주장이 애매하기 때문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 둘 다일 때가 있다. 어떤 주장이 하나 이상의 의미를 가지면서도 그 가운데 어떤 뜻으로 쓰였는지 앞뒤 문맥으로 보아도 분명하지 않다면, 그 주장은 애매하다고 할 수 있다.
@p188
어떤 주장의 애매성이 특정한 낱말이나 구절에서 비롯된 경우에는 의미론적 애매성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어떤 사냥꾼이 야생 동물 보호론자들로 부터 비난을 받고서 이렇게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사냥꾼인 내가 죄 없는 짐승을 죽이는 야만인이라고 하는데, 당신들은 왜 죄 없는 짐승의 고기를 먹는가?"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사실 이 사냥꾼은 '죄 없는'이라는 말의 애매성을 이용하고 있다 동물 보호론자들이 말한 '죄없는'은 '사냥의 허가가 나지 않은' 짐승을 죽인다는 뜻의 말인데, 사냥꾼은 말 그대로 '잘못이 없는'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의미론적 애매성을 제거하려면 문제가 되는 낱말의 의미를 설명해 주는 정의가 필요하다.
이와 달리 문장의 구조 때문에 애매한 주장들이 있다. 낱말이나 구절의 의미를 알고 있다 해도 부사(구)나 관형사(구)가 무엇을 수식하는지 정확하지 않아서 애매한 주장도 있다. 이런 종류의 애매성을 구문론적 애매성이라고 한다. 가령 '다리가 부러진 어린아이용 의자'라든지 "그녀는 아름다운 한국의 여인이다"와 같은 문장은 형용사가 무엇을 수식하는지에 따라 두 가지 이상의 해석을 낳는다. 구문론적 애매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 주장을 애매하지 않은 다른 문장으로 만들어 표현해야 한다.
한편 그 말이 뜻하는 의미는 분명하나 그 말이 적용되는 사례가 명료하지 않을 경우가 있는데, 이런 말을 가리켜 우리는 '모호하다'고 한다.
하나의 말이 애매하면서 동시에 모호할 수도 있기는 하지만, 애매함과 모호함은 전혀 다른 성질이다 어떤 말이 애매하다는 것은 그 말이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주어진 문맥이 그 말이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 결정하기에 충분하지 않은 때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에 반해서 어떤 말이 모호하다는 것은 그 말이 적용되는지 안 되는지 결정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대부분의 말들은 모호하다. 가령 '대머리'라는 말을 예로 들어보자. '대머리!' 하면 아. '벗겨진 머리' 하고 누구든 금방 알아차리는데, 그런 점에서 '대머리'는 애매한 말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머리를 두고 '대머리'라고 해야 할지 어떨지 곤란한 경우가 있다. 왜냐 하면 머리가 얼마만큼 벗겨져야 대머리인지 분명히 결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민주 국가라는 말도 그렇다. 어떤 나라가 '민주 국가'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은 '민주 국가'라는 말의 뜻('국민이 주인인 나라')이 애매해서가 아니라 그 나라의 국민이 주인 노릇을 제대로 하는지 못하는지를 결정하기가 어렵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어떤 예술품이 '외설'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도 같은 이유에서 생긴다.
@p189
모호함에서 비롯되는 불확실성은 그 모호한 말을 정의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물론 이때의 정의는 그 말의 적용 범위를 분명히 하는 것이어야 한다.
2. 의미의 종류
주장의 불명료성이 모호성에서 비롯하든 애매성에서 비롯하든 문제되는 그 낱말이나 구절을 명료하게 만들어 그 의미를 확정해야 주장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의미'라고 하는 것도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일 수 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다음 세 가지다.
먼저 말의 외연(extension)적 의미가 있다. 외연적 의미는 그 말이 적용되는 대상의 집합을 가리킨다. 가령 '행성' 이라는 말은 수성, 금성, 지구나 화성 등에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데, 이러한 것들의 집합이 곧 행성이란 말의 외연적 의미이다.
그러나 이것이 '의미'라는 말이 갖는 뜻의 전부는 아니다. 어떤 개념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개념을 제대로 적용할 줄 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기 위해서 그 개념이 적용될 수 있는 대상들을 모두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 대상이 주어졌을 때 그것이 그 개념의 외연에 속하는지 아닌지를 구별할 기준을 갖고 있기만 하면 된다. 어떤 말 내지 개념의 외연에 속하는 모든 대상은 그 대상을 가리킬 때 그 개념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공통의 특징 또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어떤 개념의 외연에 속하는 모든 대상들이 가지고 있는, 그리고 그 대상들만이 가지고 있는 성질을 가리켜 내포(intension)또는 함의라고 한다. 따라서 말의 내포적 의미는 그 말이 정확히 적용되기 위하여 사물이 가져야 하는 특징들의 집합을 가리킨다. 가령 '납세자'라는 말의 내포적 의미는 '정부에 의해 재정적 부담이나 의무를 부과 받고 지불하는 사람'이다. 이 규정에 적합한 사람은 누구나 납세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동일한 외연적 의미를 갖는다고 해서 반드시 동일한 내포적 의미도 갖는 것은 아니란 점이다. 가령 '등변삼각형'과 '등각삼각형'은 동일한 외연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내포적 의미는 다르다. 왜냐하면 하나는 두 변이 같다는 것이요 하나는 두 각이 같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함의'라는 말은 다른 용법도 가지고 있어서 때로는 주어진 말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의미까지도 포함한다.
@p190
어떤 말의 정의적 (정의적)의미는 그 말이 나타내거나 일으키는 태도 또는 감정이다. '부인'이라는 말과 '여편네'라는 낱말은 동일한 외연적 의미를 갖고 있지만, 그것들이 주는 느낌은 전혀 다르다. 전자는 존중하는 태도를 나타내고, 후자는 모욕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대개의 경우 감정을 드러내는 언어는 다른 사람의 태도나 행동에 영향을 주기 위하여 사용되기 때문에, 객관적인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삼는 말이나 글에서는 가능한 한 피해야 한다.
3. 정의
주장 속에 들어 있는 낱말의 의미를 알지 못해 주장이 불명료할 때는 정의 (정의, definition)가 필요하다. 정의는 피정의항(definiendum)과 정의항(definiens)으로 구성되는데, 피정의항이란 정의되는 말이고 정의항이란 정의하는 말이다. 가령 '원이란 평면상의 한 점에서 같은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이라고 정의하면, '원'이 피정의항이고 '평면상의 한 점에서 같은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이 정의항이 된다. 정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크게 외연적 정의와 내포적(분석적)정의로 나누어지며, 때로 동의어에 의한 정의와 조작적 정의도 유용하게 쓰인다.
먼저 외연적 정의는 어떤 개념이 가리키는 대상들을 예로서 열거하는 것이다. 이런 정의는 아주 쉽고 유용하기는 하지만 난점도 있다. 먼저 '귀신'이나 '용' 같은 외연을 갖지 않은 말들을 정의하는 데는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심장을 가진 동물'과 '허파를 가진 동물'처럼 다른 의미(내포)를 가진 두 개념이 같은 외연을 가질 수 있다. 이 경우 어떤 개념에 대해서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들을 완전히 열거해서 정의를 준다고 해도, 이러한 정의는 같은 외연을 가진 다른 개념과 이 개념을 구분해 줄 수 없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런데 '수'나 '별' 같은 개념은 완전히 열거하기가 불가능하다 이 경우 우리는 그 개념이 지칭하는 대상들의 일부분만을 열거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 또한 문제가 있다. 대상들이란 그 어느 것이나 매우 많은 성질을 갖고 있어서 그만큼 많은 개념의 외연에 속할 수 있다. 따라서 부분적 열거에 의한 정의는 외연이 다른 개념들도 구분해 주지 못한다 가령 '벤처 기업'을 정의하기 위해서 '샛별 통신' '꿈나라 정보, '새싹 데이터' 등을 열거할 경우, 이 예들은 우연히 '서울 테헤란로에 위치한 업체'의 외연일 수도 있고, '자본금 10억 이상의 기업', '1998 년 이후에 설립된 법인'의 외연에속할 수도 있다.
@p191
결국 외연적 정의는 논리적으로 볼 때 주어진 개념을 완전히 규정할 수는 없다.
동의어에 의한 정의는 동일한 것을 뜻하는 다른 낱말이나 구절을 제시함으로써 주어진 말을 정의하는 것이다. 가령 "'맥박치는'은 '고동치는'과 같은 뜻이고, '외설적인'은 '음란한'과 같은 뜻이다"는 식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는 정의할 필요가 있는 낱말과 뜻이 매우 비슷한 낱말이 있고, 상대방이 그 낱말을 잘 알고 있는 경우에는 매우 유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정확한 동의어를 갖고 있는 개념이 드물다는 사실 때문에 실제로 사용하기에는 큰 약점도 있다.
개념의 조작적 정의(operational definition)는 어떠한 조작이 어떤 결과를 낳는가를 보여 줌으로써 그 개념을 정의하는 것을 말한다. 가령 뉴턴의 절대 공간, 시간이라는 개념에 정면 도전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아인슈타인 말대로 공간과 시간이라는 개념을 거리와 지속을 측정하는 데 사용되는 조작방식을 통하여 정의하는 것이 더 좋다는 사실이 인정됨으로써, 결국 뉴턴의 추상적인 시공 개념은 폐기되고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받아들여졌다 자연과학에서뿐만 아니라 경험주의와 연관된 사회과학자들도 가령 '정신'이나 '감각'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과학적 조작 즉 실험에 의해 얻어진 생리학적 사실과 행위에 기초한 조작적 정의에 의하여 대체하려고 하였다.
동의어에 의한 정의도 줄 수 없고 조작적 정의도 적절치 않을 때 분석적 정의 혹은 내포적 정의를 사용하기도 한다 분석적(내포적) 정의는 유와 종차에 의한 정의다.
논리학에서 말하는 유와 종 개념은 전체집합과 부분집합의 관계로 생각하면 된다. 가령 삼각형이라는 전체집합은 등변삼각형, 이등변삼각형, 부등변삼각형이라는 세 개의 부분집합으로 나누어질 수 있는데, 이때 전체집합이 유이고 부분집합들이 종이다. 이때 유와 종의 구분은 상대적이다. 가령 한 사람이 자식에 대해서는 부모가 되고 부모에 대해서는 자식이 되는 것처럼, 한 집합은 더 큰 집합에 대해서는 부분집합이 되고 더 작은 집합에 대해서는 전체 집합이 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한 유의 각각의 종에 속하는 원소들은 어떤 성질을 공유하고 있으며, 그 중의 어떤 종에 속하는 원소들은 다른 종에 속하는 원소들이 갖고 있지 않은 성질을 갖고 있어서 그 종을 다른 종들과 구분해 준다 이처림 종들을 서로 구분해 주는 차이를 종차라고 한다.
@p192
어떤 개념을 유와 종차에 의해서 정의할 때에는 그 개념을 종으로 하는 유개념과, 그 개념을 나머지 다른종과 구별해 주는 종차를 밝히면 된다. 가령 "삼각형은 세 변으로 된 다각형
이다"라는 내포적 정의에서, '다각형'은 유개념이고 '세 변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사각형이나 오각형에 대한 종차이다. 그리고 "인간은 합리적 동물이다"라고 할 때, 인간이라는 종은 동물이라는 유에 포함되면서 인간과 다른 동물 종과의 차이로서 합리성이 거론되는 것이다.
내포적 정의는 가장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정의이긴 하지만, 이 정의를 적용하는 데도 한계는 있다. 먼저, 이러한 정의는 복합적인 성질을 나타내는 말에만 적용될 수 있으며, 단순하고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어떤 성질을 가리키는 개념에 대해서는 적용될 수 없다. 가령 특정한 색깔의 감각적 성질이 그렇다. 다음으로 '존재, '대상', '사물' 등과 같은 보편적인 성질을 나타내는 말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없다. 이러한 개념들은 최고류로서 모든 대상의 집합 또는 모든 존재의 집합은 유를 가지지 않기 때문에 유와 종차에 의한 정의를 적용할 수 없다 이런 난점은 실체'라든지'성질' 과 같은 형이상학적 범주들에도 해당된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처럼 언어를 명료화하기 위한 정의들과는 달리, 정의된 용어와 그 외연에 대한 어떤 감정이나 태도를 전달하거나 불러일으키기 위해 사용되는 설득적 정의도 있다. 이 정의는 진정한 의미의 정의가 아닐 때가 종종 있다. 왜냐 하면 이 정의는 용어의 참된 의미를 충분히 명확하게 밝히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흔히 설득적 정의는 확실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은 채 듣는 이나 읽는 이가 어떤 것에 대해 특정한 방식으로 느끼도록 설득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가령 우리가 '낙태'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인간에 대한 살인'으로 정의한다면, 낙태가 나쁘다는 논증을 펼치기 위해 별도의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연습문제
1. 논증의 의미
1) 논리학의 과제는 무엇인가?
2) 논리학은 심리학과 인식론의 관심과 어떻게 구분되는가?
@p193
3) 논증의 기본 구조는?
4) 논증과 인과적 설명의 차이는?
5) 건전한 논증이 란 어떤 논증인가?
6) 논리학이 건전한 논증에만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2. 오류의 유형
1) 형식적인 오류와 비형식적인 오류란 각각 어떤 오류를 말하는가?
2) 전건 부정의 오류, 후건 긍정의 오류란 무엇인가?
3) 양도 논법의 오류는 어떻게 반박되는가?
4) 자료적 오류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5) 자료적 오류 중 논점 일탈의 오류란 무엇인가?
6) 심리적 오류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7) 심리적 오류 중 '이기적 합리화'란 어떤 오류인가?
8) 언어적 오류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참고문헌
1. 한국철학사상연구회 논리연구실 엮음, (실용논리학 입문), 천지, 1997.
형식 논리학을 포괄하면서도 보다 실생활과 연관지어 논리적, 비판적 사고를 훈련할 수 있도록 의도된 논리학 입문서이다. 논리학의 기초 개념에대한 설명과 보기 문제 풀이가 쉽고도 친절하다. 특히 본 강의와 연관되는 논증의 개념과 구조, 논증의 구조 분석. 오류의 종류에 대한 적절한 실례를 통한 설명은 많은 도움이 된다.
2. 어빙 코피 지음, 민찬홍 옮김, (논리학 입문), 이론과 실천, 1988.
영어권에서 많이 알려진 논리학 교재를 번역한 것으로서, 논리학의 기초개념, 논증의 분석. 오류론에 대한 설명이 비교적 평이한 편이며. 전통 논리학의 기법과 현대 기호 논리학의 기본 개념과 기법을 포괄해서 다루고 있다.
@p194
3. 김광수 지음, (논리와 비판적 사고), 철학과 현실사, 1990.
논증의 형식적 구조를 문제삼는 전통 논리학의 관심보다는 주로 주장의 의미론적 내용과 관련해서 주장의 수용 여부를 판단하는 비판적 사고 함양을 목적으로 기획된 교재이다. 자세한 설명, 풍부하고도 흥미 있는 사례 제시와 연습 문제가 강점이다
4. H. 발랑지음,강주헌 옮김, (인간과 논리), 도서출판 예하, 1989.
세계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위해서는 세계 내의 사물들에 대해 올바르게 사고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성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흔히 합리적 원리에 근거한 사고를 이성적 사고라 하는데, 사고의 합리적 원리는 무엇인가라는 문제 의식에서 출발하여, 논리적 사고와 수학적 사고가 그러한 원리로서 사고의 법칙을 해명해 준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5. 여훈근 외 지음, (논리와 진리), 철학과 현실사, 1996.
1부와 2부는 역설과 진리, 논리와 언어란 제목으로 중요한 논리 철학적 주제들을 다루고 있으며, 3부와4부는 고, 중세와 근대, 현대 논리학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논리학에 대한 관심을 논리 철학의 문제로 심화시키고자 하는 학습자에게 적합하다.
@p195
제 2장 진리와 과학적 지식
개관
이곳에서 다루어지는 내용은 참된 지식의 의미, 근거, 기준 등을 따져 묻는 철학의 한 분야, 인식론의 문제들이다. 진리란 무엇이고 무엇을 기준으로 판별해 낼 수 있는 것인가? 진리의 의미에 대한 물음과 기준에 대한 물응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내적으로 유기적인 상관 관계를 갖고 있다. 진리의 의미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기준이 달라질 수 있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우선 대응설은 우리의 판단 또는 관념이 객관적 실재와 그대로 대응 또는 일치하면 진리라고 보는 진리관이다. 대응설은 감각적 경험에 의해 실재와 관념의 일치를 확인할 수 있다고 보는 감각적 모사설과, 감각적 현상 너머의 본질을 이성적 직관에 의해 진리로 모사할 수 있다고 보는 이성적 모사설로 나뉘어진다. 그러나 감각적 모사설은 관념과 실재의 일치를 확인할 수 없다는 문제점과 일반지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갖는다.
그래서 제기된 것이 판단과 판단 간의 관계로 진위 여부를 판정하는 정합설이다. 정합설은 진리 판정의 보편성을 누구나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이성이 보장해 줌으로써 보편적 진리의 확고한 근거와 기준을 제공한다. 그러나 정합설은 그 제계의 최대 전제인 상위 판단은 무엇으로 진리성을 보장받는가의 문제가 발생한다.
진리의 근본 요건이 논리적 보편성과 경험적 객관성이라면 결국 보편성만 확보해 주는 정합설로선 종국적으로 경험적 객관성을 강조하는 대응설적 보완이 필요하다. 물론 학문 체계 가운데는 경험적 지식 제계뿐만 아니라 수학이나 기하학 같은 순수한 이론적 체계도 있다. 그 경우에는 이성에 의한 명증적 직관이 그 진리성을 됫받침해 준다.
그러나 대응설적 진리관 특히 감각적 모사설 또한 경험적 객관성 이외에 모종의 이론적 전제를 펄요로 한다. 즉 일반지를 됫받침할 수 없는 감각적 모사설의 한계는 결국 귀납법을 통해 보완되는데, 이 귀납법 자제가 원천적으로 모종의 이론적 전제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과학적 지식이 어떻게 논리적 보편성과 경험적 객관성을 갖추게 되는지가 해명된다. 결국 과학적 지식의 보편타당성은 근본적으로 대응설이 주장하는 감각적 경험만도, 정합설이 기초하는 이성적 사유만도 아닌 감각과 이성, 경험과 이론의 합작에 의해 주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요컨대 과학적 진리란 새로운 자료들의 발견과 귀납 그리고 연역에 의한 그것들의 정합적 체계화를 통해 언제나 새로운 진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인간의 지성은 그러한 진리의 개방성을 통해 폐쇄적인 독단과 아집을 벗어 던지면서 끊임없이 발전과 진보의 행보를 거듭해 나가는 것이다.
@p196
1. 기본강의: 진리의 의미와 과학적 지식의 본질
1. 삶, 지식, 진리
인간이나 동물이나 모두 주어진 생존의 조건 속에서 문제를 안고 산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이러한 문제에 대한 끝없는 대응이다. 그런데 인간과 동물은 이러한 문제를 대응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 동물은 정해진 본능에 따라 문제에 대응하지만. 인간은 본능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즉 인간은 스스로의 삶의 보존과 향상을 위해 본능뿐만 아니라 생각과 궁리를 통해 문제에 대응한다. 이러한 대응 과정에서 생각하고 궁리해 낸 것들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앎이자 지식이다. 곧 지식은 인간 삶의 본질적 방편이다. 그러나 잘못 알고 있거나 그릇된 지식은 삶의 문제에 대한 대응을 그르치기 일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른 지식, 참된 지식을 추구하고자 하고 그것을 가려 내기 위해 부단히 바르고 참된 것에 대해 관심과 노력을 기울인다. 이것이 곧 인간이 왜 진리를 사모하고 그 기준을 따져 묻지 않으면 안 되는가에 대한 원초적 기원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참된 지식의 의미, 근거, 기준 등을 따져 묻는 철학의 한 분야 인식론의 문제 의식이다.
@p197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이고 무엇을 기준으로 판별해 낼 수 있는 것인가? 진리의 의미에 대한 물음과 기준에 대한 물음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내적으로 유기적인 상관 관계를 갖고 있다. 진리의 의미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기준이 달라질 수 있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학적인 인식 차원에서 진리의 의미와 기준을 생각해 보자. 그런데 본격적으로 이 문제를 따져 보기 전에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최소한 학적인 인식 차원에서 진리에 대한 문제란 언표 형식의 판단 내지 명제 차원에서 발생한다는 점이다. 즉 진리가 나타나는 형식적 장소는 판단 또는 명제이다. 판단이 아닌 단일한 개념 예컨대 '사과'는 진리도 아니고 허위도 아니다. "사과는 식물이다", "저것은 사과이다"와 같이 판단 내지 명제의 형식으로 주어져야 비로소 그에 대한 진위 문제가 출발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진리는 '참된 판단' 또는 바른 명제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참되고 바른 판단일까?
2. 대응설
2.1 감각적 경험과 이성적 직관
이에 대한 가장 고전적인 대답은 "그것을 그것이라고 말하고, 그것 아닌 것을 그것 아닌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참이다"라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에게서 찾을 수 있다. 이 대답은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말하는 것이 진리이다"라는 우리의 일상적인 생각과도 부합한다. 진리의 의미에 대한 이러한 견해를 우리는 대응설(correspondence theory)이라 부른다. 대응설은 우리의 판단 또는 관념이 객관적 실재와 그대로 대응 또는 일치하면 진리라고 보는 진리관이다. 그렇다면 실재와 판단이 일치하는지 않는지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감각적 경험이 그것을 판정해 준다. 누군가 "이 사과는 빨갛다"라고 했을 때, 그가 가리킨 사과가 감각적 경험에 의해 빨간 것으로 확인되는 한, 그의 말은 참된 판단 즉 진리가 된다. 이와 같이 감각적 경험에 의해 실재와 관념의 일치를 확인할 수 있다고 보는 주장을
우리는 대응설적 진리관의 하나로서 감각적 모사설이라 부른다.
@p198
그런데 기하학적 사실들같이 사실과 판단의 일치 여부를 감각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예컨대 "두 원의 접점은 하나이다"라는 판단이 참된 판단인지 아닌지는 감각으로 확인할 수 없다. 데카르트(R. Descardes)에 의하면 그와 같은 수학적, 기하학적 사실은 감각이 아닌 이성적 직관에 의해서 그 자체로 명백하고도 확실한 즉 명증적 진리로 확인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사물을 현상과 본질이라는 이원론적 구도로 나누어 생각한 플라톤(Platen)역시 감각적 현상 배후에 참된 본질로서 실재하는 이른바 이데아(idea)에 대한 인식은 예지적 직관(noein)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처럼 감각적 현상 너머의 본질을 참 실재로 인정하고, 그것에 대한 참된 인식은 감각이 아닌 이성적 직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을, 우리는 대응설적 진리관의 또 다른 하나로서 이성적 모사설이라 부른다.
2.2 대응설 비판
그러나 관념과 실재의 일치, 사실과 판단의 일치를 진리로 보는 대응설의 주장은 우리가 수긍하기 어려운 난점이 있다. 논의의 편의상 대응설적 진리관의 대표 격이자 우리의 상식적인 진리관과 가장 가까운 감각적 모사설의 주장을 중심으로 그 문제점을 살펴보자 진리라고 한다면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감각적 모사설의 판정 기준이 되는 감각적 경험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판정 결과 또한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어떤 특정 판단이 실재와 일치하는지 여부가 사람마다 다르게 판정된다면 "진리란 각자 나름대로의 것이다"라는 극단적인 상대론이라면 모를까, 진리 기준의 엄밀성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보면 애매하기 그지없는 기준이다.
@p199
그러나 감각적 모사설의 주장은 보다 근본적이고 원천적인 데서 그 한계가 드러난다 그림을 보고 설명해 보자.
그림에서 인식 주관은 실재 a를 가리키며 "이것은 사과이다"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가 가리키는 '이것'은 곧 '실재하는 사과'이고, 그것은 이미 그가 알고 있는 '사과에 대한 관념(c)'과 일치하는 것이므로 그의 판단은 진리라는 것이 감각적 모사설의 입장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자. 그가 말한 '이것'이 가리키는 것이 과연 '실재하는 사과' 자체일까, 아니면 '실재하는 사과'에 대한 인식 주관의 반영 즉 '감각적 관념으로서 사과(b)'일까? 잘 헤아려 보면 그가 말한 '이것'은 실재(a) 자체가 아니라 인식 주관 안의 감각적 관념(b)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일치한다고 여긴 것은 실재(a)와 관념(b)이 아니라 관념(b)과 관념(c)의 일치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그는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즉 감각적 모사설은 실재와 관념의 일치를 진리로 주장하지만, 감각적 모사설이 일치했다고 여기는 것은 다만 관념과 관념의 일치일 뿐이다. 물론 실재(a)와 관념(b)이 같다고만 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a와 b의 일치는 곧 b와 c의 일치이니까. 그러나 이것들의 일치 여부를 확인하려면 실재(a)를 알아야 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그것'은 '관념으로서의 그것(b)'일 뿐 '실재 자체로서의 그것(a)'은 우리 인식 안에 주어질 수 없으므로 관념과 실재의 일치 여부를 확인할수 없다. 따라서 감각적 모사설의 주장은 구호에 불과할 뿐 실제 인식 과정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주장을 펴고 있는 셈이다.
더더욱 감각적 모사설의 문제점은 그것이 가장 됫받침해 줄 수 있을 것이라 예상되는 경험적 사실에 관한 지식에 대해서조차 설명력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불이 나면 연기가 난다", "모든 코끼리는 죽는다" 등 경험적 사실에 관한 지식이란 기본적으로 일반지로서 보펀 언명의 형식을 취하는데, 그 대상이 되는 모든 것을 다감각적 경험으로 대응, 확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감각적 모사설은 "이것은 사과다". "저 말은 죽는다" 등 개별적 단칭 판단은 몰라도 보펀적 일반지로서 전칭 판단의 경우에는 원천적으로 그 기준자체를 적용할 수가 없다. 그리고 감각적 모사설이건 이성적 모사설이건 간에 대응설적 진리관은 "장차 우주는 소멸할 것이다", "핵전쟁이 일어나면 인류는 멸망할 것이다" 등 대응하는 상황이나 사건 자체가 현존하지 않는 판단들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가 없다.
3. 정합설
3.1 논리적 무모순성과 연역오 보편성
대응설적 진리관은 진리의 근본 요건으로서 보편성을 근거 짓는 진리관이기엔 원천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그래서 진리의 보편성을 화보해 내려고 하는 일부의 사람들은 지식이 판단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인 한, 보편적 진리의 근거를 실재와 관념 간의 대응 관계에서 찾지 말고 관념과 관념, 판단과 판단 간의 정합 관계에서 찾자고 주장한다. 이렇게 해서 제시된 것이 대응설과 대비되는 정합설(coherencetheory)이다. 정합설적 진리관은 예컨대 이런 것이다. 누군가 '철수는 죽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치자. 아마도 대응설로 이 판단의 진리 여부를 확인하려면 철수보다도 오래 살면서 자연사이건 사고사이건 그가 죽는지 안 죽는지를 확인하거나 살인자가 될 것을 각오하고 철수를 죽여 보려고 하거나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그 판단의 진리 여부를 확인하려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아니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않을 것이다. 왜냐 하면 그것은 이치만 간단히 따져 보면 쉽게 확인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죽는다 철수는 사람이다. 따라서 철수는 죽는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거짓이다"라고. 다시 말해 그 판단은 기성의 자명한진리 판단과 논리적으로 모순되므로 허위이다.
@p201
정합설은 이처럼 어떤 판단이 진리냐 아니냐를, 판단과 실재의 대응 관계가 아닌 판단과 판단 간의 정합 관계로 판정하는 진리관이다. 즉 기성의 자명한 판단에 맞아떨어지면, 정합되면 다시 말해 모순되지 않으면 진리이고 그렇지 않으면 허위이다. 이때 정합 여부, 모순 여부를 판가름해 주는 것은 사고의원리로서 모순율과 그에 기초한 연역의 규칙이다. 일반적으로 '이미 알려져 있는 하나의 판단이나 여러 개의 판단으로부터 다른 하나의 판단이나 여러 개의 판단들이 필연적으로 도출될 때 앞의 것에서 뒤의 것으로서의 추리를 연역적 추리'라고 한다. 예컨대 A와 B가 같고 B와 C가 같다면 그 전제에서 A와 C가 같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연역된다. 이처럼 연역의 규칙은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의를 달려야 달 수 없는 보편적인 것이다. 그것은 이성의 선천적 규칙이기 때문이다. 연역에 의한 정합 여부의 판정은 대응설처럼 감각적 경험으로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논리적인 이성적 사유로써 판정하는것이다. 따라서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정합설은 진리 판정의 보편성을 누구나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이성이 보장해 줌으로써 보편적 진리의 확고한 근거와기준을 제공한다. 그런 점에서 정합설적 진리관은 여러 지식들을 상호 모순 없이 체계화하는 기본 원리가 되면서 보편성의 기초가 된다. 모든 학문의 체계성은 정합설적 진리관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3.2 정합설 비판
그러나 정합설 또한 문제점을 갖고 있다. 정합설은 어떤 판단의 진리성을 체계 내 상위 판단과의 정합 여부 즉 상위 판단을 전제로 하고 그곳에서 새 판단이 논리적으로 연역되느냐 않느냐로 판정하는데, 과연 그 체계의 최초 전제인 상위 판단은 무엇으로 진리성을 보장받는가의 문제가 발생한다. 예컨대 "모든 사람은 죽는다"가 진리인 근거는 체계 내 상위 판단인 "모든 동물은 죽는다"에 정합되기 때문이요, "모든 동물은 죽는다"가 진리인 근거는 생명체의 생명과 관련한 체계 내 최상위 판단인 "모든 생명체는 죽는다"에 정합되기 때문이다. 즉 하위 판단은 필연적으로 상위 판단으로부터 연역적으로 도출된다. 그러나 "모든 생명체는 죽는다"는 최상위 판단은 정합 여부를 확인할 그 위의상위 판단이 없다. 그렇다면 그 판단은 왜 진리인가?최소한 정합설은최상위판단의 진리성을 설명할 수 없다. 최상위 판단의 진리성을 확인할 수 없다면
그 판단에 정합하는 하위 판단들 모두도 진리성을 보장받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즉 모든 연역은 일정한 판단을 전제로 해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로부터 아무리 필연적으로 연역된 논리적으로 참인 판단이라 해도 그 출발점이 된 판단이 내용적으로 의심스러운 것이면 그로부터 연역된 모든 명제들의 진리성 또한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 결국 정합설은 최상위 판단이 진리임을 보장해 주는 정합설 이외의 다른 진리관을 추가적으로 요구할 수밖에 없는 원천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p202
이상의 고찰을 종합해 보면. 대응설 특히 감각적 모사설은 진리 판정의 기준으로서 우리의 상식에 적극 부합하는 감각적 경험을 끌어들임으로써 새삼스럽게 우리에게 참된 지식의 핵심적인 구성 요건으로서의 감각적 경험의 중대성을 환기시켜 준다. 그러나 실재와 관념의 일치를 확인할 수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경험적 사실 판단이 갖고 있는 일반적 보편성을 뒷받침해 줄 수 없다. 그리고, 정합설은 보편적 진리를 오로지 판단과 판단 간의 논리적 연역 여부 즉 정합 관계로 설명함으로써 감각적 모사설이 뒷받침하지 못한 진리의 보편성을 확보하긴 하였지만, 결국 근본 전제가 되는 최상위 판단의 진리성을 논리적 정합이 아닌 다른 방식에 의해 됫받침받아야 하는 문제점을 드러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대표적인 참된 지식의 유형으로 꼽는 과학적 지식이란 것이 경험에 기초한 것이자 보편 타당성도 갖는 것이라면, 결국 우리가 해명해야 할 과학적 지식의 진리성은 이 두 가지 진리 이론이 갖는 한계를 넘어서서 또 다른 방식으로 보완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4. 비판적 보완
4.1 정합설의 비판적 보완: 감각적 경험과 명증적 직관
그렇다면 그러한 대응설과 정합설은 과학적 지식의 진리성을 해명하는 데 어떠한 점이 보완되어야 할까? 우선 논의의 편의상 정합설적 진리관이 명실 상부한 진리관으로서 추가적으로 갖추어야 할 점들을 먼저 생각해 보자.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정합설이 주장하는 판단과 판단간의 정합 관계가 연역 추리에 기초하고 있는 한 그것은 논리적인 무모순성과 필연성을 보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한 절차상의 논리적 타당성에만 기초한 것이므로, 일반적인 경험 과학적 지식 체계의 종국적인 진리성을 판가름하는 최상위 판단의 사실적, 내용적 진리성까지 보장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학문적 지식 체계상의 판단들이 명실 공히 논리적인 타당성을 갖는 것이자 내용적인 진리성을 갖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 연역 체계의 최초 전제이자 출발점이 되는 최상위 판단의 내용적 진리성을 뒷받침해 주는 연역 이외의 다른 방법이 요구된다. 그러면 구체적인 내용적, 사실적 진리성을 확인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다름 아닌 감각적 경험에 의해 진리성을 뒷받침해 주는 것일 것이다 이 방법은 곧 대응설 중 감각적 모사설이 주장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결국 정합설적 진리관이 진리의 근본 요건으로서 보편성과 경험적 객관성을 함께 됫받침해 주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대응설적 기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내용적 사실성 내지 경험적 객관성이란 직접적인 감각적 경험에 의해서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p203
그런데 학문 체계 가운데는 경험적 지식 체계뿐만 아니라 수학이나 기하학 같은 순수한 이론적 체계도 있다 그렇다면 그 경우 최상위 판단의 진리성 예컨대 기하학적 체계에서 "두 점을 잇는 직선은 두 점 간의 최단 거리이다" 등과 같은 연역 체계 내 최상위 공리들의 진리성은 또 무엇에 의해 뒷받침될 수있을까? 이것 역시 대응설 중 이성적 모사설의 방법이 됫받침해 준다. 즉 이성적 직관에 의해 그것은 그 자체로 명증적인 진리성을 확인받는다. 최소한 인간으로서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따질 필요조차 없이 그것이 참임을 딱 알아차린다. 즉 그것을 명증적으로 인식하는 직관 능력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선천적으로 똑같이 구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고등학교 시절 기하 시간을 회고해 보면 어떤 기하학적 명제가 옳으냐 그르냐는 그와 같이 직관에 의해 명증적인 진리로 확립된 기본 공리를 전제로 하고 그로부터 연역되느냐 않느냐로 진위를 판정하고 증명하곤 했다. 우리가 그때 수행한 증명 방법 그것이 곧 진리성의 확인 방법으로서, 정합설이 기초하고 있는 인간의 선천적 사고 원리로서 연역의 규칙인 것이다. 즉 논리적, 수학적 진리는공리에 대한 명증적 직관과 그로부터의 논리적 연역에 의해 진리성을 보장받는 것이다.
4.2 대응설의 비판적 보완: 귀납법과 자연의 제일성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정합설의 한계는 대응설적 기준에 의해 보완될 수 있다. 그러나 대응설적 진리관 중 이성적 모사설은 최소한 수학적, 기하학적 지식 체계 내에서는 최상위 판단의 보편성, 일반성을 기초 지어 주지만, 감각적 모사설은 과학적 지식의 일반지로서의 성격을 됫받침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정합설의 한계를 보완해 주지 못한다 물론 감각적 모사설은 감각적 경험을 내세움으로써 정합설적 진리관이 뒷받침해 주지 못하고 있는 지식의 감각적, 내용적 측면을 분명 보완해 준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감각적 경험만으로는 과학적 지식의 일반지로서의 성격을 설명할 수 없고, 그러한 한, 정합설적 체계를 보완할 수도 없다. 왜냐 하면 비록 경험적 내용을 담고 있을지라도 일반지로서 보판 언명의 형식을 취하지 않는 한, 정합설적 지식 체계에 편입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학적 지식의 중요한 토대가 되는 감각적 모사설에 의찬 개별적 경험 내지 감각지들은 어떤 방식으로 그들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 일반지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일까? 엄밀히 말해 경험적 일반지가 되려면 그것이 가리키는 모든 대상을 감각적 경험으로 다 확인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감각적 모사설에 의한 개별적 경험지가 과학적 지식의 토대로서 경험적 일반지로 성립되는 근거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다시 말해 감각적 모사설의 근본 한계는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
@p204
이제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곧 경험적인 일반지의 원리이자 핵심적인 학문 방법상의 원리로서 귀납법(induction)이다. 귀납법은 '구체적인 어떤 현상이나 사태가 예외 없이 일양적으로 반복될 경우 그 부분적인 사례들에 기초하여 경험되거나 확인되지 않은 사례까지를 포함한 모든 사례에 대해 동일한 사태나 현상으로 발생할 것이라고 일반화'하는 원리이다. 우리는 우리사고 능력 일반이 구비하고 있는 이러한 귀납법적 원리에 의해 비록 모두 경험적으로 확인하지는 않았을지라도, 부분적인 사례들의 일양성에 기초하여 경험적 지식을 획득하고 그 경험적 지식에 보편타당성을 부여한다. 따라서 경험적 지식의 보편 타당성은 경험에 의한 직접적 확인을 중시하는 대응설적 기초 위에 이와 같은 귀납법적 원리를 비판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해명될 수 있다.
그러나 귀납법적 원리를 엄밀하게 따져 보면 비록 일반화의 원리이긴 해도 개개의 사례 또는 어느 일부의 사례로부터 그 사례 전체에 해당된 보편적 법칙을 추리해 내는 것이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그것은 논리적 비약을 범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부분적인 사실에 기초하여 확인한 원리를 그 사실 전체에 관하여 단안을 내리는 것을 우리는 귀납적 비약(inductive leap)이라고 한다. 즉 귀납법은 귀납적 비약의 정당성을 전제한다 그러나 그 귀납적 비약의 근거는 무엇인가? 과연 과거의 것이 어떻게 미래에 일어날 것에까지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 반드시 그런 것이 아니라면 귀납법의 기반 자체가 흔들리는 것이고, 그것이 흔들리면 경험적 지식의 일반적 성격이 보편타당성도 흔들리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전통적으로 귀납적 비약을 정당화하는 근거로서 자연의 제일성(the uniformity of nature)이라는 원리가 제시되어 왔다. 밀(J. S. Mill)에 의해 "자연의 진행 과정은 한결같다"로 표현된 자연의 제일성은, 곧 우주의 모든 현상에 있어 과거의 일정한 사정 밑에 일어난 사례는 미래의 동일한 사정 아래서도 동일한 사례로 발생한다는 법칙이다.
@p205
즉 귀납법은 이와 같은 자연의 제일성이라는 법칙 위에서 성립한다. 이 법칙은 경험적으로 완겉히 확증된 것은 아니지만 경험적 지식의 보편타당성을 기초지어 주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요구되지 않으면 안 되는 원리이다. 즉 그러한 법칙 위에서 우리는 부분적인 사례일지라도 현재까지 예외가 없는 한, 그 부분 사례에 기초해서 모든 사례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지식 획득의 방법이 곧 일상에서건 학문적 영역에서건 우리로 하여금 제반 경험적 지식을 가능케 해 주는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방법으로서 이른바 귀납법의 본질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법칙도 실은 귀납의 결과로 얻은 것이라면, 귀납법은 그 자신 자연의 제일성이라는 법칙에 의존하고 그 법칙은 또 귀납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원천적으로 순환의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자연의 제일성이라는 원리는 예외적인 귀납적 진술이자 귀납법을 가능케 하는 근본 대전제로서 증명 이전에 받아들여야 할 이론적 전제임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대응설이 주장하는 감각적 경험만으로는 보편타당한 지식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요. 거기에는 경험적이긴 하되 경험으로 확증할 수 없는 그러나 경험적 지식의 일반화를 위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이론적 전제가 함께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감각적 경험에 의한 대응만을 참된 지식의 기준으로 보는 감각적 모사설의 한계는 이와 같은 이론적 전제를 기초로 하여 성립되는 귀납법을 통해 보완되고 그것을 통해 경험적 지식의 일반적 성격이 해명된다. 이런 점에서 과학적 지식의 토대가 되는 경험적 지식이란 것은 결국 대응설이 주장하는 감각적 경험만도, 정합설이 기초하는 이성적 사유만도 아닌 감각과 이성, 경험과 이론의 합작품임을 알 수 있다.
@p206
5. 종합: 과학적 지식의 성격
결국 과학적 지식의 토대로서 경험적 일반지는 자연의 제일성을 기본 공리로 받아들이는 이론적 전제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며, 그 이론적 전제 또한 궁극적인 필연성을 보장받지 못하는 말 그대로 전제인 한, 이미 영국의 경험론자 흄(D Hume)이 간파한 대로 그것은 언제라도 뒤엎어질 수 있는 개연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이 과학에서 귀납법의 역할과 의미를 축소시키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히려 학문 체계의 보편성을 확립하는 정합설적 진리관의 기초로서 연역법(deduction)과 더불어 과학적 방법론의 본질적이고도 핵심적인 바탕을 구성하면서 학문 방법론으로서 그 스스로의 위상을 언제나 굳건히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돌을 던지면 아래로 떨어진다는 귀납지가 비약을 통해 얻어진 일반지라고 해서 세상에 있는 돌 모두를 던져 보려고 하지 않으며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으며, 불에 닿으면 뜨겁다는 일반지가 모든 사례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주저 없이 불에다 손을 데는 어리석음도 범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한 경험지가 근본적으로 귀납지라고 해서 항상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그 진리성을 확인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학문적인 체계와 관련해서는 우리는 경험적 판단의 진리성 여부를 귀납이아닌 연역의 방식 즉 그 판단이 기성의 체계에 정합되느냐 않느냐로 판정하기
때문이다.
이상의 고찰에서, 우리는 사실적 내용을 강조하는 대응설적 진리관과 경험지를 일반지로 가능하게 해 주는 귀납법, 그리고 그러한 사실들의 모순 없는 체계를 성립시키는 정합설적 진리관 등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것들이 갖는 내적인 특징과 구조에 대한 반성적 고찰을 통해 그로부터 주어지는 지식과 진리의 본질과 성격을 간취할 수 있었다. 그러한 고찰을 통해 우리는 자연에 관한 진리란 본질적으로우리 앞에 무한히 열려져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요컨대 과학적 진리란 새로운 자료들의 발견과 귀납 그리고 연역에 의한 그것들의 정합적 체계화를 통해 언제나 새로운 진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인간의 지성은 그러한 진리의 개방성을 통해 폐쇄적인 독단과 아집을 벗어 던지면서 끊임없이 발전과 진보의 행보를 거듭해 나가는 것이다.
@p207
6. 근세 인식론
끝으로, 진리와 지식에 관한 이상의 원론적 논의 내용이 근세 인식론의 전개 과정에서는 어떻게 구체적인 입장들로 나타났는지를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근세 인식론의 성립 과정을 보면 대응설적인 관점은 영국경험론과, 정합설적 관점은 대륙합리론과 깊은 연관관계를 가지면서 여러 학자들을 통해 다양한 인식론적 주장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결국 경험론(empiricism)은 지식의 기원이 경험에 있음은 밝혔지만 지식의 원천으로서 경험만을 고수한 까닭에 지식의 일반지로서의 성격 즉 지식의 보펀성을 설명하는 데 실패했고, 합리론(rationalism)은 진리의 보편성을 설명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연역에 의한 논리적 무모순성에만 집착한 나머지 과학적 지식의 사실적, 경험적 내용의 측면을 설명하지 못했다. 이른바 근세 인식론의 꽃이라 불리우는 칸트(I. Kant)의 비판적 인식론이 란 위와 같은 합리론과 경험론의 장단점을 비판적으로 종합하여 과학적 지식의 보편타당성의 근거를 해명한 철학사상 중요한 의의를 갖는 인식론이다. 즉 칸트는 뉴튼 물리학 등의 당시의 자연과학적 진리가 경험적 객관성과 논리적 필연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칸트의 과제는 이미 실질적 진리로서 현존하는 그와 같은 자연과학적 지식이 어떻게 보편타당성을 갖는지를 인식론적으로 밝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칸트는 인간의 과학적 인식의 과정을 분석한 끝에 보편 타당한 지식은 단순히 감각이나 이성이 대상을 수동적으로 모사한 것이 아니라 감성과 오성이라는 인간의 인식 기능이 선천적으로 주관 속에 구비되어 있어 그 기능이 그 나름의 고유한 방식에 따라 능동적으로 구성해 진 것임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즉 감성은 외부로부터 감각적 현상들을 나름대로 해석 정리하면서 받아들여 지각을 성립시키는 선천적인 기능이고, 오성은 그것들을 나름대로의 범주로 분석, 비교, 추상하면서 그것들에 보편성을 부여하는 인간 공통의 선천적인 인식 기능이다. 결국 경험적 지식의 내용적 객관성은 감성에 의해, 그것의 보편성은 오성에 의해 뒷받침된다. 즉 칸트는 감성과 오성이라는 선천적 주관 형식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합리론과 경험론이 설명하지 못한 경험적 지식의 경험적 객관성과 필연성 즉 보편 타당성을 해명한 것이다. 특히 과학적 진리가 단순히 발견되거나 모사된 진리가 아니라 인간 나름의 선천적 형식에 의해 능동적으로 구성된 진리라는 칸트의 구성설적 진리관은 과학적 진리의 본질을 해명하는 인식론상의 획기적인 전기가 되었다.
@p208
2. 주제토론: 과학적 확실성의 근거는 무엇인가?--귀납주의와 반증주의
1. 토론 과제
다음의 제시문은 과학적 확실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귀납주의를 비판하는 반증주의의 주장을 담고 있다. 제시문의 핵심적인 내용을 분석적으로 요약 제시한 후, 반증주의자들의 기본 논점과 주장에 대해 비판적으로 토론해 보자.
귀납주의는 관찰이나 실험의 결과를 진술하는 단칭 언명으로부터 가설이나 이론으로서의 보편 언명이 이끌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관찰이나 실험의 결과는 객관적이기 때문에 이 관찰 사실을 귀납을 통해 일반화하면 과학적인 가설이 탄생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객관적인 관찰은 존재하지 않으며 과학은 경험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모든 관찰에는 관찰에 앞선 이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론이나 전제의 도움을 받지 않는 한 우리는 아무것도 관찰할 수 없다 관찰 이전에 무엇을 관찰하고 어떻게 관찰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선행한다. 의학에 관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의학도만이 엑스레이 사진을 판독할 수 있는 것처럼, 아무런 전제 내지 관점이 없는 경험이란 성립하지 않는다.
@p209
게다가, 많은 단칭 언명이 발견되더라도 단칭 언명으로부터 보편 언명을 이끌어 내는 추론 과정은 객관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이런 방법으로 귀결되는 어떠한 결론도 논리적 필연성을 갖지는 못한다. 아무리 많은 흰색의 백조가 관찰되었다고 하더라도 세상의 백조를 다 관찰하지 않는 한, 이것이 "모든 백조는 희다"라는 결론을 논리적으로 정당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귀납을 가지고는 누구에게나, 어느 장소에서나, 어느 때나 성립하는 보편 언명이 도출될 수 없다. 결국, 귀납적 방법은 끝없는 물음과 문제 제기만을 낳을 뿐이다. 따라서 이론을 검증하는 방법과 그 결과에 따라 이론을 선택하는 것이 정당성을 얻으려면 귀납주의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곧 반증주의의 방식이다. 즉 어떤 한 이론이 정당성을 갖는 것은 얼마나 많은 귀납자료들을 갖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론이 과연 반대 증거 즉 반증을 얼마나 견며 내느냐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997 년 10월 9일 정오에 연대 입구에서 검은 백조를 보았다"라는 사건이 발생하면, "모든 백조는 희다"라는 언명은 아무리 많은 자료에 토대를 둔 것일지라도 그 반증을 견뎌 낼 수 없으므로 정당화에 실패하게 된다. 물론 그 순간까지는 보편 언명은 정당화된 것이며 옳은 언명으로 행세하게 된다. 주목할 것은 이때의 반증 사례는 단칭 언명이다. 단칭 언명으로부터 보편 언명을 이끌어 낼 수는 없지만, 그 단칭 언명 하나만으로 명백하게 보편 언명을 반증할 수는 있는 것이다. 보편 명제에 긍정적인 실험 결과는 그 이론을 당분간 지지해 줄 수 있으나, 만약 부정적인 결과가 나온다면 그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어떤 이론이 검사에 견디어 내고 있어 다른 이론에 의해 대체되지 않은 그 기간 동안의 이론을 우리는 과거 경험에 의해 확증된 이론이라고 말한다.
반증 가능성(falsifiability)이 없는 이론이란 "적어도 한 마리의 희지 않은 백조가 존재한다" 같은 것이다. 언젠가는 단 한 마리의 희지 않은 백조를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존재 언명은 반증될수 없다. 그렇다면 반증될 수 없는 이 이론은 완벽한 이론인가? 오히려 그 반대이다. 이런 식의 이론은 아무것도 말해 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옳고, 저러한 상황에서도 옳으며, 서로 대립되는 두 상황에서도 옳게 판명되는 이론은 "비가 오거나 비가 오지 않는다"라는 언명처럼 결국 어떤 새로운 정보도 주지 못하기 때문에 비과학적이다.
@p210
그 대표적인 예로 점성술을 들 수 있다. 점성술은 자연과 세계에 대해서 다 설명해 주는 것처림 하면서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사이비 과학의 킬표적인 예이다. 점성술은 해석과 예언을 매우 애매하게 함으로써 만약에 그 이론과 예언들이 좀더 명확한 것이었더라면 반박되었을지도 모르는 것들을 교묘하게 설명한다. 이를테면 "물고기자리 태생은 분석적인 일에 종사하면 성공한다" 같은 언명이다. 이 같은 애매한 해석과 예언을 일삼는 점성술은 반증을 피하기 위해 이론의 시험 가능성을 아예 없애 버린 것이다.
2. 기본 논증과 비판
2.1 제시문 요약
#1 귀납주의의 주장: 귀납주의는 관찰이나 실험의 결과에 대한 객관적인 언급인 단칭 언명으로부터 이론의 역할을 하는 보편 언명이 도출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2 귀납주의 반박 1: 일반화의 기초인 관찰 언명은 객관적이지 않다. 관찰에는 이론이 앞서기 때문이다.
#3 귀납주의 반박 2 단칭 언명의 수가 많아도, 단칭 언명으로부터 보편 언명을 이끌어 낼 수는 없다.
#4 귀납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반증주의: 단칭 언명으로부터 보편 언명을 이끌어 낼 수는 없지만 단칭 언명이 보편 언명을 반증할 수는 있기 때문에, 이론의 확실성을 검증하는 방법은 반증주의에서 찾아질 수 있다.
#5 반증주의에서의 이론의 성격: 특정한 보편 명제에 긍정적인 실험 결과는 그 이론을 잠정적으로 지지해 줄 수 있는 근거를 주지만, 그 이론에 부정적인 결과가 나온다면 그 이론은 다른 이론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6 반증 가능성이 없는 이론: 반증 가능성이 없는 이론은 아무것도 말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비과학적이다.
2.2 기본 내용의 분석
이 글은 귀납주의의 문제점에 대한 포퍼(K. Popper)로 대표되는 반증주의자들의 주장을 담고 있다. 과학적 확실성의 성격에 관한 중요한 내용들이 담겨있으나, 포퍼 사상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는 그 내용이 한눈에 쉽게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주장을 근본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귀납주의의 기본 성격과 그것을 바라보는 포퍼의 기본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p211
우리들은 보통 과학 이론이잔, 관찰과 실험을 통해 얻어진 경험적 사실에서 엄격한 방법을 통해서 이끌어 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과학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리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 등이다. 과학에는 사사로운 개인적인 의견이나 좋아함, 사변적인 상상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그래서 과학은 객관적이라고 말해지고 또 그렇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지식이라고 여겨진다 이른바 귀납주의란 이렇게 널리 퍼진 과학관을 세련되게 정식화한 것이다. 즉 과학적 지식은 기본적으로 관찰의 기록인 관찰진술로부터 귀납에 의해 도출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귀납주의자들은 하나의 가설을 지지하는 증거가 많이 존재하고 반박하는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가설을 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관점이다. 그러나 (기본 강의)에서도 지적하였듯이 귀납 추리는 부분적인 사례를 기초로 전체에 적응되는 일반지를 이끌어 내는 방식 즉 귀납적 비약을 통해 이루어지므로 원천적으로 논리적 확실성을 갖는 추론이 아닌 개연적 추론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과학적 지식이 갖는 일반지로서의 보편 언명으로 나타나는 한 그것은 단칭 언명들에 의해 완전하게 검증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포퍼의 반증주의는 귀납주의가 갖는 이러한 한계를 정면으로 받아들이되 과학적 확실성에 판한 역의 관점에서 출발한다. 즉 포퍼의 반증주의는 귀납주의 문제로 지적된 것처럼, 보편 언명은 단칭 언명에 의해 검증될 수는 없어도 거꾸로 반증될 수는 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이를테면 검은 까마귀의 사례를 아무리 많이 동원해도 "모든 까마귀는 검다"라는 명제의 확실성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여기 검지 않은 까마귀가 있다"는 하나의 사실이 발견된다면 그 하나의 사례만으로도 "모든 까마귀는 검다"라는 명제가 거짓이라는 점은 확실하고도 명백하게 증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결국 과학 이론들은 경험에 의해 검증된 언명이 아니라 아직 반증되지 않은 언명이다. 그렇다고 반증되지 않으면 확실한 지식인가? 그렇지 않다. 비과학적 지식은 아예 반증 가능성 자체가 없는 명제이다. 따라서 과학적 지식은 반증되기 전까지 잠정적인 확실성만을 갖는다. 즉, 과학적인 지식은 절대적으로 참일 수 없는 명제 즉 반증 가능성을 갖는 명제이다.
@p212
포퍼는 나아가 이러한 반증주의에 기초해서 과학 이론 및 과학자사회의 개방적 특성을 논한다 즉 포퍼는 과학자는 자신의 이론을 지지하는 사례를 찾아 노력할 것이 아니라 반박하기 위해서 노력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른바 과학 이론이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아직 결함이 발견되지 않은 것이지만 언제든지 반증 가능성을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자 공동체는 이러한 과학의 특성에 기초해서 열린 사회, 열린 의식 속에서 누구라도 이론을 제안하고 다른 사람들의 이론을 비판할 수 있으며 대담하게 자신에게 가해진 비판을 수용해야 한다. 과학이란 바로 그러한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진보하는 것이다. 과학적 확실성 및 과학적 지식의 성격에 관한 포퍼의 주장을 비판적 합리주의로 부르는 것도 그러한 까닭이다.
2.3 비판
요컨대 반증주의자의의 입장에서는 어떤 과학 이론도 증명될 수 없으나 반증될 수는 있다. 그들은 완전한 논리적 확실성을 바탕으로 반증 사례를 통해 과학의 거짓됨을 거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증주의자들에게 이른바 과학성이란 실험의 결과가 이론과 모순될 경우 해당 이론의 그릇됨을 실험을 통해 명확히 드러내 보이는 것 즉 반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단 어떤 명제가 반증되면 그 명제는 무조건 거부되어야 한다 이에 따라 반증주의자들은 반증 불가능한 명제들을 형이상학적 명제라고 가차없이 낙인찍고 그것들의 과학적 지위를 부인한다.
그러나 예측된 결과를 얻지 못한다고 해서 그 이론이 직접 반증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 하면, 실험 절차가 만족스럽게 수행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실험 결과가 만족스럽게 제시되어서 기존의 이론을 고수케 한다고 해도 그 실험의 절차가 잘못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것은 어떤 이론으로부터 정당한 결과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그 실험에 포함된 여러 이론적인 가정들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길을 가다가 백조와 같아 보이지만 색깔만은 검은 한 마리 새를 마주친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반증주의자의 주장에 따르면, 검은 백조를 보았기 때문에 "모든 백조는 회다"라는 언명은 당장 폐기되어야 하고 더이상 과학적인 진술이 아니게 된다. 그러나, 실제 과정은 그렇지 않다. 우선 당신은 백조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기존의 일반적인 지식과 이 미확인 생물을 구분 짓는 다른 특성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세심한 주의를 집중시켜 조사해 볼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 조사가 십중 팔구 색 이외의 다른 차이점을 들추어 낸다면 당신은 새로운 종을 발견했다고 공표할 것이다. 또는 이런 차이점을 찾아 내지 못했을 경우 당신은 '검은 백조'가 발견되었다고 공표할 것이다. 이처럼 관찰이 모든 백조는 하얗다는 일반화를 반증하는 결론에 이르도록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 하면,특정한 이론을 반증하는 경험 역시 순수하게 경험적인 것만이 아니라 백조라는 종에 관한 일반적인 정의 즉 이론을 포함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p213
갈릴레오가 천체들은 아무 흠도 없는 수정으로 된 구형체라는 그때까지 존속해 온 천체 이론을 반박했을 때, 그가 제시한 반증 사례는 그가 관찰한 달위에 있는 '산'들과 태양 위에 있는 '반점'들이었다. 이때 그의 관찰은 눈이 아니라 망원경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망원경 및 그 망원경에 관한 과학 이론의 신뢰성을 매우 의심했기 때문에 갈릴레오의 이론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했다. 결국, 갈릴레오의 순수한 비이론적인 관찰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위협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갈릴레오의 관찰이 기반한 광학이론에 대한 신뢰도가 증가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천체 이론이 위기를 겪게 된다.
이처럼, 과학 이론 자체가 과학자 집단에서 광범위하게 의심되지 않는 한 제기된 한 번의 반증 사례 때문에 그 과학 이론 자체가 의문시되거나 다른 이론으로 대체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갈릴레오의 경우처럼 반증 사례를 보고한 과학자가 의심을 받게 된다. 과학 이론이 대체되는 것은 과학자들이 점점 더 반증사례들에 연속적으로 부딪쳐 이것을 해결할 새로운 과학 이론을 받아들일 경우에로 한정된다.
결론적으로, 관찰이나 실험의 결과를 진술하는 단칭 언명들로부터 가설이나 이론으로서의 보편 언명이 이끌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귀납주의와 달리, 반증주의는 단칭 언명들로부터 보편 언명이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반증주의는 어떤 이론의 과학적 확실성이란 그 이론이 얼마나 반증에 견뎌 내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이렇게 보면 과학적 일반지의 보편 언명이 옳은 언명으로 유지되는 기간은 단칭 언명으로 제시되는 반증 사례에 견디어 내는 한에서이다.
@p214
그러나. 특정한 반증 사례에 의해서 예측된 결과를 얻지 못한다고 그 이론이 직접 반증되는 것은 아니다 시험 절차가 만족스럽게 수행되지 않았거나 반증 사례가 근거하고 있는 이론적인 가정들을 우선 고려해야 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반증하는 경험은 순수하게 경험적인 것이 아니라 그 반증 사례를 뒷받침하는 일반적인 이론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증 사례가 순수하게 경험적이지 않다는 반증주의에 대한 비판은 귀납주의에 대한 반증주의의 비판과 공통적이다. 반증주의도 모든 관찰에는 관찰에 앞선 이론이 존재하고 이론이나 전제의 도움을 받지 않는 한 어떤 것도 관찰될 수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3. 읽기 자료: 생의 철학과 실용주의의 진리관
1. 생의 철학과 해석학
보편 타당한 진리의 가능 근거를 제시한 칸트의 인식론이 등장한 이후 근대는 객관적 실체. 보편을 강조하는 절대적 이성주의로 치닫는다. 이에 따라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이에 대한 반동으로서 비합리주의적 경향이 대두한다. 비합리주의는 이성 중심의 보편주의, 객관주의 철학들로부터 주관적이고 비합리적이라고 천시되어 왔던 충동, 의지, 본능, 생 등에 주목하고 그것이 보다 근원적임을 강조한다. 생철학(Lebenphilosophie)은 그와 같은 입장을 대표하는 현대 사상의 한 경향이다. 생철학은 의지나 충동 같은 비이성적인 것이 이성보다 더 근원적인 인간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생철학의 선구격인 쇼펜하우어의 '삶에의 의지'나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이러한 맥락에서 주장된 것들이다.
생철학에서는 어떤 대상을 인식하는 것은 그 대상에만 고유한 생의 파동을 포착하는 것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이른바 대상 세계란 고정치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로 엉켜 있는 살아 있는 유기체이므로 살아 있는 생명 그것을 인식하는 방법은 분석이 아닌 직관에 의해서이다 직관은 분석의 방법에 대립된다. 분석은 대상을 그 바깥에서 분할하고 고정시켜 파악하고자 하는 데 반해, 직관의 방법은 대상의 속으로 들어가서 그 대상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내부적인 것과 합일하는 정신적 공감의 방법이다. 이때 생철학이 강조하는 직관이란 플라톤, 데카르트류의 예지적 직관과도 다르고 칸트의 감각적 지각으로서의 직관도 아니다. 그것은 지정의를 총망라하여 대상를 향해 있는 인식 주관과 주관을 향해 있는 대상이 전적이고도 일시적으로 합일하는 것으로서 마치 예술가의 직관과도 같은 것이다.
@p215
그러나 생철학도 하나의 학이다. 직관을 강조하는 베르그송의 철학은 그런 점에서 생에 대한 학적 인식이기엔 오히려 세계의 근원을 생성과 운동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형이상학에 가깝다. 생동하고 유동하는 생을 참의 실상으로 상정하면서도 이것을 좀더 이론적으로 학적으로 파악하는 길은 없을까? 그러한 시도를 우리는 독일의 딜타이에게서 발견한다.
딜타이(W. Bilthey)에 의하면 살아 움직이는 것 즉 생에 대한 인식은 오로지 '체험'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 체험이란 생을 직접 파악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생은 항상 스스로를 외적으로 '표현'한다. 따라서 체험이 생의 내적 계기라면 표현은 생의 외적 계기이다. 딜타이는 이 외적 표현에 대한 파악을 '이해'라고 한다 그런데 주로 몸짓, 표정 등에 대한 '이해'는 아직 학적 인식 수준의 것이라 말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생을 표현하되 우리 앞에 학적 인식이 가능한 어느 정도 고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주어진 것은 없을까?딜타이가 그러한 것들로 주목하는 것이 곧 역사, 예술 작품, 풍속, 제도등과 같은 것들이다. 즉 예술, 역사 등 그러한 것들은 살아 있는 생의 내용을 담고 있되 고정적이고 지속적인 파악을 가능케 해 주는 통로이다. 예컨대 악보 같은 경우 살아 생동하는 고유의 감동과 선율을 담고 있되 그것은 언제라도 그것을 반복적으로 접하게 할 수 있게 해 준다 따라서 딜타이는 살아 있는 생의 내용을 파악하되 보다 학적으로 파악해 들어가기 위해 그러한 지속적인 표현들에 대한 이해에 주목한다. 딜타이는 이러한 '지속적 표현에 대한 학적인 파악'을 '해석'이라고 한다. 이른바 딜타이의 해석학(Hermeneutik)이란 생에 대한 그러한 학적인 접근 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결국 생의 체험은 표현에서 한층 깊어지고, 이해 내지 해석을 통해 더 깊은 생의 체험이 된다 이와 같이 생의 내용이 체험, 표현, 이해 내지 해석에서 더 풍부해지는 것을 딜타이는 원환 운동이라고 한다. 즉 인간은 이러한 원환 운동을 통해 인간다운 삶의 깊이를 이루어 가는 존재이며, 해석학은 생동하는 인간 삶의 총체적, 내적 연관을 해명해 주는 학문적 노력이다.
@p216
2. 불확정성 원리와 실용주의
인식은 보통 인간의 행동이나 실천과는 다른 정신 작용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런데 인식과 행동을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의 대표적인 것이 조작주의와 실용주의다. 조작주의의 핵심적인 주장은 어떤 개념 인식은 그것이 얻어지는 구체적 행동과 떼어서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의 물리학자 브리지먼(p. Bridgeman)은 현대 과학의 실험적 방법에서는 행위 주체의 능동적 행동 즉 조작을 통해서만 인식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조작(operation)이란 원래 활동 작업, 운전, 수술, 작전, 실험 등을 의미하지만, 여기에서는 그저 바라보고 명상한다는 뜻을 가진 테오리아(theoria)와 반대로 과학에서의 실험에서와 같이 대상에 계획적, 기술적으로 간섭하여 이것을 변화시키는 과학적 조치를 가리킨다.
이러한 조작주의는 하이젠베르크(W. Heisenberg)의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뒷받침된다. 불확정성 원리는 대상 자체에 대한 확정적인 인식이란 인식 행위로서, 조작 과정이 필연적으로 개입하는 한 불가능함을 일깨워 준다. 예를 들어 미시 현상인 전자의 속도를 관찰하려면 빛이라는 에너지를 가하는 등 일정한 조작을 대상에 가해야 하는데. 일정한 한도를 넘어서면 그 조작이 이미 전자의 속도에 영향을 미치므로 전자 속도에 대한 실험적 관찰지는 다만 개연적 일 뿐 확정 지을 수 없다. 그렇다고 빛을 가하지 않으면 관찰 자체가 불가능하다. 과학적 지식이 실험을 기반으로 하는 한, 조작주의의 관점은 과학적 지식의 본질과 한계에 대한 의미 있는 시사를 던져 준다. 실용주의도 진리가 유용성 즉 행동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주장한다 여기서 유용성이란 실제적인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가령 어떤 관념이 참인가 거짓인가는 그 관념을 바탕으로 한 예측이 행위를 통한 검증 즉 실험에 의해 들어맞는가 아닌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고, 그 예측이 삶의 문제 해결과 관련된 것인 한 그 결정은 삶의 유용성과 직결된다는 것이다. 듀이(J. Dewey)는 생이 탐구의 연속이라고 주장하면서, 탐구는 다섯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불확정적 상황, 가설의 설정, 추리, 실험, 확정된 상황이 그 다섯 단계이다. 듀이의 탐구 이론에 따르면 앎이란 주관이 객관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앎이란 이 길을 택하면 좋은 결과에 이를 것이라 예상하고 그 길을 실제로 택하여 예상된 결과를 확보하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달리 말해 불확정한 상황 즉 문제 상황에서 확정된 상황 즉 문제 해결 상황으로 전환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안다는 것은 머리 속에서 이리저리 궁리하는 것이 아니라 소망된 미래 내지 문제 상황의 해결을 가져다 주는 실천적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실용주의적, 탐구는 곧 실험적 시도인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실용주의는 미국에서 생겨난 사상이다. 신대륙에 처음 도착한 최초의 미국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의 터전을 확보하는 것이었고 그러한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미지의 땅뿐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그러한 것들에 직면하여 생존을 위해 몸소 부딪치고 해결하고 개척해 나가야만 했다. 이런 점에서 실용주의적 사고 방식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삶의 문제 해결을 위해 몸소 몸으로 행동으로 부딪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초기 미국인의 개척 정신에서 연원한 것이라 하겠다.
한전숙, 손동현, 이정호 지음, "철학개론", 한국방송통신대 출판부 1987, 참고.
@p217
연습문제
1. 삶, 지식, 진리
1) 참된 지식 이 필요한 이 유는?
2)인식론의 기본 문제 의식은?
3)진리가 나타나는 형식적인 장소는?
2. 대응설
1) 대응설의 기본 주장은?
2)감각적 모사설의 한계는?
3) 이성적 모사설이 란?
3. 정찰설
1) 정 합설의 의미는?
2) 정합설은 왜 보편성을 보장할까?
3) 정 합설의 문제점은?
@p217
4. 비판적 보완
1) 정합설이 대응설적 기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근거는?
2) 기하학적 진리의 근거는?
3) 개별적 감각지가 일반지로 성립하는 근거는?
4) 귀납법 이란?
5) 귀납적 비약이란?
6) 자연의 제일성이란?
7) 과학적 지식이 경험과 이론의 합작품인 이유는?
5. 종합: 과학적 지식의 성격
1) 과학적 지식 이 개연적 이 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2) 과학적 지식이 체계성을 갖는 이유는?
3) 과학적 지식이 발전한다는 것의 의미는?
6. 근세 인식론
1) 대응설과 정합설은 근세 인식론에서 어떻게 구체화되는가?
2) 합리론과 경험론의 장단점은?
3) 칸트 인식론의 과제는?
4) 칸트 인식론에서 감성, 오성의 역할은?
5) 칸트의 진리관을 구성설적 진리관이라고 하는 이유는?
참고문헌
1. 소광희, 이석윤, 김정선 지음, (철학의 제문제), 벽호, 1993.
우리 나라 철학 개설서 중 원론 중심으로 쓰여진 대표적인 책. 철학의 주요 주제들에 대한 해설에 원전 읽기 자료를 덧붙여 주제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를 도모한 정평 있는 철학개설서. 제 3 장과 제 8 장 참고.
2. 김여수지음, (진리의 문제), (사회과학의 철학), 민음사, 1980. pp.68-93
진리에 관한 이론적 문제들을 심도 있지만 어렵지 않게 잘 소개 정리한 글
@p219
3. 한전숙, 차인석 지음, (현대의 철학 1), 서울대출판부, 1982.
현대 철학의 기본적인 논점과 경향들이 잘 소개된 책으로서, 제2장이 본 장과 관련한 부분이다.
4.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엮음, (삶과 철학). 동녀, 1991
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소속 소장 연구자들이 철학의 대중화를 위해 철학의 주요 주제들을 실천적 관점에서 선정하고 기술한 책. 주제와 내용에 있어서 기존 철학 개설서의 상투적인 면을 걷어 냈다고 평가되는 책이다.
5. 철학문화연구소 엮음, (철학강의), 철학과 현실사, 1993.
강단에서 오랫동안 철학 강의에 종사해 온 철학 교수들이 학생들의 성향과 관심사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기술한 철학 개설서.
6. 포퍼 지음. (과학적 발견의 논리), 고려원, 1995.
반증주의의 제창을 통해 과학적 확실성과 관련한 새로운 과학 철학적 관점을 제시한 비판적 합리주의자 칼 포퍼의 저작을 번역한 책.
7. 쿤지음, (과학혁명의 구조). 동아출판사, 1989.
이른바 패러다임 이론을 제창하여 과학 이론을 바라보는 시각에 혁명적 전환을 가져다 준 쿤의 대표적 저작을 번역한 책.
8. 박정호, 양운덕, 조광제 엮음, (현대철학의 흐름), 동녘, 1996.
능력 있는 소장 철학자들이 현대의 주요 철학적 경향에 대해서 잘 정리하여 소개한 책. 특히 제1부와 제4부는 후설의 현상학에서 로티의 인식론적 행동주의에 이르기까지 대륙과 영미의 주요 인식론 사상을 요령 있게 정리 소개함으로써 개설서 수준 이상의 내용에 관심 있는 학생들에게 좋은 안내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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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IV 부 현실과 역사
제 1장 자본주의와 사회정의
1. 기본강의 자본주의의 새로운 전개--신 자유주의
(주제 토론)은 사회 정의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분배 원칙이 필요한지를 구제적으로 '상속' 문제를 통해 생각해 보는 장으로 삼았다. 상속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신자유주의 입장에 대한 분석을 통해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시장을 통한 분배가 어떤 내용인지, 그러한 분배가 자유주의에서 중시하는 기회의 평등을 실제로 보장하는지를 자례차례 분석해 본다. 그런 다응 공정한 정의란 실질적인 기회의 평등이 보장되는 것인데, 이를 위한 시포로서 국가 개입을 통한 역차별적인 분배를 주장하는 수정 자유주의의 입장을 살펴본다. 복지 정책의 원리적인 내용와 함께 그 구제적인 정잭 수단에 대하여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읽기 자료)는 현대인이 누리는 상품 소비의 자유에 대해 반성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하였다. 상품 소비의 자유가 과연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고, 타인으로부터 진정한 인정을 받게 하고, 사회 속에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는지를 평이하면서도 진지한 논의를 통해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p224
1. 문제제기
최근 IMF관리 체제를 거치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는 각 부문에서 구조 조정이란 이름 아래 전례가 없는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그 결과 나타난 현상 가운데 가장 우리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실업이 일상화된 일로서, 수많은 사람들이 '노동 시장의 유연성'을 위해 삶의 안정적인 기반이던 직장으로부터 내몰렸다. 이들 낙오자들은 노동 시장에서 이전보다 열악한 직장을 찾거나 일용 잡직으로 고용되고, 마침내는 거리를 떠도는 노숙자 신세가 되어야 했다 실업을 면한 사람들도 사정이 별반 나을 것이 없어서. 따뜻한 동료 관계보다는 살벌한 경쟁만이 존재하는 직장에서 오로지 금전적 보상을 위해 조직의 목표 달성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적대적 기업 합병이 일상사가 되고, 벤처 기업 창업과 주식 투자 열풍이 불어 순식간에 엄청난 부를 쌓은 사람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이렇듯 사회의 혼란스러운 변화가 지향하는 목표는 부문을 막론하고 조직의 효율성과 투명성을 높이는 것으로서, 이는 무한 경쟁의 엄혹한 세계 경제 환경에서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생존 전략으로 채택되었다. 이와 함께 바야흐로 우리 사회에도 본격적인 신자유주의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p225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이미 십여 년 전부터 전세계적으로 국가의 장벽을 허물며 세계화를 가속하고 있었다. 1990년대 들어 사회주의권이 해체되면서 미국과 서구 제국을 중심으로 하여 그 어떤 견제도 받지 않는 완벽한 자본주의 즉 신자유주의 체제가 구축되기 시작하였는데. 우리 사회도 금융 위기를 계기로 그 흐름의 한가운데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신자유주의란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완전히 새로운 형태가 아니라 오히려 초기의 자유 방임적 자본주의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을 일컫는다. 스미스(A. Smith)를 비롯한 고전 경제학자들은 자유 시장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개인들이 각자 사익을 추구하는 가운데 사회 전체의 이익도 증진케 하며, 사회의 생산성을 높이고, 자원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기막힌 만능 장치라는 굳은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고전 경제학자들은 정부가 할 일이라고는 국방과 치안을 책임지는 것일 뿐, 나머지 모든 일은 시장에 맡겨 저절로 최상의 결과가 얻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최소국가', '자유방임적 시장경제' 원칙을 세웠다.
그러나 그 이후의 자본주의 전개 과정에서 비약적인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고전경제학자들의 낙관적인 신념과는 달리 주기적인 불황, 공황으로 말미암은 자원의 막대한 낭비, 격심한 빈부 격차와 이로 인한 사회 불만의, 팽배, 사회주의 운동의 도전과 같은 자본주의 체제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부정적인 현상들이 나타났다. 이에 따라 자본주의 국가들은 노동자 계급의 불만을 덜어 주어 이들을 자본주의 체제 내에 묶어 두고자 갖가지 구빈 대책이나 사회 보장 제도와 같은 수정 자본주의적 정책을 채택하기 시작하여 현재에까지 이르렀다.
@p226
다시 상황은 반전되어 사회주의의 위협이 현저하게 사라진 오늘날, 자본주의 국가들은 '시장의 회복'과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통해 국가 경쟁력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사회적 약자를 위한 수정 자본주의적 정책들을 하나씩 폐기하고 있는 추세이다. 경쟁에서의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최선일 뿐, 가난은 궁극적으로 정부의 정책으로 구제할 수 없다는 주장이 사회 보장 정 척의 전통이 오래 된 서구 국가들에서도 힘을 얻고 있다. 이것이 수정 자본주의에 서 다시 원래의 자유 방임적 자본주의로 되돌아가려는 최근의 신자유주의의 득세 배경이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는 과연 새로운 시대의 희망치 원리가 될 수 있을까? 신자유주의는 사회 각 부문에서의 효율성 제고와 자유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과거 경험에서 보았듯이 새로운 희망의 원리가 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어쨌든 신자유주의는 원하든 원치 않든 이미 우리 삶의 구석구석을 규정하고 있는 강력한 힘이며, 미래의 삶에 대해서도 주어진 조건이자 토대로서 작용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나온 역사를 성찰하고 새로운 삶의 원리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이해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먼저 신자유주의는 분배와 관련해서 시장을 통한 분배를 인정할 뿐, 그 어떤 다른 정의의 원칙에 따른 분배나 이를 위한 국가의 개입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시장을 통한 분배가 과연 최선의 선택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문제점은 무엇이며. 어떠한 분배 원리가 확립되어야 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를 사회 정의의 확립이란 차원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확립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자유지상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자유는 철학적으로 고찰했을 때 전극적 자유로서 강제의 부재를 뜻한다.
소극적 자유의 의미, 그 긍정적 역할과 함께 부정적 측면에 대해서도 균형 잡힌 원리적 인식이 필요하다.
@p227
현대 사회의 자유는 한편으로 상품 소비의 자유로 이해할 때 그 풍부한 현실적 의미가 잘 드러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 소비에 관한 한 거의 무한대의 자유를 허용한다. 폭넓은 상품 소비가 개성 표현, 자유의 실제적인 향수를 위해 필요한 조건임에는 틀림없지만, 한편으로 자본에 의해 조장되고 부풀려지고 왜곡된 욕망의 표현이기도 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 나아가 시장이 인간을 소외시킨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2. 문제의 분석
2.1 분배 정의
우여 곡절은 있었지만,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인류의 줄기찬 노력은 역사의 뚜렷한 한 가지 주제를 이룬다.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정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일반적으로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최선으로 실현할 수 있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다시 인간다운 삶이란, 각자의 기본 생존권은 물론이고 여러 다양한 인간적인 욕구를 적극적으로 충족함으로써 자아실현의 기회를 보장받는 삶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이해했을 때, 사회 정의 문제에서 자아 실현을 위한 물질적 기초를 확보하는 문제, 말하자면 경제적 가치의 분배 문제가 핵심을 이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무엇보다 시장의 자유 경쟁을 중시했던 초기 자유 방임주의의 전통을 좇아 시장을 통한 분배를 주장한다. 각 경제 주체는 이기심의 본성에 따라 자율적 등가 교환 체계인 시장에서 각자의 이익을 위해 거래를 하고, 이 과정에서 각자가 생산성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각자에게 일정한 몫이 돌아가게 되는데, 이러한 분배야말로 가장 공정한 분배라는 것이다. 이처럼 시장에서 결정되는 생산성에 따라 분배하면 개인들 사이에 능력과 노력에 따라 소득의 차이가 발생하고 그 결과 자연히 빈부 격차가 벌어지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프리드만(M. Friedman)같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는 이런 소득 불평등을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열심히 노력하게 촉구하는 동기로, 그리고 경제 성장을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로 정당화하기도 한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이나 계층의 가난은 결국 각 개인이 자발적으로 근면 대신에 게으름을. 저축 대신에 낭비를 선택한 결과이거나. 아니면 선천적으로 타고난 능력과 자질, 천부적인 여건의 차이 때문이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빈곤은 정부로서도 별 뾰족한 대책이 없는 문제로서 단지 근면과 저축을 장려함으로써 시장을 통해서 많은 보상을 받게 유도할 뿐이다.
@p228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시장을 통한 소득 분배 이외에 그 어떤 인위적인 소득재분배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특히 현대 복지 국가의 특징인 폭넓은 사회 복지, 보장 제도의 형태로 사회적 약자를 위해 소득 재분배 정책을 펴는 것에 대해서는, 그러한 정책이 자유 시장의 질서를 교란하고 궁극적으로 부유한 개인들의 자유와 재산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반대한다. 가령 대표적인 신자유주의 이론가인 노직(R. Nozick)은 복지 정책의 수행을 위한 예산이 주로 누진세, 상속세, 직접세의 형태로 고소득자의 소득에서 충당되는데. 근로 소득에 대한세금은 엄밀히 말해 국가에 의한 일종의 강제 노동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시장을 통한 소득 분배만으로는 계층간 불평등. 절대 빈곤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이 지난 역사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이에 자유를 기본적인 가치로 삼되 평등의 요소를 도입하여 자유와 평등 간의 조화를 꾀함으로써, 이러한 부정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자유주의 진영 내의 또 다른 움직임에 의해 시도되었다.
평등주의적 자유주의, 수정 자유주의로 불리는 이러한 움직임은 바람직한 사회. 정의로운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소득재분배에 개입할 것을 주장한다. 왜냐 하면 시장을 통한 분배만으로는 정의로운 사회의 조건인 기회의 평등이 실질적으로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시장에서의 자유 경쟁의 결과 빈부 격차가 생겨나고. 빈부 격차는 사실상 기회의 불평등을 초래하며, 기회의 불평등으로 인해 다시 빈부 격차가 심화되는 악순환은 자본주의의 부정 할 수 없는 현실이 라는 것이다.
@p229
수정 자유주의가 제안하는 국가의 소득 재분배 정책은 앞서 말한 광범한 사회 복지, 보장정책이다. 대표적인 수정 자유주의 이론가인 롤즈(J. Rawls)는 (정의론)에서 빈민, 장애인, 노령자, 소수 집단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역차별적인 분배 정책을 취함으로써('최소 수혜자 최대 이익의 원칙' )실질적인 기회의 평등을 이룩할 것을 주장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사회적으로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기본적인 의료와 생계를 보장하고, 완전한 무상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소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평등하게 보장하는 것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러한 정책을 수행하는 국가를 복지 국가라 부르며, 복지 국가의 역할은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최소 국가에 비해 크게 증대되기 때문에 최대 국가라 부르기도 한다.
국가의 개입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점과 더불어, 신자유주의는 또한 관료제의 부패와 무능, 낭비를 들어 국가가 복지 정책을 펴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정부의 실패'라고 부르는 이러한 현상으로 인한 사회적 총손실은 정부 개입으로 인한 사회적 이 익을 크게 웃돌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무한 경쟁의 세계 경제 환경에서 국가 경쟁력 강화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국가 개입을 둘러싼 논쟁에서 신자유주의가 힘을 얻고 있는 추세이다. 신자유주의는 과거 사회 복지 체제를 완벽하게 구비했던 국가일수록 사회 전체적인 비능률, 비효율이 누적되어 국가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가령 실업자에게 일과 연금을 연계시킴으로써 일하지 않는 자는 먹고살기 힘들도록 하는 '생산적 복지'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실업 문제의 본질은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현실에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생산적 복지 못지 않게 '인간적 복지'가 필요하다는 점, 국가 경쟁력 강화란 논리 자체가 과거 분배 문제를 등한시했던 성장주의 논리의 연장이라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다운 삶의 보장, 자아 실현을 위한 물질적인 조건이 사회 구성원들에게 고루 보장되지 않는 사회가 과연 정의로운 사회일 수 있겠는가 라는 물음이
끊임없이 되물어져야 한다.
@p230
2.2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철학적으로 자유주의는 자유를 인간사회의 최고 가치로 삼는 입장이다. 자유가 제일 중요한 사회 조직 원리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유주의에 따르면 그것은 먼저 자유 원리가 개인이나 집단들의 서로 다른 가치관을 다 함께 인정함으로써 그들 사이에 평화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가치의 다원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정신인데, 이는 민주주의의 필수 조건이 된다. 두 번째는 다를 어떤 원리보다 자유 윈리가 개인의 성장은 물론 전반적인 사회 발전을 이룩하는 데 가장 성공적이었다는 경험상의 이유이다. 나아가 자유주의는 자유가 만인에게 평등하게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칸트(I. Kant)적인 생각에 의거하여 제시한다. 말하자면 개인마다 능력과 소질이 다 다르지만 누구나 사람으로서 자아를 갖는다는 사실은 누구나 평등한 자유를 인정받아 자아 실현의 기회를 누릴 수 있어야 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란 도대체 무엇일까? 가장 일반적인 한 가지 정의에 따르면 자유는 강제의 부재이다. 강제란 타인이 다른 사람에게 특정한 방식으로 행위하지 못하도록 혹은 그런 방식으로 행위하도록 힘을 행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강제가 없다면. 소극적 의미에서 우리는 자유롭다. 가령 낯선 지방을 두루 여행하고 싶은데 거주지를 벗어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떠날 수 없다면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공개적으로 동성애 관계로 살기 원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실정법에 의해 기소당한다면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소극적 자유는 장애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이다. 영국의 자유주의 사상가 밀(J. S. Mill)은 (자유론)에서 개인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그 어떤 개입으로부터도 벗어나 자신의 삶을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자신이 선택한 방식으로 조직할 수 있도록 허용되어야 한다는 자유주의의 근본 원리를 확정했다. 밀의 원리에서, 자유는 바로 소극적 자유를 뜻한다.
자유는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생활의 영역에서 무수한 항목으로 존재하는 데, 국가의 개인에 대한 주제넘은 간섭을 반대하는 소극적 자유의 보장이 사회의 진보를 가져온 측면이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초기 자본주의 단계에서 소극적 자유가 자유주의의 토대가 된 것도 봉건적 잔재와 민간 부문에 대한절대주의 국가의 끊임없는 간섭이 사회 진보에 대한 일차적인 장벽이라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수세기에 걸친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인간의 정치적 권리는 확대되고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하였으며. 사생활의 보장은 개인들의 삶을 훨씬 편안하고 여유롭게 만들었다.
@p231
그러나 자본주의의 역사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회적 갈등과 병폐도 생겨났으며, 그 때문에 소극적 자유의 원리를 재검토하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극심한 빈부 격차가 말해 주듯이, 만인이 법에 의해 보장받는 평등한 자유는 다만 형식적 자유일 뿐. 그 자체로 누구나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기회와 자원을 갖는다는 것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는 것은 앞 절에서 살펴본 대로다. 게다가 자본주의 사회의 진보를 가능케 했던 것이 반드시 소극적 자유의 보장 때문이었다는 증거도 없다. 한편 사람들이 누구나 자신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 자유를 적절히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소극적 자유 원리에 대한 심각한 문제 제기가 된다. 가령 알콜 중독자가 판단력을 잃고 충동에 지배되어 자신의 돈을 술 마시는 일에 탕진한다면 이를 진정한 자유의 행사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소극적 자유의 원리에 따른다면. 이처럼 어떤 사람이 시종일관 어리석은 삶을 선택하여 자신의 재능을 허비하거나. 타인에게 직접 해를 끼치지는 않더라도 자신의 자유를 공동체적 유대에 손상을 주는 방향으로 행
사한다 해도 그를 설득할 수 있을 뿐 그 누구도 더 나은 삶의 방식을 강제할 수 없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자유는 그 자체 목적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위한 수단이며,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는 스스로 삶을 통제할 수 있는 자율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p232
인간다운 삶을 위한 물질적 자원과 자율의 능력이 갖추어졌을 때 소극적 자유에 대비해 적극적 자유(freedom to)가 실현되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는 자유 방임주의의 전통에 충실하여 소극적 자유만을 인정할 뿐 적극적 자유에로 자유의 개념을 확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적극 반대한다. 그 이유로 국가의 개입이 시장 질서를 교란하고 개인의 정당한 사유 재산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점과 더불어, 적극적 자유를 추구할 경우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국가나 타인이 개인에 대해 부당하게 간섭하여 '보다 나은 삶'을 강요하게 되고, 그 결과 불가피하게 억압과 강제가 발생하기 때문이 라는 점이 제시된다.
사회가 적극적 자유를 추구하게 되면 자칫 한 걸음 더 나아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는 종종 현실로 나타나기도 했다는 점에서 소극적자유의 원리는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앞에서 지적했듯이 사람들이 항상 자유를 바람직하게 사용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과 함께, 자유가 궁극적으로 왜 허용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인간다운 삶의 실현과 관련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2.3 시장과 인간의 소외
상품 소비의 자유에 관한 한 그 어떤 체제도 시장 경제에 비교할 수 없다. 자본주의 시장은 상상을 넘어서는 갖가지 상품을 전시하여 소비자를 유혹한다. 소비자는 마음껏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개성을 표현하고 자유를 누린다. 상점에 넘쳐나는 상품들은 현대 사회의 소비자들에게는 자아 실현의 물질적 조건이다. 그렇지만 상품 소비의 자유는 구매력이 있는 소비자들만 누릴 수 있다. 현대인에게 자유와 개성이 중요한 만큼 시장 경제의 발달과 더불어 금전 만능의 세태가 더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시장의 원동력을 이루는 금전적 사익 추구의 동기는 사람의 의식과 태도를 변화시켜 이기심을 북돋우고 탐욕스럽게 만들며, 가능한 모든 것을 돈벌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게끔 조장하는 측면이 있다. 심지어 투표권, 명예, 양심, 사랑, 사람의 장기 등과 같이 사람들이 돈과 결부지어 생각하기 매우 싫어하는 것들조차 은연중에 또는 공공연하게 거래되는 것을 본다.
상품 소비를 통해 충족시키는 욕망이 모두 인간다운 삶을 누리고 자아를 실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는 모든 사람들의 욕망을 절대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전제하며 . 정해진 가격을 지불하는 한 최대한 충족시켜야 할 대상으로 간주할 뿐, 그 이유나 옳고 그름은 따지지 않는다. 따라서 우유가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소비되든, 미용 목욕을 위해 소비되든 상관없이 동일한 욕망으로 간주된다. 경제학에서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달성하는 것을 효율적이라 하는데, 시장 경제의 효율성에는 이처럼 인간다운 삶을 위한 참된 욕망에 대한가치 판단이 빠져 있다.
@p233
물론 욕망을 언제나 참된 욕망과 거짓된 욕망으로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신자유주의에 따르면 오히려 이러한 구분 자체가 개인의 소극적 자유에 대한 침해이며, 각자가 자신의 삶에 대해서 가장 훌륭한 판단자라고 하는 자유주의의 신념에 저촉된다. 하지만 이윤 증식을 위해 늘 새로운 상품시장을 개척하고 또 이를 위해 인간의 욕망을 창출하고 조장하는 일이 다반사가 되어 버린 오늘날, 현대인의 상품 소비 욕망에 대해 무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면 인간다운 삶을 실현하기 위한 노정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다.
한편 시장 경제는 그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 인간의 소외라고 하는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노동자가 겪는 소외에 대해서는 일찍이 마르크스(K. Marx)가 분석한 적이 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원래 노동이란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표현하는 행위로서 즐거움의 원천이며, 사람이란 노동을 함으로써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고, 나아가서 삶의 보람과 행복을 느끼게 되어 있다. 물론 보람과 행복을 주는 노동을 통해 자유로움을 누린다는 것은 인간이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노동을 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서의 이야기다. 그런데 시장 경제 아래서 노동자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억지로 하는 노동을 하며, 남에 의해서 강제된 노동을 하며, 기계적이고 재미없는 단순 반복 노동을 하게 됨으로써 노동에서 자유로움과 보람을 맛볼 수가 없다. 그림으로써 나아가 노동자는 자신의 인간적 본질로부터 멀어지고, 동료 노동자나 자본가에 대해서도 인간적 유대감 대신에 경쟁심과 적대감만 갖게 된다고 한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현상들을 모두 소외(Entfremdung)라고 불렀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장 사회에서 겪게 되는 소외로 인해 인간의 본래적인 공동체적 본질을 실현할 길이 없게 되자, 욕망이 왜곡되어 화폐에 대한 강한 추구가 생겨나고, 이로 인해 사회 전체에 화폐의 물신성이 만연하게 된다고 한다. 전통 사회의 사람들 사이의 인격적 관계는 시장 사회에서 상품들 사이의 양적 관계로 바뀌게 되는데, 이러한 양적 관계를 표현하는 수단이 바로 화폐이다. 자본주의 시장 관계가 사회를 전면적으로 지배하게 되면서 시장이 인간의 의지를 떠나 고유한 법칙에 따라 움직이게 되고, 상품 또한 마치 생명력을 지닌 독자적 존재인 양 취급되며, 화폐는 인간의 온갖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전능한 존재로서 숭배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신이 만든 시장, 상품, 화폐에 의해 오히려 지배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마르크스는 이러한 현상을 물신성이라 불렀다 물신성은 시장 경제 사회에서 인간이 격는 소외를 극적으로 표현해 주는 개념이다.
@p234
3. 종합적 고찰
현실 사회주의권이 해체된 마당에 당분간은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계속 힘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시장 경제 원리는 복음이 되어 세계 전역에 전파되어 자본주의 국가들의 각종 보호주의의 장벽을 무너뜨리는가 하면, 사회주의 국가에서조차 시장 경제에 대한 학습의 열기를 드높이고 있다. 시장 원리는 과연 새로운 시대의 희망의 원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자본주의 시장 사회가 효율성을 높임으로써 인간의 자아 실현에 유리한 물질적 기초를 마련했고, 개인들에게 폭넓은 자유를 허용함으로써 역사상 최초로 시민 사회를 가능케 하였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공적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시장의 자유 경쟁과 효율성, 투명성의 원리가 사회 구석구석에서 비능률과 부패, 억압의 요소를 몰아 냄으로써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할 여지가 여전히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도 인정하지만 시장 체제가 인간에게 소중한 가치들을 두루 실현시켜 주는 최선의 제도가 아니란 점을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사회 정의를 위한 평등한 기회의 실질적인 보장, 공동체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자기 실현을 위해 자유를 적절히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의 함양, 배금주의와 인간의 소외 극복은 자유 경쟁을 핵심으로 하는 시장 사회에서 저절로 실현되지 않는다. 국가에 의한 복지 정책의 수행을 둘러싸고 신자유주의와 수정 자유주의 사이에 계속되는 밀고 당김의 역사가 말해 주듯이, 문제의 해결은 결국 시민 사회의 자각과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본주의 시장은 기본적으로 자본의 무한 증식이 이루어지는 장이라는 점 인식하는 것은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 이유는 시장사회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가능성과 더불어 한계 또한 이러한 자본의 증식 논리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성장주의는 기본적으로 자본의 증식이 방해받지 않고 순탄하게 이루어지는 한에서 분배를 비롯한 그 밖의 사회 문제가 부차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만약 분배정의와 인간다운 삶의 실현, 소외의 극복과 같은 과제의 우선적인 해결을 요구한다면, 무엇보다 자본의 논리를 제어할 수 있는 사회적 연대와 합의를 창출해야 할 것이다. 비록 현대인은 개개인으로서는 물결을 거스를 수 없는 물방울과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더라도, 강건한 사회적 연대를 이를 경우 문제해결을 위한 거대한 일보를 내디딜 수 있다.
@p235
결국 인간은 공동체적인 존재로서 서로의 발전을 위해 관계 맺고 인간다운 삶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평등하게 누리는 삶의 양식을 찾아 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2. 주제 토론: 분배와 사회 정의
1. 토론 과제
아래의 글은 시장 경제 사회에 존재하는 경제적 불평등에 대안 신자유주의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이 글을 읽고 경제적 불평등과 관련한 신자유주의의 입장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에 대해 사죄 정의의 관점에서 비판하고, 이와 함께 사회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에 대해 토론해 보자.
대체로 보면, 개인의 천부적 능력의 차이로 인한 소득 불평등이나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른 부의 불평등은 사회적 용인도가 높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상속으로 인한 불평등에 대해서는 사회적 거부감이 매우 크다. 그러나 철저하게 신자유주의적인 사고 방식에 따른다면, 상속으로 인한 불평등만 문제삼을 이유가 없다. 엄밀히 말해서 상속으로 인한 불평등은 천부적 능력이나 자질의 차이로 인한 불평등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자녀에 대
한 교육 투자의 형태로 상속하는 것이나, 사업가로 훈련시켜 주어 상속하는 것, 또는 그냥 재산으로 상속하는 것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근검 절약으로 인한 부의 축적도 불평등을 초래하는데, 근검 절약의 자질도 사실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소득 불평등을 이유로 상속을 반대하는 것은 상속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신자유주의자는 강변한다.
@p236
설사 시장 경제 아래서 어느 정도의 소득 불평등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시장 메커니즘에 따른 분배는 소득 계층간의 자유로운 이동의 기회를 보장하기 때문에 그러한 불평등이 고착되지 않는다고 본다. 시장 경제 체제의 사회에 있어서는 가난한 집 자식들도 능력이 있고 열심히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부자가 될 수 있고, 또 반대로 부잣집 자식들이라도 못나고 게으르면 어느 새 거지 신세가 된다. 오히려 시장 경제에 의존하지 않는 사회가 사회 계층의 고정화 경향을 보인다고 신자유주의자는 말한다.
물론 그렇다고 신자유주의가 모든 빈부 격차를 이런 식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시장에서의 자유스런 경쟁을 통해서 결정되지 않는 소득, 비경제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소득, 바로 이런 종류의 소득이 현실적으로 관측되는 빈부격차의 큰 원인이며 따라서, 이러한 소득으로 인한 소득 불평등이 신자유주의가 문제삼는 소득 불평등이다. 왜냐 하면 그러한 소득 불평등이야말로 각 개인들로 하여금 합리적으로 결정하고 선택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들 탓으로 초래되는 소득 불평등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인들은 시장 경제 체제의 원활한 작동을 방해함으로써 각 개인으로 하여금 능력이나 부존 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지 못하게 한다. 그 한 예가 우리 주위에 광범하게 존재하는 각종 독점적 요인들이다 독점적 요인들은 시장에서의 자유 경쟁을 가로막음으로써 결과적으로 특정인에게 특혜가 돌아가게 한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자주 문제삼으면서 강력하게 시정을 요구하는 독점적 요인은 정부의 각종 특혜와 인, 허가로 인한 독점적 요인들이다.
2. 기본 논증과 비판
2.1 신자유주의의 분배관
그리 생활이 넉넉하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한테 돈을 얼마나 버느냐는 문제만큼 중요한 관심사는 별로 없을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상점마다 마음을 끄는 상품들로 넘쳐나는 현대 사회에서 각자의 구매력은 소득에 의해 결정된다. 좀 심하게 말하면 현대 사회에서는 결혼과 가족 계획, 취미 생활, 삶의 보람의 추구와 같은 인생의 중대사들도 소득의 크기에 따라 조절될 수밖에 없는 종속 변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봉급 생활자든 자영업자든 각자의 소득의 크기는 어떻게 결정되는 것일까? 고용주의 선심에 의존하는 것도, 혹은 순전히 운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며, 궁극적으로 메커니즘에 의해 결정된다는데, 봉급 생활자의 노동력이라고 하는 상품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자영업자의 사업의 성패 여부도 그 상품이 무엇이든 가격이나 품질 면에서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이 사실을 달리 표현해서 자본주의 시장 사회에서는 각자 타고난 능력과 노력 여하에 따라 소득의 크기가 결정된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처럼 타고난 능력과 노력 여하에 따라 생겨나는 소득 불평등에 대해서는 대체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p237
그런데 상속의 경우는 어떨까? 상속에 대해서는 사회적인 거부감이 큰 편이지만, 제시문에 나와 있듯이 신자유주의자들은 상속에 의한 부의 불평등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한다. 그 논거는 이렇다. 그냥 재산의 형태로 상속하는 것처럼, 자녀를 교육시켜 능력을 키워 주시는 것이나 훌륭한 사업가의 자질을 길러 주는 것도 모두 본질상 동일한 다른 형태들이다. 만약 재산 형태로 상속하는 것이 문제된다면 다른 두 형태의 상속도 문제되어야 하는데, 다른 두 형태의 상속이 문제되지 않으므로 재산 형태의 상속도 문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이다.
한 발 양보해서 신자유주의의 이러한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논의의 초점은 과연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불평등이 굳어지는 경향이 있는가의 여부로 옮겨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설사 상속(이나 그 박의 요인)에 의해 부의 불평등이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해도 사회의 계층 이동이 자유롭다면, 그것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에 따르면 시장은 누구에게나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기 때문에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계층 이동의 길이 열려 있으며, 따라서 부의 불평등이 고착되지 않는다. 이제 기회의 평등이 신자유주의 논의에서 핵심이 된다.
신자유주의에서 기회의 평등은 부의 불평등을 고착시키지 않는다는 이유를 넘어서 그 자체 가장 공정한 규칙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신자유주의에서 시장을 통한 분배만을 정당한 분배로 인정하는 것도 그러한 분배가 평등한 기회에 바탕한 자유 경쟁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각종 개입, 특히 정부의 각종 인,허가로 인한 독점적인 요인은 시장의 자유 경쟁을 가로막음으로써 결과적으로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보아 신자유주의는 강하게 반대하며, 이로 인한 소득 불평등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문제삼는다.
@p238
이에 따라 소득 격차에 대해 신자유주의가 내놓은 대책은, 첫째는 시장에서 불완전 경쟁의 요인을 제거하는 것이고, 둘째는 각 개인으로 하여금 시장에 적극 참여해서 시장을 통해서 많은 대가를 받도록 해 주는 것이다. 결국 시장이 유일하고도 바람직한 해결책이다.
2.2 신자유주의의 분배관 비판
그렇다면 현실의 시장 사회는 과연 기회의 평등이 보장되는 사회일까? 그보다 먼저 신자유주의에서 말하는 기회의 평등은 어떤 것일까?
가령 생명체의 유전자에 대해 깊이 연구하여 유전 공학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과학자가 되고 싶다거나, 멋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므로 의상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혹은 주식 투자를 하여 많은 돈을 벌고 싶다는 것처럼, 우리는 저마다 다양한 바람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노력하여 과학자가 되고, 디자이너가 되고, 혹은 부자가 되겠다고 하는데, 사회에서 이를 막는 규정은 없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당신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도 좋다"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에서 말하는 기회의 평등이다. 따라서 기회의 평등은 우리가 하는 일을 사회가 막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소극적 자유를 보장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럼 우리는 누구나 과학자가 되고, 디자이너가 되고, 부자가 될 수 있는가? 물론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원칙적으로는 나에게 타고난 능력이 있고 열심히 노력한다면 그렇게 될 수 있지만, 한편으로 능력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나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을 경제적 능력이 없고, 주식 투자를 할 자금이 없다면 실제로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누가 나를 막지 않는다는 것(소극적 자유)과 실제로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적극적 자유)은 별개의 문제다.
타고난 능력이 없는데다가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바라는 것만 많은 사람은 누구에게나 비웃음을 살 뿐이다. 하지만 기본적인 능력이 있으며 성실한데도 주어진 여건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는 경우에도 평등한 기회가 보장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p239
우리는 살아가면서 도중에 병에 걸려 꿈을 접어야 하는 일이 없고 자신의 꿈을 이루는 데 필요한 만큼 충분히 배울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은 한번 살아 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이 두 조건 위에서 최선을 다해 산다면 나중에 결과야 어떻게 되건 인생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무상 교육과 완전한 의료 보장이 사회 보장,복지 제도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도 이처럼 '실질적인' 기회 평등을 보장하여 모든 사람들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시장 사회는 각자의 경쟁적인 이익 추구를 보장한다. 그런데 시장에서의 자유 경쟁은 이처럼 실질적인 기회 평등이 보장될 때만 의미가 있다.
이제 앞서 이야기한 상속을 다시 생각해 보자. 상속은 평등한 기회의 보장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것은 100 미터 달리기 시합에 비유하자면, 모든 선수들이 똑같이 출발선상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선수는 이미 저만큼 앞서 나간 상태에서 시합을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자녀를 교육시키고 사업가의 자질을 훈련시켜 주는 일이 부모에 의해 개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누구나 능력과 노력 여하에 따라 최고 과정까지 교육받을 수 있는 공교육 제도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상속의 불공정성은 보다 분명해진다.
비단 상속만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에서 말하는 기회의 평등은 실질적인 기회의 평등이 아니라 형식적인 기회의 평등에 불과하다. 더욱이 시장은 경쟁의 결과 부의 불평등이 불가피하게 생겨나며, 부의 불평등은 다시 이처럼 기회의 불평등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기회의 평등을 공정한 정의의 기준으로 삼는 자유주의의 전통에서 보더라도 신자유주의가 말하는 시장을 통한 평등한 기회의 보장이라는 원칙은 수정 내지 보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p240
2.3 사회 정의를 위한 모색
사회 성원들에게 실질적으로 평등한 기회가 보장될 때, 공정하다고 할 수 있으며 사회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의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롤즈의 이론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롤즈는 정의는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문제로서, 바람직한 사회 구조와 제도 속에 구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사회 성원 모두에게 실질저인 기회 평등을 보장하여 최선으로 자아 실현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는 것이다.
롤즈는 정의로운 사회의 원칙을 제시하였는데, 그것은 평등한 자유의 원칙과 차등의 원칙이다. 정의의 원칙으로서 전자가 후자에 비해 우선하기는 하지만, 전자는 모든 자유주의자들에게 공통된 신념을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차등의 원칙이다. 차등의 원칙은 다시 기회 균등의 원칙과 최소 수혜자 최대 이익의 원칙으로 나누어지는데, 전자는 후자에 우선한다. 최소 수혜자란 사회적으로 가장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 가령 빈민, 실업자, 장애인, 노령자, 소수 민족 등을 말하는데,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기 힘든 이들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의 이익이 돌아가도록 역차별적인 분배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최소 수혜자 최대 이익의 원칙이 뜻하는 내용이다. 이때 역차별적인 분배의 구체적인 방법은 핵심적으로 무상 교육 및 완전한 의료 보장과 각종 연금을 통한 생계 지원 등으로서, 사회적으로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생존을 보장하고 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기회 평등을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때 주의할 것은 롤즈가 제시하는 실질적인 기회 균등의 방법은 사회주의적인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회적으로 일률적인 분배를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기회의 평등을 보장함으로써 공정한 경쟁의 조건을 마련하려는 것이며, 결과적인 불평등은 개인의 능력과 노력 여하에 의한 것이므로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롤즈의 전략은 정당화될 수 있는 불평등(혹은 차등)만을 인정함으로써 최대한을 달성하여 바람직한 사회의 기본 구조와 제도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다.
롤즈는 대표적인 수정 자유주의 이론가이다. 수정 자유주의는 경제적 불평등에 시장은 책임이 없다는 신자유주의의 주장과는 달리, 자본주의 시장 자체에 일정한 문제가 있어 경제적 불평등이 생겨났으며, 시장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으므로 국가의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때 국가의 개입은 고율의 상속세, 누진세, 직접세의 형태로 세원을 확보하여 광범한 사회 보장,복지 제도를 시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되면 국가의 업무는 확대되어 '하는 일이 많을수록 좋은' 최대 국가가 된다.
@p241
읽기자료: 3.자유와 소비
1.상품 소비가 주는 자유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상상을 넘어서는 갖가지 종류의 상품을 진열해 놓고 선택과 소비의 자유를 만끽하도록 나를 부추긴다. 신문을 펼치거나 텔레비전을 켜면 온갖 현란한 광고가 나를 유혹한다. 나는 애써 탐구할 것도 없이 그저 유혹에 넘어가기만 하면 된다. 사회가 거부하는 것을 억지로 실현시키려 애쓰기보다는, 사회가 제공하는 것 중에서 원하는 대로 골라 마음껏 소비함으로써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제 남은 일은 돈을 확보하는 일뿐이다. 돈은 기적과도 같이 자유와 행복을 가져다 주고, 나의 삶에 방향을 제시한다. "돈을 벌자, 악착같이 벌자!" 그렇다면 돈은 숭배 받아 마땅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흔히 겉으로는 현대의 배금주의를 경멸하고 비난하지만, 속으로는 앞다투어 돈을 소중히 여기며 산다. 그러나 돈이 제공하는 자유는 얼마나 믿을 만한 것일까? 상품 소비의 즐거움은 나의 자아 실현에 얼마만한 도움이 될까?
나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많은 물건들이 필요하다. 옷이 있어야 하고, 식량이 있어야 하고, 집이 입어야 한다. 나는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생필품에 얽매인다. 그러나 돈만 충분히 있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입던 옷이 아직 멀쩡해도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버릴 수 있다. 음식도 입맛에 안 맞으면 억지로 다 먹을 필요가 없다. 집도 차도 싫증이 나면 바꾸면 된다. 돈은 나에게 물건에 대한 처분과 선택의 권한을 부여한다. 나는 물건을 지배하면서 자유를 만끽한다. 그러나 물건에 대한 지배만으로 나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 완전히 충족될 수 있을까?
나는 살아가기 위하여 물건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도 관계를 맺어야 한다. 상품 소비가 나를 즐겁게 하는 것도 사실은 물건과의 관계보다 오히려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유로워졌기 때문일 가능성이 많다. 돈 주고 산 물건을, 나는 타인의 간섭을 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 이처럼 물건에 대한 나의 지배권은 동시에 타인을 배제하는 독점권을 의미한다. 나아가 상품 소비는 남의 눈치를 보며 남에게 주눅들어 있던 나에게 당당하게 자아를 실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기도 한다. 눈여겨봐 두었던 옷을 사 입는 다든지, 숙원이던 자가용을 장만한다든지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멋진 옷으로 나를 더욱 잘 과시할 수 있게 되었다","내 차를 몰고 내 마음대로 다닐 수 있게 되었다"는 등의 이유로 나는 즐거워한다. 나를 드러내고, 내가 해 내고, 내 마음대로 한다는 것 등은 모두 자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그러나 타인을 배제한 나만의 공간에서 누리는 자유는 방어적이며 소극적인 자유일 뿐이다. 타인과 관계 맺으며 그 속에서 나의 뜻을 관찰할 수 있어야 보다 적극적인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타인과의 관계를 꾸려 갈 수 있을까?
@p242
2. 타인의 인정을 통한 자아 실현
타인은 물건이 아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돈에 약하다 해도 돈에 의해 사람을 처분하고 선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설사 돈으로 타인을 굴복시켰다 하더라도 내가 얼마나 자유를 누릴 수 있겠는가? 상대방이 겉으로만 복종할 뿐 속으로는 나를 비웃을 수도 있다는데 생각이 미치면 나의 심기가 편할 리 없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유를 느끼는 것과 다르다. 물건은 지배해 버리면 타인은 지배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내 마음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오히려 타인들로부터 인정받고 사랑 받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돈은 내가 타인들의 인정을 획득하는 데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우리는 주관적인 의식 속에서 자아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나는 누구 못지 않게 훌륭하다", "나는 잘난 사람이다" 골백번 되뇌어도 나 스스로 믿을 수가 없다. 자아의 존재가 객관적으로 확인되어야 나는 자의식을 가진 인간으로써,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자유롭다. 자아가 객관적으로 확인되기 위해서는 우선 물증이 있어야 한다. 잘 꾸며진 나의 신체나 능숙한 말솜씨, 혹은 내가 이루어 낸 작품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물증을 타인들이 인정해 주어야 한다. 남들이 찬탄하거나 부러워하거나 하다 못해 질투라도 해 주어야 나는 비로소 자아를 확인하고 만족할 수 있다.
좋은 옷, 좋은 차를 마련하면 나는 스스로 타인이 되어 나를 바라본다. 내가 과거에 남의 좋은 옷, 좋은 차를 부러워했기 때문에, 이제 남도 나를 부러워하리라고 믿어 마지않는다. 그러나 만일 남이 "옷이 촌스럽다"거나 "차가 힘이 없다"고 악평을 한다면 나의 행복감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우선 악평한 타인을 증오하고, 이어서 옷과 차를 교체할 장기 계획에 착수할 것이다. 돈에 의한 상품소비는 자아의 속내용을 그대로 둔 채 겉모습만을 멋지기 포장함으로써 타인의 인정을 획득하려는 시도이다. 포장은 바라보는 시선을 전제한다. 포장이 성공했는지의 여부는 전적으로 타인의 여부에 달려 있다. 따라서 나는 타인의 인정을 구걸하는 신세가 되고, 타인의 인정 여부를 확신할 수 없어 항상 불안하게 된다. 타인들의 취향이 바뀌면 나는 불안한 마음에 얼른 나의 포장을 바꾼다. 또 다른 상품, 또 새로운 상품을 끝도 없이 쫓아가게 된다.
@p243
3. 상품 소비 사회에서의 자아 실현의 한계
상품 소비의 사회에서는 나도 타인도 모두 '시선'이 되어 서로의 겉모습만을 문제삼는 감각적 인간이 된다. 감각적인 인간은 세련되어 있고 예민하기 때문에 타인의 사소한 간섭에도 짜증을 낸다. 남의 사생활에 개입해 들어오는 것은 야만적인 일로서 용납될 수 없다. 감각적 인간들은 에티켓 문화를 형성하여 프라이버시 존중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다. 타인과의 만남은 서로 편하게 사무적으로 처리되고, 속마음은 결코 드러낼 필요가 없다. 서로서로 그저 상대방의 신체나 옷, 차, 집을 부러워해 주고, 상대방의 말솜씨에 감탄하며 때때로 까르르 웃어 주기만 하면 된다. 상품 소비의 사회에서 돈은 확실히 타인의 인정을 획득하는 데 위력을 발휘한다. 단, 인정을 갈망하는 나나 인정을 해 주는 타인이 모두 한갓 감각적인 시선에 머물러 있는 경우에만 돈은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자의식을 지닌 인간이 언제까지 이 정도의 인정에 만족할 것인가?
자아에 대한 의식이 발달해 가면 나는 나의 겉모습이 아니라 나의 내면을 인정받고 싶어진다. 나의 내면을 인정받고 싶어진다. 나의 내면이 그럴 듯한 내용을 가지고 타인을 감동시킬 때 비로소 타인으로부터 진정한 인정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자아의 내면을 실현하는 일은 돈의 위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나의 내면이 이미 상품이 되어 진열되어 있을 턱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소비에 의한 자유의 한계를 만나게 된다.
상품 사회에서는 이처럼 자아의 실현에 한계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사회에서나 가능할까? 그것은 아마도 서로를 진정으로 인정하고 나아가 서로의 체험을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 속에서일 것이다. 이 '체험을 공유하는 공동체'에서 비로소 개인들은 진정으로 행복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상품 사회 이전에는 '행복한 순간'이란 무엇보다도 축제의 시간이었다. 축제는 디오니소스 제전처럼 황홀경에 빠져들어 신과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종교적 집회일 수도 있고, 함박 웃음이 쏟아지는 춤과 노래의 놀이판일 수도 있다. 어떠한 경우이든 사람들은 축제에서 환희를 체험하고 또한 그 체험을 같이 나누었다. 행복이란 단순히 '즐거움을 맛봄'이 아니라 '즐거움을 같이 나눔'인 것이다.
@p244
그러나 이제 상품 사회에서 축제를 다시 열 수 없게 되었다. 공동체가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상품 사회의 개인주의는 다른 사람들과 공동으로 이용하는 것을 매우 귀찮게 여기게 만들고, 혼자서 가지고 있어야 참으로 즐길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을 낳는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간섭을 싫어하게 되고 나아가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귀찮고 부담스럽게 여기게 됨으로써 서로 고립된다. 이런 사회에서는 각자는 사람들 사이의 교류와 돈독한 유대 관계에서 생겨나는 즐거움을 느낄 기회와 멀어지면서 더욱더 물질이 주는 즐거움에 병적으로 집착하게 된다.
이훈 지음,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초록,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엮음, (삶과 철학), 동녘, 1996.
연습 문제
1. 문제의 제기
1) 최근에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가 득세하고 있는 상황이다. 신자유주의가 득세하게 된 일련의 역사적 배경은 무엇일까?
2)사회 정의에 대한 정의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각자 스스로사회 정의에 대한 정의를 내려 보고, 사회 정의 문제에서 분배 문제가 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2. 문제의 분석
1) 분배 정의와 관련하여 신자유주의가 시장을 통한 분배만을 정당하다고 인정하며 국가 개입을 통한 소득 재분배에 대해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p245
2) 수정 자유주의는 국가가 사회 보장, 복지 정책을 시행하여 소득 재분배를 이룩할 수 있다고 보는데, 이처림 수정 자유주의가 소득 재분배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분배 정의와 관련하여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
3) 신자유주의는 자유를 소극적 자유의 의미로 한정한다. 소극적 자유의 의미는 무엇이며, 신자유주의가 자유를 적극적 자유로 확대하지 않고 소극적 자유로 한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해 대답해 보자.
4) 반대로 수정 자유주의가 자유를 소극적 자유에 한정시키지 않고 적극적 자유로 확대하려는 이유는 무엇이며, 이때 적극적 자유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 대답해 보자.
5) 시장이 보장하는 상품 소비의 자유는 어떤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부정적 인 측면이 있는가?
6) 상품 소비의 자유는 소극적 자유의 표현에 가까운가, 적극적 자유의 표현에 가까운가?
7) 시장 경제 사회에서 인간 소외가 발생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3. 종합적 고찰
1) 자본주의 시장이 수행한(하는)역사 발전의 진보적인 측면은 무엇인가?
2) 시장 사회에서 인간적인 가치의 실현을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이 필요한지 에 대해 생각해 보자.
참고문헌
1. 황경식 지음, (사회정의의 철학적 기초), 문학과 지성사, 1985.
사회 정의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정리한 국내 대표적인 저작이다. 사회 정의에 대한 여러 철학적 입장에 대한 논의가 포함되어 있지만, 특히 수정자유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존 롤즈의 사회 정의론에 대한 체계적이고도 자세한 설명이 실려 있다.
2. 설헌영 지음, (정의와 평등).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엮음, (삶, 사회, 그리고 과학). 1991.
분배 정의와 관련하여 자유주의적 입장(본 강의의 구분에 따른다면 신자유주의적 입장)과 수정 자유주의의 입장,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을 잘 대비시키면서 정리한 논문이다. 분배 정의와 관련하여 본 교재에는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이 소개되어 있지 않은데, 이 논문을 참고하면 세 입장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p246
3. 이 훈 지음, (어떻게 살 것인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엮음. (삶과 철학), 1994
대학의 교양 철학 강의용으로 펴낸 7삶과 철학7의 서론 격으로 실린 글이다. 이 글 자체는 현대 사회에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삶에 대한 모색을 주제로 하여 쓰여졌지만 이 글 가운데서 (4절. 자유와 소비)가 본 강의와 연관되는 부분이 있어서 내용을 고치고 보태고 하여 (읽기 자료)에 실었다.
4. 김완진 등 공저. (공리주의, 개혁주의, 자유주의), 서울대 출판부, 1996.
공리주의, 개혁주의, 자유주의는 초기 자본주의의 발달사에서 영국을 중심으로 하여 자본주의를 철학적으로 뒷받침한 사상 조류들의 이름들이다. 자본주의의 각 발달 국면에서 어떠한 철학적 뒷받침이 있었는지, 자본주의의 현실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어떠한 철학적 문제 제기가 있었는지를 역사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이 책은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기본 관점에서 자유주의에 대한 도전과 비판에 대해 반론을 소개하고 있다.
5. 이정전 지음, (두 경제학의 이야기). 한길사, 1993
대학의 경제학 강의에서 주로 가르치는 주류 경제학과 정치 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두 큰 흐름을 그 이론 구조와 쟁점들을 중심으로 공정한 시각에서 대비시켜 서술한 책이다. 경제학 강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제학 이론의 철학적 배경, 사회적 의미 등을 풍부하게 포함하고 있다. 특히 이 책의 3부 (시장의 역할 게 정부의 역할)은 본
강의와 관련하여 참고할 내용이 많다.
6. R. 터커, A.샤프 외 지음, 조희연 옮김. (현대소외론), 들풀마당, 1983.
사회학과 철학의 중요 주제인 소외에 대한 연구 논문들을 모은 책으로서, 소외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법과 철학적 접근법이 모두 소개되고 있다 소외 개념에 대한 이해의 방법과 관련하여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현상으로 이해할 것인지 아니면 산업 사회의 노동 조건에서 비롯된 사회적 현상으로 이해할 것인지의 논의가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사상 내에서 소외론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하는 문제도 다루고 있다.
@p249
제 2장
민주주의와 공동체
시장이 우리 삶을 지배하는 경제 원리라고 한다면, 민주주의는 이 지대의 보편적인 정치, 자회 실천 원리로 자리잡았다.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에서 처음 등장하였지만, 오늘날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할 때는 주로 서양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수세기에 걸쳐 발전해 온 자유 민주주의를 가리킨다. (기본 강의)에서는 자유 민주주의의 본질적인 내용과 함께. 그 토대를 이루는 시장경제와의 관계 속에서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살펴봄으로써 오늘날 민주주의의 참된 의의와 함께 민주주의의 보다 완전한 발전을 위해서 극복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자유 민주주의의 본질적인 내용은 이미 로크의 사회 사상에 모두 드러나 있다. 로크는 소유권 이론과 사회 계약론을 통해 국가 권력의 기원을 개인주의의 관점에서 개인의 소유 보전을 위한 계약으로 설명하였다. 로크는 나아가 개인의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 권력을 제한하고 국민의 정지 참여를 보장하는 여러 민주적인 절차와 제도에 관한 사상을 발전시켰다. 자유 민주주의는 역사에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 확대 측면에서 뚜렷이 진보적인 역할을 하였다.
오늘날 자유 민주주의는 그 토대를 이루는 시장 경제와의 관계에서 상반되는 평가를 받는다. 시장 원리가 민주주의의 발전에 유리하다고 보는 시장 예찬론자들도 있지만, 시장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이 민주주의를 형식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이 있다. 그 밖에도 현대 사회의 특징을 이루는 세력 집단의 형성을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보는 지각이 있으며, 근본적으로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시장 경제 원리는 공적인 시민의 덕성을 요구하는 민주주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는 비판도 있다.
@p250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점으로 말미암아 민주주의의 의의를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는 어떤 고정 불변의 제도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가 스스로의 처지를 개선하고, 사회 성원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열을 누릴 수 있는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실천의 형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기본강의)의 주요 논의다.
(주제 토론)에서는 대다수 사람들이 노동의 댓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현실에서 민주주의를 보다 완전하게 실현하는 과제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살펴보는 기회를 마련했다.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을 검토해 보고, 그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자유 민주주의의 정치적 자유와 권리가 갖는 의의가 부정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이토론의 주된 목표가 된다.
(읽기 자료)에서는 민주주의 사상의 발달 과정을 보다 자세히 학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홉스, 로크, 루소가 민주주의 사상의 발달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를 이해해야 하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사회적 약자의 처지를 개선하고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기의 민주주의 사상에서 핵심을 이루던 원칙들에서 어떤 변화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며 어떤 이론적 뒷받침을 통해 민주주의 사상의 전환이 일어났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1. 기본강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1. 문제의 제기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노래하던 때가 오래 되지 않은 과거인데, 민주주의는 어느 새 우리 사회의 운영 원리로 빠르게 자리잡아 가고 있다. 민주적원리에 따라 정치 제도와 법률을 개선하는 공적인 영역의 노력이 지속되는 가운데, 시민의 힘을 묶어 세워 환경을 지키고, 대기업의 횡포를 감시하며, 정치권에 대하여 정치 발전을 촉구하는 등 시민 운동이 여러 부문에서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사회경제적 대우의 개선을 바라는 요구가 곳곳에서 조직적으로 분출되는 한편. 관련 당사자들 사이에 대화와 타협을 통한 문제 해결의 규칙이 정립되어 가기도 한다. 자본주의 시장이 우리 삶의'경제적 토대를 규정하는 원리라고 한다면, 민주주의는 이 시대의 보편적인 정치, 사회적 실천 원리라고 할 수 있다.
@p251
다 알고 있듯이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직접 민주주의로서 시민에 의한 통치가 핵심 내용이었다. 반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대의제로서, 주로 정부의 조직 원리와 국가 권력을 제한하여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정치 원리의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이처럼 민주주의의 의미 변화가 생겨난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근대의 민주주의가 자유주의 사상과 결합되어 자본주의의 순조로운 발전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해 왔다는 역사적 사실과 관련이 있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문제점과 가능성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함께 자유 민주주의의 본질적인 내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어떤 문제점들을 안고 있을까? 이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민주주의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살펴야 한다 시장 경제가 민주주의의 발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한다고 시장 예찬론자들은 주장하지만 반대로 시장 경제에 기인하는 여러 요인들로 인하여 민주주의가 불리한 영향을 받는다는 주장도 있다. 주요 논점은 시장의 경쟁 원리가 과연 개인들에게 최대한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가라는 문제인데, 이 문제를 둘러싼 두 입장의 주장을 고루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유 민주주의를 사회적 다수인 근로 대중을 위한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마르크스주의의 논의도 이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다음으로 비슷한 논점이지만 시장의 사익 추구적 속성과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공적 시민의 속성과의 모순이 민주주의 발전을 가장 근본적으로 위협한다는 문제 제기에 대해 논의한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 사회의 간섭으로부터의 독립성과 같은 자유 민주주의의 원칙들로 공동체의 유대를 형성하기에 충분한가. 민주주의의 발전과 공동체의 실현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대답해 본다.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여전히 "과연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제기하고 또 답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를 느낀다. 민주주의는 원래 한 가지로 정의하기 힘든 개념인데다가 서로 다른 의도로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사람들로 인하여 개념상의 혼란이 더해지기도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민주주의의 의의가 폄하되거나 부정될 수는 없다. 민주주의가 어떠한 역사적 실천 속에서 성장해 왔으며 우리에게 어떤 가능성을 주는가에 대해 성찰한다는 것은 곧 우리에게 남겨진 역사적 과제, 말하자면 인간다운 삶의 실현을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p252
2. 문제의 분석
2.1 자유 민주주의
민주주의의 어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데모크라티아는 원래 대중(demos)의 지배(kratia)를 뜻하는 말로. 한 사람이 지배하는 군주정이나 소수가 지배하는 귀족정과는 달리 시민 전체가 지배하는통치 형태를 의미했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최초로 등장한 민주주의는 오랫동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가 근대에 들어 서양에서 자본주의가 성림되고 시민 계급이 절대 군주정을 타도 하여 근대 국가를 형성한 17~18세기에 자유주의 사상과 결합됨으로써 자유 민주주의의 형태로 다시 등장한다. 이때부터 민주주의라 할 때는 대개 자유 민주주의를 뜻하게 되었다.
자유 민주주의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 고전적 자유주의 사상가인 로크(J. Locke)의 사회 사상을 간략히 살펴보자.
로크는 국가와 정치 권력의 기원을 논하기 위해 국가 혹은 사회가 성립되기 이전의 자연상태를 가정한다. 자연 상태는 자연법에 따라 개개인들이 자기의 재산과 신체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며 일체의 권력과 지배권을 서로 평등하게 갖고 있는 상태이다. 로크는 생명 자유 재산을 통틀어 소유라고 부르는데, 각 개인들은 자연 상태에서 평등하게 소유의 권리를 향유한다. 그런데 자연 상태에서는 개인들 사이에 분쟁이 생겼을 때 이를 조정하고 질서를 유지할 법률과 권력이 없다. 그래서 자연 상태에서 소유권의 보호는 매우 불확실하고 타인의 침해를 받을 우려가 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소유(생명, 자유, 재산)의 보전을 위해 서로 결합하여 계약을 맺음으로써 사회와 국가를 형성하게 된다.
@p253
이처럼 로크의 사회 이론은 사회 계약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사회 계약론은 봉건 절대 왕정을 비판하고 국가의 성립 근거를 새로 설정하기 위해 가상의 계약을 상정한 것이다. 여기서 국가는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의 동의에 의해 설립되어 그들의 소유를 보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국가가 일단 만들어진 다음에는 각 개인은 다수의 결정에 복종해야 한다.
국가의 형성으로 시민의 모든 권리가 양도되는 것은 아니며, 법률 제정 및 집행 권리(입법권과 행정권)는 양도되지만, 이것은 '생명, 재산, 자유 의 보호라는 기본 목표를 국가가 준수하는 조건하에서이다 만일 국가가 개인의 소유를 침해한다면 계약 조건을 어기는 셈이 되므로 국민은 저항권을 갖는다. 일단 법률이 만들어지면 신분에 관계없이 어느 누구도 법의 지배를 면할 수 없다. 그런데 동일한사람이 입법과 집행의 두 권력을 모두 장악하면. 자기가 만든 법률에 복종하지 않으려 할 것이며, 법률을 만들 때에도 자신의 개인적 이익에 부합하도록 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로크는 입법권과 행정권을 분리한다.
이처럼 로크는 국민 주권, 저항권, 다수결 원칙, 국가 내에서의 권력 분립, 대의 정부 등과 같이 여러 민주적인 제도와 함께 국가 권력을 제한하여 개인의 권리(생명, 재산, 자유)를 보장하는 정치 원리를 내세웠다. 이러한 것들이 오늘날 자유 민주주의자들이 '민주주의'라고 할 때 주로 뜻하는 바이다.
로크의 이러한 원리는 봉건 귀족과 절대 왕정에 맞서 투쟁한 당시 도시 상공업자 즉 시민 계급의 이익을 대변한 것이다 새로 태동한 자본주의 경제 질서를 주도한 시민 계급은 자본주의 경제의 기초가 되는 개인의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보장받기 위해 신분적 억압을 철폐하고 절대적 국가 권력을 제한하기를 원했으며, 시민 혁명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마침내 정치적 자유와 평등을 보장받기에 이르렀다. 자유 민주주의는 그 이후의 전개 과정에서 완전한 보통 선거제를 도입하여 정치적 자유와 권리를 근로 대중에까지 확대시키고, 파시즘과 같은 압제에 대항해 투쟁함으로써 역사에서 뚜렷이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2.2 시장 경제와 민주주의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고 국민의 참여를 보장하는 정치 제도의 확립이 핵심인 자유 민주주의는, 욕망 추구와 자유 경쟁을 보장하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지배적인 세계 경제 질서로 자리잡았듯이, 이 시대의 보편적인 정치, 사회적 실천 원리가 되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와 자유 민주주의는 건축물에 비유하자면 토대와 그 위에 세워진 상부 구조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보면 시장 경제가 바탕이 되어 자유 민주주의를 꽃피웠고, 자유 민주주의는 거꾸로 시장 경제의 발달을 도왔다.
@p254
그래서 가령 시장 예찬론자인 프리드만(반.Friedman)과 하이에크(F.A. von Hayek)는 자본주의 시장의 장점을 강조하면서 시장은 그 속성상 민주주의의 발달에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시장은 개인의 다양한 욕구를 최대한 만족시켜 주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폭넓게 보장하며, 개인들을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대한다. 그리고 시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개인의 정치적 자유를 확대함으로써 민주주의의 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한다고 본다. 만약 시장이 없다면 정부의 관할 사항이 될 많은 문제들이 시장을 통해 해결됨으로써, 시장은 정부의 권력 집중을 막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시장이란 거래의 장이고, 시장에서의 거래는 억지나 강압이 아닌 자발적 참여를 통해 이루어지며. 그 결과 상호 이익의 증진을 가져온다. 따라서 시장은 기본적으로 자발적 참여를 통해서 합의를 도출해 내는 방편인데.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라는 것이다.
그런데 시장은 민주주의의 발달에 긍정적인 영향만 끼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민주주의는 현재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데, 시장 예찬론자의 주장과는 반대로 그러한 문제점들 역시 시장 경제라고 하는 기본 조건에서 비롯된다.
시장은 개인이 자신의 능력과 창의성을 발휘하여 그 성과를 향유할 수 있는 기회와 권리를 허용하며 거래 당사자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폭넓게 제공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시장의 자유 경쟁 체제가 반드시 개인들에게 최대한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한다고는 볼 수 없다. 주기적인 경기 불황으로 실업자가 양산되는 것은 오히려 시장 자체의 속성이라고 보아야 하며, 따라서 시장은 생존과 직결된 취업의 자유를 보장하지 못한다 거리에 실업자가 넘쳐나는 극심한 불황의 시기에 사회의 도덕적 파탄과 더불어 개인들의 삶이 어떻게 근본적으로 위협받는지, 이에 따라 가난한 개인들의 자유와 권리가 얼마나 유명 무실해지는가는 과거 세계 대공황의 시기나 최근 우리 사회의 금융 위기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그리고 문화 산업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시장은 대중 매체의 광고 등을 통한 획일적인 대중 조작으로 체제 통합적 기능을 수행하여 대중의 참된 자유와 권리에 대한 의식을 마비시키고 왜곡시키는 부정적인 측면을 갖기도 한다.
@p255
한편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은 마르크스주의 진영에서 제기되어 왔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을 야기한다고 비판하는 마르크스주의는 자유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형식적 자유와 평등만을 인정할 뿐이라는 이유에서 대중을 위한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본다. 원래 마르크스주의는 자유주의 사상가들처럼 개인이 국가 및 사회의 주제넘은 간섭을 받지 않고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을 민주주의의 관건적인 내용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민주주의의 요체로 본다. 마르크스주의는 자유 민주주의가 사회 경제적 불평등 구조를 그대로 온존시킴으로써 투표와 같은 대중의 정치 참여를 형식적인 것으로 만들뿐이며 이에 따라 자유 민주주의는 사회의 다수를 이루는 근로 대중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고 소수의 유산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부르주아민주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이 아니더라도 자본주의 사회는 그 속성상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인을 내포하고 있음이 여러 연구를 통해 확인된다. 19세기 후반 이래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 중 하나가 된 대기업 집단, 각종 이익 집단, 팽창된 관료 조직과 같은 세력 집단의 대두가 민주주의의 위기를 불러왔다. 자본주의 시장 사회는 원래 개인이나, 기업들의 경쟁적인 이익 추구를 보장한다. 그런데 이제 개체들 간의 원자적인 경쟁이 아니라 세력 집단들 간의 경쟁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특징짓고 있다. 경제 분야에서 독과점의 결과로 강력한 대기업 집단이 형성되어 자신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와 함께 각종 이익 집단이 형성되어 자신의 집단적 이익을 내세우며, 정부 부문의 팽창 또한 자신의 이해 관계에 집착하는 권위적인 관료 조직을 탄생시켰다 그 결과 개인들은 이러한 세력 집단 앞에서 자율성을 잃고 무기력한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사회 운영의 규칙이 이러한 집단들 사이의 세력 관계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수정됨으로써 힘이 없는 다수 대중의 의견은 배제될 공산이 커진다는 점이다. 다수인 사회적 약자가 자신의 이익을 반영하고 처지를 개선할 수 있는 통로가 현실의 제도 속에 갖추어져 있지 않을 때, 그 제도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불리기 힘들 것이다.
@p2.3
2.3 민주주의와 공동체
한편 사익 추구적 시장의 특성과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공동체성 사이의 모순이 참된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협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시장은 등가물의 교환 체계이다. 교환의 관계를 포함해서 시장 사회에서 인간 사이의 연결 고리는 상호 사익의 추구라는 연결 고리이다. 이런 인간 관계에서 각자는 다른 사람을 자신의 목적 달성과 이익 증진을 위한 수단으로만 여길 뿐, 동료로서 타인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거나 삶의 경험을 함께 나눌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는다. 타인을 위한 배려라든지 전체의 이익을 고려한 행동과 같은 것은 시장에서의 행동 규칙에 적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처럼 상호 사익 추구에 바탕을 둔 인간 관계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경쟁 의식과 잠재적인 적대감이 생겨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의 공동체적 연결 고리는 사라지고 경쟁과 대립 관계의 단세포적인 개체들의 세계가 대신한다.
그런데 시장 사회의 이러한 특성은 자본주의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자유주의의 사회관에도 반영되어 있다. 사회 계약론에서 알 수 있듯이 자유주의는 원래 사회를 개인들의 행동과 상호 작용의 산물로 파악하는 개체론적 사회관을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이기적 본성의 개인들이 자신의 안전과 자유로운 사익 추구를 목적으로 합의하여 사회를 형성한 것으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에서는 근본상 개인이 사회에 우선한다는 개인주의와, 전체(사회)란 부분(개인)들의 총합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기계론의 관점이 귀결된다.
자유주의의 이러한 관점에서는 전체로서의 사회가 부분들의 총합 이상의 속성을 갖는다는 점과 인간이 지닌 공동체적 본질에 대해 제대로 주목하기 어렵다. 사회는 개인들의 상호 작용의 결과로 비로소 형성된다기보다는 개인들에 앞서서 존재하며 개인들에 대해 정체성을 부여해 주는 본질적인 측면도 있다. 그리고 개인은사회의 간섭과 구속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독립성을 늘려 가기를 원하지만. 한편으로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자아 실현을 위한 터전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개인들이 각자 자신의 자유와 권리 신장을 위해 노력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공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만 개인과 사회의 동시적인 발전이 보장된다고 할 수 있다. 참정권, 보통 선거제, 양심과 종교의 자유 보장, 사회의 간섭으로부터 개인의 독립과 같은 자유 민주주의 원칙만으로는 참된 공동체를 이루기에 충분치 않으며, 모든 개인이 자발적으로 사회 전체의 한 구성 분자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p257
민주주의는 이처럼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을 지닌 능동적인 시민을 필요로 한다 사적인 이익 추구에만 물두하고 공동체의 공적인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소극적인 시민은 공동체 성원으로서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자각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통치자들에 의해 부당한 권력의 유지와 강화에 이용당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만일 시장원리가 사회를 전면적으로지 배하게 되면 공공의 여론이나 일체감 그리고 공공 정신이 사적인 특수 이익으로 대체되고. 따라서 민주주의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만연한 정치적 무관심이나 개인적 혜택을 위해 정치적 지지를 결정하는 투표 행위 같은 것은 민주주의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3. 종합적 고찰
이와 같은 문제점들을 생각할 때 민주주의의 의의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민주주의는 고정 불변의 제도가 아니라 특권 계급에 대항하는 대중의 운동으로 실현되어 왔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고대의 민주주의는 특권 계급인 귀족에 대한 평민의 투쟁에 의해 실현되었고, 근대의 자유 민주주의도 봉건 지배 계급에 대항하여 시민과 근로자 대중이 연합하여 투쟁함으로써 실현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기를 요구하는 다수 대중과 문제 해결에 소극적인 특권 계층 사이에 일정한 긴장이 존재한다. 그런데 시장이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수 대중은 자유 민주주의가 이룩한 성과인 민주적 절차와 제도를 통해서 문제 해결의 통로를 마련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다수 대중은 정치적 자유와 권리를 적극 이용하여 사회 경제적 불평등을 제거하고 자신의 의사와 이익을 보다 잘 반영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고자 한다 따라저 민주주의는 고정된 제도라기보다는 본질적으로 다수 대중이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고자 수행하는 정치 사회적 실천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집단 이익을 추구하는 세력 집단과 사적 이익의 추구에 여념이 없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사회는 참된 공동체 사회가 아니다. 참된 공동체 사회란 전체의 발전을 자신의 발전과 동일시하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이다. 세력 집단의 횡포를 견제하여 사회 전체의 이익을 반영하고, 공동체의 문제에 책임질 줄 아는 공적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함양하는 일은 시민사회의 지속적인 자각적 노력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 민주주의는 결국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를 실현하여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한 실천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p258
잘 알려져 있듯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Platen)은 민주주의를 우매한 다수의 통치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 그 의의를 깎아 내렸다. 그가 보기에 민주주의는 사적이고 감각적인 욕구로 가득 찬 대중들에 무조건 영합하는 통치가 행해지고 공동체 원리는 사라져 버린 타락한 정치 형태에 지나지 않았다. 플라톤의 비판이 현대의 민주주의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겠지만, 민주주의의 참된 실현을 위해서 성찰해야 할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무엇보다 사회의 모순 극복을 통해 진정한 자아 실현의 조건을 마련하고자 하는. 공동체적 관심과 덕성을 지닌 개인들에 의해 실현될 수 있다 저마다 경쟁적으로 이익 추구에 여념이 없는 사회는 공동체로서 지속되기 힘들뿐더러 개인의 자아 실현의 터전이 될 수 없다.
한편 민주적 절차와 제도에 관한 법률 제정만으로 민주주의가 절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 실현의 관건은 사회의 광범한 분야에서 대중 자신의 의사가 표현되고 관철되는 대중의 자치가 실현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민주적 권리와 절차를 존중하는 정치적 훈련과 교육, 대중의 자유롭고 활발한 정치 활동이 절대 필요하다.
현대 사회가 복잡해지고 다양해짐에 따라 국가의 업무는 확대되고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따라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국가 관료 기구루 폐단을 제거하여 민주화하는 한편, 자신의 정치적 대표자를 효과적으로 감시하여, 국가의 역할이 전체 대중의 이익을 위해 행사되도록 대중이 통제할 수 있는 장치와 힘을 마련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로 된다.
현대 사회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자율적인 시민 사회의 역할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가령 비당파적인 시민 운동의 적극적인 활동이 그 한 예가 될 수 있다. 사회 각 계층의 연대를 통하여 사회의 보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시민 운동은, 그 자체 대중의 자치 활동으로서 대중이 민주적 권리 의식을 자각하고 정치적 활동을 훈련하는 장이 된다는 점에 무엇보다 큰 의의가 있다. 나아가 시민 운동은 국가의 활동이 전체 대중의 이익을 위해 행사되도록 통제하고, 노동 운동과 함께 자본의 횡포를 견제하는 적극적 역할을 할 수 있다.
@p259
억압과 불평등을 극복하여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은 역사적인 과제이다. 궁극적으로 그 과제가 언제 완수될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 삶의 진보에 대한 신념과 바람직한 사회를 이루기 위한 자각된 사회 성원들의 연대를 통해서만 그 목표를 향해 다가갈 수 있다는 것과, 그러한 실천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불러도 좋다는 점이다.
2. 주제토론: 시장은 민주적인가?
1. 토론 과제
다음은 국내 어느 시민 단체의 기관지에 실린 글의 일부이다 이 글을 읽고 오늘날 민주주의의 보다 완전한 실현을 위해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가 무엇이며, 또 이를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에 대해 토론해 보자.
외국 유수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직원들의 얼굴이 슬로 컷으로 차례차례 등장하는 대기업의 이미지 광고가 있었다. 그 광고를 좀 다른 측면에서 보자. 박사 학위를 받은 그들도 분명히 '노동자'이다. 전문직 노동자 두뇌 노동자, 골드 칼라. 소수 특권층 노동자 등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도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함으로써 살아가는 노동자라는 것이다.
@p260
17~18세기 매뉴팩처 시대의 수공업 노동자는 장인이었다. 쉬운 말로 표현하자면, 지금의 대학 교수급이었다. 당시의 숙련된 노동 기술은 전수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고, 그렇게 독점된 기술은 곧바로 특권과 연결되었다. 당시의 노동자는 도시 전체 인구의 70%를 차지하고 있던 날품팔이 대중 위에 군림하는 특권층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특권은 기계가 생산에 투입되기 시작하면서 파괴되었다. 자동화, 기계화는 19세기에 이르러 섬유 산업, 방앗간 등에서 거의 완벽한 상태에 도달했고, 섬유 노동자, 방앗간 노동자들을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었다. 우리가 다아는 기계 파괴 운동은 이에 대한 특권층 노동자의 저항이었다 당시 기계를 파괴했던 노동자는 우리가 막연히 짐작하는 것처럼 역사 속에서 헐벗고 굶주려 온 노동자 대중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소수의 특권층 노동자는 존재했다. 다름 아닌 기계를 만드는 노동자들이었다. 기계의 수요가 대량으로 요구되었으나, 기계는 여전히 소수의 숙련된 노동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고숙련 노동자들의 특권은 언제까지 유지 되었을까? 기계를 생산하는 기계가 보급됨으로써, 또는 기계를 생산하는 노동자를 기계처럼 부려먹을 수 있는 공정이 개발됨으로써 그들의 특권 역시 막을 내렸다.
복잡한 부품 생산 및 기계 조립 공정에 종사하는 노동자들로 하여금 기계처럼 일하도록 강제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테일러, 포드 시스템이었다 이새로운 시스템이 노동자의 특권을 분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 새로운 시스템이 전세계를 관철하는 데엔 50년의 세월과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필요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이른바 정보화 사회로의 이행은 이러한 역사적 변화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다. 정보화 사회를 한번 찬찬히 들여다 보자. 지금의 고숙련 노동자들은 누구인가? 석사, 박사 학위 연구원, 프로그래머, 영화를 포함한 멀티미디어 산업 종사자, 프로듀서, 언론 종사자 등이 그들이다. 정보화 사회는 이러한 고숙련, 고학력 노동자의 대량 수요를 창출하는데, 이러한 고숙련, 고학력 노동자들의 특권은 점차 빠른 속도로 소멸되고 있다. 그들은 이미 밤늦게까지 일하며 기업의 이윤 창출을 위해 혹사당하고 있다.
이렇게 특권을 상실해 가는 고숙련, 고학력 노동자의 처지가 장래 노동 운동 속에서는 희망이 되는 것이다. 고등학교나 대학의 문을 나서서 직장에 취업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대부분 '노동 조합'이라는 단어가 자신들의 인생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회사에 취업하는 순간부터 노동자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는 것이다. 금응인이 되거나, 언론인이 되거나, 연구원이 되어도 마찬가지다 굳이 학력을 속이고 '위장 취업'을 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인간다운 삶을 위해 자본과 권력에 대항해야 하는 노동자인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 취업을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역사를 발전시키는 노동자들의 당위적 사명에 합류하게 되는 것이다.
IMF 시대에 직장인이 될 사람들이여) (참여사회), 1999년 3월호.
@p261
2. 기본 논증과 비판
2.1 자본주의 시장 사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자본주의 시장 사회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렇다면 다른 사회와 구분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은 무엇일까? 그건 쉽게 이야기하자면 부모님의 사업을 물려받는 행운을 누릴 수 없는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남에게 고용되어 일을 해 주는 대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라는 것이다. 앞 글에서 말하듯이, 산업 혁명 시대의 직공이든, 정보화 사회의 연구원이든, 고등학교를 나왔든, 외국 유명 대학 박사 출신이든. 블루 칼라든, 골드 칼라든, '위장 취업'을 했든, 그냥 돈 벌 생각으로 취직했든 간에 남에게 고용되어 일하는 이상 노동자라는 신분에는 차이가 없다. 그리고 노동자인 이상, 자본가를 위한 이윤 창출에 몸바쳐 일해야 하는 처지에도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 대부분이 노동자로 살아가야 하는 자본주의 현실과 민주주의의 보다 완전한 실현은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먼저 시장 사회의 현실에서 이야기를 풀어 가자.
@p262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의 노동력 역시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상품의 하나로 판매되는 사회이다. 그런데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노동력이란 상품도 시장에서 화폐와 교환되는 판매의 과정을 거쳐야 상품으로서 제 구실을 하게 된다. 그리고 노동력이 상품으로 판매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상품으로서의 경쟁력을 갖추어야 한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장성할 때까지 적어도 십수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또 온갖 자격증을 따느라 고생하는 것도, 시장 경제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자신의 상품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노동력이 상품으로 판매된다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사실과 관련이 있다 먼저 자본주의 사회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한편에는 자본을 집중한 자본가가 있어서, 그는 그 자신의 노동력 외에 다른 노동력을 구입하여야 하며, 다른 한편에는 모든 자본을 상실하고 생존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지 않으면 안 되는 노동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와서 그 이전 사회와는 달리 개인들에 대한 모든 인격적인 구속이 사라지고, 개인들이 자신의 뜻대로 활동할 수 있는 자유가 생겨났음을 뜻한다. 그러기에 자본가는 노동자를 강제적으로 노동시킬 수 없으며, 자유로운 계약 관계를 통해서만 노동자의 노동력을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조건이 결합하여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력이 상품으로 판매
된다.
여기서 두 번째 사실이 바로 자유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내용을 이룬다 절대 왕정과 봉건적인 특권 계층에 맞서 투쟁한 시민 계급은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보장받기를 원했으며, 그러한 요구는 곧 개인의 정치적 자유와 평등, 권리 보장에 대한 요구로 표현되었다. 모든 개인들이 대등하게 자신의 의사에 따라 맺은 계약을 바탕으로 경제 활동을 자유롭게 하고, 국가든 개인이든 누구로부터도 침해나 방해를 받지 않고 경제 활동의 성과를 향유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는 것이 자본주의 경제 질서를 주도한 시민 계급의 이상이었는데, 바로 자유 민주주의의 원리와 제도 속에 그러한 이상이 간직되어 있다.
@p263
2.2. 자유 민주주의의 문제점
그렇다면 자유 민주주의에 어떤 문제점이 있다는 말인가? 여기서 자유 민주주의에 대해 가장 오래 되고 본질적 비판인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을 들어 보자.
마르크스주의가 보기에 자본주의 사회는 자유와 평등에 근거한 공정성을 정의의 원리로 삼는 사회이다. 말하자면 동등한 입장에서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합의한 것은 정의에 부합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는 표면상으로만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일 뿐, 실제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지도 자유롭지도 못하다. 그 단적인 예가 자본가와 노동자사이의 관계이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동등한 입장에서 계약을 맺고 노동력을 거래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노동자의 운명은 전적으로 노동력을 구입하는 자본가에게 의존한다. 만일 자본가의 편에서 볼 때 노동자의 노동력이 소용없다면 그는 그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생존의 권리를 박탈당한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항상 자신의 노동력을 누가 구매해 줄 것인지 걱정하며, 혹시 일자리를 구했을 경우에는 언제 고용주가 자신을 해고할는지 걱정한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격적으로 노동자는 전적으로 자유를 가지고 있지만,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는 노동자의 처지로는 자본가에게 인격적인 구속도 마다할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에 따르면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관계만 사실상의 불평등 관계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권리와 자유의 행사에 있어서 사실상의 불평등이 만연해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법 앞의 평등, 사유 재산권, 신체의 자유, 정치적 결정에 참여할 권리 등을 법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보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권리들의 실질적 행사는 부와 사회적 신분에 의해서 크게 달라진다. 각종 선거 부정과 관료의 부정 부패가 이를 단적으로 반증한다. '유전 무죄, 무전 유죄'라는 말이 있듯이, 돈이 많을수록 더 많은 법의 보호를 받게 된다. 돈이 많을수록 언론 매체를 통해서 더 많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어 있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이러한 현실적 불평등을 은폐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마치 고대 사회가 노예는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는 관념을 퍼뜨림으로써 노예제를 정당화했듯이, 자본주의 사회는 법 앞의 평등과 자유 보장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유포함으로써 자본주의가 정의롭다고 선전하고 또 그럼으로써 사실상의 불평등과 부자유를 은폐한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이다.
@p264
2.3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과제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은 가혹하게 들리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자유 민주주의의 원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실질적인 경제적 불평등으로 말미암아 온갖 자유와 권리가 불평등하게 보장되는 현실을 문제 삼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과제는 분명해진다. 말하자면 민주주의를 단지 법률적, 형식적 원리로만 인정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모든 영역에서 사회 전체의 이익을 고루 대변하는 원리로 철저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경제적 불평등을 시정하는 것이 급선무인데, 시장 자체는 경제적 불평등을 해결하는 데 무력하다는 것이 이미 지난 역사에서 입증된 이상, 자유 민주주의가 이룩한 성과인 정치적 자유와 평등, 참정권 등에 근거하여 사회적 약자인 다수 대중의 경제적 처지를 개선하고 이들의 의사와 이익이 보다 잘 반영되는 사회 제도와 절차를 만드는 일이 중요한 과제로 된다. 사회 성원 누구나 기본적인 생계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 속에서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는 물질적인 조건을 포함한 여러 사회적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일차적인 조건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는 강력한 힘을 지닌 대기업 집단이 있는가 하면, 이익 집단도 있고, 권위주의적이고 억압적인 국가 관료 집단이 있다. 이러한 세력 집단 앞에서 개인들은 자칫 자율성을 잃고 무기력한 존재가 되기 십상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세력 집단이 사회 운영의 규칙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고 운영하여 사회의 공익 실현을 방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강력한 영항력을 행사하는 세력 집단을 견제하는 한편, 관료 집단의 부패와 무능 그리고 권위주의를 제거하며 국민의 정치적 대표자를 효과적으로 통제함으로써 국가의 역할이 사회 전체의 이익에 부합되게 행사되도록 통제하는 실질적인 힘과 장치를 마련하는 일이 필요하다.
관료 기구의 폐단을 제거하는 등 국가 기구를 민주화하는 일이 억압이 없는 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라는 것은, 자유 민주주의를 비판하면서 스스로 인민 대중을 위한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했다고 주장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실패 경험에서 역으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다. 과거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주장과는 달리, 실제로는 대중의 정치 활동과 공공 생활이 위축되고, 민주적 권리와 절차에 대한 경시가 일반화되어 국가 권력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가 결여되었다. 국가 권력은 나름대로의 논리에 따라 변화에 저항하고 관료주의가 고착되었다. 그 결과 사회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는 법을 초월한 폭력적 지배. 일당 독재, 소수 지도자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구호로 전락했다.
@p265
따라서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시민 사회에서 민주적인 권리 의식에 대한 자각과 민주적 절차와 제도에 대한 존중에 바탕하여 정치 활동을 훈련하여 성숙한 자치 역량을 키우는 일이 절대 필요하다. 나아가 각자 사익 추구에서 벗어나 전체의 발전을 자신의 발전과 동일시할 줄 아는 시민의 덕성을 기르는 일 또한 궁극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 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추구해야 할 과제이다.
3. 읽기 자료: 민주주의의 역사
1, 민주주의 사상의 형성
근대 민주주의 사상의 형성 과정에서 국민 주권주의와 기본적 인권 존중에 관한 이론을 최초로 제시한 사람은 흡스(T. Hobbes)였다. 그는 (리바이어던 The Leviathan '1651')에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는 권리(자연권), 생명의 존중(자기 보존)이라고 말하고, 투쟁이 없는 평화로운 정치 사회를 이룩할 필요성과 방법을 내놓았다. 이 자연권에 관한 사상이 바로 오늘날의 기본적 인권에 관한 사상의 원형을 이룬다. 홉스는 국가나 사회가 없는 무법 상태 곧 자연 상태일 때는 당연히 각자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자연권을 행사하게 되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일어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오히려 개인의 안전이 위협받게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를 포기하고 자연권을 포기한다는 계약을 상호간에 맺어서 '공통의 권력(곧 최고 권력인 주권)'을 형성하기를 촉구하였다. 그리고 홉스는 인간의 최고 욕망인 생명의 보존에 기여하는 일종의 계산된 이기심인 이성의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공멸을 부를 수 있는 만인의 투쟁 상태를 벗어나 이러한 계약을 맺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공통의 권력인 주권을 세움으로써 국가가 형성되는데, 이 국가의 대표자인 군주가 주권자가 된다. 홉스는 국가를 운영하는 법률은 절대 권력을 지닌 군주에 의해 제정되고, 모든 인간이 이 법률에 따라 행동할 때 사회의 안정과 평화가 보장된다고 가르쳤다. 여기서 계약 또는 동의에 기반한 국가 권력의 확립이라는 사상은 오늘날의 국민 주권주의의 원형이 되었다. 홉스의 사회 사상에서 중요한 것은 국가 권력과 법의 권위는 개개 인간의 생명 안전과 이익 보장에 기여할 때에만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홉스의 견해는 현실적으로는 군주제적인 절대 권력을 합리화하는 이론인 듯이 보이지만 그 실제 내용에 있어서는 철저한 개인주의적 사고를 반영하고 있다 왜냐하면 국가는 개인들의 계산된 이기심이 계약을 맺어 형성될 수 있을 뿐이며, 개인들의 이익을 지켜 주는 한에서만 강력한 권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민주주의라고 하면 의회 정치를 연상하게 되는데, 이러한 의회제 민주주의 사상을 이론화한 것은 명예 혁명기의 로크(J. Locke)이다. 그는 (통치론 두 편) (1690)에서 영국에서의 최고 권력은 국왕과 상, 하원으로 이루어지는 의회에 있다고 말하고, 의회와 행정부(국왕)와의 관계에서는 의회가 우위에 있다고 하여, 오늘날의 의회제 민주주의와 의원 내각제의 원형을 만들었다. 또 로크는 자연 상태의 개인들이 계약을 맺고 국가와 정부를 설립하는 것은 자연권인 각자의 소유(생명, 자유, 재산)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며, 만약 국가 기관인 입법부나 행정부가 국민의 소유권을 침해하는 사태가 발생하면 그것은 계약 위반이므로 국민은 국가에 저항할 수 있다고 하였다. 로크의 이러한 주장은 국가의 존재 목적은 개인의 재산과 자유와 같은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며, 개인은 국가의 불필요한 간섭을 받지 않고 독립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현대 민주주의 사상의 중요한 원칙을 밝힌 것이다.
인민 주권론을 주장하여 민주주의의 내용을 더욱 진전시킨 사람은 프랑스의 사상가 루소(J. J. Rousseau)였다. 그는 (인간불평등 기원론) (1755)에서 사유 재산제가 인간의 참상과 불평등의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유산 계급이 자신의 재산을 지키고 늘리기 위해 전제 정치와 함께 전수가 다수 생산자를 지배하는 생산 양식을 이용하는 것을 통렬히 비판하였다 또한 그는 (사회 계약론)(1762)에서 인간이 사회 상태에서도 자연 상태에서 소유하고 있던 것과 같은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서 상호간 계약을 맺어 일반 의사(홉스의 공통 권력, 주권에 해당)를 형성하고 일반 의사에 따라 개인의 이익과 공공의 이익을 동시에 실현하도록 사회를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일반 의사에 의한 정치는 그 당시 재산을 가진 소수의 유산 계급에게만 인정되었던 선거권을 중, 소 생산자에게도 인정하라는 요구를 담음으로써 오늘날의 국민 주권의 원리를 지향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p267
2. 민주주의의 발전
프랑스 혁명에서 민중의 급진적인 요구와 행동을 지켜본 영국의 지배층은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아버지로 불리는 루소의 사회 계약설이나 자연권 사상의 영향이 영국 민중에게 파급될까 두려워하였다. 일찍이 영국 시민 계급은 자연권 자연법의 깃발을 높이 들고 절대 군주의 폭정을 타도하였으나, 이제 지배층의 지위에 올라선 상층 시민 계급은 소시민층이나 노동자 계급의 대두
에 공포감을 품고 보수화하였다.
시민 혁명기에 혁명 주류파였던 크롬웰파는 하층민에게 선거권을 주지 않아 1770 년대까지도 영국은 여전히 제한 선거제를 유지하였고. 미국에서는 흑인에게 선거권을 인정치 않았으며, 프랑스에서도 재산에 따른 자격을 설정하여 다수의 시민을 선거권에서 배제하였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정치적 권리의 획득이나 참정권의 확대가 긴급한 과제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이러한 운동이 산업 혁명기에 활발하였다. 영국의 소시민 계급과 노동자, 하층민들은 지배층에 맞서 자연권의 이름으로 선거권 확대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지배층은 참정권의 확대가 재산의 평등화 요구로 이어질 것을 경계하여 선거권은 '일정 정도의 재산과 교양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부여되는 특권이라고 주장하며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권 확대는 시대적 요구가 되어 갔다.
이때 영국에서 벤담(J. Bentharn)이 등장하여 보통 선거제의 실현을 향한 첫 발을 내디였다. 그는 지배층이 경계하는 자연권이란 말을 조심스럽게 피하고'공리'란 말을 써서. 그 말이 뜻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좋은 법률의 제정이 필요하며. 좋은 법률을 제정하는 데는 좋은 의회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국민 다수가 정치에 참가하는 보통 선거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 벤담주의는 중, 소 샘산자층에서 노동자 계급에 이르기까지 점차로 많은 지지를 받게 되었다. 시민 혁명 이래 오랫동안 민주주의 전통을 가진 영국에서는 페인(T. Paine)과 벤담의 노력이 결실을 보아 1832 년에 제1차 선거법 개정이 실현되었지만, 아직 완전한 보통 선거제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1867 년 벤담의 제자 밀(J. S. Mill)등의 노력으로 제 2차 선거법 개정이 시행되어 도시의 노동자 계급에게도 선거권이 부여되었으며, 1928 년 남녀 평등 보통 선거가 마침내 실시되었다.
@p268
3. 민주주의의 전환
19세기 중엽 이후 민주주의는 경제적 불평등의 시정, 사회적 약자의 구제라는 과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영국을 비롯한 몇몇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빈곤, 실업 등 사회 문제가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때까지 각국은 경제는 자유 방임주의에 따라 개인의 자유로운 경제 활동에 맡기고, 정부의 역할은 대내적으로는 최소한의 치안 유지와 공공 정책의 실시. 대외적으로는 국방을 책임지는 것에 그치는 '야경 국가', '최소 국가'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사회, 노동 문제가 부각된 이 시기에는 공공 복지를 위해서 개인의 자유를 어느 정도 제한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등장하게 되었다.
근대 초기에는 고용 관계에서 고용주와 피고용자가 노동 조건과 임금을 자유롭게 결정해야 한다는 계약 자유의 원칙을 채택하고 있었다. 이 원칙은 봉건 사회의 농노처럼 토지에 결박되어 노동을 강제 당하지 않고 자유로운 처지에서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노동자에게도 진보적인 내용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노사간의 계약은 형식상 계약 당사자 사이의 자유와 평등을 전제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지 않고서는 생계를 이어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일정한 세력 관계와 불평등 구조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불황이나 공황과 같은 경제의 위기 상황에서 노동자는 아무런 보장도 없이 실업 상태에 처할 위험성이 많기 때문에, 노동자에게 단결의 권리를 주어 노동자 스스로 자신의 지위를 지키고 열악한 노동 조건을 개선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새로운 노동 기본권 사상이 등장하였다. 밀은 (자유론) (1859)에서 신체의 자유, 종교 사상의 자유, 재산권 보장 등과 함께 단결의 자유를 자유의 목록에 추가하였다. 그리하여 영국에서 1870 년 노동 조합법이 제정되었으며, 오늘날 각국 헌법에서 갖가지 노동 기본권을 보장하기에 이르렀다.
@p269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또 하나의 원칙인 사유 재산의 불가침 사상도 수정할 필요성이 생겨났다. 사유 재산의 불가침이라는 견해는 본래 시민 계급이 절대 군주의 부당한 과세에 반대하는 사상으로 등장하여 자유주의의 매우 중요한 원리가 되었다 근대 국가가 성립되면서 이 사상이 현실적인 원칙으로 확립되자, 이번에는 자본가 계급의 자본 축적을 정당화하는 사상으로 발전하여 자본주의의 발전을 뒷받침하였다. 그러나 경제적, 사회적 모순이 나타나 다수의 약자가 등장하였으며,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사회 보장 복지 제도와 교육 제도 등을 정비할 필요가 생겼다. 이를 위한 재원으로 당시의 유산 계급만 부담하던 세금의 일부를 할당하고 고소득자에게 누진세를 부과하는 등의 방안이 고려되었다. 그러자 세금을 부담하고 있던 일부 재산 소유 계층은 사유 재산의 불가침이라는 전통적인 자유의 원리에 의존하여 이에 반대하였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민주주의의 전환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사람은 그린(T. H. Green)이었다 그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답게 사는 것인데, 자유의 정신은 인간 존중에 있고 자유란 인간답게 살기 위한 수단이므로, 공공 복지를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도 불가피하다는 '적극적 자유' 개념을 제기하였다. 이 이론에 기초하여 영국은 복지 국가의 방향으로 정책을 크게 전환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공공 복지를 위해서는 개인의 재산이라 할지라도 제한을 받는다는 견해는 1919 년 독일 바이마르 헌법에도 반영되었다. 어쨌든 이때부터 자본주의 국가는 체제의 안정을 위해서도 민주적 법률 및 제도 개선과 사회 보장, 복지 제도의 도입을 통해 다수인 사회적 약자가 자신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두는 것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한메 파스칼 대백과사전) '민주주의', '자유주의' 항목 발췌 정리.
@p270
연습 문제
1. 문제의 제기
1)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처음 등장한 민주주의와, 고전적 자유주의 사상가인 로크에 의해 확립된 민주주의는 어떤 의미상의 차이점이 있는지를 지적해 보라.
2) 로크는 국가 권력의 기원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3) 로크는 국가가 존재하는 목적 이 무엇이라고 보고 있는가?
2. 문제의 분석
1) 신자유주의 이론가인 프리드만과 하이에크가 시장은 민주주의의 발전에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2) 마르크스주의는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3) 마르크스가 자유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4)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이 된 각종 세력 집단의 형성은 민주주의에 대해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5) 시장의 특성상 민주주의 발전에 불리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이러한 입장의 근거는 무엇인가?
3. 종합적 고찰
1) 플라톤이 민주주의를 비판한 요지는 무엇인가?
2) 자유 민주주의가 이룩한 성과인 정치적 자유와 권리는 어떤 의의를 갖고 있는지 대답해 보자.
3) 시민 운동이 민주주의의 발전에 대해 갖는 의의는 무엇일까?
@p271
참고문헌
1. 박정호 지음, (민주주의와 국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엮음, (삶, 사회, 그리고 과학), 동녘, 1991.
민주주의 개념의 역사적 변천과 더불어 민주주의와 국가를 둘러싼 자유주의 전통과 마르크스주의 진영 사이의 논점을 알기 쉽게 정리하고 있다 현재 민주주의가 지닌 한계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어떤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지 에 대한 논의는 본 강의와 관련하여 중요하다.
2.이극찬 엮음, (민주주의), 종로서적. 1983.
민주주의의 다양한 의미에 대한 정리와 함께 현대 민주주의의 문제점에 대한 엮은이의 논의가 주목할 만하다. 이와 함께 민주주의의 본질적 내용과 조건에 대한 여러 저명한 사상가들의 생각을 그들 저작에 대한 발췌의 방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3. 프랑수아 수티른 지음, (인간과 권력), 도서출판 예하, 1989
폭력과 권력에 대한 정치철학적이고 사회학적인 논의를 정리한 책이다. 폭력에 대한 정의와 설명 방식, 권력의 본질과 기원 그리고 효력에 대한 설명들이 간략하면서도 다양하게 소개되고 있다. 이 책의 끝 부분에서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국가의 기구 자체가 억압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억압의 제거를 위해서는 국가의 민주화가 필수적이라는 논의가 주목할 만하다.
4. D. D. 라파엘 지음. 김용환 옮김. (정치철학의 문제들), 서광사, 1986
정치 사상의 주요 주제인 정치와 국가, 자유와 권위, 민주주의, 평등과 사회 정의 등의 문제에 대해 철학적 사유를 가미하여 논의한, 비교적 평이하고도 상세한 정치철학의 입문서.
5. 노베르토 보비오지음. 윤흥근 옮김, (민주주의의 미래), 인간사랑. 1989.
이탈리아의 저명한 좌파 지식인인 보비오가 쓴 이 책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전통적인 대립을 부정하고, 자유 민주주의에서 사회 진보를 위한 긍정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는 신념을 피력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상의 혼란을 정리하고, 민주주의일 문제점들과 미래의 전망에 대해 펼치고 있는 진지한 논의가 돋보인다.
@p272
6. 브라이언 레드헤드 엮음, 황주흥 옮김, (서양 정치사상), 문학과 지성사, 1993
고대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근세의 마키아벨리에서 칼 마르크스, 현대의 러셀, 롤즈, 마르쿠제, 아렌트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고전적 사상가들의 정치 철학에 대한 연구 논문들을 엮어 놓았다. 단순한 시대순 배열이 아니라 국가, 공동체, 자유주의, 사회 정의와 같은 서양 정치 사상의 핵심 주제들의 성립과 발전의 역사로서 명쾌하게 정리되어 있다.
7. 평전청명 엮음, 장하진 옮김, (사회사상사), 한울, 1982
16~17세기의 영국의 베이컨에서부터 20세기의 루카치와 서구 마르크스주의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주요 사회 사상의 흐름을 정리한 책이다. 본 강의와 관련해서는 2장과 3장의 홉스, 로크, 루소의 사회 사상을 참고할 만하다. 그 밖에도 4장은 자본주의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아담 스미스와 존 스튜어트 밀의 사회철학을 소개하고 있다.
8. 요제프 레만 지음, 설헌영, 백금저 옮김, (사회철학에의 초대), 학민사, 1983.
궁극적으로 인간 해방을 목표로 하는 사회철학의 이론과 방법, 대상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사회철학의 역사가 어떻게 이어졌는지에 대해서도 저명한 사상가별로 소개하고 있다.
@p273
제 3장
역사와 역사철학
인간은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의식 활동을 전개한다. 이와 같은 인간의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의식 활동의 전갠가 곧 역자이다. 부르크하르트가 역사를 정의하여 '의식이 눈을 뜸으로 해저 야기된 자연과의 단절'이라고 한 것도 그러한 의미이다. 즉 역사란 자연적 과정으로서의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인간이 의식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여러 특수한 사건들의 연쇄로서, 자연과 환경에 대한 인간 분투의 궤적이다. 역사에 대한 관심은 인간 삶의 불투명성에서 이끌려 나온다. 일반적으로 인간 열의 현상은 자연 현상에 비하여 극히 다양하고 복합적이다. 현재의 삶이 어지럽고 미래의 삶이 예측 불가능할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삶의 추이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른바 역사 의식이란 그러한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역사 의식의 형성 과정에서 인간이 끊임 없이 관심을 갖고 추구해 오고 욕구해 온 가장 중심적인 문제의 하나가 곧 역사의 법칙성에 관한 물음이다. 자연과 마찬가지로 역사 과정에도 모종의 법칙성이나 규칙성 따위가 있다면 그에 따른 삶의 문제에 대한 합리적 대응 능력이 강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른바 역사철학자들은 역자 과정 전제를 관통하는 모종의 필연 법칙을 인식하고자 한다. 플라톤의 역사철학이나 헤겔의 정신 사관,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 등은 바로 이런 맥락에 위치해 있다. 역사 과정의 기대, 궁극 목적, 역사의 주제, 역사의 법칙성 등과 관련한 이들의 주장들은 인간의 삶과 현실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상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따라서 (기본 강의)에서는 이들 역사철학적 사상가들의 기본 연장, 배경, 영향 등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에 중점을 둔다. 그러나 역사의 법칙성에 대한 역사철학적 주장이 인간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은커녕 오히려 불행만을 대래했다는 반역사철학적 주장 또한 만만지 않게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주제 토론)에서는 이들의 사상을 자유주의적인 관점에서 '개방 사회의 적들'로 신랄히 비판하고 있는 비판적 합리주의자 칼 포퍼의 주장을 함께 토론해본다. 포퍼 이론에서 중점을 두어야 할 부분은 그가 역자주의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으며, 그의 점진적 사회 공학론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p274
(읽기 자료)에서는 20 세기 신반 들어 문화의 새로운 양식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포스트 모더니즘의 역사 이해를 살핀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서구의 근대를 이끌어 온 계몽주의, 이성 중심주의를 부정하고 역사와 관련하여서도 철저히 반역사철학적 입장을 취한다. 따라서 이 입장에 따르면 이성에 기반한 모든 역사 해석 방식, 나아가 연속적이고 총체적인 역사의 흐름 그 자제가 부정된다. 특히 이성이 지닌 억압적 성격에 대한 포스트 모더니즘의 주장은 눈여겨볼 만하다 이성과 역사에 대한 이러한 포스트 모더니즘의 부정적 입장은 이성적 사회로의 진보를 기도하는 모더니스트의 입장에선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1. 기본강의: 역사의 법칙성에 관한 주장들
1. 역사와 역사 의식
인간은 다른 존재자들이 생태적으로 반복적인 자기 보존 방식에 따라 수동적으로 자연적 질서에 폐쇄되어 있음과 달리, 오히려 자연적 반복성을 자신의 목적에 따라 대상화하고 이용하는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의식 활동을 전개한다. 이와 같은 인간의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의식 활동의 전개가 곧 역사이다.
부르크하르트(J. Bruckhardt)가 역사를 정의하여 '의식이 눈을 뜸으로 해서 야기된 자연과의 단절'이라고 한 것도 그러한 의미이다. 즉 역사란 자연적 과정으로서의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인간이 의식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여러 특수한 사건들의 연쇄로서, 자연과 환경에 대한 인간 이성의 분투의 발자취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역사는, 필연의 사슬 속에서 본능의 대응으로 이어지는 자연사와 달리, 인간의 자유 의지에 의해 부단히 새롭게 이어지고 열려져 있는 창조와 변경의 과정이자자유의 역사인 것이다.
@p275
그러나 열려져 있는 자유는 한편으로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간은 유의미한 현재적 삶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거나 또는 새롭게 형성해 내기 위해 부단히 과거와 미래에 대한 통일적인 인식을 획득하고자 하며, 이를 통하여 역사의 진로와 방향에 대한 의식 곧 역사 의식을 형성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역사 의식의 형성 과정에서 인간이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추구해 오고 욕구해 온 가장 중심적인 문제의 하나가 곧 역사의 법칙성에 관한 물음이다. 왜냐 하면 이른바 반복적 법칙성 내지 규칙성은 불안과 미지로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안정적인 예측과 그에 바탕한 효율적인 대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자연 및 환경 세계 속에서 인간의 이성 능력의 합리적 화대라는 것은 자연 및 사회 환경에 대한 예측 능력의 강화를 의미해 온 것이 사실이며, 학문적 활동이 의미를 갖는 본질적인 근거 또한 그러한 일반적 법칙성의 탐구에 있다 할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일부 비합리주의적 경향을 예외로 한다면, 우리의 지성사는 역사와 관련하여서도 비록 자연적 법칙성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긴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역사적 흐름 속에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모종의 법칙성 또는 본질을 그 핵심적인 탐문의 과제로 다루어 왔던 것이다.
예를 들어 서양 고대 그리스인들은 역사를 통솔하는 근원적 법칙을 로고스적인 반복적 법칙성을 갖는 초월적인 운명(moira)이라 규정하였고, 중세인들은 역사 과정을 신의 섭리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여겼다. 그와 달리, 인간 이성이 주체적으로 역사 과정을 규정한다고 본 근대의 계몽주의 사상조차 그 인간 이성의 주체적인 규정 내용에 대해 체계적 설명을 시도하고자 했다. 특히 헤르더(J. G. Herder)같은 일부의 학자는 극단적으로 역사의 법칙을 자연의 법칙과 등치하여 인간의 역사를 고등 자연사라고 보았는가 하면, 20세기 들어 지구상에 존재하는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자신의 세계관으로 받아들여 졌던 변증법적 유물론 역시 인간 역사를 자연사적인 과정으로 파악하였다.
역사의 흐름 속에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이러한 법칙성에 대한 탐구는, 개별자를 통일적이고 보편적인 관점에서 고찰하고자 하는 철학적 문제 의식과 관련되면서, 이제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역사철학적 문제 영역을 구성하게 된다. 요컨대 역사철학은 전체로서의 역사 과정의 본질과 지배 원리가 과연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그것은 무엇인지를 탐문한다.
@p276
2. 플파튼의 역사철학
2.1 이상 국가의 구조
플라톤의 (국가편 Politeia)은 우주의 조화 원리에 기초한 이른바 인간들의 이상적인 공동체 즉 이상 국가에 관한 이론이 펼쳐져 있는 대화편으로 잘 알려져 있다. 플라톤에게 이상국가는 다양한 것들의 조화와 공존으로서의 우주와 자연의 원리 그대로 다양한 욕망과 각기 다른 소질들을 가진 다양한 계층들의 조화와 공존을 성립시키는 국가이다 플라톤이 보기에 각각의 인간들은 그 소질과 욕망이 일률적이지 않다. 어떤 이는 무엇을 만드는 데 소질이 있어 그 소질을 잘 발휘하고 이루는 데서 행복을 느끼고, 어떤 이는 우주의 원리를 탐구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그 일에만 매달려 있기를 원하고, 어떤 이는 운동에 소질이 있어 그와 관련한 일에 종사하여 그 소질을 잘 발휘하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각자의 소질과 욕망의 구현 그리고 서로의 사회적 삶의 보존을 위해 분업적인 사회 구조를 성립시킨다. 최초의 국가는 그와 같이 분업에 기초한 자급 자족적인 국가로 성립된 것이다.
즉 국가는 그들의 다양하고 이질적인 욕망 구조의 실현을 위해 통치 계급과 수호 계급 그러고 생산 계급이라는 분업 구조를 성립시킨다. 이 계급들은 각자의 상이한 소질과 이질적인 욕망에 따라 이루어지므로 서로를 넘보거나 빼앗을 일이 없고, 따라서 이른바 계급간의 특권이나 착취는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통치 계급은 우주의 원리에 따라 나라를 잘 통치하기를 원하고 물질욕이나 명예욕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그래서 생산자들은 그들에게 먹을 것 등 물질적인 것을 제공하며 생산자들은 그들의 통치가 자신들의 욕구를 가장 잘 발휘하게 해 주는 것임을 알고 그 지배를 그대로 따른다. 즉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인간의 본성과 욕구가 각각 상이하고 이질적이라는 전제 아래 그 각각의 필요와 욕구들이 모두 조화롭게 실현되고 보장되는 사회인 것
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우주로서 인간들은 완벽한 조화를 항구적으로 유지하는 우주와는 달리, 부단히 물질적 감각의 위협에 직면해 있기 때문에 지속적인 교육과 수련을 하지 않는 한 언제 와해될지 모르는 위기에 처해 있다. 이것이 곧 이상 국가가 명예정, 금권정, 민주정, 참주정으로 점차 와해되어 가는 근거가 되며, 그 와해 단계에 대한 플라톤의 설명으로부터 우리는 이상 국가와 대비되는 현실 국가의 역사적 변천과 전개 과정에 대한 역사철학적 통찰을 간취할 수 있게 된다
2.2 이상 국가의 와해
플라톤에 의하면 무엇보다도 이상 국가의 와해는 사회적 기능의 조화를 관장하는 통치 기능의 결함으로부터 야기된다 수호 기능과 생산 기능은 기본적으로 통치 기능에 의존해 있고, 그 결함은 통치 기능이 온전한 한 극복되므로 수호 계급과 생산 계급은 사회 해체의 원인일 수 없다. 통치 기능의 결함은 물질적 감각이 영혼의 틈새를 파고들어 통치 기능의 욕망 구조를 변질시킴으로써 생겨난다. 즉 통치 계급은 이전에 없었던 물질적 욕구를 갖기 시작하고, 그에 따라 필요 이상의 생산물을 제공받고자 한다. 그리하여 본래의 합목적적 권력 구조는 물질적 윽구의 확장 장치로 왜곡되고 이른바 착취를 성립시킨다. 이와 같은 이상 국가의 타락 과정에서 출현하는 것이 명예 정체(timokratia)이다.
명예 정체의 통치자들은 이미 착취 구조로 변질된 계급 구조를 여전히 처음의 이성적 분업을 지탱해 주는 계급 구조로 미화하고 은폐시킨다. 그야말로 껍질뿐인 명예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착취의 증대는 다른 계층으로 하여금 통치 원리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정치에 무관심하던 계층에 통치 원리에 대한 관심을 발생시켜 다른 계층마저 본래의 관심과 욕망구조에서 다른 계층의 욕망에로 확장되는 변질이 초래된다. 이로써 각 계급의 이질적 욕구들이 마침내 다른 욕구로 상호 확장, 침투되면서 모두 등질적인 욕구로 왜곡된다. 모두가 다 권력욕, 명예욕, 물질적인 욕구를 갖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때도 권력 구조는 그대로 남아 있어 모두 통치 계급으로 상승하기를 바라게 되고, 그에 따라 제한되지 않은 물질적 탐욕과 권력윽 그리고 무원칙한 술수가 행복한 삶의 원리로서 모든 영흔을 지배하게 된다. 그리하여 개인의 욕구 실현의 목표는 고유한 소질이 아닌 등질적 가치의 다다 익선으로 되어 버리고, 마침내 조화와 공존의 관계와는 무관한 무규정적인 무한 상충과 갈등의 관계를 성림시킨다 이것이 명예점 다음의 타락 단계로서의 금권 정체(oligarkia)이다.
그러나 금권정은 제한된 가치들의 무한 소유욕으로 인해 사회적 계층을 부유층과 빈민층으로 앙극화시킨다. 부유층은 덕과 명예보다는 이기적 기득권 보존에 혈안이 된다. 이에 비해 빈민층은 생존상의 질곡이 심화되면서 마침내 혁명적인 변혁을 열망하게 되고, 그 열망은 점차 확고하고도 조직적으로 통합된다. 그러나 플라톤이 보기에 이 통합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 즉 생존 욕구의 충족을 직접적 계기로 성립된 통합이므로 본성의 실현을 도모하는 이상 국가의 이성적 사회 통합과는 본질적으로 대비되는 것이며, 오히려 금권정보다 더 심각한 타락한 정체로서 이른바 민주 정체(demokratia)를 성립시키는 계기가 된다 즉 민주정은 빈민층의 통합이 이룩한 혁명을 통해 기존의 특권적 계급 구조가 철폐되고 통치권이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무차별적으로 개방됨으로써 성립되는 금권정 다음 단계의 타락된 정치 체체이다.
이른바 민주정에서는 누구나 추첨에 의해 통치에 참여하되 동시에 자신이 원한다면 통치를 받지 않을 수도 있다. 이에 따라 계급 구조는 더 이상 욕구 확장의 효율적 장치로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그것이 가지는 국가 구성을 위한 최소한의 분업적 측면도 무시된다. 자유 방임이 이 민주정의 기본 성격이다. 이에 따라 민주정 아래의 인간은 이미 등질화된 욕구의 모든 측면 즉 통치, 수호, 생산 욕구를 구분하지 않고 다양하게 제한 없이 추구하며 임의대로 그 욕구를 변경할 수 있다. 탐욕과 금욕, 절제와 무절제, 공공 봉사와 사적 이기심의 추구가 구분 없이 혼재하며, 그 욕구들의 조정과 통제는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다만 통치의 요체는 대중에 대한 무제한한 관용과 영합에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사회적 공존을 위한 원칙도 원리는 완전히 해체된 채, 다만 사적이고 개인적인 욕구만으로 가득 찬 이 정체에선 감각적 만족이 욕구의 중심적인 가치가 되면서 정치적 무관심이 초래되고 이른바 센세이셔널리즘이 판을 치게 되고, 급기야 선동 정치를 일삼는 권력자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게 되며, 급기야 그 맹목적 추종을 바탕으로 급작스럽게 부상한 권력자를 탄생시킴으로써 이른바 폭압적 예속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것이 곧 민주정 다음의 타락 단계로서 정체 중 가장 타락한 것으로서의 참주 정체(tyrannis)이다.
@p279
2.3 정지 체제 변화와 본성론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이와 같은 현실 국가의 와해 과정은 플라톤의 실제적인 역사관이라기보다는 이상 국가의 타락에 대한 경고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그러나 플라톤의 역사철학적 통찰은 플라톤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전개와 관련하여 자못 의미 심장한 역사철학적, 정치철학적 시사를 던져 준다. 특히 플라톤이 기술하고 있는 참주정의 등장 배경은 20세기 파시즘의 본질과 등장 배경과 관련한 가히 예언자적 간파이자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풍토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리고 사회 관계의 와해 과정을 인간의 본성론과 관련시키는 관점은 현실의 역사적 전개에 대한 의미 있는 역사 철학적 반성을 제공해 준다. 일례로 인간의 다양하고도 상이한 욕망 구조를 조화를 추구하는 본성의 입장에서 최선으로 보존, 실현시키고자 한 플라톤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본래적이고도 불변하는 본성으로 여겨지고 있는 인간의 이기적, 물질적 탐욕성은 본래의 다양한 욕망 구조가 사회 관계의 변질에 따라 획일화된 본성으로 파악된다.
사실상 오늘날의 다원성이란 그러한 획일적 본성 안에서의 다양성이다. 이점은 오늘날의 다원적 가치 대부분이 화폐로 교환될 수 있는 등질적 획일성을 갖고 있다는 데서도 확인된다. 이런 점을 토대로 추측하건대, 아마도 플라톤은 현대의 자본제적 민주정에 관해 매우 부정적인 문명사적 평가를 내릴 것이다. 왜냐 하면 플라톤이 보기에 아마도 현대의 민주정은 비록 그가 그린 민주정과 달리 공공성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를 갖춤으로써 그 타락한 등질화된 본성을 가진 사람들의 공존을 위한 최선의 정체로 진일보하였을지라도, 여전히 인간이 종국적으로 본성을 회복한 상태에서 추구되어야 할 바의 정체는 아니며, 그 본성을 회복시키는 정체는 더더욱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분명 이기적 욕망 구조를 변할 수 없는 본성으로 그대로 둔 채, 보다 바람직한 정치 체제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하는 현실주의 정치철학보다는, 정치의 이지적 지성화를 통해 정치 체제의 개선은 물론 욕망 구조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이상주의 정치철학을 우리들에게 교시하고 있는 것이다.
@p270
3. 헤겔의 역사철학
3.1 진리의 종체성과 변증법
헤겔(G. W. F. Hegel)의 역사철학은 "진리는 전체이다"라는 명제로 표징되는 헤겔의 유기체적 형이상학에 기초하고 있다. 우선 이 명제가 의미하는 바부터 생각해 보자 예컨대 우리가 유기체라고 일컬어지는 것을 파악하고자 할 경우, 그것은 결코 어떤 부분들의 합으로 설명할 수 없다. 유기체 안에는 어떤 부분 어떤 부분이라고 구분하여 딱 잘라서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편의적으로 나눈 것이고 엄밀히 말하자면 모든 것은 하나로 엉켜 있다. 그렇다면 그 하나의 전체 모습만이 참된 실재라는 말이 된다. 그리고 진리라고 한다면 하나로서 그것 전체에 대한 것이요 이른바 부분이라는 것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역시 그 진리에 의해서만 제대로 주어질 수 있다. "진리는 전체이다"라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주어진 말이다. 헤겔은 이처럼 인간과 자연 나아가 사회와 역사 모두가 하나로 엉켜진 유기적인 전체로 본다. 그리고 그 유기적인 전체의 중심 원리 즉 자연 현상과 역사 현상을 합한 세계의 만상을 능동적으로 구성하고 이끌어 가는 원리가 곧 헤겔의 세계 이성 내지 세계 정신(Weltgeist)이다.
그런데 이 전체로서의 실재란 칸트 철학에서의 객관처럼 단순히 범주적 이성에 의해 구성되는 고정된 실체일 수는 없다. 그것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우주적 실재로서 시간 속에서 운동, 변화, 발전해 왔고 또 해 갈 우주 전체의 전 과정 즉 과거 현재 미래의 역사 과정 전체 즉 현실 전체이다. 그리고 이 현실로 실현된 전 과정 모두 세계 이성이 이끌어 온 것인 한,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요,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현실이 유기체적이고 전체적이며 흘러 움직이는 것인 한, 그것은 단순한 형식 논리 또는 객관적 범주로 파악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갖는 운동과 변화와 목적을 통일적으로 파악해야 하므로 형식 논리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논리로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 헤겔이 그 방범을 제시한 것이 현실과 역사의 파악 논리로서의 변증법(Dialektik)이다. 즉 헤겔의 논리학은 변증법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논리학은 현실 전체의 원리를 파악한다는 측면에서 참된 존재를 설명하고 인식하는 존재론이자 인식론이다. 요컨대 헤겔은 인간과 자연, 역사와 사회란 총체적인 유기 연관을 갖는 것이라 생각했으므로, 처음부터 이런 방식 저런 방식으로 잘라서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요, 오직 그것을 하나의 통일적인 연관으로 드러낼 수 있는 방법으로 그것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p281
3.2 세계 정신과 균사
두말할 나위 얼이 우리가 앞으로 살펴볼 이른바 헤겔의 역사철학적 사유 내용은 위와 같은 변증법적 사고에 의해 파악되고 해명되는 것이요, 앞에서 이미 언급한 세계 정신 역시 그러한 해명의 결과로서 제시된 우주적 전체 현실의 근본 원리이다 결국 헤겔에게 있어 역사란 이러한 세계 정신이 자신의 목적을 드러내고 실현하는 그 우주적 현실의 전 과정을 .말한다. 헤겔적 관점에서 보면 역사 과정의 궁극적인 담지자가 되는 이 세계 정신은 그 자체로 그 자신의 존재 방식과 생명을 지니는 초개인적인 객관성이요 보편자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사를 기획, 지배, 통어한다는 의미에서 이른바 신적인 세계정신이다. 인간의 이성이나 정신은 그러한 세계 정신에서 파생된 속성과도 같은 것이다. 개인적 이성, 주관적 정신은 개인적 삶을 이끌어 가고 그 삶이란 세계 이성에 의해 통어된다는 점에서 주관적 정신은 세계 정신에 통합된다.
그런데 세계사는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 개인의 욕망과 정열과 천재성 등 인간 스스로의 동기에 의해 이루어진 수많은 인간들의 문화적, 정신적 활동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그러한 개인들이 그 자신의 관심과 동기에 따라 자신의 완성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은 실은 저 세계 정신의 목적과 의도에 의해 기획된 세계 정신의 과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즉 세계 정신은 자신을 역사의 과정에서 실현시키는 데 있어 개인의 욕구와 정열을 도구로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제계 정신의 속임수 즉 이성의 간지(List der vernunft)이다. 즉 세계 정신은 자신의 신적 의지가 목표로 하는 것을 수행하기 위해서 인간의 의지를 이용한다 말하자면 역사의 보편적 원리가 개인의 특수한 목적 속에 은밀히 들어와 잠재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사의 모든 변화는 인간의 자유 의지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개인들의 배후에서 익명적으로 작용하는 객관적 세계 정신의 힘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작용이 최소한 단위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개인적인 인간 정신에서가 아니라 각 시대의 주도적인 민족 정신 또는 역사적 개인으로서의 영웅들에게서이다. 즉 세계 정신은 시대의 민족과 영웅을 이용하여 그 시대의 철학, 문화, 예술, 제도 등 그 시대의 정신으로 현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헤겔에게 있어서 역사를 이끌어 나가는 것은 이른바 그 시대의 상부 구조인 철학, 문화, 예술 등의 관념적 정신 세계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헤겔의 역사철학을 관념론의 극치로 부르는 까닭도 그곳에 있는 것이다.
@p282
3.3 역사의 목적과 국가
그러면 역사의 궁극 목적은 무엇인가. 앞에서 보았듯이 역사의 궁극적 주체는 정신이다. 그런데 정신의 본질은 자기 운동 즉 자유(Freiheit)이다, 그러므로 역사의 궁극 목적은 자유의 실현이다. 그러나 역사의 과정 자체가 자유의 진보는 아니다. 자유는 그것을 누리는 자가 자유임을 의식적으로 자각할 때 현실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 과정의 진보는 다름 아닌 자유 의식의 진보이다. 따라서 이른바 역사적 진보는 인간의 의식적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그림으로써 현실적인 것으로 된다. 즉 세계 정신은 역사의 진보를 그 정신의 보편성을 인식하고 이를 실현시키려는 인간의 의지와 활동을 통해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 정신은 이러한 역사의 진보를 실현키 위해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의 이념을 부단히 의식케 하고 의욕케 함으로써 마침내 그 목적에 가장 적합한 것을 찾아내서 만들어 내게끔 하는데, 그렇게 해서 산출된 것이 곧 현실적인 국가이다 즉 국가는 세계 정신이 역사 속에서 자유를 실현키 위한 목적으로 산출한 영역으로서 역사의 궁극적인 목표가 실현되는 곳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의 전개 과정을 통해 점차 발전된 국가의 형태로 드러나면서 자유의 진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헤겔은 자유를 실현해 가는 국가의 역사적 발전 형태로서 구체적으로 첫째 단계로 동방적 세계, 둘째 단계로 그리스적 세계, 셋째 단계로 로마 세계, 그리고 마지막 단계로 게르만의 세계를 제시하였다. 즉 게르만의 세계에 와서야 세계 정신은 신 앞에 만민이 평등하다는 기독교 사상을 섭취함으로써 인간이 그 자체 인간으로서 자유인 것이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헤겔이 중시하는 세계 정신의 발전은 그가 감격적으로 맞이한 이 게르만 세계에서 종결한다.
@p283
그런데 이렇게 특수한 형태를 취함으로써 세계사의 각 단계를 이루고 있는 국가는 사실상 내용적으로 보면 세계 정신이 스스로의 목적 아래 성립시킨 시대적 민족 정신이 산출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민족 정신은 역사의 주체로 비추어질 수도 있으나, 사실상 민족 정신은 세계 정신이 그 시대에서 특수한 모습을 취한 것에 불과하다 즉 세계 정신은 단번에 그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각기 특수한 국가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민족 정신의 모습으로 나타나 점진적으로 그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보편자로서의 세계 정신 이 민족 정신의 진리태요 민족 정신들은 이 보펀 정신이 구현되는 여러 계기들이다 그러므로 한 민족 정신은 세계사의 과정 속에서 몰락하면서 다른 민족 정신에 그 패권을 양도하는 등 흥망의 과정이 있을지라도 보편적 세계 정신은 그 과정을 이용하여 그 자신의 목적을 구현하는 것이다.
3.4 비판적 고잘
이와 같은 헤겔의 역사철학적 구도 안에서는 결국 모든 개인의 의식이나 정신은 하나같이 그 '시대의 아들'이다 철학 또한 자신의 시대를 초월할 수 없다. 그 시대의 철학은 단지 '사상 속에 반영된 그 자신의 고유한 시대'를 세계 정신의 의도대로 반영한 것일 따름이다. 따라서 세계 정신이 그 시대에서 실현코자 정해 둔 목표와 그 필연적인 과정에 일치하지 않는 어떠한 당위나 사상 이데올로기는 모두 그릇된 환상일 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진정한 자유는 그 필연의 자각'이다. 예컨대 급류를 건너 몸을 피하려 할 경우 놓여진 징검다리를 따라가야만 자유로울 것이요 그렇지 않는 한 급류에 휩쓸려 목숨을 잃는다. 따라서 진리는 그 필연적 계기와 과정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자 동시에 그 모든 특수한 것들의 총화로서의 그 전체이다. 즉 진리는 부분과 전체의 총화로서 유기체적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헤겔에 있어서 역사적 현실은 절대 이성의 현시로서, 계기적으로 나타나는 선과 악, 개인의 정열적 헌신과 고뇌 혹은 주저와 회피 그 어떤 것이든 모두가 세계 정신 혹은 세계 이성 스스로의 구현이다. 그러므로 서두에서도 언급하였듯이 '현실적인 것은 모두 이성적인 것이요, 이성적인 것은 필연적으로 현실적인 것'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계획의 목적이 자유의 실현인 한, 역사는 언제나 발전하는 것이다.
@p284
그러나 문제는 이 발전이 개별적인 개인 단위가 아닌 집단으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즉 헤겔의 역사철학적 체계에 사적 개인이 들어설 자리는 아무 데도 없다. 그리고 현실은 어떠한 현실이라도 정당화된다. 역사의 발전 또한 오직 그 시대의 역사를 이끄는 주도적인 민족 정신과 국가로 표출되는 한, 헤겔 역사 철학에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개인이나 어떤 집단 내지 민족은 이 거대한 정신의 계획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언제나 희생될 수 있는 한갓 이용물인 셈이다. 결국 헤겔에 있어 도덕적 인륜성(Sittlichkeit)이란 개인을 단위로 하여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정신 일반으로서 최고의 도덕적 권위를 갖는, 국가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요, 역사 과정에서의 특수한 민족과 국가의 도태 또한 그 드러난 것에 대한 세계 정신의 심판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사는 세계 정신의 법정인 것이다.
4. 마르크스의 역사철학
4.1 역사적 유물론
앞에서 살펴본 헤겔의 역사철학이 시사하는 핵심적 의미는, 인간 생활의 어떤 측면도 고립적으로 이해할 수 없고 오직 그가 속한 사회적 역사적 현실과의 유기적이고도 총체적인 관련 속에서 파악되는 것임을 밝힌 것이다. 마르크스(K. Marx)는 이러한 헤겔의 유기체적 총체성을 이어받아 인간의 사회적 삶의 구조와 변화를 인간의 사회적, 역사적 형성과 전개에 대한 총체적 분석을 토대로 해명해 내고자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그 해명의 열쇠가 되는 역사적, 사회적 삶의 본질적 기초에 대해서는 헤겔과 정반대의 견해를 표명한다. 즉 마르크스는, 정신이 그 시대의 모든 사회 경제적, 역사적 현실을 주도한다고 본 헤겔과 달리. 물질적 생산력 쉽게 말해 물질적 경제 구조가 그 시대의 역사적, 현실적 전개를 주도하고, 그 시대의 정신적 생산 즉 그 시대의 철학, 문화, 예술 등은 오히려 그 물질적 생산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의 이와 같은 역사철학적 관점은, 헤겔의 역사철학이 그 자신의 논리학, 정신현상학의 체계와 통일적 연관을 이루고 있듯이, 마르크스에게서 또한 그 자신의 변증법적 유물론(dialektischer Matealismus)과 통일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즉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을 드러내는 이른바 역사적 유물론(historischer Matealimus)이란, 그 자신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역사적, 사회적 현실에 적용하여 이룩해 낸 사회 발전의 유물론적 합법칙성에 관한 이론 체계인 것이다.
@p285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은 그의 저작 7정치경제학 비판7에 아래와 같은 정식화된 언명으로 잘 나타나 있다.
"인간은 그 생활의 사회적 생산에 있어서 일정한 필연적이고, 그들의 의지에서 독립된 제 관계를 즉 그들의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 상응하는 생산 관계를 맺는다. 이 생산 관계의 전체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 즉 현실의 토대를 이루어, 이 토대 위에 법률적, 정치적 상부 구조가 세워지며, 이 토대에 일정한 사회적 의식 형태가 대응한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 양식은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 과정 일반을 제약한다 인간의 의식이 그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그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다.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그 발전이 어느 단계에 달하면 현존의 생산 관계 또는 그 법률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 소유 관계와 모순되게 된다 이러한 관계는 생산력의 발전 형태에서 그 질곡으로 변한다. 그때 사회 혁명의 시기가 시작된다. 경제적 기초의 변화에 따라 거대한 상부 구조 전체가 서서히 또는 급격히 뒤집히는 것이다."
이처럼 유물사관은 무엇보다도 먼저 역사와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주요한 힘이 정신 또는 관념이 아니라 물질적 생산에 있음을 명백히 한다. 인간은 정치, 예술, 종교 등에 관여하기 전에 의식주에 필요한 재화를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떠한 사회도 물질적 재화의 생산 없이는 존립할 수가 없으며, 따라서 사회 생활의 전 과정, 정치 제도, 인간의 사상, 관념, 예술 등 이른바 상부 구조 또는 이데올로기는 그 사회의 경제적, 물질적 생산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의존하여 형성되는 것이다.
@p287
4.2 생산 양식과 역사 변화의 원리
마르크스는 이러한 물질적 생산 과정을 구성하는 것으로서 세 가지 요소를 들고 있는데 그것이 곧 생산 수단, 생산력, 생산 관계이며, 이 세 요소가 어떻게 관련되어 구성되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경제적 구조 내지 생산 양식이 결정 또는 변화되며, 정신적 생산은 그 변화에 따라 부차적으로 이루어진다. 생산 수단이라 함은 생산에 영항을 끼치는 기본 조건으로서 토지, 기계, 설비, 도로, 기후 및 지형, 원료 인구 등을 말하며, 생산력이란 그 사회에서 생산에 이용 가능한 모든 유형의 노동력, 기능, 도구 기술 및 앞서 말한 생산 수단을 통칭하는 말이다. 그리고 생산 관계란 위와 같은 생산 수단과 생산력을 조직하고 그 생산물을 분배하는 현존의 사회 관계 내지 소유 관계를 가리키는데, 단적으로 생산력을 둘러싸고 편제되는 소유 관계를 말한다 결국 한 사회의 변화란 이와 같은 세 요소가 어떤 상태에서 어떤 관계를 맺으며 어떤 결과를 초래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요컨대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은 역사 과정 속에서 그 요소들의 관계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고 그에 따라 어떠한 필연적인 사회 변화가 이루어지는지를 지나온 역사적 전개에 대한 분석을 통해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이와 같은 마르크스의 의도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밝힘과 동시에, 그것은 왜 필연적으로 붕괴할 수밖에 없는가를 드러내고자 하는 데 있다 하겠다.
그러면 역사 과정에서의 사회적 변화는 위의 세 요소와 관련하여 어떤 일반적인 합법칙성을 가지고 일어나는가? 마르크스는 이제 이러한 변화의 원리에 변증법적 유물론을 적용하고자 한다. 즉 사회의 변화는 헤겔에서처럼 정립과 반정립 그리고 그 양자의 종합으로서 이루어지는 변증법적인 방식에 따라 이루어진다. 다만 이와 같은 변증법적인 구도를 형성하는 인자가 마르크스에게선 정신 대신에 경제적 구조의 핵심 요소들이 자리잡는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이 요소 숭 이른바 생산력이라는 요소는 인간 자체가 끊임없이 자연을 가공 변형시키면서 창조적으로 자신의 삶을 구축해 나갈수 밖에 없는 한, 필연적으로 성장과 발전을 거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시점 그 당대의 생산력과 생산 수단을 기초로 가장 바람직한 형태로 처음의 생산 관계가 성립되었다 하더라도, 생산력이 끊임없이 성장함에 따라 그 생산 관계는 생산력에 합당한 생산 관계로서의 적합성을 왔게 된다. 이렇게 되면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모순 내지 불균형이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정도로 증폭되면서 생산 관계의 변화를 통해 그 모순을 해소하고자 하는 욕구가 발생한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이러한 욕구는 필연적으로 투쟁으로밖에 나타날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생산 수단을 소유한 지배 계급은 이해 관계상 필연적으로 기존의 생산 관계 즉 현존하는 재산 분배 관계를 변함 없이 고수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장하는 생산력이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기존의 분배 관계는 어떻게든 '산산이 부서져야'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전개 양상을 아래의 유명한 두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관계는 생산력의 발전 형식에서 그 족쇄로 변한다. 그리고 이때 사회적 혁명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요컨대 사회적 역사적 변화는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모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p287
4.3 세계사의 유물론적 에석
결국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은 지나온 역사의 과정에서 이러한 혁명적 변화가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근거를 밝히고, 역사 과정에서 나타난 구체적인 생산 관계의 변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시도라 하겠다. 그러나 과연 모든 인간의 역사가 생산 관계와 생산력간의 모순에 의해 결정적으로 규정되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혁명적인 생산 양식의 변화를 초래하는 것인가? 세계사에 있어서의 혁명적인 사회 변화의 단계로서 마르크스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원시 공산 사회, 노예제 사회, 봉건제 사회, 자본주의 사회, 공산주의 사회에로의 전진적 교체를 들고 있는데, 이제 그러한 교체 과정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을 개관하여 보자. 마르크스가 설명하는 세계사의 변화 과정은 이러하다. 우선 마르크스는 역사의 최초 단계로서 그야말로 자발적인 노동에 의한 공동 생산과 양든 재산의 공동 소유만이 존재하는 원시 공산 사회를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산 관계는 생산력의 발달에 따른 분업과 잉여 생산물의 발생, 개인 또는 씨족간의 생산력의 차이와 그 분배간의 불균형 등을 초래하게 된다. 그리하여 처음의 공동의 생산 관계와 모순되는 사적 소유 관계가 싹트고, 부채 관계가 성립되며, 급기야 예속적인 노예 관계로까지 나아간다. 이렇게 하여 원시 공산사회는 붕괴된다.
더욱이 생산 조건의 확보를 위한 씨족 간, 집단 간의 전쟁은 전쟁 포로라는 대량의 노예들을 발생시키고. 이것은 다시 노예 노동력의 확보를 위한 전쟁으로 확대시키면서 강력한 국가 통제를 기반으로 한 노예제 사회를 성립시킨다. 그러나 전쟁 후의 안정기를 거치면서 주도 계급인 기사 계급은 부여받은 봉토와 노예의 영주가 되어 이른바 토지 소유자로서의 영주와 농노라는 생산 관계를 성립시키고, 그 생산력의 성장에 힘입어 왕권으로부터 독립적 지위를 쟁취한 봉건 제후들이 되면서 이른바 봉건제적 장원 경제를 성립시켜 왕권 중심의 노예제 사회를 붕괴시킨다.
그러나 이렇게 성립한 봉건제 사회도 생산력의 발달에 따라 잉여 생산물에 대한 농노의 사적 소유 및 부의 축적이 가능해지고, 나아가 부를 통한 농노계급으로부터의 해방도 가능하게 되면서, 점차 영주와 농노간의 지대 징수를 둘러싼 갈등과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 갈등의 심화는 결국 농노와 영주들의 대립은 물론이고 영주와 왕권과의 대립을 불러일으키고, 왕권은 이 대립 속에서 해방 농노 출신의 진취적 도시 상인 및 수공업자 계급과 결탁하여 승리함으로써 봉건제적 생산 관계는 해체 위기에 봉착한다. 이후 부농과 도시 상인들은 절대 왕권에 의한 지리상의 발견 등의 여건에 힘입어 급진적인 사회경제적 약진을 달성하고 시장 및 교역의 확대, 공장제 수공업 및 임노동을 성립시키고, 급기야 봉건적 신분 질서와 특권에 안주하려는 절대 왕권마저 붕괴시켜 이른바 자본주의 사회를 성립시킨다.
4.4 비판적 고잘
그러나 이와 같이 성립한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도 생산력의 성장에 따른 생산 관계상의 모순을 필연적으로 야기시키고, 마침내는 그 모순을 해소코자 하는 노동자 계급의 투쟁에 의해 필연적으로 새로운 생산 관계 즉 공산주의적 생산관계로 이행하게 된다고 마르크스는 주장한다. 결국 모든 사회 경제적 변화는 이상에서 보다시피 근본적으로는 생산력의 성장에 기인하는 생산 관계상의 모순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것이고,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은 그 필연적인 역사 과정의 내적 법칙을 체계적으로 밝히고자 한 것이다.
@p289
그러나 독일 이데올로기, 공산당 선언, 정치경제학 비판서문. 그리고 자본론 등에서 나타나는 그의 위와 같은 설명은 예상외로 매우 개략적인 데다가 필연적인 변증법적 법칙의 적용 또한 봉건제의 붕괴와 자본주의 등장까지에 대한 설명에서만 크게 돋보일 뿐이다. 사실상 역사 과정에서의 이른바 생산 양식의 변화 단계를 분석해 보면. 봉건제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에로의 이행 단계 정도를 제외하고는 사회 변화에 있어 새로운 생산 관계에 의한 혁명적인 이행이라고 볼 수 있는 단계는 거의 없으며, 그 변화는 점진적이고 매우 복합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점이다.
그럼에도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의 의의는 사회 발전의 참된 기초를 물질적 생산에서 찾음으로써 직접 물질적 생산에 종사하고 있는 인민, 노동자 대중의 창조적 역할과 역사적 사명을 높이 평가한 데 있다. 즉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에는 인간 사회를 피폐하게 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사회를 붕괴시키고, 피억압 계급인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해방하고, 나아가서 전 인류를 해방해야 한다는 실천적 목표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혁명적 실천의 요구와 정당성을 입증하는 유물사관을 기초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필연성을 단정함과 동시에 혁명에의 봉기를 촉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마르크스가 '철학은 세계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변혁'이라고 말한 까닭도 그곳에 있다.
그리하여 마르크스의 역사 유물론은 필연적이고도 본질적으로 계급 투쟁의 역사관 내지 변혁을 뒷받침해 주는 실천적 이론으로 제기된다. 이 점에서 마르크스의 역사관은 헤겔의 사변적 역사관과 극명한 차별성을 갖는다. 헤겔에 있어서는 역사는 변증법적 모순 대림을 통해서 발전하는 것이지만, 그 모순 대립은 관념 내에 있어서의 모순 대립이었으며 따라서 그 지양도 역시 관념내에서의 개념적 조작에 불과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계승하면서도 모순 대림을 한낱 개념적인 것으로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적 시민 사회에 있어서의 부르조와지와 프롤레타리아라고 하는 현실적인 계급의 대립으로서 파악하였으며, 따라서 모순 대립의 지양도 사회주의 실현을 위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현실적 정치 운동에 의하여 가능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p290
2. 주제 토론: 과연 역사의 법칙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가?
1. 토론 과제
다음 글은 역사의 법칙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역사 철학적 입장에 대해 반대하는 주장을 담고 있다. (기본 강의)를 염두에 두면서, 과연 역사의 법칙이 존재하는가에 대해 토론해 보자.
인간 역사의 궁극적 목적에 대한 확신이란 인간의 역사가 도달하고자 하는 최후의 목적이 확실히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이 목적에 다다르기까지의 그 아득히 긴 시간 내의 그 모든 역사적 사건들을 어떻게 하나의 도식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일까? 사실상 이러한 역사주의적 발상의 시원은 역사의 배후에 신의 계획이 숨어 있고 그 계획을 실현하는 도구로 특정의 민족이 선택되었다고 믿었던 선민 사상에까지 소급된다. 오늘날에도 그와 같은 선민주의적 특징은 근대의 몇 가지 영향력 있는 역사주의적 사상들 속에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 하나는 우파의 인종주의나 파시즘의 철학이며, 다른 하나는 좌파인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이다. 선민의 자리를 인종주의는 선택된 인종으로, 마르크스는 선택된 계급으로 대치했을 뿐이다. 인종주의의 경우 역사 발전의 법칙은 자연의 법칙과 같은 것으로 이해된다 선택된 인종의 생물학적 피의 우수성이 역사 과정의 과거, 현재, 미래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르르스의 경우 역사 발전은 물질적 생산력에 기초한 경제적 법칙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런 측면에서 우파의 역사철학은 자연주의적 역사주의요, 좌파의 역사철학은 경제적 역사주의이다.
역사주의의 사상은 인류의 가장 오래 된 꿈 중의 하나인 미래를 점치는 예언의 꿈을 이론의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역사주의자들은 닥쳐올 미래를 과거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분석을 통해 통찰력 있게 간취할 수 있고, 그러한 지식을 우리의 정치에 적용함으로써 우리의 역사적 현실을 가장 바람직한 방식으로 대응해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상들은 증명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체계 또는 주관적 해석으로 채워진 전체론적 주장에 기초하여, 개인의 창조성과 주체성을 역사 법칙과 사회적 삶의 필연적 구조라는 굴레에 묶어 무력화시킴으로써, 결국은 역사의 주인으로서의 인간의 운명을 노예화하는 결과를 초래하고야 만다.
@p291
2. 기본 논증과 비판
2.1 포퍼의 비판적 합리주의
우리는 (기본 강의)에서 역사 과정의 법칙성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역사철학적 입장들을 살펴보았다. 플라톤의 역사철학이 그 자신의 실제의 역사관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이들 모두는 인간 삶과 역사의 과정 전체에 관통하고 있는 모종의 필연적 법칙 내지 선천적 원리의 존재를 하나같이 인정하고 있다. 실제로 몇몇 영향력 있는 역사주의 사상은 질곡에 빠진 역사적 현실 속에서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좌절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과 꿈을 심어 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오히려 정치적 폭압과 비인간적 화를 초래하기도 했다. 스탈리니즘, 파시즘, 나치즘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렇다면 과연 역사 철학적 관점들은 전혀 무가치한 것이 아닌가? 그들이 주장하는 소위 역사의 법칙이란 것은 과연 우리가 승인할 수 있는 진정한 법칙의 자격을 갖는 것일까?
앞의 제시문은 이른바 반역사철학적 입장에 서 있는 대표적인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인 영국의 비판적 합리주의자 포퍼(K. Popper)의 주장을 정리한 것이다 포퍼의 비판적 합리주의는 20세기 스탈리니즘, 나치즘, 파시즘이 저지른 정치적 폭압과 살인에 대한 혐오를 배경으로 그 사상들의 공통적인 특성인 전제주의적 사상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그의 유명한 저술 (개방사회와
그 적들 Open society and its enemies)이란 책의 제목에 나타나 있는 '개방 사회의 적들'이란 다름 아닌 우리가 살펴본 역사철학자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 세 사람이다. 포퍼는 그 세 사람을 역사상 가장 영향력을 끼친 전체주의 사상가로 지목하고, 그들의 사상을 일괄해서 '역사주의'로 규정하여 혹독하게 비판한다.
포퍼에 의하면, 역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역사 법칙이란 단순한 주관의 해석에 불과한 신화적인 것이자 허구적인 것이라고 맹렬하게 비판한다. 물론 이러한 비판의 직접적인 근거는 그가 동시대에 체험한 야만적인 이데올로기 때문이지만, 그러한 관점을 형성하게 된 이론적 바탕에는 반증주의라는 그의 과학철학 사상이 깔려 있다. 과학 이론의 진리성이란 그 이론이 얼마나 많은 증거를 갖추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론이 얼마나 그 이론에 대한 반증으로부터 견뎌 내느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반증주의의 요점이다. 다시 말하면 과학적 검증에 있어서는 어떤 가설의 적극적인 구축보다는 부정적 사례의 연구를 통해 가설을 검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어설프고 불확실한 성과에 집착하는 것보다 명백한 과오를 수정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2.2 점진적 사회 공학
이러한 반증주의적 관점은 사회과학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이 경우 두말할 나위 없이 허술하기 그지없는 몇 가지 사회과학적 전제를 토대로 마치 전체 현실과 역사에 적용될 수 있는 진리인 양 주장하는 전체주의 사상은 전혀 과학적인 진리성을 가질 수 없는 터무니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무언가 새롭고도 획기적인 환경 여건을 이루어 낸답시고 터무니없는 황당한 계획과 이론을 세워, 그 객관적 안전도와 타당성은 도외시한 채 의욕만 앞세워 어떻게 든 새 집을 지어 보려고 하느니, 지금의 여건에서 확실하게 진단되는 문제점이나 확실하게 짚어서 고쳐 나가는 게 낫다는 것이 포퍼의 생각이다.
전체주의 사상에 기초한 정치 사상은 거의 예외 없이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사회 변혁을 죄해 왔다. 그러나 포퍼는 위와 같은 반증주의에 입각한 반증 가능성에 대한 탐문을 과학적 이성의 중요한 역할로 보고, 전체론에 대립하는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그 과학적 방법을 사회 이론에 적용하여 이른바 점진적인 사회 공학을 주장한다. 점진적 사회 공학의 관점에선 이른바 역사주의자들이 말하는 사회 변혁상의 목적의 존재 및 그 합리성이란 공학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도외시되어야 마땅하다 오히려 그러한 목적과 관련하여 사회 공학자들이 할 일이란 다만 그 목적들이 상호 양립 가능한 것인지 실현 가능한 것인지만을 판단하는 것뿐이고, 대신 관심을 집중해야할 것은 구체적으로 지금 있는 확실한 문제점의 인식과 해소에 있는 것이다.
2.3 비판적 토론
사실상 포퍼의 이론은, 20세기에 인류에게 역사상 가장 비극적이고도 피폐한 역사적 체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대의 특정 대안의 수립보다는 공격적 비판과 경계 및 반성에 우선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그 공격 배후에서 스스로를 지탱하는 기반 자체 및 그 자신의 대안은 과학이론에 기초한 역사주의에 대한 비판의 철저성에 비하면 전통적인 현존 질서의 전제에다 이성을 종속시키는 매우 소극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 What is History?)라는 역사 사상에 관한 고전적 저술을 지은 영국의 사상가 카아(E. H. Carr)는, 이러한 포퍼 이론의 성격을 정책에 대한 실제적인 개량책을 제안하는 자격은 있지만 그 근본적인 전제나 궁극적 목표를 의심할 자격은 없는 영국 관리에 비유하고 있다.
@p293
이른바 점진적 사회 공학이라는 것은, 내용적으로 따지고 보면 역사적으로 경험론적 전통 위에서 확립되어 온 인간 행태의 가장 일반적인 문제 해결 방식, 즉 실험해 보고 고치고 또 그에 기초해서 해 보고 또 고치고 하는 신중한 삶의 지혜로서의 시행착오 이론에 입각한 사회 이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포퍼가 말하는 역사주의와 그 역사주의에 대한 비판은 헤겔의 관점에서 보 면 모두 그 시대 정신의 반영이요, 그 역사주의에 대한 비판 또한 그 단계에서 요구되는 가장 적절한 시대 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실제로 철학사를 돌아보면 독단론이 득세한 후 문제점이 깊어지면 회의론과 경험론이 나타나고, 경험론의 소극성과 보수성이 사회적 모순에 속수 무책일 때 또다시 강력한 목적 지향의 독단론이 다시 나타난다. 그런 측면에서 포퍼의 이론은 20세기 전반에 인류를 위기에 몰아넣었던 특정 독단론의 위해에 대한 과학과 자유주의 에 기초한 매우 적절하고도 유의미한 비판을 담고 있다. 특히 그들에 의해 위협받고 있었던 자유주의 사회 특히 영국 사회의 경험론적 전통의 안정성을 고려하면, 급작스런 사회 변혁이라든지 새로운 사회 목표라든지 하는 따위는 결코 합당한 사회적 요구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것들이라 하겠다.
그러나 역사에는 그리고 오늘의 현실에는 그 반대의 정황도 적지 않다. 누적된 사회적 모순으로 갈등은 심화되고, 그것을 조정할 국가의 권력도 점점 약화되고, 사회적 통합을 이끌 중심적인 가치관도 사회적 목표도 없이 나라 전체가 흔들릴 경우라든지, 대혁명과 혼돈의 시기를 지나 새로운 질서의 수립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는 시기에는, 사실상 포퍼의 반증 가능성에 기초한 사회 이론은 사회 사상으로서의 작용력을 갖기 힘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변화를 가로막는 반동과 주저의 이론으로 이용될 수도 있는 것이다.
@p294
카아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과학이건 역사이건 사회이건 간에 인간 현상에 있어서의 진보라는 것은 인간이 기존 제도의 단편적 개량을 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상과 이성의 이름으로 현존 제도와 그 기초를 이루는 전제를 향하여 근본적인 도전을 시도한다는 대담한 각오를 통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3. 읽기 자료: 포스트 모더니즘의 역사 이해-푸고를 중심으로
1. 모던과 포스트 모던
헤겔, 마르크스 등의 전통적 역사철학은 역사를 총체화하여 연속성과 진보의 틀로 파악하면서 그 역사의 법칙성을 찾아 내고자 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역사철학이 상정하는 역사의 연속성과 인식 가능성은 독단이며, 오히려 역사속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단절과 불연속성, 우연적 돌연변이임을 강조하면서 종래의 역사 이해와는 다른 독특한 방식으로 역사를 문제삼는 입장이 새롭게 제기되고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통칭되는 이러한 입장들은 다양한 사상가들에게 나타나는 일종의 경향이라고 몇 마디로 정리하긴 힘들다. 하지만 역사와 관련하여 이 입장이 보여 주는 태도를 집약하면, 이들은 인간은 역사 위에 저 있거나 시대를 뛰어넘어 역사를 주도할 수는 없으며, 인간이 역사 안에 있는 한, 역사는 관조의 영역이 아니라 실천의 영역이므로 역사를 완전하게 파악할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역사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관점과 대비시키기 위해서 이른바 '역사'를 부정하고 작은 역사들을 주제화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관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모던'과 '포스트 모던'을 정의하기로 하자. '모던(moderne; modernity)'이란 서구의 현대를 주도해 온 사상적 흐름인 계몽주의적 전통 또는 이성 중심주의적 태도를 가리킨다. 서구에서 계몽주의는 이성의 빛--합리적 과학, 보편적 도덕, 자율적 예술--으로 암흑을 추방함으로써 인간의 성숙과 해방을 가져오려는 시도이다.
이런 모던의 전형적인 형태로 프랑스 계몽주의자인 롱도르세(Condorcet)의 관점을 정식화해 보자. 그는 (자연)과학의 합리성을 모델로 삼아 인간을 해방시키는 길을 신봉한다. 계몽은 관찰, 실험, 검증이란 과학적 도구를 사용하여 자연의 비밀을 풀고, 과학적 지식의 발전을 모형으로 삼아 인간의 이성을 발전시켜 세계를 남김없이 인식하려 한다. 그리고 이런 이성을 가로막는 선입견, 미신, 전통을 거부하고 비이성적인 사회 제도를 합리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전통적 세력에 저항해서 투쟁한다. 그래서 이것은 시민적 자유를 보장하는 정치 체제를 추구하고, 과학의 성장과 기술적 진보를 촉진시켜 사회적 불평등을 제거하는 인간 해방과 이성적 문명의 건설을 약속한다.
한마디로 10세기까지의 근대 서양 철학은 이성주의의 독무대였다. 그러나 '포스트 모던(postmoderne; postmodernity)'은 이런 계몽주의적 이성 중심주의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이성의 이름으로 자명하게 여겨졌던 기존의 모든 지식 체계를 뿌리에서부터 뒤흔들고,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인간과 역사를 재 구성하고자 한다 이것은 이성을 비판하여 그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자는 차원을 휠씬 뛰어넘어 이성 자체를 거부하려는 이른바 '전복의 철학'으로서 급진적인 반이성주의이다. 포스트 모던은 모던이 기초로 삼는 인간 주체, 이성, 역사의 진보 등이 란 모두 권력의 억압을 합리화하는 신화에 불과하다고 본다. 즉 계몽과 해방을 담당하는 이성과 총체성 이 란, 실제로는 억압적 이고 전제적질서를 옹호하고 정당화하는 것으로, 권력과 지식의 상호 작용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며, 근대사의 불행인 파시즘, 스탈리니즘은 이와 같은 이성, 총체성에 중심을 둔 전체주의적, 모던적 사고가 얼마나 엄청난 폐해를 가져다 주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2. 푸코의 입장
2.1 역사의 불연속성
이성에 대한 부정은 역사적 이성에 대한 부정을 포함한다. 그러면 독특한 방식으로 역사적 탐구를 하면서 역사를 부정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선도한 푸코(M Foucault)의 관점을 통해 역사철학에 대한 부정이 이성, 동일성, 총체성, 진리에 대한 부정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펴보자.
푸코는 역사란 인간의 의도에 따라 전개되거나 그것의 발전, 미래가 보장되거나 미리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역사란 하나하나 쌓여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질적인 단층들이 서로 무관한 계열을 이룬 것일 뿐이다. 통상적으로 역사철학은 연속성과 인식 가능성(intelligibility)을 상정한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사건들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그것들을 연속적 운동 안에서 일정하게 자리 매김한다. 그런데 푸코는 그러한 연속성과 인식 가능성을 부정한다. 푸코는 (지식의 역사에서) 역사적 연속성과 총체성이라는 독단을 깨뜨리고 '단절', '불연속성', '돌연변이' 등을 강조한다. 이러한 시도는 과학사에서 비연속성을 강조하는 바슐라르와 캉귀렘 등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p296
푸코는 종래의 역사 이해와는 다른 독특한 방식으로 역사를 문제삼는다. 그는 고고학적 방법과 계보학적 방법을 통해 서구의 '진리의 역사'를 재검토한다.
푸코는 객관적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관해 '말해지고 씌어진 것들'인 담론들--과학적, 철학적인 문학적, 법률적 텍스트 등. 이야기(recits), 제도적 규율 들, 협정. 안내 책자, 약호 체계, 정치적 결정 등--에 주목한다. 이른바 푸코의 담론에 관한 고고학은 특정한시대의 특정한 지식과 이론들이 가능한 조건을 찾는다. 즉 지식이 어떤 질서를 이룬 공간에 따라 구성되는가를 추적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푸코는 고고학을 통해 각 시대의 지식 질서가 각 시대나 사회마다 다르다는 것을 강조한다. 곧 사람들은 모든 시대에 항상 같은 틀로 사고하지는 않는다. 또한 과거의 사고가 쌓여 그것이 다음 시대로 전승, 발전되는 것도 아니다. 한 시대는 다른 시대와 연속된 것이 아니라 단절된 것이다.
예컨대 르네상스까지 정상적 세계의 일부분으로서 따로 격리되지 않았었던 '광인'들 내지 사회적 일탈자들--방랑자, 게으르고 방탕한 자, 신을 모독하는 자, 난봉꾼, 성병 환자, 자살 기도자 등--이 17세기에 와서는 비정상인으로 구분되어 정상인의 세계로부터 엄격하게 분리, 감
금되고 이른바 '광기'에 대해서는 언급도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 또한 다만 당시의 서구 사회를 지배한 이성주의의 잣대에 의한 것일뿐, 각 시대마다 광기와 정상에 대한 관점은 각각 다른 것이고 각기의 관점은 다른 관점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물론 푸코는 이런 관점의 교체를 광기에 대한 인식의 심화나 발전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광기를 감금하는 것이 유일하고 필연적이라는 주장은 독단에 불과하며. 그것은 다만 시대마다 권력과 지식이 상합하여 만든 그 시대의 지식의 기준으로서 권력의 억압 구조를 반영하면서 각 시대마다 다른 이른바 그 시대의 '에피스테메(episteme)'일 뿐이다.
@p297
2.2 역사의 거부
이와 같이 푸코는 담론들의 구조를 분석하면서 전통적인 지성사를 비판한다. 그는 지성사나 역사 일반을 잘 짜여진 체계나 연속적 인 진보로 이해할 수 없다고 본다. 전통적 역사 이론은 불연속적인 것을 장애로 여기고, 그것을 극복하여 연속성을 만들어 내고자 한다. 그래서 이 관점은 고립된 사건들의 표면 밑이나 뒤에 매끈한 인과성이나 연속적 관계를 찾아 내려 한다. 푸코는 이러한 시도가 역사를 형이상학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라고 본다 푸코에 의하면 종래의 '총체적' 역사는 모든 현상들을 하나의 단일한 중심--원리, 의미, 정신, 세계관, 사회나 문명의 전반적 형식--주변에 질서 있게 배치한다. 그것은 다양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실천들을 동일한 유형의 변화에 예속시키고, 그것들을 거대한 연속으로 질서 짓는다.
예를 들어 역사를 자유 의식의 진보로 볼 때 역사적 사건들은 자유와 관련하여 취사 선택된다. 선택된 사건들은 최초의 부자유로부터 최후의 완전한 자유란 종말, 목적을 향하여 발전하는 것으로 배치된다 이것은 단계적으로 보다 자유로운 상태로 자유가 점진적으로 확대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역사적 사건들 전체를 주체의 정신--유물론의 경우에는 노동과 생산--에 귀속시켜 역사를 주체가 자기를 획득하는 과정으로 본다.
그러나 이와 달리 푸코는 사건이나 과정 배후의 다양성, 복합성을 드러내고 그것들의 '단절'과 '불연속'에 주목한다. 즉, 역사에서 어떤 연속성이나 불변적 본질, 총체적 구조를 상정하거나 추구하지 않고, 역사를 다양한 힘들 간의 투쟁이나 대결로 이해한다.
이처럼 푸코는 역사를 하나의 총체성의 틀로 파악하는 전통적인 역사철학을 거부한다. 그는 역사적 객관성을 확보할 수 없으며, 역사가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불연속적이라고 본다. 그의 역사는 어떠한 동력도 없고, 인과적 설명도 없고, 목적성도 없는 역사인 것이다.
@p298
2.3 니체적 관점
인간 및 역사에 대한 푸코 나름의 이해 및 분석 방식으로서 이른바 푸코의 계보학은 어떤 고정된 본질, 다양한 현상들 밑에 있는 법칙, 형이상학적 목적성이 없다고 본다. 여기에는 이미 근대 철학의 근대성을 선구적으로 부정하고 뛰어넘고자 했던 니체(F.Nietzsche)의 관점이 깔려 있다 즉 푸코는 모든 것이 해석해야 할 '사실'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머 '해석'이라고 주장한다. 해석할 것에 절대적으로 앞서는 고정적이고 객관적인 것이란 없다. 그래서 해석은 텍스트나 세계의 고정된 의미가 아니라 다른 해석을 지시한다. 즉 해석은 다른 해석과 관계 맺고, 그 의미는 이 관계 안에서 상대적, 잠정적으로만 고정된다. 따라서 계보학은 역사를 사실들이 아니라 해석들의 역사로 기록한다.
니체가 의미, 가치, 덕, 선으로 가장된 권력 의지를 폭로한다면. 푸코는 여기에서 일정한 권력 효과를 갖는 '진리 의지'를 찾아낸다. 역사는 보편적 이성의 진보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권력들의 연극으로서 끝없이 반복되는 '지배의 연극'을 보여 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 전체는 하나의 감옥이다.
이처림 푸코는 종래의 위장된 역사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현실적 역사(Wirkliche Historie)를 드러내고자 한다. 그것은 역사를 총체화하려는 초역사적 퍼스펙티브에 반대하고 그 내적 발전을 추적하는 것이다. "역사가의 역사는 그 지점을 시간 바깥에서 찾고 그것에 대한 판단을 묵시록적 객관성에 기초를 두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에 반해 '현실적 역사'는 모든 것을 역사적 운동 안에 둔다. 시대를 넘어선 영원한 진리와 정의, 미의 이상을 거부하고 그것들이 역사 안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역사를 뛰어넘어 모든 시대에 똑같은 것으로 존속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들은 역사적으로 규정되고 역사 안에서 작용하는 것이다.
2.4 비판적 고찰
이상의 내용에서 포스트 모던이 이성의 전능함과 역사의 연속성과 진보를 내세우는 역사철학이 지닌 억압적 성격을 경계하는 태도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억압이 없는 해방된 사회는 무엇을 근거로 세워질 수 있는가? 근대 주체 중심주의적 이성이 아니라면, 반이성에 근거를 둔 사회인가? 푸코는 계보학적 연구를 통하여 권력과 지식의 체계를 단순히 기술하며, 그 자신은 어떤 권력 지식 체계가 다른 것보다 더 정당하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그는 어느 편을 든다는 것을 거부한다. .심지어 권력은 악이고 그에 대한 저항은 선이라는 무정부주의적 교의조차 거부한다. 그러므로 그는 계보학은 비판이 아니라, 억압적인 권력 지식 체계에 대하여 투쟁하려는 경우에. 그 전술이며 무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p299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하버마스(J. Habermas)는 "전술과 무기 이전에 싸워야 하는가 아닌가가 결정되어야 하지 않는가?"라고 반문한다. 하버마스는 이렇게 말한다. "적의 약점과 강점에 대한 가치 중립적인 분석은 투쟁을 하고자 원하는 사람에게만 소용이 있다. 그러나 왜 싸워야 하는가? 왜 투쟁이 복종보다 좋은가? 왜 지배는 저항되어야만 하는가? 일종의 규범적인 개념을 도입함으로써만, 푸코는 이런 질문에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성에 관한 철학적 담론) 어떤 지식도 권력의 산물로서만 이해하는 계보학자 푸코의 입장으로서는 사회의 대안을 제시할 수 없을 것이며, 설사 이성의 시대가 인간 삶의 위기를 가져다 주었을지라도 그러한 위기의 극복 또한 결국은 이성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하버마스 비판의 핵심이다.
물론 이와 같은 하버마스의 비판이 푸코류의 이론이 갖는 강점을 모두 무력화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이러한 이성 비판이 지닌 시대적 의미를 숙고해야 한다. 왜냐 하면 이성 비판이 곧 사고 자체에 대한 거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완전한 진리와 정의의 억압적 성격에 유의하면서, 보다 나은 삶과 사회를 향한 노력과 그것의 역사적 열매를 모두 버려서는 안된다. 이것은 역사의 고정된 목적이나 역사의 필연성을 이야기하는 신화를 부단히 반성적으로 되물어 보게 하며, 역사 속에서 부딪치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도 해결해 볼 것을 충고해 준다. 역사철학은 역사의 안내자이어야 할 뿐 역사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된다. 이런 점에서 역사철학에 대한 부정은 역사의 자리에 인간을 남겨 둔다.
한전숙, 이정호 지음. (철학의 이해), 한국방송통신대 출판부, 1996.
@p300
연습 문제
1. 역사와 역사 의식
1) 역사에 대한 반성적 고찰이 필요한 이유는?
2) 역사 의식 이 란 무엇인가?
2. 플라톤의 역사철학
1) 플라톤이 말하는 이상 국가의 기본 구조와 요체는?
2)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 인간의 본성은 어떻게 규정되고 있는가?
3) 이상 국가의 와해 원인과 그 과정은?
4) 인간 본성의 등질화가 의미하는 바는?
5) 플라톤이 민주정을 비판하는 근거는?
3. 헤겔의 관념론적 역사철학
1) "진리는 전체이다"라는 말의 의미는?
2) 역사는 절대 정신의 자기 전개라는 말의 의미는?
3) 이른바 '이성의 간지'란 무엇인가?
4) 헤겔이 주장하는 역사의 궁극 목적은?
5) '자유는 필연의 자각'이란 말의 의미는?
4.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철학
1) 헤겔 역사철학과 마르크스 역사철학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2) 마르크스가 파악한 역사 전개의 기본 동력은?
3) 마르크스가 파악한 사회 관계 또는 생산 양식의 변화 원인은?
4)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이 변혁 이론적 성격을 갖는 이유는?
5) 역사적 유물론의 문제점은?
5. 포퍼와 푸코
1) 포퍼가 말하는 역사주의 란?
2) 포퍼가 비판하는 역사주의의 폐해는?
3) 사상사적으로 모던과 포스트 모던이 의미하는 바는?
4) 역사의 연속성, 총체성에 대한 푸코의 견해는?
5) 포스트 모더니즘의 의의와 한계는?
@p301
참고문헌
1. 카아 지음,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와 역사철학에 대한 균형 있는 이해를 도모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책으로서, 역사와 관련한 교양 도서로서 자주 추천되는 정평 있는 고전적인 역사 사상서.
2. 필드지음, 양문흠 옮김, (플라톤의 철학), 서광사.
우리 나라에서 소개된 플라톤 철학 개설서 중에서 가장 권위 있는 수준의 내용을 담고 있는 책으로서, 복잡하고도 어려운 플라톤의 사상을 일목 요연하게 정리, 해설, 소개한 좋은 책.
3. 서양고대철학회 엮음, (서양고대철학의 세계). 서광사.
우리 나라 고대 그리스 철학의 태두 고 박홍규 교수 고희 논문집으로서, 고대 그리스 철학 특히 플라톤 철학의 주요 문제들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들이 담겨 있는 책
4. 최재희 지음. (헤겔의 생애와 사상), 이문사.
우리 나라에 체계적으로 헤겔 철학을 처음 소개한 고 최재희 교수가 헤겔 철학에 대한 오랜 강의 경험을 바탕으로 쉽고 간명하게 헤겔 사상에 관해 논한 책.
5. 루이 뒤프레 지음, 홍윤기 옳김,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기초), 미래신서.
우리 나라에 소개된 마르크스주의 소개서 중에서 균형 있는 관점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을 소개한 몇 권의 책 중 한 책 .
6. 래빈 지음, 문현병, 이부현, 이찬훈 옮김. (소크라테스에서 사르트르까지), 동녘 1993.
서양 철학 사상 주요 철학자들 6인 플라톤, 데카르트, 흄. 헤겔, 마르크스, 사르트르의 사상을 아주 간명하면서도 매우 심도 있게 정리, 소개한 책.
7. 김세균 감수,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전집), 박종철출판사.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박종철 출판사의 의욕적인 기획에 따라 그 일부가 번역 출간된 사회과학 및 철학의 고전적 저작. 마르크스 엥겔스의 저작으로서 사상과 관련한 우리 나라 번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책.
8. 포퍼 지음, 이한구, 이명현 옳김, (열린사회와 그 적들 I, II). 민음사.
20세기 초를 비극의 시대로 이끈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의 배후 사상으로서 저자가 규정한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신랄한 비판서.
9. 표재명, 양운덕 외 지음 (헤겔에서 리오타르까지). 지성의 샘.
포스트 모더니즘의 등장 배경과 요체를 잘 정리한 책.
10. 이광래 엮음. (해체주의란 무엇인가?), 교보문고 포스트 모더니즘의 등장 배경과 요체를 잘 정리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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