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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2/철학

쉽게 풀어 쓴 위대한 철학자들의 삶과 사상

by FraisGout 2020. 5. 28.

1. 탈레스

철학의 탄생

나이가 들어 죽음이 가까워짐을 느낄 때, 인간은 자기 삶의 시작이 어떠했는지 조용히 돌이켜 생각해 볼 수도 있으리라 그것은 철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철학의 역사는 이제 2500년에 이른다. 사람들은 철학이 머지않아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한다. 오늘날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은 자기가 연구하고 있는 철학이 이제는 다 낡아 빠져 여기저기서 삐걱거린다는 느낌을 종종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느낌에서 과거로 되돌아 가 철학이 아직 신선하고 활기차게 존재의 활력을 발산하던 그 시초를 더듬어 캐 보고 싶은 욕구가 생길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철학의 탄생 시기를 추적해 보려고 하면 이내 당혹감에 빠지게 된다. 그토록 멀리까지 소급해 올라가서 철학의 탄생 기록을 찾아볼 수 있게 해주는, 이를테면 정신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정리 보관하고 있는 호적 사무소란 없기 때문이다.

@p16

* 호메로스: 몇몇 학자들은 그리스 초기의 시인에게서도 철학적인 사상이 발견된다고 주장한다.(그림생략)

철학이 실제로 언제 태동했는지는 아무도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철학의 시초는 태고의 어둠 속에 파묻혀 버렸다.

그런데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철학이 소아시아 연안의 상업 도시 밀레토스에서 태어난 탈레스라는 현명한 사람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는 기원전 6세기경, 그곳에 살면서 가장 먼저 철학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학자들이 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몇몇 학자들은 탈레스 이전의 초기 그리스 시인에게서도 철학적인 생각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헤시오도스나 호메로스를 철학의 시조로 삼기도 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좀더 거슬러 올라가서, 그리스 민족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 동방 민족에게서 철학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더 극단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으로는 18세기 초기의 학자이며 베를린 학술원의 회원이었던 야콥 브루커--당시의 관례에 따르면 야코부스 브루케루스라고 불리었다-가 있다. 그는 (세계의 기원에서 우리 시대에 이르는 비판적 철학의 역사)라는 라틴어로 된 두꺼운 책을 저술하였다.

이 학자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철학의 시초는 이 세계의 맨 처음, 세계의 기원까지, 혹은

라틴어 낱말이 의미하듯이, 인류의 요람까지 소급해 올라간다.

@p17

그래서 그는 제 I권의 표지에 곰이 자기의 왼쪽 발을 물어뜯고 있는 선사 시대의 풍경이 담긴 그림을 싣고 있다. 이 표지 그림 위에는 "ipse alimenta sibi"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자기가 자기 자신의 먹이이다"라는 뜻이다. 결국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철학은 다른 어떤 양식, 곧 앞서 있었던 어떤 학문이나 예술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철학 그 자체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철학은 그 자신으로부터 생겨난 것으로서, 단적으로 인류가 아직 요람에 있던 바로 그 시기에 발생하였다는 말이다.

이렇듯 야코부스 브루케루스는 철학의 시초에 대한 탐사를 시도하면서 아주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즉 그리스에서 비롯하여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를 넘어서, 심지어 노아의 대홍수 이전, 인류가 맨 첫걸음을 내디뎠던 아담과 노아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하여 그의 두꺼운 책 제 I부의 제목은 (노아의 대홍수 이전의 철학)이다. 그렇지만 그는 여기서도 인류가 시작되기 전, 다시 말해 이미 천사와 악마 가운데 혹시 철학자가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문제를 다룬다. 물론 그는 여기서 예리한 연구 끝에 천사도 악마도 철학자는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좀더 정확하게 고찰한 결과, 아담과 그의 아들이나 손자들도 문제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비록 이들에게서 철학적 성찰의 흔적을 발견해 내기는 하지만 이 점만으로는 그들에게 철학자란 이름을 붙여 주기에는 부족하다. 예를 들어 아담은 철학적인 사색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브루케루스의 생각이다. 하루 종일 먹을 것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이, 또는 성경에 전하듯이 땀을 흘려야 빵을 먹을 수 있었던 사람이 어떻게 저녁에 깊은 생각에 잠길 만한 여유를 가질 수 있겠는가!

최초로 철학사를 기술한 위대한 아리스토텔레스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였다. 그는 외적인 궁핍이 어느 정도 해결되어 다른 일들을 돌아볼 만한 여유를 갖게 되었을 때, 비로소 학문과 철학은 시작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집트에서 처음으로 그러한 여건이 형성되었는데, 바로 승려들이 그 같은 여유를 가졌다 그들은 수학과 천문학을 발견하였다.

@p18

* 철학의 발생지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의 밀레토스(그림생략)

그러나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철학은 그리스에서 최초로 발생하였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부유한 도시 밀레토스의 부자 상인이나 누릴 수 있었던 그러한 여유로움 속에서 발생하였다. 이렇게 해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사람들은 항상 밀레토스의 철학자 탈레스에게서 철학의 시초를 발견한다.

그렇지만 탈레스의 생애와 사람됨에 대해서는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를 영리하고 약삭빠른 상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한번은 올리브 열매 수확이 풍작을 이룰 것이라고 예상한 그가 올리브 착유기를 모조리 사들였다가 비싼 사용료를 받고 빌려 주었다고 한다. 이 일화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물론 확실하지 않다. 그렇지만 탈레스가 정치적인 문제에 관여하였고, 나중에는 수학과 천문학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는 이 분야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다 탈레스는 일식을 정확하게 계산해 내는 데 성공했는데, 태양은 그가 예언한 그 날 실제로 어둠에 싸여 그의 명예를 한층 높여 주었다.

현대의 어떤 역사가는 이 사실을 철학의 탄생일을 정확하게 제시할 수 있는 계기로 삼는다. 그는 간결한 문장으로 "그리스 철학은 기원전 585528일 시작되었다"고 썼다.

@p19

이 날이 탈레스가 예언한 바로 그 일식날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철학이 일식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묻는다. 더군다나 철학의 역사란 밝힘의 연속이지 어두워짐(일식을 고려해 볼 때)의 연속은 아니지 않은가?

어쨌거나 여러 가지 사실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탈레스는 진짜 현자였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는 질이 사색할 뿐만 아니라 인생과 인생의 특성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고대의 증인들이 전하는 재미있는 여러 일화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탈레스의 어머니가 그를 설득시켜 결혼을 시키려 하자, 그는 "아직 결혼할 시기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하더니, 그 후 나이가 좀더 들어 그의 어머니가 결혼을 하라고 더욱더 재촉하자, 그는 "이제는 결혼할 시기가 지났습니다"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는 의미가 더 깊다. 왜 자식을 낳으려고 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대해서, 그는 "자식들에 대한 사랑때문에"라고 대답했다 한다.

하지만 결혼 문제나 아버지가 되는 것과 관련한 문제를 칭찬할 만한 일로 여기는 데는 조심해야 한다. 그것만으로 한 인간을 철학자로 간주하기에는 아직 부족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탈레스에 대해 보고하는 다음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철학적이다. "탈레스가 별을

관찰하면서 하늘만 바라보고 걷다가 그만 웅덩이에 빠져 버렸다. 그러자 익살스럽고 똑똑한

트라키아의 한 하녀가 이렇게 그를 비웃었다. 자기 발 밑에 있는 것도 보지 못하면서 하늘의

일을 알려고 하다니!" 웅덩이에 빠진 철학자, 그것은 정말 우스꽝스러운 몰골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 일화를 진지한 방향으로 몰고 간다. "그와 똑같은 조소는 철학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사실 철학자는 가장 가까운 친척이나 이웃이 무엇을 하는지, 심한

경우에는 자기가 인간인지 아니면 어떤 다른 존재인지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 철학자가

법정이나 다른 어떤 곳에서 자기의 발 밑이나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이야기해야 할 때, 그는 트라키아의 하녀뿐 아니라 다른 여러 민족에게도 비웃음을 살

것이다. 그는 경험 부족으로 웅덩이뿐 아니라 헤어날 길 없는 온갖 어려움에 빠진다. 그의

서툰 행동은 놀랄 만하고 우둔한 인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p20

결정적인 말은 이제부터이다. "그러나 철학자는 인간이 무엇인지, 인간이라는 존재가 다른 존재와 달리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것을 겪어야 하는지를 탐구하고 또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이제 상황이 역전된다. 플라톤이 말하고자 한 것은 이러하다. 즉 정의의 본질이라든가 다른 본질적인 물음이 문제될 때, 다른 사람들은 제대로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웃음거리로

만들고 말지만 바로 이때 철학자의 시간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사람이 바로 이 사람, 밀레토스의

탈레스를 왜 최초의 철학자라고 일컫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탈레스에게 문제가 된 것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이다. 그는 세계 안에서 지극히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그 모든 것, 즉 산과 동물과 식물, 바람과 별, 인간과 인간의 행위와 사유 등이 실제로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그 근원을 캐고 싶어했다. 이 모든 것들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탈레스의 물음이다. 더 나아가서 그는 그 모든 것이 어디서부터 유래하고,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만물의 근원은 무엇인가? 만물을 생성시켜 있게 하고 존립하게 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그것, 그 원리, 그 일자는 무엇인가? 등을 묻는다. 비록 탈레스 자신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런 것들이 탈레스의 근본 물음들이었다 그리고 그가 처음으로 그러한 물음들을 제기한 까닭에 그는 철학의 시조가 된다 왜냐하면 본질과 근거에 대해 묻는 것은 그 이후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철학의 핵심이 되는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물론 탈레스가 이 물음에 대해 제시한 답은 특이하다 즉 그는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주장했다. 어떻게 물이 만물의 근원인가?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이 수많은 세계의 형성체들, , , 동물, 우리 자신과 우리 안에 깃들여 있는 정신 등 이 모든 것이 물에서 유래했단 말인가? 이 모든 것들이 그 가장 내면적인 본질에 있어 결국 물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란 말인가? 시초의 철학, 그것은 이처럼 기이한 철학이었다.

탈레스의 이와 같은 근본 사상을 보고 사람들은 분명 그를 유물론자로 간주할 것이다.

@p21

물질적 질료인 물이 원초 원리가 되었고 이 철학자는 모든 것을 물질에서 이끌어 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많은 철학사 교과서에 그렇게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탈레스는 아직은 지극히 유치한 유물론자라고 덧붙이고 있다. 왜냐하면 실재의 원초적 성분에 대한 탐구가 그의 주장을 전혀 뒷받침해 주지 못하기 때문인데, 세계를 구성하는 근원적인 요소에 대한 물음은 물이 원초 원리라는 단순한 가정으로 해소될 수 있기에는 너무나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어려운 물음인 것이다 어쨌든 탈레스는 유물론자로서, 그런 식의 낡아 빠진 가정을 주장한 그를 더 이상 진지하게 다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철학의 시초를 우습게 여기는 것은 한번 재고해 보아야 할 일이다.

사람들이 물을 원초 원리라고 한 그 명제를 아무런 유보 없이 일종의 철학적 유물론의 표현으로 해석해 버릴 때, 과연 그 명제를 올바르게 이해한 것일까? 더구나 전혀 유물론적 해석에는 들어 맞지 않는 다음과 같은 제2의 명제가 탈레스가 주장한 것으로서 전해 내려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의구심은 더욱 커지게 된다. 그 제2의 명제란 "만물은 신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분명 모든 실재를 하나의 원질료에서 설명해 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보는 것, 즉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 전체는 신들의 현존 장소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자기 주위에서 보고 있는 것들을 단순히 목전에 있는 사물이라고만 생각한다면, 그는 세계를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은 사물의 본질이, 신적인 것이 그 사물 안에서 작용한다는 사실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탈레스는 물에 대한 명제와 신에 대한 명제에서 서로 모순된 두 가지 주장을 했단 말인가? 그 두 명제는 분명 서로 모순 관계에 놓여 있으니 말이다. 실재는 단순한 물질이든가 아니면 신적인 생명으로 꽉 차 있든가 둘 중의 하나인 것이다. 만일 여기서 단적으로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둘 중에서 하나만 통용된다면, 진리는 어느 쪽에 있는가? 이 문제는 세계 설명의 근거에까지 닿아 있고, 오늘에 와서도 그 결말에 이르지 못한 상황이다.

@p22

현대에 와서도 철학적 논의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세계를 순수한 물질의 원리로

이해해야 할 지, 아니면 사물은 어떤 심오한 것의 가시적인 외적 징표로서 그리고 세계는 그 세계 내에서 작용하는 신적 원리의 표현으로, 아니 더 나아가 신의 피조물로 받아들여야 할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태초의 철학자인 탈레스는 이 점에서 본래 어떠한 입장에 서 있었는가? 그는

사실상 지금까지 풍기고 있는 인상 그대로, 모순을 의식하지 않고 상호 모순되는 것을 연결시키지 않은 채 나열해 놓고는 이들이 융화될 수 없음을 가르쳤던 것일까? 아니면 만물이 물에서 생겨났다는 주장과, 만물은 신들로 가득 차 있다는 다른 주장 사이에는 분명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이 일치 불가능성은 물이 원초 근원이라고 하는 그 논제를 현대 자연 과학의 의미에서, 물질적 원질료에 대한 가설로 설명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논제를 당시의 고유한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그러한 자연 과학적 이론이 기원전 6세기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세계관과 부합되는지는 분명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고 말했을 때 과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숙고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 아리스토텔레스가 탈레스에 대해 보고한 것이 매우 큰 도움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도 철학의 시조가 본래 무엇을 말하려 했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아무튼 탈레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시대까지는 이미 거의 3세기라는 시간이 흘러 버렸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가 물에 대해 애매 모호하게 격언 식으로 말한 그 수수께끼를 풀면서, 아마도 탈레스가 그때 오케아노스, 즉 고대의 신화에서 대지를 둘러싸고 흐르는 만물의 생성의 아버지로 통하던 원초의 흐름을 생각했으리라고 추측한다. 아마도 탈레스에게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던 이야기, 즉 신들이 서약할 때, 이승과 저승을 갈라 놓는 명부의 강 스틱스를 불러냈다는 이야기가 생생하게 남아 있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계속해서, 맹세는 모든 것 중에 가장 성스러운 것이라고 지적한다.

@p23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의 명제를 해석하면서, 태고의 신화적 지식, 즉 오케아노스와 스틱스, 그 신화적 원초 흐름에 대한 그리고 맹세의 마술적 성스러움에 대한 이해를 끌어 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 갈려고 하는지 분명해진다. 탈레스가 물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그는 물질적인 원질료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것의 신화적 위력, 즉 근원의 신성을 생각한 것이다. 이제 여기에다가 모든 것은 신들로 가득 차 있다는 탈레스의 두 번째 명제를 아무 어려움 없이 연결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여기는 아폴로의 영역이고 저기는 제우스의 영역이라는 식의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존재하는 만물은 철저하게 신적인 힘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철학을 한다면, 단순하게 세계가 병존하는 사물들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세계에는 하나의 통일적인 원리, 즉 어떤 강력한 신적인 것이 지배하고 있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으로 자신의 근원과 존립을 부여받고 있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물인가? 탈레스는 왜 물의 형상 속에서 근원의 신성을 보고 있는가? 그것은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추정하듯이, 이 세상의 모든 생물체가 물에 잠기게 됨으로써 생명을 얻으며, 물을 마심으로써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데 그 근거를 갖고 있을 것이다.

@p24

이렇게 물이 사물에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듯이 신적인 태초의 근거도 그러하다. 즉 그것(태초의 근거)은 그것이 모든 것에 삼투해 있음으로써 모든 것에 생명을 불어 넣고 있다. 그렇다면 만물은 물에서부터 생겨났다는 탈레스의 명제는 바로 다음과 같은 뜻을 지닌다. 모든 실재에 있어서 어떤 신적인 작용, 즉 신화에 나오는 태초의 흐름과 같은 근원적인 힘이 지배하며, 이 힘은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물과 같이 모든 것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이로써 철학의 원초적인 본질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을 얻기에 이르렀다. 철학은 원시적인 자연 과학적 문제 제기나 이론으로서 시작되지는 않았다. 철학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신화의 힘이 퇴색하기 시작한 시대에 신화가 알고 있던 바로 그것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보존하기는 하되 당연히 변형된 형태로, 다시 말해 근원적인 것과 신적인 것에 대해 두드러지게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보존하는 것이 바로 철학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그렇지만 철학함이 그 시작 단계에서 신화로부터 넘겨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탈레스가 수수께끼 같은 말로 표현하려 했던 것, 즉 세계는 심오함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저 그리스의 태고적 신화를 단지 신이라 일컬어지는 어떤 상상의 존재에 대한 신기한 이야기로만 받아들인다는 것은 너무 피상적인 이해이다. 그리스인이 그들의 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들은 그것으로써 현실의 바탕에 깔려 있는 심오함을 의미하고 있다. 그들은 세계의 모든 영역을 관통하고 있는 투쟁의 현실을 경험하고는, 그것을 아레스(Ares, 군신)라는 신의 이름으로 불렀다. 그리고 그들은 한낮의 악령이 깃든 듯 한 정적을 경험하고는, 그것에는 판(Pan, 숲의 신)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인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실재는 신적인 것 안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말하려 했다. 신적인 것의 현존이 실재 중에서도 본래의 실재적 인 것이다.

원초적인 철학은 바로 이 점과 연결되고 있다. 그러나 철학은 거기서 이야기되고 있는 신화적 이야기들을 그냥 직접 수용할 수는 없었다.

@p25

철학은 인간이 종교적인 표상들에 의문을 갖게 되는 시대에, 또한 인간 스스로 물음을 제기하고 심사 숙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깨달았던 바로 그 시대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철학은 그러한 물음과 심사 숙고에서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앎에 본래의 진리로 감추어져 있는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고심하였다. 여기서 철학은, 모든 실재는 앞에 드러내 보이고 있는 얼굴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근저에는 어떤 심오한 것이 지배하고 있다는 그 점은 언제까지나 변함 없는 진리라는 것을 밝혀 낸다.

그 이래로 철학적 물음은 그것을 정열적으로 탐색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철학은 철학이 시작되었던 당시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여전히 철학은 종교적인 앎과 서로 대립적인 논쟁을 벌이고 있으며 더욱이 오늘날에 와서는, 아니 바로 지금 철학의 이 같은 논쟁에 대한 방어로 물질적 사물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순전히 현세적인 세계 해석을 고집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렇지만 만일 그렇게 옹졸해진다면, 철학이 애초에 그토록 미친 듯이 열중하였던 심오함과 원초 근거로 파고들었던 그 진지한 철저함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 철학하는 정신을 보존하고, 그것을 단순한 믿음에 전수하지 않으며 근원을 캐묻고 파헤치려 드는 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철학의 과제이다.

그것은 물론 중요하고도 매우 어려운 과제이다. 첫눈에 세계는 신적인 것의 근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오히려 탄생과 죽음, 생성과 소멸과 같은 비극적인 대립이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균열된 실재가 신적인 것 안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가정할 수 있겠는가? 신적인 것은 영원하며 생성과 소멸의 모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으로 생각해야 하지 않는가? 어떻게 영원이라는 것이 일시적으로 지나가 버리는 것의 근거일 수 있겠는가 ?

바로 여기에 철학적인 물음이 끼어든다. 이것은 철학이 시작될 때도 이미 그러했다. 그리스인의 근본 경험이자 그리스인의 세계에 대한 깊은 고뇌란, 현실은 그 모든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죽음과 파멸에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적 정신은 이러한 세계의 모습을 앞에 두고 그저 말없이 체념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p26

그리스적 정신은 지나가 버리는 세계의 섬뜩함을 신성의 관점 아래에서 더욱 깊이 파악해 보려는 정열적인 시도를 꾀한다.

바로 이것이 원초적인 그리스적 철학함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탈레스가 물의 형상에서 세계의 신적인 근원을 보았을 때, 그는 이로써 지나가 버리는 것의 유래에 대한 물음을 영원으로 늘한 셈이다 왜냐하면 물은 그것이 어떤 형태이건 언제나 물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물은 끊임없이 다른 형태, 즉 금세 수증기였다가 금세 얼음과 눈으로 또 금세 시냇물과 바닷물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여전히 물이기 때문이다. 물은 그 모습이 여러 가지 상태로 변하며 나타나지만 여전히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다. 신적인 것도 바로 그와 같다. 신적인 것은 영원하고 항상 자기 자신과 똑같지만 다른 모습으로 변하며, 바로 이 때문에 그것은 계속해서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 즉 현실 세계의 근원이 될 수 있다.

탈레스의 훌륭한 제자인 아낙시만드로스는 이 점을 더욱더 철저하게 사유한다. 우리가 그에 대해 보존하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자료를 바탕으로 추론해 보건대, 바로 그의 철학함의 출발점은 생성과 소멸이다. 즉 사물이 존재하게 되었다가는 다시 사라져 버리고, 우리 자신도 생성되었다가는 소멸되어 버리는 전체 세계란 이러한 탄생과 죽음의 거대한 연극 무대이다.

@p27

우리는 어떻게 실재가 영원과 신성 안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그것을 확신할 수 있겠는가?

아낙시만드로스는 이것에 대해 좀더 심사 숙고하여 실재에 대한 아주 훌릉한 해석에 도달하게 된다. 그는 사물이 소멸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사라져 버림에 대한 참회와 속죄이며, 죽음은 죄에 대한 값을 치르는 것이다. 그렇지만 도대체 어디에 그러한 죄가 성립하는가? 그것은 개개의 사물이 자기에게 정해진 척도를 초월하여 더 오래 현존재 안에 머무르려는 충동을 갖고 있는 바로 거기에 성립한다 따라서 그 사물은 다른 사물에 대해 죄를 짓고 있는 셈이다. 그 사물은 다른 사물에게 배정된 공간을 차지해 버리고 다른 사물들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빼앗기 때문이다. 아낙시만드로스의 관점에서 보자면 세계 전체는 존재를 둘러싼 거대한 싸움터이다. 고집스럽게 남아 있으려고 하는 것은 새롭게 다가오는 존재에 방해가 된다. 그럼으로써 그 사물은 다른 사물에게 죄를 짓기 때문에, 그 사물에는 위대한 필연성이 소멸의 선고를 내리고 그렇게 하여 새로운 사물들이 생겨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준다.

이렇게 세계는 유지된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좀더 심오한 관점을 갖고 있다 궁극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한 사물이 다른 사물에 대해 지은 죄가 아니라 신적인 근원 자체에 대한 범죄이다. 만일 모든 현실적인 것이 자기 생성을 신에 힘입고 있다면, 신적인 근원은 끊임없는 창조적인 생명력의 원리로서 이해되어야 하고, 또한 아낙시만드로스가 그렇게 말했듯이, 제한없는 것 혹은 무한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사물이 고집스럽게 존재하여 다른 사물의 존재를 방해한다면, 그것은 무한함이 본질적인 존재가 될 수 없음을 뜻한다. 즉 끊임없이 스스로 새로운 것을 분만해 내는 창조적인 생명력일 수가 없다 그것은 굳어져 죽어 버릴 것이다. 이렇듯 사물의 소멸은 현실에서는 낯설게 느껴지지만 결국에는 신적인 것에 의해 정당화된다 무한함이 자신의 생명력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남아 있기를 고집하는 사물은 죽지 않을 수 없다. 철학함과 인간에게 커다란 수수께끼였던 무상함은 이렇게 신적인 생명력이라는 불멸성에서 자신의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낙시만드로스의 의미 심장한 생각이다.

@p28

그는 우리가 그에 대해 보존하고 있는 유일하게 약간 긴 단편에서 이 사상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물의 근원은 무한함이다. 사물은 그것이 생성된 곳으로 필연성에 따라 소멸되어 가

버린다 사물은 시간의 질서에 따라 자신의 불의에 대해 서로 속죄와 참회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철학은 그 이후의 역사에서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가 제시한 해석이 철학적 물음에 대한 유일하게 타당한 대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철학은 아주 다양하게 그 문제에 대해 새로운 해결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러한 원초적인 물음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은 철학사의 결정적인 전환점에서 항상 다시 자신의 시작에 대해 상기하고, 새로운 직접성 속으로 현실의 절대적 근거에 대한 문제와 지나가 버리는 것이 불멸의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이 모든 철학의 위대한 근본 물음이며, 근본 물음으로서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철학은 물론 세계와 사물 그리고 인간을 고찰한다. 그렇지만 철학이 궁극적으로 묻고 있는 것은 세계의 심오함이다.

최초의 형이상학자인 탈레스 이래 철학자들의 사유가 끊임없이 모든 것의 근원에 대한 물음의 주위를 맴돈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때때로 이 세계의 사물들에 제대로 주의를 기울일 수 없다고 해서 더 이상 이상스럽게 생각하지 않으리라. 그런 사람들에게도 탈레스와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들 눈앞의 웅덩이를 보지 못하고 그 속에 나뒹굴어 빠지는 일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아마 세계의 심오함을 추구하는 사람은 발 디디고 있는 확고한 지반마저 잃어 버릴지도 모른다. 트라키아의 하녀들은 그것을 보고 배꼽을 잡고 웃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탄탄하고 더 확실한 근거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모험적인 희망 속에 자기가 서 있는 지반을 잃어 버릴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사람은, 철학이 그 최초의 시작 이래 무엇을 뜻하여 왔는지를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p29

2.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

상반되는 쌍둥이

철학사의 초기에 이미 커다란 대립이 있어 맞부딪쳤으니, 그것은 곧 존재와 생성의 대립이다. 이 대립은 그 후 전 서양 철학사의 흐름을 지배해 왔다. 이 대립은 두 사람의 최초의 사상가에까지 소급되는데, 곧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이다. 파르메니데스가 영원한 존재를 가르쳤다면, 헤라클레이토스는 영원한 생성을 가르쳤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두 철학자를 그처럼 도식적으로, 대립되는 개념의 틀로 규정지어도 되는가? 철학은 정말 이렇게 시작되었는가?

도대체 이 두 철학자는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이들에 관한 이야기는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파르메니데스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스승은 음유 시인으로서 노인이 되어서도 귀족들의 성을 찾아다니며 철학적 노래를 불러 주었다는 크세노파네스일 것이라고 추정된다.

@p30

그 밖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으로는 파르메니데스가 기원전 6세기경 이탈리아 남단에 있는

엘레아에서 살았고, 아마도 거기에서 죽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매우 부유하고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고대의 증인이 친절하게 덧붙인 말에 따르면 가난하지만 아주 품위 있는 어떤 사람과 친구였다고 한다. 또한 파르메니데스는 법률가이며 정치가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해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 더욱 확실하지 않은 것은 정말로 파르메니데스가 논리학과 천문학을 배우기 위해 이집트에 갔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타당성 있는 추측에 의하면, 한번은 아테네로 가서 그곳에서--플라톤이 전하듯이--젊은 소크라테스와 토의를 했다고 한다. 이에 반해 그가 총명한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이다. 현실이 순수한 존재 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으로 여겼던 한 철학자에 대해서 이렇게 전기적 정보가 적은 것은 특색 있는 일이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즉 순수 존재의 강조에 비로소 미래의 철학을 위한 그의 의미가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플라톤은 그를 "위대한 사람"이라고 불렀고, "아주 근원적인 깊이가 있는 사상가"라고 평했다.

반면 우리는 다른 최초의 철학자, 즉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해서는 파르메니데스보다 좀더 많이 알고 있다. 파르메니데스보다 나이가 어린 헤라클레이토스는 소아시아 연안의 에페소스에서 살았다. 그는 눈에 띌 정도로 정치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헤라클레이토스가 페르시아 왕인 다리우스와 서신을 교환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p31

또한 그는 출신답게 정신 자세 역시 아주 품위가 있었다. 비록 그가 그의 가문 대대로 내려온 순교장의 지위를 포기하였지만, 끝까지 귀족적인 정신 자세는 잃지 않았다. 특히 그의 정치적 친구인 헤르모도로스가 에페소스 시에서 추방당하는 것을 보고 나서는 더욱 그러했다.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극단적인 그의 발언은 오히려 거만하기까지 하다. 그는 부패한 정치적 상황을 치료하는 특효약으로써 모든 시민이 목을 매어 자살할 것을 권장하였다. 그래서 그가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정치적인 일에 열중하기보다는 아르테미스(수렵의 여신) 성전에서 어린 아이들과 주사위 놀이를 더 즐긴 것은 바로 그의 정치에 대한 일관적인 사유의 귀결이다. 결국 그는 인간에 대해 넌더리를 내고 산 속으로 들어가 풀과 잡초로 끼니를 연명해 나갔다. 이것이 그의 건강에 좋았을 리 만무하다. 그런 섭생으로 인해 그는 수종증에 걸렸으며, 의사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처방에 따라 자신의 병을 치료하려 했다. 그가 택한 처방은 다름아닌 쇠똥 치료였다. 여기에서 그에 관해 전해지는 이야기는 둘로 갈라진다. 한편의 주장에 따르면, 헤라클레이토스는 쇠똥을 온몸에 바르고 햇볕 아래 누웠는데, 이러한 무지막지한 치료가

결국 그를 비참한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이야기이다. 다른 이야기는 이보다 더 비극적이다. 그러한 사정을 알 리 없는 무지한 개들이 헤라클레이토스가 쇠똥을 바르고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시체인 줄 알고 머리며 살이며 뼈다귀며 할 것 없이 모조리 먹어 치웠다는 이야기다.

@p32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모두 확실하지 않다. 단지 확실한 것은 헤라클레이토스가 60세쯤 되어서 죽었다는 사실이다. 고대의 증인들은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를, 그와 같은 이름을 갖고 있던 어릿광대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파르메니데스에게로 되돌아 가 보자. 그는 본래 시인이었다. 그는 적어도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시로 표현하였다. 게다가 그는 시적, 철학적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유명한 교훈시는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 지혜를 찾아 나선 사람은 "밤의 집에서" 출발하여 "인간들이 다니는 길과는 동떨어진 곳"을 거쳐 "태양의 소녀들"이 끄는 마차를 타고 길을 떠난다. 그리하여 그에게 "밤과 낮의 길로 통하는 문"이 열리는데, 이 문의 열쇠는 정의의 여신인 디케가 간직하고 있다. 드디어 그는 자신에게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알려줄 "여신" 앞에 당도한다. 이 시의 내용은 분명 철학하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철학하는 사람은 무지의 암흑에서 벗어나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여 고독하게 자신의 길을 간다. 그는 진리를 찾아 길을 떠난다. 그는 닫힌 문의 난관들을 극복한다. 그리고 진리에 다가갔을 때 그는 진리를 스스로 발견하지 못하고 오히려 진리는 여신의 입을 통해 그에게 전해진다. 바로 이것이 철학함에 대한 그리스적안 근본 경험이다. 철학이 아무리 애써 파헤쳐 본다 해도 진리를 발견하지는 못한다. 진리는 스스로를 내보이며 또한 자신의 고유한 빛 속에서 나타난다. 인간의 과제는 바라봄과 들음을 통해 다만 자신을 이렇듯 스스로 내보이고 있는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p33

그러면 이러한 철학적 진리란 무엇인가? 파르메니데스는 이 진리를 "의견"과 대립시킴으로써, 다시 말해 인간이 일상적으로 현실을 보고 있는 방식, 또는 인간의 통상적인 세계상과 대립시킴으로써 드러내 보이려고 시도한다. 첫째, 사람들은 낱낱의 독특함을 지닌 개개의 사물들이 정말로 현실적인 것이라 여기며 전체를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실 개별자는 이 전체 안에서 비로소 실재할 수 있을 뿐이다. 둘째, 사람들은 세계란 상반되는 것들끼리의 싸움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모든 싸움에 단일성이 있고, 이 단일성에 근거해서 비로소 대립도 드러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파르메니데스는 의견의 의미로서의 세계 현실내에서의 대립을 어떤 하나의 근본 대립으로 소급해서 관련시킨다. 즉 불과 밤 또는 빛과 어둠의 분열이라는 근본 대립으로 소급해서 관련시키는 것이다. 거기에 따라 파르메니데스는 불 또는 빛은 여자에게, 밤은 남자에게 적용시킨다 후에 엠페도클레스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빛은 사실의 의미를 따져 보면 남자에게 적용시키는 것이 맞는다는 등 파르메니데스의 의견을 수정하려 한다. 셋째, 일상의 견해는 변하는 것 즉 생성되고 소멸하는 것을--여기에 실제로는 존재가 아닌 것(비존재)이 함께 파악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본래적인 존재자로 여긴다. 위의 세 관점은 모두 비존재를 존재 속에 뒤섞고 있다. 항상 현실적인 것이라 추정되고 있는 그것은 사실 존재와 무의 혼합이다. 개별자는 그것이 어떤 다른 개별자가 아닌 바로 그 개별자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바로

그것이다. 이런 식의 싸움 속에서 사물들은 스스로를 부인하고 있다. 순간적인 것이란 과거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그것이다. 존재와 비존재의 관점에서 볼 때 일상의 견해는 이렇게 찢겨 있고 분열되어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일상의 견해가 존재자라고 칭하는 그것은 참된 현실일 수 없고 오직 가상일 뿐이다. 그러나 철학자는 이 가상을 꿰뚫어 보아 현실의 진리를 탐색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여기서 철학자는 헤라클레이토스처럼 세 갈래의 좁은 길이 펼쳐져 있는 기로에 서게 된다. 첫번째 길로 들어서면 철학자는 분열된 견해의 진리로 나아간다.

@p34

이 길은 "아무 것도 모르는 육체만 지닌" 인간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가는 길이다. 하지만 철학자는 존재와 비존재의 모순을 지나칠 수 없다 그는 부분적으로 비존재이기도 한 그것이

참된 존재라는 데 수긍할 수 없다. 따라서 파르메니데스는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그 앞에서

경고한다. "이러한 탐색의 길에서 너의 생각을 멀리하라. 오랫동안의 타성에 젖은 습관이 너를 이 길로 몰고 와 초점 잃은 눈길과 윙윙거리는 귀와 혀가 마음껏 날뛰도록 내버려 두는 것을 막아라." 이 경고를 따르는 사람은 존재와 비존재의 분열을 넘어서게 되고, 그에게 이제 "생성은 없어지고 소멸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두번째 길은 존재와 비존재의 분열에서 철학자로 하여금 무의 편을 택하도록 하여 비존재자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도록 할 것이다. 훗날의 사상가들은 이 방향으로 나아간다. 파르메니데스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간주하는데, 그 까닭은 무란 인식 불가능하고 표현 불가능하므로 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파르메니데스는 여기에서도 "너의 정신이 이 길을 따라 탐색하지 않도록 하라"고 경고한다.

이렇게 두 길을 거부하고 나면 사려 릴은 철학자에게는 오직 세 번째 길만이 열려 있다. 즉 존재를 찾아나서는 길이 그 길이다. "이렇게 오직 존재는 존재한다라는 이 길을 공표하는 것만이 남는다." 따라서 파르메니데스 철학의 근본 명제는 "존재는 존재한다"이다 이것이 물론 지극히 형식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뜻하고 있는 바는 그 이상이다. 존재의 개념이 뜻하고 있는 바는, 이중의 의미를 지닌 존재자, 즉 사물이 무로 빠져 들어가도 남아 있는 그것이다. 그 의미는 견해가 거기에 붙잡혀 있는 그 비본래적인 존재자가 소멸되어 갔을 때 본래적인 것으로 존립하는 그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뜻하고 있는 바는 유일하게 하나뿐인 참된 현실 바로 그것을 말한다.

이제 파르메니데스는 유일하게 참으로 존재하는 것인 이 존재를 특징지으려 한다. 파르메니데스는 이 존재의 "표식"을 내보인다. 이 표식에는 존재가 유한한 존재자처럼 순수한 개별자로 쪼개져 있지 않고 일자라는 그리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속한다. 아울러 존재는 대립과 싸움을 모른다는 것, 즉 나뉘어질 수 없으며 그 자체와 동일한 하나의 전체라는 점도 갖고 있다.

@p35

다가 종국에는 존재가 소멸이나 지속적인 운동으로 특징지어질 수 없고 비운동과 영원성을 띤는 점도 존재의 표식이다. 이로써 파르메니데스는 그 뒤의 철학사에 막중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이론을 전개한 셈이다. 그는 다음의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참된 존재자가 무엇인지를 묻는 사람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에 머물러 그것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지나가는 사물에 매달려서도 안 된다 모든 현실 위에 서 있는 영원한 것, 항상 존재하는 것, 이 모든 현실적인 것 중에서 유일하고 참된 현실적인 그러한 것을 통찰해야 한다. 이 초기 사상가의 독특한 위대함은 그가 이 사상을 아주 준엄하게 선언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물론 이러한 철학적 입장의 거대한 일면성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다. 순수 존재 때문에 강제로 배제되어 무의 심연 속으로 내팽개쳐졌던 구체적인 현실은 다시 자신의 권리를 되찾게 된다. 세계의 상실이 철학에서 최후의 결론일 수는 없다. 이 점은 이미 파르메니데스와 같은 시대 사람이었던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도 드러나고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고대 때부터 벌써 "어두운 사람"이라 불리어졌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델로스 섬의 잠수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리에게 전해 오는 유일한 저서인 그의 단편들을 해석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헤라클레이토스가 후대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다. 헤겔은 "심오한 사상의 헤라클레이토스"가 완전 무결하게 철학을 시작해 놓았다고 주장한다.

@p36

니체 역시 "헤라클레이토스는 결코 쇠퇴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로 동의를 표했다.

파르메니데스처럼 헤라클레이토스도 통상적인 "견해"를 반대하고 있다. 견해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들을 줄도 말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다. 사람들이 아무리 이들을 가르친다 해도 이들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스스로는 자기들이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철학자는 이러한 통상적 세계상의 안목을 벗어나고 있다. 철학자는 사물이 실제로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이해하고 있다. 철학자는 로고스를, 그리고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에 있어서 견해와의 논쟁은 구체적인 시대 비판으로 옮겨간다. 그는 헤시오도스, 피타고라스, 크세노파네스 등을 몰상식한 만물 박사라고 비난한다. "이들의 박식은 참된 이해를 가질 수 있도록 가르치지는 못한다. 그들은 피상적인 것만을 인식하며 자신을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호메로스에 대해서까지도 일화의 형태를 빌려 무지하다는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이 분명한 것에 대한 인식과 관련해서 속고 있는 것은 다른 모든 그리스 사람보다 현명한 호메로스와 비교할 수 있다. 이를 잡고 있는 아이들이 호메로스를 속여 말하기를, 우리는 우리가 보고 잡은 것은 놓아 주며 우리가 보지 못하고 잡은 것은 가져온다"고 했다. 지식()에 해당되는 이 비판은 종교적 통찰력에도 적용이 된다. "마치 어느 누가 집과 이야기하듯이, 그들은 신의 형상에 기도를 드린다. 그들은 신이나 영웅을 그 본래의 존재로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p37

간략히 말해 어디에나 통찰력과 로고스가 결여되어 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참된 통찰력을 소유하고 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로고스는 기이한 뒤범벅 속에도 다수와 더불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늘 대하고 있는 그 로고스와 더불어 그들은 분열 속에 살고 있다. "따라서 인간들은 마치 잠을 자고 있는 것과 같다. 이들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 바로 철학자의 임무이다.

"로고스는 영혼의 독특함이다"라는 명제와 함께 철학은 처음으로 인간의 내면으로 눈을 돌렸다. 이런 의미에서 헤라클레이토스는 "나는 나 자신을 철저하게 탐구한다."고 말한다. 물론 여기서의 내면성은 그리스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여기에서 관심이 되고 있는 것은 심리학적 자기 분석과 같은 현대적 호기심도 아니고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이 신비스러운 영혼의 불안정을 알기 위한 불안한 내면의 탐구도 아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인간 그 자체 안에서 현실에 대한 참된 이해가 발견되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성은 동시에 밖으로 향해져 있다. 그러면서도 또한 심오한 차원을 간직하고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자기 자신의 탐구를 위해 내면으로 향한 고찰을 하면서 헤아릴 수 없는 것에 부딪친다. "네가 모든 길을 다 돌아다녀 찾아본다 해도 영혼의 한계를 완전하게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영혼은 그렇듯 심오한 로고스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헤라클레이토스는 철학사상 처음으로 정신의 스스로에 대한 경탄을 표현하였다.

그럼에도 헤라클레이토스는 자기 시대의 주된 철학적 문제를 놓치지 않았다. 즉 존재하고 있는 것의 참된 본질을 탐구하는 과제가 바로 그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존재자 속에서 그 존재자를 지배하고 있는 본질을 피지스(Physis) 즉 자연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기이하고 깜짝 놀랄 만한 말을 한다. "자연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감추기를 좋아한다." 모든 것 속에서 원리로서 지배하고 있는 것인 자연은 명백히 드러나 있지 않다. 자연은 스스로를 감추고 있기 때문에 이제 비로소 철학함의 힘을 빌려 합당하게 자연을 그 감추어져 있음에서부터 끄집어 내와야 한다. 자연은 어디에 자신을 감추고 있는가? 현실 속에 감추고 있다.

@p38

따라서 현실은 합당하게만 드러내어진다면 그 참된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 현실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현실은 자기 안에서 원리로 지배하고 있는 그것을 드러내 보이며 또한 동시에 감춘다. 도대체 이 현실의 이중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파르메니데스와 마찬가지로 헤라클레이토스도 현실이 그 자체모순적임을 꿰뚫어본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지칠 줄 모르고 세계에서 보여지고 있는 대립을 지적한다. 예컨대 "낮과 밤, 겨울과 여름, 전쟁과 평화, 과잉과 기아, 죽을 자와 불멸자" 등이 그것이다. 개개의 존재자 안에서도 그러한 대립을 찾아볼 수 있다 "바닷물은 가장 깨끗한 물인 동시에 가장 더러운 물이기도 하다. 물고기에게는 마실 수 있는 것이며 생명을 위한 것이지만, 인간에게는 마실 수 없는 것이며 위험하기까지 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강물이 이러한 일반적인 대립의 상징이 되고 있다 "같은 강물을 건너는 사람에게 늘 다른 물이 흘러 내려온다." "우리는 같은 강물 속에 들어가며 또한 동시에 들어가지 못한다. 우리는 존재하기도 하며 또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듯 인간도 분열되어 있고 그 자체 모순적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현실적인 것 안에 스며 있는 이러한 내적인 대립을 다음과 같이 전쟁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전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이며 모들 것의 왕이다. 그것은 어떤 사람은 신으로 나타나도록 해주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사람으로 나타나도록 해준다. 또한 전쟁은 어떤 사람은 노예로 만들고 어떤 사람은 자유인으로 만든다." 한마디로 말해 세계는 이렇게 갈기 갈기 찢겨져 있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도 현실에 대해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세계를 단순한 가상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헤라클레이로스는 세계가 그 안에 모든 대립과 모순을 지니곤 있지만 단순하게 건너뛰어 넘어가 버리지 않고 그 안에서 인간이 살고 있는 현실이라는 점을 고수한다. 그렇지만 철학하는 사람은 이 관점까지도 일시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철학자는 현실에서 궁극적인 원리로서 지배하고 있는 그것을 찾아내어 대립을 좀더 깊이 해석해야 한다 이와 같이 헤라클레이토스가 방향을 잡아 나아간 길은, 대립을 최종의 것이 아닌 곳으로 이끌고 있다.

@p39

여기서 대립의 구성 요소는 서로 연관이 되어 있다. 따라서 삶과 죽음도 그 내적인 유대에서 서로 관련되어 있다 인간에 관한 이야기들은 이러하다. "인간은 살면서 죽음과 접해 있고, 깨어 있으면서 잠에 손을 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고대 증인은 헤라클레이토스가 가르친 바를 전한다. "모든 사물은 그들의 대립되는 관계로 인해 서로 얽혀 있다. 이에 덧붙여 사람들은 대립이 항상 서로간에 뒤바뀌고 있음을 관찰하게 된다." "찬 것은 더워지고 더운 것은 차가워진다. 습한 것은 건조해지고 마른 것은 습해진다." 좀더 심오한 표현을 빌리면, "안 죽을 자는 죽게 될 것이고 죽을 자는 안 죽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 그들의 죽음 속에서 살고, 서로 그들의 삶 속에서 죽는다." 이렇게 전 세계는 유일한 변화의 순환일 뿐이다. "영혼에게는 그것이 물이 되는 것이 죽음이지만, 물에게는 그것이 땅이 되는 것이 죽음이다. 그러나 땅이 물이 되고 물이 영혼이 된다. " 마침내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러한 끊임없는 변화에 대한 핵심적인 상징을 발견한다. 전 세계는 피어올랐다 꺼지는 불이다 그것은 다시 피어 올랐다가는 다시 꺼지며... 영원히 순환하는 불이다. 그러나 이것도 헤라클레이토스의 최종적인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대립이 상호 관련 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 깊은, 이 대립들을 유지하고 있는 단일성이 드러나는 어떤 것을 밝혀낸다. 그렇기 때문에 헤라클레이토스는 철학의 전통 속에서 흔히 말하듯이 존재의 철학자인 파르메니데스에 대치되는 생성의 철학자가 아니다. 헤라클레이토스 역시 생성의 영역을 꿰뚫고 넘어서서 존재의 영역까지 소급해 간다. 그래서 그는 현실의 찢겨져 있음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보이지 않는 조화가 보이는 조화보다 더 강하다." "제각기 다른 것을 추구하는 것이 서로 일치하고 있으며, 상이한 것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생성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러한

모든 사상을 간략한 문구로 요약하여 "모든 것은 하나이다"라고 말한다. 이로써 헤라클레이토스는 놀랍게도 파르메니데스에게로 가까이 다가간다 그렇지만 그들 둘 사이에는 아직도 거리가 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비록 단일성을 보고는 있지만, 그는 자신의 위대한 동시대 사람인 파르메니데스처럼, 현실의 다양성을 본질 없는 가상 뒤에 남겨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p40

오히려 생성은 존재와 더불어 받아들여진다 "모든 것은 하나가 되고 하나는 모든 것이

된다." 그래서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변화 속에서 보여지고 있는 일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변화하면서 머무른다." 일자는 생동력있게 자신을 절제시키며, 또다시 자신 안으로 자신을 거둬들이는 단일성이다 이렇게 단일성으로서의 일자는 균열된 세계의 심층 현실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 장의 제목을 돌이켜 생각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는 진실로 정신적인 쌍둥이였다. 이들 두 사람의 관심거리는 참된 존재, 즉 하나이며 전체인 존재였다. 그럼에도 이들 사이에는 대립의 잔재가 남아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대립이란 그들이 원수처럼 서로 대치해 있는 그런 대립이 아니다. 파르메니데스는 순수 존재 때문에 완전한 세계의 상실이라는 대가를 치러야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모순으로 가득 찬 현실을 생생하게 이해하는 일자 안에서 구제한다. 이로써 이 두 초기의 철학자는 형이상학적 철학의 두 가지 근본 가능성을 만들어 낸 셈이다. 이 두 근본 가능성은 그 이후로 전 철학사를 통해 끊임없이 변화되는 형태로 다시 등장한다. 절대자에 푹 빠져 절대자를 넋을 잃고 바라보며, 수수깨끼 같은 현실을 절대자 안에서 해석해 보려는 그 모든 시도 말이다

@p41

3. 소크라테스

가시돋힌 물음

뒷문으로 들어가 소크라테스의 철학과 접해 보려는 사람은 소크라테스가 아닌 그의 아내 크산티페와 마주칠 확률이 크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언제나 집 밖에 나가 있어서 그의 아내가 문을 열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소크라테스의 아내 역시 중요한 인물이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자들 중에서 유명하다면, 크산티페 역시 그녀의 남편 못지 않게 철학자의 아내 중에서 유명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크산티페가 유명해진 것은 남편 덕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옳은 얘기다. 그렇지만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아마도 크산티페라는 아내가 없었다면 소크라테스가 유명한 철학자가 될 수 없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예민한 심리학적 감각을 가진 철학자 니체는 적어도 이 점을 간파했다. "크산티페는 소크라테스가 필요로 했던 여인이었다.

...실제로 크산티페는 소크라테스를 자신의 천직에 정진하도록 계속 들볶아 댔다."

@p42

정말로 니체가 옳게 보았을까? 옛 기록이 믿을 만하다면, 크산티페는 오히려 정반대로 처신하였다. 즉 그녀는 남편이 철학자라는 직업을 갖지 못하게 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썼다.

집에서 크산티페는 지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남편을 못살게 굴었다. 소크라테스가 그것이

지겨워 친구들과 철학적 담화를 나누려고 해도 그녀는 그것마저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녀는

때때로 양동이에 담긴 더러운 물을 창 밑을 막 지나가는 남편의 머리에 퍼붓기도 하고, 남편을 뒤쫓아가서 시장 한복판에서 옷을 마구 잡아당겨 찢기도 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친구들은 그녀의 이런 짓에 몹시 분노했고 크산티페를 지금까지 있어 온 그리고 앞으로 있게 될 모든 아내 중 가장 견디어 내기 힘든 여편네라고 불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집안에서나 집 밖에서의 곤혹스러움을 철학자다운 평온으로 잘도 참아냈다. 그녀가 그의 머리 위에다 물을 퍼부었을 때 그는 태연히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크산티페가 천둥 같은 불호령을 한 다음에는 소나기를 선사하는 법이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라고 말이다. 천재적인 젊은이 알키비아데스가 한번은 "잔소리만 하는 크산티페에게 넌더리가 나지도 않습니까"라고 묻자, 소크라테스는 "자네 역시 거위의 꽥꽥거리는 소리를 그냥 내버려 둘 수밖에 없을 걸세"라고 대답할 정도였다. 더욱이 그는 그러한 악처와의 생활이 나름대로의 좋은 점도 있다고 생각했다. 즉 크산티페를 잘 견디어 내면 다른 사람들과는 쉽게 어울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후대의 전기 작가들은 소크라테스가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 것보다 더 많이 그를 동정해 마지않는다. 그래서 그에게도 조금이나마 사랑의 행복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들은 억지로 그럴 듯한 이야기를 꾸며냈다. 그 이야기는 대강 이러하다. 아테네가 전쟁에서 패배한 후 도시의 인구가 너무나 감소하게 되자, 모든 아테네 시민은 각기 두 명의 부인에게서 자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그 법률에 복종하는 뜻으로 미르토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처녀와 두번째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전혀 그럴 듯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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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가 만약 결혼을 두 번 했었다면, 어떤 사람이 그에게 결혼을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 물어 보았을 때, 소크라테스는 "당신이 무엇을 택한다 해도 결국은 후회하게 될 것이오"라고 했는데, 이때 그는 자기의 두번째 결혼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을 것이다.

다시 한번 크산티페에게로 돌아가 보자. 그녀가 남편을 그토록 들볶아댐으로써 얻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크산티페가 못살게 굴면 굴수록 소크라테스는 불화가 끊이지 않는 집을 나와 서둘러서 그의 철학적 담화로 피해 갈 뿐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소크라테스는 비로소 소크라테스가 된다. 말하자면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아테네라는 이 도시에서의 공적인 생활에 대한 즐거움을 중요시했던 것이다. 그는 공적인 일에 끼어드는 것을 무척 중요하게 여겼다. 소크라테스가 일생을 그의 서재에서만 파묻혀 지냈더라면, 그는 결코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크산티페의 의도는 정반대로 반전되어 버린다. 그녀의 행동에는--헤겔의 사상을 빌려 해석해 본다면--어떤 "이성의 교묘한 꾀"가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철학자의 철학함을 방해하려고 했던 행동이 오히려 이 철학자가 더욱 심오하게 철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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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산티페가 고함을 치고 물을 퍼부어서 남편을 윽박지르려 했다면, 그녀는 잘못 생각한 셈이다. "크산티페는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가정을 가정답게 여기지 못하게 함으로써 사실상 그를 자신의 천직에 정진하도록 몰아댄 것이다"라는 니체의 견해는 옳다. 그렇다면 도대체 소크라테스는 집 밖에서 무엇을 했을까?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들과 잡담하기 위하여 시장이나 경기장을 쏘다닌 일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지 않은가. 그처럼 그는 대단한 게으름뱅이이다. 크산티페를 화나게 한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소크라테스는 가정이나 부인, 자식들에게 마음을 쓰거나 아버지에게서 배운 석수장이 일을 하는 대신에, 간단히 말해서 착실한 시민으로서의 생활을 꾸려 나가는 대신에,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면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과 아무 쓸모도 없는 대화나 나누고 다닌 것이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그도 때때로 돈을 벌어서 가정 살림에 보탬을 주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또한 한 남자가 성실하게 일을 해서 자기 가족을 부양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무대에서 소크라테스를 맨발로 묘사했던 것도, 그가 신발을 사신을 여유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물욕이 없이 자족하는 점은 그의 독특한 인간성에 비추어 볼 때 그릴 수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여자가 곳곳에 유혹하듯이

진열되어 있는 상품을 보고 그 물건을 살 수 있는 은화 한푼 없으면서 소크라테스와 같은 태연함을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이 태연함을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수많은 물건 중에 내가 필요로 하는 물건은 하나도 없다니!" 우리는 이 말을 들은 크산티페가 한 술 더 떠서 철학적인 고상함을 가지고 "바라는 것이 가장 적은 사람이 바로 신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아니겠어요?"라고 맞장구를 치기를 요구할 수 있겠는가 ?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행동 중에서 도발적인 것은 그가 천성적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으름뱅이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에 있다. 사실 소크라테스는 게으름뱅이가 아니었다 그는 열심히 체조를 하고, 심지어는 춤을 출 때에도 열성적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전하는 바로는, 그는 다만 건강을 위해서 체조도 하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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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의 한 증인은 소크라테스의 "뛰어난 신체 상태"를 매우 칭찬한다. 한마디로 말해 소크라테스는 정말로 남자다운 남자였다 이 사실은 소크라테스가 단지 졸병으로 참가했던 전쟁터에서 증명된다. 사람들은 그 모든 고생스러운 일들을 잘 견뎌 내는 참을성에 대해서 오직 놀랄 뿐이었다고 한다. 혹독한 겨울 날씨에 다른 사람들이 옷을 여러 겹 두껍게 껴입고 나갈 때도, 그는 맨발로 얼음 위를 걸어갔다고 한다. 한번은 그 주위의 모든 동료가 미친 듯이 도망칠 때에도 그는 유일하게 남은 졸병을 장군과 더불어 "침착하게 우군과 적군을 둘러보면서" 태연하게 걸어 나갈 정도였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군인으로서도 두드러지는 행동으로 주위의 시선을 끌었다. 알키비아데스는 동료 참전 군인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일을 들었다고 전한다. "한번은 이른 아침부터 그가 깊은 생각에 잠겨서 한자리에 줄곧 서 있었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이 되지 않는지 그 자리를 뜨지 않고 깊은 사색을 하면서 서 있더군요. 정오가 되었지요. 이제는 여러 사람들의 눈에 띄었고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기며 서로서로 소크라테스가 새벽부터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면서 줄곧 그 자리에 서 있다고들 수군거렸지요. 마침내 저녁이 되자, 몇몇 이오니아 출신 병사들이 식사를 마치고--그때는 여름이었으므로--침구를 가지고 나와 밖에서 자기로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밤새 거기 서 있을지 지켜보기 위해서였지요. 그는 선 채로 밤을 지새웠답니다. 여명이 밝아 오고 해가 떠올랐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태양을 향해 기도를 드린 후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 전쟁 중에도 소크라테스는 이런 식으로 행동했던 것이다. 하지만 평화시에는 아무도 그의 용감함과

남성다움을 알아채지 못한 듯하다. 더구나 크산티페의 눈에 소크라테스는 그저 떠돌아다니면서 지껄이기나 좋아하는 사람이며 영원한 논쟁꾼으로 보일 따름이었다.

물론 소크라테스 자신도 바로 이 점이 철학자라는 천직에 전념할 수 있었던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보았다. 그는 기회만 있으면 누구에게든 다가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그는 대화의 상대자가 정치가이든 구두장이든 장군이든 당나귀 몰이꾼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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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분명 그가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모든 사람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올바른 사고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음을 고집스럽게 지적하는 그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올바른 사고란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즉 사람들이 이야기한 것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 변론(설명) 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어야 한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이점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켰는지--플라톤의 기록에 따르면--명망이 높았던 장군 니키아스는 아주 생생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군가 소크라테스에게 가까이 접근해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너는 모르고 있는 듯싶다. 그가 처음에는 다른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을지라도 어쩔 수 없이 소크라테스의 언변에 취하여 줄곧 끌려 다니다가 결국은 자신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고,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스스로 변명하게 되고야 만다." 소크라테스는 니키아스를 다루는 그러한 방식으로 모든 세계를 다루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이 하고 있는 이야기를 도대체 알고 말하는지 모르고 말하는지 물어 본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경건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은 계속해서 "용기"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고 있고, 또 다른 어떤 사람은 국가 제도 또는 설득력 있는 연설 기법에 대해서 훤히 알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사람들이 일단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시작하면 그들은 맥없이 대화에서 지고 만다. 소크라테스는 반어법과 여러 가지 변증법적인 기술로 그들이 그렇게도 자신있게 너불너불 지껄여 댄 것들을 실제로는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며 자신에 대해서조차도 아무 것도 알고 있지 못하다고 지적해 준다.

이 모든 것들이--물음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으리라. 괴테와 실러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델피 신탁의 판결을 그들의 공동 저작인 (크세니엔)에서 2행시로 다음과 같이 풍자하고 있다. "무녀 문트는 그대를 가장 현명한 그리스인이라고 선언하였다네. 오오! 가장 현명한 사람이 종종 가장 귀찮은 존재일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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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테네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를 자주 경멸하고 비웃으며, 때로는 무례하게 대하고 괴롭혔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어느 누가 자신의 무지가 눈앞에 드러나는 것을, 대중 앞에서 드러나는 것을 그냥 기꺼이 보고만 있겠는가? 건달 귀족 청년 몇 명만이 소크라테스를 지지하고, 도시를 누비고 다니는 배회의 길을 지치지 않고 따라다녔을 뿐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특히 명망 있는 시민은 그 일에 전혀 상관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인들은 그러한 시민의 대변인이 되었다. 시인들은 소크라테스를 "세계를 개선하려는 수다쟁이", "궤변적인 화술의 발명자", "무슨 일에나 끼어드는 감초", "허풍선이"라고 불렀고, 또한 그의 "과장되고 내용 없는 말", 그의 "자질구레한 일에 신경쓰는 짓거리", 그의 "언짢은 잔소리"에 대해 심한 조소를 퍼부어 댔다.

그러나 시인들이 미처 파악하지 못했고, 대부분의 아테네인들이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사실은 바로 이 점이다. 즉 니체가 이름지었듯이, "대단한 심술쟁이"에게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말의 논쟁이 아니며, 증명과 반대 증명의 변증법적인 토론장에서의 승리도 아니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추구한 것은 진리이다. 그는 진리에 대한 물음에 사로잡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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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는 죽기 직전에 친구 크리톤에제 이렇게 말하였다. "대중이 우리에 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염려할 것이 아니라, 오직 정의와 불의에 관해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말하는 것을 따라야겠지. 그 이야기를 한 사람이, 아니 단 한 사람일지라도 말일세. 그리고 진리 그 자체가 말하는 것을 따라야 하겠지." 그는 이 세계의 모든 것, 참으로 인간과 인간의 미래의 운명에 관한 모든 것을 이해하려 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이 이러한 사실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테네 법정에서 고백한 그 자신의 변론을 들어보자 "내 목숨이 다할 때까지, 힘닿는 데까지 지혜를 사랑하고(철학을 하고), 누구를 만나든지 충고하여 위선의 탈을 벗길 것입니다. 또한 나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오오 훌륭한 사람이여! 그대 지혜와 힘이 가장 뛰어나고 가장 명성이 높은 나라인 아테네의 국민이여,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돈과 평판과 명예를 얻을까 전전긍긍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도 않는구려. 통찰이나 진리, 그리고 어떻게 더욱 훌륭한 영혼을 가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는가?'" 그의 말은 계속된다. "인간의 최고의 선은 덕에 대해서 그리고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저 자신과 남들을 시험하고 있는 것들에 관해서 매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시험이 없는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정열이다. 친구들만이 오직 이 점을 어느 정도 이해했을 뿐이다. 작가이며 장군이었던 크세노폰이 소크라테스에 대해 남긴 기록은 다음과 같다. "그 분은 인간의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였습니다. 즉 경건함과 불경함, 아름다움과 불명예, 정의와 불의, 신중함과 경솔함, 용기와 비겁함, 국가와 국민, 국민에 대한 통치와 군주 등이 무엇인지 이야기하였습니다. 또 정의와 선을 알고 있다고 믿는 모든 사람에게 정의와 선에 대해 물었습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이것을 더욱더 인상깊게 이렇게 말하였다. "소크라테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처음에는 아주 우스꽝스러운 소리만 한다고 여길 것입니다. 사티로스의 거만한 털가죽과도 같은 낱말과 어구가 그 이야기의 외형을 감싸고 있지요. 이 분이 늘 들먹이는 것은 짐싣는 당나귀와 대장장이와 구두장이와 창 던지는 사람에 관한 것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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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은 항상 똑같은 말로 똑같은 소리를 하는 것 같으므로 무식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누구나 그 이야기를 우스갯소리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본뜻이 드러나고 그 말에 심취해 보면 먼저 세상 말들 중에서 그 말들만이 유일하게 의미있는 것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그것들이 더할 나위없이 신적인 말로서 덕의 가장 갸륵한 형상을 내포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들은 고상하고 선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유익한 무척 많은 것 더 나아가 모든 것에 미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성가시도록 귀찮게 질문을 던져 얻으려 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람들에게 참으로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이해하도록 깨우쳐 주는 것이었다. 올바른 사고는 올바른 행동으로 이끌어져야 한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이 사실이 어느 다른 시대보다도 그가 살고 있는 그 시대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처럼 보였다. 소크라테스는 그리스인의 생활이 붕괴해 가는 징후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그의 시대가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구제 불능의 상태임을 보았고, 장차 그리스 정신을 깊이 함몰시키고 말 위기가 다가오는 것을 감지했다. 그는 제자와 친구들이 바로 이 사실을 볼 수 있도록 그들의 눈물 뜨게 해주었다.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많이 받은 플라톤은 어떤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 도시 국가는 더 이상 선조들의 도덕과 제도로 다스려지지 않고 있다. ... 지금의 도시 국가는 한결같이 잘못 다스려지고 있다. 율법마저도 거의 구제 불능의 상태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바로 이 점을 인식했기 때문에 진지하게 되묻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의문을 갖고 묻는다는 것은 꿈길을 헤매는 듯한 착각 속에서 뒹굴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묻는다는 것은 진리가 안겨 주는 쓰라린 맛까지도 견뎌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짐을 의미한다. 물음에 대한 이 철저함, 시대의 위기에 대한 그러한 통찰, 인간 존재의 참된 요구에 대한 인식, 바로 이러한 것들 때문에 제자들은 스승 소크라테스를 그렇게 열정적으로 따르게 된 것이다.

@p50

플라톤이 대화편 (향연)에서 묘사한 젊은 알키비아데스의 이야기는 이에 대한 더할 나위없는 좋은 예이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를 플룻을 부는 반신인 마르쉬아스와 비교했다." 이 마르쉬아스는 그의 입의 힘으로 사람들의 애간장을 녹이곤 했습니다만 거기엔 악기가 있었던 거죠. ... 선생님이 그와 다른 오직 한 가지 점은, 선생님은 악기도 없이 순전히 말로 그와 똑같은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말을 직접 듣거나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들을 때에는, 말을 전하는 사람이 말을 아주 잘못하는 사람일지라도 듣는 사람이 부녀자이든 성인 남자이든, 혹은 어린이든 우리는 그만 압도되고 마음을 빼앗기게 됩니다. 여러분, 적어도 내가 만일 아주 취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신다면, 이 분의 말이 나에게 어떤 느낌을 불러일으켰으며 또 일으키고 있는가에 대해서 여러분 앞에 엄숙하게 맹세하고 있는 그대로를 말씀드리렵니다. 이 분의 말을 들을 때 내 심장은 미친 듯 춤추는 코뤼바스들(프뤼기아스의 대지의 여신)의 심장보다 더 쾅쾅거리며 내 눈에서 눈물이 마구 쏟아져 흐릅니다. 그리고 나 이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와 똑같은 상태에 빠지는 것을 나는 봅니다. ... 그런데 여기 있는 이 마르쉬아스 즉 스크라테스는 번번히 나를 그런 상태에 빠지게 했으므로 나는 지금 나의 생활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 이 분은

내가 아주 태만하여 지금의 나 자신의 여러 가지 결함을 되돌아보지 않은 채 아테네 시민으로서의 자질구레한 일들에 동분서주하고 있다는 것을 나로 하여금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내 귀를 막고, 마치 시렌네 (이탈리아의 남해 연안에 사는 신화 속의 자매. 그 근처를 지나가는 항해자들을 노래로 매혹시켰다고 전해지는 요녀)에게서 도망치는 것처럼 이 분에게서 멀찌감치 달음박질하여 도망치는 겁니다. "만일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 분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늙어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게 될테니 말이에요.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닌 꼭 이 분에게서만, 아무도 내가 그러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느낌, 즉 누군가의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나는 다른 사람 앞에서는 부끄러워 할 줄을 모르지만 다만 이 분 앞에서만은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나는 내가 이 분을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p51

그러나 사람들은 이 분이 이르는 대로 행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 그래서 나는 꽁무니를 빼고 이 분을 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로 그를 보게 되면, 내가 그에게 고백했던 것들이 부끄럽게 여겨집니다. 때때로 나는 이 분이 인간 세계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런 일이 있게 되는 날엔, 그땐 더욱 슬퍼지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나는 이 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렇듯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와 같은 젊은이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지만, 그에게

그렇게 매료된 사람은 단지 알키비아데스만이 아니다. 확실히 마력의 근원은 수수께끼인 채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그의 추종자들이 원하는 것을 바로 주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소크라테스가 그들을 움직이고 있고 그를 속에서 갈망하고 있는 그런 확고 부동한 대답을 주리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였다. 소크라테스는 그들을 문제의 미궁 속으로 밀어 넣기가 무섭게 대화를 멈추어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던 것이다. 실제로 대화의 상대자들과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는 자신도 그들이 서로 묻고 있는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말할 수 없었다. 즉 어떤 연유로 선, 정의, 인간, 인간의 올바른 행동 등을 토론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지 말할 수 없었다. 만일 그에게 말할 것을 종용한다면 그는 자신의 무지만을 드러내 놓고 인정할 뿐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아주 진지하게 자신의 무지를 인정했다. 그럴 경우 보통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그는 법정에서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그곳을 떠나오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사람보다는 내가 더 지혜롭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왜냐하면 우리 두 사람 모두 선한 것과 정의가 무엇인지 하나도 모르고 있는 듯했는데, 그 사람은 그것이 어떤 것인가를 아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또한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믿고있는 바로 그 조그마한 점에서 그 사람보다는 내가 더 지혜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솔직하고 용감하게 자신의 무지를 고백한, 이러한

무지의 자각에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영향력을 발휘하는 비밀이 깃들어 있다.

@p52

왜냐하면 바로 그 무지의 자각에서 소크라테스가 인간이 처한 상황에 눈을 뜨고 있음이 명확해지고 인간으로, 이 인간의 상황에는 물론 무지가 안고 있는 방황의 늪에 빠져 영원히 의문에 사로잡힌 채 머물러 있을 위험이 따른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제자들에게도 그와 똑같은 용기를 갖도록 환기시켰기 때문에 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불쾌감만을 더욱 가중시켰다. 그들은 이렇게 반문한다. 이 사람은 어떻게 생겨 먹은 사람이길래 우리를 그토록 몰아붙여 우리의 무지를 폭로하게 해놓고 결국에 가서는 그 자신도 아무 것도 모른다고 고백하는가? 이것은 뻔뻔스러운 사기가 아닌가? 그들의 반문은 이어진다. 만약 소크라테스가 우리가 그토록 확실히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그 모든 것을 전부 애매 모호하게 만들어 의문을 갖도록 한다면, 또한 현존재의 확실성과 국가의 확고 부동함의 바탕이 되는 그 전통에 반기를 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더군다나 그는 자신의 파괴적인 물음으로 그렇지 않아도 이미 위기에 빠져 있는 종교를 붕괴시키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그들은 마지막으로 반문한다. 스스로는 아무런 긍정적인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 자신에게 현혹되어 있는 그 많은 제자들을 주변에 모으고 있다면 바로 그가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있는 위험한 인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이 수상쩍은 소크라테스에게 어떤 조치를 취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소송을 걸었다. 그들은 소크라테스가 신을 믿지 않고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명목으로 고소했다.

이 사실은 철학함의 본질을 뒤흔드는 하나의 진지한 문제를 제기한다. 철학함이란 다름아닌 물음을 던지는 일이다. 철학자는 그가 철학적이면 철학적일수록 더욱더 철저하게 물음을 던진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 자체를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동시에 현존하는 것 자체가 위험스럽게 된다. 만약 현존하고 있는 것을 유지시키려는 추종자들이 철학자들과 자신들을 불안스럽게 만드는 물음을 침묵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고 해서 그들을 나쁘게만 볼 수 있을까? 그렇지만 현존하는 것이 소크라테스 시대처럼 이미 밑바닥에 구멍이 날 지경에 이르렀다면 그 사실에 대해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다.

@p53

이 경우에는 다만 한 가지, 즉 철저하게 진실을 밝히려는 용기만이 도움을 줄뿐이다. 그들이 이 용기를 지니지 못했다는 점, 소크라테스가 그러한 철저한 문제 제기를 통해 미래를 위한 토대를 준비하고 있는 사람임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는 점이 바로 아테네인의 역사적 과오이다.

고소가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못된다. 소크라테스는 재판관에게 잘 보이려는 노력을 깡그리 포기하였다. 도리어 그는 자신의 변론을 통해 재판관의 감정을 더욱더 긁어 놓았다. 그의 무례한 질문 태도를 야단쳤을 때, 그는 용서를 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행동이 아폴로 신의 신탁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천연덕스럽게 주장할 정도였다. 그는 덧붙여서 이렇게 말한다 "신에 대한 나의 이 봉사보다 더 큰 선한 일은 아직 이 나라에 한번도 없었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내가 돌아다니면서 하는 일이란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 중에 젊은이든 늙은이든 누구에게나 될 수 있는 한 영혼이 훌륭하게 되도록 마음을 써야 하고 그보다 먼저 또는 그만큼 열심히 신체나 재물에 마음을 써서는 안 된다고 여러분들에게 말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 만약 나를 죽인다면 다시는 나 같은 사람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며, 좀 우습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이 나라는 마치 덩치가 크고 혈통이 좋은 말과 같아서 그 커다람으로 인해 오히려 좀 둔하므로 깨어 있으려면 무엇인가 따끔따끔하게 물어뜯는 등에 같은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디든지 따라가서 여러분들과 마주 앉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깨우치기 위해서 온종일 쉬지 않고 타이르고 나무라도록 하기 위해 신께서 나를 이 나라에 붙여 놓은 등에라 생각됩니다." 우리는 피고의 이와 같은 무례한 태도에 대해 재판관들이 얼마나 불같이 노했나를 상상할 수 있다. 더구나 한술 더 떠서 그는 형벌 대신에 오히려 그 당시 아테네 시민들이 받는 치고의 영예인, 시청에서 벌이는 만찬의 영광을 그에게 베풀어주어야 한다고 제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법정은 지체없이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p54

판결이 내려졌을 때, 이 사람이 철학에 대한 헌신을 위한 힘을 어디에서 얻고 있는지 드러났다. 사람들은 그에게 탈옥하라고 권하였고, 친구들은 탈옥을 위해 필요한 모든 준비를 해 놓았다. 그러나 그는 일생 동안 국가의 은혜를 입었으면서 사태가 그 자신에게 불리하게 되었기 때문에 법률에 복종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고 역설하면서 사람들의 권유를 거절하였다. 그 까닭은 그가 법률을 어기는 일은 비열하고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생 동안 이것을 신조로 삼고 생활하였다. 언젠가 정부가 그에게 한 정적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였으나 그는 이 부당한 명령을 거절하였고, 또 해전이 끝난 다음 아테네 법정이 장군들에게 불법적으로 사형 선고를 내렸을 때에도 오직 그 혼자만이 반대 투표를 했었다. 그러한 소크라테스였기에 죽음에 직면해서까지도 그는 단호하게 사람들의 다음과 같은 통상적인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는 사람은 삶과 죽음을 닥쳐 보아서 그 위험도를 가늠해 보아도 된다. 오히려 그는 행동을 할 때 오직 그가 의롭게 행동하고 있는가 의롭지 못하게 행동하고 있는가 만을 유의해야 하며, 철학함의 본보기로 평가받는 소크라테스 그의 행동이 선한 사람의 행동인가 악한 사람의 행동인가만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p55

무지를 알고 있는 인간인 소크라테스는 인간은 불의를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어째서 그렇게 무조건적으로 확실한지를 증명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또 근본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증명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그것은 아주 섬세하게 이끌어 낸 그 어떤 이론적 확실성보다도 더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확실성이다. 후세 사람들은 이것을 마음의 확실성이라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마음의 확실성에 바탕을 두고 있었고 궁극적으로 거기에 소크라테스의 영향력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 이렇게 해서 소크라테스는, 니체가 표현하듯이 "소위 세계 역사의 전환점과 소용돌이"가 되었다. 그것이 인간에게 역사의 위기 한가운데서도 항상 보존되어 전해 내려오듯이, 확실성이 붕괴되는 와중에서도 한 가지만은 확실한 것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파괴될 수 없는 마음의 바탕 속에 자리잡고 있는 정의로운 행동에 대한 절대적인 의무이다. 이것이 소크라테스의 위대한 발견이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이 의무에 충실하였고 그 의무를 위해 자신의 운명을 회피하지 않았다. 바로 이 점이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을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까지도 철학함의 본보기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마음의 계명에 대한 그의 앎이 궁극적으로 신성에까지 소급해 간다고 주장한 것도 아마 옳은 이야기일 것이다.

@p56

그는 그 어떠한 경우든지 모든 확실성은--도덕적인 행동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일에 지나지 않는 행동에 관해서도--내면의 소리에서 나오고, 그 내면의 소리는 그에게 귀담아 듣지 않을 수 없는 경고로 들려 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이 내면의 소리를 다이몬 (Daimon)이라 불렀고, 이것으로써 그는 신적인 영역을 지시하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다이몬은 그에게 있어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중개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그의 본질적인 소명--동료 인간들에게 물음을 던져 그들의 허위적인 앎을 폭로하라는--으로 이해한 그것을 그는 신의 명령에 대한 복종이라고. 해석한다 그는 자신의 죽음에도 이렇게 순응했던 것이다. "사람은 어디에 있든지 그곳이 스스로 가장 좋은 곳이라 믿고,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거기에 머물러야 하며, 죽음이나 그 밖의 다른 것은 조금도 염두에 두어서는 안 되고, 무엇보다도 우선 부끄러움을 알아야 합니다. 그대, 아테네인들이여. 내가 믿고 받아들이듯이, 신이 나를 거기에 있게 한 그곳에서 지혜를 사랑하며 나 자신과 남들을 시험하기 위해, 죽음이나 그 어떤 다른 것에 대한 공포를 피해 나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기이한 행동으로 비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운명을 신의 뜻에 맡긴다는 위안된 신뢰 속에서 독배를 받아들이고, 그런 정신으로 자신의 변론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은 증언으로 끝내고 있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군요. 나는 죽음의 길로, 여러분은 삶의 길로. 그러나 우리들 중 누가 더 좋은 길로 떠나는지, 그것은 신밖에 모릅니다!"

@p57

4. 플라톤

플라토닉 러브

오늘날 일상적인 대화에서 플라톤의 이름이 거론되는 때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플라토닉 러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이다. 사랑의 여러 종류 중에서 이 사랑은 감성적인 욕망이 앞서는 것이 아닌, 연인의 인격에 대한 존경을 바탕으로 하는 정신적인 애정이라고 이해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러한 사랑의 형태가 플라톤의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 묻는다면, 그 대답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뿐 아니라 "플라토닉 러브"에 이 철학자를 끌어들이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작품을 읽어 볼 때, 우리는 그 어느 곳에서도 그가 여자에 대해 특별히 존경을 나타낸 것으로 생각되는 부분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플라톤은 여자란 남자보다 덕에 있어서는 훨씬 뒤쳐지고 남자보다 약한 족속이며 잔꾀가 많고 교활하다고 주장한다.

@p58

또한 그는 여자는 천박하고 쉽게 흥분하고 화를 잘 내며, 남을 비방하기 좋아하고 소심하며 미신을 잘 믿는다고도 한다. 플라톤은 정도가 지나쳐 심지어 여사로 태어난 것은 분명 저주임에 틀림없다고 확언까지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서 자제할 줄 모르던 남자, 비겁하고 의롭지 못했던 남자들은 그에 대한 벌로 죽은 후 여자로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자들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는 남자는 역시 결혼 생활에서도 부드러운 정신적 감동을 위한 여지를 가질 리 없을 것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결혼을 두 사람이 서로를 아끼며 공통적인 신념을 가지고 그들의 삶을 꾸려 나간다는 관점에서 보지 않고, 오직 아이를 낳아서 기른다는 관점에서만 보았다. 남자와 여자를 결속시키는 것도 상호간의 이해가 아니라 될 수 있는 한 유능하고 성품이 훌륭한 후세를 낳아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는 그 일을 위해 적당한 배우자를 찾아 결합시켜 주어야 하는 임무를 맡는다. 여자는 전쟁에서 승리한 남자에게 상으로 주어졌으며, 더욱 극단적으로는 남자들의 공동 소유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플라톤이 생각한 남녀간의 사랑은 애정이 넘쳐흐르는 것이 전혀 아니다.

물론 당시 그리스에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보다 더 섬세하고 에로틱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던 아주 색다른 사랑의 관계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나이 든 남자와 미소년 사이의 관계였다. 오늘날에는 그러한 관계를 좋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플라톤 시대의 그리스에서는 정치가나 장군이 아름다운 청년에게 관심을 가지는 일이 거의 유행이다시피 했다.

플라톤은 그의 존경하는 스승 소크라테스에 대해서도 그 비슷한 일을 전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부단히 미소년과의 교제를 추구하였다. 언젠가 한번은 그가 두 대상과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한 적이 있는데, 그 하나는 당시 아테네의 천재적인 신동인 알키비아데스와의 사랑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철학과의 사랑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한번은 아테네의 청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카르미데스가 소크라테스 옆에 앉았을 때, 그는 "나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전 같으면 아주 쉽게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나의 용기 따위는 사라지고 말았다"라고 고백했다.

@p59

그러나 이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젊은이들과의 관계는 세간에서 행해지는 그러한 사랑의 관계는 아니었다. 플라톤이 이 사실에 대해 전하는 것을 보면, "플라토닉 러브"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밝혀진다. 그 이야기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표현은 젊은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플라톤이 그의 대화편 (향연)에서 보고하고 있는 내용을 보자 그는 그 대화편에서 아테네의 지도급 지식인들이 비극 경연 대회에서 우승을 거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을 위해 어떻게 축하연을 베푸는지 말해 준다. 참으로 오랫동안 그들은 연설과 답변을 하면서 에로스 신을 찬미하였다. 그때 만취해서 피리부는 여자의 부축을 받으면서 들어온 알키비아데스는 잔치의 무리 속에 끼여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상해 보이는 분위기에 젖어서 여느 때 같으면 비밀로 간직했을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당신들은 소크라테스가 아름다운 젊은이들과 사랑에 빠져 항상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그들에게 정신이 팔렸다고 보시지요. 그러나 사실 아름다움이나 부유함, 그밖에 세상 사람들이 찬미하는 그 어떤 명예도 이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무가치하며 우리 자신 역시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p60

나는 이것이 사실이라고 여러분께 단언합니다. 사람들을 풍자하고 우롱하는 것, 이것이 그 분이 평생하고 다니는 일입니다. "나는 그 분이 진심으로 내 청춘의 꽃다운 아름다움을 얻으려 애썼으며, 또 나로서는 예상하지 않았던 신이 보내준 선물과 놀라운 행운을 찾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그 분의 뜻에 순종하기만 하면, 그 분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나는 나의 아름다움에 자신이 있었지요. 이렇게 생각하기 전에 내가 하인을 거느리지 않고 혼자서 그를 방문한 적은 없었습니다만, 이렇게 생각한 후로는 하인을 돌려보내고 언제나 혼자서 만났어요. ...그리고 그렇게 단둘이 있으면, 마치 연인끼리 이야기하듯 내게 말해 주리라 생각하여 나는 혼자서 좋아했어요. 그러나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그저 다른 때와 다름없이 이야기하면서 하루를 지내다가는 그냥 돌아가곤 했어요. 그 후 나는 그 분에게 함께 운동 경기를 하자고 유인했지요. 그리고 이렇게 하면 무엇을 좀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실제로 경기도 했습니다. 그분은 나와 체조를 했으며 때로 거기에 아무도 없다는 듯이 나와 경기도 벌였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지요. 나는 이렇게 해서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아무 효과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분에 더 강렬한 방법을 강구하여 한번 공격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또 일단 착수한 일을 단념하지 않고 끝까지 추궁하여 그분의 정체를 알아보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는 그 분을

식사에 초대했으며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연인에게 하듯 그 분 뒤를 쫓아다녔지요. 오랫동안 그 분은 청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나는 설복했지요. 처음에는 식사만 마치고 가려고 했습니다. 그때 나는 창피한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서 그냥 가게 했죠. 그러나 나는 다시 이 계교를 썼습니다. 식사가 끝난 후 밤늦게까지 끊임없이 이야기를 계속하였고, 그가 돌아가려 했을 때, 밤이 이미 깊었다는 핑계로 억지로 그 분을 머무르게 했습니다. 그 분은 내 곁에 있는, 그가 식사를 했던 침대에서 잠들었습니다.

@p61

그 방에서 자는 사람이라고는 우리 두 사람밖에 없었지요. ... 등불이 꺼지고 하인들이 물러갔을 때, 염치를 무릅쓰고 내가 생각했던 것을 솔직하게 말해야만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분을 흔들어대며 '주무십니까, 선생님 !'이라고 말했지요. '아니'라고 대답하시더군요. '지금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세요?' '글쎄 뭔데?' '저는 선생님이, 지금까지 제가 사랑했던 사람 가운데 유일하게 저에게 합당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선생님은 저에게 한마디 말씀도 하시려들지 않는군요. 제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좀 들어보세요 저 자신으로서는 높은 덕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란 없으며, 또 그 일을 선생님보다 더 잘 도와주실 사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선생님 같은 분의 뜻을 따르지 않을 경우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어요.' 이 말을 듣더니 그 분은 그 분답게 늘 하던 버릇대로 조롱하는 듯한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오오 사랑스런 알키비아데스, 자네는 흥정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로군. 만일 자네가 나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정말이고, 또 내 속에 자네를 좀더 훌륭하게 할 수 있는 어떤 힘이 정말로 있다면 말이야. 자네는 내 속에 자네 자신의 미모와는 구별되는 어떤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일세 그려. 그렇지만 만일 자네가 그 아름다움을 나에게서 찾아내고 내 속을 떠보고 나를 부추겨 서로의 아름다움을 교환하려고 하면, 자네는 내게 어림없는 흥정을 하려는 게지. 자네는 가짜를 주고 진짜 아름다움을 받으려는 거야. 확실히 청동으로 황금을 바꾸려는 격일세 그러나 여보게, 주의해서 잘 보게. 그러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님을 알아차릴 걸세 ...' 그 분의 말씀을 다 듣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지요. '저에 관한 말씀은

그만하면 됐습니다. 저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을 그대로 말씀드렸어요. 그러니 선생님을

위해서나 저를 위해서 어떻게 하면 제일 좋겠는지 좀 생각해 주세요.' '좋은 말이야. 그럼

후일에 이 문제에 대해서나 또 다른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 우리 두 사람이 제일 좋다고 여겨지는 것을 생각도 해보고 실행도 해보기로 하세.' 이런 말을 주고받으니, 마치 내가 쏜 화살이 그 분에게 맞아 상처를 입힌 듯 여겨졌습니다.

@p62

그래서 나는 벌떡 일어나 그 분이 더 말할 새도 없이 내 외투를 그 분에게 덮어 드리고, 그 분의 다 떨어진 외투 속으로 기어 들어갔지요--그때는 겨울이었으니까요--그리고는 내 두 팔로 그 분을, 정말로 신 같은 그 분을 휘감고 밤새도록 사색에 잠겼습니다. 내가 이렇게 행동했지만 그 분은 태연 자약하여 아주 나를 무시하고 내청춘의 아름다움을 비웃었습니다. ... 나는 신들과 여신들께 맹세하여 다음과 같이 확언합니다. 나는 그날 밤을 소크라테스와 잤습니다만,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버지나 형과 함께 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만일 알키비아데스가 단지

소크라테스의 사나이다움의 특이함만을 이야기했다면, 이 이야기는 특별히 상기할 만한 가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의 독특한 행동은, 그의 사랑이 완전한 헌신 속에서 다른 사람에게 향해 있으면서 동시에 정신은 뒤로 물러 나와 있다. 따라서 이런 식의 "플라토닉 러브"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소크라테스가 살아가는 방식과 아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으며, 또한 소크라테스의 예에서 보여주었듯이, 플라톤이 철학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는 방법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플라톤이 이해하고 있는 철학은, 그리고 그 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분명하게 플라톤에로 소급해 올라가서 이해되고 있는 철학은 그 자체로 에로스의 한 방식이며 따라서 본질상 사랑이다.

@p63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와 가졌던 그 체험은 우선 철학적인 에로스가 감성적인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게 한다. 그렇다고 감성적인 사랑이 단적으로 배척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에로틱한 관계는, 단지 다른 유형의 사랑을 위한 출발점만을 형성할 뿐이다.

즉 플라톤이 그 안에서 철학함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는 그 곳에로의 도약을 위한 출발점을 형성할 뿐이다. 이것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감성적인 사랑이 그 자체 안에 고집스럽게 머물러 있어서도 안 되고 더군다나 방탕으로 굳어 버려서도 안 된다 감성적인 사랑은 극복되어 앞에서 이야기한 높은 경지로 승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감성적인 사랑에서 철학적인 사랑으로의 길이 도약이라는 묘사로 매우 인상깊게 표현되고

있는데, 플라톤은 대화편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그러한 묘사를 하고 있다. 거기서 소크라테스는 그가 만티네아의 여자 예언가인 디오티마 (역사적으로 실재했는지는 미상)의 비밀 계시로 체험한 것을 전하고 있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디오티마는 소크라테스엔게 에로스의 참된 본질이 무엇인지, 즉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름다움을 나타내려는 욕구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디오티마는 에로스란 인간에게 있어서는 본래 영원하고 불사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 아름다움을 영원히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영속적이고 불사적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도 사랑에 속한다. 그러나 바로 이 불사적인 것에 대한 욕구는 덧없는 아름다움에서 아름다움 그 자체인 영원한 원형으로의 도약의 단계에서 실행된다. 모든 사람은 "불사적인 것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육체적으로 생식력이 있는 사람들은 여자에게로 향하여 거기서 자기 사랑을 실행해 자식을 낳아, 이로써 불사와 모든 미래의 추억과 행복을 영원 무궁하도록 얻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생식력이 있는 사람들 또한 없지

않습니다. ... 무엇이 정신에 어울리는 것입니까?... 자기 속에 신적인 성격이 있고 어렸을 때부터 그 영혼이 이런 덕을 잉태하고 있는 사람도 장성하면 자식을 낳을 수 있고 또 낳기를 원합니다.

@p64

그리하여 그는 그 속에서 자기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아름다운 것을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추한 것 속에서는 그가 절대로 자식을 낳으려 하지 않으니까요. 생식력이 왕성한 그는 추한

육체보다는 아름다운 육체를 환영하며, 또 아름답고 고상하고 잘 자란 영혼을 만나게 되는

날이면 그 육체와 영혼을 한가지로 반갑게 맞으며, 또 이와 같은 사람에 대해서는 덕에 관해서 그리고 훌륭한 사람이 어떠해야 하며,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에 관해서 속을 털어 놓고 이야기하여 그를 교육해 보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사람을 가까이 하여 함께 지냄으로써 그는 오랫동안 잉태해 오던 것을 출산하게 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 곁에 있거나 없거나 그는 그 사람을 기억하며, 그 사람과 굳은 우정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육신의 자식보다도 더 아름답고 불사적인 자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은 이제야 비로소 에로스가 지니고 있는 본래의 철학적 비밀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는 디오티마로 하여금 계속 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게 한다. "오오 소크라테스, 이상은 사랑의 신비 가운데 몇 가지인데, 아마 여기까지는 당신께 털어 놓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옳은 길을 따라가야만 올라갈 수 있는 최고 신비에 당신이 도달할 수 있을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군요. 그러나 내 힘이 닿는 데까지 가르쳐 드리지요.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잘 들어주세요. 올바른 길로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이 일을 어려서부터 시작해야 하며, 또 아름다운 육체에 접근해야 하는 것입니다. 맨 먼저 그가 올바르게 지도를 받는다면, 오직 한 육체만을 사랑하며 거기서 아름다운 언어를 낳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한 육체의 아름다움이 다른 육체의 아름다움과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아름다움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추구할 때, 모든 육체의 아름다움이 결국 동일한 것임을 믿지 않는다면 무척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그는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모든 아름다운 육체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 육체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하여 그것이 지극히 적은 것이라고 믿음으로써 그 육체에 대한 강렬한 정욕에서 해방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정신의 아름다움이 육체의 아름다움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p65

그리하여 누구든 정신이 아름다운 사람이 있으면 비록 용모가 그다지 아름답지 못할지라도 만족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를 사랑하고 보살펴 주며, 자식을 낳고 또 젊은이들을 훌륭하게 해줄 만한 이야깃거리를 찾아 이야기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그는 더욱 우리의 여러 가지 제도와 법률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있게 되고 또 모든 아름다움이 결국 하나의 연줄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하게 되므로 육체의 아름다움이란 보잘 것 없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삶의 기준이 설정된 후에 그는 새로이 지식의 아름다움을 탐지하기 위해 지식으로 접어 들어가야 합니다. 이제 그는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의 다양한 형태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단지 하나에만 봉사하지 않게 됩니다. ... 오히려 그는 아름다움의 큰 바다로 나아가 그 바다를 바라보는 가운데 풍부하게 사랑하는 마음에서 많고 아름답고 숭고한 연설과 사상을 낳아 마침내 이런 가운데 힘을 얻고 성장하여 하나의 지식, 즉 이제 내가 말하려는 바와 같은 아름다움에 관한 지식을 터득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들을 올바른 순서로 바라보면서 여기까지 사랑의 길로 인도되어 온 사람은 이제 그 궁극의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게 되는데, 갑자기 그는 놀라운 본성을 지닌 하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p66

오오 소크라테스, 그것은 바로 아름다움 그 자체입니다. 그것을 위해 지금까지 모든 수고를 했던 것이지요. 첫째로, 그것은 영원한 것이요 생멸하는 것이 아니요 증감하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로, 그것은 어떤 곳에서는 아름답고 어떤 곳에서는 추한 그런 것이 아니요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추한 것도 아니지요. ... 오히려 그것은 독립 의존하면서 영원히 단 하나의 존재로 있을 것입니다. 한편 다른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확실한 방법으로 이 아름다움에 참여합니다. ... 그러므로 누구든지 소년을 올바르게 사랑한다면 이 여러 아름다운 것들로부터 저 아름다움에로 올라가 그것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는 마침내 그 궁극의 목표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힘으로 또는 남의 인도를 받아 사랑의 오묘한 진리로 나아가는 올바른 길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이세상의 개개의 아름다운 것에서 출발하여 저 아름다움을 향해 위로 올라가되 마치 사다리를 올라가듯 하나의 아름다운 육체에서 두 아름다운 육체로, 또 두 아름다운 육체에서 모든 아름다운 육체로 나아가고, 아름다운 육체에서 아름다운 일과 활동으로 나아가고, 그 활동에서 아름다운 학문으로 나아가고, 마지막으로 저 아름다움 자체만을 아는 것인 완전한 학문으로 나아가, 마침내 아름다움의 완성체를 알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 인생은 여기에 이르러 아니 여기에서만, 아름다움 자체를 바라봄으로써만 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제 "플라토닉 러브"의 심오한 의미는 분명해졌다. 플라토닉 러브는 단순히

관능적인 욕구를 억눌러 억압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육체적 욕구에 제한된 권한만을 인정해 준다. 그 사랑은 이 욕구를 고양된 형태의 욕구로 넘쳐 들어가게 한다. 육체의 아름다움, 영혼, 품행, 그리고 인식의 아름다움을 넘어서 아름다움 그 자체를 얻으려 하는 것이다. 플라톤이 이해하는 에로스는 모든 아름다운 것이 그것에 관여하고 있는 아름다움의 원형을 추구하는 것이며 아름다운 것의 이데아를 향한 지향이다. 이렇게 해서 "플라토닉 러브"가 플라톤의 위대한 사상의 업적으로서 서양 정신의 의식 안으로 깊이 침투해 들어와 있는 이데아에 대한 그의 사상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p67

물론 플라톤이 그의 이데아론에 도달하게 되는 여정은 우선은 철학적인 도약의 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환멸과 또한 어느 곳에서나 징조가 보이기 시작하는 도시 국가의 몰락에 대한 환멸을 통해서였다. 젊은 귀족 플라톤은 석수장이 소크라테스를 만나게 된 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갖고 있던 비극책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 정의에 대한 물음에 부딪쳐 정열적으로 정치에 투신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 플라톤은 불의와 타락이 곳곳에 성행하고 있음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가장 분명하게 이것을 경험한 것은 덕과 정의 이외의 어떤 다른 것에도 관심을 쏟지 않은 소크라테스가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는 것을 보았을 때였다. 국가 존재가 붕괴되는 마당에서 최고의 책임감을 지닌 사람마저도 죽어야 한다면, 국가의 존재는 그 뿌리에서부터 크게 잘못되어 있음에 틀림없다고 플라톤은 결론지었다. 이 경우 국가의 기초에 대한 철저한 반성 이외의 다른 구제책이란 없다. 다시 말해 정의의 본질에 대한 반성 이외의 다른 구제책이란 없다. 플라톤은 이러한 통찰로 철학자가 되었다.

@p68

그래서 그는 정의 그 자체에서 도대체 무엇이 중요하며, 또한 다른 형태의 올바른 행위들, 즉 용기, 신중함, 경건함, 지혜 등은 어떠한가를 묻는다. 플라톤은 그러한 고찰에서 인간은 정의가 무엇이며 그 밖의 다른 덕들이 무엇인지 원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인간은 자신의 영혼 안에 이 모든 올바른 행동의 원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원형은 인간의 행동을 규정할 수 있고 또 규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플라톤이 어떻게 이 원형을 추적해 나가는지는 다음의 두 고찰이 도움을 준다. 어떤 행동은 정의로운 데 비해, 또 다른 어떤 행동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 더 나아가 어떤 행동이 다른 행동보다 더 정의롭다는 사실을 우리는 정의의 원형 그 자체에서부터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현실과 이데아 사이의 이러한 관계는 오직 인간적인 행동의 영역에서만 타당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나무의 원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나무가 무엇인지 안다. 전체 현실에 대한 인식은 인간이 자신의 영혼 안에 존재자의 원형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원형을 보고 인간은 이것은 나무이고 저것은 동물이며, 이것은 나쁜 행동이고 저것은 선한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더 나아가 모든 실재가 그 실재의 원형에 참여하는 한 그리고 그 원형과 비슷해지려고 노력하는 한, 그것은 현재의 실재 자체임을 의미한다. 이래서 나무는 가능한 한도 내에 최대한으로 나무가 되려 하고, 인간은 가능한 한 인간이 되려 하고, 정의는 가능한 한 정의가 되려 한다. 모든 것은 현실적으로 있는 그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이데아를 실현하려고 노력한다. 이렇듯 플라톤은 부단히 완전함을 갈망하는 장소이며 이데아를 사모하는 에로스의 장소로서의 세계에 대한 생생한 표상을 얻어낸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플라톤은 고유한 존재자는 사물이 아니라 원형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물은 다만 원형에 참여함으로써만 사물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원형, 이데아는 원초적인 실재가 된다. 사물은 단순히 이데아의 복제품이며 열등한 정도의 실재성을 띠고 있다. 실재 안에 있는 본래적인 실재는 깊은 곳에 있는 실재성이다.

@p69

여기에 한 가지 사실이 더 추가된다. 사물이 덧없이 소멸한다는 사실, 즉 사물은 생성되고 변화하고 소멸해 버린다는 사실은 그 사물의 존재 방식에 속한다. 그러나 이것은 원형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정의의 이데아는 항상 그것 자체로서 남아 있고, 나무의 이데아도 마찬가지이다. 디오티마는 이렇게 말했다. 저 아름다운 것 그 자체, 즉 아름다움의 원형은 "생성되지도 소멸되지도 않고 증가되지도 감소되지도 않으며 그대로 항상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초의 실재는 모든 무상함에서 벗어나 있다. 전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추구에, 모든 에로스에 이 점이 해당된다. 무상한 것은 영원성을 추구한다. 플라톤이 볼 때 바로 이것이 실재성이 안고 있는 신비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생각을 토대로 인간의 본질에 대한 통찰도 얻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제 그는 원형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유래하는지를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가 실재를 인식할 때, 이 원형을 항상 이미 눈앞에 갖고 있다. 그래서 플라톤은, 인간은 원형을 그 스스로 만들지도 기획하지도 않는다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인간이 원형을 그의 시간적인 현존재에서 얻는 경험에서 획득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정의로운 행동을 정의로운 것으로서, 한 그루의 나무를 나무로서 경험할 수 있기 이전에, 인간은 이미 정의의 본질이 무엇인지, 나무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이미 정의와 나무의 원형을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앎은 어디서 유래하는가라는 새로운 물음이 생겨난다. 플라톤은 그것은 인간의 시간적 실존에 앞서, 즉 인간이 탄생 이전에 영위해 왔던 그 삶 속에서 일어났을 것이라고 답한다. 따라서 인간이 어떤 한 사물을 인식할 때 그리고 이 경우에 그에게 그 사물의 원형이 한순간 반짝 빛난다면,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뜻한다. 그는 그의 시간적 현존재 이전에 일어났음에 틀림없는, 그가 근원적으로 본 적이 있는 그 원형을 상기하는 것이다. 인식한다는 것은 다시 상기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데아의 사상은 필연적으로 영혼의 선재성이라는 가정으로 이끌려지며, 거기서부터 영혼의 불사 불멸의 확실성이라는 가정으로 나아가게 된다.

@p70

인간이 그 삶(존재) 속에서 이데아를 직접 보았다는 시간적 실존 이전의 인간의 현존함에 대해 플라톤은 엄청난 비유를 끌어들여 인상깊게 서술하고 있다. 그는 대화편 (파이드로스)에서, 어떻게 영혼이 천궁 위에서 신들의 뜻에 의해 존재하게 되며, 이때 거기서 모든 실재하는 것의 원형을 보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하늘의 위대한 군주인 제우스가 맨 처음으로 그의 날개 달린 수레를 몰면서 출발한다. 그는 모든 것을 정리 정돈하고 모든 것을 배려한다 그의 뒤를 신들과 다이몬의 무리가 따른다." 그들의 뒤를 인간의 영혼도 따른다. 한 사람의 마부가 두 마리의 말을 끌면서 따른다. "그들이 꼭대기까지 올라갔을 때, 그들은 그 꼭대기를 넘어서 천궁의 등성이에 들어선다. 그들이 그곳에 멈추어 섰을 때, 하늘의 순환 운동이 그들을 둘러싼다 그리고 그들은 천궁 밖에 무엇이 있는지를 본다." 자기에게 알맞은 것을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그러한 영혼의 정신은 "가끔씩 존재를 본다. 정신은 참된 것을 사랑하고 바라보며, 하늘의 순환 운동이 끝이 나고 시작한 그 자리에 돌아올 때까지 참된 것으로 양식을 삼아 그것을 향유한다. 순환 운동 중에 정신은 정의 그 자체를 관찰하고, 신중함을 관찰하고, 인식을 관찰하고 ... 그 밖의

다른 참된 존재자를 관찰하고 그것으로 상쾌해 한다. 그 다음 영혼은 천궁의 밑부분에 다시

도달하게 되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마부는 말들을 구유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그들에게 암므로시우스(신들의 양식)를 던져 주고, 또 넥타(신들의 음료) 를 마시게 해준다."

인간에게 그의 영혼의 선재 중에 허락되었던 이 관조는, 그에게 그의 일생을 거쳐 꺼지지 않는 동경으로 남는다. 인간은 그가 유래한 그 근원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열망한다. 바로 이 열망 때문에 인간은 감성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서 해방되려 하고, 이 지상의 생활에서 사물을 바라보면서 이미 이데아 자체의 관조에 이르려고 애쓰는 노력이 비롯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제 아름다운 것은 하나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플라톤은 이것에 대해 대화편 (파이드로슨)에서 이렇게 말한다

@p71

"어떤 사람이 여기에서 아름다움을 보고 참된 것(진리)을 상기할 때 그는 날개를 달게 되며, 그렇게 날개를 달고 그가 날아오른 곳을 동경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 때문에 그는 새처럼 아래에 있는 것은 등한시한 채 위만 바라본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를 미쳤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 중에도 가장 멋있는 환상이다." 이 환상은 모든 개개의 영혼이 그 최초의 시작에 참된 존재를 관조하였기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개개의 영혼이 사물을 보고 그러한 것을 다시 상기하는 일이 모두에게 쉽지는 않다. 그 당시 그곳에서 아주 짧게 관찰한 영혼이나 또는 추락할 때 불행한 사고를 당한 까닭에 이제는 옳지 못하게도 불의하고만 교류하는 영혼 그리고 그곳에서 관조하였던 성스러움을 잊어버리는 그러한 영혼에게는 쉽지가 않다. 오직 소수의 영혼에게만 충분한 기억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영혼들이 그곳에서 보았던 것과 유사한 것을 보게 될 때, 그들은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고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제어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이 이 지상의 생활에서 벌써 본질적인 것을 다시 순수하게 직관하게끔 되는 바로 그 환상적인 도정이 플라톤에게는 곧 철학함인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철학에 관해서 이렇게

말한다. 철학은 "신들이 죽어야 할 종족에게 희사한 또는 희사하게 될 그 어떤 선물보다도

가장 훌륭한 선물이다. "철학은 이데아로 향하는 에로스의 가장 완전한 완성이다. 철학은 인간을 일상적인 생활에서 낚아채 그를 원형에로 몰고 가기 때문에 그것은 광기와 비슷하다. 플라톤은 이러한 종류의 광기에 대해, 그 광기는 어떠한 사려깊은 지성보다도 더 멋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려는 인간 자신에게 그 근원을 두는 데 반해 이데아로 향하는 에로스의 광기는 신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아니 더 나아가 플라톤은 마침내 에로스는 본질상 철학자라고까지 주장한다. 철학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혜는 가장 아름다운 것에 속한다. 만일 에로스가 로직 아름다운 것만을 뒤좇아 가는 것이라면, 바로 이 지혜는 본질적인 대상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에로스는 반드시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며, 이것은 곧 철학함을 의미한다.

이렇듯 플라톤이 (국가)에서 말한 것은 궁극적으로 철학자에게도 해당된다.

@p72

"본래 철학자는 존재를 위해 노력한다. 철학자는 사람들이 그것만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그 많은 개별적인 것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철학자는 오히려 앞으로 계속 나아가서 존재하는 그 모든 개개의 본성을 파악하기 전까지는 실망하지 않고 에로스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 그가 참다운 존재자에 다가가 그 존재자에 자신을 결부시켜 이성과 진리를 얻게 되면 바로 그때 그는 인식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그는 참된 삶을 누리며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

따라서 그것은 궁극적으로 "플라토닉 러브"와 연관이 있다. "플라토닉 러브"는 철학하는 사람의 정열이고, 그 정열이 없이는 영원을 향한 진정한 추구란 있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의 철학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진정한 철학이라는 루소의 말은 옳다.

@p73

5. 아리스토텔레스

현세계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그는 플라톤과 더불어 그리스 철학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이다. 유명한 문헌학자 빌라모비츠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리스토텔레스, 그는 스콜라 철학이 존경하는 그러나 시험 준비생들은--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체계를 무미 건조하게 주입식으로 공부해야 했다--저주하는 사람이다." 바로 이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84년 혹은 383년경 스타기라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자주 스타기라 사람이라고 부르곤 했다. 이것은 예를 들어 셀링을 "레온베르크 사람", 니체를 "뢰켄 사람", 피히테를 "람멘나우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베를린에서 위대한 람멘나우 사람이 그의 유명한 연설 (독일 국민에게 고함)을 했다고 했을 때의 그런 의미이다.

@p74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스타기라 출신이라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도시는 그를 제외하고는 주목할 만한 철학자를 더 이상 배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스타기라가 트라키아 어딘가의 멀리 떨어진 외딴 지방이라는 것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위대한 스승 플라톤과는 달리 그리스의 정신적 수도 아테네의 시민이 아니라 지방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가 귀족 출신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플라톤과 구별된다. 그렇다고

그가 천한 집안 출신인 것은 아니다. 그는 훌륭한 시민 가문 출신으로 의사의 아들이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마케도니아 왕의 궁정 의사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의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으려 한 것 같지는 않다. 그 직업에는 고대의 증인들이 "약제사"라고 부르는 약을 조제해 파는 일도 속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히려 아테네로 가고 싶어했다. 가족들은 그를 아테네로 보내 주기로 하고, 가기 전에 그가 그곳에서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신탁에 물어 보도록 하였다. 이때 그는 철학을 공부하라는 신의 대답을 받았다고 한다. 만약 신탁이 다른 대답을 주었더라면 서양 정신사가 어떻게 전개되었을 지는 예측할 수 없다.

상당한 재산가였던 아버지는 아들의 학문 연구를 위한 충분한 재산을 물려주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록 철학자이기는 하지만, 일생 동안 편안한 생활을 누리고 많은 하인을

거느리며 호화로운 저택과 훌륭한 시중을 받으면서 지내는 것에 커다란 가치를 두었다. 그와 같은 시대 사람인 디오게네스는 집 대신에 커다란 통 안에서 살았던 것으로 유명한데, 그는 결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모범적인 인물로 비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훗날 기술하듯이, 행복에는 이 세상의 물건들을 충분히 소유하는 것도 속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는 화려한 옷을 입고 반지를 끼고 머리를 손질하는 등 남달리 치장에 신경을 썼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와 같이 화려한 치장에 상응하는, 남의 이목을 끌 만한 외모는 아니었던 것 같다. 당시 사람들은 "그는 다리가 가늘었고, 눈은 작았으며, 이야기할 때 약간 말을 더듬거렸다"고 덧붙여 말한다.

@p75

스타기라에서 아테네로 온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이것은 그 당시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한 학문에 골몰하며 쓸데없이 꼬치꼬치 캐묻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철학은 오히려 굉장히 폭넓은 관심사로 통했다. 근본적으로 모든 지식과 모든 학문이 철학에 속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정치가이든 장군이든 또는 교육자가 되려는 사람이든 처음에 한번쯤은 철학에 몰두해 보는 것이 매우 유용하다고 여겨졌다.

그 당시 아테네에서 철학을 위한 훌륭한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던 사람은 플라톤이었다.

플라톤은 아카데모스의 신성한 숲에 아카데미아를 설립하여 자기 주위에 한 무리의 학생들을 모아 놓고 그들과 공동으로 철학을 하였다. 이 공동체에 17세의 아리스토텔레스가 합류한다. 그는 20년간을 그곳에 머물면서 배우고 익히면 토론하였고, 특히 눈에 띌 정도로 성실했으며 책에 파묻혀 지냈다. 그래서 플라톤은 그에게 책벌레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는 스승을 매우 존경하였고, 이러한 스승에 대한 정중한 태도를 일생 동안 유지하였다. 훗날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은 악한 사람들이 감히 칭찬해서도 안 되는 그러한 사람이며 심지어 플라톤은 신이라고까지 말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은 결국에는 자신의 고유한 철학 사상에

이르게 되고 따라서 고령의 플라톤이 가르치는 그 모든 것에 동의할 수 없게 되는 일이

생긴다.

@p76

이러한 사실에 대해 플라톤은 "어린 망아지가 자기를 낳아 준 어미말을 뒷발로 차듯 아리스토텔레스는 나를 한껏 두들겨 팬다"고 약간은 체념 섞인 어조로 읊조렸다.

그러나 그것이 공공연한 갈등으로 비화된 것은 플라톤이 죽은 후이다. 플라톤이 죽은 후

아카데미아의 새 원장으로 임명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다른 사람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일로 비위가 상해 여기저기 떠돌다가 마침내 소아시아의 어느 군주에 의해 새로운 안식처를 제공받았다. 이 군주는 플라톤적인 정신의 철학을 진심으로 좋아하였고, 그의 철학적인 자세를 죽을 때까지 유지하였다. 이 군주는 페르시아가 침공했을 때, 십자가에 매달리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감옥 속에 있으면서까지도 그의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철학의 품위에 어긋나는 행동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그러는 사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군주의 성을 떠난다. 이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인생에서 두번째로 중요한 만남을 체험한다. 그는 아테네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을 만난 이래로, 마케도니아에서 당대의 가장 위대한 군인이자 천재적인 정치인인 알렉산더 대왕을 만난다. 물론 알렉산더 대왕은 이 당시 아직 대왕이 아니었고 13세의 소년에 불과했다.

@p77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정치 고문관이 아니라 그의 가정 교사가 된다. 우리는 이 철학자의 교육 방법이 장래의 정치가이자 장군이 될 알렉산더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년 동안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힘과 정신, 즉 장차 세계를 정복할 대왕과 보편적인 의미로 정신계를 지배한 철학자가 함께 생활했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그려보면 아무래도 공교롭게 느껴진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임명된 관직이 전혀 위험하지 않은 자리는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임으로 왕자의 가정 교사로 온 사람은-일부러 그랬는지 실수로 그랬는지 분명하게 밝혀낼 수는 없지만-반란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그는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쇠창살로 만들어진 철장에 갇혀 그 나라의 구석구석을 끌려 다닌 뒤 마침내 사자의 밥이 되고 만다. 고대의 수다쟁이들은 이 비극적인 사건을 계기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알렉산더를 계획적으로 독살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는 죄를 뒤집어씌운다. 추측하건대 이 이야기는 진실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추적자들은 이 철학자를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이 그는 궁중을 떠나 자유로운 도시 아테네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아테네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자기 주위에 끌어들였다. 그는 제자들과 큰 홀에서 만나 그들과 더불어 홀의 여기저기를 왔다갔다하면서 토론하였다. 아테네인은 이 광경을 매우 기이하게 여겨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제자들에게 "배회자들"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철학사는 이 사실을 고려해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제자들을 매우 고상하게 "소요학파"라고 부르고는 있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배회자들"을 뜻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도 여전히 그러하듯이 제자들은 특히나 그들 스승의 괴팍한 면을 주의깊게

관찰한다. 실제로 제자들은 스승에게서 몇 가지 기이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으레 학생들이 그러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들도 짓궂게 특히 스승의 잠자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스승이 항상 배 위에 뜨거운 기름을 담은 가죽 주머니를 놓고 자는 모습을 알아내고는 참으로 기이하다고 여겼다.

@p78

아마도 그는 그 주머니가 분명 필요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기록이 맞다면-아리스토텔레스는 지병인 위장병으로 고생하다 죽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더욱더 궁금하게 여긴 것은, 어떤 방법으로 스승이 잠을 줄였으며 가능한 한 재빠르게 잠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려 사유하는 자세로 돌아오는가 하는 것이었다. 제자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휴식을 취할 때면 손에 청동으로 된 구슬을 쥐고 그 밑에는 그릇을 놓아두었다. 그렇게 해서 스르륵 잠이 들면 구슬이 그릇에 떨어질 때 나는 소리에 깜짝 놀라 깨어나서 철학적인 사색을 계속할 수 있었다.

물론 그의 제자들의 공동 작업이 고작 그런 이야기에나 나오는 것 정도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자들을 개별적인 연구보다는 공동 연구를 하도록 엄격하게 이끌었다. 이렇게 해서 서양 정신사에서는 여기서 최초로 조직된 탐구 집단이 형성된다.

그런데 이러한 학문적인 평화가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과 더불어 아테네의 정치적 상황도 급변하였다. 아테네는 이제 마케도니아의 영향에서 벗어났고, 마케도니아인과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은 적에게 협력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p79

아리스토텔레스를 정치범이라고 공개적으로 죄를 뒤집어 씌우기는 했지만 그의 유죄를 증명할 증거가 충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죄가 될 만한 다른 이유를 찾아냈는데, 그것은 그가 신을 모독했다는 죄목이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고소를 피해서 도망쳐 버린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은 아이러니컬한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것은 아테네 시민들이 이미 그 전에 소크라테스에게 저지른 그와 똑같은 죄를 두번째 철학자에 대해서도 저지르는 것을 막기를 원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망명하여 얼마 살지 못하고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노예들과 애첩까지도 일일이 다 신경을 쓴 상세하고도 사려깊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상이 바로 위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애이다. 여러 차례의 거주 변경, 궁중에서의 잡다한 활동, 매우 다양한 종류의 교육적 의무, 죽음의 위험과 비난 등 그가 겪은 이 모든 사건들을 생각해 볼 때, 그가 철학적인 문제를 어떻게 그처럼 조용하게 연구할 수 있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고대 철학자 가운데 어느 누구도 아리스토텔레스만큼 꾸준히 성실하고 근면한 연구로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지는 못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자신의 개인적 운명에 대해서는 신경을 Tm지 않고 오직 온전히 사물과 사물의 연구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한번은 그가 어떤 사람이 자신에 대해 비난하는 말을 들었을 때, "만일 내가 이 자리에 없었다면 그 사람은 나에게 채찍질을 했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그의 전형적인 스타일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눈을 돌리지 않은 만큼 더욱더 세계로 눈을 돌렸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박식한 학자이면서도 세계를 대변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의 모든 관심은 실재에, 그 모든 다양한 실재의 형상에 쏠려 있었다. 그는 동물의 형태와 행태, 그리고 천체, 헌법, 시학, 수사학 등 광범한 분야를 탐구하였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해서 물음을 던졌다. 즉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며 행동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유해야 하며 행동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물었다.

@p80

그러나 이 모든 물음은 단순히 박식한 사람의 피상적인 차원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그 모든 것에 있어서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였다. 다시 말해 그는 사물의 본질에 대해서 질문하며, 결국에는 모든 실재가 바탕을 두고 있는 그것 그리고 거기에서 생겨나며 그리로 향해 가고 있는 바로 그것에 대해 묻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연구 결과를 방대한 저서로 후세에 남겼다. 고대의 한 증인은 400여 권이었다고 하고, 다른 증인은 1,000여 권이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무척 정직한 학자인 또 다른 증인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기술해 놓은 줄 수를 세느라고 많은 고생을 했는데, 이때 그가 계산한 합계는 총 445,270줄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방대한 저작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 학문의 창시자가 된다.

그러나 그가 자연 과학 저서에 남겨 놓은 연구 결과들은 그렇게 큰 빛을 보지 못했다. 그 저술 내용의 대부분이 낡아빠진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제자들과 협력하여 아주 세밀하게 사람들이 동물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전부와 동물을 정확하게 탐구하여 동물에게서 밝혀낼 수 있는 것 전부를 모았다. 거기에는 동물이 어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떻게 번식을 하는지, 어떤 병에 걸리는지 등이 수록되어 있다.

@p81

그리고 가끔은 아주 기이한 사실들도 밝혀내곤 했다. 가령 진흙과 모래 사이에서 일종의 원초적 교미로 생겨나는 동물이 있다거나, 생쥐들이 소금통을 핥기만 해도 새끼를 밴다거나, 자고라는 새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미풍만으로도 새끼를 밴다는 등등이 그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관심을 기울여 인간을 해부학적 관점에서 탐구하였다. 그는 여기에서도 몇 가지 기이한 사실들을 발견한다. 예를 들면 뇌는 중요하지 않은 부속 기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적인 것은 바로 심장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이에 비해 뇌는 단순히 뜨거운 피를 식혀 주는 일종의 냉각기일 뿐이다. 왜냐하면 "뇌는 장의 온도와 흥분을 조절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기이한 생각들을 꿰뚫고 하나의 위대한 사상, 아주 커다란 결실을 맺는 하나의 사상이 대두된다. 즉 생명체를 단순히 부분들이 모인 더미의 축적이나 단순한 기계 장치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살아 있는 것은 하나의 유기체인 것이다. 즉 자기의 부분들에게 처음으로 비로소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그러한 전체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탐구는 생명의 영역을 넘어서 세계 전체로, 즉 하늘, , 지구로 향했다. 그러나 이 모든 탐구는 자연 그 자체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시도라는 데 그 의의가 있다. 그리하여 후대의 과학, 특히 중세, 더 나아가 근세의 과학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발견을 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유기체의 본질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유기체는

하나의 독특한 전체로서 그것이 하나의 목적과 목표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이끌려지고 있다. 그런데 목적과 목표는 유기체 밖에서 안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가 그것을 그 자체 안에 근원적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기체의 목적과 목표는 어디에 성립되는가? 그것은 유기체가 자신의 가능성의 전 영역을 실현시키려고 추구하는 바로 거기에 성립하고 있다. 예컨대 식물의 본질은 그것이 식물이 되려는 모든 가능성을 실현시키려고 추구하는 것, 즉 그것이 배아, 개화, 결실을 통해 자신을 구현하는 거기에 있다.

@p82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표현하기 위해 현실태라는 개념을 만들어 낸다. 그는 현실태의 개념을 통해 개개의 모든 생물은 각기 자기 자신 안에 추구해야 할 목적과 목표를 지니고 있으며, 자신의 내적인 목적 추구성에 따라 스스로를 전개시켜 나간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듯 개개의 유기체에서 보여지고 있는 이러한 것을 전체 자연을 설명하는 그의 해석에 적용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 안에 배태되어 있는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충족시켜 실현하려고 한다. 전체 세계는 자신의 가장 고유한 완전성을 위해 노력한다. 바로 거기에 자연의 생동감이 있고, 또한 자연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다. 세계는 완전성으로의 열망에 의해 철두철미하게 지배되고 있으며 자연 자체도 바로 이러한 욕망의 집합체일 뿐이다. 세계는 자기 실현과 자기 완성이라는 하나의 엄청난 사건이다. 이 보편적 목적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상에서 매우 중요한 근본 사상이다.

이제 이 보편적 목적론은 인간에게도 아주 탁월한 방식으로 적용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제 그토록 오랫동안 몰입해 왔던 그리스 정신에 대해 언급한다. 즉 사적인 생활에서나 공적인 생활에서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인간의 현존재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는 이 물음에 대해서도 전체 자연에 대해서처럼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실현이라고 대답한다. 모든 생물처럼 인간도 하나의 근원적인 추구라는 특성으로 나타난다. 즉 인간에게 좋은 것, 그가 자신의 연락을 거기에서 느끼고 있는 바로 그러한 근원적인 것에 대한 추구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인간에게 참으로 좋은 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참된 선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인간은 그가 본질상 그것이어야 하는 바, 그것을 가능한 한 최대로 실현하여 성취시키려 한다. 인간은 진실로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본질적인 숙명이다.

이 사상으로 인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네가 "마땅히 되어야 할 그 무엇이 되어라"라는 원칙을 준거로 삼고 있는 모든 휴머니즘의 시조가 된다. 물론 그러한 윤리학은 모든 것이 인간과는 근본적으로 잘 되어 가고 있고, 인간이 전체 세계 안에서 단절없이 잘 융합되어 있다는 의식을 아직 갖고 있었던 그러한 시대에만 가능하다.

@p83

고대 말기에 그리스도교가 발원하면서 인간성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는 의식이 번져가기 시작하자 사정은 달라진다.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대해 여전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인간은 본질상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의 도덕적인 과제는 인간 본질의 근원적인 선을 실현하는 데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규정은 아직 형식적일 뿐이다. 그렇다면 본질적으로 인간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본질에 따르면 인간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하는 물음들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이 점을 파악하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동물과 구별해서 관찰한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결론에 이른다. 인간을 동물과 구별시켜 주는 것은 정신과 이성, 즉 로고스이다.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의미 없는 것을 계획할 리 없는 자연이 그 모든 생물 외에 또 인간을 태어나게 했다면, 그것은 인간만이 유일하게 실현할 수 있는 것 즉 정신, 이성, 로고스가 실현되기 위해서이다. 이렇듯 인간 현 존재의 의미는 인간이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인 이성을 도야하는 데 있으며, 인간이 실제로 그 무엇 즉 이성적인 생명체가 되는 데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참된 본질을 로고스에서 보았다면, 인간이 이 로고스의 탐구를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양 논리학의 아버지로 불리어지는 것은 그 어떤 학문적 관심의 우연이 아니라 그가 발견한 다음과 같은 사실 때문이다. 즉 인간은 그의 가장 고유한 본질인 로고스를 올바른 방식으로 실현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렇기 때문에 또한 이 로고스에 대해 통달해 있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만 단순히 로고스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인간의 본질이 충분히 규정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가 로고스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되어야 한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오직 세계와 인간에 대한 그리스적 이해에서만 가능하다. 그리스인에게 로고스는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 세계의 수수께끼를 풀어 그것을 구체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로고스를 소유하고 있는 존재이다라고 말할 때, 이것은 바로 세계를 인식해야 하는 인간의 사명을 의미한다.

@p84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나 그리스 사상 전반에 걸쳐 인간 현존재의 의미는 근세의 사상에서처럼 세계정복이 아니라 세계 인식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 최고의 생활 형태는 행위하는 생활 형태가 아니라 인식하는 생활 형태라고 주장했다 할지라도, 이것은 박식한 학자의 교만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철저한 숙고의 결과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에게 있어 인식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모든 가능성 위에 놓여 있다. 만일 현대에도 여전히 학문과 순수한 인식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면, 그것은 특히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의 영향을 계속 받은 덕택이다.

인식의 우위는 그밖에도 행동 영역에서까지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여기에서도 이성이 행동을 지배한다. 정열에 맹목적으로 이끌려 가는 행동이 도덕적인 행동이 아니라 인간이 신중하게 생각해 이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현존재를 형성하도록 하는 행동이 도덕적이다. 그리고 그것만이 또한--가장 정열적인 민족의 아들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바로는--인간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파괴시키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 것이다. 오직 통찰만이 올바른 척도를 제공한다

그렇지만 사물, 인간, 인간의 행동을 인식하려는 이러한 관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노력이 목표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그는 철학자로서 궁극적으로 이런 물음을 던진다 이렇듯 낭비스러울 정도의 풍족함을 눈앞에 보이고 있는 그 모든 것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가? 세계와 인간은 그들 본래의 근원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이렇듯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적 정신의 철학적 문제, 즉 현실의 더 깊은 근거에 대한 물음에 봉착한다.

여기서 그가 현실의 영역 어디에서나 발견한 근본 특성, 즉 보편성이 문제가 된다. 전체 세계를 철두철미하게 지배하고 있는 위대하고 포괄적인 운동은 본래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세계를 끊임없이 그 모든 구석구석에서 움직이도록 유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운동이 출발해 나오는 그러한 첫번째의 운동자가 존재해야 하지 않는가? 그는 실제로 세계는 어떤 최초의 운동자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고 대답한다.

@p85

그리고 이 최초의 운동자는 어떤 다른 것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또 다른 운동자는 무엇이냐고 또 물어야 할 것이고, 그래서 결국 최초의 운동자는 있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움직이지 않으면서(다른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최초의 운동자 또는 그 운동자가 만들어 놓고 있는 그것을 주의깊게 관찰하면, 우리는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의 부단한 추구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추구는 무엇에 의해서 야기되는가? 사랑이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생기듯이 분명 그것도 그것이 추구하는 바로 그것에 의해 야기될 것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방식으로 움직여지지 않으면서 움직이게 하는 최초의 것을 생각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것은 세상의 그 모든 추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목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에 또 다른 많은 규정들을 덧붙인다. 세상에서의 그 모든 추구는 자기 실현을 도모한다. 따라서 궁극의 목적은 현실적인 것 가운데 가장 현실적인 것, 즉 순수 현실이다. 그렇다면 가장 현실적인 것과 가장 완전한 것은 어떤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은 바로 신성이라고 대답한다. 따라서 현실의 근본 특성, 즉 부단한 실현과 완전성을 향한 부단한 욕구는 바로 여기 이 신성 안에 근거하며 거기로부터

발원하고 있다. "모든 것은 본성적으로 자신 안에 신적인 어떤 것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사물을 냉철한 정신으로 탐구하는, 세상을 대변하는 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최종의 말은 세계가 아니고 신인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교의 의미로서의 밖에서부터 세계를 존재하게끔 만든 그러한 창조주 신이 아니라 세계에 내재하는 세계 추구의 최종 목적으로서의 신성이다. 루터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우화 작가", "타락한 철학자"라고 불렀을 때,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서 그리스도교적 신개념과는 현격하게 다른 본질적인 차이를 느꼈던 것이다.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에 대한 사상은, 중세 그리스도교 철학이 그를 끌어들이는, 아니 더 나아가 그를 때때로 "자연적인 것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길을 닦는 자"라고까지 칭하게 한 그러한 방향으로 가기도 한다.

@p86

그는 더 나아가 어떻게 궁극적인 목적, 즉 신성을 생각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인간이 불완전한 방식으로만 존재하고 있는 그것,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최고의 것인 그것은 완전성에 있어서의 신성 즉 이성, 로고스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분명히 말한다. "신은 정신이거나 정신을 훨씬 초월하는 것이다."

신성이 사유하는 정신이고 그의 본질이 인식함에 있다면, 도대체 신성은 무엇을 인식하는가를 물을 수 있다. 세계는 아니다. 세계라면 궁극적인 목적이 다시금 자신의 대상인 세계에 얽매이게 될 것이고 이로써 신성은 더 이상 최종적인 목적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신성이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면, 신성의 인식 대상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은 신성 자신이라고 대답한다. 신성은 자기 자신에 대한 순수 사유이며, 일종의 자신의 본질에 대한 관상에 푹 빠져 있음이다. 이러한 통찰과 더불어 실제의 근원에 대한 그리스적 숙고는 그 절정에 도달한 셈이다.

이렇듯 세계에 온몸을 바친 냉철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궁극적으로 종교적인 근원을 갖는다. 그는 말년에 이르러 실재를 인식하려고 한 그의 부단한 노력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은 기이한 말을 남겼다. "내가 내 자신으로 다시 던져지면 질수록, 고독하면 할수록, 나는 더욱더 신화를 사랑하게 된다." 세계를 충분히 관찰한 사람은 결국에는 신성에 대한 앎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기에는 바로 그것이 인간의 과제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윤리학)의 결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일 따름이니 인간적인 일을, 사멸할 따름이니 사멸할 것들을 생각하라는 권고를 따라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할 수 있는 데까지 우리 자신을 불사 불멸한 것이 되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p87

6. 에피쿠로스와 제논

의무 없는 행복과 행복 없는 의무

에피쿠로스와 제논, 그리스 후기 철학자인 이 두 사상가는 에피쿠로스적인 세계관과 스토아적인 세계관의 창시자이며, 정반대의 사상가이기도 하다. 좀 괴상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대척자(지구상에 정반대되는 곳에 사는 사람)이다. 이 말은 두 사람의 발이 서로 반대되는 땅위에 서 있어서, 그들의 머리는 정반대되는 것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들은 단 한가지 점에서 일치할 뿐이다. 그들이 그리스적 정신이 몰락해 가는 시대에 살았던 만큼, 이 두 사람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순수한 철학적 인식이 아니라, 갈수록 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이 세계에서 인간의 올바른 위치, 특히 철학자의 올바른 위치를 찾는 일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똑같은 물음에서 시작한 그들은 서로 정반대되는 결론에 도달한다.

@p88

우선 에피쿠로스에 관해서 말하자면, 가장 많은 비난을 받았던 고대철학자의 한 사람이다. 지나치게 먹고 마시는 쾌락에 빠졌다는 소문이 그를 따라다녔다. 너무 많이 먹은 탓에 하루에도 몇 번씩 먹은 것을 토해 내야 했다는 것이다. 그는 밤마다 벌어지는 연회에 자신의 정신력을 모두 탕진해 버렸을 정도였다. 거기다가 너무 지나칠 정도로 사랑의 향락에 흠뻑 빠져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의 몇몇 단편에 포함되어 있는 창기와의 잦은 서신 교환과 부인들을 은근히 유혹하는 듯한 편지들은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가 그 중 한 여자와 그 여자의 집에서 동거했다는 사실은 특히나 매우 대단한 스캔들이었다. 그가 그의 동생을 중매해 주었던 것 역시 좋지 않았다. 그 외에도 또 악의 있는 어떤 적대자는 12통의 음란한 편지를 그가 쓴 것이라고 무고하기도 했다. 그는 이 모든 못된 짓을 하느라고 진지한 학문 연구를 등한히 하였다고 전해진다. 요컨대 사람들은 에피쿠로스를 여지없이 깍아내렸던 것이다. 로마의 엄격한 스토아 철학자인 에픽테토스는 그를 단 한마디로 "방탕자"라고 부른다. 또 다른 후세 사람은 에피쿠로스와 그의 제자들을 심지어 "에피쿠로스의 돼지들"이라고까지 부르기도 한다.

물론 제자들과 후대의 추종자들은 스승의 이런 모습을 극구 부인한다. 에피쿠로스는 금욕주의자로 칭송받았다는 것이다. 학파 내부에서는 어쩌다가 가끔 기껏해야 딱 한 잔의 포도주만을 마셨을 뿐, 대개는 물을 마시는 것으로 만족하였다고 한다. 또한 아주 어려운 시절에는 보잘것없는 콩요리로 연명했다 한다. 어떤 제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p89

"에피쿠로스의 생활을 다른 사람의 생활과 비교해 볼 때, 사람들은 그의 온화함과 자기 만족을 보면 그의 생활을 하나의 신화라 부르게 된다." 또한 그의 말에 따르자면, 에피쿠로스는 관능적인 사랑도 삼가했다고 한다. "사랑의 향락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 철학자에 관해 전해지는 이야기는 더 있다. 그는-이것은 그의 유언장이 증명하고 있다-그의 가족과 친구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세심하게 배려하였다고 한다. 나아가 노예와도 인간적인 유대 관계를 맺었다. 노예에게도 철학적인 토론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하였고, 유언장에는 노예를 해방시킬 것을 지시하였다. 자신의 학문적 연구에 관해서 에피쿠로스 자신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미 14세에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 관심을 일생동안 한번도 등한시한 적이 없었다고. 이에 대해 그는 그의 마지막 이별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매우 인상적으로 쓰고 있다. "매우 행복했던 삶의 나날을 다시 한번 경하하며 동시에 삶의 순간을 마감하면서 나는 여러분에게 이 글을 씁니다. 오줌이 나오지 않는 괴로움과 이질로 말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철학적 대화를 상기하면서 내 영혼의 기쁨은 이 모든 고통을 견며 냅니다."

비난과 변호, 이 두 가지는 모두 하나의 공통적인 배경을 갖는다. 그것은 에피쿠로스가 어떻게 자기 시대의 위기를 견뎌 내려고 했는가하는 방식이다. 에피쿠로스는 그리스 말기에 덮쳐 온 인간 현존재의 의미에 대한 무력감에 직면하여 인간의 삶의 본질은 행복일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행복은 무엇보다도 고통을 피하는 것을 포함하며 그것을 좀더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쾌락이다. 그렇기 때문에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한다. "쾌락은 행복한 삶의 근원이자 목표이다." 비록 에피쿠로스가 육체적인 향락을 경멸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 말을 바로 그런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쾌락은 정신의 아름다운 황홀경을 추구한다. 즉 대화를 나누고, 음악에 귀를 기울이며,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특히 무엇보다도 철학함을 추구한다.

@p90

에피쿠로스는 참된 쾌락과 참된 행복은 영혼의 고요한 평정에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우리가 격정을 침묵시킬 때에 도달할 수 있다. 즉 두려움, 욕망, 고통 등과 같은 이 모든 "영혼의 소용돌이"를 잠재울 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격정을 가라앉히면, "우리 영혼으로부터의 그 모든 혼란은 사라진다." 바로 여기에 철학의 최대 과제가 놓여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에피쿠로스가 철학이라 이해했던 그것, 즉 실천적 삶이 구현되는 셈이다 "어떠한 격정도 치료하지 못하고, 격정을 영혼에서 내몰지도 못하는 그러한 철학자의 이야기는 공허하다." 그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본래적인 철학적 태도, 즉 정신의 "의연함", 영혼이 누리는 "바람 한점 없는 잠잠함", "바다와 같은 고요함"이 나타난다.

그런데 어떻게 철학이 그런 식의 "영혼의 치료약"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철학이 격정의 들판을 벗어나 이성의 차원으로 들어섬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철학이 쾌락의 영역을 떠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이성의 차원에서 철학의 최고 쾌락이 생겨 나온다. "인간은 이성적인 생활을 하지 않고서는 쾌락이 넘치는 생활을 영위할 수 없고, 반대로 쾌락이 넘치는 생활을 하지 않고서는 이성적으로 생활할 수 없다." 이렇게 해서 통찰과 실천적 삶으로 이해된 철학은 인간 현존재의 절정에 이른다. "오직 명석한 사고만이 우리에게 즐거움에 넘친 생활을 마련해 준다", "이성은 우리의 최고선이다."

영혼의 평화를 어지럽히는 모든 것을 극복하고 나면, 철학자는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자기 만족을, 정신의 행복한 자유를 느끼며 살게 된다. "자기 만족의 가장 아름다운 열매는 자유"이기 때문이다. 자유는 인간이 오직 그의 주위 세계의 예속에서 해방될 때 획득된다. 따라서 에피쿠로스 학파의 표어는 "은둔 생활을 하라!"이다. 이것이 성공하게되면 철학하는 사람은 "인간 가운데서 신처럼" 존재하게 될 것이다.

사적인 생활로의 귀환은 철학자가 공적인 생활에 대한 요구, 특히 정치적 생활에 대한 요구에서 될 수 있는 한 물러서야 한다는 결과를 초래한다. 철학자는 부와 명예와 권력의 유혹에 빠져서는 절대로 안 된다. 철학자는 세상 돌아가는 형편에 크게 관여할 필요가 없다. 그는 될 수 있는 한 공적인 의무를 멀리 한다. 그 모든 일은 단지 영혼의 혼란만을 조장할 뿐이다. "인간은 생업과 정치의 감옥에서 해방되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피쿠로스의 방식은 결코 은둔자의 자세가 아니다. 에피쿠로스가 그의 집합 장소인 "정원"에서 우정을 향유한 것을 보면, 공적인 생활의 자리를 이제는 우정이 대신한 것이다. 그 후의 모든 에피쿠로스 학파 학자들은 이 우정의 생활을 실천했다. 왜냐하면 "우정을 얻을 수 있는 재능은 지혜가 행복에 기여할 수 있는 그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우리가 우정을 맺으며 살도록 만들었다." 보통 때 냉정한 에피쿠로스도 이 말만은 떨리는 시적 억양으로 말한다. "우정은 지구의 주위를 춤추며 돌면서, 우리 모두에게 행복에 눈을 떠야 한다고 공언한다."

@p91

공적인 생활 이외에 철학자가 이성적인 영혼의 평온함을 갖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으로서 일종의 세계관을 들 수 있다. 이 세계관은 현실을 불안한 것으로, 또한 모든 실재 심지어 인간까지도 지배하는 강력한 자연의 힘이나 어두운 운명의 유희장으로 파악하는 세계관이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신화와 또 몇몇 초기 철학자가 구상한 인간을 불안하게 하는 세계관이 허용되지 않도록 많은 생각을 해야 했다. 그는 이러한 의도로-순수 인식에 대한 충동에서가 아니라-자연 철학에 헌신한다. "우주의 본성이 어떻게 성립되고 있는지를 모르는 사람-그저 시인들이 지어 낸 신화가 우주의 본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바를 따라 아주 의심스러운 표상만을 갖고 있는 그런 사람-이 다른 어떤 사람을 삶의 가장 중요한 문제와 관련된 불안에서부터 해방시켜 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에피쿠로스는 자연에 대한 고찰에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받아들인다 사실상 실재하는 것은 생성되거나 소멸되는 사물이 아니며, 어떤 무한한 능력을 간직하고 있는 자연력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눈에 보이지 않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알맹이, 즉 원자이다. 원자는 그 수가 무한하고 크기와 모양 그리고 무게가 아주 다양한데, 이러한 원자들이 서로 결합하고 다시 분리되기도 한다. 원자는 무한히 텅 빈공간에서 영원한 운동을 하며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서로 만나서 사물을 만들어 낸다. 이때 원자가 무한히 많기에 무한히 많은 세계를 산출해 낸다. 영혼까지도 아주 미세한 원자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세계가 이런 식으로 파악된다면 세계는 더 이상 인간에게 위험한 거주지가 아니다. 이 경우 철학자는 더 이상 세계를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

@p92

이것은 에피쿠로스에 의해 한층 심화된다. 철학자의 조용한 자족을 특별히 방해할 수 있는 것으로는, 신들이 분노와 벌로써 또는 호의와 표상으로써 인간 생활에 관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피쿠로스는 신들에게서 현실을 지배하는 권력을 빼앗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신을 현존재의 가장자리로 내몰아 버린다. 그는 인간에게 해를 줄 수 없는 체류지를 마련해 신들을 그곳으로 보낸다. 신들은 세계 사이의 중간 지정에 거주한다. 신들이 그곳에서 이 세상의 사건에 관여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인간도 그러한 신을 염두에 둘 필요가 없다. 그들의 안식처에서 신들은 지복의 삶을 누리고 있다. 그곳은 철학자의 삶과 비교될 수 있다. 다만 신들의 삶이 훨씬더 완전한 삶일 뿐이다. "신성은 불사 불멸하고 지고 지순한 행복의 존재이다." "신들의 생활형태는 더 이상 복되고 더 이상 풍부한 선을 생각할 수 없는 그러한 삶이다."

그러나 끊임없는 불안의 원천인 죽음과 인간 현존재의 무상함이 아직 남아 있다. 이 두 가지 모두 그리스 정신의 근본 경험에 속해 있고 고대 말기에 한층 심화된다. 따라서 에피쿠로스는 영혼의 평화를 얻기 위해 죽음 앞에서의 불안을 제거하려고 노력해야만 했다. 그는 죽음의 본질을 성찰하면서 죽음은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좀더 정확하게 고찰해 보면 죽음은 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그것만을 실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느낄 수 없다. "우리가 존재하고 있을 때, 죽음은 아직 찾아들지 않았다. 죽음이 찾아들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통찰이 본질적으로 삶을 즐길 수 있게 한다. "죽음이 일종의 무일 뿐이라는 인식은 덧없는 삶을 비로소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어 준다."

@p93

영혼의 한결같은 평온함에 대한 관심은 불사 불멸의 사상도 거부한다. 죽음과 더불어 육체와 영혼을 형성해 왔던 원자들의 결합이 해체되고, 개별자는 소멸해 버린다. 이 사실을 통찰하게 될 때, 인간은 신들이 제멋대로 벌을 주거나 상을 내린다는 내세에 대한 불안을 떨쳐 버릴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내세의 운명이란 없는 것이다. 아무 것도 인간이 이 제한된 삶을 살면서 현세의 그 모든 즐거움을 향유하는 것을 방해할 수 없다.

그런데 만일 모든 것이 앞에서 이야기한 내용에 의해 좌우되고, 정신의 성찰도 바로 여기에로 이끌고 가는 것이라면, 인간에게 철학함 역시 필연적이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젊은이는 철학함을 망설여서는 안 되고, 늙은이는 철학함에 지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에게도 영혼의 건강을 돌보기에는 너무 이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제 에피쿠로스와는 정반대되는 사람인 제논에 대해서 알아보자. 제논은 에피쿠로스의 학설과 생활 방법을 극단적으로 거부하였다. 제논은 에피쿠로스가 최고의 행복으로 간주한 쾌락을 몹시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그는 쾌락을 "매우 많은 청년의 영혼을 나약하게 만드는 유혹녀"라고 했다. 제논에게는 쾌락의 자리에 의무가 들어선다.

제논은 겉으로도 항상 엄격하고 준엄하게 행동하였다. 고대의 증인들은 서로 다투어 그의 특이한 모습을 기술하기에 정신이 없다. 그는 야위었지만 장딴지는 굵었다. 그렇다고 해서 건강한 체격은 아니었고 약간 수척한 편이었다. 항상 머리가 갸우뚱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자세였으며, 이는 그리 크지 않은 키 때문에 특히 눈에 띄었다. 왜 재치 있는 전기 작가가 그러한 모습을 이집트인 크레아티스와 비교해 묘사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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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준엄한 외모 뒤에는 근엄한 정신이 깃들여 있었다. 제논은 외관상 조금 어두운 분위기를 지녔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것을 정신적인 오만함 때문이라고 쉽게 말해 버릴 수는 없다. 사람들은 그가 다정 다감하고, 품행이 단정하였다고 칭찬하기도 한다. 첫번째 특성에 대한 증거는 지나칠 정도의 수줍음을 탔다는 것인데, 이 수줍음 때문에 그는 특히 자신을 보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을 피해 다녔다.

두번째 특성에 대한 증거는 그가 한두 번 창녀와 교제를 했는데, 마지막 교제는 다만 여자를 싫어하는 남자로 보이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사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먹고 마실 때에도 절제하거나 삼가하였고, 요령껏 연회를 피해 다녔다. 좋아하는 음식은 녹색 무화과와 빵과 벌꿀이었고 여기에 곁들여 한 잔의 포도주를 마셨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말에 따르면 그의 외투는 형편없이 초라한 것이었다 한다. 매우 금욕적인 사람을 특징지을 때, 상투적으로 "철학자 제논보다 더 금욕적인 사람"이라는 식으로 표현했을 정도이다. 어쨌든 그가 92세까지 살았던 것으로 보아 이러한 생활 방식으로 건강을 유지했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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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괴팍함에도 불구하고 제논의 정신적 출현은, 특히 그가 많은 무리의 젊은 추종자들을 가진 것을 보아도 매우 중요하다. 마케도니아 왕은 아테네에 체류할 때마다 제논의 강의를 빠뜨리지 않고 경청하였다 한다. 이렇듯 제논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점차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아테네인들이 그에게 도시의 열쇠를 맡겨 보관하도록 했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들이 그를 얼마나 존경했는지 알 수 있다. 그밖에도 아테네인들은 그에게 황금 월계관을 씌웠고, 그의 명예를 찬양하기 위해 동상을 세웠으며, 그가 살아 있을 때 그의 묘비를 세워 주었다.

그런데 사실 제논은 우연히 철학을 하게 되었다. 그는 본래 크게 성공한 상인이었는데 한번은 배가 침몰하여 엄청난 양의 화물을 잃은 일이 있었다. 그때 아테네의 어떤 책방에서 한 권의 철학책을 발견하고 읽게 되었다. 제논은 이 사건으로 인해 철학에 평생을 바치게 되었고, 그 이래로 그는 배의 침몰이 아주 도움이 되는 사건이었다고 자랑하였다. 한편 철학함에 있어서는 더 깊이 항해를 해나갔다. 어떤 고대의 증인은 그에 대해 "언제나 사물의 근본에까지 파고 들어가는 진지한 탐구가였다"고 한다.

제논과 그의 젊은 제자들이 모이는 장소가 얼룩덜룩하게 채색된 주랑이었기 때문에 그 학파는 "스토아"(건축에서 주랑이라는 뜻)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것도 특징적이다. 쾌락의 사도 에피쿠로스가 정원의 뜰 안에서 머물고 있는데 반해, 쾌락의 적대자이며 의무의 사나이인 제논은 엄격하고 진지한 건축에서 보호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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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논의 철학적 사상을 생생하게 나타내 보이려면, 이와 일치하는 후대 스토아 철학자들의 견해를 끌어들이는 것이 좋을 듯싶다. 왜냐하면 고대의 증인들은 뚜렷하고 분명하게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위 중기 스토아 철학자의 대표적인 인물인 파나이티오스, 포사이도니오스와 로마 철학자인 세네카,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은 여기에서 제외시켜야 한다. 이 두 학파는 스토아 학설을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초기 스토아 철학자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의 한 사람은 클레안테스이다. 그는 전직 직업이 권투 선수였는데, 게으른 거지 같은 사람으로서, 밤마다 물을 긷고 밀가루 반죽을 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또 다른 한 사람은 경마사 출신인 크리시포스이다. 그는 매우 날카로운 통찰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일반적으로 말하기를, 만일 신들이 철학을 한다면 그들은 크리시포스 식으로 했을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에피쿠로스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초기 스토아 철학자도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출발하였다. 그때는 의지할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의지할 기반에 대한 물음이 최우선의 문제였다. 따라서 철학은 그들에게 인간 현존재에 직접적인 의미를 주는 것이었다. 철학은 "삶을 영위하는 기술"이었다. 그러나 스토아 철학자는 생활의 의미를 에피쿠로스처럼 쾌락과 향락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일치에서 발견하려고 하였다. 그 배후에는 인간은 더 이상 우주와 도시 국가에 확고한 기반을 두고 있지 않기에 단지 그저 자기 자신만을 믿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인간의 도덕적 과제는 어떤 보편적인 덕의 구현이 아니라, 개인으로서 그의 앞에 놓여 있는 인간의 특별한 이념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서양 정신사에서 처음으로 인격 개념이 등장하고, 이 개념은 후기 그리스도교 사상을 거쳐 특히 괴테 시대에 이르러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을 스토아의 영향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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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인간은 어떻게 자기 자신과의 일치에 이르는가? 제논은 이렇게 대답한다. "인간은 자연 본성과 일치하여 살 때 자신과의 일치에 이른다." 따라서 자기 실현은 주관적 임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법칙, 즉 인간 속에 있는 자연 본성과 결부된 문제이다. 자기 자신과 일치된 행동을 하여 그래서 자기의 내면 속의 자연을 실현하는 사람은, 동시에 우주의 포괄적인 법칙과 일치된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여기서부터 자연을 파악하려는 스토아 철학자의 관심이 생겨난다. 그것은 순수한 지식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자기 인식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이 관심은 에피쿠로스 학파의 관심보다 더 진지한 것이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자는 닫지 세계에서 야기된 혼란을 피하기 위해 세계를 파악하려 한다. 이에 반해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는 도덕 그 자체의 본질을 통찰할 수 있기 위해 자연의 본질에 대한 인식을 필요로 한다. "자연에 대한 인식을 얻으려는 노력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 말고 어떤 다른 목표를 갖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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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아 학파는 자연의 본질도 에피쿠로스 학파와는 다르게 이해한다. 스토아 학파는 자연을 아무런 의미 없는 우연한 원자의 활동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생명력에 의해 철저하게 지배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어떤 하나의 강력한 자연의 원리가 있는데, 이것은 여러 가지 이름을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는 불이라고도 불리고 삶의 숨결, 또는 정신, 이성, 또는 운명이라고도 불린다. 궁극적으로 자연의 원리는 신성으로 표현되고 가장 최고의 신과 동일시된다. ", 정신, 운명, 제우스 등은 모두 같은 것이고 그것은 그 외에도 여러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신은 불사 불멸하고 이성과 정신을 갖춘 생명체이며, 행복에 있어서 완전하며 어떠한 악도 접근할 수 없고, 세계와 세계 안에 있는 모든 존재자를 배려하고 있다." 따라서 에피쿠로스 학파의 주장처럼 신들은 세계에서 멀리 떨어져 거주하지 않는다. 신들은 현존하고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세계는 신들의 섭리에 의해 다스려진다. 신들은 인간사에 관계하며 전체뿐 아니라 개별적인 것에도 관계한다."

강력하고 신적인 원리는 살아 있는 모든 실재 안에 현존한다. "신은 세계 안에 포함되어 있다. 신은 곧 세계의 영혼이다." 신은 "세계의 창조자이고, 만물의 아버지이다." 그렇다. 따라서 "전 대지와 온 하늘이 신의 존재이다." 신은 "구정물 속에도, 회충 속에도, 범죄자 속에도" 있다. 세계는 이렇게 살아 있는 전체이며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이성을 갖춘 생명체"이다. "이성이 세계의 모든 부분을 속속들이 파고 들어가" 있기에 세계 자체가 "이성적이고 영혼적이며 이해 가능한 것이다." 요컨대 스토아적으로 생각된 자연은 그 자체가 "신적인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무한한 창조력 때문에 신적인 원리는 하나의 유일한 세계가 아니라, 무한히 많은 세계, 서로 끊임없이 순환하여 뒤따르는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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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아 학파는 인간이 아주 탁월한 방식으로 신적인 것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는 그 통찰에 세계의 신성에 대한 사상보다 훨씬더 큰 가치를 둔다. 바로 이 내적인 신성이 인간의 자연 본성이다. "우주의 자연에서 인간의 자연 본성도 유래한다." 이 말을 사도 바울이 아레오파고스의 연설에서 인용하고 있다. "인간은 그의 이성으로 인해 신과 친척이 된다." 이러한 의미로 클레안테스는 신을 향해 "우리는 당신과 같은 종족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인간이 이렇게 보편적인 세계 이성에 참여하고 있기에 그는 또한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이성을 깨워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것은 가장 고귀한 과제이다. 왜냐하면 이성에 인간의 참된 본질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사상에 진리의 가능성도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인간의 내면 속에 있는 이성이 모든 실재를 지배하는 세계 이성에 상응하기 때문에 인간은 그가 인식하는 것이 참이라는 보증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거대한 자연의 필연성 속에 깊이 파묻혀 있다는 이러한 생각은 어려움을 내포하고 있다. 이 생각이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이 날마다 체험하고 있는 자유와 어떻게 일치할 수 있는가?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유라는 개념을 좀더 정확하게 규정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하였다. 자유는 제멋대로의 임의가 아니라, 본래의 근원에서부터 존재하는 것이다. "내면적으로 자유로운 그 사람, 그의 이성이 선택하는 것만을 행하는 그 사람만이 자유롭다." 인간이 실제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물러나 행위할 때, 자연적이고 이성적이며 신적인 그러한 자기 자신에서부터 행위하는 것이며, 바로 그때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필연성의 테두리 내에서 그 자신의 자유를 구현하는 것이다. 이렇듯 자유는 신적인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인간이 자신의 내면적인 이성에 귀를 기울이느냐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최고 이성의 명령인 도덕 법칙이 있어 그 법칙이 행해야 할 것을 명령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개인의 가슴 속에서 작용하는 다이몬이 우주를 관통하고 있는 의지와 화음을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내면적이고 신적인 원리에 복종하는 것이 곧 덕의 본질이다. 덕은 "이성과 화음을 이루고 있는 영혼의 자세이다." 덕은 곧 "이성적 존재의 완전한 구현이며 바로 그 때문에 그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행복이다." 물론 이때 인간은 보답을 바라서는 안 된다. "덕은 덕 그 자체를 위해 추구되어야 한다. 덕은 아무런 보상도 요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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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어떠한 형태로든 격정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격정은 인간을 자신의 가장 내면적인 원리에서 이탈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로서 본성상 이성을 따르고 이성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도록 규정되어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렇듯 이것은 행동을 제약한다. 왜냐하면 "감정도 우리가 이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방해하고 영혼의 조화를 깨뜨리기 때문이다." 감정은 "영혼의 질병이다." 따라서 스토아 철학자의 삶의 이상은 "격정 없는 것"이며 자신의 운명에 대한 "의연함"이다. 많은 스토아 철학자는 이와 같은 이념을 가지고 생활하였다. 스토아 철학적인 자세는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모범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모든 것 위에 의무의 사상, "순응함"의 사상이 있다. 의무를 다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들려오는 신의 목소리에 순종하는 것이다. 의무에 관한 한 에피쿠로스 학파 철학자가 의도했던 것과 같은 개인 문제로의 환원이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면 인간은 스스로에게 공적인 과제를 부과해야 한다. "덕이 있는 인간은 고독 속에 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천성적으로 사교적이고, 활동적인 생활을 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성적 존재의 공동체 안에 편입되어 최선을 다하여 이 공동체를 촉진시켜 나가야 하는 것은 자연이 요구하는 바이다." "우리는 천성적으로 서로 결합될 수 있고, 조화를 이를 수 있으며, 국가를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서부터 보편적인 인간 사랑, "모든 인간을 인간으로서 함께 결속시키고 있는 자연스러운 애정"이 자라 나온다. 공적인 생활에서의 의무를 강조한 이 사상은, 그리스 시대 말기의 진지하고도 엄격한 철학자, 즉 제논의 가장 위대한 공적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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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플로티노스

무아경, 속의 환상

그 자신도 출중한 철학자인 포르피리오스는 3세기의 가장 뛰어난 사상가인 그의 스승 플로티노스의 전기를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 시대의 철학자 플로티노스는 육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몹시 부끄럽게 여긴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포르피리오스는 여기에 걸맞게 플로티노스가 육체의 실존을 혐오하는 몇 가지 예를 열거한다. 플로티노스는 그의 출생, 부모, 고향에 대해 말한 적이 한번도 없다. 그는 영혼이 육체에 들어온 날인 출생일조차도 비밀로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에게는 심히 유감스러운 사건, 즉 생일을 축하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초상화를 절대 그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제자들은 당시의 가장 유명한 화가를 그의 강의실에 몰래 들여 보내서, 스승의 모습을 기억한 다음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다. 플로티노스의 육체에 대한 멸시는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을 몹시 괴롭히는 위경련에 대한 처방인 위를 세척하려는 것까지 거절하였다. 병에 걸려도 그는 약 먹기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원래 습관적으로 해왔던 매일 매일의 마사지마저 그만두자 그의 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는 먹는 것도 지나치게 줄였다. 그는 준비해 둔 빵 한 조각 먹는 것조차 자주 잊어 버렸고, 그 탓으로 결국은 불면증까지 얻게 되었다. 이러한 육체에 대한 멸시의 결과로 플로티노스는 앓아 누워 야위어 가기 시작했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으며, 손과 발이 곪아 터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제자들과 교제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플로티노스는 제자들과 서로 얼싸안고 인사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포르피리오스는 플로티노스의 그러한 태도 때문에 그의 추종자들도 점점 그를 멀리 했다고 전한다.

@p102

플로티노스는 철학자 암모니오스에게서 자극받아 28세에 철학을 시작하였다. 암모니오스는 소크라테스처럼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은 사람이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정원사 조수 일을 했기 때문에 그에게 "짐꾼"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플로티노스는 처음에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육자 생활을 시작했으며, 그 후 로마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공개 강의를 하였다. 그의 강의는 아주 활기차게 진행되어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떠들썩하기도 했다. 한 전기 작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강의는 뒤죽박죽 혼란스러웠으며 소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는 플로티노스가 청강생들로 하여금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도록 고무했기 때문이다." 로마에서는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많은 청강생이 모여들었다. 순수한 의미의 제자들만 모여든 것은 아니다. 상류 사회 사람들, 그 중에는 원로원의 지도적인 인물도 플로티노스의 강의를 들으러 왔다. 황제도 황후와 함께 친히 강의실을 방문하였다. 부녀자도 그의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특별한 개방성을 입증해 준 것이라고 플로티노스의 전기 작가는 적고 있다.

@p103

전해 내려오는 바에 의하면, 청강생들은 그들 스승의 가르침을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실천에 옮겼다고 한다. 첫번째 사람인 신분이 높은 어떤 원로원 의원은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그의 노예들을 해방시켜 주고, 그의 별장을 떠나 세상사를 등진 채 단지 이틀에 한 번만 음식을 먹으면서 금욕적으로 살았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그는 부수적인 결과로 관절염을 고칠 수 있었다고 한다. 두번째 사람은 변호사로, 이 사람은 원로원 의원에 비하면 자제력이 없는 편이었다. 그는 제자들 사이에서 심한 비난을 받았지만 돈에 대한 욕심이 많았고 고리 대금업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세번째 사람은 정치적 야망이 몹시 강한 사람이었다. 플로티노스는 이 야망을 잠재워 보려 하였다. 마지막으로 네번째 사람은 스승을 시기해서 마법의 주문을 외워, 스승에게 해를 끼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마법이 오히려 주문을 왼 자신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플로티노스는 진기한 신비의 능력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그는 마술이 미치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고 그의 사지는 마치 돈주머니가 닫힐 때처럼 오므라들었다 한다. 언젠가 한번은 이집트 승려가 플로티노스에게 악마가 붙었다며 주문을 외워 퇴치하려 하였다. 그러나 정작 나타난 것은 악마가 아니라 신이었고 이때부터 구경꾼들은 그를 숭배하게 된다. 플로티노스는 일상 생활에서도 기묘한 투시 능력이 있었다. 그는 도둑을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고, 사람의 내적 심리 상태뿐만 아니라 그의 주위 사람들의 미래의 운명까지도 일순간에 꿰뚫어 볼 수 있었다.

@p104

제자들은 플로티노스의 죽음을 육체에 대한 적대적인 관점에서 해석한다. 그들은 플로티노스의 죽음을 불멸의 영혼이 육체를 벗어 던지고 해방된 것으로 이해한다. 이에 대한 증거로 제자들은 그가 숨을 거두는 순간 한 마리의 뱀이 담 틈바구니로 사라져 버린 사실을 제시한다. 이러한 의미로 플로티노스는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이제 나는 내 안에 있는 신적인 것이 우주 안에 있는 신적인 것 안으로 들어가도록 노력하려 한다."

궁극적으로 플라톤에서부터 유래하는 육체와 감각에 대한 경멸이, 플로티노스에게는 그의 철학함의 근원적인 경향으로 나타난다. 즉 세상에서 떠나려는 충동, 그것도 세상에 대한 권태에서 이 세상을 떠나려는 충동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현존이란 "추방이며 저주"이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을 등지려는 것은 이론적인 성찰에서뿐만 아니라 어떤 특별한 경험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포르피리오스는 그 자신이 플로티노스와 교제해 온 6년 동안에 플로티노스가 네번씩이나 무아의 경지에 이르는 체험을 한 것을 보았다고 전한다. 즉 그러한 체험은 그의 가장 내면적인 핵심이 모든 세계를 뛰어넘어 도약하는 체험이다. "그때 그에게 신이 나타나는데, 그 신은 어떠한 형상도 형태도 갖추지 않은, 정신 위에 군림하며 전체 정신계를 지배하는 그러한 존재이다."

그러나 플로티노스가 그때 관조했던 것을 말하려고 할 경우 그는 해결하기 어려운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언어는 세계와의 만남에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언어는 이 모든 세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는 정확한 표현을 고를 수 없는 것이다. 신성이란 "실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신성이 존재한다는 것마저도 합당하게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성은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존재에 대한 개념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또한 신을 정신이라 지칭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정신이라는 개념도 인간이 유한한 자기 경험에서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신성이란 "신성이라고 생각되는 그 모든 것과는 다르다."

@p105

그렇지만 플로티노스는 자신의 이러한 체험을 포기하지 않고 알리고자 한다. 그는 그것에 어떻게 접근해 가야 할지 그 방법을 찾아냈는데 그것은 곧 부정의 길이다. 우리는 신에 대해서 "그가 무엇이 아니라고만 말할 수 있을 뿐, 그가 무엇인지는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신적인 것 그 자체는 이러한 부정의 방법으로 부정되지는 않는다. 정반대로 신적인 것이 아닌 것, 즉 세속적인 것, 유한한 것, 본래 시간적이고 무상한 것 등은 부정된다. 이러한 유한한 것들에 통용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해 버리면 이 모든 울창한 것을 훨씬 넘어서 있는 그것에 대해 대략적으로 예상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식으로 플로티노스는 신의 체험에 대해서 조언한다. "만일 그대가 신을 말로써 표현하거나 그와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면, 모든 다른 것을 끊어 버려라. 그리고 만일 그대가 모든 것을 끊어 버리고 신 그 자체를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면, 신에게 어떤 것을 덧붙여 줄까 찾지 말고, 오히려 그대가 아직도 그대의 생각 속에서 떼어 버리지 않은 것이 있나를 찾아 보라!"

플로티노스는 이런 식으로 부정의 길을 걸으면서 신성에 대해 몇 가지 부정적인 술어를 쓸 수 있음을 밝혀냈다. 신성은 무한하고, 절대적이며, 나뉘어지지도 않으며, 비공간적이고, 비시간적이며, 운동도 정지도 없고, 형태도 없고, 구체적인 것이 아니며, 크기도 성질도 없고, 사유도 의지도 없으며, 전혀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림으로써 플로티노스가 본질적인 신의 개념에 이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한한 현실-정신적이거나 감각적이거나 할 것 없이-은 항상 하나의 다양한 것임을 인간이 이해하게 될 때 신의 본질적 개념은 얻어 진다. 플로티노스에게 다수로 존재하는 것은 곧 유한한 현실의 근본특징이다. 플로티노스는 바로 이 다수를 일치시키는 것에서 본래적인 신성의 개념을 얻는다. 유한한 현실이 다수라면, 신성은 일자성이어야만 한다. 이렇듯 플로티노스는 신성을 "순수한 일자"로 파악한다. 신성은 그 자체로 모든 유한한 실재를 초월해 있으니, 존재와 정신까지도 초월해 있다. 이것이 이 사상가의 최고의 신개념이다. 물론 그는 개념으로써 결정적인 명칭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암시만 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자리라고 불리는 바로 그것에 근본적으로 이름이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고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일자는 우리가 말로써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크고 위대하다."

@p106

플로티노스는 여기서 거기에 놓여 있는 문제점을 극도로 어려운 사유의 과정을 거쳐 논의한다. 그는 무엇보다도 특히 일자가 어떤 독립적인 존재자로서 유한한 다수를 마주하여 갖고 있는 한, 그 일자는 참된 일자일 수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따라서 일자는 아주 단순한 방식으로 다수를 자신 안에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다수에 우선해서 일자가 있고, 일자 안에 다수가 있다." 그 까닭은 "거기에서부터 또는 그 안에서 다수로 존재하는 그 일자가 없다면 다수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성으로서의 일자는 공허한 수학적인 의미에서의 하나와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일자는 오히려 단일한 것으로서 특히 자신 안에 무한한 충일을 포함하고 있다. 철학하는 사람은 도약(황홀경) 속에서 일자를 "모든 것이, 그것도 전체로서의 모든 것이 동시에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그러한 근원 그 자체"인 것으로서 경험한다.

따라서 인간은 일자와의 무아적인 일치를 이루는 순간 다수의 세계를 능가하게 된다. 인간은 이 다수의 세계를 흡사 망각해 버린 듯하다. 그러나 인간이 여전히 육체에 머물고 있는 한, 그러한 경험에 영속적으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인간이 현실로 되돌아 왔을 때, 그는 다시 분열되고 모순적인 현실에 부딪치게 된다. 그러나 이제 인간은 일자를 직관하고 난 후이기 때문에 현실을 일자의 관점에서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은 "모든 존재자는 일자를 통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로써 모순이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일자가 모든 것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면, 분명히 말해 다수의 세계는 전혀 존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딜레마에서 플로티노스는 어떻게 일자에서 다수가 가능한지, 따라서 어떻게 일자에서 다수가 전개되어 나오는지를 증명해야 하는 과제를 갖게 된다. 그는 "모든 것의 근원으로서의" 일자를 탐구해야 한다. 이렇게 시도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 즉 일자를 어떤 경우에도 자신에서부터 자립적인 존재자를 독립시켜 놓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럴 경우 일자는 모든 것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일자는 세계의 원인이어야 한다.

@p107

플로티노스는 이러한 점에서 개념적인 파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그는 일자에서 실재의 발생을 단지 그림을 통해 설명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는 일자를 넘쳐흐르는 그러나 아무리 넘쳐흘러도 고갈되지 않는 샘이라 부르거나, 또는 빛을 발산하지만 아무리 방사해도 빛이 줄어들지 않는 태양이라 불렀다. 또한 그는 일자의 전개를, 어떤 대상이 자신의 실체를 조금도 잃어 버리지 않으면서 자신을 거울에 비춰 보는 데 비교했다. 이러한 비유에 플로티노스가 세계를 보는 시각이 표현되고 있다. 세계란 그노시스의 사상에서처럼 본래 독립적인 어떤 것이 아니며, 또한 그리스도교의 해석처럼 상대적인 자립성만을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세계는 신성에서 직접 나오고, 동시에 신성 안에서 유지된다. 세계는 일자에서 흘러 나오지만, 동시에 세계는 일자 안에 포함되어 머물러 있다. 세계는 근원에서 분리됨이 없이 근원에서 흘러 나온다. 일자는 다수 안에 "동시에 현존하고 또한 동시에 그것과 분리되어 있다."

그렇다면 왜 신성이 자기 자신 안에 남아 있을 수 없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신성이 세계로 자신을 전개시켜야 한단 말인가? 그 이유는 분명 플로티노스가 세계를 실재하는 것으로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러면서도 그가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세계를 뛰어넘는 일자에 대한 경험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자는 이 두 가지를 연결시키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바로 일자의 유출에 대한 사상의 근원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관적인 근거 제시만 갖고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자에서 그 안에 머물면서 유출되어 나오는 세계의 유래는, 세계가 일자에서부터 생겨나오는 것으로 고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일자가 그 자신에서 세계의 생성으로 넘어가고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플로티노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세계가 되고자 하는 어떤 욕구를 느꼈기 때문은 아니다. 욕구는 결핍의 상징이다. 그러나 완전한 일자에게는 부족한 것이란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세계의 기원이 신의 사랑일 수도 없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세계 창조의 근거를 신의 사랑 안에서 탐지하고 있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플로티노스가 동경(열망)으로 해석한 사랑에도 부족함, 즉 결여의 감정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신적인 충일에서 세계가 생겨났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외에 다른 가능성이란 없다.

이때 일자는 "완전히 무르익어서-물론 일자는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갖지 않으며,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흡사 넘쳐흐르는 것 같으며, 이러한 일자의 충만함이 다른 것을 생겨나도록 한다."

@p108

플로티노스는 일자에서의 세계 생성에 대한 사상을 더 전개시켜 나가 일종의 비시간적이며 단지 역설적으로나 이해할 수 있는 영원한 과정으로 파악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과정은 단계별로 이루어지는데, 하위 단계로 갈수록 완전성이 줄어든다. 첫번째 단계는 일자 그 자체로서, 여기서 일자는 단순하게 그 자신 자체이다. 이 과정은 일자가 자기 자신을 바라봄으로써 궤도에 올라서게 된다. 이로써 두번째 단계, 즉 정신과 그 속에 포함된 정신적 세계 즉 이데아의 세계가 생성된다. 이 둘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일자의 모사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일자의 순수성을 잃어 버린다. 왜냐하면 정신적 세계는 이데아의 충일을 자신 안에 다 간직하고 있지 못하며, 정신은 모든 개별 정신의 총체로서 다수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정신과 이데아의 세계의 분리에 이미 이자성이 놓여 있다. 세번째 단계는 정신이 아래를 내려다 봄으로써 생겨나게 된다. 이로써 세계 영혼이 생성된다. 세계 영혼은 자체 안에 거대한 다양성을 포함하며, 그 부분 부분이 개별적인 영혼이다. 세계 영혼은 여전히 항상 영원의 영역에 속해 있으면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데 이로써 우주가, 유한한 감각 세계가, 사물의 세계가 그 어마어마한 다양성 속에서 생겨나게 된다. 이것이 곧 네번째 단계이다.

세계는 세계 영혼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에 아름답고 완전하다. 플로티노스는 이 점을 그리스도교의 세계 경멸에 맞서 특별히 강조한다. 그런데 물질이 들어서게 됨에 따라 세계의 아름다움과 완전함은 손상된다. 그렇다면 플로티노스에게 물질이란 무엇인가? 그 당시의 몇몇 그노시스 학파에서 주장하듯이, 물질은 어떤 신에 반대되는 독립적인 원리가 아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교의 창조설이 주장하듯이 무에서 창조된 것도 아니다. 물질은 오히려 모든 내려다 봄의 가장 변두리 지평이며, 세계 영혼 자체가 설정한 가장 먼 경계선이다. 이것은 빛이 그 자신의 경계로서 어둠을 형성하는 것과 같다.

@p109

전체 단계를 고찰해 볼 때,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드러난다. 전 실재, 즉 정신, 영혼, 감각적 사물의 차원에서의 전 실재가 플로티노스에게는 일자의 유일한 유출이다. 전 실재는 오직 그것이 각기 나름대로의 완전함 속에서 일자의 모사인 한에서만 실재할 뿐이다. 이런 식으로 세계가 완전히 신적인 성질을 띤 것으로 파악된다.

그런데 플로티노스는 이러한 일자의 세계 형성의 과정 가운데서 인간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을까? 그는 영혼이 나아갈 수 있고 나아가야 하는 길을 묘사함으로써 이 물음에 대답한다. 출발점은 영혼의 타락이라는 사실이다. 영혼은 원래 영원의 영역에 속해 있으며 세계 영혼이 아래를 내려다 보는 데 관여하게 된다. 영혼은 자유롭기 때문에 이 내려다 봄에서 자신을 잃어 버리고 육체 속에 몰입해 들어가 자신의 기원을 망각해 버릴 수 있다. 이것이 통상 평범한 일상적 인간의 현존재이다. 인간은 세속적인 일 속에 파묻혀 지낸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영혼에게는-모든 세계적인 것이 다 그러하듯이-일자에 대한 동경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회상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영혼은 신에서 유래하기에, 필연적으로 신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 이로써 영혼은 세속적인 일의 늪 속에서 빠져 나오려는 동기를 갖게 되고. "그가 육체로 내려 갔을 때 입었던 옷"을 벗어 버리고,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귀환의 길에 들어선다. 영혼은 처음에는 영원한 것으로서의 자신으로 향했다가 마침내는 신성 즉 일자에게로 돌아간다. 바로 이것이 철학함의 길이다.

@p110

귀환의 길도 내려올 때처럼 네 단계로 이루어진다. 첫번째 단계는 인간이 개인적인 향락 생활을 멀리하고 공동체 생활의 덕, 즉 용기, 정의, 사려깊음, 지혜로 돌아섬으로써 이루어진다. 두번째 단계에서는 감각 특히 욕망과 충동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이 단계에서 영혼은 자신을 깨끗이 하여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 그가 본래 고향에 있었을 때와 같은 초감각의 차원에 이르게 된다. 세번째 단계에서는 자아의 단순한 영혼적인 것에서 자아의 정신적 본질로의 상승이 이루어진다. 이 단계에서 이데아의 관조에서 자신의 즐거움을 갖고 있는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실존이 생겨난다. 마지막으로 네번째 단계는 모든 인간이 모든 개별적인 것을-이데아까지도-떠나 보내고 세계에서 벗어나서 자기 자신에 대한 앎마저도 사라져, "영혼의 들어설 수 없는 곳"에까지 이르는 데에서 형성된다. 이 단계에서 인간과 신성이 실제로 하나가 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 네번째 단계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수반한다. 즉 우리는 "신이 아닌 모든 것을 우리의 순수한 자아로써 지나쳐 가면서 저 높은 곳을 순수하게 때묻지 않은 채로 관조한다"는 사건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단계는 유한한 직관과 유한한 사유에서는 도달할 수 없다. 우리는 "흡사 눈을 감고 우리 안에 있는 다른 시각을 소생시켜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단순하게 해야 한다. 우리는 일자를 관조하면서 "일자가 나타날 때까지 조용히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가 우리 안에 간직하고 있는 영원함을 가지고 영원성과 영원을 관조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갑작스런 무아의 황홀의 순간에 일어난다. "우리가 우리 자신 안으로 아주 깊이 완전하게 내려 앉았을 때, 사유를 넘어서서 우리 자신을 고양해 무의식의 상태에서 그리고 무아의 경지에서 단순하게 되어 갑자기 신적인 빛으로 채워질 때, 신적인 원초 존재와 직접적으로 하나가 되어 그와 우리 사이의 모든 차이가 사라져 버릴 때, 비로소 우리는 최고의 존재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소리 없이 현존하는 바로 그 신과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플로티노스의 철학적 가르침은 완결된다.

@p111

8. 아우구스티누스

죄의 유용성

젊은 시절의 아우구스티누스를 알고 있었던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시대의 사람은 이 현세주의자가 교부가 되리라고는, 더구나 서양의 가장 위대한 교부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젊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번거로운 세상을 즐거운 마음으로 헤매고 돌아다녔다는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그가 학교에서 억지로 그리스어를 배웠고, 남의 정원에서 배를 훔쳐 먹은 사실은 그냥 너그럽게 보아 넘길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고작해야 도덕 군자인 체하는 모호한 부류의 사람들과 구별될 뿐이다. 그러나 그가 수사학을 공부하기 위해 카르타고에 갔을 때에는, "혁명가"로 자처하는 난폭한 학생 집단과 우정을 맺는다. 비록 그 자신은 몹시 주의를 해 밤중에 무고한 행인을 덮치는 일에는 가담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희곡을 쓰는 일과 여기저기 잡다한 연애 사건에는 매우 열심이어서 낮이나 밤이나 그 속에 파묻혀 시간을 보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가 좀더 안정된 지위에 이르렀을 때에도, 즉 카르타고와 로마에서 수사학 선생으로 있을 때와 마지막으로는 밀라노에서 수사학 교수가 되었을 때도, 결코 깨끗한 생활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때에도 결혼하지 않은 채 애인과 동거한다.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의 고백을 통해 알고 있듯이 그는 이 여자를 깊이 사랑했고 더구나 둘 사이에서 아들까지 낳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주저하고 있었다. 훗날 성녀 모니카로 높이 칭송받은 그의 어머니도 아들의 그러한 망설임을 거들었다. 왜냐하면 추측하건대 그녀가 도의상 격분했다기보다는 자신의 아들이 신분에 걸맞는 합법적인 결혼을 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여자 친구는-두 사람 모두 눈물을 흘리기는 했지만-이렇게 버림을 받고 만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려고 마음먹었다. 다시 말해 훌륭한 가문의 처녀와 결혼할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약혼 기간이 너무 길어지자, 그는 부리나케 새 애인을 구한다. 한마디로 말해 젊은 아우구스티누스는 기원후 4세기경의 전형적인 후기 로마 사람이다. 당시는 고대 로마의 엄격한 덕이 사라져 가고, 적당한 방탕을 남자의 이상으로 여겼다.

@p112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후기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갑작스런 개종을 통해 정신적 노동과 육체적 향락 사이에서 갈피를 못잡고 이리저리 헤매던 생활을 떨쳐 버린다. 그는 33세의 나이에 세례를 받는다. 그는 밀라노에서의 명망 있는 위치를 버리고 고향인 아프리카로 돌아간다. 그는 그곳에서 친구들과 뜻맞는 몇몇 사람이 모여 은둔 생활을 하며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일종의 평신도 수도원을 세운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조용하게 보낼 운명은 아니었다. 그곳과 인접한 도시 힙포에서 주교 보조를 선발할 때, 집회의 참석자들 사이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존재가 알려지자 강제로 떠밀려서 그의 의지와는 달리 관직에 임명된다. 훗날 그는 힙포의 주교 자리를 떠맡게 된다. 이 직분은 강론과 사제직이라는 성직자의 정신적 의무뿐만 아니라, 교회의 막대한 재산을 관리하는 성가신 일도 맡아서 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의 고위 성직자로서의 활동에는 단지 약간의 시간만을 할애할 뿐이었다.

@p114

그 밖의 시간에 그는 지칠 줄 모르고 수많은 신학과 철학 분야의 책을 쓴다. 그리고 그는 그 당시의 정신적이고 종교적인 논쟁에 정열적으로 참여한다. 그는 62세에 공적인 활동에서 물러난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에 걸리자 그는 완전히 고독과 적막 속에 몸을 숨겨 마침내 430년에 세상을 떠난다. 그가 젊었을 때 그렇게도 그를 격정적으로 사로잡았던 세계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곳에 명을 달리한 것이다.

훗날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젊은 시절을 회고해 볼 때, 그에게는 그때 일어났던 모든 일이 죄악의 연속인 것처럼 여겨졌다. 때문에 그는 단지 눈에 띄는 몇몇 불미스러운 행위들을, 예를 들면 어느 정도 책임감 없이 벌였던 일시적인 연애 관계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웅변술로 거드름을 피워 보는 지나치게 건방진 공명심 등만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 겉보기에 전혀 문제가 없는 것까지도 죄라고 여겼다. 예를 들면 그가 학생 시절 공부보다 놀기를 더 좋아한것, 또는 구구단 외우기에 열중하기보다는 트로이의 화재 이야기를 더한 것, 혹은 극장에 자주 가곤 한 것 등도 모두 죄라고 생각한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더 나아가 젖먹이 때 젖을 달라고 너무 보채며 큰소리로 울었던 일조차 죄를 지은 것이 아닌가 하고 반문할 정도이다.

말년의 아우구스티누스는 분명 그의 젊은 시절에 일어났던 일들을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p115

우리가 이 사람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볼 때, 우리도 역시 그러한 바람에 동의를 해야 할까? 만일 아우구스티누스가 처음부터, 나중에 회개를 한 다음 비로소 그렇게 된 그런 사람이었더라면 그가 그렇게 존경받는 사람 또는 그러한 성인이 되었을까? 아마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즉 그는 더 인간적이지 못했을 것이다. 한 인간의 인간성은 무엇보다도 그 사람이 넘어설 수 있고 실제로 넘어선 가능성의 범위가 얼마나 넓으냐에 따라 평가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나름대로의 합당한 근거로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렇게도 통렬히 한탄해 마지않는 젊은 시절의 바로 그 방탕이 없었다면 결코 직접 체험해 볼 수 없었을 그 가능성을 그의 방탕이 알게 해주었다고 말이다. 그에게 덜 인간답다는 것이 오히려 낯선 것으로 여겨지는 이 사실이 인간 아우구스티누스의 위대함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상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위대함에도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이 사상가가 신학과 철학적 사유의 영역에서 이룩한 것이 그에게 독특한 사유의 강도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이전의 그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곧 생생하게 자기 자신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나 자신이 문제가 되었다." 그런 까닭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생에 대해 아무런 변명없이 솔직하게 고백하여 진정한 의미의 자서전을 쓸 수 있었던 최초의 인물인 것이다. 이 자서전이 바로 그 유명한 (고백록)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그의 삶에서 일어났던 일만을 보여주려고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이 서술하고 있는 모든 사건에서 어떻게 그가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되고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되었는지를 분명히 밝히려 했다.

@p116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발견한 특징을 인간의 본질에 속하는 계기로 파악한다. 그를 철학함으로 내몰고 철학함 속에 붙들어 둔 것은 바로 이러한 인간에 대한 물음이다. 그의 근본 신념은, 인간은 오직 자기 자신으로 향한 시각속에서만 진리에 도달할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을 통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자신의 내적인 삶의 생동감 속에서 인간의 내면성을 발견한 위대한 인물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대는 밖으로 나가려 하지 말고, 그대 자신의 내면으로 되돌아 가라. 진리는 인간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실현한 이 내면성으로의 전환과 더불어 철학사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 그는 대부분의 그리스 철학자들처럼 인간을 우주의 구성원으로 고찰하지 않았으며, 소크라테스와 그 추종자들처럼 공동 생활을 하면서 행위하는 자로 간주하지도 않았고, 또한 신플라톤 주의자처림 세계 안에 산재된 신성의 한 부분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시각에 자신을 내어 보이는 그러한 본질 규정을 가진 인간이며 스스로를 자기 경험에서 드러내고 있는 그대로의 인간이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에게서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 처음 발견한 것은 인간에게는 무엇인가 부조화스러운 면이 있다는 것 이상은 아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젊은 시절의 방탕을 회상해 보고 바로 그 점을 간파한다. 즉 인간에게는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있다. 인간은 부조리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한다. 인간은 그가 잘못된 생활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혼란과 갈망, 이 두 상태에서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 가운데 하나가 비롯되는데 그것은 바로 불안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성찰을 다음과 같은 간결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우리의 마음은 늘 불안하다." 우리가 이 문장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읽는다면,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고자 했던 그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는 지평이 확실해질 것이다. "주여,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하여 만드셨나이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당신 품에 안길 때까지 편안할 수 없나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에 관해서 말할 때에는-비록 그것이 철학적인 말의 형식을 띤다 해도-단순히 인류학자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한 철학적 신학자로서 이야기한다. 이 점에서 그는 진실로 그 시대의 자식이다. 다시 말해 그렇듯 강력하게 인간의 비참함과 무력함을 체험하였기에, 인간을 신성 안에서 감싸려고 내면적으로 그렇게도 애썼던 후기 고대라는 시대의 자식인 것이다. @p117

그리고 이러한 열망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동시에 특히 그리스도교의 사상가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는 키케로의 절충주의를 통해 철학에 이르게 되며, 자신의 악한 경험으로 인해 마니교의 암울한 세계 해석에 빠진다. 마니교에서는 모든 현실을 선한 원초적 원리와 악한 원초적 원리와의 투쟁이라고 해석한다. 그 후 그는 철저한 회의주의의 극에까지 이르게 된다. 마침내는 신플라톤주의와 거기서 주장하는 내세가 참된 세계라는 그 근본 사상이 자기에게 알맞는 철학함의 방법임을 깨닫게 된다. 여기에서 그가 그리스도교 사상에 이르는 데는 단 한 걸음만이 필요할 뿐이다. 왜냐하면 신플라톤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적인 인간 해석과 비슷하게 인간을 완전히 신성과 연관지어 보기 때문이다. 이렇듯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가 그리스도교로 향하는 그때에 이미 철학적 신학자였다. 이러한 개종과 더불어 그는 서양 세계의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교 철학자가 된다. 그의 그리스도교 철학에는 인간에 대한 물음과 신에 대한 물음, 이 두 가지가 하나의 중대한 문제로 결합된다. 그는 이 문제를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신과 영혼을 인식하기를 원한다. 그것말고는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가? 그렇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

신에 대한 이러한 사상의 관점에서 볼 매, 아우구스티누스가 출발한 인간의 본질적 오류는 그 숙명적인 성격으로 전면에 부각된다. 왜냐하면 그 잘못된 점이 신과 연관지어질 경우 그것은 죄로 파악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년에 그가 젊은 시절에 저지른 잘못에 대해 부단히 무거운 죄책감을 느낀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죄 많은 부조리가 현존재의 시작부터 인간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도 바울의 원죄설을 받아들인다. 그는 이제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인간은 본래 선한 존재로 창조되었으나, 아담의 죄가 근본적으로 인간을 타락시켰기 때문에, 인간은 그 후로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는 능력을 전혀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어쩔 수 없이 숙명적인 죄의 상태에 빠져 있다. 이로써 아우구스티누스의 인간 본질에 대한 해석은 그리스 사상과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셈이 된다. 그리스 사상에서-누구보다도 소크라테스가 매우 명백하게 말하고 있듯이-인간은 본래 선하다. 그래서 인간은 실제의 행위에서 선을 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단지 자신의 본래적인 선함을 성찰하기만 하면 된다.

@p118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렇게 혼란스런 인간 본질의 문제를 원죄설을 끌어들여서 해결하고자 할 경우, 이것은 매우 어려운 사유의 벽에 부딪치게 된다. 원죄라는 인간의 죄는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이다. 그러나 이 경우 인간은 그가 잘못 행위하는 데 대해 근본적으로 아무런 책임이 없다. 그렇다면 인간의 행위는 그 자신의 책임과 자유 아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한편 죄라는 것은-만일 이 개념이 완전히 그 의미를 상실해 버리지 않는다면-죄책감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죄책감이란, 행위자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질 때에만 다시 말해 그가 자유로운 존재로서 이해될 때에만 고려될 수 있다. 이렇듯 원죄와 자유에 대한 사상은 인간에 대한 물음에서 서로 현저한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문제를 모든 시기에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의 초기 저서에서는 인간의 자유와 자기 책임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에 대해서 그는 나중에 의문을 갖는다. 신의 전능함을 철저하게 사유할 경우, 인간의 자유는 분명 포기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결국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예정설을 받아들이게 된다. 예정설에 의하면 모든 인간의 행위와 운명은 애당초부터 결정되어 있다. 우리로서는 헤아릴 길 없는 신의 결정에 따라 신이 의도하는대로 구원받기도 하고 단죄를 받기도 하는 것이다. 말년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온갖 정열을 기울여, 그가 생각하기에 인간에게 너무나 많은 자유를 부여해 인간에게 과분한 명예를 돌리고 있는-그래서 동시에 신의 영광을 축소시키고 있는-그 사람들과 대항해 싸운다. 신에 대해 끝까지 일관적으로 사유할 경우, 우리는 오직 신에게만 절대적인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지성으로는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신의 신비 앞에 머리를 숙여야 한다. 이것이 이 문제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마지막 결론이다.

@p119

신은 인간의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 어둠 속에 가리워 있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초기 통찰이다. 그는 신플라톤적 사상의 영향 아래 이 같은 통찰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전 생애에 걸쳐 이 사상을 견지하였다.. 신은 "파악할 수 없고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으며", "가장 깊숙이 은닉해 있다." 신은 근본적으로 파악될 수 없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확신은, 그가 그 확신을 부정적인 신학의 의미로서, 역설적인 형태로 다음과 같이 표현할 때 특히 인상적으로 두드러진다. 신에 관한 한 "인간의 영혼에는 어떠한 지식도 없다. 단지 인간의 영혼이 얼마나 신을 모르고 있는지를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단순한 철학적인 고찰, 즉 자연적인 이성으로는 결코 신에 대한 확실한 앎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신에 대한 앎은 계시를 통해서만 인간에게 주어지며, 인간은 단지 믿음으로 이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함은 신에 관한 진리의 문제에서 끝이 난다. 그의 철학함은 믿음의 신학으로 합류한다. "단순한 이성으로 진리를 발견하기에 우리는 너무 약한 존재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성서의 권위가 필요하다."

사유에 대한 믿음의 우위는, 아우구스티누스가 항상 말하듯 믿음은 지적 통찰을 필요로 한다는 말로써 역전되지 않는다. 이 경우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생각한 지적 통찰이란 믿음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찰은 믿음을 전제로 하며 통찰이란 원래 믿음 속에서 포착한 진리를 사유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러므로 통찰은 자기 자신 안에 확실함을 지니지 못하고 단지 믿음의 은총에 의해서만 자기 자신을 확실히 할 수 있을 뿐이다.

@p120

물론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성을 믿음에 종속시켜야 한다는 확실한 결론을 항상 내세우는 것은 아니다. 그는 초기에 철학적인 사유에 너무나 깊숙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이 철학적인 사유를 간단하게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성의 원초적인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자연적 이성이 신을 파악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 그러나 물론 신에 대한 철학적 인식이란 믿음과 비교해 볼 때 몹시 불충분하다. 철학적으로 신을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신플라톤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신에 대한 직접적인 관조에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가끔 신에게로 가는 상승의 단계에 대해 말하며, 그 최고의 단계에서 신이 관조될 수 있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그때 그때의 생각에 불과하다. 아우구스티누스 스스로도 말년에 가서는 그러한 생각을 분명하게 철회한다. 그는 모든 저서에서 인간은 신에 대해 직접적으로 관조한다기보다는 단지 간접적인 방법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즉 그는 자기 경험에서 출발하여, 자기 자신과 세계에서의 인간의 위치를 고찰하고 난 뒤 비로소 만일 인간과 세계의 존재가 신의 혜택을 입고 있다면, 그 신은 어떻게 사유되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p121

이제 어쨌거나 이런 식의 방법을 통해 자연적인 이성으로도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주장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도입한 신존재 증명은, 예컨대 후대의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이, 유한한 세계의 실재는 그 자체 안에 근거를 둘 수 없고 그래서 창조주인 신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는 특성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오히려 그의 사상의 근본 경향에 상응해 인간의 자기 경험에서 신존재 증명을 얻는다. 이 증명은 자기자신의 내면으로 눈길을 돌려 거기에 진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따라서 과연 이성이 진리 안에 있는지 아닌지를 측정할 수 있는 척도도 주어져야만 한다 이성이 그 판단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에 이 척도는 이보다 더 높은 존재가 아니면 안 된다. 그런데 이성을 넘어서고 있는 것은 신이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의 척도인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비록 희미한 윤곽으로나마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존재뿐만 아니라, 신의 본질에 대해서도 인식이 가능해야 한다고 본다. 그는 여기에서도 다시 자기 경험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우리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어떠한 회의로써도 부정할 수 없는 단 하나의 분명한 확실성이다. 그런데 신은 다른 모든 실재처럼 우리 자신을 존재하게 하고 또 존재하도록 유지시켜 주는 바로 그러한 존재이다. 따라서 신은 최고의 존재자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이 외에도 우리는 우리자신 안에서 우리 마음의 본성상-인간을 특징지어 주는 그 불안 속에서도-선을 추구하고 있음을 경험한다.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피조물도 선을 추구한다. 이러한 선의 추구도 신에서 야기되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신은 가장 최고도로 추구되는 것, 모든 동경의 목적이며 최고의 선이어야만 한다.

@p122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연적인 사유의 길을 통해 신에 대한 이런 식의 가장 보편적인 본질 규정의 인식을 넘어서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물론 특별한 방식의 인식이 필요하다. 그는 이 인식 방식을 유추에 의한 통찰이라고 특징짓고 처음으로 체계적인 형식으로 그 인식 방식을 전개시킨다. 여기에서도 그는 인간에서부터 출발한다. 만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그는 자신을 피조물로서 파악해야만 하고 그것도 그리스도교 전통이 주장하듯이, 신의 모습을 꼭 닮은 피조물로 파악해야만 한다. 다른 모든 실재도 신의 의도대로 창조된 피조물로 이해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식으로 창조된 것은 창조주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모든 실재 안에서, 특히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한 그 존재자를 암시하고 있는 징표를 찾아 나선다. 그러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일정한 방식으로 인간과 세계에서 즉 신의 작품을 통해 이 작품의 주인을 추론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유비의 방법에 근거해서 이런 식으로 신의 본질을 간접적으로 파악하는 방식은 특히 다음과 같은 결실을 맺었다. 즉 자연적인 통찰의 길을 통해, 예컨대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가르치듯이 삼위 일체인 신에 대한 어떤 것을 파악하려고 하는 데에서 풍부한 결실을 맺은 것이다. 실제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철학적인 사유가 능히 그것을 해낼 수 있다고 여겼다. 인간이 스스로를 고찰해 볼 때, 그는 자신의 본질이 삼중구조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게 되는데, 그 삼중의 본질은 기억과 의지와 통찰이다. 다른 모든 실재도 역시 삼중 구조로 되어 있다. 개개의 모든 사물은 하나이면서 다른 사물과 구별되고 또 동시에 다른 것과 연관되어 있다. 인간과 모든 피조물의 본질에서 보이는 이러한 삼위 일체가 유비의 도움을 받아 신의 흔적으로 이해될 경우, 우리는 적어도 그 안에서 삼위 일체의 신을 그 기본 구성틀에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믿음에서가 아니라 이미 자연적인 개념 파악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신에 관한 철학적 진술에 도달할 수 있는 이 모든 가능성에는 인간과 그 밖의 모든 실재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사상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사상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이 사상에 대한 근거를 다시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신은 세계의 창조자이고 세계는 신의 창조물이라는 이 사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사상뿐만 아니라 철학적 사상의 기본을 이루는 제I의 전제이다.

@p123

아우구스티누스는 바로 이 창조의 사상을 일찍이 그리스 철학자들이 결코 도달하지 못했던 그러한 철저한 근원성을 갖고 파악한다. 예를 들면 플라톤의 경우 신은 혼돈을 정돈하며 형태를 부여한 세계의 제작자이다. 따라서 혼돈은 신에 앞서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럴 경우 신의 권능이 손상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바로 이 신의 권능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신의 권능이 제한되지 않게 생각하려면 신의 창조적 의지에 선행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 따라서 그 자체로 존립하고 있는 혼돈도 있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창조는 진정 무에서의 창조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고대 사유의 극도로 역설적인 이러한 사상을 통해 절대적 권력으로서의 신의 표상은 절정에 이르게 되며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에 대해 숙고할 때마다 항상 이 표상에 부딪치게 된다.

신은 역사에 대해서도 막강한 권한이 있다. 이 점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특별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그리스 철학자들처럼 자연의 세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무엇보다도 역사의 세계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유가 철두철미하게 인간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다. 따라서 인간은 비역사적인 이성 존재로서가 아니라 역사적인 인간으로 해석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사상에서 출발하여 역사에 대한 하나의 포괄적인 해석을 시도한다. 이 해석이 그를 서양 최초의 위대한 역사 신학자와 역사 철학자로 만든다. 그에게 인류의 역사는 신의 왕국과 세계의, 악마의 왕국 사이에 벌어지는 엄청난 투쟁의 싸움터이다. 역사는 이 투쟁의 단계를 서술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 신의 영역으로까지 향한다. 역사는 인간과 더불어 시작된 것이 아니라, 사악한 천사들의 타락과 더불어 시작된다. 역사는 그리스도의 강생에서 그 정점에 이르고 최후의 심판에서, 즉 악인을 심판하고 신의 왕국을 완전히 실현함으로써 끝이 난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에서 보면 이 모든 것에서 결정적인 사건을 이끌어 나가는 것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신의 의지이다.

@p124

이렇듯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유는 그가 접하는 모든 물음에서 언제나 인간의 영역과 신의 영역 전체를 덮고 있으며, 그는 인간에서 출발하여 신적인 것에 대한 통찰에 이르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그가 이렇게-그 이전에는 거의 아무도 하지 못했던-신의 신비 속으로 파고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인간의 신비가-그 이전의 어느 사상가도 여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스스로 그 깊이를 열어 보인 데 근거하고 있다. 그런데 인간의 신비는 그 자신 한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여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모든 인간다움을 갖춘 한 인간이었다.

@p125

9. 안셀무스

신존재 증명

11세기의 위대한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캔터베리의 안셀무스의 일생에는 끊임없이 폭풍우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이미 어릴 때부터 시작되었다. 15세가 되던 해에 안셀무스는 수도원에 들어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롬바르디아의 귀족인 그의 아버지는-그에 대해서는 검소한 부인과는 정반대로 병적이다시피 지나치게 낭비벽이 심했다는 사실 말고는 알려진 게 없다-아들이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다. 이때 어린 안셀무스는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꾀를 하나 생각해내었다. 그는 수도원장을 감동시켜 수도원에 들어가려는 자기의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기에게 병이 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한 것이다. 안셀무스는 실제로 심하게 앓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매우 종속적이었던 수도원장의 마음을 바꾸게 할 수는 없었다 안셀무스에게는 건강을 다시 회복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별 도리없이 안셀무스는 건강을 즉시 회복한다.

@p126

안셀무스는 성년이 되어서 드디어 노르망디에 있는 베네딕트 수도원에 들어가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원장을 거쳐 원장이 된다. 그는 원장의 직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전기 작가가 전하듯이, 그가 신에 대한 인식의 결과로서 인간에 대해서도 대단한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도 수도원 학생들에게 라틴어 문법 변화를 가르칠 때만은 신경질을 냈다. 그는 나중에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었으며 따라서 영국 교회의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이것 역시 극적인 사건의 전개 없이는 실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안셀무스는 대주교의 자리를 거절하려고 하였다. 이때 그의 성직계의 친구들과 속세의 친구들은 일종의 기습을 감행한다. 즉 안셀무스가 왕의 병상에 위문차 왔을 때, 그를 꽉 붙들고 강제로 손을 벌리게 해서 그에게 주교의 지팡이를 쥐어 준 것이다. 그 후 친구들은 그를 교회로 데리고 가서 감사의 찬미가를 부른다. 안셀무스는 끝까지 거절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결국 그러한 짓궂은 장난에 불쾌한 내색도 하지 못하고 대주교가 되어야만 했다.

@p127

사실 안셀무스가 대주교의 자리를 꺼릴 만한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 그는 본의 아니게 복잡한 정치에 휩쓸리게 되고, 이 일은 그에게 논쟁거리만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특히 중요한 것은, 과연 왕이 주교를 선임할 권한을 갖고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안셀무스는 그 일로 인하여 왕과 교황 모두에게 의무를 지고 있는 어려운 입장이 된다. 그는 항상 면직의 위협을 받는다. 말년에 그는 몇 년 동안 영국에서 추방당하기까지 한다. 상황은 첨예화되어 왕은, 안셀무스가 로마로 여행하려 할 때, 돈이나 다른 재산을 외국으로 빼돌리려 한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워 그의 짐을 수색할 정도까지 되었다. 안셀무스는 절망에 빠져 떠나기 전에 미리 교황에게 편지를 쓴다. "저는 이미 4년 동안 대주교로 있었으나 전혀 아무 일도 하지 못했습니다. 저의 영혼은 몸서리치고 추악한 혼란 속에서 무익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국에서 살기보다는 차라리 영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죽을 수 있기를 날이면 날마다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셀무스가 이 모든 폭풍과도 같은 시간 속에서 평온을 찾아 그의 중요한 저술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한층 더 경탄할 만하다. 그는 이 저술들로 중세 철학과 신학의 기초를 마련했고,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그를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특히 두 가지 사상 영역에서 이러한 기초 작업이 이루어진다. 즉 사유와 믿음의 관계가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신존재 증명이 시도된다.

먼저 믿음과 사유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자.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받은 안셀무스는, 인간의 이 두 가지 능력 즉 믿음과 사유 중 어느 것도 그것 하나만 갖고서는 진리를 파악하기에 불충분하다고 주장한다. 단순한 앎은 본질적인 것 속으로 파고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앎은 믿음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단순한 믿음도 앎과 연결되지 않는 한에는 충분하지 못하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믿음 그 자체가 투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과 사유의 관계에 대한 안셀무스의 근본 명제는, "나는 알기 위해 믿는다."이다. 똑같은 의미로 그든 "앎을 추구하는 믿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따라서 믿음은 모든 심오한 앎에서 없어서는 안 될 출발점이며, 인간은 필연적으로 믿음으로부터 앎에 이르게 된다.

@p128

그렇다면 안셀무스는 어떤 근거로 이러한 주장을 하는가? 먼저 두번째 문제, 즉 믿음은 그 자체 본질상 인식을 가리키고 있다는 명제와 관련해서 안셀무스는 사랑의 개념으로 되돌아 간다.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을 알고 싶어한다. 따라서 신을 사랑하는 사람도 역시 신을 알고 싶어한다. 그래서 안셀무스는 다음과 같은 명제로 결론 짓는다. "내가 믿음을 확고하게 한 다음 믿고 있는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태만함이라고 생각한다."

첫번째 명제에서는 믿음은 인식에 선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올바른 순서는, 우리가 그리스도교 믿음의 심오함을 이성으로 탐구하려고 하기에 앞서 그것을 믿을 것을 요구한다." 이 주장도 사랑과 관련지어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신에 대한 인식은 중립적인 앎이 아니라 신에 대해 무한한 관심을 쏟는 통찰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에 대한 인식은 신에게로 향한 사랑을 필요로 하며, 이 사랑이 곧 믿음이다. 따라서 안셀무스는 "내가 믿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고 말한다.

이 상호 관계에서 본다면 이성과 신앙 사이에는 어떠한 갈등도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안셀무스는 이 사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신학적인 근거를 제시한다. 즉 신은 이성의 창조자일 뿐만 아니라 믿음의 창조자이다. 따라서 이 둘 사이에 모순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신적인 앎에 관해서도 이성을 전적으로 신뢰해도 된다. 바로 이 때문에 안셀무스는 계시의 도움을 받지 않고 순전히 이성만으로, 따라서 순수 철학적 방법으로 신존재 증명을 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 시대의 전기 작가의 증언에 따르자면, 안셀무스도 처음에는 그러한 생각을 악마의 유혹으로 간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 후 신의 은총의 도움을 받아서 그 과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p130

안셀무스는 신존재 증명의 시도에서, 우선은 전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려 놓은 선을 따른다. 안셀무스는 현실을 볼 때, 모든 것이 다소 선하거나 다소 완전하다는 그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만일 인간이 선함과 완전함의 척도를, 그것도 절대적인 척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러한 사실을 확실하게 밝혀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에 준해 모든 선을 측정할 수 있는 최고의 선이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 최고의 선은 다른 선을 통해서 고찰되는 유한한 선이 아니라, 그 스스로 선한 선이다. 더 나아가 안셀무스는, 우리가 선하다고 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최고의 선에 참여하기 때문에 그러한 속성을 간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최고의 선은 창조의 원리이며, 그래서 안셀무스는 그것을 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안셀무스는 비슷한 방식으로 모든 위대함은 절대적인 위대함을, 모든 존재자는 절대적인 존재자를-그리고 이것은 다시금 신으로 파악되어야 한다-전제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시도한다.

@p131

후대에 안셀무스는 처음보다 훨씬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새로운 방식의 신존재 증명을 시도한다. 이때 출발점으로서 그는 전제가 필요없는 증명의 근거를 찾아 나선다. 그는 그러한 근거를 신이라는 순수한 개념에서 발견한다. 모든 인간이 어리석은 사람이나 신을 믿지 않는 사람도 "더 이상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신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정신 속에는 절대적으로 커다란 것으로서의 신의 이데아가 실재한다. 이때 커다란 것은 양적인 뜻이 아니라, 존재 가능성의 최대 가능한 충일로 이해해야 한다. 추론은 이렇게 전개된다. 만일 신이 지성 속에 존재한다면, 실제적으로도 존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단지 이성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이성 속에서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존재하는 그것보다 열등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관념적인 신에게는 완전함, 즉 존재가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으로서의 신은 실제적으로도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더 이상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인 신도 지성 속에서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의심의 여지없이 존재한다."

안셀무스는 어떻게 이러한 사상이 그의 정신 속에서 생겼는지를 다음과 같이 감명깊게 묘사한다. "나는 자주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숙고해 보았다. 때때로 나는 내가 찾고 있는 것을 이미 파악했다고 믿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정신의 '손아귀'를 미끄러져 빠져나간다. 나는 결국 나의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절망적이고 불가능하다고 여겨 이 시도를 포기하려고 하였다. 쓸데없는 일에 나의 정신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가능한 한 그 생각들을 머리에서 떨쳐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버둥거리며 저항을 해도, 그 생각들은 더욱더 격렬하게 나를 엄습해 들어왔다. 어느날 내가 이제는 이 격렬한 엄습에 맞서 싸우기에도 지쳐 버렸을 때, 사유는 내가 그 동안 그렇게도 열심히 발견하려 애썼던 그것을-발견한다는 것을 포기하고 그래서 오히려 이제는 고의로 억제해 왔던 그것을-내게 안겨 주었다."

@p132

안셀무스의 가장 독특한 창작인 이 신의 개념을 통한 신존재 증명은 파란 만장한 역사를 갖게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벌써 이 증명을 거부한다. 칸트는 그 유명한 100개의 은화의 예를 끌어들여 이 증명에 반대한다. 생각 속의 100개의 은화는 실재의 100개의 은화보다 적을 수가 없다. 단지 이때 거기에 존재가 추가되어야 한다. 그런데 존재라는 말은 첨가되어 사실을 좀더 완전하게 만들 수 있는 사실 내용적인 술어가 아니다. 이에 반해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특히 헤겔은 안셀무스의 증명을 다시 받아들인다. 헤겔은 물론 이 증명을 합리적인 증명으로서가 아니라 "사유 속에서 정신으로 신에게로 고양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사실 안셀무스도 역시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 밖에 가우닐로라는 이름의 수사가 이미 안셀무스가 살아 있을 때, 그의 신존재 증명에 대해 회의를 나타냈다. 가우닐로는 만일 우리가 이 증명을 인정한다면, 결국 우리는 가장 완전한 섬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섬에도 존재가 첨부되어야만 그 최고도의 완전함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가우닐로는 그의 신존재 증명에 대한 비판 때문에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한다. 그는 이 일로 인해 수도원에 감금된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사실은 신존재에 대한 연구는 가끔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p133

10. 토마스 아퀴나스

세례받은 지성

철학자라고 하면 으레 사람들은 육체에 깃들인 정신이 육체를 거의 완전히 소모시켜 버려 양볼은 수척하고 움푹 패였으며 신체는 허약하기 그지없는 그런 사람을 떠올린다. 아마 임마누엘 칸트가 이러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3세기의 유명한 사상가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칸트와는 정반대인 사람이어서 그의 외모를 눈앞에 그려 볼 경우, 사람들은 생각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그는 그야말로 위풍당당한 체격을 지녔다. 그의 책상은-이것은 지금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그가 앉아서 공부할 수 있도록 둥글게 홈을 파 놓아야 할 정도였다. 우리는 이 위대한 인물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는 범위 내에서라면 이 점을 언급해도 될 것이다. 왜냐하면 토마스 자신도 그 자신의 엄청난 체구에 대해 가끔 자조적으로 이야기하곤 했기 때문이다.

@p134

토마스가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방식도 그의 엄청난 외모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그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동료들은 그를 "벙어리 황소"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과묵했던 까닭은 할 말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과묵함은 오히려 주의를 끌지 않으려는 바람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그와 같은 처신 속에 신학 혹은 철학의 일반적인 대가보다 더 많은 것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이 어떤 우연한 사건을 통해 드러난다. 한 동료 학생은 이 둔중한 학우에게 보충 수업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그는 토마스가 그 자신에게는 물론이고 어느 유명한 교수보다도 더 문제를 잘 설명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토마스는 이 학우에게 이 일을 절대 비밀로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하였다.

여기에 토마스의 성격상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 그는 자기 자신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자신의 인간됨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일에만 정신을 쏟았다. 때로는 도가 아주 지나쳐 부적절한 상황에서도 그는 생각에 잠겨 그의 주변 세계를 완전히 잊어 버릴 정도였다. 이 점을 잘 나타내 주는 일화가 있다. 토마스가 프랑스의 루드비히 국왕의 연회에 초대받았을 때의 일이다. 그는 습관대로 침묵하고 있다가 갑자기 주먹으로 탁자를 치면서 큰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마니교와 같은 이단과 논쟁을 해야 합니다." 궁신들이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으리라고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왕은 이 순간에 진정으로 미래의 성인답게 처신했다. 왕은 서기를 불러 토마스가 방금 생각했던 마니교도의 교의에 맞서는 논쟁을 기록하게 했다.

@p135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미 젊은 시절부터 자신을 잊어 버리고 일에 몰두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남부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그의 가문은 슈타우펜 황제와 친척 관계임을 자랑으로 삼았다. 이렇듯 토마스에게는 가장 화려한 출세의 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가족들은 막내아들인 그에게 성직자의 길을 걷도록 결정했다. 그 당시 그는 적어도 훌륭하고 명망 있는 수도원의 원장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토마스는 탁발 수도승들에게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는 그때 막 세워진 도미니크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여기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그 모든 외적인 화려함 대신에 청빈이라는 이상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새로운 운동의 금욕적 특징, 즉 배가 불러 만족해 하는 그리스도 교인들의 한가운데에서 복음에 따라 생을 영위하려는 이러한 시

도는, 그 당시 젊은이들 가운데 가장 활동적인 사람들을-이 중에는 토마스도 속한다-저항할 수 없는 매력으로 잡아 끌었다.

물론 이러한 탁발 수도원에 소속되는 것은 많은 극기의 의무를 필요로 한다. 토마스는 여러 차례 나폴리와 로마를 거쳐 파리까지 여행했는데 모든 여행을 걸어서 다녀야만 했다. 또한 수도원에서는 그에게 그가 저술하기 위한 충분한 종이마저 주지 않아서, 그는 어쩔 수 없이 종종 자신의 생각을 작은 종이 쪽지에 기록해야만 했다. 게다가 새롭고 혁명적이라고 받아들여진 이 운동은 즉시 보수 세력의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토마스 자신도 이러한 종류의 저항을 몇 번 받았다. 그 유명한 파리 대학은 토마스를 교수로 채용하는 것을 거절하고 학생들이 그의 취임 강연을 듣는 것도 금지했다.

@p136

이와 비슷한 보수 세력의 적대감은 이미 그가 도미니크 수도원에 발을 들여 놓으려고 결심한 순간에도 나타났다. 가족들은 가문의 명예에 대한 먹칠이라고 기겁을 하였으며, 형들은 토마스를 도중에 나꿔채 외딴 섬에 가두어 버리기까지 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그의 계획을 단념 시키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는데, 이때 그들은 아우의 결심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한 그러한 수단까지 동원했다. 형들은 그에게 예쁘게 차려 입은 젊은 여자를 들여보냈다. 즐거운 시간을 기대했던 이 젊은 아가씨는, 몸집이 거대한 젊은 남자가 벽난로에서 끄집어 낸 불 붙은 장작을 손에 들고 그녀에게 다가오자 기겁하고 말았다.

이 몸짓에서 나타나듯이, 자신의 결심에 온몸을 내던져 몰입하는 그의 정열은 토마스의 전 생애를 통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는 세속적인 생활에서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그에게 제공된 나폴리의 대주교 자리도 거절하였다 그에게는 그의 일에 완전히 몰입하기 위한 내면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그의 일이란 다름 아닌 그리스도교 철학과 신학의 토대를 새롭게 마련하려는 시도이다. 그가 이 과제에 쏟아 부은 그의 확신은-비록 그의 생존시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봉착하지만-결국에는 그가 이 분야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획득하게 해주었다. 토마스 외에는 1000년 전에 아우구스티누스만이 그러한 권위를 얻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이미 젊은 토마스에게서 이러한 미래의 중요성의 싹이 보였다. 어쨌든 위대한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그의 스승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이 일을 꿰뚫어 보듯이 예감하였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학생들의 조롱에 대해 이렇게 응수했다. "너희들은 토마스를 벙어리 황소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너희들에게 말하건대, 이 벙어리 황소가 한번 울부짖으면, 그 소리의 진동은 전 세계에 가득 울려 퍼질 것이다."

@p137

그 당시의 시대 상황은 분명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그러한 사상가를 진정 필요로 하였다. 토마스가 살던 시대는 정신적 위기의 시대로서 특히 신학과 철학은 매우 어려운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 모든 논쟁을 거쳐 여기에 이르러, 앞서 간 시대와 일종의 일치가 형성되었다. 여기에 그리스도교 철학이 출현하는데, 그것은 그리스 정신과 그리스도교 근본 경험과의 접촉에서 비롯된다. 그리스도교 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강력하고도 위력적인 사상에서 그 최초의 거대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나중에는 캔터베리의 안셀무스에 이르러 완전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 그리스도교 철학은 자연적인 이성과 믿음의 종합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이성은 신앙의 아래에 놓이게 되는데, 이는 물론 신앙에 대한 봉사에서 스스로를 완전히 전개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렇게 균형잡힌 그리스도교 철학의 체계 안에 이미 토마스 시대 훨씬 이전부터 방해의 요소가 끼어들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의 믿음과 자연스립게 들어맞지 않는 하나의 철학을 가까이 접하게 되는데, 그것이 곧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양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대해서는 아주 조금만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이에 반해 아랍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전 지식을 넘겨 받았는데, 이제 이것이 서양 사상에 침투해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것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였으니 일종의 정신적 혁명이 꾀해질 만큼 위협적인 상태로 몰고 간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제 신학의 보조 수단이 되는 것에 강력하게 반발하는 세계 해석과 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세계 해석은 하나의 완결된 체계로 제시되며, 그 체계는 사물에서 시작하여 인간을 넘어서 신까지 모든 실재를 자신 안에 포함한다.

@p138

이 세계 해석이 그리스도교 철학에는 하나의 위험스러운 일이 되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여기에서는 믿음의 진리 외에도 순수한 세속적인, 즉 순전한 지성의 진리가 주장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두 진리의 공존 가능성이 진지하게 고려되었는데, 그것은 더욱이 어떤

시시한 괴짜 학자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학문의 중심지인 파리 대학의 저명한 교수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토마스가 파리 대학에 신학 교수로 재직하던 당시, 파리 대학의 교수이자 유명한 사상가인 브라방의 지거는 믿음과 이성의 이중적인 진리에 대한 학설에까지 근접해 갔다. 그러나 만일 이렇게 두 가지 상반되는 관점에 대해 그 두 가지를 모두 진리라고 주장할 경우, 그것은 인간 정신을 구제 불능의 균열로 몰고 갈 것이 틀림없다. 이러한 사실은 극도의 불안감 속에서 감지되고 있었다. 토마스와 같은 시대의 위대한 철학자의 한 사람이자 동시에 파리 대학의 신학 교수이며 토마스의 친구이기도 한 보나벤투라는 성 예로니모의 꿈을 지적하면서 경고하였다. 꿈에서 예로니모는 최후의 심판에서 젊었을 때 키케로의 철학을 탐닉한 것 때문에 채찍질을 당한다.

그리스도교 철학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인간 정신의 단일성마저 극도로 위험한 상태에 빠지게 된 이러한 상황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싸움터에 들어선다. 그는 이 두 개의 모순적인 세계관을 서로 화해시키는 과제를 스스로 떠맡는다. 이때 두 가지 중 어느 것도 자신의 권한을 박탈당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그는 신앙의 진리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도 적당한 자리를 마련해 주려고 한다. 그는 지칠 줄 모르고 물음의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 가며 연구를 계속한 끝에 드디어 시대가 요구하는 종합을 이루어 낸다. 그 종합을 그는 방대한 저서에 수록하였는데,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신학 대전)이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고 더 강도있게 철학적으로 정리된 것은 (이교도 반박 대전)이다. 이 방대하게 기획되고 신중하게 정리된, 또한 깊은 생각을 거친 이 저서에서 그리스도교 철학은 가장 중요한 중세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1000년 이상을 이어오며 시련을 거친 믿음과 1500년 이상 지속되어 온 철학적 노력이 융합하게 된 것이다.

@p140

이성과 믿음의 그러한 종합이 이루어지려면, 우선 이 두 가지가 그 자체로 충분하게 탐구되어야 한다. 토마스는 이때 두 가지 모두가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지니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믿음은 초자연적인 진리와 관계가 있다. 믿음은 세계 사물에 대한 인식의 영역에서는 탐구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이에 반해 자연적인 이성은 바로 이 현실 세계에 일차적으로 눈을 돌린다. 토마스는 이러한 현실의 영역에서는 모든 것이 이성적으로 진행된다고 가정한다. 여기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 사상을 대변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신의 조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세계 인식의 출발점은 오히려 접근 가능한 모든 감각적 경험이며, 그것의 진리 여부에 대한 척도도 이성적 통찰력이다.

물론 자연적 이성이 초감각적인 것의 파악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버리는 것은 아니다. 자연적 이성은 일정한 한계 안에서 신을 인식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한계는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영향을 받은 중세 사상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넓지는 않다. 인간은 계시와 신앙의 도움 없이는 삼위 일체도 원죄도 그리스도의 강생도 인식할 수 없다. 그러나 신의 존재와 신의 본질에 대한 몇몇의 가장 보편적인 규정은 자연적인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것도 인식이 세계 현실에서 출발할 때만 가능하다.

토마스가 이렇게 이성과 믿음을 서로 분리했을 때, 그 역시 이중적 진리를 주장하려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는 인간 정신을 그렇게 분열시키는 위험에서 성공적으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것은 이성과 믿음, 이 두 가지는 신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사상의 도움으로 이루어진다. 한편으로 신은 믿음을 창조했고, 다른 한편으로 신은 또 한 자연적 이성의 창조주이기도 하다. 따라서 신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성과 믿음 이 두 가지는 일치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가지는 서로 모순의 관계에 서 있을 수 없다. 믿음은 반이성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성은, 그것이 스스로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믿음에 모순되는 어떠한 것도 가르칠 수 없다.

@p141

이러한 종합에서 물론 믿음이 일종의 우위를 차지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토마스는 엄격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철학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믿음의 진리는 자연적인 이성의 진리보다 더 완전하다. 자연적 이성의 진리는 믿음의 진리 아래에 놓인다. 자연적 이성의 진리는 "믿음에 대한 예비"를 함축하고 있다. 비로소 믿음은 이성에 처음으로 그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을 제공한다. "은총은 자연을 폐지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시킨다."

철학 사상의 역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토마스의 사상에서는 세계 현실이 자연적 인식에게 가장 폭넓고 자유롭게 제공된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되돌아 볼 때, 이 사상가가 전통의 수호자로 보이지만, 그 시대 사람들 눈에는 모험적인 개혁가로 간주되었다. 그는 그리스 철학의 근본 경향이, 즉 이교도의 철학 사상이, 그리스도교 사상 안에서 계속 영향을 미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는 그것이 아우구스티누스에서부터 유래해 온, 아직도 여전히 기준이 되는 그 신학과 충돌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것은 토마스가 철학에 제시하고 있는 주제에서도 잘 나타난다. 토마스에게도 신은 아우구스티누스나 위대한 그리스 철학과 다름없이 철학의 가장 고귀한 대상이다. 그러나 토마스에게 다음으로 중요한 주제는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세계로부터 고양된 영혼이 아니라, 그리스 사상가들의 주제처럼 세계이다. 인간의 영혼은 적어도 한 부분으로서 이 세계에 속해 있다. 토마스는 이미 그리스인이 보았던 것처럼, 세계를 그것이 감각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그러한 충만한 형태에서 고찰한다. 바로 여기에 사람들이 토마스의 "세계성"이라고 칭하는 것이 있다.

그렇지만 이때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사물에 대해 다양한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다. 철학자로서 토마스는 오히려 사물의 본질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그는 자신에 앞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던 것처럼 사물에서 질료와 형상을 구별하여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려 한다. 토마스는 질료에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질료는 그것에 의해 형상이 개별적인 형태로 각인되는 바로 그 요소라는 점에서만 중요할 뿐이다. 이에 반해 그는 형상 안에서 사물의 본질을 통찰한다. 그렇지만 물론 그것은 형상이 한번에 완전히 고정되어 있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토마스에게 형상이란 전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로, 그것은 사물들 속에서 생동력 있게 스스로를 전개시키고 있는 한에서 사물의 본질이다.

@p142

이제 형상 또는 본질은-토마스는 이 점에서 그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를 능가한다-원래 신의 정신 안에 이데아로서, 흡사 창조의 앞선 구상으로서 존재한다. 철학이 현실에서 본질을 끄집어 낼 때, 이것이 바로 세계 인식에서의 철학의 과제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철학은 신이 세계에 대해 가졌던 생각을 뒤좇아 사유하는 것이 된다. 인간이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신의 정신에 관여하는 유시성"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토마스가 인간 인식의 진리성을 위해 내 놓고 있는 변론이다. 동시에 이 변론에는 인식의 한계에 대한 깊은 통찰도 깔려 있다. 토마스는 인간이 그의 세계상을 자유롭게 기획 투사할 수 있다는 중세 말기나 근세 사상과는 아주 동떨어져 있다. 그는 인간의 인식은 신이 이데아에 따라 창조한 실재의 존재 구성틀에 얽매여 있다는 점을 확고하게 주장한다.

세계에 대한 신의 생각을 충분히 생각해 볼 때, 토마스에게 세계는 단계적으로 이루어진 전체로서 나타난다. 개개의 모든 실재 영역은, 그 안에서 형상이 질료보다 훨씬더 고상하면 할수록 더 높은 위치에 놓여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죽은 사물은 가장 낮은 존재 단계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형상은 순전히 밖에서 질료에 밀어 붙여 각인되었을 뿐이다. 이보다 높은 단계로는 식물이 있다. 식물은 자기 자신 안에 자신의 형상을 식물의 영혼으로 가지고 있다. 동물은 이보다 높은 단계이다. 동물의 영혼은 식물의 영혼에 감각적인 능력, 즉 지각까지도 소유하고 있다. 그렇지만 동물도 비교적 낮은 단계의 존재를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동물의 영혼은 육체와 함께 소멸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동물과는 다르다. 인간도 역시 식물과 동물처럼, 그의 영혼 안에 식물적인 능력과 감각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을 다른 모든 것과 구별해 주는 것은, 그의 영혼이 근본적으로 정신적이며 그래서 불멸적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생명에는 영혼은 물론이고 육체와 결합된 정신적 부분도 들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가 없는 순수한 정신, 즉 천사는 인간보다 더 높은 단계를 이룬다. 그러나 천사 역시 완전하지는 못하다. 천사는 비록 순수한 정신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창조된 정신이다. 따라서 창조되지 않은 정신, 즉 신은 모든 것 위에 우뚝 솟아 있다. 이것이 토마스가 구상한 실재의 구도이다. 이 구도는 그것이 갖는 단일적인 체계와 그것이 포괄하고 있는 충만함 때문에 매혹적이다.

@p143

묘사된 단계 구조는 물론 그리스도교 철학만의 독특한 특징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러한 단계 구조를 그의 세계관의 밑바탕에 깔았다. 단지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사의 자리에 천체의 정신을 놓았을 뿐이다. 그리고 토마스가 단계 구조를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것으로 생각했다는 점도 아리스토텔레스적이다. 만물은 형상화되지 않은 질료에서 벗어나 형상이 되려고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이 가능태와 현실태의 도움으로 설명된다는 점이다. 질료는 형상화될 수 있는 단순한 가능성이다. 형상을 더 많이 얻으면 얻을수록 그만큼 더 현실적이 된다. 이렇듯 이 세계 전체에는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이르려는 끊임없는 추구가 일어나고 있다. 실재는 질료가 아니라 형상 안에 존립한다는 이러한 사상을 고대 사상과 중세 사상의 결합인데, 이 둘은 근세의 관점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지평에서 토마스의 신개념을 보아야 한다. 만일 전체 세계가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이르려는 끊임없는 추구라면, 최고도로 추구되는 것은 어떠한 가능태도 배제된 순수 실재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러한 추구의 최종적인 완성 즉 신이다. 그 다음 여기서부터 신에 대한 그 밖의 본질 규정이 추가된다. 이 신이 순수한 형상으로서 어떠한 질료적인 것과도 관계가 없기에 그러한 신은 순수한 정신으로 파악되어야만 한다. 이 점에서도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른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밀착하게 됨으로써 철학은 그리스도교의 사상을 퇴색시킬 위험을 내포한다. 왜냐하면 이제 신은 어떤 방식으로든 세계 사건에 관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비록 세계 사건 자체의 한 부분으로서는 아닐지라도, 그를 향해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는, 그러나 그 자신은 움직여지지 않는 최고의 원리로서 세계사에 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범신론적인 신개념과 유사하게 된다. 실제로 그러한 식의 신개념은 토마스 시대에 아랍 혹은 서양 철학의 특정한 사조로 파악되고 있었다. 그러나 토마스가 그러한 범신론을 받아들였다면, 세계를 초월해 있는 신이 절대적으로 고귀하다는 사상은 붕괴되고 말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적 신개념에서 본질적인 요소가 사라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p144

여기에 바로 토마스의 고유하고 독특한 고도의 종합에 대한 기술이 드러난다. 그는 범신론적 귀결을 피하기 위해 창조 사상으로 되돌아간다. 신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였듯이 세계 안에서 최고도로 추구되는 것으로서 그 모든 추구를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창조자로서 모든 사건의 시초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물론 토마스는 이것을 더 이상 철학적 방법으로는 증명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명 세계가 그 근원을 신 안에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통찰한 듯이 보였다. 왜냐하면 모든 실재는 절대적인 실재인 신에 관계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관여는 역시 범신론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엄밀한 의미에서 창조의 사상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무한한 거리가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상은 자연적인 이성의 방식으로는 결코 밝혀질 수 없다. 이렇듯 창조 사상은 토마스가 그리스도교의 전통에서 취하고 있는, 그리고 오직 신앙의 길을 통해서만 참됨이 증명될 수 있는 하나의 전제이다.

@p145

세계가 창조되었다는 이 전제를 일단 인정한다면, 그때부터 토마스가 주장하듯이 신의 존재는 자연적 이성의 방법으로 통찰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그 유명한 토마스의 신증명이 전개된다. 토마스의 신존재 증명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존재 증명처럼 영혼 안에 있는 진리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토마스의 신존재 증명은 오히려-이것이 또한 토마스의 전형적인 특징이다-세계의 실재성에서 단초를 잡는다. 토마스의 신존재 증명은, 유한한 세계는 그 근거를 자신 안에 가질 수

없으므로 자신의 창조자로서의 신에게로 그 근거를 소급하고 있음을 나타내려고 한다. 예를 들면-토마스는 이렇게 논증을 전개한다-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존재하게 된 원인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설득력 있는 통찰이다. 그런데 이 원인은 다시 더 높은 원인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만 토마스가 주장하듯이, 원인의 사슬이 무한히 계속될 수는 없다. 따라서 최초의 원인이 존재해야만 하는데, 이것이 곧 신이다.

그런데 토마스는 신의 존재뿐만 아니라 신의 본질도 어느 정도는 자연적인 길을 통해 인식할 수 있다고 여긴다. 여기서도 세계의 실재에서 출발점을 취한다. 여기서는 유비의 방법을 이용한다. 인간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 창조한다는 것은 피조물에게 자신의 어떤 본질을 알려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어느 정도는 피조물에서 창조자를 추론해 낼 수 있다. 예컨대 인간의 선함에서 우리는 신의 선성을 역으로 추론할 수 있다. 여기서 토마스는 물론 극도로 신중을 기해 논증한다. 유한한 인간과 무한한 신 사이에는 너무나 엄청난 거리가 있는데 유비에 있어서 유한한 인간이 동시에 부정되고 고양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신의 선은 인간의 선함과 유비적이다. 그러나 신의 선은 동시에 인간의 선함과는 완연히 다른 것이고 인간의 선함을 훨씬 초월한 무한한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유비의 방법으로 신의 본질에 관해서 어떤 것을 알 수 있지만 그것은 단지 희미한 윤곽 안에서만 가능하다.

@p146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신에 대한 완전한 인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믿음은 완전한 통찰이 아니다. 인간은 저 세상에 가서야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신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이것과 비교해 보면 모든 철학적 인식과 신학적 인식이란 그저 그림자에 불과하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도달할 수 있는 신에 대한 최고의 지식이란, 우리가 신에 대해 사유하고 있는 그 모든 것을 신은 초월해 있다는 것을 아는 그것 뿐이다."

이 점을 토마스는 그의 삶의 종말에서 직접 체험하였다. 그는 그의 위대한 저서 (신학 대전)이 완성되기 전에 펜을 내려 놓는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나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내가 본 것에 비교해 볼 때, 내가 쓴 것이란 모두 한낱 조악한 위조풍처럼 보일 뿐이다."

@p147

11. 에크하르트

신은 곧 신이 아니다

철학 그것은 남자들만의 특권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미 650년 전에 이 사실을 반박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곧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이다. 그는 고위 성직자들 앞에서 라틴어강의를 하기도 했으며, 그가 소속해 있던 수도원은 그에게 수녀원에서도 강론하게 하였는데 그것도 독일어로 하도록 하였다. 그는 이때 자신의 신학적, 철학적 생각을 얌전한 수녀들이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 매우 풍부한 용어를 활용했다. 수녀들은 감격한 듯이 천진 난만한 시를 써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어느 한 수녀는 임종의 침상에서, 그녀가 에크하르트에게서 중요한 자극을 많이 받았다고 고백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가 그때 체험한 것이란 자신의 지성과 감성의 능력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매우 고귀하고 알 수 없는 일"이었을 뿐이다.

@p148

이러한 순전히 개인적인 사실을 제외한다면 우리가 에크하르트의 생애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매우 빈약하다. 에크하르트는 1260년경 기사 가문인 "호크하임 가에서 에크하르트"라는 이름을 갖고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어린 나이로 에르푸르트의 도미니크 수도원에 들어갔다. 아마도 그는 슈트라스부르크와 쾰른에서 공부했을 것이다. 그는 고향에 있는 수도원의 수도원장을 지낸 후 파리에서 강의를 맡게 되고, 1320년 그곳의 교수가 되었다. 바로 이 직함(Magister)에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라는 호칭이 유래했다. 파리에서 돌아온 후 그는 새로 설립된 작센의 지방 교구-네덜란드에서 발트해 연안의 리블랑드까지 관할하는-의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동시에 뵈멘의 주교 총대리 자리를 역임하며 뵈멘에 있는 여러 수도원을 개혁하는 과제를 맡게되었다. 그는 한번 더 파리 대학에 재직한 후에 슈트라스부르크에 있는 수도원 소속 대학의 학장직을 맡았고, 마지막으로 쾰른 대학에서 강의를 맡는다. 그는 1327년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묘지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라틴어로 된 학술 저서와 독일어 논문, 설교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p149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사건은 공인된 교회와의 대립이었다. 교회는 한 사상가가 독자적인 사유의 길을 걷는 것을 그냥 보아 넘기지 않는다. 어느 누군가 전통적인 궤도를 이탈하고 있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교회의 불신의 눈초리가 쏠리고, 결국 교회는 갖고 있는 모든 권력을 총동원해 개입한다. 이 같은 일이 바로 에크하르트에게도 일어났다. 도미니크 수도원의 지도적인 인물을 종교 재판에 회부하려는 기막힌 사건이 발생했다. 여러 가지 형태의 종교 재판을 주관해 온 바로 그 수도원의 원장을 종교 재판에 회부한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감히 에크하르트에게 즉시 접근하려 들지는 않았다 먼저 에크하르트 생각에 크게 영향을 받아 그와 비슷한 생각을 말하고 다니는 평신도를 박해했다. 그들을 잘 타일러 개종시키려 하지는 않고 익사시키거나 화형대의 장작더미 위에 올려 놓았다. 마침내 쾰른의 대주교가 교황에게 에크하르트에 대해 불만을 호소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해서 종교 재판이 열리게 되었는데 물론 처음에 에크하르트는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가 소속된 수도원이 그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고 그 자신도 결코 이교도의 견해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단호하게 해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크하르트가 죽은 후 교황은 칙서를 발송해 마이스터의 28개의 명제가 부분적으로는 이단적이고 부분적으로는 몹시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으로 유죄 판결을 내린다.

@p150

말년의 이러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에크하르트는 오랫동안 거의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그의 사상의 의미와 영향력은 여전히 과소 평가되고 있다. 통상적인 철학사의 서술에서 그는 정말로 의붓자식 취급을 받고 있다. 철학사에서는 무엇보다도 합리적인 철학함의 과정이 가장 많이 다루어진다. 전문적인 철학자는 전체 철학사를 통해 표면적으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저변의 다른 흐름, 즉 신비적 철학함의 흐름이 있다는 것을 쉽게 무시한다. 에크하르트가 이러한 방식으로 사유한 최초의 인물은 아니다. 그에 앞서 3세기경에는 플로티노스가, 5세기경에는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가, 8세기경에는 에리우게나가 있다. 에크하르트의 사유 방식은 그의 직계 제자인 니콜라우스쿤자누스에서 시작하여 야콥 뵈메, 바더의 프란츠에 의해 계승된다. 그러나 신비의 철학은 그것이 직접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영역을 훨씬 넘어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다. 예를 들면 피히테의 후기 사상 그리고 셀링과 헤겔의 사상은 에크하르트가 모범적으로 대변했던 신비의 철학 방식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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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도대체 신비적인 철학함이란 무엇인가? 신비의 철학 방식에서 단지 기이함과 난해함, 모호한 사변과 뒤죽박죽의 공상만을 본다면, 그것은 분명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그것만 가지고는 그 철학의 독특한 특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특색말고 다른 것을 보아야만 한다. 신비적 철학함은 일종의 경험이다. 그것도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경험이다. 즉 하나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길에서 그가 경험한 것이 나타난다. 이렇게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가르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경험의 길을 고찰해야 한다. 그것도 그 길을 추상적인 과정이 아니라 실제로 걸어가야 하는 길로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먼저 모든 세속적인 현실과 절연하도록 한다. 이를 통해서 인간은 "떨어져 나옴"에 도달한다. 이것이 에크하르트의 근본 개념이다. "설교할 때마다 나는 종종 떨어져 나옴에 대해 말한다." 에크하르트의 신비의 길은 우선 떨어져 나옴의 길 즉 이별의 길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외적인 일에 마음쓰지 말고, 더 이상 외적인 일로 근심하지도 말아야 한다. 인간은 "모든 피조물에서 자신을 비워야 하며", "모든 사물에서 떨어져 나와야" 한다. 인간은 순수하게 "모든 피조물을 망각해 버리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신비의 경험을 시작할 때 선택받은 소수만이 이를 수 있는 무아경의 초월은 문제시되지 않는다. 떨어져 나옴은 모든 인간에게 부과된 과제이다. 그것은 내적인 자세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생활에서도 실천적으로 수행되어야만 한다. 세상의 한가운데에 있는 인간은 온갖 잡다한 일, 즉 격정이나 어리석은 일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한 사람에게 있어서 인생의 스승은 1,000명의 교과 선생보다 값지다."

이러한 세계에서 자유에 도달한 사람은 순수한 내면성을 얻는다. 신비의 몸가짐은 "내면의 작용으로 모든 힘을 흩어진 사물에서 집으로 불러들이는 것, 모아들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모든 진리를 자기 안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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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 신비의 길은 두번째 단계, 즉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떨어져 나옴 즉 자기 포기로 이어진다. 인간은 그의 애착과 바람, 자기 자신의 의지까지도 버려야 하며, 자기 자신에서 풀려 나와야 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내맡겨야" 하며, 그런 속에서 "완전히 평온해져야" 한다. 인간은 전적인 "내맡김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영혼의 평온일 뿐 아니라 또한 스스로를 완전히 내맡겨 버리는 것이다. 그 속에서 인간은 "정신의 빈곤" 속에 서 있게 될 것인데, 이것은 "아무 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 것도 모르며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그러한 상태이다. 이러한 길은 물론 나름대로 특별한 위험이 있다. 만일 인간이 그가 원하는 모든 것,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면, 도대체 그에게는 무엇이 남겠는가? 에크하르트가 가리키는 신비의 길은 결국 순수한 무에 이르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크하르트는 과감히 길을 갈 것을 요구한다. "떨어져 나옴은 무가 되기를 바란다." 그것은 "단순한 무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가까이 무에 닿아 있기에 완전한 떨어져 나옴과 무 사이에는 어떤 사물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의 고유한 본질을 실현하는 한에서,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우리의 모든 본질은 다른 데가 아닌 바로 무가 되는 데 놓여 있다."

이것은 물론 그러한 세계와 자기 자신에 대한 극단적인 부정 속에서 자아가 완전히 소멸되어 버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바로 세계와 자기 자신에서 떨어져 나옴으로써 비로소 인간에 있는 본래적인 것, "영혼의 핵심", "영혼의 근거"가 전면에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진다. 에크하르트는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을 끌어들여 인간의 이 파악할 수 없는 핵심을 기술하려고 시도한다. 그는 이것을 "영혼의 우두머리", "정신의 빛", "이성", "영혼의 작은 성", 또는 특히 무엇보다도 "영혼의 작은 불꽃"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모든 명칭은 그가 의미하는 바에 정확하게 들어맞지는 않았다 그것은 "이름으로 지칭되는 것보다 더 지칭되지 않으며, 알려지기보다는 오히려 더 알려지지 않은 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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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에크하르트의 사상은 공인된 교회와 충돌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지점에 이르게 된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렇듯 많은 이름으로 불려진 영혼의 근거가 창조되었는지 아니면 창조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만일 그것이 창조되지 않은 것으로 이해된다면, 엄격한 의미로 신만이 보유해야 하는 그런 특성이 인간에게도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에크하르트가 무엇이라고 말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영혼의 작은 불꽃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이야기되기도 하고 "창조되지 않은 것", "피조물이 아닌 것"이라 표현되기도 한다. 따라서 바로 이 두번째 사상에 대해 교회의 대변자들이 에크하르트에게 비난을 퍼부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못 된다.

에크하르트는 영혼의 핵심에 대한 그의 사상을 신학에 적용시킨다. 만일 인간이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깊숙이 내려간다면, 인간은 영혼의 밑바탕에서 신과의 직접적인 관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영혼의 바탕은 아무도 손대지 못한다. 오직 신만이 할 수 있을 뿐이다." 바로 이것이 에크하르트의 근본 경험이다 그리고 이 근본 경험은 그가 영혼에 대해 기획하고 있는 구도를 규정한다. 영혼은 근본적으로 신적인 종류의 것이다. 영혼 속에는 신과 유사한 어떤 것이 있다. 영혼은 자신 안에 "신적 본질의 형상"을 간직하고 다닌다. 아니 영혼 자신은 "신이 영혼의 밑바탕에 감추인 채 놓여 있는 한" 곧 신적인 성질의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의 밑바탕은 원래 영혼이 신을 인식할 수 있는 장소이다 "영혼의 작은 불꽃은 신의 빛을 파악한다." 그리고 이러한 신에 대한 인식은 오직 떨어져 나와 있음의 경험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 신의 근거로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고유한 근거로 들어

가야만 한다." 그리고 그렇게 완전히 떨어져 나와 있음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신성의 가까이"에 이른 사람이며 신과 "순수한 합일"에 도달한 사람이다. "여기에서 신은 영혼 안으로, 근본 안으로 들어선다." 신적인 실재성과의 이러한 만남은 인간 측에서의 투신 속에서만이 아닌 신 측에서의 자기 헌신 속에서 이루어진다. 신은 "영혼의 밑바탕에 자신의 그 모든 신성을 지니고" 현존하고 있다.

@p154

에크하르트는 영혼의 근본과 신과의 이러한 완전한 일치를 찬미하기에 여념이 없다. "신에 가까이 있는 것과 영혼에 가까이 있는 것은 실제로 아무런 구별이 없다." "한 일치가 다른 일치보다 크지 않다. " "여기에서 신의 근거는 곧 나의 근거이고, 나의 근거는 곧 신의 근거이다. " "신과 나, 우리는 하나이다. " 공식적인 교회는 그러한 발언을 물론 이단이라 낙인찍어 버린다. 신과의 합일 사상에서 앞에서 말한 자아의 무화는-이것은 떨어져 나와 있음에서 실현된다-그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이것은 절대적인 무화가 아니라 신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의 새로운 탄생이라고 할 수 있다. "영혼은 무화가 되어 신성 속에 매장된다." "영흔은 신의 본질 안에서만 완전히 평온해진다." 바로 이렇게 자아의 독특함이 완전히 사라져 버릴 때, 영혼 안에서 신이 탄생할수 있다. 이때 "영혼의 밑바탕, 영혼의 본질에서 아버지이신 신은 그의 아들을 낳으며 그래서 영혼과 더불어 하나가 된다." 신의 탄생 안에서 일어나는 합일이 너무나도 완전하기에 에크하르트는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다 신은 "나를 그 자신으로서, 그리고 그 자신을 나로서, 그리고 나를 그의 본질과 본성으로서 낳는다."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전통적인 사유의 방법으로는 물론 더 이상 파악할 수 없다. 영혼은 "그러한 것이 있음을 분명 느낄 수는 있지만 그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일어나는지는 알지 못한다. "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단지 "알지 못함", "알려지지 않은 인식"만이 남는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알지 못함과 알려지지 않음을 뜻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것 이외의 모든 앎과 인식보다도 자신 안에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무지란 신에 대한 고유하고 참된 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논에서 알지 못함으로 들어서야 하며, 그렇게 될때 우리의 알지 못함은 초자연적인 앎으로서 고상하게 되고 자랑스럽게 된다."

신비적 근본 경험에서 에크하르트가 철학적 신학이라고 부르는 그것, 즉 신에 대한 사변이 발전될 수 있다. 신에 대해서 우리는 우선 "신은 존재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철학의 전통과 일치한다. "신에 대해 신이 무엇이며 누구인지를 묻는 사람은, 신은 곧 존재이라는 대답을 얻을 것이다"

@p155

신은 "단적으로 존재"라는 것은, 신이 곧 "모든 사물의 근원"임을 의미한다. 에크하르트는 모든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자명하다시피 한 이러한 사상을 넘어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신은 존재하는 것들의 창조자일 뿐만 아니라 존재자 중의 존재-이것은 이미 나름대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지만-이다. 왜냐하면 창조된 사물은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며, 다만 신의 존재의 은총에 의해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신은 "모든 자연들의 자연이고, 빛들의 빛이고, 살아 있는 것의 삶이고, 본질적인 것의 본질이고, 말하는 자의 말이다." 에크하르트는 결국 대담하게 거듭 범신론적으로, 따라서 이단적으로 들리는 주장을 감행한다. "모든 사물은 신 그 자체이다." 그리하여 웅대하게 짜여진 총체적 관점에서 볼 때, 현실은 그 전체가 신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모든 창조물은 신의 말씀이다. 모든 창조물은 그들의 모든 작용에서 신을 흉내내고 싶어한다. 모든 창조물은 모두 그것들이 처음에 흘러나온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외침을 가진다. 창조물의 그 모든 생명과 본질은 처음에 그것들이 나온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외침이며 그곳으로 서둘러 가는 것이다." 이것은 특별한 방식으로 인간에게 잘 들어맞는다. "신의 본질은 곧 나의 삶이다. 신의 본질이 나의 삶이라면, 신의 존재는 곧 나의 존재이며, 신의 본질성은 곧 나의 본질성이다."

그런데 여기서 에크하르트는 한 가지 난관에 봉착한다 신을 단순히 사물과 동일시하지 않으려면, 신의 존재를 창조된 사물의 존재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에크하르트는 명료하게-겉보기 에는 위에서 인용한 명제와 반대이다-이렇게 말한다. "신에게는 존재가 서술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신은 존재자도 아니며, 오히려 신은 존재자보다 높은 어떤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신은 존재하는 사물과 단순하게 동일시되어 버린다. 그리고 에크하르트는 이 존재자보다 높은 것은 분명 정신적인 것, "통찰", "지성"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신은 그리스도교의 전통 내에서는 본질상 정신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크하르트에게 있어서 신의 참된 존재 방식은 "존재보다 더 높은" "통찰"이다. 존재의 개념은 신에 관한 한통찰의 개념 속으로 녹아 들어가 버린다. "신은 순수한 통찰이고, 이 통찰의 존재 방식은 단지 통찰함 그 자체일 뿐이다."

@p156

그렇지만 신의 존재를 통찰로 보는 이러한 규정은 인간이 떨어져 나와 있음에서 겪은 그 경험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 경험에서는 오히려 존재와 통찰로서 이해된 신의 배후를 파고 들어가는 사유가 자라나온다. 그리고 이 사유는 "신성의 근거", "황량한 사막"에 부딪치며, "끝이 없는 심연""밑바닥이 없는 바다" 속에서 신과 마주치게 된다.

여기에서는 물론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만다. 에크하르트는 단지 "은폐된 신성의 알려져 있지 않음", "영원한 은폐의 가려진 암흑"에 대해서만 언급할 수 있을 뿐이다. "신에게는 이름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도 신에 대해서는 어떠한 것도 말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상의 존재를 파악하려면 사유는 신의 개념을 넘어서서 더 파고 들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신은 "허공에 등등 떠다니는 본질이며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무"이기 때문이다.

신을 인식할 수 있는 본질적인 방법은 매우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신에서 자유롭게 되는" 데 있다. "만일 그대가 신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그가 신인지, 어떻게 그가 정신인지, 어떻게 그가 인격인지, 어떻게 그가 형상인지 등등의 모든 것이 없어져야 한다." "그대는 있는 그대로의 신을 사랑해야 한다. 즉 비신, 비정신, 비인격, 비형상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의 순수하고 깨끗하고 명료한 일자로서의 신-어떠한 이중성과도 구별이 되는-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자 안에서 무에서부터 무에 이르기까지 영원히 침잠해야 한다."

이로써 떨어져 나와 있음은 그 극단의 가능성에 도달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내버려 둘 수 있는 최고의 것, 가장 가까운 것은 그가 신 때문에 신을 내버려 두는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p157

12. 니콜라우스

신에 관한 명명

정신계에서의 위대한 인물이 동시에 현실 세계라는 무대에서도 위대한 인물이 되기는 매우 드문 일이다. 그러나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는 바로 그러한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좋은 환경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는 1401년 쿠스에서 모젤의 어부이자 상인-물론 가난하지는 않았지만-의 아들로 태어났다. 따라서 그는 당시 유럽에서 정신적으로나 세속적으로 높은 영광을 독차지한 귀족 가문에 속하지는 못했다. 니콜라우스는 그가 소박한 어부의 아들로서 그 정도 성공한 사실에 한평생 자부심을 느끼며 살았다. 이때 그가 정신적으로 최고의 선조로 삼았던 베드로를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그가 부모 밑에서 돈에 대한 감각과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에 대한 감각을 터득한 것은 사실이다. 더군다나 그 자신에게는 그런 것이 개인적으로 전혀 필요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이 점을 경탄해하며 찬양해 마지 않는다. 그의 식탁은 매우 검소하게 차려졌다. 그는 양초 대신에 값싼 석유 램프를 사용하였다. 꼭 그래야만 한다면 그는 또한 말 대신에 나귀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닐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더 큰 인상을 주기 때문에 그럴 수 있지 않나 싶다. 헤아려 보건대 그때 그는 그의 스승이 예루살렘에 의기 양양하게 입성한 것을 회상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이 사람의 행각에 대해서는 그 어느 것이나 확실하게 알고 있지 못하다.

@p158

니콜라우스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알려진 것이라고는 고작 다음의 일화뿐이다. 그가 언젠가 그의 아버지와 다투었을 때, 그의 아버지가 그를 거룻배에서 물 속으로 집어 던지자 집을 뛰쳐나와 버렸다. 그러나 오랫동안 방황하며 떠돌아 다니지는 않았다고 한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믿는다면, 오히려 그 반대로 그는 당시 매우 유명한 학교인 디벤터 학교에 착실히 다녔으며 그 학교에서 곧 두각을 나타냈다 한다 그는 15세에 법률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고,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법률 공부를 하면서 몇 년 동안은 인문학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 후 바로 법률학 분야에서 유명한 파두아대학으로 갔다. 그곳에서 22세의 나이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그 후 그의 고향에서 변호사로 정착했다. 그러나 변호사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다. 불행히도 그는 그가 맡은 최초의 소송에서 졌던 것이다. 그는 그 일을 계기로 극단적인 결론을 내려 앞으로는 법조계에서 완전히 손을 떼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루벵 대학의 교회법 교수로 초빙받았으나 거절했다. 그는 그 대신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하고는 서품식을 받지도 않고 트리어 교구의 한 본당의 주임 신부직을 맡게 되었다. 이어 그 시대의 관례에 따라 그는 곧 성직자의 직위를 받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그 자신의 능력으로 신자들의 영신 생활을 돌보는 그 이상의 일을 떠맡게 된다.

니콜라우스가 그와 친분이 있는 추기경의 부름을 받고 바젤의 종교회의에 참석하면서 그는 처음으로 고향의 좁은 테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즉시 교황에 맞서 종교 회의의 권리를 변호하는 당에 가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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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종교 회의의 주장을 견고히 하기 위해 철저한 문헌과 자료 조사를 거쳐 방대한 저서 (가톨릭의 단결에 대하여)를 쓰는데, 이 책은 대단한 주목을 끌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그 당시 사람들의 놀라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교황의 열성적인 지지자가 되었다 우리는 무엇이 이와 같은 갑작스런 변화를 몰고 왔는지 알 수 없다. 추측하건대 니콜라우스가 항상 갖고 있던 명예욕이 작용을 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어쩌면 모든 것이 뒤죽박죽으로 혼란한 시대에서 교회의 문제는 단일한 지도자 아래에서 가장 잘 해결될 수 있다고 깊이 생각한 끝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니콜라우스는 바젤에서 폭넓은 분야에 걸쳐 교회 정치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교황과 종교 회의 사이의 반목을 중재하려고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트리어 대주교의 임명권에 대한 분쟁과 뵈멘의 후스 교회와 로마 교회를 화해시키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활동은 세속적인 분야에까지 널리 뻗쳤다 그는 바이에른 지방의 귀족들사이의 불화, 아니 더 나아가 스페인과 영국의 분쟁까지도 조정하도록 위임받았다. 교회 밖에서도 니콜라우스의 담판 능력은 높이 평가되었다. 더구나 그는 귀족들의 결혼 중매도 맡아서 해줄 정도였다. 이 모든 일 외에도 그는 달력 개정 문제에도 몰두했다. 이때 그는 충분한 계산 끝에 죽은 자들의 부활이 1700년과 1734년 사이에 일어나리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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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과 종교 회의의 의견이 일치된 가장 중요한 과제는-그 둘이 비록 그 과제를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옥신각신했지만-동방 교회와 로마간의 화해이다 니콜라우스는 특별 사절단의 지도급 위원으로 콘스탄티노플로 떠난다. 그는 귀향길에서 망망 대해를 바라보며 "위로부터의 선물, 빛의 아버지의 선물"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삶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철학적 발견을 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모든 분열에 앞서, 특히 실재성의 모든 영역에서 단일성이 우위를 차지하고 그 단일성은 궁극적으로 무한함에, 즉 신 안에 놓여 있어야 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돌아와서 은둔 생활을 하며 그의 저서 (무지의 지에 관하여)를 저술한다.

그 후 교황의 특별 사절로 임명된 니콜라우스는, 당시 연속적으로 열리고 있던 독일 제국 의회에서 교황의 직무를 대행하며 교회의 개혁에 대해 토의하게 되었다. 그는 감동적인 연설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고 이로써 탁월한 성과를 거두어 칭송을 한몸에 받았다. 따라서 교황이 그에게 최고의 영예를 준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교황은 그를 추기경에 임명한다. 동시에 교황은 그에게 새로운 직무를 수행하는 데 쓰라며 금화 1000냥을 보낸다. 니콜라우스가 누리고 있는 명성은 그가 콘클라베의 교황 선거에서 후보로서 잠시 거론되었다는 사실이 말해 준다. 교황은 그에게 독일 교회 생활의 개혁, 특히 수도원을 개혁하라는 특별 지시를 내린다. 물론 그것은 몹시 힘든 업무였다. 수많은 수도원에 아주 나쁜 죄악들이 만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방종한 여자들과의 주연, 매춘부들, 수도원과 수녀원 사이에 오가는 사악한 교제 등이 만연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밖에 미신의 만연은 교회 공동체의 종교적인 숭배에까지 침투한다. 피의 기적이 도처에서 숭상되었다. 니콜라우스는 한 치의 타협도 없이 단호한 조치를 취한다. 그는 잠을 네 시간으로 줄였으며, 여러 차례 노여움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그를 초대한 집주인에게 고함을 지르고 연회 식탁에 오른 치즈와 빵을 내동댕이쳤다고 한다. 또는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주교가 될 것이라고 방정맞게 까불거리는 불쌍한 신부 1명을 라인 강에 빠뜨려 익사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p161

니콜라우스의 그 다음 시기의 삶은 추한 분쟁으로 인해 음울해진다. 교황은 그를-상임 평의원단에서 선출한 사람을 마다하고-브릭센의 주교로 임명한다. 이로써 그는 그곳이 많은 영토의 주교 관구를 포함하고 있기에 성주로서 군림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티롤의 공작과 충돌한다. 이 공작은 주교좌에 대해 서약한 신하 관계를 전혀 지키지 않고, 오히려 주교좌에 대한 지배권을 요구한다. 이갈등은 점점 심화된다. 드디어 싸움이 벌어지고, 이 싸움에 주교 자신도 휘말려 들게 된다. 수차례의 협박과 심지어는 기습까지도 자행된다. 결국 니콜라우스는 퇴각해 간 자신의 성 안에 포위당하고 만다. 요새는 공격을 받아서 마침내 점령되고 니콜라우스는 죽음이 임박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후 사태는-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쳐, 몹시 못 마땅한 타협이기는 하지만-타협을 봄으로써 종결된다. 또 니콜라우스는 그의 개혁 계획 때문에 한 명문 수녀원과 그 수녀원의 호전적인 여자 대수녀원장과 심한 대립에 빠진다. 이 대립은 특히 수녀들이 니콜라우스에 대항할 용병대를 모집함으로써 흡사 전쟁을 방불케 하는 형태를 띤다. 머리 끝까지 화가 치민 니콜라우스는 여자 대수녀원장의 편에 서서 싸움에 가담한 농민의 무리를 학살한다.

드디어 이 모든 어려운 일에 지쳐서 니콜라우스는 "흰 눈과 검은 계곡으로부터" 로마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그는 교황이 없는 동안 교황의 직무를 대행한다 이 일을 맡고 있는 동안 그는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들의 여러 가지 분쟁에 휩쓸리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독일제국 의회에 참석하여 그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있던 터키인에 대항하는 십자군 파병 준비에도 관여한다. 프로이센에서는 분별없이 폴란드 왕과 전쟁을 하고 있는 독일 기사단의 싸움을 평정하여 질서를 바로잡아 놓는다. 그는 프랑스와 영국간의 100년 전쟁도 교황의 전권 위임자로 중재했다 물론 두드러진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과 더불어 근본적으로 교회를 개혁하려는 데 힘을 쏟았다. 개혁의 일환으로 추도문에서부터 시작하여 시시콜콜한 세부 사항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정리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그 후 그는 십자군 원정 전함의 출범을 재촉하기 위해 서둘러 가는 도상에서 146463세의 나이로 죽는다. 그의 유해는 로마의 빈콜리에 있는 성베드로 성당에 안치되었으나 그의 영혼만은 고향 쿠스에 잠들었다.

@p162

앞에서 썼듯이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하는 정신없는 교회의 일과 외교적인 활동을 하면서도 그가 저술 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놀랄 만한 사실이다. 더욱이 그의 글들을 읽노라면 한결같이 어떠한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평온함 속에서 씌어진 듯해 경탄을 금치 않을 수 없다. 그가 쓴 책의 숫자 역시 대단하다. 앞에서 언급한 책 외에 몇몇 책 제목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지혜의 사냥에 대하여), (지혜에 관한 소견), (정신에 관한 소견), (신을 향한 열망), (관조의 절정에 관하여), (근원에 대하여), (은닉된 신에 관하여), (믿음에 관하여) 등이다.

니콜라우스의 사유의 내용은 그가 콘스탄티노플로부터의 귀향길에 체득했던 발견에 의해 규정된다. 그는 여기서 신에 대한 사고를 무한함으로 파악했고 그래서 그에게는 무한성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대두된다. 그는 이미 수학의 분야도 탐구했다. 니콜라우스는 미적분을 연구하였는데, 이 미적분은 그 이후 오랜 시간이 흘러 뉴턴과 라이프니츠에 의해 비로소 완전히 정리된다. 니콜라우스는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사람으로서 그의 연구는 미래를 지시하고 있다. 고대와 중세에서 우세하였던 질적인 규정에 치우치는 경향에 반해 그는 이미 측량과 계량의 근세적인 방법을 보급시킨다. 그는 확신에 가득 차 지구가 돈다는 혁신적인 이론도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수학과 자연 과학의 영역에서 획기적인 발견에 도달한 것은 물론 아니다. 두 학문은 다만 그의 관심의 주변을 맴돌 뿐이었다.

반면에 니콜라우스는 철학적 신학의 문제를-이것은 당시 철학의 중심 분과였다-그에 앞선 어떤 사람도 한 적이 없는 그러한 방법으로 심화시킨다 그는 단 하나의 유일한 물음을 끊임없이 던진다. 즉 무한자인 신은 무엇이며 어떻게 파악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는 항상 그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 가는 것을 경험한다. 어느 순간 신의 본질에 대해 무엇인가를 파악한 듯싶다가도 그것은 다시 파악 불가능의 늪 속으로 가라앉아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우스는 항상 새롭게 신을 파악하려고 시도한다. 바로 여기에 이 사상가의 위대함이 있는 것이다.

@p163

개념적으로 신을 분명하게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점은 니콜라우스가 신을 "절대적인 무한성"으로 파악하려고 시도할 때 드러난다 무한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특징짓는다면 그것이 뜻하는 바는, 그 개념이 완전하고 무제한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경우 절대적인 무한성과 나란히 독립적인 유한성의 영역이 존립할 수 없다. 만일 그러한 경우가 가능하다면 그때는 무한성 자체가 제한되고 유한화되어 버릴 것이다. 그래서 이제 분명해지는 것은, 무한성을 그 순수한 대립이 없음에서 고찰할 때, 유한한 사고에는 "접근하기 어렵고 파악하기 어렵고 말로 표현할 수 없고 통찰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니콜라우스가 신을 "절대적인 단일성"으로 부를 때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여기서도 또한 단일성은 어떤 그 자체로 존립하는 유한한 다수성에 대립해 있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됨이 적용된다. 그럴 경우 그것은 절대적 단일성이 아닐 것이다. 이렇듯 모든 비교 가능성을 벗어나 신을 "지칭할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또한 말로 나타낼 수 없다." 따라서 절대적인 단일성으로서의 신의 개념도 역시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증명된다.

@p164

적절한 신의 개념을 발견하는 데는 다음과 같은 어려움이 있다. 신이 절대적인 무한성으로 또는 절대적인 단일성으로 파악될 경우 신은 자기 옆에 어떠한 유한함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형태가 어떠한 것이건간에 그러한 유한한 것이 대립의 세계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니콜라우스는 계속되는 사유의 시도 끝에 신을 "모든 대립의 소멸"로 파악한다. 이렇게 신을 생각할 경우 유한함은 실제로 무한함 안에서 폐기되어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니콜라우스는 "신은 모순적인 것의 붕괴 가운데서도 존립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렇듯 니콜라우스는 신을 "그것을 넘어서서는 더 큰 것이 있을 수 없는 것" "절대적 크기"로 파악하려 한다. 이로써 신은 유한한 크기와의 어떠한 관계에서도 벗어난다. 왜냐하면 제한된 것에는 증가될 수 있다는 것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절대적 크기에서는 더 이상이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이해된 신은 여전히 하나의 대립의 관계, 즉 절대적인 최소의 것과의 대립의 관계에 서 있다. 그리고 이 대립 역시 참된 신의 개념 안에서는 지양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니콜라우스는 신이 가장 큰 것일 뿐 아니라 동시에 가장 작은 것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을 일관성있게 강조한다.

그렇지만 가장 큰 것이며 동시에 가장 작은 것으로 사유된 신의 개념은 여전히 정태적으로 사유되고 있는 셈이다. 이 점은 아마도 니콜라우스가 그러한 신의 개념을 넘어서 새로운 신의 본질에 대한 명칭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해가 될 것이다. 그 새로운 명칭 안에는 무한한 창조력의 계기, 즉 가능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가능은 단순한 가능성이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신은 그가 무엇일 수 있는 바 바로 그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니콜라우스는 이 관련을 좀 대단한 표현 방식인 "가능-있음"이라고 해보려고 시도한다. 그렇게 파악된 신은 모든 실재성을 자기 안에 포용한다. 왜냐하면 실제적인 것은 "실재성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가능-있음의 실재성을 모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165

그런데 이 가능-있음이 유한하게 되어 가는 것과 맺는 관계를 이야기할 때 자칫 잘못하면 니콜라우스가 신의 가능과 세속적 가능을 같은 차원에 놓을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까닭에 그는 이제 신을 "다름이 배제된 바로 그것"으로 파악하려고 시도한다. 개개의 유한한 존재자는 모두 항상 그 자신과 맞서 있는 어떤 다른 것을 대면하고 있고, 이 다른 것에 대해 그 자신 역시 하나의 다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신에게는 해당되지도 않고 해당될 수도 없다. 그런 까닭에 다름이 배제된 바로 그것으로서의 신은 모든 유한한 것에서 분리된다. 니콜라우스는 이 개념에 대해 그것은 "지칭될 수 없는 신의 개념을 가장 가깝게 표현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것은 신기한 수수께끼처럼 찾는 사람에게 빛을 발산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다시금 니콜라우스에게는 신을 다름이 배제된 바로 그것이라 지칭하는 것도 신의 본질 안에서의 정태적인 계기를 일면적으로 강조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므로 신에 있어 역동적인 계기, 즉 가능이 더 강력한 비중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가능-있음에서처럼 신은 가능이며 동시에 있음이라는 관점만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니콜라우스에게 이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순수한 가능의 개념이다. 신은 "가능 그 자체"이다. 니콜라우스는 여기에 덧붙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신에게 분명하고 더 참되고 더 쉽게 지칭할 수 있는 어떤 이름이 주어질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 그는 이로써 신에 관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가능성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신의 개념도 다른 개념과 마찬가지로 접근할 수 없는 채로 남아 있다.

신을 개념으로 파악하려는 그의 모든 시도에서 니콜라우스는 세계를 거의 완전히 시야에서 놓쳐 버린다. 비록 그가 항상 모든 실재성은 신의 관점 아래에서 고찰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모든 유한한 것의 유래는 무한한 근원에서 흘러 나온 것이다." 그렇지만 이 경우도 신이 자신으로부터 어떤 것을 떠나 보내서 하나의 독립적인 세계를 창조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신은 모든 실재적인 것을 그 자신 안에 "포용하고 있다." 세계는 단순히 신의 "전개"이며, 그래서 그것은 그 자체 신적인 것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세계는 신 안에 있다"는 것이 통용된다

@p166

만일 니콜라우스가 신존재에 대해 그렇게 많은 규정을 하고 있다면 이 모든 규정이 결국은 문제점이 있는 것이 되어 버리기는 하지만-그에게 있어 제기될 수 있는 물음은 그렇다면 신을 인식한다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이다. 애당초 분명한 것은 그것이 지성의 도움으로는 일어날 수 없다는 깃이다. 왜냐하면 지성은 대립의 차원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지성은 항상 하나를 다른 것으로부터 분리해 놓는다. 그러나 신은 모든 대립과 분리를 넘어서 있다. 지성보다는 오히려 이성이 신을 인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니콜라우스의 이해에 따르면, 이성은 대립을 바로 그 자신의 그때마다의 단일성 속에서 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 역시 신을 항상 인간의 관점 아래에서 바라볼 뿐 신이 그 자신 안에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는 못한다 지성과 이성이 전형적인 인간의 인식 능력이라던, 그것으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신은 유한한 인식 안에서는 도대체 파악될 수 없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바 그 모든 것이 신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내가 파악하고 있는 그 모든 것은 신과 비슷하지도 않다는 것을 안다."

이제 니콜라우스의 사유는 대담하게 전개된다. 우리가 신을 앎 속에서 파악할 수 없다면 아마도 무지 속에서는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신을 보기를 원한다면 이성은 무지의 상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니콜라우스에게 있어서 무지란 절망하여 앎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신에 대한 물음에서 무지 그 자체를 분명하게 움켜쥐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지는 "아는 무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지는 신에게로 가까이 가는

정당한 방식이다. "파악할 수 없는 신에게 우리는 오직 이 무지의 지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니콜라우스의 철학적 신학은 "부정 신학"이 된다. 이 부정 신학은 철학의 한 분과로서 이미 니콜라우스 이전부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부정 신학의 본질적 특징은 그것이 신에 관해서는 오직 부정하는 진술로만 말할 것을 허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유한한 실재의 존재 규정으로서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신과 관련지어서는 부정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부정에 의해서 신의 존재까지도 부정적 술어의 형태를 띤다. 신은 결국에 가서는 무와 같은 것이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무한한 신을 향해 올라가는 사람은 어떤 것에 가까워진다기보다는 오히려 무에 가까워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신에 대해서는 "그가 존재한다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또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통용되지 않는다 이 역설은 모든 유한한 것과 신과의 무한한 간격을 끝까지 생각해 보려고 한 철학적 신학의 극단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신이 전혀 파악될 수 없다고 한다면, 도대체 우리는 무슨 권한으로 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가? 이 물음에 직면해서 니콜라우스가 신에 대한 인식을 앎의 형태가 아닌-무지의 지의 형태도 아닌-다른 영역으로 이전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인간은 신을 "동경"하면서 그에게 가까워질 수 있다. 왜냐하면 "일자를 향한 끊임없는 동경"은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동경 속에 어떤 방식으로건 동경의 대상 즉 신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동경도 신의 실재적인 파악은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신을 향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이렇듯 여기에서도 신은 파악할 수 없는 채로 남아 있다.

@p168

니콜라우스는 마침내 자신이 신비의 체험에로, 순수 관조에로 이끌려가고 있음을 느낀다. 신비의 체험에 도달하기 위하여, "어떠한 한계도, 모든 종말과 유한함도 초월하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될 경우 "우리는 모든 인식보다 더 앞서 있는 그것을 관조하는 그러한 정신적인 안목을 갖고 있음"이 드러날 것이다. 신은 "어둠 속에서 보이고", 그것도 "파악할 수 없는 관조 속에서 순간적인 무아경으로" 보이게 된다. 그렇지만 이 길도 결론적으로는 목적지로 이끌고 가지 못한다. 이때에도 신은 "어떠한 형태의 관조로도 보여질 수 없는 것"으로 머물러 있게 된다.

이렇듯 어떤 방식으로든지-철학적 사유로든지 부정 신학으로든지 동경에서든지 신비의 관조에서든지-신을 파악하려는 니콜라우스의 그 모든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간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것이다. 만일 인간 측에서의 모든 능동적인 시도가 실패했다면, 단 하나 유일하게 남은 것은 신 측에서의 능동적인 관여이다. 신과 접촉할 수 있는 가능성은 모두 신의 가장 고유한 계시로부터 생겨난다. "만일 숨어 있었던 신이 스스로 빛을 밝혀 어둠을 몰아내고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면, 신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믿음이 모든 인식과 관조 자체보다도 우위에 있음을 의미한다 궁극적으로 철학적 신학은 계시를 위하여 스스로를 포기한다. 신의 인식 가능성에 대한 니콜라우스의 가장 극단적인 예고는 다음과 같다 "신은 그 모든 현자들의 눈에는 가려지고 숨겨져 있지만, 그가 은총을 하사하고 있는 가장 겸손한 자에게는 나타난다" 이렇듯 신에 대한 철학적 그 물음이 목표에까지 이끌고 가지는 못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여전히 고려되어야 할 것은 니콜라우스가 그 물음을 오직 소수의 사람만이 보인 긴박감을 갖고 제기했다는 바로 그 점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철학적 신학으로서의 철학의 분야에서는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p169

13. 데카르트

가면 뒤의 철학자

17세기 초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이자 사상가이고, 근대 철학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데카르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상야릇한 말이 전해 내려온다. "연극 배우들이 자신의 얼굴에 나타나는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가면을 쓰는 것처럼, 나는 세계의 극장에 들어갈 때 가면을 쓴다." 가면을 쓴 철학자? 사물과 인간을 밝히려는 과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가면 속에 숨어야 할까? 그는 무엇을 숨기는 것일까?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물어 보아도 그들은 잘 알지 못했다. 데카르트는 그들에게 불투명하게 보였다. 그는 편지와 저서를 통해 그의 사상이 오해되고 왜곡되는 것을 계속해서 방어해야만 했다. 그의 학설의 의미에 관해서는 도대체 일치된 견해라고는 없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사상이 성서의 진리와 완전한 일치를 이룬다고 주장한다.

@p170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에서 있었던 개혁파 종교 회의와 몇몇 대학에서는 그의 저서들을 금하고, 가톨릭 교회도 그의 저서들을 금서 목록에 넣었다. 사람들은 그의 철학적 행위를 엿새에 걸친 신의 창조 활동과 비교하기도 하고 또 그를 구약의 입법자인 모세와 비교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은 그의 비신앙, 무신론과 부도덕을 규탄하기도 한다. 이것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의 해석자 중 어떤 사람은 데카르트를 "신과 신의 교회의 영예와 영광을 위해 싸운 그리스도교 철학자"라고 부른다. 이에 반해 다른 사람은 그의 철학과 더불어 "그리스도교 사상에 봉기하는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따라서 오늘날도 여전히 가면은 벗겨지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자기 자신과 자신의 저서를 숨기는 사람, 이 수수께끼 같은 철학자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데카르트는 어떤 사람인가?

가장 외적인 사실부터 살펴보면, 그는 1596년에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로써 그의 전기는 거의 끝이 날 뻔했다. 왜냐하면 숨어 있고자 하는 그의 열망이 너무도 컸던지 태어나자마자 지구라는 이 연극 무대에서 사라지려고 했기 때문이다.

@p171

그것도 지독한 열성을 갖고 대들었기에 의사들마저도 손을 들어 버릴 정도였다. 사정이 이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근대 철학의 창시자인 데카르트가, 그리고 그와 더불어 근세 철학 자체가 있게 된 것은, 의사들의 포기에도 불구하고 이 어린 아이를 건강하게 돌보아 준 유모 덕분이다.

데카르트는 그가 이토록 어렵게 삶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한 가지 장점을 끄집어낸다. 그는 수업이 있을 때에도 동료 학생들의 시기와 부러움 속에 아침 늦게까지 침대에 남아 있어도 되었던 것이다. 이 습관은 그가 더 큰 힘에 의해 강제로 포기하게 될 때까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계속되었다. 이것은 나중에 계속 이야기하기로 하자.

데카르트가 다녔던 학교는 당시 매우 유명하였다. 훌륭하고 전통 깊은 스콜라 학풍의 방식으로 학문을 연구하던 예수회 학교였다. 데카르트는 곧 순종적이고, 책임감이 강하며, 학구열이 높은 모범 학생으로 인정받았다. 그때 그는 이미 가면을 쓰기 시작한 셈이다. 공부에만 몰두하는 얌전한 모범 학생인 것 같은 겉모습 뒤에는 반란적인 정신이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드러나지 않게 그는 생명력을 잃어 가는 전통에 반항한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제시된 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가장 의심스러운 것으로 보였다. 특히 철학이 더욱 그러했다. 그는, 어느 누구도 어떤 철학자에 의해서도 단 한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그러한 기이하고 믿기지 않는 것을 생각할 수는 없으리라고 훗날 기록하고 있다. 데카르트는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스콜라 철학) 대신에 막 나타나기 시작한--예수회 학교에서는 금지하고 있는--과학과 철학에서의 혁명적인 방향 전환에 은밀히 몰두하고 있었다. 훗날 그는 바로 그것에 더 깊은 기초를 마련해 주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데카르트는 얼마 동안 학문을 외면한다. 그는 훗날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 스승들의 예속에서 벗어나도 좋을 나이에 이르자마자 그동안 배워 온 공부를 완전히 버리고 말았다. 나는 내 자신과 세계라는 커다란 책에서 찾아낼 수 있는 그런 지식 이외에는 어떠한 다른 지식도 탐구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p172

나는 내 청춘의 나머지를 여행을 하면서 궁정과 군대를 둘러보고, 여러 상이한 종류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과 교제하고, 경험을 쌓으며, 운명이 내게 제공하는 사건들 속에서 내 자신을 시험 해 보고, 어디에서건 내가 만나게 되는 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아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얻어내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세계의 책"을 데카르트는 맨 먼저 파리에서 찾아냈다. 왜냐하면 다른 곳에서가 아니라 바로 여기에서 커다란 세계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기 작가의 기록을 빌리자면, "몇 명의 시종을 거느리고서" 쾌락의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 들어가 말을 타고 펜싱을 하며 춤을 추고 도박을 즐겼다. 그러나 이것도 단지 하나의 새로운 가면인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는 갑자기 사교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고 고독 속에서 지냈다. 어느 누구도, 친구와 가족까지도 그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집 밖으로는 거의 나가지 않고, 신들린 듯이 수학과 철학의 문제에 몰두하여 연구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다시 넓은 세계가 그를 유혹했다 그는 여행을 하기로 결심하고, 이를 위한 가장 좋은 기회는 군복무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데카르트는 군인이 되었다. 그가 과연 한번이라도 적에 맞서 칼을 뽑았는지 우리는 물론 알지 못한다. 단지 해상 여행에서 그를 습격한 해적선들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그는 일개 사병으로서가 아니라, 장교 그것도 급료를 완전히 포기한 고급 장교로 시작한다. 그에게는 어떤 이상을 위해 싸우는가 하는 것은 관심 밖의 문제였다. 그는 프로테스탄트 야전 사령관 아래서도, 가톨릭의 야전 사령관 밑에서도 복무했다. 그는 사실 "배우"보다는 오히려 "구경꾼"이 되고자 하였고, "행위자"보다는 오히려 "관객"이 되고자 하였다. 전쟁터에서 그의 관심을 끈 것은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고 있다는 사실보다는 오히려 어떻게 사람들이 이 일을 하는 것인지, 즉 그 목적에 이용되는 무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군인 관광객으로서 네덜란드를 거쳐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를 두루두루 여행하였다. 바로 그 때문에 그에게는 전쟁 행위가 지속되는 날보다는 겨울 막사의 시간이 더 좋았다. 왜냐하면 "나는 하루 종일 혼자 따뜻한 방 안에 틀어박혀서 오로지 나의 생각만을 정리할 수 있는 한가로움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썼다.

@p173

도나우 강가의 노이부르크의 겨울 막사에서 데카르트는 중요한 발견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의 후기 철학 사상의 씨앗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이때의 일을 이렇게 쓰고 있다 "내게 기이한 통찰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기묘하고 의미 심장한 꿈들이 계속 이어진다. 데카르트는 이 모든 것에 사로잡혀 로레토(중부 이탈리아의 안코나에 있는 성지 순례지)로의 성지 순례를 예찬하더니 군복무를 그만두고 그곳으로 성지 순례를 떠난다. 그 후 그는 일반 시민으로서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마지막으로 다시 파리로 돌아오는데, 이것 역시 그곳에서 자신을 사람들로부터 숨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도 그는 곧 이 피난처에서도 만족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파리의 분위기가 철학적 사유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괴상한 생각만 들게 하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철학적 사유가 그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데카르트는 "세계라는 커다란 책"을 철저히 탐구한 후, 이제 방향을 돌려 탐구의 대상을 자기 자신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 완전한 고요함이 필요했다. 그는 네덜란드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곳에서 "적막 속에서 고독하게" 오직 인간 정신의 영역에서의 발견을 위한 삶을 산다. 그리고 이것은 이제 물론 "나에게 그동안 내가 간직해 온 그 모든 확신을 가장 포괄적이며 가장 근본적으로 뒤엎을 것을 요구하였다." 바로 네덜란드는 이러한 창조적인 고독을 그에게 제공해 주기 위해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다른 사람들의 일보다는 자기 자신의 일에 더 관심을 가지는 위대하고도 매우 활동적인 민족의 무리 속에서 나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막에서와 같이 고독하고 한적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라면 나는 어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채 나의 전 생애를 보낼 수도 있으리라." 신중을 기하기 위해 가명 수신인 주소를 사용한 폭넓은 편지 왕래만이 그와 세상을 연결시켜 주는 유일한 것이었다. 바로 이 적막이 그가 그때까지 헛되이 추구하였던 바로 그 행복을 가져 다 주었다. "참된 것을 관찰하면서 느끼는 만족감은 이 생활 속에서 얻는 거의 유일하게 순수한, 어떠한 종류의 고통에 의해서도 흐려지지 않는 행복이다." "나는 여기서 어떠한 걱정거리에도 놀라 깨지 않고 10시간이나 잠을 잤다."

@p174

데카르트는 이러한 고요 속에서 저서만을 저술했다. 물론 그의 평화가 깨지지 않을까 하는 끊임없는 걱정 속에서 글을 썼다. 그가 막 한 권의 책을 완성했을 때, 그가 그 책에서 다루고 있는 대상과 같은 대상에 대해 비슷한 것을 말했던 갈릴레이가 바로 그 말 때문에 교회로부터 단죄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래서 그는 불안해하며 자신의 저서가 공개되지 못하도록 한다. 그는 한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나의 바람은 그저 조용하게 사는 것뿐이다. ... 세상은 나의 작품을 내가 죽은 뒤 100년이 지나서야 보게 될 것이다." 이 편지를 받고 그 친구는 그렇다면 그의 책이 좀더 일찍 읽힐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빨리 철학자 하나를 죽이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다는 내용의 답장을 보낸다.

데카르트는 이렇듯 세심하게 신경을 써서 자신의 적막을 방어하지만 마침내 그가 자신의 생각 중 아주 조금만을 공개했을 때, 그는 즉시 적대시되어 무신론과 신성 모독죄로 고소를 당했다. 당국마저도 "신학자들의 수염, 목소리, 눈썹까지도 두려워하는" 여론에 영향을 받아 그에게 반대했다.

@p175

그는 물론 당연히 그를 향한 공격이 어처구니가 없음을 주장한다. "어떤 신부는 내가 회의론자를 반박했기 때문에 나에게 회의적인 태도가 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우고, 어떤 설교자는 내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다는 이유로 나를 무신론자라고 비난한다." 그렇지만 데카르트는 결국 그러한 공격의 책임이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시인한다. "만일 내가 미개인들이 생각하는 원숭이처럼 그렇게 영리했더라면,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내가 책을 썼다는 사실을 절대로 알지 못했을 것이다. 미개인들은, 원숭이가 원하기만 한다면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럴 경우 사람들이 자기(원숭이)에게 강제로 일을 시킬 것이기에 고의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똑똑하지 못했기 때문에 책을 썼다. 그래서 나는 침묵했더라면 간직할 수 있었을 그 고요와 평온을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 데카르트는 네덜란드에서 더 이상 참고 견디지 못한다.

@p176

그는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의 제안을 받아들여 스웨덴 왕궁으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그는 생활 습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만 했다. 그때까지 데카르트의 하루 일과는 정오가 되어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는데, 여왕은 이른 새벽 5시에 그에게 철학을 배우고자 했다. 설상가상으로 기후마저도 익숙하지 못했다. 그는 스웨덴을 "바위와 얼음 한가운데 있는 곰의 나라"라고 하면서 한숨을 짓는다. 요컨대 데카르트는 북유럽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는 귀향을 결심하기도 전에 54세의 나이로 죽는다.

이렇게 데카르트의 삶은 끊임없는 은폐를 위한 싸움이었다. 그의 저서에서도 비슷한 점이 엿보인다. 그의 저서도 기이한 애매 모호함으로 휘감겨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데카르트의 관심사였던 바로 그 사실 자체 안에 깊숙이 그 근거를 갖고 있었다. 그는 놀랍도록 대담하게 철학의 기초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정리하려 한다. 그러다가 자기 앞에 입을 벌리고 있는 낭떠러지에 놀라서 뒤로 물러나 고대 사상과 고대 신앙이 밟았던 길로 다시 돌아간다. 아마도 시대의 전환기에 있는 사상가는 새 것의 흔적을 따라가면서도 여전히 과거의 것에 붙들려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p177

아무튼 도래하는 것에 대한 의무감과 과거에 대한 책임감 사이의 분열된 앎 속에 데카르트와 같은 수수께끼의 현상이 갖는 독특한 비밀이 놓여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철학자의 위대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 되며, 더 나아가 인류의 정신사 전체에 우뚝 솟은 위대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물론 일차적으로 수학과 자연 과학의 영역에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 비록 데카르트가 이 분야에서, 특히 분석적 기하학의 발견을 통해 매우 중요한 업적을 세우긴 했어도 말이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수학의 정확한 방법을 철학에 도입하려고 노력한 사실이다. 이로써 철학이 확실함과 명증에 있어 기하학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그로써 지금까지의 서로 상반되는 견해의 불확실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이를 위해 세운 목표는--언젠가 명확히 표현했듯이--철학이 매장되어 있었던 그 암흑으로부터 철학을 다시 밝은 빛으로 끌어 내 오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대단한 철학적 요구로부터 어려움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전혀 다른 종류의 문제, 예컨대 형이상학적 물음, 특히 신의 존재와 인간 영혼의 본질에 대해 제기하는 물음이 중요시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철학의 원초적인 주제를 수학의 모델에서 얻은 새로운 방법적 통찰을 가지고 다시 이해하려고 한다. 그는 그 방법이 타당한 해결을 해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방법적 통찰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그에게는 분명했다. 그는 언젠가 만일 사람들이 철학하지 않고 살고자 한다면 그것은 마치 눈을 뜰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고 눈을 감은 채 있는 것과 같다고 썼다. 철학함이란 데카르트에게서는 형이상학적인 물음을 제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선 해야 할 일은 확실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수학적 공리와도 같이 직접적으로 확실하고 명백하며 그래서 철학의 전체 구조를 떠받쳐 줄 수 있는 한 점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렇게 절대적인 시작에 도달하려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잠정적인 확실성들을 분쇄해 버려야 한다. 지금까지 의심의 여지없이 진리라고 여겨 왔던 것을 일단 의심해 보아야만 한다.

@p178

데카르트는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뒤엎어 버리고 첫번째 기초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그는 단호하게 결심하여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회의하는 사유의 자유 속으로 뛰어든다. 이러한 일을 감행할 수 있도록 뒷받침한 대담성이 그로 하여금 철저한 회의 속에서 근세 철학의 결정적인 일대 변혁을 이를 수 있도록 했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근세 철학은 그의 자유에 근거를 두고 있다.

데카르트는 지금까지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한 것이라고 여겨져 온 것의 토대를 시험하자마자 모든 것이 흔들리기 시작함을 느꼈다. 이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흡사 깊은 소용돌이 속에 빠진 것 같았다. 나는 바닥을 딛고 일어설 수도, 수영을 하여 표면으로 떠오를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외부 세계의 존재가 의심스러운 것으로 드러난다. 과연 사물이 인간에게 나타나듯이 실제로도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지, 아니 도대체 존재하기나 하는지 등이 의심스러워진다. 우리는 감각이 우리를 얼마나 자주 속이고 있는지 종종 체험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의심 속에서도 최소한 육체를 가지고 있는 내 자신의 존재는 확실한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 확실함도 역시 주의해 보면 무너지고 만다. 우리가 우리의 육체적인 현존재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 단지 꿈을 꾸고 있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전 생애가 하나의 지속적인 꿈"이라는 "웃지 못할 농담"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러한 붕괴 속에서도 또 하나의 확실함은 남아 있다. 꿈속에서도 견지되고 있는 지양할 수 없는 진리가 있다. 예컨대 2+3=5라는 명제와 연장, 형태, 시간, 공간과 같은 보편적인 개념이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인식의 기초가 되는 진리마저도 데카르트가 근원적으로 철저히 회의하자 무너져 버리고 만다. 그러한 진리가 인간의 정신 구조와 밀접하게 결속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의 본질 구조가 그러해서 그에게 가장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서조차 속을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의심이 세번째 단계에서 가장 심오한 논점에 이르게 될 때 궁극적으로 문제되는 것이 나타난다.

@p179

인간이 근본적인 기만 속에 살고 있다고 전제하고--데카르트가 하듯이--또한 인간이 창조되었음을 견지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신이 인간을 본질적인 왜곡과 비진리 속으로 창조해 넣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신은 신학과 철학이 끊임없이 주장한 "진리의 원천"이 아니라, 오히려 "기만적인 신" 또는 더 나아가 "악의에 가득 찬 악마"일 것이다.

데카르트는 물론 이 사상을 주장하는 데는 주춤거린다. 그렇지만 그가 이 생각을 단지 물음의 방식만으로라도 사유하려고 감히 시도한 것은 매우 의미가 깊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확실성의 문제와 더불어, 정신이 새로운 근대시대로 넘어가느냐 마느냐 하는 위험에 처해 있음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창조된 인간은 그가 창조주의 손안에서 평온을 발견하고 그의 진리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바로 이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만일 가장 탄탄한 이 확실성의 토대가 근본적인 회의에 의해 무너져 내린다면 인간은 헤어날 길 없는 어둠 속으로 굴러 떨어질 위험에 직면한다. 데카르트 자신도 그의 회의의 길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그 자신이 그렇게 "헤어날 길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둘러싸여 있음을 알게 된다.

데카르트와 편지를 주고받던 친구 중 한 사람이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하긴 했지만, 그는 이러한 모험적인 시도가 안고 있는 위험을 분명하게 느꼈다.

@p180

데카르트가 그의 회의를 매우 날카롭게 전개시켜 나간 책인 (성찰)은 회의의 길을 끝까지 진행해 나가면서 그래도 여전히 견고한 확실성을 발견해 나간다. 그런데 만일 어느 누가 회의가 무로 끝나고 마는 그 구절까지만 읽고 그 순간 죽어 버리고 만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고 그의 친구는 물어 왔다. 이 경우 그는 영원한 행복을 상실해 버리지 않겠는가? 그것은 그에게서 모든 확실성을 빼앗고만 한 철학자의 잘못 때문이 아닐까?

데카르트는 물론 앎의 모든 확실성이 무너져 버린 바로 거기에서 하나의 새로운 확실성이 생겨 나오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었다. 그는 "진리에 대한 탐구"라는 대화편에서 대화의 참석자로 하여금 그의 상대방에게 이렇게 말하게 한다. "나는 마치 움직이지 않는 확고 부동한 점 같은 이 보편적인 의심으로부터, 신에 대한 인식과 당신 자신에 대한 인식 그리고 세계 안에 주어져 있는 모든 사물에 대한 인식을 끄집어 낼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그리고 그곳으로 이끌고 있는 이 사상의 흐름은 서양 의식의 역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특히 데카르트가 앎이 뒤흔들리는 요동 속에서도 확고함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회의도 피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회의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근원적인 확실성을 분만할 때까지 그 회의를 붙잡고 늘어진다. 내가 표상하는 모든 것, 내가 인식하고 있다고 믿는 모든 대상이 전부 의심스러운 것이 되어 버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대상에 대한 나의 표상은 실재하고, 동시에 이 표상을 가지고 있는 나 역시 실재한다 의심 그 자체가, 아니 바로 그 의심이 나의 현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의심하는 한, 의심하고 있는 나는 존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내 자신에 대한 이러한 가장 가까운 확실성은, 신이 사기꾼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도 파괴될 수 없다. 신이 나를 속인다 할지라도, 그래도 나는 속고있는 자로서 실재한다. 이렇게 해서 데카르트는 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사기 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에 이르게 된다.

@p181

이리하여 회의는 그 안에서 근대가 예고되고 있는 의식의 위기에 있어 최종적인 것이 아니다. 데카르트는 새로운 확실성을 향해 돌파해 나가는 데 성공한다. 의심의 소용돌이 속에 한 가지 확실한 것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 곧 내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데카르트가 중세 철학이 거의 그랬던 것처럼 가장 근원적인 확실성의 장소를 더 이상 신에게서 발견하지 않고, 오히려 그 장소를 인간에게 옮겨 놓음으로써 그의 철학에 가장 두드러진 공헌을 하고 있다. 이때부터 비록 다소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을 그 자신의 두 다리로 세우고 오직 그 인간으로부터 솟아나는 그러한 확실성에 자신을 맡기는 것은 근대 사유의 특징에 속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데카르트에게서 최초로 결정적인 철학적 정초를 획득하게 된 자의 자율이다.

그렇지만 자기 자신의 확실성으로는 단지 기초만 닦여질 뿐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 위에 철학이라는 건축물을 세우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에서 데카르트는 우선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이 자아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탐구한다. 이 자아가 사유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였기 때문에, 자아는 사유하는 존재라고 정의된다. 이리하여 자아는 이렇게 자기 자신을 경험한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어떻게 계속해서 그것에 대해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는가를 살펴보면, 그는 자기 경험에 머물러 있지 않고, 오히려 세계 사물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얻은 개념을 이용한다. 그는 자아를 "사유하는 사물"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자아는, 물질적 세계로부터 생각되어--물리적 세계의 사물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색깔 또는 무게처럼--사유, 의지, 느낌 등과 같은 특성을 가진 그 어떤 것으로 이해된다. 이로써 전형적인 인간 존재로서의 자아의 본래적인 모습에 대한 관점이 잘못 놓이고 만다. 이렇게 데카르트는 인간 현존재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의 전망을 한순간 동안 열어 놓았지만 즉시 그것을 다시 덮어 버리고 만다. 그는 새로운 사상을 출현시키는 자들의 운명을 겪는다. 즉 그들은 그들이 본 것을 너무나 성급하게 전수되어 내려 온 시각이라는 베일로 가려 버린다. 그렇지만 데카르트는 자기 확실성을 발견함으로써 다음 시대로 하여금 사물과 구별되는 인간만의 특별한 본질에 대해 물음을 제기하는 그러한 길을 걷게 만든 사람이다.

@p182

데카르트가 구상한 바에 따르면 인간에 대한 해석에서 두번째의 숙명적인 전개의 길이 열린다. 그가 볼 때 자아의 본질은 사유이며 그 밖의 어떤 것도 아니다. 물론 사유는 폭넓은 의미로서 감정이나 의지, 요컨대 의식의 전 영역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로써 의식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사유하는 사물"로서의 인간과 의식하지도 사유하지도 못하는 존재 사이에는 건너기에 매우 힘든 틈이 벌어지고 만다. 자아는 구체적인 세계 안에 있는 구체적인 인간으로 고찰되지 않았다. 순전히 의식 안에서 살고 있는 자아란 사물과의 접촉을 상실하고 만다. 따라서 데카르트로부터 한편으로는 세계 없는 주체, 다른 한편으로는 단순한 객체를 세워 실재를 양분하는 근대적 분열이 시작된다. 이 분열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간과 세계에 관한 철학함에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있다.

자기 확실성의 발견과 자아의 본질에 대한 탐구로써 모든 것이 행해진 것은 아니다. 회의의 길 끝에서 튀어 나왔던 가능성은, 즉 인간이 근본적인 전도의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실제로 그러한지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점이 남아 있지만, 데카르트는 형이상학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테마, 즉 모든 실재성의 근원에 대한 물음인 신에 대한 물음에 봉착하게 된다. 왜냐하면 저 근본적인 전도는, 창조 사상의 관점에서 볼 때, 신이 사기꾼으로서 사유되고 있다고 전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신이 정직하다는 것을 나타내야만 한다. 이것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신이 여하튼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한다.

이러한 의도로 데카르트는 인간이 그의 내면에서 최고로 완전한 이데아를 발견하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데카르트는 이 이데아는 인간 자신으로부터는 유래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 "신과 무 사이의 중간"인 인간이 최고로 완전한 존재의 이데아를 자신으로부터 산출시킬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데아를 어디에서 받은 것인가? 데카르트는 이렇게 대답한다.

@p183

최고로 완전한 존재 자신이 이데아를 인간의 마음 속에 심었음에 틀림없다. 그 존재만이 가장 완전한 이데아의 원조일 수 있다. 이 말은 신이 인간 안에 있는 신의 이데아의 근원으로서 필연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을 뜻한다. 신이 완전하다면, 신은 인간을 근본적인 거짓 속에 버려둘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신은 사기꾼일 수 없고 오히려 순수 진리이어야만 한다. 이로써 모든 의심이 제거된다.

이렇게 신의 존재와 신의 정직성에 대한 확실성을 되찾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한순간 자기 자신을 자기 의식의 위험스러운 고독 속에서 발견하였던 인간은 자기 자신이 다시 창조의 안전한 질서 속에 받아들여졌음을 알게 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형이상학은 여전히 그 바탕에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데카르트가 구상한 신존재 증명은 자세히 관찰해 보면 순환 논증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신존재 증명을, 인간이 최고로 완전한 존재의 이데아를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만들어 낼 수 없다는 데 근거를 두고 전개해 나간다. 인간과 같은 유한한 존재는 무한함의 이데아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원인에는 적어도 그 원인에 의해 작용받는 결과만큼의 존재가 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한함에는 그 자체 유한함보다 무한히 더 많은 존재가 주어진다. 그러나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어디에서 자신의 참됨을 입증 받는가? 데카르트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 주장은 직접적으로 명백하며 근원적으로 확실하다. 신이 인간을 근본적으로 뒤바뀌어진 상태로 내던져서 신의 근원적인 확실성에 관해서 조차도 회의하는 채로 있는 처지라면 도대체 근원적인 확실성이 있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신의 존재와 그의 정직성에 대한 증명에 성공하지 못하는 한, 직접적인 명증의 원리는 의심스러운 것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만일 데카르트가 그의 신존재 증명의 근거를 이제 비로소 끄집어내야 할 바로 그 원리에 둔다면, 이 증명은 사실상 순환 논증과 다를 바 없다. 그렇게 된다면 형이상학을 새롭게 건립하려는 데카르트의 노력은 시작부터 좌절되고 만다.

@p184

어쨌거나 이 모든 것과 더불어 데카르트는 형이상학의 기획 투사와 마찬가지로 계몽적인 경향에 있어서, 그리고 신앙심 깊은 사유와 마찬가지로 허무주의적인 절망에 있어서 앞으로 도래하게 될 철학을 위한 위대한 도발자였다. 이렇듯 그는 우리 눈앞에 기이하게도 희미한 빛 속에 가려져 있다.

불타오르는 정신의 열정으로 새로운 것을 향해 몸을 돌렸으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또한 기존의 사유에 도움을 요청한다. 그는 해체시키는 사상으로 극단의 한계에까지 모험적으로 밀고 들어가서는 거기에서 드러나는 가능성에 놀라 다시 신에 근거를 둔 확실성 속으로 숨어든다. 그는 붕괴된 형이상학을 새롭게 건립하기 위해서, 창조주에 대한 잃어버린 앎을 되찾기 위해 정열적으로 노력한다. 여기에서 그는 자기 확실성과 마찬가지로 신의 확실성도 근원적으로 인간에게 속해 있다는 확신을 얻는다. 그러나 그와 같은 신의 확실성으로의 위험한 접근에는 또한 궁극적으로 창조주 자체를 거부하는 회의가, 자아의 자유를 지반이 없는 심연에 내던져 버릴 회의가 도사리고 있다.

데카르트는 그의 새로운 발견이 불러일으키게 될 곤경--이것은 그 자신도 간신히 피해 갈 수 있을 뿐이다--에 대해 무언가를 미리 알아챘기 때문에 그렇듯 불안해하며 적막 속에 자신을 숨기고 살았는지 모른다. 그 곤경이란, 그가 스스로 과제로 설정한 바로 그 실재의 직접적인 확실성이 인간의 형이상학적 동경을 결국에는 확실한 앎 속에서 잠재울 수 있을지 분명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형이상학을 완전히 파괴해 버릴 수도 있는 가능성을 자신 안에 내포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러한 내적인 애매 모호함 속에서 데카르트는 자신의 통찰을 앞에 두고 그 자신 수수께끼처럼 되어 버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만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나는 혼자서 칠흑 같은 어둠 속을 걸어가는 인간"이라고 말한다. 아마도 그는 바로 그것 때문에 가면 뒤로 자신을 숨겼을 것이다.

@185

14. 파스칼

십자가에 못 박힌 지성

파스칼은 아주 뛰어난 신동이었다. 한 심술궂은 비평가는 그렇기 때문에 그는 결코 학교에 다닌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그가 개인 교사의 교육마저 받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저명한 세무관이었던 아버지가 직접 파스칼에게 필요한 기초 지식을 가르쳐 주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매우 엄격했다. 그는 파스칼에게 어학을 배우도록 강요하였다. 그리고 어린 파스칼의 본래 관심사였던 수학과 자연 과학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다. 12세 때 그는 마룻바닥에 엎드려 백묵으로 삼각형과 원을 그리면서 순전히 혼자 힘으로 유클리드 기하학을 발견해 냈다. 이것은 그의 집안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또한 16세 때에는 원추 곡선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여 학자들 사이에서 대단한 흥분을 불러일으켰고,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중요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p186

그는 19세 때 아버지의 조세 실무를 위해 최초로 활용 가능한 계산기를 발명했다. 그는 당시 대단한 논쟁이 되고 있던 텅 빈 공간의 존재에 대해 실험적인 연구를 해보았다. 그러나 그는 심한 치통 때문에 더이상 훌륭한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하자, 서둘러 확률 계산의 전개에 매우 중요한 룰렛의 이론을 구상해 냈다. 마침내 그는 사이클로이드, 다시 말해 구르는 바퀴의 가장자리에 박혀 있는 바늘이 그려내는 곡선을 연구하였다. 이로써 그는 훗날 라이프니츠에게 영예를 안겨 준 미적분에 가까이 접근한 셈이다. 그밖에도 파스칼의 학문적 관심은 순수 이론 분야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그는 파리의 곳곳을 다니는 합승 마차의 설계에 힘을 쏟기도 하였는데 이 구상이 실제로 빛을 보았는지 아닌지는 확실하게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 모든 것으로 미루어 보아 파스칼은 수학과 자연 과학 분야에서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는 소질을 충분히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항상 또 다른 어떤 것이 계속해서 개입된다. 즉 그의 본래의 정열은 갈수록 점점 더 철학으로 쏠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이 같은 정열이 자연 과학을 하는 데는 다소 장애가 된다고 여겼다.

@p187

파스칼은 다른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해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철학을 택하게 된다. 그의 주장은 이렇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인간이 무엇인지 탐구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일종의 초자연적 현혹이다." 인간에 대한 물음은 "인간 고유의 진정한 연구이다."

그렇지만 순수하게 철학하는 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한 가지 신비한 체험이 파스칼로 하여금 다른 인생 행로를 걷게 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죽은 뒤 사람들이 그의 양복 안쪽에 꿰매어져 있는 쪽지 하나를 발견함으로써 밝혀졌다. 그 쪽지에는 이 같은 체험이, 토막 토막 끊어진 짤막한 말들로 기술되어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것들이 씌어있었다. ", 확실성, 확실성, 느낌, 기쁨, 평화", "신만 제외하고는 세계와 모든 사물들을 잊어 버려라", "완전하고도 내적인 단념." 그 쪽지의 첫번째 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철학자와 학자의 신이 아닌 아브라함의 신, 이삭의 신, 야곱의 신." 이제 파스칼은 신앙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사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예수회와의 격렬한 논쟁에 휘말려 들게 되었다. 드디어 그는 그의 미완성의 작품인 (팡세)를 저술함으로써 정신사에 커다란 공헌을 한다. 그는 18세 이후로 끊임없이 병고에 시달렸으면서도 이 모든 것을 이루어 놓았다. 그러나 만년에 가서 그는 침묵을 지켰다. 그는 모든 교제에서 손을 뗐다. 그는 얼마 동안 수도원에 은둔하여 기도 삼매에 빠지기도 하며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일에 종사했다. 그는 어떠한 봉사도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방에 그림도 양탄자도 들여놓지 못하게 했고 그가 즐겨 먹던 요리도 거절하였다. 그는 가시 돋친 혁대를 만들어서 몸에 감고 다녔으며 166239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인간에 대한 철학적 사색에서 과연 파스칼은 무엇을 경험했는가? 그는 우선 인간을 무한한 세계 속에 몸담고 있는 존재로 보았다. 그렇지만 이것을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는 사유를 극도의 당혹감 속으로 몰아 넣고 만다. 지구에서 눈을 돌려 태양의 운행을 바라보면 지구란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 그러나 태양의 운행도 또한 "천공의 천체의 운행에 비하면 단지 아주 미세한 하나의 점에 불과할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눈에 보이는 이 전체 세계는 전체 자연을 염두에 둘 때 눈에 띄지 않는 가는 선에 불과하다."

@p188

그리고 이 자연 전체는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데, 그 까닭은 그것이 무한하기 때문이다. "유한함은 무한함의 면전에서 무화되어서 순수한 무가 되어 버린다." 이로써 사유는 끝이 나고, "무한함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린다."

자연을 무한한 연장 속에서 관찰하지 않고 단지 개별적인 자연 현상만을 관찰할 때에도 그와 똑같은 일이 발생한다. 가장 작은 생명체를 관찰해 보면--파스칼은 진드기를 예로 든다--그것도 부분을 갖고 있음이 드러난다. 우주의 가장 작은 부분인 원자도 역시 실재의 최종적인 구성 요소는 아니다. 왜냐하면 원자도 계속해서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개개의 부서진 원자 조각의 내부에는 "무한한 우주가 존재하고 있다. 그 안의 개개의 우주는 모두 자기의 천공을, 자기의 혹성을, 자기의 지구를 보이는 세계에서와 동일한 상태로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자연의 탐구는 무한 속으로 넘어간다. 그 탐구는 오직 무에서만 끝날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탐구는 무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또다시 사유는 "이 불가사이 속에서 자신을 잃고 만다"는 것이 적용된다.

@p189

이 이중적인 무한성의 사상의 의미는 중세 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특별히 명료하게 나타난다. 중세 사상에서는 모든 사물이 유한한 세계의 전체 안에 자기의 지정된 자리를 갖고 있다. 이제 그러한 장소 규정의 가능성은 사라진다. 무한히 큰 것의 지평 안에서 존재자는 무한히 작은 것으로 수축되어 버리고 만다. 무한히 작은 것의 지평 안에서 존재자는 무한히 큰 것으로 팽창한다. 이 두 가지 관점에서는 존재자는 파악될 수 없는 것이 된다. "모든 사물은 무로부터 생겨나서 무한을 향해 나아간다. 누가 이 놀라운 진행 과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결코 사물의 참된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다. 단지 언제나 사물의 한가운데 파묻혀 있는 느낌으로, 사물의 근원이나 목표를 알 수 없다는 영원한 절망 속에 빠져 있을 뿐이다. 나는 어디서든지 그저 어둠만을 볼뿐이다. 자연은 나에게 의심과 불안의 동기가 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제공하지 않고 있다." "영원한 도주 속으로 도피해 가고", "불가사의한 신비 속에" 자신을 감추고 있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형상의 테두리 안에서 인간을 고찰할 때, 파스칼에게는 문제점이 더욱 심화된다. 인간을 무한히 큰 것의 지평 앞에 놓고 볼 때, 인간은 사라져 버리는 먼지처럼 작게 보이며, "우주 속에서 지각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우주도 역시 전체를 염두에 둘 때는 지각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을 무한히 작은 것의 지평에서 바라본다면, 인간은 그 자신이 "거대한 상, 세계, 아니 전체로서" 보일 것이다. 요컨대 인간은 그가 몸담고 있는 자연과 연관지어 고찰해 볼 때, "무한에 비하면 무이고, 무에 비하면 전체"이다. 즉 인간은 "무한과 무라는 두 심연 사이에" 떠다니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들 자신이 그 속에 삼켜져 있는 전체와 마찬가지로 거기로부터 이끌려 나온 그 무도 볼 수가 없다." 이와 같이 인간은 "그 자신이 자연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대상이다." "이것이 존재 속에서의 우리의 본래 위치이다. 우리는 광대한 중간에서 떠돌며 항상 불확실하게 동요하면서, 한쪽 끝에서 다른쪽 끝으로 튕겨진다. 어느 한쪽 경계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고정시켜 지탱할 만한 기반을 얻었다고 생각하면 그 경계는 흔들리고 우리 자신을 떠밀어낸다.

@p190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따라가려고 하면 그것은 우리의 손아귀를 벗어나 영원히 도망쳐 버린다."

인간을 자연과 관련해서 고찰할 때 나타나는 이런 식의 분열은 인간 현존재만을 특징짓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분열은 인간의 실존 깊숙이까지 파고든다. 인간 존재란 파스칼에게 모순 속의 존재를 뜻한다. 바로 거기에 무엇보다도 사유의 위력이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유 속에서 모든 존재자를, 전체 속에서 모든 것을 포괄한다 "전체는 공간을 통해서 나를 에워싸고, 나는 사유를 통해서 전체를 포괄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명제가 가능하다. "인간의 전적인 존엄성은 사유 속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로써 동시에 인간의 전적인 무기력이 드러난다. "한 줄기의 수증기, 한 방울의 물만으로도 그를 충분히 죽일 수 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렇지만 또한 그에게는 다른 한 면이 있다. 즉 인간은 그의 무기력함을 사유하여 그것을 극복하고, 그것을 이해하며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온 우주가 일어나 그를 죽인다 해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우주보다 더 위대하다.

@p191

왜냐하면 인간은 그가 죽는다는 것을 알며 우주가 자기보다 어떤 점에서 우월한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주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른다."

이 분열은 인간의 본질에 한해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일상적인 행위와 행동에서도 그것은 나타난다. 파스칼은 그것을 알아듣기 쉽게 하기 위해 세상 사람들이 그런 상황에서 흔히 행하고 있는 생활상을 이야기한다. 예컨대 토끼 몰이, 공놀이, , 관청에서의 업무 등이 그런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은 진지한 일과 마찬가지로 게임과 같은 일도--파스칼이 보는 바에 따르면--기이한 이중성을 띠고 있다. 그것들은 겉보기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것들을 행하는 자세인 서두름과 열성은 그것들이 이곳 저곳 뿔뿔이 흩어져 있는 것을 뒤좇는 광적인 집착에서 자라 나오고 있음을 알려 준다. 부유한 귀족에게 소중한 것은 그가 사냥하는 토끼도 아니며 그렇다고 그가 내기에 이기면 받게되는 이득도 아니다. 그는 단지 기분 전환을 위해 오락을 추구하고 있을 따름이다.(하나에 집착하지 않고 정신을 뿔뿔이 흩어 놓기 위해 산만한 것을 추구할 뿐이다.)

파스칼은 그것을 깊이 숙고해 본 뒤, 궁극적으로는 그 배후에 홀로 있음에 대한 불안이 도사리고 있음을 발견한다. "세상의 모든 불행은 방안에서 조용히 혼자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인간은 고독 속에서 적나라한 자기 자신과 마주하게 되기 때문에 고독을 두려워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해서 "그들로 하여금 고독을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고 그들을 격렬하게 뒤흔들어 놓아 정신을 빼앗아 버릴 수 있는 그러한 사건들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한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은 그렇게도 견디기 어려운 것인가? 파스칼은 그 안에서 인간 실존의 비참함이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홀로 있는 그러한 순간 인간에게는 "권태, 우울, 비애, 고뇌, 불쾌, 절망"이 엄습한다. 그는 "자신의 허무함, 자신의 외로움, 자신의 부족함, 자신의 예속성, 자신의 무기력, 자신의 공허감" 등을 느낀다. 그는 모든 인간 현존재에게 얹혀져 있는 뿌리깊은 위협을 예감한다. 즉 인간은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내던져져 있는 것이다.

@p192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내가 곧 죽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최소한 알고 있는 것

은 내가 이 죽음을 결코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분명한 것은, 인간의 삶이 "세상에서 가장 부서지기 쉬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아무런 근심 없이 낭떠러지로 뛰어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파스칼은 이러한 비참함 가운데서도 인간의 위대함의 어떤 면모를 발견한다. 즉 인간에게는 자신의 비참함을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자기 자신을 비참한 존재로 알고 있다는 바로 그 점에 있다. 나무는 자기 자신을 비참한 것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비참함이란 자신을 비참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비참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그렇지만 파스칼은 다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위대하기를 바라지만, 그는 보잘것없는 자신을 보게 된다. 인간은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그는 보잘것없는 자신을 보게 된다. 인간은 완전해지기를 바라지만, 그가 전적으로 불완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간의 본질과 현존재 사이의 이러한 철저한 모순은 필연적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그 자신을 명백하게 파악할 수 없게 만든다. 아니 그로 하여금 근본적인 불확실성 속에 살도록 만든다 "우리는 진리를 추구 하지만 단지 우리 안에서 불확실성만을 발견할 뿐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제거해 버릴 수 없는 오류 투성이의 존재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무가 그에게 진리로 나타난다." "우리는 무한히 위로 상승해 올라가는 탑을 쌓고자 견고한 지반과 궁극적이고 지속적인 토대를 발견하려는 욕망에 불타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지반은 전체가 흔들리고 땅은 갈라져 심연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아무 것도 확실하게 인식할 수 없다. "나는 내 주위에서 암흑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파악 불가능하다. 그리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파악 불가능하다. 육체를 갖춘 영혼이 있다는 것도, 우리가 영혼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도 파악 불가능하다. 세계가 창조되었다는 것도, 세계가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도 파악 불가능하다." 따라서 모든 것은 모순인 채로 남아 있다. 그래서 파스칼은 이렇게 외쳐댄다.

@p193

"여러분들이 여러분 스스로에게 얼마나 모순되는지를 인식하시오!" 그는 요약하여 이렇게 판단한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얼마나 기묘한 존재인가! 얼마나 새로운 존재인가, 얼마나 기이한 괴물인가, 얼마나 혼란스러운 존재인가, 얼마나 모순적인 주체인가, 얼마나 경이로운 존재인가! 인간은 모든 사물의 지표이며, 보잘것없는 땅 위의 벌레! 진실의 관리자이고, 불확실함과 오류의 하수구이며, 우주의 광채이자 찌꺼기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불확실성에 직면하면 지쳐 버린 체념이나 무기력한 회의주의 또는 근거 없는 독단론으로의 도피가 당연할 것이다. 그렇지만 독단론과 마찬가지로 회의론도 엄격히 입증될 수는 없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지조차도 확실하지 않다." 인간은 독단론과 회의론, 이 둘 사이에서 살고 있다. "애매 모호한 이중성과 어떤 의심스러운 불명료함 속에" 살고 있다. 그렇지만 인간은 그 안에 그렇게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다. 그럴 수 없는 것은 여기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사건에는 결정적인 것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인간의 기만이나 비참함을 보고 있을 때, 내가 말없이 이 우주 전체를 관찰할 때, 빛이 그 자신에게만 내맡겨져 있는 인간을 관찰할 때, 우주의 이 구석에서 방황하며, 누가 그를 거기에 갖다 놓았는지, 그가 왜 그곳에 와 있는지, 그가 무엇이 될지, 그가 언제 죽는지, 이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없이 버려져 있는 인간을 관찰할 때, 나는 마치 자고 있는 어떤 사람이 황량하고 무시무시한 섬으로 보내져서 그가 깨어났을 때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고 그곳에서 달아날 수 있는 가능성마저 없음을 깨달았을 때처럼 아연 실색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나는 그러한 매우 가련한 처지에서도 절망에 빠지지 않는 것을 경이스럽게 여긴다." 이렇듯 파스칼 앞에 인간 현존재의 무의미함의 가능성이 대두된다. 그것은 신이냐 무이냐의 양자 택일로 드러난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듯이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나는 다만 내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무나 노한 신의 손안에 떨어진다는 것만 알뿐이다. 이때 나는 이 두 가지 가능성 중 어느 것이 나의 부분이 될지는 알지 못한다. 이렇듯 현존재 속에서의 나의 처지란 전적인 나약함과 불확실성뿐이다."

@p194

따라서 이성은 사유의 전 영역에서 좌초하고 철학함은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에 부딪친다. 이러한 상태에서 파스칼은 진지하게 그리스도교 복음에 눈을 돌린다. "신이 없는 인간은 모든 것에 대한 무지 속에서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신으로부터의 가르침만이 인간 실존의 수수께끼와 인간 실존의 "불가사의한 모순들"을 해결할 수 있다. 신의 계시는 인간의 불가해함을 근원적인 본질의 상태로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본다. 그것은 인간의 불가해함을 "기이한 이탈", 인류의 최초의 원죄의 결과로 파악한다. 인간은 "분명히 잘못하였고 그리하여 자신의 참된 장소에서 떨어져 나왔다. 인간은 어디에서든 불안 속에서 무익하게, 헤어날 길 없는 암흑 속에서 자신의 참된 장소를 찾아 헤맨다." 따라서 근원적으로 인간의 참된 장소는 있다. 우리는 "이전에 완전성의 단계에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 단계로부터 불행하게도 떨어져 버렸다." 파스칼은 이것을 인간의 "첫번째 본성"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그것은 인간에게 드러나지 않은 채 숨겨져 있는, "인간의 첫번째 행복에 대한 어딘가 무기력한 직감"으로 남아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타락한 상태의 비참함을, "폐위된 왕의 비참함"을 그렇게도 슬프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렇게 있는 그대로의 인간은 그가 본래 근원적으로 속해 있었던 그 질서에서 떨어져 나온 상태이다. 이것이 인간의 "두번째 본성"이다. 그러나 이 두번째 본성은 그의 첫번째 본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인간을 무한히 극복한다."

그래서 이제 파스칼은 실존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해석으로 비약한다. 인간에게 은총 속에서 하사되는 밝은 빛에 의해 자연적 현존재의 불가사의함이 그에게 투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렇지만 이것으로도 어려움이 제거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적 계시를 인식한다는 것은 애매모호하고 수수께끼 투성이기 때문이다. 원죄는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다. 이렇게 파스칼은 모든 지적인 통찰의 가능성을 내몰아 버린다. 이성이 아닌 인간에게 있는 어떤 다른 것이 진정한 확실성의 가능성을 성사시킨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고, 믿음의 장소는 이성이 아니라 마음이다.

@p195

파스칼의 십자가-그림 생략

@p196

"마음은 이성이 인식하지 못하는 이성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 "신을 느끼는 것은 마음이지 이성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신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마음이지 이성이 아니다." 믿음은 물론 아무런 객관적인 확실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 종교는 "확실하지 않다." 신과 인간 사이에는 "무한한 카오스"가 가로놓여져 있다. 신은 "떨어져 있는 신"이며, 숨어 있는 신으로 머물러 있으며 단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날 뿐이다. 그렇기에 믿음은 모험이다. 모험은 그 자신의 독특한 종류의 확실성을 수반한다.

이렇듯 결국에는 믿음에 머리를 숙이는 것이 파스칼 철학의 고유한 과제가 된다. "이성의 최후의 단계는 이성을 초월하는 무한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이와 같은 이성 자체의 부인만큼 이성에 적합한 것은 없다." "이성의 전적인 복종을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보편적인 실패 속에 사유의 자기 포기만이 남게 된다. "당신의 그 모든 통찰들은 단지 당신 자신 안에서는 진리도 구원도 발견하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철학자들은 그것을 약속하였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성취 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철학의 포기는 철학함의 정당한 종말이 된다. "철학을 비웃는 것, 그것이 곧 진정한 철학함이다." 이러한 말은 파스칼처럼 매우 어렵게 철학을 한 사람만이 말할 자격이 있다.

@p197

15. 스피노자

진리에 대한 거부

철학사에서 가장 많은 모욕을 받았던 사상가를 찾으라고 한다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스피노자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그의 운명은 생존시부터 시작되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라이프치히의 유명한 철학 교수인 토마시우스는 스피노자를 "개화가 안 된 저술가","신을 모독한 전형적인 유태인이자 완전한 무신론자", "소름끼치는 괴물'이라고 표현하였다. 또 다른 사람으로 당시 명성이 자자했던 의사이자 화학자인 디펠은 스피노자를 아무리 욕해도 직성이 안 풀렸던 것

같다. "우둔한 악마", "꽉 막힌 요술장이", "돌아 버린 멍청이", "정신 병원에서 값싼 공이나 세울 천치", "술이 취해서 정신이 돈 듯한 사람", "넝마 같은 철학", "눈속임의 익살스런 광대짓"이나 하고 "가장 유치하고 가장 비참한 헛소리"만을 펑펑 지껄이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자신의 두꺼운 책 페이지마다 서술하고 있다.

@p198

의학자와 화학자가 그처럼 말하는데 수학자와 물리학자가 침묵을 지킬리 만무하다. 그래서 뉘른베르크의 교수 슈투름도 비슷한 말로 스피노자를 "불쌍한 녀석", "별난 짐승"이라고 표현했으며, 또한 "저주받을 직관"으로 꽉 차 있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했다. 그와 같은 비방은 스피노자의 작품뿐만 아니라 그의 생활에까지 미쳤다. 그러나 사실 그에 대해 비난할 만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고작해야 밤에 연구하는 스피노자의 습관 같은 아무 것도 아닌 일들이 비방의 꼬투리가 되었을 뿐이다. 어찌 되었든지간에 한 전기 작가는 이 사실에 대해 스피노자가 "암흑의 작품"을 저술하고 있다고 밖에는 어떻게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주문을 외워서 어둠을 불러내는 곳에는 악마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며, 여기서부터는 신학자의 영역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러한 신학자중 한 사람으로 예나의 신학 교수인 무제우스는 이렇게 묻는다. "악마를 매수해 모든 신적, 인간적인 권리를 완전히 파멸시켜 버린 곳에서 어느 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사람은 천부적으로 커다란 재앙을 가진 타고난 사기꾼으로서 이 파괴 작업에 한몫을 했을 것이다." 달변인 교수 한 사람은 그의 직업에 걸맞게 스피노자에 대해 더 심한 견해를 말한다. 그는 스피노자의 책에 대해 "신에 대한 모독, 무신론으로 꽉 차 있어 참으로 지옥의 어둠 속에나 던져 버려야 할 책이다. 그 책은 지옥으로부터 인류에게 피해와 수치를 입히기 위해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지구에서는 몇 세기 동안 그보다 더한 파멸의 근원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몇 세기 정도의 시기라는 것은 이제 막 학자들의 비난의 대열에 끼어 든 도트레이트에서 온 한 곡물 상인에게는 충분하지 않았다. 몇 세기 동안뿐만이 아니라, "지구가 존립해 온 이래 지금까지 그처럼 신앙심 없는 책은 출판된 적이 없었다."그만큼 그 책은 "현학적인 혐오감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리고 유명한 정신계의 거두들도 오해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말로 스피노자와 그의 철학에 대해 그들이 품고 있는 혐오감을 표현하고 있다. 볼테르는 스피노자의 체계가 "형이상학을 가장 추악하게 오용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여겼다.

@p199

또한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의 책 중 하나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건방진 저술", "아연 실색할" 책이라고 평가했다. 칸트와 같은 시대 사람이며 친구였던 하만은 마침내 스피노자를 "건전한 이성과 학문을 해친 노상 강도요 살인자"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아주 기묘한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증오자와 비방자의 군단에 맞서 갑자기 불같이 달아오른 숭배자의 무리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레싱은 야코비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때 "사람들은 여전히 스피노자에 대해 마치 미친개에 대해 이야기하듯이 말하고 있었죠." 그러나 "스피노자의 철학 외에는 철학이라 할 만한 것은 도대체 없습니다." 헤르더는 야코비에게 이렇게 써 보낸다. "나는 이 철학이 나를 매우 행복하게 해주었다고 고백해야겠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너무나 고상한 이 철학에 대한 소리만 들어도 나의 가슴은 뛰기 시작합니다." 괴테는 인간 스피노자가 "진정한 분노와 정열"을 갖고 있다고 피력한다. 괴테는 슈타인 부인과 함께 스피노자의 책을 읽고서 이렇게 쓰고 있다. "분명 그의 정신이 나의 정신보다 더 심오하고 순수합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그에게 매우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슐라이어마허는 그의 저서 (종교에 관한 이야기)에서 감동적인 찬가를 삽입한다. "성스러웠지만 버림받은 스피노자의 영혼에 경건한 마음으로 내 머리털을 제물로 바친다! ... 그는 신앙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성령으로 충만해 있었다네." 그 당시 사람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경멸받아 온 그 철학자를 어느 정도로 지지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증거를 마지막으로 하나 더 든다면, 베를린의 철학자 칼 졸거의 편지를 들 수 있다.

@p200

"스피노자는 나로 하여금 거의 오전 내내 그에게 몰두하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내 동생은 그의 세 살된 아들 알브레히트에게 벌써부터 이렇게 가르쳐 주었다. 스피노자는 아주 똑똑한 남자였단다. 칼 아저씨가 그러는데, 그는 모든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는구나." 그렇다면 도대체 철학자 스피노자는 누구인가? 그는 무신론자인가 아니면 성인인가? 악마와 같은 사람이었나 아니면 신과 같은 사람이었나? 1800년경 그를 흠모했던 한 사람이 스피노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도대체 그 인간 스피노자에게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가? "금세 저주받았다가 금세 축복 받고, 금세 애도 받았다가 금세 비웃음을 샀던 스피노자"

그의 사상이 불러일으킨 소용돌이를 보고 사람들이 최소한도로 추측할 수 있듯이, 우리는 그를 고지식하고 자신에 찬 자기 사상의 옹호자라고 여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아마도 그는 모든 철학자 중에서 가장 외롭고, 가장 눈에 안 띄며, 가장 겸손하고 조용한 철학자였을 것이다. 스피노자는 1632년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포르투갈에서 네덜란드로 이민 온 유태인 가족이었다. 그의 이름은 바루흐였는데 당시의 관습에 따라 이름은 라틴어로 베네딕투스라 불리었다. 이 이름은 둘 다 축복 받은 자라는 뜻이다.

물론 스피노자는 외적인 삶에서는 축복 받지 못했다. 그는 성인이 되자마자 그의 고향의 유태인 종교 공동체와 치열한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성서 전통에 대해 비판적인 소견을 밝힌 것이 도화선이 되었다. 그가 볼 때 구약성서는 모순과 애매 모호한 것 투성이였고, 그래서 그는 구약의 모든 부분이 전적으로 진리만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으며 인정할 수도 없었다. 그때까지 이 총명한 젊은이에게 희망을 걸었던 유태인 공동체는 이 일로 크게 실망하여 그를 외면한다. 사람들은 밀정을 시켜 그를 염탐하기도 하고 뇌물로 매수하려 들기도 했지만 이 모든 것이 통하지 않자 드디어는 그를 암살할 계획을 단행하기에 이른다. 결국은 유태인 교회의 단호한 추방령을 선고받는다.

@p201

스피노자에게 내려진 엄청난 파문 선고는 이렇게 선포하고 있다. "천사들의 결의와 성인의 판결에 따라 바루흐 스피노자를 저주하고 제명하여 추방한다. 이는 성스러운 하느님과 성인들의 공동체가 허락한 것이다. ... 요수아가 예리코를 저주한 그 저주와 엘리사가 소년을 저주한 그 저주를 받고 율법서에 씌여 있는 그 모든 저주를 받아라. 밤낮으로 저주받을 것이며, 잠잘 때도 일어날 때에도 저주받아라. 나갈 때에도 저주받을 것이며, 들어올 때에도 저주받을 것이다. 주께서는 그를 결코 용서하지 마옵시고, 주의 노여움과 분노가 이 사람을 향해 불타게 하소서. ... 주는 그의 이름을 하늘 아래에서 지워 버리시고, 주께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부족에서 그를 제명하여 파멸을 내리소서. ... 어는 누구도 말이나 글로써 그와 교제하지 말 것이며, 그에게 호의를 보여서도 안 되며, 그와 한 지붕 아래 머물러서도 안되며, 그의 가까이에 가서도 안 되며, 그가 저술한 책을 읽어서도 안 되느니라. ... "

스피노자는 대항하려 하지 않았다. 논쟁을 위한 논쟁은 그와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그는 한번은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각자가 자신의 본성에 따라 살도록 내버려 둘 것이다. 따라서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하니 내가 진리를 위해 살 수 있도록 나를 내버려 두어라."

@p202

그런데 분노를 불러일으킨 내용은 바로 이것이다. 각자는 모두 자신의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한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는 고대에서부터 진리라고 여겨 왔던 것으로 향할 마음은 없다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이렇게 가차없이 자신의 진리를 맹세하고 나서자 그 당시 권력층의 증오를 온 몸에 받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일로 인해 그는 유태 교회와의 투쟁에 휘말려 들게 되었다. 아울러 역시 이 일 때문에 결국에 가서는 그의 전시대에 걸쳐 증오를 온몸에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철학함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진리에, 오로지 진리에만 귀기울이는 사람은 그것 때문에 생겨나는 결과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인간의 판단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스피노자는 진정한 철학자였다.

민족과 신앙 공동체에서 추방당하자, 그렇지 않아도 고독에 젖어드는 성향이 있던 스피노자는 더욱 깊이 고독 속으로 젖어들어 갔다. 그는 처음에는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암스테르담 근처에서 숨어 살다가 그 후 덴하그 근처에서 살았다. 그는 3개월 동안 한 번도 밖에 나간 적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방문객이 쓰고 있다시피 그는 "흡사 그의 서재에 매장되어 있는" 듯했다. 그는 친구들에게 "나는 멀리 떨어져 있는 당신들에게 멀리서 이야기합니다."라고 털어놓았다. 물론 그에게는 몇 안 되는 친구가 있을 뿐이었으며 편지 왕래도 매우 드물었다. 한 전기 작가는 "그는 제자에게도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스피노자는 생계 수단으로 광학 렌즈 가는 일을 하였다고 한다. 그는 기부금을 주어 돕겠다는 친구들의 제의를 마지못해 받아들였는데 다만 꼭 필요한 정도만을 받았다. 우리는 스피노자의 생활보다 더 가난하고 검소한 생활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만년에는 자신이 손수 집안일까지 해야 했다. 그저 가끔 파이프담배를 즐길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고요 속에 묻혀 사는 이러한 생활로도 적들의 증오에 가득 찬 논쟁을 피하지는 못했다. 100년이 지난 뒤에도 그의 적대자 중 한 사람은 여전히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나 지속적인 그의 은둔 생활은 결코 칭찬 받을 일이 못된다.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숨어 산 것도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참된 신과 그의 말씀, 모든 종교를 쓰레기 더미에 내던져 버릴 저주받은 체계를 생각해 내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 만일 우리가 모든 것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그가 했던 가장 쓸모 있는 활동이란 결국 사방의 벽 사이에 틀어 박혀 땀을 흘리며 신을 모독하는 책이나 써낸 데 불과하다."

@p203

스피노자는 이러한 적대 행위 앞에서 그의 적막한 생활을 더 이상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물론 익명으로 (신학적, 정치적 논고)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하였을 때, 그에 대한 싸움은 가장 격렬하게 일어난다. 그때 그에게는 사상의 자유를 변호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는 그다지 관용적이지 않았던 그 시대가 허용할 수 있는 한도를 훨씬 넘어서서 사상의 자유를 요구하였다. 만일 그가 교회의 가르침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만이라도 내세웠더라면 그에게 어느 정도 사상의 자유가 허용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스피노자는 진리를 향한 추구가 공식 교회의 문전에서 정지될 수는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스피노자가 국가에 대해 교회의 지나친 간섭을 통제하고 종교와 정치적 신념의 자유를 보장하는 과제를 부여했을 때, 그 당시 권력자들이 최고도로 격분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국가의 목적은 실제로는 자유"인 것이다.

@p204

스피노자는 이러한 맥락에서 마치 현대에 씌어진 듯한 인상을 불러일으키는 사상을 피력한다.

"이러한 자유가 억압되어 사람들이 울타리 안에 갇히고 최고 권력의 허락 없이는 감히 움직일 수도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고 해도 사람들은 최고 권력이 원하는 것만을 사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필연적으로 사람들은 매일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말하게 될 것이다. 이로써 특히 국가에 무엇보다도 필수적인 충성과 믿음은 파괴될 것이다. 대신 비루한 위선과 음흉한 사기만이 조장되어 판을 치게 될 것이다. 거기서는 기만이 자라나 온갖 미풍 양속을 파멸시킬 것이다. 존경받는 인물이 그가 단지 다르게 생각하고 위선적으로 처신하지 않는다는 그 이유 때문에 국가를 반역한 사람처럼 취급된다면, 국가에게 이보다 더한 불행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인간이 범죄나 악행 때문이 아니라 단지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라는 이유 때문에 적으로 판정 받고 사형을 받는다면, 이보다 더한 범죄가 있을 수 있겠는가? 또한 악한 사람들에게 공포의 장소인 재판정이 선행과 덕행의 고상한 사례를 벌하는 가장 멋진 연극 무대가 된다면, 이보다 더한 범죄가 있을 수 있겠는가?"

(신학적, 정치적 논고)는 출판되기가 무섭게 교회와 국가 당국은 물론 대학 당국으로부터도 금지 당한다. 이 일에 관한 한 가톨릭 관계 당국이든 프로테스탄트 관계 당국이든 의견의 일치를 본 셈이다. 네덜란드 총독은 가장 엄한 처벌을 내리겠다고 엄포를 놓아 이 책의 인쇄나 유포를 금지했다. 그 책은 "신을 모독하고 영혼을 타락시키는" 저작이며 "근거가 없는 위험스러운 견해와 추악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책에 동조하는 듯한 말조차 해서는 안 되었다. 이 규정을 과감히 어기며 책을 출간한 출판업자는 3,000굴덴의 벌금과 8년형을 선고받게 되었다. 이 논고에 반대하는 팜플렛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고, 정말 허위에 가득 찬 어떤 도서 목록은 그 책을 (신학적, 정치적 논고), 배신한 유태인이 지옥의 악마와 결탁하여 만들어 낸 책"이라고 소개했다.

@p205

이 모든 비난에 맞서는 스피노자의 유일한 무기는 침묵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한 채 이렇게 썼다. "바보처럼 놀라기만 하지 않고 학자로서 자연의 사물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이교도인이나 무신론자로 간주되었다." 스피노자는 문제 자체에 있어서는 굴복하지 않았고 굴복할 수도 없었다. 그는 친구들에게 단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다는 그 이유 때문에 어떤 사상이 진리가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진리는 항상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은 비단 오늘날의 얘기만이 아니다. 사악한 중상 모략도 나로 하여금 진리를 위험 속에 내버리도록 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스피노자의 은닉된 세계에도 때때로 그를 인정해 주는 목소리가 들려 온다. 팔츠의 영주 카를 루드비히는 스피노자에게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철학 정교수 자리에 취임할" 의향이 있는지를 물어 왔다. 그 제안을 전달한 하이델베르크의 한 신학 교수는 이렇게 첨부하였다. "당신은 다른 어떤 곳에서도 우리 영주처럼 특출난 학자들을--영주께서는 당신도 그 중 한 사람으로 여기십니다--자비롭게 대하는 영주를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은 철학하기 위한 가장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며, 당신이 이 자유를 공인된 교회에 혼란을 조장하기 위해 오용하지 않을 것이라 믿습니다." 이 제의는 상당히 유혹적이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심사 숙고 끝에 이렇게 답장을 보낸다. "교수직을 맡는 것이 나의 소망이었더라면, 저는 다른 자리가 아닌, 팔츠의 영주 전하께서 당신을 통해 제게 제의한 바로 그 교수직을 맡았을 것입니다. 자비로운 영주께서 황송하게도 제게 허락해 주는 철학의 자유 때문에라도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공적인 자리를 맡는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기에 이 훌륭한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 왜냐하면 저는 철학함의 자유가 어떠한 한계에 머물러야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공인된 교회를 혼란시키려 든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불화란 종교에 대한 내적인 사랑에서 생기는 것보다는 오히려 인간 감정의 상이함 또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왜곡하고 단죄하는--이렇게 얘기해도 된다면--대립의 정신에서 생겨나옵니다.

@p206

저는 이미 저의 고독한 사생활을 통해서도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처럼 영광된 자리에 오를 경우에는 얼마나 더한 일들을 우려해야 하겠습니까? 따라서 진실로 존경하는 선생님, 당신께서는 제가 어떤 더 나은 삶에 대한 전망 때문에 거절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방해받지 않는 생활에 대한 애정 때문에--그러한 생활을 어느 정도 계속 유지할 수 있기 위해--제가 공식적인 강의를 거절하였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스피노자는 그의 외로운 사색의 고요 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그의 전기 작가가 술회하듯이 "박물관에 매장되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지냈다. 그는 오랫동안 폐병으로 고생하다가 44세의 나이로 역시 고독하게 죽었다.

스피노자가 죽은 후에야 그의 중요한 철학 저서인 (지성의 완성에 대한 논고)와 대작인 (에티카)가 출판된다. 또한 이때에서야 비로소 그 시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가졌던 적개심과 증오심 앞에서도 자기 자신과 자신이 발견한 진리에 충실히 머물면서 명예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고 고독 속에서 끝까지 견뎌 낸 이 사상가의 그러한 힘이 어디에서 솟아 나왔는지도 드러났다. 그것이 가능했던 까닭은 그가 그의 사유에서 항상 세계와 번잡한 일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은 커다란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상함을 초월하여 영원에 이르려는 열망, 유한 속에서 갖는 정열로서 어느 시대에서나 철학의 근본 느낌이었던 바로 그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논고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된다. "일상 생활에서 부딪치는 모든 것이 덧없고 허무하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깨닫고 난 후 ... 나는 마침내 참된 선이 과연 존재하는지를 탐구하기로 결심했다. 모든 쓸데없는 것을 버린 후, 영혼이 진실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그런 선을 말이다. 나에게 지속적이고 최고의 즐거움을 영원토록 줄 수 있는 그러한 것이--이것을 내가 발견하고 획득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과연 있는지를 탐구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스피노자가 피하려고 했던 것은 일상 생활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것, 부와 명예와 쾌락의 추구 등이다. 이 모든 것은 그에게는 한낱 공허하고 허무하며 무상할 따름이었다. 그는 그것을 오직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슬픔으로 고찰할 수 있었다.

@p207

바로 여기에서부터 그에게 허망함을 초월하여 허망함으로 인한 모든 비애가 모두 사라져 버리는 상태에 대한 열망이 자라나온다. 그가 그러한 참된 행복을 가져다 주는 선을 발견했을 때,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영원하고 무한한 것에 대한 사랑은 영혼을 유일하게 진정한 즐거움으로 가까이 다가가게 하며, 그 사랑은 슬픔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따라서 스피노자 철학의 근본 특징은 무상함에 대한 비애의 경험에서 출발해 참된 사랑을 통해 영원한 것으로 뻗어 나가서 그 사랑 안에 안주하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신을 향한 정신적인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 때문에 노발리스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스피노자는 신에 취한 사람이다." "스피노자주의는 신성으로 가득 찬 상태이다." 슬라이어마허도 스피노자를 이렇게 이해한다. "그의 머리 속에 꽉 찬 것은 고귀한 세계 정신이며, 무한자는 그의 시작과 끝이었고, 우주는 그의 유일하고 영원한 사랑이다. 그는 성스러운 순결과 깊은 겸허로 자신을 영원한 세계 속에 비추어 보며, 그 자신이 세계의 사랑스러운 거울임을 깨닫고 바라보게 된다." 마지막으로 프랑스 철학자 빅토르 쿠산도 이렇게 생각했다. 그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이 "신비스러운 찬송이며, 정당하게 '나는 존재하는 자 바로 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오로지 유일한 그 분을 향한 영혼의 비약과 탄식이다"라고 적고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위대한 걸작 (에티카)는 자기 자신의 원인으로서의 신에 대한 사상과 더불어 시작된다. 철학이 신과 더불어 시작된다는 것은 스피노자에게는 아주 자명하였다. 그는 바로 이 점에서 신에 대한 확실성은 자기 확실성의 길을 통해 비로소 얻게 된다는 스승 데카르트와는 정반대이다. 이에 반해 스피노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는 무조건적으로 무한하고 완전한 존재, 즉 신의 존재보다 더 확실한 어떤 존재가 될 수는 없다. 신의 본질은 모든 불완전함을 배제하기 때문에 ... 그것은 그의 실재를 의심할 수 있는 원인을 모두 제거해 버리고 그 실재에 대해 최고의 확실성을 부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사물의 최초의 원인이며 자기 자신의 원인이기도 한 신은 스스로를 통해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이다"는 것이 통용된다.

@p208

그렇다면 정통 유태교의 대변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교회의 대변자들이 그의 생존시뿐만 아니라 그가 죽은 후에도 그를 박해한 그 증오는 도대체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그것은 스피노자가 자신의 무한한 열망의 대상으로 알고 있는 신이 그리스도교나 유태교에서 이야기하는 신과 같지 않은 데서 비롯된다. 그 신은 전지 전능한 자신의 의지로 세계를 창조하고 창조 활동 속에서 세계를 그 자체에 내맡기는 그러한 신이 아니다. 스피노자는 세계에 자립적인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는 열망의 근본 감정으로 지나가 버리는 것은 덧없고 무상하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물론 정확하게 고찰해 보면, 그러한 지나가 버리는 것은 절대로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존재나 실재가 아니다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신이고 오직 신뿐이다. 이렇게 스피노자는 창조주로서의 신과 창조물로서의 세계라는 사상을 초월한다. 바로 이와 비슷한 사상을 가진 피히테가 이것을 잘 파악하였다. "이것이 바로 진지하게 단일성을 추구해야 하는 모든 철학의 어려움이다. 거기에서는 우리가 사라져 버리든가 또 신이 사라져 버리든가 해야 한다. ... 이 문제를 최초로 깨달은 용감한 사상가는, 만일 그러한 소멸이 이루어져야 한다면 바로 우리 자신이 소멸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 파악했을 것이다. 이 사상가는 다름 아닌 스피노자이다."

그러나 세계는 분명 존재하고 인간들도 분명 존재하지 않느냐고 혹자는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스피노자도 이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물음을 던진다. 만일 본래적 의미로는 신만이 존재한다고 할 때, 도대체 세계와 인간은 무엇인가?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세계는 단지 신 그 자체가 실재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며, 인간은 신 그 자신이 사유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하나의 사물이 존재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올바른 말은 아니다. 우리는 본래 이렇게 말

해야 한다. 이 사물이 내게 나타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신이 나에게 나타난다라고. 다시 말해 나 자신 신의 사유인 바로 그 나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며, 신은 모든 실재 즉,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에 현존하기 때문이다. 또는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모든 실재는 신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신 안에 존재한다." 스피노자의 표현대로 하자면, 사물과 인간의 정신은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다.

@p209

오직 신만이 단 하나의 유일한 실체일 뿐이다. 사물과 인간의 정신은 단지 이 실체의 양태일 뿐이다. 스피노자는 모든 일시적인 것을 단호하게 포기하고서 필연적으로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나는 신과 자연에 대해, 근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즐겨 대변하는 견해와는 완전히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나는 신을 모든 사물의 내적 원인으로 간주하며 ... 이 사물들을 초월하는 원인으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것이 신 안에 존재하고 있고, 신 안에서 움직인다고 말한다. 나는 이것을, 비록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사도 바울과 모든 고대 철학자와 일치를 보면서 주장한다. 더 나아가 감히 덧붙여 모든 고대 히브리인과도 일치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제 우리는 스피노자에 대한 그 당시의 사람들과 후대 사람들의 격분을 이해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신에 취한 이 철학자를, 신을 모독하는 무신론자라고 헐뜯는 것만으로는 사람들이 만족하지 못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의 사상에는 인격적인 신이나 혹은 오직 예언자나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자신을 드러내는 그러한 유일신을 위한 자리란 결코 없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신의 계시는 모든 실재 안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이 사상은 시대가 바뀌자 레싱과 괴테, 헤르더와 슬라이어마허, 피히테, 노발리스, 셸링 등과 같은 사상가와 시인들로 하여금 암스테르담의 이 고독한 철학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이들은 신과 세계에 대한 비슷한 경험을 통해 그들이 스피노자와 가깝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신과 실재에 대한 파악 불가능성은 스피노자가 생각하듯이, 그 둘이 내적으로 밀접하게 뒤엉켜 있다는 사상을 갖고도 파악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실재 안에 신이 현존하고 있다면, 신은 세계의 실재에 속해 있는 대립과 투쟁에도 관여해야 되지 않겠는가? 이것을 1700년경 메밍겐 시의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극적으로 표현했다. "나는 세계 안에서 전쟁과 전쟁의 함성을 들었다. 따라서 신은 자기 자신을 거슬러 전쟁을 이끌어 나가야만 하고 자기 속을 부글부글 끓여야 한다. 신은 자기 자신을 파멸시키고 죽여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p210

인간들 사이의 그 모든 분노, 증오, 원한, 불운은 자기 자신을 거스른, 자기 자신에 맞서는 신의 격정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신이 인간 안에서 살고, 괴로워하고, 죽고, 태어나고, 먹고, 마시고, 자고, 성교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슬픔과 절망과 불행이 바로 신의 슬픔이고 절망이고 불행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 인간의 그 모든 어리석고 지저분한 생각들,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지껄여댈 이성의 신성 모독과 끔찍한 환상들은 모두 그 속에서 신이 자기 자신을 모사하고 거울에 비추어 보는 신 자신의 생각과 서술이어야 한다. 두 사람 혹은 몇 사람 사이의 대화는 신이 자기 자신과 달콤하게 나누는 담화일 따름이다."

그러나 이 소심한 사람은 스피노자 사상의 그 심오한 깊이를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했다. 그는 스피노자가 신에게로 향한 무한한 열망으로 세계와 그 세계의 모든 번잡스러운 일과 모든 투쟁에서 이미 오래 전에 떠났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스피노자의 사상은 극도의 위험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토록 전적으로 영원에만 몰두하는 사람에게는 시간적인 것이란 무로 해체되어 버리며, 실재란 사라져 버리고 결국에 가서는 그 자신 스스로가 비실재적인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실제로 스피노자에게 일어났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사유로 하여금 유한을 무한으로 고양시키는 과감한 시도를 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그의 투명한 고독의 진정한 원인이었던 것이다. 스피노자의 죽음을 생각하며 헤겔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그 말은 처음에는 매우 의아하게 들리지만 결국 올바른 것이다. "그는 폐병으로 오랫동안 앓다가 167722i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모든 특수성과 개별성이 하나의 실체 안으로 사라져 버리는 그 자신의 체계와 일치하여 죽었다."

@p211

16. 라이프니츠

단자의 퍼즐 게임

어떤 면에서는 17세기를 여성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의 생애 역시 이러한 관점에 잘 들어맞는다. 그가 고급 매춘부나 여인들과 놀아났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어쨌든 이런 종류의 방탕함에 대해 우리는 아는 바가 없다. 그렇다고 그가 어느 정도 신분이 높은 집안의 여인과 결혼한 것도 아니다. 정반대로 그는 일생을 독신으로 지냈으며 고달픈 떠돌이 생활을 할 운명을 타고난 셈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연 과학적, 철학적 발견을 사랑하였고, 그의 외교적인 성공을 귀부인들에게 알려 주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는 귀부인들과 열심히 교제하였고, 폭넓게 서신을 주고받았다. 그들 중에는 황후와 여왕이 있었고, 공작 부인, 선제후 왕비, 선제후 공주도 있었으며, 일반 공주들도 있었다. 이 귀부인들과의 편지에서 연애의 말이나 남녀 사이에 주고받는 은밀한 말은 결코 발견할 수 없다.

@p212

왜냐하면 라이프니츠는 지극히 사무적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사무적인 용건만을 염두에 두었다. 그는 철두철미하게 정신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이미 어릴 때부터 철학적으로 사색하는 재능을 보이기 시작한다. 라이프니츠도 파스칼과 마찬가지로 신동이었다. 아무도 그에게 라틴어를 가르쳐 주지 않으려 하자, 그는 8세 때 혼자 힘으로 라틴어 철자 읽는 법을 익혔다. 그는 동판화로 장식된 리비우스의 책을 대하게 되었을 때, 표지에 있는 글자를 보고 그 낱말들의 뜻을 해독해 내었다. 그 다음에는 본문에 몰두해서 낱말 하나 하나의 의미들을 해독했다. 또한 그는 "지식의 틀"을 갖추고 있는 논리학에 대단한 흥미를 느낀다. 15세에 이미 대학에 입학하여 법률학을 공부하지만 법률학을 공부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아니었다. 그는 곧 철학적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고 그때부터 끊임없이 그 문제와 씨름한다. 당시 철학은 목적 개념을 중심에 둔 아리스토텔레스와 기계론적 인과율에서 시작하고 있는 데카르트 사이에 놓여 있었다. 라이프니츠는 라이프치히의 로젠탈을 혼자 산책하면서, 이 두 입장 중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p213

그러나 그는 당시에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훗날에도 라이프니츠는 이 두 입장 중 한 가지를 택한 것이 아니라, 상반되는 두 입장의 종합을 시도했다. 이렇듯 그는 이미 15세에 자신의 미래의 철학적 작업을 위해 결정적으로 중요한 관점을 발견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법률학 공부를 하며 박사 학위 취득을 꿈꾸지만 라이프치히 대학의 학식 높은 교수들은 그가 너무 젊다고 생각했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대학 학장 부인이 라이프니츠를 싫어하여 박사 학위 취득을 방해하였다고도 한다. 그리하여 그는 한 전기 작가가 전하듯이 "여행길"을 떠났고, 뉘른베르크의 알트도르프 대학으로 학적을 옮겨 그곳 교수들의 경탄을 받으며 뛰어난 성적으로 시험에 통과했다. 그 즉시 21세의 그에게 교수직이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그렇지만 그는 대학교 교수직에 뒤따르는 속박을 원하지 않았기에 이를 거절하였다.

라이프니츠의 그 이후 생활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다. 비록 그는 신교도였지만, 잠시 동안 마인츠 영주와 대주교의 정치적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그는 하노버궁의 부름을 받고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하노버 왕당원의 자문관으로 머물렀다. 거기서 그는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그의 일은 대부분 외교 사절로 파리, 비엔나, 베를린, 뮌헨 등지를 다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에 대한 그의 보고서는 그의 위임자뿐만 아니라 서두에서 말한 귀족 부인들에게도 전해졌다. 그밖에도 라이프니츠는 정치적, 법률적 사건에 대한 업무일지 작성을 위임받았다. 라이프니츠는 마인츠에서도 이와 유사한 외교 활동을 수행한 바 있었다. 이 시기에 그는 모험적인 내용의 진정서를 작성하는데, 이 진정서에서 프랑스 왕에게 이집트를 침략하도록 제의했다. 이것은 프랑스 왕의 관심을 독일에서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려는 은밀한 의도였던 것이다. 프랑스 왕은 물론 이 진정서에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100년이 휠씬 지난 후 나폴레옹은 이 점도 참작하여 자신의 계획을 세웠다. 라이프니츠에게 있어서 특징적인 점은 그가 어떤 정치적 무대에서 활동하든지 그의 의도는 언제나 화해를 추구한다는 점이었다. 그는 개개의 민족이 자신의 민족 고유의 과제를 다른 나라와 협력해서 실현할 수 있는 하나의 민족 연합을 열망했다. 즉 모든 그리스도교 민족들의 조화와 세계 평화를 열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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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는 공직상으로 하노버와 볼펜뷔텔에서 궁정 도서관장을 맡았다. 그런데 그는 약간 특이한 도서관장이었다. 어떤 사람이 책을 빌려 가려고 하면 몹시 화를 냈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자신이 제안한 하노버 왕가의 역사 서술을 위임받았다. 그는 자료 수집 과정에서 영주 가문에 관해 몇 가지의 매우 중요한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 중에 그는 일반성 속으로 빠져든다. 하노버 왕족의 역사는 그 왕족이 지배했던 지역의 역사와의 연관 없이는 고찰될 수 없기 때문에 그 모든 역사학적 노력에 앞서 먼저 지질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그는 논증했다. 그러나 그것도 그에게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하노버 왕족에게 지정된 땅은 두말할 나위없이 지구의 한 부분이며, 따라서 무엇보다도 먼저 지구의 발생사를 연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이 하노버 왕족의 역사가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논리적 귀결에 따라 지구의 근원사를 기술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그가 왕가의 구체적인 역사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을 것은 자명한 이치이고, 영주가 참다 못해서 연구의 진행 상태를 재촉한 것도 역시 당연했으리라. 물론 라이프니츠는 영주가 관심을 쏟고 있는 그 가문의 명성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세계의 생성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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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과 함께 라이프니츠는 분열된 교회를 재통일하려는 임무에도 몰두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루터교와 개혁파 사이의 분열을 통합하고, 그 다음으로는 개신교와 가톨릭의 통합을, 마지막으로는 서유럽 교회와 그리스정교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이것은 그의 화해의 사상과 일치한다. 그러나 그는 이 분야에서 그다지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한다. 그가 온건한 저술이나 타협적인 교섭 활동으로 다리를 놓아주기에는 그들간의 대립이 너무나 컸던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도 라이프니츠의 학문적 노력은 체계를 잡아가기 시작하여 눈에 띨 정도로 조직적인 면모를 갖추게 된다. 그는 비엔나, 드레스덴, 베를린, 페테르스부르크 등지에서 아카데미(학술원) 창립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이 일을 위해 세밀한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다른 명칭으로 세워졌던 프로이센 학술원만이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실현되었을 뿐이다. 라이프니츠는 그 학술원의 초대 원장이 되었다. 그는 그 학술원의 재정을 위해 기상 천외한 방법들을 제안하는데, 달력, 소방 펌프, 뽕나무, 여권, 브랜디에 세금을 매기자고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라이프니츠에게 감사하지 않았다. 그는 점차 학술원의 업무에서도 제외되어 학술 원장임에도 불구하고 창립 회의에 초대조차 받지 못한다.

그렇게 다방면으로 활동하면서도 그가 조용히 학문적인 연구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는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의 학문적인 연구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더 이상 도달하지 못했고, 또한 라이프니츠 이후에도 더 이상 실현되지 못할 정도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그 혼자 전 학술원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수학, 물리학, 역학, 지질학, 광물학, 법학, 경제학, 언어학, 역사학, 신학 등을 골고루 연구하였다. 그는 수학 분야에서 획기적인 발견 즉 미분학을 발견하게 된다. 미분학은 그 최초의 발견자가 누구인가라는 문제로 뉴턴 및 그의 추종자들과의 달갑지 않은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서로가 먼저 발견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 외에도 라이프니츠는 계산기와 잠수함의 설계에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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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는 학술계에서 지위와 명성을 지닌 거의 모든 학자들과 광범위하게 학문적인 서신 교환을 한다. 이러한 그의 편지는 15,000여 통이나 된다.

실제로 라이프니츠가 가장 폭넓게 영향을 미친 영역은 철학 분야였다. 그는 사유 문자, "인간 사고의 알파벳", 즉 개개의 개념에 대한 기호를 발견한다. 이로써 그는 최근에 시도되고 있는 논리학과 의미론 분야의 선구자가 된다. 그렇지만 그것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단계에서 그친다. 그의 본질적인 연구 분야인 형이상학적 철학에서도 그는 하나의 커다란 완결된 체계에는 이르지 못한다. 그의 대부분의 논문은 그때그때 씌어진 소논문들이며 친구 특히 귀부인들이나 오이겐 왕자와 같이 영향력 있는 친구들의 물음과 의견에 대한 대답들이었다. 라이프니츠는 그의 적수 로크를 비판하는 글을 완성하고도 로크가 사망한 사실을 알고는 발표하지 않는다. 완성된 저서로는--몇몇 소논문을 제외하고는--(변신론)만이 출판된다. 이 책은 프로이센의 여왕 소피 샤롯테와의 대화에서 자극을 받아 저술한 것이었는데 이 책으로 그는 당시 대단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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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는 자신의 외모에 대해 가상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는 마르고 중간키의 체격에 얼굴은 창백했고, 손과 발은 항상 차가웠다. 그의 손과 발은 그의 손가락처럼 다른 신체 부분에 비해서 너무 길고 가늘어서 선천적으로 노동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였다. 그의 목소리는 약하고, 강하다기보다는 섬세하고 명쾌하며 나긋나긋하기도 했지만, 여러 가지 발음을 잘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는 후음 자모와 K자는 발음하기가 어려웠다." 그 당시의 한 전기 작가는 다음과 같이 그의 모습을 보충한다. "그는 일찍 머리카락이 빠져 대머리가 되었고 머리 한가운데 비둘기 알만한 크기의 혹이 있었다. 그는 어깨가 넓었으며 항상 꾸부정한 모습으로 다녀서 마치 곱사등이처럼 보였다. 그는 한번도 자기 가정을 꾸리지 못했던 만큼 음식을 선택해서 먹기보다는 항상 똑같은 음식점에서 똑같은 음식을 시켜서 먹었다."

라이프니츠의 말년의 생활에 대해 앞서의 전기 작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계속 공부만 했고, 며칠이고 의자에서 떠나지 않는 때도 있었다. 아마도 그래서 오른쪽 다리의 혈액 순환에 이상이 생긴 것 같다. 그것으로 인해 그는 걸을 때 불편을 느꼈다. 그는 혼자 치료하려고 애썼는데 단지 다리 위에 압지를 놓는 것으로 치유되기를 바라는 정도였다. 오래지 않아 그는 다리에 심한 통풍 증세를 일으켰다. 그는 조용히 누워서 안정을 취했고, 침상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무릎을 곧추세웠다. 조금이나마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나무로 된 나선형 기구를 만들게 하여 통증 부위마다 장치해 놓고 나사를 죄었다. 나는 그가 이것 때문에 신경을 다쳤고 마침내는 다리를 전혀 사용할 수 없게 되어 그 후 거의 항상 침대에 누워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듯 다양한 인간 관계 속에 우뚝 서 있던 다재다능한 인간 라이프니츠, 그는 왕실과 제후들과도 밀접한 교분을 맺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171670세의 나이로 죽었을 때 당연히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졌을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왕실은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라이프니츠는 거의 어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채 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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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의 철학적 업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추측하건대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단자라고 일컬어지는 매우 작은 사물에 대한 특이한 이론을 주장한 것이라고 말이다. 더 나아가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단자는 실재의 원리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더 물으면, 대개는 침묵만이 감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라이프니츠의 사상에 대한 서술은 특히 그가 단자론으로 무엇을 의미하고자 했는가를 밝히는 것에 중점을 두게 된다. 더 나아가 무엇이 그로 하여금 실재를 그의 독특한 방식인 단자론적으로 해석하게끔 만들었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해야 할 것이다.

우선 라이프니츠는 그의 위대한 선배인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와 중요한 점에서 대립된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사물의 실재를 연장된 것으로서 파악한다면 그 실재성은 충분히 이해된 것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관점은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이의를 제기한다. 단순한 연장성 만으로는 사람들이 어떤 사물과 관계할 때, 그 사물이 저항한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 더구나 동물의 경우처럼 동물들이 혼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 실재를 해석함에 있어서 이러한 요소를 수용하기 위해, 라이프니츠는 힘의 개념을 도입한다. 개개의 사물은 모두 그 자신에 내재해 있는 힘, 다시 말해 활력의 점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실재적인 것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물의 배후에 본래적이고 참된 실재성이 나타나니, 그것이 곧 비가시적인 힘의 세계이다.

이로써 단자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첫 걸음을 내딛은 셈이다. 라이프니츠가 힘 개념으로부터 실재를 해석하고 있는 그 활력의 점이란 가장 작은 단위이다. 라이프니츠는 물론 단자들이 물질의 종류처럼 무수히 나뉘어질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나뉘어질 수 없는 근원적인 단일성이다. 이러한 단일성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는 "모나드"이다. 이런 까닭에 라이프니츠는 각각의 활력점을 모나드 즉 단자라고 부른다.

그는 특정한 실재 영역, 곧 생명체 혹은 유기체를 고찰함으로써 보다 폭넓은 통찰을 얻게 된다. 이들 영역에서는 그것들에 내재해 있는 힘이 탁월한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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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개의 생명체는 자체 안에 그 생명체와 더불어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이끌고 조직하는 하나의 중심, 하나의 작용 원칙, 하나의 통일성을 갖고 있다. 이제 이러한 유기체를 본보기로 하여 모든 실재를 사유하여야 한다고 라이프니츠는 결론 내린다. 왜냐하면 죽어 있는 것이 생명체로부터 파악되어야지, 그 반대로 생명체가 죽어 있는 것으로부터 파악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죽은 존재자에 있어서의 활력의 점은 유기체 안의 그것과 동일한 종류의 것들이다. 모든 가장 작은 단위, 즉 모든 단자들은 살아 있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살아 있는 생명체로 나타나게 된다. "자연 전체는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라이프니츠는 이것을 시각적으로 이렇게 묘사한다. "어떠한 물질이든 그 물질의 한 조각 한 조각은 나무와 풀로 가득 찬 정원으로 이해되거나 물고기가 많은 연못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나무와 풀의 가지, 동물의 팔과 다리, 동물의 몸에 있는 물기 한 방울 등등은 또한 그런 종류의 정원이고 연못이다. 정원의 초목 사이의 지면이나 공기, 연못에서 노니는 고기 사이의 물 등은 식물도 물고기도 아니지만 그것들은 식물이나 물고기를 살아 움직이게 한다. 다만 그 대부분이 너무나 미세하기 때문에 우리가 파악할 수 없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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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우주에는 황폐의 사막, 불모의 땅, 죽음의 그림자란 전혀 없다." 무한하게 풍부한 실재의 왕국은 무한한 수의 살아 있는 단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 단자들 하나하나는 각기 다르다. 이 말은 헤겔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풍자적인 말을 하게 하였다. "전해 오는 일화에 의하면, 서로 동일한 두 개의 사물이란 없다는 이 명제는, 라이프니츠가 머물고 있던 궁정의 정원에서 떠올랐다고 한다. 그곳에서 그는 부인들에게 똑같은 두 개의 잎사귀가 있으면 찾아보라고 하였다 한다. 궁정에서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일이 벌어질 수 있었던 시대야말로 형이상학의 황금 시대가 아니겠는가! 그 시대에는 나무 잎사귀에 비료나 주면 되었지 애써 형이상학의 명제들을 검토할 필요는 없었다."

실재를 고찰하면서 이제까지 라이프니츠는 매우 중요한 하나의 존재 영역, 즉 정신적인 존재를 빠뜨리고 있다. 그러나 이 정신적 존재는 진정한 실재에 속한다. 따라서 라이프니츠는 이제 그것을 그의 구상 속에 수용해야 한다. 그의 원칙에 의하면 상위의 것으로 하위의 것을 해석해야 하기에, 그는 모든 실재를 정신을 본보기로 유추해서 설명하려고 시도해야 할 것이다. 정신의 본질에는 이중적인 것이 있다. 즉 정신은 표상을 가지고 있다는 점과 표상에서 표상을 추구한다는 점이

. 이제 단자의 본질을 정신으로부터 해석한다면, 모든 단자들에게 있어서의 표상과 추구라는 두 가지 계기를 기술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라이프니츠는 실재를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실재의 본래적인 실재는 살아 있는 활력의 점으로서의 단자인데, 이 활력의 점은 표상과 추구를 그 특징으로 갖고 있다.

이 사상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 이 사상에 의하면 의자, 책상, 침대는 우리에게 보이는 것과 같은 그러한 물질적인 사물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들의 실재는 오히려 표상과 추구의 능력을 갖춘 활력의 점들이다. 우리는 이 사상을 부족하나마 그대로 라이프니츠의 근본 개념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죽은 존재자 내부의 활력의 점들은 단지 혼란한 표상만을--마치 인간이 정신을 잃었을 때, 그 사람 안의 표상이 그러하듯이--갖고 있다는 라이프니츠의 설명으로써 이 사상의 부족함은 약간 완화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아스러움은 여전히 남는다.

@p221

라이프니츠는 단자에 있어 혼란스러운 표상과 분명한 표상을 구별함으로써 단자의 영역에 독특한 단계를 도입한다. 가장 밑의 단자는 전적으로 혼란스러운 표상만을 갖고 있는 "조야한 단자"이다. 이 단자는 무기물의 세계를 형성한다. 그 위에 생명체, 유기체의 세계가 있는데, 여기의 단자들은 대부분 혼란스러운 표상을 가지고 있고 그 외에 몇 개의 분명한 표상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경우는 이보다 훨씬 낫다. 인간의 인식이란, 그의 중심 단자 즉 인간 안의 다른 모든 단자를 통솔하는 그 단자가 혼란스러운 표상에서 분명한 표상으로 넘어가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 즉 원초 단자는 전적으로 분명한 단자만을 가지고 있다. 신은 실재를 진리 안에 있는 그대로 본다. 즉 거대한 단자들의 왕국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그의 단자 구상에서 한 가지 어려움에 부딪친다. 즉 어떻게 단자들이 서로 함께 있을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눈에 보이는 세계 안에서도 사물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단자들 역시 서로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이 가능성을 부정한다. 왜냐하면 그가 힘의 개념을 시종일관 논리적으로 사유하기 때문이다. 단자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은 단자 자체로부터 전개되어 나오는 것이다. 이는 용수철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용수철이 보여주고 있는 모든 작용은 그 자체의 내적인 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단자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의 근거로부터 키워 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단자는 다른 단자로부터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따라서 그러한 영향을 결코 발휘하지도 못한다. 이 사실을 라이프니츠는 창문이 없는 단자의 비유를 통해 극적으로 표현한다 "단자에는 그 무엇이 들어가거나 나오거나 할 수 있는 창문이 없다" 단자는 완전히 자족적이다.

그러나 이 경우 라이프니츠는 분명한 표상을 갖춘 단자가 어떻게 외부 세계를 받아들이는지 설명해야만 한다. 이 목적에 따라 그는 개개의 단자는 모두 내면에 혼란된 방식으로이기는 하지만 애초부터 모든 다른 단자에 대한, 따라서 전체 현실에 대한 표상을 간직하고 있다는 가설을 세운다.

@p222

개개의 단자 안에 온 세계가 현존하고 있다. 개개의 단자는 "살아 있는 영속적인 우주의 거울"이고, "작은 우주"이다. 아니 그것이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한, 그것은 "하나의 작은 신성"이다. 단자가 이미 항상 표상하고 있는 것에는 지금 현재 활동하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이미 언젠가 존재했던 것, 그리고 앞으로 존재하게 될 것까지도 속한다. 단자는 "과거를 간직하고 있으며 미래를 잉태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컨대 한 유럽인의 중심 단자는 자신 안에 천 년 전에 중국 해안을 떠다니던 작은 나뭇조각에 대한 혼란스러운 표상을 지니고 다닌다.

이것은 너무나도 엉뚱한 세계관이 아닐까? 만일 단자 하나 하나가 다른 것과 연관 없이 그 자체 고립된 채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극치에 이른 유아론이 아닐까? 만일 다른 단자가 연락해 오지 않는다면 의식을 갖추고 있는 단자는 어디서부터 그가 내적으로 표상하고 있는 세계가 실재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겠는가? 그렇다면 결국에 가서 세계는 실제적인 존재가 아니라 단순한 표상에 지나지 않지 않은가? 이렇게 되면 결국 모든 실재는 단 하나의 유일한 주체를 제외하고는 단순한 가상이라는 절대적 관념론에 빠지고 마는 것이 아닐까? 라이프니츠는 이에 대해 더 이상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그는 무한히 많은 단자를 갖추고 있는 실재 세계가 하나 있다는 것을 근거 제시 없이 확고하게 믿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어떻게 이러한 단자의 세계가 완전히 무질서나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그는 두 가지 생각으로 대답을 한다. 한편으로 그는 단자 하나 하나에는 그 근원으로부터 내면의 법칙이 함께 주어져 있어, 이 법칙이 그 단자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예정 조화의 가설을 끌어들인다. 예정 조화설에 따르자면, 처음부터 제각기 다른 단자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은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되어 있다. 예를 들면 두 사람이 서로 바라보고 있다고 할 때, 이것은 단자론의 의미로 보면 그 두 사람이 서로 자신을 열어 보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p223

오히려 그것은 한 사람의 중심 단자에는 그 근원에서부터 이 순간 그 단자가 항상 이미 자신 안에 갖고 있던 다른 사람의 중심 단자에 대한 혼란스러운 표상을 분명하게 끌어올리도록 예정되어 있다고 말해져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중심 단자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그렇지만 이 예정 조화는 도대체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단자 전체가 어떻게 서로서로 조화를 잘 유지하고 있단 말인가? 그의 시대에 다른 대답이 가능하지 않았듯이 라이프니츠도 신의 개념을 끌어들임으로써 그 물음에 답한다. 단자 하나하나에 내면의 법칙이, 그리고 단자 상호간에 조화가 처음부터 확정되어 있다면, 이 일은 창조주인 신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단자론에 대한 확고부동한 근거는 곧 창조 사상이다.

라이프니츠는 그의 체계의 이러한 최고의 통일성을 보장하기 위해서, 신의 존재 증명에 착수한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를 상기시키는 그의 최초의 신존재 증명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나는 하나의 신에 대한 관념이나 하나의 완전한 존재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그러한 존재에 대한 이념은 모든 완전성을 포함하고 있어야 하고 존재는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존재는 실재한다." 다른 증명은 영원한 진리 또는 본질, 예컨대 수학의 진리가 있다는 사실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한 진리에서 말해지고 있는 것은 근원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의 지성, "영원한 진리의 영역"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의 지성은 "모든 가능한 사물의 이데아"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신은 세계 안에 있는 우연의 근거로서 증명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어떤 우연적인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그 우연적인 것을 초월하는 충분한 근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인데, 그 근거가 곧 신이다. 끝으로 라이프니츠의 독특한 마지막 신존재 증명은 예정 조화의 체계에서 출발한다. 그러한 예정 조화의 체계는 단자의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상호 조화시키고 정돈해 주는 정신을 필요로 하는데, 그것이 곧 신이다.

단자론과 예정 조화실의 사상으로부터 신의 본질과 다스림도 규정된다. 신은 위대한 수학자와 같이 세계를 이루는 모든 것을 정확히 계산하고 개개의 단자에 내면적 법칙을 기획하여 전체의 모든 단자가 서로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다.

@p224

그렇지만 라이프니츠에게 신은 동시에 모든 단자들의 근윈이기도 하다. 단자는 신으로부터 "끊임없는 번갯불"에 의해서 생겨난다. 이때 셀링이 보았듯이, "신은 흡사 실재를 잉태하고 있는 구름과 같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다른 관점으로 단자 세계의 창조는 신이 개개의 단자가 대변하고 있는 무한한 관점들의 전부를 산출해 내는 것이라고 설명되기도 한다. 이 관점에서 세계란 신적 관조의 다양함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된다. 세계가 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면, 어떻게 세계에는 그렇게도 많은 고뇌와 불행과 악이 내포되어 있을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그 시대가 특히 절박하게 몰두한 변신론의 문제, 신에 대한 변론의 문제이다. 라이프니츠는 이 문제를, 유한한 세계 전체 안에서는 바로 이 세계의 유한성 때문에 모든 것이 똑같이 완전하지 않다고 주장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한다. 따라서 신은 필연적으로 선 속에 악과 불행도 섞어 넣어야 했다. 그럼에도 라이프니츠는 신은 그 모든 가능한 세계 가운데에서 가장 최상의 세계를 선택하여 창조하였다고 확신한다. "선은 신으로 하여금 세계를 창조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처럼 선이 지혜와 결탁하여 신으로 하여금 최상의 것을 창조하도록 이끌었다." 이러한 낙천주의에 대해 볼테르는 그의 9캉디드)에서 실제의 의문점들을 제시하며 온갖 조소를 퍼붓는다.

헤겔도 라이프니츠를 철저히 비판한다. 그는 단자론을 "형이상학적 소설"이라고 불렀다. 헤겔은 라이프니츠가 모든 대립들을, 그 대립들 자체를 해결하지는 않고 신 안에서 힘들이지 않고 일치시켜 버리는 것을 보고서 다음과 같은 악의에 찬 말을 한다. "신은 흡사 그 안으로 모든 모순들이 흘러 들어오고 있는 시궁창과 같다."

@p225

17. 볼테르: 궁지에 몰린 이성

볼테르는 계몽주의 시대의 엄연한 지도자로서 명석하고 뛰어난 인물이었으나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삶을 살았다. 그러한 삶은 이미 그의 출생과 함께 시작된다. 학자들은 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그의 아버지가 친아버지였는지에 대해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다. 혼란스러운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산파는 그가 살아날 가망성이 없다고 여기고 성급하게 서둘러 세례를 주었다. 이 때문에 그는 훗날 다시 정식 세례를 받는 데 애를 먹었다. 사람들의 생각처럼 볼테르는 이미 젖먹이 시절부터 신과 사이가 안 좋았던 셈이고 그 후로도 일생 동안을 하늘과 싸움을 하며 지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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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끊임없이 하늘의 대변자, 즉 성직자들과 다투면서 살아야 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교회에 무조건 복종하는 속된 권력자들과도 다투면서 살아야 했다. 그는 오랫동안 그 어느 곳에서도 조용하게 정주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파리 체류가 금지되었다. 심지어 사람들은 그를 한때 바스티유 감옥에 가두기도 했다. 그곳에서 볼테르는 감옥 소장과 함께 식사를 하는 특권을 누렸다. 사람들은 그를 헐뜯고 배척하고 국외로 추방하기도 했으며 그의 저서를 금서로 지정하고 불태워 없애기도 하였다. 또한 그의 저서를 뻔뻔스럽고 비종교적이며 파렴치하다고 비난하는 동시에 그를 악독스럽고 외설스럽다고 욕하면서 마치 전염성 세균을 대하듯이 그를 경계하였다. 한 신학 교수는 그러한 사람이 세상의 빛을 보도록 허용한 신의 섭리를 원망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볼테르는 이러한 모든 불행한 사건을 야기시킨 것은 그의 개인적인 운명뿐 아니라 "철학은 등장하자마자 현상 수배를 받게 마련이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는 많은 저서를 익명으로 출간할 수밖에 없었다. 그 책의 저자가 누구인지 드러났을 경우 볼테르는 부득이 자신이 저자가 아니라고 부인해야 하는 나약함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사람들은 악마처럼 거짓말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의도를 위장하기 위해 그러한 짓을 했다.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여겨지면, 그는 그때 그때 카톨릭적 신앙을 고백하고 심지어 회전을 하기도 하였다. 이 모든 일들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애매한 인물로 남는다. 그는 "나는 기꺼이 신앙 고백자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순교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함으로써 공공연하게 자신의 나약함을 고백한다.

볼테르의 사생활은 온통 혼란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날카로운 필치는 그의 운명이 되어 버린다. 그는 모든 세계를 붙잡고 늘어진다. 평소 볼테르를 존경해서 그를 포츠담에 초대한 프로이센 왕과도 순전한 오해와 연애 사건으로 인해 그에게서 떠나게 되는데 이 일에도 역시 잘못은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새롭게 거듭되는 복잡한 연애 사건에 휘말리곤 하였다. 후작 부인, 연극 배우, 친구 부인, 착한 시민의 딸, 화류계의 여자들과 연애하였으며 나중에는 심지어 자신의 질녀와도 연애하였다. 볼테르는 자신의 이 같은 쾌락적인 생활 태도에 신학적인 근거를 제시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쾌락을 맘껏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세상에 보낸 것이다. 그 밖의 모든 것은 무미건조하고 측은할 뿐이다." 그렇게 끊임없이 즐기기 위해서는 당연히 돈이 필요했고, 볼테르는 한동안 돈 문제로 고생을 했다. 아버지의 상당한 재산에도 불구하고 볼테르는 빚을 지기 시작했는데, 그가 어느 정도의 재력을 갖추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재산을 축적하는 방식에도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그는 말년에 대단한 부자가 되었고 대저택과 2개의 별장, 160여 명의 시종을 거느렸다. 그렇지만 그후에도 그의 혼란한 생활은 여전했다. 볼테르는 나이가 들어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육체와 영혼의 무질서에 익숙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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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모든 혼란의 와중에서도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만 갔다. 그는 정신계에서는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거의 한 세대 동안 유럽 정신계의 지도자로 군림하였다. 우리 시대의 철학자인 딜타이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활기찬 사람"이라고 그를 기린다. 그는 인격적으로 또는 편지를 통해 신과 세계와 교류를 하였는데, 물론 신보다는 세계와 더 많은 교류를 하였다. 왜냐하면 신은 직접적인 대화의 상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무려 2만 통 이상의 편지가 전해져 오고 있다. 그의 친서나 그의 수많은 작품에서 중요한 내용 또는 최소한 흥미를 유발할 만한 어떤 사실을 언급하지 않고 넘어간 것은 거의 없을 정도이다. 희곡 또한 예외가 아닌데 그의 희곡은 항상 적대시되어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독자에게 큰 감동을 안겨 주었다. 그의 소설은 끊임없이 판을 거듭하여 발간되었다. 그래서 괴테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할 정도이다. "재능과 능력을 가지고 이 드넓은 세상을 현란한 방법으로 채울 수 있는 그 모든 것에 볼테르는 신들린 듯 심취해 있었고, 그로써 그의 명성은 온 지구에 뻗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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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계에서의 볼테르의 삶이란 오직 단 하나의 투쟁이었다. 그가 일생을 바쳐 싸운 것은 사상의 자유, 종교의 관용, 이성, 평화, 인간의 행복, 불의와 억압의 폐기였다. 다시 말해 그것은 단순한 이론으로서의 계몽이 아닌 실천으로서 이해된 계몽이었다. "우리는 가능하다면 이 세계가 처한 깊은 오류의 어둠 속에 희미한 빛이나마 가져와야 한다." 니체는 이와 관련하여 그를 "인류의 가장 위대한 해방자"라고 불렀다.

볼테르의 주된 적은 교회였다. 그는 지칠 줄 모르고 그리스도교 이론을 "이 세상을 뒤덮고 있는 신성한 거짓말의 위험한 관념"이라는 식으로 매도하였다. 교회는 이성적인 신 대신에 "우리가 미워할 수밖에 없는 괴물"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신은 "세계를 창조하고 그후 세계를 물 속에 빠뜨려 버렸다. 이것은 순수한 종족을 창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강도와 독재자로 들끓게 하기 위해서였다. 신은 우리의 선조들을 물에 빠져 죽게 한 후에 그들의 자식들을 위해 죽었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그리하여 신은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무지의 벌로 수백의 민족을 벌하였다. 그러나 그 무지는 신 자신이 유지해 온 것이다." "우리가 정의라고 부르는 것을 넘쳐흐를 만큼 풍부하게 소유하고 있는 이 통치자, 자신의 자식들을 그토록 무한하게 사랑하는 이 아버지, 이 전능한 신이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한 것은, 인간을 악령에 유혹 당하고 또 유혹에 빠지도록 내버려두기 위해 그가 불사 불멸로 창조한 인간들을 죽음에 버려 두기 위해, 그리고 그의 후손들을 불행과 죄악으로 덮어씌우기 위해서란 말인가?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우리의 나약한 이성을 가장 격분시키는 모순은 아직 아니다. 훗날 자신의 외아들의 죽음을 통해 인류를 구원한 그 신이, 또는 그 자신 스스로 인간이 되어 인류를 위해 죽은 그 신이, 어떻게 거의 모든 인류를 영원히 고통받는 두려움 속에 내버려 둘 수 있는가? 철학자로서 이 그리스도교의 이론을 고찰해 보면, 그 이론은 분명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신을 악 그 자체로 만들어 버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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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수많은 예 가운데 두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볼테르는 전체 그리스도교 이론이 미신임을 폭로하려고 한다. 그가 보기에 전체 교회 역사는 미신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이 미신은 이교도에서 생겨나 유태교에 받아들여져 그리스도교 교회를 애초부터 타락시켰다." 이 미신은 "우스꽝스럽고도 가증스러우며", "우리가 최고의 존재에 바쳐야 할 순수한 숭배에 반하는 최악의 적이다." 바로 그 때문에 "이제 미신이라는 이 괴물을 쇠사슬로 잡아매야 할 시기가 도래했다."

볼테르에게는 광신이야말로 더욱더 해롭고 위험한 것으로 보였다. 광신은 예외 없이 "피에 굶주린 격정"으로 귀결되며 "죄악을 재촉한다." 광신은 "지옥의 광란"이다. "100년에 100만 명씩 계산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교는 1700만 명 이상의 인류를 희생시켰다." 그러므로 볼테르는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하느님에게 우리를 광신자로부터 구제해 달라고 기도해야만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볼테르는 모든 교회의 권력 안에서 그러한 광신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에, "천국의 보화 뒤에다 자신들의 이익을 숨기고 있는, 이것저것 분별없이 쉽게 믿어버리는 민중에게서 명예를 탐하려는 지도자들에게" 비판의 화살을 돌린다. 그는 "이성적 인간이면 누구나 그리고 선한 의지를 가진 인간이면 누구나 그리스도교 종파를 혐오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마침내 그는 더 나아가--그 자신도 광신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자기의 모든 편지를 "파렴치를 타도하자"는 투쟁 구호로 끝을 맺는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스스로를 "위대한 혁명가"라고 불렀다.

볼테르의 이러한 인식은 언젠가는 현재의 악을 제거해 버릴 수 있다는 확신에 근거를 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점차 이성적으로 될 것이며, 따라서 박해하는 데 혈안이 되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볼테르는 미래에 대한 이러한 전망이 결코 동떨어진 유토피아가 아니라고 확신한다. "광신을 혐오하는 새로운 세대가 태동하고 있다. 언젠가는 철학자들이 그 지도자가 될 것이다. 이성의 왕국은 이미 예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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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에 대항한 볼테르의 투쟁은 근본적으로 비종교적인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더구나 확고한 무신론의 귀결은 더욱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투쟁을 "모든 인간의 이익에 반하는 것"을 향한 싸움이며 "괴물"과의 싸움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나는 그리스도교도가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더욱더 사랑하려는 바로 그 이유로 그리스도교도가 아닌 것이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는 "최고의 존재를 믿어야 하는 필연성"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물음에 그는 자신의 모든 정열을 쏟는다 "인류 전체에 관계되는 것은 우리에게도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우리 또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신의 문제, 섭리의 문제는 바로 우리 모두와 관계되는 문제이다."

그렇다면 볼테르가 숭배하는 신은 어떠한 신인가? 분명 구약이나 신약 성서의 신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해 어떤 특별한 계시도 필요로 하지 않는 신이다. 그래서 볼테르는 이렇게 쓰고 있다. "지극히 높은 이의 영원한 지혜가 그 자신의 손으로 그대의 마음 깊숙이 자연적인 종교를 새겨 놓았다는 것을 생각하라." 바로 그곳에 신의 사상이 뿌리박고 있는 것이다. 그 생각은 "감정""자연적인 논리"에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 본성적으로 신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볼테르의 의견을 따를 경우 인간은 신에 대해 무엇을 파악할 수 있으며,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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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인간은 그러한 가장 최고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다. 볼테르는 일종의 신존재 증명까지 제시한다 "어떤 것이 있다. 따라서 영원한 어떤 것이 있다. 왜냐하면 무에서는 아무 것도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상은 "우리의 정신이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확실한 진리"이다. 그 외에도 신존재에 대한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거의 완전한 확실성을 지니고 있는 많은 통찰이 가능하다. "모든 작품은 그 수단과 목적을 통해 제작자를 나타내 준다. 그러므로 모두가 나름대로의 목적을 갖는 힘과 수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우주는 전지 전능한 창조주의 존재를 암시한다. 이것은 가장 큰 확실성을 띠고 있는 개연성이다." 볼테르는 이 신존재 증명이 뉴턴의 발견에 의해 입증되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변함이 없는 많은 법칙에서 입법자를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이성을 통한 신의 개념 파악이 가능하게 된다. 신은 필연적인 존재이며, 자연 가운데 퍼져 있는 지성이고 이 위대한 우주의 위대한 정신이다." 이것 말고도 우리는 어느 정도는 확실하게 신의 단일성과 영원성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물론 신에 대한 인식이 그 이상으로까지 뻗어나갈 수는 없다. "이 지극히 높은 창조주는 무한한가, 그는 어디에나 존재하며 어떤 장소에도 얽매이지 않는 존재인가?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제한된 지성, 우리의 빈약한 지식을 가지고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있겠는가?" 또한 신의

개개의 속성에 관해서도 우리는 대답할 수 없다. 인간에게는 언제나 신을 인간적인 규정으로 덮어씌울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결코 신성에 관한 합당한 관념을 갖고 있을 수 없다. 다만 이런 저런 상상을 하다가 하나의 개연성에서 어렵게 다른 개연성을 추정해 볼 따름이며, 매우 희박한 확실성에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신을 인정하고 있는 철학자는 확실성에 견줄 만한 개연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철학은 이 세계가 파악 불가능하고 영원하며, 자기 스스로 존립하는 존재에 의해 정돈되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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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맥락에서 볼테르는 자신 이전에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신존재 증명을 발견한 것이다. "그토록 많은 극단적인 신존재 증명 가운데서도 만족을 증명의 방법으로 인용하는 것을 떠올리지 못했다는 데 놀랄 따름이다. 만족은 신적인 것이다. 따라서 헝가리산 고급 포도주를 마시고 아름다운 여인과 입을 맞춘 사람, 한마디로 말해 쾌활하고 다정 다감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선을 베푸는 지극히 높은 존재에게 감사해야만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볼테르에게 있어서, 역사적으로 전수되어 온 "형이상학적 궤변들"은 건전한 인간 지성에 호소하는 이러한 논증 앞에서 퇴색해 버린다. "형이상학은 의혹의 장이고 영혼의 소설이다." "형이상학에서 우리는 단지 개연성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바다에서 헤엄을 친다" "우리는 불확실성의 바다에서 헤엄을 치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는 대략 165cm 정도의 키와 약 4입방 인치의 뇌를 가진 그런 동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점에서 볼테르는 신에 대한 일방적인 무지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미래의 통치자를 위한 지침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자연은 당신에게 지극히 높은 존재자의 실재를 입증하여 주었습니다. 당신의 심장은 당신에게 정의의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볼테르는 마음의 근원적인 앎과 연관지어서 "범죄를 잔인하지 않게 벌하며, 착한 행위에 선으로 상을 주는 지극히 높은 존재의 실존"을 확신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사상의 근거 제시에서 볼테르는 분명하지 못하다. 그는 자주 자기 자신의 가장 내면적인 확신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런 뒤 그는 다시 국가와 사회의 질서 유지를 위한 이유 때문에 자신이 그러한 신에 대한 생각을 요구하고 있다고 쓴다. "영주와 민중들은 그러한 신에 대한 이념을 뇌리에 깊이 새겨 두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사회는 그러한 관점을 필요로 한다." "국민은 종교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테르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한다.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신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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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테르가 신과 세계와의 관계를 고찰할 경우, 신에 대한 인식 가능성의 물음에서 보편적인 회의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신에 대해 생각해 보면 한 가지 절망적인 의문점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볼테르는 리스본 대지진 이후 의문이 더욱 커졌다. "자연은 매우 잔인하다. 사람들은 '가능한 모든 세계 중 최선의 세계'에서의 운동 법칙이 어떻게 그처럼 경악스러운 대참사를 일으킬 수 있는지 상상할 수가 없다. 우리들의 동료 인간이 수십만의 개미들처럼 일격에 우리들의 개밋둑 안에서 가루가 되도록 뭉그러졌다. 그들 대부분은 틀림없이 형언할 수 없는 단말마의 고통을 안고 무너진 벽돌더미에 깔려 시체마저 꺼낼 길 없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인간 존재의 삶이란 이 얼마나 비참한 도박이란 말인가!"

리스본 대지진 소식 그리고 그 자신의 경험과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통해 볼테르는 세상사에 회의를 느낀다. 이미 자연은 기형아, 흑사병, 독극물, 황무지 등 수많은 과오를 범했다. "그 많은 질서와 더불어 공존하는 그 많은 무질서, 창조적 힘과 맞먹는 그토록 많은 파괴,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여 나는 종종 흥분하였다." 인간의 생활 역시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어디에나 "개인들의 고통, 신장 결석, 관절염, 죽음과 저주가 산재해 있다. 누가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에서는 고통과 죽음에 대한 이질감이 대두된다. "우리가 빠져 허우적거리는 온갖 악의 대홍수"가 있다. 그리고 역사도 거의 어두운 면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언제나 범죄가 성공을 거두었다. 역사는 대부분 피비린내 나는 광경으로 점철되어 있다. 또한 역사는 "비참함과 잔인함의 하수구"이며 "한번도 끊겨 본 적이 없는 죄악의 사슬"이며 "죄악과 우둔함이 뭉쳐진 덩어리"이다. 따라서 세계는 라이프니츠가 생각했던 것처럼 가능한 모든 세계 중 최선의 세계가 아니다. 이 세계는 "모든 세계 중 최악의 세계"인 것이다. "행복은 한낱 꿈일 뿐이고 고통만이 현실이다 80년 동안 나는 그것을 느껴 왔으며 그 속에서 견뎌 내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모기가 거미의 먹이로 존재하듯이 인간은 걱정 근심의 먹이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세상은 눈물의 골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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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인식을 통해 볼테르는 불가피하게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게 된다. "소멸되기 위하여 끊임없이 창조되고 있는 많은 존재보다는 차라리 무가 낫지 않겠는가? 이 수많은 동물들은 단지 다른 동물들을 잡아먹고 자신들도 잡아먹히기 위해 태어나고 다시 새끼를 낳는다. 감정이 예민한 이들 존재들은 그토록 많은 고통스러운 느낌을 받도록 운명지어졌단 말인가? 그리고 이 수많은 이성적 존재는 이성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볼테르는 자신의 사유 방식에 따라 이 의문들을 신의 문제와 연결시킨다. 신이 창조한 세계 안에서 그토록 많은 무의미한 짓들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의 선함을 믿을 수 있을까? 볼테르는 이러한 신의 정당성에 대한 문제, 변신론의 문제를 풀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세계에 널려 있는 그 많은 악은 하느님의 섭리와 일치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발작적인 열병 때문에 신을 부정해야 하는가?" "악은 신에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명은 궁색하다는 것이 곧 드러난다. 그래서 이 의문은 신의 행위의 불가사의함에 대한 깨달음으로 끝이 난다 "나는 세계를 창조한 위대한 건축가가 과연 선한지를 탐구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건축가가 있다는 것만으로 족하다." 그렇지만 그것 역시 해결은 될 수 없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명제가 마지막에 놓여 있다. "선과 악에 대한 의문은 진지한 연구자로서는 풀어 낼 수 없는 혼돈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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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결국 회의주의가 이성적인 인식을 이기고 승전고를 울린다.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 당신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의 수수께끼입니다. 그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해답이 인간에게는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오직 체념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모든 것에 대해 탐구하면서도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 내가 무엇이 될는지 알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나는 때때로 절망에 빠질 지경이었다." "내가 보고 행한 모든 것에는 지성의 희미한 빛조차 없었다. 미련함으로 가득 찬 나의 지난 60년을 곰곰 생각해 볼 때, 내게는 세계가 마치 구역질나는 썩은 고름덩어리처럼 여겨진다. 권태와 덧없는 싸움, 이것이 곧 인생이다. 노소를 불문하고 우리는 헛된 공상이나 할 따름이다. 우리는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운명의 손에 떠밀려 다니는 고무 풍선들이다. 한번은 대리석에 부딪치고, 한번은 오물에 부딪쳐 한두 번 튀어 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영원히 끝난다." "우리는 모두 이 세계 안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전쟁 포로가 한순간 들판 위에서 즐기듯 그렇게 살고 있다. 언제인지도 모르는 자기의 처형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최후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사람들은 자신들이 완전히 헛되이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인간의 비참함을 보고 때때로 볼테르는 가벼운 체념 속에 빠지기도 한다. "나는 아주 뒤늦게야 이 세상에서 행복을 얻었다. 어쨌든 나는 마침내 행복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제 나는 일생 동안을 갈구해 왔던 독립과 평온을 얻었다." 그러나 그 후 그는 다시 그 시대의 투쟁 속으로 뛰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실천하기 위하여 글을 쓰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여기에 철학함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대들 철학자여! 모여서 대오를 이루시오! 그리고 나서 법칙을 세우고 이 나라의 통치자가 되시오." 그렇지만 볼테르에게 또다시 몇 가지 걱정거리가 엄습해 왔다. "모든 것, 마침내는 인간까지도 헛되이 무를 찾아 헤매다 사라져 버린다." 단지 조용히 성찰하는 철학만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나는 무던히도 철학으로 긴 여행을 준비하여 왔다." 왜냐하면 "철학이 어떤 점에서는 좋기 때문이다. 즉 철학은 위안을 주는 것이다." 철학은 "영혼의 고요를 얻도록 해준다." 그러나 사람들은 단호한 자세로 철학함에 임해야 한다. "인간은 무엇인가 과감하게 모험을 해야 한다. 철학은 인간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데 그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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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루소: 불행한 감상적 사상가

인간은 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인간은 세계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사색의 실마리를 자기 자신의 실존에 고정시킬 수도 있다. 바로 장 자크 루소가 그러했다. 그는 아마도 철학사에서 가장 자기 중심적인 사상가일 것이다. 그 자신의 술회에 따르면, 자기 성찰을 통해 인간에 대한 모든 지식--바로 이것이 그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다--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화가가 인간의 본성을 그리려고 한다면 그 모델을 자신의 마음이 아닌 다른 어느 곳에서 발견할 수 있겠는가? 그는 스스로 자각한 그대로 본성을 묘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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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참회록'이 가능했던 것이다. 루소는 이 책에서 그의 삶에 대해 쓰고 있다. 이 책은 그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출판된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 중 하나이다. 그는 '참회록'에서 자신의 성장 과정과 그의 삶에 얽혀 있는 일화와 사건들을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게 쓰고 있다. 책머리에서부터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전례가 없었던 그리고 어느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일을 시작하고 있다. 나는 나의 동료들에게 한 인간을 자연 그대로의 진리 속에 드러내 보이고 싶다. 그런데 이 인간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 될 것이다." "나는 선에 대해서도 악에 대해서도 똑같이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나쁜 일이라고 해서 조금도 숨기지 않았고, 좋은 일이라고 해서 추호도 덧붙인 일이 없다." 이렇듯 '참회록'은 자신의 성격에 대한 정당한 자기 의식과 거의 악마적인 오만 불손함이 뒤섞여 계속된다. "내가 나 자신을 깊이 헤아려 보건대 지금까지 내가 보아 왔던 그 어느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나는 현재 존재하고 있는 그 어느 누구와도 다르다고 감히 믿고 있다. 내가 남보다 나은 인간이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나는 남들과 다르다. 자연은 나를 만들 때 사용했던 틀을 깨뜨려 버렸는데, 그 잘잘못의 여부는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에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p239

루소는 1712년 제네바에서 태어나 1778년 파리 근교에서 세상을 떠났다. 67년 동안의 그의 삶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불행, 친구나 적들과의 격렬한 논쟁 등 혼란의 연속이었다. 루소는 변화 무쌍하게 열광적인 활동에 투신하는가 하면, 꿈속을 헤매며 소일하거나 빈둥빈둥 게으름을 피우며 세월을 보내기도 했으며, 또한 신경 쇠약의 좌절 속에서 악의 세계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그는 젊은 시절, 성실한 시민의 집에서 가출한 젊은이가 가질 수 있었던 거의 모든 직업을 전전하였다. 그는 작가 지망생, 수공업자, 신부의 조수, 음악 교사, 시종, 비서, 교사, 유랑 악단, 토지 등기소 직원 등을 전전하면서 지냈다. 후에 그는 외교 업무의 서기가 되기도 했고 악보 써주는 일을 하기도 하는데 이 기회를 활용하여 그는 자신의 고유한 악보 체계를 발명해 내기도 했다. 이뿐 아니라 지휘자, 성공적인 오페라 작곡가, 희곡 작가 등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베르사이유 궁전에서도 상연되었는데, 이때 그의 너저분하기 짝이 없는 복장은 참석자에게 불쾌감을 안겨 주었다. 그는 이렇게 안정되지 않은 생활 때문에 제네바,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의 시골, 파리 등지를 헤매고 다녔다. 23년만에, 때로는 23개월만에 거처를 옮겨야 했다. 그는 이러한 극도로 혼란스러운 시기 동안 온갖 패륜 행위를 저질렀다고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게 쓰고 있다. 도둑질, 사기, 무위 도식, 얌전한 여자에 대한 중상모략 등을 자행하였고 소설책을 무분별하게 읽어댔으며 나중에는 역사책도 그렇게 무분별하게 마구잡이로 읽어댔다.

루소는 그의 '참회록'에서 연애 생활에 대해서도 숨김없이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그 같은 일은 실제로 있었다기보다는 환상 속의 일이었다. 결정적인 체험은 소년 시절 그의 여자 가정 교사에게 매맞은 일인데, 그때 맞은 매는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최고의 쾌락이 된다. 그러나 그는 여자들에게 그와 같은 사랑의 봉사를 해달라고 감히 부탁하지는 못했다. 그는 또한 평생 그를 따라다녔던 자위 행위의 버릇과 음부 노출증--이로 인해 그는 몽둥이 찜질을 당할 뻔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에 대해서도 아주 솔직하게, 약간은 자랑스럽게 기록하고 있다. 마침내 그는 상류 사치의 약간 어리석은 부인인 드 바렝 부인을 알게 된다. 이 부인은 그를 일시적이나마 카톨릭교로 개종시키기도 하였고, 그에게 거처도 마련해 주었으며, 나중에는 그보다 13년이나 연상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어머니이자 애인의 역할을 대신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비애를 안겨 주는데 그녀에게는 한 사람의 애인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바람기가 있었던 것이다. 루소는 그녀와 헤어지고 베네치아의 매춘부와 난잡스런 관계를 맺다가--이때 그는 매독에 걸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끊임없이 두려워했다--한 순박한 처녀를 만나게 된다. 호텔에서 하녀로 일하는 그녀를 알게 되고부터 그는 그녀에게 애써 글을 가르쳐 주었으며, 23년간의 동거 끝에 마침내 결혼한다. 그런데 위대한 교육 이론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정을 어떻게 꾸려 나가야 할지를 몰랐다. 그는 5명의 자식을 고아원에 보내 버리는데, 그 까닭은 그의 자식들이 너무나 소란스럽고, 또 양육비가 많이 들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귀부인들에게 열을 올리는 기질은--물론 대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부부라는 단단한 결속력으로도, 남편이라는 지위로도 막을 수가 없었다.

@p240

루소의 사상의 돌발성은 그의 삶이 이처럼 돌발적이었다는 점과 일치한다고 하겠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꾸준히 발전시켜 나간 사람이기보다는 돌발적인 착상을 갖고 있는 사나이였다. 따라서 그의 결정적인 통찰은 순간에 떠오른 착상들이다. 이러한 것들 중 그의 첫 번째 착상이 그를 단번에 유명하게 만들었다. 디종 학술원은 "예술과 학문의 진보가 도덕의 향상에 기여하였는가?"에 대한 현상 논문을 모집하였다. 점잖은 학술원 회원들은 자연히 전적으로 계몽주의 정신에 입각해 문화적 업적의 진보성에 대한 열광적인 찬가를 기대하였다. 루소는 이와 반대로 그러한 진보를 당돌하게 부정하였다. 그에게는 학문과 예술의 발전이란 인간적인 것의 타락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루소의 대답은 그들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우쭐대고 있던 계몽주의의 빈 껍데기를 벗겨 버렸던 것이다. "사치, 분방함, 예속은 모든 시대에 걸쳐 오만 불손한 노력에 대한 징벌이었다. 그 노력이란 다름 아닌, 신의 지혜가 우리를 몰아 넣었던 바로 그 행복한 무지에서 빠져 나오려고 우리가 버둥거리며 만든 것에 불과하다." "전능하신 하느님이시여, 우리를 조상들의 지식과 재해로 가득 찬 재주에서 벗어나게 해주소서. 그리하여 우리에게 불확실성과 무죄와 가난을 되돌려 주소서!"

@p241

이러한 그의 중심 사상은 소위 무신론자라는 혐의로 반센 성에 감금되어 있는 그의 친구 디드로에게 가던 길에 떠올랐다. "일찍이 어떤 돌발적인 영감이 떠올랐는데 나를 사로잡은 이 충격이 바로 그것이다. 갑자기 나는 빛에 싸여 눈이 멀어 버리는 것처럼 느꼈다. 무수히 많은 생각이 엄청난 힘으로 단번에 몰려와 나는 형언할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나는 취기가 머리끝까지 오른 듯한 혼란에 빠졌다고 느꼈다. 가슴을 죄는 불안감이 엄습해서 숨쉬기조차 힘들었고, 더 이상 걸어갈 수 없어서 나무 밑에 주저앉았다. 거기서 30분 동안을 그렇게 흥분한 상태로 있었는데, 일어섰을 때 나는 내 웃저고리가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 있음을 발견했다.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는 것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 언젠가 이 나무 아래에서 보고 느꼈던 것을 단지 찰나의 한 부분만이라도 묘사할 수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분명하게 우리 사회 질서의 그 모든 모순을 드러내 보일 수 있을까? 어떠한 힘으로 우리 제도의 모든 악습을 설명할 수 있고, 얼마나 분명하게 인간이 천성적으로는 선하지만 제도로 말미암아 악하게 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까? 이 나무 아래에서 깨달은 그 많은 위대한 진리 가운데 내 기억에 남아 나의 저서에 기술할 수 있었던 것은, 그때 나를 감동시켰던 그것의 희미한 여운에 불과하다."

@p242

이 같은 체험을 함으로써 루소의 사상에 산만하게 흩어져 있던 것들이 한 점으로 모아진다. 그는 그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 준 두 저서 '학문과 예술에 관한 논문''인간 불평등 기원에 관한 논문'을 저술한다. 이미 이 저서에서 이 다음 저작들이 어떻게 진행될지를 예시한다. 전 시대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과 인간의 본질을 자연 그대로의 순수함으로 탐구하려는 시도가 그것이다. 그러한 내용을 다룬 것으로 '줄리 또는 신엘로이즈', '에밀 또는 교육에 관하여', '사회 계약론' 등이다. 어떤 저작에서나 루소는 동일한 문제를 제기한다. 즉 인간의 원초적인 본질이 사회와 국가 안에서의 존재 그리고 교육의 필연성과 어떻게 합치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의 외적인 삶은 점점 더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저서들에도 불구하고 안정을 찾지 못했다. 루소는 이제 자유 기고가로서 솔직하고 올바르게 살아갈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병고에 시달렸다. 예전부터 항상 지니고 있던 그의 기질상의 우울이 악화된 것이다. 세상에 대한 그의 불신도 커가기만 했다. 고독에 대한 갈망이 깊어만 가자 그는 이 고독에 대한 갈망을 한적한 시골에서 지내며 달래 보지만, 그의 심신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유명해진 그에게 몰려드는 모든 방문객을 거절하고 자신을 점점 더 고립시켰다. 그는 계몽주의의 친구들인 볼테르, 디드로, 달랑베르, 그림 등과도 다투어 사이가 벌어진다. 그는 볼테르에게 보내는 편지에 아주 분명하게 "나는 당신을 미워한다"는 말로 끝을 맺는다. 물론 볼테르도 가만히 앉아 욕만 먹고 있지는 않았다. 볼테르는 루소를 천치, 괴물, 사기꾼, 문학의 독버섯, 세기의 배설물, 야수, 중상모략꾼이라고 묘사하며 응수했다. 루소는 파리와 제네바 당국의 박해를 받는다. 그의 저서의 비그리스도교적 성격 때문에 그에 대한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고 책들은 공개적으로 소각되기까지 했다. 그는 끊임없이 쫓기고 있다고 생각하며 괴로워했는데 그 대부분은 단순히 상상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 그리고 자신의 저서에 반대하여 일반적인 모략이 가해질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그는 "내가 그 무시무시한 어둠을 꿰뚫고 지나가지 못하여 8년 동안이나 억눌려 왔던 바로 그 암흑의 작품"을 원망하였다. 그는 결국 추적 망상증에 사로잡힌다.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초대로 영국에 체류하기도 하지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였다. 루소는 이 고매한 친구와도 다투고 헤어졌다 그의 겉모습도 조금 기이해졌다. 그는 이상야릇한 아르메니아식 복장과 털가죽 모자를 쓰고 다녔다. 그는 결국 비참하게 죽음을 맞았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이렇게 나는 형제도, 가까운 친구도, 이웃도 없이 세상에서 완전히 혼자 남아있게 되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평소 남과 사귀기 좋아하고 상냥한 성격에 누구에게나 친절했던 나를 그들끼리 작당하여 외진 곳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경의를 표하는 대신, 내 앞에서 침을 뱉으며 지나가지나 않을까? 모든 사람들은 나를 생매장시키고 즐거워하지나 않을까?" 그러나 죽은 후의 루소의 명성은 엄청난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기간 중 그의 시신은 판테옹으로 이장되었다. 그 다음 시대의 어느 위대한 사람, 헤르더도, 괴테도, 독일 관념론 철학자인 칸트도, 니체와 톨스토이도, 루소에게서 자극 받지 않았다면 그들이 이루어 놓은 것에 결코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p243

루소의 이중적인 본질, 즉 진리를 향한 극단적인 열망과 악마적인 성급함과 불안은 그에 대한 그 시대의 두 가지 평가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레싱은 이렇게 술회한다. 루소는 "어디까지나 모험적인 철학자였다. 그는 편견이 일반적으로 통용된다 해도 결코 편견에 기울지 않고 진리를 향해 뻗어 있는 곧은 길을 갔다.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감수해야 했던 희생에는 전혀 개의하지 않고 길을 갔다. "이에 반해 디드로는 이렇게 표현한다. "이 사람은 나를 불안에 휩싸이게 했다. 그와 함께 있을 때면 마치 저주받은 영혼이 내 곁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그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그로 인해서 나는 지옥과 악마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

루소의 정신사적, 철학사적 의미는 무엇보다도 그가 계몽주의 사상이 뿌리박고 있는 토대를 뒤흔들어 놓았다는 점이다. 그는 이성에서 차갑고 메마른 이해력을, 형식에서는 경직된 태도를, 진보의 이념에서는 환상을, 요구된 자유에서는 감추어진 노예 상태를 보았다. 따라서 계몽주의가 그러한 점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의심스럽게 여겨졌다. 그의 확신에 따르면 그것들은 어떠한 자립적인 개별성도 파괴해 버린다. "사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도덕에서도 천박하고 믿을 수 없는 단조로움이 지배적이다. 모든 지성인은 동일한 형식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끊임없이 예의바른 몸가짐을 요구하고, 정해진 것에 대한 예의를 명령하는 것이다. 즉 항상 관습을 좇고, 결코 각자에게 나면서부터 정해진 정신을 따르지 않는다. 인간은 인간이 무엇인지 더 이상 생각하려 들지 않는다. 또한 인간은 끊임없는 억압 속에 구속당하고, 사회라고 불리는 무리를 만들어 동일한 상태에서 모두 똑같이 되어 버린다."

@p244

그러한 평준화와 인위적인 공존 속에서는 모든 근원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소멸되고 만다는 것이 루소의 비판적인 명제이다. 바로 거기에서 그는 계몽주의의 커다란 오류를 깨달은 것이다. "진실로 인간적인 삶을 꾸려 나가며 다른 사람의 의견에 마음 쓰지 않고 사회나 대중이 무엇을 허용하고 비난하는지에 개의치 않으면서 자신의 성향과 자신의 이성에 따라 생활하는 자연적인 인간은 어디에 있는가? 그러한 사람을 우리 중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어디에서나 온통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 말뿐이다. 어디에서나 겉만 번드레한 행복을 찾기에 급급할 뿐이다. 어느 누구도 실재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헛된 것을 추구하고 있다. 이들은 이기심에 사로잡힌 노예이자 어릿광대로서 그렇게 살아가는데, 이것은 단지 자신들이 살았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한편 루소는 진정한 인간 존재의 가능성을 자유롭게 열어 주는 데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한다. 이로써 그는 그의 세대에서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던 해방을 외치는 것이다. 오랫동안 억압되어 왔던 것이 갑자기 다시 환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칸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루소는 인간적이라고 여겨지는 다양한 형태에 깊숙이 숨겨져 있던 인간의 본성을 최초로 발견했다."

@p245

루소는 이러한 의도로 독특한 철학적 구상을 전개한다. 그것의 원칙은 지성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것, 즉 감정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일차적으로 사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느낌 속에, 즉 직접적인 분명함 속에, 마음의 확실성 속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우리의 지평을 초월해 있는, 근본적으로는 아무 것도 이끌어 내지 못하는 형이상학적 논의를 시작하자는 것이 아니다. 나는 철학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스스로의 마음에 물어 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을 뿐이다. 모든 철학자들이 내가 그릇되었다는 것을 입증한다할지라도 여러분들이 내가 옳다는 것을 느끼면 나는 만족할 것이다." 이렇게 무엇보다도 감정을 더 찬미했다. '신엘로이즈'는 모든 관습의 벽을 허물어 버리는 직접적인 사랑을 노래하는 찬가이다. 지성보다 감정을 우위에 두는 이 사상은 더 멀리 퍼진다. 감정 우위 사상은 계몽주의의 단순한 지성에 맞서 그 시대의 일반적인 태도가 된 것이다.

만일 인간이 그의 근원적인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문제가 된다면 루소는 인간이 원래 선한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을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자신의 직접적인 감정을 신뢰할 때, 인간이 공존으로 인해 현혹 당하지 않고 진실로 홀로 있을 때, 그는 선하다. "화를 초래하는 진보와, 우리의 오류, 그리고 타락을 우리에게서 없애 버린다면, 또한 인위적인 것을 우리에게서 제거한다면, 우리는 전적으로 선할 것이다."

@p246

이 사상은 루소가 시도하는 윤리학의 구상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근원적인 느낌 속에서 행위의 지침을 발견한다. "나는 이 같은 규범을 고상한 철학의 원리에서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내 마음의 바탕에 뚜렷하게 새겨 놓은 특징에서 발견한다. 내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려는지에 대해 묻고 있는 상대는 곧 나 자신이다. 내가 선하다고 느끼는 모든 것은 선하다. 내가 악하다고 느끼는 모든 것은 악하다."

이것은 물론 인간이 모든 직접적인 착상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때마다 곧바로 떠오르는 모든 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르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감정의 선함과 이 감정에서 발원하는 행위의 선함을 위해서는 모든 감정과 행동에 대해 항소의 여지가 없이 판결을 내리는 재판소가 있다는 것이다. 그 판사는 물론 이성적 성격을 지닌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원초적인 감정, 곧 양심이다. "영혼이 내면에 타고난 정의와 덕의 원리가 있다. 우리는 그 원리에 따라서, 우리 자신의 근본 법칙을 거슬러서라도, 우리의 행위와는 달리 행동하는 사람을 선하거나 악하다고 판단한다. 이 원리를 나는 양심이라고 부른다."

루소가 천명한 인간은 천성적으로 선하다는 의견을 염두에 둘 때, 그가 경박한 낙천주의를 신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인간은 본래부터 선하다는 이 명제가 아무런 제약없이 통용되는 사상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분명 루소는 이렇게 쓰고 있다 "창조주의 손에서 생겨난 만물은 모두 선하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모든 것은 인간의 손에 의해 더럽혀진다." 따라서 루소에게도 인간은 이중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결코 단일하지 않다. 나는 원하기도 하고 원하지 않기도 한다. 나는 나 자신을 동시에 노예와 자유인으로서 느끼고 있다. 나는 선을 보고 선을 사랑하면서도 악한 행동을 한다. 나는 이성에 귀를 기울일 때 능동적이지만, 나의 정열이 나를 흔들어 놓을 때에는 수동적이 된다. 내가 억압받고 있을 때 나의 가장 큰 고통은 나는 저항할 수도 있었는데라는 느낌을 갖는 그것이다." 따라서 루소가 전제하고 있는 인간의 천성적인 선함은, 인간이 선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선해야 한다는 의무감 속에 놓여 있다는 것, 그러면서도 그에게는 위협적인 폭력과 유혹으로서의 악의 가능성이 동시에 주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p247

루소는 인간의 자연 상태를 순수한 선함의 상태로 묘사함으로써 어떤 역사적 주장을 내세우려 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원시인처럼 되는 것이 생활의 조화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오히려 천성적으로 선하다는 이념을 통해 인간에게 그 이념을 구체적인 생활에서 실천해야 한다고 호소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개인 생활에서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사회생활에서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소는 그의 시대의 타락에 맞서는 대립상으로서 하나의 이상적인 상을 거울처럼 제시해 보인다. "자연 상태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고 아마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그러한 상태에 대해서 말을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연 상태는 사람들이 현재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기 위해서는 생각해야만 한다."

우리는 이러한 근본 사상으로부터 루소의 사회에 대한 투쟁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회는 선할 수 있는 인간의 천성적인 가능성을 감추고 비뚤어지게 하며 방해한다. 왜냐하면 사회에서는 노골적인 이기심이 우위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이기심이 모든 악의 뿌리이다. 루소는 이러한 방법으로 고대 이래로 철학자들이 숨죽이며 긴장했던 악의 유래에 대한 문제에 독특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악은 신의 작품이 아니다. 인간은 선하게 창조되었다. 그렇다고 악이 그 자체로 악한 반신적인 어떤 힘도 아니다. 악은 오히려 인간의 작업, 오로지 인간만의 작업일 뿐이다. 악은 인간의 사회화로 인해 생겨난다. 이로써 사상사에 있어 최초로 책임의 주체로서 사회가 등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사회 이론을 거론할 때 항상 루소를 끌어들이고, 또한 프랑스 혁명이 루소를 그들의 시조로 경배하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p248

루소의 교육 이론 역시 동일한 뿌리에서 비롯된다. 이 교육 이론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학생들에게 그 원래의 선한 기질을 북돋아 주어야 하며 그런 의도 아래 그들을 사회의 위험스럽고 나쁜 영향에서 보호해야 한다. 특히 어떠한 강요, 어떠한 도덕적 규정도 삼가야 한다. 루소에 의하면, 모든 것은 선함을 그 자체로 보증해 줄 수 있는 자유의 전개에 달려 있다. 물론 자연아로 길러져서도 안 된다. 볼테르가 '에밀'을 읽으면서, "모두 네 발로 기어다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며 정말로 기분이 좋았다고 쓴 것은 그가 루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증거이다. 루소는 인간의 존재와 행위 그 모든 것을 자기 자신에 근거하여 존재하고 행위할 수 있도록, 또한 인간이 마주치는 모든 것을 근원적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루소의 이러한 의도는 전체 시대에 걸쳐 교육학의 표본이 된다.

그의 인간상으로부터 루소가 사회를 무엇으로 이해하며 사회를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지 분명해진다. 이때 유의해야 할 것은, 역사적 진리에 대한 요청을 확인하는 것보다 동시대의 타락에 맞설 수 있는 대조물을 기획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인간이 천성적으로 선하다면, 인간의 원래적인 상태는 자유와 행복으로 특징지어져야 할 것이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그러나 루소는 곧 이렇게 덧붙인다. "그런데 인간은 어디에서나 억압의 사슬에 얽매여 있다." 이러한 예속은 사유 재산의 형성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땅에 울타리를 치고 '이 땅은 내 것이다'고 선언한 최초의 사람이 곧 국가와 불평등의 창시자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서로간에 사유 재산의 보장과 보호가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보장은 개개인이 자신의 자유 일부를 포기할 때에만 가능하다. 이와 같은 손실과 더불어 사회 생활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회란 불가피하게 파멸에 내맡겨져 있다. 사회는 "단지 인위적인 인간과 인위적인 정열의 표상만을 제공하였으며, 이 인위적인 정열은 새로운 관계가 빚어낸 작품이지 자연에 뿌리를 둔 것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p249

동시에 인간의 본성적 자유와 그의 사회적, 국가적 현존재 사이의 모순이 대두된다. 국가에서의 인간 현존재에는 다음의 것이 통용된다. "표현의 자유에는 어떠한 유보도 있어서는 안 되며, 일치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해야 한다. 한데 뭉친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할 수 없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말은 인간이 국가의 형성을 위해 협력하기로 결심했다면 자신의 자유를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는 말인가? 루소는 이것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부인한다. 국가의 본질을,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제약이 뒤따름에도 불구하고 자유가 가능한 범위에서 생각하려고 한다. 그러나 어떻게 자유와 국가의 억압을 일치시킬 수 있는가? 이에 대해 루소는 이렇게 대답한다. 국가가 자유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식으로 되어야 한다. 국가의 밑바탕에는 보편적인 의지가 자리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바로 모든 사람들의 자유의 통일이다. 이렇게 해서 루소는 주권 재민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주권이 국민에 있다는 것은 루소가 국가를 자유로운 인간들이 상호 체결하는 계약에 기초하도록 하고 있는 것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국가는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요소가 된다. 루소에게 있어서 자유는 자의적인 멋대로의 삶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자유와 개개인의 자유의 공존인 것이다. "개개인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양보함으로써 특정한 어느 누구에게 양보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사람들이 스스로 허용하는 똑같은 권리 그 이상을 얻는 사회 구성원이 아무도 없기에 각자는 모두 자기에게 부과된 것을 똑같은 정도로 다시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동시에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고 그의 존재와 소유를 보존할 수 있는 보다 더 강력해진 함을 얻게 된다. 국민들이 오직 그들 스스로 동의하였거나 또는 그들의 자유로운 이성적인 통찰로 동의할 수 있었던 그러한 규정에만 예속되어 있는 한, 그들은 자기 자신의 의지 이외에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는 것이 된다. 국민들은 이로써 물론 자연 상태의 비예속성을 포기하지만, 모든 사람을 법률에 결속시키는 그 진정한 자유와 맞바꾸는 것이다."

@p250

이러한 국가에 대한 견해는 중요한 결과를 초래한다. 루소가 살던 시대에 사실상의 국가는 순수한 공동 의지에서가 아니라, 부유한 자들에 의한 가난한 사람들의 억압, 권력층에 의한 피지배자의 억압을 토대로 이루어진 국가였던 것이다. 따라서 루소의 국가 이론은 혁명의 도화선이 된 셈이다. 루소는 혁명이 곧 닥쳐오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우리는 위기 상황과 혁명의 세기에 가까이 접근해 가고 있다."

그렇지만 루소의 사상에서 철학적으로 결정적인 것은 그가 파악한 새로운 자유의 개념이다. 루소에 의하면, 인간이 무엇을 떨쳐 버리고 있는가, 무엇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가 하는 것들은 그다지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과연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를 강조한다. 즉 자유는 자유 의지의 요소를 벗어나 스스로 하나의 규칙을 자기 의무로 삼는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로써 그는 미래의 철학함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 같은 연유로 칸트는 자신이 루소에 의해 "올바르게 인도받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결국 루소의 참된 업적은, 그가 자연적 상태의 인간을 제시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물론 이것 역시 철학적 업적이긴 하지만--오히려 참된 자유의 개념을 발견했다는 데에 있다. "인간이 스스로 규정하여 부과한 법칙에 대한 복종, 그것이 곧 자유이다."

@p251

19. : 회의론의 난파

1711년 스코틀랜드의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데이비드 흄은 회의론자였다. 사람들은 회의론자라고 하면 흔히 풍채가 빈약하고 매부리코에 비아냥거리는 듯한 입을 가진 사람을 떠올린다. 그러나 흄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시대의 어떤 사람은--흄 철학의 신봉자이다--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그의 외모는 모든 관상학을 비웃는 듯하다. 관상학에 가장 정통한 사람일지라도 특징이 전혀 없는 그의 얼굴에서는 실오라기만큼의 정신력의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흄의 얼굴은 둥글넓적하고 살이 많이 찐 편이었으며, 입은 크고 우직한 인상을 주었다. 눈도 멍하니 생기가 없어 보였는데 그의 비만한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교양 있는 철학자라기보다는 차라리 거북이 요리를 먹고 있는 시의원을 대하는 듯한 생각이 들 것이다. 지혜는 분명코 아직 한번도 그런 별난 모습으로 변장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빗나간 모습에도 불구하고 흄은 철학자이며, 그것도 회의론적인 철학자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우리가 철학자라면, 우리는 회의론적 원칙을 따르는 철학자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p252

흄은 어린 시절부터 철학을 하려고 결심하였다. 16세에 이미 그는 열정적인 독서를 통해 자극 받아, "철학자처럼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고 쓰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1년 후에 가족들의 권유에 따라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 무미 건조한 법학에 그는 진절머리가 났다. 그는 철학적인 문제를 진지하게 파헤치기 시작했는데, 키케로가 그의 위대한 정신적인 친구가 된다. 이처럼 옆길로 이탈함으로써 그는 졸업 시험을 보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자신이 중요한 철학적 발견으로 나아가는 도상에 있다고 믿었다. "많은 공부와 심사 숙고를 거친 후 드디어 내게--이때 나는 18세 가량이었다--전혀 새로운 사유의 세계가 열렸다. 나는 이때 이 일에서 그 어떠한 권위에 복종하기보다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추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 새로운 길이 어디에 있는지는 더 이상 확실하게 알아낼 수 없었다. 흄은 훗날 이 시기의 모든 기록을 불태워 버린다.

흄은 우울증으로 4년 동안 병고에 시달리면서 철학에 더더욱 마음이 쏠리게 되었다. 그는 엄격한 자기 극기로 다시 건강을 회복하였다. 그의 자가 치료 중 하나는 날마다 억지로라도 두서너 시간씩 철학적 성찰에 몰입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흥분된 공상을 식힐 시간과 여유가 있었기에 나는 나의 철학적 탐구를 앞으로 어떻게 진척시켜 나갈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심사 숙고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철학적 탐구를 계속하는 것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하여튼 흄은 다시 건강을 회복하자 정식 직업을 찾아 나섰다. 그는 브리스톨에 있는 설탕 상회에서 상인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그는 자신이 이 일에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더구나 그는 상점의 주인과 다투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주인의 편지를 그냥 받아 적지 않고 주제넘게 문법에 맞추어 문장을 고치고 문체에 손을 대어 정리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p253

그래서 흄은 다시 순수한 철학적 실존을 시도한다. 그는 프랑스로 건너가 3년 동안 지내는데, 그는 그곳에서 영국에서보다 더 힘들게 생활비를 조달해야만 했다. 그는 파리에서 시작하여 이어서 런던에서 그의 최초의 저서인 '인간 본성에 대한 논고'를 집필한다. 당시 28세였던 흄은 그 책으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그의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 시대 사람들은 흄의 저술에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 일에 대해 흄은 일생 동안 가슴 아파했다. 그는 극심한 고독을 느꼈으며, 마침내 그 시대 사람들이 그토록 의도적으로 자기를 모르는 척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고의적인 적개심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갖게 된다. "나는 나의 철학으로 인해 아무도 없는 적막함과 놀라움과 혼란에 빠진 나 자신을 보았다. 나는 내가 기이하고 흉칙한 괴물일 것이라고 상상할 정도였다. 나 같은 괴물은 인간들 사이에 섞여서 인간들과 더불어 생활하기에 적당하지 않아, 모든 인간적 교제에서 쫓겨나 완전히 고독하고 암담하게 지낼 수밖에 없으리라. 나는 모든 형이상학자, 논리학자, 수학자, 신학자들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밖으로 눈을 돌렸을 때, 나는 사방에서 투쟁, 모순, 분노, 중상 모략, 경멸 등만을 볼 수 있었을 뿐이다. 내가 나의 눈을 내면으로 돌렸을 때, 나는 회의와 무지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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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은 그 이후의 몇 해 동안 발표한 도덕과 정치학에 대한 에세이로 약간의 성공을 거둔다. 그는 이제 윤리학과 정치학 교수가 되려고 힘쓴다. 그러나 이 교수직마저도 그를 자연신론, 회의론, 무신론이라고 비난하는 성직 사회의 반대에 부딪치고, 동료 철학자들 역시 힘써 지원해 주지 않아 좌절된다. 아마도 이때의 실패 때문에 흄은 당시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를 집필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반발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 죽을 때까지 발표하지 않은 채 놓아두었을 것이다.

그 다음 몇 해 동안 흄은 여러 가지 활동으로 분주하게 지냈으나 그 일들에 그다지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정신 질환에 걸린 후작의 시중을 들게 되는데 그의 자서전에서 이 일이 자신의 생애 중 가장 경악스러운 것이었다고 술회한다. 곧이어 그는 한 장군의 비서로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이때 그는 그의 기형적인 몸집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제복 때문에 많은 웃음거리가 된다. 그는 육군 법무관이 되었고, 그 후 대사로 승진한 장군의 비서로 비엔나와 투린에 간다. 이 모든 활동 중에도 그는 틈틈이 여유를 갖고 그의 처녀작을 다시 정리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인간 지성에 대한 논고''도덕 원리에 대한 논고'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이번에는 그런 대로 성공을 거두었다.

흄의 불안정한 사회 생활은 그가 에딘버러 대학 법학부 도서관 사서직을 맡게 되자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된다.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이 자리를 얻는 데도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또다시 자연신론자, 회의론자, 무신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 문제는 공식적인 싸움으로 비약된다. 흄은 한 남자가 이와 같은 비난을 그냥 받아들인 까닭으로 그의 애인이 떠나 버린 사실은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 흄은 새로운 일을 하면서 그의 4부작 '영국사'를 집필할 기회를 갖는다. 이 책은 마침내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제 정신적인 안정을 얻었고, 그가 "부도덕한 근대 문학"류의 책들을 우선적으로 도서관에 구입한다는 그의 적들의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p255

5년 후 흄은 도서관 사서직에서 물러나 파리 주재 공사관의 서기관으로 봉직한다. 그는 파리에서 급작스럽게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된다. 프랑스 수도 파리의 계몽된 상류 사회는--그 정점에는 퐁파두르 부인이 있다--두 팔을 벌려 그를 환영하였다. 그는 이 일에 대해 그 친구들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그들은 나의 생활에 대해 묻는다네. 나는 내가 암보리사(불로 불사의 약)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안 먹고, 넥타(신들의 음료)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안 마시며, 향기 이외에는 아무 것도 들이마시지 않고, 꽃길 이외에는 어느 곳도 산책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네." 그 시대의 계몽주의자인 그림 남작은 이렇게 전한다. "부인들 사이에서 이 못생긴 스코틀랜드 사람은 참으로 인기가 대단하였다." 또 다른 관찰자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오페라 극장에서는 으레 미소짓는 젊은 부인들의 얼굴 사이로 그의 넓적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이 사교계 생활에 너무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그녀들의 남편과 어머니들을 불안스럽게 만들지 않으며 그녀들의 비위를 맞추는 남자"라고 불렀다. 그에게 예쁜 여자들과의 관계를 결혼으로까지 연장시키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왜냐하면 "여자는 없어서는 안 될 생활 필수품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파리에서의 체류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흄은 곧바로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이곳 파리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하루에도 두세 번씩 나의 안락의자와 피난처를 그리워했다." "나는 이 예절 바른 사람들이 나에게서 떠나기 전에 내가 그들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영국으로 돌아왔지만, 그의 적막하기만 했던 좁은 고향으로는 아니었다. 그는 외무부 차관이 되었으나, 1년 후 이 자리를 내놓고 모든 공직 생활에서 완전히 물러난다. 그는 에딘버러에 살면서 친구들과 교제하며 철학을 하였으나 많은 논문을 발표하지는 않았다. 이때 그는 그의 "훌륭한 요리 기술"을 발휘한다. 1776년 흄은 그의 친구 아담 스미드가 술회하듯이 "완전한 정신의 평온 속에서" 세상을 떠난다. 그는 임종의 순간에도 회의주의를 버리라는 그 모든 권유를 마지막까지 완강히 거부하며 죽었다고 한다.

@p256

흄의 회의는 무엇보다도 형이상학에, 그리스 시대부터 철학을 규정해 왔던 사유의 저 거들먹거리는 체계에 향해 있다. 형이상학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초감각적인 사물에 대한 사변은 모두 그의 날카로운 투쟁의 대상이 된다. 형이상학적 이념이란 "인간 지성으로서는 결코 접근할 수 없는 대상을 파고들려고 버둥거리는 인간 허영심의 무익한 노력의 산물이거나, 또는 넓게 확트인 벌판에서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미신의 허깨비이다. 이 미신은 벌거벗은 자신을 감추고 보호하기 위해 얽히고 설킨 숲을 찾아 헤맨다." 따라서 이 사이비 철학은 가차없이 그 정체가 폭로되어야 한다고 흄은 생각한다. 우리는 그러한 철학의 허구적 문제들을 그것의 가장 깊숙한 은신처까지 추적해야 한다. 이러한 성향으로 볼 때 흄은 인간 인식의 어둠에 빛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계몽주의의 분명하고 철저한 대변자이다. 심지어 흄은 반계몽주의적, 형이상학적인 서적들을 공개적으로 불태워 버릴 것을 촉구하기까지 했다. "도서관의 책들을 한번 잘 살펴보자. 어떻게 도서관을 청소해야 할지! 예를 들어 신학 책이나 형이상학 책 한 권을 뽑아 들고 물어 보아야 하리라. 그 책은 수량에 관한 추상적인 연구를 포함하고 있는가? 아니다! 그 책은 사실과 존재에 대해 경험에 맞는 논의를 담고 있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 책을 불 속에 던져 버려라! 왜냐하면 그 책은 궤변적인 허구만을 담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p257

그렇다면 흄은 그가 그토록 완강하게 반대해 싸우는 그 형이상학 대신에 무엇을 내놓을 수 있는가? 아니면 그에게 있어서 이제 철학은 형이상학과 더불어 종말을 고하게 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그는 오히려 바로 이러한 형이상학과 반대되는 하나의 새로운 분야를 철학에 제시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철학에서 거의 전적으로 새로운 전환을 불러일으키려고" 한다. "이러한 쓸데없는 문제들에서 탐구를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오직 한 가지 길이 있을 뿐인데, 그것은 바로 이 길이다. 인간의 지성을 엄밀히 조사 연구하고 이 지성의 힘과 능력을 정확하게 분석하여, 지성이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는 어두운 대상에는 전혀 부적당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성은 초감성적인 영역으로 탈선하여 방황해서는 안 되고, 엄격히 경험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어야 한다. 요구되고 있는 것은 "인간 지성의 제한된 능력에 가장 알맞는 대상에 우리의 연구를 국한하는 것이다. 인간의 상상은 본성적으로 커다란 비약이다. 인간의 상상은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것, 비정상적인 모든 것들을 즐기며, 통제 없이 시간과 공간과는 가장 관계가 먼 부분까지 대강 대어봄으로써 습관상 너무나 익숙해진 대상들은 회피한다. 그러나 올바른 판단 능력은 그것과 정반대의 절차를 밟으며, 온갖 멀리 놓여 있는 고도의 탐구를 한쪽으로 제쳐놓고, 익숙한 삶과 일상의 실천과 경험에 속하는 그러한 대상에 자신을 국한시킨다." 요컨대 흄은 철저한 경험주의자이다. "우리의 이성은 경험의 도움 없이는 현실적인 실재와 사실과 관련해서 어떠한 추론도 수행할 수 없다."

흄이 경험에 대해 더 상세하게 탐구하게 되자, 형이상학적 사유에 반대하는 투쟁은 더 강화된다. 그는 형이상학에서 그것의 진리를 보증하는 계기가 무엇인지 묻는다. 그는 이 물음에 대해 지성과 이성이 제공해 주는 것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흄이 볼 때, 한 세대 앞서간 대륙 철학의 합리주의는 분명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합리론은 인간의 정신에 어떤 선천적 관념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 관념은 경험과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참인 것으로서, 예컨대 보편적인 존재 개념이나 자아의 이념이나 신에 대한 개념 등이 그렇다고 한다. 흄은 이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한다. 지성과 이성은 그 자체로서는 어떤 진리도 파악할 수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밖에 무엇이 남아 있단 말인가? 최종적으로는 오직 감각적 인상들, 즉 듣고, 보고, 느끼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욕구하고, 원할 때 우리가 가지게 되는 생생한 감성만이 남는다. 모든 인식은 감성에서 출발한다. 감성은 또한 궁극적으로 참임을 증명해 주는 그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감성의 배후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적인 것을 찾아서는 안 된다. 감각적 인상은 스스로 모든 참된 인식을 위한 기초를 형성하며, 동시에 그러한 인식에서 유일하게 직접적인 대상을 형성하고 있다.

@p258

그렇지만 단순한 감각적 인상에서는 인간의 인식에 주어지는 것과 같은, 전체 세계의 모습은 결코 형성될 수 없다. 그러므로 표상이 매개의 역할을 떠맡으며 등장한다. 즉 대상과 행위 그리고 이들의 연결에 대한 표상이 그것이다. 그러나 표상은 직접적으로 참된 것이 아니라, 다만 감각적 인상으로 소급 연결됨으로써만 참됨이 증명될 수 있다. 여기에서 감각적 인상에 의해 입증되는 것만이 진리임을 주장할 수 있다는 사실은 여전하다. 따라서 철학의 중심 과제도 모든 표상을 직접적인 감각적 인상으로 해체시키는 것이다.

흄의 방법상의 관점은 특히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심장하다. 이는 자아의 문제와 인과율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먼저 첫 번째 문제를 살펴보면, 흄은 여기에서도 자신의 원칙을 적용시킨다. 원래 단일하게 그 자체로서 파악될 수 있는 자아는 없다. "왜냐하면 자아란 감각적 인상의 장소이기는 하지만, 그 자신이 감각적 인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아나 인격은 결코 인상이 아니다. 오히려 자아는 우리의 여러 가지 인상과 표상이 관련을 맺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흄에게 있어서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것은 형이상학적 철학에서와 같이 어떤 하나의 실체가 아니다. 오히려 자아는 느낌들이 함께 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붙잡기 어려운, 빠른 속도로 따라다니며 끊임없는 흐름과 움직임 속에 있는 여러 가지 의식 내용들의 단순한 묶음이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p259

인과율의 원칙에 대한 흄의 비판은 철학사적으로 더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이 비판은 칸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할 정도이다. "솔직하게 고백하건대 데이비드 흄에 대한 나의 기억은 내가 수년 동안 빠져 있었던 독단의 선잠에서 비로소 깨어나게 했고, 사변 철학 분야에서의 나의 연구에 완전히 다른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는 것이다."

흄은 우리가 모든 사건을 인과율의 관점에서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다시 말해 어떤 하나는 필연적으로 다른 것에서 뒤따라 나옴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질서정연한 세계에 관한 표상을 제공해 준다. 그러나 이제 흄은 도대체 어떠한 근거에서 인간은 사물과 사건의 인과적인 결합이라는 확실한 전제를 주장할 수 있는가 하고 묻는다. 진리는 오직 직접적인 감각적 인상 안에만 놓여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인과율은 감각적 인상에 속하지 않는다. 감각적 인상의 도움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손이 움직이고 공이 구른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건이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똑같은 확실성을 갖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 어떤 대상도 감각으로 내보여지는 속성들을 통해서는 그 대상을 있게 한 원인과, 그 대상에서 흘러나오게 될 영향(결과, 작용)을 드러낼 수 없다."

@p260

그런데 우리는 실제 생활에서 마치 그와 같은 인과율의 연결이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아니 그러한 가정이 없이는 어떠한 행동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신뢰할 만한 확실성은 아니다. 인간의 사유는 그것을 입증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일상적인 행위에서의 그 확실함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흄은 이 확실함을 "습관"으로 끌고 올라간다. 따라서 순수한 주관적 원칙으로 끌고 올라가며, 그것을 "믿음"이라고도 지칭한다. 우리는 한 가지 상태에 다른 상태가 뒤따르는 사실을 되풀이해서 확인하기 때문에, 드디어는 거기에 어떤 필연적인 연결이 있다고 믿게 되고, 그 결과 인과성이라는 개념을 만들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개념은 사실상 고마운 속임수일 뿐이다.

인간의 인식 능력과 관련된 흄의 회의론은 계몽주의의 종말적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다. 계몽주의는 어둡고 혼란스러운 표상의 밤에서 드디어 이성의 빛의 밝음을 찾는 인간의 자만심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제 이 이성 자체가 문제가 된다. 흄은 우리가 이성의 "속임수의 연역"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고 분명히 강조한다. "이렇게 인간의 눈멈과 나약함에 대한 깨달음은 모든 철학의 성과이다." "전체 세계는 하나의 수수께끼이고, 설명될 수 없는 신비이다. 회의, 불확실성, 판단의 유보는 가장 날카롭고 가장 주도 면밀한 탐구를 통해 우리가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귀결이다."

흄은 물론 그가 제한한 길을 추구해 갈 때 결국에 가서는 그러한 귀결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이때 그가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나는 내가 수많은 모래톱 위를 치달려 좁은 해협에서 가까스로 난파를 모면한 뒤, 그래도 여전히 용기를 가지고 폭풍으로 파손되어 물이 스며드는 배를 출범시키고 있는 사람, 아니 더 나아가 그러한 불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세계 일주를 생각하는 그러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된다." 그렇지만 흄은 이 일을 완전하게 성취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흄에 대한 칸트의 다음과 같은 말은 옳다고 할 수 있다. 흄은 "그의 배를 안전한 곳으로 끌고 오기 위해 그의 배를 해변(회의주의)에 정박시켜 놓았다. 그 배는 계속 거기에 매여 있으면서 녹슬어 버릴 것이다."

@p261

20. 칸트: 사유의 정확성

진정한 교수라면 교수다운 몸가짐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통념이다. 우리는 그러한 몸가짐으로서 일종의 위압적이고 완고한 품위를 떠올린다. 거기에는 약간의 건망증과 산만함이 섞여 있을 것이라고 여기게 되며 또한 세상일에 초연한 듯한 비현실적인 태도도 덧붙여 생각한다. 요컨대 이상하면서도 감동적으로 보이는, 존경할 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익살스럽게 보이는 아주 독특한 꼼꼼함이 바로 교수에게서 볼 수 있는 몸가짐이리라. 그러한 교수의 전형적인 예로 한 사람을 들어보라고 한다면, 아마도 예외 없이 임마누엘 칸트라는 이름이 들먹여질 것이다.

@p262

실제로 칸트는--적어도 그의 말년에는--꼼꼼함과 정확성의 천재였다. 그 시대의 전기 작가는 칸트가 그의 친구 그린을 방문한 것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칸트가 매일 오후 그린을 방문할 때 그린은 안락의자에서 잠을 자는 중이고, 칸트는 그 옆에 앉아서 생각에 잠기다가 그도 잠이 든다. 조금 후 은행 지배인인 루프만이 와서 또 똑같이 생각하다 잠이 든다. 드디어 정해진 시간에 모터비가 방으로 들어와서 이 사람들을 깨우기에 이른다. 그러면 그들은 7시까지 매우 흥미있는 대화를 나눈다. 이 사람들은 그야말로 정각 7시에 서로 헤어진다. 나는 그 거리의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종종 듣곤 한다. '아직 7시가 안 되었을 거야, 칸트 교수가 아직도 지나가지 않았으니까.'"

노인이 된 칸트의 하루 일과는 매우 엄격하게 짜여져 있었다. 한 친구는 칸트의 일과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칸트는 여름이나 겨울이나 매일 아침 정각 5시에 일어난다. 그의 하인은 정확하게 445분에 칸트의 침대에 가서 그를 깨우는데 그의 주인이 일어나기 전에는 침대를 떠나지 않는다. 칸트가 잠이 덜 깬 얼마 동안은 하인에게 자기를 좀 조용히 놓아두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이 하인은, 칸트가 아무리 그런 부탁을 하더라도 자신을 더 오랫동안 침대에 머물러 있게 해서는 안 된다는 단호한 명령을 받았다. 때문에 하인은 그가 시간에 맞추어 일어날 수 있도록 계속 흔들어 깨운다." 규칙적인 시간표에 따라 그 다음에는 서재에서 공부를 하고 이어서 강의를 한다. 오후에는 친구들과 둘러앉아 오랜 시간에 걸쳐 식사를 즐긴다. 정각 10시에 정확하게 잠자리에 드는 것도 의례적으로 지켰다. 이 일에 대해 그 시대의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수년간의 습관을 통해 그는 특별한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는데, 그 기술은 자신의 몸을 이불로 둘둘 싸는 것이다. 잠자리에 들 때, 그는 먼저 침대 끝에 앉았다가 가볍게 침대 안으로 뛰어들고는, 이불의 한쪽 모서리를 한쪽 어깨 위에서 등 밑을 지나 다른 쪽 어깨에 닿도록 끌어당기고, 특별한 기술로 역시 다른 쪽 모서리를 그 밑으로 싸 그렇게 계속 온몸을 감싼다. 이렇게 몸을 싸서 마치 누에가 고치를 짓는 것과 같은 모양을 하고는 잠이 들기를 기다린다."

@p263

칸트의 하루 일과처럼, 그의 주위 환경도 매우 정확하게 정리 정돈되어 있어야만 했다. 만일 가위나 주머니칼이 평상시의 위치에서 조금이라도 빗나가 있거나 또는 의자 하나라도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으면 그는 불안해서 안절부절 못 했다. 칸트를 가장 화나게 하는 것은 친구들 때문에 규칙적인 그의 생활 흐름이 깨지는 일이었다. 언젠가 한 귀족이 칸트를 시골을 두루 가로지르는 마차 산책에 초대했는데, 이 산책이 너무 길어지자 칸트는 "10시경에 불안과 불만으로 뒤범벅이 되어 그의 집으로 되돌아 왔다"고 한다. 그는 철학자답게 이 작은 체험을 통해 자신의 일상적인 생활 규칙 하나를 정한다. "어느 누구의 마차 산책에도 절대로 따라가지 말 것." 어떤 전기 작가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 세상의 어떠한 것도 그를 그의 규칙에서 벗어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규칙적인 일상을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사건들보다 칸트에게 더 고통스러운 일은 주위에서 들려 오는 듣기 싫은 소리가 그를 계속해서 방해하는 것이다. 한번은 그의 이웃집 수탉이 칸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사색을 견딜 수 없게 방해하는 그 수탉을 사들이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 주인은 "어떻게 수탉이 현자를 방해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 칸트는 그 일로 인해 이사를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새 집은 시의 감옥 옆에 있었다. 그런데 당시의 관습으로는 수감자들이 죄를 뉘우치는 마음으로 찬송가를 불러야만 했다. 이들 수감자들은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지독하게 큰 목소리로 찬송가를 불러댔다. 칸트는 그 도시의 시장에게 "감옥에서의 그와 같은 위선적인 관행"에 대해 화를 내며 불평을 토로한다. "나는 수감자들이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면 그들의 영혼이 구제받지 못하기라도 하듯이, 창문을 닫아도 노랫소리가 들릴 정도로 그들이 그토록 큰 소리로 찬송가를 불러야 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칸트가 이러한 방해에 얼마나 화가 났는지는 그가 '판단력 비판'에서까지 이 일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이 책의 제2판에서 각주를 삽입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집안에서 예배를 드리며 찬송가를 부를 것을 권장하는 사람들은, 이웃 사람들에게 함께 노래할 것을 강요하거나 그들의 사색하는 작업을 포기하도록 강제한다. 그들은 그와 같은 시끄럽고 위선적인 예배 때문에 시민들이 커다란 불평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p264

애써서 일상 생활의 리듬을 지키려는 마음가짐과 하루의 일과를 짜는 데서의 꼼꼼함에는 엄격한 자기 극기가 요구된다. 늙은 칸트는 몸소 그러한 자기 극기를 실천했는데, 물론 이때에도 그 까닭을 분명하게 설명한다. 그는 아침 식사를 단지 두 잔의 차와 파이프 담배 한대만으로 때운다. 그는 저녁 식사는 완전히 없애 버렸다. 한 증인이 보고하듯이, 차는 "아주 적은 찻잎에서 우려낸 그야말로 묽은 차"이며, 파이프 담배는 "동시에 식욕 감퇴제"로 이용되었다. 커피에 관한 한 칸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더욱 엄격하였다. "칸트는 커피를 너무나 좋아했기 때문에 커피를 마시지 않기 위해서는 대단한 자제력이 필요했고, 특히 모임에서 커피 냄새가 그를 자극할 때면 더욱 그랬다. 그는 커피 기름이 건강에 해롭다고 해서 더욱 철저하게 피했다." 그의 엄격한 규칙에 속하는 것으로는 또한, 아무리 심한 병에 걸렸을지라도 의사의 처방과 상관없이 매일 약 두 알 이상은 절대 먹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칸트는, 병을 피하기 위해 과다한 약을 사용해 죽은 어떤 사람의 묘비에 새겨진 글을 즐겨 언급한다. "무명씨는 건강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가 건강한 것보다 더 건강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여기에 누워 있다."

@p265

이러한 엄격한 자기 영양 관리에 힌트를 얻어 '단순한 의지로 자신의 병적인 감정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의 힘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펴낸다. 이 책에서는 각 장의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다음과 같은 것들이 다루어지고 있다. "잠에 관해서", "먹고 마시는 데 관해서", "고민으로 생기는 병적인 느낌에 대하여", "호흡 조절을 통한 병적인 사고의 치료와 예방" 등이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 제시하고 있는 방법들 중에서 어떤 것은 약간 기이하기도 하다. 가령 "모든 사람들에게는 처음부터 숙명적으로 일정한 양의 잠이 배정된다. 성년이 되어 자신의 활동 시간 중 너무나 많은 시간을 잠에 할애한 사람은, 자신에게 오랜 시간 동안 자지 않을 것을 약속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오래 살기를 바랄 수 없을 것이다." 칸트는 또 하나의 다른 그의 건강 규칙을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때때로 코감기와 기침감기가 잘 걸렸다. 그래서 나는 잠을 편히 잘 수가 없었다. 이렇게 밤잠을 설치는 것에 화가 나서 나는 입을 확 다물고 오직 코로만 숨을 쉬기로 결심하였다. 처음에는 가벼운 휘파람 소리가 날 뿐이었다. 그러나 중지하거나 늦추지 않고 계속하자 점점더 많이 숨을 들이쉴 수 있었고 나중에는 코막힘이 뚫려서 자유롭게 숨을 쉬게 되었다. 그러고 나자 나는 금방 잠이 들었다. 기침에 관해서 말한다면, 특히 보통 영국 사람들이 말하는 (침대에 누워서 하는) 노인성 기침은 나를 몹시 괴롭혔다. 왜냐하면 그놈의 기침이 침대 안이 따끈해지자마자 시작이 되어 잠이 드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입을 열고 숨쉴 때 들이마시는 공기가 기관지를 자극하여 생기는 이 기침을 막기 위해서는 기계적인 (약물 치료적인) 조치가 필요하지 않고 단지 직접적인 감정의 통제가 필요하다. 즉 기관지의 자극에 신경쓰지 말고 어떤 다른 대상에 정신을 집중하여 입으로 숨을 내쉬는 것을 중지해 버린다. 그러면 이것은, 분명히 느낄 수 있듯이 피가 얼굴로 몰리고 이때 이 똑같은 자극에 의해 생긴 침이 숨을 내쉬는 것을 막으며 고인 침을 꿀꺽 삼키도록 만든다. 이 감정의 조절은 정말로 대단한 정신 집중을 필요로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또한 더욱 기분이 좋게 된다."

@p266

교수들의 가장 큰 골칫거리인 건망증에 대해서도 칸트는 기이한 치료 방법을 개발한다. 그가 자기 하인 람페를 해고했을 때, 그로 인해 발생한 주변 세계의 변화를 어렵사리 감내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그 일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고 결심한다. 그리고 이 결심을 다시는 잊지 않기 위해,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경고문을 붙여 놓았다. "람페는 잊어 버려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이 철학자의 생활에는 이상한 일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는 자기의 침실 공개를 철저하게 금지하였다. 이 일에 대해 한 전기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조그마한 실수로 인해 빈대의 생식과 증식에 대한 특별한 가설을 세우게 되었고, 이 가설을 확고한 진리로 간주하였다. 그는 다른 방 하나를 햇빛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창의 덧문을 항상 내려놓았었는데, 시골로 잠시 여행을 떠날 때 창의 덧문을 닫아두는 것을 잊어 버렸다. 그는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그 방에 빈대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전에는 빈대가 전혀 없었던 것으로 믿었기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빛은 작은 곤충들의 생존 여부에 치명적이기 때문에 스며드는 광선을 차단하는 방법으로 빈대의 번식을 막을 수 있다.' 그는 자기 생각이 확실히 옳다고 믿었기 때문에, 눈곱만한 의혹과 아주 작은 의심도 불쾌하게 여겼다. ... 나는 그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하면서, 그의 침실과 침대를 깨끗이 청소하도록 배려했다. 그러자 빈대들은 차츰 줄어들었다. 비록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도록 덧문과 창문을 거의 날마다--물론 칸트가 모르게--열었는데도 빈대는 줄어들었다."

@p267

칸트의 기이함은 그가 그의 고향 도시 쾨니히스베르크의 성곽을 거의 떠나 본 적이 없었다는 데에도 있을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1724년에 태어났고, 그곳에서 역시 학생 시절을 보냈다. 그 후 그는 처음으로 귀족 집안의 가정 교사가 되었다. 그가 가정 교사 일을 성공적으로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여튼 그의 전기 작가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는 어린이들을 적절하게 잘 다루고 그들의 수준에 맞추어 얘기를 나누는 것을 하나의 뛰어난 기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이 기술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은 불가능했었다고 설명한다."

9년이 지나서 칸트는 자신이 설정했던 목표, 즉 대학 강단에서는 목표를 달성하였다. 그가 가르쳐야 할 교과 내용은 오늘날의 교수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였다. 철학 외에도 수학, 물리학, 지리학, 자연법, 역학, 광물학 등을 그것도 1주일에 20시간씩 강의를 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때때로 이 같은 노동에 한숨을 내쉬곤 하였다. "나는 날마다 내 교탁의 귀퉁이에 앉아서 무거운 망치를 두들기는 것과 비슷한 강의들을 단조로운 박자로 계속 진행해 나갔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칸트를 무미건조한 강단 철학자로 상상해서는 안 된다. 그 시대의 기록들은 한결같이 그의 재기 발랄한 성격을 칭찬하고 있다. 헤르더는 이렇게 쓴다. "가장 발랄한 시절의 칸트는 젊은이다운 경쾌함과 활발함을 지니고 있었으며, 나는 그가 이것을 그의 노년에까지 지속시켰다고 믿는다. 사색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그의 넓은 이마에는 항상 지울 수 없는 명쾌함이 서려 있었다. 심원한 사상의 달변이 그의 입술을 타고 흘렀고 해학과 재치와 밝은 분위기는 그의 곁을 떠날 줄 몰랐다. 한마디로 그의 교훈적인 강의는 가장 유쾌한 만남의 시간이었다. ... 어떠한 간계도, 어떠한 종파도, 어떠한 이득도, 어떠한 명예도 결코 그의 진리를 밝히고 전하는 일을 그만두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학생들을 스스로 사유하도록 일깨워 주었고 스스로 사유하도록 기분 좋게 이끌어 주었다. 강요는 그의 성격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내가 지금 여기서 가장 커다란 감사와 존경으로 말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임마누엘 칸트이다. 그의 초상화는 나의 눈앞에 평화스럽게 걸려 있다."

@p268

그렇지만 외적으로 그리 대단한 진전이 없었던 것은 칸트를 매우 우울하게 하였다. 15년의 오랜 세월 동안 그는 사강사로 머물러 있었다. 그는 두 차례 교수직에 지원했으나 두 번 다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마침내 그에게 문예학 교수직이 제공되었는데, 그 교수직은 학술 축제와 국가 축제 때 시를 짓는 것이 의무였다. 칸트는 이 자리를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은 다행스럽게도 '순수 이성 비판' 대신에 칸트의 시를 읽어야만 하는 사태를 모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칸트는 46세 때 드디어 정교수로 초빙받게 된다. 왕의 교수 임명서에는 그 시대의 엄숙한 문장으로 "그의 근면과 탁월함 때문에 그리고 또 무엇보다도 그가 철학에서 이룬 학문적인 성과 때문에" 그를 교수로 초빙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교수직에는 그가 "학생들을 열성적으로 가르쳐 그들을 부지런하고 재능 있는 주체로 키우기 위해 노력하며, 이를 위해서 훌륭한 모범을 보여야 하는 것이" 전제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때부터 칸트의 생활은 아주 평온하게 진행되어 나간다. 프로이센 문교부 장관과의 알력을 제외하고는 외적인 사건도 그렇게 많이 일어나지 않았다. 문교부 장관은 칸트가 종교에 대해 너무 솔직하게 서술했다고 화를 냈다. 칸트는 즉시 다음과 같은 근거를 대며 양보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는 것이 전부 참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진리를 공공연하게 말하는 것이 의무는 아니다."

이제 여러 가지 생활 여건도 안정되었기에 칸트는 결혼을 해 볼까 생각했다. 그러나 두 번의 결혼 시도는 결국 모두 성공하지 못하고 만다. 이 일에 대해 그 시대 사람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그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두 여인을 알고 있었다. 그녀들은 차례로 칸트의 마음을 사로잡아 호감을 갖게 했다." 그러나 그는 "한 여자에게는 청혼을 하는 데 너무 뜸을 들이다가--이 청혼이 거절되지는 않았을 것이다--그 여자가 먼 곳으로 이사를 가 버렸다. 다른 여자는, 칸트보다 더 빨리 결정을 끌려 약혼을 요구하는 솔직한 남자를 택해 따라갔다." 이 일에 대해서도 칸트는 통념적인 반성으로 위안을 삼는다. 가령 "독신의 ... 나이든 남자들은 결혼한 남자보다 대부분 더 오랫동안 원기 왕성한 모습을 유지한다"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는 약간은 심통이 나서 이렇게 덧붙인다. "결혼한 사람들의 험해진 용모는 분명 그들이 걸머진 굴레가 힘들다는 것을 폭로하는 것이 아닐까?"

@p270

1804년 칸트는 80세의 나이로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좋았어"였다.

되돌아보면, 칸트의 생애는 전형적인 독일 학자의 생활, 즉 꼼꼼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영위했고, 고풍스럽고 때때로 약간은 기이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인물이 철학사도 인정하는 가장 위대한 업적의 하나를 이룩해 놓았다. 그가 자신의 사상을 발표하고 난 뒤에는 이전과 똑같은 의미의 철학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듯 그의 사상은 철학의 정신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셸링은 애도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의 해설자와 신봉자라는 이름으로 그에 대해 만화나 조야한 석고상을 그려내고 있는, 또한 마찬가지로 격렬한 반대자들이 분노로 그에게 덮어씌우고 있는, 그 모든 잘못된 기형의 엉터리 모습에도 불구하고 전혀 일그러짐 없이, 그의 정신의 위대한 상은 그의 빈틈없이 완결된 유일한 독특함 때문에 장래의 전 철학 세계를 통해 두루두루 빛을 낼 것이다."

그렇다면 칸트의 철학함에서는 무엇이 문제였는가? 이 물음에 단 한 마디로 대답하기는 어렵다. 칸트의 해설자들만큼이나 많은 상이한 칸트 해석이 있다. 그의 본래의 관심은, 눈에 보이는 실재와 이 실재의 배후에서 본래 작용하고 있는 바 그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는데, 즉 모든 제약적인 것 안에 혹은 모든 제약적인 것 저편에 있는 무제약적인 것에 대해 묻고 있는 데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그의 의도를 가장 적절하게 보고 있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뜻한다. 칸트의 사상은 특히 고대이래 형이상학이라 지칭되어 왔던 그것에로 향하고 있다. 즉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을 넘어서서 실재의 최초이자 궁극적인 근거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칸트 자신이 이 점을 이렇게 확인하고 있다. "내가 숙명적으로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대는 형이상학이다." 이 형이상학에 "인류의 참되고 지속적인 안녕"이 달려 있으며, 그래서 "형이상학의 대상은 인간 본성에 아무 상관도 없는 그런 것"일 수는 없다.

@p271

칸트는 형이상학의 문제를 세 가지 관점에서 분명히 말한다. 그는 인간에 있어서의 무제약적인 것, 세계에 있어서의 무제약적인 것, 그리고 단적으로 무제약적인 것에 대해 묻는다. 인간에게 그의 제약된 유한한 존재를 훨씬 능가하고 있는, 그래서 죽음까지도 견뎌 그 후에도 지속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는가? 이렇게 해서 그는 영혼의 불사불멸에 대한 물음에 이르게 된다. 세계 안에는 단지 제약의 사슬만이 있는가, 아니면 세계는 무제약적인 행위를 위한 여지를 제공하고 있는가? 이렇게 해서 자유에 대한 물음이 고개를 쳐들게 된다. 그리고 끝으로 그 안에 모두 제약된 것이, 즉 세계와 인간이 똑같이 궁극적으로 근거를 두고 있는 어떤 것이 있는가? 이렇게 해서 신에 대한 물음이 설정된다. 따라서 칸트는 ", 자유, 그리고 불사 불멸"을 형이상학적 사유의 "피할 수 없는 과제"라고 지칭한다.

@p272

따라서 칸트는 그것에 대한 확실성에 도달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분야에서는 모든 것이 의심스러운 것으로 드러난다. 형이상학의 오랜 역사를 되돌아 볼 때 모든 것은 "단순한 더듬거림"에 불과했다. 그러나 사실이 만일 그렇다면, 직접적으로 형이상학적인 구상을 갖고 시작할 수는 없다. 오히려 먼저, 도대체 어디서부터 그러한 형이상학 자체의 의문성이 유래하는지, 도대체 어디에 이유가 있는지 등을 물어 보아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칸트가 그의 위대한 저서 '순수 이성 비판'에서 제시한 물음이다. 이 책의 본래의 주제는 인간 정신이 형이상학적 인식을 얻으려고 버둥대는 인식의 드라마이다. 배우들은 철학의 핵심 문제들을, 연극은 확실성에 도달하려는 끊임없는 시도와 이 모든 노력이 끊임없이 무기력하게 수포로 돌아가는 그 파멸을 다루고 있다. 칸트는 드디어 아무런 확실한 대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인간 이성의 본질 자체에 근거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다시 말해 이성은 눈에 보이는 실재의 배후로 되돌아가서 그 근거를 들여다 볼 수 없다. 이것은 예컨대 자유에 대한 물음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인간이 자유롭다는 데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데 대해서도 납득할 만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영혼의 불사불멸과 신에 대한 물음도 이와 유사하다. 그 물음들도 이론적 이성의 도움을 가지고는 대답할 수 없다.

결국에 가서 물음은 막다른 길목에 이르고 만다. 칸트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표현한다. 즉 그는 그러한 상태를 "균열과 착란의 대두", "혼란", "애매 모호함과 모순의 영원한 순환"이라고 말하고, 심지어는 그것이 "인간 이성에는 어쩔 수 없는 진정한 심연"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인간은 인간 정신의 가장 큰 관심사가 문제가 되는 바로 그곳에서, 즉 신, 자유, 영혼의 불사 불멸에 대한 물음에서 필연적으로 길을 잘못 든다. 결국 칸트는 인간 정신의 형이상학적 노력을 일종의 항해에 비유한다. "무한히 넓고 폭풍우 몰아치는 대양의 항해 ... 거기에서는 사방의 짙은 안개와 금세 녹아 버릴 얼음 덩어리가 새로운 땅인 양 현혹하고 있기에 육지를 찾아 여기저기 표류하는 항해자를 헛된 희망으로 속여 그로 하여금 모험에 뛰어들게 한다. 그렇지만 항해자는 결코 그 헛된 희망을 떨쳐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것을 실현할 수도 없다."

@p273

그렇지만 칸트는 회의적인 자포 자기에 빠지지는 않는다. 그는 형이상학의 "새로운 탄생"이 임박했음을 확신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인간 이성의 자기 성찰에서만 자라나을 수 있다. 인간 이성은 자신의 고유한 영역이 어디에 있고 자신의 한계가 어디에 있는지를 통찰해야 한다. 그러한 의도로 '순수 이성 비판'"인간 인식이라는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는 직물"을 검토한다. 이러한 목적 아래 칸트가 착수한 매우 힘든 탐구에서 그의 좀스러우리만큼 꼼꼼한 성격은 성실함에 기인함이 입증된다. 그는 실재가 인간의 정신 속에서 직접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인식을 결코 올바르게 묘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오히려 자기 측에서 인식의 과정 안으로 결정적인 것을 가지고 들어간다. 즉 시간과 공간의 표상과 지성의 근본 개념이 그것이다. 인식하는 사람이, 감각이 그에게 중재해 주는 감정에 이 표상과 근본 개념을 적용할 때 그에게 비로소 실재의 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인식함은 인식하는 주체의 첨가로 이루어지며, 그렇게 하나의 물질적 부분이 된다.

칸트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결론을 끄집어낸다. 즉 실재는 그것이 그 자체로서 있는 그대로 그렇게 인간에게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 인식 능력의 특별한 방식에 근거해서 그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사물 그 자체(물자체)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현상으로서의 사물을 파악할 뿐이다. 이것은 인식의 영역에서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숙명이다. 따라서 형이상학의 모든 시도는 인간에게 배당된, 그에게 걸맞는 인식 영역을 넘어서는 노력임이 드러난다. 궁극적으로는 바로 여기에 형이상학의 실패 이유가 있다. 그런데 인간은 계속해서 자신의 인식을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까지 넓히려고 노력한다. 인간은 그러한 노력에 거듭 실패하여 오직 유일하게 확실한 앎의 자리인 경험에로 내몰려 그리로 되던져진다. 인간은 "하늘에까지 닿을 수 있는" "탑 하나를" 건축하려고 하지만, 그는 "경험의 차원에서의 우리의 작업을 위해서 충분히 넓고 충분히 높은" "단독 주택 한 채"만을 지을 수 있을 뿐이다.

@p274

그 시대 사람들은, 일부는 열광적인 찬사 속에 일부는 격렬한 반대 속에, '순수 이성 비판'의 의미를 파악했다. 철학자 멘델스존은 칸트를 경외하면서도 "모든 것을 콩가루로 만드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이에 반해 헤르더는 그 책에서 단지 "무한한 허깨비들의 왕국", "발랄한 젊은 감정의 파멸", "영혼의 황폐화"만을 발견할 뿐이었다고 말한다. 피히테는 이에 반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칸트가 아무런 올바른 것을 붙잡지 못했다고 질책한다. 그렇다. 그는 아무 것도 붙잡지 못했다. 단지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빛 속에서의 사물은 어둠 속에서 더듬거릴 때와는 완연히 다른 것이다."

'순수 이성 비판'에 몰두하는 것이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을 예나에서 일어난 한 기묘한 사건이 입증하고 있다. 한 학생이 그의 친구에게 이 책은 너무 어려워 그 친구가 그 책을 이해하려면 30년은 공부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친구는 이러한 모욕을 참지 못하고--신속한 대답 대신에 주먹을 날려라라는 원칙을 충실히 지켜--자신을 모욕한 그 학생에게 결투를 신청하였다.

'순수 이성 비판'의 결론에 주목할 때, 경험의 영역에만 인식을 제한하라는 그 책에서의 요구가 과연 마지막 말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대두된다. 그리고 또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인간은 그토록 끊임없이 그에게 설정된 한계를 넘어서려고 바둥거리는가라는 물음도 제기된다. 그것은 인간이 세계 안에서만 방향을 잡으라는 과제 속에서는 자신의 본질을 완전하게 충족시킬 수 없다는 데 대한 징표가 아닐까? 실제로 그렇다. 칸트의 확신에 따르면, 인간은 그 자신의 존재 근거부터 이미 자신을 넘어, 유한한 세계를 넘어 물음을 던지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이것을 포기한다면,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며, 야만인이 되거나 혼돈 속에 빠져 버릴 것이다.

@p275

그렇기 때문에 칸트는 새로운 형이상학적 사유를 위해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물론 순전히 이론적인 연구만으로 그 이상의 성취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인간은 단순히 사고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행위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순전한 사유에는 닫혀져 있는 그것이, 인간이 행위하고 있는 그곳과 이 행위에 대해 성찰하는 그곳에서는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면 어떨까? 행위하는 인간을 향한 이 시각은 칸트가 형이상학적 문제에서 제시하는 결정적인 방향 전환이다.

다시 말해 칸트는 그가 헛되이 이론의 영역에서 찾았던 바로 그 무제약자를 실천의 영역에서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주장하기를, 만일 인간이 어떻게 그가 행동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알기를 원한다면, 그에게 멋대로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금하는 하나의 무조건적인 명령이 대두되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이때 인간에게 그 명령, 즉 바로 그렇게 행위해야 한다는 그 명령이 모든 합리적인 숙고를 넘어서 직접적으로 확실해진다. 따라서 여기 인간의 제약된 현존재 한가운데에 하나의 무제약적인 것이 나타난다. "너는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라는 무제약성이다.

칸트는 이렇게 무제약적인 것의 영역으로 넘어간 뒤에, 그가 이론적인 파헤침의 영역에서는 풀 수 없었던 신, 자유, 불사불멸에 대한 물음들도 이제는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에게 명령이 내려질 때, 인간은 그로써 그가 결단의 상황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결단은 단지 자유가 주어졌을 때에만 가능하다. 이렇듯 인간은 그가 무조건적인 명령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자유를 확신하게 된다. 이것은 형이상학에 아주 중요한 귀결을 가져온다. 무조건적 명령을 들으면서 그 명령 안에서 보증받게 되는 자유 속에서 인간은--그가 여전히 그토록 유한성에 붙들려 있다 하더라도--그의 존재의 본질적인 것 속에서는 초자연적 질서에 속해 있음을, 이것이 그에게 그의 고유한 품위를 주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칸트에게 인간은 두 세계의 시민이다. 칸트는 이 생각에서부터 영혼의 불사불멸과 신의 존재를 도덕적 실재의 필연적인 요청으로서 증명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논거를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칸트가 형이상학에 대한 절망의 시대에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일을 감행했다는 사실이다. 즉 유한성의 사슬을 깨뜨리고 절대적인 것에 도달하려는 시도를 새로이 감행하였다.

@p276

철학함이란 대답을 찾아 그 대답을 가지고 조용히 안주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철학함이란 곧 항상 새롭게 본질적인 물음을 제기함을 뜻한다. 그래서 칸트의 형이상학적 문제 해결 역시 모든 시대에 타당할 수는 없다. 그 이후 인류를 엄습한 사유의 위기 속에 형이상학의 확실성은 다시 의문스러운 것이 되어 버렸다. 그것은 오늘날 과거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더욱 의심스럽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칸트의 다음과 같은 말은 옳다. "인간의 정신이 언젠가는 완전히 형이상학적 탐구를 포기해 버리기를 기대하는 것은, 우리가 이제 더 이상 깨끗하지 않은 공기를 들이마시지 않으려고 차라리 호흡을 완전히 정지해 버리는 것을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기대하기 어렵다."

@p277

21. 피히테

자유를 위한 반란

1801'프리드리히 니콜라이의 생애와 별난 견해'라는 제목의 기이한 반박문이 발표된다. 이 반박문의 대상은 바로 그 당시의 가장 유명한 학자 중의 한 사람이며 "일반 독일 문고"의 편집인이고 많은 책을 발표한 저술가이자 계몽주의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에 반대하여 씌어진 이 글은 니콜라이의 생애와 견해를 엄밀한 철학적 방법에 의해 단 하나의 원칙에서 도출해 내려는 진기한 시도를 하였다. "그는 어떤 분야에서든지 올바르고 유용한 것은 모두 생각해 냈고, 생각해 보지 않았거나 생각하지 않게 된 것은 모두 올바르지 않고 유용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주요 명제"에 대한 반박도"나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로 시작되며, 그로써 문제는 완전히 결정되어 버린 것이었다.

@p278

반박문은 악의에 찬 풍자로 니콜라이의 자서전과 저서를 언급하면서 그의 생애를 기술하였다.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갓난 아기의 최초의 울음소리가 저술가의 세계를 온통 뒤흔들어 놓고 세계의 모든 죄인을 전율하게 만들었을 때, 그리고 이미 이 아기의 기저귀가, 그가 그 이후 불후의 명언으로 내뿜어 휘두를 세련된 익살의 향기를 풍기었을 때, 주위 사람들은 모두 이 아기가 커서 무엇이 될꼬? 하고 한결같이 경탄하며 말하였다." 이 책은 니콜라이가 괴테와 실러, 칸트, 피히테, 셀링 등과 관련하여 어떻게 "그들의 그럴 듯해 보이는 예술 작품과 발견이 결코 아무것도 아님을" 증명하고 있나를 기술하고 있다. 니콜라이는 이렇게 굳게 확신하고 있을 정도이다. "나는 우리 시대뿐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통틀어 가장 정신 세계가 풍부하고 가장 멋있는 사람이다." 아니, "나는 모든 철학자 중에서 최초의 가장 확실하고 가장 포괄적인 철학자이다." 마지막에 가서도 "자신의 작품의 불후의 가치를 경건하게 신뢰하면서" 세상을 떠난다.

@p279

반박문은 계속해서, 니콜라이의 이 그로테스크한 자만심 뒤에 숨겨져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대답은 이러하다. "경박한 지혜""천박한 학식", "무궁 무진한 수다와 그의 손아귀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이나 다 비꼬아 버리는 교묘한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니콜라이는 "타고난 돌대가리"이며 "배워먹지 못한 야비한 수다쟁이"이고 "보기 드문 진기한 것을 갖고 뒤죽박죽 잡동사니 속으로 질질 끌고 다니는 학식"의 소유자이다. "그에게 입 놀리는 것말고 도대체 제대로된 인간적인 면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더욱 분격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18세기의 문학적 스컹크와 독사가 되기로 운명 지워진 우리의 영웅은 주변에 악취를 풍기고 독소를 내뿜는다." "의심의 여지없이 사람들이 개에게 말하고 쓰는 기술을 가르쳐 줄 수만 있다면 어떤 개라고 할지라도 니콜라이의 뻔뻔스러움과 니콜라이의 인생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의 영웅처럼 훌륭한 성공을 거두게 될 것이다." 끝에 가서는 니콜라이의 저서에 최후의 결정적인 일격을 가하고 있다.

@p280

"사람들이 아직도 그의 저서를 보고 있다면, 그것은 먹은 것을 소화시키기 위해 진부한 것과 하찮은 것--하찮은 것이라는 것을 자신이 스스로 알아차리기 시작한다--을 기묘하게 요리 조리 돌리고 비트는 것을 보며 즐거워하기 위해서이다."

이 무자비한 반박문의 작가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면 일순간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요한 고트리프 피히테이다. 저 유명한 '독일 국민에게 고함'의 저자이자 ''지식학'을 명철하게 사유해 낸 사람이고, 철학적 정신을 가장 훌륭하게 창조해 낸 사람이며, '복된 삶으로의 안내'를 저술한 아주 심오한 작가인 것이다. 그렇게 진지한 철학자가 어떻게 그다지도 무지막지한 비방을 퍼부을 수 있을까?

철학함을 고요한 적막 속에 잠겨 완전한 평온 가운데서 사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사람들은 철학함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철학자들은 이중의 모습을 드러낸다. 한편으로는 내면으로 눈을 돌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외계로 나와 현실을 변형

시키려는 충동 속에 실재에로 향하고 있다 이러한 의지는 근세의 철학자들 어느 누구보다 피히테에게서 가장 힘차게 분출되고 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학자라는 직업에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단순히 생각만 할 수는 없다. 나는 행동하고자 한다." "나는 원대하고 열렬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 나의 자부심은 행위의 업적을 통해 인류 안에서의 나를 자리매김하는 것이며, 나의 실존을 인류와 전 정신 세계에 영원히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성명서, 반박문, 호소문, 연설 등을 작성해 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에 대한 논쟁에 정열적으로 뛰어들었다. 이 주제에 대한 반박문 중 하나는 '유럽 왕들에게서 지금까지 그들이 억눌러 왔던 사상의 자유를 반환 청구'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을 위압적으로 자신의 진리에로 전향시키려고 하였다. 동시대의 사람들이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바를 여전히 이해하려 하지 않자 다음과 같은 과감한 부제의 책을 저술한다. 그것은 (태양처럼 자명한 보고서 ... 독자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하나의 시도)이었다.

@p281

피히테의 개인적 영향력 역시 대단했다. 이에 대해 그의 청중 가운데 한 사람은 이렇게 보고 하고 있다. "그가 말을 멋있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모든 말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다. 그의 근본 주장은 강력했고 인간성에 의해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았다. 도전을 받을라치면 더욱 격렬해졌다. 그의 정신은 쉴새없이 세상에서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갈망했다 그래서 그의 공개 강연은 매번 불꽃을 튕기는 뇌우처럼 폭발적이었다. 그는 영혼을 고양시켰으며, 또한 선한 인간이 아니라 위대한 인간을 만들려고 했다. 그의 눈길은 엄격했고 걸음걸이는 거만했다. 자신의 철학을 통해서 자기 시대의 정신을 주도해 나가려고 했다. 상상력은 펄펄 끓어오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활력이 넘치고 있었다. 표현력은 매력적이지는 않았지만 과감하고 원대했다. 그는 대상의 가장 깊숙한 심연으로 파고 들어가서 개념의 왕국을 마음대로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다. 이것은 그가 비가시적인 세계에 단순히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지배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행동하려는 이러한 강력한 의지에서 피히테가 주위 세계를 다루는 강력한 힘이 자라나 온다. 그는 "전광 석화"처럼 이야기한다. 그는 언제나 싸움에 휘말려 있다. 반대를 참지 못하고, 그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앞서 착한 니콜라이에게 했듯이 그렇게 화가 나서 욕을 퍼부어 댄다. 동시대의 슈미트라는 이름의 한 선량한 사람에게 했듯이 존재조차 박탈하려 한다. "나는 철학자로서의 슈미트 씨란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선언한다 "이 모든 행동을 피히테는 잔인한 즐거움으로 행했다. "레싱식의 불화를 다시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나에게 도전해 오라! 나는 선술집에서 개와 싸우는 것보다는 더 진지하게 할 일이 많다. 그러나 재미삼아 ... 한 사람을 뒤흔들어 놓아 다른 사람의 흥미를 망쳐 놓는 것도 나쁘지 않다." 따라서 유명한 법률가인 안셀무스 포이에르 바하가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고 해서 전혀 이상하게 생각 할 것 없다. "피히테와 다투는 것은 위험하다. 그는 어떠한 반대도 참지 못하고, 그의 어리석음을 비판하는 모든 반대자를 자신의 인격의 반대자로 간주하는 다루기 어려운 동물이다.

@282p

나는 그가 마호메트 시대에 살았더라면 마호메트와 도박을 할 수 있었으리라고 확신한다. 그의 강단이 왕좌였다면 '그는 칼과 교도소로 지식학을 도입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지 이 철학자의 한 부분일 뿐이다. 이러한 폭력적인 투쟁자로서의 피히테는 한편으로는 통찰을 위해 조용하게 열심히 몰두하여 노력하는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단 하나의 정열을, 단 하나의 욕망을, 나 자신에 대한 단 하나의 풍부한 감정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지라도." 다른 곳에서는 "사변적인 생활에 대한 자신의 확고 부동한 사랑"에 대해 말한다 "학문에 대한 사랑, 특히나 사변에 대한 사랑은, 그것이 사람들을 일단 사로잡기만 하면 그로 하여금 조용히 그 학문에 몰두하는 것 외에는 다른 소망을 전혀 가지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린다." "만일 내가 나 이전의 몇 세기의 삶을 보았더라면, 이미 지금쯤은 나의 삶을 완전히 나의 경향에 맞추어, 혁명을 위해서는 한 시간의 여유도 돌아가지 않도록 시간을 배당했으리라." 마침내 피히테는 "영원을 향한 갈망"에 사로잡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흘러가 버리지 않는 영원한 것과 하나가 되어 그것에로 녹아들어 버리고 싶은 충동은 모든 유한한 존재에 깊숙이 박혀 있는 가장 깊은 뿌리이다. ... 영원한 것은 끊임없이 우리의 주위를 감돌며 자신을 우리에게 내보여 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원을 붙잡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행동도 할 것이 없다."

이렇게 모순투성이의 인간이 변화 없는 단조롭고 평온한 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는 것은 말할 나위 없다. 피히테는 파란 만장한 삶을 살았으며, 그의 인생은 끊임없는 성공과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는 1762년 오베라우짓츠의 한 작은 도시에서 가난한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가 처음 해본 일은 가축을 지키는 일이었다. 우리는 그때 이미 그가 자기의 채찍의 통제 아래 놓여 있는 거위에게 지배자로서의 쾌감을 느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가 어떻게 자신의 가정 환경에서 벗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일화는 하나의 교훈적인 사건이라 할 만하다.

어느 일요일 정오경에 영주가 그 마을에 오게 되었는데, 그는 목사의 설교를 놓치게 된 것을 몹시 안타까워했다.

@283p

이때 사람들이 그를 위로하면서 말하기를, 거위지기 피히테가 설교를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외울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실제로 어린 피히테는 말과 억양, 제스처까지 완벽하게 목사의 흉내를 냈다. 이에 놀란 영주는 이 거위지기를 자기가 맡아 교육시키기로 결심했다. 영주의 결심이 결국철학 세계에 피히테라는 인물을 선사하게 된 셈이다.

피히테가 고등학교를 마치고 예나 대학에 다닐 때쯤 해서는 다시 경제적 상태가 어려워졌다. 귀족 후견인이 죽고 나자 상속인들은 그의 예술 애호가적인 돌발 행위를 그리 탐탁하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피히테는 장학금을 얻으려고 신청을 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는 시간제 과외로 어렵사리 견뎌 나가야만 했다.

피히테는 취리히의 가정 교사 자리를 얻어 이 비참한 생활에서 가까스로 벗어나게 된다. 그런데 그는 어린이를 교육시키기 이전에 먼저 부모를 교육시켜야 한다고 평소에 생각해 왔었다. 그래서 "가장 눈에 띄는 교육적 과오에 대한 일기"를 써서 자기 학생의 부모로 하여금 그 책을 매주마다 읽게 하였다. 사람들은 이 부모가 즐겁게 이 책을 매주 읽지 않고, 드디어는 가정 교사를 그만두겠다는 이 강압적이고 도발적인 교육가의 오만한 위협을 받아들였을 것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피히테는 물론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는 형에게 이렇게 썼다. "나는 처음부터 고집불통의 사람들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드디어 내가 그들을 몰아 붙이고 그들로 하여금 나를 존경하도록 위압적인 방법으로 강요했을 때, 나는 이미 나의 퇴직을 선언한 셈이었습니다. 그것을 번복시키기에는 나는 너무나 자존심이 강하였고 그들의 두려움은 너무 컸습니다."

어쨌든 다른 한편으로 볼 때 취리히는 피히테에게 전혀 무익하지만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피히테는 사랑에 빠지고 약혼을 하게되었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도 물론 때로는 이렇게, 때로는 저렇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한편으로 불타는 듯한 열정으로 지를 쓸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가슴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여 폭발할 것만 같은 나의 이 불타는 열정을 그대로 당신에게 퍼부을 수만 있다면!"

@p284

그는 애인을 위해 시를 짓기까지 하였다. 물론 단 한 편이긴 했지만--그가 고백하듯이--시 한 구절을 쓸 때마다 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주저하면서 형에게 이렇게 쓴다 나는 "내 안에서 너무나 많은 활력과 욕망을 느낍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게 되면 흡사 날개가 잘려 버리고 다시는 벗어날 수 없는 그런 굴레를 지게 되는 것이나 아닐까 걱정됩니다." 그러나 그의 약혼녀가 워낙 양순해서 피히테의 모든 교육적 지시를 공손하게 따랐기 때문에 마침내 피히테는 그래도 결혼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길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가정 교사 일이 끝나자 피히테는 부득이 취리히를 떠나야 했다. 그는 라이프치히로 가서 약간은 진기한 방법으로 생활비도 벌고 유명해 지려고 한다 교육 방면에서 그렇게도 분명히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그는 왕자의 선생이 되려고 했다. 이 일이 성사가 안되자--추측컨대 자신의 약혼에 자극 받아서--"여성 교양 잡지"를 발행하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어떤

출판업자도 피히테 같은 사람에게 곧바로 그와 같은 일을 맡기는 모험을 감행하려고 하지 않았다. 비극과 단편 소설을 써 보기도 하지만 피히테에게는 운이 따르지 않았다.

이처럼 많은 실패를 겪고 무력감에 빠져 있을 때, 우연한 사건 하나가 그를 구출해 준다. 이 우연한 사건은 그를 그의 기질의 다른 면, 즉 조용한 면으로 이끌어 가서 그의 전 생애를 결정짓는다. 바로 한 대학생이 그에게 칸트 철학을 가르치는 개인 교사가 되어 달라고 청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해서 그는 당시의 철학자 중 가장 위대한 철학자를 철저하게 연구하여 알게된다. 얼마나 이 사건이 그를 감동시켰는지, 그는 한 편지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나는 아주 원대한 계획을 품고 취리히를 떠났다. ... 그러나 짧은 기간에 그 모든 희망은 좌절되어 버렸고 나는 거의 자포 자기에 빠졌다. 나는 절망 속에 칸트 철학에 몰두했다. ... 그의 철학은 마음을 고양시키는가 하면 지독한 두통거리이기도 했다. 나는 칸트 철학에서 마음과 몸 모두를 가득 채우는 작업을 발견한 셈이다. 나의 광포한, 길길이 뛰던 정신은 잠잠해졌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체험해 온 나의 삶 가운데 가장 행복한 나날이었다.

@p285

빵을 얻기 위해 매일같이 뛰어다녀야 했지만, 그 당시 나는 아마도 이 넓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외적인 궁핍은 물론 그대로 남아 있었다. 피히테는 라이프치히에서 더 이상 견뎌낼 수 없었고, 마침내는 가정 교사 자리를 하나 구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바르샤바였다. 그러나 다시 취리히에서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 그는 자기 학생의 어머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바르샤바에서는 적어도 한 가지 좋은 일은 생겼다. 그가 떠나올 때 적지 않은 보상금을 받게 된 것이었다. 이 보상금 덕분에 그는 먼발치에서 존경해 온 쾨니히스베르크의 칸트를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칸트는--분명 피히테는 어지간히 요란하게 그에게 접근해 갔을

것이다--처음에는 매우 말을 않고 삼가고 있다가 주저주저하면서 화를 낼 때에만 입을 열었다.

새롭게 생긴 돈은 금방 바닥이 났다. 칸트에게 돈을 빌리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때 뜻밖의 행운이 굴러 들어와서 덕분에 이 폭풍우 같은 사나이의 생활은 풍족해진다. 피히테는 4주에 걸쳐 "모든 계시에 대한 비판적 시도"라는 책을 썼다. 칸트는 이 원고를 칭찬하고 출판업자에게 추천하였다. 이 출판업자는 실수로 저자의 이름을 빼 놓은 채 그 책을 출간하였다. 그러자 온 세상 사람들이 이 책을 늙은 칸트가 썼다고 간주하였다. 사람들은 그 당시 바로 그와 같은 주제의 글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가장 유명한 학술 기관지인 '예나의 일반평론 잡지'조차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그러므로 쾨니히스베르크의 철학자가 인류를 위해 불후의 공헌을 세운 그 작품을 조금이라도 읽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금방 이 작품의 고상한 저자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 후 저자가 칸트가 아니라 피히테임이 밝혀졌을 때, 그렇다고 이 저서의 명성이 퇴색해 버리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피히테는 이제 칸트에게나 어울릴 정도의 책의 저자로 간주되었다.

그 후 피히테는 전격적으로 대학의 교수 초빙을 받는데, 바로 예나 대학이다. 그는 열광적인 환영을 받는다. 학생들이 그의 강의에 쇄도하였다. 그러나 곧 그의 공격적인 기질이 그를 새로운 어려움에 빠지게 하였다. 그는 눈꼴사나운 방자함에 빠져 있는 학생 단체를 강력하게 반대하며 "그들은 뛰어난 검투사로서의 공적 외에는 아무런 공적도 없다"고 말했다.

@p286

그때부터 학생들이 그의 강의 시간에 소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피히테의 부인을 대로상에서 모욕했다. 마침내 그들은 자신들에게 어울리는 무기, 즉 돌멩이로 교수의 창문 유리를 깨뜨려 버렸다. 피히테는 말할 것도 없이 노발대발하였다. "나는 내가 가장 흉악한 범죄자보다 더 나쁘게 대접받고 있음을 알았다. 못된 젊은이들의 무엄 때문에 나와 나의 재산을 포기해야 함을 알았다." 그렇지만 동료 교수들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내세워 대응 조치를 취하기를 거부했다. "어느 교수의 창문이 자주 깨지는 것은 그 교수의 성실함에 대한 가장 명예로운 증거일 것이다." 바이마르의 문교 장관인 괴테는 한술 더 떠서 아주 풍자적으로 피히테의 자아에 대한 이론--자아는 절대적인 주권으로 세계를, 즉 비자아를 정립한다--을 끌어들여 이렇게 썼다 "따라서 그들은 절대적 자아가 곤경에 빠져 있는 것을 보았다. 물론 이 자아는 사람들이 정립한 비자아에 의해, 돌조각에 의해 몹시 무례하게 깨져 버릴 수가 있다. 그는 만물의 창조주와 보존자처럼--신학자들이 우리에게 말하듯이--그의 피조물로 인해 골치를 썩이고 있는 것이다."

@p287

그러나 두번째의 더 복잡한 사건이 터지자 그때는 괴테 자신이 개입하여 무마시킨다. 피히테의 제자 한 사람이 논문을 썼는데, 그는 그 논문에서 독립적인 종교란 없고 모든 믿음은 순전히 도덕일 뿐이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피히테는 이 논문을 출간시켰다. 하지만 이제자가 이끌어 낸 그 극단적인 결론을 약간은 약화시키려고 그러한 내용이 담긴 자신의 논문을 그 책에다 첨가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명의 반박문이 피히테와 그의 제자를 무신론자라고 비난하였다. 사태는 금세 확대되었다. 작센 지방의 행정부는 자기 지방의 학생들을 더 이상 예나에서 공부시키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사람들은 이 싸움을 좀더 좋게 해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예나 대학의 동료 교수인 실러와 괴테도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피히테의 고집이 일을 그르치게 하였다. 그는 굴복하느니 차라리 "용감하게 밀고 나간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견책하려 하자 그는 문교부에 협박 편지를 보냈다. 그 일로 인해 그는 오히려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다행스럽게도 이 점에 대하여 작센의 영주보다 더 관대한 군주가 있었다. 피히테가 새로운 활동 무대를 구하기 위해 베를린에 갔을 때, 경찰이 이 수상한 인물의 체류를 달가워하지 않았을 때, 프로이센 왕은 이렇게 지시했다. "그가 자비로운 하느님을 적대적으로 이해하려고 한 일이 사실이라면, 이제 자비로운 하느님으로 하여금 그와 대화할 수 있도록 하자. 이것은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관대하게 대해 주는 것에 힘입어 피히테는 베를린에 정착했다. 처음에는 강연을 하다가 드디어는 곧 창립된 베를린 대학 교수로 초빙되었다. 그는 여기서 폭넓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의 철학 강의의 명석함과 심오함에 학생들뿐만 아니라 국가의 지도적인 정치인과 지식인도 매료당했다. 다만 프로이센 아카데미만이 그를 아카데미 회원으로 받아들이기를 주저했다. 이로 인해 유명한 의사 후페란트는, 아카데미 철학위원회는 피히테가 바로 철학자이기 때문에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심술궂은 말을 했다.

@p288

베를린에서도 피히테는 그 당시의 정치적 혼란을 눈앞에 보면서 자신의 활동을 철학 교수직에 국한시킬 수 없었고 그러려고 하지도 않았다. 바로 이제 그의 의도는 철학으로 하여금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독일 국민에게 고함'을 가지고 프로이센 국가의 새로운 탄생을 위한 노력에 결정적으로 관여하게 된다. 물론 그의 이러한 협력에 대해 이상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자발적으로 지원했다. 일종의 세속적인 종군 목사로서 군대와 함께 행군하며 "전쟁 지도자를 신의 품안에 잠재울" 의도를 갖고 지원한 것이다. 그러나 왕은 청원을 거절하고 피히테를 위로하여 "아마도 그의 웅변술이 승리를 위해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피히테는 평화 조약 체결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간호원 일을 돕던 그의 부인이 열병에 걸렸다. 그녀는 다시 건강을 회복했지만 피히테가 전염되었다. 그는 181457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렇게 정열적으로 행동에 뛰어들면서도 동시에 생각 속에 파묻혀 버리기를 좋아하는 이 사람의 생애와 사람됨을 눈앞에 그려 볼 때, 그의 철학함이 이 두 가지 요소 사이의 긴장 속에 놓여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듯 단호하게 행동을 강조하는 사람에게는 행위가, 활동적인 자아가 철학적 구상 속에서도 중요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 그토록 내면적으로 침잠해 사색하는 사람에게는 현실의 고요한 비밀이 스스로를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피히테의 철학함은 그런 상태에 있다. 그것은 절대적 행위의 사상과 더불어 시작되어, 활동하는 자아가 신성의 심연 속에 가라앉음으로써 끝이 난다.

첫번째의 주제와 관련해서 피히테는 처음에는 칸트를 따른다 칸트는 인간의 본질이 자유에 놓여 있음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 그 자유를 무조건적인 의무와 도덕률의 경험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피히테에게도 자유의 사상을 불러일으키며 양심 속에서 자신을 알려 오는 도덕의 요청이 있다. 인간의 근본 본질로서의 이러한 자기 자신을 착신하는 자유가 바로 피히테의 전체 사유를 둘러싸고 있는 이념이다. 그러나 인간의 감추어져 있는 본질을 깊이 생각하게 됨에 따라 그는 칸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근원적으로 이 이념을 생각하게 되었다.

@p289

다시 말해서 피히테는 칸트의 개념에 모순이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자아는 분명 그의 본질적 근거에서 자유로운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지만 칸트는 동시에 자아를 극히 제한된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특히 자아가 인식하며 활동하는 곳에서 잘 드러난다. 여기에서 자아는 자기 자신이 아닌 어떤 것에 얽매여 있다. 그렇다고 비록 소박하게 생각하듯이 인식의 역할이 현상하는 사물에 얽매여 단지 모사하는 데만 국한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칸트는 오히려 인식에서 주체의 자발성이 다양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자아는 전적으로 자신의 자유에 의거하여 사물에 대한 표상을 완전히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자아는 오히려 그의 외부에 있는 어떤 것에 의존하고 있다. 즉 감각 속에서 자신을 알려 오는 "사물 그 자체"에 의존하고 있다.

피히테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사물 그 자체"에 의한 이러한 식의 제한이 자유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자유를 인간의 근본 본질로 생각한다면, 자아와 더불어 일어나는 모든 것은, 따라서 인간의 인식조차도 인간의 고유한 행위에 의한 사실이어야 한다.

@p290

따라서 올바르게 이해된 자유의 개념으로는 자아 옆에 또 하나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둘 수 없다. 우리에게 세계로서 나타나는 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의 총체는 실제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인간이 자기 자신 밖에다 세워 놓은 형상일 뿐이다. 그것은 창조적인 자아가 자신의 자유 가운데 기획하고 있는 세계 기획이다. 물론 이러한 세계 형성은 의식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모든 의식된 상태에 앞서서 일어난다. 그러나 바로 이때 자아는 자기의 세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 외부의 영향에 의존하지 않으며 따라서 자유롭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피히테의 사상은 독일 관념론의 시작을 이룬다. 왜냐하면 관념론의 근본사상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곧 단지 관념적인 것만이, 정신적인 것만이, 그의 자유 가운데 있는 자아만 실재한다. 이에 반해 세계의 실재성이란 다만 우리의 표상 안에 주어져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표상마저도 세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산출해 낸 것이다. 이러한 사상 속에서 활동적인 생활의 철학자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에게 있어 모든 실재는 자아의 행위의 산물이 되어 버린다. 궁극적으로 그러한 자유로운 행위에로 소급될 수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자유 가운데 있는 자아뿐이기 때문이다. 이 자유 때문에 자아는 절대적 자아인 것이다 이것은 매우 엄청난 사상이다. 이것은 피히테와 같은 정신의 강력함을 간직하고 있는 사상가만이 사유할 수 있는 사상이다. 여기에서 실재를 지배하는 인간의 권력은--이것을 획득하려고 근대의 그 모든 노력이 경주되어 왔다.--그 극치에 도달한다.

피히테는 물론 인간적 자아를 이렇게 절대적 자아로 끌어올린 대가를 비싸게 치러야 했다. 왜냐하면 무제한적이 되어 버린 자아의 자유 앞에서는 모든 실재의 독립성이 용해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자아의 절대성은 세계를 침몰시켜 버린다 그런데 이 용해는 더욱더 심화된다. 자유로운 자아도 그것이 피히테가 생각하듯이 그렇게 절대적으로 생각될 때는 공허한 자아가 되어 버린다. 자아 이외에는 아무 것도 실재하지 않는다.

@p291

신도 다른 인간도 세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아 그 자체는 가장 냉혹한 고독 속에 존재해야 한다. 자아는 자유롭다. 그러나 비실재적이 되어 버린 실재 안에서 이러한 자유를 가진들 자아가 무엇을 시작할 수 있단 말인가?

모든 실재의 절멸 속에서 드디어는 자아마저도 그 자신의 실재성이 빠져나가고 만다.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이 단순한 표상 속으로 용해되어 버린다면, 자아만이 유일하게 이 운명을 벗어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모든 존재의 소멸이 자아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을 무엇이 막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해서 자아는 결국 허구에 불과한 것이 된다. "무에서 무로 쓸데없이 장난하고 있는 제작자"인 지성에 의해 만들어진 "단순히 지어 낸 이야기"일 뿐이다. 피히테 자신도 이러한 결론을 내린다. "자아는 어디에서건 존재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자아는 결코 존재가 아니다. 자아 자신은 도대체 알지도 못하고 존재하지도 않는다. 자아는 관념이다. 관념만이 거기에 존재하는 유일한 것이다. 그것들은 자신에 대해 관념의 방식으로 알고 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관념, 스쳐 지나가는 그것에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하는 관념, 관념의 관념으로 연결되어 있는 관념, 그 안에 아무 것도 없는 관념, 의미도 목적도 없는 관념, 나 자신도 이러한 관념 중의 하나이다. 아니 나 자신은 그것도 아니고 단지 관념에 대한 혼란한 하나의 관념일 뿐이다. 모든 실재는 하나의 멋있는 꿈으로 변해 버린다. 그것이 꿈꾸고 있는 삶도 없고, 거기에는 꿈꾸는 정신도 없다. 꿈속에서 자기 자신과 연결이 되는, 그러한 꿈속에서 꿈을 꾼다. " 칸트는 "세계와 그리고 이 세계와 더불어 우리 자신까지도 절대적 무 속으로 가라앉히는" 이 극단적 관념론의 섬뜩함을 알아차렸다. 그는 피히테의 '지식학'에 관해 이렇게 쓴다. '지식학'"나에게는 일종의 괴물처럼 보인다. 사람들이 그 괴물을 잡았다고 생각했을 때, 그것은 결코 그 괴물을 잡은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저 자기 자신을 잡았을 뿐이다 심지어 괴물을 잡으려고 뻗치는 손만을 발견할 뿐이다."

세계와 자아를 완전히 해체시켜 버리는 이 소용돌이에 놀라 피히테는 다시 한번 자유에 대해 더 깊이 사유한다.

@p292

그는 자유가 자기 자신을 부정하지 않으려면 그 자유는 제한 없는 절대성 안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자유는 본래적 제한을 발견해야만, 사실일, 그 모든 절대성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유한한 자유로서 이해되어야만 침몰에서 벗어날 수 있다.

따라서 피히테는 자아는 그의 근본적인 본질에 .절대적이며 동시에 유한하다고 설명한다. 인간은, 그것이 처음에 그렇게 보이듯이, 순수 절대성이 아니다. 인간은 절대성과 유한성의 균열이다. 피히테의 과감한 사상은 분명 순수 절대성을 건드리지만, 여기에 빠져 자신을 망각하지는 않는다. 피히테는 결국 그 안에서 인간성이 침몰해 버리는,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티탄(거인족) 같은 절대적 자아를 예고하는 예언자는 아니다. 피히테는 가장 철저하게 모순적인 존재인 인간 현존재가 그 안에 근거를 두고 있는 바로 그 모순을 사유한 사상가이다.

피히테에게 있어 유한성이란 자아가 자기와 똑같은 다른 존재를 자신의 밖에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전제해야만 하는 그 사실에서 가장 명료하게 드러난다. 사람들이 비록 사물을 자아의 단순한 표상으로 파악한다 하더라도, 세계 안에는 사물뿐만 아니라 다른 인간도 존재한다. 피히테는 다른 사람들을 단순한 표상이라고 간주하지 않는다. 바로 자유의 사상이 피히테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 안에 있는 자유로운 인격을 볼 것을 강요한다.

이래서 피히테는 자유로운 자아와 자아의 창조적인 능력에서 기획 투사된 사물의 세계 외에도 다시 자유로운 자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그로써 그의 사유의 출발은 변경되어야 했다. 이제 더이상 개별화된 자아가 출발점이 아니라 자유로운 본질의 공동체, "정신의 왕국"이 출발점이 되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에 의한 이러한 자유의 제한도 자아 그 자체가 자기 자신을 절대적으로 정립하는 데 놓여 있는 위험을 막기에는 충분치 못하다. 그것은 자유가 또 하나의 다른 관점에서, 단적으로 결정적인 관점에서 자신의 한계를 경험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것은 자유의 본질에 대해 깊이 성찰해 볼 때 드러나게 될 것이다.

@p293

피히테는 우리의 자유는 일반적인 자유가 아니라, 그때 그때 이미 규정된, 그것도 근본에서 부터 규정된 자유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자유는 양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임의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 자유의 근원에는 더 깊은 필연성이 지배하고있다. 피히테는 이제 이 근원적인 필연성의 어둠 속을 더듬어 내려가며 자유의 뿌리에서 숨겨진 것을 찾아내려고 시도한다

자유의 근거로 소급해 올라가는 사람은 자유를 뒤에 남겨 두어야만 한다. 자유는 그의 근거에 대한 순수한 지시로 바뀌어야 한다. 자유는 죽음으로써 진정 살아 있는 실재를, 근거를 전면에 부각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권력의 소멸을 감내해야 한다 그것은 "유한성을 결코 떨쳐 버리지 못하는 운명에 처해 있다. 자유는 오직 죽음을 꿰뚫고 나아가야만 삶에 이른다. 죽어야 할 자는 죽어야 한다. 아무 것도 그를 그의 본질의 폭력에서 해방시키지 못한다." "자아는 철저하게 소멸되어 버려야 한다." 후기의 피히테는 바로 여기에서 인간의 가장 절박한 과제를 보았고, 또한 그가 극도의 이기심의 시대라고 부른 바로 그의 시대를 염두에 둘 때 더욱 그렇다고 여겼다.

인간이 이렇게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위력을 죽여 버리는 것을 감내하게 될 때, 그는 진정 자신을 초월하게 될 것이다.

@p294

궁극적인 의미로 자유의 절대성을 포기하는 사람은 자유가 자기 자신을 혼자서 끌어내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의 근거에서 진정한 절대성, 즉 신성을 보게 된다. "인간이 최고의 자유를 통해 자기 자신의 자유와 독립성을 포기하고 상실할 때, 그는 본래의 진정한, 신적 존재에 참여하게 된다."

절대적 자아의 자리에 이렇게 절대적 신이 들어선다. 이것은 피히테의 사유에서 위대하고 결정적인 전향이다. 그는 "이제 오직 신만이 있을 뿐이다. 신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만으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되는 것은, 그가"신의 존재와 계시"로서 존재할 때이다.

이러한 후기 피히테의 사상에서 절대적 자아의 독재는 완전히 무너져 버린다 그러나 파괴적 붕괴의 폭력이 아니라, 오히려 아주 조용한 방법으로 자아는 자신의 근원인 신 안에 가라앉아 자기의 자유를 신의 자유 안에 묻어 버린다. "신 안에서의 삶은 신 안에서의 자유로움이다." 이것이 바로 자유의 반란자인 철학자 피히테의 마지막 말이다

@p295

22. 셀링

절대자를 향한 열정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셉 셀링이 185482080세의 나이로 죽었을 때, 그의 친구인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왕은 그의 묘비에 "독일 제1의 사상가"라는 말을 새기게 하였다. 그러나 4년 전 그의 가장 격렬한 반대자인 아르투르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썼다. "셀링은 인류를 위한 존경할 만한 사상가의 부류에 포함될 수 없다." 이처럼 같은 시대를 산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 철학자에 대한 평가는 서로 엇갈린다. 그리고 이러한 상반된 평가는 그의 전 생애에 걸쳐 발견된다. 어떤 사상가도 셀링만큼 논쟁과 옹호의 대상이 되고 열광적으로 존경받고 격렬하게 배척받으며 사랑과 미움을 동시에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그의 사상을 "겉핥기식 철학", "경박하게 되는 대로 지껄이는 것", "뻔뻔스럽고 거드름이나 피우는 호언 장담"이라고 했다.

@p296

그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이 경멸에 찬 말에 동의했다. 철학자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는 "나쁜 양심을 지닌 철학자", "19세기의 철학적 칼리오스트로 백작(Cagliostro: 연금술사, 강령술사)의 신지학적 익살"이라고 이야기했다. 또 다른 적대자는 셀링의 철학을 심지어"절대적인 공허함 속에서 ... 상연되는 익살극"이라고까지 말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평가는 또 다르다. 유명한 자연 과학자인 알렉산더 훔볼트에게는 셀링이 "조국 독일에서 가장 재기 발랄한 사람"이다. 프로이센 왕은 그에게 "신에게 선택받아 이 시대의 스승으로 온 천부적인 철학자"로서 베를린 대학에 와 줄 것을 부탁했다. 괴테는 셀링을 "우리가 오랫동안 기억하고 존경할 만한 재능의 소유자"라고 추켜세웠다. 괴테는 또한 셀링의 사상에는 "굉장한 깊이에 뛰어난 명석함이 언제나 만족스럽게" 기술되어 있다고 칭송했다. 비록 적대자들이

그들의 증오심이 지나쳐 셀링을 유다나 악마와 비교한 반면 숭배 또한 때때로 너무 지나쳐 그를 제2의 그리스도로 만들어 버릴 지경이었다.

셀링이 이렇듯 논란이 되고 있는 사상가라면 그의 인격 역시 사람들이 으레 철학자들을 얘기할 때 말하곤 하는 원만한 기질과는 거리가 먼 팽팽한 긴장 상태를 유지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셀링의 성질은 모순 투성이었다.

@297P

한편 셀링은 그 시대의 성직자 권력에 대항해서는 상당히 과감한 면모를 보인다. 종종 자신의 인격과 일을 반대하는 적대자와의 증오 어린 논쟁에 불이 붙게 되면, 이 모험감은 그로 하여금 그때까지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은 사상의 영역에까지 파고들 수 있게끔 해준다. 그는 경직되어 버린 신학의 속박에서 벗어나자마자 그가 "철학계의 반편이들"이라고 모욕을 줬던 튀빙겐 대학 강단의 철학자들과도 결별을 선언한다. 칸트와 피히테의 이념에 있어서의 혁명적인 특징을 간파했다고 생각하자 그는 극히 정열적으로 철학적 논쟁에 뛰어들었고, 이제 20세밖에 안 된 그가 자신의 일이 성공할 것을 확신하며 한 가지 사상적 구상에 이어 다른 사상적 구상을 쏟아 내었다. 그는 이러한 확신에 찬 자신감으로 그의 친구 헤겔에게 이렇게 써 보낸다 "젊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다른 각도에서 같은 작업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위험을 각오하고 뭉쳐 무엇이든지 감행하는 데 일치 단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 그러면 승리는 따논 것이나 다름없다." 그의 뛰어난 제자인 슈테펜스는 나이가 든 스승 셀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p298

"그는 용감하고 위협적인 자세로 무기력해져 가기만 하는 그 시대의 모든 무리들에 대항했다." 셀링의 여자 친구였고 훗날 그의 아내가 된 카롤리네는 그의 성격의 위압적이고 위력적인 면을 가장 깊이 잘 파악하였다. "그는 그야말로 순수한 태초의 본성이다. 광물에 비유하면 진짜 화강암이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강하게 밖으로 발산되는 성격과 함께 자신을 숨기려는 강한 충동 또한 갖고 있었으며, 이것은 나이를 먹어 갈수록 더욱 그러했다. 셀링은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아내가 죽자 자신의 내면 속으로 숨어들게 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녀는 이제 자유롭다." "그리고 나도 그녀와 더불어 자유롭다. 나를 이 세상에 묶어두었던 마지막 끈은 두 동강이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36세의 셀링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더욱더 은둔 생활을 동경하고 있다. 그것이 내 행동 여하에 따른 것이라면 이제 더 이상 내 이름은 거론되지 않을 것이다. 비록 내가 가장 강력하게 확신하였던 것을 위해 노력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철학적 구상들이 잇따라 쏟아져 나오던 몇 년이 지난 뒤 침묵의 시간이 이어진다.

@p299

셀링은 강단에 거의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거의 한 줄의 글도 발표하지 않았다. 그는 죽기 2년 전에 마지막으로 이렇게 썼다. "내가 오랫동안 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서 단지 나의 연구에서만 행복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 왜냐하면 그 속에 나의 전 생애가 깃들어 있고, 나의 연구가 완성되어 감에 따라 내게로 다가오는 영원한 평화에 대한 예감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밖으로 드러내려는 충동과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려는 갈등 사이의 이 똑같은 팽팽한 긴장감은 셀링이 그의 동료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젊은 대학생 셀링은 튀빙겐 대학 기숙사에 들어와서 특히 헤겔과 횔더린이 속해 있던 모임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그 후 셀링은 예나와 드레스덴에서 슬레겔 형제, 티크, 노발리스 등 낭만주의 시인 및 작가들과 밀접한 교우 관계를 맺는다. 그들은 정신적 영역에서 움트고 있는 새 기류에 열광해 있었으며 똑같이 풍부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셀링의 이야기가 듣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엄청난 위력에 대해서는 수많은 증거들이 있다. 슈테펜스는 셀링이 강의실에 등단하는 모습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커다랗고 맑은 두 눈에는 정신적으로 호령하는 듯한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p300

또 시인 플라텐은 셀링의 말이 끝난 뒤에는 "마치 온 청중이 숨을 멈춰 버린 듯한" "죽음 같은 적막"이 깔렸다고 전한다

그렇지만 그는 이렇게 자신의 주변 세계에 대해 개방된 자세를 가짐과 동시에 폐쇄적인 우울한 성향도 지니고 있었다. 셀링은 여럿이 모인 곳에서는 종종 서툴고 어색해 했다 친구들이 즐겁게 담소할 때, 그는 종종 침묵한 채로 앉아 있곤 했다. 실러는 셀링이 자기와 카드놀이만 할 뿐 본질적인 대화는 나누지 않는다고 몹시 불쾌해 했다. 셀링은 때대로 절망적으로 상심하곤 하여 자살까지도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면 카롤리네는 괴테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또한 친구들에 대한 애정이 갑자기 쌀쌀맞은 거부로 돌변하기도 했는데, 그 가장 비감스러운 경우는 일찍이 헤겔과 나누었던 우정이 불구대천의 원수로 변해 버린 것이다. 결국 셀링은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그래서 같은 시대의 어떤 사람은 이렇게 쓸 정도였다. "그는 우리에게 은자의 장엄한 말을 보내온다. 그 말들은 현명하고 심오한 의미로 가득 차 있지만 생동감이 없고 공감을 느끼게 하지도 않으며 감동을 주지 않는다."

이 모든 긴장, 삶과 체험의 모든 고매함과 심오함은 인간 셀링이 사상가 셀링에게 기여한 것들이다. 왜냐하면 바로 영혼의 긴장에서 그의 통찰력의 힘과 심원함이 자라 나오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짐으로써 자신의 철학적 소명을 성취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절대자에 대한 사랑 속에서 삶의 갈가리 찢겨진 균열을 스스로 떠맡는 사상가가 되는 소명을 말이다.

셀링에게는 처음부터 바로 이 절대자가 문제였던 것이다. 그는 우선 피히테를 따른다. 초기의 셀링은 피히테처럼 인간의 자아를 철학의 최고 원리로 증명하는 일을 소중히 여겼다. 유일한 본래의 실재이며 자신의 가장 고유한 자유에서 비롯되는 것, 바로 그것은 셀링이 피히테와 일치되게 표현하는 "절대 자아"이다. 이에 반하여 모든 다른 실재는 다만 이 자아의 관념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렇지만 이 입장도 무제약자에게 그렇듯 정열적으로 몰두하고 있는 셀링의 사유를 만족시켜 줄 수는 없었다.

@p301

셀링은 모든 철학함의 절대적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 바로 저 인간의 유한한 자아가 이제 더 이상 순전히 인간적이고 유한한 요소일 수만은 없음을 발견한다. 그는 그것을 "우리 안에 있는 영원한 것"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통찰해 볼 때, 자아 안에 놓여 있는 그러한 절대적 근거에 부딪치게 된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인간에게 자신의 여타의 정신과 영혼의 모든 가능성을 초월한 특별한 능력, "지성적 직관"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 모두에게는 일종의 신비스럽고 불가사의한 능력이 있다. 이 능력은 우리를 시간의 변화에서, 외부에서 추가로 덧붙여진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 우리의 가장 릴은 내면의 자신을 살펴볼 수 있게 하며, 불변의 형식으로 우리 안에 있는 영원함을 직관하게 한다."

이 지성적 직관으로 이제--셀링은 이렇게 주장한다--인간은 자기 자신의 밑바탕을 들여다 볼 때 부딪치는 그것이 자신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점, 즉 절대자 또는 신적인 것이라는 점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이때 거기에서 제시되는 것은 인간적 자아의 근거일 뿐만 아니라 모든 다른 실재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재 전체를 파악하려는 사람은--이것이 곧 철학의 과제가 아니겠는가--이 실재의 절대적 근거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 셀링은 철학이 유한한 관점을 떠나서 절대자의 관점이 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유한한 인간에 불과한 철학자는 모든 것을 흡사 신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듯 고찰해야 한다. 이것이 젊은 셀링이 선택한 참으로 거대한 과제였다.

절대자에게로의 이러한 방향 전환과 더불어 셀링은 그의 시대의 가장 명석한 정신들을 사로잡았던 운동의 한가운데 서게 된다. 어디에서나 무한한 것을 향한 동경이 불을 뿜는다. 어디에서나 그 전에 스피노자가 마지막으로 생각하였던 그 옛 사상이 새롭게 대두된다 즉 모든 분리된 것들은 근본적으로는 하나이며, 모든 실재는 단 하나의 고갈되지 않는 근원에서 유래하며, 셀링이 말하듯이 "우리 안에 있건 우리밖에 있건 모든 실재는 신적인 것으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사상이 그것이다. 이 신적인 것은 그리스도교 교리가 선포하고 있는 그 유일신이 아니다.

@p302

즉 이질적인 것으로서의 세계와 대립해 있는 창조주가 아니다. 그것은 무한한 생명으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에 가장 내면적인원리로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특히 자연이 새롭게 조명된다. 피히테는 모든 실재와 마찬가지로 자연 역시 단순히 인간에게 중요하다는 사실에 근거해서만 고찰했다. 자연은 인간이 자신의 도덕적인 과제를 실현시킬 수 있는 상소였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의 전적인 살해" 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반해 그때 막 등장한 시인과 철학자의 세대에서는 괴테의 자극을 받아 새로운 자연에 대한 감정이 분출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이제 자연을 그 고유한 생동감으로 파악하려고 한다. 자연을 인간을 위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볼 뿐 아니라 동시에 어떻게 자연 안에서 신성의 창조적인 힘이 작용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셀링도 이러한 관점에서 자연을 고찰한다. 그는 일종의 자연 철학을 구상하고 이 자연 철학을 피히테의 자연에 대한 경멸에 대립시켜 내놓는다. 이것이 초기 셀링의 시대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업적인 셈이다. 그의 자연 철학은 물론 오늘날 사람들이 이해하는 자연 철학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그에게는 자연에 대한 여러 가지 개념이나 방법을 풀이하거나 자연 과학의 결과들을 종합하는 것이 중요한 관심거리가 아니다. 오히려 셀링은 자연을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생동하는 하나의 단일한 유기체로 해석하려고 한다. 이러한 관점으로 자연을 대하게 되면 죽어 있는 것도 단지 명이 다한 생명체일 뿐이다. 자연의 내적인 생명력은 특히 어디에나 침투해 있는 양극성 안에서 잘 드러난다. 예를 들면 무기체에서는 자력과 전기의 상호 작용이 그렇고, 유기체에서는 수컷과 암컷의 대립이 그렇고, 자연 전체에서는 중력과 빛의 대립투쟁이 그렇다. 자연은 그러한 양극성을 통해 생산을 거듭하며, 그리하여 하나의 거대하고 생동력 있는 생성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자연 철학의 귀결점에는, 도대체 저 끊임없는 생성이 궁극적으로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셀링은 정신을 향해 나아간다고 대답한다. 최고의 자연 생산물은 인간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자연은 생성되어 가는 정신으로, "정신은 근원적인 것이지만 아직은 의식이 없는 상태"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정신 자체는 자연을 초월함으로써 자연 안에 배태되어 있는 것을 완성시킨다.

@p303

따라서 셀링에게 나타나는 실재는 두 가지 양상의 혼합 상태, 즉 자연의 의식 없는 상태와 인간 정신의 의식 있는 상태를 포함한다. 셀링은 이 두 영역에서 자연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법칙을 발견한다. 인간의 정신적 현존재는 양극성 안에서, 상호 대립 안에서, 그리고 이 대립의 조화 안에서 실현된다. 이것을 해석하는 것이 자연 철학을 보충해 주는 정신 철학의 과제이다. 그러나 자연과 정신, 이 두 가지는 하나의 단일한 과정으로 간주된다. 자연과 정신의 모든 현상은 "그것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자연의 심연으로부터 시작하여 정신 세계에 이르기까지의 전체를 포괄하는 하나의 커다란 유기체의 구성 부분들이다."

이제 셀링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다시 자연과 정신, 이 두 가지를 절대적 관점에서 고찰하는 것이다. 즉 자연과 정신을 창조적인 신성이 지배하고 있다는 관점 말이다. 우선적으로는 자연에 대한 것이 서술된다. 즉 모든 자연의 사건에는 신성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셀링에게 있어 모든 자연물은--나무, 동물, 심지어 돌 한 조각까지도--단순히 관찰될 수 있는 외부 세계의 사물이 아니라, 그 안에서 발현하는 신적인 생명의 표현이다 자연은 "숨어 있는 신"인 것이다.

그렇지만 자연은 아직 신의 본래적인 계시는 아니다. 이성이야말로 비로소 "신의 완전한 모상"이다. 따라서 정신과 이 정신 역사의 영역은 실재 안에 신이 현존함을 드러내는 징표를 지니고 있다. "전체로서의 역사는 계속 진행되면서 점차로 자신을 드러내는 절대자의 계시"이다 즉 전체 역사는 "신의 정신 속에서 읊어지는 하나의 서사시"이다.

자연과 정신을 통해서 신의 자기 구현의 과정이 수행된다. 셀링에게 있어 이 과정은 궁극적으로는 예술로 귀착된다. 셀링의 예술 철학은 그의 가장 독창적인 창작물이다. 셀링은 예술 역시도 생성되어 가는 신성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예술은 "필연적이며 절대자에게서 직접적으로 흘러나오는 그런 현상이다.

@p304

"실로 "신성의 유일하고 영원한 계시"인 것이다 그리고 예술은 이 세계에 있어서의 신적인 것의 각기 다른 두 가지 자기 현시를 초월한다. 예술 안에서 이 두 가지 분리된 차원이 융합되기 때문이다. 예술 작품은 인간 자유의 가장 숭고한 행위의 결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정신 영역에서 최고의 존재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예술 작품은 질료적 형태를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자연의 필연성에 참여하고 있다. 따라서 예술 작품에서는 자연과 정신, 필연성과 자유가 조화를 이루게 된다. 예술을 통해 신성은 갈라진 두 길을 거쳐서 다시금 통일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예술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철학자들에게 지고의 것이다. 예술이야말로 자연과 역사 속에 분리되어 있는 것을 영원한 근원적 일치 속에서 흡사 하나의 불길처럼 타오르게 하여, 그들에게 최고의 성스러움을 열어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렇듯 모든 실재가 신의 자기 계시로 이해된다면, 도대체 신 그 자체는 어떻게 사유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이 불가피해질 것이다. 사실상 셀링의 사유는 끊임없이 이 물음을 향해 전진해 가고 있다. 그는 절대자의 불가사의함을 추적한다. 그는 절대자를 처음에는 정신적 존재, 즉 절대적 자아로서 파악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제 그에게, 신성은 정신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자연의 영역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자아로서, 주체로서 신을 규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이제 신은 자연과 정신, 자아와 비자아, 주체와 객체의 대립을 초월한 고귀한 것으로 생각되어야만 한다. 셀링이 신을 완전히 무차별적인것 또는 절대적 동일성이라고 부를 때, 그는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신은 실재의 모든 대립이 자신들의 공통적인 근원과 목적을 갖는 바로 그 통일의 점이다.

젊은 시절 친구였던 헤겔은 물론 이 사상을 비웃는다. 헤겔은 셀링의 저 냉담한 절대자를 "흔히 말하듯이, 모든 젖소가 검게 보이는 밤"이라고 부른다. 사실상 "신과 우주가 하나가 되어 버리는" 그러한 신의 개념 아래에서는 유한한 실재의 독자성이 해체되어 버릴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p305

1851년의 셸링--그림 생략

@p306

모든 것이 오직 하나의 무차별적인 절대자 안에서 자신의 본질을 가지는 한에서만 실재한다고 한다면 사물들 사이의 모든 구별은 사라질 것이고, 결국 사물들은 단순한 가상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물을 실재적인 것으로 경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물의 실재란 그것이 궁극적으로 신에서부터 파생되어 나오고 있는지가 의심스러운 그런 종류의 것이다. 셸링이 강조하듯이 자연에는 "비이성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 "혼돈의 무질서한 탄생"이 난무하고 있다. "자연의 내적인 자기 분열"이 있는 것이다. 생명체의 영역에는 어두운 욕망과 충동이 있다. 그것은 마치 "신성이 광란의 세상에 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에도 정신의 신성함이 아래에는 비이성적인 충동이 도사리고 있다. 인간의 현존재는 "역겨움과 불안의 삶"이다. 자유까지도, 인간이라는 고등동물의 가장 고귀한 표징인 자유까지도 비이성적인 것에서 나온다. "모든 인격은 어두운 근거에 기인하고 있다." 아니, 인간은 바로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여 근원에 맞설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의 두 다리로 서려는 불손한 시도까지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역사적 "세계에 하나의 목표, 하나의 진정한 근거가 있는지를 철저히 회의하게 하는 매우 절망적인 연극"을 연출하고 있다. 셸링은 마침내 이렇게 종합한다. "세계와 인류의 문명은 본래 비극적이다. "실재에 대한 최종적인 관점은 "모든 존재의 불행"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셸링이 이렇게 의심스러운 실재가 신 안에 근거를 두고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는 실재의 반항적인 요소조차도 신으로부터 파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신에 대한 생각을 바꿀 때에만 가능하다. 절대자에게 순응하기를 저항하는 그러한 사물과 사건이 신에서 생겨났다면, 그것들은 신 안에 하나의 독자적인 뿌리를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신 안에 어떤 부정적인 것을 설정해야 할" 필연성이 생긴다. 신은 그 자신의 단일성을 손상 받지 않으면서 그 자체 모순적인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신성은 원래 두 가지 요소, 즉 어두운 근거--마치 신 안에서의 자연처럼--와 의식적인 신적 정신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p307

이 두 가지 원초적인 요소에서 발원하여 신의 생성이 시작된다. 셀링은 신성이 자신에서 나와 자신의 외적인 표현으로서의 세계로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지를 규명해 보려고 어렵게 시도한다. 그는 슬레지엔의 위대한 신비주의자 야콥 뵈메의 사상을 좇아 다음과 같은 점을 보여주려고 한다. 즉 어떻게 신 안에서 그의 자유의 불가사의한 근거로부터 충동으로서의 어두운 근거가 정신과의 결속을 끊고 신의 분리되지 않은 단일한 본질에서 뛰쳐나오는지를 보여주려고 한다. 셀링은 그것을 신의 "수난의 길"이라고 부른다. 신은 이 길에서 "자신의 본질에 대한 그 모든 경악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신의길이 곧 그의 세계 생성의 시작이다. 신의 단일성에서 뛰쳐나와 자기 자신의 두 다리로 서려는 이 충동이 바로 우리 눈에 자연, 바로 그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신성은 자기 소외에서 다시 자기 자신과의 일치로 되돌아 가려고 열망한다. 이러한 방향 전환이 이루어지는 결정적인 곳이 인간이다. "인간에게 가장 깊은 심연과 가장 높은 하늘이 있다." 인간은 자유를 가짐으로써 신에게 등을 돌릴 수 있는 극단적인 가능성에 도달한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정신이다 그래서 인간은 바로 자신의 자유를 활용하여 신적인 정신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따라서 인간과 더불어 근원인 신성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던 부분의 귀환이 시작되고, 동시에 신 안에 있는 충동과 정신의 화해가 시작된다 이와 더불어 유한한 세계도 다시 무한 속에 받아들여지게 된다. 셀링은 이 과정 전체를 되돌아보며 이렇게 말한다. "우주와 우주 역사의 위대한 목적이란 완전한 화해와 절대성으로의 재수용일 뿐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신쪽에서 볼 때, 그 안에서 신이 자기 자신을 완전히 의식하게 되는 엄청난 사건이다. 이 과정은 "완전한 의식화의 과정이고, 신의 완전한 인격화의 과정"이다.

셀링은 말년의 마지막 10년 동안 더욱더 신과 세계의 신비 속에 파묻혀 지냈다. 그는 사물의 실재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고 했다. 그리고 동시에 바로 이 실재를 더욱더 신의 자기 계시로, 우리로서는 알길 없는 신의 자유로운 행위와 작용으로 이해하려 했다.

@p308

그렇지만 그는 더 이상 포괄적인 그의 구상들을 출간하지는 못했다. 그 시대의 어느 누구도 그의 말에 귀를 귀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계의 심층으로서의 신에 대한 사상에 전적으로 몰두하여 셀링은 죽을 때까지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절대자를 향한 이러한 열정적인 사랑은 필연적으로 철학함에 대한 포기를 수반한다. 셀링도 이점에 대해 언젠가 말한 적이 있다. "한번 길을 떠난 적이 있는 사람, 모든 것에게 버림을 받은 적이 있는 사람만이, 그에게 모든 것이 가라앉아 버려 무한자와 더불어 자신만을 바라본 적이 있는 그 사람만이 자기 자신의 근거에 도달하며 삶의 모든 깊이를 인식한다. 그것은 플라톤이 죽음과 비교한 그런 위대한 한 걸음이다. 단테가 지옥의 문에 씌어 있을 것으로 생각한 다음의 문구는 다른 의미에서 철학의 입구에도 써 놓을 수 있는 것이다. '갖고 있는 모든 희망을 포기하라' 진정 철학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모든 희망, 모든 갈망, 모든 동경에서 벗어나야만 하고, 또한 그는 어떤 것도 원해서는 안 되며 아무 것도 알아서는 안 되고 완전히 벌거벗은 채 자신의 비참을 느껴야 하며, 모든 것을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이 걸음을 내딛기란 매우 어렵다. 마치 마지막 피난처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p309

23. 헤겔

인간 내의 세계 정신

"천박하고, 우둔하고, 역겹고, 메스껍고, 무식한 사기꾼인 헤겔은 전례없이 뻔뻔스럽고 어리석은 실없는 소리들을 잔뜩 늘어놓았는데, 이것을 그의 상업적인 추종자들은 불멸의 진리인 양 나팔을 불어댔으며, 바보들은 그것을 진실인 줄로 알아 환호하며 받아들였다 헤겔은 교육받은 한 세대 전체를 지적으로 파멸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 지극히 명료하게 표현된 이 글은 어떤 사람이 순간적인 실수로 내뱉은 것은 아닐 것이다. 이 글은 분명 깊이 생각한 다음 발표한 것으로, 이 글을 쓴 사람은 다름 아닌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였다. 쇼펜하우어는 일시적으로 치미는 분노에 못이겨 이런 글을 쓴 게 아니었다. 그의 저작들은 헤겔에 맞서 꾸준히 새로운 공격을 퍼붓는다. 그는 헤겔을 "불쌍한 후원자", "정신성을 가장한 괴물", "속을 뒤집어 놓는 사람"이라고 표현하였다.

@p310

또한 그의 철학에 대해서는 "내용 없는 헛소리", "무의미한 수다", "철학적인 희극", "지금까지는 그저 정신 병원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무의미하고 미친 듯한 언어들의 뒤범벅"이라고 한다. 그러나 바로 이 사람이, "그 이전의 어느 누구보다도 헛소리를 매끄럽게 번드르한 말로 지껄이는" 그가, "맥주집 주인 같은 모양을 한" "모순 투성이의 서생" 30년이란 긴 세월 동안 독일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간주되어 왔다. 그렇지만 후세에는 헤겔에 대한 진실이 폭로될 것이라고 쇼펜하우어는 예언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헤겔이 너무 "지나치게 경멸스러운 짓"을 하고 있으며 따라서 "후세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될 것일 뿐" 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후세 사람들은 헤겔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들은 얼마 동안은 그를 거의 잊고 있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의 사유는, 쇼펜하우어의 그 모든 예언에도 불구하고, 근세에서는 오직 칸트만이 그에 필적할 만한 중요성을 획득하게 된다. 헤겔에 관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저작이 저술되었고, 전 세계에 헤겔 학회가 결성되었으며, 온갖 부류의 헤겔 학도가 생겨나게 되었다. 헤겔에게 경도되기를 거부하는 사람조차도 진지한 의미로 철학을 하려고 든다면 그와의 한판 승부를 회피할 수 없게 되었다. 더 나아가 헤겔은 그의 제자인 마르크스를 통해 우리의 현 세계의 구체적인 사건에까지 관여하고 있다. 그의 사상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헤겔을 공격한 쇼펜하우어의 장광설은 잊혀졌다. 이 일은 후세 사람들이 제대로 파악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쇼펜하우어의 글에서 보이는 도가 지나친 분노의 표현은 대체로 개인적인 원한에 근거를 두고 있는 듯해 보이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대학 교수로서 헤겔과 경쟁하려 했지만 참패를 당하고 만다. 그는 그의 사유가 다른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고 확신한 나머지, 이제 신출내기 철학 사 강사인 주제에 자신의 강의들을 헤겔의 강의와 동일한 시간대로 옮겨 개설한다. 그런데 예상과는 반대로 학생들은 헤겔의 강의실로 몰려들 뿐 쇼펜하우어의 강의실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한 학기를 마친 후 쇼펜하우어는 그의 강의를 중단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의 청중이란 텅 빈 의자들뿐이었기 때문이다.

@p311

그렇듯 학생들이 헤겔에게로 몰려들었다는 것은 물론 놀랄 만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의 강의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고, 헤겔 또한 학생들이 감동할 만한 달변가도 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강의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어떤 힘이 있었다. 그에게는 강의를 듣는 학생을 휘어잡는 힘이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충실했던 한 학생은 우아한 필치로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기운 없이 다소 언짢은 듯 머리를 낮게 숙인 채 몸을 움츠리고 앉아서 그는 커다란 노트를 앞뒤로 넘기고 위아래로 훑으면서 계속 말을 하며 무엇인가를 찾았다. 끊임없는 헛기침과 잔기침은 말의 유연한 흐름을 계속 방해했고, 그래서 각 문장은 따로따로 떨어지거나 긴장된 어조로 갈라져 나왔으며 때로는 뒤죽박죽 섞이기도 했다. 모든 낱말과 모든 음절은 아주 힘들게 조각조각 발음되었는데 금속성의 음색을 띤 억센 슈바벤 지방 사투리는 마치 발음되는 하나 하나의 낱말인 가장 중요한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기이한 중량감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깊은 존경심을 불러일으켰고 그에게 경의감을 품도록 만들었다. 가슴 벅차게 사람을 사로잡는 진지함과 소박함에 이끌려 그 모든 마땅찮은 상황 속에서도 끈기 있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

@p312

해독해 낼 수 없어 보이는 것들의 밑바탕을 저 위압적인 정신이 기막힐 정도로 훌륭하게, 담대한 자기 확신감으로 편안하고도 순탄하게 문제를 파헤치고 연결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목소리는 차츰 커지고 눈은 모인 청중들 너머로 날카롭게 번득이며, 뿌리깊은 확신의 섬광이 소리없이 타오르며 빛을 발했다. 그러는 동안 그는 결코 미욱한 점이 없는 말로 영혼의 그 모든 고상함과 심오함을 헤집고 다녔다."

이처럼 일에 신들린 듯 몰두하는 자세는 그의 소년 시절부터 나타난다. 슈투트가르트 김나지움 학생인 헤겔은 일기를 썼다. 그는 순수하고도 진지한 성찰들을 때로는 독일어로, 때로는 라틴어로 일기에 적었는데, 신과 세계에 대한 조숙한 견해와 행복, 미신, 수학과 자연 과학, 세계 역사의 흐름, 심지어 '여성의 성적 특성' 에 대해서까지 기록하고 있었다. 청년 헤겔이 여성들과 친밀한 교제를 빈번하게 가진 것은 물론 아니었다. 오히려 헤겔은 그의 동료 학우들에 대해 이렇게 분노하고 있다. "남자들은 쓸데없이 여자들과 산책 따위나 하면서 자기 자신을 망치고 터무니없이 시간을 허비한다." 그러나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음악 연주회에 다녀와서는 이렇게 쓴다. "아름다운 여자를 바라보는 것은 상당한 즐거움을 준다. "

이러한 사소한 자유 분망한 태도를 제외하면 헤겔의 성격의 근본 특징은 헝크러짐이 없이 진지하다. 이러한 성격은 유명한 슈바벤의 신학교인 튀빙겐 기숙사에 들어가서도 그리 달라지지 않는다. 그곳에서 그는 같은 나이의 횔더린과 다섯 살 아래의 조숙한 천재 소년 셸링과 친해진다. 그들은 모두 칸트와 프랑스 혁명에 열광했다. 헤겔은 이러한 그의 청춘 시절의 심취를 일생 동안 변함없이 충실히 지켰다. 스스로 철학자가 됨으로써 칸트의 철학에 충실했으며 프랑스 혁명 기념일에는 매년 조용히 혼자 포도주를 마시면서 그 혁명의 의미를 되새겼다. 그런데 이 세 사람

가운데 자기 내부의 열광을 가장 잘 숨긴 사람은 헤겔이었으며, 그래서 친구들은 그에게 "노인" 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학업을 마친 후 헤겔은 맨 처음에 가정 교사가 된다. 이 자리는 횔더린이 소개해 주었다. 그러나 그 후 그는 23세의 나이로 교수가 된 셸링의 추천으로 그 당시 철학자들의 메카로 통했던 예나에 사강사로 초빙되어 간다.

@p313

그 곳에서 그는 매우 이해하기 힘들고 심오한 의미로 가득 찬 강의를 한다 급료가 워낙 박해 그는 정기적으로 바이마르의 문교장관인 괴테에게 보조금을 달라는 청원을 해야만 했다. 그는 예나에서 프랑스 혁명군이 진입하는 것을 보았다. 나폴레옹이 도시로 들어왔을 때, 헤겔은 "세계 정신" 이 말을 탄 것을 보았다고 썼다. 그러나 그 세계 정신은 헤겔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그의 집은 약탈당했고, 전쟁의 혼란으로 봉급 지급이 중단되었다. 실직 당한 철학자는 새로운 직장을 찾아야만 했다. 그는 밤베르크에서 편집인으로 활동했으나 곧 "신문 함선" (Zeitungsgaleere)에 싫증을 느끼고 뉘른베르크의 김나지움 교장으로 간다. 난해한 철학자인 그가 어떻게 어린 아이를 가르치는 일을 하며 견뎌 냈는지에 대해서는 시인 클레멘스 브렌타노의 편지에서 상당한 흔적을 찾아낼 수 있다. "나는 뉘른베르크에서 김나지움의 교장인 존경할 만하지만 융통성 없는 헤겔을 보았다. 그는 영웅 서사 집과 니벨룽겐의 노래를 낭독하면서 그것을 즐기기 위해 읽는 도중에 그리스어로 번역해서 낭송하곤 했다."

@p314

마침내 헤겔은 46세 때 교수가 되는데, 처음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있다가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 간다. 물론 베를린에 익숙해지기까지에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베를린이 하이델베르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지겹도록 많은 술집" 이 있다는 점이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고, 꽤 비싼 생계비와 방세 때문에 걱정한다. 그러나 그는 곧 베를린에서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그는 특히 이 점을 본을 여행하는 동안 분명하게 깨닫는다. 본은 전혀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그 점에 대해 아내에게 이렇게 쓴다. "본은 울퉁불퉁하고 거리는 좁아터졌다오. 시의 근교나 경치 또는 식물원이 매우 아름답기는 하지만 말이오. 그러나 나는 베를린이 더 마음에 드오." 사람들은 이에 대해 헤겔의 첫번째 전기 작가가 쓴 그의 사교적 기질에 대한 글을 읽는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은 베를린의 부인들의 사교계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또한 반대로 부인들의 사교계는 곧 이 훌륭하고 재기 넘치는 교수를 좋아하게 되어 사랑으로 감싸고 돌보았다."

물론 헤겔이 항상 그렇게 사랑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전기 작가는 계속해서 이렇게 쓴다. "그는 노하고 격분하는 데 대단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일단 증오하기로 작정하면 정말로 철저하게 실행에 옮겼다. 그의 질책 또한 대단히 매서웠다 그에게 당하는 사람은 곧 사지를 바들바들 떨 정도였다." 때때로 동료들과 불화를 빚게 되는 것도 어찌 보면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와 불화를 빚은 사람으로는 고집 센 대학 강사인 쇼펜하우어가 있다. 그리고 슐라이어마허와의 불화도 그중 하나다. 헤겔은 다른 동료들과 함께 하는 술자리에서는 슐라이어마허와 간단한 대화를 나누기는 했지만 그다지 좋은 사이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대학 구내에서까지 이런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이들 두 사람이 어떤 논문에 대해 토론하다가 서로 칼을 빼들고 싸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이 소문을 공적으로 부인하기 위해 티볼리에서 사이좋게 같이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은 하찮은 일들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헤겔이 대학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는 것과 머지않아 독일의 철학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p315

그의 강의실은 발 들여놓을 틈이 없이 청중들로 꽉 들어찼는데 학생들뿐 아니라, "육군 소령, 대령, 추밀 고문관" 까지 왔다. 그의 철학은 이미 그의 전임자 피히테처럼 갈수록 프로이센 국가의 정신적인 형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것은 물론 오래 계속되지 않는다. 61세 되던 해인 1831년 헤겔은 콜레라로 죽는다. 당시 베를린 전역에는 콜레라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는데, 철학적 사유에 정진하고 있던 한 생명을 앗아가 버린 것이었다. 그가 글로 남긴 최후의 말은 "오직 사유하기만 하는 인식의 열정 없는 고요함" 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바로 이 사유하는 인식에 그의 전 생애를 바쳤다. 그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이 밑바닥에 무엇을 간직하고 있는지를, 그리고 이러한 현실 속에서 사유하고 행위하며 살고 있는 인간에게는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파헤치려 했다. 그것은 모든 위대한 철학이 설정하고 있는 과제이다. 따라서 헤겔을 이해하려면 이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p316

그러면 흔히들 그러하듯이 헤겔 사상의 업적을 피상적으로 배울 수 있는 변증법--, , 합의 짤랑거리는 운율--에서 탐지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살아 있는 철학으로서의 그의 사유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의 철학은 현존재에 대한 구체적인 물음에서 생겨 나와 체계로 발전해서 마침내 서양 정신의 거대한 형이상학이 된다.

헤겔은 그러한 구체적인 물음에 일찍이, 그것도 칸트를 공부할 때 부딪치게 된다. 칸트는 그의 거대하게 기획된 윤리학 구상에서 의무와 경향을 첨예하게 대립시킴으로써 인간을 두 부분으로 갈라놓았다. 한 부분은 도덕 법칙을 의식하는 "본래의 자기 자신" 이고, 다른 부분은 나쁜 성향을 갖고 있는 "경험적 자아" 이다 그런데 헤겔에게는 "전 인간의 일치"를 되찾는 일이 중요한 관건이 된다. 그는 전체 인간의 일치를 사랑에서 찾는다. 사랑은 인간의 도덕적 본질의 표출일 수 있으며, 그것은 또한 인간의 자연적 성향과도 상응한다. 따라서 사랑의 본질에 대한 물음은 헤겔 사유의 출발점이 된다. 여기서 그는 첫번째 결정적인 발견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후에 그의 전체 철학의 기본 윤곽을 형성한다.

왜냐하면 헤겔은 사랑에서 처음으로 하나의 계기를 만나게 되는데, 그 후 그는 이 계기를 모든 현실에서 다시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계기가 곧 변증법이다. 그러므로 변증법의 뿌리는 추상적 사유 가운데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변증법의 발견은 구체적인 현상의 고찰에서 비롯된다. 여기에서 헤겔은 다음과 같은 통찰을 얻는다. 변증법은 근원적으로 철학적 성찰의 관심사가 아니라 현실의 본질적인 구조계기이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생생한 사건으로서의 사랑에는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먼저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그는 자기 자신에게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긍정해야하고 정립해야 한다. 그것을 형식을 빌려 표현하자면, 사랑이라는 사건의 전체 속에 있는 정립이다. 그러나 사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더 포함된다. 즉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서 나와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바치고, 이러한 헌신 속에서 자신을 잊어버리며, 그럼으로써 스스로 소외된다

@p317

그는 이렇게 자기 자신을 거부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처음의 정립을 부정하고 다른 사람을 자기 앞에 마주 서게 한다. 따라서 사랑의 형식적 구조에는 단지 정립만 속하는 것이 아니고, 부정하는 반 정립도 속한다. 그렇지만 이것으로 현상이 완전히 파악된 것은 아니다. 결정적인 것은, 사랑하는 자가 타인을 사랑하면서 자신을 잊고, 그럼으로써 본래적인 자신을 되찾는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헌신 속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더 심오한 의미에서 자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사랑의 참된 본질은 자기 자신의 의식을 포기하여 자신을 다른 자기 속에서 망각하는데 있으며, 이러한 소멸과 망각을 통해 비로소 처음으로 자기를 소유하고 점유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 정립에 속하는 부정이 다시 부정된다. 소외는 지양되며 동시에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 사이의 진정한 종합이 완성된다.

이렇듯 사랑의 사건은 변증법적 과정의 구조를, 그것도 하나의 생생한 사건으로서의 구조를 보인다. "사랑받는 사람은 우리와 대립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의 본질과 하나이다. 우리는 단지 사랑받는 자 안에서 우리를 본다.--그러나 사랑받는 자는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아니다.--이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기적이다." 사랑이 현실 속에 있는 하나의 사건이라면, 이 말은 곧 변증법은 현실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 즉 모순과 모순의 화해가 드러난다는 뜻이다.

헤겔은 사랑을 좀더 상세하게 고찰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한다. 사랑은 단지 전체 현실의 개별화된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다양한 방식으로 철두철미하게 꿰뚫고 있다. 사랑은 곧 현실의 근본 진행 과정이다. 모든 생명은 사랑하는 관계에서 생겨나며, 오직 이런 관계를 통해서만 스스로를 보존한다. 이 말은 사랑 속에서 나타나는 것은 생 그 자체라는 뜻이다. 사랑하는 사람들 또한 이 점을 알고있다. 그들은 사랑에 압도당하면서 그들 속에서 보이지 않게 생명이 싹트고 있음을 예감한다. 사랑 속에는 "생명 자체가 존재" 하는 것이다. 이렇듯 헤겔에 의하면 눈으로 보이는 사랑의 이면에는 "생명의 무한한 우주" 가 펼쳐지고 있다는 것이다.

@p318

다시 말해 사랑은 거기에서부터 모든 생명체가 생성되는 근거로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비로소 헤겔의 사유는 더욱 심오한 의미에서 철학적 사유로 발전된다. 그는 더 이상 눈앞에 드러나는 것만을 보는 게 아니라, 보이는 것의 존재 근원을 묻는다. 그는 또한 사랑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 즉 우주 생명은 현실 일반의 근원임을 깨닫는다.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에는 하나의 위대한 생명이 흐르고 있다. 그래서 헤겔은 모든 현실적인 것 중의 현실적인 것으로서의 존재 근원을 "절대적 생명", 또는 "절대자" 라고 부른다. 모든 현실이 절대자 속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보는 것, 모든 것이 한 절대자의 구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헤겔의 철학적 근본 지향이다. 이것은 또한 그의 사유에 형이상학적 특징을 부여한다. 왜냐하면 이제 현실은 바로 이러한 본래적으로 현실적인 것으로 절대자의 관점에서부터 고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철학은 "절대적인 학문"이 된다.

철학이 절대적인 학문이 되어야 한다는 헤겔의 생각은, 특히 그의 시대와 관련하여 절박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시대는 "생명의 현상에서 자취를 감춘 절대자", "신 자체가 죽었다는 느낌" 등의 표현으로 특징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생각대로라면, 그의 시대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절대자가 다시 그의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절대적 생명은, 헤겔이 단호히 주장하듯이 그의 뛰어난 예시인 사랑에서와 똑같은 변증법적 구조를 보이고 있다. 그것도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을 그들 속에서 전개되는 생명의 표현으로서 고찰할 때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꿰뚫고 흐르고 있는 것이 하나의 동일한 생명이라는 것을 감지한다. 따라서 그 모든 것의 근원에는 생명의 단일성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분리된 본질임을 알고 있다. 그들은 나뉘어짐의 고통을 경험한다. 단일한 생명은 살아 있는 본질들의 다양함 속에 분산되어 나타난다. 그리하여 분열은 근원적으로 자기 자신과 일치하고 있는 생명이 된다. "필연적 분리는 영원한 대립 속에서 자신을 형성하는 생명의 요소이다."

@p319

그렇지만 모든 분리 속에서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일치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들 속에서 전개되는 생명은 분열에서 통일로 나아가기를 갈구한다. 사랑 속에서 "생명 그 자체는 자기 자신의 중복과 자기 자신의 일치로써 존재한다." 따라서 근원적으로 현실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생명은 스스로 변증법적인 과정인 분리와 결합의 자기 소외와 화해의 영원한 사건이다. 이러한 자기 내적인 리듬으로 생명은 끊임없이 새로운 형상을 창조하고, 그 속에서 자기의 창조적인 본질을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헤겔은 이 우주 생명을 신성으로 지칭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신성 안에서 살고 있다." 신은 "무한한 생명" 이다. 따라서 헤겔의 사유는 철학적 신학이 된다. 철학의 대상은 "신과 그에 대한 해석일 따름" 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신을 처음부터 절대적으로 철학의 정상" 에 자리하게 하는 데 달려 있다.

모든 것 속에 살아 있고 그 속에서 모든 것이 살고 있는 바로 그 신성은 그리스도교적 의미의 인격적이고 초월적인 창조주로서의 신이 아니라 "세계의 신" 이다 그렇지만 헤겔은 한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의 신의 개념으로 접근해 가서 전통과 분명히 연계되는 점을 찾는다. 그는 신성을 정신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해석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헤겔에게 인간 정신이란 세계 속에서의 신의 가장 고귀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신성이 인간의 정신 속에서 가장 높은 단계로 자신을 구현하고 있다면 신성 자체도 정신적인 유형이어야 할 것이다. "절대자는 정신이다. 이것이 절대자에 대한 최고의 정의이다." 이렇게 헤겔은 그의 철학의 근본 개념, 절대 정신의 사유에 이른다. "신은 절대 정신이다."

그런데 신은 정신이고, 세계는 신이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라고 한다면, 거기에서부터 세계 또한 궁극적으로 정신적 존재여야 한다는 결론이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헤겔은 실제로 이러한 엄청난 결론을 이끌어 낸다. 우리가 우리 목전에 보는 모든 것, 즉 인간과 인간 정신의 창조물뿐 아니라 사물, , 동물, 식물, 요컨대 전체 자연이 그 근본에 있어서는 정신인 것이다. 사물들이 물질적 속성의 존재라고 여기는 것은 단지 우리의 제한된 유한한 관점일 뿐이다.

@p320

세계를 옳게 이해하거나 철학적으로 이해하는 사람, 헤겔 식으로 말하자면, 세계를 진리에서 통찰하는 사람은 세계를 겉으로 드러난 정신으로 파악해야 한다. 왜냐하면 "정신적인 것만이 현실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제 본래적으로 어려운 철학적 과제가 대두된다. 즉 어떻게 신이 자연으로서 그리고 인간 정신으로서 나타나고 있는지, 더 나아가서는 도대체 신성이 세계가 되어야 할 내적 필연성이 과연 있는 것인지를 설명해야 한다. 헤겔은 변증법이 어떻게 그것의 가장 높은 단계인 신 안에서 다시 한번 나타나는가를 보임으로써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신이 정말 우주 생명이라면, 신은 이러한 우주 생명과 똑같은 동일한 내적 구조를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 정신의 근본 개념" "자신의 타자로부터 자기 자신에게로의 화해의 귀환" 이다. "신은 자기 자신과 구별된 것으로, 대상으로 존재한다.

@p321

그러나 이러한 구별 속에서 단적으로 자신과 동일하게 존재하는 것, 즉 신은 정신이다." 바로 이러한 신성 안에서의 내적인 변증법적 사건은-헤겔이 깨달은 바와 같이--신성 스스로가 세계임을 입증하고 있는 방식이다.

이것을 명료하게 하기 위해서 헤겔은 인간 정신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는 인간 정신을 신적 정신의 모상으로 보는데, 그것은 인간 정신이 신의 가장 고귀한 현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 정신의 특징은 무엇인가? 헤겔은 인간은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존재라고 답한다. 정신은 본질상 자기 의식이다. 그렇지만 자기 의식이라 하여 완전히 완료되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거기에는 자기 의식의 단계가 존재하며, 그것은 생성, 발전하는 자기 의식이다. 이것은 예컨대 어린 아이가 성장한 사람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있다는 데에서도 직접적으로 잘 드러난다. 이제 헤겔은 생성되어 가는 의식의 도정이 변증법적 방식임을 보여주려고 한다. 다시 말해 그 도정이 사랑과 생명의 현상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바 있는 그런 세 단계로 수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신의 발전은 돌출이며, 자기 분리인 동시에 자기 복귀이다."

자기 의식의 제1단계는 정신이 아직 꿈을 꾸고 있는 상태와 비슷하다. 인간은 아직 명확히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한다. 예를 들면 어린 아이의 자아 의식과도 같다. 어린 아이는 자신이 거기 있다는 어렴풋한 느낌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바로 이러한 단순한 현존재의 감정은 변증법적 도식에서 정립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자기 자신을 의식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꿈꾸는 상태에서 깨어나야 한다. 이것이 제2단계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돌리게 되며,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헤겔이 말하는 바와 같이 이제 매우 신기한 일이 일어나게 된다. 정신이 자기 자신을 보는데, 그에게는 그가 본 그것이 어떤 낯선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그는 말하자면 자신의 모습에서 소외되었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는 놀라서 묻는다. 이것이 나란 말인가? 그리하여 자기 직관 가운데에서 자아에서의 소외가 일어난다 자아는 직관하는 자아와 직관된 자아로 분리된다.

@p322

이러한 "자기 소외"가 반정립의 단계이다. 그러나 이 반정립 단계에서도 인간은 아직 현실적이고 완성된 자기 의식에 도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자기 직관에서 본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 즉 직관하는 자와 직관되는 자는 똑같은 자아라는 사실이다. 헤겔이 말한 바와 같이 이로써 인간은 이제 자기 소외 단계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그는 자기 자신과 화해하게 된다. 이것이 자기 의식에서의 종합단계이다. 이러한 숙고의 결과는 인간 정신은 자기 의식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자기 의식은 생성되어 가는 자기 의식이며, 그 자체가 변증법적이다.

헤겔은 이렇게 인간 정신에서 발견한 것을 이제 신의 정신에 적용시킨다. 신의 정신도 생성하는 자기 의식이고, 이 자기 의식의 생성은 변증법적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헤겔이 신성을 이해하고 있는 바를 볼 때 제일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신성은 단연코 완료된 것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어떤 내적인 생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성은 발전을 통해 비로소 자기 자신에 대한 완전한 의식에 도달한다. 바로 이 점에서 헤겔의 신에 대한 사상은 그리스도교의 신에 대한 개념과 가장 명백하게 구별된다 그의 철학적 근본 사상은 신 자신이 하나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신은 자기 자신의 본질을 완전하게 전개시키는 과정을 이행한다는 것이다.

헤겔이 설명해야 하는 두번째 것은, 어떻게 내적인 신의 역사가 변증법적 생성으로 수행되는가 하는 것이다. "절대 정신은 영원히 자기자신과 똑같은 본질로서 자신에 대해 타자가 되며, 이 타자를 자기 자신으로서 인식하는 그런 존재" 이기 때문이다.

이에 상응하는 제1단계가 있다. 이 단계에서는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여 절대 정신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과 같다. 헤겔은 엄청난 시도로 이러한 신성의 자신 안의 존재를 "논리학" 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해석하려고 한다. 논리학은 "어떻게 신이 자연과 유한한 정신의 창조 이전에 그 자신의 영원한 본질 내에 존재하고 있었는가를 기술하는 신에 대한 서술" 을 포함하고 있다.

@p323

그렇지만 그것이 현실적인 자기 의식이고자 한다면, 신성은 꿈꾸고있는 단계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다. 헤겔은 신이 완성된 자기 의식에 이르는 과정을 서술하기 시작한다. 먼저 신성은 자기 자신을 찾아 나서야 한다. 신성은 제2단계에서 자기 소외를 감내하여 스스로 자신을 외화시켜야 한다. 신성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흡사 낯선 것을 보는 것처럼 직관하는 자아와 직관된 자아로 나뉘어진다. 헤겔은 다음과 같은 치밀한 주장을 내세운다 이렇게 자신 안에서 분열된 신성은 우리의 눈앞에 세계로 나타나는 바로 그것이다. 신성의 자기 소외는 곧 신성의 세계 생성이다. 이 말은 곧 헤겔이 엄청난 과제를 떠맡아야함을 뜻한다. 즉 현실 전체를 신과 절대 정신의 관점에서부터 파악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의 철학함은 흡사 신의 관점으로 자리를 옮긴 듯하다. 헤겔은 인간 속의 세계 정신이 된다.

세계가 자신의 자기 소외 내에서의 신의 표현이라는 것을 헤겔은 세계 자체에서, 그리고 또한 세계가 우리에게 드러나는 그대로 명확히 보여주려 한다. 세계는 한편으로는 자연으로 나타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정신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양자 모두 그 밑바탕에 있어서는 신의 표현으로 파악되어져야 한다. 이러한 철학적 관점에서는 자연을 인식하는 인간 정신이란 곧 신 안에 있는 직관자로 이해된다. 그리고 인간 정신이 인식하는 자연은 이러한 신적인 직관이 관조한 것이 된다. 자연은 "자기 자신의 타자로서의 절대 정신"이다.

우리가 자연, 사물로서 인지하고 있는 것은 실제로는 신 자신이다. 자기 자신을 낯선 것으로 직관하는 그대로의 신이다. 자연 철학은 헤겔에게 신론이 되며, 자기 소외 속에서의 신에 대한 학설이 된다. 인간의 정신이 자연을 인식한다고 할 때, 이것은 실제로는 인간의 정신 안에 현존하는 신성이 자기 자신을 인식함을 뜻한다.

이러한 자기 직관의 사건 속에서 이미 귀환이 진행되고 있다. 이것이 자기 의식의 제3단계를 특징짓는다. 왜냐하면 이제 신은 직관하는 자로서, 또 직관된 자로서 하나이며 동일한 자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자기 의식의 수행의 본질에 속한다. 이러한 신의 자기 자신에로의 귀환은 인간 속에서 수행된다.

@p324

인간 속에서 신은 완료된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으로 나타나며, 인간 안에서 신적 자기 의식의 변증법은 마침내 그 끝에 도달하게 된다. 헤겔은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그의 "정신의 철학" 에서 다양하게 기술하고 있다. 신의 자기 인식은 인간 정신의 차원에서 수행되고 있는 그 모든 것의 가장 내적인 의미이다. 신의 자기 인식은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개별 존재에서도 나타난다. 그것은 법, 국가, 학문, 예술, 종교, 그리고 최정점에서는 철학함에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인간이 마침내 전체 현실을 신적 정신의 표현으로서 파악하는 데 성공하게 되면 이렇게 말 할 수 있다. 신성은 자신의 세계 생성과 균열의 긴 모험을 마치고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들어왔다고 말이다.

헤겔이 여기서 기도하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사건이다. 헤겔은 전체 현실을 절대 정신의 순수하고 완벽한 표현으로서 파악하려고 한다. 그는 "절대자가 영원히 자기 자신과 벌이고 있는 비극을 이렇게 묘사한다. 즉 절대자는 스스로 영원히 객관성 속에 탄생되고, 이러한 그의 형태 속에서 자신을 고통과 죽음에 내맡기고 자신의 죄로부터 스스로를 영광 속으로 고양시킨다. "왜냐하면" 죽음을 두려워하고 황폐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보존하려는 그러한 생명이 아니라, 죽음을 견뎌내고 죽음 속에서 자신을 견지하는 생명은 곧 정신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정신은 절대적 균열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함으로써만 자신의 진리를 획득한다."

그렇지만 결국 헤겔의 이 웅대한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는 자신의 체계 안에 짜맞춰질 수 없는 냉혹한 사실 때문에 좌초하고 만다. 분명 그 안에는 신적인 것의 직접적인 표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완벽한 세계 형태가 있다. 즉 완벽한 유기체, 도덕적으로 이해된 국가, 성공한 예술품, 진정한 종교, 위대한 철학 등이 그런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이 광활한 사막의 조그만 오아시스일 뿐이다. 이 황폐한 사막은 실재의 현실 속에서 신의 표현으로 해석될 수가 없다. 거기에는 자연에서와 같은 무의미하고 불완전한 것들이 있고, 또한 수많은 실패한 시도들이 있으며, 삶의 무절제한 낭비와 끝없는 반복이 있다. 거기에는 또한 인간 감각의 혼돈스러운 요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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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연구실에 앉아 있는 헤겔--그림생략

@p326

또한 거기에는 역사에서와 같이 도저히 신적인 정신의 완성된 자기 의식으로의 발걸음이라고는 이해할 수 없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의미한 사건들이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을 통해 세계는 신의 순수한 표현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세계 속에는 반대되는 것들이 있다. 즉 반신적인 세력과 카오스의 세력이 있다. 헤겔이 거듭 시도한 것처럼 우리가 세계를 신성으로 파악하려고 고집한다면, 우리는 마침내 신이 세계가 되어 투쟁과 충돌이 일어나고, 가끔 승리하기도 하지만 수많은 패배가 전개된다는 것까지를 인식해야 한다. 신은 드물게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데 성공할 뿐이며 그 나머지는 파멸뿐일 것이다.

헤겔은 실패했다. 그러나 그가 설정한 과제, 즉 본질적인 관심은 그대로 남아 있다. 즉 세계를 통일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한 점을 발견해야 한다는 과제는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에 비추어 볼 때 헤겔은 모든 철학함의 모범이 된다. 그러나 신의 애매 모호한 점을 인식하며 파고들려는 그의 모든 다양한 시도가 실패했을 때, 철학자에게는 괴테가 인간의 최고의 과제라고 부른 체념만이 남게 된다. "탐구될 수 없는 그것을 조용히 흠숭할지어다."

@p327

24. 쇼펜하우어

사악한 통찰력

아르투르 쇼펜하우어는 확실히 박애주의자는 아니다. 그와 정반대로 그는 인간을 극히 혐오했다. 그는 스스로를 "인간 혐오자" 라고 불렀다. 한때 유명한 여류 작가였던 그의 어머니 요한나 쇼펜하우어는 아들의 "비뚤어진 심성" 을 매우 한탄하였다. 아들의 "천박한 세계와 인간의 곤궁함에 대한 끊임없는 한탄"은 그녀의 신경을 몹시 건드렸다. 쇼펜하우어는 그의 동료들이 자신에게 나쁜 짓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항상 의심스런 눈으로 주위를 경계했다. 그는 침실에 항상 무기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 또 집의 가장 은밀한 곳에 값나가는 물건을 숨겨두었다. 이발사가 면도칼로 자신의 목을 벨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이발사에게 면도를 시키지도 않았다. 누군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그는 폭력을 휘두르기까지 했다. 언젠가는 바느질하는 어떤 얌전한 여자가 수다를 떨어 그를 방해했다고 그녀를 바닥에 내동댕이친 적도 있었다.

@p328

그 일로 인해 그녀는 평생 불구로 지내게 되었고, 쇼펜하우어 자신도 평생 보상의 의무를 지게 되어 두고두고 자책감과 경제적인 부담으로 괴로워했다. 그는 출판업자들이 그의 책을 보급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며 끊임없이 다투었다. 그는 말년을 프랑크푸르트에서, 그 스스로 그렇게 말했듯이 "염세주의자"로서 완고하게 외부인과의 접촉을 끊고 살았다. 함께 생활한 유일한 존재는 그가 아꼈던 충실한 부들 강아지뿐이었다.

그의 증오의 대상은 무엇보다도 특히 철학 교수들이었다. 물론 쇼펜하우어도 한번은 대학에서 강의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베를린 대학에서 그는 학생들이 자신의 강의를 몹시 원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유명한 헤겔의 강의 시간대에 자신의 강의를 개설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강의를 들으려는 학생은 거의 없고, 나중에는 청강자가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되자 몹시 놀란다. 그는 결국 교수직을 포기하고 재야 학자가 된다. 그렇지만 그는 그 같은 실패를 자기 자신의 탓이 아니라, 밤에는 늑대로 변하는 것 같은, 다른 철학 교수들의 그릇된 증오와 과도한 시기심 탓으로 돌린다.

@p329

물론 동료들은 그를 증오하거나 시기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그에 대해 도대체 알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이에 몹시 실망한 그는 지독한 독설을 퍼붓기 시작한다. 그는 모욕할 대상을 선별하는 데 신중을 기하기 위해 법적인 자문까지 받았다. 그의 신랄한 인신 공격의 대상은 그 누구보다도 헤겔이었다. 헤겔의 학설은 그에게는 "절대적으로 허풍스런 헛소리에 불과한 철학" 이며, "허풍"이요, "사이비 지혜" 이며, "정신병자의 수다"로 여겨졌다. 또한 헤겔을 "허풍스런 도배장이", "사기꾼", "정신이 썩어빠진 추악한 남자"로 생각했다. 피히테에 대해서도 헤겔 못지 않게 나쁘게 평가한다. 쇼펜하우어가 판단하기에 피히테의 말은 "궤변" 이며, "요술장이의 주문" 일 따름이었다.

물론 그 시대의 철학에 대한 이러한 가차없는 선고에서 쇼펜하우어 자신은 제외시킨다. 그의 사상과 비교해 볼 때 이전의 철학자들--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몇 몇 영국 학자들을 제외하고는--의 사상은 "피상적인 것" 이라고 간주한다.

@p330

그는 자기가 "철학의 숨은 황제" 라고 자칭한다. 더 나아가 자신을 철학적 종교의 창시자로 부상시키기까지 한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을 따르는 몇몇 추종자들을 "사도", "복음사가" 라고 불렀다. 같은 시대의 사람들이 그를 거의 인정하지 않자, 그는 "후대의 판결" 에 호소한다. "내가 어떤 대상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무식쟁이로 창피를 당하는 때가 올 것이다." 마침내 성공과 더불어 명성이 찾아들자, 그는 의기양양해 한다. "나는 수많은 철학 교수들의 오랜 세월에 걸친 똘똘 뭉친 저항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해냈다."

대학 교수 다음으로 쇼펜하우어의 경멸의 화살이 쏠린 대상은 "여성" 이었다. 비록 그 또한 젊은 시절에 몇 몇 여성들과 즐거운 경험을 나눈 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성적 충동으로 이성이 흐려진 남자들만이, 키가 작고 어깨가 좁으며 엉덩이가 크고 다리가 짧은 이 여자라는 존재를 아름답다고 한다. 당연히 여자라는 족속은 속된 존재라고 불러야 한다.

@p331

여자들은 음악에 대해서도, 시에 대해서도, 조형 미술에 대해서도 아무런 참된 감정이나 이해력이 없다. 만일 그들이 그런 능력이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면, 그것은 남자들의 마음을 끌려는 의도로 꾸민 흉내일 뿐이다." 여자들의 특징이란 "미치광이에 가까운 낭비벽", "본능적인 교활함", "뿌리뽑기 어려운 거짓말 습관" 등이다. 요컨대 여자란 일종의 "하위의 존재"이며," 어린이와 본래의 인간이라 할 수 있는 남자 사이의 중간 단계" 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경멸은 그의 특징인 뿌리깊고 포괄적인 염세주의에서 비롯된다. 염세주의는 그의 사유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그 스스로도 자신의 철학에 "음산함과 암담함"이 있다고 말한다. 바로 이러한 염세주의적 특징 때문에 그는, 지난 반세기 동안 대단한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때문에, 사람들이 그러한 사상에 특히 귀를 기울여 예상하지도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특히 인간 현존재에 초점이 모아지는데, 그에 따르면 인간 현존재는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욕망의 굴레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것이다. 욕망은 끊임없이 가라앉힐 수 없는 새로운 욕망을 부채질해댄다. "인간 마음에 나 있는 바닥이 뚫린 심연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인생은 결국 "계속되는 사기" 일 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계속해서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 경우, 결국 인간은 이러한 무의미한 유희에 싫증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피할 길 없이 권태로워지는데 이것은 더욱 고통스러운 일이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과 권태,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인간 삶의 특징을 형성하는 불행이 싹트게 된다. 인간의 삶이란 "갖가지 고난과 지속적인 불행의 상태" 이다. "개개인의 인생사는 고뇌의 역사이다." 이것은 특히 인간 현존재의 죽음에서 잘 드러난다. "인간의 인생 행로는 희망의 조롱을 받고 죽음의 팔에 안겨 춤을 추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인간은 모두 결국에는 난파를 당해 부서진 돛대를 안고 죽음의 항구로 흘러 들어온다."

인간의 삶은 희극과 비극이 한데 어우러진 것이다. "왜냐하면 하루의 방황과 번뇌, 순간의 부단한 조롱, 한 주일의 소망과 두려움, 짖궂은 장난에 의해 끊임없이 일어나는 매 시간의 사건들 등은 완전히 희극적인 정경이기 때문이다.

@p332

그러나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소망, 헛된 노력, 잔인한 운명에 의해 짓밟힌 희망, 커지는 괴로움 끝에 마지막으로 죽음이 등장하는 전 생애의 불행한 오류는 언제나 비극을 연출한다."

여기에 덧붙여 인간들은 서로 아웅다웅 다투며 삶을 고해로 만들어버린다. "불의, 극도의 부당함, 냉혹, 심지어 잔인한 행위는 인간들이 서로를 괴롭히는 행동 방식" 이기 때문이다. "미개인은 서로를 잡아먹고, 문명인은 서로를 속인다. 사람들은 이것을 세상살이라고 말한다." 인간 세상은 "지옥이고, 그 안에서 인간들은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고통받는 영혼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옥의 악귀들이다. " 말하자면 삶이란 "비탄의 연속일 뿐이며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 따라서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낙천주의는 순전히 허무 맹랑할 뿐만 아니라 정말로 사악한 사유 방식이며,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인류의 재난에 대한 쓰디쓴 조롱이다."

그러나 비참함은 단지 인간의 삶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생명체는 고통 속에 내던져져 있다. 전체 자연은 존재하기 위한 무자비한 싸움터이다. 전체 자연은 "끊임없이 고통받고 불안에 떠는 생물들의 투기장이다. 한 존재는 다른 존재를 잡아먹어야만 살아 남을 수 있고, 그래서 맹수들은 저마다 모두 다른 수천의 존재들의 살아 있는 무덤이며, 이 맹수의 자기 보존은 수많은 고문에 의한 죽음의 연쇄 사슬인 것이다." 모든 현실을 특징짓고 있는 것은 "생명에서 본질적으로 생기는 고통이며, 세상은 그러한 고통이 넘쳐흐르고 있다." 이렇듯 세계는 "도처에서 결국은 파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계를 가능한 최선이라고 간주한 라이프니츠와는 반대로, 쇼펜하우어에게 있어 이 세계는 모든 가능한 세계 중 가장 나쁜 세계이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알게 되는 모든 것이란 "모든 사물의 헛됨과 모든 화려한 세계의 공허함" 을 증명하는 것일 뿐이다. 한마디로 세계는 "있어서는 안 될" 어떤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현실에 대한 이러한 염세적인 시각은 바로 그의 철학적 사유의 출발점이기도하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자세히 고찰해 보아야만 한다. 그가 세계의 고뇌에 대해 제시하고 있는 논증은 근본적인 철학적, 형이상학적 숙고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p333

쇼펜하우어의 대표작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이 말은 인간이 사물을 표상한다는 단적인 행위의 사실 요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쇼펜하우어는 오히려 전체 현실은 단순히 인간에 의해 표상된 현실로서 실재한다는 것을 말하려하고 있다.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은 사물이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는 그러한 방식으로가 아니다. 인간에게는 오직 사물에 대한 표상만이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을 뿐이다. 인간은 나무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단지 나무에 대한 그의 표상만을 알고 있을 따름이다. 쇼펜하우어는 똑같은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인간은 "태양이나 대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항상 단지 태양을 보는 눈과 대지를 만져 보고 느끼는 손만을 알뿐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모든 사물은 단지 현상에 불과하다.

@p334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쇼펜하우어는 그의 스승 칸트의 충실한 제자인 셈이다. 그가 사물의 시간과 공간 및 인과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들을 인간의 정신에 귀속시켰을 때에도 그는 칸트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시간적, 공간적, 인과적인 것은 사물 그 자체에 통용되지는 않는다. 시간적, 공간적 인과적인 것은 사람들이 사물에 던지는 시선에 통용되는 것이다. 인간은 시간, 공간, 인과성을 원래 자기 자신 안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마치 세계 안에 있는 것처럼 본다. 세계의 현상에 대한 이 명제는, 나중에 드러나겠지만,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에서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다.

쇼펜하우어가 실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 현상이라면, 그것은 순수하고 적나라한 관념주의에 머물 것이다. 세계는 단지 가상일 뿐이며, 인간적인 정신으로 꾼 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쇼펜하우어처럼 현상의 개념을 좀더 정확하게 심사 숙고해 본다면, 현상의 배후에는 어떤 것이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이 점은 이미 칸트가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다만 최고로 규정되지 않은 "사물 그 자체", 즉 거기에 대해서 아무 것도 진술할 수 없는 "X" 만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쇼펜하우어는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사물 그 자체의 본질에 대한 진술을 과감히 시도한다.

이러한 의도에서 그는 간접적인 방법을 택한다. 처음에 그는 육체를 갖춘 본질로서의 인간이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을 탐구한다. 인간은 자신의 육체를 이중적인 방식으로 인식한다. 첫째, 육체는 그에게 있어서 사물 가운데 하나의 사물이며 직관할 수 있는 표상의 객체이다. 그러나 둘째로, 인간 속에는 육체가 직접적으로 느끼는 내면의 시야도 있다. 이때 육체는 인간 의지의 표현으로 나타난다. 육체의 움직임은 의지의 자극에서 비롯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외적으로 관철된 의지의 자극일 따름이다. 쇼펜하우어는 신체의 기관과 형태도 인간 의지의 표현 방식으로 해석한다. 이렇게 해서 그는 이와 같은 명제에 이른다. 본질적으로 볼 때, 인간의 육체는 대상으로 관찰된 객관화된 의지이다. 육체는 물체로서 나타나지만, 그 자체 존재(즉자적 존재)는 의지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해서 인간 존재의 영역에서 자체 존재의 본질에 속하는 어떤 것을 발견하였다고 생각한다. 즉 의지는 인간의 가장 내면적인 본질인 것이다.

@p335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육체에 대한 이와 같은 이중적인 관점을 모든 실재의 본질을 해석하는 열쇠로 이용한다. 현실에는 자체 존재의 영역이 있으며, 그 안에서 사물은 사물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의지의 구체화로서 이해된다. 왜냐하면 의지는 "식물을 싹트게 하고 성장시키는 힘이고, 수정을 결정시키는 힘이며, 자력이 북극으로 향하는 힘이고, 이질적인 금속들이 갈라져 나와 구별되게 하는 힘이며, 원심력과 구심력으로서 또는 분리와 결합으로서 나타나는 물질의 친화력 속에 있는 힘이며, 최종적으로는 돌을 대지로 끌어들이고, 지구를 태양으로 끌어들이게 하는 모든 물질 안에 강하게 작용하는 중력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디에서나 하나의 의지의 힘이 지배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쇼펜하우어는--인간 의지의 문제점에 대한 많은 유추를 통해--다음과 같이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 세계란 그 자체 존재와 그 내면의 본질을 고찰해 볼 때 의지이다. 세계는 현상하는 의지로서 현존한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의지를 자기 실현 속에서 많은 의지로 나뉘어진 단일한 원동력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원초 의지는 인간의 경우처럼 처음부터 의식된 의지의 형태로 나타날 수는 없다. 원초적 의지는 오히려 그 근원에서부터 "맹목적이고 제어될 수 없는 충동" 이다. 이러한 원초 의지가 자체로부터 이렇듯 풍부한 세계 현실을 산출시키는 것이다. 무기체의 세계에 작용하는 힘에서부터 인간의 인식된 의지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외화의 단계에서 원초 의지는 스스로를 인식을 향해 정화시켜 나간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나의 철학은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세계는 의지의 자기 인식이다. " 여기에서도 쇼펜하우어의 전체 사유를 규정하고 있는 염세주의가 대두된다. 왜냐하면 그는 세계를 철저하게 지배하는 고통을 원초 욕구에서 파악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쇼펜하우어가 간파한 원초 의지는 투쟁과 대립으로 가득 차 있다. 원초 의지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분노한다. 따라서 원초 의지는 자기 구체화에서도 투쟁적이고 대립적이다.

@p336

즉 상호 충돌로서, 유기체의 세계에서는 끊임없는 투쟁으로서, 인간 세계에서는 항구적인 대결로서 나타난다. 세계의 불행이 바로 이 끊임없는 보편적인 투쟁에 의해 성립되고 있는 한, 세계를 산출해 내는 원초 의지에는 더욱 깊은 분열이 드러나게 된다. 즉 원초 의지는 고통을 야기시키지만, 여기서 고통을 받는 것도 역시 그 자신이다. 다시 말해 원초 의지의 자기 구체화의 단계에서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자기 자신을 만들어 내는 원초 의지로 모든 실재의 통일적인 해석을 위한 하나의 형이상학적 원리를 발견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원리를 전통이나 그 시대 철학의 유사한 원리들과 구별한다. 원초 의지는 세계에 내재하며 따라서 세계를 초월하는 신적인 근원은 아니다. 원초 의지는 헤겔에서처럼, 정신의 성격을 지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충동이며 의지이다.

쇼펜하우어는 그러한 형이상학적 근본 원리를 단초로 삼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사물들 사이를 어떤 깊은 통찰력 없이 단순히 헤매며 떠돌아다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형이상학적 동물" 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형이상학적 욕구를 부여받았다. 그것은 이미 종교에서 잠정적인 형태로 표현되며, 그 후 철학에서 최고의 정점에 도달하게 된다. 철학은 세계에 대한 놀라움과 의혹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예외 없이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가 작용한다. "철학을 하도록 만드는 경이감은 분명히 세계 안에 있는 고통과 악을 바라보는 데서 생겨난다." "의심의 여지없이 죽음에 대한 지식이나 삶의 고통과 궁핍에 대한 고찰은 철학적 성찰을 하고 세계에 대해 형이상학적 해석을 하도록 가장 강하게 자극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인간은 어떻게 끊임없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제기된다. 그것은 1차 단계에서, 인간이 그의 사유에서 의지에 의한 곤궁과 의지에 의한 규정성에서 벗어나며, 개별적인 것의 인식을 초월하여 자신을 세계와 사물의 순수한 직관으로 고양시킬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러면 인간은 자신의 제한되고 고뇌로 가득 찬 개별성과 그것의 인식 방식을 초월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그는 이해 관계가 없는 고찰에 이르게 된다.

@p337

비로소 순수한 관조의 상태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밝고 영원한 세계의 눈"이 된다. 인간이 이 단계에서 바라보게 되는 것은, 의지의 덧없는 형태가 아니라, 그 순수한 본질에서의 사물, 또는 쇼펜하우어가 플라톤의 사상을 좇아서 표현하고 있듯이 사물의 이데아이다. 사물의 이데아는 본질적이고, 덧없이 지나가는 것들에서 끌어올려진 영원히 존재하는 실재의 원래 형상이다. 예컨대 광석의 원래 형상, 나무의 원래 형상, 인간의 원래 형상이다. 사물의 이데아는 실재 안에서 이 실재의 다양한 형태로 자신을 표현한다. 그렇지만 그 자체로서 볼 때 이데아란 과연 무엇인가? 이데아는 순수하고, 모든 실재에 앞서 가는 원초 의지의 표현이다. 원초 의지는 처음에 이데아의 영역에서 자신을 구현하고 그 뒤 그것에 따라 비로소 가시적인 현실 속에 자기를 구체화시킨다.

이데아에 대한 관조는 무엇보다도 예술의 관심사이다. 예술은 "세계의 유일한 본래의 본질적인 것, 세계 현상의 참된 내용, 전혀 변하지 않는 것, 따라서 어느 시대에나 똑같이 진리로 인식되는 것" 등을 고찰한다. 이것은 먼저 건축 양식에서 시작된다. 건축 양식은 무거움과 견고함의 이데아를 그 상호간의 투쟁 속에서 볼 수 있게 해준다. 그 다음은 인간 육체의 순수한 이데아를 표현하는 조각품으로 진전된다. 그것은 다시 실재 이데아의 다양함을 재현하는 회화로 인도되며, 계속해서 시로 이어진다. 시는 인간의 이데아를 그 노력과 행위와 관련된 계열 안에서 나타나게 하고, 그것을 초월해서 모든 세계 이데아를 나타나게 한다. 그것은 음악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음악은 세계의 순수한 본질을 표현한다.

그렇지만 예술 작품의 창조와 감상은 인간을 의지와 결속된 고통에서 지속적으로 구제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인간을 단지 잠깐 동안 그의 고뇌에 가득찬 개별성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을 뿐이다. 이렇듯 예술은 단지 일시적인 위안일 뿐이다. 의지와 의지의 혼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다른 길을 찾아 나서는 일은 필연적이다.

이제 이것은 단지 고통만을 만들어 주는 의지가 근본적으로 부정됨으로써 가능하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어려움이 대두된다.

@p338

원초 의지에서 생겨나는 것은, 애초부터 필연적으로 생겨난다. 그렇다면 그 자신 역시 원초 의지에서 생겨난 인간이 어떻게 자유로이 의지에 반대할 수 있겠는가? 쇼펜하우어는 이 의문을 어떤 강인한 힘을 통해 해결한다. 그는 간단하게 이렇게 주장한다. 분명 인간은 순전한 필연성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그렇지만 그는 한 가지 점에서 자유롭다 즉 모든 것을 규정하는 의지에 맞서 자기 자신을 부정할 수 있다는 바로 그 가능성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이에 대해 확실한 근거를 제시한다. 그는 이때 윤리적인 행동 요소, 즉 책임감, 판단력, 죄책감에서 출발한다. 이것들은 분명히 자유를 전제한다. 그렇지만 자유는 자신의 자리를 어디에 둘 수 있는가? 행동과 행위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철저히 인과적으로 규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는 인간의 그때 그때의 개별적인 속성에 자리해야 한다 인간이 자기 행위의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것은 본래 그가 이런 저런 일을 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이런 저런 일을 행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쇼펜하우어는 다시 형이상학적 사변으로 돌아오게 된다 인간이 책임지게 되는 그러한 속성은 그의 경험적 특성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예지적 특성" 에서--쇼펜하우어는 칸트를 좇아 그렇게 말한다--성립된다. 예지적이라 함은 "모든 현실적 존재에 앞서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쇼펜하우어의 사상은 이러하다. 인간은 그의 출생에 앞서 자유로이 일정한 규정된 성격을 스스로의 판단으로 택했으며, 따라서 그 후 자신의 삶에서 그 성격에 따라 행위하며 그 성격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비록 그의 경험적 현존재에 있어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지만 그의 본질의 뿌리에 있어서는 자유롭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의지를 부정할 수 있는 가능성도 생기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의지의 부정은 어떻게 수행되는가? 의지의 부정은 두단계, 즉 이론적인 단계와 실천적인 단계에서 일어날 수 있다. 이론적인 길은 다음의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시작된다. 즉 모든 현실의 근본 예는 원초 의지가 지배하고 있으며, 그 원초 의지가 자신의 분열 때문에 세계에 고통을 야기 시키고 있다.

@p339

인간이 이 점을 파악한다면, 그는 또한 세계 안에서의 그 모든 고뇌에 가득 찬 사건이 단지 참된 실재의 현상, 즉 원초 의지의 현상일 뿐이고, 그 자체가 실제적이 아님도 통찰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 사건은 그를 더 이상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사유 속에서 고통스러운 현실을 극복하게 된다. 그러면 근심과 절망을 대신해서 절묘한 태연함이 영혼에 찾아든다. 즉 마음이 집착하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체념과 무의지가 그것이다. 이러한 태도의 당연한 귀결은 금욕이다. 금욕의 마지막 완전한 단계에서는 내면의 평화가 찾아오며, 그 평화 안에서 의지는 완전히 소멸된다. 그것이 바로 "바다와 같이 고요한 상태" 이다.

그렇지만 이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두번째 단계에서 행위를 통한 의지 부정이 일어난다. 두번째 단계는 고통을 함께 나눔으로써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 주는 데에서 성립된다. 쇼펜하우어는 이것 역시 형이상학적으로 증명한다. 만일 모든 생명체가 단일한 원초 의지 안에 포용되어 있다면, 그것들은 서로 한 뿌리 안에서 결속되어 있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근본에 있어서는 하나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로써 믿을 수 없는 개별성의 울타리는 무너져 버린다. 다른 사람의 고통은 곧 나 자신의 고통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통찰에서 연민이 싹튼다. 인간은 연민으로 인류 전체의 고통을, 아니 모든 생물의 고통을 함께 견뎌 낸다. 연민은 이렇게 해서 이기주의를 극복하는 도덕적 자제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연민은 정의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이 통용된다. 즉 이기주의에서 악이 생기고 연민 에서 선이 생긴다. 이것이 쇼펜하우어 윤리학의 기본 원칙이다. 그의 윤리학에 따르면 고통을 만들어 내는 의지는 연민의 행위를 통해 부정된다. 이것은 물론 쇼펜하우어에게는 순전히 이론에만 그치고 있다. 그는 그의 삶에서 동물을 제외하고는 거의 아무에게도 연민을 갖지 않았다. 의지의 이론적인 부정도, 실천적인 부정도, 궁극적으로는 쇼펜하우어의 모든 사상의 맹아인 그 예외 없는 염세주의를 없앨 수는 없었다. 그는 여전히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면 더 나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p340

"존재보다는 비존재를 단호히 더 선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그는 니르바나(열반),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의 소멸을 갈망한다. 여전히 그에게는 세계와 인간의 참된 목표는 무이다. "우리 앞에 단지 무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p341

25. 키에르케고르

신의 첩자

많은 철학자들이 여자 문제로 인해 자신의 인생 행로 밖으로 내동댕이쳐진다. 요컨대 철학자가 여자에 의해서 비로소 자신의 올바른 길로 접어들게 되는 일은 정말 보기 드물다. 더욱이 이런 일이 상류 사회의 유명한 귀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겨우 15세의 소박한 평민의 딸에 의해서라면 더더욱 드문 경우라 하겠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일이 죄렌 키에르케고르에게 일어난다. 그에게 레기네 올센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키에르케고르가 될 수 없었을 것이고, 그가 써 놓은

철학적 작품들 또한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24세의 키에르케고르를 어린 소녀에게로 이끈 것은 말 그대로 첫눈에 반한 사랑이다. 그는 레기네를 보자마자 그녀와 결혼할 것을 결심한다. 3년 후 그는 그녀와 약혼한다. 그런데 바야흐로 이때부터 문제는 시작된다.

@p342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이 도대체 한 여자를 자기에게 묶어 놓을 권한을 갖고 있는지 숙고하기 시작했다. 결혼에 대한 그의 엄격한 생각에 따르자면, 결혼의 주요 부분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절대적으로 솔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것을 해낼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그에게는 함구해야 할 문제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그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과 같은 남자를 위한 결혼의 가능성이란 점점 더 희박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다음부터 놀라운 연극이 시작된다. 키에르케고르는 약혼녀가 스스로 약혼을 파기하기를 바란다. 그는 자신이 혐오스럽게 처신하고 타락한 것처럼 보이게 하여, 마침내 레기네가 약혼 파기를 선언하도록 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녀를 다시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서 못된 놈으로, 그것도 가능한 한 최고로 못된 놈으로 행세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마침내는 잔인한 장면이 연출된다. "그녀는 나에게 당신은 결코 결혼을 하지 않을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 하지. 10년 후 바람기가 좀 잠잠해지면 다시 젊어지기 위해 젊은 신부감을 찾게 될 거야."

이 가엾은 소녀가 그 일로 거의 심장이 찢어질 듯한 아픔을 느꼈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 역시 갈피를 못 잡는다.

@p343

그는 그녀와의 관계를 끊었음에도 불구하고 특이한 방식으로 새롭게 레기네와의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는 꼼꼼하게 그녀와의 모든 만남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그의 일기에 기록해 두었다. 그것이 코펜하겐의 작은 거리에서였든 교회에서였든 가리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았는지 바라보지 않았는지, 그녀가 방긋 웃었는지 웃지 않았는지, 그녀가 서 있었는지 앉아 있었는지 등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감히 레기네에게 말을 건넬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는 마침내 그녀가 다른 남자와 약혼했다는 것을 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제 키에르케고르의 절망은 극에 달했다. 그는 그의 일기에 레기네의 배신을 비난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가 죽을 때까지 레기네와의 관계는 그의 일기와 그의 저서에서 자학적 숙고의 주요 주제였다.

키에르케고르가 결혼의 가능성을 위해 요구했던 극단적인 솔직함은 왜 그리고 무슨 일 때문에 그를 방해했는가? 그것은 별 문젯거리도 못되는 것이었다. 즉 그가 사창가에 한번 간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있는 여자와 은밀한 관계도 맺지 못하고, 오히려 그녀의 조롱만 샀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키에르케고르에게는 이 과오가 어떤 심오한 일에 대한 하나의 징표였다. 즉 그와 그의 가족은 어떤 가혹한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p344

그 숙명은 아버지에게서 비롯된다. 아버지도 역시 성적으로 탈선했던 것이다. 비록 그는 그 처녀와--훗날 키에르케고르의 어머니가 된다--결혼했지만, 일생 동안 그 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지냈다. 또 한 가지가 더 있다. 아버지는 취중에 그가 젊은 시절에 신을 저주한 적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을 그의 일기에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한 남자에게 일어난 끔찍한 사건, 그 남자는 어린 소년 시절 유틀란트의 황야에서 양떼를 지키면서 많은 어려움을 참아 내야만 했고 주리고 있었으며 비참했다. 그는 언덕 위에 올라가서 신을 저주했다. 이 남자는 그가 82세가 되어서도 이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사건으로부터 그의 가족과 그에게 벗어 던질 수 없는 저주가 시작되었다고 확신하였다. 키에르케고르가 이 사건을 극도로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은 그의 성격상의 기질적 특성인 우울증에 기인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매우 비참한 우울증에 빠졌던 사람이다. 가장 작은 모기에서부터 그리스도 강생의 신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가 나를 불안하게 하였다. 나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 같았고 특히 나 자신이 가장 그러했다." 이 우울증은 엄청날 정도의 자기 연관성에 귀결되고 있다. 키에르케고르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본질의 파악 불가능한 어디에 어떤 의미가 놓여 있을 수 있다는 점을 필이 연구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겉으로는 경망스럽고 멋이나 부리는 건달처럼 연극을 하면서 우울증을 지워 버리려 한다. 그는 옷에 지나치게 신경을 썼으며, 카페나 극장을 열심히 드나들기도 하고 코펜하켄의 거리를 빈둥거리며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는 그 도시의 유원지 "티볼리"로 자주 놀러 간다. 그는 책을 하나 저술하는데, 그 중 한 장의 제목은 "유혹자의'일기"였다. 그는 이렇게 쓴다. "나는 지금 막 내가 혼백으로 있었던 그 사회에서 돌아왔다. 기지와 유머가 내 입에서 흘러 넘쳤고 모든 사람들이 웃었으며, 모든 사람들이 내게 경탄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나는 뛰쳐나왔고 총으로 머리를 쏘아 죽어 버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의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길은 시적이고 철학적이며 신학적인 창작에 있음을 깨닫는다.

@p345

그에게는 수없이 많은 생각이 끊임없이 밀어닥쳐 표현되기를 재촉하고 있었다. 그는 무수히 많은 책을 저술한다. 그 작품 속에서 그는 그의 개인적인 문제를 소재로 삼아 객관화했기 때문에 그 작품들은 자기 고백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저서들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인생의 여정), (철학적 단편), (불안의 개념), (공포와 전율), (죽음에 이르는 병), (그리스도교 입문) 등이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작품 속에서 논쟁을 일삼았기 때문에 수많은 반대자를 갖게 된다. 그는 같은 시대 사람들의 평범한 지성을 공격한다. 그러면 그들은 나름대로 반응을 보인다. 즉 키에르케고르에게 모욕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그 도시의 유명한 풍자적인 신문에 계속해서 악의에 가득 찬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의 기이한 옷차림, 가는 다리, 척추의 기형으로 인해 그렇게 만든 짝짝이 바지 가랑이. 어디 그뿐이랴. 그는 그의 애인의 어깨 위에 말 잔등에 올라탄 것처럼 올라타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몹시 상처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조롱받는 것이 그 시대에 어떤 특별한 말을 하는 사람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조롱받는 순교자"가 된 것을 감내했다.

@p346

그러나 이것뿐이 아니다. 키에르케고르가 그의 심사 숙고의 과정에서 그리스도교적인 실존의 참된 본질을 성찰하기에 이르렀을 때, 그는 공식 교회와 첨예한 논쟁에 휩싸인다. 그는 교회가 그리스도교 정신을 배반했다고 비난한다. 그는 매우 공격적인 반박문을 발표하여 교회, 특히 교회 주교들에게 도전한다 그는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후인 1855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우울증과 성찰을 뒤섞어 밭갈이한 토양에서 키에르케고르가 본질적인 언어로써 말하고자 했던 것이 모두 싹튼다. 키에르케고르처럼 내면 가장 깊숙이 자기 자신에 대해 물음을 던진 사람에게는, 그가 철학을 할 때에도 인간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을 방관자로 내버려두는 학문적 문제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철학하는 사람 자신이 그 물음 속에서 최대의 관건으로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본질적인 인식은 인간의 실존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에 대해 깊이 숙고하는 실존적 사상가가 된다. 그는 인간이 포괄적 의미에서 그 자신에게 수수께끼가 되어 버린 그런 시대에 비로소 등장한다. 따라서 그는 우리 시대에 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이른다. 철학 분야뿐만 아니라 신학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철학에서는 야스퍼스와 하이데거, 신학에서는 바르트와 불트만에게 영향을 주었다.

모든 관심을 인간에 관한 물음에 집중시키는 것은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적 근본 신념에 있어 매우 중요한 귀결이다. 거기에서부터 자주 인용되거나 자주 오해되는 "주관성이 진리이다"라는 명제가 성립된다. 이로써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모든 것은 단지 주관적일 뿐이다, 모든 것은 인간에게 순전히 상대적일 뿐이다, 객관적인 진리는 없다는 것 등은 아니다. 키에르케고르는 통속적인 상대주의에나 어울릴 그런 식의 이해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가 주관성이 진리라고 거듭 반복할 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어떤 것이 인간에게 진리가 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인간이 그것에 온 정열을 다 쏟아 그의 개인적인 진리로 장악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실존을 건드리거나 변화시키지 않는 진리라면 그런 진리를 얻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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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케고르는 이 점에서 그이 비판의 상대인 위대한 헤겔과 맞선다. 헤겔은 그의 웅대한 체계 속에서 현실을, 즉 자연뿐 아니라 역사도 파악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실존의 곤궁 속에 빠져 있는 인간을 망각하였다. 아무리 포괄적인 전체 조망이라 해도 그것이 현존재를 변형시키지 못하는 한 인간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진리란 결단을 내려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서 자신의 실존 속에 구현시키는 그런 사람에게만 생생하게 존재할 뿐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관점을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한다. "나에게도 진리가 될 수 있는 그런 진리를 발견해야 하며, 내가 그것을 위해 살고 죽을 수 있는 그런 이념을 발견해야 한다."

그런데 키에르케고르가 그토록 정열적으로 탐구한 인간의 실존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실존적 사상가로서 그는 자신의 체험에서부터 인간의 개념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의 자기 체험은 세계와 자기 자신에 대한 낯설음, 분열, 밑도 끝도 없는 불안, 절망 등과 같은 경험들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모든 것을 그의 개인적 운명으로 파악할 뿐 아니라 인간의 근본 상황으로 파악한다. 인간은 피할 도리 없이 "불안", "죽음에 이르는 병""절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다만 이것을 전적인 성실로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안--이것은 키에르케고르의 위대한 발견이다--속에서 인간은 자유의 가능성을 자신의 근본 본질로서 경험한다. 불안은 현실을 압박해 들어오는 가능성의 그물로 불어 보이며, 인간은 이 가능성에 직면해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불안 속에서, 그가 한번에 영원히 확정되어 버린 존재가 아니며 그의 존재는 존재 가능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인간에게 부여된 그 무시무시한 것은 선택 그리고 자유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사상으로 그의 실존 가능성, "인생 여정의 단계"에 대한 중요한 이론을 전개시킨다. 첫 단계인 "심미적 단계"에 있는 사람은 풍부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가능성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고 내버려둔다.

@p348

그는 단지 바라보거나 즐기기만 할 뿐 행위하지 않고, 그래서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산다. 그는 구미가 당기는 것이나 오락거리만 좇아 다니며 가능성을 구속력이 없는 실험으로 남김없이 다 써버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듯 순전히 심미적으로만 사는 사람은 마침내 존재의 공허감에 빠지게 되고, 본질적인 의미에서 비현실적으로 남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키에르케고르는 심미적 단계가 인간에게 최종적인 실존 가능성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실존함이란 오히려 인간이 그의 앞에 놓여 있는 가능성 가운데 한 가지 가능성을 움켜쥐고 다른 가능성을 내던져 버리는 것을 뜻한다. 이렇듯 인간의 자유는 결단으로서 실현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현실에 이르고 현존재 속에 자신의 자리를 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선택과 결단은 키에르케고르가 인간을 고찰하는 바로 그 본질적인 범주이다. 선택과 결단은 두 번째 단계인 "윤리적 단계"의 특색을 나타낸다. 인간은 이 윤리적 단계에 들어서서 실제로 결단을 내릴 때, 비로소 본래의 자기 자신에 이르고 자신의 과제가 될 수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으로도 여전히 키에르케고르의 가장 내면적인 사유의 정곡을 찌르지는 못하였다.

@p349

스스로 윤리적인 인간이 되어 보려는 노력도 절망으로 끝나 버린다. 결국 그는 인간은 그 혼자의 힘만으로는 진실로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무력감이 바로 인간이 갖는 유한성의 가장 심오한 징표이다. 키에르케고르처럼 지칠 줄 모르고 끊임없이 현존재의 수수께끼를 되씹는 사람은 마침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인간의 존재는 그 자체가 허무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이러한 사실에 대한 극단적인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그에게--그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새로운 가능성이 열려야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가능성 속에서 인간은 자신이 단순히 유한한 존재만은 아니며, 유한과 무한으로 섞여 짜여진 경이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경험한다. 인간의 본질에서 유한은 인간을 이 세상 삶의 소용돌이 속으로 내던져 그 속에 확 붙들어 두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인간 본질의 다른 부분은 인간으로 하여금 무한한 열망 속에서 다른 세계와 연관을 맺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인간은 그것으로부터 절망의 비애 속에서도 위안을 받으며, 동시에 자기형성, 행위와 결단에 필요한 지침을 획득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무엇보다도 특히 현존재 안에 있는 무한성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무한을 깨닫게 된 사람은 세 번째 단계인 "종교적 단계"로 들어서게 된다.

철학자로서의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명확하게 표현한다. 그리고 신학자로서의 키에르케고르는 똑같은 것을 좀더 직접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인간은 신의 절대적 요구에 처해 있다. 이것이 선택과 결단에 본래적인 준엄함을 준다. 즉 그것들은 신 앞에서의 선택과 결단인 것이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마침내 이렇게 말한다. "한 인간이 완전히 자기 자신, 한 개별적인 인간, 이 특정의 개별 인간이 되는 것을 감행하는 것은 극히 중요하다. 이 모든 엄청난 긴장과 이 모든 엄청난 책임을 떠맡고 홀로, 신 앞에 홀로 서는 것 말이다."

키에르케고르가 끊임없이 정신적이며 영적인 고뇌 끝에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되자, 그는 그의 우울한 기길 때문에 겪은 그 모든 시련 끝에 마침내 위안을 얻는다. 그는 자신이 지닌 매우 심한 우울의 본질에는 그 우울이 유한의 영역에서는, 특히 인간과의 교제에서는 제거될 수 없다는 사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p350

우울함은 그것이 오직 무한 속에 근거를 둘 때만 평온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우울이 그렇게 해서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우울증이 어쩔 수 없는 운명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영원 속에 근거를 두게 되면, 그에게도 우울증을 견뎌 낼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바로 그토록 우울했기 때문에 마음의 고통 속에서 영원을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을 수 있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내 인생은 끔찍스러운 우울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내 인생은 아주 어린 시절에 벌써 그 깊은 밑바닥까지 뒤죽박죽 엉켜 있었다. 존재 자체의 이러한 불행이 제거될 수 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비록 나는 전 생애를 그토록 괴로워해야 했지만, 신은 분명 사랑이라는 사실을 즐거운 마음으로 확신하면서 영원한 것을 움켜쥐었다."

인간은 무조건적으로 영원함 속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키에르케고르의 요구는 그의 시대에는 걸맞지 않았다. 그의 시대는 헤겔이 선포했듯이 인류의 진보와 "역사 속의 이성"을 믿던 세기였다. 키에르케고르는 대다수의 같은 시대 사람들보다 더 심오하게 통찰했기 때문에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통렬하게 비판하며 몰아 부쳤다. 이것은 그의 일기장의 메모와 저서 속의 격렬한 비방으로 표현된다 "전 유럽은 완전히 파산으로 치닫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는 절망의 시대이다." "비를 예고하는 한 마리 새가 있다. 그것이 바로 나다. 한세대에 금방 쏟아질 것 같은 폭풍우의 징후가 보이면 나와 같은 그러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키에르케고르는 특히 그가 살던 시대를 진정한 정열이 없는 시대, 사실에 대한 감동이 없는 시대라고 비난한다. 모든 직접적인 것은 통속적 이해의 지배 하에 침몰해 버렸고, 행위 해야 하는 그 모든 힘은 끝없는 성찰 속에서 질식해 버리고 말았다.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을 아주 명료하게 인식한다. 특히 그 자신이 자기 파괴에 이르게 될 정도로 이러한 지나친 지적 성찰의 위험성을 체험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리고 그는 통속적인 이해의 우세가 인간 현존재를 애매 모호하게 만든다는 것을 지적한다.

@p351

왜냐하면 사람들이 행위 하는 것처럼, 그리고 어떤 일이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기껏해야 행위와 사건에 대해 사유하고 앉아 있기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도처에 지성이 난무하고 있다. 무조건적인 연모 대신에 이성적인 결론, 무조건적인 복종 대신에 합리성에 근거한 복종, 모험 대신에 개연성 혹은 약삭빠른 계산, 행위 대신에 방관이 판을 치고 있다."

애매 모호하게 행위를 방해하는 끊임없는 성찰의 증세는 키에르케고르가 간파했듯이 인간을 치명적인 위험으로 몰고 간다. 만일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어떤 것을 결단하지 않고, 선택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되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과 깊은 의미에서 구별이 되지 않을 것이다. 삭막한 평준화가 만연된다. 인간의 공존은 "대중"이 되어버리고, 파악 불가능한 무명의 "공중"이 되어 버린다. 이들의 특징은 "수다"이다. 모든 책임 있는 이야기는 "잡담" 속에 묻혀 버린다. "

무도 더 이상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무슨 위원회, 무슨 위원회를 세우는 것으로 만족해한다. 결국에 가서는 시대 전체가 위원회가 되어 버리는 것으로 끝장이 날 것이다." "그러나 무리()는 비진리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익명으로 전체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키에르케고르는 같은 시대 사람들에게 지칠 줄 모르고 계속적으로 각자는 모두 단독자가 되라고 요구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가장 고유한 실존을 끊임없이 걱정하며 신 앞에 홀로 선 단독자가 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단독자'라는 범주에 내가 의도하는 의미를 연결시킨다. 나는 사람들에게 그것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 나의 사명임을 인식했다." 이 사명은 물론 무거운 짐이다. 그렇지만 이 사명을 실제로 떠맡는다면 그것은 엄청난 사건이다. "단독자로 실존하는 것보다 더 엄청난 것은 없음을 습득한 사람은, 그것이 가장 위대할 일라고 말하기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단독자가 되라는 요구를 특히 갈수록 대중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그 시대의 그리스도교를 향해 외친다. 세례 증서만 있으면 아무 문제없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생각은 그리스도교의 진지함을 천박한 유희로 뒤바꾸어 놓는 것이다.

@p352

이러한 통찰의 귀결로서 키에르케고르에게는 다음과 같은 사명감이 분명해진다. 사이비 그리스도교에 맞서 참된 그리스도의 존재를 분명하고 강력하게 제시하는 것이다. 그에게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군중의 관심사가 아니라 단독자--무조건적인 정열 속에 자신들의 영원한 행복을 염려하는 단독자--의 관심사를 뜻한다. 단독자는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닌, 모험이라고 할 수 있는 믿음을 골라잡는다. 믿음은 영원한 것이 일시적인 것으로 되었다는 역설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기에 믿음은 오직 모든 평범한 이해를 떨쳐 버리는 "비약"으로만 도달할 수 있다. "믿음은 신을 얻기 위하여 지성을 잃어버림을 의미한다." 이러한 확신 속에 단독자로서의 키에르케고르는 자기 나라의 공공 교회를 무자비하게 공격한다. 이것은 "흡사 절망적인 발걸음으로 존립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에 도화선을 놓아야" 하는 것과 같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키에르케고르는 마침내 그의 우울한 실존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가장 심오하게 해석하기에 이른다. 이제 그는 신은 그러한 우울한 인간을, 그러한 외톨이를 세속화된 그리스도교 시대에 그리스도 복음의 진지함을 다시 선포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고 이해한다. "나는 마치 가장 높은 분을 위해 봉사하는 첩자와도 같다." "나는 실존함'이 인식과,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교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를 염탐해야 한다." "나의 삶은 다른 사람은 알지도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는 하나의 끔찍한 고뇌이다. 모든 것이 자만과 오만으로 차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나는 나의 살 속에 가시를 가지고 있었다. 그처럼 걸리는 무엇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았고, 어떤 직장도 가질 수 없었다. 그 대신 나는 예외자로 남았다 낮에는 연구와 긴장으로 보내고 밤에는 증오나 편견 따위를 없애며 보냈다. 이것이 바로 예외이다." 그러나 끝에 가서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토록 우울했었다는 점은 어쩌면 내게는 하나의 행운이었다."

@p353

26. 포이에르바하

신의 창조자로서의 인간

행운이 따르는 철학자가 있는가 하면 끊임없이 불행에 쫓겨다니는 철학자도 있다. 이런 사람으로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를 꼽을 수 있다. 어쩌다가 삐그덕거리는 그의 삶에 때때로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들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의 시작은 매우 전도양양해 보였다. 저명한 법률가인 아버지는 한 명의 애첩에게 지출되는 돈을 충당하고도 많은 자식들을 그런 대로 교육시킬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재산이 있었다. 어린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는 모범생으로서 선생님들의 신임을 얻는다. 그의 학교 시절의 생활 기록부 중 하나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포이에르바하는 "활달한 성격을 지녔고 질서를 잘 지키며 매우 침착하고 조용한 성품을 가졌으며, 대단히 모범적인 품행과 근면성을 지닌 특출난 학생이다. "그는 넉넉한 학비 보조를 받으면서 하이델베르크에서 신학을 공부했지만, 신학에 실망하고 철학으로 전공을 바꾼다.

@p354

왜냐하면 "자유와 예속, 이성과 믿음에 대한 신학의 헛소리들은 나의 진리, 즉 통일성, 단호함, 무조건성을 죽을 때까지 요구하는 영혼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베를린으로 옮긴 후 그는 비밀 정치적인 신조를 갖고 있다고 증명해 보임으로써 혐의를 벗어날 수가 있었다. 그는 대학에서 헤겔의 영향을 받게 된다. 헤겔과 짧은 인사말을 주고받은 것을 제외하면 딱 한번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 유명한 루터와 베그너의 포도주 집에서였다. 그렇지만 그는 그때 너무 수줍어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다. 그 후 포이에르바하는 에어랑겐에서 학위를 받고 25세의 나이로 강사가 된다. 이때서야 비로소 그는 천천히 내적으로 헤겔로부터 벗어난다. 그는 이 도시에서 고독한 생활을 하며 오로지 전적으로 자신의 학문에만 몰두한다. 그는 한 편지에 이렇게 썼다. "이토록 조용한 곳에서 지금 나는 거실 같은 자연에 둘러싸여 아침에는 물 한잔을 마시고, 점심에는 약간의 식사를 하고, 저녁에는 맥주 한 조끼와 이에 곁들여 기껏해야 무우 하나를 먹는다.

@p355

만일 내가 언제나 이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만 있다면 이 지구상에서 아무 것도 더 바랄 게 없으리라." 그밖에 그는 고작해야 "그토록 오랜 시간 앉아 있으려면 꼭 필요한 커피"를 마실 따름이었다.

그러나 어려움이 닥친다. 포이에르바하는 짧은 기간의 강사 활동으로도 대학에 싫증을 낸다. 여기에는 결정적인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그가 (죽음과 불사 불멸에 대한 사상)이라는 책을 쓴 것이다. 비록 익명으로 그 책을 발행하기는 했지만, 그가 저작자임이 곧 드러났다. 이 책은 저자인 그를 신학적, 정치적 보수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학술 분야에서는 더 이상 활동을 못 하도록 발을 묶어 버리는 그런 종류의 책이었다. 그는 그의 누이에게 이렇게 써보낸다. "나는 소름끼치는 자유 사상가, 무신론자, 그것만으로도 부족해서 반그리스도의 화신이라는 소문 속에 휩싸여 있다." 다른 한 가지는 포이에르바하 스스로 자신은 강단에서 거의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점이다. 그의 재능은 손으로 글을 쓰는 것이지 입으로 하는 강의가 아니었다. 에어랑겐에서 교수 자리를 얻을 가망은 사라졌다. 그는 변명이 될 만한 구실을 대면서 대학을 떠난다. 즉 대학에는 "생계를 위한 감자 재배의 학문을 빼놓는다면 경건한 양치기만이 번창하고 있을 뿐이다"는 것이었다. 그는 다소 대담하지만 완전히 잘못된 것만은 아닌 확신으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나는 철학자이기 때문에 철학 교수로는 적당하지가 않다." 그는 "특별한 존재의 등급"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평범한 전문 교수의 지위로 깍아 내려서는" 안 된다

포이에르바하는 이제 부득이 온갖 가능한 직업을 다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김나지움 선생, 가정 교사, 도서관 사서, 편집인, 자유 기고가 등 여러 직업을 생각해 보았지만 그 어떤 직업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파리로 떠나기로 오래 전부터 마음먹어 왔지만 결단성 없는 성격으로 실패한다. 그 다음 그는 다소 앞뒤가 맞지 않지만 다시 여러 대학에 자리를 얻기 위해 서류를 제출한다. 그러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는 결국 단념하고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교수대에 목을 매단 채로 살고 있다."

이때 한 여자로 인해 상황이 바뀌게 된다. 포이에르바하는 성주이자 도자기 제조업자의 딸과 열렬한 사랑에 빠진다.

@p356

그는 그녀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나의 영혼은 심연에 빠져있다오. 거기에서는 그대를 그리워하는 탄식만이 유일한 생명의 징표로서 내 귓전을 울리고 있소." 베르타 뢰브라는 이 여자는 포이에르바하의 정신적인 기품 때문인지 그의 외모의 수려함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에게 호감을 표시한다. 그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던 전기 작가는 이 일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중간 정도의 키에 마른 체격이었으며, 나이가 들어서도 알맞게 균형 잡힌 고상한 몸가짐을 유지하였고, 걸음걸이는 가볍고 탄력이 있다. 그는 진지하면서도 온화하고, 총명한 외모에다 담갈색의 날카로우면서도 인자하고 친절한 눈매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넓고 아름답게 생긴 이마는 짧게 자른 숱 많은 갈색 머리로 덮여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날카로운 코와 입은 단호하게 보임에도 불구하고 틀림없이 성품이 착하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적당하게 콧수염을 기르기로 작정했는데 콧수염은 나이가 들면서 얼굴을 온통 뒤덮었다." 전기 작가는 "그의 인품에서 풍기는 인상이 저항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p357

따라서 포이에르바하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 여자는 포이에르바하의 구혼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고 또한 결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마침내 "총각 생활의 지저분함을 다 떨쳐 버리고 신성한 결혼 생활의 깨끗한 목욕물에 들어가게 되었다. 결혼 생활은 그에게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커다란 안정감을 준다. 그는 성의 탑 꼭대기 방에서 그렇게 바라던 은거 생활을 하게 된다. 외적인 생활은 도자기 공장에서 벌어들이는 아내의 수입뿐만 아니라--전기 작가가 영명하게 표현하고 있듯이--훌륭한 과수원과 정원, 야생 동물과 새들이 사는 커다란 숲, 그리고 양어장에 의해 풍족하게 꾸려 나갔다.

포이에르바하의 지나칠 정도의 꼼꼼한 생활 방식에 관해 전기 작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모범적이고 단순한 생활 습관을 가졌다. 그는 거실의 청소와 난방을 스스로 하였고, 밤에는 잠자리를 몸소 돌보고--이런 점은 파스칼과 아주 비슷하다--낮에는 잘 정리 정돈해 두었다. 그의 연구실은 빈틈없이 정돈되고 청결하게 유지되었다. 천재적 인간의 표면상의 특권은 그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불편을 끼치게 하는 어수선함이지만 포이에르바하는 이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p358

그는 또한 옷매무새도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하게 하고 다녔다. 그는 새벽부터 소박한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꽉 끼는 듯한 맨 윗단까지 단추를 채운 어두운 색깔의 웃옷이나 산지기처럼 보이는 자켓을 주로 입었다. 그는 특히 독일의 많은 학자들에게 필수적이다시피 한 잠옷과 슬리퍼 등 연약하고 태만한 안락함을 연상시키는 모든 것을 싫어했다. 그는 낮에는 언제나 장화를 신었고, 때때로 테가 없는 작은 모자를 가볍게 눌러 쓰기도 했다. "우리는 이 도망 나온 대학 강사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의 장인의 성안에서 세상을 떠난 명상적이고 약간은 고루한 구식 풍의 생활을 즐겼다."이 시기에 할 수 있는 최선의 생활은 은둔 생활이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사회 관계는 모든 외적인 연대성의 위장에도 불구하고 철두철미하게 썩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원적인 생활에서 포이에르바하는 그의 명성을 높인 책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저술한다. 학계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포이에르바하 자신도 그 책의 가치를 분명하게 의식하였다. 그는 자신의 책이 "뿌리까지 썩고 철두철미하게 위선적인 현 세대를 위한 저술이 아니라 커 가고 있는, 더 나은, 더 강한 세대를 위한 저술"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제 자신을 "철학 사상이 극단적인 한계에까지 내몰린 시대의 마지막 철학자"라고 느낀다. 그는 그의 친구들이 인정해 주는 것도 좋아했지만, 그보다는 농부, 여관집 주인, 군인들이 그의 책에 대해 열광하고 있다는 것에 참으로 기뻐하였다. 이들은 먼 곳에서 어려운 걸음으로 그를 방문하였고, 그에게 힘차고 감동적인 편지를 보냈다. 그의 책을 읽고 마음의 혼란을 일으켜 비극적으로 생을 끝낸 어느 처녀의 이야기조차도 그의 행복을 심각하게 방해할 수 없었다.

그때 새로운 일이 터진다. 1848년 혁명이 발생한 것이다. 이제는 눈부신 활동과 적극적인 참여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시기가 온 것 같았다. 그는 민주주의 시대의 본분을 다한다. "국가의 용무를 특권 계층이나 특권 계급의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문제, 민족의 문제로 만들려는 정신은 승리할 것이며 반드시 승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오직 그의 승리와 더불어서 인류의 과제가 실현되기 때문이다.

@p359

포이에르바하는 열심히 활동한다. 그는 혁명의 막이 오른 도시, 파리로 갈까 생각해 본다. 그에게 농장을 무료로 제공해 주겠다고 한 자유의 땅, 미국으로의 이민도 고려해 본다. 형편이 달라졌으니 다시 대학에서 활동하거나 잡지를 발행해 볼 까도 생각한다. 포이에르바하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학생들로부터 "새로운 시대 정신을 발하기 시작한 매우 드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강의에 초빙받는다. 대학 당국이 그에게 강의실을 내주기를 거절하자 그는 학자와 노동자를 상대로 시청에서 강의를 강행한다. 그가 강연장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청중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이델베르크의 학생으로서 강연에 참석한 고트프리트 켈러는--그의 서투른 강의 방식에 대해 약간의 유보적인 언급을 하면서도--포이에르바하를 "현대의 철학 분야에서 가장 뛰어나고 가장 중요한 역사적 인물"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포이에르바하는 다시 무기력과 낙심에 빠진다. "나는 언제나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상태를 견디며 살아왔다. 나는 예전의 조용하고 소박한, 그러면서도 즐거웠던 그 삶이 사무치게 그립다. 내게는 모든 것이 무시무시하고 으시시하다." "나는 내가 강단에서야 하는 것이 마치 가련한 죄인이 단두대 위로 가야 하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친구들은 그를 혁명적 운동에 동참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는 거절한다.

@p360

그는 어떤 열렬한 혁명가에게 하이델베르크에서의 등단 바로 직전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하이델베르크로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젊은 학생들에게 종교의 본질에 대한 강연을 합니다. 만일 내가 그곳에서 뿌린 씨앗 가운데 몇 개의 낟알이라도 100년 안에 싹이 튼다면, 나는 인류의 행복을 위해 당신이 당신의 투쟁으로 이룩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룩해 놓은 셈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포이에르바하는 그의 은신처로 되돌아온다. 그렇지만 그곳에서도 그는 어렵게 생활해 나가야만 한다. 그는 그의 거처를 "나의 우울한 연구실"이라고 부른다. "나는 매 순간마다 세계를 못질했던 그 가장 날카로운 못에 찔린다." 체념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그에게는 "자신이 마치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이루어 놓은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철학자보다 차라리 나무꾼이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영원한 삶을 떠나 영원한 죽음"으로 들어가기를 원했다. 세계에서 들려오는 메아리로도 더 이상 그가 망각된 채 있는 것을 깨우지 못했다 대작에 뒤이은 그의 저작들은 전혀 언급할 만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무관심과 냉담이 그를 사로잡았다.

@p361

포이에르바하는 자신을 "늙은데다가 사람들을 배척하는, 비위가 상하는 상태 속에서 쇠약해진 남자", "오직 자기 자신의 추도사를 쓰는 데나 유용할, 일할 능력도 없는 백발의 노인"이라고 썼다.

설상가상으로 궁핍한 외적 생활이 시작된다.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도자기 공장의 수입이 떨어지고, 결국은 파산을 선고할 수밖에 없게 된다. 공장에 돈을 투자한 포이에르바하는 재산을 깡그리 날려 버린다. 성에 있는 단촐한 주거지마저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자, 뉘른베르크 근교로 이사한다 그러나 "소음의 시궁창"이라 할 새 집에서 포이에르바하는 거리의 소란스러움, 어린 아이들의 고함 소리, 개 짖는 소리에 시달려 몇 년 동안 제대로 연구를 못 한다 마침내는 자선단체의 기부금 및 친구들의 공개적인 모금과 희사로 가까스로 생활을 유지한다. 그는 여러 번 졸도 발작을 일으킨다. 포이에르바하는 마침 내 정신이 혼미한 채로 오랫동안 식물 인간으로 지낸다. 그는 1872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비록 포이에르바하는 그의 학생 시절에 이미 신학을 단념했지만, 그래도 그의 관심은 일생 동안 종교 문제에 쏠려 있었다. 16세 때 그는 "종교에 반대하는 단호한 경향"을 마음 속에 확고하게 하였다. 그는 훗날 "종교를 내 인생의 목적이자 사명으로 삼는다."라고 썼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저서들은 "엄밀히 볼 때 오직 하나의 목표, 하나의 의지, 한 가지 사상, 한 가지 주제를 갖고 있다. 이 주제는 바로 종교와 신학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 다음 포이에르바하는 헤겔에게 사로잡히게 된다. 그는 모든 세계의 실재를 지배하는 절대 정신에 경도된다. 그렇지만 그는 곧 이 사상 속에서 방황하게 된다. 왜냐하면 헤겔의 의미로 보자면 절대 정신은 포이에르바하가 문제삼았던 인간의 정신이 아니라 신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이에르바하는 그리스도교 신학과 비교해 볼 때, 본질적인 것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헤겔의 절대 철학 역시 사변 신학이다. 그는 "사변"을 극복하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사변이란 단지 "술 취한 철학"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철학이 다시 말짱한 정신을 갖게 되기를 바랐다.

@p362

따라서 포이에르바하는 자기 자신의 철학함에서는 결코 그 어떤 신적인 원리나 또는 절대 본질에서 출발하지 않고 인간, 오로지 인간에서 출발하기로 결심한다 이때의 인간이란 구체적인 현존재와 자연의 질서 속에 놓여 있는 그대로의 인간이다. "인간의 첫 번째 대상은 인간이다." "인간은 모든 사물과 모든 실재의 척도이다. "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철학의 관심사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는 실재로서 인간 현존재를 지적한 것, 따라서 일종의 인간학적 철학의 기초를 마련한 것은 포이에르바하의 고유한 업적이다. 그밖에도 그에게는 일반적으로 "현실성과 총체성에 있어서의 현실"이 중요했다. 그의 관점으로 보자면 거의 모든 철학과 신학의 전통은 환상의 허깨비를 뒤쫓고 있었다. 그 전통은 내세, 절대 세계, 이데아의 세계, 신의 세계를 본래적인 실재로 상정하고 있다. 이에 반해 포이에르바하는 현세의 실재, 즉 지금 여기에서의 자연의 실재와 인간의 실재를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본다. 그것만이 그에게는 유일한 실재이다.

따라서 포이에르바하에게는 다른 존재자보다 인간이 뛰어난 점은, 특히 동물보다 뛰어난 점은 이성--전통적으로 거의 예외 없이 주장되어 왔듯이--이 아니다. 이성은 너무나 지나치게 실재를 뛰어넘어 사변하려는 경향이 있다. 인간을 특징짓고 있는 것은 오히려 감성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감성은 인간의 본질이다. " 그리고 정신은 단지 "감성의 본질일 뿐이고 감각의 보편적 통일성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성은 또한 진리의 장소이기도 하다. "진리, 실재, 감성은 전부 동일하다." 그는 그의 철학적 여정을 회고하여 이렇게 쓴다. "나는 초감각적인 것에서 감각적인 것으로 넘어갔으며, 초감각적인 것의 비 진리와 허위에서 감각적인 것의 진리를 도출해 내었다."

모든 초감각적인 것의 포기가 포이에르바하의 무신론을 형성하고 있다. 그는 이것을 철학사에서 최초로 근본적으로 그리고 그 모든 귀결까지 염두에 두고 필이 생각하였다. "신의 본질은 신이 공상적이고 비현실적이며 환상적인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다."

@p363

이러한 전통적 입장에 맞서 포이에르바하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신의 인간화"이고, ""신의 인간 외적, 초자연적, 반이성적 본질을 인간의 자연적, 내재적 타고난 본질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헤겔의 신적 이성, 절대 정신은 단지 "우리 밖에 실재하는 망령"임이 드러난다. 이것은 "최고의, 가장 폭력적인 추상화"이다. 이에 반해 유한한 인간에게 제한되는 무신론은 포이에르바하에게 있어서는 참된, 본래적인 철학적 입장이다.

그런데 이 새로운 원리로써 헤겔의 절대적 사변뿐만 아니라 일반으로 통틀어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가 내동댕이쳐진다. 포이에르바하는 그렇지 않아도 그리스도교가 막바지에 이르렀다고 보았다. 일종의"종교적 혁명"이 진행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멸망되어 가는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포이에르바하는 그것을 동정하지 않고 열광적으로 환영한다. "인간이 그리스도교를 포기할 때, 비로소 그는 인간이 된다." 그로써 인간은 구름 속의 낙원을 포기하고 오직 이 현세의 참된 실재만을 파악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믿음의 자리에 무 신앙이, 성경의 자리에 이성이, 종교와 교회의 자리에 정치가가, 하늘의 자리에 땅이, 기도의 자리에 노동이, 지옥의 자리에 물질적 궁핍이, 그리스도의 자리에 인간이 들어선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부터 "새롭고 솔직하고, 더 이상 그리스도교척이 아닌, 단호히 비 그리스도교적인 철학의 필연성이" 흘러나온다.

그 시대의 종교적 상황에 대한 이러한 지적만으로는 물론 대단한 것을 이루었다고 할 수 없다. 포이에르바하는 거의 전 인류의 역사에서 신적인 존재는 언제나 받아들여져 왔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설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한 해석의 원리는 바로 포이에르바하가 도입한 인간학적 관점이다. "인간은 종교의 시작이고, 종교의 중간이며, 종교의 끝이다." 이러한 인간으로의 환원은 신 개념의 파괴를 몰고 온다. 포이에르바하는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이라는 존재는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신은 "표상이나 환상 속에 있는 어떤 것이지, 진리나 현실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의 이념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본질, 즉 종족으로서 그에게 보편적인 것을 자기 밖에 설정해 놓고 하나의 신으로 만드는 데서 비롯된다.

@p364

"신에 대한 앎은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영, 즉 자기 자신의 본질에 대한 앎이다." 신은 하나의 독립적인 실재의 존재로서 직관된 인간 본질의 이상이다. "신은 인간의 "외화된 자기 자신이다."

이것은 특히 포이에르바하가 전통으로 신에 대해 거론된 특성들을 조사할 때 매우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모든 특성은 포이에르바하가 이해했듯이, 인간의 자기 이해에서 생겨났다. "인간은 신의 전지(Allwissenheit) 안에서만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하는 자신의 소망을 채울 수 있다. 인간은 신의 편재 (Allgegenwart) 안에서만 어떤 장소에도 얽매이지 않으려는 자신의 소망을 구현한다. 인간은 신의 전능함 안에서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신의 소망을 구현한다 " 이렇게 신적인 영역은 그 전체가 몽땅 인간에게로 되돌려진다. 그리하여 포이에르바하는 다음과 같은 학문 이론적 주장을 하게 긴다. "신학의 신비는 인간학이다."

그렇지만 이것으로도 아직 왜 인간이 거듭해서 상상의 도움으로 신과 신적인 종교를 만들어 내려는 유혹에 빠지는지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p365

포이에르바하는 이것을 심리적인 소여성으로 소급시킨다. 인간 내재적 능력과 힘이 신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특히 예속 감정이 중요하게 간주된다. 인간은 그가 그것에 의존하고 있다고 알고 있는 바로 그것을 신으로 숭배한다. 신은 인간에게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그런 존재이며, 인간의 능력을 무한히 넘어서, 그래서 인간에게 자신의 제한성, 무력감, 연약함 등 자기 비하의 감정을 불어넣게 하는 그런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이 이 예속성을 종교적으로 설명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속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진실로 의존하곤 있는 것은 자연, 그것도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힘"인 외적인 자연뿐 아니라 우리 안의 자연 본성, 즉 충동, 욕망, 관심 등이다. 따라서 예속 감정은 포이에르바하가 생각하듯이 세계 내재적으로 또한 인간 내재적으로 이해해야한다. 사람들이 이것을 이해한다면, 비로소 예속성의 감정이 연관을 맺고 있음에 틀림이 없는 어떤 세계 초월적, 인간 초월적 존재를 상정하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포이에르바하는 인간 영혼의 심연을 더 깊숙이 파고 들어간다. 그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것으로 욕망과 이 욕망 기저에 행복에 대한 충동이 깔려 있음을 발견한다. 이것은 인간에게 다시 신에 대한 사상의 생성을 유발하는 동기가 된다. "인간이 실제로 그렇지는 않지만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는 그것을 인간은 신으로 만들며, 그래서 그것이 인간의 신이 된다." 자신의 행복을 결코 완전히 실현할 수 없는 인간은 상상력을 가지고 완전한 행복인 신을 만들어 낸다. "신이란 상상 속에서 충족된 인간의 행복에의 욕망이다."

포이에르바하는 이것을 계속 숙고해 나갔고, 결국 그에게는 모든 신에 대한 믿음의 뿌리는 이기주의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행복을 향한 갈망은 이기적인 갈망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충족시킬 수 없는 과도한 이기주의를 만족시키는 것을 도와줄 수 있는 신을 생각해 낸다. 그래서 포이에르바하는 이렇게 주장한다. "인간의 이기주의는 종교와 신학의 근본 원리이다.

@p366

왜냐하면 숭배와 흠숭의 대상이, 따라서 한 본질의 신적인 품위가 인간의 안녕에 대한 그 존재의 연관성에 달려 있다면, 그리고 인간에게 유익하고 유용한 존재만이 신적 존재라고 한다면, 그 존재의 신성의 근거는 오직 유일하게 모든 것을 자기 자신과만 연관시키고 이러한 연관 속에서만 평가하는 인간의 이기주의에 있다." 이 문장에서의 "이기주의"라는 표현은 물론 사람들이 흔히 이 말과 연결시키고 있는 도덕적인 평가 절하의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이 표현은 오히려 자기 긍정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이 같은 자기 긍정은 포이에르바하의 철학처럼 오로지 인간에게만 의존하고 다른 모든 것을 배제시켜 버리는 그러한 철학의 필연적인 기초를 형성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말 그대로 무신론적 철학이다.

포이에르바하는 그의 "미래의 철학"으로 모든 종교, 모든 신학, 그리고 신학적으로 전염된 모든 철학을 완전히 극복하였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는 그의 결정적인 책에 "세계 역사적 사실의 등급"을 매길 수 있었다. 그는 그의 학설이 "세계사의 전환점"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물론 이 점에 있어서는 뭔가 잘못 생각하였다. 신의 문제에 관한 논쟁은 포이에르바하의 단호한 무신론에도 불구하고 계속 진행되어,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그 절박성이 조금도 상실되지 않고 있다.

@p367

27. 마르크스: 현실을 위한 혁명

칼 마르크스가 그의 본래적인 삶의 계획을 그대로 실행했더라면 오늘날 세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청년 마르크스는 타고난 시인으로 자처했고, 또한 그의 시 정신이 엿보이는 몇몇 증거들이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것들은 (요정의 노래), (땅의 정령의 노래), (사이렌

(바다. 요정)의 노래) 등 지극히 시적인 제목을 지니고 있다. 한마디로 전부 신화적인 노래들이다. 비록 매우 슬픈 시이기는 하지만 특히 마음을 감동시키는 시가 하나 있다. 그 제목은 (운명의 비극)이다. 그 가운데 몇 구절은 인용해 볼 만하다

@p368

아가씨는 거기에 그토록 창백하게 서 있네,

조용히 입을 다문 채로.

천사와도 같은 부드러운 마음은

눈물로 흐려져 있고, 새침해 있네.

그토록 경건했고, 그토록 부드러웠던 그녀

하늘에 내맡긴

순결의 복된 모습은

단아함으로 엮어졌다네

거기에 고귀한 기사가

화려한 준마를 타고

눈에는 바다와 같은 사랑과

타오르는 열정을 담고 왔었네.

그가 말릴 길 없이

싸움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노도와 같이

떠나 버리자

가슴 깊숙이 꽂혔다네.

 

그러나 마르크스는 다른 어조로 노래하기도 한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죽음의 노래를 울부짖고

우리는 냉정한 신의 원숭이들이다.

 

이 시들을 감상하고 난 후, 마르크스가 비록 심하게 영혼에 상처를 입었다고는 하지만 시인의 길을 포기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독일어 시 예술이 많은 것을 잃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아무튼 유명한 변호사인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였다"네가 통속적인 시인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았다면 유감 천만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아들에게 워털루 전투에 대해 "웅장한 양식의 송시"를 써 보라고 제안한다. 그렇지만 후세 사람들은 그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인류의 행복으로 보느냐 불행으로 보느냐에 따라 마르크스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시 쓰기를 단념한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거나 유감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p369

칼 마르크스는 1818"온갖 소음과 우스꽝스러운 성화와 성상으로 뒤덮인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마을인" 트리어에서 태어났다. 그의 유년 시절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흥미있는 것은 훗날 열광적인 무신론자가 된 그가 고등 학교 졸업 논문을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의 일치"라는 주제로 썼다는 것이다. 그 후 법률 공부를 하기 위해 본에 갔을 때, 확실히 그는 외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다. 여하튼 걱정이 된 어머니는 이렇게 써 보냈다. "네가 너의 작은 살림을 어떻게 꾸려 나가고 있는지, 작은 살림이건 큰 살림이건 가계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인데 잘 꾸려나가고 있는지 몹시도 궁금하구나. 내가 이런다고 약한 여성들의 노파심이라고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된다. 몇 가지 덧붙여 말하고 싶구나. 사랑하는 칼, 청결과 정리 정돈을 사소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건강과 쾌적함은 바로 그것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네 방을 자주 청소하는 것을 잊지 말고 정확하게 잘 지켜라.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칼, 매주 수세미와 비누로 문질러 닦도록 해라." 그녀가 이러한 훈계조의 편지를 쓴 것은 분명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가 공부하는 양을 보면 정리 정돈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그는 학생 조합에 가입한다. 그리고-이 기록이 사실이라면-결투하다가 부상을 당한다. 그는 "야간 안면 방해, 고성 방가 및 음주"로 학생 감옥소에 들어가야만 했다. 그는 "금지된 무기"를 소유했기 때문에 고소된다. 그는 계속 빚을 진다. 이 와중에 그는 제니 폰 베스트팔렌과 약혼한다. 귀족 가문인 약혼녀의 집안에서는 이 무일푼의 총각을 다소 주저하며 받아들인다. 마르크스의 아버지도 "시적인 감흥으로 사랑의 흥분과 도취에 들떠" 한 여자를 잡아두려는 것을 나무란다.

마르크스는 베를린에서 두 학기 동안 학업을 계속하는데, 여기에서도 모범 학생은 아니라는 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의 아버지가 불평을 호소할 만한 이유는 있었다. "무질서하고 학문의 모든 분야를 어정쩡하게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면서 침침한 석유 등잔 아래서 모호한 야심을 품고 맥주 때문이 아니라 학자 차림으로 망나니 짓을 하는 것, 예의라고는 모르는 제멋대로 된 녀석"이라는 비난을 아들에게 퍼붓는다

@p370

흥청망청한 돈 씀씀이도 아버지를 놀라게 한다. 마르크스는 몇몇 강의만을 들을 뿐이었는데, 그것도 법률학보다는 철학과 역사학 분야였다. 그는 학기 내내 거의 학교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어쨌거나 그는 23세에 한 시간도 출석한 적이 없는 예나 대학에서 철학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졸업한다. 이 모든 외적인 사건들은 전혀 그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가 정말 중요하게 여긴 일은 청년 헤겔 학도의 모임인 "박사 클럽"의 회원이 되어 그곳에서 밤낮없이 토론하는 일이었다. 그의 친구들은 그를 "사상의 창고", "이념의 황소 대가리"라고 단정했다. 그는 틈틈이 "새로운 형이상학의 근본 체계"를 서술한다. 물론 그는 교수가 되려고 한다. 그러나 헤겔 좌파인 그의 친구들이 거의 예외 없이 보수주의적인 정권에 부딪쳐 실패하는 것을 보고는 그 생각을 버린다.

그 대신 마르크스는 편집인, 그것도 쾰른에서 발행되는 자유주의적 경향을 가진 (라인신문)의 편집인이 된다. 그는 직업상 정치, 경제적인 구체적인 문제를 다루게 된다. 그는 대담하고 자유로운 정신으로 신문을 편집한다. 훗날 그는 공산주의의 지도적인 인물이 되었지만, 이때는 공산주의를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 후 그는 정치적 탄압 때문에 편집자 자리를 포기해야만 했다. 프로이센 왕이 "라인강의 창녀"라고 명명한 이 신문은 폐간되고 말았다

그 후 마르크스는 오래 기다려 온 약혼녀와 서둘러 결혼을 하고, 파리로 향한다. 그는 그곳에서 그의 친구 아놀드 루게와 함께 (독일, 프랑스 연감)을 발행한다. 그는 얼마 동안 루게 가족과 함께 일종의 "공산주의 공동체" 생활을 하지만, 그의 융통성없는 성격 때문에 곧 갈라서고 만다. 마르크스는 파리에서 하이네와 프랑스 사회주의자들과 접촉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는 이 도시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한다. 그는 프로이센 정부의 요청으로 프랑스에서 추방당하고 브뤼셀에 잠시 체류한다. 그는 브뤼셀에서 제1차 세계 공산당을 (17명의 회원으로) 창당한다

그 다음 잠깐 동안 런던에 가 있다가 1848년 독일 혁명이 발발하자 돌아온다. 이 혁명을 계기로 그는 (공산당 선언)을 집필하고, 자신의 혁명 계획을 촉진시키기 위해 잠시 프랑스와 독일로 되돌아간다. 그는 쾰른에서 (신라인 신문)을 창간한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다시 추방당하는 신세가 되고 결국 죽을 때까지 런던에서 살게 된다. 대륙을 잠시 여행하는 동안 말고는 줄곧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파리와 브뤼셀에서 체류한 짧은 기간은 그나마도 의견을 달리하는

혁명가들과의 통렬한, 그리 관대하지 못했던 불화로 점철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연구에도 몰두하여 (경제학, 철학 수고)를 집필한다. 그렇지만 이 저작들은 대부분 그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출판된다.

마르크스는 런던에서 극도로 궁핍한 가운데 무섭게 불어나는 가족들과 함께 어렵게 살아간다. 현실적인 궁핍이 종종 그들의 생활을 짓눌렀다. 잡지 창간은 실패로 끝나 버린다. 마르크스는 대개 후원금으로, 특히 친구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재정적인 지원으로 생계를 이어 나갔다. 살림은 거의 파산 직전이었다. 때때로 가구를 저당잡혀 차압당하기까지 해야 했다. 언젠가 한번은 외출할 수조차도 없었는데, 그 까닭은 그의 옷을 전당포에 잡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병마는 끊일 새 없이 그와 그의 가족을 찾아들었다. 다만 몇몇 아이만이 태어난 첫 해를 넘겼을 뿐이다. 마르크스는 빛으로 압박 받다가 마침내 파산을 선고하려고 한다. 오직 충실한 벗 엥겔스만이 이 최악의 조치를 막아 준다.

@p372

부인 제니는 절망에 빠져서 이렇게 비참한 생활을 하느니 자신과 아이들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자주 생각한다. 이 판국에 마르크스는 하녀와 연애 소동을 일으킨다. 이 연애 사건의 결과, 그렇지 않아도 재정적 궁핍으로 뒤숭숭한 가정의 분위기는 완전히 흐트러지고 만다. 같은 신조를 가진 동지들과의 논쟁도 끊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이를 악물고 연구를 계속한다. 너무나 지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허탈감에 빠진 짧은 기간을 빼고는 열심히 작업을 계속했다. 이렇게 그는 대표작 (자본론)을 집필한다. 그는 실제로 그 책의 제1권을 출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책에 대한 평이 전혀 없자 스스로 긍정적, 부정적 비판들을 쓴다. 그러나 전3권으로 된 이 저서가 완성되기 전, 마르크스는 1883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마르크스의 외모와 인간성에 대해서는 러시아 친구 중 한 사람이 아주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의 멋있는 수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는 활력, 의지력, 꺾일 줄 모르는 확신으로 뭉친 그런 남자의 전형이다. 외모도 매우 기이하게 생겼다. 숱 많은 검은

머리카락, 털로 뒤덮인 손, 단추가 잘못 채워진 웃옷, 비록 그의 외모와 행동이 아주 기이하게 보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존경을 요구할 권리와 힘을 갖고 있는 그린 남자의 풍모를 가졌다.

@p373

그의 행동은 순하면서도 과감하고 자신에 차 있다. 그의 태도는 모든 사회적 예절과 너무나도 상반된 것이었다. 그의 태도는 거만했고, 약간의 경멸감마저 띠고 있었다. 그의 금속성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그가 내리고 있는 인간과 사물에 대한 극단적인 판단과 묘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그는 명령조의, 어떠한 반대도 용서하지 않는다는 어투가 아니고는 달리 말하지 않았다. 게다가 또 나를 거의 고통스럽게 만드는 그 어조에 의해-그가 말하는 모든 말이 그러했다-그의 말투는 더 날카롭게 들린다. 이러한 어조로 그는 정신계를 지배하고 이 정신계에 법칙을 하달해야 하는 그의 사명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토로했다. 마치 환상의 순간이 눈앞을 떠돌듯이 내 앞에 한 민주주의 독재자의 화신이 서 있었다."

마르크스는 철학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그 시대의 위대한 정신적 논쟁에 뛰어든다. 그 시대는 거물 헤겔에 의해 규정되고 있었는데 그는 헤겔의 사상을 "현금의 세계 철학"이라고 하며 심취한다. 그러나 그런 뒤 그는 심취했던 것보다. 더 단호하게 그에게서 멀어져 간다.

그의 비판은 헤겔의 역사에 대한 고찰에 집중된다. 헤겔에 있어 역사는 사건의 단순한 우연적인 연속이 아니라, 하나의 내재적인 원리 다시 말해 일종의 내적인 변증법에 따라서 진행되는 의미있는 흐름이다

@p374

이때 결정적인 것은 역사의 본래의 주체는 행위하는 인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역사에서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하나의 정신-헤겔은 이것을 "세계 정신" 또는 "절대 정신" 또는 ""이라고 부른다-이 지배한다. 생성되어 가는 신이 역사의 진행과 더불어 자기 의식을 실현한다. 그는 역사 과정의 개별 단계에서 자기 자신에 도달한다. 헤겔은 그가 살던 시대에, 그것도 그 자신의 체계 안에서 절대 정신이 역사를 통한 모든 잘못된 길을 거쳐 마침내 그의 목표, 즉 완성된 자기 의식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이제 세계 정신은 여기까지 도달한 것이다. 최종의 철학은 그 모든 이전 철학의 결과이다. 아무 것도 상실되지 않고 모든 원리는 보존되었다. 이 구체적인 이념은 무려 2500년에 걸친 정신의 노력의 성과, 자신을 인식하려는 정신의 진지한 연구의 결과이다" 따라서 헤겔의 철학이 출현한 후에는 파악되지 않은 현실이란 더 이상 없다. 이것이 (법철학) 머리말에 나오는 그 유명한 명제의 의미이다.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 따라서 헤겔은 이성과 현실은 이제 드디어 일치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성과 현실은 진정 화해하였다. 절대 정신은 자기 자신을 모든 현실로, 그리고 모든 현실을 자신의 구현으로 파악하였다

마르크스는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다. 모든 현실을 절대 정신으로부터 이해해야만 한다는 헤겔의 사상은, 그에게는 근거가 제시되지 않은 일종의 "신비주의"일 뿐이다. 이럴 경우 현실 자체에서부터가 아니라, 실제 현실 위의 한 점에서부터 철학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마르크스의 결정적인 요구는, 철학은 물구나무 세워져야 한다는 것 즉 현실을 바라보는 시야가 역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적인 현실을 가지고 이 세상의 현실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모든 사유의 출발점은 구체적인 현실이어야 한다. 이러한 사상은 마르크스 철학에 무신론이라는 각인을 새긴다. "진리의 피안이 사라져 버린 지금 역사의 과제는 차안의 진리를 확정짓는 것이다"

헤겔이 현실은 이성과 화해했다고 주장했을 때, 그는 구체적인 현실을 안중에 두고 있지 않았다고 마르크스는 생각한다. 헤겔의 경우 그것은 순전히 사유의 영역에서 전개된다. 헤겔이 이야기하고 있는 현실도 순전히 사유된 현실일 뿐이다

@p375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사실적 현실은 모순적인 것, 파악될 수 없는 것, 따라서 이성과 화해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헤겔의 전체 철학은 이 실제의 현실을 그의 포괄적인 사유 안에 포함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좌초하고 만다. "따라서 세계는 총체적인 철학이 마주 대하고 있는 일종의 찢어진 세계이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구체적인 현실은 인간의 현실이다. "우리가 시작하는 전제는 실제의 개인들이다. " 마르크스가 가정하는 철학은-헤겔에 반대하여 포이에르바하를 따르는-인간 실존의 철학이다. "인간의 뿌리는 인간 자신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그 자신의 철학을 "현실의 휴머니즘"이라고 한다. 인간을 위한 제I의 가장 본래적인 현실은 인간이다. 그러므로 이 인간에서부터 새로운 사유도 시작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는-헤겔처럼-인간을 본질적으로 인식의 능력으로 고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인간적 실천, 구체적 활동이다. "인간은 실천 속에서 진리, 즉 현실과 힘, 그의 사유의 현세성을 입증하여야 한다." "그것은 실제로 활동적인 인간에서부터 출발한다."

인간의 실천의 본질에는 그것이 공존 속에서 수행된다는 것이 포함된다. 포이에르바하가 인간을 고립된 개인으로 파악했다면, 마르크스는 매우 명백하게, 인간은 항상 이미 그를 떠받치고 있는 한 사회 안에서 살고 있음을 강조한다. "개개인은 사회적 존재이다." "인간, 그것은 인간들의 세계 곧 국가, 사회이다." 이 사회적 본성은 마르크스에게 그 다음의 모든 숙고를 위한 출발점을 형성한다. 많이 논의되고있는 명제도 이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의 존재를 규정하고 있는 것은 그의 의식이 아니다. 오히려 역으로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그의 의식을 규정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사회는 무엇으로 형성되는가? 마르크스의 대답은 이러하다. 일차적으로 공동의 의식이 아니라, 공동의 노동에 의해서 형성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원래 경제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관계와 특별히 그 관계의 기초가 되는 생산력은 인간 현존재의 토대이다. 단지 이 경제적 관계가 변화되는 정도에 따라 "이데올로기적 상부 구조"라 표현되는 의식의 방식이 발전된다

@p376

이데올로기적 상부 구조에는 국가, 법률, 이념, 도덕, 예술, 종교 등이 있다. 경제적 토대에서

헤겔이 정신에 부여한, 역사 발전의 법칙이 발견된다. 경제적 관계는 변증법적으로 전개된다. 그것도 계급간의 갈등 속에 전개된다. 그 때문에 마르크스에 있어서 역사는 특히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철학사를 풍부하게 만든 그 많은 인간학적 역사 철학 이론 가운데 하나나 다름없는 것처럼 보인다. 분명 흥미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단지 수많은 해석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데 무엇이 마르크스가 말한 바를 그토록 열광적으로 지지하도록 만들고 있는

? 그 다음 시대를 그토록 폭넓게 규정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분명 마르크스가 순수한 사상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 않고, 단호하게 현실을 변화시킬 과제를 떠맡고 있는 데 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서로 다르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이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의도에서 마르크스는 그의 시대를 비판하기 시작한다. 그의 시대 곳곳을 둘러보며 그는 인간의 진정한 본질, 즉 인간의 자유와 독립, "자유롭게 의식된 행위"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관찰한다. 어디에서나 인간은 자기 자신에서부터

이탈되어 있다. 어디에서나 인간은 진정한 인간 현존재의 가능성을 상실해 버렸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인간의 "자기 소외"라고 부르고 있는 것의 의미이다. 자기 소외는 만연되어 있는 "인간 세계의 평가 절하"를 의미한다.

여기에서도 마르크스는 경제적 관계로 소급해 올라간다. 인간의 자기 소외는 노동자가 그들 자신의 노동의 생산물에서 소외되어 있다는데 뿌리를 두고 있다. 노동의 결과인 생산물은 노동자가 향유하지 못하고 고용주의 손 안으로 들어간다. 노동의 생산물은 "상품"이 된다.

다시 말해 노동자에게는 낯선 물건이 된다. 노동자는 살아가기 위하여 그 물건을 구입해야 하기 때문에, 그 물건에 예속되어 얽매이게 된다. "노동이 생산한'상품, 노동의 생산물은 노동자에게 낯선 존재로서, 생산자로부터 독립된 일종의 힘으로서 등장하게 된다." 따라서 노동도 역시 "소외된 노동"이 되어 버린다. 즉 노동은 노동자의 활동 의욕의 표시가 아니라 그에게 자기 보존을 위해 강요된 수단이 된다

@p377

노동은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강제 노동"이 되어 버린다. 이런 식의 발전은 자본주의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자본주의에서는 자본이 인간의 손아귀를 벗어난 권력의 기능을 떠맡는다

노동 생산물의 소외는 또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외"도 초래한다. 그것은 단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반목적인 투쟁"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들 사이의 일반적인 관계는 갈수록 더욱더 직접성을 상실해 간다. 그 관계는 상품에 의해, 그리고 "누구에게나 몸을 파는

창녀"인 돈에 의해 매개된다. 마침내 프롤레타리아(Proletarier, 무산 계급)도 상품의 성격을 받아들이게 된다. 프롤레타리아의 노동력은 노동 시장에서 거래되고, 구매자의 자의에 무방비로 내맡겨진다. 프롤레타리아의 "내면의 세계""점점 더 가난해진다." 그들의 "인간적 위치와 품위"는 갈수록 짓밟힌다. 이것이 소외의 절정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상실되어 버린 인간"이다. 그의 현존재는 "인간성의 완전한 상실"이다. 즉 그의 본질은 "탈인간화된 본질"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과정의 절정에서-마르크스는 그것을 입증할 수 있다고 믿는다-전복이 나타나야만 한다

@p378

이 전복은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소외를 의식하게 됨으로써 가능해진다. 프롤레타리아는 이제

"자신의 정신적, 물질적 비참을 의식된 비참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인간 상실을 의식하고, 그래서 그들 스스로를 없애 버리는 인간성 상실"을 이해한다. 마르크스의 진단에 따르자면, 그것은 자본은 소수의 손안에서 축적되고, 대중의 빈곤은 증대되고, 실업자가 증가되는 현상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이로써 자본은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꼴이 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이제 역사적인, 학문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변증법적 필연성에 의해, "확실한 법칙"에 따라, 전복과 혁명이 뒤따라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전복의 과제는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인간을 인간을 위한 최고의 본질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인간이 굴복당하고 노예로 되고 버림받고 멸시받는 존재가 되는 그 모든 관계를 뒤집어 엎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진정한 자유의 왕국"을 여기로 이끌고 오는 것, 인간이 "그의 본질을 최대한 풍부하게" 계발하여 소외를 완전히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곧 공산주의 운동의 과제라고 마르크스는 생각한다. 바야흐로 "공산주의는 인간의 자기 소외인 사유 재산을 적극적으로 파기하여 인간에 의해 그리고 인간을 위해 인간의 본질을 실제적으로 구현할 때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는 지금까지의 그 모든 발전 안에서 이 발전을 의식하게 된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다시 말해 인간다운 인간 자신에로의 완전한 복귀이다. 이 공산주의는 인간과 자연 또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의 진정한 해소이며, 자유와 필연성 사이에 벌어지는 투쟁의 진정한 해결 방법이다. 공산주의는 역사의 수수께끼의 해답이다." 공산주의는 "인간을 위한 인간 본질의 실제의 구현"이다. 공산주의를 통해 "인간 사회의 선사 시대는 막을 내린다." 이제는"진실로 인간적인" 사회가 시작된다. 그러나 이 사회의 모양새가 어떠한지에 대해 마르크스는 더 이상 귀띔해 주지 않았다.

@p379

28. 니체: 허무주의의 위력과 무기력

어떤 모임에서건 니체의 이름을 거론할 때, 누구든지 으레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너 여자한테 가니? 채찍을 잊지 말아라." 그렇지만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노파의 입을 빌려한 이 말은 여성에 대한 니체의 태도를 완전히 잘못 전해 주고 있다. 다시 말해 여성에 대해 니체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수줍음을 탄다. 비록 그가 어린 시절, 아버지가 죽고 난 후 여자들 즉 할머니, 어머니, 두 명의 고모, 누이 등에 둘러싸여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다. 모든 여자들 앞에서의 불안감은 오히려 그 때문에 더 촉진되었을지도 모른다. 니체는 학생 시절, 드리워진 커텐 뒤에서 소녀들에게 갈채를 보내려고 과감히 시도한 적이 있지만, 이때에도 한 무리의 학우들과 함께 그랬을 뿐이다. 언젠가 한번은 하인에게 잘못 이끌려서 사창가에 가게 되지만 그는 재빨리 도망쳐 나온다

@p380

그래서 "싸구려 장신구와 속이 훤히 내비치는 얇은 옷"을 휘감고 피아노 앞에 앉아 있던 여자들은 그에게 몇 소절 연주해 보일 틈도 없었다. 두번째로는 먼 발치에서 본 여배우에게 푹 빠져 특별히 그녀를 위해 작사 작곡한 노래를 그녀의 집으로 보낸다. 물론 그 여배우는 답장을 주지 않았다. 세번째로 열차여행을 하는 동안 발레리나와 사귀게 되는데 이 소박한 모험도 종착역에 도착하자 곧 끝나 버린다. 네번째로 니체는 젊은 여자에게 편지로 처음으로 청혼을 한다. 그런데 그것도 그가 막 여행을 떠나려고 하고 있을 때였다. 게다가 편지 쓰는 것마저 몹시 서툴러서 그가 아무런 답장도 받지 못한 것은 오히려 당연할 지경이다. 다섯번째로 그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부인인 코시마를 연모한다. 여섯번째로 그늘 머리에 떠오르는 젊은 여자들에게 전부 초청장을 보내어 스위스에 있는 그를 방문하도록 초대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도 아무 진전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 다음번에 니체는 당시 21세밖에 안 된 한 매력적인 여성에게 완전히 사로잡혔다. 그녀의 이름은 루 살로메이다. 첫번째 만남에서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운명적인 힘이 우리를 서로 만나게 하였나요?" 그는 루를 신뢰하여 그의 가장 깊이 감추어 둔 생각까지 털어놓았으며, 그녀를 그의 유일한 제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감히 그녀의 손을 잡아볼 엄두도 못 낸다. 그는 한 친구를 전령으로 루에게 보내 본다. 그런데 이 친구 역시 루에게 반해 있었으며, 더군다나 그녀에게 청혼까지 하였다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한다. 그러니 그 친구가 부정적인 대답을 알려 온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곧 루와의 관계도 끝장나고 그 친구와의 관계도 누이동생의 간계에 의해 끝이 나버린다. 결국 니체는 그저 이런 말을 할 따름이었다. "결혼한 철학자는 코메디에나 어울린다." 아직 한 여자가 남아 있는데, 그녀는 "라마"라고 불리는 니체의 누이이다. 그녀는 니체가 살아 있을 때는 물론이고 죽은 후에도 자신의 남자라고 선언한다. 그녀는 니체를 교묘하게 휘어잡아 꼼짝 못 하게 하고 큰 공헌이 될 유고 발간의 노력에서도 명백한 서류의 위조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니체의 손에 쥐어져 있는 채찍은 노파의 근거없는 수다에 불과하다

@p382

이보다 엄청난 것은 니체의 철학적 자기 의식이다. "내가 이 시대 제일의 철학자라는 것은 불가능한 말이 아니다. 아니 아마도 그 이상일 것이다. 2000년 사이에 놓여 있는 그 어떤 결정적인 것과 숙명적인 것이 나일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인류의 역사를 두 쪽으로 갈라놓는

결정적인 과업"을 맡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는 "앞으로의 모든 미래를 결정짓게 되는 그러한 결의를 인류에게 촉구하는 것"이 그의 소명이라고 여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1884년 신교도 목사관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분명 그의 집의 가풍에서 많은 것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전한다. 그는 "성경 구절과 찬송가를 사람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기막히게 암송해 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어린 목사"가 그의 별명이 되어 버린다. 그런데 소년은 다른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낸다. 그는 10세 때 모텟(Motette, 성서 중의 구에 의거해서 작곡한 다성의 무반주 악곡)을 작곡하고 많은 시를 짓는다. 그는 14세 때 이미 자서전을 쓸 준비를 한다. 그 후 유명한

슐포르타 학교에 들어갔을 때, 그는 특출한 학생으로 손꼽혔는데, 무엇보다도 독일어 작문과 음악에서 월등한 재능을 보였다. 단지 수학과 철자법이 다소 부진했을 뿐이다. 그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얼마나 엄격히 교육시켰나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짤막한 이야기들이 잘 말해 주고

있다. 언젠가 한번 니체는 학생들을 감독해야 했다. 그리고는 감독 보고서를 다소 익살스럽게 기록한다. "강당에서 깜빡깜빡 타고 있는 램프들이 너무 흐려서 학생들은 각자 자기의 불이라도 빛나게 하려고 노력한다." "최근에 고3 교실의 긴 의자들을 페인트로 칠했는데, 탐탁지 않은 패거리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표시해 놓았다. " 이런 식으로 가볍게 보고서를 작성한 결과에 대해 니체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엄격한 선생님들은, 어떻게 그렇게 진지한 보고서를 다분히 장난기를 섞어 작성할 수 있는가에 대해 경악스러워했다. 선생님들은 토요일에 나를 종교 재판에 회부해서 벌칙으로 3시간 동안의 감금과 몇 차례의 외출 금지를 선고하였다."

@p383

니체는 고등 학교 졸업 시험 (Abitur)을 치른 후, 이미 학생 시절부터 그의 집안의 믿음과는 소원해졌기에 집안의 전통에 어울릴 듯한 신학 대신에 고대 언어학을 본과 라이프치히에서 공부한다. 그는 잠시학생 조합원이 되며 결투를 하기도 하는데 항상 돈에 쪼들린다. 그는 전공과 함께 "저 활기에 넘친 어두운 천재"인 쇼펜하우어에 매우 심취한다. 그의 염세주의는 니체에게 뿌리칠 수 없는 매력을 풍긴다. "나는 여기서 질병과 치료, 추방과 은신, 지옥과 천국을 보았다. 자기 인식에 대한 욕망, 실로 자기 파괴에 대한 욕망이 나를 강력하게 사로잡았다." 그는 친구들에게 "쇼펜하우어 식 요리 냄새를 풍겨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또한 니체는 그가 선택했던 전공 학문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다. 그의 지도 교수이자 유명한 고대 언어학자인 리출은 그를 "전체 젊은 언어학도의 우상"이라고 극찬한다. 그는 한동안 정신적 세계에서 멀어진다. 그는 기마 야전 포병에 입대한다. 금욕적인 학자의 얼굴에 무시무시한 칼을 찬, 철학자적인 전사의 모습을 하고 있는 용감무쌍한 사진이 한 장 있다

@p384

그 당시를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 때 그의 임무는 "이곳의 대포를 끌어안는 것이다. 부드러움보다는 원한 서린 태도로."

니체는 아직 학위 획득을 끝내기도 전인 75세 때, 바젤의 교수로 초빙된다. 그는 그곳에서 대학이라는 울타리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 자재로 풍부한 강의 활동을 전개한다. 이 시기에 리하르트 바그너와의 우정-훗날 니체는 그와 가장 씁쓸한 불화를 빚게 된다-이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니체는 그가 "진정한 언어학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회의에 사로잡힌다. 이 무렵 그는 그의 최초의 위대한 저서 (음악 정신에서의 비극의 탄생)을 내놓는다. 이 작품은 전공 세계에서 전적인 무시와 격렬한 반대에 부딪친다. 그는 10년 뒤 견디기 힘든 두통과 눈의 통증에 시달리고, 또 우울 증세와 사람들과 교제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 그리고 대학에서의 교수의 의미에 대한 회의로 괴로워하다가 결국 교수직을 그만둔다

니체는 그때부터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도망자"처럼 바젤과 독일의 많은 지방, 이탈리아, 스위스 등지를 옮겨다니며 생활한다. 어디서나 검소한 호텔 방에서 지낸다. 그는 무척 빠른 속도로 작품을 완성해 세상에 내놓는다. 그렇지만 그의 작품들은 아무런 반향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니체는 이로 인해 몹시 실망하고 더욱더 깊은 고독감을 느낀다

@p385

"지금까지 사람들이 존경하고 사랑해 온 그 모든 것에 대항한 나의 통렬하고 선동적인 투쟁 속에서 나 자신은 남이 눈치 채지 못하는 동굴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설령 사람들이 찾으려고 나서더라도 더 이상 발견할 수 없게끔 감추어져 있는 그 어떤 것 말이다." "나는 나 스스로를 최후의 철학자라 부른다. 왜냐하면 내가 최후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 이외에는 어떤 사람도 나와 이야기하지 않으며, 나의 목소리는 내게 죽어가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여겨진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마저 반응이 없자 이렇게 쓴다. "영혼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부터의 외침에 한마디의 대답도 듣지 못하는 것, 그것은 끔찍한 체험이었다. 그 체험은 나를 살아 있는 사람들과의 그 모든 모임에서부터 끄집어 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또한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다. "나는 항상 끝도 안 보이는 낭떠러지에 서 있다."

1887년 니체가 45세의 나이에 졸도하였을 때, 필 낭떠러지는 입을 벌려 완전히 그를 삼켜 버렸다. 그 사건은 튜린에서 일어났다. 그는 마부에게 학대받는 말을 흐느끼며 끌어안는다. 혼란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그는 호텔로 옮겨진다. 의사들은 발작 증세라고 진단하는데 원인은

예전에 전염된 일이 있는 매독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후 그는 11년이라는 긴 세월을 어머니 집에서 어머니와 누이의 간호를 받으면서 산다. 가장 신뢰하는 친구인 오버베크는 이 시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는 피아노에서 울려나오는 시끄러운 노래와 광기에

고조되고, 그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사상 세계로부터 갈기갈기 찢어져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이때 그는 알아듣기 힘들 정도의 희미한 어조의 짧은 문장으로 죽은 신의 후계자로서의 자신에 대해 기이한 예언자적인 이야기와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일 등 그 모든 것을 마치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이 이야기한다. 다시 형언하기 어려운 괴로운 전신 경련과 발작이 일어난다. 그렇지만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모든 것은 내가 거기에 있었던 짧은 일시적인 순간 동안 일어났다. 전반적으로 그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천직인 새로운 영원성을 표현하는 익살꾼의 표현들이 압도적

이다

@p386

비길 데 없는 표현의 대가인 그가 즐거움의 환호마저도 가장 진부한 표현이나 우스꽝스러운 춤과 발작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었다." 니체는 1900년 세상을 떠났다

니체의 사유는 그의 삶과 밀접하게 결속되어 있다. "나는 언제나 나의 전 육신과 삶을 다해 책을 썼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니첸 사상의 변화들은 또한 그의 실존의 단계이다. 그가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말한 것은 바로 그 자신에게 딱 들어맞는다. "나는 너희에게 세 가지

정신의 변형을 말하려 한다. 즉 어떻게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고, 마지막으로 사자가 어린 아이가 되는지를 말하겠다. " 낙타는 이상에의 경외와 믿음의 단계, 전수된 것에 대해 인내하는 자세의 단계를 말한다. 사자는 이러한 믿음을 파괴하고 자유로운 정신의 시대, 허무주의를 체험하는 것을 상징한다. 마지막으로 어린 아이는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추구를 가리킨다. 그것은 삶을 순진 무구하게 긍정하며 받아들이는 단계, 새로운 믿음의 시대이다.

그러므로 니체의 정신적 여정 또한 문화적인 창조물로 과거에서 현재로 전수되어 온 그 모든 것의 숭배에서 시작된다. "첫번째 과정. 그 누구보다. 더 숭배한다. (그리고 따르고 배운다) 모든 숭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한데 모아 서로 싸우게 한다. 모든 고난을 짊어진다." 이러한 의도에서 문화적 가치, 특히 그림과 음악에서의 문화적 가치들이 쇼펜하우어적인 의미로 기분 좋은 환상, 또 세계의 심연 위에서의 연극이라고 정당화된다. 현실은 아주 깊숙이까지 균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이것을 이미 그의 첫번째 단계에서 알았다. 가령 그리스 정신은, 독일의 고미술 학자 빈켈만이 그렇게 이해하려 했던 것처럼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으로 이해해서는 파악이 되지 않는다. 그리스 정신은 오히려 비애를 자아내는 지반에서 비롯됐다.

아폴로적인 요소, 절제와 질서는 파괴의 원리이면서 동시에 창조적인 힘의 원리인 디오니소스적 요소와 끊임없는 투쟁의 관계에 서 있다. 이 두 가지 요소에서 비로소 그리스 정신의 가장 높은 업적인 비극이 생겨나는 것이다.

@p387

첫번째 단계는 문화에 대한 믿음이 파괴됨으로써 끝이 나버린다. 여기에서의 전형적인 예는 니체와 리하르트 바그너 음악과의 관계이다. 니체는 처음에 바그너의 음악을 보편적 문화의 새로운 시작을 표현하였다고 열광적으로 환영한다. 그러나 그 후 그는 그 음악에서 몰락의 징후를 탐지한다. 이제 바그너의 시대는 퇴폐로 보인다. "우리가 내던져진 이 시대는" "커다란 내적인 몰락과 붕괴의 시대이다. 이 시대의 특징은 불확실함이다. 아무 것도 확고한 기초와 견고한 믿음 그 자체 위에 서 있지 못한다."

니체가 시대의 몰락을 묘사하기 위해 선택한 특징적인 표현은'허무주의"라는 말이다. 겉으로는 그토록 안정되게 존립하고 있는 것의 자리에 "허무", 무가 들어선다.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 전개될 200년의 역사이다. 내가 서술하는 것은 도래하는 것, 더 이상 다르게 다가올 수 없는 것, 즉 허무주의의 도래이다. 이 역사는 지금 미리 이야기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필연성마저도 여기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래는 이미 100개의 징후로 나타나고 있고, 이러한 운명은 어디에서나 자신을 예고하고 있다. 이 미래의 음악에 모든 사람들이 이미 귀를 종긋 세우고 있다. 전체 유럽의 문화는 이미 오래 전부터 매 세대마다. 커가는 긴장의 책임 추궁 속에 파국을 향해 움직여 가고 있다. 즉 불안하고 폭력적이며 황급하게 덮치면서 종말을 알리는 급류처럼 더 이상 성찰하지 않으면서 성찰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p388

니체 자신도 그 스스로가 이러한 운명에 얽혀들었음을 알고 있다. 그는 허무주의를 그 자체 내에서 끝까지 참고 견뎌 내야 하는 것이 그의 임무임을 파악한다. 스스로를 그렇게 표현했듯이, 그는 "유럽 최초의 완전한 허무주의자이다. 그러나 그는 허무주의를 이미 스스로 그 종말까지 산 사람이다."

따라서 니체는 그 시대의 내적인 붕괴를 가차없이 폭로하여, 현재가 얼마나 허무주의적인지를 보여주려고 한다. 그는 "인류에게 최고의 자기 성찰의 순간을 마련해 주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니체에게 "자유로운 정신"의 임무이다. "두번째 과정 사람들이 가장 단단하게 얽매여 있는 숭배하는 마음을 깨뜨린다. 자유로운 정신 독립, 폐허의 시대. 모든 숭배의 비판."

자유로운 정신은 무엇보다도 전수되어 관습처럼 굳어져 버린 선입견을 뒤집어 엎어야 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세 가지 관점에서 행해진다. 첫째는 진리에 대한 믿음의 파괴이다. 시대는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대는 자신의 학문적 인식의 진보를 자랑한다. 그러나 니체는 시대 의식이 밑바탕이 비어 있음을 발견한다. 인간에게는, 그가 언젠가 그랬듯이, 절대적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 그래서 단지 "모든 믿음, 모든 의견이 필연적으로 거짓이라는 통찰"만이 남는다. 따라서 허무주의는 첫번째로 "진리와는 끝장"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허무주의는 두번째로 "도덕과도 끝장"임을 의미한다. 니체는 매우 명석하게 통상적인 도덕이 지닌 불확실성을 깨달았다. 즉 도덕적인 원칙이 공표되지만 행위는 그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허무주의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절대적인 무가치에 대한 믿음", "절대적인 무의미에 대한 믿음"이다. 도덕이 그렇게 허무주의적으로 전복되어야 할 필연성의 근거는 허무주의 자체 안에 이미 결정되어 놓여 있다. 도덕은 삶에 대항한다. 도덕은 "반자연"이 된다. 이제 삶과 자연이 진실을 위하여 도덕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다. "도덕의 자살이 이들의 최후의 도덕적 요구이다."

@p389

허무주의는 세번째로 "종교와도 끝장"임을 의미한다. 니체는 그의 허무주의적 태도의 귀결로 무엇보다도 특히 그리스도교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에 이른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에 대한 태도가 분명하지 못한 사람에게 나는 결코 어떠한 동의도 할 수 없다. 여기에는 오직 한가지의 정직함, 즉 무조건적인 부정만이 있을 뿐이다. " 니체는 더 깊이 들여다. 본다. 그리스도교는 멸망을 자초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는 그 시작부터 직접적인 삶에서 등을 돌렸고, 바로 그 이유로 근본적으로 허무주의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붕괴는 그리스도교 자체에서부터, 즉 그리스도교 안에서 키워진 진실성의 본능에서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이제 바야흐로 "경외심을 가지고 명령하고 기만하던 2000년 동안의 진리에 길들여졌던 것이 파국을 맞아 이 파국이 오히려 신에 대한 믿음에서도 거짓말을 금지하는" 시기가 왔다

종교가 붕괴되면서 종교는 이미 언제나 인간의 생산물, "인간 작품이며, 인간 광기"라는 점이 폭로된다. 따라서 허무주의의 가장 깊은 의미는 "신은 죽었다"라는 문장으로 표현된다. "신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그것을 너희에게 말하고자 한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 너희들과 내가! 우리는 모두 신을 죽인 살인자들이다!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었는가? 우리가 어떻게 바닷물을 다. 마셔 버릴 수 있을까? 우리는 어디로 움직여 가고 있는가? 우리는 무한한 무에 의해 길을 잘못 들지 않았는가?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 있었다! 모든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해야 할까? 이 위대한 행위는 우리에게 너무나 위대한 것이 아닌가? 그 품위에 걸맞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신들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보다. 더 위대한 행위는 이제까지 단 한번도 없었다. 우리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이 행위 때문에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보다. 더 위대한 역사에 속한다. " 그러나 니체는 물론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안다. 신의 죽음의 결과는 "연속적인 붕괴, 파멸, 멸망, 전복"이다. 그 결과는 "그 비슷한 것은 아마도 아직껏 이 세상에 있어 본 적이 없는 경악과 음울과 인식의 섬뜩한 논리"일 것이다. 마지막에 가서 니체에게 제기되는 문제는, 사람들이 허무주의에 멈추어 서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p390

그는 확고하게 주장한다. 허무주의는 최종적인 것이 아니다. 허무주의에서 긍정적인 점은, 허무주의가 하나의 통과점이라는 것이다. 허무주의에 의해 "유럽에서는 그토록 웅장한 정신의 긴장이 형성됐다. 그토록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로 사람들은 가장 멀리 있는 목표를 쏠 수 있을 것이다. " 이것이 세번째 단계로의 전환이다. 이 단계에서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모든 것에

폭넓게 영향을 미치는 허무주의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제 허무주의에서 "모든 연극 중 가장 희망찬 연극"을 본다. "세번째 과정. 적극적인 입장에, 긍정에, 쓸모 있는지를 판가름하는 위대한 결단. 내 위에는 어떠한 신도, 어떠한 인간도 있을 수 없다! 어디에 손을 대야 할지를 아는 창조자의 위대한 본능. 위대한 책임감과 순결" "우리는 감히 광막함 속으로 뛰어든다. 우리 자신이 감히 그것을 결행하는 것이다. 우리의 강인함이 지금까지 태양이 사라져 간 그곳, 그 바다로 갈 것을 강요한다. 우리는 하나의 새로운 세계에 대해 알고 있다."

새롭게 창조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붕괴되고 가면이 벗겨진 도덕이다. 철학자는 "새로운 도표 위에 새로운 가치를 서술하여야 한다. " 그것은 "모든 가치들의 전복"으로 이끈다. 그렇지만 이것은 초월자에 대한 믿음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에서부터 생겨난다. "창조하고 의욕하고 평가하는 자아"가 이제 "사물의 척도와 가치"가된다. 새로운 가치 질서의 근본 가치는 삶이 된다. 중요한 것은 "삶의 가장 낯설고 가장 어려운 문제 속에서도 삶을 긍정하는 것, 본래의 무궁 무진함을 즐거워하며 생성 자체의 영원한 기쁨이 되기 위해 자신의 최고의 유형을 회상하면서 갖는 삶에의 의지, 자신 안에 또한 소멸의 기쁨까지도 지니고 있는 기쁨"이다.

인간 역시 끊임없이 자신을 초월해 밖으로 밀치고 나가는 삶의 위대한 창조의 과정 속에 서 있다. 인간은 "하나의 통과점이고 몰락"이다. 그러나 인간의 길은 어디로 나 있는가? 니체는 이렇게 답한다. 인간 그 이상인 어떤 것으로, 그렇지만 신이 아닌 "초인"에게로 가고 있다. 초인은 "인간의 먹구름에서 내려치는 번개"이다. 초인은 숭고한 새로운 인간 유형이 된다.그러나 현재의 인간은 "동물과 초인 사이를 이어주는 밧줄-절벽 위의 밧줄"이다

@p391

자신을 넘어서서 밖으로 밀어붙인다는 이 규정은 인간적 현존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니체는 이 규정을 모든 생명의 근본 특징, 아니 존재 자체의 근본 특징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힘에의 의지"라는 특징을 서술한다. "나에게 세계는 무엇인가? 세계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무지한 활력을 가진 괴물-써도 닳아 없어지지 않고 단지 변형되기만 하는 활력의 괴물-이다. 그 자신의 한계가 아니면 ''로 둘러싸여져 있다. 그 자체 내에서 폭풍우를 일으키고 휩쓸어 버리는 힘의 바다, 가장 단순한 형태에서부터 가장 다양한 형태로 흩어지게 하며 밀물과 썰물로서 영원히 도로 흘러 들어오는 바다, 가장 견고하고 가장 차가운 것에서부터 가장 거칠고 가장 자기 자신에 모순되는 것으로 흩어지는 바다. 그리고 나서는 풍부함에서 다시 간단함으로 귀향하고, 모순의 게임에서 다시 조화의 기쁨으로 귀향하는, 충족을 모르고 피곤을 모르는 생성-영원히 자기 자신을 창조하고 영원히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이 나의 디오니소스적 세계-너희들은 이 세계의 이름을 알기를 원하는가? 이 세계는 힘에의 의지이다-그 밖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고 너희들도 또한 이 힘에의 의지이다.-그 밖의 아무 것도 아니다."

창조와 파괴에서의 이러한 삶은 어떠한 방향도 어떤 목적도 어떤 목표도 갖고 있지 않다. 그렇기에 그것은 가장 깊은 본질에 있어 허무주의적이다. 따라서 삶의 긍정은 결국 삶의 허무주의적 성격의 긍정이다. 이것에 대한 최고의 상징은 "영원한 회귀"이다. 존재한 적이 있는

것은 모두 다시 돌아온다. "달빛 속에 기어가고 있는 느린 거미, 달빛, 그리고 함께 속삭이고 있는, 영원한 사물에 대해 속삭이는 문 가에 서 있는 나와 너-우리들은 모두 이미 한 번 존재했었지 않았는가?" 이로써 허무주의의 극단에 도달한다. "현존재는 그것이 그렇게 존재하듯이 의미와 목적이 없고, 무로 끝나버림이 없이 불가피하게 되돌아 온다. '영원한 희귀', 이것은 허무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이다. ('의미 없는 것')는 영원하다."

그렇지만 니체에게는 그 모든 것 안에 허무주의에서의 구제가 놓여 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의미 없는 현존재를 긍정해야 하고, 그래서 무의미의 한가운데에서 의미를 창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유롭게 된 정신은 우주의 한가운데 신뢰하는 즐거운 숙명론과 더불어, 오직

개별자만이 배척되어야 하고 전체 안에서 모든 것이 스스로를 구제하고 긍정한다는 믿음 속에 서 있다. 그는 더 이상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니체의 태도에 대한 가장 심오한 표현은 운명에 대한 사랑이다

@P393

29. 야스퍼스: 풍요로운 실패

아주 친한 사이가 아닌 사람이 방문 허가를 받고 칼 야스퍼스를 찾아가면, 의자에 몸을 꼿꼿이 세우고 앉아서 손님을 맞이하는 야스퍼스를 만나게 될 것이다. 마치 나랏님이 은혜로 아랫사람을 굽어 살피는 듯한 모습이다. 그는 이러한 자세로 그의 손님에게 신과 인간과 세계에 대해 가르친다. 이 일은 다소 겸손하고 호의가 어려 있기는 하지만 현저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가운데 행해진다. 야스퍼스는 방문객이 반대 의견을 펴면 예의 바르게 귀를 기울이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친절하게 동의하거나 쌀쌀맞게 거절하면서 자신의 설명을 계속 진행해나가기 위해서이다 이런 식의 다소 격식을 차린 듯한 접대는 분명 나름대로 고상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 속에 냉기어린 쌀쌀함을 포함하고 있다.

@p394

지금 묘사된 이 장면은 야스퍼스의 일생 내내 지배해 온 근본 분위기와 상응한다. 즉 고독감, 인간들에 대한 무너뜨리기 힘든 거리감, 세계와의 모든 접촉에 대한 불안감 등이 그것이다. 야스퍼스 자신도 종종 얼마나 그가 학창 시절에, 또한 대학에 들어가서도, 혼자 있는듯한 느낌을 가졌는지를, 그리고 단지 몇몇 사람들과만 동경해 마지않던 교제를 갖기를 간절히 바랐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곤 하였다. 이후로도 그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는다. 심지어 친한 친구와도 자주 절교하곤 했다. 이러한 고독은 근본적으로 어려서부터 줄곧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힌 병에 원인이 있다. 이 병으로 그는 여행, 승마, , 수영 등도 할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당구 뿐이었다 이 병은 또 그에게 아주 규칙적인 하루하루를 보낼 것을 지시하였다 그렇지만 그가 고독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병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동료들과 항상 거리감을 유지했는데, 그 이유는 통상적인 사회 생활을 함께 하고 싶지도 않았고 함께 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P395

그는 직무상의 이유가 아니면 어떤 집단도 방문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야스퍼스의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바젤 시절에 대해 알고 있다. 그는 2o년 동안 그곳에 살면서 단 한번 영화 구경을 갔고, 단 한번 연극을 보러 갔는데, 두 번 다 단순히 그의 제자들이 그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신뢰와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교수직 이외에는 공직이건 대학의 보직이건

결코 맡지 않았다. 그는 한번도 그의 동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 그러니 철학자들의 회합에 대한 그의 심각한 혐오감은 더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는 말년에 선동적인 저서들에서 종종 도덕적 설교자의 태도로 정치적 토론에 적극 개입하는 바람에 더욱더 외로워진다. 그는 좌익과 우익 모두로부터 그저 경멸의 차가운 시선만을 받아야 했다.

주변 세계에 대한 야스퍼스의 태도를 우리는 교육자적 태도와 예언자적 태도가 혼합된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겠다. 어디를 가든 그는 언제나 가르쳤다. 그런데 이 가르치는 일은 단지 사람들과의 직접적인 교제나 그의 학생들과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그것을 훨씬 넘어서 광범위하게 행해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훗날 그를 "게르만 교수"라고 불렀다. 그러나 지식 전달 차원에서의 그의 가르침은 비본래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그의 이론은 그가 고독 속에서 돌연 깨달은 통찰들로서, 그는 이 통찰들을 분명하게 이야기하여 설명하려 들지 않고

아예 선포부터 한다. 그래서 일반 여론이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양태도 분열되었다. 일부 사람들은 그의 계시로 말미암아 깨달음을 얻는가 하면, 일부 사람들은 칼 바르트처럼 "야스퍼스의 연극"또는 "청소년의 유혹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심지어 아인슈타인은 야스퍼스의 철학을 "주정꾼의 허튼 소리"라고까지 말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야스퍼스를 바르게 보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 한 가지는 확실히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은 확실히 심각한 진지함 속에서 산출된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그는 외로운 사람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나의 의사 소통의 철학은 현대의 모든 노력 가운데 가장 고독한 노력이 아닌가?"

@p396

야스퍼스가 철학적으로 말하려 하는 것은 그의 개인적인 문제에서부터 비롯된다. 왜냐하면 소수의 철학자들에게서처럼 그에게도 사상은 실존에서부터 직접 생겨나오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전 생애를 사상에 대한 헌신으로 영위해 간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주로 인간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일찍이 이렇게 썼다. "나의 분야는 인간이다. 나는 인간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서도 지속적인 집중력과 기쁨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훗날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인간과 분리될 수 있는 철학의 문제란 없다. 철학하는 사람, 그의 근본 경험, 그의 행위, 그의 세계, 일상적인 행동, 거기에서부터 말해지고 있는 힘 등을 옆으로 제쳐놓아 둘 수는 없다."

이러한 철학적인 자세가 야스퍼스의 철학함의 내용을 결정한다. 그의 사유는 끊임없이 인간 주변을 맴돈다. 그의 정신적 열정은 인간의 근본을 캐는 일에 쏠려 있었다. 그가 의학과 정신 병리학을 공부하게 된 것도 참으로 "인간을 그 전체로 파악하기 위하여" 그리고 "인간 가능성의 한계를 알기 위하여" 행해진 것이다. 그의 (정신 병리학)이 오늘날까지도 권위 있는 책으로 인정되고 있는 사실이 이것을 입증한다.

@P397

야스퍼스는 심리학을 연구하면서 철학적 문제에 접근하게 된다 이미 50여 년 전에 발간된 그의 (세계관의 심리학)은 학문 세계로 하여금 그에게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이미 그는 그가 그 후 언제나 거듭 겪게 되는 일과 마주치게 된다. 즉 한편에서는 열광적인 환호를 받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냉혹한 거절을 받게 되는 것이다. (세계관의 심리학) 이후 야스퍼스는 본래의 철학함 속으로 계속 깊이 빠져든다. 그리고 이 역시 계속 인간에 대한 관심에 의해 이끌려지고 있다. 이 주제에 대한 근본적 사상을 그는 광범위한 두 권의 저서-그 중 하나는 (철학)이고, 또 다른 하나는 (철학적 논리학)이다-에 수록하였다. 그리고 철학사에 대한 다양한 연구도 인간의 문제에 방향을 두고 행해졌다. 이 연구는 "위대한 사상가들의 작품 속에 있는 인간의 자기 해석"을 소개하고 있다.

그 스스로 인간에 대한 걱정으로 안달하는 사람만이 인간으로부터 그리고 인간을 위해서 철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야스퍼스에게 철학이란 곧 "우리 자신에 대한 근심"이다. 이것이 그의 전체 작품을 꿰뚫고 있는 근본 분위기이다. 이러한 근본 흐름에 기초하여 그는 자신이 "교수들의 철학"이라 이름 지은 것에 대항해 싸운다. 그에게 이 교수들의 철학이란 "본래적인 철학"이 아니고 단지 "우리현존재의 근본 물음과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문제에 대한 설명" 일 뿐이다. 이와는 반대로 인간에 대한 야스퍼스의 관심은 인간과 더불어 현대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건을 생생하게 관찰하게 만든다. 야스퍼스는 인간이 극단적으로 위험에 처해 있다고 본다. 그는 그것을 속세의 권력이 그에게 교수직을 포기하라고 강요했을 때, 그리고 부인을 추방하겠다고 위협했을 때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권력만이 인간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더욱 단호하게 우리 시대의 일반적인 특징을 이루는 것을 통해서도 그러한 위험은 가중된다. 즉 기술과 획일화된 집단 군중을 통해서, 가열된 산업 열기에 의해 뿔뿔이 흩어져 버림으로써, 인간 관계의 비인간성을 통해서도 일어난다. @P398

야스퍼스는 인간에 대한 염려를 현대에 대한 그의 해석의 토대로 삼아 국가 사회주의(나치)의 지배가 시작되기 2년 전에 (현대의 정신적 상황)이라는 저서를 내놓아 폭넓은 반향을 얻지만, 이 철학자도 물론 파멸을 향해 치닫고 있는 상황을 달리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와 똑같은 우려는 야스퍼스가 60년대에 발표한 정치적 저서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저서에서 그는 독일 민주주의의 위험에 대한 그의 걱정을 웅변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야스퍼스가 인간의 본질에 대해 깊이 사유하면 할수록 그것은 그에게 더욱더 수수께끼가 되어 버린다. "인간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욱 불확실하다 " 인간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가능성이며 가장 커다란 위험이다."바로 그 때문에 인간을 파악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이다. 참으로 우리는 인간을 세계 안의 사물들처럼 중립적인 직관에 의해 파악할 수는 없다. "인간 그 전체는 어떤 파악 가능한 객관화의 가능성 에서도 벗어나 있다. 인간은 흡사 무방비 상태로 있는 것이다 "인간은 열려있다. 왜냐하면 그는 자유라는 독특한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에게서 세상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을 발견한다.

@P399

파악할 수 없고 증명할 수도 없으며 결코 대상이 될 수 없는 것, 모든 학문적인 탐구를 벗어나는 어떤 것, 곧 자유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은 개별자뿐만 아니라 인류와 인류 역사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사물들의 흐름을 전체로 규정하고 있는 역사 법칙이란 없다. 미래에 속하는 것은 인간의 결단 및 행위에 대한 책임이다." 이러한 자유의 이념이 야스퍼스의 근본 사상이다. 그것과 더불어 그가 말한 모든 것은 존립하거나 무너진다 자유는 물론 보편 타당하게 확정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치 현실 속에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처럼, 현실을 그렇게 관찰할 수 있다 "자유는 증명될 수도 반박될 수도 없다." 그렇지만 인간은 자신이 오로지 형편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결단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느낀다. 그것은 물론 이론적인 앎의 문제가 아니다. 자유는 오직 실천 속에서만 명백해진다. 즉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결단을 내리는 가운데, 즉 가능성을 움켜잡는 가운데 드러난다. "자유는 나의 통찰에 의해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위에 의해서 증명된다." 그리고 이 행위의 영역에서 자유의 의식은 확실성을 띠게 된다. 나는 "행위하면서 지금 내가 원하고 행위하고 있는 그것을 나 자신이 원하고 있음을 나 자신이 확신하고 있는 그러한 순간을 갖는다. 나는 알기를 원하는 것과 행위함이 내게 달려 있기를 바란다." "나는 내가 단순히 거기에 존재하고, 그렇게 존재하고 있고, 그 결과로써 그렇게 행위할 뿐 아니라, 나는 행위함과 결단을 통해 나의 행위와 동시에 나의 본질의 근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자유는 무엇을 말하는가? 야스퍼스에게 있어 자유는 우선, 그가 처해 있는 상황 속에서 그때마다 이것이나 저것을 결단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유는 좀더 심원한 차원을 가지고 있다. 자유속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붙잡을 수도 놓칠 수도 있다. 또한 인간은 자유 속에서 자기 자신을 획득할 수도 잃어 버릴 수도 있다. 여기에서 비로소 야스퍼스 철학의 윤리적 뿌리가 전면에 부각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가장 심오한 실존적인 자유"이고, "실존적 선택"이며, "나 자신의 선택", "현존재 속에서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결단"이다.

@P400

왜냐하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움켜잡는 것, 자기 자신을 선택하는 것, 스스로를 자기 자신으로 정립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모든 것이 달려 있고, 그래서 또한 철학함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철학을 하는 사람은 자기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철학을 하는 것이 아니다. " 그렇기 때문에 야스퍼스는 그의 사유를 "실존 철학"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실존 철학은 "그것을 통해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 될 수 있는 그러한 사유"이기 때문이다. 그 경우 실존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현존재와 같은 것, 즉 우리가 일상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그것이 아니다. 오히려 실존은 인간의 극단적인 가능성으로서의 자기 존재를 의미 한다. 그러나 야스퍼스가 이렇게 자기 존재에 대한 그의 사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콧대 높은 고림의 자유를 강조하고 있으므로, 철학함 이라는 것이 순전히 고독 속에서의 개별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커다란 오해이다

@p401

야스퍼스가 이웃 사람에 대해 취하고 있는 그 모든 거리감에도 불구하고, 아니 아마 바로 그 때문에 더욱 그에게서 다음과 같은 것을 이해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즉 자기 존재란 오직 다른 사람과의 교류 속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더욱이 근본적으로 한 사람과의 교류 속에서 가능할 뿐이다 그는 결혼이 절대적으로 그리고 한평생 한 사람에게만 행해야 하는 것으로 본 유일한 철학자이다. 그리고 자서전적 저서에서도 계속해서 확실히 하고 있듯이 그러한 경험을 그의 사유의 기본 토대로 받아들였다. 이제 교류는 그에게 자기 존재와 자유의 본질적인 판단 기준으로 비쳐진다. "우리는 단지 다른 사람이 그 자신으로 되는 그만큼 우리 자신이 되며, 다른 사람이 자유롭게 되는 한에서만 우리 자신도 자유롭게 된다." 이러한 단초로 부터 야스퍼스의 정치적 요청이 싹튼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자유이고 동시에 그로 인한 올바른 양상의 공존이다. 이것은 보편적인 이성 사회로 확장되어야 하며, 야스퍼스는 오로지 그 사회 속에서만 진정한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엿본다. 그는 거기서부터 마지막으로 포괄적인 세계 질서의 요청에 이른다. 그 요구는 무엇보다도 특히 원자 폭탄의 위협에 직면해서 인간이 스스로를 파멸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로 향해 가고 있는 길은 끊임없이 암초와 낭떠러지를 지나쳐 가게 되어 있다. 따라서 야스퍼스는 그 길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파멸은 최종적인 것이다." 사유하고 인식하며 세계 속에서 연구하려는 노력, 다시 말해 과학의 길은 그 내적 필연성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한계에 봉착하고 만다 물음 위에 또 물음이 있고, 물론 부분적인 대답도 있지만 문제가 포괄적이 되면 아무런 해결책도 없다. 예컨대 세계의 시작과 끝에 대한 물음, 세계의 유한성과 무한성에 대한 물음, 심지어 사물의 근거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 조차 대답할 수 없다. 이렇게 물음들은 모순과 역설에 빠진다. 이런 식의 물음들을 제기하면 사람들은 "사실적, 과학적인 세계 정위가 품고 있는 의문점에 도달"하게 되고, 결국에는 "단적으로 파악될 수 없는 것의 낭떨어지"에 도달한다

@P402

따라서 과학이 흔히 그러하듯이 그러한 한계란 없는 것처럼 처신하는 것은 정도를 벗어나는 것이다. 과학은 다른 것이 아니다. 과학은 끝까지 파고들어 드디어 "현존재의 균열"을 보게 될 때까지 멀리 그리고 깊이 파헤쳐 들어가야 한다. 야스퍼스가 이해하고 있는 철학함은 과학으로 하여금 한계에까지 밀어붙여야 하는 것이 그의 임무임을 상기시켜 주는 과제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그가 그 자신에게로 향하려고 노력하고, 그 자신을 이해하려하고, 그 자신의 삶을 스스로의 힘으로 형성하려고 시도할 때, 더욱더 압박해 오는 한계를 경험한다. 인간은 그의 현존재가 사물의 존재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때 그는 예기치 못한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야스퍼스는 이것을 "한계 상황"이라고 부른다. 이 한계 상황 속에서 위기는 과학의 한계에서 겪은 그 실패보다 무한히 더 깊이 인간을 좌초시킨다. 인간은 한계 상황 속에서 그가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고 자신의 힘으로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율하게 된다. 그는 절대적인 한계에 부딪친다. 그것은 가령 이웃 사람의 죽음을 보는 순간에, 그리고 자기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또는 피할 수 없는 전쟁, 고통, 죄책감을 경험하면서, 또는 모든 사람이 얽매여 있는 바꿀 수 없는 운명의 체험 속에서 일어난다. 이 한계 상황들은 "인간 그 자체에 관련되고, 유한한 현존재에게 불가피하게 주어져 있는 궁극적 상황"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추구는 이렇게 결국 벗어날길 없는 상황 속으로 몰고 간다. 모든 체계가 다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 마치 "발 밑의 바닥이 꺼져 버린 것 같은" 기분이다. 한계 상황들은 마치 "우리가 부딪치는 벽"과 같다. 한계 상황들은 "둥둥 떠 다니는 불확실함" 속에서의 현존재, 철저히 좌초한 현실에 놓인 현존재를 드러내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인간의 모습을 매우 혼란스럽게 만드는 바로 그것이다. 더욱이 그것은 그런 모습이 유별나게 두드러진 현대에서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언제 어디서나 그러하다. 그렇지만 이 경험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질은 한계 상황 속에서 비로소 의식되기 때문이다"

@P403

야스퍼스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인간의 현존재는 이 희망없는 전망으로 끝나 버려야만 하는가? 그는 무엇보다는 인간은 그것에서부터 어떻게 헤어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고 대답한다. 오히려 인간은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더욱더 깊이 그 속에 빠져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좌초를 바라볼 때, 산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현실에 대한 앎이 불안을 고조시킬 때 또는 절망이 나를 불안 속으로 가라앉히려 할 때, 이러한 불가피한 사실에 직면했을 때 불안만이 마지막 남은 것인 양 느껴진다 본래적인 불안은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는 어떠한 출구도 없는 최종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불안이다." "나는 그러한 불안 속에서 최후의 불안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침몰해 들어간다." 그것은 허무한 절망의 상황이고, "무의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바라보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견뎌 내는 도리밖에 없다. "허무주의 속에서 성실한 인간에게 불가피한 것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진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현존재의 파악이 불가능함을 시인해야만 한다. 인간은 죽음, 고통, 전투, 죄의식, 운명에 대해 긍정해야만 한다. 그가 그것을 매우 진지하게 행할 때, 바로 이 한계 상황을 견뎌 내면서 그의 고유한 실존에 도달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열린 눈으로 한계 상황 속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된다." 이 한계 상황이 또한 "보다 깊은 철학의 근원"이 된다.

야스퍼스가 가정한 실존의 답습은 물론 연속적인 과정이나 필연적인 과정 속에서 수행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비약을 통해 가능해진다. 즉 절망에서부터 장악한 자기 존재로의 비약을 통해, "자유로서의 나에게로의 비약"을 통해 가능해진다. "불안을 떨쳐 버리고 평온으로 비약하는 것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엄청난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이 비약을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이행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비약은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에서 야스퍼스의 철학함의 새롭고 심오한 차원이 밝혀진다. 자기 존재와 자유로의 비약은, 절망에 직면해서 외적인 불가능함을 넘어서서 특별한 경험, 곧 선사되어짐의 경험을 통해 가능해진다. 좌초 속에서 인간은 그가 그 자신에게 마련해 줄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체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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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나의 자기 존재의 근원 안에서 나는 내가 나 스스로를 창조한 것이 아님을 의식하게 된다. 내가 오직 나의 근원적인 의지로는 결코 해명될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되돌아 가 본래적인 나에게로 갈때, 나에게 내가 완전히 내 자신이 될 때, 나는 더 이상 단지 나 자신만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내가 충족된 역사적 현재에서 ''라고 말하는 이 본래적인 '나 자신'이 분명 나에 의해 내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 자신이 나로 인해 놀란다. 예컨대 그러한 행위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나 혼자서 그것을 할 수 없었을 것이며, 그것을 다시 한번 그렇게 할 수도 없으리라는 점이다. 의욕 속에 내가 본래 나 자신이었을 때, 나는 동시에 나의 자유 속에 나에게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 나는 내 자신 안에서 "파악할 수 없는 것을 파악하게

되었음"을 경험한다. 선사됨과 주어짐은-야스퍼스는 이렇게 결론짓는다-선사와 주는것을 전제한다 그것도 역시 근본 경험의 한 부분이다. 극단적인 좌초의 상황 속에서 인간은 세계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도 아닌 어떤 도움을 만나게 된다.

야스퍼스는 그와 같은 만남을 "초월"이라고 부른다. 경우에 따라 그는 그것을 ""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을 고려해서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실존은 초월 없이는 불가능하다." "인간이 숙명 속에서 내적으로 자기 자신의 위치를 고수할 때, 죽음 속에서도 꿋꿋하게 견뎌 낼 때, 이것을 그 혼자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 여기서 그를 도와 주는 것은 세계 안에 있는 그 모든 도움과는 다른 종류의 도움이다 그가 자기 자신을 견뎌 낼 수 있는 것은, 파악할 수는 없지만 그 자신의 자유 안에서 느낄 수 있는 초월의 도움 덕분이다." 이로써 철학은 자신의 최고의 과제와 마주치게 된다. 그 과제는 "초월로의 비약을 준비하고 상기시키고 결정적인 순간에 스스로 그것을 수행하는 사유이다." "철학은 초월을 맴돈다. "야스퍼스는 초월에 대한 이러한 기초적 경험을 "철학적 믿음"이라 부른다. 그것은 "초월에 대한 믿음"으로서 "파악할 수 없는 확실성"

수반하고 있다 "철학적 믿음은 모든 진정한 철학함의 필수 불가결한 근원이다." 그러나 야스퍼스는 신에 관해 우리는 그것을 더이상 진술할 수 없다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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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 관한 숙고를 통해 신의 존재는 더욱더 의심스러워질 뿐이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따라서 이 영역에서의 참된 앎이란 "무지의 앎"이다 "철학적 실존은 숨어 있는 신에게 결코 직접 다가갈 수 없다는 사실을 감수한다. " 그러면서도 야스퍼스는 형이상학적 진술을 한다. 그렇지만 이 진술은 직접적으로 신에게로 향한 것이 아니고, 신에 의해 규정된 세계로 향한 것이다. 전 실재는-세계적인 실재건 인간적인 실재건-철학적 믿음 속에서 하나의 새로운 해석을 획득하게 된다. 나타나는 모든 것은 이제 암시로서, 기초로서, "초월의 암호"로서 이해될 수 있다. "암호일 수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현존재는 어떤 규정되지 않은 흔들림과 언어를 가지고 있어 어떤 것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무엇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세계는, 자연이건 인간이건, 천체 공간이건 역사이건, 그냥 단순히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흡사 관상학적으로 직관되어야 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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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야스퍼스는 그가 구상한 철학함의 의미를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요약한다. "철학함에서는, 같은 길에 있는 사람에게는 계시가 완전히 배제된 신앙이 호소해 오고 있다. 그것은 혼미 속에서의 어떤 객관적인 이정표는 아니다. 인간은 각기 가능성으로서의 그가 그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것만을 수용할 수 있다. 초월의 관점 아래 현존재의 존재를 밝혀 줄 차원에의 추구가 감행된다. 모든 점이 다 의심스러운 것이 되어 버린 세계 안에서, 우리는 목표를 알지 못하면서도 철학적인 방향을 잡아 보려고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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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하이데거: 존재에 대한 진술

한 사상가를 이해하려면 그의 출신 성분이나 환경을 고려하는 것도 상당한 도움이 된다 특히 이 점은 마르틴 하이데거를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사항이다. 그의 출신 성분은 일생 동안 그를 따라다녔다. 그는 알레만 지방 출신으로 1887년 메스키르히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거의 변함없이 슈바르츠발트나 그 부근인 프라이부르크에서 보냈다. 펠트베르크의 비탈진 언덕 위에 그는 조그만 오두막집을 갖고 있었다. 스파르타 식의 간결한 나무 의자와 침대로 검소하게 꾸며진 오두막이었다. 물은 부근에 있는 우물에서 직접 길어 와야 했다. 하이데거는 자주 오랫동안 움막 앞에 놓여 있는 긴 의자에 앉아 끝없이 펼쳐져 있는 산과 말없이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곤 했다. 그러는 동안 그의 사상은 무르익어 갔다.

@P407

또는 근처의 조그마한 "음식점 겸 맥주집"에서 이웃에 사는 농부들과 이 지방 특유의 툭툭 끊기는 사투리로 그들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런데 알레만적 기질이 단순히 슈바르츠발트 지방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하이데거의 애착에서만 발휘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의 정신적인 특질에서도 부각된다. 즉 무겁고 신중한 사유, 묻고 대답하는 데 집착하는 성격, 그를 에워싸고 있는 외로움, 그에게서 풍겨나오는 우울한 분위기 등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외모에서도 그는 시골 농부티가 났다. 어떤 사람 얘기로는, 한번은 비엔나의 한 철학자가 하이데거에 대한 강연을 했는데, 그는 강연을 끝내고 나서 맨 앞줄에 앉아 있는 한 농부가 강연이 계속되는 동안 줄곧 다 알아듣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는 점을 들어 자신이 매우 명료하게 설명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농부는 바로 하이데거 자신이었다 이것은 전해 내려오는 꾸민 이야기일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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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하이데거의 사진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다지 크지 않은 체구에, 젊은 사람들이 즐겨 입는 향토풍의 옷을 입고, 끝이 현족한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산속의 드넓은 풀밭을 터덜거리며 걸어가는 모습을 볼 때, 사람들은 즉시 이 철학자가 대지와 결속되어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대지와의 깊은 유대감으로 그는 두 번이나 베를린 대학의 명예로운 교수 초빙도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는 대도시의 소음과 요란한 문화를 싫어해 차라리 아직까지는 조용한 프라이부르크에 머물거나 "들길"을 거닐면서 들길이 건네는 ""에 귀를 기울여 그 말들을 명상적인 글 속에 기술하기를 바랐다. 하이데거는 소년 시절에는 스키에 열광하였으며 또 사실 선수 못지않은 전문 스키인이었다. 그는 심지어 스키에 대해 강의까지 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의 강의를 들은 사람들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추억거리가 있다. 펠트베르크의 한 여관에서 플라톤에 대한 세미나를 한 뒤 곧이어 스키장으로 가서 스키 교육을 받았다. 이때 아주 작은 사고가 발생했다 그가 아주 완만한 커브 길에서 미끄러져 눈 속에 나뒹구는 바람에 선생으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닌 지경이 되었던 것이다.

@P410

철학함에서의 미끄러져 나동그라지는 것보다도 여기서의 이 실수가 그에게는 한결 난감했으리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승의 이러한 실수에 제자들은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랐고, 하이데거 역시 몹시 민망해 하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곧 그는 아주 기막힌 회전 기술을 보임으로써 그 같은 실수를 만회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스키 선생으로서가 아니라 철학 선생으로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는 격앙되는 법 없이, 수사학적인 거드럼을 피우는 법 없이, 불필요한 잡소리 없이, 긴장하여 약간은 거칠게 목에서 나는 목소리로 각 낱말들을 강조하며, 때로는 문장들마저도 딱딱 끊어 가면서 말한다. 그런데도 그의 말에서는 어떤 강력한 매혹적인 힘이 발산된다. 그가 강의나 강연을 할 때면 강의실은 언제나 초만원이었다. 그의 세미나에서 학생들은 언제나 사실에 머물려는, 어떠한 문제도 회피하지 않으며 모든 성급한 대답들을 물리치는 사유의 긴장을 배운다. 이렇게 하이데거는 이미 젊은 시절부터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강사로서 영향을 미쳤고, 나중에는 마르부르크 대학과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철학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젊은 시절에 특히 그는 헌신적으로 제자들을 돌보아 주었다. 그래서 오늘날 대부분의 그의 제자들이 철학뿐만 아니라, 신학과 그 외 다른 학문 분야의 교수직을 맡고 있다 이들은 또한 하이데거 집에서 열렸던 수많은 축제를 잊지 못할 것이다. 정원을 돌며 행한 제등 행렬과 민요 합창, 그리고 깊이파고든 그 토론의 시간들을 말이다. 하이데거는 사유란 순전히 그 자체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되고 변형시키려 해야 하며, 개인적 실존이든 공적인 실존이든 상관없이 실존으로 파고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그의 사상에 커다란 생동감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그로 하여금 짧은 기간이기

는 하지만 국가 사회주의(나치)에서 죽음을 향해 가는 인간 현존재의 영웅적으로 인내하는 사상이 실현되고 있다고 믿게 만들기도 했다. 이 실책 때문에 그는 교수직을 내놓아야 했고, 그 후 현실적인 정치와는 담을 쌓는다. 만년에 가서는 모든 공직 생활에서 거의 완전히 물러나 가까운 동료들의 모임에만 나타날 뿐이었다.

@P411

그렇지만 여기에서도 그는 언제나 그의 사유의 위력과 깊이로 계속 영향력을 과시했다. 하이데거의 철학적 활동은 두 번의 절정기를 갖는다. 한번은 2o년대이고, 그 다음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이다. 첫번째 시기는 (존재와 시간)의 출판에 의해 마련되었다 그 책은 비록 반에 해당하는 일부만 출간되었지만 그야말로 번개처럼 철학의 아성들에 철퇴를 내리쳤다. 하이데거로서는 그것은 그 자신의 가장 고유한 사유로의 돌파였다. 그는 가톨릭 신학과 신칸트 학파로부터 기인하여, 현상학자의 거장인 에드문트 훗설-그에게 이 책을 헌정하고 있다-의 영향을 받아 단번에 자신의 사상을 형성했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아주 오래 전에 플라톤이 "존재를 둘러싼 거인들의 싸움"이라 부른 것을 새롭게 부각시키려 한다. 핵심적인 물음은 "존재의 의미"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존재"(있다)를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컨대 나무가 "있다", 인간이 "있다", 신이 "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이 물음은 얼핏 보기에 철학의 한 특정 분과, 즉 존재론의 추상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인 것 같다.

@P412

그러나 그 물음을 추적해 보면, 그것이 사유의 근거와 릴은 심연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존재에 대한 물음과 더불어 우리는 칠흑 같은 어둠의 가장자리까지 접근해 들어간다."

그렇다면 이제 이 물음을 어떻게 궤도에 올려 놓아야 하는가? 또 인간이 그것에 대해 묻고 있는 존재는 어디에서부터 접근 가능해지는가? 하이데거는 존재의 이해에서라고 대답한다. 그것은 인간이 항상 어떠한 형태로든 존재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이해하고 있는 곳을 말한다. 이러한 존재의 이해는 언어 속에서 표현되고 있지만 또한 사물을 다루는 일상적인 행동과 동료 인간들과의 교제에서도 표현되고 있다. 존재 이해를 해명하기 위하여 하이데거는 이를 상세하게 분석해 나가면서 존재 이해의 장소로서의 인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때 그는 분석을 인간에 대한 추상적 개념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경험적 인간으로부터, 그러한 인간의 자기 이해와 자기 경험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는 또한 인간을 인간 밖의 어떤 한 관점, 예컨대 신

이라든가 절대 정신 따위에서 고찰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이 그 자신에게 그의 고유한 관점으로 나타나고 있는 그대로 고찰하려 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이 돌이나 나무처럼 그냥 단순하게 거기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 방향으로 자신을 설계하여 선택한 그 가능성 안에서, 그 가능성들로부터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데카르트 이래 근세 철학이 으레 인간을 인위적으로 고립시켜 파악해 왔는데 하이데거는 그런 식으로 파악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어떻게 개개인의 인간이 나름대로의 "세계"를 갖고 있는지, 어떻게 그가 다른 존재자에 파묻혀 또는 다른 인간들과 더불어 실존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세계 내 존재"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다른 사람들과의 공존"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은 다른 모든 존재자에 비해 다음과 같은 점에서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인간의 개입 없이는 닫혀진 채 머물러 것을 세계가 인간에 의해 열려지고 관찰되고-인식되고 느껴진다는-바로 그 점이다. 인간이 "존재자 전체로 침투"함으로써 이 존재자 전체가 "개방 가능한 것" 이 된다.

@P413

하이데거는 이것을 인간 현존재의 "초월"이라고 부른다. 이 표현은 인간이 어떤 초감각적 존재 또는 어떤 초감각 존재적 세계와 연관이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이데거의 언어 사용에 있어 초월이란, 인간이 존재에 대한 시각에서 모든 존재자를 항상 이미 초월했음을 의미한다. 이때의 존재는 흡사 모든 이해, 느낌, 그리고 인식의 지평을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존"이라는 표현도 하이데거에게는 비슷한 것을 의미한다. 실존 대신에 그는 가끔 "탈존"(Ek-sistenz)이라는 표현도 쓴다. 실존이란 인간의 꾸밈없이 적나라한 현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인간이 돌이나 나무처럼 그렇게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기나 하다는 듯이 말이다.

오히려 실존이란 인간은 현실적으로 실존함의 방식으로, 탈존의 방식으로, 또는 자기 자신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 다시 말해 항상 이미 이해된 존재 안으로 나가 서 있는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실존으로서의 세계 내 존재를 좀더 상세하게 해석하는 데 있어 하이데거는 인간의 일상적 상황에서부터 출발한다. 인간은 우선 대개 그 자신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세계에 빠져 있다. 그는 그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존재하듯이 그렇게 존재한다. 인간은 "그들"(세상사람들)에게 내맡겨져 있다. 그렇지만 인간의 과제는 자신이 이처럼 옭아매어져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참된 자신을 찾는 데 있다. 이것은 일종의 근본 기분 속에서 분명해진다. 이 근본 기분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어떠한지를 알려줌으로써 반성없이 멋대로 그냥 살아가는 삶과 인간의 환상으로부터 구출해 준다. 이러한 근본 기분들 중에서 하이데거는-키에르케고르를 좇아-불안을 가장 고귀한 기분이라고 칭한다. 불안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모든 현실은 물거품처럼 빠져나가 버린다. 불안 속에서 인간은 회피할 수 없는 죽음과 세계의 가능한 허망함을 마주하게 된다 따라서 불안 속에서는 모든 일시적인 의지는 무너져 내리고 전면에 내세웠던 모든 구실들은 다 떨어져 나가고 만다. 인간은 자신이 "죽음에 내던져져 있다는 것"을 경험하여, 그가 "무속으로 빠져 그 안에 붙들려 있음"을 체험한다. 그리고 나서 "인간 현존재의 섬뜩한 곳에서 외치는 소리"인 양심은 인간이 일상적으로 사로잡혀 있는 것, 즉 비본래적인 것에 빠져 있는 것으로부터 인간을 끄집어 내어 그를 적나라하게 자신의 가장 고유한 본래의 자기 앞에 세워놓는다. 인간은 "죽음을 각오한 결단성" 속에서 그 자신이 되며,

자신의 "허무한 실존"을 떠맡으면서 그 자신이 된다.

@P414

인간은 결단할 때, 타인의 법칙에 따라서가 아니라 바로 그 자신 그리고 자신의 가장 고유한 근본에서부터 실존하기로 결단할 때 그 자신이 된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사상이 다름아닌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 사이에 확립되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갖는 어이없는 무근거성과 내적인 위험이, 인간에 대한 보다더 깊은 철학적 해석과 위기에 처한 인간을 구제하기 위한 돌파구에 대한 전망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하이데거가 단번에 그 시대의 철학적 움직임의 정상에 올라서고 사방에서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밀물처럼 밀려든 것도 이해할 만하다. 그렇지만 하이데거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단순한 인간 상황의 묘사가 아니었다. 그는 앞에서 언급한 실존 관계가 인간의 본질에 대한물음과 연관될 때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중요했다. 하이데거는 인간 현 존재의 근본 구조로서 시간성을 들추어 낸다. 이것은 자주 논의되어 온 시간이라는 현상을 새롭게 해석하도록 만든다. 시간은 그 안에서 흐름들이 일어나고 있는 어떤 도식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래 어떤 객체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시간은 본질상 인간 현존재의 시간성이다. 자신의 죽음을 앞질러 달려가는 가운데 또한 매 일상의 행위 가운데 인간은 "자신을 앞서 가 있다." 그는 자신의 미래의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기획 투사한다. 동시에 인간은 매순간 자신의 기재(과거)에 의해 규정되며 철저히 지배된다. 인간은 전혀 자신의 행함이 없이 자신의 구체적인 현존재에로 내던져져 있다. 이것이 인간의 "이미 이 세계 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존재자를 현재화시키면서 현존하고 있다. 인간의 본질에서 "곁에 있음"도 일부를 이룬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요소, "자신을 앞서서", "이미 있음", "곁에 있음" 등이 인간 현존재의 독특한 시간성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 요소들은 인간 현존재의 "탈자체" 들이다.

@P415

즉 인간 현존재가 자기 자신에서부터 나와서 서 있는 방식들이다. 그 안에서 인간은 자신의 본질적인 유한성을 구현시키고 있다. 그것들은 또한 시간에 대한 인간 지식의 근원이기도 하다.

(존재와 시간)이후 짧은 시간 안에 수많은 하이데거의 저술들이 연달아 간행된다. 그것들은 부분적으로 철학사, 즉 아낙시만드로스,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 헤겔, 그리고 특히 니체를 다루고 있다. 하이데거는 니체의 다양한 사상에 새롭고 놀라운 관점을 개진해 놓는다.

다른 저술들은 시인과 시 작품의 해설을 담고 있다 특히 횔더린이 주요 주제이기는 하지만 릴케, 게오르게, 트라클, 벤 등도 해설의 주제가 되고 있다. 하이데거는 세상의 이목을 끈 강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휴머니즘에 대한 서한), 그리고 보다 심원한 저서 (동일성과 차이성)에서 하나의 새로운 사유를 정초해야 하는 문제를 논의하였다. 마지막으로 하이데거는 오늘날 특히 긴박한 몇 가지 물음들에 대해서도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다. 즉 언어, 예술, 기술의 본질에 대한 글을 발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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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저술에서 하이데거가 통찰하고 있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즉 그의 사유가 도달하려고 애쓰는 곳인 존재로는 처음에 제시한 길인 인간과 인간의 현존재를 통한 길로서는 도달할 수 없음을 통찰하게 된다. 그보다는 도리어 관점을 바러야 한다는 과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즉 인간과 인간의 존재 이해를 통해 존재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를 통하여 인간과 유한한 전체 현실을 고찰해야 한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사유의 전향"이라는 요청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와 씨름하면서 하이데거는 수십 년을 고독한 투쟁을 해온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여정에 대해 본질적으로 통찰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만일 존재가 문제가 되고 중요시된다면 인간에 관한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인간에게서 인간이 근세의 주관주의와 현대의 실존주의에서 획득한 그 핵심적 지위를 박탈해 버린다 현대를 본질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기술도 그렇게 볼 때 하나의 오류의 길일 뿐이다. 기술은 주관성의 마지막 승리인 셈이다. 왜냐하면 기술에서 그리고 기술에 의해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세계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기의 하이데거가 주장하듯이 우리는 인간에 대해 자율적인 본질만을 이야기해서는 안 되고 오직 존재와의 연관 속에서 이야기해야만 한다. 인간은 존재에 예속되어 있다. 모든 것은 존재에 달려 있다. 인간이 존재하는 것도 인간 자신을 위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오직 존재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즉 인간에 의해서 존재의 드러남이 실현되고 있는 한, 아니 실현되고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이데거가 그렇게도 빈번히 시사하고 있는 이 존재란 무엇인가? 그는 존재에 대해 자주 거의 신화적인 단어들로 설명한다. "그렇다면 존재는-존재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것 자체이다. 존재를 경험하고 말하는 것을 미래의 사유는 배워야만 한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이데거가 "존재"로써 무엇을 의미했는지가 더욱 애매해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좀더 명확히 하려 한다면, 하이데거가 분명히 존재 아래 신이나 세계 근거를 이해하려는 것을 거부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더 나아가 존재란 하이데거에서 있어 절대로 존재자(존재하는 어떤 것)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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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존재를 대상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로 여기에 하이데거는 가장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한다. 그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특히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구별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존재론적 차이""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균열"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견해를 따르면 지금까지의 모든 형이상학은 바로 이 점을 등한시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형이상학은 "잘못된 길"로 빠져들었다. 대체로 하이데거는 바로 여기에 엄청난 귀결이 뒤따르고 있음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바로 거기에 대체로 "서양의 숙명"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긍정적인 관점에서 존재란 무엇인가? 이 표현은 하이데거에서 드러나 있음, 감추어져 있지 않음(비은폐성)을 의미한다 인간은 하나의 사실에 대해 그 사실과 그 사실이 놓여 있는 관계가 그에게 드러나고 은폐됨이 없을 때, 그것이 "있다", 그것이 어떠어떠하게 "있다", 그것이 어떻게 "있다"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존재하다"(있긴는 하이데거에게는 어떻게든 현존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다"(있다)는 오히려 감추어져 있지 않고 드러나 있는 것, 빛 속에서 있는 것, 나타나게 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존재"는 바로 이러한 "밝힘"의 과정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세계의 드러남이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가? 하이데거의 첫번째 대답은 이러하다. 그것은 무의 발견을 통해 실현된다. 만일 우리가 불안 한가운데서 마주치듯 무를 대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무가 세계 전체를 우리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도록 함으로써 모든 존재자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도대체 존재자가 있다는 것마저도 유의할 수 없을 것이다. "불안의 무라는 밝은 밤에 비로소 하나의 존재자 그 자체의 근원적인 드러남의 가능성이 생겨나온다. 존재자는 있고 무는 없다(존재하는 것은 존재자이고 무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존재 물음의 절박성, 존재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은 무의 경험에서부터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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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하이데거의 시각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인간이 무를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가 인간을 덮쳐와 마치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불안 속으로 끌고 갈 수 없듯이 그렇게 무를 대면한다는 사실이다. 정확한 표현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무자체는 활동적이다. 하이데거 자신은 이렇게 표현한다. "무는 무화한다." 그러나 이때 물론 어떤 형이상학적 주체를 떠올려서는 안된다 무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닌 어떤 것 그 자체가 무화되어 버리는 사건을 지칭한다.

그렇지만 이것으로도 하이데거는 아직 그의 본래의 노력의 목표점인 존재에 이르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무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종적인 것인지, 따라서 철저한 허무주의가 참된 사유 방식이어야 하는지가 문제이다. 하이데거는 그것도 아니라고 대답한다. 허무주의는-그것이 비록 서양 사람들의 숙명임이 부인될 수 없다 하더라도-분명 인간의 지속적인 체류 장소는 아니다. 그것은 무의 본질 자체로부터 귀결되어 나온다. 무는 단지 "존재의 너울"일 뿐이다. 따라서 문제는 계속 더 파고 들어가야 한다. 무의 배후에서 존재 자체를 대면하게 될는지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존재는 하이데거에게 있어 무와 똑같은 기본 구조를 갖고 있다. 존재도 하나의 사건이며 하나의 "근본 사건" "존재의 사건"이다. 따라서 존재는 무와 마찬가지로 동사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이미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그 안에서 존재자와 인간이 드러나게 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사건이다. 존재는 발생하는 비은폐성이다. 존재가 발생한다는 말은 존재가 세계 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밝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존재란 밝게 비추어짐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밝힘"(Lichtung)으로써 존재가 역사적 인간에게 스스로를 선사해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존재에도-무에서와 같이-그것이 인간의 은총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자체에서부터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통용된다. 존재는 결코 "인간의 작품"이 아니다. 존재야말로 세계가 밝게 드러나는 사건의 본래의 참된 주체이다. 존재에게 본래의 우선권이 있는 것이다. 존재는 인간을 위해서도 아니요, 존재자를 위해서도 아니요, 오직 순수하게 자신을 위해서 존재를 수행하고 있다. 존재는 자신의 의미를 자신 안에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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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존재는 역사의 개별 시기에 존재자와 인간을 각기 상이한 관점에서 드러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존재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것은 바로 그 수행에서 본 존재이다. 따라서 중국, 그리스 또는 중세에서의 존재는 현대인과 다른 어떤 것을 뜻하고 있을 것이다. 현대인에게 존재는 주로 부정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너무나 존재자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대안에게 존재는 주로 "모든 존재자의 붕괴", "고향상실" 속에서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특히 기술의 이질적 본질로서 현대인에게 밀어닥친 운명-이것도 존재가 인간에게 보낸 것이다-속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우리 시대에 존재 그 자체는 저의 망각되어 버렸다. 현대는 "존재 망각"의 시대, "존재 부재"의 시대이다 바로 그 때문에 "허무주의"의 시대인 것이다. 허무주의란 "존재가 밖에 머물러 있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대의 극단적인 존재 망각의 존재 운명도 극복될 수 있다 물론 인간에 의해서나 인간의 작위를 통해서가 아니다. 필요한 것은 존재 자신이 자기측에서부터 오류의 길을 가고 있는 인간에게 다시 새롭게 몸을 돌려 존재의 새로운 경험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미래에 걸어 보는 희망이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인간이 "존재의 부름""귀를 기울여" 존재가 건네오는 말을 놓치지 않음으로써 그가 "존재의 목동"임을 다시 경험하는 길밖에 없다 인간은 존재가 언어를 통해 나타나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그는 "존재의 말함"이 소리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최대의 과제이며 거기에 인간의 본질적인 품위가 놓여 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명심해야 할 것은, 그것의 성공 여부는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의 도래는 존재의 운명에 기인한다."

그 모든 진지함 속에 이것이 일어날 때-하이데거의 견해에 따르면-현대의 이 "신이 멀리 떠나 버린" 밤의 어둠이 극복될 수 있다. 그럴때 새로운 신이 존재의 빛 속에 나타나는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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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존재의 가까이에" 이를 때 비로소 인간은 "신이나 신들이 거절하며 남아 있어 어둠이 그대로 깔려 있게 될지, 성스러움이 솟아오르면서 신이나 신들의 현현이 새로이 시작될 수 있게 될지"의 결정이 일어나게 되는 데까지 오게 된다. 그렇지만 이것 역시 인간의 소관 사항이 아니라 존재 자신의 관장 사항이다

거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물론 더 이상 전통적인 의미의 철학의 가능성에 속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이 점을 분명 의식하고 있다 "미래의 사유는 더 이상 철학이 아니다. 그 사유는 자신의 일시적인 본질의 궁핍 속으로 내려가고 있다. 사유는 언어를 단순한 말 속에 집결시킨다." 그러나 지금 당장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무명 속에 실존하는" 인내를 배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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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러셀: 저항으로서의 철학

버트란드 러셀은 1872년 오래된 귀족 가문의 자손으로 태어났고, 훗 날 그 자신도 경에 임명되었다. 그의 자서전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된다.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세 가지 정열이 나의 인생을 결정하였다. 즉 사랑에 대한 갈망, 인식에 대한 열망,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첫번째로 사랑을 언급한 것은 분명 우연이 아니다. 사랑을 향한 갈망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을 구하려고 애쓴다. 첫째, 사랑은 황홀경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종종 이 몇 시간의 충일감을 위해 나의 전 생애, 아니 앞으로 내 앞에 펼쳐질 생애까지도 포기할 정도로 강렬한 황홀감을 만끽하게 해주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에서, 나는 사랑을 구하려고 노력하였다. 사랑은 고독으로부터 건져내 주기 때문이다. 사무치게 외로운 의식이 세계의 가장자리를 넘어서는, 차갑고 생기 없으며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과 같은 경악스러운 고독에서 구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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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나는 사랑을 통한 일치 즉, 신비스럽게 축소된 그 모사 속에서 성인과 시인의 상상 속에 살아 있는 하늘의 조짐을 눈치챌 수 있기에 사랑을 얻으려고 그토록 고심했다."

이 말들은 러셀의 삶을 통해 볼 때 그의 실제 행동들과 일치한다. 그는 일찍부터 철학자로서 두각을 나타낸다. 한 동급생이 12세 된 그에게 성교육을 실시하자 그는 이내 보편적인 원리를 파악한다. "자유로운 연애는 유일한 이성적 체계이고, 결혼은 그리스도교적 미신의 소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셀은 사실상 이 미신을 아주 싫어한 것만은 아니었든지 4번씩이나 결혼한다.

러셀은 첫번째 부인을 17세 때 알게 된다. 그녀는 해방된 여성으로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자유 연애를 맹세한 알리스라는 이름의 여대생이다. 러셀은 오랜 동안의 순결한 약혼 기간을 지낸 후 그녀와 결혼한다. 한 신문 기사에 따르면, 그녀는 "사람들이 마음으로 생생히 그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후 러셀은 외롭게 자전거 여행을 하던 중 그의 사랑이 식어 버렸음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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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오토리네라는 이름의 유부녀와 교제를 시작하지만 그녀는 러셀과의 연예 관계가 오래 지속되기에는 무리가 될 정도로 남편과 자식과 재산에 너무 집착한다. 몇 번의 일시적인 관계가 스쳐간 후 이번에는 콜레트라는 여자가 러셀의 인생에 뛰어들어 그에게 "존재의 구석구석에 따스함"을 심어 준다. 그 다음은 두번째 부인인 도라로 이어진다. 비록 러셀은 서로 알게 된 처음 순간부터 그녀에게 "내가 누구에게선가 자식을 갖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당신에게서는 아닐 것이오"라고 단언했지만 그녀에게서 아들과 딸 각각 한 명씩을 얻게 된다. 둘째아들인 피터는 세번째 부인이 낳았다. 그렇지만 이 결합도 오래 가지 못한다. "1949년 아내가 내게 이제 싫증이 난다고 심중을 털어 놓았을 때 우리의 결혼은 끝장났다." 러셀은 80세가 되었을 무렵, 마지막으로 네 번째 부인 에디트와 결혼한다. 그는 그녀와 함께 있음으로 해서 드디어 그의 긴 생애 동안 사랑을 향한 갈망 속에서 추구하였던 바를 찾았다고 고백한다. 물론 이것이 그로 하여금 미의 여왕들의 무리에서 포근함을 느끼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러셀이 이토록 파란 많은 생애 속에서 매우 폭넓은 학문적 활동과 저널리즘적 활동에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놀랄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의 고유한 사명이 자유 저술에 있음을 깨닫고 일찍이 이 사명을 수행하기로 결심하였다. 베를린의 동물원을 산책하면서 내린 결심이었다. 그 일 외에도 그는 일시적으로 케임브리지와 소르본느, 그리고 미국의 여러 대학들에서 교수직을 맡았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온갖 종류의 주제에 대해 강연하였다.

러셀의 학문적 노력의 서막은 수학적 근본 문제에 대한 논구가 장식한다. 그는 철학자 화이트헤드와 함께 전3권으로 된 이해하기 어려운 책 (수학의 원리)를 저술한다. 이 책은 현대 수학의 근본이 되는 책으로 평가된다. 이 책의 저술 작업이 몹시도 힘들었던지 심지어 그는 이 시기에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후 그를 우울증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도 바로 수학이었다. "수학은 안식처이다. 수학이 없었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그의 수학적 연구 속에 이미 러셀의 철학적 관심이 표현된다. 그가 수학에 무엇보다도 관심을 가진 것은 수학의 논리학에 대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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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그는 포괄적인 방법으로 독특한 철학적 문제로 방향을 돌린다. 이 문제에 대한 그의 다양한 저술들은 철학사를 출발점으로 하여 인식론을 거쳐 윤리학에까지 이른다.

러셀은 이 모든 일보다 그의 활발한 정치적 활동 때문에 더 잘 알려지게 된다. 정치 활동은 이미 젊은 시절부터 시작된다. 그는 여성 해방을 옹호한다. 이로 인해 청중들로부터 썩은 달걀과 쥐 세례를 받기도 한다. 그는 사회주의 이념도 가까이한다. 그는 "일종의 신비적인 깨달음"으로 근본적인 평화주의를 위해 분투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중에 히틀러 독재의 청산이 문제가 되자 물론 이 평화주의를 수정한다. 그가 등장하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반대 시위가 벌어졌고 폭력적인 공격까지도 자행됐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영국이 개입하는 것을 반대하는 데 분투 노력한다. 그는 병역 기피자들을 후원한다. 또한 그는 그가 이 지구상에서 악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에 맞서 싸운다. 즉 베르사이유 조악, 히틀러의 폭정, 스탈린 정권의 잔혹한 행위, 고루한 반공산주의, 사유 재산의 악용, 핵 전쟁, 베트남 침공 등에 맞서 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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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박해받는 개인들을 위해 투신할 뿐만 아니라 쉬지 않고 토론과 라디오 방송 연설 집행, 편지 쓰기, 전보 발송, 위원회 조직, 대회의 준비와 진행, 자금 모금, 결의서와 성명서 작성 등으로 바쁘게 생활한다. 러시아, 중국,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등지로의 광범위한 여행과 미국에서의 오랜 기간 동안의 체류는 그의 입장을 굳히는 데 한몫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은 수많은 저서들에 정리, 간행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진다. 온건한 반권위적 정신에 입각한 학교 설립과 같은 그의 교육적 노력도 많은 주목을 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왕성한 활동들은 또한 많은 적대 관계를 야기시킨다.

요컨대 러셀은 세상과 끊임없는 갈등을 겪는다. 그는 미국 대학의 교수직을 박탈당한다. 그 이유는 그의 저서들이, 법정에서 고발 대리인이 주장하듯이, "방탕하고 음탕하며 호색적이고 음란하고 에로틱하고 색정적이고 위엄이 없고 편협하고 허위이고 도덕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병역 기피자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직도 박탈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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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정부를 공격했기 때문에 심지어 6개월 동안 투옥되기까지 한다. 물론 교도소에서는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읽고 쓸 수 있는 1등실을 배정받기는 하지만 재정적으로는 자주 곤란을 겪는다. 러셀은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지만, 가난한 동포들과 정치 기구를 후원하는 데 아낌없이 써버린다. 그래서 그는 저술업에서 생기는 불규칙적인 수입으로 버터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때때로 버스 승차권 한 장마저 살 수 없을 정도로 궁핍을 겪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뒤 그는 더없는 명예를 누리게 된다. 그는 왕이 내리는 영국 최고의 훈장과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는 정신계와 정치권의 내노라 하는 모든 명망있는 신사들 거의 모두와 교제를 하고 있었다. 그는 아인슈타인, 루터포드, 닐스 보어, 아이젠하워, 케네디, 후루시초프, 네루, 주은래 등과 사귀었다. 그의 세계적 명성은 1969년 그가 9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속된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항상 고독이 앙금처럼 남아 있었다. "우리는 드넓은 대양의 해변가에 서서 텅 빈 밤하늘에 대고 절규한다. 때때로 어떤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화답한다. 그러나 그것은 물에 빠져 죽은 혼령의 목소리이다. 다음 순간 다시 침묵이 엄습해 온다."

러셀이 초기에 특히 몰두한 것은 확실성의 문제이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수학의 길을 통해 철학에 이르는 첫번째 통로를 찾도록 해주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수학이 모든 철학함의 척도가 될 수 있는 확실성을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수학은 이미 러셀의 최초의 정신적 사랑이었다. 훗날 그는 11세 때 유클리드 기하학을 읽었을 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첫사랑처럼 숨이 막히는 듯한 내 인생의 가장 커다란 사건 중 하나였다." 그렇지만 벌써 그 당시의 그에게 "전제에 대한 회의"가 싹튼다. 그 후 그는 이 전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10년간에 걸친 오랜 연구로 고군 분투한다.

수학에 대한 탐구는 러셀을 직접 논리학의 문제 영역으로 이끌고 간다. 그는 모든 수학의 공리들이 논리학의 원리로 소급될 수 있음을 확인한다. 수학의 논리학적 토대에 대한 해명은 수리 철학뿐 아니라 수학적 논리학의 원천을 형성할 수 있었다.

@p427

그렇지만 이때 논리학은 자신의 전통적 성격을 탈피해야 한다. 논리학은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주목하여 파악할 뿐 아니라, 대상에 대한 모든 가능한 관계를 만들어냈다. 논리학은 "관계 논리학"이 된다. 일상 언어로는 획득할 수 없는 논리학의 절대적 정확성을 보증하기 위해 러셀은 특별한 기호 언어를 개발한다. 주체에서 유래하지 않고 객관적 타당성을 지닌 그러한 순수논리학의 개발에 대한 관심은 러셀의 사유를 일생 동안 지배한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철학이 해야 할 일이란 본질적으로 논리적 분석과 그에 따른 논리적 종합이다."

러셀은 논리학에 멈춰 서지 않는다. 그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철학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철학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왜냐하면 철학은 분명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유용성"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의 목표는 "인식"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어려운 점은, 사람들이 철학 안에서 "그 어떤 확실하게 윤곽지워진 앎의 상태"에도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정반대로 철학의 가치는 본질적으로 철학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바로 그 불확실성에 있다." 그렇지만 바로 이것이 러셀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띤다. "철학적 변화를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마치 감옥에 감금되어 있는 것처럼 한평생을 지낸다.

@p428

건전한 인간 상식의 선입견, 그의 시대나 그의 국가의 습관적인 견해, 공동 작업이나 숙고하는 이성의 동의 없이 그 자신 안에서 자라난 의견들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러셀에 있어 그 다음의 철학적 과제는 논리학에서 현실로 넘어가는 통로를 발견하는 데 있다. 왜냐하면 논리학 자체에서 보자면 논리학적체계는 현실과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이 세상에는 이성적 인간이 결코 의심할 수 없는, 그렇게 전적으로 확실한 인식이 있는가?" 이 점에 대해 러셀은 매우 비판적이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있는 책상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여긴다. 러셀은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정확히 말해 단지 "일종의 감각 자료들", 예를 들면 "관점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색깔 또는 형태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도대체 실제로 책상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은 그대로 남는다. "아마도 외부 세계는 단지 하나의 꿈에 불과할 것이다." 그것은 불합리하게 보일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러셀은 이렇게 강조한다. "철학자가 되려는 사람은 불합리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러셀은 이제 "일반적으로 실제의 책상이 존재한다는 가정을 뒷받침하는 근거들"과 논쟁을 벌인다. 그가 생각하기로는 이 주장은 "엄밀하게 증명될 수 없다." 전 생애는 꿈이고, 우리는 그 꿈 속에서 우리 자신의 상상력으로 대상적인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는 이 추측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또한 그 추측이 사실이라는 어떠한 근거도 없다. 그 밖에 이것은 "우리에게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대상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통상적인 가정보다 훨씬 덜 단순한 가설이다." 따라서 러셀이 외부 세계의 실재성에 대한 물음에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단순함의 원리"일 뿐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기초가 되는 회의주의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감각 자료들을 불러일으키는 실재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사유는 막다른 골목에 이른다. 대상들의 공간이라는 것이 문제이다.

@p429

실재하는 것은 직관의 공간이 아니라 "물리적인 공간"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물리적인 공간이 "그 자체로는 어떤 상태에 있는지"에 대해 결코 알 수 없다. 똑같은 상황이 물리적 대상 그 자체에 대한 관점에서도 나타난다. "우리가 대상을 푸르거나 붉게 나타나게 하는 대상의 성질을 직접 알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러셀은 여기에서도 온건한 회의주의의 입장에 머무른다. 분명 실제적인 어떤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무엇인지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이것은 대체로 인간이 사물의 인식에 도달하는 방식 때문에 그렇다. 러셀은 인식을 두 부류, 즉 면식에 의한 인식(Bekanntschaft)과 기술에 의한 인식(Beschreibung)으로 구분한다. 전자는 직접적이고 후자는 간접적이다. 면식에 의한 인식 즉 직접적인 인식은 감각 자료들과 내적 감각들이고, 나아가서는 기억들이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는 자아도 여기에 속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직접적이라고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참이다. 이에 반해 기술에 의한 인식은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며 사물과 사물의 관계, 다른 사람들과 그들간의 관계 등을 모두 포함한다. 그렇지만 그 인식은 그 자체로 참은 아니다. 이 인식의 참됨은 그때마다 면식에 의한 인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모든 명제는 각기 전적으로 우리가 면식으로 알고 있는 그러한 구성 요소로 성립되어야만 한다."

이것에 이어 러셀은 사람들이 그것의 도움으로 주어져 있는 것에서 결론들을 끄집어 내고, 그래서 앎을 확장시킬 수 있는 원리들에 대한 고찰로 넘어간다. 여기에 귀납법의 원리가 톡톡히 한몫을 한다. 그러나 귀납법의 원리는 단지 개연성만을 마련해 줄 뿐, 절대적 확실성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태양이 지금까지 매일 떠올랐었기 때문에 내일도 다시 떠오르리라는 것은 확실하지가 않다. 자연 법칙들도 단지 개연적일 뿐이다. 왜냐하면 자연 법칙이라는 것도 자연이 한결같다는 똑같은 개연적 믿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경험을 토대로 하여 우리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사물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하는 모든 앎은 일종의 확신에 기인하고 있다. 그리고 이 확신은 경험에 의해 증명될 수도 없고 반박될 수도 없으며, 그러면서도-적어도 그것의 구체적 사용에 있어-많은 다른 경험의 사실들처럼 우리 안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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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경험에는 일련의 직접적이고 분명하며 자명한 원리들이 작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논리학의 근본 명제들이나 기하학의 공리들이 그렇다. 그것들에서 "우리는 감각 자료들로 소급시킬 수 없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여기에 또한 어떤 방식으로는 일반 개념-러셀이 "보통 개념"이라고 부르는-예를 들면 유사함, 정의, 검은색, 삼각형, 지금 등이 있다. 그와 같은 것들은 단순히 의식 속에만 실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사유로 파악은 하지만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닌 독립된 세계"에 속한다.

러셀의 회의주의적 입장을 고려할 때, 그가 존경할 만한 철학의 핵심인 형이상학에 아무런 본질적인 인식 가치도 부여할 수 없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젊은 시절 형이상학에, 그것도 종교적인 문제와 관련해서 몰두했다. 그는 고통을 주는 죄의식 그 자체가 있음을 확인한다. 그가 어린 시절 좋아하던 노래는 "이 세상은 피곤하고 죄는 무겁다"는 노래였다. 그러나 15세에서 18세까지의 시기에 그는 죄의식에서 벗어난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당시 이미 형이상학의 세 가지 중요한 대상들, 즉 신, 자유, 불사 불멸에 대한 믿음을 떨쳐 버렸다. 그는 이 대상들에 대한 학문적 근거들을 탐구해 보지만 결국 아무 것도 알아낸 게 없었다. 그래서 그는 무신론자가 되어 버렸다.

훗날에도 러셀은 형이상학을 멀리한다. "전체로서의 우주에 대한 인식은 형이상학을 통해서는 도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형이상학적인 대답 역시 불충분한 채 있는 것을 좋아한다. 그 때문에 러셀은 형이상학적 물음들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대답을 발견할 수 있는 희망이 아주 희박할지라도, 형이상학적 물음들을 계속 연구하는 것, 그 물음의 의미를 의식하게 해주는 것, 가능한 통로를 시험해 보는 것, 그리고 만일 우리가 순전히 확실시된 인식에만 국한시킨다면, 아마도 죽여 없애 버렸어야 할 세계에 대한 그러한 사변적 관심을

일깨우는 것 등은 철학의 문제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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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이 그의 인식론에서 전개하고 있는 냉정한 정신은, 윤리학의 문제를 둘러싼 그의 노력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비교조적 윤리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윤리학은 순전히 주관적이어서는 안 되고, 일정한 방식으로 객관적 타당성을 지니고 있어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도적인 관점은 인간은 어떠해야 한다는 인간의 유토피아적 모습이 아니라, 그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그대로의 인간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러셀은 이제 인간을 "필연적으로 자신의 욕망의 충족"을 갈구하는 존재로서 이해한다. 왜냐하면 윤리학에서 그가 이해하고 있는 바로는 순수한 이성보다는 오히려 감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윤리학에 "근본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정서와 감정"이다. 이 말은 물론 이성이 배제되어야 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은 본질적으로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을 강구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지 이 목적을 스스로 정립하라는 과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윤리적인 의미로 선한 것은 욕망이 향하고 있는 그것이고, 나쁜 것 또는 악한 것은 욕망에 배치되는 것이다. 그러나 러셀은 단지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만을 욕망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사랑과 우정", "예술과 학문"도 역시 욕망 충족을 추구하는 영역에 속한다. 그 밖에도 전적으로 이타주의적인 욕망이 있다. 예를 들면 자신의 어린 아이를 위하는 부모의 욕망이 있고, "동정과 자비"가 있다. "한 개인의 욕구 충족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욕구 충족도 똑같이 선하다"라는 문장은 일반적으로 타당하다. 따라서 윤리적 행위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욕망들은 개인의 안녕뿐만 아니라 전체의 안녕으로 향해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가능한 한 일치되도록 해야 한다. 러셀은 거기서부터 구체적인 윤리적 요구를 내세운다. "미움이 아니라 사랑이,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 전쟁이 아니라 평화가 추구할 만한 가치들이다."

이로써 러셀은 인간의 공동 생활에서 빚어지는 현실적 문제들에 바짝 다가선다. 윤리적으로 근거를 두고 있는 그의 정치적인 개입과 참여는 전적으로 직접적인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괴로워 소리치는 신음 소리들이 나의 심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굶주려 죽어가는 어린이들, 독재자에게 고문당하는 희생자들,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 자식들에게까지 증오 서린 부담이 되어져 버린 노인들-무의탁, 고통, 궁핍, 슬픔으로 뒤덮여 있는 이 세계, 이 모든 것은 인간 생활의 본래의 모습에 대한 냉소에 찬 풍자 만화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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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의 정치적 요구의 가장 내면적인 동기는 인류의 존속에 대한 우려이다.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인류의 존립이 인간이 도덕적 숙고에 어느 정도로 고개 숙이는 것을 배울 수 있는가에 달려있는 그러한 단계에 도달했다." "우리의 시대는 암울하지만, 우리 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바로 그 불안들이 지혜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이 실현되려면 인류는 인류가 처해 있는 이 위험한 시대의 절망을 떨쳐 버리려고 노력해야 하고, 이제껏 있어 왔던 그 모든 것보다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인간이 그것을 원하기만 하면 그것은 실현될 수 있다." 러셀이 이것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강력하게 외치고 있기 때문에, 그는 그의 시대를 위해 배역을 맡은 가장 감명 깊은 권고자가 된다. 마침내 그의 정치적 호소는 다시 철학의 영역으로 합류된다. "이 세계가 행복해지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요소는 통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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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몰락

성인들의 전기를 보면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일이 때때로 있다. 그러나 철학자들에게서는 이런 일이 아주 드물다. 그렇지만 그 일을 멋지게 실천한 사람이 있다. 1889년 빈에서 실업가의 아들로 태어난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상속받은 수억의 재산을 전부 선물해 버린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에게 준 것은 아니었다. 물론 어마어마한 규모의 기부금을 희사받은 릴케나 트라클을 가난한 사람으로 간주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도리어 비트겐슈타인은 그 몫의 재산을 그렇지 않아도 이미 상당한 재산을 보유하고 있는 그의 형제 자매들에게 나눠 줘 버린다.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추측하건대 내적으로 소유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이 아마도 그에게 그처럼 보기드문 일을 하도록 부추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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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바로 이 점에 있어 그는 자신이 진정 철학자임을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적어도 외형적으로 보기에는 평탄한 유년기를 보낸다. 그는 아버지의 시골 영지와 도시의 별장에서 자란다. 그렇지만 당시에 이미 그는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23세 때, 그는 지난 9년 동안을 끔찍한 고독 속에서, 거의 자살의 극한 상황 속에서 살았다고 고백한다. 이처럼 내면 깊숙이 간직한 근본 정서를 그는 일생 동안 안고 살았다. 그는 자신의 일을 끝내기도 전에 머리가 돌아 버리거나 죽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고 끊임없이 두려워했다. "사람들은 늘상 비틀거리다가는 쓰러지고 또 비틀거리다가는 쓰러지곤 한다. 그리고 오직 자기 자신만이 자신을 일으켜 세워 다시 계속 걸어 가려고 애쓸 수 있다. 어쨌든 나는 내 일생 동안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것은 그렇다고 하고, 비트겐슈타인의 부모 집에는 최상의 교양있는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음악이 각광을 받았다. 클라라 슈만, 말러, 브라암스 등은 그 집의 친숙한 손님들이었다. 비트겐슈타인도 상당히 음악적 재능이 있어서 클라리넷을 곧잘 연주했고 얼마 동안은 지휘자가 될 꿈을 간직했을 정도이다. 물론 훗날 그의 음악적 재능은 친구들에게 교향곡이나 협주곡의 전 악장을 휘파람으로 불어 들려 주는 정도로 한정되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언제나 순수한 만족만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고등학교를 마친 후 공학을 공부하기 위해 베를린에 있는 공과 대학에 입학한다. 기술도 그가 애착을 느끼는 일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는 이미 소년 시절에 최신형의 재봉틀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 후 그는 맨체스터로 옮겨서 학업을 계속하고 그곳에서 당시 막 대두되기 시작한 항공학으로 방향을 돌린다. 이때 수학에 대한 그의 관심이 눈을 뜨게 된다. 그는 러셀에게 배우기 위하여 케임브리지로 간다. 러셀과는 그 후 성실한 우정을 맺는다. 러셀 자신도 이렇게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을 알게 된 것은 내 인생의 가장 충격적인 정신적 체험의 하나였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을 "천재의 완벽한 전형"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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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비트겐슈타인은 그 대학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바로 전 해를 노르웨이의 어느 한적한 농장에서 지낸다. 1914년 군에 입대하지만 병 때문에 군복무에서 제외된다. 그러나 자원병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에 지원한다. 그는 장교로서 동부 전선과 남부 전선의 전투에 참전하여 나중에는 이탈리아에서 전쟁 포로가 된다. 그는 이 시기에 최초의 유명한 저서 (논리 철학 논고)를 완성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전쟁이 끝난 후 격렬한 내적 위기에 빠진다. 그는 한 시골 책방에서 복음서에 대한 톨스토이의 책을 접하는데, 이 책이 그의 마음을 깊숙이 뒤흔들어 놓는다. 그는 앞으로 검소한 생활을 꾸려 나가기로 결심하고 남부 오스트리아의 시골 선생이 된다. 시골에서의 그의 생활에 대해 그의 전기 작가 중 한 사람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수줍음을 타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으며 몹시 남루한 차림새였으며 가장 간소한 거처를 골라 살았다. 마치 승려의 독방을 연상시키는 것 같은 아주 작고 가구가 없는 방이나, 또는 어떤 집에서든 작은 방만을 골라서 살아갈 뿐이었다. 언젠가는 그가 방 하나를 세들어 있던 여관이 댄스 음악으로 소란스럽자 얼마 동안 학교 부엌에서 잠을 잔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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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그는 다시 한 마을 사람의 사용하지 않는 작은 세면장에서 기거했다. "어쨌거나 그는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그의 기술 공학 공부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시골 공장에 있는 고장난 증기 기관을 수리해 주기도 하고 주부들의 재봉틀을 손봐 주기도 했다. 그는 학교에서의 임무도 극도로 진지하게 수행해서 새로운 학습 방법을 실험하기도 했다. 단지 그의 동료들과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몇 년 후 비트겐슈타인은 교사직을 포기한다. 새로운 울적한 마음이 그에게 엄습한다 그는 잠시 수도원에 들어갈까 궁리해 본다. 그러다가 수도원의 보조 정원사가 되는데, 그의 잠자리는 연장을 보관하는 헛간이었다. 그 후 그는 건축 양식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누이를 위해 당시로는 초현대식의 건축 방식을 도입한 집을 설계한다. 그는 마침내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케임브리지로 돌아온다. 그는 그곳에서 학위를 받고 특별 연구원으로 강의하는데, 그의 강의에는 그의 동료 교수도 몇몇 참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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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자 중 한 사람은 강의 시간을 이렇게 묘사한다. "비트겐슈타인은 강의실 한가운데 있는 수수한 나무의자에 앉아 있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사상과 명백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는 종종 그가 명확하게 생각하지 못했음을 알아채고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주 이와 같은 말들을 했다. '나는 바보다', '자네들은 멍청이 선생을 두었다', '나는 오늘 정말로 멍청하다.' 여러 번 그는 강의를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표명했지만, 7시 이전에 강의를 마치는 적은 좀처럼 없었다. 비록 비트겐슈타인은 그러한 모임을 강의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강의'라고 하기에는 적당하지가 않다. 첫째로 그는 이 모임에서조차도 계속 탐구를 진행해 나간다. 그는 특정한 문제들에 대해 혼자 있을 때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심사 숙고하였다. 두번째로 이 모임은 거의 대부분 담화로 이루어진다. 비트겐슈타인은 보통 여러 명의 청강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들의 대답에 응수했다. 그 모임은 대화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때때로 그는 생각을 이끌어 내려고 노력하는데 이때 그는 단호한 손짓으로 모든 물음과 대답을 금지시켰다. 자주 긴 침묵의 시간들이 찾아들곤 했다. 가끔 비트겐슈타인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릴 뿐, 그동안 다른 사람들은 조용히 침묵하면서 긴장하며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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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지 시간 동안 비트겐슈타인은 극도로 긴장해서 생각을 이끌어 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집중되어 있었으며 얼굴에는 생기가 넘쳐흘렀다. 그의 두 손은 매혹적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표정은 어두웠다. 사람들은 그들이 극도의 진지함, 극도로 긴장된 집중, 그리고 아주 강력한 정신적 압박을 대면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강의가 끝나면, 비트겐슈타인은 완전히 탈진해서 부랴부랴 극장으로 달려갔다. 아무 영화나 한 편 보면서, 그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철학을 잊어 버리기 위해서였다.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는 동안에도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검소한 생활 방식을 유지한다. 그의 방에는 안락 의자도 독서용 전등도 없었고 사방의 벽은 그림 한 점 없이 황량했다. 그의 옷차림도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엄격한 예의 범절 준수 사항으로 정하고 있는 것과 엄청나게 어긋났다. 그는 회색 플란넬 바지를 입고, 그 위에 목이 트인 셔츠와 털로 짠 조끼나 가죽 점퍼를 입었다. 전기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비트겐슈타인이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거나 모자를 쓴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는 식사도 극히 간단하게 해서 단지 콘 프레이크만 먹고 살았다는 소문이 있는데 이것은 약간 과장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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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그는 빵과 치즈만으로 식사를 했다. "비트겐슈타인은 무엇을 먹든지 항상 똑같은 것을 먹는다 하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케임브리지 시절-노르웨이에 체류하기 위해 1년간 떠나 있었지만-그의 두번째 중요한 책 (철학적 탐구)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그 책은 그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출간된다. 그 사이 그는 철학 교수가 된다. 그러나 곧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 그는 다시 자발적으로 지원해서 처음에는 병원에서 환자 수송 요원이 되었다가, 그 다음에는 의학연구소의 실험실 조수가 된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케임브리지로 돌아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철학 교수직을 포기한다. "철학 교수라는 허무맹랑한 자리""일종의 생매장된 존재"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이제 그는 오로지 연구에만 헌신한다. 그는 처음에는 아일랜드의 한적한 농장에서 지내다가 만년에는 더블린의 한 호텔에서 기거하는데, 온갖 질병에 시달린다. 비트겐슈타인은 암으로 고생하다가 1951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아주 멋진 삶을 살았다고 말해 주시오. "

비트겐슈타인의 사유는 서로 대조를 이루는 두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번째 단계는 (논지 철학 논고)로 대변된다. 그 책은 영어 사용권의 지배적인 사조인 논리 실증주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두번째 단계는 (철학적 탐구)로써 특징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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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도 영국과 미국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최근까지도 유럽 대륙에서 언어학의 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논고)는 몹시 어려운 책이다. 이 책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정열적이며 근원적인 사유를 아주 냉담하게, 거의 수학적인 형태 속에 은닉한채 존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것을 그는 정직한 철학의 과제라고 여겼다. 그런데 존재하는 것, 그것은 무엇인가?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은 "사실들"이라고 대답한다.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다." 따라서 세계는 전통적 의미에서처럼 사물들의 총체로서가 아니라 사실들의 총체로서 이해된다. 이 차이는 다음과 같이 예를 들어 설명할 수 있다. 예컨대 책상은 사물이다. 그러나 책상이 갈색이라거나 책상이 방에 놓여있다는 것 등은 사실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사실 대신에 "사태의 존립"이라고도 말한다. 사태는 "대상들의 결합"이며, 대상들은 "세계의 실체를 형성하고 있다." 세계 안에는 복합적인 사태와 단순한 사태가 있다. 복합적인 사태는 더 이상 환원될 수 없는 단순한 사태로 소급될 수 있다. 단순한 사태에 근원적인 실재가 귀속된다.

사태들은 명제들의 대상이 된다. 복합적인 사태들은 복합적인 명제들의 대상이, 그리고 단순한 사태들은 단순한 명제들 또는 요소 명제들의 대상이 된다. 이렇기 때문에 명제들의 분석을 통해 사태들의 세계의 실재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도 또한 복잡한 명제들은 단순한 명제들로 소급 환원시킬 수 있다는 맥락이 통용되기 때문이다. 단순 명제들은 "직접적인 연결 관계에 놓여있는 이름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본래의 접촉과 이와 더불어 실

재에 대한 확실성의 원천은 요소 명제들과 단순한 사태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 점을 비트겐슈타인은 더 이상 증명하지 않고 가설로 남겨 둔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모든 참된 요소 명제들에 대한 언명은 세계를 완전하게 묘사한다." 왜냐하면 요소 명제들로부터 모든 참된 명제들을 도출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명제들은 요소 명제들을 가지고 있는 진리 조작의 결과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림 개념을 끌어 들여 명제들과 사태들의 관계를 더욱 정확하게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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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실들에 대한 그림을 만든다." "명제는 실재의 그림이다." 이것은 물론 사진과 같은 복사의 의미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명제는 단지 사태의 논리적 구조를 반복할 뿐이다. 왜냐하면 논리적 형식은 세계와 마찬가지로 세계에 대한 명제들에도 공통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명제는 실재의 논리적 형식을 보여준다."

이로써 철학의 분야는 극단적으로 제한된다. "철학의 목적은 사고에 대한 논리적 해명이다." 이에 상응하여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사유될 수 있는 모든 것은 명확하게 사유될 수 있다. 진술될 수 있는 모든 것은 분명하게 진술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원리는 궁극적으로 단지 자연 과학에만 들어맞을 수 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단호히 말한다. "참된 명제들의 총체는 전체 자연 과학이다." 그러나 "철학은 자연 과학의 한 분야가 아니다." 따라서 이를 벗어나는 모든 철학적인 주장, 특히 형이상학적 주장이 부정된다. 그것은 명확하게 사유될 수도 분명하게 말해질 수도 없다. "철학적 문제를 기술하였던 대부분의 명제들과 물음들은 거짓된 것이 아니라 무의미하다." 따라서 형이상학적 대답만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물음도 배척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뜻으로 (논고)의 머리말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책에서 철학적 문제들을 다루고자 하며-내가 생각하는 바로는-이 문제들의 물음 제기는 우리 언어의 논리에 대한 오해에 기인하고 있음을 나타내고자 한다." 여기에 그 유명한 (논고)의 마지막 문장이 적용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요약하면 이런 뜻이다. "올바른 철학의 방법은 본래 다음과 같은 것이다. 자연 과학의 명제 그 외의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해서는 안 된다.-따라서 철학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그래도 다른 사람이 여전히 어떤 형이상학적 문제를 말하려고 한다면, 그에게 그 자신이 제시한 명제 중에서 어떤 기호가 아무런 의미도 주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일러 주어야 한다. 이런 방법이 다른 사람에게는 불만스럽게 여겨지겠지만-그는 우리가 그에게 철학을 가르친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것이다-그것만이 유일하고 엄밀하게 정당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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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은 물론 자연 과학적 명료함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정도로 경솔하지는 않다. "우리가 과학적으로 가능한 모든 물음에 대답했을 때, 우리는 우리 삶의 문제가 전혀 언급조차 되지 않았음을 느낀다." 삶의 문제는 물론 엄밀한 척도에 따라 사유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은 이 문제에 손을 댄다. "철학은 생각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정하고 그럼으로써 생각할 수 없는 것의 한계를 정하려고 한다. 철학은 생각할 수 있는 것을 통해 내면으로부터 생각할 수 없는 것에 정의를 내리려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존재하기는 하지만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신비스러운 것"이라고 부른다. "물론 말할 수 없는 것도 있다. 그것은 스스로를 내보인다. 그것은 신비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그런 것에는 독특하게 드러나는 방식이 적당하다. 그것은 비록 파악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내보인다. 그러나 철학은 "말할 수 있는 것을 명백하게 나타냄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도 암시할 수 있다."

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 즉 신비스러운 것에 속하는 것으로는 첫째, 윤리적인 것이_있다. 윤리적인 것은 "사태"가 아니지만 그래도 나타나고 있다. 둘째, 삶은 신비스러운 어떤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주장한다. "공간과 시간 안에 있는 생명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은 공간과 시간 밖에 놓여 있다." 셋째, 자아가 신비의 영역에 있다. "주체는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한계이다." 그렇지만 주체의 실존-비록 신비스럽다고 하더라도-은 논란이 되지 않는다. "자아, 자아는 깊이 숨겨진 비밀이다." 넷째, 전체로서의 세계가 그 현존에 있어 신비스럽다. "신비적인 것은 세계가 어떻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있다는 사실이다." 다섯째, 이것은 세계의 의미에도 적용된다. 세계의 의미는 "세계 밖에 있어야만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의 의미를 지칭하기 위해 ""이라는 표현도 사용한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인생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세계의 사실들로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인생이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p443

과학적으로 파악할 수 없고 그 때문에 신비스러운 신이라는 개념은 따라서 신을 세계의 의미로서 생각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제 이 세계의 신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실재 안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고 분명히 강조한다 "신은 세계 안에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신은 세계의 세계 외적인 의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곳에서는 신을 세계의 총체로서 이해한다. "신은 모든 것이 서로 관계하는 그 방식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이것은 물론 생각할 수도 말 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러한 신을 받아들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신의 신비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예속되어 있다. 우리가 예속되어 있는 바로 그것을 우리는 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신은 이런 의미에서 단순히 운명, 또는 같은 이야기이지만, 우리의 의지에 예속되어 있지 않은 세계이다."

(논고)를 완성한 후 비트겐슈타인은 "문제들을 본질적으로 해결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 후 그에게 자신의 저서에 의심을 품게 하는 기묘한 일이 발생한다.

@p444

그는 이 책에서 너무나도 자명하게 세계는 사실들로 나뉘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사람들은 똑같은 정당성을 갖고 세계는 사물 또는 사건들로 나뉘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실재를 분석하는 데는 단 하나의 명백한 가능성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로써 (논고)의 근본 전제들 중 하나가 떨어져 나간다. 사람들이 명제를 요소 명제들로 분해하면 명제의 의미는 명백해진다는 이 주장도 언어에서는 다의적인 애매함이 지배적이라는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분석이 필연적으로 참된 실재로 인도하는 것은 아니다. 이 밖에도 비트겐슈타인에게는 복잡한 사태와 단순한 사태, 복합 명제와 단순 명제의 구별도 의문스러워진다. 도대체 절대적으로 단순한 것은 없다. 더 나아가 그림이론도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단순한 사태나 사물들도 없고 단순한 명제들도 없다면, 사람들은 단순 명제들이 단순한 사태들이나 사물들을 그려낸다고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신비론도 포기한다. 이렇게 해서 (논고)의 전 체계가 와르르 붕괴되고 만다.

비트겐슈타인은 이제 새로운 단초를 찾아야만 했다. 이것이 (철학적 탐구)에서 행해진다. 그는 그 책에서 철학적 어려움과 "사유의 혼란"은 언어가 다의적이기 때문에 생긴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이렇게 그는 이제 언어 탐구에 눈을 돌리게 된다. 이제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논리적 명제가 아니고 일상 언어이다. 일상 언어는 가장 근원적인 현실이다. 인간은 그 속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철학도 일상 언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의존해야만 한다. 사람들은 일상 언어의 도움으로 철학의 전문 용어를 격파할 수 있다. "우리는 낱말들을 그것의 형이상학적인 사용으로부터 끄집어 내어 일상적인 사용에로 되돌려 보낸다."

언어의 낱말들이 명백하지 않은 이유는 낱말들이 등장하고 있는 맥락에 따라 그 의미가 바뀌어질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떤 낱말도 명백하게 철학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 "하나의 낱말이 어떻게 적용될는지 알아챌 수가 없다. 사람들은 낱말의 사용을 눈여겨 보고 그것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따라서 어떤 하나의 단일적인 시간이라는 개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표현은 그것이 사용되는 언어적 맥락에 따라 각기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다.

@P445

협정을 체결할 때, 시계를 볼 때, 시간의 길이를 잴 때 등 그 표현은 각기 다른 어떤 것을 말하고 있다. 요컨대 "한 낱말의 의미는 언어에서의 그 낱말의 사용이다."

여기에 철학적인 노력이 개입하게 된다. 철학은 여러 가지 가능한 의미를 해명한다. "철학은 언어라는 매개에 의해 마법에 걸려 있는 우리의 지성에 맞선 투쟁이다." 그러한 마법은 특히 사람들이 일반적인 개념, 예를 들면 무나 정신을 사물로 간주하거나, 또는 사람들이-플라톤적 의미로-모든 실제의 말이 관여하고 있는 ""의 본질이 있다고 가정하는 데 있다.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근본적인 오류이다. 사람들이 목마뿐만 아니라 목장에 있는 말에게도 적용하여 사용하는 ""이라는 낱말은 아무런 단일적인 본질을 지시하고 있지 않다. 이 경우에 결정적인 것은 같음이 아니라 다름이다. 상상했던 본질의 같음은 여러 상이한 맥락에 놓여 있는 낱말의 "가족 유사성"으로 환원된다.

그런데 낱말들이 등장할 수 있는 삶의 영역은 그야말로 다양하다. 수많은 언어에 수많은 세계가 있다. 이 언어 세계의 상이함에 따라 낱말의 의미도 변한다. 예컨대 "당신"이라는 표현은 연애하면서 말해질 때와 협박하며 말해질 때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진다. 비트겐슈타인은 그 안에서 낱말들이 각기 상이한 의미로 나타내는 것을 "언어 놀이"라고 부른다. 언어 놀이는 흡사 그 안에서 그때마다 다르게 말해지는 주변(범위)과 같다.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것을 예로 든다. "명령들, 명령들에 따라 행동한다-바라봄에 의한 또는 측정에 의한 대상의 묘사-묘사(그림)에 따른 대상의 산출-경과의 보고-경과에 대해 추측을 세워 본다-가설을 세우고 검토한다-도표와 도식으로 실험의 결과를 기술한다-이야기 하나를 창작한다, 읽는다-연극을 상연한다-가요를 부른다-수수께끼를 푼다-농담을 한다, 이야기한다-응용된 계산 문제를 푼다-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한다-부탁, 감사, 저주, 인사, 기도."

@p446

비트겐슈타인이 이해한 철학의 과제는 따라서 언어가 사유에 설치해놓은 함정을 사유가 피해 가도록 신경을 쓰는 것이다. 전통을 통해 전승되어 내려온 철학적 문제의 얽히고 설킨 무지막지한 혼란으로부터의 구제는 언어 놀이의 해명과 묘사에 달려 있다. "우리가 파괴하는 것은 단지 공중 누각에 불과하다. 우리는 언어가 서 있는 언어의 기반을 파헤친다." 따라서 철학은 아무리 버둥거려도 결국은 해결할 수 없는 그런 문제에 대한 논의가 아니다. 철학은 "실제에 있어 '순전히 기술적인것'"이다. 다시 말해 낱말들의 사용을 기술하는 것이다. "모든 설명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기술이 들어서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철학적 문제들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로써 전수된 전통적 철학은 막을 내린다. 비트겐슈타인이 끌어올린 것은 철학의 몰락인 셈이다.

@p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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