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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2/철학

철학이란 무엇인가

by FraisGout 2020. 5. 28.

1장 철학이란 무엇인가

 

1절 들꽃 철학, 밥그릇 철학

 

많은 사람들에게 철학은 낯선 것이다.

왜냐하면 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학교

교육은 온통 미국식의 실용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철학은 단지 윤리 과목의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철학과 낯을

익히고 친근해질 기회가 적다.

 

철학이 우리들에게 낯선 이유는 또 있다. 철학은 세상을 등지고 저

혼자서만 고고하게 서있기 때문이다. 철학은 지상의 흙탕물에 발을

빠트리려고 하지 않는다. 철학은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몇몇 철학자들만의 비밀스란 밀교가 되더라도 생소한 개념과 이론에 그만

책을 덮어버리기 일쑤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자. 철학이란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물론 철학 없이도 생각할 수는 있다. 그러나

철학이 있으면 생각을 잘할 수 있다. 생각을 잘할 수 없는 사람은 발전할 수

없으며, 생각을 잘할 수 없는 민족도 발전할 수 없다. 세상에는 수많은 학문과

이론이 있지만, 생각하는 것 그 자체를 가르쳐주는 것은 철학밖에 없다.

따라서 낯설게 느껴지는 철학이지만 좀더 친근해질 필요가 있다.

 

게다가 사람들이 쉼 없이 생각을 하듯이 철학은 우리의 일상 생활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철학과는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생각도 그

배후에는 철학적 사고가 놓여 있는 경우가 많다.

 

조금만 일이 잘 안 풀려도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람이 있다.

 

그것 봐요. 난 안되요. 난 그런 놈이에요. 사고치기 전에 날 가만히

내버려둬요.

 

이러한 말은 사소한 것 같지만 인생과 세계에 대한 일반론을 포함하고

있다. 그가 한 말 속에는 인간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사물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고방식도 내포되어 있는 듯하다.

아이들은 질문이 많다. 어떤 때는 아이들의 질문이 너무 철학적이어서

어른들을 당황스럽게 하기도 한다.

 

엄마, 하늘은 왜 파래요?

 

좋은 엄마가 되려면 어떻게는 이 질문에 답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세상에는 그 나름대로의 이치가 있다는 것을 하나하나 깨쳐 나간다.

이와 같이 사물의 이치를 깨쳐 나가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싹이다.

 

사실, 멀게만 느껴지는 철학도 우리의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철학은 한 부분만을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고 사물 전체를 연구한다. 그래서

일상 생활뿐만 아니라. 세상의 어떤 부분이든 철학과 관계되지 않은 것은

없다. 철학이라. 그런 것이다.

그런 철학이 온실 속의 화초처럼 저 멀리 서있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철학은 모진 비바람과 폭풍우 속에서도 예쁜 꽃을 피워내는 들꽃이야 한다.

철학은 박물관의 고려청자처럼 그저 바라만 보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철학은 부엌 한구석에 초라하게 놓여 있지만 언제나 밥을 담아 먹을 수 있는

밥그릇이어야 한다. 우리가 지금부터 시작하려는 철학은 사람들이 이제껏

돌보지 않고 뒷전으로만 밀어놓아둔 들꽃 철학, 밥그릇 철학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아, 일상 생활을 지혜롭게 살려고 해도 철학이 필요하다.

하물며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필수적이다. 좀더

진지한 생각, 좀더 올바른 철학에 의해 사회는 진보한다.

우리가 세상을 좀더 진지하고 철학적으로 고민한다면, 인간과 세상을

조금이나마 진보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얼마나 기쁘고

소중한 일인가?

 

2절 보이지 않는 손

 

철학을 공부하는 의의는 세계관을 확립하는 것 이다. 세계관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전체적이고 원칙적인 견해를 말한다. 따라서

철학에서 말하는 세계란 세계지도 나 세계일주 라고 할 때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세계란 자연, 사회, 인간 등 이 세상에 있는

것 모두를 말한다. 따라서 세계관이란 인간이 갖고 있는 사물을 보는 방식과

생각하는 태도 를 뜻한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끊임없이 세계 속에서 사물을 보고 생각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굳이 철학을 배우지 않아도 이러저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생활 속에서 저절로 터득되는 상식 이나 생활의 지혜 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상식에서 터득되는 상식적 세계관으로 철학을 대신할 수는 없을까?

만약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그 어려운 공부를 머리 싸매고 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그저

어른들 말씀이나 잘 듣고 착한 마음만 먹는다면 모든 문제가 술술 풀릴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상식적 세계관은 철학을 대신할 수가 없다. 상식의

세계와 철학의 세계는 엄밀하게 구분되어 있다. 많은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이점을 간파했다 이것을 모르고서는 철학이나 과학을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예로 애덤 스미스를 살펴보자

애덤 스미스는 근대 경제학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가

쓴 국부론 은 마르크스가 쓴 자본론 과 함께 경제학의 양대 고전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애덤 스미스가 살아 있을 당시에 그는

경제학자보다는 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그의 경제 이론은 국가의

공공정책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여튼 애덤 스미스는 경제를 움직이는 원리로 보이지 않는 손 을

주장했다.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우리가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 양조장 주인, 또는 빵

가게 주인에게 자비심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자신들의 이익을

생각하면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휴매니티가 아니라 자신의 자애심에

의하여 행동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의 필요가 아니라 그들의 이익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다.

산업이 생산물의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시도하는 것은, 오로지 그 자신만의

이득을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 경우 다른 많은 경우에서와 같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인도되어 그가 의도하지 않았던 목적을 촉진하게 된다.

 

애덤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을 최초로 서술한 것은 천문학사 에서

였는데, 그 것은 정확히 말하면 쥬피터의 보이지 않은 손(The in-visible of

Jupiter) 이라는 것이다. 각각의 개인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보이지

않는 신의 손이 각 개인을 인도하여 경제 관계의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애담 스미스는 자유방임주의가 유행하던 시대의 사람이며, 세계 최초로

산업혁명을 이룬 영국의 부르주아를 대변하던 사람이다. 그가 경제의

자연적인 조화를 신봉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애덤 스미스의 이론이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고 싶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애덤 스미스는 세계를 둘로 나누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는

보이지 않는 손을 볼 수 없는 세계고,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손을 볼 수

있는 세계다

보통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손을 볼 수 없으며 단지 보이지 않는 손에

인도되어 살고 있다. 애덤 스미스에 의하면 푸줏간 주인, 양조장 주인, 빵가게

주인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손을 볼 수는 없다. 그들은 상식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세계에 살고 있으며, 따라서 상식적 세계관만으로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손을 복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누가 그 손을 보았을까? 물론 애덤 스미스가 보았다. 또한 경제학자들이 그

손을 볼 수 있다. 애덤 스미스나 경제학자들은 경제에 관한 이론적 지식을

탐구했다. 그들은 이론적 지식에 의해 보통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이론적 지식은 상식적 세계관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보여준다. 모든 이론적 지식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 점에 있다.

상식과 생활의 지혜는 아무리 해도 이점을 뛰어넘을 수 없다.

 

앞에서는 경제학이라는 과학으로 상식과 구별되는 지식을 설명하였지만

사정은 철학에서도 마찬가지다.

독일의 대철학자 헤겔의 말을 들어보자

 

그뿐만 아니라 또한 지의 활동은 여기서 자기자신의 내면으로 복귀하는바

왜냐하면 이 활동은 타재성 속에서도 역시 자기자신과의 순수한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지의 활동은 진실로 하나의 간계라고

해야만 하겠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식으로서는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는 듯이

보이지만 실은 내용에 대한 그의 규정적 활동과 또한 그의 구체적인 생명력이

오직 자기보존과 특수한 자기의 개인적 관심만을 추구하는 듯이 보이게

하면서도 실은 그와 반대되는 것, 즉 자기자신을 해소시킴으로써 바로 그

자신이 전체를 구성하는 한 계기가 되도록 하는 행동으로 이어져 나가는 것을

눈여겨보기 때문이다.

 

역시 헤겔은 난해하다.

그러나 그가 말하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성의

간계에 의해 움직인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이성이 시키는 대로 행동한다. 그래서 헤겔은 그것을

이성의 간계라고 불렀다.

상식적 세계관망을 갖고 있는 보통 사람들은 이성의 간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살아간다. 오지 철학자만이 그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상식적 세계관만으로는 세상을 온전히 알 수 없다. 상식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을 볼 수 없으며, 이성의 간계를

알아차릴 수 없다.

철학은 상식과는 다르다. 아니, 철학은 상식과 다를 뿐 아니라 상식을

뒤집어놓는다. 철학은 구태의연한 상식에 문제를 제기한다. 철학은 상상

새로운 생각으로 충만해 있다. 상식적 세계관만으로는 새로운 생각을 전개할

수 없다. 철학은 온갖 고정관념과 타성을 깨부순다. 철학은 모든 사물을

새롭게 볼 것을 요구한다. 철학이 세상에 태어난 지는 이미 25백 년이

넘었지만 아직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그러한 새로움 때문이다.

 

상식의 세계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리 모두 그것을 한번

찾아가보자.

 

3절 그의 생각

 

그는 생각했다...

에게해로 떨어지는 붉은 해를 바라보며 그는 끝없는 상념에 잠겨들었다.

새들은 둥지를 찾아 날아가고 있었으나, 늙은 나무 등걸에 앉은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한가지 생각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난하였다. 그러나 그는 돈버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비웃으며 쑤군거렸다.

 

그는 확실히 똑똑하기는 해, 하지만 돈을 못 벌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람...

 

그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로 했다. 그는 기상을 관측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음해의 돈이 얼마

없었으나 그는 자기 지방의 올리브기름 짜는 기계의 사용권을 전부 얻어낼 수

있었다. 자신과 경쟁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싼 값으로 기게 사용권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 다음해... 올리브 농사는 정말 큰 풍년이 들었다. 그리고 기름 짜는

기계의 수요가 엄청나게 늘었다. 그는 비싼 가격으로 기름 빠는 기계의

사용권 십만원짜리를 빌려주어 큰돈을 벌었다. 말하자면 그는 대단한

투기꾼이 될 소양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이러한

것들이 아니었다.

그의 관심은 오직 한가지였다. 그것은 하늘과 땅이, 바람과 별이, 나무와

숲과 새와 동물이, 그리고 인간이- 즉 세상의 모든 사물이 - 과연 어디로부터

오는가 하는 문제가 된 것은 겉으로 드러난 사물이 아니라 사물의 배후에

숨어 있는 사물의 본질이었다.

 

그는 물었다.

 

만물의 본질은 무엇인가? 만물은 어디로부터 유래하는가? 만물의 근원은

과연 무엇인가?

 

그의 생각은 위대하였으나 그의 부모 입장은 그게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는

맨날 빈둥거리는 한심한 아들의 버릇을 뜯어고치기 위해 일단 그를

결혼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직 그럴 시간이 되지 않았어요.

 

그의 나이가 더 들자 그의 어머니는 더욱 맹렬히 공세를 퍼부었다. 그러자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그럴 시간이 지나가버렸어요.

 

그는 결혼도 마다할 정도로 자기 생각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는

별을 관측하며 길을 가다 개울에 빠지기도 하였다. 영리하고 재치있는

트라키아 하녀가 개울에 빠진 그를 조롱하였으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강렬한 에게해의 태양이 지자 어느덧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는 나무

등걸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나일강 하구에 어떻게 흙모래가 흘러와서

삼각주가 만들어지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나일강 하구의 삼각주는 결국

나일강이 쌓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눈에는 단단하게 보이는 땅도

결국 물어서 생기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다른 것들은 어떨까?

 

모든 것의 양분에는 물기가 있을 뿐 아니라 열조차도 물에서 생기며 물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더욱이 모든 종자는 물기가 있는 것이 자연스런 상태다.

따라서 물이야말로 모든 것들의 근원이 된다.

이제 드디어 자신이 사로잡았던 오랜 생각에 결론을 낼 때가 왔다.

 

물이야말로 모든 것의 밑에 숨어 있는 근원적이고 일반적인 것이다!

 

그의 이름은 탈레스다.

탈레스는 최초의 철학자로 간주된다. 탈레스는 기원전 6세기경의

이오니아의 밀레토스 지방 사람이다.

 

기원전 6세기는 인류 역사상 놀라운 비약의 시대였다. 이 시대는 이오니아,

그리스 지역에서 철학이 최초로 발생한 시기다.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는

공자와 맹자가 나타나서 유교의 기초가 만들어진 시기이며 인도에서는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가 활약한 시기다. 이스라엘, 이집트, 바빌로니아에서는

유태인 예언자가 나타났으며, 조로아스터교가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밖에

이집트왕 네코가 어부들에게 아프리카 일주 항해를 시킨 시기이기도 하다.

기원전 6세기에 수많은 사상이 동시에 만들어진 것은 매우 흥미로우며

신비하기까지 하다. 각각의 사상이 탄생하는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철학이 기원전 6세기에 지중해 변의 그리스와 이오니아에서 발생한 것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원시인들도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자연과 세계는 과연 무얼까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그들은 밤하늘의 별은 사냥꾼들이 태우는 화톳불이라고

생각했으며 은하수는 하늘의 등뼈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동물의 뱃속에 살고 있으며 은하수는 그 거대한 동물의 등뼈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에는 수렵 종족의 정서가 잘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인간의 문명이 발달해가면서 이러한 생각은 점차 색깔을 바꿔가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화톳불을 피우던 사냥꾼은 신으로 승격되었다. 신들은

저마다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가족과 친척들도 갖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모든 신들의 왕으로 제우스신을 옹립하였으며, 여신

헤라는 그의 처가 되었다. 은하수는 동물의 등뼈에서 젖길(Milky Way)

되었다. 그리스인들은 밤하늘에 펼쳐진 빛의 띠는 여신 헤라의 유방으로부터

힘차게 젖이 흘러나와 하늘을 흐르는 것이라고 믿었다. 유럽에서 은하수를

젖길이라고 하는 것은 이 전설에서 나온 말이다.

신은 자연을 움직였으며 인간의 모든 근심 걱정에 관계하기 시작했다. 신이

행복하면 인간도 행복했다. 가뭄, 폭풍우, 전쟁, 지진, 화산폭발은 모두 신의

노여움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인간은 신을 달래고 신의 환심을 사야했기 때문에 신이 노하지 않게

하기 위한 기도나 주문을 외게 되었다. 이로부터 신화와 종교적 세계관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화와 종교적세계관은 세상을 손쉽게 이해시켜주었다.

그러나 세계의 손쉬운 이해는 새로운 지식과 문명의 발전을 억제하였다. 신은

오랫동안 세상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신화적 의식에 위기가 다가왔다. 그것은 기원전 9세기에서 7세기에

이루어진 경제적 발전과 사회적 변화에 의한 것이었다.

이오니아는 수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였으며 권력의 집중이 없었다.

따라서 자유로운 연구가 가능했으며 정치적 목적으로 미신을 조장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권력을 장악한 상인들은 기술을 적극적으로 진보시켰다.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는 바로 이오니아 사람이었다.

이 시기에 그리스 또한 무역과 항해가 발달하고 부의 증가가 이루어졌다.

엄격한 계급 구분이 서서히 붕괴되고 새로운 가치관이 요구되었다. 철학은

이러한 요청에 대한 대답이었다.

 

신하는 일종의 비유다. 신화는 집단적 창조물이다. 신화는 여러 이미지가

겹쳐져 있다. 반면에 철학은 명료한 언어로 자시의 사상을 표현한다. 철학은

문제들을 얼버무리지 않고 이성의 법정으로 소환한다. 그래서 인간의 이성에

의해 가차없는 비판을 받으며 살아남은 생각만이 철학으로 존재할 수 있다.

 

탈레스가 결혼도 마다하여 생각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만물이 물로부터 발생했다는 그의 생각은 오늘날 우리들의 전다, 양자,

중성자 혹은 가설적 입자인 쿼크가 모든 것을 이루고있다 는 생각과 무척

유사하다. 한편 그의 생각은 터무니없는 이야기 같기도 하다. 그러나

탈레스의 결론이 옳은가 그런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이

사고방식이다. 그는 최초로 인간 이성에 의거해 사물을 설명했다. 시대의

요청에 철학으로 답하기 시작한 것이다.

 

철학(Philosophy) 은 그리스어에서 나왔다. 그리스어에서 phileo

사랑하다 이고 sophia 는 지혜 이다. 철학은 말 그대로 지혜의 사랑 을

뜻한다. 철인 이라고 하는 말은 높은 지혜와 참된 인생관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철학적 사고는 세계를 이해하는 데 신화적 사고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철학적 사고에는 이성과 지성이 세계 이해를 위한 견고한 토대가 된다.

사실적 관찰, 논리적 분석, 일반화, 추론, 증명 등이 신화적 사고를

세계관에서 예술영역으로 밀어내 버렸다. 따라서 신화의 역할은 사람들의

예술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에 한정된 반면에, 철학은 삶과 과학의 기준이

되었다.

 

4절 돈오돈수, 돈오점수

 

한꺼번에 단박 깨달음으로 더 이상 닦음은 필요 없는가, 아니면 깨닫고

나서도 꾸준히 닦아야 하는가.

불교사를 통틀어 가장 치열하고 화려했던 논쟁으로 손꼽히는 이 문제를

놓고 국내의 석학들이 1013일부터 12일간 전남 승주 송광사에서 치열한

학술토론을 벌인다.

이번 대회는 특히 초인적인 수행과 깊은 선지식을 바탕으로 돈오돈수를

선의 요체로 강조해온 조계종 현 종정 이성철 스님의 이른바 성철 불교 에

대한 최초의 공개적 비판이 강도 높게 제기될 것으로 알려져 교계 안팎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성철 스님은 60년부터 한국 조계종의 종조인 보조국사 지눌의 돈오점수

사상을 강도 높게 비판해왔으며 81년 한국 선사상의 일대 명저로 꼽히는

자신의 저서 선문정로 를 통해 깨닫는 그 자리에서 바로 부처가 된다 고

단언한 바 있다.

 

이 논쟁은 돈수(단박에 닦음)냐 점수(꾸준히 닦음)냐에 있지만, 우리의

관심은 그것이 아니다. 그 문제는 불교계의 문제다.

우리의 관임은 돈오에 있다. 돈오돈수의 입장이나 돈오점수의 입장이나

모두 돈오를 부정하지 않는다. 깨달음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종교의 깨달음이란 이런 것이다. 한줄기 빛이 머리속을 스치면서 갑자기

세상이 환하게 보이고 사물의 이치가 낱낱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사정은 기독교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신이 계시라는 것은 순간적인 것이다. 신의 계시가 한달이고 두달이고

일년이고 이년이고 계속되는 것을 보았나? 신의 계시란 아무리 길어봐야

으아아아...앗 하는 소리가 끝나기 전에 이루어진다.

 

철학과 종교의 차이는 바로 이것이다.

종교는 신의 계시나 순간의 각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데 반해서 철학은

이성의 꾸준한 활동에 의해 가능하다. 철학은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래서 일찍이 헤겔은 피스톨의 방아쇠를 당기듯이 철학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철학과 종교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양자는 비슷한 과제를 제시했다. 그것은 세계를 해명하는 것, 그리고 인간의

의식과 행동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 양자는 모두 독특한 하나의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차이는 크다.

종교는 신이나 성자를 내세워 세계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을 설명한다.

그러나 종교의 교리는 이것이 진리다 고 이야기할 뿐 어떠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종교는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다. 그 교리가 이성적으로 아무리 불합리하다고 하더라도 종교에서는

논리보다는 믿음이 앞선다. 따라서 자유롭고 자주적으로 생각하려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머리를 통째로 저당잡힌 셈이 된다.

종교와 철학은 초점이 전혀 다르다. 종교는 인간의 불안과 희망, 그러고

믿음의 추구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에 철학은 세계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려

한다. 따라서 철학은 세계관의 지적 측면을 가장 중요시한다.

 

과거 수천 년을 볼 때, 철학적으로 사고한 사람들과 종교를 믿었던 사람들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많았을까? 물론 종교 쪽이다. 그것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종교 쪽이 많다. 철학적 사고는 자유로운 사고라는 것이 특징이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진지하고 가장 성실한 사람만이 자유롭고 자주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도덕적 원칙과 일반적 세계관을 종교에서

찾았다. 삶이란 고달픈 것이고 운명은 언제나 가혹한 것이었다. 그러고

역사는 언제나 인간의 손을 벗어난 듯이 보였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의지한 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주적으로 생각하려는 사람들,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려는 사람들은

종교보다는 철학을 택했다. 물론 그 길은 고독하고 험한 길이다. 그러나 그

길이 힘들고 험한 만큼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의 기쁨은 그만큼 큰 것이다.

철학이라는 좁은 길 이 가지는 매력은 아마 그렇게 큰 기쁨에 있는 것이

아닐까?

 

5절 행복한 리어왕

 

리어왕은 드넓은 영토를 지배하는 왕이었다.

그는 80의 고령이었지만 머리는 은빛으로 빛나고 얼굴은 억센 혈기로

가득했다. 그러나 아무리 혈기가 왕성해도 자신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노령의 지배자는 사랑하는 세 딸에게 국토를

나누어주기로 작정한다. 그런데 여기서 리어왕은 참으로 딱한 실수를

저지른다.

그는 세 딸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들 중에서 누가 가장 나를 사랑하는지를 말해달라, 진실로 효심 있는

딸에게 특별한 은총을 내리리라.

 

그러자 맏딸과 둘째딸을 가장 달콤한 말을 동원해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맹세하는데 정작 아버지를 가장 사랑하는 막내딸을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자식된 도리로서 할 일을 다하겠습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리어왕은 노발대발한 나머지 막내딸을 쫓아내고 두 딸에게만 국토를

나누어준다. 그후 리어왕은 맏딸의 집에 머물렀는데 맏딸은 아버지를

구박하며 둘째딸의 집으로 쫓아버린다. 그러나 둘째도 역시 언니에게 돌아가

사과하라며 리어왕을 박대한다.

리어왕은 너무나 억울하고 분하여 거의 실신 상태가 되어 밖으로

뛰쳐나간다. 밖에는 칠흑같은 어둠에 폭풍과 번개가 광란치고 있었다. 그는

소리를 지르고 머리는 쥐어뜯으며 미친 듯이 벌판을 헤매었다.

리어왕 은 결국 못된 두 딸과 착한 막내딸 그리고 리어왕이 모두

죽음으로써 비극적인 막을 내린다.

이상은 영국의 위대한 극작가 셰익스피어의 작품 리어왕 의 내용이다.

그런데 여기서 리어왕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현대의 철학을 마치 불행한

리어왕 으로 비유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철학은 수많은 개별

과학에 각각의 연구 분야를 넘겨주고 이제는 개별 과학으로부터 버림받은

신세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사실 철학은 모든 학문 중에서 왕과 같은 존재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과 개별 과학의 관계를 처음으로 규정하였다. 그는

과학은 각각 자기 분야를 연구하는 반면 철학은 존재의 제1원인, 1원칙,

최고의 일반적인 근원에 관한 학문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철학을 과학의

주인 이라고 불렀다. 그는 과학을 마치 철학이라는 노예주를 섬기는 노예와

같은 존재로 보았던 것이다.

지식이 왕성하게 발전하던 19세기에 이르러 이와는 정반대되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과학은 위대하고 철학은 열등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과학이 곧

철학이라는 주장하며, 과학이야말로 인간의 이성을 괴롭혔던 복잡한 문제들을

말끔히 해결해주리라고 했다. 그들은 철학에서 왕위 를 빼앗아 시녀 로

만들었으며 철학을 불행한 리어왕 이라고 했다.

그러나 과학의 눈부신 발달에도 불구하고 철학이 답해야 할 영원한

문제들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세계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그것은 과연 조화스러운가? 진보란 어떤 것이며 그 기준은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이며 오류는 왜 나타나는가? 양심, 정의, 선과 악, 그러고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는 새롭지만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우리 사회는 과연 어디쯤 와 있는가? 우리 사회는 어디로

향해 가야 하는가? 인류 멸종의 심각한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개별 과학이 결코 답할 수 없으며 여전히 철학의

주요 임무로 남아 있다. 오히려 철학의 개별 과학의 왕성한 연구 성과로

이러한 문제에 더욱 잘 답할 수 있게 되었다. 철학은 불행한

리어왕 이라기보다는 모든 일을 잘 처리한 행복한 리어왕 이라고나 할까?

 

우리 시대 최고의 이론물리학자로 알려진 스티븐 호킹은 그의 책 시간의

역사 를 마치면서 철학과 과학의 관계를 기술하고 있다.

 

오늘날까지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우주가 무엇 인가를 기술하는 새로운

이론을 개발하는데 골몰한 나머지 왜 우주가 존재하는지 물을 틈이 없었다.

한편 왜 를 묻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과학적 이론의 발전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따라오지 못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완전한 이론을 발견하게 되면, 이것은 머지않아

누구에게나 원칙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과학자,

철학자, 일반 사람들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인간과 우주가 왜

존재하는가란 문제를 논하는 데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 답을

찾아낸다면 그것은 인간 이성의 최종적인 승리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비로소 우리는 신의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뜰에 나가 나무를 한번 바라보라. 굵은 나무 줄기에 수많은 가지가

뻗어나와 있다. 줄기만 있고, 가지가 없는 나무는 없다. 또한 가지만 있고

줄기가 없는 나무도 없다.

철학과 과학의 관계도 이런 것이다. 철학이 나무줄기라면 수많은 가지는

개별 과학이다. 줄기는 무덤덤하지만 수많은 가지에 아름다운 꽃과 열매가

열리듯이 철학에서 뻗어나온 개별 과학은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맺고 있다.

 

개별 과학은 한정된 부분을 연구한다. 그러나 철학은 세계를 전체적으로

연구한다. 역사학은 개별 과학이다. 역사학은 역사적 사실들을 연구한다.

그러나 역사철학은 역사 그 자체를 연구한다. 철학은 세계의 한 부분이

아니라 세계를 전체적으로 드러낸다.

세계를 전체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이 또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술이다.

겉보기에 예술은 철학과는 전혀 다른 것 같다. 고학은 어느 한 분야만을

연구하지만, 예술은 인간의 삶 그 자체를 이야기한다. 세계를 전체적으로

표현하는 것, 이 점이 예술과 철학의 공통점이다.

그러면 철학과 예술의 차이는 무엇일까? 철학과 예술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표현한다. 철학은 분명한 언어 로 세계를 표현하는 반면 예술은

감각적 이미지 로 표현한다.

철학과 예술은 서로 넘나들기도 한다.

위대한 철학적 저작은 흔히 문학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갖는 경우가 많다.

위대한 철학자들은 점마다 매우 독특한 문체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했다. 또한

철학자들이 아예 손걷고 예술로 나서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면

실존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철학 사상을 문학 작품으로 아주 훌륭하게 형상화

시켜 냈다.

 

2장 변증법이란 무엇인가

 

1절 해님 달님

 

옛날 옛날에 아주 먼 옛날에...

어떤 아주머니가 팥죽 한 동이를 이고 깊은 산길을 가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 아주머니가 막 산모퉁이를 돌 때, 갑자기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어흥... 하고 나타났어요. 깜짝 놀란 아주머니는 호랑이에게 두 손을 싹싹

빌며 사정을 했으나, 호랑이는 아주머니를 잡아먹고 말았어요.

호랑이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아주머니가 입고 있던 옷을 걸쳐 입었어요.

그리고는 어린 오누이가 기다리는 그 아주머니의 집으로 갔어요. 그리고는

달각달각 문을 흔들며 말했어요.

 

얘들아, 문 열어라. 엄마 왔다.

 

그러나 그 목소린 아무래도 엄마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이렇게 말했지요.

 

문짝 사이로 손을 좀 보여주세요. 호랑이는 문짝 사이로 엄마의 옷소매를

쓱 들이밀었어요. 오누이가 옷소매를 보니 그것은 틀림없이 엄마가 입고 나간

옷이었어요. 그래서 오누이는 그만 문을 열어주고 말았어요.

마침내 엄마 옷을 입은 호랑이가 집안으로 들어왔어요. 그러나 엄마의 치마

밑에는 누런 꼬리가 나와 있었어요. 깜짝 놀란 오빠는 얼른 꾀를 내어

말했어요.

 

엄마, 밖에 별이 떴나 보고 싶어요.

 

오누이는 얼른 집은 나와 잡 뒤의 커다란 미루나무 위로 올라갔어요. 잠시

후 호랑이도 집을 나와 나무 위의 오누이를 발견했어요. 호랑이가 나무위로

올라오려 하자 오빠가 꾀를 내어 말했어요.

우리는 부엌에 있는 참기름을 바르고 올라왔어요.

 

호랑이는 부리나케 부엌으로 가서 참기름을 가져다가 발랐어요. 그러자 그

모습을 보던 순진한 동생이 깔깔 웃으며 말했지요.

 

저런 바보! 나 같으면 헛간에 있는 도끼를 가져다가 나무 등걸을 콱콱

찍어서 올라오겠다.

 

이젠 정말 큰일 났어요. 호랑이가 헛간에서 도끼를 가져다가 도끼 자국을

내며 올라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오누이 바로 아래까지 올라왔어요. 오빠는

겁에 질려 하늘에 기도를 올렸어요.

 

하느님, 저희에게 동아줄을 내려 주세요.

 

아니, 그런데 하늘에서 정말 동아줄이 내려오는 것이 아니겠어요? 오누이는

그 동아줄을 자고 하늘로 올라갔어요. 나무 위에 올라온 호랑이는 똑같은

기도를 외었지요. 그러자 이번에도 동아줄이 내려왔어요. 호랑이도 동아줄을

잡고 하늘로 올라갔으나 그만 동아줄이 끊어져 떨어져 죽고 말았어요.

동아줄은 썩은 동아줄이었거든요.

하늘로 올라간 오누이는 해님과 달님이 되었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해님 달님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호랑이 때문이 아니며, 오누이 때문도 아니다.

바로 그 동아줄 때문이다.

 

정치에는 정치노선이 있고 버스에는 버스노선이 있듯이 철학도 나름대로의

방법을 갖고 있다. 방법이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길을 의미한다. 올바른

방법만이 올바른 세계관을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에 방법은 매우 중요하다.

방법이 없으면 어떠한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 어떤 물질의 화학적 구성을

알고 싶으면 우선 화학적 분석 방법을 익혀야 한다. 여론 조사를 하기

위해서는 통계학적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모든 학문은 반드시

자기 나름대로의 방법을 개발한다. 그래서 물리학의 방법이 화학의 방법과

다르고 화학의 방법이 경제학의 방법과 다른 것이다.

철학에서도 방법을 연구한다. 철학이 전체 에 관한 학문이듯이 철학의

방법은 모든 학문과 이론에 공통되는 방법이다.

 

철학의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크게 보아 변증법적 방법과 형이상학적 방법이 있다.

변증법은 dialectic 을 번역한 말이다. 같은 어원을 가진 마로는

dialog 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대화라는 뜻이다. 모두 dia 라는 접두어가

붙어 있다. 이 접두어는 분할, 구별, 분리 라는 의미와 어떤 사건에 많은

사람이 참가한다 는 의미를 갖는다. dialog log 는 말 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dialog 는 대화한다는 뜻을 가지며, 변증법도 대화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dialectic 을 말 그대로 번역하면 문답법,

토론술이라는 의미다.

그리스 사람들은 대화야말로 진리 발견의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대화의 방법을 철학의 방법으로 바꾸었다.

변증법은 모든 사물이나 개념을 상호 연관 속에서 생성, 발전, 소멸하는

것으로 고찰한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모든 사물은 연관 속에서 변화,

발전한다. 사물의 성질이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은

변증법적이어야 한다.

 

그러면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본래 형이상학(Metaphysics)은 너머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Meta 와 세계내

현상에 대한 과학인 자연학의 합성어다. 따라서 형이상학이란 세계 밖에

위치한 사물들에 관심을 갖는 학문이다.

형이상학이라는 개념은 우연히 만들어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가 죽자 그의 제자들은 그의 모든 저작을 분류하여 목록을

작성했다. 그런데 그들은 자연학 이라고 명명된 저작 다음에 정신적인

문제들을 다룬 이름이 없는 저작을 발견했다. 그들은 그것을 자연학

다음 으로, 그리스어로는 Metaphysics 로 명명하여 분류했던 것이다.

형이상학을 방법이라는 의미로 사용할 때는 변증법에 대립되는 의미로

사용한다.

형이상학적 방법이라는 것은 사물은 움직이지 않는 것, 일단 완성되면

영구히 변하지 않는 것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형이상학은 변화를 깨닫지

못하든가, 또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방법을 의미한다.

형이상학은 또한 사물을 조각조각 분리해서 바라본다. 형이상학은 무수히

연계된 현실을 고의적으로 분리한다.

 

우리가 세계에 접근하려 할 때에는 세계를 잴 수 있는 잣대가 있어야 한다.

몸무게를 재려면 저울이 있어야 한다. 옷을 맞추려면 줄자가 있어야한다.

몸무게를 줄자로 재려 한다든지, 옷을 맞추는 집에서 저울만 갖다놓는다면

곤란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변증법과 형이상학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잣대다.

우리는 어떤 잣대를 사용해야 할까?

이것은 마치 우리 앞에 두 개의 동아줄이 내려와 있는 것과 같다. 어떤

동아줄을 잡겠는가? 썩은 동아줄? 아니면 튼튼한 동아줄? 우리는 일단

튼튼한 동아줄이라고 생각되는 변증법을 붙잡고 시작해보자.

 

이 책에서는 방법의 문제, 변증법의 문제를 동아줄에 비유하고 있는데,

서양에서는 옛부터 그 문제를 아리아드네의 실고리 에 비유해왔다.

그 이야기는 그리스, 로마 신화 중에서 테세우스 이야기에서 나온다.

 

테세우스는 아테나이왕 아이게우스와, 아이트라라고 하는 트리이젠왕의 딸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 아이가 아직 태어나기 전에

아이트라와 헤어지게 되었는데, 그의 칼과 신을 돌 밑에 놓고, 아이가 크고

힘이 세어져서 그 들을 굴리어 그 물건을 꺼낼 정도가 되거든 자기에게

보내라고 일러두었다.

테세우스는 장성하자 어렵지 않게 돌을 움직여 칼과 신을 꺼냈다.

그는 마침내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데, 도중에 수많은 모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많은 악당들을 만난다.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가 그 유명한

프로쿠르스테스였다. 그 이름의 뜻은 영어의 stretcher(늘리는 사람)

해당한다. 그는 쇠침대 하나를 가지고 있는데, 자기가 잡은 나그네를 그 위에

잡아맨다. 만을 침대보다 키가 작으면 거기에 맞도록 손발을 잡아 늘렸다.

만일 길면 긴 만큼을 잘라내버렸다. 테세우스는 그 프로크루스테스를 잡아다

그가 딴 사람들한테 한 그대로 해주었다.

그는 결국 아버지를 찾아가 후계자가 된다.

그때 아테나이인은 크레타왕 미노스에게 바쳐야 하는 산 제물 때문에 무척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 제물이란 7명의 소년과 7명의 소녀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미노타우로스라고 하는 황소의 몸뚱이에 사람의 머리를 한 괴물의

먹이로 바치기 위해 해마다 보내는 것이었다.

이 괴물 매우 영맹한 짐승으로, 다아달로스라는 사람이 만든 미궁 속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그 미궁이 또한 대단히 복잡하게 만들어져서, 누구라도

한번 그 안에 갇히면 세상없어도 출구를 찾아낼 수 없었다. 미노타우로스는

끔찍스러운 소리로 으르렁대면서 사람의 제물을 먹으며 살고 있었다.

테세우스는 자청해서 산 제물의 하나가 되었다. 이윽고 크레타에 도착하자,

소년과 소녀들은 미노스왕을 배알하였다. 그런데 왕의 딸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를 보고 그를 깊이 사모하게 되었다. 아리아드네는 그에게 괴물을

찌를 칼과 실뭉치를 하나를 주었다. 그 실뭉치만 있으면 미궁의 출구를

알아낼 수 있는 것이었다.

테세우스는 실고리를 늘어뜨리고 미궁 속에 들어가 괴물을 감쪽같이

처치하고 그 실고리를 따라 미궁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아리아드네와 제물로

죽을 뻔한 소년, 소녀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이야기로부터 아리아드네의 실고리 는 방법의 문제를 뜻하게 되었다.

책에서 곧이 실고리보다 동아줄을 쓴 이유는 한국적인 예를 찾으려 한 점도

있지만, 실고리보다는 동아줄이 얼마는 튼튼하고 좋은가?

 

2절 미인의 기준

 

시대마다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이상은 그 시대의 시대적 토대의

성격에 의해서 좌우된다. 요컨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도덕 관념이 없는

것처럼 절대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개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관념은 수천 수백 가지지만 그러한 것은 도덕과

마찬가지로 항상 시대 그 자체 속에서 자신의 명확한 기준을 가진다. 결국

도덕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에 대한 관념도 각각의 문화를 형성하는 데

필요하며 각각의 문화와 분리할 수 없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우아함이라든가 사랑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자태를 사랑했다. 이미

이야기했던 것처럼 여성은 비너스와 동시에 유노여야 했는데 가슴이

부풀어오르고 팽팽한 여성이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여겨졌다. 그 때문에

처녀들도 일찍부터 유방이 큰 것을 자랑했다. 브랑톰은 늠름한 체격의 여성,

즉 크고 당당한 몸매, 부풀어오른 큰 유방, 통통한 허리, 포동포동한 엉덩이,

거칠게 달라붙어 거인을 탈진시킬 수 있을 정도의 힘찬 팔과 튼튼한

허벅다리를 가진 여성을 가장 아름답다고 칭송 그리고 그는 이러한

여성이야말로 진실로 아름다운 여성이었고 왕녀다운 여성이었다고 한다.

풍속의 역사 는 민중의 눈과 글을 통하여 각 시대의 풍속과 그것에

대응하는 상부. 하부구조를 분석함으로써 민중을 역사 발전에 주체로 바라본

유럽 최초의 과학적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에두아르트 폭스는 이 책에 의해 문명사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위에 인용한 그의 글이 약간 야하더라도 이해하고 넘어가자.

사실 나는 이 책에서 점잖은 표현을 찾아내느라고 상당히 애를 먹었다.

 

확실히 예전과 지금의 아름다움의 기준은 다른 것 같다.

루벤스나 르노아르의 누드화를 볼 것 같으면, 날씬한 아가씨가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니고 웬 뚱뚱한 아줌마들이 그려져 있지 않은가? 그 아줌마들의 배는

임산부들처럼 불룩하게 나와 있으며, 그들의 다리는 마치 축구 선수의

다리통처럼 굵다.

옛부터 말하기를 춘향이가 곱다지만 그것도 그 시대 사람들의 아름다움의

기준에 의한 것이다. 춘향이가 지금 태어났더라도 옛사람들이 말한 대로 정말

그렇게 고울까? 어쩌면 그저 동글 넓적하고 펑퍼짐한 평범한 얼굴일 수도

있다. 불행하게도 그 유명한 춘향이 사진이 남아 있지 않아 확인할 길이

없다.

사람들은 황x혜가 예쁘다고들 한다. 그러나 반대로 황x혜를 루벤스 앞에다

데려다놓으면 뭐라고 할까?

 

이렇게 삐쩍 곯아서 어디다 써먹겠어? 모델이 이렇게 시원치 않아서야

어디 그림 그릴 맛이 나야지. 에잉...

 

동서고금의 미녀들을 다 데려다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무얼까? 그것은

상식적인 생각으로는 잘 변하지 않을 듯한 아름다움의 기준도 시대를 따라

변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변화하는 것은 아름다움의 기준만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화한다.

 

변증법의 가장 첫 번째 원리는 세계는 변화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물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은 운동이다.

 

그러면 세계의 변화를 살펴보자.

먼저 우주를 생각해보자.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우주는 아무런 변화도 겪지

않았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아주 오래 전부터 수많은 별이 생성, 발전

소멸되어갔다. 또한 우주는 끊임없는 팽창을 거듭하고 있다.

우주의 일부인 지구만 해도 그렇다. 단지 불덩어리였던 은하계의 변두리에

불과하던 지구에 바다가 생기고, 식물이 살게 되었고, 산소가 만들어지자

수많은 생물들이 탄생했다.

지구의 생물들도 아메바와 같은 가장 단순한 생물로부터 어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 등으로 변화, 발전해 나갔다. 그래서 마침내 진화의 기적이

일어났다. 인간이 탄생한 것이다.

인간 사회도 끊임없는 변화, 발전을 거듭해 높은 수준의 문명에까지

이르렀다.

 

건전한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세계가 변화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인간이 감지하기 힘들 정도로 변화의 속도가 느린 것들도

많다. 그러나 인간이 감지하기 힘들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변화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세계가 변화한다는 것은 전파망원경으로 우주를 관측하지 않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어느새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고 새로운 상품들이 쏟아져 나오며,

새로운 사람들이 길거리를 메우고 있다.

 

어렸을 때 살았던 동네에 가본 일이 있는가?

우리는 흔히 어렸을 때 살았던 곳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멋진 집들, 크고

넓은 길, 우람한 가로수... 그러나 오랜만에 찾아간 어린 시절의 동네는 왜

그리 작고 초라한지. 그러면 나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그동안 내가 많이 컸군.

 

그렇다. 나도 변화했다. 나도 변화하고 너도 변화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변화한다. 또한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 변화한다. 변화의 세찬 물결을 거스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면 이렇게 단순하고도 명쾌한 진리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는가? 있다.

누군가? 너무 빠른 사회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 흘러가는 젊음을

아쉬워하는 사람들, 더 이상 병세가 악화되지 않기를 바라는 환자들은 변화를

부정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말고 또 있다. 그러면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기존의

사회관계로부터 부당한 특혜와 특권을 누리는 자들이다. 그들로서는 변화를

인정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보수주의 진영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보수주의는 진정한 현실주의가 될 수 없다. 아무리 위대한

보수주의자라고 하더라도 변화하는 세계를 보수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모든 사물은 변화한다. 그런데 모든 사물은 단지 변화할 뿐만 아니라

발전한다.

발전이란 훨씬 더 새롭고 훨씬 더 수준 높은 것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것이며 낡은 것이 쇠퇴, 소멸하는 것을 말한다. 발전하는 새롭고 수준 높은

것이 승리하난 이유는 새로운 것이 낡은 것의 뛰어난 점을 이어받아 낡은

것의 결점을 극복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새로운 내용을 더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새롭고 수준 높은 것은 사물의 발전 법칙에 합치하는

것이고, 따라서 새로운 조건에 적응한다.

 

생물의 진화는 사물의 발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생물계에서는 새로운 종자가 탄생한다. 새로운 종자는 낡은 종의 뛰어난 점을

극복하는 새로운 성질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이 하여 생물은 세대와 세대를

이어가면서, 단지 변화할 뿐만 아니라 발전한다.

새로운 것은 처음에는 미약하고 잘 눈에 띄지 않고 사소하다. 반면에 낡은

것이 우세하고 주도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새로운 것은 끊임없이 발전하여

커지는 반면에, 낡은 것은 시간이 갈수록 타락하고 사멸해간다. 왜 그럴까?

새로운 것들은 사물의 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며, 객관적 조건에 잘

들어맞는 것들이다. 이와 같이 사물은 단순히 변화할 뿐 아니라 발전한다.

 

모든 사물은 변화, 발전한다. 따라서 어떤 사물을 온전히 파악하려면 그

사물의 변화, 발전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 체중이 80Kg인 사람이 둘 있다. 한사람은 70Kg이었다가

80Kg으로살이 찐 사람이 있다. 또 한 사람은 100Kg이었다가 80Kg으로

살이 빠진 사람이다. 누군가 아무런 생각 없이 많이 찌셨군요. 했다가는

실수하기 딱 알맞다.

모든 사물은 변화, 발전하기 때문에 사물을 잘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 사물

을 역사적인 발전 과정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변화와 발전의 역사적 관점,

것은 변증법과 형이상학을 가르는 가장 3주요한 시금석이다.

 

여기 사과 한 개가 있다.

형이상학적 관점에서는 이 사과를 어떻게 탐구할까? 형이상학적

탐구에서는 우리는 이 사과의 모양과 색을 묘사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의

성질들에 대한 목록을 작성할 것이며, 그것의 맛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우리는 그 사과를 배와 비교하여 그것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알아내고, 마침내

사과는 사과고 배는 배다 라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이것은 단지 사고에 대한 형식적인 탐구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이

탐구에서는 사과에 대한 역사적 관점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사과를 변화와 발전의 역사적 관점에서 탐구해야 한다. 우리는

잘 익은 사과는 언제나 그것 자체로 존재해 있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풋사과이기 전에, 그것은 꽃봉오리였다. 그래서 우리는 봄철의

사과나무 상태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또한 잘 익은 한 개의 사과는 그대로 남아 있지는 않는다. 만일 사과가

땅에 떨어져 적당한 온도와 수분이 있다면 그 사과는 새로운 사과나무로 자랄

것이다. 따라서 이 사과는 과거에 사과로 존재하지는 않았으며, 앞으로도

사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변증법은 한 개의 사과를 과거의 사과와 미래의 사과 사이에 하나의

이행기로 파악한다.

 

사회를 볼 때에도 마찬가지다.

형이상학적 관점을 취할 때, 우리는 언제나 빈부의 격차가 있었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우리는 재벌과 졸부가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을 들을 것이다. 또한 이 사회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을 들을 것이다. 또한 이 사회와 다른 사회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비교하며,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다 는 결론을 얻을 것이다.

변증법적 관점에서는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는 언제나 그것 자체로

존재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알게 되며, 자본주의가 영구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본주의 역시 과거에서 미래로의 한 이행기에 불과할 뿐이다.

 

3절 장맛과 공부

 

옛부터 우리네 살림에는 이런 말이 있어왔다. 장맛 좋은 집 애가 공부

잘한다는 말이다.

무슨 말일까. 결코 딴 이야기가 아니다. 우선 장맛이 놓으면 반찬 맛이

놓을 것이고 반찬 맛이 좋으면 밥맛도 좋게 될 것이므로 이 때문에 애들이

군것질보다는 밥을 잘 먹을 것은 뻔한 이치다. 따라서 밥 잘 먹는 애들이

건강하게 자랄 것은 나무나 당연하고 또한 이렇게 건강하게 자란

애들이야말로 공부도 잘할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실지로

우리네 된장, 간장, 고추장에는 사람의 골에 영양을 주는 특수 영양분이 들어

있는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장맛이 좋다면... 그것을

먹은 애가 머리가 좋아 공부를 잘하게 될 것은 그야말로 과학적 이치라

하겠다.

그래서 우리네 살림에서는 며느리 감을 고르되 이왕이면 얼굴 생김새나 그

품성보다도 장을 잘 담그는 집에서 들어오기를 간절히 원해온 전통이

있어오는 터다.

뿐만 아니라 일단 시집을 가서 자식새끼를 낳아 기르는 아낙네들은 다투어

장맛을 유별나게 내려고 애를 써온 것이니 이것이 모두 자식에 대한 사랑,

어서 잘 먹고 잘 자라 공부도 잘 하라는 에미 애비의 사랑의 열매였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었다. (백기완 우리 겨레 위대한 이야기 )

백기완의 구수한 이야기는 재미있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위에서 든 장맛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장맛 이야기는 우리네 풍습을

말해주기도 또 한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세상이 이렇게까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장맛 이야기의 연관성을 살펴보면 이렇다. 장맛 -> 반찬맛 -> 밥맛

-> 애들 건강 -> 애들 공부 잘함. 이렇게 언뜻 보면 관계가 없어 보이는

것들도 수많은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보았을 때 사물들 사이의 연관은 보편적이다. 세상의 어디를

둘러봐도 모든 사물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원자들이 모여 (연관되어) 분자를 형성한다.

또한 분자들이 여럿 모여 우리 눈에 보이는 물체를 형성한다. 모든 물체는

서로 잡아당기는 힘이 있다. 이를 만유인력이라고 한다. 옛말에 옷깃만

않아도 인연이라고 했다. 하지만 옷깃도 닿지 않고 멀리 지나가는 사람도

인연이 있다. 저 사람과 내가 서로 잡아당기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저

사람이 나한테 끌려오지는 않는다. 지구의 중력이라는 더욱 강력한 힘이

우리를 잡아당기고 있기 때문이다. 먹이사슬은 생물들 사이의 연관관계를

나타내준다. 먼저 먹이사슬의 맨 아래는 광합성 작용을 하는 식물이 있다.

위로 풀을 뜯어먹고 사는 풀벌레나 초식 동물이 있다. 그 위로 다른 동물을

잡아먹고 사는 호랑이, 사자, 늑대와 겉은 육식 동물이 있다. 그 위에 인간이

있다. 그러나 동물이나 인간은 죽어서 식물의 거름이 되니 돌고 도는 관계가

아닐 수 없다.

 

사회로 눈을 돌려보자.

우리 사회는 무수히 많은 일을 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노동자, 농민,

학생, 정치인, 교사, 언론인 등등이 그들이다. 이들 많은 사람들은 서로

밀접한 연관을 맺고 살아가고 있다.

지하철 노동조합이 파업을 했을 때 우리 모두가 지하철의 노동자와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 쉽게 느꼈을 것이다. 교육 민주화나 언론 민주화는

교사나 언론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학부형이거나

학생으로서 교육에 연관되어 있고, 정보 서비스를 제공받는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특히 모든 사람의 이해관계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정치인들의 나태와 무능은 고스란히 서민 대중의 어깨 위로 전가된다. 선거

때 돈을 마구 뿌리는 정치인은 자신이 투자한 것 이상으로 수익을 올리려 할

것이다. 돈을 뿌리는 것은 사실 서민의 호주머니를 털기 위한 전초전에

불과할 뿐이다. 이제는 정치를 올바르게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민중 스스로가

팔 걷어붙이고 나서는 방법밖에는 없다.

 

환경 문제는 사물의 연관성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주택가에 들어와

있는 연탄 공장의 분진으로 주민들이 진폐증에 걸리기도 한다. 한강 상수원의

오염이 서울 시민 모두를 불안으로 몰고 간다. 그러나 환경 문제에서

연관성은 이보다도 훨씬 더 광범위하고 무차별적이다. 온산이나 울산의 공장

폐수는 바다로 흘러들어가 일본의 동경 앞바다로, 호주의 시드니 항으로,

미국의 샌프란시스코로 흘러들어간다.

온산이나 울산의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그 오염된 바다에서 나오는

물고기를 먹고산다. 미국의 포드 자동차 공장의 굴뚝에서 나오는 매연은

하늘로 올라간 뒤 산성비가 되어서 뉴욕에도, 북구의 삼림에도, 서울 하늘에도

무차별적으로 내린다. 가장의 냉장고에 쓰는 프레온 가스가 이미 지구의

오존층에 구멍을 뚫었다.

이렇게 광범하고 무차별적인 연관성 때문에 환경 문제는 진정으로 인류

모두의 문제가 되었다.

사물의 연관성을 잘 나타내주는 예로는 나비 효과 라는 것이 있다.

기발하기는 하지만 수학적으로 엄격하게 증명되고 또한 실험적으로 증명된

법칙에 의하면 아마존의 정글에서 날개를 파닥거리는 나비는 몇 주일 후 또는

몇 달 후 시카고의 날씨를 바꿀 수 있으며 또한 사실상 바꾸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나비 효과라고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연과 사회의 모든 사물은 상호 연관되어

있다. 변증법은 사물은 연관되어 있다 는 것을 사물을 인식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사물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입장은 대체로 비과학적이거나 혹은 부당한

정치적 의도가 개입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노동자는 노동자고, 정치는 정치다. 노동자와 정치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

따라서 노동자 자신의 본분인 노동을 열심히 하고 정치인은 자신의 본분인

정치를 열심히 하면 돼. 그러면 만사형통이야. 아아! 내가 생각해도 정말 옳은

소리 같군. 역시 나는 머리가 좋아. 이런 진리를 나 혼자서만 알고 있으면

말도 안돼. 그럼 이걸 아예 법으로 만들어버리면 어떨까?

이 말은 단지 농담이 아니었다. 우리나라는 노동조합의 정치 활동을 법에로

금지하고 있는 세계에서 몇 안되는 나라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조합의 정치활동 금지는 그 자체로 노동자와 정치가 얼마나 밀접히

연관되어 있나를 보여주고 있다.

만약에 노동조합이 정치 활동을 한다면 자연히 일하는 사람들이나 서민

대중의 이익을 대변할 것이고, 지금과 같은 가진 자들만의 정치나 가진

자들만을 위한 정치는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노동조합의 정치 활동은 정치적으로 매운 민감한 문제이며, 그만큼 노동자와

정치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부당한

정치적 의도로 사물의 연관성을 주정하는 의견이 있다면 재빨리 간파하고

막아야 하는 것이다.

 

변증법에서 어떤 부분을 전체와의 연관 속에서 바라보는 것을 구체성이라고

한다. 반면에 사물을 고립된 개별자로 바라보는 것을 추상성이라고 한다.

모든 사물이 연관되어 있음을 고려한다면 구체성만이 우리를 진리로 인도할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의 두뇌를 연구하는 두 사람의 의학박사가 있다고 하자.

그중에서 사물을 추상적으로 보는 추 박사는 인간의 두뇌를 여러 개

구해서 연구를 사직했다. 반면에 사물을 구체적으로 보는 구 박사는 인간의

두뇌뿐만 아니라 두뇌와 관계된 신경계통, 장기계통, 근육계통을 모두

구했으며, 그밖에 원숭이 등의 포유류의 두뇌를 구해 연구를 시작했다. 만약

우리가 두 사람의 연구 성과를 놓고 내기를 건다면 당신이라면 어디에

걸겠는가? 나 같으면 두말 않고 구 박사 쪽으로 걸겠다. 그것은 물론 구

박사의 구체적 사고방식 때문이다. 인간의 두뇌를 연구한다고 해서 인간의

두뇌만 가지고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인간의 두뇌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인간의 신체 전체와 어떠한 연관을 맺고 있는지를 먼저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사물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만약 우리가 사물의 연관성을 무시한다면 사물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가질

수 없을 뿐 아니라 현실에 대해서도 잘못된 행동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모든 사물은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철학적 견해를 변증법이라고 한다. 이에

반해 사물이 고립되어 있다고 보는 철학적 견해를 형이상학이라고 한다.

라이프니츠는 17세기 독일 사람으로서 중세 철학의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라이프니츠는 어려서부터 신동이었으며, 혼자서 그 어려운 라틴어를 익혔다.

그는 이미 21세에 교수직을 제의 받았으나 거절하였다. 그는 하노버 왕가를

보필하며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주로 외교적 활동을 담당하였는데 그밖에

왕실 도서관장직을 맡았으며 학술원 건립 등에도 관계하였다.

그토록 다방면에 바쁜 사람에게 학문 연구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다음 이야기는 그가 도서관장직을 맡았을 때의 이야기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좋은 도서관장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누군가 독특한 생각을 갖고 책을

빌리러 오면 그는 극도로 성을 냈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하노버 왕가의 여사 서술을 위임받았다. 물론 그는 사료들을

바탕으로 하여 왕가의 몇몇 중요한 사실들을 정립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뒤 그는 보편성을 상실하고 있다. 그는 하노버 왕가의 역사는 그

가문이 지배하는 토지의 역사와 무관하게 고착될 수 없으며, 그런 이유에서

여하한 역사적 노력에 앞서 우선은 지질학을 다루어야 한다고 논변한다.

그러나 그것도 그의 성에 차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노버가의 특정한 영토는

말할 것도 없이 지구의 한 부분이며, 따라서 무엇보다도 지구의 발생사를

탐구해야 하지 때문이다.

그래서 하노버가의 이 역사가는 그에게 그럴싸해 보이는 논리적 귀결에

따라 지구의 근원사를 기술하게 되었다.

그가 구체적인 역사를 아주 미약한 정도로만 다룬다는 사실이나 왕이

끊임없이 그 작업의 진행을 재촉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느 선제후에게나 발생보다는 자기 가문의 명예가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하기는 라이프니츠의 논리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그는 하노버

왕가의 역사 -> 지질학 -> 지구의 역사 로 계속 환원해갔다. 그의 논리대로

한다면 지구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우주의 역사를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식으로만 생각을 계속해 나간다면 개별적인 문제는 모두 없어지고

온통 우주의 역사만 남게 되지 않을까?

예를 들어 어린이는 어떻게 성장하는가? 라는 문제를 생각해보자.

우리가 라이프니츠의 논리를 따른다면, 어린이의 성장-생물의 성장-생물의

진화과정-지구의 발생사- 우주의 발생사- 로 되어 처음 생각했던 어린이의

성장은 없어지고 우주의 역사만 남게 되어버린다.

 

그러면 라이프니츠의 잘못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사물의 연관성만을 일면적으로 강조하고 사물이 연관되지 않은

측면을 간과해버린 점이다. 이와 같이 사물이 연관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연관되자 않은 것을 철학적으로는 상대적 독립 이라고 한다. 상대적 독립은

사물이 아무런 관계도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절대적 독립과는 다른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물의 연관은 매우 복잡하며 각각의 사물이

연관된 정도도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사물이 매우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경우도 있고, 서로 상대적으로 독립되어 느슨하게 연관된 것도

있다.

 

이 세상의 무수한 연관 중에서 어떤 특수한 연관을 법칙이라고 한다.

법칙은 먼저 지속적이고 반복되는 연관이어야 한다. 그리고 본질적이고

필연적인 연관이어야 한다.

실험실에서 무수히 반복되는 실험, 밤을 밝히는 연구소의 연구, 가설,

이론과 실천 등등이 사실은 모두 사물의 법칙을 알아내려는 노력이다.

오랜 역사적 노력 끝에 인류는 수많은 법칙을 발견해냈다.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 진화의 법칙, 만유인력의 법칙, 수요와

공급의 법칙 등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이와 같이 사물의 법칙을 밝혀내는 것과 같은 과학적인 성과도 사물은

연관되어 있다는 변증법적인 철학에 기초해 있어야 올바른 성과를 낼 수

있다.

 

3장 변증법의 법칙

 

1절 참는 것과 싸우는 것

 

고통스런 일이 있어도 참아내라.

슬픈 때도 모르는 듯, 말없이 일하거라.

그렇게 해야 윗사람들의 인정을 받는다.

상경 열차 창밖으로

메아리치던 어머니의 목소리

그 소리에 젖어 일만 하였다.

아버지 없는 집안에 너...

잔업에 철야에

어머니의 간절한 소원을 위하여

오손도손 평온한 가정을 위하여

하지만 어머니!

산다는 것은 참는 것뿐이란 말입니까!

동료들은 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머니 저는 어찌하란 말입니까?

 

지방에서 올라온 어떤 처년 노동자가 쓴 것이다. 한 노동자의 고민을 잘

표현한 좋은 시다.

아마 인간답게 살려고 하는 노동자라면 한번쯤은 이러한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그래서 이 노동자의 절규는 그만큼 우리 가슴에 와닿는다.

 

이 청년도 청운의 꿈을 품고 도시로 나왔을 것이다. 돈을 벌어 늙으신

부모님도 좀 편안하게 모시고, 돈 때문에 못다 한 공부도 열심히 노력하면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이 청년이 생각하는 것과 같지

않았다. 이 세상은 정직하게 살려는 사람에게 언제나 손해 보게 하는

세상이었다. 이 청년의 마음속에서 점점 불평등한 사회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마음이 싹텄다. 그러나 그 일에는 또 다른 벽이 있었다. 그것은 인간답게

살려는 사람들이 극복해야 하는 고뇌에 찬 내적 갈등이며, 억압자들의

탄압이다. 그래서 이 청년은 갈등하는 것이고 그 갈등이 이 시를 낳았다.

 

이 청년 노동자의 마음속에는 크게 대립하는 것이 있다.

참는 것 싸우는 것 이 그것이다. 이 청년의 마음속에 있는 두 대립물은

상호 투쟁하고 있다. 만약에 참는 것이 더 우세하다면, 이 청년은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의 대열로 나설 것이다. 이 청년은 마음속의 갈등을

통해서 자신의 의식을 발전시켜 나간다. 의식의 발전은 그냥 오는 것은

아니다. 참는 것과 싸우는 것의 갈등을 통해서 온다.

대립물의 갈등을 통해서 변화, 발전하는 것은 이 청년의 마음만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사물이 대립물의 갈등을 통해 변화 발전한다.

인식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그것이 하나를 둘로 나누는 데 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물을 둘로 나누어야 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사람을 잘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둘로 나누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그것을 선전과 선동으로 나눈다. 선전이 사회 구조의 모순에 대해

총체적으로 설명을 해내는 것 이라면, 선동은 대중의 정서와 지역적, 역사적

특성을 고려하여 사회의 모순에 대해 구체적이고 생생한 폭로를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놓고 진실을 위해 우뚝 서도록 만드는 것 이다.

따라서 같은 주제도 선전을 할 것인가 선동을 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며, 사람을 설득하는 문제의 시작이다.

전쟁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려면 역시 그것을 둘로

나누러 보아야 한다. 전재의 승패를 결정짓는 전체적인 방침을 전략이라고

하고, 전쟁의 한 부분인 전투의 승패를 결정짓는 방침을 전술이라고 한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전략과 전술을 잘 나누어 전쟁에 임해야 한다.

예를 들면 전술적 패배 라는 것이 있다. 적을 유인하거나 방심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패배하는 것이 전술적 패배다. 그러나 전술적 패배는 전략적으로 더

큰 승리를 얻기 위한 것이다. 만약 전략과 전술을 나누지 않아 전술적 패배를

활용하지 않는다면 전략적으로 손해다.

 

인식은 무엇보다도 현상과 본질의 분리로부터 시작한다.

오직 그러한 분리만이 사물의 내적 연관과 사물의 특수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식이 하나를 둘로 나누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물이 그렇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은 그 사물 내부에 대립물을 갖고 있다. 모든 사물은 그 사물의

대립물의 상호 의존과 갈등에 의해 변화하고 발전한다. 그것을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 이라고 한다.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은 변증법의

가장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법칙이다. 말하자면 변증법의 핵심인 것이다.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이 사물의 변화, 발전의 원인을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앞에서 모든 사물의 변화, 발전은 변증법의 가장 기본적인

관점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은 왜 사물이 변화,

발전하는가 를 설명해준다. 따라서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은 변증법을

관통하는 가장 근본적인 법칙이 되는 것이다.

 

변증법에서 말하는 대립물이란 이상 생활에서 쓰는 의미나, 논리학에서

말하는 논리적 대립물과는 다르다.

일상 생활에서는 대립한다 고 하면, 서로 사이가 좋지 않거나 반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논리적 대립물은 상호 배척하는 개념이나 명제를 말한다.

예를 들면, 희다 의 논리적 대립물은 희지 않다 이다. 논리적 대립물은

사고의 혼란을 피하기 위한 논리적이고 형식적인 구분을 뜻한다.

 

반면에 변증법에서 말하는 대립물이란 사물의 내부에서 나타나는 실제적인

대립물을 말한다. 변증법적 대립물은 상호 전제하고 서로에 대해

의존적이어서 하나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남성과 여성을 살펴보자.

인간이라는 사물은 남성과 여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양자는 서로

전제하는 관계다. 여성이 없는 남성은 남성이 아니다. 여성이 없는 남성은

단지 인간일 뿐 남성이라고는 할 수 없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또 다른 예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를 들 수 있다.

노등자가 없이는 자본가가 있을 수 없다. 자본은 스스로 가치를 생산할

수는 없다. 자본은 살아 있는 노동과 결합할 때만 이윤을 낳을 수 있다.

따라서 자본가는 노동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반대로 자본가가 없다면

노동자는 자본주의 임금 노예로서의 역할을 그만둘 수 있다. 그때에도

노동자는 일을 계속하겠지만 그때의 노동자는 자본주의적 임금 노동자가

아니다. 이러한 관계를 철학적으로 대립물이라고 한다.

 

대립물은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다.

자연 현상에서 인력과 척력, 원심력과 구심력도 대립물이다. 생명 현상에서

동화와

이화, 섭취와 배설도 대립물이다. 그밖에도 대립물은 많다. 사는 것 과

죽는 것 도 대립물이다. 긍정과 부정도 대립물이다. 사랑과 미움도

대립물이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이 참는 것과 싸우는 것도 대립물이다.

그러나 도처에 대립물이 있다고 해서 아무거나 대립물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대립물은 반드시 한 사물 안에서 대립하는 경향을 지닌 것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연탄과 컴퓨터 라든지 사랑과 호떡 같은 것은 대립물이

아니다.

 

대립물은 통일되어 있다. 왜냐하면 대립물은 언제나 한 사물의 내부에

공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립물은 상호 투쟁한다. 왜냐하면 대립물은 말

그대로 대립하는 경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한 사물의 내부에 상호 의존하고 상호 투쟁하는 경향을 갖는

것을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 이라고 한다.

 

여기서 물 한 컵이 있다고 하자.

컵에 든 각 물분자 사이에는 응집력과 분산력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한편의 힘이 다른 한편의 힘을 물리치면 이물은 새로운 액체로부터

고체로 이행한다. 그리고 분산력이 승리하면 이 물은 액체로부터 기체로

이행한다.

따라서 물은 내적으로 대립하는 힘의 투쟁에 따라 그 형태가 결정되며,

상태의 변화도 대립하는 힘의 변화에 따라 설명된다. 이와 같이 대립물은

일정한 시점에서 서로 역의 위치로 전화할 때 특히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일정한 조건이 이루어지면 대립물은 상호 전화한다. 응집력과 분산력의 산호

전화에 의하여 물의 상태가 변화했다. 이와 같이 사물은 대립물의 상호

전화에 의하여 변화, 발전한다.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을 모순이라고도 한다. 요즈음은 모순이라는

표현이 더 자주 쓰이고 있다. 이제 모순에 대해 알아보자.

 

2절 창과 방패 이야기

 

옛날 중국에서 한 상인이 사람들을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었다.

 

소란한 장터에서 잠시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고대 중국의 첨단

과학으로 만든 신무기로 여러분을 모시겠습니다. 이런 기회는 자주 있는 것이

아니예요. 이건 정말 없어서 못 파는 물건입니다. 일단 잡아두세요. 새로

개발된 이 창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는 만능 창입니다.

일단 전쟁터에 나가서 사용해보세요. 만약에 이 창으로 못 뚫는 방패가

있다면 가지고 오세요. 돈으로 전부 보상해 드립니다. , 그리고 또

있습니다. 이 방패로 말할 것 같으면, 어떤 창도 막을 수 있습니다. 품질이

확실히 보증한다는 뜻에서 여기 보증서를 첨부하겠습니다. , 다시없는

기회입니다. 이제 몇 개 남지 않았어요. 먼저 잡는 사랑이 임자예요.

 

길가던 사람이 그 말을 듣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에끼 여보슈. 그 창으로 그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겠소?

 

그러자 그 무기 상인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달아나버렸다고 한다.

무기 상인의 말은 불합리 를 내포하고 있다. 그 창으로 그 방패를 찌러보면,

창에 대한 선전이나 방패에 대한 선전에서 어느 한쪽은 틀리게 되어 있다.

만약에 그 창으로 그 방패를 찔러 반쯤 뚫어진다면 어떨까? 반쯤 뚫어진 것은

뚫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아무튼 그 상인의 말은 틀렸다.

 

이 중국의 고사에서 나온 말이 모순이다. 모란 창이라는 뜻이고, 순이란

방패라는 뜻이다. 그래서 모와 순을 합해 모순이라고 하면 불합리하다 는

뜻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철학에서 사용하는 모순의 뜻은 그러한 것이

아니다.

철학에서는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을 다른 말로 모순이라고 한다. 모순 은

보편적이다. 사물이 있으면 반드시 모순이 있다.

 

가장 단순한 운동인 장소의 이동도 모순에 의해 설명된다. 지금 우리가

차를 타고 신나게 달리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차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자신의 현재의 위치에 대해 투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동차는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있는 동시에 없다는 것에 의해서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즉 있는 것 과 없는 것 의 모순에 의해 자동차는 움직인다.

자연 운동의 기본 형태는 견인하는 힘과 반발하는 힘의 모순이다. 태양을

둘러싼 목성의 운동은 혹성이 태양으로 이끌려가려는 중력과, 태양에서

떨어져 나가려는 관성이라는 두 힘의 모순에 의한다.

화학 현상도 분자의 결합과 분리라는 모순에 의한다.

생물의 세계 역시 모순에 의해 발전한다.

생명이란 죽음에 대한 부단한 투쟁이다. 동물 또는 식물의 한가지 종을

생각해보자. 종에 속한 개체는 어느 것이나 차례로 죽어간다. 그러나 종은

연속되고 번식한다. 이와 같은 삶과 죽음의 모순에 의해 생물은 발전한다.

삶과 죽음의 모순이 없는 생물이 있을까?

그러한 생물은 없겠지만, 잘 죽지 않고 아주 아주 오래 사는 생물을 생각할

수는 있다. 그러한 생물은 환경에 무한정히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수

없다. 간혹 저등한 생물에게서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는데, 만일 그 생물이

아주 저등한 상태로 아주아주 오래 산다면, 그 생물이 진화를 하기란 매우

힘들 것이다. 이와 같이 생명이 생명과 죽음이라는 모순 없이는 어떠한

발전도 있을 수 없다. 현실적으로 모든 생물체는 생명과 죽음의 모순에 의해

발전한다.

 

사회의 발전도 모순에 의해 설명된다.

먼저 사회의 형성 그 자체를 생각해보자. 사회는 인간과 자연의 모순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간의 조상인 유인원이 노동을 시작했다. 노동은 자연을

변화시킴과 동시에 유인원을 변화시켰다. 노동은 우리의 선조들을 생존을

위한 투쟁 과정으로 결속 시켰고, 이에 의해 사회가 형성되었다. 원시사회의

대표적인 노동인 사냥을 예로 들어보자. 사슴보다 뜀박질이 느리고

코끼리보다 몸집이 작은 인간이 사냥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의 협동 노동이 필요했다. 그러한 협동은 노동이 인간 사회의 모태가

되었음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자연과 인간의 모순, 그것에 의해 인간 사회가

형성되었다.

그렇게 형성된 인간 사회도 계속 모순에 의해 발전한다. 사회는 생산을

해야 발전할 수 있다. 그런데 생산에도 모순이 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그것이다. 생산력이란 인간이 자연을 개조하여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힘을

말한다. 생산력은 점진적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생산은 한 개인이 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생산하는 과정의 인간 관계가 맺어진다. 그것이 생산관계다. 어떠한

사회나 그 사회에 상응하는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있다. 그런데 이 양자가

모순관계를 이룬다. 생산관계가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생산력에 조응하지

못하면 양자의 모순에 의해 사회가 변화한다.

 

이와 같이 모순은 어디에나 있다.

그리고 모순은 사물이 발전하는 원동력이 된다. 한 사물을 잘 파악하려면

그 사물의 모순을 파악해야 한다.

 

모순은 어디에나 있지만 그 모순은 모두 다르다.

모순이 서로 다른 이유는 하나하나의 사물이 서로 다른 이유와 같다.

세상의 어떠한 사물도 똑같은 것은 없다. 그와 같이 모순도 모두 다르다.

그것을 모순의 특수성이라고 한다. 따라서 어떤 사물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사물의 특수한 모순을 파악해야 한다.

만약에 모순의 특수성을 연구하지 않는다면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과

구별되는 특수한 본질을 확정할 수 없다. 또한 사물 운동의 특수한 원인 또는

특수한 근거를 발견하기도 어렵다.

 

모순의 특수성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는 사상적 태도를 교조주의라고

한다. 교조주의자에게는 원칙이나 이론은 있지만 구체적인 현실은 없다.

원칙이나 이론이라는 것은 어떤 한가지 일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한

부분의 일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 부문의 일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따라서 원칙이나 이론을 구체적인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려 한다면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교조주의자는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다.

사물을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모순의 보편성뿐만 아니라 모순의 특수성

또한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모순의 특수성은 그 성질에 따라 몇몇 범주로

나눌 수 있다. 그 가운데 내부 모순과 외부 모순, 주요 모순과 부차적 모순,

그리고 절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에 대해서 알아보자.

 

내부 모순과 외부 모순

 

어떤 사물의 내부의 모순이 내부 모순이다. 반면에 어떤 사물과 다른 사물,

또는 그 사물의 환경과의 모순이 외부모순이다.

내부 모순과 외부 모순은 물질 세계의 모든 사물에 있다. 내부 모순은

언제나 주된 것이고 결정적인 것이다. 내부 모순은 사물 자체의 성질을

규정한다. 어떤 사물의 외부 모순은 그 사물의 내부 모순에 의해 굴절된다.

그러나 내부 모순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해서 외부 모순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흔히 외부 모순은 사물 발전의 조건을 형성한다. 또한 어떤

특수한 경우에는 외부 모순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역할은 내부 모순을 통해 실현된다. 예를 들어 우리 민족의 분단의

비극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과 소련 양대국이 38선을 그으면서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민족 분단은 모순은 내부 모순이 아니라 외부 모순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인가? 물론 이 경우에 외부 모순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민족 분단의 원인을 전적으로 외부 모순으로

돌려서는 안된다. 미국과 소련이 38선을 그어 한 민족을 두 개의 체제로 나눌

수 있었던 근원에는 우리 민족 안에 내부 모순이 있었다. 즉 우리 민족

안에는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세력과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세력이 서로

투쟁하고 있었다. 우리 민족 안의 내부 모순이 없었다면 미국과 소련도 두

개의 체제를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경우에는 외부 모순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내부 모순을 통해 실현된다.

 

주요 모순 부차적 모순

 

사물이 크고 복잡해지면 모순도 많아진다. 따라서 한 사물에 하나의

모순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매우 많은 모순이 모두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물의 성격과 발전을 규정하고 어떤 체계 안의 다른 모순까지

지배하는 본질적 모순을 주요 모순이라고 한다.

비본질적이고 사물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며 주요 모순에

종속되는 모순을 부차적 모순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우리사희의 모순을 살펴보자.

우리사회에는 여러 가지 모순이이 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모순, 배운

자와 못 배운 자의 모순, 관과 민의 모순, 민족과 외세의 모순, 남성과 여성의

모순, 세대간의 모순 등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를 규정하는 가장 기본적 틀은 우리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라는 점이다. 자본주의는 노동과 자본의 모순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주요 모순은 노동과 자본의 모순이다. 앞에서 말한 다른 모순들은 부차적

모순이며 노동과 자본의 모순에 의해 규정되는 모순이다.

 

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

 

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은 인간 사회에서만 나타난다.

서로 대립하여 화해할 수 없는 모순이 적대적 모순이다. 적대적 모순은

한쪽이 다른 쪽을 폐지함으로써 해결된다. 반면에 비적대적 모순은 대립적인

관계 이외에 상호 공통된 이해 기반이 있으며 상호 조화로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이 고정불변인 것은 아니다. 일정한

조건이 주어지면 양자는 상호 전화할 수 있다.

 

적대적 모순은 사회의 기본 계급 사이에 존재한다.

노예제 사회에서는 노예 소유주와 노예, 봉건제 사회에서는 봉건 영주와

농노,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적대적 모순이 나타난다.

그러나 같은 계급 내부에서도 적대적 모순이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자본가 계급간의 모순이 격화되어 나타난 것이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이었다.

 

비적대적 모순은 근본적으로는 이해관계가 같으나 현상적으로는 대립하는

계급이나 사회 세력 사이에 나타난다. 노동자, 농민, 도시 서민, 상인, 지식인,

학생, 중소 상공인은 서로 여러 가지 면에서 이해관계가 대립하고 있으나,

모두 독점 대자본의 피해자들이며 근본적인 이해관계는 일치한다. 따라서

이들 사이의 모순은 비적대적 모순이다.

 

3절 나폴레옹의 계산

 

엥겔스는 반뒤링론 이라는 책에서 프랑스 나폴레옹 1세의 기병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질과 양의 상호전화에 대하여 아주 잘 설명하고 있다.

이집트의 비정규 기병인 마무류크 병사는 기마술이 좋고 용감하며

각개격파에는 능한 기병이었지만 반면에 규율성이 결여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프랑스 병사는 비록 기마술과 검술 면에서는 그들에 비해

뒤떨어졌지만 규율은 엄격하게 지켰다.

따라서 나폴레옹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3명의 프랑스 병사와 2병의 마무류크 병사가 전투를 한다면 마무류크

병사가 절대적으로 이길 것이다. 그러나 100명의 프랑스 병사와 100명의

마무류크 변사가 맞서 싸우면 전세는 우열을 가르기 힘들 것이다. 만약

300명의 프랑스 병사가 대열을 이루어 300명의 마무류크 병사와 전투를

벌인다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프랑스 병사가 1000명으로 증가하면 1500명의

마무류크 병사를 반드시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전투 규모가 계속 확대되면 될수록 규율이 강한 프랑스 군대의 전투력이

더욱더 잘 발휘되는데, 이것은 질을 향한 양의 전화이다.

프랑스 군대의 우수한 규율성이 잘 발휘될 수 있는 단계에 이른 후에는

원래 3명의 프랑스 병사가 2명의 마무류크 병사에게 패했던 상황이

평균적으로 2명의 프랑스 병사가 3명의 마무류크 병사를 이길 수 있는

상황으로 변하게 된다. 이것이 질을 향한 양의 전화인 것이다. (유월 편집부

구성, 생활 속의 변증법 )

 

나폴레옹은 전술의 천재였으므로 아마 그의 계산은 맞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양과 질의 문제 또는 양적 변화와 질적 변화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질과 양은 어떤 사물에도 다 있는 사물의 속성이다.

질은 있는데 양은 없다거나, 반대로 양은 있는데 질은 없는 사물이란 없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인식한다는 것은 그 사물의 질과 양을 인식한다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여기 철가방 이 하나 있다.

이 철가방의 재질은 알루미늄이고 물건을 넣어 들고 다닐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이 철가방의 질이다. 한편 그 철가방은 들고 다니기

적당한 크기며 하나다. 그것은 철가방의 양이다. 이와 같이 사물은 양과 질을

동시에 갖는다.

 

그러면 질이란 과연 무엇일까?

질이란 어떤 사물을 바로 그 사물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질은 어떤

사물을 다른 사물과 구별시켜준다. 우리가 철가방을 가죽가방이나, 혹은

의자와 구별하는 것은 그 사물의 질 때문이다.

또한 양이란 물질적 체계의 측정 가능한 규정성인 크기, 부피, , 무게,

지속, 연장, 강도 등등을 말한다.

따라서 양은 언제나 측정 가능하며 수치로 표현될 수 있다.

 

질과 양은 대립물의 통일이다.

질은 양이 아니고, 양도 질은 아니다. 그러나 질과 양은 떨어져 있을 수도

없고 분리될 수도 없다. 질과 양은 대립하면서 통일되어 있다.

 

그런데 나폴레옹의 예에서도 나와 있듯이 양적 변화는 질적 변화를

초래한다. 양적 변화란 수량의 증감이나 장소의 이동을 뜻한다. 프랑스

병사가 3명에서 1000명으로 늘어난 것은 양적 변화다. 반면에 질적 변화는

상태의 변화를 말한다. 프랑스 병사는 1000명으로 늘어나면서 전투력이

엄청나게 커졌다. 그것이 바로 질적 변화다. 그런데 그러한 질적 변화는 양적

변화에서 나온 것이다.

이와 같이 양적 변화는 단지 양적 변화로 그치지 않고 나아가 질적

변화로의 전화의 법칙이라고 한다. 이 법칙은 사물의 발전 방향을

나타내준다.

 

이 법칙은 사물 발전의 보편적인 법칙이므로 무수한 예를 찾을 수 있다.

물을 섭씨 100도까지 끊이는 동안에는 물의 물리적 성질에는 어떠한 질적

변화도 없다. 그러나 일정한 한도를 넘어서 가열을 하면 물은 전혀 새로운

질을 갖는 수증기가 된다. 물은 액체여서 아래로 흐르지만, 수증기는 기체이고

하늘을 둥둥 떠다닌다.

화학적 반응에서도 양은 질로 전화한다. 물 한 바가지를 이등분하면 양만

반으로 줄어들 뿐 질에는 변화가 없다.

그러나 그물을 계속 나누다 보면 우리는 어느 순간에 한 개의 물분자를

얻게 된다.(H2O) 한 개의 물분자도 물의 성질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물분자를 또 둘로 나누면, 이번에는 물이 아니라 산소와 수소가 된다. 산소와

수소는 물과 전혀 다른 질을 갖는다. 물은 불을 끄지만 산소와 수소는 불을

붙인다.

 

이러한 예는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헤겔이 말한 재미있는

예를 들어보자.

 

한 알의 보리는 한 무더기의 보리가 아니다. 그러나 한 아르 한 알의

보리가 계속 쌓이면 결국에는 한 무더기의 보리가 된다.

 

말의 꼬리털 하나를 뽑았다고 해서 말의 꼬리털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말의 꼬리털을 계속 뽑는다면 마침내 그 말의 꼬리에는 털이 하나도

없게 될 것이다.

 

노새는 무거운 짐을 잘 짊어질 수 있지만, 노새의 등에 계속해서 조금씩

짐을 쌓는다면 노새는 끝내 견디지 못한다.

 

이와 같이 모든 사물은 양과 질이 있으며, 양적 병화는 질적 변화를

초래한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양적 변화와 질적 변화를 통일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런데 양적 변화와 질적 변화 중에서 어느 한쪽을 극단적으로

과장시키거나 무시한다면 반드시 오류에 빠진다.

사물의 발전 과정 가운데 질적 변화를 무시하는 견해를 개량주의라고 한다.

또한 양적 변화를 무시하는 견해를 모험주의라고 한다. 정치적 견해나

실전에서 개량주의나 모험주의는 크나큰 재앙을 부린다.

 

4절 정신의 여행

 

여행 어떤가?

여행 좋지.

그런데 여행이 왜 좋은가?

여행을 하면 신기하고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어서 좋지.

 

웬 난데없는 여행 이야기인가 하면, 여행도 철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대 철학자 헤겔은 정신현상학이라는 책을 썼다.

정신현상학은 헤겔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며 지금도 철학적으로 큰 가치를

가진 저작이다. 그런데 정신현상학을 그 제목만 보아서는 내용이 쉽게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어떤 정신 현상에 관한 책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책은

정신 현상에 관한 책은 아니다.

정신현상은 정신의 현상학이다. 헤겔은 대표적인 주관적 관념론자로, 세계의

근본인 정신으로부터 시작한다. 정신이 여러 과정을 거친 뒤에 다시 더욱

수준 높은 정신으로 되돌아간다는 내용이다.

 

괴테는 헤겔과 동시대인이었다. 괴테는 정신현상학이 가진 구조와 똑같은

구조를 가진 소설을 썼다. 그 소설이 바로 파우스트다.

 

소설 파우스트는 그 소설의 주인공 파우스트 박사로부터 시작한다.

파우스트 박사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아버리고 그 대신

메피스토펠레스를 따라다니며 많은 것을 배운다. 결국 그는 더욱 완전한

인간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소설 파우스트도 역시 파우스트 박사의

여행담이다.

 

정신현상학과 파우스트는 변증법의 근본 법칙인 부정의 부전 의 법칙을

그대로 나타내준다. 그래서 여행과 철학이 관계가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면

부정의 부정의 법칙을 알아보기에 앞서 변증법적 부정 에 대해 알아보자.

변증법적인 부정은 일상 생활에서 쓰는 부정 이라는 말이나 논리학에서

쓰는 부정 과는 구별해야 한다. 일상 생활에서는 부정을 어떤 것을 부인하고

거부한다는 뜻으로 쓴다.

예를 들면 이렇게 쓴다.

그는 자신의 혐의를 주정했다.

그러나 변증법적 부정은 그저 아니다 고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한편 논리학에서 쓰는 부정은 어떤 명제의 논리적 부정을 뜻한다. 예를

들면,

좋다 의 부정은 좋지 않다 이다.

좋지 않다 의 부정은 좋다 이다.

논리학의 부정은 말하자면 논리적 조작이다. 따라서 논리학의 주정을 다시

부정하면, 원래의 명제로 돌아온다.

 

변증법적 부정은 사물의 실제적 발전과정에서 나타나는 부정이다. 예를

들어보자.

씨앗으로부터 식물이 자라나는 것은 씨앗의 변증법적 부정이다. 씨앗이

없어졌기 때문에 부정은 부정이다. 그런데 변증법적 부정이 일상 생활에서의

부정이나 논리적 부정과 다른 점은 씨앗은 없어졌지만 그 대신 식물이

자란다는 점이다. 식물은 오히려 씨앗보다 훨씬 더 발전된 사물이 아닌가?

 

변증법적 부정이 논리적 부정과 다른 이유는, 사물이란 절대적으로 부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물이 절대적으로 완전히 부정될 수 있겠는가? 변증법적

부정은 긍정적인 것을 보존하는 부정이다. 그래서 씨앗의 부정 이 오히려

씨앗의 발전 과 같은 뉘앙스를 갖는다.

 

변증법적 부정은 사물의 발전 과정 속에서는 어디서나 나타나기 때문에

많은 예를 찾을 수 있다. 백지에 그립을 그리는 것은 변증법적 부정이다.

그림을 그리면 백지는 없어지지만 그림이라는 새로운 사물이 생긴다.

같은 예로 대지에 새로운 건물을 신축하는 것도 변증법적 부정이다. 건물을

지으면 대지는 없어지지만 건물이라는 새로운 사물이 생긴다.

원료로 제품을 만드는 것도 똑같다. 원료는 변증법적 부정으로 없어지지만

제품이라는 새로운 사물로 태어난다.

인간의 진화를 한번 생각해보자.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인간은

유인원으로부터 진화하였다. 진화란 유인원의 끊임없는 부정이었다.

부정이 절대적인 부정이었다면 유인원은 멸종되고 살아남은 자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진화는 유전 이라는 긍정적인 것을 보존하는 측면이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진화도 변증법적 부정이다.

1960년대 서구의 학생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허버트 마르쿠제의 철학을

부정의 철학 이라고 한다. 그는 당시 서구 사회의 온갖 비인간성, 부조리,

합리를 부정하자고 외쳤기 때문이다. 사회도 변증법적 부정을 통해서

발전한다. 사물은 변증법적 부정을 통해 발전한다. 그러나 그 사물은 또

한번의 부정을 통해 처음의 사물로 복귀하게 된다는 것이 부정의 부정 의

법칙이다.

헤겔의 정신 이나 파우스트의 여행담은 부정의 부정 법칙을 그대로

보여준다. 정신이나 파우스트는 여행을 떠남으로써 현재의 자신을

부정한다. 그런데 정신과 파우스트는 자기자신의 자리로 돌아옴으로써 부정을

다시 부정한다.

 

변증법적 부정은 논리적 부정과 다르다. 이와 마찬가지로 변증법의 부정의

부정 법칙은 논리학의 부정의 부정 과는 다르다.

논리학에서 부정의 부정은 원래의 명제로 돌아간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좋다 의 부정은 좋지 않다 이고, 좋지 않다 의 부정은 좋다 가 되어

원래대로 돌아간다.

변증법의 부정의 부정의 법칙에서도 형식적으로는 처음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보면 처음과 나중은 다르다. 나중의 가물은 부정의 부정을

통해 처음 사물보다 더욱 발전된 사물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변증법이 무언지 물어 보면 그 사람은 어떻게

대답할까?

변증법요? 글쎄, 잘 모르겠지만 정반합 아닙니까?

 

그가 그렇게 대답하는 이유는 그가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상하게도 변증법에서 좋은 것은 다 빼버리고 정반합만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 아무튼 그 사람의 말이 맞는 것인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다. 변증법은 대단히 풍부한 내용을 갖는데 그것을

단지 정반합으로 설명하려 한다면 틀린 이야기다. 그러나 정반합이 변증법의

한 측면을 설명한다는 면에서는 맞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부정의 부정

법칙이다. 반은 정에 대한 부정이고, 합은 반에 대한 부정이다.

 

부정의 부정 법칙은 사물의 발전 과정을 나타낸다.

사물은 일반적으로 직선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고 수많은 시행착오와,

우회로, 후퇴를 거친다. 오히려 직선적인 발전은 진정한 발전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나쁜 것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 나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좋은 것만 안다는 것은 진정으로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아니다.

 

유도는 좋은 운동이다.

신체를 건강하게 단련하고 호신술로도 쓸 수 있으며, 게다가 예의를

존중하는 기풍을 배울 수 있는 남성적이고 씩씩한 운동이다.

유도는 어느 운동 못지 않게 격렬한 운동이다. 그런데 왜 하필 부드러울

유자 유도인가?

그 이유는 유도는 상대방의 힘을 역이용하기 때문이다.

유도의 대표적 기술인 배대 뒤치기 같은 기술을 살펴보자. 배대 뒤치기는

상대방이 밀고 들어오는 힘을 이용해서 뒤로 드러누우며 한쪽 할로 상대방의

배에 대고 뒤로 넘기는 기술이다. 배대 뒤치기는 호쾌한 큰 기술이다. 이런

큰 기술은 상대방의 힘을 이용하지 않고는 여간해서 하기 힘든 기술이다.

그런데 배대 뒤치기에서도 부정의 부정이 나타난다.

상대방이 나를 메치려고 밀고 들어오는 힘이 부정 이라면, 그 힘을

이용해서 배대 뒤치기를 하는 힘은 부정의 부정 이다. 부정의 부정은 힘을

배가시킨다. 상대방의 힘을 이용하면 그럴 더 크게 메칠 수 있다.

다른 운동에서도 얼마든지 부정의 부정을 찾을 수 있다. 권투에서 카운터

펀치도 부정의 부정이다. 상대가 나를 치려고 뻗는 팔이 부정이라면 그

펀치를 피해 내가 날리는 주먹은 부정의 부정이다.

축구 경기에서도 부정의 부정을 찾을 수 있다. 상대편의 공격을 막아내고

재빠른 기슴을 한다면 그것은 부정의 부정이다.

 

부정의 부정은 운동 경기뿐만 아니라 어디서나 나타난다.

우리가 사진을 찍어서 보는 것도 부정의 부정을 이용한 것이다.

사진을 찍는 것은 피사체를 부정하여 필름에 담아내는 것이다. 현상은 그

필름을 부정하여 사진에 담아내는 것이다. 물론 사진은 피사체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한 측면만을 부정한다. 따라서 사진은 젊은 시절의

모습을 오래 간직할 수 있다든지 멀리 떨어진 사람에게도 보낼 수 있다든지

하는 측면에서는 피사체 보다 발전된 사물이다.

컴퓨터의 입력과 출력도 부정의 부정이다.

우리는 원자료를 부정하여 컴퓨터에 입력시킨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부정하여 프린터로 뽑아낸다.

 

사회의 발전 과정도 부정의 부정을 경과한다.

원시 사회의 생산력은 극히 낮았으나 평등과 평화를 지키고 있었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억압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는 사회는 더욱 발전하여 다시 평등과 평화를 찾게 된다.

새로운 사회는 평등과 평화라는 점에는 원시 사회와 같으나 높은 생산력

수중에서는 차이가 있다.

또한 인간의 인식도 부정의 부정을 통해 발전한다.

최초의 원자론은 그리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의 원자론은

레우키포스, 데모크리투스, 에피쿠로스에 의해 주장되었다. 그들은 물질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아주 적은 알갱이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기름은 부드럽고 둥근 원자들로 구성되며, 식초는 거칠고 갈고리

모양의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육체는 조야한 원자들로

구성되었으며, 영혼은 순수한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들은 신들의 존재마저 가장 순수한 원자의 집합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사상을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만큼

설득력이 약했기 때문에 곧 잊혀지고 말았다. , 부정된 것이다.

오늘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원자는 핵의 주위를 도는 전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물질의 기초 단위를 이룬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것은 과학적 실험에

의해 입증된 것이며, 그만큼 설득력이 있다. 따라서 현대의 원자론은 물질의

기초 단위가 원자가 아니라는 사상을 다시 부정했다. , 부정의 부정이

이루어진 것이다.

물질의 기초 단위가 원자라는 점에서는 거대의 원자론이나 현대의

원자론이나 같다. 즉 형식에서 같은 것이다. 그러나 내용을 보면 현대의

원자론은 고대의 원자론을 한 단계 발전시킨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인식도 부정의 부정을 통해 발전한다.

 

4장 범주

 

1절 회의주의자의 외모

 

전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갯가 뱃사람 하나가 서울 구경을 오는데, 서울 가서는 뱃사람 티를 내지

않으리라 하였으나 멀리 남대문의 문 열린 구멍을 바라보고 한다는 소리가

똑 킷통 구멍 같구나 해서 그예 뱃사람 티를 내고 말았다는 것이다.

사람이 만일 요즘 철로 공부라면 궁금스럽게 목선의 키를 꽂는 구멍을

생각해내기 전에 철로의 터널부터 먼저 생각했을 것이다. 그 사람으로서

무심중에 나와질 말, 말레 그 사람의 체위, 성미의 냄새, 신분의 냄새,

사람의 때가 묻은 말을 찾아야 하는데 그런 말이란 얼마든지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일 것이다.

뱃사공이 남대문 구멍을 형용하는 데는 똑 킷통 구멍 같구나 가 최적의

하나밖에 없는 말일 것이요, 철로 공부가 남대문 구멍을 형용하는 데는 똑

돈네루(터널) 구멍 같구나 가 최적의, 하나밖에 없는 말일 것이다. (이태준

문장강화 )

 

뱃사람은 뱃사람 티를 배게 마련이다. 철로 공부 역시 철로 공부 티를 내게

마련이다.

노동자는 노동자 티가, 학생은 학생 티가, 부자는 부티가 난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생김생김이나 말투나

입은 옷을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 어떤 사람인가는 대강 알 수 있다.

허름한 잠바에 운동화를 신고 한 손에 연장 보퉁이를 들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노가다일 것이다. 말쑥한 양복에 정중한 말씨와 태도를

갖고 있는 사람은 아마 월급쟁이일 것이다. 허여멀건 얼굴에 비싼 모피

코트를 걸치고 손가락에는 큼직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있는 여자는 돈

많은 부인네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번에는 뱃사람이 마음을 독하게 먹고

목욕을 깨끗이 한 뒤 이발소에 가서 단정하게 머리를 손질한 후 멋진

양복으로 갈아입었다고 하자.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그가 뱃사람이 아닐

수는 없다. 그 사람의 겉모습은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저렇게 될 수도 있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뱃사람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철학적으로 표현해보자.

어떤 사물의 표면적이고 피상적인 면을 현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물의

배후에 숨어 있는 근본적인 면을 본질이라고 한다. 어떤 사물도 본질과

현상을 동시에 갖고 있다.

본질은 비교적 안정되어 있으나 현상은 매우 다양하게 변화한다. 본질은 한

사물의 본성을 규정한다. 사물의 특성은 본질에서 나온다. 현상은 본질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세상일이 골치 아프면 머리도 식힐 겸 북한강에 한번

가보라. 강물은 물결과 거품을 일으키며 우르르 우르르 빨리도 흘러간다.

그러나 강물의 밑바닥은 어떤가? 강물의 바닥은 발리 흐르는 강물의 표면과는

달리 비교적 조용히 느릿느릿 흐른다. 강을 바라보며 이렇게 중얼거리면

어떨까?

 

강물의 표면은 현상이지만, 본질은 강물의 밑바닥에 숨어 있다.

 

뱃사람 이야기에서도 본질과 현상은 나타난다. 뱃사람은 여러 가지 외양을

취할 수 있다. 그 사람이 작업복을 입고 물고기를 잡고 있거나, 남대문을 똑

킷통 구멍 같구나 하며 뱃사람 티를 내고 서울 거리를 활보하거나 또는 멋진

양복을 입고 세련되게 행동하거나 하는 그 사람의 현상이다. 그러나 그가

뱃사람이라는 본질은 변함이 없다.

 

그러면 본질과 현상에 대하여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점은 모든 사물은 본질과 현상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점이다. 현상은 있는데 본질은 없거나 본질은 있는데 현상이 없는 경우는

없다. 본질과 현상은 실과 바늘같이 항상 따라다닌다.

 

모든 생명체의 본질은 신진 대사다.

모든 생명체는 신진대사를 하여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체마다 신진대사를 하는 방법이 다르다.

식물은 햇빛과 이산화탄소 그리고 물로 광합성을 하여 자양분을 얻고

생명을 유지한다. 바다에 사는 조그마한 물고기들은 플랑크톤을 먹고 생명을

유지한다. 산에 사는 호랑이는 동물을 잡아먹고 그것을 소화함으로써 생명을

유지한다.

이 지구상에는 생물의 종류만 해도 엄청나다. 식물만 해도 50만 종이며

동물은 150만 종이나 된다. 그런데 각각의 생물의 종이나 개체는 모두 다른

방법으로 신진대사를 하고 있다. 즉 신진대사라는 생명체의 본질이 여러 가지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본질은 현상을 통해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본질은 직접 나타낼 수 없다. 한편 현상이라는 것은 본질의 표현이기

때문에 그 내부에 본질인 것을 포함하고 있다.

처음에 말한 바와 같이 뱃사람은 뱃사람 티를 내게 마련이라든지 철로

공부는 철로 공부 티를 내게 마련인 것은 본질이 현상을 통해 밖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이 40이 되면 자기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

 

사람의 얼굴은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것이지만,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일을

하느냐에 따라 그의 얼굴도 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40쯤 되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얼굴 모습보다도 자기자신의 생각이 더욱 많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상과 본질은 구별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본질이 현상을 통해 쉽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는

현상이 본질에 반대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 예로는 링컨의 말을 무색하게 하는 회의주의 철학자 흄의 외모를 들

수 있다.

 

1711년 스코틀랜드 귀족의 아들로 출생한 데이비드 흄은 회의주의자다.

회의주의자라고 할 때. 사람들은 흔히 신체적으로 허약하고 코가 오똑하며

일그러진 입을 가진 사람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흄의 외모는 전혀 다르다.

그와 동시대인--아마도 그의 철학의 신봉자일 것이다--은 이렇게 적고

있다: 그의 외모는 모든 관상학을 무색케 했으며, 이 학문에 아무리 능통한

자라 하더라도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 그의 얼굴 표정에서는 그의 정신

능력의 미미한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얼굴은 넓적하고

퉁퉁했고, 그의 입은 크고 우직한 인상을 주었다. 눈은 멍하니 얼이 빠져

있었고, 그의 비계살은 보면 섬세한 철학자보다는 차라리 거북이 요리를 먹는

시의회 의원을 대하는 듯한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물론 지혜로서 그의

외형이 좀 특이하게 치장된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변함없는 사실은, 그의

예외적인 외모에도 불구하고 흄은 철학자이며, 더욱이 회의주의 철학자라는

점이다

 

여기서 그가 회의주의 철학자라는 것이 본질이라면 그의 외모는 현상이다.

그런데 당황스럽게도 현상이 본질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 것이다. 사실

현상이 본질을 잘 반영하고 있으면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소동이 인류 역사를 통해

계속되어왔다.

 

예를 들면 지동설과 천동설을 둘러싼 소동이 그러한 것이다.

일단 현상은 어떠한가? 현상적으로는 하늘이 지구를 중심으로 해서 돈다.

우리가 딛고 있는 대지는 너무나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고, 해와 달과 별은

동쪽 하늘에서 떠서 서쪽 하늘로 지지 않는가? 근대 이전의 우리의 선조들이

천동설을 믿은 것은 어쩌면 매우 자연스런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별자리를 과학적으로 관측한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을 주장했다.

겉보기와는 달리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그러한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과 성직자들을

설득하는 데는 상당한 애를 먹었다. 왜냐하면 본질과 현상이 정반대였기

때문이었다.

 

현상은 본질을 드러내주지만 반대로 본질을 은폐하기도 한다.

 

현상과 본질은 상호 전제하고 상호 대립하는 변증법적인 모순관계에 있다.

그러면 현상과 본질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중요한 것일까?

본질일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대답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현상과

본질은 굳게 결합되어 있으며 어느 한쪽을 분리하여 그 중요성을 논할 수

없다.

흔히 많은 사람들은 단번에 본질에 이르려 한다. 그리고 현상은 쓸데없는

짐으로 생각하고 버리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가장 중요한 한가지를

놓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현상과 본질의 구별이다. 현상과 본질의 구별은 그

자체로 변증법의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이제까지 우리는 사물에는 본질과 현상이 있으며, 본질은 현상을 통해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현상만 바라보고

만족해서는 안되며 그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사물의 본질을 알 수 있는가? 그 방법은 본질이 현상하는

것과는 반대의 길을 걸어가면 된다.

먼저, 현상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본질은 현상을 토해 스스로를 드러낸다. 본질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시작할 수 있는 곳은 현상이다. 인식이란 사물의

현상적 인식에서 본질적 인식으로 심화되는 것이다. 감성적 인식에서 이성적

인식으로 심화되는 것이다. 감성적 인식에서 이성적 인식으로 심화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다음에는 현상의 연관을 연구해야 한다.

본질은 여러 가지 현상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따라서 각각의 현상은 본질의

한 측면만을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본질을 온전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현상을 총체적으로 연관시켜 연구해야 한다.

 

2절 똑같은 잎사귀를 찾아라

 

어떤 면에서 17세기는 부인들의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의 생애 역시 이러한 구도 속에 있다. 그가 정부들이나 애인들과

몰려다녔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방탕한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그로 인해 초라한 나그네 신세를 면치 못하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자연과학적, 철학적 발견들과 외교적 성과들을 유력한

부인들에게 털어놓기를 좋아해서, 그들과 왕성한 교류를 하고 만은 편지를

교환하였다. 그중에는 황후와 왕비가 있었고 공작부인, 선제후비, 태자비가

있었으며, 일반 왕녀들도 있었다.

어느 날 라이프니츠는 서로 동일한 두 개의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는

명제를 그 부인들에게 제출했다. 그리고 부인들에게 궁전 안에서 서로 동일한

두 개의 잎사귀가 있는지 찾는 부인들을 한번 상상해보라. 그들의 대화가

들리는 듯하다.

 

백작부인:세에상에... 리이프니츠 선생님 말대로 똑같은 잎사귀가 하나도

없군요.

남작부인:오마나! 백작부인 이걸 보세요. 요 잎사귀 두 개는 똑같은 것

같아요.

후작부인:아내예요. 남작부인. 요쪽 잎사귀는 끝이 약간 꼬부라져 있잖아요?

백작부인:그럼 아침부터 하루종일 찾았는데도 똑같은 잎사귀를 찾은 사람은

하나도 없군요.

 

결국 그 부인들은 똑같은 잎사귀를 발견할 수 있었을까? 물론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세상에 똑같은 것은 아무데도 없기 때문이다. 철학에서는

다른 사물과 구별되는 사물 하나하나를 개별자라고 한다. 또한 그러한 성질을

개별성이라고 한다. 모든 사물은 하나하나가 개별자로 존재한다. 사람만 해도

그렇다. 철수, 순희, 영희, 미경이, 개똥이는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이간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어떠한 사물도 그 자체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은 수많은 다른

사물들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각 사물들의 성질이나 관계에서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철학에서는 그러한 공통점을 보편자라고 한다. 또한 그러한

성질을 보편성이라고 한다. 철수, 순희, 영희, 미경이, 개똥이는 모두

인간이라는 공통점을 잦고 있다.

 

모든 사물은 개별적인 면과 보편적인 면을 동시에 갖는다. 순전히

개별적이기만 하거나, 순전히 보편적인 사물을 없다. 개별성은 그 성질상

현상에 관계가 있다면, 보편성은 본질과 관계가 있다.

개별자와 보편자의 연결고리로 특수자가 있다. 특수자는 개별자에 대해서는

보편적이지만, 보편자에 대해서는 개별적이다. 예를 들면 철수는 개별자이고,

인간은 보편자다. 그러면 한국인은 어떤가? 한국인은 철수에 대해서는

보편적이지만, 인간에 대해서는 개별적이다. 철수와 인간을 매개해주는

한국인과 같은 범주를 특수자라고 한다.

 

개별자와 보편자도 변증법적인 모순관계에 있다. 둘은 상호 의존하고 상호

전제하는 관계다. 보편자는 개별자를 통해서 존재한다. 예를 들면 보편적인

일간, 보편적인 동물, 보편적인 식물이 어디 있는가? 누군가가 그런 것을

찾는다면, 라이프니츠의 말을 듣고 궁중을 헤매는 부인들처럼 아무데서도

찾지 못할 것이다. 보편적인 인간은 개별적인 철수 속에서 존재하고, 보편적인

동물은 앞집 강아지 멍멍이 속에서 존재하며, 보편적인 식물은 우리집

앞마당에 핀 국화 꽃 속에서 존재한다.

또한 개별자는 언제나 보편자를 포함한다. 철수는 개별자이지만, 서울

시민이고 한국인이며 인간이라는 보편성을 잦는다. 멍멍이도 개이며

동물이다. 국화꽃도 식물이며 동시에 생물이다. 이와 같이 개별자 속에는

보편자를 표함하고 있으며 양자는 변증법적 모순 관계에 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다.

 

단순한 말이다. 그러나 이 단순한 말이 이미 보편자와 개별자의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물론 개별자다. 철학자는 소크라테스에

대해서는 보편자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다 는 단순한 말이

개별자는 보편자다 는 변증법적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 사실상 우리의

인식은 개별자와 보편자의 모순에 의하지 않고서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철학과 과학은 보편성을 추구한다.

경제학은 경제현상의 보편적인 법칙을 연구한다. 물리학은 물리적 현상의

보편적인 법칙을 연구한다. 모든 학문이 다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의 행동이나 실천은 어제나 개별적이고 구체적이다. 그러면

철학과 과학의 이론을 우리의 행동이나 실천에 곧바로 적용시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다. 개별자를 무시하고 보편자만 추구하는

사상적 태도를 교조주의라고 한다.

교조주의란 성서나 법전의 자구에 맞추어 모든 행위의 기준을 삼는 데서

나온 말이다. 정치적 실천에서 교조주의는 모든 사람들에게 큰 재앙이다.

소련의 스탈린주의나 중국의 이립삼 노선은 대표적인 교조주의다. 그러나

교조주의는 정치적 실천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주변의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관공서에 한번 가보라. 거기에는 현실보다도

규약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들이 득실거리고 있다. 교조주의자는 머리를 쓰지

않는다. 아니, 머리를 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책에 나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교조주의가 판친다. 그 상당부분의 책임은 우리 나라의

교육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나라의 학생은 어떠한 창의성도 요구받지

않는다. 학생들이 하는 것이 도대체 무언가? 그들은 주어진 것을 그저 딸딸

외우기만 하면 된다. 사지선다형 시험문제 중 한 가지는 진리고 나머지 세

가지는 비진리다. 교과서에 나온 것은 진리고 나머지는 모두 비진리다.

정도면 창의성을 요구받지 낳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창의성을 죽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우리 나라 학생들은 어느 정도는 모두 교과서 교조주의자다. 교과서 라는

말이 우리 나라만큼 위력 있는 나라도 별로 없을 것이다. 하기는 이젠

어른들에게도 교과서란 말은 위력적 인가보다. 다른 나라에서는 엄연히 철학

입문 이라고 나온 책도 우리 나라에서 번역하여 출간할 때는 어느새 철학

교과서 가 되어버린다. 출판업자들의 약삭빠른 상혼의 씁쓸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교조주의를 떨쳐버리려면 머리를 써야 한다. 구체적 사물에 대해서

구체적인 연구를 해야 한다. 어제까지나 남의 머리로 살려고 한다면

교조주의를 떨쳐버릴 수 없을 것이다.

반면에 보편자를 무시하고 개별자만을 추구하는 사상적 태도를

기회주의라고 한다. 기회주의자의 행동에는 기준이 없다. 그저 편한 대로

생각하고 자기에게 유리한 일만 하면 된다. 불행하게도 오리나라의 정치인들

중에는 그런 사람이 너무너무 많다.

이념도 필요 없다. 양심도 소용없다. 의리도 저리 가라! 오직 금배지만

달아주면 무슨 일이든지 한다!

그들은 개별성을 내세우며 끝없이 변명한다.

 

이 돈을 다른 돈과 달라. 깨끗한 돈이야. 그러니까 먹어도 돼.

 

이번 일은 정말 물불 가리지 않고 싸워야해. 그건 나도 알아. 하니만 나는

특수해. 나는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우리 마누라가 아프거든...

 

우리 나라는 누가 뭐래도 정치 후진국이다. 우리 나라의 정치적 후진성에는

물론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원칙 없는 정치, 기회주의적 정치인도 정치의

후진성에 한 요인이 되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러한 기회주의를 항상 경계해야 한다. 따라서 원칙 없는 타협은

금물이다. 기회주의자는 원칙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각각의

개별자가 어떠한 보편적 연관 속에 놓여 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보편적 원칙 속에서 행동해야 한다.

 

3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일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 작품은 식민지 시대의 시인 윤동주의 서시이며, 윤동주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가장 놓아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내용은

시인 윤동주의 인생관을 섬세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의 형식은

운문이다. 운문은 산문과 달리 음악적인 리듬을 갖고 있다. 이 작품은 내용과

형식을 갖는다.

 

그러나 내용과 형식을 갖는 것은 이 작품만이 아니다. 모든 사물은 내용과

형식을 갖는다. 내용이 있는데 형식이 없다든지, 형식은 있는데 내용이 없는

경우는 없다. 흔히 형식이 매우 느슨한 경우를 형식이 없다 고 하는데,

철학적으로 보면 형식이 없는 것도 하나의 형식이다.

예를 들어 호흡 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호흡은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활동이다. 호흡의 내용이

산소를 신체에 공급해서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이라면 그 내용은 폐라는

형식을 필요로 한다. 모든 생물이 내용과 형식을 갖는다. 각 생명체의 생명

활동이 내용이라면, 그 생명 활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구조, 조직은 형식이다.

정치 활동을 하는 정당을 생각해보자. 정당의 내용은 그 정당의 이념이며

목적이다. 정당의 형식은 중앙당과 지구당 등 조직체계다.

한 사회의 생산양식에 있어서 그 사회의 생산력 발달은 내용을 나타내며,

생산력을 이루는 각 요소의 배치를 나타내는 생산관계는 형식이다. 그래서

이린 말이 있다.

 

맷돌은 봉건 영주가 재배하는 사회를 낳으며, 증기 제분기는 산업

자본가가 지배하는 사회를 낳는다.

 

여기서 맷돌과 증기 제분기는 생산력이자 내용이다. 또한 봉건 영주가

지배하는 사회 와 산업 자본가가 지배하는 사회 는 생산관계를 나타내며

전자가 봉건제 사회를 후자가 자본주의 사회를 뜻한다. 즉 형식이다.

앞에서 든 윤동주의 시도 그렇지만, 문학 작품이나 음악, 미술도 내용과

형식을 갖는다. 문학, 음악, 미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내용이라면 문자,

소리, 그림은 형식이다.

 

이와 같이 모든 사물은 내용과 형식을 갖고 있다. 그러면 내용은 무엇인가?

내용은 사물의 내부에 포함된, 사물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의 합이다. 그러면

형식은 무엇인가? 형식은 내용의 외적인 표현방식이며, 구조이자 조직이다.

 

그러면 내용과 형식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주도적이고 중요할까?

두말 할 것 없이 내용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사람의 말을 들을 때,

사람이 말하려는 내용을 중요시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 사람이

그것을 얼마나 멋지게 표현했는가는 그 다음 문제다. 이와 같이 내용은

형식보다 더 중요하다.

지금 이 책은 내 컴퓨터 에피 로 쓰고 있다. 전에 쓴 책은 손으로 썼다.

형식적으로 보면 손 작업이 컴퓨터로 바뀐 것이다. 컴퓨터와 손 작업의

차이는 원시인과 현대인의 차이만큼 큰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내가

쓴 책의 내용이 큰 차이가 나겠는가?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내용이다. 단지

컴퓨터를 사용하면 훨씬 빠르게 쓸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어떤 것을 표현하려고 해보자.

먼저 내용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 내용에 걸맞는 식을 생각해야 한다.

만약 내용이 어떤 정치 집단의 정치적 견해를 나타내려고 한다면, 그 형식은

성명서와 같은 형태가 될 것이다.

만약 내용이 연인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려 한다면, 그 형식은 매우

부드럽고 시적이어야 할 것이다. 연인에 대한 사랑을 성명서 낭독하듯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와 같이 내용은 형식을 주도한다. 그리고 내용은

형식을 규정한다. 그러면 형식은 무엇인가?

형식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형식에 대해서 아무런

고민도, 그려도 할 필요가 없을 것 아니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형식은 내용에 대해 능동적인 영향을 미친다.

흔히 고대의 재발견 으로 르네상스가 왔다고 한다. 고대의 재발견은

내용이다. 그러나 르네상스 세대가 도래한 더욱 중요한 원인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인 인쇄술의 발달이었다.

인쇄된 책의 출현은 중세의 대학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버렸다. 그때까지

학습이라는 것은 기껏해야 원본을 힘들여 베끼거나 강의를 듣고 복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쇄된 책이 출현하자, 누구나 어디에서나 학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엄청난 학습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문예부흥,

즉 르네상스로 이어진 것이다. 그와 똑같은 일이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다.

컴퓨터는 책보다 훨씬 친절하다. 컴퓨터는 무한한 인내력이 있다. 아무리

틀려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할 수 있다. 컴퓨터는 학생이 필요로 하는 한

명령하는 대로 움직인다. 그런 일은 학교 교사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교사는 바쁘다. 따라서 한 학생에게만 신경을 쓸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컴퓨터는 다르다. 학생의 학습 속도가 빠르건 늦건, 학생이 쉽게

느끼거나 어렵게 느끼거나 항상 옆에서 도와준다. 컴퓨터는 학습의 형식이다.

얼마나 위력적인 형식인가? 컴퓨터는 인간의 인식 과정에 엄청난 명화를

가져왔다.

이와 같이 형식은 내용에 능동적 작용을 가하기도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형식주의를 비판하는 것일까?

그것은 형식주의자들이 형식의 상대적 능동성을 절대화시키기 때문이다.

형식주의에서는 내용은 필요 없고 형식만 있다. 형식주의자는 내용의

주도성을 원천적으로 부정한다. 이 점이 형식의 능동성을 인정하는 입장과

형식주의의 차이점이다.

 

4절 노이로제 치료법

 

노이로제라는 병이 있다.

이 병은 몸에는 아무런 장애가 없는데, 관념으로 장애를 느끼며 여기저기가

아프고 고통스러운 병이다. 말하자면 없는 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병을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병을 앓고 있는 한 환자가

의사를 찾아왔다.

학교를 갓 졸업한 신출내기 의사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 당신은 아픈 것이 아닙니다. 걱정하지 하세요. 당신은 단지 아프다는

환상에 빠져 있을 뿐이에요. 별다른 치료가 없으니 집에 돌아가 푹 쉬세요.

 

이런 말을 들으면 환자는 뭐라고 할까?

 

이런 돌팔이 의사 같으니라고. 나는 아파서 미칠 지경인데 집에 가서

쉬라고? 재가 지금 꾀병 부리는 줄 알아?

 

이 환자는 수소문 끈에 용하다는 의사를 찾아갔다.

 

잘 오셨습니다. 이 병에 대해서는 제가 전문이지요. 조금 힘드시겠지만

열심히 치료하면 완치 가능합니다. 우선, 제가 지어주는 약을 드십시오. 한결

기분이 나아질 것입니다.

 

그 약을 먹은 환자는 그 의사가 얼마나 용한지 떠들어대며 돌아다녔다.

 

역시 소문대로 그 의사 선생님이 최고야 그 약을 먹으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잖아?

 

하지만 그 약의 성분은 무엇이었을까? 보나마나 비타민이나 영양제가 몇 알

들어 있었을 것이 뻔하다.

 

그러면 그 용한 의사가 신출내기 의사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 용한 의사는

병의 원인을 잘 알고 병의 원인에 대한 처방을 해주었다. 그 병의 원인은

정신에 있으므로 의사의 권위를 이용하여 병의 정신적 요인을 해결해주었다.

 

이와 같이 병에도 원인이 있지만, 이 세계의 모든 현상은 원인과 결과가

있다.

원인이란 다른 현상을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현상을 말하고, 결과란 원인에

의하여 발생하거나 변화되는 현상을 말한다.

당연히 원인은 시간상으로 결과보다 앞서서 나타난다. 이는 원인과 결과의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다. 그러나 시간상으로 앞선다고 하여 반드시 원인은

아니다. 예를 들어 까마귀가 날아간 다음에 배나무에서 배가 떨어진다고 해서

까마귀가 날아간 것이 배가 떨어진 원인이 될 수 없다. 까마귀가 날아갈 때

우연히 배가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인과 결과가 되기 위해서는 시간상의 차이뿐만 아니라, 양자에

필연적 연관이 있어야 한다. 즉 일정한 원인에 대해서는 반드시 일정한

결과가 따라야 한다.

 

원인과 결과는 다르다.

따라서 우리는 가장 먼저 원인과 결과를 구별하여야 한다. 두 현상 가운데

하나가 원인이면 하나는 결과다. 예를 들어 몸이 아프기 때문에 병원에 가는

것이다. 여기서 원인과 결과를 뒤바꾸면 어떻게 될까? 병원에 가기 때문에

몸이 아프다? 황당한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원인과 결과의 구별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 구별은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것이다.

어떤 현상은 일정한 조건에서는 원인이 되지만, 다린 조건에서는 결과가

된다. 왜냐하면 물질 세계의 발전은 무한히 연속적이어서, 어떤 현상은 그

앞에 나타난 형상의 결과이기도 하고 뒤에 나타날 현상의 원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회사에 입사하기 위해서 취직 시험을 쳐서 붙었다. 따라서

그는 그 회사에 취직을 하였다. 그는 열심히 일했고 한 달 후에는 첫 월급을

탔다.

말하자면, 그가 그 회사에 취직을 한 것은 그가 취직 시험에 붙은 결과이다.

한편, 그는 취직을 하였기 때문에 월급을 탈 수 있었다. 따라서 그가 취직을

한 것은 어떤 면에서는 원인이 되고, 다른 측면에서는 결과가 된다.

이와 같이 원인과 결과는 서로 다른 것이지만 절대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상호 전화되는 관계에 놓여 있다.

 

또한, 많은 경우에 원인과 결과는 상호 작용을 한다.

1987년 이후 우리 나라에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지역과 직종을 불문하고

수많은 노동조합이 생겨났다. 노동자는 이제 분명히 하나의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 세력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으며 우리 사회의 진보적 발전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노동조합은 단결과 투쟁이 생명이다.

강철같은 단결은 노동조합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또한 그러한 단결은

굳센 투쟁으로 나타난다. 그러면 단결과 투쟁 중 어느 쪽이 원인인가?

단결이 잘 되어야 투쟁을 잘할 수 있다. 사실이다. 그래서 단결은 원인이고

투쟁은 결과다. 그러나 반대로 투쟁을 잘 하면 노동조합의 단결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에는 투쟁이 원인이고 단결은 결과다. 이와 같이

원인과 결과는 상호 작용을 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보와 같이, 어떠한 현상에서나 원인과 결과가 있다. 그리고

원인과 결과는 서로 다른 것으로서 구별되는 것이지만, 그러한 구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상대적인 것이다. 양자는 상호 전화한다.

 

우리가 원인과 결과의 문제를 놓고 볼 때, 빼놓을 수 없는 문제가 조건이다.

조건은 원인과 결과의 상호 작용에 큰 영향을 미친다. 우라늄이 일정한

조건에서 급격히 폭발하면 인류에게 엄청난 재앙을 주는 핵폭발이 되지만,

다른 조건에서 완만히 분열시키면 질병의 치료에 사용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 유리한 조건은

만들어내되 불리한 조건은 극복해 나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5절 인간의 땅으로 내려온 이유

 

18606월 어느 날 오후, 보세스터 주교 부인은 인간이 유인원의

후손이라는 주장을 듣고 놀란 나머지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한다.

세상에, 유인원의 후손이라니! 사실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사실을 널리 알려지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그녀가 그토록 염려 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밝혀진

바대로 우리는 유인원의 후손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인원과 공동의

조상을 가지고 있다. 물론 양자의 차이가 대단히 미미한 것이 사실이지만,

사소한 차이야말로 실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리차드 니키, 오리진 )

 

지금으로부터 수백만 년 전, 일단의 유인원의 무리가 정든 숲을 떠나

땅으로 내려왔다. 지상 생활은 수상생활과는 전혀 다른 생활 방식을

제공했다. 또한 맹수의 위험도 도사리고 있었다. 밀리에 비해서는 가혹한

생존 조건이었다. 그러나 그 유인원들은 이 가혹한 조건에 썩 잘 적응했다.

그들이 바로 현생 일류, 호모 사피엔스의 조상이다.

반면에 숲을 고수한 유인원들도 있었다. 지금도 동물원에 가면 그들의

자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하나의 지울 수 없는

의문이 우리의 머리속을 스친다.

 

왜 인간은 지상으로 내려왔는데, 원숭이는 숲을 고수했을까?

 

그 대감은 지질학의 판지아 가설에서 찾을 수 있다.

아주 멀고 먼 옛날에는 지표의 모양이 현재와 달랐다. 현재 지구는 5대양

6대주가 있다. 그러나 아주 먼 옛날에는 판지아라는 거대한 땅덩어리만

있었다. 그런데 이 거대한 땅덩어리가 서서히 조각나기 시작했다. 하나는

북반구에 있었던 라우라시아였고 다른 하나는 남반구에 있던

곤드와나랜드였다. 그런데 이 두 대륙 그런데 이 두 대륙 또한 서서히

조각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대양을 둥둥 떠다니는 섬과 같았다.

원래 인간과 원숭이의 조상은 나무 위에 살았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빽빽한

숲이야말로 가장 좋은 환경이었다. 유인원 무리들이 주로 밀림이 있는 곳에서

살았던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살고 있던 땅이 거대한 배가

되어 둥둥 떠내려가고 말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말았다.

밀림은 어느덧 탁 트인 사바나가 되었다. 사바나에는 우거진 밀림은 찾아볼

수 없었고 드넓은 평원에 드문드문 나무가 서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우리의 조상들은 지상으로 내려온 것이다. 물론 수상 생활을 고수한

유인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한편, 자기가 살던 땅이 떠내려가지 않거나 떠내려가더라도 큰 기후 변화가

없었던 곳에서는 유인원들이 땅으로 내려올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인간의

조상과 같은 큰 어려움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대신 더 이상의 진화는

할 수 없었다.

 

인간의 진화는 우연성과 필연성의 변증법을 그대로 보여준다.

유인원이 인간으로 진화하는 과정은 수많은 우연성이 개재되어 있다. 사실

유인원들이 살고 있던 땅덩어리에 거대한 기후 변화가 생긴 것은 우연이었다.

또한 만약 이런 기후 변화가 15백만 년만 일찍 일어났더라도,

그때까지의 생물의 진화 수준이 너무나 낮았기 때문에 밀림 거주자들 중에 그

누구도 그러한 기후 변화를 활용할 수 없었으리라고 한다. 기후 변화가 그때

일어났던 것도 우연이었다. 그러면 인간의 진화는 순전히 우연의

산물이었을까? 물론 아니다.

인간의 진화는 필연의 산물이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사물이 변화,

발전하듯이 생물은 진화한다. 저등한 생물이 보다 고등한 생물로 진화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법칙이다.

또한 진화 과정 속에서도 필연성이 적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밀림이 아닌

사바나에서는 지상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필연이다.

 

운동경기를 해보면 우연과 필연의 결합을 알 수 있다.

축구 경기를 하는데, 우리편이 쏜 슛이 일곱 번이나 골대를 맞고 나온다면

그날은 정말 재수 옴붙은 날이다. 그런 날은 우리편의 실력이 아무리

월등해도 상대방을 이길 수 없다. 이건 우연이다.

그러나 축구 시합을 할 때마다 매번 그럴 수는 없다. 축구 시합의 승부는

대체로 실력에 의해 결판난다. 이건 필연이다. 이와 같이 우연성과 필연성은

상호 결합되어 있다.

 

다음 이야기는 내가 우리 나라 최고 악법, 국가보안법으로 구속, 수감되어

있을 때들은 이야기다.

교도소란 죄지은 자를 교도하고 교화한다는 곳이라는 뜻 일게다. 그러나

내가 본 바로는 그렇지 않다. 교도소는 범죄의 대학교다. 그것에서는 날마다

새로운 범죄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진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범죄도 이젠 머리를 써야 해. 이 바닥도 너무 경쟁이 심해졌어.

구태의연한 방법으로는 먹고살기도 힘들어.

 

범죄꾼들에게 새로운 범죄는 확실히 유리하다. 잘하면 크게 한 건 올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혹 잡힌다 하더라도 형량이 비교적 적다. 신종 범죄는

적용할 법규가 마땅치 않아 형량이 적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무슨 이야기들을 하는가? 철창에 갇힌 수인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밤이면 밤마다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우리 방에 있던 김형은 소매치기로

들어왔다.

 

그날 말이야, 아침에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나무 젓가락이 부러지는 거야.

기분이 영 찜찜하고 안 좋더군. 그런 날은 일을 나가지 말아야 하는 건데...

아무튼 전철을 타러 나갔어. 우리도 매너가 있어서 우리 동네에서는 일을 잘

안 하는데, 아 그날 따라 눈에 확 띄는 물건이 보이잖아. 살금살금 다가가서

가방을 째고 지갑을 뺏지. 그만 돌아서려는데 누가 내 손목을 딱 잡는 거야.

하필 거기에 소매치기 전담반이 잠복하고 있었는지 누가 알았겠어? 아무튼

나같이 재수 없는 놈도 세상에 또 없을 거야.

그의 말에 의하면 그는 전적으로 우연히 잡혀 왔다. 그날 일만 안나갔어도,

나갔다 하더라도 동네에서만 일을 벌이지 않았어도 잡히지는 않았을 거라는

거였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일요일만 빼고 일주일에 6일은

일을 나갔다. 그리고 하루 일당 30만 원을 채우기 전에는 일을 끝내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는 그날 그 자리에서 안 잡혔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잡힐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나 차마 김형이 그때 안 잡혔어도 언젠가는 잡혔을 거요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의 마지막 아쉬움마저 빼앗아버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철학적으로 보면 이렇다. 그가 그날 그 자리에서 잡힌 것은 우연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매일 일을 나가다가는 언젠가는 잡힌다는 것은 필연이다.

이와 같이 사물의 발전에는 필연성과 우연성이 함께 결합되어 있다.

 

그러면 필연성과 우연성은 무엇일까? 필연성이란 사물의 반전 과제에서

반드시 나타나는 추세다. 우연성이란 사물의 발전 과정 속에서 나타날 수도

있고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이런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고 저런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는 현상이다.

생물의 진화는 필연이지만 진화 과정은 무수한 우연적인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사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꼭 지금과 같은 모습을 띠라는 법은 없었다.

어떤 다른 모습을 띠라는 법은 없었다. 어떤 다른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었는지를 한번 상상해보라! 얼마나 흥분되는 일인가?

그런데 우연성과 필연성 중에서 어느 한쪽만 극단적으로 과장시키는 경우가

있다.

먼저 우연성만 강조하고 필연성을 무시하는 견해를 살펴보자. 이 견해에

의하면 세상은 우연적 요소가 쌓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며, 거기에는 어떠한

필연적인 법칙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의 진보와 퇴보,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모두 운수에 맡겨버리는 소극적인 인생관을 낳는다.

 

그런 사람으로는 누가 있을까?

내 생각으로는 변방의 늙은이 새옹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새옹은 변방

늙은이의 말 고사의 주인공이다. 새옹은 변방에 사는 노인네다. 한번은

새옹이 애지중지 키우던 암말을 한 마리 잃어버렸다. 동네 사람들이 걱정하자,

새옹이 동네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것이 혹 좋은 일이 될지도 모르지요.

 

아니나다를까 그 말은 야생마와 눈이 맞아 새끼까지 낳아서 돌아왔다. 동네

사람들이 축하해주자, 새옹은 이번에는 근심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이 일이 나쁜 일이 될 수도 있지요.

 

역시 나쁜 일이 일어났다. 새옹의 아들이 그 야생마를 타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져버렸다. 다시 동네 사람들이 위로하려 하자 새옹은 말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이 일이 좋은 일이 될 수도 있어요.

 

그후 전쟁이 일어났는데, 그 아들은 다리가 부러져 있었기 때문에 징집

대상에서 면제되었다고 한다.

 

도대체 새옹이 하는 일이 뭔가?

모든 일을 우연에 맡겨버리지 않았는가? 말을 잃었으면 찾으러 나서는 것이

옳고, 전쟁이 싫으면 반전 운동을 해야지 새옹처럼 넋놓고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된다. 항상 그런 식으로만 살아가는 혹 이런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아들이 전쟁에 나가지 않아 기뻐하고 있었는데, 동네 사람들은 병을 피해

마을을 떠나고 있었으나, 새옹은 이 일이 놓은 일이 될 수도 있지요 하며

그냥 버티고 있었다.

얼마 후 전쟁에 나갔던 사람들과 병을 피해 달아났던 동네사람들이 다시

마을로 돌아와서 새옹의 집을 찾아가 보았으나, 그곳에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와 같이 모든 일을 우연에 맡겨버려서는 올바르게 살 수 없다.

 

이와 반대로 우연성을 무시하고 필연성만을 일면적으로 강조하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견해는 얼핏 보면 매우 과학적인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세계의 반전이 모두 필연적으로 정해진 것이 되어버려 인간이 세계에 개입할

소지를 없애버린다. 이러한 견해는 숙명론적 세계관이 된다. 따라서 운명을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운명에 지배당하는 자로 전락하는 것이다.

 

6절 아이는 어떻게 크나?

 

아장아장 걸어가는 어린아이는 너무너무 귀엽다. 보들보들한 뺨하며,

조그마한 손하며, 옴죽옴죽 거리는 입하며 ...보기만 해도 즐겁다.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엽다. 옛부터 어려서 신동 아닌 사람 없고 젊어서 시인 아닌

사람 없다고 했다. 귀여운 고것들이 또 얼마나 영리한지. 그래서 부모들은

이런 쓸데없는 걱정들을 한다.

 

조놈이 저렇게 영리한데, 저러다 혹 커서 대통령 되어버리는 거 아냐?

 

내 아들놈은 노벨상은 따놓은 당상이야.

 

그러나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부모의 엄연한 권리다. 왜냐? 아이들은

가능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대로 아이들 중에는 커서

대통령이 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혹은 노벨상을 탈 수도 있다. 반대로

백수건달이 되거나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아이들은 백지다. 그 백지에는

여러 가지 그림이 가득 찰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백지다. 백지는 가능성이다.

 

가능성이란 아직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장차 실현되어 현실로 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또 현실성이란 가능성이 실현되어 현실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을

말한다. 아이는 장차 커서 어른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 애가 아직

어릴 때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일 뿐이다. 이제 그 아이가 다 커서

현실성이 되었다. 그러면 가능성이 현실성으로 된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이라고 해서 모두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아이는 불행하게도

몹쓸 병에 걸려 죽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면 가능성이 현실성으로 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가능성에 대해서 좀더 알아보자. 가능성도 여러 가지가 있다.

가능성, 추상적 가능성, 실제적 가능성이 그것이다.

논리적으로 모순되거나 자연적, 사회적 법칙에 위배되는 것이 불가능성이다.

어떤 것이 불가능할까? 둥근 사각형은 어떤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불가능성이다.

가물은 아래서부터 위로 흐른다. 이것도 아니다. 그래서 불가능성이다.

불가능성은 현실성과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다.

 

한편, 논리적으로도 모순되지 않고 자연과 사회의 객관적 법칙에도

어긋나지 않지만 가능성이 현실화되기에는 아직 구체적인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는 경우를 추상적 가능성이라고 한다. 추상적 가능성은 말하자면 공상이다.

현실적인 조건은 필요 없다. 그저 상상의 나라를 펴기만 하면 된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제주도에 가는 거야. 기차는 필요 없어. 뛰어서

부산까지 가면 돼. 문명의 이기는 이제 지긋지긋하다. 배도 필요 없어! 그냥

헤엄쳐서 제주도로 가는 거야. 그러면 저녁때까지는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저녁밥은 해물된장찌개로 먹어야지.

 

논리적으로 모순되지도 않고 자연이나 사회적 법칙을 어기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사람과 내일 저녁 식사 약속을 한 사람은 조심하시라. 이 사람이

약속을 지킬 가능성은 없다. 이러한 가능성이 추상적 가능성이다.

 

그러면 실제적 가능성은 무엇일까? 필요한 조건을 만들어내면 현실화시킬

수 있는 현실적인 가능성이 실제적 가능성이다. 아장아장 걸어가는

어린아이를 바라보며 저놈이 20년 후면 어린이 되겠지 하는 것은 현실적

가능성이고 말하자면 진짜 가능성이다.

 

가능성과 현실성의 관계도 역시 변증법 적 모순관계다. 양자는 상호

전제하고 상호 대립한다. 가능성과 현실성은 다른 것이다. 우리는 이 양자를

구별해야 한다. 불가능성이나 추상적 가능성은 물론이고 실제적 가능성도

아직 현실성은 아니다. 아이는 아직 어른이 아니지 않은가? 이 점이 가능성과

현실성이 대립하는 측면이다.

또한 양자는 서로 의존하고 있다. 가능성 없이 현실성 없고 현실성 없이

가능성 없다. 게다가 가능성은 현실성으로 전화한다. 아이는 나이를 먹으면

어린이 되지 않는가? 이와 같이 가능성과 현실성은 대립하며 통일되어 있다.

가능성이라는 말에는 희망이 배어 있다.

 

좋은 가능성은 현실화시켜야 한다. 물론 나쁜 가능성은 그러면 안되지만,

좋은 가능성을 현실화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가능성은 현실성으로

전화될 수도 있고 전화되지 않을 수도 있다. 놓은 가능성에서 현실성으로

전화되지 않는 측면을 없애버리면 어떨까?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가능성이 현실화될 수 있는 주관적, 객관적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

아이를 잘 키워 훌륭하고 씩씩한 어른이 되게 하려면, 우선 교육 환경이

좋아야 한다. 물론 여러 가지 비교육적인 환경은 멀리할수록 좋다. 그러고

따뜻한 사랑이 필요하다. 아이는 부모의 사랑으로 크기 때문이다.

 

5장 유물론과 관념론

 

1절 창조의 순간은 언제?

 

그이 2000년 동안 서구 사회에서는 기독교적인 창조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교회는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으며, 누구도

그 주장을 반박하지 못했다. 단지 창조의 순간이 언제 일어났을까 하는

호기심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1650년에 아르마의 대주교 제임스 어셔는 구약성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수명을 근거로 계산을 했다. 그 결과 제임스 어셔는 창조는 기원전 4004년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후 캠브리지의 성 캐더린 대학의 학장인 라이트푸트

박사는 좀더 정밀화를 기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하늘과 땅과 인간은 성스러운 삼위일체의 신에 의해 한순간에 창조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 탄생 4천 년 전 1023일 아침 9시쯤 일어났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당시까지의 생각으로는 지구와 우주의 역사가 겨우

6천 년 정도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태를 악화시킨 것은 화석이었다.

화석에 의하면 지구의 역사는 6천 년 정도가 아니라 훨씬 멀리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지질학자이며 박물학자였던 퀴비에 남작은

천변지이설을 제창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지구에는 일련의 천변지이가

있었으며 그때마다 동식물이 완전히 절멸했고, 그때마다 신이 새로운

동식물들로 지구를 다시 채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아의 홍수도 그러한

천변지이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퀴비에 남작은 지구의 역사에 8

년을 덧붙였다.

 

그러나 우주 과학의 발달은 창조의 순간을 훨씬 앞으로 밀쳐버렸다. 우주의

대 폭팔 이전의 상태를 연구하는 스티븐 호킹은 바티칸의 예수회가 조직한

우주론에 관한 학회가 참석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학회의 마지막날 참가자들은 교환과의 회견이 허락되었다. 교황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대 폭발 후의 우주의 진화를 연구하는 것은 괜찮으나,

폭발은 우주 창조의 순간이므로 하느님의 일이니 만큼 대 폭발 그 자체를

알아보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내가 학회에서 방금 이야기했던

주제--시공간은 유한하지만 경계가 없고 따라서 시공간의 시작, 우주 창조의

순간이 없다는 가능성--를 교황이 몰랐던 것을 그때 다행으로 생각했다. 나는

갈릴레이와 같은 운명이 될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1929년 미국의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은 별자리를 관측하다가 밤하늘의

모든 별들이 우리로부터 급속히 멀어져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구에서 보았을 때의 이야기지 다른 별에서 지구를 본다면 지구는 그

별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이 될 것이다. 즉 우주는 팽창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이전에는 별들이 더 가까이에 있었다는 사실을 뜻한다. 사실

지금으로부터 100억 년이나 200억 년 전쯤에는 이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고,

그때의 대 폭발로부터 우주는 팽창을 시작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의 순간은 불과 6천 년 전에서 무려 2백억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면 신이 세계를 창조한 순간은 200억 년

전이고, 그것은 사실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과학이 더욱 발달하고

우주의 비밀이 하나하나 벗겨지면 신은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세계를

창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이제까지 살펴본 대로 창조론이

역사적으로 변화된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면 창조론이 이렇게 동요하는 이유는 무얼까? 그 이유는 창조론은 어떤

초자연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것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교조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누군가에 의해서 한순간에 창조됐는가, 아니면 그 스스로

존재했는가의 문제를 알아보기 위해 우리 다같이 김양과 이선생의 대화를

한번 들어보기로 하자.

 

김양:선생님, 철학은 무엇을 연구하는 학문인가요?

이선생:세계의 근원에 대해서는 종교가 잘 설명하고 있지 않나요? 저는

창조주의 이야기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세상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주군가가 그것을 만들었기 때문 아니겠어요?

이선생:인류는 오래 전부터 그러한 생각에 끊임없이 사로잡혔지요.

왜냐하면 그 이론은 세계의 근원을 가장 손쉽게 설명해주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면서 창조주가 세계를 만들었다는 생각은 점점 더

부정되고 있어요. 또한 철학적으로 보았을 때도 문제는 역시 남습니다.

세계를 만든 이가 창조주라면 그 창조주는 누가 만들었냐는 거지요.

김양:창조주의 창조주라고요?

이선생:그렇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아요. 창조주는 또 누가

만들었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죠. 이렇게 하여 창조주가 무한히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세계를 만든 것을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세계는 무한히 존재했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지요.

김양:그렇다면 그러한 창조주 중의 누구라도 진짜 창조주와 간은 정신적인

것이 과연 세계의 근원이 될 수 있겠느냐는 거죠.

이선생:그렇지요. 또한 세계가 무한히 존재했다면, 창조주와 같은 정신적인

것이 과연 세계의 근원이 될 수 있겠느냐는 거죠. 오히려 세계의 존재가 보다

근원적이고 일차적이며, 정신적인 것은 이차적이고 파생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요?

 

김양:선생님 말씀은 잘 알겠어요. 이러한 문제는 철학에서 중요한

문제인가요?

이선생:그래요. 이 문제는 아주아주 중요한 문제예요. 이 문제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철학이 크게 두 진영으로 나누어지지요. 또한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각 개인의 세계관도 크게 달라지지요.

김양:선생님, 오늘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우리도 김양과 이선생의 대화를 잘 들었다.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철학의 가장

중요한 관계에 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존재한다 는 것과

생각한다 는 것의 관계다.

모든 인식이나 이론, 더 나아가서 철학의 출발점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분하여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 사람이

책상이나 의자나 들판이나 사회를 생각할 때, 생각의 주제를 생각되는 대상과

구별해야 한다.

이때 생각하는 주제는 정신, 의식, 관념이며, 생각되는 대상은 존재하는 것,

즉 물질, 자연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느 쪽이 일차적이고 근본적인가 하는 문제는

모든 다른 문제에 관통되어 나타난다.

 

예를 들어보자. 설탕은 달다. 그러면 단맛은 설탕의 객관적인 특성인가,

아니면 인간의 주관적인 미각인가?

아름다음이란 대상의 자연적인 속성인가, 아니면 인간의 미적 감각에

속하는 문제인가?

진리란 객관적인 기준이 있는가, 아니면 인간이 주관적으로 판단해도 되는

건가?

이러한 예는 무수히 많으며, 이러한 모든 질문들은 하나의 문제로 귀결된다.

 

창조론은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이 근원적이고 일차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철학적 입장을 관념론이라고 한다.

관념론은 항상 의식, 정신, 사유, 관념을 일차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존재,

물질, 자연을 이차적이고 파생적이며, 정신이나 신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존재, 물질을 일차적으로 간주하는 철학적 입장을 유물론이라고

한다.

 

그 누구도 이 문제를 회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느 편에서야 할 것인가?

그야 당연히 옳은 편에서야 하지 않겠는가? 과학의 발달은 어느 편인가 하면,

유물론 쪽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왜 그럴까?

 

존재는 의식에 앞서 이미 존재하고 있다. 존재는 시간상으로 영원하며,

공간상으로 무한하다. 우주의 대 폭발이 지금으로부터 200억 년 전이라지만,

그 전에도 물질은 엄연히 존재 하고 있었다. 존재는 인간이 의식하건 아니건

객관적으로 있어왔으며, 끊임없이 발전해왔다.

반면에 의식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의식은 인간이 탄생하고 나서야

시작되었다. 무한한 존재에 비해 의식이 차지하는 시간과 공간은 상상 할 수

없을 정도로 작다.

 

도한 의식은 존재의 산물이며, 존재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의식을 본 적이 있는가? 살아 있지 않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두뇌라는 물질적 존재가 없는 의식을 사상할 수 있는가? 의식이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그것은 존재한 후에, 존재함으로써 중요해직 수 있다.

이와 같이 세계를 잘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은 역시 유물론이다.

 

그러나 한가지 문제가 남는다.

그러면 의식은 무엇이란 말인가? 의식은 아무것도 아닌가? 의식은 존재에

대해 전적으로 수동적인가? 이 문제에 대한 실마리는 변증법이 제공하고

있다. 변증법은 사물간의 상호 의존과 상호 투쟁을 주장한다. 존재와 의식의

관계도 일방적이고 일면적인 맥빠진 형이상학적 관계가 아니고 변증법적으로

상호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의식은 존재에 대해 수동적이면서 능동적이다.

의식은 존재의 반영인 동시에, 존재에 대한 투사다.

이와 같이 존재는 의식에 대해 일차적이고 근원적지만, 의식은 존재에 대해

능동적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철학적 입장을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이미 전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큰 철학이다. 또한

이 철학은 과학에 근거한 과학적인 철학이므로, 과학의 급속한 발달과 함께

더욱 영향력을 확대해 나갈 것이다.

 

유물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우리가 살려본 변증법적

유물론이고, 또 하나는 기계적 유물론이라는 것이다.

기계적 유물론은 역학의 산물이다. 역학에서는 전체 세계가 원자로

합성되어 있으며, 원자들은 역학의 법칙에 따라 운동한다고 본다. 역학은 모든

사물의 운동을 공간 속에서 물체의 단순한 위치 이동으로만 생각한다. 기계적

유물론은 역학에 기초한 유물론이기 때문이다. 기계적 유물론은 역학에

기초한 유물론이기 때문이다. 기계적 유물론에서는 사물의 다양한 변화,

발전을 단지 역학적 운동형식으로 환원시킨다. 따라서 기계적 유물론은

역학적 운동 이외의 운동 즉 화학적, 생물학적, 사회적 운동에 대하여 올바른

설명을 할 수 없다.

 

기계적 유물론 앞에 가면 모든 것이 기계가 되고 만다.

예를 들어보자. 먼저 시계는 어떤가? 물론 시계는 기계적 유물론 앞에 가면

기계가 된다. 시계의 모든 운동은 단순히 기계적 운동으로 설명된다. 시계의

태엽을 감아주면 시계는 복잡한 기계적 운동에 의하여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기계적 유물론 앞에 사람을 갖다 놓으면 어떻게 될까?

사람도 역시 기계가 되고 만다. 기계적 유물론 앞에서는 사람도 역시 좀더

정밀한 시계에 불과할 뿐이다. 정말로 사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

주체성, 창조성, 욕망과 희망, 상상력 등은 도무지 간 곳이 없다. 기계적

유물론자에게 인간은 단지 로봇에 불과하다.

기계적 유물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시계의 운동 등 극히 단순한

기계적 운동에 국한되어 있다. 하기는 요즈음에는 기계적 유물론으로는

시계의 운동조차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 태엽 시계는 박물관에나 가야

찾아볼 수 있게 되었고, 모두들 전자 시계를 사용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전자

기계는 단순히 기계적 운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 않은가?

 

사실 기계적 유물론은 역학이 모든 학문의 왕이었을 때 유행한 철학이다.

물리학, 화학, 사회과학 등 새로운 학문이 왕성하게 발전하면서 기계적

유물론은 이미 역사에 유물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계적 유물론의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아직도

유물론하면 기계적 유물론을 머리속에 떠올리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첫 번째 이유는 물론 무지 때문이리라.

아직도 유물론에 대해 너무나 모르고 있을뿐더러, 단지 유물론이라는

어감으로 많은 사람들이 유물론을 기계적 유물론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유물론을 기계적 유물론으로 생각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유물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고의적

악선전이다.

그들은 말한다.

 

유물론자는 냉혈한이야. 그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다.

유물론자는 사람도 물질로 본다잖아?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이러한 말들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들이다.

오히려 유물론자는 인간과 사회의 진정한 진보를 열망해왔다. 그것은

기계적 유물론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단지 과학이 발달하지 못해 좁은

시야를 가졌을 뿐이지 그들이 인간을 무시하거나 인류의 진보를 원치 않았던

것은 절대로 아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이 확립되면서 기계적 유물론은 철학으로서의 의의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기계적 유물론은 변증법적 유물론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이론적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

 

2절 플라톤과 버클리

 

그러면 관념론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관념론의 종류는 관념론 철학자 수만큼이나 많다. 관념이라는 것이 애매한

것이어서 과학적인 기준으로 찾기가 매우 어렵다. 이 틈을 이용해서 관념론

철학자들은 모두 그들만의 독창성을 내세워서 저마다 새로운 철학을

만들었다. 사실 철학이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도 이 점에 있다. 입 있는

사람은 모두들 한마디씩 하는데 그 말들이 모두 다르니 철학이 어려울 만도

하다.

 

그러나 관념론도 크게 보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객관적 관념론과

주관적 관념론이 그것이다. 객관적 관념론은 세계의 근본을 인간의 주관적

의식의 외부에 있는 객관적 관념에서 찾으려 한다. 주관적 관념론은 세계의

근본을 인간의 주관적 의식에서 찾으려 한다.

 

먼저 객관적 관념론부터 알아보자.

객관적 관념론은 관념론의 가장 오래된 형태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헤겔, 공자, 이퇴계, 이율곡 등등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부분의 철학들이

여기에 속한다.

 

객관적 관념론은 기독교 사상을 비롯한 종교의 사상을 연상하면 된다.

종교는 만물의 근원을 신에서 찾고 있다. 객관적 관념론은 신을 이러저러한

객관적 정신으로 바꾸어 놓았다. 예를 들면 플라톤은 이데아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순수형상을, 헤겔은 절대정신을, 공자는 천명 또는 이를

객관적 정신으로 제시했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인간의 주관적 의식의

외부에 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객관적 관념론을 이해하기 위해서 대표적인 객관적 관념론자였던 플라톤의

사상을 알아보자.

먼저, 이렇게 물어본다. 우리가 과연 삼각형을 그릴 수 있는가?

삼각형이란 세 개의 선분으로 이루어진 도형이다. 따라서 삼각형을 그리기

위해서는 세 개의 선을 그려야 한다. 그런데 수학적 정의에 의하면 선분이란

길이만 있고, 넓이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선분을 그리는 것이 아니고 단지

선분 같이 것을 그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 왜 우리는 삼각형을 그리지 못하고 단지 삼각형같이 생긴 것만을

그리는가? 진짜 삼각형은 뭐고 삼각형같이 생긴 것은 뭔가?

이에 대해 플라톤은 진정한 삼각형은 이데아고 삼각형 같은 것은 현실

세계라고 대답했다.

플라톤은 세계를 둘로 나누었다. 하나는 이데아의 세계고, 하나는 현실

세계다.

이데아의 세계는 진정한 세계고, 현실 세계는 가상의 세계다. 이데아의

세계는 천상의 세계고, 현실 세계는 지상의 세계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제우스에 의해 인솔된 신의 대열은 천구를 뛰어돌아, 천구의 끝을 떠받치고

있는 둥근 천장을 올라가 천구의 밖으로 나아간다. 그곳이 이데아의 세계다.

그것에는 여러 가지 이데아가 있다.

영혼의 신의 대열을 뒤따라 역시 이데아의 세계를 보려고 한다. 그런데

영혼은 날개를 가지고 있는 기사와 날개를 가지고 있는 두 마리의 말로 되어

있다. 그런데 말을 잘 모는 영혼의 이데아의 세계를 살짝 볼 수 있지만, 말을

잘 못 모는 영혼은 지상으로 떨어져 육체에 머문다. 우리가 삼각형을 그릴 수

있는 것은 이데아의 세계에서 살짝 본 진짜 삼각형을 상기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렇게 생각했다.

모든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움의 이데아에 의해 아름답다. 큰 것을 크게

하는 것은 큼의 이데아다.

플라톤의 철학은 객관적 관념론의 전형이다.

인간의 의식 밖에 있는 어떤 정신적인 것, 즉 이데아가 만물의 근원이다.

플라톤은 철학은 정신이나 의식이 존재와 물질에 대해 근원적이며

일차적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관념론이다. 또한 그 정신, 의식은 인간의

주관적 의식으로부터 독립된 것이기에 객관적 관념론이다. 플라톤 이후에

수많은 객관적 관념론자가 나타났지만 객관적 관념론의 철학적 구조는 매우

유사하다. 단지 그들은 플라톤의 이데아를 여러 가지 다른 객관 정신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물론 객관적 관념론도 인류의 인식을 확대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로 객관적 관념론의 근거는 매우 희박해졌다. 또한 객관적

관념론은 세계를 창조하고 세계의 근원이 되는 것은 객관 정신이라고

주장했지만, 그 객관 정신은 어디로부터 왔는지 끝내 밝히자 못하고 있다.

 

객관적 관념론과 달리 인간의 감각, 의식, 관념 등이 세계의 근원이며

전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주관적 관념론자다.

주관적 관념론자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의 의식과 독립해서 물질 세계가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는 점이다.

대표적인 주관적 관념론자로 영국의 대주교이며 철학자였던 버클리가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 개울 등등 한마디로 말해서 모든 감각적 물체가 자연적,

실재적으로 존재한다는 의견이 이상하게도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라. 그것은 모두 근거 없는 독단이다. 지금 그대 눈에는 집, ,

개울 등등으로 된 풍경이 보인다고 치자. 그대는 그 풍경들이 그대의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연적, 실재적 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지금 그대에게 확실한 것은 일정한 빛깔과 모양 등등의

감각의 다발이 그대의 의식 속에 나타난 것일 뿐이 아닌가?

눈을 감으면 그들 감각이 사라진다. 그때에 어떻게 당신은 그들 풍경들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런 증명은 불가능하다.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된다는 것이다. 지각을 떠난 존재는 없다. 실재하는 것은 감각,

지각, 마음, 오적 그것뿐이다. 물질적인 외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무슨 황당무계한 이야기인가?

존재한다는 것은 오직 우리의 마음뿐이고 객관적인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니, 도대체 이런 것을 어떻게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러면,

이렇게 건전한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것은 혹시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고백을 한번 들어보자.

 

우리가 물질에 반대하여 제가한 여로가지 주장이 설사 논증의 힘이 없다

할지라도 지식과 평화와 종교를 지키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믿을 수

있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와 같이 부당한 정치적 의도가 없는 한은 주관적 관념론은 아무래도

설득력을 갖기 힘들다. 버클리 자신도 주관적 관념론만으로는 아무래도 너무

황당하다고 생각했는지 다음과 같이 객관적 관념론으로 슬쩍 내빼고 있다.

 

내가 느끼는 것은 어느 정도 다른 사람에게도 공통된다. 모든 사람이

산으로 아는 것은 모두가 공통적으로 그렇게 의식하기 때문이며 이

공통감각을 여로 사람에게 동시에 일으키게 하는 원인은 신의 정신이다.

이제 버클리의 의도는 빤하게 드러난다. 그의 주장은 진실로 과학적인

태도로 세계를 밝히려 하기보다는 기존의 봉건적 사회 질서와 종교를

옹호하려는 의도가 더 크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버클리의 주장을 들은 어느 과학자는 나는 그를 이렇게 반박하지 하며

옆에 있는 바위를 발로 뻥 찼다고 한다.

이야말로 주관적 관념론에 대한 가장 통쾌한 반박이다. 만약 버클리의

주장대로 객관 세계가 단지 환상에 불과하다면 바위를 찬 발이 아플 리가

없을 것이다.

만약 주변에서 주관적 관념론을 믿는 친구가 있다면 옆에 있는 바위를 한번

차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유물론과 관념론의 문제는 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다. 따라서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도 이 두 관점의 차이는 어디서든 나타난다.

전에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세상물정 모르는 어느 부잣집 아이의

이야기다.

 

우리집은 가난해요. 운전 기사가 둘 있는데 둘 다 가난해요. 파출부

아줌마도 여럿 있지만, 하나같이 가난해요. 마당에 풀장이 있지만 그것도 아주

좋은 편이에요. 우리집은 너무 좁아서 테니스장도 못 만든단 말이에요.

누가 이 아이에게 돌은 던지랴?

그 아이의 생각은 상식을 벗어나지만, 그 아이가 그런 환경 속에서만

커왔다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 아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의

존재의 반영일 뿐이다.

 

옛사람 중에서 존재와 의식의 관계를 유물론적으로 해석한 사람은 누가

있을까?

내 생각으로는 맹모가 그런 사람이 아닌가 한다. 맹모는 맹자를 좋은

환경에서 교육시키기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갔다고 한다. 맹모의 행동은

존재의 중요성을 잘 인식한 행동이다.

하기는 우리 나라에서도 수많은 맹모의 후예들이 있어서 모두들 8학군으로,

8학군으로 몰린다. 물론 진정한 유물론자라면, 단지 8학군으로 이사가려고

애쓰기보다는 교육 제도의 모순에 주목하고, 교육 제도 자체의 개선에 노력

할 것이다.

 

그러나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은 사회의 진보를 놓고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다.

관념론은 사회 진보의 기준을 어떤 초자연적인 힘이나 정신에서 찾는다.

도대체 그러한 사상이 어떻게 사회의 진보를 위한 실질적인 힘이 될 수

있겠는가? 흔히 관념론이 사회의 진보에 보수적인 태도를 취한 이유는 이러한

이유에 기인한다.

반면에 유물론자가 사회의 진보에 기여하려고 노력한 것은 그들의 철학적

신조에 비추어 보아 당연하다. 그들은 사회의 물질적 토대의 진정한 변화를

원했기 때문이다.

 

3절 외화와 자기화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뒷간 이야기다. 냄새가 좀 나더라도 이해하시라.

철학은 어느 곳이고 관계하기 때문에 뒷간까지 갈 수도 있다.

 

나는 매우 많이 돌아다니는 편이다. 그래서 공중 화장실을 애용한다.

그런데 공중 화장실에서 들어가서 앉아 있다 보면 눈에 띄는 것이 있지

않은가? 그것을 쳐다보며 나는 항상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억압은 역시 정치적 억압과 성적 억압이군.

 

어떤 이야기인가 하면, 화장실 벽에서 항상 발견되는 것이 있지 않은가.

정치적 구호와 음란한 낙서 말이다. 정치적 구호는 왜 발견되는가? 그것은

우리 사회가 정치적으로 억압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는

국가보안법이 엄연히 살아 있어서 법적으로도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

그밖에 사회적, 문화적으로도 정치적 자유를 제약하고 있다. 따라서 그 억압의

분출이 화장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다음은 성적 억압이다. 하지만 이것은 정치적 억압과 성질이 좀 다른 것

같다.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것을 상품화한다. 성도 역시 마찬가지다. 술집,

사창가, 영화, 연극, 문학 등등 모든 곳에서 성상품의 홍수다. 아마 시장

규모로 보면 성시장이 가장 큰 시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말하자면,

사회적으로 성적 자극을 너무 심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회도 그렇게

과도한 성적 자극을 감당할 수 없다. 따라서 이젠 반대로 사회적으로 성을

억압한다. 그래서 그런 억압의 분출이 화장실까지 찾아가는 것이다. 물론

화장실에서 성적 억압의 분출되는 이유 중에는 화장실의 분위기, 그 분위기

탓도 있겠지.

 

그러면 인간은 왜 화장실까지 찾아가서 스스로를 분출시켜야 하는가?

그것은 인간이란 세계를 향해 자기자신을 외화하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원래 외화란 객관적 실재를 산출하는 정신의 활동을 말한다. 객관적인

세계를 인간의 주관성이 외화된 것으로 보는 견해는 이미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에서부터 나타난다.

 

헤겔은 자연과 사회의 모든 현상을 정신의 외화로 보고, 이 외화가 바로

변증법의 핵심적인 요소라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세계사란 세계 정신이

인간의 의식을 매개로 사회 현상들에 자기자신을 외화하고, 다시 이 현상들은

세계정신과 모순을 이루어 훨씬 더 고차적인 의식 형태를 야기시킨다는

것이다. 세계 정신은 이렇게 끊임없는 외화와 복귀, 또 새로운 외화를 통해

역사 과정을 산출해낸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외화 개념을 소외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소외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인간으로부터 독립하여 인간에게 소원한 관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소외는 유물변증법의 핵심적인 개념이지만, 여기에서는 외화 개념을

사용해보기로 하자.

 

헤겔은 대표적인 관념론자다. 따라서 그에게는 항상 정신이 일차적이고,

물질은 이차적이다. 즉 그는 거꾸로 서 있다. 그러나 거꾸로 서 있는 그를

바로 세우면, 그가 사용한 개념은 매우 유용하다.

외화 개념도, 그것이 인간적인 주체가 물질적인 객체에 능동적인 작용을

사하는 것을 뜻한다면 매우 유용한 개념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인간은

자기자신을 표현한다. 인간은 자연과 사회에 능동적인 영향을 미치며, 자연과

사회를 변형시킨다. 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은 자연과 사회에 자기자신을

대상화시킨다. 즉 객관적인 대상에 자기자신을 집어넣는 것이다. 또한 외화란

요즈음 표현으로 하면 자아실현이다. 즉 자기자신을 객관세계에 실현하는

것이다. 외화란 인간의 본질적인 속성이며, 인간은 외화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그러면 인간은 어떠한 형태로 자기자신을 외화시킬까? 외화의 가장

대표적인 형태는 노동이다. 노동이란 인간이 자신의 의도대로 자연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노동과정은 인간이 자기를 외화시키는 과정이다. 사회적

실천도 인간이 자기를 외화시키는 주요한 형태다. 인간은 자신의 의도대로

사회를 만들어간다.

인간은 자신을 표현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위대한 예술가들은 격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격정은 바로 자기자신을 표현하려는 격정이다.

문필가들에게서 펜을 빼앗아버리고, 화가에게서 붓을 빼앗아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그들은 미치고 말 것이다. 그것은 가장 중요한 속성인 외화하려는

속성을 그들에게서 차단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은 외화하기만 하는가? 인간 스스로를 외화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인간은 아무것도 집어넣지 않고는 끊임없이 물건을

토해내는 요술상자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전기를 만들어내는 자기동력기가

아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무언가를 먹어야만 무엇인가를 배설해내지, 아무것도

먹지 않고 계속 배설해 낼 수 없는 것과 같다.

 

인간은 세계를 자기화한다. 자기화란 자기와는 다른 낯선 것으로 마주서

있는 대상을 자신에게 친숙한 것으로 동화시켜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독일어 Aneignung 은 보통 전유라고 번역되자만 이는 Aneignung 이 가진

뜻이 제대로 표현해 내지 못하므로 여기서는 문자 그대로의 뜻을 살려

자기화라고 하겠다.

인간은 노동이나 실천을 통하여 세계를 인식한다. 즉 세계를 자기화하는

것이다. 철학과 과학은 인간이 세계를 자기화하는 가장 중요한 양식이다.

 

일반적으로 철학적 세계관에는 언제나 대립된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외부로 향한 의식이다. 이것은 인간이 세계를 향한 의식이다. 다른 하나는

내부로 향한 의식이다. 이것은 인간 그 자신을 향한 의식이다. 모든 사물은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그 모든 연관 중에서 가장 특별하고 중요한 연관이

세계와 인간의 연관이다. 인간은 세계내의 다른 사물과 달리 특별한 지위를

갖기 때문이다.

인간과 세계의 연관은 외화와 자기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흔히

이야기하는 삶의 의미라든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삶의 의미를 세계와는 고립된 인간 자체에서만 찾으려 했을

때는 반드시 실패하고 말 것이다. 사물은 모두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삶의

의미도 인간과 세계의 구체적인 연관 속에서 찾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4절 노동과 실천

 

인간은 세계를 향해 자기자신을 외화한다. 또한 세계를 자기화 한다.

그런데 인간의 외화와 자기화를 매개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노동과

사회적 실천이다.

 

누구나 노동 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노동 하면 노가다를

연상한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노동은 상식적인 세계관에서 바라본

노동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철학은 노동 그 자체를 추구한다.

자연을 변화시켜 인간에게 유익한 것을 만드는 것이 노동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생활 수단을 자연으로부터 얻는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자연을 이용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육체, 즉 팔,

다리, 머리, 손 등을 움직여 자연을 인간의 삶에 활용한다. 노동은 인간에

의한 자연의 변화이다.

어떤 동물도 자연 환경을 의도적으로 변화시키자 않는다. 동물은

자연환경에 단지 수동적으로 적응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노동한다. 따라서 노동은 인간을 인간 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속성이다.

노동은 인간이 자기자신을 외화시키는 것이다.

 

한편, 노동은 인간이 세계를 자기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손이 발달하였고, 언어를 가지게 되었고, 사고를

촉진시켜왔다.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인간 사회를 발전시켜왔던 것이다.

아주 먼 옛날에 유인원의 한 종류가 인간으로 진화를 시작했다.

유인원은 직립 자세를 취함으로써 인간으로의 진화에 첫발을 내디뎠다. 직립

자세로 인하여 자유로워진 손을 이용하여 노동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은 인간의 손을 발달시켰다. 그리하여 지금은 지구상의 손을 발달시켰다.

그리하여 지금은 지구상의 모든 생물 중에서 가장 발달된 손을 갖고 있다.

그런데 손의 신경 계통과 두뇌의 신경 계통은 매우 밀접히 연관되어 있고,

손의 빈번한 사용은 두뇌의 발달을 가져왔다.

또한 유인원은 원시 사회의 공동 노동의 필요성에 의하여 언어를

발달시켰다. 혀와 입은 빈번한 사용으로 인해 유인원의 혀와 입은 계속

진화하여 분절음을 발음할 수 있게 되었다. 언어의 사용으로 인해 인간의

지능은 매우 빠르게 발달했다.

 

그밖에 인간 사회의 과학과 기술의 개발 역시 노동에 의한 것이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연을 변화시키면서 자연의 성질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 자연을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면 어떤 동물도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현대 사회에서는 과학과 기술이라면, 실험실과 연구소를

떠올리게 되었지만,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직접적인 노동이 과학과 기술에

기여한 것에 비하면 실험실과 연구소의 역할은 아주 작은 것이다. 물론

실험실과 연구소도 노동과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실험실과 연구소에서도

실험과 검증에 의하여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킨다. 실험과 검증이란 결국

노동의 외화와 자기화와 똑같은 구조로 이론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노동을 통해 인간은 인간답게 되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언어를

발달시켰고 과학과 지식을 획득했다. 흔히 생각하듯이 과학과 지식은 자연을

그저 바라보면서 곰곰이 생각해서 발달한 것이 아니었다. 과학과 지식은

인간이 자연에 직접 접촉하면서 발달한 것이었다. 인간은 자연을 자기화

하면서 인간이 되었고 인간이 자연을 자기화하는 매개가 곧 노동이다.

 

유인원이 노동을 통해서 인간으로 진화하자 인간은 자연 환경과 전혀 다른

또 하나의 환경 속에 놓이게 되었다. 사회가 바로 그것이다.

사회는 인간 스스로가 만든 것이다. 사회는 인간의 외화물이다. 이 세상의

어떤 생물도 인간 사회 와 같은 것을 만들어내지는 못하였다. 인간은 자연을

만들지는 못하였다. 단지 자연을 변형시키고 개조할 뿐이다.

그러나 인류의 거대한 손은 자신의 고유한 창조물을 만들어내었으니,

그것이 바로 사회다. 따라서 그만큼 사회는 인간의 속성이 잘 외화되어 있다.

인간은 사회적 실천을 통하여 자기자신을 사회에 외화시킨다.

사회는 인간의 창조물이고 외화물이지만, 그 자신은 인간으로부터 독립하여

자기자신의 논래대로 움직인다. 왜냐하면, 사회는 인간의 창조물이지만 각

개인의 창조물은 아니다. 그런데 각 개인은 나름대로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다양한 생각을 하고 있다. 따라서 사회는 어느 누구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독립된 실체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이제는 사회 자체를 배우고 연구해야

하는 새로운 과제가 주어진다. , 사회를 자기화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를 자기화하는 방법은 사회적 실천이다. 단지 관조하는 것만으로는

사회를 알 수 없다. 사회에 개입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과정이야말로 사회를

알 수 있는 지름길이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연과 관계한다. 또한 인간은 사회적 실천을 통해

사회와 관계한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신을 외화하고 자연과 사회를

자기화함으로써 인간답게 될 수 있다.

우리 삶의 의미도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노동을 통해 자연을 개조하고 사회적 실천을 통해 사회를 진보시키는 것,

또한 그 과적을 통해 스스로 배워 나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가치와 의의가 아닐까?

삶의 의미는 생산에서, 사회를 진보시키는 과정에서 찾아야 한다. 삶의

의미를 소비에서, 향유에서, 그 어떤 결과적으로 남는 것 에서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거꾸로 된 가치관이 아닌가?

 

6장 인식론

 

1절 자연의 질문

 

지금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실들이 오랜 세월 연구를 거듭하는 동안

언젠가 밝혀질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과제는 너무 광범위하다. 미약한 한

인간의 힘으로는 평생을 다 바친다 해도 캐내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여러

세대를 거친 후에야 우리는 우주의 지식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먼 훗날

우리의 후손들은 의아해 할 것이다. 그토록 자명한 일들을 조상들이 모르고

살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의 후손들은 얼마나 많은 짐을 지고 있는가?

그때가 되면 우리들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질 것이다. 그러나 모든 세대마다

탐구할 소재는 갖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우주는 얼마나 빈약한

존재인가? ...자연의 신비는 한번의 노력으로 벗겨버릴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세네카는 수천 년 전의 사람이다. 그러나 위에 인용한 그의 글은 것 잡은

생선처럼 얼마나 신선한가?

세네카의 말대로 우리는 옛 사람들이 지금 보면 너무나 자명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의아해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후손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세계는 넓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은 너무나 많다. 누구도

그것을 모두 다 알아낼 수도 없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경고를 잊지 않는다.

 

많은 것을 알고 할 수 있는 인간, 너는 지와 무지의 경계 속에서 살고

행동하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부디 조심하거라! 유식한 것 같은 기분에 빠져

있을 때가 가장 위험한 때이니라.

 

우리가 보기에는 매우 높은 문명 수준이나 과학 기술의 발달로 몇 세대가

지난 후에 본다면 아주 유치한 수준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매우 참신한

진리라도 몇 세대가 지난 후에 본다면 아주 구태의연한 상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참신한 진리가 몇 세대를 지나면서 구태의연한 상식이 된다는 사실,

그 사실 자체가 인간 의식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있다. 세네카의 말대로 모든

세대는 탐구할 소재를 갖고 있다. 인간의 인식은 세대와 세대를 이어가며

엄청나게 발전해왔다.

어떻게 보면 인류의 역사는 인간 인식의 무한한 확대, 심화의 역사이기도

하다. 독을 깨뜨려 도구로 삼던 인간은 어느덧 우주 여행을 하고 있다.

자기가 사는 숲의 먹이에 대해서만 생각하던 인간이 이제는 수십만 광년

너머의 별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이야기만 기억하던

인간이 이제는 수백억 년 전의 일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인간 인식의 발달은

정말로 놀라운 것이다.

 

인간의 인식은 끊임없는 발전해왔다.

이와 동시에 인간은 인식 그 자체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도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이에 대한 대답이 인식론이다. 인식론은 철학 자체의 발생과

함께 생겨났으며, 철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다.

 

그러면 인식론의 가장 첫 번째 문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이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다.

많은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인간 인식의 가능성을 확신하였으며, 그러한

확신에 따라 세계를 탐구했다. 그 결과 인간의 인식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세계를 인식할 수 없다는 주장도 결코 만만치는

않았다. 그러한 철학적 견해를 불가지론이라고 한다.

모든 물체를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이 사실은 많은 실험과 연구의 결과로

안아낸 사실이다. 오늘날 이러한 사실을 의심할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나 불가지론자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말할까?

원자란 인간이 물질의 운동을 이해하기 위해 편의상 도입한 개념이다.

누가 원자가 정말로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세상에서 아무도 그것을 본

사람은 없다. 인간은 사물 그 자체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따른다면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경험적 사실이나

감각뿐이다. 그러나 경험적 사실이나 감각 또한 매우 주관적인 것이며 결코

확실하다고 말할 수 는 없다. 결국 세계는 알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불가지론은 과학이 아직 발달하지 못하고 세계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

너무나 빈약할 때의 인식론이다. 현대 사회의 인식론으로는 결코 설득력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세계를 전적으로 알 수 없다고 하지는 않더라도

불가지론적인 사고방식은 의외로 넓게 퍼져 있다.

 

유물론은 이와 같은 사고 방식을 반대한다.

유물론은 인간이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유물론은 인식도

변증법적으로 진행된다고 주장한다. 자연적이나 사회의 발전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인식 과적도 변증법적으로 진행된다. 인식이란 사유가 세계에

무한하게 접근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과 세계 사이에 모순이 발생하고

해결되는 영원한 과정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위에 인용한

세네카의 말은 변증법적인 인식론의 핵심을 잘 설명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위에 인용한 세네카의 말은 변증법적인 인식론의 핵심을

잘 설명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도 인간의 인식을 진보시켜온 것은 인간이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는 입장이지 불가지론은 아니었다.

 

그런데 불가지론과는 다르면서 세계를 인식 할 수 있다는 입장과도 다른 또

하나의 입장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그러면 그런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무엇을

중요하다고 하는가? 그들은 중요한 것은 유용성 이라고 주장한다. 그러한

철학적 입장을 실용주의 또는 프래그마티즘이라고 한다. 진리는 인간에게

유용하다. 옳은 것은 쓸모 있는 것은 모두 옳은 것이다 고 주장한다.

실용주의자는 사물의 본질은 알 수 없을 분 아니라,

알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그 사물의 유용성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유용한 허위 와 같은 것을 생각해보자. 건전한 이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진리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용주의자는 그것을 진리와 같다고 우긴다. 유용한 허위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유용할 수 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유용할 수는 없다. 따라서 실용주의자들이 그토록 주장하는 유용성은 항상

이러한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

 

실용주의는 자본주의의 신물이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화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 앞에 자유로운 것은 없다. 자본은 돈벌이가 되는

일이면 어디든지 찾아 나선다. 자본에게는 돈벌이가 되는 것은 유용한

것이다. 자본은 그 돈벌이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다.

실용주의는 자본의 논리와 똑같은 논리를 갖는다. 실용주의는 사물의

본질을 따지지 않는다. 단지 사물의 유용성만을 따진다. 그러나 문제는 그

사물의 유용성이라는 것이 매우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유용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유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결국 실용주의는 진리에 대해서 언제나 상대적일 수밖에 없고 결코 진리에

다가서려고 하지 않는다.

 

2절 진리란 무엇인가

 

철학은 진리를 추구한다.

그러면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란 바른 인식 이다. 바르자 않은 인식은

진리가 아니다.

옛 사람들은 사람은 달에 갈 수 없다 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간은 이미

로켓을 타고 달에 가서 달 표면을 마음껏 걸어다녔다. 따라서 요즈음

사람들은 사람은 달에 갈 수 있다. 는 바른 인식이다. 그런데 바른 인식과

바르지 않은 인식은 무엇이 다른가? 바른 인식은 객관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한 것이다. 즉 객관적 사실과 인식이 일치하는 것이 바른 인식이고

그것이 바로 진리다.

 

철학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진리에 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 진리란 객관적인 것인가, 아니면 주관적인 것인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어떤 학교의 교실을 들여다보자.

, 지금부터 선생님이 문제를 하나 내겠어요. y=2x+1일 때, x=2y

몇이죠? 답은 1)2, 2)번은 3, 3)번은 4, 4)번은 5 중에서 고르세요. 정답은

다수결로 결정하겠어요. 먼저 1)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들어보세요.

 

이 교실에서는 별로 배울 것이 없을 것 같다.

민주 사회에서 다수결이 아무리 좋은 방법이라고 하더라도 진리를 다수결로

결정할 수는 없다. 이 교실에서 번에 손든 학생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그것이 정답이 될 수는 없다. 진리란 인간이 주관적으로 마구 결정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방대로 진리는 객관적이다. 어떤 이론이나 생각이 객관적 사실과 일치하면,

그것을 바른 인식이며, 진리다. 진리란 주관적 견해, 소망 의도와는 무관한

것이다. 따라서 객관적 진리는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진리다.

 

둘째, 진리란 절대적인가, 아니면 상대적인가?

 

진리라고 하면 흔히 영원히 변치 않는 그 어떤 것 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완전하고, 영원하며, 변치 않는 절대적 진리다. 절대적 진리란

절대적으로 완전한 진리를 말한다.

그러나 진리를 절대적 진리로만 파악하는 것은 우리를 불가지론의 늪으로

끌어들인다. 인간에게는 그 어떤 절대 도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만약 절대적

진리만이 진리이고 다른 모든 것은 비질리라고 한다면, 인간은 정말 진리를

인식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사물을 완전하게 인식할 수 없다. 인간의 실천이나

기술적 수준은 언제나 한계가 있다. 또한 어떤 사람이 사회적 처지에 따라서

객관적 사실 또한 변화, 발전한다. 이러한 경우 사물의 전체 발전 과정을 모두

다 인식할 수는 없다.

우리가 획득하는 진리는 언제나 부분적인 한계가 있다. 이것을 상대적

진리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이 상대적 진리를 인식한다는 사실이 결코 인간의

인식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상대적 진리가

객관적 사실과 부분적으로 일치하는 내용을 지닌다고 한다면, 상대적 진리는

부분적으로 절대적 진리를 포함하는 셈이다. 따라서 상대적 진리는 절대적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19세기말까지 뉴턴의 역학이 절대적 진리라고 생각되어왔다. 그러나 뉴턴의

역학은 우리 눈에 보이는 일반적인 사물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지만, 원자 안의 전자의 움직임과 같은 극단적으로 미세한 사물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는 없다. 따라서 현대에 와서는 그러한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양자역학이라는 것이 나타났다. 따라서 뉴턴의 역학은 결코 절대적 진리가

아니다. 그러나 뉴턴의 역학은 여전히 우리 눈에 보이는 일상적인 사물을

설명하는 데는 유효하다. 즉 뉴턴의 역학은 상대적 진리인 것이다.

처음 얼마간에는 제대로 인식을 못했을지라도 우리는 점점 상세하고 깊이

있게 사물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 겨로가, 우리의 머리에는 상대적 진리가

쌓인다. 상대적 진리가 쌓여감에 따라 상대적 진리는 절대적 진리에

접근해간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세계를 완전히 인식할 수는 없지만

무한히 인식을 발전시켜 나갈 수는 있다.

 

진리를 이야기할 때 또 하나의 문제가 제기된다. 즉 어떤 이론이나 생각이

진리인가, 허위인가를 인식할 수 있는 시금석이나 기준에 대한 문제가

그것이다.

 

데카르트는 명증성이 진리의 기준이라고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아 명백히

옳은 것만을 진리로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진리의 기준을 가장

손쉽게 생각해내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결코 옳은 방법은 아니다. 과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명증한 것으로 보였던 것들이 나중에 허위로 판명되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진리는 객관적인 것이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객관적인

진리의 기준을 인간의 주관적 의식에서 찾으려 했기 때문에 결코 성공할 수

없었다.

어떤 이론이 진리인가 허위인가를 판명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인식된 것과

비교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어떻게 그와 같은 비교를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주관적인 의식과

객관적인 세계를 직접 결합함으로써 가능하다. 그것이 바로 실천이다. 쉽게

말해서 어떤 이론이 옳거나 그르거나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해보면 안다 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달에 갈 수 있느냐 없느냐는 해보면 안다. 인간이 어떠한

통해서도 달에 갈 수 없다면, 인간은 달에 갈 수 없다 가 진리다. 그러나

인간은 이미 달에 발을 디뎠다. , 인간은 달에 갈 수 있다 는 이미 검증된

진리다. 따라서 그것만큼은 확실한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진리의 기준이 실천이라는 것은 과학자들에게는 이미 상식이다. 어떠한

과학적인 이론도 실험을 거치기 이전에는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다.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엄밀한 실험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스스로

진리라고 주장할 수 있다. 실험도 주관적 의식을 객관적 세계와 직접

결합시키는 것으로, 하나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진리의 기준이 실천이라면, 진리의 이론적인 기준은 없는 것인가?

유물론은 진리의 이론적 기준이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

논리학의 몇몇 법칙이라든지, 근본적인 자연적 법칙은 진리의 이론적인

기준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진리의 근본적인 기준으로서의 실천을

대체할 수는 없다. 이것들은 실천을 단지 보완할 뿐이다.

 

3절 인식의 두 단계

 

달 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 달

어디 어디 떴나

남산 위에 떴지.

 

아이들이 즐겨 부르는 동요의 가사다. 여기서는 달을 쟁반 같다고 하고

있다.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가만히 살펴보면, 둥글넓적하고 평평한 것이

확실히 쟁반같이 생겼다.

달을 쟁반 같다고 인식하는 것, 이것은 인간 인식의 한 단계를 나타낸다.

이와 같이 사물 개개의 외부에 드러난 현상만을 인식하는 것을 감성적

인식이라고 한다.

그러나 감성적 인식은 우리에게 사물의 외부적인 접촉만을 부여해줄

뿐이다. 감성적 인식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이해시켜주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불충분한 것이다.

 

어떤 사물을 이해하려면, 그 사물을 그 밖의 다른 사물과 연관시켜,

기원을 파헤치고 내적 모순을 파악해야 한다.

달은 쟁반같이 둥글넓적한 것이 아니다. 달은 지구의 한 위성으로 공과

같이 생겼다. 이와 같은 인식은 감성적 인식을 뛰어넘는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을 이성적 인식이라고 한다. 이성적 인식은 직접적인 감각에

의한 인식이 아니라, 개념을 사용한 인식이다.

 

그러면 개념은 어떻게 생기는가?

그것은 우리가 아이들에게 어떻게 말을 가르치는지를 생각해보면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이에게 곰돌이 라는 말을 가르치려고 한다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우선 아이에게 몇 번이고 계속해서 곰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아이에게 곰을 보여주면서 계속 반복해서 그것이

곰돌이 라고 말해주어야 한다.

그러면 아이는 어느 순간, 곰과 곰돌이 라는 곰의 이름을 결합시키게 된다.

이것은 그 아이에게 곰돌이 라는 개념이 생기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인식에는 두 가지 단계가 있다. 하나는 개개의 곰을

보면서 생가는 직접적인 감각에 의한 인식의 단계다. 또 하나는 곰돌이 라는

추상적인 개념에 의한 인식의 단계다. 또 하나는 곰돌이 라는 추상적인

개념에 의한 인식의 단계다. 전자에게 감성적 인식의 단계이고, 후자는 이성적

인식의 단계이다.

 

그러면 감성적 인식과 이성적 인식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완전한 인식일까?

그야 단연히 이성적 인식이다. 감성적 인식은 감각적 인식이며 단지 사물을

표면적인 현상만을 인식한다.

이성적 인식은 개념적 인식이며, 사물의 내적인 본질을 인식한다. 그러나

물론 이성적 인식이 중요하다고 하여 감성적 인식이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것을 본질과 현상의 변증법을 상기하면 금방 알 수 있다. 본질이

중요하다고 하여 현상을 무시하면 반드시 오류에 빠진다. 감성적 인식과

이성적 인식도 변증법적 관계에 있다. 곰을 보지 못하고서는 곰돌이 라는

개념을 가질 수 없다. 이성적 인식은 감성적 인식에 의존하고 있다. 이성적

인식은 그것 자체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적 인식은 감성적

인식의 양적 축적에 의한 산물이다.

인간의 감각과 인식은 사회적 실천에 의해 몇 번이고 되풀이된다. 그에

따라 인간의 두뇌 안에서는 인식 과정에 있어서는 돌연한 변화가 일어나서

개념이 발생한다. 이 개념이라는 것은 이미 사물의 현상이나 사물 개개의

일면, 또한 그 사물들의 외부적인 연결이 아니며, 사물의 본질과 정체, 그리고

사물의 내적인 연결을 포착한 것이다.

감성적 인식이 이성적 인식으로 변화하는 과정도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이행이 적용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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