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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포스트모던 과학철학

by Frais Study 2020. 8. 16.

Zuzana Parusnikova, “Is a Postmodern Philosophy of Science Possible?”, Studies in History and Philosophy of Science 23, No.1 (March 1992)


■ 이 논문은 영국의 Wolfson College에 재직중인 Parusnikova가 1992년에 발표한 것이다. 흔히 포스트모던 철학의 대표주자들인 푸코, 데리다, 리오따르 등의 논의를 혼합해놓는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자는 여기서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리오따르적 경향과 데리다적 경향을 정확히 구분하여 논하고 있다. 두 경향에서 과학활동의 성격을 규명해주는 이론이 출현될 수 있는가를 각각 살펴본 저자의 결론은 ‘포스트모던 과학철학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그렇다고 하여 저자가 과학철학의 전통을 반드시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이 논문은 인식론적 차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우회적인 (그러나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비판을 제공한다. 한마디로 포스트모더니즘은 과학활동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가능성을 스스로 봉쇄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은 불가사의하고 과학은 실증적이라고 본다. 포스트모더니스트의 통상적인 이미지는 무책임하게 나돌아다니고 엉뚱하고 미숙하며 보이는 건 모두 흉내내는 사람의 이미지이다. 대조적으로 과학자는 침착하고 잘 훈련되어 있으며 심각한 문제들을 조사하는 데 매우 깊이 몰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포스트모더니스트는 모든 것에서 재미를 자아내는 데 반해, 과학자는 중요한 발견을 하느라 땀을 흘린다. 이러한 두 이미지가 같이 만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들은 근본적으로 양립불가능한가?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가 과연 공정한 것인가? 글쎄, 재미와 흉내내기가 포스트모던의 기획에 고유한 것이라고 주장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이것의 과학에 대한 접근방식에 있어 좀더 복잡한 상을 제시하고자 한다.
대단히 논쟁의 여지가 많은 주장이긴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두개의 주요한 경향이 구분될 수 있다. 첫번째 경향은 포스트모던의 조건에 대한 리오따르적인 묘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발전시켜, 세계가 국지적이고 자율적인 복수의 담론들 파편화되어있다는 관념을 강조한다. 두번째 경향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포스트구조주의적 요소를 강조하는데, 의미의 문제에 천착하여 의미가 근본적으로 고정되어있지 않고 미끄러지는 것이라는 입장으로 귀결된다. 양쪽 요소들을 혼합해놓는 논자들에 의해 이 경향들이 가끔 중첩되기도 하지만, 나는 이 두가지가 분석적으로 다르다고 여긴다.
나의 견해로는, 이들 포스트모던 시각들 가운데 어느 쪽이건간에 과학 내적 담론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과학철학에 적용하려는 것은 그다지 가망없어 보인다. 과학은 인식이나 인식소(認識素; episteme)와 연관되어 있으며, ‘과학적’ 과학철학은 과학이 동원하는 인식의 종류가 무엇이고 과학이 어떠한 가정을 만들어내며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는지에 대하여 메타-질문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과학철학은 과학의 발전과 자기이해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한다. 과학철학은 과학자들이 과학의 문제와 지위를 ‘좀더 깊이’ 그리고 ‘더욱 깊은 이론적 틀’ 안에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과학에 대한 철학적 반성을 제공하려 한다. 과학철학은 일종의 과학이면서 동시에 일종의 철학이고자 하는데, 양쪽 모두에서 과학자들과 의사소통하면서 독특한 철학적 고찰을 제공한다. 과학철학은 과학과 철학의 독특한 종합을 산출하기를 희망하며 한번에 두 개의 의자에 앉기를 원한다. 이 경우 과학철학은 원칙상 인식론적이고 기초주의적인 기초주의(founcaionalism): 고정불변하며 사회적 요인에 의해 변화되지 않는 인식의 기초 또는 방법이 존재한다는 입장. 본 논문에 따르면 기초주의자는 “우리의 이론을 위치짓고 평가할 수 있는 얼마간 영구적이며 중립적인 모체가, 즉 우리의 지식을 정당화할 얼마간 확고하고 객관적인 토대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역자 주)
 분야로 존속하는 셈이며(‘우리 과학철학자들은 당신네 과학자들보다 과학에 관한 어떤 것들을 더 잘 알고 있소’), 나는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친화력을 증대시킬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철학이 과학과 직접적으로 관련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우리가 포기할 수 있다면, 포스트모던 과학철학의 가능성을 고려해볼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도, 나는 포스트모던 과학철학의 전망은 그다지 유망하지 않다고 결론짓는다???포스트모던 과학철학은 대신 과학에 대한 다양한 사회학적, 역사학적 또는 문학적(literary) 연구로 용해되고 만다.

첫번째 경향

(a) 파편화된 세계(들)
최근에 캠브리지대학에 머물면서 나는 소위 ‘견고한’ 과학들(‘hard’ sciences; 곧 자연과학???역자주)을 포함한 다양한 연구영역에서 일하는 과학자들을 만날 기회를 가졌다. 서로의 관심영역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포스트모더니즘의 ‘무정부주의적’ 테제들이 과학자들의 엄격하고 냉정한 추론방식을 언짢게 할까봐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언급하기를 꺼려하곤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내가 이 주제를 꺼낼 때 상당히 긍정적으로 반응하였다. 나는 많은 과학자들이 어렴풋하게나마 포스트모더니즘에 친숙하며 심지어 꽤 동조적이기조차 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들이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거칠게 말해서 리오따르의 대중용 판본이었다. 나의 개인적이고 제한된 경험에 의하면 그들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내재된 반권위주의적이고 반독단적인 요소를 제대로 알고 있는데, 이때 그들은 어떠한 방법론적 규범론(normativism)도, 연구의 규칙과 목표에 부여되는 어떠한 제한도 거부하는 것을 포스트모더니즘과 동일시한다. 이들의 해석에 의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과학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비(非)관례적인 접근방식 및 과학자의 활동과 관련된 조직적?행정적 배치에 있어 더욱 큰 유연성을 허용해준다. 후자는 아마도 연구자금의 분배에 관한 의사결정권이나 특정 연구영역에서 과학자들 자신에 의해 행해지는???이를테면 [과학자사회와는] 동떨어진 무지한 관료들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새로운 지위임명(appointments)과 관련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
이러한 시각들은 포스트모더니즘과 매우 관련깊은 특징들???다시 말하자면 규율에 반대하여 상상력에 초점을 맞추는 것과 과학활동의 목표를 정당화함에 있어 어떠한 상위 권력도 거부하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반권위주의는 과학 담론 자체의 보편적인 ‘타당성’을 변호할 수 있는 어떠한 가능성도 거부함을, 그리고 다른 부류의 담론에 대한 과학 담론의 우월성을 거부함을 함축한다. 리오따르는 포스트모던 시야로의 길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언어게임들의 이질성에 대한 인지가 첫번째 단계이다. … 두번째 단계는 게임을 규정하는 규칙에 대한 어떠한 합의도, 그리고 그 안에서 행해질 수 있는 어떠한 ‘장기말의 움직임’도 국지적이라는 원리이다. … 이 방향으로 나아가면 다수의 [그 효력의 범위가] 한정적인 메타-입론(meta-arguments)이 존재한다는 입장에 찬성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메타규정(metaprescriptives)과 관련된 주장이 시-공간적으로 제한적이라는 내 주장의 의미이다. J. F. Lyotard, The Postmodern Condition: a Report on Knowledge, Mancheste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84, p. 66. (국역 ?포스트모던의 조건?, 민음사) 강조는 원저자. [ ] 안은 역자. 리오따르는 언어를 게임에 비유한 비트겐시타인 후기 입장을 원용하여, 담론들을 각자의 규칙을 가진 ‘언어게임’들로 본다. 그렇다면 개개의 담론적 실천들은 각자의 게임규칙을 따르는 ‘장기말의 움직임’에 비유할 수 있다. (역자주)


유사한 시각이 바우만(Bauman)에 의해 사회학에서 확장되고 발전된다.

그것은 이 새로운 문화적 경험이다. … [이 경험은] 세계가 다른 어느것도 아닌 그 스스로의 추진력에 의해 결정되며 어떠한 전반적 계획에도 종속되지 않는 자기구성적이고 자기추진적인 과정이라고 보는 포스트모던의 시각 안에서 정제되어왔다. … 포스트모던의 시야는 세계가 무한한 숫자의 의미발생요인들???모두가 상대적으로 자기지탱적이며 자율적인, 모두가 그들 자신의 각자의 논리에 종속되며 그들 자신의 진리 타당화 기구로 무장된???로 구성되어있음을 드러낸다. Z. Bauman, “Sociology and Postmodernity”, Sociological Review 36 (1988), pp. 790-823, p.799.


포스트모던의 세계는 많은 고립된 세계들로 파편화되어 나타난다; 그것은 꼴라쥬이며, 어떠한 ‘거대’메타서사(‘grand’ meta-narrative)로도 통일될 수 없는 국지적인 담론들의 다수성 안에서 무작위적으로 모아놓은 요소들의 혼성모방(pastiche)이다. 이제 질문은 이같은 개념화가 과연 어디서 과학, 철학 그리고 과학철학으로부터 결별하느냐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입장에서 과학과 철학은 많은 담론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게다가 과학 자체는 하나의 동질적인 담론이 아니라 다양한 연구영역과 활동을 위한 백지상태의 이름표일 뿐이다. 포스트모던의 시각에 의하면, 그들 자신의 게임을 진행중이며 그들이 하는 것에 대한 스스로의 국지적 규칙을 산출하는 다수의 과학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b) 집없는 철학?
철학의 경우는 훨씬 더 골치거리이다. 과학들은 고유의 주제와 연구분야를 가진 데 반해, 철학은 이를 결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이 우리의 삶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겠는가?
포스트모던의 시야에서 볼 때, 철학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나 인식론적 의미에서나 기초적인 분야라는 전통적인 특권을 누리기를 중지한다. 철학은 세계의 엄청난 다양성을 뛰어넘어 그것의 본질적인 통일성으로 우리를 인도해주는 독특한 통찰(형이상학)도 제공하지 않으며, 세계에 대한 어떠한 독특한 인식론적 실마리도 제공하지 않는다. 철학의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역할은 이미 오래 전에 그 기초가 침식되었다. 이 일은 최초의 근대 철학자인 데카르트에 의해, 그리고 나중에 칸트???기존의 형이상학적 철학 패러다임에 대한 인식론적 철학 패러다임의 승리를 완결지은???에 의해 수행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철학에서 형이상학적 요소를 부활시키려는 모든 시도들과 함께 인식론적 패러다임도 끝장이 난다. 철학은 인식론적인 안내자, 또는 과학적 지식에 대한 일반적 규칙을 제정하고 철학적 기초를 제공하는 인식론적 ‘경찰’로서 구실하는 기능을 부정당한다.
이러한 모습은 철학에 그다지 유망해보이지 않는다. 일관적으로 비(非)기초주의적인 철학이 제공할 수 있는 것에는 아무런 특별한 게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로티(Rorty)는 다음과 같이 쓴다.

철학자가 지식획득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는 관념을 포기하는 것은, 철학자의 목소리가 언제나 대화의 여타 참여자들의 관심을 압도하는 주장을 담고있다는 관념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철학적 방법’이나 ‘철학적 기법’, ‘철학적 관점’이라고 불리는 뭔가가 존재한다는 관념 역시 포기하는 일이 될 것이다. R. Rorty, Philosophy and the Mirror of Nature, Oxford: Basil Blackwell, 1986, p. 392.


이러한 판결은 음울해보인다. 철학은 진정으로 죽어있는 인공물에 불과한가? 글쎄, 로티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철학이 충족시킬 수 있는 역할이 아직 있으니, 그것은 다시 말해 모든 확립된 사유방식을 빈정대며 약올려대는 기능이다. 철학은 훈련되고 목표지향적인 탐구가 아니라 교화적인(edifying) 활동으로, 훼방놓는 기능을 수행하는 대화로 간주된다. 철학은 ‘지혜’를 전하는 것, 진지하고 존경할만하며 고귀해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대신 도발하고 도전하며 심지어는 즐겁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철학은 많은 양의 생명력없는 지혜(‘도덕’)에 지겨워지는 것 대신에 차라리 재미있는 것을 택한다. 다시 로티가 말한다: “위대한 교화적인 철학자들은 활성화되어 있으며(reactive: ???) 풍자와 패러디와 격언(aphorisms)을 제공한다.” Ibid., p. 369.

그러나 로티에 의해 제시된 세 명의 위대한 교화적 철학자들(듀이, 비트겐시타인, 그리고 하이데거)은 이[로티가 제시한 교화적 철학자의] 상에 들어맞지 않는다. 대단히 호의적으로 봐준다 해도 하이데거를 유머작가로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의심할 나위없이 그들은 로티의 ‘포스트-칸트적, 포스트-인식론적 문화’의 좋은 예이다. 그러나 이 포스트-칸트주의라는 것만으로 그들을 포스트모던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내가 보기에는, 인식론적 기초주의는 더이상 비판을 위한 매력적인 과녁이 아니다. 오늘날 ‘강경 노선의 기초주의자들’???우리의 이론을 위치짓고 평가할 수 있는 얼마간 영구적이며 중립적인 모체가, 즉 우리의 지식을 정당화할 얼마간 확고하며 객관적인 토대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굳이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니더라도] 이미 주류 철학은 행위자들이 세계에 개입한다는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우리는 중립적인 관찰자가 아니라 언제나 어떤 개념적 틀, 신념들과 어휘의 틀에 얽매어있다. 합리성은 맥락의존적(context-dependent)이며 역사적으로 결정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분석철학과 과학철학의 전통에서 이같은 발전은 비트겐시타인의 언어게임 이론, 쿤의 패러다임-전환과 패러다임간의 불가공약성(incommensurability), 콰인(Quine)의 전체론(holism), 로티의 실용주의(pragmatism) 또는 퍼트남(Putnam)의      ???        (internalism)까지로 추적될 수 있다.
강경 노선의 기초주의로부터 지식이 사회적, 역사적으로 결정된 맥락에 의존한다는 관점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분명히 로티가 제시한 세 명의 영웅은 (니체와 해석학자들과 같은 다른 많은 이들과 함께) 주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에게 포스트모더니스트라는 자격을 부여하는지는 극히 불분명하다. 그와 마찬가지로 머피(Murphy)는, 탁월한 포스트모던 논자인 콰인에 의해 우리가 전체론과 반(反)기초주의로 대표되는 포스트모던 과학철학의 새로운 시대에 들어갔다고 주장하였다. N. Murphy, “Scientific Realism and Postmodern Philosophy”, British Journal for the Philosophy of Science 41 (1990), pp. 291-303.
 그러나 그녀는 우리가 ‘근대적 기초주의’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것과 포스트모더니스트의 반기초주의 사이의 근본적인 구별을 고려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합리성이 작동하는 맥락(context)을 이해하고 명료화하고 설명해내려 하며, 그것들의 구성요소들과 규칙, 그리고 근저의 논리를 찾아내려 한다. 그 다음에 우리의 노력은 이 맥락들의 지도를 만들고 합리성의 건축물을 짓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경우 우리는 아직 근대의 틀에 위치해있는 것이다???우리의 합리성이 상대적인 개념이며 우리가 그것을 ‘가능한 한 많이’ 정의하려 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말이다. 내가 보기에 콰인은 이 경향에 속해있다. 
그 대신, 우리는 합리성의 맥락을 교란하고 불안정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 경우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스트이다???우리는 최대한의 가능한 명료한 이해를 성취하려고 하기보다는 지배적인 관점을 비판하고 전복시키며 주의깊게 ‘오해하고’ 텍스트를 ‘오독한다’. 우리는 어떠한 일반적인 권위에도 호소하지 않으며, 우리는 다만 우리가 따분해지면 규칙을 바꿀 수도 있는 게임을 하는 것이다.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어떤 것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 그것은 고민할 가치가 없다.
아마도 포스트모던 철학자가 되는 것은 마치 포스트모던 시대에 소크라테스가 되어 모든 확립된 지식이나 가치체에 의문을 던지고 모든 확립된 권위와 논쟁하는 것???그러나 진리를 얻으려는 목적 없이, 그리고 선(善; the Good)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하려는 희망 없이 말이다???과 유사하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철학자는 소크라테스의 현실적이며 비(非)감상적이고 마음씨좋은 성격을 간직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이 떠오른다. 포스트모던 철학자는 실질적으로 똑똑한 저널리스트와 다를 바가 있는가?
로티는 유감스럽게도 이 점을 충분히 고심하지 않았다. 그가 든 예들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예컨대 그는 왜 파이어아벤트를 철학자-아이러니스트로 제시하지 않는가? 예를 들어 새로운 이론의 고안은 부분적으로 과학자가 만족스러운 성생활을 즐기느냐에 달려있다는 파이어아벤트의 ‘다다적’(dadaist) 제안은, 어떠한 ‘매력과 유머’도 없는 과학의 ‘심각한’ 이미지를 희롱하고 약올리는 접근법을 깔끔하게 묘사해준다. P. Feyerabend, Against Method, London: Verso, 1978, p. 174, p. 175. (국역 ?방법에의 도전?, ?겨레)

그러나 나는 포스트모던 과학철학에 대한 이러한 기술(記述)을 고려함에 있어, 그러한 철학이 어떻게 과학 담론과 관계될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다양한 자율적인 ‘과학 게임들’이 존재함을 인정한다면, 다소의 비꼬는 말로 그것들을 교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상상하기는 힘들다. 그 게임들[과학 담론들]은 고도로 세분화되어있고 외부인에게 폐쇄적이어서, 포스트모던 철학자는 (만일 그녀[포스트모던 철학자]가 훈련된 과학자가 아니라면) 과학자들과 전혀 의사소통할 수 없을 것이다. 이론물리학으로부터 어떤 방정식들을 패러디하는 것은 흥미진진한 일이겠지만, 나는 이것이 어떻게 행해질 수 있는지 모르겠다.
비전문가가 접근하기가 훨씬 수월해 보이는 사회적 영역에서는 아이러니적인 접근방식을 고려하는 것이 좀더 손쉬운 일이다. 사람들은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심지어는 경제적 이슈에 관해서까지 자연스럽게 논평을 한다. 걸프전, 보건이나 교육정책, 세금, 유럽통합 등등???이것들은 모두 일상적인 대화의 주제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든 (비록 원격적으로라도) 여러가지 사회적 전략의 모델을 만드는 데 능동적으로 참여한다(적어도 참여한다고 믿는다). 또한 우리 모두는 대중매체를 통해 이 이슈들에 친숙해져 있으며 지속적으로 그것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는다. 사회과학의 영역에 속해있는 이슈들은 폭넓게 논의되며, 대중화된 평태로서 공적(public) 생활의 일부가 되어간다.
자연과학의 경우는 포스트모던 철학자에게 좀더 비(非)호의적인 상황인 것처럼 보인다. 자연과학은 상당히 배타적이며, 그리고 그 ‘순수한’ 형태로는 대화하기 너무 어렵다. 철학자-아웃사이더인 철학자-아이러니스트는 과학 내적인 활동과 관련해서는 말할 거리가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마도 이 주장은 과학을 너무 많이 신비화하고, 비전문가가 접근하기 힘든것으로 간주되는 ‘전문적’(technical) 자연과학과 대중의 지식과 논쟁이 접근가능한 ‘대중적’ 사회과학 사이를 너무 날카로운 구분하는 것일런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아마도 모든 종류의 과학이 (그리고 예술조차도) ‘전문적’과 ‘대중적’이라고 지칭될 수 있는 두개의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리라. [중략]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은 모두 전문적 측면과 대중적 측면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이제 포스트모던 과학철학자의 역할에 관한 우리의 잠정적인 비호의적 판단이 이러한 이중성[전문적/대중적]에 의해 변화되느냐는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자연과학이 완벽하게 폐쇄적이지는 않다는 사실이 과학철학자에게 어떠한 [개입의] 여지를 주는가?
과학자와 철학자 사이의 생산적인 상호작용에 대하여 낭만적인 그림을 그려보는 것은 매력적인 일일 것이다. [자연]과학철학자는 이를테면 고도로 전문화된 생태학적 연구와 오존층의 구멍에 대한 신문지상의 경고 사이에 위치한 작품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경제학철학자[사회과학철학자]는 일반균형 거시경제 모델( ??? general equilibrium macroeconomic models) 안에서 화폐의 역할에 대한 전문적 이야기와 인플레이션에 대한 재무장관의 논평 사이의 어딘가에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고, 음악 비평가는 5음 음계와 뮤지컬 장기공연을 예고하는 광고포스터 사이에 위치지워질 수 있는 등등.
이것은 진정 놀라운 모습이다. 철학자와 비평가는 여기서 사회를 위하여 여러가지 세련된 과학적?문화적 활동들을 해석해준다. 동시에 이들은 이 활동들에 대하여 충분히 교육받고 훈련되어 있어, 좁은 전문분야들(‘게임들’) 안에 너무 깊이 빠져있는 과학자들이나 예술가들로서는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는 새롭고 신선하며 도전적인 시야를 제공한다. 철학자와 비평가는 과학이나 문화가 실제로 하고 있는 바, 그것들이 채용하고 있는 방법과 목표들, 그것들이 전하는 메시지와 가치, 그것들이 가진 의미를 이해한다. 그리고 과학자와 예술가를 위해, 철학자와 비평가는 좀더 넓은 시야와 그들[과학자 및 예술가들]의 노력의 좀더 넓은 결과들을 알려줄 수 있다. 철학자와 비평가에 의해 수행되는 이러한 활동이 가지는 가치는, 세계에 대한 좀더 나은 이해와 우리의 합리성의 진전이라는 고귀한 목표에 대한 기여일 것이다.
이러한 환상적인 그림은 물론 모더니즘의 전형적인 특징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 완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기각되었다. 나는 지금 벌써, 내가 과학자와 과학철학자 사이에서, 예술가와 예술 비평가 사이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생산적 상호작용을 보는 데 실패했다는 신경질적인 중얼거림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논문의 견지에서 보면 이러한 신경질적인 중얼거림은 본질적으로 모더니스트의 것이며, 모더니스트의 가정과 접근방법은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 간단히 곧바로 기각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의 난점인, 왜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을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느냐는 문제에 대한 간단한 답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요점을 다시 강조하기 위해, 포스트모더니즘은 생산적 상호작용과 독단적 억압을 전혀 구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지적하고자 한다. 생산적 상호작용을 소리높여 외치는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셈이다???다른 모든 사람들의 지적?문화적 활동들을 평가할 수 있는 표준과 규율, 상투적인 규범과 기준을 철학자와 비평가가 실질적으로 만들어낼 것을. 그 결과 ‘타자(他者; the other)’는 무시되며, 다양성은 침해된다. 일례로 바르트(Barthes)는 바로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그에게 비평(철학)이란 중심적인 메시지를 이해하는 것, 텍스트의 일관적인 의미를 이해하고 정당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 것이다. 반대로 비평은 텍스트의 의미의 환원불가능성과 다양성, 그리고 그 안에서 의미가 산포되는(disseminated) 다차원적 공간을 보여주고자 한다. R. Barthes, Critique et verite, Paris: Seuil, 1966.
 그러므로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문학비평’이라는 용어가 사용될 때, 그것은 설명이 아니라 도발을 의미한다.
이러한 주장은 앞에서 언급되었던 포스트모더니즘의 두번째 경향???텍스트의 해체에 일차적인 관심이 있는???으로 인도한다. 어쨌건 포스트모더니즘의 첫번째(리오따르적인) 경향의 경우, 포스트모던 과학철학자의 역할에 관한 논의의 결과는 [처음 논의를 시작할 때보다] 좀더 비호의적으로 되어버렸다. 과학에서 행해지는 것을 ‘밝혀주는’ 메타담론의 포스트모던적 공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 담론은 자율적이다. [다른 담론과] 겹칠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그 담론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관여할 문제이다. 외부로부터의 어떠한 ‘조언자’도 여기에 끼어들 수 없는 것이다.

(c) 과학자를 위한 과학
포스트모던의 접근방식으로는 문화적?공공적 영역에서 과학에 도전하고 이를 자극할 수는 있을지라도 과학들과 의사소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바로 내리고 싶어질 것이다. 그러나 너무 빨리 포기하지는 말자. 포스트모던 과학철학의 대안이 존재하는 것이다. 다양한 과학들이 존재함에 따라, 우리는 특정 과학들에 상응하는 다양한 철학들이 존재함을 주장할 수 있다. 물론 이 철학들은 과학을 ‘약올리기’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니라, 과학 연구 안에서 산출된 문제들에 대한 진지한 이론적 고찰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철학자들은 과학자들이 마주치는 문제들과 관련된 과학 내적인 논쟁들에 참여하는 전문가들이 되는 것이다???이것이 리오따르가 ‘한정된 메타-입론’(finite meta-argument)이라고 부르는 것이리라.
그리고 아마도 이것은 최근에 진행되어온 바이다. 일반적인 인식론적?방법론적 문제에 매달리는 철학저작들은 퇴각중인 듯하다. 과학사 및 과학철학에 대한 헤퍼서적(Heffer's Bookshop)의 최근 카탈로그를 잠깐 살펴보면 이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우선, 과학철학이 단지 21페이지를 점하고 있는 데 비해 과학사는 62페이지에 이른다는 것은 흥미있는 사실이다. 과학철학 부문은 물리학, 생명과학, 공학 및 기술의 철학에 관한 고도로 전문화된 항목들을 포함하고 있다. ‘일반적 저술들’(General Works)이라고 이름붙여진 항목도 있지만, 면밀하게 살펴보면 이 항목은 다음과 같은 저술들의 제목 또는 설명을 포함하고 있다.

걸출한 천체물리학자가 독자들을 개론적인 근대과학 여행으로 이끌어갑니다.

열여섯 편의 글들이 비평형 열역학의 원리들을 우주의 물리적 진화라는 문제에 적용하는 것에 대하여 논하고 있습니다.

[담겨있는] 글들은 식량생산, 보건, 에너지 등에서의 과학의 역할에서부터 플레밍, 러더포드, 플랭크, 그리고 바이즈만 등에 대한 간략한 묘사들에 이릅니다.

또는,

?태평양의 시각: 캘리포니아의 과학자들과 환경?

이 책은 오늘날 소련의 학제를 광범위하게 포괄하고 있으며, 몇몇 분야들에서 변증법적 유물론과 과학 사이의 중요한 상호작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공산당과 소련 과학?

?과학기술에서 태도와 활동의 이슬람화?

또는,

?과학자로서의 괴테?

?우연성의 주변부: 다윈에서 뒤엥(Duhem)에 이르기까지 과학상의 변화에 대한 프랑스 카톨릭의 반응?
이 논문집은 빅토리아기 지식인인 윌리엄 휴웰(Whewell)???도덕철학, 광물학, 교육철학, 물리학과 공학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들에서 그의 영향력의 자취를 추적할 수 있는???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일반적 저술들’이란, 세분화된 과학 담론에서부터 다양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사회학적 그리고 역사적 주제들에 대한 논의에 이르기까지 극히 동떨어진 주제들을 모아놓은 상당히 비균질적인 혼합물이다. 그러니 이것이 바로 리오따르와 그밖의 사람들에 의해 묘사된 진정한 포스트모던의 조건이 아닌가?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조건은 포스트모던적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조건이 포스트모던 과학철학을 지지해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세분화된 과학 담론의 경우, 왜 이러한 이론적 ‘한정적인 메타-이야기’가 [(포스트모던)철학자가 아니라] 과학자들 자신???좀더 추상적인 문제들에 흥미를 느끼고 있으며 또한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그들 자신의 세분화된 영역에서 적절한 교육 및 훈련을 받은???의 몫으로 남겨져서는 안되는가 라는 질문이 남게 된다.
이제 나는,  자신들도 과학에 대한 철저한 소양을 갖고 있어 ‘거의’ 과학자라는 과학적 과학철학자들의 주장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과학철학에서 과학적 요소를 강조하는 주장일수록, 학문적?제도상으로 독립적인 ‘과학철학’이라는 분야의 위상을 위태롭게 한다. 뭔가에 대하여 철학적이라 함은 정확하게 무슨 말인가? 나는 일관적인 비기초주의적 접근방식은 철학의 모든 독특함을 잃어버리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본다. 포스트모던 과학철학자가 과학자에게 가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내 말좀 들어보게. 나는 당신이 모르고 있는 과학에 대한 뭔가 심오하고 도움이 될 거리를 말해줄 수 있어!” 과학은 과학자들의 손에 남겨져야 하는 것이다.
나는 과학자들이 자신의 일에 대하여 성찰해야 함을 부인하지는 않는다???어쩄든 인간은 자신이 관련되어있는 어떠한 영역에서건간에 어떤 형태론가 성찰을 해야 한다. 나의 논지는, 과학철학자에게 독특한 철학적 시야가 없다면 그는 이론화 작업을 하는 과학자들처럼 일인 이역[과학에 대한 성찰과 과학활동 자체]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활동적인 과학자들은 그 과학 분야에서의 발전에 [과학철학자보다] 더욱 긴밀하게 접촉하고 있으며, 그들의 연구가 직면하는 문제들에 의해 더욱 자연스럽게 자극받으며, 결국 그 문제들을 다룰 수 있는 훨씬 나은 동기를 갖고있다. 그러므로 과학철학자들은 과학의 기생충, 과학의 거품으로 나타나게 된다.
과학에 대한 정치적, 사회학적 그리고 역사적인 접근방식의 경우 이것들이 포스트모던 과학철학의 영역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의 문제는 바로 앞의 절(節)에서 나타난 바 있다. 포스트모던 과학철학이 이러한 사회적?역사적 분야들의 혼합물에 대한 ‘우산’으로 작용한다는 것이 이치에 닿는 말일까? 더우기 포스트모더니즘은 국지적 담론을 메타-담론 안에 통합시키려는 어떠한 시도도 거부하며, 그 대신 과학에 대한 사회적 연구는 푸코에 의해 발전된 바와 같이 계보학적인 경향을 따라갈 터인데 말이다. 그 연구들은 어떠한 거대이론적 뒷받침이나 체계의 구축도 없이 이루어지는 사례연구의 형태를 띠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모더니티의 일반적 특성들에 대한 포괄적인 사변을 발전시키기보다는, 새로이 나타나고 있는 권력구조와 병원, 감옥, 또는 과학연구실의 조직 사이의 상호작용을 검토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포스트모던의 조건 하에서 우리는 특정한 방식들로 과학에 연결된 다양한 담론들???과학이 다양한 수준에서 사회와 상호작용하는 특정한 양식들을 연구하는, 그러나 과학철학을 위한 별도의 영역을 남겨놓지는 않는???을 가지고있는 듯하다. 이러한 접근방식의 한가지 아름다움은, 이 사회적?정치적 분석들을 하는 사람들이 더이상 과학철학의 버릇없음(“물리학을 모른다면 감히 과학에 손대지 마시오”)으로 인해 고통받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두번째 경향

(a) 의미의 비고정성(elusiveness)
포스트모더니즘의 두번째 경향의 주된 관심은 의미의 문제이다. 의미란 비고정적이고 파악할 수 없다고 보는 이 경향을 나는 포스트모더니즘 내의 포스트구조주의적 또는 해체적 요소라고 부른다. 이러한 관점의 대표적 인물은 데리다???바르트, 크리스테바, 라깡, 들뢰즈, 그리고 가타리와 같은 그밖의 프랑스 이론가들과 함께???이다. 
위에서 논의된 ‘리오따르적’ 경향은 의미의 문제를 보편적인 차원에서 국지적 차원으로 옮겨가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국지적 차원 내에서는 단어들의 의미가 명료하게 정의된 것으로 간주되었고, 국지적 게임들의 규칙은 정확하게 결정되며 참여자들에 의해 동의된 것이었다. 의미가 ‘시간적?공간적으로 제한되어’ 있으며 모든 언어게임에 적용되는 일반적 타당성을 주장하지만 않는다면, 의미의 명료함과 비(非)애매성이 보장되었다.
반면 두번째 경향은, 의미가 적용되는 범위가 크건 작건간에, 의미를 현전(現前)시키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함을 함축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의미의 타당성의 범위를 제한한다고 하여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해지거나 또는 더 쉬워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경향은 다음과 같은 말에서 드러난다.

포스트모던적인 사고는 텍스트와 제도들의 가운데에서 차이의 자리를 찾아내는 것, 결정불가능성의 각인(inscription)을 검사하는 것, 기호화와 동일성 및 인식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지식생산의 다가성(多價性)을 가로지르는 중심화된 통일성의 산란을 감지하는 것을 재고하는 것과 결부되어있다. H. J. Silverman, “Introduction: The Philosophy of Postmodernism”, in H. J. Silverman, ed., Philosophy and the Arts, London: Routledge, 1990, pp. 1-13, p. 1


포스트모던 철학은, 우리의 위세등등한 이성중심주의을 전복하는 재미나는 도발을 하라고 충동질하는 해체적 전략들, 질문들, 그리고 의혹들의 집단이다.… D. M. Levin, “Postmodernism in Dance: Dance, Discourse, Democracy”, in Silverman, ed., ibid., pp. 207-234, p. 224.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의미 개념은, 의미란 절대로 기호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또한 의미는 언제나 기호들의 총체 안에 분산되어 있으며 [담론에 참여하는 개개인의] 말해지지 않는 전술들(tactics)의 총체에 의해 발생된다는???소쉬르의 구조주의적 시각을 발전시킨 것이다. 구조주의자는 의미란 그것의 지시물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대신 의미들의 관계망 안에서 ‘포착되는’ 것임을 주장하며, 재현(representation)으로서의 의미 개념을 부정한다. 기호의 의미는 그 기호 안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 의해???하나의 기호와 다른 기호의 경계를 정하는 차이들의 구조에 의해???구성된다. 그런데 구조주의와 대조적으로, 데리다는 차이들의 구조는 절대로 확정될 수 없으며 따라서 의미는 절대로 완전해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기호의 의미는 영원히 부재하는 저 타자(他者)의 흔적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b) 의미의 용해(dissolution)
포스트구조주의는 [언어]구조???의미가 그 안에서 ‘배회하는’???를 완전히 이해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는 점, 대신 의미를 낳는 어떤 구조이건간에 어떻게 용해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려 한다는 점을 명심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데리다는 사물을 명료하게 하고 분류하고 계통을 세우고 체계 내에 포함시키고 위계화시키는, 줄여서 의미를 현전(現前)시키는 서구 문화의 강박관념???유형학적인(typological) 예로서 과학???을 이 해체적 활동과 대조시킨다. 동시에 이 상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텍스트가 우리가 대면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실재(reality)라는 관념을 채용한다. 우리는 세계 자체에 접근할 수 있는 방도가 없다???텍스트는 우리 세계의 한계들을 설정한다. 세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텍스트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과 등가(等價)이며, 텍스트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할 수 없음을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포스트구조주의는 텍스트(세계)가 절대로 조리있고 일관적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텍스트 안에는, 텍스트의 의도된 논리와,다양한 형태의 의도하지 않은 모순적 활동???독단적이며 정통적인 독해에서는 억압되는???사이의 긴장이 존재한다. 포스트구조주의는 텍스트의 ‘주변적인’(marginal) 측면들을 강조함으로써 텍스트의 이 파열적인(disruptive) 효과에 정확하게 초점을 맞추고, 명료한 이해와 텍스트의 투명성 및 의미의 비(非)애매성에 대한 환상을 제거하고자 한다. 포스트구조주의는 모든 텍스트가 그 자신을 배반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텍스트의 파열적인 잠재성을 해방시키고자 한다. 하버마스가 말한바와 같이 “해체의 과정은 이 일반화된 비평론을 동원하여 철학적?과학적 텍스트 안에서 억압되어있는 수사적(修辭的)인 의미의 잉여를???그 텍스트의 명시적 의미에 대항하여???보이고자 한다.” J. Habermas, The Philosophical Discoures of Modernity, Cambridge: Polity Press, 1990, p. 191.

데리다는 그의 해체적 전략으로 의미를 현전시키려는 노력이 자기궤멸적임을 보여준다. 우리는 상호연관된 의미들의 미로 안에 갇혀있다???의미를 현전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정의하려는 기호에는 없는 다른 것들로 연기된다(deferred). 하나의 기호는 다른 기호를 차례대로 기표로서, 그리고 기의로서 대체해가면서, 하나의 기호는 언제나 또다른 기호로 이끌어진다. 달리 말하면, 의미는 완전해지지 않은 채 언제나 지연된다. 이것이 데리다의 차연(差延; differance) 개념의 핵심인데, 차연은 다름(to differ)과 동시에 지연됨(to defer)을 ‘의미한다’. 차연 개념을 비롯한 데리다의 주요 개념들에 대해서는 김형효, ?데리다의 해체철학?, 민음사 참조. (역자주)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은 놀기 시작하는 것인데, 우선 차연의 놀이에 들어가서 어떠한 단어나 개념이나 주요한 언명도 정리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며, 이론상 현존하는 중심에 서서 텍스트상의 차이의 간격과 운동을 다스리는 것이다. J. Derrida, Position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2, p. 14.


데리다에 의하면 원천적(original) 의미???그로부터 다른 의미들이 유도될 수 있는???의 구실을 할 선험적 기의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의미는 언제나 완전히 고정되지 않고 빠져나간다. 추적과 연기의 과정은 끝이 없고, ‘지구를 움직일’ 수 있는 ‘아르키메데스의’ 받침점은 얻을 수 없다.

(c) 미로로서의 텍스트
이렇게 개념화해놓고 보면 텍스트(세계)는 매우 신비스러운 것이다. 마치 텍스트가 우리를 갖고 노는 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로 안처럼 텍스트 안으로 끌려들어간다. 보르헤스(Borges)의 ‘바벨의 도서관’ 이야기는 그러한 세계의 훌륭한 본보기이다. “그 세계(다른 사람들은 도서관이라고 부르는)는 불확정적이며 아마도 무한한 숫자의 육각형 회랑들???매우 낮은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회랑들 사이에는 거대한 환기통이 있다???로 이루어져있다.” J. L. Borges, Labyrinths, Harmondsworth, Middlesex: Penguin, 1979, p. 78.
 보르헤스는 그 도서관이 구성되어있는 방식을 자세히 기술한다. 그는 그 건물의 평면도, 층과 복도, 구역과 방들의 체계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결국 그 도서관의 구조는 이해할 수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도서관은 육각형들 가운데 어떤 것이라도 정확한 중심이 될 수 있으며 외부와의 경계로 접근할 수 없는 공간이다.” Ibid., p.79; 원저에서 강조를 제거함.

포스트구조주의자는 텍스트의 비정통적인 독해(‘오독’)를 실험하며, 이러한 텍스트상의 모험에 매혹된다.

나는 오늘 나 자신이 헤겔이 묘사한 바의 고대 그리스인 같은 존재라고 상상한다. 헤겔은 말한다. 자연이 지성(intelligence)의 설계임을 지각하기 위하여, 고대 그리스인들은 나뭇가지의 바스락거림, 샘물, 바람 등???간단히 말해 자연의 진동???에 대하여 열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캐물었다고. 그런데 내가 캐묻는 것은 의미의 진동에 대해서이다. 내가 캐묻는 것은 의미의 진동이며, 나는 언어???근대의 인간인 나에게는 곧 자연인???의 바스락거림을 듣고 있다. R. Barthes, The Rustle of Language, Oxford: Basil Blackwell, 1986, p. 79.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이 경향은 어디에 소용이 있는가? 우리는 전통적으로 철학이란 심오한 성찰을 제공하며 진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있다. 반면 이 부류의 포스트모던 ‘철학’은 단지 게임을 위한 게임을 하고 있을 뿐이다. 텍스트는 우리가 빠져들어가는 덫이며 우리는 그것을 절대로 정복하거나 터득할 수 없다. 

텍스트간의 짜집기는 그 자체의 일생을 가지고있다. 우리가 무엇을 쓰건간에 그것은 우리가 아마도 의도하지 않았거나 의도하지 못한 의미들을 운반한다. 그리고 우리의 단어들은 우리가 의미한 바를 말할 수 없다. … 언어는 우리를 통해서 작동한다. 이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해체주의적 충동은 어떤 텍스트를 들여다보면서 다른 텍스트를 찾아내고, 어떤 텍스트를 다른 텍스트로 용해시키고, 또는 어떤 텍스트를 다른 텍스트 안에 축조해낸다. D. Harvey, The Culture of Postmodernity, Oxford: Blackwell, 1989, pp. 49, 51.


‘철학이 어떠한 소용이 있느냐?’는 질문은 철학적 활동에 대한 모종의 일반적인 규제적 목표와, 이에 더하여 그것의 정당성을 입증할 필요를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들에 대한 논쟁은 또다른 전형적인 근대적 담론을 낳을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는 자신의 입장을 견고하게 만드는 데 신경쓰지 않는다. 메타이론화, 정당화, 정의(定義) 내리기, 또는 특정화 등은 정확히 의미의 명료함에 대한 전통적인 추구를 지속하는 것일 뿐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는 단순히 이와는 다른 종류의 일을 할 뿐이다.
이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두번째 경향은 모던의 입장에 대한 어떠한 우월한 대안을 제공하는 척 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포스트모던의 어휘들은 모던의 어휘들을 대체할 것을 의도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스트는 새로운 개념적인 위계의 체계, 모종의 새로운 인식론적 권위를 도입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비록 가끔 이런 식으로 해석(‘잘못 해석’)되기도 했지만. 포스트모던의 어휘들은 단지 모던의 어휘들을 약올리고 그것의 지배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무시되어온 것(‘타자성’)을 제기하려고 의도되었을 뿐이다. 
모든 권위주의적 권리주장을 포기하는 것은, 해체의 전략이 이중적임을 의미한다. 해체를 할 때, 우리는 해체되고 있는 어휘들을 사용해야만 한다. 데리다는 이 문제를 ‘지우면서 쓰기(writing under erasure)’라고 부르고 고찰하였다. 우리는 쓰면서 동시에 지운다. 우리의 언어는 [해체의 도구로] 적합하지 않지만, 우리는 이것을 사용해야만 한다. 의미는 절대로 완전하지 않으므로, 해체도 절대로 완전하지 않다. 그리고 이 과정에는 원천이 되는 지점도 없으며 최종점도 없다. 그 결과 모든 해체의 과정은 더이상의 해체의 여지를 남겨놓으며, 긍정적인 대안으로 내놓는 데 필요한 완결성[이라는 조건]에 절대로 도달할 수 없다. 
이것은 영구적인 자기-아이러니라는 결정적 요소를 함축한다. 어떠한 입장도 방어될 수 없다. 텍스트가 ‘완성되는’ 순간 그것은 즉시 지워지고 있다. 어느것도 해체를 피할 수는 없다.

(d) 해체적 과학철학?
이 해체적 경향을 발전시켜 포스트모던 과학철학을 만들 전망이 있을까? 이 목적에는 앞서 논의된 리오따르적 판(版)보다 해체적 포스트모더니즘이 더 ‘해로운’ 것처럼 보인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첫번째 경향은 특정한, 명료하게 정의된 국지적 규칙들을 따르는 자율적이고 국지적인 담론들의 다수성으로 과학(들)을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비록 국지적으로나마 질서는 보장된다. 그 결과 거대한 통일을 이룩하려는 야망 없이 그것 자체에 대하여 반성하는 과학들, 그리고 과학에 대한 ‘제한된 메타-담론’의 다수성을 포스트모던 문화의 일부로 간주할 수 있게 된다. 나는 그러한 반성이 철학자가 아닌 과학자의 몫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 포스트모던 경향은 적어도 과학과 양립불가능하지는 않다. 
두번째의 포스트모던 경향은 전혀 다르다. 두번째 경향은 반성의 대상이 되는 모든 텍스트의 논리와 규칙들을 용해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경향은 텍스트 내부의 모순과 긴장을 끌어올리기 위하여 텍스트로 실험을 하며, 그래서 결과적으로 텍스트의 일관성과 권위를 위태롭게 만든다.
나에게 이러한 접근방식은 과학을 존중하는 어떠한 과학철학에도 전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과학은 하나의 인식론적인 활동이다. 과학의 목적은 최대한의 명료함, 확실함 그리고 일반적 타당성을 가지는 지식을 얻는 것이다. 동시에, 과학적 지식은 체계적 지식이라는 형태를 가진다. 과학적 지식은 튼튼하고 온전하며(sound) 견고하다. 과학자들은 인식 주체가 오류를 일으킬 수 있으며 이론은 완벽하지 않고 지식은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들은 이 바람직한 특성들을 극대화시킨 지식체를 구성하고자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두번째 경향은 반대로, (과학) 텍스트의 독해 및 이해에 있어 모든 확립된 방식을 해체하고자 한다. 이 경향은 정확하게 [첫번째 경향과] 반대의 방향으로 간다. 이 두 경향간의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주기 위하여, 우리는 약간의 포스트모던 어휘들을 나열해볼 수 있다???해체, 산포, 용해, 축출, 치환, 산란, 분쇄, 분해, 탈중심화, 불연속. 이 부류의 포스트모더니즘은 과학과, 그리고 과학을 권위있는 것으로 간주하며 과학적 지식의 이론을 제공하기를 원하는 과학철학과???과학철학은 방법론적 주제에 대하여 과학에 조언을 하고 과학이 제공하는 지식이 어떠한 부류의 것인지를 설명해주며 과학 자신의 가정과 목표 등을 밝혀준다???어떠한 동맹관계도 맺을 수 없다. 
그러나 다시, 과학철학이 과학과 가까운 근연관계여야 한다는 주장을 우리가 포기함을 고려한다면, 해체는 흥미진진한 접근방식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해체적 방법은 모든 텍스트가 용어들의 위계를 보유하고 있음을 가정한다. 이 위계는 통상 하나의 용어가 그것에 대립하는 용어에 의해 특권화되는 이원적 대립쌍들로 명시된다. 그 특권화된 용어는 다른 용어를 설명하고 이해하는 데 기초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암묵적으로 ‘타자’는 불평등한 종속항이며 결핍되어있는 것으로 취급된다. 예를 들어, 데리다는 ‘현존/부재(presence/absence)’의 이원적 쌍을 모던 문화에 고유한 것으로 간주한다. 현존은 과학적 활동을 특징지우는 명징성, 분명함 그리고 투명성에 대한 욕망을 표현한다. 부재는 현존을 결여하고 있는 그 무엇인가로 나타난다. 현존은 ‘타자’의 ‘단점들’을 지적해내는 ‘기초주의적’ 설명항이다. 데리다는 이원적 쌍의 어느 한편에 특권을 주는 것은 실질적으로 자의적임을 보여준다. 둘 중에 어느 쪽이 주도적인 부분인지를 묻는 이 난제는 어떠한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인 관점으로도 풀 수 없는 것이며, 그러므로 해체는 텍스트를 구성하는 위계적 구조의 현상태(status quo)를 실추시킨다.
그러므로, 가능한 포스트모던 과학철학은 모두 텍스트상의 활동으로, 차연(differance)의 놀이로, 근대 이성중심주의의 헤게모니를 해체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리고 이 부류의 과학철학은 과학(들)과 어떠한 협력관계도 맺지 않는, 과학적 합리성 자체에 대한 급진적인 도전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포스트모던 과학철학의 성립이 필연적으로 저지되는 것은 아니다. 대신 이러한 해체적 과학철학은 과학에 관해서 어떠한 규범적인 주장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 과학철학은 과학자에게 안내와 조언을 제공하는 대신 되려 과학 텍스트에 대한 새롭고 암시적인 독해를 제공하고, 과학의 언어와 수사 및 이를 사용하는 화자(話者) 등등에 초점을 맞추며, 실험적인 텍스트상의 활동을 발전시킬 것이다. 이 접근방식은 과학철학은 과학적 토론에 기여하고 (편협한 마음을 가진) 과학자들에게 과학과 관련된 철학적 통찰을 풍부하게 함으로써 ‘과학적’이 되어야 한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기각하고, 명백하게 전혀 다른 종류의 과학철학을 도입할 것이다.

결 론

포스트모던 과학철학은 가능한가? 나의 해답은 잠정적인 ‘아니오’로 공식화될 수 있다. 국지적 담론들의 복수성으로 특징지워지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첫번째 경향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선택을 남긴다. 과학에 대한 아이러니컬한 대화, 고도로 특화된 ‘전문가-대화’, 사회과학의 일분야 가운데 포스트모던 과학철학은 어느 쪽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 나에게는 이들 선택사양들 가운데 어느 것도 특별히 매력적이지 않다. 첫번째 경우, 자연과학(hard sciences)???그리고 아마도 사회과학까지도???에는 외부의 참견이 접근할 수 없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두번째 경우, ‘과학철학’은 단지 과학에 기생적일 뿐이며, 과학자 자신들에 의해 가장 잘 수행되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마지막 경우, ‘철학’이라는 용어는 아무래도 쓸데없는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경우에] 과학철학은 결과적으로 과학으로, 또는 사회적?역사적 연구분야들로 용해되고 만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두번째 (또는 해체적) 경향은 첫번째 경향보다 더하다. 이 경향은 의미의 권한 범위를 국지적 차원으로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의미가 상관적인(relational) 것임을 보여줌으로써 어떠한 의미의 권위도 불안정하게 만든다. 하나의 기호의 의미는 다른 기호들의 차이의 구조들 안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위치에 의존한다. 이 위치는 중립적으로 또는 외부적으로 결정되지 않으며, 궁극적 의미를 향한 끝없는 추구 속에서 기호들의 유희에 따라 임의로 바뀔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과학과도, ‘과학적’ 과학철학과도 양립할 수 없다. 
우리가 과학철학에서 ‘과학적’이라는 요건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과학 텍스트의 문학적(literary) 해체의 형태를 취하는 포스트모던 과학철학의 가능성을 고려해볼 수 있겠다. 이 전략은 “개념상의 대립들의 분해(dismantling), 위계적인 사유 체계들을 분해하여 또다른 텍스트상의 기호들의 질서 안에 재기입하는 것” C. Norris, Derrida, London: Fontatna, 1987, p. 19
을 포함한다. 이러한 포스트모던 과학철학은 정립된 해석상의 상투어구를 혼란시키고 약올리기 위하여, 과학 텍스트를 실험 대상으로 삼아 이것의 명시적인 내용에 의해 억압되어있는 것을 탐색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첫번째 경향에서 [과학으로부터] 분리된 ‘과학철학’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 제기로 끝난 것과 유사한 상황에 직면한다. 이[두번째] 부류의 포스트모던 과학철학은 결과적으로 과학 텍스트들에 대한 문학비평(literary criticism)으로 용해되고 말 것이다. 과학에 대한 이러한 접근방식을 ‘철학적’이라고 지칭할 것인지의 여부는 관습의 문제일 것이다. (번역: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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