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뮬레이션된 세계 속으로
걸프전이 한창일 때,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스트 중 하나인 쟝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그 전쟁이 시뮬레이션(simulation)이라고 주장해서 약간의 소란을 야기한 적이 있다. 직접 그 글을 읽은 것은 아니었지만, 아마도 그것은 미사일이 날아가고 전투기가 폭격을 하고 하는 것이 모두다 모니터 상에 나타난 계기를 통해 컴퓨터로 조작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런 과정이 CNN TV로 생중계방송 되었다는 점에서 시뮬레이션 게임과 다를 바 없다는 주장처럼 생각되었다. 그가 말하는 시뮬레이션이란 “원본도 사실성도 없는 과잉실재(hyper-reality)를, 모델을 통해 만들어내는 작업”(Baudrillard, 1992b: 12쪽)이었기에, 그것은 마치 실제 전쟁은 없고 상상적인 게임과 같은 전쟁의 모사물만이 있다는 주장처럼 들렸다. 그래서 폭격과 미사일로 죽어가는 이라크 국민을 생각했던 모든 진지한 사람들은 그 ‘철없는’ 발언에 한결같이 분노를 표시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조금 진지하게 이해해준다면, 이라크 전쟁은 그런 전쟁이 사실은 항상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유별난 전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디즈니랜드가 ‘실제의’ 나라, ‘실제의’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거기 [따로] 있듯이. 그리고 감옥이, 사회 전체가 감옥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거기 [따로] 있듯이.”(Baudrillard, 1992b: 40쪽) 그리고 그것을 통해 미국의 지배에 저항하거나 거슬리는 자는 누구나 저렇게 되리라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한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의 진의야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이전에는 공격을 하는 전쟁국이 전쟁의 규모와 참상을 은폐하고 감추려했다면, 이 전쟁은 오히려 광고처럼 선전하고 전쟁의 과정을 중계방송하도록 했다는 점에서 다르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TV나 라디오, 신문 등의 매체가 매일매일 우리의 ‘영웅’들을 곳곳에서 만들어내는 방식을 그대로 빼어닮았다.
사회가 시뮬레이션들로 이루어지고, 그것을 통해 작동하다는 주장을 받아들이든 말든, 이러한 사실이 이전의 어떠한 시기와도 비교할 수 없이 공공연하고 광범위하며 막대한 영향력을 갖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야구에 별다른 흥미가 없어도, 많은 야구의 영웅들을 알고 있으며, 그 영웅들에 관한 기사와 방송, 행사가 벌어진다. 스타가 된 배우들의 예는 차라리 고전적이다. 아마운서와 DJ, 정치인은 물론 심지어 의사와 교수들까지도, 시뮬레이션을 통해 영웅이 되고, 그 시뮬레이션된 복제물을 또 다시 복제하는 과정이 반복된다.
이런 현상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가장 자주 떠올리게 되는 사례다. 이것도 아마 사실이든 아니든 신문이나 잡지, 책 등을 통해 시물레이션되고, 그 시뮬레이션이 또 새끼를 치고 하는 중첩된 시뮬레이션의 일부기도 할 것같다. 어쨌거나 이제는 포스트모던한 사회의 징후처럼 간주되는 이것들을 피하기 힘들며, 그만큼 포스트모던이라는 말도 피하기 힘들게 되었음은 확실하다. 하지만 현대의 다양한 시뮬레이션들이 그렇듯이, 포스트모던 역시 시뮬레이션되고, 또 다시 시뮬레이션되며, 그럼으로써 그 적용의 폭은 점점더 넓게 확장되어 가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그것을 두고 정치적인 보수주의 내지 반합리주의적이고 낭만적인 공론(空論)이라는 극단적 비난에서, 그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모든 새로움을 담고 있다는 적극적 찬사까지 교차되고 있다.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피해가기는 누구도 힘들어진 것같다.
2.‘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란 모더니즘이란 말에다 ‘뒤’나 ‘후(後)’를 뜻하는 포스트(post)라는 접두어를 붙여 만든 말이다. 이 말은 1960-70년대 미국에서 문학과 건축 등의 예술관련 분야에서 만들어진 말인데, 말 그대로 모더니즘 이후에, 모더니즘과 상반되는 특징을 갖는 작품이나 작가, 혹은 취향이나 태도 등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 대립의 양상이 가장 두드러진 것은 건축에서였다.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나 그로피우스(W. Gropius),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를 대표로 하는 모더니즘 건축은 흔히 ‘기능주의’라고도 불리며, 국제적인 건축운동을 진행되었기에 ‘국제주의 양식’이라고도 불린다. 이들은 19세기 후반 서양 건축을 주도한 신고전주의의 지극히 장식적인 건축을 거부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거기서 장식은 부르주아들의 높아진 지위와 과시욕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였으며, 따라서 본질적으로 기생적일 뿐 아니라 건축물 자체에 관해서도 반기능적인 것으로 보였다(Caliiniscu, 1994: 345쪽).
그것은 또한 미적으로도 퇴폐적이고 타락한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들은 금욕적이고 유토피아적이고 합리주의적인 건축을 추구했다. 즉 기능적인 연관에 따라 전체적으로 강력한 통일성을 갖는 간결하고 명확한 건축을 하려고 했다. 이를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더 적은 것이 더 많은 것이다”라는 말로 요약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이같이 엄격한 원칙이 시간이 지나면서 단조롭고 일률적인 건축물을 양산하게 되었다고 본다. 그것은 삶의 복합성을 지극히 단순한 하나의 형태로 환원시켰고, 과거의 양식과 지나치게 절연함으로써 과거와의 모든 연속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포스트모던 건축을 대표하는 사람 중 하나인 로버트 벤츄리(R. Ventury)는 앞서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말을 “더 적은 것은 더 지루한 것이다”라고 비틀어버렸다(Ventury, 1995, 33-34쪽).
그들은 이제 과거를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하여 건물의 현재 속으로 끌어들였고, 르네상스 시대 이후 즐겨 사용된 고전적 형태는 물론 리본과 같은 장식도 사용하기 시작했고, 지극히 다양한 내부 공간을 결합시키기도 했다. 이로 인해 상이한 시대의 건축 양식(코드)들이 뒤섞여 공존하게 된다. 이를 젱크스(Ch. Jencks)는 ‘이중 코드화’라고 부르며, 이것이 현대 포스트모던 건축의 언어를 특징짓는다고 말한다(Jencks, 1991: 6쪽). 이로써 그들은 현대적 삶의 ‘복합성’과 ‘모순’을 건축물에 반영하고자 했다(벤츄리의 유명한 책 이름이 바로 ?건축에서 복합성과 모순?(Complexity and Contradiction in Architecture)이다).
문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모더니즘과 대립한다. 일찍이(1960년) 비평가 레빈(H. Levin)은 그것을 모더니즘의 난해한 지성주의에 반해 반지성주의로 특징지은 바 있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을 정립하고 확산시켰던 핫산(I. Hassan)이나 피들러(L. Fidler)는 지식보다는 비전, 논리보다는 환각을 중시하며, 에고에 대해서 이드를 중시하는 것으로 특징짓는다(김욱동, 1992: 20-22쪽). 그들은 조이스(J. Joyce)와 프루스트(M. Proust), 엘리에트(T. S. Elliot), 파운드(E. Pound), 카프카(F. Kafka) 등으로 대표되는 모더니즘이 그 가능성을 탕진하여 고갈되어 버렸다고 보며, 그것이 애초에 갖고 있던 저항정신이 대학의 제도 안으로 흡수되면서 소진되었다고 본다.
또한 그들은 아방가르드적인 경향을 갖던 유미주의적 태도가 전제하는 미적인 것과 비미적인 것의 구별을 거부하며, 이발소 그림이나 탐정소설, 공상과학소설과 같은 저속한 것(이를 흔히 키취(kitsch)라고 부른다)들을 끌어들이며, 다른 사람의 작품을 섞어 쓰는 혼성모방(pastiche)을 이용한다. 보르헤스(J. Borges)나 마르케스(G. Marquez), 에코(U. Eco), 로브그리예(A. Robbe-Grillet), 베케트(S. Beckette), 버로우즈(W. Burroughs) 등이 그런 범주에 드는 작가들이다(M. Caliniscu, 1994 참조). 이는 미술이나 음악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마를린 먼로로 성모나 모나리자 식의 성스런 여인상을 대체해 버린 앤디 워홀(Andy Warhol)이 그런 경우다.
다른 한편 포스트모더니즘은 1960년대 프랑스에서 본격화된 철학적 흐름과 관련되어 있다.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등으로 흔히 분류되는 이 흐름은 근대 철학이 서 있는 지반을 공격한다. 나중에 다시 말하겠지만, 데카르트 이래 근대 철학이 발딛고 있던 ‘주체’라는 범주, ‘진리’라는 범주 등을 비판 내지 해체하며, 세계나 지식이 하나의 단일한 전체일 수 있다는 ‘총체성’ 개념을 비판한다. 이러한 흐름의 문을 연 사람은 사회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C. Levi-Strauss)였고, 라캉(J. Lacan), 알튀세르(L. Althusser), 푸코(M. Foucault), 들뢰즈(G. Deleuze)와 가타리(F. Guattari), 데리다(J. Derrida) 등이 이런 흐름을 형성한 사람들이다.
이후 리요타르(J-F. Lyotard)와 보드리야르는 이런 흐름에서 더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을 적극 사용하며 일반화했다. 이후 전 세계적으로 확장된 일련의 철학적 흐름을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좀더 거슬러 올라가 이들 철학이 기초하고 있는 니체와 하이데거(M. Heideggar), 후기의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 등 역시 포스트모더니스트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런데 단지 명칭의 문제를 넘어서는, 종종 많은 혼동을 야기하는 문제가 있다. 흔히 철학적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분류되는 포스트구조주의는, 근본적으로 근대 철학 내지 근대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문제설정을 공유하고 있다. 예를 들어 철학적인 주체 범주나 ‘인간’이라는 범주를 비판하거나, 혹은 그러한 주체가 근대에 이르러 나타난 사회적인 ‘주체’와 연관되어 있다고 보며, 근대적 주체를 만들어내는 일상적인 메카니즘을 드러내고 비판한다. 혹은 근대적 사유방식이나 삶의 방식을 비판한다. 혹은 사물을 표상/재현하는 근대적인 방식을 비판한다. 그런데 예를 들면 프루스트나 조이스, 카프카가 그렇듯이, 문학적 모더니스트들 역시 사실주의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근대적인 표상의 방식과 서술의 방식을 해체하려고 한다. 이 점에서 포스트구조주의의 문제의식은 기묘하게도 문학적 모더니즘과 겹쳐 있다.물론 모더니즘이 갖는 이러한 특징이 건축에서도 동일한 것은 아니다. 거기서는 모더니즘은 확실히 근대적 사고의 특징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으며, 따라서 건축에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관계는 문학에서와 동일하다고 보기 어렵다.
이는 몇몇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자들이 (베케트나 보르헤스는 물론) 프루스트나 카프카 등에 기대어 작업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예를 들면 들뢰즈와 가타리, 데리다 등).
그렇지만 포스트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일반적으로 대비하고 대립시키기에는 양자 사이에 있는 문제의식의 공통성이 없지 않다. 더구나 리요타르나 보드리야르는 포스트구조주의의 내부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명시적으로 이동한 철학자며, 맑스주의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로 알려진 라클라우(E. Laclau)와 무페(Ch. Mouffe)는 데리다와 라캉에 의존하고 있다. 또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을 전세계적으로 확장한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리요타르도 포스트모던은 모던(근대적인 것)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라고 말한다(Lyotard, 1990: 276-278쪽).그러나 이렇게 되면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포스트구조주의에서 비판하고자 했던 바가 매우 취약한 것이 되어 버리고, 그것의 고유한 내용이 역사적으로 무화(無化)된다. 이제 포스트모던의 ‘기원’은 근대의 낭만주의로,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로, 급기야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로가지 소급되기에 이른다.
이런 사정 때문에 벨슈(W. Welsch)는 근대와 근대적 모던, 20세기의 모던, 포스트모던을 구별하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모던과 포스트모던과의 차이가 확연하게 구별되지 않지만, 포스트모던은 20세기 모던에 기초하며, 이 20세기 모던이야말로 모던과의 단절이라고 주장한다(Welsch, 1994: 427쪽). 그렇지만 이 경우 문학이나 미술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모더니즘 비판은 설 자리를 잃게 되며, 건축에서는 적절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인지 혹자는 현실적으로 철학이나 사회이론에서 근대성 비판으로 특징지어지는 흐름을, 문학이나 예술, 문화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구별하여 ‘포스트모더니티’라는 말로 따로 부르자는 제안(김욱동, 1992: 38쪽)을 하기도 한다. 양자의 문제설정이 포괄하는 폭과 수준이 다르고, 직접적으로 겨냥하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그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유용한 면이 없지 않다.
분명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단지 모더니즘의 스타일이나 특징에 대한 비판으로 제한하나면, 그것은 문학이나 예술에 한정된 타당성을 가질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전체를 포괄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제기할 수 있는 문제의 폭을 지나치게 제한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을 “다양한 형태로 구현된 근대성에 관해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해주는 어떤 관점”(Caliniscu, 1994: 342쪽)으로 확장하여 정의할 수 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를 계속하여 사용하는 것은 나름의 새로운 적실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경우 예컨대 문학에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공통된 관점 위에서 만들어지는 어떤 경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3.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적 지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철학은 매우 근본적이고 중요한 위상을 갖는다. 그것이 근대성 자체에 대해 질문할 수 있으려면, 근대성의 일부를 이루는, 대개는 당연시되어 있는 사유의 지반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로 인해 근대성에 대한 모든 질문은 근대적 사유방식을 겨냥하게 마련이고, 그것은 당연히 철학적으로 중요한 전제를 비판하게 된다. 그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주체’, ‘재현’, ‘진리’, ‘총체성’과 관련되어 있다.
1)주체의 문제
근대 철학은 물론 근대적 사유를 시작한, 이른바 ‘근대의 아버지’는 데카르트(R. Descartes)다. 데카르트가 이런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나’라는 ‘주체’의 범주를 신으로 독립시켰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신이 지배하던 중세에 세계나 인간은 신이 창조한 것이었다. 인간이든 세계든 신의 창조로 설명되었다. 신에서 시작하지 않고서 ‘나’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불경(不敬)스런 것일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갈릴레이(G. Galilei)는 세계의 운행을 연구했고, 자연의 운동을 설명할 수 있는 수학적인 공식을 찾아내려고 했다(이를 ‘자연의 수학화’라고 부른다). 그보다 약간 앞서 케플러(J. Kepler)는 태양계에서 항성의 운동을 세 가지 법칙으로 간단명료하게 설명한 바 있었다. 교회는 이런 새로운 이론을 신의 이름으로 ‘근거지우지’ 못했다. 다시 말해 비록 자연과학자 자신이 그러한 지식이 신이 만든 이 우주의 질서와 조화를 보여준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그것이 참인지 아닌지, 참이라면 어째서 참인지를 신의 이름으로 밝혀주지 못했다.
데카르트는 당시 첨단을 달리던 그 과학적 지식을 확실한 기초 위에 다시 세우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 그는 더없이 확실한 출발점을 찾으려고 했고, 이로 인해 모든 것을 의심하는 ‘방법론적 회의주의’를 채택한다. 나의 눈도, 나의 귀도, 나의 신체도, 나의 생각도 모두 믿을 수 없는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의심을 해도 의심을 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처럼 ‘나’라는 주체(subject)의 존재야말로 어떠한 의심에도 흔들리지 않을 확고부동한 기초로 여겼다. 이제는 이 확실한 ‘나’로부터 확실한 지식의 근거를 찾으면 되었다. 데카르트가 보기에 그것은 오류없이 사고할 수 있는 이성, 즉 수학적인 이성이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은 수학화함으로써 확실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의 운동을 수학화하려는 갈릴레이의 시도는 이제 확실한 기초 위에 놓인 것이다. 더불어 ‘나’는 신에게 의존하지 않는 주체의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스트의 선구자로 간주되는 니체는 이것이 ‘문법의 환상’이라고 비판한다. 예컨대 ‘비가 온다’는 문장에서 ‘온다’라는 동사는 ‘비’(雨)라는 주어(subject)를 가져야 한다. 여기서 마치 ‘비’라는 주체/주어가 있고, 그것이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는 것같은 환상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하늘에서 떨어지는(오는) 것을 ‘비’라고 부르는 것이며, ‘오는’ 것이 곧 비(와 동일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찬가지로 ‘나는 생각한다’에서 동사 ‘생각한다’는 주어가 있어야 한다. 바로 여기서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면 생각하는 ‘나’가 있어야 한다는 문법의 환상이 생겨난다(Nietzsche, 1982: 39쪽 이하).
정신분석학자인 라캉은, 소쉬르(F. Saussure)의 구조언어학을 빌어서 언어와 주체의 관계를 뒤집어 놓는다. 언어는 문법과 다양한 규칙들로 짜여진 구조를 갖고 있으며, 내가 말을 하려면 내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규칙에 따라서 해야 한다. 그 규칙을 벗어나면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한다. 따라서 그가 보기엔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나를 통해 행해지는” 것이다. 데카르트라면, 내가 하는 말이 맞건 틀리건, 말을 하는 나란 주체는 존재한다고 하겠지만, 라캉은 언어의 구조가 ‘나’라는 말하는 주체의 전제라고 말한다.
좀더 나아가 그는 프로이트(S. Freud)의 무의식 개념을 언어학과 결합하여,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말한다(Lacan, 1994). 당연히 무의식은 우리의 의식에 우선한다. 즉 우리의 의식은 의식되지 않는 무의식에 기초하고 있다. 그런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말은, 언어적인 질서에 따라 무의식이 진행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라캉은 데카르트의 문장을 뒤집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 여기서 ‘존재하지 않는 곳’이란 아마도 언어구조일 것이고, ‘생각하지 않는 곳’이란 무의식일 것이다.
다른 한편 홉스(T. Hobbes)는 데카르트 철학을 사회과학으로 밀고나가 근대적인 사회이론을 창시했다. 즉 그는 사회 내지 국가란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로 나뉘어져야(분석) 한다고 보았고, 더 나뉠 수 없는 확실한 요소에서 출발하여 이론적으로 구성되어야(종합) 한다고 생각했다. 그 출발점은 바로 ‘인간’이라는 주체였다(Hobbes, 1990).
인간이라는 주체는 각자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를 갖는다. 즉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하고자 한다. 그런데 그 즉시 서로의 의지가 충돌하여 전쟁과도 같은 커다란 혼란이 생겨버린다. 그대로 방치한다면 각자가 자기가 하고 싶은 바를 위해 남과 싸우게 되니, 이제 “인간은 서로에 대해 늑대가 된다”. 이런 상태를 그는 ‘자연상태’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질서를 전제하는 “사회란 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이 유명한 ‘홉스의 질문’이다.알다시피 그 답은 이 끔찍한 혼란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어떤 한 사람(절대군주)에게 자신의 권리와 의지를 양도하고, 그의 통치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 질문을 통해 이제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이론인 (근대적) 사회과학이 탄생한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 사회이론의 출발점에는 ‘주체’라는 개념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종종 포스트구조주의적 사유의 선구자로 간주되는 맑스(K. Marx)라면 이 질문에 대해 다시 질문할 것이다. 그처럼 서로 동등한 의지와 권리를 가지고 서로 싸우는 ‘인간’ 내지 ‘주체’가 대체 어떻게 가능했는가? 왜냐하면 귀족과 평민, 농노의 신분이 확연했던 그 이전 시대만 해도 사람들이 서로 동등한 권리나 의지를 갖는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맑스가 보기에 서로 동등한 귄리를 갖는 이런 ‘시민’은 무엇보다도 우선 시장에서 형성된 것이다. 즉 서로가 동등한 권리를 갖고 계약에 의해 일이 성사되며, 경쟁으로 인해 서로가 서로에 대해 늑대가 되는 곳이 바로 시장이고, 이는 유럽의 중요한 도시들에서 14세기 이래 점차 발전해온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그런 ‘인간’은 농민들을 토지에서 몰아내면서 신분으로부터도 해방시켰던, 이른바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라고 불리는 가혹한 역사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Marx, 1988). 따라서 홉스가 ‘출발점’으로 당연시했던 ‘주체’나 ‘인간’이란 개념은 사실은 역사적 과정의 결과물이요 생산물이다. 확실한 출발점이라고 간주되던 주체 개념은 이제 해체된다(Althusser, 1997).
포스트구조주의의 가장 유명한 사상가 중 하나인 푸코는 좀 다른 방식으로 이 주체 개념을 해체한다. 홉스가 정상적인 사람들이라고 보았던 그 ‘인간’ 내지 ‘주체’, 혹은 데카르트가 생각했던 이성적 주체는, 광인이나 부랑자, 게으름뱅이, 가난뱅이, 범죄자 등을 ‘종합병원’이란 이름의 수용소에 가두고, 그들을 사회로부터 배제함으로써 만들어진 ‘정상인’의 모습이요(Foucault, 1967), 나중에는 규율와 감시, 처벌 등을 통해 신체적으로 훈육된 ‘인간’이라는 것이다(Foucault, 1989).
여기서 맑스나 푸코에게 공통된 것은, 근대의 사회이론이 출발점으로 삼았던 ‘주체’가 반대로 ‘근대’(modern)라는 역사적 과정의 결과요 생산물이라는 것이다. 마치 데카르트의 ‘주체’가 문법이나 언어구조의 결과였던 것처럼. 따라서 그것은 근대라는 역사적 과정을 넘어서면서 동시에 극복하고 넘어서야할 것이기도 하다.
2)의미와 재현의 문제
전체는 아니라해도 넓은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전반에 걸쳐 언어학 내지 기호학의 영향은 매우 커다란 것이었다. 그것은 라캉이나 데리다, 보드리야르처럼 직접적으로 기호학에 의존하는 입장은 아니어도, 기호학이 제기한 어떤 문제를 피해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의미와 재현의 문제다.
소박한 자연주의적 태도나,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실증주의적 입장에서 기호란 대상--이를 ‘지시체(referent)’라고 한다--을 지시하는 것이고, 의미란 기호가 지시하는 그 대상이었다. 예를 들면 ‘워크맨’이라는 기호(記表)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어떤 기계를 지시한다는 것이고(이때 이 기계가 ‘워크맨’이라는 기호의 지시체다), 바로 그 기계가 ‘워크맨’이란 단어의 의미라는 것이다. 또 기호들이 결합해서 이루어진 문장의 의미는 그 문장을 듣고 떠올리는 그림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그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내 워크맨을 집어던졌다”는 문장의 의미는, 여러분이 이 문장을 읽거나 듣고 떠올리는 그림--이를 ‘표상’(representation)이라고도 한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소쉬르는 이런 생각을 처음부터 뒤집어 놓았다. 즉 기호는 대상과 아무런 관련이 없이 자의적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즉 어떤 기계를 ‘워크맨’이라고 부르든, ‘위코코’라고 부르든, 아니면 ‘뚜르름’라고 부르든 아무 상관이 없으며, 실제로 워크맨이라고 부르는 건 사회적인 관습이고 약속이라는 것이다. 이는 ‘의’나 ‘에서’, ‘그런데’, ‘위하여’ 등의 단어를 떠올리면 더더욱 그렇다. 이를 소쉬르는 ‘기호의 자의성’이라고 부른다(Saussure, 1990: 85쪽). 따라서 기호의 의미(記意)는 그것이 지시하는 어떤 대상(지시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기호의 사용에서 중요한 것은 기호들 간의 관계 속에서 어떤 기호와 다른 기호의 ‘차이’(difference)다. 예를 들어 프랑스어 moutton은 ‘양’이란 뜻이다. 이 말은 영국으로 들어가 mutton이 되었는데, 이미 양을 뜻하는 sheep이 있었기 때문에 mutton은 주로 양고기를 뜻하는 것이 되었고, 대신 sheep은 살아있는 양을 뜻하는 것이 되었다(같은 책, 138쪽). 즉 같은 기호(기표)가 상이한 두 언어의 망 속에서 상이한 관계 속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 의미가 달라진(different) 것이다.
언어에서 지시체가 사라지면서 문제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이를 두고 라캉은 기의에 닿지 못하고 미끄러진다고 말하며(Lacan, 1994), 데리다는 기표는 또 다른 기표의 무한한 연쇄를 낳기 때문에 기의는 무한히 지연된다고 말한다(Derrida, 1992). 예를 들어 ‘워크맨’의 의미는 ‘녹음과 재생이 가능한 휴대용 기계’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기표들일 뿐이며, 이는 ‘녹음’, ‘재생’, ‘휴대’ ‘기계’가 무언지 말해야 한다. 이 단어들은 각각 또 다른 기표들을 낳는다. 거기서 나온 설명하는 말들 역시 또 다른 기표를 통해 설명되어야 한다. 기표는 언제나 이처럼 또 다른 기표의 물고 물리는 무한한 연쇄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의미는 무한히 지연되고, 결국 기표는 기의에 이르지 못하고 미끄러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나 기호를 통해 대상을 재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근대적 사유가 주체를 신에게서 독립시키는데서 시작했다고 했는데, 이는 그와 짝이 되는 ‘대상’이라는 개념을 필요로 한다. 사유가 무언가를 생각하고, 말이 무언가를 말한다고 할 때, 이 ‘무언가’가 바로 대상인 것이다. 말의 의미가 지시체나 그림이라고 할 때, 그것은 어떤 대상을 말로써 ‘재현’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방금 말했듯이 말이나 기호는 다른 말이나 기호와 연결되는 무한한 연쇄망을 이룰 뿐, 기의에 이르지 못하며, 지시체나 대상을 재현하지 못한다. 이로써 소박한 대상이나 재현, 그것을 통해 정의되는 의미 개념은 이제 해체되어 버린다. 의미란 서로 맛물려 있는 기호들의 조직된 질서 속에 있는 것이다.
3)진리와 지식의 문제
대상의 재현 가능성이란 문제는 불가피하게 진리의 문제를 새로이 환기시킨다. 근대적인 사유 안에서 진리는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된다. 하나는 주체와 대상을 분할한 위에서, 대상과 일치하는 지식을 진리로 정의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수학을 모델로 하는 주체의 이성적 능력 안에서, 그 논리적인 정합성을 통해 진리를 정의하는 것이다.
전자는 진리임을, 즉 대상과 일치하는 지식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선 이미 진리를 기준으로 갖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혹은 지식과 대상의 일치를 확인해 줄 초월적 제3자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궁지에 빠진다. 즉 내가 (지식의)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실제로 나와 일치하는지 알려면, 이미 내 얼굴을 알고 있어야 하거나, 양자를 보고 일치한다고 해줄 확실하게 믿을만한 제3자(예전에는 신이 이를 수행했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내 얼굴에 관해 내가 아는 것은 처음부터 거울을 통해 얻은 것이란 점에서 참/거짓을 판단할 기준이 못된다. 또한 근대 철학은 신이란 3자 없이 주체와 대상이라는 이항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확인해줄 제3항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는 근대 철학자 전체를 따라 다닌 불길한 예감이었다(이진경, 1995).
상대성 이론은 절대적 기준이 되는 좌표계가 없으며, 좌표계 자체가 운동에 따라 변화한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양자역학은 위치와 에너지를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이 불길한 예감을 현실화했다. 이는 기호학과 더불어 대상을 참되게 재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했다.
다른 한편 논리적 정합성으로 진리를 구원해 줄 수학적 밧줄은 1931년 괴델의 정리로 인해 끊어졌다. 괴델은 산수처럼 자명해보이는 어떠한 공리계도 그 공리만으론 참/거짓을 증명할 수 없는 명제를 포함하고 있음을 증명했고, 더불어 어떤 공리계도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음을 증명했다(김용운/ 김용국, 1989).
그렇다면 이제까지 과학이라 불리운 지식은 대체 무엇이며, 이제 지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지금까지 과학을 표방한 지식이 진리로 간주되어온 것은 그것이 현실적으로 유효한 효과를 갖기 때문이며, 또 그런 한에서만 그렇다. 즉 진리이기에 유효한 것이 아니라, 유효한 한에서 진리인 것이다. 이런 유효성을 흔히 ‘진리 효과’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뉴튼의 역학은 참이 아니지만, 현실 세계에서 그것이 표시하는 오류는 실제 효과에 비해 매우 작기 때문에 그동안 과학으로 간주되어왔고, 또 그런 한에서는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반대로 유효하다고 간주될 조건이 있는 한 어떤 지식도 진리로 다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확실성’은 지식마다 다르겠지만. 이는 현존하며 유효하게 작동하는 모든 지식을 다루는 새로운 방향을 보여준다.
여기서 진리의 문제는 어떤 지식의 효과와 확실성의 문제로 된다. 진리 내지 지식의 문제를 확실성의 문제로 다루는 것으로는 비트겐슈타인이 대표적이며, 효과의 차원에서 다루는 것은 푸코가 대표적이다. 여기서 후자는 주체나 대상에 관한 앞의 논의와 긴밀하므로, 후자만을 간단히 보겠다.
푸코는 주체가 인식하고 지식을 갖는다는 생각을 전복한다. 반대로 그는 지식에 의해 주체와 대상이 구성되고, 그것들이 서로 특정한 형태로 관계지워진다고 본다(Foucault, 1992). 예를 들어 정신병리학이라는 지식(혹은 ‘담론’)은 앞서 말했던 대감금을 통해, 그리고 거기서 광인을 다시 분류하여 감금했던 사건을 통해 형성되었다. 그것은 광인들을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 그들의 행동과 태도 등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것을 분류하고 그것의 ‘원인’을 나름대로 서술함으로써 그들을 이제 병자로 다루게 되고, 그들을 다루는 기술을 치료라고 부르게 된다. 초기에 ‘의사’를 뽑는 기준은 인내심이 강하고 사람을 잘 다루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한다(Foucault, 1967).
일단 이렇게 성립한 정신병리학은 이제 정상에서 벗어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환자로, 그들이 보이는 증상들을 ‘치료’의 대상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그들을 치료하는 사람을 그 ‘치료’의 주체로 정의한다. 이제 정신병리학이 작용하는 공간(병원) 안에서는 몇 사람의 의사와 간호사 등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말할 수 없으며, 말해도 들리지 않는다. 반면 환자의 항의나 저항을 철창 안에 가둠으로써, 혹은 때론 처참하게 때리고 무력화시킴으로써 제압하는 것은 ‘치료’의 일부가 된다. 치료된다는 것은 의사의 의지에 정확하게 부합하여 복종하는 것을 뜻한다. 이렇듯 푸코는 지식 안에서, 지식을 통해서 작용하는 권력을 발견한다. 권력은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위해 (정신병리학 같은) 지식을 필요로 하고 만들어내며, 반대로 지식은 그 안에서 권력을 작동시킨다. 그래서 그는 양자를 지식-권력(savoir-pouvoir)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만들어 버린다.
4)총체성의 문제
근대적 사유는 보편성과 총체성, 단일성을 추구한다. 데카르트는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을 찾아낸 자신의 ‘방법’이 갈릴레이나 자연과학 뿐만 아니라 모든 지식의 보편적인 방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해체의 위기에서 주체 개념을 살려낸 칸트 역시 모든 경험이 공통으로 기반하고 있는 기초를 찾아내려고 했고, 모든 행동이 공통으로 기반하고 있는 도덕의 기초를 찾아내려고 했다. 헤겔은 이 모든 것이 사회는 물론 인류 전체의 역사 전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총체성을 갖는다고 본다. 모든 개별적 현상을 만들어내고, 그것들에 단일성을 부여하는 하나의 중심, 그것이 보편성, 총체성, 단일성이라는 주제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명시적인 선언문(Lyotard, 1992)은 바로 이 보편성과 총체성, 단일성을 겨냥하고 있다. 리오타르는 그러한 총체성과 보편성, 단일성이 각각의 부분이 갖는 고유한 특성과 고유한 영역을 제거했으며, 그것을 하나의 거대한 전체 아래 억압했다고 본다. 그는 이제 이러한 총체성을 자임하는 담론, 보편성을 주장하는 지식이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졌다고 한다. 그런 만큼 다양한 부분들을 자기 발 아래 거느리는 위계화된 전체도 제거되어야 한다고 본다.
여기서 그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을 끌어들인다. 비트겐슈타인은 사후 출판된 저서 ?철학적 탐구?에서 언어란 어떤 단일한 규칙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차라리 다양한 삶의 형태에 따라 달라지는 다양한 언어게임들만이 존재한다고 말한다(Wittgenstein, 1994). 예를 들어 학자로서 학회에서 사용하는 말들은, 바로 그 사람이 방송에 나와서 사용하는 말과 다르고, 동료들과 식당에서 사용하는 말들과 다르며, 집에서 사용하는 말들과도 다르다. 어떤 단어는 방송이나 학회에선 사용되지 못하고 배제되며, 집이나 식당에서는 거의 듣기 힘든 단어들이 학회에선 사용된다. ‘물’이라는 동일한 단어조차, 방송이나 학회에선 그 분자구조가 어떻다고 설명하는 연구대상(H2O)을 의미하지만, 식당이나 집에선 ‘물을 갖다달라’를 의미할 것이다. 죽음이란 단어는 의사가 병언에서 사용할 경우와, 시에서 사용되는 경우, 실연한 사람이 사용하는 경우, 하이데거같은 철학자가 사용하는 경우 모두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처럼 하나의 단어가 뜻하는 의미조차 다르게 만드는 언어게임의 다양성은 문법으로도, 언어구조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확실성이나 정확성 역시 각각의 언어게임마다 다르게 정의된다(Wittgenstein, 1994: 73-74쪽). 지금 시간을 묻는 말에 대해 12시 10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극장 앞에서라면 충분히 정확하겠지만, 물리학 실험실에서는 너무도 부정확한 것이며, 모내는 논에서는 지나치게 충분하다. 내 손이 있는 것이 확실한가는 데카르트같은 철학자로선 믿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림을 그리는 화가에겐 더없이 확실하며, 밥짓는 어머니에겐 어이없는 질문이다. 앞서 지식이나 담론에 대한 푸코의 연구를 참조한다면, 각각의 담론이 갖는 고유한 언행의 규칙이란 이러한 언어게임의 국지성, 전체로의 환원불가능성을 뜻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리요타르나 보통의 포스트모더니스트는 총체성과 보편성에 대한 이러한 비판을 다양성의 원리로 제시한다. 그것은 물론 이전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리요타르 말처럼 포스트모던은 모던과 단절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전에는 그 다양성을 하나의 척도로 굳이 통일시키려는 기획이 있었던 것이고, 그런 점에서 다양성에 대한 억압이 지배적이었다면, 이제는 다양성이 명시적인 규칙 내지 의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다르다고 말한다(Welsch, 1994). 덧붙이자면, 이러한 주장이 국지적인 통일성, 어떤 단어나 문장의 사용을 하나의 언어게임으로 성립하게 해주는 어떠한 규칙의 부재를 뜻하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근대적 사유방식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러한 비판은 사회에 대한 이론이나 예술에 대한 이론에서 변형된 형태로 다시 나타난다.
4.포스트모더니즘과 현대 사회
포스트모더니즘은 일차적으로는 예술에, 다음으로는 지식에 대해 직접적으로 제기되었지만, 그것은 현대 사회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담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여기서는 그것을 명확하게 이론화했던 보드리야르의 이론을 통해 간단히 살펴볼 것이다. 그의 이론의 초점은 소비 사회와 시뮬레이션 개념에 맞추어져 있다.
1)소비의 사회
상식에 따르면, 혹은 정치경제학에 따르면 상품에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있다. 예를 들어 전화기는 전화를 하는데 사용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사용가치다. 반면 흔히 값으로 매겨져 표시되는 가치가 있다. 3만원, 5만원, 20만원... 이것이 교환가치다. 사용가치는 교환가치와 독립적이어서, 3만원 짜리든, 5만원 짜리든 별 차이없이 비슷하다.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은 3만원이면 충분한 물건을 20만원이나 주고 살까? 좀더 명확한 예를 들면, 같은 속옷도 어떤 사람은 한벌에 만원하는 것이면 충분한데, 다른 사람은 100만원 짜리를 찾는다. 마찬가지 자동차인데, 누구는 500만원하는 티코를 사고, 누구는 5000만원이 넘는 벤츠를 산다.
사용가치만 놓고 보자면, 이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미 1920년대에 미국의 사회학자 베블렌(T. Veblen)은 이를 유한계급의 ‘과시적 소비’라고 부른 바 있다. 즉 비싼 값은 자신의 신분과 위광을 과시하기 위해 지불하는 비용이라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즉 상품의 사용가치가 아니라 입은 옷이 어떤 상표인지, 신은 신발이 얼마 짜리인지가 실제로 상품을 소비하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남과 어떻게 다른지, 혹은 자신이 어떤 집단의 사람들과 같은지를 드러낸다.
이는 단지 유한계급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가 자극되고 소비가 흘러넘치는 현대 사회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소비된 상품의 의미를 구성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상품은 이제 사용가치가 아니라 의미를 낳는 기호적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상품을 기호로 다루는 기호의 정치경제학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Baudrillard, 1992a).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제 상품들은 서로 간에 종횡으로 짜여진 의미들의 그물을 짠다. 마치 기호들이 의미들의 그물을 짜듯이. 이는 사람들 자신이 짜는 것이 아니라 상품들 자체 간에 짜여지는 것이다. 벤츠는 보통 자동차와는 비교할 수 없는 부와 지위를 의미하며, 고급 향수는 평범한 로션 냄새로는 쫓아갈 수 없는 격조있는 유혹을 표시하며, 바하의 음반은 품위있는 음악적 취미를 뜻한다. 그것은 이미 사람의 의지 외부에 있는, 자기 발로 서 있는 그물이며, 소비자는 단지 그에 적절한 어떤 것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사회적으로 훈련되고 때로는 강제되기도 한다. 검푸른 작업복을 입고 피아노를 사는 사람이나, 평범한 월급쟁이 주제에 벤츠는 사는 사람은 별종이거나 ‘미친 놈’이다. 이런 훈련은 농촌인구를 산업노동에 적응시키기 위해 19세기 내내 이루어진 훈련의 20세기 판(版)이다. “소비 사회, 그것은 또한 소비를 학습하는 사회, 소비에 대해 사회적 훈련을 하는 사회기도 하다.”(Baudrillard, 1991: 106쪽)
이러한 소비를 통해 사람들은 기호화된 상품들의 그물망에 내장된 사고와 행동 방식을 수용한다. 그리고 소비되는 다른 상품들을 보고서 그 의미를 읽을 수 있는 코드를 받아들인다. 이제 이런 방식의 소비와 향유는 의무가 되었다. “소비인(消費人)은 자신의 향유를 의무로 삼는 존재로, 향유와 만족을 꾀하는 존재로 간주된다.”(같은 책, 104쪽).
더 나아가 이런 소비 대상의 중심에 이제 육체가 들어선다. 건강함과 아름다움은 개인의 절대적인 지상명령이 된다. 건강한 육체를 위해 건강식품, 의약품, 의료 자체가 일상사가 되며, 아름다움 육체를 위해 화장품과 의복이 삶의 울타리를 치게 되며, 날씬한 몸매를 위해 육체를 배려하고 억압하게 된다. 모델은 이러한 육체를 위한 코드화된 ‘모델’을 보여준다. 성과 섹스는 소비되는 상품의 중심에 선다. 이젠 성 자체가 소비의 대상이 된다.
이처럼 코드화되고 의무화된 소비는 소비하는 사람을 개별화한다. “노동력의 박탈에 의한 착취는 사회적 노동이라고 하는 집단적 영역에 관계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단계부터는 사람들을 연대(連帶)하게 한다...소비자인 한에서 사람들은 다시 고립되고 뿔뿔이 떨어져서 기껏해야 서로 무관심한 군중이 될 뿐이다(가정에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들, 경기장 및 영화관의 관중 등).”(같은 책, 113쪽) 즉 소비는 개인적으로 행해지기에, 개인적인 만족이나 불만으로 끝나버린다. TV의 프로그램에 대해 집단적으로 항의하는 사태를 생각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소비의 사회와 상품의 기호화는 대략 전후의 서구 사회를 통해 관찰된 현대 사회의 초상화다. 그것은 생산이 지배하던 사회에서 소비가 지배하는 사회로, 상품의 사용가치에서 기호적 가치로의 전환이라는 점에서, 근대(modern) 사회와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이는 아마도 1929년에 시작된 세계적인 대공황과 결부된 것이 아닐까? 이전에 자본주의는 베버가 잘 보여준 것처럼, 프로테스탄티즘 윤리가 요구하는 욕망의 억제와 절약, 금욕 등을 요구했었다(Weber, 1988). 그것을 통해 자본의 축적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든 아니든, 그것을 통해 노동자가 자신의 고통스런 처지를 하늘이 내리신 소명으로 말고 살아갔는지 아닌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가 지배적이었던 북부 독일은 물론, 그들의 종교개혁에 대항하여 새로이 개편된 카톨릭의 유럽에서 금욕적 생활은 삶의 규범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런 태도는 프로테스탄트의 이주로 역사를 ‘새로’ 시작한 미국에선 더욱더 그랬다. 그들은 1920년대 들어오면 금주법(禁酒法)까지 만들어 금욕을 강제했다(김진균, 1993).
반면 알다시피 1920년대는 이미 포드주의적인 대량생산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기도 하다. 이는 상품이 엄청난 양으로 시장에 쏟아져 나오는 것을 뜻하는데, 바로 그 시기에 금주법까지 만들어 금욕과 절약, 절제를 강제했던 것이다. 당연하게도 쏟아져나온 엄청난 상품은 팔리지 않고 쌓이게 되었고, 이로 인해 전례없는 대공황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사태의 문제를 포착한 부르주아지는 이제 욕망의 배치--쉽게 말하면 욕망의 조절방식--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게 된다. 그리고 소비를 창출하기 위한 조치가 다양하게 취해진다. 뉴 딜(New Deal) 정책과 케인즈주의는 이러한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뉴 딜은 단지 국가 재정을 다루는(deal) 새로운(new) 방식이었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사람들의 욕망을 다루는 새로운 방식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절약이나 금욕이 미덕이 아니라 소비가 미덕 내지 의무로 된다. 보드리야르는 이와 관련해 매우 시사적인 글을 인용하고 있다.
“국고로부터 90억 달러를 돌려받은 소비자들은 200만개의 소매점으로 풍부함을 구하여 쇄도하였다......그들은 선풍기를 에어콘으로 바꾸는 것이 자신들의 힘으로 경제를 성장시키는 것임을 이해하였다. 500만대의 소형 텔레비젼과 150만대의 전기육절기(電氣肉切機) 등을 구입함으로써 그들은 194년의 호황(boom)을 보증하였다.”(Time지의 기사, Baudrillard, 1991: 109에서 재인용)
유사한 발언이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입에서 나왔으며, 급기야 “절약은 반(反)미국적이다”는 말도 나오게 된다(같은 책). 소비 사회라는 현상은 이렇듯 변화된 욕망의 배치 안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2)시뮬레이션
매스 미디어 연구의 선구자인 맥루한(M. MacLuhan)은 “매체가 메시지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매체에 담겨 있는 어떤 내용이 아니라 매체라는 형식 그 자체가 곧 메시지라는 것인데, 이는 매체 자체가 갖는 특성이 메시지를 이미 선결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크로넨버그(Cronenberg)는 자주 언급되는 컬트 영화 중 하나인 <비디오 드롬>에서, “화면이 망막이다”라는 말로 변형하여 사용한 바 있다. 이 영화 역시 TV나 매체에 깊숙히 침윤된 현대의 삶을, TV와 현실의 뒤섞임을 통해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포스트모던한 사회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로 간주된다.
보드리야르는 맥루한의 명제를 더 멀리 밀고 간다. 그는 매체는 자신의 형식에 따라 작용하는 작동체라고 본다. 상품 생산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교환가치의 작용 그 자체가 사람들의 관계를 돈과 계산이 지배하는 냉혹한 관계로 만들어버리듯이, 매체의 작용 그 자체는 결코 중립적이지도, 혁명적이지도 않다고 말한다(Baudrillard, 1992a, 191쪽). 따라서 매체가 작동하는 방식이 그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된다.
대중매체는 응답을 거부하며, 응답이 이루어질 수 없는 일방적인 방식으로 말하고 행한다. 메시지가 교환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전달된다. 신문이나 TV를 보면서 때론 어이없어 하고 때론 욕을 하지만, 그런 생각이나 말은 종이나 브라운관에 부딪쳐 흩어지고, 침묵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오직 가능한 것은 매체를 거부하거나 아니면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매체가 내장하는 일정한 코드에 따라 언제나 모델화된다. 아름다운 얼굴의 모델이 그 안에서 나오고, 바람직한 말투의 모델이 거기서 나오며, 관심을 주어야 할 상품의 모델이 거기서 나온다. 그 모델에 따라 사람들은 상품을 사고, 소비되는 상품의 의미를 읽는다.
또한 어떤 사건(청소년 범죄, 노동조합의 파업, 재벌 기업의 부도)이나 모두 매체의 코드에 따라 상투적인 모델로 변형된다. 그래서 우리는 말만 들어도 그 내용을 안다. 청소년 범죄는 결손 가정이나 문제 있는 가족의 탓이거나, 저질 만화나 성과 폭력으로 넘치는 못된 영화 등 유해환경의 탓이다. 지하철 노동조합의 파업은 당사자가 아닌 많은 사람의 불편을 야기하는 노동자의 항의다. 재벌 기업의 부도는 취약한 재무구조와 무리한 확장으로 인한 것으로 국민들에게 피해가 전가된다 등등. 여기서 각 사건이 갖는 그때그때의 특이성은 사라지고, 반복되는 동일한 모델만 남는다. 이러한 절차를 따라 실재계(實在界)는 정해진 코드가 된다(Baudrillard, 1991: 183쪽).
한편 이전에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았던, 그래서 그냥 흘려 보내던 일들이 이 매체를 통해 때론 정치적 의미를 갖는, 때론 사회적 파장을 갖는 ‘이벤트’(event)가 된다(같은 책, 198쪽). 잘 나가는 야구 선수의 귀국은, 야구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나도 어느새 알게 되는 큰 이벤트가 된다. 이처럼 매체는 모든 일들을 하나의 이벤트로, 스펙타클(spectacle, 구경거리)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구경거리로 새끼를 친다. 야구선수의 가족과 생활을 알려주는 잡지, 그가 출연하는 쇼, 그가 나와서 컴퓨터를 파는 광고, 그를 앞세운 사인회, 이런 행사들의 문제점을 다룬 신문 등등... 하나의 스펙타클이 또 다른 스펙타클을 낳고, 하나의 기호가 다른 기호를 복제한다(Debord, 1996).
매체의 코드에 따라 사건화되고 뻔한 모델에 따라 증식되는 이러한 복제 속에서, 이젠 무엇이 실재고 무엇이 복제인지가 모호해진다. 더불어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인지도 모호해진다. 그 복제물과 스펙타클 밑에 정말 무언가가 있다고 믿는가? 스포츠 영웅을 다루는 저 요란한 스펙타클들에서 원본이 대체 어떤지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스펙타클에 상응하는 원본이 없음을 감춘다. 그렇지만 그것은 원본보다 훨씬 더 생생한 영웅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스펙타클이 이제는 현실의 사람들을 움직인다. 사실 그 기호 뒤에 정말 훌륭한 영웅이 있는지 없는지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서 그저 잊고 말면 그만인 것이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현대의 시뮬레이션은 이처럼 다른 스펙타클로부터 복제하는 복제를 통해, 원본보다도 훌륭한 저 원본 없는 복제를 통해 특징지어진다. 그것은 모델을 가지고, 그 모델에 따라 스펙타클을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원본보다 더 생생하고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스펙타클을 ‘과잉실재’(hyper-reality)라고 부른다(Baudrillard, 1992b: 12-13, 26-27쪽). 그것은 실재 ‘저편으로 벗어나 있’(hyper)지만, 그래서 실재가 아니지만, 실재보다 더 실재적이란 점에서 ‘과잉된’(hyper) 실재고, 없는 것을 대신한다는 점에서 ‘지나친’(hyper) 실재다.
전통적인 기호나 복제물은 무언가를 지시하고 무언가를 재현한다. 그러나 시뮬레이션이 만들어내는 과잉실재는 원본이 없다는 점에서, 더 나아가 시뮬레이션된 모델에 실재를 맞추려 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기호와 근본적인 단절을 이룬다. 이런 점에서 보드리야르는 시뮬레이션과 그에 따라 만들어진 과잉실재가 흔히 말하는 포스트모던한 사회의 특징을 이룬다고 보는 셈이다.
5.포스트모더니즘과 예술
포스트모더니즘이 예술과 관련해 다루어진 것은 대개 스타일이나 방법 등을 통해서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풍자적인 의도 없이 빌어다 쓰는 혼성모방(패스티쉬: pastiche), 저속한 싸구려 그림이나 물건(키취)을 작품에 적극 사용하는 것, 과거의 것을 되살려 사용하는 것, 전위주의에 반대하여 평이하게 만드는 것 등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재현의 문제와 저자(주체)의 문제와 관련해 다시 정리해서 설명할 것이다.
1)숭고, 혹은 재현의 문제
리요타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를 ‘숭고’라는 문제와 관련시킨다. 그가 말하는 이 ‘숭고’라는 개념은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나온 것인데, 어떤 개념에 적합한 대상을 표상하지 못하는 경우에 일어나는 미적 현상이다. 이는 매우 강력하지만 동시에 모호한 감정이고, 즐거운 동시에 고통을 수반하는 감정이다(Lyotard, 1990: 274쪽). 조국을 침략한 제국주의에 항거하여 싸우다 잡혀서 처형당하는 전사의 죽음, 죽은 아들 예수를 안고 비통해하는 어머니 마리아의 눈물, 꿈과 희망에 가득차 인생을 향해 질주하려는 젊은 렘트란트(Rembrandt van Rijn)의 기상, 혹은 압도할 듯이 감싸며 둘러친 저 거대한 봉우리들 등은 이런 장엄 내지 숭고한 감정을 일으킨다. 그것은 때론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강한 감정이지만,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는 꼭집어 말하기 힘들다.
리요타르는 숭고라는 숭고라는 개념으로써 근대(모던) 예술을 정의한다. 즉 “표상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하는 예술을 가리켜 ‘모던’이라고” 부르겠다는 것이다(같은 책, 275쪽). 예를 들어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의 <모나 리자>는 단지 한 여자의 얼굴이 아니라, 그 얼굴에 스며든 어떤 성스러움이 존재함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며, 그 얼굴의 미소로 신비하고 영원한 그 무엇을 상기시켜려 한다. 바하(J. S. Bach)의 <마태수난곡>이나 <c단조 미사> 역시 음들의 배열과 혼합을 통해 신비하고 성스러운 무언가를 상기시키려고 하며, 베토벤(L. Beethoven)의 5번 교향곡 <운명>이나 <에그몬트 서곡>은 신이 아니라 인간의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매우 강렬하게 드러내며, 반 고호(van Gogh)의 불타는 벌판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불타는 그 무엇을 표현한다. 또 피카소(P. Picasso)는 복수(複數)의 시점에서 본 형태를 중첩시켜 그림으로써 공간의 본질에 대한 무언가를 보여주고자 했으며, 뒤샹(M. Duchamps)은 소변기 앞에다 <샘>이라고 써 놓음으로써 기계화된 생산을 통해 잃어버린 무언가를 상기시켜려 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런 내면의 빛이나 말할 수 없는 어떤 본질을 떠올리려는 시도에서 벗어난다. 앤디 워홀로 대표되는 팝아트(pop art)는 그런 숭고함 대신에 일상사 속에서 발견되는 평범함의 주변을 돈다. 성스럽거나 고상한 어떤 색조도 배제한 채, 코카 콜라병과 마를린 먼로의 핀업 사진, 햄버거, 만화 등이 입체감마저 상실한 채 작품이 된다. 앤디 워홀은 말한다. “현실은 매개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현실을 환경으로부터 떼어내어 캔버스 위에 놓기만 하면 된다.” 올덴부르크(Oldenburg)의 말은 매우 시사적이다. “마치 미술관에 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나는 온갖 종류의 상점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쇼윈도와 판매대에 진열되어 있는 상품들이 귀중한 미술품처럼 보였다.” 혹은 백남준처럼 부처마저도 공사장의 포크레인과 함께 TV 속에 들어앉힘으로써 숭고한 분위기를 제거해 버린다.
더불어 그들은 20세기 전반기의 모더니즘 예술처럼 상품화된 세계에 대한 전복을 꿈꾸지 않으며, 통속적 세계로부터 저주받는 것을 자처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이미 모더니즘이 제도 속에 자리잡은 이래 하나의 위선처럼 보였다. 반대로 그들은 저주받은 서명 대신에 서명 자체를 상품화하려고 하며, 그 상품화된 세계 속에 전적으로 편입되고자 한다. 따라서 그들은 모더니즘의 아방가르드주의를 벗어나며, 반대로 싸구려 복제물들(키취)을 동원하며 그것을 또 다시 복제한다. 즉 아름다움과 독창성의 미학에 대항하여 ‘시뮬레이션 미학’을 만든다(Baudrillard, 1991, 157쪽).
“팝이 의미하는 것은 투시법과 이미지에 의한 상기(想起)작용의 종언, 증언으로서 예술의 종언, 창조적 행위의 종언, 그리고 역시 중요한 것으로서 예술에 의한 세계의 전복 및 저주의 종언이다.”(같은 책, 166쪽) 확실히 이런 점에서 최근의 예술은 숭고함이라는 개념을 명시적으로 포기하고 대신 일상성과 평범성을 택했다. 여기서 모더니즘과 그것은 확연하게 구분된다. 그러나 이에 대해 보드리야르는 그들이 주장하는 ‘평범함’이 숭고함이라는 범주의 현대판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일 수 있겠는가고 질문한다(같은 책, 169쪽). 반대로 그것은 어쩌면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마저 예술의 신성한 과정 속으로, 또 다른 숭고함 속으로 밀어넣는 역설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리요타르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에서 미묘한 긴장을 읽어낸다.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표상할 수 없는 것, 보여줄 수 없는 것을 보여주려는 한에서 그것은 분명 모더니즘의 일부다. 하지만 다른 것이 있다면, 모더니즘이 보여줄 수 없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보여줄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는 점이다. 알기 쉽게 바꿔 말하면 모더니즘은 감추어져 있는 신성한 어떤 것을 보여주려 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그걸 보여줄 수 없음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이다.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표상 불가능성을 강력히 전달하기 위해서 새로운 표현 방식을 탐색하는 것.”(Lyotard, 1990: 279쪽)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이후’(포스트)와 ‘이전’(모던)의 역설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같은 책).
2)저자의 죽음
문학이나 예술은 물론 철학이나 각종 인문과학에서 저자라는 관념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 포스트모더니즘을 특징짓는다. 이전에 비평은 작품이나 텍스트를 저자와 관련하여 다루었다. 이 작품은 어느 시기에 어떤 사회?역사적 조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그때 저자는 어떤 사상에 영향을 받았고, 이 작품에서 저자의 의도는 무엇이었고 등등. 이를 입증하기 위해 그 당시 정치적 사건과 저자가 읽은 책들, 저자의 편지와 일기, 관련된 친구나 동료의 증언 등이 동원된다. 그리고 그가 쓴 다수의 작품들은 그의 사상이나 태도와 관련하여 통일성을 갖는 것으로 해석된다. 혹은 좀더 유연하게 받아들이면, 현재의 지평에서 작가가 작품에 담은 의미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그 세부적인 차이가 있지만, 대개는 작품에 메시지를 담아 발신하는 발신자가 있고, 작품은 그 메시지가 담긴 매개체며, 수신자는 당시의 코드나 그것에 현재의 맥락을 섞어서 작품을 해석하고 그에 담긴 메시지를 수신한다는 전통적인 소통(communication) 이론의 모델에 입각해 있다. 즉 작품에서 작가의 메시지를 읽거나 해석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비판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레비스트로스나 중기의 바르트(R. Barthes)로 대표되는 구조주의의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데리다의 해체주의적인 입장이며, 마지막은 푸코의 계보학적 비판이다.
구조주의는 작품을 기호들의 구조화된 망으로 본다. 단어나 문장, 음표들, 혹은 색채와 형태는 그것들 간의 내적인 구조로 짜여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문장이나 이미지의 의미나, 어떤 부분의 의미는 작가의 의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그것과 관련된 다른 문장들, 다른 이미지들, 그것을 조직하는 전체적인 구조 안에서 결정된다(Jacobson/ Levi-Strauss, 1989). 그렇다면 작가라는 어떤 특권적인 주체가, 작품의 의미가 발생하고 그리로 귀결되는 어떤 특권적인 중심일 수 없다. 이제 비평은 작가에 대해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으며, 작품의 내적인 구조를 찾아내는데 주력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작품을 만드는데서 중요한 것 역시 각 부분들의 내적인 구조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의 죽음’이 선포된다(Barthes, 1997). 그것은 철학에서 일어난 주체의 해체와 동형적인 것이었다.
데리다의 비판은 더욱 근본적이고 급진적이다. 그가 보기에 어떤 작품도 독자를 전제한다. 그렇지만 어떤 독자도 작가가 의도한대로 읽지만은 않는다. 그렇다고 저 치밀한 구조주의적 분석가들처럼 읽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무능력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작품 내지 텍스트가 하나의 확고한 통일성을 갖지 못하며, 차라리 이질적인 것들로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텍스트도 여백을 포함하는데 이 여백은 새로운 독서와 해석이 다양하게 생성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어떤 텍스트도 다른 텍스트를 명시적으로 인용하거나 은밀히 혹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포함하고 있다. 독창적인 원본은 없으며, 텍스트들이 서로 결합된 텍스트들만이 있다는 것이다(이를 흔히 ‘상호텍스트성’이라고 부른다)(Derrida, 1981; Derrida, 1982).이것은 다른 사람의 작품을 명시적으로, 혹은 암시적으로 끌어다 결합하여 사용하는 패스티쉬를 ‘정당화’하는 것같다. 실제로 데리다는 ?산포?라는 논문을 소설가인 솔레르스(Ph. Sollers)의 글을 이탤릭으로 표시하고, 그 문장들 그 사이에 자신의 문장을 섞어서 씀으로써, 텍스트의 이질성과 상호텍스트성을 보여준다(Derrida, 1981). 또 ?철학의 여백? 서문을 일부러 둘로 갈라 두 개의 이질적인 텍스트가 공존하는 양상을 보여준다(Derrida, 1982). 그렇지만 그의 이런 실험적인 글쓰기가 성공적일 수 있다면, 그것은 그렇게 쓴 글이 나름의 논지와 일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것이 없다면 그것은 그저 횡설수설일 뿐이고, 아마도 화장실에 여러 사람이 낙서해놓은 그 이질적인 글들의 복합체와 구별이 안되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에코(U. Eco)가 코난 도일 등을 빌어 만들어낸 소설(?장미의 이름?)에서도 그런 혼성모방과 복제가 그것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것은 거기서 흥미롭고 중요한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고, 그 나름의 일관성을 갖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독창성의 부재가 아니라 독창성 의 변형이, 통일성의 부재가 아니라 통일성의 변형이 있다고 해야 하는 게 아닐까?
따라서 어떤 텍스트에도 읽어내야할 진정한 의미는 없으며, 차라리 중요한 것은 읽는 사람이 독자적으로 읽어내는 것이고, 더 나아가 특정한 해석을 반복하도록 강요하는 지배적인 해석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발신자는 없으며, 오직 텍스트와 수신자만이 있을 뿐이다. 저자는 죽고 작품을 읽는 사람만이 남는다.
푸코는 일단 작품 내지 저작의 개념을 문제삼는다. 저자가 쓴 것은 모두 작품인가? 혹은 출판된 것만이 작품인가? 가령 사드가 감옥에 있는 동안 자신의 환상을 끄적거려 놓은 것은 작품인가? 니체의 수첩에 적은 아포리즘의 초안은 분명 작품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 옆에 약속장소와 주소 등을 적어놓았다면 그것도 작품인가?(Foucault, 1989: 244-245쪽) 실제로 프로이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한 글에서 그의 세탁표까지 추적하고 있는데, 이 세탁표 역시 작품인가? 결국 이는 작가나 저자로부터 시작해서 작품을 정의하는 것이 얼마나 곤란한가를 보여준다.
나아가 저자의 개념을 문제삼는데, 여기서 그가 문제삼는 방식은 많이 다르다. 즉 저자의 부재나 죽음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반대로 ‘저자의 탄생’을 문제삼는다. 즉 저자는 언제 어디서나 있었던 것은 아니며, 또한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위치를 갖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중세의 많은 기사도 문학은 저자가 따로 없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치면서 수정되었다. 우리의 경우도 유사하여, 저자가 없이도 사람들 사이에 순환되었고, 사람들 사이에서 노래불려졌다. ?아라비안 나이트?도 그렇다. 반대로 서양의 과학적 담론들은 저자의 이름이 표시될 때만 진리의 가치를 가졌다고 한다(같은 책, 251쪽). 반면 17-18세기를 거치면서 서양에선 일종의 역전이 발생한다. 과학에선 개인적인 저자의 이름들이 사라져가고, 반대로 문학에서는 익명이 용인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이때를 지나면서 저자라는 것은 습득하고 소유할 수 있는 권리(저작권)가 된다. 나아가 저자는 이제 나기 나름의 작품 세계를 갖는다. 바꿔 말해 그가 쓴 모든 텍스트는 그 작품 세계 안에서 이해되고 위치지워진다. 품격있는 시인이 음탕한 도색소설을 썼다는 것은 믿을 수 없으며, 심지어 그게 사실이란 증거가 있어도 그것은 그의 작품에서 배제되어야 한다. 그것은 작품을 형성하는 작품의 기원이자, 그 작품들이 통일성을 갖도록 하는 기능을 갖게 된다. 이를 푸코는 저자 기능이라고 부른다. 이 “저자 기능은 우리가 저자라고 부르는 어떤 이성적 실체를 확립하고자 하는 복잡한 조작의 결과”다(같은 책, 252쪽).이러한 조작은 기독교적 전통이 정통적인 텍스트를 선별하고 인정하던 방식에서 유래한 것이다. 성 제롬(St. Jerme)은 4가지를 제시하는데, 여러 책 가운데 질이 떨어지는 것은 작품 목록에서 제외하고, 많은 작품들과 모순되는 작품이 있으면 제외하며, 다른 문체로 씌여진 작품도 제외해야 하며, 저자 사후의 사건이나 인물을 언급하는 것은 나중에 삽입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같은 책, 253쪽).
결국 푸코는 어떻게 해서 저자가 존재하고, 어떻게 해서 작품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가지며, 작품의 통일성을 형성하는 중심으로 기능하게 되었는가를 질문하는 것이다. 이로써 저자에 부여된 중심적 권위와 배타적 권리는 비판적으로 극복해야 할 역사적 산물이 된다. 이로써 푸코는 이제 저 저자를 죽여야 할 때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보다시피 저자의 죽음이란 주체와 총체적 통일성, 진리의 문제 등이 동시에 응축되어 있는 문제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내세우는 소설가 보르헤스는 예컨대 ?픽션들?에서 없는 저자를 만들어 인용하거나, 어떤 저자의 씌여지지 않은 책을 인용하고, 있지도 않은 잡지를 인용하는 등의 허구(픽션)을 만들어냄으로써 저자 기능을 신랄하게 조롱한다.
6.포스트모더니즘과 정치
어떠한 철학적 전환도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그것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가려고 시도한다. 칸트나 디드로(Diderot)의 계몽주의도 그랬고, 데카르트나 베이컨(F. Bacon)의 철학도 그랬으며, 에라스무스(D. Erasmus)의 르네상스적 인문주의나, 더 거슬러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스콜라 철학도 그랬다.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여기서 예외가 아니며, 오히려 그것이 예술에서 철학 및 이론 전반으로 확장되었던 배경에는 히틀러나 스탈린에 의한, 그리고 그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전체주의적 경험이 밑에 깔려 있다. 총체성에 대한 지나친 거부는 이와 직접적으로 결부되어 있다. 그런 만큼 정치나 운동에 대한 새로운 모색이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중요한 주제다.
하지만 여기서도,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에 대한 극히 상이한 태도들 이상으로 각이한 입장들이 있다. 중요한 것 몇 가지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1)저지와 내파
보드리야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을 통해서 나아갈 수 있는 하나의 극한적 지점을 보여준다. 그는 가치가 지배하는 교환, 가치를 소비하는 관계를, 그 이전의 상징적 교환과 대비한다. 상징적 교환은 고대나 이른바 미개사회에서 벌어지는 교환으로,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는 포틀래취(potlach)나 경제적 기능과는 분리된 교환/제휴 관계를 가동시키는 쿨라(kula)와 같은 것이다. 여기서는 경제적 가치의 냉정한 계산이나 이미 위계적으로 의미화된 소비와는 달리, 사람들의 관계가 무언가를 서로 주고받았다는 것으로 충분한 그런 관계다(Baudrillard, 1992a; Baudrillard, 1994). 자본주의는 생산의 거울을 통해 이런 관계를 모두 생산의 체계 안에서 경제적 기능으로 계산되는 것으로 바꾸었다.
그가 주목하는 곳은 이곳이다. 그는 이 생산의 거울을 깨버릴 것을 주장한다. 이를 위해 생산(production)에 반하는 유혹(seduction)의 전략을 제시한다. 유혹은 베일로 가리는데서 나온다. 그 베일은 상징성이다. 생산의 거울은 이 베일을 벗김으로써 모든 것을 명확한 의미를 갖는 기호로 바꾸어 버린다. 유혹의 전략이란 그 의미의 명확성을 가리고, 그 의미를 생산하는 지배적인 코드(기호적 질서)를 변환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복제가 복제를 시뮬레이션하는 과잉현실의 세계에 이르면 이런 전략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다. TV는 사람들을 개별화시키고, 그들의 시선을 오직 TV만을 향하게 한다. 그리고 TV에서 나오는 정보가 세계에 대한 나의 지식을 구성하고, 대화는 그것을 소재로 하며, 거기서 나온 사건과 영웅을 모르면 무시하거나 바보가 되고, 어떤 말이 참인가 거짓인가는 매체에 나온 것을 기준으로 하게 된다. 이제는 TV가 진실을 만들며, TV가 바로 진실이다(Baudrillard, 1992b: 68쪽). 매체에 의해 프로그램되고, 매체에 의해 시뮬레이션되는 진실. 그것은 분명히 조작적인 진실이다.
“이 조작적 진실은...탐색하고 질문하는 테스트의 진실이고, 만져보고 자르는 레이저 광선의 진실이며, 구멍난 삶의 시퀜스를 간직하고 있는 모체들의 진실이고, 당신의 결합들을 명령하는 유전적 코드의 진실이며, 당신의 감각에계에 정보를 제공해주는 세포들의 진실이다.”(같은 책, 69-70쪽)
급기야 TV 카메라가 옆에 있어도 마치 없는 것처럼 생활할 수 있게 된다. 이젠 자신 스스로가 과잉실재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이제 모든 것이 코드화된 과잉실재의 일부가 된다. 이를 보드리야르는 ‘저지’의 단계라고 부른다(같은 책, 71쪽). 그것은 과잉실재가 실재를 대체해버린 상황에서, 혹시라도 이 안에서 프로그램되지 않은 우발적인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전략이다. 여기서 유혹의 전략이, 베일을 씌워 의미를 바꾸고 그로써 코드를 뒤집으려는 전략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이제 남은 것은 우리 모두 코드화하는 권력의 요구대로 그 과잉실재 속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하루에 16시간을 TV 보는 것. 혹은 TV를 보다 늦게 출근하고, 일하면서도 TV를 보고, 끝나면 그 즉시 TV를 향해 달려가는 것. TV 보는데 방해가 되는 일은 아예 찾지도 않는 것. 이로써 생산의 질서는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고 내부로부터 함몰하리라고 보드리야르는 말한다. 밖으로부터의 공격에 의해 폭파(explosion)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몰려들어감으로써 내파(implosion)되는 것이다(같은 책, 130쪽).
이는 사람들의 삶을 생산과 상품, 소비로 한없이 흡수하는 자본주의와 권력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반어적인 냉소요 섬뜩한 저주다. 그것은 이제 적극적으로 바꾸려는 어떤 노력도 소용없다는 결론에서 나오는 허무주의적 전략이다. 그는 이런 식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논리의 한쪽 끝에는 저주스런 허무주의가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일까?
2)등가와 접합
서구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운동이론으로 적극 나아가는 것은 여성운동, 동성애자운동, 반인종주의 운동, 환경운동, 문화운동 등의 적극적 대두와 관련이 있다. 이전에는 이러한 운동은 노동운동에 비해 부차적인 위치만을 부여받았고, 노동운동에 의해 지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좌익정당을 중심으로 하나의 총체적인 운동으로 결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노동운동과 상충하거나 갈등하는 사태가 생기면 당연히 노동운동에 그것이 맞추어져야 했다. 그러나 1960년대 말 이래 이 운동은 노동운동이나 좌파정당의 실질적 무관심이나 위계화된 관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행보를 갖기 시작했다. 전통적 노동운동이나 좌익정당은 이 운동을 이끌거나 포섭할 능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처럼 전통적인 사회운동의 배치에서 벗어난 이 운동들을, 이전의 노동운동 중심의 사회운동과 구별하여 흔히 ‘새로운 사회운동’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자신들의 운동이 갖는 고유성을 인정해 줄 것을 주장했다. 그것은 모든 운동이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하나의 전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총체성의 관점과 맞서는 것을 뜻했다.
이전에 맑스주의자였던 라클라우(E. Laclau)와 무페(Ch. Mouffe)는 이러한 입장을 라캉과 데리다의 이론을 이용해 이론화하였고, 사람들은 이들을 포스트맑스주의(post-Marxism)라고 불렀다. 그들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사회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고, 담론 속으로 현실을 끌어들였으며, 이미 주어진 것으로 고정된 것은 없다고 했으며, 총체성이란 범주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Laclau/ Mouffe, 1990). 그것은 맑스주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뜻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맑스주의에서 이미 벗어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모든 사회적 실천이 담론(구성체) 안에서 일어난다고 본다. 의사나 환자의 실천은 의학적 담론 안에서 정의되고 진행되며, 여성과 남성의 행동은 가족적 담론 안에서 이루어지며, 노동자의 계급투쟁은 사회주의적 담론 안에서, 민족운동은 민족주의적 담론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담론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실천은, 그에 고유한 사회적 관계를 구성하는 담론적 실천이다. 잠정적인 고정점 역할을 하는 적대를 통해 이러한 담론적 실천들 사이에 적대적인 분할이 발생하고, 그것을 축으로 하여 등가적인 접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한다. 이 경우 이전에는 적대를 두고 연대했던 어떤 세력은 이 경우 별다른 연대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을 수 있으며, 다른 집단은 오히려 큰 관심을 보이며 접합에 관여하게 된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우연에 의해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어떤 조건에서는 환경문제를 둘러싸고 개발주의자와의 적대를 통해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의 접합이 이루어지는 반면, 다른 조건에서는 남성적 가부장주의에 대한 여성운동과 동성애운동이 접합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이 접합된 운동에 언제나 노동운동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또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다른 운동이 노동운동의 입장에 종속되어선 안되며, 한 운동이 다른 운동에 종속되어서도 안된다. 이러한 접합에서 각각의 운동은 서로 동등한(등가적인) 위치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등가화됨으로써 각자의 고유성이 서로 간에 결합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요컨대 라클라우와 무페는 등가와 접합이라는 개념을 통해 새로운 사회운동에 서로 등한 위치를 부여하려 했고, 그것을 통해 각 운동이 갖는 고유성과 차이를 부각시키려 했으며, 동시에 그것을 종속시키는 어떤 특권적인 어떤 중심을 제거하려고 했다. 그러한 등가화된 운동들의, 시기마다 고유한 연대와 접합이 그들이 제시하는 민주주의 운동의 전략이다. 이로써 포스트모더니즘은 새로운 민주주의를 위한 이념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셈이다. 자본과 노동이라는 특권적 적대와 노동운동이라는 특권적 운동이 사라지고, ‘등가’의 원리에 따라 모든 운동이 평등한 시민권을 획득한 민주주의.이는 하나의 중심적인 운동으로 모든 운동을 환원하던 태도에 대한 적절한 비판을 담고 있으며, 각각의 고유성을 인정한 위에서 어떻게 연대가 가능한가를 이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고정성과 총체성에 대한 비판이 단지 등가화와 연대 방식의 변화에 머물고 있으며, 각각의 운동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 특히 그토록 문제가 많은 노동운동은 대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새로운 제안을 포함하지는 못하고 있다. 더불어 접합의 문제를 전적으로 우연에 맡겨버림으로써, 연대의 문제 또한 수동적인 것으로 남겨두고 있다. 기존의 틀과 경계를 적극적으로 넘어서는 능동적 개념의 부재는, 아마도 현존하는 경계를 고정하려는 권력의 작동을 누락하고 있다는 이론적 공백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기이하고 극단적인 태도를 예상하고 우려하는 사람들은 이제 안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앤디 워홀 말대로 ‘평범함’을 추구하는 것이고, 다만 그 평범함에 ‘새로움’의 단장을 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3)횡단과 유목
포스트모더니즘이란 평에 대해 가장 못마땅해하며 거부하는, 하지만 대개 그렇게 사람들이 분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들뢰즈와 가타리일 것이다. 사실 그들은 포스트모던하다고 간주되는 새로운 현상이나 예술에 대해 어떤 특별한 시선을 주지 않으며, 별달리 그것을 다루지도 않는다. 그들이 베케트 같은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을 다루는 것은 카프카나 프루스트, 불레즈, 클레와 같은 이른바 ‘모더니스트’를 다루는 방식과 그리 다르지 않으며, 차라리 그들의 관심은 후자에 더 가까이 있다.
그렇다고 그들을 모더니스트라고 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근대성에 대한, 근대 사회와 근대적 권력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수행하고 있으며, 그것을 전복하려고 꿈꾸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점 역시 “시로써 혁명을 하겠다"던 랭보(A. Rimbaud)의 말처럼, 이른바 문학적 ‘모더니스트’들의 꿈 역시 그렇다고 할 때, ‘20세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근친성을 주장한 벨슈의 말은 이 경우 특히 설득력이 있다. 즉 다양한 형태로 제시되는 근대성에 대해 다시 질문할 수 있는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재정의한다면, 이런 흐름과 연관해 그들을 다루는 것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푸코와 유사하게 근대 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는 미시적 권력의 작용점을 다양한 영역에서--기호는 물론 심지어 리듬과 얼굴에서도--찾아낸다(Deleuze/ Guattari, 1980). 그 권력은 욕망 내지 삶의 흐름이 갖고 있는, 무엇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고유한 특이성을 어떤 도식에 맞추어 통제가능한 질서로 바꾸며, 그것에 욕망이나 흐름을 고정하려 한다. 그것은 생산적인 힘(능력)과 의지(욕망)를 특정한 형태로 코드화하거나, 특정한 영역으로 영토화한다.
예컨대 공부하고 싶다는 의지(욕망)은 기존 대학이란 제도 안에서는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철학 등의 분과(discipline)가 정의하는 주제와 연구 방법, 논문 스타일에 이르기가지 코드화되고, 직업에 의해 영토화된다. 그러나 공부하려는 의지는 그러한 권력에 앞서는 것이고, 그에 선행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런 코드화하고 영토화하려는 힘에 안주하려 하지 않는 한 거기서 벗어난다(탈주). 그것은 새로운 연구의 주제를 찾아내고, 그것을 위해 기존의 분과를 가로지르면서(횡단) 화학과 분자생물학, 철학, 음악 등을 ‘접속’하여 새로운 연구의 영역을 창출해낸다.
이런 과정은 기존의 코드와 영토에서 벗어난다는 점에서 탈코드화하고 탈영토화하는 운동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것은 또 다시 권력에의해 재코드화되고 재영토화된다. 하지만 또 다시 탈코드화하고 탈영토화하는 운동이 시작되고... 결국 인류의 역사에서 만들어진 모든 가치의 영역은 이처럼 탈영토화하고 재영토화하는 반복적인 운동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반복이지만, 새로운 것이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반복이란 점에서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의 반복이다. 이를 그들은 니체를 따라 ‘영원회귀’라고 부른다.
이처럼 탈코드화하고 탈영토화하는 운동은, 특정한 코드와 영토에 ‘정착’시키고 고정시키려는 권력의 지대(地帶)를 횡단하면서 끊임없이 이동하며 새로운 영토를 생성해낸다는 점에서 ‘유목’(nomad)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단번에 전체를 해방시키는 혁명이 아니라, 권력이 작동하는 모든 지대, 그리하여 모든 것을 고식적인 형태로 고착시키려는 지배적 경향에서 벗어나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생산하는 긍정적 생성이다. 그것을 통해 권력에 길든 삶의 방식, 권력에 의해 코드화되고 영토화된 개인에서 벗어나, 횡단하며 접속하여 이루어지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개개인을 새로운 주체로 만들어내려는 것이다. 언제나 스스로를 넘어서는 사람. 그것은 각자가 ‘다른 것’이 되는 것이다. 니체는 그것을 ‘넘어서는 자’--‘초인’--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도 아니며, 사소한 일도 아니다. 언제나 정착을 요구하고, 언제나 정형화를 요구하는, 그것이 바로 나를 위하는 것이라는 친근한 유혹을 거절해야 하기 때문이다. 횡단이라는 전략이 기존의 제도화된 권력의 눈에 심히 거슬리는 위험한 발상이라면, 유목의 전략은 그 친근한 유혹을 뿌리친다는 점에서 황당하고 어이없는 발상으로 보일 것이다. 그것은 이미 정착을 유혹하는 권력의 눈이다.
결국 횡단과 유목은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정착할 영토가 아니라 벗어날 영토임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벗어난 포스트모더니즘이다.
4)아우토노미아
나중에 들뢰즈의 동료였던 가타리와 함께 책을 내기도 했던 네그리(A. Negri)는 이탈리아의 아우토미아 운동과 긴밀히 관련되었던 맑스주의자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자본과 노동 간의 적대가 없는 것처럼 함으로써 현대 자본주의를 신비화하고 있다고 비판하지만, 그것이 제기하는 현대 사회의 새 면모에 대해서는 적극 수용하면서, 새로운 정치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포스트모던한 세계에서 계급 적대의 관점’이라고 요악하는데, 데리다의 해체주의와 네그리의 아우토노미아를 ‘접합’하려고 하는 라이언(M. Ryan)은 이 역시 포스트모던 정치학의 하나로 보고 있다(Ryan, 1996)
네그리는 매체의 발달에 따른 정보?통신 혁명이, 공장 자동화와 더불어 생산과 노동은 물론 착취의 양상마저 바꾸고 있다고 본다. 정보?통신의 발달에 따라 이젠 공장의 벽을 넘어서 노동과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되는데, 자본은 이를 이용해 생산을 재조직화한다. 이제는 그 자체로 가치를 갖게 된 정보와 소통을 직접 착취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직접적인 생산영역인 공장이 착취의 영역이었다면, 이제는 그것이 유통마저 포함하는 전 사회적 영역으로 확장된다. 다시 말해 사회 전체가 공장이 된다. 이를 네그리는 ‘사회적 공장’이라고 부른다. 더불어 자본 역시 ‘사회적 자본’이 된다(Negri, 1989).
이는 노동자의 개념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 온다. 자본의 착취가 생산은 물론 유통까지 포섭하게 되었기 때문에, 착취되는 노동자 역시 공장을 벗어나 유통은 물론 가사노동을 하는 가정 주부로까지 확장된다. 이를 네그리는 ‘사회적 노동자’라고 부른다. 결국 사회적 노동이란 다양한 소통의 연결망을 통해 하나로 결합되는 사람들의 집단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착취의 영역의 확장이기 이전에, 노동이 생산적인 힘으로 전환되는 집합적 영역의 확장이고, 노동이 갖는 그 집합적 잠재력의 확장이다. 자본의 새로운 착취는 바로 이 새로운 잠재력의 착취인 것이다(윤수종, 1997).
공장 자동화나 소통적 노동의 새로운 집합적 단위로 인해 만들어지는 자율적이고 다양한 삶의 영역은 이렇듯 사회적 자본의 포섭과 착취로 인해 다시 단일한 적대로 환원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적대의 차원을 제거함으로써 신비화한다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즉 총체화되지 않는 자율성과 다양성의 가능성을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자체로 절대화하며, 그것을 다시금 착취의 대상으로 ‘총체화’하는 자본의 적대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네그리의 전략은 각각의 집합적 노동자, 사회적 노동자가 자본의 포섭에서 벗어나 자율적인(아우토노미아는 이탈리아어로 ‘자율’이란 뜻이다) 집합적 주체로 스스로를 새로이 구성해야 하며, 자본의 실질적 포섭이 작동되는 다양한 분절을 횡단하면서 서로 접속하는 것이고, 자본의 가치증식이 아니라 집합적 주체 자신의 가치증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본에 의한 노동, 화폐로 변환되는 노동의 외부에서 스스로 노동하는 것이고, 이런 점에서 노동이기를 그친 노동이다(Negri, 1994).
흔히 아우토노미아로 지칭되는 네그리의 이러한 전략은 포스트모던한 조건 위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보통의 포스트모더니스트와는 어쩌면 매우 상반되는 방향을 지시하고 있다. 그것은 동시에 포스트모더니즘이 맑스주의에 대해 긋고 있는 부정의 경계선을 제거하면서, 양자의 피가 서로 섞이는 혼혈 내지 합금을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6.비판들
마지막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몇 가지 비판을 간단히 보자. 대개는 뒤섞여 있지만, 편의를 위하여 좀 도식적으로 구분해서 보자면, 예술과 관련해서는 제임슨(F. Jameson)의 비판이 자주 언급되는 편이고, 사회이론과 관련해서는 하비(D. Harvey)의 비판이 잘 알려져 있으며, 철학적 지반 내지 정치적 기획의 차원과 관련해서는 하버마스(J. Habermas)의 비판이 유명하다.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특징을 주체의 죽음과 혼성모방이라고 보면서, 그것이 소비 사회로의 이행을 보여주는 1940년대의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적 상부구조라고 말한다(Jameson, 1990). 상부구조라는 말은 경제적 관계의 변화를 반영하며, 그러한 관계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구성물이란 뜻이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은 소비사회의 미학이다.“(같은 책, 261쪽)
보드리야르의 소비 사회이론은 이러한 설명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의 비판은 제임슨 자신이 포스트모더니스트의 작품에 대해서 양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호한 결론으로 끝난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소비 사회의 논리에 부합하며, 그것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부정적이지만, 실제로 그런 입장의 작품에 대해서는 종종 칭찬을 하고 있으며,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이 소비 사회에 저항하는 방식을 포함하는가에 대해서는 미해결로 남겨두고 있기 때문이다(Caliniscu, 1994: 357-358쪽).
하비 비판의 요지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불리는 운동이 모더니즘의 역사 전반과 차이점보다는 연속성이 더 많는 것,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또 다른 보편적 입장을 갖게 됨으로써 타자들의 목소리를 억압한다는 것이다(Harvey, 1994: 158-159쪽). 그리고 그 역시 포스트모더니즘이 무엇을 반영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는, 경제적으로는 포디즘에서 유연적 축적체계로의 이행을, 시?공간적으로는 ‘시?공간 압축’이란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여기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보편적 입장을 가짐으로써 타자의 목소리를 억압한다는 것은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 어떤 것도 일반적인 이론의 형태를 취하는 한 포괄적인 작용범위를 갖는 ‘일반성’을 갖지만, 그것이 곧바로 보편성과 동일한 것은 아니며, 또한 보편적 입장을 갖는 것이 언제나 타자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입장을 강요해선 안된다는 주장은 심지어 보편성을 갖는 경우에도 타자의 목소리를 억압하진 않는다. 다시 말해 하나의 중심 기획에서 벗어난 타자의 목소리를 억압하거나 배제하는 ‘보편적 기획’인가, 아니면 그 기획에서 배제되고 억압된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기획인가는 보편성이란 말로 동일시될 수 없는 근본적 차이가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간에 연속성이 있다는 것은 리요타르나 다수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인정하고 있는 것이며, 포스트모더니즘이 근본적으로 모더니즘 내에 있는 것이라고까지 말한다는 점에서 비판으로서 의미가 없다. 그것이 비판이 되려면, 모더니즘, 아니 근대성 내부에 공존하던 것 가운데 지배적인 것이 달라진 것이라는 논리를 반박해야 하는데, 이는 하비의 경우 차라리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그것을 경제적인 조건의 변화나 시?공간 압축으로 근거지우며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거기서 약간의 문제를 지적하자면, 포디즘에서 유연적 축적체제로의 이행이 1960년대 이후에 해당한다면, 시공간 압축과 그에 따른 시공간 개념의 변화는 20세기 초에 이루어지는데, 이는 포디즘이 자리잡던 시기와 차라리 대략적으로 일치한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이러한 경제적 시공간적 조건에 의해 설명하려는 그의 입장에 포스트모더니즘을 부정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상부구조’로서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제임슨과 유사한 태도처럼 보인다.
하버마스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예술의 영역에서 분화되어 발전한 것을 다른 모든 영역으로 확장하려는 것이며(Habermas, 1990: 294쪽), 이성과 합리주의 자체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있는 규범적 기초를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Habermas, 1994). 그가 보기에 “객관적 과학, 보편적 도덕과 법, 자율적인 예술을 그 내적인 논리에 따라 발전시키려던”(Habermas, 1990: 290쪽) 계몽의 기획은, 비록 각각의 전문적 영역으로 분화가 심화되면서 위기에 처하겠지만, 아직도 포기할 수 없는 미완의 기획이다. 이를 위해 일상생활의 실천과 분화된 현대 문화를 다시 연결하는 것이 필요하며(같은 책, 296쪽), 소통과 합의에 의해 공통의 규범적 기초를 마련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까지 본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은 예술이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거나 정치가 미학화한 것이라기보다는, 반대로 철학과 과학, 사회이론, 예술 및 정치의 영역에서 나름대로 형성되는 것들이 ‘소통’하고 접속됨으로써 형성된 것처럼 보인다. 그는 푸코나 데리다를 보들레르나 바타이유에서 이어지는 족보를 그리지만, 포스트구조주의가 직접적으로는 구조주의에, 따라서 일차적으로는 언어학과 정신분석학이라는 과학에 줄을 대고 있다는 것은 프랑스 철학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리요타르 또한 현상학과 정신분석학에서 시작하여 문학과 예술의 새로운 경향을 포괄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을 확장한 것임을 몰랐던 것일까? 나름의 영역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성장한 것의 접속이기에, 예술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철학, 사회학에서 그것이 그토록 다르고, 같은 예술에서도 문학과 건축이 다른 외연을 갖는 것이 차라리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리고 이런 문제의식이 계몽적 기획이나 게몽적 이성을 비판한다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을 단순한 반합리주의와 동일시해도 좋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문제삼고 있는 것은 그토록 당연시되어 있는 계몽적 이성이 사실은 다른 종류의 사고방식이나 삶의 방식을 배제하고 타자화함으로써 성립되었다는 것이고, ?말과 사물?에서 푸코가 잘 보여주었듯이 그런 이성과는 다른 종류의 이성이 서구의 역사에서도 있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종류의 사유를 배제하거나 자신에 동일화되는 한에서만 받아들이는 그런 이성과는 다른 이성이 가능한가라는 진지한 질문인 것이다. 다만 그것이 반드시 모든 사람에게 또 다시 동일하게 적용되는 초월적인 힘(권력!)을 갖지 않아야 한다는 제한을 두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차이와 다양성이, 즉 다른 태도와 다른 생각, 다른 규범이 생겨날 여백을 포함하는 이성. 따라서 이것을 위해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어떤 초월적 규범에 합의할 필요는 없다.
다음으로 이러한 비판의 규범적 기초 내지 근거에 관하여. 이는 “진리란 없다“는 문장이 자기언급으로 인해 곧바로 자기부정된다는 논리에 기초하고 있다. 즉 이성에 대한 비판은 또 다른 어떤 근거를 가져야 하는데, 그것이 이성일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비판은 그런 문장이 얼마든지 자기언급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준 괴델(K. Godel) 이후에 논리학적으로 적절성을 상실했다. 반대로 그것은 어떠한 규범은 말할 것도 없고, 과학의 명제나 수학적 정리조차 완전한 자기근거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모를 때만 가능한 비판이다.
사실 우리는 규범적 근거가 확실해야만 이성적으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합의된 공리에서 시작해도, 그것에 근거하지 않는 외부적인 규범이나 명제가 끼어드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괴델이 충분히 보여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모두가 대개는 적절하다고 여기는 직관을 이용한다. 스피노자가 잘 보여주었듯이 그러한 직관은 이성의 매우 중요한 일부분이다. 더불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합의나, 이상적인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상황은 있는 적도 없으며, 있을 수도 없다는 것, 반대로 그것은 곧바로 거기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와 항상 충돌하고 만다는 것을 추가해 두자.
끝으로 하버마스는 포스트모더니스트를 보수주의라고 비난하는데 이에 대해 한마디 하자면, 거기에는 별다른 근거를 찾아보기 힘들다. 즉 왜 보수주의인지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차라리 계몽의 기획을, 위기에 처한 보편적 규범과 그것에 기초한 근대적 질서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야기된 위험에서 보존하고자 하는 것이 하버마스의 생각이기에, 그 근저에서 우리는 쉽게 ‘보존’하고자 하는 욕망을 읽어낼 수 있다. 이런 보존의 욕망, 보존의 본능이야말로 어떤 태로를 보수주의로 정의할 수있게 해주는 ‘근거’다. 그렇다면 보수주의라는 말은 하버마스에 더 적절해 보인다. 덧붙이자면, 어떤 이론이나 주장에 대해서 그것이 옳은가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정치적 의미를 갖는가를 가지고 비난하는 것은, 정치가들이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숱하게 사용한 방법이긴 하지만, 이론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안타깝게도 거기서 우리는 하버마스가 생각하는 어떤 보편적인 규범적 근거도 찾아볼 수 없다.
7.결론?
지금까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 철학적 지반과 사회이론, 예술과 정치에 이르는 매우 광범위한 영역을, 별다른 논평을 가능한 한 붙이지 않고 간략히 검토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말했듯이, 여기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제목 아래 다루어진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그런 명칭을 자처하지 않았으며, 적지 않은 경우 그것을 비판하고 거부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포스트모더니스트로 취급한 것은, 그것이 그들을 다루는 일반적인 방법이란 점에서 그렇다. 좋든 싫든, 그리고 옳든 그르든 그들은 그렇게 불리고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식으로 그들을 다루는 것은 그들을 다루는 하나의 방법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다루기 시작하면, 그 경계선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 매우 다양해진다는 것이 금방 드러난다. 예를 들어 푸코가 포스트모더니스트라면, 그와 사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매우 가까웠던 들뢰즈 역시 그 안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고(이는 보통 일어나는 일이다), 그 경우 들뢰즈와 함께 작업하고 함께 책을 썼던 가타리를 제외한다면 우스운 장난이 될 것이다. 그런데 가타리가 포함된다면 그와 함께 선언적인 책을 함께 썼으며(Guattari/ Negri, 1995), 들뢰즈/ 가타리에 대해 강한 공감을 표시하고 있는(Negri, 1997) 네그리를 빼 놓기가 불가능해진다. 실제로 네그리의 영향을 크게 받은 라이언이 이후 데리다와 함께 연구하면서 해체주의를 맑스주의에 도입했기 때문에(Ryan, 1994), 이는 전혀 부적절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아마도 포스트모더니즘과 정치를 다루는데서 극명하게 드러났듯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을 특징짓는 정치적 태도는 보드리야르의 허무주의와 라클라우/ 무페의 새로운 민주주의, 들뢰즈/ 가타리의 유목에서 네그리의 아우토노미아에 이르는 지극히 넓은 스펙틀검을 가지며, 그 각각이 갖는 이질성의 폭은 그 스펙트럼 이상이다.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 외부에서, 혹은 그것이 등장하기 이전에 서구에 등장했던 정치적 사고의 폭 전체보다도 훨씬 넓다고 해야 한다. 자세히 다룰 수 없었지만, 철학에서 함께 다루어진 사람들 역시 그에 못지 않은 이질성을 갖고 있으며, 예술에서는 더욱더 그렇다.그렇다면 이제 데리다 식으로 말해 포스트모더니즘은 ‘해체’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데리다가 어떤 통일성을 갖는 듯한 개념이나 이론의 내부에 존재하는 균열을 드러내는 식으로 해체를 진행했다면, 여기서는 반대로 포스트모더니즘이 내부가 지극히 이질적인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가능했다는 점에서 다르지만.
따라서 그들을 철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하나로 묶어서 ‘포스트모더니스트’라는 비난을 퍼붓거나 찬사를 바치는 것은 우스운 일이란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들을 이처럼 흔히들 그러하듯이 하나로 묶어서 다룸으로써, 무조건적인 비난이나 순진한 지지가 얼마나 어이없고 부적절한 것일 수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의지에 반하여, 일상적인 용법에 따라 그들을 하나로 묶어서 다룬 것은 충분히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은 불가능하다”거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없다”는 결론을 내려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분명히 아니다. 매우 이질적인 것들이 하나의 말로 묶여 사용되는 것은 꼭 옳은 것은 아니라해도 나름의 이유가 있는 법이다. 포스트모더니즘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각자의 입장에서 추론되는 결과들이 매우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들 각자가 주목하는 지점이나 분석하는 방법이 다르고, 때로는 부닥치고 논쟁할 만큼 서 있는 지점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근대 내지 근대성, 혹은 근대주의에 대한 비판을 가능하게 해주는 어떤 관점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포스트모더니스트를 정의하는 명확하고 뚜렷한 기준은 아니라 해도,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일종의 ‘가족유사성’(Witgenstein, 1994)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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