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4월 23일 조간 신문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을 전 세계적으로 유행시켰던만큼 그 말과 거의 동일시되던 장 프랑수아 료타르의 죽음을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유행의 물결을 따라 포스트모더니즘 또한 흘러가 버린 지금어서일까? 료타르의 죽음은 마치 포스트모더니즘 자체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처럼 들린다.
1924년 베르사이유에서 태어난 그는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을 공부했는데, 그의 많은 동년배들이 그렇듯이 후설의 현상학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실존주의가 풍미하던 1950년대의 프랑스는 헤겔(Hegel), 후설(Husserl), 하이데거(Heideggar)라는 이른바 3H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그가 쓴 첫 번째 저작은 현상학에 대한 것이었다. 1959년까지 10년 간 고등학교 철학 교사를 했는데, 그 중 일부는 알제리에서 보냈으며, 알제리 해방운동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알제리 문제에 대해 프랑스 정부의 정책에 저항하는 전투적 활동가였다. 1956년부터 1966년까지 그는 카스토리아스나 르포르 등과 함께 극좌적인 사회주의 잡지 <Socilaisme ou barbarisme>(사회주의인가 야만인가)와 사회주의 신문 <Pouvoir ouvrier>(노동자 권력)의 편집위원으로서 활동하였다. 이 그룹은 흔히 트로츠키주의적이라고 분류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프랑스 공산당이 이끌던 주류 좌익에 대한 좌익적 비판 조직들 가운데 하나였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해 보인다. 그런 만큼, 1968년 혁명의 진원지였던 낭테르 대학(현재 파리 10 대학)의 강사였다는 사실을 접어 둔다고 해도, 그가 ‘쁘띠 부르주아들의 관념적 급진성’의 소산이라고 공산당과 노동조합이 비난하던 68년 혁명에 적극 개입했던 것은 차라리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셈이다. 68년 혁명은 그 성과의 하나로 뱅센(Vincenne) 실험대학을 탄생시켰는데, 나중에 생 드니(Saint Denis)의 파리 8대학과 통합된 이 대학에서 료타르는 1989년 은퇴할 때까지 철학을 가르쳤다. ?담론, 형상?(Discours, figure, 1971)과 ?리비도 경제?(Economie libidinale, 1974)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퀘벡 정부의 요청으로 ?씌여진 ?포스트모던의 조건?(Postmodern Condition)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새로운 지적 문화적 흐름으로 개념화함으로써 국제적인 명사가 되었다.
료타르는 ‘스타’ 급에 속하는 프랑스의 다른 많은 지식인들과 매우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카뮈나 데리다, 알튀세르처럼 알제리에서 탄생하지는 않았지만, 부르디외나 푸코처럼 알제리에서 ‘자신의’ 지적 인생의 초반부를 보냈다. 그리고 이들 모두처럼 알제리를 통해 자신의 ‘외부’를, 즉 프랑스의 ‘외부’를 경험했고, 그 외부를 통해 자신의 내부를 보고 사유했다. 그것은 자부심 가득 찬 서구 문명의 외부를 체험하는 계기는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그가 평생 뛰어넘고자 애쓰던 ‘보편주의’를 외부에서 다시 보게 하는 체험적 요인이 아니었을까?
비슷한 방향으로 그를 밀고 간 또 하나의 요인은, 역시 다른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68년의 경험이었다. 여기서 경험이라는 말은 최소한 이중적인 요인을 내포하는 것이었다. 첫째로, 프랑스 공산당을 필두로 하는 전통적인 맑스주의자들의 폐쇄적이고 고답적인 태도. 이는 사르트르의 열렬한 ‘앙가쥬망’(engagement)을 프랑스 공산당에 대한 평생에 걸친 짝사랑으로 만들었고, 알튀세르로 하여금 친구의 자살을 체험하도록 했으며, 봉기한 학생과 노동자 대중들로 하여금 정부와 함께 공산당과 경직된 노동조합을 비판하게 만들었다. 공산당이나 전통적 노동운동의 ‘전망’에서 벗어난 수 많은 미시적인 흐름과 움직임, 창조적 힘과 저항 등을 수용할 수 없다면, 그리하여 그것으로써 공산당이나 공산주의 자체를 갱신하고 변이시킬 수 없다면 혁명이 대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반대로 그것을 포착하고 그것의 힘을 혁명의 기초로 만들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료타르 역시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으리란 가정은 결코 부당한 것이 아니다.
둘째로, 체코의 두브체크 개혁에 대한 소련의 강제 진압, 솔제니친의 소설로 (과잉)노출된 ‘수용소 군도’ 등은 좌익적 지식인들을 기존의 사회주의 체제를 스탈린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게 하였고, 이는 기존의 사회주의적 이념들에 대해서조차 전체주의라는 의혹을 갖게 했다. 금욕적 체제에 반해 욕망의 해방을 내세웠던 68혁명은 일부 좌파 지식인들로 하여금 전체주의의 일상적이고 미시적인 뿌리를 추적하고, 그것을 전복할 수 있는 새로운 운동을 독자적으로 사유하도록 자극했다면, 또 다른 일부 지식인들로 하여금 모든 좌익적 전망 자체를 기각하고 비판하는 알리바이를 제공했다. 들뢰즈/ 가타리와 푸코, 료타르 등이 전자에 속한다면, ‘신철학’이란 이름으로 한때 ‘잘 나가던’ 앙드레 글뤽스만이나 베르나르 앙리-레비는 후자에 속한다.
료타르가 ?담론, 형상?에서 말이 ’감각적인 것’에 덧씌웠던 회색의 베일을 벗겨내려 하고, 담론에 의한 규제와 재현가능성이라는 요청을 따돌리는 ‘형상’(figure)을 되살리려 했던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맑스와 프로이트로부터 표류’(Derive a partir de Marx et Freud, 1973)하면서 욕망 내지 ‘리비도의 경제’나 ‘충동적 장치’(Des dispositif pulsionnels, 1971)에 주목하려고 했던 것 역시 68년 혁명을 위와 같은 방식으로 통과한 사유의 산물임을 이해하는 것도 이해하기 쉬운 일이다. 또한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 개념을 따라 언어란 그것이 이용되는 상황과 맥락에 따라 동일한 기표의 의미조차 달라진다고 하면서, 어떤 구조나 보편적 전체를 전제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Just Gaming, 1979; Postmodern Condition, 1979)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라면 충분히, 아니 이러한 맥락에서라야 비로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맥락에서라면, 부분들이 가지는 고유성과 이질성을 어떤 보편적인 규칙이나 구조, 규범으로 환원하기를 거부하며, 반대로 그것들로 표현되기 힘들고, 그것들에 의해 표현되지 못하게 된 것들을 드러냄으로써 보편적인 규칙이나 규범에 대해 ‘논전’(Differand, 1983)을 벌이자고 주장하는 그의 정치학 내지 윤리학이 상대주의나 허무주의, 반합리주의, 낭만주의, 신보수주의라는 숱한 통상적 비난과 별로 관계가 없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료타르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동일시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급속히 부상하고 유행했던 만큼 그 역시 통념적인 이해과 통상적인 비난을 그 대가로 치러야 했다. 그리고 그 유행의 물결이 썰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주의자들이 붙여 놓은 그 비난의 옷을 입은 채 쓸려 나갔다. 그리하여 그 말을 전 세계의 지식 시장에 퍼뜨린 장본인이 죽은 지금, 포스트모더니즘은 죽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그와 함께 그의 문제의식을 가리고 통속화했던 그 이름이나 옷들을 아낌없이 보내자. 그럼으로써 그것이 가리우고 있던 문제의 육체를 드러내고 새로이 빛나게 할 수 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죽음은 그에게는 하나의 축복일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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