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90년대 중반부터 우리 학계의 공통적인 관심사를 형성해 온 대표적인 토픽을 꼽으라면 아마도 근대성이 아닐까 싶다. 문학연구 역시 여외는 아니여서 한국 근대문학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재해석과, 근대적 실천의 정당하고 타당한 준거로서 민족문학의 갱신 작업을 통해 문학의 근대성에 대한 재인식을 시도하고 있다. 문학의 근대성에 대한 담론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역사적 범주로서 근대문학의 탈신비화 전략이나, 문학의 근대적 실천의 유의미성에 대한 옹호를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90년대 초반 적지 않은 위기를 겪었던 민족문학을 옹호하기 위한 일종의 헤게모니적 진지전의 형태를 띤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문학적 근대성에 대한 논의가 민족문학론과 불가분의 관계로 자명하게 받아들여지면서, 알게 모르게 전자는 후자의 위기를 극복하는, 혹은 그 실천을 정당화하는 구성요소로 사용된 것이다. 문학의 근대성 연구는 그런 점에서 문학의 존재와 내재적 힘을 차분하게 따져보는 이론적?개념적 실천이었다기 보다는 마치 80년대 민족문학 이념논쟁을 방불케하는 이데올로기적 진지전을 무의식화하고 있음으로써 역사적 근대의 국면들에 대한 과학적 검토는 민족문학의 동시대적 위기의 방어기제로, 혹은 적절한 부재를 감추는 코팅재료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문학의 근대성 논의가 문학연구에 있어 좀더 이론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로 이어져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탈’ 선언들이 얼마나 경박하고, 탈역사적인가를 제대로 따져들어가지 위해서는 문학의 근대성을 민족문학의 옹호?갱신?재구성을 위한 절대적인 구성 요소로 이해하거나, 문학의 근대성을 민족문학의 정신으로 동일시하는 사고로부터 단절하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 그 이유는 대체로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는 민족문학의 정당성이 상업적인 소비문화와 천박한 문학상품의 범람을 초래한 포스트모더니즘에의 저항에서 찾아지면서 근대성의 주목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허구를 간파할 것이라는 판단으로 바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 때문이며. 둘째는 문학의 근대성은 역사적 국면에서 특수하게 생겨나는 방법으로 동일시될 수 없으며, 설사 방법이 실천의 중요한 요소라 하더라도 민족문학은 문학의 근대성의 한 요소에 불과하다는 점 때문이다.
물론 문학의 실천에 대한 문제의식으로서 근대성에 주목하는 것 자체가 근대극복을 주요한 과제로 삼는 것이고, 민족문학이 그러한 근대극복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동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근대적 모순으로서 분단체제가 지속되고 식민지적 근대의 잔재가 청산되지 않는 이상 민족문학은 한국적 근대의 완성에 있어 여전히 실천의 중심에 있어야된다는 주장이 쉽게 포기되지 않는다. 그래서 적어도 우리 역사에서 민족문학은 하나의 범주나 방법으로 구별짓기보다는 자본주의 근대 억압체제를 극복하는 하나의 보편적인 실천정신으로 받아들여야된다는 지적이 일면 타당해 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민족문학은 근대적 모순을 극복하려는 실제적?상징적 실천주체로 각인되면서, 억압적 근대와 해방적 근대라는 대당을 형성하는 한 축으로 기능해왔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되겠다. 민족문학은 애초부터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특정하게 구성된 문학적 실천의 한 형태이며, 그 방법적 실천으로서 리얼리즘 역시 근대문학에서 생겨난 특수한 미적 양식의 하나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민족문학이나 리얼리즘의 저항은 내재적으로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구성된 특수한 실천효과이며, 국지적으로 선택된 담론적 실천의 한 형태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담론구성체로서 민족문학은 근대적 모순이 미해결된 채로 남아있다고해서, 그 존재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다. 민족문학은 근대적 모순에 개입하는 실천양식의 변화 속에서, 그리고 근대완성이 반드시 근대극복에 선행하는 기획은 아닐 수 있으며 오히려 근대극복에 대한 적극적인 노력들이 근대의 완성을 무의식화하는 기획이라는 전제 속에서 그 존재가능성과 실천적 의미가 논의되어야 한다. 그런 인식을 통해서 민족문학은 하나의 담론구성체 로 기능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스스로 기표를 지워버리면서 근대극복의 실천적 효과를 생산할 수 있으며, 근대극복의 주체이자 대상으로 인지될 수 있다.
어쨌든 지난 몇 년 동안 문학의 근대성에 대한 논의들은 민족문학의 위기를 타개하려는 현실적 필요에서 그 존재의 역사적 근거를 탐구하는 리뷰이거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데올로기에 대응하는 논리, 역사적 근대 시대에 주목하면서 한국 근대문학사 연구의 활성화를 위한 학술적인 실천, 그리고 근대 극복을 위한 실천이지만, 결코 근대적 기획을 넘어서지 않으려는 문화적 아비투스의 재현 중 어느 하나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논의들은 서구적 근대의 합리성이 미완적이기는커녕 거의 부재하다시피 한 한국적 근대(이른바 ‘전근대적’ 근대)에 대한 비판작업을 동시에 수행했지만, 그러한 비판작업이 미완의 기획을 성공시키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로 탈근대적인 실천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충분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근대와 전근대의 경계라는 것이 가치평가의 영역에서는 구분될 수 있을지몰라도 시공간상으로 그 실재성을 구분하기가 어렵듯이 근대와 탈근대의 실천도 대상이 애초부터 구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민족문학과 리얼리즘의 역사적 토대로, 혹은 그것들의 동시대적 실천의 준거로 환원되지 않는 문학의 근대성의 성격들을 발견하는 것이 그런 점에서 중요한 것이며, 지배적 담론으로 구성되지 않았던 근대성의 요소들이 어떻게 탈근대적 요소로 전화될 수 있는지를 기술하는 것이 결정적이다. 이 글은 문학의 근대성에 대한 그간의 담론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문학의 탈근대적 실천이 어떤 점에서 근대성의 자기전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논의하고자 한다.
2.
민족문학론의 구성적 요소로, 혹은 민족문학사의 확대 시점으로 문학의 근대성을 주목하고자하는 작업들은 근대성의 다양한 혁명적 계기들과 그것의 무한확장의 가능성을 제한적으로 규정함으로써 결론적으로 근대성의 담론을 ‘퇴행적’이고 ‘제한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지난 몇 년 사이의 문학의 근대성 담론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문제점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는 문학의 동시대성을 역사적 근대성의 시점으로 묶어두려는, 혹은 그 사이의 차이를 소멸시키려는 ‘퇴행적인’ 담론이고, 다른 하나는 근대성의 시공간이 서로 이질적인 속성들의 집합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나의 총체적인 덩어리로 명시하는 ‘제한적’인 담론이다. 전자의 경우는 앞서도 설명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방어기제로 사용되는 경향이고, 후자의 경우는 근대 극복의 단일한 메커니즘으로서의 민족문학론을 유지하고자 하는 경향이다. 문학의 근대성담론은 그런 점에서 대체로 민족문학론과 그 방법으로서 리얼리즘적 형상화의 유효성이 과연 타당한가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배치되고 있다. 필자가 판단하기에 문학의 근대성담론의 그간 논의들은 다음과 같이 몇가지 문제군으로 구분된다.
(1) 한국문학의 근대성에 대한 재고
한국문학에서 근대적 유산이 얼마나 왜곡되고 황폐한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는 최원식의 논지는 민족문학운동의 현재적 의미를 강화시키는 근거로 근대성의 재고를 삼는다. 그는 “계몽의 기획을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화려한 방자함에도 불구하고 나라와 민족의 경계를 빠르게 지워나가는 전지구적 자본의 운동과 결합된 후기자본주의의 문화논리라는 점에서 그 명칭의 포스트모던(탈근대)은 하나의 과잉수사” 최원식, 「한국문학의 근대성을 다시 생각한다」, 『창작과비평』94년 겨울, 9쪽
에 불과하며 “지금 사는 이 시대는 근대 이후이기는커녕 근대의 절정인지 모른다”고 진단하면서 “맹목적 근대추종과 낭만적 근대부정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려온 우리 사회에서 예정설정된 역사의 최종목표로서의 근대 이후가 아니라 ‘근대적’ 근대이후의 상을 어떻게 모색할 것인가”(11쪽)가 우리들의 핵심과제이며 한국문학의 근대성이 대안적 민족문학운동으로 연결되는 고리라고 말한다. ‘근대적; 근대이후의 상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체로 그것이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복고적 민족주의나 근대성의 내재적 발전의 독립성을 찾는 과정과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한국 근대문학 유산의 가난함에 대한 냉철한 인식”(16쪽)을 통해 근대성의 쟁취와 근대성의 철폐의 이중적 과제를 동시에 사고하는 “고양된 자각”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는 20세기 한국문학사의 궤적들을 거울삼아 민족문학사운동의 일부가 80년대에 빠져들었던 프로문학적인 편향을 해소하자는 제안을 결론삼아 한다.
(2) 미적 근대성의 활성화
근대성은 단일한 총체가 아니라 이질적인 요소들의 집합이다. 하버마스의 언급대로 계몽주의의 기획은 과학과 도덕과 예술이 서로 자율적인 영역으로 분화되는 과정을 경험했는데, 이 과정에서 근대는 이성적 합리성의 격자틀로 존재하며 때로는 근대적 주체를 구획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요컨대 자본주의적 삶의 질서가 그런 근대적 구획을 노동하는 주체에 적용시켰고, 자본주의의 발전의 동력으로 존재하는 기술력은 인간의 감성을 황폐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이다. 그러나 근대성의 요소들 중에서 미적 근대성은 그러한 합목적이고 일괴암적인 삶의 황폐를 막는 에너지로 작용한다. 요컨대 미적 근대성이 근대 내부의 한계를 극복하는 장치임을 강조하는 황종연의 글 황종연, 「근대성을 둘러싼 모험」, 『창작과비평』, 96년 가을호.
이 그러한 문제의식에 부합한다. 그는 근대의 변증법이 속물적 현실과 계몽주의의 전체주의적 기획을 제거하는 내적인 자기부정의 원리임을 역설하는 서영채와, 문학의 도구적 근대성을 비판할 수 있는 힘을 미적 근대성, 미적합리성에서 찾으려는 이광호의 글을 주목하면서 한국문학에서 진지하게 탐구된 적이 없었던 미적근대성과 미적 자율성이 문학의 근대성을 탐구하는 요체임을 강조한다. “문학이 부르주아적 합리주의에 대립하는 자율적 영역을 구성한다면 그것은 문학이 합리주의에 항변하는 관념적 주체들을 특권적으로 점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문학이 추구하는 의사소통이 합리주의의 중심화된 주체성의 전횡을 거부하기 때문”(229쪽)이라고 말하면서 그는 “합리적 인식과 압제에서 자유로운, 탈중심화된 문학적 실천을 구체적으로 이론화하는 작업”(230)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3) 광의의 모더니즘에 대한 인식
모더니즘이 하나의 방법적인 사조가 아니라 그 자체로 역사적 리얼리티라는 주장을 통해 미적 방법으로서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층위를 넘어서려는 진정석의 논지 진정석, 「모더니즘의 재인식」, 『창작과비평』1997년 여름호.
는 기본적으로 민족문학과 리얼리즘이 그 실효성을 상실해가고 있다는 판단에서 출발한다. 그는 “오늘날 민족문학의 위축은 그동안 민족문학론이 민족사의 특수한 과제에 대한 문학적 응전의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근대성이라는 인류사의 보편적 경험이 제기하는 문제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152쪽)다고 진단한다. 현실의 리얼리티가 문학적 형상화의 출발점이며, 리얼리즘은 그래서 늘 새롭게 생성되는 리얼리티에 몸을 열어놓아야 하며, 중요한 것은 생생한 리얼리티를 포착하는 데 있는만큼, 그 리얼리티를 형상화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이 개발되어야한다는 게 그의 주장의 요지이다. 그는 또한 민족문학론 내부에 잔존하고 있는 “근대문학=민족문학=리얼리즘”이란 도식이 근대성을 협소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4) 리얼리즘의 심화
광의의 모더니즘에 대한 재인식을 통해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진정석의 논지와 정반대로 윤지관은 역으로 한국문학에서 모더니즘의 고사를 예를 들면서 리얼리즘의 당대 형상화의 정당성과 모더니즘의 영어번역상 왜곡될 수 있는 리얼리즘의 근대성의 성취를 강조한다. 그는 민족문학을 민족주의문학으로, 리얼리즘의 재현주의와 도식주의로 환원하려는 논지를 비판하면서 “한국의 근대문학이 서구와는 달리 모더니즘이라는 주도적인 현대문학의 명칭을 마다하고 리얼리즘에 천착한 것은 모더니즘 문학을 배격하자는 것이 아니라 근대적 현상에 대한 대응으로서 모더니즘까지 아우르는 리얼리즘이 우리 현실에서 배태되었음을 말해주며, 어떤 의미에서는 소위 미학적 근대성의 한국적 형태가 바로 리얼리즘” 윤지관, 「민족문학에 떠도는 모더니즘의 유령」, 『창작과비평』1997년 가을호, 269쪽.
이라고 진정석과는 정반대된 의견을 제시한다. 자본주의의 세계체제가 문학의 존속에 많은 압력을 가지지만, 그런만큼 문학의 반체제적 기능이 중요해지며 그 임무를 제대로 완성할 수 있는 민족문학과 리얼리즘이 오히려 지금 시점에서 옹호되어야한다는 것이 그의 대체적인 주장이다. 윤지관, 「상품인가 물건인가: 국가경쟁력과 민족문학」, 『창작과비평』, 1994년 여름호, 59쪽 참고.
(5) 민족문학의 보편성
민족문학이 진정석이 말한 것처럼 “주변부적 특수성만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일종의 특수주의, 곧 제3세계주의”의 산물이 아니라 인류의 진보와 인간의 삶에 대한 보편적 가치를 담고있다는 주장들은 사실 백낙청의 민족문학론이 줄곧 강조해온 바이기는 하지만, 특히 민족문학의의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전망을 모색하는 민족문학의 재해석 작업의 일환으로 제기되는 듯하다. 백낙청은 민족문학의 운명을 소위 전지구적 문명들의 연대라는 거대한 기획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서 민족문학의 낡은 개념들과 협소한 시각들을 교정하는 데 앞장선다. 민족의 모순을 좀더 복잡한 시각으로 접근하려는 ‘분단체제론’이나 동양적 진리와 선에 대한 대중들의 각성을 이른바 ‘앎의 차이’로 정의하려는 ‘지혜의 위계질서’ “내가 ‘지혜의 위계질서’라는 말을 통해 환기하려는 바는 지혜 혹은 어떤 본질적인 삶의 능력의 정도에 따라 사회조직을 면밀하게 구성하는 계획없이 해방과 진정한 평등의 사업이 실효를 발휘할 수 있겠냐는 물음이다. 왜냐하면 일반 민중들이 전반적으로 지금보다 훨씬 지혜로워지지 않고서 -더 분별력있고 더 적절하게 훈련되지 않고서- 는 진정으로 민주적이고 환경친화적인 어떠한 세계도 건설될 수 없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백낙청, 「한반도에서의 식민성 문제와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 『창작과비평』, 1999년 가을호, 26쪽)
가 그 대표적인 견해이다. 그에게 있어 민족문학은 폐기되어야할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문명의 반문명성에 저항하는 중요한 세계사적 자산으로 보편적 의미를 가진다. 자본주의의 문명의 반문명적 요소들의 존재 근거가 아직 자본주의가 완벽하게 관철되지 않는 현실에 있다면 “오늘의 자본주의 문명이 자본주의로서의 자기완성겸 문명으로서의 자기부정에까지 가기 전에 아직 남아있는 문명적 유산을 총동원하여 새로운 지구문명을 건설할 필요성이 한층 긴박” 백낙청, 「새로운 전지구적 문명을 향하여」, 『창작과비평』, 1996년 여름호, 11쪽.
하다는 그의 진단은 요컨대 민족문학에 대한 정의와 실천에 있어 “민족주의적인 과제만을 떠맡는 것이 아닌”(18쪽) 것, “민족적이지만 민족주의적이라기는 힘든 과제로서 통일문제를 천착하는 작업”(21쪽)이라는 설명과 맞닿아 있다. 백낙청의 이러한 주장은 민족의식을 민족주의와 구분하고, 민족문학의 주체론이 동일성의 환원주의에서 차이와 통일성을 인식하는 변증법적 의미를 갖는다고 말하는 김재용의 글 김재용, 「민족문학론과 주체의 문제」, 『실천문학』, 1999년 봄호 참고.
에서도 드러난다. 즉 민족문학론은 실천대상이나 주체의 설정에 있어 애초부터 비환원론적인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것이다.
(6) 민족문학의 근본적인 전화
민족문학의 존재를 옹호하면서도 그 실천 내용에 있어 근본적인 전환이 없이는 그 유효성이 없을 것이라는 임규찬의 지적 임규찬, 「세계사적인 전환기에 민족문학론은 유효한가」, 『창작과비평』, 1998년 봄호.
은 민족문학논쟁을 일으켰던 소장파학자들의 더 철저한 자기비판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문화가 기승을 부리는 만큼 민족문학의 존재의미는 커진다 보면서 민족문학의 국민문학적 위치로의 승화나 생태주의나 페미니즘 등 시대가 요청하는 다양한 운동과의 연계, “문학과 인간의 근원적인 동력과 활력을 되찾는 작업”(81)에 관심을 갖는다. “그 과정에서 민족문학론은 이제 다양한 층위에서 스스로 해체되기도하고, 또 재결합도 하는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움직임으로 작동되어야 할 것이다.... 이점에서 과거와 같은 ‘민족문학진영’ 개념은 해체되어야하며, 차이를 존중하는 다전선 전략에 근거한 다양한 자아실현과 민주주의의 지향을 포용해야 한다”(79-81쪽).
3.
서로 중첩되는 영역이 있긴 하지만 문학의 근대성과 관련하여 최근 논의되었던 내용들이 대체로 정리된 듯하다. 짧은 논평이었던 만큼 필자들의 논지를 제대로 담았는지 모르겠지만, 위의 견해들을 종합해 보면 문학의 근대성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세가지 중요한 문제점들, 혹은 기존 논의들의 한계를 다시 추출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문학의 근대성과 민족문학론은 불가분의 관계로 간주되면서 탈근대성과 탈근대주의가 민족문학의 편에서는 이데올로기의 적으로 간주된다. 민족문학이 옹호되는 기준은 도식적으로 보면 식민지적 근대 모순의 청산에 대한 나름의 정치적 정당성 때문으로 보인다. 아직 우리 사회가 근대적 모순으로서 민족적인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 사회인 바, 그 생명력은 유효할뿐더러 긴박하기까지하다는 진단들은 대체로 민족문학을 옹호하는 논자들의 대체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민족문학을 옹호하는 논자들의 심층에는 고도로 상업화된 후기자본주의의 독점시장의 위협에 대한 적절한 방어 기제로 ‘근대성의 재발견’이란 토픽을 사용하면서 탈근대적인 실천의 다양한 경로들을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데올로기로 쉽게 동일시해 버린다. 탈근대성과 탈근대주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 하의 독점 문화산업의 범람, 탈역사화된 개인주의적 취향, 기표의 무한복제만 존재하는 시물라크르의 시대만을 생산하는 탈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일반화시켜버린다. 탈근대적 실천의 가능성에 대한 회의와 외면은 자연 근대성을 극복해야하는 억압적 체제의 공간이자, 그 극복을 내재적으로 가능케하는 실천적 공간으로 완결시켜버린다. 모순과 대안이 근대성의 범주에 존재하는 한 탈근대성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형태이자 허구효과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요컨대 리얼리즘의 한계를 지적하기 위해 미적 모더니즘을 강조하는 것이나, 전세계 민중들의 차이와 연대를 민족문학운동이 담당해야 할 과제로 역설하는 것이나, 근대성을 자기완결적인 공간으로 보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광의의 모더니즘이 생생한 리얼리티에 다름아니라고 강변해도, 주어진 근대적 삶을 탈영토화하려는 실천들은 미적 모더니즘의 틀로 모두 포괄되지는 않는다.
둘째, 근대성의 재고를 통한 민족문학운동의 재구성에 대한 일반적 제안들은 많지만, 구체적인 실천방향에 대해서는 여전히 추상적이다. 이는 첫 번째 지적와 사실상 연결된다. 적어도 민족문학이 전화가 지금 시점에서 필요한 것이라면, 새로운 실천방향들이 구체적으로 제기되는 과정에서 그 시급성의 이유가 설명될 수 있겠다. 그러나 민족문학의 갱생을 외친지 수년이 지났지만, 이렇다할만한 구체적인 전화과정을 선보인 경우는 작품의 산출의 면에서나 이론적 재구성에서나 그리 두드러지지 않아 보인다. 조금 진전된 내용이라야 민족문학은 민족주의 문학이 아니라 민족전체의 운명(민족적인 것)을 다룬다거나, 전지구적 문명의 연대를 위한 소중한 자산이자 민중세력들의 힘이라고 추상화될 뿐이다. 중요한 것은 민족 전체의 운명이라는 테제 안에 얼마나 많은 차이들이 존재하는지를 드러내는 것, 다시 말하면 그러한 차이들의 내재적 표출을 통해서만이 민족의 운명이라는 것이 하나의 명목론적 개념으로 드러난다는 점을 인지하는 것이다. 요컨대 민족문학의 갱생이나 전화를 위한 현실적인 실천과제들은 적어도 그것이 민족문제만을 다루는 국지적 문학으로 축소하지않는바에야 대부분 차이와 모순의 이질적 복합체를 생산하고 그것들의 자유로운 연합을 추구하는 탈근대적 실천을 통해서 해결될 수 있다. 근대성의 이절적 요소들을 사실 역사유물론적 관점에서는 그 자체로 탈근대적인 국면들을 그 안에 내장하고 있다. 그 요소들은 미완의 근대를 완성하는 기획으로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 근대 자체의 삶의 환경과 인식의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차원으로의 이동을 의미한다.
셋째, 민족문학에 대한 완강한 옹호나 반성적인 성찰이든, 아니면 그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이든 문학에 대한 존재론적인 물음들, 즉 문학이 어떻게 자신의 형태를 진화시켜나가느냐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의문없이 자명하게 받아들인다. 미적 모더니티의 산물로서 모더니즘 텍스트는 문학의 장 안에서 어떻게 발생했으며, 그것의 역할은 어떻게 변화해왔는가에 대한 분석이 먼저 선행되어야하는 것은 문학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적 근대의 제도적 산물이며, 자본주의의 테크놀러지의 발전에 따라 실천적인 층위에서도 그 기능과 형태가 달라지지 때문이다. 요컨대 부르디외의 문학장에 대한 분석은 이와 관련하여 주목을 요한다. 그는 문학장은 유용한 위치들의 분배(봉헌된 예술가/고뇌하는 예술가, 소설가/시인, 예술을 위한 예술과 사회주의 예술)에 의해서, 그 위치들을 견지하는 행위자들의 객관적인 성격들에 의해 구조화된다고 말한다. 장의 역동성은 이러한 위치들 사이의 투쟁에 기초한다. 부연하자면 장의 역동성은 “기성전통의 정통성과 새로운 문화실천의 양식들의 이단적인 도전 사이의 갈등에서 표현된 투쟁이다”. 부르디외는 이 투쟁의 대립적인 관계를 위치(position)와 위치취하기(position-takings)로 명명한다. 피에르 부르디외, 『예술의 규칙』, 하태환 역, 동문선, 1998, 305-9쪽 참고. “문학의 장은 그 안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작용하는 힘들의 장이다...... 그리고 또 문학장은 이 힘들의 장을 보존하거나 변형하려는 경쟁적 투쟁들의 장이다. 분석의 필요 때문에 대립‘체계’로 취급할 수 있는 위치취하기들(작품들, 선언들, 정치적 선언들 등)은 객관적인 이러저러한 동의적 형태의 결과가 아니라, 영구적인 갈등의 산물이고 내기물이다. 달리 말하면, ‘이 시스템’의 생성적이고 통일적인 원칙은 투쟁 그 자체이다”(232).
문학의 존재에 대한 물음은 부르디외가 언급한대로 문학장에서 어떻게 위치지워지는가의 문제이면서 마슈레가 언급하듯이 철학적 사유의 대상 P. Macherey, The Object of Literature, Cambridge: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 참고. 마슈레의 지적대로 문학은 역사가 아니라(과학이나 철학이 아니라), 자신의 구체적인 존재양식을 생산하는 역사적 물질들과 특별한 관계를 갖는 것인데, 그 관계를 인식하게 해주는 것이 철학적 사유이다. 마슈레는 문학의 임무는 철학 속에서 철학적인 요소를 말하는 것이고 이는 진리에 대한 문학의 특정한 관계가 본질적으로 비판적이다라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233).
이 되기도 하지만, 더더욱 중요한 것은 문학의 존재는 항상 가변적이라는 사실이며, 그 가변성은 문학의 형태의 변화, 그 형태변화가 야기시키는 문학장의 변화, 그리고 그 문학장의 변화가 새롭게 구성하는 문학실천의 장의 생산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다. 요컨대 민족문학의 형태는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점, 그 안에는 수없이 많은 형태의 문학적 실험들과 서사적 변형들이 가능할 수 있다는 점, 그래서 민족문학은 명목론적인 자신의 기표를 문학장의 변화에 따라 지워버릴 수 있다는 점들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이러한 지적을 민족문학진영이나 모더니즘 진영이나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본격문학의 파괴 내지는 문학적 서사의 해체와 문자로 쓰여진 문학성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문학의 탈근대성에 대한 근대적 비판도 상업주의문화의 범람만이 아니라 문학의 지배적인 형태의 소멸, 즉 문학의 죽음에 대한 경계와 연결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문학의 존재형태에 대한 질문들은 현존하는 문학적 형태의 물질적 완결성에 대한 의문이지 문학이 주는 서사적 상상력이나 문자의 감각을 무용지물로 보는 것은 아니다.
4.
지금까지 문학의 근대/탈근대 논의들은 리얼리즘-포스트모더니즘의 논쟁으로, 혹은 객관적 현실과 허구적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간주되어 왔다. 따라서 그 대상으로 민족문학과 리얼리즘의 위기와 그 외연의 확대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항상 논의의 중심이 되어왔고, 탈근대적 실천은 근대적 실천 안에 수렴되거나 다원주의나 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로 배제되는 과정을 밟아왔다. 문학의 탈근대적 실천은 근대성에 주목하는 논자의 편견대로 문학의 죽음, 서사의 해체, 혼성모방, 역사적 향수주의, 탈역사적 개인주의와 같은 문제들에 천착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동안 문학연구 전반에 대한 새로운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며, 문학의 생산에 있어서도 텍스트 내의 의미를 새롭게 생성하는 작업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문학의 탈근대적 실천의 과제들을 간략하게나마 새로운 차원에서 제기하는 것으로 끝맺고자 한다.
(1) 문학연구는 맑스주의와 탈구조주의를 접합시키는 작업을 통해서 문학의 근대성에 대한 과제들을 재구성해야 한다. 이는 탈구조주의적 토픽을 맑스주의적의 문제설정으로 전도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이 문제설정에 대한 기존의 대표적인 작업으로는 마이클 라이언(Michael Ryan, Marxism and Deconstruction:A Critical Articulation: Baltimore & London:Johns Hopkins University, 1982)을 들 수 있다. 라이언은 해체주의의 철학과 맑스주의의 정치학을 결합함으로써 철학적인 것은 탈정치적일 수 없으며, 정치 역시 철학적이고 개념적인 전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는 맑스주의와 해체주의의 결합은 두가지 실천적 활동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말한다. 첫째 맑스주의의 개념적 하부구조 내에서 형이상학적 요소들을 골라내는 것, 특히 그것이 계급의 변증법과 갖는 밀접한 관련성을 고찰하는 것, 둘째 맑스주의의 정치비판의 무기로서, 반형이상학적이고 포스트레닌주의적인 진보들을 위한 이론적 탐색을 제공하는 수단으로서 해체주의적 분석을 사용하는 것이다(Introductionc 참고). 그는 결국 데리다의 해주체의적 사유와 맑스의 변증법을 절합하는 것이 탈근대적 맑스주의의 중요한 이론적 실천으로 보는 있는 듯하다(2, 3장 참고).
이 문제는 탈구조주의의 정치성에 대한 재고일뿐 아니라 근대적 메타담론으로서 맑스주의 비평의 전화와 맥락을 같이한다. 근대적 메타담론으로서 맑스주의는 텍스트, 해석, 글쓰기, 욕망과 같은 문제를 자신의 메타이론의 구성조건으로 적극 사고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심지어는 그 개념들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계급성과 생산양식, 개인의 억압과 사회의 모순이 텍스트 내에서 어떻게 각인되어 있는지를 심도있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담론의 물질적인 조건들과 의미의 미시적이고 무의식적인 영역들에 대한 개념적인 검토를 요한다. 해석, 글쓰기, 텍스트에 대한 정치적 재메타화는 맑스주의 비평의 전화를 위한 개념들의 실천으로 자리매김될 것이다. 요컨대 욕망, 글쓰기, 텍스트, 해석과 같은 탈구조주의적 토픽이 맑스주의의 실천의식과 결합하는 과정에서 문학의 근대성을 논의를 새롭게 재편할 수 있으며, 민족문학 연구의 전화에 있어서도 중요한 개념적 실천이 될 수 있다.
(2) 문학예술 혹은 문화적 텍스트는 테크놀러지의 형태로 존재하는 역사적 구성물이면서 동시에 내재적으로 감각적인 특성을 가진 미적구성물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텍스트의 존재형태는 테크놀러지의 발전의 역사 속에서 구성된다. 요컨대 문학의 존재는 구술텍스트에서, 문자텍스트로, 문자텍스트에서 이미지 텍스트로, 이미지 텍스트에서 다시 하이퍼텍스트로 전화되는 텍스트의 물질적 형태 속에서 논의된다.
부르주아 세계관에서 문학은 오래동안 인간의 감정과 정신을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예술로 인식해왔고, 문학적인 완성은 어떤 기술의 발전으로는 긍극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작가의 고유한 창조적 산물로 생각해왔다. 문학가치의 절대성과 문학서사의 보편적 교훈 속에는 문학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월하며, 영원할 것이라는 신념이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문학의 시간성과 물질성을 문학성이라는 초월적 공간으로 대체시켜버린다. 부르주아 문학의 세계관과 대결을 벌이는 비판적 리얼리즘의 경우도 부르주아의 허위의식을 비판하면서, 문학의 시간성과 물질성을 초월적인 공간이 아닌 역사적인 공간으로 이해하고자 했지만, 문학의 절대성과 보편성에 대해서는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엥겔스의 언급대로 ‘위대한 리얼리즘’의 승리를 가져다 준 19세기 비판적 리얼리즘의 역사주의는 문학의 시간성과 물질성을 문학이 대결해야 할 역사로 보았지, 자기 자신의 역사로 보지 않았다. 문학의 역사주의는 문학형태의 역사와 암묵적으로 거리를 둠으로써, ‘자기소실효과’를 보지못하는 자명성에 빠져있었다. 소위 1848혁명을 기점으로 더 이상 위대한 리얼리즘이 나올 수 없게 된 상황, 총체적 서사가 붕괴되고 파편화된 극적 서사가 지배하는 시기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부르주아의 사물화된 허위의식의 전면화를 비판한 것이지만, 이 때의 역사주의 역시 문학형태의 변화를 역사위기의 징후로 상대화시켜 버린다. 문학의 시간성과 물질성은 이제 외재적인 문제에서 다시 내재적인 문제로 되돌아와야 한다. 이는 문학의 역사를 문학의 초월성으로 대체하려 했던 형식주의와, 문학에 의한 역사로 환원하려했던 역사주의의 양편향을 극복하려는 시도이다. 문학의 시간성과 물질성을 내재화한다는 것은 문학의 역사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면서 문학에 대한 역사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의 테크놀러지를 말하고자 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이다. 문학의 테크놀러지는 전통적인 문학론에 대해 두 가지 새로운 문제들을 제기한다. 첫째는 문학은 개인의 신념이나 정신의 산물이기 이전에 하나의 물질적인 존재 형태를 갖는다는 점이다. 가령 문학의 존재형태에 대해서 고전소설은 반기술적 형태이고 최근에 등장한 사이버문학만 기술적 형태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월터 옹(Walter J. Ong)의 지적대로 문학의 문자성은 문학의 구술성을 대체한 하나의 테크놀러지 형태였으며, 서사적 표현형태의 다양한 자기발전을 거쳐왔다. Ong, Walter J., Orality and Literacy, New York:Methuen, 1982
옹은 말하기와 글쓰기가 반드시 대체의 관계가 아닌 겹침의 관계이긴 하지만 대체로 문화의 진보를 통해 문자성이 구술성을 압도하는 과정을 밟아왔다고 본다. 문학의 테크놀러지를 말한다는 것은 단순히 문학이 테크놀러지 형태로 발전해온 역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표상체계로서의 문학의 완결된 의미형태(기표를 통한 기의의 표상), 현실에 대한 텍스트의 동일적 지시관계(텍스트를 통한 비텍스트적 현실재현)라는 현상과 본질, 형식과 내용의 이분법적 사유가 문학의 존재방식을 늘 사후적인 것으로, 이미 굳어진 몰적 형태로 추상화시킨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글쓰기의 자기욕망과, 그 표현적 형태의 특이성들의 존재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때 테크놀러지는 육체적 감수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장치가 된다. 글쓰기, 표현, 감각의 특이성 자체가 문학 테크놀러지의 구성요소인 것이다. 문학에서 의미의 내재성은 표상체계로 환원될 수 없는 감각과 표현의 특이성 속에서 생성되는 것이고 바로 여기에서 문학의 어떤 힘과 가치가 발견된다.
(3) 문학의 실천은 표현에 대한 힘들과 강도들을 높여나가고 의미를 생성하는 다양한 영토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 필자는 이미 알튀세르의 문학예술론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론이 아니라 감성적 실천을 위한 이론적 실천이며 졸고, 「문학실천의 전화를 위한 구성조건」, 『문화과학』94년 여름호 참고.
, 들뢰즈가 강조하는 감각의 생성과 표현기계의 활성화가 문학의 미적인 실천에 있어 탈근대적인 의미를 제공해준다고 언급을 한 적이 있다. 졸고, 「테크놀러지, 문학기계, 감수성의 생성, 실천에 대하여」, 『문화과학』 98년 여름호 참고.
문학예술의 힘은 글쓰기의 힘이며, 그것은 감성적 실천에서 나온다. 들뢰즈는 예술작품은 “감각들의 집적, 지각들과 정념들의 복합체”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철학이란 무엇인가』, 이정임 역, 1995, 234쪽
라고 말한다. 감각들과 지각들과 정념들은 스스로 가치를 지니며 모든 주관적 체험을 넘어서는 존재인 것이다. 표현은 어떤 내용을 담아내는 형식적인 장치가 아니라 그 자체가 내용의 힘이고, 의미를 결정짓는 강도이다. 들뢰즈에게 있어 의미의 생성은 사건의 계열화와 그 계열화로 인해 발생되는 물질성의 표면효과에서 비롯된다. 들뢰즈는 스토아학파에서 말하고 있는 사물의 두 가지 성질에 대해 언급하면서 의미가 어떻게 생성하는지를 고찰한다. 그에 따르면 스토아학파는 첫째, 사물은 “응집력, 물리적 성질, 서로 간의 관계, 능동과 수동, 그리고 ‘상태(state of affairs)를 지닌 물체들” G. Deleuze, The Logic of Sense, New York: Univ. of Columbia, 1990. 48-9쪽.
로서 정의된다. 물체들은 오직 현재 속에서만 그 의미를 규정받을 수 있는데, 왜냐하면 “살아있는 현재는 행위를 동반할 뿐 아니라 능동태와 수동태를 표현, 측정하는 시간적인 외연이기 때문이다”(49). 이 때 살아있는 현재는 물체 사이의 인과관계를 파괴시켜버린다. 오직 현재만이 시간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공간 안에 실재하는 모든 물체들은 서로 간의 관련하에서, 서로를 위해서 원인일 뿐이다. 둘째, 모든 물체를 원인으로 파악하면서도 그 원인은 전혀 다른 본성을 가진 어떤 것, 즉 효과를 생산해낸다. 들뢰즈는 이 효과들이 물체들이 아니라 비물체적이며, 바로 사건이라고 말한다. 텍스트의 의미는 어떠한 고정된 코드화, 개별화를 거부하는 사건의 특이성이 표면효과를 생산하는 것을 말한다. 표현이 의미의 재현형식이 아니라 의미생성의 사건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문학에서의 다양한 사건들의 배치와 문체들의 실험들은 문학의 탈근대적 실천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4) 문학은 끝임없이 소수자들의 문학이 되어야 한다. 소수자들의 언어, 문체, 감성이 서로 이질적이지만, 다양한 목소리가 숨쉬는 시장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상품형식으로 존재하는 문학의 독점화를 막을 수 있는 대안이다. 근대문학의 언어들은 사실 제국주의적 근대의 정치적 억압 속에서 다양한 민족문학어의 문체와 소수어의 감성을 살리지 못했다. 민족문학어는 지배적이고 표준적인 코드로 사물화되고, 때로는 지배언어의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는데, 폭력적 근대에서 소멸된 소수언어를 살리는 실천은 문학의 죽은 결을 살리는 데 유효하다.
소수언어의 시장들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타자들의 언어, 서로 다른 이질적인 언어들이 의미의 독점공간을 탈중심화시키는 실천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요컨대 들뢰즈가 카프카의 문학을 소수집단의 문학으로 보는 이유는 단지 카프카의 문학언어가 단지 소수언어 소수민족에 속해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소수집단’라는 의미에는 소수자들의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불평등에서 야기되는 표현과 발화의 자연스런 탈영토화라는 계기들을 가지고 있으며, 문학은 이러한 언어와 발화를 사용하고, 배치시키고 변화시키는 탈영토화를 위한 표현기계인 것이다. 지배문학의 한가운데서 소수집단의 문학을 지켜나가는 것, 즉 체코의 유태인이 독일어로 써야하고, 우즈벡인이 러시아어로 써야 하는 상황에서 소수집단의 문학을 지키는 것은 “자신의 물밑세계, 자신의 고유한 사투리, 자신의 고유한 제 3의 세계, 자신만의 황량한 세계를 고안하는”(『소수집단의 문학을 위하여』조한경 역, 문학과지성사, 199237) 희생을 치룰 때 가능한 것이다.
소수자의 언어로서 여성, 청년, 동성애자, 정신분열자, 생태주의자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다시 그 안에 서로 다른 수많은 이질적인 소수언어들을 다시 이중분절시키는 실천 속에서 문학은 자신의 근대적 한계들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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