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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3/문화경제론

예술에 대한 공적 지원을 둘러싼 쟁점들

by FraisGout 2020. 7. 11.

수입의 배분과 예술지원

형평성과 소득의 배분 문제는 정부의 예술지원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 이 때 두 가지 방식의 토론이 가능하다. 첫째로, 현존하는 소득의 배분이 예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말하자면, 소득의 불평등성이 가난한 사람으로 하여금 예술과 문화에 접근할 수 없도록 만드므로 그것이 공적 지원을 위한 정당성의 근거가 되고 있는가? 두번째 질문은 거의 첫번 질문을 뒤집어 놓은 셈이 된다. , 소득의 배분상태가 예술에의 접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가 아니라, 예술의 지원이 소득의 재분배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묻는 것이다. 말하자면, 공적 지원이 부유한 사람들의 비용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예술 소비를 도울 수 있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또는 그 역인가? 어떠한 경우에 배분의 결과들이 문제가 되는가? 일단, 현존하는 수입의 불평등성이 예술참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아보도록 한다.

많은 조사결과들을 요약하면, 공연예술이나 박물관·미술관 관람객들 중에는 소득이 낮은 사람들이 매우 드물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1960년 초 미국의 경우, 5천 달러 이하의 소득을 가진 사람들은 도시인구의 35.2%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전체 예술관람객 중 8.5%에 불과하다. 이러한 상황은 이후의 조사들에서도 별로 변함이 없다.

따라서 누구나 문화예술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려는 욕구가 예술지원을 위한 가장 강력한 주장들 중 하나가 된다. 전체 인구의 20~30%에 불과한 부유한 사람들만 예술을 향유할 수 있다면, 그러한 문화예술 정책은 잘못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성격상 필연적으로 도덕적 주장이다. 모든 사람이 자아발전을 위해 균등한 기회를 누려야 한다는 것은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에서 궁극적인 신념에 속한다. 나아가, 문제는 예술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예술이라는 재화의 높은 가격과 개개인의 낮은 소득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지역적인 이유도 존재한다. 많은 지역사회들이 전문적인 수준에서 정규적으로 예술을 제공할 만한 시설과 기관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예술과 문화가 지역적으로 보급되는 것을 도울 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접근 기회를 늘려주기 위해 지원이 요청된다.

예술을 위한 공공 지원을 선호하는 대부분의 분석가들은 모든 사람에의 접근 개선이라는 목표에 매우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정치적으로도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 이 평등주의적 윤리에 기초하고 있는 이와 같은 생각은 전미예술기금(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 NEA)이 천명한 목표들 중에서도 첫째로서 여실히 반영되어 있다. 그것은 곧 예술을 수많은 미국인들에게 널리 활용 가능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금체제가 아주 진보적으로 개편되거나, 예술지원의 형태가 소득이 낮은 사람들의 이익을 확대하기 위한 프로그램들을 많이 포함하지 않는 한, 예술지원은 분배의 정의에 역행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수입이 낮은 사람들보다 유복한 사람들이 예술활동에 좀더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예술지원을 위해 낸 세금보다 더 많은 지원 혜택의 몫을 베어가는 결과가 빚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가치재(merit goods)이론

만일 사회가 부유한 사람들로부터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소득 재분배를 원한다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정부 보조된 가격으로 특별한 재화나 서비스를 마련해주는 것보다는 현금을 주는 것이 경제이론상으로는 좀더 타당하다. 보조가 이루어진 저수입자용 주택과 같이 현물로 이루어지는 재분배는 현금만큼 좋을 수는 있지만, 결코 더 좋을 수는 없고 더 못할 경우가 오히려 더 많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현금을 받아서 쓰고 싶은 대로 쓰게 될 때에는 우선적으로 선택하지 않을 것이 분명한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부가 종종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조된 가격이나 때로는 심지어 무료로 특정한 재화를 제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저수입자용 주택과 진료가 가장 중요한 사례가 된다. 그와 같은 경우의 지원을 위한 해명으로는 해당되는 대상들이 경제학자가 가치재’(merit goods)라고 부르는 것이라는 대답이 가능하다. 이는 사회가 소비자들이 시장가격으로 사기를 원하는 것보다 더 많은 양을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하리라고 결정한 재화를 뜻한다. 다른 말로 하면, 소비자의 선호를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공중 또는 그 법률적 대표들이 그들 자신의 선호를 강제하기로 결정하는 것으로서, 가치재의 가격을 낮추고 그렇게 해서 소비량을 늘리기 위해 지원금을 쓴다.

가치재이론은 정부의 예술 개입을 위해 가장 의미있는 하나의 설명이라는 점에서 관심의 대상이 된다. 예술은 좋은 것으로, 좀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아주좋은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소비자들에게 맡겨 놓는다면 활동의 결과가 그들이 요구할 것보다 많아질 것을 알면서도 공공의 지지를 선호하는 정치가들은 기꺼이 예술을 지원코자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공중 또는 그 대표들 중 다수가 소비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동의하여 지원키로 한 재화들 중에는 우량주택, 건강관리, 그리고 예술이 대표격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지출 대상이 특별 대우를 받을 만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한, 이는 매우 만족스럽지 못하다.

가치재들이 왜 특별한가를 묻든다면, 그것들이 사람들이 깨닫고 있는 것보다 사람들에게 더 좋은 독특한 질을 지닌 재화나 서비스의 계열에 속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컨대, 소비자들은 적당한 건강관리의 중요성을 소홀히 할지 모른다. 그들에게 맡겨 놓는다면,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그것을 너무나도 적게 밖에는 이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를 지원함으로써 우리는 그 가격을 낮추고 그들로 하여금 좀더 많이 소비하도록 부추긴다. 예술에 관해서는 아마도 조금 다르게 말하고 싶어할지 모른다. 초점은 사람들이 치료적인 의미에서 깨닫고 있는 것보다는 그들에게 더 좋다라고 말하지 않고, 예술 경시가 많은 사람들은 그에 관해 알고 있었다면 크게 즐길 만한 경험으로부터 떼어 놓게 된다는 것일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이미 정보의 결여로 인한 시장 실패라는 범주 아래 시도했던 지원의 정당화 근거와 일치한다.

또 하나의 가능한 설명은 가치재가 일상적인 소비자 재화들로부터 구별되는 고유 가치’(inherent worth) 또는 본래적 장점’(instinsic merit)의 유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경제학적 담론의 영역 밖에 놓여있는 가치판단으로 치부하는 입장에 서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우리로서는 그러나 경제 자체가 과연 목적일 수 있는가 하는 견해를 좀더 무게 있게 생각하는 편이다.

요컨대 참가자들이 받는 직접적인 이익을 넘어서서 예술은 사회 전체를 위한 외부적 편익을 산출한다. 그중 가장 중요한것으로는 미래세대를 위해 보존된 문화유산(cultural legacy), 교양 교육에의 공헌, 예술적 혁신에 의해 산출된 집단적 이익 등이 손꼽힌다. 호주와 캐나다에서 이루어진 조사들은 예술이 외부적 편익을 산출한다는 공중의 확신을 보여준다. 그들은 예술을 지원하기 위한 실질적인 과제를 기꺼이 부담할 용의를 지니고 있다.

형평의 고려 역시 보조를 위한 추가적인 정당화 사유에 해당된다. 평등주의적 윤리는 모든 시민들이 국가의 예술 문화유산에 최소한도 접근은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높은 가격 장벽과 낮은 소득 그리고 지리학적 접근불가능성 같은 다소간 성격이 다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보조가 요청된다.

 

공적 지원에 대한 반대의견들

끝으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예술·문화에 대한 공적 지원에 찬성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에 유념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은 정당하다고 볼 수 없는 공적 지출 프로그램의 증식에 반대하는 견해들을 지니고 있다. 그 요지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납세자들에게 정부에 의해 선택된 예술을 지원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합당한 정치사회적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 예술의 집합적 이익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은 모든 계층들을 중산층을 지원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실제적인, 가치있는 예술의 창조에서 도움보다는 해악을 끼칠 우려가 더 크다.

첫번째 주장에는 국수주의적 견해마저 작동한다. 즉 적어도 미국에서는 온갖 고급문화들이 미국적 국민생활과 아무 관계도 없고 또 국가적 단결이나 정체성의 수립에도 아무런 공헌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말할 것도 없이 이는 억지에 속한다. 예컨대 유럽적 전통이 미국문화 발전에 아무런 공헌도 하지 못한다는 견해에 동조할 미술사가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가장 미국적이라 할 추상표현주의는 1940년과 50년대에 미국뿐 아니라 유럽에도 비범한 영향을 미쳤는데, 그 뿌리는 20세기 초엽의 유럽 작품들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발레를 석권하고 있는 네오클래식 양식은 러시아 안무가 조지 발란신에 의해 뉴욕에서 발전되었던 바, 그는 특별히 미국 청중을 위해 미국 무용가들을 활용했다.

두번째 주장에서는 그것이 예술지원이 소득분배에 미치는 영향들에 반대하는 것인지, 지원을 위해 징수된 세금은 어떤 경우에나 반드시 누군가가 소비할 수 있는 권리를 방해한다는 사실에 반대하는 것인지가 분명치 않다. 우리로서는 이미 소득재분배 문제와 시장 실패 문제를 다루었으므로 상론은 생략키로 한다.

마지막 주장, 즉 정부 지원이 순수예술 창조에 오히려 해악을 끼친다는 견해는 우리 사이에서도 종종 들려온다. 즉 사이비예술가들에게 정부예산을 낭비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지원의 오랜 역사를 지닌 유럽에서는 이러한 사태가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으로 보아, 전문적인 평가체계가 문제될 뿐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가난에도 불구하고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이지, 좋은 작품을 위한 필수조건이 가난일 수는 없다.

요컨대 예술지원은 일차적으로 대부분의 소비자들이 예술과의 친숙한 관계를 통해 얻게 될 유용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입문적인 정보나 경험을 위해 돈을 쓰지 않으려 하는 경향을 조준해야 한다. 그러므로 지원은 단순히 경제적인 소외계층만이 아니라 문화적인 소외계층을 위한 활동에 우선적으로 주어져야 한다. 만일 정부지원이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에 금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늘날 세계문화정책의 대강이 왜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요약되고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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