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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자본주의와 근대적 노동의 체제

by Frais Study 2020. 5. 28.

1.‘노동의 정치’로부터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는 노동을 기초로 사유되고 구상되었으며, 노동을 기초로 존재하고 작동한다. 이는 소련의 사회주의나 맑스주의 이전부터 확고부동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푸리에(Ch. Fourier)는 일찍이 “모든 사람은 노동해야 한다”는 명제를 이미 제시한 바 있으며, 오웬(R. Owen)은 자신의 공산주의를 실험하면서 노동시간을 단위로 하는 노동증권을 통해 노동생산물이 교환되는 노동시장을 조직한 바 있다.F. Engels, “Die Entwicklung des Sozialismus von der Utopie zur Wissenschaft,“ ?공상에서 과학으로 사회주의의 발전?, K. Marx/ F. Engels, 김재기 편역, ?마르크스 엥겔스 저작선?, 거름, 1988, 214-216쪽.
 
여기서 정치는 노동에 대해 억압과 지배의 메카니즘을 뜻하는 것일 뿐이고, 노동에 기초하지 않은 자들이 노동하는 자들을 착취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런 만큼 노동에 대해 잉여적인 것이다. 따라서 노동의 해방이란 달리 말하면 정치로부터 노동의 해방이고, 노동에 직접적으로 기초한 사회란 그러한 정치가 축소되고 소멸되어 노동 그 자체로 해소되는 사회다. 이런 점에서 푸리에는 이미 정치를 노동으로 환원해야 한다는 생각을 분명히 한 바 있으며, 이 경우 정치학은 생산의 과학이 되리라고, 따라서 정치학은 경제학으로 흡수되리라고 예견했다.같은 책, 210쪽.
 따라서 초기의 공산주의는 생산과 생활이 정치적 조직없이 이루어지는 공동체를 모델로 하고 있었다.이런 이유로 인해 오웬의 공산주의적 실험은 오로지 경제적인 측면에 집중하였고, 그들 자신 역시도 피할 수 없었던 정치적인 측면은 오히려 간과되고 무시되는 결과를 낳았다. 오웬이나 오웬주의자들에 의한 공산주의적 공동체의 실험이나, 푸리에의 ‘팔랑크스’(Phalanx)를 모델로 하는 다양한 실험적 공동체 운동, 생시몽주의자나 캬베(Cabet) 등의 평등주의적 운동에 대해서는 L. Benevolo, The Origine of Modern Town Planning, 장성수/윤혜정 역, ?근대도시계획의 기원과 유토피아?, 태림문화사, 1996, 71-133쪽 참조.
 
어찌됐든 정치를 노동으로 환원하며, 정치가 노동과 직접적으로 통일될 수 있는 조건을 공산주의의 요건으로 간주하는 것은 단지 초기의 공상적인 사상가들만의 생각은 아니다. 노동에 기초한 정치, 노동하는 사람들을 위한, 노동하는 계급 자신에 의한 정치. 이런 점에서 공산주의는 종종 ‘노동의 정치’로 정의되기도 한다. 즉 노동의 정치로서 공산주의란 말하자면 ‘노동의, 노동에 의한, 노동하는 자를 위한 정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노동의 정치’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라는 말보다도 훨씬 더 공산주의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특히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된 이후, 아직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맑스주의자들은 ‘노동의 정치’를 현존하던 사회주의와는 분리함으로써 공산주의적 소망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하였다.
확실히 사회주의 체제에서 정치는 ‘노동의 정치’가 꿈꾸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국가는 소멸과 축소의 길을 걸은 것이 아니라, 차라리 강화되고 확장되는 반대의 길을 걸었고, 정치가는 노동자를 더욱 강한 힘으로 통치하고 지배했으며, 결국 정치가 노동으로 환원되기는커녕 반대로 노동이 정치로 환원되는 양상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나 쉽게 던지는 단순하고 소박한 질문을 다시 반복할 수 있다: 이는 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스탈린이나 ‘나쁜’ 정치가들 때문이었을까? 레닌이나 레닌주의적 당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국가관료나 관료제 때문이었을까? 비-노동의 정치. 혹은 노동자 대중이 직접적으로 정치화되기는커녕 정치로부터 배제되고 소외되었으며, 단지 정치를 위한 수단이 되는데 그쳤기 때문일까? 노동의 비-정치. 
여기서는 어느 경우든 결국 노동의 정치가 아니라 노동과 정치의 분리가 문제가 되고 있다. 즉 역사 속에 현존하던 사회주의 체제는 노동의 정치를 실행했던 것이 아니라 이전과 마찬가지로 노동과 정치의 분리를 실행했던 것이라는 점에서, 노동의 정치와 대립된다는 것이다.
적어도 노동의 정치를 꿈꾸었던 사람이라면, 누가 이러한 사실을 부인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이 또한 전부라면, 우리는 이제 그 빗나간 역사를 피해서 노동의 정치를 위한 새로운 역사를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아니, 반대로 말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라면, ‘노동의 정치’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던 정치적 실천 속에서 우리는 대체 무엇을 배울 수 있는 것일까? 정말 그것은 노동과 분리된 정치의 실패만을 뜻하는 것일까?
근본적인 태도라면, 그리하여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차라리 근본으로까지 안고 들어가는 태도라면, 여기서 차라리 이 비극적인 역사를 노동의 정치의 역사로서, 글자 그대로 노동의 정치는 아니라해도 적어도 노동의 정치와 분리될 수 없는 역사로서 인정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바로 그 노동의 정치를 위한 실천이 어떻게 그와 같은 비극적 결과로 귀착되었는가에 대해 다시 질문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노동과 정치의 분리만이 아니라, 노동의 정치 안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난점에 대해 다시 사유하고, 그것으로써 노동의 정치 자체를 다시 사유할 수 있는 지점을 추적하는 것은 아닐까? 
여기서 우리는 좀더 근본으로 거슬러, 노동의 정치를 통해 노동 자체에 대해 다시 질문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노동의 정치가 ‘노동’의 정치인 한, 노동 속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정치'와 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의 성격과 무관하게 그 성격이 정의될 수는 없기 때문이고, 따라서 노동의 정치에 대한 문제는 노동, 특히 자본주의에서 행해지는 노동의 질이나 성격과 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은 일차적으로 생산적 힘과 의지의 표현이며, 그에 고유한 특이성을 갖는다. 그것은 언제나 무언가를 생산하고 창조하는 능력이며 활동이다. 그것은 주어진 것, 기존의 것 속에서 새로운 것을 형성하고 창조하는 잠재성(virtualite)의 영역이다. 이런 의미에서 노동은 생산적인 힘 전체로 구성되는 ‘내재성의 장’(champs d'immanence)이며, 생산적인 활동 전체의 집합이다.
동시에 노동은 언제나 특정한 역사적 형태를 취하며 특정한 배치(agencement)로서만 행해진다. 특히 자본과 노동의 적대가 내재적 경계를 구성하는 자본주의에서 노동은 자본에 의해 이루어지는 생산의 특정한 배치 안에서 이루어지며, 그 안에서만 (생산적인) 노동으로 인정된다. 노동의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성격은 자본에 포섭되어서만 가치있는 것(the valuable)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그것이 갖는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능력은 자본의 창조성, 자본의 생산성으로 나타난다. 자본에 새겨진 노동의 흔적. 더불어 생산적 활동의 집합 내지 생산적 능력이 작용하는 내재성의 장으로서 노동은 자본을 통해 가치를 생산하는--모든 가치의 기원으로--활동으로 변환되고, 노동의 생산적 능력은, 정치경제학에서 표상하듯이, 가치의 형태로 변환된다. 나아가 자본이 노동을 자신의 의지대로 이용하기 위해선 노동 그 자체를 포섭하고 통제해야 한다. 이로써 자본은 노동에 자신의 흔적을 새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노동의 창조적인 생산의 능력을 포섭하고 통제하려는 권력이며, 그러한 능력의 자유롭고 자주적인 의지를 무력화시키는 권력이다. 
따라서 자본의 권력이 포섭하고 통제하는 ‘노동의 체제’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자유롭고 창조적인 노동의 생산적 능력을 상품을 생산하는 활동으로 변환시키는 체제며, 그것을 위해 노동을 자본주의적인 생산의 배치로 포섭해내는 체제고, 노동을 특정한 방식으로 반복하게 함으로써 노동 자체에 일정한 반복의 형식을 부과하고, 이로써 노동하는 사람을 자본의 요구에 적합한 근대적인 주체로 생산해내는 체제다. 이 경우 ‘체제’(regime)라는 말은 노동을 통제하는 자본의 권력이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강한 의미--정권(!)--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자본이 작동시키는 권력에 대해 노동의 생산적인 능력이 저항의 형태로 변형되는 영역이며, 결국 권력을 둘러싼 복합적인 실천이 조직되는 장이란 점에서 분명 정치의 영역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 근대적인 노동의 체제를 통해 그에 고유한 ‘노동의 정치’를 포착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앞서 ‘노동의 정치’라는 개념으로 표시했던 노동에 의한 정치(politics by the labour)라기보다는 (자본주의적) 노동 안에서 이루어지는 정치(politics in the labour)라는 의미에서 노동의 정치다. 그러나 이는 ‘노동의 정치’를 사유하기 위해서 반드시 경유해야 할 정치적 영역임이 분명하다.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노동의 정치를 위하여, 노동 및 노동하는 신체에 새겨진 자본의 권력을 추적하는 것. 이를 위해 우리는 다시 맑스의 ?자본?을 참조할 것이며, 거기서 제시되고 있는 이론적 요소를 근대적 노동의 체제와 노동의 미시정치학을 개념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지점으로까지 밀고 나갈 것이다.
?자본?의 연구에 따를 때 이는 적어도 네 가지 차원에서 추적할 수 있다. 활동 내지 사회적 실천이 조직되는 시간적 형식; 그 공간적 형식; 기계와 결부된 형식; 축적과 과잉인구. 그리고 나중에 다시 말하겠지만, 이 네 가지 중 앞의 세 개는 근대적 노동의 방식 내지 노동의 체제를 형성하는 ‘해부-정치적인’ 세 가지 축을 이루며, 뒤의 하나는 그 축들로 이루어진 노동의 체제 속으로 노동자를 포섭하는 ‘생체-정치적’ 메카니즘을 이룬다. 


2.근대적 노동의 성분들

(1)노동과 시간-기계

“다음과 같은 공장규칙은 아주 일반적이다. ① 작업 시작 10분 후 정문을 폐쇄한다. 그 후에 온 사람은 아침식사 시간 까지 들어갈 수 없다. 이 시간 동안 작업을 하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직기당 3펜스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② 기계가 작동 중인 동안 자리를 비우는 직공은 한 직기당 한시간에 3펜스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작업시간 중 감독자의 허가없이 작업실을 떠나는 사람은 3펜스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또 다른 공장규칙을 보면 3분을 늦게 온 노동자는 15분에 해당하는 임금을 벌금으로 물어야 하고 20분을 늦게 온 노동자는 하루 일당의 1/4를 벌금으로 물어야 한다. 아침 식사 시간까지 공장에 오지 않는 노동자는 월요일의 경우 1실링, 다른 날에는 6펜스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F. Engels, Die Lage der arbeitenden Klasse in England, 박준식 외 역,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 두리, 1988, 219-220쪽


1845년에 출판된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에서 엥겔스가 전하고 있는, 매우 빈번히 인용되어 유명한 이 구절은 자본주의에서 시간이 갖는 의미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는 시계를 이용해서 시간을 잰다는 것이, 적어도 공장에서라면 무엇을 뜻하는지를 너무도 잘 보여준다. 여기서 시계는 단지 시간의 흐름을 기술적으로 표시하는 단순한 기술적인 기계기를 넘어서, 사람들의 행동과 삶의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사회적 기계로서 작용한다. 마찬가지로 시간은 단지 t로 표시되는 어떤 개념이기를 벗어나, 삶의 방식이 그에 기초하여 분절되고 조절되는 기계다. 이런 이미에서 우리는 ‘시간-기계’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이에 대해서는 이진경,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푸른숲, 1997, 81쪽 이하 참조.

이는 단지 공장에 한정되지 않는다. 학교나 기차는 물론 거리나 집 안에서도 언제나 우리의 삶은 이러한 시간의 눈금을 통해서 측정되고 통제된다. 때로는 징벌조차 수반하는 강제의 형식으로, 때로는 자발적으로 사용하는 척도의 형식으로. 근대는 모든 행동이나 삶을 이 시계적인 시간-기계를 통해서 절단하고 채취한다. 시계적인 시간은 이제 삶과 행동을 분절하는 내적인 형식으로 자리잡는다. 
시간을 측정하는데 시계가 사용된 것은 이미 중세의 수도원에서였고, 도시에서는 상업의 발달과 더불어 독자적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기술을 발전시켰고, 시계의 사용이 확장되었다.J. Attali, Attali, J., Histoire du temps, Fayard, 1982; Landes, D., Revolution in Time: Clock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Harvard Uni. Press, 1983 참조.
 하지만 시계적 시간이 대중들의 삶 속으로 파고들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노동의 통제와 연관되어 있었다. 르 고프(J. Le Goff)에 따르면 중세 도시에서 노동에 대한 시간적인 강제와 통제는 시계의 발전의 또 하나의 동력이었다. 당시로서는 단지 작업시간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데 종을 사용하는 정도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업을 하거나 투쟁이 벌어질 때면 노동자들은 제일 먼저 작업시간을 알리는 종을 부수었고, 반대로 부르주아는 종을 부순 자를 사형에 처한다는 규정으로 이에 대처했다고 한다.J. Le Goff, Pour un autre moyen age: temps, travail et culture en Occident, A. Goldhammer (tr.), Time, Work and culture in the Middle Ages, Uni. of Chicago Press, 1980, 46-47쪽.

그런데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공업이 확장되면서 시간의 관리는 더욱 중요하고 긴요한 문제가 된다. “노동일의 시작은 공설시계, 예컨대 바로 근처의 철도 시계를 통해 지시되며 공장의 시계는 이에 맞춰져야 한다.”K. Marx, ?자본?, I-1, 328쪽.
 1700년대부터 이용되던 시간표와 시간관리인, 벌금 등은, 산업혁명으로 자본주의가 그 기초를 확고하게 한 18세기 말이 되면서 방적공업에 본격적으로 도입된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오면서 시간표는 매우 정교하고 자세한 것이 되기 시작했으며, 알다시피 19세기 말이 되면 시간표는 시간에 따라 미세한 동작 하나하나까지를 통제하려는 ‘시간관리’가 나타난다.E. P. Thompson, Customs in Common, Merlin Press, 1991, 387-389쪽.

이처럼 시계를 이용한 시간적 통제의 발전은 자본주의의 역사와 나란히 이루어졌다. 맑스는 이러한 시간적 통제를 자본주의라고 불리는 근대적 생산양식의 자연법칙이라고 말한다.

“노동의 시한이나 한계, 중단을 시계종 소리에 따라 군대 식으로 일률적으로 규제하는 이러한 세밀한 규정은 결코 의회적 사고의 산물은 아니었다. 그것들은 근대적 생산양식의 자연법칙들로서, 점차적으로 갖가지 관계들로부터 발전한 것이다. 그것들의 정식화나 공인 및 국가적 선언은 오랜 기간에 걸친 계급투쟁의 결과였다.”?자본?, I-1, 328-9쪽.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혹은 직접적으로 그것이 행해지는 공장에서 노동과 시간의 긴밀한 관계는 맑스의 주요한 관심사 가운데 하나였다. 노동과 시간의 관계는 ?자본?의 제일 모두에서부터 맑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다. 또한 ?자본?의 가장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인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은 바로 노동과 시간의 직접적인 관계를 다루고 있다. 노동이 생산하는 가치 및 잉여가치의 양은 노동이 행해지는 시간의 외연적인 크기에 달려 있으며, 절대적 잉여가치란 바로 이처럼 노동시간의 크기에 의해 결정되는 잉여가치의 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절대적 잉여가치의 양을 결정하는 노동시간의 외연적 크기는 자본의 이해와 노동의 이해가 직접적인 적대관계를 이루는 지점이기도 하다. 맑스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계급투쟁이 시간을 둘러싼 투쟁이었다는 사실이다.같은 책, 271쪽 이하.
 노동시간의 제한으로 표상되는 공장입법들은 그러한 투쟁이 그때그때 도달한 지점을 표시한다. 
결국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다루는 장에서 맑스는 자본의 일차적 관심이 노동시간의 외연적인 장악과 통제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앞서 인용한 엥겔스의 문장은 작업을 시작하는 시간을 엄격히 지키도록 통제하려는 자본의 의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채플린이 미쳐서도 무의식적으로 누르길 잊지 않았던, 그리고 화장실 앞에 설치함으로써 그 성격이 더욱 분명해졌던 시간 기록계는 시간에 대한 이러한 외연적인 통제 장치다. 
다음으로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은 노동시간의 외적인 크기가 제도적으로 제한된 조건 아래서 노동시간의 내적인 장악과 통제를 겨냥하고 있다. 이제 착취할 수 있는 시간의 크기가 제한되기 때문에,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을 내적으로 철저하게 착취하는 것이 자본에게는 중요하게 된다. 노동시간 안에서의 공백을 제거하고, 주어진 시간을 철저하게 활용하여 노동력의 이용을 극대화하며, 시간의 흐름에 행동과 동작을 대응시키고, 정해진 행동에 필요한 최소 시간을 측정하고 강제하는 것. 이를 위해 이제 시간은 매우 짧은 단위로 미세한 선분들로 분할되고, 표준적인 척도에 따라 정해진 시간에 특정한 동작이 대응된다. 시간의 선분화. 이제 시간은 선분들처럼 분할된 단위로써 다시 결합한다. 즉 시간의 선분화는 노동의 시간적 분절방식을 표현한다.이에 대해서는 이진경,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107-120쪽 참조.
 그리고 그러한 대응을 강제하기 위한 관리가 행해진다. 그것은 때로는 노동강도의 강화라는 형태로 진행되기도 하고, 때로는 과학과 효율성이 대변하는 생산성의 상승이란 형태로 진행되기도 한다. “일체의 게으름은 여기서 죽는다!”
공장에서 이처럼 시간을 선분화하고, 선분화된 시간에 따른 통제를 도입하는 것의 목적은 “무엇보다 사람들의 일관성없는 작업습관을 폐기하고 그들 자신을 복잡한 불변적 규칙성에 일치시키도록 훈련시키는 데 있었다.”Ure, The Philosophy of Manufactures, 15-16쪽, Marx, ?자본?, I-2 484쪽에서 재인용.
 다시 말해 그것은 자본이 요구하는 규율을 노동에 강제하고 노동자들의 생활을 통제하기 위해서다. 시간표라고 불리는 ‘기계’가,여기서 ‘기계’(machine)라 함은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그리하여 특정한 목적과 기능을 수행하는 모든 것을 지칭한다. “기계란 인간의 통제 하에 운동을 전달하고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각각 특정한 기능과 작동을 갖고 있는 고정적 요소들의 결합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기계야말로 진정한 기계다. 사회 기계는 그것이 不動의 動者(immobile motor)로서 나타나고 다양한 개입을 행하는 한 은유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문자 그대로 하나의 기계다.”(Deleuze/Guattari, L'Anti-Oedipe, tr. by Hurley et. al.,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Minnesota Uni. Press, 1983, 141쪽). 이러한 기계의 개념은 유기체적 생물 개념과 기계론적 기계 개념의 대립을 넘어서려는 것으로, 생명체의 자기 생산과 유지가 기계처럼 일관되고 통합된 기능적 단위를 이룬다는 점에서 “생물은 자기 자신을 만드고 재생하는 화학적 기계”라고 정의했던 생물학자 모노(J. Monod)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김필호, ?질 들뢰즈의 펠릭스 가타리의 욕망이론에 대한 연구?, 서울대 석사학위 논문, 1996년 2월, 29-30쪽, 43-46쪽 참조).
 그리고 나중에는 ‘시간관리’라는 통제기술이 중요해지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또한 시간의 내포적 이용과 관련해 중요한 것은 노동과 노동 사이에서 시간의 소실과 낭비를 제거하거나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다. 이는 분업이 발전할수록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를 위해 어떤 작업에서 다른 작업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단계적이고 연속적인 구성체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즉 동시에 행해지는 작업을 하나의 공통된 시간적 척도와 시간적 계열화를 통해 공시화(共時化, synchronization)해야 한다는 것이다.E. P. Thompson, 앞의 책, 370쪽.

여기서 시간-기계는 작업의 분할과 더불어 분할되고, 분할된 각각의 시간에는 특정한 동작이 대응된다. 또한 그렇게 분절되고 분할된 시간은 공장에서 행해지는 작업 전체의 공시화를 통해 단일성을 획득하는 단계적인 결합의 기초를 제공한다. 상이한 작업들이 효율적으로 분할되고 결합하는 기초로서 시간-기계는 근대적인 노동의 체제를 구성하는 하나의 축을 이룬다.

(2)노동과 공간-기계

근대에 이르러 시간이 단지 개념이기를 넘어서 ‘기계’였던 것처럼, 공간 역시 개념을 넘어서 ‘기계’로서 작동한다. 벽은 어떤 공간을 다른 공간과 구별하고 분리하며, 문은 그 상이한 공간을 넘나드는 흐름에 대해 주어진 공간을 개방한다. 벽은 닫고 문은 연다.벽은 동선의 흐름을 끊을 뿐이다. 문은 끊겨진 동선의 흐름을 다시 잇는다. 문이 닫힌다는 것은, 혹은 어떤 흐름을 끊는다는 것은 문이 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문은 열리기 위해 있는 것이다.
 학교나 공장, 사무실의 문은 그것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별하여 적절히 절단을 행하는 사람에 의해 열고 닫힌다. 이는 별도의 직책을 배정하지 않았을 뿐, 집도 마찬가지다. 벽과 문은 이런 점에서 사람들의 활동의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기계며, 이 기계들에 의해 열리고 닫히는 공간 역시 활동의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기계다. 공간-기계.
그런데 공간-기계의 작동은 단지 흐름의 절단과 채취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을 특정한 양상으로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학교나 공장, 사무실에 들어가기 위해서 사람들은 특정한 의복을 갖춘다. 그리고 그 각각의 공간은 허용되는 활동과 금지되고 배제되는 활동을 고유하게 갖고 있으며, 언행은 그 허용의 경계에 의해 제약된다. 밥먹기를 무슨 특권인 양 응석을 부리던 아이들이 유치원의 문턱을 넘으면 혼자 앉아 스스로 떠먹고, 책상에 앉기를 싫어하던 아이들 역시 학교의 문을 통과하면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있는다. 집에서는 언제나 느릿느릿 굼뜨던 남편도 작업대 앞에서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고, 아직도 소녀적인 몽상을 버리지 못한 아가씨도 사무실의 전화를 받으면 사무적인 목소리를 낸다. 활동의 형식으로서 공간. 
그러나 그 공간의 문을 나서면 그들은 모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행동을 바꾼다. 이는 시간이 학교나 공장을 넘어 집이나 거리에서도 활동의 형식으로 동일하게 작용한다는 사실과 대조된다. 시간이 활동 전체에 침투하여 일반성을 획득하는 내적인 형식이라면, 공간은 활동의 외적인 경계마다 다르게 작용한다는 점에서 외적인 형식이라고 하겠다.
자본은 자신에 고유한 시간-기계를 다양한 영역에서 흡수하고 발전시켜온 것처럼, 그에 고유한 공간-기계를 발전시켜왔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공장이라는 공간-기계다. 이는 생산 규모의 일정한 발전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특히 산업혁명을 통해 형성된 대공업은 이 공장-기계의 발전을 필수적인 요건으로 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발전 이전에 노동이 이루어지던 작업장(workshop)은 17-8세기 이전에는 집, 상점과 동일한 장소를 점하고 있었다. 그 시기 이후 집과 작업장은 분리되며,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그것은 ‘공장’이라고 불리는 별도의 독자적인 공간으로 변화된다.F. Braudel, Civilasation materielle, economie et capitalisme, tome 1, Les Structures du quotidien: Le possible et l'impossible, 주경철 역,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I: 일상생활의 구조?, (상), 까치, 1995, 396쪽.
 공장은 한마디로 ‘노동의 공간’이었다. 그것은 산 노동이 가치로 양화되는 공간이며, 동시에 자본주의 하에서는 ‘자연과의 대사과정’이 이루어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공장은 다른 공간과도 달리 다수의 노동자와 기계 등을 하나의 공간에 집결함으로써 성립된다. 공간적 집결. ?자본?에서 협업에 관해 서술하면서 맑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좀더 많은 수의 노동자가 같은 시간에 동일한 공간에서...동일한 종류의 상품을 위해 동일한 자본가의 지휘 아래 일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개념적으로도 자본주의적 생산의 출발점을 형성한다. 생산방식 자체에 관해서 말한다면 가령 초기의 매뉴팩춰는 동시에 동일한 자본에 의하여 사용되는 노동자의 수가 많다는 것 말고는 준프트적 수공업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그것은 준프트 장인의 작업장이 확대된 것뿐이었다.”K. Marx, ?자본?, I-2, 375쪽. 이탤릭은 원저자 강조, 고딕은 인용자 강조.


여기서 맑스는 협업의 효과를 공간적 집결의 효과로 정의하고 있다. 즉 생산방식 자체에 관한 어떠한 변화가 없는 경우에도 공간적 집결은 노동의 결합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확대된 생산성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노동대상은 동일한 공간을 좀더 단축된 시간에 통과한다. 다른 한편 예컨대 한 건물을 동시에 각 방면에서 만들기 시작한다면 협업자들은 동일한 일이나 동종의 일을 수행하는 경우라도 노동의 결합이 발생한다. 노동대상에 대하여 공간적으로 다면적으로 수행하는 144시간이라는 결합된 노동시간은...따로 떨어져있는 노동자의 12시간 노동일 12일보다도 신속하게 총생산물을 만들어낸다. 동일한 시간 안에서 생산물의 각각의 공간적 부분들이 성숙하는 것이다.”같은 책, 380-381쪽


이는 노동의 공간적 집결이 갖는 생산적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산방식 상의 변화가 없는 경우라면 ‘같은 시간’이라는 말은 공간적 집결을 설명하는 조건일 뿐이기 때문이다. 공장의 탄생은 노동을 대규모로 집결할 수 있는 공간-기계의 생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공간적 집결이 충분히 유효화되기 위해서는 집결되는 공간이 다른 공간들과 명확하게 구분되고 일정한 불연속을 통해 구획되어야 한다. 공간의 구획화. 어느 공간이나 다른 공간과 일정 정도 구분되며 성립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집도, 작업장도, 식당도, 공장도. 공간들의 구분은 공간 사이에 일정한 불연속이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근대 이전에는 이러한 공간적 불연속이 확고하지 않았고, 그런 만큼 구획의 경계는 불명료했다. 집과 작업장, 상점은 하나의 공간 안에 섞여 있었고, 사람들이 모여서 담소하거나 함께 놀고 어울리는데서 거리와 집은 근본적인 불연속성을 갖지 않았다. 
물론 공간의 성격에 따라, 불연속적인 단절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서구 중세의 나환자 수용소나 근대에 이르러 광인과 부랑자, 빈민과 게으름뱅이, 범죄자 등등을 가두었던 ‘종합병원’(L'Hpital general), 혹은 방어를 위해 성벽을 두른 중세 말의 도시 등이 그렇다. 근대에 이르면서 부분 공간 사이의 불연속은 강화된다. 공장은 그러한 경우의 대표적인 경우다. 

“...‘나태와 방탕 또는 낭만적인 자유의 환상을 근절하기 위해서, 나아가서 구빈세의 경감과 근로정신의 조장 및 매뉴팩춰에서의 노동가격 인하를 위해서’, 자본의 충실한 대변인인 우리의 에카르트는 공적 자선에 의지하고 있는 이러한 노동자를 하나의 ‘이상적 구빈원’에 가두어 두자는 든든한 수단에 제안한다. ‘이러한 집은 공포의 집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자본의 혼이 아직 꿈만 꾸고 있던 1770년의 피구휼민을 위한 공포의 집이 불과 몇년 뒤에는 매뉴팩춰 노동자 자신을 위한 거대한 ‘구빈원‘으로 나타났다. 그것이 바로 공장이었다.”같은 책, I-1, 321-322쪽. 강조는 인용자.


이런 점에서 맑스는 공장은 ‘완화된 감옥’이라는 푸리에의 말에 동의를 표시한다.같은 책, I-2, 487쪽.
 이는 공장이란 수용소나 감옥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다른 영역과 단절된, 그리하여 거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노동자들의 행동을 강제하고 통제할 수 있는 공간-기계다. 공장이라는 공간-기계는 이미 다른 공간과 구별되는 공간적 ‘구획’이며, 그 구획을 통해 이전에는 소통되던 공간에 절단과 불연속을 도입한다는 것이다. 이 절단은 앞서 맑스 말처럼 노동자들의 노동을 자본가들이 바라는 방식대로 강제함으로써 그 결과를 착취/채취하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장이라는 공간-기계는 공간 자체를 특정한 방식으로 분할하고 구획하는 방식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구획을 통해 각각의 공장은 그 외부의 공간과 이질적인 것이 되며, 동시에 공장 내부적인 완결성과 동질성을 강화한다. 공간적 집결이 공간적 구획을 전제하며, 이러한 전제를 실제로 만들어간다. 공간의 구획화를 통해서 부르주아지는 공간을 장악하고 통제할 수 있으며, 이는 그 공간 안에서 노동자들의 행동과 사고를 장악하고 통제할 기초를 제공한다.
공간적 구획화는 이런 점에서 공장이라는 공간-기계가 다른 공간과 구별되면서 정립되는 분절의 양상을 규정한다. 즉 그것은 각각의 공장이 다른 공장과 사이에 경계를 만드는 방식을 보여준다. 이로써 각각의 공장은 노동의 공간적 집결이 이루어지는 독립된 공간-기계가 된다.
이처럼 구획된 공간 안에서 노동의 집결은 노동 자체를 변화시키며, 집결된 노동들의 새로운 분배를 야기한다. 그것은 시간과 유사하게 한편으로는 분할의 방향을 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결합의 방향을 취한다. 근대적 분업의 발생지로서 매뉴팩춰에 대해 서술하면서 맑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매뉴팩춰 내의 분업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분명히 파악하는 것이다. 첫째, 생산과정을 그 특수한 부분들로 분할하는 것은 수공업을 각종 부분작업들로 분할하는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둘째, 이 분업은 하나의 특수한 협업이다...”?자본?, I-2, 393-394쪽.


첫째, 공간적 분할의 방향에 대해서. 스미스의 고전적인 서술이그는 ?국부론?에서 핀을 만느는 작업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첫 번째 사람은 철사를 펴고, 두 번째 사람은 곧게 다듬고, 세 번째 사람은 자르고, 네 번째 사람은 뾰족하게 하고, 다섯 번째 사람은 머리를 붙이기 위해 끝을 간다. 머리를 만드는 데에도 두세 가지 별개의 작업이 필요하다. 머리를 붙이는 작업이나 핀을 하얗게 만드는 작업도 독립적인 일이다. 그리고 핀을 종이에 싸는 일도 그 자체로서 하나의 작업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핀을 만드는 작업을 18개의 부분 작업으로 분할한다(A. Smith,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김수행 역, ?국부론?, (상), 동아출판사, 1992, 14쪽).
 잘 보여주듯이 근대적 생산의 기초를 이루는 분업은 하나의 작업을 여러 가지 부분 작업들로 분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맑스는 “매뉴팩춰는 협업의 조건을 단지 그대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수공업적 활동의 분해에 의하여 처음으로 창조하는 것”이라고?자본?, I-2, 400-401쪽.
 말한다. 이는 공간-기계로서 근대적인 공장체계의 원리를 이루는 것이다. 맑스가 자주 인용하는 유어 박사의 말: “공장체계의 원리는 육체적 기술을 기술과학으로 대체하며, 또한 한 가지 과정을 그것의 본래적 구성요소로 분할함을 의미한다.”A. Ure, Philosophy of Manufacture, P. Thompson, The Nature of Work: An Introduction to Deates of the Labour Process, 심윤종/김문조 역, ?노동사회학: 노동과정에 관한 제논쟁?, 경문사, 1987, 47쪽에서 재인용.

작업의 분할은 두 가지 변화를 수반한다. 하나는 그 분할된 작업에 작업하는 노동자를 대응시키는 것이다. ‘배비지(Babbage)의 원리’는 이것을 노동력의 구매에까지 적용하려는 것이다. “제조업주는 작업을 각기 다른 기능과 힘을 필요로 하는 몇 개의 과정으로 구분함으로서, 각 과정에 필요한 양만큼의 기능과 힘을 구입할 수 있게 된다.”C. Babbage, On the Economy of Machinery and Manufactures(1832), Braverman, Labour and Monopoly Capital, 이한주/ 강남훈 역, ?노동과 독점자본?, 까치, 1987, 77쪽에서 재인용.
 이로써 노동력의 구매비용은 노동자의 종합적인 능력으로 구매할 때보다 저렴해진다는 것이다.H. Braverman, 앞의 책, 79쪽.
 
다른 하나는 공간의 분할이다. 공장이라는 공간은 이제 이 분할된 작업에 대응하여 분할된다. 그리고 그 분할된 각각의 공간적 장소에는 분할된 작업이 기능으로 대응하고, 그 기능을 수행하는 장소에 기능을 수행하는 노동자가 배치된다. 이로써 그 장소는 개별화되고, 요구되는 기능에 의해 수행되는 작업이 개별적으로 통제되고 평가될 수 있는 조건이 확보된다. 그리고 이 분할된 공간에 배치된 노동자는 “자신의 신체를 그 작업을 위한 자동적이고 전문화된 도구로 전환시키고,”?자본?, I-2, 394쪽.
 노동자가 갖고 있는 노동능력은 그 각각의 공간적 장소에 할당된 ‘기능’으로 환원된다. 기능에 의한 공간의 분할과 장소의 할당 및 고정, 이것은 공장에서 공간-기계가 작동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둘째로 공간적 결합의 방향에 대해서. 이 분할된 공간에 고정되어 행해지는 저 분할된 작업들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며, 연관된 다른 작업과 결합됨으로써만 유의미한 결과로 전환된다. 분할된 작업들의 공간적 분배와 작업 순서에 따른 반복적 계열화를 공장이라는 공간-기계가 내장하고 있는 것이다. 공간적 배열. 이런 점에서 분업은 이전에는 시간적인 계기를 통해 이루어지던 작업들이 공간적으로 병존되고 공간적인 분포 안에서 계열화되는 것이다. 

“일정량의 원료, 예를 들면...바늘 공장에서 철사를 본다면, 이는 각각의 부분노동자들 손에서 시작해 그 최종적 형태에 이르는 생산단계를 시간적으로 순차적으로 통과한다. 하지만 반대로 [분업이 행해지는] 작업장 전체를 하나의 전체 기구로 본다면 그 원료는 동시에 그 모든 생산단계에서 동시에 발견된다...각 단계적 과정은 시간적 계기로부터 공간적 병렬로 변환된다.”같은 책, 400-401쪽. 강조는 인용자.


다른 한편 공장이라는 공간-기계가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분할된 각각의 장소에 배치된 사람들의 행위를 일정하게 양식화해야 한다. 공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분업은 각각의 작업에 대해 “주어진 시간 안에 주어진 성과가 이루어진다는 전제” 위에 성립하며, 이 경우에만 시간적 작업의 공간적 배치는 유효하고 효과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단순협업과도 전혀 다른 종류의 연속성과 일관성, 규율, 질서 및 노동 강도가 발생한다.”같은 책, 401쪽
 이를 통해 각각의 작업은 다른 작업과 조화될 수 있고 전체적으로 통제될 수 있도록 양식화되어야 한다. 
이는 공장 안에서 사람들의 행위를 두 가지 방향에서 양식화한다. 하나는 노동자에 관한 것으로, “동일한 노동자를 동일한 세부노동에 긴박함으로써만 이러한 사회적 조직은 달성된다.”같은 책, 401쪽
 연결과 결합에 따른 시간 소모를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 각각의 작업에 요구되는 규율은 고유한 양적 기준을 갖게 되고 근대적 시간-기계에 의해 활동의 절단과 채취가 이루어진다. 다른 하나는 자본의 지휘와 감독, 감시와 규율이 긴요하게 된다.같은 책, 384-385쪽
 “노동수단의 획일적인 운동으로 노동자가 기술적으로 종속되어 있고 남녀를 불문하는 연령층의 개인들로 이루어져 있는 노동체의 독특한 구성은 하나의 병영적인 규율을 만들고, 이 규율은 완전한 공장체제에 다다를 때까지 이미 앞에서도 말한 바의 감독노동을 발전시키고 나아가서 근육노동자와 노동감독자로의...노동자의 분할을 완전히 발전시킨다.”같은 책, 434쪽

요컨대 공장이라는 공간-기계는 다른 공간과 불연속성을 갖는 고유한 공간으로 구획되면서 성립되는데, 공간적인 분할과 공간적 배열을 통한 공간적 결합의 방식을 통해서 노동이 행해지는 공간적 지반을 작동시킨다. 그리고 이 공간-기계는 각각의 노동자의 행동을 양식화시키는 방식으로 노동자의 활동을 장악하고 통제한다. 이런 점에서 공장에서 작동하는 공간-기계는 시간-기계와 마찬가지로 근대적인 노동의 체제를 구축하는 또 하나의 축을 이룬다. 

(3)노동과 ‘기계’-기계

알다시피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적 대공업은 ‘기계’를하지만 기표의 동일함으로 인한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 절에서는 공장에서 사용되는, 기계론적인(mecanique) 방식으로 작동하는 기계는 일상적인 용법에서 ‘기계’라고 불리는 것이란 점에서 ‘기계’라고 표시하고, 기계적인(machinique) 방식(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방식으로)으로 작동하는 기계는 앞서와 마찬가지로 그대로 기계라고 쓰겠다.
 통해 성립된다. ‘기계’는 공장의 기본적인 구성요소다. 또한 공장에서 행해지는 노동이 이제 ‘기계’를 피해갈 수 없으며, 차라리 ‘기계’를 통해 행해지기에, ‘기계’는 노동의 체제를 구성하는 또 하나의 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기계’는 노동의 형태와 리듬에 대해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기계’와 더불어 행해지는 어떠한 노동의 흐름도 바로 그 ‘기계’의 운동형태와 리듬에 의해 절단되고 채취된다. 이런 점에서 ‘기계’ 역시, 우리가 앞서 사용해 온 포괄적인 의미의 기계로 정의될 수 있다. ‘기계’-기계. 
?자본?에서 맑스는 ‘기계’를 정의하는 것의 난점을 거론하면서, 역사적인 요소를 포착할 수 있는 ‘기계’의 개념을 요구하고 있다.?자본?, I-2, 428쪽.
 즉 ?자본?에서 다루어지는 ‘기계’ 개념은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 노동방식의 변화 등과 관련된 것이고, 직접적으로는 산업혁명을 통해 전적으로 공장에 도입된 경제학적 개념이다. 
여기서 맑스가 ‘기계’를 정의하는 방식은 매우 특이하다. 예컨대 인간이 동력인가 자연력이나 인공력이 동력인가 하는 어떤 요소에 의해 ‘기계’를 정의할 수 없다고 본다. ‘기계’는 일정한 부분요소들의 계열화된 집합체로서 정의된다. 즉 ‘기계’는 동력기, 전동장치, 도구 내지 작업기라는 본질적으로 상이한 3개의 부분이 접속됨으로써 이루어진다.같은 책, 429쪽.
 그리고 이 중에서도 동력기는 초기부터 갱신되기 시작한 부분이며, 작업기는 산업혁명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갱신되기 시작한 부분인데, 작업기의 갱신이야말로 18세기 산업혁명의 출발점이라고 한다.그리고 이어서 기계체계의 개념이 정의된다. “노동대상이 일련의 상호보완적인 각종 작업기에 의하여 수행되는 서로 관련된 한 계열의 부분과정들을 통과할 때 비로소 진정한 기계체계가 개개의 독립적인 ‘기계’ 대신에 등장하게 된다...이제는 이 협업이 특수한 기능을 가진 작업기들의 결합으로 나타난다.”(같은 책, 436쪽)
 
그런데 이러한 ‘기계’의 계열은 노동자라는 전혀 다른 요소와 접속될 자리를 내포하고 있다. 노동자는 계열화된 집합체인 ‘기계’와 접속됨으로써 작업한다. 동력기--전동장치--작업기--노동자의 새로운 계열. 노동자의 ‘기계’로의 이러한 계열화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결과를 수반한다. 
첫째, “공장의 모든 운동은 노동자로부터가 아니라 기계로부터 출발”하며같은 책, 436쪽.
 ‘기계’가 작업에서 중심의 자리를 차지한다. 더불어 ‘기계’의 특성에 노동과정이 맞추어진다. 예를 들어 24시간 주야 교대노동이 가장 많이 행해지는 용광로, 단철, 압연 공장 등의 금속공업에서는 그러한 연속적 교대 노동에 대해 용광로라는 ‘기계’로써 정당화한다. 맑스는 자본가 샌더스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에 용광로가 특별한 소실의 원인이 될 것이다. 용광로의 불을 끄지 않고 그대로두면 연료가 낭비되고..., 또 그 불을 꺼뜨리면 다시 불을 붙여 필요한 온동에 이르기 까지의 시간적 손실이 생길 뿐 아니라...용광로 자체도 온도의 변화 때문에 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자본?, I-1, 307쪽에서 재인용.

둘째, 노동자가 ‘기계’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기계’가 노동자를 사용한다. “매뉴팩춰에서는 노동자가 도구를 사용하는데 반하여 공장에서는 기계가 노동자를 사용한다. 전자에서는 노동수단의 운동이 노동자로부터 출발하는데, 후자에서는 노동자가 노동수단의 운동을 뒤따라가야 한다. 매뉴팩춰에서 노동자들은 하나의 살아있는 기구의 구성원이다. 공장에서는 하나의 죽은 기구가 노동자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며, 노동자는 살아 있는 부속물로서 그 기구에 합체되어 있다...어떠한 자본주의적 생산도 노동자가 노동조건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노동조건이 노동자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공통된다.”같은 책, 482-483쪽.

셋째, ‘기계’는 자신과 하나가 되도록 노동자를 훈육한다. “노동수단의 규칙적 운동에 노동자를 기술적으로 종속시켜야 하며, 그리고 남녀노소의 구별없는 개개인으로 이루어져 있는 노동체의 독특한 구성은 하나의 병영적인 규율을 만든다. 이 규율은 공장에서 완전히 제도로서 정교해지고, 또 이미 말한  감독노동을 완전히 발전시킴으로써 노동자를 육체적 노동자와 노동감독자로, 산업병사와 산업하사관으로 분할하게 된다.”같은 책, 484쪽.
 
선분적인 시간에 대응되는 동작의 관리나, 주어진 공간적 위치에 대응되는 동작의 관리는 그 자체만으로는 구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준선이지만, 그 기준선에 따르는가 여부는 감독자의 통제를 필수적 조건으로 하는데, 동작마다 확인하고 일일이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테일러가 고안한 시간적 단위동작이나 길브레스가 연구한 과학적 동선은 그 자체만으로는 노동자의 신체를 포섭하고 장악하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테일러는 3명당 1명의 감독자를 붙일 것을 제안하기도 했던 것이다.
기계는 노동자를 기계에 계열화하고, 노동 자체를 기계화함으로써, 그리하여 노동대상의 흐름을 기계화함으로써 이러한 통제의 기술을 현재화된다. 공장의 모든 운동의 출발점을 장악한 기계는, 기계적으로만 움직인다는 바로 그 점으로 인해 노동자개인의 자의적인 움직임을 배제하고 자신의 움직임에 노동자의 움직임을 일치시킨다. 거기에 맞추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여기서 기계는 요구되는 시간적 단위기준과 공간적 동작을 스스로에 물질화하고 있으며, 이로써 개별 노동자의 동작 하나하나에 기계화된 시간적 기준과 동작의 기준을 물질적으로 강제하고, 각 동작의 성과를 확인하고 평가한다. 더불어 그러한 동작의 반복은, 처음부터 직업적인 강도로 개개인의 신체를 훈련시키고 훈육시킨다.
결국 자본주의의 공장에서는 “자동장치가 그 주체고 노동자는 그저 의식있는 기관으로서 자동장치의 의식없는 기관과 병렬되어 이 기관과 함께 중심적 동력에 종속되어 있을 뿐이다.”같은 책, 479쪽.
 그 결과 “공장 전체에 대한, 따라서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의 절망적인 종속이 완성된다.”같은 책, 482쪽. 이런 점에서 맑스는 운동의 출발점이 된 중심기계를 자동장치(Automat)일 뿐아니라 독재자(Autokrat)라고 표시하는 유어(Uhr) 말을 인용하고 있다: “이들 큰 작업장에서는 증기라는 인자한 군주가 자신의 주위에 무수한 신하를 거느리고 있다.”(같은 책, 479쪽에서 재인용)
 이제 노동자 없는 ‘기계’는 생각할 수 있어도 ‘기계’ 없는 노동자는 생각하기 힘들어진다. ‘기계’의 중심화.
‘기계’가 작업의 중심의 자리를 차지하고, 노동자의 동작이 ‘기계’ 자체에 종속됨에 따라, 이제는 노동 자체가 ‘기계’를 통해 형태화되고 기능화된다. 노동이 ‘기계’에 계열화됨으로써 노동자는 ‘기계’의 일부가 되며, 노동 자체가 기계화(mecanisation)된다. 여기서 기계화는 노동 내지 동작이 '기계'적이고 반복적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은유가 아니다. 노동하는 동작은 ‘기계’를 통해 정의되며, ‘기계’의 운동과 주기성, 리듬에 따라 행해진다는 점에서 노동 자체가 ‘기계’ 운동의 일부가 된다.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대다수를 차지하던 수공업에서는 장인들의 섬세하고 치밀하게 코드화된 기술--비기(秘技)--가 특권적인 자리를 점하고 있었고, 그것은 부분적인 작업을 하는 자에게도 숙련된 코드화된 기술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치 역학이 복잡한 ‘기계들’의 운동을 단순한 ‘기계’적 과정의 복합과 반복으로 환원했듯이, 기술공학은 기계화될 수 있는 형태로 운동을 분석하여 노동에 요구되는 작업을 단순하고 동질적인 동작의 요소들로 환원시켰다. 소수의 기본적 운동형태들로 운동과 동작은 요소화된다.“대공업은 인간에 대하여 인간 자신의 사회적 생산과정을 은폐하고 또 자연발생적으로 특수화된 각종 생산부문들을 국외자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각 부문에 통달한 사람들에 대해서까지 수수께기로 만든 그 장막을 찢어버렸다. 대공업의 원리, 즉 각 생산과정을 그 자체로서 파악하며 그것을 구성요소들로 분해하는 것...은 새로운 근대적 과학인 기술공학을 낳았다...기술공학은 또한 인체의 모든 생산적 활동이 필연적으로 취하게 되는 그러한 소수의 기본 운동형태들--비록 사용되는 도구들은 다양하더라도--을 발견하였다...”(같은 책, 551쪽)
 나아가 노동과 그 리듬이 ‘기계’의 운동과 리듬의 일부로 통합된다. 즉 노동자가 ‘기계’의 일부로 계열화됨에 따라 노동은 ‘기계’의 운동과 리듬에 포섭된다. 이로써 노동의 동선은 ‘기계’의 동작의 일부가 된다. 동선이 ‘기계’로 영토화된다. 
이는 또한 노동의 시·공간적 형식이 요구하는 양식화된 동작의 형성과 결부된 것이다. 여기서 ‘기계’는 그러한 양식화된 행위의 기술적이며 물질적인 기초다. 기본적이고 요소적인 형태의 동작에 기초한 병영적인 규율은 이를 현재화하게 하는 사회적 요인이다. 


3.근대적 노동의 미시정치학

(1)노동하는 신체의 해부정치학

시간-기계와 공간-기계, ‘기계’-기계는 서로 교차하면서 근대적인 노동의 양상을 규정한다. 자본주의의 발전이 진행됨에 따라서 한편으로 그것은 상품화하고 가치화하려는 의지가 닿는 만큼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시켜왔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더욱더 미세하게 분할된 치밀한 작용의 지점을 확보해왔다. 엥겔스가 서술한 시대에 시간-기계는 단지 출근시간을 통제할 수 있었을 뿐이지만, 그리고 스미스의 시대에 작업은 철사를 다루는 몇몇 동작으로 분할되었을 뿐이지만, 20세기에 이르면 각각의 동작은 들어올리기, 이동, 내리기, 회전 등과 같이 그 자체만으론 아무 것도 생산할 수 없을 것같은 역학적인 단위동작으로 분해되었고, 그 단위 동작마다 1초 이하의 시간이 기준으로 할당되어 동작의 속도와 형태를 규정하게 된다. 
이처럼 자본은 가용한 모든 경험과 지식, 혹은 과학을 동원해 매우 날카롭고 섬세한 칼날로 노동을 분석하고 해부한다. 그리고 노동의 모든 틈새에 칼날을 밀어 넣고는 쪼개고 또 쪼갠다. 그리고 그 쪼개진 각각의 동작을 시간과 공간, ‘기계’의 축을 따라 배열하고 조립한다. 단순화해서 정리하자면, 시간-기계는 노동을 시간적 규율에 따라 규범화하려 하고, 공간-기계는 양식화된 동작의 도식에 따라 노동을 동질화하려 하며, ‘기계’-기계는 역학적 요소 동작에 따라 노동을 표준화하려 한다. 이로써 시간-기계와 공간-기계, ‘기계’-기계는 통제의 일반적 형식을 제공하면서, 조밀하고 정밀한 세 겹의 망으로 노동 자체를 감싸고 노동 자체에 침투한다. 
여기서 시간-기계와 공간-기계, ‘기계’-기계에 의해 작동하는 권력이 겨냥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노동자의 신체다.M. Foucault, Surveiller et punir, 박홍규 역, ?감시와 처벌?, 강원대 출판부, 1989, 184쪽.
 그것은 주어진 단위 시간 안에, 주어진 공간에서 주어진 동작을 반복할 수 있는 신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것은 그러한 요구에 맞는 신체를 생산하려 한다. 기계의 움직임과 리듬에 따라 기계화된 동작을 반복하는 신체, 개인적인 특성을 뛰어 넘어 주어진 기능을 양식화된 동작으로 정확하게 수행하는 신체, 그리고 할당된 시간 안에 주어진 동작을 완수할 수 있는 신체.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제 노동과 노동자의 신체는 권력의 표적이 되고, 이러한 신체를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과학, 새로운 지식이 형성된다. 신체의 해부학적 분할과, 분할된 신체의 미시적 동작에 대한 역학적 연구, 그것을 통제하는 기계적 메카니즘에 대한 연구, 그리고 그것을 위한 신체적 훈육의 기술들. 여기서 근대적 노동의 미시정치학의 한 축을 이루는, 노동하는 신체에 대한 해부정치학이 형성된다. 

“이 경우 신체의 작용, 곧 신체의 구성요소와 동작 및 행위에 대한 계산된 조작인 강제권에 의한 정치가 형성된다. 신체는 권력장치 속에 포함되며, 그 장치는 신체를 검사하고 분해하며 재구성한다. ‘권력의 역학’의 일종이기도 한 ‘정치해부학’이 탄생하는 것이다.”같은 책, 186쪽.


이후 신체의 동작에 대한 기술은 이른바 ‘생체-공학’을 낳고, 생체-공학은 과학의 이름으로 기계와 도구는 물론 부엌과 사무실의 설계에까지 명시적으로 도입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해부학적 치밀함을 수반하는 이러한 신체의 생산이, 그리고 그러한 신체를 생산하는 기술이 단순히 일련의 정해진 동작을 강제로 밀어부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신체적 억압과 부자유의 양상을 취하지 않으며, 차라리 역학적 효율성과 신체적 유용성의 형태로 제시된다. 가장 힘을 적게 들이고 가장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그래서 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정확하게 작업할 수 있는 동선의 연구, 그리고 주어진 시간 안에 그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신체의 훈육. 이런 점에서 그것은 정확하게도 과학의 형상을 취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신체와 동작, 신체와 기계에 “가장 좋은 관계를 강제하는 것”을 추구한다.같은 책, 204쪽.
 그것은 유용한 활동을 위한 ‘훌륭한 습관’을 형성한다. 
다른 한편 단계적 진행에 따른 작업의 공간적 배열과 그 배열된 작업의 시간적인 진행은 작업하는 노동자 각각을 다른 노동자의 ‘적절하고 훌륭한’ 작업을 위한 조건으로 만든다. 내가 늦게 일하면 그 뒤에 있는 다른 모든 노동자가 늦어지게 되며, 내가 일을 멈추거나 잠시 빠져나가면 그 뒤에 있는 모든 노동자들이 일할 수 없게 되며, 내가 대강 엉성하게 작업을 수행하면 다른 노동자의 작업 전체가 수포로 돌아간다. 직무에 대한 성실함이나 책임감이 단지 자본가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바로 자신 스스로 추구해야 할 ‘미덕’이 되는 것은, 그리하여 노동자 스스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삶의 덕목이 되는 이러한 관계의 산물이 아닐까? 유능함에 대한 경의 역시 기계에 대한 유용한 기술, 유용한 지식에 대한 경의며, 훌륭하게 기계화된 신체에 대한 찬탄이다. 일상적인 미덕으로서 정확한 시간‘관념’ 또한 노동이 행해지는 이 근대적인 체제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부지런함, 성실함, 정확한 시간관념, 유능함은 이제 자신의 ‘욕망’이 된다. 노동의 도덕이란 이러한 근대적 노동의 형식을 통해 형성된 욕망의 배치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따라서 노동하는 신체에 작용하는 권력은 그것이 유용함의 형태로 수행되기에 더욱 효율적으로 순종하게 되는 신체를 생산한다. 순종할수록 유용하며, 유용함을 추구할수록 순종하게 되는 권력. 복종할수록 유용한 기술, 유용한 지식, 유용한 능력을 획득하게 되는 권력. 하지만 유용한 만큼 잘 드러나지 않으며, 유용한 만큼 벗어나기도 쉽지 않은 권력. 그리하여 유용함에 안주하는 한, 새로운 활동과 새로운 삶의 방식을 위해 유용함을 이용하기보다는, 유용함에 이용당하게 되기 마련인 그러한 권력의 배치. 

(2)과잉인구의 생체정치학

근대적인 노동과 노동하는 신체에 대한 해부학적 분할과 통제에 기초한 근대적 노동의 해부정치와는 다른 방식으로 근대적인 주체를 생산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메카니즘이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전면적으로 발전하기 위한 조건에 내재되어 있으며, 자본의 일상적인 축적 조건 자체에도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맑스는 이를 ‘과잉인구’라는 개념으로 표시한다.
임노동자 계급은 근대 이전인 14세기 후반에 이미 발생하였고,?자본?, I-3, 827쪽.
 포괄적인 의미에서 자본 역시 중세 후기에 이르러 발전한 도시에서 이미 출현한 바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중세의 섬에서 나타난 부분적인 현상에 불과했고, 자본주의가 그 기초를 사회 전체의 수준에서 마련하게 되었던 것은 16-17세기 이후며, 전면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산업혁명이 있었던 19세기 이후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자본주의가 그 기초를 전 사회적인 수준에서 확립하게 된 계기는 이른바 ‘본원적 축적’이라고 불리는 사건을 통해서였다. 
15세기-16세기에 시작된 본원적 축적은 공유지는 물론 농민들의 보유지를 광범하게 수탈하는 과정이었고, 이로써 한편으로는 자본을 집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토지로부터 분리된 무산자들을 생산하는 과정이었다.같은 책, 805쪽 이하.
 이 과정을 통해 일할 수단을 잃고 ‘놀거나’ 부랑하는 빈민들이 전 사회적인 수준에서 엄청나게 생산되었다. 그것은 자본에 의한 생산수단의 독점으로 인해 노동할 조건을 상실한 생산적인 힘의 통제되지 않는 범람이었다. 생산의 조건에서 분리되었기에 결코 생산적인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 힘의 범람. 따라서 그들은 자본은 물론 사회의 이름으로 비난받고 핍박받는 자들이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러한 부랑자들은 인간의 범주에 들지 못하는 사회적 ‘해충’이었다. 그들은 사회적 질서와 발전을 위해 제거되고 소멸되어야 할 ‘타자’들이었다. 입법들은 그들을 ‘자유의지’에 의한 범죄자로 취급하였으며, 그들이 노동하지 않는 것을 그들의 의지의 결여에서 찾았다.같은 책, 824쪽.
 따라서 그들은 “짐차 뒤에 결박되어 몸에서 피가 흐르도록 매를 맞고 그 뒤에는 그들의 출생지나 그들이 최근 3년간 거주하던 곳으로 돌아가서 ‘노동에 종사’해야 했다... 그리고 부랑자로 다시 체포되면 태형에 처하고 귀를 절반 자르며, 세 번 체포되면 중죄인으로서 ‘공동체의 적’으로 규정되어 사형에 처해졌다.”같은 책, 824쪽.
 1547년 영국의 법에 따르면, ‘노동하는 것을 거절하는 자’는 그를 게으름뱅이라고 고발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했다.같은 책, 824쪽.

이로써 자본이 지배하는 ‘새로운 시대’(Neue Zeit; 근대!)에 걸맞는 새로운 인간이 정의된다. 그것은 저 ‘노동하기를 거절하고’ 부랑하는 자들과는 달리, 정착하여 착실히 노동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시기에 이러한 정의는 긍정적으로는 결코 성립될 수 없는 것이었다. 실제로 착실히 노동할 수 있는 땅도, 혹은 자본에 (추가로) 고용되어 노동할 수 있는 작업장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도덕이나 규범으로서 사람들에 작용하는 ‘정상인’의 정의가 되기 위해서는, 그 외부에 있는, 결코 그래선 안되는 저 부랑자들의 부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는 국가권력까지 동원해서, 이후 부르주아지가 다양한 덕목으로 추앙하게 될 형상과 정반대의 모습을 취하는 저 ‘해충들’을 생산하면서 시작했던 셈이다. 이런 점에서 본원적 축적이란 어쩌면 자본 자신이 경멸하고 비난하며 처벌을 종용하는 저 ‘해충들’을 전 사회적으로 집적하는 과정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잠재적인 저 노동자들을 정상적인 형태로 자신의 지배 아래 포섭하기 위해 ‘타자’들을 양산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정상의 조건으로서 비정상, 인간을 정의하기 위한 조건으로 비인간, 노동자의 정상적 형상의 조건으로 부랑자.
근대인의 ‘타자’는 단지 자본주의의 발생지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알다시피 자본의 축적에 관한 맑스의 연구에서 핵심은 자본축적의 일반적 법칙이란 생산력 발전에 따라 유기적 구성이 상승하고 그로 인해 노동 인구를 기계가 대체함으로써 항상적으로 과잉 인구가 형성된다는 것이었다. 즉 자본축적의 일반법칙이란 자본주의적 인구법칙이라는 것이 맑스의 결론이었다. 
베버는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생활양식의 형태를 프로테스탄티즘의 종교적 에토스를 통해서 보여준 바 있다. 그것의 요체는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억제하여 축적하는 자본가, 혹은 시간을 아껴쓰며 자신에 맡겨진 천직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합리적 근대인이었다.M. Weber, 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 박성수 역,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문예출판사, 1988. 
 근대적 노동자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이러한 종교적 에토스로 환원될 수는 없다고 해도, 저 근대인의 상은 자본이 요구하는 노동자의 정상적인 형상을 표상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자본은 축적을 수행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이 가진 형상과 반대의 모습을 취하는 실업자를 생산해낸다는 것을 맑스는 보여주고 있다. 즉 자본의 축적은 근대인의 타자인 실업자를 과잉인구 형태로 항상적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정신’이 맹렬히 비난하는 병리적 현상으로서 실업과 게으름, 빈곤이 바로 자본 축적의 산물이라는 것을 맑스는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요컨대 과잉인구화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정상적 과정이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과잉화시키고 유휴화시키는 타자화과정을 내포한다는 것을 뜻한다. 
나아가 이러한 과잉인구는 자본의 정상적인 축적에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 한편으로는 과잉인구는 노동의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작용하는 전제요 배경이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행해지는 노동의 수요와 공급의 법칙의 작용은 자본의 독재를 완성한다.”?자본?, I-3, 724쪽.
 다른 한편 이는 아직 취업하고 있는 노동자들에 대해 실업화하려는 압력을 일상적으로 행사한다. 실업화 압력. 그것은 자본에 대해 대항하거나, 자본에 복종하지 않는자를, 나아가 자본의 요구에 적절하지 않게 된 자를 일차적인 실업화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자본에 대한 복종과 충성을 강요한다. 실업을 면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형태의 노동에도 적응해야 하고, 갑작스런 업무나 배치의 변경에도 순응하여야 한다. 이런 조건으로 인해 기계화된 동작의 도식, 강도(强度)를 수반하는 시간적-기계적 강제는 아무리 고통스런 것이어도 감내해야 하며, 그렇지 못한 자는 무능력하거나 불성실한 자로서 쫓겨날 각오를 해야 한다. 즉 그것은

“노동과정에서 노동자를 그 비열하고 가증스런 [자본의] 독재에 굴복시키고, 그의 전체 생활을 노동시간으로 전환시키며, 그의 처자를 저거노트의 수레바퀴(Juggernaut-Rad) 밑에 던져 넣는다...[그리하여] 상대적 과잉인구, 또는 산업예비군을 언제나 축적의 규모 및 힘과 균형을 유지하게 하고 있는 그 법칙은 헤파이토스의 쐐기가 프로메테우스를 바위에 못박은 것보다 더 단단하게 노동자를 자본에 못박는다.”같은 책, 729-730쪽.


이로써 자본은 그 구체적인 물적 형태와 기술적 형태, 그에 요구되는 노동의 형태에 무관하게 노동력을 채취하여 이용할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한다. 
따라서 “과잉인구가 축적의 필연적 산물, 혹은 자본주의적 토대 위에서 부의 발전이 야기하는 필연적 산물이었다면, 이번에는 이 과잉인구가 자본주의적 축적의 지렛대로, 심지어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생존조건으로 된다. 과잉 노동인구는 마치 자본이 자기의 비용으로 육성해 놓은 것인 양 절대적으로 자본에 속하며 자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산업예비군을 형성한다.”같은 책, 715쪽.
 정의상 이미 자본주의의 외부며 타자에 속하는 이 산업예비군 내지 실업자가, 자본이 정상적으로 축적되기 위한 내적 조건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실업자나 취업하려는 자는 생존을 위협하는 저 ‘자유’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떠한 종류의 일이나, 어떤 고통스런 규율도 감수하려는 의지를 갖게 된다.

“대공업은 바로 그 공황을 통해 노동의 전환을, 따라서 노동자들로 하여금 다양한 종류의 노동에 최대한 적응하는 것을 일반적인 사회적 생산 법칙으로 만들어버리며, 이 법칙의 정상적인 실현을 위해 다양한 관계들을 적합시키는 것을 자신의 사활을 건 문제로 만들어 버린다...[그것은] 자본주의적 착취의 필요를 위해 궁핍한 상태에 묶어두고 있는 저 산업예비군이라는 괴물을, 인간을 절대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대체하는 것, 즉 사회의 세부적 기능의 담당자인 부분적 개인을...어떠한 종류의 노동이라도 절대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개인으로 대체하는 것을 사활적인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자본?, I-2, 552-553쪽.


새로운 생산부문에 진출한 자본, 새로운 기계를 채택한 자본, 그리고 생존을 위협하는 노동조건을 수반하는 작업이 기꺼이 새로이 적응하겠다는 의사를 갖춘 노동자들을 언제든지 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항상적인 실업화 압력 속에서 노동하는 취업자들 역시 경우는 크게 다르지 않다. 
실업자의 일상적 생산을 통해서, 혹은 실업화 압력을 통해서, 자본은 노동자의 임금을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인간’의 경계 내부에 들어가기 위한, 혹은 그 안에 살아남기 위한 노동자들의 경쟁을 만들어낸다. 이 경쟁은 노동자들 사이에 개별화의 분리선을 긋는다. 이제 다른 노동자는 모두 자신의 경쟁자요 적이다. 노동자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것을 끊임없이 확인해 주어야 한다. 고용을 위한 노력은 그 경쟁에서 성공하기 위해 ‘자신 스스로 선택한 문제’요 자신의 ‘욕망의 문제’가 된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이 노예제에서는 사람들을...근면하게 만드는 폭력적 방법이 있었다...그때[노예제] 사람들은 타인의 노예였기에 노동을 강요당하였다. 지금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욕망의 노예기에 노동을 강요당한다.”?자본?, I-3, 731쪽에서 재인용. 강조는 인용자.


각각의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기 위해 자신이 ‘양질의’ 노동력을 갖추기 위해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취업준비는 다름 아닌 자신의 욕망이 된다. 그리고 성공과 실패의 문제는 각각이 가진 개별적인 능력으로 환원된다. 실업은 실업자 자신의 무능력 탓일 뿐이다. 사고의 중심에는 언제나 자기가 있으며, 사고는 언제나 이해관계의 선을 따라 진행되고, 생각할 수 있는 공동체란 자신이 생계를 책임져야할 가족의 범위를 결코 넘지 않는 근대적 이기주의 내지 개인주의가 과연 이와 무관한 것일까?
만약 앞서 말한, 시간, 공간, 기계로 짜여지는 근대적 노동의 성분들이, 훈육과 통제 등을 통해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을 근대적 권력의 도식으로 동일화시키는 ‘동일자’의 벡터장을 형성한다면, 상대적 과잉인구는 자본의 축적에 필수적인 외부라는 점에서, 그리고 실업화 압력은 모든 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배제의 위협이란 점에서 ‘타자화’의 벡터장을 구성한다. 그것은 타자화하려는 위협과 압력을 통해서 근대적 노동의 장이라는 동일자를 경계지우며, 사실은 항상-이미 타자화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타자의 양태(실업, 게으름, 빈곤, 무기력함 등등)을 통해 동일자의 양태를 정의한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타자화의 벡터장을 통해 근대적 노동의 도덕과 규범을 노동자의 신체에 새겨넣으며, 자본의 요구를 노동자 자신의 욕망으로 변환시킨다. 
만약 푸코 말대로 인구의 통제와 성적 통제 전략을 통해 부르주아의 건전한 계급적 신체와 건강한 삶을 생산하는 근대의 성적인 ‘생체-정치’가 이루어졌다면,M. Foucault, La volonte du savoir: Histoire de la sexualite, 이규현 역, ?성의 역사?, 1권, 나남, 1990, 137, 149쪽.
 이제 우리는 맑스를 대신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자본에 의한 인구의 통제(상대적 과잉인구)와 실업화 압력을 통해 자본의 요구에 맞추어 노동자의 ‘건전한’ 계급적 신체를 생산하는 자본의 생체-정치가 이루어졌다고. 이런 점에서 상대적 과잉인구는 단지 노동자 간의 경쟁을 통해 임금을 낮추는 메카니즘을 이룰 뿐만 아니라, 근대적 노동의 체제에서 요구되는 노동의 조직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생체정치적 조건을 형성하는 셈이다.


4.자본주의와 근대적 노동의 체제

(1)근대적 노동의 체제

앞서 보았듯이, 자본에 실질적으로 포섭된 노동은 시간-기계와 공간-기계, ‘기계’-기계라는 세 가지 축을 따라 분해되고 결합된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적 노동의 영역은 이들 세 가지 축을 통해 짜여지는 3차원의 입체적 공간으로 표상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시간-기계의 축은 한편으로는 선분화된 시간을 기초로 하여, 특정한 동작을 시간에 대응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시간표-기계는 이러한 시간적인 대응의 양상을 종합적으로 표시한다. 다른 한편 시간표와는 다른 차원에서, 관련된 작업들은 시간의 낭비나 지체 없이 접속되고 연결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작업장 전체를 통괄하는 시간적인 공시화가 이루어진다. 
둘째로, 공간-기계의 축은 다른 공간과 불연속성을 갖는 구획된 공간 안에서, 한편으로는 기능에 대응하는 다수의 개별적인 위치들로 공간을 분할하고, 이 개별화된 장소들에 노동자를 할당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분해된 작업들을 공간적으로 배열함으로써 하나의 노동으로 결합해낸다.
셋째로, ‘기계’-기계의 축은 ‘기계’-기계는 작업 자체를 ‘기계’적이고 역학적인 요소 동작으로 분해하며, 그것에 접속되는 노동 자체를 연관된 요소 동작으로 분해한다. 이로써 노동 자체는 기계화되며, 이 기계화된 동작들은 ‘기계’를 통해, 혹은 ‘기계들’의 체계를 통해 하나의 완결된 노동으로 조립된다.
노동은 이 세 가지 성분의 힘에 의해 동시에 분해되고 결합되며, 이 세 가지 힘은 노동 자체를 공간적?기능적으로 동질화하고, 기계적으로 표준화하며, 시간적으로 규범화한다. 노동자 각각이 갖는 개별적 자질과 능력의 차이는 제거되고 무화되어야 할 특성이 되며, 이 세 가지 성분의 힘에 의해 평균적인 규준에 맞추어 획일화된다. 노동자 각각은 이 획일화된 노동의 도식에 자신의 신체를 일치시키거나 최소한 근접시켜야 한다. 
이런 점에서 근대적 노동자에게 작용하는 이 벡터적인 성분들은 단순히 물리학적 의미의 힘일 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신체를 통제하고 지배하는 권력인 것이다. 요컨대 근대적 노동을 생산하는 이 입체적 공간은, 세 가지 방향의 성분을 갖는 권력이 노동 및 노동하는 신체에 작용하는 장(場)이라는 의미에서 정확하게도 하나의 ‘체제’다. 근대적인 노동의 체제.
이러한 노동의 체제 안에서 노동은 해부학적 분할과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생산적인 활동의 집합에 붙이는 이름으로서 노동은 이제 노동하는 자의 의지로부터 독립하여 세 가지 성분을 통해 독자적으로 정의되고, 그렇게 정의되어 작용하는 노동이 노동하는 자의 움직임과 의지를, 그리하여 욕망을 규정하게 되었다. 
이는 노동하는 자가 노예로서, 혹은 농노로서 존재하던 시기에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근대에 이르러 출현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건’(evenement)이다. 이전에는 노동자와 생산수단의 자연적인 계열화, 혹은 ‘인간과 자연의 대사과정’으로 노동이 정의되었다면, 이제는 기초적인 요소 동작으로 분할되고 동질화된 노동이 기능적 연관성에 따라 다른 노동 및 생산수단과 계열화되며, 인간적 요소인 노동자는 그 계열 안에서 정의된 기능의 담지자가 된다. 다시 말해 이전에는 노동자가 노동의 양상을 정의했다면, 이제는 노동이 노동자의 양상을 정의한다는 것이다. 노동은 이제 실증성(positivite)의 영역 안에 자리잡게 된다.
이 새로운 사건은, 근대에 이르러 노동을 둘러싸고 있는 생산의 배치가 근본적으로 변환되는 상황을 통해 발생한 것이다. 직접 생산자가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고, 생산수단이 소수의 소유자 손에 집적되며, 이로써 생산수단의 소유자가 생산의 이니셔티브를 장악하게 되는, 전혀 새로운 상황이 그것이다. 생산의 구체적 조건을 이루는 이 상황을 통해서 맑스가 자본주의라고 명명한 생산의 배치가 탄생한다. 그것은 알다시피 자본이 생산 자체를 장악하는 배치다. 여기서 자본의 일반적 정식(G--W--G')으로 표시되는 가치증식의 계열은, 그 안에 생산과정을 포함하는 새로운 반복적 계열로 변환된다. 맑스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시했다.

          A   
G -- W     ‥‥P‥‥ W'-- G'
          Pm   
(  ) 

이 새로운 배치에서 생산은 가치의 증식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의 도식 안에 포섭되며, 증식된 가치를 뜻하는 상품(W')과 접속된다. 즉 생산은 증식된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한에서만 이루어지고, 노동은 그러한 가치를 생산하는 한에서만 생산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이를 유효화하기 위해 자본은 노동을 노동자로부터 분리하여 생산을 위한 기능으로 환원한다. 이를 맑스는 자본에 의한 노동의 ‘실질적 포섭’이라는 개념으로 나타낸 바 있다.
아마도 푸코 말처럼 스미스 이래 노동이,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객체’라는 인식론적 형식을 획득하게 되었다면,M. Foucault, Les mots et les chose, 이광래 역, ?말과 사물?, 민음사, 1980, 266쪽 이하; 300쪽 이하.
 그것은 이처럼 노동이 ‘인간’과 분리된 독자적인 실증성의 영역을 구축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사회학주의적 ‘유물론’에 반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역설과 조우하게 된다. 노동이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독자적인 실증성의 영역을 구축하던 시기에, 반대로 노동을 인간의 본질적인 속성으로 인식하는 ‘인간학적’ 담론들이 탄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헤겔에게서 ‘노동의 인간학’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잘 보여주는 것처럼, ‘인간’이 타인의 의지에 의해 노동하는 노예의 위치로 전락하게 된 이유와, 그것을 통해 가능하리라고 보이는 ‘회복’의 변증법적 과정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려는 것이다.G. W. F. Hegel, Die Phanomenologie des Geistes, 임석진 역, ?정신현상학?, I, 지식산업사, 1988, 256쪽 이하.
 그리고 이것이 프랑스 혁명의 영향 아래서 형성된, ‘죽어있는 객관성’으로서 실증성에 대한 인간학적 분노와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청년 헤겔에 대한 루카치의 저작에서 읽어낼 수 있다.루카치는 이 죽어있는 객관성으로서 ‘실증성’이 청년 헤겔이 사용했던 중심적이고 결정적인 개념이라고 말한다. 이 개념이 나중에 외화라는 개념으로 불렀으며, 이 문제 속에 역사적인 대상성에 관한 모든 문제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G. Lukcs, Der junge Hegel, 김재기 역, ?청년 헤겔?, 1권, 동녘, 1986, 127-128쪽). 이는 처음에는 종교, 특히 기독교의 실증성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이후 스미스의 영향을 받으면서 노동 개념을 통해 새로이 ‘외화’ 개념으로 발전한다(이춘길/ 서유석 역, ?청년 헤겔?, 2권, 동녘, 1987).
 이는 분명히 헤겔에서 연유하는 포이에르바하의 ‘소외’ 개념이나,L. Feuerbach, Das Wesen des Christentum, 박순경 역, ?기독교의 본질?, 종로서적, 1982.
 노동의 소외에 대한 분노를 가장 극적인 형태로 표현한 청년 맑스의 저작에서K. Marx, Okonomisch-politische Manuskripte, 최인호 역,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 박종철출판사, 1991.
 더욱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노동이 실증성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던 시기에 나타난 노동의 인간학이란, 그처럼 인간적 속성에서 분리된 노동, 소외된 노동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며, 객체의 형식을 취하는 노동의 보충물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처럼 노동이 해부학적으로 분해되고 ‘인간’으로부터 분리된 실증성을 영역을 구축했다는 사실과 그에 대해 느끼는 인간학적 분노를 우리는 브레이버만의 훌륭한 책에서H. Braverman, 앞의 책.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2)몇 가지 노동 통제 기술의 위상

여기서 우리는 근대적인 공장에서 흔히 사용되는 몇 가지 기술적 요소들을 근대적 노동의 체제 안에서 다시 위치지울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그 요소들이 근대적인 노동방식을 구성하고 작동시키는데서 수행하는 기능을 미시정치적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에 의해 작동하는 권력의 효과와 작용 지대(地帶)를 근대적 노동의 체제의 표상 공간 안에 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테일러에 의해 명확하게 개념화된 ‘시간관리’는 말 그대로 시간에 대한 관리를 목적으로 한다. 알다시피 그것은 노동을 다수의 요소 동작으로 분해하여, 각각의 요소 동작에 허용되는 최대 시간을 대응시키는 것이고, 그 대응의 양상을 감시하고 감독하는 관리를 직접적인 내용으로 한다. 이로써 노동의 통제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으리란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시간관리’는 명확하게 시간-기계의 축 위에 위치하고 있다. “필자가 특히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모든 체계가, 과학적 관리에서 단연 가장 중요한 요소인 단위시간에 대한 정확하고 과학적인 연구에 달려있다는 점이다.”F. W. Taylor, On the Art of Citting, A. Sohn-Rethel, Intellectual and Manual Labour: A Critique of Epistemology, 황태연/ 윤길순 역,?정신노동과 육체노동?, 학민사, 1986, 178쪽에서 재인용.

물론 이를 위해서는 노동의 분할을 가능하게 해주는 노동의 기계화와, 분할된 동작의 각 부분이 하나로 조립될 수 있는 기초로서 표준화를 일정하게 전제한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테일러에게서 동작의 분할은 브레이버만 말대로 구상 기능과 실행 기능의 분리 이상은 아니었으며, 사실상 구상 기능을 뜻하는 정신노동을 노동자로부터 떼어내는 것에 머물고 있었다. 그에게 동작의 분할은 동작 그 자체를 동질화하거나 표준화하기 위한 연구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수행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측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동작에 걸리는 시간의 측정]을 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사실 이는 시간측정을 정확하게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은 인간의 작업을 각각의 요소로 분할하고, 각각의 요소를 개별적인 단위시간으로 측정하는 것이다.”F. W. Taylor, Shop Management, A. Sohn-Rethel, 앞의 책, 183쪽에서 재인용. 
 

반면 테일러의 제자였던 길브레스(F. Gilbreth)의 주된 관심사는 그 요소 동작을 누가 하든 동질적인 양상으로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동작을 극한적으로 분할하여 요소 동작으로 분해하고, 각각의 요소 동작이 그리는 동선(動線)에 대해 치밀하게 연구했다. 

“이 테일러의 후계자로서는 스톱워치 방식을 정확한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스톱워치는 벙어리와 마찬가지로 동작이 어떠한 모양으로 행해졌는지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이 방법에서는 운동의 형태는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으며, 연구할 수도 없다. 한편 길브레스에게는 운동을 구성하는 요소를 그려내고 그 궤적을 밝히는 것이 문제였다.”S. Giedon, Mechanizaton Takes Command: A Contribution to Anonymous History(1948), 이건호 역, ?기계문화의 발달사: 쓸모있는 물건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역사?, 유림문화사, 1994, 67쪽.
 

이를 위해 그는 손수건을 접는 동작, 끈을 묶는 동작 등의 다양한 동작을 사진과 영사기 등을 이용해 연구했고, 그 동선을 공간적 좌표 안에서 철사줄을 이용해 표시했다. 이는 공간 안에서 동작을 동질화히기 위한 동선의 연구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구체적인 노동형태와 무관한, 하지만 모든 노동형태를 그것으로 구성할 수 있는 23개의 기본 동작을 찾아낸다. 이는 마치 작업이라는 건물을 짓는 벽돌같은 기본요소라고 보며, 자신의 이름을 거꾸로 써서 서블릭(Therblig)이라고 부른다. 
이런 의미에서 길브레스의 과학적 관리법은 테일러와는 다른 고유한 영역을 갖는다. 그는 시간관리와 구별되는 ‘동작관리’를 독자적인 영역으로 확립했다. 이는 동작을 분할하여, 공간적인 동선을 따라 동질화하려는 기술이라는 점에서, 공간-기계를 일차적인 성분으로 한다. 물론 시간관리가 그랬던 것처럼, 동작관리 역시 다른 성분을 이미 전제하거나 기초하고 있다. 동작의 분할이 벽돌과 같은 기본 요소로 되기 위해서는 동작이 ‘기계’와 결부된 역학적 기초 위에서 분석될 수 있어야 하며, 벽돌에 상응하는 서블릭 개념은 조립을 통한 전체 동작의 구성이라는 개념에 기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동작관리는 공간-기계의 축과 ‘기계’-기계의 축이 만드는 평면 상에 위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기계’-기계의 축과 공간-기계의 축이 만드는 평면 상에 어셈블리 라인이 위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870년경 미국의 신시내티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어셈블리 라인은 “물체를 작업 상의 한 단계로부터 다음 단계로 기계적으로 이동시키는 작업방식”이라고 정의된다.S. Giedion, 앞의 책, 63쪽.
 이 작업방식은 처음에는 조립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잡은 돼지를 세척하여 각 부위별로 분해하는데 이용되었는데, 24인치 간격의 고가식 레일을 이용하여 노동대상을 공간적으로 이동시켰다. 여기서 식육을 생산하는 작업은 공간적으로 분할되고 고정되며, 작업 순서에 따라 공간적으로 배열된다. 그리고 노동대상을 이동시키는 기계가 그 배열된 공간을 연결시킨다. 이제 노동자는 공간을 이동할 필요가 없어지며, 작업대에 위치가 고정된다. 개별적인 공간의 분할과 배정, 그리고 그 공간의 기능적 배열. 이로써 노동자와 작업의 공간적 대응은 기계적 수단을 획득하게 된다. 
하지만 조립되는 라인을 거쳐가면서 분할된 동작들은 하나의 완성된 동작으로 ‘조립’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기계화되고 표준화된 동작을 통해 각각의 작업자가 수행해야 할 작업의 형태가 명확하게 정의될 수 있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기계화된 라인의 동작과 리듬에 맞게 기계화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어셈블리 라인은 공간-기계 만큼이나 ‘기계’-기계의 차원을 중요한 성분으로 하며, 따라서 그 두 축이 만드는 평면 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셈블리 라인은 이동 자체가 내포하는 시간적 요소를 배제할 수 없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그 정의 그대로 기계를 통해 노동대상을 이동시키는 것이며, 차라리 작업의 시간적 계열을 공간적 계열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물론 그 흐름이 시간의 진행을 따르지만, 여기서는 아직까지 시간이 기계와 결합된 독자적 성분을 구성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시 말해 라인이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란 점에서 시간-기계의 성분은 충분히 추상될 수 있다. 
이와 달리 콘베이어 시스템은 세 가지 성분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우선 그것은 노동대상을 기능적으로 배열된 작업을 따라 공간적으로 이동시킨다. 그리고 그것은 기계적인 분해와 조립의 조건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미 어셈블리 라인을 내용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동시에 거기서 운반장치의 움직임은 자기자신의 시간적인 리듬을 가지며, 작업은 이 리듬과 속도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즉 시간-기계의 성분이 어셈블리 라인에 추가된 것이다. 운반장치의 속도와 리듬에 작업자 전체의 속도와 리듬이 맞추어져야 하기 때문에, 분할된 작업 각각이 ‘기계’에 따라 표준화되고 동작이 동질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더욱 긴요한 조건이 된다. 이로써 규율화된 시간적 리듬을 장악한 ‘기계’는 스스로 그것을 강제할 수 있는 물질적 장치가 된다. 여기서 ‘기계’의 중심성과 독재는 완성된다. 이제 ‘기계’는 노동하는 신체가 버틸 수 있는 한계를 실험하고 언제나 그 한계에 도전한다.

“기계 운반장치의 동일한 시간의 리듬과, 그것이 인간과 기계 사이에 주는 척도의 통일은 근대 대량생산의 유동식 생산방법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이룬다. 결합된 노동과, 그와 결합된 기계는 이러한 척도의 통일 아래 움직인다.”A. Sohn-Rethel, 앞의 책, 191쪽.


이러한 기술들은 특정한 형태로 노동을 강제하며, 그런 방식으로 노동할 수 있는 신체를 일상적으로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노동의 체제를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기술이며, 나아가 그것을 통해 노동자의 신체에 작용하는 권력을 작동시키는 기술이고, 그럼으로써 노동 자체를 권력의 벡터로 포섭해내는 기술이다. 각각의 기술들이 갖는 위치는 그것이 작동시키는 권력의 성분을 보여주며, 그것을 통해 노동자의 신체에 새겨지는 생체-권력의 형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들은 언제나 산노동의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의지에 작용하며, 그것이 갖는 생산적 능력의 자유로운 흐름을 규범화되고 표준화되며 동질화된 동작으로 고착시키고 가두는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이탈과 저항, 혹은 투쟁과 조우할 운명을 갖고 있다. 
출근시간을 지키고, 작업시간을 엄수하게 하려는 시도는 처음부터 무수한 이탈과 무시, 불복종에 부닥쳤고, 그것을 제압하기 위해 다 합치면 임금 전체보다도 더 큰 벌금과 신체적 징벌 등을 동원해야 했다. 테일러주의는 테일러 자신의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게 제대로 실현된 적이 단 한번도 없으며, 그것을 구현하려는 자본가의 시도 역시 번번히 실패했다. 시간관리나 동작관리는 다만 자본가의 입장에서 바람직한 방향을 표시하는 일종의 ‘이념형’이었던 셈이다. 노동자들이 초기에 기계의 도입과, 그로 인한 노동의 기계화에 대해 응수하는 방식은, “생산력 발전에 반하는 운동”이라는 이유로 좌파로부터도 비난받았던 ‘기계파괴운동’이었다.이는 앞서 푸코가 말했듯이, 근대적 노동의 신체를 생산하는 권력기술들이 과학의 형식을 취하며, 유용성을 통해서 설득력을 획득한다는 점과의 긴밀한 연관을 보여주는 셈이다. 한편 이를 ?자본?의 중요한 일부로 다루었던 맑스의 직관은, 그것을 주로 기계를 통한 착취의 증가라는 주제에 결부하여 다룸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산주의적’ 통념으로는 결코 환원될 수 없는 것이었다.
 포드가 임금 유인과 더불어 적극 도입했던 콘베이어 시스템은 적지 않이 노동자의 손에 의해 정지되어야 했다. 
푸코 말처럼 그것은 언제나 과학의 형태로 진행되었고, 과학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하여 ‘유용성’을 입증하는 다양한 수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언제나 저항과 이탈, 투쟁에 ‘시달려야’ 했다. 근대적 노동의 체제는 그것이 세 가지 성분을 갖는 강력한 권력의 벡터장임에도, 결코 안정적이지 못한 것은 이처럼 권력은 끊임없이 누수하고 거슬리는 탈주선의 저항이나 이탈, 투쟁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권력 이전에 탈주선이 존재하는 것이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차라리 권력 이전에 저항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권력이 완벽히 작용하여 탈주선이 사라지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의 어떠한 생산적 힘도 이용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여기에 완벽한 통제가 생산성의 증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무수히 입증되었다는 식의 얘기를 굳이 추가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노동의 체제를 항상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드는 저 이탈과 저항, 투쟁을 겨냥하여 작용하는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차원’이 그 체제 안에 내재한다. 그것은 앞서 본 과잉인구 내지 실업화 압력이라는 생체정치적 메카니즘이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본다면 노동의 체제를 표상하는 저 3차원의 공간 안에 노동자의 유입과 유출을 통제하는 메카니즘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이탈하거나 저항하는 자, 투쟁하는 자들을 배제하는 메카니즘이고, 그런 사실을 ‘실업화 압력’의 형태로 반복하여 상기시킴으로써 저항과 투쟁을 향한 의지를 무력화시키는 메카니즘이며, 반대로 개별화하는 경쟁을 통해 충성과 복종을 욕망하게 하는 메카니즘이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근대적 노동의 체제가 안정적으로 작동하게 하는 또 하나의 차원이다. 
이 네 번째 차원으로 인해 앞의 세 가지 성분들은 저항과 투쟁에도 불구하고 유효화되고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세 가지 해부정치적 요소가 노동을 포섭하는 방식으로 작용하는데 반해 이 생체정치적 요소는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그렇지만 전자가 노동자들로 하여금 이탈하고 저항하게 하는 반면, 후자는 충성하고 복종하게 하는 것이다. 
포드주의가 근대적 노동의 체제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앞의 세 가지 성분에, 바로 이 네 번째 차원을 유기적으로 통합하고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포드는 테일러주의의 본질적인 측면들을 이어받았지만 동시에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노동통제방법 및 일관작업대열이라는 두 가지 원리를 추가로 도입하였다.”C. Palloix, ?노동과정의 역사적 전개: 포디즘에서 네오포디즘으로?, 허석렬 편, ?노동과정?, 이성과 현실사, 1986, 244쪽.
 그것은 거대한 기계적 집적으로 인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극도로 높임으로써 노동인구의 강력한 과잉화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과 더불어, 일당 5달러(FDD; Five Dollar A Day)라고 요약되는 고임금 체제를 도입하여, 노동력의 순탄한 공급을 보장하고, 노동자들을 소독하여 노동자 반란을 방지하여 최상의 조건에서 대량생산과 자본 축적의 급속한 진전을 보장하고자 했다.B. Coriat, "Un developpement createur du Taylorisme," Palloix, 앞의 책, 245쪽에서 재인용.
 
요컨대 포드주의는 채취된 노동인구에게 높은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내부와 외부의 격차를 확대하고 노동력 채취의 절단선을 유례없이 강화했다. 이는 새로운 노동의 체제가 주는 고통을 보상의 형태로 변환시키고, 외부와의 격차를 통해 새로운 ‘욕망의 노예’로 변환시키는 방식인 셈이다. 나아가 그것은 새로운 욕망의 자극을 통한 새로운 시장의 확장을 추구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러한 체제 역시 또 다른 저항과 투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을 굳이 추가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애시당초 그 체제는 탈주선으로 표시되는, 생산적 활동을 수행하는 저 자발적인 힘과 능력에 대해 (반)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힘과 능력은, 근대적 노동의 체제가 모든 것을 포괄할 듯한 입체적 공간으로 표상됨에도 불구하고 결코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없게 하는, 권력의 근본적인 무능력 지대인 셈이다. 그것은 근대적 노동의 체제에 내재하는 외부다. 따라서 어쩌면 그 자발적인 능력은, 그리하여 탈주선과 저항, 혹은 계급투쟁은 그 노동의 체제가 작동하기 이전부터 선재하는 것이란 점에서, 그 체제의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차원이라고 해야할 지도 모른다. 제 0차원. 


5.자본의 흔적과 노동의 주체

지금까지 우리는 맑스의 주 저작인 ?자본?을 통해 근대적인 노동의 체제를 작동시키고, 자본이 요구하는 규율을 노동하는 신체에 새기는 중요한 양상에 대해 검토했다. 이는 자본이 노동 자체를 노동자로부터 분리하여 자신 아래에 포섭함으로써 노동하는 신체에 자신의 흔적을 새기는 메카니즘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노동에 새겨진 자본의 흔적을 추적할 수 있으리란 가정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자본?은 맑스 자신이 정의한대로 물질적 생산양식으로서 자본주의를 그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물질적 생활 그 자체의 생산으로서 생활양식 내지 활동양식이 그와 전혀 무관하게 구성되는 것은 아니라고 할 때, 특히 공장처럼 두 가지 양식이 중첩되는 영역에서라면, 그 겹친 주름을 통해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작동시키는 주체생산양식의 요소들이 있을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맑스의 연구에 묵시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이러한 요소들을 찾아내려고 했던 셈이다. 이를 통해 근대적 활동방식 내지 근대적 주체생산방식의 전체는 아니라 해도, 적어도 공장에서 작용하는 주체생산양식의 중요한 고리들을 추적할 수는 있으리란 것이다. 그리하여 공장이라는, 근대의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영역 가운데 하나에서 자본주의와 근대적 주체의 생산이 결부되는 양상을 포착하려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생산양식과 주체생산양식이라는, 역사유물론의 이중의 대상으로 잠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것은 하나의 영역을 관찰하는 두 가지 상이한 방식을, 그리하여 ‘사건화’하는여기서 사용하는 사건 내지 사건화의 개념에 대해서는 G. Deleuze, Logique du sens, Minuit, 1969, 68-69쪽 이하; G. Deleuze/ F. Guattari, Mille Plateaux, Minuit, 1980, 235쪽 이하; M. Foucault, “Questions of Method,", G. Burchell, C. Gordon, P. Miller (ed.), The Foucault Effect: Studies in Governmentality,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1, 76-77쪽; 이진경, ?들뢰즈: 사건의 철학과 역사유물론?, 서울사회과학연구소 편, ?탈주의 공간을 위하여?, 푸른숲, 1997 참조.
 두 가지 상이한 방식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맑스가 훌륭하게 보여준 것처럼, 생산양식에 대한 연구는 일차적으로 착취와 계급적 지배의 맥락에서 적대와 계급투쟁에 대한 연구다. 여기서 노동시간의 문제는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에서 명시화되어 있듯이 노동일을 둘러싼 계급적 착취와 적대의 문제로서 나타난다. 공장이라는 공간의 문제는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에서 다루듯이 일차적으로는 노동생산성과 노동강도의 강화를 통한 착취의 문제로 나타난다. ‘기계’의 문제 역시 상대적 잉여가치의 착취를 강화하는 문제로 나타나며, 이로 인해 노동이 단순화됨에 따라 여성과 아동노동이 노동자의 축출에 이용되며, 근본적으로 노동조건의 악화와 임금의 저하 등을 야기한다. 기계파괴운동 역시 주로 ‘기계’로 인한 노동자의 축출과 연관해서 다루어진다. 상대적 과잉인구의 문제는 자본 축적에 따른 임금의 저하의 문제로 주로 다루어진다.
한편 주체생산양식에 대한 연구는 대비해서 말하자면 노동방식이나 노동의 체제를 주로 노동자의 신체를 장악하고 통제하는 생체권력과 그에 대한 저항의 계열 안에서 문제를 본다. 이 경우 노동시간의 문제는 테일러가 극명하게 보여준 것처럼 노동자의 신체를 훈육하는 시간-기계의 문제로 다루어지고, 공장이라는 공간의 문제는 노동 자체를 해부학적으로 분해하고 그렇게 분할된 요소 동작을 배열하는 문제로 다루어지며, ‘기계’의 문제 역시 ‘기계’의 중심화를 통한 노동 자체의 기계화의 문제로 다루어진다. 이로 인해 기계파괴운동은 단지 생산력 발전에 반하는 반동적 운동이 아니라 ‘기계’를 통해 노동을 통제하고 장악하려는 권력에 대한 노동자의 저항이요 투쟁으로 다루어질 수 있게 된다. 과잉인구 역시 임금의 문제와는 다른 차원에서, 생존 조건을 상실한 ‘자유로운’ 타자를 통해 정상적인 노동자의 삶을 정의하고 강제하며, 동시에 경쟁과 실업화 압력을 통해 자본에 대한 충성과 복종을 자신의 욕망으로 변환시키는 메카니즘으로 다루어진다. 이러한 계열화의 선 안에서 저항은 신체를 장악하려는 생체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그리하여 결국은 신체에 새겨지는 자본의 흔적에 대한 저항으로 위치지워진다. 이는 과잉인구를 다루면서 썼던 것과는 겹치면서도 상이한 외연을 갖는 ‘생체정치’의 영역이다.
이 상이한 두 가지 사건화 방식을 통해 자본가계급의 권력을 둘러싼 계급투쟁과 근대적인 생체권력을 둘러싼 생체정치가 서로 교차하는 지대를 포착할 수 있다. 그것은 맑스의 책에서 읽어낸 것처럼 생산양식과 주체생산양식이 교차하는 지대며, 근대적 노동의 체제 안에서 작용하는 생체권력과 자본가계급의 권력이 교차하는 지대고, 그런 만큼 노동자들의 저항이 계급투쟁과 접속되고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생체권력을 전복하려는 노동자의 생체정치로 변환될 수 있는 지대다. 역사유물론이 이중의 대상을 전복하는 이중의 혁명을 꿈꾼다면, 자본에 반하는 계급투쟁이 근대적 권력에 반하는 생체정치와 결합되고, 하나가 다른 하나로 끊임없이 변환되는 이 과정처럼 중요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이제 이 두 가지 정치가 교차하는 겹침의 지대를 통해, 그리고 그 양자의 접속과 변환을 통해 계급투쟁이나 생체정치 자체가 상이한 것이 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성장하여 제도적인 안정성을 얻게 되는데 근접할수록 노동운동이나 계급투쟁에 가까이 다가오는 또 다른 전체주의의 위험, 그것은 자본의 권력을 대신해 대중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려는 욕구/필요에 내재하는 근대적 생체권력의 무의식적 작동에 기인한다. 그것은 계급투쟁을 통해 자연적으로 소멸하지 않는, 독자적인 영역과 체제를 갖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생체권력에 대한 저항은 자본에 의한 고용과 포섭을 통해서만 생존할 수 있는, 그런 만큼 끊임없이 자본의 욕망을 스스로 욕망하게 되는 저 조건을 겨냥하지 않는다면, 어느새 자본에 의한 끊임없는 재영토화를 벗어나지 못하거나 아니면 ‘죽음의 선’을 타게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노동이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활동‘이라면 ‘노동의 정치’는 그러한 능력이 ‘정치화’하는 것을, 다시 말해 정치가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활동 그 자체에 의해 정의되고 이루어지는 것을 뜻한다. 이는 자발적이고 자주적인 활동으로서 코뮨주의적 정치의 잠재성을 형성한다. 반면 그것은 또한 근대적 노동의 체제를 통해서, 노동하는 신체를 장악한 생체권력과 노동 그 자체에 새겨진 자본의 흔적이 만들어내는 정치적 효과를 포함하고 있다. 자신의 욕망의 배치인 만큼 발견하기 어렵고, 이미 습속화되어 버린 일상적인 생활양식의 무의식적 지반인 만큼 제거하기 어려운 것. 결국 ‘노동의 정치’가 자본주의의 극복일 뿐만 아니라 ‘근대’의 극복일 수 있다면, 그것은 노동 자체에 새겨진 이 자본의 흔적을 변이시키는 것을 통해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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