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유럽의 여러 다른 지역이 보여주었던 서로 다른 소유관계와 계급간 세력균형 아래에서는 아주 똑
같은 인구의 동향 및 상업의 동향이, 소득분배에서의 장기적인 추세에 관련해서 뿐만 아니라 생산
력의 발전 또는 정체가 보여주는 전반적인 패턴들에 관해서도, 전혀 다른 경제적 결과를 빚어내었
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계급구조를 확립하고 발전시키며 변화시켰던 상대적으로 독자적인 과
정은, 전산업시대에 유럽에서 이루어진 장기적인 경제발전에 관한 어떠한 해석에도 반드시 핵심에
놓여야만 한다.
<경제외적 강제> 영주들이 경제외적 강제에 의한 잉여수탈을 통해 그리고 농민들이 생계를 위한
생산을 통해 그들 스스로를 재생산했던 것은, 생산단위들의 완벽한 전문화나 잉여의 체계적인 재투
자 또는 정기적인 기술혁신을 향한 어떠한 폭넓은 추세도 나타나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다. 이러한
재생산구조로 말미암아 - 특히 장기적으로 인구가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던 상황에서 - 체제 전반
에 나타났던 결과는, 노동생산성의 하락을 향한 궁극적으로는 커다란 규모의 사회-경제적 위기를
향한 장기적인 추세가 체제 자체 안에서 내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로의 돌파> 필자는 성장이 다소간 장기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체제로 넘어가는 최초의
돌파가 유럽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계급관계의 양면적인 발전 덕분이었다고 주장했다. Ⅰ.
영주가 경제외적 강제에 의해 잉여를 수탈하는 체제가 무너진 것이고, Ⅱ. 농민의 토지소유권이 침
식당한 것, 또는 농민의 완벽한 토지소유권을 향한 어떠한 추세도 좌절당해 버린 것이다. 이러한
양면적인 발전의 결과는 무엇보다도 토지에서 새로운 사회적 소유체제가 등장해 나온 것이었다.
그것은 직접생산자가가 생계수단으로부터 분리되고, 그와 더불어 경제외적 강제에 의한 잉여착취의
체제가 몰락함에 따라, 해방된 노동력과 토지 그리고 생산수단이 가장 많은 수익을 내는 방식으로
결합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영주와 자본주의적 차지농 그리고 임금노동자의 세 계급으
로 이루어진 체제는 근대초에 영국에서 농업이 탈바꿈을 하고 뒤이어 지속적인 경제발전으로 넘어
가는 돌파가 이루어질 수 있게 만든 바탕이 되어주었다. 반면에 같은 시대에 대륙의 대부분 지역에
서는 농민의 토지소유와 경제외적 강제에 의한 잉여착취(프랑스의 경우에는 세금 및 관직의 구조,
동유럽의 경우에는 예농제)로 특징지어지는 사회적 소유체제가 다양한 형태로 존속하여, 농업의 계
속된 정체와 쇠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전반적인 사회-경제적 위기를 빚어내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Ⅰ. 인구모델과 계급관계.
필자는 "경제적 사회적 변화를 촉진시키는 데 인구가 맡는 역할의 중요성을 깎아 내리려고'결코
시도하지 않았으며, 그 점에서도 교역의 성장에 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필자의 논의는 적어
도 넓은 맥락에서 보면 인구론적 해석을 내세우는 학자들이 제시한 주된 장기적 경제동향을 인정
하는 것에서 출발하였다.
기술이 정체되어 있는 상황에서 나타난 인구의 증가는 그 주기의 상향국면에서 노동력에 비해 토
지의 가치를 상승시키고, 공산품에 비해 식량가격을 상대적으로 높이며, 일인당 생산량을 하락시키
는 결과를 낳았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인국과다는 그 자체를 교정하고, 결국에 가서는 인구동향을
역전시키며, 그리하여 다시 토지에 대한 노동력의 비율과 제 요소들의 상대적인 가격에서 정반대되
는 추세가 나타나는 것으로 특징지어지는 하향국면을 가져오게 되었다. 필자의 의도는 이러한 두
국면의 주기가 존재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1. 인구의 변화와 소득분배.
필자의 주장은 바로 인구의 변화로 말미암아 제 요소의 상대적인 희소성에서 나타난 변화들은, 그
변화들이 이를테면 변화하고 있는 사회적 소유관계와 계급들 사이의 세력균형이라는 프리즘을 통
해서 굴절되었을 경우에만, 중세 유럽의 소득분배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인구의 증감으로 말
미암아 제 요소들의 상대적 희소성이나 가격에서 나타난 변화들이 소득분배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
던, 그 영향이 완전히 영주와 농민이 상대적으로 얼마큼 이나 토지를 직접 소유하고 있었는가에 달
려 있음은 분명하다. 영주와 농민이 토지에 대해 노동력의 상대적인 비율에서 나타난 변화로부터
제각기 얼마만큼이나 이익을 얻어 낼 수 있었는가를 결정했던 것은 바로, 이미 자리잡고 있던 토지
분배의 양식이었던 것이다. (또한) 영주들이, 그들이 관습보유농에 대해 얼마나 커다란 권력을 지
니고 있었으며 또 그러한 권력을 얼마만큼 행사하고자 했었는가에 따라, 같은 면적의 토지에 대해
시장에 의해 결정된 수준보다 더 낮거나 또는 같거나 아니면 더 높은 지대를 부과할 수 있었다. 여
기서도 역시, 이미 자리잡고 있던 분배 - 여기서는 강제력의 분배 - 가 인구의 변화에 의해 결정된
시장의 요인들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인가를 구조적으로 결정지었던 것이다.
<영국> 인구가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었던 12세기말과 13세기 동안에 영국에서는 대체로 영주들에
게 유리하고 농민들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변화가 이루어졌다. 이는 영주의 재산권강화(직영지가 유
지 또는 증가된 것)와 영주권의 강화(관습보유지에 대해 자기 마음대로 공조를 요구할 수 있는 영
주의 권한이 증대된 것)라는 서로 연관된 현상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중세말에 인구가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었던 동안에도 서유럽에서는 장기적으로 농민들에게 유리하
고 영주들에게 불리한 변화가 이루어졌고, 이는 예농제의 쇠퇴로 드러났다. 그러나 동유럽 특히 동
부 독일에서는 15세기로부터 줄곧 완전히 정반대 되는 추세가 나타났다.
2.장기적 농업주기.
(인구모델이) 전제하는 바를 받아들인다면, 그것의 논리를 의문시할 이유는 전혀 없다. 또한 두 국
면으로 이루어진 장기적인 농업주기가 중세에는 서유럽의 거의 모든 지역을 기르고 근대 초에는
서유럽의 일부분을 특징지었다는 점에 대해서도 별로 의문이 제기되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러한
장기적인 농업주기가 지닌 구체적인 양상들을 설명하는 데 멜더스적 모델이 과연 알맞는가 하는
점은 문제가 되고 있다.
Ⅰ,인구과다가 실제로 나타나지 않는가는(경작되지 않는 땅이 얼마나 이용될 수 있는가에 달려 있
을 뿐만 아니라) 소득 및 부의 분배에 직접 달려 있다. 영주들이 어느 정도로 토지를 소유하고 농
민들로부터 잉여를 수탈했는 가에 따라 이른바 인구의 上限線은 두 가지 측면에서, 즉 직접적으로
는 영주들이 비생산적인 용도를 위해 곧바로 농민의 소비를 감축시켜 버린 결과로서 그리고 간접
적으로는 농민들이 투자와 혁신을 통해 생산력을 증대시키는 데 투입할 수 있는 자금이 상실된 결
과로서 더욱 낮추어졌다. 포스탄과 해체가 보기에 어떤 경우에 결국에 가서는 인구과다가 나타나는
경향이 있었음으로, 그들은 인구의 상한선이 성격상 계급관계에 달려 있었다는 그러한 지적은 이야
기를 너무 복잡하게 만들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인구의 증가
는, 여러 다른 지역에서 서로 다르게 나타났던 영주와 농민 사이의 세력균형과 재산관계에 따라,
아주 다른 수준의 인구밀도에서 인구과다를 불러왔던 것으로 보인다.
Ⅱ, 맬더스적 메커니즘은 스스로를 교정해 가는 과정으로 작용하여, 노동인구(기존의 기술수준에서)
그 사회가 이용할 수 있는 자원과 합치시키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하지만 사실상 그 메커니즘은
전산업시대의 유럽에서 이러한 일을 언제나 완벽하게 해낼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영주와 농민 사
이에 맺어졌 있던 잉여착취의 관계가 생산과 분배 모두를 결정짓는 데 너무나 깊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회 - 경제적 체제의 작용은 생산인구 및 그 인구의 생계수요를 可用한 생산
량과 합치시키는 경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직접생산자가 수탈당하는 잉여를 생산에 참여하
지 않는 지배계급의 수요와 합치시키는 경향도 있었다. 잉여착취의 비율이 일정하다고 할 때 영주
들의 소득수준은 농민생산자(차지인)의 수와 함수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영주들은 인구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그들의 수입을 유지하거나 증대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서로 서로 다른 영주
들로부터 더 많은 것을 뜯어내기 위해 애쓸 뿐만 아니라, 농민들 각자로부터도 더 많은 양을 수탈
하려고 시도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적어도 가능성의 차원에서는 균형상태를 되살리기 보다는 오
히려 생산을 파국으로 몰고가 인구를 더더욱 감소시킬 수 있었다.
사실상, 14세기 중엽으로부터 나타난 인구의 감소는 유럽의 거의 모든 지역에 걸쳐 맬더스적 원칙
에 따라 경제가 부활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다시 만들어내지 못하였다. 지대를 납부하는 농민들이
줄어든 데 따른 결과로서 수입의 감소에 맞부딪친 영주들은 (지대와 세금을 통하여)농민에 대한 부
담을 증대시키고 그들 서로간에 싸움을 벌임으로써 이에 대처하였으며, 그리하여 농민의 생산력을
잠식시키고 인구를 더더욱 감소시키게 되었다. 그 결과는 멜더스적 자체교정이 아니라 하락의 악
순환으로 나타났다.
3. 맬더스적 정체로부터 경제발전에로의 길.
<인구론의 빈곤> 인구론자들은 그들이 따로 떼어내 고찰해온 특수한 형태의 경제정체에 대해서나,
경제가 그러한 정체를 극복하여 지속적인 성장으로 돌파해 갈 수 있게 만들었던 요인들 - 지속적
인 전문화, 자본투자, 그리고 기술의 혁신 - 에 대해서나 만족스러운 설명을 제시하지 못한다. 달리
말해 그들은 생산력이 발전하지 못했다는 그들의 맬더스적 전제가 어떤 이유로 한 시대 동안 줄곧
본질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존속하다가 그 뒤에 가서는 더 이상 그러지 않게 되었는가를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약점은, 장기적인 농업주기의 상향국면을 특징지었고 전문화와 투
자 그리고 혁신을 이루어낸 사람들에게 수익을 증대시킬 가능성을 제공하였던 식량가격의 상대적
인 상승에 관련하여 특히 뚜렷하게 드러난다. 인구요인에 의해 자극된 그러한 시장의 誘因들은 13
세기나 14세기초 동안이나 16세기와 17세기초 동안에 유럽의 대부분 지역에서 그에 상응한 생산의
증가를 불러오지 못하였다. 하지만 근대초에 영국에서는 그러한 유인들이 노업이 탈바꿈을 시작할
수 있도록 자극했던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무엇으로 설명되며 과연 인구요인으로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프랑스 - 보유지 통합과 절대주의> 프랑스에서는 르 르와 라뒤리가 다른 곳에서 우리에게 말하
고 있듯이, 농촌에서 땅을 끌어보아 커다란 농장을 만들려는 노력이 없지 않았음에도 농민의 토지
소유권이 대체로 침해를 받지 않아, 보유지의 분해가 보유지의 통합을 능가했으며, 그와 더불어 절
대주의가 발전해 나왔다. 이는 중세에 이미 자리잡고 있었던 패턴, 즉 생산성의 하락이 인구위기와
생산위기를 불러오는 패턴을 되풀이 되게 만들었다.
<영국 - 자본주의 발전의 길> 영국에서는 농민의 토지소유를 침해하려는 영주들의 직접적 행위가
농업생산성의 향상과 전반적인 경제발전을 뒷받침함으로써, 우리에게 낯익은 자본주의적 농업구조
의 등장을 향한 길을 닦아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차이점들은 찾아볼 수 있음은 '일직선으로 나아
가는 추진력'이 존재했다는 르 르와 라뒤리의 전제를 의문시하게 만드는 동시에 봉건지배 계급이
비슷한 상황과 문제에 대해 보였던 서로 다른 반응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Ⅱ. 중세유럽에서의 계급구조와 계급조직 그리고 봉건제의 발전.
<봉건제에서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혼융'이 봉건적인
계급구조와 생산체제를 뚜렷하게 특징짓는 본질적인 측면이었다는 것이 사실상 필자가 지닌 관점
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측면은 지배계급의 재생산을 위한 '경제적'조건들이 직접생산자
로부터 잉여노동을 수탈하는 체제에 의존하고 있었고, 그 체제는 경제외적('정치적')강제로 특징지
어졌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있었다. 다시 말해서, 이와 같은 경제외적 강제에 의한 잉여수
탈의 체제가 생계수단(토지, 도구 등등)을 직접 소유한 농민들이 이루어나간 생산력의발전과 연관
을 맺고 또 모순을 일으키면서 보여주었던 다양한 발전형태들은 유럽의 봉건제가 어떻게 전개되어
나갔는가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열쇠를 제공한다.
다시 말해 유럽 봉건경제의 전개과정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던 노동생산성의 하락을 가져온 농업 및
인구의 특수한 발전 패턴, 지배층인 영주계급의 '정치적'인 수요를 충족시키기 윟나 사치품들이 지
배하였던 비생산적인 산업생산의 특징적인 유형들, 또한 (생산인구 자체를 포함한) 생산력의 고갈
과 영주의 수입감소 그리고 영주의 반동에서 뚜렷하게 드러난 특수한 형태의 위기를 이해하는 데
에는 - 또한 그에 더하여 봉건제가 여러 다른 지역에서 서로 다른 유형의 사회적 생산체제에 의해
어떤 식으로 대치되었는가 또는 대치되지 않았는가를 이해하는 데에도 - 경제외적 강제에 의한 잉
여수탈체제의 다양한 발전형태들이 반드시 고려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1. 봉건제의 발전과 위기 : 몇 가지 일반화.
1)농민의 생계수단 소유와 비경제적 강제에 의한 잉여수탈.
<농민과 영주의 관계> 농민의 소유권은 궁극적으로 영주의 권력에 의해 제한되었다. 사실상 개개
영주들이 힘을 얼마나 끌어모을 수 있가에 따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주들이 하나의 계급으로서
얼마만큼이나 상그들 상호간의 경쟁을 배제하고 협력을 증진시킬 수 있었는가 - 또 그럼으로써 얼
마만큼이나 주권의 분할에 따른 영향을 극복할 수 있었는가 - 에 따라, 영주들은 그만큼 더 그들의
지배권을 강화하고 더 나아가 심지어는 농민의 소유권을 위협할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영주들
이 개인으로서나 하나의 계급으로서 어떤 방식으로 또 어떤 정도로 地貸關係에서 힘을 행사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그러한 방식과 정도가 어떻게 변화했는가 - 이는 농민들에 대해 영주가 지니고
있던 정치-사법적 권한의 성격과 효율성이 겪는 변화에서 전형적으로 표출되었다 - 가 어째서 그
들이 지배계급으로 형성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했고, 또한 생산체제 전체의 발전과정에도 깊이 흔
적을 남겼는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早婚> 일정한 한계 안에서는 인구증가율이 결혼연령에 달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결혼
연령은 다시 가족을 이루는 데 필요한 수단, 특히 한 뙈기의 경작지를 확보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는 서유럽 특유의 패턴이 자리를 잡았던 것으로 여
겨지며 이 패턴은 중세의 비교적 급속한 인구증가율을 뒷받침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패턴
은 보유지의 극단적인 분해와 더불어 경제적 기회들이 점점 더 줄고 있었음에도 아주 느리게 변화
해갔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장기적인 추세는 인구과다를 향해 나갔던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인
구과다는 토지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키고, 경제외적 강제나 통제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더욱 많은
지대를 수탈할 가능성을 낳았다.
중세말에 꼬리를 물고 나타난 일련의 위기에 직면하여 유럽의 봉건지배를 구성하고 있던 여러 부
류들은 (가) (12세기와 13세기의 경우에는) 인구의 증가를 틈타 이익을 얻기에는 토지(직영지)가 부
족한 상황, 그리고 또는 (나) (14세기와 15세기의 경우에는) 인구의 격감으로 그들이 지닌 토지로부
터 수입을 얻어내기가 힘들어진 상황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들은 영주들이 궁
극적으로 그들로 하여금 경제외적 강제에 의해 잉여를 수탈할 수 있게 해주었던 제도들에 의존해
있었음을 드러내주었고, 영주들로 하여금 여러 다른 방식으로 이러한 제도들의 복구 그리고 또는
변형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경제외적 강제와 관직소유권> 이러한 장치들은 처음에는 지대수탈을 정당화시키는 관습차지인에
대한 사법권으로 구현되었으나, 뒤에는 중앙집권화된 수탈 즉 국가가 징수하는 세금 가운데 한몫을
차지할 권리를 부여하였던 관직소유권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봉건 경제의 두 가지 측면> 잉여수탈의 체제가 이를 테면 그 자체의 논리에 따라서 그리고 상
당히 커다란 정도로 농민생산이 필요로 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 특히 농민에 대해서 지배적인 지
위를 유지하고 다른 영주에 대해서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 두 가지 요구 모두에서 비롯된, 정치적
동기로 이루어지는 소비에 대한 영주들의 필요가 점점 더 증대되어 가는 데 비례하여 - 발전해나
가는 경향이 있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부정할 수 없다. 영주의 잉여수탈이 궁극적으로 농민을 기반
으로 한 생산에 의해 제한되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영주의 잉여착취체제가 농민생산의 발전 그
자체를 제한하고 심지어는 결정할 수 있었다는 것도 역시 사실이었다. 봉건경제의 발전은 두 가지
측면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며 상호작용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농민 소유자들로 이루어진 계급
이 그들 스스로를 재생산하고 자기 가족의 혈통이 이어질 수 있도록 만들기 우해 의존하였던 생계
를 위한 생산체제의 발전과 봉건영주들로 이루어진 계급이 개인으로서나 지배계급으로서나 그들
스스로를 재생산하기 위해 의존하였던 비생산적인 소비를 위한 그리고 경제외적 강제를 통한 잉여
체제의 발전이었다.
2) 영주와 농민 그리고 생산성의 하락.
포스탄과 헤처는 기술의 혁신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이유를 '새로운 기술적 가능성들이 충분하게
제공되지 못했다는 것' 때문으로 돌리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포스탄과 헤처가 주장과는 달리,
오히려 존재하고 있던 가능성들을 이용할 능력을 봉건경제가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미 존재하
고 있는 자본집약적인 기술들을 이용할 능력이 보잘 것 없었음을 감안한다면, 농업생산에 대한 투
자가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음은 곧바로 이해될 수 있다.
<생산성 정체의 정치적 원인> 그러면 봉건적인 소유체제 또는 잉여수탈의 장치들은 어떻게 해서
보다 생산적인 방법들을 채택하는 능력을 제한하고, 그리하여 생산적인 투자의 가능성을 줄이며,
또 그럼으로써 경제를 경제외적인 또는 '정치적'인 발전 형태를 띠도록 이끌어 갔는가? 우선 그러
한 잉여수탈의 장치들은 (자본주의의 이전의 다른 경제적 장치들과 마찬가지로) 영주든 농민이든
직접생산자들을 교환에서 얻어지는 이윤을 극대화시켜 시장의 기회들에 반응해야 한다는 철칙으로
부터 상당한 정도로 해방시킴으로써 그러한 일을 해냈다. 이로써 경제는 그 핵심적인 측면들에서
여전히 '가부장제'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대체로 농민생산자들은 그들의 생계수단(토지, 도구)을
시장을 통하지 않고서 (다소간) 직접적으로 소유 이용하였다. 이는 그들이 그들의 생계 및 생산에
필요한 것들을 구입할 돈을 얻기 위하여 시장에 생산물을 내다팔도록 강요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그 결과 그들은 그들의 생산수단을 다른 생산자들과 가장 효율적으로 경쟁하기 위해 운용할 필요
가 없었다. 그들은 그 대신에 생산을 곧바로 그들 가족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에로 지향시킬
수 있었다. 비슷하게 영주들도 농민들의 잉여를 직접 수탈할 수 있었으므로, 시자에서 경쟁적으로
생산해야 할 직접적인 경제적 압박을 전혀 받지 않았고 따라서 생산비를 절감할 직접적인 압력으
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영주들이 교환을 위한 생산을 극대화시키려 시도하면 할 수록 그 만큼 그 그들은, 그들과 차지인들
사이에 맺어져 있었던 관계 덕분에 고정자본과 개선된 기술을 노동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 이용함
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농민의 노동부역을 더욱 강화하거나 농민생산자들에게 화폐로든
현물로든 더욱 많은 부담을 지우며 또는 경작면적으로 더욱 넓힘으로써 그렇게 하는 경향을 보이
게 되었다.
생계수단을 소요하고 있는 예농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노동은 강요된 노동일 수 밖에 없었고 그처
럼 '해고될 수 없는' 노동은 고정자본이나 수준 높은 기술의 세심한 이용을 필요로 하는 생산방법
들에 적응하기가 더할 나위 없이 어려웠던(또는 매우 높은 감독비용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인구
가 (특히 13세기가 진행되어 가면서)크게 증가함에 따라 임금이 아주 낮게 떨어지고 토지가격이 아
주 높게 상승했던 것이, 영주들로 하여금 (당연히 이와 같은 변화가 그들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었기 때문에) 노동지대를 화폐지대로 금납화시키고 그들의 직영지를 임금노동을 사용하여 경작하
거나 토지시장에다 임대지로 내놓도록 이끌어 갔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낮은 임금과 높은 토지가
격은 예전의 노동집약적이고 노동력을 쥐어짜는 방법을 계속 유지시키고 투자자금이 토지의 구입
으로 흘러들어가게 만드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면서, 자본집약적이고 노동력을 절감하는 혁신들을
채택하게 만드는 유인을 더욱 감소시키는 역할도 하였다.
영주들이 농민들에게 (노동으로 보다는) 화폐 또는 현물로 더욱 많은 부담을 짐지움으로써 그들의
수입을 증대시켜려 애썼고 또 그러는 데 성공했던 경우, 그들은 투자를 위한 농민들의 자금을 잘라
먹음으로써 농민들이 지니고 있던 땅에서 발전이 이루어질 기회를 줄여 버렸다. 농민들이 지니고
있던 땅뙈기가 대부분 아주 작은 규모에 머물러 있었고 또 그들의 투자자금도 한정되어 있었으므
로, 농민들이 (토지의) 축적과 혁신을 이루어낼 가능성은 애초부터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또한
수확이 아주 불확실했고, 식량가격이 커다란 폭으로 오르내렸으며, 그에 관련하여 현금작물에 대한
시장이 변덕을 부렸으므로, 농민들은 당연하게도 생산물의 매매를 위해 시장에 의존하는 데 뒤따르
는 위험부담을 피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가능한 한 그들 자신의 땅뙈기에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
들을 빠짐없이 생산하기 위하여 작물을 다양화시켰으며 진짜 확실하게 남는 것만을 내다팔았다. 이
처럼 '생계를 위한 생산'을 지향하는 성향은 당연하게도 심지어는 시장의 기회들이 증대되었을 때
에 조차도 상업적인 작물의 전문화를 가로막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생산의 혁신을 가로막는 커다
란 걸림돌이 되었다. 농민들은 오히려 정반대로 그들의 보유지를 여러 자식들에게 분할해 나누어
주는 경향을 보였다. 사실상 인구가 증가하는 상황 아래에서 땅뙈기를 분해하는 농민들의 성향은
농업경제 전반에 걸쳐 그에 반대되는 (토지의) 축적을 향한 어떠한 성향도 압도하고 그리하여 발전
가능성을 더더욱 줄여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3) 봉건제의 여러 발전 형태 : 식민화로부터 정치적 축적까지.
봉건계급은 장기적으로 보아서 전형적으로 비생산적이고 경제외적 패턴들을 결정지었다. 사실상 봉
건제가 발전하고 개량되어 가는 전형적인 과정은 새로운 땅을 경작지로 개간하는 이른바 식민운동
의 형태를 띠고 나타났다. 새로운 땅이 이용될 수 있고 인구가 증가하는 한 영주들은 예전에는 경
작되지 않고 있던 땅에 농민들을 새로이 정착시키는 것만으로도 수입을 늘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형태의 발전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분명히 한정되어 있었다. 경작지를 더욱 넓히고 그리하여
지대를 납부하는 농민들을 더 많이 거느릴 가능성은 토지의 한정된 공급으로 말미암아 분명하게
제한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식민운동을 넘어서는, 특히 투자와 개선을 통해 생산량을 증대시킬 가
능성이 제한되어 있음을 감안 할 때, 봉건제의 발전이 안으로 향하는 형태 - 즉 부를 창출하기 보
다는 오히려 부를 재분배하는 형태를 띠는 경향이 있었다.
<투자대상으로서의 토지> 토지획득을 선호하는 성향 그 자체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기존의 계
급적 생산관계에서 비롯된 결과로서 이해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성
향은 사리에 맞는 것이었다. 직영지 생산을 개선하기 위해 고정자본 또는 인력자본에 투자하는 것
이 이미 지적되었듯 단지 아주 한정된 결실만을 맺으리라고 예상될 수 있었기 때문에, 영주들이 그
들의 잉여를 오로지 그들의 보유지를 더욱 넓히고 그리하여 지대를 얻어낼 수 있는 땅과 농민들에
대한 그들의 통제권을 더욱 팽창시키는 데만 사용한 것은 그들의 입장에 볼때 합당한 것이었다. 더
구나 개선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농민경제이 부문까지 확대되어 있었기 때문에, 농민들도 생계를 더
더욱 확실하게 보장받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투기행위로서도 똑같이
토지구입을 선호하는 성향을 드러내었다. 달리말해서 봉건제의 맥락에서는 토지가 훌륭한 투자대상
이었다. 실로 토지는 인구증가가 토지와 식량의 가격을 상승싴는 장기적인 동향을 가속화시키면 시
킬수록 - 그리고 경제가 생산량을 인구증가에 맞추어 증대시킴으로써 이러한 시장의 즈웋들에 제
대로 반응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입증됨에 따라 - 그만큼 더 좋은 투자대상으로 나타났다.
<徙民政策> 새로운 땅을 개간하거나 경작지를 구입하는 것 이외에, 영주들은 서로가 다른 영주의
것을 빼앗거나 또는 농민들로부터 더욱 많은 것을 쥐어 짜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수입을 체계적으
로 늘릴 수 있었다. 생산증대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랐으므로 무력의 효과적인 사용은 심지어
단기적으로 보아도 부를 축적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었다.
<토지의 집중과 정치적 집중> 그 결과 영주들이 그들 사이에 서로 경쟁하고 다투는 성향이 일반
화되었고, 적어도 장기적으로 보아 이는 정치적 축적을 진짜 불가피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따
라서 정치적 축적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위해서는 증대된 군사력 그리고 또는 사법권이 그에
따라 증대된 비용을 충당하고 남을 만큼 수익을 가져다주어야만 했으며, 이러한 비용은 시간이 흐
를 수록 더욱 더 늘어나는 경향이 있었다. 그 결과 정치적 축적은 스스로를 지속시키면서 점점 더
확대되어 가는 과정 - 더욱 커다란 힘을 휘두르기 위해 자원을 끌어 모으고, 자원을 끌어모으기 위
해 보다 효과적으로 무력을 행사하며, 그리고 다시 효과적으로 무력을 행사 하기 위해 보다 많은
토지와 인력을 끌어모으는 과정이 되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그럼에도 정치적 축적은 그러한 양적인 측면만으로는 결코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양적인
팽창과정일 뿐만 아니라 봉건적인 지배계급이 점점 더 세련되게 스스로를 조직해가도록 요구하는
질적인 과정이기도 했다.
<지배계급사이의 경쟁과 결속> Ⅰ. 농민조직의 영역이 지리적으로 촌락이나 지방에 한정되는 경향
이 있었으므로 영주들의 잉여수탈장치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가는 영주들 사이에 결성된
조직이 어느 정도 확장될 수 있고 그에 상응하여 영주들 사이의 경쟁이 어느정도 억제될 수 있느
냐에 따라 달라지는 경향이 있었다. Ⅱ 영주집단들 사이의 경쟁이 치열해 짐에 따라 점점 더 세련
된 형태의 군사조직과 무기가 필요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대외전쟁'을 치루기 위해 지
도적인 한 주군을 중심으로 하여 영주집단들로 이루어진 조직은 아주 많은 영주들을 서로 결속시
키는 근원적인 원천이 되었고, 이는 다시 영주들이 서로의 재산을 보호하고 농민들을 통제하기 위
해 필요로 했던 효율적인 상호협력을 구축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리하여 봉건시대 내내 전쟁은 봉
건제의 중앙집권화를 촉진시키는 커다란 추진력으로 작용하였다.
<영주와 봉건국가> 봉건국가란, 적어도 제각기 궁극적으로는 무력을 행사할 수단을 직접 이용할수
있거나 또는 그러한 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봉건영주들의 여러 무리가 함께 구성한, 자치
를 위한 다양한 형태의 연합체를 뜻하였다. 개개 영주들 또는 영주집단의 경제적인 성공은 봉건국
가의 형성에 달려 있는 경향이 있었으며, 장기적인 추세는 전반적으로 정치적 축적을 위한 더욱 강
력한 정치적 중앙집권화를 향한 것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상품생산의 정치적 함의> 이러한 맥락에서 교역은 대체로 지배계급의 소비수요가 늘어나는 데
발 맞추어, 특히 정치적 축적을 위한 수요의 증가에 힘을 얻어 팽창하였다. 교역은 본질적으로 수
공업자가 생산한 사치품 및 군사용품들과 농민이 생산하고 영주들에 의해 수탈된 필수품(식량)의
교환을 중심으로 한 생산물의 유통을 촉진시켰다. 우선 무엇보다도 도시에 기반을 둔 산업이 모습
을 드러낸 것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이러한 사회적 노동분업의 성장은, 전문화를 통하여 생산비용을
절감시키고 그리하여 사치품들을 상대적으로 보다 값싸게 만들었기 때문에 영주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그럼에도 장기적으로 보면 이와 같은 형태의 사회적 노동분업이 유럽 전체에 걸쳐 성
장해 나온 것은 영주들에게 파멸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경제전반에 걸쳐 생산적 노동과 비
생산적 노동 사이의 불균형이 점점 더 심각해진다는 것을 뜻하였다. 이처럼 농업경제의 토대가 점
점 더 무너져감에 따라 도시사회가 농업경제에 가하는 압력도 줄곧 커져 농업경제에 심각한 타격
을 주게 되었다.
<중앙집권화와 노동생산성의 하락> 영주들에 의한 정치적 축적의 효율성이 궁극적으로 그 밑에
깔려 있는 봉건적인 생산기반의 허약함으로 말미암아 한정되어 있었음이 사실이라고 해도, 심지어
농업부문이 인구를 먹여 살릴 능력을 잃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조차도 힘을 한 곳으로 모으고 조직
을 중앙집중화시킴으로써 더욱 강력하고 조직이 잘 갖추어진 봉건적 계급국가가 건설될 수 있었고
또 실제로 건설되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 결과, 정치적 축적을 위해 정치적 중앙집중화를 더
욱 증대시키는 스스로의 힘으로 추진되는 성향은 노동생산성을 하락시키는 장기적인 성향을 더욱
가속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인구를 생산과 합치되게 맞추는 '정상적인' 맬더스적 메커니즘을 교란
시키기도 하였다. 농민들의 잉여가 그 한계에 도달하고 실로 더 나아가 인구의 격감과 줄어드는 경
향이 있었으므로, 그 잉여를 강제적 수탈과 전쟁을 통해 재분배하기 위해 보다 강력한 수단들을 만
들어내려는 영주들의 노력도 더욱 강화되고 그럼으로써 경제와 사회 전반에 걸친 파멸적인 위기를
가져올 상황을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었다.
2. 경제성장국면(1150 - 1300년 무렵)에서의 인구와 발전.
봉건적인 생산체제를 아주 뚜렷하게 특징지웠던 '정치적인 요소'와 '경제적인 요소'의 '혼융'을
만족스럽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브와의 접근방식과 인구론자들의 그것 모두가 지닌 핵심적인
약점을 이룬다.
1) 13세기의 프랑스 경제 : 봉건적인 공조징수율의 하락?
봉건경제 전체에 관한 그의 분석에서 브와가 기본적인 관념으로 제시한 것은 그의 이른바 '봉건적
인 공조징수율이 하락하는 추세'이다. 상향국면인 12세기와 13세기에 봉건지배계급이 총생산량 가
운데 차지할 수 있었던 비율은 농민계급의 그것에 비해 점점 더 낮아져만 갔다.
봉건영주들의 소비수요와 그들의 실제 소비는 중세 동안 줄곧 의심할 나위없이 증가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소비수요의 증가는 우연하게 나타난 일이 아니었으며 또한 그것을 '상부구조'에 속한 현상
으로 보아 무시해 버릴 수도 없다. 그것은 영주들로 하여금 개인으로서나 계급으로서나 스스로를
재생산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과정들로 부터 비롯된 몇 가지 절대적 필요들 - 무엇보다도 정
치적 축적을 위한 수단을 점점 더 많이 만들어내야 할 필요성 - 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요컨데 중세 동안 줄곧 봉건적인 지대수취율의 하락을 향한 보편적인 추세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
혀진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영주들이 어째서 그러한 추세를 허용했고 했거나 막지 못했는가를
설명해야만 한다.
2) 13세기의 영국경제 : 인구적 요인이 영주들의 번영을 낳았는가?
브와의 모델은 영국에 관한 자료와는 모순 되는 것으로 보인다. Ⅰ, 13세기말(1279년)에 영국에서는
자유롭지 못한 조건으로 보유된 토지가 전체 경작지 가운데 무려 1/3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예농보유지들은 영주가 자의적으로 부과하고 또 증대시킬 수도 있는 온갖 종류의 공조들을 납부해
야만 했다. Ⅱ, 포스탄의 추산에 따르면 영국의 경우에 평균해서 예농차지인의 총생산량가운데 50%
가량이 영주들에게 수탈당했던 반면, 그에 비해 브와의 결론에 따르면 프랑스의 여영주들은 관습보
유농들의 총생산량 가운데 단지 9-10 %만 차지하였다. 직영지도 영국에서는 전체 경작면적 가운데
어쩌면 북부 프랑스에서 직영지가 차지하고 있던 비율의 세배에 가까울 1/3을 차지하고 있었다.Ⅲ,
영국에서는 13세기말에 가서도 예농의 노동부역이 아주 생생하게 살아남아 있었다.
실제로 중세 영국에서 나타난 장기적 추세들은 브와의 해석과는 완전히 반대로 흘러갔다. 영국은
프랑스를 따라잡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따금 정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사실상 영국
에서는 중세경제의 성장국면 가운데 대부분에 걸쳐 영주들이 총소득 가운데 점점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12세기 동안에도 인구가 증가하고 있었지만, 12세기의 대부분에 거쳐 농민들로부터 영주들에게 납
부되는 온갖 부담들이 고정되어가는 성향이 나타났으며, 그러한 성향은 농민들에게 유리하게 작용
했다. 그럼에도 12세기말과 특히 13세기로 부터는 인구의 지속적인 증가와 더불어 앞선 추세가 역
전되는 상황이 나타났다. 영주들은 농민들로부터 점점 더 많은 것을 수탈해 낼 그들의 권리를 다시
성공적으로 내세울 수 있었다. 이는 법률에서 자유농과 비자유농 사이를 구별하는 선이 더욱 뚜렷
하게 그어지고 농촌인구 가운데 커다란 부분에게 예속의 낙인이 찍힌 것으로 표출되었다. 이처럼
예속화가 나타난 것과 더불어 농민들은 점점 더 많은 부담을 짐지게 되었다.
(이 당시) 영주들은 경제적인 실속을 얻을 수 있는 영주권을 행사하기 위해 농민들에 대하여 그처
럼 아무 제약도 없는 물리적인 힘을 휘두를 필요가 거의 없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의심할 나위 결
정적이었던 것은 예농들이 국왕의 법정에 의해 영주들의 자의적인 수탈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도록
배제되었다는 사실이었으며, 이와 같은 결과는 다름 아니라 이 시대에 법률에서 이루어진 발전들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영주권이 확실하게 확보되어 있었던 곳에서만 인구의 압력은 어쩌면 이따금이나마 영주들로 하여
금 보다 쉽게(토지부족으로 말미암아 경제적으로 선택의 여지가 심각하게 한정되어 있었던) 부자유
차지인들로부터 갖가지 부과금을 거두어 들일 수 있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살펴 보았듯
이 그와 같은 인구적 상황 그 자체만으로는 어떻게 해서든 그러한 영주권을 확립할 수도, 또 자동
적으로 그러한 부과조의 수탈을 가능하게 만들 수도 없었다. 오히려 정반대로 영국의 영주들이 12
세기 말과 13세기에 나타난 겉보기에 유리하지만 파멸적일 수도 있었던 시장의 상황에 편승하여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들이 대체로 농민들에 대해 그러한 영주권을 부과하고 유지
하며 직영지를 유지 팽창시키는 데 성공했던 덕분일 것이다.
<'봉건적 징수율의 하락'개념에 대한 비판> 14세기 초에는 북부 프랑스의 농민들이 관습보유지에
대한 실질적으로 완전한 소유권을 이미 획득해 놓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같은 시대에 영국에서 나
타난 변화와 아주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으며, 이 또한 장기적으로 중요한 결과들을 낳게 될
것이었다. 어쨌든 이와 같은 프랑스이 맥락에서 브와가 '봉건적 공조징수율의 하락'을 향한 추세를
발견해 냈다는 것은 거의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3) 봉건국가와 경제의 발전 : 영국과 프랑스의 비교.
사실상 꽤 오랫동안 중세 프랑스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13세기 후반에 절정에 다달았던 시대를
'농민의 승리'가 이루어진 시대로 서술해 오고 있다. 반면에 중세 영국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같
은 시대를 영주반동 또는 장원 반동의 시대로 서술해 놓고 있다. 13세기에 프랑스에서는 영주들의
수입위기를 향한 추세가 전반적으로 나타났던 반면에 영국에서는 같은 시대가 영주계급의 황금시
대로 간주되어 왔다.
서로 다른 발전과정에서 적어도 가설을 구성하는 데 뒷받침이 되는 하나의 토대로서는 프랑스의
경우에 비해 영국의 '경제적'발전이 뒤떨어져 있었다는 것 보다는, 오히려 봉건지배계급의 '정치
적'조직이라는 면에서 영국이 상대적으로 앞서 있었다는 것이다. 영국의 영주들은 농민들로부터 잉
여를 수탈하는 데 프랑스의 영주들보다 더 뛰어나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그들의 자체조직이 보다
더 훌륭하게 이루어져 있었다. - 즉 그들이 봉건적인 중앙집중화를 이루고 봉건적인 축적을 해나가
는 데 프랑스의 영주들보다 더 앞서 있었다. - 는 점이었을 게다.
<영국의 경우> 사실상 영국 봉건계급의 自治조직이 12세기와 13세기에 영국의 그거보다 '더 앞었
던 것'로 나타나는 이유는, 그것이 출발점이 달랐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이러한 자치조직의
측면에서 이미 대륙 특히 노르망디가 일구어낸 여러 발전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기도 했
다.
<프랑스의 경우> 프랑스에서의 중앙집중화가 좀더 뒤늦게 가속화되었을 때 그러한 중앙집중권화
는 영국에서의 발전으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아니 더 나아가 부분적으로는 실로 영국의 직접적인
정치-군사적 압력에 대한 반응으로 진행된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봉건제의 중앙집중화는 영국의
패턴을 뒤쫓지 않았으며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영국의 패턴으로 부터 더더욱 아주 멀리 벗어나게
되었다.
<정복 왕조로서의 영국> 영국에서 봉건제가 일찍이 국왕을 중심으로 중앙집중화를 이루어낸 것은,
정복사업을 조직하고 영국을 점령하며 그곳에서 그들 계급의 지배를 확립해야 한다는 여러가지 필
요로 말미암아 노르망디 귀족의 자체조직이 더더욱 높은 수준으로 발전해갔음은 두말할 ㄹ나위도
없다. 그것은 또한 보다 고도로 발전된 군사적 의무 및 조직의 체제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倍臣들
에게 바로 위의 주군은 물론 국왕에게도 충성을 맹세하도록 의무화시킨 새로운 절차에서도 분명하
게 나타났다. 물론 이 모든 과정에서 바로 국왕이 최상위 주군으로서 주도적이고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은 사실이나, 이 경우에 국왕의 힘은 영주들 사이에 이루어져 있던 협력의 포고가 깊이가 표출
된 것이었다.
<중앙집중화와 영주의 관계> 하지만 이러한 국왕의 권력강화는 귀족들 사이의 단합이 더욱 굳어
져 갔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영국에서는 봉건정부의 발전이 일종의 자체교정의 메커니즘을 통해
서 영국귀족의 이해관계에 아주 가깝게 부합되어 갔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그 이유는 국왕이
여전히 통치 행위의 모든 측면에서 귀족의 지지에 크게 의존해 있었다는 데 있다. 그 결과 봉건국
가를 점점 더 효율적으로 건설하는 작업은 귀족의 묵인과 지지를 필요로 했고, 따라서 귀족들의 이
해관계를 반영할 수 밖에 없었다. 왕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중심으로 귀족들
을 조직하고 단합시킬 필요가 있었고 따라서 왕이 그 과정에서 귀족들의 힘을 강화시키는 것은 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례적으로 강력한 왕권은 유럽에서 가장 고도로 발전된 봉건국가에서 階序的으로 조직되어 있던
이례적으로 강력한 귀족을 반영한 것이었다. 따라서 영국에서 강력한 국왕국가가 성장해 나왔음은
'단순한 정치적인' 발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영역에서 가장 효율적인 '축적'을 가능하
게 해주었던 사회적인 계급관계의 형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처럼 고도로 결속되어 있던 노르망디 귀족들이 영국을 점령함으로써 나타난 최초의 결과 가운데
하나는 봉건적 통제권이 강회되고 농민들에게 더욱 무거운 부담이 짐지워진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영국의 귀족들이 그 계급 안에서 이례적일 만큼 높은 수준으로 단합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
들이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었고 영주들 사이의 갈등을 규제할 수 있었으며 농민들을 강력하게 지
배할 수 있었다는 점들에서 동시에 드러난다. 봉건적 계급관계 및 생산관계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요소'와 '경제적 요소'가 서로 떼어질 수 없이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러
한 점들에서보다도 더 분명하게 드러날 수는 없다.
<영국과 프랑스의 차이점> 11세기 말과 12세기에 영국에서는 왕권의 중앙집중화가 더욱 더 진척
되어 갔던 반면에, 같은 시대에 프랑스의 대부분의 지역은 왕국의 차원에서 또는 심지어 제후령의
차원에서도 효율적인 정치조직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에서 잘 나타나듯 권위의 극단적인 분해로 특
징지워져 있다. 그렇다면 중세 경제의 성장국면 동안에 프랑스의 봉건영주들이 잉여착취자로서 상
대적으로 약했다는 사실을 상당한 정도로 그들이 정치적 단합을 이루지 못했던 탓으로 돌리는 것
도 그렇게 터무니 없는 일은 아닐 게다. 그렇게 본다면 이 시대에 프랑스에서 영주의 수입이 하락
하는 추세를 보였다는 사실을 브와의 뒤를 따라 봉건적인 공조징수율의 하락을 향한 구조적인 성
향에서 빚어진 불가피한 결과로 이해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고도로 조직된 프랑스의 농민공
동체들이 저항을 통해 거두어들인 농민의 승리에서 빚어진 결과였다. 하지만 프랑스 농민들의 승리
를 가능케 만들었던 요인은 상대적으로 보아 프랑스 귀족들이 극도로 분열로되어 있었다는 점이었
던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의 영주들이 - 자의적인 (다시 말해 가변적인) 부과금을 요구하고 관습 보유지에 때한 공조
를 가격상승에 발맞추어 조정할 능력을 잃었다는 사실에서 직접 나타나듯이 - 예농제(영주권)의 쇠
퇴를 막지 못했다는 바로 그 점이야 말로 프랑스 귀족으로 하여금 특히 13세기에 봉건지대의 하락
을 그리고 그에 따라 수입의 감소를 맛보게 만든 주된 요인이었음은, 특히 비교사적 관점에서 볼
때 확실해 보인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13세기가 영국에서는 바로 귀족 전체가 예농차지인들을 국왕
법정으로 배제시키고 관습차지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을 예농의 신분으로 전락시키며 그리하여 농
민들 대부분을 자의적인 수탈에 노출시키는 데 성공했던 시대였다는 사실은 반드시 기억되어야만
한다.
끝으로 프랑스에서 중앙집중화된 효율적인 왕정이 특히 13세기말로부터 발전하고 강화되어가는 데
바탕이 되었던 핵심적인 장기적 토대는, 왕정의 중앙집중화된 잉여착취의 체제(특히 국가의 과세)
가 성주 및 그 밖의 대제후들이 보여주는 분산되고 서로 경쟁적인 영주권보다 상대적으로 더 우월
했다는 사실에 있었다는 필자의 원래 주장역시, 비슷한 논의로 뒷받침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프랑스에서는 왕정의 발전이 영국에서의 그것과 뚜렷하게 대조적으로 매우 많은
갈등을 내포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모순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처음에는 프랑스의 대제후들이 국왕의 왕실과 행정부에 들어가 있지 않다는, 아니 사실상 그로부터
배제되어 있었다는 사실 - 다시 말해 왕실과 국왕의 행정부에 들어가 있던 것은 모두 하급기사들
이었다는 사실 - 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는데, 이는 처음부터 군소영주들을 거느리고 있던 대제후들
에 의해 주도된 앵글로-노르만 정부와 아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왕저잉 경쟁과정을 통해 발전되
어 갔다는 점은 또한 국왕의 사법권이 영주법정을 희생시키면서 국왕의돈주머니를 불리기 위한 수
단으로 발전해 갔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의적인) 국왕의 과세가 점점 더 성장해 영
주들이 갖가지 공조를 징수하는 것을 위협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농민의 법적 지위> 농민의 법적 지위가 - 프랑스에서는 국왕에 의해 재산권이 인정되는 방향으
로, 반면에 영국에서는 국왕에 의해 예농제가 더욱 뒷받침되는 방향으로 - 아주 다르게 발전해 나
아갔다는 사실은 이 시대에 그 두 지역에서 계급의 형성 및 계급간 갈등의 패턴과 소유체제의 발
전양태가 아주 다르게 나타났음을 가리키는 중요한 지표를 제공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절대주의 국가의 대두> 이처럼 프랑스에서는 왕정의 발전이 봉건귀족의 해체라는 맥락 속에서
그리고 몇 가지 중요한 점에서는 봉건귀족과의 갈등 속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얄굿게도 그러한
왕정의 발전은 그로 말미암아 전혀 의도된 바 없이 장기적으로 빚어진 결과로서 프랑스의 지배계
급을 보다 강력한 토대 위에서 재조직하고 재구성해주게 될 것이었다.
요컨데 12세기와 13세기 동안에 프랑스의 왕정은 정복과 동맹을 통해 그 힘을 꾸준하게 증대시켜
나갔다. 하지만 특히 13세기 말부터는 영주조직의 해체와 농민의 승리로 빚어진 결과였던 영주들의
수입감소가 국왕으로 하여금 새로운 형태의 중앙집중화를 향해 커다란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도록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주계급은 그들 가운데 많은 수로 하여금 국왕의 행정부를 행해 몰려 들
게 만들어 세금/관직 국가의 형성을 향한 길을 열어주게 될 장기적인 과정에 들어서기 시작하였고,
그에 상응하여 농민의 재산권은 국왕에 의해 더욱 강화되어갔다.
장기적으로 보아, 중앙집중화된 잉여수탈의 성장은 귀족을 재조직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것은
군소영주들을 국왕이 내리는 관직에 의존하게 만들었고 강력한 제후들을 궁정으로 들어와 그들 스
스로를 왕정과 제휴시키도록 끌어들였던 것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영국에서는 지배계급 전체가 보다 발전된 조직을 갖추어 제후들이 국왕을 중심
으로 중앙집중화되었 있었던 덕분에 12세기말과 13세기에 농민들에 대한 영주들의 권한과 제도적
권리들이 다시 강화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영주들 사이의 정치적 결속은 분권화된 봉건적 잉여
수탈 - 즉 예농제 - 이 성공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보장해 주었다. 이로써 영주들은 그들의 넓은
의미에서의 재산을 단기적으로나 장기적으로나 지켜낼 수 있었다. 그 결과 13세기의 프랑스에서 뚜
렷하게 찾아볼 수 있는 영주의 수입위기를 보여주는 징후가 영국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따
라서 중앙집중화된 잉여착취의 체제가 등장하여 분권화된 잉여착취의 체제를 잠식하고 몰아내는
추세 - 즉 절대주의적 통치형태의 맹아적 대두 - 도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3. 봉건제의 위기 : 그 시작과 여러형태.
봉건적인 계급관계 또는 소유관계는 생산성을 하락시키는 장기적인 추세를 결정하였고, 또한 봉건
사회의 전반적인 경제발전에 이를테면 근본적인 구조적 한계를 그어 놓았다.
1) 생산 및 인구의 상한선과 계급문제 사이의 관계 : 흑사병 이전의 유럽에서 나타난 그 성격
영주와 농민 사이의 잉여착취관계가 얼마만큼 강력했는가가 농민에 기반을 둔 경제 및 인구의 팽
창가능성을 제한하거나 증가시키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영
주권이 비교적 약하고 인구가 밀집한 지역들은, 그들이 말하고 있듯이, 한정없는 인구팽창을 뒷받
침할 수 없었다. 계속되는 인구증가는 궁극적으로 가난과 기근을 만연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다. 그럼에도 이처럼 보다 자유로운 지역들이 같은 시대에 고도로 장원화되어 있었던 지역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인구를 먹여살릴 수 있었으며 또 실제로 먹여살렸다
는 사실은 주목할만 하다. 달리 말해서 영주권이 미약한 지역에서는 농민들이 영주에게 납부하는
공조가 낮았던 덕분에 보다 많은 소비를 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뿐
만 아니라 그들은 잉여 가운데 훨씬 더 많은 부분을 마음대로 재투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장원화
된 지역의 농민보다 단위면적당 더욱 많은 생산을 거두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그들이 지닌
인구증가의 가능성도 그만큼 더 컷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실상 이렇게 볼 때, 13세
기에 프랑스의 대부분 지역에서 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인구밀도가 나타났던 것을, 다름 아
니라 이 시대에 영국에 비해 프랑스의 영주권 및 잉여착취가 상대적으로 미약했다는 사실에 비추
어 해석하는 것도 그렇게 지나친 일은 아닐 것이다.
2) 영주의 수입 위기와 그 결과.
서유럽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는 지역에 따라 그 시기가 다르긴 했지만 13세기말이나 14세기에 인
구증가가 마침내 끝을 맞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맬더스적 논리를 엄밀히 따른다면 이러한 인구의
감소는 인구를 자원과 합치시킴으로써 체제가 지닌 병폐를 치료하고, 그리하여 다시금 인구증가 및
경제성장의 시대를 열어주어야만 했다. 하지만 뒤따랏던 것은 그러한 시대가 아니라 오히려 장기간
에 걸친 경제와 인구의 쇠퇴 - 몇몇 지역에서는 파국 - 를 겪게 될 시대였다.
인구의 감소는 경작이 한계지를 떠나 좋은 땅으로 되돌아가게 만들고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농업생산성을 높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농민들의 1인당 소득이 더 높아진 것은
반드시 농업투자의 증대를 촉진시켰을 것이다. 이러한 두 메커니즘은 둘 모두 인구 및 경제의 새로
운 성장에 영향을 미쳤고 궁극적으로 그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은 아주 장기적
으로만 적어도 한 세기 정도나 뒤늦게 이루어졌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서 그처럼
뒤늦었던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귀족의 반동> 귀족들의 수입감소는 이르건 늦건 어느 곳에서나 영주들로 하여금 귀족계급을 재
조직하여 보다 더 효율적으로 농민들을 수탈하고 봉건계급 내부의 전쟁을 수행함으로써 그들의 재
산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강력하게 밀고 나가도록 만들었다. 이것이 이른바 '귀족의 반동'이었다.
이는 농민의 생산력을 더더욱 와해시키고 그리하여 인구를 더더욱 감소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귀족의 몰락과 절대주의 국가의 대두> 북부 프랑스에서는 영주의 수입감소가 13세기 중엽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13세기 부터는 이러한 감소와 더불어 중앙집중화된 국왕의 과세제도가 급속히 성
장해 나왔다. 그리하여 국가기구는 더욱 성장해 나오면서 점점 더 효율적으로 되어갔고 수탈을 강
화했는데, 그로부터 얻어진 수입 가운데 일부는 더욱 심각해진 영주의 수입위기를 메꾸는 데 사용
되었다. 하지만 세금의 증대는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던 농민경제에 타격을 가했다. 14세기 초에는
이미 다름 아니라 영주의 공조요구가 미약했던 덕분에 앞에서 지적했듯이, 농민인구가 주어진 토지
자원과 기술수준을 감안할 때 가능했던 가장 높은 수준에 거의 다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중앙집중화된 과세의 증대는 생산을 와해시키고 인구를 생산을 와해시키고 인구를 감소시키는 효
과를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인구의 감소는 균형을 살리지 못했다. 인구의 감소는 세금납부자의
감소를 뜻했고, 따라서 영주들에게는 전반적인 수입의 감소를 의미했으며, 그리하여 수입을 되살릴
필요를 더더욱 크게 만들었다. 영주들의 기본적인 대응은 전쟁의 가열과 국왕 과세의 성장 그리고
국가기구(관직)의 건설이라는 서로 연관된 발전들을 부추기고 그리부터 이익을 얻어내려 애쓰는 것
이었다. 그 결과 14세기 후반과 15세기 초반에는 과세의 증대와 점점 파괴적으로 되어 가고 있던
군사적 행동들이, 농민의 생산기반이 위축되어 가고 있었던 것과 관련을 맺는 가운데, 불균형과 쇠
퇴의 '악순환'을 시작되게 만들었다. 이처럼 정치적 축적을 위한 정치적 중앙집권화의 가속화는 필
요하였던 맬더스적 자체조정을 가로막았고, 그 대신 봉건제를 장기적이고 전반적인 위기속으로 몰
아넣었다.
<영국의 경우> 영국에서는 인구밀도가 대체로 프랑스에서 도달되었던 것 만큼 높은 수준에 이르
지 못했다. 14세기 초에 영주의 부과금이 높은 수준에 올라 있었던 것이 인구가 프랑스에서와 같은
정도로 팽창하지 않도록 만들어 주었음은 거의 확실하다. 더구나 15세기 초에는 영주의 반동이 농
민들의 이주 뿐만 아니라 농민들의 저항에 의해서도 깨져버리는 바람에 이미 실패로 돌아가 있었
다. (이는 어쩌면 영국의 분권화된 잉여착취형태가 아무리 잘 조직되고 통합되어 있었다고 하더라
도 - 특히 중세말에 상대적으로 인구가 부족하게 된 상황 아래에서는 - 프랑스에서 새로 등장한
중앙집중화된 - 세금과 관직에 의한 - 잉여착취체제에 비해서는 뒤떨어져 있음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이 시대에 대륙의 몇몇 지역이 겪었던 것과 같은 종류의 경제적 파국을 막아주었던 요인
은 바로, 영국의 귀족이 장기적으로 볼 때 예농제를 강화하거나 절대주의적 국가에 의한 과세를 시
행함으로써 농민들에 대한 경제외적 강제를 통한 잉여수탈을 증대시키지 못했다는 점에 있었을 것
이다.
<동유럽의 경우> 엘베 이동의 독일 지역은 또 다른 패턴을 보여준다. 이 지역에서 중세에 이루어
진 인구와 경제의 발전은 서유럽으로부터의 식민운동에 크게 의존해 있었던 덕분에, 서유럽의 추세
로부터 강력한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 말미암아 동부 독일에서는 위기가 서유럽보다
얼마간 뒤늦은 시기에 나타난 것으로 보이고 얼마간 다른 형태를 띠었으며 또한 아주 다른 결과를
빚어내게 되었다.
동유럽에서는 14세기 말부터는 인구증가가 급격히 둔화되었다. 서유럽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이에
대한 설명은 아주 미약한 정도로만 생산성 하락의 문제와 관계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동부
에서는 아직도 식민가능한 처녀지가 엄청나게 널려있기 때문이다. 서부에서는 이미 이루어지고 있
던것과 똑같은 쇠퇴의 주기가 동부지역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파국적인 결과들을 경제와 인구에 가
져다 주면서 모습을 드러냈던 것은, 부분적으로는 역병 때문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인으로
는 서부에서 나타난 인구 및 경제의 전반적인 쇠퇴로 말미암아 동부로의 이주가 급격히 줄어들었
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주들은 수입감소를 겪었고 경제외적 수단들을 동원함으로써 이에
대응하려고 시도하였다. 동유럽의 영주들은 (관직과 세금으로부터 수입을 증대시키기 위해) 그들이
기댈 만한 잘 발달된 중앙집중화된 국가기구를 전혀 갖고 있지 못했으므로, 예농제를 강화함으로써
농민들로부터 더욱 많은 것을 수탈하려 했다. 동시에 그들은 그들 사이에 서로에 대한 공격을 더욱
강렬하게 벌였으며, 그럼으로써 그나마 거의 남아있지 않았던 군주정이나 통합된 국가의 흔적마져
대부분 없애버리고 있었다. 끝으로 그들은 대외적으로도 전쟁을 위해 조직을 갖추었는데 그들의 군
사적 원정으로 말미암은 황폐화는 생산과 인구에 특히 파멸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
들의 수입이 더더욱 위협받게 되자 영주들은 농민과 다른 영주의 희생을 대가로 수입을 벌충하려
는 시도를 다시 되풀이 했고, 이는 경제 및 인구의 불균형과 쇠퇴를 향한 낯익은 악순환을 낳게 되
었다.
Ⅲ. 봉건제의 위기에 따른 결과와 뒤이은 발전 패턴.
15세기 중엽으로부터 서유럽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던 상황이 마침내 물러갔
으며, 그라히여 새로운 경제상승의 시대가 막을 올렸다. 농민들은 다시금 보다 질 좋은 땅을 경작
하고 있었으며 그리하여 생산성 증대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내란과 대외전쟁은 좀더 드믈게 발생
하였고 그 파괴성도 어느 정도 줄어들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어쩌면 귀족들이 탈진해 있었고
또 그들의 진영이 일시적으로 흐트러져 있었던 것을 반영한 현상일 것이다. 또한 지배계급이 농민
에게 뜯어내는 수탈의 수준도 그에 발맞추어 적어도 일시적으로나마 낮아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
고 역병의 영향 역시 사라져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따라 인구가 증가하고 경작이 팽창하는
새로운 시대가 막을 올렸으며, 이러한 상황은 생산의 증대를 낳고 그와 더불어 영주계급과 농민계
급 모두의 수입을 증가시켜 주었다. 그에 따른 결과로 나타난 수요의 증가는 유럽의 산업 및 상업
이 새로운 팽창의 시대를 맞이하는 데 필요한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유럽의 여러 다른 지역이 새로운 경제팽창의 시대가 열어준 기회와 위험들에 대해 보여주었던 서
로 다른 경제적 반응들은, 중세 말에 나타난 영주의 수입위기로부터 모습을 드러냈던 농업에서의
여러 다른 소유 관계 또는 잉여착취체제에 의해 결정적으로 조건지워졌다는 것이 바로 필자의 주
장이었다. 이러한 소유관계 자체는 상당한 정도로 농업에서의 계급형성 및 계급갈등이 걸어갔던 서
로 다른 장기적인 과정들 - 유럽의 여러 다른 지역에서 지배계급이 그 자체의 재생산을 보장하는
데 필요한 잉여를 착취하기 위해 발달시킬 수 있었던 장치들의 형태와 힘을 농민들이 크든 작든
어느 정도 제한할 수 있게 만들었던 과정들 - 에서 빚어진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다. 동시에 어떤
경우에든 - 즉 예농제가 성장한 동유럽의 경우에든, 농민의 재산권 확립과 연관하여 절대주의가 성
장한 프랑스의 경우에든,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통합된 국가가 대두한 것과 연관하여 토지에서 고
전적으로 자본주의적인 관계가 발달해 나온 영국의 경우에서든 - 새롭게 등장해 나온 잉여착취체
제는, 지배계급이 해당 지역에서 예전에 도달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으로 자체의 조직을
갖추고 스스로를 중앙집중화했던 덕분에 성립될 수 있었으며, 따라서 그것은 적어도 하나의 시각에
서 볼 때는 이러한 방향을 향한 봉건제의 전반적인 추세가 절정에 오르지는 않더라도 지속되고는
있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끝으로, 이미 자리를 잡은 서로 다른 소유체제들은 필
자가 보기에 지역에 따라 아주 크게 다른 경제발전의 패턴을 만들어내는데 - 대륙의 대부분 지역
에서는 여러 다른 형태로 농업의 쇠퇴와 궁극적으로 '전반적'인 위기를 가져다준 반면, 영국에서는
자기지속적인 성장에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돌파를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데 - 구조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1. 서로 다른 발전 패턴의 뿌리.
1) 예농제의 성장과 쇠퇴 : 동부와 서부의 비교.
14세기 말과 15세기에 서유럽에서는 영주들이 그러려고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예농제를 강화함으
로써 영주의 수입위기에 대처할 수 없었던 반면, 엘베 이동의 유럽에서는 영주들이 바로 이러한 일
을 실제로 해낼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하면서, 필자의 설명은 동유럽이 상대적으로 최근
에 와서야 특히 식민운동을 통해 발달해 나왔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었다. 동부 독일뿐만 아니라
폴란드도 포함하는 북동부 유럽의 영주들은 처음부터 '인위적'이고 합리적으로 고안된 농민의 정
착형태를 만들어가면서 뒤늦은 농업발전의 과정을 이끌어 가고 또 통제하였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서유럽의 영주들은 보다 더 오래전 부터 이미 자리잡고 있었으며 더 잘조직되어 있었던 - 또 그들
의 권리를 위해 (많은 경우 성공적으로) 투쟁해온 전통을 물려받고 있었던 - 농민공동체에 맞서 그
들의 권력을 '바깥으로 부터' 덮어씌워야만 했다. 그 결과 동부의 영주들은 농민들을 예농으로 전
락시킴으로써 수입감소의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을 갖고 있었던 반면에, 서부의 영주들에게는 서부
의 농민들이 상대적으로 더 강력한 힘을 갖추고 있었던 덕분에 이러한 길이 처음부터 막혀있었다.
동부의 영주들은 실제로 주로 그들 스스로를 정치적으로 재조직하는 방법을 통해서 특히 새로운
형태의 봉건국가를 발전시킴으로써 이러한 일을 이루어 낼 수 있었다.
실로 동부에서 식민과정을 영주들이 직접 이끌었다는 사실은, 그들로 하여금 의식적으로든 무의식
적으로든 장기적으로 그 지역의 경제에 대한 그들의 지배를 보다 쉽게 만들어 주었던 정책패턴을
확립할 수 있도록 허용해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경제외적 강제를 통해 잉여를 수탈하고 정치적 축적을 이루어내는 그들의 능력이 더 커졌
던 점은 장기적으로 볼 때 경제의 파국을 빚어낼 가능성을 낳았다. 어디서나 밑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던 생산성은 낯익은 '정치적'인 해결책들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른 농민에 대한 요구의 증대와
지배계급들 안에서의 더욱 격렬해진 투쟁 그리고 대외전쟁은 결국 경제의 후퇴와 동유럽版 '17세
기의 전반적인 위기'를 낳았다.
2) 토지에 대한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의 대두 : 영국과 프랑스의 비교.
<프랑스> 16세기 초반에 영주들이 극복하지 못했던 봉건적 공조징수율의 하락은 농민들의 토지에
대한 소유권이 점점 더 실질적인 것으로 되어가게 만든 원인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은 결과였던 것
이다. 이러한 소유권은 물론 16세기에 새로이 발전해 나온 것이 아니라 영주들이 부과하는 온갖 공
조가 고정되고 농민들의 토지보유가 세습화되어 갔던 오랜 기간에 걸친 과정에서 비롯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16세기초 동안에 영주들은 차지인들을 내쫓으려고 체계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시도하였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러한 시도들은 이따금 성공적인 농민반란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듯이 주로 농민들의
힘이 강력했기 때문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국왕,영주,농민> 영주들로 하여금 수입을 얻기 위해 국가에서 손을 벌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
던 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은 농민들의 확고한 지위였다. 영주들이 국가의 관직과 세금징수
에 기대게 됨에 따라 영주들은 그러한 과정을 통해 국왕정부의 전반적인 권력을 강화시키고 그리
하여 국왕의 사법권을 더욱 강력하게 만드는 경향을 보였던 것이다. 그 결과 영주들의 지방적인
사법권은 날개가 꺽여 버리게 되었고, 이에 따라 농민소유자들에게 맞서서 대항할 수 있는 영주들
의 능력도 더더욱 줄어들었다. '국가라는 기구는 여전히 대체로 봉건제의 기구로 남아'있기는 하지
만, '이 기구의 실제 활용이 장기적으로는 영주의 직접적인 착취와 경쟁함으로써 봉건제를 약화시
키는 데 보탬이 되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끝으로 어쩌면 전반적인 발전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는 징후로서 국왕은 세금을 징수하는 모든
책임을 농민촌락들의 손에 맡기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국왕은 이렇게 함으로써 그의 옛 경쟁자인
영주에 맞세워 공동체를 강화시켰다. 하지만 국왕은 그렇게 하면서 점점 더 쇠퇴하고 있었던 분권
화된 영주들의 공조에 대한 요구를 대신하여, 중앙집중화된 국왕의 잉여착취를 점점 더 무겁게 그
리고 점점 더 효율적으로 부과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영주들은 단지,경제적 지대를 물리는 데 필요한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
었을 충분한 봉건적 권력 - 특히 자의적인 요구를 할 수 있는 권리로 나타나는 권력 - 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절대주의 국가> 그 결과 절대주의의 성장은 영주계급으로 부터 비록 간헐적이고 궁극적으로 효
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조직적인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여러 차례에 걸쳐 그때 그때 프랑스에서 절
대주의적인 국가기구의 장기적인 팽창을 중단시켰던 영주들의 왕정에 대한 반발은, 옛 착취양식과
새로운 착취양식 사이에 진짜 경쟁이 벌어졌음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현상이다.
절대주의 국가기구가 이처럼 잉여착취의 옛 구조물들을 잠식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하더라도, 그것
은 또한 그 구조에 기대어 살아왔던 많은 개개인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기도 했던 것이다.
요컨데 절대주의 국가가 단순히 영주에 의한 분권화된 착취에 바탕을 둔 옛 재산형태들을 유지하
도록 보장해주는 역할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오히려 절대주의 국가는 옛 체제의 변형된 형태로 나
타나게 되었다.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절대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데 가장 열렬하게 몸바친 사람들
은 바로 많은 경우 '새로운 인물들'이었던 국왕의 관리들이었다. 하지만 국왕은 그 나름대로 자신
의 권력을 실제로 강화시키기 위해 이러한 종복들의 충성을 확실히 해놓아야 했다.
농민들에 대한 보다 효율적인 잉여착취체제는 지배계급의 보다 효율적이고 긴밀하게 짜여진 정치
적 연합, 즉 보다 강력한 국가를 필요로 했다. 이것은 사실상 대개 국왕의 종복들에게 유리한 방향
으로 '정치적 영역에서의 사적 소유권'이 다시 창출됨으로써 건설되었는데, 이는 모순 되게도 (다
시 건설된) 독립적인 (커다란, 하지만 그래도 부분적으로만 관직에 기반을 두고 있던) 지배계급에게
국왕이 궁극적으로 의존하는 상황이 다시 나타난 것을 뜻하였다.
새로운 잉여착취체제는 옛 체제보다 더 효율적이었고 더더욱 올곧게 과시적인 소비와 전쟁을 지향
하고 있었다. 그것은 옛 체제보다 훨씬 더 커다란 정도로 농민들의 생산력 향상에 필요한 요건들과
관계없이 발달하였고, 그리하여 장기적으로는 더 완전하게 그러한 요건들을 파괴하게 되었다.
15세기 중엽으로부터 프랑스에서는 중간층 농민들이 토지에 강력한 통제권을 지니게 되었으며, 이
에 따라 중세로부터 눈에 익은 발전 패턴, 즉 인구의 증가와 보유지를 더욱 세분화시키고 그와 더
불어 생산성이 하락하여 궁극적으로는 정체와 쇠퇴를 불러오는 패턴이 전개되어 갔다. 당분간 영주
들은 이러한 과정으로부터 이익을 얻어 낼 수 있었다. 단지 버려져 있던 땅이 다시 경작되고 농민
보유지의 수가 늘어나는 것만으로도 (지대는 고정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수입은 증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얼마 뒤에는 경작이 보다 한계적인 성격을 띤 땅으로까지 확산되어 가고
생산성이 인구증가에 직면하여 하락하기 시작한 것과 더불어, 인플레이션이 점점 더 가속화되면서
고정된 지대의 가치를 잡아먹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성장의 시대가 막을 내리기 시작하고 - 농민들
뿐만 아니라 다시금 자신의 수입이 더 늘어나는 수요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지방
영주들에게도 - 온갖 종류의 경제적 문제들이 나타나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탄이었다.
절대주의적 세금국가(tax state)가 줄곧 그 힘을 키워감으로써 경제는 또다시 거의 항구적인 파멸을
겪게 되었다.
<영국> 중세에 영국의 지배계급이 진보된 자체조직을 갖추고 있었다는 바로 그 점이야말로 그들
이 분권화된 형태의 봉건적인 잉여착취를 봉건경제의 성장국면 동안에 제대로 가동하도록 만들 수
있게 해주었던 주된 요인이었다.
1350년 이후, 지대가 실질적으로 크게 하락함에 따라 쪼들리게 된 신하들은 역시 재정적으로 궁핍
해진 상위 주군에게 손을 더욱 크게 벌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런 요구만 해도 충족시키기에는
너무나 컸던 것이다. 그 결과는 당파가 모습을 드러내고 귀족들의 조직이 와해되며 귀족계급 안에
서 내분이 벌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15세기 중엽을 특징지웠던 정부의 붕괴와 내란의 발
발을 불러왔다.
<영주의 위기 돌파구로서의 자본주의> 영국의 영주들로 하여금 장기적으로 수입위기로부터 빠져
나갈 새로운 길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요인은, 바로 그들이 농민들을 다시 예농으로 전락
시키지 못하고 (프랑스 영주들이 그러했듯이) 절대주의를 향해 나아가지도 못한 데 있다. 중세말에
나타난 영주의 수입위기로 말미암은 압력아래 그들 자신의 자체질서와 자체조직이 무너져가는 가
운데, 영국의 지배계급은 당분간 봉건적 정치적 축적의 장치들을 거꾸로 뒤집에 놓지 않을 수 없었
다.
농민들에게 어떤 종류든 경제외적 착취를 다시 부과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으므로 영주들은 그
들에게 남아있는 봉건적 권력들을,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를 향한 발전임이 판명될 변화를더욱더
촉진시키는 데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주의 토지재산에 대한 통제권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봉건적 권력을 잘 드러내는 것으로서, 영주들
이 중세 내내 그들 자체의 조숙한 중앙집중화를 바탕으로 하여 확립하고 유지해왔던 강력한 입장
이 물려준 유산이었다. 그들의 뒤이은 시대에 얼마간 다른 형태를 사용하여 그들 자체의 중앙집중
화를 더 높은 수준으로 올림으로써 이러한 권력을 더욱더 강화시키게 될 것이다.
요컨데 중세 전반에 걸쳐 영국의영주들이 유지하고 있었던 직접적인 봉건적 권리 및 권한들은 그
들에게 뒤이은 시대에 토지에 대한 그들의 통제권을 확립하고 유지하며 팽창시킬 수 있는 강력한
바탕을 마련해 주었고, 바로 이러한 점에서 그들이 농민에 대하여 프랑스의 영주들보다 훨씬 더 강
력한 입장을 누렸다는 것을 부정하기란 힘든 일이라고 여겨진다.
인구가 궁극적으로 점점 더 산업분야의 일자리로 옮겨간 것은 강력한 인구상승세와 더불어 장기적
으로 농산물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키고 따라서 식량가격을 상승시킴으로써, 농업생산의 증대와 농
업생산성의 향상을 빚어내었다.
농업의 발달은 생산조직자와 직접생산자(이 둘은 이따금 동일한 사람이었다)로 하여금 더 이상 그
들의 재생산 수단을 완전히 소유하지 못하게 만들고, 따라서 시장을 위해 체계적으로 생산하지 않
을 수 없도록 만들었던 새로운 사회관계의 체제에 의해 조건지워진, 뚜렷하게 자본주의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에 따라 차지인 사이에서는 토지를 얻기 위해 그리고 영주들 사이에서는 차지
인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이 벌어졌는데, 그러한 경쟁은 비용절감을 자극하고, 따라서 전문화와 개
선을 부추겼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상대적으로 비효율적인 소규모 차지인들이 대규모 자본주의
적 차지농에 의해 밀려나게 만들고, 그리하여 농업의 변혁을 뒷받침 해주었다.
점점 더 많은 수의 영주와 차지인이 상업적 활동을 계속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평화와 안정을 보
장해 주기를 국왕에게 기대하게 되었다. 이로써 영주의 토지소유계급이 점점 더 크게 자체의 중앙
집중화를 이루어 나갔던 장기적 추세는 물론 이제는 토지소유계급이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데 사용
하고 있던 소유관계 또는 잉여착취관계의 성격이 달라진 데 발맞추어 질적으로 다른 형태를 띠긴
했지만, 근대 초 동안에 더욱 확대되었다.
튜더 시대 동안에 등장한 국가는 결코 절대주의 국가가 아니었다. 상업적인 영주와 자본주의적 차
지농 그리고 임금노동자의 세 계급으로 이루어진 새로이 대두하고 있던 자본주의적 계급구조를 주
도함으로써 지대상승으로부터 이익을 얻어낼 수 있었던 영국의 토지소유계급들은 잉여를 착취하기
위해 직접적인 경제외적 강제에 의존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또한 그들은 정치적 수단(세금 징수/
관직과 전쟁)을 통해 잉여를 수탈하는 장치로서 국가가 간접적으로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도 필
요로 하지 않았다.
그들이 적어도 대내적 차원에서 필요로 했던 것은 바로 질서를 바로 잡고 사적 소유권을 보호하며
그리하여 계약을 기반으로 한 경제적 과정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보장해 줄 값싼 국가였다. 국
왕절대주의를 지향한 두 차례의 실험은 좌절되어 버렸으며, 영국경제의 발전을 가로막게 될 세금국
가는 결코 나타나지 못했다.
새로운 국가는 그것을 뚜렷하게 특징짓는 측면으로 비록 모든 차원에서 토지소유계급에 의해 움직
여 졌지만 그 계급에게 관직의 열매를 따먹을 기회를 아주 한정된 저오로 제공했을 뿐이며, 지방의
통치업무에 대해서는 전형적으로 아무런 댓가도 지불하지 않았다. 또한 새로운 국가는 비록 군사력
을 독점하기는 했지만 단지 최소한의 세금만을 부과했을 뿐이다. 사실상 17세기 말부터 줄곧 세금
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을 때 그러한 세금들이 국왕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던 덕분에 이제 확고하
게 국가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고 있던 토지소유계급에 의해 그 자체의 구성원들에게 부과되었다
는 점은 실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는 프랑스에서 나타난 상황과 뚜렷하게 대조되는 데 프랑스
에서는 지배계급에 속해 있다는 한 가지 징표만으로 국세가 면제되었으며, 그것은 또한 국가가 본
질적으로 귀족을 위해 부를 제공해주는 정치적인 장치로 여겨졌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요컨데 영국에서는 농업자본주의를 향한 발전이 17세기 말에 이미 '경제적인 요소'와 '정치적인
요소'의 유서깊은 '혼융'을 끝장내고 있었으며, 국가와 시민사회를 제도적으로 분리시켜 놓고 있었
다.
영국의 발전은 대륙의 대부분 지역에서 나타난 발전과 두 가지 서로 관련된 결정적인 측면에서 이
미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었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귀족이 등장해 농업혁명을 이끌어가고 있었다는
점으로 분명히 특징지어졌던 것이다.
2. 서로 다른 발전 패턴의 결과 : 영주와 농민 그리고 자본주의적 농업(1450 - 1750)
1) 소유형태와 토지소유권의 발전.
문제는 이 두 나라에서 어떻게 이처럼 아주 다른 추세들이 나타났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두 지역 모두에서 근대초 내내 줄곧 똑같은 시장의 요인들 특히 무엇보다도 식량가격의 상승이 강
력한 영향을 미쳐, 토지축적을 통해 이익을 얻어내려는 동기가 계급분화를 불러오기에 전혀 모자라
지 않을 만큼 크게 생겨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뒤로 두 나라에서 농민들이 - 특히 농민의 토지소유
권이 - 아주 다른 발전과정을 겪었다는 사실에 있다. 프랑스와 영국에서 빠져들어있던 서로 다른
소유체제에 대한 언급은 바로 이처럼 서로 다른 발전패턴을 설명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두 나
라 각각에서 농민들로 하여금 대체로 유사한 경제적(시장) 조건에 서로 다른 방학으로 반응하도록
허용한 그리고 또는 강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상이한 소유체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비교적 커다란 규모로 농사를 지어 보다 효율적으로 생산하고 시장에서 보다
많은 수익을 얻어낼 수 있었던 부농들이 그들의 우세한 경쟁력을 이용함으로써 - 소농들의 임대차
기간이 만료되었을 때 더 높고 더 안정된 지대를 제시하거나 또는 시장에 나오게 된 임차지인들에
대해 소농들보다 높은 지대를 제시함으로써 - 곧바로 소농들을 희생시키면서 토지를 축적할 수 있
었다.
영국에서 농민의 계층분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거의 모든 경우 비교적 규모가 큰 상업적 차지인이
었던) 요맨이 성장하도록 만들었던 것은 시장의 성장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영국의 농업생산자
들을 완전히 경쟁적인 생산에 의존하도록 만들었더 사회적 소유관계였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서로 다른 사회적 소유체제가 제도적으로 자리잡고 또 그것이 두 나라의 경제
가 제각기 나아갈 길을 결정적으로 갈라 놓기 시작한 것은, 이처럼 바로 15세기 후반으로부터 이루
어진 일이었다.
그처럼 다른 발전과정은 첫째로, 두 나라 각각을 지배하게 되었던 인구체제에서의 분명한 차이로부
터 비롯된 결과였고, 둘째로는 두 나라 모두에서 강력하게 나타났지만 그 각각에서 서로 다른 영향
을 미쳤던 시장의 새로운 성장으로부터 비롯된 결과였다. 이러한 원인들 각각의 작용 또한 서로 다
르게 제도화된 소유관계에 소급될 수 있었다.
<프랑스 - 결혼연령의 앞당김> 프랑스에서는 15세기 중엽으로부터 농민의 소유권이 다시 확인되
고 심지어는 더 강화되었던 것이 농민을 기반으로 한 예전의 인구체제가 다시 나타날 수 있게 만
들었다. 이러한 인구체제가 (비교적) 이른 결혼연령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음은 분명하고, 이처럼 이
른 결혼연령은 다시 땅을 이른 나이에 쉽게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는 다
시 궁극적으로는 보유지의 분할을 허용하였던 강력한 농민소유권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영국 - 결혼 연령의 늦춰짐> 영국에서는 토지가 비경제적인 조그마한 땅뙈기들로 분해되는 것
을 가로막는 경향이 있었다. 그 결과 자녀들은 성년이 되면 땅뙈기를 얻을 것이라고 더 이상 기대
할 수 없게 되었다. 반면에, 가족 안에 있는 자녀의 수는 가능한 한 상업적 보유지의 경제적 생산
에 따른 여러 필요와 가능성들에 맞추어 조정되어야 했다. 그 결과는 결혼연령이 늦어지고, 가족의
규모가 작아지며, 자녀들을 집 바깥으로 내보내 다른 직업을 갖게 만드는 것과 같은 양태들로 나타
났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서로 연관을 맺는 가운데 인구는 보다 느리게 증가하였고 전반적으로
보유지의 분해가 억제되는 결과들이 빚어졌다.
토지소유의 집중화engrossment는 생산의 필요들과 별개로 아니 더 나아가 많은 경우에는 사실상
생산의 필요들과 상충되게 진행되어 갔다. 얄궃게도 토지소유의 단위가 더 커지는 것은 경작의 단
위가 더 작아지는 것을 뜻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프랑스에서 1450년으로부터 농업이 걸어갔던 발전 패턴은 농업이 전과 다름없이 농민소유
자에 의해 지배되었기 때문에 중세에서의 발전 패턴과 본질적으로 단절을 이루지 않았던 반면, 영
국의 그것은 일종의 돌파를 겪었다고 결론 짓고자 한다. 더구나 이러한 차이는 생산의 발전에 여러
가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2) 소유관계와 생산성.
영국과 프랑스에서 서로 다르게 소유관계가 자리잡았던 것은, 16세기 후반에 가서 재산분배의 발전
패턴을 서로 다르게 조건짓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농업생산력의 발전방향도 서로 다르게 나아가도
록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a) 프랑스의 농민소유자와 영국의 자본주의적 차지농.
농민을 기반으로 한 프랑스 농업은 종교전쟁에 따른 황폐화가 막을 올리기 훨씬 전에 이미 그 자
체가 아무런 억제도 받지 않고 발전해 가는 가운데 정체와 쇠퇴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영국은 이와 뚜렷하게 대조적인 양상을 보여준다. 우리가 아다시피 영국에서는 근대초가 진행되는
가운데 농업혁명이 이루어졌다. 중세와 근대초에 걸쳐 유럽엣 시행된 복합농업에 사용될 수 있었던
기술 아래에서 기본식량의 생산비용을 상당한 정도로 값싸게 만들어줄 질적 개선이 이루어지기 위
해서는, 가축사육과 곡물경작이 보다 더 긴밀하게 결합되고 서로 더욱 강력한 相補관계를 맺을 필
요가 있었으며, 특히 토양의 비옥도가 떨어지는 성향을 막아줄 수 있는 똥거름의 양과 쟁기질의 횟
수를 더욱 늘리려면 가축생산이 곡물생산에 비해 더 크게 늘어나야만 했다. 농민들의 생계를 위한
생산은 직접소비를 위한 식량생산을 부추긴 반면 전문적인 사료작물의 경작 및 가축사육을 멀리하
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가축생산과 곡물생산을 서로 경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은 그럼
으로써 앞서 말한 종류의 변화를 직접 가로막는 장애를 이루었다. 반면에 자본주의적 소유체제는 -
경쟁에 의해 강요되는 전문화 및 개선을 향한 성향을 마련해 줌으로써,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앞
에서 말한 (분해의 과정이 아니라) 계층분화의 과정을 통하여 모험을 무릎쓰고 투자를 하며 필요한
대규모 영농을 수행할 수 있는 자본주의적 차지농계급을 등장시킴으로써도 - 그러한 변화를 촉진
시켰다.
<소농의 존재> 소농들이 대규모 차지농들에 못지 않게 효율적일 수 있었던 특수한 분야들에서는
- 무엇보다도 낙농업에서, 그러나 또한 시장을 지향하는 도시 부근의 원예업에서도 - 소농들도 살
아남을 수 있었고 또 실제로 많이 살아 남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쩌면 자본주의적 소유관계가 경쟁을 통해 경제 전반에 걸친 지속적인 과정으
로서 전문화와 개선을 향한 - 즉 노동의 사회적 지리적 분업을 향한 - 체계적인 추진력을 제공해
주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하여 영국에서는 우리가 아다시피 지역들 사이에서
전문화를 이룬 한 지역의 발전이 다른 지역의 발전과 서로 의존하는 유기적인 관계를 맺는 복잡한
분업적 전문화 체제가 일찌감치 발달해 나왔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새로운 기술들이 이용될 수
있게 됨에 따라 계속해서 발전하고 변화되어 갔다.
b) 프랑스와 영국의 대규모 차지농장.
겉모습은 비슷하나 프랑스의 몇몇 지역에서 나타난 대규모 직영지로 특징지어지는 생산체제는 사
실상 영국에서 지배적이었던 것들과 아주 다른 사회적 생산관계의 존재를 반영한 것이었다. 필자가
기본적으로 밝히고자 했던 점은 특정한 소유관계의 체제와 결합된 잠재적 생산력을 분석하기 위해
서는 - 사실상 그 체제를 완전하게 규정하기 위해서는 - 개개 생산단위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만으
로 충분하지 않으며, 경제체제 전체 안에서 생산 단위들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구체적으로 밝혀
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농민을 기반으로 한 생산에서 나타날 수 밖에 없던 낮은 농업생산성은 프랑스의 내수시장과 산업
부문의 발전을 제한했고, 그리하여 농업 바깥에서 다른 일자리를 찾기 어렵게 만들었다. 따라서 궁
극적으로 볼 때 규모가 큰 재산단위 및 생산단위가 등장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지대의 수준을 결
정했던 것은 전과 다름없이 바로 농촌에 매여있는 농민들로부터 나오는 생계를 위한 토지에 대한
수요였다. 토지 가운데 농민들이 차지한 몫이 줄곧 줄어듦으로써 인구가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한
뒤에도 토지에 대한 수요는 계속 증가할 수 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지대도 게속 상승해 갔던 것이
다.
영국에서 특히 곡물경작지역들에서는 자본주의적 차지농들이 고도로 자본집약적 농업을 장악하였
고, 그에 따라 토지를 보유한 농민들의 수는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영주들의 수
입이 자본투자를 바탕으로 한 차지인들이 얼마만큼 효율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가에 달려 있
었다. 요컨데, 자본주의적 차지농의 수익은 영주의 지대수취를 위한 전제조건을 이루었다.
경제적 성공은 축적과 혁신에 달려있었고, 이러한 맥락에서는 차지인이 자금부족에 시달리는 경우
영주가 어느 정도 자본투자의 역할을 떠맡는 것이 때로는 영주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영주와
차지이니 맺고 있던 그와 같은 공생관계는 경제적으로 훌륭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으며, 역동적인
농업발전을 뒷받침하는 경향이 있었다.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영국의 대농장과 프랑스의 대농장 사이에 질적인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은,
곡물가격이 낮았던 시대인 17세기 후반에 그들이 서로 분명히 다르게 기능했다는 것에 더할 나위
없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같은 시대에 1660년대로부터 줄곧 식량가격이 낮았던 상황에 대해 프랑스의 토지소유자들이 보여
주었던 반응은, 쿠퍼 스스로 지적하고 있듯이 영국에서의 반응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 농산물
에 대한 시장, 즉 가격이 하락하는 데 발맞추어 지대도 하락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켜주는'
시장이 쇠퇴해가는데 직면하여, 프랑스의 토지소유자들은 지대상승을 고집하였다. 그 결과 대규모
차지농들을 포함한 엄청난 수의 차지인들이 높은 지대와 낮은 가격 사이의 틈바구니에 끼여 쥐어
짜이으로써 빚구렁에 빠져들었으며, 결국에는 농장의 여러 장비와 심지어 집안가구들까지 포함하
여 그들이 축적해 놓은 재산의 대부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농장 자체마저도 영주에게 넘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점이 영국의 영주들보다 프랑스 영주들이 더 또는 덜 합리적이었다거나 또는 덜 자
비로웠다는 것을 가리켜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다른 상황에 직면해 있었을 뿐이었다.
<법칙의 역사성> 한 가지 단서가 붙어야만 한다. 그 단서란 중세와 근대초의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났던 '규칙'이 모든 시대 모든 지역에 해당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특정한 소유체제와 특정한 경제 발전 - 경로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가 역사를 초월하는 법칙에 의
해 지배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에로의 도약이 일단 여러 지역에서 이루어지면서,
이러한 도약은 그에 뒤이어 다른 곳에서 벌어지게 될 비슷한 과정들의 조건과 성격을 다시 돌이킬
수 없게 변화시켰다. 19세기가 진행되어감에 따라 소규모 소유자 겸 경작자들을 기반으로 하는 농
업이 경제발전에 지니고 있던 의미는 변화되어갔다. 시장을 위한 생산을 지향하게 만드는 유인들은
더욱 커졌고, 생계를 위해 생산을 하게 만드는 압력은 줄어들었으며, 소규모 가족농장의 기술적인
잠재력은 더욱 팽창하였다. 산업의 성장 덕분에 더욱더 폭넓은 범위의 상품들을 싼 값으로 구입할
수 있게 되면서, 농민들로 하여금 필수품의 자가생산을 포기하고 전문화를 이루어내며 그들이 필요
로 하는 것들은 시장에서 구입하도록 부추기는 요인들은 엄청나게 커졌다. 또한 온 세계에 걸쳐 기
본적인 식량의 공급이 점점 더 늘어났고 수송수단의 발달로 그 처럼 늘어나고 있던 식량을 더 쉽
게 구할 수 있게 되면서, 전문화에 따른 위험부담도 점점 더 줄어들어 갔다. 끝으로 19세기로 가면
서 인공비료가 발달하고 생물학적 지식이 증대됨에 따라, 소규모 가족농장은 특정한 몇몇 생산유형
에서 긍정적인 이점들을 갖게 되었다. 특히 새로운 형태의 가축생산에서는 가장 수준 높은 기술들
이 대규모 농장 못지 않게 소규모 농장에서도 훌륭하게 이용될 수 있었으며 자본도 거의 필요로
하지 않았다. 더구나 소규모 가족농장에서는 가축생산에 필요한 노동이 보다 질높게 그리고 보다
정성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반면에 임금노동을 사용하는 대규모 농장에서는 대개 그러지 못했
다. 이러한 발전들은 당연하게 농민영농이 직접생산자를 생계수단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경제외적 과
정을 거칠 필요도 없이 순조롭게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인 영농으로 이행하는 것 - 즉 가족 농장
이 계속 살아남는 것 - 을 훨씬 더 쉽게 만들었다.
결론 : 산업과 농업 그리고 경제발전.
영국의 경제로 하여금 대륙의 이웃들에게 이미 막혀 있었던 발전에로의 길로 올라설 수 있게 만들
어 주었던 것은, 바로 농업에서의 계급관계 또는 소유관계가 바뀐 데 뿌리를 둔 농업생산성의 증대
였다. 이러한 발전에의 길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는 '전반적인 위기'가 경제를 사로잡았던 시대
를 거쳐서 산업혁명의 시대에 들어와서 까지, 산업화가 계속되고 경제가 전반적으로 성장한 것으로
특징지어졌다.
17세기에 영국의 경제는 그것이 옛 멜더스적 한계들 너머로 인구를 계속 증가시킬 수 있었다는 점
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전통에 의해 지배되고 있던 수출을 위한 직물산업이 위기와 정체를 맞이한
데 직면하여 산업과 경제 전반의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대륙에 있는 모
든 다른 나라의 경제와 뚜렷하게 구별되고 있다. 영국산업의 지속적인 팽창은 어쩌면 원래 직물수
출로부터 힘을 얻었을지도 모르지만 기본적으로는 궁극적으로 농업생산의 지속적인 탈바꿈에 뿌리
를 둔 내수시장의 성장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프랑스와 서부 독
일 그리고 동부 유럽에 걸쳐 제조업생산이 널리 하락한 데에는 바로 내수 시장이 - 농업생산성의
하락으로 말미암아 잠식당한 바람에 - 한정되어 있었고 또 쇠퇴해 갔던 것이 근본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인구는 17세기말을 거쳐 18세기에 들어서서까지 줄곧 증가하였고, 그와 함께 줄곧 농업으로부터 산
업으로, 그리고 농촌지역으로부터 도시지역으로 옮아가, 런던 뿐만 아니라 리버풀, 맨체스터, 그리
고 버밍엄도 크게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곡물가격은 더 이상 상승하지 않았다. 이 덕분에
실질임금이 증대될 수 있었고, 그리하여 농업인구에게는 새로운 황금시대가 열렸다. 바로 농업이
마음대로 소비할 수 있는 소득을 증가시키고 그에 따라 구매력을 증대시켜 주었던 덕분에 내수시
장은 줄곧 팽창해 갔다. 이리하여 산업은 농업에 힘입어 발전해 갔고, 동시에 거꾸로 농업이 더더
욱 개선을 이루어가도록 자극해 주었다. 이와 같이 위로 향한 발전적인 순환은 산업혁명에 들어서
서까지 계속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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