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제 제기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
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속 버튼을
눌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 장정일, 라디오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 김춘수의 [꽃]을 변주하여, {길안에서의 택시잡기}, 민음사, 1988, p.64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香氣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
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
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김춘수, 꽃, {김춘수전집}, 도서출판 문장, 1986, p.142 }}
문학이 음악이나 미술, 사진 등과 다른 점은 그것이 언어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언어는 늘 변화한다.
그런데 변화는 아무 것도 없는 속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늘 있음을 전제로 해서 일어난다. 그래
서 언어는 재창조된다. 물론 음악이나 미술 등도 재창조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
고 각각의 작품들도 작가나 유파 속에 집단을 이루어 존재한다. 그림의 부분부분과 질료는 그런 것들을 벗
어나 따로따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각조각 나누어 보면 언어는 모두 일상 생활이나 기존의 텍스트 속에 녹아 있다. 그리고 그 각각이 나
름대로의 독특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언어적 특성을 작가의 경우에 한정시켜 살펴보면,
한 작가는 그만의 독특한 문체를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것은 일종의 경향을 이루게 되
고, 때로는 문단 전체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권위를 부여받아 일군의 세력을 형성하기도 한다. 그런
데 그 독특한 문체라는 것도 내면을 주의깊게 들여다 보면 모두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조합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어떤 어휘들을 즐겨 사용하고, 어떤 통사적 구조를 선호하는가가 문체의 외면적인 성격을 규정
할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작가의 독특한 문체가 다른 작가의 작품 속에서도 드러날 때, 그것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 것인가. 지금까지는 이에 대해 상호텍스트성(간텍스트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왔다. 한 텍스트는 이
전 텍스트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그 텍스트에는 이전 텍스트들의 흔적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는 것이다. 그러나 상호텍스트성은 다분히 우연적이고 비의도적인 측면이 강하다. 그것은 문화의 일반적인
속성에 의거하여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피력한다. 그러므로 상호텍스트성이라는 개념은 창
작자의 의도가 개입된 모방에 이르러서는 그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제 위의 두 시들을 살펴보자. 장정일의 시는 작가가 밝히고 있듯이, 김춘수의 <꽃>을 변주한 작품이
다. '변주'라는 용어가 주는 낯설음은 그것이 주로 음악에 사용되어 온 개념이기 때문이다. '변주'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주제를 바탕으로 하여 리듬, 가락 따위를 바꾸고 꾸며서 연주하는 일'이다. 그러나 장정일의
시를 살펴보면 리듬이나 가락, 즉 시의 형식적인 측면은 거의 김춘수의 작품과 동일하다. 오히려 주제, 즉
내용의 측면에서 새로운 것으로 바꾸고 꾸미는 일을 하고 있다. 물론 형식과 내용이 어우러져 하나의 작품
을 이루고 그것이 문학으로, 음악으로 장르를 형성해 간다는 측면에서는 동일한 인식에 기초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작가가 교과서에도 나오는 익히 알고 있는 시를 바꾸어서 새로운 시로 쓴 까닭은 무엇일까? 아
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이미 김춘수의 시가 널리 알려져 있다는 사실과 관련을 맺고 있다. 시조의 경우, 우
리는 그것이 지니고 있는 형식적 자질 및 내용적 특성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시조나 한 수 지어
보게.' 하고 누군가가 권한다면 그 말이 의미하는 뜻이 무엇인지, 그 사람이 어떤 형식의 것을 원하는지 곧
인지하게 된다. 만약 그 사람의 말을 거절할 의사가 없다면 그 형식적 자질을 망가뜨리지 않는 범위 내에
서 일정한 내용을 담아 그가 요구하는 형식의 것을 제시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김춘수의 시는 대부분의 독
자들에게 이미 어떤 형태로든 인지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변주를 한다면 가장 효과적으로 그 의도
를 드러낼 수 있는 작품이 되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장정일의 시에서 드러난 것과 같은 기법을 패러디{{ ) 패로디의 개념 및 기능, 의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 상태이다. 이 글에서는 패로디의 범주를 너
무 넓게 잡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주로 패로디의 긍정적인 측면에 주목하고 있는 린다
허천(김상구, 윤여복 옮김, {패로디 이론}, 문예출판사, 1992)과 비슷한 관점에서 논의를 이끌어 가
고자 한다. 즉, 패로디가 글쓰기 전통의 파괴가 아니라 오히려 글쓰기 전통에의 복귀이며, 전통에
대해 끊임없는 대타 의식을 지닌 생산적인 패러다임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것이다.
}}로 범주화하고 그것의 개념과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이 작가에게는 독자로서의 시 쓰기 행위이며 독자에게는 작가의 비평 의식과 창작 의식의 일면을 엿보게 하는 텍스트로서의 기능을 담당한다는 측면에서 검토해 보고자 한다.
2. 표절, 모방 그리고 패러디
표절이나 모방에 대한 논란은 예술사 곳곳에서 발견된다. 특히, 미술 분야에서 표절에 대한 시비는 위조
문제와 관련을 맺으면서 끊임없이 쟁점화되어 왔다. 미술에서 위작의 역사는 미술사와 더불어 시작되었으
며 그리스 시대의 미술가들은 팔리지 않는 동료나 제자의 작품에 자신의 서명을 기입하여 도와주었다는
위작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 유준상, 미술의 不正行爲에 대하여, 월간미술, 92년 1월호, p.99 }}
사실 , 그 당시에 그것은 '사회성을 갖는 사실'로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것이 사회성과 관련을 맺으면서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의 일이다. 이는 고고학, 미학, 역사학 등의 여러 학문들이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예술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가 가능해졌고, 귀족 중심의 문화가 서서히 깨어지기 시작한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문학의 경우에도 이미 기원전 7, 8세기의 그리스에서부터 명작의 시구나 문체를 모방하는 표현 기법들
이 성행하였다고 한다. 사실 문학사를 통하여 고대 로마 시대의 시인 베루길리우스를 비롯하여 제프리 초
서, 윌리엄 셰익스피어, 존 드라이든, 존 밀턴, 새뮤얼 테일러 코울리지, 로런스 스턴과 같은 영국 작가들에
이르기까지 표절이나 도용의 혐의를 받지 않은 작가는 단 한 사람도 없다.{{ ) 김욱동, {문학의 위기}, 문예출판사, 1993, p.209
}}
그러므로 이제 표절과 모방의 범주를 확실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표절과 모방은 그야
말로 아주 미묘한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그것에 접근하는 시각에 따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
면 귀고리'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표절이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초반의 일이다. 91년 대한민국미술대전의 서양화
부문 수상작과 관련된 미술 분야의 표절 논쟁과 92년 이인화의 소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에 대해 제기된 문학에서의 표절 논쟁이 그것이다.
여론에서 문제삼기 시작하여 평론가들 사이의 지상 논쟁으로까지 발전한 이번 표절시비의 쟁점은 표절
여부와 작가의 윤리성에 대한 논란보다는 이 작품의 표절 여부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공식적인 태도와 이
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평론가들이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미술사적 논거 자체의 합당성 여부에 놓여 있다
고 볼 수 있다.{{ ) 심광현, 표절시비와 미술대전의 향방, 월간미술, 92년 1월호, p.118
}}
한 평론가의 올바른 지적처럼 이제 표절 문제는 윤리성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입장의 차이에 근거한
논쟁의 성격이 짙다. 원작 텍스트를 전용한 어떤 작품이 표절 시비의 대상이 되었을 때 비판론자는 이를
'표절'이나 '도용'으로 규정하지만 옹호론자는 이를 다른 개념으로, 즉 '인용'이나 '차용', '패러디', '패스티쉬
(혼성모방)' 등으로 규정되도록 진술한다. 즉, 이러한 행위들은 의도의 차이에 따라 상이한 방식으로 규정
되는 것이다.{{ ) 김수현, 예술작품에 대한 표절판정의 논리, 미학 제18집, 한국미학회, 1993, p.30
이 글에서는 표절 판정에서 자주 언급되는 '작가의 의도' 문제에 대해 그것이 원작은폐를 부인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작품에 대한 의미 해석과 가치 판단에 원작에 대한 지식이 개입되지 못하는 상황'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독자의 능력이 다양한 층위를 이루고 있고, 지식의 개입 여부가
일괄적으로 추출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므로 실제적인 판정에 여전히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
작가의 의도는 표절에 대한 명백한 판단 기준이 되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그 작품의 전체적 맥락인
것이다. 이렇게 표절이나 도용의 혐의를 두는 데 미시적 측면보다는 거시적 측면이 고려되어야 하는 까닭
은 문학 작품이 매체로 삼고 있는 언어의 특수성 때문이다. 언어는 시중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사용한 다음
에야 비로서 나의 손에 들어오는 화폐와 같아서 내가 사용하는 언어에는 항상 다른 사람들의 가치나 이데
올로기가 침윤되어 있게 마련이다.{{ ) 김욱동, 앞의 책, pp.194∼195
}}
물론 그렇다고 해서 텍스트의 내용이나 형식적인 측면이 고려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에 대해서도 엄밀한 판정을 내려야 할 뿐 아니라, 작품 자체의 문학적 완성도에 대한 평가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복사'나 '조립', '베끼기', '빌려오기' 등으로 규정되고 있는 예술 작품의 창작 방법에 대한 용인은 작품의 미적 수준과 일정한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자연스럽게 예술 창작의 한 방법론으로 규정되고 있는 모방의 개념으로 넘어가게
된다. 모방은 단순히 견습 작가들이 창작 방법을 습득하는 과정에만 국한되지 않고, 더 나아가서는 고대인
들이 이룩했던 예술적 탁월성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이라는 관점에서도 큰 의미와 의의를 지닌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남의 작품을 모방하거나 흉내내는 것은 결점이나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미덕으로 간주되
었을 뿐 결코 표절이나 도용으로 간주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 김욱동, 앞의 책, p.212
}}
전통적인 미술에서 말하는 모방은 일상 경험의 대상이나 사건에 대한 충실한 복제인 단순 모방뿐 아니
라 본질의 모방 또는 이념적인 것의 모방까지를 포함해서 광범위한 범주를 갖는다.{{ 최형순, 현대미술의 창작개념에 대한 연구 - 창작과 모방의 역학과 패러디, 서울대 석사, 1994년, p.11
}}
문학에서의 모방도 내용이나 형식적인 측면뿐만이 아니라, 세계관이나 창작 방법과 관련된 포괄적인 것으로 규정되어 왔다.
오늘날 모방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창작 방법은 패러디이다. 패러디는 모방의 한 형식이지만 항
상 패러디된 작품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닌 아이러닉한 전도에 의한 모방이다.{{ ) 김상구.윤여복 옮김, 린다 허천, {패로디 이론}, 문예출판사, 1992, p.14
린다 허천은 오늘날 패로디라고 부르는 것이 과거에는 모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왔다고 지적하
면서 패로디와 모방과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패로디=모방이라는 등식은 각각의 개념을
너무 단순화한 느낌이 없지 않으므로 보다 엄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이후에 나오는 패로디와 관련된 논의들은 주로 이 책의 입론을 원용하여 전개해 나갈 것이다.
}}
그
러
므로 근대적 패러디에는 오늘날의 예술을 정확하게 반영하기 위해 아이러닉하며 비판적인 차원에서의 거리감이 가미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차이를 둔 반복으로서의 패러디는 비평적 거리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패러디는 당대의 문화적 조건과 여러 모로 결부되어 있다. 현대 예술에서 자아 반영의 양식에 대한 관
심이 최근에 증대되고 있으며, 비평적 연구에서 텍스트의 상호관련성이 강조된다는 측면에서 패러디는 주
목받고 있는 것이다. 사실 패러디가 쟁점이 되고 있는 것도, 대중 문화의 홍수 속에 쏟아져 나오는 많은
작품들에 대한 가치 기준이 명확하기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양한 창작 방법을 인정하는 현대의 예술 풍
토 때문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패러디 사가(historian)들이 문화적으로 세련되어서 패러디 작가
들로 하여금 패러디 독자의 능력에 의존할 수 있게 해주는 시대에 패러디가 번성했다는 데 동의하는 것이
다.{{ ) 린다 허천, 앞의 책, p.35
}}
당대의 문화에 대한 문화적 믿음은 우리가 지각하고 사유하는 행동 방식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우
리의 정서적.심리적 반응들을 조건지우고 수정한다. 우리의 근본적인 믿음들은 우리의 감각, 정서, 지각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은 예술 작품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변화시킨다.{{ ) 최진희, 현대 미학에서의 '위조' 문제에 관한 연구 - 위조품의 가치와 그 존재론적 자격에 관한 논의를 중심으
로, 서울대 석사, 1995, p.34
}}
그
러
므로 이중적 기호화를 통해 아이러닉한 전언을 보내고 있는 패러디는 독자의 다양한 반응을 유도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창작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패러디는 창작 방법으로서뿐 아니라, 창작의 추동력으로서 상정되어야 한다. 그것은 패러디가 작가
의 의도와 관련된 단선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 관객, 청자 등의 모든 수용자와 전체적
인 연관을 맺고 있는 다층적인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다.
3. 창조성의 새로운 범주 - 패러디
(1) 메타 언어를 통한 자기 독립성
패러디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그것이 이미 알려진 텍스트를 내용이나 형식의 측면에서 수용자가 인식
할 수 있도록 재약호화한다는 것이다. 즉, 소설에 대한 소설, 시에 대한 시, 영화에 대한 영화 등의 방식으
로 인식되어지는 독특한 텍스트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는 때로 장르를 뛰어 넘어 소설을 시로, 시를 영
화로, 영화를 광고로 패러디하는 실험적인 방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진다.
이미 형성된 텍스트를 유사한 내용이나 형식으로 재텍스트화하는 것은 주로 메타 언어적 측면에서 접근
된다. 특히, 패러디의 경우에는 그것이 결코 단순 모방이나 패스티쉬에 그치지 않는 새로운 독립성을 지닌
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처럼 메타 언어를 통한 자기 독립성의 획득은 구체적인 텍스트에서는 다양한 유형으로 나타난다. 먼
저 권위에 의존하여 텍스트에 주목하게 하는 방식이 있다.
테레사는 안나 카레니나를 가슴에 안고/ 갈대바구니 저어 희고 견고한 침대 같은/ 토마스의 팔에 착륙
했다 가끔 침대가/ 흔들리기도 했지만 카레닌이라는/ 예쁜 강아지와 함께 그들은 오래 행복했다// 그녀는
어둡고 푸른 물 위를 흘렀다/ 갈대바구니도 없었다 분홍치마 연두저고리/ 떨어진 꽃잎처럼 젖어 옛집에
돌아왔다/ 집에는 그녀를 두려워하는 가족들이/ 있었다 그들은 커다란 입을 가진/ 더러운 개를 키우고 있
었다 오래 행복했다{{ ) 성미정, 참을 수밖에 없는 존재의 가여움, 시와 반시, 1994년 겨울호, p.52
}}
삐삐 아빠는 섬 감옥에 갇힌 채/ 바다로 병을 던졌다/ 병 속에는 살려달라는 내용의 쪽지가 들어 있다/
삐삐는 말을 타고 바닷가를 지나다/ 병을 줍고 아빠를 구할 결심을 했다/ 힘센 삐삐는 빗자루를 타고 날
아다녔다/ 한 손으로 역기를 들었다/ 삐삐는 나쁜 사람들을 혼내주었다/ 별것 아닌 손짓 발짓만으로/ 스릴
넘치는 액션도 없이/ 하지만 삐삐를 보면 슬펐다/ 세상의 악에 홀로 맞서는 천진한 아이/ 주근깨와 코가
말린 큰 신발을 보면/ 가슴속에서부터 저며오는 눅눅한 우울/ 언젠가 소풍 갔을 때 나는 요구르트병에/ 살
려달라고 적은 나뭇잎을 넣어 시냇물에 흘려보냈었다/ 아직 나를 구원하려고 달려온 사람은 없어/ 넓은
바닷가 한 알갱이 모래를 줍는 일이란/ 실제로 삐삐는 죽었다고 했다/ 관 속에 들어간 삐삐를 누가 발견
할지/ 삐삐의 말괄량이 짓거리는 여전히 슬프다{{ ) 윤의섭, 말괄량이 삐삐의 죽음, 문학과 사회, 1995년 가을 제Ⅷ권 제3호, 문학과 지성사, pp.1048∼
1049
}}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패러디한 성미정의 시는 대비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원래 소설의 스토리를 시로 구성한 후에, 테레사에 대비되는 분홍치마 연두저고리의 그녀를 등장시
켜 대비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테레사의 경우에는 주로 내적인 자기 번민이 갈등 상황
을 유발하지만, '그녀'의 경우에는 가정 형편과 같은 외적인 요인들이 갈등 상황을 유발한 것으로 추정된
다. 그래서 '떨어진 꽃잎'과도 같이 흐느적거리는 몸을 이끌고 아무도 반가워하지 않는, 더러운 개가 살고
있는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집은 자기를 지켜줄 수 있는 어떤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 집
이요, 가족들이 눈치를 보며 자기를 슬금슬금 피하는 집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줄의 '오래 행복했다'는 역
설적인 진술로 보인다. 어쨌든 그녀에게 일상적인 삶은 되풀이되었을 것이며, 행복이라는 말은 오히려 사
치에 가까운 말이라는 의미에서의 '오래 행복'인 것이다. 이러한 형식은 제목에서도 역력하게 알 수 있다.
개인의 의지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참을 수밖에 없는 존재의 가여움'으로 패러디된다. 이것은
존재 자체가 관념적인 철학적 문제가 아니라, 삶의 실천적 문제로 전이됨을 의미한다. 즉, 현대에서의 대중
적인 삶의 조건들은 사유를 통해 규정되기보다는 상황 자체에 의해 이미 틀로 정착된 것임을 확연하게 보
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미정의 시는 밀란 쿤데라의 텍스트를 참고로 하였지만, 마침내 자기 독
립성을 확보하게 된다.
윤의섭의 시는 텔레비전에서 이미 인기리에 방영된 바 있는 {말괄량이 삐삐}에 대한 패러디이다. 이 시
역시 성미정의 시처럼 기존의 텍스트를 구성한 후, 그에 대하여 자신의 경험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이루어
져 있다. 풍자적인 기법이 텍스트 전체를 이중화해서 보여 주며 수용자의 해독을 기다리고 있다. '세상의
악에 홀로 맞서는 천진한 아이'인 삐삐를 보면 신이 나기보다는 차라리 슬퍼진다. 그 당당함과 용기는 감
탄스럽지만 거대한 세상의 부조리에 대항하기에는 삐삐의 힘이 너무나 나약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있어
서도 삐삐의 행위는 슬픈 것으로 비추어질 수밖에 없고, 그것은 자신의 작은 실험으로 더욱 견고해진다.
살려 달라고 적은 나뭇잎을 삐삐 아빠가 병을 던졌듯이 흘려 보냈지만, 삐삐는 달려와 주지 않았다. 더 이
상 삐삐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제 희망은 사라지고 나만이 덩그라니 놓여 있다. 다른 사람
에 대한 기대는 '넓은 바닷가에서 한 알갱이 모래를 줍는(찾는)' 행위처럼 아득한 것으로 퇴화하고 만 것이
다.
이처럼 권위에 의존하는 패러디의 형식은 여러 시인들의 시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종교시로 불리우는
일군의 시들도, 성서 등의 텍스트가 지니고 있는 권위를 내세우며 은폐된 의도를 기호 해독자에게 툭툭 던
진다.
종교시의 경우는 다소 예외라고 할 수 있지만, 권위에 의존하는 패러디는 일반적으로 풍자적인 기법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이는 패러디가 아이러니라는 수사 기법에 의해 표출될 수밖에 없다는 특성과 맞물려
있다. 패러디처럼 풍자의 경우에도 아이러니를 창작 기법으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권위에 의존하는 패러디와 상당 부분 맞물리기는 하지만 비슷한 상황에 의존하고 있는 패러디도 하나의
유형을 형성한다.
아침 티브이에 난데없는 표범 한마리/ 물난리의 북새통을 틈타 서울 대공원을 탈출했단다/ 수재에 獸災
가 겹쳤다고 했지만, 일순 마주친/ 우리 속 세마리 표범의 우울한 눈빛이 서늘하게/ 내 가슴 속 깊이 박혀
버렸다 한순간 바람 같은 자유가/ 무엇이길래, 잡히고 또 잡혀도/ 파도의 아가리에 몸을 던진 빠삐용처럼/
총알 빗발칠 폐허의 산속을 택했을까/ 평온한 동물원 우리 속 그냥 남은 세명의 드가/ 그러나 난 그들을
욕하지 못한다/ 빠삐용, 난 여기서 감자나 심으며 살래/ 드가 같은 마음이 있는 곳은 어디든/ 동물원 같은
공간이 아닐까/ 친근감 넘치는 검은 뿔테안경의 드가를 생각하는데/ 저녁 티브이 뉴스 화면에/ 사살 당한
표범의 시체가 보였다./ 거봐, 결국 죽잖아!// 티브이 우리 안에 갇혀 있는,/ 내가 드가?{{ ) 유하, 빠삐용-영화 사회학, {武林일기}, 세계사, 1995, p.98
}}
이 시는 영화 {빠삐용}을 패러디하고 있다. 빠삐용이 감옥에 갇혀 탈출하고자 하는 상황과 동물원의 우
리 속에 갇혀 있다가 자유를 찾아 도망을 친 한 마리의 표범이 처한 상황을 통해, TV 속에 갇혀 있는 '나'
자신과 현대인들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된다는 이 시는 그야말로 문명 비판적 성격이 짙다고 할 수 있다. 특
히, 빠삐용이 탈출에 성공하는 것을 보면서도 죽음에 대한 공포로 자유를 포기하고 억압적인 삶을 지속하
는 드가는 동물원에 남은 세 마리의 표범과 비교되면서 일반화된다. 그것이 자유에 대한 욕구보다는 죽음
에 대한 공포가 강한 나약한 인간의 본성임이 표면화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 자신도 결코 그러한 인간
의 본성에 거역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러나 난 그들을 욕하지 못한다/ 빠삐용, 난 여기서 감자나 심으며
살래'라는 시구에서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거봐, 결국 죽잖아!'하며 당연한 결과라는 듯이 TV를 지켜보
는 자신을 깨달으며 문득 놀라게 되는 작가의 모습에서도 그러한 기미를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상황에 의
존하는 패러디의 경우에도 그 상황이 결국은 자기 자신의 상황으로 대치됨으로써 작가만의 고유한 자기
독립성을 확보하게 된다.
그는 부자집 안방에서 부르는 소리에는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왜놈이나 지체 높은 양반이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고집이나 애국심을 말하려고 이 따위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그는 부잣집
잔칫방 대신에 영화로움 대신에, 장텃바닥이나 어린이 놀이터 가설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는
기생년에 잽혀 노래를 불렀다고도 한다. 그가 촌놈이라거나, 오입쟁이라거나, 무슨 속 깊이 감춘 노여움이
있음을 말하려고 이 지랄을 떨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귀신이 우는 소리를 냈다고 한다. 귀신 울음 소
리에 모두들 소름이 끼치고, 귀신 오는 발자국 소리에 온갖 죄진 년놈들 몸을 움츠렸다고 한다. 그는 거꾸
로 귀신을 잠재우는 소리를 냈다고도 한다. 쑥대머리 귀신 형용 춘향가 한 대목을 듣고, 그의 재주를 칭찬
하려고 이 짧은 세 치 혓바닥 놀리는 것이 아니다. 모두들 가슴 추운 날, 다 잃어버린 날, 앉은뱅이.곱사.문
둥이, 그래도 무엇 한 가지 남아 일으켜 세우는 것이 사람 사는 일이라고 한다. 모닥불이라도 피워, 그의
곱은 손 덥혀 주자고도 한다. 임방울. 그의 시를 지금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 이성부, 林芳蔚, {前夜}, 창작과비평사, 1981, pp.54∼55
}}
판소리 명창으로 특히, 춘향가 중 '쑥대머리' 부분을 더늠으로 잘 불렀던 임방울의 전설적인 삶을 소재
로 삼고 있는 이 시는 임방울의 삶에 대한 자세, 즉 세계관을 근거로 하여 텍스트를 구성하고 있다. 민중
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자유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즐겼던 임방울은 신기에 가까운 귀곡성으로 듣는 이를
감동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작가는 정작 임방울의 삶을 이야기하려고 이 시를 쓰는 것은 아님을, 그
의 인간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기 위해 이 시를 쓰는 것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독자들은 그럼에도 불구
하고 임방울에 대한 화자의 긍정적인 시선을 통해, 그것이 강한 부정을 통한 긍정임을 숙지하게 된다. 그
긍정도 과거 지향적이라기보다는 미래 지향적이다. '그래도 무엇 한 가지 남아 일으켜 세우는 것이 사람
사는 일이라고 한다. 모닥불이라도 피워, 그의 곱은 손 덥혀 주자고도 한다.'에서 알 수 있듯이, 임방울의
삶은 한 판소리 명창의 삶으로 묻혀 버릴 성질의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의 삶으로 재해석되
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를 쓰고 있지 않다는 화자의 진술은 결국 그의 시를 통해 '지금
우리의 시'를 쓰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권위에 의존하는 모든 시가 패러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초기의 시 텍스트에서는 대상 그 자체
에 대한 존경이 주를 이루어 현대적 의미에서의 패러디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텍스트의 인유 정도에 그치
는 경우가 많았다.{{ )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높었다 낮었다 출렁이는 물살과/ 물살
몰아갔다 오는 바람만이 있어야 하네.// 오- 우리들의 그리움을 위하여서는/ 푸른 銀河ㅅ물이 있어
야 하네.// 돌아서는 갈 수 없는 오롯한 이 자리에/ 불타는 홀몸만이 있어야 하네!// 織女여, 여기
번쩍이는 모래밭에/ 돋아나는 풀싹을 나는 세이고……// 허이연 허이연 구름 속에서/ 그대는 베틀
에 북을 놀리게.// 눈썹 같은 반달이 중천에 걸리는/ 七月 七夕이 돌아오기까지는// 검은 암소를 나
는 멕이고,/ 織女여, 그대는 비단을 짜세.(서정주, 牽牛의 노래, 한국현대시문학대계 16, 지식산업사,
1981, pp.40∼41)
}} 이는 패러디가 현대성의 징표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패러디는 많은 문화 속에 존재해 왔지만 모두 명백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 패러디가 편재해 있다는 사실은 패러디의 형식적 정의와 실용적 기능에 대한 재고를 초래한다. 패러디는 진정한 허구성의 패러다임이나 허구 창조 과정의 패러다임은 아닐지라도 확실히 자아 반영의 한 양식인 것이다.{{ ) 린다 허천, 앞의 책, pp.49∼50
}}
이처럼 메타 언어를 통해 패러디는 오늘의 삶을 재해석하고 새로운 삶의 지표를 제시한다. 패러디에서
행해지는 전통적인 요소의 인유는 단순한 전통에의 복귀라기보다는 그것을 끊임없이 현대화하는 것과 관
련된다. 그러므로 메타 언어라는 차이를 통한 반복을 통해 패러디는 비판적 거리를 형성하여, 독자들에게
동시대의 문화에 대한 비평적 능력을 획득하게 한다. 이는 현대적 의미에서의 패러디가 일정한 자기 독립
성을 가지고 독자와 지속적인 대화를 나누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언어 유희를 통한 의미 재구성
패러디의 또 다른 특성은 주로 기법적인 측면에서 언어 유희가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언어 유희는 모더
니즘과 풍자의 경우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모더니즘에서는 언어에 대한 실험의 한 양상으로 언어 유희가
드러났으며, 이는 주로 인간의 지적 활동의 소산인 경우가 많았다. 풍자에서는 패러디의 언어 유희와 거의
흡사한 양상이 드러나는데, 이는 패러디가 풍자와 갖는 공통된 속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어 유희와 패러디는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 그것은 패러디가 지니고 있는 아이러니한 갈
등 상황이 놀이를 통해 해소되고 완화되어 일정한 텍스트적 자질을 형성한다는 측면과 관련되어 있다. 피
아제에 따르면 놀이 상태에서는 갈등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한다. 혹시 발생한다 하더라도 진지한 상황에서
라면 불가피하게 철저히 붙들고 씨름해야 할 그러한 갈등이 놀이 상태에서는 어떤 보상이나 청산에 의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우리를 괴롭히곤 하는 복종과 개인의 자유 사이의 갈등
은 현실에서는 굴복이나 반항 또는 어느 정도의 타협에 의한 협동으로 귀결되곤 한다. 그러나 놀이에서는
그 갈등 자체를 아예 없애 버리는 것처럼 해 버리거나 가능하진 않지만 그럴 듯한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맺힌 한을 푸는 방향으로 갈등의 양상을 변형시켜 버릴 수 있다. 놀이가 갈등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자아가 이런 방식으로 놀이의 전 영역을 지배하게 되기 때문인 것이다.{{ J. G. 카웰티, 도식성과 현실도피와 문화, 박성복 편역, {대중예술의 이론들 - 대중예술 비평을 위하여}, 도서출
판 동연, 1994, p.92
}}
그럼 이제 시 텍스트에서 언어 유희적 양상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일부분을 그대로 인용하는 경우가
있다.
시시껄렁한 詩가 아니라
詩詩껄렁하지 않을 바다를
쓰고 싶었지 파도가
되고 싶었다 時時로
현기증 나는 갈매기로
섬, 섬을 흔들고 싶었지
木船이 되고 싶었다
수평선이 되고 싶었지
싶었다. 싶었, 싶-
나제 놀다 두우고온 나아무닢빼는
엄마 겨테 누우워도 새앵가기나요
푸른 달과 희인구름 두웅실떠가는
연모세서 사아알살 떠어다니게쪼
피, 피곤한 항해의 하루 저, 접는 닻으로도
다, 다리 짤린 꾸움조차 꾸, 꿀 수 없어요
가, 각질 굳은 신발 거, 거친 수염으로 끌려가는
지, 지상에서 스으을슬 나, 낡아 가겠죠
-지 않았다.
파도 치지 않는 밤마다
노을 불쾌한 저녁마다
향기 나지 않는 낯마다
바람 불지 않는 아침마다{{ ) 양병호, 방학숙제-1. 동시 짓기, 시와 반시, 1994년 겨울호, pp.45∼46
}}
이 시에서는 여러 층위에서 다각적으로 언어 유희가 이루어지고 있다. 계열체를 이루는 일군의 시어들
이 가지런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있고, '詩', '詩詩', '時時' 등의 시어가 언어 유희의 형태를 띤 채 배열되
어 있다. 그리고 드러나는 활자로 재현되고 있는 '지 다 지 다 지 다. 피, 다, 가, 지, 다. 마다 마다 마다
마다'라는 독특한 시어의 재구성도 놀이 형태를 띠며 의미를 형성하고 있다. 한편 '동시 짓기'라는 부제가
상징하는 바와 같이, 텍스트의 가운데 부분에는 <나뭇잎배>라는 동요가 소리나는 대로 씌어 있다. 이는
천진난만함과 느슨함의 상징이며, 시 전체가 상정하고 있는 불쾌함과 욕구의 불충족에 대한 대비적 구조이
다. 특히 눌변의 언어로 제시되고 있는 동요의 패러디는 편안함이 아닌 피곤함과 지침으로, 서정적이 아닌
현실적인 것으로 대비되어 있다. 즉, 이 시 텍스트는 여러 층위의 패러디가 텍스트 전체를 통괄하며 녹아
흐르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비슷한 음절을 차용하여 언어 유희를 통해 패러디를 구현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아래 시의 경
우에는 피자집인 'HUT'과 '핫토'라는 발음의 유사성을 통해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내면서 문화에 대한 인식
을 새롭게 하고 있다. 특히, 이 시의 경우에는 제목이 그 시 전체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측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降雪에 따끈한 보리차 한 잔, 중학 1학년이던 나에게 그런 흐뭇한 겨울밤을 차려준 中國人 호떡집이 그
때의 花洞에는 있었다. 핫토 핫토 발음하며 통나무집이라고 뜻새김한 日人 英語선생도 그때의 京城第一高
等普通學校에는 있었다. 통나무집을 알지 못하는 나는 덩달아 핫토 핫토 하기만 했다. 그때는 또 서울이
얼마나 추웠던지 방(온돌)안의 잉크며 정강이가 다 얼어붙곤 했다. 한밤에는 불알도 얼어붙고, 달과 별, 꿈
도 다 얼어붙곤 했다.{{ ) 김춘수, (PIZZA), HUT, {서서 잠자는 숲}, 민음사, 1993, p.51
}}
또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의 이름이 지니고 유사성을 이용하여 언어 유희를 하는 경우도 있다.
참 세상 많이 좋아졌지,/ 절로 말이 새어나오게시리/ 라디오 디제이까지 청취자에게 속삭인다/ 오공비리
로 4행시를 지어주시죠// 대세가 결판나서 그런가?/ 오공의 털로 만들어진 손오공 놈들까지도/ 이젠 단호
히 벗어나야 한다고/ 근두운 타고 날아가듯 벗어나야 한다고 떠드는/ 오공, 오공, 오공 시대// 참, 많이 부
드러워졌어/ 체제의 손바닥{{ ) 유하, 오공 시대, 앞의 책, p.32
}}
이 시에서는 {손오공}의 주인공 '오공'과 제5공화국의 준말인 '오공'이 지니고 있는 음운의 일차적인 유
사성을 이용하여 두 이미지를 교묘하게 엮어 내고 있다. 그리고 부처님과 손오공의 일화에서 등장한 '부처
님의 손바닥'을 '체제의 손바닥'으로 전이시키고, 그것이 엄격하고 벗어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자
유롭게 까불어도 제재를 당하지 않는 부드러운 것임에 새삼 감탄하고 있다. 또 '오공의 털로 만들어진 손
오공'인 '오공'과 생명을 같이 하던 무리들조차도 이제는 단호히 벗어나야 한다고 이곳 저곳에서 떠든다는
풍자적 패러디는 우리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 준다.
그런데 같은 풍자적 패러디이지만 풍자의 성격이 보다 강한 텍스트의 경우에는 약간 다른 경향을 드러
낸다.
잊을께요 서방님./ 피난민의 봇짐 위에 퍼붓던 소나기도/ 죽은 어미 젖꼭지를 빨며 울던 젖먹이도/ 잊을
께요 서방님./ 다락 속에 숨어 있다 겁탈당한 언니도/ 나룻배에 피난민을 실어나른 뱃사공도/ 아직도 이기
고 돌아오지 않는 사람도/ 이젠 정말 잊을께요 서방님./ 어디로 가실까요 사막으로 가실까요/ 아랫도리로
가실까요 겨드랑이로 가실까요/ 피에 물을 탈까요 물에 피를 탈까요/ 무엇을 드릴까요 서방님./ 뒷모습만
드릴까요 헤어짐만 드릴까요/ 숫처녀의 발가락을 잘라 드릴까요/ 과부의 발바닥을 벗겨 드릴까요/ 그믐밤
에 첫사랑을/ 보름밤에 짝사랑을 훔쳐 드릴까요/ 무서워 무서워요 불을 켜요 서방님./ 서방질을 하게 하는
서방님도 잊을께요/ 시아버질 독살한 맏며느리도/ 아들이 아버지를 쏘아 죽인 보리밭도/ 옷걸이에 걸려 있
는 과부의 갈비뼈도/ 잊을께요 잊을께요 서방님.{{ 정호승, 獄中書信 5, {슬픔이 기쁨에게}, 창작과비평사, 1979, pp.69∼70
}}
제목과 여성 화자의 독백은 우리의 고전인 {춘향전}의 한 대목을 상상하게 한다. 그러나 이 시의 화자
가 춘향이와 유사한 인물이라고 생각해서는 큰 오산이다. 일편단심 이몽룡을 기다리던 춘향이처럼 겉으로
는 이 화자도 '서방님'에게 고분고분 순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무엇이든 하겠다는 헌신적인 태도에
서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잊겠다고 주장하는 것들 - 언어 유희를 통해 - 의 내면을 살펴보면 그것이 비수
를 감추고 있는 서늘한 여인의 눈초리를 연상하게 된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특히, 청유형이지
만 강한 명령의 어법이 지배적인 '무서워 무서워요 불을 켜요 서방님'과 부조리한 일조차도 강요하는 서방
님에 대한 원망이 들어 있는 '서방질을 하게 하는 서방님도 잊을께요'라는 시구에서, 강하게 그러한 인상을
받게 된다. 게다가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이별이라는 본래 텍스트의 상황이 같은 이별이기는 하지만 전쟁이
라는 거대한 틀 속에서 이루어지는 처참한 이별과 대비되면서 묘하게 어두운 분위기를 연출함을 감지할
수 있다. 그리하여 패러디 자체가 가지고 있는 기발함과 톡톡 튐이 상당 부분 감해지는 경향이 있을 알게
된다.
언어 유희를 통하여 의미를 재구성하는 패러디는 독자의 해석을 용이하게 한다는 점에서 대중성을 확보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시대의 언어 현실을 반영하는 독특한 언어 감각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측면에서 언어
적 실험의 전형을 이루게 된다.
지금까지는 패러디가 시 텍스트에 구현되어 있는 방식 및 그 의의에 대하여 검토해 보았다. 그렇다면
패러디를 읽어내는 것이 시 쓰기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4. 패러디 읽어내기와 시쓰기
분명히 문학은 이제 핵심적인 사회적 담론으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이미 상실하였거나 지금 그 위치를
상실하고 있는 중이다. 비록 문학 행위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제도로서의 문학이 상
당히 약화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 김욱동, 앞의 책, p.18
이는 다분히 문학의 정전 논의와 관련을 맺고 있는 것 같다. 문학의 정전을 기존의 제도 교육 내
에서 설정하였던 것과 동일한 범주에서 규정하게 되면, 문학은 촛불처럼 꺼져 버리지는 않을까 두
려워하며 떨고 서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전의 범위를 보다 확산하여 통속 문학이 아닌 대중
문학을 선별적으로 끌어 들인다면 꼭 불안에 떨며 서 있지 않아도 될 것처럼 보인다. 특히, 문학 교
육은 다수의 대중들을 늘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필요성은 더욱 증대된다고
하겠다.
}}
이는 '탈장르'나 '장르확산'과 같은 현상에서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즉 장르와 장르 사이에 놓여 있던 경
계선이 붕괴되고 한 장르가 다른 장르와 서로 혼합되면서 장르 특유의 성격이나 본질을 잃어버리는 속에
서 그러한 조짐을 엿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창작과 비평에서도 마찬가지로 발생하고 있다. 이제 시인은 더 이상 시를 쓰는
작업 자체에만 만족할 수 없다. 시를 쓰는 행위는 독자와의 소통을 염두에 둔 행위이며, 당대의 문화에 대
한 비평적 접근이다. 시인은 언어를 만드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리하여
전통적으로 비평이 점하고 있던 자리는 작가에게, 독자에게 조금씩 자리를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
다. 마찬가지로 창작은 천재만이 전유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 비평가에게도 해당되는 창조적 활동이 되
었다.
진정으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비평가는 교육자의 동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가의
동기에서 비롯된다. 그 동기는 자유롭고도 아름답게 역할을 담당하려는 단순한 욕망, 내면적으로 부글거리
고 그 안에 큰 마력을 지니고 있는 관념에 외형적이고 객관적인 형체를 부여해 주는 단순한 욕망, 그리고
그 관념들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이 세계에 명료한 잡음을 만들어 내는 단순한 욕망인 것이다.{{ ) 김욱동, 앞의 책, p.156에서 재인용.
}}
미국의 문학비평가 H.L 멩큰의 말과 같이, 비평은 일종의 창작 행위로서 그 의미를 부여받기에 이르른
것이다.
그렇다면 창작은 비평과 무관한 행위인가. 창작 속에는 여러 가지 비평 활동이 기본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오늘날 그것이 가장 명료하게 드러나는 것이 패러디 기법을 통한 창작 행위이다. 패러디는 결코 기
생적 공생의 양식이 아니다. 패러디의 작용 속에는 텍스트의 생산과 수용의 행위가 관여되어 있기 때문에
패러디의 사상적 위상은 오묘하다. 패러디 속에는 이중의 목소리가 녹아 있고, 이를 통해 일종의 비평적
행위를 창출한다. 그것은 작가의 비평적 행위뿐 아니라, 텍스트를 해독하는 해독자로서의 독자에게도 비평
적 활동을 요구한다. 여기에 패러디 읽어내기의 교육적 가능성이 잠재해 있다.
근래의 메타픽션은 연기자와 관객, 작가와 공동 창조하는 독자 사이의 형식적 차이를 거의 유념하지 않
는다. 그리고 패러디는 다른 텍스트들의 합법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하나의 위협, 심지어 혼란을 야기시키
는 어떤 힘으로 간주되고 있다. 패러디는 문학의 규범들을 '비사실화하고 찬탈해' 버린다. 어떤 의미에서
다른 텍스트의 자질을 전용(표절 혹은 차용)하는 것은 개개의 상품으로서의 예술 작품의 공인된 위상에 오
명을 남기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러디의 위반은 궁극적으로 패러디가 함몰시키려
고 하는 바로 그 규범들에 의해 공인된다. 심지어 조롱하면서 패러디는 다시 강화되는 것이다. 형식적인
의미에서 패러디는 조롱된 관행을 패러디 속에 명기함으로써 그 관행의 지속적인 존재를 보장한다. 그러므
로 패러디는 예술의 현주소뿐 아니라 예술의 출처를 밝혀줌으로써 예술의 합법성에 대한 관리자 역할을
수행한다.{{ ) 린다 허천, 앞의 책, pp. 123∼124
}}
이런 패러디의 기능 때문에 패러디는 오히려 전통을 회복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된다. 앞에서 예를
든 텍스트들처럼 기존에 잘 알고 있던 텍스트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패러디는 진정한 의미에서
전통에 복귀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패러디는 일종의 역사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린다 허
천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의미심장하다.
기호부여자와 해독자 사이의 묵계에 의해 모든 예술적 대화가 이루어지지만, 정확한 기호화의 의도가
수용자에게 인식되지 않을 경우, 그들 사이의 대화행위가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은 패러디와 아이러니의 독
특한 일련의 전략의 일부이다. 환언하면, 일반적인 예술의 기호에 덧붙여, 독자들은 자신들이 읽고 있는 것
이 패러디이며, 어느 정도, 그리고 어떤 타입의 패러디인가를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독자들은 그들이 읽고
있는 작품이 단지 하나의 문학작품으로서만, 다시 말해서 패러디적이지 않은 작품으로 읽혀진다 해도 패러
디 되는 텍스트나 전통을 알아야만 한다.
패러디는 이제 독자들이 텍스트를 읽어내는 효과적인 하나의 기제일 수가 있다. 그것은 아이러니를 기
반으로 하고 있는 풍자와 유사한 읽기 방법이 동원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패러디된 텍스트와 대
화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고 해도, 올바른 의미의 파악을 위해서는 패러디라는 전통이 가지고 있
는 규범적 성격을 독자가 인식하도록 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패러디와 글쓰기의 관계는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패러디가 이중의 비평 활동
이라는 측면과 맞물리게 된다. 패러디된 작품은 일단 우리가 기존에 잘 알고 있던 작품에 대한 일차적 비
평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의미화한다. 그 다음에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것이 어
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한 이차적 비평을 한다. 역시 그에 대해서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의미화한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한 편의 시 텍스트를 읽으면서 기존의 텍스트에 대한 비평까지도 함께 흡수하게 된
다. 이는 비평의 목적 중에 하나인 교육적 효과까지도 유발함을 의미한다. 즉 시 텍스트의 읽기를 통해 간
접적인 비평 교육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의 위치가 독자의 위치로 전이됨을 의미한다. 비평을 하기 위해서는 코드를 해독해 내지 않
으면 안 되므로, 패러디를 구현하는 작가에게는 그러한 작업이 필수적으로 동반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편,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의미화'하는 것과 관련하여 패러디된 텍스트는 창작 교육의 역할도 담당한
다. 일반적으로 미학에서 말하는 창작 과정은 '창작적 기분 → 창작 구상 → 내적 정련 → 외적 완성'의 단
계를 밟게 된다. 패러디된 텍스트는 이 대부분의 과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예를 들어 문제 제기에서 제시한 바 있는 장정일의 <라디오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을 살펴보
기로 하자. 작가는 김춘수의 <꽃>을 읽는 순간 창작적 기분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본래 텍스트가 주는
내용과 형식적인 자질이 작가에게 독특한 감응을 주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질들은 원래 작가가
상정한 소재인 '꽃과 존재'에 대비하여 '라디오와 사랑'이라는 존재를 상정하게 해 준다. '꽃'에서 '이름'이
문제가 된 것처럼 '라디오'에서는 '전파'가 문제가 된다. 라디오는 전파만 타게 되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
고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내적 정련의 과정을 통해, 제2의 텍스트
는 외적 완성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의미에서의 모방이 아닌 재창조 작업이 되는 것이다.
동일한 문학과 문학, 미술과 미술, 음악과 음악의 장르라면 이러한 과정은 이처럼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예술 영역이 서로 혼합되는 경우에는 그 과정이 보다 복잡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각각
의 영역이 가지고 있는 장르적 규범이 모두 상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서는 보다 광범위한 영
역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상에서 창조성의 새로운 범주인 패러디에 대해 살펴보았다.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비
판을 받고 있긴 하지만, 창작 교육이 제대로 행해지지 않고 있는 현 시점에서, 그것이 기존의 교육 방법을
활용할 수 있는 훌륭한 매체라는 점에서 충분한 의의가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이에 대해 보다
실천적인 차원에서의 접근이 있어야 하리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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