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단 한 송이의 장미 혹은 책임지는 사랑에 관하여
"네가 장미를 위해 할애한 시간이 네 장미를 아주 소중한 것으로 만들어 주었어."
"내가 장미를 위해 할애한 시간이…."
어린 왕자가 그 말을 기억하기 위해 되뇌었다. "사람들은 그 진실을 잊어버렸어."여우가
말했다. "그렇지만 넌 그것을 잊으면 안 돼. 넌 네게 익숙해진 것들을 지켜 줄 책임이 있어.
넌 장미를 책임져야 해...."
난 자네가 생각하는 사랑이 서서히 태어나는 것과 같은 의미라는 것을 잘 알고 있네. 자네
가 생각하는 사랑은 종종 자네의 눈빛에 반짝이며 나타나는 섬광 같은 것이지. 그리고 자네
는 램프에 다시 불을 붙일 수 있듯 그것을 언제라도 다시 불러 올 수 있다고 믿고 있어. 물
론 그 말은 진실이야. 어느 순간 아주 단순한 말이 그런 힘을 발휘해 사랑에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아주 쉬운 일처럼 보일 때도 있지.
"안녕!"어린 왕자가 말했다. 장미가 만발한 정원이었다. "안녕!" 장미들이 말했다. 어린 왕
자는 그것들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모두 그의 꽃과 비슷해 보였다. "너희들은 누구니?" 어린
왕자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우리는 장미꽃이야." 장미들이 말했다. "아!" 어린왕자가 짧게
말했다. 그는 기분이 울적했다. 자기가 기르던 꽃이 자기 같은 꽃은 온 세상에 오직 하나뿐
이라고 말했던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5천 송이나 있지 않은가? 모
두 똑같이 생긴 꽃들이 한 정원에 그렇게 많이 모여 있다니! .........
어린 왕자는 장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너희는 내 장미와 달라. 아직은 아무것도 아니
야." 하고 장미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예뻐. 하지만 너희들의 아름다움은 텅 비어 있어.
너희를 위해 죽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거야. 물론 지나치다가 문득 너희들을 본
사람이 너희들이 내 장미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 그러나 너희들 모두보
다 내게는 내 꽃이 더 소중해. 왜냐 하면 그것은 내가 날마다 물을 주는 꽃이니까. 그러고
내가 날마다 유리로 보호해 주는 꽃이니까. 또 바람막이를 대 주며 잘 보호하는 꽃이니까.
왜냐 하면 그것은 바로 내 장미꽃이니까."
난 사랑이 없으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다. 지금까지 애정 없이는 그 어떤 말도, 그 어
떤 행동도 하지 않았고, 글조차 쓰지 않았다.
그 사람이 죽으면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사람만 나는 사랑하리라. "그때 난 왜 그것을 이
해하지 못했을까!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고 판단했어야 옳았는데...... 그것은 내게 향기를 주
고, 나를 위해 빨갛게 피어났었지. 절대로 그 꽃에서 도망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꽃들은
내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모순 덩어리였어. 그때 난 그것을 사랑하기에는 너무 어렸
어."
난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상대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을 때 싹튼다.
"준비에브, 말해줘, 사람이 사랑 때문에 죽을 수 있을까?" 너는 책을 읽다 말고 입을 꼭 다
문 채 곰곰이 깊은 생각에 빠졌어. 넌 고사리와 귀뚜라미와 벌을 생각하며 적당히 대답할
말을 찾았던 거야.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지. "음, 벌들도 사랑 때문에 죽거든."
아, 우리는 그제야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준비에브, 애인이 뭐야?" 우리는 네 얼굴
이 빨개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어. 우리가 그 질문을 하자마
자 넌 달빛을 받아 반짝이던 연못의 수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지. 그런 네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물에 비치는 달빛 같은 사람이라야 너의 애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 "준비에브,
애인있어?" 이번에는 네 얼굴이 정말 빨갛게 될 거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아니었어. 넌 깔깔
대고 웃으면서 고개만 내저었지. 네가 살고 있는 나라에서 한 계절은 꽃을 피우고, 한 계절
은 열매를 맺고, 다시 어떤 계절은 사랑을 가져다 주었지. 인생은 그렇게 쉬웠어.
사랑은 기도의 훈련이고, 기도는 침묵을 위한 훈련이다.
전쟁에서 살아남는다면 조용히 사색하며 밤을 보내는 것은 뒤로 미룰 생각이다. 그것보다
는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밤을 보내고 싶다. 밤에는 인간의 이성이 잠들고 사물들은 지극히
단순한 의미로 존재한다. 밤이 되면 사람들은 흩어진 자신의 삶을 다시 모으며 나무처럼 편
안해진다. 낮에는 으레 있게 마련인 자질구레한 다툼이 밤이 되면 위대한 사랑으로 이어진
다. 별들이 가득한 밤하늘의 창가에 기대어 서 있던 남자는 잠자고 있는 아이들과 내일의
일용할 양식 그리고 저기 저 선잠 자는 연약하고 사랑스러운 아내를 위해 다시 방으로 들어
선다. 아무도 사랑을 차지하려고 싸우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그곳에 존재한다.
사랑을 극심한 고통을 안겨 주는 소유욕과 착각하지 마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당신
은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반대말인 소유욕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
다.
사랑은 창고에 저장해 둔 물건처럼 아무 때나 쉽게 꺼내어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설레는 가슴이 전제되어야 한다. 당신이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서 받은
선물이 사랑이 아니듯이 당신의 유쾌한 마음도 단지 눈에 보이는 풍경 때문이 아니라 힘들
게 위로 올라왔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있는 힘을 다해 산을 올라갔다는 것 때문에 그런 마
음을 갖는 것이다.
그녀가 남자에게 소리친다. "나를 붙잡아 주세요!" 사랑의 손길은 너를 꼭 붙들고, 너희 현
재와 과거와 미래를 잡아 준다. 사랑의 손길은 그렇게 너를 온몸으로 감싸안는다.
사랑이 싹트면 사람은 모든 것을 그 사랑에 맞추어 생각하고, 사랑은 그에게 넓은 세상을
품은 듯한 느낌을 가져다 준다.
난 인간 사이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대화를 통해 서로가 정확히 서로의 의견
을 이해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나 그것만큼 위험한 생각은 없다. 마음 속에 있는
은 말을 통해 밖으로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말
을 했다 해도 단지 뭔가를 표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타인이 자신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는 경우는 단 하나, 사랑의 기적이 일어났을 때만 가능하다.
마음의 세계로 향하는 길을 발견한 사람은 희망의 싹을 틔우는 작은 씨앗으로 변한다. 희
망의 불빛이 반짝이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보여 주려고 얼른 다른 사람의 소맷자락
을 잡아당기며 기쁨을 전한다. 승리는 사랑의 열매다. 오직 사랑만이 당당하고 정당한 것을
알아본다. 사랑만이 그곳으로 이끌어 준다. 사랑은 인간의 이성을 능가하는 삶의 힘이다.
사랑은 그 대가를 바라지 않을 때 진정 빛을 발한다.
사랑을 주려 하지 않고 받으려고만 하면 오히려 더 가난해진다. 하지만 사랑은 주면 줄수
록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누군가가 존재해야만
한다. 나의 것을 주고도 언제나 잃기만 한다면 그것은 주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상실하
는 것이다.
당신은 나를 사랑해야만 한다. 하지만 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왜냐 하면 사랑하는 데
는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사랑 그 자체가 사랑해야만 하는 이유일 뿐이다.
사랑은 분명 욕심낼 만한 가치가 있다. 사랑은 집안 가득 향기를 뿌려 주고, 정적만이 있는
물 항아리에서 감미로운 음악 소리가 나게 한다. 사랑은 저녁 무렵이면 집으로 돌아오는 아
이들의 눈망울에 내리는 아름다운 축복이다.
나에게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나의 발걸음에 아무런 의미도 주지 않는 집을 나는 사랑
할 수 없다.
난 이렇게 쓰러져 더 이상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리라. 고통이나 심지어 절망조차도.
그것이 나를 더욱 슬프게 한다. 첫사랑이 깨어진 소녀에게는 아픔과 눈물이 남아 있다. 그것
은 살아 있는 삶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나 난 아무런 아픔도 느낄 수 없다. 눈물조차 흘릴
수 없다. 황폐한 가슴으로는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준비에브, 나는 그 마술을 기억하고 있어. 그대를 양팔로 껴안고 그대가 아플 때까지 포옹
하는 거야. 그러면 그대는 다시 새로운 생명을 얻으며 큰 울음을 터뜨릴 꺼야.....
2. 관계 맺는 것 혹은 길들여지는 것에 관하여
친구는 당신을 위해 있는 존재이다. 타인에게는 열어 주지 않는 문을 당신에게만 열어 주
는 사람이다.
"내려와서 나랑 같이 놀자." 어린 왕자가 여우에게 말했다. "난 지금 너무 슬퍼..." 여우가
말했다. "아직 길들여지지 않았거든." "아, 미안해."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렇지만 잠시 생각
에 잠겨 있던 어린 왕자가 다시 물었다. "길들여지는 것이 어떤 건데?" "너는 여기 아이가
아니구나." 여우가 말했다. "무엇을 찾고 있지?" "난 사람을 찾고 있어." 어린 왕자가 말했
다. "길들여진다는 게 뭘까?" "그건 이미 새카맣게 잊혀진 말 중의 하나야." 여우가 말했다.
"그 말은 '서로 익숙해진다'라는 뜻이지." "익숙해진다고?" "음, 아직까지 너는 나에게 수만
명의 어린 소년들과 아무 차이도 없는 그냥 어린 소년에 불과해. 난 너를 필요로 하지 않고,
너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아. 나도 너에게는 수만 마리의 여우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한
마리의 여우일 뿐이야. 너는 나한테. 나는 너한테 세상에서 유일한 친구가 되는 거지...."
우리는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야간 근무를 나갔다. 먼저 밤을 보낼 준비부터 했다. 선창에
서 궤짝을 대여섯 개 들고와 속을 비운 다음 그것으로 간신히 바람을 막아 그 안에 막사안
처럼 가느다란 촛불을 하나씩 피웠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의 공터 한복판
에 천지 창조의 순간처럼 외로움 속에 인간의 마을을 만들었다. 우리는 궤짝에서 나오는
흔들리는 불빛을 보며 사막 한 귀퉁이에서 막연히 구원의 손길을 던져 주는 이른 새벽의 붉
은 노을이나 무어인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아직까지도 난 그날 우리가 왜 성탄절 분위
기를 느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한 사람씩 옛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말장난을
하거나 노래를 불렀다. 분위기는 마치 치밀하게 준비된 축제가 한창 무르익어가는 것처럼
달아올랐다. 사실 우리는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가난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바람과 모
래와 별뿐이었다. 그것은 트라피트회의 수도사들에게조차 너무 가혹한 현실이었다. 그렇지만
흐린 불빛 속에서 가진 것이라고는 추억뿐인 일곱 명의 사내가 눈에 보이지 않는 보물을 나
누듯이 마음의 정을 나누었다. 그 순간 우리는 진실로 우리 자신과 만났다. 오랫동안 우리는
각자 근심에 짓눌려 있거나 아무 의미도 없는 말들만 주고받으며 지내 왔다. 그러다가 위험
의 순간을 맞았고, 서로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되었으며 모두 같은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상대를 잘 이해하게 되었다는 기쁨은 한 사람씩 다른 사람에게 전해졌
다. 우리는 서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른 사람을 이해했다. 마치 감옥에서 갓 나온 죄
수가 바다가 무한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으며 놀라는 기분이었다.
누구나 그런 것처럼 남들이 나를 알아봐 주기를 바라는 욕심이 있는 나는 당신 앞에만 서
면 순수한 마음이 된다. 난 언제나 나를 순수하게 해 주는 곳으로 가고 싶다. 나를 당신에게
가까이 다가가게 한 것은 내 믿음이나 신념이 아니다. 내 모습 그대로 긍정해 주는 당신의
모습은 나로 하여금 스스로를 관대하게 대하도록 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준 당신
에게 난 한없는 고마움을 느낀다. 나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사람에게 더 이상 바랄 것이 뭐
가 있겠는가? 다리를 저는 사람을 초대하면 난 그에게 자리에 앉을 것을 권할 뿐 춤을 출
것까지 요구하지는 않는다.
여우는 말을 멈칫하며 어린 왕자를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제발..... 나를 길들여 줘!" 라고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러나 나는 시간이 별로 없어. 친구들을 만나고, 많은 것들을 사귀어
야 하거든." "사람은 자기가 길들이는 것만 알게 되는 거야." 여우가 말했다. "인간들은 뭔가
를 사귈 시간이 없어. 그들은 이미 다 만들어져 있는 것들을 가게에서 사거든. 그러나 친구
를 파는 가게는 없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친구가 없어. 네가 만약 친구를 원한다면 나를
길들여 줘!" "어떻게 해야 하는데?" 어린 왕자가 물었다. "참을성이 많아야 해." 여우가 말
했다. "일단 내게서 조금 떨어진 풀밭으로 가서 앉아. 나는 너를 곁눈질로 몰래 조금씩 훔쳐
볼 거야. 넌 아무 말도 하지마. 말이란 오해의 원인이 되거든. 그런 다음 넌 날마다 내게로
조금씩 다가오는 거야."
머릿속에 다시 분명히 떠오르는 말이 있다. 그것은 이렇게 홀로 앉아 있는 이곳에서 맛보
는 가장 달콤한 말이다. 그 말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가
득채워 주리라. 늘 똑같은 말이다. 누구나 위험이 닥치면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해 책임을
느끼는 것 같다. "평화가 당신의 마음 속에 깃들기를." 이 말은 우리가 가장 즐겨 하는 말이
다.
우물에 몸을 기대고 소녀들을 쳐다보았다. 가슴을 설레게하는 소녀들을 그렇게 가까이 보
고 있노라면 인간에 대한 정외와 신비감에 빠져들게 된다. 살아 있는 생물들은 쉽게 생기를
되찾고, 꽃들은 바람결에 어우러지고, 백조들은 함께 사이좋게 헤엄을 치며 지내는 곳, 바로
그곳에서 이상하게도 오직 사람들만이 사이좋게 어울리지 않고 자신만의 성을 쌓는다. 정신
적인 내면의 세계는 또 얼마나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가!
누구나 모든 사람에 대한 책임이 있다. 혼자 책임을 져야 한다. 사람마다 다른 사람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알고 나자 난 나의 문화라고 이름붙인 서구의 문화에서
파생한 종교의 비밀을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의 죄를 짊어진다." 각자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져야 한다는 의미다.
나는 나를 소중하게 여겼을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수많은 눈빛들이 내 침묵을 비난
한다. 나는 애써 대답한다. 있는 힘을 다해 큰 소리로 대답한다. 그러나 난 이 암흑 같은 현
실에서 지금보다 더 밝은 빛을 내보낼 능력이 없다. 뭔가 애타게 기다리는 눈빛을 볼 때마
다 난 가슴이 아프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곧장 달아나고 싶은 충동을 가누기 어
렵다. 저쪽에서 그들은 내게 구원을 요청한다. 저기 저쪽에서 배가 난파되어 괴로워하고 있
다. 난 마치 수백 년을 잘 사람처럼 깊은 짐을 빠지기로 한다. 그러나 저쪽에서 나는 비명
소리, 절망을 불사르며 타오르는 횃불같은 그것 때문에 잠을 이루기 어렵다. 그런 불행한 상
황에서 난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내가 애써 고집을 피우며 가만히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순간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에게 가야 한다. 그래서 그들을 구해 주어야 한다.
인간 사이의 관계란 자신을 누군가에게 보여 줌으로써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관계란 타인
의 마음과 온전히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조심스럽게 자라나는 것이다. 그런데도
당신이 당신의 모습만을 내 앞에서 흔들어 대면 난 당신을 떠나 다른 곳으로 달아나고 싶어
진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밝히는 불빛들, 무엇인가를 위해 켜놓은 저 불빛들은 저마다 소중한
의미를 담고 있으리라. 누군가는 책을 읽고 있거나 생각에 잠겨 있을 것이다. 혹은 가슴 속
깊이 묻어 두었던 이야기를 고백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 누군가는 안드로메다 성운을 열
심히 관찰하고 있으리라. 그러나 저 불빛들 가운데는 겉모습만 환하게 빛을 내고 있을 뿐
실제로는 아무런 생기도 아무런 느낌도 전해지지 않는, 잠들어 있는 불빛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우리는 서로 '만나기'위해 노력해야 한다. 들판 저 멀리 깜박이는 불빛들과 의사 소통을 하
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한다.
자신을 도와주는 친구는 쉽게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아저씨는 밤에 별들을 바라볼 거야. 내 별은 너무 작아서 어디에 있는지 아저씨에게 가르
쳐 줄 수가 없어. 그게 더 나아. 내 별은 아저씨에게는 많은 별들 중의 하나가 될 테니까 말
이야. 그래서 아저씨는 그 모든 별들을 다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게 될 거야..... 별들은 모두
아저씨의 친구가 되겠지. .........
아저씨가 밤에 하늘을 쳐다보면, 내가 그 별 중의 하나에서 살고 있고, 내가 그 별 중의 한
별에서 웃고 있으니까 아저씨에게는 모든 별이 다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일 거야. 아저씨는
말이야. 웃을 줄 아는 별들을 갖게 되는 거지!
잃어버린 동반자의 자리를 메워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난 시절 알았던 사람을 인위적
으로 만들어 낼 수는 없다. 함께 나누는 추억의 보물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서로 노여워
했던 것, 의견이 맞지 않아 충돌했던 것, 화해를 하고 가슴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던 순간들,
그런 깊은 정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 참나무를 심자마자 그것이 만들어 낼 그
늘에서 쉴 생각에 조바심부터 내지는 말아야 한다.
서로 실망시키지 않는 것에서 우정을 발견하며, 서로 모욕하지 않는 것에서 참사랑을 발견
한다.
오직 신뢰만이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어떤 일에서는 신뢰할 수 있지만 다른 일에서는 신
뢰하지 못하는 것은 신뢰가 아니다. 신뢰가 있는 사람은 언제나 믿음직한 사람으로 남는다.
사람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횃불이 촛대처럼 반듯하게 타올랐다. 두려움에 떨며 우리는
사막에 피워 놓은 횃불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침묵과 빛으로 전하는 우리의 마음이었다. 도
움을 요청하는 절규일 뿐만 아니라 마음 속 깊은 우리의 사랑에 대한 고백이기도 했다. 우
리는 마실 것을 원했다. 그러나 그것 못지 않게 인간과의 의사 소통을 간절히 원했다. 오늘
밤에 어디에선가 또 다른 불이 타오르며 우리에게 화답할 것이다. 오직 인간만이 불을 이용
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
비행사들은 재회의 순간을 맞을 때까지 오랫동안 기다리는데 익숙하다. 한 노선의 동료들
이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없는 보초들처럼 세계 각지에 길게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카사블
랑카, 다카르 혹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몇 년이 지난 다음 다시 만
나면 끊어진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계속해야 한다. 늘 그런 식이다. 그렇게 살다 보면 세상이
어떤 때는 공허하다가도 어떤 때는 풍요로 가득 찬다. 우리의 직업은 직접 찾아가 보기는
어렵지만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정원이 가득한 세상으로 우리를 자꾸만 다시 인도한다.
살다보면 종종 동료들과 헤어진 채 지내면서 그들에 대해 별로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을 때도
많다.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모를 때도 있지만 그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들도 일부
러 소식을 전하지 않고 우리도 그들을 별로 생각하지 않고 지내지만, 그래도 그들은 믿음직
스러운 동료로 남는다. 어쩌다 마주치면 우리는 어깨를 감싸며 반갑게 인사하고, 기쁨의 탄
성을 내지른다. 그렇게 우리는 기다림을 이해할 줄 안다.
같은 목표를 향해 우리의 마음이 한 형제처럼 이어져 있을 때, 우리는 용기를 얻고 안도의
숨을 내쉰다. 그리고 서로 마주보고 있을 때가 아니라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을 때 사
랑은 더욱 깊어진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모름지기 동지란 먼 정상을 향해 올라갈 때
똑같은 밧줄에 서로 의지하듯 그렇게 운명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요즘같이 안락한
세상을 두고, 사막에서 마지막 남은 음식을 서로 나눠 먹으며 그토록 행복해했던 이유는 과
연 무엇이었을까?
도움의 손길에서 멀리 떨어진 곳, 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우리 모두의 마음은 똑같았다. 살
아야 한다. 우리는 저마다 생각해 낸 방법들을 이야기했다, 서로의 방법이 달랐다 하더라도
이 방법들이 목적은 아니기에 결국 모두 같은 곳을 지향한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우리는 현재의 가치만을 생각하지 않고 먼 훗날을 위해 친구라는 이름의 나무를 심고 가꾼
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그 나무들이 한 그루 두 그루 사라지기 시작한다. 우리와 함께 지
냈던 친구들이 떠나면서 우리에게 평안한 휴식처가 되어 주던 나무그늘도 조금씩 사라진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늙어 간다는 슬픔으로 회한에 젖는다.
친구란 무엇보다도 상대를 내 마음대로 조종하거나 이용하지 않는 사람을 일컫는다.
친구란 당신을 따뜻이 받아들이기 위해 존재한다. 만약 당신을 변화시키고 강하게 만들고
싶으면, 그 일을 당신의 적에게 맡겨라. 그들은 나무를 뒤흔드는 폭풍우처럼 그 일을 거뜬히
해낼 것이다.
당신이 그에게 보내는 미소는 눈먼 사람에게 비치는 해처럼 따뜻한 코트가 된다. 당신이
그에게 미소짓는 것을 보고 누가 당신을 천박하다고 생각하겠는가? 그가 당신의 그런 미소
를 받을 만한 사람이 못 된다고 누가 주장하겠는가?
내 생활은 날마다 똑같아. 내가 닭의 뒤를 쫓으면 사람들이 내 뒤를 쫓아와. 닭들은 모두
비슷비슷하게 생겼고, 사람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인 것 같아. 그래서 난 좀 심심해. 그렇지만
네가 나를 길들여 준다면 난 밝은 햇살을 받는 것처럼 기분 좋게 살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되면 난 수많은 발자국 소리 중에서 네 발자국 소리를 알아챌 수 있겠지. 다른 사람의 발자
국 소리가 들리면 난 얼른 굴 속으로 숨을 거야. 그러나 너의 발자국 소리는 마치 음악 소
리처럼 나를 유혹해 나를 굴 밖으로 뛰어나오게 할 거야. 그리고 저것 좀 봐! 저기 건녀편
에 있는 밀밭이 보이지? 난 원래 빵은 안 먹거든. 그러니 밀밭이 나랑 무슨 상관이 있겠니.
밀밭을 쳐다보면 생각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그것은 슬픈 일이야. 그런데 네 머리카락은
밀밭처럼 황금색이구나. 네가 만약 나를 길들여 준다면 난 정말 너무 행복할거야. 밀밭의 황
금색을 보면 금방 네 생각을 하게 될 테니까. 그러면 밀밭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도 정
겹게 들리겠지.
"언제나 같은 시각에 찾아와 주면 좋겠어. 만약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내 마음은 3시부
터 설레기 시작할 거야.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기다려지겠지. 그러다가 4시가 되면
흥분해서 안절부절못할 만치 행복해할 거야 그런데 네가 만약 아무 때나 불쑥불쑥 나타난다
면 언제부터 너를 기다려야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잖아. 또 곱게 마음을 단장하고 널 기다
리는 행복감을 느낄 수도 없어. 의식이 필요해." 여우가 말했다. "의식이라고? 그게 뭔데?"
어린 왕자가 물었다. "그것은 이날을 다른 날과 다르게 만들고, 지금 이 시간을 다른 시간과
다르게 만드는 거야."
남에게 선물할 때는 인색하게 굴지 말자. 물건을 아끼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
을 전하는 것에 인색하지 말라는 뜻이다. 선물은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외로움
을 이어 주는 다리다.
자만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내 생각에 그것은 나쁜 습관이라기보다는 질병에 더 가깝다.
당신을 사랑으로 대하지 않고, 당신에게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는 사람을 당신은 좋아하겠
는가? 자만심에 찬 사람은 결국 관계를 포기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정신은 더 이상 성장
하지 못할뿐더러 영원히 위축될 수 밖에 없다.
당신은 당신이 갖고 있는 온갖 관계들, 즉 가족, 친구, 고향, 조국 등의 것들 때문에 이 세
상에 의미있게 존재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3. 발견의 비밀 혹은 진정을 중요한 것에 관하여
"잘 가." 여우가 말했다. "내 비밀은 이거야. 아주 간단해. 오직 마음으로 보아야만 잘 볼
수 있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거든."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
지 않는다." 기억해 두려고 어린 왕자가 그 말을 되풀이했다.
먼곳에서 신비한 빛을 내던 존재가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던 그 우물이었다는 것을 오늘에
서야 알게 되었다. 여인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집 전체를 신비스럽게 만들어 놓을 수 있는
것처럼, 우물은 아주 멀리까지 신비스러운 빛을 내뿜었다. 마치 사랑처럼. 우리는 사막의 규
칙을 받아들이고 그 방식을 따르기로 했다. 그제야 사하라는 우리 마음 속을 들어와 본래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우리가 사막 속으로 깊숙히 들어간다는 것은 오아시스를 찾아 나섰다
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어딘가에 숨어 있을 우물을 우리가 마음 속으로 절실하게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막이 아름다워."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건 맞는 말이었다. 난 언제나 사막을 사랑했다.
모래 언덕 위에 앉아 있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렇지
만 침묵 속에서 뭔가 신비한 빛을 내는 것이 보인다. "사막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이곳
어딘가에 우물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야...."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 순간 난 놀랍게도 모래
에 쏟아지는 그 신비한 빛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때 난 지은 지 꽤 오래 된 집에서
살았다. 집안 어딘가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집이었다. 물론 그것을 찾아
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그것을 찾으려고 시도한 사람조차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
러나 그것 때문에 집 전체가 신비스러운 마술에 걸린 것처럼 보였다. 우리 집은 가슴 속 깊
숙히 신비스러운 비밀을 숨기고 있었다. "맞아." 내가 어린 왕자에게 말했다. "집이든, 별이
든, 혹은 사막이든 그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눈으로 볼 수 없는 거야!"
문맹자가 예언자의 책을 들어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어떤 글자의 모양이나 금빛으로 덧칠한
그림들만을 유심히 쳐다본다면 그는 중요한 것을 간과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공허한 사물
속에 있지 않고, 성스러운 지혜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양초에서 중요한 것은
흔적을 남겨 놓는 촛농이 아니라 불빛이다.
"안녕하세요?" 어린 왕자가 말했다. "안녕!" 장사꾼이 말했다. 그는 갈증을 잊게 하는 데
효과가 아주 뛰어난 알약을 팔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알씩만 먹으면 갈증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 걸 파세요?" 어린 왕자가 물었다. "시간을 엄청나게 절약할 수
있게 하니까." 장사꾼이 말했다. "전문가들이 계산해 본 바로는 이것을 먹으면 사람들이 일
주일에 53분을 절약할 수 있다는 구나." "사람들은 그 53분 동안 뭘 하는데요?" "자기가 원
하는 일을 하겠지...." "만약 53분의 시간이 내게 있다면, 나는 천천히 우물가로 갈 텐데...."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목표가 의미가 없다고 하면 무엇을 향해 노력해야 하느냐고 당신
은 물을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해 난 지극히 평범하지만 살아가면서 터득한 소중한 비밀을
가르쳐 주겠다.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한 진정한 발견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세워진 목표만이
가장 진실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과 관련이 없어 보이거나 서로 무관해 보이는, 모순
에 가득 찬 언어로 이루어진 현재를 잘 풀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미래에 대한 준비는 그
렇게 현재를 잘 다지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막에서는 아득히 먼 곳에서 자석이 잡아당기는 것 같은 신비한 힘이 작용한다. 기억 속
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유년의 집이 그런 것처럼.... 단지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르는 오래 된 친구가 그런 것처럼....
사막을 가로지르며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난 예전에는 미처 이해할 수 없었던
또 하나의 진실을 발견했다. 그때 난 길을 잃었다는 절망감에 빠져 자초자기의 심정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자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바로 그런 순간 인
간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는 것 같다. 밤하늘의 별이 망토처
럼 펼쳐져 있고, 온몸이 모래에 뒤덮여 갈증으로 숨이 막힐 것만 같았던 그 순간 가슴 속으
로 뜨겁게 빌려들어오던 깨달음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사막은 원래 확실한 것은 별로 주지 않는다. 그 안에 있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
도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사막에 가면 인간들은 자신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그곳에서 고요히 잠든 내
면의 생명력이 슬며시 기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인간은 영혼에 의해 인도된다.
사막 한가운데서 나는 내가 섬겨 왔던 절대자처럼 고귀한 존재가 된다.
어느 순간 문득 드는 깨달음이 운명을 바꾸어 놓을 것처럼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깨달
음은 서서히 준비해 놓은 길을 정신 세계에서 갑자기 시각적으로 인식하는 것에 불과하다.
마치 시처럼. 문법을 익히고 문장론에 심취해 공부한 후에야 잠들어 있던 감성이 깨어났고,
어느 날 불현 듯 시 한 편이 내 심금을 울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너희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마음이 무척 아파. 그러나 따지고 보면 난 예전보다
더 잘 지낸 편이었어. 도시에는 인간적인 삶이 없거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비행기
를 조종할 수 있느냐 혹은 없느냐 따위가 아냐. 내가 생각하는 비행기는 목적이 아니라 수
단이니까. 난 내 인생을 비행기에 송두리째 바치고 싶은 생각은 없어. 농부가 쟁기를 위해
일하지 않는 것과 같은 거야. 그러나 비행기를 타면 도시를 벗어날 수 있고, 새로운 곳에서
순수한 진실을 되찾을 수 있지. 바람과 별, 어둠과 모래와 더불어 살면서 인간답게 일하고,
인간답게 걱정할 수 있거든. 바로 이것이 도시를 떠나 홀로 비행사가 된 이유이며 목적이야.
우리는 자연의 힘을 가늠하면서 정원사가 새봄을 기다리듯 새날이 밝기를 손꼽아 기다리
지. 또한 우리는 비행장이 축복받은 땅이라도 되는 것처럼 간절히 그리워하고, 그것을 별들
의 세상에서 찾으려고 언제나 노력해.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 인생의 길을 선택하는
도박에 참여했고, 내 몫을 잃은 것뿐이야. 그 대신 난 탁 트인 바다에서 시원한 바람을 맛볼
수 있었어. 그 맛을 한번 본 사람은 그것을 영원히 잊지 못해. 그렇지 않을까, 친구들? 우리
는 일부러 위험을 찾아 나섰던 것이 아냐. 그런 짓은 자만이며 만용일 뿐이지. 우리는 투우
사들과 달라. 일부러 위험한 짓을 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으니까. 난 내가 무엇을 찾으려는지
알고 있었어. 내가 찾고 싶었던 것은 바로 사람답게 사는 삶이었어.
고향은 항상 내 생각 속 어딘가에 살아 숨쉬고 있는 실체다. 단지 고향 마을의 풍경, 고향
의 축제, 익숙한 고향 마을의 건물들만이 내 마음 속의 고향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감히 도달할 수 없는 수많은 행성들 사이에서 단 하나의 진정한 별을 찾아 헤맨다.
친숙한 자연이 있고, 다정한 집과 우리의 마음이 담겨 있는 오직 하나뿐인 별을 찾아 우주
속에 길을 잃고 찾아 헤매는 것이다. 세상의 풍요는 모래 알갱이 같은 수많은 별들 사이에
숨어 있다.
네 개의 벽과 기둥이 지붕을 덩그러니 받치고 있다고 해서 모두 집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붕을 올리고, 벽돌을 쌓아올렸다고 모두 집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 공간에 대한 추억과
애착만이 그것을 진짜 집으로 만들어 주며 그곳에 담긴 인간의 영혼을 보호해 준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바로 곁에 있는 것보다 가깝게 느껴지고, 눈에 보이지 않아도 눈에 보
이는 것보다 더 감정의 풍요로움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집이 진짜 집이다. 그래서 인간의 마
음 속마다 고향과 같은 따스함, 샘물과 같은 신선함을 불어넣어 주는 집이야말로 진정한 의
미의 집인 것이다.
"아저씨가 사는 별의 사람들은 집 정원에 5천 송이의 장미를 키우지만 그래도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해요." 어린 왕자가 말했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꽃 한 송이나 물 한 모금에서도 그
것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어요." 그리고 어린 왕자는 덧붙여 말했다. "하지만 눈으로는 볼
수 없어요. 언제나 마음으로 찾아야 해요."
저기 보이는 마을을 보면 평화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농부들은 저녁에 집으로 돌아
오고, 곡식은 창고에 저장된다. 빨아 널었던 빨래는 착착 접혀 옷장 속으로 들어간다. 평화
로운 시절에 사람들은 찾고자 하는 물건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저녁 때 어디에서 자게 될지
도 당연히 안다. 질서가 흐트러지고, 사람들이 안정을 찾지 못한 채 불안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어디에서 만나야 할지 알지 못하고, 바다로 나간 지아비가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않
을 때 평화는 깨어진다. 평화는 사물이 각자 자기의 의미와 자리를 찾은 이후의 형태 속에
담겨 있다. 그것은 다른 소중한 것들을 위한 든든한 배경과 뿌리가 되었을 때 그 가치가 가
장 잘 드러난다. 나무 속에서 다시 만나는 땅 속의 광물질이 완벽하게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내가 사하라에 있던 시절 어느 깜깜한 밤중에 아라비아인들이 갑자기 우리가 피워 놓은 모
닥불 근처에 나타나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위험을 경고했다. 모래와 바람과 별들만 있던 사
막이 그제야 우리에게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고, 하나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사막이 얼마
나 광활한지 그들이 우리에게 알려주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음악도 마찬가지다. 탁월한 것이
넓이의 개념을 일깨워 준다. 그러나 난 인간에게 직접 관련되어 있는 것 중에 숫자로 세거
나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안다. 진정한 넓이는 눈으로 볼 수 없다. 그
것은 오직 마음으로만 가능하다.
사하라는 끝없이 모래만 펼쳐져 있는 광활한 사막이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날마다 권태와
단조로움에 시달린다. 그러나 사막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모습을 바꾼다. 비탈진 언덕이 생
기는가 하면 신비스러운 상징이 살아 숨쉬는 것 같은 단단한 현상이 불쑥불쑥 생겨난다. 그
것을 발견하는 순간 단조로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어린 왕자가 잠들었기 때문에 난 그를 팔에 안고 다시 길을 걸었다. 가슴이 뭉클했다. 마치
깨어지기 쉬운 보석을 안고 가는 것 같았다. 이 세상에 그보다 깨어지기 쉬운 것은 존재하
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난 달빛을 받고 있는 하얀 이마, 살짝 감고 있는 눈, 바람에 살짝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보며 이렇게 혼자말로 말했다. "내가 보는 것은 껍데기일 뿐이야. 본질
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어린 왕자의 입술이 약간 벌어지는 듯하더니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흘렀다. '잠들어 있는 어린 왕자의 얼굴이 나를 이렇게 감동시키는 것은 그가
한
송이의 장미꽃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야. 장미꽃이 잠자고 있는 동안에도 등불처럼 어린
왕자의 마음 속에서 빛을 내가 때문이야.' 그런 생각을 하자 어린 왕자가 더욱더 깨어지
기
쉬운 보석처럼 느껴졌다.
내가 사하라에 있던 시절 어느 깜깜한 밤중에 아라비아인들이 갑자기 우리가 피워 놓은 모
닥불 근처에 나타나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위험을 경고했었다. 모래와 바람과 별들만 있던
사막이 그제야 우리에게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고, 하나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사막이 얼
마나 광활한지 그들이 우리에게 알려 주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음악도 마찬가지다. 탁월한
것이 넓이의 개념을 일깨워 준다. 그러나 난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것 중에
숫자로 세거나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안다. 진정한 넓이는 눈으로 볼
수 없다. 그럿은 오직 마음으로만 가능하다.
"나는 얼굴이 시뻘건 한 남자가 살고 있는 별을 알고 있어요. 그 남자는 꽃의 향기를 맡아
본 적도 없고, 별을 쳐다본 적도 없어요. 어느 누구를 사랑한 적도 없었지요. 그리고 날이
면 날마다 덧셈만 했어요. 그리고 아저씨처럼 하루 종일 이렇게 말했죠. '난 중요한 일을 하
는 사람이야! 난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몹시 거만하게 굴
었
죠. 하지만 그는 인간이 아니라 버섯이에요." 어린 왕자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내가 있는 별에는 꽃이 한 송이 있어요. 내가 그 꽃에 날마다 물을 주지요." 어린 왕자는
별들을 사들이는 사업가에게 말했다. "매주 청소를 해 주는 화산도 세 개나 있고요. 일주일
에 한 번씩 그을음을 털고 대청소를 해 주지요. 난 불꺼진 화산도 청소 해 줘요. 어쨌든 난
내 꽃과 화산을 위해 늘 뭔가 해 주고 있어요. 그렇지만 아저씨는 별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해요."
초라한 무대에 인간의 갈등과 우정 그리고 기쁨이 거창한 연극처럼 펼쳐지고 있다. 험난한
세상에 우연히 태어나 모래와 눈의 위협을 받고 있는 우리 인간들이 영원의 의미를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는가? 인간이 만든 문명은 화산에 쉽게 부서져 버리고, 밀려오는 해일에 씻겨
나가고, 모래 바람에 흔적도 없이 파묻혀 버릴 아주 약한 도금에 불과한 것을.
삼각형 각의 합이 얼마인지 알고, 랭군의 위도와 경도가 얼마인지 안다는 것만으로 인간이
라고 할 수 있을까?
어른들은 숫자에 애정을 갖고 있다. 내가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다고 말하면 그들은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결코 물어보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 말이다. "그 애 목소리가 어떻
든?" "그 애는 어떤 놀이를 좋아하니?" " 그 애도 나비를 수집하니?" 오히려 이런 것들만
물어 본다. "나이가 몇 살이니?" "형제는 몇 명?" "몸무게는 몇 이지?" "그 애의 아버지는
월급을 얼마나 받니?" 그런 것을 다 알고 난 다음에야 상대를 제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한
다.
나는 어린 왕자에게 양의 주둥이에 씌울 망태기를 그려 주었다. 그런데 깜빡 잊고 가죽끈
을 달아 주지 않았으니 그걸 양에게 잡아맬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의 별에 무슨 일이 일
어
난 것은 아닐까? 양이 꽃을 먹어 버리지나 않았을까?' 하고 나는 궁금해하곤 했다. 어느
때
는 '설마 먹지 않았겠지. 어린 왕자가 그 꽃에 유리 덮개를 잘 덮어 놓을 거야. 양도 잘 돌
볼 거고.' 라고 생각해 본다. 그럴 때면 나는 행복한 마음에 하늘의 뭇 별들이 모두 웃고 있
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만약 깜빡 잊고 덮어 주지 않았다면, 양이 몰래 꽃에게 다가갔
다면... 이런 생각이 들면 그만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솟는다. 참으로 수수께끼 같은 일이
다. 이 세상 어딘가에 살고 있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한 마리 양이 한 송이 장미꽃을 먹었
는지, 먹지 않았는지에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인다는 것은.....
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완전한 처녀지에 첫발을 내디뎠다. 돌 하나 없는, 두께가 3백
미터나 될 것 같은 조개 껍데기로 이루어진 땅이었다.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얼음 덩어리
같은 조갯가루 더미 위에 난 생명을 품고 바람에 날려온 최초의 씨앗 같은 존재였다. 그곳
에서 최초의 인간이 된 나는 귀한 금을 만지듯 조개 껍데기 가루를 이 손에서 저 손으로 흘
려 보냈다. 한 순간 갑자기 나는 전율에 휩싸였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 20미터도 채 안 되
어 보이는 곳에 검은색 자갈돌을 집어들었다. 딱딱하고, 새카맣고, 물방울 모양을 한 주먹만
한 크기의 돌이었다. 쇠처럼 무거웠다. 그 두꺼운 조갯가루 더미를 뚫고 땅 밑에서 올라온
자갈돌들, 세상의 어떤 운석도 그 까만 자갈돌처럼 자기의 근원을 확실히 말해 주지는 못하
리라. 그런데 더욱 경이로운 것은 수많은 별무리 중의 하나인 지구에 인간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당신들은 나에게 가장 아름다운 집과 가장 훌륭한 자동차의 모형을 보여 주었지만 정작 그
곳에서 살고 그 자동차를 운전할 사람에 대해서는 설명해 주지 않았으니,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렸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조종사가 꿈꾸고 있는 더 차원 높고 세련된 행복이란 일상적인 생활에서 완전히 탈출함을
뜻하고 더 멀고 고차원적인 세계로 발돋움함을 뜻한다. 우리가 여태 성장하면서 맛보아온
자질구레한 관계나 집착은 깨끗하게 단념하도록, 그것들을 담담한 마음가짐으로 초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뜻에서 문과 열쇠는 탈출의 상징이며, 지붕 밑 다락방의 서까래는
먼 길로 항해할 것을 재촉한다. 이 세상의 모든 어린이에게 어서 짐을 꾸려 길을 떠나라고
재촉해야 한다. 그리고 영원히, 영원히 집시의 삶을 살아가라고 부추기고 격려해야 한다.
나는 우편 비행기의 조종사들이 편지를 나르는 게 뭐 그리 훌륭한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는
다. 다만 이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갖게 되는 투철한 책임감, 바로 그것을 높이
살 뿐이다. 그래서 이들은 훌륭하며 마땅히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진정한 진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진정한 진실은 사람들의 마음으로부터 거부되어 가장
자리까지 밀려나서 더 이상 눈에 확연하게 뜨이지 않게 된 후에야 명백하고 당연한 이치로
남을 수 있다.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이 더 좋은 음식과 더 화려한 옷을 얻는 것에 있다고 생각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생각으로 편협한 속물이나 로봇을 키워 왔을 뿐이다. 요즈음
사람들은 문화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 채 수학 공식을 기억하는 두뇌만 필요로 한다.
현대의 공업 학교의 평범한 학생도 파스칼이나 데카르트가 알았던 것보다 자연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과연 그들이 위대한 인물들의 정신적 업적에 도달할
수 있을까? 거짓된 해결책들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4. 진정한 기쁨 혹은 삶이 아름다운 이유에 관하여
수없이 많은 별들 중 어딘가에는 분명 한 송이 꽃이 피어 있을 것이다. 그 꽃을 사랑하는
사람은 별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 질 수 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거다. "내 꽃이 저기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겠지."
설령 우리가 하는 일이 무의미하고, 아무 가치도 없는 시시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역할을 온전히 지각하고 있을 때 우리는 편안하게 살아가고, 평화롭게 죽을 수 있다. 오직
그것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준다.
2분 후 난 플밭에 섰다. 마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어느 별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었다. 전혀 겪어 보지 않은 새로운 기후였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나는 마치 어린 나무
가 된 것 같았다.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며 한껏 기지개를 켜자 모처럼
심한 허기가 느껴졌다.
먼 여행을 다녀왔다는 것에 감개무량해하며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던 나는 내 그림자를
보며 큰 소리로 웃었다. 그것은 내가 땅에 착륙했음을 가장 확실하게 증명해 주었다.
그래도 삶이 아름답다는 생각은 어떻게 생기는가? 조용히 이루어지는 진정한 기적이여! 본
질적인 사건들은 얼마나 간단하고 명쾌한 것인지.... 전쟁 전 투르늬 지방의 솔 강가에서 있
었던 일이다. 우리는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강물 위로 목조 베란다가 나 있는 식당을 찾아
갔다. 우리가 있던 곳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내 둘이 카누에 있던 짐을 내리
고 있는 것을 보자 문득 그들을 식사에 초대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발코니에서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그들을 불렀다. 그들은 순순히 위로 올라와 우리와 합석했다. 우리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들을 그렇게 식사에 초대했다. 아마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마음
속에 파티를 벌이고 싶은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햇빛이 좋았다. 먼 수평선
까지 이어진 건녀편 강둑의 포플러 나무들은 부드러운 달콤한 햇살을 받고 있었다. 별다른
이유 없이 분위기는 점점 유쾌해졌고, 아무도 그 이유를 대지 못했다. 모든 것이 다 이유가
될 수 있었다. 화창한 햇살, 한가로이 흘러가는 강물, 우리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기꺼이 와
준 사내들, 영원히 끝나지 않을 축제라도 벌어진 듯 행복할 정도로 친절하게 대해 준 식당
의 아가씨.... 우리는 이를테면 완벽한 행복을 즐기고 있었다. 원하는 것이 모두 다 충족되었
다. 더 이상 털어놓을 비밀도 없었다. 우리는 서로 순수하고, 솔직하고, 분명하고, 너그럽다
고 느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매혹시킨 진실이 무엇인지 말하지 못했다.
어느새 밤이 검은 연기처럼 피어올라 순식간에 계곡을 가득 채운다. 이제는 더 이상 지형
을 구분할 수 없다. 그 대신 마을에서 불빛이 비치고, 자기들끼리 서로 화답하는 별빛도 보
인다. 그리고 비행기 조종사는 위치를 알리는 등을 깜박거리며 신호를 보낸다. 온 지구가 불
빛 인사로 뒤덮여 있다. 기나긴 밤을 맞아 등대의 불빛이 바다로 향하듯 저마다 자기의 별
에 불을 밝힌다. 인간의 삶에 숨겨져 있는 모든 것이 반짝거린다. 마치 항구에라도 온 것처
럼 부드럽고 아름답게 밤이 피어난다. 계기판의 라듐도 빛을 내가 시작한다. 조종사는 계기
판을 하나씩 점검해 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때로는 손가락으로 기계를 톡톡 두드
려 보고 금속에 생명을 잘 전달되고 있음을 감지한다. 기계는 무심코 진동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서 숨을 쉰다. 5백 마력의 엔진이 쇳덩어리에 조용히 전류를 흘려 보내 얼음처럼 차가
운 것을 벨벳처럼 부드럽게 변화시킨다. 모처럼 조종사는 비행 중에 황홀한 광경을 보고 느
끼는 현기증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물질의 신비로운 활동을 보고 가슴 뿌듯해 한다.
리겔과 기요메 그리고 나는 누악쇼트 전초 기지에 불시착했다. 모르타니의 작은 요새가 드
넓은 바다 한가운데 홀로 외롭게 떠도는 무인도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나이가 지
긋한 중사가 세네갈의 사병 여러 명과 함께 주둔해 있었다. 그는 우리를 하늘에서 내려온
손님처럼 반갑게 환대했다. "아니, 세상에 이렇게 반가울 수가! 이렇게 자네들을 만나 이야
기를 나눌 수 있게 되다니 정말 꿈만 같아!" 그는 무슨 큰일이라도 벌어진 것처럼 호들갑을
떨더니 끝내 눈물을 흘렸다. "자네들이 6개월 만에 처음 찾아온 손님들이라네. 이곳에는 반
년마다 식료품을 배급하기 위해 이동 부대가 찾아오지. 한 번은 중위가 오고 한 번은 대위
가 오는데, 마지막으로 대위가 왔었네." 우리는 당혹스러웠다. 우리가 원래 가려고 했던 곳
이 불과 2시간 거리인데...어쩌면 그곳에는 우리가 먹을 음식이 벌써 준비되어 있을지도 모
르는데 피스톤의 연결봉이 부러지는 바람에 새로운 운명이 우리에게 닥치다니! 중사는 감격
에 겨워 눈물까지 흘르며 마치 무슨 대단한 인물이라도 보는 것처럼 우리를 반겼다. "마음
껏 마시게나! 이렇게 사람을 대접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르네! 지난 번에
대위가 왔을 때는 포도주가 한 방울도 없었다네. 건배조차 할 수가 없었지! 난 그때 내 처
지에 대해 크게 낙담했지." 건배! 땀에 흠뻑 젖은 채 낙타를 타고 온 사람과 힘차게 잔을 부
딪치며 하는 건배! 그는 반 년 동안 그 순간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렸을 것이다. 어쩌면 그날
이 되기 한 달 전부터 무기를 닦고, 지하 창고까지 초소를 말끔히 청소해 놓았으리라. 그리
고 며칠 전부터는 그날을 맞을 생각에 가슴 설레며 잠도 잘 이루지 못했을 테고, 틈만 나면
작은 요새의 테라스로 나가 아타르의 이동 부대가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불쑥 나타나지는
않는지 보려고 먼 지평선을 눈으로 샅샅이 훑었을 것이다. 그런데 포도주가 없었다니.... 건
배를 못 했으니 축제도 벌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나 비참한 기분을 느꼈
으리라.
고향집이 우리에게 주는 기적은 그것이 단순히 우리를 보호해 주고 따뜻하게 해 준다는 의
미에 있지 않고, 더구나 그것이 우리 소유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에 근거하지도 않는다. 고향
집의 진정한 가치는 오랜 시란 동안 행복한 순산들을 비축해 놓았고, 꿈이 샘솟는 옹달샘
같은 것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음에 있다.
내 기억 속에 깊은 흔적을 남겨 놓은 것들과 내 삶의 소중한 순간들을 떠올려 보면 그것들
은 모두 세상의 재물로는 살 수 없는 것들이다. 찬란한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떠다니는 야
간 비행 때 느끼는 충만감은 돈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느낌이다. 힘든 비행을 마치고 다
시 땅에 발을 내디디면 만나는 나무와 꽃 그리고 우리에게 새롭게 주어진 삶의 빛깔로 덧칠
한 여인네의 미소는 아주 사소한 것들이지만 그 모든 것은 절대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이다.
직업의 위대함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사람을 한 곳에 모다 준다는 것에 있다. 다른 사람과
교류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에게 주어진 진정한 기쁨이다. 우리가 물질의 충족만을 위해 일한
다면 그것은 감옥을 만들어 스스로 독방 안에 자신을 가두는 꼴과 같다. 인생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 지도 못하는 쓰레기 같은 돈과 함께 그 안에 외롭게 갇히는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 지난날 내가 겪었던 순간들 중에 소중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 준 순간들을 헤아
려 보면 그것들은 모두 물질의 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함께 동고동락한 친구의 우정은
돈을 아무리 많이 주어도 살 수 없는 것이다. 함께 이겨 낸 고난이 우리를 영원히 하나로
묶어 주었다. 야간 비행과 찬란하게 빛나는 수많은 별들 속에서 몇 시간 동안 맛본 황홀한
광경은 돈으로는 절대로 살 수 없는 것들이었다. 위험한 비행을 마치고 다시 만나는 땅, 나
무, 꽃, 여인, 미소들... 싱그러운 생명력으로 채색되어 아침이면 우리에게 새로운 선물을 안
겨 주며 우리의 노고를 위로해 주는 작은 음악회와 같은 그것은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것이다.
조각가는 심혈을 기울여 작품을 만든다. 양 손으로 번갈아 가며 누르고, 실수를 반복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상을 떠올리면서 결국 진흙으로 빚어 낼 것이다. 정작 작품을 만드는 일에
서 기술이나 지성, 판단력은 창작에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단지 학문과 지성만을 추구한다면,
조각가는 손으로 하는 일에 전혀 재미와 행복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
의 행복에 있다.
흘러가는 세월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한 줌의 모래처럼, 혹은 우리를 노쇠하게 만드
는 어떤 것으로 보인다면 우리는 불행하다. 반대고 생각을 바꿔 흘러가는 세월이 우리를 완
성시키고 있다고 여기면 큰 행복을 느낄 수도 있다.
프레보가 파편 더미 밑에서 오렌지를 하나 발견했다. 뜻밖에 찾아온 기적을 우리는 지금
함께 나누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흥분되었다. 사실 하루에 물 20리터는 마
셔야 할 것 같은 인간에게 오렌지 반쪽은 얼마나 사소한가. 난 모닥불 옆에 누워 그 눈부시
도록 아름다운 과일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혼자 이런 생각을 한다. '사람들은 오렌지가
무
엇인지 알지 못해!' 그리고 이런 생각도 한다. '우리의 처지가 매우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
것
이 이입 안에 군침이 도는 이 즐거움까지 망치지는 못해. 기금 이 순간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오렌지 반쪽은 내 인생 최고의 기쁨이야. 난' 난 하늘을 올려다보고 반듯하게 누워 오
렌
지 한 쪽을 입으로 쪽쪽 빨면서 별똥별을 하나 둘 세어 본다. 잠시 동안 난 완벽한 행복을
맛본다.
"불빛을 발견했다." 네리가 시스네로스 공항에 착륙을 허락을 요청한 다음 유도등을 세 번
깜박거려 줄 것을 요청했다. 시스네로스 공항이었다면 마땅히 불빛을 세 번 깜박거렸어야
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그 불빛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마치 우리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다가갈 수 업는 아득히 먼 별처럼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우리는 친근
한 산이 있고, 집이 있고, 우리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소중한 기억들로 우리를 인도해 줄 단
하나의 불빛을 찾아 수많은 불빛들 사이를 헤매 왔다. 상황은 매우 위험했다. 그런데도 지극
히 인간적인 본능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심한 갈증과 허기가 느껴졌던 것이다. 시스네로스
를 찾았다면 우리는 연료만 채우고 곧바로 다시 떠날 생각이었다. 이른 새벽녘까지 카사블
랑카에 도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네리와 나는 시내로 갈 생각이었다. 시내에는
이른 새벽에 문을 여는 작은 카페가 있다. 오붓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갓 구워 낸 빵과 따
뜻한 밀크 커피를 마시며 지난밤에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웃고 싶었다. 그렇게 삶이 우
리에게 안겨주는 이른 아침의 신선한 선물을 고스란히 맛보고 싶었다.
"안녕." 어린 왕자가 말했다 "안녕." 철도원이 말했다. "여기서 뭘 하는 거예요?" 어린 왕자
가 물었다. "여행자들은 천 명씩 나누고 있지." 철도원이 말했다. "사람들을 태우고 먼 곳을
가는 기차들을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보내고 있단다." 불을 환히 밝힌 급행 열차가 천둥치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와 철도원이 있는 곳을 뒤흔들고 지나갔다. "아주 바쁜 모양이네
요.,. 저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거죠?" 어린 왕자가 물었다. "글쎄, 그거야 기관사도 모르지."
철도원이 말했다. 그 순간 급행 열차가 환하게 불을 켜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반대 방향에
서 달려와 번개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벌써 되돌아오는 건가요?"" 어린 왕자가 물었다. "저
건 아까 간 손님들이 아니란다. 아까 지나간 열차와 지금 지나간 열차가 서로 반대 방향으
로 달리고 있는 거야." 철도원이 말했다. "자기들이 사는 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요?"
어린 왕자가 물었다. "인간은 말이지, 자기가 사는 곳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단다." 철도원
이 말했다. 그때 불을 밝힌 세 번째 급행 열차가 큰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저기에 탄 사람
들은 앞에 간 사람들을 쫓아가는 건가요?" "사람들은 아무 것도 쫓지 않는단다. 열차 안에
서 잠들어 있거나 졸고 있겠지. 오직 아이들만 유리창에 코를 납작하게 대고 있단다." 철도
원이 말했다.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이들뿐이에요. 아이들은 헝겊
조각으로 만든 인형을 오랫동안 갖고 놀 수 있어요. 그것은 아이들에게 아주 소중해요. 그래
서 누군가 그것을 빼앗으면 금방 울음을 터뜨리지요....." 어린 왕자가 말했다. "아이들은 행
복하겠구나." 철도원이 말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 자신이 느끼는 고통과 슬픔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곤 한다. 그럴 때마
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슬픈 표정으로 위로의 말을 건넨다. 그러나 동정심이 그들의 마음 속
에 동정심으로만 남아 있다면 나와 그들 사이에는 아직 거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정심
이 그 의미를 잃어버릴 때, 다시 말해 그들이 나와 동일한 고통과 슬픔에 사로잡힐 때 나와
그들 사이에는 새로운 인간 관계가 만들어진다. 마치 갓 풀려난 죄수가 새로운 공기를 들이
마실 때처럼, 그런 기쁨과 환희를 느끼게 된다.
나는 고독을 안다. 사하라 노선을 비행하는 조종사로 사막에서 3년간 근무하는 동안 그것
을 뼈저리게 맛보았다. 그곳에 있다 보면 황량한 오지에서 젊음이 시들어 가고 있다는 것
따위는 조금도 두렵지 않다. 그것보다는 아득히 멀리 있는 사람들의 세상이 그 사이 연륜을
더해 간다는 것이 그런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나무는 열매를 맺고, 들판에는 밀알이 여물
고, 여인네들은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세월이 흐르니 어서 빨리 돌아가고 싶지만 난 매인
몸이다. 그 사이 세상의 소중한 보물들이 사막의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정든 고향을 떠나야만 할 때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영양이나 새들도 사람의 손에 잡히면 아예 삶을 포기하려고 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당신도 누군가에게 당신의 사랑스런 아내와 자식 그리고 관습을 억지로 빼앗기
거나 혹은 이제까지 당신의 삶을 밝혀 주었던 불빛, 땅 속 깊은 수도원에도 한 줄기 비쳐들
었을 그 불빛이 꺼지면 그것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당신과 당신의
연인이 고이 간직하고 있을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당신은 죽음의 길목에서 벗
어날 소도 있다. 당신은 애써 인내하며 목숨을 지탱할 것이다. 비록 당신이 떠나온 집이 아
주 멀리 있어도 사막에 있는 당신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
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설령 잠을 자고 있더라도 당신에게는 큰 도움이 될 우 있다.
이런 종류의 기쁨이 우리 문화의 가장 소중한 열매가 아닐까? 독재자 아래서도 우리는 물
질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며 자라온 우리들에게는 새로운 사
람과의 우연한 만남은 대단히 소중한 기회이며 우리에게 큰 기쁨을 주는 일이다.
5. 영혼의 불빛 혹은 인간의 소중한 가치에 관하여
인간다운 일을 과연 얼마나 했는지가 인간을 진정으로 아름답게 해 주는 요인이다.
기요메의 용기는 무엇보다도 그의 강직함과 성실함에 근거한다. 그러나 그의 투철한 책임
의식은 그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그는 자기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직무와 자신을 기
다리는 동료들에 대해 언제나 책임을 느낀다. 그들의 근심과 기쁨이 늘 자기에게 달려 있다
고 생각한다.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책임을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사
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스스로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은
책임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다. 언뜻 보기에는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가
난한 사람들을 보면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 동료가 쟁취한 성공을 자랑스러워하는 마음, 무
심코 깔고 앉은 돌로 이 세상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는 그런 자세가 참다운
인간의 모습이다.
지금 세상에는 단 한가지, 오직 한 가지 중요한 문제만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인간들에게
영혼의 감성과 고뇌를 되돌려주느냐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그것이 그레고리오 성가처럼 그
들의 어깨 위에 사뿐히 내려앉을 수 있게 하느냐는 겁니다. 이제는 가전제품이나 정치 혹은
경제나 이야기하고, 낱말풀이 수수께끼나 풀면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
래서는 안 됩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시나 그림이나 사랑 없이는 결코 살아갈 수 없게 되어
야 합니다. 정신의 삶이 있다는 것을 다시 발견해야 합니다. 그것은 이성이 지배하는 삶보다
더 위대하고, 오직 그것만이 인간을 해방시켜 줄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인간의 무엇을 발전시키겠다는 건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인간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겠다고 약속하는 정치적 구호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우리는 길러서 살만
찌우면 되는 가축이 아니다. 가진 자나 권력자가 베푸는 관대함에 개개인의 삶이 좌우되어
서는 안 된다. 부자가 자신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가난
한 사람들에게 고마워할 것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다.
수백 년 동안 우리의 문화는 인간을 통해 신을 보아 왔다. 인간은 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 안에 있는 신을 존경했다. 신을 품고 있는 인간들은 모두 한 형
제였다. 인간이 신의 형상을 닮았다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존엄성을
안겨 주었다. 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신 앞에 모두 똑같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때문
에 인간을 평등하게 한다. 평등은 그 평등을 서로 연결할 대상이 없는 한 아무 의미 없는
공허한 말이 될 뿐이다.
상품이 인간의 삶을 좀더 풍요롭게 하는 것은 물로 좋은 일이다. 그러나 상품이 인간을 소
비 중독에 걸리게 하고, 인간을 단지 소비하는 존재로 만든다면 이는 인간을 위한 상품이
아니라 인간을 상품을 위한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난 사람들이 서로 상대에 대해 예의를 갖춰야 하는 까닭을 잘 알고 있다. 학식이 높은 학
자도 시커먼 굴 속에서 일하는 광부에게 예의를 갖춰야 한다. 왜냐 하면 광부 역시 창조주
를 닮은 우리의 형제이며, 학자는 그를 통해 신에 대한 경외감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무
엇이 더 고귀하고 무엇이 더 천박한지 알 수 없으므로, 다른 사람을 노예로 부려도 좋을 권
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인간의 권리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켜 줄지 생각도 않고 우리는 사람들에게 공동체에 헌
신할 것을 무작정 요구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공동체가 인간의 권리를 은연중에 소홀히 다
루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공동체의 도덕은 개개인의 공동체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이유를 아주 설득력 있는 말로 분
명히 설명할 수 있다. 반면에 공동체가 개개인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것에 대한 이유를 설
명하려면 온갖 언어의 기교를 부리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인간에게는 인간을 인간답게 해 주는 오직 한 가지 진실만 있다. 그것은 삶에서 나오는 관
계의 존엄성, 솔직함 그리고 서로 상대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다. 이를 호들갑스럽게
어깨를 툭 치며 시시하게 의형제나 맺으려고 하는 짓과 비교하는 사람은 진실을 모르는 사
람이다. 우리가 인간과 인간의 욕구를 본질적인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서로 자신이 옳
다고 생각하는 진실만을 우겨서는 안 된다. 논리는 무엇이든 증명할 수 있는 법이다. 본질적
인 것을 인식하려면 상대가 어느 편에 속해 있는지 잠시 잊어야 한다. 우리는 인간을 곧잘
우파나 좌파로 나눈다. 그러나 진실은 당신들도 알다시피 세상을 혼돈으로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단순화하는 거다. 진실은 보편적인 것을 해독하게 만드는 언어다.
난 인간의 형제애가 어디에서 기원했는지 않다. 신 앞에 인간들은 모두 한 형제였다. 서로
하나가 될 때만 우리는 형제가 될 수 있다. 하나로 묶어 주는 끈이 없다면 우리는 서로 나
란히 서 있을 뿐 한 형제라고는 말할 수 없다. 신의 유산인 우리의 문화는 인간을 인간 앞
에 한 형제로 만들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인간의 자유를 설파해 왔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을 중심에 놓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를 막연히 억압이 없는 것으로 정의했다. 일반적으로 자유는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피해를 입혔을 때만 제한받는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관련되지 않은 일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다. 자유는 인간
을 중심에 놓았을 때만 그 참의미를 알 수 있다.
언젠가 자살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사랑에 대한 고민 때문에 한 젊은이가 총구를 정확하
게 심장에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 젊은이는 어떤 문학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을 모방했
는지 모르지만 손에 흰 장갑을 끼고 그 짓을 했다. 그러나 그때 내가 그 슬픈 비극의 장면
을 보고 멋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한없이 측은하게 생각했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기요메가 안데스 산맥을 행군하다가 조난당했던 때의 일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4박 5일
동안 피켈도 없고, 밧줄도 없고, 식료품도 없이 영하 40도의 추위에 4천5백 미터의 절벽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사투를 벌였다고 했다. "발을 한 발자국씩 앞으로 옮기는 것만이 유일하
게 나를 구할 수 있었지. 그리고 다시 또 한 걸음, 매번 그렇게 발을 옮겨야만 했었어...."구
출된 후 그가 처음으로 했던 말을 난 그 후에도 오랫동안 기억에서 지울 수 없었다. "맹세
하건데 대 동물도 나처럼 버텨 내지는 못했을 거야!" 그것은 일찍이 내가 들어 본 말 중에
가장 고위한 말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가치를 인정하고, 인간에게 합당한 명예를 안겨주는
말이었다.
난 인간을 위해 싸운다. 그들의 적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에 맞서 싸운다.
교회 대신 창고를 짓고, 악기를 만드는 대신 수도관을 설치하는 일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더 풍요롭게 했는지는 알고 싶지 않다. 내가 무엇보다 알고 싶은 것은 과연 우리들이 어떤
인간성을 지니고 있는가이다. 나는 거만하고 무감각한 인간성을 경멸한다.
물론 나는 나와 다른 길을 선택한 사람과 맞서 싸울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길을 가지만 결국은 같은 별을 좇는 사람은 존중해 주어야 한다. 다
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이 인간의 가슴 속에 뿌리내리게 되면, 그것이 영원히 보장될 수
있는 사회, 정치, 경제 체제를 다시 만들 수 있을 만큼 사람들은 성장한다. 그렇듯 인류의
문명은 처음에는 아주 작은 열의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뜨거운 욕구로 인간의 가슴 속에 심
어진다. 사람들은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면서도 반짝이는 별에 이르는 길을 마침내 찾아 낸
다.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라 할지라도 고마음의 표시를 너무 지나치게 하지 마라. 너무 지나
치게 고마워하면 당신 스스로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또한 당신을 구해 준 은인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를 살펴보아라. 만약 그가 고맙다는 인사를 기대하고 있다면 천박한 사람임
이 분명하다. 잘 생각해 보라. 그가 당신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 그 혼자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인지를, 바로 당신이라는 소중한 존재가 있었기에, 당신과 함께 그는 생명을 구
하는 일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생명을 구하는, 지극히 당연한 일에 노력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 그는 이미 충분한 보상을 받은 거나 같다. 그러므로 그 일에 대해 굳이 고맙다고
할 필요는 없다. 만약 그가 고귀한 성품의 소유자라면 당신에게서 감사의 인사를 받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초월하여 행동할 수 있다는 것에서 인간의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이 자신
의 이익과 이해 관계만 찾을 한다면 그의 삶은 그지없이 참혹하고 비참할 것이다. 그러나
남을 위해서 봉사하고 희생한다면 존경과 찬사를 한 몸에 받을 것이다. 이는 마땅하며 지당
한 일이다.
참호 속에서 우리는 무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별빛이 비치는 참호 밖으로 천천히 나갔다.
참호에서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나는 저기저쪽에서도 우리를 마주보고 있는 사내들이 우리와
똑같은 시간에 무장한 채 담요를 뒤집어쓰고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저기 저 건너편에서
우리와 대치하고 있는 그들도 땅 속에서 깨어나 애써 정신을 가다듬을 것이다. "자, 중위,
저기 맞은 편에 네 손에 죽게될 도 하나의 너가 몸을 일으키고 잇다. 그도 너와 마찬가지고
자기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했으리라. 진실이나 정의 혹은 인간에 대한 사랑을 위한
일이 아니라면 이 세상 어느 누가 자신의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겠는가?"
주여, 저는 근원을 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언어의 빈약함에 대한 치유가 진실이
라는 것을 알고 있나이다. 저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묻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도 알고
있나이다. 억지로 이런 저런 반대를 하다가 시간을 많이 흘려보낸 지금에서야 질문을 그만
두고 오룻이 축복을 영접합니다.
6. 가치 있는 삶 혹은 인내와 도전에 관하여
중요한 것은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전진하는 거다. 그런 목표는 이
성이 아니라 정신으로 더 잘 감지할 수 있다.
증오는 사람을 늘 불안하고 불만스럽게 만든다. 어떤 종류의 증오든 그것은 가슴 속 깊은
곳에 자리를 잡으며, 마음 전체를 지배해 버린다. 이상하게도 부정적인 것은 사람의 마음에
자리를 잘 자리잡는다.
당신이 나를 이긴후, 난 비로소 더욱 강해질 수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한계를 벗어날 수만 있다면 누구나 우주적인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
당신의 적이 당신에게 나타내는 경외감만이 당신에게 유일하게 의미 있는 경외감이다. 당
신의 친구들이 당신에게 나타내는 존경의 마음은 당신이 스스로 우쭐대지 않을 때만 당신에
게 의미가 있다.
땅은 우리에게 그 어떤 책보다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왜냐 하면 그것은 저항할 줄 알기
때문이다. 인간은 장애물을 만났을 때 자신의 능력을 가장 잘 가늠해 볼 수 있다. 농부는 밭
에서 일을 하며 땅의 저항을 개척하면서, 자연의 비밀을 조금씩 터득한다. 그가 그렇게 캐낸
비밀은 절대적이고 확실한 진리가 된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들이 있다. 그들은 마음 속에서 중요한 것을
다 지워 버리고 어중간한 상태에 만족한 채 그 안에서 행복을 찾으며 평생을 오두막집에서
보낸다. 그렇게 그들은 자기 자신을 파면시킨다.
우리 인간은 완전한 상태에 절대로 도달할 수 없다. 완점함이란 당신이 걸어가는 길을 인
도해 주는 별처럼 네게 방향을 가르쳐 주고, 뭔가를 향해 끝없이 전진하게 도와 줄 뿐이다.
그것은 당신이 길을 선택하도록 도움을 줄 뿐 도중에 잠시 주저앉아 쉴 곳까지 마련해 주지
느 않는다. 만약 그렇게 하면 당신의 정신을 지탱하고 있는 힘이 줄어들고, 당신은 시체처럼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사막을 사랑한다. 언뜻 보면 텅 빈 공허와 침묵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
나 난 사막에 홀로 있는 것보다 밀실에 갇힌 채 자신만의 규칙을 고수하며 살아가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더욱 외로움을 느낀다. 그들이 갇힌 밀실을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없이 텅비어
있다.
용기가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용기마저 빼앗는다.
잊기 위해 내면적으로 무감각해지거나 평화롭게 살기 위해 가슴 속의 충동을 외면하며 살
아가는 사람들을 난 경멸한다. 풀리지 않는 모순과 갈등은 당신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
록 당신 마음을 억지로 더 크게 벌려 놓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스스로 성장하고 싶
다면 그러한 투쟁에 당신 자신을 이용하라. 그것만이 당신을 자유롭게 한다. 그것은 당신을
자유롭게 하는, 땅 위의 유일한 방법이다.
만약 내가 변명하기 위해 나의 불행을 운명의 탓으로 돌렸다면 그것을 곧 나 자신이 운명
앞에 굴복했다는 뜻이다. 또 그것을 배신의 탓으로 돌리면 그것은 내가 배신에 무릎을 꿇었
다는 뜻이다. 그러나 잘못을 내 탓이라고 생각하면 달라진다. 그것은 내가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나에게 새로운 용기와 도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네가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은 너의 말이 아무런 설득력도 없으며, 네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
를 이기고 싶어한다는 것을 뜻한다.
거만함은 자부심의 결핍에서 비롯된다.
내가 너에게 소중한 비밀을 가르쳐 줄게. 너의 지난 모든 과거는 지금의 너를 탄생시킨 것
에 불과해.
지난 과거를 물로 늘어지려는 자는 어리석다. 과거란 화강암 조각처럼 단단하여 깨뜨릴 수
도 바꿀 수도 없는, 이미 완전하게 지나가 버린 것이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을 애써 꺼
내려 하지 말고 너에게 주어진 오늘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라. 다시 불러올 수 없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거기에는 단지 과거라고 새겨진 도장이 찍혀 있을 뿐이다.
나는 이미 이 세상에 이렇게 살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조건에서 다시 태어나는 일은 불가
능하다. 또한 과거로 돌아갈 수도, 과거를 돌이킬 수도 없다. 현재는 마치 서투른 목수의 발
치에 여기저기 널려 있는 건축 자재들처럼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게 미래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
이미 입은 상처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 것은 아예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불평하거나 더 좋은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을 불만스러워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뜻
이다. 왜냐 하면 당신이 살아온 지난 과거는 오늘의 당신을 있게 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
다. 그것은 그렇게 존재할 따름이다. 상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공연히 과거 때문에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지 마라.
미래를 미리 내다보려 하지 말고, 미래가 실현될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가야 한다. 마치 시간
이 지나면서 가지를 하나씩 내뻗고 자라나는 나무처럼 말이다. 나무는 현재의 순간 순간에
충실하면서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자라날 것이다.
사람들은 먼 곳을 찾아가고 싶은 마음에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진짜 먼 곳은 세상 어느
곳에도 없다. 그곳은 항상 어딘가와 이어져 있다. 어디론가 완전히 다른 곳을 데려다 주는
도피는 아직 한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간이 스스로 인간이라고 느끼기 위해 달리기 시
합을 벌이거나 전쟁을 일으키고 싶은 욕구가 생기면 그것은 더불어 사는 사람들과 세상에
자기 자신을 연결하기 위해 끈을 만들어 놓고 싶다는 뜻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것은
얼마나 가련한 관계인가! 기도하는 도미니카 수도사의 마음은 완전히 현재와 맺어져 있다.
그는 미동 없이 자기 자신의 세계에만 몰입하기 때문에 현재의 인간 그 이상은 절대로 될
수 없다.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파스퇴로도 오직 현재만 생각했다. 그런 파스퇴르가 연구에
몰두할 때보다 더 인간적으로 보인 적인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지만 멀이
앞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화첩 앞에서 움직이지 않고,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세잔도 역시
현재에 몰두했다. 침묵하고, 점검하고, 평가할 때 그는 가장 인간적이었다. 그런 그의 캔버스
는 바다보다도 넓었다.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일들은 미리 예측하기 어렵다. 가장 아름다운 기쁨은 기대를
가장 적게 했을 때 맛볼 수 있다. 그러나 보석처럼 빛나는 그 순간들은 가슴 속에 깊은 그
리움을 남겨 놓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쁨이 싹틀 때 가장 우울했던 시절을 마음속으로 그
린다.
패배... 승리... 그런 것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가끔 갈피를 잡기 어려울 때가 있다. 세
상에는 이기는 승리도 있지만 지면서 이기는 승리도 있다. 사람을 파멸시키는 패배가 있는
가하면 누군가를 일깨우는 패배도 있다. 인생은 그 사람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가 아니
라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에 따라 드러난다. 내가 의심하지 않는 참다움 의미의 승리는 조그
만 씨앗의 생명력 속에 숨어 있다. 씨앗을 시커먼 흙 속에 심어 놓으면 그것만으로 승리의
조짐이 시작된다. 그러나 씨앗의 승리를 제대로 축하하려면 먼저 시간이 흘러가야 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보다 더 큰 무엇인가를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간다.
난 내게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을 가지려 했다. 그래서 만족스럽게 보낼 수 없었던 저녁
시간들, 어지러운 현기증에도 불구하고 1만 미터 상공까지 이어지던 고독과 두려움,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갈망.... 스스로 직접 참여하지 않은 채 구경만 하는 방관자들에게 나는 이상
한 일을 하고 있는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난 그 일에서 비록 찾고 싶은 것을 찾지는
못했지만 반드시 찾아야 할 것은 찾을 수 있었다.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 사람은 절대로 수고한 만큼 거둬들이지 못한다.
다른 사람에게 더 많이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그럴수록 당신에게 더 많은 것이 남을 것이
다.
선물의 가치는 그것을 받은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달려 있다.
물리적인 행동은 우리가 그 행동 뒤에 숨겨져 있는 정신적인 배경을 이해할 수 있을 때 그
진의를 이해할 수 있고 감동을 느낄 수도 있다.
미소는 이따금 아주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 살짝 짓는 미소로 어떤 빚도 갚을 수 있으며
조그만 미소로 호의를 얻을 수도 있다. 때로 우리는 미소를 통해 삶의 활력을 되찾기도 한
다.
난 내가 뿌리를 내린 이 풍요로운 땅에서 사람들과 함께 모여 노래를 부른 것이 즐겁다.
그러나 사람들 속에서 내가 입은 상처와 침묵 그리고 외로움의 자유도 함께 느낀다. 난 군
중 속에 있더라도 얼마든지 나 자신으로 혼자 남아 있을 수 있다. 군중 속에 파묻혀 있기는
하지만 내 영혼은 오직 나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유혹당하게 되는지 신부님만큼이나 잘 안다. 유혹을 당한다는 것
은 정신이 잠들어 버렸다는 것을, 그래서 이성이 꼬치꼬치 이유를 따지지 않는 사이에 자기
자신을 유혹에 내팽겨쳤다는 것을 뜻한다.
완전함은 더 이상 아무것도 더할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아무것도 뺄 것이 없을
때 달성된다.
모든 것은 영혼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받아들인 것은 감정으로 바꾸어야 한다. 마음 속에
담은 것을 도자기처럼 우아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무엇을 상대로 싸우든지 간에 일단 싸움을 시작하면 세상의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 보인다.
모든 것이 당신이 맞서 싸우는 적을 이롭게 해 주고, 적을 감춰 주는 은밀한 둥지처럼 보인
다. 어떤 것에 맞서 싸우든지 당신은 당신 자신을 스스로 버려야 한다. 당신이 맞서 싸우고
자 하는 것의 아주 미세한 부분이 당신 몸 속 어딘가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 가운데 정녕 견딜 수 없는 일이란 하나도 없다. 말하자면 나는 고통
이라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절반밖에는 체험하지 못했다. 어느 날 내가 탄 비행기가 물 속에
가라앉았고 난 익사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정작 익사에 이르는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
뿐이 아니다. 나 자신과 나의 모든 것이 곧 사라져 버릴 거라고 생각한 적이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그런 결말은 아직 내게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교육의 유일한 목표는 올바른 지혜를 갖추게 하는 데 있다. 그것의 주된 관심사는 공부를
얼마나 했느냐 하는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물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적
당한 수단을 만들어 주느냐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언제나 시간이 없다.
오늘 나는 몹시 슬프다. 정말 참담하다. 지금 나는 인간적인 본질을 잃어버린 우리 세대를
생각하며 슬퍼하고 있다. 그들은 술집, 수학, 경주용 자동차만을 정신적 삶의 형태로 여기며
서로 단단한 무리를 만들어 그 안에 자신을 구속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어떤 빛깔도 찾아
볼 수 없다. 이제 사색하고 고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7. 별은 왜 빛나는가? 혹은 깨어 있음에 관하여
별을 따라가며 산을 넘는 길손이 산에 올라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몰두하다 보면 어느새
별이 길을 안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성당에서 돈을 받고 의자를 빌려 주는 사람
도 마찬가지다. 의자를 내주는 데 너무 열중하다 보면 자기가 하느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게 된다.
누가 더 비행기 조종을 잘 할까를 가지고 경쟁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아
주 높이 올라가고, 어떤 사람은 몹시 빠르게 날아간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가 왜 그렇게
높이 올라가고 빠르게 날아가는지, 왜 그렇게 경쟁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잊고 있거나
알지 못한다. 그것이 정작 중요한 문제임에도.....
만약 내가 내 존재를 포괄할 수 있고, 나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공식을 찾아 낼 수 있다
면 그것이 곧 나의 진실이다.
진실은 증명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직접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오렌지 나무가
다른 곳에서는 뿌리를 잘 내리지 못하는 데 어떤 곳에서는 열매를 많이 맞는다면 그곳이 곧
그 나무의 진실이다. 어떤 믿음, 어떤 문화, 어떤 가치 척도, 어떤 계획이 우리가 지금 여기
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충족해 준다면 바로 그 믿음, 그 문화, 그 가치 척도 , 그 계획이 인
간의 진실이다. 논리? 그것은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아가고 변명하는지 지켜 볼 따름이다.
사람들은 거짓과 진실을 구별하기 위해 별의별 행동을 다 한다. 그런 후 쉽사리 어떤 것이
진실이 아니면 그것을 거짓이라 하고 거짓이 아니면 진실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러나 나는
거짓이 진실의 반대말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거나 거짓인 것이
아니라 다만 전혀 다른 것이고, 다른 돌로 쌓아올린 신전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라는 것을
난 잘 알고 있다.
모순은 말로 표현하려고 하는 언어를 통해서만 생겨난다.
뉴턴은 해답이 이미 주어진 수수께끼를 푸는 것처럼 오랫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법칙을 '발
견'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는 창의적으로 행동했을 뿐이다. 그는 사과가 떨어지는 것과 태
양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는 인간의 말을 만들어 냈다. 진실은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
다. 그것은 가장 단순한 것으로 회귀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어느 누구도 뉴턴이 생각해 낸 법칙을 거꾸로 증명해 보이지 못했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그것은 절대적인 진실이 되었을 텐데....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가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할 때보다 훨씬 더 어렵다. 만약
당신이 당신 자신을 법정에 꿇어앉힐 수 있다면 그런 당신이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이다.
진리는 세상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어야지 혼란과 무질서를 초
래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없느니만 못하다.
집단에 속해 있고 싶은 욕구가 워낙 강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을 어딘가에 속하게 해
줄 수 있는 단어를 만들어 냈다. 그래서 기독교인, 데카르트 학파, 뉴턴 학파, 마르크스주의
자와 같은 새로운 말이 생겨났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딜레마도 인류사만큼 그 역사가 깊다. 그것은 인류의 발전과 늘
함께해 왔다. 사회의 질서는 시간이 지나면서 발전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처해 있는 현실
을 언제나 시대를 앞지른 언어로 표현하려고 한다. 그 말이 맞을 수도 있고,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람은 언어와 언어에 부합되는 형상의 노예다. 불충분한 언어는 모순을 만들어 내지
만 절대로 현실이 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내야만 그것은 비로소 구
제된다.
우리는 새로운 언어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난 단지 상징적인 진실에만 접근한다. 내가 쓰는 언어 영역 안에서 진실은 내가 갖고 있는
개념으로 만들어진다.
삶은 단순하지도 복잡하게 얽혀 있지도 않고, 밝지도 암울하지도 않고, 모순으로 가득 차
있지도 서로 연결되어 있지도 않다. 삶은 그냥 그대로 존재할 뿐이다. 사람들의 말이 모든
것을 자기 혼자 정리했다가, 어지럽게 했다가, 밝게 했다가, 어둡게 했다가, 흩어졌다가 다시
하나가 되게 해 줄 뿐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경험한 것을 말로 표현하고 싶어한다. 말로 표현하지 못하면 새로운 행동
을 만들어 낸다.
물리학자고 핵과 성운에 관한 형이상학적인 방정식을 세우며 이야기할 때 누구에게나 진리
가 될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평범한 목동도 마찬가지다. 양들을 잘 보호하고,
그들의 마음과 행동을 잘 이해하는 목동은 양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기가 시시한 일꾼 이상
의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캄캄한 어둠 속에 비행하며 우리는 밤이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
다. 불빛, 어둠을 뚫고 새어 나오는 불빛, 몇몇은 외로운 집에서 나오는 빛이리라. 탁자에 팔
꿈치를 괸 채 등잔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농부는 자기의 소망을 누군가 알아채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자기의 소망이 빛을 품고 하늘까지 날아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까.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등잔이 자기 집의 초라한 식탁만을 밝혀 준다고 생각하지만
절망하듯 비틀거리며 타오르는 그 불빛의 소리를 누군가는 먼 곳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살아 있을까? 우정과 애정 그리고 사랑을 파괴하고 뒤흔들어 놓을 일들이
우리 인생에서 종종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비극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우리의 관
습과 인습 그리고 법률이 우리 삶의 테두리를 정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관습과 인습을 넘
어 삶의 비극을 느낄 수 있을 때, 그때야말로 우리가 진정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
까.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미친 듯한 바람이 나를 뒤흔들어 놓았다. 이런 극단
적인 상황 앞에 놓이자 나는 인간의 언어가 얼마나 무력한 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왜 사람
들이 극단적인 상황에 부딪혔을 때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지도 깨달았다. 언어란 인간의
경험에 따라 그 표현이 적절히 바뀌는 것은 아니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은 실
제로 그 일이 닥쳤을 때는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예를 들어 배가 좌초한 끔찍한 경험을 술
회하면서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사건을 겪고 난 다음 머릿속으로 그 일을 다시 되
새기면서 새삼스럽게 두려움을 느끼는 것 때문이지 당시에 꼭 그런 느낌을 가졌던 것은 아
니다.
언어란 인간이 부여한 의미를 지닌 단어에 불과하다. 그래서 '험준한 산' 이라는 단어를 들
으면 난 하이에나와 재칼, 깊은 계곡과 별이 떠 있는 하늘을 향해 깎아지른 듯 치솟은 암벽,
바람이 쓸고 가 산마루가 있는 험준한 산을 머릿속에 떠올린다. 인간은 그렇게 '험준한 산'
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말장난을 치면서 말을 하는 것은 어떤 진실도 담을 수 없다.
누군가를 평가하기 위해 사람들은 흔히 그가 살아온 인생이나 그가 했던 일을 정리해서 설
명해 달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만큰 어려운 일은 없다. 정리하고 언어로 설명하는 일은 이미
그 속에 누군가의 판단과 생각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나는 별과 우물과 고통에 친숙해졌다. 그러나 별과 우물과 그리고 고통 그 자체는 내게 아
무런 의미도 없다. 내 정신이 내게 부여한 의미대로 그것들을 형상화하지 않는 동안에는 말
이다.
언어는 모든 것을 전달하지도, 모든 의미를 함축하지도 못한다.
침묵 속에 편안히 쉬도록 나를 그냥 놓아 두어라! 난 내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싶다. 진실은 오직 침묵 속에서만 열매를 맺고, 뿌리를 뻗는다. 특히 그것은 많은 시간을 필
요로 한다.
"빨간 지붕에 창가에는 제라늄 꽃이 놓여 있고, 지붕에 비둘기가 내려앉은 예쁜 집을 보았
어요." 어른들에게 그렇게 말하면 어른들은 그 집을 쉽게 상상하지 못한다. 오히려 10만 프
랑짜리 집을 보았다고 말하면 그들은 그제야 이렇게 말한다. "아, 정말 아름다웠겠다."
인간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인간의 모든 것은 역설적이
다. 거칠게 투쟁해서 정복한 사람은 부드러워지고, 너그러웠던 사람은 부자가 되면 냉정해
진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놀라울 정도로 인간을 풍요롭게 하는 힘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고 있
다. 그런데 개개인을 위한 단 한 가지의 옳은 진실을 어디에서 찾아 낼 수 있을까?
인간과 숲. 세상에 인간만 있다면 사람들은 너무나 지루해했으리라. 야생 동물도 만나 보지
못했을 거고.... 자연의 힘이나 도시의 힘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
가 사는 지구는 어떤가. 모든 것이 함께 어우러져 조화롭게 있다기보다는 마치 채소밭처럼
똑같은 모양의 사람들만 가득하다.
그는 소용돌이를 바로잡아 가며 별들을 좌표 삼아 계속 자꾸자꾸 올라간다. 별들의 창백한
미소가 아름답게 손짓하는 가운데 그는 어찌나 애를 써서 빛과 별을 찾아 헤매었던지 만약
조그만 끈이라도 손에 잡히기만 한다면 한사코 매달려 놓치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저
멀리 마을 구석의 작은 주점에서 아른거리는 한 가닥의 불빛이라도 쟁취할 수 있다면 그는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칠 것이다. 그는 어둠을 밝혀주는 불빛에 그토록 목마르고 허기진 것
이다. 그래서 그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저 빛의 광장으로 향하는, 불나방과 같은 행위를 감
행하는 것이다.
모순과 갈등을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는 세상을 둘로 나누어 보는 단순한 사고 방식을 가
지는 것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반대되는 모든 것을 잘못으로 단정하는 방법이
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신과 악마를 한눈에 가려내는 광신도의 사고 방식과 같다.
나는 더 이상 모진 비바람을 탓하지 않으련다. 직업의 마력은 내게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다. 거기에서, 나는 시커먼 용과 시퍼런 번개의 머리털로 왕관을 쓴 산꼭대기와 대결
할 것이다. 그리고 밤이 오면 자유롭게 해방이 되어, 별 속에서 내 길을 찾을 것이다.
8. 이별과 헤어짐 혹은 사라지는 것에 관하여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아저씨의 마음이 아플 거예요. 난 이제 죽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아저씨도 알다시피 그건 진실이 아니에요." 나는 잠자코 들었다. "길이 너무 멀
어요. 몸을 함께 데려갈 수 없어요. 너무 무겁거든요. 그렇지만 내 몸은 속의 것이 빠져나가
버린 낡은 껍데기처럼 놓여 있을 거예요. 그건 낡은 껍데기 때문에 슬퍼할 필요는 없어
요...." 날이 샜을 때 그의 몸을 더 이상 발견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아 그는 분명히 자기의
별로 돌아갔을 거다.
이제는 죽음이 무섭고 두려운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라. 난 죽어 가는 사람이 공포에 떠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죽음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죽음이 사물의 질서대로 제 시
간에 찾아오면 죽음도 고통스럽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다. 나중에 아들의 아들에게 넘겨 줄
수 있도록 평생 동안 소중히 돌봐 왔던 염소와 나무를 아들에게 넘겨주고 떠나는 농부의 마
음은 평화로울 것이다. 농가에서는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각각의 생명마다
콩깍지처럼 자기를 감싸고 있던 껍질을 깩 나와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어느 날 사막에 불시착한 채 아침이 되기를 기다린 적이 있었다. 산마루의 한쪽은 달빛을
받아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그늘진 족은 시커먼 어둠에 잠겨 있었다. 빛과 그림자가 펼
치는 장엄한 광경을 바라보다 나는 무거운 침묵 속으로 빨려 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캄캄
한 하늘이 온 누리를 뒤덮고 있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높은 산봉우리 위에서 팔짱을 낀 채 별을 벗삼아 반듯하게 누워 있었던 것이다.
주위의 적막함과 별의 아름다움이 어찌나 황홀하였던지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내 주변에는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난 마치 바닷물 속으로 뛰어드는 잠수부
처럼 별들 속으로 빠져들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런 염려와는 달리 대지에 온전히 몸을 맡
기고 있는 것이 너무나 편안했다. 그때처럼 중력의 위대함을 절실히 느껴 본 적이 있었을
까? 그것은 사랑의 힘처럼 전지전능해 보였다. 나는 지구가 내 등을 받쳐 주고, 나를 꼭 붙
잡은 채 나와 함께 밤의 공간 속을 움직이고 있음을 몸으로 느꼈다. 내 처지는 어떠했는가?
나는 사막에서 길을 잃어 모래와 별 사이에 달랑 혼자 남아 있었다. 내 목숨은 무거운 침묵
에 짓눌린 채 비행기가 나를 발견하게 될 때까지 며칠이고, 아니 몇 달이고 이렇게 있어야
했다. 내일 당장이라도 무어인들에게 살해당할 수도 있는 끔찍한 상황이었다. 내가 갖고 있
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다만 숨을 쉬고 있다는 것에 감격하며 모래와 별 사이를
헤매다 조금씩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일 뿐이었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는 세 명의 농부를 곁에서 본 적이 있었다. 방 안에 슬픔이 가득했
다. 한 세대를 다음 세대로 이어주는 매듭이 풀어졌다. 세 아들은 문득 세상에 자기들만 홀
로 남아 있는 듯 외로워했다. 이제는 살아가는 방식도 새로 배워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그
단절의 순간에 아들들에게 또 한번의 새로운 삶이 주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세 아
들이 밖으로 뛰어 놀고 있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임무를 인계할 때까지 각 가정의 가장이자
구심점 역할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난 그들의 어머니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노파가 입술을
꼭 다문 강인한 얼굴로 편안하게 잠들어 있었다. 얼굴이 마치 석상처럼 보였다. 난 아들들의
얼굴에서 그 모습을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 노파의 얼굴이 아들들의 얼굴 속에 숨어 잇고,
노파의 몸이 아들들의 몸 속에 들어가 있었다. 아들들은 건장한 사내들로 자라나 그렇게 서
있었고, 어머니는 막힌 폐광처럼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노파의 자식들은 자기들이 낳은
자식의 몸 속에 각자의 흔적을 남겨 놓게 될 것이다. 노파는 단순히 생명을 이어 주는 것
이상의 업적을 남겼다. 자식들에게는 언어를 가르쳤고, 수세기 동안 경작해 온 토지와 전통
이라는 정신적 재산을 물려주었다.
죽음이 언제나 비극이 아니라는 것을 난 잘 알고 있다. 언젠가 기억 속에 묻어 두었던 프
로방스의 한 마을이 생각난다. 교회당 첨탑 뒤로 저녁 황혼이 붉게 물들어 있던 어느 날 난
풀밭에 누워 바람결에 들려오는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를 평화롭게 즐겼다. 그 소
리는 내일 어느 노인이 땅에 묻힐 거라는 것을 동네 사람들에게 미리 알려 주는 종소리였
다. 평생동안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하다가 늙고, 병이 들어 한 생애를 마감한 노파의 죽음,
바람결에 뒤섞여 천천히 들려오는 그 종소리는 내게 참담한 슬픔이이 아니라 왠지 모를 편
안함을 전해 주었다. 교회의 종은 언제나 똑같은 소리로 탄생과 죽음, 세례식과 장례식을 알
렷다. 가난한 노파와 땅이 하나가 됨을 알리는 그 소리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전해 주었다.
나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을 삶과 연계해서 생각해 보면 오히려 달콤한 감미로
움마저 느껴지는 것 같다.
당신은 죽지만 영원히 죽는 것은 아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단지 당신의 상상일 뿐이다.
당신이 죽음을 만났을 때 그것은 당신에게 더 이상 죽음이 아니다.
열다섯 살 때 난 처음으로 아주 귀한 교훈을 얻었다. 며칠 전부터 동생이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어느 날 새벽 4시쯤 동생을 돌보던 간호원이 나를 불렀다. "동생이 너를 찾는구나."
"상태가 안 좋은 가요?" 간호원은 아무 말도 안 했다. 난 얼른 옷을 주섬주섬 걸치고 동생
에게 가 보았다. 동생이 평소와 똑같은 어조로 말했다. "죽기 전에 형과 말을 하고 싶어서
불렀어. 난 곧 죽을 거야." 동생은 심한 경련을 하더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동생은 온몸을 떨면서도 손을 내저었다. 난 그 손짓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동생
이 죽음을 애써 물리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가까스로 경련이 가라앉자
동생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무서워하지마. 난 괜찮아. 아프지도 않아. 나도 어쩔 수 없어.
내 몸이 그렇게 하는 거야." 동생은 자기 몸을 자신과 별개의 낯선 것처럼 말했다. 20여분동
안 사투를 벌인 동생은 애써 정신을 가다듬은 다음 이렇게 말했다. "유언을 남기고 싶어...."
그렇게 말해 놓고 동생은 어른처럼 말한 것이 부끄러운지 얼굴이 빨개졌다. 만약 동생이 큰
탑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면 내게 그것을 마저 완성해 달라고 부탁했으리라. 혹은 자식을
둔 아버지였다면 아들을 돌봐 달라고 부탁했으리라. 그리고 만약 전투 비행기를 모는 조종
사였다면 비행 기록을 내게 넘겨 주었으리라. 그러나 동생은 아직 어린아이였다. 그래서 내
게 모형 증기선과 자전거 그리고 장난감 권총을 유산으로 남겨 주었다.
죽은 사람은 땅에 묻는 순간에도 그는 여전히 우리에게 사랑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을 뿐
우리는 그를 떠나보냈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한다. 죽음이란 정녕 위대한 것이다. 죽음은 우
리를 새로운 경험으로 이끌고 새로운 세계와 만나게 한다. 또한 죽은 사람에 대해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우리의 세상이 모습을 달리하는 순간이다. 겉으
로 보기에는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모든 것이 달라진다. 책의 두께는
변함없지만 책의 내용이 뭔가 달라진 경우와 같다.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죽은
사람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순간을 머리에 떠올려 보아야 한다. 장례를 치르는 날 찾아온
조문객과 인사를 나누느라 정신없이 바쁘다. 그래서 장례식이 끝나고 난 다음에야 죽은 자
와 비로소 헤어지게 된다. 그제야 죽은 자가 우리 앞에 온전한 모습을 보이며 나타났다가
우리의 기억 저편으로 멀어져 가고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너무나 견
디기 어려운 고통에 전율한다. 그가 우리 곁을 진정으로 떠났고, 그를 더 이상 아무리 곁에
둘 수 없다는 것을 거제야 비로소 깨닫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강렬한 욕구가 나를 엄습해 온다. 어서 내게 평화를 달라고 난 두 손 모아 하
느님께 빌었다. 추수해 놓은 곡식처럼 자연의 질서를 따르는 세상의 이치가 부여해 주는 평
화. 이제는 내 앞에 그 어떤 변화도 용납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다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늙은 것 같았다. 세월이 흐르
는 사이 친구와 적을 하나씩 잃었고, 가슴 아픈 이별의 순간들이 내 앞길에 점점 짙은 그림
자를 드리웠다. 오랫동안 타향에 머물다가 고향을 돌아온 나는 물질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들은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마치 이해할 수 없
는 음악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처럼 쓸데없는 것들의 무게에 짓눌려 있었다.
아버지는 살인가가 날린 일격에 숨을 거뒀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사흘 동안 사람들의
몸은 모두 얼어붙은 것 같았다. 그러다가 아버지를 땅 속에 묻고 나서야 모두들 다시 허리
를 놀리고, 어깨를 반듯하게 폈다. 그러나 아버지는 묵직한 무게로 우리 안에 깊은 흔적을
남겨 놓았다. 우리는 삐걱거리는 밧줄로 구덩이에 관을 내려놓으며 죽은 시체를 땅에 묻었
던 것이 아니라, 보물을 고이 간수해 두었다. 아버지는 신전의 시금석처럼 땅에 당당하게 자
리를 잡았다.
달이 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미 귀머거리가 되었는데 무선 방향 탐지기조차 없다면 이
제는 앞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될 것이다. 주위가 점점 어두워지고, 마침내 달마저 희미하게
꺼져 가는 석탄처럼 짙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하늘이 한순간 구름으로 뒤덮였다. 우리는
빛과 모든 사물이 사라진 안개 속을 헤치고 다녔다. 모든 희망을 포기하려는 순간 저 앞에
서 불빛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난 기쁨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네리가 내게 몸을 숙였
다. 그가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빛은 항로 표시등을 켜 놓은 비행장에서 나오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그 빛이 잠시 흔들리더니 이재 사라졌다. 우리가 구름과 안개
사이로 잠시 모습을 드러냈던 별을 잘못 본 것이다. 이어서 다른 불빛들이 나타났고, 우리는
조그만 희망을 품은 채 그 불빛들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얼마 남지 않은 연료는 거
의 바닥이 보이는데 우리는 반짝이는 미끼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 불빛들은 모두 진짜 항로
표시 등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매번 다른 별로 목표를 바꾸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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