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사상가이자 저술가. 부친이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망명생활을 했으나, 정형적인 저널리스트적
감각을 지닌 경쾌한 문체로 많은 저서를 남김.
대표작으로 "플라톤과 디오니시오스" "미국의 철학"
"외설에 대하여" 등이 있음.
최초의 행복의 철학자 한스
최초의 행복에 관한 철학자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사람일까? 이 물음에 대답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그러나 성은 몰라도 이름만은 알고 있다. 한스, 보다
정확하게는 '행복한 한스'가 그의 이름이다.
'행복한 한스'는 오래 전부터 독일에서 구전되어 온
옛날 이야기의 하나로, 야콥 그림과 빌헤름 그림
형제가 19세기 초에 수집 간행한 독일의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동화책"에 수록되어 있다. 영국의
시인 오든(1907__73)은 이 책의 동화들은 성서
다음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말해 왔다.
한스는 원래 철학자라고 불릴 만한 사람은 아니다.
그에 대해 알려진 한에서는 그는 평범한
기술자지만, 그렇다고 일을 하면서 철학을 하는 그런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그가 도제시절을 끝내고
어머니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겪는
모험, 이 모험이 그후의 모든 철학자의 행복에 대한
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한스는 체험을 통해 위대한
철학적 발견을 한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발견이었을까?
이 대답은 한스가 쓴 책이나 그가 한 말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여행 노정에 감추어져 있다.
한스는 7년 동안 일한 끝에 고향의 어머니에게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는 매우 건실했으므로 그의
스승은 많은 보수를 주었다. 스승은 한스에게 그의
머리통만한 금덩어리를 주었다. 한스는 이 보물을
보자기에 싸서 등에 짊어졌다. 그러자 그는 매우
행복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스는 금덩어리가 너무
무거워 귀찮아졌다. 그리고 이제는 금덩어리에서
기쁨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런데 마침 저쪽에서 말을
탄 사람이 왔다. 말은 얼마나 멋진가! 걷지
않아도 되지 않는가. 가만히 올라타고 있으면 데려다
주는 것이다. 뾰족한 돌에 발을 상하는 일도 없고
구두도 못쓰게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한스는
금덩어리와 말을 맞바꾸었다. 그러자 한스는 매우
매우 행복했다.
갑자기 악마가 그를 공격했다. 악마는 말에게
달려들었던 것이다. 말은 그를 떨어뜨렸다. 그래서
그는 말이 보기 싫어졌다. 그런데 마침 농부가 암소를
끌고 지나갔다. 암소는 얼마나 좋은가! 천천히
뒤따라가기만 하면 되고, 게다가 밀크나 버터나
치즈는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 한스는 말과 암소를
맞바꾸었다. 그러고 나니 한스는 더욱 행복했다.
낮이 되자 무척 더워졌다. 늪을 빠져나가는 길은 꼭
한 시간이 걸렸고 혀가 입천장에 말라붙었다.
이런 때를 암소를 끌고 가는 게 아닌가. 그래서 그는
소를 나무에 묶고 젖 밑에 그의 가죽모자를
놓았다. 그러나 젖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소는 몹시 화를 내고 뒷발로 그의 머리를 세게
걷어찼다. 한스는 소가 싫어졌다. 그런데 마침
이번에는 고깃간 주인이 돼지를 끌고 지나갔다.
돼지는 얼마나 좋은가! 돼지고기는 쇠고기보다 훨씬 맛있다.
게다가 순대는! 한스는 소와 돼지를 맞바꾸었다.
그러자 한스는 더욱 행복했다.
한스가 다음에 만난 사람은 일주일 동안 먹이를
잔뜩 먹인 매를 들고 가는 사람이었다. 이런! 매는
얼마나 멋진가! 게다가 이 매는 조금도 이상한 점이
없다. 그가 소와 바꾼 돼지는 지금 처음으로 듣는
이야기지만 이웃 마을의 이장집에서 훔친 거라고 하지
않는가. 그는 돼지가 싫어졌다. 그는 벌써부터
매고기구이와 그 기름과 좋은 쿠션을 만들 수 있는 그
흰털을 탐내고 있었다. 그는 시끄러운 돼지를
주고 매를 넘겨받았다. 그러자 그는 매우 행복했다.
마침내 한스는 고향 앞마을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그는 쾌활하게 가위를 갈고 있는 한 사내를 보게
된다. 이 사내는 참으로 유쾌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가위 가는 일보다 더 좋은 장사는 없기
때문이었다. 한스는 매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매와 숫돌 두개를 맞바꾸었다. 그러자 한스는
더욱더 행복했다.
걸음을 옮겨 놓을 때마다 숫돌의 무게는 더해 갔다.
한스는 피곤하고 목이 말랐다. 그는 숫돌이 매우
짐스러워졌다. 간신히 우물을 발견하고 숫돌을
우물가에 놓고 물을 먹으려고 몸을 굽혔다. 그런데
그가 몸을 움직이면서 조심하지
않았는지 숫돌이 우물 속으로 빠져 물 속에
가라앉았다. 그러자 그는 다시 행복했다. 그래서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행복의 눈물을 흘리면서
조물주에게 감사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나는 행운아야, 어려울 때마다 구원자가 나타나다니.'
마음도 가볍게 모든 걱정에서 해방되어 행복한
마음으로 그는 집에 닿았다. "행복한 한스"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프랑스 말 "Le Bonheur;행복"
요컨대 한스의 경험은 인간이면 누구나 언젠가는
겪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행복은
금덩어리나 돼지나 숫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많다. 그러나
어떠한 부라도 모든 면에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그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보라, 옷이다! 이것이
행복이다! 라고 말한다든가, 보라, 왕국이다! 이것이
행복이다! 라고 환성을 올릴 수는 없다. 어쩌면
그것은 나를 불행하게 만들지도 모르고, 부분적으로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만 나머지 부분에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할지 모른다. 다시 말하면 '행복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어떤 부를
가리키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한스의 위대한
경험이다.
한스의 여행을 계기로 분명해진 이 진리를 우리는
거듭하여 새롭게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행복이라는 것은 그 시대, 그 계급의 특징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매우 구체적인 관념 속에서 자라나기
때문이다. 행복은 때로는 마법사의 모습으로
구현되고, 때로는 카에사르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19세기에는 많은 사람들의 경우, 행복은 찬양 받는
거장이나 절대적인 지배력을 가진 로스차일드의
모습이었다. 현대의 행복은 소문이 파다한 범죄
조직의 보스라든가 영화 스타에 의해 대표된다.
이러한 행복의 구현에 대한 신앙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물론 한편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그 찬란한 빛은
사실은 속임수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학교에서 배운
이론 때문에 태양이 움직인다는 인상이 지워지지
않는 것처럼 속임수라는 것을 알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행복이 압도적인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광휘와 행복의 구별을
한스에게 가르쳐 준 그의 경험은 무의미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누구든 광휘를 동경하면서도 동시에
빛나는 것은 흔히 행복의 마네킹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마네킹은 몸에 걸친 옷을
자랑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옷이 아니다.
타레이랑은 무수한 사람들이 행복의 구현자로 생각한
나폴레옹에 대해 "황제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라고 말했다.
광휘의 허망함을 체험한 사람은 한스만이 아니었다.
후에 불타라고 불린 인도의 왕자는 상상할 수도
없는 광휘를 버렸다. 그것이 그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톨스토이는 유력한 대지주,
찬양 받는 예술가라는 광휘를 포기했다. 그것이 그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시인을 행복을 노래해 왔다. 그러나 그때 그들의
방법은 인간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포기한 광휘를
노래하는 것이었다. 행복을 간접적으로 묘사하는 이
방법의 뛰어난 예가 있다. 모파상의 단펀소설
"르 보느와르"가 그것이다.
수잔느 드 슐몽은 프랑스 난시에서 태어난 젊고
아름답고 부유한 처녀였다. 그녀는 로트링겐의
귀족이었다. 아버지는 이 도시의 경기병 연대
연대장이었으며, 이 연대에는 수잔느가 미치도록
사랑하는 미남 하사관이 있었다. 온 나라의 의젓한
가문의 청년들이 그녀의 사랑을 애걸했다. 그러나
그녀는 농부의 아들인 그 미남 하사관과 손을 맞잡고
달아났다. 그녀의 부모는 그후로 딸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모파상이 수잔느 드 슐몽의 이야기를 하게 한
작중인물은 달아난 지 50년이 지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문명사회를 등진 코르시카에 살고 있었다.
그곳은 세계의 끝이라고 할 만한 미개지였다. 그녀가
사는 오두막집은 양쪽에서 바위가 불쑥 나온 좁고
어두운 산골짜기에 외롭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길다운 길도 없었고 먼 마을까지 나가지
않으면 여인숙도 없었다.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
무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이 황량한 토지에는
죽음의 발자국 소리마저 들리는 듯했다.
약간의 짚더미가 수잔느의 침대였다. 묽은 감자
수프가 그녀의 식사였다. 50년 전에 그녀가 난시에서
이곳까지 따라온 남편은 지금은 귀도 들리지 않는
82세의 노인이 되었다. 광휘의 그림자조차도 남지
않은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그녀는 50년이
지난 지금 "이분은 나를 정말로 행복하게
해주셨어요"(귀머거리 노인도 함께 있었으나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었다. 모파상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이 고백을 되풀이한다. "그는
그녀의 인생을 구석구석까지 행복으로 가득 채웠던 것이다."
그녀가 버린 찬란한 모든 것, 그녀가 조금도 불평을
하지 않는 주위의 황야를 생각하면, 이 행복이
얼마나 멋진 것인가를 짐작 할 수 있다.
행복은 그대 안에 있다
수잔느의 경우에는 백발 노인이기는 하지만
변함없는 행복의 구현자 애인이 있다. 그러나
숫돌까지 잃어버린 한스에게는 어디를 보아도 행복을 안겨 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만일 한스가 후에 여행에서 겪은
모험을 해석하려고 한다면 그가 빠져나오기 힘든
오류의 미궁에 빠질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만일 그가(만일의 경우의 이야기지만)그 동안에
너무 슬픈 시나 음울한 철학서적을 읽기라도 한다면
그는 언젠가는 반드시 다음과 같이 생각할 중대한
위험에 마주칠 것이다. '결국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참된 행복이다. 금덩어리가
차례차례 모양을 바꾸다가 마지막으로 숫돌이 우물
속으로 떨어질 때 나는 가장 행복했다'라고.
그러자 한스여, 이것은 진리가 아니다! 숫돌을
잃었을 때의 그대는 그보다 앞서서 금덩어리, 말,
돼지, 매, 숫돌을 차례로 빛나는 것이냐고 하는
남들의 말을 되풀이하지 말라. 어디까지나 자신의
경험에 충실하라. 그것이 최선이 방법이다. 그대는
그때 여행을 하며 변증법 철학의 과정을 경험한
것이다. 그리고 한 덩어리의 금이나 두 개의 숫돌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며, 심지어 불행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는 진리를
배운 것이다. 또한 그대는 외적으로 아무 이유가
없더라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다시
말하면 행복은 이것이나 저것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한스여, 그대는 이 점을 배운 것이다. 행복은
그대 안에 있다. 이것이 바로 그대가 여행에서
얻게 된 값진 교훈이다.
이렇게 해서 한스 이후로 모든 철학자가 이 교훈과
맞겨루게 되었다. 그 중에는 이 교훈을
과대평가하고 '그대의 마음속에서 생긴 것은 충실하고
강력하며 또한 성장하여 끝까지 따라다닌다'
고 믿은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만일 행복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면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충실하지도 않고 강력하지도 않으며 마지막까지
성장하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이
아닌가. 오늘 어떤 감정이 모든 것을 밀어내고 불쑥
떠오른다. 내일은 이 감정이 이집트의 미이라보다도
더 완전하게 죽어 버린다. 그래서 내일은 속속들이
찾아보아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이 감정은 부실하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행복도 이 감정 못지 않게
부실하다. 그렇다. 행복이 그대 안에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첫걸음이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다.
한스는 행복과 불행에 대해 중요한 경험을 한
발견자들의 정상에 설 만한 공적이 있다. 그러나
처음은 어디까지나 처음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행복할 때 나는 한스의 '행복은 그대 안에
있다'는 지혜에 찬성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행복을
찾아 방황하게 된다면 나는 우선 '나의 어디에 행복이
있는가?' 하는 문제에 부딪힐 것이다. 한스의
위대한 발견 뒤에 갑자기 미발견의 광대한 영역, 곧
자아가 예감되는 것이다.
그 안에 행복이 깃들어 있다는 신비로운 영역
'자아'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 왔다. 이
영역을 규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에 한없는
매력을 느낀 노자를 비롯하여 규명이 불가능한 것
속의 규명이 가능한 부분에 관심을 기울인 프로이트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2천년 동안에 걸쳐 위대한
심리학자들이 작성한 자아의 지도는 18세기 이전에
지구를 그린 지도와 흡사하다. 각 지도는 때로는
엉뚱할 만큼 비슷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영혼의 지도 대부분에는 지도 제작자가
여기에 구멍을 뚫으면 행복은 스스로 솟아 나온다고
생각한 곳에 표를 해 두었다. 그러나 자아의 지도가
일치하는 경우가 드문 것처럼, 사람들이 행복의
샘이라고 지정한 장소도 일치하는 경우가 드물다.
자아라는 거대한 세계의 어디에서 행복이
솟아 나오는가 하는 점에서 사람들의 의견은 천차만별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한스의 이야기도 대답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의 위대한 행복의 심취자
에피쿠로스는 이 문제에 그 나름으로 대답하려 했다.
에피쿠로스의 처방(명령과 금지)
성자 아우구스티누스와 성자가 아닌 마르크스의
찬양을 받은 이 고대의 계몽가는 행복의 십자군을
거느리고 있다. 그가 행복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각별히 권한 무기의 하나는 이성이었다.
다음과 같은 경우를 가정해 보자. 어떤 사람이
파티에 초대를 받았는데, 거기에 가면 매력적인
대화도 고급 술도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초대받은
사람은 고급 술이나 매력적인 대화에는 흥미가
없다고 하자. 또 한 가지 가정을 덧붙여서, 이 사람은
술을 마시면 쾌활해지는 것이 아니라 피곤을
느끼는 체질이어서 술을 마시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자. 이러한 경우, 대화를 위해서는
음주를 단념한다는 별로 달갑지 못한 체념이
강요된다. 에피큐리언의 행복은 이러한 금욕을
바탕으로 한다. 이것은 행복의 단념은 아니다. 보다 큰 행복을
위해 다른 행복을 단념하는 것이다.
가정한 이야기를 계속하기로 하자. 예의 파티에서
술을 단념한 에피큐리언의 옆에 역시 술을 마시지
않으면서 술을 못마시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이 사람은 예컨대
매력적인 대화를 즐기기 위해 음주를 단념한 것이
아니라 가정이나 종교시간에 음주는 죄악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는 경우였다.
술을 들지 않는 이 두 사람, 곧 행복을 위해
삼가하는 한 사람과 어떤 미신 때문에 들지 않는 또
한 사람은 두 사람 앞에 놓인 빈 술잔만을 본다면
비슷하다. 그러나 이와 같이 비슷하다고 하더라도
빈 술잔을 놓고 있는 두 사람의 단념의 의미는
다르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두 사람의 체념은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위대성은 체념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체념을 찬양하지는 않았다. 그는 행복을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위해 체념하는 것이다.
어떠한 쾌락, 어떠한 환희, 어떠한 행복이든 그
자체로서의 악이 아니다. 이것이 모든 에피큐리언의
기본 입장이다. 그리고 에피쿠로스가 위가 주는
행복을 찬양한 것은 당시 이미 이러한 행복을
대대적으로 부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떤
청년이 에피쿠로스에게 "저는 방자한 성적 쾌락을
구하는 충동을 억누를 수가 없습니다"라고 고백했다.
이에 대해 에피쿠로스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과도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말하기
시작하지만, 이에 앞서 원칙적으로 상대의 말을
시인하는 놀라운 발언을 한다. 자네의 욕망에
따르라고... 물론 이 말에 이어 "그러나"라는 말이
나오고, 이 "그러나" 다음에 욕망에 따를 때
고려해야 될 사항이 길게 나열된다. 그렇지만 여기에
나오는 금지 일람표가 의미 있는 것은 쾌락, 기쁨,
행복을 초래하는 모든 것을 원칙적으로 시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절대적'인 미덕, 곧 행복에
앞서서 그 정당성이 증명되어야 하는 미덕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덕을 찬양하라'는 것은 '미덕이
행복에 기여한다면'이라는 단서가 붙을 때이고,
'그렇지 않으면 손을 떼라'는 것이다. 이 스승의 문장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독창적인 문장(가장
오해받기 쉬운 것이기도 하지만)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방탕자의 쾌락이 그 사람을 고통과
공포로부터 벗어난 경지로 드높여 준다면(단지 이
경우뿐이지만)이러한 쾌락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미덕이란 모든 암초를 피해서
행복에의 길을 안전하고 확실하게 향해 하도록 할
임무가 있는 조타수에 지나지 않는다. 에피쿠로스는
'이성'이라는 조타수, '미덕'이라는 조타수에게는
매우 냉담했다. 어디를 향해 키를 돌리는가? 라는
것이 전부였다. 선을 향해서? "만일 미식이나
사랑이나 음악의 즐거움, 모든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을 바라볼 때의 가슴 설레임을 제외한다면, 나는
선이라고 부를 만한 일을 알지 못한다."
에피큐리언의 '미덕'이 갖는 행복이라는 독특한
향기는 언제나 기억하고 있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 현명하면서도 쾌활한 금욕주의자는 욕구의 재고
조사를 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아쉬운 생각 없이 단념할 수 있는 욕구와 단념할
수 없는 욕구를 알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분명해진 일은 '어떤 사람에게는 당연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는 욕망이 있다'는 것이었다.
무의미한 것으로서 고대의 주석자들은 왕권과
기념비에 대한 욕망을 들고 있다. 또한 에피쿠로스는
당연한 욕구를 불가결한 욕구와 자연적 욕구로
나누었다. 불가결한 욕구 중의 하나는 갈증이다.
분명히 당연하기는 하지만 불가결한 것은 아닌
욕구로서 에피쿠로스는 미식을 들었다. 오늘날이라면
이러한 심리학은 유치하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눈에는 유치하게 보이더라도 그
배후에는 커다란 성과를 약속하는 원리가 살아 있다.
다시 말하면 불행을 초래하는 충동 중에서 어느
것을 쉽게 제거할 수 있는가를 알기 위해 충동의
체계를 규명하는 원리이다. 이 충동의 심리학은
불구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복한 삶에의 의지를 가진
사람에 의해 탄생되었다.
'무엇을 단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행복의
이론에서 항상 커다란 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에피큐리언적인 체념과 행복을 적대시하는 부정론자
사이의 경계선은 언제나 명확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에는 세계 사상 매우 유명한 인물 디오게네스가
있었다. 그는 큰 통 속에서 살았다. 또한 그는
젊은 농부가 손으로 물을 떠 마시는 것을 보고
바가지를 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도대체 어떠한
이유로 이 괴상한 그리스 사람은 편안하지 못한 생활을 하게
되었는가? 제멋대로 사는 부랑자이고 문화의
경멸자라고 비난받은 디오게네스를 나는 오히려
궁전의 쾌적함과 결부된 온갖 번잡함에 진저리를 내는
섬세하고 다감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분명히
순수한 향락을 탐구하면서 큰 통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절조 높은 생활을! 섭생을 지켜라! 문화와 거리를
가져라! 에피쿠리언의 제3의 명령은 '숨어서
살아라!' 이다. 이것은 사회의 압박으로부터,
그러니까 사회의 칭찬으로부터도 그 오류로부터도
멀어지라는 것이다. 사회의 오류나 어리석음이나
비열한 거짓말이나 책이라는 형태로 그대들에게
밀려오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말라. 이러한 말은 가장
엄격한 은둔생활을 엿보게 하지 않는가? 이렇게
본다면 다시금 에피큐리언과 그 적들을 혼동하기
쉽다. 그들은 열광적으로 행복을 찬양하는 자와
음율하게 행복을 부정하는 자를 혼동할 만큼 서로
비슷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의 '숨어서 살아라'라는 말에서는
신랄함이나 반항적 은둔성은 볼 수 없으나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예컨대 고대 중국인이 생각한, 도시에
사는 것보다는 산 속에서 사는 것이 갖는 여덟
가지 장점과 같은 것이다. 이 장점은 어떤 것인가?
인습에 사로잡혀 필요가 전혀 없다. 쓸데없는
손님을 만나지 않아도 된다. 배신 잘하는 인간의
마음에 조심할 필요가 없다. 공인에 대한 쓸데없는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된다... 고대 중국의
에피쿠로스라고 해도 좋을 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이 '숨어서 살아라'는 먼 나라의 황량한 카르스트
고원에서 살면서 죽음을 선취하려고 한 중세의
수도자들의 은거와는 조금도 비슷하지 않은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숨어서 살았으나 그것은 삶을 끝까지
즐기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기 자신을 독방에
가두려고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에피큐리언의 동산의
은둔처는 인간 적대시의 본거지가 아니었다.
에피큐리언의 우정에 대한 열광은 '숨어서 살아라'
하는 것이 행복 없는 인간 세상을 싫어하는 것이 아님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
에피쿠로스의 말과 행동은 각별히 불안했던 시대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른바 격동의 시대에는
숨어서 사는 것이 특별한 매력을 가졌었다. 말하자면
알렉산드로스 같은 위대한 사람들이 역사책에 그
이름을 기록하는 시대에는 에피쿠로스 같은 언제나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운이 나쁘면 두 달마다 짐을
싸들고 피난을 가야 한다. 저 유명한 알렉산드로스의
대제국이 건설되었다가 붕괴되는 동안에
에피쿠로스는, 청년기에는 사모스로부터 아테네로,
아테네로부터 코로폰으로, 코로폰으로부터 레스포스
섬의 뮈틸레네로, 그리고 뮈틸레네로부터 소아시아의
란프사코스로 전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와
같이 끊임없는 이주는 쉬운 일이 아니다. 어쨌든
이러한 이민이 세계사가 만들어지는 현장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지고 싶다는 갈망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 역시
철학자인 제논은 마케도니아 왕의 측근이었다. 이
시대는 철학가 외교관이 되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이 점에서 그의 후예, 곧
"현세의 위대한 인간에게는 길을 양보해야 한다"고
말한 2천년 후의 에피큐리언인 니체와 입장이 같았다.
현자는 정치에 관계하거나 지배자가 될 생각은 하지
말라고 에피쿠로스는 말한다. 현자 에피쿠로스는
숨어서 행복하게 산 것이다.
행복한 사람, 불타
불행에 둘러싸인 불타의 여러 가지 호칭 중에
'행복한 자'라는 호칭이 있다. 무엇이 그를 행복하게
만들었는가? '구원의 지복을 즐기고' 있었을 때 그는
행복했다. 구원에는 무엇으로부터의 구원과
무엇을 위한 구원이라는 두 자기가 있다. 이러한 두
가지 구원이 불타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불타는
불행으로부터 구원되고 불행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다음에 비로소 길이 열린 그 무엇에로 구원된 것이다.
이 사람의 소극적인 행복은 처음에는 극단적인
불행으로 채색되어 있었으나 이때를 경계로 해서 그는
적극적인 행복에 둘러싸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고뇌와 오뇌의 소멸이라는 지복의 상태를
일생 동안 지복의 감정을 갖고 즐길 수는 없다.
소크라테스도 족쇄가 다리에 파고들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는 단 하루도 행복하게 지내지 못했을
것이다. 앞에서 말한 이야기를 하고 30분쯤 후에 그는 행복한
다리 따위는 까맣게 잊었을 것이다. 행복한
불타가 구원의 지복을 향수 했다면 그는 무엇인가의
부재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현재 존재하기
때문에 지복을 느꼈을 것이다.
불타의 행복에 붙인 인도의 고유명사는 열반이다.
열반은 단지 무, 곧 모든 불행의 제거만이 아니라
동시에 확고하게 존재하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인간을 구원하고 더 나아가 충일을 느끼게
하는 특별한 행복이다. 이 충일에 이르는 구원은
하루를 보내고 등불을 끌 때, 그리고 충일을 왜곡하던
하루의 배경이 사라질 때, 많은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열반은 현세에 실존하는 자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비주의자들이 제가끔 다른
이름을 붙이고 있는 현세의 체험이다. 그러나
신비주의자의 체험인 열반에 신비적인 요소는 없다.
등산하는 사람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헐떡거리면서 산정에 설 때, 갑자기 강력한 숨결이
전신을 감싼다. 이 숨결은 별이나 만년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몸 안을 뚫고 지나간다. 그리고
그는 구원의 지복을 누리는 것이다. 이 지복한
감정에는 눈이나 귀나 코나 그밖의 무수한 감각이
받아들이는 모든 것이 관계된다. 이러한 구원은 산에
오르지 않더라도 경험할 수 있다. 꽃피는 들에 서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언덕의 능선에 시선을 돌린다.
그러면 구원의 행복이 바람이 되어 불어오는 것이다.
위대한 신비주의자들은 구원을 위해 산정이나
꽃피는 들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행복에의
비상을 훈련에 의해 터득하고 소도구 없이 성취한다.
그들은 위대한 시인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내면에 삶의
충일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대지나 여러
감각은 스스로의 행복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행복을 불타는 터득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코끼리를 만지고 있는 장님과
같다. 한 사람은 머리를, 또 한 사람은 코를, 또
한사람은 꼬리를 만지며 "코끼리는 이런 거다"
"아니야, 코끼리란 이런 거야"하고 싸움을 벌이는
장님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의해야 할
것은 불타는 코끼리의 외관에 대해서는 전혀
가르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이 중요한가? 코산계의 신사바나무 숲에
머물렀을 때, 불타는 나뭇잎 몇 개를 따서 들고
제자들에게 물었다.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이
나뭇잎과 이 숲 속에 있는 다른 나뭇잎과 어느 것이
많은가?" "스승이여, 스승께서 들고 계신 나뭇잎은
얼마 되지 않으므로 숲속의 나뭇잎이 더 많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이다. 내가 알고 여러분에게 전하지
않은 것이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보다 훨씬 많다.
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하지 않았는가? 전한다
하더라도 여러분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으며, 불성에의
전환을 촉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현세로부터의
이탈, 모든 쾌락의 망각, 덧없는 것의 소멸, 평화,
인식, 자각, 열반으로 이끌어 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전하지 않은 것이다."
불타는 위대한 계몽가였지 결코 인생에 등을 돌린
허무주의자는 아니었다. 행복한 자 불타는 발을
물에 담그고 추위에 떨고 있는 불행한 고행자들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개구리나
거북이, 물뱀이나 악어나 그밖의 수중동물은 모두
극락으로 갈 것이다!" 이 행복한 자는 모든
자기학대를 거부했다. 그것은 학대받는 피조물을
불행으로 이끌어 갈 뿐, 열반의 행복으로 인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는 에페쿠로스의 적이 아니었다. 그는 물론
행복에의 길의 개척자는 아니었다. 그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어떻게
하면 살아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는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단순한 순간적인 환상이 아닌 절대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삶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영속적
행복 속에서 살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열반의
상태가 인간 일생의 상태가 될 수 있는가?
이러한 역설은 불타가 단지 불행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복과 인생을 긍정했음을 보여 준다.
그는 유럽의 어느 누구보다도 수미일관하다. 곧, 그는
불행으로부터 현세의 삶의 영역을 제외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정합성을
유지하기 위한 희생도 하지 않았다. 그는 행복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행복의 추구에 열중하는 사람은 불타에게서 강력한
적을 발견하지 못한다. 불타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어둠에 이름을 붙일 용기가 없었던 많은
몽상가들보다 훨씬 친절한 우정의 얼굴이다.
불행한 여우
'행복'이라는 말을 듣고 떫은 듯이 낯을 찡그리고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행복의 경멸자는 아니다.
그렇긴 해도 행복을 중요시하지 않거나 나아가 이를
무시하는 사람들의 수는 상당하다. 또한 이러한
사람들이 배출되는 배경도 다양하다. 선천적인
행복불감증이라는 이상 증세가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자연이 행복을 위한 기관을 갖추지 못한
인간을 탄생시킬 가능성은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행복에 대한 냉담성은 자연의
장난이고 기형이다.
보다 확고한 기반 위에서 이야기를 계속한다면,
우선 이러한 냉담성은 그 사회에 불고 있는 차가운
바람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진리와 정의에 대한
불감증을 일으킨 것은 자연이 아니라 실증주의라는
사상적 풍토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진리나
정의는 그 내용이 무엇보다도 역사와 함께 변화하는
전통에 좌우되는 추상명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어떤
사람에게는 즐거운 모든 것, 예컨대 애플파이라든가, 핀으로 찌른
나비표본이라든가, 유명인과의 교제라든가,
우표수집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포괄하는
집합명사라고 생각한다.
현대의 사상적 풍토는 행복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데에는 별로 적합하지 않다. 게다가 아주 옛적부터
행복을 과소평가 하는 것이 때로는 매우 효과적임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발견을 한 것은 저 악명 높은
여우로, 그는 먹고 싶어 죽겠는데 입이 닿지 않는
포도를, 저것은 틀림없이 실 것이라고 단정해 버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스의 우화작가 이솝이 이야기하는 이 여우는
어느 더운 여름날, 과수원 근처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높은 가지에 매달린 잘 익은 포도송이 아래에
이른 여우는 이 포도라면 자기의 갈증을 말끔히
가시게 할 것이라고 환성을 올렸다. 그래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달려나가 훌쩍 뛰어올랐다. 그러나
포도에는 닿지 않았다. 여우는 여러 번 거듭해서
시도했다. 유혹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여우는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여우는 고개를 쳐들고
거만하게 코를 내밀고 점잖게 그 자리를 떠나면서
말했다. "저 포도는 틀림없이 실 거야."
이 이야기에 나오는 여우는 어떻게 해서든지 포도를
먹고 싶었다. 그 포도가 얼마나 단지 여우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우는 이 포도를 딸 수 없었다.
너무 높은 것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우는 딜레마에 빠졌다. 여우는 한편으로는 포도에
닿을 수 없었고, 또 한편으로는 포도 생각을 머리
속에서 털어 버릴 수가 없었다. 이때 여우는 탈출구가
하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탈출구란 욕망의
대상을 파괴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 방법은 두 가지, 곧 객관적인 방법과 주관적
방법이 있다. 즉, 포도를 실제로 흔적도 없이 으깨
버리는, 적어도 먹을 수 없게 만드는 방법과 포도는
그대로 놓아두지만 자기의 상상 속에서 말에 의해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포도가 이미
존재하자 않을 때에도, 내가 그것을 시다고 생각했을
때에도 포도는 이미 나의 마음을 끌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다시 말하면 손을 닿지 않는 포도를 으깨
버리는 행위에 악의의 기쁨, 위해를 가하는
기쁨의 가장 깊은 하나의 뿌리가 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에서 가장 대규모의 위해는 세계를
파멸시키는 것이리라. 언제나 되풀이하여 나타나는
세계 멸망의 표상은 아마도 행복을 거부하는 세계가
멸망하기를 바라는 소망일 것이다. 현대 심리학이
상당히 주목하는 파괴 충동은 어느 정도까지는 손이
닿지 않는 포도를 파괴해 버리려는 충동이다.
지금까지 어쩔 수 없는 체념을 충분히 보상할 만큼
만족스러운 파괴에 성공한 사람은 권좌에 있던
세계적으로 유명한 방화범들이었다. 그들만이
자기들을 만족시켜 주지 않는 세계를 불태워 버리는
것으로 마음이 가벼워질 수 있었다. 만일 네가 황제로
로마를 불타오르게 했다면, 그것은 다른
방법으로는 기독교를 처리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리라. 나치스는 처음부터 그들이
직면한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생각했더라도 아마
전쟁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제2의
기회는 독일이 세계를 제패하지 못할지는 모르더라도
이미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느 나라도
세계를 제패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히틀러 문학에서 볼 수 있는 세계 멸망의 풍조는
모든 것이 멸망하면 말할 것도 없이 독일인도 이미
존재하지 않겠지만 러시아나 영국, 미국 등
세계사적인 주역들도 이미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허무에 대한 쾌감이었다. 어떠한 혁명에서나 이러한
방화범들이 하나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그들에
의해 혁명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악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욕망은 갖고 있더라도 스케일이 작은 사람은 자기
손이 닿지 않는 것을 헐뜯고 단 포도송이를 시다고
말함으로써 만족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것만으로는 별로 소용이 없다. 자기보다
행복한 이웃이 단 포도를 먹고 입맛을 다시는 모양은
누구나 매일 보는 것이다. 이럴 때에 자기는
누릴 수 없는 것이라는 관념을 변함없이 견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개인적인 미망에 갇힌 광인은
불유쾌한 현실에 대해서는 안전하다. 그들에게는 이
현실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다
정상적인 사람은 집단적 광기에 의해 구제된다.
집단적 광기는 신학자나 철학자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들만이 광기를 진리고 드높이고 경험을 확고하게
제의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필요하면 언제든지 단
포도를 신포도로 바꾸어 놓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이렇게 함으로써 손도 대지 않고 그들은
유혹으로부터 그 매력을 박탈하고 만족할 수 없는
인간으로부터 어쩔 수 없는 체념이라는 괴로움을
빼앗아 갔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저 포도는 시다고
말한 여우는 인류에게 최대의 선행을 베푼
자들의 대열에 끼일 수 있겠다. 이 여우는 고전적인
'행복한 한스'와 함께 역시 고전적인 '불행한
여우'로서 기념비를 세울 만한 업적을 남긴 것이다.
그러나 이 여우의 정체는 반드시 선행자만은
아니다. 물론 이 여우는 많은 점에서 인생의 무거운
짐을 벗겨 주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본다면
인간으로 하여금 그 비참한 상태에 적응하게
한 것이다. 분명히 이 여우는 인간으로 하여금 크고 작은 무수한
어쩔 수 없는 체념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행복과 불행에 대해서도 자신의 것이든 남의
것이든 무신경하게 만든 것이다. 이 여우는
사람들을 주어진 상황 속에 가둬 두고 동경을, 그리고
동경과 함께 모든 가능성을 축출한 것이다. 이
여우는 행복 부재의 상태를 고정시켰다. 그리고
신포도에 의해 비참한 체념의 고전적 존재가 되었다.
사실상 가장 열광적인 행복의 적은 이 여우에게
공감하는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행복에의
동경을 축출할 결심을 한 인간은 인생에 어떠한
가능성이 있는가를 생각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행복을 생각하면 불안해지는 것이다. 행복을 생각하면
행복이 없는 일상이 멋없어지고 게다가 일년에
몇 번밖에 없는 가난한 축제마저도 시시해지는
것이다. 또한 행복을 생각하면 자신의 운명에 대해
분개하는 사람도 있다. 요컨대 행복에 대해 사색하면
사람들은 그 나름의 가난과 결핍을 상기하게 되어
세계의 평화가 교란되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갖지
못한 자와 마찬가지로 많은 가진 자들도 행복에
대해 무한한 분노를 느낀다. 행복이 스크린에 비칠
때에는 누구나 재미있게 구경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은밀한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불안해 할
필요는 없다. 결국 영화에 지나지 않고 이것은
누구나가 승낙한 약속인 것이다. 게다가 영화관 안은
어둡다. 어두우면 아무도 자기를 보지 못한다.
진지한 인간과 행복의 관계는 비밀의 관계를 가질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사람은 행복을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처럼
다루는 것이다.
항상 변함이 없는 행복, 생애에 걸친 행복은 두
피안의 선취에만 있을 수 있다.
곧, 천국이든가 유토피아에만 존재할 수 있다. 탄식의
골짜기인 이 세상은 여러 가지 제도와 기구를
통과하는 오랜 행군이다. 영원한 행복, 지복 중의
지복은 하늘의 피안과 현세의 피안이라는 두 피안의
어느 쪽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눈으로
보아서는 인생에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종교의 창립자나 철학자는 매력적인 세계를
꾸며내기는 했으나, 이것은 가장 엄격한 형식을
갖춘 맹신에 지나지 않는다.
개별적인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지복은 순간적이고
매우 한정된 지복이다. 예컨대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 내 부모는 매년 우리를 북해로
데리고 갔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바닷가로 뛰어나가
지복의 감정에 사로잡혔다. 또 다른 순간적인 지복의
예를 든다면, "아이다"에서 지하실에 갇힌
사랑하는 두 사람이 부르는 마지막 듀엣을 들을
때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복 다음에는 전락(신비적
합일로부터의 전락이기도 하다)이 뒤따른다. 사랑의
예는 이 정도로 해 두자. 내가 차를 타고 가다가
헐리우드에서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졌을 때, 내
왼손은 가는 근육으로 간신히 붙어 있었다. 팔은
부목을 대어 버팀대 위에 올려 놓여졌다. 나에게는
마약의 일종인 판트폰이 투여되었다. 나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이때만큼 편안한 지복감을
강렬하게 느꼈을 때가 없다. 그런데 그후에 약효가
사라지는 전락의 시간이 닥쳤다. 나는 현대의 마약
상습자들도 그때의 나와 동일한 지복감을
맛보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이 전락도 이에
앞서는 지복감에 대응하리라.
나에게 내 인생의 경험을(애정만은 빼놓고)
요약하라고 한다면, 나는 인생에는 지복의 순간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고 말하겠다. 보호받는 생활
속의 행복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부질없는
노력이다. 인간은 이런 데서 의미를 발견할 수는
없다. 위대한 종교의 창립자나 철학자는 가끔 인간의
행복에 보호받는 생활을 덧붙였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으며 차츰 비참한 해석을 받게
되었다. 무의미한 인생을 보낼 수는 없다고 믿는
사람은 자살하는 길밖에 없다. 무의미란 언제까지나
보호해 줄 것이 없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순간적인 행복, 지복의 한 조각으로 충분한
것이다. 인간은 보다 겸손해지는 것을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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