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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행복은

행복에 대한 단장 알랭

by FraisGout 2020. 7. 27.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평론가. 본명은 Emile Auguste 
Chartier.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헤겔, 루소
등의 사상을 훌륭하게 발전시킨 사상가로 언급되나 
평생을 고교교사로 생활함. 주요 저서로 "행복에
대한 단장" 등이 있음.

     슬픈 마리

  주기적인 우울증에 관하여, 특히 어떤 심리학 교수가 
진료소에서 발견한 저 슬픈 마리와 즐거운
마리에 대하여 반성해 보는 것도 흥미 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이야기는 벌써 잊어 버렸지만 보존해
둘 만한 가치가 있다. 이 아가씨는 시계처럼 정확하여 한 
주일 동안은 즐거워하고, 다음 한 주일
동안은 슬퍼하는 것이었다. 즐거워할 때에는 모든 일이 
잘 되었다. 비오는 날도 활짝 개인 날고
마찬가지로 좋아하고, 사소한 우정의 표시도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애정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면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불쾌한 감정이 일어나는 법이 없었다.
그녀의 보잘것없는 생각도, 마치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아름다운 꽃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여러분에게 권장하고 싶은 상태였다. 현자도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항아리에 두 개의 손잡이가
있는 것처럼, 어떠한 일에나 두 가지 면이 있다. 나쁘다고 
생각하면 언제나 나쁘게 보인다. 좋다고
생각하면 언제나 좋게 보인다. 행복하려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한 주일 후에는 모든 기분이 변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맥이 풀렸다. 무슨 일에 대해서나
흥미를 가질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시들했다. 
이미 행복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애정도
믿지 않았다. 자기는 아무에게도 사랑을 받은 적이 없다고 
불평하고, 그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를 우매하고 못난 여자라고 
단정했다. 자기의 이러한 병을 생각하고는 그 병을
더치게 했다. 그리고 이 사실에 대해서는 자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일종의 무서운 방법으로
조금씩 자살을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당신이 
나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고요? 그렇지만 나는
당신의 연극에 넘어가지 않아요."하고 그녀는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이었다. 칭찬을 받고 나서는
놀린다고 생각하고, 친절한 대답을 들으면 모욕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비밀은 엉큼한 흉계였다.
불행한 자에게는 아무리 좋은 일도 시시하게 보이므로, 
이와 같이 상상에서 오는 마음의 병은 치료 할
길이 없다. 행복을 얻으려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의지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 심리학 교수는 용감한 자를 위해 더욱 무서운 
교훈, 더욱 두려운 시련을 발견했다. 이런
인간의 주기적인 심리활동에 대해 많은 관찰과 측정을 
하는 동안에, 하루는 혈구를 입방체로 세어
보았다. 그러자 분명한 법칙이 나타났다. 기쁨을 느끼는 
기간의 마지막 무렵에는 다시 많아지는
것이었다. 혈구의 다과--이것이 저 상상에서 오는 환각의 
원인이었다. 이리하여 의사는 그녀의
까다로운 불평에 대하여 "안심하세요, 내일이면 행복하게 
돼요."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말을 조금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를 사실상 슬프게만 생각하려고 드는 친구가, 이에 
대하여 나에게 말했다. "뻔하지 않는가.
우리로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네. 생각만으로 혈구를 
만들어 낼 수는 없네. 그러니 어떠한 철학도
소용없네. 이 커다란 세계는 여름과 겨울, 비오는 날과 
개인 날--이렇게 그 법칙에 따라서 우리에게
기쁨과 슬픔을 줄 걸세. 행복하게 되려는 나의 욕구는 
산책하고 싶다는 욕구와 다를 것이 없네. 내가
저 골짜기에 비가 오도록 할 수는 없으니 말일세. 그리고 
내가 내 마음속에 울적한 벌레를 기르는 것도
아니네. 나는 그것을 참고 있네. 그리고 내가 참고 있음을 
알고 있네. 이건 좋은 위로가 되네!"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엄격한 판단이나 
슬픈 예언이나 쓰라린 추억을 되짚어 보면,
자기의 슬픔을 잘 알 수가 있다. 이를테면 슬픔을 맛보는 
격이다. 그리고 슬픔 속에 혈구가 문제된다는
것을 잘 알게 되면, 자기의 판단 같은 것은 문제시하지 
않을 것이다. 슬픔을 몸 안에 처넣으면, 그것은
아무런 가식도 없는 한갖 피로나 또는 병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에게 기만을 당하느니, 차라리 위병을
앓는 편이 낫지 않을까? 감정이 날카로운 자는 이론도 
진정제도 함께 배격한다. 내가 말하는 이 방법을
사용하면 동시에 두 가지의 치료법에 길이 열리는 것이니 
주목할 만한 일이 아닌가.

     신경쇠약

  이즈음과 같은 우기에 남자의 기분은--여자의 기분도 
그렇지만--날씨처럼 변덕스럽다. 학식도
많고 분별력도 있는 친구가 어제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쩐지 요즈음은 기분이 개이지 않네 그려. 일이나 
트럼프를 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기쁜가 하면 금세 슬퍼지고 슬픈가 하면 곧 
기뻐지면서, 이렇게 고양이 눈동자보다 더
빨리 기분이 변하네. 그 원인이란 다름이 아니고 편지를 
써야 한다거나, 전차 시간을 놓친다거나,
외투가 너무 무겁다거나 하는 정도일세. 그런데 그 때문에 
진짜 불행이라도 당한 것처럼 생각되네.
사리를 가려 그까짓 일은 아무래도 무방하다고 타일러도 
막무가내일세. 나의 판단력은 젖은 대고처럼
전혀 쓸모가 없네. 결국 나는 스스로 신경쇠약이라고 
진단을 내려 버렸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뭐 크게 떠들 것 없이 사물을 잘 이해하도록 하세.
누구나 자네와 같은 입장에 있네. 다만 자네는 불행에 대해 
날카로운 센스를 갖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네.
지나치게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왜 기뻐지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하는가를 따지려고 하네 그려.
자네가 언제나 초조감을 느끼는 것은 자네의 기쁨이나 
슬픔이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원인에서는 얼른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일세.
  실은 행복이나 불행에 원인이란 있을 수 없네. 모든 
것이 우리의 육신과 그 작용에 달려 있네.
아무리 건장한 체격도 대개는 식사, 보행, 주의력, 독서, 
날씨 등의 형편에 따라서 날마다 긴장에서
침체로, 침체에서 긴장으로 옮아가는 걸세. 자네 기분은 
그것에 의해 마치 파도 위에 떠 있는 배처럼
올라갔다 가라앉았다 하네. 그런 것은 대개 보잘것없는 
걸세. 무슨 일이나 손에 잡고 있으면 조금도
마음에 걸리지 않는데, 그것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 
여유가 생겨 곰곰이 생각하면 곧 자질구레한 그
이유라는 것이 나타나는 법이라네. 그런데 자네들은 
그것이 결과인데도 원인이라고 생각하네. 민감한
사람은, 슬프거나 즐겁거나 반드시 그 이유를 
생각해 낸다네. 그리하여 하나의 이유가 두 개의 목적에
유용할 수도 있네.
  몸이 약했던 파스칼은 별의 수가 많아서 무서워졌네. 
그가 별을 쳐다보면서 숭고한 전율을 느낀 것은
 무의식중에 창가에서 추위에 떨었기 때문일 걸세. 
대담한 시인이라면 여자친구나 되는 듯 이 별과
이야기를 주고받았을 걸세. 그리고 두 사람 다 별이 
총총한 하늘에 대해 엄청난 말을 할 테지. 문제도
되지 않는 엄청난 말을 스피노자는 말했네. 인간이 정념을 
갖지 않은 적이 없지만, 현명한 자들은
마음속에 오묘한 사상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에 비하면 
정념은 보잘것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고.
스피노자의 어려운 논리를 따르지 않더라도 그의 본을 
받아, 음악이나 그림이나 재미있는 이야기와
같은 행복을 담뿍 간직할 수가 있네. 이에 비하면 우리의 
우수와 같은 것은 눈에 차지 않을 걸세.
사교가는 약간의 의무감에 의해 자기의 분노를 잊을 수 
있네. 우리는 알차고 유용한 일이나 책이나
친구들을 좀더 이용하지 않고 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걸세. 아무튼 가치 있는 것에 여전히
별로 흥미를 찾지 않는 것은 아마도 일반적인 그리고 
중대한 결과를 가져오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네.
우리는 그런 가치 있는 것에 기대를 거네. 마땅히 바랄 
것이 무엇임을 알고 이를 바라는 것도 때로는
훌륭한 일이라네."

     불쾌감

  격분한 어조대로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할퀴는 것이 
가장 좋다. 그것은 스스로 자기의 불행을
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자기 자신에게 복수를 
하는 셈이다. 아이들은 처음에 이런 수법을
곧잘 쓴다. 자기가 우는 것에 골을 내어 더욱 극성스럽게 
운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괴롭힘으로써 더욱 
고약해지는 사람이 있다. 자기가 고약한 자가 되기
때문에, 남도 고약해지게 하는 것이다. 그는 책을 읽어도 
잘 알 수 없어, 자기가 생각해도 창피한
일이므로, 다시는 책을 읽지 않으려고 맹세한다. 
쓸데없이 고집을 부린다. 계속해서 기침을 한다.
기억 속에서도 모욕을 찾아낸다. 스스로 모가 난다. 
확신도 없이 해보고 나서 실패하고는 한번 해볼만
했는데 이것도 운수 소관이지 하고 말한다. 도처에 찌푸린 
얼굴을 해보이며 사람을 싫어한다. 남에게
불쾌한 인상을 주면서 남들이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을 
의아스럽게 생각한다. 그는 억지로 잠을
잔다. 아무리 큰 기쁨일지라도 일단 의심을 해본다. 
만사가 다 귀찮다는 표정으로 사사건건 반대를
한다. 그는 불쾌로써 불쾌를 조성한다. 그리하여 이런 
입장에서 자기 자신을 판단한다. "나는 소견이
좁고 인색하다. 기억력도 쇠퇴되고 어느 새 나이도 먹어 
버렸다." 그는 일부러 불쾌한 얼굴을 하고
거울에 비쳐 본다. 이러한 것들이 불쾌감의 함정인 
것이다.
  나는 "살을 에는 듯한 추위로군. 그러나 건강에는 
이것이 제일이야." 하고 말하는 사람을 경멸할 수
없다. 우리가 이 이상 더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바람이 북동쪽에서 불어올 때, 손을 비비는 것은
이중으로 좋은 일이다. 이 경우에 본능은 지혜만큼이나 
가치가 있으며, 육체의 반응은 우리에게 기쁨을
표출한다. 추위에 대항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으니, 
그것은 추위에 만족하는 일이다. 그리고 기쁨을
달관한 스피노자투로 말하자면, "내가 만족을 느끼고 
있는 것은 따스해졌기 때문이 아니다. 만족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따스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기쁨을 찾기 어려우면, 우선 기쁨을 축적할 
일이다. 즉 그것을 손에 넣기 전에 고맙다고
해야 한다. 희망은, 희망한 이유가 이루어지게 하고, 좋은 
징조는 실물을 나타나게 하기 때문이다.
"까마귀가 우는 소리도 당신의 기분 여하에 따라서 행복이 
될 수 있다"라고 에피크테토스는 말했다.
불쾌한 사람을 만나면 웃어 보일 일이다. 그리고 잠을 
자고 싶으면 잘 수 있다고 확신해야 한다.
누구에게나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자기 자신인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일종의 미치광이에 대해 말해 왔다. 
그러나 미치광이란 우리들의 오류가 확대된 것에
불과하다. 단지 잠깐 나타나 보일 따름인 불쾌한 동작 
속에도 박해에 대한 집념이 응축되어 나타나
있다. 나는 이러한 광기가 우리들의 반응을 지배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상해에 기인함을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초조해 한다는 것은, 자기 무덤을 판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다만 미치광이들
속에서, 우리들의 교훈이 되는 것을 찾아볼 뿐이다. 이 
경우에 그것은 확대경을 통한 것처럼 커 보이는
저 두려운 오류이다. 이 가련한 인간들은 자문자답을 
한다. 그들은 혼자서 비극을 연출하고 있다.
이것은 반드시 효과를 나타내는 마법의 주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까닭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헤라클레스

  인간이 곤란을 헤치고 나가는 데 힘이 되는 것은 자기의 
의지뿐이라는 것은, 종교나 기적이나
불행과 함께 옛날부터 있는 관념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본질상 의지 자체와 동시에 언급될 수 있는
관념이기도 하다. 의지의 힘은 결과에 의해 입증되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스는 자기를 노예로 간주하게
될 때까지 스스로 이러한 입증을 해 보여주었다. 그는 
자기가 노예라고 믿었을 때에는 부질없이
살아가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는 편을 택했던 것이다. 이 
옛이야기는 매우 아름답다. 나는 아이들에게
외부에서 오는 압력을 이겨내는 법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 
헤라클레스의 사적을 암송시키고 싶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산다는 것이며, 이와 다른 태도는 
비겁하기 짝이 없고 단지 죽음을 연장하고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나는 삶을 극복해 가면서 스스로 반성하고, 그릇된 길에 
접어든 골목에서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며,
자기의 잘못을 찾아 진심으로 자기 자신을 책망하는 
소년을 좋아한다. 그러나 주위의 사물이나 사람들
가운데서, 언제나 무슨 트집을 찾아내는 인간의 탈을 쓴 
자동기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런 사람들에게서는 기쁨을 찾아볼 수 없다. 주위의 
사물이나 사람들은 이 불행한 인간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의 
생각은 추운 겨울날의 나무 잎사귀처럼, 바람에
불려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나는 자기의 외부에 불평을 
하는 사람들이 결코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데 비하여, 자기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나는 
바보였어..." 하고 뉘우치는 사람들은 자기의
경험을 소화하여, 굳세고 쾌활한 얼굴을 하고 있음을 보고 
감탄하게 된다.
  경험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마음을 무겁게 하고 
또 하나는 가볍게 한다. 침울한 사냥꾼은
토끼를 놓치고는 "내 운수니까 할 수 없지"하고 말을 
잇는다. "이런 꼴은 나만 당하지."
  그러나 쾌활한 사냥꾼은 토끼가 날쌔게 줄행랑을 치는 
모습을 보고 감탄한다. 그는 토끼의 천직은
인간의 찌개 냄비에 고기를 제공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속담에는 사나이다운 지혜가 많다. 나의
할머니는 언제나 "제비는 구워진 새가 되어 땅에 
떨어지지는 않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의미심장한 말이다. 잠자리를 마련했기 때문에 잠들 수가 
있는 것이다. 바보는 "내가 음악을 좋아하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말한다. 그러나 우선 음악을 
해볼 일이다. 처음부터 음악을 좋아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우리의 뜻에 어긋나 있다. 아니 
모든 사물은 우리에게 무관심하여
문제시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대지의 
표면은 인간의 활동이 없으면 가시밭과
질병으로 뒤덮일 것이다. 적도 아니지만 동지도 아니다. 
인간의 편의 되는 것은, 인간의 활동뿐이다.
그러나 공포를 자아내는 것은 희망이다. 그러므로 우연한 
성공을 거두는 것은 몹시 상서롭지 못한
실마리가 된다. 신을 축복하는 자가 이윽고 신을 저주하게 
된다. 그러한 태도는 신혼부부가 한동안
구청장이나 교회의 문지기를 좋아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교회의 사환이 식이 끝난 후에 어떤 표정을
하고 촛불을 껐는지 보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어느 날 
향수를 파는 소녀가 미소를 짓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녀는 가게의 문을 닫으면서 동시에 미소를 
그쳤다. 가게의 큰문을 닫는 상인의 모습도 볼만한
일이다. 알 수 없는 사물--인간도 포함하여--이 그 고유의 
법칙을 우리에게 표시하자마자 (인간은
그 법칙에 좇아서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일에 착수한다. 그러나 어떤 존재가
우리에게 호의를 약속하자마자 우리는 인식을 박탈당하고 
희망밖에는 의지할 것이 없어진다. 모든
존재는 그 전조나 반영에 있어서보다 막후의 풍부한 
생활이 더 아름답고 친근한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정력적인 사람들은 곤경과 변화를 사랑한다. 평화는 여러 
가지 힘 사이에 존재한다.

     느릅나무

  나무를 좋아하는 한 사나이가 나와 함께 정원을 
거닐면서 이렇게 말했다. "잎이 돋아나기
시작했어요. 얼마 안 가서 느릅나무에 작은 송충이가 
붙어서 잎사귀를 모두 먹어 버릴 테지요. 그렇게
되면 나무는 폐를 떼어낸 것처럼 결단이 나요. 질식하지 
않으려고 새로운 잎사귀가 나와서, 이를테면
봄을 두 번 맞이하는 격이 되지요. 그래서 나무는 
기진맥진하게 되니, 2__3년 후에는 새잎이
돋아나지 못하고 죽어 버릴 거요."
  그는 100년이나 묵은 느릅나무를 가리키며, 이처럼 그 
나무가 오래지 않아 죽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쓸어 버려야죠. 그까짓 송충이쯤 맥을 못 쓸 
테니까요. 한 마리 죽일 수 있다면, 백 마리나 천
마리도 죽일 수 있을 테죠."
  그는 말했다. "천 마리 정도의 송충이는 문제가 
아니지요. 그러나 몇 백만 마리나 되거든요.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나요."
  나는 말했다. "그러나 당신은 돈이 많지 않소? 돈만 
있으면 사람을 살 수 있을 텐데 뭐가 문제요?
열 사람의 안부가 열흘만 일하면 송충이쯤 몇 마리라도 
퇴치시킬 수 있을 거요. 이렇게 아름다운
느릅나무를 살리기 위해서는 2 - 3백 프랑쯤 던진들 
어떻소?"
  "돈이야 있지요. 그런데 일손이 모자라고... 저 높은 
나뭇가지를 다 어떻게 한담? 선정할 줄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할 텐데. 이 근처에는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두 사람뿐이오."
  "두 사람이라도 족해요. 그 두 사람에게 높은 
나뭇가지를 맡겨요. 그리고 별로 익숙하지 못한 다른
사람에게는 사닥다리를 쓰도록 해요. 나무 전부를 다 
소생시킬 수 없을지라도, 적어도 두세 대는 건질
수 있을 거요."
  그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용기가 나지 않는군요. 내가 
할 일은 따로 있을 것 같소. 그놈의 송충이들이 보기 
싫어 잠깐 여기를 떠야겠소"
  나는 대답했다. "상상력의 힘이란 무서운 거요. 당신은 
싸우기도 전에 이미 지고 있소. 손이 미치는
데까지 있는 힘을 다해야 하오. 일이 귀찮고 인간이 
연약한 것을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못하오.
그러므로 우선 행동해 보고 나서 자기 행위에 대해 생각해 
볼 일이오. 석공을 봐요. 잠자코 연장을
놀리고 있소. 큰 돌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소. 그러나 
머지않아 집이 서고 계단에서는 아이들이 뛰놀게
되어요. 나는 언젠가 한 직공이 두께가 15센티나 되는 
강철에 구멍을 뚫기 위해 손잡이가 구부러진
줄칼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감탄했소. 그는 연신 
휘파람을 불면서 연장을 돌리고 있었소. 먼지처럼
부서진 강철의 부스러기가 휘날리고 있었소. 나는 대담한 
이 사나이에게 경탄하였소. 벌써 10년 전
일이오. 그는 이 구멍을 뚫고, 그 밖에도 강철에 많은 
구멍을 뚫을 거요. 송충이는 당신에게 교훈을
주고 있소. 느릅나무에 비교하면 송충이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오. 그러나 조금씩 깎아 먹고 있는
동안에 산 전체를 결단내는 거요. 작은 힘이나마 의지하고 
벌레에 대해서는 벌레가 된 심정으로 싸워야
하오. 무수한 원인이 당신의 편이 되어 있소. 그렇지 
않다면 느릅나무는 벌써 없어졌을 거요. 운명이란
변화무쌍한 것이오. 손가락 끝을 약간 움직이기만 해도 
새로운 세계가 나타날 수 있소. 아무리 작은
노력이라도 무한한 성과를 가져올 수 있구요. 이 
느릅나무를 심은 사람들은 인생이 짧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을 거요. 당신도 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다만 자기 발 밑만을 주의하고 대담하게 행동을
개시해요. 그렇게 되면 느릅나무도 살릴 수 있을 거요."

     행동

  경쟁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고생이 막심하다. 공치기를 
하는 사람도 그렇고 권투를 하는 사람도
그렇다. 책을 보면 인간은 쾌락을 구한다고 쓰여 있지만 
이것은 분명치 않다. 오히려 고통을 구하고
고통을 사랑하는 듯이 보인다. 늙은 디오게네스는 "가장 
좋은 것은 고통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그런 사람은 자기가 구하는 고통 속에서 쾌락을 
발견한다고 말할 터이지만, 그것은 억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이 발견하는 것은 쾌락이 아니라 
행복일 것이다. 그런데 쾌락과 행복은 속박과
자유가 다른 것처럼 매우 다른 것이다.
  인간은 행동하기를 원하되 복종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자진하여 그토록 고생하는 사람들도 강제
노동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자기 자신에게 닥쳐올 불행을 
좋아할 사람도 없고, 궁핍을 느끼기를
좋아할 사람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자유롭게 
고생하는 일이라면 곧 만족을 느낀다. 나는 지금
이러한 한담을 쓰고 있다. 붓대로 밥을 먹어야 하는 
저술가라면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에게도 강제를 받지 않는다. 자진하여 하는 일은 
즐겁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행복하다.
권투선수도 남에게 얻어 맞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진하여 얻어맞는 것은 좋아한다. 우리
자신의 뜻에 좇아서 싸울 때에는 어려운 승리보다 더 
즐거운 것은 없다. 사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힘뿐이다. 헤라클레스는 괴물을 찾아내어 이를 
분쇄함으로써 자기의 힘을 자신에게 입증했다. 그러나
사랑에 빠지자마자, 그는 자신의 노예 상태와 쾌락의 힘을 
느끼게 되었다. 인간은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환락에서 서글픔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구두쇠는 많은 쾌락을 희생시킨다. 그리고 첫째로 
쾌락에 대해 승리함으로써, 그리고 거기서 힘을
축적함으로써 커다란 행복감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그는 
이 힘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얻고 싶은
것이다. 유산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 만일 구두쇠라면, 
그는 더욱 비참한 수전노이다. 왜냐하면 무릇
행복이란 본질적으로 포에지이며, 포에지는 행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선반으로부터 떨어지는
떡덩이와 같은 행복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법이다. 행복을 
자기 힘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아이들은
우리들의 정원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모래산이나 밀짚 
같은 것으로 스스로 훌륭한 정원을 만든다. 자기
스스로 수집하지 않은 수집가를 생각할 수 있을까?
  전쟁을 하는 재미는 전쟁을 하는 데 있다. 무장을 
하자마자 각자는 분명히 자유를 갖게 된다.
그리하여 병사들은 강제로 싸우게 하는 사령부 같은 것은 
염두에도 두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의
자유를 느끼자마자 새로운 생활 속에 뛰어들어가 거기서 
취미를 발견하게 된다. 죽음은 무서워할
필요도 있지만, 동시에 죽음을 기다리고 나중에는 죽음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죽음에
선수를 써서, 이를테면 격투장 안에 죽음을 불러들이는 
자는 자기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병사들은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 죽음을 
찾아나서는 편이 훨씬 쉽다는 것을 저마다 잘 알고
있다. 또한 인간은 시간이 가져다 주는 운명보다도 자기 
손으로 만들어 나가는 운명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전쟁 속에는 포에지가 있어, 그 때문에 사람들은 
벌써 적까지도 미워하지 않게 된다.
전쟁이나 모든 정념을 올바로 이해하게 하는 것은 이 
자유의 도취이다. 페스트는 강제된 것이지만,
전쟁은 도박처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신중한 
것만으로는 충분한 평화가 보장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정의에 대한 사랑으로써, 평화를 
참아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정의를 만들어 내는 것이
다리나 터널을 만드는 것보다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평화가 있다면 오직 그 때문이다.

     행동하는 자

  나의 취미에서 본다면 치안국장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그는 언제나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조건하에서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때는 불이다, 어느 때는
수해다, 어느 때는 사태다, 압사다 하고 사건이 연달아 
일어난다. 이어서 진흙 구덩이다, 먼지
투성이다, 병이다, 가난이다, 또 때로는 싸움이다, 
경우에는 따라서는 열광이다. 이 행복한 사람은
끊임없이 분명한 행동을 필요로 하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 일반적인 규칙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종이 부스러기 같은 서류도 필요없다. 그런 
것은 이른바 관리들에게 맡겨 둔다. 그는
지각과 행동 자체이다. 이 지각과 행동이라는 두 개의 
수문이 열릴 때 생명의 강은 인간의 마음을
가벼운 날개처럼 운반해 간다. 거기에 유희의 비밀이 
있다. 트럼프 놀이를 한다. 그것은 생명을
지각에서 행동에로 옮기는 것이다. 축구를 한다. 더욱 
좋은 일이다. 예견할 수 없는 새로운 소재 위에,
재빨리 어떤 행동을 실행하는 것--이것이 인간의 생활을 
크게 충족시켜 준다. 그리고 보면 도대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시간을 회한을 삼켜 버린다. 사람들은 흔히
도적이나 강도의 정신생활은 어떤 것일까? 하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는 그들에게는 정신생활 같은
것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무엇을 노리고 
있던가,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자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능력은 자기의 발 밑과 손톱을 살피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러므로 형벌의 관념이나 그밖의
어떠한 관념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다. 이 눈멀고 
귀먹은 기계는 무섭기 짝이 없다. 그러나
누구에게 있어서도 행위는 의식을 지워 버린다. 이 
에누리없는 폭력은 나무꾼의 도끼의 일격과 통하는
데가 있다. 정치가의 태도에는 그다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결국 그러한 면이 발견되는 경우가 가끔
있다. 도끼처럼 탄탄한고 둔감한 인간을 보더라도, 그 
인간이 그다지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별로 무섭지는 않을 것이다. 
힘은 동정심을 갖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동정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투쟁인가? 인간이 행동 속에 깊이 
빠지려는 것이다. 인간의 사상이란 발차하면
어두워지는 전차의 전등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깊은 
사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거기서 놀랄 만한
행동의 힘이 나온다. 그 힘은 마음의 등불을 지워 버리기 
때문에 좋도록 자기를 합리화한다. 이에
의하여 많은 비천한 정념--우울병, 염세관 혹은 음모, 
위선, 원한, 또는 공상적인 사랑이라든지,
닳고닳은 악덕이라든지, 온갖 반성에 의해 생기는 
보잘것없는 정념들이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행동의
흐름 속에서 정의도 또한 사라져 버린다.
  치안국장은 수해나 화재와 싸우는 것과 같은 수법으로 
폭동과 싸운다. 폭동도 또한 자기의 등불을
꺼버린다. 흉포하기 짝이 없는 암흑이다. 그 때문에 
곤봉으로 고문을 하는 형리가 있는가 하면, 고백을
청취하는 재판관도 있었던 것이다. 의자에 묶여서 숨이 
끊어지는 고통을 맛보고, 노의 움직임에 따라
거기서 죽어간 조향수가 있는가 하면, 그들은 몽둥이로 
때리는 자들도 있었던 것이다. 몽둥이질을 하는
자들은 몽둥이 이외의 것은 생각지 않았다. 어떤 야만 
상태라도, 일단 이루어지면 그것은 계속될
것이다. 치안국장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나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무위는 모든
약덕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든 미덕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임금님의 권태

  생활의 다소 고생이 되더라도 너무 평탄한 길은 걷지 
않는 것이 좋다. 임금님들이 만사가 생각대로
되는 것이라면 참 가엾은 존재라고 하겠다. 그리고 신이 
어디엔가 있다면 신경쇠약에 걸려 있을
것이다. 옛날에는 신들도 나그네의 차림을 하고, 
사람들의 문을 노크하러 왔다고 한다. 아마도
시장가나 갈증이나 애정을 느끼는 일에 다소의 행복을 
맛보기로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들이 자기의
전능의 힘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그러한 것은 
아무짝에도 못 쓴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시간과
공간까지도 폐지하고, 자기의 욕심을 눌러 없애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요컨대
그는 권태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후부터 그는 목을 
매든가 물 속에 몸을 던지거나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수면의 숲 속에 있는 
미인처럼 잠들고 있었을 것이다. 행복이란
분명히 자기 자신에 대해 눈뜨게 하는 불안이나 정념, 
또한 어느 정도의 고통을 언제나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의 세계보다 상상력에 의한 편이 더욱 행복한 
경우가 많다. 이것은 실제의 행복을 손에 넣으면
이 이상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주저앉아 버리기 
때문이다. 재물에는 두 가지가 있다. 주저앉게
하는 재물은 인간을 권태롭게 만든다. 마음을 즐겁게 하는 
재물을 다시 계획이나 일을 요구한다.
그것은 농부가 몹시 갖고 싶어하다가 겨우 소유한 밭과도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쉬고 있는 힘이 아니라 
행동하고 있는 힘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은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이미 만들어진 행복을 갖고 가보라. 그는
병자처럼 고개를 흔들 것이다. 음악을 듣는 것보다 
자기가 직접 음악을 하는 것을 더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어려운 것이란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중에 어떤 애로가 있을 적마다
그것은 피를 끊게 하고 정열을 불타게 한다.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라면 누가 올림픽의
월계관을 탐낼 것인가? 그런 것은 아무도 탐내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질 우려가 없다면, 누가 트럼프
놀이를 하려고 하겠는가? 여기서 신하들과 트럼프 놀이를 
하는 늙은 임금이 있다고 하자. 임금은
놀이에 지면 화를 낸다. 신하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신하들이 트럼프 놀이를 하는
방법을 잘 깨치고 나서는 왕은 결코 지는 법이 없다. 
그러자 이번에는 왕이 트럼프를 내던지고 만다.
왕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을 탄다. 사냥하러 가는 
것이다. 그러자 그것은 어디까지나 임금의
사냥이다. 짐승들이 저절로 임금의 발 밑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사슴도 역시 신하이다.
  나는 많은 임금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작은 왕국의 
작은 임금들이다. 너무 귀여움을 받고, 아첨을
당하고, 금이야 옥이야 하고 자라난 가정의 
임금님들이다. 그들에게는 무엇이건 갖고 싶다고 생각할
틈이 없다. 조심스러운 눈이 그들의 생각을 벌써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작은 쥬피터
(그리스 신화의 올림푸스 신족의 왕. 제우스의 라틴어 
이름)들은, 무슨 일을 해서든지 화를 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방해물을 생각해 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욕망을 
만들어 냈다. 그리하여 정월달의 태양처럼
마음이 변했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고집을 부렸다. 
그리고 너무나 권태로워 죽어 버리지 않고
있다면, 여러분들에게 이런 펑탄한 왕국을 지배할 것을 
명령하지 않기를 바란다. 험준한 산길을 통해
인도해 주기를 바란다. 우물과 같은 눈과, 쇠 침대와 같은 
이마를 갖고, 행길에서 자기 귀의 그림자를
보았다고 해서 즉시 멈춰 서는 그런 안다루시(스페인 
남부지방의 이름)의 좋은 당나귀를 길동무로 삼아
주지 않기를 바란다.

     아리스토텔레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진하여 하는 
것이 기분이 좋아지는 기본이 된다. 그러나
사탕은 입 속에서 녹이기만 하면, 별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맛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와
같은 방법으로 행복을 맛보려고 하다가 실패하는 것이다. 
음악을 듣기만 하고, 자기가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별로 재미가 없다. 그러므로 어떤 현명한 사람은 
음악을 귀로 맛보는 것이 아니라 목으로
맛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름다운 그림에서 느끼는 
즐거움까지도 자기 자신이 끄적끄적 그려본다던가,
그림을 수집하지 않으면 과히 보람이 없는 휴식의 
즐거움에 지나지 않는다. 즐거움은 단지 받아들이는
데 있지 않고 탐구하고 정복하는데 있다. 사람들은 연극을 
보러 가지만 그들은 실지로 말하는 것
이상으로 권태로워 한다. 그렇다면 자기 스스로 제작해 볼 
일이다. 적어도 자기 스스로 출연해 볼
필요가 있다. 출연도 일종의 제작이다. 누구나 사교계의 
희극을 상기할 터이지만, 거기서는 배우가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나는 인형 연극에 대해서만 
생각하던 행복한 몇 주일을 상기한다. 그러나 미리
말해 두거니와, 나는 조그마한 나이프로 나무 뿌리에 
고리대금업자나 군인이나, 처녀나 노파를
아로새기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들은 거기에 옷을 
입혔다. 나는 구경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비평은 그들에게 맡겨 버렸다. 그런 것은 보잘것없는 
즐거움이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이라고 그들이
스스로 생각해 냈다는 점에서 역시 즐거운 것이다.
  우리는 행복해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사람들은 
언제나 행복이 자기를 피한다고 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서 얻은 행복에 대한 말이라면 사실이다. 얻은 
행복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가 손수 만드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가 손수 만드는 행복은 절대로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 그것은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인간은 언제나 배워야 하는 것이다.
알면 알수록 더욱 더 많이 배우게 된다. 여기서 라틴어 
학자들의 즐거움도 우러난다. 라틴어 학자들이
누리는 그러한 즐거움에는 끝이 없다. 학식이 진전함에 
따라서 즐거움이 증가한다. 음악가의 즐거움도
마찬가지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은 놀랄 만한 
말을 했다. 즉 참도니 음악가란 음악을 즐기는
사람이며, 참된 정치가란 정치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즐거움은 힘의 표시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이
말은 우리를 이론 밖으로 끌어내는 언어의 완벽성으로 
하여 높이 울려 온다. 몇 번이나 무시를
당했지만 끄덕하지 않는 이 놀라운 천재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 점을 잘 생각해야 할 것이다. 어떤
행동에 있어서나 참된 진보의 표시는 사람들이 거기서 
느낄 수 있는 쾌락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일만이 유일하고 충분한 즐거움이다. 나는 여기서 힘의 
결과인 동시에 힘의 원천이기도 한 자유로운
일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억지로 참을 
것이 아니라 행동할지어다.
  석공들이 열심히 자기의 조그마한 집을 만드는 것을 
누구나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돌
하나하나를 고르고 있는 것을 잘 보아야 한다. 이러한 
즐거움은 또한 어떤 직업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직공은 언제나 생각해 내고 배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직공이 자기가 만들 물건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고, 자기가 만든 물건을 소유하지도 않으면 
배우기 위해 별로 애쓰지도 않고, 언제나
같은 일을 되풀이하게 되면, 기계적인 행동이 권태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큰 혼란도 가져온다. 이와는
반대로 일의 연관성이라든가, 오늘의 농작물이 내일의 
수확을 약속하는 것이 농부들의 행복을
자아낸다. 나는 물론 자유롭게 자립하고 있는 농부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많은 수고가 따라야
하는 이러한 행복에 대해 사람들은 저마다 크게 
반대한다. 그나마 언제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는
행복을 누리고 싶다는 얕은 생각에서 그러는 것이다. 
디오게네스가 말한 바와 같이, 괴로움이 오히려
나은 것이다. 그러나 정신은 이 모순을 짊어지려고 하지 
않는다. 정신은 이 모순을 극복해야 한다.
거듭 말하거니와 우리는 고통의 반사인 쾌락을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다.

     과장된 말

  가끔 길가에서 햇볕을 쪼이거나 발길을 질질 끌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도깨비 같은 인간을 만나게
된다. 이처럼 늙어빠지고 당장 죽을 것만 같은 사람을 
보면, 처음에는 어떤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렇게 말하면서 도망친다. "저 도깨비 
같은 늙은이는 왜 진작 죽지 않은 걸까?"
그러나 본인은 역시 살고 싶은 것이다. 햇볕을 쪼이고 
있는 것이다. 죽고 싶지 않은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우리들의 사고에 있어서의 어려운 길이다. 반성은 
대체로 여기서 걸려 넘어지고 상처를 받아
초조해지며, 오류의 기로 접어든다. 이러한 일은 흔히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광경을 목격한 후에 조심스럽게 올바른 길을 
찾고 있을 때, 나는 한 사람의 친구를 만났다.
그는 눈에 노기를 띠고 말도 변변히 못하면서 덜덜 떨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큰소리로 말했다. "모든
일이 비참하기 짝이 없네. 건강한 친구들은 병이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네. 매우 두려워하고 있네.
그리하여 자기 공포 이외에는 아무것도 잃지 않으려고 
하네. 공포를 남김없이 씹어 보고 있는 것일세.
저 병신들을 보게. 그들은 죽는 편이 훨씬 나을 걸세. 
그런데 결코 죽음을 택하지 않네. 죽음을 저만치
밀어 버리고 있는 걸세. 그리고 이 공포가 병을 더욱 
더치게 하네. 자네는 살아가기가 이렇게 괴로운데
어찌하여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하고 말하네. 그러나 
죽음과 공포를 동시에 미워할 수는 없네. 우리는
이렇게 하여 죽어가는 것일세."
  그가 말한 것은 그에게는 어디까지나 분명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려고 들면,
그렇게 생각되는 것이다. 불행해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려운 일은 행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행복해지려고 노력하지 않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와 반대이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를 잡을 수 없다.
  나에게도 이 소란스러운 웅변을 경계해야 할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밝은 척하는 그릇된 빛으로 나를
기만한다. 자기가 구제할 길이 없는 불행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스스로 몇 번이나 한탄했는지 모른다.
왜? 아마도 현혹되었던가, 지쳐 있었던가, 혹은 하늘의 
구름에 그늘진 한 여자의 눈 때문이었으리라.
그것은 또 고작해야 어떤 하찮은 생각 때문이거나 어딘가 
기분이 나빴던 때문이거나, 얼굴 표정이나
말투에서 미루어 보아 허영심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이런 기괴한 어리석음이 있는
것이다. 1년만 지나고 보면 태연스럽게 웃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즉 눈물, 흐느낌, 위장, 심장, 배, 결렬한 동작, 근육의 
경직 등이 추리 가운데 들어오면, 정념은
우리를 기만한다고. 단순한 사람은 몇 번이나 거기에 
걸려든다. 그러나 나는 이 그릇된 빛은 오래지
않아서 곧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그것을 
곧 없애 버리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떠들어대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나는 내 목소리가 나에게 얼마나 강한 영향을
주는가를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자기 자신에 대해 
희극배우로서가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또한 병이나 죽음은 누구에게나 흔히 있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여기 거역하는 것은 인간답지
않은 그릇된 태도임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참된 인간적인 
태도는 어떤 방식으로나 반드시 인간인
자기와 자연의 추세에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분노를 키우고 분노에
키워지는 불평 불만 속에 뛰어드는 경솔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야말로 지옥
가운데서 빙빙 도는 격이다. 그러나 악마는 곧 나 
자신이며, 갈퀴를 들고 있는 것도 나 자신이다.

     너 자신을 알라!

  나는 어제 이런 광고를 읽었다. '위대한 비결, 인생에 
성공하고, 인심을 움직여서 이를 유리하게
이용하는 정확한 방법. 문제는 누구든지 갖고 있는 생명의 
액체에 있다. 다만 그 사용법을 아는 것은
유명한 X선생이다. 10프랑으로 교수함, 앞으로 사업에 
성공 못하는 사람은, 10프랑의 돈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운운...' 이것을 실은 
신문사는 무료로 광고를 내주었을 리가 만무한
즉, 자액의 상인인 성공의 선생에게는 손님이 꽤 있었던가 
보다.
  나는 이 선생은 분명히 본인이 자부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용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액체의
이야기는 덮어 두더라도, 그는 대체 어떤 수작을 하는 
것일까? 만일 그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확신을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대견하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손님들은 전에는 태산처럼 꿈쩍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비겁함은 커다란 장애이며, 그리고 유일한
장애인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아마도 무의식중에, 
손님들에게 주의, 반성, 질서, 방법 등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할 것이다. 이른바 액체의 방사와 같은 것도 
누구에게나 혹은 어떤 사물을 강하게
상상하는 것이리라. 선생은 점차로 손님들을 유도하여 
그들의 주의를 집중할 수 있게 될 때까지 끌고
갈 것이다. 다만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돈을 벌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이 방법에 의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일--즉 자기의 과거, 실패, 피로, 뱃속의 
형편 등을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곧 그때까지 시시로 증가하고 있던 
무거운 짐에서 해방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욕설을 퍼붓는 것으로 자기의 생활을 낭비하고 있는 
것일까. 둘째로 그들은 자기가 원하고 있는 것,
주위의 상황이나 사람들의 일을 진지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생각하게 되어 흔히 꿈속에서 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함께 뒤범벅이 되거나 혼합되어 버리는 일이 
없게 된다. 그후에 성공이 찾아오는 것은
뜻밖의 일이 아니다.
  그 선생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우연한 일을 나는 
문제시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와 반대되는 우연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 일반적으로 누구나 
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 때문에 자기를
그르치는 것이다. 인간은 시종일관하는 존재가 아니다. 
보통 동지보다 적을 애써 기르고 있는 것이다.
저 사나이는 나에게 악의를 품고 있다고 당신은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상대편은, 그런 것은 벌써
옛날에 잊어버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조금도 
그것을 잊지 않고 있다. 다만 당신의 얼굴
색으로 그에게 그의 의무를 생각나게 할 뿐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 외에는 거의 적이 없다. 그는
그릇된 판단이나, 기우나, 절망이나, 자기에 대한 
비과학적인 언사 등을 하여 자기의 가장 큰 적이
되어 있다. 어떤 사람에게 다만 "당신의 운명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10프랑
정도의 가치는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시대에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델포이(고대 그리스의 도시.
아폴론의 신전이 있었다)에 아폴로의 예고를 받아 모든 
일에 조언을 하고 돈을 받는 일종의 무녀가
있었다. 신은 우리들의 자액의 상인보다 정직하여 그 
비결을 신전의 정면 바람벽에 써 붙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일이 자기에게 유리한지 불리한지 알려고 자기 
운명에 대해 물으러 왔을 때에는, 신전에
들어가기 전에 만인에게 가치 있는 다음과 같은 심원한 
신탁을 읽을 수 있었다. 즉, '너 자신을 알라!'

     우정

  우정에는 놀라운 기쁨이 깃들어 있다. 기쁨이 전염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면, 이것은 곧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있는 것이 친구에게 조금이라도 
기쁨을 준다면, 그 기쁨을 복 이번에는 내가
기쁨을 느낀다. 이와 같이 각자가 남에게 주는 기쁨은 그 
본인에게로 되돌아온다. 동시에 기쁨의 보물
창고가 개방되어 두사람 다 이렇게 생각한다--나는 내 
마음속에 행복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을 별로
유용하게 사용하지 못했다.
  기쁨의 원천이 마음속에 있음을 인정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 무슨 일에 대해서나
불만스러워 억지로 웃기 위해 서로 접촉하는 사람들처럼 
서글픈 것은 없다. 그러나 만족을 느끼고 있는
사람도 혼자 있으면, 이윽고 자기를 만족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즉 그의 기쁨은
곧 잠들어 버린다. 그리하여 일종의 백치 상태, 무감각 
상태에 도달한다. 내부의 감정은 외부의 운동을
필요로 한다. 만일 어떤 폭군이 권력을 존중할 것을 
가르치려고 나를 투옥시킨다면, 나는 날마다
혼자서 웃는 것으로 건강법을 삼을 것이다. 나는 발을 
훈련하는 것처럼 나의 기쁨을 훈련시킬 것이다.
  여기에 한 묶음의 죽은 나뭇가지가 있다고 하자. 그것은 
외관상 흙덩이처럼 생기가 없다. 그대로
버려 두면 나중에는 흙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 
나뭇가지는, 태양에서 받아들인 열을 갖고 있는
것이다. 성냥개비라도 켜 대어 보라. 당장 불탈 것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단지 문을 흔들어서 죄수의 잠을 
깨우기만 하면 족한 것이다. 이와 같이 기쁨을
눈뜨게 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계기가 필요하다. 
갓난아기가 처음 웃을 때에, 그 웃음은 어떤 의사
표시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을 느껴서 웃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웃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먹는 일이 즐거운 것처럼, 웃는 일이 
즐거운 것이다. 그러나 우선 먹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웃음에 대해서만 진실인 것은 아니다.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일기 위해서도
말을 필요로 한다. 인간은 혼자 있는 한, 자기 자신일 수가 
없다. 어리석은 모럴리스트들은 사랑이란
자기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너무나 단순한 
견해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빠져나갈수록 더욱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자기가 
살고 있다는 것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된다.
그대의 나무를 구렁텅이 속에서 그대로 썩혀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승리

  인간은 행복을 찾기 시작하자마자, 이것을 발견할 수 
없는 운명에 빠져 버린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하다. 행복이란 쇼윈도 속의 물건처럼, 우리가 
선택하여 돈을 내고 집으로 갖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행복은, 당신이 그것을 손에 갖고 있지 
못하면 행복할 수가 없다. 만일 당신의 이것을
외부 세계에서 찾으면, 결코 아무것도 행복한 모습을 
취하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행복에 대해서는
추리할 수도 예견할 수도 없다. 그것은 지금 현재 갖고 
있어야 한다. 행복이 미래 속에 있는 것처럼
여겨질 때에는 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이미 행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곧 행복을 의미한다.
  시인들은 흔히 사물을 설명하는 방법이 서툴다. 나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음절이나
운율을 맞추는 일에만 너무 고심하기 때문에 진부한 
말밖에는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행복은 먼 미래에 있는 한 아름답게 빛나고 
있지만, 그것을 잡아 보면 조금도 좋은 것이
못 된다고. 마치 무지개를 잡거나 샘물을 바닥에 붓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조잡한
표현이다. 행복을 좇아가는 것은 말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행복을 자기 주위에서 찾는 사람들을
특히 서글프게 하는 것은, 그들이 조금도 행복을 원할 
엄두가 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트럼프 놀이를
하는 것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은 내가 트럼프 
놀이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권투나 검술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음악도 마찬가지로, 우선 처음에 
어느 정도의 곤란을 극복한 사람에게만 그
즐거움을 주게 마련이다. 독서도 마찬가지이다. 발자크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처음에는 지루하기 때문이다. 게으른 독자의 태도를 보면 
매우 재미있다. 소리 내며 페이지를 들쳐
본다. 몇 줄 읽다가 책을 던져 버린다. 독서의 행복은 
예견하기 어려운 것으로 경험을 쌓은
독서가들까지도 스스로 놀랄 정도이다. 학문은 멀리서 
바라보면 조금도 즐겁지 않다. 그러므로 그
안으로 걸어서 들어가야 한다. 처음에는 강제가 필요하며 
곤란이 필요하다. 규칙적인 노력과 승리에
계속되는 승리--이것이야말로 분명한 행복의 공식이다. 
그리고 트럼프 놀이나 음악이나 전쟁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여럿이 행동하는 경우에 행복은 
생기를 띤다.
  그러나 행동, 노력, 승리하고 하는 같은 마크를 언제나 
갖고 있는 고독한 행복도 있다. 예컨대
수전노나 수집가의 행복이 이와 흡사하다. 그리고 이 
양자는 서로 닮아 있다. 수전노가 옛 금화를
탐낼 때 특히 그렇지만, 탐욕이 악덕으로 간주되는 데 
반하여 칠보나 상아나 그림이나 진본 같은 것을
유리창 속에 진열하는 사람이 도리어 치하를 받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책을 더럽힐까 봐 읽지 않는
책의 수집가가 있는데, 금화를 다른 즐거움과 바꾸려고 
하지 않는 책의 수집가가 있는데, 금화를 다른
즐거움과 바꾸려고 하지 않는 수전노는 사람들이 
조소한다. 사실은 이런 행복도 다른 모든 행복과
마찬가지로 멀리서는 맛볼 수가 없는 것이다. 우표 수집을 
좋아하는 것은 우표 수집가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 영문을 알 수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권투를 좋아하는 것은 권투선수이고 사냥을
좋아하는 것은 사냥꾼이며, 정치를 좋아하는 것은 
정치가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행동에 있어서만
행복한 것이다. 즉 인간은 자기가 자기에게 부여하는 
규율에 의해서만 행복한 것이다. 요컨대 축구
경기의 경우나 학문 연구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 수련을 
받아들이는 데서 행복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임무는 멀리서 보면 재미가 없다. 뿐만 아니라 불쾌감을 
느끼게까지 한다. 행복이란 칭찬을 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오는 칭찬인 것이다.

  행복해지기를 원하고 이를 위해 애쓸 필요가 있다. 다만 
행복이 들어올 수 있는 문을 열어 놓기만
하고 방관자의 태도에 머물러 있으면, 그것은 서글픈 
일이다.
  도시 사람들에게 시골이 즐거운 것은 시골에 직접 가기 
때문이다. 행동은 욕구를 수반한다. 우리는
몸소 행하지 않는 것을 바랄 수 없으며, 고립무원의 
기대는 언제나 서글픈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가
남에게 꾸어준 것과 같은 행복을 기다리고 있으면 
사생활은 언제나 비참한 것이다.
  누구나 가정의 폭군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기주의자는 자기 행복으로써 주위 사람들을
지배하는 법률로 삼는 것이라고 생각할 터이지만, 그것은 
너무나 단순한 생각이다. 사물은 결코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이기주의자가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것은 
행복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살려고 하지 죽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며,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다. 만일 
각자가 재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고, 장작을
때기만 해도 그 사회는 훨씬 살기 좋아질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마침 비가 오고 있다. 지붕 위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무수한
작은 도랑들이 지절댄다. 공기는 씻겨서 걸러진 것 같다. 
구름은 아름답게 뜯어 놓은 솜을 닮았다.
이런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말한다. 비는 추수를 모두 망쳐
놓는다고. 또 다른 사람은 말한다. 만물이 흙탕으로 
더렵혀진다고. 그리고 제삼의 사람은 말한다.
풀밭 위에 앉는 것은 매우 유쾌한 일인데 하고. 물론이다. 
그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당신이 불평을
터뜨려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불평하는 그 비는 
집안에까지 나를 쫓아온다. 그러므로 비가 올
때야말로 명랑한 얼굴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일기가 나쁠 
때에는 즐거운 얼굴을 할 일이다.
  불행해지고 불만스러워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즐겁게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왕자처럼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된다. 행복을 상품처럼 
여기거나 무게를 달아보는 눈초리는, 모든 것에
권태의 빛을 던지게 된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모든 선물을 
경멸하는 일종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행복은 보기만 해도 아름다운 것이다. 
어린애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서 노는 데 열중한다. 자기를 위해 남들이 
놀아 주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물론
어린이들도 화가 나면 얼굴 표정이 변한다. 그것은 어떠한 
기쁨도 거절하는 얼굴이다. 다행히 이들은
곧 잊어버린다. 그러나 절대로 화낸 얼굴을 바꾸지 않는 
어른들을 누구나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거기는 그럴 듯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나도 잘 안다. 
행복하게 된다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 대한 투쟁이다. 이 투쟁에서 지는 
경우도 있다. 극복할 수 없는 사건이나
스토아주의의 초심자들에게는 당해 낼 수 없는 불행이 
있다. 그러나 있는 힘을 다해서 싸운 연후가
아니면 결코 패배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아마도 가장 분명한 의무일 것이다. 특히 나에게
분명한 것은 행복해지려고 원하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비관주의는 기분에 속하고, 낙관주의는 의지에 
속한다. 본질적으로 유쾌하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기분이란 언제나 언짢은 
법이다. 그리고 모든 행복은 의지와 자제로 되어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변명은 노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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