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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행복은

더 이상 장난할 시간이 없다 휴 프레이더

by Frais Study 2020. 7. 27.

  인간성 개발에 초점을 둔 책들로 유명한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주요 저서로 "나에게 쓰는 편지"
"나는 대지를 만지고, 대지는 나를 만지고" "사랑과 
용기에 대하여" 등이 있음.

  행복해지기는 쉽다. 어려운 것은 우리 자신에게서 
불행을 떠나 보내는 일이다. 우리는 모든 걸 다
쉽게 포기해도 불행만은 포기하지 못한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이성적이지 못하다. 하지만 행복을
등지는 것은 얼핏 보면 아주 당연한 일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불행에 관심을 기울이고, 더
구체적으로 불행을 지속시키는 생각의 근거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불행을
정당화하려는 이유들은 어떤 것일까?
  이 세상을 행복한 마음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은 
현실적인 것일까? 이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한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은 외면 할 수 없는 진리로 보인다. 
지금까지 당신은 아마도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려는 생각은 하지도 않고 지내 왔을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우리가 무언가를 바라면
그것은 득이 되지 않고, 우리가 추구하던 일도 결국 해가 
된다는 것이 세상 사는 이치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무언가를 끊임없이 기대하고 추구하는 일을 그만 
둘 수는 없으리라.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들을 생각해 보자. 헛된 꿈, 크고 작은 부, 명예, 권력, 
맛있는 음식, 강렬한 쾌락...
그 무엇이든 상관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그 
결과는 한결같이 비참한 것이다.
  그러면 욕심 없이 천천히 꾸준하게 노력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노력의 결실은, 비록
끈기 있게 애써서 얻었다 해도 결국 빼앗기고 만다는 것이 
세상의 대체적인 이치이다.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었다. 그들 인생의 
종착지에는 한결같이 상실과 외로움, 고통스런 죽음이
기다릴 뿐이라는 인식이 오랫동안 전해 내려 왔다. 어떻게 
해야만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종말에서
진정으로 벗어날 수 있겠는가? 혹시 당신의 인생도 그런 
종말을 맞으리라 예측하고 있진 않은가?
  또한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긴 세월은 어떤가? 그 긴 
시간들이 어김없이 우리를 이끌어 가는 마지막
장소는 과연 가치 있는 곳일까? 나이가 몇이든 여기 이 
세상에서 보는 것 가운데 믿을 만한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오늘 유치원의 놀이터에서 누군가가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해도 내일이면
다른 아이와 놀게 될 것이다. 부모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자식들을 돌보지 않고, 또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면 이번에는 자신의 부모를 버린다. 삶의 
모든 여정에서 온갖 형태로 강자는 약자를
먹이로 삼는다. 자연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지만 모든 
자연 현상은 자기 아닌 다른 것의 희생으로
이어져 간다. 물론 모든 현상이 절대적으로 이러한 
법칙대로 움직이는 건 아니다. 그러나 몇몇
예외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세계의 본질임엔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행복해질 수 없는 이유는
세계의 이런 본질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자연히 
떠오른다. 확실히 그런 것 같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만일 그밖의 다른 길이 있다고 우리가 그 다른 길을 
택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 일일까?
  하루에도 수천 번씩 행복을 희구하는 우리의 마음은 
이보다 훨씬 더 강한, 행복해질까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스러져 버린다. 아주 작은 활기조차 조금 
오래 지속되었다 싶으면 두려움 때문에 제지하게
된다. 우리가 완전한 자유를 만끽하고, 샤워하며 노래 
부르고, 남에게 들릴 만큼 큰 소리로 휘파람을
불게 되면 곧바로 해묵은 걱정이 스멀스멀 우리 속으로 
스며든다. 우리의 변덕스러운 기분은 금세
의심에 사로잡혀 버린다. 거부할 수 없는 어떤 이유로, 
도움을 받는다는 확신도 없이 우리는 다시
심각한 마음 상태로 되돌아가야 한다.
  행복은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건강, 자식들과 그밖의 
인생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이다. 나는 개개인의 마음 상태가 전체에게 끼치는 
영향을 알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행복의 역할에 대한 내 의견을 알리는 것이다. 
만일 행복에 관한 책을 찾아 공부하느라 애쓰는
독자가 있다면, 또 행복에 대해 생각할 형편이 아니어서 
그런 책 얘기를 너무 불공평하고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 개인이 느끼고 있는 행복에 
대한 생각이 그런 이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리라 생각한다. 나는 그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라고 권하고 싶다.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해답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공부 방법을 찾아 고심하는
것이 고심하지 않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낫다는 것이다.
  행복한 생각의 효과를 진정으로 아는 이는 누구인가? 
행복은 열린 마음에 다가서서 남몰래 용기를
불어넣고 희망을 준다는 말이 사실일까? 나는 그렇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내가 진정으로 사랑할 때
나와 같이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김없이 느낄 수 있고, 돈독해지는 가족
혹은 동료의식 속에서 진정한 힘은 부드러움이며, 그것이 
담고 있는 메시지란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일 속에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행복해지는 것이 좋을 뿐 아니라 정당하다고
믿는다. 나는 경험을 통해서 나 개인이 상냥해질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길은 바로 내가 행복해지는
것임을 안다.

     지속적인 행복

  영원한 행복은 없다는 믿음을 아주 폭넓고 깊게 
뿌리 박혀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생은 냉혹한
현실일 뿐이다. 어떤 성스러운 종교학자가 나타난 영원한 
행복을 설교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고
오히려 그를 사기꾼이나 허풍선이라고 생각한다. 왜 안 
그러겠는가? 단 하루라도 '완전한 평화'를
체험해 본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일생 동안 완벽한 
평화를 구가한다는 것은 엉터리이고 어리석은
일로 보인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지속적으로 행복해지는 일은 
바라지도 않는다고들 한다. 하지만 하고 싶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재미있는 의문이 
떠오른다. 이 글을 적당히 학구적인 분위기와
권위를 가지고 시작하기 위해 우선 행복의 정의를 내리는 
편이 낫겠다.
  미리엄 웹스터 Memiam--Webster 사전에는 행복의 
지속성에 대해 이렇게 쓰려 있다. '상대적인
영원함으로 특징지어지는 평안한 상태... 그리고 이 
상태를 지속시키려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바람이
특징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정의는 행복이 발생하는 
'장소'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마음이
만족스러운 상태...'
  사전이란 일상적으로 단어가 사용되는 용례를 알려줄 
뿐이지만, 내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행운, 번성과 그밖의 세속적인 성공의 여러 
형태를 행복의 근거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단어의
용법뿐만 아니라 어떻게 이 '마음의 만족'이 생기고 
사라지는지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도 제시한다.
우리가 지속시키려는 흡족한 마음의 상태는 '아름다운' 
느낌이지만 이것은 외부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는가 하는 데 달려 있다. "아, 얼마나 아름다운 
아침인가! 얼마나 멋진 하루인가!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어 있구나."
  그러나 우리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까? 우리는 더 좋은 차를 갖고
싶어한다. 하지만 더 좋은 차로 느껴지는 흡족함은 얼마나 
오래 갈까? 더 좋은 집도 갖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 집이 언제까지 그렇게 좋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행복의 지속을 바라는 자연스런 소망'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행복은 지속되지 않는다고 
믿는 사실이 신기하지 않은가?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살펴보면 지속되어 온 행복은 결국 불행의 주제가 
되고 만다.
  '버팔로 모는 목동이 롤러 스케이트를 탈 수는 없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행복해 질 수
있다'는 노래 가사가 있다. 중요한 것은 행복해지려는 
마음이다.

     행복의 근거

  행복을 자아내는 마음의 상태는 하루를 어수선하게 
만드는 쓸데없는 일들을 가볍고 수월하게
스쳐지나갈 줄 아는 마음이다. 그것은 산들바람처럼 모든 
것에 새롭게 생기를 불어넣고 아무것도
방해하지 않는다. 그것은 행복한 존재 그 자체이다. 이런 
마음은 타인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그 무엇을
갖고 있다. 이에 반대되는 마음 상태란 끊임없이 온갖 
일들에 얽히고 설켜 하루의 일을 엉망으로
만드는 마음이다. 불행한 마음은 무절제하고 흥분을 
잘하며 무엇보다도 겁에 질려 있다. 마음의
일관성도 갖지 못하고, 내면의 평온한 지향점도 찾지 
못하며 무슨 문제라도 일어나면 금방 나쁜 예감에
사로잡힌다.
  마음은 충분히 다스릴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의 생각은 너무 혼란스럽고 상처받기 쉬워서
하루 내내 두꺼운 막으로 가리워진 상태로 사람들을 
바라보며 지낸다. 그래서 우리는 사림들의 마음
속에 담겨 있는 진실한 생각을 알지 못한다.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 꼭 알아야 할 것은 마음의
본성이다. 예를 들어 갓난아기가 어린이들은 우리를 
기쁘게 한다. 이것은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아이들 마음 속의 순진무구함을 바라보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옳고 그름의 판단을 유보한 시선으로
아이들을 봄으로써 금방 그 순수함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가치 있는 일들이 그러하듯이 결코 성급한 마음으로는 
아이들을 기를 수 없다. 먼동이 트는 새벽의
침묵 속에 조용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우리는 땅이 눈뜨는
소리를 듣는다. 빛과 그림자가 변해 가는 신비로운 순간을 
목격한다. 이것은 조금만 성급한 마음이
되어도 놓쳐 버리기 쉬운 은밀한 기쁨이다. 서두르면 
불행해진다. 당신의 마음 속에 깃든 사랑의
마음은 아주 고요하다. 이것은 신체적으로 굼뜬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평화 속에서 움직임이
없는 상태이다.
  그렇다고 아이들을 행동의 본보기로 삼는 것은 
어리석다. 아이들은 세상에 나올 때 행복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제대로 갖추고 나온 게 아니지만 어쩌면 
그런 것들을 다 갖추었다고 할 수도 있다.
아이들은 우리 어른이 잃어버린 특별한 힘, 특히 정신의 
힘을 가지고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이들을 보면 지나칠 만큼 분주하고 온갖 것에 관심을 
쏟으면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마음속에는 단 한 가지 목표만이 있어야 한다.
  과거에 얽매일 이유가 없는 자유로운 아이들이 
통찰력은 어른들을 가르치는데, 특별한 방법을 쓰는
것은 아니고 행동으로 직접 보여 준다. 아이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뚜렷한 한 가지 목적을 표현한다.
다섯 살 짜리 아이는 손가락을 이용해서 벽에 그림자로 
형상을 만들지 못한다. 5개월 된 아기는 벽에
비친 그림자가 움직일 때마다 그것을 잡으려 애쓸 
것이다. 하지만 두 아이 모두 손가락으로 노는 법을
안다는 것은 확실하다. 아이들은 확실히 결단력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것에 대해서 단 한 가지
결정을 내리기 때문이다. 두 아이는 다른 모든 아이들이 
그렇듯 이 모든 것--테이블 세팅, 손님들,
음식--을 단일한 눈을 통해 파악했다. 거기에 있는 모든 
것이 흥미로웠던 그는 즐겁게 놀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성숙해 감에 따라 이와 반대되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독립적이고 한정된 기능을 맡기 시작한다. 그날 저녁까지 
리넨 냅킨은 단 한 가지 용도로밖에 쓰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밖에 다른 즐거움을 주진 못했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이 한계를 지운 잣대 안으로
어느새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을 가두어 버린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인 출세에 그다지 득이 되지 않는
사람들과는 친밀한 교제를 하려 하지 않는 분류의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인간관계란 이용하기
위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보는 
것은 상당히 불행한 일이다. 이에 반해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는 사람들의 신체적 결함마저도 상당한 
흥미와 기쁨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아이들은
아주 특별한 관심을 보이거나 또는 아주 무심하다. 이것은 
불행에 대한 판단에서 비롯된 태도가
아니다. 나는 최근에 네 살 짜리 아이들 몇 명을 보았다. 
그애들은 수영장에서 놀고 있었는데 보통은
자기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렸겠으나 내가 본 그날은 심한 
다운증후군을 앓는 어른들 주위만 맴돌았다.
이 네 살바기 아이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다운증후군을 
앓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노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나중에 그 애들이 재잘대는 
소리를 듣고서 나는 그들이 어른들의
고통스러운 질병을 본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편견이 없고 객관적이기
때문에 수영장에 온 그들과 다른 사람들과의 다른 점을 
아주 정확하게 보고 얘기한다. 하지만 그들의
얘기에는 대꾸를 하거나 비난할 만큼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이들은 아주 재미있게 놀았고,
아이들의 관심이란 오직 그 재미라는 것뿐이었다.

     생각을 만드는 현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 다만 생각이 그렇게 만들 
뿐이다.' 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 말인가?
이 말은 우리가 상황을 지배할 힘이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해도 생각만큼은 완벽하게 컨트롤 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행복의 열쇠는 마음을 좋은 
생각으로 채운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이 훌륭하며 일어나는 일마다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질없다. 이것은 엄격하고
공정한 판단에 위배되는 것이 분명하므로 내면의 혼란만 
일으킬 뿐이다.
  생각이 그것을 그렇게 만든다. 생각이 세상에 옷을 
입히는 것이다. 정작 세상은 의외로 우리의
행복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세상은 우리에게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다.
  조단은 태어난 지 다섯 달이 되자 유모차에 누워 있는 
것보다 앉아 있는 걸 더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그 애를 보행기 위에 앉혀 놓았다. 물론 아이의 
다리는 걷기에는 아직 약했다. 어느날 아내와
내가 부엌에 들어가 아이를 돌보지 못했을 때 친구가 
현관에서 집안으로 막 들어오다 목욕탕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가 곧바로 목욕탕으로 달려가서
살펴보았다. 그리고 조단이 욕조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서 
욕조의 바닥에서 천장까지 샅샅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살피는 걸 발견했다. 아마 조단은 바로 그 
순간 걷기 시작하기로 마음먹었을 것이다.
목욕탕의 욕조 속으로 그녀는 곧장 뛰어들어갔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녀는 물 아래 가라앉은 아이를
보자 기겁을 했다. 그녀는 아이를 끌어내고, 우리를 
소리쳐 부르고, 우리가 아이의 젖은 몸을 닦아줄
동안 큰 소리로 야단을 쳤다. 나는 아이가 조금도 당황한 
기색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우리는 조단이
울음을 터뜨릴 것이라 예상했으나 그는 끝내 울지 
않았다. 게다가 보행기에 다시 옮겨 놓자 그는 재빨리
욕조 쪽으로 나아갔다. 우리는 황급히 안전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그 아이의 생각 속엔 수영을 하지
못하면서 물 속에 눕는 것은 '나쁘다'라는 선입견이 
심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는 얼마 전까지
엄마의 자궁 속에 잠겨 있던 기억을 더듬으며 물 속에 눕는 
느낌이 '좋은' 것이라는 것을 알았음이
분명하다.

  아주 간단하게, 당신이 화를 내고 있는 동안은 행복해질 
틈이 없다. 그러나  그 당시의 심정은
분노야말로 아주 중요하다고 믿는 상태이다. 분노가 
우리의 가장 자연스런, 그리고 필요한 감정이기
때문에 셀 수 없이 많은 형태로 '화를 내는 일은 
중요하다'는 단언이 이루어지는 걸 들어 왔다. 이
익숙해진 생각에 의문을 품지 않는 한 결코 하루 종일 
평화롭게 보내는 일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화를 낼 합당한 이유는 언제나 마음 
속에 떠오르는 법이므로 평화로워진다는 것은
부질없는 희망처럼 보일 것이다.
  분노는 절대로 마음의 가장 밑바닥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위선적인 행위 없이도 충분히
사라질 수 있다. 당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바를 알게 되면 
마음속에 자리한 가짜 열정과 해묵은
비통함의 흔적까지 말끔히 없애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리 그 기초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좀처럼 그들의 진실된 감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좀처럼 그들의
진실된 감정이 깃든 자리에 다가갈 수가 없다. 이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묻는 것으로
가능해진다.
  첫번째 단계는 욕을 퍼붓는 것보다는 혼란스러운 
느낌일 때가 훨씬 좋다. 당신의 몸이 나와 타인을
공격하는 욕망을 드러내도록 방관하지 말라. 당신이 
침울해진 이유가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을 그만두게 되면 당신은 분명히 소중한 시간을 아낄 
수 있다. 그러나 물론 그것 하나만으로
겉으로 드러나는 감정을 없애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아주 작은 분노라도 일어나면 당신은 즉시
마음을 바꾸어 이 분노를 가만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은 계속해서 분노야말로
자신의 진실된 느낌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
  분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신은 그것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알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 마음속에 감춰져 있는 위대하고 올바른 
힘을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행복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생각에 쉽게 
동의한다. 그러면서도 전혀 그렇게 살지는 못한다.
그 근거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드러나는 태도 속에서 
분명히 찾을 수 있다. 우리는 그 증거를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행복이 마음의 문제라는 사실을 자꾸만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사소하고
진부한 사실 때문에 정말 가치 있고 소중한 것들을 잃어 
버리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그래서 행복을
저지하는 데 전력투구한다.
  모든 비평이 비평가를 공격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 아닌 다른 사람들이 보잘것
없게 보여야 자신이 더 훌륭하고 근사해 보인다고 
믿는다. 자신의 결정적인 이미지를 자신에게서 찾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늘 자신을 버리고, 우리가 대상으로 
삼는 사람에게 판단의 잣대를 들이댐으로써
그 비교를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형성하려 한다. 
마음속에서 이러한 생각을 없애 버리는 일은
가능하다. 만일 타인과 비교해 자신을 평가하는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만족할 수 없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의견을 끊임없는 판단을 통해서 
지속시킨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어느날
문득 우리가 타인을 공격하는 일을 잊어버리고 모든 이가 
선량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상당히 오랫동안 우리는 조금이라도 함부로 다루어지면 
상처받아 왔다는 생각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우리는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을 모두 들추어낼 
수 있고 그들이 한 일, 그들이 게을리 한 일을
샅샅이 기억해낼 수 있다. 우리가 강조하려고 결정한 
행위의 규칙이 다른 이에게보다 자신에게 더
쉬운 것이면 우리는 타인에게 겨누었던 공격의 총구를 
돌려 우리 자신에게 향하도록 규칙 자체를
고친다. 이것을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 이라 
부르고, 자기 외의 다른 이는 이보다 더 큰
잘못이 있다는 식으로 이 규칙을 자세히 살피게 된다. 
사고방식의 전도로 공격해야 할 대상이 누가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불행한 경우 공격적인 
생각은 한 가지의 분명한 요인이 된다.
비난의 표적이 우리 자신이든 타인이든 어떤 사물이든 
상황이든 그 결과는 정신적인 상처로 남는다.
  모든 생각은 돌고 돈다. 우리가 아무리 자책에서 
벗어나려 해도 우리의 죄를 믿는 한 여전히 우리
마음에는 죄책감이 석연찮게 남아 있다. 내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죄책감은 자기 부정을
무의식적으로 행동화함으로써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게 우리가 아는 잘못을 알려준다고 해도
부정적인 생각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우리의 판단력은 
환기시키면서 얻어지는 정의감과 약간의 신체적
마비증상을 제외하면 무력감일 뿐이다. 그 무력감은 이제 
문제들이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서 우리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다른 이의 마음에까지 
확산되었다는 느낌이다. 우리의 불행한 마음속으로
더 강한 자의식이 꾸역꾸역 밀려든다. 우리가 비난의 말을 
입밖에 냄으로써 그 부정적인 인식을
꺼낸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바깥으로 
표출한다고 해서 마음속의 부담감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그럴수록 그것은 더욱 강조되고 강화되어 
마음속에 더 오래 남을 것이고, 이제는 그것으로
슬픔이 하나 더 느는 것이며, 슬픔과 짝을 이뤄 
배신감까지 뒤따르게 된다. 우리는 비록 미약할지라도
다른 사람은 공격해 왔다. 그 사람 또한 우리처럼 열심히 
노력했을 텐데 말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타인에 대한 적개심 없이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고 솔직해질 수 있다. 베개를
던지거나 소리를 지르고, 공기가 맑은 곳에서 산책하거나 
운동을 함으로써 몸의 긴장을 풀고 머릿속을
말끔하게 하는 것이 내부의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일 수도 
있다. 행동으로 옮기는 이러한 방법은 아무런
해가 없다. 왜냐하면 이런 방법은 다른 사람들을 동요시켜 
문제를 복잡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을 이리저리 얽히게 만드는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워야 할 규칙이란 '비난하는 생각을 마음에 
남겨두지 말아라, 즉 그 싹을 뽑고 마음에 난
상처를 한시바삐 어루만져주라'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에게도 아무런 손해를 입히지 않는다. 우리가
자신이나 타인을 진심으로 용서하는 마음이 되면 
마음속에 암초처럼 남아 있던 불안들이 떠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지금 당장 실행하는 것이 좋다. 이유는 
간단하다. 당신이 타인의 약점에 너무 오래
집착하다 보면 당신의 마음은 불행한 생각으로 점점 더 
깊게 물들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응용하라고 제안한 것 중에 가장 어려운 
부분은 '나쁜 생각을 자아내는 싹을 자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 제안을 실행하는 절차가 복잡하기 
때문이 아니라 의외로 비난하는 버릇이 우리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탓이다. 나는 언젠가 아주 
열심히 일하는 친구를 살펴본 적이 있다.
그녀는 몇 분이나 몇 시간 동안이 아니라 몇 달에 걸쳐서 
지나칠 만큼 일을 해댔다. 일에 대한 지나친
열중은 그녀가 자신의 부모--수년 전에 돌아가시긴 
했으나--를 조금씩 용서하게 되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마흔이 되었을 즈음 그녀는 자신의 어린시절의 
비통한 추억이 너무나 마음 속 깊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과 거친 관계를, 그것도 오래 
지속시키지도 못하는 관계를 맺어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그후로 과거의 기억에 비추어 
사람들을 판단하는 습관을 버리고 아버지의
행동을 기준으로 삼아 남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평가하는 버릇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녀는 일일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늘 공책을 가지고 
다니면서 분노가 표출될 때의 모든 증세를
일일이 적는 것이었다--좌절감, 비난, 분노, 악의 
등등--그녀는 하루를 마감하면서 자신이
적어 내려간 목록을 읽고 하나하나 마음으로 들여다보면서 
자신을 화나게 했던 사람이나 상황에 대한
진정한 느낌이 어떤 것이었나 되새겨 보았다. 이렇게 
6-7개월을 실행하자 그녀 내면에 아주 유쾌한
변화가 오기 시작했음을 물론, 난생 처음으로 새롭고 오래 
지속될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친구처럼 꾸준히 노력하려 하지 
않는다. 변화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다시 예전의 방식으로 도망치듯 되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 친구는 자신 비통함의 찌꺼기를
계속 마음에 묻고 다니는 한, 조금이라도 타인을 향한 
악의가 남아 있는 한, 인생의 기쁨이란 무너지기
쉬운 불안한 것이라는 인식을 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인간관계를 시작하자마자 그녀는 해묵은 분노가 
아직도 조금은 남아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곧장 자신이 진실로 열망하는 것과 
문득문득 나타나는 감정을 비교해 보았다. 그녀는
자신은 물론 그 누구에게도 해가 될 생각을 가슴속에 
하나도 품지 않게 될 때까지 이 방법을
되풀이했다.
  우리는 '잔인할 만큼' 정직해야 하며 심지어 신중히 
거론되어야 할 것마저도 즉시 말해 버려 자신의
숨기고 싶은 비밀까지도 들추어내야 한다. 이에 반해 
단순한 진실 속에 살게 되면 이렇게 매일매일
던지는 질문들이 자신의 포용성과 사랑을 구하는 것에 
국한되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느낀 것을
곧이곧대로 말로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부정직하다는 
것을 마음으로 알게 된다.
  선택은 우리가 한다. 우리는 자신의 이해력과 선의를 
살펴볼 수 있고 사랑의 마음으로 반응할 수도
있으며, 익숙한 자의식이 들추어내는 '잔인한 진실'을 
대답할 수도 있다. 다수가 하는 선택에는 실수란
없다. 그리고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약간의 불안감과 
걱정, 수치심, 오해를 느끼면서도 예기치 않은
인간관계에서 탈없이 견디는 이유가 된다.
  우리의 진실된 시선은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우리의 전 생애를 쉽사리 평화로운
분위기로 변화시킬 수 있다. 비통에 젖어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변했다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일이다. 우리가 아침마다 하는 허드렛일, 직업, 벽에 못 
박는 일, 아이 돌보기, 저녁에 하는
자질구레한 일들은 연민과 기대의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마지못해 하는 힘겨운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자질구레한 일들에서 인생의 고결한 면이 
드러난다. 간단한 사실은, 부드러운 시선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세상을 더욱 부드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책 가운데 하나인 중국의 
"역경"에서는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고요함은
산처럼 크다.' 자신과 타인을 안정된 마음으로 좋은 점만 
보려고 노력하면 이제껏 느꼈던 부정적인
면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알게 된다. 그것은 태양이 
떠오르면 가뭇없이 자취를 감추는 한갖 그늘에
불과하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

  우리의 경험 속에 산재한 많은 단정하는 버릇, 동요, 
쓸데없는 정신적인 흔들림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지나친 관심에서 초래된다. 평온해지기 위해 필요한 
또 하나의 단어는 '현재'이다. 오직 현재만이
우리가 단단한 지반 위에 설 수 있도록 지켜 준다. 동시에 
현재를 중시함으로써 더욱 폭넓은 시야를
얻게 된다. 즉 우리의 근심, 걱정을 사라지게 하는 곳도 
바로 현재라는 공간이다. 어떤 사람이
일생 동안 어떤 것을 외면하며 보냈다면 그에겐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고 단정하기 쉽다. 이것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다. 그러나 당신이 설 자리가 아무리 
오래된 전통 깊은 장소라 하더라도 그곳에
머무는 한 괴로울 것이다.
  현재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가 멈춰서서 바라보는 것을 
망설이는 모습에서 잘 나타난다. 이러한
태도로 우리는 늘 기회가 오면 주춤거리고, 반대로 도달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은 서둘러 쫓아다닌다.
정신적으로 우리는 지나친 기대감과 소심한 낙담 
사이에서 갈피를 못잡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마치
해안에 부서지는 파도처럼 이룬 것 하나 없이 포말로 
흩어져 되돌아가는 모습이다. 우리가 실행에
옮기는 행위란 희생, 수난의 형태이거나 아니면 결국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고 오랫동안 만족감도
주지 못하는 일들이다. 한 번 돌진하고는 곧 흔적없이 
사라져 가는 식이다. 형태는 다양하게 변하지만
그 기본 양식은 한결같고 변화가 없다. 무엇이든 지금 
현재에 머무는 편이 정신적으로 낫다.
  우리는 평생 동안 똑같은 일에 대해 매번 같은 실수를 
하면서도 그것을 절대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매번 사정을 설명하고 변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가슴에 묻어 두고 그 일에 집착 할
필요는 없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결코 다시는 똑같지 
않을 것임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현재만이 실재한다는 사실은 얼마나 무해하고 순결한가?
  우리의 삶은 현재라는 알려진 지점에서 생성된다. 
이곳이 바로 시간의 방해를 벗어나서 실재로
들어가는 장소이다. 우리의 생각이 과거의 회한에 젖어 
있고 미래의 설계에 빠져 있다면 우리는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거의 죽은 거나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죄는 아니지만 불행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우리가 실제로 사는 기간은 끊임없는 현재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삶의 질은 우리가
현재에 얼마나 잘 응답하는가에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이를 알지 못한다.
  잠시 동안 내가 아주 직설적이 되는 것을 허용해 주기 
바란다. 나는 당신들에게 언제쯤 자신의
겉모습에 매달려 분투하는 일을 그만둘 거냐고 묻고 
싶다. 언제 당신의 아이들과 즐겁게 놀아줄건가?
일생 동안 한번쯤 같이 술을 마시자고 제안해 본 친구라도 
있는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다른
이에게서 이런 제안을 받아본 적도 별로 없을 것이다. 
당신의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산들바람의 숨결을
처음으로 느낀 때가 언제였나? 언제쯤이 되어야 당신은 
음식 맛을 제대로 음미하며 식사할 수
있겠는가? 도대체 당신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당신이 
미래에 대해서 발견할 수 있는 전부란, 미래는
여전히 미래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왜 당신은 아직도 맛난 
음식을 생각하듯 그렇게 자꾸만 마음속에
미래를 되새기는가? 이러한 당신의 생활은 끊기 쉬운 
습관은 아니다. 하지만 당신은 정말 가치 있는
모든 것을 잃어 버릴 생활태도를 끝내 버리지 못해 죽음의 
순간이 다가와서야 왜 자신이 사랑하는 데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는지 안타까워지는 것이다.
  우리에겐 더 이상 장난할 시간이 없다. 이제 죄책감과 
의무감을 끊어 버리자. 노래를 부르자.
살아가야 할 삶과 즐겁게 지낼 사람들이 있다. 마음의 
눈으로 보면 당신은 이 모든 자질구레함과
혼돈스러움을 벗어난 세상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늘 행복하게 사는 것은 정말 가능한 일이다.
어디 가능하기만 하겠는가? 그런 생각으로 인생을 시작해 
보자.
  우리는 여기서 당신이 인생에 가까이 가는 태도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당신은 여지껏 인생에 제대로
다가서지 못했다. 행복한 삶이 어디에 있는지 아직도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행복을
찾는가? 당신은 아직 제대로 묻지조차 못한 행복에 대해 
수없이 추측해 본다. 당신은 지금 이러한 추측
속에서 살고 있다. 당신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거의 모든 
것은 이 가정들에서 유래한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이 책이 다른 책과 다르다면, 당신은 한가지 
사실을 꼭 이해해야 한다. 즉 과거에 당신이
살아왔던 일상적인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가려면 상당히 
많은 노력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당신이 노력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완전히 자신을 
바쳐 노력하기로 맹세했다면, 이 모든 것들은
차츰 놀랄 만큼 수월해질 것이다. 희생, 단조롭고 힘든 
일, 퉁명스러움, 고통, 긴장은 당신이 애써야만
하는 노력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가입해야 할 단체도, 
지지해야 할 강령도, 따라야 할 사람이나
책도, 돈을 줄 이유도 없다.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 
순간에 내려야 한다. 결단은 이렇게 간단하다.
  '나는 시작하겠다.'
  그러면 당신은 무얼 시작해야 하는가? 이제 당신은 
친절해지도록 애써야만 한다. 친절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친절해지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 행복해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지만
투쟁할 필요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러면 그들은 현재에
마음을 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된다. 
그리고 한동안은 마치 딴 사람이 된 듯이
행동한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변화된 모습을 쉽게 잃어 
버리고 왜 그 자각이 희미해졌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게 된다. 당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내가 당신의 삶에 대해 얘기하는 바를
그냥 덧붙이는 말처럼 듣지 말라. 이것도 바로 당신의 
삶이다.
  행복, 친절, 평화라는 당신의 목표는 절대로 부차적인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당신은 자신의 삶을
평화롭게 만들려는 희망을 갖지 못한다. 또한 서두르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화를 내는 데 시간을
버린다. 조급함이나 성마름은 당신이 행복해질 기회를 
얻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물론 당신은
실수를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실수를 할까 겁내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당신의 삶의 목적이 이제
마음 깊은 곳에 확고히 뿌리내리게 된다면, 혹시 잘못한 
걸 알게 되더라도 틀림없이 문제 삼아야 할
한 가지 사실만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잘못된 것은 
무엇인가?
  말이란 아주 얄팍하다. 말이 실속 있게 되려면 경험이 
필요하다. 지속적으로 노력하면 그런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어렴풋한 이해의 반짝임을 
체험하지만 당신이 잊었던 새로운 행복감은 이제
다가올 것이다. 변화의 여행을 처음 시작할 때는 이러한 
느낌이 흡사 마술에 걸린 것처럼 명멸할
것이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당신은 모든 사건과 상황이 
각각 독립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서 마침내 분명한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행복해지는 것 외에 우리에게
올바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들은 나에게 잘 보이려고 
얌전하게 행동할 필요가 없다. 나는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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