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경 생활을 위주로 했던 우리 조상들은 농사가 시작되고 끝나는 시기마다 각 각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추며 노래를 부르고 놀았다는 문헌 기록이 전한다. 부여의 영고(迎鼓), 고
구려의 동맹(東盟), 예의 무천(舞天), 백제의 오월제(五月祭) 등과 같은 제천 의식이 그것인
데, 이 과정에서 행해진 원시 종합 예술로서의 제의(祭儀)놀이 속에서 고대 가요가 발생했으
리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다. 이렇게 하여 발생한 가요는 집단적 민속요와 개인적
서정요로 분화되어 발달하여 왔다.
그러나 이 같은 고대 가요는 오늘날 거의 전해 내려오지 않고, 다만 <삼국사기(三國史記)>
나 <삼국유사(三國遺事)> 및 중국의 문헌에 단편적으로 한역되어 전해 오고 있을 뿐이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고조선 시대의 서정적 비가(悲歌)라 할 수 있는 <공후인( 引, 일
명 公無渡河歌)>과 주술적·제의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 <구지가(龜旨歌)> 및 개인
적 서정을 읊은 최초의 노래라고 할 <황조가(黃鳥歌)>가 있다.
따라서 이들 노래는 거시 딸린 배경 설화와 함RP 이해하여야 고대 가요의 참 모습과 고대
인의 삶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들 노래들을 통해 선조들의 생활과 사고를 이해
하고, 그 속에 형상화된 상징들을 고찰함으로써 시가 문학 발생의 배경을 음미해 볼 수 있
을 것이다.
고려속요의 일반적 이해
고려시대에 불려졌던 노래는 크게 1) 고려 초 균여 대사(均如大師)의 사뇌가와 <도이장가
>, <정과정>등 향가계 노래, 2) <한림별곡>을 비롯한 경기체가, 3) <청산별곡>, <동동>
등의 속요, 4) 고려 말에 발생한 시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순연한 고려 시대의 노래라 할 수 있는 것은 경기체가와 속요로서, 이들은 바로
전 시대의 시가 양식인 신라 향가의 전형적 서정 형식을 이어받아 우리 고전 시가의 중요한
시가 형식인 조선시대의 시조 및 가사를 창출하게 한 교량적 역할을 하였다.
고려 속요는 한때 고속가(古俗歌)나 장가(長歌)로 불리기도 한 것으로, 그 형성 시기는 명
확하지는 않으나 대체로 고려 예종 11년(1116)의 송나라 대성악 수입 시기 무렵일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속요의 작자는 대부분 알려져 있지 않다. 이것은 고려 속요가 원래 재래의 민요를 새
로운 궁중 무악 혹은 연악으로 재편하여 수용하면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원래 민간
에서 유포·전승되던 민요가 궁중의 속악 가사로 수용되면서 개편되었다가 다가 한글 창제
이후에 문헌에 기록되어 전승되고 있는 것이므로 본래의 작자는 사라졌다고 하겠다. 이렇게
보면 고려 속요의 작자층은 고려 시대의 일반 민중이며, 이후 그것을 향유한 왕실 및 권문
세족들은 수용자층이 되어 이원적으로 구분된다. 때문에 그 내용도 <청산별곡>과 같은 특
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일반 민중의 강렬한 사랑과 이별의 정한이 주류를 이룬다. 훗날 조선
조 학자들이 이른바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 하요 지탄한 바로 그것이다.
속요의 형식은 대부분 분절식(分節式)이며, 각 분절의 말미에는 후렴구가 이어진다. 전후
양절로 구분되고 여러 연이 중첩되기도 하는 것이 보통이다. 주로 2·3·4음절의 음수율을
보이는데, 그 중 3은절이 우세하며 3음보가 다수이다.
이러한 고려 속요는 음악을 다루는 교방(敎坊)등에 전하다가 조선 시대에 『악학궤범(樂學
軌範』과 『악장가사(樂章歌詞)』등에 정착되어 전한다.
악장의 일반적 이해
악장이라는 장르는 제왕의 위업을 찬양하는 노래를 일컫는데, 송도가(頌禱歌) 또는 송축가
(頌祝歌)라 불리기도 한다. 그 연원을 살피자면 멀리 소급해 올라갈수 있으나, 조선왕조가
창건되자마자 건국과 함께 예악을 정비하여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생각에서 악장을 제정
하는 데 힘썼다.
새로운 왕조 창건을 칭송하는 노래를 짓는 사업은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용비어천가>
와 <월인천강지곡>도 악장 제정 사업의 일환을 이룩된 훌륭한 성과라고 할 만하다. 경기체
가 중에도 왕조 창건을 칭송하는 노래가 여러 편 있어서, 경기체가는 독자적인 형식을 갖추
고 있는 갈래이면서 얼마 동안 악장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악장은 끝내 문학적인 안정을 얻지 못했고, 독자적인 형식을 창조하기 어려웠다. 장
이 나뉘어져 있고 여음이 붙은 것은 고려 속요의 전통을 이었다고 볼 수 있으나, 율격이나
표현 방법은 그 전례를 따를 수 없어서 aah호한 상태에 머물렀다.
작품으로는 정도전(鄭道傳)의 <납씨가(納氏歌)>, <궁수분(窮獸奔)>, <정동방곡(靖東方曲)>,
<문덕곡(文德曲)>, <몽금척(夢金尺)>, <신도가(新都歌)> 등과 권근(權近)의 <상대별곡(霜
臺別曲)>, 변계량(卞季良)의 <화산별곡(華山別曲)>, 윤회(尹淮)의 <봉황음(鳳凰吟)>, 상진
(尙震)의 <감군은(感君恩)>등이 있다.
가사의 일반적 이해
'가사'를 지칭하는 용어로는 歌辭와 歌詞 두 가지가 있다. 이 둘을 개념상 구별 하자는 견
해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구별하지 않고 歌辭라는 용어를 보편적으로 사용한다. 형식은 4
음보 연속체로 된 율문이다. 한 음보를 이루는 음절수는 3·4음절이 흔하고, 행 수에는 제한
이 없다. 마지막 행이 시조의 종장처럼 되어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는데, 전자를 정
격이라 하고, 후자를 변격이라 부르기도 한다.
가사의 장르적 특징에 관해서는 많은 견해가 잇는데 중요한 것으로는 다음 세가지를 들 수
있다. ① 가사는 시가와 문필의 중간적 형태이다. ②가사는 율문으로 된 수필이다. ③ 가사
는 율문으로 된 교술 문학이다. 이러한 견해들은 서로 공통점이 있는데, 가사는 율문이되 서
정시와는 달리 사물이나 생활에 관한 잡다한 나열이나 설술로 되어 있음을 지적한 점이다.
①에서는 가사가 시가 문학에서 산문 문학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장르라 했는데, ③에 위
하면 교술 율문이 민요, 경기체가 등의 형태로 오랜 역사를 가지다가 시대적 요청에 따라서
가사라는 특정 장르를 이루었다고 한다.
가사의 첫 작품으로는 고려말 나옹 화상의 <서왕가(西往歌)>나 조선 초 정극인의 <상춘곡
(賞春曲)>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서왕가>는 국문이 없을 떄 이루어 졌으며, 후대 문헌에
기재된 점으로 보아 나옹의 작품인지 의심되고, <상춘곡>도 후세의 문헌에 정착되었기 때
문에 정극인의 작품인지 의심할 수 있음직한 일이다. 이렇게 같은 조건이라면 연대가 앞선
쪽을 택하는 편이 옳으며, 또 첫 작품으로 보기에는 <상춘곡>이 너무나 정제된 형식을 갖
추고 있다고 보아 가사는 이미 고려 말엽에 이루어 졌음을 인정할 수 있다.
가사의 기원에 관해서는 다음의 여러 견해가 있다. ①고려 속요 또는 경기체가에 기원을
두고 있다. ②<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등에서 보이는 시형에 따라서 이루어져 있다.
③ 교술 민요가 기록 문학으로 전환되면서 이루어진 장르이다. 이와 같은 견해차를 보이고
있는데 여기에서 가사와 경기체가의 관계는 주목 할 만하다. 둘 다 사물이나 생활을 나열
서술하는 장르라 할 수 있는데, 경기체가의 쇠퇴에 병행하여 가사가 발전죄었다. 경기체가에
서 취급되는 사물이나 생활은 단편적이나, 가사는 이들을 지속적으로 깊이 있게 다룬다. 가
사는 조선조에 들어와 사대부에 의하여 육성되었다고 생각되며, 경기체가가 수행하던 역할
을 물려받아 발전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드리고 초기 가사의 창작에 나옹 화상과 같은 승려
가 관여했다는 사실도 결코 가볍게 보아 넘길 수는 없다고 본다.
가사는 역사적으로 볼 때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①조선 초기의 양반 가사가 중심
이 되던 시기, ②조선 후기의 평민가사[서민가사]가 지배적이던 시기, ③개화기 가사가 나타
나고 전대 가사의 잔존이 이와 병행되는 시기가 그것이다.
제1기의 대표적인 작가는 정극인, 정철, 박인로 등이다. 이들은 벼슬에서 물러나 자연에 묻
혀 사는 생활을 가사로 나타냈고, 가사를 시조와 함께 사대부 문학의 장르로서 세련시켰다.
정철은 모든 것을 잊고 자연과 융합하고자 하면서도 세속적 진출의 욕구를 은유와 상징으로
노래했다. 박인로의 가사는 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을 지녀 제2기에 접근했다. 제1기 가
사에는 정격이 지배적인데, 제2기 가사는 대체로 변격이다.
제2기 가사는 현실주의적 사고가 대두하고 평민늬 문학적 역할이 커진 시대 사조와 결부되
어 전 시대와는 다른 성격을 지녔다. 양반 가사도 생활의 구체적인 내용을 다루는 방향으로
나아가서 평민 가사와의 거리가 단축되었는데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가 그 좋은 예다.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연행가(燕行歌)> 등의 기행 가사, <북천가(北遷歌)> 등의 유
배 가사도 이런 경향에서 생겨났다. 평민 가사로서 주목할 만한 것은 <우부가(愚夫歌)>, <
용부가(庸婦歌)> 등의 풍자적인 작품이다.
제3기는 최제우의 <용담유사(龍潭遺詞)>에서 시작된다. <용담우사>는 개화기의 문제와 고
민을 심각하게 다루었으므로 전대 가사와 구별 될 수 있는 문학사적 성격을 지닌다. 독립신
문, 대한매일시보 등의 신문에 가사를 게재하여 개화기 가사는 성격이 더 분명해지는 반면,
가사의 형식은 짧아지고 분연(分聯)되는 등의 변모를 보였다.
규방 가사[일명 내방 가사]는 제2기에 시작되었는데 개화기를 거쳐 일제하에서도 활발하게
창작되었다. 규방가사는 양반 부녀의 장으로서, 속박된 여성 생활의 고민과 정서를 호소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어, 신분상 양반의 문학이면서도 내용상 평민 가사라 할 수 있다.
향가란 본래 중국의 노래에 대한 '우리의 노래'를 뜻하는 명칭으로, 보다 좁은 의미로는 신
라 시대부터 고려 초기까지 향찰식 문자로 지어진 노래 전반을 총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향가는 달시 '사뇌가(詞腦歌)', '시내가(詩內歌)', '사내악(思內樂)' 등으로도 지칭된다.
향가는 4·8·10구체가 있는데 4구체는 이름 없는 사람들이 지어 부른 민요풍의 노래이고,
8·10구체는 불교적 귀족 문화를 배경으로 고도의 서정을 노래한 서정 가요이다. 특히 10구
체 향가는 통일 신라 시대의 문화적 관록이 고도로 양식화된 것으로서 향가의 완성형이라
일컬어지며, 이것이 '사뇌가'라는 하나의 장르 개념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현존하는 향가는 『삼국유사』에 실린 14수와 『균여전』에 실린 <보현십원가(普賢十願
歌)> 11수를 합하여 모두 25수이며, 12세기 초 고려 예종이 지었다는 <도이장가>와 정서가
지은 <정과정>을 각각 그 문자와 형식의 유사성을 근거로 하여 향가의 잔영으로 파악하고
있다.
향가의 작가는 대부분 슬려나 화랑 등으로 보며 그 내용 역시 불교적 색채가 짙은 것이 많
다. 진성 여왕대에 각간(角干) 위홍과 대구 화상이 『삼대목』이라는 향가집을 편찬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 현전하는 향가집은 없다. 『삼국유사』 소재 향가는 대부분 그 배경 설화와
함께 전승되고 있어 노래 자체의 올바른 해석을 위해 설화와 관련성 여부가 논란거리로 대
두되기도 한다.
통일 신라 시대에 꽃핀 불교적 귀족 문화를 배경으로 민족 문학으로서의 개성을 지니고,
사상이나 내용면에서 고대 시가와는 다른 일정한 수준을 보여 주었다는 데에 향가의 문학사
적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경기체가의 일반적 이해
경기체가는 고려 고종 때 발생하여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까지 독립된 한기가 형태로 존재
하다가 임란이후 자취를 감춘 시가이다. '경기체가'라는 명칭 외에 '별곡(別曲)' 혹은 '별곡
체(別曲體)'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들 노래가 말미에 반드시 '위 ∼景 의 엇더
니잇고[景幾何如]'라는 문구를 붙이기 때문에 거기서 경기(景幾)라는 말을 따서 경기체가
라 부르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현전 경기체가 26편 가운데 정형성을 띤 노래는 <한림별곡(翰林別曲)>을 비롯한 7편 뿐이
고 나머지는 변격 내지 파격이다. 경기체가의 형식과 율격을 논의할 때는 대개 <한림별곡>
을 대상 작품으로 하여 논의하게 되는데,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몇 개의 장(章)이 중
첩되어 한 작품을 이루는 연장(聯章) 형식을 취하고 있다(최소한 3장이상은 되어야 한다.).
둘째, 한 장은 6행으로 되어 있되 제4행과 제5행에서 두 개의 구조적 단위[前大節, 後小節]
로 양분되는 분절 형식이다. 셋째, 제 4행과 제6행에는 경기체가의 고정된 사투어인 '위 ∼
景 의 엇더 니잇고'가 오는 것이 원칙이다. 넷째, 제5해으이 4음보 가운데 뒤 2음보는 앞
2음보의 가사를 반복한다. 다섯째, 제1행에서 제3행까지는 매행이 3음보이며, 제5행은 4음보
인 것이 원칙이다. 여섯째, 음수율은 제1, 2행이 3·3·4, 제3행이 4·4·4, 제5행이 4·4·
4·4의 음절로 고정되어 있다.
경기체가는 지금까지 서정 장르로 다루어 왔으나, 그 내용이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작품
외적 세계상)을 작품 내에다 옮겨 열거하여 전달하는 것뿐이므로 작품 외적 세계상이 작품
에 개입하여 이루어지는 자아의 세계화인 교술 장르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대두되었다.
한편 이러한 견해를 수용하면서 중간, 혼합적 갈래로 보는 경우도 있다.
고려 고종 3년 당시 신진 관인이었던 사대부들에 의해 <한림별곡>이 처음 불리어진 뒤
110년이 지나 안축(安軸)에 의해 <관동별곡>과 <죽계별곡>이 창작됨으로 해서 한 기가 장
으로 성립하게 되었으나 그 형식은 전형인 <한림별곡>의 형식에서 다소 벗어났다. 안축의
작품은 후소절(後小節)의 첫 행(전체로서 제5행)이 5음보격에서 2음보격으로 줄어들고 반복
을 생략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조선조에 들어오저 초기에는 관학파 혹은 훈구파 사대부들에 의해 경기체가가 창작되면서
그 작품의 세계는 사대부적 이상이 투사된 자연과의 조화를 노래하는 경향에서 사대부로서
의 관인적 이상을 강조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거나, 이념 지향적인 교술성이 강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그 형식도 유영(柳潁)의 <구월산별곡(九月山別曲)>과 변계량(卞季良)늬 <화산별곡
(華山別曲)>, 예조(禮曹)의 <가성덕(歌聖德)> 이외에 <오륜가(五倫歌)>, <연형제곡(宴兄弟
曲)>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은 정격에서 변격으로 기울어 졌다. 이는 이들 노래가 궁중의
연향에 악장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작가 나름의 형식적 변용을 시도한 결과로 추측된다.
경기체가의 소멸기인 조선조 중종, 명종, 선조대에 이르면 새 왕조의 예악이 일단 정비되
고, (재도지문(載道之文)의 문학관을 지닌 사림파가 등장하면서 부화한 사장 취미의 불순한
문학 작품이 배척되자, 그 작품의 세계는 관인적 이상을 강조하거나 이념 지향적인 교술성
이 강조되던 경향을 탈피하고 다시 개인 신분의 사대부적 이상을 노래하는 경향으로 기울어
졌고, 그 형식도 행의 수와 율격이 파격의 길로 치닫게 되었다.
김구(金絿)의 <화전별곡(花田別曲)> 베 5, 6장에서 이런 형식적인 파격의 경향을 보인 경
기체가는 주세붕(周世鵬)의 <도동곡(道東曲)>, <육현곡(六賢曲)>, <엄연곡(儼然曲)>, <태평
곡(太平曲)> 등은 연장체 형식을 취하나 각 장은 반복, 전환의 구조와 분절 형식을 허물고
단형화하는 경향으로 나아갔고, 권호문(權好文)의 <독락팔곡(獨樂八曲)>애 이르면 연장체
형식이면서 각 장은 장형화 되었다가, 이후 소멸하였다. 이와 같이 경기체가가 소멸된 것은
결국 재도지문의 문학관을 지닌 사림파의 등장이 직접적 원인이었고, 가사 시조의 융성이
간접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조의 일반적 이해
시조는 3장 6구, 4음보격으로 된 조선시대 시가의 대표적 형태로, 그 형식상의 본래적 기원
은 10구체 향가인 '사뇌가'나 <정읍사>등에서 찾을 수 있다. 떠 우리는 시조의 형태를 고려
속요인 <만전춘<의 한두 연이다. <동동>의 각 연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시조는 기
존의 시가 형식을 기저로 하여 고려 말에 새로운 유교적 이념을 가진 신흥 사대부 계충의
미의식을 반영하여 생성된 시가 형식이다.
이렇게 형성된 시조는 조선 왕조가 안정되어 가면서 그 사회의 정신적 기반을 표현해 줄
수 있는 시가 형식으로 정착하여, 유교적 이념을 노래하거나 그것을 기반으로 한 저연 풍경
이나 애정등을 노래하였다. 16세기에 들어서는 사람파(士林派)들을 중심으로, 자신의 유학적
이념을 드러내거나 강호 자연에 묻혀 사는 즐거움을 노래하기 위해 단형 시조의 형태에 만
족하지 않고 여러 수의 시조를 동일한 제목 아래 잇달아 노래해 나가는 연시조의 형태도 생
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사회의 안정이 흔들리면서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서민 정신이 대두하였
는데, 이에 따라 시조 형식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사설 시조는 주로 이름없는 평민 가
객들에 의해 창작된 것이 대부분으로, 형식적 파격과 함께 내용도 기존의 단형 시조에서는
볼 수 없었던 민중의 자유롭고 발랄한 감정이나,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실을 소재로
하여 참신하고 기발하게 표현한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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