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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1/궁중비사

조 선 편 (朝 鮮 篇) 03

by FraisGout 2020. 6. 30.

 

    思 悼 世 子 

    그늘에서 자란 龍



   제 이십대 임금 경종(景宗)은 임금 노릇도 겨우 사년밖에 못하고 삼십칠세의 장년으로 

슬하에 왕자도 못둔 채 세상을 떠났다.  경종이 승하하기 전에 다음 임금을 이을 세자책립

(世子冊立) 문제로 궁중과 조정에선 물의가 일어났다.

  이때 숙종(肅宗)의 둘째 왕자 연잉군(延 君)이 왕세제(王世弟)로 책립되었다.  연잉군은 경

종의 이복동생으로 생모(生母)가 천한 무수리였으므로 소론파가 끝까지 반대하여 임인사화

(壬寅士禍=辛壬士禍)를 일으킨 참혹한 당파싸움을 벌였던 것이다.

  연잉군의 생모는 그많은 궁녀도 아니고 궁녀의 심부름을 하던 최소녀(崔少女)였다.  숙종

과 자리를 같이 한 후 십삭 만에 왕자가 태어났다.  최소녀는 농부의 딸로 얼굴은 못생겼으

나 몸이 튼튼했으므로 태어난 왕자도 튼튼했다.  숙종은 왕자를 낳은 최소녀를 정이품(正二

品)의 소의(昭儀)로 봉했다.

  영조는 생모가 천한 여자였으므로 존재조차 없이 소년시절을 궁중에서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그늘 속에서 자랐다.  이러한 선천적인 열등감은 성격형상에도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

다.

  연잉군은 이복형 경종이 무후(無後)했고, 자기를 밀어 준 당파의 덕택으로 왕세제로서 동

궁에 추대되었다가, 경종이 승하하자 왕위에 올라서 영조가 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소

론에서는 즉위 후에도 실력으로 폐왕(廢王)시키려는 반란까지 일으켰던 것이다.

  경종 사년에 왕이 승하하고 영조 원년으로 임금이 바뀌어지자, 이에 임금자리를 바라던 

왕족들과 소론 정객들은 뒤에서 영조를 쫓아낼 음모를 진행스키고 있었다.

  "궁녀가 부리던 천한 종의 몸에서 생긴 사생아가 지존한 왕위에 오르다니, 이런 해괴한 

왕실 모욕이 어디 있느냐.  민가의 양반집에선 상상도 못할 패륜의 불상사가 왕실이라고 해

서 그럴 수가 있느냐.  그것도 어엿한 왕족의 잘난 자제가 많은데..."


  연잉군이 왕세자로 책립되자마자 맨 먼저 경종에게 반대 상소를 올렸던 유봉휘(柳鳳輝)는 

귀양을 갔다.  그러던 차에 경종의 건강이 약해지자 소론파의 조성복(趙聖復)이 동궁(東宮=

延 君)에게 섭정을 시키라고 상소했고 이어 경종은 동궁에게 국정을 맡겼다.  그러나 좀 

있다가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최석항(崔錫恒)이 왕에게 상소를 올려 거사를 음모했다 하여 

조성복을 진도(珍島)로 귀양 보냈다.  그러자 소론파에서 다시 들고 일어나 노론파의 김창

집, 이이명(李 命), 조태채(趙泰采)등을 귀양 보내고 조성복을 불러들이게 했다.

  "노론파 소론파가 서로 귀양살이를 번갈아 다닌다.  귀양 번복은 약과지만 피를 흘리고 

말 당파 싸움의 징조다."

  "연잉군이 임금이 되건 밀풍군(密豊君)이 임금이 되건 백성에겐 상관 없지만, 노론파 정객

이 연잉군을 밀고 소론파가 밀풍군을 미는 것은 모두 저희들이 세도를 부리기 위한 음모에 

지나지 않는다."

  정치 싸움에 싫증이 난 백성들은 그들 쌍방을 모두 다 싫어했으나 세도에 눈이 어둔 당파

들의 암투는 계속되었다. 

  경종 이년에는 소론파의 승지(承旨) 김일경(金一鏡) 등이 궁중의 궁녀들과 궁녀를 감독하

는 환자(宦者) 박상검(朴尙儉) 및 문유도(文有道) 등과 결탁하고 동궁을 직접 살해하려다가 

발각되었다.  소론파에서는 이 사건 배후에는 이미 귀양 보낸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李健

命), 조태채까지 이 동궁 모살에 연죄했다고 몰아서 전부 사형에 처해 버렸다.  이것이 이른

바 임인사화(壬寅士禍)였다.

  경종 사년에 왕이 승하하고 동궁이 영조로 등극하자, 소론파에서도 이제는 왕에 대하여 

반대는 하지 못했으나, 은근히 배후에서 지난일을 가지고 들먹거렸다.  영조는 어려서부터 

궁중과 조정에서 성행하는 당파싸움을 눈이 아프도록 보아 왔고 골치가 아프게 고민해 왔으

므로 당파싸움을 엄금하는 탕평책(蕩平策)을 통감했다.

  "내가 임금이 된 이상 정치 부패의 고질인 당파싸움만은 엄금하겠다."

  이런 생각은 영조의 가장 현명한 정책이었다.  그래서 신임무옥이 조작된 흉계였다는 여

론에 따라서 영조가 친히 김일경, 목호룡, 이의연(李義淵)을 고문한 끝에 김일경은 사형에 

처하고, 목호룡과 이의연도 전형(典刑)에 처했다.  그리고 그들과 행동을 같이 한 소론파의 

이천해(李天海), 윤취상(尹就尙)도 사형에 처하고 유봉휘, 이광좌(李光佐), 조태구(趙泰耉) 등도 

귀양을 보냈다.  그리고 신임사화로 사형에 처했던 김창집, 이건명, 조태채 등을 복권시키고 

관작을 추증(追贈)했다. 

  이러한 영조의 당파싸움을 금하려는 탕평책으로 노론파의 원한은 어느 정도 풀어졌으나 

소론파의 불평은 더욱 격화되었다.

 "탕평이 무슨 탕평이냐.  우리를 잡아 죽이는 것은 당화(黨禍)가 아니고 무엇이냐.  허울 좋

은 가짜 탕평책이다."

  김일경의 아들 김영해(金寧海), 목호룡의 형 목시룡(睦時龍)과 그 일당의 아들과 손자들은 

영조를 원망하고 반란 음모를 진행해 오다가 영조 사년에 마침내 반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그들은 이유익(李有翼)과 조덕징(趙德徵), 또 그들이 성사 후에 임금으로 추대할 밀풍군을 암

암리에 충동질했다.  조덕징은 밀풍군의 처질(妻姪)이었으므로 그와의 연락을 주로 맡아 했

다.

  조덕징은 한세홍(韓世弘)과 함께 청주로 내려가서 교묘한 거짓말로 이인좌(李麟佐)를 충동

하여 반란군의 대원수(大元帥)로 추대하겠다고 권했다.

  "선왕 경종을 시역하고도 병사라고 세상을 속이는가 하면 소론파를 죄없이 잡아 죽였소.  

그래서 왕비께서도 천한 여자 소생인 임금 영조를 몰아내고, 어엿한 왕족의 혈통을 이어 받

은 소현세자의 손주님 밀풍군을 임금으로 세우라는 밀령을 주셨소."

  "그러면 서울에서 거사에 호응할 군력(軍力)은 어떻소.  거사에 실패하면 역적으로 몰려 

죽을 테니까 계획이 소홀해선 안 되오."

  "서울 군비는 되었소.  총융사(摠戎使) 김중기(金重器) 장군과 금군대장(禁軍大將) 남태징

(南泰徵)도 호응하기로 맹세했고 평안병사(平安兵使) 이사성(李思晟)도 동지요.  김영해와 목

시룡도 영남의 군사를 얻으려 내려갔으니, 권서봉(權瑞鳳)이 곧 군사와 무기를 이끌고 이곳

으로 와서 장군과 행동을 같이 할 것이요.  그리고 서울에서는 이유익(李有翼)이 모사(謀事)

의 책임을 맡고 만반 태세를 갖추고 있소.  이제는 이 장군이 의군(義軍)의 대원수로 행동만 

개시하면 되오."

  "좋소.  그럼 나는 여기서 영남 의군과 합쳐서 청주 군영을 점령하고 의군을 일으켜서 서

울로 진격해 올라갈 테니 도중의 수령들을 내응케하고 서울에서 의거(義擧)의 풍문을 미리 

퍼뜨려서 민심을 소란케 하시오."

하고 이인좌는 반란군 대원수로 나설 것을 약속했다.

  이러한 반란사건의 정보를 미리 알게 된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가 맨 먼저 궁중으

로 달려가서 왕에게 급변을 알리자 왕실과 조정에서는 깜짝 놀라서 반란군 진압에 대한 긴

급대책을 세우는데 분망했다.

  한편 서울 장안에는 모의를 꾸미는 자들이 선동하는 말, 격문 등이 나돌고 유언비어가 인

심을 흉흉케 했다.

  "지금 임금은 어미도 없는 가짜 임금이다.  왕대비 명령으로 가짜 임금을 몰아내고, 진짜 

임금으로 남원군을 모시려는 의병이 일어난다."

  "영조에게 억울하게 죽은 김일경 일파가 밀풍군을 업고 나서는 반란이 아닐까."

  "반란군이 남쪽과 북쪽에서 쳐들어 와서, 서울에 잠복한 반란군과 합쳐 궁중을 점령한다

지."

  "난리가 나면 장안이 불바다가 될 테니 빨리 피난을 가야 한다."

  이런 풍설은 모두 일부러 꾸며서 미리 퍼뜨린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그런 방문을 붙이고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범인을 잡으려고 애썼으나 허탕만 

쳤다.  그러던 차에 청주에서 반란의 불길이 올랐다.

  "이인좌가 반란군의 대원수를 자칭하고 청주 병영을 점령했다."

  이 정보에 접한 조정에서는 양성(陽城), 진위(振威), 안성(安城), 용인(龍仁)의 수령(守令)을 

모두 무관(武官)으로 갈고, 병조판서 오명항(吳命恒)을 사로 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로 삼은 

후, 박찬신(朴纘新)을 중군(中軍)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청주에서 병영을 점령한 이인좌는 영남에서 군대를 거느리고 합류한 권서봉과 함께 청주

병사 이봉상(李鳳祥)이 술에 취해서 기생과 동침 중에 있는 것을 잡아 죽이고 의기양양하게 

서울을 향해서 진격했다.  관군은 안성에서 반란군을 맞아서 싸웠는데, 반란군 선봉장 박종

원(朴宗元)을 잡아서 목을 베고, 대원수를 자칭하는 이인좌와 청주 목사를 자칭하던 권서봉

까지 사로잡았으므로 이른바 이인좌 반란은 곧 진압되었다.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킬 때에 

천하에 선언한 격문도 한 장의 허장성세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 선왕 경종대왕께서는 성명(聖名)하신 상주(上主)였으나 흉악한 간신배들이 시역하였다.  

그 뒤에 그 간신들이 즉위시킨 현재의 임금은 숙종대왕의 아드님도 아닌 신분 불명의 허수

아비다.  우리 충의의 동지들은 왕대비(경종의 왕비 魚氏)의 밀조(密詔)를 받고 종사(宗社)의 

정통을 바로 세우려는 의거(義擧)이다.  우리 의군은 억울하게 시역 된 선대왕 위패를 모시

고 서울로 쳐들어 간다.  모든 백성들은 우리 의군의 뜻을 양해하고 힘을 모아 성원하기 바

란다. >

  그러나 이런 격문은 역적죄의 증거품이 되는데 그치고 말았다. 

  반란이 진압된 후에 이인좌를 비롯한 주모자 육십여명은 참형을 당했고, 밀풍군도 엄중한 

감시를 받다가 일년 만에 사약을 받았다.  한편 난리중에 산승(山僧)과 협력해서 이인좌를 

사로잡아 올린 농민 신길만(申吉萬)은 그 공으로 일약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의 감투를 

썼다.

  영조는 이번 반란의 원인이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에서 생긴 것을 통탄했다.  그리고 이

른바 탕평(蕩平)으로 양파 화해를 붙였다.  왕은 양파의 거두를 불러서 좌우에 앉히고 친히 

두 손으로 양파 대표의 손을 잡았다.

  "이처럼 나라가 어지러워진 원인은 경들과 나와의 사이에 간격이 생겼기 때문이요.  경들

과 경들의 동지는 오늘부터 분쟁을 말고 이처럼 모두 나와 손을 잡고 국사에 함께 힘써 주

기 바라오.  나도 앞으로는 노론, 소론에 전연 구애하지 않고, 오직 인물의 능력과 충성만을 

믿고 어진 사람을 쓰겠소."

하고 친히 약속을 했다.  그러나 경종 때부터 원수가 된 노론과 소론의 간격은 영조의 악수

극(握手劇)으로 간단히 화해되기에는 너무도 심각한 것이었다.  그들 대표자는 나가서 다시 

상소하겠다는 말만 했다.  왕은 지금 당장 화해를 약속하지 않으면 언제까지든지 그들의 손

을 놓지 않고 기다리겠다고 웃으면서

  "비록 부형(父兄)과 선배들이 원수로 지냈다 하더라도 대대로 원수가 되어서야 되겠소.  

더구나 나라를 위하는 충성을 먼저 한다면 사사로운 원한을 풀 수 있지 않소.  경들이 나라

와 나를 도우려면 당장 화합해서 국사에 전념해 주어야 하겠소."

라는 말을 반은 명령이요, 반은 애원으로 정적(政敵) 두 사람에게 당부했다.

  "신은 벼슬을 그만두고 산림에 은퇴해서 한가로운 세월을 보내겠습니다.  마음이 맞지 않

는 사람들과는 국사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신도 전의 잘못을 책임지고 조정에서 물러나겠습니다."

  그들은 모두 파당의 해소와 협력을 거부했다.  그러나 왕의 분부는 끈덕져서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입을 모아서 일개월 동안만 조정에서 함께 일하면서 장래의 

방침을 정하겠다는 말을 하고야 왕의 악수공세에서 해방되어 나왔다.

  그 후에도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은 그치지 않았다.  오직 우의정 송인명(宋仁明)과 명어

사(名御使)로서 이인좌 반란 때의 공으로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진 박문수(朴文秀)만이 영조

의 탕평론을 진심으로 지지했다.

  "노론과 소론은 물과 기름 같다.  그것을 합치려는 것은 어리석은 정책이다."

하고 양파에서 모두 반대했다.

  "탕평 타령으로 탕평당(蕩平黨)이 한 개 더 생겼을 뿐이다.  그러나 탕평당원은 영조, 송인

명, 박문수 세명밖에 없다."

하고 양파에선 빈정댔다.  그뿐 아니라 무능한 팔방미인을 탕평당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고 탕평선(蕩平扇)이라는 비유로 야유하기도 했다.  그것은 종이와 대를 억지로 부착해서 

만든 부채라는 뜻이었다.  그토록 당파간의 원한은 그들의 골수 속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 思悼世子 ]   < 昭寧陵의 福 향나무 >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思 悼 世 子 

    昭寧陵의 福 향나무



   영조는 팔십삼세의 장수를 하고, 임금노릇도 오십이년간이나 해서 재위(在位)에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농민의 딸로서 궁녀의 하인 노릇을 하던 천한 여자를 빌어 숙종의 씨를 받

고 탄생한 영조는 그 불행한 모계(母系)를 생각해서인지 성격도 이상해져서 일생 고난을 겪

었다.  그러한 이상한 성격의 영향으로 만년에는 노망해서 냉대로 정신병자가 된 친아들 사

도세자(思悼世子)를 뒤주 속에 넣어서 참살한 해괴한 사건까지 일으켰다.

  그러나 영조의 유일한 공적은 당파싸움을 일생 동안 엄금한 고집이었고, 인간적 미덕은 

천한 생모(生母)에 대한 지극한 효성이었다.  생모가 천한 여자였기 때문에 왕위에서 몰아내

려는 이인좌의 반란도 당했고, 그런 당파를 타파하려다가 당파의 반감을 사서 또다서 윤지

(尹志)의 반란까지 당했다.  그래도 생모에 대한 효성은 지극했다.  생모가 죽은지 오랜 후 

왕이 늙은 뒤에야 구차한 표시를 묘전(墓前)에 했다.  일국 왕의 위력으로서도 신하들의 당

파싸움은 막지 못했고 서족(庶族) 멸시의 철칙을 타파하지 못한 열등감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조의 생모 최씨는 천한 서민의 딸로서 생전에는 물론 빈(嬪)의 대우도 받지 못했다.  죽

은 뒤에는 양주땅 고령산(楊洲高靈山) 기슭에 묻혔으나, 그것은 초라한 묘(墓)로서 대신들의 

산소에 비해도 형편이 없었다.  궁중 예법에 따르는 능호(陵號)는 물론이요, 원호(園號)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최씨는 숙종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므로 숙종이 임금으로 있을 때도 그 

묘는 원으로 봉하지 못했다.  영조가 임금이 된 후도 생모의 신분 때문에 반란까지 일어났

으므로 영조는 환갑이 되도록 생모의 성묘(省墓)조차 못했다.

  "내가 임금으로서 죽기 전에 어머님 묘소를 능으로 봉하고 떳떳이 성묘라도 해야겠는데, 

완고한 구법(舊法)과 신하들의 반대 때문에 인륜의 도리도 못한다."

하고 영조는 늘 한탄했고 이 문제로 신하들과 여러번 충돌까지 했다.  그러나 언제나 영조

의 효성의 뜻은 꺾이고 말았다.

  "선대왕께서 원으로도 능으로도 봉하시지 않은 것은 궁중예법과 또 선대왕의 성려(聖慮)에

서 그러하신 것입니다.  상감께서도 사정(私情)으로는 비록 능으로 봉하고 싶으시더라도 부

왕께서 안하신 일을 하실 수는 없습니다.  예법을 어기고 부왕의 뜻에도 어긋나는 봉능(封

陵)은 모후(母后)에 대한 효성이 도리어 부왕에 대한 불효가 되기 때문에 될 수 없습니다."

  신하들의 반대 이유는 이런 식이었다.  그런주장을 하는 신하들은 양반 집안에서도 서족

은 조상 제사에 제대로 참석하지 못한다는 범절을 은연중에 암시했으므로 왕은 참을 수 없

는 모욕감을 느꼈다.  그러나 타고 난 핏줄의 숙명은 어찌 할 수 없었다. 

  "내 차라리 임금의 씨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모친 성묘쯤은 자유롭게 할 텐데, 임금이 됐

기 때문에 성묘도 못하니 임금은 불효를 해도 좋단 말이냐?"

  이런 기묘한 신세 한탄까지 했지만 입으로는 누구에게 하소연하지 못할 가슴 속에서 썩는 

고통이었다.  가난했던 농부 외조부도 세상을 떠났고 외삼촌 같은 외가의 친척도 없었다.  

왕은 외가의 유족이라도 있으면 특명으로 벼슬을 시켜서 차차 양반의 지체로 끌어 올릴 생

각이 있었으나 그럴 사정도 못되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이름만 겨우 알아낸 외조부 최

효일(崔孝一)에게 추증(追贈) 형식의 허위(虛位)의 벼슬이나 시킬 생각을 했다.  이런 문제까

지도 대신들은 반대하고

  "국가에 공로도 없는 무명한 농민에게 무슨 명분으로 무슨 벼슬을 주층할지 전례가 없어

서 난처합니다."

하는 핑계로 미룬 것이 영조가 임금이 된 이후 이십년이 지나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임금의 외조부에 대한 나라의 예우(禮遇)도 못한다면 나의 체면은 어찌 되느냐?"

  왕은 그런 호령이 당장 치밀었으나 왕의 생모를 천한 여자로 경멸하는 신하들에게 그런 

말을하면 자기 얼굴에 스스로 침을 뱉는 것 같아서 감히 입 밖엔 내지 못했다.

  그 후 영조는 임금 노릇을 이십여년이나 하고 이제는 노망의 고집을 밀고 나갈 배짱도 생

겼으므로

  "내 체면으로도 죽기 전에 외가에 대해서 벼슬을 추증해야 되겠소.  경들도 모친과 외가

에 대한 효도와 의리를 알고 있다면 나의 이런 충정(衷情)을 양해할 것이요."

하고 강경히 말했다.

  "상감의 지극하신 효성에는 감복하오나..."

  "에잇, 죽은 그분들이 생전에 노론파였소?  소론파였소?  죽은 분들에게 추증하는데 어떤 

대감의 벼슬을 갈아 치우는 거요?  경들의 그 인색은 오직 나를 고롭히려는 처사가 아니고 

무엇이요."

  왕은 주먹으로 상을 치면서 노했다.

  "황공하옵니다.  상감 생각대로 하십시오.  신들은 상감 분부대로 절차를 밟아 올리겠습니

다."

  왕의 무모한 강제 명령에 마지 못해서 하지만 자기들은 책임을지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왕은 불쾌했지만 이제는 자기 뜻대로 강행하려고 결심했다.

  "그러나 추증 관직의 품위는 잘 감안하여 분부하시기를..."

  높은 벼슬은 삼가라는 주문이었다.  왕은 또 화가 났다.  그래서 기왕이면 최고의 영위(榮

位)를 추증하려고

  "외조부(崔孝一)께는 영의정, 외증조부(崔泰逸)께는 좌찬성(左贊成), 외고조(崔未貞)께는 이

조판서를 추증하게 하오."

  대신들은 물론 처음 듣는 시골 상놈의 이름들이었다.

  "예."

  마지 못해서 대답한 대신들도 속으로는 대단히 못마땅했다.

  (상감이 또 노망하셨군.)

하면서도 왕의 명령대로 추증수속을 했다.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외가 사대(四代)에 최고 벼슬을 추증을 한 뒤에 왕은 최후의 

목표인 생모의 묘를 능으로 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봉능(封陵) 문제는 왕실의 예법과 선대왕 재위(在位) 때 없던 일이오라 사헌부(司

憲府)에 물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고 신하들은 난색을 표명했다.  그러나 사헌부에서는 심중히 토의한 끝에, 아무리 임금의 

사친(私親)이라도 이런 경우에는 봉능할 수 없다는 유권적(有權的) 판단을 내렸다.

  "전에 광해군(光海君)도 모친을 봉능한 예가 있었고, 연산군(燕山君)도 폐비(廢妃)를 봉능하

지 않았는가?"

  영조는 대사헌(大司憲)을 불러서 노기 띤 음성으로 추궁했다.

  "황공하온 말씀이나 그런 무리를 한 뒤가 좋지 못하였습니다.  상감께서는 그런 불길한 

예를 따르지 마십시오."

  대사헌은 역시 강직한 간언(諫言)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친모를 초라한 묘소로 방치하면 내 생전에 무슨 얼굴로 성묘를 하겠는가."

  노했던 왕도 대사헌의 유권적이고 불길한 징조라는 말에는 애원하다시피 통사정을 했다.

  "상감마마 생모로 생각하시면 민망스러우시지만 숙종대왕의 후궁이라는 점에서 생각하시

면 사리가 명백하지 않습니까?"

  "왕실에는 그런 적서(嫡庶)의 구별 없이 세자 책립도 하지 않소."

  "세자에 적서를 구별 않는 것과 후궁 봉능과는 별개 문제입니다."

하고 대사헌을 비롯한 소론파의 대신들은 끝내 반대했다.  왕은 궁중예법만 내세우는 명분

론을 당파적인 반대라고 추궁할 수도 없었다.

  (이놈들 어디 두고 보자.  내가 죽기 전엔 모친 묘소를 능으로 봉하고 말겠다.)

하고 영조는 다음 기회를 벼르고 꾹 참았다.  그리고 은인자중하다가 몇 해 후에 다시 생모

의 봉능을 요구했다.  이때도 대신들은 여전히 반대했다.  그러나 영조는 끝까지 고집을 부

려서 반대하던 대신들의 주장을 꺾고 타협하는데 성공했다.

  "그럼 능은 지나친 특례니까 봉원으로 하십시오."

  "능과 원이 얼마나 다르기에 그렇게 인색하오."

  영조도 삼십년의 소원이 거의 이루어졌으므로 웃으면서 말했다.

  "능이나 원이나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고 대신들이 선심이나 쓰듯이 대답하자 영조는 농담 비슷하게 덧붙였다.

  "그럼 아주 능으로 봉하지."

  깜짝 놀란 대신들은 어이가 없었으나 그냥 웃음으로 얼버무려 넘겼다.

  "이만 해도 내가 비로소 성묘할 면목이 섰소."

하고 소녕원(昭寧園)으로 승격시키고 곧 소녕원에 거동하기로 했다.  이에 앞서서 묘문(墓門)

과 정자각(丁字閣)도 세웠다.  원이라고 하지만 여느 능에도 못지 않은 건물과 석물(石物)을 

세우고, 참배 후에는 친히 비문을 써서 각자(刻字)한 큰 비석도 세웠다.

  생모의 묘소에 처음 참배한 영조는 묘전에서 통곡하고

  "제 생전에 능으로 봉해 올리겠으니 잠간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하고 모친의 영을 위로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능으로는 승격시키지 못했다.  영조는 생모

가 생존할 때에도 궁중의 뒷방에서 숨어서 지내다시피 했고 사후에도 왕모(王母)의 대접을 

받지 못하는 초라한 묘소에 묻혀 있던 어머니를 위해 효성으로 삼십년이나 신하들과 싸워서 

겨우 원으로 승격시킨 것이다.

  아직도 능으로는 대우하지 않으려는 소론파의 완고한 반대에 대한 반발로서, 어떤 능보다

도 치산(治山)을 잘하고, 능참봉에 대한 대우도 후하게 했다.  원소 부근의 산림 감독도 특

별히 엄하게 했으므로 나무가 무성해서 소녕원의 경치가 좋아지고 명승지로서의 품위를 갖

추게 되었다.  능참봉을 비롯하여 모두를 원근처의 산림 도벌을 엄하게 단속했다.

  그래도 부근의 농민들은 원소의 나무를 몰래 베어다가 때고, 재목을 베어다 집도 짓고, 좋

은 관상목(觀賞木)을 몰래 캐다가 서울로 갖다 정원수(庭園樹)로 팔았다.

  "소녕능의 나무를 훔지는 자는 엄벌에 처하라."

  영조의 명령을 받은 능참봉은 도벌하는 자를 잡으면 큰 죄인으로 다루었다.  그래도 근처

의 가난한 농민들은 밤으로 능림(陵林)을 침범했다.  소녕원은 그 때문에 농민의 원망도 샀

지만 영조의 엄명으로 울창하고 좋은 임상(林相)을 자랑할 수 있었다.  소녕원이라는 이름은 

제도상의 명칭이긴 했지만 일반에게는 그런 까다롭고 무의미한 격식은 알지도 못하고 필요

도 없었다.  어떤 능보다도 훌륭하고, 어떤 능참봉보다도 대우를 잘 받는 탓으로

  "소녕능은 과연 금상(今上)의 생모 능인만큼 훌륭하다.  능 나무를 베면 그대신 백성의 목

이 달아난다."

  그럴 정도로 소녕원은 입산금지로도 유명했다.  그러나 그 근처에 사는 박서방이라는 중

년 빈농(貧農)은 그 엄금된 능림의 향나무를 캐서 서울에서 팔려다가 공교롭게도 미행(微行)

하던 영조에게 발각되었다.  영조는 새문안에 있는 경희궁(慶熙宮)에 있었는데 아침 저녁으

로 민간인의 옷을 입고 혼자 미행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상감, 너무 자주 미행을 하시다가 무슨 변을 당하실지 모르오니 염려되옵니다."

  측근자가 아뢰어도 영조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혼자 미행을 하면 마음대로 산책을 즐길 수도 있고, 백성의 실정을 잘 알게 돼서 정사에

도 큰 도움이 된다."

  "지당하신 말씀이오나..."

  이럴 정도로 영조의 미행은 측근자들도 말리지 못했다.

  영조는 어느 봄날, 아침 일찍이 홀로 궁을 나와서 서대문 밖을 산책하고 있었다.  마침 시

골 농부가 지게에 지고 온 싱싱한 향나무를 내려놓고 살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조는 

그 향나무를 사다가 궁중 정원에 심고 감상하고 싶어졌다.

  "여보, 그 향나무 팔 거요?"

  영조는 농부에게 물었다.  농부는 오늘은 첫손님을 아침에 맞았으므로 재수가 좋으리라고 

기뻐하면서

  "예. 첫손님이니 싸게 들여 가십시오.  보시다시피 좋은 향나무입니다.  양주 고령산에서 

난 유명한 향나무입니다.  생원님 댁 울안에 심으면 복을 받으실 겁니다."

  물론 영조의 평복 미행인 줄은 꿈에도 모른 농부는 신수가 훤하게 생긴 상대자를 어떤 부

잣집 노인으로 알고 생원님이라고 부르며 권했다.  영조는 양주 고령산에서 캐 온 향나무라

는 말에 얼핏 생모의 소녕원 생각이 떠올랐다.

  "아, 양주 고령산에서 난 향나무요?"

  "예, 고령산은 명산입니다.  산 밑에는 유명한 소녕능이 있지 않습니까?  그 명당이 있는 

고령산입니다."

  영조는 그 시골 백성들이 조정의 대신들이 까다롭게 따지는 소녕원을 당연하다는 듯이 소

녕능이라고 부르는 것이 우선 반가왔다.

  "설마 그 능림에서 캐어 오지나 않았소?"

  영조는 문초하려는 생각에서가 아니고 무심코 물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겁을 집어 먹은 

농부는

  "천만에요.  제가 아무리 무식하기로서니 어찌 감히 소녕능의 나무를 캐오겠습니까.  나라

의 영과 능참봉의 감독이 어찌 심한지 나쁜 심보를 가진 나무꾼도 능림 근처엔 얼씬도 못합

니다."

  "아암, 그렇겠지,  그런데 그 곳 사람들은 소녕원이라고 하지 않고 소녕능이라고 부르오?"

  "소녕원..이라니요.  소녕원이라고요?  아니 올시다.  그냥 소녕능이라고 합니다."

  농부는 소녕원이라는 말을 처음 듣는 이름이라 소녕능이라고 했다.  원과 능의 구별이 있

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생원님 복향나무를 들여가십시오."

  영조는 그 복향나무보다도 농민이 소녕능이라고 불러 준 것이 반가왔다.  그래서 농부가 

부르는 대로 값을 주겠다고 선뜻 흥정을 했다.

  "그럼 우리 집으로 지고 갑시다."

  "예, 생원님 댁이 어디신지요?"

  "나를 따라오시오."

  영조는 향나무를 진 농부를 데리고 경희궁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경희궁으로 따라 들어

가면서도, 어떤 대감댁이려니 했다.  그리고 그 생원은 이 대감집의 집사거나, 아니면 이댁

에 나무를 선사하려는 문객 정도로 짐작했다.  그러나 관복을 입은 사람들이 황급히 나와서 

공손히 생원을 맞아 들이는데 좀 이상스러웠다.

  "이 나무를 받아 두고 나무장수는 행랑방에 기다리게 하라.  그리고 시골서 새벽에 떠나

서 조반도 못했을 테니 주식 대접을 잘하라.  귀한 손님이다."

  귀한 손님이라.  영조의 말에 이번엔 관원과 하인들이 놀랐다.  그들은 그 나무를 지고 온 

농부를 행랑방이 아닌 나은 방으로 안내하고 좋은 반찬으로 아침상을 차려다 대접했다.

  "나으리, 이 댁이 어느 대감 댁입니까?"

  농부는 비로소 관복 입은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은 아직도 모릇오?"

  관원도 왕이 귀한 손님이라고 했으므로 당신이라고 공대하면서 이상스럽게 생각했다.

  "아까 그 분은 누구십니까?"

  "여기는 경희궁이고, 아까 뵈온 분이 상감이신데...  당신은 누구시오?"

  "앗, 상감님!"

  농부는 깜짝 놀라서 이젠 목이 달아났다고 벌벌 떨었다.  상감 어머니의 능림에서 캐다 

팔려던 향나무를 지고 죽으러 들어온 것이로구나 싶었다. 

  "나으리, 저는 소녕능 근처에 사는 농부입니다.  그러나 저 향나무는 능림에서 캐어 온 것

이 아니고 고령산 산 속에서 캐어 왔습니다.  상감께서 소녕능에서 캐 온 줄 잘못 짐작하시

고 저를 벌하러 끌고 오신 모양입니다마는 천지신명께 맹세하지만 백성이 어찌 감히 능나무

에 손을 대겠습니까?"

  관원도 어리둥절했다.  상감께서는 귀한 손님이라 식사 대접을 잘하라 하셨는데, 이 귀한 

손님은 자기의 죄를 변명하면서 애원하는 것이었다. 

  "좌우간 기다려 보시오.  상감께서 무슨 분부가 계실 테니까."

  "나으리, 제가 능나무를 캐다 파는 그런 죄인이 아니라고 상감께 잘 말씀해 주시오."

  "글세,  벌을 주시든지 상을 주시든지 낸들 알겠소?"

  이런 수작을 하고 있을 때, 아까 생원이라고 부른 영조가 용포(龍袍)의 임금 모습으로 고

관들을 거느리고 나와서 농부를 대했다.  농부는 마당으로 뛰어나가서 땅바닥에 엎드렸다.

  "아까는 상감을 못 알아 뵙고 생원님이라고까지 불경(不敬)한 말을 올렸습니다.  그 죄로

는 죽어도 마땅하옵니다마는 저 향나무는 소녕능 능림에서 캐 온 것이 아닙니다."

  "오오, 알았다.  그런 걱정은 말고 향나무 값을 받아라."

  "황공하옵니다.  향나무는 진상하겠으니 값을 그만 두십시오."

  "아니다.  어려운 백성의 물건을 거저 받을 수야 있겠느냐?"

  영조는 시관이 준비해 왔던 묵직한 전대(錢袋)를 농부에게 내주었다.  나무값이 아니라 막

대한 상금이었다.  농부는 자기가 <소녕능>이라고 지방민들이 다 부르는 대로 말한 것을 기

뻐한 왕의 상금인 줄은 모르고 사형 대신에 큰 상금이 내린 것을 꿈같이 생각했다.

  "보아 하니, 자네는 충성되고 정직한 인물 같다.  무슨 벼슬을 하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말해라."

  "상감마마 그 말씀이 정말이십니까?"

  순박한 농민은 생각대로 정직한 질문을 왕에게 했다.

  "허허, 임금이 백성에게 거짓말을 하겠느냐?"

  좌위의 고관들도 소리 없이 웃었다.

  "내가 자네 인물을 충성되게 보았으니, 무슨 벼슬을 시키고 싶어서 그런다."

  "황공하옵니다.  무식한 백성이 땅이나 파 먹고 살지 무슨 벼슬을 할 자격이 있습니까?"

  "음, 자네 생각이 충직해서 더욱 믿음직하다.  다행히 소녕능 근처에 살아 그 지방 사정을 

잘 알 테니 능에서 봉사할 생각은 없느냐?"

  "감사하옵니다.  그러면 능참봉 밑에서 청지기라고 시켜 주시면 충성껏 일하올까 합니다."

  "음, 나도 그것을 바랐다.  그럼 소녕능 참봉을 시키겠으니,  능을 잘 지켜서 충성을 다하

라."

  "네? 저에게 능참봉을!  그런 자격이 없으니 능 청지기를 시켜 주십시오."

하고 농부는 사양했다.  그러나 <소녕능>이라고 불러 준 말을 첫 번 들은 영조의 감격은 그 

농부에게 능참봉이란 벼락감투를 씌웠다.

  (사람의 팔자 운수는 알 수 없구나.  만일 능참봉이나 능 청지기에게 향나무 캔 죄가 발

각 되었으면 다리 하나쯤 부러졌을 텐데, 요행히 임금을 만났기 때문에 상금과 함께 벼슬까

지 했구나!)

  농부는 농림을 범한 양심의 가책도 느꼈으나 자기를 위한 복향나무의 복을 못이기는 척하

고 받았다.


  [ 思悼世子 ]   < 魔力을 지닌 肉體 >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思 悼 世 子 

    魔力을 지닌 肉體



   영조에게는 중전(中殿)인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와 계궁(繼宮)인 정순왕후(貞純王

后) 김씨(金氏)가 있었으나 모두 소생이 없었고 다만 여러 궁녀들로부터 이왕자와 십이옹주

를 얻었다.

  정성왕후가 혈육을 남기지 못하고 승하하게 되자 영조는 여러 빈궁과 귀인이 있었지만 정

실(正室) 중전을 또 맞아들이려고 했다.  이때 영조는 나이가 이미 육십육세였으나 아직도 

여자에 대한 정력을 왕성했다.  이때는 영조도 매사에 고집을 부려서 <영조의 노망>이라는 

욕을 먹고 있었다.  특히 영조의 사십년 가까운 고집정치와 말년의 노망을 싫어한 당파에서

는 빨리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왕위에 세우려는 음모조차 있었다.  그래서 궁중과 조정에서

는 부왕파(父王派)와 자왕파(子王派)로 갈려서 암투하게 되었다.

  "육십육세의 늙은이가 열다섯 소녀를 후비로 하여 중전을 삼으려니, 이런 해괴한 일이 있

는가."

  "손녀, 증손녀 같은 어린 계집애를 향락하려는 칠십 노인은 노망이겠지만, 국구(國舅)의 세

도를 하려고 어린 딸을 늙은 산송장에게 팔아먹은 김한구(金漢耉)가 더 미친 놈이다."

  세상에서는 이런 욕들을 했다.  그러나 궁중의 많은 궁녀들 사이에는 질투 섞인 비상한 

화제가 되었다.  더구나 아직 삼십이 못된 젊은 몸으로 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옹주까지 낳

은 문숙의의 질투는 폭발할 지경이었다.  문씨는 자기가 아들을 낳아서 한번 왕모(王母)로 

올라서려는 야심까지 품고 있었던 만큼, 이 정실 왕비의 문제가 났을 때부터 갖은 아양과 

연극으로 왕을 농락하려고 했다.  왕과 사도세자와의 사이를 이간시키려는 당파싸움에서도 

궁중에서 주동역할을 한 간사한 여자였던 만큼, 자기보다도 어린 처녀가 자기의 천한 집안

보다 문벌이 높은 재상집에서 들어오려는 것을 막으려고 무척 애를 썼다.

  "상감, 제 몸에 태기가 또 있는 모양입니다.  이번엔 꼭 왕자를 낳아서 상감님 은총에 보

답하겠습니다."

  "뭐, 네 몸에 태기가 있어?  그래 이번엔 꼭 아들을 낳아라."

하고 늙은 왕은 기뻐하면서, 젊은 문씨의 탄력있는 배를 이불 속에서 어루만지면서 기뻐했

다.  그러면 문씨는 아랫배에 힘을 주어 불룩하게 내밀어서 왕을 속이며 아양을 떨었다.

  "효장세자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지금 동궁(東宮=思悼世子)은 공부는 않고 부랑자들과 어

울려서 주색에만 빠져 있으니 걱정입니다."

  "그래서 나도 걱정이다.  그러나 내 나이 이미 칠십이 가까운데 아들을 낳을 수 있겠느

냐?  너 설마 어떤 젊은 놈의 씨를 밴 것은 아니겠지?"

  왕은 질투나 의심보다도 문씨가 귀여워서 콧소리로 흥흥거리며 농을 했다.  아직도 자기

의 정력으로는 여자를 얼마든지 즐길 자신이 있었으므로, 문씨의 태기가 있음직도 해서 기

뻤던 것이다.

  "상감마마 그게 무슨 농담이십니까.  그보다도 상감님의 이런 정력이시면 칠십 아니라 백

살이 되셔도 생남하십니다.  제가 꼭 상감님 아들을 낳아 드리겠습니다."

  "아아, 그럼 얼마나 경사스럽겠느냐.  그러면 내가 너를 더 귀여워하마."

  "상감님 싫어요.  제가 아들을 낳지 못해서 싫어하셨구만요."

  "허허, 언제 너를 싫어했니?  지금까지 나는 중전이나 빈궁들보다 너를 제일 귀여워하지 

않았느냐?"

  "그럼 왜 정성마마가 승하하시자, 중전이 비었다는 핑계로 계궁(繼宮)을 또 들여놓으시려

고 하세요?"

  "아아, 그걸 네가 투기하느냐?  신하들이 권하니까 생각 중이지 아직 정한 것도 아니다."

  "만일 저보다 젊은 여자를 중전으로 들여놓으시면, 저는..."

  "너야, 중전이 또 들어오건 말건 이렇게 귀여워 할 거 아니냐?"

  "싫어요.  그럼 우선 뱃속에 든 아기를 떼어버리고 저도 죽어버리겠어요."

하고 문씨는 원망스러워 하면서도, 갖은 애교를 육체의 유혹과 함께 부렸다.

  "후후후.  걱정 말고 왕자나 하나 잘 낳아라."

하면서 늙은 왕도 젊은 문씨에게 늙은 정력을 쏟았다.  문씨는 왕이 밤으로 어루만져 볼 때

는 배에 힘을 주어서 속였고, 낮이면 치마 속에 솜뭉치를 넣어 배 부른 모양을 보여서 왕의 

계궁(繼宮) 맞는 것을 중지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영조에게 아첨하는 신하들은 계궁을 허위(虛位)에 두는 것은 왕실의 내허(內虛)라

고 주장했으며, 노망한 왕도 또한 재상집 어린 처녀에 대한 호기심을 금하지 못해서, 마침내 

김한구의 딸 십오세 처녀는 정순왕후(貞純王后)로 맞아들였다.

  거짓말로 아들을 배었다고 왕을 속이려던 후궁 문숙의도 단념하고

  "상감마마가 저를 소박하시고 어린 중전을 맞았기 때문에 산신(産神)께서도 실망하신 모양

입니다."

  왕은 정순왕후를 맞은 뒤에도 문숙의의 침실 매력을 잊지 못하고 자주 밤으로 그 침실을 

찾아왔다.  문씨는 어느날 밤에 밥까지 굶은 배에 힘을 빼고 울면서 호소했다.

  "너 그게 무슨 말이냐?"

  "역시 제 복이 없는지 낙태하고 말았습니다."

하고 흑흑 느껴 울었다.  눈물까지 줄줄 흘렸으므로 왕은 문씨의 슬픔을 정말로 알고

  "어디 보자."

하고 문씨의 배를 만져 봤다.  과연 전에 핑핑하게 부르던 배가 착 까부러져 있었다.  분명

히 낙태한 것 같았다.

  "네 복보다도, 내 복이 없나보다.  기왕 낙태했으면 하는 수 있느냐.  몸을 잘 조리하고 

슬퍼하지 마라."

  "상감, 몸이 괴로우니, 오늘밤엔 제 방에 모시지 못하겠습니다."

  "아, 알았다.  몸조리나 잘하거라."

하고 왕은 누웠던 몸을 일으키고 옷을 입으려고 했다.  침실에서 나가려는 왕의 동정을 본 

문씨는 왕이 이 길로 다른 여자의 방으로 갈 것이 샘났다.

  "상감마마, 늦은 밤에 침소를 옮기실 것까진 없습니다.  저도 고적하니 저쪽 상감마마 금

침에서 그냥 주무십시오."

  "오오 그러마.  아주 이 방에서 쫓아내는 줄 알았구나.  허허허."

  문씨는 그런 연극으로 낮에 솜덩이를 치마 밑에 넣고 다니던 거짓말의 고통을 무난히 면

하고 혼자 웃었다.  간사하고 영리한 문씨는 거짓 잉태도 무난히 숨겨 넘기고 그 때문에 도

리어 왕의 동정과 사랑을 더 끄는데 성공한 것이다.

  "제가 아무리 상감을 충성껏 섬기고, 상감께서 사사롭게 귀여워해 주셔도 조정의 양반들

은 상놈의 궁녀 출신이라고 해서 저를 멸시합니다.  양반이래야 별종잔가요.  당파싸움과 백

성재물, 나라재물만 도적질하는 놈들 아닙니까?"

  "그래 당파싸움 때문에 나라가 망할 것 같다."

  "상감, 당파싸움 못하게 하는데 묘안이 있습니다."

  "허허, 너한테 그런 묘안이 있느냐?"

  문씨는 눈웃음을 치면서, 제법 심각한 문제라도 말하듯이 입을 열었다.

  "당파싸움은 지금 행세하는 양반들로선 아무리 상감님 명령이라도 고쳐지지 못합니다.  

모두 할아비 아이들 때부터 내려온 대대원수니까 피에 밴 당파싸움이라 그렇습니다.  차라

리 당파싸움에 전연 물들지 않은 사람을 등용해야 합니다."

  "당파에 물들지 않은 유능한 사람이면 얼마든지 등용할 방침이지만..."

  "양반들은 모두 당파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니 당파와 아주 관계 없는 소위 중인(中人), 

상민(常民)을 벼슬시키는 용단을 내리시면 그런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허긴 그도 그렇다."

  중인과 상민에게 벼슬을 시킨다.  그것은 분명히 뿌리 깊은 신분제도(身分制度)의 봉건성

(封建性)을 타파하는 일종의 계급혁명(階級革命)이다.  그러나 실지로는 유명한 영조의 고집

으로도 내릴 수 없는 용단이었다.  만일 그러하자면 현재 각파의 양반들과 전국의 유림이 

서로 일치 단결해서 반해하고 일어설 것이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상감마마, 이런 말을하면 황송하오나 성모(聖母)께서도 제 몸과 똑같은 후궁의 신분이라 

일생을 양반들의 천대를 받으셨으며, 심지어 상감까지도 천한 여자의 아드님이라고 해서 여

러번 반역소동까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저는 물론 중인 태생이지만 상감님 피에도 역

시..."

  "그것은 짐도 원통한바이다."

  "그러니,  마마 생전에 상반(常班)의 폐단을 없애고, 중인, 상민도 벼슬을 시키십시오."

  영조의 피에도 천민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문씨의 이런 신분 한탄은 바로 왕자신의 울

분이기도 했다.  신하들도 양반 자세로 영조의 생모는 인간대접을 하지 않았던 것이 분했다.  

그런 피에 밴 서민성(庶民性)은 영조의 성격의 큰 요소(要素)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가 배척한 당파싸움에는 양반근성과 적서(嫡庶) 차별에 대한 반항도 겸해 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중전에 냉랭하던 서북인(西北人)도 등용하려고 했고,  중인

도 약간 벼슬을 시켜서 물의를 일으켰다.

  그러나 문씨는 그런 큰 문제보다도 우선 자기 친정 동생에게 감투를 주어서 중인의 지체

를 면하고, 친정 자손들에겐 양반대우를 받게 하려는 야심에서 이런 거창한 문제를 꺼냈던 

것이다.

  "가까운 예로 제 지체를 좀 올려 주셔요."

  "네 지체라니?  내 사랑 이상의 무슨 높은 지체가 있느냐.  남자라면 벼슬이라도 주겠지

만 말이다.  나는 네가 남자가 되어 훌륭한 영의정이 되는 것보다, 귀여운 여자가 된 것이 

얼마나 행복인지 모르겠다."

  "저야, 그까짓 빈궁(嬪宮) 대우는 바라지 않지만..."

  "그래?  나도 너를 빈궁으로 삼고 싶었지만, 중전보다 더 사랑하는 귀인(貴人) 대우가 좋

지 않으냐.  궁주범절이 야속하게 너를 빈궁으로 올릴 수도 없구나.  때도 늦었고..."

  "상감 제 말이 아닙니다.  제 친정 동생이 어느 양반보다 학문도 인품도 잘났지만, 조상이 

중인이고 제가 천한 궁녀 출신이라, 썩어빠진 양반에게도 굽실거리며 천대 받고 있습니다.  

제 친정 동생이 벼슬을 해서 양반이 되면 제 지체도 오르고 자손들에겐 그런 천대를 면할까 

합니다."

  "아, 네 친정 동생에 그런 잘난 인물이 있었느냐.  그럼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

  "대신들은 제 사돈의 팔촌까지 벼슬도 시키고 중인들도 양반의 족보에 넣어 가며 돈으로 

감투를 팔지만, 저는 그런 짓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상감께서 알아서 하실 때만 기

다렸습니다."

  "어, 그러냐?  갸륵한 생각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처남의 존재까지 모르는 불찰을 저질

렀구나."

  왕은 문씨의 동생을 처남이라고까지 하면서 웃었으므로 문씨는 기뻤다.

  "제 친정은 그전부터 후궁관계로 어떤 재상집 양반 못지 않게 왕실과는 혈통이 통합니다.  

제 동생 자랑이 아니라 어떤 양반집 자제만 못하지 않으니, 한번 불러 보시고 적당한 벼슬 

한자리 시켜 주십시오."

  "아, 보나 마나, 네 동생이면 내 처남인데 그냥 둘 수야 있나.  무슨 벼슬이 소원이냐?"

  "그야 단번에 대감까지 바랄 수 있습니까?  그러나 나으리 지위는 너무 낮으니 과거 치루

지 않고 할 수 있는 영감자리 하나 시켜 주십시오."

하고 문씨는 중인으로는 일약 영감지위를 소망했다.

  "음, 좋아.  우선 대신들 간섭 없이 시킬 벼슬은 왕실관계 관직인데...  마침 육상궁 소감

(毓祥宮少監) 자리가 비었으니 어떻겠니?"

  "육상궁 소감이면 더욱 적임입니다.  저의 시어머님의 제를 제 동생이 대신 받들 수 있으

니까요."

하고 문씨는 기뻐했다.  제 동생이 궁중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벼슬을 하게 된 것이 

더욱 반가왔던 것이다.

  육상궁은 영조의 생모 최씨의 영혼을 모신 별묘(別廟)로서 소감이라는 직명이지만 별묘의 

최고직이었다.  일이라고는 일정한 절차에 따른 제사를 지낼 뿐, 한가롭고 수입 좋은 벼슬이

었다.

  문숙의의 친정 동생 문성국(文聖國)은 글깨나하는 청년으로서 장안의 호걸을 자처하던 유

명한 건달이라, 장안의 건달과 깡패가 그를 중심으로 육상궁에 모여들어서 밤낮으로 도박을 

하면서 술을 마셨다.  그러는 한편 문성국은 그들 일당의 두목으로서 궁중의 누이와 결탁하

고 소위 자왕파(子王派)로서 영조를 몰아내고 사도세자를 왕으로 세우려는 당파를 제거하는 

행동파 구실까지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영조를 옹호하는 부왕파 가운데서 은연한 세력

을 갖게 되었다.  그는 육상궁 관비를 유용하고 누이 문숙의로부터 받은 기밀비로 장안의 

유흥가를 판치고 돌아다녔다.  장안의 건달들을 부하로 거느리고 해만 지면 말을 타고 유명

한 기생집 순례를 하는 것이었다.

  "문성국은 단순한 제관(祭官)도 건달도 아니라 문귀인의 밀령으로 자왕파라는 소론을 잡아 

죽이려는 무서운 밀정이다."

  이런 소문이 장안에 돌자 소론파에 속하는 자들은 술집에서 술김에 토하던 시국의 불평을 

삼가야 했다.  문성국의 부하 건달들이 모두 부왕파의 밀정 같았기 때문이다.

  윤지(尹志)의 반란이 실패한 후에 소론파는 자기들 신변의 안전과 장래의 희망을 사도세

자에게 걸고 움직이게 되었는데 이것이 소위 자왕파의 시초였다.  당시 노론만 득세시키는 

영조의 세력을 꺽으려면, 영조와 사이가 좋지 못한 다음 임금이 될 사도세자에게 붙어서 역

시 왕실에 충성을 다 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자왕파인 소론에서는 우선 일을 시작함에 있어서 유언비어를 조작하고 미신까지 이용했

다.  그 예로서 황해도에 예언(豫言)하는 생불(生佛)이란 여자가 나타나서 기묘하게도 민심을 

끌었다.  이 생불을 자칭하고 나온 여자는 자왕파에서 정치적으로 이용한 일종의 무당이었

다.  그러나 자기는 무당이 아니고 생불의 선녀라고 하면서 우선 무당들을 공갈해서 자기 

세력 밑에 넣으려고 공작했다.

  유교와 무당의 사교(邪敎)는 장차 망한다.  지금 궁중에서는 늙은 왕이 망녕을 부려서 썩

은 노론에게 세도를 시키고 여색에만 빠져 있다.  세자가 공부를 않는다고 죽인다 살린다 

하는 것은, 현명한 세자가 유교책을 버리고 불교책만 믿고 공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

님의 광대무변한 위력과 공덕은 세자를 성군(聖君)으로 모시고 모든 백성은 지상의 극락 생

활을 하게 된다.  너희들 무당도 말세의 불바다에서 살아나려면 생불인 나의 가르침을 받아

야 한다."

  생불이라는 여자는 무지한 무당들에게 세자를 지지하는 정치적 목적의 선동을 불교도 아

닌 생불의 이름으로 퍼뜨렸다.  그러자 무당이 겁을 집어먹고 귀신단지를 태워 버리고 여승

도 아닌 괴상한 무당으로 전향했다.

  이런 사실을 안 조정에서는 이경옥(李敬玉)을 암행어사로 삼아서 황해도로 파견했다.  허

술한 백성 옷으로 변장한 암해어사는 봉산(鳳山) 어느 시골에 가서, 생불이라는 새로운 무당

이 기도하는 구경을 했다.  치성 온 사람들에 대해서 부자가 되게, 생남하게, 벼슬을 하게 

기도한 뒤에 생불의 교훈을 받은 무당은

  "그러나 이 모든 영험은 부처님께 치성을 드려야 한다.  그리고 특히 벼슬을 하려면 늙은 

세력을 없애 버리고 젊은 세력이 일어서야 한다.  늙은 세력은 노망한 임금과 완고한 노론

의 간신들이다.  그리고 젊은 세력은 현명한 왕세자와 소론의 중신들이다.  그러니 당신들 

자손이 벼슬하고 귀하게 되려면 늙은 세력이 멸망하라고 기도를 드려야 한다."

하고 역시 무당 기도식으로 징을 울리면서 정치적인 넋두리를 했다.  암행어사는 그런 사실

을 직접 보고 들은 뒤에 황해감사와 각읍의 수령에게 지시해서 그런 무당을 검거해서 엄하

게 다스렸다.

  그러나 그럴수록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노망한 임금이라고 저주 받는 영조도 무지한 

무당들까지 부처의 명목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데 대해서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사도세자가 반역심을 갖고 있을 듯한 의심이 생겼다.  글은 읽지 않고 무술에 골

몰한 것도 그런 변란을 준비하는 것처럼 생각됐다.  그 전에도 글을 배우지 않고 잡패들과 

어울려서 시중으로 미행(微行)하면서 주색에 방탕한 것만 꾸짖었지만, 이때부터는 아비를 죽

이고 임금이 되려는 역적의 자식으로 의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뚜렷한 증거가 없으므로 

소위 자왕파인 소론의 잔당을 경계했다.

  문숙의와 내통하는 부왕파에서는 이 기회에 자왕파로 지목되는 소론파를 소탕하려고 별렀

다.  문숙의의 동생 문성국은 영의정 김상로(金尙魯)의 집을 밤중에 찾아갔다.

  "아, 자네가 밤중에 웬일인가?"

  영의정도 영조의 총애를 받는 문숙의의 동생인 만큼 귀한 손님 대접으로 맞았다.  무슨 

중대한 비밀로 온 줄 짐작했으나 태연한 태도로 대했다.

  "대감께서는 황해도의 생불 소동의 진상을 아십니까?"

  "아, 암행어사의 보고로 알았네."

  "그럼 상감께 정식으로 아뢰셨습니까?"

  "대강은 아뢰었지."

  "대강이 아니라 그것이 모두 소론파들이 상감을 없애고 왕세자를 등극시키려는 음모라는 

점을 여쭈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 사람, 그런 끔찍한 소리를 어찌 풍문만 듣고...  아니 사실이라도 감히 아뢸 수 있나.  

우리는 상감의 신하인 동시에 동궁의 신하가 아닌가.  그런 말씀 아뢰다가는 도리어 상감께 

노염을 사서 목이 달아날 텐데.  시일을 두고 경계만 하면 자연 사필귀정(事必歸正)할 것 아

닌가?"

  "대감, 그러시다간 대감도 늙은 파로 몰려서 큰 변을 당합니다.  상감께서도 이런 문제는 

비록 짐작을 하시더라도 대신들의 공신 상주(上奏)가 없으면 친히 발언하시진 못합니다."

  영의정 김상로는 어디까지나 몸을 사리는 신중한 태도였다.

  "제가 벼슬이 좀 더 높으면 직소(直訴)하겠습니다마는..."

차차 문성국은 은근히 김상로의 태도를 비굴하다고 암시했다.

  "아차, 자네 누님(문숙의)은 종종 만나지 않겠나?"

  "웬걸요.  아무리 누님이라도 제가 어찌 궁중에 출입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문성국은 뻔한 거짓말을 했다.

  "허긴 자네가 누님을 통해서 상감께 알려 드리면 제일 무난하겠는데."

  "대감께서 그런 의향이면 제가 누님을 만나서 말해도 좋습니다."

  "뭐 내가 시켰다고 해선 안 되네.  자네 의견대로 해야지."

  "예, 알겠습니다."

  문성국은 영의정의 내탁으로 일을 하려는 다짐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 중대한 

문제가 조정에 상정되었을 때는 영의정이 책임지고 증언하게 되겠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문성국은 궁중으로 가서 누이 문숙의에게 침소봉대로 사도세자의 반역음모가 뚜렷

하다고 고자질했다.  문숙의는 아우의 말을 더욱 과장되게 거짓말까지 붙여서 영조에게 밀

고했다.  문숙의는 입에 담지 못할 말까지 해서 왕 부자간을 이간시켰다.

  "글세 임금 자리에 눈이 어둔 동궁은 노망한 임금은 없애버려야 한다고 벼르면서 창덕궁

에선 늙은 개만 봐도 이 늙은 놈하고 칼로써 개백정 짓까지 한답디다.  영의정도 그런 사실

을 알면서 너무 황송한 말이라 아뢰지 못한다고 제 동생에게 고충을 말하고 있다 합니다."

하고 문숙의는 자기의 과장한 이간책의 책임을 영의정에게 전가시켜서 왕으로 하여금 더욱 

믿게 했다.

  "설마, 그놈이 아무리 미쳤기로서니 제 아비를 죽이고 왕이 될 생각을 할까?"

  "늙으신 상감의 자부(慈父)의 은혜도 모르니 정말 망측합니다.  모두가 소론파들이 충동이

는 음모이니, 우선 동궁 측근자들을 처단하십시오.  그러면 일시 잘못했던 동궁도 후회하고 

잃었던 효심(孝心)을 돌릴지도 모릅니다."

  영리한 문씨는 왕자도 동정하는 척하면서 우선 동궁이 타고 있는 말부터 잡아 죽이라고 

권했다.  이런 풍문이 돌기 시작하자 동궁을 가깝게 모시고 있는 이천보(李天輔), 이후 등이 

불안해 했다.  그러던 차에 사도세자는 종기로 앓았다.

  "온양 온천으로 행차해서 탕치(湯治)하는 것이 좋소이다."

  시의들이 권고하자 세자는 왕의 하락을 창했다.  왕 부자지간에 큰 불상사가 날지 모른다

는 풍문은 이미 세상의 상식으로 되어버렸다.  왕은 세자가 괘씸스러워서 종기로 죽기라도 

했으면 시원하겠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세자가 미워서 병을 고치려는 온양행차조차 금

했다는 풍문이 두려워서 마지 못해 허락을 했다.

  그러나 부왕파의 노론측에서는 세자의 언동을 감시하려고 일시도 세자의 옆을 떠나지 않

았다.  좌의정으로서 직접 세자의 사부(師傅)의 중책을 맡고 있는 이후도 세자에게 무슨 변

이 있을까 걱정하면서 수행했다.  행궁(行宮)에서 세자는 이후에게 심중의 고민을 토로했다.

  "나는 죽고만 싶소."

  "옥체의 종기도 이 온천 영험으로 나으실 것이니 안심하고 조리하십시오."

  "몸의 종기보다 마음에 더 큰 병이 들었소.  욕되이 죽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차라리 

자결하고 싶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동궁께서 만일의 일이 있으면 저도 살지는 않겠습니다."

  이후는 이미 대세가 세자에게 불리해서 무슨 참변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을 느꼈

다.

  "나에겐 부왕이 어려워서 감히 가깝게 하지 못한 죄는 있지만 어찌 다른 불효의 뜻이야 

있겠소.  그러나 아버님 주위에는 흉한 요기(妖氣)가 아버님 총명을 흐리게 하고 있소.  또 

공연히 당파의 불만으로 나를 업고 일을 꾸미려는 자들도 못마땅하오."

  "망극하옵니다.  모두 신들의 불민한 죄올시다."

하고 세자와 선생은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래도 온천은 효과가 있어서 서울로 환궁했지만 세자는 마치 죽음의 길에 오르는 것처럼 

불안했다.

  (아아, 그냥 서인(庶人)이 돼서 자유롭게 유람이나 다니고 싶다.)

  세자의 지위도, 왕대리의 권한도, 장차 임금의 지위도, 다 버리고만 싶었다.  그러나 온천

에서 돌아오자 궁중과 조정의 공기는 아주 험악해져 있었다. 

  "동궁의 반역심을 조장한 것은 동궁측근의 소론들이다.  그들의 대죄는 마땅히 엄벌해야 

한다."

  이런 노론파의 공격을 받게 되자 영부사 이천보와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차례로 자결

했다.  그들은 결국에 가선 자기들이 역적으로 몰려서 죽을 것을 겁냈으며, 기왕 죽을 바에

는 스스로 깨끗이 죽어서 왕세자의 목숨만이라도 구하려는 충성에서 한 억울하고도 비장한 

자결이었다.  온양온천에서 같이 가서 세자와 울고 돌아온 이후도 임금 부자지간의 싸움이 

피를 보지 않고는 그치지 않을 것을 알고 역시 자결했다.

  (아아, 나를 오랫동안 교육해 주던 세 사람이 모두 나 때문에 억울하게 자결했다.  충신을 

셋이나 죽이고 나만 살 면목이 있으랴.)

  왕세자는 마침내 자포자기하고 실성한 사람같이 되어버렸다. 울화증이 난 왕세자는 평복

단신(平服單身)으로 동궁처소를 버리고 어디론지 먼길을 떠나려고 서둘렀다.  깜짝 놀란 시

신(侍臣)들이 난처한 표정으로 앞을 막았다. 

  "동궁께서 어디를 미행하시렵니까?"

  "글세, 서울서 아주 멀리 가버리고 싶소."

  "안 되십니다.  그러지 않아도 상감께서 동궁의 동저을 감시하시는 중인데, 정 어디로 행

차 하시려면 상감께 아룁고 가셔야 합니다."

  "평양에라도 놀러 가려는 것을 용서하시겠소.  이것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내 길을 막

지 마시오."

하고 왕세자는 단신으로 창덕궁의 동궁처소를 나섰다.  멀리 떨어진 경희궁에 있는 부왕은 

이런 세자의 미행을 알지 못했다.

  "우리도 상감의 노염을 사서 죽더라도 동궁을 따라 모시고 가자."

  동궁의 시신과 선비 몇 명은 죽을 각오를 하고 왕세자의 평양 미행에 따라 나섰다.  그 

후에 이런 사실을 안 대신들도 쉬쉬하고 영조에게는 보고하지 않았다. 


  [ 思悼世子 ]   < 女體 彷徨 >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思 悼 世 子 

    女體 彷徨



   사도세자는 수명의 시신과 선비만 거느리고 부왕 영조 몰래 평양으로 유람의 길을 떠났

다.  부왕이 언제 역적으로 몰아서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감돌고 있는 궁중에서 잠시 

해방되려는 생각과 부왕에 대한 소극적인 반항이기도 했다.

  (언제 죽을지 모를 몸이니 청춘의 향락이나 실컷 채워보자.)

하는 자포자기의 방탕한 기분이었다.  영조 삼십칠년 사월, 평양 가는 연도의 산천에는 신록

이 무르익고 늦봄의 꽃이 만발했다.  거의 반광인(半狂人)이 된 이십오세의 왕세자는 객사

(客舍)의 달밤 두견새 우는 소리에도 단장(斷腸) 눈물을 흘렸다.

  비록 왕 몰래 하는 미행이었지만 대신들도 거의 광증(狂症)의 왕세자가 도중에서 무슨 변

이 생길까 해서 연도 수령들에게 비공식적으로 대접하라는 통첩을 내렸다.  그런가 하면 노

론파에서는

  "왕세자가 자주 지방으로 돌아 다니는 것은 무슨 음모를 꾸리며는 계획인지 모르니 불온

한 언동을 내사하라."

하고 각도 수령에게 비밀 지령도 내렸다.  그러나 왕세자의 평양미행은 철두철미한 방탕의 

만유(漫遊)였다.  평양은 자연도 좋았지만 색향(色鄕)으로 유명했다.  세자는 평양기생들과 

마음껏 놀았다.  주색을 즐기는 그의 습성은 정치싸움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데에 가장 좋은 

약이었다.

  궁중의 모든 구속에서 벗어난 자유인으로서 마음껏 방탕한 유흥을 즐기는 세자는 평양의 

일류 기생은 모조리 수청을 들리겠다는 기세를 올려서 평양 화류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심

지어 산에 놀러갔다가 기생에서 여승으로 전향하고 수도하던 가선(假仙)이까지 농락했다.

  평양에서 서울로 돌아올 때는 그동안 정들인 평양 미인을 오륙명이나 가마에 태워 가지고 

몰래 돌아왔다.  그들은 가선을 비롯한 평양 기생들이었다.

  사도세자(思悼世子)는 기생들을 몰래 데리고 서울로 돌아왔으나, 처음에는 부왕 영조의 노

염을 두려워해서 동대문 밖에 숨겨 두고 밤으로 미행해서 정치적 공포를 방탕한 향락으로 

풀곤 했다.  정숙하기로 유명한 세자비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는 질투의 기색은 보이지 않

고 다만

  "대조(大朝=영조)께서 평양을 다녀오신 것도 아직 모르시지만 불원 아시면 또 엄교(嚴敎)

가 내릴 것입니다.  더구나 기생들까지 데려다가 밤으로 보러 다니시는 것을 아시면 큰 변

이 날지 모릅니다.  그러지 않아도 대조께 반역의 뜻이 있다고 참소하는 무리가 있는 때인

만큼 조심하셔야 하옵니다."

  "동궁비답지 못하게 질투하는 거요.  언제 역적으로 몰려 죽을지 모를 몸이니 죽기 전에 

지랄이라도 싫도록 해보겠소."

  사도세자는 영조로부터도 미친 자식으로 구박을 받아 온지가 오래였고 영조를 극도로 무

서워하는 공포증은 마침내 일종의 정신병 환자의 증세를 나타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조가 세자에게 왕위를 빼앗길까 오해하고 대노한 사건도 이미 십년 전인 영조 

이십육년에 있었던 일이다.  그때 사건은 사도세자가 홍역으로 죽다 살아난 병후였는데 마

침 대간(臺諫) 홍준해(洪準海)가 영조에게 세자를 너무 엄하게 다루지 말고 인자하게 다루라

는 의미의 상소를 올렸다.

  그때는 아직 당파들이 세자를 이용하려고 하지 않았고 순수한 교육적 의미에서 올린 홍준

해의 상소였다.  그러나 영조는 대노하고 소년 세자를 더욱 엄하게 몰아대었다.  세자는 중

병 끝의 약한 몸으로 눈이 쌓인 마당에 엎드려서 용서를 빌었다.  눈이 펑펑 내려서 세자의 

몸을 파묻어도 용서할 때까지 땅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노기는 다시 폭발해서 그 해 섣달 십오일에는 영조가 창의궁으로 가서 왕실의 어

른인 인원왕후(仁元王后)에게

  "세자에게 전위(傳位)하겠습니다."

하고 화풀이까지 했다.  그러나 노령으로 귀가 어두운 인원왕후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상감 좋을 대로 하오."

하고 지나는 말로 대답했다.  그러나 영조는 자교(滋敎)의 허락까지 받았으니 세자에게 전위

(傳位)하고 물러나겠다고 역정을 부렸다.

  이에 대해서 세자는 망극해서 시신에게 곧 영조의 번의를 애원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

리고 인원왕후도 귀가 어두어서 내용도 모르고 한 마디 잘못 대답한 것을 알고 영조에게 빌

다시피 해서 겨우 무마시켰다.

  이때 세자는 망극해서 손지각(遜志閣) 뜰 얼음 위에 짚자리를 깔고 대죄(待罪)하다가 다시 

창의궁 앞에 엎드려서 빌었다.  그때 세자는 부왕의 노엽게 한 불효를 탄식하고 머리를 돌

에 부딪혀서 망건이 찢어지고 이마에 피가 흐르는 상처까지 입었다.  이로써 영조는 화를 

풀었으나 그때부터 세자는 정신적으로 광병의 징조가 나타났다.

  세자는 부친을 염라대왕같이 무서워했다.  낮에도 귀신이 보인다고 야단을 했다.  그리고 

부왕과 스승이 강권하는 유학경서(儒學經書)는 읽지 않고 불경과 도경(道經)을 읽는 버릇도 

생겼다.  도경의 하나인 옥추경(玉樞經)을 읽고 도를 닦으면 잡귀를 물리치고 도술을 부리게 

된다고 마음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옥추경을 읽은 뒤에는 더 귀신을 무서워했다.  이 귀신은 공포증에서 생긴 변형된 

영조의 환영(幻影)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옥추(玉樞)라는 글자조차 무서워 했고 옥추단(玉樞

丹)이라는 패물까지 무서워서 가지지 못했다.

  천둥소리나 번갯불도 무서워해 정신을 잃었고 그런 글자만 봐도 혼돈하는 경계증(驚悸症)

이 고질이 되었으니 일종의 광병(狂病)이었다.  그러다가 여관(女官=英嬪朴氏))을 가까이 해

서 아이를 배자 영조의 꾸중이 두려워서 낙태시키려고 하다가 못하고 영조 삼십년에 은언군

(恩彦君) 인( )을 낳은 후, 영조의 엄한 꾸중으로 벌벌 떨며 지냈다.

  영조 삼십이년에 세자는 모친상을 당해서 정신상에 더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런데 영조의 

총애를 받는 후궁 문숙의와 친정 동생 문성국(文聖國)이 사사건건 세자의 욕을 고자질 했다.  

그래서 영조는 신화와 궁녀들 면전에서도 죽일놈 미친놈하고 엄한 꾸중을 했다.

  세자는 이때부터 울화병이 점점 격화해서 궁중의 내관(內官)들을 매질하는 광증이 생겼고, 

칼로써 직접 궁중비복을 찔러 죽이는 살인극도 여러번 저질렀다.

  "동궁은 살인광(殺人狂)이다.  걸리면 죽는다.  피하는 게 제일이다."

하고 궁중의 내관들과 비복들은 세자를 두려워하고 벌벌 떨었다.  그리고 다음해 영조 삼십

삼년부터는 해괴하게도 옷에 대한 광증이 생겼으니 의대병(衣帶病)이라고 불렀다.  아내 혜

경궁 홍씨는 이 의대병 때문에 수십 벌의 새 옷을 해대느라고 죽을 고생을 했다.  궁중의 

비용으로도 동궁에 대한 예산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혜경궁 홍씨는 친정 부친 홍봉한(洪

鳳漢)에게 호소해서 친정 신세를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세자는 귀신을 위해 놓고 새 옷을 모두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고 찢어 버리고, 또 옷 입히는 시중을 잘못 든다고 마구 때려서 상하게 했다.  이런 의대병

은 죽을 때까지 육, 칠년이나 계속되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한벌을 입으면 그 옷이 더럽고 

해질 때까지 벗지 않아서 마치 거지 같은 주제로 지냈다.  그럴 때 새옷으로 갈아입히려고 

하면 그 사람을 또 때려서 피흐르는 것을 보고 웃었다.

  그러나 정권욕에 눈이 어둔 당파들은 이렇게 부자간의 불화로 정신병까지 든 세자를 업고

서 반역음모를 꾸몄으니 실로 무자비한 망동이었다.

  부왕에 대한 공포증과 정신착란증은 그런 것을 다 잊어버리려는 핑계 비슷한 자포자기의 

방탕으로 날로 기울어졌다.  동궁 처소 후원에서 말타기, 활쏘기, 칼쓰기로 울화를 풀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대조(大朝)께서 내가 무술놀이 하는 것을 위험한 음모 준비로 뒤집어 씌우려 한다."

하고 누가 고하지 않은 일을 지레 겁을 먹고 모조리 파괴해버렸다.  그리고

  "대조가 나를 잡아 죽이려 하니 깊이 숨어야겠다."

한 후 횐취정(環翠亭)에 숨어서 나오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후원에 땅을 파고 그 속에 들

어가서 숨기도 했다.  굴로 내려가는 출입구 뚜껑 위에도 뗏장을 덮고는 어두운 굴 속에 틀

어박혀서 오뉴월의 한증막 같은 더위도 참았다.  그래서 정신적인 광증은 마침내 육체적 건

강까지 상케하고 중병이 들어버렸다.

  그래도 밤으로는 동대문 밖에 데려다 숨겨 둔 가선(假仙)을 비롯한 평양기생을 보러 다녔

다.  그런 방탕은 점점 심해져 마침내는 궁중에까지 데려다가 건달패, 동궁 시신들을 데리고 

밤을 세우며 놀았다.  세자비 혜경궁은 모든 것을 병으로만 돌리고 질투 같은 것은 한번도 

나타내지 않았다.  

  어느날 무슨 바람인지 세자는 오래간만에 돌연 혜경궁 방을 찾아와서는 우는 소리를 했

다.  

  "대조의 노염이 아무래도 무사하지 못할 것 같소."

  "설마 그럴리야 있겠습니까?"

하고 세자비는 남편을 위로했다.

  "세손만은 귀여워 하시니까, 나는 죽여버려도 국본(國本)엔 지장이 없을 거 아니요."

  "병환 때문에 그런 지나친 공포를 느끼시지만 그럴수록 대조께 안심하시도록..."

  "흥, 모를 소리.  나를 점점 더 미워만 하시니까, 동궁을 폐위(廢位)하고 죽여버린 뒤에 세

손은 죽은 형님 양자로 빼앗아 가실 거요."

  혜경궁은 이럴 때의 남편 동궁의 정신이 성한 사람 같으므로 더욱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가선을 비롯한 계집들과 밤을 새우며 방탕한 잔치를 하는 광경은 마치 상가(喪家)

와 같았다. 

 주효가 낭자한 잔치상도 마치 귀신의 난장판 같은 것을 만들어서 그 속에 들어가서 송장처

럼 누워서 잤으며, 나인들도 함부로 강간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살상하기를 예사로 했다.

  세자의 이러한 방탕과 광증의 행패가 심해지자 부왕파에 속하는 노론파에서는 세자를 위

하는 소론파를 숙청하는데 절호의 기회라고 보고 흉계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것도 세자를 

직접 해치는데 충분한 증거를 잡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영조도 이제는 형식상으로 세자에게 대리(代理)를 시키고 직접 정치엔 관계하지 않았으므

로 어린 세손에게 글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었다.  근력도 노쇠해서 전과 같이 당파

싸움도 강경히 금하지 못하고 오직 고집만을 전보다 심해서 일종의 노망증까지 걸려 있었

다.

  "너는 아비를 닮지 말고 공부를 잘해서 장차 좋은 임금이 되어야 한다."

  아들에 대한 실망과 증오심은 어린 손자에게까지 이런 말로 훈계했으나, 세손은 어린 마

음에도 조부와 부친의 나쁜 사이가 자기 부자지간까지 이간하는 듯하여 민망하고 가슴 아팠

다.

  영조 삼십팔년 여름 마침내 세자와 영의정 신만(申晩)과의 사이가 극도로 악화했다.  신만

은 영조에게 세자에 대한 걱정을 여러 가지로 말을 올렸는데 그것이 모두 세자의 잘못에 대

한 선후책이었다.

  "영의정 신만이 대조께 내욕을 고자질해 바쳐서 대조의 노염이 심하였다."

  세자는 그런 생각에서 울화를 터뜨렸다.  그러나 세자의 지위로서도 영조의 신임을 받는 

영의정 신만에게 직접 화풀이를 할 수가 없자 그의 아들인 영성위(永城尉)를 아비 대신 잡

아다 죽인다고 별렀다.  영성위는 세자의 누이동생 화협옹주(和協翁主)의 남편이었다.

  "영성위를 잡아다 죽여야 한다."

  세자는 날마다 별렀다.  만일 세자와 만나기만 했으면 직접 칼로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겁을 낸 영성위는 세자의 그런 눈치를 알고 일체 궁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큰 소리

로 벼르기만 하면서 화합옹주에게 자기 일을 영조께 잘 말해 달라고 편지로 애원한 것도 처

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효과가 없자 영성위를 위협하려고 영성위의 집에 관원

을 보내서 관복을 비롯한 그의 패물과 일용품을 압수해다가 불살라버렸다.

  "내가 직접 대조께 가서 억울한 사정을 아뢰겠다."

하고 영조를 만나려고 했으나 부왕과 세자를 싸움 붙이려고 안내할 신하들은 없었다.


  [ 思悼世子 ]   < 뒤주속에 世子가 >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思 悼 世 子 

    뒤주 속에 世子가



   노론파의 행동파 구실을 하는 중인(中人) 건달 나경언(羅景彦)은 영조 삼십팔년 윤오월 

십일일에 형조참의(刑曹參議) 이해중(李海重)에게 중대한 밀고를 했다.

  "대감, 요즘 세자께서 큰 일을 꾸미신다는 소문이 있는데 알고 계십니까?"

  "자네 그게 무슨 소린가, 누구한테 그런 말을 들었는가?"

  "소인의 형이 액정별감 상언(尙彦)이 아닙니까."

  액정별감은 궁중 하인들의 감독역이다.

  "아, 그렇지."

  "대감, 실은 소인 형의 말이온데, 세자께서 노망든 부왕을 들어내고 임금이 되시려고 바로 

무슨 변을 일으키신답니다."
  
  "에잇, 그런 망극한 말을 함부로 하는 법이 있는가?"

  "대감께서 형조참의시니까 미리 아시지 않습니까?"

  이해중은 전 영의정이요, 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에게 그런 밀고 사실을 말했다.

  "형조참의의 직책상 이런 사건을 상감께 아뢰지 않을 수도 없고, 그러자니 부자 사이의 

의를 끊는 것 같기도 해서 망극하오.  홍대감은 국구(國舅)의 관계이기도 하니, 이 문제를 

잘 조정해서 무사하게 해주시오."

  그러나 홍봉한으로서도 사위를 역적으로 고발 할 수도 없고, 또 그것이 분명히 어떤 일파

의 날조한 음해인 줄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사위를 두둔하고 변명하기도 거북해서 망설였다.

  "나로서 어찌 이런 문제의 시비를 따질 수 있소.  이참의가 상감께 잘 말씀 드려서 공연

한 풍설이라고 사실을 밝혀 주시오."

  "나로서도 실로 난처합니다."

  이해중과 홍봉한은 서로 책임을 미루려고 했으나 결국 이해중이 변(變)을 고하는 상소를 

올렸다.

  "에잇, 궁중에서까지 대역(大逆)의 변이 생기다니.  내가 친히 조사하겠다."

하고 영조는 상을 치면서 대노했다.  좌우의 신하들은 깜짝 놀랐다.  여기서도 노론파와 소

론파의 반응은 정반대로 달랐다.

  "이 문제는 심중히 사실을 밝혀야 하겠으니 상감께서는 진정하시고 일단 사헌부에 맡겨 

주십시오."

  이런 의견은 세자를 두둔하는 소론파의 의견이었다.  그들도 대노하는 영조 앞에서 그것

이 노론파의 중상모략이라고 단언하고 나서진 못했다.

  "사세가 급박한지도 모릅니다.  빨리 친국(親鞫)하시되, 상감님 신변이 위험하오니 경호군

을 풀어서 주위를 엄중히 경호해야 하옵니다."

  "음, 곧 경호군을 대령시켜라.  그리고 모든 궁문을 굳게 닫아라."

  성낸 영조는 엄명을 내렸다.  그리고 전임 시신과 현임 대신들을 급히 소집했다.  이 소문

이 장안에 퍼지자 인심은 흉흉했다.

  "이크, 기어코 궁중에서 골육지간에 피를 흘리게 됐군."

  "동궁이 하도 방탕만 하고 미친 병까지 걸렸으니 노론파에서 동궁파를 없앨 흉계다."

  "아냐, 동궁이 미친 행세한 것도 대역의 흉계를 숨기려는 거짓 미친 짓이었다는군.  정말 

미친 사람이 그렇게 계집을 밝힐 수 있어.  글공분 않고 무술만 익힌 것을 봐도 알 거 아닌

가."

  민간의 유언비어도 자연 두 갈래로 갈라졌다.  그것은 반대파 쌍방에서 풍설을 서로 조종

하는 관계이기도 했다.

  "좌우간 나라 꼴은 말이 아니다.  노망한 부왕이 미친 왕자를 잡아 죽이려는 판국이다."

  "자식을 죽이지 않으면 아비가 죽을 테니까.  왕위와 목숨을 지키려면 그럴 수밖에 있겠

나?"

  이런 흉흉한 소동은 궁중에서 더욱 심했다.  세자도 죽을 각오를 하고 오월 십삼일에는 

혜경궁에게 비장한 마지막 편지를 보냈다.

 < 어젯밤의 소문이 심상치 않고 무섭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죽어서 모르거나, 요

행히 살면 종사(宗社)를 붙들어야겠지만, 죽을지 살지 모르겠소.  그러나 내가 죽어야지 세

손의 목숨이 보전될 것 같소.  그러니 이대로 죽은 후엔 빈궁을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소. >

  혜경궁은 남편의 비장한 편지를 보고 천지가 무너지는 듯 아득했다.  한편 세자의 모친 

선희궁도 왕실의 참변을 어떻게 해서든지 잘 수습하려 했다.  남편 영조의 끔찍한 각오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참변이 세자 뿐 아니라 세자비와 세손에까지 미칠까 두려웠다.  그러면 

국본(國本)의 계승조차 끊어지고, 궁중의 혼란은 격화되는 동시에 당파와 먼촌 왕족들까지 

왕위계승의 쟁탈전을 벌일 것은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희궁은 영조에게 눈물을 흘리

면서 아뢰었다.

  "상감의 결심을 아오며 더는 말 드리지 않겠습니다.  동궁의 하는 일은 사실이거나 아니

거나 모두 본 정신이 아닙니다.  병으로 그러니 어찌 책망하겠습니까.  처분은 하시더라도 

부자지정으로 은혜는 베푸셔야 하옵니다."

  "처분을 하면 그만이지 무슨 은혜를 베푼단 말이요?"

  "세손 모자를 평안케 하시도록..."

  "그 아비의 죄를 모자에게까지 씨울 생각은 없소마는 아비를 죽이려는 미친 자식은 용서 

못하오.  그것도 왕실의 일이라 열성(列聖)께 대한 면목으로도 처분하지 않을 수 없소."

  영조가 세자를 처분할 결심은 이미 요지부동이었다. 

  마침내 친국이 휘녕전(徽寧殿)에서 열렸다.  사도세자는 그 곳으로 끌려 나가기 전에, 세

자비 혜경궁이 있는 덕성각(德成閣)에 잠시 들려서 최후의 상면이 될지도 모르는 잠시를 함

께 지냈다.  그리고 거기서 담을 격한 휘녕전으로 간 뒤에, 바로 부왕의 노성이 들려서 혜경

궁은 피눈물을 쏟으며 울었다.  그러나 나인을 담밑으로 보내서 동정을 살피라 하고 남편의 

운명을 빌었다.

  친국의 장소는 살기가 돌고 있었다.  남태제(南泰齊)를 지의금(知義禁)으로, 한익모(韓翼謨)

를 판의금(判義禁)으로 임명했다.  이런 사람들을 거느리고 영조가 직접 재판을 통솔하는 형

식을 취했지만 모든 권한은 영조에게 있었다.  그리고 여러 대신들이 배석했다.

  "먼저 고변(告變)한 나경언의 증언을 듣자."

  영조의 명에 따라서, 역시 죄인 취급을 받는 나경인이 법정에 끌려 나왔다.  그러나 그는 

태연한 태도로 어전(御前)에 엎드려서 입을 열었다.
 
  "소신은 이번 일을 미리 알고서 상소코자 하였으나 미천한 몸이오라 상소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형조에게 사실을 여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사건 내용을 상세히 글로 기록해 왔

사오니, 먼저 이 글월을 올리옵니다."

하고 미리 준비한 고발문을 올렸다.

  < 동궁이 장차 나라를 새로 만든다는 소문이 떠돌아서 신이 그 내용을 알아 보고... >


  임금은 여기까지 읽고서 화를 버럭 내고, 그 문서를 세자의 장인 홍봉한에게 휙 던져 주

었다.

  "영상이 이 흉서를 읽어 보시오.?

 홍봉한은 영조가 자기에게 역정을 내는 태도에 황공해서

  "황공하옵니다.  신을 먼저 죽여 주십시오."

하고 엎드렸다.  그 흉서는 다른 법관과 대신들에게 회람되었다.  모두 침울한 안색으로 말

이 없었다.

  "나경언은 벼슬도 없는 일개 서민으로도 나라에 대한 충성에서 이런 흉사를 고발했는데 

여러 대신은 다들 알면서도 나에게 알리지 않았으니 그 심사를 알 수 없소.  저 나경언에게 

부끄럽지도 않소?"

  대신들은 여전히 묵묵히 앉았을 뿐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홍봉한은 더욱 책임을 느끼고

  "동궁을 불러 들여서 엄중히 책망하십시오."

  이런 정도의 말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세자는 홍화문(弘化問) 밖에 엎드려서 죄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조는 세자를 불러 들이라고 명했다.  홍봉한은 다시

  "그러나 죄인 나경언을 한 자리에 있게 하는 것이 미안하오니 나경언을 잠시 물러나게 하

십시오."

  나경언은 군사에게 끌려서 일단 퇴장하면서도 태연한 태도로 홍봉한을 불만스러운 시선으

로 쏘아보았다.  나경언이 퇴장한 뒤에 세자는 휘녕전 섬돌 아래 엎드렸다.

  "너는 나의 대리로서 정사는 버리고 지방으로 다니면 방탕한 짓을 했고, 인제는 해괴한 

계집들과 여승까지 궁중에 들여서 후궁을 삼았으니, 중년의 자식을 낳아서 왕자를 삼을 작

정이냐?  더구나 너는 나를 죽이고, 여승은 왕손의 어미를 죽인 뒤에 무슨 꼴로 나라의 임

금이 될 작정이냐?"

  영조는 부친으로서나 왕으로서나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토하면서 노발대발 했다.  듣던 

대신들이 민망해서 숨도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런 놀라운 광경을 홍화문 밖에서 지켜보던 소년 세손은 문 안으로 뛰어 들어가면서

  "할아버님, 아비를 살려 주십시오."

하고 울면서 애원했다.  대신들은 어린 세손의 효성에 측은한 눈물을 머금었다.  그러나 영

조의 아들에 대한 분노는 극도에 달했다.

  "너는 나가거라!"

하고 세손에게 호령했다.  세손은 하는 수 없이 쫓겨 나와 왕자재실(王子齋室)에서 엉엉 울

음을 터뜨렸다.

  혜경궁은 남편이 처형되기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나려고 칼을 들었으나 측근에 있던 사람들

이 칼을 빼았고 말았다. 혜경궁은 숭문당(崇文堂)과 휘녕전 사이의 건복문(建福門) 밑으로 가

서 세자가 친국 당하는 휘녕전 안의 동정을 살피려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영조가 칼을 

휘두르면서 호령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세자가 겁에 질려서 애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님, 그전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금후로는 아버님 분부도 잘 듣고 글도 읽겠

습니다."

  "여승과 기생들을 궁중에 들여다가 난잡한 행동을 하고, 심지어 대역의 음모를 한 죄를 

뉘우치고 하는 말이냐?"

  "그런 죄상은 억울한 말씀입니다.  그런 풍설의 출처가 알고 싶습니다."

  "네 가슴에 물어 봐라. 임금의 대리인 동궁 네가 죄인과 따지면 체면이 어떻게 되겠느냐?"

  "전부터 화증병이 있어서 저도 모르게 실수하는 일은 있었사오나, 이런 억울한 말씀에는 

정말로 미치겠습니다."

  "그 이상 더 미치겠느냐?  아주 미쳐 죽든지 자결하든지 해라.  보기고 싫다.  밖으로 나

가서 기다려라."

  세자는 휘녕전을 나와서 금천교(禁川橋)에서 죄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자가 나간 뒤에 세

자의 장인 홍봉한은 영조에게 조심스럽게 아뢰었다.

  "상감마마, 불충불효한 무고를 하여 상감 부자지간을 이간시킨 나경언을 극형에 처해서 

다시는 이런 흉화(凶禍)가 없도록 하십시오."

  "흉악한 죄를 고발한 충성된 백성을 왜 처형하란 말이요.  차라리 이런 흉한 죄를 덮어 

두려던 대신들을 벌할망정 정직한 백성은 벌할 수 없소."

  다른 대신들도 홍봉한의 변호에 동조해서 부자지간의 참변을 막으려고 애섰다.

  "상감, 대저 동궁께서 잘못된 점이 있다손치더라도, 신하로서 그 죄를 들추는 것은 임금의 

잘못을 폭로하는 불충이니 나경언의 소행은 엄벌해서 후세를 경계케 해야 하옵니다."

  "나경언은 일개 무식한 서민이지만, 그 충성은 대신들 보다 극진한데, 어찌 죄를 주겠소."

  "군주에 대한 고변자(告變者)는 자고로 죄를 주었습니다."

  대신들은 나경언의 죄를 주장했다.  그것이 비록 사실이라도 죄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노

론파의 벼슬아치들은 나경언 같은 건달을 이런 경우의 행동대로 이용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경언이 죄인으로 옥에 갇히게 되자, 그는 비로소 자기가 희생물로 죽지나 않을까 하는 겁

이 났다.  그는 옥으로 끌려 가면서

  "나는 동궁마마를 모함한 죄로 죽어 마땅하오나, 나에게 그런 고변을 하라고 시킨 김한구

(金漢耉)와 홍계희(洪啓禧) 등 노론파가 있습니다."

하는 배후관계를 폭로했다.  이에 당황한 노론파에서는 곧 나경언의 구명운동을 개시했다.  

문성국은 영조의 후궁 문숙의를 찾아가서 

  "누님, 나하고 친구이며 우리 파를 위해서 동궁의 죄를 고발한 나경언이 도리어 불경죄로 

죽게 되었소.  동궁의 죄를 자세히 상감께 여쭈어서 억울한 나경언의 목숨을 살려 주시오."

  "염려 마라.  이번에 미친 동궁을 처분하지 않으면 우리에게도 큰 화가 미칠 것이다.  내 

힘껏 상감께 말하겠으니, 옥중의 나경언에게 연락해서 안심하게 해라."

하고 간악한 요부 문숙의는 그날 밤에 영조를 선동해서 세자를 더욱 미워하도록 갖은 말을 

고잘질했다.

  다음날도 친국은 계속되었는데 영조는 우선 나경인을 구양 정도로 가볍게 다루려고 했다.  

그러나 재판장격인 남태재와 홍낙순(洪樂純) 등이 반대했다.

  "신하로서 임금 대저를 고발한 것만으로도 대역죄가 성립됩니다."

  "역적을 고발한 자는 상을 주어야 한다."

  왕의 고집은 대단했다.

  "세자를 역적이라고 부르시면 상감의 경우가 어찌 되십니까?"

  "경들의 왜 형식만 갖추려 하고 죄의 진상 조사는 피하려고만 하오."

하고는 영조도 나경언의 구명을 포기했다.  그래서 나경언은 노론파에게 이용만 당하고 억

울한 희생을 당했다.  그가 처형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영조는 또 대신들을 조롱했다.

  "경들도 나경언같이 충성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용기를 가지시오."

  "..."

  대신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영조는

  "나경언의 유족을 후하게 대우하라."

하는 분부를 내렸다.  영조가 일개 서민인 나경언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관대한 것은 세자에 

대한 분노가 얼마나 컸던가를 증명하는 태도이기도 했다.  이때야말로 소위 부왕파라는 노

론과 자왕파라는 소론들은 숨가쁜 암투를 벌였다.  나경언이 처형되자 문숙의를 중심으로 

세자배척의 운동이 더욱 속도가 가해졌다.  그와 동시에 위급해진 세자를 구하려는 운동도 

조심스럽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세자를 살리려는 구명운동을 영조의 노염에 불을 지르는 역효과밖에 지나지 않았

다.  어떤 충신의 말보다도 후궁인 요부 문숙의의 말을 믿게 된 영조의 마음은 아들을 원수

로 삼는 악마로 화해 버렸다.  문숙의는 세자의 생모까지 위협적으로 농락했다.

  "이번 사건으로 상감의 감정을 더 상하게 하면, 동궁 뿐 아니라 동궁빈과 세손에게까지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

  이런 협박에 놀란 세자의 생모까지도 영조에게, 세자는 처분하더라도 빈궁과 세손은 보호

해 달라는 애원을 했다.  이것은 생모까지도 세자를 죽이라고 승낙한 결과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세자 처단을 결심한 영조는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신 선원전(璿源殿)에 참배하고 중대한 

결의를 고했다.

  "불효 자식 때문에 열성께 큰 죄를 지을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자식이 아비 왕을 시역하

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 하는 수 없이 자식에게 자결을 권하겠으니 저의 이 고충을 용서하

여 주십시오."

  그런 최후의 절차를 밟은 뒤에, 영조는 친국장소인 휘녕전으로 나왔다.

  "인젠 동궁이 죽었구나."

  혜경궁은 남편이 오늘로 죽을 것을 직감하고 기절해 버렸다.  세자를 불러 낸 뒤에 승지

를 시켜서 세자의 관과 버선을 벗기고 뜰아래 엎드리게 했다.

  "더 말하지 않겠다. 속죄하려면 이 자리에서 자결하라."

  냉혹한 선언이었다.  부친이 아들에게 자살하라는 형식으로 죽이려는 것이었다.  

  "영의정, 세자가 자결하기 전에 먼저 세자위(世子位)를 폐하게 하오."

  "그런 것은 대신들에게 분부하셔서 심중히 정하도록 하십시오."

  영의정 신만도 민망스로워서 이렇게 아뢰었다. 

  "왕실에 관한 일은 내 집안 일이요.  내 말대로 하시오."

  영조는 영의정에게 호령했다.

  "아버님, 저를 살려 주십시오."

  세자도 이때만은 본 정신으로 목숨을 빌었다. 이마로 땅을 부딪쳐서 피가 낭자하게 흘렀

다.

  "대신들은 다 밖으로 나가시오.  내 집안 일로 경들의 수고를 끼치지 않게 하겠소."

  대신들도 하는 수 없이 밖으로 퇴장했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문 밖에서 동정을 살피던 

소년 세손이 울면서 들어왔다.  세손은 땅에 엎드린 부친(세자) 뒤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아비 대신 저를 처벌해 주십시오."

  "네가 또 왜 왔느냐?"

하고 시신을 시켜서 세손을 밖으로 데리고 가라고 명했다.  영조는 그 뒤에 칼을 빼어 들고 

세자 앞으로 내려갔다.

  "어서 이 칼로 자결해라."

  동궁의 시신들이 하는 수 없이 세자를 묶은 포승을 풀었다.  자살할 손을 자유롭게 해준 

것이다.

  "동궁의 시신들도 물러가라."

  영조는 또 명령했다.  시신들도 하는 수 없이 물러났으나 한림(翰林) 임덕제(林德 )만은 

세자 옆에 엎드려서 함께 죽으려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왕은 군사를 시켜서 그도 끌

어내 보냈다.  세자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는 듯이

  "한림, 한림까지 가면 어떡하오."

하고 한림의 옷자락을 잡고 울었다.  그러나 군사들은 세자의 손을 잡아 떼고 한림을 끌어 

냈다.

  "아버님, 살려 주십시오."

  모든 신하가 쫓겨 나가고 군사들만 남은 적막한 휘녕전 안에는 냉혹한 살기만 등등했으나 

세자는 부자지간에만 통할 수 있으리라는 최후의 애원을 했다.

  "네 죄를 알거든 어서 이 칼로 자결하라."

  영조는 아들에게 자살을 권했다.  그러나 세자는 살려 달라고 애원하며 차라릴 부친이 직

접 죽일지라도 자살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설마 죽일까 하는 일루의 희망이 없지도 않았

기 때문이다.

  "너희들 뒤주를 가져 오너라."

  영조는 자결하지 않는 세자를 뒤주 속에 넣어서 죽일 생각으로 내관(內官)에게 명했다.  

내관들은 소주방으로 가서 큰 쌀 뒤주를 운반해 왔다.

  "너 죄를 용서 받으려면 이 속에 들어가서 천지신명에게 조용히 빌어라."

  "아버님, 그러면 용서하시겠습니까?"

  세자는 망설이면서도 칼보다는 좀 안심한 듯이 물었다.

  "어서 들어가서 속죄하라."

  세자는 하는 수 없이 뒤주 속으로 들어갔다.  큰 뒤주였지만 간신히 무릎을 세우고 앉을 

정도의 넓이었다.  영조는 손수 뚜껑을 탁 닫고, 쇠를 철컥 잠갔다.  그 순간 뒤주 안은 암

흑세계로 변했다.

  (언제나 용서하고 뒤주에서 내주실 것인가)

  세자는 그런 일루의 희망을 걸었으나 그것이 산송장의 관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왕은 쇠잠긴 뒤주를 엄중히 감시하라고 명령하고, 풀을 뜯어다가 퇴비(堆肥)처럼 덮어 쌓

았다.  폭양 아래서 풀더미는 찌는 듯한 열기로 뒤주 속의 세자를 질식시켰다.  그리고 사흘

만에 세자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서인(庶人)이 된 세자의 아내 혜경궁은 영조께 상소하고 세손과 함께 친정 홍봉한 집으로 

물러 나갔다.  혜경궁은 자결하고 싶었으나 아들(세손)의 장래를, 위해서 모진 목숨을 끊지 

못했고 그때부터 늙을 때까지 눈물로 쓴 사도세자의 장편 비극을 남겼는데, 이 저술이 국문

학의 중요한 고전(古典)의 하나인 [한중록(恨中錄)]이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서 죽인 노망한 영조도, 나중에 노론파의 음모인 것을 깨닫고 후

회 했으나, 죽은 아들을 살릴 수는 없었다.  총애하던 후궁 문숙의를 귀양 보내고 음모에 관

련한 노론파를 처형했으나 그래도 영조는 즉위 이래 오십여년 동안이나 당파싸움을 금지하

려고 소위 탕평정책(蕩平政策)을 써보았으나, 자신도 노망한 만년에가서는 그 당파싸움에 말

려들어서 자기 아들 사도세자까지 참살했던 것이다.


  [ 끝없는 戚臣勢道 ]   < 비단폭에 서린 꿈 >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끝없는 戚臣勢道 

    비단폭에 서린 꿈



   제이십이대 임금 정조(正祖)는 학문을 좋아했다.  그래서 학문에 대한 정열은 수많은 편

찬 사업을 해서 문운(文運) 발전에 공헌이 컸다.  그러나 문약(文弱)으로 왕실중흥(王室中興)

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영조가 일생을 두고 금지하려던 당파싸움도 완전히 없애지 못한 끝이어서, 영조가 

승하하고 정조가 즉위(卽位)할 때부터 다시 발호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척신(戚臣)에 의한 전형적(典型的)인 세도정치로서 모양을 달리하고 나타나게 되었

다.  그 뒤의 순조(純祖), 헌종(憲宗), 철종은 인물부터가 무능하거나 무식한 임금으로서 조선 

역대를 통해서 척신들의 발호와 왕기쇠미(王氣衰微)를 가져온 대표적인 인물이다.


   철종(哲宗)은 강화도에서 글도 배우지 못하던 빈농소년(貧農少年)이었다.  열강(列强)의 세

력이 조선에 밀려 들어서 중대 사건이 많이 발생한 것도 이때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영

웅 대원군(大院君)과 여걸(女傑) 민비(閔妃)가 이런 거센 외국의 폭풍을 가로맡아 막기는 했

지만 대원군과 민비를 중심으로 한 싸움이 척신 암투와 바꿔짐에 따라서 그 영향도 커지는 

동시에 결과적으로 이씨 왕조를 멸망의 길로 몰아 넣었던 것이다.


   정조는 영조가 뒤주에 넣어서 참살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외아들이었다.  영조의 재위

(在位)시에 세손(世孫)으로 책봉되어서, 부친과는 반대로 어려서부터 조부 영조의 사랑을 받

았다. 

  부친 사도세자가 어느날 밤에 자다가 용꿈을 꾸었다.  세자가 창공을 나는 용으로부터 찬

란한 주옥(珠玉)을 받은 꿈을 꾸고 잠을 깨자 혜빈(惠嬪) 홍씨(洪氏)에게 기이한 꿈 이야기를 

하고

  "백견(白絹)을 내주오."

  "왜요?"

  "하도 훌륭한 용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니 그림으로 그려 두어서 이 대몽(大夢)을 기

념하겠소."

  그림을 잘 그리는 남편의 취미려니 했으나 그 이상으로 기뻐한 세자비(世子妃)는 부끄러

운 듯이 말했다.

  "동궁(東宮)께서 제 대신 태몽(胎夢)을 꾸셨으니 장차 나라에 경사가 있을 징조인가 하옵니다."

  "허허 부부일신이니까,  남편도 태몽을 꿀 수 있겠지."

하고 흰 비단 폭에 생동하는 용을 꿈에 본 모습대로 그려서 벽에 걸고 기뻐했다.  그리고 

각별한 감명으로 동침한 그날 밤에 과연 잉태해서 낳은 것이 세손(世孫)으로서 나중에 조부 

영조의 대를 이어서 임금이 되었다.

  용의 태몽으로 탄생한 세손은 과연 용안(龍顔)이 준수했고 어진 웃음소리도 종소리같이 

맑게 울렸다.  그런데다 그 얼굴이 미인이던 모친의 모습을 닮으므로 모친의 기쁨은 더욱 

컸다.  그리고 기질은 부친을 닮아서 백일 전에 일어섰고 돌이 되기 전에 걸음마를 했다.  

말을 하기 전부터 글자를 보면 좋아했으며 네 살 때는 글자를 곧잘 외었다.  영조와 글 선

생은 세손의 글 재주가 차차 비범한 것을 보자 동국성인(東國聖人)이 될것이라고 기뻐했다.

  정조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서 일류 학자의 실력이 있었고 재위 이십사년 동안 역사

와 문학을 학자들에게 편찬시키는데 온 정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밖의 모든 정치문제는 

신하들에게 맡겼다. 이 때문에 척신들의 세도정치를 조장하는 폐단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정조는 임금이 되었어도 학문에 흥미를 가졌기 때문에 정사에는 도대체 열성을 보이지 않

았다.  그러므로 정권을 노리는 무리들은 정조의 이복형제(異腹兄弟)들을 추대해서 임금으로 

세우고 정조를 몰아내려는 반역 음모를 여러번 일으켰다.

  정조에게는 이복형제가 셋이나 되었다.  즉 영빈 임씨(英嬪林氏) 소생의 은언군(恩彦君), 

숙빈 임씨(肅嬪林氏) 소생의 은신군(恩信君), 귀인 박씨(貴人朴氏) 소생의 은전군(恩全君)이다.

  정조가 임금이 된 원년(元年)에는 홍상범(洪相範) 등이 은전군 이찬(李 )을 임금으로 세우

려는 반란을 음모했다.  홍상범의 부친 홍술해(洪述海)는 황해감사(黃海監司)로 있다가 재물

을 탐낸 죄로 먼 섬으로 귀양을 가자 그의 일족인 홍상간(洪相簡)이 원한을 품고 역적음모

를 하다가 잡혀 죽었다.  그리고 그의 일족은 모두 귀양을 가거나 폐적을 당했다.

  홍술해의 아들 홍상범과 홍상길(洪相吉)은 전주에 귀양가 있다가 부친과 일족의 원수를 

갚으려고 서울로 잠입해서 홍필해(洪弼海), 강용휘(姜龍輝), 전흥문(田興文) 등과 결탁하고, 궁

녀들과 짜서 정조를 침전에서 시역하고 은전군을 왕으로 세울 흉계를 착착 진행했다.  그러

는 동안에도 홍술해의 처와 첩은 무당에게 정조가 망하고 은전군이 왕이 되도록 저주의 굿

까지 했다.

  그후 장정 오십여명에게 무장을 시킨 뒤에 홍술해는 추석이 가까운 밝은 달밤에 궁중 기

습(奇襲)을 하려고 복면을 한 후 밤중에 행동을 개시했다.  홍술해와 전흥문과 강용휘 세명

이 맨 먼저 궁궐의 담을 넘었으나 파수병에게 들켜서 죽음을 당했다.  사건에 격분한 대신

들과 대사헌(大司憲) 및 종친관(宗親官)들은

  "은전군을 법대로 다스려서 이런 흉계의 근본을 없애야 하옵니다."

하고 은전군에게 독약을 내려서 죽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음이 온순하고 우애가 두터

운 정조는

  "은전군이 불우한 환경에서 곤궁히 지낸다 하나 과인이 후히 대접 못한 것이 후회되오.  

더구나 이번 음모사건은 은전군의 본의가 아니고 오직 흉한 자들이 명목상 업고 나섰을 것

이니, 은전군을 처형하는 것은 형제지정에서 차마 할 수 없소."

하고 반대했다.

  "국가의 대죄를 사친(私親)의 정리로 용서하면 금후에 이런 변이 그치지 않을 것이니 안됩

니다."

  정조를 옹위하는 신하들은 자기들의 반대세력에 이용될 은전군의 처벌을 강경히 주장했

다.

  "아아, 사실 여부를 막론하고 왕위 다툼으로 형제지간에 이런 불행이 있다니 참으로 조상 

열성(列聖)에 대한 면목이 없소."

  정조는 은전군을 미워하기 전에 자기의 권한으로 형제에게 독약을 내리는 것이 슬펐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신하들의 주장대로 독약을 내려서 은전군의 목숨을 끊게 했다.

  이런 역적사건이 있은 후에도 당파싸움으로 몰린 불평파에서는 경향 각처에서 때때로 역

적음모 사건을 일으켰다.

  충주에 사는 이술조(李述祚)는 홍인한(洪麟漢)일파가 정권을 제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반대

파를 역적으로 몰아 죽인다고 분개하고 대담하게도 충주 목사에게 직접 장담을 하고 나섰

다.

  "조정에 역적 홍인한이 제 마음대로 학정을 하면서 유능한 충신들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

고 있소.  그 놈을 없애려면 그 역적을 신임하는 암군(暗君)을 갈아 치워야 하겠으니, 나는 

군사를 일으켜서 의병대장이 되어 대궐을 쳐들어 가서 나라를 바로잡겠소.  목사도 언제 역

적으로 몰려 죽을지 모를 사람이요.  나의 의거에 찬동하시오.  성사 후엔..."

하고 목사를 꾀이는지 위협하는지 모를 소리로 호언장담을 했다.  충주 목사는

  (이자가 미쳤나?  정말로 반란군을 일으킬 생각인가?  당파적인 불평의 발악인가?)

  그리고 목사는 그 사실을 곧 나라에 밀고했다. 조정에서는 깜짝 놀라 어사를 보내서 이술

조를 잡아 처벌했으나 아무런 군사 모집의 사실도 없고 단순한 당파적인 불평임이 밝혀졌

다. 이런 불평 언동은 각처에서 발생했다. 그리고 숙청당한 홍국영(洪國榮)의 잔당은 수령의 

제도가 놀라왔던 만큼 잔당들의 세력도 아직 남아 있어서 시국을 비방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홍국영에게 등용되었던 송우암(宋尤庵)의 후손 송덕상(宋德相)은 평산(平山) 땅의 신

형하(申亨夏)와 함께 소론파를 누르려는 음모를 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서 귀양살이를 했다.

  "그런 역적의 무리는 귀양으로 부족하니 응당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득세한 소론파에서는 불온한 말 한 마디만 해도 잡아 죽여야 한다고 왕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파쟁에 골치를 앓던 정조는

  "북은 칠수록 소리가 나는 법이요.  이런 불평이 자꾸 나는 것은 나의 부덕의 소치요.  또 

노론 소론이니 시파(時派)니 벽파(僻派)니 하는 파벌 싸움의 여파요.  그러나 파벌 싸움부터 

없애야 하오."

  정조 즉위 당시에 세도를 소론파가 부리고 있었으나 왕의 힘으로도 막을 수가 없었다.  

다만 이런 문제가 날 때마다 마치 학자 모양으로 너희들 소론파는 불우한 노론파를 너무 학

대하지 말라는 정도로 설교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왕의 설교에 귀를 기울일 신하들은 

아니었다.

  충주와 평산에서의 반란 문제는 세력도 없는 자들의 작은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조정안에서도 정조를 비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지평(持平) 지위에서 쫓겨난 이유백(李有

白)과 공조참의(工曹參議) 이택징(李澤徵)은 공론했다.  

  "임금은 규장각(奎章閣)에 벽파(僻派) 놈들만 모아놓고 국정을 그리치고 있다.  규장각을 

때려 부셔야 하오."

  "놈들 세력을 무슨 방법으로 때려 부수겠소.  말만 들어도 시원하지만 공연히 또 역적으

로 몰리게."

  "충신이 역적으로 몰려 죽는 것이 두려워서 의로운 일을 못하겠소?  방법이야 합법적으로 

상소를 해서 상감의 잘못을 깨우쳐 드리는데서부터...  그래도 효력이 없으면 다른 방법을 

쓰는 수밖에..."

  그들은 은근히 실력 행사도 사양치 않겠다는 음모를 했다.  그리고 이택징은 곧 시폐(時

弊)를 규탄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상소문으로 역적에 몰리는 일이 많았으므로 그들은 죽을 

각오로 그 상소문을 올렸던 것이다.

  < 근자에 규장각은 승정원(承政院) 이상의 집정(執政) 기관으로 변해서 모든 국정이 거기

서 논의되고 집행되니, 앞으로 규장각은 본무(本務)로 돌아가게 하셔야 합니다.  만일 지금

과 같이 하실 바에는 규장각과 승정원 둘중의 하나를 없애버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규

장각은 본시 상감께서 사사로이 학문을 연구하시는 곳입니다.  학문을 숭상하고 학자를 대

우하시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만일 중대한 국사를 규장각의 신하들로 하여금 처리케 한다

면 상감은 결국 규장각의 사신(私臣)으로 하여금 국정을 요리하게 하는 결과가 됩니다.  금

후로는 전교(傳敎)를 비롯한 모든 국정문제는 승정원을 통해서 하시기 바라옵니다. >

  이런 상소문의 내용은 국왕을 간(諫)하는 신하의 말로는 과격한 표현이었고,  은근히 규장

각에서 과분한 총애를 받는 벽파에 대한 독설이었다.  정조는 이에 대해서 노하지 않고 여

러 가지로 알아듣도록 이야기했다.

  규장각과 승정원은 물론 성격이 다른 기관이지만, 규장각의 사신(私臣)이라도 좋은 인물은 

얼마든지 승정원의 공신(公臣)으로 등용하겠으며, 그것이 오히려 당파를 초월한 인물 중심의 

인사정책이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규장파의 인물은 벽파 중심으로 되어 

있었고 승정원의 고관도 거의가 벽파일색이었다.

  그러나 대사헌(大司憲)은 이택징을 반역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들고 일어났다.  이에 대해

서 이유백은 이택징의 상소를 옹호하는 상소문으로 대항했는데,  그 내용은 더욱 용감하게 

청풍김씨(淸風金氏)의 중전(中殿)에게까지 미쳤고, 중전의 친정 출신인 김시묵(金時默)의 죄상

까지 들추어서 그를 숙청해야 한다고 극언(極言)했다.

  그러나 결과는 이택징과 이유백을 귀양 보내라는 왕명이었다.  사태가 이쯤되자 자기에게

도 화가 미칠 것을 겁낸 이유백의 아우 이유원(李有遠)은 자기만 살아나려고 형까지 파는 

비굴한 행동을 했다.  그것은

  "이유백과 이택징은 반역의 뜻을 품고 공모해서 상소문을 전후로 올렸습니다.  사전에 그

런 일을 알고 미리 보고하지 못한 속죄를 하기 위해서 늦게나마 사실을 아룁니다."

하고 사헌부(司憲府)에 밀고한 것이었다.  따라서 귀양갈 형과 이택징을 결국 사형시키게 하

고 말았다.

  (내게 그런 비겁한 동생이 있었으니 누구를 탓하랴.  나를 죽이고 너만 살면 얼마나 좋을

것이냐?)

  형 이유백은 탄식하면서 조용히 사형을 받았다.

  (그놈도 우리와 뜻을 같이 했습니다.)

하고 아우를 고발했으면, 아우 이유원도 사일등(死一等)을 감해 받더라도 귀양살이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형만한 아우가 없다는 격으로, 형은 아우에 대하여 보복 밀고는 하지 않고 

죽었다.

  그러나 반대파에서는 이 사건을 발전시켜서 귀양 보냈던 송덕상, 신형하를 비롯한 일파 

등 일곱명도 완풍군(完豊君)을 임금으로 내세우려는 음모를 했다고 역적으로 몰아서 모조리 

사형에 처했다.  이들은 모두 득세한 소론파에 몰린 노론파들이었으므로 노론파의 불평과 

불안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던 중 정조 팔년에 소용 서씨(昭容徐氏)가 정조의 아들을 낳았다.  서자였지만 왕세자

(王世子)로 책봉했다.  중전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이 원자(元子)를 왕세자로 삼은 것이

다.  장차 임금이 될 중대한 자리였다.  왕실에서는 이 경사를 영희전(永禧殿)에 봉고(奉告)

하는 식전(式典)을 올리게 되었다.  고백헌관(告白獻官)인 김하재(金夏材)는 직무상 하는 수 

없이 제전을 집행하였으나 예방승지(禮房承旨) 이재학(李在學)에게 정조를 비방했다.

  "죄없는 노론파를 모조리 잡아 죽이더니, 인젠 젊은 중전이 세자를 낳을 때도 기다리지 

않고 서실 소생을 왕세자로 봉하니 나라 꼴이 어찌 될지 걱정이요.  충신들은 이때 일어서

서 나라를 바로 잡아야 하오."

  그는 믿는 친구라 이런 불평을 말했다.  그러나 이재학은 그런 말을 듣고 그냥 있으면 나

중에 자기도 역적으로 몰려서는 죽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곧 친구를 배반하고 왕에게 

밀고했다.  왕은 김하재를 잡아다가 직접 심문했다.  그러나 김하재는 왕에게 당당히 소신을 

진술했다.

  왕은 당파싸움을 말로만 금하면서 실제로는 소론파만 중용하고, 소론파가 날조한 반역죄

로 노론파의 충신을 얼마나 죽였는가.  중전이 아직도 젊은데 왜 좀 생남을 기다리지 않고 

서실 소생을 왕세자로 봉하느냐고 공박했다.

  "이 대역무도(大逆無道)한 놈을 처치하라."

  왕은 대노했다.  그러나 김하재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신은 죽겠으나 억울한 충신을 죽이는 것은 신으로 그치시기만 바랍니다."

하고 조용히 형장으로 끌려나갔다.  김하재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죽은 뒤에 정조는 

아무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조용히 김하재의 말을 되새겨 보았다.  처음에는 노

론파의 유력한 집안으로 역적죄로 끌려서 죽은 사람을 세어보고 몸에 소름이 끼쳤다.  다음

에는 소론파의 대가집을 생각해 보았다.  역시 역적에 몰린자가 많았다.

  (이러다가는 어느 파를 믿어야 할까.  모두 저희들끼리 세력싸움으로 죽이고 죽는 미친 

짓이 아니냐?)

  정조는 그런 생각을 심각하게 했다.  그래서 원로대신들과 상의한 뒤에

  "선왕 때부터 국사범으로 죽은 자는 할 수 없으나 귀양 간 자들은 전부 용서해 돌려보내

라."

하는 국법의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그 덕택으로 거의 다 풀렸고,  중한 죄로 멀리 귀양 

갔던 김구주(金龜柱)와 화원옹주도 가까운 곳으로 옮긴 뒤에, 그들도 적당한 시기에 용서를 

하였다.  그러자 반대파에서는 이에 대해서 또 반대운동을 일으켰다.

  (아아, 선왕께서 일생을 두고 막지 못한 당파싸움을 어찌 내 힘으로 막겠는가?)

  정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이라도 양위할 세자(世子)가 있으면 정치에서 떠나서 

학문에만 전력을 기울이고 싶었다.


  [ 끝없는 戚臣勢道 ]   < 설레이는 伏魔殿 >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끝없는 戚臣勢道 

    설레이는 伏魔殿



   정조는 재위 이십사년에 학문을 위주로 한 소위 문치(文治)에는 많은 공적을 남기고 사

십칠세 칠월, 전신에 종기를 앓다가 백약무효(百藥無效)로 승하하고 말았다.  이때 세자는 

겨우 열한살의 소년으로서 왕위에 올랐다.  이 임금이 순조(純祖)다.

  새로운 임금이 어렸으므로 궁중에서 제일 어른 되는 영조의 미망인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金氏)가 섭정(攝政)이 되어서 소위 수렴정치(垂簾政治)를 했다.  이때부터 정순왕후의 친

정인 경주 김씨(慶州金氏)가 척신세도(戚臣勢道)를 부리는 동시에 반대파 숙청의 풍파를 일

으켰다.  정순왕후는 임금 순조의 증조모뻘이라 대왕대비(大王大妃)라고 불렀다.

  "늙은 대왕대비가 친정 일가만 내세우니 인젠 경주 김씨 천하가 되었구나.  늙은 암탉이 

조정에서 활개를 치니 우리 나라는 이제 망했다."

 그런 욕을 하면서도 불우하게 내쫓기는 소위 시파(時派)에서는 전전긍긍했다.

  대왕대비는 선왕(先王) 때 역적으로 몰려서 죽은 김구주(金龜柱)를 복권(復權)시키고 이조

판설 추증까지 했다.  이것은 경주 김씨가 속하는 벽파(僻派)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한 것이

나 다름 없었다.  그런데다 마침 천주교가 시파 중심으로 전파되어 있었으므로 벽파에서는 

사학(邪學) 추방이라는 명목으로 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사학의 괴수 정약종(丁若鐘)과 그 도당을 잡아서 처단하라."

  대왕대비는 이런 엄명을 내리는 동시에 사학 반대에 철저한 목만중(睦萬中)을 대사간(大司

諫)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정약종, 정약전(丁若銓) 및 그의 아우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을 비롯한 이가환

(李家煥), 이존창(李存昌), 홍교만(洪敎萬) 등이 맨 먼저 잡혀서 문초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

은 이구동성으로 서양학문을 연구하는 자유와 종교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고, 학문까지 당파

싸움의 희생으로 악용한다고 반박했다.

  "어느 편이 당파싸움을 일삼느냐.  너희들이 그따위 역설을 하는 것부터가, 학문이니 종교

니 하는 명목으로 당파 음모를 하는 사학의 본색을 스스로 폭로하는 증거다."

  "우리가 배우려는 학문은 결코 사학이 아니고 정학(正學)이요."

  "정학은 공자님의 유교 뿐이다.  공자님보다도 서양 오랑캐들의 예수가 정교란 말이냐?"

  "유교보다도 예수교가 전 인류를 차별 없이 사랑하는 정교(正敎)라고 믿소."

  "너희들은 임금도 없고 조상도 없단 말이냐?"

  "하나님이 우주의 임금이시오.  인류의 아버님이요."

  "그래서 불충 불효하는구나.  그래서 제 할아비 제사도 지내지 않는구나.  그 대답으로 무

군 무부(無君無父)의 대죄가 성립된다."

  그런 위협과 고문으로도 그들의 신념을 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권력은 그들을 사형에 

처하거나 귀양 보내는 것을 할 수 없었다.

  이때 정약용도 형들의 관련으로 잡혀서 문초를 받았는데

  "나는 소년시절에 천주교를 한 때 믿었던 것이 사실이요.  그러나 중년 때 종교적인 신앙

은 버렸기 때문에 그 당시에 이미 나라에 나의 태도를 상소하였소.  다만 서양의 학문만은 

우리가 취할 바가 많기로 지금도 연구하고 있소."

  "그러나 너희 형 약전은 독신자가 아니냐?"

하고 신문자는 추궁했다.  정약용은 정색을 하고

  "당신은 인륜 도덕을 주장하면서 아우가 형의 죄를 증명하라고 하는 거요?  당신이 그럴 

경우엔 어떤 대답을 하겠소?"

  신문하는 자도 더 추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형제는 사형을 면하고 귀양 정도의 벌

로 그쳤던 것이다.

  섭정하는 대왕대비가 그렇게도 엄금하는 천주교였으나 불우한 왕족들 가운데서도 천주교

에 의탁해서 고민을 위로하려는 경향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도세자와 영빈 임씨(英嬪

林氏) 사이에 출생한 은언군(恩彦君)의 부인인 송씨(宋氏)와 송씨의 며느리 즉 상계군(常溪君)

의 처 신씨(申氏)는 천주교 신부 집을 찾아가서 영혼의 구원을 호소했다.

  시아버지는 역적으로 끌려서 강화도로 귀양 가서 빈농(貧農)으로 몰락했고,  신씨 남편도 

역적으로 몰려서 독약을 먹고 죽었던 것이다.

  신부는 불우한 왕족을 위로하고 하나님을 잘 믿으면 모든 불행과 고민에서 구원 받는다고 

설교했다.  그들은 그 후로 천주교 예배 모임에 나갔다.  그리고 거기 모이는 여자들의 친절

에도 감명을 받고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도 천주의 구원이라고 생각했다.  기도 때만은 당파 

싸움에 대한 저주도 잊었다.

  은언군의 부인 송씨는

  "신부님, 또 악착스러운 당파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천주교 탄압은 소위 남인(南人)파를 

잡아 죽이려는 핑계입니다.  신부님은 위험하오니 어디로 피하십시오."

라고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에게 일렀다.

  "아니요.  다른 신도의 죄를 대신해서 내가 희생되겠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한 신도가 달려와서 신도 중에서 배반한 자가 있어 천주교의 

모든 신도들을 관가에 밀고했다는 얘기를 전했다.  주신부는 의금부(義禁府)로 자수해 나가

서 천주교도를 죄인으로 몰지 말 것을 호소하고, 그 책임은 자기 하나에게만 지워 주면 십

자가를 지고 달갑게 희생되겠다고 말했다.

  의금부에서도 대국(大國)으로 섬기는 중국 사람을 소홀히 할 수 없어서 영의정 심환지(沈

煥之)에게 보고했다.  영의정도 청국을 두려워하는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였으므로 조심스

럽게 물었다. 

  "당신은 상국인(上國人)이라 특별대우를 하겠소.  그러니 신자들 소재만은 정직하게 말하

오."

  "남자 신자는 이번에 모두 잡혀서 처형되고 두세명의 여자 신자밖에 없소."

  중국인 신부는 남은 신자들을 보호하려고 한말이었다.  그러나 영의정은

  "여자 신자의 신분을 밝히시오."

  "여자까지 처형하시겠소?"

  "처형은 않더라도 알아는 두어야겠소."

  "처형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 말하겠소."

  신부는 공연한 말을 했다고 후회했으나 꺼낸 말을 부인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여자를 무슨 처형을 하겠소.  어서 말하시오."

  "송씨와 신씨는 불우한 왕족이요, 김씨는 나를 구해 준 여인이요."

  "왕족의 송씨와 신씨?"

  영의정은 곧 은언군의 미망인과 며느리라고 깨달았다.  그는 곧 그 사실을 확인하고 대신

들을 데리고 궁중으로 들어가서 대왕대비 김씨에게 의외의 사실을 보고했다.

  "역적의 내실이었지만 여자라고 용서했더니 또 역적 무리와 야합했구나.  그년들을 엄중

히 다스리게 하오."

  대왕대비의 명령으로 송씨와 신씨를 잡아다가 신부와 대질시켰다.  주문모 신부는 그들이 

여자신자라고 시인했다.  혹시나 하고 의아하던 대신들은 깜짝 놀랐다.  임금 순조의 삼촌댁

인 숙모와 사촌 형수가 죄인으로 걸려 들었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러나 체통과 법을 핑계로 내세우는 당파심은 몰락 왕족의 미망인 같은 것은 안중에 없었다.  

영의정을 비롯한 대신들은 역적의 과부들이 반성치 않고 또 역적의 온상인 천주교를 믿었을 

뿐 아니라 외국인 신부와 만나 풍기도 문란시켰으리라는 조건을 들어서 엄벌해야 한다고 대

왕대비의 뜻에 맞는 말을 공식으로 제기했다.

  대왕대비는 곧 사형선고를 내리고 사약(賜藥) 집행을 명령했다.  송씨와 신씨는 대왕대비

가 내린 독약을 받고서 천국으로 갈 것을 믿으면서 기도한 뒤에 그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벽파에서는 두 여자를 처형한 뒤에 다시 송씨의 남편을 또 죽이려는 좋은 구실로 이용했

다.  송씨의 남편 은언군은 글도 잘했고 또 인품이 온후해서 강화도에 귀양 보낸 후에도 종

종 서울집에 와서 처자와 상봉하는 특전을 베풀어 준 것이 선왕 정조의 아량이었다.  그러

나 이번 사건으로, 아내와 며느리로 하여금 역적음모를 시키기 위해서 천주교와 결탁시켰다

고 몰아서 그까지 독약을 내려서 죽여 버렸다.  이렇게 해서 대왕대비는 친정 척신(戚臣)의 

김씨 일파로 완전히 정권을 농락하게 만들었다.

  "손자 내외와 증손자 며느리를 죽인 대왕대비 김씨는 악독한 여자다.  그렇게 극성 맞은 

경주 김씨 세도가 오래 갈까?"

  궁중과 항간에서는 이렇게 저주하는 소리가 높아 갔지만, 권세에 취한 김씨 중심의 벽파 

귀에는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다.  이에 불평을 말했던 자는 모조리 역적으로 몰아서 죽였

는데 천안(天安)의 윤가기(尹可其)와 임시발(林時發)이 처형되었으며, 그들의 불평을 무마시키

려던 선왕의 공신(功臣) 윤행님(尹行恁)까지 역적으로 몰아서 죽였다.

  경주 김씨를 중심으로 한 벽파와 세도정치는 정적을 가혹하게 숙청하는 동시에 자기 일파

만 벼슬을 하도록 노력했다.  벼슬만 제대로 했으면 백성에겐 상관 없었으나 그들의 부패는 

국고를 좀먹고 각종 명목의 중세(重稅)로 민간재물을 취해 사복을 채웠다.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민심은 흉흉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악이 쌓이고 쌓인 끝에, 순조 

십일년에는 마침내 관서지방(關西地方)에서 홍경래(洪景來)의 반란이 폭발했다.

  이 영특한 야인(野人)은 부패한 세도정치에 반기를 들고 민중을 선동해서 강력한 반란군

을 조직했다.  그가 반란을 일으킨 것도 소위 정당의 파벌과는 직접 관계가 없이 부패한 관

권에 대하여 초보적인 민권(民權)을 주장하는 일종의 혁명운동이었다. 그리고 이 반란의 또 

하나의 특이성은 조선 건국 이래로 서북인사를 벼슬 시키지 않는 차별대우에 대한 반발이기

도 했다.

  홍경래의 반란군은 파죽지세로 서북지방을 휩쓸어서 각 읍의 수령을 무찔렀고, 그 후에는 

충청도 일대에까지 파동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이년 동안 끌었다.

  시파로 몰린 남인파에서는 큰 기대를 걸고 은연중 이에 호응했다.  그리고 일반 백성들에

게도 홍경래 반란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었다.

  "김가 놈들의 세력이 너무 극성을 부리더니 이번엔 망하고 말 것이다.  홍경래는 제갈량

의 꾀에 관운장의 용맹을 겸한 영웅이란다.  하루에 천리를 자유로 날아 다니는 둔갑술도 

있다더라.  벌써 개성이 함락되었다니까 서울 입성도 시간 문제다."

하는 풍문에 서울에서도 피난 가는 사람이 생기는 소동을 일으켰다.  이런 때를 이용해서 

홍경래의 밀령을 띤 건달 유한순(兪漢淳)이 서울로 잠입해서 민심을 선동하고, 김씨 일파에 

몰린 불평 정객을 규합해서 서울에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영조 때 일시 명 어사로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던 박문수(朴文秀)의 집안은 그 일대로 

벼슬줄이 그치고 말았는데, 그의 증손이라는 박종일(朴鍾一)은 자기가 직계의 증손이면서 겨

우 봉사(奉事)라는 나으리 노릇밖에 못한다고 불평만했다.

  그는 건달 친구로부터 홍경래의 밀사로 서울에 잠입한 유한순을 소개 받고 함께 거사할 

것에 뜻을 모았다.  박종일은 유한순보다는 유식했으므로 민심선동의 격문도 써 주면서 반

란 음모에 참가했다.  그리고 순조를 갈아치우고 새로 들여 놓을 임금으로는 역적으로 몰려

서 죽은 은언군의 아들을 추대하기로 했다.

  "은언군은 억울하게 역적으로 몰려 죽었지만, 다행으로 아드님이 강화도에 건재하고 있다.  

왕실의 정통은 그밖에 없다.  지금 임금은 가짜다.  천의(天意)와 민심은 은언군의 아드님을 

새 임금으로 등극시킬 것이다."

  이런 내용의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격문으로도 써서 서울거리에 붙였다.  이런 풍문이 나

돌자 자기가 은언군의 아들로서 거사하려고 서울로 잠입했다는 거짓 인물이 나타나기도 했

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그들 가짜 왕자와 혼란통에 한몫 보려던 건달들을 잡아서 처단했다.  

유한순만은 도망쳐 버렸으나 강화도에서 영문도 모르고 있던 은언군의 진짜 아들 해동(海

東)은 또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은언군의 자식 해동을 잡아 죽여 없애야지.  그 놈이 살아 있기 때문에 놈들이 추대하려

고 한다."

  조정의 강경파는 은언군의 유족까지 멸종시키려는 구실을 삼았다.

  순조 십이년에 홍경래는 싸우다가 잡혀 죽었고 반란도 진압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대

원수 홍경래가 살아서 피신 중이며, 병자년(丙子年=순조 십육년)에는 다시 난리를 일으키고 

새 임금을 맞아서 나라를 바로잡는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심지어는 가짜 홍경래까지 가끔 

나타나서 조정의 신경을 어지럽게 했다.


  [ 끝없는 戚臣勢道 ]   < 虛弱靑春의 노래 >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끝없는 戚臣勢道 

    虛弱靑春의 노래



   순조(純祖)가 사십오세로 승하하자 겨우 팔세의 헌종(憲宗)이 제이십사대 임금으로 등극

했다.  그래서 조모되는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섭정이 되어서 수렴정치(垂簾政治)를 칠년 동

안이나 했다.  선왕 순조가 어렸을 때는 영조의 왕후가 척신세도정치(戚臣勢道政治)의 신례

(新例)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안동 김씨 출신의 순원왕후가 섭정이 되었기 때문에 

그 친정일파가 전보다도 강력한 척신정권을 차지하고 들어 앉았다.

  그렇게 되자 그전의 경주 김씨와 섭정이 되지 못한 헌종의 모친(순조의 왕후) 풍양 조씨

(豊壤趙氏) 친정과 안동 김씨 삼파전(三巴戰)의 암투가 벌어졌다.  경주 김씨의 세력은 헌종 

육년에 안동 김씨의 김홍근(金弘根)이 대사헌(大司憲)이 되어서, 십년 전에 생긴 경주 김씨 

김노경(金魯敬)의 벼슬을 추탈(追奪)함으로서 종지부를 찍었다.

  안동 김씨의 이런 가혹한 처사는 헌종의 외가 풍양 조씨가 점점 왕의 세력을 믿고 안동 

김씨를 싫어했으므로 그것에 대한 위협수단이기도 했다.

  "경주 김씨 시대는 벌써 지나 갔다.  풍양 조씨가 아무리 외척이지만 안동 김씨가 있는 

동안엔 꿈쩍 못한다."

  섭정 순원왕후의 세력을 믿고 하는 장담이었다.  헌종의 나이 십오세가 되자 과부 조모의 

섭정을 거두라는 여론이 강하게 일어났다.  이런 여론으로 순원왕후도 자기의 노령을 빙자

하고 헌종의 친정(親政)에 동의하고 후궁으로 물러났다.  오랫동안 정권을 독점해 오던 경주 

김씨는 자기들 정권이 다시 튼튼해질 것이라고 과신하고 헌종의 친정을 환영(?)했으나 그것

이 큰 실수였던 것이다.

  그러나 헌종이 친정을 맡은 다음 해인 칠년부터 임금의 외척인 풍양 조씨가 점점 득세하

기 시작했다.  경주 김씨가 세력을 만회하려고 당황하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늦어서 경종의

외증조부 조인영(趙寅永)이 영의정으로 올라 앉았고 이어서 외사촌 형 조병구(趙秉龜)가 총

융사(摠戎使)가 되어서 국권(國權)을 장악했다.  경주 김씨는 한 때 눈부신 세도를 했던 만큼 

그 몰락의 속도도 빨랐다.

  "세불십년(勢不十年)이라더니, 경주 김가도 인젠 풍양 조씨에게 몰려났다."

  "궁중 치맛바람에 따라서 영의정 이하의 재상이 갈리고, 국정이 그들 외척의 손에 농락되

니 한심하다. 그래 인물은 외척에서만 난단 말인가.  척신세도가 없어져야 나라 꼴이 된다."

  척신의 발호를 욕하는 것은 불평 정객들만이 아니고 선비와 백성들의 탄식이기도 했다.

  민심이 이렇게 어수선하게 되자 불우한 몰락 왕족은 새임금이 되리라는 미신 같은 풍문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역적으로 몰리기도 했고 뜻하지 않은 대우도 받았다.

  조석도 제대로 끓이지 못하는 가난한 전계군(全溪君) 이광은 그전의 정치적 관계로 언행

을 삼가고 있었다.  그런데 의술을 비롯한 관상 등의 술법으로 행세하는 이원덕(李遠德)이 

전계군에게 왕운(王運)이 있다고 예감(豫感)하고 그의 곤궁한 생활을 도와 주었다.

  "이씨 왕실도 외척등살에 다 망해 가고 있습니다.  전계군 만하신 왕실 정통(正統)이 없으

니까 미구에 대통(大通)의 날이 올 것입니다."

  "이 사람 그런 무엄한 소리 말게.  누구를 또 역적으로 몰리게 하려고 그런 경솔한 소리

를 하는가?"

  전계군은 속으로는 은근히 바라는 일이었지만 그런 소문이 퍼지면 자기에게 큰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서 이원덕의 호의를 경원해 했다.  그러나 전계군은 왕운의 대통을 보지 못하고 

곤궁속에서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뒤에 남은 아들이 어렸으나 이원덕은 그 소년의 장래에 왕운이 있다고 내다 보았다.  전

계군의 큰 아들 이원경(李元慶)은 자기를 도와 준 이원덕의 은혜를 고맙게 여기고 외로운 

마음을 의지했다.

  이원덕은 불평 정객인 민진용(閔晋鏞), 박순수(朴醇壽) 등과 만나기만 하면 그들을 선동했

다.

  "김가의 세도정치로 나라는 곧 망합니다.  나도 지금은 관상쟁이라고 천대를 받지만 새 

세상이 되면 대감쯤 지낼 것입니다."

  "자네 자기 관상만 자랑 말고 우리 관상도 봐주게."

  "보나마나 멀지 않아서 두 분 다 대감이 되실 좋은 상입니다.  관상 말이 났으니 말입니

다마는 전계군 큰 아들 원경의 상이 금년 안으로 대통할 운수입니다.  그래서 김가를 미워

하는 몇몇 대감들에게 잘 말씀해 두었습니다.  새 세상이 되면 그 분들이 새 임금을 돕기로 

하고요."

  "세상이 바뀔 수 있긴 해."

  "그야 전계군 아들이 임금 될 수도 있지.  홍경래가 살아 와서 세상을 뒤집더라도 누군가 

이씨 왕족에서 새 임금을 세워야 할 테니까 말야.  그러고 살펴 보면 전계군 아들보다 가까

운 종친도 없구만."

  민진용과 박순수도 이런 맞장구를 쳤다.

  "영감들도 불평의 탁상공론으로만 말고 동지들을 규합해 두시오.  그러다가 세상이 바뀌

면 한 몫 보셔야 합니다."

  "기왕이면 직접 일을 하지.  남의 힘으로 바꾸어질 때를 기다려?"

  그들의 불평은 이런 적극적인 음모로 발전했다.  민진용은 이종락(李鍾樂)을 죽산(竹山)으

로 찾아가서 세도 부리는 김가 일파와 외척에 휘둘리는 무능하고 어린 임금을 몰아내고 전

계군의 아들 원경을 임금으로 추대하자는 음모에 동지가 되라고 권했다.  그리고 또 포천

(抱川)의 서광근(徐光近)도 권해서 충의계(忠義契)에 기명(記名)하게 한 뒤에 서울서 거사할 

때에 폭도를 몰고 상경하라고 일러 두었다.

  그러나 서광근은 서울의 거사를 기다리면서 준비하는 중에 조부 서기순(徐箕淳)에게 들켰

다.  그는 충의계의 음모 사실을 말하고 조부에게도 협력을 권했다.  그의 조부는 한때 승지 

벼슬까지 했으나, 김씨 세도로 몰려나서 시골에 내려와 있었으므로 이번 경주 김씨와 풍양 

조씨의 외척을 몰아내는 혁명운동엔 으례 찬성하거나 묵인해줄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감투욕에는 부자간의 정의도 조손간(祖孫間)의 의리도 없었다.  서기순은 손자가 

가담한 음모를 밀고하고 상으로 큰 감투를 쓰는 것이 더 빠르고 안전하다는 야비한 계산에

서 손자를 팔았다.  그는 곧 서울로 올라가서 헌종의 장인 조만영(趙萬永)에게 충의계의 반

란음모를 밀고했다.

  이 밀고로 이원덕을 비롯한 관계자는 일망타진되어서 참형을 당했고, 밀고한 서기순의 손

자 서광근은 고문 중에 매맺아 죽었다.  그리고 왕족 원경도 십팔세의 소년으로 사형되었다.

  그러나 외척들에게 세도정치를 내맡긴 헌종은 허위(虛位)의 임금으로서 국정에는 거의 관

여하지 않았고 또 왕자(王者)의 능력도 없었다.  자기의 임금자리를 노리는 반란 소문조차 

모르고 오직 여러 비(妃)와 빈(嬪)과 무수한 궁녀들의 치마폭에 싸여 과음(過淫)으로 청춘의 

혈기를 탕진해서 육체까지 허약해졌다.

  이십이 되도록 많은 여자를 관계했으나 세자가 될 아들도 딸도 낳지 못했다.  그러자 조

모, 모친 등 과부만 득실거리는 궁중에서는 자꾸 빈궁(嬪宮)만 늘였다.  그래도 소생은 없고 

젊은 왕의 청춘만 병들어서 마침내 과음으로 인한 부족증이 걸렸다.  현대 의학으로는 일종

의 폐병의 증세였을 것이다.

  이십세가 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이, 삼년 동안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심한 불면

증까지 겸해서 밤에도 잠을 자지 못했다.  피골이 상접하도록 수척할 뿐 아니라 체온까지 

낮아졌다.

  "상감마마, 몸이 얼음장같이 찹니다."

  밤낮으로 안기는 후궁들도 허약한 왕의 정력에 불안을 느꼈다.  그런 왕에게 생남을 바란

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은 여자의 죄라고 탓하면서 양가(良家)

의 딸을 자꾸 빈궁으로 끌어들였다.

  이런 문제로 부사과(副司果) 이승헌(李承憲)은 상소를 올리다가 화를 입었다.  왕후 김씨, 

계비 홍씨의 나이가 아직 젊은데 또 빈궁을 모실 것이 아니라, 중전의 태후(胎候)를 돕기 위

하여 경도(徑道)를 보강하면 될 테니 좋은 약을 쓰라고 권고했던 것이다.

  이런 왕자 출생을 위한 의학적인 상소도 기이한 현상이었지만 이에 대해서 부수찬(副修

撰) 윤경선(尹景善)은 불경한 상소문을 올린 이승헌을 처벌하라는 상소문으로 반박했다.  이

것도 실은 당파가 빚어낸 소동이었다.  그러나 손을 보려는 대왕대비는 김재청(金在淸)의 딸

인 십오세의 소녀를 맞아들여서 경빈(慶嬪)으로 봉했다.  이것으로서 젊은 헌종은 정식부인

만도 세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마음대로 관계하는 궁녀가 수십명이나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어린 소녀의 경빈의 몸에서 요행히 태기가 있었다.  궁중에서는 큰 경사라고 

생남기도를 하고 기다렸으나 아기는 왕세자가 될 아들이 아니고 딸이었다.  그 공주마저 왕

의 허약한 혈통 때문이었는지 곧 죽고 말았다.

  궁중 과부 왕비들의 실망은 컸고 헌종의 허약한 부족병은 점점 중해지기만 했다.  혈통을 

남기지 못한 젊은 왕은 언제 세상을 떠나버릴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조

정의 당파싸움은 날로 심해 가기만 했다.

  헌종 십삼년에는 십년 동안 세도한 풍양 조씨의 세력이 기울기 시작했고, 이에 대한 반대

파의 공격이 맹렬해졌다.  헌종의 외조부 조만영의 부자가 차례로 세상을 떠났으므로 가까

운 외척으로는 조인영(趙寅永) 부자만 남았기 때문이다.

  대사헌(大司憲) 이목연(李穆淵)까지 조병현(趙秉鉉)의 비행을 열거했다.  즉 외척의 위복(威

福)을 방자하게 남용해서 매관매직으로 뇌물을 받아 거만의 사재를 축재하였다고 폭로하고 

그런 무리는 숙청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대사헌의 이런 상소에 대해서 헌종은 일을 

무마하려고 했으나 대사간(大司諫)까지 들고 일어섰다.

  그러자 헌종도 하는 수 없이 그를 귀양 보냈다.  얼마 후에 철종(哲宗)이 등극하자 새로 

득세한 안동 김씨가 그를 사형에 처해 버렸다.  헌종이 이십이세로 승하하는 동시에 외척 

풍양 조씨의 세도도 완전히 끝났던 것이다.


  [ 끝없는 戚臣勢道 ]   < 江華 道令 >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끝없는 戚臣勢道 

    江華 道令



   헌종이 이십이세로 세자가 없이 승하하자 후계 임금문제가 급하게 되었다.  이때 강화도

에서 귀양살이로 상일을 하던 고아(孤兒) 이원범(李元範)이 뜻하지 않게 임금이 되었다.

  이원범의 조부와 부친과 형제들은 모두 역적으로 몰려서 죽거나 귀양살이를 했다.  그의 

조부는 사도세자의 이복형제 은언군(恩彦君)으로 역적이란 누명을 쓰고 죽었다.

  그에게는 아들 삼형제, 즉 상계군(常溪君), 풍계군(豊溪君), 전계군(全溪君)이 있었다.  이중

에서 상계군은 역적으로 몰려서 죽었고, 풍계군은 은전군(恩全君)의 양자로 들어갔으며, 전

계군은 귀양살이를 하다가 빈궁 속에서 병으로 죽었다. 

  그런데 이 전계군에게 또 아들이 삼형제 있었다.  맏아들 원경(遠慶)은 술객 이원덕(李遠

德)의 허황된 음모사건에 이용되어서 역적으로 죽었고, 둘째는 일찍 병으로 죽었다.  그리고 

원범만 살아 남았는데 그는 후처의 소생이었다.

  그의 모친 염씨(廉氏)도 세상을 떠났으므로 원범은 사고무친한 몰락 왕족의 고아가 되었

다.  헌종과의 촌수는 칠촌 숙질간이어서 가까운 집안이었으나 역적의 후손이라고 생활도 

돌보아주지 않았다.

  강화도 섬에서 농사지을 땅 하나 없는 십사세의 가난하고 무식한 고아는 강화도 성 밖의 

오막집에서 홀로 살면서 나무를 해다 팔기도 하고 남의 집의 농사 일도 거들어서 겨우 살아 

갔다.  먼 친척은 있었으나 도와 주기는커녕 냉대만 했다.

  그러나 섬 사람들은 이 고아를 왕족이라고 놀려댔다.  강화도령이란 대명사는 우대하는 

편이었다.  <총각>이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원범아.  너도 왕족이면 양반씨로선 제일인데 글이라도 배워야 하지.  그런 일자무식으로 

아주 섬 상놈이 될 거냐?"

  "밥 먹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글 공부를 해요."

  "그럼 내가 가르쳐 주마.  작대기를 땅에 놓으면 한일(一)자요.  네 낫은 정음의 기억(ㄱ)자

다.  하하하."

  "불쌍한 왕족을 울리지 마라.  그러다가 왕의 용꿈이라도 꿔서 등극하면 경친다."

  "핫핫핫."

  동네 악동(惡童)들이 놀려대면 원범은 자기의 몸에 왕족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 저주스

러웠다.  그는 다른 총각들과 떨어져서 외롭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상놈의 총각들도 열대여섯살이 되면 장가를 들었다.  원범은 그들이 부러웠다.  열일곱살

의 사춘기가 되어도 장가들 가망이 없었다.  섬 상놈이라도 그를 사위로 삼으려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고생을 할 바엔 상놈의 집에 데릴사위로라도 들어가고 싶다.)

  원범은 그런 생각까지 해보았다.  그러나 그런 처복조차 없었다.

  "야 쇠돌아.  너 장가든 맛이 어떠냐?"

  원범은 새로 장가든 친구에게 농을 걸었다.

  "이놈아.  어른에게 쇠돌이가 뭐냐?  서방님이라고 해야지."

  장가든 상놈의 청년은 원범을 호령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장래에 무슨 큰 꿈도 꾸어 보

지 못하는 원범은 세상이 야속하고 두렵기만 했다.  가족이 모두 역적으로 몰려서 죽었다는 

이야기와 그 참상만 듣고 보면서 자란 소년의 마음에는 장래에 대한 꿈은 싹조차 트지 못했

던 것이다.

  그러나 십칠세 쯤 되자 힘도 농사를 지을 만큼 되었다.  사고무친한 그는 자기의 육체 노

동만 믿고 살아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산비탈을 개간해서 농사를 짓고, 나무도 해다 

팔고, 품팔이도 했다.  거친 밥이라도 제 힘으로 벌어 먹게 되자

  (임금이니 벼슬이니보다 이런 농사꾼 팔자가 편하다.  조부나 형제들 같이 역적으로 몰려 

죽을 염려도 없고...)

  이런 체념의 철학까지 체험한 그는 글 배울 욕심도 없어졌다. 오직 어떤 상놈의 딸이라도 

아내만 얻으면 즐거운 가정을 이룰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가난은 면할 수 없었고 열아홉

살이 되어도 남루한 옷에 머리를 땋아내린 외로운 섬 총각의 때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헌종 십오년 유월, 헌종이 세상을 떠났으나 강화도의 고아 총각 이원범은 국상이 났다는 

소문을 늦게야 들었다.  그러나 그는 촌수로는 칠촌 아저씨인 왕이 승하했어도 아무런 충격

도 받지 않았다.  건너 마을에 살던 아는 상놈이 죽었다는 소문보다도 관심이 없었다.  장가

를 못들어 갓을 쓰지도 않았으므로 다른 백성들처럼 검은 갓을 흰갓(白笠)으로 바꿔 쓰는 

그런 형식적인 절차를 밟을 필요도 없었다.

  궁중에서는 다음 임금을 모시는 문제로 중대한 회의가 중희당(重熙堂)에서 열렸다.  궁중

의 어른인 대왕대비 안동 김씨는 옥새를 가지고 발친 상좌에 나와서 중신들의 회의를 주관

(主管)하고 있었다. 

  "어떤 왕족을 새 임금으로 모셔 들어야 할까."

  대신들도 창졸한 문제라 대왕대비의 의중을 몰랐다.  그러나 안동 김씨파의 고관 몇몇만

은 대계(大計)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대왕대비께서 종사(宗社)에 대한 분부를 정해 주십시오."

  "일시도 보위(寶位)를 궐할 수 없사오니 대왕대비 어명을 바라옵니다."

  원로 정원용(鄭元容)과 좌의정 김도선(金道善)이 재촉했다.  대왕대비는 울음 섞인 음성으

로 그러나 기정 방침대로 말했다.  대신들의 귀에는 울음 섞인 낮은 말이 들리지 않았다.

  "글자로 알려 주십시오."

  대왕대비의 울음소리와 함께 헌종의 모친 대비도 또 왕비도 눈물을 흘리며 울었기 때문에 

좌중은 비창한 가운데 숙연했다.  왕대비는 정음으로 영묘(英廟)의 혈손(血孫)으로는 원범밖

에 없으니 그로 하여금 종사를 잇도록 하고자 하는데 경들의 의향은 어떠냐는 의미의 글을 

써서 내렸다.

  안동 김씨의 몇몇 신하를 제외한 여러 신하들은 뜻밖의 이름에 놀랐다.  그때서야 전계군

의 막내 아들 원범이가 아직도 강화도에 생존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당하온 말씀이옵니다.  곧 승지에게 교서(敎書)로 번역(한문으로)해서 선포하고, 새 상감

을 강화도에서 모셔 오겠습니다."

  "원로인 판부사가 직접 영접사로 가서 모셔오시오."

  "예, 망극하옵니다."

  정원용은 대사가 간단히 끝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안동 김씨들은 속으로 만세를 불렀

다.  헌종이 승하하자 전격적으로 임금을 정한 것은 안동 김씨 일파의 계략이었다.  이 문제

를 국상 뒤로 미루고 질질 끌면 각 당파에서 신왕 추대의 암투가 벌어져서 자기들 뜻대로 

되지 않을까 두려워서 대왕대비와 사전에 결정하고 곧 절차를 밟았던 것이다.

  이런 벼락 임금의 희소식도 모르는 원범은 그날도 폭양 볕을 쪼이며 지게를 지고 들로 풀

을 베러 나가고 집에 없었다.  영접사 대시들보다 먼저 달려 온 교군(校軍)들은 신왕의 집을 

찾아서 헤매다가 동리 사람의 안내로 초라한 초가삼간집으로 달려갔다.  이웃 사람들은 깜

짝 놀랐다.

  "불쌍한 원범이까지 또 역적의 씨라고 잡아 죽이려고 서울서 병정이 몰려 왔구나.  원범

이 신세가 가련하다."

하고 동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이댁 도련님께서 어디 가셨소?"

  "모릅니다.  산으로나 들로 꼴비러 갔겠지만요."

  "빨리 불러 오시오."

  "우리가 어디 간지 알아야지 불러 옵죠."

  교군들도 동리 사람에겐 임금으로 모시러 왔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 신성한 기밀은 

대신들이 직접 예를 갖추어서 할 절차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황송한 줄 알면서도 도

련님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그 때문에 꼭 잡으려고 온 군사인 줄만 알았다.

  원범의 동무되는 총각들은 그에게 이 변을 알리고 어디로 도망을 보내려는 우정에서 몰래 

그를 찾아서 들로 뛰어갔다.

  "원범아, 너 여기서 꼴 베고 있었구나.  큰일났다."

  헐레벌떡하고 찾아온 친구 총각은 원범을 발견하자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무슨 큰일이냐?"

  원범은 태연한 태도로 반문했다.  그리고 싱긋 웃으면서 다시 말했다.

  "또 나를 놀리려는 장난이구나."

  "서울서 병정 수십명이 와서 네 집을 포위하고 동네 사람더러 너를 찾아내라고 야단이다.  

또 무슨 난리가 나서 너를 역적으로 몬 모양이다.  잡히면 죽을 테니, 빨리 도망쳐라."

  원범은 깜짝 놀라서 풀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젠 죄없이 죽었구나 하는 절망으로 눈 

앞이 캄캄했다.  왕족의 후손으로 태어난 것이 원망스러웠다.

  "이놈아, 정신 차리고 빨리 도망쳐야 산다."

  "빨리 알려줘서 고맙다.  그러나 이 섬에서 도망하면 어디 숨겠니?  네 집에 숨겨 달래도 

겁나서 못 숨겨 주지 않겠느냐?  숨을 곳도 없고 숨겨 줄 사람도 없다.  조상의 죄를 지고 

죽을 뿐이다."

  그러나 제발로 걸어가서 잡히기도 싫어서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땅 속으로 그대로 들어

만가고 싶었다.

  이때 다른 친구가 또 달려왔다. 

  "원범아, 너한테 큰 운수가 티었다.  서울서, 아니 궁중에서 너를 데리러 왔다.  잡으러 온 

줄 알았더니 병정들 말이 서울 데려다 왕족 대우로 잘 살게 해준다는 거다."

  "원범아, 그 놈들이 너를 잡으려고 꼬이는 수작이다.  속지 말고 어서 도망쳐라."

  먼저 왔던 친구가 그럴싸한 말을 했다.  원범은 반신반의로 한숨만 쉬었다.  잡아가거나 

모셔가거나 제 발로 걸어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도망할 기력도 없었다.

  그래서 운명만 기다리고 있을 때 들로까지 찾아 나온 교군들이 저쪽에 보였다.  그들은 

세명의 총각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그 중에는 분명히 대신같이 풍채도 좋고 비

단 관복을 입은 노인이 교군과 함께 오더니

  "어떤 분이 강화도련님이신지요?"

하고 세 명 총각에게 물었다.  세 명 중에서 제일 남루한 옷을 입은 원범이 풀밭에서 일어

서면서

  "대감, 제가 이원범이온데 무슨 죄로 잡으러 오셨습니까?"

  "황공하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늙은 대신은 원범에게 공손히 읍하고

  "실은 대왕대비의 어명입니다.  곧 서울로 행차하십시오."

  원범은 역적으로 잡으러 온 것이 아닌 것만은 알았다.  그러나 대신도 임금으로 모시러 

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민심을 자극시키지 않으려는 방법인 줄을 짐작할 원범도 못되었

다. 

  "원범아, 너는 서울로 잘 돼 가니 다행이다.  그러나 언제 만날지 모르는 작별이 섭섭하구

나."

  "이놈들 무엄한 소리 말고 저리 비켜라."

  상놈 총각들이 <너>라고 하는 수작을 망극하게 여긴 교군들이 원범의 친구들을 호령하고 

대령한 남녀(藍輿)에 원범을 태워 모셨다.  원범은 꿈만 같았다.

  "너희들 우리 집과 논밭 좀 보살펴다오."

  "아, 그런 걱정 말고 잘 가거라."

  원범은 집에 들려 갈 필요도 없었거니와 교군들도 남녀를 메고 그냥 큰 길로 향해서 강화

읍으로 직행했다.



   궁중으로 들어 온 원범은 대신들이 시키는 대로 면류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고, 대보(大

寶)를 받고서 철종(哲宗)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글자 하나 모르는 야생아(野生兒)의 강화

도령은 왕으로서의 호의호식이 도리어 성미에 맞지 않았다.  대궐이라는 감옥에 갇혀 죄수

처럼 자유가 없는 것이 제일 고통이었다.

  고초장에 비벼 먹은 꽁보리 밥이 꿀맛 같았고 그것이 술술 소화되어서 건강하던 몸이, 임

금이 된 후로 먹는 산해진미(山海珍味)가 운동부족으로 소화가되지 않아서인지 게트림만 나

는 위장병에 걸려 버렸다.

  "임금으로서 선정(善政)을 하려면 글을 배워서 덕을 닦아야 합니다."

  신하들은 무식한 왕에게 글공부를 권했다.  이십세나 된 임금이 천자문(千字文)의 주먹 같

은 글자들을 보며

  "하늘천(天)"

  "따지(地)"

하고 읽는 것은, 배우는 왕이나 가르치는 학자나 민망스럽기만 했다.  그래서 철종은 글읽기

를 제일 싫어했다.  그러나 그런 무식한 철종이 정치에 무능하고 흥미조차 느끼지 않는 것

이 세도정치를 하는 안동 김씨에겐 매우 편리했다.  처음부터 그런 허수아비 왕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도 중요한 정책을 결정할 때는 왕의 결재를 취하는 형식을 밟았다.  대신들이 

무슨 문제를 보고하고 의견을 말하면 내용도 모르고, 또는 알려고조차 하지 않고, <좋소, 그

대로 하오.> 하는 식으로 일체를 안동 김씨 일파가 하는 대로 방임했다.


  [ 끝없는 戚臣勢道 ]   < 임금에게 投石하는 民心 >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끝없는 戚臣勢道 

    임금에게 投石하는 民心



   이십세의 임금 철종(哲宗)은 아직도 여자를 모르는 강화도령이었다.  어서 대가집 미모의 

규수를 왕비로 삼아서 장가라도 들여 주었으면 했으나 헌종의 국상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

다.  그러나 고운 궁녀들이 밤낮으로 시중하는 남치마 바람에 그는 청춘의 피가 끓어 올랐

다.  그래서 왕후를 맞는 대혼(大婚)이 있기 전에 철종은 궁녀들에게 동정(童貞)을 바치고 여

색을 향락하게 되었다.

  강화도의 나무꾼 총각으로 시골 색시의 손도 잡아 보지 못하던 철종은 고운 궁녀들을 누

구든지 수청들일 수 있는 것이 임금의 호강이라고 생각했다.  정치에도 상관 않고 글 공부

도 하기 싫은 그로선 궁녀들과의 유희가 유일한 기쁨이었다.

  임금이 된 만 일년 이개월 만인 철종 이년 팔월에 대왕대비는 안동 김씨 김문근(金文根)

의 딸 십오세 소녀를 왕후로 간택해서 대혼례를 거행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서 대왕대

비는 형식적인 섭정을 그만두고 친정(親政)을 하도록 했다. 그러나 무식한 철종으로서는 친

정할 능력도 없었다. 

  "상감의 뒤엔 국구(國舅)가 있으니 나는 안심하고 거북한 수렴정치를 그만두겠소."

  대비는 이같은 말을 대신들 앞에서 했다.  그것은 형식적으로는 친정이지만 실지로는 철

종의 장인 김문근에게 섭정의 권한을 물려 준다는 선언이었다.  이 순간부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완전무결한 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철종은 실제의 정치를 장인 일족이 하게 되자 할 일이 없었다.  철종의 일과는 오늘은 어

떤 궁녀를 데리고 자느냐 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궁녀들과 접촉에 말썽이 많던 대

왕대비가 칠십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자 철종은 아주 마음 놓고 무수한 궁녀들을 모조리 범

하는 난음 생활에 빠져버렸다.

  무능하던 선왕 헌종도 과색(過色)으로 이십이세의 단명을 했고, 허약 때문에 자녀도 남기

지 못했다.  그 덕택으로 임금이 된 강화도령도 그 길만은 선왕의 전철을 밟아서 더욱 철저

했다.  왕비 김씨와 그밖의 여러 궁녀가 십여명의 자녀를 낳기는 낳았으나 모두 건강하지 

못한 태아였기 때문에 모조리 일년을 못 살고 죽었다.

  "왕은 과음으로 양기가 부족해져서 성한 아기를 낳지 못한다."

  시의들은 왕의 양기를 보충하려고 인삼, 녹용의 보약을 장복시켰으나, 약에서 얻는 양기 

보다는 소비하는 양기가 많은 왕의 몸은 쇠약해지기만 했다.

  "궁녀들의 치맛바람에 임금의 생명이 슬어진다."

  이런 경멸적인 조롱이 궁중에서 공공연히 떠돌았다.  강화도령으로 이십이 되도록 여자를 

모르고 건강하던 청년이었으나 임금이 되어서 궁녀들에게 그 야생적 본능을 탕진하자 삼십

전에 노쇠한 몸이 되어서 허리를 못 쓰고 수족이 찼다.  그리고 뼈만 남은 몸은 홀로 지탱

을 못했다.

  철종은 권력에는 처음부터 인연이 멀었지만 여색으로 육체까지 이렇게 쇠약해서 거의 폐

인이 되자 처가인 안동 김씨의 세도만 극도로 번성했다.

  재상급만 치더라도 영의정 김좌근, 이조판서 김병기(金炳冀), 동녕위(東寧尉) 김현근(金賢

根), 예조판서 김병지(金炳地)와 김병필(金炳弼), 형조판서 김영근(金泳根), 판서 김병주(金炳주

 )와 김대근(金大根) 그리고 김병국(金炳國)과 김병학(金炳學)도 차례로 영의정을 지냈던 것

이다.

  철종은 궁중에 선대의 과부 왕비들과 궁녀들뿐이로서, 종친 왕족도 없고 외로운 존재였다.  

다만 가까운 종친(宗親)으로는 사촌동생 경평군(慶平君) 뿐이었다.  철종은 역시 핏줄이 닿는 

경평군을 때때로 궁중으로 불러서 서로 고독한 심정을 위로하곤 했다.

  경평군은 철종과는 달리 글도 잘했고 인품도 늠름해서 왕의 대리로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

기도 했다.  그러나 처가인 안동 김씨들은 철종이 가까이 하는 경평군까지 시기하여 궁중출

입을 못하게 했다.

  "이씨 왕조는 김가 세도로 망한다.  금극목(金克木)이라더니 김성(金姓)이 목성(木姓)의 이

씨(李氏)를 누르고 왕기(王氣)까지 범하는 말세가 되었다."

  백성들은 이런 오행설(五行說)까지 들추어서 극성맞은 김씨 세도를 욕했다.  이런 풍설이 

돌던 중 철종 십일년 구월에는 돈화문(敦化門)에 이씨 왕조가 멸망하고 타성(他姓)이 왕위를 

범하므로 빨리 화근을 없애지 않으면 말세가 온다는 흉서가 붙었다.

  이것은 세도하는 김씨를 욕하는 동시에 왕을 위협하는 정치적 모략이었다.  이런 흉서사

건으로 궁중은 궁중대로 안동 김씨는 안동 김씨대로 그 음모자를 잡으려고 했으며 민심수습

을 위한 대책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경평군은 관직도 없는 몸이라 그런 각의(閣議)에는 참가할 자격도 없었다.  그러나 평상에 

품었던 안동 김씨에 대한 불평을 털어 놓았다.

  "이 나라는 이씨의 것이냐?  김가의 것이냐?  왕족은 모두 쫓겨나가고 김가만 세도를 부

린다.  외척이 물러나야 나라가 바로 된다."

  그러나 이런 말을 들은 김씨파에서 그냥 있을 리가 없었다.  임금 철종까지 무시하는 그

들의 세도 앞에 경평군 정도를 숙청하는 것은 여반장이었다.  그들 일파는 직접 철종에게 

경평군의 망동을 규탄하고 처벌을 주장했다.

  "돈화문에 붙인 흉서도 경평군의 소행이 분명하오.  옛날부터 종친은 궁중에도 정원(政院)

에도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법입니다.  상감의 지친일수록 언행을 삼가야 하는데 도리어 

상감을 욕되게 하고 국정을 혼란시키기 위해서 영부원군 김좌근을 비롯한 현관(顯官)들을 

모함하는 망동은 마땅히 엄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철종은 하는 수 없이 경평군의 궁중출입을 금하겠다고 하고 그 정도로 무마하려고 했다.  

그러나 김씨의 재상들은 모두 결속해서

  "불충 무능한 우리는 국정에서 손을 떼겠으니 경평군같이 충성되고 유능한 자에게 국정을 

맡기시오.  우리는 자퇴하고 성 밖으로 나가서 근시하겠습니다."

  이렇게 철종을 위협했다.  경평군을 처벌하지 않으면 철종에게도 협력하지 않겠다는 강경

한 시위행동이었다.  왕도 척신의 세도에 굴복하고 경평군을 전라도 신지도(薪智島)에 귀양 

보낸 후 그 배소(配所)에서 나오지 못하게 엄중한 경계를 하여 신변 구속을 했다.

  사형 다음 가는 이런 처벌에도 분을 풀지 못한 김씨들은 그의 군호(君號)를 삭탈하고 서

민(庶民)으로 강하(降下)시킬 것을 요구했다.  철종은 너무 심한 왕족 모욕이라고 분하게 생

각하면서도 외사촌 동생을 서민으로 강하했다.  그래서 경평군은 칭호를 삭탈당하고 서민이 

되어 이세보(李世輔)로 명백만 보존했다.

  "왕의 위신으로 사촌동생을 억울하게 죄 주는 위인이 무슨 왕이냐.  궁중에선 궁녀에게 

사족을 못쓰고, 국정에선 처가 등살에 사족을 못 쓴다.  이씨 왕조도 말세가 되었구나."

  못난 임금의 소행은 항간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렇게 위신이 떨어진 철종에 대해서 백

성들은 경멸과 반감을 품어 거동할 때에 어떤 백성이 돌을 던져서 왕이 탄 덩으로 날아드는 

불상사까지 생겼다.

  "임금에게 백성이 돌을 던진 것은 유사 이래의 처음이다.  유사 이래로 못난 임금이니까 

당연한 대접이다.  민심이 천심이매 나라는 망하고 말 거야."

  임금에 대한 백성의 투석사건은 장안에 큰 화제가 되었다.  그 화제 끝에는 으레 철종의 

난잡한 사생활을 본 것처럼 들추었고, 세도 부리는 김씨에 대한 불평이 따랐다.

  조정에서는 돌을 던진 백성을 잡아서 목을 베었다.  배후를 캐서 김씨 반대파를 얽어 넣

으려고 했으나 범인은 순진한 백성으로 자연발생적인 반발이었으므로 관인이라는 소문을 퍼

뜨려서 못난 임금 체면을 유지하려고 했다.

  "언젠 임금이 실지 정치를 했나?  재상들만 잘 골라서 충성되고 유능한 신하를 쓰면 되지 

임금은 바보만 아니면 신하의 공로로 현군(賢君)이 되는 법이야."

  "그러나 지금 세도 김가에겐 나라에 대한 충성도 백성에 대한 책임도 없으니 탈이다.  거

기다가 임금은 바보에다 과색으로 부족병에 걸려 있다.  백성의 돌벼락을 맞아도 싸다."

  이런 투로 철종과 외척 안동 김씨의 폭정을 비난했다. 

  "나라가 그 꼴이니 하늘도 노해서 흉년만 든다.  이렇게 살기 어려운 세상은 뒤집어 엎어

야 한다."

  근년에는 한발과 홍수가 잦아서 흉년이 자주 들었다.  거기다가 백성이 초근목피로 연명

할 때도 탐관오리는 가혹한 수탈로서 사복을 채웠다.  못 살겠다는 민심 소동을 이용해서 

불평 정객과 정치 건달들은 반란 음모를 꿈꾸었다.  그리고 각처에서 기근으로 농민들이 산

적으로 화해서 세상을 어지럽혔다.

  이런 때 별로 벼슬이 높지 않은 김순성(金順性)과 전현감(前縣監) 이긍선(李兢善)은 몰락 

왕족 이하전(李夏銓)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잡혀 죽기도 했다.

  김순성은 기해년(己亥年)에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몰아서 축출한 때에 천주교에서 전향

해서 신도 동지를 오위장(五衛將)의 무관 감투를 썼다.  그러나 명색만 오위장이지 궁정근무

에는 참여하지도 못하였고 규칙적으로 봉록도 나오지 않았으므로 생활이 곤란했다.

  따라서 그는 경향 각지로 돌아다니며 호언장담을 일삼는 정치건달이 되었다.  김순성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후손으로서 완창군(完昌君=李時仁)과 친하게 지냈다.  완창군은 가

난한 왕족으로서 당시의 임금 철종과는 촌수도 아득한 먼 종친에 지나지 못했다.  이 완창

군도 철종과 세도 부리는 김씨 일파를 싫어하고 있었다.  그들은 만나면 정치적 불평을 했

다.

  그런데 완창군의 아들인 이하전(李夏銓)은 똑똑하여 소년 때부터 글재주도 좋고 기품이 

강직하며 용모도 준수했다.

  "도련님 글재주가 놀랍다지요?"

  김순성은 완창군 집에 들리면 주인의 보비우겸 아들 이하전의 칭찬을 했다.

  "소년 과거라도 시켜볼 생각이요."

  "도련님은 과거만 보면 실력으로 장원급제할 것입니다.  그러나 왕족을 배척하는 김가패

가 방해나 하지 않을까요?"

  "급제한대야 김가 세상에선 행세 못하겠지만 공부 실력이나 겨누어 본 뒤에 세상이 바뀌

면 써 주겠지."

  "세상이 바뀌는 것을 기다리다간 또 딴 놈들이 세도하게 됩니다.  우리가 먼저 들고 일어

서서 뒤집어 엎어야 합니다."

  "김오위장, 그런 소리하다 목 달아나려고.  나야 다 본 세상이라 아무렇게 죽어도 좋지만 

아들만은 공부를 시켜야겠네."

  "그럼요.  장차 대통(大統)을 이어 받더라도 강화도령같이 일자 무식으로선 나라의 수치거

든요."

  "허허, 이 사람 누구를 역적으로 몰리게 하려고 그런 소리를 하나.  강화도령이 그렇게 무

식할까?"

  "저보다 잘 아시면서 무슨 딴청을 쓰십니까?  천자(千字) 책 한권을 몇 해 두고 배워도 못 

떼었다는데야 알 것 아닙니까?"

  "천자 책은 본디 어려운 글이거든.  그 천자의 글을 짓느라고 옛날 유명한 학자도 머리가 

희도록 오랜 세월 고생해서 백수문(白首文)이라고 하지 않는가?"

  주인 완창군도 철종을 조롱하는 농담을 했다.

  "그래서 재주 좋은 강화도령도 한평생 천자와 씨름하는 모양이죠.  핫핫핫."

  김순성 오위장도 농을 했다.

  그런데 완창군이 자랑하는 아들의 글재주도 과거에는 보기좋게 낙방거사가 되고 말았다.  

그것도 과거 본 글이 시관의 심사에서 낙방이 된 것이 아니라 과거 보는 시장(試場)에서 안

동 김씨 자제들의 시기로 굴욕을 당하고 스스로 붓을 꺾고 퇴장해 버렸던 것이다.

  완창군의 아들 이하전은 글을 잘못 지어도 이미 급제로 예정되어 기세 등등한 안동 김씨 

청년들을 알았다.

  "완창군 댁 도련님이 왜 우리들 백성과 함께 과거를 다 보러 왔나?  왕족이면 양반 중에

서도 양반인데 무엇이 부족해서 과거로 벼슬을 하려고 하지?  자고로 임금의 종친은 벼슬

을 않고 점잖게 봉군(封君)의 국록만 먹을 것이지.  벼슬은 해서 백성의 재물을 긁어 먹을 

야망인가."

  "이놈들.  내가 벼슬하려는 것은 너희들 김가 모양으로 조정의 세도를 잡고 사복을 채우

려는 야망에서가 아니다.  임금을 돕고 백성을 편히 살게 하려는 포부에서다."

  "이놈.  먼촌 종친이라고 우리 안동 김씨를 모함하느냐?  당장 사과하라.  사과하지 않으

면 역적 다음 가는 관가모욕 죄로 다스리겠다."

  세도 김씨의 청년들은 과거장에서 이하전을 공박했다.

  "너 같은 놈들과 한자리에서 과거 보는 것이 창피하다."

하고 이하전은 붓을 꺾어 버리고 퇴장해 버렸다.

  "하하하, 그 놈 과거에 자신이 없으니까 생트집을 하고 쫓겨 가는구나.  그렇게 벼슬이 하

고 싶거든 너의 조상 능의 능참봉이라도 시켜주마.  핫핫핫."

  안동 김씨 청년들은 과거장을 박차고 나가는 이하전의 등뒤에서 웃어댔다.  그러나 이하

전은 그 뒤에도 공부를 열심히 했고,  몇 해 후에는 온후한 그의 인품도 세상에서 인정되었

다.  그리하여 그의 부친 완창군이 세상을 떠난 뒤에, 왕족을 너무 냉대한다는 비난도 막기 

위해서 한직 돈녕 도정(敦寧都正)을 시켰다.  그러나 그는 일체의 정치적 분쟁에선 멀리 하

려고 조심했다.


  [ 끝없는 戚臣勢道 ]   < 비틀거리는 王孫 >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끝없는 戚臣勢道 

    비틀거리는 王孫



   철종의 무능과 척신(戚臣) 안동 김씨파의 세도에 불평하는 민심소란에는 으레 이것을 이

용하려는 반란음모가 수반했다.  그리고 새로 추대해서 명분을 세우는데 이용할 인물에는 

언제나 몰락한 왕족 이씨(李氏)가 선택되었다.

  세도 김씨에게 역적으로 몰려서 귀양살이를 하거나, 아주 평민이 되어버린 몰락 왕족도 

한번 원한을 풀고 임금이 되어보고 싶은 생각도 있겠지만 숨어서 사는 그들을 충동하여 한

몫 보려는 정치 건달들의 음모도 작용했다.  그러다가 그 음모가 실패하면 왕족들까지 억울

하게 역적으로 몰려 숙청되어야 했다.



  "강화도의 나무꾼 총각이 임금이 되었으나 나약하고 무능해서 척신 김가에게 휘둘리고 있

다.  그러나 이번엔 초도도령님(椒島道令任)에게 왕기(王氣)가 비쳤다.  초도에 사는 소현세

자(昭顯世子)의 후손이야말로 왕실의 정통(正統)이다."

  이런 풍문이 황해도 일대에 유포되었다.

  소현세자는 인조(仁祖)의 맏아들이었는데 병으로 죽었다.  그리고 그 아들과 손자들은 여

러명이 역적으로 몰렸다.  그 후손에는 이명섭(李明燮)과 이영섭(李永燮)이 있었는데 글도 잘

하고 인물도 잘 생겨서 초도에서 인망을 받고 있었다.  다 같은 운명으로 귀양 간 왕족의 

후손이었지만 임금이 되어 있는 철종보다는 인물이 월등나았다.  그러므로 그들을 추대해서 

왕을 갈아치우려는 책동이 <초도에 왕기가 있다.>는 정치적 유언비어를 퍼뜨렸던 것이다.

  황해도 연안(延安)에 살며 정치적으로 불평객이던 진사(進士) 김응도(金應道)는 이명섭의 

부친 이정현(李庭賢)과 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가끔 초도로 가서 세상 이야기를 하면서 비분

강개(悲憤慷慨)했다.  그들은 부친이 죽은 뒤에도 가끔 찾아와서 위로해 주는 김진사를 고맙

게 대했다.  그런데 한번은 김진사가 찾아와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도련님 형제는 귀한 혈통의 후신으로서 앞으로 반드시 귀하게 되실 것입니다.  무식한 

가짜 왕족이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세상이 이꼴로 망해 갑니다.  지금 초도에 왕기가 비치

기 시작했으니 시운이 오기만 기다리시오."

  이명섭 형제는 꿈 같은 말에 우선 두려운 생각이 들었으나 부친과 막역한 친구요, 유식한 

김진사의 말이라, 그런 행운이 왔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유혹을 느꼈다.  그러나 김진사의 

말을 못 알아 들은 척했다.  그 후로부터 초도와 황해도 일대에는 < 초도에 새로운 왕기가 

돈다. >는 풍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명섭과 이영섭 형제는 그런 풍문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고, 또 임금 철종에 대

한 반역의 꿈도 꾸고 있진 않았다.  그보다도 선대들이 역적으로 몰려서 강화도에 고아로 

고생 끝에 임금이 된데 대해서는 오히려 축복을 했다.  같은 처지에서 고생하는 자기들도 

무슨 덕을 볼 희소식이 있으려니 하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형님, 은언군 댁도 이제 역적의 누명을 벗고 참 잘 되었습니다."

  "그래 다행한 일이다."

하고 형제는 기뻐했다.

  "새임금과 우리와는 촌수가 어떻게 되지요?"

  형 명섭은 오랫동안 족보를 따지고 나서

  "십육촌간인가 보다."

  "그렇게 멀어요?"

  "십촌만 넘으면 남이라니까, 그냥 먼 촌 일가지마..."

  형제는 좀 실망해서 쓸쓸히 웃었다.

  "그러나 불우한 왕족에겐 동정하시겠지."

  그러나 그들에겐 새 임금이 들어선 뒤에도 아무런 기쁜 소식이 없었다.

  "우리 형제는 먹고 지낼 걱정은 없으나,  선친님들 누명이나 씻어 주시는 분부나 내렸으

면 좋겠는데..."

  형제는 이렇게 은근히 불평을 품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황해도 본토에 사는 불평객 채희재(蔡喜載)가 초도로 와서 이명섭 형제의 집

을 찾아왔다.

  "댁에서 과객에 대한 대우가 후하시다는 소문을 듣고 하룻밤 신세지려고 들렸습니다."

  "이런 섬까지 오셔서 얼마나 불편하시겠소.  누추한 집이나마 쉬어 가십시오."

  주인 형제는 풍체도 근사한 선비차림의 과객을 맞아들였다.  그날 밤에 채희재는

  "나는 채제공(蔡濟恭) 종손으로서 이 나이까지 공부는 했으나 김가들의 세도정치가 남인

(南人)으로 모는 바람에 과거도 단념하고, 이렇게 산수를 찾아서 돌아다니며 세월을 보냅니

다."

  신세한탄겸 자기 소개를 했다.  그리고 주인 눈치를 보면서 세상에 대한 불평을 늘어 놓

았다.  이명섭 형제는 그를 경계하면서 그의 정치 불평에는 관심이 없는 듯이 지나는 말로 

흘려 듣고만 있었다.  신분도 모르는 사람의 이런 불평에 맞장구를 치다가 화를 입을까 두

려웠다.  혹 자기들의 내심을 염탐할고 온 밀정인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도련님들은 나를 수상한 사람으로 의심하는 것 같은데, 실은 연안 김진사하고는 생사를 

맹세한 동지입니다. 김진사가 요전에도 댁에들려서 세상 이야기를 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하고 채희재는 갑자기 친밀한 표정을 지으면서 음성을 낮추었다.

  "김진사의 뜻이 바로 내 뜻입니다. 김진사가 도련님 선친과 막역한 사이가 아니었습니까?"

  "예, 김진사는 선친과 친하셨고, 선친이 돌아가신 뒤에도 가끔 들려서 외로운 우리 형제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김진사는 우리들 동지와 함께 큰 꿈을 꾸고 있습니다.  요전에 와서도 초도에 새로운 왕

기가 돈다는 말을 하셨죠?"

  "네.  그러나 그게 정말입니까?"

  이명섭도 안심하고 채희재의 말에 끌려 들었다.

  "지금 임금이 무식한데다가 몸도 나약해서 멀지 않아서 병몰하겠지만 살아도 없애야 할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 뜻있는 동지들은 멀지않아서 도련님을 신왕으로 모시려고 전국의 

충의지사(忠義之士)를 규합 중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뜻은 고맙습니다.  그러나 그런 큰 일이 어찌 쉽겠습니까?"

  "도련님은 이 조그만 섬에 계시니까 서울사정과 전국의 민심을 모르실 겁니다.  그러나 

시운은 무르익어 거고 있습니다.  우리 동지의 의거(義擧)를 믿고 기다리십시오.  모든 일은 

우리 동지들이 하겠으니..."

  이명섭도 자기를 임금으로 추대해 준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그전에 김진사가 하던 말

보다도 확고한 태도로 다짐하는 채희재의 말에 세상형편이 그렇게 돌아가는 듯하기도 했다.  

직접 행동으로 나와서 모험을 하라면 겁이 나서 거절 하겠지만, 그 비밀만 알고 기다리라는 

말까지 사양할 생각은 없었다.

  (일이 실패하지 않도록 잘해 주시오.)

하는 말을 하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동했다.  채희재는 그런 이명섭 형제의 심중을 살피자 

무릎을 탁 치고 자신만만하게 역설했다.

  "염려 마시고 기다리시오.  우리도 일을 섣불리 하다간 역적으로 몰려서 죽을 텐데 조심 

않겠습니까.  그리고 시운과 실력에 자신이 없이 어찌 경거망동을 하겠습니까?"

하고 밤이 늦도록 철종의 욕과 척신 안동 김씨 타도를 역설하고 이튿날 아침에 그 집을 떠

났다.  이명섭 형제는 멀지 않아서 임금이 될 듯해서 흥분했다.  좁은 섬에서 육지에도 가 

보지 못한 그들은 글은 읽었지만 정치세계가 얼마나 복잡하고 위험한 것을 모르는 순진한 

청년들이었다.

  (무식한 강화도 나무꾼 원범이도 되는 임금이라면 우리 형젠들 못 될 법이 있으랴.)

하는 기묘한 망상조차 하게 되었다.  그리고 채희재는 연안으로 가서 진사 김응도에게 풍을 

쳤다.

  "이번엔 초도로 가선 이명섭 형제에게 우리 뜻을 털어놓고 얘기해서 잘해 달라는 부탁까

지 받았소.  관상을 보니 그만 인물이면 훌륭한 임금입니다.  역시 김진사 눈이 높아요."

  "이제 동지를 모아 자금을 조달합시다."

하고 두명은 구체적인 행동에 나섰다.  그들은 무식한 시골 부자들에게 새 세상이 되면 큰 

벼슬을 시켜 준다고 돈을 받아내고, 중병자에겐 병을 고쳐 준다고 속여서 정치 자금을 모았

다.  그리고 채희재는 대담하게도 친구 사이인 구월산성의 별장(別將)에게까지 군사비 중에

서 돈을 대고 병력도 협조시키라고 권하다가 코만 떼고 말았다.

  "내가 친구로 알고 한 말이니 비밀만 지켜주게."

  채희재는 애걸했다.

  "친구를 고발해서 죽게야 할 낸가?  그러나 그런 허무맹랑한 음모는 그만두어야 하네.  

그만둔다는 약속을 하면 고발만은 않겠네."

  산성별감은 위협조로 충고했다.

  "허허허, 자네도 아다시피 내가 홧김에 해본 소리지, 그런 무모한 짓이야 어찌 하겠나?  

그만두고 말고 할 것이 있겠나?  농담이니 염려말게."

  그런 수작으로 산성별장의 고발만은 모면했다.  그러나 자금이 조달되자 불량배의 장사

(壯士)들을 매수해서 폭력으로 세상을 뒤집어 엎을 모의를 했다.

  그런데 이들 중의 한명으로 그전에 포교를 지낸 고성욱(高成旭)이라는 자는 문화현(文化

縣)에서 행동대 병력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나갈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점점 내막을 

알고 보니 허장성세(虛張聲勢)의 협잡성을 알게 되자 겁이 났다.

  (에라 언제 볼 작자들이냐.  공연히 역적으로 잡혀 죽느니보다 이 기회에 벼슬이나 하자.)

하는 생각으로 몰래 서울로 가서 포도청에 밀고했다.  포도청에서는 대사헌(大司憲)에 보고

하고 곧 황해도로 병력을 출동시켜서 김응도, 채희재 외 주동자와 그 부하들을 일망타진했

다.  그리고 그들이 초도의 이명섭을 추대한다는 내막이 드러나자 그들 형제도 잡아들였다.

  이로써 초도의 왕기는 사라졌고, 음모를 고발한 고성욱만 상으로 오위장(五衛將) 벼슬을 

했다.

  전에는 철종의 사촌동생 경평군(慶平君)이 희생되었고 이번에는 십육촌의 이명섭 형제가 

희생되었다.  다음에는 완창군(完昌君)의 아들 이하전(李夏銓)이 또 희생될 운명에 놓이게 되

었다.

  이하전을 추대하려던 김순성과의 관계는 앞에서 본바와 같았으나 그 뒤에 이하전은 돈녕

도정(敦寧都正)의 한직에 있었고 당시의 종친으로서는 유일한 관직자로 남아 있었다.  그는 

왕족이 반란음모에 이용되는 페단을 알고 있었으므로 모든 언행을 조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하전이 모르는 동안에 김순성 오위장은 이하전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준히 해왔다.  그는 그전에 현감(縣監)을 지내다가 김씨 세도의 여파로 몰려난 후에 불평

을 품고 있던 이긍선(李兢善)과 의기가 투합(投合)했다.  시골로 돌아다니며 불평객 친구들과 

연락하고 서울로 돌아온 김순성은 우선 이긍선의 집을 찾아갔다.

  "영감, 시골 다니면서 동지들과 연락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지방민의 인심도 모두 김가 

세도에 진저리를 내고 있으며 병신 임금을 몰아내고 새 세상이 돼야 살겠다고 아우성들입니

다.  그러니 우리가 거사할 시기가 왔다고 봅니다.  새 임금으론 전에 다 말씀 드렸지만 돈

녕도정 이하전, 그 분을 모시면 정계에서도 세상에서도 환영할 것입니다."

  "그야, 지금 왕족으론 그 분밖에 없으니까 그분을 추대하는 건 좋지만 우리 둘 힘으로야 

어찌 세상을 둘러 엎겠는가?  일할 행동대가 있어야지."

  "지금 장사로 유명한 자로선 네명이 있는데 모두 협력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들의 부하

가 또 각각 많으니까 문제 없습니다."

  오위장으로 행새하는 김순성은 건달 두목들과 안면이 넓어서 임일희(任馹熺), 이재두(李載

斗), 고제유(高濟儒), 정유성(鄭裕誠) 등과 손을 잡게 되었다고 자랑했다.

  "허어 자네 활동이 놀랍군."

  "그래서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가서 정유성을 만났고, 잔라도 해남으로 가서 임일희도 만

나고 왔습니다."

  "음, 그러나 거사할 시기는 더 두고 연구해 보세.  그러는 동안에 실력이나 더 길러 두기

로 하고..."

  "아닙니다.  우리가 안해도 딴 패가 일어설 것입니다.  기왕이면 먼저 해야지 늦으면 다음 

세상도 딴 놈들 세상이 됩니다."

  "그럼 거사할 준비를 하세."

  그들은 장사들을 매수해서 그들 부하의 부랑배를 이용할 계획을 세우고 그들이 사용할 무

기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사들에게 칠월 오일에 궁중으로 쳐들어 가기로 약속했

다.  그러나 병력 모집이 여의치 않아서 팔월 십일로 연기했다.

  그러나 음모 내용이 허술한 것을 알게 된 장사의 하나인 이재두가 김순성의 협잡성을 의

심하게 되었다.  우선 현재 진행 중인 음모의 내용이 이상했다.  일을 연기하는 것도 실력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그뿐 아니라 그가 오위장으로 출세한 것도 그전에 천주교도를 

팔아 먹은 배신행동으로 이룬 것이 꺼림했다.

  (저놈이 이러다가 일에 자신이 없게 되면 또 우리를 팔아 먹을지도 모른다.  아니 처음부

터 팔아 먹으려고 꾸민 협잡인지도 모른다.  그놈 장단에 춤추다가 역적으로 몰려 죽고 그

놈만 출세시켜 주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장사 임일희에게 상의했다.

  "설마 그럴 리야 있나.  더 참고 있게.  내가 자네보다 더 가까우니까 잘 알아 보겠네.  

그가 배신할지 모른다는 의심만으로 자네가 배신하면 그보다 나쁜 사람이 되지 않겠나.  죽

어도 의협심을 지킬 자네가 그런 비겁한 행동을 해서야 되겠나."

하고 이재두를 타일렀다.

  "그럼 기다려 보죠."

  이재두는 임일희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한번 의심한 그는 점점 불안해지기만 했

다.  그는 임일희도 모르게 포도청에 밀고했다.  포도청에선 곧 김순성을 잡아서 엄중한 고

문을 했다.

  이때 이미 영남지방에서는 조정을 규탄하는 행동과 재물을 강탈하는 등의 민란(民亂)이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서울에서 이런 흉계를 꾸민 음모사건은 본보기로서도 엄단해야 한다고 

김씨 일파에서 들고 일어섰다.

  고문 결과 완창군의 아들 이하전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던 내막도 드러났다.  영문도 모르

던 이하전은 잡혀서 문초를 받았다.  그러나 이십이 갓 넘은 이하전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의 무죄를 주장했다.  김순성은 부친 재세시에 집에 온 것을 본 일은 있지만 그 

후 수년 동안 만난 일조차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저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전연 모릅니다.  그자들이 흉계를 꾸미느라고 혹 내 이름을 팔

았다 하더라도 나로선 모르는 일이니까 나를 괴롭히지 마시오.  그자들 중에서 나를 만나서 

그런 모의의 말 한마디라도 한 사실이 있는지 그 자들이나 철저히 조사해 주시오."

  추관(推官)이 김순성 등을 조사한 결과 자기들 마음대로 이하전을 추대하려고 했을 뿐 이

하전과의 접촉은 없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추관도 이하전에게는 오히려 미안하게 여기고 

일단 석방하고 근신하라는 훈계를 받았다.

 그러나 김순성, 이금선 등을 역적죄로 참형한 뒤에, 김씨 일파는 이하전을 없애 버려야 금

후에는 그런 추대음모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사건에 관련시켜서 처단할 것을 주장했다.  철

종도 마지 못해서 이하전을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이하전은 소년 때부터 우리 김씨 일문을 원수로 삼아왔다.  과거 때도 우리 김씨 일문을 

욕한 일이 있었다.  이번 일도 그놈이 주동이 되진 않았더라도 정(情)을 알면서 성공하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좌우간 그 놈은 우리 김씨의 적이다.  이 기회에 없애 버려야 한다."

  "귀양 보냈으면 됐지 억울한 종친은 그 이상 벌할 수가 있느냐?"

  온건파에는 이런 주장도했다.  그러나 김씨파에서는 직접 철종에게 대들었다.

  "이번 역적음모도 이하전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상감께서 종친이라고 사정을 두고 살려 

두시면 또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모릅니다.  그는 또 종친의 세를 믿고 충성된 척신을 타도

하려고 벼르고 있습니다.  그런 자와는 같은 하늘 밑에서 상감을 보필하기 어려우니 불신 

받는 우리는 조정에서 물러나겠습니다."

  "내야 종친이라고 무슨 두둔을 하겠소.  귀양 보내는 것이 옳다고 하기에 그러라고 했을 

뿐이요.  귀양이 경하다는 경들의 의견이라면 적당히 처분하시오."

  그전에도 이런 식으로 사촌동생 경평군까지 희생시킨 철종이었다.  그런데 덕흥대원군의 

후손인 이하전은 촌수도 먼 일가로서 개인적으로도 정이 들지 않은 왕족이었으므로 김씨 주

장에 맡겨버린 것이다.

  "상감께서 이하전을 대역죄(大逆罪)로 사사(賜死)하라시는 엄교(嚴敎)가 내리셨다."

  김씨 일파는 곧 이하전에게 독약을 내리는 절차를 취했다.  그래서 제주도로 귀양간 이하

전은 목숨만 산 것이 다행이라고 체념하고 있다가 왕이 내렸다는 독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

났다.  김씨 일파는 이로써 왕족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러고도 분을 풀지 못했는지 서울

에 남았던 이하전의 모친과 아내까지도 그가 죽어 없어진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안동 김씨의 행패가 너무 과격해서 왕실의 인륜까지 끊으면서 자파와 

정권연장에만 급급하다는 비난이 높아갔다.

  (왕족도 우리 앞에 맥을 못 춘다.  하물며 불평정객이나, 성명 없는 백성이 김씨 세도에 

반대하겠느냐?)

하는 김씨 일파의 기세는 기고만장했다.  그러나 천운(天運)과 민심은 이미 철종과 안동 김

씨한테서 멀어지고만 있었다.

  철종은 얼마 후 삼십삼세의 청년으로서 후계 시킬 아들도 없이 과음(過淫) 여독의 부족병

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 철종의 승하를 계기로 척신세도로 극성(極盛)을 부리던 안

동 김씨도 급전직하로 몰락해 버렸던 것이다.


  [ 雲峴宮의 봄 ]   < 샘물 잃은 갈대 >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雲峴宮의 봄 

    샘물 잃은 갈대



   사사로운 집안에서도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양자를 하면 가정불화가 생기기 쉽다.  

더구나 왕실(王室)에서는 더욱 심하다.  세자가 없어서 종친(宗親)의 소년을 맞아 임금으로 

세우는 수가 있을 때 이런 양자임금을 가리켜서 입승 대통(入承大統)이라고 한다.

  철종(哲宗)의 선왕(先王) 헌종(憲宗)이 무후(無後)해서 부득이한 사정으로 강화도에서 곤궁

히 지내던 빈농소년(貧農少年)을 맞아서 임금을 삼은 것은 앞에서 본바와 같이 소위 강화도

령(江華道令)으로서 등극한 철종이었다.  선왕 헌종이 이십삼세의 청년임금으로서 아들을 남

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듯이 철종도 삼십삼세의 단명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역시 아들이 없

었다.

  그런데 헌종과 철종 이대의 임금은 모두 무능한 임금이었다.  헌종시대에는 모친 신정후

(神貞后) 조대비(趙大妃)의 수렴정치(垂簾政治)로서 외척(外戚) 조씨가 세도를 부렸다.  그리고 

철종시대에는 외척 김씨(金氏)가 세도를 부렸는데 이 두 국척(國戚) 사이의 추잡한 파쟁 속

에서 철종은 무위 무능한 임금으로 치맛바람에 취하여 스스로 젊은 생명을 소모해 버렸던 

것이다.

  일개 무능한 임금의 죽음은 인간적으로 동정이나 해주면 족했지만 지존(至尊)한 그 임금

의 뒤를 잇는 자리다툼에는 실로 국가의 운명이 좌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철종이 세상을 

떠난 뒤에 다음 임금을 모시는 문제로 세도하던 외척의 김씨와 조씨 사이에는 치열한 경쟁

의 암투가 있었다.

  결국 조대비는 흥선군(興宣君)의 둘째 아들을 맞아서 고종(高宗)으로 등극시켰다.  그 뒤로

는 흥선군이 어린 임금을 대신하는 영악한 집권자(執權者)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흥선군이 

바로 조선말기(朝鮮末期)의 역사를 뒤흔들고 민비(閔妃)와 함께 나라를 망쳐버린 대원군(大院

君)이다.

  철종이 세상을 떠나고 고종이 양자임금으로 들어선 시기는 조선왕운(朝鮮王運)이 이미 기

울었고 백성은 부패한 세도정치(勢道政治)에 지칠대로 지쳐서 생활이 말 아닌 상태에 있었

다.  위로는 왕위 쟁탈과 당파의 알력으로 집권층의 암투가 계속되어서 암살이 횡행했고 아

래로는 병란(丙亂)과 민란(民亂)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조선의 정치가 이처럼 부패 문란하고 민생이 도탄에 빠져 있을 때, 밖의 세계는 십팔세기

부터 과학문명의 발달과 함께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경쟁이 치열해서 식민지 확장정책에 여

념이 없었다.

  이러한 구미(歐美) 열강의 세력은 점점 동양으로 손을 뻗어 왔다.  중국은 서양 열강의 강

요로 굴욕적인 개항(開港)과 할양(割讓)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일본도 삼백년 동안의 봉건

전제(封建專制)의 막부정권(幕府政權)이 무너지고 명치유신(明治維新)을 단행해서 서양문물을 

수입 활용하여 근대국가(近代國家)로서의 새출발을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왕실과 위정자들은 이러한 동서양의 국제정세와는 고립해서 오직 왕위와 

정권의 쟁탈에만 몰두하면서 소경 제 닭 잡아 먹는 우거(愚擧)만 일삼고 있었다.  그러나 거

센 외세(外勢)의 바람은 우리 한반도(韓半島)에도 불어와서 마침내 외국 군함에서 쏘는 대포

소리에 놀라게 되었다.

  대원군은 이에 대한 자위(自衛)로 쇄국(鎖國) 정책을 단행했으나 결국 방안의 호랑이 노릇

에 지나지 못했다.  그와 호적수였던 민비는 교묘한 외세 이용의 번복으로 자파 세력 유지

에 급급했으나 결국 제 꾀에 빠져서 죽은 여우에 지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863년(哲宗 十四年) 봄에 아직도 삼십삼세의 젊은 임금으로 거품 꺼지 듯이 허약해진 

목숨을 거두고 말았다.  궁중과 집권층 양반들은 임금의 죽음보다도 자파(自派)의 세도를 유

지할 수 있고 또는 부활시킬 수 있는 임금을 택하기에 골몰했다.

  "세자를 정하지 못한 채 승하(昇遐)하셨으니 어떤 분으로 입승대통(入承大統)해야 좋을까."

  모두 왕실을 위하는 충성스런 말을 수색 띤 얼굴로 걱정했다.  그러나 검은 뱃속에선

  (이 기회에 꼭 우리 파에 유린한 분을 업고 들어가야겠다.)

하는 야심으로 암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 항간에서는 쉬쉬하면서도 철종이 일찍 죽는 

병인(病因)에 대한 화제에 더 흥미를 느꼈다.

  흰 것을 쓰고 흰 옷을 입는 국장(國葬)은 단순한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그만큼 백성의 

존경을 받지 못한 임금이었다.  국상이 났다는 소문으로 비로소 철종이라는 임금이 있었던

가 하는 반응밖에 없었던 항간에서는 쉬쉬하는 풍문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궁중에서 밤낮 한 일이란 허리 운동밖에 없었다니 무쇠 허리라도 병이 날 것 아닌가.  

오랫동안 허리를 못 쓰고 누워서만 지냈다네."

  "허리 운동은 본디 누워서 하는 게 아닌가?"

  "젊은 분이 요통으로 죽다니."

  "죽을 정도로 색에 곯으셨으니 염복도 많은 임금이셨군."

  술자리에서 시정천민(市井踐民)들까지 이런 무엄한 흉을 볼 만큼 철종은 여색으로 몸이 

허약해서 스스로 죽음을 재촉한 것이 사실이었다.  아무리 궁중 침실의 허리 운동이라도 인

간이 사는 세상에는 비밀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왕자교육(王子敎育)도 받지 못했던 무식한 

강화도령에게서 명군(名君)의 치적을 바라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결국 등극 동기부터

가 당파들의 이용물로 시작된 철종에게는 우선 왕의 실권을 행사할 만한 소양과 능력이 없

었다.

  그뿐 아니라 외척 안동 김씨가 국권을 좌지우지 했으므로 한 일도 없고 시키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궁중에서 주색의 환락에만 빠져서 짧은 인생을 취생몽사(醉生夢死)한 젊은 임금이

야말로 인생으로서 가장 불행한 인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철종이 강화도의 도령.  아니 나무꾼 총각으로 도민(島民)의 처녀와 가정을 이루고 빈한한 

농부의 생활을 계속하였으면 아마 평범하고 건강한 몸으로 육, 칠십의 수명을 누렸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철종은 정비(正妃) 이외에도 무수한 궁녀들과 애욕의 생활을 누린 젊은 임금이었다.  주지

육림(酒池肉林)에서 밤낮으로 정력을 소모한 젊은 임금은 몸이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서 허

리까지 제대로 쓰지 못해서 요통증이라는 병명으로 용미봉탕(龍尾鳳湯)의 천하 보약을 썼으

나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정확한 현대의학으로 진찰했으면 폐병이었을는지도 모른다.  여색의 중독 환자에게는 보

양(補陽)하는 정력제도 소용이 없다.  약으로 보충한 이상의 정력을 계속 소모한다면 무슨 

선약이 소용 있을 것인가?  몸이 허약해서 여자와의 동침을 감당하지 못하면서도 허양(虛

陽)만 동해서 죽는 순간까지 궁녀의 치마폭을 잡고 놓치 못했다 한다.  궁녀들로부터 새어 

나온 말이지만 결코 소박 맞은 궁녀가 꾸며낸 질투의 거짓말은 아니었다.

  철종은 허리를 못쓰고 누워서만 지냈다.  궁녀들이 좌우에서 부축해 일으켜도 머리가 어

찔어찔하고 눈에서 오색 불똥이 빙빙 돌다가 눈이 먼 듯 앞이 캄캄했다.  누워 있기에 지루

해서 앉아 있으려 해도 혼자는 몸을 가누지 못해서 등뒤와 좌우에 궁녀들을 앉히고 기대 있

어야 했다. 

  젊고 탄력 있는 궁녀의 몸에 기대어 있으려면 젊은 임금은 또 허양이 동해서 성적 유혹을 

느꼈다.  그러면 궁녀 중 하나의 치마끈을 잡고 바르르 손을 떨었다.  치마끈을 풀 기력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른 궁녀들이 자리를 비켜서 그 방에서 나간다.  치마끈을 잡힌 

궁녀는 남아서 이미 남자 구실도 못하는 임금을 만졳켜 주지만 궁녀 자신은 아무런 쾌감도 

느끼지 못하는 순간적인 봉사를 해주어야 했다.

  "아아, 내가 이렇게도 허약해졌을까.  너를 마음으론 귀여워하면서 몸으론 귀여워할 힘조

차 없구나.  이러다가는 아들 하나 남기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

  "상감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송하오나 쾌차하실 때까진 여자를 가까이 하지 

마옵시면 어떠세요?"

  궁녀로서도 상감의 건강을 염려하고 말했다.  여자로서도 무의미한 육체의 봉사가 쑥쓰럽

기도 했을 것이다.

  "너까지 나를 실망시키느냐?"

  임금은 노염과 탄식섞인 음성으로 궁녀의 허리를 껴안았으나 팔에는 힘이 없었다.

  "그런 말이 아니오라..."

  "아, 다 듣기 싫다.  너는 나보다도 힘차게 오래 안아 줄 하인 놈이 더 좋단 말이 아니냐?  

바른 대로 말해라."

  임금이 이렇게까지 애원하듯이 추궁하면 궁녀는 의무적으로라도 갖은 성적아양과 기교를 

부려서 무능한 임금을 위로하고 자극해 주었다.  이래서 임금의 정력은 더욱 소모되고 생명

은 단축되었다. 

  "나는 너를 안은 채 죽어도 좋다.  너희들 없이는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다."

  풍류탕아(風流蕩兒)는 남자의 죽음은 여자와 동침 중에 복상사(腹上死)가 제일 좋은 인생

의 최후라고 한다지만 이 젊은 임금의 건강은 이미 복상할 기력조차 없었다.  그러면서도 

여색을 단념하지 못하고 환락의 습성도 버리지는 못했다.  철종 자신으로도 너무 여색을 탐

하는 것이 건강에 좋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런 반성 정도로는 여자의 치마끈을 놓을 

수 없는 것이 야속했다.

  "아들 하나 두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

하는 철종의 탄식은 왕위를 자기 혈통에게 이어주고 싶다는 희망 이외에 본능적인 고독감이

기도 했다.  철종의 환경과 능력과 성격이 정치에 열중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밤낮으로 

궁녀들과 성적유희에 빠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정치에 대한 아무런 실권도 없고 할 일도 

없는 정력은 어느덧 여색에 빠져서 무료한 세월을 보내게 되었고, 그것이 습성의 중독이 되

어서 마침내 정력과 생명을 단축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명예롭지 못한 병인(病因)의 화제만 남기고 아들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승하해 버

리자 왕실과 세도 정치가들에게는 왕위 계승이란 중대하고 심각한 문제가 닥쳤다.

  이때에 정권을 전횡한 파는 안동 김씨(安東金氏) 일족이었다.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은 세

상에서 보통 생각할 수 있는 가까운 종친(宗親) 중의 인물(소년)로서 전계군(全溪君)의 아들 

영평군(永平君)과 풍연군(豊燕君)의 아들 완평군(完平君), 그리고 흥녕군(興寧君) 아들의 사형

제 가운데서 임금을 생각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외척으로서 가장 발언권이 강했던 국구(國舅) 김문근(金汶根)이 

작년에 이미 세상을 떠났으므로 큰 타격이었고 그때까지 치밀한 사건 공작을 하지 못했으므

로 매우 당황했다.

  "자칫하면 조가들이 무슨 음모를 할지 모르니 그쪽 동정을 살펴보라."

  김좌근은 정적(政敵)의 움직임을 경계했다.  조가라 함은 조대비(趙大妃)와 그의 조카 조성

하(趙成夏) 등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조대비와 조성하는 안동 김씨 세도에 불평을 품고 

철종이 승하하기 전부터 세자책립(世子冊立)에 관한 공작을 은연중에 해왔다.  조대비는 이 

기회에 자기 파에 유리한 종족을 다음 임금으로 삼으려는 종전의 계획을 급속히 진행시켰

다.

  이런 문제에 대해선 조대비가 결정권을 갖고 있는 것이 궁중 관례(宮中慣例)였기 때문에 

아직 준비도 없고 발언권도 약한 영의정 김좌근파에게는 불리했다.  더구나 조대비 일파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에도 아직 어두었다.  한편 조대비파에서는 전격적으로 이 문제를 당행

하려고 했다.


  [ 雲峴宮의 봄 ]   < 잠자는 사자 >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雲峴宮의 봄 

    잠자는 사자



   왕위 계승에 관한 발언권은 혈통문제인만큼 왕실과 외척(外戚)에 있고 대신들은 의견을 

말할 정도이지 결정권은 없었다.  당시의 사정으로 발언권의 순서를 보면 조대비를 비롯한 

과부(寡婦) 삼대(三代)의 왕후가 첫째요, 외척의 세력과 관계로는 철종비(哲宗妃)의 외척인 안

동 김씨파가 둘째요, 익종비(翼宗妃)의 외척인 풍양 조씨(豊穰趙氏)가 셋째, 헌종비(憲宗妃)의 

외척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미미한 존재에 지나지 못했다.

  철종이 승하하자마자 조대비는 궁중의 최고 위의 권한으로 중신들을 창덕궁 안의 중희당

(重熙堂)으로 소집하고 긴급회의를 열었다.  발을 늘인 상좌에는 신정후(神貞后) 조대비와 익

종비와 철종비의 삼대 과부가 차례로 앉고,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와 남양 홍씨 출신의 중

신들이 연석했다.

  이 중대회의의 중심격은 물론 조대비였다.  조대비는 비로소 마땅치 않던 외척 김씨의 거

두(巨頭)들을 멸시하는 권력의 쾌감을 느끼면서, 다음 임금으로 어떤 분을 모시면 좋겠느냐

고 물었다.

  이 자리에서 응당 강경한 복안을 주장할 영의정의 아들 김병기 이하의 안동 김씨들은 신

통한 대책이 없었으므로 서로 얼굴만 쳐다보면서 당황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조대비는 외척들을 비롯한 중신들에게 아직 이렇다 할 안이 없는 것을 알아채고 자기 생

각대로 결정해 버릴 결심을 했다.  만일 시간의 여유를 두고 생각해 보자고 하면 암투와 잡

음이 생길 것을 두려워한 조대비는 당황하는 중신들에게 명령하듯이 독촉했다.

  "나 같은 미망인이 이런 망극한 국상을 당하여 원통한 중이나, 지금 나라 사정이 일시의 

여유를 허락치 못할 중대 시각이니, 이 자리에서 속히 종사(宗事)의 대계(大計)를 결정하고, 

이 전국대보(傳國大寶)를 계승케 하오."

하고 그 자리에 모셔 내놓은 옥새를 가리켰다.  조대비로서는 계획한 대로의 일대 연기를 

한 셈이다.

  "..."

  그러나 김씨 일문을 비롯한 세도가들은 사건이 중대한 만큼 준비 없는 대답을 경솔히 할 

수 없어서 묵묵히 앉아만 있었다.  그것은 침울한 권력투쟁을 내포한 무거운 침묵이었다.

  이때 정계에서는 오히려 세력이 미악하던 팔십 노신(老臣)인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원

용(鄭元容)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이는 이미 조대비와 연락이 되어 있었으므로 역시 예정

대로의 역할을 맡고 나섰던 것이다.

  "여러 중신들이 별로 아뢸 의견이 없는 것은 자성(慈聖)의 명지(明旨)를 기다리는가 하옵니

다.  그러하온즉 이 문제는 역시 자성께서 책정하시는 것이 좋을까 하옵니다."

  이 말에 당대의 세도가 김씨 일파는 정신이 아찔했다.  그러나 대의명분으로 조대비의 독

단을 막을 준비도 없었다.  한층 더 침울한 공기가 흘렀다.  조대비는 이 중대한 문제가 뜻

밖에도 자기의 생각대로 결정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그러나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중대 결정을 발표했다.

  "그러면 흥선군(興宣君)의 제이자(第二子) 명복(命福)으로 익종(翼宗)의 대통(大統)을 이어 

받도록 하고 싶소."

하고 당당한 선언을 했다.  김씨 일파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지금까지 멸시해 오

던 흥선군이 이 순간에 득세하고, 김씨 일파를 조정에서 축출할 뿐 아니라, 보복적인 살육과 

투옥을 감행할 것 같은 공포로 몸이 떨렸다.  흥선군이 자기 아들을 임금으로 등극시키면 

곧 제일의 권력자로서 등장해서 어린 임금의 이름으로 무소불육의 괴완(怪脘)을 발휘할 인

물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대왕대비의 말씀이 지당한 분부로 아옵니다.  황공하오나 후일의 증거로 친히 그 뜻을 

글로 써서 내려 주십시오."

하고 정원용이 요청했다.  이 중대회의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대비와 정원용의 문답으로 

된 연극이요, 다른 대부분의 중신들은 불평을 품은 침묵의 관객에 지나지 못했다.  조대비는 

발 안에서 한글의 친필로 한 장의 선언문을 썼다.

  <흥선군의 제이자로 익종의 대통을 잇도록 하라.>

  정원용은 자기가 미리 조대비의 뜻을 받아서 하는 연극이라는 눈치를 채이지 않기 위해서 

심중한 태도로 일을 진행시키려고 도승지(都承旨) 민치상(閔致庠)에게 부탁했다.

  "도승지, 이 교서(敎書)를 한문으로 번역해서 좌중에 들려 주시지요."

  한문으로 번역된 조대비의 교서 낭독을 들은 안동 김씨들은 과부인 조대비의 말로 들을 

때보다 글로 되자 자기들에게 내린 냉혹한 사형선고문 같이 무서워졌다.

  (이제 흥선군 손에 우리 안동 김씨는 다 죽겠구나!)

하는 한숨이 여기 저기서 새어나왔다.

  "대왕대비께 아뢰오.  사왕(嗣王)은 아직 봉군(封君)하지 않고 계시오니 먼저 봉군하도록 

분부를 내리시오."

  역시 정원용이 절차순서를 요청했다.

  "과연 그렇소.  익성군(翼成君)으로 봉하고 곧 궁중으로 모셔들이도록 예를 갖추어 마중 

가게 하오."

  조대비가 봉군(封君)의 칭호까지 그 자리에서 지어서 발표하는 것을 본 중신들은 미리부

터 치밀한 준비를 해 왔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더욱 놀랐다.  그리고 흥선군 - 즉 신왕(新

王)의 생부(生父) 이하응(李昰應)의 야망이 번개같이 성공한데 놀랐다.

  세도 정치를 하던 안동 김씨 일족은 임금으로 왕실에 들어앉은 이명복(李命福)이라는 소

년이 문제가 아니고 그의 생부인 흥선군 이하응이 섭정세도(攝政勢道)로 정권을 빼앗기게 

될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흥선군 이하응은 그때까지 관도령(官道令)이라는 별명으로 불려온 몰락왕족(沒落王族)으로

서 세도하던 안동 김씨의 멸시를 받아 왔었다.  일반 양반사회에서도 그를 장안의 부랑자

(浮浪者)로 여기고 교제조차 하기를 꺼려했던 사람이었으나 아들이 고종(高宗)으로 즉위(卽

位)하게 되자 일약 대원군(大院君)이 되어서 정권(政權)을 장악해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국사

를 요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살고 있던 운현동(雲峴洞)의 집도 운현궁(雲峴宮)으로 존

칭하게 되었으니 이때야말로 운현궁은 꽃피는 봄을 맞아 최고의 행운으로 빛나게 되었던 것

이다.

  흥선군은 1,820년, 즉 순조(純祖) 이십년에 안국동(安國洞)에서 종친(宗親) 이병원(李秉源)을 

조부로 남원군(南原君) 이구(李球)를 아버지로 하여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부인은 민씨(閔

氏)였다.  영조(英祖)의 현손(玄孫)뻘이 되고 자(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대담한 성격으로서 기국(器局)이 크고 호탕했다.  헌종(憲宗) 구년에 

흥선군으로 봉군(封君)되었고, 같은 십삼년에 중국으로 가는 동지사(冬至使)의 물망에 올랐으

나 실격(失格)하고 말았다.  그는 이때부터 관운이 비색했으며 동시에 세도가들에 대한 불평

객이 되었다. 

  그 후에도 종친부유사당상(宗親府有司堂上)이니, 또는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이니 하는 미미한 한직(閑職)에서 썩고 있는 신세에 지나지 못했다.  그 이유는 헌종과 철종

의 시대에는 외척 안동 김씨가 정권을 독점하고 왕족의 유능한 인물일지라도 정계 진출을절

대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가 놈들이 왕실과 국가를 망쳐버리고 있다.  그러나 내가 죽기 전에 그놈들 역적을 소

탕해 버리겠다."

  불우한 시대에 태어난 흥선군은 시정의 부랑배와 불평정객들과 막걸리 타령을 하는 자리

에서 이런 소리를 탕탕했다.  그러나 안동 김씨는 이런 몰락 왕족의 불평을 문제도 삼지 않

고 무시해 버렸다.

  "외척의 세도가 우리 왕족을 다 역적으로 몰아 죽이더라도 나는 놈들의 손에 죽지 않는

다.  놈들의 원수를 갚지 않고는 죽지 않는다."

  "대감께서 그런 큰 소리 하는 것도 우리들 같은 서민과 술친구가 된 덕분인 줄 아시오.  

만일에 그자들이 두려워할 만한 세력이라도 있어 보시오.  당장에 도정궁(都正宮)과 경평군

(慶平君) 같은 참변을 당하실 게 아니요?"

  "하하하, 그러니까 자네들과 술타령하는 것이 역시 제일이야."

하고 흥선군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나 흥선군도 세도하게 되면 우리들 막걸리 친구를 잊으실걸요."

  "그땐 기생집 유흥비며 노름돈 걱정은 시키지 않을 테니 염려 마라.  큰 감투는 자네들 

머리에 어울리지 않으니까 적당한 호강을 시켜 줄게 두고 보아라."

  흥선군의 시중의 서민 부랑자들과도 이렇게 친한 교제를 하고 취중 농담으로 정치적인 세

력의 씨를 뿌리면서도 심중의 큰 야심은 숨기고 있었다.  불평과 고민을 이런 부랑자들과의 

술타령으로 잊으려고 했으며 유명한 난초그림(蘭畵)의 청아(淸雅)한 풍류로 고독을 위로했다.  

그리고 무슨 일을 몰래 꾸미는데도 뒤에서 기안묘책(奇案妙策)으로 동지를 지휘했다.

  헌종 때에는 세도하는 외척 김씨 때문에 왕족들이 숨도 못 쉬던 수난을 겪어야 했다.  철

종 십삼년에는 도정궁 이하전(李夏銓) 사건이 발생했다.  왕족 이하전은 기개가 높은 인물로

서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지지를 받고 철종 대신으로 왕위계승(王位繼承)의 후보자로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외척 김씨들은 그런 유능한 인물을 임금으로 맞아들이면 자기들의 세력에 방해가 

되리라는 생각에서 반대하고 무능한 강화도령을 철종으로 맞아들이게 했던 것이다.  그때는 

그것으로 무사했으나 이하전을 지지하는 영의정 권돈인을 몰아낸 뒤에는, 이하전이 왕위를 

찬탈하려는 대역죄(大逆罪)로 몰아 없애고 연루자 이긍선(李兢善)과 김순성(金順性) 등도 처

형하였다.  이 사건도 그들을 배척해 버리기 위하여 김씨 일파가 꾸민 연극임을 세상에서는 

의심하지 않았다.

  이 사건보다도 이년 전인 철종 십일년에도 왕족 경평군 이호(慶平君 李皓)도 세도하는 외

척을 비난했다는 설화(舌禍)로 원도(遠島)로 귀양을 갔다.

  "경평군도 김좌근, 김문조 등 세도 외척의 욕을 하다가 그런 봉변을 당했으니 대감도 말

조심하시오."

하고 술친구들이 충고하면 흥선군은 껄껄 웃으면서

  "그 분은 같은 말을 해도 상대자가 자네들 같은 무식쟁이 망나니가 아니고 꽁한 샌님들과 

찬물만 마시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했으니까 무슨 음모라도 한 것처럼 몰아대기 쉬웠던 거

야."

  "그렇지 않소.  경평군의 말동무가 우리들보다 유식한 양반이래서가 아니라 대감이 경평

군만도 못하게 김씨일족에게 무시당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허긴 그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놈들에게 철봉을 가할 순간까지 내가 무능력한 주정뱅이

로 인정되기를 나는 바란다."

  "그러면 우리는 대감의 신변보호를 하는 광대란 말인가요?"

  "그러니까 내가 막걸리라도 사는 게 아니냐?  아무튼 이런 시절엔 술이나 먹는 게 제일이

다.  그런 얘기를 하면 술맛이 쓰다.  자!  잔이나 들까."

  그런 농담을 하면서도 그는 경평군이 세도가 김좌근의 욕을 한 죄로 작호(爵號)를 박탈당

하고 귀양까지 갔던 사실에는 항상 분개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후일의 대망(大望)을 도

모하기 위해서 우선 생명의 안전만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정계 진출의 뜻을 일단 단념했

다.

  그래서 모략과 살육을 일삼는 정계(政界)를 멀리하고 세상을 버린 풍류객, 또는 타락한 유

야랑(遊冶郞)을 가장(假裝)하고 시정(市井)의 부랑아와 어울려서 막걸리 타령으로 세월을 보

냈다.  취하면 세도 김씨의 욕도 안주삼아 탕탕했다.  그러나 이런 자리에서 한 말을 문제삼

기엔 영의정 김좌근은 너무도 위대한 권력자였고, 흥선군은 너무도 타락된 관도령에 지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심중에 원수로 여기는 세도가의 집을 직접 찾아 다니면서 비참한 구걸행각까

지 했다.  모든 자존심과 체면도 버린 그런 행색도 그의 도량이 큰 원모(遠謀)에서 나온 행

동이었다.

  우선 빈한한 그로서는 그들의 동정을 빌어서 당장의 실리(實利)도 취하고 그들에게 자기

의 야심을 숨겨서 안심시키고 겸해서 그들의 동정을 염탐하려는 목적에서였다.

  "대감, 큰 아들 놈이 빈들빈들 놀고 있어서 꼴이 보기 싫으니 무슨 일자리 하나 생각해 

주시오."

하고 엽관운동도 아닌 밥벌이의 취직운동을 했다.

  "대감, 좋아하는 술은 해야겠으니 술값을 좀 주시오."

하고 용돈 구걸도 했다.  재상 김좌근의 으리으리한 저택을 비롯한 여러 재상집을 이런 구

걸로 무상 출입했다.

  "하하, 관도령님이 헌신짝을 질질 끌면서 재상집 구걸을 다니시니 상당한 술값을 얻으셨

겠군요."

  재상집 큰 사랑에 우글거리는 문객(門客)들도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멸시하는 

태도로 조롱했으나 관도령은 조금도 개의(介意)하지 않았다. 

  "마침 병풍을 꾸미게 됐으니 관도령님 난초 그림이나 몇 폭 그려 주고 가시오.  그림값은 

생각하리라."

하고 돈을 거져 주기가 아까와서 그런 청을 조롱하듯이 하는 재상도 있었다.

  "대감, 나는 이래도 환쟁이는 아니니까 그림 값은 싫소.  그림은 선사할 테니 대감도 술값

을 선사하시오.  하하하."

하고 관도령은 난초 그림을 신나게 휙휙 그려 주고 그 그림값의 몇 분의 일도 못 되는 술값

을 주면

  "아아, 대감댁 인심이 제일야."

하고는 술집으로 갔다.  이런 흥선군의 탈속한 태도에 정객들은 그를 위험한 정적으로는 꿈

에도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면으로는 귀신도 모르게 세력의 줄을 잡으려고 비밀 운동을 하고 있었다.  

궁중에서 제일 어른으로 있는 익종후(翼宗后) 조대비(趙大妃)와 그의 조카 조성하(趙成夏)가 

세도 김씨에 대한 불평을 품고 있는 것을 안 그는 우선 조성하와 친분을 맺는데 성공했다.

  그는 그 풍류객다운 가야금 솜씨와 난초그림 솜씨와 술과 말재주로 조성하와 인간적인 친

분을 맺었다.  인간적으로 친해진 뒤에서야

  "대왕대비께 있어서나 조공에게 있는 부당한 고적감과 불우한 사정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소.  나야 세상을 버린 몸이라 세도고 벼슬이고 다 구역질이 나서 입에도 올리기 싫

지만 공이야 대비님의 어엿한 조카로서 왜 관운이 이렇게 비색하오?  그것이 모두 김좌근

을 괴수로 한 김씨 일족의 횡포한 세도 때문이 아니요?  나는 내 야심이 아니라 자유롭게 

행동 할 수 있어요.  만일 조공과 대비님을 위한 일이라면 우정으로 무슨 도움이라도 되겠

소.  또 그 세도 김씨를 타도하는 일이라면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목숨이라도 바칠 셈이요.  

다행히 놈들은 나를 몰락왕족의 타락분자로 멸시하고 조금도 경계하지 않으니 뒤에서 돕는

데는 편이한 일이요."

  이러한 말로써 조성하와는 김씨 타도의 동지가 되었다.  그는 감히 궁중에 출입할 자격이 

없는 미미한 신분이라 조대비와는 만날 기회가 없었다.  조성하를 통해서만 깊은 궁중에 있

는 왕실의 제일 어른인 조대비와도 연락을 자주 취할 수 있어 김씨 타도의 먼 계획을 착착 

진행시키면서 장차 천하를 잡을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대원군에게 뜻밖의 행운이 빨리 왔다.  그것이 바로 철종의 승하로 아들이 없

던 철종의 뒤를 이을 임금을 종친 중의 인물에서 구하는 문제가 난 것이다.

  조대비, 조성하, 대원군, 정원용은 김좌근 등 김씨일파의 세도를 꺾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고 기뻐했다.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을 임금으로 세우자는 계획이 전격적으로 성공한 것

도 이러한 흥선군의 치밀한 예비공작 때문이었다.


  [ 雲峴宮의 봄 ]   < 攝政 大院君 >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雲峴宮의 봄 

    攝政 大院君



   새로운 임금을 정하는 중신들의 긴급회의가 조대비의 이름으로 소집된 날, 아직 관도령

의 조롱받는 신분인 흥선군은 운현궁에서 외출하지 않고 초조한 마음으로 대망(大望)의 기

쁜 소식이 예정대로 오기를 기다렸다.

  (김가놈들이 무슨 수작으로 대비님 의향을 방해할지도 모른다.  만일의 경우엔 어찌할까?)

  만일 자기 둘째 아들이 이번에 임금이 되지 못하면 어찌 할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자신이 없었다.  오직 비는 것은 이 문제에 한해서 제일 강한 발언권이 있는 조대비의 용단

만 바랄 뿐이었다.  문제가 미묘하게 발전해서 권력으로 쟁탈전을 벌리게까지 된다면 영의

정 김좌근을 영수로 한 김씨의 세력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보, 궁중에서 무슨 기별이 없소?"

  흥선군은 부인 민씨에게 자주 물었다.

  "아무 기별도 아직 없습니다."

  "형님한테서도?  명복이 유모한테서도?"

  "예."

  그의 형님은 종척회(宗戚會)에서 일을 보고 있었으므로 조대비의 뜻을 미리 알려고 궁중

에 보냈고, 임금이 될 명복의 유모도 연락차 형님에게 딸려서 궁중에 보냈던 것이다.  흥선

군은 일말의 불안감이 섞인 초조한 마음으로 혼자서 술만 마시며 기다렸다.  그답지 않게 

어젯밤에 꾼 꿈도 되생각하면서 쓴 웃음도 지어 보았다.  이른 봄의 햇빛은 뜰에서 밝게 빛

났고 남산 위에는 흰 구름이 가볍게 흐르고 있었다.

  운현궁 뒷뜰 공중에는 조그만 구름 조각 같은 연 두 개가 경쟁하듯이 깜쭉 깜쭉 떠오르고 

있었다.  오늘 임금이 될 대명(大命)이 내린 명복이가 형과 함께 연을 띄우며 무심히 놀고 

있는 것이다.

  올 봄에 열두살 된 명복의 모습이 갑자기 거인(巨人)의 환상(幻像)으로 흥선군에게 보이기

도 했다.  이 순간에 흥선군은 영달(榮達)의 신(神)과 같이 보이는 어린 아들의 뒷모습에 절

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으로

  "부디 임금이 되어 주십시오."

하고 빌었다.  아들을 위한 마음보다도 아들을 미끼로 자기의 영달을 위한 야망이었다.  난

초그림을 그리며 가야금을 즐기던 풍류객의 심정과는 딴판이었다.  천하를 호령할 호랑이가 

숲에서 튀어나오려고 그 출발 시각을 기다리는 순간의 심정이었다. 

  "그런 초조한 때에 운형궁과 문 밖에서

  "쉬위!"

하고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렸다.

  "앗, 그러면 그렇지!"

  흥선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가 안심한 듯이 웃음을 짓고 다시 태연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팔십노인의 정원용이 청지기의 안내로 사랑 마루에 올랐다.  흥선군이 방문을 열

고 나가서 공손히 읍하고 모른 척하는 인사를 했다.

  "원로(元老)께서 어찌 오셨습니까?"

  "대비님 명으로 왔소이다."

  "무슨 분부로?"

하고 물으면서도 흥선군은 낯이 간지러웠다.  그리고 은인인 동지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약

간 미안한 감도 없지 않았다.  역시 피차의 체면을 존중하는 정원용은 공식적으로 정중한 

음성을 내어

  "대감의 둘째 아드님을 익성군(翼成君)에 봉하시라는 분부올시다."

  "황공하온 분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사주(嗣主)로 모시게 되어서 곧 궁중으로 모시고 오라는 분부올시다."

  "네에."

하고 흥선군은 정원용에게 칙사에 대한 감사의 읍을 다시 했다.

  "잠깐 편히 앉아 계시오.  곧 차비를 시키겠습니다."

  흥선군은 안으로 들어갔다.  정원용도 이번 일에 성공한 공으로 앞으로 흥선군의 덕을 후

하게 받을 것으로 짐작하고 마음이 흐뭇했다.  주인이 안으로 들어간 뒤에 혼자 사랑방을 

둘러보니 집꼴과 방안 광경이 말이 아니었다.  집만은 큼직했으나 기둥이 기울고 벽이 터졌

으며 몇 해 묵은 도배지도 그을고 군데군데 찢어져서 밖의 화창한 봄 햇살과는 달리 우중충

한 찬 바람이 돌았다.  오직 소박한 병풍에 주인이 그린 난초그림만이 싱싱한 향기를 피울 

듯이 살아 있었다.

  (폐옥 같은 운현궁에도 저 병풍의 난초가 봄을 맞았구나)

  정원용의 노안(老眼)에는 유명하다는 흥선군의 난초그림이 오늘따라 더욱 명화로 보였다.

  흥선군은 내실로 들어가서 부인에게 그 소식을 전하고 뜰에서 연 날리기에 열중해 있던 

명복이를 불러들였다.  십이세의 소년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의아한 얼굴로 부모의 웃는 

낯을 쳐다보았다.

  "명복아, 네가 임금이 되어 궁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네 이름을 불러 보는 것도 오늘뿐

이다.  네가 임금이 되면 우리 부모도 네 신하가 되어 충성을 바치게 된다.  임금이 되면 지

금까지의 개똥이짓 장난을 해선 안된다.  임금답게 될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된다."

  개똥이는 명복의 별명이었다.  이것이 그에 대하여 생부로서 사사롭게 타이르는 최후의 

훈계였다.

  "오오, 우리 상감님, 축하 올리오."

하고 모친 민씨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 눈물 속에는 비록 임금으로 지존(至尊)

의 영위(榮位)에 오르지만 오늘부터 아들을 빼앗긴다는 어머니로서의 슬픔이 섞여 있었다. 

  "좋은 영광의 날에 왜 눈물을 보이는 거요?"

  부인을 충고하는 흥선군에게는 아들을 빼앗긴다는 기분은 조금도 없었다. 아들이 임금이 

되어서 궁중으로 들어가면 그 궁중이 곧 자기의 집으로 된다는 생각 뿐이었다.  어린 임금

의 실권을 자기가 대신 맡아 가지고 천하를 호령할 야망은 이미 달성되었다고 확신하고 있

었기 때문이다.

  "내 아들로서 명복아, 개똥아 하고 불러 보는 것도 오늘 뿐 내일부터는 지존한 나랏님이

며 우리 부모도 나랏님을 섬기는 백성이요.  그러나 역시 사친(私親)은 다른 백성과는 달리 

친근하게 대해야 인륜에 어긋나지 않으니 앞으로도 잘 요량해 주시오."

  모친은 이런 말까지 했다.  그것은 부친 흥선군도 같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부친의 그런 

심정은 모친의 단순한 애정의 호소와는 달리 세도에 대한 야망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임금이 되시더라도 부모의 정은 잊어선 안 되지요."

하고 부친도 모친의 말에 얼른 맞장구를 쳤다.

  "아버님, 어머님, 무엇을 벌써부터 저에게 그런 공대 말씀을 하십니까?"

  "그 인륜의 효성은 감사하나 역기 지금부터 임금으로 대접해 올리는 것이 백성된 도리요.  

그러나 일단 귀한 자리에 앉으시면 조정의 권력을 쟁탈하려고 임금을 둘러싼 추악한 음모가 

극심한 법이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부모의 정을 저버리는 일에는 귀를 기울이지 마시기 바

라오.  이것이 등극을 앞둔 임금에게 아비로서 부탁하는 말이요."

 흥선군은 아직 어린 아들이지만 왕좌(王座)에 오르는 그에게 위협의 주사를 미리 놓아 주

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아버님, 제가 입궁하는 것부터가 아버님 덕택인데 어찌 부모님 은혜를 잊겠습니까.  앞으

로도 공사나 사사나 모두 아버님 뜻에 맞도록 하겠습니다."

  아버님 덕택으로 임금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임금이 된 소년이 자기를 임

금으로 세우는데 치밀한 정치적 공작을 했다는 사실은 조금도 몰랐다.  오직 왕족인 부친의 

혈육을 타고 났기 때문이라는 의미에서 한 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흥선군은 공사간의 

문제를 부친의 뜻에 맞도록 하겠다는 말에는 매우 만족했다. 

  "자아, 그럼 대비께서 기다리시겠으니 어서 궁중에서 보내신 이 옷을 입고 입궁해 가시

오."

  모친 민씨는 궁중에서 보낸 홍포(紅袍)를 입히고 복건을 씌워서 사랑에서 기다리는 원로 

정원용에게로 보냈다.  명복은 사랑으로 가서 팔십 노인 정원용에게 할아버지를 대하는 존

경의 마음으로 절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정원용은 깜짝 놀라 말리면서

  "익성군님, 이번 대경(大慶)을 축하 아뢰오."

하고 정중한 읍을 먼저 했다.  궁중예법에 능숙한 그는 이미 정계의 실권자로 등장한 흥선

군 앞에서 [상가마마]라고 아첨해 보이고 싶기까지 했으나 공직으로는 아직 등극대례를 올리

지 않은 임금 후보자였기 때문에 지금 봉해진 익성군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럼 노신(老臣)이 궁으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정원용은 흥선군 부자에게 인사하고 방을 나왔다.  대문 밖에는 남여(藍輿)가 대기하고 있

었다.

  "가마에 오르시오."

  정원용은 가마 문을 열면서 소년에게 타라고 공손히 권했다.  소년은 배웅 나온 부모에게 

하직 인사의 절을 하려고 했다.

  "아니올시다.  지존(至尊)은 사친에게 절하지 않는 법이요."

하고 아들이 부모에게 절하려는 것을 막고 못하게 했다.  그러자 부모가 도리어 허리를 굽

히고 아들이 가마에 타기를 기다렸다.

  "오오, 잘 가시오."

  모친이 목멘 소리의 인사를 했다.

  "어머니!"

  어린 소년의 음성이 가마 안에서 들렸다.

  정원용은 전격적인 조대비의 명령으로 비밀리에 운현궁에 왔으나 소년 신왕(新王)을 실은 

남여가 떠날 때는 벌써 부근의 시민들이 소문을 듣고 문전에 몰려와서 이 놀라운 경사스런 

가마가 떠나는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허허, 사람팔자는 모르겠다.  외입쟁이 관도령의 아들 개똥이가 새 임금이 됐다!"

  "관도령도 이젠 임금 아들을 업고 관재상(官宰相)이 되겠군.  용꿈 꾼 건 아들보다 아버지

다."

  백성들은 감히 부러워할 수도 없는 이 사람 팔자의 용꿈으로 수군거렸다.

  어느덧 운현궁에서 창덕궁까지의 길에는 구경 나온 백성들로 혼잡을 이루었다. 

  "개똥이가 임금이 돼서 궁중으로 들어가는 가마다."

  "개똥이가 어떤 아인데.  그 이름이 천해서 천하 제일로 귀하게 된 모양이다.  이젠 쇠똥

이가 영의정이 될 판이군."

  정치에 무관심한 백성들도 그 이름만 듣고 이런 농을 했다.  그들은 쇠똥이가 될 흥선군  

곧 대원군으로 세도를 부릴 인물의 존재조차도 몰랐다.

  "쉬이, 길 비켜라!"

  신왕이 탄 남여의 전후에는 동원된 친군영(親軍營)의 병정들이 호통을 치면서 혼잡한 군

중을 정리했다.

  "개똥아, 너 임금이 되었으니 나도 벼슬 한자리 부탁한다."

  어제까지 이놈 저놈하고 흙투성이가 되어 싸우던 동무 아이들이 부러운 듯이 외치기도 했

다.  그러나 가마에 탄 소년 임금은 그런 소리에 무슨 대꾸를 할 자유도 없었다.  그는 가마 

속에서 그 정답던 아이들과 다시는 놀 수 없게 된 것이 가장 섭섭했다.  어쩐지 겁만 나서 

몸이 덜덜 떨렸다.  자기가 임금이 되어서 궁중의 주인으로 들어간다는 기쁨보다도 무서운 

임금 앞으로 잡혀 가는 죄인 같은 공포심이 앞섰던 것이다.

  궁중에서는 만조 백관들이 모여서 신왕이 될 익성군의 입궁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가마가 도착해서 정원용이 어린 익성군을 조대비 앞으로 인도해 가자 조대비는 영의정 김좌

근 이하 고관 대작이 도열(堵列)한 앞에서

  "오오, 익종의 뒤를 이을 내 아들이 왔구나."

하며 소년의 손을 잡고 반가와했다.  앞서 익성군을 봉한 것이 바로 조대비 자신의 양자로 

삼아서 왕을 삼으려던 계획이었음을 이제 분명히 알게 된 김좌근 이하의 김씨 일파는 아연

실색하고 새삼스럽게 놀랐다.

  (세도만 믿고 나를 무시하던 너희들 안동 김가는 새 임금이 내 양아들이라는 것을 알아 

두어라.)

하는 위협이 조대비의 말고 행동에 여실히 나타났다.  조대비는 당황해 하는 김씨들 면전에

서 예정대로 봉군식(封君式)을 그 자리에서 재빨리 거행하였다. 

  어느덧 황혼이 되고 곧 어두어졌다.  큰 촛불이 켜진 뒤에 궁중에서의 첫 수라상을 받은 

익성군 옆에서는 따라온 유모 박씨와 처음 보는 궁녀들이 깎듯한 시중을 했다.  오늘 하루

의 일이 아직 꿈만 같은 소년은 배가 고팠으나 진수성찬이 목을 넘어가지 않았다.

  몸이 그냥 공중에 떠 있는 것만 같았고 정신이 없고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이런 어려운 

왕노릇은 곧 그만두고 동무들과 장안 골목에서 술래잡기나 하고 노는 편이 훨씬 더 좋다고 

생각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자유인(自由人)의 언어와 행동을 할 수 없이 임금이라는 울

에 갇힌 소년이었다.

  "시장하실 테니 어서 많이 드십시오."

  궁녀들이 좌우에서 권했으나 소년은 그러는 등살에 먹을 것도 먹지 못하는 것이 화가 났

다.  혼자 내버려 두면 오죽 잘 먹으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점씩 먹어도 배가 부를 지경으로 많은 반찬이 큰상에 가득한 것이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난한 살림에서 어머니가 고생해서 차려 놓던 아버지 진지상의 무김치와 된

장찌개만을 생각하니 부모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는 아직도 빈상(貧相)이 밴 

순진한 소년이었다.

  "유모, 다음부터는 내 밥상엔 이렇게 여러 가지 반찬을 놓지 못하도록 전하오."

  "네."

  유모는 무심코 그런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 말을 들은 한 궁녀는 아첨할 좋

은 기회라 생각하고 곧 조대비에 그 소식을 전했다.

  "어쩌면 어린 임금의 말씀이 그렇게도 현명하시게 지당합니까?"

  "그러니까 내가 고른 아들 새임금이 아니냐?  이제 나라가 바로잡히겠구나."

  조대비는 나라가 바로잡힌다는 것은 으례하는 형식상의 칭찬이요, 궁녀들로부터 칭찬해 

주는 것이 기뻤던 것이다.

  "이것이 모두 대왕대비님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궁녀들은 조대비의 세력이 오늘부터 강해진 눈치를 알기 때문에 침이 마르도록 조대비의 

비위를 맞추려고 새로운 임금의 칭찬에 정신이 없었다.  

  다음 날에는 임금의 생부에 대한 대우 문제가 각의에 올랐다.  조대비와 그 일파는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이라는 칭호로 승격시키려고 했다.  임금의 생부에게는 자고로 대원군의 

칭호를 주었다.  그러나 일찍이 생존한 임금의 생부로서 대원군이 된 사람은 없었다. 

  이에 대해서 영의정 김좌근이 비로소 신왕 섭정에 대한 불만의 일단을 들고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이미 소를 잃은 외양간을 고치려는 어리석은 짓이었으나 흥선군이 임금된 아들

을 업고 정계에 등장하는 것을 막아 보려는 차선(次善)으 행동을 개시한 셈이었다.

  "옛날부터 우리나라에는 생존한 대원군이 없었습니다.  익성군의 생부를 대원군으로 봉하

면 혹시 정치운동에 관여할까 두려우니 대원군 칭호는 그이 생존시엔 보류하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익성군의 생부가 혹시 정치운동에 관여할까 두려워하는 영의정의 뜻은 잘 알겠소.  그러

나 영의정도 아다시피 흥선군은 그림과 술만 즐기는 세상이 다 아는 풍류객이니 번거러운 

정치엔 뜻이 없을 분이요.  전례가 없다고 대원군을 봉하지 않으면 그 분이 죽기를 기다리

는 것 같기도 해서 어린 임금의 효성으로는 송구스러워 하겠으니 그것도 딱한 일이요."

  조대비는 인정론(人情論)도 꺼내서 영의정을 괴롭혔다.  그러나 김좌근은 그 말은 못들은 

척했다.  대원군이 될 흥선군은 김좌근의 그런 소견에 분격했으나 실권만 잡으면 그만이지 

대원군 칭호는 실권을 잡은 뒤에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대원군의 봉작(封爵)은 나 스스로 원하지 않으니 사양한다.  다시는 그 문제를 입에 올리

지 말라."

하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나 조대비를 비롯한 일파에서는 정식으로 중지된 대원군 칭호

로 흥선군을 불렀다.  김좌근은 명분만 얻고 실속을 잃었다.  이 문제에서도 그는 대원군에

게 진 셈이 되고 말았다.

  "대비께서는 그 문제보다도 빨리 신왕의 즉위식을 올리도록 하시오."

  대원군은 조대비를 충동였다.  조대비는 김좌근을 불렀다.

  "미망인으로 나는 세상 일을 모르오.  익성군을 좋은 임금으로 기르는 것만 즐거운 희망

이요.  임금으로 기르기 위해서도 빨리 즉위식을 올리도록 제반 절차를 빨리 갖추게 하오."

  "즉위식의 시기는 잘 생각해서 아뢰겠습니다."

  영의정 김좌근은 기정사실이지만 형식적으로라도 신왕의 즉위식만은 될 수 있는 대로 지

연 시킬 전략을 세웠다.  어린 익성군이 정식으로 국왕 자리에 앉게 되면 대원군이라는 무

서운 호랑이 역시 정식으로 정권을 뒤흔들고 나설 위험성이 빨리 노출될 우려가 있었기 때

문이다. 

  그러나 조대비는 며칠 후에 또 즉위식의 재촉을 했다.  익성이 정식으로 임금이 되기 전

에 김씨 일파에서 무슨 음모를 꾸밀는지 몰랐다.  김좌근도 성화 같은 조대비의 재촉은 그

냥 묵살하고 연기만 할 명분도 서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하는 수 없이 곧 기일을 정하고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이래서 어린 임금은 조선(朝鮮) 제이십육대 고

종(高宗)으로 등극했다.

  아들을 고종으로 정식 등극시킨 대원군은 완전히 정권장악의 정치무대를 완성시켰다. 이

제는 그가 복면을 벗고 그 정치무대에 주역배우로 등장만 하면 되었다.

  "음, 이젠 김씨에게 사원(私怨)도 풀 기회가 왔다.  아니 사원보다도 썩은 종래의 파당정치

를 숙청하고 서정(庶政)을 일신하고 나라에 봉사할 기회가 왔다."

 대원군은 세도하던 김씨에게 학대 받던 불평을 풀 수 있다는 것을 통쾌하게 느꼈다.  그리

고 그보다 더 큰 정치적인 포부와 용기도 새롭게 갖게 되었다.

  (미미한 존재로서 아들을 임금으로 등극시키는 첫 번 난관을 무난히 돌파한 내다.  이제

야 무슨 일인들 못하랴.  알고 보면 김가에게도 수완 있는 정객은 없다.  모두 쓸개가 빠지

고 머리까지 썩은 놈들이었구나)

  대원군은 이번 왕위계승문제로 김씨의 세력단결이 대단치 않은 것을 실지로 알았다.  더

구나 세도가 중에 중요한 한명을 자기 파로 무난히 매수해 버리기까지 할 만큼 놀라운 수완

을 발휘했던 것이다.  김씨 일족의 거물 중에서도 김병학(金炳學)은 비교적 당파성이 적고 

관용성이 있었다.  그래서 대원군은 왕위계승 문제가 나오기 전부터 인간적으로 접근해서 

친분을 맺고 지냈다.  그래서 대원군은 불우한 시절에 적지 않은 도움을 물심양면으로 받기

까지 했다.  그러다가 왕위계승 문제가 나자 대원군은 김병학에게 자기의 의중을 털어놓고 

찬성해 주기를 원했다.

  "이 일이 성사되면 대감께도 서운치 않은 대우를 하겠소."

  "허어, 그게 무슨 말이요.  이런 중대한 국사에 우리들 개인의 이해가 개입돼서야..."

하고 김병학은 점잖은 미소를 띠웠다.

  "이런 말까지 하는 나의 심정은 대감이 찬성하건 반대하건 비밀을 지켜 주실 것을 믿기 

때문에 한 것이니 그것만 알아 주시오."

  "음, 그런 신의가 없을 사람 같이 보였다면 섭섭한데요."

  김병학은 역시 친구답게 웃었다.  대원군은 그가 적극 후원하지 않더라도 김씨 일족과 함

께 반대하지 않기만 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종친 중에서 어떤 한분을 모실 문제니까 흥선군의 아들인들 물망에 오르지 말란 법이야 

있겠소.  왕비와 충신들의 공의로 정할 문제니까 흥선군도 낙관은 못하겠지만, 과히 비관도 

할 필요는 없어요."

  김씨 일파의 거물로서 이런 이해와 동정을 해주었으므로 대원군은 큰 힘을 얻었다.  김병

학의 이런 호의를 받게 되자 대원군은 그의 독특한 매력있는 교제술을 발휘하면서 무릎을 

치면서 바싹 다가 앉았다.

  "기왕 말을 했으니...  대감 잠간 귀를..."

하고 김병학의 귀로 입을 가져갔다.

  "내 아들이 왕위에 오르면 대감의 따님을 꼭 왕비로 맞도록 힘쓰겠습니다."

  "음, 흥선군이 나를 그렇게까지 믿소?  당신이 나를 그렇게 믿으면 나도 흥선군을 믿어야 

하겠군요."

  김병학은 허허 하고 웃을 대목이었으나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도 임금의 장인이 된다

는 뜻밖의 유혹에는 정치적인 욕망이 동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대감, 고맙습니다."

  김병학이 체면상 차마 확약은 하지 못하고 빙그레 웃기만 할 때 대원군은 그의 확답을 들

은 듯이 감사의 뜻을 표하고 표연히 자리를 떴다.  그 뒤에 김병학은 다른 김씨들이 대원군

의 아들 왕위계승에 반대하는데 동조(同調)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원군은 약속했던 김병학

의 딸을 고종의 왕비로 맞아들이지는 않았으나 그가 집권하던 모든 김씨를 관직에서 숙청해 

버릴 때도 이 김병학만은 전보다 중용(重用)해서 그때의 호의에 보답했다.

  대원군은 김씨 일파의 일부를 분열시켰을 뿐 아니라 중립파로서 비교적 덕망이 두텁던 원

로 재상(元老宰相)의 정원용과 박규수(朴珪壽)가 고종 즉위를 지지하도록 하는데 성공한 것

도 그 당시의 정세로는 비상한 수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러한 이면공작과 함께 조대비를 전면에 내세운 대원군은 뒤에서만 비밀 공작을 해서 

소기의 대망을 달성했다.

  실질적으로 궁중의 제일 어른이요, 형식상으로 섭정(攝政)이던 조대비는 영의정 김좌근의 

집권당 일파의 세도를 무시하고, 대원군에게 실질적으로 국정을 요리할 수 있는 실권을 위

임했다.

  "내가 미망인으로서 정치에 어둡고 국왕이 또한 어리니 대원군이 뒤에서 보아 주어야 하

겠소."

  이것이 대원군에게 물려 준 이유였다.  김좌근도 대원군 칭호를 봉하는 형식적인 반대엔 

명분을 세웠으나 조대비가 비공식으로 개인적 고문을 삼겠다는데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졌

다.  조대비와 고종을 사사롭게 돕는 것이 실질적으로는 정권을 잡는 첫출발이 되었던 것이

다. 

  사태가 이쯤 되자 이번에는 김흥근(金興根)이 또다시 조대비에게 직접 항의했다.

  "상감의 생부는 일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어떤 중대한 국정문제에 상감

의 뜻과 생부의 뜻이 다를 경우에 상감께서는 부자의 도리로 뜻대로 하시지 못하고 생부의 

뜻을 따를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경(卿)의 그 말이 옳은 줄 나도 아오.  그러나 정치문제가 아닌 상감의 건강문제, 교육문

제로 지도해 올리는 것은 당연하며 그것까지 막는 것은 인륜에 어긋나는 무정한 일이 아니

겠소?"

  조대비는 이렇게 김흥근의 화살을 피했다.

  "그리고 나로서도 상감으로서도 그 분에게 어떤 상당한 대우를 하고 자주 만나서 가정적

인 이야기도 하고 싶은데 이것은 정치와는 관계 없는 인정상 문제가 아니겠소?"

하고 조대비는 불쾌한 안색까지 보였다.  여기엔 좀 거북한 표정을 하던 김흥근은 일부러 

웃는 얼굴을 하면서

  "예.  그런 의미의 대우문제로선 그 분과 나라의 체면을 유지할 정도로 적당한 땅과 돈을 

하사(下賜)해서 생활을 편하게 하고, 그 분은 오직 나라의 태공(太公)으로서 전과 같은 풍류 

생활을 한가롭게 즐기게 하면 족하옵니다."

 "그러기에 그 분 자신이 전번의 대원군 봉하겠다는 말이 났을 때도 스스로 사양했으니 경

들이 염려하는 정치관여는 없을 줄 아오."

  조대비도 여자의 앙큼한 마음으로 솜에 비수를 싼 듯한 말로 빈정댔다.  그러나 대원군이 

자주 궁중에 출입해서 그의 정치적 세력이 강화되기 시작하자 영의정 김좌근이 또다시 조대

비에게 항의했다.

  "흥선군의 궁중출입이 너무 번거로운 듯해서 세상에 많은 오해가 생기고 있습니다.  앞으

로는 그 분의 궁중출입을 삼가케 하고 천륜의 정의를 위해서는 상감께서 한달에 한번씩 운

현궁으로 행차하여 근문(覲問)하시면 될까 합니다."

  대원군의 궁중출입을 금지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자 자리를 같이 하고 있던 대원군파의 

조두순(趙斗淳)이 접적으로 이것을 반박했다.

  "대원군이..."

  이 첫마디부터가 김좌근과는 달랐다.  김좌근은 공식으로 대원군을 봉하지 않았으므로 흥

선군이라고 했는데, 조두순은 대원군파가 궁중에서 공공연히 부르는 대원이라 했던 것이다.  

김좌근은 조두순이 무슨 말을 할까 하고 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조두순은 슬쩍 대원군의 

궁중출입 가부는 피하고

  "대원군이 아무리 상감의 생부일지라도 상감 앞에선 사친(私親)의 신하에 지나지 않소.  

그런 신하에게 친히 행차해서 볼 의무가 어디 있단 말이요?"

  "그러면 흥선군에게 한달에 한번씩만 궁중에 들어와서 상감을 뵙게 하고, 정사(政事)는 대

비께서 수렴청정(垂簾聽政)하십시오."

하고 김좌근은 타협안을 내놓았다.  이것으로 조대비는 정식으로 섭정(攝政)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렇다고 조대비가 지지하는 대원군의 정치에 대한 이면활동을 막을 수는 없었고 

대원군을 한달에 한번만으로 궁중출입을 보장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김좌근은 

적어도 대원군의 궁중출입 제한과 감시를 제도화(制度化)하려고 했다.  처음에는 대원군도 

김씨 일파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하여 궁중출입을 되도록 피했다.  그러나 대원군의 세력은 

이미 확고부동하게 되었으므로 그가 궁중에 자주 들어 가지 않더라도 그의 정치활동엔 아무

런 지장도 없었다.

  조대비는 대원군이 궁중에 출입할 때는 장수 한명과 군사 다섯명을 출동해서 시위(侍衛)

케 했다.  중요대관들은 자진해서 운현궁으로 대원군을 찾아서 문안하고 정치문제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결국 정치의 중심무대가 궁중보다도 대원군의 사저(私邸)인 운현궁으로 옮겨

진 역효과를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창덕궁과 운현궁 사이의 특별 통용로(通用路)

와 통용문을 만들고 고종과 대원군만이 자유롭게 출입하게 되었다.  그리해서 처음에 삼가

던 대원군의 궁중출입도 자연 무시되고 창덕궁과 운현궁은 한집안의 안채 사랑채처럼 되었

다.  조대비는 국정(國政) 전반을 대원군에게 맡겼다.

  따라서 대원군은 정식적인 관직명을 바라지 않고 이면에서 조대비의 교명(敎命)이나 고종

의 왕명(王命)으로 자기 뜻대로의 독재정치를 감행했다.

  이처럼 대원군이 운현궁에서 천하를 호령하는 무서운 호랑이로 활약하게 되자 그처럼 오

랫동안 세도가 드세던 영의정 김좌근 이하의 김씨 일파의 거물 정객들도 스스로 위축되어 

자연히 물러나게 되었다.  이때 대원군의 민완(敏腕)과 세력으로는 김씨 일파의 정적(政敵)을 

무슨 역적의 죄명으로 몰아서 몰살할 수 있었고 귀양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그런 옹졸한 방법으로 후환을 남길 작은 인물은 아니었다.

  "무용지물은 스스로 물러갈 것이다.  가을을 맞은 낙엽은 바람이 안 불어도 우수수 떨어

지고 만다."

  대원군을 지지하는 조급한 자들이 김씨 일파를 엄중히 처치하자고 건의하면 대원군은 이

렇게 여유 있는 태도로 회심의 민소(憫笑)를 띠우고 정적들의 자멸을 기다렸다.  그것은 그

의 인간적인 관용성(寬容性)에서가 아니라 당파 싸움의 세도정치로 나라가 망하려는 것을 

구해 보려는 그의 정치적 탁견(卓見)에서 나온 정책이었다.  그리하여 세도 부리던 김씨 일

파가 자연 위축되어서 자멸적 후퇴를 하는 동시에 그들 때문에 불우하던 유능한 인물을 초

당파적으로 새로 등장시켜 청신한 공기를 정계에 일으켰다.

  그것이 또한 일반 국민이 갈망하는 여론인 것을 그 자신이 천대 받을 때 시정을 배회하면

서 직접 보고 느낀 체험에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대원군의 독재적 

세도정치였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당시 민심에 환영 받을 근대적(近代的)인 정치를 그는 정

책면에서 용감히 개척해 나갔다.

  "아, 그 놈의 지긋지긋한 김씨 세도의 세상이 망해서 시원하다."

  이런 백성의 환호는 간접적으로 대원군의 정책을 지지했으므로 대원군도 더욱 자신을 얻

고 종횡무진으로 혁신 정책을 실천하게 되었던 것이다.

  "운현궁 자리에서 왕기(王氣)가 서리고 이 나라에 성현이 나신다더니, 아이들까지 동요(童

謠)로 부른 그 예언이 이제야 맞았구나!"

하고 운현궁에서 고종이 나서 등극하고 대원군이 집권한 것을 마치 나라의 큰 경사처럼 찬

양하는 소리가 장안에 퍼지기도 했다.  이것은 대원군에게 아첨하려고 꾸며진 선전만도 아

니고 실은 철종 초년(初年) 때부터 동요로 불려진 예언이었다.  그러나 이런 예언이 공교롭

게도 적중한 것은 대원군에게는 큰 힘이 되고 복이 되었다.

  [ 雲峴宮의 봄 ]   < 沒落하는 金氏勢道 >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雲峴宮의 봄 

    沒落하는 金氏勢道



   대원군이 득세하게 되자 오랫동안 세도를 부리던 김씨 일문에 낙엽을 재촉하는 가을 바

람이 쓸쓸히 불어 왔다.  그들에게는 < 김씨가 망해서 시원하다.  이젠 나라가 제대로 되고 

백성도 편히 살게 되었다. >하는 백성의 소리가 더욱 무서웠다.

  이런 판국이라 속으로는 전전긍긍하면서도 자기들끼리 모이면 대원군을 미워하고 욕했다.  

그러면서도 대원군의 혹독한 숙청에서 구명(救命)되기를 은근히 바랐다.  세도 부릴 때는 안

하무인으로 강하다가도 한번 세도가 꺾이면 비굴하게 약해지는 것이 당시 양반들의 특징이

었다.

  이들 안동 김씨가 득세한 것은 김조순(金祖淳)이 순조(純祖)의 국구(國舅=임금의 장인)가 

된 때부터였다.  그 뒤로는 순조, 헌종(憲宗), 철종(哲宗) 삼대에 걸쳐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국정을 요리해서 일족 영달의 사욕에만 급급했다.  따라서 매관매직(賣官賣職)하는 탐관오리

(貪官汚吏)가 백성을 수탈해서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정치는 썩을 대로 썩었다.

  김조순이 국구가 된 이후에 그의 일족에 있던 영의정과 좌상(左相)의 재상 노릇을 한 이

름만 보더라도 좌근(左根), 병기(炳冀), 병주(炳注), 홍근(弘根), 응근(應根), 병시(炳始), 병덕(炳

德), 달순(達淳), 수근(洙根), 병학(炳學), 병국(炳國), 이유(履裕), 이교(履喬) 등이다.  그리고 그 

이하의 판서(判書)와 참판(參判)은 수십명에 달했고, 지방장관인 감사(監司)와 군수(郡守) 현감

(縣監)까지도 모두 김씨 일족이거나 그들에 추종하는 사람들만 등용했다.

  "안동 김씨가 아니면 능참봉 감투 하나 못 쓰는 세상이다."

하고 불우한 정객과 선비들은 한탄했다.  그뿐 아니라

  "안동 김가가 아니면 인간이 아니다."

하는 교만한 소리가 그들의 입에서 서슴지 않고 튀어나왔던 것이다.

  그렇게 세도가 당당하던 김씨 일파도 철종이 승하하고, 고종이 등극하는 동시에 고종의 

생부 대원군이 집권한 순간부터 추풍낙엽처럼 처량하게 시들어 버렸다.

  처량한 신세가 된 김씨와 거두들은 북문 밖 삼계동(三溪洞)에 있는 호화로운 김홍근의 별

장에 모여서 서로 신세한탄을 하면서 대원군이 자기들에게 어떤 숙청방법을 쓸까 하는 정세

판단을 하면서 화풀이로 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전 득세 시기에 이 별장에서 흥겹게 진

탕 놀아나던 잔치의 술맛과는 딴판이었다.

  "그까짓 망나니가 무슨 정치를 하겠소.  그 망나니 일당이란 기껏해야 천하장안(千河長安)

의 잡것들이 아니요?"

  김홍근은 대원군을 망나니라고 멸시해 불렀다.  천하장안의 잡것들이란 천가, 하가, 장가, 

안가들로서 그들은 모두 궁녀들의 오라비로서 신분이 천한 서울의 부랑자였다.

  대원군은 그의 불평시대에 그들과 함께 항간을 헤매면서 주색잡기의 친분을 맺어왔으며, 

천하를 호령하게 된 오늘도 그들과 그전 친분을 그대로 계속하면서 역시 시중 밤거리를 취

해 돌아다녔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중요한 염탐에 이용하고 있었다.

  "그럼요.  그 따위 천하고 무식한 부랑배 일당만으론 정치를 감당 못할 것이요.  울며 겨

자 먹는 격으로라도 우리 김씨의 힘을 빌지 않고는 일을 못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

리 김씨에게 아직도 거친 손질을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오.  그런 협

력을 구하면 못 이기는 척하고 자리를 지키면서 적당한 기회에 우리 세력의 만회를 도모합

시다."

  김병기는 비겁할 정도로 낙관론을 말했다.  그러나 김병학은 대원군의 인물을 잘알고 있

었기 때문에 이 의견에도 찬동하지 않았다.  그는 전부터 대원군과 친했고 고종 등극문제에

도 다른 김씨들처럼 적극적인 반대를 하지 않았으므로 동족들 중에는

  "병학이 놈은 집안을 배반하고 대원군 덕을 볼 놈이다.  그러나 그 놈도 딸을 고종의 왕

후로 시켜 준다는 꼬임에 속은 놈이니까 가엾은 놈이다."

하고 욕을 했다.

  그러나 그로서는 조금도 동족을 팔아 먹을 마음도 없었고 그런 행동을 한 일도 없었기 때

문에 양심의 가책은 받지 않았다.

  "대원군은 권력을 잡은 이상 나라가 흥하든지 망하든지 좌우간 큰일을 저지를 인물입니

다.  우리 김씨 뿐 아니라 노론파(老論波)를 꺾고 새로운 서민적(庶民的) 정치를 해보고야 말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 김씨만을 모조리 잡아 죽이는 일은 않을 것입니다."

  "자네는 중용될 테니까 그런 소리 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자네 딸과의 국혼문제는 어떻

게 됐나?"

하고 김병기가 빈정거렸다.

  "그야, 흥선군이 낭인시절에 그 다운 농담이었지 지금 와서 어찌 우리 안동 김씨와 국혼

을 하겠어요?"

하고 병학은 겸연쩍게 웃어 넘겼다.

 "좌우간 그 천하장안의 잡것들과 막상막하(莫上莫下)한 망나니 보잘 것 없는 자니까 그래도 

나라 일을 해보려면 역시 우리 힘을 빌어야 할 거야."

  병기는 아직도 정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자기들의 힘을 과

신하는 말을 되풀이했다.  

  "형님, 그러나 그들 너무 얕잡아 봐선 안 됩니다.  앞으로 보시오.  그가 성미는 괴팍하지

만 민심의 동태엔 우리보다 밝고 더 정확히 알고 있어요.  시중의 천한 무리와 간격 없이 

주색 타량한 것도 실은 위장 호신술이었구요.  그 덕택으로 민심의 기미를 체험했고 백성에

게 친밀감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는 단순한 오입쟁이가 아닙니다.  앞으론 아무

래도 백성을 떠난 양반정치론 민심을 수습할 것 같지 않습니다."

  "자네는 그놈 덕을 볼 테니까 칭찬만 하는 게 아닌가?"

  "아니올시다.  막말로 그가 무식한 망나니라 할지라도 미친 망나니가 권력의 칼을 함부로 

쓸 때는 얼마나 무섭겠어요.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도 경계하시란 말입니다."

  병학은 동족에게 배신자 취급을 당하기 싫어서 이런 말까지 했다.  이 말에 잠시 좌중은 

침울해졌다.  자기 이외에는 천하에 인물이 없다는 자존심이 강한 병기도 목에 비수가 스치

는 듯한 소름이 끼쳤기 때문이다.

  "그래, 그 놈이 우리에게 미친 놈의 칼장난을 해오면 어쩔까?  무슨 대책이 있어야 하지."

  누군가 걱정스럽게 말하자 병학은 일동을 위안시켰다.

  "그러나 그가 당장에 우리 김씨에게 잔인한 행동은 안할 것입니다."

  "음, 세상은 이미 망나니의 것이 됐으니 패군지장의 우리들이 원망하고 욕하면 소요있나?  

이런 때는 몸조심 하는 것이 제일이야.  아무튼 병학이, 자네가 그의 동정을 잘 아니까 무슨 

수상한 눈치가 있거든 잘 연락해 주게.  미운 일가도 고운 남보다는 핏줄이 가깝지 않은가."

  "원 형님두,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만일 제가 그와 가깝다면, 그럴 경우에 동지 구실을 

할 거 아닙니까?"

  대원군을 제일 멸시해 오던 병기가 이번에는 제일 그를 무섭게 생각하고 일종의 구명운동

(救命運動) 같은 말을 했기 때문에 병학은 이런 말로 일동을 안심시켰다.

  "자, 그럼 피차의 몸조심을 위해서 마지막 잔을 들세."

하고 그들은 삼계동 김홍근의 별장을 나왔다.  초승달이 희미한 봄밤의 산길에는 세도를 잃

은 정객들이 남의 눈을 피하듯이 뿔뿔이 떨어져서 내려갔다.  그 한명 한명의 희미한 그림

자는 봄밤을 즐기며 거니는 이름 없는 백성들의 모습이 부러울 정도로 쓸쓸해 보였다.

  며칠 후에 김병기는 자기 집에 잔치를 차리고 대원군을 초대했다.  그의 불안한 마음은 

대원군이 자기들에게 대하는 태도를 은근히 떠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족들에 대

한 명분이요, 역시 그 새로운 권력자의 호감을 사려는 비굴한 교제술이기도 했다.

  "그가 거만해져서 우리 집에 와 줄까?  그전엔 오는 걸 귀찮게 여기고 푸대접한 것을 분

하게 여기고 오지 않을지도 몰라."

  그는 대원군이 오지도 않을 것이 걱정스러웠다.  

  "와도 좋고 안와도 좋다.  안 오면 그것으로 그의 태도를 알게 되니까.  초대한 것이 무의

미하진 않다."

  그는 또 이런 허세를 부려보기도 하면서 초조하게 대원군을 기다렸다.

  그러나 대원군은 그전 낭인 때와 같은 허술한 옷차림으로 청지기 한명 거느리지 않고 표

현히 나타났다.  큰 가마를 타고 많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위엄있게 올 줄 알고 딴 방에 차

려 놓은 요릿상이 무색할 정도였다.  그러나 주인 김병기를 비롯한 일족들은 대원군의 단신

(單身) 내방에 도리어 위압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역시 자기들을 경계하지 않는 태도 같아

서 고마운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주인 김병기는 옛날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문객방에서 푸대접해 보냈지만 이번에는 진

수성찬을 자기 사랑방에 차려 놓고 기다리다가 그가 대문에 들어서자 마당까지 뛰어 내려가

서 칙사 대접으로 모셔 올렸다.

  "대감께서 이런 누추한 집에 와 주셔서 황송합니다."

  "대감 그게 무슨 말이오?  우리 집보다 훌륭한 고래등 같은 재상집인데 누추한 집이라니

요."

  전과 다름 없는 호탕한 농담이었으나 주인 병기에게는 가슴이 뜨끔했다.  우리 집이라는 

운현궁은 이름이 궁이지 최고의 득세를 한 오늘까지도 폐옥을 면할 정도로 간소하게 수리했

을 뿐 이 재상집에 비하면 오히려 누추할 정도였다.

  (너희들이 얼마나 국고를 좀먹고 백성의 고혈을 빨아 모았기에 이런 으리으리한 고대광실

에 떵떵거리고 살아 왔느냐?)

하고 질타하는 듯이 (자격지심이지만) 대원군의 말이 들렸던 것이다.

  대원군은 권하는 대로 윗자리에 앉고 배빈(陪賓)으로 온 김병학과 그의 일족이 열석했다.  

이 초대연에 대원군과 친한 김병학을 꼭 참석시킨 것도 이 자리의 공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

한 생각에서였다.  서로들 인사를 마친 뒤에 병학이 먼저 잔을 들어서 대원군에게 권했다.

  "대감 한잔 드십시오."

  "이 댁에 올 적에 웬일인지 전과는 달리 다리가 떨리더군.  어디 술 기운으로 떨리는 마

음을 달래 볼까?"

  대원군은 역시 뼈 있는 농담을 하면서 잔을 받아서 마신 뒤에

  "자아, 대감도 드시오."

하고 병학에게 잔을 돌렸다.

  "대감, 요즘은 얼마나 분망하십니까?"

  병학이 무심코 물었다.

  "아아, 나야 예나 지금이나 종로 뒷거리 상술지에서 탁주타령하기에 바쁘지요.  그밖에 바

쁠 일야 있어야죠."

하고 아예 정치 이야기는 듣기도 싫어했다.  사실 지금도 그는 역시 밤이면 종종 옛날 부랑

자 친구들과 어울려서 싸구려 주색을 적당히 즐기고 있었다.

  "대감, 제 술도 한잔 드십시오."

하고 주인 병기가 술잔을 권했다.

  "주인 대감의 잔은 못 받겠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 술에 독이 들어 있지 않소?  나도 죽기는 싫으니까요."

  "넷?"

  병기는 안색이 창백할 정도로 초풍을 했다.

  "지금 잡수신 술과 같은 주전자에서 따른 술이 아닙니까?"

  "허어, 아까 것과 잔이 다르지 않소?"

  그러면서도 대원군은 심술궂게 웃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럼 제가 먼저 시음(試飮)하고 드리겠습니다."

  병기는 그 술을 쭉 마신 뒤에 다시 술을 부어서 대원군에게 권했다.

  "허허허, 이제 됐소.  주인이 먼저 하시고 객에게 주는 것이 주법(酒法)의 예절입니다."

  "제가 워낙 주법을 몰라서 실례했습니다."

  대원군은 자연스런 태도로 이런 종류의 농담을 탕탕 해서 가끔 좌중이 서먹서먹해졌다.  

아무래도 주인 병기의 정책적 초대연에 대원군은 흥이 나지 않는 듯 싸늘한 분위기였다.  

이럴 때는 김병학이 웃으면서 부자연한 공기를 완하시키고 기생에게 눈짓하여 술을 권하게 

했다.  기생은 좌석의 공기를 눈치채고 아양을 떨면서


  "대감님, 한잔 더 드십시오."

하고 잔을 두 손으로 들어서 공손히 올렸다.

  "이년, 기생노릇을 하는 너까지 주법을 모르느냐?  나는 역시 상술집 작부의 막걸리 잔이 

구미에 맞더라."

하고 술잔 든 기생의 손목을 탁 쳐서 물리쳤다.  술잔이 날으고 술인 주인 얼굴에 튀었다.  

기생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고 주인은 얼굴에 튄 술은 닦을 경황도 없이 대원군의 얼굴만 

옆눈으로 살폈다.

  (또 왜 노했을까?)

  그런 불안으로 등골이 서늘했다.

  "너,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아느냐?"

  "죄송하옵니다."

  "잘못도 모르면서 무엇이 죄송하냐.  술좌석에 무슨 대감이 있느냐.  술 먹을 때는 재상도 

망나니요.  정경부인도 화냥년이다.  그래야 술의 진미가 나는 법이다."

  망나니 별명을 내가 너희들 대감들보다 낫다는 비꼬는 수작이었다.  이런 수작은 다른 재

상 양반들은 도저히 몽상도 못할 명기(名技)의 농담이요 또 풍자였다.  이런 면이 대원군의 

진정한 인간면이었다.  주인 병기 같은 양반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망나니의 명기

였던 것이다.

  "네 알아 모셨습니다."

  "그 알아 모셨다는 말도 틀렸다."

  "망나니 이 술 한잔 드세요."

  "오냐.  먹고 말고.  하하하"

  대원군은 웃으면서 기생의 손에서 잔을 받아 마시고

  "요 귀여운 화냥년의 기생아.  너도 한잔 들어라."

하고 대원군은 손수 술을 따라 기생에게 권했다.

  "호호호, 참 재미있는 술꾼이셔."

  "너 그렇게 반하단 몸선도 보여야 한다."

  "모르겠어요."

  "그래 그래, 알면 망나니한테 혼날 테니 모르는 게 좋으리라.  핫핫핫"

  대원군은 망나니 노는 꼴을 대감님들에게 보여 주려는 수작이었다.  덕분에 좌석에서 웃

음 소리가 터졌다.

  "허허허, 여러 분의 그 웃음 소리를 들으니까 비로소 술맛이 나는군요."

  "너 이름이 뭐냐?"

하고 이번엔 기생에게 물었다.

  "화냥년이요."

  "그렇지, 화냥년, 노래 하나 들어보자."

  기생이 노래를 부르자 좌석은 더 한층 화기가 돌고 주인도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네 소리를 들으니까 거문고를 타주고 싶구나."

하고 옆에 있던 거문고를 잡아서 스르릉 줄을 훑어 유명하다는 거문고의 풍류객 솜씨를 자

랑했다.

  "어쩌면 그리 잘 타세요?  저 같은 것은 어림도 없는 솜씨입니다."

  기생도 정말 탄복해서 칭찬했다.

  "거문고하고 난초 그림으론 청나라에까지 유명한 분인 줄 모르냐?"

  김병학이 기생에게 대원군의 명기 소개를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덕분에 좌석의 흥이 높아졌습니다."

  주인 병기도 대원군에게 치하했다.

  "자아, 나는 주량이 크지만 주인도 술을 하셔야 연회가 어울립니다."

  "예, 저야 얼마든지 하겠으니 대감도 좀 더하십시오."

  "허허허, 또 대감이 나더러도 대감이라는군요.  전엔 그렇게 인색하시던 술을 오늘엔 왜 

이렇게 권합니까?"

  전 보다는 누그러진 말이었으나 또 가시 돋힌 말이었다.

  "용서하시오.  그때는 그때요, 지금은 지금이 아닙니까?"

  주인도 솔직히 그전의 푸대접을 인정하고 취담(醉談)처럼 가볍게 사과했다.

  "허허, 피장파장이지.  나도 입으론 험담도 잘 하지만 건망증이 있어서 지난 일엔 구애하

지 않는 사람이요.  산천도 변하는데 어찌 인심이 변하지 않겠소?  인심은 자꾸 새롭게 변

해야 살맛 있는 세상입네다."

  대원군은 이런 농담으로 주인의 초대연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  주인도 이 말에 적지 않

은 안도감을 느꼈다.

  연회가 파한 뒤에 병기를 비롯한 안동 김씨 고관들은

  "알고 보니 대원군도 독종은 아니다.  김씨 일문이 참화까지는 받지 않을 것 같다."

하는 안도감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김홍근만은 너무 호화로운 삼계동의 별장을 짓고 호강했기 때문에 대원군보다 애

교있는 수단에 걸려서 골탕을 먹고 그 별장을 몰수 아닌 진상을 고종에게 자진해서 하지 않

을 수 없었다.  삼계동 막바지 북악산 남쪽 기슭의 좋은 산수, 넓은 정원을 꾸민 그의 별장

은 장안에서도 유명한 명승(名勝)이었다.

  어느날 대원군은 소탈한 평복으로 김홍근의 집에 표연히 나타났다.  그전 같으면 청지기

나 문인들이 적당히 대하고 돌려 보냈으나 이번의 예고 없는 그의 방문에는 주인도 깜짝 놀

라서 당황하게 사랑으로 맞아 올렸다.

  "아, 대감께서 미리 기별도 없이 웬일이십니까?"

  주인이 황송하게 물었다.

  "대감에게 청이 있어서 왔지요."

  "저에게 무슨 청이십니까?"

  주인은 듣던 중 반가운 말이었다.

  "실은 술친구들과 한적한 곳에서 하루 놀고 싶은데 대감의 그 유명한 별장을 하루만 빌려 

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전 같으면 대원군도 감히 하지 못할 청이었고 설사 하더라도 당장에

  "당신 그게 무슨 망녕된 소리요.  장안의 잡놈들과 술주정해서 남의 별장 망쳐버릴 생각

이요?  원 별소리를 다하오."

하고 펄쩍 뛰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형편이 달랐다.

  "대감이 쓰신다면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요즘은 통 나가 보지도 않아서 지저분할지도 모

르니 며칠 여유만 주시면 소재도 하고 정돈해서 빌려 드리겠습니다."

  "아니올시다.  내일 쓰겠으니 그러실 여유도 없습니다."

  "그럼 오늘 중으로라도 소제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빌려 쓰는 것마도 황송하온데 그런 폐까지 끼쳐선 내가 나쁜 사람이 됩니다.  정 그러신

다면 그만두겠습니다."

  "허허허, 대감님 성미를 짐작하니 그럼 그대로 나가셔서 노십시오."

  "네 고맙습니다."

  그의 집을 나온 대원군은 김홍근의 굽실거리던 광경이 우스웠다.

  "하하하, 김홍근이도 졸장부로구나.  그전엔 나를 그렇게 멸시하고 푸대접하더니 이젠 내 

앞에 설설 기면서 살려 달라는 시늉을 하는구나.  가엾은 친구지만 이런 것이 세상 인심이

다.  홍근이나 병기에 비하면 그래도 김가 중에선 병학이 의리 있는 친구다.  내가 곤궁할 

때는 그렇게 전곡(錢穀)을 보내서 도와 주더니 내 형편이 달라진 오늘엔 아첨도 않고 친구

로서 충고까지 해준다.  그는 역시 사람이 됐어."

  대원군이 혼자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튿날은 천하장안(千河長安) 등의 네명의 유명한 부

랑자 친구를 비롯한 천민(賤民) 출신의 옛날 술친구 십여명을 데리고 삼계동에 있는 김홍근

의 별장으로 놀러 나갔다.  장안의 망나니 일당이 별장으로 가니 오늘따라 굉장한 잔치가 

준비되어 있고 장안의 일류 기생이 모여 와 있었다.

  "대감, 오늘은 웬일입니까?  마치 칙사 도임상 같은 진수성찬이 아닙니까?  대감 취미답

지도 않게..."

  "너희들을 위한 도임상이 아니다.  칙사를 보내시는 분께서 행차하신다.  너희들은 그 분

이 퇴하신 뒤에 이 상을 그대로 받고 진탕 놀아라."

  일동은 깜짝 놀랐다.

  "그럼 상감께서 오늘 여기 행차하십니까?"

  "대감, 이런 날 불러 주셔서 영광입니다."

하고 일동은 긴장했다.  그러면서도 그전엔 자기들에게

  "아저씨, 엿 한가래 사 줘요."

하고 졸라대던 그 개똥이 시절의 초라하던 소년 모습이 눈에 선해서 꿈결 같은 감회를 금하

지 못했다.

  이 별장의 여러 체 집과 정자들 가운데서도 제일 경치가 좋은 곳에 자리 잡은 유관재(幽

觀齋)는 실로 선당(仙堂) 같은 별천지였다.

  대원군도 다른 정자에 간단히 차려 놓은 주석으로 술 친구들을 데리고 가서 일렀다.

  "여기서 두서너 잔만 먼저 하자.  상감이 오실때까지 낯이 붉지 않을 정도로 하면서 놀고 

있어라.  나는 잠간 궁중으로 가서 상감을 모시고 나오겠다."

  대원군은 궁중으로 급행하더니 이윽고 고종의 미행(微行) 행차를 인도하고 돌아왔다.

  어린 임금은 유관재에서 유곡(幽谷)의 산수미(山水美)를 구경하면서 오찬을 하고 이내 환

궁(還宮)했다.  그 뒤에 대원군은 밤이 늦도록 장안 오입장이들과 전과 다름 없는 잡스러운 

유흥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세상에서 멸시 받는 이 천민 상인(商人)들의 잡놈들에게 자

기의 정치적 포부의 일관을 피력하면서 그들의 협력을 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라를 구하는 정치란 별 것이 없다.  세력 없고 가난한 백성을 잘 살게 해주는 것이 바

로 요순(堯舜) 시절의 선정(善政)이다.  민심이 천심(天心)이기 때문에 임금도 대신들도 백성

을 하늘로 섬길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지금 같은 김씨 일파의 양반정치엔 민심이 따르지 

않는다.  누가 저를 못 살게 하는 세도 정치를 신뢰하겠느냐?  백성을 위한 정치에 백성의 

심정과 살림을 알아야 하고 백성 자신도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너희들은 

앞으로 내 수족이 돼서 높은 감투를 씌어 준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너희들에게 어울리

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고관들은 뒤에서 감시하는 직책을 너희들에게 맡기겠다.  중앙에서 

지방에까지 공정하고 치밀한 마패 없는 암행어사가 돼서 민심의 동향을 살피고 신분의 고하

를 막론하고 탐관오리의 죄상을 염탐해서 직접 나에게 보고하라."

  이것은 민심의 동향과 관리의 행동을 정확 신속히 알기 위한 대원군의 정보망(情報網) 조

직을 위한 중대한 포부였던 것이다.

  "대감, 그런 일엔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너희들을 적소(適所)에 등용하는 거다.  그러나 만일 사원(私怨)으로 허위 

보고를 하면 너희들 목이 달아날 줄 알아라.  그런 중대한 공사의 죄악은 나의 우정으로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허허허, 좌우간 너희들의 분투를 위해서 축배를 들자."

  대원군의 지기(知己)에 감격한 일동은 간달다운 의협심으로 대원군에게 신의를 맹세하는 

잔을 들었다.  대원군은 누구에게나 이런 식으로 솔직한 심정을 독특한 변술로 토했으므로 

인간적 매력을 상대방에게 주어서 신임을 얻고 대소(大小)의 정치문제에도 큰 효과를 거두

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감님 이 김가 놈의 별장이 참 훌륭합니다.  이것도 모두 국고를 좀먹고 백성의 

재물을 훔쳐서 지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이다.  앞으론 일체의 벼슬아치가 이따위 짓 못하게 너희들이 잘 감시하란 말이다."

  "우선 이 별장부터 대감께서 몰수하십시오."

  "이놈, 그런 생각이 바로 김가들이 지은 죄가 아니냐?  내가 왜 남의 재산을 빼앗겠느냐.  

지난 일엔 나는 관대한 태도를 취하겠다.  앞으로만 잘해 볼 생각이니라."

  "그럼 김가가 제물로 바치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음, 네 놈 눈치가 됐다.  그런 눈치로 모든 일을 염탐하면 된다.  실은 김가들이 나의 관

용(寬容)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직도 새 임금과 나를 깔보고 반성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 

반성을 촉구시키려고 오늘 상감을 이 별장에 행차하시게 한 거다."

  대원군은 그들에게만 그런 복안을 말했다.  그러나 상감의 행차와 이 별장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허지만 암만해도 이 별장을 김가들에게 그냥주어 둘 수는 없습니다.  대감의 별장이 돼

야지 우리도 종종 와서 이렇게 놀 수 있지 않습니까."

  "나는 너희들이 아다시피 돈이고 땅이고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다.  나에게 대원군이란 

허명(虛名)을 주기도 아까와하고 두려한 영의정 김좌근이가 그 대신 돈과 땅을 하사해서 편

히 살게 하고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지 않았더냐?  그래서 대왕대비께서 상당

한 돈과 따을 하사하겠다 하셨지만 나는 사양했다.  그런데 내가 이까짓 김가의 별장을 탐

내겠느냐?"

  "저라도 내일 가서 대감께서 이 별장을 퍽 좋아하시더라고 슬쩍 인사를 하면 곧 바칠 건

데요.  김홍근은 대감께 아첨하려고 오늘도 선뜻 빌려준 거니까요."

  "허허허 진상 받으실 분은 따로 계시니 걱정마라."

  "알았습니다.  그럼 김홍근이가 이 별장을 상감께 바쳤군요.  옳아, 그래서 상감께서 아까 

첫행차를 하셨군요."

  "허허허, 아직 바치진 않았지만 상감이 한번 노시고 가셨다는 소문을 들었다면 그 자는 

지금 억지로라도 반성하고 있을 것이다."

  "하하하, 대감님 장난은 이제 알았습니다.  상감께서 행차까지 하신 곳에서 제가 주색 향

락의 장소론 쓰지 못하겠지요."

  "거참, 통쾌합니다.  그러나 상감께 진상되면 우리는 이번이 첫 번 구경이요.  마지막 구

경입니다."

  이런 별장 놀이가 있는 며칠 후에 김홍근은 정사(政事)로 고종을 뵈었을 때에 큰 충성이

나 하듯이 공손히 아뢰었다.

  "상감께서 전날 삼계동 소재 신(臣)의 유관재에 나가 노셨다 하와 감격하였나이다.  경치

가 좋다고 칭찬하셨다 하오니 앞으로 종종 소풍하시면 좋을까 하옵니다.  그런 장소를 신의 

도리로서 그냥 있을 수 없사오니 상감께 바치겠습니다."

  김홍근은 울며 겨자 먹는 격으로 마음에 없는 충성을 보였다.  자고로 임금이 놀던 장소

는 신하가 소유하지 못하는 법이었기 때문이다.  대원군은 이런 수단으로 김홍근에게 억지 

충성을 시켜서 그 자신의 생색을 내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 화제도 장안에서 사라질 때쯤 

되어 고종은 그 별장을 대원군에게 내려 주었다.  그때는 아무도 대원군이 김홍근의 별장을 

빼앗았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대원군은 이 별장문제 이외에는 안동 김씨에게 아무런 정치적 보복은 하지 않았다.  물론 

그들을 전부 요직에서 물러나게 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초당파 인물중심의 대의명분에서 단

행한 조각(組閣) 방침에 따른 인상을 일반에게 주었다.
  
  뿐만 아니라 김씨 중에서도 몇 명의 인물을 중용하는 아량과 인정도 베풀었던 것이다.

  하루는 대원군이 김병학의 집을 밤중에 혼자 찾아갔다.  김병학도 대원군이 밤중에 남 몰

래 찾아왔으므로 약간 뜻밖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오랜 우정을 서로 믿는 사이라 반갑게 

맞았다.

  "밤중에 웬일입니까?"

  "실은 대감에게 쑥쓰러운 청이 있어서 왔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 사이니까 거두 절미하고...  아시다시피 지금 초당파 인물중심의 조정을 꾸밀 준비

중입니다.  어떤 한 개의 당파나 또는 양반만이 벼슬을 하는 폐단을 없애고, 어느 정도 똥 

상놈까지도 공평하게 등용할 결심입니다.  나라와 나라 일을 하는 벼슬 자리는 어떤 일파나 

양반만의 농락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감의 그 개혁취지는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똥상놈까지 고관에 등용하면 역시 종래의 

지배층이던 양반 관료와 유림(儒林)에게 지나친 충격과 반발을 일으키지 않을까 합니다.  그

것만은 좀 서서히 하면 어떨까요?"

  "일리 있는 신중론입니다.  그러나 독초는 뿌리채 뽑아 버리는 것이 혁신정책이니까 다소 

잡음이 있어도 구폐는 이때 단연 일소 해야하겠습니다."

  "대감의 용단이라면 하실 수 있겠지요마는..."

  "내가 듣고 싶은 건 그 점입니다.  용단을 내릴 결심도 방안도 서 있지만 나에게 그 용단

을 내린 후의 문제를 수습할 능력이 있겠습니까?  솔직히 의견을 말해 주시오."

  "글쎄요.  아니 대감에겐 그 능력도 계십니다.  그러나 좀 어렵겠지요."

  "나도 그 어려울이라는 점을 잘 압니다.  그래서 실은 대감의 힘을 빌리려고 청하러 왔습

니다.  대감은 계속해서 국사를 봐 주시되 이번 새로 조직하는 내각의 좌의정(左議政)을 맡

아 주십시오."

  김병학으로서도 뜻밖의 후대(厚待)였다.

  "대감의 호의에는 감격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선 우리 김씨를 모두 죄인 취급하고 있으며 

또 당연히 삼가야 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또 나로선 친척들이 다 몰려난다고 비탄하고 

있는 이때에 나만 그런 영전을 하면 친척들에게도 미안하니까 사양하겠습니다."

  "허허허, 세상 잡음과 인정만 생각하면 크고 어려운 일은 못합니다.  내가 몰아내지 않는

데 김씨 일문이 왜 몰려난다고 야단들입니까?  다만 관계(官界)에 이동이 있을 뿐입니다.  

세상에선 김병기 대감과 나하고 사이가 제일 나쁘다고 하지만 그 분도 유임을 청하겠고 김

병국 대감도 그냥 유임을 청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김씨 중에서 대감만 운운의 말씀을 하

실 필요도 없습니다."

  대원군도 중대한 인사문제를 상의하는 자리라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대감의 지기지정(知己之情)에 감격합니다.  그 문제는 더 좀 생각할 여유를 주십시오.  그

러나 혹 대감도 나와의 종래의 우정에 끌리지 않는가 하는 점을 재고(再考)해 주십시오."

하고 김병학도 냉정한 태도를 피차가 취하자는 말을 했다.  그러자 대원군은 껄걸 웃으면서 

김병학의 손을 다정스럽게 잡았다.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큰 일일수록 사람끼리 서로 믿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경우에 

따라선 우정이 가장 중할지도 모릅니다.  내 진정을 탁 털어놓고 말하면 이제 나도 대감의 

종전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

  "내 심정을 아시겠습니까?"

  "네, 알 뿐입니까."

  김병학도 가슴이 뭉클했다.

  "고맙습니다.  그럼 이만 가겠습니다."

  그러나 결국 새로운 조정 조직 명단에 요직을 차지하게 된 것은 김병학의 우의정 한명 뿐

이요, 김병기와 김병국은 유임이 아닌 감등 좌천으로 남았을 뿐 영의정 이하의 여러 판서들

을 지내던 김씨는 모두 밀려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두명을 다시 승진시켜서 준 것은 후일

의 일이요, 김병학만은 뒤에 영의정까지 시켜서 대원군의 우정의 표시를 보았다.


  [ 雲峴宮의 봄 ]   < 天下를 두 손에 쥐고 >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雲峴宮의 봄 

    天下를 두 손에 쥐고



   一  대담한 人材登用

  "나라를 바로 잡으려면 모든 파벌을 초월해서 유능한 인재를 적소(適所)에 등용하는 것이 

기초가 된다."

  이것이 대원군이 주장하는 정치조직의 원칙이었다.  그러나 자기가 믿을 만한 인물이어야 

했고 또 한번 등용하면 자기가 더욱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능난한 솜씨가 그

에게는 있었다.

  그리고 대원군은 자기 아들을 왕으로 세워 준 조대비에게 감사를 느꼈으나 수렴섭정(垂簾

攝政)의 과부 조대비 치맛바람 밑에서 일하는 것을 거북스러 했다.  그래 고종이 열다섯살 

되던 고종 삼년 이월에 조대비의 수렴섭정을 폐지하고 국왕친정(國王親政)이라는 명복 밑에

서 대원군이 직접 정치에 손을 대고 자기 마음대로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다. 

  이때서야 그도 비로소 삼정승(三政丞) 육판서(六判書)를 비롯한 대신의 요직을 그의 마음

대로 쓰게 된 것이다.  이 당시 조정의 요직을 보면 영의정이 조두순(趙斗淳), 좌의정이 김

병학, 우의정이 유후조(柳厚祚)였다.  조두순과 김병학은 종천의 관록으로나 대원군과의 관

계로 보아서 당연한 인사였다.  그러나 우의정에 유후조를 등용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허어, 죽어 지내던 남인파(南人波) 유후조가 우의정이 됐어!"

하고 대원군의 대담한 인사문제에 또 한번 놀랐던 것이다.  또 한번이란 이에 앞서서도 북

인파(北人波)의 임백경(任百經)을 우의정에 등용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남

인 유후조도 이조판서(吏曹判書)로 기용한지 불과 일년만에 일약 재상을 시켰기 때문에 정

계에 큰 화제가 되었다.

  대원군은 그 뒤에도 남인의 한계원(韓啓源)을 우의정으로 삼았고, 북인의 강로(姜老)도 좌

의정으로 삼았던 것이다.  노론파(老論波)만 벼슬을 하던 구폐(舊弊)를 타파하고 남인파, 북

인파에게도 환심을 샀다.

  "이제 남인도 북인도 사람 행세를 하게 되었다."

하고 사람들은 환영했다.  그 파에서 한두명이 대관에 등용되어도 그 파에 속하는 많은 선

비들까지 용기를 얻게 되었다.  적어도 세도파에 의한 멸시나 탄압을 면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영향은 퍽 컸던 것이다.  과거의 그런 당화(黨禍)로 억울하게 정치범(政治犯)으로 처형 또

는 박해당한 이백명 가까운 사람도 모두 탕척(蕩滌)하고 복권시켰다.

  그전에 유명했던 이하전(李夏銓)의 역적사건으로 고생하던 사람들도 옥에서 석방되었고 

경평군 이세보(慶平君李世補)도 귀양을 풀고 벼슬을 시켰다.  특히 그전에 반감을 가졌던 이

장렴(李章濂)을 위험성 있는 금위대장(禁衛大將)에 임명한 사실은 대원군의 허심탄회하고도 

대담한 인재등용이라고 큰 화제에 올랐다.

  "옛날 적에게 역적질 하기 제일 좋은 칼을 주었으니, 대원군이 어느 사이에 이대장을 그

렇게 심복부하로 만들었을까?  정말 귀신이 곡할 인물등용의 요술이다."

  그보다도 조선(朝鮮) 건국(建國)이래 처음으로 서북인(西北人)을 참판(參判)에 등용해서 지

방차별을 철폐하고 본보기를 증명한 것은 사백년 이래의 처음 보는 일대 영단이었다.  그것

도 고려왕실(高麗王室)의 후손인 왕정양(王庭陽)이있기 때문에 더욱 대담하고 파격적인 일이

었다. 

  이상은 소위 양반 중의 파벌을 타파하고 지방차별을 철폐한 인사행정이었다.  그것보다도 

대담한 것은 아전, 평민, 천민들 중에서도 유능한 심복 인물을 등용해 정보기관의 관원으로 

경향 각지에 배치한 것이었다.

  "대원군 치하에선 상놈도 기를 펴고 살게 됐다."

  이런 덕을 본 사람은 대원군 방랑시절에 친교한 <천하장안(千河長安)>의 난봉꾼을 비롯한 

아전계급이었다.  즉 궁녀(宮女)의 오빠들인 천희연(千喜然), 하정일(河靖一), 장순규(長淳奎), 

안필주(安弼周)를 비롯하여 환관(宦官) 이민화(李敏化), 가령(家令), 이속(李屬)의 이승업(李承

業), 유재소(劉在韶), 윤광석(尹光錫) 등 이십여명에 달했다.

  이러한 인사문제 하나만으로도 대원군의 인물 된 성격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이 점에 

관해서 외국인 헐버트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그는 지배자로서의 위엄이 있는 개성(個性)과 백절불굴하는 강한 의지(意志)의 소유자로서 

한국 근세사상(近世史上)에서 가장 뚜렷한 성격의 인물이다.   그는 여러 가지로 평가되었는

데 어떤 자는 한국의 위대한 정치가였다고 생각하고 어떤 면에서는 일개의 민중선동가에 지

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대원군을 민중선동가로 본 점이다.  이 말은 다른 의미에서는 민심

을 제일 잘 알고 또 소중히 여긴 정치가요, 민중을 위한 자기류(自己流)의 민주주의 방법을 

처음에 시도(試圖)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二  당파소굴의 書院撤廢

   "나라를 망쳐버리는 것은 부패한 벼슬아치의 죄 뿐 아니라 조상 뼈다귀 자세만 하는 양

반의 족속들이다.  나라의 덕을 제일 보면서 나라의 대한 의무도 이행하지 않고 정치에 대

한 불평만 하는 것이 양반들이다.  놈들은 일도 안하고 세금도 내지 않는다.  양반의 부당한 

기세를 꺾고 일반 다대수의 민중의 사기(士氣)를 돋구워야겠다.  양반이고 상놈이고 모두 백

성일 바엔 공평한 대우를 나라가 보장해야 한다."

  대원군은 이런 선언을 하고 지방까지 뿌리깊이 박힌 토반(土班=지방양반)의 허리에 철퇴

를 내리기 시작했다.  우선 평민에게만 물리던 세금과 부역을 양반에게도 물리게 세제개혁

(稅制改革)을 단행했다.

  그리고 양반의 평민 학대와 수탈의 구악을 엄중히 금했다.  그러자 일반 백성들은 양반 

압제에서 해방된 만세를 불렀다.  이에 대해서 양반의 대변자인 각지방의 유림(儒林)들이 반

대 여론을 일으키고 탁상공론(卓上空論)의 상소문을 계속 올렸다.

  "에잇, 식자우환(識字憂患)의 유림이 입만 살아서 모든 당파 싸움을 조종하고 있다.  놈들

의 소굴인 전국의 서원을 일제히 폐쇄하라."

  대원군의 말은 곧 법령이었고 이 법령은 철저하게 신속히 단행되었다.  그리고 시정(時政)

을 비판해서 상소하는 선비는 용서 없이 귀양을 보냈다.  서원에 모여서 천하를 논란하던 

유림들은 대단한 불평을 품었으나 그들은 반대운동을 표면화시킬 용기도 없는 문약자(文弱

者)들이었다.  다만 뒷공론만으로 불평을 했다.

  "대원군은 진시황같이 선비를 탄압하고 학문 연구의 자유를 박탈하는 폭군이다."

  사실상 서원은 처음의 목적대로 지방의 청소년에게 한문과 도덕을 가르치는 순수한 사립

학교의 구실은 않고 정치 불평을 하는 소굴로 타락되었다.  심지어 사원에서는 묵패(墨牌) 

통문(通文)을 돌려서 지방민에게 각종명목의 금전을 수탈하는 원부(怨府)로까지 부패해 있었

다.  그러기 때문에 대원군은 그들 기생충 선비들에게 철퇴를 내렸던 것이다.

  "아, 그 지긋지긋하던 서원의 행패가 없어져서 잘됐다.  학자님 생원님들의 유흥비 생활비

를 대느라고 백성의 갈빗대가 부러질 뻔했는데 이젠 허리를 펴고 살게 되었다."

  백성은 이렇게 좋아했으나 세도와 밥줄이 끊어진 서원 중심의 선비들에겐 청천벽력(靑天

霹靂)이었다.  그 중에서도 기개가 있는 지방 대표들은 서울까지 원정해서 대궐 앞에서 항

의했다.  오늘로 말하면 서원폐지에 대한 선비들의 시위였다.

  "교육 기관인 서원을 폐지하는 것은 이 나라를 미개지로 만들 위험을 초래한다.  한문과 

학자를 탄압하는 것은 최대의 학정이다."

하고 아우성을 쳤다.  그러나 대원군은 코웃음을 쳤다.

  "서원에서 성현의 교육이 끝난지 오래고, 글 읽는 소리가 취흥방가(醉興放歌)로 변해 버렸

다.  그 중에서 가장 큰 피해는 서원의 세도로 양민의 금품을 수탈하는 행동이다.  그 백면

서생(白面書生)들을 잡아서 한강 이남으로 몰아내라."

  대원군의 명령을 받자 군사들이 동원되어 시위하러 올라온 삼남(三南)의 유림대표들을 개

끌 듯이 잡아서 한강 너머로 쫓아버렸다.  그리고 뒷이어 각 서원에 국가에서 허용했던 일

체의 토지를 몰수해서 완전히 서원의 기능을 박탈해 버렸다.

  이런 서원들 중에서도 가장 부당한 세도를 부린 대표적 서원이 청주(淸州)에 있는 화양동

서원(華陽洞書院)이었다.  이 서원은 우암 송시열(尤庵宋時烈)의 유지(遺志)에 따라서 명말(明

末)의 신종(神宗), 의종(毅宗)을 추모(追慕)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었다.  그런데 이 화양서원을 

근거로 삼고 행패를 부린 유림들은 중앙의 세도가들과도 결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권력이 

강대했다.

  < 모월, 모일에 제향을 올리겠으니 제수전(祭需錢)을 얼마씩 봉납(奉納)하라. >

는 묵패라는 고지서를 발송하면 관리고 백성이고 땅을 팔아서라도 기부하지 않으면 서원마

당에 잡혀가서 볼기를 맞고 주리를 틀리는 사형(私刑)을 받았다.  이런 악폐에 대해서 대원

군이 전에도 관령으로 단속해 보려고 했으나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던 것이다.  그만큼 

세도를 부린 화양서원이라 제향 올리는 규모도 호화스러워서 일종의 문화명물(文化名物)로 

유명했다.  

  대원군 자신도 낭인 시절에 청주까지 가서 그 제사지내는 광경을 구경하다가 큰 봉변을 

당했으므로 다른 일반 백성이 두려워한 것은 물론이었다.  대원군은 수수한 낭인으로서 제

사 구경을 갔다가 무심코 손에 부채를 든 채 서원의 돌층계를 오르고 있었다.

  "저런 불경(不敬)스러운 놈!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무엄하게 부채를 든 채 올라가느냐?"

하고 유생(儒生)과 서원 청지기가 달려와서 멱살을 잡고 끌어내렸다.

  "네가 어떤 놈이냐? 성명을 대라."

  "성명이랄 게 있는 사람도 못되오."

  "뭐, 성명 삼자도 없는 놈이냐?  성명도 모르는 무식쟁이 놈이 감히 부채를 든 채 이 서

원의 층계를 올라!"

  "성명을 대라, 보아 하니 상놈은 아닌데 어디서 온 누구냐?"

  "서울서 이 서원의 제향이 유명하다기에 구경 왔소."

  대원군은 마지 못해서 대답했다.

  "이놈아, 제향구경을 하다니, 네 조상 제사도 구경만 하느냐?  성현의 제향엔 경건히 참배

하는 법이다."

하고 유생은 대원군의 뺨을 갈겼다.  그러나 대원군은 분한 마음을 꾹 참고 그들의 행패를 

피해서 도망치듯이 서원을 뛰어나왔다.  그때 그가 왕족이라는 신분을 밝혔으면 봉변을 안 

당했을지도 몰랐다.  설사 몰락한 낭인 왕족의 신분을 밝혔더라도 가짜라고 추궁당했을지도 

모를 일이며 혹은 왕족이 그런 예법도 모르냐고 모욕을 당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그때도 자신이 평민으로 자처했고 또 세상의 갖은 모욕을 꾹 참는 인내

성이 있었다.  그러나 천하를 호령하게 돼서 백성의 원부가 된 서원을 때려 부시는 이때, 그 

당시의 봉변을 회상하고 쓴 입맛을 다셨다.



  三  웅장한 景福宮 재건 

  대원군은 자기 자신의 사생활은 여전히 풍류객답게 간소한 것을 좋아했으므로 절제해서 

사치스롭고 호화로운 것을 피하고 재물에 대한 태도도 담백했다.  그러나 그의 웅장한 정치

적 포부를 펴기에 앞서서 왕실의 권위의 상징이요, 자기의 친아들 고종왕이 새로 들어앉을 

웅장한 궁전을 지을 결심을 했다.  경복궁은 조선 건국시에 건설되었으나 임진왜란(壬辰倭

亂) 때 적의 병화로 타 버렸다.  그 치욕의 흔적이 이백년 동안이나 그대로 폐허로 남아 있

어 낮에도 산짐승이 우굴대고 밤에는 귀신이 나올 듯한 흉한 궁터가 되어 있었다.  대원군

은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이백년 동안 재건하지 못한 경복궁은 내가 꼭 전보다 훌륭한 규모로 재건하겠다."

하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러나 이 거대한 건축 사업에 필요한 막대한 자재와 재정과 인력 

동원이 큰 난관이었다.  다른 왕의 시대에도 경복궁 재건 문제가 나올 때마다 그것의 가능

성이 없어서 항상 중지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자기에게는 하고자 해서 못할 일이 없다고 스스로의 힘을 믿는 대원군이었지만 이 

문제는 중신들의 동의를 얻어야 하므로 의견을 물었다.

  "지금 국고의 재정이 미약하고 백성의 힘도 약한데 어찌 그런 거대한 역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까? 공연히 무모한 공사를 일으켰다가 민원(民怨)을 사거나, 중도에서 기진맥진해서 

완성하지 못한다면 왕실과 대원군의 수치가 될까 두려워합니다.  지금은 그럴 시기가 못됩

니다."

하고 중론이 반대했다.

  "어려운 일인 줄은 나도 아오.  그러나 나라의 부흥을 위해선 우선 나라의 근본이요, 상징

인 왕궁이 부흥해야 하오.  내 설계가 비록 우리 나라 조선 최대의 규모라 하지만, 그래도 

청나라의 궁궐에 비하면 문제도 안 될 소규모요.  그러나 외국에 대한 우리 나라의 위신을 

지킬만한 궁궐로서 경복궁 재건만은 꼭 해야겠소."

  대원군은 끝내 주장했다.  영의정 이하의 대신들의 반대하는 이유에도 나라를 위한 고충

에서였다.  그러나 그들은 말하자면 결국 남의 집을 짓는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왕족인 

대원군으로는 불타버린 조상의 집을 다시 짓고 싶은 생각이기도 했다.

  더구나 새로 된 임금 내 아들에게 훌륭한 궁궐을 지어 주고 싶은 것과 내 집에 대한 욕망

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정의 대신들은 현재의 국가재정의 실정을 방패로 반대했다.  

이에 대해서 대원군은 마침내 귀신의 힘을 빌려서 일반 민심을 납득시키려는 기계(奇計)를 

안출했다.  다시 말하면 미신의 효력을 이용할 음흉한 모략이었다.  그는 이에 앞서 조대비

의 여자다운 허영심을 충동하여 그 찬성을 얻으려고 했다.

  "지금 쓰고 있는 이 창덕궁은 경복궁이 전화로 소실된 후에 임시로 지은 가궁(假宮)에 지

나지 못했습니다.  지금 나라를 번영시킬 이 기회에 우선 왕실의 위엄을 백성에게 보이고 

외국에 대하여 위신도 세워야 하겠습니다.  세도하던 일개 대신들의 집도 굉장히 크고 호화

로운데 궁궐이 이렇게 초라해서 되겠습니까?  청나라에 갔다 온 사신들이 그 나라의 궁전

이 얼마나 굉장한가는 대비께서도 들으시지 않았습니까?  또 선성(先聖)께서 나라와 함께 

건설한 경복궁을 저런 폐허로 버려 두는 것은 왕실의 후손으로도 죄송한 일입니다."

  조대비는 결국 자기 집을 훌륭히 지어서 호강시켜 준다는 대원군 말에 혹 반해 버렸다.

  "대원군의 말이 옳소.  대원군 계획대로 해 보오."

  대원군은 그전에도 서로 상의했던 조대비의 찬성을 다시 다짐하고

  "조대비께서도 경복궁 재건을 열심히 바라고 계시다."

하는 소문을 퍼뜨리고 반대하는 중신들의 눈치를 봤다.  그러나 완고한 그들은 종전의 태도

에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대원군은 운현궁으로 돌아가서 지금은 운현궁에 데려다 두고 직접 청지기로 부리고 있는 

천가, 하가, 장가, 안가 네명을 함께 불렀다.

  "이크, 우리 네명을 함께 부르시는 것을 보니 무슨 기쁜 소식이 있나 보네."

하고 그의 앞으로 나갔다.

  "대감, 무슨 분부이십니까?"

  "음, 너희들에게 부탁할 일이 있다.  이리로 가깝게 오너라."

  "네"

  "이번에 경복궁을 재건하게 되었다..."

  "완고파들의 벽창호 콧구멍을 뚫으셨습니까?"

  "아직 멀었다.  그 막힌 콧구멍을 너희들 힘으로 뚫어야겠다."

  "저희들이?"

  "그래, 코를 뚫기 위해서 우선 그 자들의 눈을 속이고 입을 막는 비결을 써야겠다."

  그리고는 퇴침만한 청석(靑石) 돌을 주었다.  그리고 그 돌을 갖다가 이리 이리 하라고 비

밀지령을 내렸다.  그들은 대원군 앞을 물러나와서

  "이것이 뭘까?"

하고 궁금증이 났다.  청석 돌멩이에는 이상한 체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비방이라시더니 이것이 무슨 주문(呪文)인가 보다."

하고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싱긋거렸으나 무식한 그들의 눈엔 한문으로 쓴 글 내용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며칠 지난 뒤에 창덕궁 의정부(議政府)의 청사를 수리할 때, 땅 속에서 청

지기들이 몰래 묻어 두었던 그 돌멩이가 두 군데서 나왔다.  역사하던 인부들이 무슨 글씨

가 쓰여져 있는 것을 수상스럽게 여기고 흙을 털고 공사 감독에게 갖다 보였다.

  "이런 돌이 땅속에서 나왔습니다."

  공사감독도 이상히 여기고 자세히 본즉 한문으로 다음과 같은 예언(豫言)의 글귀가 새겨

져 있었다.

   癸末甲元 新王雖登 國嗣叉絶 可不懼哉

   景福宮殿 更爲 建 寶座移定 聖子神孫 繼續承承 國祚更延 人民富盛

   東方老人秘訣 看此不告 東國逆賊

  [ 계해년 말에서 갑자년 초에 걸쳐서 새 임금이 등극하더라도 나라를 이을

  자손이 또 끊어질 운수이매 어찌 송구스럽지 않으랴.

   그러나 경복궁을 다시 짓고 보좌(寶座)를 옮기시면 성자신손(聖子神孫)이

  대를 이어 번성해서 나라의 경사가 무궁하고 백석이 부성(富盛)하리라.

   이 글은 동방노인(東方老人)이 예언한 비결이라 만일 이 비결을 발견하고

  도 이대로 아뢰고 실행하지 않으면 나라의 역적이다. ]


  공사감독은 깜짝 놀라서 이 비결의 돌을 임금께 바쳤다.

  "경복궁을 짓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  이 비결대로 하지 않는 신하는 나라의 역적이다."

하는 천명(天命)을 빙자한 대원군의 모책이었다.  그러나 경복궁 재건을 반대하던 대신들도 

그것이 대원군의 장난일지 모른다고 추측했으나 그런 증거를 폭로할 수도 없었고 이 비결을 

미신이니 묵살하자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는 국왕의 손이 끊이고 나라가 망해도 좋

다는 불경 죄로 몰려서 그야말로 역적의 누명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청석명(靑石銘)의 예언은 궁중을 비롯한 야반 백성에게 호기심을 일으키는 화제가 되어서 

전국에 유포되었다.  아직도 미신을 믿는 일반 민심은

  "그런 비결까지 나왔으면 경복궁을 지어야지.  반대하는 대신은 역적이지."

하면서 경복궁 재건은 당연한 일이라는 편으로 민심은 움직였다.

  조대비는 고종 이년 사월 삼일에 현임(現任) 대신들과 전임(前任) 대신들을 모두 희정당(熙

政堂)에 불러 놓고, 경복궁 재건에 대한 최후 결정을 내릴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경

복궁 재건에 반대하는 대표적 인물인 이유원(李裕元)과 물러난 영의정 김좌근도 참석했으나 

대원군은 보이지 않았다.  발을 늘인 저쪽 섭정(攝政) 자리에 앉은 조대비가 입을 열었다.

  "국초(國初)에 국가와 왕실의 지초로 세운 경복궁을 적국의 병화에 태운 채 이백년이나 그

대로 폐허로 버려 둔 것은 열성(列聖)에 대하여 황송하고 백성에 대해서도 위신이 서지 못

했소.  선대(先代)도 이 문제가 한두번 논의 되었으나 왕실에 그만한 일을 감당할 중심이 없

어서 중지되어 왔으나 이젠 책임지고 일할만한 대원군이 있으니, 이 기회에 경(卿)들은 대원

군과 상의해서 재건공사를 일으키도록 하기 바라오."

  이 말을 들은 이유원은 모든 것이 대원군의 연극임을 알았다.  그러나 감히 입을 열고 간

단한 심중론을 말했다.

  "경복궁의 재건 취지에야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오직 걱정되는 것은 막대한 경비와 부역 

동원의 문제입니다."

  "나도 잘 아오.  그런 점을 대원군과 잘 상의하면 될 줄 아오."

  이런 압력에 대해서 대원군의 힘으로도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에 대해서 가

장 연장자인 원로 중신 정원용이 또 대원군에게 찬성했다.

  "나라의 근본이 되는 궁궐을 재건하는 것은 가장 큰 경사로 생각하오.  모든 힘을 기울여

서 신하와 백성의 충성을 다할 기회라고 믿습니다."

  아무도 반대하지 못하고 좌중이 잠잠했다.  좌의정 김병학도 대원군 편을 들고 나왔다.

  "역대에 못한 큰 사업을 지금 하는데 성대(聖代)의 뜻이 있습니다.  대원군이 총책임을 지

고 하시면 될 것입니다."

  김병학의 말이 있은 뒤라 말하기 쉽다는 듯이 김좌근이 입을 열었다.

  "막대한 재정이 첫째 문제요.  아직도 삼남지방의 유림과 백성의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 

이때라 시기가 아직은 이른가 하옵니다."

  시기상조(時機尙早)론으로 소극적 반대를 한 것이다.  이때 영의정 조두순이 간단하나 결

정적인 찬성을 했다.

  "큰 일을 하는데는 다소의 난관이 있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경복궁을 재건

하지 못한 것은 신들의 불찰이었습니다."

  반대론의 대표적인 이유원도 하는 수 없이

  "재정이 준비되는 대로 착수하기로 우선 정해 두고..."

하는 말로 중신회의는 침울한 공기 가운데 끝났다.

  이런 결정이 내리자 대원군은 그날로 활동을 개시했다.  조대비의 교서(敎書) 형식으로 세

상이 깜짝 놀랄 대계획을 발표하는 동시에 영건도감(營建都監)을 설치했다.  대원군의 총지

후 하에 도제조(都提調)에 영의정 조두순, 제조(提調)에 열두명의 고관을 임명했다.  그리고 

가장 중대한 재정문제는 우선 거국적인 원납금(願納金)제도를 활용하기로 했다.  나라의 궁

전을 이룩하는데 충성을 표시하는 기부금을 자원해서 내라는 대원군의 명령을 거역할 신하

와 백성은 있을 수 없었다. 

  우선 그 본보기로 궁중에서는 조대비의 명의로 십만냥의 국고금을 하사했다.  오랫동안의 

세도로 거부가 된 안동 김씨 일파에서는 사과하는 의미와 구명하는 운동비로서도 남보다 거

액의 원납금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대원군의 부하들은 반 위협적으로 장안의 부호가들을 

찾아 다녔다.  타의(他意)겸 자의(自意)에 의한 원납금은 막대한 금액으로 모여 들었다.  김

병기는 이만냥을 내었고, 김병학도 만냥을 냈다.  원납금을 모으러 다니는 대원군 부하들은

  "예전엔 세도가가 백성의 돈을 강제로 빼앗아 갔지만 이번에는 자기 형편에 따라서 양심

껏 나라에 대한 충성을 표시하면 된다.  마음에 없으면 내지 않아도 좋다.  절대로 강제가 

아니다."

  이런 권유는 강제보다도 더 무서웠기 때문에 더 큰 효과를 거두었다.  원납금 운동이 시

작된지 며칠이 안 되어 벌써 사십만냥이라는 거액이 모였다.  대원군은 만족한 표정으로 종

친(宗親)들을 모아 놓고

  "백성의 경복궁 재건에 막대한 원납금을 바치고 있는 이때 우리들 왕족으로서 그냥 있을

수가 있겠소?  우리 종친 중에는 가난한 사람도 많으니 내지 못하거나 적게 내는 사람의 

체면도 생각해서 개별적 원납은 그만둡시다.  그리고 형편대로 낸 원납금을 모아서 종친 일

동의 명의로 내면 좋을까 하오."

  "대감의 말씀이 고맙소."

하고 가난한 왕족들이 기뻐했다.  대원군은 그 자리에서 제일 많은 금액을 발기장에 적었다.  

그래서 모은 돈 사만냥을 원납해서 빈한한 왕족들의 체면도 세워 주었다.

  "가난한 농민들은 원납금을 내기가 어려울 테니 공사장에 나와서 부역으로 충성을 다하면 

좋다."

  이런 지시도 내렸다.  부역도 결국은 재정의 일부를 부담하는 것이지만 농민들에게는 관

대한 처치였다.  사월 십오일을 기해서 경복궁의 터를 닦기 시작했다.  그러자 장안의 빈민

들이 모여 와서 신속하게 기초공사가 진행되었다. 

  "시작이 반이다.  대원군의 수완이 굉장하다."

  터가 닦아지는 공사판에선 신들이 났다.  밥도 술도 잘 나왔으므로 고마워하는 사람도 있

었다.  그러나 서울부근의 성 밖에 농민들의 자진 부역 부대가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때가 

마침 농사를 시작하기에 바쁜 시절이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속으로 원망했던 것이다.  그 기

미를 알게 된 대원군은 지령을 내렸다.

  "지금은 농사를 다 지은 뒤에 하도록 하라."

  "역시 백성의 사정을 잘 알아 주는 대원군이다."

  순진한 농민들은 당장의 사정만 봐 주어도 고마웠다.  대원군에 대한 인기는 또 올라갔다. 

그래도 장안의 빈민을 비롯하여 원납전을 내지 못할 가난한 양반들까지 모두 부역에 나와서 

공사장은 활기를 띠었다.  하루에도 천명 가까운 장안의 백성들이 모여들었다.  경복궁 기지

(基地)안에는 임시로 휴게소와 숙소가 늘어서고 막걸리 집도 생겼다.

  대원군은 그 삯 없이 일하는 부역꾼들의 식사를 위하여 삼시로 따뜻한 밥을 지어서 배부

르게 먹였다.  그 쌀은 물론 호조(戶曹)의 창고에서 나오는 나라의 쌀이었다.  이렇게 해서 

대원군은 민심을 사면서 일을 시켰던 것이다.  이런 활발한 역사는 빠른 성과를 올려서 한

달도 못 가서 그 넓은 궁궐의 터전이 잘 닦아지고 주추가 놓여질 단계가 되어서, 전국에서 

목공과 석공(石工)이 동원되었다.

  그들에게는 물론 공전을 주었다.  그리고 부역 부대가 점점 늘게 되자 그들에게 식사를 

지어 줄 수 없게 되어서 밥값 정도의 일당을 내주었다.  그러자 경복궁 공사장 외곽에는 밥

장수 술장수가 번성했다.  밤으로는 창녀들의 매춘행위도 놀음판도 벌어졌으나 대원군은 그 

노역하는 자들을 위안하는 의미에서 그것을 금하지 않았다.

  의기가 양양해진 대원군은 점점 욕심을 부려서 예정보다도 궁궐의 수를 늘이고 목재와 석

재도 더 좋은 것을 택하게 되었다.  목재는 서울에서 가까운 능림(陵林)에서 베어 쓰다가 그

것이 부족해서 역시 민간 산림에까지 손을 뻗치게 되었다. 

  석재는 멀리 강화도에서 떠왔으므로 수륙의 운반에도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처음에 환

영하던 백성들에게서도 점점 원망하는 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대원군은 예정대로 밀고 

나갔다.

  그래서 그 해 구월에 벌써 경복궁의 광화문을 비롯한 동서남북 네 궁문(宮門)이 상량식을 

올리게 되었다. 

  경복궁 서쪽에는 큰 못을 파고 그 안에 옛날 있었던 석경루(石瓊樓)를 재건하려고 땅을 

파다가 박경회(朴慶會)라는 인부가 동제(銅製)의 옛날 보기(寶器)를 파냈다.  공사를 감독하던 

참찬관(參贊官) 김태욱(金泰郁)이 뚜껑을 보니 수진보작(壽進寶酌)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

다. 

  "이 안에 옛날 상감님ㅇ 쓰시던 보배(寶盃)가 들어 있구나."

하고 열어 본즉 안에는 과연 금동제(金銅製)의 술잔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잔에는 칠언 

절귀(七言絶句)의 한시(漢詩) 한수가 새겨져 있었다.

  華山道士袖中寶, 獻壽東方國太公.  靑牛十廻白己節, 開封人是玉泉翁.

[ 화산도사(華山道士)의 소매 속에 들었던 이 보배를 

  동방의 국태공(國太公)의 손을 빌어 바치노라.

  도사가 푸른 소를 타고 돌아오는 이날에,

  이 보배를 발견해서 열어 보는 사람, 옥천옹(玉泉翁)일러라. ]

  이런 비결의 보물 발견은 처음에 발견했던 청석명(靑石銘) 보다도 큰 반향을 일반 백성에 

일으켰다.  국태공이란 대원군의 공식칭호(公式稱號)였던 것이다.  대원군은 점점 부담하기 

어려울 정도의 원납전과 부역의 고통을 느끼게 된 백성들이 원망의 소리가 높아지자 또 이

런 모략을 했던 것이다.

  그것이 대원군의 연극이라는 것을 유식한 사람들은 곧 알았지만 감히 입 밖에 내서 욕하

지 못했다.  대원군은 그런 소수의 빈축을 살 것은 물론 처음부터 알고 한 계략이었다.  문

제는 그것을 믿는 일반 대중에게 지지를 받을 목적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전의 청석명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대원군 자신의 위대성(偉

大性)을 화산도사의 이름으로 찬양한 점이다.  이제는 그만큼 그의 세력은 확고 부동하다는 

자신을 갖고 구차한 복면은 벗어 버렸던 것이다.

  "이런 경사가 없다.  이 보물을 발견한 인부 박경회가 바로 옥천공이매, 누명(樓名)도 그의 

이름을 따서 경회루(慶會樓)라고 하자."

하고 대원군은 명명(命名)했다.  대원군은 아마 처음부터 이 누명을 미리 생각하고 그 인부

에게 그런 가명(假名)을 자백하도록 했는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그 비결의 보물이 진짜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 발견한 인부에게 당장의 오위장

(五衛將) 벼슬을 시키고 나중에는 중추부사(中樞府事)로 승진시켰다.

  그리고 나서는 대원군의 연극은 점입가경(漸入佳境)의 경지로 되었다.  날마다 삼천명이나 

되는 부역 인부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서 경복궁에는 무대가 만들어지고 대규모의 흥겨운 연

극이 벌어졌다.  열명 한반(一班) 열반 일대(一隊)의 집단은 삼백이나 되었다.  그들의 대마

다 서민자래(庶民自來)라는 깃대를 세우고 농악을 잡혀서 공사장으로 출동시켰다.  대 앞에

는 화려한 의상을 입힌 소년을 장정 어깨에 무동세우고 대원들은 머리에 종이로 만든 꽃벙

거지를 씌웠다.  그리고 일을 하는데도 농악을 이용해서 사기를 돋우는 동시에 그들의 피로

를 덜어 주었다.  그리하여 일의 능률을 올리는 동시에 고역에 대한 불평을 무마시켰던 것

이다.

  큰 토목을 운반할 때나 터를 다지는 공동작업에는 으레 한명의 고수(鼓手)가 북을 치면서 

합창지휘를 했다.  이것이 유명한 경복궁타령이다.

  "한양천도(漢陽遷都) 오백년에..."

하고 고수가 북을 치면서 첫마디를 메기면 대원들이 일제히 줄을 잡아 당기면서 힘찬 노래

를 불렀다.

한양천도 오백년에    천하영웅 국태공이

천우신조 북받으며    국태민안 경복궁을

백성들의 충성으로    구름높이 이룩하네

에엘루야 상사디야    에엘루야 상사디야

  한 노래가 끝나면 고수가 덩덩 북을 치면서 또 다른 노래의 첫마디를 메긴다.

  "이궁 뒤를 우러보면..."

  이에 따라서 대원들이 또 합창하면서 신난 듯이 줄을 끈다.

이궁 뒤를 우러보면    삼각산도 높을세라

이궁 앞을 내다보면    한강수도 푸를세라

이 경치에 복을 받아   궁 이름도 경복일세

에엘루야 상사디야    에엘루야 상사디야

  이럴 때 대원군도 공사장으로 가끔 나와 보았다.  그는 일을 독려하려고 하지 않고 위로

의 말만 했다.

  "수고들 한다.  그만 쉬고 술이나 한잔씩 하라."

하고 돈을 주며 돌아 다녔다.  그래서 공사장에서는 대원군이 나타나기만 기다렸다.

  그래도 확대만시켜 가는 공사로 막대한 재정 부담과 부역에는 백성들의 불만이 점점 늘어

갔다.  공사를 시작한지 만일년이 되는 고종 삼년 삼월에는 공사장에 산적했던 목재에 원인 

모를 화재가 나서 전부 태워버렸다.  이때가 마침 천주교도(天主敎徒)를 박해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천주교도가 원한을 품고 방화했다."

는 소문이 퍼졌다.  사실이 그럴는지도 몰랐으나 범인은 잡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풍문은 

천주교도 박해를 더 가혹히 하는 구실을 주었을 뿐이다.  재목이 부족해지자 민간 소유 산

림에 원납목(願納木)을 갖다 쓰게 되었다.

  "이크, 이제 양반이 죽을 판났다."

  큰 재목이 될 만한 산림은 양반들의 소유였기 때문이다.

  "백성의 산을 공으로 빼앗은 것을 나라에 좀 바친들 억울할 게 뭐냐."

  양반의 압제를 받아 오던 백성들은 대원군의 가혹한 원납목 방법을 좋아했다.

  대원군의 수완으로도 오년에 걸친 거대한 경복궁 공사에는 진땀을 뺐다.  재정이 어려워

지자 상경하는 지방인 에게 남대문을 비롯한 성문(城門)에서 통문세(通門稅)까지 받았다.  그

리고 전에는 평민만 물던 나라에 대한 세금을 양반에게도 물게 했다.  이 점에는 일반 백성

이 통쾌해 했다.  그래도 건축비가 딸리자 화폐개혁까지 해서 당백전(當百錢)을 새로 만들어 

내서 통화가 팽창하게 되었다.

  자연 물가가 앙등했고 사주전(私鑄錢)의 피해가 심했다.  사주전을 막기 힘들게 된 대원군

은 청나라의 동전(銅錢)을 썼으므로 그 폐단도 막고 차차 물가가 안정되긴 했지만 이때만은 

대원군도 당황했다.

  그러나 빈약한 국가 재정을 기울이고 광범한 민폐를 끼치면서도 처음 계획보다도 웅장한 

규모의 경복궁 재건을 완성시킨 것은 대원군의 굳은 의지와 인내와 수단을 가리지 않는 용

단이 아니고는 아무도 몽상하지 못할 큰 공사였다.


  [ 雲峴宮의 봄 ]   < 우물 안의 큰 개구리 >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雲峴宮의 봄 

    우물 안의 큰 개구리



   대원군은 경복궁(景福宮) 재건의 무리한 사업을 단행했을 뿐 아니라, 사민평등(四民平等)

으로 양반 세도의 신분제도(身分制度)를 개혁하고, 국민의 의식주(衣食住)에 이르는 생활양식

(生活樣式)과 풍속까지를 개량했다.  그런 움직임에서 세금제도(稅金制度)도 개량했고 군역

(軍役)의 불공평도 혁신해서 군기(軍紀)를 확립하고 국방태세도 튼튼히 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에서 가장 물의를 일으킨 두 가지 큰 사건은 안으로 천주교도에게 가혹

한 탄압을 내린 것이요, 밖으로는 여러 외국의 군함을 무력으로 물리치고 엄격한 쇄국정책

(鎖國政策)을 단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변동동기는 기묘한 것이어서, 하마터면 대원군이 천주교도의 큰 원수가 되

지 않고 도리어 큰 은인이 될 뻔한 미미한 여자의 애처러운 일화도 숨어 있었다.  그것은 

어린 고종의 유모 박소사(朴召使)가 천주교 신자였고, 이 유모를 통해서 대원군의 부인 민씨

도 반신자(半信者) 정도로 동정했기 때문이다.  유모 박소사는 고종이 어릴 때부터 충실한 

유모 노릇을 했으며 임금이 된 뒤에도 궁중에 따라 들어가서 측근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마님, 아드님께서 임금이 되신 것도 모두 천주님께서 거룩한 은총을 내리신 덕택입니다.  

제가 천주님께 기도할 때는 언제나 상감님의 복을 먼저 빌고 있습니다.  천주교의 천주님 

가르치심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외국끼리도 서로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롭게 살자는 주의 

입니다.  지금대로 우리나라에서 천주교를 탄압하면 나라가 망하고 탄압한 사람들은 죽어도 

지옥에 가서 고생합니다.  상감님은 천주님의 축복으로 지존의 몸이 되셨지만 완고한 대신

들 때문에 만일 상감님께까지 천주님의 노염이 미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대원군 대감께

서는 본디 모든 백성에게 인자한 정치를 하시려고 하는데, 다른 완고한 대신들이 천주교도

를 이 나라 백성이 아닌 오랑캐라고 몰기 때문에, 양반 세도에서 상놈까지 자유롭게 해주신 

대원군 대감의 총명을 흐리게 하고 있습니다.  마님께서 대감님께 잘 말씀하셔서 천주교 탄

압을 못하도록 완고한 대신들을 타이르게 해 주십시오."

  대원군의 부인 민씨는 유모 박씨를 신임했고 그 말이 옳은 듯도 했다.  무엇보다도 임금

이 된 아들과 남편 대원군이 지옥에 갈까 두려웠다.

  "마님, 그뿐입니까?  만일 천주교 선교사인 서양 사람을 박해하면, 그들 나라가 노해서 강

한 군대로 쳐들어 와 이 나라를 단번에 쑥밭으로 만들어 버릴 것입니다.  그렇게 큰 청나라

도 천주교를 반대하다가 경을 치고 굴복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국제 정세와 천주교와를 연결시킨 정치문제까지 설명했다.

  "그런 변이 나면 큰일나게."

  민씨는 겁이 났다.

  "그러니 마님께서 대감께 잘 말씀해 주세요.  그러면 우리 천주교도가 대감을 하느님의 

사도(使徒)로 추앙할 것이요, 여러 서양 나라에서도 고마워하고 상감님 부자님과 우리 나라

를 도와 주실 것입니다."

  "내가 잘 말해 봄세."

  민씨는 남편을 설복해 볼 생각이 들었다.  유모 박소사가 이런 웅변을 토한 것은 역시 천

주교도인 남편 홍봉주(洪鳳周)에게 얻은 지식이요, 또 그가 아내를 통해서 천주교도의 구명

운동을 시켰기 때문이다.

  홍봉주는 삼대를 통한 천주교도로서 남인파(南人波)의 거물이기도 했다.  그가 천주교도이

기 때문에 아내가 임금의 유모이면서도 불우한 처지에서 전전긍긍하며 지내고 있었다.  박

소사는 곧 남편에게 대원군 부인의 호의와 대원군에게 간곡히 청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고 알렸다.

  "아, 고마운 소식이요.  인제 우리가 상감님 유모 덕을 보는가 보오."

하고 아내의 공을 칭찬했다.  기뻐한 홍봉주는 곧 신도이며 친구인 남종삼(南鍾三)에게 연락

했다.  남종삼은 전부터 대원군과 친한 사이였다.  그 후에 남종삼은 대원군을 찾아가서 흉

금을 털어 놓고 대원군에게 천주교의 포교 자유(布敎自由)를 호소했다.  그는 국내 정세에서 

국제 정세에 이르기까지, 세계태세와 역사의 앞길을 내다보는 열변을 토하는 동시에, 그 인

식을 깊이 하기 위해서 글로 쓴 논문까지 전했다.

  "문명국들의 종교자유와 민권 존중의 대세 이외에도, 우리 나라로선 지금 우리 나라를 넘

보고 남하정책(南下政策)에 급급한 아라사(노서아)를 막으려면 불란서와 독일의 힘을 빌어야 

합니다.  우리 나라 현재의 힘만으론 당하지 못할 것은 대감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

까?  이런 위급한 국제 정세에 불란서와 독일을 천주교 탄압으로 노하게 해서 적국으로 돌

리는 것은 어리석은 외교정책이기도 합니다. 나 자신이 천주교라 구명운동을 하는 것은 절

대 아닙니다.  영감도 아시다시피 나 자신은 신앙의 양심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을 지언정 

비겁한 구명 운동만으론 대감께 이런 청은 않습니다."

  "음, 자네 기질은 내가 아네."

하고 대원군의 마음은 움직였다.  천주교를 반대한 순조(純祖) 이래의 탄압 정책은 따지고 

보면 완고한 양반들의 유교사상에서 나왔던 것이다.  그 양반들의 부패에 철추를 내린 대원

군으로선 천주료를 해방해 주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으로 자기의 지지파를 더 얻

고도 싶었다.  그리고 남침(南侵)하려는 노서아를 막을 수 있다면 그런 다행이 없었다.

  "알았어.  허나 이 오랜 유림(儒林)들의 정책은 내 힘만으론 어려우니 반대하는 대신들의 

양해를 구해 보겠네.  그러고 불란서 선교사가 누구던가?"

  "베르누 선교사입니다.  우리 나라 이름으론 장경일(張景一)이라고 합니다."

  "그럼 그와도 한번 만나 보고 싶은데 자네가 연락해 주게."

  "네, 감사합니다.  그러면 그도 기뻐할 것입니다.  공교롭게 지금 지방에 내려가 있으니 

상경하는 대로 소개하겠습니다."

  남종삼은 이젠 천주교도들이 살았다고 감격하면서 재삼 당부하고 운현궁을 나왔다. 

  대원군은 천주교 탄압을 완하하면 어떻겠느냐고 대신들을 모아놓고 물었다.  대신들은 대

원군의 태도에 놀랐다.  그러나 이 문제에만은 강경히 반대하자는 암계(暗計)가 순간적으로 

통일되었다.  원로 정원용이 맨 먼저 발언했다.

  "순조대왕 이래로 천주학은 엄금한 전통입니다.  신유사옥(新酉邪獄)의 잔당이 또 준동하

는 모양이니 차제에 철저히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대원군은 도리어 처음부터 혹을 얻어 붙인 꼴이 되었다.  이에 이어서 영의정 조두순, 좌

의정 김병학, 영돈녕(領敦寧) 김좌근이 천주교의 철저한 탄압을 주장했다.

  "세계 대세로 봐서 서양 각국에 반감을 살 위험이 없을까요?  청나라도 그들에게 혼나고 

있는 판국인데 천주교를 묵인함으로써 그들과 친하는게 어떨까 하는데요."

  대원군은 남종삼에게 들은 말도 해봤다.

  "우리 나라 국교(國敎)는 주자학(朱子學)이 있을 뿐입니다.  기타의 사교(邪敎), 이학(異學)

은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탄압하긴 쉽소.  그러나 만일 이 문제로 서양 제국에게 화를 당하면 그 책임을 질 수 있

겠소?"

  "천주학 무리가 목숨을 걸고 저희들 사교에 충실한데, 우린들 그만 각오가 없겠습니까?  

그보다 대원군은 우리의 결의와 천하의 유림들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도 대원군다운 용

단으로 철추를 내려 주기 바라오."

  원로 정원용이 대원군에게 채찍을 가하는 기세를 보였다.  대원군은 자기의 경솔을 깨달

았다.  그는 이 순간에 번의( 意)하고 천주교도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결심했다.  그리고 

즉시로 철저한 천주교 거물급의 검거선풍(檢擧旋風)이 일기 시작했다. 장경일 등의 외국인 

선교사도 일망타진 되었다.  고종의 유모 남편 홍봉주도 잡혔다.  이 검거된 사람들은 정치

범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포도청에서 의금부(義禁府)로 넘겨서 엄중한 문초를 했다.  대원군

은 직접 의금부로 나가서 장경일을 문초했다.

  "그대의 국적(國籍)은?"

  "불란서 사람이요."

  그는 유창한 조선말로 대답했다.

  "본명은 무엇이고 언제 우리나라에 왔는가?"

  "불란서 이름은 베르누고, 조선에는 십년전에 왔소."

  "주소는?"

  "홍봉주 집에 유숙하고 있소."

  고종 유모의 남편 집에서 그는 있었던 것이다.  대원군은 갑자기 온순하고 충실한 유모 

박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사사로운 인정은 무시하려고 했다.

  "천주교 선교사로서 무슨 일을 했는가?"

  "천주님의 뜻을 받들고 이 나라에 와서 천주교의 사랑으로 선남선녀(善男善女)들을 천주님 

길로 인도하는 일을 해 왔소."

  "우리 나라에 공자님 유교가 있는데 왜 남의 나라 종교를 방해했는가?"

  "유교를 방해할 의사는 없습니다.  다만 유교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유교와도 비슷한 도

덕을 가르쳤을 뿐이요."

  불란서 선교사는 조금도 두려운 빛이 없이 침착한 태도로 당당한 대답을 했다.

  "제 조상의 제사도 안 지내는 것이 무슨 도덕인가?  본국으로 돌아간다면 관대하게 석방

할테니 빨리 돌아가라."

  "아직 본국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습니다.  길 잃은 양떼와 같은 신도를 버리고 나만 편하

게 갈 수는 없소."

  대원군은 이 외국인 선교사의 강한 태도가 마음에 들기도 했다.  부인 민씨의 청도 있었

기 때문에 이만은 용서해서 귀국시킬 생각이었다.

  "우리 나라는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 외국 사람은 후대할 용의가 있소."

  "그러나 이 나라는 나의 제이의 고국이며 친구와 교도가 많이 있어서 떠나기 싫소."

  "이 나라에 그냥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죽어도 있겠소.  이 땅에 뼈를 묻을 각오로 있소."

  대원군은 자기보다도 뱃심이 강한 그가 미워졌다.  아무에게도 저보지 않은 그가 일개 선

교사에게 지고는 싶지 않았다.

  (이놈 죽고 싶으면 죽어 봐라!)

  대원군은 마침내 외국인 선교사도 국내 신도와 함께 학살할 결심을 했다.

  대원군의 명을 받고 천주교도 학살의 책임을 맡고 활약한 이경하(李景夏)는 고종 삼년 이

월 십삼일에 외국 선교사와 남종삼, 홍봉주 등을 체포하여 삼월 팔일에 전부 사형에 처했다.  

이 때 서울에서 학살된 천주교도의 시체는 수구문(水口門) 밖에 산같이 쌓여서 버려졌다.  

그리고 대학살의 선풍은 전국 지방에 걸쳐서 단행되었다.  이때 불란서 선교사도 세명이나 

죽고, 삼십여일 동안에, 삼만명의 천주교도가 목숨을 잃었다.  이것은 실로 세계적으로도 드

문 천주교도 학살사건으로 대원군의 일대 실정(一大失政)인 동시에 그의 잔인성을 일면에 

폭로한 비극이었다.

  그가 만일 처음 생각대로 천주교의 자유도 허용하고 그것을 계기로 서양의 신문화를 수입

하여 개화(開化) 정책을 섰다면, 결코 일본의 신문명에 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사건은 

마침내 불란서를 자극시켜서 연이은 외국의 군사적 침범 행동을 유발시켰다.

  이 학살의 위기를 모면해서 청국으로 탈출한 불란서 선교사 리델은 중국 지부(芝 )에 머

물고 있던 불란서 동양함대 사령관 로즈에게 조선에서 일어난 대원군의 천주교도 대학살 사

건을 보고했다.  그러자 로즈 제독(提督)은 분격하고 군함을 몰고와서 조선에 항의하고 그것

을 구실로 침략하는 기회를 삼으려 했다.

  북경주재 불란서공사는 조선을 공격하려는 예비 공작으로 청국의 간섭을 막으려고 청국을 

위협했다.

  "조선의 국왕이 불란서인을 학살했으니 불란서는 군대를 보내서 응징하겠다.  작은 나라

가 감히 이런 불법 행동을 자행한 것은 청국의 보호를 믿고 한 소행이니 청국도 응분의 연

대책임을 져야 하오."

  이에 대해서 청국은 당황했다.  조선문제로 연대책임은 피해야 하겠으나, 조선에 대한 청

국의 권익을 잃을 것 같았다.

  "조선은 독립국이니 그 나라에서 행한 불란서인 학살 사건은 청국이 알 바 아니요.  그러

나 출병 문제만은 삼가고 사건 경우를 심중히 조사한 뒤에 평화적으로 해결하기를 바라오."

  청국으로서도 불란서 함대에 대해서 큰 공포를 느꼈다.  청국은 바로 육년 전에 영불 연

합군에게 큰 패배(敗北)를 당하고 권익을 양도했으므로 조선 문제에 대해서 강경한 태도로 

나설 수가 없어서 이 이상의 간섭은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불란서 함대는 군함 세척을 거느리고 구월 이십일 태안반도(泰安半島)의 당진만(唐津灣)에 

침입해 왔다.  함대는 거기서 군함 한척을 강화도(江華島)로 보내고 로즈 제독이 직접 지휘

하는 군함 두척은 한강을 칠십여리나 거슬러 올라와서 서울을 위협했다.

  이에 놀란 조야(朝野)는 물끓듯 당황해 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일체의 외교교섭 대신 무

력으로 대항했다.  이십오일에 어재연(魚在淵) 장군이 거느린 삼천명의 군대가 한강에 올라

온 불란서 군함 두척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어재연 장군은 전사했으나 적함도 손해를 

입고 후퇴했다.

  대원군은 곧 애국심을 선동하고 외국침략에는 전쟁의 실력으로 물리치자라는 호령을 내렸

다.  그는 종로에 배외주전(拜外主戰)의 비석을 세워서 경종(警鐘)을 울렸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 서양 오랑캐가 우리 나라를 침입해 왔다.   전쟁이냐 화해냐의 두 길밖에 없다.

  그러나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행동이다. ]


   대원군은 이런 강경한 태도로 국내의 평화해결론을 억압하고 주전론을 선동했다.  그리

고 삼만명의 군대를 모집해서 훈련하는 동시에 경기 일대에 방비를 강화하고 평안도 포병부

대 일천명을 파견해서 국방을 굳게 했다.

  처음 싸움에 뜻밖의 실패를 한 불란서 함대는 청국에 있던 전 함대와 일본에 있던 불란서

군 육백명까지 동원한 아홉척의 군함으로 아산만(牙山灣)에 침입했다.  그리고 강화 해협으

로 포선(砲船) 두척과 상륙대(上陸隊)까지 출동해서 본격적인 조선 침공을 했다.  그 전투에

서 강화도 포대(砲臺)가 함락되고 십오일에는 강화도가 적군에게 점령되었다.  이 패전으로 

성중(城中) 창고에 있던 무기 전부와 사십만냥이나 되는 금은과 사고(史庫)에 있던 귀중한 

서적 전부를 약탈 당했다. 

  대원군은 적군에게 안심시키려는 전술로 군대 철수의 공문서를 보냈다.  문서가 왕래하는 

동안에 이쪽의 공격 태세를 갖추려는 수단이었다.  이 대원군의 요구에 대해서 적군 사령관

은 선교사 살해에 대한 손해 배상금과 사과를 요구하고 이 교섭을 위해서 책임 있는 강화사

절(江華使節)을 보내라고 회답했다.

  대원군은 그 동안에 군대를 정비해서 적군의 본거지인 정족산(鼎足山)을 급습해서 적병 

삼십여명을 사상시키는 맹공격을 가했다.  로즈 제독도 하는 수 없이 전함대를 거느리고 도

망해 버렸다.  불란서군을 두 번이나 격퇴시킨 장병은 의기 충전해서 서울로 개선했다.

  그러나 곧 이어서 미국과도 싸우는 사건이 발생했다.  1,866년에 미국 기선 셔만호가 평양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으므로 대원군의 배외국방(拜外國防)의 정책에 따른 평안감사 박규

수(朴珪壽)가 군민(軍民)을 파견해서 그 기선을 태워 버리고 선원과 승객 전부를 잡아 죽였

다.  이에 격분한 미국은 셔만호 서건의 손해배상과 통상조약을 강요하려고 해군소장 로저

스가 군함 여섯척을 거느리고 1,871년 오월 이십삼일에 영정도(永定島)에 이르렀다.  그리고 

유월 이일에 군함 두척과 기선등으로 한강을 거슬러 서울로 들어오려고 강화도에 침입했다.  

이때 대원군은 강화도 수비장병에게 끝까지 싸워서 적군을 물리치라는 엄명을 내렸다.

  "먼저 불란서 함대를 격퇴하듯이, 이번의 미국 함대로 보기좋게 물리쳐라.  서양 오랑캐는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말아서,  우리 나라에는 감히 접근할 생각을 못하게 하라."

  강화도 포대에서 적함을 공격하자 미국군의 육전대 육백오십명이 상륙해서 우리 포대를 

점령하는 등 한때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우리 장병은 끝까지 악전고투해서 유월 십일일 

밤중에 육박전으로 적군을 무찔러서 대승했다.

  "조선 군대가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다."

  미국함대 사령관 로저스 장군은 하는 수 없이 함대를 거느리고 도망해 버렸다.

  이처럼 불란서 함대와 미국 함대의 침공을 격퇴시킨 대원군은 자신의 힘을 과신(過信)하

고 또 세계 문화의 진운(進運)에 어두었으므로, 소위 양이쇄국(攘夷鎖國) 정책을 더욱 엄중히 

했다.  오랑캐를 물리치고 나라에 성문을 굳게 닫는다는 정책이었다.

  외국의 선전포고도 아닌 일부 병력의 격퇴에 만심(慢心)을 일으킨 대원군은 결국 방안에

서 호랑이 잡는 격의 큰소리를 치면서 스스로 우물안 개구리가 된 것을 깨닫지 못했다.  양

이쇄국에 시종하려는 그는 이웃 나라 일본과도 교류하기를 꺼려했다.

  일본은 대원군의 쇄국정책보다도 먼저 삼백년 동안이나 도꾸가와(德川) 봉건군벌정치(封建

軍閥政治)를 해왔다.  그러나 일본은 명치 초년(明治初年)에 외국에 문호(門戶)를 개방하고 

서양의 문명을 수입해서 근대국가(近代國家)로서 착착 새로운 발전을 하고 있었다.  그 시기

에 있어서 조선은 일본이 버린 쇄국정책을 새로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 일본이 조선에 사신을 보내서 새로운 국교를 맺으려고 서로 수교(修交)하자고 제의

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일언지하(一言之下)에 이것을 거절했다.

  "양놈들이 우리를 넘보더니 이제는 왜놈까지 우리를 넘보려고 한다."

하고 대노한 대원군은 동래부사(東萊府使)에게 명하여 일본 사신은 쫓아 보내고, 전국에 명

하여 일본과의 왕래를 일체 엄금해 버렸다.  그리고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에게 임진왜란

(壬辰倭亂)의 기회를 또 노리는 일본의 책동을 각별히 경계하라는 명령과 함께 임진왜란 때 

쓰던 갑옷까지 보내 주어서 사기를 돋았다.

  조선의 강경한 배일 태도에 모욕을 느낀 일본에서는 한때 정한론(征韓論)까지 일어났다.  

그 주장의 대표자는 사이고오 다까모리(西鄕隆盛)였다.  그러나 당시 서양의 추세(趨勢)로 보

아 일본의 국내혁신이 시급하다는 이유로 식자들이 이에 반대했기 때문에 소위 정한론은 꺾

이고 말았다.

  이때에 만일 일본이 전쟁을 걸어 왔더라면 어떠했을까.  불란서나 미국이 동양 파견 함대

의 일부로 위협한 정도로 그치지 않고 본격적인 전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 점을 

두려워했던 대원군은 밀정을 보내서 일본의 동향을 살핀 결과 일본의 일부 정한론이 중지되

었다는 정보를 확인하고서야 안심했다.

  그러나 세계와 담을 쌓는 고립적인 외교정책은 도리어 외국의 원한을 사서 본격적인 침략

전쟁을 자초(自招)한다는 식자들의 여론이 비등했다.  그리고 오랜 대원군의 독재정치에 대

하여 백성들도 염증을 일으킨 기호를 타서 반대 정객들이 이 대외정책의 실패를 구실로 대

원군을 공격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이것이 대원군 실각(失脚)의 한 도화선(導火線)이 되었

다.

  대원군이 십년 동안 섭정(攝政)으로 독재정치를 하는 동안에 고종도 이제 청년으로 장성

했으므로

  "이젠 상감도 연장했으니 대원군이 섭정할 시기도 지났다.  빨리 친정(親政)으로 복귀시켜

야 한다."

  이런 여론이 일어나는 동시에 고종왕후(高宗王后)인 민비(閔妃)의 세력이 이미 대원군과 

대립할 정도로 커졌다.  즉 민비는 시아버지와 정권쟁탈에서 강적으로 된 것이다.

  민비는 대원군의 세도를 자기가 잡으려는 운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민비는 자기의 일당인 간관(諫官) 최익현(崔益鉉)에게 밀령을 내려서 대원군의 무모한 배

외정책 특히 당시에 문제된 배일정책에 대하여 반대운동을 전개시켰다.  그래서 그로 하여

금 고종에게 배일정책의 위험성을 논하고 대원군의 배일정책의 선봉장이던 동래부사 정현덕

과 안동준(安東晙)을 사형에 처하라라는 상소문을 올리게 했다.

  이때는 고종도 대원군의 말보다도 왕후인 민비가 하라는 대로 하게 되어 있었다.  고종은 

민비가 시킨 최익현의 상소를 옳게 여기고 정현덕은 귀양 보내고 안동준은 참형(斬刑)에 처

했다.  이것은 대원군의 세력이 무력해진 증거였다.  십년 동안 천하를 호령하던 대원군의 

위력도 마침내 며느리 민비의 치맛바람에 서리를 맞은 셈이다.


  [ 運命의 女人 閔妃 ]   < 少年王의 첫사랑 >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運命의 女人 閔妃 

    少年王의 첫사랑



   열두살에 양자 임금으로 궁중에 들어온 고종은 생부 대원군과 사사로운 가인(家人)으로 

만나는 일이 많지 않았다.  궁중에 자주 들어오는 대원군은 대개 조대비와 중요한 정치문제

만 수군대고 돌아갔다.  모친 민씨의 따뜻한 사랑을 받을 기회는 더욱 없었다.  처음에는 잠

자다가도

  "어머니!"

하고 잠꼬대를 하는 수가 많았다.  자기를 보고

  "개똥아, 이자식!"

하고 욕하며 놀던 평민 시절의 동무들이 그립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궁중에는 그를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가족도 없었다.  삼대(三代)의 과부들인 

선대(先代)의 왕후들도 그를 따뜻한 애정으로 돌봐 주지는 않았다.  제일 어른인 조대비가 

양모(養母) 관계이긴 해서 가장 소중히 여겨 주었지만 그것도 대원군과의 정치적 흥정과 같

은 동기에서 시작한 것이어서 육친의 애정이 있을 수 없었다.

  왕으로서의 권한도 모조리 대원군에게 있으므로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어린 임

금은 아직 정치권력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 대신 개인적 생활에는 완전한 자유라기보다도 

방임주의적인 상태에 놓여 있었다.

  지능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한창 발달할 시기의 소년왕에게는 지도하는 어른이 없었다.  몰

론 글공부는 했지만 신하로서 어려워만 하는 선생에게 맡겨졌을 뿐이다.  외롭기만 한 소년

은 따분한 글공부가 하기 싫었다.  그러나 가르치지 않아도 다가오는 사춘기(思春期)는 성에 

눈을 뜨게 했다.  외롭던 소년의 마음을 끈 것은 후궁에 많은 예쁜 궁녀의 매력이었다.  글

방보다 궁녀들 방에 놀러가는데 재미를 붙인 소년은 드디어 궁녀 이씨의 미색(美色)에 반해 

버렸다.

  궁녀로서 임금의 총애를 받는 것은 큰 영광이었다.  정실 왕비는 못 되더라도 귀인 또는 

빈궁(嬪宮)으로서 첩 노릇을 할 수가 있고, 다행히 아들을 낳으면 세자(世子)로 삼아서 임금

의 뒤를 이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상궁(李尙宮)은 자태가 아름다웠고, 머리가 영리하고, 

나이 또한 고종보다 많은 처녀였다.  이 궁녀는 처음에는 시녀로서 고종을 섬겼으나, 점점 

친해지자 누이같이 친절히 고종의 신변을 돌봐 주었다.  그러던 중에 서로 사랑의 싹이 트

게 된 것이다.

  "상감마마"

하고 손을 잡아 주며 옷을 입혀 줄 때에 탄력 있고 부드러운 처녀의 몸이 스치는데 쾌감을 

느끼게 된 소년왕은 자기도 모르게 애욕이 동해서 궁녀의 가슴에 안기며 젖가슴을 더듬었

다.

  "상감마마 왜 이러세요."

하고 소년왕의 손을 뿌리치고 얼굴을 붉혀 보이면 왕은 더욱 애달픈 피가 끓어 올랐다.

  "너 그러지 말고, 우리 장가 들고 시집 가는 흉내 좀 해보자."

  "어머나, 상감께서는 아직 아기신데 그런 소리까지 하세요?  그러다가 이상한 소문이 퍼

지면 큰일 납니다."

  "나는 임금이다.  임금이 너를 좋아한다고 누가 막을 거냐?"

  궁녀에게만은 왕노릇을 해보겠다는 듯이 제법 조숙한 말까지 하면서 치마끈에 매달렸다.

이런 일이 몇 번 있은 뒤에, 소년왕은 밤중에 궁녀의 방으로 가서 놀다가 궁녀 이씨의 이불 

속에서 임금의 어린 동정(童貞)을 깨뜨리고 말았다.  그 뒤로 고종은 낮에 글을 읽고 있어도 

이상궁 생각만 나서 좀이 쑤셨다.  그러면 책을 덮어 놓고 이상궁의 방으로 가서 풋사랑의 

쾌감에 취했다.

  "상감마마, 밤으로나 가끔 오시지 낮에 공부도 않고 놀러만 오시면 어떡하십니까?  제가 

무슨 춘향이라고 이도령처럼 글공부도 않고 이러세요?"

  "춘향이면 너보다 잘난 미인이랴.  나는 이도령 이상으로 네가 좋다.  책을 펴고 글을 읽

으려면 글자가 모두 네 귀여운 눈웃음으로 보여서 견딜 수 없다.  이도령처럼 너를 끝까지 

사랑하마."

  "어마.  저도 상감마마 없이는 못 살겠습니다.  그러나 너무 여자를 가깝게 하시면 중하신 

몸에도 좋지 못합니다."

  "왜?"

  "기운이 파해서 병이 될 염려도 있습니다."

  이상궁이 그런 주의를 시킬 정도로 어린 임금은 여자의 몸을 밝혔다.

  "너를 사랑하다가 병이 돼서 죽어도 좋다.  너는 내가 싫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

냐?"

  "상감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야요?"

하고 이상궁은 시무룩해진 왕을 안아 주며 달랬다.

  그러던 중에 고종이 열다섯살의 봄을 맞게 되자, 왕후책립(王后冊立) 문제가 급속히 진행

되었다.  임금의 결혼은 왕실의 가장 큰 경사였다.  그러나 왕후 후보자를 둘러싸고 또 각파

의 세력 암투가 벌어졌다.  자기파에 유리한 규수를 왕후로 만들어야 세도를 부릴 지반을 

톡톡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랑감인 십오세의 고종에게는 아무런 흥미도 없었다.  이상궁과 더 자유로운 애

정을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상감마마, 중전마마를 맞으시면 저는 본 척도 않고 버리시겠지요?  아주 버리시면 저는 

죽고 말겠어요."

  이상궁은 눈물을 흘림 속삭였다.

  "중전이 들어와도 나는 너만 사랑하겠다.  맹세한다.  너보다 귀엽고 예쁜 여자가 어디 있

겠느냐?"

  "정말이세요?  그야 저는 천한 궁녀니까 지금까지처럼 상감님을 독차지할 생각은 없습니

다.  그러나 아주 잊지만 말고 종종 제 방에 와 주시면 만족하겠습니다."

  "걱정 말아라.  중전이 들어와도 너는 내 첫정이 든 사람이니까, 실제는 본실이다.  나만 

너를 사랑하면 되지 않느냐?"

  "아이 좋아.  그럼 상감마마만 믿습니다.  변심 하시면 저는 죽어버리겠습니다."

  "그런 방정맞은 소리 하는 게 아니다.  네가 죽으면 나도 못 산다."

하고 고종은 이상궁을 끌어 앉았다.  이상궁은 자기보다 나이 어린 애인을 마치 아기를 안

고 젖을 먹이듯이 헤친 가슴을 내맡겼다.

  "흐흐흐... 내가 임금이 돼서 제일 기쁜 것은 너하고 이렇게 지낼 수 있게 된 것 뿐이다."

  "그래도 저는 걱정입니다."

  "뭐가?"

  "이번에 들어오실 중전이 강짜가 심한 규수가 아닐까 하고요."

  "내가 여편네 하나를 못 꺽을 남자같이 보이느냐?"

  "그러나 누가 알아요?  상감마마 젖혀놓고 세도 부린 중전이 전에도 계셨다는데요."

  궁녀들은 항상 역대의 왕비들을 화제에 올렸고 특히 궁녀들과 임금 사이의 치정관계에 전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장차 맞을 자기의 비(妃)가 자기를 맞고 세도를 부릴 

영악한 여성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더구나 자기 생각대로 못할 것이 없는 대원군 조차도 자기의 세력 유지를 위해서 간택한 

며느리인 왕비가 배은망덕하게 자기의 세력을 타도하고 덤빌 강적이 되리라고는 천만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선왕 삼년상도 지냈으니 곧 왕비를 책립(冊立)해야 한다."

  고종 삼년 삼월부터 이 문제는 구체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궁중에선 조대비가 서둘렀

고 조정의 여러 대신들도 이 대혼(大婚) 문제를 둘러싸고 모두 자기들 파에 유리한 규수를 

천거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대원군은 이 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부인 민씨에게 상의했다.  당시의 권력

으로 보나 며느리 간택의 시아버지 입장으로 보나 그에게 거의 결정권이 있었다.  문제는 

어떤 집의 규수로 정하는냐에 있었다.  문벌도 봐야겠고, 규수의 인물도 봐야겠고, 자기 세

력 유지에도 편의한, 세가지 조건이 구비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밤중 침실에서 부인 

민씨에게 이 문제를 여러번 상의했다.

  "부인, 왕비를 빨리 간택해야겠는데,  적당한 규수가 생각 안 나오?"

  "글쎄요. 좋은 규수를 골라야겠는데요..."

  부인은 이렇게 대답하기도 했고

  "궁중과 대신들의 동정은 어떤지요?  남들이 천거하기 전에 대감이 먼저 마음에 든 규수

를 정하셔야 합니다."

하고 재촉하기도 했다.

  "좋은 혼처가 생각 나지 않소.  그럴 듯한 규수는 역시 당신이 나보다 더 잘 알 것 같은

데 좋은 규수를 둔 집이 없소?"

  며느리 보는데는 역시 시어머니 의견이 큰 영향력을 갖는 법이다.  부인 민씨는 이 기회

에 자기 친정편인 민씨 문중에서 왕비될 규수를 추천하고 싶었다.  그러나 가까운 친정엔 

적당한 규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일갓집인 민치록(閔致錄)의 딸이 똑똑한 것을 어릴 

때 본 기억이 떠 올랐다.  그러나 자기 친정 쪽에서 추천하는 것이 좀 거북하기도 했다.  그

것은 대원군이 처갓집을 무시하는 형편인데다, 규수의 집안 문벌이 미미했기 때문이다.  그

러나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대감께 좋은 규수가 생각 안 나시면 우리 친정 민씨집은 어떨까요?"

  "당신같이 못나지 않고 규수만 잘 두었으면...  허지만 민망하지만 민가는..."

  대원군이 부인을 놀리는 말투로 얘기하므로 부인은 오히려 말하기가 쉬웠다.

  "민가 민가 하시지만... 내가 못났다 하시지만 상감될 아들을 낳은 건 민씨집 딸의 내가 

아닙니까?"

  "허허허 그렇군.  어디 우리 왕자(王子) 같은 왕손(王孫)을 낳아 줄 규수가 민씨 집안에 또 

있을까?"

  "염려 마세요."

  "허지만 민씨도 왕비된 뒤엔 모두 좋게 못했어.  태종(太宗)의 민비는 그 외척(外戚)이 세

도 부리다가 장인과 처남이 역적으로 몰렸거든.  이번에도 민비를 세웠다가 내가 역적으로 

몰리지 않을까?  허허허..."

  "대감 그런 흉한 소린 마세요."

  "아냐.  숙종(肅宗)의 민비도 아들을 낳지 못했어.  암만 해도 민비는 왕실로선 궁합이 맞

지 않는 모양이야."

  "대감도 그런 미신 같은 말씀을 하셔요?  태종의 민비는 그래도 좋은 아드님을 낳으시지 

않았어요."

  "뭐 웃음의 소리로 한거요.  허지만 우리가 이번에 민가를 추천하면 나를 못마땅해 하는 

놈들이 그전 전례를 들고 나와서 반대할 거요."

 "그런 반대래도 규수만 좋으면 우리가 미는 며느리감을 누가 막겠어요."

하고 부인은 자신 있게 말했다.

  "실은 민치록의 딸이 똑똑했어요.  지금쯤 어엿한 규수가 돼 있을 겁니다."

  "치록이가 누구지?"

  대원군에게도 얼른 생각나지 않는 무명인사의 이름이었다.

  "벼슬은 군수밖에 못하고 죽은지도 오래니까 대감은 잘 모르실 거야요."

  "아, 알겠소.  아비도 없는 딸이군."

  "어머니도 없는 외로운 소녀지만, 임금 처가의 세도를 제일 미워하신 대감이 그런 말씀하

셔요?"

  "음, 그래.  왕비의 친정이 무력한 건 도리어 좋소.  문제는 규수인데."

  "그 규수가 잘 생겼다니까요."

  "민비를 세우고 그 덕으로 민씨가 좀 세도를 써도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습니까?"

  "음, 그럼 그 규수를 당신이 다시 선을 본 뒤에 생각해 봅시다."

  부인 민씨는 자기가 시골에 있는 그 집에 가면 무슨 소문이 날까 두려워 하고, 몰래 가마

를 여주(驪州) 땅까지 보내서 규수를 운현궁에 데려다가 하루를 묵혀서 보내고 비단 옷감도 

선사했다.  그리고 다른 눈치는 보이지 않고 적당한데 혼처를 구해 주겠다고 외로운 소녀를 

위로해 보냈다.  대원군도 그때 잠깐 규수의 선을 보았다.  규수를 보낸 뒤에 대원군은 먼저 

부인에게 말했다.

  "음, 그만한 규수면 됐소.  역시 당신의 눈이 높군."

  "그것 보세요.  대감도 이젠 처갓집에 절해야 합니다."

  "허허허, 벌써부터 민비의 세도를 쓰는군."

  "세도가 아니라 기뻐서 그래요.  며느린 역시 우리 시부모가 골라야 해요."

하고 부인은 기뻐하면서 친정 자랑을 했다.

  대원군은 곧 궁중으로 들어가서 조대비에게 민치록의 딸이 왕비로서 가장 적당하다고 추

천했다.  조대비는 대원군의 말이면 무조건 듣는 처지였고, 더구나 며느리뻘의 간택이라 곧 

찬성했다.  이 말을 들은 부인 민씨는 기뻐했다.  그러나 곧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러나 그 딸만 남았던 집이니 딸을 궁중에 바친 뒤에 계모가 외롭겠어요.  이 기회에 

적당한 양자를 넣어서 대를 이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부인에겐 다른 생각이 있어서 한 말이었다. 

  "그렇군.  그 집을 이어 줄 양자론 누가 좋겠소?"

하고 대원군은 당연한 말이라고 찬성했다.  지금 까지는 보잘 것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양

자도 두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낸 말이니, 그 집의 양자론 내 친정 동생 승호(升鎬)가 좋겠어요."

  대원군은 자기 처남을 그 집의 양자로 넣어서 고종과도 처남 관계를 맺게 한다는 것이 매

우 마음 든든한 묘안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대원군 처남 민승호를 국척(國戚)의 당주(當主)

인 양자로 밀어 넣었다.

  국혼(國婚) 절차는 빨리 진행되었다.  궁중에서 삼간택(三揀擇=세번째 선 보는 마지막 절

차)을 마친 대왕비 조대비는 교서(敎書)로 [고첨정(故僉正) 민치록의 딸과 대혼(大婚)이 결정

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죽은 국구(國舅) 민치록에게는 즉일로 영의정을 추직(追職)하고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을 봉했다.

  그 뒤에는 십오세의 신랑인 고종은 비로소 맞선보는 친영례(親迎禮)를 올렸다.  그 예식을 

끝낸 뒤에는 곧 신랑 신부인 고종과 민비가 사사로운 가인(家人)의 지위로 운현궁에 행차하

여 친부모인 대원군 부부에게 절을 하고 새 며느리인 민비도 시부모에게 보였다.  그 다음 

날인 고종 삼년 삼월 이십이일에는 고종이 성인이 된 임금으로서 인정전(仁政殿)에서 백관

(百官)의 하례(賀禮)를 받고 전국의 죄수에게도 대사령(大赦令)을 내려서 나라의 경사를 축하

했다.

  꿈결에 왕궁의 안 주인이 되고 이천만 백성의 국모(國母)가 된 민씨는 왕보다는 한 살 위

인 십육세의 시골 소녀였다.  그러나 여주 시골에서 가난한 편모 슬하에 고생만 하던 민비

지만, 세상 물정도 모르고 궁녀와의 풋사랑에만 취해있는 남편 고종보다도 세상물정과 백성

의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천성이 영리하고 영특해서 여걸(女傑)다운 천질까지 있

었다.  비록 가난한 시골 집에서 편모 아래 자랐지만, 양반집 전통으로 글도 배워 여러 면에

서 고종보다 훨씬 나았다.

  그러나 이 신부 민비는 첫날밤부터 신랑 고종에게 냉랭한 소박을 맞았다.  궁중에선 중전

(中殿)마마로 섬겨 바치고 국민들도 국모로 우러러 보았으나, 민비는 깊은 궁중에서 고독한 

생과부의 한숨만 쉬면서 새로운 인생의 고민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고종이 신부 민비를 소박한 것은 물론 후궁의 요화(妖花) 이상궁의 매력 때문이었다.  그

러나 처음 들어온 어린 왕비로서 궁녀에 대한 강짜도 하지 못하고 꾹 참고 겉으로는 정숙 

온순한 왕실의 정부(貞婦) 노릇을 했다.  아직도 처녀인 민비는 남편의 애정에 굶주린 비애

를 책 읽는 일로만 위로하면서 남편의 마음이 변해 주기만 기다렸다.

  결국 민비는 그 후 삼년 동안이나 공부하는 동안에 후일에 여걸 정치가로서의 실력을 기

를 수가 있었다.  민비는 많은 독서를 하는 가운데서 자기가 나라 일과 백성을 지도할 뜻을 

품고 특히 맹자(孟子)와 춘추좌전(春秋左傳)을 애독하고 연구했다.  민씨는 거기서 사회학(社

會學)과 정치학(政治學)과 국가 흥망의 역사철학(歷史哲學)을 배웠던 것이다.


  [ 運命의 女人 閔妃 ]   < 空房回春 >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運命의 女人 閔妃 

    空房回春



   고종왕비로 민비가 등장한데 대해서는 천하가 깜짝 놀랐다.  부모도 없는 가난한 시골 

처녀가 일약 중전마마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민비의 부친 민치록은 벼슬이라고는 군수밖에 지내지 못했으며, 살기가 어려워서 서울 안

국동에서 살던 집까지 팔고 여주 땅에 사는 친척을 의지하고 낙향(樂鄕)해서 농사를 지어 

연명했다.

  그러므로 민비의 소녀 시절은 불행했다.  어려서 모친을 잃고 계모를 맞았으나 얼마 후 

부친도 세상을 떠났다.  민비는 이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느라고 고생을 했다.  그러나 그런 

고생 중에도 밤으로 글공부를 해서 재원(才媛)이란 칭찬을 받았고 여자로서 해야 할 모든 

집안 일을 솜씨 있게 처리하여 근처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저만 하면 재상집 맏며느리 노릇도 잘할 처녀다. 아들로 태어났으면 큰 과거를 할 텐데 

딸로 태어난 것이 아깝다."

하고 칭찬해 오던 시골 사람들은 그 처녀가 일약 국모(國母)가 되었을 때는 깜짝 놀랐다.

  "중전까지 된 것은 역시 하늘이 낸 복이지만 대원군의 솜씨가 대단하다.  본인이 아무리 

잘났기로 부모가 다 죽고 보잘 것 없는 집의 혈혈 고아를 중전으로 간택한 것은 역시 대원

군다운 영안이다.  대원군 부부는 상감의 생가족으로 중전의 처가족으로 완전히 궁중세력을 

독점했으니 앞으로의 세도가 더욱 극성맞을 것이다."

하면서 은근히 대원군의 처사를 빈정대기도 했다.  그러나 여자로서 최고의 영위(榮位)에 오

른 그 민비가 고종의 소박으로 독수공방(獨守空房) 생과부 노릇을 한다는 소문을 들은 백성

들은 수군거렸다.

  "이름만 중전마마면 뭘해.  여자는 역시 남편의 사랑을 받고 생남생녀해서 일가 화목이 

제일이지.  차라리 시골 농부의 아내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후회할 거야.  그러

기에 분수에 넘친 일시의 호강은 도리어 화가 되는 거야.  민중전을 그렇게 소박하는 건 이

상궁이 양귀비 같은 미인이라 그렇다지."

  결국 여성인 민비를 동정하는 소리였다.  그런가 하면 처음에 그렇게 좋아하던 대원군조

차 민비가 왕손을 낳아 주지 않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궁내 정보에 정통한 그는 고종이 궁녀 이씨를 사랑하고 민비에게 냉담한 사실은 알았지

만, 민비가 삼년동안이나 처녀로서 독수공방할 정도로 고종이 멀리하고 있는 침실의 비밀까

지는 상상도 못했다.  남자로서 열 계집 백계집을 마다 할 리가 없다는 것은 자기의 오입 

경험으로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자의 얼굴을 보고 싶은 대원군은 부인 민씨에게까지 

싫은 소리를 했다.

  "민중전은 암만해도 자복이 없나 보오.  무슨 병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젊은 몸으로 삼

년이 지나도록 태기가 없다니 역시 숙종의 민비처럼 아들을 못 두게 되는 게 아닐까 걱정이

요.  그래서 처음에 내가 민가는 어떨까 했더니 당신이 졸라대는 통에 그랬지만,  아마 큰 

실책이었나 봐."

  "잘 된 건 영감 힘이요, 못 되면 민가 탓이군요.  그렇지만 두고 보세요.  상감이 아직 젊

고, 삼년쯤 태기가 없대서 걱정할 건 없습니다.  결혼 후 십년 만에 초산하는 일도 흔하지 

않습니까?"

  "아니, 십년 동안이나 손자를 못 보고 기다리란 말이요?  정 그렇다면 빈궁(嬪宮)이라도 

맞아서 손자를 빨리 봐야지."

  "빈궁이 아니라도 이상궁이 있지 않습니까?  이상궁과는 중전보다 가까이 했어도 역시 태

기가 없지 않아요?  그렇다고 상감에게 자복이 없다는 것도 아니니 좀 더 기다려 보세요. 

대감보다 내가 더 걱정이라 불공도 드리고 명산 대천에 기도도 올리게 하고 있으니까 멀지 

않아서 경사로운 영험이 있을 겁니다."

  "그런 미신을 어떻게 믿겠소."

  대원군은 백성들의 미신은 금하고 있었으나 궁중에서 여전히 행해지는 뿌리 깊은 미신 행

사는 모른 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이상궁의 몸에 태기가 있다는 소문이 궁중에 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자 

이상궁의 지위가 중전마마인 민비보다도 더 높아질 듯한 대우가 공공연히 엿보였다.

  사태가 이쯤 되자 질투를 꾹 참고 자중해 오던 민비도 그냥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는 없

었다.  우선 이상궁을 죽여 없앨 질투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대원군이 공공연히 이

상궁에게 보약을 구해다 주는 것도 눈에 거슬렸다.  그러나 영리하고 치밀한 민비는 고종에

게만은 조금도 그 문제로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고 오로지 애정을 자기에게 돌리려는데만 

전력을 기울였다.  첫째는 이상궁에지지 않을 만한 여자의 매력으로 고종의 애정을 끌려고 

했다.

  "궁녀 이가 년이 상감의 눈에 고운 꽃으로 보인다면 나도 고운 꽃으로 보이게 향기와 웃

음으로 대해 보자."

  여자로서 남자에게 아름답게 보이고 사랑을 받으려는 것은 귀천의 차이가 없는 본능적인 

욕망이었다.  민비는 그전에 소홀히 여기던 화장과 의상에도 각별한 힘을 썼다.  그런 몸단

장을 했는데 고종이 본 척을 않자 실망과 분함이 들끓었다.  실망한 얼굴을 거울에 비쳐 보

고는 쓸쓸한 자기 얼굴을 스스로 위로하면서 웃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질투보다도 자존심이 궁녀에게 지고 싶진 않았다.  쓸쓸한 웃음을 남자의 마음을 

유혹할 수 있는 미소(媚笑)로 꾸며 보기도 했다.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요부(妖婦)의 웃음

이란 어떤 것일까 하고 거울 속의 얼굴로 기생 표정도 창작해 보면서, 소박맞은 젊은 생과

부의 심정을 위로했다.

  "내 미모로 부족하면 내 지식으로, 아니 상감의 권력에 대한 야심을 불태워서라도 내 존

재를 알리고, 상감의 마음을 끌어야겠다."

  애정에 굶주린 민비는 차츰 정권에 대한 욕망이 생기고 있었다.  대원군이 언제까지나 고

종을 무시하고 궁중의 사생활까지 뒤흔드는 것이 보기 싫었다.  대원군의 섭정을 빨리 고종

의 친정(親政)으로 변경시키고, 자기 자신이 권력을 잡아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고종을 자기의 애정과 정치적 식견으로 신임받아야 했다.  굶주린 애정도 충

족시키는 동시에 오랫동안 책에서 배운 정치적 포부도 펴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십이 되도

록 숫처녀로 정력을 써 보지 못한 민비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이미 폭발점에 달해 

있었다.  민비는 대원군도 이상궁도 죽음도 두렵지 않은 굳은 결심을 했다.

  만일 일개 궁녀인 이상궁이라는 애정의 적이 없이 처음부터 고종의 총애를 받고, 여성으

로서의 행복만 가졌다면, 그리고 이상궁이 고종의 아들을 낳지 않고, 설사 낳았더라도 대원

군이 조급하게 그 궁녀 소생의 아들을 세자(世子)로 봉하려고까지 안했더라면 민비와 대원

군과의 피투성이 권력 투쟁은 일어나지 않았을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원군은 

자기가 고른 며느리에게 세력을 빼앗기고 비참한 몰락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원군까지 몰아낼 야망을 품게 된 민비는 이상궁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질투의 권화(權

化)로 돌변한 민비는 노골적으로 이상궁 학대를 하기 시작했다.

  하루는 이상궁을 불러 세워놓고 죄인 다루듯이 날카로운 문초를 했다.

  "이년, 요망스러운 미태로 상감님 총명을 흐리게 해서 공부도 못하시게 네 방에 끌어 모

시고 추잡한 짓을 한다니, 그러고도 무엄한 줄 모르느냐?  도대체 너는 중전인 나를 어떻게 

알고 그런 행동을 하느냐?"

  "상감께서 가끔 제 처소에 행차하십니다마는 제가 무슨..."

  "이년 가끔이라니?  하루에 두번 세번 가셔도 가끔이냐?"

  "..."

  "상감께서 네 방에 왜 그렇게 자주 가시느냐?  네가 무슨 아양을 부려서 그런 것이지?"

  "오시는 상감을 저로선 거역할 수도 없사옵고.."

  "네 배에 애가 들었다는데 사실이냐?"

  민비의 말은 독이 올라서 떨렸다.

  "모르겠습니다."

  "모르다니, 네 뱃속의 일을 몰라.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배를 갈라서 보겠다."

  "아마 그런 듯도 합니다."

  "몇 달 됐느냐?"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궁중에 소문이 파다할제야 여러 달 된게 아니냐?"

  민비는 상사람의 욕과 다름없는 말을 했다.  이상궁도 바른대로 대지 않을 수 없었다.

  "댓달 된 것 같습니다."

  "아들을 낳으면 세자로 봉해 주신다는 어른들 말이 정말이냐?"

  "그런 말씀은 듣지도 못하였으며, 소녀로서는 더욱 생각조차 못할 말씀입니다."

  "상감께선 무슨 말씀하시더냐?"

  "상감껜 말씀도 못 올리고 있습니다."

  "이 간롱스러운년, 또 거짓말이냐?  왜 못 알려 드렸느냐?"

  "부끄러워서..."

  "부끄러운 년이 어린 임금을 유혹했어?  상감마마를 언제부터 농락했느냐?"

  농락이란 말에는 이상궁도 변명을 했다.

  "소녀가 어떻게 감히 상감마마를 농락하겠습니까?"

  "그럼 마다는 네 몸을 상감께서 억지로 농락 하셨단 말이냐?"

  이상궁은 그렇다고 할 수는 더욱 없었다. 

  "어쩌다가 그렇게..."

  "흥, 어쩌다가 모르는 새에 애까지 뱃느냐?  대관절 언제부터 상감을 가까이 모셨느냐?"

  "중전마마께서 들어오시기 전부터..."

  이상궁은 이 말에는 좀 기운이 났다.  민비보다 임금의 사랑에는 기정사실의 우선권이 있

다는 대답이었다.  민비는 더 묻고 싶지가 않았졌다.

  "네 지난 죄는 더 묻지 않겠다.  그러나 오늘부턴 상감을 가깝게 해선 안 된다."

  "..."

  "내 명이 못마땅하냐?  상감을 가깝게 하지 않겠다고 맹세해라."

  "네, 그리 하오리다."

  "꼴 보기 싫다.  그만 물러 가거라."

  이상궁은 겁도 나고 분하기도 해서 후궁의 자기 방에 가서 푹 엎딘 채 혼자 울고 있었다.  

그때 고종이 소리도 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엎드린 이상궁의 등을 끌어 안았다.

  "내가 누구냐?"

  고중은 농을 걸었다.

  "모르겠습니다."

  쌀쌀히 쏘아 붙이는 듯한 이상궁의 어깨가 떨리고 흐느끼는 소리가 고종을 놀라게 했다.

  "너 우는구나.  왜 우느냐?"

  그러나 이상궁은 그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상감마마, 낮에 이렇게 제 방에 오시면 안 됩니다."

  "네가 보고 싶어서, 어디 글을 읽고 있을 수 있어야지.  대관절 왜 우느냐?"

하고 고종은 억세고 능란한 청년의 팔솜씨로 여자의 몸을 끌어 일으켜서 얼굴을 어루만지면

서 눈물을 씻어 주었다.  이상궁은 금시에 마음이 풀렸다.

  "상감마마 이번이 마지막으로 소녀와 멀리해 주십시오."

하면서도 방긋 웃어 보였다.  그 원망스러워하는 태가 더욱 귀여워진 고종은 이상궁의 입을 

자기 입으로 막고 비벼대면서

  "그런 말 못 나오도록 이렇게 막아 버리겠다.  내가 오는 것이 그렇게도 싫으냐?"

  "싫을 리야 있겠습니까마는, 제 몸이 괴로워서 그럽니다."

  "왜?"

  "제 몸이 점점 무거워져서요..."

  "흐흐흐, 알겠다.  어디 내 옥동자가 얼마나 커졌나, 아버지 손으로 배 좀 만져 보자."

  "어마, 부끄러워.  그러시지 마세요."

하면서도 이상궁은 치마 속으로 들어오는 고종의 손을 막지는 않고 행복스러운 듯이 눈을 

감았다.  그러면서도 민비의 강짜로 혼났다는 말은 알리지 않았다.  고종은 이상궁의 배를 

어루만지는 쾌감에 취해서

  "이런 경사에 울긴 왜 우는 거냐.  네가 옥동자를 낳으면 맏아들이니까 세자가 된다.  그

러면 너도 지금보다 떳떳하게 된다.  그런데 왜 울었느냐?"

하고 고종은 제법 어른처럼 이상궁을 위로했다.

  "너무 기뻐서 울었습니다.  그런 말씀하시면 중전마마께서 노하십니다."

하고 그제야 민비의 말을 했다.

  "아기가 커가기 때문에 몸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구나.  중전이 질투하고 너를 괴롭히

지나 않드냐?"

  "중전마마도 여자이신데, 왜 저를 미워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상감께서 저를 멀리

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중전이 뭐라고 해도 걱정 마라."

  "상감마마 아기만 무사히 낳아 드리면 저는 죽어도 원한은 없습니다."

  이상궁은 민비와 충돌을 하는 것이 겁났다.  그래서 민비에게 혼난 사실을 고하지 않았다.

  민비의 저주 가운데도 이상궁의 뱃속의 왕자는 자라고 세월은 흘러서 고종 오년 사월에 

첫 아들을 낳았다.  민비의 초조한 고민은 극도에 달했다.  대원군은 왕손(王孫)을 본 기쁨

을 참지 못하고 이상궁 소생에게 완화군(完和君)이라는 칭호를 봉하고 왕손 모자를 지극히 

사랑했다.

  "내 몸에서 아들을 못 낳으면 저 궁녀 소생이 세자가 되고 임금이 된다."

  이렇게 될 장래를 생각한 민비는 이상궁 모자에 대한 증오심이 불타 올랐다.  당장에 그 

모자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대원군이 원수 같았다.  그러나 민비는 그런 표정을 일

체 나타내지 않고 고종과의 화합에만 전력을 다하면서 그럴 기회만 기다렸다.

  하루는 고종이 내전(內殿)에 들렸다가 민비 방에는 전과 같이 들리려고도 않고 그 방 앞

의 마루를 그냥 지나가고 있었다.  단장하고 있던 민비가 기민하게 방문을 열고 나가서 고

종의 앞을 막고 요염한 웃음을 띠우며 무슨 중대한 일이라도 있는 듯이

  "상감마마, 지금 왕실과 국가에 큰 불행한 일이 터질 것 같습니다.  잠간 제 방으로 들어 

오십시오."

하며 손을 잡을 듯이 청했다.  이제는 자기의 지위가 어떻다는 것도 알고 정치가 어떻게 돌

아가고 있다는 것도 막연히나마 느끼게 된 고종은 깜짝 놀라서 민비의 방으로 들어갔다.

  "무슨 큰일인데 나를 놀라게 하오.  무슨 불길한 징조라도 있소?"

  "지금 나라가 망하고, 상감께서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를 위태한 시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 상감께서 큰 용단을 내리지 않으시면..."

  "어서 말을 하오.  무슨 역적음모라도 있는 것이요?"

  고종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실은..."

  민비가 말을 하려고 할 때에, 망을 세웠던 시녀가 당황히 뛰어와서 알렸다.

  "중전마마, 지금 대원군께서 내전으로 오십니다."

  민비는 당황해 했으나 곧 침착하게

  "상감, 오늘 자정쯤 다시 오십시오."

하면 뒷문으로 고종의 등을 밀어서 내보냈다.  고종은 중대문제가 대원군과 무슨 관계가 있

을까 하는 예감이 번개같이 머리를 스쳤다.

  (설마 그럴 리야...)

  고종은 평소에 사이가 좋지 못한 민비와 대원군이라 그러는 줄만 알았다.  즉 대원군이 

싫어하는 민비방에 고종이 낮에 와서 있는 것을 보면 민비의 입장이 거북해서 그러는 줄만 

알았다.  자기로서도 민비 방에 와 있는 것을 대원군에게 알리고는 싶지 않았다.

  그날 밤 자정 때쯤 고종은 보통 옷 차림으로 민비의 방을 찾아갔다.  민비는 이런 깊은 

밤에 자기 방에서 고종을 맞게 된 것을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고

종에게 국가의 중대한 기밀을 알리겠다고 약속한 민비는 화려한 밤화장을 하고 금침까지 깔

아 놓고 있었다.  준비시켰던 술상도 시녀들이 들여 오고 곧 물러나갔다.

  고종은 지금까지 소박하기 만하던 민비의 다정스러운 여자 모습을 새로 발견하고 남편으

로서 미안한 감조차 들었다.  민비는 술을 권하면서 웃기만 했다.  고종의 눈에는 오늘밤따

라 민비의 얼굴이 고와 보였다.

  "우선 술을 드십시오."

  민비는 술잔을 권했다.  고종은 잔을 받아 마시면서도 중대한 말을 묻고 싶었으나 민비의 

정성에 동정심이 앞섰다.

  (억시 여자였구나. 중대한 얘기를 한다더니, 금침을 펴고 기다린 것은 남편의 정이 그리워

서 나를 끌어오려는 수단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래도 좋다고 안심되었다.  아까 낮에 놀란 듯이 무슨 역적음

모라도 있어서 그것을 알리려는 것이 아닌 것이면 얼마나 다행하랴 하는 안심이었다.

  민비는 고종에게 술을 권한 뒤에 갑자기 수심을 짓는 듯한 엄숙한 태도로

  "상감마마"

하고 고종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보았다.

  "참 낮에 하려던 중대문제란 뭐요?"

  고종은 물었다.

  "상감께서는 인제 이십세가 다 되신 어른 임금이십니다.  그런데도 대원군은 섭정(攝政)으

로 국정을 농단해서 국내외로 원성이 높습니다.  특히 상감을 사사로운 어린 아들처럼 무시

하고, 상감의 허명만 이용하고 왕실까지 업신여기니 신하로서 삼가는 태도가 일호도 없습니

다.  더구나 무모한 쇄국 외교정책으로 서양의 강대국들은 물론이요, 옛날부터 친선하던 청

국까지 대원군의 외교정책에 놀라고 있습니다.  이런 국내외의 정세가 위급한 때에 빨리 대

원군의 섭정을 중지시키고 상감께서 친정(親政)을 하셔서 왕권을 회복하시고 국가의 유지와 

번영을 도모하셔야 합니다."

  "음"

  고종은 지금까지 소박만 맞던 민비가 자기에게 임금 대접을 하면서 정치문제를 상의하는

데 감격했다.  이것이 그에게는 처음으로 듣는 정치문제에 관한 말이었다.  그는 이제야 자

기가 임금의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듯했다.  따라서 권력에 대한 매력을 느꼈다.

  "나라를 대원군이 망쳐 놓아도 그 책임은 상감께 있고 왕실 열성(列聖)에 대한 죄도 상감

이 져야 하게 됩니다.  빨리 친정을 하셔야 합니다."

  민비는 현실의 정치문제를 비판하고, 이론적으로는 춘추좌전(春秋左傳)과 맹자(孟子)에서 

배운 왕도(王道)와 정치철학을 도도히 강의했다.

  "음, 중전의 말이 옳소.  의당 그래야 할 것을 내 불찰로 국정을 섭정에게 일임하고 전연 

관계하지 않았지만 금후론 빨리 친정을 회복해야겠소.  그러나 나는 아직 대신들과도 생소

하고 지식과 경험이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그럼 제가 내조에 힘쓰겠습니다.  대신들도 대원군의 세도에 마지못해서 면종복배(面從腹

背)하는 사람이 태반이니, 그들과 비밀리에 상통해서, 우선 친정복귀(親政復歸)의 대의명분으

로 힘을 규합하면 됩니다."

  "그렇게 대신들의 찬성을 얻을 수 있소?"

  "예, 제가 비록 여자지만 상감과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각오가 있습니다."

  고종은 민비의 말이 고마웠고, 여장부다운 권위까지 느꼈다.  민비는 고종이 자기 말에 찬

성한 것이 기뻤다.  그와 동시에 정치문제에는 백지같이 단순하면서도, 역시 권력에 대한 욕

망에는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아내인 자기에게 애원하다시피 경의(敬

意)까지 표하는 순진성에는 민망스럽기도 했다.

  이 순간 민비는 일개 여성으로 돌변하더니 고종을 남편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내의 지

위로 내려가서 거의 노골적인 성적 매력을 고종에게 뿜었다.

  "상감, 오늘밤은 밤도 늦었으니 여기서 주무세요."

  민비는 부끄러운 듯이 추파를 던졌다.

  "음, 글세..."

  고종은 지금까지 민비를 소박만 해온 것을 후회했다.

  "이상궁이 여자라면 저도 여자입니다.  하찮은 궁녀에게 질투를 하는 건 체통이 서지 않

아서 참고만 있었지만, 제가 명색만의 중궁으로 얼마나 외로운 신세 한탄을 하면서 울었는

지 모릅니다."

  "미안하오."

  고종은 비로소 남편으로서 아내에게 사과했다.  첫날밤에 옷도 벗겨 보지 않은 채 삼,사년 

동안이나 소박해 온 민비에 대해서 그는 처음으로 여자로서의 매력을 느꼈다.  이미 이상궁

에게서 남녀 관계에 능숙해진 고종은 노처녀인 민비의 옷을 벗기고 첫날밤의 화합을 했다.  

민비는 비로소 여자로서의 행복을 느끼고 그날 밤을 행복하게 지냈다.

  그 뒤로 민비는 육체적 애정으로도 고종을 완전히 매혹시키고 정치적으로는 지도하는 위

치를 획득하게 되었다.  그래서 민비의 방에는 상감의 출입이 잦고 이상궁의 방에는 발길이 

점점 적게 되었다.  이렇게 고종의 애정과 신임을 독점하게 되자 민비는 교묘하고 치밀한 

방법으로 정치적인 비밀 운동의 그물을 정계에 펴기 시작했다.

  목표는 대원군 축출을 위한 고종의 친정 회복(親政回復)이었고, 대원군 실정으로 위험하게 

된 배외정책(排外政策)을 꼬집고 나섰던 것이다.  민비의 비상한 활동과 국내외의 사정이 대

원군에게 불리한 것을 간파한 각 파의 정객들은 은연중에 민씨의 대원군타도 운동에 호응해 

왔다.


  [ 運命의 女人 閔妃 ]   < 深宮毒蔘 >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運命의 女人 閔妃 

    深宮毒蔘



   대원군의 방 안에서 호랑이 잡는 식의 무모한 배외정책을 직접적인 공격 목표로 삼고, 

그의 독제 권력을 타도하려는 민비의 교묘한 비밀 정치 운동은 착착 효과를 거두어 갔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자기 권력에 도취한 대원군도, 그의 치밀한 정보망도 일개 심궁(深宮)

의 여자인 민비가 그런 강적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이 무렵에 민비는 애정 문제에 있어서도 완전히 이상궁에게 승리하고 고종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민비는 대원군이 자기의 비밀정치 운동을 미리 알까 두려워 해서 일부러 

이상궁에 대한 학대를 했다.  그렇게 하므로 밖으로는 개인적인 질투에 여념이 없는 여자라

는 연막(烟幕)을 펴고, 안으로는 역시 꼴 보기 싫은 이상궁의 존재를 완전히 없애버리려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계략이었다.

  "이상궁의 소생의 왕손(王孫)을 세자로 삼을 기미를 알자 자복 없는 민비가 미안한 줄도 

모르고 질투가 심해진 모양이오."

  대원군은 부인 민씨에게 며느리 흉을 보면서 경멸했다.  민비가 못마땅해진 대원군은 중

전마마라는 존칭도 부르지 않고 민비라고 부르기를 서슴지 않았다.  이런 남편의 말에 대해

선 부인 민씨는 아이도 못 낳는 여자를 며느리로 추천했다는 남편의 조롱이 두려워서 친정 

출신의 민비를 두둔하기도 거북한 입장이었다.
  
  "민비가 아무리 질투를 해도 왕실의 대를 잇는데는 맏 왕손의 완화군을 세자로 봉해야 하

오.  대왕대비도 찬성이시고..."

  대원군은 그 전에도 해오던 말을 부인에게 또 다짐했다.

  그러던 차에 이상궁 소생의 완화군은 건강하게 자라다가 삼대 과부 왕후들의 귀염 가운데 

성대한 돌 잔치로 축복 받은 뒤에 원인도 모르게 갑자기 죽어 버렸다.  그리고 이어 이상궁

도 자하문 근처의 작은 여염집에 감금되고 말았다.  이상궁이 궁중에서 축출된 것은 고종의 

명령에 의한 것이지만 뒤에는 민비의 음모가 숨어 있었다.  이상궁이 밤중에 담을 넘어서 

외간 남자와 밀통 했다는 음해가 고종을 노엽게 했기 때문이다.

  "그년이 상감께서 자기를 멀리하자, 무엄하게도 상감께 분풀이로 외간 놈과 밀통을 했습

니다."

하고 민비는 고종을 충동했다.  고종도 반신반의했으나, 밤에 담을 넘어 다니는 것을 목격햇

다는 증인이 나서기도 했고 이미 총애하는 민비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도 궁중에서 말썽이 

되는 이상궁을 아주 내보내는 것이 편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이상궁도 민비의 밀령을 받

은 자객(刺客)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이상궁을 죽인 것은 민비가 시킨 보복이다."

  "완화군을 죽인 것도 민비가 시킨 것이다."

  이런 소문이 돌았으나 이때는 이미 민비가 고종의 총애를 받고 있었으며 정계에도 은연한 

세력을 펴고 있었으므로 아무도 그 진상을 폭로할 사람은 없었다.

  대원군도 일개 궁녀의 편을 들고서 며느리 민비를 공격하면 위신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에 

모른 척하는 수밖에 없었다.

  "소인(小人)과 여자는 역시 할 수 없다."

하고 민비에 대한 의심에는 쓴 입맛만 다셨다.  그뿐 아니라 포대기 속에서 원인 모르게 죽

은 왕손 완화군을 세자로 세우려던 자기의 계획은 이미 청국의 압력으로까지 반대를 받아서 

그로서는 더 언급하기도 거북했던 것이다.

  완화군이 죽기 전에 민비는 완화군의 세자 책립(冊立) 운동이 일어나자, 청국의 힘으로 대

원군의 계획을 꺾으려고 했다.  마침 이유원(李裕元)이 동지사(冬至使)로 청국에 가게 되자 

대원군과 사이가 좋지 않은 그에게 비밀 사명을 주어 보냈던 것이다.

  민비는 청국의 총리대신 이홍장(李鴻章)에게 후한 예물을 보내고 대원군의 무모한 전횡(專

橫)으로 조선 왕실이 위태롭다고 밀고했다.  천한 궁녀의 소생인 서자(庶子) 완화군으로 세

자를 삼는 것은 왕통(王統)과 천륜에 어긋나는 처사이므로 중전 민비가 낳을 왕자로 정통을 

이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대원군의 고집은 청국에서도 골치를 앓고 있소.  세계 정세도 모르고 외국과 충돌만 하

는 그로서 자기 어린 아들을 임금으로 세우더니, 세자 문제도 좌지우지해서, 현숙한 왕비를 

그토록 괴롭게 합니다."

  청국에서는 민비의 청대로 조선 조정에 대한 공식 외교문서를 보내서 완화군 세자 책립을 

바대하는 의향을 전했던 것이다.

  이홍장의 권고 문서를 가지고 돌아온 이유원은 조정에 보고한 뒤에 대원군에게 자기가 민

비의 청으로 그런 문서를 받아 온 것을 알까 두려워서

  "청국의 세계 각국에 대한 외교 정보가 신속하고 빠른데는 놀랐습니다.  이홍장은 벌써 

우리 조정에서 백성에게도 비밀에 붙이고 있는 정책을 알고 있으며, 우리도 모를 지방 소식

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완화군 문제만 하더라도 아직 정식으로 논의된 바도 없는데, 그런 

권고 서한을 전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나도 모르는 일이라고 대답했더니 당신도 완화군 

세자책립에 찬성이냐고 하는 핀잔을 받았습니다."

  "이홍장은 그럴 자요.  그전에 청국 명령이라면 굽실굽실하던 우리나라가 요즘 좀 줏대가 

잡히자 나 하는 일엔 모두 못마땅해 하니까요."

  대원군은 민비의 수단에 농락된 줄도 모르고 도리어 자기의 위력을 자랑했다.

  이 문제 뿐 아니라 민비는 대원군이 모르는 동안에 이미 대원군 반대 세력을 정계 각파에

서 규합하는데 착착 성공하고 있었다.  민비는 대원군을 이용해서, 겉으로는 대원군 자신이 

자기의 심복 부하를 조정 요직에 등용시키는 형식으로 민비와 미리 결탁한 인물들을 교묘하

게 등용했다.

  민비 친정의 오라버니 승호(升鎬)를 비롯한 규호(奎鎬), 겸호(謙鎬), 태호(台鎬)도 대원군이 

인심을 쓰는 형식으로 등용되었지만 민비가 미리 사전연락을 했으며, 또 대원군보다는 민비

에게 핏줄이 가까웠다.  그러나 대원군은 형식상 자기가 벼슬을 시켜 주었으니까 민비보다

는 자기편을 들리라고 착각을 하고 있었다.

  다음에는 조대비의 조카 조영하(趙寧夏), 조성하(趙成夏)도 대원군에 대한 불평이 있으므로 

민비는 오라버니 민승호와 결탁하도록 했다.  그리고 전직에서 감등되어서 겨우 붙어있는 

안동 김씨의 병기(炳冀), 병국(炳國)도 끌어 넣었고 실권도 없이 대원군에게 이용만 되고 있

는 영의정 조두순(趙斗淳)까지 포섭하는데 성공했다.

  민비는 대담하게 대원군 친형과 맏아들까지도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이용해서 대원군의 

정치적 기밀을 훔쳐냈고 후일에 후대할 미끼로 잡아두었던 것이다.  대원군의 맏아들 이재

면(李載冕)은 사람이 미련해서 자기 부친에게도 자식 대접을 받지 못했는데, 이런 어리석은 

점을 이용했고, 대원군의 형 흥인군(興寅君) 이최응(李最應)도 아우에게 멸시당하는 불평을 

이용해서 민씨는 접근했던 것이다.  이밖에도 서원 철폐와 양반 계급 멸시에 불평인 유림들

과 결탁을 하고 유림의 여론을 좌우할 거물 최익현(崔益鉉)과 대원군 타도 운동의 밀약을 

하는데 성공했다.  이 모든 계획과 방법은 민비가 그들과 한번도 만나지 않고 깊은 궁중 규

방(閨房)에서 지정되었다.

  그러나 대원군도 강짜 심한 며느리가 완화군 문제로 이상궁 모자를 박해하고 고종의 총애

에만 취해서 단꿈을 즐기는 요부(妖婦)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민비와의 비밀 

연락은 모두 대원군의 처남, 즉 대원군 부인의 친 동생인 민승호가 맡아서 민비의 수족같이 

활동했다.

  민승호는 호적상으로는 민비의 오라버니였지만 민비와는 먼촌 일가에서 양자로 들어왔으

므로 친누이인 대원군의 부인보다 혈통 관계로는 남이었다.  그러나 민비의 수단과 권력의 

이해관계로 말미암아 대원군 부부를 적으로 삼고 민비의 수족이 되어서 암약했던 것이다.

  민비의 정치 세력이 암암리에 확장되어 갈 때 민비는 최대의 행복의 날을 맞았다.  고종 

팔년 동짓달에 민비 몸에서 첫아들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민중전께서 첫아드님을 낳으셨다.  나라의 큰 경사다."

  민씨는 이제는 당연한 세자감인 첫아들을 낳았으므로 기뻐했고 물론 고종도 기뻐했다.  

민씨의 세력은 요지부동의 큰 기둥을 세운 셈이다.  그러나 민비의 행복감은 후산(後産)의 

고통이 가시기도 전에 사흘 만에 악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태중에서부터 병을 지니고 출생한 아이는 첫 울음을 울었지만 대변 불통이라는 괴상한 병

으로 거의 죽어가는 애처로운 생명이었다. 

  대원군은 어린 왕손(王孫)의 위독을 구하려고인지 혹은 독살하려고인지 산삼 한 뿌리를 

구해다가 독삼탕을 끓여 먹이게 했다.  이때는 민비 자신도 그 구하기 힘든 산삼으로 죽어

가는 평생소원이던 첫아들이 소생할 것을 빌면서 시아버지의 문병을 고마워했다.

  그러나 그 산삼의 효력도 없었는지 혹은 그 산삼이 독이 되었는지 아이는 죽고 말았다.  

그러자 궁중에서부터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완화군을 세자로 세우려다가 실패한 대원군은, 완화군을 민중전이 죽였다는 분풀이로 이

번 민중전이 낳으신 아드님을 독살했다."

  "산삼이 무슨 독약일까?"

하는 반문도 생겼다.

  "독삼탕은 어른에게도 조심해 쓸 정도로 위험한데 갓 낳은 아기에겐 만부당한 독약이 된

다.  대원군은 그것을 알고서 구하는 척하고 죽인 것이다."

 민비는 그런 말을 듣고 대원군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비는 총명하고 상당한 학문

의 실력도 있었지만 여자의 약점인 의심증이 많았고 또 무식한 여자보다도 미신과 신령기도

를 좋아했다.

  "갓난 아기에게 산삼이 독약이냐?"

하고 궁중 전의(典醫)들에게 물어보았으나 그들도 대원군이 가져온 산삼을 달여서 쓰는데 

찬성한 책임상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은 못했다.  그러나 영리한 민비는 시중의 민간 의사에

게까지 물어오라고 명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갓난 아기에겐 해롭기도 하지만 당시의 증세를 모르니까 단정하기는 어

렵다 합니다."

  어떤 의사도 이 이상의 대답은 하지 못했다.  아무리 민비를 동정하는 의사도 현재 세도

를 부리고 있는 대원군이 자기 손자를 민비 소생이기 때문에 산삼이 독인 줄 알고 먹여서 

죽였다고 할 용기가 없었다.  점을 쳐 보아도 신통한 분풀이를 할 점괘는 나오지 않았다.

  "허허허, 내가 미치지 않은 이상 손자를 독살 하다니.  소인과 여자는 할 수 없다."

  그 이상은 언급하기도 싫어한 대원군은 더욱 민비가 미워졌다.  그러나 호김심이 많은 세

상 사람들은 완화군을 민비가 죽였다는 소문과 그 보복으로 민비의 아들을 대원군이 죽였다

는 소문을 연결시켜서 쉬쉬하는 화제로 입에 올렸다.

  민비는 대원군을 더욱 미워했으나 증거도 없었기 때문에 아들 잃은 슬픔을 새로운 아들을 

비는 미신으로 위로했다.  궁중에서는 사흘이 멀다고 기도를 올렸다.  무당과 판수와 중과 

도인(道人)이 활개를 치고 궁중에 출입했고 명산대천(名山大川)에까지 세자 탄생을 비는 기

도를 올렸다.

  이 때문에 국고의 재정이 기울 정도였다.  대원군은 이제 민비의 세력을 꺾을 수 없을 정

도로 대신들이 그의 말을 듣지 않음을 알았다.  대원군은 때늦게 자기 세력의 만회에 초조

해졌으며 민비는 하루라도 빨리 대원군의 세력을 꺾어 버리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 運命의 女人 閔妃 ]   < 恨을 안은 발길 >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運命의 女人 閔妃 

    恨을 안은 발길



   민비에게는 마침내 대원군을 정계에서 몰아내는 공격을 노골적으로 표면화할 기회가 왔

다.  고종 십년 여름에 명치유신(明治維新)으로 국력을 강화한 일본에서 소위 정한론(征韓論)

이 머리를 들었다.  대원군의 배일정책(排日政策)은 일체 외국에 대한 완강한 쇄국정책(鎖國

政策)의 하나였지만 대원군이 일본의 수교사절(修交使節)을 적대적(敵對的) 태도로 쫓아 보낸

데 대하여 일본은 강경한 정한론을 주장했다.

  만일 일본과 정면 전쟁이 되면 임진왜란(壬辰倭亂) 이상의 타격을 받으리라고 대원군 이

외의 정객들은 두려워 했다.  민비는 이 기회에 대원군을 몰락 시키려고 우선 대원군의 위

험한 쇄국정책에 대한 비난 여론을 조야(朝野)에 조성시켰다.

  "대원군의 대외정책은 세계 대세에 역행하는 위험천만한 망국 정책이다.  자기의 세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공연한 외국에게 국민의 불만을 전환시키려는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외국과도 화친을 논하는 자는 매국노(賣國奴)라는 그의 고집은 아직도 버리

려고 하지 않았다.  그해 시월에 민비는 고종의 명의로 대원군이 꺼려하는 유림의 거물인 

최익현(崔益鉉)을 부승지(副承旨)로 등용하는 동시에 그로 하여금 대원군의 실정을 과격히 

비판하고 고종의 실질적인 친정(親政)으로 국난을 구해야 한다는 수만어(數萬語)에 달하는 

상소문을 올리게 했다.

  "상감과 중전께서 대원군의 반발을 막아 줄 테니 철저하게 대원군을 탄핵해 주시오."

  민비의 뜻을 전하는 민승호는 최익현을 격려했다.  최익현은 대원군에 대해서는 사원(私

怨)과 공분(公憤)을 품고 있었다.  민비는 그의 신망과 이론과 문장력을 이용해서 대원군 배

척의 불길을 조야에 던지게 했던 것이다.

  그 과격한 상소문에는 대원군의 실정에도 불구하고 대신인 육경(六卿) 간관(諫官)들도 그

의 위력이 두려워서 꿈쩍 못하고 비굴한 속론(俗論)만 일삼는다고 고관들의 무능까지 겸해

서 공격했다.  이런 식으로 고관 전체를 공격했으므로 정계의 큰 물의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것은 민비의 생각을 대변한 것이므로 고종은

  "나라를 생각하는 충정(衷情)에서 나를 경계 하도록 하는 정론이매 극히 가상(嘉尙)하다."

하고 최익현을 칭찬했다.

  대원군은 공격의 중심 대상이 자기였으므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러나 체면상 

침묵을 지키고 뒤에서 간접적으로 욕을 먹은 대신들을 충동시켜

  "우리들을 모욕하는 최익현의 상소를 전적으로 인정하고 칭찬하시는 상감의 비답(批答)이 

황송하므로 우리는 총사직하겠습니다."

하고 고종을 위협케 했다.  고종은 뜻하지 않은 고관 전체의 반발에 당황했다.  그러나 이런 

파생적 잡음에 대해서 민비는 눈썹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상감 걱정 마십시오.  대신들의 감정을 자극시킨 좀 지나친 구절도 있었지만, 대신들의 

대부분도 대원군을 탄핵한데는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대원군에 대해서 감히 

한 마디의 충고도 못한 그들은 당연히 그만한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두고 보십시오.  말로

만 발뺌을 하려고 그러지만 사직할 뼈다귀 있는 대신은 한명도 없습니다.  그것도 대원군의 

충동에 자기들의 체면 유지로 흥분한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좌의정 강로(姜老)와 우의정 한계원(韓啓源)이 최익현의 상소취지를 반박하는 상소

를 올렸다.  이에 대해서도 고종은

  "최익현의 상소는 정당하다.  그것은 대신들의 책임일 뿐 아니라 나 역시 반성하고 실천

해야 할 충언(忠言)이다."

하고 최익현의 상소를 적극 비호했다.

  대원군도 고종의 비답(批答)이 뜻밖에 강경한데 놀랐다.  다음에는 영돈녕(領敦寧) 홍순목

(洪淳穆)도 최익현의 상소를 물리치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고종의 태도는 조금도 변하

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과 승정원(承政院)이 총동원해서 최익현을 규탄

하는 상소를 올리고 무능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가겠다고 고종을 위협했다.  그들은 대

원군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체면 손상에 흥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종의 태도

는 더욱 강경해졌다.

  "경들이 무능함을 스스로 책임지고 물러나면 굳이 말리지 않노라."

하는 비답으로 그들을 전부 파면시켰다.  대원군은 고종에게 그런 용기가 있으리라고는 생

각할 수도 없었다.  물론 민비가 뒤에서 시키는 자기 배척운동이라고 이를 갈았다.  고종은 

그 뒤에도 최익현의 상소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자들은 귀양을 보내고 유생(儒生)에게는 

과거 볼 자격을 박탈해서 더욱 강경한 처단을 내렸다.

  "대원군이 물러나면 될 것을 공연히 다른 사람들만 희생을 당한다.  그래도 대원군이 직

접 자기 이름을 지적해서 규탄하지 않았다고 모른 척하는 것은 철면피다.  인제 직접 그를 

공격해야 한다."

하고 민비는 최익현으로 하여금 자기 상소에 대한 반박을 재반박하는 상소문을 또 올리게 

했다.  그 가운데서 최익현은 명확히 대원군이 정치에서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강경한 주장

을 했다.

  "오직 상감의 사친(私親) 관계에 있는 자는 그 지위를 존중히 해서 생활비로 국록을 후히 

대접하되 국정에 관여시켜서는 안 됩니다."

  이레 동안의 상소파동(上疎波動)은 이렇게 발전해서 대원군에게 불리한 대세(大勢)는 결정

적 단계에 이르렀다.

  "일개 유림 출신의 부승지가 어찌 감히 그런 용기가 있으랴.  물론 민비의 대변이긴 하지

만 아직도 칼자루를 잡고 있는 대원군에게 암살될 위험을 무릅쓰고 나온 것은 역시 나라에 

대한 충성이다."

 정계의 소식통들은 대원군을 규탄하는 최익현을 충성 된 영웅으로 칭찬했다.

  "최선생은 역시 대학자요, 충신이다."

  유림들은 박수갈채를 했다.

  그러나 고종은 대원군의 특정인물까지 지목한 최익현의 과격한 상소로 세상에 부자지간에 

권력 암투가 있다는 이면이 폭로되어서 체면상 거북하게 되었다.

  "최익현은 용감한 충신입니다.  그러나 사태가 이렇게 돼서 좀 거북하게는 되었습니다.  

그러나 올 것이 온데 지나지 않아서 통쾌합니다.  다만 대원군이 그를 암살할지 모르니 이 

기회에 상소문이 과격하다는 핑계로 필시 귀양 형식을 취해서 그의 생명을 보호해 주는 것

이 좋을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신들의 그에 대한 감정도 무마하고 그의 생명도 보호해 주었다.  그가 

제주도로 귀양 갈 적에 대원군의 독재에 지친 백성들은

  "최충신이 억울한 귀양을 가신다."

하고 공공연히 환송을 했다.  민승호는 미리 최익현에게 가서

  "선생의 신변이 위험하고, 대신들의 오해를 풀고, 상감과 중전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시 제주도에 가서 편히 계시다가 대원군이 아주 물러난 뒤에 모셔 오겠습니다."

하고 민비의 뜻을 전했던 것이다.

  "충신 최익현을 귀양 보낸 연극은 대원군도 스스로 귀양 가라는 것인데 대원군도 바보야.  

자기 세월이 다 갔는데도 왜 운이 다간 세도에 연연사고 있는 거야.  저러다가는 민비에게 

시아버지 체면도 유지 못하고 정말로 창피를 당하려는 모양이다."

  그런 백성의 여론이 대원군의 귀에도 들려 오게끔 대세는 기울고 말았다.  울분을 호소할 

곳도 없게 된 대원군은 아직도 자기에게 동정하는 대신 박규수(朴畦壽)와 몰래 만나서 정확

한 정세 판단을 물었고, 자기가 섭정에서 물러나야만 되느냐고 물었다.

  "대감의 심정에는 미안한 말이나 진퇴에는 시기가 있는 법입니다.  대감은 십년 동안 집

정으로 국정에 많은 개혁을 하신 공이 큽니다.  그러나 정계는 물론 일반 민심도 십년이면 

변합니다.  이 때 정국을 안정시키는 대국적 견지에서, 담백한 태도로 대정(大政)을 봉환(奉

還)하시고, 풍류와 산수로 그동안의 심신 피로를 휴양하시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박규수는 대원군의 실정에는 일언반귀도 언급하지 않고 그가 자진해서 섭정에서 물러나라

고 권했다.  대원군은 박규수까지 그런 말을 했으므로 섭정 사임을 결정했다.  그러나 속으

로는

  (앙큼한 년, 지금은 내가 너한테 쫓겨 나지만 어디 두고 보자.)

하고 며느리에 대한 복수를 맹세했다.  그리고 그는 곧 섭정을 사임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삼계동 별장에 가서 홧술과 낮잠으로 세월을 보냈다.  대원군 시대가 오기 전까지 세도를 

부리던 안동 김씨에게 그 별장을 바치게 하던 일세의 영웅도 이제는 그 별장에서 자신이 몰

락 정객의 신세로 탄식하게 되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더니, 그 무서운 대원군의 호랑이 세도도 십년으로 끝났다.  

앞으로 민비세도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지만 대원군을 거꾸러뜨린 것만은 통쾌하다.  좌우

간 민비는 여걸이다."

  대원군의 몰락을 좋아하는 것은 그의 독재에 억압되었던 백성들의 해방감(解放感)이었다.  

그의 탄압으로 삼만여명이 학살당한 천주교도의 친척들이 제일 시원히 여겼으며, 앞으로 민

비가 외국과 친교를 맺고 개명정책을 써서 다시 신앙의 자유가 오기를 바라며 기뻐했다.

  대원군은 삼계동 별장이 장안에 있어 급속도로 자기의 과거 영향이 사라지는 것을 듣고 

볼수 있어 가슴이 아팠다.

  "내가 권력을 잡았을 때는 아첨하고 은혜를 입은 놈도, 인젠 한 놈도 위로하러 오지 않는

구나.  보기 싫고 시끄러운 서울을 떠나서 시골 산속으로 숨어버리겠다."

하고 그는 양주군(楊洲郡) 직곡산(直谷山) 속에 지었던 산장(山莊)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

곳의 자연은 전과 같이 조용하고 아름다웠지만, 그의 눈에는 적막강산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는 아직도 권력에 미련이 남아서 그전의 풍류객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 運命의 女人 閔妃 ]   < 바람속에서 >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運命의 女人 閔妃 

    바람속에서



   대원군이 물러나자 그 해 십일월에 고종의 친정(親政)이 단행되어 대원군이 다시 정치에 

참견하지 못하게 되었다.  민비는 야심대로 성공하였고 천하의 실권을 잡고 휘두르게 된 것

이다.  고종도 처시하(妻侍下)인 민비의 치마바람은 삼천리 강산의 초목까지도 벌벌 떨게 했

다.

  정권을 한 손에 잡은 민비였지만 정계에 정면으로 나설 수는 없게 된고로 궁중행사 이외

에는 모두 오라버니 민승호(閔升鎬)와 일가 오라버니 뻘 되는 민규호(閔奎鎬)에게 맡겼으므

로 또 다시 민씨에 의한 척족(戚族)의 세도정치가 재현되고 말았다.

  민승호는 민비의 권력을 대행하는 제일인자가 되었고 민규호가 제이인자가 되었다.  그리

고 영의정 이하 모두가 민비와 결탁하여 대원군 축출에 공로가 있던 인물로 개편되었다.

  영의정으로 이유원(李裕元), 박규수(朴畦壽)로 우의정, 아우인 대원군을 배반한 이최응(李最

應)으로 좌의정을 삼았다.  그 밖의 인물로는 역시 각파의 인심을 얻으려고 조대비 친척인 

조씨문중의 중심인물인 조두순(趙斗淳)을 원훈(元勳)으로 예우(禮遇)하고, 조대비의 조카 조영

하(趙寧夏)도 금위대장(禁衛大將)으로 삼았다.  그리고 대원군의 최대의 정적(政敵)이던 안동 

김씨의 김병국(金炳國)을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시켰다가 뒤에 우의정까지 시켰다.

  한편 대원군의 후퇴에 결정적 동기를 만들었던 탄핵상소의 주인공 유림 최익현을 명목상

의 귀양으로 제주도에 보호해 두었던 것을 석방 상경시켜서 충신 대우를 했다.  그와 동시

에 유림에 대한 대원군의 탄압을 완화해서 그가 폐쇄시켰던 청주 화양동서원(華陽洞書院)을 

비롯한 서원을 부활시켜서 삼남(三南) 지방에 세력이 굳은 유림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대원군의 독재를 종언시킨 것은 좋았지만, 그가 실시한 정책은 거의 모두 말살하고 그전

의 상태로 복귀시킨 것은 감정적 처사였으며 실질적으로는 대원군의 독재가 민비의 독재로 

권력의 주인공만 바뀌어졌을 뿐이었다. 

  특히 대원군을 중심으로 모였던 남인계(南人系)의 인물을 무자비하게 정계에서 숙청한 것

은 정계 이면의 파벌 암투를 심각케 했고, 밖으로 일본에 대한 반동적인 개방외교정책(開放

外交政策)은 상당히 큰 영향을 그 후의 국운(國運)에 미치게 했던 것이다.

  대원군은 양주 산 속에 숨어 있었으나 그는 권토중래(捲土重來)해서 민씨 일족에게 복수

하려고 벼르고 있었고, 민씨파에게 숙청당한 대원군파는 대원군의 복귀를 기다리면서 지하

공작의 음모를 끈덕지게 했다.  이 때부터 시아버지와 며느리를 정점(頂點)으로 하는 양파는 

표면의 경쟁을 떠나서 모략과 암살의 수단을 서슴지 않아서 장안은 암흑세계(暗黑世界)의 

중심지가 되었다.

  대원군의 산장에는 민비가 파견한 밀정이 주위에 잠복해 있었으므로 이름난 불평 정객들

은 접근하지 못했다.  그러나 청지기 등속의 천하장안(千河長安)을 비롯한 잡패들은 외부와

의 연락을 하면서 정보를 제공했다.

  "민가 일족을 소탕해야만 우리 동지가 살고 나라도 제대로 바로 잡을 수 있다.  결정적인 

때가 올 때까진 산발적으로 놈들을 죽여서 가슴을 서늘케 해주어야겠다."

  천가, 하가, 장가, 안가를 비롯한 패거리들은 대원군의 뜻을 받고 하수인(下手人)을 자원하

고 나섰다.  그런 활동이 그들에게는 신이 났고 대담한 수완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암살

에 필요한 무기도 입수하면서 민씨 요인의 암살을 모의했다.

  "대감, 자기황(自起黃)을 쓸 만큼 구했습니다."

  "속아 사지나 않았느냐.  한 개쯤 산 속에 가서 시험해 봐라."

  "진짜에 틀림없지만, 시험도 해보겠습니다."

  그들은 자기황 한방으로 민비 이하의 정적을 몰살시킬 듯이 의기가 등등했다.  자기황이

란 그 당시 청국에서 수입해 오는 일종의 폭탄으로서 유황(硫黃)을 비롯한 화약을 장치한 

간단한 폭발물이었다.

  대원군이 물러난지 한달 만인 십이월 십일 밤중에 경복궁 안의 민비 침전(寢殿)에서 천지

를 진동시키는 굉장한 폭음을 내고 자기황이 터져서 침전 일부를 폭파하는 동시에 자경전

(慈慶殿)에 화재를 일으켰다.  이 불길은 삽시간에 번져서 자경전을 비롯해서 순희당(純熙堂)

과 자미당(紫微堂) 등 사백여간의 전각(殿閣)을 태워버렸다.  이 사건으로 궁중과 조정은 발

칵 뒤집혔다.

  "어떤 역적의 흉한이 이런 대담무쌍한 투탄(投彈) 방화를 했을까?"

  "대원군이 시킨 반란 음모다."

  조야에는 이런 풍문이 돌았다.

  고종과 민비는 우선 난을 피해서 창덕궁으로 옮기는 동시에 포도청의 전기능을 동원해서 

범인 체포를 엄명했다.  그러나 교묘하고 대담한 범인은 체포하지 못했다.  민비로서도 증거

를 잡지 못한 풍문과 추측만으로 대원군을 추궁할 수는 없었다.  범인을 잡지 못하게 되자 

민비는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 궁중 화재는 실화(失火)였다고 발표하고 일체의 유언비어(流

言蜚語)를 단속하라고 해서 결국 불문에 붙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선 경복궁 화재에 나를 관련시켜서 의심하는 풍문이 도는 모양인데, 내가 심혈을 

기울여서 지은 경복궁을 내가 태워 버리다니, 그런 모함이 어디 있느냐.  나도 산 속에서 홀

로 근신하는 몸인데 귀신이 돼서 경복궁에 들어갔단 말이냐.  산중에 와서 조용히 있는 나

까지 잡으려는 간악한 모략이다."

  대원군은 일소에 붙이고 한 술 더 떠서

  "그런 추잡한 모략이 횡행하는 정치무대기 때문에, 내가 섭정을 스스로 그만두고 한가한 

생활을 택한 것이 아니냐?  경복궁에 화재가 난 것은 하늘이 민씨 일족의 행패를 미워하고 

반성을 촉구하는 경계의 천화(天火)였을 것이다."

하고 민씨 일족의 세도정치에 대한 비난을 했다.  그러나 대원군의 비상한 수완을 알고 있

는 민비측에서는 대원군의 동정을 더욱 엄중히 감시하고 그를 지지하는 잔당의 탄압을 더욱 

철저히 했다. 

  "대원군이 죽기 전엔 안심할 수 없다."

하고 민씨파에서는 역시 대원군의 음모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민비는 다음해(고종십일년)에 기다리던 아들을 또 낳았다.

  "세자님 되실 생남 기도를 올린 덕택입니다."

하고 그동안 굿으로 한몫 보던 무당, 판수, 술객(術客), 도인(道人)과 불공을 올리던 중들이 

자기들 공을 자랑하면서 축하를 올렸다.  민비는 미신을 좋아하는 여성이었으므로 아들을 

낳기 위해서는 국고를 기울일 정도로 재물을 아끼지 않았다.  민비의 수족으로 활약한 오라

버니 민승호도 불교를 믿었으므로 왕자를 비는 불공에는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이런 신불기도로 세자감의 아들을 낳았다고 믿게된 민비는 그 후로 더욱 미신에 취했으므

로 신임을 받는 무당과 중이 궁중에서 득실거리고 세도까지 부리게 되었다.

  민비는 세자 탄생의 축하로 죄수의 대사령(大赦令)을 내리고 유림에게 경과(慶科)의 과거

를 보이게 했다.  그러나 결과에 있어서 학식과 인물 좋은 신인(新人)을 등용한다는 과거제

도(科擧制度)의 취지와는 달리 방(榜)에 발표된 급제자(及第者)의 명단은 모조리 민씨 일족의 

자제거나 민씨파에 속하는 고관들의 자제 뿐이었다.  이처럼 칫번 과거부터 세도정치로 부

패했으므로 청운(靑雲)의 뜻을 품었던 유능한 선비들은 실망하고 민비 정권에 대한 반감을 

가졌다.

  "저희들 자식만 급제시키는 게 무슨 과거냐?  무식한 병신이라도 민가 자식이면 급제시키

고, 그밖의 선비는 아무리 제갈량 같은 재주와 포부를 가졌더라도 낙방거사로 돌려보낸다.  

그래도 대원군 시절엔 선비를 이렇게까지 모욕하진 않았고 인사행정이 이렇게까지 썩어 빠

지진 않았다.  무당과 넋두리 춤만 추는 치마바람에 나라가 망해 버린다."

  세자탄생을 축하려던 과거도 결국 유림들의 저주만 늘리고 말았다.

  그러나 궁중에서 민비가 벌이는 무당춤 넋두리는 점점 번성하기만 했다.

  "중전마마, 낳으신 복보다도 잘 기르시는 복이 정말 큽니다."

  요망스러운 무당과 중의 무리는 아들에 미친 민비를 유혹하고 위협했다.  옥동자도 크지 

못하고 죽으면 도리어 불행하다는 말은 먼저번 아들을 낳은지 사흘만에 잃었던 민비의 뼈아

픈 슬픔을 공포심으로 이용하려는 간사한 무리들의 위협이었다.

  민비는 아들의 명(命)을 위한 굿을 매일같이 올렸다.  궁중에는 괴상한 의상을 입은 요무

(妖巫), 괴승(怪僧)의 무리가 활개를 치고, 무슨 굿, 무슨 기도 하고 법석대는 징소리 북소리

와 함께 주문(呪文)과 경문(經文) 외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왕궁은 마치 화려하고 웅장한 

무당집이나 불당(佛堂)과 같았다.

  민비는 궁중에서 행하는 세자 명복(命福)으로도 부족해서 명산대천(名山大川)과 불각(佛閣) 

음사(陰祠)에까지 기도행사를 확대하였다.

  이에 대한 경비가 예상외로 막대하게 들자 궁중과 국가의 재정을 맡은 관리들은 비명을 

올렸다.  처음에는 궁중예산을 집행하는 내수사(內需司)의 재정을 썼으나, 그것으로는 도저

히 감당할 수 없어서 국가의 일반 재정인 호조(戶曹)의 재정까지 함부로 갖다 탕진했다.  국

가의 재정을 맡은 호조판서도 마침내 민비에게 간(諫)했다.

  "중전마마, 그만큼 하셨으니 인제 기도행사를 중지하여 주십시오."

  "호조, 나 하는 일에 왜 반대하오.  그것도 세자의 명복을 비는 일인데.  호조에게는 그런 

충성보다 경비 드는 게 더 아깝소?"

  "나라 일에는 막대한 재정이 필요합니다.  본디 넉넉치 못한 예산에서 이처럼 예정밖의 

비용이 자꾸 들어서는 나라 일에 큰 지장이 생깁니다."

  "나라가 누구의 나라요, 나라를 위해서 나라 전곡(錢穀)을 쓰는데 왜 반대하는 거요?"

하고 민비는 호조를 마치 역적처럼 몰아붙였다.

  "지당하신 말씀이오나 궁중의 모든 비용은 내수사 재정으로 쓰시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데 요즘은 일반재정인 선혜청(宣惠廳) 전곡까지 기도 비용으로 소모되기 때문입니다."

  "선혜청 재산이 세자 기도의 비용도 댈 수 없이 빈약하오?"

  "예, 예산된 일반 국용에도 많이 부족한 형편이오라."

  민비는 국가가 내 것이요, 내 아들이 왕자라는 사고방식(思考方式)만 있었지 국가의 재정

이 얼마나 빈약한지를 몰랐다.  결국 민비는 자기의 정치자금으로 또는 미신 비용으로 물쓰

듯이 했으므로 국고는 텅텅 비게 되었던 것이다.

  "아뢰기 황송하오나, 요 일년 동안에 든 재정이 대원군 십년 동안에 든 것보다 더 많았습

니다."

  민비는 대원군의 검소와 자기의 낭비를 비교한 호조의 말에 눈썹을 치올리고 화를 냈다.

  "나라의 재물을 나라에서 쓰는데 무슨 불평이요?"

  "신도 얼마든지 바치고 싶으나 실정이 기도에 쓰실 비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호조는 우는 상을 했다.

  "그럼 좋소.  각 지방 재정에서 바치게 하오."

  "지방 재정이 곧 호조의 재정입니다."

  "지방 창고도 다 비었단 말이요?"

  "예.  지방비도 태반 부족한 실정이오니, 빈것이나 일반입니다."

  "그럼 백성들에게 바치게 하오."

  백성의 재산도 자기 마음대로 빼앗아 들여다가 왕자 명복의 굿비용으로 탕진하겠다는 민

비의 무모한 독단이었다.

  "호조로서는 적당한 세금을 받는데도 백성들이 못살겠다고 아우성을 치는데 무슨 명목으

로 더 받겠습니까?"

  "호조는 그 책임을 지지 않아도 좋소."

하고 민비는 성을 냈다.  이렇게까지 민비에게 바른 말을 한 호조는 궁중에서 물러 나와서 

곧 영의정에게 사표를 냈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의 사표는 수리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민비

의 미신에 의한 국고 탕진에는 아무런 반성도 나타나지 않았다.

  "궁중에서 암탉이 울고 활개치는 바람에 춤추고 새도하는 것은 민가 떨거지와 무당년, 판

수놈들 뿐이다.

  일년동안 벼르던 대원군은 마침내 민씨 일족 암살의 음모를 계획하고 심복 부하의 행동대

에게 밀령을 내렸다.

  "우선 민비의 수족 민승호를 죽여라."

  "대감님 그놈의 식구를 몰살시킬 묘안이 있습니다."

하고 부하는 장담했다.

  "그러나 꼬리를 잡히지 않게 조심해서 해야 한다."

  "예, 걱정마십시오.  대감님 은혜를 갚을 때가 왔습니다.  만일 불행히 잡히더라도 절대로 

대감님 관계는 불지 않고 달게 죽겠습니다."

  "음, 잡혀서 죽다니 그러면 너희들 공을 갚지 못할 게 아니냐?"

  "저희들이 대감님과 가까운 것은 세상이 다 알고 민승호며 그집 청지기까지 얼굴을 아니

까 시골 동지를 보내겠습니다."

  "그래, 그것이 좋다.  그리고 묘안이란?"

  "네, 실은"

하고 그들은 대원군과 함께 민승호 암살 계획을 밀의(密議)했다.  그리고 며칠 지난 십일월 

이십팔일, 해가 져서 어둑어둑할 무렵에 시골티 나는 관가(官家)의 청지기 한명이 민승호 집

을 찾아왔다.

  "대감님 계십니까?"

  "어디서, 무슨 일로 왔소?"

  "실은 시골 어떤 원님의 봉물과 편지를 대감께 전해 올리러 왔소."

  "어느 원님 댁에서?"

  "그건 밝히지 말고 봉물과 편지만 올리고 오라는 우리 원님 분부라..."

하고 청지기는 싱긋 웃었다.  민승호 집의 청지기도 더 물을 필요는 없었다.  각 처에서 엽

관운동(獵官運動)과 승진운동으로 이름을 숨기고 뇌물을 가져오는 사람이 부지기수(不知其

數)였기 때문이다.

  "알았으니 두고 가시오.  수고했소."

  민대감집 청지기는 선물과 편지를 받았다.

  "그럼 부탁하오."

하고 어떤 원님의 청지기라는 이상한 사나이는 돌아갔다.

  민승호는 마침 그날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돌아와서 마악 저녁상을 받고 있다가 청

지기가 들여온 편지와 보배를 싼 작은 상자를 받았다.  우선 편지를 뜯어 본즉 다음과 같은 

사연이었다.

  < 상자 속에 것은 귀중한 진품(珍品)이오니 타인이 모르게 대감께서 친히 열어 보시고 소

납(笑納)하시기 바랍니다. >

  (무슨 보물일까?  혹은 무슨 기밀문서일까?)

  궁금히 여긴 민승호는 그 상자를 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양모(養母)인 한창부

부인(韓昌府夫人)과 자기 아들애가 있었다.  이 양모가 바로 민비의 계모(繼母)이다.

  "시골 원이 보낸 선물인데 진귀한 물건이라기에 여기서 펴보려고 왔습니다."

  민승호는 양모에게 웃어 보였다.  할머니와 손자는 자기들에게 물건을 보여주려고 안방까

지 갖고 왔다 생각하며 호기심이 나서 앞으로 다가앉았다.  새로 만든 나무 상자는 잠겨져 

있는데 뚜껑 밑에 구멍이 뚫어지고 열쇠가 끈에 달려 있었다.

  "뭘까?"

  어린 아들이 궁금해 했다.

  "알아 맞추면 너 주마."

  "아버지, 어서 여서요, 빨리 먹고 싶어요."

  소년은 우선 맛있는 음식이 들어있으려니 하고 졸랐다.

  "오냐.  열쇠로 열어 보자."

  민승호는 열쇠를 구멍에 넣고 돌렸다.  순간

  "탕!"

하고 터지는 폭탄 소리가 나고 방안의 벽이 달아났다.  양모와 아들은 직사하고 비명 한 마

디내지 못했다.  중상을 입은 민승호의 피투성이가 된 몸이 피바다 같은 방바닥에 자빠져서 

꿈틀거리면서 비명을 올렸다.

  폭발 소동에 식구들과 남녀 비복(卑僕)과 청지기가 몰려 왔다.  이 때는 부서진 방안의 물

건이 타기 시작했다.  놀란 사람들은 시체와 중상자보다도 불끄기에 정신이 없었다.  불은 

곧 껐으나 끔찍한 방안의 참경에 모두 벌벌 떨다가 곡성을 터뜨렸다.

  "나를 죽인 놈은... 음, 그 놈은 운현궁이다..."

  죽어가는 민승호는 최후의 저주를 했다.  운현궁이란 자기의 매부인 대원군이었다.  청지

기는 곧 의원을 불러다가 응급치료를 하려 했으나 의원이 오기 전에 민승호도 죽어서 모자

손(母子孫)의 세 초상이 눈깜짝할 사이에 났다.  그리고 그 며칠 후에는 대원군을 배반하고 

민씨파에 붙어서 영화를 누리던 대원군의 친형 이최응(李最應)의 집에도 방화사건이 발생했

다.  연달아 일어나는 폭살(爆殺)사건, 방화사건은 민비 일파 거물들의 가슴을 서늘케 했다. 

  조정에서는 민승호 폭발사건의 범인 체포에 힘쓴 결과 폭탄을 전한 범인을 잡고 보니 뜻

밖에도 진주병사(晋州兵使) 신철균(申哲均)의 청지기였다.  민비는 신철균과 그의 청지기 장

(張)가를 대역죄(大逆罪)로 고문한 끝에 참형(斬刑)에 처했다.  그는 물론 대원군 지지파였으

나 대원군의 직접 지령이라는 근거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대원군이 뒤에서 이런 사건을 지휘하고 있다는 풍문은 세상에 돌아서 공공연한 비밀로 인정되었다.  민승호의 암살로 민비파가 전전긍긍하게 되자 대원군파에서는 폭탄세례

로 선전 포고를 한 기세로, 이번에는 정치적 공세를 표면적으로 취하기까지 했다.  장령(掌

令) 손영로(孫永老)로 하여금 대담하게도 대원군을 다시 조정에 모셔야지 흉흉한 민심을 수

습하고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친정(親政)을 비난하는 상소문을 고종에게 올리게 했던 것이

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 대원군이 섭정으로 다스린 십년간의 공적으로 탐관오리가 숙청되고 상하에 검소한 생

활이 실천되었더니, 친정 일년 동안에 영의정 이유원(李裕元)을 비롯한 불충지신(不忠之臣)들

이 권세를 마음대로 자행(恣行)해서 정계에 뇌물이 성행하고 국정을 부패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그런 세도의 병폐를 일소하고, 대원군에게 다시 정치를 맡겨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민비는 펄펄 뛰었다.

  "이놈도 민대감을 암살한 신가놈과 결탁한 놈이다.  무엄하게도 상소라는 형식으로 상감

을 협박하고 있다."

  파랗게 성이 난 민비는 사헌부(司憲府)에 처벌하라고 명했다.  대원군을 지지하는 의사는 

상소문으로도 표시하지 못하게 간관(諫官)들의 언론 자유마저 박탈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

래서 손영로는 금갑도(金甲島)로 귀양을 보냈다.

 이에 대해서 간관과 옥당(玉堂)들이 상소하는 사람을 벌하면 국정 비판과 건의(建議)의 길

이 막힌다는 상소를 했으나 모두 묵살되고 말았다.  그 후에 계속해서 상소한 유생(儒生)들

은 모조리 귀양을 보내고 암살까지 했다.  그리고 암살된 민승호의 부자(父子) 뒤에 누구를 

양자로 들여 앉히느냐 하는 문제로 민씨 문중에 또 암투가 벌여졌다가 마지막에 역시 민비

의 환심을 더 산 민태호(閔台鎬)의 아들 민영익(閔泳翊)이 들어가서 세도하는 대를 이어 받

았다. 


  [ 運命의 女人 閔妃 ]   < 外勢의 潮流 >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運命의 女人 閔妃 

    外勢의 潮流



   일본은 대외 강경책을 쓰던 대원군이 몰락하고 민비가 정권을 잡고 등장하자 조선과의 

수교통상(修交通商)을 서둘렀다.  그러나 종전의 배일정책을 곧 개방하는데는 김병학(金炳學) 

등이 아직 반대했다.

  일본은 민비의 새조정도 곧 대일화친정책을 쓰지 않는데 조급해서 군함 운양호(雲揚號)를 

비롯한 일곱척의 군함과 육천명의 군대를 가지고 강화도로 몰려왔다.  그들은 강력한 무력

시위로 통상조약을 강요할 계획이었다.  그들은 강화도 해협의 수심(水深)을 측량하고 부근

의 육지와 섬도 조사했다.

  고종 십이년 팔월 이십일일에 일본 함대는 강화도 동남방 난지도(蘭芝島) 부근 바다에 머

물고 운양호의 함장 이노우에(井上) 제독(提督)이 수십명의 해군을 거느리고 연안을 탐색하

고 있었다.  그들이 초지진(草芝鎭)에 있는 우리 수비병진지의 포대(砲臺)에까지 접근하자, 

도민들과 수비병은 깜짝 놀랐다.

  "불란서 군대인지, 미국 군대인지 또 외국 군대가 들어왔다."

  그전에 불란서 군함과 미국 국함에게 놀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복으로 된 군복을 

입고 서양식 무기로 장비된 일본군대는 먼눈으로 봐서는 서양군대 같았다.  포대의 수비병

이 나가서 그들에게 항의했다.

  "너희들은 왜 우리나라에 무단으로 침범하느냐.  도대체 어느 나라 군대냐?"

  그러나 그들의 키가 작고, 조선 사람과 얼굴이 비슷한 황색인(黃色人)들이었다.

  "우리는 일본 사람이다."

하고 그들은 한문(漢文)으로 대답을 써 보였다.

  "일본 군대가 왜 우리 나라를 침범하느냐?"

  "허허허, 우리는 조선과 이웃나라로서 화친할 생각은 있어도 침범할 생각은 꿈에도 없다."

  "이번 상륙한 것은 청국으로 통신(通信)하려가다가 물이 떨어져서 식수(食水)를 구하려고 

왔다."

  우리 병정은 곧 그 사실을 수비대 본부에 보고 했다.  포대에서는 그것이 거짓 핑계라고

단정하고 포격을 개시했다.  그러자 일본군대는 곧 단정(短艇)을 타고 철수했다.

  "우리 강화도 포대는 전부터 외국 군대를 쫓아 보낸 승리의 전통이 있다.  불란서 군함, 

미국 군함도 보기 좋게 격퇴시킨 우리다.  네까짓 일본 군함쯤 문제냐?"

하고 그들을 통쾌히 비웃었다.  그러나 그런 장담도 순간에 지나지 못했다.  일단 본함(本

艦)으로 돌아간 그들은 우리 포(砲)보다 굉장한 성능이 강한 거탄(巨彈)을 퍼붓고 반격해 왔

다.  이 일본 군함 운양호는 초지진 포대를 파괴하여 침몰시킨 후에 유유히 함수(艦首)를 돌

려서 영종진(永宗鎭) 포대에 맹공격을 가했다.

  영종진 포대에서는 응전했으나 당하지 못하고 침묵하자 일본군 육전대(陸戰隊)가 상륙, 공

격을 감행해서 살육과 방화와 약탈을 감행했다.  영종진 진지에 있던 수비병 오백명 중 사

령관인 첨사(僉使) 이민덕(李敏德)이하고 풍지박산으로 도망치고, 삼십오명의 전사자와 십육

명의 포로라는 큰 희생을 내었다.  그리고 대포 삼십육, 화승총(火繩銃) 백삼십개를 약탈당

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피해는 두명의 경상자(輕傷者)밖에 없었다.

  그들에 비해서 우리의 무기는 구식인데다, 규모가 작았으며, 수비병의 사기(士氣)도 대원

군 시대보다는 여지없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런 참패를 당했던 것이다.  이 운양호사건

이야말로 근대국가로 개명한 일본이 우리나라에 무력침략을 감행한 시초였다.

  그러나 당시의 조정으로선 일본의 불법 행동에 아무런 대책도 결정하지 못하고 이 사건을 

쉬쉬해서 일반 국민에게 숨겨 두려는 태도로 우물쭈물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 사건의 책임

을 도리어 우리에게 추궁했다.

  "항해 중의 선박이 담수(淡水)를 구하려고 섬에 들렸는데, 불법으로 포격한 것은 국제법상

으로도, 인도상으로도 용서할 수 없다.  이에 대한 공식 사과를 하는 동시에, 우호통상 관계

를 맺고 친선을 하자."

  이에 대해서 민비정권은 당황했다.  일본은 청국과의 교섭까지 통해서 조선에 압력을 가

했다.  그해 십이월에는 전보다도 큰 규모의 외교, 군사를 겸한 거물급 사절단을 보내서 우

리 조정을 위협했다. 

  "화친이냐, 전쟁이냐. 둘중의 하나를 택하라. 그것도 오직 조선의 태도 여하에 달려 있다."

  무력을 배경으로 한 일대 외교공세였다.  이 무장된 외교사절단의 명단만 보아도 일본의 

비상한 관심도(關心度)을 알 수 있었다.  즉 일본은 거물급 대사(大使)를 조선에 파견해서 과

거 대원군의 배외정책으로 일본에게 행한 국서불수리(國書不受理)에 대하여 무례를 추궁하

고 운양호사건의 책임을 추궁하였다.  이것은 이를 계기로 국교 재개를 촉진시키기로 방침

을 세운 것이다.  그래서 청국주재공사 모리 유우레이(森有禮)로 하여금 청국의 태도를 확인

하는 한편 일본주재 각국 공사에게도 양해를 구해서 사전 준비를 했다.  그 뒤에 특파 전권

대사로는 육군 중장겸 개척장관 구로다 기요다까(黑田淸隆), 부사(副使)로는 이도오 히로부미

(伊藤博文)의 심복 이노우에 가오루(井上聲)였다.  그리고 실문진영으로는 육군소장 다네다 

마시아끼(種田政明), 외무대승(外務大丞) 미아모도 고이찌(宮本小一) 육군중좌 가바야마 지끼

(樺山資紀), 외무권대승(外務權大丞)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 등 외교와 군사 전문가를 배치

했던 것이다.

  일본은 이처럼 조선에 대하여 국제적인 양해 밑에 거국적인 태세로 임했으나, 조선의 민

비정권은 대외문제에 무식하고 무능해서 화전(和戰) 양단간의 뚜렷한 정책도 세우지 못하고 

당황만하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대원군은 정권 만회의 기회만 노리고 울분에차 있다가 대일수교반대(對日修交反對)라는 

대의명분을 들고 민비정권에 불평을 품은 유림을 선동해서 민심을 자극시켰다.  그는 산 속

에서 잠자던 호랑이처럼 정치 무대인 장안의 운현궁으로 돌아와서 민비정권에 반격을 가하

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림들을 통하여 반대 여론을 일으키는 동시에 애국심을 자극하는 유

언비어(流言蜚語)도 퍼뜨렸다.

  "대원군이 다스릴 때는 탐관오리를 숙청하고 국방비를 저축해서 외군 침략을 통쾌하게 격

퇴시켰다.  그런데 민빈정권은 미신의 굿비용으로 국고를 탕진하고 국방을 돌보지 않았다.  

무당, 판수가 호의호식하고 세도까지 부리는 반면 군대에겐 무기도 제공하지 않고 밥도 제

대로 먹이지 않았으니 나라를 위해서 싸울 충성도 기운도 없게 됐다.  그뿐 아니라 썩은 현 

정권은 자기들 세력을 유지하기에만 급급해서 나라를 일본에게 팔아 먹으려고 비밀 외교를 

하고 있다."

  한편 민비정권에서는 실제로는 친일(親日)보다도 오히려 공일(恐日)병에 걸려서 고민했다. 

이틈을 타서 대원군이 그것을 구실로 정권을 다시 노리려는 책동도 또한 겁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정에서는 이 문제로 오래 논의했으나, 세계대세와 현재의 국력으로는 일본과 수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소위 대일완화책이 좌의정 이최응의 명의로 고종에게 건의되었다.  이최응

은 대원군의 친형이었느데, 또다시 그와 정면충돌하는 상소문을 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일본의 전권대사 구로다(黑田) 일행이 현무호(玄武號)에 타고 야포(野砲) 팔문(八

門)과 의장병(儀仗兵) 이백오십명으로 위신을 세우고 따로 군함 석척과 수송선 두척에 오백

오십명의 병력을 싣고 부산항에 들어왔다.  신식 무기로 장비한 병력만도 팔백명이나 되어 

그들의 강경외교정책의 태도를 알 수 있었다.

  이  정보에 접한 조정과 백성들은 큰 공포심에 떨었다.

  "우리 나라를 쳐들어 오는 일본의 선발대다.  지금의 일본은 임진왜란(壬辰倭亂) 시대의 

일본보다도 강한 서양식 군대로 개량되어 있다.  대원군 같으면 이기건 지건 한번 싸워 볼 

용기라도 있겠지만 무당에 홀린 민비로선 싸워 보지도 못하고 항복할 것이다."

  외교관계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일반 백성들은 일본의 대사가 군대의 호위로 왔다는 것 

자체가 선전포고차 온 것으로 알고 겁을 냈다.  이런 국민의 공포증을 대원군을 최대한으로 

이용해서 민비정권을 타도하려고 했다.

  부산에 있는 왜관장대리(倭館長代理) 야마노시로 유우쬬오(山之城祐長)는 일본전권대사를 

정중히 대접하라는 위협적인 구술서(口述書)를 동래부사(東來府使)에게 전달했다. 

  < 일본전권대사 일행이 장차 강화도로 가서 귀국의 전권대신(全權大臣)과 회담을 청하려

는 것이 귀국방문의 목적입니다. 만일 귀국의 전권대신이 국빈으로 정중히 마중하지 않으면 

서울로 직접 들어가서 정부와 직접 담판을 할 것입니다. 일행의 승선이 강화부에 도착하는 

시일은 마침 엄동기의 풍파가 심하기 때문에 아마 칠, 팔일 후가 될 듯하니 귀관은 이 소식

을 빨리 귀국정부에 전달하기 바랍니다. >

  그리고도 일본 함대는 부산에 머물러서 무슨 정보수집을 하는 모양이더니, 본국으로 이개

대대(二個大隊)의 육군 병력을 증파(增派)해 달라고 급사(急使)를 본국 시모노세끼(下關)로 보

냈다.

  일본 사절단은 부산에서 정보를 수집한 결과 조선 조정에서는 아직도 일본에 대한 외교정

책이 확립되지 못한 것과 은퇴해 있던 대원군이 종전의 배일운동을 다시 일으키고 있는 정

세를 알고, 만일의 경우 위험한 사태가 벌어질지 모르므로 그런데에 예비책까지 준비했다.

  이런 만반준비를 갖춘 그들은 고종 십삼년 일월 삼일에 강화도에 들어왔다.  먼저 군함 

맹춘호(孟春號)가 초지진(草芝鎭) 앞바다에 들어와서 강화부판관(江華府判官) 박제근(朴齊近)

과 함장(艦長) 가사마 히로다데(笠間廣盾) 사이에 교섭이 시작되었다.

  "귀국과 국교 문제로 친선관계를 맺으려고 일본전권대사가 왔으니, 이 뜻을 조정에 전해

주시오."

  이런 간단한 요구에 대해서 강화부 판관은

  "곧 품달하겠으니 회답을 기다려 주시오."

하고 대답할 정도의 간단한 회견이었다.  이 정보를 그날로 받은 조정에서는 전직, 현직의 

중신들을 비상소집하고 고종 어전에서 중대 회의를 열어 대책을 토의한 결과 그들을 정식외

교사절로 대하고 회담을 하기로 결정했다.  외교문서도 접수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퇴해 보

내던 대원군 시대의 대일정책은 이것으로 완전히 쇄국(鎖國)의 문을 개방하였다.  그리고 접

견대관(接見大官)으로는 어영대장(御營大將) 신헌(申櫶), 도총부 부총관(都摠附副摠管) 윤자승

(尹滋承)을 접견부사(接見副使)로 임명해서 일본 사신과 교섭하게 했다.  그러나 이 강화도회

담의 광경은 나라의 체면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들은 당당한 군함으로 호위된 강국의 규

모와 사기(士氣)로 기세가 당당했지만 우리 대표단의 진용과 그 배경의 군사시설은 초라하

고 사기도 없었다.

  우선 그들은 여섯척의 군함에서 거대한 대포로 예포(禮砲)를 쏘아서 우리 대표와 강화도 

수비병과 백성을 놀나게 했다.  그런 공포 속에 그들 대표는 사백명의 서양식 무장을 한 의

장병(儀仗兵)을 거느리고 당당히 상륙했다.

  "친선 회담을 하려는데 왜 대포를 쏴서 민심을 놀라게 하오?"

  우리 대표가 말하자 그들은 도리어 의아스러운 표정과 경멸하는 태도로

  "당신들 오는데에 경의를 표하고, 이번 친선 회담을 축하하는 예포(禮砲) 입니다.  소리는

나도 탄환은 없는 공포인데 놀랄 것이 무엇입니까?"

  신식 국제예법도 모르느냐는 조롱까지 받은 우리 대표단은 더 할 말이 없었다.  예포에도 

놀라는 무지무력(無知無力)을 첫순간부터 스스로 폭로한 셈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일본도 

그들이 그때부터 이십사년 전인 천팔백오십삼년, 미국 사절단에게 강제로 일본의 문호개방

(門戶開放)을 당하던 때에는 지금 조선의 모습 그대로였던 것을 잊은 듯했다.  그때의 일본 

모습이 오늘의 조선 같았고 오늘의 일본은 그때의 미국과 같았던 것이다.

  천팔백오십삼년에 미국 외교사절 폐리 제독은 일본에게 통상수교(通商修交)를 하려고 쇄

국정책을 고집하던 도꾸가와(德川) 정부에게 강요했던 것인데, 폐리 제독은 미국의 태평양 

방면 대함대를 거느리고 동경만(東京灣) 우라가(浦賀)에 달려 들었다.  그 때 일본의 국민들

은 그 쇠로 만들고 검게 빛나는 거대한 군함을 처음 보고 <구로부네(黑艦)>라고 벌벌 떨었

다.  일본이 서양의 문명을 조선보다 먼저 발달시킨 것은 미국의 <검은 배>였는데 그 위협 

외교수단도 그대로 조선에 적용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검은 배가 아닌 일본의 이 검은 배는, 과연 미국이 일본에 가져다 준 것처

럼 새문명의 선물을 조선에 주려는 것일까?  또는 일본 모양으로 조선은 그 검은 배의 선

물을 제 나라에 유익하도록 활용할 마음의 자세와 목적의식이 있는 것인가.

  아무튼 일본의 위협적 분위기 속에 회의는 수차 거듭한 끝에 이월 이십칠일에 십이개도에 

달하는 소위 강화도 조약이라는 한일수호조약(韓日修好條約)이 정식 조인되었다.  그러나 조

선측의 태도가 마지 못해서 하는 것으로 보아 후일에 딴 소리를 할까 염려한 일본측은 조인

과 동시에 국왕의 비준(批准)을 고집했다.

  이에 대해서 비준에는 상당한 절차가 필요하니 후일로 미루자고 주저하자 일본측은 노해

서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구로다 전권은 강화도를 떠나 버렸다.  이에 당황한 조정

에서는 남은 부전군 이노우에와 절충하고 고종의 비준까지 교환했다.

  그런데 이 비준에 있어서 고종은 물론 민비까지도 아직 확고한 태도를 정하지 못해서 이

상한 고충의 소극(笑劇)까지 남겼다. 고종은 비준문에 친서(親署)하는 대신에, 그러면 만일의 

경우에 무슨 책임이나 체면을 면할 줄로 알았든지  < 조선국주지보(朝鮮國主之寶>라는 진짜 

옥쇄가 아닌 소도장을 신주(新鑄)해서 찍었던 것이다.  

  이러한 곡절을 겪고 체결된 소위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의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은 

근대 조선이 외국에 대하여 최초로 체결한 조약으로 실로 역사적인 개국정책(開國政策)임에

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 조약 내용은 당시에 약국(弱國)이던 조선엔 불리하고 강국이던 일

본에겐 유리한 조약으로서 국내외에 주의할 만한 몇 가지 문제를 포함하고 있었다.  국제정

세와 외교술책에 어두운 당시 조정에서는 알면서도 꺾이고 몰라서도 속은 흔적이 남아 있

다.

  조약문의 첫머리에 있는

  < 조선은 자주(自主)의 나라이므로 일본과 더불어 평등의 권리를 보유(保有)한다. >

  이 문귀는 당연한 듯해서 조선 대표들이 기뻐했을지 모르나, 그것은 전통적으로 자주독립

국(自主獨立國)의 취급을 하지 않은 청국에 대해서 특권을 인정하지 않고 조선에 관계된 이

익과 발언권을 청국과 평등하게 보장하려는 일본의 속셈이었다.  다음에 부산항 이외의 항

구, 곧 인천항과 원산항을 일본에게 개방하게 한 것은 청국과 아라사와의 장래 경쟁을 위해

서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필요한 일본의 포석(布石)이었다.  또 조선연해(朝鮮沿海)의 해도

(海圖) 작성과 해안 측량을 허용케 했으며 일본 거류민의 치외법권(治外法權)을 인정해서 그 

재판권은 <조선에 있는 지정 된 강국>이라고 정해서 불평등한 권익을 승인시켰던 것이다.

  이런 외교적 흉계는 서양의 강대국이 약소국을 기만한 마술로서 불란서가 이미 안남(安

南)에 대해서 그러했고 또 일본 자신이 미국에게 당한 대우였다.  일본은 그런 술법을 조선

에도 써서 성공했던 것이다.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이 체결되자 일본에서는 자기 나라의 개화된 문명과 부강한 국력

을 자랑하려고 조선 조정의 친선 사절을 초청했다.  조정에서는 이를 받아 들여 예조참의

(禮曹參議) 김기수(金綺秀)를 수신사(修信使)로 임명해서 보냈는데 이때의 사절단 파견에는 

나라의 위신도 세우려고 상당한 규모를 차렸다.

  사절단 일행은 칠십명이나 되었으므로 일본의 화륜선(火輪船) 황룡환(黃龍丸)을 전세로 빌

려 타고 고종 십삼년 사월 사일에 부산항을 떠났다.  그러나 김기수 이하의 사절단은 모두 

비장한 각오로 공포에 떨고 있었다.

  "놈들이 우리를 청해다가 죽이거나 인질(人質)로 잡아 두지나 않을까?"

  "사대부(士大夫)로서 만리 이역에 무슨 봉변을 하더라도 임금을 위해서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해서 집을 잊자."

  그들은 사당에 참배하고 살아서는 못 돌아올 각오까지 했던 것이다.

  "왜놈은 양놈들의 앞잡이니까, 놈들에게 속아서 기밀을 누설해선 안 된다."

하고 그들은 기선 안에서도 서로 다짐했다.  그러나 일행이 일본 땅에 상륙한 순간부터 뜻

밖에도 친절하고 융숭한 영접을 받았다.  일행은 예기하지도 않고 희망하지도 않았는데 아

까사까(赤坂) 이궁(離宮)에서 명치천황과의 접견식까지 마련해 주었다.

  이에 대해서 수신사 김기수는 비로소 당황했다.  조선왕의 대리자격으로 일본 왕이 만나

겠다는데 실상은 고종 황제의 친서(親書)도 갖고 오지 않았던 것이다.

  "실은 국서도 받아 오지 않았으니 예의상으로도 사양하겠습니다."

  김기수는 일본 외교관에게 솔직히 사양했다.  일본에 사절은 보내면서도 친서를 준비해 

주지 않았던 것은 타의(他意)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한 외교 경험이 없는데서 온 실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본은 사절단의 환심을 사려고, 그런 형식 문제에는 개의하지 않고 외

교예의상 특별대우를 해서 명치천황의 접견식을 거행해 주었다.  그리고 총리대신, 외무대신

이 베푼 두번의 공식 연회와 사연(私宴) 여섯번에다 은밀히 미기(美妓)들의 특별보상까지 곁

들여 여수(旅愁)를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체류기간 이십일 동안에 그들은 서양문물을 모방

한 근대식 시설의 군사, 산업, 교육기관의 중요한 시찰로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모든 공식 생활에 양복을 착용했고 머리를 깎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칙사대접

을 받는 조선사절단은 상투에 큰 갓을 쓴 한복 차림이어서 일반 일본인들이 기이하게 바라

보았다.

  "우리나라도 명치유신 전에는 모양은 다르지만 상투를 틀고 일본복으로 사무를 보았으나 

지금은 편리하고 능률적인 양복을 입고 머리를 깎게 되었습니다.  서양 것도 편리하고 좋은 

것은 택하고 보시다시피 일본 것도 좋은 것은 그대로 보호 유지합니다."

하고 은근히 조선도 빨리 서양문명을 섭취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이처럼 융숭한 대우를 받고 귀국한 사절단은 일본에 대한 인식이 아주 달라졌다.  종전에 

외국 사절이라고는 청국을 대국(大國)으로 섬기는 소국(小國)으로서 상전을 문안하는데 지나

지 않았다.  독립국가로서 외국에게 동등한 대우를 받은 것이 사절단으로서는 제일 기뻤다.  

그리고 사절이 놀란 것은 청국의 문물제도는 그대로 대규모를 자랑하는 구문화에 지나지 않

았으나, 근대 국가로 신흥한 일본의 문물제도는 서양식의 신문화가 백화만발하려는 딴 세상

이었다. 

  "우리나라도 빨리 서양의 신문화를 섭취해서 적어도 일본에 뒤떨어져선 안 된다."

  이것은 사절단이 일본의 실정을 보고 부러워하는 생각이었다.  그들의 대일 인식도 불과 

이십일동안의 사찰로 천양지판의 전환을 했던 것이다.  일본왕과 대신들이 보낸 진귀한 예

물을 갖고 돌아와서 바치자 고종은 수신사 김기수를 자미당(紫薇堂)으로 불러서 복명(復命)

을 받았는데, 고종은 민비와 함께 일본 실정에 대한 문답을 했다.

  "일본왕의 인물이 어떻게 보였소?"

  고종은 명치천황의 인상을 물었다.

  "매우 정명(精明) 하였습니다.  (頗爲精明)"

  "국민들의 풍속과 범절은?"

  "대개 나라의 부강을 위해서 힘쓰고 있었습니다.  (槪以富强爲務)"

  "어떤 방법으로?"

  "열심으로 부하고 강해질 기술을 숭상하며 실천하고 있습니다.  (專尙富强之術)"

  "일본인들의 생활태도와 정도는?"

  "국민이 모두 각자의 직업을 갖고 근면히 일하며 놀고 먹는 백성이 없고, 길가에는 걸인

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질이 유순하고 친절하며 사나운 자가 없었습니다.  (人皆

柔順款曲 則無 强悍者矣)"

  "기술이란 어떤 것인고?"

  "서양식 기계로 물품을 만들기 때문에, 물건이 좋고 빨라서, 그런 기술을 배우지 않은 사

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계를 다루는 솜씨에 익숙해 있습니다.  (蓋欲學器械 無

技不學矣 敎鍊之法 果 熟矣)"

  "그럼 동양 고래의 경전(經傳) 같은 것은 다 버렸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기계 위주의 새 문명에 열중하면서도 도덕면에서는 고래의 경전을 숭

상해서 지킵니다.  (經傳尙傳)"

  이 모양으로 김기수는 일본의 문물과 풍속을 모두 찬양해 마지 않았다.  이리하여 조정의 

대일정책에도 큰 영향은 끼쳤지만 국제적 흥정에는 세계정세에 어둡고 또 국력도 약한 조선

이 항상 밑지기만 했다.

  이러한 민비 정권의 대일정책에 대해서는 대원군을 선봉으로 하는 반대론이 점점 강하게 

일어났다.  그런데 여기서 기이한 현상은 그 전에 배일정책의 주동자인 대원군의 섭정을 반

대하고 극렬한 상소문 사건을 일으켜 대원군을 몰락시킨 최익현이가, 이번에는 강화도에서 

대일수호조약이 진행되고 있는데 오란망(五亂亡)이라는 이유를 들어서 역시 과격한 반대 상

소문을 올렸던 것이다.

  < 소문에 의하면 일본과 화친을 한다고 하여 만구(萬口)가 모두 분개하고 사경(四境)이 흉

흉하니, 만일 그렇게 되면 상감의 처사는 큰 실책입니다.  화친문제로 그들이 애원할 정도로 

우리가 강한 입장에 있어서 그들을 견제할 수 있다면 그 화친은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

나 우리가 그들을 두려워해서 화친을 구하면 목전의 고식지책에 지나지 못합니다.  금후의 

그들의 흉악한 야욕을 무엇으로 충족시키겠습니까?  이것이 난망(亂亡)의 첫째 화근입니다.  

그들의 물화(物貨)는 모두 사치하고 신기하며 우리의 물화는 겨우 백성의 명맥을 유지할 정

도의 소박한 것이라 그들과 통상을 하면 수년을 못가서 지탱하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반드시 

망할 것이니 이것이 망란의 둘째 화근입니다.  그들은 일본의 탈을 썼으나 실을 양적(洋賊)

이므로 그들과 화친하면 서양의 사학(邪學)을 전해서 나라를 휩쓸게 할 것이니 이것이 망란

의 셋째 화근입니다.  그들이 우리나라에 자유로 왕래해서 큰 집에서 호화스럽게 생활하면 

부녀자들이 그들을 사모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망란의 넷째 화근입니다.  그들은 재욕(財

欲)과 색욕(色欲)만 알고 인정과 의리가 없으니 무슨 해괴한 일이 생길지 모르며, 이것이 망

란의 다섯째 화근입니다.  후세의 춘추(春秋=歷史)의 붓을 잡는 자 이 일을 쓴다면 모년모월

(某年某月)에 양인(洋人)이 조선에 들어와서 모처에서 화친을 맹세하였다 할것이매 이것은 

기성고강(箕聖故疆)이 일조에 멸망했다고 통탄할 것입니다.  오늘날 오는 왜인(倭人)은 양복

을 입고 양포(洋砲)를 쓰고 양선(洋船)을 타고 있으니 이것은 왜양 일체(倭洋一體)의 명백한 

증거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에게 속으려고 하십니까... > 

  최익현의 반대 상소문은 일본자체의 침략성을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반대하는 동시에 그

들의 중개로 서양문화가 전파되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오늘로 보면 일리(一理)에는 밝았

으나 일리에는 어두운 주장이었다.

  같은 날짜로 상소한 전사간(前司諫) 장호근(張皓根)은 최익현보다도 강경한 대일주전론(對

日主戰論)을 강조했다.

  < 추류(醜類)가 사백명이나 우리 땅에 하륙하였다 하오니 수백년 굳게 닫혔던 문을 열고 

도적을 맞아 들이는 것이 웬일입니까.  그들이 정한 십삼조라는 것은 더욱 해괴망측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군신 상하가 일치 단결해서 죽기를 맹세하고 그들을 배척하는 것이 당연합니

다.  그런데도 조정의 대신들이 그런 논의는 하지 않고 혹 그런 의견을 상소 하면 모조리 

축출해서 충간(忠諫)의 길까지 막아 버리고 발본책(拔本策)은 세우지 않고 있습니다.  목하의 

급무는 국방 태세를 엄중히 하고 인재를 등용해서 요해(要海)를 굳게 방비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이선(異船)을 소탕할 수 있습니다. >

  이밖에도 일본과 통상한 후에 신기한 일본 상품이 사치폐단만 조장시키는 무용지물이라는 

비자해자졌다.  그리고 조약에 따라서 원산항을 개방하려 할 때 유림들이 반대하고 유통(儒

通)이라는 역문을 돌렸기 때문에 그 대표자를 잡아서 귀양보내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인천개항(仁川開港) 문제가 시끄러워졌을 때는 원로 이유원(李裕元)이 자기만 반대

하는 척하고 사의(辭意)를 표명했다.  그러자 김병학(金炳學), 홍순목(洪淳穆), 한계원(韓啓源), 

이최응(李最應)의 각료들도 일시에 단결해서, 자기들도 인천개항을 찬성한 바가 없다고 이유

원을 반박했다.

  이처럼 처음엔 민비 세력에 아부하기 위해서 개국론에 찬성하던 자들까지 그후에 일본의 

이권 강요가 계속되자, 책임을 회피하려고 분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통상조약이 체결된 병자년(丙子年)에 큰 흉작이 들었는데다가, 민비의 

낭비로 국고가 탕진되었기 때문에 백성은 기아에 허덕이고, 정부관리와 군대에게 봉급도 제

대로 주지 못하는 큰 경제위기에 봉착했다.

  "일본과 친해지면 잘 산다더니, 하늘도 미워해서 이런 흉년이 들었다."

  백성들은 이와 같은 불평을 터뜨렸다.

  대원군은 이런 정치 분위기와 국민 감정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유림을 모아 개화당(開化

黨)이라는 이름을 내건 민비 정권에게 대하여 일대 반격을 착착 준비하고 있었다.


  [ 運命의 女人 閔妃 ]   < 妓 女 亂 心 >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運命의 女人 閔妃 

    妓女亂心



      경복궁 안에선 북소리 덩덩

  무당년 중놈의 춤바람 분다.

  진고개 사탕도 개화당 선물

  장안의 남녀가 집팔아 댄다.

  운현궁 호랑이 코만 골아도

  자기황 소리가 탕탕 터진다.


  세상에는 이런 풍자적(諷刺的)인 노래가 나돌았다.  민비의 사생활의 부패와 그의 정책인 

개화 풍조에 불평을 품고 어서 대원군이 혁명을 일으키고 다시 정권을 잡아야 한다는 뜻이

다.  진고개 사탕은 일본 상품이 일반국민 생활에 환영되고 있다는 상징(象徵)이었다. 기계

로 짠 광목과 비단은 종래 부녀자들이 가정에서 만든 거친 무명과 명주를 무색케 하고 수공

업을 위축시키는 동시에 사치 풍조를 조장했다.  침침한 들기름 등잔불보다 석유 남포불은 

밤을 밝게 해주었다.

  "우두를 하면 무서운 마마병에 안 걸리고 곰보도 안 된다.  신기한 비방이다."

  "금계랍은 학질과 복통엔 그만이다."

  우두(牛痘)는 종두(種痘)요, 금계랍은 키니네다.  종래의 한약과 무당 굿으로는 고치지 못

하던 마마병과 학질에도 개화바람을 타고 신약(新藥)이 들어왔다.  그러나 불평객의 야당기

질(野黨氣質)은 좋은 점을 묵살하고 나쁜 점만 과장해서 선동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다름 

없는 정쟁방법(政爭方法)이다.  아무래도 민비의 개화당에게는 세월이 불리해졌다.  대원군

이 언제까지나 산장과 운현궁에서 낮잠만 자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낮잠 자는 소

리조차 혁명의 폭탄 소리처럼 민비와 개화당 일파에겐 들렸던 것이다.

  세상이 이쯤 되자 대원군 주위에는 민비 정권에 불평을 품은 정객과 모사(謀士)들이 모여 

들기 시작했다.


  대원군이 사랑하던 기생 홍련(紅蓮)에게는 설화(雪華)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래서 대원군

의 심복 정보원(情報員)이며 낭인시절부터의 부하인 장안의 건달 장순규(張淳奎)는 술친구 

난이인 진주병사(晋州兵使) 신철균(申哲均)에게 설화를 기생첩으로 소개했다.  천하장안(千河

張安)패거리 중의 하나인 그로서는 쉬운 일이었다.  그리고는 민비의 오라버니 민승호(閔升

鎬)를 폭사시키도록 꼬였다.  그 사건은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성공했으나, 신철균은 민

비의 손에 잡혀서 참형을 당해 장가가 신철균에게 소개했던 설화는 과부가 되었다.

  삼십이 넘은 설화는 또 기생으로 나서기도 거북하여 망설이는 차에 장가는 또다시 대원군

의 일당으로서 전에 승지 벼슬을 지낸 안기영(安驥泳)에게 셋째 첩으로 소개했다.

  설화는 장가의 끄나풀로서 대원군을 위하여 정보활동을 해 온 여투사(女鬪士)였는데 이번

에는 안기영의 첩이 되었으므로 부첩(夫妾)의 뜻이 맞았고 애욕의 정도 각별했다. 

  어느날 밤에 안기영의 집에는 친구인 진사 채동술(進士蔡東術)과 승지 권정호(權鼎鎬)가 

모여서 밀의를 하고 있었다.  설화도 그들이 남편과 함께 대원군파였으므로, 옆방에서 망을 

보듯이 바깥도 경계하면서 그들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대원군께서 민비를 죽여야 한다고 벼르기만하고, 우리가 거사한다면 책상물림이라 안 된

다는 심중한 태도만 취하시니 답답하오.  대원군 명령을 기다릴 것도 없소.  우리가 먼저 해

치웁시다."

  권정호가 성급하게 말을 했다.

  "그야 좋은 수만 있으면 대원군도 하라고 하실 것 아니요?"

  안기영이 궁금해서 물었다.

  "이번 팔월 (고종 십구년)에 과거가 있어서 영남을 비롯한 전국의 선비가 모입니다.  그때 

그들을 대원군의 명령이라고 선동해서 대궐을 점령하고 민비 앞잡이 개화당 놈들을 몰살하

고, 별동대로 하여금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게 하여 왜놈을 모두 몰아내면 되지 않소.  아무

래도 피를 보지 않고는..."

  "선비들이야 입과 글로는 개화당을 잘 치지만 그런 실지행동에는 비겁해서 안 될 걸요.  

대원군은 우리들까지 책상물림이라 일할 자격이 없다는데, 선비들이야 더구나 책상도령이 

아니요."

  "거사를 하려면 역시 불평만만한 군대를 이용해야 하오."

  대원군파의 모주(謀主)격인 채동술이 군대로 하여금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옳소.  그럼 군대에 손을 뻗칩시다."

  "내가 무관(武官) 친구를 찾아가서 상의해 보겠소."

  채동술은 광주산성 별감(廣州山城別監) 이풍래(李豊來)를 찾아 가서 모의해 협력해 달라고 

권했다.  이풍래는 그 자리에서 친구의 면전이라 듣고만 있었고 찬부(贊否)간의 확답은 하지 

않았다. 

  "좌우간 잘 생각해 주시오.  믿는 사이라 상의한 것이니 절대 비밀로 하고."

  "그야 물론이지요."

  채동술을 보낸 뒤에 이풍래는 잠시동안 대원군측의 동정을 살폈다.  그러나 채동술의 큰 

소리와 달리 잠잠했다.  이풍래는 겁이 났다.  만일 음모가 발각되면 자기도 모의자의 일당

으로 몰려서 목이 달아날 것만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힌 것이다.

  (친구고 뭐고 내가 살아야겠다.)

  이풍래는 친구를 배반하고 이 기회에 자기의 공을 세워서 출세할 유혹을 느끼고, 그 음모

사실을 의금부(義禁府)에 고발했다.  이 고발을 들은 고종은 안색이 창백해졌고 민비의 안색

은 불빛같이 노염이 피어 올랐다.

  "운현궁이 시킨 반란 음모에 틀림 없습니다.  이번엔 운현궁을 잡아다 직접 심문하고 대

역죄로 처단해야 합니다."

  민비는 고종의 양해를 구하려고 했다.

  "운현궁이 시켰는지, 심중히 미리 조사한 뒤에 사실이라면..."

  운현궁이란 물론 대원군이다.  지금까지도 민비는 시아버지를 숙청하려고 별렀으나 뚜렷

한 증거로 명분을 세우지 못하기도 하고 또는 고종의 체면을 보아서 단행하지 못했다.  그

러나 이번만은 처치할 결심을 했던 것이다.

  안기영, 채동술, 권정호는 즉시 잡혀서 엄중한 고문을 당했으나 대원군은 직접 지휘했다는 

사실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민비는 사건을 날조 확대시켜서 마땅치 못하게 생각하던 

조중호(趙中鎬), 한성근(韓聖根), 윤웅열(尹雄烈), 유도석(柳道奭), 윤홍섭(尹弘燮) 등의 무관도 

역적 죄로 몰아서 참형에 처해 버렸다.

  그리고 대원군에게는 직접 손을 대지 못하게 되자 대원군의 서자(庶子) 이재선(李載先)을 

그들이 추대했다는 사건을 꾸며서 독약을 먹여 없애 버렸다.  억울하게도 대원군 대신 희생

된 이재선은 미미한 군별직(軍別職)에 있었는데 고종에게는 이복형(異腹兄)이었다.  민비는 

고종으로 하여금 핏줄이 통한 형까지 죽이게 하고서야 화를 풀었다. 

  이 사건의 주모자로 몰린 안기영의 첩 설화도 잡혀 가서 고문을 당했다.  설화는 중년여

자였지만 아직도 미모였기 때문에 추관들의 음탕한 농감이 되었다.

  "이년, 너는 기생으로 곱게 늙지 못하고 대역적놈만 골라서 첩노릇을 하느냐, 역적 놈들의 

그 맛이 그렇게도 좋으냐?"

  "미인박명이라 서방만 잡아먹는 팔자로구나."

  "그년, 내가 하룻밤 데리고 자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고문과 경멸을 당한 설화는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은 되었으나

  "너도 죽여버릴 수 있지만 계집의 얼굴이 아까와서 우선 살려는 보낸다.  그러나 금후로 

역적놈들 잔당과 만나기만 해도 잡아 죽이겠다."

하는 위협을 받았다.  설화는 두 번째 남편도 잃어버린 기구한 팔자가 되었다. 

 이제는 기생노릇도 첩노릇도 지긋지긋해졌다.  집으로 돌아와서 신세한탄으로 지난던 어느

날 밤 자기를 잡아 가던 포교가 어슬렁어슬렁 찾아왔다.

  "나으리 웬일이시오?"

  설화는 깜짝 놀랐으나, 기생 솜씨로 아양까지 피우며 물었다.  포교에게 나으리라는 것도 

큰 대접이므로 그의 동정을 사려는 본능적인 태도였다.

  "아씨에게 조용히 할말이 있어서 왔소."

  조용히 할 말이라고 하므로 설화는 자기 방으로 불러 들였다.

  "나으리 또 잡으러 왔소?"

  "음, 경우에 따라서는..."

  포교는 싱그레 웃어보였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실은 내가아씨에게 통사정을 하러 왔는데... 양반들만 상대하던 아씨가 나 같은 포교 따

위야 어디..."

  눈치 빠른 설화는 이 포교가 자기에게 반해서 음침한 수작을 부린다는 것을 알았다.  그

러나 잡으러 온 것보다는 백배 나았다.

  "나으리는 왜 그런 말을 해요."

  "아씨, 나는 지체도 낮고 가난해서 이 나이에 기생오입 한번 못해 보고 상처를 일찍한 채 

홀아비 신세로 있어요.  아씨를 본 후론 밤에도 잠이 와야죠.  살림은 같이 못하더라도 하룻

밤의 정이라도..."

  "호호호, 나으리 그런 농엔 넘어갈 내가 아네요.  아무리 떠봐도 족쳐도 아무 죄 없어요."

  설화는 슬쩍 딴 소리를 했다.

  "아씨, 내가 밀탐하러 온 건 아니고 정말로..."

하고 포교는 설화의 손을 잡고 부르르 떨었다.  포교는 설화의 약점을 이용해서 야심을 품

고 왔던 것이다.

  "호호호, 나으리도 포승 들지 않은 손으로 여자의 손을 잡을 줄 알아요?  그런 얘기라면 

어서 돌아가요.  공연히 역적집에 밤에 드나든다고 혼나지 말고요."

  "아, 아씨의 정만 한번 받아 보면 역적으로 능지 처참해서 죽어도 한이 없겠소...  이건 변

변치 않지만 내 정표로 받으시오."

  포교는 가슴 속에 넣고 왔던 비단 옷감을 내놓았다.  그러나 설화는 그것도 밀쳐 놓고 냉

정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는 태가 포교에게는 더 도발적으로 보여 억센 두팔로 설화

의 가는 허리를 힘껏 껴안았다.

  "이럼 소리치겠어요."

하면서도 설화는 몸을 맡긴 채 스르르 눈을 감았다.  찾아온 나비를 대하는 꽃과 같은 태도

에 포교는

  "소리쳐도, 죽여도 좋소."

하고 늘어졌다.

  "나도 나으리께 청이 있어요."

  "나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흥흥."

  "나를 다시 잡아가지 않는다고 약속해 주겠어요?"

  설화는 일종의 흥정을 했다. 

  "나 같은 일개 포리야 상관의 명령에 복종할 뿐이지만, 만일 그런 명령이 내릴 기미만 있

으면 미리 알려서 숨게 하겠소.  아니 내가 숨기고 보호하지요."

  "정말 맹세하겠지요?"

  "혈서라도..."

  "혈서를 쓸 것까지 없지만, 만일 나를 또 잡아가면 당신이 나를 강간했다고 폭로해서 경

치울 테니 그리 알아요."

  "좋소.  그럼 강간을 허락하시오.  허허허"

  그리고 포교는 설화의 이불 속에서 하룻밤을 즐겁게 보냈다.

  "개화당 덕은 내가 제일 보는군."

  포교는 설화의 몸을 한번 범한 뒤에는 아씨라는 존대를 치워 버렸다.

  "흥, 포도대장 세도도 못 부리면서."

  "아니지 개화당 반대파는 역적으로 모는 세월이니까 내가 천하일색의 설화와 이렇게 잘 

수 있지."

  "흥, 민비가 고맙단 말이지?"

  "민비는 지독한 중전이야.  죄도 없는 시형 이재선에게 독약 사발을 안기다니..."

  "나도 여자지만 민비는 천하 독부로서 나라를 망쳐 버리고 있어요."

  "그렇지, 그런 극성을 부리다가 끝이 좋지 못할 거야."

  포교도 어느새 설화와 동지가 된 것 같았다.  

  "지금, 군대도 들먹거리는 정보가 있어요.  의금부와 포도청은 속으로 떨고 있으니까, 무

슨 난리라도 나고야 말거야."

  포교는 설화에게 그런 기밀까지 부지중에 누설했다.  설화는 다음날 그 정보를 대원군의 

정보원 장가에게 보고했다.

  이 정보처럼 군대는 불평불만으로 들먹거리고 있었다.  국고는 텅텅 빈데다가 흉년까지 

들어서 세금을 받아 들이지 못한 조정에서는 군대의 봉급조차 오래 지급치 못하고 있었다.


  [ 運命의 女人 閔妃 ]   < 壬午軍亂 >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運命의 女人 閔妃 

    壬午軍亂


   "고과대작은 주지육림(酒池肉林)에 취해 있으면서 졸병은 굶어 죽으란 말이냐?  굶주린 

병정이 전쟁이나 충성을 할 수 있느냐?"

  "국방비가 없다고 오영문(五營門)을 두 개로 줄이더니, 일본장교가 훈련시키는 별기군(別技

軍)만 후대하고 우리는 밥도 안 먹이니 조정 창고라도 털어다 먹자."

  "개화당 정부를 뒤집어 엎어야 한다."

  이런 불평이 폭발점에 달하자, 임오년(壬午年=고종 19년, 1,882년) 6월에 겨우 한달분의 쌀

을 군대에게 지급한다는 조정의 포고가 내렸다.  6월 5일은 아침부터 선혜청 도봉소(宣惠廳

都捧所) 앞에 마치 거지떼 같은 군졸들이 부대를 들고 모여 들었다. 

  "일년 이상이나 밀린 봉급을 겨우 한달치밖에 안 준다니 기가 막힌다."

  "이나마 얻어다가 처자에게 죽이라도 먹여야지 어떡하나."

  이런 불평을 하는 군대들에게 이윽고 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 민겸호(閔謙鎬)의 부하 창

리(倉吏)들이 창고문을 열고 배급쌀을 되어 주기 시작했다.

  "왜 침수로 썩은 쌀을 주느냐?"

  "그나마 왕모래가 절반이나 섞여 있다."

  "이것도 사람이 먹으라는 쌀이냐?  다른 쌀로 내라."

  군졸들은 썩고 왕모래 섞인 쌀을 바꾸어 내라고 아우성을 쳤다.  쌀을 되던 하인들이 몰

매를 맞게 되자 악을 썼다.

  "당신들 보다시피 창고엔 이 쌀밖에 없소.  더 좋은 쌀이 있거든 들어와서 찾아내시오."

  드디어 군대와 창고지기 사이에는 싸움이 벌어졌다.

  "너희들이 몰라?  네 상전 놈들과 짜고서 해먹은 농간이 아니냐?"

  "군대면 그런 소리 해도 좋으냐?  누가 어떻게 해먹었단 말이냐?"

  당대의 세도가 민겸호를 상관으로 모신 하인들도 너절한 군대는 안중에 없었다. 

  "그럼, 네 상전들도 너희들도 이런 쌀을 먹고 있느냐?"

  "그놈들부터 때려 죽여라!"

  격분한 군사들은 창고지기를 죽일 기세로 흥분했다.

  "창고를 부셔 버려라."

  "더러운 창고를 불질러 버려라."

  폭동의 기세는 점점 높아갔다.  군대는 마침내 창고지기들에게 폭력을 가했다.  당황한 창

고지기들은 이런 군대의 폭행을 선혜청 당상 민겸호에게 고발했다.  폭행 주동자로 지목된 

김춘영(金春永)과 유복만(柳卜萬) 등 수명의 병정은 민겸호의 연락으로 출동한 포교들에게 

잡혀서 포도청에 갇혔다.

  "잡혀간 병정 오명 중 두명은 폭동죄로 사형에 처하게 되었다."

  이삼일 후에 이런 풍문이 서울에 돌았다.  무위군영(武衛軍營)과 장어군영(將禦軍營)의 장

병들은 이 사건에 대하여 행동 통일을 논의하던 중 동료 두명이 사형된다는 소문에 격분했

다. 

  "동료만 희생시켜선 안된다."

  "그들을 구해 내지 못하면 앞으로 우리도 다 잡혀가 죽는다."

  이럴 때 김춘영의 아버지와 유복만의 동생이 이웃 사람들과 함께 군영으로 들어와서 아들

과 형을 구해 달라고 울며 호소했다.

  6월 9일에 군졸의 대표는 무위대장(武衛大將) 이경하(李景夏)의 집을 찾아가서 동료의 석

방을 진정했다.  이경하도 자기의 직속부하를 구하려고는 했으나 당대의 세도가 민겸호의 

위세에는 맥을 추지 못했으므로 체포된 병졸들을 관대히 처분해 달라는 소갯장을 군졸들에

게 써주면서 직접 청원하라고 자기 책임을 회피하였다.

  군졸들이 이대장의 편지를 가지고 민재상 집을 찾아 갔으나 대감은 궁중에 가고 없다 하

고 청지기들과 전날 창고에서 매맞은 창고지기들만 달려나와서 군졸들에게 욕을 퍼붓고 대

문을 닫으려고 했다.

  "요전에 도봉소(都捧所) 창고에서 우리를 친 놈들이 대감댁에까지 몰려 왔구나.  당장 물

러가지 않으면 포도청 포교들을 부르겠다."

  "이놈들, 네놈들 때문에 우리 동료가 죽게 됐다.  대감을 못 만나게 하는 네놈들을 죽인 

후 대문을 부시고 들어가서 대감과 담판하겠다."

  격분한 군졸들은 청지기와 창고지기를 잡아 동댕이치고 대문을 부시고 안으로 습격해 들

어가서 호화로운 저택과 가구를 닥치는 대로 파괴해 버렸다.  그리고 오색찬란한 의복과 필

육, 진귀한 패물과 골동품을 끌어 내다가 마당에 쌓아 놓고 불을 질러 버렸다.

  "백성의 고혈을 빨아서 군대를 굶기면서 도적질한 이 더러운 재산을 모조리 태워 버려라.  

민가 놈들을 모조리 잡아다 저 불 속에 태워죽이자."

  흥분한 군졸의 집단은 복수의 쾌감으로 환성을 올리면서 화염이 오르는 민겸호 집을 나왔

다.  그러나 나와서 생각하니 갈 곳이 없었다.  어디로 가도 반란죄로 잡혀 죽을 중대사건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비로소 났다.

  "이 길로 포도청으로 가서 동료를 탈환하자."

  "영문으로 들어가서 복장을 하고 본격적인 혁명으로 민씨 일파의 개화당을 전부 없애 버

리자."

  "그러자, 기왕 역적으로 몰리게 됐으니, 복장을 하고 전군대가 대궐로 쳐들어 가서 민씨부

터 죽여 버리자."

  자기들도 예기치 않은 폭동을 일으킨 군대들은, 갑자기 이 폭동을 혁명군으로 조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이 의거(義擧)를 후원하고 지휘해 줄 지도자가 없다.  대의명분(大義名

分)을 세우고 당당히 싸우려면 민씨와 맞설 인물을 추대할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  대원위(大院位) 대감께 우리 실정을 호소해 보고 최후의 태도를 결정하자."

  "옳소.  대원위 대감은 우리편에 서 주실 것이다.  자아 운현궁으로 가서 그분을 추대하고 

궁중으로 밀고 들어가자."

  돌박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무장지졸(無將之卒)들은 대원군을 혁명군의 지도자로 삼으려고 

운현궁으로 몰려갔다.

  대원군은 운현궁 문 밖까지 나서서 자기를 혁명군의 지도자로 추대하려고 호소하는 군졸

들에게 미소를 띠우면서 간단한 훈시를 했다.  그는 침착하고 위엄있는 태도로 얘기했다.

  "너희들 고충은 잘 알겠다.  그러나 이렇게 작당해서 남의 인명을 살상하거나 재물을 파

괴하면 안 된다.  그러지 않아도 민심이 흉흉한 이때에 군대가 들고 일어서면 나라가 위태

롭게 된다."

  대원군은 자기도 아직 태도를 결정할 수 없었다.  일부 군대의 돌박적인 폭동을 경솔하게 

지휘하겠다고 곧 선언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정에서 들어도 상관 없을 정도의 

말을 하면서 은근히 너희들 군대가 정말로 총 결속해서 혁명을 일으키면 <나라가 위태로

울> 정도로 위대한 힘을 갖고 있다고 암시적인 선동을 했다.

  "대감, 이대로 돌아 가면 민가 일파에게 역적으로 잡혀서 죽을 뿐입니다.  기왕 죽을 바에

는 놈들의 세도정부를 둘러 엎겠으니 대감께서 다시 이 나라 정치를 맡아 주십시오."

  그러나 대원군은 의미 있는 미소만 띠워 보였을 뿐이다.

  "너희들 신변을 무사하게 하고, 군미(軍米)를 좋은 쌀로 주도록 하겠으니 조용히 영문으로 

돌아가거라."

  그래도 군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흥분했던 군대가 삼삼 오오 돌아가기 시작했다.  군대들

의 굳은 결심을 본 대원군은 속으로 이미 이 기회를 이용하려고 결심했다.

  (군대까지 나를 지지하는 이때, 내가 그들의 용기만 못해서야 되겠느냐.)

  대원군은 심복 허욱(許煜)에게 눈짓을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허욱은 이 군란의 주동자격

인 김춘영의 부친 김장손(金長孫)과 유복만의 형 유춘만(柳春萬)의 옆구리를 꾹 찔러서 운현

궁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대원군은 그들 세명을 밀실로 데리고 가서 사건 경과와 군대의 동향을 자세히 들었다.  

그리고 대원군은 단호한 밀령을 내렸다.

  "허욱, 자네가 직접 군대를 혁명군으로 하여 조직적인 지휘를 하게.  우선 군영으로 돌아

간 뒤에 군대 전부를 동원해서 완전무장을 시킨뒤에 민가 일파를 전격적으로 없애 버려.  

군대의 신임을 얻고 사기를 돕기 위해서 내 입장은 자네가 적당히 말해도 좋아."

  대원군은 곧 심복 부하들에게 비상 소집을 명령했으므로 청지기와 정보원들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대원군과 만나고 궁문 밖으로 나온 유춘만이 기다리고 있는 군졸들 앞에서 큰 소리로 외

쳤다.  

  "대원위 대감께서 우리들 소원대로 용감히 행동하라는 분부를 내리셨다.  이분에게 지휘

하도록 임명하셨으니 일치단결해서 이분의 명령대로 행동하자."

  "만세!"

  흥분한 군대는 일시에 환성을 올렸다.

  "세도 민가를 모조리 죽이자.  개화당을 때려 부셔라."

  이런 아우성을 치자 허욱은 지휘자로서 제일 호의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 일체의 개인 행동을 삼가라.  뭉치면 모두 살고 헤지면 모두 죽는다.  뭉쳐서 

끝까지 싸우면 의거(義擧)로 성공하고 개별행동으로 분렬하면 실패하여 역적의 누명을 쓰고 

잡혀 죽는다.  우선 군영으로 행진하자."

  "왓!"

하고 군줄들은 비로소 대열을 정돈하고 출발 준비를 했다.

  "우선 군영으로 가서 남은 군대와 완전무장을하고 다음 명령을 기다려라."

  군대는 당당한 시위행진으로 동별영(東別營)으로 향했다.

  "군대가 대원군을 추대하고 민씨 일파와 개화당을 때려 부시게 됐다."

  일반 백성들은 어느 사이에 몽둥이를 들고 군대에 합류했다.  군대가 동별영에 가는 동안

에 뭉둥이 든 군중도 수백명에 이르렀다.  군대와 민중은 동별영으로 밀고 들어가서 무기 

창고를 부시고 무기를 꺼내다가 완전무장을 하고 다시 거리로 뛰어 나왔다.

  당황한 민비는 곧 무위영대장 이경하에게 군란(軍亂)을 진압시키라는 급명을 내렸다.  이

경하는 자기 통솔 부족의 책임을 느끼고 당황히 나서서 조용히 해산하고 군영으로 가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군대를 지휘하던 그전의 사령관 자격이 없었다.  지금의 지휘

관은 대원군이 임명한 민간인 허욱이었던 것이다.

  "이경하는 썩은 무관이다.  그전에 대원군께 중용된 은혜도 잊고서 민가들의 주구(走狗)노

릇을 한다.  저놈부터 때려 죽여라."

  격분한 군대와 군중이 아우성을 치자 이경하는 무장답지 못하게 창백한 얼굴로 꽁무니를 

빼고 말았다.

  "우선 포도청을 때려 부수고, 감금된 동료를 구출하자."

  군대는 종로를 휩쓸고 포도청으로 몰려가자 포도대장을 비롯한 포교는 삼십육계(三十六

計)를 치고 말았다.  군대는 구치장을 부시고 김춘영, 유복만, 정의길(鄭義吉), 강명준(姜命俊) 

등의 동료 병정을 석방했다.  석방된 그들은 일약 영웅의 모습으로 반란군의 선두에 나섰다.

  포도청 앞에서 반란군민(反亂軍民)의 기세는 충천했고 인원은 점점 늘었다.  여기서 부대

를 셋으로 나누어서 허욱과 유춘만과 김장손이 각대의 대장이 되어서 행동지휘를 분담했다.

 "일대는 경기감영(京畿監營)으로!"

  "일대는 민태호(閔台鎬) 집으로!"

  "일대는 별기군(別技軍) 훈련소로!"

  노도와 같은 군민 합동의 반란군중은 각각 공격목표로 몰렸다.  경기감영에서는 관찰사 

김보현이 도망쳐 버렸으므로 무기고를 파괴하고 칼과 창을 약탈해서 민간 대원들이 나누어 

들었다.  

  "청수관(淸水館)으로 가자!"

  청수관은 일본 공사관이었다.  반란군중은 일본 공사관에 침입하려고 했으나 수비하던 일

본 군대가 총을 쏘았으므로 일시 후퇴했다가 해가 진 뒤에 몰려 가서 불을 질렀다.  일본인

들을 전부 죽이려고 했으나 공사 하나부사(花房)는 관원과 인천으로 도망해서 영국 기선 비

어호(飛魚號)를 타고 본국으로 피신했다.

  별기군 훈련소를 습격한 반란군은 일본인 교육 장교를 죽이고 별기군 군대로 합류시켜 버

렸다.  반란군은 그날 밤이 깊도록 세도하던 대관들의 집과 민비가 단골로 불공 드리던 서

울 주변의 절까지 파괴하고 방화했다.  그리고 일단 동별영으로 돌아와서 내일의 행동 계획

을 세운 뒤에 날이 새자 당시의 영의정으로 있던 대원군의 형 이최응(李最應)의 집을 습격

했다.  당황한 이최응은 새벽 잠자리에서 잠옷 채로 빠져나와 도망치려고 높은 뒷담을 넘다

가 안으로 떨어져서 중한 낙상을 입고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집안 뒤지던 반란군은 그를 

발견하고 쓰러져 있는 그의 몸을 창으로 찌르고 발로 밟아서 무참하게 죽였다.

  "놈들의 영의정을 죽였으니 이젠 나라를 망친 요부 민가년을 죽여 없애자!"

  그들은 이미 국모(國母)도 중전(中殿)도 민비도 아닌 요부(妖婦) 민가년으로 욕하며 이최응

처럼 피의 심판을 내리려고 창덕궁으로 돌격해 갔다.  반란군은 마침내 왕궁까지 쳐들어 갔

다.  이제는 완전한 역적으로 화한 혁명집단이었다.  돈화문을 지키던 대궐의 수문장(守門

將) 이하의 파수병도 막지 못하고 도망치자 반란군의 최후의 목표를 향해서 아우성을 치며 

몰려 들어갔다.  이 때 대궐안으로 돌입한 성난 군민의 수는 수천명에 달했다.

  민비도 덜덜 떨면서 고종에게 애원했다.

  "우선 이 폭동을 진압시키는데는 일시 운현궁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민비는 그 반란의 뒤에서는 대원군이 총 지휘를 하고 있는 줄 알았으므로 그와의 화해적 

태도를 취해 우선 급한 화를 면해 보려는 마지막 술책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하던 참이요."

  고종은 그런 생각이 있으면서도 민비가 찬성할지 몰라서 기다렸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우선 목숨을 살고 보자는 왕과 왕후의 초라한 순간이었다. 

  "곧 운현궁으로 가서 대원군을 궁중으로 모셔 오도록 하라."

  고종은 중사(中使)를 급히 보내서 대원군을 청해 반란 무마의 뜻을 전했다.  그가 아니고

는 아무도 반란군민 수천명을 진압할 수는 없었다.  흥분한 군민들은 이최응을 무찌른 피묻

은 창검으로 궁궐의 기둥을 치면서 아우성을 쳤다.

  "중전을 잡아라."

  "민비를 잡아 죽여라."

  "그년을 죽여야 나라가 바로 되고 백성이 살수 있다."

  그런 아우성이 민비의 귀에까지 들렸다.  민비는 고종이 있는 궁전의 뒷방에 숨어서 벌벌 

떨었다.  도망을 치려고 해도 이미 때가 늦었다.  모든 전각이 점령 포위되고 넓은 어원(御

苑)의 숲 사이까지 반란군으로 꽉 차 있었다.

  민비는 고종에게는 직접 난폭한 행동을 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서 고종이 있는 궁의 뒷방

에 숨어 있으면서 빨리 원수의 대원군이 와서 성난 군민을 진정시켜 주기를 기다렸다.

  대원군은 운현궁 아소당(我笑堂)에 앉아서 허욱으로부터 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보내 오

는 반란상황의 정보를 받으면서 통쾌한 미소를 띠우고, 중용한 문제에는 비밀 지령을 내리

고 있었다.

  (궁중을 점령했으면 인제 상감이 나한테 응원해 오겠지.)

하고 전세를 전망하고 있던 그에게 예기한바와 같이 고종이 보낸 중사가 와서

  "상감께서 대감을 빨리 궁중으로 모시고 오라는 분부이옵니다."

  "중전마마는 무사하신가?"

  "예"

  "어디 계시지?"

  "상감과 함께 계시면서 대감 오시기를 기다리십니다."

  대원군은 이때도 특히 민비의 행방을 물었다.  중사는 그의 뜻도 모르고 보통 안부려니 

하고 사실대로 대답했다.

  "당신도 함께 갑시다."

  대원군은 부인 민씨에게 말했다.

  "네"

  고종의 신변을 걱정하고 있던 부인은 얼른 궁중에 들어갈 준비를 시작했다.

  "급한 때 무슨 예복이오.  그대로 갑시다."

  대원군은 부인을 재촉하고, 벌벌 떨고 달려와 있던 큰 아들 이재면(李載冕)을 데리고 창덕

궁으로 들어갔다.

  "대원군 대감 만세!"

  대원군이 돈화문을 들어서자 반란군민들이 일시에 환영 만세를 불렀다.  마치 구국 영웅

(救國英雄)을 맞는 듯 감격의 환호성이 궁궐을 찌렁 찌렁 울렸다.

  "대원군 대감 행차시다.  길을 비켜라."

하면서 군중은 스스로 물결 갈라지듯이 길을 열었다.

  "뒤를 호위하라.  모시고 가자."

  앞을 열었던 무장한 군중은 대원군 뒤에 다시 뭉쳐서 고종이 기다리는 궁으로 따라갔다.  

고종은 중희당(重熙堂)에서 창백한 얼굴로 대원군을 맞았다.  고종을 호위하기보다는 자기들 

살길을 구해서 도망쳐 와 있던 민겸호와 경기감사 김보현이 버선 바닥으로 뜰까지 내려와서 

대원군에게 굽실거렸다. 

  "저 비굴한 놈이 민겸호다."

  "저 놈은 김보현이다."

  "저 역적 놈들을 잡아 내려라!"

  격분한 군중이 보당까지 뛰어 올라서 민겸호와 김보현을 잡아서 질질 끌고 마당으로 내려

왔다. 

  "대감 살려 주십시오."

하고 민겸호가 대원군에게 애원했다.  그러나 대원군의 태도는 잔인할 정도로 빈정댔다.

  "허허.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천하세도가 민대감을 살리고 죽일 권한이 있소."

  민겸호는 이제 죽었구나 하는 낙망으로 눈앞이 캄캄했다.  그래도 김보현은 끌려가면서도 

최후의 허세를 부렸다.

  "어전에서 이게 무슨 무엄한 행패냐?"

  자기를 끌고 가는 군중에게 반항을 한 것이다.

  "이놈이 아직도 세도 버릇을 못버렸구나.  지옥에 가서도 제 버릇 못버릴 놈이다."

  군중은 두명을 중문 밖으로 나가서 무참하게 박살한 후 시체를 개천에 굴러 떨어뜨렸다.  

두명의 고관을 죽인 피에 흥분한 군중은

  "민비를 잡아 죽이자."

  "그년을 살려 두면 또 무슨 요사를 부릴지 모른다."

  민비는 고종의 힘으로도 자기의 목숨을 보호하지 못할 것을 깨달았다.  민겸호에게 대한 

대원군의 복수심이 곧 자기에게도 미칠 것을 안 것이다.  그러나 민비는 침착하게 도망할 

계획을 세우고 허술한 궁녀로 변장하고 궁전 뒷문으로 빠져 나왔다.

  뒷문 밖에도 민비를 잡아 죽이라고 아우성 치는 군중으로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대담 침착한 민비는 종시 궁녀 모양으로 그 군중에 섞여서 밀리면서 탈출할 구멍을 찾고 있

었다.  겨우 대조전(大造殿) 앞까지 왔을 때, 무예별감(武藝別監) 홍재희(洪在羲)가 허술한 궁

녀 모습으로 변장한 민비를 보았다.

  "아, 너 여기 있었니?  너를 찾느라고 혼났다."

  홍재희는 재빨리 기지(機智)를 써서 자기 누이 동생 취급을 했다.  그리고 옆에 넋을 잃고 

있던 가마꾼에게 눈짓을 했다.

  "자네들 미안하지만, 내 누이 동생 좀 태워서 궁 밖으로 내다 주게.  천한 궁녀 노릇 시킨 

것도 가엾은데 이 난리통에 밟혀 죽으면 어쩌나.  자아 술값을 받고..."

하고 홍재희는 능청맞은 소리를 하면서 돈을 꺼내서 후하게 주었다.  가마꾼은 못이기는 척

하고 궁녀 아닌 민중전을 태우고 군중의 혼잡을 피하며 나갔다.  가마 옆에는 홍재희가 호

위하고 따라갔다.  그러나 도중에서 창든 군졸들이 가마를 막고

  "누구를 태우고 가느냐?"

  "제 누이 동생이요."

  "뭐, 어디 보자."

  군졸들은 난폭하게 가마문을 열어 젖혔다.  그러나 그들은 궁녀로 변장한 민비의 얼굴을 

알아 채지 못했다.

  "너는 누구냐?"

  "궁녀 올시다."

  "궁녀는 이럴 때도 가마 행차냐?"

  "너는 민중전 있는 곳을 알겠지?"

  "모릅니다."

  "수상하니 나오너라.  중전 처소를 알리잖고는 못 간다."

  당황한 홍재희는 우는 상을 하면서 창 끝으로 위협하는 군졸에게 애원했다.

  "이 애는 내 누이 동생입니다.  오라비가 못나서 천한 궁녀 노릇을 시켰는데 마침 병중에 

이런 혼란이라 집으로 데려 가는 중이요."

  "정말이냐?"

  "정말입니다."

  다짐해 대답한 홍재희는 가마 안에서 정체를 숨기려고 병인인 척 얼굴을 숙이고 있는 민

비에게

  "얘, 어서 가마에서 내려라.  가마 탄 것이 오해를 받는 모양이다."

  민비가 가마에서 내리자 홍재희는 얼른 등을 돌려대면서

  "자아, 업고 가자."

하고 천연스러운 연극을 했다.  민비는 홍재희의 충성이 고마웠고, 그의 임기응변의 기지에 

감탄하면서 잠자코 그의 등에 업히고 병으로 고단하다는 듯이 얼굴을 그의 등에 파묻었다.

  이래서 잡혀 죽을 뻔한 민비는 간신이 살벌한 궁중에서 탈출해 나왔다.  민비가 이런 요

행으로 궁중에서 탈출하는 사이에 고종과 대원군 사이의 회견은 간단하게 끝났다.  고종은 

곧 대신들에게

  "지금부터 모든 공무(公務)는 대원군 앞에서 품결(稟決)하라."

하고 대원군에게 국정의 실권을 일임할 것을 밝혔다.  그리고 국왕으로서 이번 군란사건에 

대하여 자책(自責)하는 교서(敎書)를 발표했다.

  "오늘의 이런 전무(前無)한 변란이 일어나게 된 것은 나의 부덕(不德)한 탓이로서 하나도 

내 잘못이요 둘도 내 잘못이다.  이런 말을 하게 될 내 심정이 어찌 한심스럽지 않으랴.  제

신(諸臣)은 흥분한 군중을 잘 타일러서 조용히 물러가게 하라."

  이런 고종의 분부가 내리자 반란군민들은 대원군에게 정권이 다시 돌아온 것을 만족히 여

기고

  "대원위(大院位) 대감 만세!"

를 궁중이 진동하도록 불렀다.  순식간에 정권을 쟁탈한 대원군은 군중을 향해서

  "군민들의 진의(眞意)가 무엇인지 나는 잘 알고 있소.  나에게 국사를 맡아 보라는 상감 

분부가 내린 이상 여러분이 원하는 바에 따라서 모든 일을 선처하겠으니 안심하고 돌아가서 

군무와 생업에 종사하기 바라오."

  그러나 군중은 대원군의 해산명령에도 불복(不服)하고 궁중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민중전을 이 기회에 처단해야 물러 나겠습니다.  민중전을 잡아서 처단하는 날까지 궁중

에서 물러나지 않겠습니다."

  군중들은 궁중을 샅샅이 뒤지면서 소란을 계속했다.  대원군은 하는 수 없이 거짓말로 우

선 군중을 무마하려고 했다.

  "중전께서는 동란 중에 승하하신 것이 확인 되었다.  다만 체백(體魄)의 행방을 찾지 못하

고 있을 뿐이니, 그리 알고 해산해 돌아가라."

  동시에 민비가 살해될 때 입었다는 옷을 관에 넣고, 정식으로 국장(國葬)을 발표하는 동시

에 국장도감(國葬都監)까지 설치했다.  이로써 반신반의하는 반란군민은 해산해 돌아갔고 애

매한 전국의 백성들은 각종 풍설 속에 백립(白笠)을 쓰고 국상을 입었다.

  대원군은 일단 정권을 잡은 이상 빨리 자기 세력으로 정부를 개조하고 싶었다.  그리고 

또 민비가 살아서 숨어 있다손치다라고 장례식까지 공식으로 지내면 적어도 다시는 왕비로 

되돌아 오지 못할 것이며 생매장이나 다름없다고 안심했다. 

  "민비는 귀신같이 도망쳐서 살아 있으면서 대원군에게 복수할 음모를 하고 있다.  설영 

죽었다 해도 귀신으로서 원수를 갚을 무서운 여자다."

  세상에서는 이런 풍설이 돌았다.  대원군도 그 뒤에 민비를 정말로 죽여버리려고 사방으

로 수색했으나 행방이 묘연했다.


  [ 落照의 王家 ]   < 山中女王 >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落照의 王家 

    山中女王


   "중전마마, 급한 경우오라 무엄한 언동을 하였나이다."

  창덕궁 뒷문으로 민비를 업고 탈출하는데 성공한 홍재희는 민비를 등에서 내려놓으면서 

사과했다.

  "홍별감, 그게 무슨 말이요.  자아 어서 안전한 곳으로..."

  민비는 생명의 은인이라고 고마워하면서 빨리 피신할 곳으로 데려가도록 부탁했다.  마침 

퍼붓는 비에 궁녀로 변장한 여름 옷이 몸에 착 들어 붙어서 민비의 젊고 풍만한 살빛이 그

냥 드러나 있었다.

  "우선 윤태준(尹泰駿)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그 집은 안전할까?"

  "네, 제가 믿는 터라."

  홍재희는 민비를 화개동(花開洞)에 있는 윤태준 집으로 안내해 갔다.  거리에 범람하던 사

람들도 비를 피해서 모두 집안에 들어가 있었으므로 도망치는 민비에게는 다행이었다.

  비에 쪼록 젖은 초라한 모습의 민비를 윤태준의 집에선 당황하고 송구스러워하며 곧 골방

에 숨기고 옷을 갈아입게 했다.  민비는 밤이 되기를 기다려서, 홍재희에게 민응식(閔應植)

과 민긍식(閔肯植)을 몰래 불러다가 우선 신변 안전의 방도를 상의케 했다.

  "거리가 아직 소란하지?  반란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상감께서는?"

  "상감께서는 대원군에게 국정을 맡기셨으며, 대원군은 중전이 승하하셨다고 국상발표를 

했습니다."

  "아, 그 소식은 알고 있소.  아무래도 서울을 빠져서 시골로 숨어야겠는데 노자와 그밖의 

비용을 마련할 수 있소?"

  "네, 곧 마련하겠습니다."

하고 대답을 쉽게 했으나 세도하던 민씨가 모두 도망하는 판이라 그들도 돈을 준비할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주인 윤태준에게 부탁했고 윤태준은 조충희(趙忠熙)에게 돈 오백냥을 빌

려다 민비의 피란 비용으로 주었다.

  노자가 마련되자 민비는 동대문 밖의 이근영(李根永) 집으로 가서 민응식, 민긍식, 민영기

(閔泳驥)와 함께 피란민을 가장하고 여주(驪州)로 피란할 준비를 했다.  모든 준비가 된 민비 

일행은 십사일 새벽에 광나루로 가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민비는 생명을 유지하려고 창덕궁을 탈출해서 한강을 넘으면서, 멀리 북악산을 돌아보고 

비분강개했다.

  (운현궁의 원수를 갚고, 한강을 다시 건너서 환궁할 날은 언젤까.  무슨 고생을 하더라도 

내가 죽지만 않으면 꼭 원수를 갚겠다.)

  민비는 굳은 결심으로 자기를 격려했다.

  하인처럼 짐을 진 민응식, 민긍식이 뱃군에게 교섭했으나

  "장마로 불어난 이 큰 물엔 보통 때도 배를 못내요.  더구나 지금은 대원군이 일체의 피

난민을 건너선 안 된다는 엄명이 내렸소.  만일 들키면 잡혀 죽게요."

하고 배를 내려고 하지 않았다.  허술한 차림의 후행(後行)으로 가장(假裝)한 민영기는

  "물이 불었지만 당신들 솜씨로 못 건너겠소.  신행(新行)길이라 꼭 건너야겠으니 특별히 

부탁하오.  난리가 났다고 혼인까지 금하실 대원군도 아니실 거요.  선가는 후하게 주겠소."

  "혼행(婚行)도 딱하지만, 벌이 못하는 우리도 딱해요."

  이때, 민간 신부로 가장하고 가마 안에 있던 민비가 큰 금가락지를 빼어서 민응식에게 주

며 눈짓을 했다.  그는 그 묵직하고 빛나는 금가락지를 사공의 손에 쥐어 주면서

  "세상은 난리가 나도 혼인댁 경사는 지내야 할 거 아니요.  자아 누가 오기 전에 빨리 건

너 갑시다."

  사공들은 신부가 혼인 반지까지 빼어 주는데 동정한 듯이, 그러나 그 재물이 탐나서 못 

이기는 척하고 배를 냈다.

  "생원님, 뱃값으론 큰 마음 쓰셨지만, 나중에라도 피난민 건너 주었다고 대원군이 우리 목

을 잘라 버릴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나라일 잘하실 대원군께서 설마 그런 가혹한 벌을 내리시겠소?"

  민영기가 슬쩍 대원군을 추켜 올렸다.

  "말씀 맙쇼.  세도에 눈이 어두워서 중전마마까지 죽인 흉악한 시아버진데 우리 뱃사공 

따위는 파리 목숨만치나 생각하겠어요?"

  민비는 대원군을 미워하고 자기를 동정하는 이름 없는 백성이 고마웠다.  그처럼 물에 빠

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과도 같았다.  그러나 다른 동료 사공은 민비가 망해서 

마땅하다는 말도 해서 아찔하게 했다.

  대원군의 철통 같은 정보망과 경계망도 민비를 잡지 못하고 이처럼 한강너머로 탈출시켜 

버렸다.  그러나 이미 권력을 잡은 대원군은 이제 민비의 생사는 염두에도 없이 오래 굶주

렸던 정권 야망을 채우는데 분망했다.  우선 민비 일파를 몰아내고 곧 자기 당파로 새 조정

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의 정변(政變)은 군사의 국상문제로 조야의 물의가 분분

하던 때라 극도로 불안한 정국(政局)에서 대원군과 운명을 같이 하려는 인물은 구하기 힘들

었다. 

  신응조(申應朝)는 우의정을 시켰으나 처음부터 사퇴하고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또 조대

비 외척(外戚)의 거물인 병조판서(兵曹判書) 조영하(趙寧夏)도 더 중용하려고 했으나 실질적

으로는 협력하지 않고 방관태도를 취했다.  병조판서도 그만두고 싶었으나 그렇게까지 하면 

대원군에게 박해를 받을 것 같아서 그냥 정세 관망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대원군은 국민에게 신임 받을 만한 인물로 그의 새 조정을 확고하게 조직할 수 없

었다.  더구나 영의정 홍순목(洪淳穆)도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우선 부자체제(父子體制)로 임할 수밖에 없었다.  즉 그의 아들 이재면(李載冕)에게 

삼영(三營)의 대장(大將)을 겸임시키고, 호조판서와 선혜당상(宣惠堂上)까지 맡겨서 군권(軍權)

과 국고(國庫)를 장악시켰다. 이처럼 대원군의 신정권은 불안한 약체성(弱體性)을 면하지 못

했다.

  "민비가 살아서 반격준비를 하고 있다."

  "민비는 이미 청국으로 망명해서 청국이 전부터 미워하던 대원군을 끌어낼 공작을 하고 

있다."

  "청국에 간게 아니라 일본에 가서 청병해 가지고 와서, 일본 공사관을 불지른 대원군을 

몰아낸다더라."

  백성들 사이에는 그럴 듯하기도 하고, 또는 당치도 않은 유언비어(流言蜚語)가 횡행했다.  

대원군은 벼락 같은 정권회복은 했으나 심복 일꾼이 적었고, 국제정세가 불리하게 되자 고

독감과 불안감을 금하지 못했다.  대원군은 그럴수록 민비 일당에 대한 가혹한 숙청을 서둘

렀다.  우선 자기의 아들인 고종을 단단히 단속할 생각을 하고 사사로운 가인(家人)으로서 

고종을 대했다.

  십이일 밤에 대원군은 궁중의 조용한 방으로 고종을 불러놓고 아비로서 자식에 대한 엄숙

한 훈계를 했다.

  "너를 내가 임금을 시킨 것은 나라를 위하고 집안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는 간

악한 계집이 하자는 대로 해 나라를 이 꼴로 망쳐 놓았으니, 임금으로서 그런 용렬이 어디 

있으며, 또 이 아비에게 그런 불효가 어디 있을 수 있느냐?"

  특히 민비를 간악한 계집이라고 직접 욕을 했다.

  "아버님, 모든 것이 소자의 잘못입니다.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신성해야 할 궁중이 굿터, 유흥장으로 타락해 버렸고, 국정은 민가 일파의 세도로 부패했

고, 개화정책으로 일본세력을 끌어들였으니 이것이 매국망동이 아니고 무엇이냐."

  "소자의 힘으론 주위 사정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국정은 고사하고 궁중의 유흥장도 못막는 그런 임금, 그런 사내자식이 어디 있느냐?"

  대원군은 시아버지답지도 못하게 민비에 대한 원한을 풀려고 갖은 말을 했다.

  "모두 얕은 계집들의 소행이었습니다."

  "궁중에서 그런 잔당은 모두 없애 버려야 한다."

  "예"

  "다시는 그런 계집들에게 홀려서 안 된다."

  "예"

  고종이 민비를 계집들이라고 복수(複數)로 나무랐으므로, 대원군도 이미 죽었다고 발표한 

민비를 꼬집어 말하지는 않고 다시는 그런 계집들에게 홀려선 안 된다는 못을 박고 아들 고

종의 약속을 받았다.  대원군이 노골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만일 민비가 살아서 세력을 회복하고 재등장하더라도 너는 또 민비 농간에 홀리지 말고 

아비 나에게만 효자 노릇을 해라.)

  이런 의미였지만, 입에 올려서 말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의미를 가진 대원군으 

호령에 고종은 벌벌 떨면서 맹세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원군이 나간 뒤에 고종은 혼자 오열했다.  앞으로 자기의 지위와 생명이 어찌 

될지 불안했다.  아버지인 대원군에게 부정(父情)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고 오직 무섭기만 

했다.  따라서 민비에 대한 정이 그리워지기만 할 뿐이었다.

  고종은 민비가 어디서 살아 있기만 빌었다.  민비가 살아서 대원군을 다시 몰아내고 전과 

같은 왕실의 위세를 세워 보면 싶었다.  아니, 그것 보다도 민비와 도망해서 어떤 산 속에서 

농사꾼 부부로 함께 살았으면 얼마나 행복스러웠을까 하며 임금의 거짓 자리(虛位)가 귀찮

기만 했다.

  그러나 민비 처시하의 시절보다도 무력해진 고종은 대원군에게 감시당하는 궁중의 수인

(囚人) 같은 신세였기 때문에 사랑하고 존경하던 민비의 생사 소식을 수소문해 볼 길조차 

없었다.  대원군의 임기응변으로 국상까지 지낸 것은 반신반의였지만 민비가 살아서 서울을 

탈출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서울을 탈출한 민비는 운이 좋아서 건재했다.  아침에 광나루에서 한강을 넘은 민

비 일행은 망명(亡命)의 길을 강행군해서 그날밤에 여주로 가서 친정 민영소(閔泳韶) 집으로 

들어갔다.  그 집에 숨어서 며칠 지내면서 정세를 보고 있던 중

  "대원군이 민비를 잡으려고 전국에 밀정을 파견했다.  이 집 주위에도 수상한 놈이 기웃

거리고 있다."

  이런 소식을 들었으므로 밤중에 그 집을 떠나서 남한강(南漢江) 지류(支流)를 거슬러 올라

가서 장호원(長湖院)으로 피했다.  장호원에는 서울서부터 민비를 호위해 온 심상훈(沈相薰)

의 별장도 있었고, 민형식(閔炯植)의 시골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비는 장호원으로 몰래 

들어가서 민형식의 집에 은신하고 있었으나 세도하던 서울 민씨가 몰려 왔으므로 민비가 있

다는 비밀을 곧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민형식의 세도로 학대를 받았던 지방민들이 그에 대한 보복을 할 좋

은 시기라고 들고 일어났다.  장호원에 사는 장사(壯士) 정문오(鄭文五)가 주동이 되어서

  "우리를 못살게 하던 민형식의 집에 나라를 망친 민비가 와서 숨어 있다.  이 기회에 종

전의 원수를 갚자."

하고 난동을 일으킨 군중이 민형식 집을 습격했다.  그러나 이때도 운이 좋은 민비는 민속

하게 일행과 함께 다시 육십리나 산길로 도망해서 국망산(國望山) 밑의 한적한 산촌(山村)에 

이르렀다.  산촌은 경치가 좋았고 행인에 대한 인심도 좋았다.

  "국망산이란 이름이 좋습니다.  여기가 나라일을 다시 도모할 희망의 명당일까 합니다."

  일행은 민비를 안심시키고 당분간 그 마을에서 숨어 살기로 했다.

  "집세를 후하게 주겠으니, 저 집을 빌려 주시오."

하고 심상훈이 마을 노인에게 부탁 하자, 마을 사람들은 일행이 행세하는 서울 사람들 같아

서 의아스럽게 여겼다.  그리고 큰집의 주인은 먹을 것도 넉넉한 시골 선비였으므로 사랑에 

글방도 차려 놓았다는 핑계로 수상한 서울 사람에게 집 빌려 주기를 거절했다.  그래서 가

난한 사냥꾼의 집을 빌려서 살기로 했다.

  민비는 물론 신분은 숨겼으나, 피란은 사람이라 하고 돈으로 마을 부녀자들에게 선심을 

쓰면서 일류의 사교술로 산 속에서 여왕 노릇을 했다.  민비는 비록 망명중이었지만 유흥과 

미신의 기도로 적막한 피난살이의 심회를 위로했다.  그래서 국망산에 무엇을 비는 무당의 

굿소리와 술집의 잡가 소리로 마을이 점점 번거로와지자 시골서 학자 행세를 하는 훈장은 

민비 일행의 행동을 비난했다. 

  "허허, 서울 난리가 우리 산촌의 미풍양속(美風良俗)까지 어지럽히게 됐다.  그래도 피난해 

온 서울 양반들인 줄 알았더니 장사로 돈푼이나 번 잡된 중인들 같다."

  민비 일행은 그런 공격이 도리어 망명정객으로 의심 받는 것보다 나아서 고마웠다.  민비

가 국망산에 소원 성취를 기도하는 굿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마을 사람들은 몰랐다.  그리고 

부녀자들과 술자리를 벌이고 법석대는 것도 단순히 피난중의 객고(客苦)를 위로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런 태연스러운 유흥태도는 정치적인 망명가의 일행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한 

술책이기도 했던 것이다.  일행의 신하들도 민비에게 왕비에 대한 존경의 태도는 일체하지 

않았다.

  그러나 밤으로는 민비를 중심으로 조그만 망명정권의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열고 치열한 

음모가 거듭되었다. 

  "인제 흉선군(兇鮮君)도 반란 성공에 취해 있고 민심도 좀 가라앉았으니, 우선 상감께 중

전께서 무사히 생존해 계시다는 비밀 연락을 올려서 성심(聖心)을 위로해 드리는 시기인가 

합니다."

  "그렇소.  그러나 내가 있다는 소식만으론 상감의 마음을 더 걱정시켜드릴 뿐이니 흉선군

을 몰아낼 비책을 세워서 기뻐하시게 해드려야 하오."

  민비의 일념은 대원군을 몰아내고 당당히 환궁(還宮)하려는 욕망에 불타고 있었다.  흉선

군(兇鮮君)이라는 악칭(惡稱)은 흥선군(興宣君) 즉 대원군을 저주한 그들의 호칭(呼稱)이었다.

  <흉악한 조선의 폭군>이라는 뜻이다.

  "역시 청국의 이홍장(李鴻章)에게 밀사(密使)를 보내서 청병(請兵)해다가 흉선군을 죽이거

나 잡아가게 하는 것이 상책으로 아오.  국내의 우리 힘으론 도저히 조속한 만회를 하기 어

려우니까."

  민비는 그전에 세자책립(世子冊立) 문제도 청국에 밀사를 보내서 이홍장의 일갈(一喝)로 

대원군의 주장을 꺾어 버렸던 경험을 이때 되풀이 하려고 했다.

  "현명하신 방안입니다.  이홍장은 흉선군을 전부터 싫어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청국은 그

동안 일본에게 개국정책을 쓴 우리나라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있던 참이니, 이 때 국내의 

군란(軍亂) 수습을 청하면, 일본에 대한 경쟁으로 곧 응해 올 것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폭도들에게 공사관을 습격당한 일본은 그냥 있지 않겠고 그 책

임은 우리가 복귀한 후에도 문제가 될 것이오.  이에 대한 대책으로도 청국의 발언권을 세

워줄 필요가 있소."

  민비는 시골 산 속에서 피난해 있으면서도 외국의 힘을 이용하고 외국을 이간시키면서 자

기의 정권을 회복하려는 외교술책을 창안해 냈다.  이런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외교술책이 

앞으로 나라와 함께 자신의 생명까지 멸망시킬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이런 망명정권을 자처하는 음모에 참가하고 연관을 가졌던 인물은 함께 피난왔던 홍재희, 

민응식, 민긍식, 민형식, 민영기, 윤태준, 심상훈 등이었다.

  "그럼 누구를 상감께 밀사로 보낼까?"

하고 인선한 끝에, 역시 세상에서 제일 의심하지 않는 윤태준이 좋으리라고 결정했다.

  "궁중과 내외정세, 서울 민심을 살피고 상감께 나의 무사한 소식을 여쭈오.  그리고 대원

군의 불법반란을 청국에 빨리 보고해서 흉선군을 몰아낼 것을 청원하시도록 아뢰오."

  민비는 정식으로 임무를 부탁했다.  이런 임무를 맡은 윤태준은 서울로 잠입했다.  물론 

자기가 직접 고종을 만날 길은 없었으므로 교묘한 방법으로 민비의 비밀연락을 고종에게 전

달했던 것이다.

  "오오, 중전이 살아 있구나.  지금 형편으론 역시 청국에 응원을 구하는 것이 유일한 최선

의 방법이다."

  고종은 민비의 소식이 반가왔고 민비의 생각이 옳다고 여겼다.  이에 용기를 얻은 고종은 

비밀리에 민태호(閔台鎬), 조영하(趙寧夏)에게 상의하고 밀사를 보내서 천진(天津)에 주재하고 

있는 외교관 김윤식(金允植)과 어윤중(魚允中)으로 하여금 청국에 강력한 응원을 청하게 했

다.

  민비 일파의 이러한 내정간섭(內政干涉)의 자청은, 실제로 청국자체가 행동보다 시간적으

로 늦었지만 청국에게는 조선땅으로부터 출병을 정식 청원받았다는 명분으로 일본을 비롯한 

각국에 대하여 방패가 되었다. 


  [ 落照의 王家 ]   < 사라진 天下 >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落照의 王家 

    사라진 天下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서울주재 일본공사관이 방화되고 관원(館員) 십여명이 살해된 사

실은 시모노세끼(下關)로 피난 귀국한 하나부사(花房) 공사의 전보로 일본 정부에 보고되었

다.  일본의 국론은 격화돼서 정한론(征韓論)이 재연(再燃)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정변 성격을 알아보고 근본대책을 세우자는 신중론으로 기울어서 우선 다

음과 같은 당면 외교정책이 채택되었다.

1. 조선에 대해서는 국제법 범위 안에서 최대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할 것.

2. 전권위원(全權委員)으로 하나부사 공사를 보낼 것.

3. 전권위원은 육해군으로 호위할 것.

4. 이노우에(井上) 외무대신이 시모노세끼로 가서 직접 전권위원을 지휘할 것.

5. 반란의 원인과 성격을 세밀히 조사할 것.

6. 우선 부산과 원산의 일본 거류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군함을 파견할 것.

  조선에 대한 이러한 일본의 당면방침이 정해지자, 일본주재 청국공사 여서창(黎庶昌)은 곧 

본국에 보고하고 이 기회에 청국에서 빨리 군대를 파견해서 변란을 진정시키고, 이번 사건

을 계기로 일본이 조선에서 얻을 이권 획득을 방지해서 청국의 우선적 발언권을 확보하는 

것이 좋으리라는 건의도 첨가했다.  이홍장은 이 건의에 즉시 찬성하고 북양대신서리(北洋

大臣署理) 장수성(張樹聲)에게 북양함대(北洋艦隊)의 조선 출동을 명령했다.

  "일본을 앞질러 빨리 서울로 가서 무력으로 동란을 진압하라.  그리고 국왕의 청원대로 

대원군을 잡아오라."

  이런 명령을 받은 마건충(馬建忠)과 정여창(丁汝昌)은 속국(屬國)의 내란을 평정하려는 당

연한 종주국(宗主國)의 장군들처럼 군대를 거느리고 조선으로 향했다.

  청국의 함대가 조선에 닿기 전인 유월 이십일(고종 십구년)에는 일본측과 회담했는데 이

때 대원군은 정권을 잡기 전과는 딴판으로 일본의 항의에 사과하고 영구히 민비 시대에 체

결된 수호조약을 준수해서 양국의 친선을 도모하겠다고 머리를 숙이고 타협하지 않을 수 없

었다.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강경한 척왜론(斥倭論)으로 민심을 선동하던 대원군도 그런 명

분으로 일단 정권을 잡자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십여일 전까지 공약하고 장담하던 

척왜론을 친일정책으로 돌변시킨 것이다.  그리고 유월 이십육일에는 일본군함 금강호(金剛

號)가 인천에 입항해서 하나부사 공사가 군대와 함께 와서 조선 조정에 정식 항의를 하고 

일련의 회담을 할 예정이라고 부평부사 김낙진(金洛鎭)에게 통고했다.  이때 비로소 하나부

사 공사가 육해군을 거느리고 온다는 정보를 알게 된 조야에서는 깜짝 놀랐다.  그 군대는 

하나부사의 신변을 보호하는 동시에 시위행동이었으나 당장 조선을 쳐들어 오는 전쟁으로 

알고 민심이 흉흉해졌다.

  "일본이 쳐들어 온다."

  "일본 공사관을 쳐부실 때는 기세를 올리더니, 일본 군함이 쳐들어 오자 대원군도 벌써 

항복하고 화친을 애원했다지.  민비고 대원군이고 저희들 세도에만 급급하지 나라의 흥망엔 

관심도 없고 힘도 없다.  약한 백성만 언제나 세도가의 밥이다."

  식자들 사이에는 일체의 정색에 대한 불신의 탄식이 떠돌기까지 했다.

  그러나 일반이 두려워했던 일본군보다도 먼저 청국의 본격적인 파견군이 질풍같이 상륙해

서 서울을 휩쓸고 청장 원세개(袁世凱)가 조선 조정을 호령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유월 이십칠일에 청국의 북양함대 군함 세척이 하등의 예고도 없이 인천 월미도에 나

타났다.  일본 출병의 기선(機先)을 제(制)하고 조선 내의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목이었다.  

물론 그것은 계획 이후에 접수한 국왕 고종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고 책임을 전가(轉嫁)하는 

동시에 일본의 자극을 피하려고 일본과 조선과의 문제를 공정하게 조정한다는 구실을 통고

했다.  그러나 청국이 조선에 대하여 갖고 있는 종주국(宗主國) 행세를 막으려는 일본이 속

을 리가 없었다.

  이리하여 인천항에는 이해를 달리하는 일본군함과 청국군함이 서로 야심을 경쟁하듯이 검

은 연기를 토하고 있었다.  이런 정세를 본 미국에서 동양함대의 군함을 인천에 보내서 사

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민비와 대원군의 정권쟁탈의 내란은 마침내 외국들의 무력 간섭을 

자초(自招)하고 말았던 것이다.

  청국은 일본의 강경한 태도 특히 청국에 대한 자극을 완화시키려고 일본의 양해를 구하기

에 급급했다.  청국 파견군 사령관 정여창과 마건충은 일본 군함 금강호를 예방(禮訪)하고 

임오군란의 진상을 보고하는 한편 청국이 파병한 이유에 대한 양해를 구했다.  그들은 임오

군란의 경과와 성격을 다음과 같이 일본측에 보고했다.

1. 이번 변란은 대원군이 조조한 것이며 지난 해 가을에 그의 아들 이재선(李載

 先)이 음모로 처형당한 행동의 연장이다.

2. 대원군이 조종한 반란군민은 왕비와 중신들을 살해한 뒤에 국왕을 감금하였

 고 외교관계의 인물도 거의 살해 되어서 형언할 수 없는 혼란과 무력으로 주

 권의 존 재가 불명하다.

3. 지금 만일 신속한 조처를 취해서 왕권 회복을 서두르지 않으면, 배외정책의 

 원흉인 대원군이 재류 일본인을 몰살할 것이다.

4. 그렇다고 지금 일본이 병력으로 보복하거나 간섭하면 동양의 큰 불행이요, 

 서양 각국도 간섭할 것이니, 이때는 역시 긴밀한 관계에 있는 청국이 조정해서 

 원만히  해결하는 것이 좋다.  일본에 대한 체면과 손해배상을 최대한으로 보

 장해 주겠다.

  그러나 이러한 청국측과 제의에 대해서 일본측은

  "조정의 호의는 감사하다.  그러나 우리 문제는 당사국끼리 평화적 회담으로 해결하겠다.  

일본은 결코 무력으로 조선 국내 문제에 간섭할 의사는 없다."

하고 청국측의 제의에 반대했다.  청국측은 일본의 본의를 정탐하려는 예방이었고, 그 동정

에 따라서 최종 태도를 결정하려는 시간적 여유를 얻기 위한 수작이었다.

  그런데 일본의 태도가 청국의 조정에 불찬성인 것을 알아챈 정여창은 군함 위원호(威遠

號)로 급히 귀국했다.  정세보고를 하고 본국의 훈령을 받기 위해서였다.  청국에서는 정여

창의 보고와 건의에 따라서 육군 육영(陸軍六營)까지 추가 동원하기로 했다.

  그러나 정여창이 군함 두척을 인천항에 남겨두고, 한척을 몰고 귀국한 그날(29일)에 일본

공사 하나부사는 육군소장과 해군소장이 거느리는 군함 네척과 군대를 실은 수송선 세척으

로 당당히 인천항에 들어왔다.  그리고 시모노세끼에는 이노우에 외무대신이 출장해 있고, 

오까야마(岡山)에는 혼성여단(混成旅團)의 대병력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러한 청일 양국(淸日兩國)의 군사적 간섭과 시위에 대해서 대원군은 자기의 세력에 당

장 철퇴를 내리려는 청국측의 제독(提督)을 더 환영하고 일본측의 공사(公使)를 더 푸대접했

다.  그는 일본보다 청국이 더 자기 정권을 보호해 주리라고 착각했던 모양이다.

  아무리 그가 종래에 일본을 배척해 왔더라도 청국이 대원군을 숙청해 달라는 민비의 비밀 

청에 찬성하고 온 줄 알았으면 어떠했을까?  그러나 공사관 습격으로 격분해서 온 일본의 

위력이 두려워서, 청국의 간섭으로 일본의 양해 내지는 격퇴해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런 태도는 그가 뜻밖에 온 청국 군함을 영접하는 정부대표로 병조판서(兵曹判書) 조영

하(趙寧夏)와 공조대신(工曹大臣) 김홍집(金弘集)을 접견대관(接見大官)으로 내보내서 정중한 

예를 표시한데 비해 일본공사에게는 아주 격이 떨어지는 반접관(伴接官) 윤성진(尹成鎭)을 

보내서 냉대했던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원군은 청국 군함의 접견대관으로 보낸 조영하와 김홍집에게까지 이 미묘한 외

교 공작에서 배반을 당했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대원군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이미 세계 무대에서 후퇴된 청국보다 신흥강국인 일본에게 더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청국의 마건충 장군과 회담한 뒤에 밤중에 하나부사 일본공사와 비밀 회견을 자청

하고 일본군이 청국군보다 먼저 입경(入京)하라는 권고까지 했다.  그들의 생각은 보기 싫은 

대원군의 세력을 일본의 힘으로라도 없애 버리려는 반발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청국군 마건충의 본심은 모르고 배일을 주장하는 대원군을 도와서 일본의 세력을 

억제 하려는 줄로 알았다.  즉 대원군이 청국에게 표시한 언사와 대원군에게 의무적으로 보

내는 편지를 전해 받고 그런 착각을 했던 것이다.  좌우간 그들까지도 대원군의 실각을 바

라고 하나부사에게

  "대원군이 정권을 전횡하여 국왕의 의사는 하나도 통하지 않소.  공사가 만일 입경한다면 

일개 대대쯤 병력이래야 위엄이 설 것이요.  우리가 일본군의 입경을 비밀로 국왕에게 주상

(奏上)할 테니 그때를 기다리시오."

  이쯤 되면 완전한 이적밀정(利敵密偵)과 다를것이 없다.  민비가 청국군의 파견을 청한 것

이나, 이들이 일본군의 입경을 청한 본심은 오직 대원군을 축출하려는 정권 사욕에서 출발

했다는 점에서는 똑 같다.  그러나 어윤중의 일기에는 그 후에도 조영하는 거의 매일같이 

청국의 마건충과 만났다 하니 조영하는 청국에게도 일본에게도 다 같이 대원군 제거 공작으

로 암약했다는 추측이 있을 만하다.

  하나부사 공사는 조선 조정의 양해도 기다리지 않고 칠월 이일에 일개 중대 병력을 먼저 

양화진(楊花津)에 보내서 대기케 하고, 삼일에는 호위병을 거느리고 밤에 입경해서 진고개의 

전 금위대장(禁衛大將) 이종승(李鐘承)의 집을 숙소로 정하고 들었다.

  대원군은 그때까지 서울 시내의 숙사가 미비하다는 핑계로 하나부사 공사의 입경을 차일

피일 연기해 왔으므로, 이에 노한 하나부사는 조정의 초청도 없이 그냥 들어왔던 것이다.

  그렇게 된 뒤에야 당황한 대원군은 하는 수 없이 식료품을 선물로 보내서 환영의사를 표

했으나 하나부사는 그것을 받지 않고 도로 보냈다.  그에게는 대원군이 안중에도 없었다.  

형식적으로라도 국왕 고종과 직접 담판을 강요했던 것이다.

  하나부사는 칠월 칠일 육해군 사령관을 대동하고 이개 중대의 호위로 창덕궁으로 들어가 

중희당(重熙堂)에서 고종을 만나고 군란 처리에 대한 일본측의 일곱 개 요구조건을 냈다.  

그리고 삼일 이내로 만족한 회답을 해달라고 한 뒤에, 대원군과는 비공식으로 잠간 만나고 

창덕궁을 물러나왔다.  그러나 대원군은 칠월 구일에야 산릉간심(山陵看審)을 핑계로 협상 

연기를 통고했다.  이에 격분한 하나부사 공사는 곤노오(近藤) 사무관만 남기고 인천으로 떠

나버렸다.  대병력이 있는 인천으로 철수한 것은 분명한 위협 행동이었다.

  대원군은 청국의 마건충에게 밀서(密書)를 보내서 일본측의 요구조건을 알리는 동시에 하

루속히 서울로 와서 조정해 달라고 애원했다.  이때 청국측은 오장경(吳長慶)에게 인솔되어 

증파(增派)된 사천명의 병력이 군함 다섯척에 실려서 남양만(南陽灣)에 도착해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보다 소수의 일본병은 인천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그들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

해서 좀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남양부(南陽府) 이명재(李命宰)와 회견하고 고종에게 

정식으로 서한도 상정(上呈)했다.

  대원군으로부터 빨리 입경하라는 초대를 받은 청국군은 십일 해질 무렵에 당당히 입성했

으며, 대원군도 아들 훈련대장 이재면과 함께 청국군의 숙소로 제공한 남별궁(南別宮)으로 

방문하고 정중한 위문을 했다.

  서울과 인천 부근에는 일본군과 청국군이 경쟁적으로 대치되어 있었고, 인천바다에는 미

국과 영국의 군함도 와서 조선의 경동하는 정세를 감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세태이자 <고

금미문지사(古今未聞之事)>로 민심이 흉흉했다.

  대원군은 종전의 쇄국정책은 흔적도 없이 그 자신도 청국군에게 일본의 압력을 조정해 달

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청국군은 이십일에 대군을 거느리고 입성했는데 일본군의 호위 부

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압도적 부대였다.

  "십삼일에 대원군을 예방하오리다."

  청군측에서 찾아가겠다는 통고를 하자, 대원군은 마치 구세주라도 오는 듯이 국빈대우의 

의식 준비와 호화로운 연회를 마련하고 기다렸다.

  그날이 되자 오장경, 정여창, 마건충, 원세개 등은 청국 군대가 장안을 점령한 가운데 위

풍도 당당한 기마(騎馬) 모습으로 운현궁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형식적으로는 경의를 표한

다는 예방이었지만 대국(大國)의 지배자로서 속국(屬國)의 소관(小官)을 순찰하러 임하는 태

도였다.

  대원군의 융숭한 대접을 받은 뒤에 그들 사이에는 의례적(儀禮的)인 필담(筆談)이 한문으

로 교환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지막으로

  "군무에 대하여 상의할 것이 있으니 오흠사(吳欽使) 장중(帳中)까지 왕림해 주시오."

라는 말을 남겼다. 

  오장경의 주둔군 진중으로 오라는 명령이었다.

  "네 고맙습니다."

  대원군은 이런 명령조의 호출에 자존심이 상했으나 그들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처지였

으므로 혼연한 승낙을 했다.

  이때 장안에는 이미 청국군이 쫙 깔려 있었다.  그들은 군란의 잔당을 경계하고 청국의 

대관을 보호하며 장안의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이었으나 도처에서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자

를 능욕하는 등 마치 적국의 서울을 전쟁으로 점령한 긋이 갖은 행패를 부렸다. 

  "겁냈던 일군은 오히려 온순한데, 믿었던 청군이 장안을 점령하고 이런 오랑캐 짓을 한다.  

일군의 힘을 빌려서라도 저놈들을 몰아내 주었으면 좋겠다."

  백성들은 당장의 피해만 생각하고 청군을 저주했다.  부녀자들은 쥐구멍을 찾아서 숨고, 

슬금슬금 성 밖으로 피난하는 사람이 어느덧 몰려서 혼란한 광경을 이루게까지 되었다.  그

러나 대원군은 청군 졸개들의 이러한 행패에 항의할 생각은 꿈에도 없고 그들로 하여금 일

본을 견재하려는 일념에서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청탁을 하려고 남대문 밖의 남단(南壇)

에 진치고 있던 오장경의 진중으로 찾아갔다.

  오장경과 마건충은 대원군을 정중히 환영했으므로 대원군은 매우 만족한 표정으로 안심했

다.  인사가 끝난 뒤에 소위 군무(軍務)를 상의하자던 필담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선 무섭게 굴던 운현궁 호랑이가 외국군의 함정에 스스로 빠지고 말았던 것

이다.  청국에서는 이미 국왕 고종의 이름으로 민비의 비밀 청원을 받고 있었다.  그것은 불

법 군란을 일으키고 정권을 약탈한 그를 죽이든지 청국으로 납치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 부탁을 받은데다가 현지에 와서 보니 대원군에 대하여 정계나 국민이 지지하지 않는 

실정을 알았다.  그런데다가 청국군은 생각했던것 이상으로 일본의 태도가 강경하고 무력까

지 개입시켜서 소위 <조정>하려는 청국에 대해서도 노골적인 불만을 표하고 은연중에 위협

을 하고 있는데에 당황했다.  일본과는 충돌을 피하면서 조선에 대한 발언권을 일본과 적당

히 분배해 갖는 것이 현명한 외교전략으로 삼고 따라서 청국군은 일본과 흥정하는 미끼로서

도 대원군의 희생이 필요했다.

  "무모한 군란을 일으킨 원흉 대원군을 우리가 납치해 갈 테니, 그 뒤에 조선의 정국을 안

정시키는 것은 동양평화와 우리 양국의 공동이익이 될 것 같다.  이 점을 일본서도 양해하

라."

  이런 비밀 제안이 청국측으로부터 일본측에게 있었다.

  "현재로선 대원군에게 책임을 추궁해야지, 그를 귀국으로 잡아 가면 누구를 상대로 담판

을 하겠는가?"

하며 일본측은 불신을 표시했다.

  "국왕과 직접 하면 된다."

  "국왕이 무슨 실권이 있느냐?"

  "대원군만 추방하면 평화외교를 주장하던 여걸 왕후 민부인이 환궁해서 다시 섭정으로 들

어 앉을 것이다."

  "민비가 살아 있는가?"

  "살아 있다.  대원군을 잡아 가라고 우리에게 청한 것도 민비의 비밀 연락이다.  그것이 

국왕의 명의로 되어 있고 또 국왕의 본의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대원군을 납치해 가는 것

은 합법적이요, 국왕의 친정(親政)을 도와주는 우방(友邦)의 도의가 아닌가?  대원군을 지금 

상대로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도 불리하고, 조선 국내의 혼란을 조장할 뿐이다."

  "음, 그럼 귀국의 책임으로 좋도록 하라.  우리와는 관계 없는 일이다.  후일에도 귀국의 

이런 비공식 이야기는 피차 비밀로 하자."

  드디어 일본도 대원군을 청국으로 잡아간다는 청국의 제안에 찬동했다.  일본으로서는 일

본에 대한 당면의 적인 대원군에게 직접 항복을 받지 못하는 것이 불만이기도 했으나 생존

한 민비가 다시 집권을 하고 종전대로 일본과의 친선정책을 쓴다면 도리어 시끄럽지 않게 

일본의 체면도 서고 실리도 거둘 것 같았다.  그리고 이 문제로 당장 청국과의 관계를 악화

시키기도 싫었던 것이다.

  대원군은 고종과 민비를 비롯한 국내 음모와 일본과 청국의 국제 야합으로 자기를 외국으

로 잡아 가려는 것도 모르고 오장경의 군문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이런 대원군을 상대로 한 청국군 장군의 필담은 점점 죄인 심문과 같은 내용으로 발전해 

갔다.  처음에는

  "귀국의 군제(軍制)가 약해 보이는데 귀국도 삼면이 바다이니 육군보다 해군을 증강하는 

것이 어떻소?"

  "당연한 말씀이나 국가 재정이 아직 외국과 같은 신식군함을 장만할 여유가 없소."

  "일년에 한척씩만 마련해서 삼사년 후에 삼사척만 돼도 좋지 않겠소?"

  "금후에 생각해 보겠소!"

하고 마치 순수한 군비문제로 조선에 동정하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각하는 이번에 반란을 일으킨 목적이 무어이요?"

하고 갑자기 중대한 심문을 시작했다.  대원군은 벼락을 맞은 듯이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했

다.  그러나 그의 호통하는 버릇도 여기서는 통용시킬 수가 없었다.

  "내가 무슨 반란을 일으켰나요?  오직 소란한 정계와 민심의 뒷 수습을 했을 뿐이요."

  "폭력으로 정권을 잡고, 국정을 각하의 마음대로 할 목적이 아니었소?"

  "아니요, 민비 일파의 세도에 반대한 군민이 혁명을 일으켜서 시국의 수습이 어려워지자, 

국왕이 나로 하여금 국정의 중책을 위임한데 지나지 않소."

  대원군은 자기가 반란과는 상관 없고, 국왕의 뜻으로 합법적인 정권을 위임 받았다는 구

구한 변명을 했다.

  "허허, 각하가 그런 비겁한 소리를 할 줄은 몰랐소.  떳떳한 일이면 그런 변명은 하지 않

으실 텐데.  역시 반란이 불법이었다는 가책이 있어서 그런 변명을 하는 것이요.  잘못했으

면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사대부(士大夫)답지 않소?"

  대원군은 개인적인 모욕까지 당했으나 이 외국 장군의 심판에 쩔쩔매기만 했다.  그러나 

상대바의 추궁은 더욱 준열해지고 죄인 취급까지 했다.

  "귀국의 국왕전하는 우리 황제폐하께서 책봉(冊封)한 임금이요.  그런 국왕을 위협하고 왕

비를 살해한 것은 이 나라에 대한 대역(大逆)일 뿐 아니라 우리 황상(皇上)께 대해서도 중대

한 불경(不敬)이요.  마땅히 중죄를 받아야 하오."

  "..."

  대원군은 자기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듯한 청국 장군에게 아무런 항변도 하지 못했다.  그

러나 한참 후에야 반문했다.

  "장군은 나를 죽이겠단 말이요?"

  "내야 어찌 각하를 죽이고 살릴 권한이 있소.  귀국의 국왕과 우리 황제께서 처분하실 문

제지요.  다만 각하가 국왕과 부자지간이니까 용서할 수도 있지만, 우리 황상께 가서 사죄하

고 또 각하의 서투른 외교에 대하여는 황상의 유지(諭旨)를 받을 필요가 있소."

  대원군은 청국 장군이 자기를 청국으로 잡아 가려는 - 외국으로 귀양 보내려는 계획을 비

로소 알았다.  대원군은 죽어도 고국에서 죽고 싶었다.

  "우리나라 일은 잘하건 못하건 우리가 할 권한이 있소."

  "허허. 그야 잘하면 그래도 좋지만 잘못해서 중대한 국제문제가 생긴 이상 종주국(宗主國)

의 입장에서 좌시(坐視)할 수는 없소."

  "..."

  "빨리 우리나라로 가서 황상께 사변 경과를 보고해 올리고 적절한 유지를 받고 돌아오시

오."

  "..."

  "내 권고에 불복이요?"

  오장경은 위압적으로 추궁했다.

  "후일 적당한 때에 그리하겠소."

  우선 당장 끌려가는 것이라도 피하고 싶었다.

  "후일이라면 언제요?"

  "우선 내외 중대문제를 수습한 뒤에"

  "각하의 우리 황상을 가 뵙는 것이 중대문제 수습의 첫길이요."

  "지금 내가 없으면 국정을 어찌 하란 말이요."

  "나라엔 당신밖에 인물이 없소?  국왕이 친히 보실 것 아니요?"

  각하라고 부르던 청국 장군은 당신이라고까지 경멸하듯이 불렀다.

  "국왕께서 중대 문제를 친히 보실 수도 없고"

  "당신도 참 말귀를 못 알아 듣는군요. 당신이 있기 때문에 현재 내외문제가 더 혼란에 빠

지고 있소.  잠시 어려운 자리에서 피해 쉬시오.  신변보호는 책임지겠으니"

  "그러나..."

  "문답은 끝났소.  오늘 밤에 남양만으로 가서 우리 군함을 타고 천진으로 가시오."

  오장경은 병정들을 불러서 대원군을 곧 남양만에 정박중인 청국 군함까지 호송하라는 명

령을 내렸다.  청국 병정 십여명은 이미 대기시켰던 초라한 가마에 대원군을 잡아 태우고 

삼엄한 호위로 영문을 나섰다.  뒤에는 정여창이 말을 타고 직접 감시역으로 따라갔다.  그

리고 다음 날에는 새 정권의 제이인자인 대원군의 아들 이재면도 남별궁에 감금하는 전격적

인 조치를 취했다. 
  
  "대원군은 납치되고, 그 아들은 감금되었다.  대원군의 삼일천하(三日天下)도 제가 모셔들

인 청국군의 손으로 끝났다.  인젠 숨어 있던 민비가 또 나타나겠지.  젠장 우리 백성들은 

시아비, 며느리 싸움 등쌀에 이래 저래 죽어만 난다."

  백성들은 대원군의 삼일천하도 별로 환영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민비의 재등장도 탐탁하

게는 여기지 않았다.  장안에서 멋대로 행패 부리는 것은 대원군 부하도 아니요, 민비의 부

하도 아닌 청국 병정들이었다.  이때 청국 장군 정여창은 당당한 포고문을 발표했다.

  "조선과 일본의 국교를 조정하기 위해서 대원군은 청국 황제폐하의 유지를 받으러 천진으

로 떠났다."

  이처럼 청국군에게 납치된 대원군은 군함 위원호로 천진으로 압송되었다.  천진에서는 총

리대신 이홍장과 외무대신 주복(周馥)에게 엄중한 문초를 받고 수일 후에는 황제의 명령이

라고 해서 멀리 보정부(保定府)로 귀양을 갔다.

  이역 만리에 귀양간 대원군은 언제 암살될지도 모르는 몸으로 망연한 귀국의 날을 기다리

면서 한숨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그는 이때 비로소 정권 야욕을 피동적이나마 단념하

고 난초그림과 술로 풍류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그의 난초그림은 중국에서도 이름을 떨치게 되어서 청국의 풍류문화인들과 사귀게 되었는

데 이것이 그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러나 그의 배소(配所)에는 군대가 배치되어서 엄중한 

감시를 하고 있었으며 그 뒤에 민비가 그 곳까지 보낸 감시원들의 감시도 받아야 했다.


  [ 落照의 王家 ]   < 宮中亂舞 >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落照의 王家 

    宮中亂舞


   대원군을 청국으로 납치해 가고 그의 아들 이재면까지 감금해 버린 청국군은 완전히 군

정(軍政)을 실시하고 있었다.  장안의 성문 수비는 물론 궁궐에까지 호위 명목으로 청군이 

주둔했다.  그리고 일본에게도 조정이라는 명목으로 생색을 냈다.  조선에는 전권대신 이유

원(李裕元), 전권부관 김홍집(金弘集), 일본에서는 공사 하나부사가 인천항에 정박한 일본군

함 비예호(比叡號)에서 정식 회담을 열었다.  회담은 삼일간 진행되었는데 결국 일본측의 요

구대로 결정되었다.  칠월 십칠일에 조인된 소위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의 육개조는 다음과 

같다.

    1. 오늘부터 이십일 안으로 조선국은 흉도를 체포하고 괴수를 엄중히 처벌할 것.

    2. 일본국의 관리로서 살해당한 (십삼명)자는 조선국이 예장(禮葬)할 것.

    3. 조선국은 오만원을 지불하여 피해자 유가족 및 부상자를 위자할 것.

    4. 흉도의 폭동으로 일본국이 받은 피해 및 공사를 호위하기 위해서 파견한 군사비 

     중의 오십만원을 조선국이 오개년 내에 완납할 것.

    5. 일본 공사관에 호위 군대를 약간명(사실은 일개대대)을 두어서 경비할 것.

    6. 조선국은 대관(大官)을 특파하여 국서(國書)를 보내서 일본국에 사과할 것.

  한편 청국군은 일본과 제물포조약이 조인된 그날인 칠월 십칠일을 기해서 반란군을 소탕

한다고 행동을 개시해서 왕십리(往十里)와 이태원(梨泰院)의 조선군 부대를 습격하고 일백 

칠십여명의 조선군대를 습격하고 일백 칠십여명의 조선군대를 체포하여 무차별 학살하고 반

란군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관내의 집을 침입해서 살육과 약탈과 강간을 자행했다.

  일본측에서는 조선 조정에서 약속한대로 일본인을 살해한 범인으로 손순길(孫順吉) 등 세

명을 일본관리 입회 아래 목을 베었다.  그리고 포도청에서는 반란 주모자로 김장손(金長孫) 

등 여덟명을 체포해서 대역죄(大逆罪)로 사형을 집행했다.  그리고 고종도 부덕(不德)을 자백

하고 민심의 안정을 호소하는 교서(敎書)를 발표했다.  이때의 교서는 고종 스스로 범하였다

고 팔대 죄목(八大罪目)을 들어서 국민에게 사과했는데, 이것은 전제(專制) 시대의 제왕으로

는 이례적인 일로서 고종이 얼마나 선량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에 이런 선량한 임금에게 유능한 충신이 있었다면, 임오군란(壬午軍亂)은 오히려 전화

위복(轉禍爲福)의 계기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민비가 다시 등장해서 정권을 휘둘렀

으므로 군란 이전과 조금도 달라질 수 없었던 것이다.

  "대원군이 청국으로 잡혀 갔으니, 빨리 민중전을 모셔 오자."

  민씨 일파에서는 새 세상을 만났으므로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민씨 일파에서는 

이 희소식을 알리려고 힘세고 걸음이 빠른 장사(壯士) 이용익(李容翊)을 민비 피난처로 파견

했다.  국망산(國望山) 신령에게 득세환궁(得勢還宮)을 빌면서 음모를 하고 있던 민비는 곧 

일당과 함께 장호원으로 나와서 상경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대관들이 왕비봉영(王妃奉迎)차 

급행해 갔고, 청장 오장경은 부하 군대 백여명까지 호위로 파견했다.  그리하여 죽었다던 민

비가 팔월 일일에 청국군 호위로 서울에 도착하게 되자 문무백관이 성 밖까지 나가서 영접

하는 가운데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군란 때 궁녀의 변장으로 홍재희 등에 업혀서 새양쥐처럼 비에 젖어 탈출할 때와는 천양

지판의 호화로운 환궁 광경이었다.

  "허허, 팔자에 없는 충성으로 억지 국상을 입었더니, 백립(白笠) 값만 손해 났구나."

  오십여일 동안 백립을 쓰고 국상을 입었던 백성들은 민비 생환의 소식을 듣자, 우선 우롱

당한 백립값이 아까왔던 것이다.

  "상감도 민비도 좀 삼가야 할 때가 아닐까?"

  이런 여론은 조정 일부에도 있었고, 백성들도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민비는 곧 다시 정

권을 잡고, 그런 말을 한 고관을 징계하는 동시에 자기 일파로 새 조정을 만들었다. 

  그러나 민비 일당의 거물들이 군란으로 많이 희생당했으므로 희생을 면했던 민족(閔族)의 

태호(台鎬), 응식(應植)과 피난시의 중신들을 중심으로 등용하고, 조영하(趙寧夏)을 청국황제

에 대한 사은사(謝恩使)로 북경에 파견했다.  그리고 대원군의 잔당에게 피비린내 나는 보복

을 감행했는데 정현덕(鄭顯德)과 이경하(李景夏)도 이때 잡혀 죽었다.

  그리고 일본에는 사죄사(謝罪使)를 보냈으므로 독립국의 위신은 땅에 떨어져 버렸다.  뿐

만 아니라 일본 군대가 돌아가자 장기 주둔한 청국군은 조선의 주권을 무시하고 사실상의 

종주국(宗主國) 군정(軍政)으로 민비 정권을 지휘했던 것이다.

  워낙 무력한 고종은 민비를 총애하는 개인적 행복을 되찾았겠지만, 민비의 종전과 같은 

독재에는 조금도 간섭할 용기도 수완도 없었다.

  군란 후에 청군의 위력으로 전멸된 군사는 청장 원세개의 지휘하에 새로 천명의 군대를 

모집해서 보충했는데 두 개의 군영(軍營)을 설치했다.  그리고 명칭은 <신건친군영(新建親軍

營)>이라고 했다.

  훈련은 청군 장교가 맡고 무기도 청군의 무기를 사용했다.  군란 전에 일본식 훈련을 받

던 일부의 별기군(別技軍) 대신 이번에는 모든 조선군이 청국식으로 훈련을 받았으며, 그 통

솔권까지 청국의 원세개가 장악하고 있었다.

  군사까지 이렇게 청국에 예속되었으므로 국정 전반이 그들의 감독 지도하에 놓이게 되었

다.  조선군까지 청국의 훈련 지휘하에 들게 되자, 일본측에서는 겉으로는 방관했지만 속으

로는 불평만만했다.  이런 분위기를 완화하기 위해서 일본의 체면도 세워 주려는 형식적 연

구까지 했다.

  즉, 시월 초에는 창덕궁 안의 춘당대(春塘臺)에서 고종친람(高宗親覽)의 외국군 연병식(演

兵式)까지 거행했다.  하루는 청국군의 연병식을 하루는 일본군의 연병식을 했으니 일국의 

궁중에서 외국군의 시위경연(示威競演)을 시킬 만큼 민비 정권은 사대주의(事大主義)의 최대 

추태를 폭로하고 말았던 것이다.

  고종이 민비를 다시 맞기 전에 국민에게 사죄한 선정(善政)의 관심은 씻은 듯이 사라져버

렸다.  조정과 지방 관청에는 민씨 일파와 민씨에게 아부하는 무지몽매한 무리만 등용했다.

  그 일례로서 민비가 피난 때 공을 세운 자들의 특별 등용의 이야기는 항간의 웃음거리가 

되기까지 했다.  윤태준(尹泰駿)과 이조연(李祖淵)을 고관으로 등용하려고 했으나 그들은 과

거에 급제한 적이 없으므로 남의 눈에 거북했다.  그래서 그들만을 위한 엉터리 과거를 보

여서 많은 선비들을 골탕먹였다.

  "이번엔 문벌과 지방차별 없이 실력 있는 인재를 뽑기 위해서 과거를 보인다."

  과거의 취지는 그러했지만 거의 백지를 낸 윤태준과 이조연 두 명만을 급제시켜서 높은 

관직에 등용했다. 

  "아무리 여자 염치지만, 그런 야한 수작으로 만천하의 선비를 우롱할 수가 있는가?"

  대원군의 강적이던 유림은 이런 민비 처사에 대해서 전보다도 심한 경멸과 반발을 느꼈

다.  그러나 민비는 윤태준과 이조연같이 문벌도 없고 자격도 없는 자들을 과거에 급제시켜

서 피난 시절의 공을 표창했다.  그래서 이때의 사기과거(詐欺科擧)를 <민비의 이인과(二人

科)>라고 빈정댔다.

  이보다 걸작으로 <무당 봉군(巫堂封君)>이라는 피난 생활과 얽힌 민비의 미신일화(迷信逸

話)도 있다.

  피난했던 산속 마을에서도 민비는 무당의 굿을 좋아했는데 이 시절에 박씨라는 영리한 무

당이 있어서 민비의 신임을 받았다.  무당 박씨는 민비가 비록 신분을 숨기고 있었으나, 인

품으로나, 주위에 모시고 있는 가족들이 보통 서울 사람이 아닌 것을 보고 갖은 수단으로 

민비의 환심을 사려고 간사스러운 무당의 수단을 부려서 민비의 마음을 족하게 했다.

  무당은 시골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문을 듣고 장차 민비가 세도를 하게 되면 서울로 따

라가서 한몫 보려는 꿈을 꾸었다.  민비일 줄은 그의 점괘로도 알아 맞추지 못했으나 남들

의 소문으로 민씨 일문의 어떤 재상집 부인쯤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장호원 민형식 집에 있다가 거기서 민형식에게 학대 받던 주민들에게 봉변을 당하고 쫓겨

왔기 때문에 그만 신분 짐작은 짐작은 무당이 아니라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무당은 피난 살림답지 않는 민비의 돈 씀새를 알아내고, 장차 서울까지 따라가서 대관집 신

세를 지려고

  "마님 신관이 참 훌륭하십니다.  지금은 세상이 어수선해서 이런 산골에까지 오셔서 고생

하시지만, 멀지 않아서 서울로 돌아가셔서 귀하게 되실 것입니다."

  "귀하게 되다니, 공연히 남의 마음만 들뜨게 하는 게 아니요?"

  "제 관상과 점은 영험합니다.  이래도 관운성제(關雲聖帝)님 신령의 딸입니다.  마님께서 

장차 귀하게 되시면 제 점괘를 잊지 마십시오.  그러면 액운이 풀리도록 치성을 올려 드리

겠습니다."

  "무당 말대로 귀하게만 되면 신세를 갚고 말고.  그러나 나는 남편도 자식도 없는 젊은 

과부인데, 앞으로 무슨 수가 있어서 귀하게 되겠소."

  "아닙니다.  이번 서울 난리에서 큰 화를 면하고 피난하신 것도 관운성제님의 신조(神助)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서울에서 무슨 화를 면했다는 거요?"

  "다른 민씨댁 대감들이 많이 참변을 당하셨지만, 마님은 영특하신 관운성제님 인도로 이

곳까지 오셨습니다."

  민비는 이 무당의 말이 맞는다고 반하기 시작했다.

  "관운장 신령이 나를 구해서 이곳으로 인도했다고?"

  "네 그렇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소?"

  "제가 국망산에서 관운성제께 기도 올리다가 잠간 눈을 감았더니, 당신의 딸로 태어난 저

에게 현몽해서, 서울에서 귀하신 부인을 국망산 밑으로 인도했으니, 네가 가서 뵙고 인도해 

드리라고 일러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앞으로 관운성제님 대신 마님을 위해서 기도 하겠

습니다."

  "아, 고마워라.  그러나 피난 중이라 복채도 넉넉히 못 주는 것이 안타깝소."

하고 민비는 시골 부잣집에서도 받아 보지 못한 큰 돈을 주었다.

  "마님, 이렇게 후하신 복채를 주시면 황송합니다.  피난 중 용채로 쓰시고, 저에 대한 복

채는 서울 가셔서 제 기도대로 후하게 되신 뒤에 주십시오."

  "아냐, 그땐 또 그때고, 이건 적지만 내 호의니까 받아 둬요."

  그래도 무당 박씨는 사양하다가 못 이기는 척하고 받았다.  민비는 복채에도 담백하면서 

자기를 위해서 좋은 점을 쳐 주고 앞으로도 복을 빌어 준다는데 반해 버렸다.

  이렇게 해서 민비의 마음을 혹하게 한 무당 박씨는 다른 무당과 짜고, 자기가 관운성제님

의 딸이며 자기들의 스승이라고 선전하게 해서 더욱 민비의 신임을 얻고, 그들과 함께 민비

로부터 후한 복채를 받아서 나누어 먹으려고, 한 이레만큼 국망산에 기도굿을 올렸다.

  그러는 동안에 그 부인이 아마 죽었다는 중전마마가 피난해 온 것인지도 모른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그 소문을 들은 무당 박씨는 은근히 민비의 정체를 떠 보았다.

  "마님 제가 지난 밤에 또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무슨 길몽인가?"

  "네, 마님을 위한 길몽이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큰 꿈이라 마님께도 말씀하기 어렵습니다."

  "나를 위한 큰 꿈이라면 삽시다."

  "돈으론 팔 수 없는 큰 꿈입니다."

  "열냥쯤 주면 팔겠소?"

  "만냥 꿈이지만..."

하고 무당은 웃어 보였다.

  "궁금하니 어서 들려 줘요."

  민비는 조급하게 재촉했다.

  "실은 관운성제가 현몽해서 하시는 말씀이 국망산은 나라의 대운(大運)을 원망(願望)한다는 

명당이다.  이 명당에 오셔서 정성으로 기도하시는 분은 나라를 위한 귀인이다.  팔월달에는 

그 분에게 대운이 형통하실 테니 너도 모시고 서울로 올라가서 잘 모셔라 하는 계시(啓示)

를 내리셨습니다."

  무당은 심중하게, 민비가 중전인가를 떠보려고, <나라를 위한 귀인>이라는 말을 하고 민

비의 표정을 살폈다.

  "내가 나라를 위해서 귀인이라고?  그야 어떤 사람이 나라를 위하지 않을까?"

하면서 웃는 민비에게

  "그런 보통 의미라면 관운성제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마님께서 만일 

규수였다면 꼭 중전마마로 간택되실 길몽입니다마는..."

하고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는, 무릎을 바싹 당겨 앉으면서 물었다.

  "마님, 저는 보통 무당이 아닙니다.  저를 믿으시거든 마님 신분을 저에게만 알려 주십시

오."

  "호호호, 내가 처녀였다면 중전마마가 될 뻔했군.  관운성제 딸의 꿈대로 내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서 중전마마가 되면 그때는 그 꿈의 은혜를 갚겠소.  그런데 팔월엔 서울로 돌

아가서 귀하게 된단 말은 맞을까?"

  "네 분명히 그런 말씀을 관운성제께서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길몽의 감사제를 올려 주시오."

하고 민비는 선뜻 굿비용을 내주면서 기뻐했다.  눈치 빠른 무당은 일부의 소문처럼 살아서 

도망해 온 민비라고 믿었다.  그러나 더 추궁하지는 않고 큰 굿을 지낼 준비를 했다.

  그리고 팔월이 되기전 칠월 하순에 서울로부터 재상들과 청국군대까지 내려와서 생존해 

있는 민비를 모시러 온 것이다.  민비 다음으로 신난 여자는 무당 박씨였다.

  "중전마마 축하하옵니다. 저는 벌써부터 중전마마이신 줄 알았으나, 신변이 위험하실까봐 

숨겨 왔습니다.  제 점괘와 그동안의 기도대로 환궁(還宮)하게 되셔서 중전마마와 나라를 위

해서 이런 경사가 없습니다."

  "모두 박소사(朴召使) 정성 덕분이었다.  나를 따라 서울로 가자."

하고 민비는 약속대로 무당을 가마에 태워서 서울로 데리고 왔다.  그 뒤로 무당 박소사는 

민비의 총애를 받으면서 궁중에서 차차 세력을 얻었다.

  "중전마마, 대궐 뒤에 관운성제님 모실 사당을 지어 주십시오.  거기서 나라와 중전마마의 

복을 빌겠습니다."

  "아, 그러자. 궁중의 시녀들도 박소사를 시기하는 모양이니, 관운장 사당의 신관(神官)으로 

나가 있으면 격도 높은 신성한 지위니까 더욱 좋을 거야."

  민비는 곧 아담한 북묘(北廟)를 지어서 신관 대우를 하고 그 북묘에서 때때로 성대한 굿

을 지냈다.  박무당은 큰 굿이 있어서 민비가 고종을 동반하고 구경올 때면 신나는 노래와 

춤으로 관운성제 딸의 영험한 재주를 자랑하며 총애를 받았다.

  "과연 중전이 반할 만한 무당이요."

  고종도 민비의 비위를 맞추듯이 무당을 칭찬했다.

  "나라를 위해서 충성이 있고 영험이 많은 무당이니, 봉군(封君)을 해서 특별대우를 하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중전 생각이 그렇다면 좋도록 하시오."

  고종의 승인을 받은 민비는 박소사라고 부르던 무당에게 진령군(眞靈君)을 봉해서 조칙했

다.

  "북묘의 무당이 나라에 유공하고 영험해서 진령군으로 봉하게 됐다.  인물도 미인이고 점

도 잘 쳐서 민비가 홀딱 반해서 그런 대우를 받고 세도가 등등하다."

  이런 소문이 장안에 파다해지자,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이 북묘구경을 하러 모여들었다.  

그런 백성들이

  "묘구경을 왔소."

하면 무당은 위엄 있는 태도로 호령을 했다.

  "묘구경이 뭐요?  관운성제께 참배 왔다고 하시오."

  또 어떤 때는 무당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하도 영한 무당이래서 점을 치러 왔소."

  "무당 무당 하지 마시오.  나는 진령군이 아니요?"

하고 오만한 소리를 했다.  진령군의 세도가 직접 민비와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재상집 

부녀자들은 그 줄을 타고 남편 재상들의 출세 운동을 하려고 뇌물을 싸가지고 찾아 다녔다.

  "진령군 누님"

  "진령군 아주머니"

하고 고관대작들도 이 무당에게 아첨했으며, 늙은 재상은 주책도 없이 수양딸로 정하고 갖

은 아첨을 했다.  진령군의 힘으로 민비에게 추천되어서 감투를 쓴 자 중에는 조병식(趙秉

式), 윤영신(尹榮信), 정태호(鄭泰好) 등의 위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무당이 젊었을 때 낳

은 사생아(私生兒) 김창열 같은 자는, 그전에는 무당의 사생아로서 세상의 천대를 받았으므

로, 무당의 자식된 것을 숨기려고 어미 대우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비의 총애로 진령군

의 세도를 부리게 되자 서울로 찾아와서

  "어머니, 어머니"

하고 효자처럼 따랐다.  그래서 그도 무당 어미덕으로 벼슬을 하고 새 양반이 되었다.

  이처럼 민비가 다시 집권한 뒤에 궁중의 미신 숭배는 부활되어서 무당까지 세도를 부리는 

부패상을 폭록하게 되었다. 


  [ 落照의 王家 ]   < 움트는 開化의 꿈 >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落照의 王家 

    움트는 開化의 꿈


   임오군란(壬午軍亂) 후에 있었던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의 의무를 이행하려고, 일본에게 

사과의 국서(國書)를 전달하게 되었다.  사절단의 수교사(修交使)로는 정사(正使)에 박영효(朴

泳孝) 부사(副使) 김만식(金晩植) 수원(隨員) 김옥균 등 십오명이었다.

  그러나 이 십오명을 일본까지 보내는 재정에도 궁색한 조정에서는 체면불고하고 오천원밖

에 되지 않는 여비조차 일본의 보조를 받고 일본 공사가 귀국하는 일본기선 명치환(明治丸)

의 신세를 지는 초라한 사절단이었다. 

  이 때에 수행한 김옥균은 대담한 성격으 모사(謀士)로서, 이 기회에 국제정세를 연구하는 

동시에 일본의 유형무형의 후원으로 국내에서의 개화운동(開化運動)을 일으킬 준비를 하려

는 정치적 포부가 있었다.

  이들 사절단은 일본에 가서 독립국 사절단의 대우를 융숭히 받고, 제물포조약 이행 조건

의 완화에도 성공한 후 차관획득까지 하고 돌아와서 조정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공통적으로 감명 깊게 각성한 점은 조선도 일본처럼 개화혁신(開化革新)해야 하겠다는 결심

이었다. 

  박영효 일파에서는 귀국하자마자 그런 정책으로 소장세력을 규합해서 개화독립당(開化獨

立黨)을 조직했다.  그전의 개국정책을 지지하는 일파도 속칭 개화당이라고도 했으나 정식

으로 개화당의 명칭과 정책을 들고 나선 정당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개화당은 서양문명으로 혁신된 일본을 본받겠다는데서 일본색채가 농후했다.  그런데 

이때의 민씨 정권은 척족(戚族) 민씨를 비롯해서 친정(親情) 사대주의로 일변도(一邊倒)되어

서 관제(官制)와 군제(軍制)까지 청국식으로 개편한 수구파(守舊派)를 형성하고 있었다.

  여기서 또다시 신구 대립의 파쟁은 움트기 시작했다.  개화당파에서 민영익만이 외아 문

협판(外衙門協辦)이라는 청국식 관명의 외무대신 격으로 임명되었으나, 이것은 민씨의 소장 

영수자격으로였고, 박영효는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시켜서 각료급에게 참여하지 못했다.

  친정(親情) 수구파(守舊派)의 민비 정권은 사절단보다 더 오래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 온 

개화당의 참모장격인 김옥균을 포경사(捕鯨使)의 명칭으로 해외로 파견, 경원하는 인사 발령

을 하고 당수 박영효마저 광주유수(廣州留守)로 좌천해버렸다.  

  그와 동시에 박영효 일파가 개화정책의 출발을 만들어 관보를 겸한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

(漢城旬報)을 만들어 발간했으나 창설한 개화당 인사에게는 실권을 주지도 않았을 뿐 아니

라 청국군의 행패를 비판하였다 해서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민비는 정권 유지에 급급한 나머지 신흥세력의 개화당을 탄압하는 동시에 대원군 세력의 

잔재를 뿌리째 뽑으려고 귀양 보냈던 정현덕(鄭顯德), 조채하(趙采夏), 이재만(李載晩), 이원진

(李遠進)을 비롯하여 조병창(趙秉昌), 조우윤(趙宇潤), 이회정(李會正), 임응준(任應準) 등 여덟

명을 군란과 관련시켜서 전부 사형에 처해 버렸다.  

  이래서 개화당과 대원군의 잔당은 정책이 다르면서도 민비정권 타도에는 감정적으로 동조

(同調)하는 역효과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허욱(許煜) 등 일곱명이 군란 주동자로 능지처참당

한 것은 일이라도 일으키다가 실패 당한 결과이겠지만 위의 여덟명 참변은 억울한 죽음이었

다. 

  "대원군의 잔당은 모조리 죽여버려라.  그놈들이 이 나라 땅 위에 살아 있다는 것만 생각

해도 치가 떨린다."

  민비는 민태호에게 직접 명령했다.  고종도 그 자리에서 찬성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로지 

민비의 감정적인 보복에 지나지 않았다.

  조병창 부자가 함께 참살되었고 정현덕은 군란 당시에 귀양 가 있던 몸이라 군란은 구경

조차하지 못했고 대원군이 재집권한 뒤에 불러다가 감투를 씨운 것이 대원군이 청국에 잡혀

가기 닷새 전의 일이었다.  그런 정현덕까지 군란에 관련했다는 억지 죄명으로 죽였던 것이

다.

  이 시절의 민비의 인간성과 정권의 보수주의에 대해서 외국 평론가 롱포드는 다음과 같이 

비평했다.

  < 국왕에 대한 왕비의 영향력은 전능의 그것이었다.  정적(政敵) 대원군이 중요한 존재였

을 때는 그가 가진 보수적 편파성과 싸우기 위해서 개국정책도 썼다.  그러나 왕비가 반대

한 것은 대원군의 정책이 아니었고 대원군의 개인과 그의 세력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임오

군란데 피신했다가 요행히 권력을 잡자, 또다시 친정 민씨들로 조정의 모든 요직을 독점시

켰는데, 민비와 민씨 일파의 보수주의는 이미 전통적인 고질이었다. >

  이러한 민비 정권의 사대주의와 부수주의는 청국의 힘만 믿고 일본에게는 푸대접했고, 심

지어 지일파(知日派)로서 자주혁신(自主革新)을 주장하는 박영효, 김옥균의 개화당을 탄압했

으므로 일본은 은인자중하면서 국내외 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대국(老大國) 청국의 허울 좋은 위세를 코웃음 치듯이, 신임 일본공사 다께조에

(竹添)는 실리적(實利的)인 성과를 과학기술면에서 착착 거두고 있었다.  그 중요한 이권만으

로도 부산과 나가사끼 간의 해저전신(海底電信)의 부설, 한일통상조약, 이정조약(里程條約), 

택지차용권(宅地借用權), 각 항구의 관세업무(關稅業務)를 일본은행 지점이 취급할 것 등을 

조선 정부와 교섭해서 조인에 성공했던 것이다.

  청국과 민비의 사대보수당은 허울 좋은 권력에만 취해 있는 사이에, 일본은 과학과 경제

의 힘으로 실리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처럼 신흥국가로 일해 보겠다는 개화당의 젊

은 혁명적 정열은 보수당의 부패와 독재를 비상수단으로 타도하려는 음모를 계획했다.

  "민비 일당의 보수 세력을 몰아내야, 우리도 살고 나라도 구한다."

  이런 개화당의 운동은 대원군 세력을 몰아 내고 세도를 부리던 민비정권에게 새로운 정적

이 아닐 수 없었다.

  일본에 갔던 젊은 사절단이 개화당을 조직한 것은 일본의 새로운 문물제도를 본따서 조선

도 그와 같은 근대국가로 개화 발전시키려는 순수한 애국 정열에서였다.  그래서 정식 당명

도 개화독립당(開化獨立黨)이었으나 보통은 개화당이라고 불렀다.

  김옥균과 서광범(徐光範)이 늦게 돌아온 것은 국제정세 연구와 일본에서 개화당의 정치자

금을 구하려는 일 때문이었다.  일본의 조야에서는 김옥균의 정치운동 취지에는 찬성하고 

정신적 후원을 아끼지 않겠으나 민씨 정권에 반대하는 새로운 야당에게 정치자금을 대주는 

것은 위험하다고 거부했으므로 결국 실패하고 귀국했다.

  김옥균이 귀국하자 먼저 귀국했던 사절단 - 개화당 동지들은 조정에서 거세당하고 있었

다.  그러나 민비와 고종은 김옥균의 외교수완을 인정했다.  사절단 일행의 최대 선물인 이

십만원 차관을 성공한 공이 주로 김옥균의 활동에 있었던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화당이라는 이유로 등용하지 않고 푸대접했으므로 불평이었다.

  "꾹 참고 대사(大事)를 위해 끝까지 단결해서 실력을 기르며 시기를 기다립시다."

하고 당수격인 박영효를 격려했다.  광주유수로 좌천된 박영효도 용기를 얻고

  "나도 한성판윤에서 쫓겨났지만, 도리어 잘됐소.  남한산성에서 혁명세력을 기르겠습니다.  

직속군대 육백명을 모집 육성할 자신이 생겼으니, 일단 거사시엔 우리 개화당의 혁명군으로 

쓸 수 있소."

  그리고 당세 확충을 책략하던 중 김옥균에게는 또 다시 일본으로 갈 기회가 왔다.

  당시 재정 궁핍에 허덕이던 민비정권에서는 일본과 청국이 조선에 대한 이권경쟁을 하자 

일본에서 덕을 볼 수 있으면 최대한 이용하려고 했다.

  마침 사절단이 이십만원의 차관을 얻어 와서 갈증을 면한 조정에서는, 다시 삼백만원의 

대일차관을 하려고 서울주재 일본공사관과 교섭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조선주재 초대 미국공사 푸트가 부임하는 길에 그의 통역으로 따라 귀국한 윤치호(尹致昊)

가 일본을 거쳐 올 때, 일본 외무대보(外務大輔) 요시다 기요나리(吉田淸成)가 김옥균에게 보

내는 사신(私信)을 전해 왔다.

  < 귀하가 국왕의 위임장만 갖고 정식 교섭을 오면 귀국에서 희망하는 삼백만원 차관이 

성공 될 가능성이 있소. >

  민비도 삼백만원이라는 돈이 당장 생긴다는 기쁨으로 김옥균에게 국왕의 위임장을 내주

며, 꼭 성공하라는 부탁을 했다.  김옥균은 큰 희망을 품고 동경으로 갔으나, 외무대신 이노

우에는 물론 편지까지 보낸 요시다 외무차관까지 태도가 냉정했다.

  "각하의 편지만 믿고 국왕의 위임장까지 갖고 왔는데 안 된다는 것이 무슨 말이요."

하고 김옥균은 요시다를 추궁했다.

  "나로서는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으나 총리대신과 외무대신이 일본의 재정상태가 그

런 거액을 외국에 빌려 줄 사정이 못된다 하니 어찌합니까?  미안하게 되었으니 이 기회에 

당신의 포부인 신학문 연구라고 하고 돌아가시오.  학비 생활비는 염려 마시고..."

  요시다는 이런 핑계를 했다.

  "삼백만원이 많으면 백만원이라도 차관을 해줘야 나의 체면도 서지 않겠습니까?"

  "글세 다시 물어는 보겠지만..."

하고 요시다는 얼버무렸다.  그 후에 또 재촉해도 소용이 없었다.  김옥균은 액수를 자꾸 낮

추어가며 애원하다시피 했으나 일본 정부의 태도는 단돈 만원도 차관에 응하지 않겠다는 태

도였다.

  김옥균이 그 후에 알아보니 차관을 거절한 이유에는 두 가지 문제가 개재해 있었다.  첫

째가 김옥균 자신에 대한 인격모욕 문제였다.  그것도 일본인이 아닌 동포와 청국인의 모략 

중상에 의한 모욕과 방해공작이었다.

  국내에서 외교문제로 일본공사와 공식 접촉을 하던 민영목(閔泳穆)은 그런 중대한 사명을 

정적인 개화당 청년모사(靑年謀士)에게 맡긴 것에 질투를 느끼고 일본공사 다께조에에게 박

영효와 김옥균은 경거망동하는 위험도배라고 중상했다.  그리고 청장 목인덕(淸將 穆麟德)도 

민영목과 같은 중상을 했을 뿐 아니라 김옥균은 국왕의 위임장을 위조해 가지고 가서 개화

당의 정치자금으로 횡령하려는 행동이라고까지 모략했다.

  청국으로서는 일본이 막대한 자금을 제공함으로써 일본의 발언권이 강화되는 것을 꺼렸으

므로 무슨 짓이든지 대일차관을 방해해야 할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다께조에 공사는 이런 

정보를 일본 외무성에 보냈고 겸해서 김옥균 등의 개화당이 정계에서 무력하므로 무력한 야

당의 간부를 조선의 대표로 상대하는 것은 장래가 위험하다는 의견도 상신했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일본정부로서도 청국이 갖고 있는 조선에서의 군사적 정치적 지배에 대항하기 

위해서 조만간 청국과의 실력 충돌을 각오하고 군비 확충을 암암리에 진행중이었으므로 그

런 차관을 조선에 제공해서 청국을 자극시키는 것이 불리하다는 점도 있었던 것이다.

  이런한 관계로 김옥균이 대일차관에 실패하고 실망해서 갑신년(甲申年) 삼월에 귀국하자 

개화독립당 전체의 낙망이 더욱 커졌다.  그들의 낙망은 곧 수난(受難)이었다.  박영효도 광

주유수에서까지 몰려났으므로 그가 혁명군으로 이용하려던 양병계획(養兵計劃)도 수포로 돌

아가고 말았다. 

  개화당의 운명이 이처럼 약화되어 갈 때에 동지였던 민영익이 미국과 구라파를 시찰하고 

돌아온 후 민비의 수단에 매수되어 동지들을 배반하고 역시 민씨 일족의 본색을 나타냈다.  

개화당에서는 당내의 모든 정책과 비밀을 아는 민영익이 민비의 주구(走狗)로 돌변했기 때

문에 타격이 큰데다가 민영익 자신이 정면에 나서서 박영효, 김옥균의 세력을 공격했다.

  그리고 청장 목인덕은 김옥균이 청국의 간섭을 공격하고 일본의 힘으로 청국 세력을 꺾으

려는 책사이며, 당오전(當五錢)의 화폐 문제로 직접 면박당한 것을 보복하려고 민비에게까지 

그를 정계에서 숙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김옥균은 굳은 각오를 하고 고종에게

  < 지금의 국내실정은 정령(政令)이 하나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분당반목(分黨反目)만 심

해지니, 어느때 뜻하지 않은 사변이 발생할지 모릅니다.  신은 잠시 시골로 물러가 있겠습니

다. >

하는 상소를 올리고 동대문 밖의 별장에 은퇴하고 표면상의 정치활동을 멈추어 버렸다.

  이때 청국에 대한 정책에 중대 변혁이 생겨서 질식상태에 빠졌던 개화당에게는 시운이 오

는 듯했다.  조선에 파견되 청국 군대의 군권남용이 조선 백성의 원만 대상이 되었고, 또 막

대한 재정을 낭비했기 때문에 군란 수습과 대원군 납치로 위엄을 떨치던 마건충 장군을 탄

핵하는 여론이 청국 조정에서 일어났다.

  "조선 백성의 원망을 사고, 군사비를 남용하고, 일본에 반감만 사는 주둔군을 곧 철수시켜

라."

  이런 청국 국내 여론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주둔군 장군끼리의 반목

(反目)이 크게 작용했는데, 그것은 오장경(吳長慶)과 원세개(袁世凱)의 세력 투쟁에서 나온 여

파이기도 했다.

  그래서 갑신년(甲申年=西紀 1,884년) 사월에는 청국 주둔군은 반감되고, 원세개에게 밀린 

오장경 등의 부대는 본국으로 철수해 가고 말았다.  이어서 청국에서는 안남 문제(安南問題)

로 불란서와 정면 충돌이 났다고 들려오고 대원군을 석방 귀국시킨다는 풍문도 들려왔다. 

  민비를 중심으로 한 친정 보수당은 점점 그들의 정권유지에 불안감을 느꼈다.  그와 동시

에 일본에서도 이 기회에 청국의 한국 지배를 배제하자는 적극론이 우세해졌다.  그 방법으

로는 외교적으로 청국과 직접 담판하고, 그것이 여의치 못하면 영국, 미국, 불란서, 독일 등

과 협력해서 조선의 독립권을 보장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에 대해서는 정부내에 개화

독립당의 세력을 강화하도록 적극 지원하자는 정책을 채택했다.

  이런한 국제정세의 변화를 본 개화독립당은 다음 정권을 노릴 운동을 다시 활발히 추진시

켰다.  그러나 친정보수당은 개화당과 타협하고 인물을 등용하는데는 여전히 인색했다.

  국제정세의 변화로 개화당이 유리하게 되는 미묘한 동향을 본 민비정권에서는 큰 선심이

나 쓰는 듯이 개화당 인물을 등용한 것이 겨우 신설 우정국(郵政局) 총판(總辦)으로 홍영식

(洪英植), 부승지(副承旨)로 서광범(徐光範), 신설된 조련국(操鍊局)의 사관장(士官長)으로 서재

필(徐載弼)을 임명했을 뿐이었다.

  "민비정권엔 우리와 타협해서 국난을 타개할 의사가 조금도 없다.  인제는 청년층의 동지

를 규합해서 비상수단으로 썩은 보수당을 타도하는 수밖에 길이 없다."

  김옥균의 단호한 계략으로 당론이 결정되자 자기들 주선으로 일본에 유학 보냈던 사관생

도(士官生徒)를 불러들이는 등 암암리에 혁명 준비를 진행시켰다.

  청국이 불란서와 전쟁상태에 들어가자 일본공사 다께조에는 본국의 훈령을 받고 돌아와서 

전과는 천양지판으로 국왕과 조정에 대하여 태도가 강경해졌다.  다께조에는 공사의 귀임을 

인사차 방문한 외아문(外衙門)의 김홍집(金弘集)과 김윤식(金允植)에게 청국과 친청 조정에 

대한 공격을 노골적으로 했다.

  "귀국 외교관 중에는 청국의 종노릇하는 자가 수명 있다고 하니 나는 그 따위 사람들과는 

외교문제를 이야기하기도 싫소."

하고 김홍집을 위협했다.  그리고 김윤식에게도 직접 면박해서 개인적 모욕까지 했다.

  "당신은 학문에 능하고 청국과 내부(內付)할 의사가 있다 하니, 아주 청국에 가서 벼슬하

지 않겠소?"

  친청 보수당의 외교관이 이런 위협과 창피를 당했다는 소문은 곧 정계를 긴장시켰다.  김

옥균은 곧 일본공사를 단독 방문하고, 다께조에에게 기고만장한 웅변을 토했다.

  "당신이 말한 그 청국 종들의 중상모략을 듣고 우리 개화당을 의심하고 과소 평가했기 때

문에 우리의 구국대계는 실패했소.  한일 양국의 공영(共榮)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우리의 정

책을 적극 후원해 주시오."

  그리고는 다께조에 공사를 비난까지 했다.

  "과거에 실례된 일이 있었다면 사과하오.  그러나 어느 나라든지 외교정책은 때에 따라서 

변화되는 것이니 오해하지 마시오.  앞으로는 일본도 적극적으로 당신들의 개혁운동에 협력

하게 될 것이요."

  다께조에는 과거를 사과하면서 앞으로의 개화독립당을 응원하겠다고 솔직한 약속을 했다.  

이런 약속을 받은 김옥균은 곧 박영효에게 보고하고 그로 하여금 일본 공사를 방문케 해서 

더 자세한 개혁운동의 방침을 설명하고 협력을 요청하도록 급속한 활동을 전개했다.

  구월 십오일에 일본공사는 고종을 알현(謁見)하고 총 두 자루를 외무대신의 예물로 바치

고 국왕을 통해서 개화독립당을 위한 거대한 정치 자금조의 선물까지 바쳤다.

  "임오군란(壬午軍亂)의 손해배상금(損害賠償金) 잔액(殘額) 사십만원을 귀국 정부에 환납(還

納)하옵니다.  그러나 그 금액은 전부 내정개혁 자금으로만 전용(轉用)해 주십시오.  그리고 

불란서가 완고한 보수주의(保守主義)인 청국과 전쟁 중이니, 앞으로 국제정세에 일대 변화가 

예상됩니다.  이런 중대시국에 임해서 귀국에서도 상하가 단호한 결심으로 일치 단결해서 

내정개혁을 실천하시기를 바라옵니다."

  이 같은 중대 권고를 국왕에게 아뢴 것은 청국의 내정관섭을 공격하는 동시에 일본이 개

화당운동을 적극 후원한다는 것을 선언한 셈이었다.  일본공사가 고종과 알현하고 나온 다

음날은 마침 양력 십일월 삼십일일로 명치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이었다.  그는 신축

한 일본공사관에서 축하연을 베풀고, 초대한 내외 빈객들 면전에서 청국공사 진수당(陳樹棠)

에게 조롱 이상의 모욕을 했다.

  "진공사(陳公使)는 무골해삼(無骨海蔘)이요."

  이것은 못난 병신이라는 욕이었다.  이 의미를 알아들은 사람은 그 자리에서 놀랐다. 그리

고 나중에 전해 들은 정계에서는 의논이 분분했다.

  "일본공사가 청국공사를 각국 외교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런 모욕을 한 것은 일본이 불

란서와 동맹하고 청국에 개전(開戰)할 징조다.  그렇지 않고서야 외교관끼리 그런 실례가 있

겠는가?"

  "민비당의 운도 다 갔군.  인제 개화당이 세월 만났다."

  "세도가 바뀌는 것은 좋지만 외국의 힘으로 엎치락 뒤치락하는 꼴이 한심스럽다."

  "세상은 바뀌고 또 피비린내 나는 당파 싸움이 벌어질까 걱정이다."

  민심은 또다시 흉흉해졌다.


  [ 落照의 王家 ]   < 甲申政變 >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落照의 王家 

    甲申政變


   개화독립당의 박영효, 김옥균,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은 실력으로 정권을 잡으려고 밤낮

으로 모의했다.  그들은 일본의 힘을 빌리려고 일본공사관에 비밀 연락을 하고 그들의 후원 

약속도 받았다.  행동대로는 당시의 건달인 소위 장사(壯士)라는 거리의 폭력배를 매수해다 

모아놓고 김옥균은 습격 목표와 방화 및 암살의 방법등을 지령했다.

  마침 우정국(郵政局)의 낙성식 연회를 여는 날이 되었다.  이 날이 고종 이십일년인 갑신

년(甲申年) 시월 십칠일인데 양력으로는 십이월 오일이었다.

  우정국장이 다행히 개화당 동지 홍영식이었으므로, 비교적 쉬운 일이었다.  낙성식에 초대

한 민씨 정권의 실력자들을 암살하고 장사단(壯士團)을 몰아 왕궁을 점령한 뒤에 고종과 민

비를 위협해서 개화당 정부 조직을 왕명으로 발표시키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보

수당의 반란이라고 왕을 속여서 호위 명목으로 일본군의 동원을 요청하여 청국군의 간섭을 

막으려는 계책을 꾸몄다.

  그리하여 혁명의 봉화(烽火)는 우정국에서 연회중인 시각에 폭력배 장사단으로 하여금 안

동별궁(安洞別宮)에서 올리도록 했다.  이런 지령을 내리고 김옥균은 그 방화가 보수당파의 

폭동이라고 속이고 혼란을 일으킨 뒤에 번개같이 정적(政敵)들을 숙청하고 왕궁을 점령하려

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날밤 연회가 진행 중인 예정시각이 되어도 안동 별궁의 방화소식은 들리지 않았

다.  행동파들의 계획이 여의치 못한 모양이었다.  초조해진 김옥균과 박영효는 긴급히 전술 

변경을 상의했는데 이 때문에 의식적으로 지연시킨 연회가 열시까지 끌었다.  각국의 공사

들은 지루해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불야!"

  이때 우정국 옆의 민가에서 불이 났다.  안동 별궁에서 올리지 못한 혁명의 봉화를 개화

당의 행동파는 애매한 민가에 방화했던 것이다.  불길은 충전해서 우정국을 포위할 듯했다.  

당황한 내외빈객들은 허둥지둥 밖으로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개화당의 배신자로서 행동에 민첩한 민영익(閔泳翊)이 맨 먼저 피난해 나갔다.  이때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개화당 행동대원 윤경순(尹景純)과 이은종(李殷鍾)이 몽둥이와 칼로 

습격했다.

  "사람살려라!"

  민영익은 직사를 면하고 피흐르는 손을 흔들면서 우정국 안으로 되돌아 왔다.  내외 손님

들은 깜짝 놀라서 벌벌 떨었다.  그러나 미국공사와 영국공사는 침착한 태도로

  "어떤 자가 대감을 습격했소?"

하고 물었다. 김옥균은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의 일파도 뒤를 따랐다.  눈치 빠른 민영익은

  (저 개화당 놈들이 나를 암살하려 했구나)

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도 자기 개인 암살음모라고는 생각했지 그것이 

반란 사건의 첫 번 유혈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김옥균과 박영효는 곧 일본공사관으로 달려가서 행동개시를 알리고 일본군의 협력을 부탁

한 뒤에 궁궐 금호문(金虎門)으로 급행하자, 거기에는 미리 지령해 둔대로 근처에 숨어 있던 

장사들이 막 몰려왔다.

  뭉둥이와 망치를 든 사십여명의 폭한들이 수문장을 때려 눕히고 궁중으로 침입했다.  그

들은 궁중의 여러 개 중문(中門)을 쳐들어 가면서 막으려는 내시(內侍) 등을 물리치고 고종

과 민비가 이미 잠든 침전(寢殿)의 안뜰까지 들어갔다.

  고요한 침전에서는 그 영악한 민비도 이런 변란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단꿈만 꾸고 있었

다.  개화당은 이미 낮에 김봉균(金鳳均)을 시켜서 인정전(仁政殿) 행랑채에 폭탄을 묻어 두

었으므로 폭탄 심지에 불을 붙였다.

  "탕!"

  천지를 진동시키는 폭음과 함께 인정전이 불길을 올리면서 타기 시작했다.

  폭음소리에 놀라서 잠을 깬 고종과 민비는 정신이 아찔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중전, 저 폭음, 저 불이 웬일이요?"

  "상감 진정하시오.  역적놈의 반란인 듯하오."

  민비는 입술을 물고 당황하는 고종을 진정시키려 했다.

  "위험하니 어디로 피신해야지."

  고종은 약한 여자인 민비를 보호하고 피신할 행동은 취하지 못하고 도리어 민비의 보호를 

바라는 듯이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상감, 나를 따라오시오."

  민비는 시녀에게 등불을 들리고 침전에서 빠져 나오려고 일어섰다.  민비의 머리에는 임

오군란(壬午軍亂) 때 궁녀로 변장하고 궁중에서 도망치던 때의 정경이 회상되었다.

  (또 대원군의 잔당의 반란일까?  아니다.  개화당 놈들의 반란일 거다.)

  이런 추측을 하자 김옥균과 박영효의 얼굴이 대원군 얼굴과 함께 명멸(明滅)했다.  임오군

란 때는 낮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밤중이라 낮보다 피난이 어려울 듯도 하고 도리어 편리

할 것도 같았다.  또 다른 것은 그때는 고종을 두고 민비 자신만 도망쳤으나 지금은 고종을 

데리고 가는 것이 달랐으며, 또 마음에 든든하기도 했다.

  (개화당 반란이라면 상감을 시역(弑逆)하진 않겠지.  이번엔 상감을 모시고, 곁에서 떠나지 

말아야겠다.)

  고종을 방패로 자기 몸을 정적(政敵)의 박해에서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너, 그 등불을 꺼라."

  먼저 등불을 들렸던 시비에게 명하고 고종의 팔을 잡으면서 어두운 침전 마당으로 내려섰

다.

  "상감마마, 반란이 일어나서 모시러 왔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김옥균이 나서며 아뢰었다.

  "밤중에 무슨 소란이요, 어디서 누가 일으킨 반란이요?..."

  고종은 떨리는 음성으로 김옥균에게 물었다.  옆에 있던 민비는 침착한 태도로

  "이 반란은 청국군을 업고 하는 거요, 일본군을 업고 하는 거요?"

하고 물었다.  개화당인 김옥균에게 개화당이 아니냐고 물을 수도 없어서 이런 질문을 했던 

것이다.  김옥균이 청국군을 업은 보수당의 불평분자라고 거짓말을 하려는 순간에 또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나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잠시 후에 김옥균은 천연스럽게

  "청국군대가 궁궐을 포위하고 궐내로 쳐들어 오는 중입니다."

하고 큰 소리로 국왕과 왕비에게 공포심을 일으켜 주었다.  그러나 박영효가 앞으로 나와서 

김옥균의 말을 이어서

  "사태가 긴박하고 괴상하니, 상감께서는 청국군을 막기 위해서 일본군 출동을 청하십시

오."

  "상감마마, 일군 청병을 윤허(允許)하여 주십시오."

  임금을 속여서 임금의 이름으로 일본군대의 출동을 청하려는 수작이었다.  그리고

  "청국군에게 포위된 궁중은 위험하오니 옥좌(玉座)를 잠시 일본공사관으로 옮기십시오."

하며 일본공사관으로 납치하려는 계획대로 권했다.  고종이 주저하고 있자

  "상감, 체면문제도 있으니 다른 곳으로 피신 하십시오."

  옆에 있던 민비가 수상스럽게 여기고 반대 의견을 말했다.

  "어디로 가면 안전하겠소?"

  고종은 우는 듯이 떨리는 음성으로 민비에게 물었다.

  "그럼 경우궁(景祐宮)으로 행차하시오."

  박영효는 일본공사관으로 납치하려던 계획이 여의치 않자 경우궁에 감금시켜 놓고 자기 

계획을 강요할 생각이었다.  고종은 일본공사관으로 가지 않는 것은 다행했으나 다리가 떨

려서 걸음도 잘 걷지 못했다.  김옥균은 박영교(朴泳敎)에게 말했다.

  "상감을 업어 모시오."

  임오군란 때는 민비가 홍재희 등에 업혀서 도망했으나, 이번에는 고종이 박영교 등에 업

혀서 경우궁으로 납치되어 갔다.  그러나 걸어서 가는 민비는 매우 침착했다.

  김옥균은 고종과 민비를 경우궁에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감금하고, 무장한 오십여명의 부

하 장사단(壯士團)으로 경비시켰다.  트는 겨울날 새벽은 살벌하게 춥기만 했다.

  반란이 일어났다는 정보를 알게 된 민비정권의 고관들은 깜짝 놀랐다.  반란의 성격과 상

황도 자세히 모른 채, 민태호(閔台鎬)와 조영하(趙寧夏)가 맨 먼저 궁중으로 달려왔다.  그리

고 국왕과 왕후가 경우궁에 감금된 것을 알고 수상히 여겼다.

  "대감, 청국공사와 원세개 장군에게 빨리 연락합시다."

  조영하가 민태호에게 말했다.

  "우선 상감을 뵙고 안위(安危)를 안 뒤에 합시다."

  그들 두명은 불안한 마음으로 경우궁 외문(外門) 앞까지 갔다.  이때 대문이 확 열리면서 

무장한 장사들이 와 몰려 나왔다.

  "이 나라를 망친 역적놈들!"

  장사들은 두명의 목을 칼로 베어 버렸다.  조금 후에 들어오던 윤경순(尹景淳)도 이조연

(李祖淵)도 참살당했다.  경우궁 앞은 민비 보수당 요인들의 피로 물들었다.  피는 곧 붉은 

얼음으로 변해 얼어 붙었다.  나중에 들어온 민영목(民泳穆)도 정전(正殿) 앞까지 오다가 학

살되었다.

  그런 공포 속에서도 내시(內侍) 유재현(柳在賢)은 왕과 왕비가 시역(弑逆)이라도 당할 것을 

염려하고 박영효와 김옥균에게 항의했다.

  "상감과 중전을 이렇게 감금하는 불경(不敬)이 어디 있소.  당신들 마음대로 칙령(勅令)을 

받으려다가 불응하시면 시역이라도 할 계획이 아니요?"

  유재현은 그들을 역적이라고 면박하자 김옥균은 살기등등해서 부하에게 명령했다.

  "저 내시놈을 죽여 버려라."

  명령일하에 유재현은 당상에서 몰매로 타살되었다.  그는 민비의 심복으로서 항상 측근을 

따라다녔는데, 이번에도 단신으로 경우궁까지 따라와서 김옥균 일파의 반란을 목격하고 참

다 못해서 항의하다가 죽은 것이다.

  내시 유재현은 박살하는 광경은 본 고종은 벌벌 떨었다.  민비도 이제는 이 반란의 성격

을 정확히 파악하고 김옥균과 박영효가 미웠으나 역시 그들의 손에 생사가 달려 있음을  생

각하고 참았다.

  김옥균은 고종이 벌벌 떠는 기색을 보자, 단번에 정권이양의 왕명을 받으려고 강요했다.

  "상감마마, 빨리 개혁정부를 새로 조직하라는 어명(御命)을 내리시오."

  박영효가 자기에게 대명(大命)을 내려 달라는 협박이었다.  

  "미국공사와 영국공사가 왔습니다."

  밖에서 경비하던 장사들이 김옥균에게 알렸다.  김옥균도 외국 사신들의 국왕 방문을 막

을 수는 없었다.  침착한 태도로 들어온 그들은

  "급변을 듣고 문안차 예방하였습니다.  사태가 잘 안정될 것이니 안심하십시오."

  "감사하오."

  인사를 마친 후 바로 물러났다.  고종은 그들의 소매에 매달려서 여기 있어 달라고 애원

하고 싶었으나 냉담한 인사 끝에 그들은 돌아가고 말았다.  다음에 방문 온 독일공사가 오

히려 오랫동안 이야기하고 갔다.  그러나 일본공사는 수시로 드나들면서 김옥균과 밀의를 

거듭했다.  민비는 모른 척하면서 날카로운 신경으로 무슨 음모 냄새를 맡으려고 애썼다.

  그날도 저물어 해가 질 무렵 노환의 조대비(趙大妃)가 어젯밤 소란에 놀라서 병세가 위급

하다고 알려 왔다.  고종과 민비는 이것을 핑계로 창덕궁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김옥균에

게 말했다. 

  "잠간 기다리시오."

  김옥균은 옆방으로 가서 일본공사와 상의한 뒤에 다시 돌아와서 선심이라도 쓰는 듯이

  "이젠 사태도 좀 안정되어 가고, 대왕대비의 문병도 하셔야 하겠으니 창덕궁으로 옮겨 모

시겠습니다."

하고 김옥균이 안내역으로 앞장섰다.  고종과 민비는 이미 출동한 일본군의 경비를 받으며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개화당의 <김옥균 내각>이 벌써 국왕을 협박해서 성립되고 있었다.  

영의정은 흥영군(興寧君) 이창응(李昌應)을 업고 나왔으나 좌의정에는 이십사세의 개화당원 

홍영식을 올려 앉히고 우포도대장(右捕盜大將)까지 겸임시켰다.

  박영효는 친군영사(親軍營使)겸 좌포도대장(左捕盜大將)이 되고, 김옥균은 호조참판(戶曹參

判)이 되고 서광범, 변수(邊燧), 윤치호 서재필을 요직에 임명했다.

  이런 새로운 인사 발령을 내렸는데 워낙 인물이 부족하고 정계와 국민에게 큰 세력을 갖

지 못했던 개화당에서는, 각료 전원을 개화당 일색으로 일신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무난한 

보수파와 중간파들의 관직은 유임시키는 동시에 거국일치 내각이라는 허울을 만들었던 것이

다.  이런 인사 발표와 아울러 새 정부의 당면정책도 공포했다.

    1. 대원군을 곧 귀국시킨다.

    2. 문벌을 없애고 평등하게 유능한 인사를 관리에 등용한다.

    3. 지세법(地稅法)을 없애고, 탐관오리를 숙청해서, 국민 부담을 감소하면서도 국가 

    재정은 증대시킨다.

    4. 내시부(內侍部)를 폐지한다.

    5. 국정을 부패케 하고 사욕을 채운 자를 색출해서 엄벌한다.

    6. 규장각(奎章閣)을 폐지한다.

    7. 순경을 모집 훈련해서 도적을 방지한다.

    8. 혜상공국(惠商工局)을 페지한다.

    9. 정치범으로 귀양 간 사람을 방면 복권시킨다.

   10. 전후좌우(前後左右) 사영(四營)을 폐지하고 근위군(近衛軍)을 둔다.

   11. 국내 재정은 호조(戶曹)에서 관활하고, 기타의 재정기관은 일체 폐지한다.

   12. 대신(大臣)과 참찬관(參贊官)의 회의는 의정소(議定所)에서 결정해서 임금께 

    품정(稟定) 한 후에 정령(政令)을 반포(頒布)한다.

   13. 정부 육조(六曹) 이외의 관청은 전부 폐지한다.

  이러한 혁신 정강을 나열한 포고문이 장안 거리에 나붙자, 백성들은 그 정책의 변혁에 별

로 관심을 갖지 않고 다른 데만 흥미를 느꼈다. 

  "대원군이 귀국한다지?"

  "개화당도 저희들 힘만으론 민비를 못 당하겠기로 대원군을 데려다 개화당 신주로 모실 

생각인가보다."

  "개화당이고 뭐고, 두고 봐야 안다.  어떤 놈의 당파나 저희들의 세도를 위한 싸움이지 백

성이 죽고 사는 거완 상관이 없다."

  "좌우간 개화당 등장으로 일본과 청국이 전쟁을 하게 되면, 우리 나라는 중간에서 쑥대밭

이 된다.  정감록(鄭鑑錄)에도 그런 예언이 있다더라."

  무식하면서도 건전한 상식이 있는 민중들은 이런 화제로 수군거렸다.

  "그러나 김옥균이 경솔한 혁명은 공중누각(空中樓閣)이라 길겐 못 갈걸."

  장안에서 이런 풍설이 떠돌고 있을 때, 궁중을 폭력으로 점령하고 정권의 기초를 다지고 

있던 김옥균의 개화독립당 일파도 후사(後事)가 불안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정권이 공중누

각의 꿈으로 끝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일본공사에게 군사적으로 적극 후원을 부탁했다.

  십팔일이 되자 일본공사는 청국측의 반발이 뜻밖에 큰 것을 보고 그들과 타협하려는 태도

로 돌변했다.

  "일본군이 궁중에 오래 주둔하면 내정 간섭의 오해를 받겠으니 그만 철병하겠소.  당신들

이 잘하시오.  우리는 이면에서 원조를 해줄 테니..."

  일본공사 다께조에는 김옥균과 박영효에게 말했다.  깜짝 놀란 김옥균은

  "당신의 약속만 믿고 한 일인데, 이 혼란 중에 갑자기 철병하면 배신 행동이 아니요?  앞

으로 삼일간만 더 궁중에 주둔해 주시오.  그 사이에 우리 당이 모든 자위태세(自衛態勢)를 

갖추겠소."

  "철병해도 삼일간은 사관 열명으로 근위대(近衛隊)의 훈련은 하겠소."

  일본공사로부터 그만한 정도의 언질을 받은 김옥균은 새 정부가 개화정책을 단행하는데 

필요한 오백만원 차관을 애원했다.  다께조에 공사는 오백만원은 어렵지만 삼백만원 정도는 

조속히 융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로 김옥균을 안심시켰다.

  개화당의 간부들은 일본이 궁중에서 철병을 해도 군사고문 제공, 삼백만원 차관, 재정고문 

제공을 허락 받았으므로 희불자승(喜不自勝) 하면서 금석같이 믿었다(信之若金石).

  "인제 청병 간섭의 방어책만 세우면 우리 정권은 요지부동이다."

  김옥균은 개화당 간부들과 군사문제를 토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 청국의 오조유

(吳兆有) 장군이 보낸 사관 한 명이 국왕을 만나겠다고 신청했다.

  "오조유, 원세개 장군이 오면 모르되 일개 사관에게는 국왕 알현을 시킬 수 없다."

고 거절하자, 청군 사관은 오조유가 국왕께 바치는 사한을 전달했다.  그 내용은 < 서울 장

안 안팎이 평시와 다름 없이 평정(平靜)하니 부디 안심하십시오. >하는 위안과 격려의 간단

한 문면이었다. 

  김옥균 일파는 청국이 이처럼 개화당의 혁명을 냉소하는 듯한 태도에 불안을 느꼈다.  오

조유의 서한을 전달한 청국 사관을 냉대해 보낸 뒤에, 곧 이어서 청국군의 통역관이 와서 

원세개 장군이 군대 육백명을 거느리고 궁중으로 국왕을 알현하러 오겠다는 일방적인 통고

를 전했다.

  "원장군의 입궐은 좋으나 군대의 입궐은 부당하다.  만일 그런 사태가 벌어지면 불상사의 

책임은 청국에 있다."

  김옥균은 강경한 항의를 했다.  그리고 곧 다께조에 일본공사와 상의하고 각영(各營)의 군

대를 단속해서 청군과의 일전(一戰)도 불사(不辭)하겠다는 결의를 했다.  그러나 그날 오후 

두시반에 청국군의 대병력은 동서 양면에서 궁중으로 기습해 왔다.  요란한 총성에 김옥균 

일파와 일본공사 다께조에는 당황했다.

  청국군은 보수당의 긴밀한 연락으로 취한 행동이었다.  즉 민비는 고종의 명의로 반란 진

압에 청군 출동을 요청했던 것이다.  천오백명의 병력을 두 대로 나누어서, 일대는 오주유 

지휘하에 선인문(宣人門)을 돌파 침입했고, 일대는 원세개의 지휘로 돈화문을 공격해 왔다.  

이밖에 청국군이 훈련시켜 오던 조선군 좌우영(左右營)의 군대와 백성까지 합세한 부대도 

수천명에 달했다.

  그러나 이런 공격군은 맞을 궐내의 수비병은 주력부대가 되는 일본군이 일개 중대의 이백

명에 불과하고 박영효가 지휘할 수 있는 전후영(前後營)의 조선군은 팔백명 정도에 지나지 

못했다.

  조청연합군(朝淸聯合軍)과 조일연합군은 왕궁을 전쟁터로 하여 공방전(攻防戰)을 벌였다.  

그러나 병력도 청국측이 훨씬 우세한데다가, 이미 철병하려던 일본군은 다께조에 공사의 애

매한 태도에 따라 본격적인 전투를 피하고 신변자위(身邊自衛) 정도로서 사기(士氣)가 전연 

오르지 않았다.

  김옥균 등이 당황해 하는 틈에 민비는 세자(世子) 부부를 데리고 궁전을 빠져서 북쪽 산

으로 도망했고, 왕대비(王大妃), 대왕대비(大王大妃)도 따로 궁문을 빠져나와 피난했다.

  "중전이 세자를 모시고 종적을 감추셨다."

  청국군의 총성에 놀라서 방어책에 정신이 없던 김옥균은 이 소식을 듣고 침전(寢殿)으로 

달려갔다.

  "앗, 상감도 안 계시다!"

  김옥균은 고종의 행방을 찾아서 후문(後門)으로 뛰어나가 울창한 후원 산길을 올라갔다.  

무감(武監)에게 인솔된 네 다섯의 병정의 호위를 받으며 북산(北山)으로 탈출하려는 고종

을 발견했다.

  "상감, 그리 가시면 위험합니다."

  김옥균은 고종의 도망을 위협적으로 중지시키는 고함을 치고, 서광범과 함께 달려갔다.  

김옥균은 고종을 또다시 납치해다가 연경당(延慶堂)에 감금하고 청국군과 싸우는 일본군진

지에 있던 다께조에 공사에게 급히 연락했다.

  공사는 일본군의 일부를 거느리고 연경당으로 와서 고종의 주위를 경호(警護)했다.  개화

독립당의 간부들은 연경당에 모여서 일본공사와 함께 긴급한 대책을 토의했다.  김옥균이 

먼저 다께조에에게 제의했다.

  "청국군의 무력이 궁중까지 침범한 이상, 상감께서 일시 인천으로 피난하셨다가, 사태를 

수습한 후에 환궁하시게 하는 것이 좋을까 하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고종이 다께조에의 대답보다 먼저 반대했다.  고종은 이미 민비와 

굳은 약속을 하고, 청국군의 힘을 빌어서 일본군과 개화당의 반란을 진압할 생각이었으므로 

그들에게 포로가 되어 인천까지 호송되기는 싫었던 것이다.

  고종이 인천까지 피난하라는 김옥균의 권고를 거부하자 개화독립당의 간부들은 고종의 뜻

밖의 강경한 태도에 어쩔 줄을 모르고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모두 다께조에의 말을 기

다렸으나 그는 심중히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잠시 침울한 공기가 장내에 흘렀다.  움푹한 

지대에 있는 연경당은 청국군의 공격을 막는데는 매우 불리한 지점이었는데, 바로 왼편쪽에

서 공격군이 몰려들고 탄환이 날아왔다. 

  "뒷산으로 이동해야 하겠습니다."

  그들은 고종을 모시고 언덕 위로 피해서 이리 저리 안전지대를 찾아서 방황하다가 점점 

급해지자 동북문(東北門) 안까지 이르렀다.  이때는 이미 십구일의 해도 저물었는데 공격군

의 총성은 더욱 요란스러웠고, 청국군이 지른 궁궐의 화염(火炎)은 황혼의 저녁 하늘을 더욱 

벌겋게 물들였다.  임금을 모신 개화독립당의 간부들은 안전한 곳을 찾지 못해서 망연실색

하고 있었다. 

  이때 민비와 세자, 그리고 대왕대비, 왕대비가 오시라는 기별이 왔다.  북묘는 진령군(眞

靈君)을 봉한 무당 박소사(朴召使)가 민비의 복을 빌던 곳이라 민비에게는 신앙적으로 마음

이 좀 놓이는 피난처였던 것이다.  고종은 민비를 비롯한 왕족들과 함께 있고 싶었다.

  "나도 북묘로 가겠다."

  고종은 민비가 기다리면서 사람까지 보내서 부른 북묘로 가고 싶어했다.

  "그 곳은 위험하오니 단념하십시오."

하고 김옥균이 반대했다.  고종을 민비와 함께 모시기는 꺼림직했던 것이다.

  "무감, 빨리 북묘로 인도하라."

  고종은 심복 무감(武監)에게 거듭 명령했다.  김옥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린 강경한 명

령이었다.  무감은 재촉하는 고종을 호위하고 북묘로 향해서 출발했다.  그러자 박영효는 성

을 내고 긴 칼을 쑥 뽑아 들고는 고종을 인도하고 가는 무감의 옆구리에 대고 위협했다.  

고종은 다시 억류당하고 말았다.  박영효는 자기의 모의(毛衣)를 벗어서 소나무 밑에 깔고

  "상감, 편히 앉으셔서 잠시 쉬십시오."

하고 권했다.  그러나 고종에게는 편한 자리가 아니고 바늘방석같이 불안한 자리였다.  그러

나 김옥균의 날카로운 감시의 눈과 박영효의 칼끝이 무서워서 북묘로 가겠다는 고집은 더 

하지 못했다.  박영효와 김옥균은 이때도 함께 있던 다께조에에게
  
  "상감을 모시고 인천으로 가야겠으니 군대로 호위해 주시오."

하고 또 고종을 인천까지 납치해 가기를 요청했다.

  "..."

  다께조에는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때 마침 북산을 점령하고 있던 조선 별초군

(別抄軍) 백여명이 황혼 속으로 일본군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맹렬한 사격을 가했다.  고종

의 옆에 있던 시신(侍臣)이 탄환을 맞고 쓰러지자 고종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김옥균은 무

감에게

  "저놈들에게 여기 상김이 계시니 사격을 중지하도록 하오."

하고 명했다.  자기들보다는 고종의 심복인 무감을 시키는 동시에 자기들이 고종을 납치하

고 있는 것도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무감은 큰 소리로 이곳에 상감이 계시니 사격을 

중지하라고 외쳤다.

  공격하던 조선군 부대의 사격이 중지되자 고종은 또 대왕대비의 안위가 걱정스러우니 북

묘로 가야겠다고 주장했다.  실은 민비와 함께 있고 싶었던 것이다.  이때 다께조에가 이 문

제에 대해서 비로소 입을 열었느데, 그 뜻밖의 말에 김옥균과 박영효가 벼락을 맞은 듯이 

놀랐다.

  "일본공사가 국왕을 호위하는 것이 도리어 문제를 까다롭게 할지 모르니 일본 군대는 철

수하고, 사태의 진전에 따라 선후책을 강구하겠소."

  "상감을 우리가 억지로 모신 것은 당신과 일본 군대를 믿고 한 일인데, 지금 철병하면 청

국군과 민가 일족에게 정권이 다시 돌아갈 텐데, 그러면 우리는 어찌 되란 말이요?"

  김옥균이 성을 내고 항의했다.

  "사태는 심상치 않게 되었소.  처음엔 청국군뿐인 줄 알았더니, 지금 발포한 것은 조선군

이 아니요?  조선군의 발포는 국왕을 우리 일본군대가 호위하고 있기 때문이오.  오해와 모

험을 무릅쓰다가 만일 국왕께 불행한 일이라도 생기면 안 되니까..."

하고는 김옥균의 말은 무시하고, 고종에게 일본군은 철수하겠으니 대국을 잘 통찰해서 사태

를 수습해 달라고 아뢰었다.  고종은 안심하고 무감을 재촉해서 민비가 기다리는 북묘로 급

행했다.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서재필은 자기들의 혁명(甲申政變)이 단 삼일 동안의 명목상 집권 

- 문자 그대로 삼일천하로 몰락한 운명을 직감(直感)했다.

  "우리는 장차 어디로 가야 옳소?  국왕을 따라가면 친정 보수당에 잡혀 죽을 테고..."

  이제는 정권의 욕망보다도 자기들의 생명을 구하기에 급급했다.

  "당신들 고충에 동정하오.  우선 나를 따라오시오."

  대부분의 개화독립당 간부는 다께조에를 따라가서 우선 생명을 보전하기로 했다.

  다만 홍영식은 이번 혁명에도 민영익을 보호해 주었고, 청장 원세개와도 친분이 있어서 

민비 부수당의 보복을 면할 듯 싶었다.  또 그 자신도 국왕을 따라 가겠다 했으므로 김옥균 

등도 이에 찬성하면서 뒷일까지 당부했다.

  "자네는 인덕이 있으니까 박해는 면할 것이니 국내에서 시기를 기다리게.  우리는 국외로 

망명했다가 후일에 권토중래(捲土重來)하겠네."

하고 비장한 다짐으로 동지들과 이별했다.


  [ 落照의 王家 ]   < 狂亂하는 季節 >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落照의 王家 

    狂亂하는 季節 


   김옥균 일파의 중심인물들은 다께조에를 따라서 일본공사관으로 피신했다.  홍영식과 박

영교는 민씨 일파와도 개인적으로 사이가 나쁘지 않았으므로 안심하고 고종을 모시고 갔다.  

그러나 참형만 자초(自招) 했을 뿐 삼일천하의 개화독립당은 국내에선 완전히 멸망해 버렸

다.

  그날 밤, 남산에 있던 일본군의 병영도 습격을 받고 불에 타버렸다.  이십삼일에는 아침부

터 보수당에서 선동한 민중이 일본공사관을 포위하고 돌을 던지면서 침입하려다 문 앞의 파

수병과 충돌했다.

  "김옥균, 박영효 등 역적을 내놓아라!"

  "개화당을 조종하는 일본공사는 곧 물러가라!"

  일본공사도 사태가 위급해지자 미국공사와 영국공사에게 응원을 청하려고 했으나 청국군

과 흥분한 군중 때문에 그들의 교통은 완전히 두절당했다.

  일본공사관이 완전한 고도(孤島)와 같이 외부와 일체의 연락이 끊어지자 당장의 곤란은 

그날 먹을 식량조차 구할 길이 없는 것이었다.  공사관에서는 직원의 고용원과 호위병이 칠

십명인데다가 피난해 온 일본인 거류민을 합한 삼백명의 큰 식구를 수용하고 있었기 때문이

다.  식량이 떨어진 그들은 관내에서 아사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탈

출해서 인천으로 가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결심했다.  다께조에를 비

롯한 관원은 죽 한그릇씩으로 점심 요기를 하고 군대의 호위로 공사관을 나와서 인천으로 

도망해 갔다.

  이 일본 공사관 직원과 군대 한복판에는 개화독립당의 중심인물인 박영효, 김옥균, 서광

범, 서재필, 신응식(申應植), 정난교(鄭蘭敎), 유혁로(柳赫魯), 변수(邊燧) 등이 구경꾼의 시선을 

피하면서 무거운 걸음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서울을 탈출하려다가 광화문 거리에서는 청국군과 조선군의 습격으로 한때 전투까지 하고

는 패쇄된 서대문을 부수고 마포로 나와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갔다.  그리고 인천에서 일

본기선 천세호(千歲號)로 일본공사를 따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처럼 개화독립당이 일본 세력과 함께 도망친 뒤에 청국군은 전보다도 더 강한 보호자로

서 국왕과 민비정권을 지배하게 되었다.

  청장 오조유는 십구일 밤에 고종을 자기 군영에 모셔다 보호했다.  다음 이십일에는 원세

개의 군영으로 모셔갔다.  그리고 거기서 원세개의 지휘 밑에 최초의 중신회의가 열려서 조

정의 중요인사가 발령되었다.  그리고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은 오적(五

賊)으로 몰아 잡아서 극형에 처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외무협판(外務協辦) 목인덕(穆麟德)은 개인적으로도 원수 같던 김옥균 등을 체포하라

는 왕명(王命)을 받자 군대를 거느리고 인천으로 급행했다.  그러나 때는 조금 늦어서 개화

독립당원들은 이미 일본기선에 망명해 있었다.

  그는 일본공사 다께조에를 만나서 김옥균과 박영효 등의 역적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다께조에는 본래 성격이 약한 기회주의적인 외교관이었다.  그래서 국왕의 명령으로 김옥균 

등을 체포하러 왔다고 위협하자, 다께조에는 김옥균 등에게 또 배신행동을 했다.  즉 하선하

도록 요구한 뒤에 자유롭게 피신하라고 권했다.

  "공사는 또 배신하고 우리를 잡혀 죽게 할 작정이요?"

  사형선고와 같은 다께조에의 하선(下船) 요구에 김옥균, 박영효 등은 차라리 배 위에서 자

결할 각오를 했다.  그래도 다께조에는 인정상으로라도 자기가 책임져야 할 망명객들에게 

무자비하게 냉혹한 태도를 취했다.  대담한 책사(策士)인 김옥균도 이제는 살길이 막연했다.

  그러나 이 위급한 때에 그들을 구원해 준 의협심이 많은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그는 천

세호의 선장 쓰지가쓰 사부로오(迂勝三郞)였다.  그는 단호한 태도로 일본공사의 태도를 물

리치고 선장의 권한으로 말했다.

  "처음에 망명객을 태운 것은 다께조에 공사의 체면을 보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런 문제가 생겼다고 다시 하선하라는 공사는 비겁하다.  이젠 내 체면으로도 하선시킬 수 

없다.  비록 공사의 명령이라도 이 배의 권한은 내게 있다.  나는 선장의 책임으로 인도상

(人道上) 곧 잡혀 죽을 망명객을 하선시킬 수 없다."

하고 망명객들을 배 밑의 비밀실에 숨겨 주었다.  그리고 재촉하는 목인덕에게는 시치미를

떼고

  "공사는 그 사람들이 이 배에 탄 줄 알고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나, 선장인 나로선 그런 

사람을 태운 일이 없소."

  목인덕은 우물쭈물하는 일본공사에겐 큰 소리를 했지만, 일본선장의 권한을 무시하고 외

국기선을 수색할 수는 없었다.  공사의 정치적인 대접보다도 선장의 인도적 위협심이 김옥

균 등의 많은 인명을 구해 준 것이다.

  그리하여 개화독립당의 갑신정변(甲申政變)은 삼일천하로 실패했다.  비록 그들이 일본의 

후원으로 거사는 했지만 이 운동은 근대국가(近代國家)로서의 민주적 자주독립(民主的 自主

獨立)을 시도한 최초의 정치운동(政治運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개화당의 갑신정변은 민비 보수정권에게 세계각국과의 관계가 복잡미묘함을 알려 주었다.  

청국군과 일본군과의 충돌 사건이 국제적으로 큰 변화를 일으키게 했던 것이다.  일본은 조

선에 대하여 공사관 습격과 일본인 사십명 살해에 대한 배상과 앞으로의 보장을 위해서 한

양조약(漢陽條約)을 체결시켰다.  그리고 청국에 대해서는 천진조약을 성공적으로 체결시켜

서 양국 군대의 철수와 함께 이권평등으로 조선에 대한 욕망을 채웠다.  이와같이 조선에 

대한 이권을 청국과 일본이 서로 싸우고 서로 타협하는 정세에 시기를 느낀 세계 각국 특히 

노서아, 영국, 미국은 조선의 중립론을 들고 나와서 통상 등으로 이권을 노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조선은 마침내 극동의 화약고(火藥庫)가 되는 운명을 외부로부터 강요당하고 또 

내부에서 자초(自招)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조정에서는 그들 각국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민비는 종래의 친정(親政)정책에 변덕을 부려 청국과 일본을 다 배척하고 다른 제 삼국의 

외국세력과 결탁할 꾀를 부렸다.

  "청국도 인젠 믿을 수 없다.  신흥 일본의 세력에 밀려서 일본이 요구하는 천진조약으로 

철병도 하고, 원수의 대원군까지 귀국시킬 모양이다."

  민비는 일본과 청국간의 공동양해로 대원군을 귀국시킨다는 것이 싫었다.  이 문제만 보

더라도 민비정권을 청국과 일본이 다같이 탐탁히 여기지 않고 대원군으로 하여금 민비의 정

적을 삼아 후원하려는 비밀공작이 아닐까 하는 의심과 불안을 느꼈다.

  "비록 청국과 일본이 대원군의 집권을 후원하지 않더라도, 그가 자유로운 몸으로 귀국하

면 또 정치음모를 할 것이다."

  민비는 대원군을 송환한다는 소문이 외국군의 침입보다도 싫었다.

  "청국과 일본은 저희 나라끼리 우리 정부를 무시하고,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야합하면서 

이용만 한다.  이 기회에 노서아와 손을 잡고 청국과 일본의 간섭을 막아야겠다."

  이런 생각으로 노서아 남하정책(南下政策) 때문에 반대하던 종전의 방로책(防露策)을 포기

하고, 1,885년 사월 십사일에 한로조약(韓露條約)을 체결하였다.  그와 동시에 민비는 밀사를 

노서아 황제에게 보내, 조선에서 외국 간섭으로 중대사건이 생길 때는 조정의 보호를 요청

한 비밀외교까지 했던 것이다.

  노서아가 조선에 대한 남하정책을 노골화하고, 조선왕실과 노서아왕실 사이에 밀약설이 

유포되자, 영국 함대는 노서아의 세력이 동양에서 팽창함을 견제하기 위해서 1,885년 사월 

십오일에 남해의 거문도(巨文島)를 무단 점령했다.  노서아에서는 이에 대해서

  "만일에 영국 해군의 이런 불법행동을 시인한다면 우리로서도 조선반도의 어느 일부를 점

령할 것이다."

라고 엄중히 항의했다.  조선의 영토는 마치 외국이 분할 점령하는 대상물같이 자기들 마음

대로 흥정했던 것이다.  민비정권은 영국의 거문도 점령이 노서아의 압력으로 철수되기를 

은근히 바랐다.

  노서아의 이런 강경한 태도와 일본 및 청국의 항의에 부딪친 영국은 거문도를 오천파운드

의 돈으로 사겠다고 했으나, 전기 삼개국의 반대로 민비정권은 거절했다.  청국 이홍장도 영

국이 거문도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노서아가 조선의 일부분을 점령하는데 찬성한다는 뜻으로 

영국에 대하자 영국도 하는 수 없이 1,887년 이월에 해군을 철수시켰다.

  민비정권은 국토의 일부를 외국군사에게 불법 점령당하고도 자력으로는 격퇴할 실력이 없

었다.  이것은 대원군이 각국의 군대를 격퇴한 자주성과는 판이한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의

타(依他)외교에 지나지 못했고 이러한 민비의 잔꾀는 마침내 조선을 외국의 충돌과 전쟁마

당으로 만들고 끝내는 자신의 생명까지 외국의 흉인(兇刃)에게 빼앗기고, 조선왕실과 나라까

지 멸망시키는 화근이 되었던 것이다.

  청국은 민비정권이 갑신정변 때에 왕실을 구해 준 은공도 잊고 천진조약을 계기로 일본과 

함께 자기 나라를 경계하고 노서아와 친하려는 술책이 미웠다.  그래서 청국의 이홍장은 일

본의 이노우에 외무대신과 상의한 끝에, 조선 조정의 민비세력을 견제하는 의미에서 대원군

을 석방해서 본국으로 돌려보내게 되었다. 

  청국도 일본도 임오군란(壬午軍亂) 때의 원흉으로 미워하고 청국으로 납치해다가 엄중히 

감금했던 대원군이다.  그러나 갑신정변(甲申政變) 이후의 국제 정세의 변화로, 민비가 친로

정책(親露政策)을 꾀하게 되자 민비 최대의 정적인 대원군을 석방 귀국시키려고 했던 것이

다.

  "대원군을 귀국시키는 청국과 이에 찬성한 일본은 장차 그에게 정권을 맡기기 위한 공작

이다.  귀국하기 전에 외교간섭으로 중지시켜야 한다.  그놈의 늙은이 병으로 죽지도 않고 

또 돌아오면 두통거리다."

  민비는 대원군의 귀국이 두려웠다.  그리고 그를 이용해서 자기의 세력을 꺾으려는 청국

과 일본의 야합이 분했다.  민비는 노서아 공사에게 대원군 귀국 반대에 후원해 줄 것을 밀

청(密請)하는 동시에 민씨 일파의 대표자격인 민영익(閔泳翊)을 천진으로 보내서 이홍장에게 

직접 반대운동을 했다.

  "각하, 대원군이 귀국하면 또 임오군란 같은 폭동을 일으켜서 조정을 전복할 음모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국내 혼란을 구실로 각국의 군대가 조선에 출동할 것이요.  그러면 조선

의 독립이 위태로울 뿐 아니라,  각국의 군대가 조선 땅에서 충돌할 것이니, 실로 위험합니

다.  대원군은 국왕의 생부요, 왕비(민비)의 시아버지이며, 양(兩) 전하도 사사로운 정의로서

는 귀국을 누구보다도 바라지만 국가를 위해서 귀국 보류를 원하시니 그 점을 잘 살펴 주시

오.  귀국에 있는 동안에도 교묘한 수단으로 국내의 잔당(殘黨)과 밀통하면서 음모한 죄가 

적지 않았습니다."

  이런 거짓말로 이홍장을 졸라댔다.

  "우리 나라로선 귀국의 내정문제엔 간섭할 생각도 없소.  다만 국왕의 부친을 너무 오래 

감금해 두는 것이 양국의 체면상, 또는 인도상 미안해서 돌려 보낼 생각 뿐이오.  효성이 지

극한 국왕도 왕비도 환영할 우리 나라의 호의를 당신들이 공연히 그러는 것이 아니요?"

하고는 이홍장은 능청맞게 이런 말로 민영익을 반박했다.  그리고 국왕과 왕비가 대원군의 

귀국을 반대한다면 그것은 인간으로서 불효가 아니냐고 빈정대는 태도까지 보였다.  민영익

을 파견한 뒤에도 불안해진 민비는 김명규(金明圭)와 이응준(李應俊)을 또 파견해서 반대운

동을 했으나 이홍장은 도리어 그들을 설복시키려고 했다.

  "대원군이 귀국하더라도 전과 같이 정치활동에 흥미를 느끼지 않을 것이니 왕비를 비롯한 

민씨 일문에서도 원만한 화해를 하도록 당신들이 힘써 주시오.  좌우간 우리는 국가간의 체

면과 인도상의 염치로 이 이상 대원군을 억류시킬 생각은 없소."

  이홍장의 기정방침은 민비가 파견한 반대운동자들의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각하의 의견이 정 그러시다면 귀국 후에 서울에 있지 못하게 하고 국내의 어느 벽지에 

한거(閑居)하도록 하는 조처에 귀국에서도 양해 해 주시오."

하고 국내에서 귀양 보내는데 묵인해 달라고 애원까지 하자 이홍장은 껄꺼 웃었다. 

  "허허허, 그건 부친에 대한 국왕의 생각이요?  아니면 국왕을 보필하는 대신들의 생각이

요?"

  아무리 국왕이라도 자기 부친을 귀양 보낼 수가 있느냐?  그러면 불효의 죄를 면하지 못

한다는 위협이었다.  이 말에 대해서는 청하던 사신들도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홍장은 민비가 파견한 사신들의 청원을 일축하고 보정부(保定府)에 귀양 보냈던 죄인 

대원군을 국빈 대우로 천진에서 맞았다.  이홍장은 특별히 청국황제도 만나게 하고 귀국 감

상과 조선의 정치문제에 대한 대원군의 진의(眞意)를 타진했다.  이에 대해서 대원군은 이홍

장의 호의에 감사하면서, 칠십 가까운 노인답지 않게, 외국에 오랫동안 감금된 사람답지 않

게, 자기 소신을 솔직히 피력했다.

  "왕비가 계속 정치를 휘두르면 귀국이 아무리 보호 원조하더라도 조선은 수년을 보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귀국에서 왕비에게 일체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엄중한 지시를 하고, 귀국

의 대신 한명을 파견해서 국정의 대소사를 감독케 하면 나라도 지탱되고 민심도 안정될 것

입니다."

  민비가 대원군을 미워하는 만큼 대원군도 민비를 미워했다.  그러나 그 분풀이를 역시 외

세(外勢)에 의해서 하려는 사대주의에는 대원군도 민비와 다를 바가 없었다.

  청국의 대신이 조선 통감격으로 가서 내정을 감독해 달라는 대원군도 이제는 완전히 배외

쇄국(排外鎖國)의 정책을 버렸던 것일까.  청국만은 양이(洋夷)가 아니라는 종주국(宗主國) 대

우로서 그랬던가.  혹은 민비를 꺼려하는 자기를 석방 귀국시켜 주는 이홍장의 호의에 아부

한 말이었던가.

  아무튼 청국의 힘으로 조선 조정에서 민비의 세력을 꺾어버리려고 청국의 힘을 애원한 것

은 사실이다.  대원군의 이런 솔직한 말은 이홍장에게 충분한 이용가치를 인식시켰다.

  친로거청(親露拒淸)하려는 민비의 외교술책을 어느 정도 완화시키려는데는 대원군을 귀국

시켜서 은연중에 친청 세력을 유지 강화시키려는 것이 좋다는 자신을 갖게 해주었다.  그래

서 대원군은 임오군란 후 청국에 잡혀간지 만 삼년 만에 청국군함으로 당당하게 귀국했다.

  대원군이 삼년 만에 외국 귀양에서 풀려 오자 청국, 일본의 공사들은 크게 환영을 했고, 

민비 정권을 중오하던 국민들도 환영했다.  그러나 고종과 민비를 비롯한 조정의 중신들은 

그와 정반대로 냉대했다.  대원군에 대하여 직접 박해는 가할 수 없었으므로, 그가 서울에 

와서 운현궁에 들어간 다음날부터 운현궁에는 관민을 막론하고 일체의 출입을 엄금했다.

  청국 보정부의 귀양살이 이상으로 부자유했다.  그리고 임오군란 때 도망했다가 잡힌 김

춘영(金春永), 이영식(李永植) 등을 능지처참해서 대원군을 위협하는 동시에 대원군의 옛날 

종복(從僕)들도 다시 시중하지 못하도록 독살하고 옛날에 대원군과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을 

모조리 체포하려고 엄중한 수배를 했다.

  "민비와 대원군 싸움에 나라가 망한다."

  "시아비는 청국편, 며느리는 아라사편이니, 이 집안 싸움이 언제 청아(淸雅) 전쟁으로 터질

지 모른다."

  "지금 앞장선 청국과 아라사보다 모른 척하고 구경하고 있는 일본이 더 무섭다.  청국도 

아라사도 다 늙어서 허장성세만 하지만, 실속만 노리는 신흥강국 일본의 꾀에 두 나라가 농

락만 당하고 있다.  중간에서 말리는 척하면서 대원군과 민비 - 청국과 아라사를 이간시키

는 것은 일본이다.  그러다가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얻는 건 결국 일본일 거야."

  세상에서는 친청 대원군과 친로 민비의 당파 싸움을 이렇게 욕하면서 경계했다.  그러나 

민비와 대원군의 권력 투쟁의 암투는 악화해 가고만 있었다. 

  사실상 아직도 청국은 조선에 대해서 국제적인 발언권이 제일 강했으며 민비의 비밀 친로 

경향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일본이 청국보다 더 강적인 노서아를 막기 위해서 당

분간 청국에 대한 간섭에 동의했으므로, 이홍장은 임오군란 때 공을 세웠던 원세개를 대원

군 호환사(護還使)로 다시 보내는 동시에 그대로 조선 주재 청국책임자로 삼아서 강력하고

도 노골적인 내정간섭을 하게 했다.

  이것은 대원군이 청국대신급으로 조선 국정을 감독하라고 한 요청이 제도화(制度化)된 것

이나 다름없었다.  이는 일종의 감국대신(監國大臣)으로서 후일 일본이 만든 조선통감(朝鮮

統監)의 소형전례(小型前例)였던 것이다.

  민비정권은 대원군을 옹호하는 원세개의 압력을 배제하려고 노서아와의 비밀외교에 더욱 

정력을 기울였다.  민비는 척신(戚臣)들과 공모하고 웨베르 노서아 공사에게

  "조선왕국을 노서아 제국이 보호 육성해 주시오.  청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지원해 주되, 

청국이 꺼려하거든 군함을 파견해서 견제해 주시오."

하는 내용의 국새(國 )와 총리대신의 도장까지 찍은 비밀문서를 보냈던 것이다.

  민비의 이러한 친로 비밀교섭에 반대해 오던 민씨 일파의 거물은 우영사(右營使)로 있던 

민영익(閔泳翊)이었다.  그는 대원군과 역시 정적이었으나 외교문제에 한해서는 반로친청(反

露親淸)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민비의 친로 비밀공작에 반대한 나머지 고종 병술년(丙戌年) 칠월에 왕실의 친로 비

밀교섭을 청국 원세개에게 밀고했다.  오만불손한 원세개는 민비도 안중에 없었으므로 종전

의 그런 풍문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지만, 민영익의 밀고로 그것이 사실임을 비로소 알고 

놀라는 동시에 분개했다.  원세개는 곧 본국의 이홍장(李鴻章)에게 비밀 전보를 보냈다. 

  < 국왕(高宗)이 노서아와 밀약하고 청국 세력을 몰아내려 하는 음모를 하고 있으니 국왕

을 갈아치워야 하겠음. >

  결국 일국의 왕을 마음대로 갈아치우려는 음모가 진행되었는데, 고종을 몰아낸 뒤에는 고

종의 조카(형의 아들)인 이준용(李埈鎔)을 세자로 들여세우고 대원군을 섭정으로 삼아서, 그

에게 국정을 맡기겠다는 계획이었다. 

  원세개의 이런 음모는 물론 대원군에게 비밀로 연락되고 정권회복에 호시탐탐하면서 민비 

일당에게 복수할 기회를 노리던 그에게는 이를데 없이 기쁜 소식이었다. 

  "장군의 건의가 이홍장 대신을 비롯한 귀국 조정에서 승인될지 모르겠으나, 모든 것은 장

군의 힘만 믿습니다.  만일 귀국에서 승인하지 않을 경우라도 장군만 후원하신다면 국내 사

정만으로도 해치울 방도가 있습니다."

  대원군은 조급하게 졸랐다.  그러나 원세개로서는 본국의 승인 없이는 어려웠으므로 이홍

장의 찬성을 얻으려고 모든 정보를 비밀제공했다.  그리고 연극을 꾸몄다.

  대원군의 운현궁을 습격 방화하고 그 폭동의 책임을 민비 일당의 소행으로 뒤집어 씌운

다.  그리고 민비 일당의 만행을 규탄한다는 명목으로 폭도들로 하여금 이 기회에 민비정권

을 전복시키려고 궁궐을 습격하는 난리를 일으킨다.  그 뒤에 원세개는 폭동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청국 군대를 거느리고 궁중을 점령한 뒤에 고종을 폐위시키고 대원군에게 다시 정

권을 맡긴다는 음모였다.

  그러나 원세개의 그런 음모 건의를 받은 이홍장은 심중한 태도를 취해서 노서아에 대한 

외교 교섭을 하는 동시에 대원군 자신의 세력이 민비 일당의 세력을 제거할 시기까지 기다

리는 것이 좋으니 제반 준비를 갖추고 기회를 보라는 훈령을 원세개에게 내렸다.

  대원군의 주체세력이 아직 약한 때에 준비 부족의 폭동을 일으켜서 내란이 일어나면, 청

국 군대 뿐 아니라 일본을 비롯한 각국, 특히 민비와 밀약한다는 노서아도 군대를 파견해서 

복잡한 국제분쟁이 조선에서 재발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홍장은 고종폐위와 대원군 재집권에 대한 계획에는 찬성하고 곧 청국으로서의 

준비 행동에 착수했다.  즉 조선 출병을 정여창(丁汝昌)에게 명령하는 동시에 성선까지 동원

해서 군대 수송의 준비도 서둘렀다.  서울에 있는 원세개는 그런 정보를 받고 불원간 거사

할 계획에 자신을 갖고 조선 조정과 국왕 고종에게 노골적인 압력을 가했다.

  원세개는 노서아의 밀서(密書) 사본(寫本)을 제공한 민영익의 비밀을 지켜 주려고 위조 전

보로서 조선 조정을 위협했다.  그는 칠월 십오일에 대신들과 각군영의 대장들을 자기 공관

으로 초대하고 연회를 베풀었다.  그리고 잔치가 진행 된 자리에서 한 장의 위조 전보를 공

개했다.

  "나는 이번에 본국 정부에 대해서 면목이 없게 되었소.  여러분과는 평소에 친한 사이로 

믿었는데 어쩌면 그렇게 나를 속여서 놀라게 했소.  내가 채 보고도 하기 전에 본국에서 먼

저 귀국과 노서아와의 밀약(密約) 사실을 알고 귀국에 문죄차(問罪次) 군대가 오늘 정오에 

군함으로 출동했다는 전보가 왔소."

  원세개는 위조 전보로 위협했다.  초청 받았던 대신들은 깜짝 놀라 황망히 돌아가서 고종

과 민비에게 보고했다.  왕실과 정계는 물론 이 소문을 전해 들은 장안의 인심이 흉흉해졌

다.  정부에서는 친군사영(親軍四營)에 비상 경비령을 내렸다.

  원세개는 자기의 위조 전보 한 장으로 연극의 효과가 큰 것을 보고 코웃음을 치면서 이튿

날에는 고종을 방문하고 직접 위협했다.

  "문죄의 대병이 오기 전에 전하는 빨리 우리 양국의 친선 관계를 파괴하는 간신의 무리를 

숙청해서, 전하의 본심이 아니라는 성의를 보여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불행한 일이 발생

할지 모릅니다."

  고종도 원세개의 이런 위협에 당황해서 어쩔줄을 몰랐다.  원세개는 외교독판(外交督辦) 

서상우(徐相雨)를 불러 놓고

  "귀국정부의 군신상하(君臣上下)가 우리나라와의 친선정통을 파괴하는 불법을 감행했으니, 

그 책임을 느끼거든 즉각 사과하고 타국과의 밀약음모를 파기하시오."

하고 오만불손한 요구를 내놓았다.  그리고 미리 연락한 대원군은 국가 안위(安危)의 중대사

건을 금시 초문이라는 놀란 표정을 짓고 궁중으로 찾아와서 조대비(趙大妃) 홍대비(洪大妃)

에게

  "무모한 친로 밀약으로 청국에 배신해서 지금 청국이 노하고 대군을 급파하였다니, 왕실

의 운명이 목전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청국 대군이 입성하기 전에 조정에서 간신배를 몰

아내고 국정을 바로 잡아서 우선 청국의 노여움을 풀고 안으로 민심 안정을 도모해야 합니

다."

하고 대원군은 눈물까지 흘리면서 자기가 다시 정권을 잡아야만 이 중대 위국을 수습할 수 

있다는 암시를 했다.  당황한 군신은 긴급 회의를 열고 선후책을 강구했으나, 우선 국왕과 

대신들이 책임을 피하려 했다.

  "아라사와의 밀약문서는 국왕도 대신들도 모르는 일이요."

  "비밀서류의 사본에는 분명히 국새가 찍혀 있소.  증거품을 보여야 시인하겠소."

  "그건 모두 협잡배들의 장난입니다."

  "우선 그 협잡배가 어떤 자들인지 엄중 처단하시오.  그리고 아라사공사관에서 그 문서 

일체를 회수해서 무효로 해버리시오."

  원세개는 강경한 요구를 했다.  조정에서는 하는 수 없이 밀사(密使)의 역할을 한 자들을 

억울하게도 협잡배로 몰아서 귀양을 보냈는데, 민비 정권에게 충성을 다한 조존두(趙存斗), 

김가진(金嘉鎭), 김학우(金鶴羽), 김양묵(金良默) 등은 민비정권에 의해서 희생되었다.  그러나 

노서아공사관에서는 비밀문서를 반환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조선 조정의 처사에 대

해서 항의했다. 

  "청국의 내정간섭으로 외교문서를 반환하라는 것은 실례도 이만 저만한 것이 아니다.  그

리고 무죄한 사람들을 억울하게 귀양 보내는 법이 어디 있느냐?"

  민비의 외교정책은 청국에게 위협을 받았을 뿐 아니라, 노서아로부터도 웃음거리가 되었

다.  그러나 원세개의 국왕 폐립의 음모는 꾸준히 계속되었다.  그는 칠월 이십일일에 이홍

장에게 전보로 밀청(密請)했다.

  < 국왕은 비밀문서를 보낸 채현식(蔡賢植)을 암살해서 증거를 인멸시키려고, 아라사 군대

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국내의 상하인심이 흉흉한중이니, 만일 오백명의 군대

만 보내 주셔도 국왕을 폐한 후에 아라사와 야합하려는 무리를 천진(天津)으로 잡아다가 신

문할 수 있도록 만들겠습니다. >

  원세개는 수병 오백명만 있으면 고종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대원군에게 집권시킬 수 있다

고 장담했다.  그러니 일국의 왕위(王威)와 군력이 얼마나 풍전등화(風前燈火)같이 미약했던

가를 알 수 있다.  이때 만일 대원군에게 정권을 담당할 세력이 있었으면 이홍장도 원세개

의 음모에 찬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대원군에게는 아직 그만한 정치세력이 없었고 

일반 국민도 그를 그렇게까지 신임하고 있지 않았다. 

  그밖에도 미묘한 국제정세가 있었으므로 이홍장은 고종 폐위를 단행하는데 심중한 태도를 

취했다.  그리해서 결국에는 외교문서에까지 국왕의 거짓 옥새를 사용했다는 고종의 증언으

로 국왕의 위신까지 떨어뜨렸다.

  < 금후로는 외국인과의 일체의 공사(公私) 계약에는 외무 아문(外務衙門)의 관인 없으면 

무효이다. >

  그리고 이런 조회문까지 각국 공관에 보냈다.  그것은 노서아와의 밀약문서가 위조물이며 

옥새까지도 위조물을 찍었기 때문에 무효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구육책(狗肉策)이었으며 

약국의 굴욕외교(屈辱外交)로서 극치의 표본이 아닐 수 없었다.

  "민비의 고집과 간지(奸智)도 별 수 없구나.  구차한 변명으로 대원군에게 정권을 또 빼앗

기지 않은 것만 운수가 좋았다."

  이런 욕을 먹는 민비도 하는 수 없이 서상우와 이응준(李應俊)을 사신으로 청국에 보내서 

양해를 구했으나 결국은 사과행각(謝過行脚)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소동 끝에 고종의 폐위

는 모면되고 민비정권은 구차한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원세개도 싱거운 놈이야!"

  이미 이가 빠지고 발톱이 무딘 늙은 호랑이 대원군도 청국의 힘으로 민비에 대한 원수를 

갚고 다시 정권을 누려 보려던 야망이 수포화되자 공연히 마음만 들뜨게 했던 원세개를 싱

거운 놈이라고 원망했다.

  사건이 이렇게 일단락되자, 민영익은 원세개에 대해서도 거북했고 왕실에 대해서도 미안

해서 향항(香港)으로 망명해 버렸다.  그가 망명한 또 하나의 이유는 친로 비밀 외교 반대의 

자기 주장이 뜻밖에도 고종폐위와 대원군 재등장의 음모로 발전된데 대한 불안과 불만에도 

있었던 것이다.


  [ 落照의 王家 ]   < 亡國의 吊鍾 >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落照의 王家 

    亡國의 吊鍾


   민비는 자기의 반청친로(反淸親露)의 비밀외교가 문제도어 청나라의 노염을 사고 고종의 

왕위 폐립 위기에까지 이르렀으므로 경풍을 하고 울화가 나서 몸져 누워버렸다.  민비만 믿

고 의지하던 고종은 국권의 위기에 못지 않은 불안을 느꼈다.

  그뿐 아니라 인생에 대한 고독까지 느끼고 우울한 날을 보냈다.  민비의 미신숭배를 아는 

측근에서는 병마를 쫓아내려는 무당굿을 자주했으나, 민비의 병세는 더해질 뿐, 배에 종기까

지나서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감국대신(監國大臣)으로 위세가 당당하던 원세개은 민비의 병이 중해지자 직접 왕실에 자

주 들어와서 조정의 대신들을 직접 명령하면서 제마음대로 부렸다.

  고종은 표면상 국왕으로서 감국대신 원세개의 호령에 꿈쩍도 못했으나, 그와는 반대로 필

요도 없는 실력자 민비는 심궁 안에서 그의 오만한 태도에 불평만했다.  이번에는 할 수 없

이 청국에게 사과했지만 장차는 세계 강국인 노서아의 힘을 빌려서 원세개와 이홍장에게 보

복하려고 별렀다.

  원세개는 처음에는 숙국 조선에 대한 정치적 명분을 세우고 위세를 부리는데 치중하고 경

제적 이권에는 비교적 소홀했으므로 일본은 조선의 주권을 존중하는 척하고 정치간섭엔 관

심이 없는 듯이 무역통상을 중심으로 경제적 실익만을 취했다.

  그러나 원세개도 차차 경제적 이권을 확장해서 일본과 경쟁했으며 종주국적인 정치적 압

력으로 경제적 이권도 일본보다 우선권을 행사했다.  그래서 일본과 청국관계는 점점 심각

한 암투를 벌이게 되었다.  그것은 청국과 노서아의 대립 이상으로 심각했다.  더구나 민비

는 청국의 간섭을 노서아의 후원으로 억제하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으나 일본 세력의 침투

는 청국 이상으로 꺼려 했다.  그러나 일본 신흥세력의 대륙진출 의욕은 조선과 청국의 반

대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민비정권은 청국의 종주국적인 태도에 불만은 있었으나, 그 보호 밑에서 근근히 정권의 

명백유지만 하고 내부에서는 부패가 거듭되고 있었다.  모든 정치적 공작은 반대파인 대원

군의 세력 탄압과 일본에 망명중인 김옥균, 박영효 등 친일적 개화독립당의 음모를 분쇄하

는데만 경주했다.

  그리하여 그들을 암살하기 위해서 여러명의 자객(刺客)을 일본에 밀파하고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재야(在野)의 낭인 정객(浪人政客)들로 김옥균, 박영효 등을 보호해 주

었으나 정부로서는 귀양을 보내 김옥균의 신변보호를 해주었다.

  김옥균은 일본에서 모사(謀事)가 여의치 못하자, 민비를 싫어하는 청국 이홍장의 후원을 

받을 생각으로 청국 상해로 건너 갔으나, 동지로 가장하고 함께 따라간 민비측 자객 홍종우

(洪鍾宇)의 칼을 맞고 여관에서 객사(客死)했다.  그리고 그의 시체가 서울로 이송되자 민비

파에서는 죽은 시체에 역적의 패를 붙이고 다시 참형에 처하는 잔인한 보복까지 했다.  그

러자 일본 언론계에서는 그 비인도적 처사를 비난했고 냉정하던 일본정부에서도 그것이 노

골적인 반일 행동이라고 못마땅해 하는 동정을 표시했다.

  이처럼 민비정권에 대한 일본의 반감과 일청관계가 악화일로에 있을 때 마침 전라도에서 

동학당(東學黨)의 반란이 일어나서, 부패한 민비정권을 타도하려는 민중운동이 폭발했다.

  부패하고 무력한 관군(官軍)의 힘으로는 도저히 동학당 반란을 진압하지 못하게 되자 조

정에서는 이럴 때면 외세에만 의존하는 상투적 구명책으로 청국에 청병(淸兵)해서 국내 반

란의 진압을 호소했다.

  청국에서는 조선 파병의 구실을 기다리던 중이라, 오월 삼일(甲午年)에 천오백명의 군대로 

아산만(牙山灣) 백석포(白石浦)에 들어왔다.  청국은 조선 출병에 앞서서 천진조약(天津條約)

에 따라 일본에게 그 사유를 통지했던 바 일본은 이에 대한 회답 대신 사흘 후인 오월 육일

에 일만명의 군대를 태운 군함으로 인천항에 입항했다.

  "앗, 일본과 청국이 전쟁을 하게 되었다."

  조정에서도 놀랐고 청국도 놀랐다.  민심도 흉흉했지만 많은 난리를 겪은 백성들은 급하

면 피난할 생각으로 비교적 무관심했다.

  "왜놈과 돼놈이 싸우면 어느 나라가 이길까?"

하면서 제 나라 땅에서 싸우는 외국군대 싸움을 구경하려는 호기심으로 수군거렸다.  이런 

예측은 적중에서 청국군은 아산에 상륙해서 서울로 향하고 일본군은 인천에 상륙해서 일부

는 서울로 향하고 일부는 평택으로 향해서 북상하는 청국군을 막았다.

  "우리는 우리의 속국 조선의 청병으로 속국의 내란을 진압하려는 목적에서 왔지만 일본은 

왜 군대를 남의 나라에 무단 출동하느냐?"

  청국측 항의에 대해서 일본은 저대로의 핑계를 했다.

  "조선에서 내란이 나고 청국 군대까지 출동하는 판국에 일본 거류민의 보호상 그냥 있을 

수 없다.  또 청국 군대가 진압할 정도의 내란이라면 우리도 국제 도의상 청국과 함께 내란 

진압에 협력할 생각으로 왔다."

  당황한 조정에서는 사신을 보내서 일본공사 오오도리(大鳥)에게

  "이미 동학당 내란도 진압되었으니, 귀국의 군대를 곧 철수 하시오."

하고 요구했다.  그러나 오오도리는 완강히 거부했다.

  "청국군대가 먼저 왔으니 그들이 먼저 철병해야 우리도 철병하겠소."

  그것은 청국군대가 철병하지 않으면 전쟁도 사양하지 않겠다는 청국과 조선 양국에 대한 

노골적인 태도였다.

  민비정권은 내정의 부패로 농민폭동을 겸한 동학란을 유발(誘發)시켰고, 그 진압책으로 청

국 군대를 불러들였으나, 청하지 않은 일본 군대까지 침입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일

본군을 격퇴시킬 힘이 없는 조정은 청국군이 일본군을 격퇴해 주기만 바랐다.  일본이 아무

리 신흥국가지만 대국인 청국의 힘엔 당하지 못하리라는 상식적 신뢰감도 갖고 있었던 것

이다.

  그러나 일본공사 오오도리는 청국군과 일전(一戰)할 계획은 깊이 숨기고, 이때까지 나타내

지 않고 있던 내정간섭을 노골적으로 시작했다.  오오도리 공사는 조선에서 민란(民亂)이 계

속되는 원인이 부패된 정치에 있다는 것을 설교하고

  "이 기회에 시급히 내정개혁을 단행하시오.  모든 국내반란과 국제문제 분규는 내정개혁

에서만 이룰 수 있소."

하고 소위 오강목(五綱目) 이십개조(二十個條)에 달하는 개혁안을 강요한 후 교정청(校正廳)

을 신설하고 심의하라고 요구했다.  조정에서는 하는 수 없이 교정청의 임원을 대신급으로 

구성하고 일본이 지시한 개혁안을 심의하기 시작했다.

  < 일본의 개혁안은 비록 체면상 부끄럽게 되었지만, 그 취지와 원칙에는 찬성이다.  곧 

민씨 일파의 부패한 전제정치(專制政治)를 폐지하고 초당파 거국내각으로 서정(庶政)을 일신

하는 동시에 선진 문명국의 제도를 체택해야, 이 국난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

  이런 취지의 상소문이 계속되었다.  이남규(李南珪) 등의 이런 상소는 자주적 입장에서 빨

리 내정개혁을 하라고 주장했다.  민비의 대변자 노릇만 하던 고종은 이런 긴박한 내외 공

세에 정신을 못 차리고 우물쭈물하며 시일만 지연시켰다.  

  "청국의 원세개와 파견군 사령관이 본국과 연락해서 일군을 몰아내는 단호한 대책이 설 

때까지 일본에 대한 회답을 지연시키도록 하시오."

  민비는 고종에게 남의 힘으로 남의 힘을 꺾으려는 이런 외교적 잔꾀만 말하고 부패한 자

기 일파의 내정개혁에는 일호의 반성도 없었다.  고종은 민비의 말을 따라서 청국 이홍장에

게 직접 호소하는 비밀전보까지 보냈다.

  "일본의 내정간섭이 급박하오.  그들이 요구한 소위 개혁안을 심의하는 척하고 있는 것은 

귀국에서 신속히 시국 해결을 해주기 바라는 동안의 임시 작전에 지나지 않소."

  그러나 이홍장은 청국주재 각국 공사을 통해서 조선에서의 일본군 철병을 외교적으로 교

섭할 뿐, 독자적인 적극 행동에는 심중한 태도를 취했으므로 민비정권은 총칼을 들이대고 

내정개혁을 강요하는 일본 압력에 지쳐버렸다.  조선에 파병된 청국군 천오백명의 힘으로는 

일본군 만명의 세력을 당할 것 같지 않았다.  더구나 이홍장이 일본을 압도할 대군을 증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불안했다.

  일본공사는 날마다 내정개혁의 심의에 결과를 재촉했으나 지연전술에 화가 나자 조선 대

표세명을 불러서 최후 담판을 했다.  조정의 대표들은 일본 세력에 눌려서 내정개혁에 합의

를 보게 되었으나 고종은 청국을 믿는 마음에서 결재를 내리지 않았다.

  "청국군을 철병시키고, 청국과의 통상조약을 폐기하시오.  이 회답을 유월 이십일까지 하

시오.  이것이 최후의 회답입니다."

  오오도리 공사는 명령적으로 최후 기한을 정하고 정식으로 청국에까지 노골적 태도를 표

시했다.  대세는 이미 결정적으로 일본에 유리했다.

  "원세개도 겁쟁이 졸장부다.  조선 임금을 호령하던 놈이 일본공사가 무서워서 본국으로 

도망쳐 버렸다."

  "아냐, 대군을 데리고 오려고 간 것이겠지,  설마 목숨이 아까와서 도망했을까?"

  원세개는 정세 보고차 귀국한다는 명목이었으나 그의 대리로 당소의(唐紹儀)가 부임되자 

기대하던 조정에서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청국의 현지 세력은 일본에 비해서 시시 

각각으로 떨어져 가고만 있었다.

  일본세력이 갑자기 유리하게 되자 친일적인 재야 정객들과 민비 정권에 불만을 품은 각파

의 정객들은 암암리에 일본공사관에 출입했으며, 특히 일본 낭인(浪人)들과 야합해서 다음 

정권에 한몫 보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이때 특히 벼르며 기다리던 일파는 대원군을 지지하는 숨은 세력이었다.  일본측에서는 

우선 민비정권을 갈아치우는데 대원군을 이용할 계략을 세웠다.  그전에는 대원군을 배일정

책의 주창자로 일본을 미워하는 완고한 노호(老虎)로 꺼렸지만 민비를 제일 미워하였으므로 

이용하려고 생각했다.

  일본공사가 통고한 최후 기한인 유월 이십일에도 조정에서는 아무런 회답도 하지 않았다.  

일본측은 곧 실력행사에 착수했다.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한 일본측에서는 미리 치밀한 행동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일본공사는 이십일일 새벽을 기해서 일본군 이개 대대를 직접 인솔하고 경복궁으로 공격

해 들어갔다.  영추문(迎秋門)을 지키던 호위군은 총 몇 방을 쓴 뒤에 도망쳐버렸다.  남은 

병정의 무장을 해제시킨 뒤에 곧장 함화당(咸和堂)으로 달려든 일본공사 오오도리는 임금을 

배알(拜謁)하고 겉으로는 공손히

  "놀라지 마십시오.  오늘은 내정개혁에 대한 말씀을 직접 들으러 왔습니다."

했으나 사실은 임금을 감금한 것이었다.  이때도 경복궁안의 각처에서는 호위군과 일본군과 

싸우는 총성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호위군의 완전 패배였고 무장해제로 조

용해졌다.

  아침 해가 높아지고 열시쯤 되자 일본군에게 호위된 대원군이 갑자기 경복궁에 나타났다.

  "대원군이 궁중에 들어왔다."

  궁녀의 복장으로 후궁에 숨어서 벌벌 떨던 민비는 궁녀들이 전하는 말을 듣고 대원군이 

일본군과 야합해서 일으킨 반란이라고 직감하고 치를 떨었다.  그러나 사실은 대원군이 주

동적으로 취한 행동이 아니었고 일본공사가 그를 이용한 것이었다.

  대원군도 민비정권을 타도하는데 통쾌했으나 일본군의 이용물로서 그들의 괴뢰정권의 수

반이 되는 것은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동기는 여하간에 자기가 다시 정권을 잡으

면 자주적으로 부패한 정치를 일신해 보려는 야심과 포부는 아직도 왕성했다.
 
  고종도 일본군의 총칼에는 하는 수 없이 일본공사가 요구한 내정개혁안에 무조건 찬성하

고, 신하들에게 신속히 개혁안을 실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오늘부터 중요한 국사는 대원군이 결재하도록 하고 육해군의 통수권도 대원군께 맡기도

록 하라."

  고종은 오랫만에 만난 생부(生父)에게 무슨 효도나 하는 듯이 국정의 실권을 위임했다.  

일본군의 총칼이 두려워서 마음에 없는 정권을 민비로부터 이양시켰던 것이다.

  대원군이 정권을 잡은 뒤에는 형식에만 그치지 않고 민씨 일파의 숙청이 단행되었다.  중

요한 조정의 고관들은 귀양 보내고 내각은 개화당 일파로 편성되어서 일본이 요구한 정치개

혁이 진행되었다.

  국내의 정변이 일본의 무력 위협으로 대원군을 재등장시킨 뒤에는 국제적으로 일본과 청

국의 군대가 충돌했다.

  유월 이십삼일에는 벌써 청국군 구백명을 싣고 오던 군함이 일본 군함의 공격으로 침몰해 

버렸다.  그리고 이십오일에는 평택에서 육전(陸戰)이 벌어졌으나 역기 일본군의 대승리로 

끝났다.

  패잔병은 강원도로 돌아 평양으로 가서 새로 파견된 청국군과 합류한 후 일본군을 조선 

땅에서 막고 자기 나라 땅에는 침입하지 못하게 하려는 작전을 세웠다.

  청국은 이미 사실상의 전쟁을 인정하고 칠월 일일에는 정식으로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했다.  그 선전포고 첫머리에는 속국(屬國) 조선을 종주국(宗主國)의 권리와 의무에서 수호하

기 위하여 침략자 일본군을 토벌한다는 대의명분을 강조했다.  이에 대하여 일본도 같은 날

에 선전포고를 했는데 일본도 조선을 원조하고 동양 평화를 위해서 청국의 침략행동을 격퇴

하겠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일본의 대군은 막대한 군수품을 북송(北宋)하면서 평양으로 공

격해 갔다.  군수품을 운반하는 우마차와 지게부대는 밤낮으로 길을 메우고 일본군의 뒤를 

따랐다.  동원 인부는 물론 조선의 농민들이었다.  마침 농한기였으므로 농민들은 자진해서 

군수품 운반에 동원되었다.  큰 돈벌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전의 청국군대는 공짜로 부역을 시키고 약탈까지 했는데 일본군은 전쟁터 일에도 비싼 

품값을 꼭꼭 지불해 준다.  이 난리 통에 돈벌고 구경하게 됐으니 나쁘지 않다."

  그들 인부의 대부분은 청국이나 일본의 어느편이 지든 이기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이 

돈버는 재미만 보려고 했다.  그러나 일부 친일파들은 의식적으로 일본군에 협력했고, 군수

품 운반을 선전하고 격려했다.  승승장구하는 일본군은 평양의 청국군도 단번에 무찌르고 

압록강을 넘어서 구월에는 만주 땅을 휩쓸고 여순(旅順) 군항(軍港)까지 함락시켜 버렸다.

  "작은 섬나라 일본이 몇 십배나 큰 청국을 단번에 이겨 버리다니!"

  조선의 친청파들도 비로소 일본의 강대한 신흥세력에 놀랐다.  그리고 국내의 청국 세력

은 싹가시고 일본 세력이 판치게 되었다.  대원군 자신조차 일본의 힘으로 정권을 다시 잡

았지만 그래도 전쟁에는 일본이 지리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평양 전투 때까지는 기회주의(機

會主義)의 탈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평양감사에게는 밀사를 보내서 청군에게 협력하라는 

지령까지 내려서 그만 골탕을 먹게 했던 것이다.

  대원군은 이 시기에 일본의 괴뢰로서 정권을 잡고 있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것은 남의 

나라 지배를 벗어나서 자기 마음대로 정치를 해보려는 강한 개인적 성격에서였다.  또 하나

의 고민은 아직도 고종과 그전 잔당을 조종하고 있는 <궁중의 요물>을 없애지 않고는 속이 

시원치 못했다.  <요물>은 며느리 민비였다.

  대원군은 우선 친일파인 개화당과 국사를 같이 하기가 싫었다.  자기가 비록 섭정의 자리

에 있으나 그전의 정적들이요, 지금은 일본의 내정간섭만 합리화하려는 그들이 못마땅했다. 

일체의 국정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면 일본의 내정간섭을 봉쇄하는데 있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청국이 연전연패하는 판국에 자기 힘으로 국내에서의 일본 세력을 추방할 비

밀계획까지 추진시켰다.  실로 대담한 배짱이었다.  그러나 군대가 없는 그는 결국 진압된 

동학당의 잔세(殘勢)를 이용해서 내정의 부패와 외국의 내정간섭을 막자고 그들을 선동했다.

  이런 밀행을 받은 동학당 간부들에게는 찬부양론이 격화했다.  결국 교주 최시영과 손병

희, 이용구는 경천안민(敬天安民)의 종굑적 평화론을 주장했으므로, 동학군의 총사령관 전봉

준과 참모장 김원식만이 수만명의 동학군을 재수습해 가지고 서울공격의 행군을 개시했다. 

  이것이 시월 이십일일 새벽이었다.  그들은 북상도중에 공주를 습격하게 되자 일본군 천

명이 관군 응원차 급파되었다.  그러나 변변치 못한 동학군의 재래식 무기로는 일본군의 신

식무기와 근대식 전술에는 싸움의 상대도 되지 못하고 풍지박산해서 도망쳐 버렸다.  그러

나 동학군이 대원군의 충동으로 다시 행동을 개시했다는 풍문은 경향각지에 새로운 유언비

어를 일으켰다. 

  "대원군이 동학군을 선동해서 서울로 쳐 올라오고 있다.  이번엔 민비 잔당과 친일파를 

조정에서 몰아낸다는데, 그러면 궁중에 또 피흘리는 소동이 벌어진다."

  이때 정부의 요직에는 친일적인 개화당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심지어는 김옥균과 함께 

일본에 망명했던 박영효까지 와서 큰 감투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배일태도를 고집하

는 대원군과 가까이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죽이려던 민비와 같이 대원군을 싫어했다.

  조선의 이권문제를 중심으로 일본과 청국이 전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민비와 대원군의 

왕실 암투는 또다시 격화했다.  일본으로도 처음에는 대원군을 이용해서 집권까지 시켰으나, 

일본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는 대원군을 꺼리게 되었다.

  이 문제를 알게 된 민비는 어제까지 청국의 힘으로 일본 세력을 꺾으려고 책동했으나, 이

제는 일본의 힘으로라도 대원군을 제거하고 싶어 했다.  이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권력싸움

은 나라의 흥망 이상으로 그들의 이성을 흐리게 했던 모양이다.

  대원군도 동학군 선동이 출발부터 일본군에게 참패하자 앞날이 불안해졌고, 그 비밀이 일

본측과 민비에게 알려질까봐 두려웠다.  그는 자기의 이번 집권이 멀지 못할 것을 짐작하고 

초조한 날을 보냈다.  민비를 빨리 제거하지 못하면 그 <궁중요물>에게 자기가 큰 화를 입

지나 않을까하고 그답지 않게도 신변 조심까지 했다.  그래서 형식상 맡겨진 집권자로서 세

도에도 한 걸음 물러서서 엉거주춤하니 사태를 관망하고만 있었다.

  이러던 때 친일적 개화당의 득세통에 벼락감투를 쓴 법부협판(法部協辦) 김학우가 시월(高

宗 31년=甲申年)에 암살되었다.  경무청(警務廳)에서는 전동석(田東錫)을 범인이라고 체포해

서 고문을 하고 강제로 사건을 꾸몄다.  그리고 정인덕(鄭寅德)을 비롯해서 속속 검거된 자

들은 모두 대원군의 부하들이었다.  발표된 범죄 사실은 특별법원에서 조사한 것인데 조사 

내용은 다음과 같이 무시무시했다.  즉 대원군의 종손 이준용을 임금으로 삼고 고종과 민비

를 살해해 버릴 목적으로 동학군과 결탁해서 궁중을 습격하고 조정 요인들을 몰살한 뒤에 

대원군 일파로 새로운 내각을 세운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재판에 의해서 전동석 등 네명은 사형에 처하고 대원군의 종손 이준용 등 세명은 

귀양 보내고, 그밖의 관련자들은 십년, 십오년의 징역에 처해서 대원군의 세력을 뿌리째 뽑

아버렸다.

  "그 요물의 계집이 나를 모해하려고 이런 흉악한 사건을 날조했다."

 대원군은 분개했으나, 이제는 그를 두둔해 줄 아무도 없었다.  일본도 이미 그의 이용가치

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 대해서 중립파이던 각료의 김홍집, 김윤식 및 어윤중 등은 순전히 날조된 연극

이니 마땅히 무죄라고 주장했으나 박영효와 서상범 등 대원군 반대파는 엄중한 처단을 주장

했다.

  그 뒤로 대원군은 다시 마포 별장으로 은퇴해서 두문불출하고 정권은 또다시 민비의 수중

으로 돌아갔다.  일본으로서는 민비도 못마땅했으나 궁중 소동에 관계 않는 척하고 간섭하

지 않았다.  대원군에게 요물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민비인만큼, 일본에 대해서도 겉으로는 

외교적 타협을 하여 시녀로 일본소녀까지 두고 총애했다.

  그리고 생활도 개화풍(開化風)의 새로운 면모를 좋아했다.  즉 일본의 사탕과 서양식 커피

를 즐겨했고, 궁중에는 발전기를 놓아서 찬란한 전등을 켜고 밤이 늦도록 서양식 연회를 향

락했다.  그러면서도 민비의 핏속에 배어 사라지지 않는 것은 무당의 굿이요, 대원군에 대한 

증오심이었다.  그러나 민비의 대오정책은 여전히 마음 속에서 일본을 꺼리고 노서아의 세

력으로 일본의 세력을 꺾으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대원군을 밀어 주었다는 점에서 일

본을 미워하는 마음이 격화된 민비였기 때문에 노서아와 결탁하기가 어려우면 차라리 청국 

세력이 회복되기를 바랐다.  일본에서는 이런 민비의 대일태도가 불만이었다. 

  얘기는 다시 앞으로 거슬러 올라가 오오도리 일본공사가 왕궁에 군대를 몰고 침입해서 무

력으로 정변을 일으키고 대원군을 괴뢰로 등장시켰다는 여론이 비등하자 일본은 오오도리 

공사를 소환하고 그대신 거물급의 이노우에 가오루를 공사로 파견했다.  실지로는 조선 조

정을 철저히 감독하려는 계획이었다.

  "이노우에 공사는 대원군과 결탁해서 민비를 없애버리려고 왔다."

  이런 풍문이 도는 가운데 이노우에는 그전 청국의 원세개 이상의 위엄을 갖고 부임했다.  

대원군도 민비의 모함으로 부하들이 참형을 받고 쫓겨 나자, 이제는 일본세력을 빌려서라도 

민비 일당을 없애버릴 생각이 들었다.  청일 전쟁중에도 일본을 깔보고 엉구주춤하던 대원

군도 지금은 일본의 실력을 알았을 뿐 아니라 우선 민비의 원수를 마지막으로 갚고 싶었던 

것이다.  대원군은 일본의 낭인정객(浪人政客) 오까모도 류우노스께를 막하(幕下)의 동지로 

삼고, 민비 제거와 정권회복의 책동을 했다.

  이노우에 공사가 부임하자 오까모도는 민비의 음모로 죽을 뻔하다가 풀려나온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을 데리고 가서 비밀면회를 시켰다.  이준용은 대원군의 대변으로 민비가 자기 

조손(祖孫)을 모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이유는 자기 조손이 일본과 화친하려는 것을 꺼

려하는 탓이라고 민비를 중상했다.  그것은 주로 낭인 오까모도의 교사에 의한 것이었다.

  "좌우간 궁중에서 싸움이 잦고, 내정개혁이 지지부진하면 조선의 독립조차 위태로우니 군

신상하가 인화(人和)를 도모해서 문명개화에 힘써야 하오."

  이노우에는 일장훈시를 했다.  그리고 이튿날에는 궁중으로 들어가서 고종을 만나고서 역

시 똑같은 설교를 했다.

  일개 외국 공사에게 궁중의 추악한 암투까지 훈계를 받아야 할 지경에 이른 것은 실로 국

가의 수치가 아닐 수 없었다.  이노우에는 궁중의 사치 생활을 비판하고 심지어는 정치의 

방법론까지 강의했다.  통역에는 대원군파의 오까도모가 했는데 마치 왕비의 침실 풍경까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궁중통(宮中通)으로 자처하는 태도였다.

  이노우에의 설교적이고 강요적인 말에 대해서 고종은 자신없는 말로 우물쭈물했다.  옆방

에서 엿듣던 민비는 남편 왕의 답변이 이노우에의 정연한 이론에 꿀리며 당황해 하는 것이

짜증날 정도로 안타까왔다.  이노우에도 무능한 국왕보다는 실력자인 민비와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다음 날에는 민비와 국왕과의 공동 회견을 요청하고 그날은 물러나갔다.  다음 날 

이노우에는 다시 와서 민비와 만나려고 거듭 청했다.  이 회견에서 민비는 병풍 뒤에서 얼

굴은 보이지 않고 음성만의 문답을 했다.  이노우에가 내정개혁의 시급을 강조하자 민비는 

또렷한 음성으로 이노우에에게 항의했다.

  "유월 정변 때 대원군을 내세운 것은 일본이 내정간섭을 한 무모한 장난이 아니고 무엇이

었소?"

  이노우에는 민비의 날카로운 추궁에 잠시 얼굴빛을 붉힌 뒤에

  "그것은 공사가 관계한 일이라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궁중의 완고파가 일본과의 친선

조약을 무시하고 청국의 속국으로 종노릇하려는 것을 막기 위한 일종의 경고였다고 보며 정

권의 교체를 담당한 것은 어디까지나 대원군이었으니, 그것 역시 귀국의 사정이었습니다."

  이노우에는 어색한 변명을 했다.

  "폐왕(廢王) 폐비(廢妃)까지 하려던 음모사건은 어떤 세력을 믿고 한 일이요?"

  "그 문제는 대원군 일파에서 했다고 이미 처벌까지 한 일이며, 그것이 사실이라면 대원군

에게 물어볼 문제요,  일본으로서도 유감스런 궁중 알력으로 생각하오.  그 사건이 날조된 

것이라는 풍문도 있지만 그 점에 대해선 우리로선 흥미조차 없습니다."

하고 교활한 이노우에는 은근히 민비의 음모가 아니었느냐고 빈정거렸다.

  "솔직히 말해서 공사도 대원군의 집권을 바라고 있지 않소?"

  "천만에요.  대원군은 일시적으로 혼란되었던 궁중을 감독했을 뿐, 이미 물러간 것이나 다

름없지 않습니까?"

  "유월 음모사건에서 정상을 참착해서 방면중인 이준용을 앞으로도 왕으로 삼으려는 음모

가 계속되고 있다는 징조를 어떻게 생각하오?"

  민비의 질문은 노골적이었다.  이노우에는 우물쭈물하는 고종과 천양지판인 민비의 대담

한 발언에 놀랄 정도였다.

  "이준용은 그런 잡음을 없애기 위해서 당분간 일본에 가서 공부나 하도록 권할 생각입니

다.  아무튼 우리는 내정간섭을 삼가고 궁중의 친목을 바랄 뿐 그런 의미에서 대원군과 이

준용도 앞으로는 직접 정치에 관여하지 않도록 권고할 생각입니다."

  민비는 그래도 계속해서 대원군을 밀었던 일본의 내정간섭을 추궁했다.  이노우에는 이에 

대해서 대원군은 일본의 호의도 배신하고 전쟁중에 청국과 밀통한 비행도 있어서 인간적으

로 믿을 수 없는 자라고 그들의 불만까지 솔직히 털어놓았다.  이 점에서 민비도 대원군에 

대한 울분이 좀 풀렸다.

  이때는 이미 국내의 동학란도 진압되었고 청일전쟁도 일본의 승리단계에 있었다.  민비정

권은 이노우에가 요구한 내정개혁안이 기초로 된 십사조를 발표했는데, 객관적으로 보아도 

이 개혁안은 분명히 현대적인 정치 방법으로서 국가의 새 출발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자주적으로 성실하게 실천되지 못했기 때문에 도리어 일본에게 먹혀버리는 

원인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일본은 이렇게 조선을 청국의 속국에서 해방시키는 동시에 그

들이 대우해 준 독립국을 상대로 해서 공수동맹(攻守同盟)까지 맺는데 성공했다.

  이 공수동맹은 국제적 분쟁에 있어서 일본이 조선과 공동책임을 지고 어떤 나라와의 곤경

에서도 한패가 되어 전쟁까지 한다는 최대의 의무 관계였다.

  일본의 세력이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조선을 좌지우지하게 되자,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일본으로 망명했던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의 개화당이 들어와서 대신들이 되었다.  

그들은 상해에서 민비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된 옛날의 동지 김옥균을 회상하고 감회가 깊었

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은 종래 청국의 속국 지위에서 조선을 해방시키고 완

전 독립국으로 세계에 선포하는 주동적역할을 했다.  종전에는 청국왕을 황제폐하로 섬겼기 

때문에 조선왕실에서는 왕전하(王殿下)로 밖에 존칭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의 독립국 선언으로 고종황제폐하로 승격되고, 민비는 황후폐하로 승격되었다.  

이런 왕실의 독립적 칭호는 실로 고려(高慮), 조선(朝鮮)을 통해서 최초로 보는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자국(自國)의 힘으로서가 아니라 일본의 정책적 후원에 의한 것

이었기 때문에 오래 가지 못한 허명(虛名)에 그칠줄은 황후폐하 민비도 몰랐다.  더구나 민

비 자신이 일본인 흉인(兇刃)의 희생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므로...

  을미년(乙未年=西紀 1,895)에 청국은 마침내 일본에게 항복하고 시모노세끼 조약에서 조선

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승인했다. 그리고 청국은 대만(臺灣)과 요동반도(療東半島)와 팽호도

(膨湖島)를 일본에 내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노서아를 비롯한 독일과 불란서가 반대했다.  

이른바 삼국 간섭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요동반도와 팽호도를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일본이라도 아라사의 위압엔 견디지 못하는구나."

  민비는 일본의 실력이 노서아만 못하다는 것을 재확인하자 그전에 실패한 노서아와의 친

선 정책을 다시 꾀하기 시작했다.  친일 개화정책으로 민씨 일파가 몰락한 것을 회복시킬 

수단으로는 노서아의 힘을 빌어야 했기 때문이다.  박영효는 대원군 세력을 꺾는데 중요하

게 이용했으나 서광범, 서재필, 이완용 등 친일 내각은 모두 갑신정변 때의 원수들이었다.

  특히 박영효는 일본 세력의 대표격으로서 대원군 세력 제거에는 민비의 신임을 받았으나 

그는 세력이 커지자 총리대신 김홍집도 무시하게 되어서 내각의 불화까지 일으켰다.  그는 

마침내 김홍집을 밀어내고 내무대신의 자리에서 군무대신까지 겸해 민비의 실권까지 위협했

다.  그에게는 강력한 일본 세력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비는 대원군 세력 제거에 공이 있던 박영효도 몰아낸 후, 노서아 세력을 배경으로 삼고 

갑신정변 때 쫓겨났던 민영달(閔泳達), 민영환(閔泳煥), 민영소 등 살해를 면하고 생존했던 

불우한 친정 쪽 정객들과 그당시 심복이던 심상훈(沈相熏) 등을 특진관(特進官)으로 등용해

서 개화당 구적(舊敵)의 세력을 회복시켰다.  이것은 삼국 간섭에 꺾인 일본을 깔보고 취한 

친일파 숙청의 노골적인 준비 공작이었다.

  "민비가 또 옛날의 야심으로 농간질을 하는구나."

  박영효 일파는 분개하고 반격 공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비는 노서아 공사와 밀약

을 하고 그로 하여금 일본 공사에게 내정간섭을 하지 말라는 말까지 하게 했다.  일본공사

는 친로정책에 대한 문제를 박영효와 상의했다.

  "민비와 그 일당은 우리 개화당 출신을 몰아낼 뿐 아니라 친로정책으로 일본 세력까지 몰

아낼 음모 중이니, 공사도 정신 차리시오."

  "민비가 대원군을 몰아칠 때는 나를 이용하더니, 인제는 구수파를 재등용해서 친로반일 

음모를 하니, 역시 궁중 요물 때문에 조선의 개화는 방해될 뿐 아니라, 앞으로 또 궁중이 소

란하겠으니 앞날이 걱정이요."

  일본공사는 박영효에게 당신도 총리대신 김홍집을 몰아낸 것이 친일 내각을 분렬시켜서 

민비의 배신 행동을 촉진시켰다는 나무람도 했다.  박영효는 일본공사의 태도가 냉담한 듯

이 느꼈고 오늘 밤에라도 민비가 보낸 자객의 칼에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박영효에게는 엉뚱한 방면에서 재난의 불똥이 튀어나왔다.  마침 

대원군 파로 몰려서 관리에서 쫓겨난 한재익(韓在益)이라는 자가 일본 낭인과 민비정권을 

서로 욕했다.

  "민비를 없애 버려야 나라가 잘 된다."

  "그러나 대원군도 못 죽인 민비를 누가 감히 죽일까?"

  "박영효가 해치울 것이요."

하고 일본 낭인이 아는 척하고 말했다.  한재익은 그 뒤에 이런 역적음모를 밀고하면 상을 

받고 벼락 감투를 얻어 쓰리라는 생각을 하고 박영효를 팔아먹으려고 밀고했다.  이 보고를 

받은 민비는 곧 박영효의 체포를 명령했다. 그리고 고발한 한재익은 경무관(警務官)을 시켜

서 공로를 표창했다.

  외무대신 김윤식(金允植)은 일본공사에게 박영효를 역적음모자로서 체포형이 내렸으니 양

해 해 달라고 통고했다.  일본공사는 이 사실을 박영효에게 알리자 그는 일본공사관으로 도

망해가서 신변보호를 청했다.

  일본공사는 박영효를 보호했다.  그리고 조선의 강경한 요구를 받았으나 망명해 온 정치

범은 국제법상 인도하지 못하겠다 라고, 일본 병정의 호위로 당당히 서울시내를 행진해서 

한강에서 일본인이 운전하는 기동선을 태워 인천까지 보냈다.  박영효는 거기서 일본 기선

을 타고 또다시 망명의 길을 떠났다.

  그가 첫 망명에서 귀국하고 세도를 부릴 때는 옛날 개화당 동지들에게 구세주 같은 환대

를 받았으나 이번 또 쫓겨 갈 때에는 신응희(申應熙)와 이규완(李圭完) 두명의 동지만이 그

를 보호하고 따라갔을 뿐이다.  박영효는 세태와 인심의 무상(無常)을 느끼면서 또다시 일본 

땅으로 떠나갔다.  박영효가 또 일본으로 망명하자 대원군을 추대하려는 일본인 낭인 오까

모도는 박영효의 잔당 이주회(李周會)와 함께 민비 제거의 음모를 진행시켰다.  같은 친일파

이면서 박영효와의 세력 다툼으로 밀려났던 전 총리대신 김홍집의 세력을 박영효의 잔당과 

합하고 대원군을 업은 후 거사(擧事)하려는 공작이었다.

  "김홍집도 인제는 실각한 박영효와의 사감을 씻고 근본의 정적 민비타도에 합력할 것이며 

대원군도 전과는 달리 일본과 손을 잡을 가능성이 충분하오."

  오까모도는 미우라 일본공사를 충동이고 대원군도 감언이설(甘言利說)로 권고했다.

  "일본의 후원이 끝까지 신의를 지킨다면..."

  대원군도 민비타도로 정권을 다시 잡으려는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몸은 비록 늙었

으나 정권야망의 불길이 식지 않은 대원군도 이번만은 중대한 결의를 표명했다.

  그래서 을미년 시월 삼일 가을 밤에, 공덕리에 있는 대원군의 한가한 별장에서는 중대한 

비밀회의가 열렸다.  책사 오까모도와 대원군, 대원군의 아들이며 고종의 형인 이재면, 그리

고 손자 이준용 네명이 모인 자리에서, 오까모도는 일본공사의 양해를 받았다는 전제하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내놓았다.

  "지금 당장 민비를 없애고 싶으나 그것만은 일본공사가 시기상조라고 찬성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전제로서 대원군께서 국왕을 돕고 궁중을 감독하는 정도에 그치고 정치문제에는 직

접 관여하지 마십시오.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세 사람을 중심으로 내정개혁을 추진시키면, 

대원군이 직접 참여하지 않아도 민비의 독재를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드님(이

재면)은 국내대신으로 하고, 손자님(이준용)은 삼년 동안 일본 유학을 해서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장래를 위해서 좋을까 합니다."

  "음, 그 계획대로 되면 나도 찬성이요."

  대원군도 현재의 사정으로는 가장 좋은 안이라고 직석에서 찬성했다.

  이런 비밀을 눈치챈 민비는 곧 훈련대의 해산을 단행하려고 군무대신 안경수(安 壽)를 

일본공사에게 보내서 사전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훈련대의 대장 우범선(禹範善)이 불만을 

품고 일본공사에게

  "사태가 위급하오.  민비는 훈련대를 해산시킨 뒤에 곧 대원군 일파와 친일정객을 일망타

진 할 음모를 하고 있소.  오늘밤으로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당신까지 큰 봉변을 당할 것이

요."

하고 충동였다. 

  "그것이 사실이요?"

  "사실이요."

  "그럼"

  미우라 공사는 오까모도의 미온적인 대책으로는 민비의 반격을 당할 줄 알고 긴급 대책을 

세웠다.

  "그럼 훈련대와 일본 수비병과 일본 낭인들이 단결해서 내일 새벽에 거사(擧事)합시다."

  민비는 내일(시월 팔일) 새벽에 대원군 일파와 일본군대가 경복궁을 쳐들어 와서 자기를 

살해 하려는 줄도 모르고

  "이번에 대원군을 아주 없애버려야겠다."

하고 자기대로 벼르면서 안심하고 잠이 들었다.

  이튿날 새벽 세시에 대원군은 이주회와 오까모도를 앞장 세우고 나서자 광화문에는 이미 

우범선이 지휘하는 훈련대와 일본 수비대의 병력이 집결해서 대원군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

다.  대원군 일행을 맞은 군대는 경복궁으로 쳐들어 갔다.

  궁중을 지키던 시위대(侍衛隊)는 총을 쏘고 대항했으나 대장 홍계훈(洪啓薰)이 총에 맞아 

쓰러지고 군대는 도망쳐 버렸다.  건청궁(乾淸宮)을 지키고 있던 시위대도 싸우지 못하고 물

러섰다.  대원군은 훈련대와 일본군의 호위로 경복궁으로 들어가면서 성명서를 발표했다.

  < 간신배들이 임금의 총명을 흐리게 하고 조정을 부패문란케 해서 유신대업(維新大業)을 

그르치고 있다.  나는 나라가 위태로운 현상을 종친(宗親)으로서 좌시할 수 없어서 간신배 

숙청에 착수했다.  임금을 모시고 사직을 튼튼히 하여 백성이 안심하고 잘 살 정치를 단행

하겠으니 백성들은 동요치 말라.  만일 나의 의로운 일을 방해하는 자는 엄단할 것이다. >

  이런 선언을 하고 대궐로 들어간 대원군은 일본의 병력을 배경으로 고종을 협박해서 곧 

새로운 내각을 조직하고 발표했다.

  "민중전이 왕실과 국사를 망치는 장본인이니 왕비를 폐하고 서인(庶人)으로 강하(降下)시키

시오."

  부인을 내쫓으라는 대원군의 요구에 고종은 

  "그것만은 심하오.  금후로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못하게 하면 그만이지 왕실의 가정문제

까지 그렇게 할 필요는 없지 않소?"

하고 최후의 언쟁을 벌였다.  내각 개편에는 두 말을 못한 고종이었지만 아무리 원수 같은 

며느리라도 명색이 임금인 자기에게 이혼을 강요하느데는 불만이었다.  그리고 그런 정도는 

가정문제라 일본도 묵인하리라는 일루의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종이 대원군과 폐비(廢妃) 문제로 언쟁을 하고 있을 때 민비는 이미 이 세상 사

람이 아니었다.

  일본군과 일본 낭인을 비롯해서 훈련대인 조선군은 민비를 찾아서 궁궐을 샅샅이 뒤졌다.  

침전에서 자다가 총성에 놀라서 깬 민비는 사태의 위급을 비로소 알고 궁녀의 옷으로 갈아

입고 침전에서 도망쳐 나갈 틈만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침전 밖에는 자기를 잡으려고 혈

안이 되어 날뛰는 군대와 일본 낭인으로 꽉 차 있었다.  그들은 마침내 침전으로 침입해서 

벌벌 떨면서 우왕좌왕하는 수십명의 궁녀들을 잡고

  "민비가 어디 있느냐?  숨은 곳을 대지 않으면 너희들을 모조리 죽여 버린다."

하고 위협했다.

  "저희들은 모릅니다."

  궁녀들은 모두 민비를 알리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때 민비는 도망을 치지 못해서 궁녀의 

옷차림으로 궁녀들 틈에 끼어서 이리 저리 몰리고 있었다.  그러나 오가와(小川)라는 시녀-

민비에게 총애를 받던 일본 여자는 궁녀 차림의 중년 여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말았다.  

검도에 능숙한 일본 낭인은 민비를 단칼로 찔러 죽였다.

  "너희들 이 시체를 끌어다 태워 버려라."

  낭인은 일본군대에게 명령했다.  군대는 민비의 시체를 침실의 이불에 둘둘 말아서 녹원

(鹿苑) 숲 속으로 운반한 후 곧 석유를 뿌리고 화장해 버렸다(그 장소는 지금 국립 미술관 

동편 옆이다).

  이때 민비의 나이는 사십오세로서 아직도 여자의 젊은 태가 남았던 여걸의 왕비였다.  이 

여걸은 불운한 고아로 자라서 왕비가 된 뒤에, 처음에는 남편 고종의 소박도 받았지만, 그 

비상한 수완으로 고종의 총애를 회복했고 절륜의 정력과 지략(智略)으로 전후 삼십년간 정

권을 좌지우지 했다.

  그러나 역시 영웅 정적(政敵)이던 시아버지 대원군과 처음부터 끝까지 피투성이의 암투 

끝에 마침내는 외국 낭인의 칼로 비명(非命)의 살해를 당했다.  대원군도 며느리에 대한 정

치적 보복엔 성공한 셈이지만 인륜상으로는 큰 죄를 저질렀던 것이다.

  고종은 사랑하고 존경하던 왕비에 대해서 공식으로 슬픔도 표하지 못했다.  대원군의 요

구대로 폐비 선언을 했으므로 물론 국장(國葬)의 대접도 못했다.  그리고 그동안 모든 국정

의 잘못을 민비에게 돌리고, 그것을 막지 못한 자신의 무능을 친서 형식으로 발표해서 백성

에게 사과하기까지 했다.

  이것으로 민비와 대원군의 궁중 암투는 끝났다.  그러나 민비의 살해사건은 이씨 왕조의 

조종(吊鍾)과도 같이 그 후의 국운은 몰락일로를 걸었다.  민비를 잃은 고종도 주위의 사정

에 끌려서 그 후에 친로 반일정책을 한때 썼고 그 때문에 노서아 공사관으로 피난하는 서글

픈 생활까지 했다.

  그러나 역시 이런 조선 문제로 청일전쟁과 똑같은 노일전쟁까지 일어났고, 이 전쟁도 세

계의 예상을 뒤집고 역시 일본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 뒤로 일본은 완전히 조선을 손아귀에 넣고 을사조약(乙巳條約)을 체결하여 일본의 보

호국으로 만들었다.  그 뒤에 바로 한일합방이라는 형식을 거쳐 결국 나라는 망하고 일본의 

영토의 일부인 식민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역사에 있어서 <만일에>라는 문제는 항상 따르는 중대한 수수께끼지만, <만일에> 조선 

말기의 남걸이던 대원군과 여걸이던 민비가 정권 투쟁만 하지 않고 합심해서 나라를 위해 

협력했더라면, 복잡미묘한 국제정세를 잘 활용해서 근대화된 독립국가로 발전시켜 번영의 

기초를 세웠을지도 모를 것이다.  실로 애석하고 통탄할 골육상잔의 당파싸움으로 일을 그

르쳐 피눈물 나는 역사의 한 장을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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