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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1/궁중비사

조 선 편 (朝 鮮 篇) 02

by FraisGout 2020. 6. 30.

    龍顔의 손톱자국 

    나비와 꽃들 



   성종대왕(成宗大王=西紀 1,470-1,494)은 세조(世祖)의 맏아들인 덕종(德宗)의 둘째 아들로

서 자기 아버지 덕종이 일찍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세조의 손자 자을산군(者乙山君)이라 

하였다가 아저씨인 예종(睿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예종은 본래 몸이 약하여 재위 일년도 넘기지 못하고 나이 이십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왕실(王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지위도 높은 이가 세조대왕의 왕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였다.  이제 누구에게 왕위를 전하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정희왕후 윤씨의 말 한 

마디로 작정이 되게 되었다.  정희왕후는 원로공신(元老功臣) 신숙주(申叔舟)에게 물었다.

  신숙주는 대답했다.

  "그전부터 세조께서 자을산군을 가장 귀여워 하셨으니 속히 상주(喪主)로 정하여 민심을 

안정시키소서."

  벌써 신숙주와 정희왕후 사이에는 자을산군을 내세우기로 의논이 다 되어 있었던 것이었

다.  아무도 여기에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차례대로 말하면 덕종의 맏아들 되는 월산대군

(月山大君)이 될 것이지만...

  이리하여 성종은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고, 그때 성종의 나이는 열 세 살이었다.  

예종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성종은 열세살 때에 당시 영의정(領議政)으로 있던 한명회(韓明

澮)의 딸과 결혼하고 있었으며 성종이 임금이 되자 한씨로 왕비를 정하였다.

  성종은 점차 자라남에 따라 성질이 너그러우며 모든 일을 재치 있게 잘 처리해 나갔다.  

대궐 안에서는 할머니가 되는 정희왕후 윤씨며 어머니되는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韓氏)며 

숙모되는 예종 왕비 안순왕후(安順王后) 한씨(韓氏) 등이 있어 성종은 이들을 위로하기 위하

여 곧잘 후원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특히 성종은 자기 형님인 월산대군에 대하여는 늘 미

안한 생각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따로 큰 저택을 지어 월산대군을 모셨는데 그 곳이 오늘날 

덕수궁(德壽宮) 자리가 되었다.

  성종의 나이도 이제 이십이 되었다.  평화로운 세상이 계속되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쌓아 준 평화의 혜택은 손자 대에 와서 꽃이 핀 것이었다.  세종(世宗) 때도 평화스러웠지만 

그때는 새로운 일을 하느라고 별로 놀아보지 못했다.  이제는 그때와 다르다.  삼천리 방방

곡곡에서는 평화스러운 노래소리가 들렸다.  대궐 후원에서는 매일같이 유량(流亮)한 풍악소

리가 흘러나왔다.  그럴수록 임금의 술은 늘어가고 군신 사이의 놀음은 심해갔다.

  성종은 이 무렵, 전날에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로 있던 윤기무(尹起畝)의 딸을 사랑하여 

숙의(淑儀)를 삼았다.  윤씨는 그 당시 장안에서 절세 미인으로 이름이 높았다.  성종이 사

랑하는 후궁도 많았지만 그중에 뛰어나게 잘 생긴 윤씨는 특별한 사랑을 한몸에 독차지했

다.  밤에 궁중 후원에서 잔치가 벌어지면 각지에서 불러들인 기녀들이 노래와 춤과 재담으

로 취흥을 돋구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뒤에는 임금은 신하들에게 직접 큰 잔으로 술을 

권했다.  신하들은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게 취하여 거의 매일 밤 술을 마시며 놀았다.

  그렇다고 해서 성종은 주색(酒色)에 빠져서 다른 일을 돌아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

가 낮에는 정치에 유의하여 공명정대한 처결이 많았기 때문에 국태민안(國泰民安)의 황금시

대를 이루었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성종을 평하기를 주요순, 야걸주(晝堯舜, 夜桀紂)라 하였

다.  다시 말하면 낮에는 중국의 옛날 요(堯)와 순(舜) 임금과 같이 선정(善政)을 하고 밤에는 

걸왕(桀王)과 주왕(紂王)처럼 주색을 좋아하고, 놀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걸(桀)과 주(紂)는 


주색에 빠져 나라를 망치고 말았지만 성종은 그렇게 놀고 주색에 빠졌다 할지라도 낮에는 

요순(堯舜)과 같이 선정을 베풀어 나라를 부강케 했다는 것이다.

  성종이 이루어 놓은 가장 두드러진 사업 몇 가지만 들더라도 이 점은 곧 짐작할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동국통감(東國通鑑),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등의 편찬과 경국

대전(經國大典)의 완성 등이 모두 이때에 이루어진 사업들이었다.

  이렇듯 성종은 명철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정치도 공명정대하게 잘하는 임금이었지만 연

락(宴樂)과 동시에 색(色)을 좋아하는 단점이 있었다.  성종은 그 후에도 윤호(尹壕)의 딸 윤

씨를 숙의(淑儀)로 맞아들이고 이어 권숙의(權淑儀), 엄숙의(嚴淑儀), 정소용(鄭昭容) 등을 사

랑하였다.

  성종대왕 오년 사월 십오일에 왕비 한씨가 나이 열아홉살에 세상을 떠났다.  이년 후에 

숙의(淑儀)로 있던 윤씨(윤기무의 딸)를 승차시켜 왕비로 정했다.  윤씨는 왕비로 승차한 넉

달 후에 원자(元子)를 낳았다.  첫아들을 낳았으니 임금의 사랑은 높아질대로 높아졌고 따라

서 윤비의 교만한 생각도 이만저만한 지경이 아닐만큼 도에 넘치게 되었다.

  윤비(尹妃)는 워낙 규모 없는 가정에 태어난 몸이어서 어려서부터 별로 보고 들은 것 없

이 자란데다가 타고난 성품이 간악하여 투기가 자심(滋甚)하였다.  게다가 이제는 국모의 지

위까지 차지하게 되었으니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었다.  이제는 자기 명령만 내리면 무엇이

나 소원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었으므로 윤비의 교만과 사치는 날이 갈수록 심하였다.

  그러나 오직 한가지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지존(至尊)의 사랑을 자기 혼

자만 독차지 하려는 욕심이었다.  질투심이 강한 윤비는 임금이 다른 비빈(妃嬪)의 방으로 

들어가는 날 밤이면 시기심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서 그날 밤은 한시도 잠을 이루지 못

했다.  후원에는 임금의 후궁이 많아 오늘은 이곳 내일은 다른 곳, 나이 이십여세가 된 임금

은 호색하는 심정도 더욱 늘어갔다.  그 중에서도 권숙의(權淑儀), 엄숙의(嚴淑儀), 정소용(鄭

昭容) 등 세 후궁은 임금의 방탕한 생활을 북돋아 주었다.

  성종은 물론 윤비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워낙 성품이 호탕한 임금은 

왕후 한 사람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서 윤비가 제아무리 시기를 하더라도 다른 비빈에게도 

한결같이 사랑을 베풀고 있었다.  청초한 정소용, 산뜻한 엄숙의, 구수한 권숙의 등 사람마

다 대해 주는 맛이 각각 달랐다.  이런 까닭으로 해서 왕비와 숙의 소용 사이의 투기는 날

이 갈수록 심해 지기만 했다.

  성종 팔년 삼월 어느날, 누구의 소위인지는 모르지만 편지 한 장이 권숙의 집에 전해졌다.  

보낸 사람의 성명은 물론 씌어 있지 않았고 다만 감찰가 소송(監察家所送)이라고 씌어 있을 

뿐이었다.  그 글 내용인즉 정소용과 엄숙의가 비밀히 서로 협력하여 중궁(中宮) 즉 왕비 윤

씨와 원자(元子)를 살해하기를 계획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숨겨 두었다가 발각이 되는 날

이면 큰 벌을 받을 것이요, 이것으로 고발을 하면 정소용이나 엄숙의의 생명이 위태할 것이

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으냐 하는 걱정에 치들만 떨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때까지든지 이

것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것을 정원(政院)으로 보냈더니 정원에서는 다시 임

금께 드렸다.  임금은 곧 중신들을 불러

  "이것이 궁중의 비밀이라 할지라도 중대한 일이니 만큼 어떻게 하였으면 좋으냐?"

하는 의견을 묻게 되었다.  여러 사람의 말이 이것은 아마도 정소용의 소위인 듯 하나 정소

용이 현재 임신(姙娠)중에 있으니 해산(解産)한 후에 국문(鞠問)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하므

로 성종도 그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윤비의 마음은 더욱 허전해졌고, 후궁들이 자기 모자를 음해하려고 하

는 것을 알게 되자 불현 듯이 두 후궁을 없앨 계획을 세우고 비상(砒霜)을 준비하여 간직해 

두었다.

  임금은 자라나는 아들의 재롱이 귀엽기 한이 없어 낮에 틈만 있으면 윤비의 방으로 곧잘 

발길을 옮겼다.  그런데 하루는 윤비 방에 앉아 있다가 머리맡 서안(書案) 위에 비단 주머니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가 하고 무심히 열어 보다가

  "앗!"

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임금이 소스라치게 놀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 비단 주머니 

속에는 천만 뜻밖에도 비상 한 덩어리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임금은 또 서안 밑에 놓여 

있는 작은 상자 하나가 눈에 띄는대로 얼른 그 상자도 집어서 열어 보았다.  상자 속에 들

어 있는 것은 하연 종이 한 장 뿐이었다.  옆에 있는 윤비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서 떨기

만 할 뿐이었다.  그 종이를 꺼내서 읽어 내려가던 임금은 또다시 놀랐다.  거기에는 정소용

과 엄숙의를 방양(方穰)하는 글이 씌어 있었던 것이다.  방양이라는 것은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의 이름을 써서 그 종이를 땅에 묻고 날마다 그위로 밟고 다니면 그 사람이 죽는다는 

일종의 저주문(詛呪文)인 것이다.

  "음, 악독한 계집이로군!"

  임금의 입에서는 그런 노여움이 무심중에 새어 나왔다.  하마터면 무서운 참극이 궁중에 

벌어질 뻔했다고 생각하니 이 사실을 발견한 이상에는 그냥 둘 수가 없었다.  윤비도 이미 

임금의 그런 뜻을 깨달았는지 이제는 고개도 들지 못했다.

  "이것이 모두 어디서 생긴 것이요?"

  이윽고 임금이 입을 열었다.  중궁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요전에 친잠(親蠶)하러 나갔을 때 삼월이라는 종년이 가져다 주었습니다."

하고 말했다.

  임금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것이 심상한 일이 아니라 곧 삼월을 불러다가 자백을 시켰

다.  삼월은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딱 잡아떼다가 마침내 형장(刑杖)과 고문(拷問)에 

이기지 못하여 모든 것을 순순히 자백했다.  그 공술(供述)에 의하면 방양서에 쓴 글씨는 사

비(四非)라는 종년과, 또 윤비와 인척이 되는 선전관(宣傳官) 윤구(尹 )의 처와 둘이서 쓴 것

이고, 비상 주머니는 장흥부인(長興夫人) 즉 윤비의 어머니 신씨(申氏)가 내어준 것이며, 그

리고 석동(石同)이라는 사람을 시켜 윤비와 원자를 해치겠다는 글을 권숙의 집에 던지게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성종은 신씨의 작위(爵位)를 빼앗고 삼월은 교형(絞刑)에 처하고, 사

비는 장(杖) 일백 개를 때려서 변방(邊方)의 관비(官婢)로 내쫓았다.

  이 사건은 중궁이 임금을 해치려고 한 것은 아니지마는 정소용과 엄숙의를 없애려고 한 

것이니 이는 투기심에서 나온 행동이라, 투기는 좋은 일이 아니다.  만일 그 마음이 자라나

는 날에는 자기의 뜻대로 안 될 때 여기서 더 심한 생각도 들지 말란 법이 어디 있겠는가하

여 임금은 몇몇 중신들에게 말하기를

  "중궁이 이미 국모(國母)가 될 뿐 아니라 원자까지 낳았으니 어떻게 처리하였으면 좋겠는

가?"

하고 물었다.

  중신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그만 기가 질려 아무 말도 하는 이가 없었다.  임금은 중

신들이 아무 말도 없는 것을 불유쾌하게 생각하여, 다시

  "그러면 중궁에 대한 죄목을 정하라."

하고 명령을 내렸다.  예조판서(禮曹判書) 허종(許琮)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중궁에게 죄를 정하는 일은 천하에 드러내어 발표하지 마시옵고, 대궐 안 한적한 곳을 

택해서 별처(別處)케하여 이, 삼년 동안 개과천선(改過遷善)할 때까지 기다려서 그때 복위(復

位)케 할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그때 가서 폐출(廢黜)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주장했다.  이에 중신들의 의견에 따라 왕비 윤씨를 별궁에 있게 하고, 선전관 윤구를 

옥에 가두었다.  이것이 성종 팔년 사월에 일어났던 일이다.


  [龍顔의 손톱자국]   <질투와 질투가>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龍顔의 손톱자국 

    질투와 질투가



   그 후로 중궁과 세 후궁 사이의 암투는 더욱 치열해졌다.  임금은 가끔 별궁에 있는 윤

씨를 잊지 못해 그리고 발길을 돌렸다.  그러면 그때마다 질투에 불타는 윤씨와 임금 사이

에 사랑 싸움이 일어나곤 했다.  하루는 싸우는 정도가 너무도 지나쳐 윤씨가 손톱으로 임

금의 얼굴을 할퀴어 용안에 손톱자국이 완연히 드러나게 만들었다.  임금도 분개하려니와 

인수대비(仁粹大妃) 한씨(韓氏) 즉 성종의 어머니는 이것을 보고 크게 노하지 않을 수가 없

었다.  인수대비는 여러 중신들 앞에서 임금의 얼굴을 보이면서 

  "임금의 몸은 옥체(玉體)인데 누가 얼굴에 손을 댈 수 있는 일이냐?  이것은 임금을 해치

려는 반역죄에 해당하는 것이니 그대로 둘 수 없다."

하고 야단을 했다.

  인수대비는 워낙 윤비를 평소부터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윤비가 아직 숙의(淑儀)의 한 

사람으로 성종의 총애를 받고 있을 때부터 그의 성품이 교만하다하여 내심으로는 은근히 미

워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를 왕비로 승격시킬 때에도 마음에 매우 마땅치 않았으나 왕비가 

궐위(闕位) 중인데다가 윤씨가 덜컥 원자를 낳았는지라 어쩔 수 없이 승낙했던 것이다.

  인수대비가 윤비를 싫어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인수대비가 정소용, 엄숙

의 두 빈궁(嬪宮)을 각별히 사랑하건만 윤비는 그들 두 빈궁을 오래 전부터 미워하고 시기

했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로 시어머니 되는 인수대비와 며느리 되는 윤비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인수대비는 따로 우의정(右議政) 윤필상(尹弼商)을 불러

  "임금의 옥체에 손을 댄 왕비를 조정에서 논의하여 폐위(廢位)시키도록 하오."

하고 당부했다.  바로 이 윤필상은 세조 왕비 정희왕후의 친정 일가로서 당시 자기의 친척 

윤호(尹壕)의 딸이 궁중에 들어와 후궁에서 임금의 숙의(淑儀)로 있었다.  말하자면 같은 자

기의 친척의 딸을 왕비의 자리에 앉혀 놓고 윤씨들의 세력을 잡아보고자 하던 때였다.  좋

은 기회라 생각하고 윤필상은 왕비를 쫓아내려고 획책했다.

  성종 십년 유월 삼일 아침 일찍이 영의정 정창손(鄭昌孫), 상당부원군(上堂府院君) 한명회

(韓明澮),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 심회(沈澮),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 김국광(金國光), 우의정 

윤필상 등이 대궐에 모여 어전 긴급회의를 열었다.  물론 윤비 폐위에 관한 회의였다.  윤비

의 폐위 문제는 중대한 국가지사인 만큼 비록 대비의 분부가 있었다 하더라도 임금은 만조

백관의 결의에 의하여 최후의 결정을 내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임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날에 중궁의 실덕(失德)이 매우 컸기 때문에 폐위를 시키려 하였는데 경(卿) 등이 모두 

옳지 않다고 반대를 하였고, 과인도 중궁이 뉘우치기를 바랐으나 언제까지나 뉘우치는 기색

이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과인까지도 능멸(凌蔑)히 여기게 되었으니 중궁의 실덕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뒤에 무슨 중대한 일을 저지를지도 알 수 없으니, 인

제 마땅히 왕비의 지위를 빼앗아 서인(庶人=보통 사람)을 만들 것이다."

  영의정 정창손 등은

  "중궁은 원자를 두신 분입니다.  이제 하루 아침에 폐위하게 되면 여염집으로 가야 합니

다.  전날 정인지(鄭麟趾) 등이 중궁의 집안과 인품을 본 후에 정하신 왕비입니다.  내보내

지 말고 따로 궁전을 지어 거처케 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임금은 노여움이 더하여 

  "정승들은 모두 물러 가거라.  과인의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결단코 이 결심을 번복할 수 

없다."

하여 기어이 폐위의 뜻을 보였다.

  그러나 도승지(都承旨) 홍귀달(洪貴達), 좌승지 김승경(金升卿), 우승지 이경동(李瓊同), 좌부

승지 김계창(金季昌), 우부승지 채수(蔡壽) 등만은 남아서 여러번 간청하였다.  임금은 더욱 

노여워

  "경 등이 물러가지 않으면 과인이 먼저 내전으로 들어간다."

하면서 일어서 나갔다.

  중궁 윤비는 자기를 폐위한다는 소식을 듣고 땅을 치며 통곡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사인교(四人轎)를 마련해 가지고 온 승지는 통곡하는 중궁의 옆을 받들어 일으키며

  "어서 수레에 오르십시오."

하고 사인교에 타기를 재촉하였다.

  "여보 승지!  대궐에서 쫓겨나가더라도 내 아들 동궁이나 한 번 만나고 갈랴오!"

  중궁은 목을 놓아 통곡하면 애원하였으나 이미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동궁은 인수대비 

의 어명으로 이미 중궁과의 상봉이 엄금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이제까지는 일국

의 국모로 갖은 영화와 부귀를 누리던 왕비 윤씨는 오늘은 초라한 사인교에 몸을 실고 통곡

을 하면서 대궐문 밖으로 축출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홍귀달 등의 승지들은 차비문(差備門) 안에 나아가 또다시 왕비 폐위의 처분을 철회

해 달라고 간청하는 동시에 인수대비에게까지 가서 청원하였다.  임금은 홍귀달 등이 인수

대비에게 청하여 왕비 윤씨를 구원하려는 행동을 미워하여 홍귀달, 김승경, 이경동, 김계창, 

채수 등을 옥에 가두게 하였다.

  이에 대사헌(大司憲) 박숙진(朴叔秦)과 대사간(大司諫) 성현(成俔) 등이 정식으로 왕비의 죄

상을 임금에게 묻게 되었다.

  임금은 중신들 회의에서 결정지은 것이니 정원(政院)에 물어보라 했다.  홍문과 직제학(弘

文館直提學) 최경지(崔敬止) 등은 또한 임금에게 왕비의 죄상을 물었다.  소위 삼사(三司)에

서 연합하여 묻는 것이었다.  그러나 임금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홍문관 전한(典翰), 이우

보(李祐甫)에게 왕비를 폐위시킨다는 일을 종묘(宗廟)에 고제(告祭) 드릴 글을 지으라 하였다.  

이때 이우보가 듣지 않으므로 임금은 이우보를 의금부(義禁府)에 가두고 다시 조위(曺偉)라

는 사람으로 하여금 글을 짓게 했다.  그 후 육조판서(六曹判書)들이 또한 연합하여 폐위의 

불가함을 진정하였지만 끝내 임금은 듣지 않았다.

  임금은 기어이 왕비 폐위의 이유를 종묘에 봉고(奉告)하는 동시에 왕비 윤씨를 폐하여 서

인을 삼는다는 교서를 널리 발표하였다.

  한편 폐비(廢妃)가 된 윤씨는 친정에 있으면서 날마다 슬픈 눈물을 흘리며 후회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을 성종에게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성종은 아무리 윤씨를 사처로 내

보냈다 하지만 그래도 아들이 있으므로 날마다 사람을 보내 윤씨의 행동을 살피게 할 뿐 아

니라 글로 아무쪼로 회개하라고 타이르고 만일 회개만 한다면 다시 왕비의 지위를 회복하여 

주겠다고 달래보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회답이며 회개의 태도가 확실히 보인다는 

보고가 성종에게 전하여질 길이 없었다.  그것은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 한씨의 방해로 인

한 것이었다.  인수대비는 고자(宦臣)를 시켜 날마다 윤씨가 소세(梳洗)와 화장에만 힘쓰고 

도리어 임금을 원망하는 태도로 교태만 부린다고 임금에게 알리었기 때문에 임금은 그 말을 

믿고 더욱 윤씨를 미워하게 되었다.

  이렇듯 인수대비의 방해와 투기로 인하여 진정한 윤씨의 생활상태가 임금에게 알려지지 

않는 까닭에 윤씨의 처지는 더욱 불리하게만 될 뿐이었다.  그러나 인수대비에게도 근심 걱

정은 있었다.  장래에 윤씨의 아들이 왕세자가 되고 필경 지존의 자리에 나아가게 될 것이 

뻔한 사실인즉, 그렇게 되면 윤씨가 그 아들에게 모든 사실을 일러 바치게 되고 그런 날에

는 궁인들 가운데 큰 살육이 일어날 것이요, 이 일이 벌어져 자기에게까지 해가 미칠 것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쳐서 어떤 때는 혼자서 근심과 걱정에 잠겨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었

다.  이제는 내친 걸음이라 인수대비는 원자(元子)가 좀더 자라나 철들기 전에 윤씨를 없이

하여 원자로 하여금 이 사실을 영원히 모르게 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인수대비는 마침내 임금에게 윤씨를 비방하여 말하기를

  "내 아들이 자라기만 하여라, 하고 벼르고 있는 모양이니 이대로 버려 두었다가는 장차 

대궐 안에 무리 장사가 날 터이니 윤씨를 빨리 처치하라."

고 했다.  임금도 윤씨가 회개하지 않는 한에는 그 성질도 반드시 그러하리라는 생각이 드

는 터에, 자기 어머님의 말씀도 있고 보니 어떤 기회에 윤씨를 처치하려는 결심을 갖게 되

었다.

  왕비 윤씨가 대궐에서 쫓기어 자기 친정으로 들어간 것이 성종 십년 유월 삼일이다.  그

로부터 어느덧 삼년이란 세월이 흘렀갔다.  그 동안에 임금은 또 다른 숙의 윤씨 즉 윤호

(尹壕)의 딸을 승격시켜 왕비로 정하여 천하에 발표했다.

  인수대비의 감독과 주의가 면밀하여 폐비 윤씨의 현상을 그대로 임금에게 알리는 사람도 

없었고 또 알릴 수도 없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사실이 감추어질 수는 없었다.  윤씨가 회

개하는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이 차츰 세상에 퍼졌다.  여기에 놀란 사람들은 백관(百官)들이

었다.  백관들은 직접 사실을 임금에 알렸다가는 어떠한 명이 내릴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

요, 또 인수대비에게 불리할 것이라하여 감히 말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세상에는 여러 가지 유언비어(流言蜚語)가 떠돌게 되고 윤씨에 대한 동정이 많

이 전하게 되어 아무리 요순(堯舜) 같은 성종 임금이라 할지라도 윤씨에 대한 처사만은 공

평치 못하다고 당시 백성들이 의심을 품었다.

  이에 성종 십삼년 팔월 십일일에 이르러 시강관(侍講官) 권경우(權景祐)는 임금 앞에 나아

가 폐비 윤씨가 여염집에 애처롭게 처하여 있는 것은 온 국민이 모두 마음 아프게 여기고 

있는 터인즉 어떤 특별한 곳을 택하여 거처케 하는 동시에 생활품을 내려주십시오, 하고 간

청했다.  이때 옆에 있던 대사헌 채수(蔡壽)와 한명회 등도 한경우와 입을 모아 폐비 윤씨의 

별처 공봉(別處供奉)을 청했다.

  임금은 소리를 높여

  "경 등이 윤씨를 여염집에 있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원자에게 아부하여 

다음 대에까지 영화를 바라보자는 그런 천박한 생각에서 하는 소리가 아니냐?"

하고 호통을 쳤다.

  동지사(同知事) 이극기(李克基)며, 대사헌 채수며, 검토관(檢討官) 안윤손(安潤孫) 등은

  "신 등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고 대답했다.

  임금은 또한 말을 이어

  "경 등이 만일 원자에게 아부하는 것이 아니라 하면 무슨 까닭으로 군부(君父)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가지고 말을 하는 것인가?  근일에 박영번(朴英蕃)이라는 사람이 글을 올려 윤

씨의 말을 했으나 이 사람은 현직이 아니니 그냥 둘 수도 있지만, 지금 경 등이 말하는 것

은 모두 윤씨만을 위한 것이지 과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고 공박했다.  권경우와 채수 등은 그래도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했다.  

임금은 이것을 매우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임금은 마침내

  "너희들이 경연관(經筵官)으로서 과인의 뜻을 알 터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말을 자꾸만 하

니 과연 너희들은 윤씨의 신하인지 이씨의 신하인지 알 수가 없다.  현재 윤씨가 처형되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이것은 필경 윤씨의 집안과 불초(不肖)한 무

리들이 서로 인연이 되어 말을 전한 모양이다."

하고 윤씨의 배다른 오라버니 윤구, 윤우 등을 의금부에 가두어 버렸다.

  십이일에는 임금이 채수와 권경우를 불러 폐비 윤씨의 일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물어 보았

다.  채수와 권경우는 전날처럼 똑똑히는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나라 일이 나날이 그릇되어 

간다고만 할 뿐이었다.  다시 말하면 윤씨는 원자의 어머니이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임금의 귀에는 이런 말이 윤씨에게 아부하는 것처럼 들리기만 했다.  노

기등천한 임금은 중신들을 불러 채수와 권경우의 죄를 의논케 하고 그러고도 마음이 풀리지 

않아 전에 상소문을 올린바 있는 박영번을 금부에 가두었다.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번갈아 가면서 윤씨를 그대로 여염집에 두어서는 안 된다느니, 원

자가 있는 이를 그렇게 할 수 없다느니하여 임금과 인수대비의 심정을 괴롭히자, 이것이 비

록 윤씨를 위한 말이라 할지라도 도리어 윤씨를 위해서는 크게 불리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대사헌이니 대사간이니 무슨 사림(士林)이니 하는 사람들이 연달아 상소(上疏)질을 하는데, 

이것이 하루도 빈 날이 없이 들어오니 임금은 마침내 성이 가시어 견딜 수가 없었다.  이리

하여 임금은 이제 더 윤씨를 내버려 둘 수가 없다고까지 생각이 들게 되었다.

  십육일에는 임금이 인수대비와 의논하고 최후의 결정을 내렸다.  임금은 곧 문무백관을 

불러 놓고

  "폐비 윤씨는 원래부터 음흉한 여자로서 반역적인 마음을 먹었다.  원자가 점차 자라남에 

따라 인심이 그를 동정하는 기미가 생겼다.  이대로 나가다가는 훗일 무슨 일을 저지를는지 

알 수 없다.  과인은 윤씨가 폐비되었어도 거의 매일 궁중을 저주하고 세자의 장성을 기다

려 복수한다는 말을 들었다.  훗일에 폐비는 세자가 임금이 된 후까지 오래 살아서 국정을 

어지럽힌다면 종사를 어찌 구하겠느냐?  과인이 여기서 결심하고 폐비 윤씨에게 사사(賜死)

한다."

  이 말이 떨어지자 아무도 무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듣고 있는 문무백관의 등에는 

진땀만이 흘렀다.  임금은 이내 좌승지 이세좌(李世佐)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이극균(李

克均) 두 사람을 불러

  "좌승지는 전지(傳旨)를 받들고 의금부도사는 약사발을 담고 가라!"

하고 최후의 분부를 내렸다.  이미 최후 단계의 어명은 떨어지고야 말았다.  폐비 윤씨의 생

명은 이제 구원될 길이 영영 막히고 말았다.

  임금은 사사(賜死)의 어명을 내리고 곧 편전으로 들어갔다.  비록 사직의 백년 대계를 위

하여 어쩔 수 없이 폐비에게 사약의 어명은 내렸으나 임금의 심회는 매우 앙앙하였다.  폐

비 윤씨는 일찍이 눈에 넣어도 아픈 줄을 모를 만치 사랑하던 여인이었다.  일개 숙의로 있

던 그가 원자를 낳자 그로 하여금 중궁으로 삼았을 때에는 그와 더불어 백년을 해로하려던 

여인이었다.  사사롭게는 사랑하던 아내요, 공적으로는 원자의 생모이기에 공사간에 결코 홀

대할 수 없는 여인이기도 했다.

  (그가 조금만 회개하는 빛을 보여 주었더라도 좋았을 터인데..)

  임금은 창가에 홀로 앉아 정원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무심중에 그렇게 중얼거렸

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임금의 눈에서는 한 줄기 눈물이 맥없이 흘러 떨어졌다.


  [龍顔의 손톱자국]   <피묻은 수건>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龍顔의 손톱자국 

    피묻은 손수건



   이날도 폐비 윤씨는 그의 어머니 신씨와 함께 적막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때는 초가

을, 아무리 황폐한 정원에도 녹음만은 제대로 우거졌다.  폐비 윤씨는 방문을 열고 정원에 

무성한 녹음을 내다보고 있었다.  한나절쯤 되어 어디선가 벽제소리가 아득히 들려오기 시

작하더니 그소리는 시시각각으로 가까이 울려졌다.

  "아니, 저게 웬 벽제소리요?"

  두 모녀는 동시에 깜짝 놀랐다.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 오는 것을 보면 이 집을 찾아오

는 벽제 소리가 분명해 보였다.  이윽고 벽제 소리는 담장 밖에서 요란스럽게 나더니 뒤미

처 내시가 대문을 밀고 들어서며

  "어명이요!"

하고 내놓는 것은 뜻밖에도 사약이었다.  어머니 되는 신씨는 얼굴이 파랗게 질리며

  "사약이 웬일이요?"

하고 펄펄 뛰었다.

  좌승지 이세좌는 사사전지(賜死傳旨)를 한 구절 한 구절 읽기 시작했다.  폐비 윤씨는 물

론 신씨 부인도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몸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참으로 비참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전지를 받든 사람들로서는 어명을 이행하지 않을 수

가 없었다.  마침내 좌승지 이세좌가

  "속히 분부 거행할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엄숙히 말했다.  이세좌의 명령이 내리자 내시들은 목욕물을 데우고 방안을 뜨겁게 하

기 위해 아궁지에 장작을 지피기 시작했다.

  옛부터 사약을 받드는 데는 일정한 법도(法度)가 있었다.  즉 약사발을 받는 자는 그 약을 

마시기 전에 반드시 목욕재계를 하고 의관을 정제해야만 하였고, 그런 뒤에는 약사발을 상

에 받아 놓고 임금 계신 방향을 향하여 세 번 절하고 마셔야 한다.  그리고 그 방에는 방다

닥에 발을 대지 못할 만치 불을 뜨근뜨근하게 지펴야만 한다.  왜냐하면 방안이 그처럼 뜨

거워야만 약기운이 몸에 쉬이 퍼지기 때문이었다.

  폐비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각오한바 있음인지 겁내는 빛은 

별로 없었다.  이제는 치를 떨기는커녕 오히려 놀랍도록 침착하기까지 했다.

  폐비가 약사발을 마지막 한 모금까지 들이마셨을 때에는 이미 그의 얼굴에는 붉은 핏기운

이 화악 내솟았다.  뒤이어 폐비의 코와 입에서는 붉은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때 

폐비 윤씨는 수건에다 그 입과 코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한웅큼 받아 그것을 어머니 신씨에

게 내밀어 주면서

  "어머니, 나는 죽소.  어머니는 이 피묻은 수건을 잘 간직하였다가 다음날 원자가 자라나

서 임금이 되거든 그때에 내가 이렇게 죽었다는 증거로 이것을 보여 주오."

하고 신신부탁을 하고 죽었다.

  이것을 본 신씨는 금시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멀거니 앉아 있다가 딸의 몸을 어루만지며

  "불쌍하게 고만 죽었구나.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

하고 통곡을 했다.  그날로 신씨도 장흥(長興)으로 귀양의 길을 떠났다.

  이렇게하여 폐비 윤씨의 한많은 생애는 슬픔속에서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가 남겨 놓은 

한 조각의 피묻은 수건!  그것은 장차 어떤 비극을 자아낼는지 아직까지는 아무도 모를 일

이었다.

  이세좌는 곧 폐비 윤씨의 죽음을 궁중에 알리고 동시에 그 시체를 수습하여 동대문밖에   

묻어 주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온 이세좌는 자기 부인과 마주 앉아 근심에 싸였다.

  "우리 집 자식들의 앞길이 이제는 막혀버렸소.  동궁이 다음날 임금이 되면 제일 먼저 우

리 집 자식들이 걱정이 되는구료."

  이세좌가 한숨을 몰아쉬며 마누라에게 하는 말이었다.  마누라는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는 자식들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장차 너희들의 앞길이 걱정이구나."

하고 함께 한숨만 쉴 뿐이었다.

  성종은 윤씨를 내쫓고 마침내 죽음을 주었지만 그 쓰라린 마음은 씻을 길이 없었다.  원

자를 볼 때마다 마음 한 구석에는 언제든지 검은 구름이 떠오르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되었

다.  원자에게는 자기 어머니를 내쫓았다는 말을 누구에게나 하지 못하도록 단속을 단단히 

한 까닭에 그말을 알리는 이가 없었다.  때문에 원자는 철 모를 때에는 <자기는 본래부터 

어머니가 없이 태어났나보다> 하는 생각을 가졌고, 좀 철이 든 다음에는 자기 어머니가 병

으로 세상을 떠났으려니 생각하고 별로 어머니에 대한 일은 관심에 두지 않았다.  원자가 

태어난지 네 살 때에 왕비가 쫓겨났으니 자기 어머니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을 것이요, 

일곱 살 때에 죽었지마는 쫓겨 난 후에는 만난지 못하였으므로 역시 알 길이 없었던 것이

다.  그러나 성종으로서는 원자에게 대하여는 애연한 생가기 없지 않았다.  한 번은 원자가 

훈련원(訓練院) 구경을 하고 온 일이 있었다.  그날 저녁 대궐로 돌아온 원자를 보고 성종은 

이렇게 물었다.

  "너 오늘 훈련원에 가서 무엇을 구경하고 왔니?"

  성종은 그냥 무심히 물어본 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원자의 대답은 너무나 의외였다.

  "다른 것은 하나도 볼 것이 없었습니다마는 남문 밖으로 나갔더니 송아지 한 마리가 어미

소를 따라가는 것이 있었는데 어미가 부르면 송아지가 대답하고, 송아지가 부르면 어미가 

대답하면서 서로 정답게 걸어가는 것이 퍽 그립게 보였습니다."

  임금은 가슴이 철렁하였다.  동시에 임금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내가 역시 잘못이었던가? 자식의 어미니에게 대한 정리는 생각하지 않고 원자의 생모를 

죽게 하였으니 그것은 역시 잘못이었던가?)

  원자가 어전을 물러나간 뒤에, 임금은 편전에 혼자 얹아서 무한한 괴로움에 헤매었다.  더

구나 원자가 자기 생모의 바참한 운명을 이미 알고서 그런 소리를 했다 하더라도 모르겠는

데 그런 내막을 전혀 알지 못하는 원자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왔으니 임금의 심정은 더욱 

고통스러웠다.

  세월은 또 흘렀다.  성종의 풍류 좋아하는 것은 윤씨가 죽었다고하여 조금도 줄어지지는 

않았다.  윤씨가 죽은 뒤 얼마 안 가서 할머니 되는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가 세상을 떠나

자 복인(服人)으로 그 기한을 지르는 동안만은 정지되었던 대궐 안의 곡연(曲宴)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성종은 부지런하고 건강하여 낮에는 정무(政務)에 바쁘고 저녁에는 연회에서 노래를 듣고 

춤추다가 밤이 깊으면 왕비, 소용, 숙용, 궁녀들 중 어디든지 마음 내키는 데로 찾아드는 것

이 일과였다.

  성종은 특히 숙의 하씨(河氏), 귀인(貴人) 정씨(鄭氏), 숙의 홍씨(洪氏), 숙용(淑容) 심씨(沈

氏), 귀인 권씨(權氏) 등의 미인을 사랑하여 십육남, 십이녀 종합 이십팔남매를 두었는데 이

것은 조선 여러 임금 중에 가장 많은 자녀들인 것이다.


  [燕山君]   <荒淫의 싹>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燕 山 君 

    荒淫의 싹



   성종의 원자가 바로 후세에 폭군이라고 부르는 연산군(燕山君=西紀 1,498-1,506)이다.  연

산군은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살아 있으면서도 서로 만나보지 못한 채 자라나서 자기는 어머

니 없이 세상에 태어난 특별한 사람이거니 스스로 생각하여 어머니가 약사발을 받아 먹고 

죽은데 대하여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인수대비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대궐 안에서 누

구든지 원자에게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으니, 그것은 인수대비가 누구든지 그러한 사

실을 알려주는 사람에게는 남녀를 막록하고 목을 베인다는 선언을 하고 항상 감시를 해왔기 

때문이다.

 대게 조선의 전례에 의하면 왕의 원자가 여덟살이 되면 왕세자(王世子)로 책립(冊立)되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연산군도 이런 예에 따라 그가 여덟살 되던 해 즉 성종 

십사년 정월에 왕세자 책립의 의식을 거행하였다.

  연산이 열두살 되어 입학(入學)하던 해 삼월에 병조판서(兵曹判書) 신승선(愼承善)이라는 

이의 딸로 왕세자빈(王世子嬪)을 삼기로 약혼을 정하고, 이어 춘궁(春宮)을 따로 건축하였으

니, 춘궁이란 왕세자가 거처하는 집을 말한다.

  그 이듬해 이월 육일에 선정전(宣政殿)에서 초례(醮禮)를 행하고, 왕세자가 신승선의 집으

로 가서 신씨(愼氏)를 대궐로 맞아들였다.

  왕세자는 어려서부터 여간 고집이 강하지 않았다.  누가 뭐라 하건 자기 의견에 맞지 않

으면 아무리 권하고 달래어도 듣지 않았다.  다만 부왕 성종에게만은 자기 고집을 부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자기 아버지에게도 사실은 마음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고 겉으로만 어

쩔 수가 없어서 순종한 것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성종이 사슴(鹿) 한 마리를 구하여다가 대궐 안에 두고 기르

는데 이 사슴이 매우 영리하여 사람을 잘 따르고 이르는 말도 잘 들어서 누구에게나 반가이 

달려와 뛰어오르면 혓바닥으로 손이나 얼굴을 핥기도 하였다.  그토록 영리하고 다정한 동

물인지라 성종은 각별히 귀해하였거니와 궁중에 드나드는 문무백관들도 누구나 한결같이 그 

사슴을 사랑했다.  하루는 왕세자가 부왕을 뵈러 왔더니 사슴이 마주 나아가 왕세자의 손과 

얼굴을 핥으며 뛰어올랐다.  제딴에는 반갑다는 시늉이었다.  그러나 이때 왕세자는 그것이 

마음에 언짢았든지 발길로 사슴의 배를 걷어찼다.  사슴은 그만 대궐 뜰 위로 굴러 떨어졌

다.

  "앗!"

  순간 성종 부왕 뿐 아니라 옆에 있던 제관(諸官)들도 모두 놀랐다.  사슴은 가벼운 몸이라 

놀라기는 했으나 별로 상한 데는 없었다.  그러나 부상을 당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

기를 따르는 동물을 너무나도 무참히 대하는 왕세자의 포악한 행동에는 모두가 몸서리를 아

니 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부왕은 단박 얼굴에 진노의 빛을 띠우며

  "동궁아, 그 짐승이 무슨 죄가 있다고 발길로 차기까지 하느냐?  짐승도 사람을 믿고 사

람을 위해 사는 법인데 그렇게도 천대를 한단 말이냐?  사람이란 짐승에게도 덕을 입혀줘

야 하는 법이거늘 하물며 그것을 발길로 찬단 말이냐?"

하고 큰 소리로 나무랐다.

  왕세자는 고개를 수그린 채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임금은 다시 추상 같은 질책을 내렸

다.

  "너, 듣거라.  짐승을 천대하는 버릇이 점점 자라게 되면 필경 백성들까지도 그렇게 천대

하게 될 것이니, 네가 그렇게 되는 날이면 이 나라의 꼴이 어떻게 되겠느냐?"

  임금의 책망은 아주 엄했다.  왕세자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자리를 물러나왔다.  이때 그

렇게 책망 들은 것이 얼마나 아프게 여겨졌던지 왕세자는 부왕이 돌아가고 자기가 임금 자

리에 나아간지 아튿날에 제일 먼저 자기 손으로 활을 쏘아 그 사슴을 죽여버렸다.  이 한 

가지로 왕세자의 성격이 어떠하다는 것은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왕세자가 입학할 당시에는 유명한 학자 서거정(徐居正)으로 스승을 삼았다가, 그가 늙어서 

돌아간 후로는 조지서(趙之瑞)와 허침(許琛)이라는 두 사람을 맞아 왕세자의 스승을 삼았다.  

한사람의 동궁을 가르치기 위하여 불행하게도 두 사람의 성격은 정반대였다.  조지서는 워

낙 성질이 강강한 사람인지라 남을 용서할 줄을 몰랐다.  그의 자(字)는 백부(伯符)요 호(號)

는 지족정(知足亭)이라 하였으며 성종 때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였고 어유소(魚有沼)가 만주

(滿洲)의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할 때에 그의 막하(幕下)로 출정한 경력까지 있는 사람이었다. 

왕세자가 장난하기만 좋아하고 공부할 생각을 갖지 않으면, 조지서는 비록 왕세자라 할지라

도 조금도 주저하지 아니하고 그를 책망하였다.

  "저하(低下)는 장차 이 나라의 임금이 되실 분입니다.  그러한 동궁께서 글 읽기는 싫어하

시고 장난만 좋아하시면 장차 이 나라가 어찌 되겠습니까?  부디 장난을 삼가시고 글공부

를 부지런히 하십시오."

  조지소는 이 모양으로 번번히 왕세자를 꾸짖었다.  그러나 왕세자는 이런 조지서의 책망

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부왕의 분부도 있고 해서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잠자코 듣

고만 있지만 마음 속으로는 늘 원수같이 미워하고 무서워 했다.

  (이 늙은이가...  어디 두고 보자!)

  왕세자는 자기를 위해 애써 주는 조지서에게 이런 앙심까지 먹는 것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허침이라는 이는 성질이 온순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그의 자(字)는 헌

지(獻之)라 하고 호(號)는 나헌(懦軒)이라 했다.  그때 북정원수(北征元帥)로 이름을 날리던 허

종(許琮)의 아우였다.  허침은 왕세자가 장난이나하고 뜀뛰기를 좋아하며 공부에는 마음을 

두지 않아도 별로 책망하는 일 없이 방임주의(放任主義)를 썼다.  그는 다만 왕세자에게 이

르기를

  "공부란 억지로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놀 때는 놀더라도 일단 공부를 하게 되면 그때

만은 열심히 할 것입니다."

하여 별로 책망하는 일도 없었다.  그래서 왕세자도 그의 앞에서는 가끔 책을 읽고 혹 토론

도 하는 일이 있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조지서 선생이 글을 가르치려고 왕세자 방으로 나가보니 왕

세자가 보이지 아니하고 바람벽에 커다란 글씨로

대성인(大聖人)에 허침(許琛)이요

대소인(大小人)에 조지서(趙之瑞)라

하고 씌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필적을 보니 왕세자의 글씨가 분명했다.  조지서는 매우 

불유쾌하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곧 사표를 쓰고 시골로 낙향(落鄕)할 생각까지 했다.  그

러나 한편 생각하기를 지금 자기가 사표를 내면 왕세자의 흠점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인즉 

이것은 자기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라하여 곧 마음을 고쳐먹고 모든 것을 꾹 참았다.

  훗일 왕세자가 임금이 되자 조지서는 자진하여 서울 같은 번화한 곳이 싫으니 지방관이나 

되기를 청하여 창원군수(昌原郡守)로 취임하였다가 얼마 아니 되어 그것도 사직하고 지리산

(智異山) 속에 숨어버리고 말았다.  이를테면 장차 어지러워지는 세상을 자기 능력으로는 도

저히 바로 잡지 못할 것을 짐작하고 진작 세상과 인연을 끊어버렸던 것이다.

  조지서는 지리산으로 들어온 이후로 그 곳에 정자를 지어 이름을 지족정(知足亭)이라 정

하고 날마다 산천을 즐기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니나 다르랴,  연산군 십년 

갑자사화(甲子士禍)에 걸려 조지서도 극형을 당하여 시체는 강물에 띄워 버린바 되고 가산

은 몰수를 당하고 말았다.  이와는 반대로 허침은 연산군이 등극한 후에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가 좌의정(左議政)까지 승진되어 무사히 일생을 마치게 되었다.

  동궁 왕세자는 글 읽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대신에 여색(女色)이라면 어려서부터 헤아리

지 못할 정도로 호탐하였다.  이미 열세살에 세자빈(世子嬪)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궁

녀들을 하루도 유인하지 않는 날이 없더니, 열여섯살이 되었을 때에는 곽린(郭璘)의 딸이 미

모였던 까닭에 그를 양원(良媛)이라하여 세자궁에 맞아들이기까지 했다.  황음(荒淫)의 싹은 

이미 이때부터 트고 있었던 것이다.

  동궁 왕세자는 열아홉살 되던 해 십이월에 성종이 병환으로 돌아가자, 이듬해 일월 이십

구일에 창덕궁에서 즉위식(卽位式)을 거행하였다.  이때 인수대비와 인혜대비(예종 왕비)를 

높여서 대왕대비(大王大妃)라 하고 대행왕비(大行王妃) 윤씨를 왕대비(王大妃)라 하고 세자빈

(世自嬪)이었던 신씨를 왕비로 승격시켰다.  대행왕(大行王)이라는 것은 임금이 돌아가신 후

에 아직 시호(諡號)를 올리기 전에는 대행왕이라고 부르는 것이 예(例)로 되어 있었다.

  연산군은 이제 신왕(新王)이 되었다.  나이는 꼭 이십세였다.  조선 열번째의 임금으로서 

일찍이 역사상에서 그 유를 찾아보기 힘들 만치 황음무도(荒淫無道)한 연산군의 폭정은 이

때를 기하여 시작된 셈이었다.


  [燕山君]   <戊午士禍>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燕 山 君 

    戊午士禍



   연산군이 등극하던 해 삼월 십육일의 일이었다.  성종이 승하한지도 어느덧 삼개월이 흘

러 연산군은 선릉(宣陵)에 써서 올릴 지문(誌文)을 읽어 보고 있었다. 지문을 얼마간 읽어 내

려가다 보니 마침 그 지문속에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무(尹起畝)라는 이름이 나오고 

또 폐비에 관한 사실이 나왔다.

  연산군은 승지를 불러

  "윤기무가 무엇하는 사람인데 대행왕의 지문에 나오게 되느냐?"

하고 물었다.  질문을 받은 승지는 얼른 대답할 바를 몰랐다.  왜냐하면 판봉상시사 윤기무

란 폐비 윤씨의 친정 아버지로서 신왕 연산군에게는 바로 외조부(外祖父)가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윤기무는 자기 딸 윤비가 왕비로 책봉되기 이전에 죽었으므로 연산군이 외조부의 이름을 

모르는 것도 당연하지만, 연산군에게 만약 그 사실을 그대로 알렸다가는 연산군이 아직도 

전연 모르고 있는 생모 윤씨에 대한 모든 비밀이 대번에 탄로(綻露)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

고 신하된 몸으로 임금에게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정말 난처한 입장이었다.

  승지는 말을 못하고 벙어리가 된 채로 엎드려 있기만 했다.  그러자 연산군은 답답하다는 

듯 어탑(御榻)을 한 손으로 두드리며

  "왜 대답을 못하느냐?  윤기무가 어떤 사람이냐?"

하고 대답을 재촉하였다.  승지는 마침내 할 수 없다는 듯이 사실대로 대답했다.

  "윤기무는 폐비 윤씨의 아버지로서 윤씨가 아직 왕비되기 전에 세상을 떠난 분으로 금상

전하(今上殿下)의 외조부가 되는 분입니다."

  "뭐?  윤기무라는 사람이 과인의 외조부라고?"

  연산군은 깜짝 놀랐다.

  "과인에게는 외조부가 따로 있는데, 어째서 윤기무가 과인의 외조부가 된단 말이냐?"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이제는 비밀을 지킬 수가 없게 되었다.  승지는 폐비 윤씨의 

비밀을 연산군에게 낱낱이 다 말하고야 말았다.

  "여쭙기 황공하오나 전하의 생모는 따로 계셨습니다.  전하께서 아직 어리셨을 때 선왕께

서 전하의 생모님에게 폐위의 분부를 내리셨는데, 그때 선왕께서 모든 것을 비밀로 하라는 

특명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과인의 생모는 아직도 생존해 계시느냐?"

  "이미 여러 해 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승지는 폐비 윤씨가 약사발을 받고 죽었다는 사실까지는 차마 알리지 못했다.

  "음--."

  연산군은 생모 윤씨가 여러 해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리에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쉬었

다.  연산군은 너무나 놀라운 사실에 눈 앞이 캄캄하여 그날부터는 수라도 들지 않고 슬퍼

하였다.  그러다가 하루는 인수대비를 찾아뵈고 생모 폐위의 경위를 물어보았다. 인수대비는

  "선왕께서 왕세자의 생모에게 폐위의 분부까지 내리게 되었을 때는 본인에게 그만한 잘못

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소?"

하고 암암리에 생모 윤씨에게 좋지 못한 행실이 있은 듯이 말했다.

  (나의 생모에게 반드시 무슨 잘못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잘못이 있었다 하더라

도 나에게는 둘도 없는 어머니가 아니더냐!)

  연산군은 그날부터 생모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생각을 했다.  자기

의 생모 윤씨가 궁중에서 쫓겨나게 된 것은 필경 사헌부(司憲府)나 사간원(司諫院)이나 홍문

관(弘文館)의 유생들이 소위 칠거지악(七去之惡)이니 뭐니하는 유학의 이론으로 임금께 자꾸

만 상소(上疏)질을하여 마침내는 부왕도 어쩔 수 없이 폐비시킨 것이 아닐까 하고 제멋대로 

짐작을 했다.  이렇게 생각하자, 연산군은 유생들이 죽이고 싶도록 미워졌다.

  (이놈들!  어디 두고 보자.)

  이렇게 앙심을 먹은 연산군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얼굴은 어려서부터 자기에게 잔소

리만 헤오던 조지서 선생이었다.  조지서!  모든 유학자들이 조지서 선생같이 밉기만 했다.

  그때 유학자들은 대개 김종직(金宗直)이란 사람의 제자로,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간(大諫)에 이른 사람들이 많았다.  성종 때에 폐비 윤씨를 옹호한 사람도 그들이었고, 연

산군을 가르친 이도 모두 유학자들이었다.

  김종직은 조선 유학계(儒學界)의 사표(師表)로 비록 야인(野人)으로 있을 때에도 그의 일거

일동은 당시 정치계에 큰 영향을 주어, 선왕 성종은 그를 일부러 서울로 불러 올려서 형조

판서(刑曹判書)의 벼슬을 시킨 일까지 있었다.

  유학자들은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따른다하여 모든 것을 중국에 의뢰하고 중국을 모방하

기에 힘썼다.  특히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것이 그들의 중심 사상이

었다.  만약 임금이 유학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이 있을 때에는 죽음에 이를 지라도 기어

이 그 일을 중지시키도록 하여야만 충성을 다하는 것이요, 임금이 듣지 않는다고 그만두어

서는 충성이 아니라고 믿었다. 특히 이러한 일을 맡은 사람들이 소위 삼사(三司)라고하여 사

헌부, 사간원, 홍문관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이 책임을 맡은 사람들은 청백하고 학

문으로나 인격으로나 남의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이라야 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임금도 

이 사람들의 말이라면 꺾지를 못했고, 동시에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대신들보다도 

이 사람들의 의견을 더 많이 참작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렇듯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유학자들을 연산군은 가장 미워하게 된 것이다.

  이때에 유자광(柳子光)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일찍이 세조대왕(世祖大王) 시절에 이시애

(李施愛)를 정벌함으로써 강순(康純), 남이(南怡) 등 장수와 함께 나라에 혁혁한 공적을 남긴 

사람이었다.  허나 후에 강순과 남이는 원훈(元勳)이 되고 유자광은 차훈(次勳)이 되었다.  

유자광은 그 점에 불만을 품었다.  그때 사회제도는 첩의 아들 즉 서자(庶子)는 아무리 하늘

에 올라가 별을 따는 재주가 있더라도 행세할 수가 없었다.  유자광은 바로 유규(柳規)라는 

사람의 첩(妾)의 아들이었던 까닭에 차훈에라도 들게 된 것은 세조대왕이 그의 공이 크다하

여 특별히 호의를 베푼 것이었다.

  유자광은 은근히 남이를 시기하였다.  강순은 나이도 많고 군사에 대한 경험도 많은 소위 

원로(元老)격인 만큼 원훈이 되더라도 나무랄 점이 없지만, 남이로 말하면 자기보다도 나이

도 어리고 재주도 부족한데, 또는 이번 싸움에 자기의 활약으로 남이의 이름이 드러났는데 

지위가 자기보다 위요, 상을 받는데도 자기보다 몇 갑절이나 더 많이 탔다는 것이었다.  더

구나 남이가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승격하여 그 흥청대는 꼴을 유자광으로서는 눈이 아파 

볼 수가 없었다.  유자광은 어디까지나 남이가 그렇게 된 것은 재주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의 문벌(門閥)이 좋아 출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이는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외손자요, 

세조대왕을 도와 혁명에 공을 세운 권남(權擥)의 사위인 것이다.  당시의 사회제도로 남이에

게는 유자광과 같은 서자(庶子)쯤은 사람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남이를 사랑하고 아껴주던 세조대왕이 돌아가고 예종(睿宗)이 임금이 되었다.  예

종은 남이가 태종대왕의 외손자로 대궐 안에서 모두 떠받치는 사람이지마는 공주와 연애 사

건이 있은 후로는 남이를 몹시 괘심하게 생각했다.

  하루는 남이 장군이 대궐 안에서 숙직을 하는데 그날 밤 혜성(彗星)이 나타났다.  사람들

은 모두 이것이 불길한 징조가 아닌가 하고 걱정을 하고있는데, 남이는 그것은 [除舊布新之

象] 즉 옛 것을 없이 하고 새로운 일이 나타날 기상아라고 말했다.  옆방에서 이 말을 들은 

유자광은 예종에게 달려 나아가 이번 혜성을 보고 남이가 한 말은 역모를 경영하는 사람의 

말이라고 모함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남이를 좋게 여기지 않던 예종은 곧 남이를 잡아다

가 극형을 내려 죽여버리니, 남이는 순전히 유자광의 고자질로 인하여 죽었던 것이다.  이리

하여 세상 사람들은 유자광이 임금에게 고자질한 것이 나쁘다고 소인(小人)이라고 했다.

  김종직도 유자광을 소인놈이라고 욕했다.  하루는 김종직이 함양군수(咸陽郡守)로 있을 때 

동헌(東軒) 누마루에 유자광의 시(詩)가 현판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내가 있는 동헌마루에 

유자광이 같은 소인의 시를 걸어둘 수 없다하여 그 현판을 당장에 떼어내려 불을 질러버린 

일이 있었다.  나중에 그런 사실을 풍문으로 들은 유자광은 내심 크게 분개했으나 감히 김

종직에게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속으로만

  "흥, 어디 두고 보자!"

하고 앙심을 먹고 앙갚음의 기회가 오기만 기다렸다.

  그 후 김종직은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내다가 당시의 왕세자인 연산군의 눈 모양이 사

나움을 보고 그가 암만 해도 장차 나라에 큰 일을 저지를 인물이라하여 자진하여 벼슬을 버

리고 낙향(落鄕)하였다가 성종 이십삼년 팔월에 세상을 떠났다.  유자광은 김종직이가 죽었

으니 이제는 그의 제자들에게라도 앙갚음을 해야겠다고 암암리에 계획했다.

  이때 김종직이가 가장 사랑하면 제자 김일손(金馹孫)이란 사람이 사관(史官)으로 있었다.  

사관(史官)이란 곧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 즉 그날 그날 대궐에서 일어난 일이나 각 지방에

서 일어난 일을 기록하는 벼슬을 말함인데, 지금 우리가 조선실록(朝鮮實錄)이니 승정원일기

(承政院日記)니 하는 것이 다 그러한 종류의 역사책들이다.  따라서 사관들이 기록하는 사초

(史草)는 어디까지나 사실 그대로 써야 하며, 또한 다른 사람이 이것을 함부로 볼 수 없고 

임금도 자기 시대의 사초를 볼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런데 성종이 승하하고 신왕 연산군이 들어 앉은지 얼마 아니하여 김일손은 사관을 사직

하고 이극돈(李克墩)이란 사람이 성종 실록을 편찬할 사국당상(史局堂上)이 되었다.  이극돈

이 사국당상이 되어 선왕 때의 사초를 읽어 보니, 그 사초 중에는 놀랍게도 이극돈 자신의 

불미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대목이 있었다.  그 내용인즉 일찍이 이극돈이가 전라감사(全

羅監司)로 있을 때에 정희왕후(貞喜王后) 즉 세조대왕비 윤씨가 세상을 떠났을 때 전국민이 

경조(敬吊)의 뜻을 표하여야 할 터인데도 불구하고 특히 이극돈은 지방장관으로서 관기(官

妓)를 불러 연락(宴樂)을 한 것은 풍교(風敎)에 매우 어그러지는 일이라는 내용이었다.

  이극돈은 그 사초를 보고 크게 놀랐다.  만약 그 기록을 그대로 둔다면 오명(汚名)을 천추

에 남기게 될 것이므로, 이극돈은 곧 김일손을 찾아가서, 사초에서 자기에 관한 대목을 좀 

고쳐 줄 수 없는가 하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강직한 김일손은 이극돈을 책망하여

  "그대도 사관이 아닌가?  사관은 사실 그대로 쓰는 것이 직책이 아닌가?  그대가 사관이 

아니라면 혹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사관으로서 어떻게 한 번 사초에 씌어진 것을 고

치라고 하는가?"

하고 단단히 타일렀다.  이극돈은 그의 위엄있는 말에 기가 질려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자리

를 물러났으나 내심으로는 크게 분개하여 언제든지 김일손에게 복수를 하고야 말겠다는 생

각을 갖게 되었다.  이극돈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본 결과 유자광이 김일손 등에게 깊은 원

한을 품고 있음을 알고 마침내 유자광을 찾아갔다.  유자광도 일찍이 김종직에게 모욕을 당

한 일이 있는지라 그의 제자인 김일손에게 평소의 원한을 풀어 볼 생각에서 이극돈과 함께 

그들에게 복수할 방도를 강구했다.  유자광은 이극돈에게

  "김일손 등에게 복수할 방도를 세우자면 내가 그 사초를 한 번 읽어봐야겠소."

하고 말했다.  원래 사초는 임금도 마음대로 못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극돈은 김일손에게 

복수할 생각에만 눈이 어두어 유자광에게 사초를 보여 주었다.

  유자광이 그 사초를 읽어본즉 세종대왕(世宗大王)에 대한 기록에서 세조(世祖)를 비방하는 

대목이 많았다.  즉 세조가 한 번은 자기 아들 덕종(德宗)의 후궁(後宮)인 권씨를 불렀으나 

권씨가 그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것이라든지, 또 후전곡(後殿曲)이라는 슬픈 노래를 듣고 세

상일을 근심한 것이라든지,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가 죽은 것을 사절(死節) 즉 절개

를 위하여 죽었다든가, 또는 성종 때 일에 세종대왕의 여덟째 아들인 영응대군(永應大君) 부

인 송씨(宋氏)가 군장사(窘長寺)에 가서 설법을 듣다가 시비(侍婢)들이 깊이 잠든 틈을 타서 

학조(學祖)라는 중과 정을 통했다는 등등의 기록이 그것이다.

  유자광은 이것을 보고 노기를 띠어 이대로 있을 수 없다하여 곧 노사신(盧思愼), 윤필상

(尹弼商), 한치형(韓致亨) 등 중신들을 찾아 보고

  "당신들은 세조대왕에게 사랑을 받은 중신들인 만큼 이러한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도 묵

과 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위협을 했다.

  이 말을 들은 중신들은 이것을 임금께 알린다면 당장 큰 사건이 벌어질 것을 뻔히 짐작하

면서도 그러나 한편 알고도 잠자코 있으면 지정불고죄(知情不告罪)라는 중대한 죄과를 범하

게 되는 것이므로 할 수 없이 임금께 고발하게 되었다.

  연산군 사년 칠월 초하룻날 노사신, 윤필상, 한치형, 유자광 등은 차비문(差備門)으로 나아

가 임금께 비밀한 일을 여쭙겠다고 청했다.  중신들이 임금에게 비밀한 일을 여쭈러 왔다는 

소식을 듣고 도승지(都承旨) 신수근(愼守勤)이가 부랴부랴 마중을 나왔다.

  "대감들께서 어떻게 이렇게 함께 오셨습니까?"

  도승지 신수근이가 묻자 유자광이 얼른 신수근의 귀에 입을 갖다대고 뭐라고 한동안 소곤

거렸다.  도승지 신수근은 처음에는 건성으로 듣고 있다가 나중에는 연신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유자광이 속삭이는 내용은 이미 짐작할 수 있었다.  김일손을 비롯하여 선비들을 

없애버리자는 유자광의 말에 신수근이가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이는데는 까닭이 있었다.  

그 까닭은 이러하다.

  도승지 신수근은 연산군의 비(妃) 신씨(愼氏)의 원척(遠戚)이었다.  그가 도승지로 임명될 

때에 대간(臺諫)들은 만일 신수근이가 도승지가 되면 외척(外戚)이 권세를 휘두를 우려가 있

다하여 그를 극력 반대했었다.  이런 관계로 신수근도 유신(儒臣)들인 대간들에게 앙심을 먹

고 있었던 것이다.

  신수근이 유자광의 속삭임을 듣고 앞장 서서 중신들을 곧 대궐 안으로 인도했다.

  연산군은 유자광이가 늘어놓은 말을 듣고 노기가 충전했다.  그렇지 않아도 미웁기 짝이 

없던 유생들이다.

  가뜩이나 미웁던 판에, 사초에 세조대왕에게 대한 추문까지 기록하였다니 연산군의 노여

움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연산군은 곧 의금부 경력(義禁府經歷) 홍사호(洪士灝), 도사(都師) 신극성(愼克成) 등을 경상

도 청도(淸道)로 보내 김일손을 붙들어 오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칠월 십일일에는 김

일손의 사초를 모두 대궐 안으로 가져오라고 분부를 내렸다.  이때 이극돈은 그것을 전부 

드린다면 다음날 사관들이 역사적 사실을 바른 대로 쓸 사람이 없을 것이라하여 김일손이가 

쓴 사초 중에서 왕실에 관계되는 부분만을 골라 대궐로 들여보냈다.

  김일손이 억울하게도 큰칼을 쓰고 서울로 끌려 올라오자, 연산군은 김일손을 친히 국문

(鞠問)할 생각으로 그를 수문당(修文堂) 앞으로 끌어내게 하였는데, 그 자리에는 노사신, 윤

필상, 한치형, 유자광, 신수근 등과 주서(注書) 이희순(李希舜) 이외에는 아무도 참석하지 못

하게 하였다.

  뜰 아래 큰 칼을 쓰고 엎드려 있는 김일손을 보고 연산군은 큰 소리로 호령을 했다.

  "네가 성종대왕의 실록을 기록할 때에 어찌하여 세조 때의 일까지 기록하였는지 바른 대

로 그 이유를 말하여라!"

  김일손은 이극돈이란 놈이 사초를 보고서 임금께 고자질을 한 것이라 깨달았다.  김일손

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역사를 기록할 때에 전왕(前王)의 사실도 기입하는 것은 옛날부터 있는 일입니다."

  임금은 더욱 노기를 띠어

  "그러면 세조대왕께서 예종의 후궁 권씨를 귀여워하고 사랑하였기 때문에 불러보려고 했

으나 권씨가 듣지 않았다는 일은 네가 꾸며 가지고 세조대왕을 헐뜯으려고 한 것이 아니

냐!"

  연산군의 국문에는 점점 살기가 감돌았다.  김일손은

  "아니옵니다.  그것은 소신이 지어서 한 것이 아니라 권부인의 조카뻘 되는 허경(許磬)이

란 사람한테서 들은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연산군은 점점 대노하여 곧 허경이란 자를 붙들어다가 물어보았다.  허경은 김일손에게 

그런 사실을 말한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의 표정이 너무나 험악한 것을 보고

  "소신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아마 김일손 대감이 정신이상이 생겨서 그런 소리

를 하나봅니다."

하고 부인하면서 모든 죄를 김일손에게 씌여버렸다.

  임금이 직접 여러 사람을 불러 며칠 동안 계속 심문하는 동안 하루는 유자광이 소매 속에

서 책한 권을 꺼내어 연산군에게 보이면서

  "이 책을 좀 보옵소서.  이 책은 김종직의 글이온데 이 책 하나만 가지고도 그들이 넉넉

히 세조대왕을 조롱하여 불충(不忠)한 뜻을 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말했다.

  연산군이 받아보니 그것은 조의제(吊義帝)라고 쓴 글이었다.

  "조의제?  조의제란 말이 무슨 뜻이요?"

  연산군이 유자광에게 물었다.

  "조의제라 하옵는 것은 옛날 한(漢)나라의 의제(義帝)가 항우(項羽)의 손에 시살(弑殺)된 것

을 조상한다는 뜻으로, 김종직이가 그런 글을 쓰게 된 본뜻은 세조대왕을 항우에게 비유하

고 의제는 단종(端宗)에 비하여 세조대왕께서 단종을 죽이시온 것을 직접 쓸 수가 없으니까 

그렇게 돌려서 쓴 글이옵니다.  한 번 친히 읽어 보옵소서."

  이 말을 듣자 연산군은 살기등등한 기세로

  "음, 읽어볼 필요도 없겠소.  이제 김종직, 김일손 등의 죄상이 분명히 드러났으니 그놈들

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하고 좌우에 시립하고 있는 중신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유자광은 연산군이 노한 기회를 이용하여 평소 원수처럼 여기던 김일손 등 유학자들을 일

망타진할 생각에서

  "김종직이나 김일손 등의 죄악은 무릇 신자(臣子)된 사람으로서는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

之讐)로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무리들을 조사하여 모조리 없애버려야만 조

정이 깨끗해질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안한다면 나머지 무리들이 암암리에 다시 일어나 화

란(禍亂)을 일으킬 우려가 있습니다."

하고 임금에게 주장했다.

  실로 무서운 주장이었다.  김종직과 김일손의 무리라면 삼사(三司)의 대간(臺諫)들을 비롯

하여 조정 요직에 허다히 있다.  그들을 모조리 잡아 없애자는 것이니 그 자리에 참석했던 

중신들은 모두가 놀랐다.  그러나 누구 하나 이의(異議)를 주장하는 사람은 없었다.

  곧 임금의 명령이 내렸다.  세조대왕으로 말하면 국가 위급한 때를 당하여 간신들이 내란

을 일으키려고 한 것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역도逆徒)들을 박멸하고 종사(宗社)를 안정시켜 

자손이 계승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는데, 김종직과 그 문도(門徒)들이 성덕(聖德)을 비방하고 

김일손으로 하여금 사초에 무서(誣書)케 하였으니 그 죄는 대역(大逆)이라하여 부관참시(剖棺

斬屍)의 형벌을 내렸다.  즉 부관참시란 그때 김종직이가 몇 해 전에 죽었기 때문에 무덤을 

파서 그 시체가 들어 있는 관(棺)을 깨치고 시체의 허리를 베는 형벌이니 그것은 인생으로

서 최대의 극형인 것이다.

  칠월 이십육일에는 김일손 등의 죄를 정하였는데, 김일손,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

는 대역죄로 능지처참(陵遲處斬)에 처하고, 이목(李穆), 허경 등은 참형에 처하고, 그 나머지 

김종직의 제자, 친구 등은 형장(刑杖)을 때려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냈다.  이로써 유학을 

숭상하던 사람으로서 이번 혹화(酷禍)를 면한 사람은 별로 없을 정도였다.  이것을 무오사화

(戊午士禍)라 한다.

  연산군의 뜻을 거스릴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삼사의 대간들이며 그밖

의 유학자들이 임금의 하는 일에 대하여 걸핏하면 상소질하기가 일쑤이더니 이번 무오사화

가 있은 후부터는 누구 한 사람 감히 임금이 하는 일에 이러고 저러고 하는 사람이 없게 되

었다.  이제 연산군은 마음 놓고 자기의 생각나는대로 무슨 일이든 행할 수가 있게 되었다.


  [燕山君]   <妖女 張綠水>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燕 山 君 

    妖女 張綠水



   무오사화가 있은 것은 연산군이 등극한지 사년째 되는 해였으니, 연산군의 나이는 그때 

스물세살이었다.

  나이가 스물세살이면 색(色)에는 완전히 눈을 뜬 판이요, 게다가 무슨 일이나 맘대로 하게 

되었으니 그의 음탕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벌어지게 되었다.  이때 연산군은 왕비 신씨와 

궁인 곽씨(郭氏) 이외에 따로 윤훤(尹萱)의 딸을 맞아 숙의(淑儀)를 삼았다.  연산군이 여자를 

좋아한다는 소문은 차츰 세상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이 눈치를 알아차린 김효손(金孝孫)

이란 사람은 자기 처매(妻妹)인 장록수(張綠水)란 여자를 연산군에게 천거했다.  당시 장록수

는 예종의 둘째 아들인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여자 종(婢)으로 있었다.  그녀는 성질이 영리

하고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기로 이름이 높았으며, 그 목소리는 매우 맑고도 깨끗하여 듣

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히 기쁜 마음을 갖게 했다.  나이는 그때 삼십이며 연산군 보다도 

몇 살 위이지만 이팔의 소녀와도 같이 앳되게 보이고 아름다왔다.

  연산군은 장록수를 한 번 만나보고 매우 마음에 흡족하였다.  곧 장록수를 맞아들여 숙원

(淑媛)을 봉하였다. 연산군의 장록수에 대한 사랑은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갔다.

  이후부터 임금이 조회에도 나아가지 않고 더욱이 경연은 물론 다른 대궐에 거동도 않고, 

그저 장록수 옆에 있는 것이 가장 기쁘고 유쾌한 시간이었다.  이제 장록수의 옆을 떠나서

는 살 수 없을이만큼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임금이 장록수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장록수는 차츰 교만해져서 마침내는 임금을 조종하

게 되었다.  임금은 마치 장록수 앞에서는 죽은 사자와도 같이 온순할 뿐이었다.  임금은 아

무리 노여웠다가도 장록수만 보면 웃음이 저절로 피오 올랐다.  따라서 장록수의 일거수 이

투족(一擧手一投足)은 온 백성에게 영향 주는바가 컸다.  그때 벼슬자리를 얻으려든가 감투

를 쓰려든가 무슨 청할 일이 있으면 임금이나 조정 비변사(備邊司) 등에 청하기보다 장록수

에게 청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고, 제일 빠른 길이었다.

  이 때문에 장록수의 집 앞에는 인마(人馬)가 끊일 새 없었고 값비싼 물건이 사방에서 날

아들었다.  장록수의 말 한 마디면 죽을 사람도 살릴 수 있었고, 살 사람도 죽일 수 있어서, 

그는 실로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장록수의 부귀와 영화가 어찌나 

극진했던지 그때의 사람들은 아들 낳기를 원하지 않고 오히려 딸 낳기를 원하여 다음과 같

은 노래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즉

     張使天下父母心

( 장록수는 천하의 부모들 마음에 )

  不重生男重生女

( 아들보다 딸을 더 중하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

  연산군은 장록수를 기쁘게 해줄 양으로 각 관청의 비자(婢子)나 여염집 딸이라도 여덟살

부터 열두살까지 얼굴 예쁘게 생긴 소녀들을 대궐로 들여다가 노래와 춤을 가르쳐 연회에 

참가케 하였다.  이밖에도 당시의 유명한 기생인 해금기(奚琴妓), 광한선(廣寒仙) 등 네 사람

을 택하여 대궐로 불러들이고, 또는 가야금, 아쟁牙箏) 잘타는 기생들도 각각 한 사람씩 불

러들였다.

  이때부터 궁중에 곡연(曲宴)이 없는 날이 하루도 없었고, 연산군은 하루도 취하지 않는 날

이 없었으며, 연산군의 곁에는 늘 장록수가 앉아 있었다.  정사야 잘 되거나 못 되거나, 백

성들이야 죽거나 말거나 연산군은 술이면 그만이요, 장록수면 그만이었다.

  그때만 해도 창덕궁의 담이 낮아서 담 밖에서 대궐 안을 엿볼 수가 있었다.  대궐 안에서 

매일 연회가 벌어지고 노래소리에 춤을 추며 야단법석을 떨면 그것을 구경하느라고 담밖에  

는 수백명의 군중이 모여들어 나중에는 잘한다 못한다하는 소리까지 군중들 입에서 튀어나

올 때가 있었다.  실로 대궐 안의 체모에 손상되는 일이 많았다.

  연산군은 당장에 도승지 이극균(李克均)을 불러 아래와 같은 어명을 내렸다.

  "대궐 담장을 새로이 두 길 높이로 쌓아올리고 담장밖에 있는 민가(民家)들은 모두 무너 

버려라.  그리고 대궐 안이 내려다 보일만치 높은 곳에 있는 복세암(福世庵), 인왕사(仁旺寺), 

금강굴(金剛窟) 등도 모조리 철폐시키고 또한 백악(白岳)이나 인왕산(仁旺山)이나 사직산(社稷

山) 같은 데는 잡인(雜人)의 입산을 일체 엄금하라!"

  기막힌 어며이었다.  곧 경복궁 담장밖에 있는 집들이 헐리고, 경복궁에 가까이 있는 복세

암, 인왕사, 금강굴 등도 철폐당하고 동시에 동소문(洞小門) 밖 동구에는 경수소(警守所)를 

설치하여 군사들로 하여금 잡인들의 북문 밖 각 산에 올라 대궐 안을 바라보는 것을 엄금케 

하였다.  이러한 것이 모두 장록수라는 일개 요부와 음탕한 애욕을 즐기기 위해 내려진 명

령이었던 것이다.

  어느 해 봄날이었다.  연산군은 대궐 안에서 장록수와의 연락에도 염증이 생겼든지 하루

는 내시(宦官) 몇을 거느리고 정업원(淨業院)으로 미행(微行)을 나온 일이 있었다. 전부터 이 

정업원은 늙은 후궁들이 살 곳이 없으면 이곳에 와서 여생을 편하게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후궁이 나가 살게 되면 젊은 궁녀들도 몰래 빠져 나와 함께 지내는 일이 많아서 이러한 여

승들 중에는 뜻밖에도 미인이 섞여 있었다.  연산군은 이런 자를 엽색(獵色)하려는 것이다.

  연산군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이 정업원에 나타났다.  법당 안에서는 여러 비구니들이 불

경을 읽다가 불시에 나타난 임금을 보자 일제히 일어나 합장하고 

  "대왕마마 만수무강하사이다."

  그러면 임금은 그저 웃음만 띠고

  "여러 비구니들 어서 독경을 계속하여라."

하고 옆에 서서 조용히 독경하고 있는 비구니들을 번갈아 바라본다.  머리에 곱게 접은 고

깔을 쓰고 흰 손에는 염주를 들고 눈을 감은 채 소곤소곤 독경하는 비구니들!  그 중에는 

정말 아리따운, 매력 있는 젊은 비구니들도 많이 있었다.

  "음"

  연산군은 뜻모를 미소를 지었다.  연산군은 여러 비구니들 중에서 젊고 아리따운 비구니

들만 몇을 헤아려 보고

  "자, 이제 모두들 물러가거라,  그리고 과인이 지적하는 다섯 명만 남아 있거라!"

  연산군은 손을 들어 젊은 비구니 다섯명을 일일이 가리켰다.

  속세를 떠난 비구니라 할지라도 어명을 거역할 길은 없었다.  물러가라는 명령을 받은 늙

은 비구니들은 제각기 염불을 외우며 합장 배례를 하고 선원(禪院)으로 사라져 갔다.

  ... 이날 연산군의 황음(荒淫)은 차마 눈을 뜨고서는 볼 수가 없도록 어지러웠다.  일찍이 

한사람 한사람의 여성을 상대로 음탕한 행동을 한일은 많았으나, 일시에 여러 계집을 상대

로 그토록 어지러운 행동을 취해 보기는 연산군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어 대궐로 돌아와 

광한선과 또 희롱하니, 이때부터 연산군의 황음이 본격적으로 심해지게 되었다.

  한 번은 연산군의 계모인 왕대비 윤씨가 임금을 위로하기 위해 창경궁(昌慶宮) 안뜰에서 

큰 잔치를 베푼 일이 있었다.  이 자리에는 정승(政丞), 사헌부(司憲府), 승정원(承政院)의 고

관들도 배석하고 있었다.  이날 왕대비는 연회를 흥겹게 하기 위해 여기(女妓) 광한선, 내한

매(耐寒梅) 등을 불러 임금을 모시게 하였는데 연산군은 술이 취하자 왕대비를 비롯하여 여

러 중신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한매, 광한선의 두 기녀를 한품에 껴안고

  "자, 모두들 이 어여쁜 기생의 이름을 시제(詩題)로 삼아서 시를 지어 보아라."

하고 분부를 내렸다.

  기생의 이름을 시제로 해서 중신들더러 시를 지으라니 그처럼 중신들을 모욕하는 일은 없

었다.  중신들은 모두 이맛살을 찌푸렸으나 그렇다고 감히 불평을 말하는 자도 없었다.  그

러던 중 대사헌 이자건(李自健)이가

  "기생의 이름으로써 시를 짓게 하는 것은 중신들의 체면을 손상케 하는 분부로 아룁니다."

하고 용감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에게 이런 반대가 통할 리 없었다.  연산군은 끝내 

고집을 부려 중신들로 하여금 기생의 이름으로써 시를 짓게 하였다.

  이렇듯 연산군의 고집과 황음이 날이 갈수록 심해가지만, 조정에 중신이 많되 이제는 간

언(諫言)을 올리려는 사람조차 없게 되었다.


  [燕山君]   <甲子士禍>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燕 山 君 

    甲子士禍



   연산군은 자기 어머니 윤씨가 폐위를 당하였다가 약사발을 마시고 죽었다는 일은 대강 

눈치로 알았으나, 다만 그 일은 부왕이 윤씨를 미워하여 그렇게 한 일이라고만 알았지, 그 

자세한 내막까지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연산군 신하 가운데 가장 신임받는 사람은 연산군의 처남되는 신수근(愼守勤), 그 다

음이 임사홍(任士洪)이라는 사람이었다.

  임사홍은 일찍이 성종 때에 당상관(堂上官)의 벼슬까지 지낸 자로서 그의 맏아들 임광재

(任光載)는 예종의 부마(駙馬=사위)였고 둘째 아들 임숭재(任崇載)는 성종의 부마였다.  선왕 

성종과는 그렇듯 깊은 관계의 인물인지라 임사홍은 그것을 핑계 삼아 임금께 잘 보여가지고 

자기의 부귀와 영화, 권력을 유지하려고 갖은 방법으로 임금께 아첨하였다.  더욱이 그 둘째 

아들 숭재는 남의 미첩(美妾)을 빼앗아다가 임금에게 드린 까닭에 연산군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그런데 그의 셋째 아들 임희재(任熙載)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어 김종직의 제자가 되었

고 성종 때 생진(生進) 시험에 급제하고 연산군 사년에는 대과(大科)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그해는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던 해여서 김종직의 제자라하여 임희재도 귀양을 갔었

다.  임희재는 자기 형들이나 아버지와는 달라서 남에게 아첨하여 권리를 얻어 부귀와 영화

를 누리는 것을 천하게 여긴 때문에 늘 형제 사이나 부자간에 뜻이 맞지 않았다.

  그는 글만 잘할 뿐 아니라 글씨도 잘 썼다.  자기 집 병풍에 이러한 글을 써 붙인 일이 

있었다.


  祖舜宗堯自太平
( 순 임금과 요 임금을 본받는다면 저절로 태평세상을 이룰터인데 )

  秦皇何事苦蒼生

( 진나라 시황제는 어찌하여 국민을 괴롭혔던가 )

  不知禍起蕭墻內

( 화가 자기 집 담장 안에서 일어날 줄은 모르고 )

  虛築防胡萬里城

( 공연히 쓸데없이 오랑캐를 막는다고 만리장성을 쌓았구나 )

  이 시는 김종직이가 조의제문(吊義帝文)을 지어 세조대왕을 비방한 것과 마찬가지로 진나

라 시황제의 이름을 빌어 연산군을 조롱한 것이다.  즉 연산군이 백성들로 하여금 궁중의 

연락(宴樂)을 엿보지 못하게 하려고 대궐 담장을 높이 쌓은 사실을 전시황에 비겨서 비난한 

시였다.

  그런데 하루는 연산군이 임사홍 집에 미행(微行)을 나왔다가 병풍의 시를 보고 크게 노하

였다.

  "이것이 누구의 글이냐?"

  연산군은 시를 읽다가 무섭게 임사홍에게 물었다.  임사홍은 속임 없이 사실대로 자기의 

아들 희재가 쓴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연산군의 노여움은 점점 고조되어

  "그대의 아들이 이렇게 불초(不肖)하니 과인이 그대로 둘 수 없어 죽이려고 하는 바이니, 

그대의 의견은 어떠하냐?"

하고 물었다.  임사홍은 방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면서

  "소신의 자식이 과연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불초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진작 

전하께 여쭈어 형벌을하려 하였으나 애비된 마음에 차마 용단을 내리지 못한 것을 용서하십

시오."

하고 간절히 빌었다.

  연산군은 곧 임희재를 의금부에 가두었다가 며칠 후에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그런데 임

사홍은 자기 아들이 참형을 당하여 죽는 날, 조금도 슬퍼하거나 언짢아 하는 일이 없이 도

리어 자기 집에서 대연(大宴)을 베풀어 친구들과 함께 즐겁게 놀고 있었다.  이것을 보면 임

사홍이 얼마나 간악하고 냉혹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전해 들은 연산군은 더욱 임사홍을 신임하게 되어 그 후에도 가끔 임사홍 집에 행

차하게 되었으니, 임금이 이렇듯 자주 신하의 집에 행차하는 까닭은 임사홍이 많은 미희(美

姬)들을 미리 마련해 두었다가 연산군의 행차가 있을 때마다 그 미희를 임금에게 바치는 까

닭이었다.

  하루는 옆에 모시는 사람도 없는 조용한 틈을 타서 임금과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

다가 문득 폐비 윤씨에 관한 얘기를 끄집어내었다.

  "폐비 윤씨로 말씀 올리자면 본래 성질이 나빠서 성종대왕의 미움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엄숙의 정숙의가 투기심이 강하여 성종대왕께 자주 고자질을하여 결국 성종의 노여움이 극

도에 이르러 그렇게 폐출당한 것이옵니다. 돌아가신 것도 약사발을 내려서 돌아가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연산군은 그만 정신이 아찔하였다.

  "뭐 엄숙의와 정숙의가?"

  지금은 후궁에서 안일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선왕의 총애를 받아오던 엄숙의와 정숙의가 

생모에게 그처럼 원수일 줄은 전연 몰랐던 일이기 때문이다.

  (생모의 원수를 바로 눈 앞에 두고도 여지껏 모르고 있었구나!)

  연산군은 이제 의심해 볼 생각조차 없었다.  그는 그만 분통이 터져 올라 그 길로 대궐로 

돌아와 엄씨와 정씨 두 숙의를 불러내다가 대궐 뜰에 세우고

  "네년들이 과인의 생모를 독살시켰지?  이 죽일년들아!"

하고 자기 주먹으로 당장에 두 사람을 때려 죽였다.  연산군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엄

씨와 정씨의 시체를 여러 갈래로 찢어서 소금에 절여가지고 까막 까치나 뜯어 먹으라고 산

에다 그냥 버려두게 하였다.

  대궐 안에서 이렇게 큰 소동이 일어나는 바람에 궁녀들이나 하녀들은 그냥 벌벌 떨고만 

있었다.  바로 이때였다.  인수대비가 시녀들의 부액을 받으면서 나타났다.  연세가 이미 칠

십이 가까운지라 후궁에서 한가한 여생을 보내고 있었는데 연산군이 대궐에서 엄숙의와 정

숙의를 때려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온 것이었다.

  인수대비는 노여움이 북받쳐 임금을 향해

  "아무리 그 두사람의 숙의가 잘못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선대왕(先大王)께서 사랑하던 사

람인데 그렇게 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

하고 소리를 높여 호령을 하였다.

  그러나 꾸짖는 말을 공손히 듣고만 있을 연산군이 아니었다.  연산군은 한참 인수대비를 

노려보고 있다가

  "이 늙은 게 뭐 어쩌구 어째?"

하고 비호같이 덤벼들어 가슴팍을 머리로 받아서 쓰러뜨렸다.  인수대비는 쓰러지면서

  "이럴 법이 있나.  이럴 법이 있나."

  몇 마디 이렇게 주워대다가 그만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다.

  연산군이 이어 정숙의 몸에서는 난 안양군(安陽君)과 봉안군(鳳安君) 형제에게 큰칼을 씌

워 옥에 가두어 버렸다.  때는 연산군 십년 갑자(甲子) 삼월 이십일이었다.

  인수대비는 이때 쓰러진 것이 원인이 되어 얼마동안 신고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인수대

비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누구든지 폐비 윤씨에 대한 일을 입밖에 내어서는 아니 된다 해서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더니 그만 임사홍이가 발설하여 이러한 참극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인수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이제는 아무런 제한도 없게 되었으므로 폐비 윤씨의 생모되는 

신씨(申氏)가 자유로이 대궐 안에 출입하게 되었다.  폐비 윤씨가 죽을 때 피묻은 수건을 자

기 어머니에게 주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얘기한 바있거니와, 신씨는 인수대비의 감독이 

심해서 대궐에 들어갈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 인수대비가 돌아간 기회를 타서 대

궐로 들어가 그 피묻은 수건을 연산군에게 보이며 그때의 현상이며 윤씨의 전하는 이야기를 

자세히 설명하였다.

  피묻은 수건을 보자 연산군은 더욱 흥분하여 미친 듯이 날뛰었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던 

그 심정, 어머니가 마지막 흘린 피수건을 받아들고 한없이 흐느껴 울었다.  이제야 비로소 

자기 어머니의 최후의 일을 확실히 알게 된 것이다.  연산군에게 남은 일은 오직 복수 뿐이

었다.

  엄씨 정씨의 죽음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춘추관(春秋 )에 명령하여 폐비사

약 시말단자(廢妃賜藥始末單子)를 작성하여 올리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생모 윤씨의 사사

(賜死) 사건에 관계되는 모든 인물을 조사하여 바치라는 명령이었다.

  그런데 [폐비사약 시말단자]에 의하여 최초로 희생을 당한 사람은 선왕 성종 때에 승지(承

旨)로 있던 이세좌(李世佐)였다.  이세좌는 왕명에 의하여 폐비 윤씨에게 약사발을 들고 갔

던 바로 그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승지로 있는 놈이 반대는 못할망정 사약을 가지고 갔으니 이는 도저히 용서 못할 일이

다.  그놈을 거제도(巨濟島)로 귀양을 보내라!"

  연산군은 이세좌에게 처음에는 그런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암만해도 그런 정도로는 직

성이 풀리지 않았던지 이세좌가 거제도로 귀양을 떠나간지 사흘 후에 연산군은 그를 죽이라

는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사사(賜死)의 명령을 귀양 가던 길인 곤양군(昆陽郡) 양포역(良浦

驛)에서 받은 이세좌는 아무런 원망도 없이 그날 밤에 스스로 목을 매고 죽어버렸다.

  폐비사약 시말단자에 기록된 인원은 한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윤비를 폐출하는데 적극적

으로 찬동한 사람은 물론이려니와, 비록 찬동은 아니 했더라도 반대를 못한 사람들까지 모

두 조사해 올리라는 명령이었으므로 시말단자에 기록된 명단이 수백명이나 되었다.  그리하

여 폐비 사건에 관련이 있는 사람은 모조리 대역죄로 삼족(三族)을 멸하였는데 아무리 경한 

형벌을 당한 사람이라도 팔촌(八寸)까지는 형벌을 면지 못했다.  그러므로 형벌의 범위는 거

의 전국에 미쳐서 민심이 극도로 흉흉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한 형벌을 받은 사람들은 윤필상(尹弼商), 한치형(韓致亨), 한명회(韓明

澮), 정창손(鄭昌孫), 이세겸(李世謙), 심회(沈澮), 이파(李波), 김승경(金升卿), 이세좌(李世佐), 

권주(權柱), 이극균(李克均), 성준(成俊) 등의 열두명으로서 연산군은 그들을 이륙간(二六奸)이

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중에 살아 있던 윤필상, 이극균, 이세좌, 권주, 성준 등은 참형을 

당하고 이미 죽은 사람들에게 대하여는 김종직의 예(例)에 따라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하였

는데, 이번에는 한걸음 더 나아가 쇄골표풍(碎骨飄風)이라고하여 무덤을 파고 송장 허리를 

잘라 그 뼈를 갈아서 가루를 만들어 바람에 날리기까지 했었다.

  이 해가 바로 갑자년이고, 또 대역죄로 죽은 사람의 대부분이 선비들이었으므로 후세에 

이 사건을 가리켜 갑자사화(甲子士禍)라 부르게 되었다.


  [燕山君]   <酒池肉林 속의 歲月>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燕 山 君 

    酒池肉林 속의 歲月



   사람 죽이기를 파리 죽이기보다 더 쉽게 하고 보니 착한 임금이란 말을 듣기는 틀린 일

이라고 생각한 연산군은 이제는 될 때로 되어라 하는 기분이 되었다.  남이야 욕을 하거나 

말거나 백성이야 죽거나 말거나 이왕 내친 걸음이니 마음대로 놀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다 처남(妻男)되는 신수근이나 사돈인 임사홍이 임금의 비위만 맞춰 충실한 종노릇을 

하였으니 나라 꼴은 날이 갈수록 어지러워지고 민심은 나날이 흉흉해 갔다.

  그러던 어느날 장록수의 집에 난데없는 글발 한 장이 날아 들었다.  그 내용인즉 임금이 

장록수를 너무 지나치게 사랑함을 조롱한 글이었다.  연산군은 이것을, 전에 정소용이나 임

숙의 밑에 있다가 지금은 귀양을 가 있는 궁녀 전향(田香)과 수근비(水斤非)가 한 짓이라하

여 그 두 사람의 부모 형제와 친척들을 모두 붙잡아 들여 때리고 불로 지지고하여 여러 가

지로 고문하였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도 자백하는 사람은 없었다.  임금은 의금부 낭청(郎

廳)을 강계(江界)와 온성(穩城) 각각 보내어 전향과 수근비를 능지에 처해 버렸다.

  생모 윤씨의 원한을 풀어준다하여 전국 각지에 걸쳐 여러 천명의 선비와 그의 가족을 죽

인 연산군은 또다시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다.  전향과 수근비를 죽이고도 다시 전향의 친척

인 최금산(崔今山), 그의 어머니, 아우 춘금(春今), 향비(香非) 등도 능지를하여 죽이고, 그 친

척이며 수근비의 부모, 동생, 숙모(淑母) 등은 형장을 때려 국경 지방으로 쫓아 버렸다.

  임금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아무리 무력하고 순박한 백성들이

라도 이제는 더 참고 견딜 수가 없었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도대체 이런놈의 세상이 어디 있담!"

  "이놈의 세상이 언제나 망하려는고"

  순직한 백성들의 입에서 이런 불평이 나왔다.  연산군도 그것을 전연 모르지는 않았다.  

백성들의 불평을 짐작하고 있기에 내심으로는 불안한 생각이 없지도 않았다.  연산군은 그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이제 더 한층 술과 계집으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장록수도 역시 같은 불안한 생각은 있었다.  장록수의 생각에는 중신들이 모여 있는 정원

政院)이나 삼사(三司)에서 또다시 무슨 상소(上疏)질이나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일 두려웠

다.  그래서 장록수는 임금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어서(御書)를 내리게 하였다.

  << 오월에 우박(雨雹)이 내리는 것은 큰 변괴다.  이것은 사람을 많이 죽이기 때문에 화기

(和氣)를 잃어서 그러한 것이다.  근일에 더위로 인하여 국사를 폐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덥다하더라도 억지로라도 일을 보아야 할 것인가.  대궐 안에서 연회를 자주 여는 것은 국

비(國費)를 낭비하는 것이 아닐까.  백성들의 집을 철거시키는 것은 민원(民怨)을 사는 일이 

아닌가.>>

  이러한 글을 내려 중신들의 의견을 떠보게 했다.

  정원과 대간(臺諫)들은 벌써 임금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뭐

라고 대답만 하면 죽이거나 쫓아버릴 것은 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장록수와 연산군은 이

만하면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귀에 거슬릴 말을 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매우 만족한 

미소로 중신들을 내려다 보았다.

  그해 칠월 십구일이었다.  이른 새벽에 신수영(愼守英)이라는 사람이 임금 앞에 나아와 비

밀한 일을 알리었다.  신수영은 머리를 조아리며

  "오늘 아침 한 사나이가 소신을 찾아와서, 자기는 제용감정(濟用監正) 이규(李逵)의 심부름

꾼이라고 하면서 난데없는 글 한 장을 주고 갔는데 그 글을 보온즉 거기에는 전하를 노골적

으로 비방하는 무엄한 사연이 씌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신은 우선 그 사실을 알려 드리

고자 배알한 것입니다."

  "그래 그 글에 나를 뭐라고 비방을 했는고?"

  "내용인즉 다름이 아니오라 전하가 몹시 난폭하시고 또 너무 호색을 하신다는 비방이 씌

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투서의 글자는 한문이 아니라 모두 정음(한글)인데다가, 대궐에 여

의(女醫)로 있는 개금(介今), 덕금(德今), 고온지(古溫知), 조방(曺方) 등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전하를 그렇게 비방하더라는 사연입니다."

  그 소리를 들은 연산군은 당장 이규를 불러다가

  "그대는 신수영에게 이런 글을 보낸 일이 있느냐?"

하고 손에 들고 있던 투서를 이규 앞에 내던졌다. 이규는 자기 앞에 던져진 서장을 주어 보

았다.  그러나 전부가 정음으로 씌어있는지라 정음을 모르는 그로서는 읽을 재주가 없었다.  

그는 정음을 몰라 이 글을 읽을 줄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음, 그대는 정음을 모른다."

  정음을 모른다면 그가 투서를 했다고는 볼 수 없었다.

  연산군은 다시 그 투서 속에 씌어 있는 개금, 덕금, 고온지, 조방 등 여의들을 모조리 불

러들여 투서에 대한 문초를 시작했다.  허지만 누구 하나 투서를 했다는 사람이 없었다.  연

산군은 그만 노여움이 북받쳐 그 글 쓴 사람이 도망칠까봐 서울 성 주위에 있는 여덟 문을 

굳게 닫아 교통을 끊어버리고 군사들로 하여금 성문을 지키게 하는 동시에 중신들을 불러 

현상체포(懸賞逮捕)의 방침을 세우고 죄인을 붙잡는 사람에게는 베(布) 오백필을 상으로 준

다는 것을 의금부 문에다가 크게 써붙였다.

  그와 동시에 이후부터는 정음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을 금지시키고, 이미 배운 자는 다

시는 정음을 쓰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한편 연산군은 정음을 아는 자를 한성(漢城) 오

부(五部)로 하여금 조사하여 정원에 알리게 하는 동시에 그 필적으로 투서와 대조하였다.  

즉 정음 아는 사람은 각각 한문과 정음 글씨를 쓰되 네벌씩 써서 그것들을 모아 큰 책을 만

들어서 의정부, 사헌부, 승정원에 각각 배치하여 때때로 투서의 글씨와 대조케 한 것이었다.

  그때 사람들은 정음을 아는 것을 한 개의 수치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문을 진서

(眞書)라 하고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언문이라 한 것도 그러한 뜻에서 나온 말인 것이다.  이

렇듯 정음이 천대와 멸시를 받던 그때에 설상가상(雪上加霜)격으로 연산군의 학대를 당하고 

보니 세종대왕께서 애써 만들어 놓은 우리의 글이 그만 오유(烏有)에 돌아갈 지경에까지 이

르게 되었다.  연산군은 정음을 배우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이미 정음으로 써놓은 책들

도 모두 불에 태워버렸다.  다만 중국말을 해석하거나 그 발음에 대한 설명 같은 것만 남기

고는 무슨 기록이건 소설이건 하나도 남기지 않고 불질러 버렸던 것이다.

  서울 여덟 대문이 칠월 십구일에 닫혔다가 팔월 육일에야 열리게 되었지만,  그동안 죄인

은 잡지 못하고 공연히 교통 차단으로 백성들만 괴롭힌 결과가 되었다.

  이렇게 교통을 차단한다, 정음 배우는 것을 엄금한다, 정음 책을 불사른다 하고보니, 백성

들만이 아니라 임금을 가까이 모시고 있는 내시들까지도 임금이 잘못한다고 비난을 하기에 

이르렀다.  연산군은 이런 소리가 듣기 싫어서 내시들에게 목패(木牌)를 하나씩 채워주어 그 

목패에 씌어진 대로 지키지 않으면 엄벌에 차한다고 선언을 했다.  그 목패에는 구시화지문

(口是禍之門), 즉 입은 화난의 문이요, 설시참신도(舌是斬身刀)라, 즉 혓바닥은 몸을 베이는 

칼이니, 폐구심장설(閉口深藏舌)이면, 즉 입을 닫치고 혓바닥을 깊이 감추면, 안심처처뇌(安

心處處牢)라, 즉 안심하고 간 데마다 편할 것이라는 뜻이다.

  연산군은 날마다 궁녀들에게 갖은 음란을 다부리면서도 장록수에게 대한 사랑만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따라서 장록수의 세도는 날이 갈수록 확대되어 이제는 팔도강산을 마음대

로 뒤흔들게까지 되었다.

  장록수는 대궐 안에서만 연락(宴樂)에 취하느니보다는 산과 들로 돌아다니면서 사냥도 하

고 잔치도 열어보는 것이 더욱 흥미 있으리란 생각을하여 그 뜻을 임금께 말했다.  누구의 

말이라고 그 말을 연산군이 거부하랴.  곧 서울을 중심삼아 사방 몇 십리의 주위를 사냥과 

오락장으로 만들어 거기에는 금표(禁標)를 세워 공사(公事)이외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즉 동쪽으로는 한강(漢江), 삼전도(三田渡), 광나루(廣津), 묘적산(妙寂山), 퇴현(槌峴), 

천마산(天摩山), 마산(馬山), 주엽산(注葉山)에 이르는 곳까지요, 북쪽으로는 돌참(石岾), 홍복

산(洪福山), 게넘이참(蟹踰岾)까지요, 서쪽으로는 파주 보곡현(坡州寶谷峴)까지요, 남쪽으로는 

용산(龍山), 한강, 노량진, 양화도(楊花渡)까지 이르는 광대한 범위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그 

금표 안에는 사람의 통행을 금지할 뿐 아니라 그 안에 살던 사람들도 모두 다른 곳으로 철

거 시키고 무인지경(無人之境)을 만들어 놓았다.  이렇게 한 후에 임금은 장록수와 그밖에 

미인들이며 호위하는 군사들이며 사냥꾼들을 거느리고 산곡과 숲 사이로 돌아다니며 노루와 

산돼지, 꿩, 토끼 등을 잡는 것을 큰 재미로 여기었다.

  한편 장악원(掌樂院)의 기녀(妓女)들을 그전보다 갑절로 늘이되, 될 수 있는 대로 나이 이

십미만으로 얼굴이 예쁜 처녀만 선택하여 그들에게 취악(吹樂)과 현악(絃樂)을 가르쳐 연회

에 참여케 하는 동시에 처용무(處容舞)도 가르치게 했다. 그리고 악공(樂工)을 광희(廣熙), 기

악(器樂)을 흥청(興淸) 혹은 운평(運平)이라고 하였는데 흥청악은 삼백, 운평악은 칠백으로 수

효를 정하였다.  흥청은 사예(邪穢) 즉 더러운 것을 씻어버린다는 뜻이요, 운평은 운태평(運

太平) 즉 국운이 태평한 때를 만났다는 뜻이었다.  그들이 처용무라는 춤을 출 때에는 여러 

가지 난잡한 행동을 보여 심지어는 옷을 입지 않고 춤을 추는 일도 있어 그 추잡한 꼴을 차

마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때 내시에 김처선(金處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김처

선은 옷을 벗고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차마 못본 척할 수가 없어 임금에게 여러번 간언(諫

言)을 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은 그런 말을 듣기는커녕 오히려 김처선을 미워하기에 이르렀

다.  하루는 김처선이 대궐에 들어가기 전에 자기 집 가족들에게

  "상감께서 처용문가 뭔가 하는 추잡한 춤을 추는데, 오늘은 내가 끝까지 강경하게 반대할 

생각인즉 아마 살아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떠났다.

  그날도 역시 궁중에선 처용무가 벌어졌다.  김처선은 보다 못하여 임금 앞에 나아가

  "이 늙은 것이 세조대왕 때부터 사대(四代) 임금을 모시고 대궐 안에서 살아왔지만 이처럼 

추잡한 춤은 처음 보았습니다.  소신은 사기(史記)도 읽어 임금의 몸으로서 이토록 황음에 

빠지신 임금은 고금에 없는 일인 듯하오니 상감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고 몸을 삼가시기 바라

옵니다."

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기탄없이 떠들어 대었다.  늙은이가 호령이라도 하듯이 큰 소리로 떠

들어대는지라 춤을 추며 돌아가던 기녀들은 그만 질겁을 해서 한편 구석으로 피해버렸다.

  그 모양을 본 연산군은 크게 노하였다.

  "이놈! 이 늙은 것이 무엇이 어떻다고 주둥이를 놀리느냐?  썩 물러가지 못하느냐!"

  그러나 김처선은 결심한 바가 있는 듯 물러서려는 기색도 없이

  "상감께서는 국가 장래를 생각하시고 부디 이어지러운 꿈에서 깨어나시기 바랍니다."

  이에 연산군의 분노는 극도에 달하고 말았다.  시녀에게 활을 내어라 하고는 잔뜩 활시위

를 메워 김처선의 가슴을 향해 쏘았다.  화살은 김처선의 갈빗대에 가서 푹! 하고 박혔다.  

그러나 김처선은 아픔을 참아가면서 다시 큰 소리로

  "조정의 충신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거늘 이 늙은 고자놈이야 무어 죽는 것을 두려

워하겠습니까.  다만 원통한 것은 우리 상감께서 저러다가 임금 노릇을 오래 못할 것이 걱

정일 뿐입니다."

  연산군은 그 소리에 더욱 화가 나서 또 한 번 활을 쏘아 갈겼다.  김처선은 마루바닥에 

쓰러졌다.  연산군은 김처선의 다리 하나를 찍어 버리고

  "일어서 물러가지 못하겠느냐?"

하고 호통을 쳤다.  김처선은 임금을 쳐다보면서

  "상감께서는 부러진 다리로 걸어갈 수 있습니까?"

하고 대답했다.  이에 연산군은 그 혓바닥마저 잘라버렸다.  그러자 김처선은 자기 손으로 

자기 배를 갈라서 창자를 끊고 숨이 질 때까지 입으로 무엇이라고 지껼였다.  연산군은 더

욱 노하여 그 시체를 호랑이에게 주어 먹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분노가 풀리지 

않아서 

  "김처선이라는 놈은 나쁜 놈이나가 김처선이라는 처자(處字)가 들어 있는 글을 읽거나 말

을 하지 말라."

하고 명령까지 내렸다. 그리고 또 김처선의 양자인 김공신(金公信)을 죽이고 그의 재산과 가

옥을 몰수하는 동시에, 그의 본관(本貫)이 전의(全義)라하여 전의읍(全義邑)을 폐해 버리고 그

의 부모의 무덤을 파헤쳐 평지를 만든 뒤 그의 일가를 칠촌까지 중벌을 주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김처선의 이름인 처자(處字)가 들어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부르기 싫다하여 처서

(處暑)라는 절계(節季)의 이름을, 저서( 暑), 또 처용무(處容舞)를 풍두무(豊頭舞)라고 까지 고

치었다.

  이 후로는 조정에 중신이 많다 하되 어느 한 사람 임금에게 간언을 올리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섣불리 귀에 거슬리는 상주를 했다가는 김처선 처럼 즉석에서 목숨이 달아날 것은 

뻔한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연산군의 황음무도한 생활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제는 황음무도 그 자체에서 어떤 즐

거움을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인지 모르게 괴롭고 무엇인지 모르게 두려운 심정을 잊

어버리기 위해서도 술과 계집이 기어코 필요하였다.

  연산군은 장악원의 기녀들 수를 좀더 늘이어 규모를 크게 하려고 구영수(具永壽)라는 사

람으로 장악원 제조(提調)를 임명하였다.  제조라는 것은 지금 말로 총감독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파고다] 공원에 있던 원각사(圓覺寺)의 중들을 모두 내쫓고 장악원을 그 곳에다 옮

겨 가흥청(假興淸) 이백, 운평 천, 광희(廣熙) 천을 두고 총률(總律) 즉 음악 지휘자 사십명을 

두어 그들을 가르치게 했다.

  연산군 십일년 오월 오일에 대궐 안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여기 모인 사람들은 왕후

들의 친족을 비롯하여 남자 손님이 천여명에 여자 손님이 이백팔십명이나 되었다.  하니 얼

마나 큰 잔치인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연산군은 여자들 손님 윗저고리 가슴에 

누구의 아내 아무개라고 명패를 써서 붙이게 했다.  그 까닭은 그중에 나이 젊고 얼굴이 예

쁘게 생긴 사람을 기억해 두었다가 훗일에 다시 불러보려는 심산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 후에도 중신들이 연회에 참석할 때에는 반드시 동부인 출석하도록 분부를 내렸다.

  연회에 참석하였던 여자 가운데 남보다 뛰어나게 아름다운 여자가 있으면 푸른 옷을 입은 

하인을 시켜

  "대궐에 들어오는데 화장을 잘못하여 예의에 어그러졌다."

하며 책망하는 듯 비밀실로 끌고 오게 한다.  그러면 그 비밀실에는 연산군이 지키고 있다

가 맞아들여 욕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니 정경부인(貞敬夫人)이나 정부인(貞夫人)이나 숙

부인(淑夫人)이나 하는 양반의 부인일지라도 결국 임금에겐 반항하는 도리다 없어 욕을 보

게 마련인데 일단 욕을 당한 부인들은 그것이 창피하여 말을 내지도 못했다.  그중에는 그

것을 영광으로 알고 대궐 안에서 며칠씩 머물러 있는 사람도 있기는 했지만...  그리고 그 

곳을 한 번 거쳐나온 여자의 남편은 그 이튿날 벼슬자리가 한급 혹은 두급씩 뛰어오르는 게 

항례였다.  이리하여 승진을 갈망하는 사람이나 감투를 바라는 사람은 은영중 자기 아내가 

임금의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행동은 물론 연산군 자신의 호색 취미도 있기는 했지만 실상은 그보다도 장록수의 

지휘에 의한 것이었다.  장록수도 여자라 투기심은 남보다 갑절이나 강했다.  그러한 장록수

가 비록 유부녀일지라도 다른 여자를 임금에게 안겨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겠

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까닭이 있었다.  같은 종의 계급이나 미천한 여자라면 물론 장록수도 

투기심을 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고관의 부인 즉 양반 계급의 여자들인 것이다.  장록

수가 자신이 종의 딸로 사회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던 몸이라 그 아니꼬운 양반의 부인네들

을 좀 욕보여 복수를 해보자는 심삼이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양반의 부인네들이 얼마나 정

조를 지키며 얼마나 점잖을 빼나 두고 보자는 태도로 연산군을 시켜 그 정조를 유린케 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장록수가 장난 삼아 시험해 보았던 것이 이제는 그만 버릇처럼 되어 장록수도 

금할 수가 없게 되었다.  연회 때에만 부르는 것이 아니고 일단 미인이라고 지정된 여인은 

아무 때나 임금이 마음 내키는 대로 불러들였다.  연산군은 유부녀 농락에 새로운 맛을 붙

인 것이다.  이렇게 많은 여자를 사랑하는 가운데 연산군은 투기심도 차츰 강해져서 사람을 

많이 죽였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연산군은 유생(儒生) 황윤묵(黃允默)의 소실 최보비(崔寶非)라

는 여인을 사랑하였는데 최보비는 말이 적고 웃음을 잘 웃지 않았다.  최보비가 웃지 않는 

것은 본 남편 황윤묵을 생각하기 때문이라하여 연산군은 아무 죄없는 황윤묵을 죽여버렸다.

  그리고 또 영남(嶺南)서 데려온 어떤 유부녀가 음식상에 돼지머리를 통으로 삶아 놓은 것

을 보고 혼자 웃음을 지우자 연산군은 즉석에서 그 연유를 물었다.

  "왜 까닭없이 웃느냐?"

  "다름이 아니오라 소첩의 전 남편이 돼지처럼 생겼는데 지금 돼지머리를 보온즉 남편 생

각이 떠올라서 웃었습니다."

  연산군은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승지를 불러다가 그 여인의 남편 목을 잘라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며칠 후에 그 사나이의 목을 소반에 놓아 그 여인에게 보여 주면서

  "자, 네가 그리워하던 돼지 서방을 실컷 보아라."

하였다.

  이 무렵 연산군은 경복궁 안에 서총대(瑞 臺)라는 큰 역사(役事)를 일으켰다. 서총대란 원

래 성종대왕 때 후원에 파가 났는데 한 줄기에 아홉가지가 뻗었으므로 그것을 서총(瑞 )이

라하여 그 주위에 돌을 둘러쌓게 한 것이었다.  그러던 것을 연산군은 새로 돌을 다듬어 열

자 높이로 쌓아올리고 그 앞에 연못을 파서 놀이터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을 쌓을 재력(財力)이 모자라 백성들에게 베(布)를 짜 바치게 하였다.  허나 연

산군 학정 십여년에 피를 말릴 대로 말린 백성들에게 그런 여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백성

들은 하는 수 없이 이불솜을 뽑고 옷의 솜을 뽑아서 베를 짜 바치었다.  그 모양으로 낡아

빠진 솜으로 베를 짜 바치니 그 베가 좋을 턱이 없었다.

  그래서 서총대포(瑞 台布)란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품질이 엉망이고 나쁜 베를 가리켜 

말하는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경회루(慶會樓) 옆 연못가에 만수산(萬壽山)이라

는 커다란 산을 쌓아올린 뒤에 봉래궁(蓮來宮), 일궁(日宮), 월궁(月宮), 훼주궁(蘂珠宮) 등을 

짓게 하였다.  그리고 오색이 영롱한 비단으로 꽃을 만들어 장식하고, 연못 속에는 은금 보

화로 산호림(珊瑚林)을 만들어 세우고 물 위에는 용주(龍舟)를 띄워 놓았다.  이 모양으로 산

은 산대로 백화가 만발한 듯 오색이 영롱하고 연못은 연못대로 호화찬란한데다가 다락 위에

는 붉은 비단 장막을 쳐놓으니 바람이 불 때마다 꽃과 장막이 물결처럼 흔들리는 폼이 하늘

의 무지개조차 무색할 지경이었다.

  연산군 십일년 유월에는 이계동과 임숭재를 채홍준사(採紅俊使)라하여 전라도와 충청도로 

각각 보내어 좋은 말(馬)과 미녀를 구해오게 했다.  팔월에 이르러 미녀 육십삼명, 양마(良

馬) 백오십필을 구해오자 임금은 크게 기뻐하여 두 사람에게 노비 열 사람씩을 주고 지위도 

높여주었다.  구월에는 이손(李蓀), 홍숙(洪淑), 조계상(曺繼商), 성몽정(成夢井) 등을 평안도로 

보내어 다시 한 번 채진(採進)케 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채청사(採靑使), 채응견사(採應犬使)를 팔도로 보냈는데, 채청사란 아

직 출가치 않은 처녀로서 얼굴이 잘 생긴 여자를 채택하는 것이고, 채응견사란 좋은 매(應)

와 영리한 개를 구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연산군은 남의 아내이건 처녀이건 할 것 없이 그

저 잘 생긴 여자라면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붙들어 오게 하였다.

  이렇게 전국에서 붙들어 온 남의 아내, 첩, 색시, 기생, 시종들, 무당들의 총 수효가 만여

명이나 달하고 보니 이제는 그 거처할 곳과 그들의 생활품 조달이 큰 골치덩이가 되고 말았

다.  원각사에다 방도 많이 만들고 대궐 안에도 방을 만들었건만 그래도 부족하였다. 이렇게 

많은 여자들 가운데 한 번 임금의 부름을 받아 사랑을 입은 여자는 천과흥청(天科興淸)이라 

부르고, 아직 기다라고 있는 여자는 지과흥청(地科興淸)이라 불렀다.

  연산군의 황음과 학정은 조금도 잦아들지를 않았다.  아니, 나아지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그 규모와 사치가 심해지더니 이제는 아예 주색잡기에 미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의 눈

에는 이미 국가도 백성도 없었다.  오직 아리따운 계집과 그 육체가 있을 뿐이었다.  연산군

이 여색에 그토록 철저히 미치게 된 것은 요부 장록수의 죄였는지도 모른다.  장록수는 처

음엔 양반집 부인들에게 욕을 보이기 위해 연산군에게 황음을 조장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장록수의 수단으로도 연산군의 황음을 막아낼 도리가 없게 되었다.


  [燕山君]   <歡樂이 끝났을 때>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燕 山 君 

    歡樂이 끝났을 때



   임사홍의 며느리요, 임숭재(任崇載)의 부인인 휘숙옹주(徽淑翁主)는 선왕 성종의 서녀(庶

女)로서 연산군에게는 서매(庶妹)에 해당하는 여인이었다.  그렇건만 연산군은 임사홍 집에 

자주 드나드는 사이에 자기 서매에게조차 욕심이 생겨서 마침내는 그를 능욕하였다.  임숭

재는 임금에게 아첨하기 위하여 남의 미첩(美妾)을 빼앗아다가 들인 까닭에 임금에겐 특별

한 총애를 받아오던 터이나, 이제 자기 부인까지 욕을 당하고보니 그 심정은 좋을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임숭재는 겉으로 그런 표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불쾌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연산군은 임숭재가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건만, 혹시나 그가 딴 생각을 가지

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그에게 아무 잔소리도 말라는 뜻으로 쇳조각을 입에 물게 하였

다.  이에 이르러 임숭재는 그만 풀이 죽어서 말조차 자유로이 할 수 없어 상심(傷心)한 끝

에 심홧병으로 죽고 말았다.

  연산군이 왕족 부녀를 능욕한 사실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성종대왕의 형님이요, 연산왕의 백부(伯父)인 월산대군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부인 

박씨(朴氏)는 미인으로 유명하였는데 월산대군이 돌아간 후에는 과부로 쓸쓸한 세월을 보내

고 있었다.  연산왕은 이 박씨가 뛰어나게 예쁜 것을 그대로 둘 수 없다 하여, 백모(伯母)가 

되는 것도 잊고 능욕을 하였다.  박씨는 한편으로 분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부끄럽기도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연산군은 박씨의 그 수줍어하는 태도가 도리어 예쁘게 보여 더욱 마음

이 달아서 사랑했다.  이리하여 그를 승평부대부인(昇平府大夫人)이라는 존호(尊號)를 주고 

그의 아우인 박원종(朴元宗)에겐 관직의 한 계급을 높여 주었다.  부부인(府夫人)이라는 것만 

하여도 대군(大君)의 부인이라야 갖는 칭호인데 부대부인(府大夫人)은 그보다 더 높은 지위

이며 정일품(正一品)이상이었다.

  박씨의 마음은 쓰리고 아팠다.  그러나 임금 앞에서는 그러한 태도를 공공연하게 드러낼 

수도 없어 그날 그날 살아가는 것이 죽기보다도 괴로왔다.  그러다가 배가 부르기 시작했다.  

박씨는 이제 이 아이까지 낳으면 무슨 낯으로 세상에 얼굴을 내놓으랴 하고 고민하다 못하

여 필경 독약을 마시고 자살함에 이르렀다.  죽을 때 자기 아우 박원종에게

  "나는 이렇게 인륜(人倫)에 어그러지는 일을 당하고, 사람이라고 얼굴을 들고 다닐수가 없

어 죽음으로서 청산하는 바이니 이 억울하고 분통한 일을 네가 갚아라."

하는 유서를 남긴 채 한많은 세상을 떠났다.

  박씨가 죽기 전에 너무나 마음 고통이 심하여 신병이라 핑계하고 임금의 연회에도 잘 나

타나지 않으므로 연산군은 그를 위로하기 위해 북도절제사(北道節制使)로 가 있던 박원종을 

서울로 불러올렸다.  그러나 연산군 십이년 유월 이십일에 박씨가 세상을 떠나고 보니 박원

종의 분노와 침통한 심정은 여간 크지가 않았다.  박원종은 이때부터 누님의 원통한 일을 

설분(雪憤)하고 저 망나니 같은 임금을 몰아낼 생각을 갖게 되었다.

  때마침 성희안(成希顔)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조참판(吏曹參判)이란 벼슬자리에 있

었는데 하루는 연산군이 양화도(楊花渡) 월산대군 별장에서 연회를 열고 중신들에게 시를 

짓게 할제, 성희안은 임금이 하는 일이 하도 마땅치가 않아서

  "성심원불애청류(聖心元不愛淸流)"

라는 글을 지어올렸다. 즉

  "우리 임금께서 원래 청류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하는 뜻이다.

  이 글을 본 연산군은 자기를 조롱한 것이라하여 곧 성희안을 파직(罷職)시켰다.  이후 성

희안은 관계(官界)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초야에 묻혀서 친구들과 함께 시나 짓고 술이나 

마시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연산군이 뉘우칠 날만 기다렸다.  그러나 연산군의 황음과 폭정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하여 갈 뿐이라 성희안 역시 어떻게 하면 저러한 임금을 하루 빨리 퇴위(退位)시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큰 일을 경영하려면 혼자 힘으로는 도

저히 불가능했다.  여기서 성희안은 동지를 구할 계획을 세웠다.

  이때 마침 박원종은 그 사람됨이 충실하고 사심(私心)이 적은 까닭에 무사(武士)들에게 추

앙을 받고, 또 근일에는 자기 누이가 음독자살까지 하였으니 그 심정이 움직일만 한데 어떻

게 하면 그와 만나볼 수 있을까 하고 여러 가지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같은 동리

에 사는 군자부정(軍資副正) 신윤무(申允武)란 사람이 박원종과 둘도 없는 절친한 사이란 것

을 알았다.  신윤무는 벌써 성희안과는 그때 의기상통해 있는 우국지사(憂國之士)의 한 사람

이었다.  성희안은 신윤무를 통하여 박원종의 의향을 슬며시 떠보게 하였다.

  한편 박원종은 신윤무한테서 성희안의 인물이며 그가 품고 있는 생각을 듣자, 당장 팔을 

걷어 붙이며

  "그러한 생각은 내가 누구보다지지 않을 만치 가지고 있소.  그런데 누구와 어떠한 방법

으로 일을 일으켜야 될지 알 수가 없어서 오늘날까지 참고 기다려 오던 중이요."

하고 자기의 뜻한 바를 신윤무 편으로 성희안에게 전하였다.  성희안은 곧 박원종의 집을 

찾아가 서로 손목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며

  "사내 자식으로 나라가 장차 위망(危亡)해 갈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어찌 그대로 있

을 수가 있을 것인가.  자 오늘부터 생사를 걸고 큰 일을 같이 도모해 봅시다."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굳은 언약을 했다.

  성희안은 박원종과 뜻을 통하게 되자 일시에 천군만마를 얻은 듯이 기뻤다.

  박원종과 성희안은 그때부터 함께 극비밀리에 동지들을 널리 규합한 결과 이조판서(吏曹

判書) 유순정(柳順汀)과 우의정 김수동(金壽童)을 끌어들였다.

  연산군 십이년 구월 일일, 이날은 연산군이 미인들을 거느리고 장단 석벽(長端石壁)에 새

로 지은 정자로 놀러갈 생각을 하고 있던 날이다.  박원종과 성희안 등은 이날을 기하여 임

금이 장단에 놀러갔다 돌아오는 길에 군사를 숨겨 두었다가 임금을 붙들어 가두어 두고 임

금의 아우되는 진성대군(晋城大君)을 모셔다가 임금으로 추대할 계획을 세웠다.  이것을 실

행하기 위하여 군자부정(軍資副正) 신윤무, 전수원부사(前水原府使) 장정(張珽), 군기시첨정(軍

器寺僉正) 박영문(朴永文),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홍경주(洪景周) 등을 시켜 무사들을 모아 

일일 저녁에 훈련원에 모이게 했다.

  그런데 연산군은 이러한 일이 있는 줄 알 길이 없는데 무슨 예감이 들었는지 갑자기 장단

행(長端行)을 중지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이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떠들썩하니 준비하던 일

을 중지하고 말았다.  그러나 박원종과 성희안 등은 애써 모아놓은 무사라든가 그밖에 여러 

사람들을 그냥 돌려보냈다간 비밀이 탄로될 것이라하여 그대로 예정한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

  박원종은 이때 유자광이 꾀가 많고 여러번 이런 일에 경험이 있다 해서 그에게도 사람을 

보애어 이 일에 참가를 시켰다.

  우선 신윤무를 보내 임사홍, 신수근, 신수영의 집으로 가서 임금을 잘못 인도했다는 뜻으

로 때려 죽이고, 개성유수(開城留守)로 가 있는 신수근의 동생되는 신수겸(愼守謙)은 따로 사

람을 보내 죽이게 했다.

  한편, 무사들이 훈련원에 모였다는 소문이 퍼지자 서울 장안에 기운깨나 쓰는 사람들은 

대개 모여들었다.  이에 그 많은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부서를 정한 후 그들을 인솔할 사람

도 대개 작정되자, 윤형로(尹衡老)를 진성대군 관저로 보내 뜻 있는 사람들이 의기(義旗)를 

들고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리는 동시 무사 수십명으로 하여금 시위(侍衛)케 하였다.

  이날 밤 성희안 등은 돈화문(敦化門) 앞에 나아가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대궐 안에 연산

군을 모시고 있던 장사(壯士)며 시종 들던 내시등이 대궐 밖에서 일어난 일을 알게 되자 모

두 하수도 구멍으로 빠져 도망쳐 버려서 대궐 안은 이미 사람 없는 쓸쓸한 곳이 되고 말았

다.

  입직승지(入直承旨) 윤장(尹璋), 조계형(曺繼衡), 이우(李 ) 등이 사변을 일어난 것을 알고 

창황히 들어가 임금께 알리었다.  연산군은 곧 활과 칼을 가져오라 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연산군은 놀라고 황겁하여 달아나려고 하다가는 다시 되돌

아 와 승지들의 손을 잡고 부들부들 몸을 떨고 뭐라고 말을 하려다간 말문이 막혀 다시 입

을 다물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것을 본 승지들은 대궐 밖의 일을 살펴본다는 핑계를 

하고 모두 하수도 구멍으로 빠져나왔다.

  박원종은 내시 몇 사람을 앞장 세워 장사 수십 명을 거느리고 대궐 안으로 들어가 임금께 

국보(國寶) 즉 옥새(玉璽)를 내놓으라 하고, 임금 앞에서 아첨만 떨던 전동(田同), 심금손(沈今

孫), 강응(姜凝), 김효손(金孝孫) 등을 죽여버렸다.  그리고 새벽이 되자 궁문이 열리는 것을 

기다려 경북궁으로 나아가 성종대왕의 계비(繼妃) 윤씨를 뵙고

  "주상전하(主上殿下)께서 크게 군도(君道)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천명과 인심이 벌써 진성대

군에게로 돌아갔으므로 여러 중신들이 대비전하(大妃殿下)의 뜻을 받들어 진성대군을 맞아 

모시려 하는 바이오니 성명(成明)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청했다.  이에 대비도

  "모든 준비를 예도(禮度)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거행하라."

하는 분부를 내렸다.

  곧 유순정이 진성대군의 잠저로 가서 진성대군을 경북궁으로 맞아들였다.  이날로 근정전

(勤政殿)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여 백관의 치하를 받으며 새 임금이 왕위에 올랐다.

  한편 즉위식을 거행하고 만세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올 때에 연산군은 승지를 불러도 누

구하나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고, 장록수, 전비(田非), 김귀비 등 가장 사랑하던 여인들은 부

들부들 떨면서 울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자 박원종이 대궐로 들어와 연산군이 보는 앞에서 장록수, 전비, 김귀비 등을 붙들어

다가 다른 곳에서 죽여버리고 그 재산을 몰수하였는데 그때에 장록수의 재산은 국고(國庫)

의 절반을 넘었다 한다.

  그리고 연산군은 강화(江華)섬밖에 있는 교동도(喬桐島)에 유폐시키고 세자(世子)는 강원도 

정선(旌善)으로 귀양 보냈다.


  [外戚의 싸움과 垂簾廳政 ]   <사랑의 痛哭>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外戚의 싸움과 垂簾聽政 

    사랑의 痛哭



   진성대군(晋城大君) 곧 중종(中宗=西紀 1,506-1,544)이 연산군(燕山君)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은 나이 열아홉살 때이다.  

  진성대군의 아내 신씨(愼氏)는 박원종(朴元宗)일파에게 임금을 잘못 인도했다는 죄목으로 

제일 먼저 피살된 신수근(愼守勤)의 딸이다.

  중종이 즉위식을 올린 날 저녁 경북궁에서 왕비 신씨를 맞으로 사람이 나왔다.  신씨는 

이때 어젯밤 자기 아버지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에 잠겨 있던 중이었다. 남편이 

임금이 되고 자기는 왕비가 돠었으나 그렇다고 역적으로 몰린 친정 아버지의 죽음을 슬프하

지 않을 수 없었다.  슬픔과 기쁨이 뒤섞인 착잡한 심정으로 신씨는 경북궁으로 들어갔다.  

회색이 만면한 임금은 궁녀들을 거느리고 신씨를 반가이 맞아들였다.

  그날 밤 중궁의 처소로 찾아간 임금을 붙들고 왕비를 그저 눈물 뿐이었다.

  "울지 마오, 중전.  옆방에 나인들이 있소.  왕이로서의 체통을 지켜야 할 게 아니요?"

  임금도 왕비의 친정 아버지가 살해된 것을 알고 하는 말이었다.  얼마를 울다가 왕비는 

겨우 진정하고 고개를 들었다.

  "상감, 이 몸의 운명도 길지 못할 것 같사옵니다."

  왕비의 눈에는 아직도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요?  이제 일국의 국모인데."

  "아니올시다.  반정공신(反正功臣)들이 이 몸을 역적의 딸이라하여 내쫓게 되오면 상감도 

도리없이 그들 말을 따를 수밖에요..."

  "그건 안 되오.  아무리 반정공신들의 말일지라도 안 되오.  안 되오."

  임금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힘있게 말하였다.  이들 젊은 부부는 그 당시 조혼의 풍습으

로 벌써 팔년 전인 진성대군 열한살 때 열두살 난 소녀 신씨를 맞아 결혼하여 이제는 애정

으로 깊이 결합된 사이였던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될진댄 차라리 나도 임금의 자리를 내버리고 전날과 같이 대군으로 돌아가

겠소."

  임금도 어느덧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신씨가 궁중에 들어온지 벌써 여러 날이 되었다.  그동안 임금은 새로운 정치를 하느라고 

분망한 나날을 보냈다.

  우선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유순정(柳順汀), 유자광(柳子光), 신윤무(辛允武), 박영

문(朴永文), 장정(張珽), 홍경주(洪景周) 등 여덟 사람을 일등공신(一等功臣)이라 하고 차례차

례로 사등 공신까지 봉했다.  그리고 전에 연산군에게 아첨하던 무리들을 몰아내고, 영의정 

유순(柳洵), 좌의정 김수동(金壽童), 우의정 박원종 등과 의논하여 연산군 때의 비정(秕政)을 

고치기에 힘썼다.

  하루는 영의정 유순을 비롯하여 박원종, 김수동, 유자광, 성희안, 유순정 등 중신들이 임금 

앞에 나아와

  "신 등이 여러 날을 두고 생각건대 신수근의 딸을 중궁으로 두는 것은 천하에 의심을 사

는 일이며, 은연중 화근을 기르는 일이온즉, 사직을 보존하자면 신씨를 폐하여 서인(庶人)으

로 만들게 하심이 가하오이다."

하고 말했다.

  임금은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생각하고, 중신들을 한 번 내려다본 후에

  "비록 과인이 경(卿) 등에 의하여 이 자리에 앉았다 하더라도 그 일만은 좇을 수 없소. 죄

없는 조강지처(糟糠之妻)를 내쫓다니 못할 노릇이요."

  딱 잘라 말했다.  그러나 박원종은

  "신등도 그 점은 짐작하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종사(從社)에 관한 일이오니 사은(私恩)으

로 인하여 대사를 그르치지 마시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완강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임금은 더 이상 듣기도 싫다는 듯 침전으로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 정도로 물러날 신하들이 아니었다.  박원종은 승지를 시켜 어서 결단을 내리라

고 졸랐다.  박원종 등의 입장에서 본다면 신씨를 몰아내는 일은 그들의 생사(生死) 문제와 

직접 관련되는 일이었다.  신씨를 만약 그냥 중궁에 머물게 해둔다면 다음날 원자가 태어났

을 때 언젠가는 살부지수(殺父之讐)의 혐의로 몰살당할 것이 뻔한 노릇이기 때문이다.

  밤은 점점 깊어가는데 박원종 등은 물러갈 생각도 않고 그날 밤으로 중궁을 내보내라고 

아우성이었다.  만약 임금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장차 또 무슨 변이 날지 모를 기세였

다.

  이미 신씨가 타고 나갈 가마까지 마련하여 중궁 뜰 앞에 대놓았다.  임금은 더 이상 버티

어 보아도 소용엇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임금으로서는 자기 입으로 신씨에게 나

가라고 할 수는 없었다.  임금은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임금의 마음은 오직 괴롭기만 했다.  신씨는 임금의 품에 안겨 흐느끼기만 하고 임금은 신

씨의 등을 어루만져 달래어 줄 뿐이었다.  임금의 눈에서도 눈물이 비오듯 했다.  신하들에

게 휘둘리는 임금의 신세를 스스로 한탄하며 흘리는 눈물이었다.

  얼마 후 신씨는 울음을 그치고

  "상감, 이제는 할 수 없습니다.  이 몸은 물러가야만 하겠습니다.  상감께서 이몸 하나를 

생각하시다 혹 용상마저 버리게 되면 안 되겠습니다."

하고 신씨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일어섰다.  임금은 그저 넋을 잃고 허공만 바라보았다.  한

참 후 임금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벌써 신씨가 시녀들에게 싸여 가마를 타고 궁중에서 물러 

나간뒤였다.

  신씨는 그전 진성대군 집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박원종 등은 그것도 안 된다하여 하

는 수 없이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의 집으로 갔다.

  신씨 부인이 중궁의 자리에 앉은지 불과 일주일 만에 생긴 일이다.  이 소문이 한 번 세

상에 알려지자 백성들, 특히 학자들은

  "임금의 조강지처까지 몰아내는 신하가 어디있느냐?  박원종, 성희안 등 강신(强臣)들을 

몰아내야만 한다."

하고 떠들어댔으나 그것은 한낱 헛소리로 그쳤을 뿐 감히 그들 강신들을 몰아낼 만한 세력

은 아직 조정 안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박원종은 그의 처형(妻兄) 윤여필(尹汝弼)의 딸을 왕비로 책봉케 하였다.  

이분이 바로 장경왕후(章敬王后)이다.

  그러나 장경왕후 윤씨(尹氏)는 중종 십년 삼월 이일 아들을 낳은지 일주일도 못 되어 세

상을 떠났다.  그러니까 폐비 신씨가 궁중에서 쫓겨난지도 벌써 십년이란 세월이 흐른 셈이

다.  그동안 권세를 부리던 박원종은 이미  죽고 없었으나 그래도 임금은 다른 강신들의 눈

이 무서워 한 번도 신씨집을 찾아가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때에 폐비 신씨를 다시 맞아 들이자는 의논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담양부

사 박상(朴祥)과 순창군수 김정(金淨) 등은 영남 학자들과 교제하면서, 그전부터 박원종 등이 

신씨를 폐비시킨 데 대하여 불만을 품어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장경왕후가 죽고 다시 계

비(繼妃) 문제가 조정 안에서 떠돌고 있을 때, 김정과 박상은 서로 만나서 의논하기를

  "지금 원자(元子)는 강보 중에 싸여 있는데 일부 정객들은 후궁 박숙의(朴淑儀) 소생 복성

군(福成君)을 싸고 돌며, 복성군의 어머니 박씨를 정식 왕비로 삼으려는 기미가 보이오.  잘 

못하면 원자의 위치가 불리하게 되겠소."

  "그렇소.  후궁이 세력을 잡으면 나라가 망하오."

  "그러니 박씨를 왕비로 승격시키는 것 보다는 오히려 전에 내쫓은 폐비 신씨를 다시 끌어

들이는 것이 좋을 것이요."

  김정과 박상 등은 이런 결론을 내리고 곧 상소문을 썼다.  물론 자기네들이 쫓겨나더라도 

나라를 위해서는 할 일을 해야만 되겠다는 비상한 각오 밑에 붓을 든 것이다.

  << 전에 신씨가 폐위 당한 것은 당시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이 신수근을 죽이고, 그 

딸을 왕비로 그냥 두면 훗일 자기네들이 해로울까보아 한 짓입니다.  신씨는 아무런 죄없이 

강신(强臣)들의 억압으로 쫓겨났습니다.  이제 장경왕후가 돌아가시고 중궁의 자리가 비었는

데 전하께서는 이 기회에 신씨를 다시 복위시키어 부부의 길을 밝힘이 대의에 맞는 일인가 

하나이다.  만일 숙의(淑儀) 박씨를 승격시켜 왕비에 앉히거나 다른 분으로 왕비에 앉히게 

되오면 승통(承統)을 주로하는 종사(宗社)의 일로 볼 때, 이는 원자의 위치를 위태롭게 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

  이러한 상소문이 정원에 들어오자 조정 안은 때아닌 풍파가 일어나게 되었다.

  대사간(大司諫) 이행(李荇)이나, 대사헌(大司憲) 권민수(權敏守) 등은 김정과 박상 등의 상소

문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이것은 공연히 평지에 파란만 일으키는 사론(邪論)입니다.  나라가 태평한 이때 사론으로 

사직을 어지럽혔으니 마땅히 이들을 잡아다가 문초하여 처형해야 합니다."

  문제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다.  임금도 그중대성을 인정하고 곧 영의정(領議政) 유순

(柳洵), 좌의정 정광필(鄭光弼), 우의정 김응기(金應箕), 좌참찬(左參贊) 장순손(張順孫), 우참찬

(右參贊) 남곤(南袞) 등을 불러 이 문제를 의논케 했다.  중신들은 즉시 모여 의논한 후 임금

께 아뢰었다.

  "신씨를 다시 세웠다가 신씨한테서 또 왕자가 태어나면, 지금의 원자와의 관계는 더욱 복

잡해지기만 할 따름입니다.  즉 가례한 순서로 보면 응당 신씨가 원실인즉 장경왕후의 소생

은 곧 계실의 소생이 되겠으니 이런 모순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김정과 박상 등은 나라

의 대사를 경솔히 지껄인 죄로 엄중히 다루어야 합니다."

  이러하여 박상은 남원(南原), 김정은 보은(報恩)으로 각각 귀양을 보내 평지의 풍파는 일단 

가라앉았다.

  그 후 중종은 새로이 윤지임(尹之任)의 딸을 책봉하여 계비를 삼으니 이가 곧 문정왕후(文

定王后)이다.


  [外戚의 싸움과 垂簾廳政 ]   <己卯士禍>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外戚의 싸움과 垂簾聽政 

    己卯士禍



   중종(中宗)은 재위 오년 동안을 공신들에 의하여 휘둘려오기만 하다가 안당(安 )을 이조

판서에 앉힌 후부터는 새로운 이상적 정치를 해보려고 힘썼다.  안당은 성종(成宗) 때부터 

벼슬하여 연산군 같은 폭군 밑에서도 무사히 지내온 사람이다.  그가 중종으로부터 새로운 

정치를 해보라는 특별한 분부를 받아 이조판서 자리에 들어 앉은 후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어질고 학문 있는 사람을 천거한 것이었다.

  조광조(趙光祖)도 안당이 천거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인데 이때부터 지방에 있던 학자들이 

차츰 서울로 올라와 정치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두 젊은 사람으로서 특히 나라의 

언론을 맡은 사헌부나 사간원에서 일하며, 정치를 감독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전에 박상과 김정이 신씨 복위(復位) 문제로 귀양을 가게 되었을 때에도, 정언(正言)인 조

광조는 

  "대간(臺諫)에서 상소하는 사람을 그르다고 도리어 벌을 주었으니 이는 임금에게 상소하는 

길을 막는 것이요."

하고 권민수, 이행을 공박하여, 결국 그들을 파직(罷職)케하여 귀양보내고 이장곤(李長坤)으

로 하여금 대사헌을 삼고, 김안국(金安國)으로 대사간을 삼은 일까지 있었다.

  이때 젊은 학자들의 중심은 조광조였다.  그는 학행과 덕망이 아울러 높았던 사람으로 정

계에 발을 들여놓은지 삼년이 채 못 되어서 부제학(副提學)이 되고, 그해 겨울에는 대사헌

(大司憲)이 되어 임금의 신임을 한몸에 지니었다.

  그는 부제학 당시 만조백관들이 결정한 여진(女眞) 토벌을 한 마디로 반대해서 중지케 만

들었고, 또 판서 고형산(高荊山)이 거만하다하여 그 부하를 잡아서 옥에 가두고, 또 대비(大

妃)가 소중히 아는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는 조정의 세력이 

점점 조광조 일파에게 집중되어 그들의 세력은 한때 원로 대신들도 어쩌지 못할 정도였다.

  기묘년(己卯年)에 들어서면서부터 조광조 등 신진들의 득세는 더욱 심하여 원로 대신들을 

개몰 듯 몰아대었다.  소위 사림(士林)과 정객들의 반목이었다.  젊은 학자들은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에게 대하여는 함께 조정에 있기도 싫어하는 배타적 태도로 나

와 자연 적을 많이 만들게 되었고 또 반대당들은 기회만 있으면 조광조 일파를 조정에서 몰

아내려고 더욱 굳게 뭉치었다.

  "병인년(丙寅年) 반정 때의 공신록(功臣錄)은 엉터리요.  거기 이름이 적힌 공신의 대부분

은 아무런 공도 없이 박원종에게 아부해서 된 사람들이 많소.  이제 이것을 가려내어 공신

록을 대폭 삭제해야 하오."

하고 들고 나섰다.

  이 결과 공신록에서 삭제 당한 사람은 칠십여명이나 되었다.  삭제 당한 공신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이들은 또 이들대로 연합하여 조광조 일파를 원수처럼 여기고, 이를 제

거코자 하였다.  당시 희빈 홍씨(熙嬪洪氏)의 부친 홍경주(洪景周)도 공신의 한 사람으로 조

광조 일파에게 배척을 당한 사람이었다.

  하루는 홍경주와 남곤(南坤)이 서로 만나, 조광조 일파를 몰아낼 의논을 하였다.  남곤으

로 말하면 조정 안에서 조광조 일파와 직접 맞서서 싸우는 반대파의 중심이었다.

  "젊은 것들이 자기 세상인 양 소란을 피우는 꼴은 정말 두고 볼 수가 없소."

  "그렇소.  언젠가 희빈(熙嬪)을 만났더니 상감께서도 젊은 것들 잔소리에 화를 내시더라고 

하오."

  두 사람은 서로 뜻이 맞아 다시 불평을 품은 동지들을 규합했다.  총관(總管) 심정(沈貞)이 

적극적으로 여기에 가담했다.

  홍경주는 이때부터 궁중으로 들어가서 자기 딸을 자주 만나며 조광조 일파를 몰아낼 공작

을 했다.  어느날 임금이 희빈 홍씨의 처소를 찾아 갔을 때 홍씨는 허리춤에서 벌레 먹은 

나무 잎을 하나 꺼내어 임금에게 보였다.

  "이게 뭐요?"

  임금은 눈이 휘둥그래서 그 나무 잎을 받아 자세히 보았다.  푸른 뽕나무 잎은 이상스럽

게 벌레가 먹었는데, 그 벌레 먹은 자국은 글자 형용이 뚜렷하고 그 글자는 대게 주초위왕

(走肖爲王)이라 되어 있었다.

  주초(走肖)란 곧 조(趙)자를 말함이요, 장차 조씨(趙氏)가 임금이 된다는 뜻이다.

  "주초위왕이라?  무슨 뜻이요?"

  임금은 이상스런 기색으로 홍씨에게 물었다.

  "후원 뜰 뽕나무 밭에서 주워온 것이온데, 지금 세상에서는 조가가 임금이 된다고 떠들고 

있다 하옵니다."

  임금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곧 입적 승지를 불러 그 나뭇잎을 보이며 아는 대로 말

해보라 했다.

  입직 승지는 깜짝 놀라면 한참 동안 말을 못하다가 임금이 하도 엄하게 다구쳐 묻는 말에

  "조(趙)가가 왕위에 오른다는 뜻으로 해석되옵니다."

하고 역시 희빈 홍씨와 같은 대답을 했다.

  다음날 여러 신하들에게 이 뜻을 또 물었다.

  신하들의 대답은 대게

  "조광조가 근자에 그 세력이 커져서, 감히 아무도 그에게 대항을 못하더니 이번에 이런 

도참(圖讖=예언)이 뵈이는 까닭은 필시 무슨 일이 벌어질 조짐이라 생각됩니다.  한시 바삐 

조광조 일파를 엄중 문조하여 처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임금은 조광조 등이 매사에 임금 하는 일에 지나치게 간섭하

러 드는 것을 매우 불쾌히 여겨오던 참이다.  더구나 조광조가 너무 일찍 성망이 높고, 또 

그들의 도당이 여간 많지 않아서 진작 제거해 버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

기 시작하던 때이다.

  이때 또 조광조 등이 서로 모이기만 하면, 역모 의논하는 것으로서 일을 삼는다는 말이 

자주 들려오고 있었다.  임금은 곧

  "이자(李 ), 김정(金淨), 조광조(趙光祖), 김구(金絿), 김식(金湜), 유인숙(柳仁淑), 박세희(朴

世熹), 홍언필(洪彦弼), 박훈(朴薰) 등을 잡아들이라."

했다.  으로써 유명한 기묘사화(己卯士禍)는 벌어졌다.  그때 사람들은 기묘사화는 남곤, 홍

경주, 심정 등이 꾸며낸 것이라하여 이들을 소인이라 욕을 했다.

  다음날부터 죄인을 끌어내어 문초를 하고, 김전(金詮), 이장곤(李長坤), 홍숙(洪淑) 등을 추

관으로하여 그죄를 정하도록 했다.  이때 조광조의 나이는 삼십팔세, 김정은 삼십사세,  박

훈은 삼십육세로서 모두 삼십대의 청년들이었다.  젊은 세대 사람들이 이상적 정치를 해본

다고 하다가 너무 급진적으로 흘러 실패한 것이었다.

  << 역적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는 참형(斬刑) 윤자임, 박세희, 박훈 등은 장류(杖流) >>

  이렇게 각각 죄목이 내려졌다.

  그러나 정광필(鄭光弼), 안당(安 ) 등 온건한 중신들은 관대한 처분을 주장하여 결국 조광

조는 능성, 김정은 금산, 김식은 석산, 김구는 개녕, 윤자임은 온양, 박세희는 상주, 박훈은 

성주로 각각 귀양 보냈다.

  이러한 소문이 전해지자 당시 유생들은 벌떼같이 일어나 광화문밖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조광조 등의 무죄한 것을 상소한다고 대궐 안으로 들어가려 하고,  또 문지기는 유생들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느라고 옥신각신했다.  마침내 대궐 문이 열리었다.  유생들은 그 자리에 

연좌(連坐)하여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 통곡소리는 임금 있는 처소에까지 들렸다.

  임금은 금군(禁軍)을 동원하여 대표자를 잡아 가두게 하고 유생들을 몰아내도록 명을 내

렸다. 그러나 유생들은 금군이 휘두르는 몽둥이질 밑에서도 물러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금군은 반항하는 자 약 삼백명을 잡아넣고 간신히 유생들을 쫓아냈다.  다음날에도 유생들

은 다시 몰려와 떠들어댔다.  그 결과 전날에 가둔 삼백며응ㄹ 전부 방면하고 돌려 보냈다.

  궁중과 궐문 밖이 이와같이 소요하고 전국의 인심이 동요되자 임금은 도리어 마음이 약해

져서 조광조 등을 슬그머니 놓아줄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때 박배근(朴培根), 정귀아(鄭歸

雅) 등 무사(武士)들이 떼를 지어서

  << 아직도 조광조 일파의 무리가 그대로 있어 소란을 피우니, 이런 자들을 모두 격살해야 

한다.  그들은 무(武)를 경멸하고, 우리를 욕한 자들이다.  무사들은 단결하여 그들을 없애야 

한다. >>

  이렇게 선동하며 나섰다.

  그리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대사헌 이항(李況), 대사간 이빈(李 ) 등도 조광조 등을 사형

에 처하게 하고 유생들의 등용문인 현량과(賢良科)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혼돈상태는 더욱 계속되고 좀체로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임금은 각일각 함악해 가는 형세를 염려하고 할 수 없이 능주(綾州)로 귀양보낸 조광조에

게 사약을 내리고 다른 사람들은 절도(絶島)로 다시 귀양처를 옮기도록 했다.


  [外戚의 싸움과 垂簾廳政 ]   <灼鼠의 變>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外戚의 싸움과 垂簾聽政 

    灼鼠의 變



   조광조 등 젊은 학자들이 몰려나자 조정에서 일약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남곤(南

袞)과 심정(沈貞) 일파였다.  그러나 이들은 조광조 일파를 몰아낸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장

차 정권을 독점할 생각으로 다시 자기들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고하기 시작했다.

  기묘사화(己卯士禍) 이년 후인 신사(辛巳)년, 심정과 남곤은 사헌부와 짜고 전부터 조광조 

등과 가깝게 지내오던 우의정 안당을 비롯하여 문근(文瑾), 유운(柳雲), 유인숙(柳仁淑), 정순

붕(鄭順朋), 신광한(申光漢), 박영(朴英) 등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안당은 조정에서 물러난 뒤로 고향 음성에 내려가 한가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아들 처겸(處謙), 처함(處 ), 처근(處謹) 등 삼형제는 남곤과 심정이 자기 아버지까지 

몰아내고 정권을 독차지하고 있음을 불만스럽게 여기고 

  "남곤과 심정은 전에 조광조를 몰아내더니 이제 또 우리 아버지까지 없애려든다.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다."

하고는 외숙 시산정(詩山正=正淑), 권진(權 ), 안정(安珽) 등과 함께 의논하여 남곤과 심정 

등 간신배들을 몰아낼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일은 뜻하지 않게도 안씨 집안의 서얼(庶蘖)인 송사련(宋祀連)이란 자의 고발로 탄

로가 나서 안씨의 일족은 모두 역적으로 몰려 거의 멸문(滅門)의 화를 당하였다.  송사련으

로 말하자면 안당은 그의 외삼촌이 된다.  즉 안당의 아버지 안돈후(安敦厚)는 나이 많아 상

처(喪妻)하고 종 중금(重今)을 첩으로 데리고 살았는데 중금은 딸 감정(甘丁)을 낳았다.  감정

은 자라 백천(白川)에 사는 송린(宋璘)에게로 시집을 가서 아들 사련(祀連)을 낳았던 것이다.  

사련은 어려서부터 서울에 올라와 외가인 안당의 집에서 살았는데 이번에 송사련이 안처겸 

등 형제를 역적으로 고발한데 대해서는 까닭이 있었다.

  당시는 양반과 상놈의 관계를 몹시 따지던 때이라 송사련은 외사촌들에게 천대만 받고 자

라났다.

  (사람은 매일반인데 그래 양반만 사람이고 상놈은 사람이 아니란 말이냐?  나도 양반이 

되어야겠다.  어떻게 하면 나도 이 원수의 신분 관계를 벗어나 한 번 득세를 해보나?)

  송사련은 늘 이러한 생각을 먹고 기회만 엿보고 있던 중 안처겸 형제들이 무슨 모의를 하

는 것을 보고 자기고 한몫 들 것을 주장했으나 처겸은

  "상놈의 새깨가 어른들 얘기하는데 감히 한몫끼러 들다니!"

하고 상대도 하지 않았다.

  송사련은 그 길로 처남 정상(鄭 )을 찾아가 처겸 등에게 모멸 당한 얘기를 하며 신세 한

탄을 했다.  정상도 양반들에게 늘 업신여김을 받아오던 신세라 자기네들이 양반이 될 기회

는 바로 이때라고 하면서 그들의 모의를 정원에 고발하자고 했다.

  다음날 송사련과 정상 등의 고발을 들은 남곤과 심정 등은 우선 안처겸을 잡아 가두고 그

의 일당이라고 지목되는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올렸다.  이로써 볼똥은 안당에게도 비화하여 

결국 안당은 아들의 음모를 알면서도 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교살되고 만 것이었다.

  이때부터 조정은 남곤, 심정, 이항, 김극복 등이 마음대로 뒤흔들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

은 이것을 보고 모두 불만을 품지만 그들의 세력이 두려워 감히 겉으로 대항하는 사람이 없

었다.

  그러던 중 김안로(金安老)도 전부터 조정 안에서는 은연한 일련의 세력이었는데 근자에 

남곤, 심정 등의 득세로 자꾸만 밀려나게 되자 부제학 민수천(閔壽千), 장순손(張順孫)등과 

제휴하여 곤정(袞貞) 타도에 팔을 걷고 나서게 되었다.  바야흐로 조정은 두 갈래로 갈라져 

서로 기회만 있으면 상대편을 꺾으려는 판이었다.

  김안로는 이 무렵 자기의 기반을 단단히 할 계획으로 아들 김희(金禧)를 효혜공주(孝惠公

主)에게 장가보냈다.  이제 부마(駙馬)의 아버지로서 당당히 세력을 잡을 만하게 되었다.  김

안로가 대사헌이 되자 세상에 소문이 돌기를 사헌부에서 대신 하나를 칠 모양인데 아직 시

기가 아니어서 의론이 통일될 때까지 기다리는 모양이라 했다.  남곤은 이 소문을 듣고 버

썩 의심이 들었다.

  그 후 김안로가 다시 이조판서가 되자 조정신하 중에 그리로 붙는 사람이 많아지고 무슨 

공론이 일어날 때마다 우선

  "이숙( 叔=김안로의 자)의 생각은 어떻소?"

하고 묻는 일이 많게 되었다.  김안로의 세력이 이렇게 커진 것을 보고 남곤 일파는 더 내

버려 둘 수 없다하여 일제히 들고 일어섰다.

  남곤은 우선 대사헌 이항(李沆)을 시켜 상소케 했다.

  << 김안로는 붕당을 만들어 조정을 불화케 하고 있소.  즉시 내보내는 것이 좋겠소. >>

  다음에는 홍문관의 응교(應敎) 심사손(沈思遜), 수찬(修撰) 조인규(趙仁奎), 정자(正字) 송인

수(宋麟壽) 등이 글을 올리기를

  << 김안로에 대하여는 대신과 대간(臺諫)이 아뢰어도 윤허(允許)를 아니하시니 한심함을 

이길 수 없나이다.  전일에 조광조에 대하여 당초에 전하가 미리 알고 내쫓지 못한고로 마

침내 방자하게 권세를 휘둘러 나라 형세가 위태하였으니 어찌 이를 거울삼지 않으오리까.  

상감께서 만일 김안로의 정적(情迹)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하여 차마 죄를 주지 못한다면 

훗일에 근심될 것이 어찌 조광조 때 같기만 하오리까.  대저 간사한 것을 알기가 쉽지 아니

하고 그것을 내쫓기는 더욱 어려우니 알고도 내쫓지 못하면, 모르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상감께서는 속히 결단하여 먼데로 귀양 보내서 조정에 발 들여놓지 못하게 하소서. >>

하였다.

  이러한 상소가 연달아 올라오니 임금도 처음에는 부마의 아버지라하여 두둔하다가 마침내

는 할 수 없이 가까운 풍덕(豊德)으로 귀양을 보냈다.  김안로를 쫓아낸 것은 물론 남곤이 

주모자가 되고 대사헌 이항과 응교 심사손(심정의 아들)이 앞장을 서서 한 일이다.  이 때문

에 김안로는 이 몇 사람들에게 몹시 원심을 품게 되었다.

  김안로를 쫓아내긴 했으나 조정 안에서 또다시 신진(新進) 정객들이 밀고 들어 서서 말썽

을 부렸다.  즉 남곤 일파인 이항이 우의정이 될 때 이들이 들고 일어나서 반대하기 때문에 

이항은 취임을 못하고 말았다.  이항이 우의정에 임명된 것이 정해년(丁亥年) 정월의 날이

니, 남곤이 죽기 바로 한달 전이다.  남곤이 죽은 정해년은 기묘년에 조광조 일파를 쓰러뜨

린지 구년째가 되는 해였다.  그리고 신사년(辛巳年) 안당의 옥사로 무수한 사람이 죽어서 

완전히 정권을 잡은 후로는 불과 육년이었다.  남곤은 오십칠세로 죽을 때까지 영의정으로 

있었다.

  남곤이 죽은 후 신진(新進) 대간들과 심정 일파와의 대립은 매우 심각하였다.

  이러던 중 세자(世子) 생신날에 대궐 후원 나무 가지에 쥐의 사지와 꼬리를 자르고 주둥

아리와 두 귀와 두 눈을 모두 불에 지져서 걸어둔 사건이 벌어졌다.  이것을 세상에서는 

<<작서(灼鼠)의 변(變)>>이라 했다.  그 후에도 계속 임금의 침실 난간에 불에 지진 쥐가 버

려져 있어 일은 점차로 거칠어졌다.  처음에는 궁 안에서 생긴 일이라 대신들도 모르고 있

었는데,  세자의 외조부가 되는 윤여필(尹汝弼)이 이것은 세자를 저주한 것이라하여 들고 일

어났다.  심정도 좌의정 이유청(李惟淸)과 함께 어전에 나가 범인을 잡아 낼 것을 상주했다.

  다음날 많은 궁인(宮人)들이 문초를 받았다.  그러나 아무런 증거도 나타나지 않게 되자 

결국 대비(大妃) 윤씨의 전지(傳旨)로 경빈(敬嬪) 박씨에게로 지목이 가게 되었다.  대비는 이

유청에게 정음으로 전지를 써서 내리기를

  << 이번 '작서'에 관한 일은 듣기에 매우 놀라운 일이다.  내가 곧 문초하여 알아내려 하

였으나 조정에서 문초한다 하기에 알아낼 줄 알았더니 여러 날 문초하여도 죄지은 사람을 

잡지 못하니 내가 의심 나는대로 알린다.  동궁의 작서는 나도 잘 알지 못하지만, 임금 침실 

옆에 걸어 놓은 작서는 아무래도 경빈 박씨의 소행 같다.  그때 그 쥐가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거기에는 경빈 한 사람만이 있었다.  만일 다른 사람이 쥐를 갖다 놓았다면 경빈이 보았

을 것이다.  쥐가 움직일 때에 상감이 보시고,  이 쥐를 내다버리라 하여서 시녀가 쥐를 싸 

가지고 나갔는데 그때 경빈이 급한 말로 '그 쥐는 상서롭지 않습니다.'하고 말했다 한다.  달

리는 의심할 만한 사람이 없다.  이 일이 사소한 일이 아니므로 얼른 말하지 않았으나 그동

안에 경빈은 '궁 안에서 여러 사람이 나를 의심한다.'고 혼자 성이 나서 푸념을 하였다고 하

니 이상스럽다.  그리고 또 며칠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경빈의 딸 혜순옹주(惠順翁主)

가 비자(婢子)들과 가인상(假人像)을 만들어 목을 베어 죽이는 시늉을 하면서 작서를 발설한 

사람은 이렇게 죽인다고 하고 몹시 꾸짖고 떠들며 방자(詛呪=저주)를 했다고 한다. >>

  이 전지를 받은 대신들은 곧 임금 앞에 나아가

  "대궐안의 일은 신(臣) 등이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대비께서 내리신 전지로 보아서 하루

라도 박빈을 궁중에 둘 수 없나이다.  박빈을 폐하여 서인을 만들고 복성군(福成君)의 작호

(爵號)를 삭탈하여 내쫓아야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니 임금도

  "대신들의 하는 말이 옳다.  박빈과 복성군은 조정의 공론대로 죄를 주라."

하였다.  그러나 이로써 일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경빈 박씨로 인연하여 조정의 벼슬자리

를 얻은 자들까지 한꺼번에 몰아 내는 책동이 일어났다.  경빈 박씨가 궁중에서 쫓겨나자 

대간들은

  "좌의정 이유청은 처음에 이 일을 아뢰자 할 수 없이 아뢰었고, 또 문초할 때에도 죄를 

주지 아니하려다가 어렷의 주장으로 치죄하게 되었으니 죄상 자격이 없으므로 갈아야 하고, 

또 박빈과 연인(蓮姻) 관계 있는 이들도 모두 내쫓아야 합니다."

하고 주장했다.  박빈과 연인 관계가 있다함은 곧 이조판서 홍숙(洪淑), 예조참판 김극개(金

克塏), 문학(文學) 홍서주(洪 疇), 병조좌랑(兵曹佐郞) 김헌윤(金憲胤) 등을 가리켜 말함이었

따.

  홍숙은 당성옹주(唐城翁主)의 남편인 홍려(洪礪)의 조부요, 홍서주는 그의 아버지다.  또 

김극개는 혜순옹주(惠順翁主)의 남편인 광천위(光川尉) 김인경(金仁慶)의 조부요, 김헌윤은 그

의 아버지인데, 이 두 옹주는 모두 경빈 박씨의 몸에서 난 임금의 딸들인 것이다.  박빈이 

죄를 얻고 쫓겨난 이상 그 딸의 시아버지나 시조부도 물러나야 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홍

숙이 동궁빈객(東宮賓客=세자를 기르치는 직책)으로 있는 것은 불가하다고 했다.  박빈이 세

자를 헤치려고 요사를 부렸는데 그 딸의 시조부가 어떻게 세자와 가까운 직책에 있을 수 있

느냐 하는 것이다.

  또 박빈이 죄를 지은 이상, 그 친정 아버지인 박수림(朴秀林)이나 그의 오라버니인 박인형

(朴仁亨), 박인정(朴仁貞) 등도 모두 벼슬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했다.

  이로써 박빈의 일족과 그와 관련되었던 신하들까지 모두 쫓겨나게 되었다.  박씨는 이십

여년전에 떠났던 고향 상주(尙州)로 갔다.  그리고 오년 후에는 다시 북성군과 함께 사사(賜

死)로 모자가 일시에 죽게 되었다.

  이리하여 조광조 일파가 죽을 때에 남곤 일파와 줄을 대어서 궁중에서 여러 가지 작용을 

하였다는 말을 듣던 박씨는 그 파란 많은 생애를 닫았다. 경빈 박씨는 조광조가 죽을 때가 

가장 세력이 강하던 때였다. 당시 임금의 사랑하는 품이 궁중에서 그를 덮을 사람이 없었다.

  박빈은 경상도 농촌에서 자라난 가난한 선비의 딸이었다.  그 집이 비록 사족(士族)이라고

는 하나, 그의 아버지 박수림은 정병(正兵)이 되어 간신히 먹고 살았다.  그러나 기구한 박

씨의 운명은 일대의 폭군 연산군에 의하여 열렸다.  연산군이 한창 극도로 음란할 때에, 이

미 보통 궁녀로는 만족하지 못하여 각도에 채홍사를 보내서 민가의 어여쁜 처녀를 뽑아올릴 

때 그녀의 절색(絶色)도 뽑히어 올라왔던 것이다.

  연산군이 쫓겨난 후 채홍사에 의하여 징발되었던 미인 수백명은 그대로 반정 공신 박원종

(朴元宗)에게 하사하였었다.  그 후 박원종은 다시 박빈을 후궁으로 들여보냈다.  이러니 박

빈은 박원종을 위시한 반정 공신들 손에 쥐어져서 그들에게 내통해 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여간 상주 농촌에서 자라난 빈한한 농민의 딸이 임금의 배필이 된 것은 행운이라 아니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충분한 교양이 없는 여자의 흔히 있는 버릇으로 박빈도 아양을 떠는 

수단에만 힘을 써서 임금의 은혜를 믿고 방자히 굴다가 이번 화(禍)를 당한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을 했다.

  "임금이 지나치게 사랑한 때문에 박빈은 죽게 된 것이다."


  [外戚의 싸움과 垂簾廳政 ]   <불붙는 東宮殿>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外戚의 싸움과 垂簾聽政 

    불붙는 東宮殿



   <작서(灼鼠)의 변(變)>이 날 때에 세자(世子)의 나이는 십삼세 소년이었다.  사사집이나 

궁중이나 전실 아들을 계모가 그리 사랑하지 않음은 마찬가지다.  세자의 계모 문정왕후에 

대한 정성스런 효도는 천성이라 할 만하였다.  그러나 계모 문정왕후는 세자에게 좋게 대하

지 않았다.

  한편 세자의 할머니인 자순대비(慈順大妃)는 나라의 전도를 생각하여 세자가 소중할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할머니로서, 어머니 얼굴도 못보고 계모 슬하에서 구박을 받으며 자라나

는 손자를 측은히 여겨 늘 보호의 손길을 뻗치고 있었다.  더구나 이 자순대비는 성종의 계

비로서 어머니 없던 연산군을 길러낸 경험이 있으므로 계비인 문정왕후와 세자 사이의 미묘

한 관계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왕실의 집안 일을 가장 잘 이용하려 한 것이 김안로(金安老)였다.  남곤 일파에게 

배척되어 풍덕(豊德)으로 귀양 가 있는 김안로는 낮이나 밤이나 다시 정권 잡기를 노리고 

있었는데 그 길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남곤 일파의 전횡을 싫어하는 신진파들과 그

리고 기묘사화에서 조광조 일파로 몰렸던 사람들과 합세하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궁중의 

미묘한 공기를 이용하여 김안로가 다시 정계로 나와야 세자(世子)를 보호할 수 있다는 말로 

대비와 임금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작서의 괴변이 나던 전해인 병술년(丙戌年)에 경기감사 민수천(京畿監事閔壽千)은 김안로

를 찾아갔다.  김안로도 반가이 맞았다.

  "이렇게 찾아 주시니 고맙소이다."

  "원 천만의 말씀을.  진작 찾아 뵙고자 했으나 세상의 이목이 두려워 그렇게 되었습니다."

  민수천은 그동안 조정에서 일어난 일들을 얘기하고

  "지금이 바로 좋은 기회입니다.  대감이 다시 나오셔야 심정, 이항, 김극복 등을 누를 수 

있습니다."

  "나야 지금 귀양살이를 하는 몸인데..."

  "아닙니다.  지금 심언경(沈彦慶), 심언광(沈彦光) 형제가 언론을 좌우하며 기묘사화에 몰린 

사람들을 다시 끌어들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뒤에서 밀어 주는 사람이 없어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대감께서 기묘사화에 몰린 사람들을 수용(收用)하겠다고 말씀만 해보십시

오.  당장 권세를 잡을 수 있습니다."

  김안로도 마침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참이라 

  "옳은 말씀이요."

하고 기쁜 낯을 감추지 못했다.  이후 김안로는

  "만일 내가 정권을 잡으면, 기묘년에 몰린 사람들을 수용하겠다."

는 말을 퍼뜨려 신진(新進)들의 마음을 사는데 힘썼다.  그러던 중 경빈 박씨가 쫓기어났다.  

김안로는 아들 김희를 시키어 이면 공작을 하기 시작했다.  김희는 대비를 찾아가 눈물을 

흘리면서

  "저의 아버지는 아무 죄없이 남곤 일파에게 미움을 받아서 귀양을 갔습니다.  이제 귀양 

간지도 육년이나 되는데 여러번 은사(恩赦)는 있었으나 풀려나지 못했습니다.  저의 아버지

는 원래 병이 있는데다가 또 수토(水土)로 생긴 병으로 거의 죽게 되어, 원통하기 그지없습

니다.  대비께서는 이 원통한 일을 풀어 주십시오."

  그리고 김희는 또 자기 부인 효혜공주를 시키어 궁중에 발이 닳도록 드나들게 하면서 대

비나 중전(中殿)에게 원통함을 호소하고 임금을 움직이게 했다.  자순대비는 어머니 없이 자

란 효혜공주와 세자를 극진히 사랑했다.  세자가 난지 닷새만에 그의 어머니 장경왕후가 죽

으니 대비는 그 손자인 세자를 기르는데 더할 수 없이 극진했던 것이다.  이러한 궁중의 사

정을 아는 심언경 형제들도

  "동궁을 보호하려면 김안로를 데려와야 한다."

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안로를 데려오려면 대비가 임금에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될 수가 없었다.  원래 

김안로는 조정의 의논으로 귀양을 보낸 것이니 귀양을 푸는데도 정부의 의논이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마침 우의정 이행(李荇)도

  "박빈이 비록 지금은 쫓기어 났어도 그와 인척이 되는 사람들은 모두 권세 있는 재상(宰

相) 자리에 있고, 또 복성군을 임금이 사랑하시는 품이 여러 대군들 중에 제일 가는 처지이

니 훗일에 무서운 일이 동궁(세자)에게 미칠는지도 모릅니다.  이때에 김안로를 놓아서 오게 

하면 동궁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는 말을 했다.  이리하여 궁중으로는 대비가 측은히 여기고, 임금으로는 사위 김희를 몹시 

사랑하고, 조정으로는 이행이 주장하고, 공론으로는 심언경 형제가 주장하게 되어, 김안로는 

마침내 풍덕에서 귀양이 풀려, 기축년(己丑年) 오월 이십사일에 서울로 돌아왔다.

  육년 만에 다시 조정에 돌아온 김안로는 기묘년 사화 당한 사람들을 기용하고 당면의 정

적(政敵)인 심정, 이항 등을 죽이고, 정광필(鄭光弼)을 귀양 보내고 박빈을 죽이고, 또 자기의 

귀양을 풀리게 한 이행까지 귀양을 보냈다.

  이제 김안로는 왕실의 인척으로서 동궁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들어와 세력을 떨치게 되

었다.  김안로는 마침내 대제학(大提學)에 좌의정(左議政)까지 지내 그의 이름은 명나라까지 

알려졌다. 이때 중종에게는 아들 아홉명에 딸 열한명이 있었다.  딸들이 다 각각 시집가서 

사위도 열한명이나 되었다.  이 중에 특히 정비(正妃)의 몸에서 난 딸은 장경왕후(章敬王后)

가 낳은 효혜공주(孝惠公主)와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낳은 의혜공주(懿惠公主) 두 사람 

뿐이었다.  중종은 어머니 없이 계모 슬하에서 자라난 효혜공주에 대하여 늘 측은한 생각을 

가져서 그 사위인 김희까지도 특별히 사랑하였다.

  김안로는 이러한 임금의 심정을 잘 이용하였다.  그러나 운명은 때때로 짖궂은 장난을 했

다.  김안로가 정계에 자리를 잡고 권세를 부릴 만하게 되자, 신묘년(辛卯年) 사월 이십일에 

효혜공주가 죽었다.  김안로가 보배상자처럼 소중히 여겨 오던 공주인 만큼 그때 김안로의 

실망은 여간크지가 않았다.  그뿐 아니라 그해 십월 십일에는 아들 김희마저 죽었다.  그리

고 효혜공주의 친동생인 세자를 극진히 보호하던 자순대비가 그 일년 전인 경인년(庚寅年) 

팔월 이십이일에 돌아간 것도 김안로에게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까지 자순대비

는 계비 문정왕후와 세자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궁중의 어른으로서 잘 조화(調和)시키며 세

자를 따뜻한 날개로 휩싸 주던 분이다.

 김안로는 이때부터 자기의 처(妻)편 되는 채무택(蔡無擇)이나 그밖의 심복들을 대할 때마다

  "이제 중궁의 친형제되는 윤원로(尹元老)나 윤원형(尹元衡) 등이 정권을 잡을려고 책동할 

것이다.  너희들은 그들을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이렇게 늘 경계를 해오고 있었다.  대비가 돌아간지 사년 후에 세자의 동생인 경원대군

(慶原大君=뒤의 명종)이 중궁 문정왕후 몸에서 태어났다.  경원대군은 갑오(甲午)생이니 그 

형인 세자(뒤의 인종)가 이십세 되던 해이다.

 임금은 맏아들 세자가 이미 이십세나 된고로 세자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마음을 놓고 있었

다.  그러나 둘째 아들인 경원대군은 아직도 젖먹이다.  그리고 임금 자신은 그때 사십칠세

로 이미 노년기에 들어서고 있었다.  어느날 임금은 젖먹이인 경원대군을 안고서 

  "내가 죽은 후에 네가 목숨을 부지하고 살는지?"

하고 한탄하였다.  임금은 자신이 형 연산군 밑에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겪던 것을 회상

하고 하는 말이었다.  정권을 잡기 위하여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정객들, 거센 비바람이 쉴

새없이 뿌리치는 정계(政界)에서 자신의 피를 받은이 어린 것이 그대로 목숨이 붙을 것 같

지 않았다.  임금은

  "네가 공주였더라면 왜 목숨 보전 못할 것을 염려하겠느냐.  네가 아들로 태어난 것이 몹

시 불행이구나."

하고 눈물을 흘렸다.  이때 옆에 있던 왕비 윤씨(문정왕후)가 임금의 소매를 잡고

  "상감!"

  한 마디 하고는 흑흑 느껴 울었다.

  "여보 중전, 울지 마오.  내가 눈물을 보인 것이 잘못이었소,  자...."

하고 임금은 다정하게 왕비를 위로하였다.  한참을 느껴 울던 왕비는 고개를 들고 눈물 어

린 얼굴로 임금을 우러러보았다.

  "어런것도 어린것이려니와 이 몸도 곧 폐위되게 되었나이다."

  밑도 끝도 없이 불쑥 내놓는 말에 임금은 저으기 놀란 표정으로

  "그게 무슨 소리요?"

하고 물었다.

  "대군(경원대군)이 태어난 후로 김안로 일파에서는 이 몸이 외척들과 짜고서 동궁을 없애

려 한다고 모함을 하고 있답니다.  이런 억울할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자기의 동생 원로와 원형도 김안로에게 쫓ㄱ나게 된 사연을 고하였다.

  임금은 크게 노하였다.  다음날로 김안로 일파를 잡아들이라 하고 역적으로서 처벌케 했

다.  김안로는 죽는 마당에 있어서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나 한몸 죽는 것은 상관 없지만 장차 중궁 윤씨의 외척들이 권세를 잡을 것이 걱정이다."

하고 조용히 왕명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  그가 권세를 부린지 칠년만이었다.


   김안로 일파가 쫓겨난 후에도 조정은 여전히 뒤숭숭했다.  이번에는 그전 왕후 장경왕후

의 오라버니인 윤임(尹任)이 동궁 편에서, 그리고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로와 윤원형 등은 문

정왕후 편에서 서로 세력을 잡으려고 으르렁댔다.

  이들은 원래 자순대비(慈順大妃)와 같이 파평(坡平) 윤씨로서 세조(世祖)의 국구(國舅)인 윤

번(尹 )의 자손들이다.  윤임은 윤원로, 윤원형 형제와 구촌간으로서 아저씨뻘이 되는데 김

안로의 세력을 꺾고 그를 쫓아낼 때는 서로 연합하여 힘을 뭉쳐 싸웠으나 이제 김안로가 쫓

겨난 뒤로는 어딘지 모르게 화합하지를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동궁의 나이 이미 삼십인

데도 아들이 없었다.  동궁이 장차 왕위에 오를 것은 뻔한 일이지만 아들이 없으니 경원대

군을 세제(世弟)로 봉해야 한다는 것이 원로와 원형 형제의 주장이었다.

  그럴수록 윤임 쪽에서는 동궁에게 후사(後嗣)를 얻게 한다고 후궁을 많이 끌어들었다.  그

러나 어찌된 일인지 아무데서도 소식이 없었다.  원형과 원로 형제는 누님인 문정왕후를 자

주 찾아가서 졸랐다.

  "누님, 경원대군의 세제 책봉 문제에 대해서 상감께서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응, 여러번 말씀을 드려봤는데 워낙 결단심이 없으신 상감이라 좀체 확답을 안하셔."

  문정왕후는 매우 안타까운 어조로 대답했다.  욕심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동궁을 없애고 

자기의 소생을 동궁으로 세우고 싶었을 것이다.  원형은

  "지금 조정 안의 공기는 동궁과 누님의 사이가 화합치 못한 것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습니다.  빨리 상감의 응낙을 얻어 놓지 않으면 장차 일만 시끄럽게 될 것 같습니

다."

하고 말했다.  과연 며칠이 못 가서 대사간(大司諫) 구수담(具壽聃)과 대사헌(大司憲) 정순붕

(鄭順朋) 등이

  "요즘 윤임을 대윤(大尹), 윤원형을 소윤(小尹)이라 하면서 대윤은 동궁을 보호하고 소윤은 

경원대군을 보호한다고 서로 싸우고만 있으니 이 두사람을 내보내야 합니다."

하고 들고 일어났다.

  "그게 무슨 소리요?"

  임금은 놀래어 그 출처를 밝히도록 추궁했다.  이 바람에 윤임은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자리를 내놓고 물러나려고 했으나,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배경을 믿고 물러날 생각을 아니했

다.  임금도 할 수 없이 윤임을 만류하여 그대로 눌러 앉히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이러한 싸움으로 입장만 곤란해진 동궁은 워낙이 효성이 지극한 천성이라 계모에 대한 미

안한 생각만이 앞서서 경원대군과 자기와의 사이에는 아무런 틈이 없다는 점을 일부러 글로 

써서 정원으로 내보냈다. 이로써 임금도 더 묻지 않고 이 중대한 일은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 후에도 대윤과 소윤의 암투는 좀처럼 가라앉을 줄 모르고 더욱 치열해져 가기

만 했다.  문정왕후는 임금을 대하기만 하면 경원대군을 어서 빨리 세제로 봉해 달라고 앙

탈을 하며 조르기만 했다.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듯이 임금도 이제는 외척들 싸

움에 진저리가 나고 귀찮은 생각이 들어서 마침내 왕세자에게 선위를 한다는 조서(調書)를 

내렸다.  임금의 생각으로는 왕세자를 왕위에 앉혀야만 경원대군을 세제로 세울 수가 있다

고 느낀 때문이었다.  만조백관들은 깜짝 놀랐다.

  "웬일인가?"

 "아직도 근력이 정정하신데."

  "윤임하고 윤원형이하고 세도 싸움을 하는 꼴이 보기 싫어서 선위를 하신다는 것이 아닌

가."

  모두들 수군거렸다.

  즉시 영의정 윤인보(尹仁輔), 좌의정 홍언필(洪彦弼), 우의정 김극성(金克成), 좌찬성 소세양

(蘇世讓), 우찬성 윤임(尹任), 호조판서 조계상(曺繼商), 이조판서 윤인경(尹仁鏡), 형조판서 성

세창(成世昌), 공조판서 이구령(李龜齡), 병조판서 양연(梁淵), 한성판윤 이기(李 ) 등은 물론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삼사까지 모두 일어나서 반대상소를 올렸다.

  동궁도 이 소식을 듣고 스스로 죄인으로 자처하여 거적자리를 합문밖에 깔고 머리 풀고 

맨발로 꿇어앉아서 대죄를 드렸다.

  "아바마마, 생전에 선위를 하시다니 이것이 웬 말씀이십니까.  이것은 저에게 죽으라는 말

씀이옵니다.  다시 성명(聖命)을 거두어 주십시오."

  동궁은 이틀 밤을 꼬박 세우면서 통곡을하여 석고대죄를 계속해서 드렸다.

  임금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문정왕후의 앙탈과 신하들의 만류 틈새에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개인적인 사정과 욕심으로 신하들의 만류

를 몰리치고 문정왕후의 요구를 들어 주고 여생을 편안히 보내고 싶었다.  허나 임금은 이

것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사정과 욕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모든 신하들

의 의사는 일개 왕비의 주장보다도 더 존중해야 한다는 것도...

  "중전의 앙탈이야 나 혼자 견디면 되지.  그걸로 나라를 그릇칠 수야 있나"

  임금은 결국 이렇게 마음을 먹고 다음날 양위한다는 조서를 도로 거두어 들였다.


   이로부터 중종은 말년에 이를수록 후궁을 많이 두고 어색(漁色)으로 모든 고민을 잊으려

는 경향을 보였다.  이때 중종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있던 후궁에 숙용(淑容) 안씨(安氏)

가 있었다.

  숙용 안씨는 원래 안산(安山)이 고향으로 안단대(安坦大)라는 농부의 딸이었다.  가세가 빈

한하여 어려서부터 서울에 사는 고모 집에 와서 일하며 얻어먹고 있었는데, 안씨의 나이 십

칠세 되던 해 옆집에 사는 김상궁(金尙宮)이 그 아름다운 자태를 보고 궁 안으로 데려다가 

무수리로 부렸다.  이 어린 무수리가 궁에서 지내는 동안 이럭저럭 이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제법 촌티를 벗어 말끔한 궁중 여인이 되었다.

  어느날 안씨는 김상궁의 처소에서 뜻밖에도 순회를 나온 임금을 뵈었다.  늘 김상궁 처소

에서만 잔심부름을 해온 까닭에 임금을 직접 대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안씨는 김상

궁의 등 뒤에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임금을 맞았다.  반달같이 탐스럽게 생긴 처녀의 자

태는 곧 임금의 눈에 띄었다.

  "저 애가 누구냐?"

  임금은 시종에게 물었다.  그러자 시종이 채 대답하기 전에 김상궁은

  "황송하옵니다.  안산에서 온 무수리옵니다."

하고 아뢰었다.

  "뉘 집안이지?"

  "예, 농부의 딸이옵니다."

  "음, 농부의 딸이라?  저 애를 이리 가까이 오라고 일러라."

  김상궁이 옆으로 물러서고 앞으로 나오기를 이르자 어린 안씨는 약간 홍조 띤 얼굴을 하

고 외씨 같은 버선 끝으로 치마 기슭을 가볍게 차면서 임금 앞으로 몇 걸음 걸어나오는데 

그 얼굴은 바야흐로 피어나는 꽃송이 같아 황홀하게 아름다왔다.  임금의 눈에는 기쁜 빛이 

감돌았다.

  "너 몇 살이냐?"

  "황송하옵니다.  금년에 열아홉이 되옵니다."

  "음..."

  임금은 감탄을 마지 않았다.

  (이런 애가 궁중에 있었나?)

  임금은 즉시로 궁녀들에게 이 애를 치장해서 보내라고 일렀다.  얼마 후 안씨는 새로 몸

치장을 하고 궁녀들의 호위를 받아가며 임금이 기다리는 방으로 들어갔다.

  "좋은 옷을 입으니 더욱 곱구나"

  임금은 이렇게 말하며, 안씨의 섬섬옥수를 붙잡아 앉도록 했다.

  "너도 이제부터 귀인(貴人)이 된다.  자, 술이나 한잔 부어라."

  안씨는 은주전자를 들고 공손히 술을 부었다.  임금은 안씨가 따라 주는 술잔을 손에 든 

채 그녀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쳐다보더니 기쁜 미소를 지으며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이날 밤 안씨는 한 번 임금과 금침(衾枕)의 정을 맺은 후로 어엿한 후궁으로서 숙용(淑容)

이라는 내명부(內命婦)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수년 후에는 영양군(永陽君)과 덕흥군(德興君)

을 낳았다(이 덕흥군의 소생이 바로 이조 십사대왕 선조이다).

  매사에 표독스럽고 투기심이 많은 문정왕후는 숙용 안씨가 미천한 집안 출신이라하여 구

박이 자심하였다.  더욱이 임금의 사랑이 안씨에게 많이 기울어지자, 왕후는 안씨를 내쫓을 

생각까지 먹었다.  그러면 무던한 심덕을 지닌 안씨는 왕후의 비위를 잘 맞추어 조금도 거

역할 줄을 몰랐다.

  중종 삼십팔년 정월 초의 일이다.

  어느날 밤 동궁과 빈궁(嬪宮)이 깊이 잠들어 있는데 별안간 불이 일어나더니 그 침전 일

대가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어느 누구의 짓인지 동궁과 빈궁의 침전 문은 밖으로부터 

굳게 잠기고 벌써 검은 연기는 방안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빈궁은 먼저 잠에서 깨어나 문

을 부스고 동궁을 안전한 곳으로 모시려 했다.  그러나 동궁은

  "지금이 바로 내가 죽어야 할 때인가 보오.  지금까지 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했음은 오

직 부모님께 악한 소문이 돌아갈까 두려워서였소.  그러나 이제 밤에 잠자다가 불에 타 죽

었다면 그런 염려는 없을 것이요.  나는 피하지 않기고 했으니 어서 빈궁이나 피하오."

하고는 움직이지를 않았다.  이 말을 들은 빈궁은 통곡을 하면서

  "저만 혼자 살면 무엇하리까."

하고 함께 죽기를 원했다.

  갑자기 일어난 불에 동궁 이속(吏屬)들이 달려와서 동궁에게 속히 피하기를 권했다.  그러

나 이미 죽기를 마음 먹은 동궁이 그들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이속들은 하는 수 없이 

임금에게 아뢰었다.  불이 난 줄도 모르고 잠자던 임금은 뜻밖의 말에 창황망조하여 곧 동

궁의 처소로 와보니 이미 불바다가 되어 있었다.  임금은 위엄이고 무엇이고 돌아볼 겨를도 

없이

  "백돌(伯乭)아, 백돌아."

하고 동궁의 아명(兒名)을 목놓아 부르짖었다.  안에서 조용히 앉아 타죽기를 각오한 동궁이

었으나 부왕의 이 울음소리를 듣자 그 효도(孝道)스러운 마음에 그냥 더 있을 수가 없어

  "예."

하고 대답한 후 빈궁과 함께 불길을 헤치고 밖으로 나왔다.

  "아바마마!"

  임금의 눈에는 궁금하던 동궁의 모습이 비쳤다.

  "오, 백돌아!"

  임금은 떨리는 가슴으로 동궁을 껴안았다.

  "아바마마!  불효의 죄 크옵니다.  놀라시게하여 황공하옵니다."

  목메여 호소하는 동궁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다.

  "네가 살았구나!"

  늙은 임금의 용안에서도 눈물이 떨어졌다.

  불이 꺼진 뒤에 화재의 원인을 추궁했으나 실마리를 잡을 길이 없었다.  다만 조정에서는 

수군수군 공론들이 많았다.

  "뻔한 일이지.  동궁에 불이 일어난 것은 동궁을 없애버리자는 고약한 놈의 짓이 아닌가?"

  "그렇다면 윤원형의 짓이란 말인가?"

  선비들은 수군거렸다.  이러한 수군대는 공론은 마침내 밖으로 터져나와 버리고 말았다.

  대사간 구수담은 마침내 경연(經筵)의 자리에서

  "이번 동궁에서 일어난 화재 원인은 윤임과 윤원형의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져서 마침내 

여기까지 이르렀다고 세상 사람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고 바른대로 쏘아 붙였다.  이어서 정언(正言) 심령(沈 )도

  "이번 화재에 대해서는 궁중 안 사람들이 모두 간신 윤원형의 소위라 지적하고 있습니다.  

윤원형을 죄 주어야 합니다."

  기막힌 폭로였다.  만좌는 악연히 놀라 얼굴빛들이 하얗게 질렸다.  임금도 하도 엄청난 

소리라 얼른 무엇이라 대답을 내리지 못했다.

  이때 이 자리에는 윤원형의 심복 임백령도 경연관으로서 참석하고 있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런 중대한 일을 가지고 경솔하게 사람을 지적하여 말한다는 것은 경연관의 체통이 아

니라 생각하오.  이번 동궁의 실화에 대해서는 상감께서는 친히 궁중 예속들에게 엄하게 물

으시어 아직도 조사를 하시는 중이온데 함부로 경연관이 유언비어를 내어 경솔한 입술을 놀

리니 이는 요망하기 짝이 없소.  경솔한 대사간과 요망한 정언을 죄 주시오."

  임백령의 이런 말에 임금도 고개를 끄덕였다.  임금은 사건이 크기는 하나 무사주의를 택

하고 싶었다.  이제 또 옥사를 일으키는 것이 지긋지긋하도록 싫었다.  이리하여 얼마 안 가

서 구수담과 심령은 벼슬이 갈려버리고, 임금도 여기에 대해 더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

다.  이로써 중대한 일은 흐지부지 되어갔다.

  동궁에 불이 난 사건이 있은 뒤부터 임금의 마음과 몸은 더욱 피곤하고 늙어 갔다.  임금

의 몸이 쇠약해질수록 조정에서는 윤임과 윤원형의 싸움은 절정에 올랐다.

  임금은 마침내 병이 들었다.  효성이 지극한 동궁은 식음을 전폐하고 병상에 누운 임금을 

밤과 낮으로 모시었다.  임금은 병이 든지 이십여일에 자기는 일어나지 못할 것을 깨달았다.  

임금은 병환중에 특별히 좌의정 홍언필(洪彦弼), 우의정 윤인경(尹仁鏡)을 불러

  "나는 이제 다시 일어날 것 같지 않소.  오늘부터 세자에게 전위(傳位)를 하니 경들은 이 

뜻을 받아 세자를 도와서 나라 일을 보살피도록 하오."

  이렇게 말하면서 임금은 옥새를 대신에게 전했다.  대신들은 옥새를 받들고 물러나와 이 

뜻을 세자에게 전하고 옥새를 세자께 올렸다.  세자는 통곡하면서

  "내일이라도 상감께서 병세가 쾌차하실 텐데 내가 전위를 받는다는 것은 불가하오."

하며 끝끝내 옥새를 받지 아니했다.  대신들은 하는 수 없이 이런 사유를 임금께 다시 아뢰

었다.  그러나 임금은

  "안 된다.  세자에게 옥새를 전해라."

하고 병석에서 고개를 흔들었다.

  임금은 마침내 세자에게 전위한 다음날에 숨을 거두니, 재위 삼십구년에 나이는 오십칠세

였다.  동궁이 곧 즉위하게 되니 이가 곧 인종(仁宗)이다.

  [ 外戚의 싸움과 垂簾廳政 ]   <乙巳士禍>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外戚의 싸움과 垂簾聽政 

    乙巳士禍



   인종(仁宗=西紀 1,544-1,545)이 왕위에 오른 것은 삼십세 되던 해이다.

  인종은 동궁으로 있을 때 맞이한 동궁빈(東宮嬪) 즉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 박용(朴墉)의 

딸을 그대로 왕비에 봉하였으나 여전히 슬하에는 일점 혈육이 없었다.

  인종은 효성이 남달리 지극하고, 신하의 올바른 말을 기꺼이 들으며 백성들의 고난을 임

금의 고난으로 여기는 성군(聖君)이었다.  대간(臺諫)에서 도승지(都承旨) 윤원형을 내쫓으라

고 하는데 대해서도 인종은 윤원형을 내쫓기는커녕 오히려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승격시

켜 문정왕후의 마음을 편안케 했다.  이제 시대는 윤임 일파 대윤(大尹)의 시대이되 결코 문

정왕후의 오라비되는 윤원형 등 소윤(小尹)을 다치지 않았다.

  이렇게 효성을 다해 여러 가지로 마음을 써서 그 계모(繼母)를 받드는데도 불구하고 문정

왕후는 조금도 그 앙탈스러운 성질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더 심하게 신왕(新王)을 대했다.  

인종이 대비(大妃) 앞에 문안 드리러 가면 대비는 그가 낳은 경원대군을 앞에 앉히고

  "우리 모자가 전하의 손에 죽을 날이 머지 않았소.  언제쯤 죽이려 하오?"

하는 엄청난 말을 하기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임금은 대비전 문밖에 엎디어 효성의 부족함을 뉘우치며 대죄(待罪)의 밤낮

을 보냈다.

  이런 노심초사가 쌓여서 그런지 혹은 부왕의 상(喪)을 당하여 장차 해나갈 정사(政事)를 

걱정한 나머지인지 인종은 임금이 된지 얼마 안 가서 앓기 시작했다.  병이 점점 중하여 스

스로 회복하지 못할 줄 알고, 임금은 중신들을 불러 앞에 앉히고

  "내 병이 이렇게 중한데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니 경들은 나의 아우 경원대군을 세우고 

국사를 잘 다스리오.  또 조광조(趙光祖)는 어진 선비였는데 저렇게 억울하게 죽었음이 늘 

내 마음에 쓰라렸소.  내 마음 먹은 바를 이루지 못하고 가니 경들은 내 뜻을 받들어 조광

조의 관직이나마 회복시켜 주기 바라오."

하고 유언을 했다.

  그리고 좌우에 있는 신하를 시켜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고 해서 무엇을 쓰려고 하더니 붓

을 놓고 탄식하며

  "나의 심중에 있는 말을 글로 써서 알리려 했더니 이제는 그것도 할 수가 없구나."

하는 한 마디를 남기고 임금은 다시 깨어나지 못한 채 승하하고 말았다.  재위 팔개월 나이

는 삼십일세였다.

  당시 인종의 요서(夭逝)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소문이 떠돌았다.  문정왕후 즉 대비가 자

기의 소생인 경원대군을 임금으로 내세우기 위해 임금을 방양(方穰)했느니, 또는 밤마다 부

처님께 기도를 올렸느니 하는 말이 떠돌았다.

  인종이 세상을 떠나자 제일 먼저 기뻐한 것은 대비와 윤원형 형제들이었다.  이들은 임금

의 승하를 알리는 천아성(天鵝聲)소리 구슬픈 가운데서도 자기네의 세상이 돌아왔다고 기뻐 

날뛰었다.  인종이 승하한 그날로 경원대군은 나이 십이세로 등극을 하였으니, 이가 곧 명종

(明宗)이다.

  명종(明宗=西紀 1,545-1,567)이 등극하지 문정대비는 신왕(新王)이 나이기 어림을 핑계삼아 

스스로 발(簾)을 드리우고 섭정을 맡아했다.

  대비는 우선 선왕 인종의 외숙(外叔)인 윤임 일파를 몰아내려고 생각했다.

  이제 대비가 나라의 권력을 한손에 쥐긴 했으나 아직도 윤임 일파는 정원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좌의정 유과(柳灌), 이조판서 유인숙 등이 윤임과 더불어 매사에 대비를 견제하고 

나섰다.

  대비가 섭정하게 된 뒤 얼마 안 가서 윤원형의 형 원로를 해남으로 귀양 보내야만 했던 

것도 윤임 일파의 압력으로 인한 것이었다.  영의정 윤인경(尹仁鏡), 좌의정 유관을 비롯한 

모든 대신들이 정원에서

  "윤원로는 과거에 선왕과 신왕을 이간시킨 자이니 내보내야 하오."

하고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대비도 하는 수 없이 자기의 친오라버니를 귀양 보냈다.  자기

의 친형제를 귀양 보내고 나니 대비의 마음이 좋을 리가 없었다.

  이때 윤원형에게 난정(蘭貞)이라는 첩이 있었다.  난정은 매우 영리한 여자로서 궁중과 윤

원형 사이를 왕래하며 여러 가지 중요한 일을 연락하곤 했다.  윤원형이 직접 대비를 궁중

으로 찾으면 윤임 일파에서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았던 까닭이다.

  윤원형은 형님 원로가 쫓겨남을 보고 즉시 자기의 심복들과 의논했다.

  당시 윤원형의 심복으로서는 이기(李 ), 임백령(林百齡), 정순붕(정순붕), 허자(許磁) 등이 

있었다.  윤원형은 이들과 의논한 결과 한 계책을 세우고 나서 다음날 난정으로 하여금 궁

중으로 들어가서 대비에게

  "윤임이 자기의 조카되는 계림군(桂林君) 유(瑠)를 선왕의 양자로 세워, 장차 큰 일을 꾀하

고자 하오."

하는 말을 밀고케 했다. 대비는 이 말에 깜짝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렇겠다.  윤임이 전부터 우리 모자를 잡아 먹겠다고 하더니 결국은 이런 수작을 하

는구나."

  대비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곧 충순당(忠順堂)으로 나와 대신들을 불러들이고서

  "듣자니 윤임은 중종대왕 때부터 우리 모자를 해코자 하더니 이제 인종이 승하한 후 자기

의 지위가 불안함을 느끼고서 딴 마음을 품고 무슨 모의를 한다는 말이 있소.  경들은 이러

한 말을 어떻게 생각하오?"

하고 대신들을 한 번 훑어보았다.
  
  어린 임금은 그저 놀란 표정으로 몸을 떨고만 있을 뿐이다.  윤원형 일파는 이때가 바로 

자기들의 반대파를 없앨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우선 이기, 정순붕 등이 어전에 나와

  "윤임은 좌상 유관과 이언적(李彦迪), 이림(李霖), 유인숙, 권발(權撥) 등과 함께 모의한 흔

적이 있소.  엄중히 처단하여야 하오."

하고 일제히 일어섰다.  그러나 영부사(領府事) 홍언필과 신광한(申光漢), 백인걸(白仁傑) 등

은 아무래도 사건이 확실치 않으므로

  "윤임이 종사를 모의한다고 하나 아직 그런 형적이 없으니 이는 공연히 만든 것이요."

하고 반대하고 나섰다.  이렇게 해서 조정 안은 한동안 이 사건으로 서로 상소하고 논란하

여 자못 시끄러웠다.

  이러던 중 경기관찰사 김명윤(金明胤)이 전날에 윤원형의 첩 난정이 밀고한 바와 같은 내

용을 가지고 윤임 일파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윤임이 자기의 조카 계림군을 추대하여 임금의 자리에다 앉힌다는 말이 있소."

  한 번 이런 말이 나오자 윤임은 역적이란 누명을 쓰게 되어 사건은 매우 중대성을 띠우게 

되었다.

  대비는 곧 계림군 이하 모든 관련자를 잡아들이도록 명했다.  며칠 후 안변(安邊) 황룡사

로 도망 갔던 계림군이 잡혀옴으로써 이 조작된 역모 사건의 친국은 벌어지게 되었다.  계

림군은 중의 복색을 한 채로 사령에게 끌려서 국청 앞으로 나왔다.  이때의 추관(推官)은 임

백령과 허자(許磁)였다.

  "너는 윤임과 함께 역모를 도모했으니 그 죄를 아는가?"

  "신은 역모한 일이 없습니다."

  "그럼 왜 도망을 했느냐.  죄없는 자도 도망을 한단 말이냐?"

  윤임을 옭아넣기 위해 애꿎은 계림군만 희생을 당할 판이었다.

  "어서 바로 대어라."

  "바로 대라고 하오나 무엇을 어떻게 바로 댈 것인지 신은 모릅니다."

  "그래도 바로 대지 못하겠느냐?"

  무서운 고문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주리를 틀때마다 계림군이 지르는 비명소리는 온 국

청 안을 울렸다.  어린 임금은 이 처참한 광경에 그만 질려서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았다.  대

비도 보다 못해 임금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얼마 후 계림군은 서리가 가리쳐주는 대로

  "아저씨 윤임이 임금을 없애고, 나를 대신 임금으로 세운다 했습니다."

하고는 그 자리에 졸도했다.  이제 계림군은 고문을 면하게 되었으나 그 대신 역적이라는 

누명을 쓰고 며칠 뒤에는 처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어서 윤임(형조판서), 유관(좌의정), 유인

숙(이조판서) 등을 반역 음모죄로 사사(賜死)하고 그 나머지 대윤을 싸고 돌던 이언적, 노수

신(盧守愼), 유희춘(柳希春) 등 수많은 사류(士類)들도 귀양 보냈다.

  이로써 조정은 완전히 소윤 일파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대비는 이번 사건의 공로

자를 표창한다고 정순붕, 이기, 임백령, 허자 등에게 보익공신(保翼功臣)이란 칭호를 내렸다.  

때는 명종 즉위초인 을사년이므로 사가(史家)들은 이를 을사사화(乙巳士禍)라 한다.


  [ 外戚의 싸움과 垂簾廳政 ]   <夕陽에 배운 佛經>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外戚의 싸움과 垂簾聽政 

    夕陽에 배운 佛經



   이제부터 조정은 거의 윤원형 일파로 바뀌게 되었고, 또 한편으로는 어린 임금도 차차 

나이 들었으므로 대비는 체모상 발을 걷고 정권을 아들 임금에게 돌려 주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러나 대비가 정권을 임금에게 내놓았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표면상 형식에 지나지 못하

는 것이고 사실은 아직도 임금 뒤에 앉아서 여전히 권력을 휘둘렸다.  대비는 자기가 하고

자 하는 일은 정음(한글)으로 손수 써서 내시를 통해 임금에게 전달하고 그대로 시행할 것

을 고집하였다.

  명종(明宗)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이런 대비의 명령 아닌 명령을 받아야만 했다.  물론 명

종은 이런 명령 가운데 크게 그릇된 일이 아니면 모후(母后)의 뜻을 받들어 힘써 시행하였

지만 그러나 사리에 어긋난 일이면 아무래도 시행할 수가 없어서 난처하게 되는 수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대비는 정음 글씨로 윤원형의 첩 난정(蘭貞)을 정실부인으로 

특명하고 정경부인에 봉하라는 전지(傳旨)를 임금에게 내렸다.  난정으로 말하자면 윤임 일

파를 몰아내는데 있어 공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전부터 대비의 비위를 잘 맞춰서 대비의 귀염

을 받아 오는 터였다.  그래서 가끔 궁중에서 대비가 연회를 베풀고 공신들의 부인네들을 초

청할 때면 비록 난정이 첩이란 신분에 있지만 그녀도 반드시 초청을 받았다. 그러나 공신들

의 부인들은 난정의 신분이 첩이라 해서 경원(敬遠)을 하니 남에게 지기를 싫어하는 난정이 

이런 기색을 알아차리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날로 집에 돌아와 윤원형을 붙들고

  "여보, 날 언제까지 첩으로만 둘 작정이오?  그 아니꼬운 정경부인들 멸시 때문에 나는 

더 견딜 수가 없어요."

  이래서 윤원형은 대비를 움직이게 되었고, 대비 또한 당신이 귀여워하는 난정의 일인지라 

손수 글을 써서 이번 전지를 임금에게 내리게 된 것이었다.

  임금은 대비의 전지를 받아 보고 전지를 받들고 온 중관에게

  "국법에 없는 일을 어찌 하겠소.  대비전께 가서 이번 전지는 거두시도록 부탁드리오."

하고 낯을 찡그리며 돌려보냈다.  중관은 대비전에 가서 그대로 왕명을 고했다.

  "뭐라고? 전지를 거두라고?"

  대비는 발끈 화를 내며 당장 임금을 들어오라고 했다.  잠시 후 임금은 대비전으로 나왔

다.  어느새 들어와 있는지 대비 옆에는 윤원형이 앉아 있다가 임금을 보고 급히 일어나 맞

이하려 했다.  그러나 이때 대비는 윤원형을 보고

  "오늘은 가인의 예(家人之禮)로 대하는 것이니 그대로 앉아 있게."

하고 다시 임금을 향해서 

  "너는 외숙에게 먼저 절하도록 하라."

했다.  임금은 어머니의 명령대로 윤원형에게 절했다.  그제서야 윤원형도 일어나

  "만수무강하옵소서..."

하며 맞절을 했다.  이러한 광경을 옆에서 지켜 보던 대비는 동생에게

  "여보게, 오늘은 외숙으로서 생질을 대하듯 하라 했잖은가?  상감에게 대한 예를 떠나서 

말하게."

  "예, 누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럼 자네가 직접 생질에게 청을 해보게."

  그래도 윤원형이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멈칫거리자, 어린 임금은 벌써 

알아차리고 어머니를 향해

  "외숙의 하고자 하는 말씀은 대강 짐작이 갑니다.  아무리 집안 어른의 청이라 해도 국법

에 없는 일은 불가한 줄 아옵니다.  아까 어머니의 전지는 받자왔으나 소자의 생각..."

하고 난색을 보이자 대비는 차츰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는 눈으로 아들을 노려보더니

  "무슨 소리냐.  네가 임금이 된 것은 나와 네 외숙의 힘인데 그것을 몰고 우리 형제의 말

을 거역한단 말이냐?"

하고 추상같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래도 어린 임금은

  "남의 이목이 있는데 어떻게 첩을 정경부인으로 봉할 수 있습니까?"

하고 어머니의 생각을 돌리려고 부드럽게 말해 보았다.  그러나 대비는 여전히

  "내일 곧 왕명으로 정경부인에 봉하도록 하라."

할 뿐이었다.  어린 임금은 더 말해야 소용 없음을 알고 곧 대비전을 물러나왔다.

  다음날 정원에서 임금은

  "좌의정 윤원형의 부인을 정경부인에 봉하노라."

하고 교지를 내렸다.


   대비는 궁중에서 공신들의 부인네들을 초청하여 자주 연회를 베풀었다.  대비가 이렇게 

자주 연회를 베푸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에 비인 것을 채워보고자 함에서였다.  

전에는 정권만 자기 손아귀에 들어오면 더 바랄 것이 없으리라 생각해 오던 대비였다.  그

러나 이제 소원대로 정권이 자기 손아귀에 들어오고 보니 전날에 그렇게도 매력있던 것이 

별로 신통해 보이지 않았다.  화창한 봄날이면 대비는 미망인으로서 전날의 남편이 그리워

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대비는 궁중 후원에 차일을 치고, 진수성찬을 벌여놓고, 한편으

로는 풍악을 잡히며, 부인네들만의 청유(淸遊)를 즐기면서 모든 것을 잊으려했다.

  그러나 이것도 한때 뿐이었다.  텅 비인 마음 한 구석은 여전히 채워지지가 않았다.  대비

는 다시 마음을 불교 행사로 돌렸다.  대비의 마음에는 어느덧 인생의 무상감이 점령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오늘은 진관사(津寬寺), 내일은 장의사(藏義寺) 이렇게 절간을 찾아다니며 불공을 드리고, 

나중에는 전국 각지의 이름 있는 사찰마다 사람을 보내서 재를 올리게까지 했다.  전에 차

일을 치고 연회를 베풀던 궁중 후원은 어느덧 무차대회(無遮大會)의 장소로 변하고 전날의 

청아하 풍악소리는 불경소리와 목탁소리로 바뀌게 되었다.  이렇듯 대비가 불사에만 열중하

고 있음을 보고, 때에 강원감사 정만종(鄭萬鍾)은 보우(普雨)라는 희대의 요승(妖僧)을 대비에

게 소개하였다.  보우는 원래 양양 신흥사(神興寺)의 중으로 간지(奸智)에 능한 인간이었다.  

보우가 일단 궁중을 드나들며 대비 마음에 들기를 노력하자 대비는 당장 그에게 혹해 버리

고 말았다.  그리하여 어느새 대비는 보우의 말이라면 무슨 말이든 듣게끔 되었다.

  때마침 나라에는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 백성들이 많이 죽고 더욱이 명종 십년 여름에는 

왜구(倭寇)가 영암(靈岩) 달량성(達梁城)에 쳐들어와 민심이 매우 흉흉하였다.  그러자 보우는 

대비에게

  "지금 국사가 다난하고 민심이 흉흉하옴은 붕당만을 일삼는 유림 정치 때문에 그러한 것

이옵니다.  대비마마께서는 나라를 생각하시와 국정을 쇄신하고, 승과(僧科)를 두어서 크게 

불교를 융흥시키소서."

  "좋은 말이오.  불사는 조종조(祖宗朝) 때부터 모두 행하여 오던 일이니 이제 불사로써 나

라에 새 기운을 불어 넣어야겠소."

  대비의 생각은 보우보다도 더 적극적이었다.  당장에 대비는 언서를 임금에게 보내어 승

과(僧科)를 새로 설정하여 중들에게도 과거를 보이도록 하라고 분부를 내렸다.

  이때로부터 정능(靖陵) 옆에 있는 봉은사(奉恩寺)를 선종(禪宗)의 도회소(都會所)로, 또 광릉

(光陵) 옆에 있는 봉선사(奉先寺)를 교종(敎宗)의 도회소로 정하고, 여기서 다른 과거와 마찬


가지로 승과회시(僧科會試)를 보일 때, 강경제술(講經製述)을 치르게 하면서 이에 합격한 자

에게는 각각 중의 계급을 주었다.  이래서 각 지방의 사찰마다 이 승과에 응하려는 중들의 

독경소리가 들려나오게 되었고, 또 선방에서는 열심히 공부하는 중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경을 보고 유림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조정은 물론 성균관의 

유생들까지 들고 일어났다.  요승 보우를 처단하라고 나섰다.

  "요승 보우는 국정에 간섭하여 나라일을 그릇 치고 있소.  즉시 그의 관직(都大禪師)을 삭

탈하고 죄를 주도록 하오."

  매일같이 이러한 상소문이 빗발치듯 임금 앞에 날아 들었다.  임금은 입장이 거북했다.  

임금도 보우의 행동을 매우 괘심하게 여겨오던 터였다.  욕심 같아서는 당장 처단해 버리고 

싶지만 그러나 그의 뒤에는 대비가 앉아 있으니 섣불리 건드릴 수 없었다.  임금도 조신(朝

臣)들과 함께 다만 보우를 처단할 기회만이 오기를 엿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러던 중 대비가 중한 병으로 드러눕게 되었다.  보우를 몰아낼 좋은 기회가 온 것이었

다.  임금은 대신들의 공론에 따라서 곧 보우를 제주도로 귀양을 보낸 다음, 제주 목사(濟州

牧使)에게 비밀히 전하여 그를 죽이도록 했다.  제주 목사 변협(邊協)은 매우 꾀가 많은 사

람으로 그는 장사단(壯士團)이란 것을 만들어 가지고 보우와 함께 힘겨루기를 시켜서 보우

를 매맞치어 골병이 들게 했다.  보우는 시름 시름 앓다가 소문도 없이 죽었다.  얼마 후 대

비가 병이 완쾌되어 다시 보우를 찾았지만 제주 목사로부터는 병사(病死)라는 보고가 올라

왔을 뿐이었다.


  [ 外戚의 싸움과 垂簾廳政 ]   <물결은 잠자고>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外戚의 싸움과 垂簾聽政 

    물결은 잠자고 



   윤원형은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서 무수한 사람들을 치워버리고 그 후에도 여러 

정적(政敵)들을 없애고 드디어 독세도(獨勢道)로 정사를 전횡해서 그 폐해가 한두가지가 아

니었다.

  아직 유충하던 명종도 차차 지각이 나자 국가 대세를 살피고, 외숙 윤원형의 전횡을 근심

하다가 드디어 다른 세력을 세워 윤원형의 진횡을 억압하려고 종친이며 자기의 처족이 되는 

이양(李樣)을 끌어들여 이조판서라는 요직에 앉혔다.

  이양은 명종의 왕비 인순 심씨(仁順沈氏)의 외숙으로서 그러니까 왕비 심씨는 그의 생질

의 따님이 되는 셈이다.

  한 번 임금이 이양을 두둔해 준다는 소문이 나자 그의 밑으로 모여드는 자가 나날이 늘어

서 미구에 윤원형을 대적할 만한 세력이 형성되었다.  이로써 조정은 다시 윤원형 일파와 

이양의 일파가 서로 맞붙어 싸우게 되었다.  그런데 이양은 그 인물이 교만방자해서 차츰 

그 하는 행동이 원형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다.  이양은 시험관을 매수해서 자기의 

아들 이정빈(李廷賓)에게 장원을 시키는가 하면, 또 돈을 주고 과거에 합격한 신사헌(愼思獻)

을 두둔하여 자기의 심복을 만드는 등 그 방자하고 협잡스런 행동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

경이었다.

  먼저 사림(士林)에서 이러한 사실을 가지고 자기들의 절개를 지키며 이양에게 반기를 들

고 영합(迎合)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 또 이양은 이양대로 사림들을 못마땅히 여겨 그들을 

배척해서 장차 큰 사화를 일으킬 듯한 형세를 자아냈다.

  이양은 자기의 심복인 윤백원(尹百源), 이감(李戡), 권신(權信), 신사헌, 이영(李翎) 등과 더

불어 어떻게 하면 윤원형의 세력을 꺾고, 또 사림들마저 일망타진을 하나 의논하기에 영일

(寧日) 없는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이때부터는 임금도 협잡으로 말썽만 부리는 이양에게 

실망을 느끼고 다시 중전의 오라버니 되는 심의겸(沈義謙)에게 새로 기대를 걸고 있었다.

  심의겸은 전부터 임금의 근심을 덜어드리고 조정의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서 자기의 외종

조(外從祖)되는 이양을 치워버리고 사람들과 깊이 사귀어 오던 터였다.  심의겸은 한 번 임

금의 밀지(密旨)를 받게 되자 우선 자기와 인척관계가 되는 부제학(副提學) 기대항(奇大恒)을 

찾아가 이양을 탄핵할 시기가 왔다고 알렸다.  다음날 기대항은 어전에 나아가 

  "이조판서 이양은 돈만 알고, 군신의 의도 모르는 자입니다.  자기에게 아부 않는 사람을 

해치고자 할 뿐 아니라 자기의 당파를 만들어 조정을 일망타진하려 합니다.  그대로 두면 

훗일 큰 화를 입을 것입니다."

하는 탄핵의 제일성을 발했다.  한 번 이런 탄핵의 소리가 떨어지자 윤원형의 일파들도 잇

달아 일어나서 이양을 쳤다.

 한 동안 세력이 당당하던 이양도 여기에는 배겨낼 수가 없어 강계(江界)로 이 세상을 떠났

다.  이래서 또 조정은 어제까지 좋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쫓겨나고 새로운 사람들이 들

어오고 있었다.

  세월은 흘러 마침내 문정대비가 오래 병석에 누워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제는 윤원형

이 몰락할 차례였다.  그전까지는 대비의 세력이 무서워 입을 봉하고 있던 사람들마저 한 

번 윤원형에게 공격의 화살이 떨어지자 여기 저기서 들고 일어나 마치 조정 안은 벌집을 쑤

셔놓은 것처럼 떠들썩했다.  한결같이 극형에 처하라는 소리 뿐이었다.  그러나 임금은 

  "윤원형은 무도한 죄인인 줄은 과인도 짐작하는 바이지만 그는 과인에게 외숙이 되는 사

람이오.  외숙을 어찌 처단할 수 있소.  다만 윤원형의 관직을 삭탈하고 시골로 보내도록 하

오."

하는 명령을 내렸다.  윤원형은 원한을 품고 사람들의 복수가 두려워 밤에 몰래 애첩 난정

을 데리고 황해도 강음(江陰)으로 내려갔다.

  이보다 조금 앞서 임금은 오직 하나밖에 없던 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를 잃었다.  이때 

세자의 나이는 불과 십삼세, 임금은 기가 막혀서

  "나라에서 지난번 을사년(乙巳年)에 무죄한 사람들을 죽였으니 나라 꼴이 바로 되어갈 수 

있겠는가?"

  이렇게 탄식하며 때로는 술을 마시고 울기도 했다.  어느 때는 조정의 일도 보지 않고 궁

중 깊이 들어 앉아서 조신(朝臣)들의 애를 태우기도 했다.  그러자 문정대비는 또 손자를 새

로 얻어보겠다고 명종의 후궁을 많이 몰색하여 들였다.

  문정대비가 돌아간 이년 뒤에 명종도 병석에 눕게 되었다.  병이 차츰 위독해지자 임금은 

영의정 이준경(李浚慶), 영부사(領府事) 심통원(沈通源), 병조판서 원곤(元 ), 도승지 이양원

(李陽元) 등을 불러들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서 임금은 눈을 뜨고 뭐라고 말하고자 하

나 말이 되지 않았다.  임금은 끝내 말 한 마디 못하고 그대로 승하였다.  재위 이십이년, 

때에 임금의 춘추는 삼십사세란 장년이었다.

  이제 궁중의 어른이라고는 인순왕후 심씨 뿐이었다.  인순왕후는 매우 덕스러운 분으로 

문정대비와 달라서 정사에 관여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하나밖에 없던 소생인 순회

세자를 잃은 뒤로는 가끔 명종과 후사에 대해 이야기가 있었던 듯 대신들이 왕위 계승할 사

람을 상주할 때 인순왕후는 곧 전교를 내렸다.

  "전에 덕흥군의 제삼자 하성군(河城君)을 양자로 삼으라는 말씀이 계시었소."

  이로써 도승지 이양원, 동부승지 박소립(朴素立), 주서 황대수 등이 사직동 덕흥군의 저택

으로 하성군을 모시러 갔는데 이 하성군이 바로 이조 십사대 왕 선조(宣祖)이다.


  [ 榮華를 좇는 사람들 ]   <致誠 三千里>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榮華를 좇는 사람들 

    致誠 三千里 



   선조(宣祖=西紀 1,567-1,608)는 나이 십육세로 등극하였다.  뜻밖에 임금의 자리에 앉게 

된 선조는 처음 얼맛동안은 양모인 인순대비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을 받았다.  그러나 인순

대비가 몇 달 안가서 스스로 정사를 상감에게 돌려보낸 후부터는 영상(領相) 이준경의 도움

을 받아 초정(初政)에서 많은 선정을 베풀었다.

  우선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죄 없이 쫓겨난 사람들을 전부 석방하고 죽은 사람들에게는 

관작을 회복시켜 주도록 교지를 내렸다.  이래서 한때 억울하게 잡혀 있던 사람들이 대개 

나와 임금의 정치를 도왔다.  이제 임금의 나이도 십팔세가 되자, 양모인 인순대비는 오라버

니 되는 심의겸을 불러 왕비를 맞을 의논을 했다.

  "여보게, 상감도 이제 나이가 찾으니 왕비를 구해야겠는데 어디 좋은 자리가 없겠나?"

  "글쎄요.  아무래도 외척을 잘 골라야 할 것입니다."

  심의겸은 전에 윤원형 등 외척들의 전횡을 많이 보아온 터라 우선 이렇게 누님 대비에게 

말했다.

  "빨리 서둘러야겠네.  정식 왕비도 책봉되기 전에 후궁들 몸에서 왕자가 먼저 태어서야 

쓰겠나?"

  대비는 후궁인 공빈 김씨(恭嬪金氏)가 임해군(臨海君)을 낳고 또 후궁 김귀인(金貴人)에게

서도 멀지 않아 왕자가 태어나리라는 소식을 듣고 하는 말이었다.

  "누님, 그렇더라도 왕비 간택은 신중히 하셔야 됩니다.  제가 알아서 잘 할 터이니 좀 더 

기다려 주십시오."

  "아무쪼록 잘 해보게."

  인순대비는 왕비 선택을 심의겸에게 일임했다.  

  심의겸은 곧 대비 앞을 물러나와 자기 당파 사람들과 의논했다.  되도록 자기와 가까운 

사람하고 국혼을 시킬 생각인데 좀체 마땅한 자리가 없었다.  그러던 중 한 번은 친구 박응

남(朴應男)이

  "우리 형님 딸이 어떻겠소?  우리 집안은 세력을 부릴 만한 사람이 없으니 좋지 않겠소?"

하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대개 여기에 찬성했다.  심의겸도

  "그럼, 어디 그렇게 해봅시다."

하고 그 길로 누님 인순대비를 찾아가 박응남의 형 박응순(朴應純)의 딸을 천거했다.  이리

하여 곧 박씨가 왕비에 책봉되고 심의겸의 지반도 더욱 공고해지게 되었다.

  선조 오년(1,571년)에 영상 이준경이 세상을 떠났다.  이준경의 죽음은 나라를 위하여 불

행한 일이었다.  이준경으로 말하면 전에 퇴계(退溪)가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지금 신하 가운데 의지하시고 믿을 만한 사람은 영의정 이준경 뿐인 줄 아뢰오."

할 만치 그는 당대의 명상이었다.  이준경은 죽은 뒤 그의 아들 이덕열(李德悅)은 자기 아버

지가 세상을 떠날 때 적어 놓은 것이라하여 유차(遺箚) 한 장을 올렸다.  그 유차는 이러했

다.

  < 지금 조신들은 큰 소리만 하면서 서로 붕당을 일삼으니 이것이 나중에는 반드시 나라

의 화근이 될 것입니다. >

  임금은 붕당이 생긴다는 말에 찔끔했다.  이것을 듣고 이이(李珥)는 글을 올려

  < 대저 사람이 죽을 때에는 착한 말을 하는 법인데 이제 이준경이 죽을 적에는 악한 소

리를 하였소. >

  이런 격렬한 말로 이준경을 공박했다.  삼사(三司)에서도 이준경이 쓸데없는 소리를하여 

천청(天聽)을 현혹시켰으니 죄 주는 것이 옳다고 대들었다.

  그러나 수찬(修撰) 유성룡(柳成龍)만이 홀로 이 말에 참여하지 않고

  "대신이 죽을 때 올린 말이 옳지 못하다면 그 말을 물리치는 것은 모르지만 죄를 주기까

지 하는 것은 너무 과하지 않은가."

하였고 좌의정 홍섬(洪暹)도

  "이준경이 생전에 공이 많은데 죄 주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므로 이 의논은 그만 두게 되었는데 이런 일이 있은지 몇 해 뒤에 과연 이준경의 말대로 

조정은 붕당의 싸움터로 변했다.

  이 무렵 임금 선조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는 후궁으로 김귀인이 있었다.  김귀인은 원

래 상주(尙州) 시골 태생으로 인순대비의 궁에서 무수리 노릇을 하고 있다가 임금의 눈에 

들어 사람을 받게 된 것이다.  이 김귀인이 아들을 낳자 임금은 인빈(仁嬪)으로 승격시켰다.

  왕비 박씨한테서는 아직 소식도 없는데 먼저 얻은 공빈(恭嬪) 김씨는 벌써 아들만 둘을 

낳았고 이제 또 인빈 김씨가 아들을 낳았다.  인빈은 공빈이 자기보다 먼저 아들을 둘이나 

낳은 것이 좀 불만이었지만 임금의 사랑을 한몸에 지니었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인빈의 그 모란꽃같이 환하게 잘 생긴 얼굴은 언제나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임금은 

인빈이 아들을 낳은 뒤로 더욱 그 발길이 잦았다.  인빈이 옆에 있어야만 임금의 마음은 즐

거웠다.

  오늘도 임금은 지루한 정사를 마치고 인빈의처소로 발길을 옮겼다.  부액해 바치던 시위

들이 물러나자 방안에는 임금과 인빈만이 남았다.  조용한 침실이었다.  임금은 젊은 여인의 

가느다란 허리에 팔을 드리워 강하게 끌어당겼다.

  "상감, 누가 보옵니다."

  "보긴 누가 봐, 너와 나 단 둘 뿐인데..."

  임금의 포옹은 더 한층 강렬해지고 지극히 행복스런 유열 속에 두 남녀는 시간이 흐르는 

줄을 몰랐다.  이날 밤, 만뢰가 고요한 한밤중 임금과 인빈의 침실 안에서는 도란도란 얘기

소리가 새어나왔다.

  "상감, 어린 왕자를 위하여 불공을 드려볼까 하나이다."

  "좋을 대로 하지, 뭐 그런 것까지 다 내게 허락을 맡노?"

  "아니옵니다.  불공을 드릴려면 초가 있어야 하오니 황랍(黃蠟) 오백근만 내려 주십시오."

  "오백근?  그렇게 많이 드나?"

  "그러하옵니다."

  사실인즉 인빈은 자기의 소생으로 왕위를 계승시킬 생각이 간절하여 부처님 앞에 자기 소

생의 수명장수를 빌어 보자는 생각이었다.

  이튿날 임금은 내수사별좌(內需司別座) 김공량(金公諒)을 시켜 황랍 오백근을 인빈의 처소

로 들여보내라 일렀다.  김공량은 인빈 김씨의 오라버니다.  그는 소문이 나면 시끄러울 줄 

알고 은밀히 황랍을 바리바리 실어 인빈에게로 보냈다.  황랍 오백근은 곧 초로 변하여 조

선 팔도에 흩어져 있는 명산대찰로 흘러 들어가 불사를 하는데 쓰여졌다.  그리고 인빈 김

씨는 서울 근처의 절에 나가 부처님 앞에 엎드려

  "이 어린 왕자에게 소원성취하옵도록 복을 내려 주옵소서."

하고 빌고, 한편 자수원(慈壽院)의 비구니들을 시켜서는 금강산에 들어가서 유점사, 장안사 

등 큰 절에 불공을 드리라고 명했다.

  이러한 불사는 물론 어디까지나 은밀한 가운데 진행되었지만 그래도 한입 건느고 두입 거

너서 그 소문은 점점 퍼지기 시작하여 마침내 이 소문은 선비와 조정에 벼슬하는 사람의 귀

에까지 들어갔다.

  "인빈이 아들을 위하여 불공 드린다고 황랍을 가져다가 초를 만든다지."

  "인빈의 목통과 담이 여간 아니야."

  "황랍 오백근을 바리바리 실려서 금강산 일만 이천봉 봉우리마다 촛불을 켜놓고 천일 기

도를 드린다나."

  "뭐 황랍 오백근태미나?  그래 대간(臺諫)들은 가만히 보고만 있나?"

  이러한 소문이 물끓듯 조야를 뒤덮자 사간원에서 먼저 글을 들고 일어났다.

  <전하, 황랍을 무엇에 쓰시려고 오백근태미나 들여가셨습니까?  항간에서는 여러 가지 소

문이 떠돌고 있습니다.  쓰는 용도를 밝히어 사람들의 의혹을 풀도록 하십시오.>

  이러한 간관들의 상소가 임금 앞에 올려졌다.

  "내수사 물건을 내 마음대로 쓰는데 간원에서 무슨 시비인가?  이것은 일반 사람이 알지 

않아도 무방하다."

  임금은 간단히 일축해 버렸다.  그러나 간관들은 또 다시 상소를 올렸다.

  <지금 궁중에서는 많은 황랍이 필요 없는 줄아옵니다.  이곳에는 필시 좋지 못한 일과 구

부러진 길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나이다.  어찌하여 그 쓰시는 길을 밝히지 아니하옵니까?>

  이 말을 들은 젊은 임금은 언성을 높여 호령했다.

  "기막힌 일이다.  안에서 쓰는 물건에 대하여 신하들이 이렇게 참견을 하니 어쩌자는 건

가?"

  옳은 길로 임금을 인도하려던 간관들은 이 열화와 같은 임금의 노여움에 모두들 움찔했

다.  마침내 대사간(大司諫) 이이(李珥)는 사직서를 정원에 바치고 비장한 상소를 했다.

  <근자 밖에서는 나라에서 불상(佛像)을 만드느니, 불사를 크게 이룩한다느니 하는 말이 떠

돌고 있던 중 마침 황랍을 안으로 들이라는 말씀이 계시니 어찌 백성들이 의심하지 않으오

리까.  앞서 신등이 여러 차례 간하는 상소를 올린 것은 해와 같이 정대한 전하의 입장을 

밝혀서 백성들의 모든 의심을 끊어버리려한 것이온데,  전하는 간관들이 승순(承順)치 못하

다 해서 크게 마음이 아프셨다 하오니 슬픈 일이옵니다.  아무쪼록 신의 무리 중 부족한 자

를 쫓아내서 뒤사람을 징계하옵소서. >

  이 말을 듣고 있던 임금은 더욱 노기를 띠며 소리를 질렀다.

  "내가 부처를 만든다는 소문을 누구에게 들었는가?  내가 친히 잡아서 국문(鞠問)코자 하

노라."

  임금은 대사간 이이의 사직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이때로부터 임금과 이이의 사이는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있은지 얼마 후의 일이었다.  사헌부의 대사헌의 명을 받든 헌부 서리들이 금

강산으로 치성을 떠난 자수원 비구니들을 잡아 올렸다.  그리고는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가 

들고 일어나

  "황랍 오백근을 대궐 안으로 들여간 것은 금강산에 비구니들을 보내서 치성하느라고 쓴 

것이 분명하오.  헌부 서리들 손에 비구니들이 잡힌 것을 부면 증거가 확실하오."

  이렇게 황랍 오백근을 쳐들어 말하니 성균관을 위시하여 팔도의 향교(鄕校) 선비들도 벌

떼처럼 상소를 올려 들고 일어났다.  여기에는 임금도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임금은 할 수 

없이 내수사별좌 김공량을 불러 넌지시 일렀다.

  "아무도 모르게 황랍 오백근만 더 마련해 들여 보내라."

  임금은 이렇게 영을 내린 뒤에 양사와 모든 선비들에게

  "비구들이 금강산으로 치성을 드리러 간 것은 내가 사실 모르는 일이니, 과히 나를 책망

하지 말라.  그대들이 하도 의심하니 황랍 오백근은 도로 내수사로 내보내기로 한다."

  임금 선조는 마침내 황랍 오백근을 내수사에 도로 내보내는 형식을 취하여 나라의 여론을 

가라앉게 했다. 그러나 인빈 김씨는 양사(兩司)를 위시하여 모든 선비들에게 앙심을 먹었다.


  [ 榮華를 좇는 사람들 ]   <비단 이불에서 싹튼 分黨>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榮華를 좇는 사람들 

    비단 이불에서 싹튼 分黨 



   선조 팔년, 당시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참변으로 죽은 김종직(金宗直)의 제자 김근공(金謹

 )의 문하생으로 김효원(金孝元)이란 명망 있는 수재가 있었다.  김효원은 심의겸보다 일곱

해 아래 되는 나이로 심의겸과 친분이 두터웠다.

  심의겸이 아직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의 벼슬로 있을 때였다.  어느날 공사(公事)로 인해

서 당시 영의정이던 윤원형(尹元衡)을 만나러 그 집으로 찾아갔는데 그때 윤원형은 아직 자

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청지기는 그를 작은 사랑으로 인도했다.  심의겸이 사랑에 들어가 

보니 아랫목에는 매우 화려한 이부자리가 깔려 있었다.  심의겸은 어떤 손님이 와서 묵는가 

하고 청지기에게 물은 즉 청지기의 대답이

  "건천동 서방님의 침구입니다."

하는 것이었다.  건청동 서방님이란 윤원형의 첩 정난정(鄭蘭貞)의 친정 당질녀서(堂姪女 )

되는 김효원을 말함이었다.

  이때 윤원형의 첩장인(妾丈人) 정윤겸(鄭允謙)의 종손녀서(宗孫女 )되는 김효원은 그 처당

고모 즉 윤원형의 첩 난정의 사랑을 받아서 늘 그 집을 드나들던 터였다.

  청지기에게 이 말을 들은 심의겸은 김효원이 사림(士林)에게 쟁쟁한 이름을 가진 명망 있

는 선비로서 세도 재상의 집 사랑에 쫓아다니며 아첨하기 위해서 금침까지 끌고가서 묵는다

는 것으로 해석하고 이때부터 김효원을 마음 속으로 매우 비열한 인물이라 생각하게 되었

다.

  그 후 김효원은 등과해서 재명(才明)이 날로 높아갔다.  때마침 이조전랑(吏曹銓郞) 오건

(吳健)이 사직하게 되자 그 후임자를 추천하게 될 때에 김효원이 지목되었다.  이조전랑이란 

벼슬은 비록 고위직(高位職)은 아닐지라도 그 직책이 내외 관직의 추천과 출석 등 중요한 

직책을 맡은 일인 때문에 당시 명망 있는 인물이요, 똑똑한 자격을 가진 자가 아니면 쓰지 

않았던 것이다.

  오건은 김효원의 재질을 사랑해서 그를 후임자로 천거했더니 당시 이조참의(吏曹參議)이

던 심의겸은 전날 김효원이 이부자리를 끌고 세도재상의 집 사랑을 쫓아다니던 일을 끄집어

내서 말하고 지개(志介)가 그와 같이 천박하고 야비한 인물이니 아직 그 자리에 서지 못할 

사람이라고 반대했다.  이래서 김효원은 창피만 당하고 낙선되었다.  그러나 김효원을 동정

하는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은 가만히 있지 않고

  "심의겸이 오래전 일을 들추어서 후진의 앞길을 막는 것은 권세를 남용하는 것이다.  그

는 국척(國戚)으로서 국정에 지나친 간섭을하여 인재등용을 방해한다."

라는 반박을 했다.

  수년 후에 김효원은 결국 이조전랑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상당한 공적을 쌓은 후 그 자

리를 떠나는데 후임자로 심충겸(沈忠謙)의 말이 나왔다.  심충겸은 의겸의 아우이다.  전부

터 외척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싫어하던 신진사류들은 불만을 품고 반대했다.  특히 김효

원은 정면으로 반대했다.  김효원은 예전 심의겸이 자기를 반대하던 일을 생각하고 다른 사

람을 천거했다.  심의겸은 김효원의 태도에 매우 분개하여

  "옳든 그르든 나와 혐의하면 혐의했지 내 아우에게까지 혐의를 옮기는 것은 소인의 하는

짓이다.  외척이라도 원흉가(元兇家)의 문객보다는 낫지 않은가."

하고 비꼬았다.

  이때부터 당론은 갈라져서 김효원을 동인(東人)이라 하고 심의겸을 서인(西人)이라 하였다.  

우의정 박순(朴淳) 같은 사람은 원로이면서도 심의겸의 편을 들었고 대사간 허엽(許曄)은 김

효원보다 훨씬 선배이면서 김효원 편을 들어 조정은 완전히 두 파로 갈라졌다.  그중 김계

휘(金繼煇), 정철(鄭撤), 윤두수(尹斗壽), 홍성민(洪聖民), 이해수(李海壽), 구사맹(具思孟), 신응

시(申應時), 이산보(李山甫) 등은 서인 중의 쟁쟁한 인물들이고, 동인에는 김우옹(金宇 ), 허

엽, 유성룡(柳成龍), 이산해(李山海), 이발(李潑), 우성전(禹性傳), 이성중(李誠中), 허봉(許 ) 등

이 있었다.  이것을 을해분당(乙亥分黨)이라 부른다.



   이때에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부제학으로 있으며 조정의 분당을 매우 근심하여 이를 

제거한다고 심의겸을 개성유수(開城留守), 김효원을 삼척부사(三陟府使)로 내보냈다.  그래도 

조정의 당파 싸움은 여전하여 이이는 하는 수 없이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선조(宣祖)는 다시 이이를 불러들여 대사헌, 병조판서 등 중직을 맡겼다.  이이는 우

선 동인 이발과 서인 정철에게 편지를 보내서 

  "두 분이 마음을 합해서 나라일에 힘 쓰시오."

하고 권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도리어 이이를 보고 공연히 어물어물하기만 한다고 불쾌히 

여기고 듣지 않았다.  특히 동인 편에서는 율곡이 중립인물(中立人物)이 아니고 서인편인즉 

그의 말을 좇다간 서인의 세상이 올 것이라고들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 조정에 있는 

서인들은 대개 율곡의 문인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친구들이었던 까닭이다.  한편 서인쪽에서

는 또 율곡의 중립적 태도를 평하여

  "천하에 어찌 두가지 일이 모두 옳고 두가지 일이 모두 그른 법이 있을 수 있느냐."

하고 은연중에 율곡이 서인편을 적극적으로 두둔하지 않는 것을 불만히 여겼다.

  그러던 중 선조 십팔년에 이이가 세상을 떠났다.  이이가 조정에 있을 때는 그래도 그의 

힘으로 서인들이 득세했었다.

  그러나 일단 이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때까지 상주(尙州)에서 한가로이 지내던 동

인의 거두 노수신(盧守愼)이 들어와 영의정이 되고 이산해는 이조판서, 유성룡은 예조판서가 

됨으로써, 갑자기 동인의 세력이 조야에 팽창하고 서인이 밀려나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동인들의 세상이었다.  그들은 먼저 서인의 원흉(元兇)인 심의겸을 탄핵하기 

시작했다.

  "청양군(靑陽君) 심의겸은 전날부터 박순, 정철, 신응시, 김계휘, 윤두수, 박응남(朴應男) 등

과 붕당을 만들고 권세를 부려 조정을 혼란시켰소.  응당 관직을 삭탈하여 엄중한 죄를 주

어야 하오."

하고 들고 일어났다.  임금은 심의겸을 죄 주고 싶지 않았으나 동인들에게 눌리어 어찌할 

수 없었다.  이때는 이미 인순대비도 세상을 떠난 뒤라 심의겸은 안으로부터의 원조도 받을 

수가 없었다.  붕당의 원흉은 마침내 파직을 당하고 그 후 얼마 안 가서 곧 세상을 떠났다.

  심의겸이 쫓겨난 뒤로 동인들은 더욱 득세하여 서인들을 압박하고 규탄하였다.  이러다가 

마침내 기축역옥(己丑逆獄)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 기축역옥은 정여립(鄭汝立)이란 일개 선

비의 반항으로 일어난 것이다.

  정여립은 전주(全州) 사람으로서 총명하고 말을 잘하므로 일찍이 이이가 천거하여 그를 

수찬(修撰)을 삼았다.  정여립은 이이를 항상 공자(孔子)에게 비교하여 높이 받들었다.  그러

나 이이가 죽은 뒤로는

  (이제 동인의 세상이 되겠구나!)

  재빠르게 판단하고 동인의 거두 이발과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하지만 정여립은 동인들

이 자기를 서인 이이의 제자라고 해서 배척하려는 기미가 보이자, 일찍이 스승으로, 은인으

로 섬기어 오던 이이를 비방하기 시작하여, 경연(經筵)에서 터무니없는 말로 이이를 험뜯으

니 임금도 놀라

  "정여립은 전에 이이를 스승으로 섬기더니 이제는 그 스승을 욕하는가?"

하고 그를 나무랐다.

  동인들도 비록 자기네들이 미워하는 이이라 하지만 남에게 아첨하느라고 스승을 욕하는 

정여립을 보고 모두들 간흉 소인이라고 욕을 했다.  다만 이발만이 힘써 그를 두둔하고 천

거했으나 임금도 그 후로는 정여립을 나쁘게 보아 종시 쓰지 않았다.

  이에 정여립은 벼슬을 내놓고 고향에 내려가 불평분자를 모아들여서 그들과 시국의 불평

을 말하고 타매(唾罵)하다가 마침내 반역의 음모를 품게 되었다.

  "목자망(木子亡) 정읍흥(鄭邑興)이다."

  "장차 난리가 나서 사람의 수가 아주 적어진 후에야 진인(眞人)이 나온다."

  "정씨(鄭氏)는 진인이다.  무자년(戊子年)이나 기축년(己丑年)에 난리가 난다."

  이러한 소문들이 그때 호서(湖西) 지방을 비롯하여 해서 지방에까지 파다하게 떠돌았다.  

이것은 모두 정여립이 사람들을 시켜서 퍼뜨리게 한 것이다.  기축년 구월이 되면서 황해도 

일대에서는 난리가 쉬 난다고 자못 소란하였다.

  이때 송익필(宋翼弼)이란 사람이 정여립의 모반하려는 기색을 자세히 조사해 가지고 시골 

시람들을 시켜 밀고케 했다.  고변하는 글을 황해도에서 먼저 올라왔다.  조정에서는 임금이 

즉시 편전에 나와 고변서를 앞에 놓고 대신들에게 물었다.

  "정여립이 역적질을 한다는 게 사실인가?"

  우의정 정언신(鄭彦信)은 정여립과 동종(同宗)이므로 평소부터 사이가 좋았다.  그는 임금

앞에 엎드려

  "그건 당치고 않은 말들입니다.  정여립이 한낱 독서인에 불과한데 어찌 역적질을 꾸미겠

습니까?"

할 뿐이었다.  조정에서는 계속 이 고변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다가 결국 금부도사(禁府都事)

와 선전관(宣傳官)을 보내 정여립을 잡아오도록 했다.

  한편 정여립은 밀고한 사실을 알고 진안(鎭安) 죽도로 도망했다.  그러나 팔도를 두루 찾

아서라도 기어이 잡아올리라는 어명이 내리자, 정여립은 더 숨을 길이 없어 죽도에서 스스

로 목숨을 끊어 죽고 말았다.  정여립의 시체는 곧 서울로 올려다가 반역죄로 다시 그 목을 

베게 하고 그 아들 옥남(玉男)을 국문하기 시작했다.  옥남은 이때 나이 십칠세로 날 때부터 

손에 임금 왕(王)자가 새겨져 있었다 한다.

  이 옥사를 맡은 위관(委官)은 우의정 정언신이었는데 그는 이 옥사를 맡아본지 한달이 지

나도록 결말을 내지 못했다.  그러자 서인측에서는 이번 기회에 동인을 없애고자 들고 일어

났다.  먼저 정철이

  "옥남의 죄를 국문하는 것이 너무 완만하고 지리하게 끌기만 한다.  그 까닭을 밝히라."

  이렇게 논박하고 또 백유함(白惟咸)도

  "이발(李潑)의 무리들이 정여립과 서로 결탁한 때문에 정언신이 여립의 죄상을 덮어 주려

는 것이다."

하고 신랄하게 대들었다.

  이에 임금은 정언신을 물러나게 하고 새로 정철을 위관(委官)에 앉혔다.  정철이 새로 위

관이 되어 옥사를 다스리게 되자 여기 저기서 상소문이 빗발같이 쏟아져 들어왔다.

  "정여립은 동인들과 결탁하고 반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소. 이제 그의 친당을 보면 이발, 

이길(李 ), 백유양(白惟讓), 정언신, 정언지(鄭彦智), 홍종록(洪宗祿), 정창연(鄭昌衍) 등이요."

  이것은 호남의 유생 양천회(梁千會), 양천경(梁千頃) 등이 올린 상소문이었다.

  정철은 여립의 조카 정집(鄭緝)과 호남 사람 선홍복(宣弘福)이 밀고한 것을 가지고 임금께 

아뢰었다.  

  "정언신, 홍종록, 이발, 백유양, 정언지, 이길 등은 여립과 내통한 것이 뚜렷하므로 반역죄

로 처참함이 마땅하나이다."

  임금은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이들을 곧 반역죄로 처단하고 다시 김우옹(金宇 )과 정인

홍(鄭仁弘)도 정여립과 평소에 친했다는 것으로 해서 귀양을 보냈다.  그러나 이것으로써 이 

사건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다시 경인년 오월에는 정개청(鄭介淸)이라는 전라도 유생이

  < 역적 정여립의 집터를 보아 주었다. >

는 죄목으로 잡혀 왔다.  곧 정개청을 문초하였으나 정개청이 집터를 보아 주었다는 것은 

전혀 알 길이 없고 그 대신 다른 죄 두가지가 나타났다.

  즉 그 하나는 소위 배절의론(排節義論)이다.  [배절의론]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 절의(節義)란 여사여사한 것인데 후세에 이르러서는 절의의 이름만 취하고 그 알맹이는 

잃어버렸다. >

는 뜻의 내용으로, 후세의 소위 알맹이 없는 허명의 절의를 욕한 글이었다.  글의 제목은 원

래 [배(排)]자는 없었고 그냥 [의절론]이라 했다.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는 허명의 절의를 배

척한 논이라고 죄를 만들자는 편에서는 [배절의론]이라 주장하였다.

  훗일 그의 후손이며 후생들의 변무(辯誣) 상소에는 

  <어디 거기 배(排) 자가 있습니까? 없는 배자를 억지로 붙여서 죄목을 지었습니다.>

하여 그야말로 본의를 저버린 글자의 다툼이 되었다.

  둘째 죄목은 정개청이 정여립에게

  <도(道)의 고명(高明)을 본 이는 당대에 오로지 존형(尊兄) 뿐이외다.>

라고 칭송하여 편지한 것이 발각이 난 것이었다.  그래서 임금은 노하여 사관(詞官)에게 명

하여 [배절의론]을 조목조목 들어서 공박하는 글을 짓개하여 각 향교에 돌리고

  "자기 말로는 서로 알지도 못한다더니 두 번째에는 얼굴만 서로 안다 하고, 지금 또 이런 

해괴한 편지가 나타나니 대체 도(道)는 무슨 도를 가리킴이냐?"

하여 엄벌에 처하게 하였으나 정철이 여러번 임금께 아뢰어서 귀양을 보내기로 하였다.  그

러나 정개청은 귀양 간지 한달 뒤에 죽어버렸다.  이때 죽은 이 정개청의 서원(書院)은 그 

후 삼백년간을 당쟁의 승부를 따라서 헐리었다가 다시 서고 섰다 다시 헐리곤 했다.

  그 다음 문제거리의 인물이 또 하나 생겨났다.  그는 비명(非命)에 죽었고 죽은 뒤에도 꽤 

오래 들추어져서 당쟁에 이용을 당한 인물이었다.

  일찍이 우계 성혼(牛溪成渾)의 집 근처에 한 중노인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성혼이 우연

히 그 집에 들렸더니 인물 생김이 산림처사(山林處士) 같았다.  그래서 그 뒤 율곡 이이와 

함께 또 찾았다.  이리하여 당시의 두 거유(巨儒)에게 알려진 바 되어 상계(上啓)하여 육품직

으로 지평(持平) 벼슬을 얻고 후에 경상도 진주(晋州)에 내려가 살았다.  그가 바로 최영경

(崔永慶)이다.  

  그런데 역적 정여립의 아들 옥남(玉男)의 초사 가운데 대장에 길삼봉(吉三峯)이란 사람이 

있었다.  하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길삼봉이란 실물은 없었다.  그런데 그 뒤 차차 어디서 난 

소문인지 길삼봉이 아니라 최삼봉(崔三峯)이라는 말이 돌았다.  한데 우연히도 최영경의 호

가 삼봉(三峯)이라 이 때문에 최영경은 서울로 잡혀왔다.

  원래 최영경은 정철과 사이가 좋지 않아 전부터 정철을 비방하였다.  그런 일이 있었던 

만큼 최영경이 옥에 갇힌 날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일부러 위관(委官) 정철을 조용히 

만나서 그의 심경을 물었다.  그러자 정철은 변색을 하면서

  "평소에 영경이 나를 욕했다 하지만 사혐(私嫌)으로써 어찌 역옥(逆獄)을 다스리랴."

하고 애써 풀어 주어 최경영은 일단 백방이 되었다.  그런데 그 뒤 이상한 시(詩) 한 구절이 

발견되어 최영경은 다시 문초를 당하게 되었는데 이때 몸이 쇠약하여 옥중에서 죽었다.  이

로써 일단 기축역옥(己丑逆獄)은 끝났다.


  [ 榮華를 좇는 사람들 ]   <野望山脈>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榮華를 좇는 사람들 

    野望山脈



   기축역옥(己丑逆獄)이 있은 뒤로 붕당의 세력은 바뀌었다.  이발(李潑)을 중심으로 세력을 

떨치던 호남 지방의 동인은 완전히 없어지고 오직 유성룡을 중심으로 한 영남지방의 동인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어느 때부터인지 호남 지방의 동인들을 북인(北人)이라 하고 영남지방 

동인을 남인(南人)이라고 불렀다.

  선조(宣祖)는 기축년 옥사 때 정철의 힘으로 호남지방의 동인을 전부 몰아내고 이제 남은 

세력 중 북인 이산해(李山海)를 영의정으로 삼고 서인 정철을 좌의정, 남인 유성룡을 우의정

을 삼아서 붕당을 공평히 해보고자 했다.

  그러나 기축역옥 후 조정의 명망은 서인 정철에게로만 모두 쏠렸다.  이산해는 영의정으

로서 정철에게 장차 떨려날 것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이때 후궁에서 임금의 총애를 독차지 하고 있던 인빈 김씨의 세력은 왕비 박씨를 능가했

다.  왕비 박씨는 아들을 하나도 낳지 못하는데 인빈은 황랍 오백근으로 크나 큰 말썽을 일

으킨 후 계속 아들만 사형제를 낳았고 또 딸 다섯형제를 내리 낳았다.  왕비 박씨에게서는 

아들이 하나도 없는데 왕자 사형제와 딸 다섯을 낳았으니, 인빈의 의기는 자못 양양했다.

  후궁 속에는 인빈 김씨보다도 먼저 임해군(臨海君)과 광해군(光海君)을 낳은 공빈(恭嬪)이 

있으나, 여러 해 전에 세상을 떠났고 다음에는 순화군(順和君)을 낳은 순빈(順嬪)이 있고, 인

성군(仁成君)과 인흥군(仁興君)을 낳은 정빈(貞嬪), 흥안군(興案君)과 경평군(慶平君)을 낳은 

온빈(溫嬪)이 있으나, 임금 선조의 귀염은 인빈 김씨가 독차지를 했다.  임금 선조는 인빈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곧이 들을 지경이었다.

  인빈 김씨의 세도가 높아가니 내수사별좌 김공량(金公諒)의 세도도 누이의 세도를 따라서 

광채가 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동정을 자세히 살피게 된 영의정 이산해는 정철의 세력을 

억제하는 길은 내수사별좌 김공량과 친해서 인빈 김씨를 가까이 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리하여 이산해는 김공량을 그의 집으로 자주 찾아왔다.  당대의 영의정이 일개 

별좌의 집을 찾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산해는 자기들의 일파가 세력

을 잡기 위해서는 그런 것도 관계치 않았다.

  어느날 밤, 이날도 이산해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느라고 밤이 깊어서 선비 복색을 하고 

상노 아이 하나만 데리고 김공량을 찾아보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인정(人定)이 

친 뒤인지라 어둠 속에서 순라(巡羅)꾼이 나타나서

  "누구냐?"

하고 호통을 치며 덤벼드는 바람에 영의정 이산해는 몹시 당황했다.  이 꼴을 하고 영의정 

아무개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아니 왜 대답을 못하는 거냐?  꿀먹은 벙어리냐?"

  순라꾼은 말을 마치자마자 달려들어 영의정의 멱살을 잡고 눈을 딱 부릅떴다.  이산해는 

얼떨김에 다급해져서

  "나는 영의정일세."

하고 신분을 밝혔다.

  순라꾼은 잠간 멈칫하다가 상노의 손에서 등불을 빼앗아 들고 얼굴로 가까이 가져다댔다.  

환한 불빛에 눈이 부셔 영의정은 고개를 돌렸다.  복색은 비록 미복(微服)이지만 망건 편자

에는 옥관자(玉貫子)가 붙어서 불빛에 찬란했다.

  "정말 대감이십니까?"

  순라꾼은 슬며시 뒤를 두며 물었다.

  "그러네.  틀림없는 영의정일세."

  "대감께서 이 밤중에 무슨 일로, 더구나 구종별배(驅從別輩)도 안 데리시고 평교자(平轎子)

도 안타시고 이복 차림으로 다니십니까?"

  "그저 그럴 일이 있어서 그러네."

  이산해는 억지로 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대감께서도 나라법은 지키셔야 합니다."

  이런 순라꾼의 훈계를 듣고 이산해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이후 이 소문은 온 장안에 퍼져서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영의정이 인빈 김씨의 오라비 김공량을 찾아다니다가 순라꾼에게 잡혀서 큰 봉변을 당했

다니."

  "나라가 망해도 분수가 있지.  영의정이 무엇이 부족해서 김공량이한테 아첨하러 돌아 다

니는 건가?  에이 더러워..."

  선비들은 이렇게 탄식했다.


   한편 새로이 좌의정이 된 정철과 우의정이 된 유성룡은 포부가 많았다.  이들은 서로 만

나서 일을 의논하다가 유성룡이 먼저 말을 꺼냈다.

  "지금 정궁(正宮)에는 일점 혈육이 없으신데 상감께선 후궁들만 너무 가까이 하셔서 왕자

가 열 세 분이나 되니 이 일을 장차 어찌하오."

  "글쎄 나도 거기 대해 많이 생각해 보고 있소.  정궁(正宮)에 아들이 계시다면야 이 어른

이 동궁(東宮)이라 아무런 걱정이 없겠지만..."

  좌의정 정철도 동감이라는 듯이 얼굴에 근심의 빛을 띠운다.

  "좌의정 대감, 우리가 이 기회에 동궁을 속히 모시도록 상감께 아룁시다.  우선 나이 많은 

왕자로 동궁을 세워 민심을 안정시키도록 함이 어떻겠소?"

  "대단히 좋은 말씀이요.  원자(元子)가 안 계시니 동궁을 봉한다면 여러 왕자 중에서 순서

대로 나이 많은 왕자로 동궁을 세워야 할 것이요."

  정철의 찬동하는 말을 듣고 유성룡은 마음이 헝그러워졌다.

  "그럼 이 사람은 곧 영의정 대감을 만나 내일이라도 상감께 동궁 책봉을 건의하자고 말을 

하겠소."

  유성룡은 벌써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글쎄 영의정이 찬동할까?"

  정철의 근심어린 대답이었다.  유성룡은 의아해 하는 눈치로 정철을 보며

  "어째서 영의정 대감이 안 듣겠소?"

  "영의정은 지금 김공량이 하고 가깝소.  공량이는 인빈의 오라비 아니요?  인빈에게는 장

성한 왕자가 여럿이 있는데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첫째 왕자 임해군의 어머니 공빈은 

불행히 돌아가서 없지 아니하오,  그러니..."

  "안 될 말씀.  우리는 장유유서(長幼有序)의 대의 명분을 찾아 임해군을 동궁에 세우자는 

것이요.  어찌 이런 일에 친하고 안 친하고가 있겠소?"

  유성룡은 정색을 하고 대답한다.

  "물론이요.  그러나 세상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으니 걱정이요."

  "그럼 우리 둘이서 영의정 대감을 찾아가 그의 의향을 물어봅시다."

  "좋소."

  이리하여 좌의정 정철과 우의정 유성룡은 영의정 이산해를 찾아갔다.  영의정의 집은 으

리으리하였다.  우선 큰 사랑에 들어가 보니 아랫목에는 비단 보료를 깔아놓고 뒤에는 비단 

병풍을 둘러쳤다.  정철과 유성룡은 주인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앉아 있었다.  얼마 후 주인 

이산해는 명주 옷으로 위 아래를 감고 들어서며

  "두 대감께서 어떻게 이렇게 찾아 오셨소?"

  좌의정 정철은 좋은 일이라면 시각을 지체지않고 기어코 성사를 해보려는 성벽이 있었다.

  "영의정 대감!"

하고 정철은 자기네들이 찾아온 목적을 대강 설명하기 시작했다.  정철의 얘기를 다 듣고난 

영의정 이산해는

  "응당 동궁을 책립하자면 제일 왕자인 임해군이 동궁이 될 것이지만, 그러나 아직 중궁께

서 젊으셨으므로 상감께서는 혹시나 하고 아들 낳기를 기다리고 계실는지도 모르오.  그러

니 이제 우리가 공연히 이 말을 드리면 도리어 어떻게 생각하실는지..."

하고 난색을 보였다.  그러나 성급한 정철은

  "아니, 상감께서 올해 춘추가 사십이신데 무엇을 더 기다려 본다는 말이요?"

하고 우겨댔다.  옆에서 유성룡도

  "영의정 대감, 지금 정궁에는 원자가 없으시고 후궁에만 장성한 왕자들이 많은데 민망(民

望)을 든든하게 하려면 아무래도 속히 왕자 중에서 동궁을 세워야 하겠소.  내일이라도 우

리 셋이서 조당(朝堂)에 모여 함께 들어가 아뢰기로 합시다."

  "내일?  내일은 좀 바빠..."

  이산해는 눈을 깜짝거리며 대답했다.

  "그럼 모레로 하지요."

  정철이 말했다.

  "그럽시다.  모레쯤 모이기로 하지."

  이산해는 말을 마치자 자리에서 일어서고 남은 두사람도 모레 조당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

고 흩어졌다.

  약속한 이틀 뒤였다.  정철과 유성룡은 벌써부터 모여서 이산해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

산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약속한 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급한 볼 일이 생겨 못가니 상감 뵈오러 갈 것을 연기해 주기 바라오."

하는 글발만을 보내왔다.  성미 급한 정철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서

  "흥, 국가 대사를 위해 예궐하는 마당에 영의정이 급한 일이 생겼다고 언약을 어기다니, 

괘씸하고 고이한지고!"

하고 이산해를 욕했다.

  한편으로 영의정 이산해는 정철, 유성룡 등과 조당에 모여서 동궁 책립을 아뢰고자 약속

한 뒤에 가만히 밤중에 김공량을 찾아가서 

  "지금 정철은 임해군을 동궁에 세우고 신성군(信城君)의 모자와 그대를 죽이려 한다."

고 일러 주었다.  이러한 말에 김공량은 깜짝 놀라 곧 궁중으로 들어가 누이 인빈에게

  "누님 큰일 났소!"

하고 이산해한테서 들은 얘기를 다 고해 바쳤다.

  인빈은 또 그날 밤으로 임금을 붙들고 울면서

  "상감, 저는 어차피 죽을 바엔 대궐을 더럽히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서 죽겠나이다."

하고 애원했다.  임금은 깜짝 놀라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인빈의 대답은

  "지금 정승 가운데 임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우리 모자를 죽인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임금은 단지 껄껄 웃었다.  동궁을 책봉하고 아니하는 것은 내게 달렸지, 정승에게 달렸겠

느냐, 무슨 그런 헛소문을 듣고 근심하느냐 하고 위로하였다.

  이러한 일이 있는 줄도 모르는 정철은 며칠 후 유성룡과 함께 영의정을 대신해서 동궁 책

봉에 대한 계청을 올렸다.

  < 상감, 지금 세상이 흉흉하오니 민망을 든든하게 하기 위해서 하루라도 속히 동궁을 세

우도록 하십시오. >

  이 말에 임금은 문뜩 생각이 났다.  전에 인빈에게 듣고는 다만 웃고 말았지만 이제 정승

의 이런 계청이 있는 것을 보니 사실 무슨 일이 비밀리에 진행되는 듯 싶어 임금의 노여움

은 지극하였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아직도 중궁이 젊었는데 후사가 나올지도 모르는 이때 누가 그런 

생각을 하였소."

  정철은 임금이 이렇게 진노할 것은 생각치 않았으므로 당황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지금 내가 아직 살아 있는데 경은 장차 세자를 세워서 무슨 일을 하려는가?"

  임금의 노한 분부가 또다시 떨어졌다.  대사간 이해수(李海壽)와 부제학 이성중(李誠中)이 

정철이 혼자서 불벼락을 맞는 것이 딱해서 어전에 엎드리며

  "상감, 동궁을 세우자는 것은 좌의정 혼자서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신하들이 다 함

께 의논한 결과 아뢰는 것입니다."

  임금은 대사간과 부제학의 이런 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무엄한지고..."

  여전히 노기에 찬 호통이었다.  임금은 그대로 용상에서 일어나 내전으로 들어가 버렸다.  

정철은 이날 대궐에서 물러나오는 길로 좌의정 직에서 물러난다는 사표를 써서 바쳤다.  이

렇게 임금의 미움을 산 기회를 타자 동인측에서는 정철을 참소하기 시작했다.

  임금도 인비의 참소를 들어서 정철을 미워하던 참이라 마침내 정철을 강계(江界)로 귀양

을 보내라는 영을 내렸다.  이 바람에 대사간 이해수와 부제학 이성중의 벼슬도 외직(外職)

으로 쫓겨나고 이밖에 정철과 친하게 지낸 윤두수(尹斗壽)와 이산보(李山甫) 등 많은 사람이 

벼슬이 떨어지고 귀양길에 오르게 되었다.


  [ 壬辰倭亂 ]   <서울을 버리고>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壬 辰 倭 亂 

    서울을 버리고



   그 뒤 일년쯤 지나 왜구(倭寇)가 쳐들어 왔다.  선조(宣祖) 이십오년 사월 십삼일 부산을 

지키고 있던 첨사(僉使) 정발(鄭撥)은 힘을 다하여 막았으나 반나절이 못되어 패하고 전사했

다.  부동산성을 빼앗은 적병들은 다시 동래로 들이닥쳐 동래성을 포위하였다.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은 빈약한 군대와 녹슨 무기로 며칠을 대항하였으나, 일본군의 

조총(鳥銃) 앞에 동래성도 미구에 함몰당하고 말았다.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자 일본군은 승

승장구 경상도 여러 고을을 폭풍처럼 휩쓸고 북상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 급보를 접하자 크게 당황하여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삼아 급

히 내려가게 하고 다시 뒤미처 대장 신립(申砬)으로 도순변사(都巡邊使)를 삼아서 순변사 이

일의 뒤를 후원하게 하였다.  이일은 전에 북쪽에서 야인을 물리쳐 혁혁한 무훈을 세운 사

람이고 대장 신립은 인빈 김씨의 소생 신성군(信城君)의 장인으로 임금 선조의 신임이 가장 

두터울 뿐 아니라 이일과 함께 당대의 명장이라는 칭호를 짊어진 사람이었다.

  이들은 모두 크게 장담하고 내려갔다.  이때 이일은 급한대로 군인을 모집할 사이도 없이 

단기(單騎)로 내려갔는데 뒤에 군사라고 모집해서 내려보낸 것을 보면 그것은 군사가 아니

고 시정에 있는 서리나 유생, 무뢰한들 뿐 그것도 삼백명에 불과했다.  이래서 이일은 지방

의 군사들을 모을대로 모아 보았으나 그 세력 역시 보잘 곳이 없었다.

  신립이 미처 경상도 땅을 밟기도 전에 이일이 참패한 소식이 들려왔다.  신립은 겁을 먹

고 새재(鳥嶺)에 이르러 진을 친 채 감히 진군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신립

은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이 자연의 요새인 새재(鳥嶺)를 버리고 충주(忠州)로 물러가 달래

강(丹月江)을 등지고 배수(背水)의 진을 쳤다.  종사관 김여물(金如 )이 이것을 보고

  "지금 이일이 상주에서 패한 것은 문경 새재의 요새를 지키지 않고 도리어 지나치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상주에서 왜병을 막은 까닭입니다.  장군께서는 군사를 돌려 새재를 지키

도록 하십시오.  새재 높은 곳에서 적을 막는다면 우리는 비록 팔천여명의 군사를 가졌다 

하나 한 사람이 능히 열명의 적을 막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간했다.  그러나 도순변사 신립은

  "아닐쎄.  적병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넓은 들에서 좌우로 철기(鐵騎)를 달려서 싸

워야 승리할 수 있네.  두고 보게."

  "그렇지만 자고로 험준한 곳을 지켜야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기왕 새재로 나가지 아니

하시려면 높은 언덕에 결전을 해서 쳐들어 오는 적병을 산 위에서 화살로 쏘아 막읍시다."

  "허, 글쎄 그런 게 아니래두."

  신립은 끝내 김여물의 말을 듣지 않았다.

  왜병은 어느새 문경 새재를 넘어 충주로 몰려왔다.  마치 급한 풍우같이 무서운 형세로 

닥쳐 왔다.  신립의 군대는 정돈할 사이도 없이 왜병과 마주 싸우게 되었다.  군사들은 뒤에 

큰 강이 있어 달아날 수 없으므로 사력을 다 해 싸웠다.  신립은 말을 달려 적진 속으로 두 

번씩이나 돌격을 했다.  그러나 어느덧 길은 막혀서 적진을 돌파할 수가 없었다.  뒤에는 배

수진 달래강이요, 앞에는 조총을 어지럽게 쏘면서 포위해 들어오는 왜병의 떼들이다.

  신립은 죽을 것을 각오하고 말을 다시 달려 적진으로 쳐들어 가 수십명을 죽여버렸다.  

그러나 힘은 다하고 형세는 글렀다.  군사들은 자꾸 조총 탄환에 밀려 달래강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강물은 붉게 물들고 시체는 강이 차도록 떠내려 가고 있었다.

  신립은 이제는 더 싸울 기운조차 없었다.  옆에 있는 김여물을 돌아보고

  "종사관, 미안하이.  내가 자네 말을 안 들은 것을 후회하네.  나는 이제 죽을 몸이니 어

서 자네나 피해 달아나게."

  "갈 데가 어디 있습니까?  저도 이미 각오한 몸이올시다."

  "그럴 것 없네.  자네는 어서 달아나 훗일을 기약하게."

  "사나이가 세상에 났다가 나라일에 죽는 것처럼 쾌한 일인 없습니다.  저도 장군과 함께 

같이 죽을 것입니다."

  두 사람은 끝까지 달래강 기슭에서 왜병과 백병전을 전개하다가 마침내 말을 탄채 달래강 

푸른 물 속으로 빠져 버렸다.  비록 적에게는 패했을 망정 깨끗이 죽어 적에게 항복하지 않

으려는 때문이었다.  김여물은 바로 인조반정(仁祖反正) 때의 유명한 공신 김유(金 )의 아버

지이다.


   신립의 패보는 서울의 상하 인심을 극도록 흔들어 놓았다.  조정을 위시하여 서울 장안

은 수선수선하고 불안과 공포 속에 휩싸여 떨기만 했다.

  임금 선조는 유성룡에게 도체찰사(都體察使)라는 중임을 내렸다.  도체찰사란 임금의 몸을 

받아 전체의 전쟁을 보살피는 높고도 소중한 자리로 모든 대장들은 도체찰사의 명령과 감독

을 받아야만 했다.  임금은 다시 영을 내려 김인빈의 오라비 내수사별좌 김공량에게 활 잘 

쏘는 사람 이백명을 뽑아서 대궐 안을 지키게 했다.

  그러나 서울의 세력가들은 벌써부터 봇짐을 싸가지고 산으로 도망하는 자들이 생기기 시

작했다.  그리고 궁중 안에서도 김인빈을 비롯하여 여러 후궁 나인들이 임금에게 피란 갈 

것을 졸랐다.  차츰 임금의 마음도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마음이 어수선하기 시작했다.  내

수사별좌 김공량에게 은밀하게 영을 내려서, 여자들의 짚신과 남자의 미투리를 죽죽이 사들

여서 대궐 안으로 들이라 했다.  김인빈을 비롯한 모든 후궁과 나인들이 여차직하면 서울을 

버리고 멀리 피난 길을 떠날 채비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창덕궁 대궐 지밀에 가까운 협

문 안에다 사복(司僕)과 말들을 대령해 세워 두게 했다.

  이러한 일들은 지극히 은밀한 가운데 진행되었지만 이 소문은 어느덧 새어 나갔다.  영의

정 이산해가 임금에게 아뢰인 뒤 임금의 마음이 흔들려서 피난갈 것을 결정했다는 소문이었

다.  이산해는 당시 사복도제조(司僕都提調)를 겸해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자 사간원과 사

헌부에서 들고 일어났다.

  "영의정 이산해를 내쫓아야 합니다.  조종조 이래 역대로 지키던 서울을 내놓고 달아난다

는 것은 오국(誤國)이옵니다."

  그러자 장계군(長溪君) 황정욱(黃廷彧), 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 유홍(兪泓), 영중추부사(領

中樞府事) 김귀영(金貴榮) 등도 입을 모아

  "서울은 꼭 지켜야만 합니다.  서울을 버리자고 말을 꺼낸 자는 소인(小人)이옵니다."

하고 모두들 울면서 간했다.  임금도 마음이 몹시 구슬펐다.

  "종묘사직이 서울에 있는데 내가 서울을 버리고 어딜 간단 말이냐.  경들은 과히 염려 말

라."

  임금은 이렇게 모든 신하들의 마음을 달랬다.  이때 임금의 말을 듣고 우승지 신집(申 )

은 다시 어전에 엎드리며

  "전하, 지금 소란한 민심을 진정시키려면 하루 바삐 세자를 세워 국본(國本)을 정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니이다."

  전에 정철은 이 말로 쫓겨난 일이 있던 터이다.  문득 임금의 눈 앞에는 강제로 귀양 가

있는 정철의 얼굴이 떠올랐다.  달아나는 것보다 나라의 근본을 확실히 세우라는 신집의 말

은 과연 정당한 의견이었다.  임금은 이 말을 더 노엽게 들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임금은 영의정 이산해, 좌의정 유성룡, 우의정 이양원(李陽元) 등을 돌아보며, 왕자 

중에서 어진 자를 골라 세자로 세워보라 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감히 누가 적당하다는 말

은 못하고 임금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윽고 임금 선조는 엄숙하게 입을 연다.

  "광해군(光海君)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니 세자로 삼으려 하니 경들의 생각은 어떠하

오?"

  이 말에 모든 대신들은 눈들이 휘둥그래졌다.  필시 인빈 김씨의 소생 신성군으로 세자를 

봉할 줄 알았는데 너무나 뜻밖이었다.  대신들은 일어나 절하며

  "지당하옵신 분부이옵니다."

  찬사를 올릴 뿐이었다.  이리하여 광해군이 세자에 책봉되었다.  다음날 조정에서는 세자 

책봉식을 조촐하게 거행하였다.

  다시 하룻밤을 지난 사월 이십구일 저녁 무렵이었다.  충주에서 패한 신립의 군노 서너명

이 말을 타고 남대문 성안으로 뛰어들었다.  한 곳도 성한 곳이 없는 부상병들이다.  삽시간

에 이 소문은 장안에 퍼졌다.  신립의 패잔병이 벌써 서울에 당도했으니, 왜병이 서울에 쳐

들어 오자면 하룻밤이면 넉넉하다.  거리는 공론이나 한 듯이 일제히 문을 닫고 보따리를 

머리에 인 피난민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궁중 안에서도 비빈, 상궁, 나인, 무수리들이 수군수군 야단이었고 묘당에서는 급히 회의

를 열어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사세가 급하오니 어서 평양으로 행차하십시오."

  영의정 이산해가 아뢰었다.  그러나 임금은 묵묵히 대답이 없었다.  다시 도승지 이항복이 

어전에 엎드려서 아뢰었다.

  "우선 서편으로 가시어 명(明)나라에 구원병을 청하는 것이 좋을 줄 생각하옵니다."

  그러자 장령(掌令) 권협(權 )은 끝까지 서울 지켜야 한다고 우겨댔다.  이윽고 임금은 영

을 내렸다.

  "임해군은 함경도로 떠나되, 영부사 김귀영과 칠계군 윤탁연(尹卓然)이 호위해 가고,  또 

순화군(順和君)은 강원도로 떠나되 장계군 황정욱, 호군 황혁(黃赫), 동지 이기(李 )가 호위

해 가라."

  그리고 우의정 이양원은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서 서울을 지키도록 하였다.  이날은 임금

도 신하들도 꼬박 밤을 새웠다.  마침내 임금은 종묘와 사직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대궐을 

떠났는데 뒤에는 세자 광해군과 왕자 신성군, 정원군(定遠君)이 따랐다.  왕비는 인빈 김씨 

이하 나인들에게 옹위되어 대궐문을 나섰다.

  이때는 벌써 내시들도 다 달아나고 없었다.  병조판서 김응남(金應南)은 임금을 호위할 군

사들을 모으려고 했으나 모두 어디로 도망갔는지 한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만에야 도

승지 이항복이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말과 가마를 구해와서 비로소 임금은 말을 타고 왕비와 

김인빈을 비롯한 후궁들도 가마를 탔다.

  때는 새벽이지만 아직 날은 완전히 밝지 않아 어둑어둑한데 하늘에서는 비까지 내리기 시

작했다.  도승지 이항복이 맨 앞에 서서 길을 인도했다.  일행이 돈화문 대궐을 나와서 경복

궁 대궐 앞을 지나니 길 양편에는 어느새 쏟아져 나온 백성들이 통곡을 했고 그 소리는 천

지를 진동했다.  

  사현(沙峴) 마루턱까지 이르렀을 때야 날은 비로소 동이 트기 시작하는데, 힐끗 서울 편을 

바라보니 우중에도 서울 장안이 불빛으로 환했다.

  "어디에 불이 났을까?"

  "누가 불을 질렀을까?"

  "벌써 왜병들이 쳐들어 왔나?"

  모두들 궁금해서 술렁거렸다.

  "난민들이 상감께서 행차하신 뒤 대궐에 몰려 들어 불을 지르고 닥치는 대로 물건들을 집

어간다고 하오."

  옆에서 누가 아뢰었다.

  "무엇 대궐이 탄다고?"

  임금은 아무 말없이 동쪽 하늘만 바라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쏟아지는 빗물에 섞

여서 눈물인지 빗물인지 분간하기가 어렵게 얼굴을 흘러 내렸다.

  일행은 불바다가 된 서울을 등지고 또다시 서편을 바라보고 지향없는 길을 총총히 걸었

다.  비는 여전히 쏟아졌다.  임금도 이제는 속속들이 젖었고 걸어가는 나인들의 옷은 젖어

서 몸에 착 들어붙어 온 몸이 그냥 드러나 보였다.  그래도 궁녀들은 부끄러운 기색 하나없

이 묵묵히 따를 뿐이었다.

  홍제원(弘濟院)에 당도하여 교군들이 어깨를 쉬느라고 잠깐 가마를 땅에 내려놓고 있는 

동안 경기감사 권징(權徵)이 뒤늦게 쫓아왔다.  그는 자기가 입고 온 우장을 벗어서 임금에

게 바쳤다.

  어느덧 벽제관(碧蹄館)에 다다랐다.  점심 때가 훨씬 지났는데도 점심 먹을 준비도 없다.  

비는 쏟아지고 춥고 배가 고프자 여기서 슬그머니 하나씩 둘씩 떨어져서 도로 서울로 돌아

가는 사람도 많았다.

  보행하는 사람들은 이제는 다리가 아파서 더갈 수가 없었다.  그 중 임금의 어의(御醫) 노

릇하는 양예수(楊禮壽)란 노인은 평소에 각기병이어서 웬만한 양반이 왕진을 청하더라도 좀

체로 응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하도 급해서 당나귀 한 필 얻어타지 못하고 

도보로 임금을 쫓아왔다.  평시에 아프다는 다리도 이런 때는 아무 일 없는지 곧잘 걸었다.  

이 모양을 바라보던 도승지 이항복은 슬며시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 양동지! 양동지의 각기병은 난리탕이 제일이로구료!"

하고 늙은 의원을 놀려준다.  모든 사람들은 창황 중이나 허리를 잡고 웃어댔다.  임금도 이 

소리를 듣고 빙그시 웃고,  수심에 싸여서 울고 있던 궁녀들의 입가에도 소리 없는 웃음이 

떠돌았다.

  "그것 안 되었군.  어의 양동지에게 말 한필 주어라."

  이리하여 늙은 의원 양동지에게 겨우 말 한필이 차례갔다.

  일행이 혜음령(惠陰嶺) 고개를 넘어가는데 비는 더욱 줄기차게 쏟아졌다.  별안간 억수장

마가 진 것 같았다.  비를 무릅쓰고 파주(坡州)에 이르렀으나 사람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

다.  여기서도 점심을 그대로 굶고 날이 저물어서야 겨우 임진강(臨津江) 가에 다다랐다.

  강물은 온 종일 쏟아진 비로 인해서 도도한 탁류를 이루었는데 나룻배가 하나도 없으니 

큰일이었다.  길은 어둡고, 강은 가로막히고 비는 쏟아지는데 적병들이 뒤에서 쫓아올 생각

을 하니 이제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이항복이 잠시 무엇을 생각하더니 호위하는 군

사들을 시켜 그 근처에 있는 화석정(花石亭)을 비롯하여 나루 사공의 집까지 불을 지르게 

하였다.  어둡던 강가는 비로소 사람들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리하여 불빛 비

치는 강변을 뛰어다니며 겨우 나룻배 다섯척을 구해서 밤이 깊어서야 임금은 중전과 김인빈

과 함께 강을 건넜다.

  이때까지 임금은 꼬박 꿂은 채로 있었다.  이항복이 보다 못하여 내시에게 임금께 드릴 

술이나 차라도 준비했느냐고 물었으나 급해서 준비를 못했다는 대답이었다.

  밤 삼경(三更) 때나 되어서 일행은 동파역(東坡驛)에 다다랐다.  파주목사 허진(坡州牧使許

晋)과 장단부사 구효연(長湍府使具孝淵)이 장막을 치고 임금께 수라상을 올릴 준비를 했다.  

그러나 어디서 몰려 왔는지 무수한 난민들과 또 호위하던 군관들이 함께 어울려서 음식을 

빼앗아 먹기 시작했다.

  파주목사와 장단부사가

  "이놈들아 상감께서 잡수실 수라다.  이게 무슨 짓이냐?"

하고 호통하고 쫓았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난민들과 군사들은 삽시간에 밥을 주먹으로 움켜서 한 솥 밥을 다 입에 틀어넣었다.  무

질서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는 다시 밥을 지을래야 쌀이 없었다.  파주목사와 장단부사는 

당장 벌이 내릴 듯하여 도망가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좌의정 유성룡이 어디로 돌아다니더

니 겨우 쌀을 구해다가 임금에게 다시 수라를 지어 올렸다.  임금으 비로소 밥그릇을 대하

자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임금은 이때처럼 맛있는 수라를 들어 본 일이 없었다.

  다음날부터는 임금을 호위하고 왔던 군사들이 하나 둘씩 도망을 치기 시작하였다.  일행

은 마부와 군사들이 별안간 없어져서 더 갈래야 갈 수가 없게 되었고 임금은 긴 한숨만 쉴 

뿐이었다.  때마침 황해감사 조득인(趙得仁)이 군사 수백명과 말 육십필을 거느려 임금을 호

위하러 온다는 소식이 들려 모든 사람들은 저으기 힘을 얻었다.

  일행은 다시 질서를 차려서 길을 떠났다.  널문이(板門店)에 이르러 조인득이 풍덕 군수에

게 명하여 미리 차려놓게 한 음식을 먹었다.  백관들은 이틀 만에 얻어먹는 밥이었다.

  초현(招賢) 역에서부터는 마중 나온 황해감사 조인득이 군사를 거느려 어가를 호위하게 

되자 그날로 개성(開城)에 도달하였다.  일행은 평화스러운 개성 거리를 보고 우선 마음을 

놓았다.

  곧 쫓겨오는 임금의 행차를 구경하려고 백성들이 모여들었다.  구경꾼들은 후줄근한 임금

의 모습과 초라한 만조백관들의 얼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서로들 수군댔다.

  "나랏님이 수고하시네."

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와 반대로

  "수고하긴 뭘 수고해. 임금이란 게 백성은 돌보지 않고 후궁만 생각하느라 저 꼴이 됐지."

  이렇게 욕하는 자고 있었다.

  많은 군중 속에서 갑자기 임금 앞으로 돌을 던져 호위하던 군사 하나가 맞아 소리를 질렀

다.

  "어느 앞이라고 감히 이런 짓을 하느냐?"

  그러나 임금을 호위하는 군사는 너무도 수가 적고 힘이 약했다.

  임금은 얼른 송도 유수(松都留守)가 있는 동헌으로 들어가 행궁(行宮)을 잡았다.  불안 공

포에 싸인 하룻밤도 지나고 다음날 아침 어전엔 모든 신하들이 모였다.  어제 임금에게 백

성이 돌까지 던진 사건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어제 내가 남문 밖에서 당한 일은 한심한 일이다.  임금이 이꼴을 당했으니 누가 이 책

임을 지겠는가?  누구 때문에 민심이 이렇게까지 악화되었은가?"

  임금의 목소리는 격분에 떨렸다.  모든 재상들과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삼사(三司)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또다시 싸움을 벌였다.

  "이산해와 김공량의 죄 크옵니다.  그들은 대궐 안에까지 손을 뻗쳐서 결탁하고 홍여순(洪

汝諄)의 무리와 함께 나라일을 그릇쳤기 때문에 어제와 같은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더구나 이산해는 영의정이란 자리에 있으면서 달아날 궁리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한편에서 말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이산해가 아무리 김공량과 친하게 지냈다 해도 그것으로 나라를 그릇친 것이 무엇이란 

말이요?  또 처음부터 달아나고자 한 것은 어찌 영의정 뿐이요.  좌의정 유성룡이나 최황

(崔滉)도 일반이 아니요."

하고 맞서고 반박했다.

  다음날은 삼사의 모든 간관과 헌관들이 일제히 임금 앞에 나아와

  "오늘날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가 이산해와 김공량이 안팎이 되어 일을 한 때

문이요.  모든 백성들은 영의정과 김공량에게 원망과 분함을 품고 있소.  이들을 극형에 처

하여야 하오."

하고 더 한층 맹렬히 들고 일어났다.  임금은 잠자코 언관들의 말을 듣고만 있다.

  "전임 좌의정 정철을 불러서 민심을 가라앉히십시오."

  임금은 다시 더 어찌하는 도리가 없어서

  "이산해를 평해(平海)로 귀양 보내라.  그리고 최흥원(崔興源)으로 영의정을 삼고 윤두수

(尹斗壽)로 좌의정을 삼고, 유홍(兪泓)으로 우의정을 시키라.  또 전암 좌의정 정철의 귀양을 

풀어 다시 부르게 하라."

하는 분부를 내렸다.

  이로써 나중에 동인은 물러나고,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내수사별좌 김공량은 이산

해가 벼슬이 떨어져서 평해로 귀양가는 것을 보고 가만히 누님 김인빈과 눈물을 흘려 작별

한 뒤에 강원도 산골로 가서 숨어버렸다.


   바로 이날(오월 삼일) 왜병은 서울에 들어왔다.  임금의 일행은 다시 평양을 향해 떠났

다.  평양에 머문지 달포도 안 되어 왜병은 임진강 가에 진을 친 한응인(韓應寅)의 마지막 

저항선을 뚫고 유월에는 벌써 평양 근처에까지  육박하였다.

  임금의 일행이 다시 평양을 버리고 의주로 달아나려 할 때 평양 사람들은 대신들을 보고

  "너희 놈들은 평생에 나라의 녹만 처먹고 당파 싸움만 일삼더니 나라가 이꼴이 되지 않았

느냐.  이놈들아, 우리만 성을 지키라 하고 달아나면 너희만 살고 우리는 죽으라는 수작이

지, 대신인지 승지인지 하는 것이 모두 개새끼만도 못하다."

하고 덤벼들었다.  대신들은 그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 달아나는 도리밖에 없었다.

  의주 피난처에 도착하자, 곧 명나라로 구원을 청했다.  요동부총병(遼東副總兵) 조승훈(祖

承訓)이 칠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온 것은 칠월.  그리고 뒤미처 이여송(李如松)이 제

독(提督)에 임명되어 사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서 다음 해 계사년(癸巳年) 정월에 평

양을 탈환하여 국면을 전환시키기 시작했다.


  [ 壬辰倭亂 ]   <亂世에 흐르는 愛情>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壬 辰 倭 亂 

    亂世에 흐르는 愛情



   이때까지 육지에서는 연전연패라기보다 싸우지도 않고 도망만 가는 싸움이었다.  그런 

중에 오직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이 수로를 끼고 적의 서진(西進)을 잘 막아

내었으므로 그래도 대국(大局)은 아주 무너지지 않고 있었다.

  임금이 의주에 자리를 잡자, 할 일 없는 신하들은 또다시 지나간 일을 가지고 서로 논했

다.

  "이홍로(李弘老), 홍여순, 유영길(柳永吉) 등은 이산해의 부하로서 뇌물과 아첨으로 나라  

망친 자들이요.  지금 우리가 이렇게 피난살이를 하게 된 것이 누구의 소생이요."

  이것은 서인들이 이산해나 유성룡의 부하들이 다시 정권을 잡을 것을 두려워해서 동인의 

잔당을 몰아내고자 하는 소리였다.  그러면 동인측에서도 지지 않고

  "정철은 서인의 거두로서 나라일을 돌보지 않고 술과 글로만 세월을 보냈소.  이런 자를 

다시 소환하여 정승의 자리에 앉게 하는 것은 불가하고, 그리고 윤두수는 아무런 일도 못하

면서 일찍이 평양을 고수한다고 하였소."

하고 공격했다.  피난길에 있으면서도 자기들의 뜻에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내쫓고자 하는 

심산이었다.  임금은 잠시 조용해졌던 붕당 싸움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보고, 심중에 매우 

좋지 않게 생각하면서 친히 글을 지어 여러 신하들에게 보이었는데, 그 글은 이러했다.

  諸臣今日後  忍復名西東

( 여러 신하들이어, 이제부터는 동이니 서니 제발 다투지 말라. )

  임금도 당파 싸움에는 이제 지긋지긋했던 것이다.  임금은 골치가 아프고 시끄러우면 으

레 후궁에 있는 인빈 김씨를 찾았다.  이곳만이 고요하게 마음 놓고 온 종일 쉴 만한 아늑

한 장소라고 생각했다.

  인빈도 이제는 한창 무르녹아 익는 여인의 나이로 전보다 훨씬 피부에 기름이 올라, 흰 

살결이 더욱 희고 밝은 창을 대하는 듯한 눈은 윤을 뿜었다.

  임금은 영빈을 보고

  "아무리 싸움중이라도 너만 있으면 적적한 것을 모르겠구나."

하고 은근히 기뻐했다.  그러자 인빈은 임금에게 조용히 물었다.

  "상감, 장차 적병이 쳐들어 오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적병은 무슨 적병, 명 나라 원군이 들어온 이상 다시 서울로 올라가게 될 텐데."

  "정말이오니까?"

  "내년 정월은 서울서 지내게 될걸."

  "아이구 좋아라.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인빈은 어린애 모양으로 눈을 반짝이며 임금을 쳐다 보았다.

  과연, 다음 해(癸巳年) 사월 왜병이 남해안으로 밀려난 가운데 화의(和議)가 진행되자 임금

은 시월에 의주로부터 서울로 환도했다.

  이동안 유성룡은 명장 이여송의 접반관(接伴官) 노릇을 잘 하였으므로 다시 임금의 신용

을 회복하여 서울 환도 후에는 윤두수가 밀려 나고 그 뒤를 이어서 유성룡이 영상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때부터 동인들이 정권을 잡고 정철은 환도한 다음 해인 갑오년(甲午年)에 

세상을 떠났다.

  서인(西人)의 장로격인 정철이 없어지자 동인(東人)의 기세는 놀랍게 일어났다.  정철이 떠

난지 수일 후에 벌써 남인과 북인의 책동은 시작되어 수년 전에 정여립(鄭汝立) 역옥(逆獄)

에 빗걸려 들어 죽은 최영경(崔永慶)의 신원(伸寃)과 추증(追贈) 문제가 일어났다.

  삼사에서는 연하여 상소를 올렸다.

  < 정철은 간물(奸物)로서, 이전 최영경이 자기를 욕한 것에 원한을 품고 기축역옥(己丑逆

獄) 사건에 자기가 위관(委官)이 된 것을 다행히 여기고 최영경을 잡아오게 꾸미고, 겉으로

만 구하는 체하면서 뒤로 얽어넣어서 종내 영경을 죽여버렸습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최영

경의 원통함을 통촉하시고 정철을 추죄(追罪)하셔야 하실 것입니다. >

  갑오년 오월에서 시작하여 그해 십일월까지 하루도 건느지 않고 조정에서는 두파로 나뉘

어 임금께 말로써 혹은 글월로써 이 문제를 가지고 다투었다.

  때는 바야흐로 난리는 조금 뜸해졌다 하지만 전후(戰後)의 수습이며 정돈은 아직 그냥이

었고 또다시 언제 왜병이 쳐들어 올는지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시절이건만 모든 신하들은 

그쪽은 둘째 문제로 삼고, 이미 죽은 정철의 관직 깎기에만 급급하였다.  임금도 너무 지긋

지긋하여

  "지금은 군신이 다만 창을 메고 군사를 훈련하여 적을 칠 일을 생각할 때요.  그밖의 다

른 일은 도외시해야 할 것이니, 이런 소요는 스스로 짐작하여 덮어둠이 옳지 않은가?"

하면 사류(士類)들은 도리어

  "국시(國是)를 바로 잡는 일은 하루가 늦으면 하루가 늦을수록 그만큼 더 나라가 위태로와 

지는 일이오니 소요하다하여 어찌 가만 있으리까."

하여 죽은 정철의 관직 깎는 것을 고집하였다.  이 주장의 중심인물은 김우옹(金宇 ), 기자

헌(奇自獻), 이기(李 ) 등이니 이때 김우옹은 대사헌이요, 이기는 대사간이오, 기자헌은 장령

(掌令)이었다.  이리하여 드디어 십일월에 죽은 정철의 관직은 삭탈이 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서인(西人)은 몰락을 당했다.  정승에서부터 한낱 녹사에 이르기까지 벼슬자리는 

모두 동인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서인이 없어지고 동인의 독무대가 되자 다시 동

인 자체내에서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의 대립이 벌어졌다.

  북인의 거두 이산해는 쫓겨나기는 했으나, 임금은 인빈 김씨와의 관계도 있고 해서 이산

해를 종시 잊지 못했다.  이러한 기미를 알아차린 정탁(鄭琢)은 기회를 엿보아

  "정철의 관직이 삭탈된 이때 억울하게 쫓겨난 이산해를 다시 부르시옵소서."

하고 임금에게 청했다.  이때 대사헌 김우옹이 정탁을 나무라고 파면시키니, 북인들은 이것

을 보고

  "유성룡이 이산해가 다시 나오면 자기를 누를까 겁내서 김우옹을 시켜 정탁을 쫓아낸 것

이다."

라고 비난했다.

  이런 일로 해서 북인은 더욱 유성룡을 미워하던 차 마침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우리 나라

에 나와 있는 명장 양호(楊鎬)가 무고당한 것을 변명할 일이 생겼다.

  이것은 양호의 중군(中軍) 팽우덕(彭友德)이 우리 나라 접반사 이덕형(李德馨)에게

  "여보 큰일이 생겼소.  본국에서 나온 병부주사 정응태(丁應泰)가 이십여개 죄목으로 양호

를 모함하는 보고서를 써 갔소.  그런데 그 중에는 귀국에 대한 것도 몇 가지 들어있다 하

오."

하고 말한테서 알게 된 것이었다.

  이때는 전진도 가라 앉은 무술을(戊戌年)이었다.  이덕형은 즉시 이 사실을 임금에게 아뢰

었다.  지금 명나라가 구원해 주는 이 마당에 명나라 황제의 의심을 살만한 일이 있게 되는 

것은 불리한 노릇이므로 임금은 곧 유성룡을 보고

  "일이 중대하니 경이 명나라에 들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일일이 변명해 주오."

하고 말했다.  그러나 이때 유성룡은 병이 있다하고 사양하므로 임금은 이것을 매우 괘씸하

게 여겼다.  이것을 가지고 지평(持平) 이이첨(李爾瞻)과 대사헌 이헌국(李憲國)은 서로 공박

했다.  먼저 이헌국이

  "국가 다난한 이때 영의정 자리를 비게 되는 것은 좋지 못하오.  다른 사람을 보내는 것

이 좋을 듯하오."

하면 이이첨은

  "중요한 때일수록 영의정이 직접 전말을 설명하는 것이 좋소.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명을 

받고 가지 못하겠다는 말은 임금을 속이는 것이오."

하고 대들었다.  임금은 마침내 이이첨의 말을 옳게 여기고 이헌국을 파면시켰다.

  이에 남이공(南以恭)의 무리들은 임금이 유성룡을 싫어하는 것을 알고

  "유성룡은 오랫동안 우성전(禹性傳), 이성중(李誠中) 등 심복의 사수를 받아 국정을 농단하

고 사류를 해치었소.  그리고 또 성룡은 왜적과 화의를 주장해서 나라를 그릇친 자이니 물

러나게 해야 하오."

하고 공박했다.  이때부터 남인 유성룡을 내쫓으라는 상소가 연일 잇달아 들어왔다.  임금도 

이러한 상소질에는 더 견딜 수가 없었던지 끝내 유성룡을 내보내고 말았다.

  유성룡을 몰아낸 후 북인은 다시 두 갈래로 갈라져 이산해와 홍여순을 중심으로 한 자들

은 대북(大北), 남이공과 김신국(金藎國)을 중심으로 한 자들은 소북이라하여 서로 싸우다가 

그해로 김신국과 남이공이 물러나고 이산해의 대북이 세력을 잡았다.  이러던 중 이원익(李

元翼)이 상소로 유성룡의 청백한 것과 충성스러움을 말하고 홍여순, 임국로(任國老) 등을 탄

핵하다가 도리어 대사간 최철견(崔鐵堅)에게 쫓겨나 다시 이산해가 영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산해와 홍여순이 정권을 잡은 후 이들이 또다시 서로 싸우므로 이산해의 당을 

육북(肉北)이라하고 홍여순의 당을 골북(骨北)이라 하였다.

  이때 이산해 편에 가담한 이이첨이 상소로 홍여순을 논박하며 몰아내고자 하여 다시 조정

이 시끄러워지자 임금은 이 두 사람을 다 내쫓고 다시 서인(西人)을 쓰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있은지 얼마 안 되어, 서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귀(李貴)가 조정에 들어와 대북 정인홍

(鄭仁弘)의 행동을 비판하였다.  이에 정인홍은

  "신이 성혼(成渾), 정철과 사이가 좋지 못하고 또 유성룡과도 서로 가깝지 못하였더니 지

금 와서 그 무리들이 신을 이렇게 미워합니다."

하고 전에 성혼이 정철과 함께 공연히 죄없는 최영경을 죽였다는 것을 트집잡아 서인 전체

를 공박하였다.

  대사헌 황신(黃愼)이 이 말을 듣고 이귀와 성혼을 위하여 그렇지 않다고 변명하자 임금은 

도리어 황신의 벼슬을 바꾸고 간혼독철(奸渾毒澈)이란 전교까지 내려 조정에 있는 서인들을 

다시 내쫓았다.  그후 소북 유영경(柳永慶)으로 이조판서를 삼고, 대북 정인홍(鄭仁弘)으로 

대사헌을 삼았으므로 이제부터 또 이들이 서로 싸울 차례다.


  [ 壬辰倭亂 ]   <촛불이 타는 밤>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壬 辰 倭 亂 

    촛불이 타는 밤



   소북 유영경이 정권을 잡은 후 얼마 안 가서 왕비 박씨가 세상을 떠났다.  임금은 나이

가 이미 오십이 넘었으나 다시 재혼할 생각을 가졌다.  이때 후궁에는 인빈, 순빈(順嬪), 정

빈(靜嬪), 정빈(貞嬪), 온빈(溫嬪) 등 아이를 낳은 빈만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래도 정실(正室)

이 없으니 새로 왕비를 또 맞이하려는 것이었다.

  의인왕비(懿仁王妃) 박씨의 장사를 치른 뒤 임금은 임인년(壬寅年=선조 삼십오년)에 이조

좌랑 김제남(金悌男)의 딸을 새 왕비로 맞이했다.  이때 임금의 나이는 오십하나요, 새 왕비

(仁穆王妃)의 나이는 십구세였다.

  첫날밤, 중전궁은 밤새도록 촛불이 휘황했다.  어린 왕비는 여러 시녀에게 둘러싸여 임금

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밤이 꽤 깊은 뒤 임금이 중전궁으로 들어섰다.  어린 왕비는 조용

히 일어나 임금을 맞이하고 다른 시녀들은 모두 옆 방으로 물러났다.

  때는 칠월이라 방안은 몹시 무더웠다.  임금은 친히 부채질을 하면서 좌정한 뒤 중전을 

바라보았다.  중전은 다소곳이 머리를 숙여 앉았는데 그 약간 홍조를 띤 두 볼은 바야흐로 

피어나려는 한떨기 꽃봉오리 같았다.  임금은 슬며시 손을 잡아끌며

  "자, 이리 가까이 오오."

하며 이리저리 처녀의 몸을 어루만졌다.  중전은 아무 반항 없이 임금이 하는대로 몸을 내

맡기고 있었다.

  "나이 보다는 꽤 숙성하곤 그래.  지금 궁중에는 아직도 정실 아들이 없으니 중궁이 아들

을 하나 낳아야지."

  임금은 처녀의 등을 어루만지며 이렇게 말했다.  중전은 부끄러운 듯 또다시 얼굴에 홍조

가 물들었다.  임금은 팔에 힘을 주어 처녀의 가는 허리를 이끌어 당기자 처녀의 숨소리는 

가쁘다 못해 가늘게 떨렸다.

  "누가 보옵니다."

  중전은 무심결에 이렇게 말하며 임금의 용포 소매 속에다 얼굴을 파묻었다.

  "허, 보긴 누가 보나.  너와 나 단 둘 뿐이 아닌가."

  임금은 귀여워 못 견디겠다는 듯 더욱 팔에 힘을 주어 끌어당겼다.  지극히 행복스런 유

열(愉悅) 속에 첫날밤은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게 흘러갔다.

  얼마 후 왕비의 몸에는 태기가 있었다.  임금은 이번에야말로 정실에서 아들이 생긴다고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어느날 임금은 오래간만에 인빈의 처소로 발길을 돌렸다.  인빈은 언제나처럼 반가이 맞

았다.  

  "상감, 우러러뵈온지 퍽 오래옵니다.  신정 재미가 매우 좋으신 게지요?"

  "그래 참으로 오래간만이다.  일각이 여삼추라더니 정말 시시때때로 네 생각이 나서 그리

웠다."

  "희롱의 말씀입니다.  시시때때로 그리워졌다면 그토록 오래 아니 찾으셨겠습니까.  듣자

온데 중궁께서 태중이라 하옵시니 반갑나이다."

  "글쎄 아들을 낳을지 몰라."

  "첫아들 낳으실 것이옵니다."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야."

  그날 밤 임금은 풍염하고 능란한 인빈의 처소에서 구정을 흡족이 누리었다.  다음 날 이

침 인빈은 전부터 마음 먹고 있던 말을 임금에게 했다.

  "상감, 이번에 중궁께서 아들을 낳으시면 그 태자로 세자를 정하십시오."

  "세자는 벌써 광해군으로 세우지 않았나?"

  "그러시지만 이번에 태어날 태자는 정실 소생이 아니옵니까?  벌써 세상에서도 그렇게 될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사실 임금도 새로 태어나는 정실 소생으로 세자를 삼고 싶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부

터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긴 했으나 명나라에서는 큰 아들 임해군을 안 세우고, 둘째 아들을 

세운다고 아직까지도 응하지 않고 있는 판이다.

  임금의 마음은 저으기 흔들렸다.  더욱이 세상에서도 응당 그렇게 될 것으로 알고 있다는 

말에 임금도 어느덧 새로 태어나는 원자(元子)로 세자를 삼으리라 마음 먹었다.

  원자(元子)로 세자를 삼아야겠다는 생각은 인빈 뿐만 아니라 유영경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영경은 인빈 김씨의 소생인 정휘옹주(貞徽翁主)의 부마 유정량(柳廷亮)의 조부로서 인빈과

의 사이고 가깝고 미묘한 궁중 사정에도 환한 터였으므로 인빈이 전에 자기 소생으로 세자

가 못된 것을 늘 불만히 여기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 바였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새로 태

어나는 원자로 세자를 삼아야겠다는 것이 또한 유영경의 생각인 것이다.

  이때부터 인빈은 대북의 이산해보다 소북의 유영경을 더 신임하여, 유영경이 칠년 동안 

득세할 동안 대북 일파는 조정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젊은 궁궐의 안주인 인목왕후(仁穆王后)는 그 후 첫아기를 낳았다.  그러나 그 아기는 아

들이 아니라 딸 정명공주(貞明公主)였다.  임금의 첫 번째 꿈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정실 소생의 원자는 아마 내 팔자에 없나보다."

  임금은 이렇게 자탄해 보기도 했다.

  어느덧 일년은 또 지나갔다.  임금은 인빈 김씨의 처소를 찾은 뒤에는 반드시 인목왕비도 

찾았다.  일년이 채 못가서 어린 왕비는 또다시 태기가 있었다.  임금은 또 한 번 희망을 걸

었다.  임금은 어린 왕비를 극진히 대하고 약방에 명하여 날마다 지황과 녹용을 다려다 바

치도록 했다.  한해 후에는 과연 기다리던 아들 영창대군(永昌大君)이 태어났다.  임금으로

서는 정실(正室)에서 처음 낳은 아들이라고 기뻐하는 정도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유영경

은 이것을 보자 임금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때마침 임금이 재위 사십년이 되므로

  "성성께서 재위 사십년에 중전이 처음으로 원자를 낳으셨으니, 사십년 축하식과 아울러 

크게 경축해야 하오."

하며 축하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이 축하식에서 유영경은 문무백관으로 하여금 영창대

군 만세까지 부르게 했다.  그 광경은 마치 세자가 영창대군인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임

금도 늙으막에 생긴 적자(嫡子)라 조신(朝臣)들이 세자를 제쳐 놓고 영창대군 만세를 부르는 

것을 별로 탓하지 않고 그저 만족한 미소로 대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바라보는 광해

군의 마음은 여간 쓰리고 아프지가 않았다.

  이 일이 있은지 얼마 안 되어 임금의 몸에는 자주 병이 나기 시작하더니, 정미년(丁未年) 

시월서부터는 그 증세가 매우 위태로와졌다.  광해군은 세자로서 매일 임금에게 문안하러 

들어갔는데 하루에도 몇 차례씩 들어가서 임금의 용태를 살폈다.  광해군이 이렇게 정성으

로 부왕의 문병을 하는 까닭은 그때 항간에 유영경 일파가 세자 광해군을 폐하고 영창대군

을 새로 세자에 봉하려 한다는 소문이 자자한 까닭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광해군의 형 임해군(臨海君)도 은근히 다음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말까지 

들렸다.  임해군은 자기가 세자에 오르지 못한 것을 늘 불평으로 지내다가 최근에 와서는 

부왕이 병중에 있는 틈을 타서 실력으로 정권을 잡아보려고 무사들을 모으고 있다는 것이었

다.  광해군으로서는 잠시도 마음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라에서는 매일 임금의 병을 낫게 한다고 산천에 기도를 했다.  그러나 임금의 병세는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이때부터 임금은 하루바삐 전위(傳位)를 하고 죽을 생각만 했다.  

그런데 지금 전위를 하자면 아무래도 광해군 밖에는 없을듯했다.  인빈과 유영경 등은 영창

대군을 세자로 세우라고 하지만 영창대군은 아직 나이가 너무 어렸다.  역시 광해군에게 전

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임금은 하루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영의정 유영경, 좌의정 허욱

(許頊), 우의정 한응인(韓應寅) 등을 불러

  "벌써 일년 가까이 누워 있어도 별로 차도가 없소.  이제는 며칠을 더 살것 같지도 않고 

또 아무래도 벅찬 나라일을 감당키 어려우니, 세자 광해군에게 전위할까 하오.  세자도 이제 

나이가 많아졌으니 그렇게 해보도록 하오."

  임금은 진정으로 전위의 뜻을 표했다.  그러나 세 정승들은

  "전하, 아직 전위하실 때가 아닙니다.  섭양만 잘 하시면 다시 일어나시게 됩니다."

하고 반대했다.  하지만 임금의 전위할 뜻은 굳었다.  대신들이 물러간 뒤 임금은 다시 전교

를 내려 원로대신들과 의논해서 세자에게 전위하도록 하라고 독촉을 했다.

  한데 유영경은 임금의 이런 전교를 받들고도 당분간 더 좀 두고 본다고 원로들에게 이것

을 알리지도 않았다.  당시의 원로대신들은 이항복, 이원익, 이덕형, 이산해, 기자헌 등이었

다.  후에 이 사실이 대북 일파에게 알려지자 이이첨과 이산해의 아들 이경전(李慶全) 등은 

그때 영남에 내려가 있는 정인홍(鄭仁弘)에게 사람을 보내어 유영경이 세자를 위태하도록 

꾀한다는 진상을 알리고 어서 상소하라고 권했다.

  이때는 벌써 이산해, 이이첨 등 대북 일파가 세자 광해군에게 붙어 세자빈(世子嬪)의 오라

버니 되는 유희분(柳希奮)과 밤낮으로 모여, 유영경을 몰아낼 의논을 하고 있을 때인 것이

다.  정인홍은 원래가 경골한(硬骨漢)으로서 두려운 것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라, 남을 공격

할 때는 언제나 선봉 노릇을 잘 했다.  그는 시골서 상소를 올리기를

  < 유영경이 임금의 명령을 비밀히 하고 여러 원로 대신들을 부르지도 않으니 무슨 무서

운 흉계가 있기로 이런 짓을 하는지 알 수 없나이다.  나라의 일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옵

니다.  옛부터 임금의 유고(有故)한 때는 세자가 그 대리를 하는 법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

을 유영경은 혼자서만 비밀히 처리하려 하니, 이는 세자를 위태롭게 하는 수작이옵니다. >

하고 정면으로 유영경을 공박했다.

  그러나 임금은 아직도 유영경을 크게 신임하고 있어서 정인홍의 상소문을 보자 몹시 노하

였다.

  "정인홍은 세자로 하여금 빨리 전위 받게 하려고 하니, 소위 신하된 자가 임금을 퇴위시

키는 것으로 능사를 삼는다."

하고 꾸짖었다.  이후 대북과 소북은 서로 반박하며 싸우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소북

은 다시의 집권당이었다.  임금은 결국 유영경과 인빈의 주장대로 정인홍을 영해(領海)로, 

이이첨은 갑산(甲山)으로, 이경전은 강계(江界)로 각각 귀양 보내라고 명했다.  그리고는 세

자 광해군이 문안을 드릴려고 하면

  "네가 무슨 놈의 세자냐?  명나라에서 인준해 주지 않는 세자가 무슨 놈의 세자냐? 빨리 

물러 가거라!"

하고 호통을 쳤던 것이다.

  이 때문에 광해군은 목에서 피를 한 대야씩 토하고 밤과 낮으로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렸

다.  그 후 대북의 거두들이 귀양을 떠난 지 며칠 안 되어 선조는 마침내 세상을 떠나고 광

해군이 등극하게 되었다.  때에 선조의 나이는 오십칠세요, 재위(在位)는 사십일년만이었다.


  [ 暴風前夜 ]   <스러진 어린 魂>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暴 風 前 夜 

    쓰러진 어린 魂



   광해군(光海君=西紀 1,608-1,623)이 왕위에 오르자 대북의 이이첨과 정인홍 등은 미처 배

소(配所)에 당도하기도 전에 선조 승하하신 소식을 듣고 되돌아 올라와서 갑자기 공신(功臣)

으로 돌변하였다.

  어제까지의 죄인이 오늘은 제멋대로 정원 안을 활보하고 다니는 형편이었다.

  광해군은 이산해로 하여금 원상(院相)을 삼고 선왕의 장례식 준비를 맡겼다.

  이것을 보고 유영경은 곧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광해군은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런 말을 하느냐고 하면서 아주 너그러운 도량으로 오히려 유영경을 위로하며 만류하였다.  

유영경은 할 수 없이 선왕의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그냥 영의정 자리에 눌러앉아 있을 생각

을 하는데, 임금의 만류가 있은지 불과 수일도 안 가서 대북 일파들이

  "유영경은 전에 전하께서 세자로 계실 때 전하를 물리치고 영창대군으로 세자를 세우려고 

꾀한 원흉이옵니다.  그런 대죄인을 그냥 조정 안에 머물러 두게 함은 불가하오니 즉시 추

방하시기 바랍니다."

하는 글을 올렸다.  임금은

  "선왕이 승하한지 한 달도 못되어서 선왕의 신임하던 대신을 어떻게 그렇게 대접한단 말

이요.  그것은 너무 지나친 말들이요."

하고 과거의 모든 혐의를 깨끗이 잊은 듯이 이렇게 유영경을 두둔했다.  그러나 대북 일파

에서는 정권욕에 눈이 뒤집혀서 매일같이 유영경을 추방하라고 상소질을 했다.

  마침내 임금도 이들의 등살에 못 견디어 유영경을 내쫓고 이원익(李元翼)으로 영의정을 

삼았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양사(兩司)에 이이첨, 이경전, 정인홍 등을 등용했다.

  이리하여 선조(宣祖) 승하한지 불과 육개월 후에는 완전히 대북 일파의 조정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때 광해군의 나이는 서른 다섯이었다.  세자빈이던 유씨(柳氏)가 이제 왕비로 승격은 했

으나 광해군의 사랑은 왕비보다도 김상궁(金尙宮)이란 후궁에 더 기울어져 있었다.

  김상궁은 전에 선왕이 병중에 있었을 때 그 곁에서 시중을 들던 궁녀이다.  광해군이 세

자로서 병 문안을 들어가면 으레 김상궁이 상냥하게 나와서 안내를 했다.  선조가 광해군의 

문안을 달갑지 않게 여기며 호통을 쳐서 내쫓을 때 김상궁은 피를 토하며 통곡하는 세자를 

극진히 간호하였다.  광해군은 그 젊고 영리하게 생긴 김상궁의 정성어린 간호를 여러번 받

았다.  광해군은 이때부터 김상궁을 은근히 마음 속에 새겨 두었다가 후에 임금이 된 후 후

궁으로 맞아들였던 것이다.

  왕비 유씨가 자기의 오라버니인 유희분과 권력잡기에만 골몰하고 있을 때 김상궁은 오직 

임금의 마음만을 잡기에 힘썼다.  그러니 임금의 정이 자연 김상궁한테만 쏠리게 되었음을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동안 후궁에는 여섯명의 숙의(淑儀)와 열명의 소원(昭媛)이 생겨났지

만 김상궁의 세력을 꺾을 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김상궁은 또 왕비 유씨의 비위도 잘 

맞추어서 왕비한테서도 미웁게 보이지 않아 가끔 왕비에게 불려가서 말동무 노릇도 하곤 했

던 것이다.

  한동안 세상은 잠잠했다.  임금도 나이가 지긋하므로 앞으로 정치가 곧잘 될 것으로 기대

되었다.  광해군은 당론(黨論)의 해가 큰 것을 알고 가끔 조신(朝臣)들에게 주의를 시키며 또 

자기자신도 매양 거기서 초월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뿌리깊이 내려오는 당론은 평소에는 

사라진 듯 보였다가도 무슨 일만 생기면 곧 표면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대간(臺諫)에서 광해군의 형님인 임해군이 모반을 꾀했다고 탄핵을 하자,  이 문제를 가지

고 조정 안은 또다시 시끄러워졌다.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이산해, 한응인 등 소위 원로

들은 임해군의 사형을 반대하고 귀양만 보내자고 하는데 대해서 이이첨, 유희분, 정인홍 등

은 원로들이 남인과 상통하여 호역(護逆)을 한다고 대들었다.  

  임금은 처음 임해군에게 죄를 줄 생각이 없었는데 강신(强臣)들의 권고가 하도 극성스러

워지자 결국은 강화 교동(江華喬洞)으로 귀양을 보내어 위리안치(圍籬安置)케 했다.  위리안

치란 담장을 쌓고 그 담장 안에서만 지내되 밖으로는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때 강

화의 현감은 이현영(李顯英)이란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이 임해군의 신세를 가엾이 여기고 

때때로 문 밖까지 내주어 얼마간이나마 자유를 주었다.  이러한 소식이 이이첨의 귀에 들어

가서 현감은 당장에 교체되고 새로 현감이 부임하였다.  새 현감은 바로 이이첨의 부하로서 

그는 얼마 후에 사람을 시켜 임해군을 죽이고 말았다.

  신해년(辛亥年=光海 三年)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왕비 유씨를 배경으로 한 유희분의 세력이 

부쩍 늘어서 궁중의 중요한 자리는 모두 유씨들의 독단장같이 되어버렸다.  유희분은 자기

네 집안 자제들로 하여금 과거에 합격시키고자 부정한 짓을 제멋대로 하였다.  때에 임숙영

(任叔英)이란 사람 역시 과거에 응하였는데 그는 답안을 쓸 때 외척 유씨들의 부정이 하도 

눈에 거슬려서 시대를 개탄하는 글을 써서 바쳤다.  시관들은 임숙영의 글을 보고 깜짝 놀

랐다.  글로서는 매우 잘되었으나 그렇다고 그 글을 발표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임숙영은 

전시(殿試)에서 누락(漏落)되었다.

  권필(權 )이 이런 소문을 듣고 풍자하는 시(詩)를 지었다.

  宮御靑靑花亂飛
( 대궐 버들은 청청하고 꽃은 바람에 어지러이 날이는데, )

  滿城冠盖媚春輝
( 성 안에 가득찬 사람들은 봄빛에 아첨을 떠네. )

  朝家共賀昇平樂
( 모든 백성들이 태평세월이라고 희희낙락 하건만, )

  誰遣危言出布衣
( 위태로운 말을 누가 내어서 베옷 입은 사람을 내쫓았느냐. )

  권필은 뒤에 이 글이 알려져서 혹독한 곤장을 맞고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그는 귀양 가

던 도중 장독(杖毒)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광해 오년(癸丑年)의 일이었다.  동래(東萊)의 어떤 은상(銀商)이 적지 않은 은을 말에 실어

가지고 서울로 올라오다가 새재(鳥嶺)에서 불한당 떼를 만나 재물과 목숨을 한꺼번에 빼앗

긴 사건이 일어났다.

  포청의 활동으로 그 불한당은 곧 잡혔다.  잡고 보니 그 불한당은 서인의 거두 박순(朴淳)

의 서자(庶子)되는 박응서(朴應犀)였다.  뿐만 아니라 그 떼거리들이 모두 서(庶)줄이나마 명

문의 자제들이었다.

  포도대장 한희길(韓希吉)은 의심이 덜컥 났다.  아무리 서줄이나마 명문집 자제들만이 모

여서 결당(結黨)을 도모했다는데에 의심을 두지 않을수가 없었다.  더욱이 시절이 시절이니

만치 그들의 배후에 무슨 줄이 없나 문초를 단단히 하였다.  박응서는

  "세상이 적서(嫡庶)의 차별을 너무 심하게 하여 서자를 천대하므로 나라를 뒤집으려고 우

선 군자금을 구한 것이요."

라고 했다.

  이 소문은 퍼져서 이이첨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이이첨은 당시 부제학으로서 그 세도는 

외척 유희분과 더불어 당대 제일이었다.  그는 속으로 무슨 큰일을 꾸밀 것을 생각하고 포

도대장 한희길을 찾아가 밤새도록 수군댔다.  포도대장 한희길은 박응서를 은밀한 곳으로 

불러내어 우선 먹을 것을 주며 은근히 달래었다.

  "네 죄는 죽어 마땅하되, 내 말대로만 하면 살아날 수도 있다."

  이 말에 박응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박응서는 장차 자기가 죽을 것을 짐작하고 어떻

게 하면 살아날까 궁리하던 참이다.  그는

  "살려만 주신다면 무슨 짓은 못하겠습니까?"

하고 대답했다.  한희길은 박응서의 귀에다 대고 무어라고 속삭였다.  박응서는 연방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며칠 후 의금부에서 문초할 때 박응서의 입에서 새어나온 토자는

  "역적 도모를 하였다."

  "지금 임금을 내쫓고 영창대군을 모셔다 임금으로 삼기를 꾀하였다."

  "영창대군 모후(母后)되는 인목대비(仁穆大妃)도 물론 아는 바이다."

  "인목대비의 친정 아버지되는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도 배후의 인물이다."

  실로 놀라운 토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인목대비라 하면 지금 임금의 생모는 아니나 당당한 

적모(嫡母)인 것이다.  또한 여러 가지 사정으로 따져본다 할지라도 인목대비한테는 불평과 

불만이 있을 것이었다. 인목대비는 전부터 후궁 태생의 현왕이 왕위를 계승한데 대해서 적

지 않은 불만을 품고 있는 터였다.  환경과 입장이 그러하니 자식을 둔 어버이의 마음으로 

혹은 어떤 다른 생각이 약간 있었을는지도 알 수 없다.

  또 인목대비의 입장이 그러니까 대비의 친정 아버지되는 김제남에게도 그런 불만이 물론 

있을 수 있다.  그 위에 김제남은 인목대비보다도 한층 더 불평을 품게 될 연유가 따로이 

있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지금 임금은 북인들을 더 신임하기 때문에 서인인 김제

남은 당파적으로도 또한 임금에게 불평을 품고 있다고 볼 수가 있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 위에 박응서의 입에서 놀라운 토사가 나왔으니 역적 도모는 

믿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더욱이 요로의 당직자인 이이첨, 정인홍 등이 모두 

북인인지라 문제는 가장 나쁜 편으로 해결을 짓게 되었다.

  광해군은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 판의금(判義禁) 박승종(朴承宗) 등을 거느리고 친

국을 벌인 후에 영창대군은 폐서인(廢庶人)을 시키고 김제남은 사사(賜死)하고 그 일족을 깡

그리 목베인 다음 인목대비의 어머니 부부인 노씨(府夫人盧氏)를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허나 사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이첨 일파들은 다시 영창대군을 폐서인만 시킬 게 

아니라 죽여야 한다고 대들었다.  임금은 할 수 없이 또 명령을 내렸다.

  "서인 의(永昌大君)는 여덟살밖에 안되는 어린아이니 죽일 수는 없고, 강화로 귀양을 보내

도록 하라."

  이 명령이 떨어지자 어머니 되는 대비는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내놓지 않았다.  어명을 

받은 군노들은 대비의 품에서 영창대군을 빼앗아 가지고 궁문 밖으로 나갔다.  대비는 아들

을 빼앗기고 그대로 방바닥에 쓰러져 통곡했다.  아무것도 모르며 끌려가는 영창도 어머니

를 부르며 발버둥쳤다.  인목대비는

  "이놈들아, 차라리 날 잡아가거라.  어린 것이 무슨 역률(逆律)을 범했다고 잡아가는 것이

냐."

  소리소리 질렀으나 이런 말이 무지한 군노들에게 통할 리가 없다.  군노들은 억지로 울부

짖는 아이를 끌어가고 말았다.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쫓겨난 후 울타리가 튼튼한 집안에 갇히우고 군사들이 매일같이 지

키고 있었다.  어린 영창대군은 그 속에서 매일같이

  "어머니! 어머니!"

하고 울며 지냈다.  마침내 대군은 울기에도 지쳐 그만 병이 들어버렸다.

  강화부사 정항은 대군이 있는 방에다 불을 많이 때라고 명령하였다.  방은 펄펄 끓으며 

달아 올랐다.  어린 영창은

  "아이 뜨거워 어머니!"

  소리를 몇 번 지르고 나중에는 문틈으로 기어 나오려다가 그대로 숨이 막혀서 쓰러진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한편 영창대군이 강화도로 쫓겨난 후 대비의 거처는 정동(貞洞)에 있는 경운궁(慶雲宮)으

로 옮겨졌다.  이것은 광해군이 대비와 함께 창덕궁(昌德宮)에 있기 싫어서 취한 조처였던 

것이다.  이제는 내시도 많지 않고 시녀도 몇 명밖에 없었다.  넓고 넓은 경운궁 대궐 속에

서 밤이면 무서운 줄도 모르고 친히 우물가로 가서 사발에 정화수를 떠 놓고 영창이 빨리 

살아 돌아오기만 빌었다.  어린 영창은 벌써 세상을 떠났건만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르고 이

같이 지성으로 빌고만 있었다.

  가끔 그 옆에는 영창보다 두어살 위인 정명공주(貞明公主)가 역시 어머니 하는 대로 칠성

님을 향해 절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의 쓸쓸하고 괴로운 나날도 하루 하루 흘

러서 여름이 다 가고 가을이 되었다.  그런데 하루는 돌연밖에 나갔던 궁녀 하나가 숨이 턱

에 차서 뛰어 들어오더니 기절하도록 구슬픈 소식을 들고 왔다.

  "마마! 마마!"

  "웬일이냐?"

  대비는 숨이 턱에 차서 뛰어드는 궁녀를 바라보고 물었다. 

  "권필이란 시인이 신문고를 울려 대군께서 강화에서 돌아가신 것을 폭로시키다가 지금 사

형에 처하라는 분부를 받고 의금부에서 끌려 나갑니다."

  "뭐? 대군이 죽었다고?"

  대비는 눈 앞이 캄캄했다.

  "네, 강화부사 정항이란 자가 이이첨의 지령을 받아 대군을 방에 가둔 후에 산더미 같은 

장작불로 구들을 달궈서 숨이 막혀 죽게 했답니다."

  대비는 맥이 탁 풀렸다.  몸을 지탱하기 위해 기둥을 붙들 힘도 없었다.  그대로 쓰려져서 

기절하고 말았다.  어린 정명공주는 기절하여 쓰러진 어머니의 치마자락을 휘어잡고 어머니

를 부르며 통곡만 했다.


  [ 暴風前夜 ]   <西宮에 쌓이는 恨>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暴 風 前 夜 

    西宮에 쌓이는 恨



  이때 조정에서는 이이첨이 앞장을 서서 대비를 폐위(廢位)시키는 음모를 진행하고 있었다.

  좌의정 정인홍은 원래부터 이이첨과 한패이면서도 이번 일에만은 겁을 집어먹었는지, 혹

은 만대에 누명을 쓸 것이 두려웠음인지, 슬며시 발뺌을 하고 시골집에 내려가 누워버렸다.  

또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은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고 

  "이런 짓은 간사한 무리들의 짓이다.  나도 이 자리에 있다가는 무슨 변을 당할지 알 수 

없다."

하고서 영의정의 벼슬을 내놓고 강릉 고향으로 물러나 다시 오지 않았다.

  이이첨은 심복인 우참찬 유간(右參贊柳澗)을 자기 집으로 불렀다.

  "지금 영상도 없고, 좌상은 시골 내려가 누워 있으니 일을 할 사람은 당신과 우의정 한효

순(韓孝純)밖에 없소.  빨리 대사를 결정해서 조정의 여론을 실천하게 하오."

  대비를 폐하는 지령을 내렸다.

  유간은 부리나케 한효순을 찾아 이이첨의 말을 전했다.

  우의정 한효순은 백대의 누명을 들을지언정 세도 이이첨의 말은 반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

다.  그는 유간의 손을 잡고

  "어떠한 방법을 취했으면 좋겠소.  유참찬 좀 가르쳐 주구료."

하고 물었다.

  "만조백관을 대궐 안에 모아놓고 대비의 죄악을 밝힌 후에 폐하는 게 가한가 부한가 가부

를 쓰라고 하시오.  이렇게 하면 일은 쉽사리 처결될 것이 아니겠소?  대감이 이번 일에 공

을 세운다면 영의정은 떼어논 당상입니다."

  한효순은 공명에 눈이 어두웠다.  영의정이 된다는 말에 뻔히 옳지 못한 일인 줄 알면서

도 당장 대궐로 들어가 정원 승지를 불렀다.

  "조정에 중대한 공론이 있으니 어서 만조백관을 초청케 하오."

  승지들도 역시 이이첨의 심복들이었다.  한효순이 대궐로 들어오기 전에 벌써 이이첨한테

서 연통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승지들은 곧 만조백관한테 초패를 놓았다.  삼공(三公)과 육조판서 이하 참판, 참의, 정랑, 

좌랑까지 불렀다.  이이첨의 직계부하들이며 대북의 일당들은 오늘 돌연 부른 것이 무슨 일

인지 대강 짐작들은 했으나 미관말직의 벼슬아치들은 까닭을 알지 못하고 모여들었다.

  반나절이 넘어서야 모든 사람들은 모여들었다.  이때 전관의 직함을 가진 사람들까지 합

하여 구백삼십여명이나 되었고 그 중 종실(宗室)만도 일백칠십여명이나 되었다.

  우의정 한효순은 가장 크나 큰 국사나 처리하는 듯 큰 소리로 외쳤다.

  "역적 김제남의 따님인 대비는 그의 아들인 영창대군으로 왕위를 계승시키려 하여 열 가

지 큰 죄악을 범하였소.  그러니 이미 전하와 모자의 정은 끊어진지 오래오.  어머니 아닌 

사람을 어머니로 모실 수는 없소.  만조백관들은 그를 폐위시키라 하오.  여론에 따라 가부

를 묻는 것이니 여러분은 가부를 표시해 주기 바라오."

  이렇게 말하자, 처음부터 이이첨의 주구가 되어 폐모론을 주장하던 대사간 윤인(尹 )이 

앞으로 나와 큰 소리로 외친다.

  "옳소.  벌써 폐모를 했어야 할 터인데 오늘날까지 끌어 내려온 것은 전하께서 너무나 인

정이 많은 탓이라 하겠소.  빨리 백관에게 가부를 물어 처단하오."

  윤인은 팔을 걷어 붙이고 떠들어 댄다.

  "자아, 그러면 만조백관들은 두 줄로 갈라서서 가(可)하다는 사람은 좌편에 서서 이름을 

쓰고 부(否)하다고 하는 사람은 우편으로 열을 지어 자기 이름과 붓자(否字)를 쓰시오."

  한효순이 명령을 내린다.  어느새 정원 승지는 미리 준비해 놓았던 사선상 두 개와 명단

책 두벌을 서리(胥吏)를 시켜 만조백관 앞에 양편으로 갈라 놓는다.

  대사간 윤인이 가하다는 자를 쓰는 줄의 맨 앞을 섰다.  그 바로 뒤로는 대사헌 정조(鄭

造)가 대섰다.  이 두 사람은 본래부터 폐모론을 주장하던 자들이다.  폐모론을 주장한 이후

에 이이첨의 눈에 들어서 미관말직인 당하관으로 있던 두 사람은 일약 대사간과 대사헌이 

되었다. 

  뒤를 이어 대북의 소위 명사들이 꼬리를 이어 폐모하는 것이 옳다는 줄에 대섰다.  여기 

붙어서 눈치를 살피는 아전들, 서리들이 힐끔힐끔 남의 눈치를 살피면서 갓자(可字)쓰는 줄

에 대어섰다.

  이때 원임대신 이항복한테 수의(收議)를 하러 나갔던 칙사가 돌아왔다.

  "백사 정승의 수의문을 가지고 왔습니다."

  한효순이 그 수의문을 받아 만조백관에게 피로하며 읽는다.

  "신은 벌써 반년 동안이나 중풍에 걸려 아직 병중에 있소.  누가 전하를 위하여 이런 일

을 만들도록 하였는지 몰라도 자고로 어미가 악해서 비록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자식은 어

미를 죄 줄 수 없소.  아버지가 자애스럽지 못해도 아들은 효도를 극진히 해야 하는 법이요.  

도대체가 이러한 것은 논의하는 것부터가 불가하오."

  반대하는 대답이 분명하였다.  국가의 동량이었던 이항복이 폐모론에 반대하는 것이 분명

해지자 만당의 공기는 삽시간에 변하였다.  그때가지 힐끔힐끔 대북 일파의 눈치만 살피던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 둘 반대론의 나오기 시작했다.

  한효순도 원래는 줏대가 없고 주변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이이첨과 같이 악랄한 우

인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대북의 직속 당파도 아니었다.  그는 의외로 반대론이 많

이 나오는 것을 보고 겁이 슬며시 났다.

  결국 이날의 공론은 찬반(贊反) 양론으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후 폐모론을 

주장하는 대북 일파들은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대해 무서운 공격을 가해왔다.  우선 이항복

에 대하여는 처참의 형을 가하라 하였고,  양사(兩司)에서도 그의 말이 발만(發慢)하니 삭탈

관직하라고 들고 일어났다.

  임금은 전조(前朝)의 대신을 죄 줄 수 없다 하여 여러 가지로 반대해 보았으나 조정은 벌

써 대북 일파의 손에 들어 있는 것이다.  결국에는 이항복을 북청으로 귀양보내고 말았다.  

이후부터는 거의 날마다 대비의 죄를 들고

  "지금 뿌리를 뽑지 않으면 훗일 해 되는 일이 많아질 것이요."

하고 대비를 없애라는 상소가 계속해 들어왔다.  임금은 하도 기가 막히고 귀찮아졌다.  무

엇 때문에 이들이 이렇게까지 악착스럽게 폐모하라고 성화를 부리는지 그 뜻을 알 수가 없

었다.  임금은 마침내

  < 내 덕이 없어 임금이 된 후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나 매우 유감스럽다. 전번에 친형 임

해군을 죽이고 또 어린 영창대군을 죽였다. 이것은 생각만 하여도 형제의 정으로 잘못 된 

것을 알고 있는데 지금은 또 종사를 위해 폐모를 시켜야 한다니 내 죄 더욱 큰 것을 느낀

다. 내 무슨 죄가 많아 이런 변을 당해야 하는고! 경 등은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말아라. >

하고 글을 내려 다시는 그런 소리를 말라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인성군(仁城君) 이하 여

러 종실들이 일어나 나라를 위해 대비를 폐하라고 떠들었다.  모두가 대북의 사주를 받아 

일어난 괴뢰들이었다.

  그 다음 해인 광해군 육년 이월 십일일 마침내 빈청회의(賓廳會議)에서는 임금의 한탄도 

개의치 않고 좌의정 정인홍 이하 예조판서 이이첨 등이 모여서 폐모의 절목(節目)을 결정했

다.  

  즉, 명나라에서 준 존호(尊號)와 본국에서 준 옥책(玉冊)과 옥보(玉寶)를 빼앗고 대비라는 

명칭을 서궁(西宮)이라고만 하고, 국혼 때 내린 납폐(納幣) 등속을 비롯하여 왕비의 어보(御

寶)나 표신(標信)을 회수하고, 출입할 때 연(輦)과 의장(儀仗)도 폐지해 버리고 일체 문안과 

숙배를 폐하여 후궁과 같이 대우를 한다는 것이었다.

  이밖에도 또 그 절목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들어 있었다. 

  < 대비는 아비가 역적의 괴수가 되었고,  그의 몸이 역적 모의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자

식이 역적의 추대한바 되었으니 이미 인연은 종묘와 사직에 끊어진바 되었다.  그가 죽은 

후에 나라에서는 거애(擧哀)를 하지 아니하고 복(服)을 입지 아니하며 신주는 종묘에 들어갈 

수 없다.  또 서궁의 담을 더 높이 쌓고 무장(武將)을 두어 지키게 하되 그 수직 군사의 행

동은 병조에서 감독하고 내시는 두 명, 별감은 네 사람만 두게 한다. >

  대강 이러한 것들이었다.

  승지는 곧 이 결정을 받들고 대비에게로 갔다.  대비는 영창대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로는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만 있었다.  몇 번인지 목을 매어 자진(自盡)을 하려고 한 일까

지 있었다.  그러나 궁녀들은 대비에게 자진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머리도 그냥 흐트러뜨

린 채 밥과 음식을 물리치고 누워 있는 대비 앞에 돌연 내시가 승지를 인도하여 들어왔다.

  승지는 우선 열가지 죄목을 읽고 폐모의 선언을 내렸다.  대비는 방 안에서 궁녀들에게 

부축되어 오뚝이 앉아서 모든 선언을 다 들은 후에 이(齒)를 바드득 갈았다.  별안간 문을 

벼락치듯 열어젖혔다.  오뚝이 앉아서 승지를 호령한다.

  "승지야, 듣거라,  만고에 자식이 어미를 폐한다는 말을 처음으로 들었다.  자식이 어미를 

어찌 폐하느냐?  나는 상감보다 나이 적은 젊은 계모다마는 상감의 아비가 친히 친영례(親

迎禮)를 거행하여 맞이해들인 정정당당한 적모(嫡母)다.  알아 듣겠느냐?  제 아비가 정해놓

은 어미를 어떻게 자식이 마음대로 쫓아낼 수 있느냐.  상감한테 내 말을 전해라.  폐모를 

할것이 아니라 죽여버리면 만사가 다 해결될 것이 아니냐고.  공연히 세상이 시끄럽게 떠들

썩할 것 없다.  나를 빨리 없애버려라.  왜 못하느냐?  맘대로 하는 것을!  나를 어서 죽여

버리라 해라!"

  어린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누웠던 대비에게 어디서 그런 기운이 솟아

나는지 쨍쨍한 목소리로 승지를 꾸짖는다.  승지는 고개를 숙이고 부들부들 떨고만 섰다가 

슬며시 피하여 나가버린다.

  대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늙은 궁녀들에게 영을 내린다.

  "먹을 것을 좀 가져 오너라.  이제는 내가 살아 저놈들이 망하는 꼴을 좀 보아야겠다."

  악에 받친 대비는 스스로 자청해서 먹을 것을 청했다.  

  "옳으신 생각이십니다.  그저 오래 오래 사시어서 눈으로 저 자들의 망하는 꼴을 보셔야

지요."

  늙은 궁녀는 대비를 위로한다.

  조정에서는 폐모를 선포한 후에 서궁(西宮)의 담을 더 한층 높이 쌓아 올리고 군사를 풀

어서 철통같이 포위해 버렸다.  그러나 이럴수록 대비는 악착같이 살아야 한다고 마음 속으

로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고 다짐했다.

  친정 아버지도 역적으로 몰아 죽였다. 어린 아들도 불을 질러 숨이 막혀서 죽게 했다.  금

이야 옥이야 사랑해 주던 늙은 남편 선조대왕도 꿈같이 세상을 떠나 돌아갔다. 다만 남아 

있는 혈육이라고는 생사를 모르는 친정 어머니 노씨와 열살밖에 아니 된 정명공주 뿐이다.

  늙은 어머니와 어린 딸, 핏줄이 엉킨 두 여자만이 남아 있을 뿐 자기의 몸은 이제 혈혈단

신 홀몸뚱이다.  그러나 이제는 도리어 살아야겠다고 반발했다.  소금밥에 피죽을 끓여 먹고

라도 오래오래 살아서 조정이 되어가는 꼴을 보리라 결심했다.


  [ 暴風前夜 ]   <그믐밤의 탈춤>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暴 風 前 夜 

    그믐밤의 탈춤



   이때 조정에서는 명나라의 불 같은 독촉을 받아 참판 강홍립(姜弘立)을 오도도원수(五道

都元帥)로 정하고 평안병사 김경서(金景瑞)로 부원수를 삼은 후에 이만명의 군사를 거느려 

심하(深河)에 출병케 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조선을 구해준 명나라의 은공을 갚자는 것이다.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 가담하고 있는 틈을 타서 갑자기 세력을 펴친 여진족

(女眞族)은 그 후 점점 강성하여 건주호(建州胡)의 추장 누루하치(奴兒哈赤)가 광해군 팔년에 

드디어 자립하여 후금국(後金國)을 세우고 연호를 천명(天命)이라 정했다.  그런 후에는 더욱 

막막강병이 되어 만주의 요동 벌판은 말할 것도 없고 명나라 서울 북경(北京)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명나라에서는 세번 네번 구원해 달라고 청이 들어왔다.  한번 이런 요청이 들어오자 조정

에서는 가장 중대한 사건으로 취급하여 묘당에서 토론하게 되었다.  전에 임진왜란 때 명나

라가 우리를 구원해 주었으니 이번에 그전 은혜를 갚는 뜻에서 구원병을 보내야 한다는 사

람과, 의리상으로는 응당 구원해 주어야겠지만 강대한 이웃나라인 후금국을 건드리는 것은 

자는 호랑이를 건드리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반대하는 사람과, 이렇게 의견이 두 갈래로 나

뉘어서 좀처럼 결정이 나지 않았다.

  한편 누루하치는 이 소식을 듣고

  < 금번에 귀국이 명나라를 도와서 출병한다 하니 매우 섭섭한 일이다.  우리는 귀국과 아

무런 혐의도 없다.  출병치 말고 국경을 지키며 형세만 보아라.  만약에 귀국이 명나라를 도

와 원병을 보낸다면 조선 삼천리 강산을 무찔러 버리겠다. >

하는 위협을 보내왔다.

  여진(女眞)이 비록 태조대왕과 세종대왕 때 조선에 굴복해서 조공(朝貢)을 바치고 종노릇

까지했지만 이제는 강국이 되었다.  여진 누루하치를 업신여겨 볼 수 없게 되었다.

  광해는 몇 달을 두고 골치를 앓았다.  광해는 마지못해서 심하(深河) 출병을 하면서도 원

수 강홍립에게 비밀히 지령을 내렸다.

  "형편을 보아서 향배(向背)를 취하라.  그리고 오랑캐한테 먼저 칼을 빼어들지 마라.  누루

하치한테 활을 쏠 때는 반드시 활촉을 뽑아서 허청으로 화살을 쏘게 하라.  그리하여 뒷날 

말썽이 나지 않도록 하라!"

  이같이 신신당부해 보냈던 것이다.

  강홍립은 군사를 거느려 심하까지 갔으나 광해의 밀지(密旨)대로 살촉을 빼고 살을 쏘았

다.  뿐만 아니었다.  대세가 명나라에 불리한 것을 알자 도원수 강홍립은 슬며시 누루하치

한테 항복해 버렸다.

  뒤미처 요동(遼東)과 심양(瀋陽)이 함락되었다.  명나라 조정은 조선을 의심했다.  그러나 

오랑캐는 오랑캐대로 항복한 강홍립을 앞세워 조선을 치러 들어온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떠

돌았다.  서울 장안은 발끈 뒤집혔다.

  "큰일 났네, 오랑캐가 강홍립을 앞장 세워가지고 조선으로 쳐들어 온다네."

  "그뿐인가, 명나라가 또 쳐들어 온다네,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원해 주었는데, 조선은 오

랑캐와 내통이 되어가지고 항복해 버렸다고 노발대발하면서 쳐들어 온다네.  큰일 났네."

  사람들은 만나는 대로 수군거렸다.  조정에서는 갑자기 장수감을 뽑느라고 만 사람을 뽑

는 만인무과(萬人武科)를 보였다.

  과연 명나라에서는 문죄사를 내보내기로 작정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명나라의 장수 모문룡

(毛文龍)은 요동이 함락되자 군사 수천명을 거느리고 의주(義州)로 넘어와서 철산(鐵山) 앞에 

있는 단도(槨島)에 진을 치고 패잔병들을 불러들이지 시작하였다.

  한편 오랑캐는 오랑캐대로 의주까지 쳐들어 와서 한인(漢人)을 만나는 대로 모조리 죽여

버리고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잡아 바치라고 공갈과 엄포가 대단했다.

  광해는 양면 정책을 썼다.  비밀히 금은보화를 강홍립에게 보내어 오랑캐한테 바쳐서 조

선이 딴 뜻이 없는 것을 밝히게 하고, 한편으로는 이정구(李廷龜)를 변무사(辯誣使)로 명나라

에 가서 오랑캐와 통한 일이 없다는 것을 변명하라했다.

  원래 이정구는 글 잘하는 재상으로 이름이 명나라에 자자했으므로, 그가 전에 폐모(廢母) 

때 조정에 참예하지 아니했다고 귀양을 보냈던 것을 풀고 그의 명성을 이용하여 명나라 조

정의 노한 것을 늦추자는 것이었다.

  이같이 온 나라가 소란스러울 때 이이첨, 유희분의 집 기둥에는 화살에 십자로 붙잡아맨 

협박장이 들어와 박혔다.  새로 영의정이 된 박승종(朴承宗)의 집에도 들어왔다.  협박장의 

내용은 이러했다.

  < 빨리 대비를 복위시키지 않으면 너희들은 명나라의 문죄사가 나올 때 나라에 공론이 

일어나서 육시처참을 당하리라.  곧 서궁의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다시 대비로 받들어 모시

게 하라. >

  하루는 유희분과 이이첨이 만나 이 협박장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먼저 유희분이 

말을 했다.

  "살에 협박장을 붙들어매서 대청 기둥이 아니면 문설주에 화살을 박아놓으니 범인을 잡을 

도리가 없습니다.  필시 대비편 사람들의 하는 짓이 분명합니다."

  이이첨은 고개를 숙이고 대답이 없다.

  "장차 명나라 문죄사가 들어온다면 어찌하지요?  그리고 누루하치가 또 온다면?"

  말을 마친 유희분의 얼굴은 노랗게 질려 있었다.

  "서궁(西宮)이 복위되는 날에는?"

  이이첨의 가슴도 조마조마한 모양이다.

  "대감이나 나는 죽음을 당하고 말 것이니다.  더구나 대감은 죄상이 더욱 크니까."

  유희분의 말을 듣는 이이첨은 입술이 바르르 떨린다.

  "어찌해서 내 죄가 더 큽니까?  죄를 당하면 다같이 당해야지요."

  이이첨의 목소리는 독이 들었다.

  "불을 질러 영창을 죽이고, 대비를 서궁으로 쫓아낸 일은 대감이 한 짓이니 나나 박승종

보다 책임이 더 큽니다."

  이이첨의 눈에는 별안간 핏줄이 빨갛게 섰다.  유희분은 이이첨의 살기 띤 독한 눈을 피

했다.  이이첨의 살기를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말을 부드럽게 붙여 본다.

  "나는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 말은 내가 잘못 했소이다.  좌우간 속히 

일을 피워볼 길을 생각하십시다."

  이이첨도 조금 수그러졌다.

  "유대감의 생각은 어떻게 하면 일이 피게 되리라 생각하십니까?"

  "빨리 복위를 시킵시다.  그저 일은 무사한 것이 제일입니다."

  "유대감은 정신이 나가셨소?  도로 복위를 시키면 대비의 원망이 풀릴 줄 아시오?"

  "그럼 이대감의 생각에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이이첨은 대답 없이 필묵을 당겨서 왼편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  손바닥 안에는 글자가 

두 자가 씌어졌다.  소리 없이 유희분 앞에 내민다.

 [ 滅 口 ]

  두 글자다.  유희분은 이이첨의 눈을 빤히 살펴보다 묻는다.

  "멸구란 죽이라는 뜻입니까?  어떻게 죽이란 말요?  어떤 방식으로?"

  "한밤중에 자객(刺客)을 서궁으로 들여보내기는 쉬운 일입니다."

 이렇게 대답하며 이이첨은 간드러지게 웃는다.


   임술년(壬戌年) 십이월 그믐날 그 해의 마지막을 알리는 방포(放砲) 소리를 군호삼아 이

이첨의 심복 백대형(白大珩)과 이위경(李偉卿) 등은 건달패 십여명을 거느리고 북과 장구를 

치며 어지러이 서궁에 돌입하였다.

  한편 그날 초저녁에 대비가 꿈을 꾸니 선조대왕이 생시와 조금도 다름없는 복색으로 나타

나서 대비를 보고

  "도적의 무리가 곧 들어올 것이니 피하지 않으면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요."

하고 조용히 말한 다음 사라졌다.

  대비는 꿈을 깨어 흐느껴 울었다.  옆에 모시고 있던 궁녀가 그 까닭을 알자

  "선대왕의 혼령이 나타나셔서 이르시는 말이오니 반드시 까닭이 있겠습니다.  대비께서는 

저와 옷을 바꾸어 입으시고 얼른 후원으로 몸을 감추십시오."

  궁녀는 대비의 소복을 벗기고 자기 옷을 입힌 후에 머리에 얹은 첩지까지 바꾸었다.  그

리고 대비의 소복을 자기가 입고 스스로 가짜 대비가 되어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밤은 점점 깊었다.  섣달 그믐날 밤이라 거리는 웅성거렸다.  삼경(三更) 때쯤 되니 서궁 

대문 앞으로 건달패들이 별안간 소고와 꽹과리를 두드리며 들이닥쳤다.  문 지키는 군사들

이 물었다.

  "뭣하는 놈들이냐?"

  "섣달 그믐에 잡귀를 쫓는 탈춤패들이요.  서궁에도 액막이를 하라고 위의 분부를 받들어 

나왔소."

  "출입패(出入牌)를 보여라."

  탈막을 쓰고 앞에 선 자가 출입패를 군사한테 보였다.  틀림없는 궁중 출입패다.  군사들

은 문을 열고 탈춤패를 들여보냈다.

  꽹과리와 소고 치는 소리가 요란한 속에 탈춤패들은 춤을 추면서 대비가 거처하고 있는 

침실 앞까지 들어갔다.

  대비와 옷을 바꾸어 입은 궁녀는 침착하고 대담했다.

  "누가 이렇게 소란을 떠느냐?"

  큰 소리로 꾸짖었다.

  앞장을 선 건달패 두목은 대비의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 손을 번쩍 들어서 탈춤

패들한테 말없는 군호를 보낸다.  탈춤패들은 우르르 대비의 침실로 몰려들어 왈칵 미닫이

를 열어 젖혔다.  앞에 섰던 한 자가

  "오늘은 섣달 그믐이라 잡귀를 쫓아내라는 위의 분부를 받고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말을 마치자 소매 안에서 비수를 뽑아 거침없이 대비를 찔렀다.  순간 구슬픈 비

명소리가 일어나며 가짜 대비는 푹 고꾸라졌다.

  이때 마침 영의정 박승종이 대비를 해하려는 이이첨 등의 음모를 눈치 채고

  (만약 대비를 해하는 일이 생긴다면 비록 자기가 손을 아니 댔다 해도 영의정의 책임으로 

누명을 뒤집어 쓰고야 만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일은 훼방을 노아야겠다.)

  결심하고는 친히 군복을 갖추고 군사를 지휘하여 서궁으로 뛰어들었다.

  "저놈들을 잡아라!"

  군사들은 일제히 허리에 찬 육모방망이를 뽑아들었다.  그러나 탈춤패들은 벌써 일을 저

지른 뒤였다.  그들은 재빨리 어둠을 타고 담을 뛰어 넘어 도망을 치고 말았다.

  탈춤패들이 도망 간 후에 박승종은 전상으로 올라가 방문을 열어 보았다.  피비린내가 왈

칵 코를 스쳤다.  박승종의 가슴은 탁 내려앉았다.  눈같이 흰 소복을 입은 여인의 몸에는 

홍건히 피가 흘렀다.  틀림없는 대비였다.

  "조금만 일찍 왔다면 대비의 목숨을 구했을 것을!  이놈은 만대의 역적놈이 되겠구나."

  박정승은 우두커니 시체 앞에 서서 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숙였다.

  대비가 죽었다고 믿은 것은 박승종 뿐이 아니었다.  이이첨도 탈춤패들의 보고대로 대비

가 죽었거니 하고 믿고만 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있던 날 대비가 나타남을 보고 여태

껏 살아 있었는가 하고 놀래었다고 한다.


  [ 暴風前夜 ]   <새문안의 王氣>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暴 風 前 夜 

    새문안의 王氣



   광해군은 근자에 와서 마음에 차차 번뇌를 느끼기 시작했다.

  형을 죽이고, 아우를 죽이고, 대비를 폐위시켜서 서궁(西宮)에 감금하고, 이항복 이하 늙은 

중신들을 다 보내고 나니, 아무리 이이첨, 유희분 등의 말만 듣고 행한 일이라 하나 깊은 밤

중에 홀로 앉아 고요히 생각해 보면 어쩐지 마음이 괴로왔다.  광해군은 젊어서 좋아하지 

않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김상궁의 거처를 찾는 광해군의 발길은 

잦아졌다.

  이때는 명나라에서도 입을 다물고, 누루하치도 중국을 통일하기에 바빠서 딴 생각을 아니 

하게되어 차츰 세상이 태평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해마다 풍년이 들어서 먹을 것이 

풍부하니 광해군은 궁중 넓은 후원에서 김상궁을 위시한 여섯 사람의 숙의와 열 사람의 소

원(昭媛)에 싸이어 행락으로 나날을 보냈다.

  임금의 나이는 벌써 사십이 넘어섰고 김상궁도 이제는 나이 삼십이 넘어 한참 무르익어 

가는 좋은 시기였다.  아침에 만조백관들을 모아놓고 국사를 논의해야 할 조회 시간이 되어

도 광해군은 김상궁만 옆에 끼고 누워 있는 날이 많게 되었다.

  김상궁은 이때부터 임금을 배경삼아 본격적으로 권도(權道)를 부리기 시작했다.  김상궁의 

총행(寵幸)이 비길데 없다는 말은 궁중과 조정에 파다하게 퍼졌다.  김상궁의 친정을 통해 

벼슬자리를 얻으려는 자는 날이 갈수록 늘었다.  김상궁의 친정 어미는 과부가 된 후에 유

몽옥(劉夢玉)에게 개가했다.  유몽옥은 과거를 못 본 백두(白頭)이건만 김상궁의 덕으로 횡성

현감(橫城縣監) 까지 지냈다.  이밖에 김상궁의 조카사위가 되는 정몽필(鄭夢弼)은 무슨 일만 

있으면

  "아주머니!"

하며 궁중을 드나들었다.

  유가와 정가의 집으로는 조정의 벼슬하는 대관들이 뻔찔나게 드나들었다.  유몽옥과 정몽

필의 문전은 날마다 사인교, 가마, 초헌, 남여로 시장을 이루었다.

  이리하여 나라에서 내리는 벼슬의 지위가 김상궁에게 바치는 뇌물의 다과에 따라 결정되

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상궁은 이렇게 모아들인 제물을 기특하게도 그때 임진왜란으로 폐

허가 된 대궐 중수(重修)에 쓸어 넣었다.

  창덕궁(昌德宮)의 중수(重修), 그밖에 다른 관청 등의 재건 역사를 벌였다.  늘 돈이 부족

하여 건축 사업을 중단하지 않으면 안 될 때마다 김상궁이 내놓는 은전으로 역사를 계속해 

나갔다.  광해군은

  "너의 충심을 무엇으로 갚을지 모르겠다."

하며 더욱 김상궁을 신임했다.

  김상궁은 이렇게 임금의 마음만 사로잡은 것이 아니었다.  김상궁은 한편으로 왕비의 환

심을 사기 위해서 무당을 불러들여 굿을 하고, 또 지관(地官)들이나 술수(術數)하는 자들을 

불러들여 대왕전하와 중전, 동궁의 만수무강을 빌며 점을 치게 했다.

  한 번은 성지(性智)라는 도승(道僧)을 청해서 여러 가지 점을 쳐보인 일이 있었다.  성지는 

김상궁의 신수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운명은 국운과 같이 하는 대운이올시다.  이 재앙을 막는 길은 새로 일어나는 왕

기(王氣)를 눌러 막아야 합니다."

  새로 일어나는 왕기를 눌러 막아야 한다는 말에 김상궁은 귀는 번쩍 열려졌다.

  "새로 왕기가 어디서 일어납니까?"

  "간단히 말씀을 할 일이 아닙니다.  함부로 말을 했다가는 소승의 목이 달아납니다.  어전

이 아니고는 아뢸 수 없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어전에서 말씀을 아뢰도록 하지요."

  김상궁은 곧 성지라는 중을 광해군에게 소개 했다.  광해군은 대뜸 물었다.

  "들으니 대사는 나라에 왕기가 일어난다고 했다 하니, 사실인가?"

  "예, 그런 말을 상궁께 올린 일이 있습니다."

  "나라에 왕기가 일어난다 하니 어느 곳에 일어난단 말이냐?"

  "바로 서울 인왕산(仁旺山) 밑에 왕기가 서려 있습니다."

  광해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해진다.

  "내 자리를 뺏을 사람이 나타났단 말이지?"

  "새로 왕이 될 큰 인물이 인왕산 밑에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 어찌하면 좋을고?"

  광해군의 목소리는 떨리는 듯했다.  성지는 눈을 딱 감고 합장한 채 대답이 없다.

  "말씀을 해주십시오.  대사님."

  김상궁도 옆에서 간곡하게 부탁한다.  성지는 한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새문안에는 왕기가 멈춰 있는 곳이니 그 곳에 크게 궁궐을 이룩하시어서 미리 다른 일이 

없도록 눌러 놓셔야 하겠습니다."

  성지의 말이 끝나자 김상궁이 아뢴다.

  "대사가 말씀한 새문안 대궐터는 바로 정원군(定遠君)의 집이옵니다."

  "뭐, 정원군의 집이야?"

  광해군은 깜짝 놀랐다.

  정원군은 돌아간 인빈 김씨(仁嬪金氏)의 소생으로 의주(義州) 피난길에서 죽은 신성군(信城

君)의 아우요, 광해군의 이복 동생이다.  정원군은 나이 아직 사십미만이었으나 아들 삼형제

를 두었다.  큰 아들은 능양군(綾陽君)이요, 둘째는 능원군(綾原君), 셋째는 능창군(綾昌君)이

다.  광해군은 성지를 보낸 다음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말이 괴상한데..."

  아무래도 으심스럽다는 듯 김상궁을 향해 혼자 말한다.

  "그야 하늘 일이란 모르는 것이올시다."

  김상궁은 목소리를 나직이 하여 자기 의사를 표시한다.

  "정원군은 무능하고 못나기 한량없는 사람이야.  이 사람의 집에 왕기가 서려 있다니 괴

상한 일이거든..."

  광해군은 또 한 번 뇌까린다.

  "정원군은 못났다 하지만 아들이 삼형제나 있습니다.  아들 삼형제 중에 혹시 인물이 있

을는지 모릅니다.  좌우간 전하께오서는 곧 정원군에게 집을 비우라고 분부를 내리십시오."

  광해군은 김상궁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며 내시를 불렀다.

  "정원군한테 별감을 내보내서 사흘 안으로 집을 비고 옮기라고 이르라."

  내시는 어명을 받들어 별감을 정원군의 집으로 내보냈다.

  광해군이 즉위한지 십년이 넘었건만 형제인 정원군에게 무슨 분부를 내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정원군은 임해군의 일과 영창의 일이 있은 뒤에 영영 대문을 닫아 걸고 두문불출

하고 있었다.  친구가 와도 만나지 아니했고 일가 친척도 서로 찾지 아니했다.  세상을 등지

고 산송장이 되어 나머지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대전 별감이 나와서 어명을 전하러 왔다고 한다.  온 집안은 눈이 둥그래

졌다.  부인 구씨도 깜짝 놀랐다.

  부인 구씨는 당대 문장가(文章家)로 이름이 높은 구사맹(具思孟)의 딸이다.

  "웬일이지요?"

  "글쎄, 나도 모르겠는데?"

  정원군은 침착하게 대답하면서 조복으로 바꾸어 입고 칙사를 만날 준비를 했다.  대청문

을 활짝 열어 놓고 대청바닥에 단정히 꿇어앉아 어명이 내려지기만 기다린다.  아내 구씨와 

큰 아들 능양군도 뒤에 시립해 섰다.

  "경이 지금 들어 있는 집을 헐고 궁을 세우려 하니 경은 따로 집을 구해서 나가라는 어명

이요."

  청천벽력 같은 뜻밖의 소리다.  정원군은 자기의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어명이

니 거역할 수는 없었다.

  "분부대로 집을 내놓겠습니다."

  정원군은 어깨가 축 처졌다.

  "사흘 안으로 집을 내놓고 이사를 하되, 만약 영을 어기는 날에는 큰 벌을 받을 것이요."

  칙사는 마지막 어명을 전하고 돌아갔다.  칙사를 보낸 다음 정원군의 집안 식구들은 서로 

멍하니 바라보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집을 왜 내놓으랍니까?  수다 식구에 간단한 살림도 아닌데, 어떻게 나갑니까?  우선 집

을 구해야지 아니합니까?"

  구씨 부인은 마음을 잠깐 진정시킨 후에 이같이 물었다.

  "별 수 없지, 나가라면 나갔지 별 수가 있나?  동대문 밖 처갓깁으로라도 방 한간을 빌려

서 이사를 가야지."

  정원군은 길게 한숨을 짓는다.  이때 옆에서 아무 소리 아니하고 섰던 이십대의 젊은 능

양군이 나직한 음성으로 부모께 아뢰었다.

  "사흘 안에 집을 옮기라 하니 지체 말고 옮기십시오.  공연히 지체를 하셨다가는 큰 의심

을 사십니다."

  정원군의 귀가 번쩍 띄었다.

  "의심이라니, 무슨 소리를 들었느냐?"

  "이이첨의 집으로 드나드는 문객들의 입에서 나온 소리를 이귀의 아들 이시백(李時白)이 

저한테 귓속말을 해준 일이 있습니다."

  "이이첨의 문객들이?  그래 무어라고 하더란 말이냐?"

  "기막힌 소리올시다.  새문안에 왕기(王氣)가 서려 있는데 이 왕기가 일어나는 집이 바로 

우리 집이라 합니다.  큰 일날 소리가 아닙니까?"

  "뭐?  우리 집에 왕기가 일어났다고?  이것 큰일 났구나.  이런 까닭에 나는 문을 꽉 닫

아 걸고 일체 아무하고도 만나지 않고 지내는 터인데 이게 웬소리란 말이냐!  여보 마누라, 

지금이라도 곧 당신 친정집으로 가서 사정 얘기를 하고 사랑채를 좀 빌려달라 하시오."

  정원군은 기절초풍을 하고 서둘렀다.  이튿날로 정원군은 부랴부랴 처갓집으로 식구들을 

옮겼다.

  곧 새문안 정원군의 집은 헐리고 거기에 새로 짓는 대궐터를 닦기 시작했다.  나라에서는 

도편수를 뽑고 팔도에 부역 명령을 내렸다.  미구에 새문안에는 푸른 하늘을 찌르고 굉장한 

대궐이 이루어졌다.  광해군은 대궐 이름을 경덕궁(慶德宮)이라 했다.

  이렇게 대궐을 지어 놓고도 광해군의 불안한 마음은 좀처럼 사라지지 아니했다.  공연히 

허전했다.  하루는 이이첨을 불러 물었다. 

  "인왕산 밑에 왕기가 있다 하여 이것을 미리 막기 위해 경덕궁을 지었으나 나의 생각에는 

왕기는 땅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달렸다고 생각한다.  정원군의 집안 식구에 혹시 

영특한 아이들이 있을는지 모를 일이다.  경의 뜻은 어떠한가?  만약에 그러한 애들이 있다

면 아주 싹을 도려버리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되는데..."

  간특한 이이첨은 벌써 광해군의 뜻을 짐작했다.  그는 잠시 눈을 깜박이며 생각했다.  이 

기회에 자기와 세력을 겨루고 다투는 신경희(申景禧)를 꺾어버리자 생각했다.

  신경희는 정원군의 부인 구씨의 외사촌이었다.  이이첨과 함께 폐모를 주장한 사람으로, 

겉으로는 이이첨과 좋은 체했으나 마음 속으로는 항상 이이첨의 세력을 시기해서 속으로 원

수가 되어 있었다.  신경희는 유림(儒林)에게서 한몫 세력을 잡고 조정에서 이이첨의 세력과 

곁고 틀고 있었다. 

  이이첨은 이 기회에 신경회를 죽여버리자는 생각을 했다.

  "그래, 경은 무슨 의심스런 일을 짐작했는가?"

  광해군은 재차 묻는다.  이이첨은 잔기침을 두어번 하고 나서

  "아닌게 아니오라 소신도 이 점을 주의하와 항상 정원군의 집안 일에 유의한 바 있습니

다."

  "그래 무슨 일이 있었나?"

  "들은 바에 의하면 신경희는 정원군의 셋째 아들 능창군(綾昌君)을 추대하려 하여 백방으

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경희는 소신을 만날 때마다 능창군의 자랑이 놀라왔

습니다.  만약 능창군을 추대하여 왕을 삼는다면 능창군의 어머니와는 외사촌간이 되니바로 

조카가 임금이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의 큰 세력을 잡기 위해 이같은 불궤(不軌)한 뜻을 품

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광해군은 노기가 충천했다.

  "괘씸한 것들!  곧 두 놈을 다 잡아다가 역적 모의한 것을 실토케 하라."

  광해군은 승지를 불러 신경희와 능창군을 금부에 하옥시켜 엄하게 국문하라는 영을 내렸

다.  금부도사는 즉시 신경희와 능창군을 잡아내서 꽁꽁 묶은 후에 금부로 끌고 갔다.

  집을 빼앗기고 처갓집에 우거하고 있던 정원군은 별안간 셋째 아들 능창을 또 잡아가니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정원군은 그만 심화병이 나서 자리에 눕는 몸이 되었다.  평

화스러운 집안에 잠자다가 물벼락을 맞은바와 다름없이 된 정원군은 큰 아들 능양을 앞에 

앉히고 눈물을 흘리며

  "안온한 집안에 된벼락도 분수가 있지. 네 생각에도 그 온후 침착한 네 아우놈이 그래 역

적질을 한단 말이냐.  일이 이렇게 됐으니 이제는 별도리가 없다. 고관대작의 권문 앞에 무

릎 꿇기는 차마 못할 일이지만 골육 하나 살리자면 그저 눈을 꽉 감고 무릎을 꿇어 볼밖에 

없다. 유희분을 찾아 보아라. 지금 임금을 움직일 사람은 유희분하고 이이첨밖에 없다."

  능양군은 평소에 부친이 아우 능창을 특히 사랑하시던 일을 생각할수록 아버지의 애타는 

가슴을 미루어 생가하고 부지중 눈물이 흘렀다.  능양은

  "아버지, 너무 상심 마십시오.  백번인들 못가보겠습니까?"

하고 그 길로 유희분을 찾아갔다.

  광해군 십사년(壬戌年) 여름 어느날, 오늘도 유희분은 아침부터 친구들을 청해 놓고 술타

령을 하고 있었다.

  능양은 유희분의 집 대문을 들어섰다.  큰 사랑으로 들어가는 중문을 들어서면 거기엔 청

지기 방이 있어서 먼저 거래를 하지 않고는 주인을 만나볼 수 없게 되어 있다.  능양군은 

이 관문에 먼저 걸렸다.

  "어디서 오신 손님이시오니까?"

  청지기는 처음 보는 능양의 행색을 훑어보며 이렇게 물었다.

  "대감 계시거든 종실 능양이 뵈러 왔다고 일러라."

했다.  능양군으로 말하면 아무리 대가집 청지기인들 깍듯이 존대해 줄 처지가 되랴 하는 

생각으로서 서슴지 않고 반말을 해붙인 것이지마는 청지기는 실쭉해서 

  "거기 앉아 기다리시오."

하고 한동안 거드름을 피운 후에야 사랑으로 들어갔다.

  능양은 우선 여기서 아니꼬운 정경을 보게 되었다.  그는 마루 끝에 걸터앉아서 하회를 

기다렸다.

  사랑방에는 다수의 손이 있는 듯 지껄이고 떠들고 웃고 하는 소리가 요란히 들려 나온다.  

기생의 권주가와 시조 부르는 소리.

  이윽고 기다리고 앉아 있는 능양군의 등뒤에서 청지기의 뿌루퉁한 음성이

  "이리 들어오십시오."

하였다. 넓은 사랑방 아랫간에 조그마한 방이 하나 달려 있다. 청지기는 이방으로 안내하며

  "여기 좀 계십시오."

하고 가벼렸다.  장지문 하나를 경계삼은 넓은 사랑방에는 주객이 삐익 둘러앉았고 곱게 차

린 기생들이 손님 하나씩 걸러서 앉아 술을 권하며 시중을 들고 있는 것이 마치 색동저고리

를 보는 듯했다.

  능양군은 자리에 조용히 앉아 눈을 감았다.  이렇게 앉아 있기를 한식경이나 했다.  그러

는 동안에 손은 하나 둘씩 일어서 나갔다.

  이리해서 손이 거의 퇴산하자 주인 유희분의 아우 희량(希亮)의 음성이

  "형님"

하고 부르는 것이 들려나왔다.

  "왜"

  "아까부터 종실 능양군이 와 계신 모양인데 인사가 되었소?  이 방으로 모셔들여서 무슨 

일로 오셨는지 말씀을 들어보는 게 좋지 않소?"

  "능양군이?  뭘하러 날 찾아왔겠나, 아우 능창군 때문이겠지."

  "글쎄 하여간 만나보는 게 인사가 아니겠소?"

  "술이 취했는걸.  취풍에 무슨 말이 나갈지 아나.  오늘만이 날이 아니지.  얘, 월선아,  

너 파연곡(罷宴曲)으로 한 마디 더 불러라, 불러."

  말이 떨어지자 월선이란 기생은 낭랑한 목청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장지문 하나를 

격하여 이 대화를 듣고 있는 능양군의 가슴에 불덩이가 치밀었다.  눈물이 나올 듯하였다.

  능양군은 벌떡 일어섰다.  더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대문을 나서는 능양군의 입에서는 

긴 한숨이 터져나왔다.  세상에 아무리 골육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일이라 하기로서니 차마 

이 굴욕이야 어이 받을 수 있을 것인가.

  "가증스럽고 야비한 놈."

  능양군은 속으로 이렇게 욕을 해붙이고 침을 탁 뱉았다.

  그 후 능창은 강화(江華)로 이송되어 귀양살이를 하게 되고 귀양살이로 속죄만 된다면 하

고 일루의 희망을 둔 것이 필경엔 사형을 당해 죽고 말았다.

  이것이 원인으로 아버지 정원군의 울화는 그칠 수 없는 병이 되어, 정원군 역시 그 후 얼

마 안가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능양군은 아버지의 상사를 당한 후에 비탄에 잠긴 수개삭을 보내는 동안, 모든 인간사를 

청운으로 돌리고, 희노애락(喜怒哀樂)을 좀처럼 얼굴에 나타내지 않을 만큼 대오철저(大悟徹

底)의 수양을 하였다.

  그러나 일생에 한 번은 이 분풀이를 하고야 말리라는 결심만은 줄어들지 않았다.  물론 

어떤 수단으로 분풀이를 하여야 한다는 일정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요, 그런 계획을 실행

에 옮길 아무런 자신이 있는 것도 아니다.  능양군은 그저 막연히 분풀이를 해야겠다고 생

각만 지니고 있었다. 


  [ 暴風前夜 ]   <反正謀議>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暴 風 前 夜 

    反正謀議



   계해년(癸亥年=光海 十五年) 정월 초, 모악재 너머 서진관사(西津寬寺)에는 하루의 정초놀

이로 절밥이나 사먹자고 모인 듯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진관사 구내에는 여남은 채의 집이 있었다.  명색은 여염집이었지마는 기실은 모두 진관

사와 깊은 인연을 맺고 절을 중심으로 하여 벌어먹는 집들이다.  세 사람은 그 중에서 가장 

조용하고 외딴집을 찾아서 들었다.

  이 세 사람은 이괄(李适), 장유(張維), 최명길(崔鳴吉)이었다. 

  이괄은 그때 북병사(北兵使)의 인수를 받고도 병을 청탁하고, 부임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

다.  그가 차일피일하고 부임하지 않고 있는 까닭은 당시 왕실의 부패가 극도에 달하여, 상

처로 말하면 고름이 잔뜩 들어서 침 한대만 주면 고름이 주르르 쏟아질 듯한 형세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불우한 지사(志士)와 강개비분하는 의사(義士)들과 사귀며 장차 큰일을 꾸

밀 생각을 했다.  그가 이렇게 해서 교분을 맺게 된 것이 전판서 장운익의 아들 형제 장유

와 장신(張紳)과 원두표(元斗杓)를 비롯하여 최명길, 이귀의 아들 이시백, 조익(趙翼) 등의 젊

은 또는 장년(壯年)의 사람들이었다.

  이날 이괄은 최명길, 장유와 무슨 비밀히 의논을 할 생각으로 일부러 조용한 곳을 찾아 

나선 것이다.

  안주인이 술상을 차려놓고 나가자 세 사람은 우선 술 한잔씩을 따라 마시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괄이 먼저 이렇게 말을 끄집어 냈다.

  "무슨 일이건 시기와 모사(謀事)가 들어맞아야만 성사가 되는 법인데 인제 시기는 되었다

고 볼 수 있고, 동지도 그만하면 어지간히 손이 맞을 만큼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문제는 

누구를 위에 추대하느냐 하는 것하고 또 하나는 성(城) 안에서 내응해 주는 유력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거야."

  "그 유력한 내응자란 병권을 잡은 사람이라야 더욱 좋겠네."

  최명길이가 이렇게 말을 보탠다.

  "병권을 가진 사람의 내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내외 호응의 효과를 거두자는 것이지만 

반드시 군병을 합류시켜 주지 않더라도 동병(動兵)만 맡아 주면 되는 거야.  중립만 해주면 

된다는 거야."

  이괄은 자신이 만만한 설명을 하였다.

  "병권을 가졌다면 누가 제일 유력하겠소?"

  장유의 질문이다.

  "그건 뻔한 일이 아닌가.  오늘 특히 장공을 청한 것두 그것 때문인데 제일 합당한 인물

은 장공의 사돈 영감되는 이대장(李大將)이지."

  이대장이란 포도대장 이흥립(李興立)을 말하는 것이다.

  장유는 더 말없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다.

  "우리 군사는?"

  최명길이 또 묻는 말이다.

  "우리에겐 장단(長端) 부사 이서(李曙)의 군사가 있지 않은가?"

  "그것만으로 될까?"

  "무슨 소리, 지휘만 잘하면 쓰고도 남지.  지금 구굉(具宏)을 몰래 장단으로 보내 둔 것도 

이서를 도와서 군사를 증모하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

  사실 장단부사 이서는 이괄 등과 벌써부터 기맥을 통해 가지고 천여명 군졸을 기르고 있

었다.

  이괄은 그보다도 이흥립 이대장을 설득시켜야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리

고는 이대장을 설득시키는 중임(重任)을 장유에게 간청을 했다.  장유의 아우 장신은 이대장

의 사위다.  장유는

  "그건 염려들 마시우, 아우를 시켜서 십분 충분히 이대장의 배짱을 살핀 후에 우리의 뜻

을 알리고, 자진해서 우리의 편이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중립의 태도로서 동병을 맡도록 할 

수는 있다고 장담하겠소."

  "그리만 되어도 우리는 큰 성공이지."

  이런 이괄의 말에 장유는 다시

  "그보다두 더 긴박한 문제가 추대 인물이 아니요?"

  "하여튼 종실 가운데서 골라야지."

하는 최명길의 말에 이괄은 술을 한잔 따라 마시고는

  "고른단 말이 안 될 말이요.  종실 가운데에 제법 왕위에 올라앉을 만한 위인이 얼마나 

된다구 고르고 가리고 할 여지가 있는가?"

  이괄은 심중에 이미 작정해 둔 인물이 있는 듯하였다.

  "그럼 영감 흉중에 생각하고 있는 인물이 있소?"

하는 최명길의 질문에

  "아무렴 있지."

  "누구요?"

  "난 돌아간 정원군의 아드님 능양군밖에 없다고 생각하네."

  "능양..."

하고 최와 장은 서로 눈을 맞추어 잠시 말이 없었다.

  "능양군이 어째서 우리가 추대할 만한 인물인가를 이야기해 줌세."

하고 이괄은 설명하기 시작했다.

  "반정거사(反正擧事)는 잘 되면 구국(救國)의 공을 세우는 것이지만 실패하면 역적으로 삼

족이 멸망하는 화를 입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본즉 여느 종실로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

할 일이란 말일세.  적어도 왕가에 대하여 심각한 불평불만이 있고 이래도 못 살고 저래도 

살 수 없는 어떤 비상한 사정에 빠져 있는 사람이 아니면 자진해서 응할 도리가 없는 것일

세."

  장유와 최명길은 이괄의 사리 밝은 설명에 승복하지 앉을 수 없었다.  듣고 보니 과연 절

절이 그럴 법한 경위였다.

  "두 말할 것 없소.  영감의 말씀에 동감이요."

  장유가 먼저 이렇게 의사를 발표하고는

  "그런데 능양군의 말씀이 났으니 말이지 요즘 내가 듣기에는 김유(金 )와 이귀(李貴) 같은 

분들이 능양군과 가끔 왕래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혹시 김유나 이귀 등 노패가 무슨 일

을 꾸미지나 않소?"

  "꾸며도 좋지 않은가.  우리는 우리지,  우리의 운동이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고 한들 해될 

바는 없지.  또 어느 기회에 합류해도 좋지 않은가."

하고 이괄은 만족한 안색을 하였다.

  젊은이 일파의 계획은 착착 진행되었다.  제일 중요한 장단부사와 이서의 양병 음모도 순

조롭게 잘 돼나갔다.  젊은이 일파가 실질적인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에 김유, 이귀, 심기원

(沈器遠), 신경진(申景 ) 등의 노패는 노패대로 어느 때는 이귀의 집 사랑에, 어느 때는 새

문밖에 있는 어떤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밀회를 거듭하였다.


   진관사에서 돌아와 각기 헤어진 세 사람은 서로 맡은바 소임을 수행하기에 바빴다.

  장유는 이틀 후에 아우 장신을 시켜서 사돈 대감을 설복시키도록 했다.  장신이 그 장인

을 찾은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장신은 큰 사랑에 와서 이흥립에게 읍하고 웃목에 앉았다.

  이흥립은 아들이 없었다.  다만 무남독녀를 두어 장신을 아들같이 사랑했다.

  "저녁 먹었나?"

  "예, 참 저녁 진지 안 잡수십니까?"

  "아직 생각이 없다."

  이흥립은 한동안 장신을 바라보더니

  "너 왜 과거는 안 보니?"

  "지금 조정에는 벼슬할 마음이 없어요."

하고 장신은 대답했다.  이흥립은 이 소리를 듣고 한 번 크게 껄걸 웃으면서

  "너도 요새 그 흔한 절개 있는 지사(志士)가 되려는 게로구나."

  "그럼 장인께서는 이 시국에 대해서 불평이 없으시니까?"

  흥립은 이외의 질문에 약간 놀라는 빛을 보이며

  "왜 불평이야 없겠니, 그러나 한세상 지내는데 부귀나 누리면 그만 아니냐?"

  이렇게 대답하면서 이대장은 장신이 무슨 생각이 있구나 하는 것을 짐작했다.

  "그럼 만일 그런 태도를 가지고 계시다가 훗일 어떤 새 국면이 열릴 때 옥석혼효(玉石混

淆)로 함께 몰리게 되면 무슨 말로 변명을 하시렵니까?"

  장신은 이야기를 차츰 목적하는 설복의 방향으로 끌고가기 시작했다.

  "그런 조짐(兆朕)이 보인단 말이냐?"

  "보이고 말고요.  보인다느니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놀라운 사위의 말에 이대장은 비스듬히 누워있던 몸을 가누어 바로 일어나 앉았다.  그리

고는 심각한 안색을 했다.

  "옹서간이니 상관은 없다마는 너 경솔히 그런 말을 다른 데서 해서는 못 쓴다."

  "그런 조심을 아니할 리 있겠습니까?"

  "그래 정녕 그 적실(的實)을 아느냐?"

  "알고 있습니다.  전 참판 김유와 전 평산부사 이귀, 그리고..."

  "김유와 이귀가?"

  "그렇습니다."

  "음"

하고 묵묵히 무엇을 생각하더니

  "이귀가 중심이 되어 일을 꾸미고 있다면 일은 믿음직할 게다."

  "그밖에도 심기원, 신경전 등이 있습니다."

  "이귀는 그런 소문이 돌아서 수차 금부에 대죄(待罪)까지 허긴했다마는..."

  "이귀 영감이 그런 혐의를 수차 받고도 태연히 대죄를 하는 소이는 김상궁이 궁중에 있어

서 상감의 의심을 틀어막아버리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상궁은 수양딸처럼 궁중

에 드나드는 이시백의 누이 예순(禮順)이란 여승(女僧)에게 반해서 그 예순이의 청으로 이귀

에 대한 의혹을 풀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전에 들은 말이다마는 예순이라는 여승은 죽은 김자겸(金自謙)의 아내였다면

서?"

  "그렇습지요."

  "일은 꼭 되리라고 믿느냐?"

  "믿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오면 일은 지금 두갈래로 벌어져서 북병사 이괄을 중심으로 

하는 일파가 있어서 장단부사 이서의 손으로 군졸까지 기르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익어갈수록 놀라운 말 뿐이었다.  사위의 입에서 이괄의 이름이 나올 때 이흥립

은 다시금 눈을 감고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이괄의 패기만만한 모습이 눈 앞에 떠올랐던 

까닭이다.

  "그 젊은 패엔 어떠한 인물이 있느냐?"

  이대장은 눈을 감은 채 이렇게 묻는다.

  "장단부사 이서는 이귀, 김유와 맥을 통하기는 하였지마는 기실은 구굉이란 인물과 일심

동체가 되어서 젊은 패에 속하고 있고, 최명길, 원두표 등등 일당 백의 인물들이 있습니다."

  이흥립은 눈을 감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한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눈을 뜨고

  "이런 일이란 형제간에도 알리기 어려운 일이며 아내에게도 말하지 못할 일인데 너 무엇

을 믿고 나에게 그런 비밀을 토설하는 것이냐.  만일에 내가 너의 소청을 들어 주지 않으면 

어쩔 셈이냐."

  이대장은 긴장한 안색으로 이렇게 질문하였다.

  "예, 지당한 말씀이올시다."

하고 장신은 허리춤에서 짤막한 비수를 꺼내 앞에다 놓고, 또 무엇인지 종이에 싼 조그마한 

봉지를 내놓았다.

  "실상 이런 비밀을 말했다가 응낙을 받지 못하면 상대자를 살려 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비수로 상대자의 심장을 찔러 그의 입을 봉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

러나 저의 처지로 어찌 부모와 같은 장인의 몸에 칼질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

하고 종이 봉지를 펴보이며

  "비상이 있습니다.  이것을 먹고 저 자신이 세상을 떠나는 수밖에 없다고 결심했습니다."

  이대장의 눈은 그 두 가지 물건에서 잠시 떠나지 않았다.

  "음, 마땅히 그만한 결심이 있어야 하는 게지, 알았다.  집어 넣어라."

  "예."

  장신은 조용히 그 두 가지를 다시 허리춤에 간직해 넣었다.

  "이귀를 만날 기회도 있긴 하다마는 내 입으로 말하긴 싫다.  너의 목숨을 걸고 대답해 

두려무나.  이흥립은 결코 동병을 하거나 방해를 하지는 않겠다구."

  "예."

  허리를 굽실하며 이렇게 대답하는 장신의 얼굴에는 금시에 생기가 돌았다.

  나머지의 일은 동지들의 굳은 단결과 비밀 유지 뿐이었다.  다만 요즘 와서 염려되는 바

는 노패 이귀, 김유, 김자점 등의 행동이 차차밖에 누설되어 항간에는 불원 무슨 큰일이 일

어난다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한 일이다.  비록 이귀의 딸 여승 예순이가 궁중에 자주 드나

들어서 김상궁을 어머니라 부르고 그의 힘으로써 이귀에 대한 의혹을 막아버리는 이면의 운

동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한 번 두 번이지 너무나 사람의 입에 오르고 보면 필경 어떤 

화변이 생길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을 막아야 한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노패와 

젊은 패의 합동을 꾀하고 일의 주동권을 잡아야 한다고 장신은 생각했다. 

  거사 후의 인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비록 노패들을 앞장 세운다 할지라도 실천에 있어서는 

젊은 자기네들이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장신은 형 장유를 통하여 이괄 일파에게 이흥

립의 승낙 쾌보를 전했다.


   반정모의(反正謀議)를 개시한지 수삭, 그동안 동지들의 초조와 고심 그것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거사하는 일짜를 삼월 열사흗날로 작정한 이후의 이괄 이하 젊은이 일파는 그 전부가 각

기 동서로 나뉘어서 맡은 소임대로의 부서에 매어 달렸다.

  구굉, 원두표 등은 벌써 변장하고 장단부사 이서에게로 가서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참모

의 역할을 하고 있고 장신은 처가에 일참(日參)하여 장인 이흥립 장군의 행동을 감시할 겸 

그의 중립적 행동을 취하겠다는 언약을 지키도록 직접간접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노인파 김유는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내객을 사절하고 틀어박혀 있고, 이귀 노인만이 

평일과 다름없이 객도 만나보고 출입도 하였다.

  반정모의의 노소파를 막론하고 열흘이 넘어서부터는 억제할 수 없는 불안 초조와 흥분에 

노상 가슴 속이 떨림을 면할 수 없었다.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가 앞으로 이틀밖에 남지 않

았다.  하루가 천추의 길이 같았다.  죽으나 사나 정한 날짜가 얼른 오기나 했으면 한 것이 

필경 오고야 말았다.

  열이튿날!

  이날 일반 백성의 눈에 뜨이지 않는 커다란 움직임이 세 가지 있었다.

  하나는 장단읍에서의 움직임이다.

  이날 장단부사 이서는 돌연 군사를 다섯 대로 나눠가지고 서울 가는 길로 향하여 행군하

라는 명령을 내렸다.

  둘째의 움직임은 창덕궁 비원에서의 큰 잔치였다.  개나리꽃을 제외하고는 아직 꽃이 피

지 않았지마는 일기도 따스하고 꽃봉오리 현저히 붉어진 비원에서 광해군은 육품 이상의 만

조 벼슬아치를 모아놓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이 잔치는 이귀의 딸 예순이가 김상궁을 

움직이고 김상궁은 다시 임금을 움직여서 특별히 봄놀이를 겸해서 베푼 것이었다.

  비원 봄놀이는 한창 어우러져 어느덧 고관대작은 물론 구종들까지 술타령에 녹아떨어져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대관들이 질탕으로 놀고 있는 자리에서도 이흥립 대장만은 마음이 편치 않았

다.  오늘이 반정 거사의 날인 것을 알고 있는 그라,  술을 마시면서도 흥취가 나지 않았고,  

몇몇 대관들의 낯을 바라볼 때 하잘 것 없는 것이 인간이로구나 하는 감개가 가슴에 떠오를 

뿐이었다.  

  오늘이 지나면 판국이 변해서 저 희희낙락하며 놀고 있는 위인들의 머리가 떨어져 나갈 

것이다.  눈 앞에 닥쳐오는 화변을 깨닫지 못하고 술을 마시며 즐겨 노는 꼴이 가련도 하고 

어이 없는 생각도 들었다.

  해가 훨씬 기울어졌을 때 선전관 하나가 이대장 앞에 와서 나지막한 음성으로

  "돈의문 수문장이 와서 서문 밖 모화관 관지기 송가란 위인이 중대한 고변사유가 있다고

해서 데리고 왔다 합니다."

  "고변?"

  순간, 이흥립의 낯에 불안의 빛이 떠올랐다.  이흥립은 모화관 관지기란 위인을 놀이 자리

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불러들였다.

  시립한 선전관이 이대장의 영을 받아서

  "아뢰어라."

하고 말하기를 독촉하였다.  송가는

  "역모 고변이올시다.  오늘 김유, 이귀, 이괄 등 서인(西人) 일파가 장단부사 이서와 합력

하여 연서역에 군병을 모아가지고 오늘밤으로 성내로 쳐들어 올 계획이올시다."

  "너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고?"

  "오늘 연서역으로 군사가 모여드는 것을 소인의 눈으로 보아서 알았삽거니와, 소인의 조

카 놈이 장단 관가 장수로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틀림없는 일인가?  만일 사실에 없는 무고를 한 것이 드러나면 너의 목숨이 없어질 터인

데 그래도 좋으냐?"

  "틀림없습니다."

  이흥립은 이 대답을 듣고 나서 송가를 잠시 물러가 있게 하되, 일체 그런 발설을 타인에

게 했다가는 목을 벤다고 위협을 해놓고, 선전관더러

  "그 놈 정신이 뒤집힌 미친 놈이지마는 그냥 내보냈다가는 또 무슨 소리를 함부로 떠들어

서 인심을 소요케 할는지 모르니 자네는 포청에 기별해서, 그 놈을 내 말 있기까지 옥에 가

두라고 하고, 돈의문 수문장에게도 그따위 낭설을 발설했다가는 당장에 군법으로 참하겠다

고 일러 두게."

하는 영을 내렸다.

  이리하여 고변해서 상급이나 타먹자는 타산으로 온 송가란 위인은 포청에 갇혀버리고, 이 

내용은 아무한테도 알려지지 않았다.


  [ 暴風前夜 ]   <밤은 밝아오고>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暴 風 前 夜 

    밤은 밝아오고



   이러한 위기일발의 아슬아슬한 사실이 비원 한 모퉁이에서 연출된 같은 시각에, 동대문 

밖 능양군 외가집 사랑에서는 능양군과 이귀 두 사람만이 조그만 약봉지 하나를 앞에 놓고 

수군대고 있었다.

  능양군은 어제 오늘 양 이틀간 비상한 감동에 도리어 마음이 설레어 노상 가슴이 부들부

들 떨리고 있는 느낌에 잠겼다.  이, 삼일 동안 죽었다가 깨어났으면 하는 어린애 같은 생각

까지 일어났다.

  용용한 희망과 불안, 초조 그리고 시각으로 쳐서 이십사시간 후에는 이 나라의 지존이요, 

통치자인 지위에 오르느냐, 역적의 이름 아래 능지처참을 당하느냐의 판단이 나게 되는 지

금 그는 자기의 부들거리는 가슴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능양군은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기에 노력하였다.  이귀는 

  "동지의 한 사람이라고 할는지 평교의 심의로서 대하는 것도 지금 이 시각 뿐입니다.  천

지신명의 가호가 있다고 믿으니 아무 불안을 가지지 마시되 세상 일이란 필경 알 수 없는 

것이온즉 이 약을 달여서 놓으시고 만일 일이 그릇되어 내일 새벽까지 아무 기별이 없을 때

에는 자처하셔서 깨끗한 최후를 맞아들이셔야 합니다."

  긴장한 안색으로 이귀는 이렇게 말하기 어려운 것을 했다.  이것은 물론 이귀 개인의 뜻

이 아니고 여러 동지의 뜻이었다.

  지리한 봄날 하루도 어느덧 저물었다.  대자연의 하루는 사회의 모든 움직임을 한 아름 

껴안고 어둠의 장막 속으로 기어들어 가는 것이었다.


   연서역의 밤은 시각이 늦어갈수록 달빛이 밝아서 거기에 모인 사람들의 행동에 많은 도

움이 되었다.

  이귀와 이서가 진중에 영을 내려서 사세 여하를 막론하고 일체 불빛을 엄금하였다.

  화톳불 한 자리 피울 수 없었고 횃불은 더욱 안 되었다.

  이귀, 구굉, 장신, 심기원, 원두표 등은 장단부사 이서가 가져온 장막을 치고 그 속에 모여

서 시각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고 있는 중에도 문제는 김유가 아직 나타나지 않는 점이다.  경위로 말하면 이날의 

총지휘는 김유가 맡아 하기로 되어 있은즉 적어도 이귀와 동행하여 군사를 지휘 단속하여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유에게서는 아무 기별도 없다.

  이귀의 가슴은 답답했다.  단순히 김유가 불참하고 있다는 그 문제 뿐이 아니라, 누가 고

변을 하여 붙잡히지나 아니했나 그렇게 상상하며 별별 잡념까지 머리에 다 떠 오른다.

  "영감, 무슨 심려가 계셔서 안색이 좋지 못하슈?"

  이괄이 옆에서 묻는다.

  "대장된 사람이 지각을 하니 그것두 불안하거니와 무슨 사고가 생긴 것 같아서 더욱 아니 

날 생각이 다 나누구료."

  "그런 염려는 마시우.  나두 소문을 들은바도 있고, 필유곡절(必有曲折)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소마는 뭐 근심하실 게 있으리까.  이제는 성중 군병이 모조리 쏟아져 나온다 해도 걱정

될게 없습니다.  당당히 싸워보는 것도 재미있지요.  김찬판은 영영 불참인가 싶소."

  "그럴 리는 없지마는..."

하면서도 이귀 역시 굳세게 이 말을 부인하지 못했다.

  "염려 마시우.  허장성세가 아니라 이놈의 팔뚝이 있소."

  두 사람의 등 뒤에서 장사 원두표가 이렇게 호언을 했다.

  이서는 아까부터 수백명 군졸을 단속하기에 넓은 벌판을 왔다 갔다하고 있었다.

  이귀는 유심히 그 편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뜩 무엇을 생각하고

  "여보, 이병사 영감!"

하고 이괄을 불렀다.

  "왜 그러시우."

  "지금 시간이 어찌 되었소?"

  "자정이 멀지 않은 것 같소."

  "큰일났군."

하고 이귀는 초조한 낯으로 웅기중기 모여든 동지들의 낯을 한동안 둘러보더니

  "북병사 이괄 영감에게 대장 소임을 맡아보시도록 합시다."

는 발언을 하였다.

  여럿은 이구동성으로

  "동병은 신속을 요하는 것이니 빨리 그렇게 합시다."

하고 찬동했다.  이괄은

  "그럼 불초가 여러분의 합의를 보았은즉 외람되나마 대장의 소임을 맡겠소."

하는 쾌락을 했다.  이 말이 떨어지자 여럿은 각기 맡은바 부서로 헤어지고 이귀와 이괄, 그

리고 몇 동지들은 미리 만들어 놓은 단 앞으로 걸어갔다.

  잠간 흐리었던 하늘이 말끔히 벗어지고 보름이 가까운 맑은 달빛이 넓은 벌판의 구석구석

을 비추어 거기에 정연히 편대를 짜고 늘어선 군졸들 머리에 용용한 기분을 일으켜 주었다.

  이괄은 단에 올랐다.  단에 올라서 막 군령을 내리려 할 즈음 저편 군사의 일부분이 별안

간 와글거리는가 하더니 말에서 내려 이리로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김유였다.  오늘 대장의 소임을 맡았던 김유가 이제 도착한 것이다.

  이귀 이하 여러 동지는 그의 내참을 반가와하기보다 차라리 난처한 지경에서 당황하였다.  

이괄은 김유를 노려보며

  "대장이 이제서야 오니 일이 어찌 되겠소.  지금은 내가 대장이니 당신을 참해야 하겠소."

하고 장검을 빼어 들었다.  이괄이 빼어든 장검은 달빛에 비치어 서릿발처럼 번득였다.  이

때 이귀가 내다르며 이괄의 손을 잡고 빌었다.

  "북병사 영감, 좀 참으시오.  지금 김유의 목을 베이는 것은 군률로 보아서 당연한지 모르

겠소마는 결과는 동지 하나 죽였다는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 거룩한 거의(擧義)의 첫길

에 동지를 죽이는 게 무엇이 시원하겠소.  만일 마음이 안 풀리시면 이놈의 목부터 베어 주

시오."

하고 이괄을 말리었다.  이괄도 기실 죽이려고 하였던 것은 아니므로 손에 빼어든 장검을 

자루에 꽂아 박으며

  "그러면 이제 대장이 왔으니 나는 대장을 사양하오."

하며 대장을 김유에게 내주었다.


  김유가 늦게 온 이유는 이러하였다.  김유의 집 별배 만길이란 위인은 본래 금부 나졸출

신으로 각 대가집 하배들간에 지면이 많고 소문을 염탐해 들이는데 능난했다.

  이날 낮, 만길이는 이리저리 연줄을 얻어가지고 비원 봄놀이에 들어가서 궁노와 사령 틈

에 끼어 구경도 하고 주식도 배부르게 얻어먹곤 하였다.  여기서 귀밝고 눈치 빠른 만길이

는 심상치 않은 기밀을 엿들었다. 

  모화관 관지기가 고변하러 들어왔다는 중대한 기밀을 들었고, 그 고변을 선전관 하나가 

우선 이흥립 대장께 전했다는 것, 이대장은 친히 그 고변자를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고변 내용을 다 들은 후에 무슨 영인지를 선전관에게 내려서 그 고변자를 우선 포청에 가두

어 놓게 했다는 것 -- 이것을 듣게 된 만길이는 그 길로 비원에서 뛰어나와 한달음에 상전

댁으로 돌아와 알렸다.

  만길의 보고를 들은 김유는 완전히 불안과 공포에 어지러워졌던 것이다.  일은 이제 태반 

글렀구나 하는 불안이다.  반정모의가 성공되면 모르거니와 만일에 실패한다면 주인이 역적

으로 몰리는데 가족인들 그냥 내버려 둘 리 없다는 생각으로 우선 가족을 안전한 곳으로 옮

길 생각을 했다.  그러노라니 자연 연서역으로 나가지 못하고 중요한 가산을 정리하느라고 

늦었던 것이다.


  자시(子時)는 벌써 넘은지 오래고 축시(丑時)가 다 된 한밤중에 전 거의군(擧義軍)은 저마

다 등에 의(義)자를 하나씩 크게 써붙이고 숙연히 행군하기를 시작했다.

  창의문(彰義門)에 당도하기에는 한 시간은 더 걸릴 것인즉, 창의문을 돌파하고 성내로 쳐

들어 가는 것은 일러도 첫새벽이라고 생각되었다.

  창의문에 당도하여 원두표, 이기축(李起築) 힘센 장사들이 미리 준비해 가지고 온 도끼로 

대문을 부서져라 하고 두드리며

  "문 빨리 열어라."

하고 외치자 이때 당번이 되어 지키고 있던 문지기 하나가 급히 문루에 올라서 내려다 본즉 

희미한 새벽 달빛에 보이는 광경은 어머어마하였다.

  검은 복색의 군병이 수천만인가도 싶었다.  이미 풍설에 들은바 있어 오늘이 있을 것을 

알고 있던 문지기는 부들부들 떨며

  "문을 열테니 문 부수는 손을 멈추시오."

하고 외쳤다.

  이때 쾅! 쾅! 문부수는 소리에 잠이 깨어서 내다른 수문장과 다른 병졸들이 뛰어나왔다.  

수문장은

  "이놈아, 문을 열지 말아라!"

하고 호통을 치는데, 그 호통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윙! 하는 활시위 소리와 함께 수문장의 

몸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어느새 벌써 성벽을 타고 넘은 군졸이 호통치는 수문장을 습격한 것이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거의(擧義) 군병은 물결치듯 문안으로 쏟아져 들었다.  앞에 선 원

두표는 도끼를 들어 방금 일어선 수문장의 머리를 쳐서 죽였다.  모두가 수분에 지나지 않

은 짧은 시간에 연출되었다.

  이괄은 여기서 무질서하게 쏟아져 들어온 군병을 다시 호령하여 정제하고 행진을 시작했

다.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행군은 군졸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릴 뿐 숙연히 나아갔다.

  이때 정원에는 이미 급변을 고한 자가 있어 이흥립 대장과 중군 이곽(李廓)은 영의정 박

승종의 명령으로써 각기 요로를 지키게 되었다.

  이흥립은 창덕궁 앞에 결진하였고 이곽은 파자교(把子橋) 일대에 진을 티고 있었다.

  이흥립은 말에 높이 앉아 전 군사에게 영을 내렸다.

  "너희들은 일체 내가 말머리 돌리는 대로 행동하라.  만일 어기는 자 있으면 군법으로 처

벌한다."

하는 영이다.

  의거군은 선봉에 원두표, 이기축, 김자점, 최명길 등이 서서 행진을 하고 조금 떨어져서 

이괄과 그의 부하 군졸 그리고 맨 뒤에 이귀와 김유가 있었다. 

  관상감재에 이르러서부터는 아우성을 치며 금호문(金虎門)을 향해 돌진하였다.  이 고함소

리를 들은 이흥립은 채찍을 높이 들고 말머리를 동쪽으로 돌리니 거기 결진하였던 군사는 

일제히 파자교를 향해 내리몰렸다.

  중군 이곽은 멀리 고함소리를 듣게 되자 이흥립의 군졸이 이리로 몰려 내려오는 것을 보

고 말을 달려 이흥립 대장에게로 가니 이대장은

  "사세 불리하니 빨리 군사를 아래 도감으로 옮기게."

하는 영을 내렸다.

  반정군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금호문 앞에 다다르니 수문장 박효립(朴孝立)이 문을 

열었다.  역시 수문장과도 내응이 있었던 까닭이다.  

  반군은 궐내로 쏟아져 들어갔다.

  이때 광해군은 작취가 미성하여 자리에 누워 있었는데, 궁 밖 고함소리에 놀란 김상궁이

밖에 나갔다가 달려 들어오며

  "상감마마, 큰일 났습니다.  반군이 벌써 금호문에 쳐들어 왔습니다."

  "반군이?"

하고 광해는 취중에도 정신이 번쩍 들어서

  "도감 군졸들은 뭘한다는 건가?"

  "대장 이흥립이 도망을 했답니다."

  "뭐?"

  광해군은 깜짝 놀랐다.

  그러는 중에도 고함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오고 궁중 대소 관속이 혼비백산하여 사방으

로 흩어져 도망하는 소요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궁중에 벌써 화광이 충천하였다.

  김상궁은 이 위급한 중에도 자가의 친가로 보낼 보물 상자를 꾸리어 궁녀 하나에게 들려

서 북문으로 달려보내고 자기는 급급히 옷을 갈아 입기 시작했다.  상궁이 아니라 여느 나

인 부스러기에 불과한 차림을 하자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번 반군의 중심 인물이 이귀라 

하니 이귀의 생명은 수차에 걸쳐 자기의 입으로 살려 주었고 수양딸인 예순이가 있은즉 설

마하니 나의 목숨까지야 죽이랴 하는 어리석은 추측을 하였다.

  편전 앞 누마루에서

  "종묘에 불이 붙었나 보아라."

하고 외치는 광해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죽느냐 사느냐의 이 자리에서 종묘는 다 무엇이

냐 하는 생각에 김상궁은 냉랭한 코웃음을 치며 문으로 내다라 도망쳤다.

  광해군은 생사가 위급한 지금에도 반정의 중심 인물이 왕자 종실이라면 종묘에 불을 지를

리는 없다고 추측한 때문에 종묘에 불이 붙느냐고 연방 부르짖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대답이 귀에 들어오기 전에 황황히 어전으로 달려온 영의정 박승종은 혼백이 

몸에 붙지 않은 듯 왕에게 국궁할 여유도 가지지 못하고

  "상감마마..."

하고 부르짖었다.

  광해군에게는 그 소리쯤으로도 반가왔다.  내시의 대부분이 도망하고 선전관 무감 등속이 

하나도 눈에 보이지 않는 이때 영의정 박승종이 나타난 것은 고맙고 반가왔다.

  "나의 대에 와서 나라는 망했구료.  어이 하면 좋겠소."

  "상감 모든 것이 천운입니다.  빨리 옥체를 피하십시오."

  "경의 어이 할려오?"

  "늙은 신이야 이제 죽사온들 한이 있사오리까."

하고 박승종은 눈물이 비오듯 내리는 것도 모르는 듯 서 있었다.  신하들은 하나도 광해군

의 신변에 시립한 사람이 없었고, 단지 남아 있는 것은 변숙의(邊叔儀)와 내시 두엇이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거의 허탈상태에 빠져 있는 광해군을 모시고 간신히 북문에 이르렀다.

  화광은 궐내 이곳 저곳에서 충천해 있고, 금호문 내외에 고함소리 연하여 들려온다.  당초

에 능양군은 궐내에 불을 놓지 말라고 영을 내리었지만 의거 군사의 대부분이 대궐에 불을 

지름으로써 자기 가족들에게 의거가 성공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다.

  북문에 이른 광해군은 몸을 부들부들 떨렸다.  북문에 당도하기는 하였으나 문은 굳게 잠

겨 있어서 나갈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광해군은 내시의 어깨에 올라 무등을 타고 간

신히 성벽을 넘었다.

  한편 능양은 궐내에 들어와서 인정전에 우선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곧 중신들에게 예궐

하라는 초패를 놓았다.

  이때 이 초패를 받고 맨 먼저 예궐한 것이 병조판서 권진(權縉)이었고 그 뒤를 이어 대소 

판원이 황황히 궁중에 모여들었다.

  반정 북새가 아직 끝나기 전이라 곁에 이귀, 김유, 이괄등이 시립하고 있고 모여든 전조

(前朝) 신하들은 쳬례를 차릴 여우가 없어 인정전 대뜰 아래에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는 형

편이었다.

  이때 맨 먼저 예궐한 권판서가 때마침 대뜰 앞에 나선 능양군 앞에 나아가 국궁하고 넓죽

이 절을 했다.  이 광경을 바로본 대소 관원은 거의 모두가 그 뒤를 따라서 절을 했다.

  능양군은 이귀에게 분부하여 전조 대소 관원을 일단 정원과 집으로 물러가 있게 하고 의

거에 참가한 군관 소임 이상을 불러들이게 했다.

  할 일이 태산 같았다.

  반정은 성공했지만 첫째 광해군을 잡아들여야 할 것이고, 서궁에 유폐된 인목대비(仁穆大

妃)께 문안 인사를 보내어 궁중으로 모셔들일 것, 전조의 관원을 전반적으로 해직하고 새로 

정부를 조직하여야 할 것 등 등의 일이 어느 것 하나 급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먼저 영을 내려 내시와 여관(女官) 등을 안정 시키고, 이흥립과 상의하여 의거 군졸을 각 

영(營)에 임시 수용케 하였으며 일변 광해군의 행방을 상을 걸고 수색케 했다.

  사방으로 사람을 내놓아 광해군의 행방을 수색케 한 결과 광해군이 내서 두엇과 그릭고 

변숙의 등과 더불어 북문을 넘었다는 것만을 알게 되었을 뿐 북문을 넘은후의 행방이 모연

하였다.

  어느덧 날은 밝아 해가 높다랗게 떠올랐다.

  능양군은 차츰 역정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 광해의 행방 하나 알아들이지 못한단 말이요?"

  참다 못해 터져나오는 능양군의 역정소리가 시립한 여럿을 황송케 하고 민망케 했다.

  이때에 대전 별감 하나가 어떤 중노인을 데리고 들어와서

  "전 상감의 소식을 아뢰고자 전의(典醫) 정남수(鄭楠壽) 소명도 없이 들어와 뵙고자 하오."

  "이 말에 능양군은 반기며 놀라서

  "그래 그대가 전왕의 행방을 아는가?"

하고 전각 앞에 엎드린 노인에게 물었다.

  "행방이 아니오라 지금 숨어 계신 집을 이 눈으로 보고 왔습니다."

  "어떻게 해서 보았더란 말이요?"

  "그전 상감이 작취 미성으로 정신이 혼미하신데다가 오늘 이 대궐에서 몸을 피하시느라고 

기절하시다시피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변숙의가 평소 소인의 집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급보해 왔기에 그 들어 계신 집에 소인이 가서 약을 지어올렸던 것입니다."

  "그대에 대한 상전(賞典)은 차차 내리겠거니와 지금 곧 무감을 데리고 그 집으로 인도하도

록 하오."

하고는 능양군은 곁에 있는 이귀에게 고개를 돌려 눈짓을 했다.

  이리하여 정남수란 전의에게 인도를 받아 들이닥친 무관과 병졸들에게 광해군은 붙잡혀서 

창덕궁으로 압송되어 왔다.

  능양군은 비로소 얼굴의 주름살을 폈다.

  능양군은 이귀와 의논하고 광해군을 우선 궁중 일실에 감금하여 놓고 승지 홍봉서(洪鳳

瑞)를 불러서 서궁으로 인목대비를 찾아 뵙게 하였다.

  인목대비는 서궁 하배들의 보고로서 반정 의거의 큰 소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듣고 몹

시 궁금히 여기던 차다.  창덕궁에서 승지 홍봉서가 능양군의 사신으로 문안차 대령했다는 

말을 듣고 곧 그를 불러들이었다.

  홍봉서는 대청 끝에 굴복하고는 곧 능양군의 전갈을 주달하기 시작했다.

  "능양군이 이귀, 김유, 이괄 등 동지와 더불어 반정 의거를 감행하와 오늘 새벽에 창덕궁

을 점령하옵고 간신들을 방금 숙청 중에 있사옵니다.  능양군은 마땅히 달려와서 대비마마

께 문안을 드려야 할 것이오나 반정 벽두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잠시도 자리를 떠날 수 

없는 형편이므로 우선 소신을 보내서 의거의 전말을 사뢰옵고 겸하여 창덕궁의 뒷수습이 대

충 정리되는 대로 대비마마를 몸소 모시러 오겠다는 말씀이옵니다."

  홍승지가 이렇게 말을 마치자 대비는

  "상감은 지금 어이 되었누?"

  "궁중에 감금되어 있습니다."

  대비의 얼굴에는 비로소 기쁨의 표정이 뗘올랐다.

  "그럼 옥새는?"

  "옥새는 신왕께서 지니고 계십니다."

  "신왕이라니, 새임금이 뉘란 말이냐?"

  홍봉서는 무심히

  "능양군 말씀이옵니다."

하고 대답했다.

  "능양군이 누구의 허락으로 보위(寶位)에 올랐단 말이냐?"

  갑자기 대비의 노기 띠운 음성이 홍승지의 가슴을 찔렀다.

  "이제 보니 능양은 임금의 자리가 탐나서 반정을 일으킨 것이로구나.  벌써부터 이 늙은 

것을 무시하는 꼴을 보니 장래가 무섭다.  냉큼 돌아가서 능양군더러 제멋대로 올라 앉은 

자리 오래 잘 누리라고 전갈하라."

하고는 벌떡 일어섰다가 다시 앉으며 열어 놓았던 미닫이를 손수 불쾌스러이 닫아버렸다.

  홍승지는 어안이 벙벙했다.  말 한마디 무심코 잘못했다가 대비의 큰 노염을 사게 된 것

이다.  그는 곧 창덕궁으로 돌아와 이 사실을 능양군에게 보고했다.

  "허허 그거 큰일 났군, 대비의 말씀이 지당하시지."

하고 이귀를 다시 서궁으로 보냈다.

  대비는 시녀의

  "이귀 노인이 문안겸 급히 아뢸 말씀이 있다고 등대했습니다."

하는 전갈에 얼굴에 화기를 띠우며

  "들어오라고 그래라."

하였다.  이귀는 대청 끔에 올라 굴복하였다.  대비는 이귀가 문안의 말씀도 올리기 전에 먼

저 입을 열었다.

  "이번 반정 의거의 자세한 경과는 홍승지에게 들었거니와, 듣건대 능양군이 보위에 올라 

임금이 되었다 하니 대체 뉘의 허락으로 대통을 이었다는 거요?"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능양군이 보위에 오른 듯이 생각하온 것은 홍승지의 착각이옵

고 반정 뒷수습에 능양군이 주로 명령을 내리는 것을 임금으로서의 전교인 양 잘못 생각한 

과실이옵니다.  능양군이 아무리 분망중이온들 그러한 법도를 무시할 분이오니까?"

  이귀는 진정의 표정을 얼굴에 띠우고 이렇게 변명하였다.

  대비는 이귀의 말에 저으기 느끼는바 있는 듯 싶었다.  대비는 부드러운 어조로

  "늙은 그대야 설마 거짓말을 하겠소.  그대의 말과 같다면야 낸들 폭군을 내몰고 이 나라 

사직을 바로 잡는 이 마당에 무슨 트집을 하겠소.  원체 체례로 말하면 광해를 잡아들이어 

대행대왕의 영위 앞에 꿇리어 수죄하고 몰아낸 후에 내 손으로 옥새를 능양에게 전하는 것

이 법도가 아니겠소?"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생각하옵건대, 미구에 능양군께서 문후차로 등대하올 줄 아옵니

다."

  이귀는 이렇게 대답하며 또 한 번 굴복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있은 능양군과 대비

의 대면은 극적이었다.

  능양군은 대비께 뵈이고 절하면서 눈물을 흘리었다.

  "수년 유폐의 고생을 하신 할마마마를 이제야 마음놓고 뵙게 되오니 기쁜 눈물이 앞을 가

리옵니다."

  이 첫마디의 말이 대비의 가슴을 찔렀다.
 
  능양군을 보면 좀 따져보리라 하던 감정이 스르르 녹아버리고 말았다.

  "이 몸이 너의 애쓴 덕으로 다시 기를 펴게 되었으니 고마운 일이다."

  "모두가 천운이시지 무슨 이놈의 힘이오리까."

  "나는 이귀의 이야기로서 너의 사정은 알았다마는 일시 네가 보위에 올랐단 소문을 듣고 

괘씸한 소행이라고 몹시 한심하게 생각했더니라."

  "천만 뜻밖의 일이옵니다.  대통을 이을 인물이야 할마마마께서 하시기에 있느니라고 생

각하고 있을 뿐, 어이 그런 방자한 생각을 먹사오리까."

  "음"

하고 대비는 머리를 크게 끄덕이었다.

  "그럼 이 나라에 한때도 임금이 없으서야 될 수 없으니 즉 조당에 즉위 거행의 준비를 하

고, 옥새를 가지고 와서 내게 전하라."

  "예, 하교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능양군은 곧 이귀를 시키어 옥새를 받들어 대비께 올리라 했다.  그러나 이귀는 옥새를 

안고 대비 앞에 나아와

  "이러한 판국에 대비마마께옵서 옥새를 드리라 하심은 전혀 그 뜻을 알 수 없습니다."

하고 아뢰었다.  대비도 그 뜻을 알아차리고 급히 대답했다.

  "내가 옥새를 가져 무엇하겠소.  나에게는 이미 친자식도 없소.  옥새를 드리라 함은 이 

나라의 국체를 중하게 하고자 함이요."

  "그러시다면 정전(正殿)에 납시어 대신을 불러들이어 정식으로 거행함이 옳을까 하나이다.  

이렇게 국보가 지름 길로 거쳐 드리어짐은 옳지 아니한가 하나이다."

하고 이귀는 대답하였다.  대비는 이 말을 듣고 곧 정전으로 자리를 옮겨 대신들을 불러들

이었다.

  능양군은 김자점으로 하여금 모든 문을 지켜 다른 왕자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박홍구

(朴弘耉)를 시켜 공손히 옥새를 받들어 대비께 드리었다.

  대비는 옥새를 받아 감격에 넘치는 음성으로

  "광해군은 이 세상에 용납지 못할 죄인이니 속히 처치할 것이요.  내 이미 십년을 유폐되

었다가 어제 저녁 꿈에 선왕을 다시 뵈왔더니 오늘의 이 경사로운 일이 있구나."

하고 내시에게 명하여 부복하고 있는 능양군을 당(堂)으로 오르라 하여 친히 옥새를 능양군

에게 전하며

  "위로 선왕의 뜻을 받들고 아래로 백성들의 마음을 살펴 일국이 화평하도록 하라."

하며 전교를 내렸다.

  능양군은 머리를 굽혀 세 번 절하고 옥새를 공손히 받았다.

  이조 십오대의 임금 인조(仁祖)가 바로 이 능양군이며 이때 그의 나이는 이십구세였다.


  [ 受難의 王朝 ]   <외로운 英雄>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受難의 王朝 

    외로운 英雄



   인조(仁祖=西紀 1,623-1,649)는 먼저 왕며으로서 광해군을 강화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라

는 처분을 내리고 호위의 법례를 갖추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창덕궁으로 모시라는 하교를 

내리었다.  그리고 첫 공사로 새로운 조정을 조직하였다.

  영의정에는 이원익(李元翼), 이조판서에는 신흠(申欽), 병조판서에는 김유(金 ), 예조판서에

는 이정구(李廷龜), 형조판서에는 서성(徐 ), 공조판서에는 이흥립, 대사헌에는 오윤겸(吳允

謙), 호위대장에는 이귀(李貴) 등으로 각각 발령 되었다.

  그 다음으로는 영창대군, 임해군, 능창군, 연흥부원군 김제남 등의 관작을 다시 주게 하고 

인목대비의 어머니인 노씨(盧氏)는 제주도로부터 영환(迎還)하도록 영을 내리고, 그동안 부부

인 노씨를 학대한 제주목사 양호는 약사발을 안기어 사사(賜死)하였다.

  한편 폐모의(廢母議)를 주장하던 이이첨, 정인홍, 윤인, 정조 등 십육명을 거리에서 차례차

례 목을 베었다. 

  이때부터 반정 의사(反正義士)들이 모여 있는 빈청 내외에서는 논공행상의 발표를 앞두고 

서로 의견들이 분부하였다.  누구는 일등이 마땅하고 누구는 이등에 합당하다는 등, 구체적

인 토론이 아니고 막연히 각자의 공적만을 토의하여 하나의 여론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여

기서 가장 문제되는 인물은 김유와 이괄 두 사람이었다.  

  김유의 공적이 크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거사 당일 연서역에 늦게 도착한 그 실책

을 문제삼는 것이다.  그것을 가장 문제삼는 것은 이괄이었다.  이괄은 당일 김유의 모호한 

행동은 그 동안의 그의 공적을 상쇄하고도 오히려 죄목이 남는다는 것이고 더구나 김유가 

자기 집 권솔을 사방으로 헤쳐 숨어 있게 한 사실은 그의 심경을 의심하기에 충분하다는 것

이다.

  이괄의 이러한 강경한 주장에 대하여 김유는 김유대로 이괄은 벌써 군문에 목을 베어 걸

어야 할 것을 김유 자신이 반정거사란 대의에 비추어 참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괄은 

연서역에 모이는 정각보다 훨씬 빠르게 이르러서 이귀를 농락하여 군졸에게 호령한 것은 그

가 우정 김유보다 일찍이 가서 미리 대장의 지위를 가로채보자는 비열한 행동이었다고 공격

하는 것이다.

  세상에 정각보다 늦게 이르른 죄목은 있거니와 정각보다 빠르게 내참한 죄목도 있느냐고 

이괄은 호통을 치기까지 했다.  그러나 누가 옳고 그르든간에 승리는 김유에게로 돌아갈 것

인 뻔했다.  왜냐하면 임금은 김유를 무조건하고 믿고 대소사 일체를 그의 처단에 맡기고 

있는 까닭이다.

  이귀는 이괄의 행상(行賞)에 관해서 사전에 김유에게 주의를 하였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번 거사에는 이괄의 힘이 큰 바 있고, 앞으로도 모든 일에 과감한 

인물이니 깊이 생각하오."

하였다.  그러나 김유는

  "모든 일에 과감하다고는 하지만 그러한 성급하고 교양 없는 인물을 큰 자리에 올렸다가

는 일을 그르칠 우려가 있소."

  "그럼 낙점(落點)은?"

  "이등쯤 하려고 하오?"

  "그게 말이 되오."

  "그럼 일등으로 하란 말이요?"

  "그래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데."

  "일등은 과합니다."

  김유는 단연 이괄을 이등공신으로 내려밀 결심을 보였다.

  "이런 논공행상이란 공평하게 해야지 만일에 지나치게 불공평하다면 큰 화근이 되는 법입

니다."

  "화근이 무슨 화근이요.  공훈이 이등이라구 해서 상당한 벼슬에 오르지 못하는 게 아닌

즉 상관 없다고 생각하오."

  김유는 어디까지나 대수롭지 않게 해석하고 자기의 심산대로 내뻗칠 눈치였다.

  다음날 행상이 발표되었다.

  일등 공신이 열사람, 이등 공신이 열여섯 사람, 삼등이 스물여섯 사람이다.

  일 등에 든 사람의 이름은 이러했다.

  김유, 이귀, 김자점, 심기원, 이서, 신경진, 최명길, 이흥립, 구굉, 심명길.  그리고 이 등에

는 이괄을 필두로 원두표, 장유, 장신 등이며, 삼등에는 이기축, 승지 홍봉서 같은 사람들이 

들어 있었다. 

  장유, 장신 같은 사람, 그리고 이귀의 아들 이시백, 김유의 아들 김경증 등이 이등으로 올

라 붙은 것은 오히려 후한 처분이라고 할 것이지마는 그들과 선을 같이 하여 이괄을 이등으

로 몰아넣은 것은 확실히 불공평하고 가혹한 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이 행장이 발표되자 이괄은 물론 동지들 사이에 불평이 비등하였다.  더욱 조정의 조직에 

대해 그러하였다.

  영의정 이원익은 누구나 반대 못할 원로이니 당연하려니와 김유 자신은 병조판서로 앉고, 

이귀는 호위대장이란 자리로 돌렸다.  호위대장이니 상감 신변을 호위하는 측근 중신이라고 

하겠지마는 뚜렷한 정권을 가진 자리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참는다 하고, 그 이

외의 각조 장관의 자리는 모두가 반정 동지가 아니었다.  말인즉 반정에 이면 협조를 하였

다 하니마는 어찌하여 정면으로 활동한 사람을 제외하고 이면 협조자를 등용했는가.

  김유의 농간이 너무나 심했다.  소위 이면 협조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김유를 

지원하는 무리들로 김유는 타일의 비약을 꾀한 것이었다.

  이괄은 한성좌윤(漢城左尹)이라는 벼슬 한 자리를 얻었다.  북병사와 한성좌윤이 그 얼마

나 승하가 있는 자리냐.

  이로부터 이괄은 두문불출, 나날을 집에 틀어박혀서 술로 날이 새고 술로 날이 저무는 장

야의 술타령을 했다.

  이귀는 그동안 정무에 분주한 날을 보내는 중에도 아들 시백으로 하여금 이괄의 동정을 

살피게 하여 그 정보를 받고 한편으로는 김유에게 권하여 그를 좀 더 우대할 도리를 찾게 

하였지만, 김유는 도무지 그것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태도를 고치지 않았다.

  이귀는 생각했다.  김유 자신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이괄의 감정이 심각하여 언제

고 한 번 일을 일으키고야 만다 하면 능양군이 반정의 의로운 일을 완성한 보람없이 나라가 

어지러워 질 것이 분명하다.  더구나 지금 북쪽의 오랑캐가 그 세력이 날로 강성해져서 멀

지 아니하여 명나라를 침범코자 그 기회를 엿보고 있는 이때가 아닌가.

  그러므로 이귀는 먼저 이괄을 만나서 그의 심중을 헤아려 보고 겸하여 그의 노여움을 풀

어 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이귀는 일부러 밤을 타서 이괄을 찾았다.  만만한 불평에 싸여 있는 이괄도 이귀 노인에

게만은 호의를 가지고 있는 터이다.

  처음 두 사람 사이에는 시국 이야기가 오고 갔다.  시국 이야기가 얼마쯤 끝날 무렵해서 

이괄이

  "그런데 영감."

  "...?"

  "영감이 이 야심에 오신 것이 시국 이야기를 듣고자 오신 것이 아니고 나의 근황을 아시

자고 오신 듯한데."

  "사실 그렇소."

하고 이귀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근황은 알아서 무얼 하시려오?"

  "반정초에 형제 싸움이 우려돼서 그러오."

  "형제가 무슨 형제오니까.  나 하나의 존재가 뭐 꺼릴 게 됩니까?"

  "바람 좀 쏘여보는 게 어떻소."

  "외방으로 나가라고요?"

  "그렇지."

  "그것도 좋지요.  어차피 서울에 앉아 있어서는 갑갑도 하구, 기실 눈꼴이 틀려서 견디기 

어렵소이다."

  "무엇이 그렇게 눈꼴이 틀리는 거요?"

  "반정이 성공되면 썩은 물이 모두 흘러 내려가고 새물이 들어올 줄 알았는데 지금 같아서

는 임금 한분 갈아들이고 서인(西人) 일파가 대북(大北) 대신 다시 머리를 들었다 뿐 무엇 

하나 청신한 정책이 없지 않소."

  "차차 있을 테지."

  "첫 출발이 틀렸소."

  이괄은 언하에 이렇게 부정하였다.  이귀는 잠자코 돌아갔다.

  이러던 중 북방 오랑케의 움직임이 수상해지자, 나라에서는 장만(張晩)을 도원수(都元帥)로 

하고 이괄을 부원수로 정하여 북쪽을 지키게 하였다.  이것은 이미 예기하고 있었던 일이라 

이괄은 다만 고소를 지으며 받았을 뿐이다.

  이괄은 발령이 내리자 그 이튿날로 수병 수십명을 거느리고 서울을 떠났다.  임금은 전례 

없이 미행으로 모화관까지 행차하여 이괄을 전송하며 보검 한 자루를 내주었다.


  [ 受難의 王朝 ]   <運命의 꽹과리>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受難의 王朝 

    運命의 꽹과리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세상은 일변하여 대북(大北)이 전멸하고 서인(西人)들이 오래간

만에 정권을 잡게 되었으며 남인(南人) 또한 이원익(李元翼)의 재등장으로 서인 다음으로 세

력을 펴게 되었다.

  그러나 반정공신의 논공행상이 불공평한 것으로 인하여 서인들 내부에 큰 모순이 드러나

게 되어 세상은 또다시 어지러워지기 시작하고 연달아서 역옥 사건이 일어났다.

  사람 몇만 모이면 왕자를 추대한다고 떠들어댔다.  이러한 역옥 사건이 있을 때마다 늘 

추대 인물로 지목되는 왕자는 인성군(仁城君)과 흥안군(興安君)이었다.

  흥안군을 내세우려던 황현(黃玹)의 역옥 사건과 인성군을 추대한 윤인발(尹仁發) 등의 음

모가 두드러진 예이다.  흉흉한 서울의 민심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왕손이 많이 있는데, 인빈 김씨의 소생인 정원군의 아들이 당한 말인가.  아들을 젖혀놓

고 손자가 대통을 이었으니 나라가 바로 될 리 없지.  다시 뒤집어 엎어야 한다."

  이런 소문이 떠돌았다.  반정공신들은 이런 소문이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인가 그 출처를 

캐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때 이것을 고발하여 공신이 되고자 하는 무리가 나타났다.  

전에 윤인발하고 서로 맥을 통해서 일해 오던 문회(文晦), 이우(李佑) 등이

  < 기자헌(寄自獻), 현즙(玄揖), 이괄(李适) 등이 흥안군을 내세우려고 역모하고 있소. >

하는 글을 올렸다.

  임금은 공신들을 불러 의논했다.  이귀와 최명길은

  "아무래도 이괄이 수상합니다.  그가 영변 병영(寧邊兵營)에 내려간 후로 군졸을 조련하고 

병기를 보수(補修)하는 품이 심상치 않습니다.  필시 반란을 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관련자를 잡아 문초하십시오."

하며 즉시 국청을 두라고 했다.  이로써 이괄의 아들 이전(李 )과 기자헌 등이 잡히고, 이

괄에게는 체포령이 내렸다.

  한편 이괄은 아들이 잡혔다는 기별을 듣고

  "내 자식이 아직 미거한데 어찌 역모를 꾀했으리요.  이는 필시 나를 미워하고 시기하는 

일파가 모함하여 그리된 것이다.  나도 대장부다.  어찌 죄없이 소인의 참소로 부자가 한 자

리에서 국청에 무릎을 꿇리오."

  이렇게 분개하다가도 다음에는

  "나의 양심에 죄지은 일 없고, 아무리 불공평한 조정인들 그래도 사람마다 김유 같은 자

만 있는 것이 아닌 이상, 병력을 가진 나를 멀리 두고 내 아들을 먼저 잡는 그런 어리석은 

행동은 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확실한 통고를 받지 않고 행동을 취하는 것은 이른바 

소위 경고망동으로 오히려 김유 같은 자에게 구실을 주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였다.  그러던 것이 며칠이 안 가서 금부도사(禁府都事)와 선전관 일행이 경내에 들어섰다

는 정보가 왔다.

  그의 부하 이수백(李守白)과 기익헌(奇益獻) 등은

  "별 수 없습니다.  이쪽에서 먼저 도사의 목을 잘라 버립시다."

  이괄도 그 말에 개죽음은 할 수 없다 하면서 금부도사와 선전관 일행을 포박하여, 서울 

소식과 조정의 공론을 상세히 심문한 후에 그들을 한칼로 베어버렸다.  막하에 있는 군사들

은 일이 거칠어지는 것을 보고 모두들 벌벌 떨고 있었다.

  이괄은 피묻은 칼을 높이 치켜들고서

  "여러 장병들이여, 이제 싸움은 시작되었다.  조정에는 지금 간사한 무리들이 사람을 모해

하고 충직한 신하를 죽이고 있다.  우리는 불의(不義)의 칼 아래 죽느니보다 나가서 먼저 그 

자들을 없애야 한다."

  "옳소."

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울려 퍼졌다.

  다음날을 기해 서울로 진격할 때 그 부근에 있는 군사들도 모였다.  제일 먼저 구성부사

(龜城府使) 한명련(韓明璉)이 가담했다.  반란군의 총수는 일만이천명이나 되고 그밖에 임진

왜란(壬辰倭亂) 때 해로가 막혀서 미처 돌아가지 못한 왜병 삼백명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조총(鳥銃)을 갖고 있어 실로 일당 백의 강병들이었다. 

  도원수 장만은 이 급보를 서울로 기별하는 한편 병력을 거느리고 이괄을 막으려 하였으나 

오랫동안 조련을 받은 이괄의 군대를 당할 도리는 없었다.  여러 고을이 차례로 함락되었다.  

사나운 회오리바람처럼 여러 고을을 함락한 이괄의 군대는 중군대장 남이흥(南以興)과 부딪

치는 것을 꺼려 뒷길로 돌아서 바로 서울로 향했다.  서울은 바로 풍전등화(風前燈火)였다.

  조정에서는 벌써 패색이 농후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갈팡질팡했다.

  김유는 서울이 위태로와지자 이괄에게 붙을 만한 위험분자를 모조리 잡아서 죽였다.  이

괄의 친척들은 물론이요 기자헌도 끌어내어 죽였다.  서울의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졌다.

  마지막 방어선인 임진강에서 이귀와 박효립(朴孝立) 등이 패한 뒤부터는 서울은 더욱 혼

란하여 벌집을 쑤셔놓은 것 같이 되었다.  벌써부터 봇짐을 싸가지고 도망하는 관리들까지 

생겨났다.

  갑자년(甲子年) 삼월 초여드렛날, 임금은 우선 신주를 먼저 보내고 대비를 가마에 태워 내

보낸 후 한강을 건너 공주(公州)로 몽진하였다.

  임금이 떠난지 이틀 뒤에는 이괄의 군대가 서울에 들어왔다.

  이괄은 선조(宣祖)의 열째 아들 흥안군을 모시고 개선장군처럼 나타났다.  길가에는 출영

나 온 시민들로 가득 찼다.  누구의 입에선지

  "새 임금이 들어오신다."

  한 마디 외치자 시민들도 모두 환성을 올렸다.  

  이괄은 그나로 흥안군을 세워 임금이라 칭하고, 명색 조정이란 것을 벌여 서인(西人)에게 

내 쫓긴 대북(大北) 사람들까지 쓸 만한 사람이면 모조리 불러들여 각기 한 자리씩 맡겼다.  

그리고 과거령(科擧令)까지 내려 선비들을 뽑는다 했다.

  전에 이이첨의 부하였던 사람들은 이제야 세상을 만났다는 듯이

  "살기 좋은 새 세상이 왔으니, 모두들 안심하고 일하오."

하고 사람들을 충동이며 돌아다녔다.  이제는 내 세상이노라고 임금이다, 대신이다, 하고 서

둘던 이괄의 귀에 정충신(鄭忠信)이 관군을 거느리고 남하한다는 소문이 들려온 것은 흥안

군의 새 나라가 생긴지 불과 며칠이 안 되어서였다.

  이괄은 몹시 당황하여

  "도원수 장만이야 대수롭지 않은 인물이지만 정충신은 만만한 적수가 아니다."

하고 황황히 군사를 모으고, 군기를 정비하는데 한 장교가 달려와 정충신의 군대가 이미 서

대문 밖 안재(鞍峴)에 웅거하고 있다고 알려왔다.

  정충신은 전라도 광주 태생으로 임진왜란 때 열세살의 어린 나이로 광주목사 권율(權慄)

의 장계(狀啓)를 가지고, 육로 수천리 의주 행재소의 선조에게 갖다 바친 뒤 왕의 지극한 사

랑을 받아 선조의 명으로 이항복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선조가 서거하고 광해가 왕위에 오

르자, 고결한 그의 성품이 간사한 신하들로 가득 찬 조정에 연합되지 않아 초야에 묻혀 있

다가 인조반정 후 비로소 안주(安州) 방어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소

식을 듣자 숙천부사(肅川府使) 정문익(鄭文翼)에게 그의 맡은 고을을 부탁하고 단신 장만의 

진중으로 뛰어갔다.  장만은 

  "이 난리 중에 어찌 맡은 고을을 함부로 떠났소."

하고 정충신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이괄과 정의(情義)가 형제간 같아서 그가 민란을 일으킨 오늘 안주에 그냥 있

다가는 의심을 받기가 쉽습니다.  장군께서는 이 사람에게 군사를 맡겨 이괄을 치게 해주십

시오."

  이에 장만은 정충신에게 여러 모로 전략 방법을 묻고 그의 전략이 비범함에 감복하여 그

에게 부원수란 직책을 맡기고 군사 이천명을 주어 중군대장 남이흥과 함께 적을 무찌르게 

했던 것이다.

  이괄은 정충신이 웅거한 안채를 바라보았다.  과연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그러나 그 수

효는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저편 군사는 얼마 되지 않으니, 일제히 공격하여 빼앗아버리자."

  그의 명령 아래 이괄의 군사는 일제히 안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산 위에는 정충신의 

관군이요, 산 아래는 이괄의 군대이다.  마침 동풍이 불어 이괄의 군은 크게 유리하여 총탄

과 화살을 퍼부으며 산정을 향해 육박했다.  산 위에서도 지지않고 모든 병기를 동원하여 

대항해 왔다.  싸움이 점차 치열해 가던 중 풍세는 서북풍으로 변했다.  이제는 위에서부터 

공격하기가 좋았다.  화살과 돌과 모래가 내려와 이괄의 진을 뒤덮었다.  군사들은 눈을 뜨

지 못해 크게 동요되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정충신의 군은 돌격으로 옮겼다.  

 이괄의 군대는 그래도 얼맛동안은 잘 싸워 물러서지 않았는데 별안간 뒤에서 징(錚) 소리

가 일어나더니 [후퇴하라!] 소리가 산천이 진동하도록 울려왔다.  이괄의 군대는 멋도 모르고 

후퇴를 개시했다.  본래 군대는 북소리에 진군하고 징소리에 퇴각하는 것이었으므로 정충신

은 계교를 써서 남이흥으로 하여금 적진 후방으로 가서 징을 치며, 퇴각을 하라고 외치게 

한 것이었다.  이괄의 군은 여기서 산산히 패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장만(張晩)은 볼만이요, 이괄(李适)은 꽹과리"

하고 비웃었다.  이것은 그때  장만은 파주(坡州)에 머물러서 보고 있기만 하였고 이괄은 꽹

과리로 인해 크게 패하여 결국은 목숨까지 잃게 된 것을 말한 것이다.

  정충신에게 산산히 분쇄된 이괄은 얼마 남지 않은 군사를 이끌고 도망하여 성중으로 들어

가려 하였다.  그러나 벌써 백성들의 태도는 표변해 있었다.

  "역적 이괄이 패했다.  저놈 쫓아라."

하고 성문을 굳게 닫고 들이지 않았다.  이괄은 하는 수 없이 초라한 군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 광주쪽으로 향해서 달아났다.

  정충신의 관군은 성 안으로 들어와 그동안 이괄에게 협력한 사람들을 잡아 들이었다.  서

울은 다시 공포의 거리로 변했다.

  이괄의 군사들은 광주로 달아나 광주목사 임회(林檜)를 죽이고 다시 이천(利川)에 이르렀

는데 이때는 이미 이괄을 쫓던 군사들도 하나 둘 떨어져 나가고 단 여섯 사람밖에 남지 않

았다.  이괄은 한명련, 기익헌, 이수백 그리고 군졸 서넛과 다시 남으로 내려가 재기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그러나 야박한 것은 인심이다.  그렇게까지 이괄을 섬겨오던 기익헌과 이수

백은 비밀히 의논하기를 서로 살 도리를 강구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쑥덕거렸다.

  그들은 밤에 이괄과 한명련이 잠든 틈을 타서 그들 두 사람의 목을 잘랐다.  그리고 그 

머리를 군복에 싸가지고 공주 행재소(行在所)로 가서 임금에게 바치었다.

  이로써 한동안 매우 급하던 난리가 평정되었으므로 임금은 두 수급(首級)을 검증한 다음 

팔도 각 고을로 돌리고 과장(科場)을 설치하여 충청도 선비들을 뽑은 다음 동가(動駕) 소리 

높이 서울로 돌아왔다.

  기익헌과 이수백은 얼마 후 죄를 용서 받고 놓여나왔다.  그러나 서흥(瑞興)에서 이괄과 

싸우다 죽은 이중로(李重老)의 아들 이문웅(李文雄)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고 백주에 서

울에서 이수백을 죽였다.  의리를 배반하고 자기만 혼자 살고자 하던 역적의 잔당은 결국 

좋은 최후를 보지 못하고 이렇게 죽어간 것이다.

  이괄의 반란 사건이 평정되자 서인(西人)들은 조금만 의심스러운 자가 있어도, 이괄의 당

이라고 하여 잡아 죽였다.  흥안군도 역시 잡히어 옥중에 있었는데 훈련대장 신경진(申景 )

이 자고로 난신(亂臣) 역적은 죽어야 한다고 하며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버렸다.

  그러나 흥안군이 임금 노릇을 한 것은 어디까지나 이괄의 강박에 못 이겨 하였던 것이었

고 또 그는 평민과도 다른 왕족인 이상 응당 인조의 재가(裁可)를 얻어 처리를 했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신경진은 제멋대로 목을 잘라버린 것이었다.

  인조는 서울로 돌아와서 그러한 처사를 듣고 크게 노하여 신경진을 며칠 동안 금부에 가

두기까지 하였다.  반정공신들의 방자한 행동은 날로 심해 갔다.  서인 아닌 사람들은 한시

도 기를 펴고 살 수 없었다.  사실 역적이 아니더라도 당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

이 무고하게 서인에 의해 희생이 되었다.

  이때부터 거리에는

  < 폐주 광해군을 다시 모셔와야 한다.  이번의 반정이라는 것은 서인들이 자기네 당만 생

각하고 일으킨 것이다.  더구나 나라에는 왕자가 얼마든지 있는데 광해가 잘못 했으면 다른 

왕자를 내세울 것이지, 그렇게 하지 않고 한 대를 거너 손자를 세웠으니 될 말이냐.  이것은 

반정이 아니고 순전히 서인들의 농간이다. >

  이러한 격문이 나붙기 시작했다.  그러면 이것을 가지고 서인 일파에서는

  "이는 인성군을 내세울려고 역모하는 자들의 소행이니 당장 인성군을 없애야 하오."

하고 들고 일어났다.  이원익을 중심으로 한 남인(南人)들은 인성군을 두둔하여 서인 일파에

게 대항했다.  서인측에서 특히 공신들이 인성군을 죽여야 한다고 떠들어대면 남인측에서는 

죽여선 안 된다고 나섰다.

  공신들 중에서 가장 온건하다는 평을 듣던 이귀마저도

  "인성군은 전에 폐모를 적극 주장한 자로서 대비에 대한 죄과도 있고 또 그 후 역모 사건

이 일어날 때마다 으례 인성군을 추대한다는 말이 나오니 응당 처벌해야 하오."

하고 주장했다.  인조는 이러한 이귀의 주장에 대하여

  "경마저 그런 소리를 하면 내 마음이 어찌 되는가.  인성군을 죽이라는 말은 나의 덕을 

더럽힐 생각에서 하는 말이 아닌가."

하고 언짢은 기색을 보였다.  잠잠하던 조정은 인성군 문제를 가지고 서인 남인으로 갈라져 

또 다시 당파싸움으로 흔들렸다.

  그 후 계속해서 효성 땅의 선비 이인거(李仁居)의 역모사건과 또 광해군의 왕비 유씨의 

조카 유효립(柳孝立)의 역모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이 추대하려는 인물이 또한 인성군이었다.  삼사에서는 합세하여 인성군을 참하라고 

부쩍 떠들어댔다.  그러나 대사간 정온(鄭蘊)은

  "전에 영창대군은 역적들이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고 해서 죽였는데 이번 인성군의 경우

는 확실한 증거도 없이 극형에 처하라고 하니 이 아니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아니오니까.  

역옥은 거의 해마다 일어나고 있는데 오늘날 인성군을 제거하면 다음날에 또 다른 인성군이 

나오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오리까.  삼사에서는 종사(宗社)를 위해 인성군을 죄 주어야 한

다지만 전하는 광해군 때의 전철(前轍)을 밟지 말아야 하오."

  임금은 정온의 말을 옳은 말이라 하며 칭찬까지 하였다.  그러니 이번에는 대비로부터도 

인성군을 죽여야 한다는 정음(한글) 전교가 내려왔다. 대비는 물론 서인편을 두둔해서 인성

군을 죽이라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서인 일파에게는 이것이 여간 반갑지가 않았다.

  서인 일파와 대비, 이렇게 양측에서 들고 일어나는데는 임금도 더 견딜 수가 없었다.  마

침내 임금은

  "아무리 종사를 위한 일이라 하나 골육간에 서로 살상하게 되니 나의 마음이 아프다."

하는 비통한 말로써 승낙하였다.  이리하여 죄없는 인성군은 반정공신들의 등살에 못 이겨, 

결국 원통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 受難의 王朝 ]   <丁卯胡亂>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受難의 王朝 

    丁 卯 胡 亂



   우리 나라에서 이렇게 내란과 시비로 무비(武備)를 등한히 하고 있을 때 북쪽 만주에서 

일어난 후금(後金)은 점점 그 힘이 강해졌다.

  그 태조(太祖)인 누루하치는 명나라가 쇠약해 감을 틈타서 중원(中原)으로 진출할 야망을 

품고 우선 후방인 우리 나라의 동향을 타진해 왔다.  말하자면

  "너희들이 광해조 때같이 명나라 편을 들어 우리에게 도전하면 재미없다."

하는 식의 일종 위협이었던 것이다.  조정에서도 오랑캐들의 힘이 강대하여 거역해 내지 못

할 것을 알고 사신을 보낼 생각을 했다.  그러나 막상 사신을 보내려 하니, 누구 한 사람 내

가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평안병사로 있는 정충신이 이 어려운 소임을 맡았다.  그는 오랑캐들의 만지(蠻地)로 들어

가서 형제지국(兄弟之國)의 의를 맺고, 무사히 돌아왔다.  때마침 역적 한명련의 아들 한윤

(韓潤)은 이괄이 패주할 때,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도망하여 한동안 구성(龜城) 땅에 숨어 

있다가 아무래도 불안하여 만주로 달아나, 후금국에 의지코자 했다.  거기에는 광해조 때 명

나라를 도우려고 출병했다가 잡혀서 아직까지 본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강홍립(姜弘

立), 박난영(朴蘭英) 등이 있었다. 

  한윤은 자기 부친의 원수를 갚는다고 강홍립, 박난영 등을 충동하였다.

  "최근 몇 년 동안 본국과 연락이 끊겨서 매우 궁금하던 차요, 그래 본국의 사정은 어떻게 

되었소?"

  강홍립이 궁금해 묻는 말에 한윤은

  "말 마십시오.  광해군을 내쫓은 뒤로는 전에 벼슬하던 사람들까지 다 내쫓고 있습니다.  

민심은 새 임금을 싫어하여 이번에 이괄 장군이 반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백성들은 크게 환

영했습니다."

  "음, 그럼 우리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소?"

  "제가 듣기에는 장군의 가족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합니다."

  사실에 있어서 공신들이 강홍립의 처자를 죽였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강홍립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그는 한윤의 말에 크게 노하여 은근히 복수할 생각을 가지

고 누루하칭게 동병하도록 권했다.

  그러나 누루하치는 정충신과의 언약도 있고 해서 출병을 하지 않았다.

  인조 사년에 누루하치가 죽고 그의 넷째 아들 홍타시(弘他時=皇太極, 뒤에 淸太宗이 됨)가 

그 뒤를 이었다.

  홍타시는 한윤과 강홍립의 못된 말을 듣고 군사 삼만명을 보내 조선을 치게 했다.  홍타

시의 군사는 회오리바람같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의주(義州)를 엄습하여 부사 이완(李莞)

을 죽이고 계속해서 곽산(郭山), 정주(定州)를 함몰시키고 청천강을 건넜다.

  안주성(安州城)을 지키던 목사 김준(金浚)과 병사 남이흥(南以興)이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

한 전사를 한 것은 이때의 일이다.

  적군은 평양을 무너뜨리고 평산(平山)에 이르렀다.  이때는 벌써 조정이 서울을 버리고, 

묘사주(廟社主)와 대비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한 뒤이다.

  홍타시는 자기 장졸들에게

  "출병의 목적이 조선에서 시위하는 정도로써 유리한 조건 아래 화의를 맺아 후고의 우려

를 없이함에 있으니, 구태여 인명을 함부로 희생하여 조선과 원수가 될 것이 아니다.  또 시

일을 천연하여 전쟁이 오래 계속되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불리한 노릇이니, 적당히 화의를 

맺도록 하라."

  이렇게 경고한 까닭으로 그들은 평산에서 더 진진하지 않고 사자(使者)로 유해(劉海)라는 

항복 한인(降伏漢人)과 강홍립, 박난영 등을 강화로 보내어 화의를 교섭케 했다.


   의주가 함락되었다는 정보가 처음 서울에 도달하였을 때, 조정에서는 홍타시가 조선에 

출병하기까지의 그 원인과 곡절을 몰라 이에 대응할 방침을 세우지 못하고, 오직 갈팡질팡

하기만 하고 있었다.  늙은 조관들은 도망갈 계책 뿐이요, 젊은 신진 대간들은 객기를 부려 

명나라 원군에 일루의 희망을 걸고 무작정 항전론(抗戰論)만 주장했다.

  이때 이귀는 김유와 불목 중에 있어서 어전에서 논쟁하다 과격한 언사로 김유를 꾸짖은 

것이 죄안(罪案)이 되어 파직 근신 중에 있는 몸이었다.  사태가 매우 급하고 나라의 공론이 

통일을 얻지 못하니 인조는 특히 어찰(御札)을 내려서 이귀를 불렀다.

  "평소에는 경의 충간을 듣지 못하다가 급한 때를 당하여 부르는 것은 과인으로서 매우 면

괴한 일이다.  경의 충성과 도량으로 응당 용서하리라 믿는다.  이제 적병이 침입하여 나라

가 위태로운 이때 조정에 응전할 대책 세울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노라.  경은 속히 출사하

여 과인의 좌우를 떠나지 말고 계책을 지도하여 종사를 보호할지로다."

  이와 같은 간절한 소명을 받은 이귀 노인은 황공 제읍( 泣)하고, 일신을 희생하여 국난을 

구제할 결심으로 다시 복직 입조하게 되었다. 

  이귀의 출사를 맞아 인조는 그를 탑전에 자리를 주어 앉히고 곧 시국 대책을 물었다.  이

귀는 머리를 조아려 아뢰었다.

  "홍타시의 야심은 중원 침략에 있으므로 조선은 처음부터 안중에 두지 않았음에도 불구하

고 이제 갑자기 침입한 것은 신의 생각으로는 두가지 원인이 있는 듯 짐작되나이다.  첫째

로는 홍타시가 아버지의 유업을 계승하여 그 뜻을 달성하려고 이제 대병을 일으켜 중원으로 

향하기에 앞서서 후고의 근심을 끊으려고 일종의 시위 수단으로서, 먼저 조선을 굴복시켜 

우리로 하여금 명나라를 돕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오며, 둘째로는 이괄의 잔당과 강홍립 등

이 원심(怨心)을 품고 적에게 무소(誣訴)하여 출병을 종용한 것입니다.  적의 출병한 목적이 

이상 두가지 예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오면, 적의 속셈은 우선 속전(速戰)과 속화(速和)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시일을 천연하여 중원에서 쓸 군사를 조선에 오래 묶어두는 것은 

반드시 그들의 본의가 아닐 것인즉 결국 화의는 우리 측에서 제의하지 않더라도 적으로부터 

응당 있을 것으로 압니다.  오직 우려되는 것은 우리에게 수비가 없으므로 여기서 적을 방

어하기가 매우 어려운 점입니다.  하지만 소수의 병력으로써 강적을 대항함에는 수비가 안

전한 강화도로 피할 도리밖에 없사온즉 서울을 버리시고 잠시 강화도로 피하옵소서.  이렇

게 되면 적이 비록 십만 강병이 왔다 할지라도 이른바 함정에 든 호랑이의 신세라 진퇴가 

불능하여 굴복될 것이 분명하온즉, 소신의 계책은 먼저 지키고 다음에 싸우고 그리고 화(和)

하는 것을 전하께 권하는 바입니다."

  그때까지 갑론 을박으로 날을 보내던 조정에 비로소 수전화(守戰和)의 삼대 방침이 수립

되어 이귀의 헌책대로 강화도 파천(播遷)이 실현된 것이다.

  강화도로 옮겨 와서 우선 급한 고비를 넘기고 보니 조정의 대관들은 다시 그전 버릇대로 

이귀의 헌책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특히 청의파(淸議波)로서 강개 격앙하는 선비들은

  "오랑캐는 예의를 모르는 금수들이요.  이러한 금수에게 우리가 명나라를 대신하여 먼저 

토벌치는 못할망정 그들과 화친하느니 하여, 요사스러운 말로써 전하로 하여금 절해 고도

(孤島)에 몸을 의탁케 하시고, 또 장사들의 전투심마저 저하케 하니 이것은 나라를 욕 뵈이

고 임금을 위태케 하며 의리를 저버리게 하는 소위로 그 죄는 천지간에 용납지 못할 바요."

하고 이귀를 공격하였다.  탄핵을 만난 이귀가 출사를 하지 못하게 되자 그의 헌책한 방침

도 중구난방이 되어 버리고 강화도의 조정은 또다시 갑론 을박으로 영일이 없었다.

  한편 후금의 홍타시는 조선정부가 강화도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음을 보고 그 대책으로 의

주에서 평양에 이르는 수백리 연도 점령 지역에 군사로 하여금 농작을 짓게 하여 이른바 불

퇴전(不退轉)의 결심을 보여, 은근히 주전파(主戰派)를 위협하고 서울 총공격을 개시 하였다.

  서울 유도대장(留都大將) 김상용(金尙容)은 기겁을 해서 먼저 창고에 불을 지르고 강화로 

도망쳐 왔다.

  유해를 비롯한 강홍립, 박난영 등이 외교문서를 가지고 강화로 찾아온 것은 바로 이때의 

일이다.

  방어력과 전투심을 잃은 조정에서는 유해를 연미정(燕尾亭)에서 영접하도록 예조판서 이

귀와 참판 최명길(崔鳴吉)을 내보냈다.

  이귀와 최명길은 유해와 강홍립을 만나보고 비로소 홍타시의 출병동기가 한윤의 무소로서 

이루어진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다시 강홍립의 숙부 진흥군(晋興君) 강신(姜紳)으로 하여금 홍립의 자녀

와 손자를 데리고 답례사(答禮使)로서 적진에 들어 가게 했다. 

  강신은 적진에 이르러 홍립을 만났다.  강홍립은 자기의 숙부를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자기의 자식과 손자들이 혈색 좋고 충실한 것을 보고는 비로소 한윤에게 속은 줄을 

깨닫고 후회하는 빛을 보였다.

  강신은 강홍립을 꾸짖으며 말하였다.

  "네 일국의 도원수로서 수만군을 거느리고 멀리 명나라를 위해 응원을 가서, 아무리 전왕

(前王)으로부터 밀지(密旨)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대체의 방침으로서 될 수 있으면 희생

을 적게 하여 국력을 소모치 않았다가 다른날에 방비하자는 것이요, 그 취사선택은 여전히 

너에게 일임하신 것으로 안다.  그러므로 너의 처지에서는 왕명에 충실할진대 이제 무슨 면

목으로서 이역에서 십년씩이나 묵고 있다가 못된 역적의 말에 속아서 배반자의 신분이 되어

가지고 고국에 돌아왔느냐."

  이 말에는 강홍립도 크게 느낀 바 있어 그 후 양국의 사신이 왕래할 때마다 일을 잘 주선

해서 화의를 성립시켰다. 즉



一, 조선과 만주국은 앞으로 형제의 의를 맺고 영원히 서로 침범치 않는다.

二, 맹약의 성립과 함께 만주군은 조선으로부터 철퇴하고 이미 점거한 땅을 전부 

  반환한다.

三, 만주군이 획득한 인물과 재보는 맹약 이전의 것이므로 돌려보내지 않으나 조선

  으로부터 상당한 대가로써 찾아가려 할 때에는 언제든지 반환한다.

四, 금후 만주국과 남조(南朝=명나라를 기리킴) 사이에 전쟁이 있을 경우 조선은 절

  대로 남조를 원조하지 않는다.

五, 맹약을 맺은 후에 조선조정은 만주군에게 상당한 호군례( 軍禮)를 행하며, 국

  왕의 친형제와 자질 중에서 특사로 삼아 조정 대표로 대신 일명을 영솔케 하여 국왕의 친

  서를 받들어 심양(瀋陽)에 와서 사례를 진술한다.

六, 매년 춘추 이기에 조선으로부터 신사(信使)를 파송하여 교의를 돈독케 하며, 그  

  때마다 상당한 예물과 세폐(歲幣)를 보낸다.


  이러한 절목을 정하고, 강화 성내에 단(壇)을 쌓고 백마(白馬)를 잡아 하늘에 제사하며 그 

피를 찍어서 형제의 의를 맺었다.  이리하여 만주군이 철퇴할 때 한윤은 그냥 데리고 가서 

오진 강홍립과 박난영만을 조선에 남아 있게 하였다.  그러나 적군이 미처 경내로부터 철퇴

하기도 전에 조정에서는 또다시 척화론(斥和論)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 受難의 王朝 ]   <丙子胡亂>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受難의 王朝 

    丙 子 胡 亂



   인조 십년 임신년(壬申年)에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승하하자 만주국에서는 특사를 보내어 

조문하였다.  조정의 척화(斥和)하는 일파에서는 만주국의 특사를 거절하자고 주장하였으나 

그렇게 할 수도 없어 받기는 하면서도 그 대접을 소홀히 하였다.  인조는 환후를 이유삼아 

끝내 특사를 한 번도 접견하지 않았고 접반하는 관원도 이름 모를 미관에게 내맡겼다.

  이런 일을 저쪽 사신이 알 까닭이 없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홍립과 한윤이 

투항한 이후로 저들은 조선 사정을 세밀하게 알 뿐만 아니라 특사의 통역으로 따라온 고마

아(古馬兒)란 자가 비록 만주의 성명을 갖고 그들의 의복까지 입고는 있으나 실상은 평안도 

은산(殷山)의 관노(官奴)로 있다가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적군에 사로잡혀 투항했던 자인 것

이다.  그의 본명은 정명수(鄭命壽)라 했다.

  이 정명수가 만주국의 장수 용골대(龍骨大)의 막하에 들게 된 후부터 용골대는 만주국 유

일의 조선통이 되어 홍타시의 신임을 받아서 조선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가 참견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번 인목대비 승하 때에도 그가 조문사(吊問使)로 뽑혀서 나왔던 것이다.

  용골대는 매우 좋지 않은 인상을 받아 가지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삼년 후

인 을해년(乙亥年)에 이르러 인렬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가 또 승하하였다.  이번에도 용골

대가 마보대(馬保大)를 데리고 조문을 왔다.

  이때는 벌써 만주국이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황제국으로서 승격하고 연호를 숭덕(崇

德)이라 칭할 때이다.

  용골대와 마보대는 청나라 군사 백여명과 몽고 군사 구십여명을 거느리고 위풍당당하게 

황제국의 사신으로서 나타났다.  우선 조정에서는 예의상 접반사와 통사를 보내서 마중을 

했다.

  용골대는 홍타시의 친서(親書) 외에도 다른 두통의 봉서를 내놓았다.  접반사가 나중 내놓

은 두통의 봉서를 보니 한 장은 만주국 팔기대신(八旗大臣)이라 쓰고, 또 한 장은 몽고제왕

자(蒙古諸王子)라 쓰고 그 앞면에다가는 봉조선국왕(奉朝鮮國王)이라 쓴 것이었다.

  이것은 전례에 없는 일이었다.  접반사는 어찌해서 너희 나라 대신과 몽고 왕자가 무엄하

게 우리 상감께 글을 바치느냐 탄하니 용골대는

  "그게 무슨 말이요.  우리 한(汗)의 성업이 혁혁하여 안으로 팔기대신과 밖으로 항복한 몽

고 왕자들이 우리 한을 추대하여 황제위(皇帝位)에 나가시게 했소.  귀국은 우리와 형제의 

나라라 이 소식을 들으면 대단히 기뻐할 줄 알았는데 어째서 안 받겠다는 거요?"

하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접반사는 하도 엄청난 이 말에

  (허허, 이런 변괴가 있나.  되놈이 천자라니!)

  혼자 입안의 소리로 중얼대며 국서(國書)와 편지도 받지 않은 채 용골대를 흘겨보고, 빨리 

말을 몰아 조정에 이 사유를 복명했다.

  접반사의 복명을 받은 조정에서는 물의가 분분했다.  대사간 정온(鄭蘊)은 여전히 반대하

며, 몽고 왕자의 사신을 물리치라고 했다.  그리고 홍익한(洪翼漢) 등 척화신(斥和臣)들도 여

기에 반대하여

  "오랑캐 사신을 붙들어 목을 베어서 당당히 법을 알리는 게 옳은 줄로 아뢰오."

하고 엄중하게 배척했다.  다만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만이

  "이번 금나라 사신의 서신은 응당 받아야 하고 그를 불러 보신다 하여도 무관한 줄 아뢰

오.  다만 보고 안 보고 할 것은 몽고 왕자 뿐이외다.  몽고 왕자도 반드시 꼭 박대할 것은 

없으며, 엄하게 물리칠 것은 그들의 패서(悖書) 뿐이옵니다."

하고 척화론에 반대 의견을 토했다.  이렇게 의론이 분분한 중에 날짜만 자꾸 끌던 중, 용골

대 일행이 서울에 당도한지 사흘 만에야 조정에서느 다시 접반사를 보내 한(汗)의  조문만

은 받는다는 기별을 했다.

  어차피 한(汗)하고는 정묘년에 형제지국의 의를 맺었으니 조상마저 받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될터이니, 황제로 추대한다는 팔기대신과 몽고 왕자의 글은 받지 말고 조상만 받되, 이번 

한(汗)의 사신이 전과 달라 백여명이요, 그 중에는 무기를 가진 자들도 있으니 절대로 전례

대로 대궐 안에서 조상을 받지 말고 따로이 대궐 앞 금천교(禁川橋)에 군막을 치고 이것들

의 조상을 받는 게 옳다고 조정의 의론이 낙착된 까닭이다.

  용골대 일행이 금천교에 새로 마련한 혼전(魂殿)에 이르러 허위(虛位)에 대고 삼배구고두

(三拜九叩頭)를 올릴 때, 용골대의 가슴 속에는 부쩍 불안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동안 정탐

군의 기별로는 조선 조정이 발끈 뒤집혀서 금나라 사신의 목을 잘라 버리자고 임금께 우긴

다더니 이제는 이 다리 옆의 군막이다.  또 왕궁에서 알현(謁見)을 허락하기커녕 왕궁의 그

림자조차도 구경시키지 않는다.  무슨 비밀한 계획이 있는 것 같이만 느껴졌다.

  의심이 버쩍 난 용골대가 겁을 잔뜩 집어먹고 사방을 둘러볼 때이다.  별안간 바람이 홱!  

일어나더니 군막이 푸르르 날렸다.  군막 뒤에는 호위하는 조선 군사들이 무장을 하고 둘러

서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용골대는 순간, 앗! 소리를 치며 그대로 뛰기를 시작했다.  

뒤미처 마보대도 몽고 왕자들도 뛰었다.  나머지 백여명이 영문도 모르고 눈이 뒤집혀서 헐

레벌떡 용골대의 뒤를 따라서 뛰었다.

  좌우 옆 길가에 빽빽이 늘어서서 구경하던 백성들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놈들이 모두 

달아나니 나라에서 이들을 붙잡는 줄만 알았다.

  "오랑캐가 달아난다.  붙잡아라!"

  우뢰같이 일어나며 백성들은 앞을 다투어 용골대를 뒤쫓았다.  그럴수록 용골대는 꽁지가 

빠지게 달아났다.  겨우 모화관 근처에 이르러 아무 집에나 뛰어 들어가서 마굿간에 있는 

말을 집어타고 무악재 고개를 향해 치달아났다.

  원래 조정에서는 용골대가 전례없이 일백 수십명이나 군사를 데리고 더구나 팔기대신과 

몽고 왕자의 편지를 가지고 왔으니, 혹시 무슨 불우의 변란이 있을까 해서 금천교 다리 밑

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군막 뒤와 옆에 파수를 세워놓았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갑자기 바

람이 펄럭하고 군막을 젖히는 바람에 파수병이 용골대 눈에 띄어, 그는 영락없이 자기를 죽

이려고 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일은 매우 공교롭게 되어버렸다.

  어쨌든 용골대가 달아나자 조정에서는 통사 박난영(朴蘭英)을 벽제관까지 쫓아보내서 다

시 돌아가자고 청하니 용골대가 이 말을 들을 리 만무하다.  고개를 가로 흔들고 그냥 말을 

몰아 달아나 버렸다.

  평화의 사신이 달아났으니 싸움은 목전에 닥치게 되었다.  위에서는 곧 팔도에 통문을 돌

려 군사를 모으게 했다.


    병자년(丙子年) 겨울에 접어들자, 북방에서의 군사의 이동이 심해지며, 마보대가 의주까

지 와서 부윤 임경업(林慶業)에게

  "너의 나라가 대신이나 왕자를 보내 강화를 맺지 않으면 치러 가겠다."

는 말까지 건네어 왔다.  그래도 완고한 척화론자들은

  "이번에 오랑캐 사신이 오면 목을 베이시오."

  "미리 평양가지 나가 싸움을 준비해야 하오."

  이런 말로써 헛기운만 내고 있었다.  드디어 섣달 열이튿 날, 의주부윤 임경업의 급한 장

계(狀啓)가 서울에 올라왔다.

  "이달 초아흐렛날 적병이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 옵니다."

  그 이튿날, 즉 열사흗날 낮에는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장계가 올라왔다.

  "적병이 벌써 안주(安州)까지 왔습니다."

  도원수 김자점의 장계를 채 묘당에 돌리기도 전에 이번에는

  "적병이 벌써 평양에 들어왔소."

하는 평양감사의 장계가 올라왔다.

  평양은 서울서 불과 오백여리.  사흘 동안에 압록강에서 평양까지 왔으니 기막힌 노릇이

다.  조정은 발칵 뒤접히고 온 장안이 슬렁거렸다.  재빠른 사람들은 벌써 보따리를 싸들고 

남부여대하여 피난들을 가느라고 남대문 밖이 꽉 메워졌다.

  조정에서도 우선 영의정 김유의 아들 김경징(金慶徵)으로 강화 도검찰사(都檢察使)를 시켜 

강화를 지키게 하고, 윤방과 김상용(金尙容)으로 종묘사직의 신주와 빈궁(嬪宮), 원손(元孫) 

이하 봉림대군(鳳林大君), 인평대군(麟平大君)을 모시어 가게 했다.

  섣달 날씨는 무섭게 추었다.

  새벽부터 서둘러 떠나 강화도로 피난 가는 묘사주(廟社主)를 받든 일행이 김포(金浦), 양천

(陽川)을 거쳐 양천강 언덕에 다다른 것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 무렵이었다.  창졸

간에 일어난 일이라 배 준비가 넉넉할 수 없었다.

  강화유수 장신(張紳)이 겨우 주워 모아 온 것이 여남은 척밖에 없었다.  검찰사 김경징은 

자기 집 재물바리부터 먼저 건느게 하고, 그 다음에는 자기 어미, 제 아비의 첩, 제 아내부

터 건느게 하니, 세자빈(世子嬪)과 원손을 모시고 섰던 나인들은

  "저런 무엄한 것이 있나.  빈궁마마와 원손 애기보다 제 어미 제 계집이 제일이람."

하고 발들을 굴러 분해했다.

  이래서 묘사주를 모신 대신들과 세자빈, 왕자들은 여기서 이틀이나 묵어야 했다.  이러는 

동안 적군은 벌써 경기 땅에 들어서서 송도를 두려 빼고, 장단부사 황직(黃稷)은 적병을 대

항하러 나섰다가 그대로 항복하여 청나라 복색을 하고 길잡이가 되어 같이 들어오고 있었

다.

  이제는 상감마저 몽진(蒙塵)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임금은 남대문을 나서서 강화로 향하고자 했다.  세자(世子)가 뒤에 모시고 영의정 김유, 

이조판서 최명길, 훈련대장 신경진(申景 ) 등이 그 뒤를 따르니, 성 안에 남았던 백성들은 

통곡하며 <상감마마!>하고 부르짖었다.

  막 남대문을 나서려 할 때
  
  "벌써 적의 선봉은 홍제원까지 이르렀고, 그 일부는 김포, 양천강 앞에서 강화도로 가는 

통로를 끊었소."

하는 소식이 들러왔다.  임금은 하는 수 없이 남대문 문루에 올라가 따라온 신하들을 돌아

보며 물었다.

  "일이 이렇게 급박하니 어찌하면 좋겠소?"

  이때 철산부사(鐵山府使) 지여해(池如海)가 앞으로 나서며

  "신에게 포수(砲手) 오백명만 주시면 우선 급한 대로 사현(沙峴)에서 적의 선봉을 꺾겠습니

다.  그 동안에 전하는 강화도로 피하십시오."

  영의정 이하 여러 신하는 이것을 반대했다.

  "지여해의 말이 용감스럽긴 하지만 어떻게 오백명으로 십만 대군을 당한단 말입니까?"

  이번에는 최명길이 어전에 나와 엎드리며

  "종사의 멸망이 경각에 달렸으니 청하건대 신이 단기(單騎)로 적진에 나가 담판하려 하나

이다.  그 사이에 전하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가 기회를 보아 강화로 들어가시도록 하

옵소서."

했다.  임금은 이 말에 매우 마음 든든히 여기며

  "경은 진정 충신이요.  나라가 이꼴이 된 것은 과인이 척화신을 내쫓지 못한 탓이오."

하며 동중추(同中樞) 이경직(李景稷)을 부사로 삼고 수행원으로 군사 이십명을 주어 보냈다.  

최명길이 이경직과 함께 적진을 향해 떠나자 임금은 대가를 돌려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수구문을 빠져 겨우 송파강(松坡江)에 다다르니 강물이 얼어서 엉겨붙었다.  강화 모양으

로 배탈 걱정없이 얼음을 타고 건넜다.

  일행이 남한산 밑에 당도하니 저물어 가는 해는 벌써 떨어져서 삽시간에 앞뒤를 분별하지 

못할 캄캄한 밤이다.  앞에서 임금을 인도하는 사람은 한 두번 와서 길을 안다는데도 자꾸 

험한 산을 끼고 맴만 돌 뿐이다.

  이리저리 헤매는데 앞에서 불빛이 반짝였다.  사람들은 지옥길에서 천국을 만난 듯 반가

와 했다.

  내시가 창문을 두드리니 몸집이 큰 총각 하나가 나왔다.

  "이애, 산성 길을 가다가 잊었는데 어디로 가지?"

  "우리집 뒤로 요리조리 올라가면 돼요."

  총각은 한참 손짓을 하며 설명했다.  자기는 늘다녀서 잘 알지 모르지만 처음 가는 사람

이 손짓만 가지고 알 리가 만무하다.

  "이봐, 그러지 말고 수고스럽지만 좀 앞에 서서 길을 가리켜 다구."

  "가르쳐 주기는 어렵지 않지만 간대야 산성은 못들어 갑니다.  벌써 밤이 깊었으니 문을 

닫았을 거예요."

  "가르쳐만 다우.  들어가는 건 염려말고."

  여러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애원하는 말에 총각은 마지 못해서 앞장을 서서 길을 걸었

다.  산바람은 눈보라를 갈겨 쳐서 올라가는 일행을 눈코 뜰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모든 

사람들은 온 종일 시달린 끝이라 촌보를 옮기기가 어려웠다.  그 중에서도 임금이 가장 딱

해 보였다.

  앞에서 훨훨 가던 떠꺼머리 총각이 뒤를 돌아다보고 하도 딱했던지 임금 앞으로 가서 등

을 대고

  "이거 아주 못 걸으시는군요.  내 등에 업히시우."

  "어, 고맙네.  총각."

  임금은 평생에 이렇게 고마운 일을 받아본 일이 없는 것 같았다.  총각 등어리는 반석같

이 든든하기만 했다.  총각은 임금을 업고 평지를 걷듯 성큼성큼 올라간다.  임금은 등에 업

힌 채 총각에게 물었다.

  "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갑돌이라 해요."

  "무엇으로 생업을 삼고 사니?"

  "산에서 나무나 하고 그걸 팔아서 살지요."

  "부모는 다 계시냐?"

  "칠십 먹은 어머니 하나 뿐이예요."

  "몇 살이냐?'

  "서른살이예요."

  "음, 그런데 얘, 싸움이 났다는데 너는 왜 달아나지 않니?'

  "내야 뭐 가진 게 없으니 도적이 들어와도 무서운 게 없지요."

  "이럴 때 나라님은 무서워할까?"

  "나라님이야 죄가 있으니 무섭겠지요."

  "나라님에게 무슨 죄가 있다던?"

  "그런 것은 말 못하겠어요."

  "왜 말을 못하니?"

  "잘못 말하다가 잡혀가게요."

  이렇게 얘기를 주고 받는데 어느덧 산성 문 앞까지 다 왔다.

  산성수어사(山城守禦使) 이서(李曙)는 오랑캐가 쳐들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수어영(守禦營) 

군사와 승군(僧軍)들을 풀어 밤을 도와 산성을 파수하고 네 군데 문을 닫아 대기하고 있던 

차라 밤이 깊어 누가 성문을 두드린다는 말에 달려와 보니 어찌 놀라지 아니하랴.  임금의 

행차가 문밖에 추위를 못 이겨 떨고들 섰다.

  이서는 황공망극하여 손수 성문을 열고 임금을 맞아들였다.

  뜬눈으로 산성에서 밤을 새운 임금은 첫닭이 홰를 쳐 울자 다시 강화도로 피난한다고 나

섰다.  성문을 너서니 험한 산길에 빙판이 져서 말이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말고삐를 잡은 

어자(御者)가 채찍을 들어 갈기나 말은 전신에 땀만 흘릴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임금은 하

는 수 없이 말을 버리고 도보로 걷기를 시작했다.  간밤의 노독이 아직 풀리지 못한 채 다

시 미끄러운 새벽 산길을 걷자니 한 걸음마다 아프고 두 걸음마다 미끄러졌다.

  임금의 기색은 좋지 못하였다.

  "얘, 도로 산성으로 돌아가자."

  내관을 돌아보고 이렇게 분부를 내렸다.  이대로 걸어서 인천을 거쳐 강화로 가기는 마치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 어렵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임금이 다시 산성으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적병의 동정을 살피러 갔던 최

명길이 돌아와 복명해 엎드렸다.

  "수고했소.  이조판서!  적군의 동정이 어떠하오?"

  임금은 최명길에게 물었다.

  "신이 용골대를 진중에서 만나 보고 무단히 형제지국을 범한 연유를 물으니 용골대는 노

기를 띠며 형제지국의 의를 깨뜨린 것은 너희 나라가 먼저 아니냐 하면서, 전에 비변사(備

邊司)에서 평안감사에게 보낸 오랑캐와 절화(絶和)하라는 유문(諭文)을 내보이지 않겠습니

까?"

  "그래서 뒷일이 어찌 됐단 말이요."

  임금은 뒷말을 재촉하였다.

  "용절대는 별안간 고함을 치며 신의 목을 베이고 남한산성을 무찔러 쳐라 하고 호령하였

습니다.  신은 얼굴빛을 정색하고 조선은 의를 존중하는 나라라 무단히 사신인 나를 죽였다

는 소리가 일어나면 팔도의 근왕병(勤王兵)이 구름 일 듯 일어날 것이니 내 목을 베이려거

든 빨리 베어라.  마주 고함쳐 호통했습니다.  신의 기색을 살피던 용골대는 저희끼리 한참 

수군 거리더니 세 가지 조건을 들어 화친하기를 청해왔습니다."

  임금은 그 세 가지 조건을 물었다.

  "황송하오나 한 가지 조건은 왕자를 볼모로 보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대신을 보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오랑캐 사신을 목베이자는 척화신(斥和臣)을 보내라는 것이옵니다."

  이 말에 곁에 모시어 섰던 만조백관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오달제(吳達濟) 이하 젊은 척화신들은 오랑캐들의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고 최명길

은 화친하는 길 이외에 종묘사직을 지킬 길이 없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또다시 평화론과 척화론이 대립되었다.  이러는 동안에 적병의 선봉은 벌써 풍우

같이 마전(麻田)을 건너서 남한산성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조정에서는 하는 수 없이 종실 능봉수(綾峯守) 칭( )을 왕제라 하고, 심즙(沈 )을 가짜 대

신을 만들어서 적진으로 보냈다.

  용골대와 마보대는 우선 가짜 왕제와 가짜 대신을 면대해 보고

  "당신이 정말 임금의 아우요?"

하고 능봉수의 위 아래를 훑어보니 능봉수는 태연히

  "그거 무슨 소리요.  나는 진정한 왕의 아우요."

하고 거침없이 대답했다.

  마보대는 다시 가짜 대신 심즙을 돌아보았다.

  "대감도 정말 대신이요?"

하고 똑바로 심즙을 쳐다보니 심즙은 겁많고 어리석은 위인이라 얼른 능봉수처럼 똑똑히 대

답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마보대는 의심이 버썩 일어났다.  옆에 있는 박난영에게 물었

다.  박난영도 역시 정말이라고 했다.  이때 용골대가 썩나서며 박난영의 멱살을 버쩍 추켜

잡고

  "이놈, 내가 너를 여태껏 우대했는데 그 은혜를 모르고 거짓말을 한단 말이냐. 내가 다 알

고 있다."

하고 환도를 빼어 박난영의 목을 갈기니 윽! 소리 한마디에 난영의 목은 땅에 떨어졌다.  이

로써 제일차의 화의는 결렬되고 말았다.


  [ 受難의 王朝 ]   <三田渡의 눈물>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受難의 王朝 

    三田渡의 눈물



   능봉수와 심즙이 적진에서 쫓겨온 뒤, 임금은 대신과 비국당상(備國堂上)을 인견하고 눈

물을 흘리며

  "나라일이 여기까지 이르니 어찌하면 좋단 말이요."

하고 통탄했다.

  영의정 김유와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이

  "일이 급하오니 화친하기를 청하는 것이 상책인 줄 아뢰오."

하고 화의를 주장했다.  임금은 한숨을 쉬고

  "그럼 이번에는 좌의정이 호판 김신국(戶曹判書 金藎國)을 데리고 가오.  만일 용골대가 

기어이 왕자를 보내야 된다 하거든 대군들이 지금 강화에 있으니 화친이 되는 날이면 추후

로 보내겠다 대답하오."

하고 분부를 내렸다.  다음날 홍서봉과 김신국이 산성을 나서서 섬전도로 용골대를 찾으니, 

용골대는 당장 세자를 볼모로 보내지 아니하면 화친하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임금 이하 백관들은 안색이 변하며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임금은 

다시 대신들을 불러 세자를 적진에 보내는 가부를 결단하려 하였다.  그러나 누가 감히 먼

저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음, 모두들 말이 없으니 그럼 세자를 보내란 뜻이구료.  모든 사람들의 뜻이 그러하다면 

보내지."

  임금의 얼굴은 흙빛과 같이 참담하였다.  밖에서 이 소식을 듣고 섰던 동양위(東陽尉) 신

익성(申翊聖)이 어전에 급히 나와

  "안 됩니다.  동궁을 보내시려면 먼저 소신의 목을 베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으니 만좌는 모두 얼굴빛이 푸르러졌다.  신익성의 말이 떨어지자 다시 예조판

서 김상헌(金尙憲)이 들어와 영의정 김유를 보고

  "영의정이 동궁 전하를 적진으로 모시자 했다니 이런 변괴가 어디 있소.  다시는 대감과 

하늘을 같이 일 수가 없구료."

하고 준절히 면박했다.  뒤미처 홍익한, 윤집(尹集), 오달제 등이

  "간신들이 나라를 위태롭게 했으니 분규를 일으킨 장본인을 목베어야 하오."

하고 연거푸 상소를 올렸다.  며칠이 지난 후부터는 적병이 산성을 완전히 포위하여 부분적

인 싸움이 벌어졌다.

  원두표와 이시백이 나가 싸워서 원두표는 적장 양고리(楊古利)를, 이시백은 오상(吳祥)을 

각각 죽임으로써 사기를 떨치었다.

  이때부터 적은 사, 오일 동안 싸우던 군사를 내보내지 아니하고 진문을 굳게 닫고 포위마 

했다.  이제 산성에서는 사람 먹을 군량미가 떨어졌다.  적병은 산성 안팎을 겹겹이 둘러싼 

채 군사 하나 꼼짝 안하고 있다.  아무리 이쪽에서 싸움을 돋아봐도 적병은 그저 들은 척 

만 척 결진만 하고 있다.

  산성에선 모든 사람이 갑갑증이 나고 초조해 배길 수가 없었다.  이때 이 외로운 산성에 

일루의 희망이 잠간 비치기 시작했다.  원주영장(原州營將) 권정길과 충청감사 정세규가 응

원병을 거느리고 산성 근처까지 왔다는 소식이 들어온 것이다.  산성 높은 곳에 올라가 보

니 검단산(儉丹山)에서 호병과 싸우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이 싸움은 며칠이 가지 않았다.  정세규와 권정길의 군사는 청나라 군사에게 전패

하여 내빼고 말았다.  그 후부터는 감히 근처에 응원해 오는 군사가 없었다.

  청병들은 산성에 있는 조선군이 밖으로 연락을 할까봐 목책(木柵)을 성 밖으로 둘러치고 

군데군데 쇠방울을 달아 사람이 목책을 넘기만 하면 방울소리가 요란히 나도록 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남한산성은 완전히 두겹 세겹 적진 가운데 둘러싸인 외로운 성이 되고 

말았다.

  정축년 정월이 되면서부터는 청나라의 황제가 직접 나와서 항복하라고 독촉했다.

  최명길 등이 임금의 분부를 받아 답서를 써보냈다.  그 내용인즉 그대로 아무 조건 없이 

싸우지 말고 전과 같이 형제국으로 지내자는 것이었다.

  호진(胡陣)에서는 이 국서(國書)를 받고도 한 동안 아무 기별이 없었다.  며칠 뒤 좌의정 

홍서봉이 적진으로 가서 답서 재촉을 했다.  그러자 적장 용골대는 빙글빙글  웃으며 품안

에서 간지 두 장을 꺼내 홍서봉에게 주었다.

  "대감 그것을 읽어 보오."

  홍소봉이 그것을 받아 보니 바로 봉림대군이 상감에게 올리는 친필이다.

  첫대목부터 호천망극 넉자를 쓰고 강화도가 함락되어 원손(元孫)은 행방을 모르고 빈궁과 

봉림, 인평 두 대군은 적군에게 볼모로 붙들려 있고, 원임대신 김상용은 폭약으로 자진하고 

원임 윤방만 살아서 역시 적군에 붙들렸다는 기막힌 소식이었다.

  강화 검찰사 김경징과 부사 이민구(李敏求)는 하나는 영의정 김유의 독자요, 하나는 병조

판서 이성구(李聖求)의 아우로 모두가 권신의 자제들이다.

  처음 강화도 피난이 묘당에서 논의될 때 김유는 즉석에서 자기 아들과 이민구 두 사람을 

천거하였다.  임금은 이때

  "경징과 민구는 모두 백면 서생으로 큰 일에 대하여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다.  경의 천거

를 의심치는 않으나 직책이 중한 만큼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김유는

  "소신이 어찌 감히 자식의 재간 유무를 모르고 국가의 중임에 천거하오리까.  경징은 비

록 미거하오나 일찍이 소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인(異人)을 만나 도술(道術)을 배웠다 

하옵기로, 이제 국가 위급한 때를 당하여 전하께 만일의 도움이 될까 하와 추천하는 이외에 

다른 뜻이 없사옵니다."

  이리하여 김경징은 임금으로부터 상방보검(尙方寶劍)의 하나를 받으며

  "강도에 있는 문무백관과 수륙 제군으로 경의 명령에 복종치 않을 때는 선참후계(先斬後

啓) 하여도 무방하니라."

하는 교서까지 배수하였다.  강화로 들어온 김경징은 앞에 큰 강이 있으니 안심된다고 하면

서 대안(對岸)의 김포와 통진(通津)의 관곡(官穀)을 가져다가 먹어대며 매일 같이 연미정(燕尾

亭) 근처에서 술만 마시며 세월을 보냈다.

  군관도 장교들이 무슨 긴급한 정보를 보고하거나 처분을 물어 오면

  "그따위 쓸데없는 일은 그만 두고 술이나 한잔 마시라."

하고 사무는 도무지 살피지 아니했다.

  이러던 중 청나라의 예친왕 다이곤(睿親王 多爾袞)의 대병은 강화도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적군은 먼저 인천(仁川), 부평(富平), 통진, 김포 등을 함몰시킨 후 한강 상하에서 선척을 압

수해 가지고 경기수영(京畿水營)을 깨쳐서 전선(戰船)을 노획했다.  그리고는 즉시 조수 밀리

듯이 바다를 건느기 시작했다.

  김경징은 장대 위에 높이 앉아 그 광경을 바라보고 깔깔대면서

  "저놈의 군사가 몇 만이나 되는진 몰라도 나의 호령 한마디에 바닷속 고기밥이 될 것이니 

응전하지 말고 구경이나 해라."

  이 말에 모든 장졸들은 대장의 하는 일이 매우 맹랑하고 추측키 어려웠지만 그래도 군률

을 지켜 움직이지 않고 오직 대장의 거동만을 구경하게 되었다.

  적병의 승선이 점점 육지 가까이 오는 것을 기다려 김경징은 술법을 쓴다고 칼을 빼어 공

중을 가리키며 진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장(神將)은커녕 날씨는 쾌청한 채 적병을 

실은 배는 평온한 바다를 미끄러지듯 자꾸만 육박해 왔다.  갑자기 김경징의 얼굴은 흙빛이 

되는 동시에 허겁지겁 장대 아래로 내려와 바닷가에 매어 논 조그마한 어선을 잡아타고 어

디로인지 도망쳐 버렸다.

  강화도는 이렇게 해서 어이없이 함락이 되고 말았다.  강화에는 여자들의 피난민이 많아 

적병들은 여자를 잡아 제멋대로 희롱했다.  김경징의 어머니와 처도 적병에게 잡혔으나 그

들은 비겁한 경징의 행동과는 반대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여장부의 기개를 보였다.  이밖에

도 조관과 부녀의 순절하는 사람이 매일같이 속출했다.

  강화도의 함락은 남한산성 안에 있는 임금으로 하여금 최후의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이 외로운 성 안에서 적을 대항하던 것도 묘사를 위하여 굴치 않으려 한 것이다.  그러

나 이제 와서는 모두가 허사가 되었다.  내 이제 누구를 위하여 항전하며 우리의 군사와 백

성을 도탄에 빠지게 할 것이냐."

  이런 비통한 하교와 함께 출성 통지의 사신을 적진에 내보냈다.

  최후의 어전회의에서 국서(國書)의 초안을 잡은 최명길은 붓을 놓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

렸다.  옆에서 김상헌은 그 국서를 집어서 찢어버리며

  "사나이가 국가 패망하는 이 마당에 한 번 목을 찔러서라도 외롭게 죽지는 못할 망정 손

가락으로 이 글을 짖고 있어.  아, 해괴한지고."

  일변 꾸짖고 일변 땅에 엎디어 울며 일어나지 못했다.

 동양위 신익성은 칼로 기둥을 찍으며 통곡했다.  최명길도 눈물을 흘리며

  "대감! 시생은 대감의 의기를 모르는 것이 아니올시다.  시생 역시 대감만한 의기와 기백

은 가졌소이다.  그러나 이것은 부득이한 일이 아니오니까."

  찢어버린 종이 조각을 다시 수습하여 이어대기 시작했다.


   정축년(丁丑年) 정월 삼십일, 임금은 오십명의 시위군사를 인솔하고 곤룡포(袞龍袍)대신 

남포(藍袍)를 입고 서문으로 내려섰다.

  성에 가득한 신하와 백성들은 통곡하며 임금의 행차를 받들어 보낸다.

  청왕(淸王) 홍타시는 삼전도(三田渡)에 진을 치고 아홉층 단을 나룻가 남쪽에 모은 뒤에 

황색 장막과 황색 일산을 꽂고 단위에 앉아서 기다렸다.

  조선왕 인조는 진 앞 백보 밖에서 말을 내려 걸어 들어갔다.  세자궁도 말에서 내려 부왕 

뒤를 따랐다.

  진앞에 이르러 용골대는 조선왕을 인도하여 단아래 자리를 펴고 북면(北面)하여 절하기를 

청한다.  인조는 잠간 주저하다가 호인의 풍습대로 세 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린다.  

이것이 항복하는 식이다.

  조금 있다가 용골대는 다시 임금에게 단에 오르기를 청한다.  거기에는 이번에 출정 나온 

청나라 왕자와 몽고의 왕자들이 동서 양편으로 갈라서 앉아 있다.  임금은 동편에 서향을 

하며 앉았다.  건너다보니 맞은쪽 서편 끝자리에 강화도에서 볼모로 잡혀 온 봉림대군, 인평

대군이 있다.  아, 얼마나 반가우랴.  두 대군은 눈으로 목례를 보내며 다만 소리없이 눈물

만 흘릴 뿐이다.  

  다음에는 행주례(行酒禮)가 있었다.  군악소리 웅장하게 울리는 중에 임금은 청왕에게 술

을 부어 올렸다.  수치스럽기 한량없는 광경이었다.  행주례가 끝나니 청왕 홍타시는 임금에

게 수달피 웃옷 두 벌과 백마(白馬) 한 필을 하사했다.

  다 저녁 때가 되어 청왕은 임금에게 당일로 서울 환궁할 것을 허락하고 왕세자와, 빈궁과,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은 눌러 진에 머물게 하니 장차 볼모로 심양(瀋陽)까지 데리고 갈 생각

인 것이다.

  임금의 일행이 강을 건너 서울로 향하니 청병의 일부대가 임금을 호위한다고 뒤따랐다.  

일행은 밤이 깊어서야 겨우 창경궁에 다다랐다.  사십여일만에 다시 보는 대궐!  그러나 대

궐들은 이미 차디찬 재가 되어 있었다.


  [ 受難의 王朝 ]   <멀고 먼 北녘 땅으로>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受難의 王朝 

    멀고 먼 北녘 땅으로



   정축년(丁丑年) 이월 초이튿날 청왕은 다이곤에게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을 호위

하여 천천히 뒤에 오라 이르고 자기는 군사를 거느려 급급히 회군했다.

  이월 초여드렛날 세자와 봉림대군이 대궐로 들어와 부왕에게 작별인사를 올리니 임금은 

남이웅(南以雄)과 정뇌경(鄭雷卿) 등을 수행원으로 배정하고 그밖에 무재(武宰)로 이기축(李起

築)을 따르게 한 뒤에 기운찬 장사패 여덟명으로 세자와 봉림대군을 호위하여 청나라로 가

게 했다.

  원래 동궁 행차라 대신으로는 영의정 김유가 마땅히 앞잡이 서서 심양으로 가는 게 당연

하나 김유는 백방으로 꾀를 피워 사양한 까닭에 남이웅으로 가함대신(假銜大臣)을 만들어 

보내게 된 것이다.

  임금은 이날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녹번이를 넘어 창릉(昌陵)까지 나가서 세자와 봉림대군

을 전송했다.  세자는 통곡하며 울고, 봉림대군은 부왕의 상심되는 마음을 더욱 상하게 할까 

하여 끊어오르는 슬픔 회포를 지그시 참고 있었다.

  "잘들 갔다 오너라.  무슨 일이든 경솔하게 하지 말고 참고 참아라."

  임금 역시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당부했다.

  양화도(楊花渡) 나룻가에 진 치고 머물러 있던 다이곤의 대군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

보대가 선진을 맡고 다이곤은 중군(中軍)을 이끌고, 세자와 봉림대군이 말고삐를 나란히 한 

그 좌우 옆에는 팔장사(八壯士)들이 옹위하며 걸어가고 그 다음에 동궁빈 강씨(姜氏)와 봉림

대군 부인 장씨(張氏)의 옥교가 따랐다.

  뒤에는 용골대가 옹위해 나가고 그 다음에는 잡혀가는 조선사람 남녀노소 수만명이 장사

진을 이루었다. 

  송도에 이르렀을 때, 송도유수는 말 이십여필에 쌀을 실어가지고 와서 동궁과 대군에게 

바치었다.  동궁과 대군은 그 쌀 중에서 얼마를 진 뒤에 묶어서 따라오는 척화신(斥和臣) 오

달제와 윤집에게 나눠 주었다.  이들은 홍익한(洪益漢)과 함께 척화(斥和)를 했다고 역시 심

양으로 끌려가는 길이었다.  홍익한은 평양에서 직접 심양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다시 해주(海州), 평양(平壤)을 지나 안주(安州)에 다다르니 슬픈 소식이 진중에 떠돌았다.

  삼학사(三學士) 중의 한 사람인 홍익한이 호정(胡廷)에서 끝끝내 항거하다가 청태종(淸太

宗)의 노염을 사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세자와 대군이 심양에 도착하여 관소(館

所)를 정하고 체재하는 동안 윤집(尹集)과 오달제(吳達濟) 등도 끝끝내 반항하다가 죽음을 당

하고 말았다.

  그동안 조선의 조정에서는 변동이 많았다.  영의정 김유는 삭탈관직을 당해서 쫓겨나고 

그 대신으로 영의정에는 이홍주(李弘胄)가, 좌의정에는 최명길이, 우의정에는 장유(張維)가 

들어 앉았다.  그리고 강화도를 잃어버린 김유의 아들 김경징은 강계로 귀양살이 갔다가 사

사(賜死)를 받아 죽었다.

  이 무렵 용골대는 인조(仁祖)에게 조선왕을 봉한다는 책봉사(冊封使)가 되어 조선으로 다

시 나왔다.  그는 청태종의 책봉조칙을 인조에게 건넨 뒤에 여러 가지 난처한 조건을 요구

했다.

  첫째  한(汗)의 송덕비(頌德裨)를 삼전도에 세울 것, 둘째 대신들의 자제를 청국과 서로 바

꾸어 혼인할 것, 셋째로 조선 여자로 한(汗)의 시녀를 뽑아 보낼 것 등이었다.  모두가 난처

한 요구들이었다.  그러나 한(汗)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었다.

  삼전도 나룻가에는 얼마 후 엄청나게 크고 넓은 대리석 빗돌이 세워졌다. 

  그리고 대관들의 본실 소생들은 부랴부랴 혼인을 올리고 종의 딸들을 수양녀로 삼거나 첩

의 딸로 한 명씩 바쳐서 청나라 대관의 아들과 혼인하게 보내기로 하고, 한(汗)의 시녀로 만

들 여자는 관비(官婢) 속에서 열 명을 뽑아 용골대에게 전해 주었다.

  이렇게 온 나라가 힘에 눌려 청나라에 복종은 하고 있으나 속 마음으로는 아직도 임진왜

란(壬辰倭亂) 때 조선을 도와 준 명나라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하여 청태종이 다시 

명나라 장수 심세괴(沈世魁)가 웅거하고 있는 가도( 島)를 칠 테니 조선서도 군사를 보내라

고 요구해 왔을 때 조정에서는 마지 못해 평안병사 유림(柳琳)과 의주분윤 임경업(林慶業)을 

보내 바다에서 청군을 돕게 하였다.  그러나 임경업은 몰래 사람을 심세괴에게 보내어 가도 

백성들을 많이 피난케 하였다.

  그 뒤에 또 금주(錦州)를 칠 때도 유림과 임경업은 형식적인 응원만 하고 돌아왔다.  명나

라가 아주 쇠미(衰微)하여 강남(江南)에 근근히 그여맥을 지탱하고 있을 때에도 이와 같은 

친명(親明)의 뜻은 꺾이지 않았다.

  영의정 최명길과 의주부윤 임경업은 명나라에 독보(獨步)라는 중을 보내어 수차 연락을 

취했다.  명나라에서는 궁금하던 차에 조선의 책임 있는 재상의 글을 받고 두 나라가 힘이 

부족한 것을 개탄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이 명나라 병부상서 홍승주(洪承疇)가 청나라에 항

복하는 바람에 전부 탄로되었다.  크게 노한 청태종은 조정에 통고하여 최명길과 임경업을 

잡아 들이라 명했다.

  이때 임경업은 전부터 호진(胡陣)에 참가하여 명나라를 칠 때마다 도리어 명나라 군사에

게 여러 가지 편의를 준 듯한 혐의가 있다 하여 청나라에서 조정에 항변하고 임경업을 삭탈

관직 시키게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임경업은 의주부윤과 평안병사의 직책을 내놓고 서울

로 돌아와 한가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판이다.

  이런 중에 사건이 벌어져 최명길로부터 명나라 홍승주가 청나라에 항복한 뒤 우리와 연락

이 있었던 일을 자백해 버렸으니 이 일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편지가 왔다.  임경업

은 이 편지를 받아보고 곧 몸을 숨기어 명나라로 건너갈 결심을 했다.

  임경업이 몸을 숨겨 도망한 것을 크게 조선의 조야를 놀라게 했지만 청국의 분노는 더욱 

더컸다.  용골대는 최명길이 잡혀서 심양으로 끌려 오자 곧 문초를 했다.

  "모든 일은 명나라 항복한 장수 홍승주에게 들어 알고 있으니 은휘 말고 대답하라."

  "은휘할 리가 있겠소.  무엇으든 물으시오."

  "독보란 중을 명나라에 보낸 것은 무슨 뜻으로 한 짓인가?"

  "병자년 이래 조선의 형편으로 말하면 가뜩이나 군사가 없는 판에 서해 바다에는 더욱 방

비가 없었소.  하루 아침에 명나라 군사가 조선을 향해 쳐들어 온다면 어떻게 대항하겠소?  

그리고보니 미리 명나라에 간첩을 보내서 조선이 명나라에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알리자는 

생각이었소."

  "국왕이 이 일을 아는가?"

  "처음부터 국왕은 권모술수(權謀術數)를 좋아하시지 않으므로 나와 임경업 두 사람만이 상

의해서 보낸 것이요."

  "임경업이 도망했다는데 이것은 조정에서 일부러 숨기는 일이 아닌가."

  "그건 당치도 않은 소리요.  조정에서 사람을 숨길려면 영의정 최명길을 숨길 것이지 어

찌 일개 무장인 임경업을 숨기겠소?"

  최명길은 펄쩍 뛰며 그렇지 않다고 변명했다.  용골대도 다시 더 물을 게 없었다.  최명길

의 답변을 일일이 한(汗)에게 보고하고 최명길을 심양옥에 가두었다.  이 옥에는 이때 김상

헌(金尙憲)도 척화신으로 잡혀와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만나 감개가 무량하였다.

  한편 임경업은 일편엽주(一片葉舟)로 서해를 건너 등주(登州)로 갔다.  이때 등주의 주사대

장(舟師大將)은 홍승주가 청나라에 항복한 뒤에 황종예(黃宗裔)란 사람이 도독(都督)이 되어 

있었다.  임경업은 황종예와 힘을 합하여 호국을 치기 위해 전선(戰船)을 만들고 군사를 교

련시켰다.  부지런히 서두르는 동안에 배는 벌써 삼십척을 만들었고 군사들은 제법 노련하

게 훈련되었다.  배만 다 완성되면 장차 큰 싸움을 시험해 보려 하는 판에 뜻 아니한 소식

이 들려왔다.

  명나라 숭정황제(崇禎皇帝)가 유적(流賊) 이자성(李自成)의 핍박을 받아 북경을 빠져나가고 

황제는 만세산(萬歲山)에서 목을 매어 죽고 신종(神宗)의 아들 복왕(福王)이 남으로 달아나서 

남경(南京)에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임경업과 황종예의 낙심은 이만저

만이 아니었다.  황종예는 임경업에게

  "장군은 중군(中軍) 마홍주(馬弘周)와 함께 등주를 지켜 주시오.  나는 근왕군(勤王軍)을 거

느리고 남경으로 가야겠소."

하고 그대로 떠나 버렸다.

  황종예가 떠난 뒤에 임경업은 중군 마홍주와 함께 등주에서 군사 일을 다스렸다.  그런데 

다시 불리한 소식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이자성이 남으로 도망하고 호군이 북경을 점령했

다는 소식이다.

  이때 청국은 태종 홍타시가 죽고 그의 아우 다이곤(多爾袞)이 큰아들 숙친왕(肅親王)을 폐

한 뒤에 겨우 여섯 살 된 셋째 아들 순치(順治)로 황제를 삼고 자기는 스스로 섭정(攝政)이 

되었다.

  임경업은 마홍주가 벌써부터 청나라와 내통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모르고 그와 함께 남경

으로 가려다가 그만 마홍주의 배신으로 호병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임경업이 북경 옥에 갇혀 있는 동안 섭정왕 다이곤은 명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통일하고 

도읍을 북경으로 옮겼다.  그리고 이제는 조선이 겁날 것 없다 하여 그 동안 심양에 잡혀 

있던 세자와 대군을 놓아주었다.  뒤이어서 김상헌과 최명길 등도 대사(大赦)로 놓여 나왔

다.  최명길과 김상헌은 벼슬을 버리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 나머지 여생을 보내고 영의정에 

김자점(金自點)이 들어 앉았다.

  한편 동궁은 구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기쁨이채 풀리기도 전에 별안간 세상을 떠나게 되

어 궁중은 다음 세자 문제로 또 한 번 파란이 중첩하게 되었다. 

  당시 인조는 후궁인 조소용(趙昭容)의 품에 안겨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지내고 있었다.  영

의정 김자점은 조소용의 소생인 옹주의 부마 김세룡(金世龍)의 조부였다.  김자점은 조소용

이 세자빈 강씨와 사이가 나쁜 것을 미리 짐작하고 세자의 아들인 원손(元孫)을 물리치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세울 것을 주장하고 임금의 총애를 한몸에 지닌 조소용도 임금에게 봉림

대군으로 세자를 세울 것을 극력 주장했다.

  좌의정 홍서봉과 이경여(李敬與) 등이 원손으로 세우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함에도 불구

하고 임금은 마침내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이렇게 되고보니 원손은 한낱 왕손으

로 떨어지고 강빈(姜嬪) 역시 홀로 쓸쓸한 과부 노릇을 하며 지내게 되었다.

  이러던 중 조소용은 은근히 강빈을 아주 없앨 생각을 먹고 여러 가지로 임금에게 무고를 

했다.  조소용에게 눈이 어두워진 임금은 우선 강빈을 후원 별당에 유폐시켜 놓고 대신과 

육경(六卿)을 불러

  "강빈은 심양에 있을 때부터 왕비 노릇을 하려고 했다 하오.  돌아온 후에는 수라상에 독

(毒)을 넣지 않나, 북경서 사온 요물 같은 귀신을 가지고 밤마다 저주를 하지 않나 그 못된 

행실은 이루 말할 수 없는데 어찌 경들은 가만히 있소?  어서 경들은 왕법을 엄하게 다스

리오."

  강빈을 죄 주라는 재촉을 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왈가왈부 밤이 늦도록 떠들기만 하고 

판결을 짓지 못했다.  임금은 몹시 답답증을 내고 그중에서도 맹렬히 반대하고 나선 홍무적

(洪茂績)과 이경석(李景奭)을 멀리 귀양을 보내게 하고 

  "강빈을 폐서인(廢庶人)할 뿐 아니라 사사(賜死)를 내리도록 하라."

하는 엄한 말을 내리었다.

  이로써 강빈은 남편을 잃은 뒤 얼마 안 가서 궁중을 쫓겨나 자기 집으로 돌아와 사약을 

마시고 그 한많은 세상을 등졌다.  강빈의 소생 석철(石鐵)과 석린(石麟)도 그 후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거기서 둘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이때를 전후하여 심기원(沈器遠)의 역적 모의가 또 탄로되어 조정은 물끓듯 어수선했다.  

김자점은 영의정으로 심기원 옥사에 추관(推官)이 되어가지고, 신문할 때, 당시 조정 안에 

자기와 한패가 아닌 사람은 이름을 불러가며 역적으로 몰아 죽였다.

  심기원이 극형을 받아 처참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회인군 덕인(懷仁君德仁)은 심기원에

게 추대되었다는 바람에 피살되고, 임경업도 심기원과 함께 역적 모의를 할 양으로 명나라

로 도망한 자이니 조선으로 내보내 달라고 청나라에 간청했다.  섭정왕 다이곤은 임경업을 

옥에서 내놓으며 사신에게 칙유(勅諭)까지 들려 보냈다.

  < 조선이 귀순한 뒤 임경업은 두 나라 사이를 이간시킬 양으로 명나라에 정탐을 보내는 

등 좋지 못한 일을 많이 하다가 급기야 제 자신이 명나라로 들어가서 나라일을 어지럽게 하

였다.  진작 임경업을 처결해 버릴 것이로되 개과천선하기를 바라고 옥 속에 가두었더니 지

금 들으니 임경업이 조선 국왕을 폐하려 역적 모의를 했다 하니 놀라운 일이다.  이제 임경

업을 보내니 조선은 처결한 후 하회를 알리기 바란다. >

  이것이 병술년(丙戌年)의 일이었다. 

  임경업이 김자점의 독수에 걸려 세상을 떠나자 한동안 조정은 김자점과 임금의 총희 조소

용의 독단성이 되어버렸다.  이때 이들에게 대항해서 나선 사람은 같은 공신 계통인 원두표

로서 김자점과 서로 파가 갈라져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 김자점편을 낙당(洛黨)이라 칭하고 

원평부원군(原平府院君) 원두표파를 원당(原黨)이라 하였다.

  조정은 이 두 파당의 싸움으로 한가로운 날이 없을 지경이었다.  이러던 중 최명길도 병

들어 죽고, 또 인조도 기축년(己丑年) 오월에 승하하니 때는 병자호란이 일어난지 십삼년 두

의 일로 인조의 나이 오십오세였다.  봉림대군이 곧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효종(孝宗)이다.


  [ 受難의 王朝 ]   <깨어진 北伐의 꿈>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受難의 王朝 

    깨어진 北伐의 꿈



   효종(孝宗=西紀 1,649-1,659)은 나이 심십일세에 왕위에 올랐다.  효종은 그 형 소원세자

와 더불어 아홉해라는 긴 세월을 볼모잡이의 몸이 되어 심양과 북경에서 갖은 풍상을 다 겪

은 분이다.

  그가 탄생되기는 인조가 아직 능양군으로 있을 때였고, 그의 모후(母后)는 인열왕후(仁烈

王后) 한씨(韓氏)이다.  그는 여덟살 때 봉림대군에 봉해졌으며 부인으로는 신풍부원군(新豊

府院君) 장유(張維)의 따님을 맞았다.

  효종은 심양과 북경에서 오랜 볼모잡이 생활을하고 있었을 때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맹세

한 사실이 있었다.

  ( 첫째 군사를 기를 줄 아는 장수를 얻어야 한다.  그래야만 병자, 정축의 뼈에 사무치는 

부끄러움을 씻을 수 있다. )

  이렇게 마음 속으로 깊이 맹세했던 것이다.  효종은 즉위 초에 거유(巨儒)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俊吉), 이유태(李惟台) 등을 불러서 정치를 보좌케 하고, 일단 멈추었던 대동법(大同

法)을 다시 시행하고 수차(水車)를 장려하여 농사관계에 쓰게 하는 등 내정 충실에 힘을 섰

다.

  이리하여 세월이 흐르기를 오년...  갑오년에 이르러서 웬만큼 국고(國庫)가 충실히 된 뒤

에 비로소 삼남 각도에 오영장을 두었다.

  그 어느날 임금은 야반에 갑자기 침전에서 무감을 불렀다.  야반에 급한 어명이라 황황히 

무감이 달려서 뜰 아래 국궁하고 영을 기다릴 때에 임금은 손짓으로 무감을 툇마루 가까이

까지 불러서 무감의 귀에 무슨 분부를 내렸다.  그날밤 자정이 훨씬 지나서 대궐 별감 십여

명은 말을 달려서 장안 각 무신(武臣)의 집으로 향하였다.

  "지금 예궐하라는 분부가 계시오."

  이 분부를 들은 무신들은 무슨 영문인지를 몰랐다.  아닌 밤중에 갑자기 대궐에서 부르는

지라 황급히 옷을 입고 혹은 말로, 혹은 가마로 대궐로 달려 들어왔다.

  그러나 그들이 대궐에 들어서자마자 사면에서 빗발치듯 화살이 날아와서 들어서는 무신은 

모두 이 불의의 화살에 맞아서 거꾸러 졌다.  그러나 화살에 촉은 없었다.  이런한 가운데 

단지 한 사람, 빗발치는 살도 모르는 듯이 손을 앞으로 읍하고 국궁한 채로 정전(正殿)을 향

해 나아가는 사람이 있었다.

  그때 용상 아래 읍하고 섰던 한 내관의 소리가 울렸다.

  "누군가라는 하문이 계시오."

  "삼도 도통사 이완(李浣)으로 여쭈오."

  우렁찬 대답은 마치 대궐이 드렁드렁 울릴 듯이 터져 나왔다.

  "오오."

  그것은 내관의 소리가 아니었다.  용상 위의 임금의 옥음이었다.

  오오, 한 마디 뿐 임금은 용상에서 내렸다.  부축하려는 내관을 물리치고 몸소 옥보를 정

전 밖으로 옮겼다.

  "상감마마, 야반의 급명, 어떤 사연이온지?"

  "저 빗발치는 화살은 어떻게 하고 들어왔소?"

  "상감마마."

  이완은 의대 앞자락을 약간 들쳐보였다.  겉은 예사 의대지만 그 속에는 든든히 갑옷을 

두른 것이었다.

  "그 갑옷은?"

  "예, 야반에 지급 예궐하랍시는 어명, 범상치 않은 일이옵기 총망중이오나 속에 무장을 하

고 왔나이다."

  "오오, 국가의 동량."

  임금은 몸소 이완을 붙들었다.  그리고 몸소 인도하여 내전으로 들어갔다.  그날 임금은 

이완과 단 둘이 밀의로써 밤을 새웠다.  이튿날 이완은 특지로 훈련대장의 임무를 띠게 되

었다.


   그새 오년간을 임금 마음 속에만 간직하고 오로지 그 준비 행동으로서 국력 충실에만 힘

쓰던 궁극의 목적 북벌(北伐)은 드디어 공포되었다.

  "최근 오년간을 두고 보아야 이 대임을 맡을 장신(將臣)은 대장 한 사람밖에 없었소.  그 

안식이 틀리지 않아 그날밤 예궐할 때에 총망중에도 몸단속을 잊지 않은 점은 가히 대임을 

넉넉히 맡을 만하니 나를 도와서 병자의 치욕을 씻어 주시오."

  임금이 손을 잡고 간곡히 이렇게 당부할 때에 이완은 눈물을 흘리며 이 성지(聖旨)에 보

답하기를 맹세하였다.

  임금과 이완은 의논한 끝에 전국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 육백명을 모아들였다.  그리고 그

들에게 무술을 연습시키어서 장차 북벌의 웅지를 펼때에 쓰려고 준비했다.

  임금은 또한 송시열의 협조를 얻어 정치에도 몰두하여 장차 북벌할 때라도 그 군량이 부

족하거나 국력이 고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각 방면으로 노심하였다.

  갑오년에 드디어 전제(錢制)를 시행했다.  이전까지는 베로써 서로 바꾸어 물물교환(物物

交換)을 하던 것을 장차 웅지를 갖고 있는 임금은 그런 불편한 제도를 그냥 두었다가는 큰

일을 할 때에 지장이 되겠으므로 당전(唐錢) 십오만문(萬文)을 사다가 먼저 평양, 안주 등에 

사용케 하여 보고, 그 결과가 양호하므로 훈련도감에 명하여 돈을 만들어 퍼치었다.  돈으로 

바꿀 물가표(物價表)까지 작성하여 이 낯선 쇳덩이가 퍼지기 편토록 하였다.

  군사들의 옷제도도 너무 거추장스럽다 하여 경편하고 편하도록 개량케 했다.  말하자면 

퐁속제도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세밀하게 관찰하여 개량한 것이다.  그 개량이라는 것은 장

차 북벌할 때 유리하도록 하자는 복선에서 나온 것이다.

  전국에 금은광(金銀鑛)을 장려하여 거기서 나는 금은을 모두 거두어 올려서 바둑돌 모양

으로 만들어 두었다.  이것도 장래 군용금으로 쓰려는 것이었다.  (소위 금바둑쇠라는 것으

로서 대원군 집정 초까지 그냥 곱다랗게 보관되어 있다가 경복궁 대궐 영조에 쓰였다.)

  이렇듯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임금의 마음에 있는 바는 북벌 뿐이요, 무슨 일이든 모두가 

북벌에 이용하자는 복선에서 나온 것이었다.  어느덧 창고에는 그득히 곡식과 재물이 꽉 차

게 되었다.

  이리하여 을미(乙未), 병신(丙申), 정유(丁酉), 무술(戊戌)을 지나서 기해년(己亥年)에는 국력

과 군력이 아울러 충실하여 인제는 거사(擧事)라는 단 한가지의 과정이 남아있게 되었다. 

  드디어 출사(出師)의 날까지 결정되었다.

  효종 십년 기해 오월 오일.

  이 최후의 결정까지 끝났다.

  그 해 봄에 임금은 이황(李滉), 이이(李珥), 김린(金麟), 송인수(宋麟壽), 이항복(李恒福), 김

장생(金長生) 등의 서원에 사액(賜額)을 하였다.  지금 바야흐로 북벌의 대군을 떠나 보냄에 

국내의 말썽 많은 유생들이 이렇다 저렇다 말썽을 부리다가 다시 당쟁이 일어나면 대사를 

그릇치겠으므로 그들을 회유하기 위해 선유(先儒)들 서원에 사액을 하여 그들의 환심을 하 

둔 것이다.

  삼월에서 사월로 들어서면서부터는 북벌 준비 때문에 온 나라가 뒤끓었다.  이렇게 사월 

달도 휙하니 지나가고 오월 초하루.


  "인제 나흘이 남았구나."

  손꼽아 기다리는 출사일(出師日)을 다시 꼽아 보면서 이완 대장은 엄중히 갑옷으로 몸을 

싼채로 잠간 잠을 자려고 안석에 기대었다.  안석에 기대는 참에 무슨 불길한 꿈을 걸핏 꾸

면서 이완은 눈을 번쩍 떴다.  동시에 귀를 울리는 것은 누군가 대문을 요란히 두드리는 소

리였다.

  대궐에서 급사(急使)가 달려온 것이었다.  급히 입궐하라는 분부였다.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가슴이 철썩 내려앉은 이완 대장은 까닭없이 떨리는 다리를 겨우 지탱하여 등대

하는 말에게 올라 곧장 대궐로 달려 들어갔다.

  들어가니까 기다리고 있던 승전빗이 곧 이완을 인도하여 내전으로 들어갔다.  내전 뜰아

래 국궁하고 서 있으려니 안으로 들라는 것이었다.  이완은 국궁하고 황급히 동온돌 문 밖

에서 승후하였다.

  "이완, 참내하였습니다."

  "들, 들어오오."

  가슴이 서늘했다.  옥옴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그 우렁차던 임금의 음성으로는 들

을 수가 없었다.  분부를 따라 동온돌 안에 들어서면서 힐끗 보매 용안이 검붉게 변하고 온 

몸을 와들와들 떨고 있는 것이었다.

  "상감마마"

  이완은 넓죽 엎드렸다.

  "대장, 내 몸이 편찮아!"

  아래 윗 이가 떡떡 머주치기 때문에 분명치 못한 옥음으로 임금은 이렇게 말했다.

  "상감마마"

  "좀 가까이"

  이완은 무릎 걸음으로 나아갔다.

  "대장, 오월 단오, 오월 단오"

  "예, 출사가 인제 겨우 나흘 남았습니다."

  "내가 죽는 일이 있을지라도 기어코 북벌은 진행하오."

  "마마! 그게 무슨 하교이시온지.  마마!"

  그러나 임금은 인제 기운이 없는지 그 자리에 모로 눕고 말았다.

  그날밤 이완은 내전 뜰에 서서 밝혔다.  천가지 만가지 생각이 이완의 머리를 오락가락 

했다.  출사하기로 결정된 날이 이제 겨우 나흘이 남았고 그 날이 이 용감한 북벌군을 임금

이 몸소 모악원까지 배웅하기로 내정이 되고, 그 준비조차 다 되었거늘 갑자기 옥체 미령하

니 이 일을 장차 어쩌나.

  "하늘이여.  우리 전하의 환후를 쾌차케 해주시오."

  이완은 밤새도록 하늘을 우러러보며 빌었다.  그러나 이튿날은 환후가 더욱 침중하였다.

  이리하여 이틀, 사흘, 나흘(출사키로 작정한 그전날)에 마흔하나라는 한창 장년으로서 평

생의 웅지를 펴보지 못하고 임금은 황천의 길을 밟았다.


  [ 受難의 王朝 ]   <禮論으로 지새는 나날>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受難의 王朝 

    禮論으로 지새는 나날



   현종(顯宗=西紀 1,660-1,674)은 효종의 독자(獨子)로 부왕이 심양에 볼모로 가 있을 때 탄

생하였고 부왕이 승하하여 등극할 때는 십구세의 어린 나이였다.

  먼저 현종은 조모가 되는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慈懿大妃) 조씨(趙氏)가 아들인 효종의 승

하로 입게 되는 복상 문제로 골치를 앓게 되었다.  즉 어머니되는 자의대비가 아들을 위하

여 일년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 삼년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서 서인(西人)과 남

인(南人)이 싸우게 된 까닭이다.

  서인 송시열과 송준길(宋俊吉)은 효종은 차자(次子)이니 일년이면 된다 하였고, 남인 허목

(許穆)과 윤휴(尹 )는 비록 차자라도 장자로 승격 하였으니 응당 삼년이라야 된다고 서로 

싸우며 양보하지 않았다.  임금도 자기 아버지의 종통(宗統)을 인정하느냐 않느냐 하는 중대 

문제이므로 이 복상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윤선도(尹善道)는 상

소를 올려

  < 지금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는 삼년이 옳다고 생각하오.  효종이 비록 차자라도 대통을 

이었으니 장자로 승격된 것이 확실한데 송시열 등은 딴 수작들을 부리니 이것은 일종의 승

통을 인정치 않겠다는 것으로,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소.  만일 송시열의 말과 같

다면 그럼 효종은 가세자(假世子)라는 말인지 섭정왕(攝政王)이란 말인지 한 번 묻고 싶소.  

효종을 정통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소현세자의 자손을 내세우려는 수작인 것이 분

명하오. >

하여 예론(禮論) 싸움에 크게 불을 질러 놓았다.  서인들이 소현세자의 아들을 내세운다는 

말을 들은 궁중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승지 김수항(金壽恒) 등은

  "윤선도의 상소문은 예론을 칭탁(稱託)하여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요."

하고 들고 일어났다.

  임금도 윤선도의 상소문이 너무 지나친 말이라 하여 그 상소문을 돌려 보내고 근신할 것

을 명했다.  그러나 서인들은 이만한 처벌로 만족하지 않고 윤선도를 죄 주라고 떠들어댔다.  

그러면 윤선도를 두둔하는 남인 측에서도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이 문제로 남인과 서인이 

서로 싸우게 되자 임금은 할 수 없이 윤선도의 상소문을 불지르게 하고 삼수(三水)로 귀양

을 보냈다.

  처음에 예론은 남인측의 주장이 유리하게 전개되더니 과격한 윤선도의 상소문이 도리어 

역효과를 낸 셈이 되고 말았다.  예론은 결국 서인들의 주장대로 기년(朞年=일년)을 채용하

였다.  이때로부터 송시열의 서인 일파들이 조정에 서게 되어 남인은 세력을 쓰지 못했다.

  다음에는 현종 갑인년(甲寅年) 이월에 임금의 어머니 인선대비(仁宣大妃) 장씨(張氏)가 세

상을 떠나게 되었다.  임금은 전에 아버지 효종 때 일도 있고 해서 이번에는 특히 일에 잘

못이 없도록 하라고 전교까지 내리었다.  그런데 예조판서 조형(趙珩) 등이 다시 자의대비에 

대한 복상 문제를 상주하였다.

  < 시왕제(時王制)에 의하면 어머니가 자부(子婦)를 위해 복을 입는 것은 기년(朞年)과 대공

(大功=九個月)의 두가지가 있습니다.  전에 효종대왕 때는 대비께서 기년의 복을 입었으니 

이번에는 거기에 준해서 대공의 복을 입는 것이 옳은 줄 압니다. >

  이래서 문제는 또 벌어지게 되었다.  즉 이번에는 효종의 부인이 승하하였으므로 시어머

니 자의대비가 며느리를 위해 일년의 복을 입느냐 구개월의 복을 입느냐 하는 것이다.  임

금이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고 자의대비의 복제를 의논하고 있을 때 대구(大邱)

의 유생 도신징(都愼徵)이 상소를 올려

  < 대왕대비의 복제에 대하여 대공으로 마련하는 것은 효종대왕 승하 때와 같이 인선대비

(仁宣大妃)를 장부(長婦)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요.  마땅히 기년으로 해야 하오. >

하고 일부 서인(西人)들이 대공(大功)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반대하고 나섰다.  임금도 잘

못하다가는 자기도 차자의 손(孫)이란 대우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어서

  "전에 부왕 때 기년제를 채택한 것은 효종을 차자로 취급한 것이 아닌가.  그러니 이번에

도 인선왕비를 작은 며느리라는 입장에서 대공으로 하자는 것이 아니요?  더 논할 것 없다.  

기년제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고 서인들의 주장을 물리쳤다.  이 때문에 대공(大功)을 주장하던 우의정 김수흥(金壽興)을 

비롯하여 조형, 김익경(金益炅), 홍주국(洪柱國) 등은 귀양을 가고 말았다.

  원래 현종은 어려서부터 몸이 유약(柔弱)하였다.  이 때문에 재위 십사년간을 두고 건강한 

날이 드물었고,  따라서 그 체질을 그대로 받아가지고 탄생한 세자(世子)까지 유약다질(柔弱

多疾)해서 장차 국사(國嗣)가 근심이 되었다.

  어쨌든 왕실이 고적한 것만은 가리울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인선대비의 인산(因山)이 끝나

고 효복(孝服)을 입은 채 현종은 다시 병석에 눕게 되었다.  현종은 아직도 삼십여의 장년이

나 날이 갈수록 환세가 침중해지자 후계자를 튼튼히 세워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때 세자의 나이는 십사세였다.  미목이 청수하고 기골이 준수할 뿐 아니라 성품이 화순

하고 재질이 총명했다.  어느 모로 보든지 믿음직한 인물이 될 만한 싹이 보였다. 

  그러나 오직 근심되는 것은 그 신체가 건강치 못한 것과, 또 그나이 아직 어려서 설사 지

금 일을 당하게 된다면 아무리 숙성하다 하더라도 그 나이로는 왕위에 오르기에는 너무도 

어린 나이였다.

  병환이 위독한 아버지는 역시 병중에 있는 동궁을 앞에 앉히고 당신의 사후의 일을 근심

하며 이렇게 일렀다.

  "내가 죽더라도 앞으로 아비와 같이 의지하고 믿을 만한 재상이 있다.  그는 시임 영의정 

허적(許積)과 우의정 김수항(金壽恒)이다.  일후에 가장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될 때에는 그 두 

재상에게 부탁하고 믿어서 지내어라."

  이렇게 이르고 조용히 두 재상을 불러서 다시 동궁에게 사부(師父)의 예로서 절하여 뵈읍

게 하고, 인해서 두 재상에게는 간곡한 말로 고명 유촉(顧命遺囑)을 거듭 부탁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지 한달 후 갑인년(甲寅年) 추석(秋夕), 현종은 임종을 재촉하였다.  만호장

안에서는 추석 차례도 차리지 못하고 초조히 기다리고 있을 때 궁중에서는 벌써 임금이 빈

천(賓天)했다는 소문이 들리었다.  재상의 집, 선비의 집은 물론이요, 서인(庶人)이나 천민(賤

民)의 집에서도 추석 차례를 지내지 못했다.

  그러나 저녁 때부터 기식이 소생된 임금은 병세가 차차 감해졌다.  하룻밤을 그대로 새우

고 그 이튿날 아침에 임금은 궁인들에게 할마마마를 뵙게 해 달라고 분부했다.  할마마마는 

예론(禮論)으로 늘 골치를 앓는 자의조대비(慈懿趙大妃) 그분이다.

  얼마 후 자의대비는 임금의 병상 앞까지 나타났다.  대비는 근심스러운 얼굴로 손왕(孫王)

의 이마를 짚었다.  이때 젊은 임금은 대비의 손목을 잡으면서

  "저는 회생할 가망이 없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앉은지 십오년에 아무것도 해놓은 일 한

가지 없이 선대왕의 유촉을 받잡고도 십오년을 벼르면서도 그 이가 갈리게 분한 국치(國恥)

도 씻지 못한 채 그대로 세상을 떠나게 되오니 너무나 원통하옵니다."

  대비는 이 젊은 임금에겐 어머니 못지않게 차마 잊을 수 없는 존재였다.  대비는 인조대

왕의 계비로서 이제 오십일세의 나이로 봄에 승하한 모후보다도 여섯 해나 젊었다.  그러나 

현종이 어릴 때부터 지극히 사랑해 주었다.  어머니보다도 더 따르고 지냈던 그 분이었다.  

일찍이 부왕되는 효종이 빈천할 때에도 효종은 아들 현종을 두번 세번 계모되는 이 대비에

게 부탁하고 그 후 현종이 이십의 약관으로 왕위에 오른 뒤에도 임금을 보호하여 내정을 보

좌하여 오늘에 으르렀던 것이다.

  이런 때문에 오늘에 이르러서는 이미 어머니 인선대비도 승하하고 이 분을 오직 할머니겸 

어머니로 믿고 의자하는 터이니 그 사모하는 정이 더욱 간절하였다. 

  "할마마마, 불효 손이 죽은 후에는 크고 작고 무슨 일이든지 오직 할마마마께 당부합니다.  

그러나 동궁이라는 것이 약질이어서..."

  대비는 이 말을 듣고 더욱 오열하였다.  옆에 모시고 있는 왕비 명성왕후(明聖王后)도 따

라서 울음을 삼키었다.  왕비는 임금보다 두 해가 아래인 삼십이세였다.

  임금은 동궁의 병세를 물어보고 곧 앞에 데려오라 했다.  얼마 후 동궁이 들어왔다.  동궁

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갑자기 숨결이 높아지면서 눈을 감고 정신을 잃게 되었다.

  한동안 창황망조하는 중에 저녁 해가 질 무렵에 창덕궁 궐문 밖에서는 기어이 천아성(天

鵝聲)이 일어났다.  곧 국휼(國恤)을 반포하고 치상(治喪)의 예제(禮制)를 진행하는 한편 다음 

군왕의 즉위식을 하였다. 

  안에서는 자의대비가 모든 일을 보좌하고 밖에서는 고명 유촉을 받들던 허정승과 김정승

이 만조 백관을 영솔해서 대정을 보좌했다.  이번에 등극한 임금이 효종의 독자(獨子)인 숙

종(肅宗)이다.


  [ 女難春秋 ]   <오긍골의 사흘밤>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女 難 春 秋 

    오긍골의 사흘밤



   숙종(肅宗=西紀 1,674-1,720)은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올랐으나 그 영특한 자질은 과히 유

충하지 않았다.

  그러나 항상 근심되는 일은 숙종의 나이 어리고 또다시 병석에 눕게 되자 평소에 보위를 

엿보던 그 무리들이 다시 준동하는 기미가 보이게 되는 일이었다.  더욱 세상의 물정이 이

리 뒤치락 저리 뒤치락 하는 통에 부왕인 현종이 빈천하는 시간까지 재삼 간곡하게 당부한 

말 [아버지 대신 의자하고 믿으라]하던 허적(許積)을 자기 스스로 죽이게까지 결정하지 않으

면 안 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허적은 무슨 까닭에 칠십 평생을 부귀로서 살아가다가 역모로 몰려서 몸에 사약 

사발을 안고 죽게 되고 전 가족이 멸망하는 참화를 당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는가.  허적

은 그 관직이 혁혁해서 입조 오십년인 현종 말년에는 지위가 영의정에까지 오르게 되고 따

라서 현종이 승하할 때는 고명유신으로 숙종을 추대하여 다시 숙종의 조정에서도 영의정으

로 있으면서 차차 서인들을 몰아내고 남인의 세력을 펴보려고 하였다.

  그러자 서인들은 이 눈치를 알고 허적을 어떻게 해서든지 치워버릴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허적에게는 아무러한 탈도 잡을 것이 없으므로 그 아들 허견의 하는 일이 암만해도 

수상해 보이니 이 자의 일을 뒤쫓아 살펴보아서 미심한 일만 있으면 당장 고변해서 처분을 

내리도록 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 때문에 이 일을 알게 된 허적은 그 아들에게 이런 세상 물정을 귀띔해 일러 주었다.  

그러고도 사람이 믿음성이 없기 때문에 늘 자기의 심복을 내세워서 허견의 행동을 뒤쫓아서 

내탐하게 하였다.  그러나 허적의 귀에는 허견에 대한 세상 풍설이 좋지 못하게 들리는 것

이었다.

  뉘집 양가 여자를 뚜장이를 놓아서 빼어내다가 간통하였다느니, 별별 말이 다 들리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놀랍게 들리는 말은 세상 사람들이 허견을 지목하여 복선군(福善君)이라는 

종친을 껴가지고 역모를 꾸민다는 혐의를 받는 일이었다.  허견을 불러서 주의시키면 펄쩍 

뛰면서 그런 일이 절대로 없다고 하지만 허적은 아들로 인해서 한시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이러던 중, 허견이 또 일을 저질렀다.  허견은 전부터 역관(譯官) 이동구(李東耉)에게 아름

다운 딸이 있는 것을 보고 마음에 항상 잊지 않고 있었는데 후에 그 딸은 역시 역관 다니는 

서효남(徐孝男)의 며느리가 되어 들어갔다.  이동구의 딸은 그 이름을 차옥(次玉)이라 하여 

그 아름다운 성중에도 소문이 높아서 당시 세상 사람들은 아름다운 얼굴을 비교할 때에 [이

차옥이 만큼이나 예쁘구나]하였다.

  허견은 항상 이차옥을 제 손안에 넣어보려고 벼르던 중 어느날 술취한 마음에 갑자기 이

차옥을 생각하다가 드디어 온당치 못한 일을 저지르게 되었다.

  이차옥의 고모부 이시정(李時靖)도 역시 역관 집인데 새로 며느리를 보게 되어 잔치를 베

풀자 이 잔치에 이차옥도 청함을 받아서 참례하게 되었다.  이차옥에게는 그 내종 오라비의 

장가드는 잔치에 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저녁때가 되고 손들이 차차 돌아갈 때쯤 이시정의 집에는 낯선 교정(轎丁) 한 사

람이 들어서면서

  "사동 아씨 여기 계시지요?  저 서역관댁 마님이 별안간 위중하시다 하여 모시러 왔습니

다."

  이런 말을 하니 이차옥은 그 교정이 낯선 사람이지만 의심치 않고 곧 따라나섰다.  교자

는 휭하니 달렸다.  뒤에는 몸종이 따라섰으나 중간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교정들은 교자를 

메고 사동 서역관 집으로 가지 않고 오긍골 어떤 조그마한 집으로 들어가더니

  "이 댁이 마님 친척되시는 댁인데 여기 오셨다가 병환이 나셔서 이댁 건넌방에 누워 계십

니다."

하면서 그 집 마루 앞에 내려놓고 교군을 멘 채 그대로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이차옥은 시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말에 마음이 황황하여 아무 정신없이 그 건넌방 

문을 열고 보니 그 안에는 시어머니가 누워 계실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젊은 사나이가 반가

이 맞았다.

  "오, 차옥이 오래간만이요."

하고는 일찍이 그 친정 부친 이동구의 집에 드나들면서 그대를 마음에 항상 사모했노라고 

중언부언하는데 행동이 괴상했다.

  이때에야 비로소 이차옥도 이번 일이 모두 이흉한 자의 간계로 꾸며진 일이라는 것을 알

게 되었다.  당장 문을 박차고 도망가려고 했으나 그때 형편으로 도저히 그 독수를 면할 수 

없어 드디어 그 사나이에게 욕을 당하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기회를 보아 나가려 했으나 철통같은 감시로 인해서 도저히 이 집을 벗어나

갈 수가 없었다.  악착을 떤다면 나갈 수도 있겠지만 이웃이 알게 되고 또 시집에게까지 알

게 된다면 더욱 창피한 일이었다.  차옥은 아주 벙어리같이 꾹 참으면서 사흘을 지냈다.

  연사흘을 계속해서 그 이름도 모르는 음흉한 사나이에게 갖은 욕을 다 당하고 사흘째 되

는날 밤 그 사나이는 차비를 구해서 차옥을 집으로 데려다 준다고 이 집에서 내보냈다.  차

옥은 이번에야말로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교자 안에서 자주 바깥을 살펴보았으나 밤이 깊어 

지척을 분별할 수 없는데다 교정들은 얼마나 왔는지 좀 쉬어가자고 교자를 내려놓았다.  그

러나 한참이 되어도 교자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궁금해서 밖을 내다보니 교정들은 한 놈 없

이 다 도망가 버리고 없었다.

  차옥은 얼른 밖으로 나와서 살펴보니 그 곳은 곧 사동 자기 친정집 대문 앞이었다.  일변 

놀랍고 일변 반가와서 뛰어 들어갔다.  친정 부모도 이게 웬일이냐고 깜짝 놀라서 그 곡절

을 물었다.  차옥은 감히 대답하지 못하다가 하인들이다 물러간 후에야 울면서 모친에게만 

그간 자기가 욕을 본 경과를 이야기했다.

  이 집에서는 놀랍고 분한 것을 견딜 수 없어서 그놈이 누구인 것을 알아보려고 백방으로 

생각하다가 드디어 하인을 시켜서 그 교자의 주인을 찾게 했다.  그 결과 그 교자는 야조개 

어느 세물전 셋보교인 것을 알았다.  그들은 그 보교를 세주었다는 세물전을 찾아가서 물어

보니 그것은 사직골 사는 허대감이 빌려 갔다는 것이었다.

  이동구는 벌써 그가 누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기는 했으나 아무리 이런 불법 행위를 

했다 하더라도 그네들은 지금 세도 재상이니 자기 같은 사람이 이런 문제를 섣불리 꺼냈다

가는 도리어 되잡히기가 십상팔구요, 또 이미 딸을 찾았고, 제 시집에서는 모르고 있는 터이

니 그저 꿀꺽 참는 수밖에 없다 생각하고 분기를 억지로 참았다.

  차옥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독수리가 병아리 차가듯 잡아다가 수일을 욕뵌 사람은 과연 

허견임에 틀림없었다.  허견의 생각으로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담아오고 알지 못하는 사이

에 담아냈으니 아무도 모르리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견이가 이차옥을 데려온 집은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첩 예정(禮貞)이

란 여자가 살고 있는 집이었다.  청풍부원군이라고 하면 현종(顯宗) 왕비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의 아버지가 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숙종으로 본다면 외조부가 되는 셈이다.

  그러면 허견이 어떻게 그런 집에 그것도 남의 첩의 집에 가 있게 되었는가?  원래 예정

이란 여자는 허견의 처 예형(禮亨)과 의형제간으로 허견의 집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는 서인과 남인이 서로 그 행적을 내탐해서 무슨 단서를 얻어내기 위해 저편에 자기

의 심복을 그편 모르게 들여보내는 것이 예사처럼 되어 있는 때다.  허견도 서인 김우명의 

집안 일을 내탐할 양으로, 처음에는 청풍부원군 집에 침모가 나가고 없는 틈을 타서 예정을 

시골서 떠들어온 사람의 행색으로 들여보냈다가, 차츰 김우명의 마음을 사로잡게 해서 첩으

로 들어앉게 했던 것이다.

  한번 첩으로 들어앉게 되자 김우명은 예정을 슬그머니 빼내다가 새로 집을 장만해 놓고 

살림을 시켜 주었다.  그러던 중 김우명은 세상을 떠났다.  늙은이의 첩실을 면하게 된 예정

은 다시 허견의 집을 드나들게 되었다.  허견의 처는 전에 병사(兵使)를 지낸 홍순민(洪淳民)

의 첩의 딸로서 그 성질이 괴벽하고 마음이 착하지 못한 편이었다.

  예정과 허견의 사이는 마치 형의 남편과 처제의 사이와 같은 정도로 친숙했지마는 김우명

이 죽은 후로 예정이 자주 허견의 집에 드나들고 나서부터는 허견의 아내는 혹시나 하는 생

각에 늘 허견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형은 예정의 집에다 심부름하는 계집아이를 첩

자로 들여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루는 이 첩자가 와서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

라며 분을 참지 못했다.

  어느날 평일과 다름없이 예정은 예형을 찾아왔다.  마침 허견은 시골에 가고 입에 없던 

때였다.  아무러한 눈치가 없이 종일 지내고 이내 예형의 집에서 자고 가려고 밤늦도록 이

야기하고 있는데 예정에게 돌연 청천벽력이 내렸으니 일은 이제부터 벌어지게 된 것이다.

  냉면으로 밤참이 들어와서 맛있게 먹고 난 후였다.  방은 더웠으나 예정은 냉면을 먹은 

후라 달달 떨었다.  예형은 하인을 시켜서 강차(薑茶)를 끓여 오라고 호령을 하면서 예정을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호호호호, 아마 인제는 옥동자를 낳으려나 보구먼.  이렇게 더운 방에서도 춥다고 떨고 

야단이니...?"

  이런 말을 했다.

  "아이구, 형님두, 별말을 다 하시는구료, 하늘에 올라가야 별을 따지 않수."

  "왜 그래, 내가 들으니 귀동자를 낳을 만하겠던데."

  "왜 무슨 소리를 들으셨수?"

  "우리 집 대감을 어째서 자네네 집 건너방에 사흘씩 묵혀 두었나?"

  갑자기 예형의 얼굴에 독기가 팽창했다.  예형은 계속 예정을 보고 코웃음을 치면서

  "입이 광주리만 해도 할 말은 없겠지?"

  "그렇지만 나는 아무 죄도 없어요."

  "요, 앙큼한 년! 그래도 변명이야?"

  예형은 옆에 놓인 퇴침으로 예정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이때에는 예정도 암상이 날대로 

났다.

  "그런데 왜 까닭없는 사람을 땅땅 때리는 거예요? 어디 더 때려봐요."

  몸을 예형에게로 들이대면서 이렇게 발악을 했다.

  "네깐 년은 죽여놓아도 좋다, 그 따위 버릇을 하다가는..."

  예형은 한층 더 호통을 치면서 그의 머리채를 끌어당겼다.

  "아니, 댁 대감이 어떤 년 하나를 잡아다가 놓고 이틀 사흘 그 따위 짓을 한 것을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러는 거예요.  내 말이 믿기 어렵거든 대감께 물어보라니까,  누구는 그

리 허름한 줄 아우?"

  "아따, 부원군의 첩실이니까 어깨가 으쓱한가 보다.  그 알뜰한 죽은 영감장이의 첩실, 누

가 알아 준다고 으쓱거려.  그나마 누가 그 자리에 가게 해주었는데...  그러고 저러고간에 

내 말은 다른게 아니야.  우리 집 대감이 어떻게 아무 일 없이 남의 집, 그야말로 부원군 첩

실의 댁을 찾아가서 그 건넌방을 치우고 버젓이 그런 짓을 했느냐 말이다.  네가 그전부터 

그 따위 짓을 하다하다 못해서 나중에는 다른 계집까지 천거를 하는 게 아니냐 말이다."

  예형은 노기충천해서 예정을 넘어뜨리니 예정은 장지에 부딪쳐 쓰러지면서 입에서 피를 

쏟았다.  이 두 개가 몽땅 빠져버린 것이다.


   이런 일이 있던 이듬해 봄이었다.  청풍부원군의 조카되는 김석주(金錫胄)는 돌아간 그 

숙부의 옛 정의를 생각해서 그 서숙모가 되는 예정을 가끔 찾아가서 위로해 주었다.

  그러던 중 김석주는 그 서모 예정과 허견의 처 예형과 사이에 큰 싸움이 일어나서 예정의 

이까지 빠지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하루는 김석주가 그 서숙모를 찾아와서

  "지금 형편으로는 좀 거북한 일이지만 다시 허견의 집에 드나들면서 그쪽 내막을 자세히 

살펴 주시오."

하고 부탁하였다.  예정은 김석주가 자기에 대해 마음 쓰는 일을 늘 고마워 해 오던 터라 

그만한 부탁을 안 들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예정은 다시 예형을 찾아갔다.

  "형님, 더러운 것은 사람의 정입니다.  그렇게 이가 부러지게 싸우구두 십년 가까이 든 정

을 잊을 수가 없어서 어떻게 그대로 견디겠습니까.  기왕 일은 누가 잘했건 누가 잘못했건 

그만두고 우리 형님이 그리워서 왔으니 그전대로 의지하고 삽시다."

  "아닌게 아니라 나도 그때 무슨 살이 들어서 그랬는지 그 후에 퍽 후회했네.  조금도 예

전일을 생각치 말고 앞으로는 여전히 잘 지내세.  이렇게 와서 먼저 풀어 주니 고맙네."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고 두 사람은 전과 같이 왕래를 했다.

  김석주는 예정을 통해서 허견의 일을 어느 정도까지 알게 되었다.

  < 허견은 매일 만나는 사람이 벼슬아치보다도 아직 벼슬하지 않은 이들, 대개는 모양이 

초라하고 자비하나 변변히 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며, 그 중에도 복선군이란 종실과 가장 

친하다는 것, 그리고 밤중에 남의 이목을 피해서 슬그머니 왔다가는 슬그머니 나가는 사람

들이 몇 사람 있다는 것. >

  이런 일들을 차차 알게 된 것이다.

  김석주는 곧 의관을 차리고 자비를 준비해서 상동에 사는 한성좌윤(漢城左尹) 남구만(南九

萬)을 찾아갔다.  김석주는 예정에게서 들은 허견의 이야기를 남구만에게 대강 들려주고 이 

기회에 허견을 내쫓고 서인들이 다시 일어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남구만은 결기 있는 사나이였다.  이런 단서가 알려지지 않아 애를 쓰며 기회 있는 대로 

남인을 쓰러뜨리려고 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곧 조정에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렸다.

  < 신이 항간에 떠도는 말을 듣건대 청풍부원군 김우명은 이미 작고했으나 그 부실 오씨

(吳氏=예정)가 아직 옛집을 지키고 있사온데, 오씨는 허견의 처 홍씨와 결의 형제를 맺은 사

이옵니다.  그런데 허견의 처 홍씨는 항상 제 집에 드나드는 오씨가 그 남편과 어떠한 정사

관계가 있다고 해서 마구 때리고 싸우다가 드디어 오씨의 앞니를 몇 개나 빼어놓았다 합니

다.  부원군의 첩은 비록 천인이지만 중전의 서모가 되는 분이요, 어찌 이것을 그대로 두겠

습니까? >

  한번 이 상소문이 나오자 세상은 뒤숭숭해졌다.

  이튿날 허적이 사연을 밝혀서 상소했다.

  < 신의 소자 허견의 처는 죽은 홍순민의 첩의 딸로서 그 성품이 괴악하여 이루 말하기 

어렵고 당초에 결혼 때도 속아서 결혼한 것이요.  그간 그의 결의형제라는 예정이란 여자와 

친하게 지낸다는 말은 들었어도 서로 싸웠다는 말은 처음 듣는 말이요.  아마 그의 성품이 

흉패해서 그런 좋지 못한 소문이 나는 모양이요. >

하고 아뢰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에는 우윤(右尹) 신정(申晸)이 다시 상소를 올려 이차옥의 

사건을 들어내 놓고 공박했다.  임금은 그 상소를 포도대장 구일(具鎰)에게 내주며 이 사실

을 조사해 올리라 분부했다.

  구일은 어명을 받들어서 당일로 허견과 차옥을 잡아가두고 문초를 해본 결과 차옥이 그 

일을 전연 부인하니 마침내 무근지설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남구만이 다시 상소를 올렸다.

  < 세상에서 다 아는바이지만 허견은 집에서 하는 일 없이 친구를 모아가지고 시국을 의

논하는 것과 남의 집 유부녀를 겁탈하는 것으로 농사를 삼는 터입니다.  이차옥의 사건으로 

말하면 허견의 아내 예형과 그의 결의 형제인 예정이 증거이온대 그들을 다 젖혀 놓고 허견

과 이차옥만을 불러서 물어봤으니 그 일의 진상이 드러날 리 있겠습니까.  그뿐 아니라 이

윤휴(尹 )가 싸고도는 때문에 결국 무소가 된바이오나 윤휴로 말하더라도 바른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공공연히 나라에서 금하는 소나무 수천주를 베어다가 자기 집을 지었다

합니다.  국법에 산 소나무 열주만 베어도 사죄(死罪)에 이른다고 했는데, 법을 맡은 자가 

이와같이 하니 어떻게 백성을 조종할 수 있겠습니까. >

  이 상소를 보고 젊은 임금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즉시 형조판서 이관징(李觀徵)을 불러

  "듣자니 요즘 권문 세가에서 처지를 믿고 부정한 짓을 하는 모양이니 이 사실들을 전부 

밝혀내라."

했다.  며칠 후 이관징이 임금께 아뢰었다.

  "전후 사실을 조사해 본 결과 허견의 집 일은 지각 없는 낭속들이 터무니 없이 떠들어서 

소문이 났던바이오며, 윤휴의 집은 살펴보니 그 집은 새로 지었으나 모두가 헌 재목으로 지

었습니다."

  이때에 임금은 남구만이 두번이나 올린 상소가 전혀 무근지설을 무소해서 남을 헐뜯으며 

임금을 속인 것이라 하여 그 자리에서 남구만의 관직을 삭탈하고 귀양을 보내고 말았다.

  바로 이 무렵 강화도의 계선돈대(繫船墩台)를 쌓는 역사가 있어서 팔도의 승군(僧軍)들을 

불러모아 일을 시키고 수사(水使) 이우(李偶)가 이 일을 감독하게 되었다.  하루는 이우가 병

조판서 김석주에게 무명인의 투서를 올려보내 왔다.

  김석주는 그 편지를 보고 그대로 쥐고 있을 수 없다 하여 조정에 내보였다.  그 투서의 

내용은 시국을 비방하고 현 조정을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 슬프다.  이때는 정히 나라가 위태하기 짝없는 시기로구나.  임금은 유충하신 중에 다

병유약하고 국정은 몇 사람의 재상의 손에서 마음대로 농권되니 백성은 모두 도탄에 빠져서 

민심은 점점 불안하여 장차 내란이 일어날 것이니, 남의 나라를 막기 위해 돈대를 쌓는 것

은 도리어 우스운 일이로구나.  제공은 이런 일을 치우고 승군(僧軍)을 수백명 모집해 가지

고 도성으로 들어가 삼개(麻浦)에서 기다리라,  그러면 의군(義軍)은 승군과 합세해 가지고 

소현세자의 손자 임창군(臨昌君)을 추대해서 거의(擧義)하려는 터이다. >

  이 글을 보던 모든 사람은 창황망조해서 그날로 어전회의를 열어가지고 선후책을 강구하

기에 급급했으니 사태는 목첩간에 긴박한 듯이 보였다.  우선 투서한 사람을 찾고자 이우를 

문초하였다.  이우의 말에 의하여 사십세 넘은 키가 크고 수염이 많은 자를 범인으로 단정

하고 수소문할 때 또 대궐 근처에 누가 익명서(匿名書)를 던지고 갔다.

  그러나 이 일이 있은 후 서인과 남인의 감정은 당장 폭발할 듯이 극도로 팽창되었다.  이

러한 중에 허적과 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던 허목(許穆)이 상소를 올렸으니,  그 상소는

  < 영의정 허적은 선왕의 고명(顧命) 유신으로 주상을 도와야 할 처지에 있음에도 불구하

고 당색(黨色)을 가려서 사람을 쓰고 그 교만과 사치가 날로 심한 중에 요즘에는 내시와 궁

녀들과도 연결하여 전하의 동정을 시시로 내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서자 허견은 아비

의 세력을 믿고 양가의 부녀자를 겁털간음하고 백성의 재물을 빼앗아들이나 조정에서는 그 

누구 한 사람 탄핵하는 사람이 없고, 혹시 여론을 일으키는 자가 있어도 번번이 바른 말하

는 사람만이 귀양 가고 죄를 입으니 이같이 하다가는 종묘사직이 위태해질 것입니다.  급히 

상당한 조처를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

  임금은 이 상소를 보고 곧 노염을 지으며

  "한동안 아무 일이 없더니  또 남구만 같은 자가 생겼구나.  이 무슨 주제넘고 쓸데없는 

짓이냐.  영의정 허적은 나라의 기둥인데, 그를 해치려는 자가 누구냐?"

  이런 말을 하고 도리어 허목을 귀양 보냈다.  숙종이 허적에 대하여 믿고 의지하는 마음

은 이만치 깊고 두터웠던 것이다.

  허적의 처지가 이와같이 반석처럼 튼튼해지자 허견의 방종함은 날로 심해서 뜻있는 자가 

차마 그 분노를 견딜 수 없었다.  이제는 공공연하게 남의 집 부녀를 겁탈하고 궐내를 출입

하고 무기를 대량으로 만든다는 소문이 들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그 누구 한 사

람도 감히 입을 열어 탄핵하는 자가 없었다.  이런 형편을 돌아보던 김석주는 드디어 직접 

탑전에 나아가 아뢰었다.

  "허적은 늙은 간흉이요,  허견은 젊은 역적이오니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시오면 훗날 반

드시 후회할 날이 올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의 여론을 살피시고 의심의 귀추를 따라서 곧 

그들의 생활 이면을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임금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허적 부자를 의심하면서 곧 별군직(別軍職) 이입신(李入身)과 

어영장(御營將) 박빈(朴斌)을 비밀히 불러서

  "복선군과 허적 부자의 사생활을 밤낮으로 살펴서 알아 올리라."

  분부를 내렸다. 

  이들은 각각 그 맡은바 집 부근으로 다니면서 동정을 살피는데,  그동안 이입신은 당당한 

벼슬아치면서도 남루한 의복에 교군처럼 차리고 여러 차례 복선군 집에 출입했는지라 궁비

(宮婢)들과도 차츰 낯이 익게 되었다.

  어느날 새벽 찬서리를 맞고 덜덜 떨면서 복선군 궁 행랑채 아궁이 앞에서 불때는 궁비 앞

으로 가서 손을 째며 이죽이죽 말을 붙이는데, 의외에도 여기서 이상스런 일을 듣게 되었다.

  "아니 손끝은 왜 그렇게 다쳤소.  퍽 아프시겠구료."

  "바느질이 세차서 바늘 끝에 찔린 게 덧나서 그래요."

  "바느질은 침모가 할 게 아닌가?"

  "한 두 벌이라야지요."

  "아니 무슨 혼수(婚需) 바느질이요?"

  "아니요."

  "그럼?"

  "글쎄, 무엇에 쓸 것인지 군복을 한가위에 백벌을 말랐어요.  그래가지고는 꼭 밤에만 짓

는 거예요.  그래서 거진 마쳤는데 또 몇 백 벌을 지을지 모른다고 하니 그 바느질을 어떻

게 해낼지 모르겠어요."

  "아니, 그것은 무엇에 쓴답디까?"

  "낸들 아우."

  "그래 그것은 모두 궁대감께서 하시는 일이지?"

  "그렇지도 않은가 봅디다.  저 어느 정승의 아드님이라나 그분께서 옷감을 가져온다는데 

그분은 꼭 밤에만 왔다가 돌아가시지요."

  이입신은 크나 큰 수확을 얻은 것을 기뻐하며 이 내탐 거행을 도맡은 김석주에게로 가서 

이 사실을 낱낱이 고했다.

  이날 영의정 허적의 집에서는 조부 허잠(許潛)의 충정공 시호(諡號)를 받는 날이었다.  이

제 그의 손자 허적이 나라의 중신이 되었으므로 그공으로 조부까지 시호를 받게 된 것이다.  

허적의 집에서는 이날 아침부터 사당에 차례를 지내고 원근 친척과 고구들을 청해서 굉장한 

잔치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날은 아침 후에 별안간 비가 내리므로 잔치집에서는 큰 고통을 겪게 되었다.  

준비해 놓은 음식이며 이미 초청한 손님이며 아무리 해도 하루도 연기할 수가 없었다.  그

런 때문에 그대로 진행하려고 우선 비를 막을 수 있는 준비로서 궁중의 차일을 빌려내다가 

처놓고 빈객들을 대접하는 일에 분망했다.  이런 일을 모르는 임금은 이 비오는 날에 잔치

를 치를 허영상집 일을 생각하고 근신(近臣)에게

  "오늘 허영상댁 잔치라는데 비가 와서 안되었다.  궁중 차일을 내어 보내주라."

  이런 말을 하였다.  이때 옆에 있던 내시가 아무 생각없이

  "궁중 차일은 벌써 영상댁에서 내어 갔습니다."

하고 대답해 아뢰었다.  젊은 임금은 불시에 자기의 승낙없이 가져간 것이 몹시 불쾌했다.

  "나라의 물건을 마음대로 가져가다니 될 말이냐.  괘심한 일이로구나."

  다음 순간 허적에게 대한 의심이 부쩍 일어났다.  이러는데 김석주가 급히 입궐하여 이입

신이 내탐한 정보를 아뢰었다.  임금은 곧 무감을 허적의 집에 보내어 그 빈객들을 조사케 

했다.  이날 잔치에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사람은 종친으로는 복선군 형제요, 서인편으로는 

오두인(吳斗寅), 이단상(李端相), 김만기(金萬基) 등 몇 사람뿐, 그 외에는 전부가 남인의 재상

들 뿐이었다.  그 중에도 훈련대장 유혁연(柳赫然)이 주인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다른 손들의 이목을 집중케 했다.

  무감은 이 형편을 정찰하고 대궐로 들어가 위에 아뢰었다.  즉시 내시가 허적의 집으로 

나와서 왕명을 전하고 유혁연과 김만기를 곧 입시하라고 말했다.  위에서 병조를 통하지 않

고 직접 훈련대장을 부르는 일은 나라에 변고가 있기 전에는 없는 일이다.  훈련대장이 입

시하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도 그대로 안연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부제학 유명천(柳命

天)이 벌떡 일어서면서 주인 허적을 보고

  "대감, 대궐의 수비하는 책임자를 불러들이니 수상하옵니다.  삼공(三公)이 들어가 일을 무

마시킵시오."

하고 권했다.  허적은 잠시 무엇을 생각하고 앉았다가

  "작년 가을부터 상감이 우리들을 경계하시는 눈치더니 그동안 또 무슨 말이 들어간 모양

일세."

하고는 유명천의 권고로 우의정 민희(閔熙)와 같이 예궐하였다.

  내전 궐문에 이르러 승지에게 알현할 것을 전하니 승지가 들어갔다가 나와서 

  "시방 대할 까닭이 없으니 그대로 물러가라고 하시오."

하였다.  영의정은 우의정의 얼굴을 돌아보고 우의정은 영의정의 얼굴을 돌아보며 모두 흙

빛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허적은 허견을 불러앉히고 최근에 어떠한 일을 했던가를 물어보았으나 허

견의 입은 딱 붙은 채 대답이 없었다.

  허적은 하룻밤을 그대로 밝히고 날이 밝자 곧 민희를 청해서 만났다.

  "대감, 이게 어떻게 된 셈이요?"

  민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낸들 알 수 있소.  시운이 지나서 남인이 몰살을 당하는 판인가 보오."

  "그러나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죄를 당할 일은 없었소이다."

  "죄 없으면 관계치 않겠지."

  "그런데 또 기막히는 일이 있소이다."

  "무슨 일이요?"

  "훈련대장 유혁연 집에 밤 사이에 두 세 차례 사람을 보냈는데 아침까지 퇴궐치 않았다해

서 친한 무감을 통해 알아보니 어제 저녁으로 의금부로 넘어갔다 하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

요."

  허적은 유혁연이 잡혀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게 웬일이요?"

  "하, 글쎄 낸들 알 수 있소이까?  꼭 미칠 것만 같소이다."

  이런 걱정을 하는 가운데 또 하루가 지났다.  그러나 아직도 궐내로부터는 하등 처분이 

내리지 않았다.

  한편 김석주는 그동안 자기의 심복 정원로(鄭元老)를 시켜서 또 상소를 올리게 했다.

  < 허견은 유혁연과 그밖에 여러 동지를 규합해 가지고 역모를 하여 장차 복선군을 추대

하려 하던 일이 최근에 알려졌는데, 불일내로 거사할 모양이니 속히 처분하시옵소서. >

  임금은 더 참고 기다리지 않았다.  허적이 가평(加平) 고을로 내려가 숨어버리려고 황황히 

가사를 정돈하고 있는데 돌연 의금부 나졸들이 집을 에워싸고 들어왔다.  허적이 의금부로 

붙들려 간 뒤에 허견도 도망갔다가 붙들리고,  복선군도 붙들리고 따라서 그 동지로 혐의 

받던 자들도 모두 붙들리니 그 수효가 수백명에 이르렀다.  그 후 임금은 일곱 군데에 국문

처를 베풀고 그들을 엄중 국문한 결과 이번 역옥 사건에 주범이 되는 허적 부자, 유혁연, 복

선군, 윤휴, 민희, 오시수, 이태서(李台瑞) 등은 모두 처참하고 그밖의 사람들은 모두 귀양 

보냈다.  이것이 숙종 육년 경신년의 일이므로 이 일을 경신대옥(庚申大獄)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는 반면에는 김석주와 정원로는 역모를 고변했다는 그 공로로써 보사훈(保社勳)

을 받게 되었으며, 허적의 내각이 쓰러지는데 따라서 김수항(金壽恒)으로 영의정을 삼으니 

좌우영상과 육조판서가 모두 서인이 임명되어 어제까지 기세충천하던 남인들은 멸망하고 서

인의 세력이 조정을 뒤덮게 되었다.


  [ 女難春秋 ]   <凝香閣의 嬌聲>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女 難 春 秋 

    凝香閣의 嬌聲



   숙종이 열네살 때 아직 동궁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갑인년의 봄이 돌아오고 그때 왕대

비로 계시던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의 환후가 위중하게 되었다.  평일과 마찬가지로 밤 문

안을 드리려고 할머니(繼會祖母, 莊烈大妃)의 처소로 와서 보니 때마침 할머니는 왕대비(仁

宣王后)의 병실로 가서 없고 나인들만이 몇 사람 있었다.

  어린 동궁은 혼자 할머니 방으로 들어가서 앉아 있는데 다른 궁인들은 어디로 갔는지 다 

없어지고 오직 각시 나인 하나만이 앞에서 거행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각시 나인이 
어린 동궁의 마음에 매우 아름다워 보였다.  동궁은 어깨를 으쓱으쓱 하면서 애를 쓰다가 

각시 나인을 보고

  "얘, 내 등 좀 긁어다오."

  이런 명령을 내렸다.  각시 나인은 좀 머뭇머뭇하다가 세자 등뒤로 가서 도포를 들치고 

손을 옷 밑으로 넣어 조심스럽게 긁어 드리고 물러나려 하는데 동궁은 각시 나인의 손목을 

꽉 쥐고

  "어디 그 손톱 좀 보자, 어째서 긁는 것이 그렇게 시원치 않으냐?"

  이런 말을 하고 손을 들여다보았다.

  각시는 그만 수줍어서 머리를 돌렸다.

  "뭐가 그렇게 부끄러우냐?"

  "..."

  "너 성이 뭐냐?"

  "사친의 성은 장가라 하옵니다."

  "몇 살이지?"

  "열여섯이옵니다."

  "얘, 내 얼굴이 붉어졌나 좀 보아라.  아까 어떤 나인이 장난으로 술을 권해서 한 모금 마

시었다.  혹시 얼굴이 붉어져서 꾸지람을 들을까 염려된다."

  세자가 이런 말을 하자 아직까지 수줍어하고 있던 각시 나인이 이 말을 듣더니 아무 생각 

없이 얼굴을 들어서 생긋 웃으며 세자의 얼굴을 마주 건너다보았다.  마주 건너다보다가 깜

짝 무슨 생각이 났던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약간 돌리면서 억지로 대답해 아뢰었다.

  "소녀가 뵈옵기에는 아무 기색이 없사옵니다."

  실상은 술을 마셔서가 아니요, 각시 나인의 얼굴을 좀 바로 보자는 지혜에서 나온 말이었

다.  세자는 비로소 분명히 그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과연 아름답고 어여뻤다.

  바로 이때 뜰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대왕대비 환어하는 기척이었다.  각시 나인은 황

황히 문을 열고 나가서 행차를 맞았다.  세자도 밖으로 나와서 할마마마를 모셔들였다.

  그 후부터는 매양 이 궁에 왔다가 각시 나인 장씨를 보면 남의 눈에 띄울세라 몰래 웃음

을 보내고 그럴 때마다 장씨는 수줍어서 머리를 돌렸다.  이와같이 하는 사이에 은연중 사

랑은 자라났다.

  봄부터 가을까지 지내는 동안에 왕대비와 임금의 국상을 치르고 세자가 왕위에 오르게 되

었다.  이때 남몰래 기뻐한 사람은 장씨 궁인이었다.  장씨 궁인은 벌써 자기가 세자의 애정

을 사로잡았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 세자가 왕위에 오르자 다음 날의 영화를 꿈꾸었다.

  어느덧 세월은 이년이 흘렀다.  그 해 겨울 어느 눈내리는 밤, 젊은 임금은 미행으로 장씨 

궁인 처소를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장씨 궁인은 버선발로 뛰어나와

  "황공무지하여이다."

하고 그 앞에 엎드렸다.

  장씨 궁인은 어느 정도까지는 이런 일이 있을 줄 미리 짐작하였고 또 며칠 전 꿈에는 황

룡이 자기 몸을 칭칭 감았던 일도 있었으므로 이상히 생각하고 벌써 여러 날 전부터 밤단장

을 하며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그녀는 곧 방장을 두르고 촛불을 대홍촉으로 갈아끼고 한옆에 공손히 서서 분부만 기다렸

다.  이때 장씨의 나이는 열여덟이니 이년전 그때보다 얼굴은 더 곱게 피어났고 태도도 그 

전보다 점잖아졌다.  얼마 후 젊은 임금은 깔아놓은 비단 이불 한쪽을 젖히고 장씨의 손목

을 잡아 끌어들였다.

  장씨 궁인에게 이런 엉뚱한 꿈이 지나간 후에도 임금은 자주 이런 엉뚱한 꿈을 그녀에게 

실어다 주었다.  한번 두번 횟수가 거듭됨에 따라 두 사람의 애정은 차츰 깊어갔다.

  이듬해 봄 임금은 호조판서 김만기(金萬基)의 따님으로 왕비를 삼았다.  왕비는 임금과 동

갑인 열일곱이지만 그 조성한 지각과 활달한 언동은 벌써 성인을 능가할 만했다.  왕비는 

곤순전(坤順殿)의 새 주인이 된지 얼마 안 가서 임금의 은총이 어디에 기울어져 있는가를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래서 하루는 대왕대비에게 사후를 갔을 때에 조용히 대비에게 이렇

게 아뢰었다.

  "소녀가 무엇을 아오리까마는 들으니 주상(主上)은 어느 곳에 총애하는 바 궁인이 있다 하

옵는데, 그런 궁인을 그대로 두오면 왕실에 누(累)가 될 것 같사오니 명분(名分)을 달리 하시

고 처소를 따로 정해 주시옴이 옳은 줄로 아뢰옵니다."

  대왕대비는 이 말을 들으니 너무도 기특하고 고마왔다.  진작부터 장씨 궁인을 명분을 달

리해주려 해도 새로 들어온 왕비의 마음이 어떠할까 염려되어 마음은 있으나 발설치 못하고 

있던 차였다.

  "중전의 말이 너무도 기특하오.  그러나 궁인으로서 따로이 무슨 공이 없으면 후궁을 책

봉하지는 못하는 법인즉 아직 명분은 정해 줄수 없고 처소나 따로 정해주랴 하는 바이오."

  대비는 이런 말을 하였다.

  이후부터 장씨는 응향각(凝香閣)에 옮겨서 거처하게 되었다.  앞으로 장씨 궁인이 왕자라

도 탄생하는 날이면 직첩이 내릴 것이다.  그런데 차츰 궁중 여기저기서 쑤군거리는 말들은 

심장히 들어버릴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왕비 처소와 응향각을 드나드는 나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장씨 궁인은 임금을 대할 때마다 

왕비를 비방한다는 것이었다.  왕비는 처음에는 그 말이 모두 중간에서 말을 좋아하는 철없

는 궁인들의 지껄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사람 저 사람들이 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듣더라도 노상 심상하게만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떤 궁인은

  "황공한 말씀이오나 나인 차림으로 한번 미행을 납시어 친히 그 거동을 보옵소서."

  이렇게 말하는 자도 있었다.

  왕비도 마침내 몸소 그 거동을 살피기로 했다.  어느날 달밝은 밤 왕비는 나인의 복장을 

하고 두어 궁인만 데리고 응향각으로 갔다.  조용 조용히 창 밑으로 가서 귀를 대어보았다.  

무슨 말이 얼마나 지나갔는지 임금과 장씨 궁인 사이에는 한창 봄바람을 일으키고 꽃을 피

우는 때였다.

  젊은 임금의 걸걸한 웃음소리와 간드러진 장씨의 웃음소리가 교차되는 이 광경은 귀보다

도 눈이 더 궁금해했다.  얼마 후 장씨의 암상이 난 독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글쎄 중전인지 뚱전인지가 이러더래요, <그까짓 게 무슨 상감이야, 그래 관례도 하기전

에 상복을 입은 채 요사스런 계집년에게 홀려서 왕비가 무언지 임금노릇이 무언지 아무것도 

모르고 그년의 치맛자락에 휩싸여 헤어나질 못하는 것이...  그년부터 능지처참해서 없애버

려야 나라가 될걸.> 이러더라니 이게 차마 입으로 할 소리입니까.  그 말을 들은 뒤로는 소

녀는 정말 치가 떨리고 분해서 못 견디겠어요."

  "중전이 그랬을 리가 있나."

  "중전이 무슨 중전이예요?"

  "왕비니까 중전이지 무에야."

  "왕비는 누가 왕비에요.  상감을 먼저 모셨어요.  먼저 모신 사람이 정궁비(定宮妃)가 아니

에요. 호호호호."

  얼마전 까지만 해도 뽀루퉁하던 장씨에게 어디서 그런 간특한 웃음소리가 나오는지, 그 

웃음소리에 젊은 임금도 따라서 걸걸하게 마주 웃어버렸다.  이런 정경을 듣게 된 왕비는 

너무도 해괴하고 치가 떨려서 차마 더 들을 수가 없어서 그 자리를 물러났다.

  자기 처소로 돌아 온 왕비는 곧 봉서나인(封書內人)을 불러들여서 대필을 잡게하여 장씨 

궁인의 죄상을 일일이 들어 기록하게 하고

  < 아무날 밤에 응향각에서 어떠어떠한 일까지 있는 것을 본 자가 있으니 대개 이런 계집

을 일향 관대하신 처분으로 그대로 궁중에 묻어 두시면 훗일 어떠한 회한(悔恨)이 계시올지 

모르는 일이며 소비(小妃)의 처지로 보아서 이런 말씀을 아뢰오면 혹 질투로 그런다고 하실

지 모르오나 널리 통촉하시옵고 사실을 살피시온 후에 곧 장씨 궁인을 방축하시옵기 바라옵

니다. >

하는 것을 다음날 날이 밝은 후에 대왕대비에게 올렸다.  이 글을 본 대왕대비는 크게 놀랐

다.  대비는 그 봉서를 자리 밑에 넣어둔 채 따로 지밀상궁을 시켜서 수일 동안 응향각의 

동정을 살피게 하니, 참으로 왕비의 말대로 해괴망측한 고로 드디어 장씨 궁인을 불러서 꾸

짖고 그 날로 사친의 집으로 방축하는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일은 이것으로 일단락이 지어진 것은 아니었다.  장씨 궁인은 원래 덕기가 없는 

위인 이어서 자기의 잘못은 추호도 깨닫지 못하고 오직 왕비의 책동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 

하여 속으로 깊이 왕비를 원망하고 사친의 집으로 돌아가니 사태는 점점 험악해졌다.


   장씨 궁인이 궁중으로부터 추방 처분을 받게 되어 사친의 집으로 나온 때는 숙종 오년 

늦은 가을의 일이었다.

  이때에 임금의 나이는 십구세요, 장씨는 이십세였다.  장씨는 집에 나와서 머리를 동이고 

드러누워 한숨으로 날을 보내고 그 모친 윤씨는 쫓겨나온 딸을 보고 몸부림 쳐가며 통곡했

으나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던 것이다.

  하루는 이 눈물과 탄식으로 지내는 장씨 모녀의 집 문을 두드리는 허름한 사나이가 있었

다.

  "아니, 대감이 웬일이십니까?"

  장씨의 어머니 윤씨가 문을 열고는 기겁을 해 놀란다.  사나이는 손을 내저으면서 조용히

  "떠들지 말게.  남의 이목을 가려서 오느라고 혼이 났네.  그런데 대관절 각시를 좀 보아

야겠는데."

  "원 이런 미안할 데가 있습니까?  어서 들어오십시오."

  윤씨는 손님을 맞아 들이고 장씨 궁인을 불렀다.

  손님이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전에 윤씨가 침모로 가 있던 숭선궁저(崇善宮邸)의 아들 동

평군(東平君)이었다.  승선군은 인조대왕(仁祖大王)의 왕자의 한 분이다.

  얼마 후 장씨 궁인이 모친을 따라서 동평군 앞에 나타났다.

  "대감, 오래간만입니다."

  허리를 반쯤 꾸부려서 인사를 드렸다.

  "듣자니, 너무도 아깝고 가엽고 그런 변고가 어디 있더란 말인가?"

  "모두가 제 팔자이고 운수이지요.  하는 수 있습니까."

  "지금 밖에서 서두르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얼마간 기다리게, 다시 부르실 날이 계실거요."

  "진정이십니까?"

  장씨는 반신반의 하면서도 정신이 드는 듯 물었다. 

  "내가 왜 헛말을 지껄일 리가 있나."

  동평군은 장씨 귀에 입을 갖다 대고 조용히 무슨 말을 일러 주었다.

  그 대체를 말하자면 지금 왕비가 아무리 장씨를 괄시하고 내쫓았다 하더라도 임금이 장씨

를 총애하던 그 정은 오히려 잊지 못할 것이다.  대왕대비께서 비록 일시적 처분으로 그와 

같이 명령은 내렸으나 지금 조사석(趙師錫) 같은 분이 대왕대비한테 들어가서 마음을 돌리

게 하려고 서두르는 중이니 재소입(再召入)의 날이 멀지 않았다 라는 것이었다.

  조사석이라 하면 대왕대비의 사친이 되는 조창원(趙昌遠)의 사촌 아우로서 대비가 가장 

가까이 두고 신임하는 사람이다.

  장씨는 이 말을 듣고

  "이렇게 이 몸을 비호해 주시니 그 은혜를 갚을 바를 아직 못하겠습니다."

하고 사례를 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 경신대옥(庚申大獄)으로 인해서 허적(許積) 등 남인일파가 쫓겨나는 바

람에 남인측의 한 사람인 동평군과 조사석도 두문불출 근시하는 몸이 된고로 장씨 궁인의 

재소입운동(再召入運動)은 한때 주춤하게 되었다.

  이러던 중 궁중에는 또다시 큰 소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왕비가 하룻밤 사이에 병을 얻

어 갑자기 세상을 떠났던 까닭이다.  모든 국민이 슬퍼하고 아까와하는 가운데 오직 한 사

람만이 기뻐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장씨 궁인이었다.  장씨 궁인이 임금을 사모하는 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간절해졌다.

  아쉬운 마음에, 공방을 지키다가 쓸쓸함을 못 이기어 혹시나 임금께서 자기를 불러들이지 

않을까 기다려지는 것이 근일의 장씨 궁인의 심경이었다.  그러나 사태는 추측하는 것과는 

전연 달랐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돌아와도, 다시 여름이 돌아와도 다시 가을이 돌아와도 왕비의 일년 

기복을 마치게 되는 때까지도 이렇다 할 소식이 궁중으로부터 들려오지 않는 것이었다.  장

씨 궁인은 매일 문 밖만 기웃거리고 새벽녘이면 궁중에서 승은(承恩)하는 꿈을 꾸었다. 

  이럴 즈음에 장씨 궁인의 가슴을 서늘케 하는 소식이 들리었으니 그것은 숙종이 다시 계

비(繼妃)를 간택한다는 것이었다.  장씨 궁인은 이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 실망낙

담했으나 역시 하는 수 없었다.  오직 그 누가 왕비가 되는 가가 궁금했다.

  새 왕비가 되는 이 거룩한 행운은 수백명 간택 처녀들 중에서 서인파(西人波)의 거두 민

유중(閔維重)의 둘째 딸이요, 송준길(宋俊吉)의 외손녀에게로 떨어졌다.  한동안 쓸쓸하던 곤

순전(坤順殿)에는 또다시 봄바람이 깃들기 시작했다.  새왕비와 임금의 금실은 나날이 깊어

서 임금은 장씨 궁인을 완전히 잊은 듯이 보였고 또 이런대로 한해 두해 지나가니 국가의 

기초가 바야흐로 자리를 잡은 듯 튼튼해 보였다.


  [ 女難春秋 ]   <다시 피는 꽃>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女 難 春 秋 

    다시 피는 꽃



   새왕비 민씨(閔氏)가 입궐한지 어느덧 육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이동안에 궁중 형편을 

살펴보면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듯하나 내부를 세세히 캐어보면 참으로 복잡다단했으니 근

심되는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그중에 더욱 큰 근심은 새왕비가 입궐한지 육년에 아직도 아기를 낳지 못하는 일이었다.  

임금은 어쩌다가 혹시 곤순전에 들리면 조용히 왕비에게

  "왕대비를 가서 뵈오나 대왕대비를 가서 뵈오나 모두 왕자 탄생이 늦어지는 것을 보고 큰 

걱정들을 합니다. 그러니 전날에 풍정으로 사귀었던 장씨 궁인이 다시 마음에 생각나는 구

료..."

  이런 말을 했다.  왕비는 미안하고 죄송한 가운데서도 그 장씨 궁인이라는 말을 듣고는 

더욱 마음이 불안했다.

  "너무나 미안 죄송합니다.  그렇게 장씨 궁인이라시니 대체 그가 누구이옵니까?"

  "중전을 알 게 없소."

  "호호... 그래도 좀 말씀해 주셔요."

  "왜 또 까닭없이 질투나 하려고?"

  "원 도섭스러워라.  소비가 설마 그렇게야 할라구요.  그런 염려는 마시고 말씀이나 들려 

주셔요."

  "내가 옛날에 아직 어려서 친했던 어여쁜 궁녀가 있었다오.  그런데 그전 왕비가 마음에 

꺼려해서 그 여인이 궐문 밖으로 추방이 됐다오.  그것도 벌써 여덟해나 되니 독수공방에 

한탄으로 오죽이나 나를 원망하겠소."

  이 말을 듣고 왕비는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지면서 젊은 임금을 쏘아보며 그 말의 뜻이 어

디 있는가를 살펴보다가

  "그럼 그 궁인을 만나보고 싶으십니까?"

  이렇게 물었다.

  "보고 싶은들 옛날에 추방된 궁인을 다시 부를 체면이 어디 있겠소?"

  "왜요?"

  "궁중 일이란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말이요."

  "상감마마"

  왕비는 사색을 고치면서 임금을 바라보며 말했다.

  "상감께서 어떠한 처분을 내리시더라도 설마 내보냈던 궁인 하나를 다시 불러들이지 못한

단 말씀입니까.  소비에게는 아무런 꺼림을 두지 마시고 하루 바삐 그 가엾은 궁인을 불러 

들이게 하옵소서.  그리하셔야 성덕(聖德)에 누(累)가 되시지 않으실 것 같사옵니다."

  "그러나 나로서 이런 말을 여러 어른께 시뢰고 또 여러 신하에게 할 수 없지 않소?"

  "그러면 소비가 대왕대비전께 사뢰어 보면 어떨까요?"

  이 말을 듣던 임금은 얼굴에 희색이 돌면서

  "그런다면 여북이나 고맙겠소.  그러나 미안해서..."

  "호호, 별 말씀을, 소비에게는 미안한 생각을 가지실 필요없습니다."

  이런 대화가 있은 후, 어느날의 일이었다.  왕비는 대왕비전에 사후(司後)하여 다음과 같

이 장씨 궁인의 말을 아뢰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소비는 나이 이십이 되었으나 몸에 병이 있사와 아기를 낳지 못하

는 것 같사오니 국가의 종사가 끊기기 전에 미리 여기에 대한 계책을 베푸셔야 할 줄로 아

롸옵니다."

  대왕대비는 놀라운 표정으로 왕비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러기에 말이요, 만일 아무 일이 없다면 중전이 입궐한지가 벌써 육년, 아직도 아무러한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근심스러운 일이요."

  "듣자온즉 예전에 상감의 후대를 받게 되었던 장씨 궁인이 있다 하옵는데 그 궁인이 무엇

이 잘못되어 추방 처분을 받아 사가(私家)로 나갔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비록 그렇다 하더

라도 벌써 팔년이라 하오니, 그동안이면 그 궁인도 회과천선(悔過遷善)이 되었을 것 같습니

다.  그러하오니 대왕대비께옵서 너그러우신 처분으로 다시 불러들이시오면 곧 사속지망(嗣

續之望)이 있을 것도 같사오니 바라옵건대 널리 통촉하시와 부르시옵도록 하옵소서."

  "중전의 심덕은 매우 갸륵하오.  사람이란 마음이 다른데 있겠소.  누구보다도 장씨 궁인

이 들어오는 일을 꺼려야 할 중전으로서 도리어 이와같이 솔선해서 말을 하니 고마운 일이

요.  그러면 내 한번 고집을 세워서 불러들여 보겠소.  그러나 중전의 마음이 끝끝내 고마울

는지..."

  "황공하온 말씀이오나 소비는 조금도 염려하지 마시옵고 부디 소비의 소원이오니 장씨 궁

인을 불러들여 주시옵소서."

  왕비는 이런 말을 아뢰고 물러 나왔다.


   때는 숙종 십이년 병인(丙寅) 사월 어느날...  젊은 임금은 백화가 난만한 후원 뜰에서 잔

치를 베풀고 대왕대비와 왕대비를 모시고 즐거운 하루의 봄날을 보내고 있었다.  임금은 손

수 술잔을 들어 대왕대비에게 올리었다.  그러나 대왕대비는 마음이 몹시 불쾌한 듯

  "이런 놀음에도 모든 일에 근심이 없어야 즐겁지 않겠소."

  이런 말을 하였다.

  "아니 할마마마께서 무슨 근심이 따로 계십니까?"

  "나는 생전에 현손(玄孫)을 보지 못하고 죽을까 보아 그것이 큰 근심이요.  그전 중전도 

이십이 되도록 아무 사속지망이 없은 채 떠나가고, 이번 중전도 들어온지 벌써 육년인데도 

도무지 아무 기색이 없으니 아마도 이대로 가다가는 사속지망이 염려될 것 같으니, 후궁이

라도 미리 두어서 낭패 없도록 힘써 보는 것이 옳을 듯하오."

  "그러하오나 상감이 나이 아직 삼십이 못된 이때 이 일이 무슨 근심이옵니까.  미리 서둘

를 것이야 없지 않을까 하옵니다."

  옆에서 왕대비가 이렇게 참견을 했다.

  "그러나 이렇다고 저렇다고 세월만 덧없이 흘려 보내면 이 일을 후회하게 될 장본인이 아

니겠소."

  "그러하오면 대왕대비마마께서는 어떠한 처분을 했으면 좋으실지요?"

  "궁인을 새로 두는 일보다 이미 득죄하고 추방 처분을 받아서 나가 있는 장씨 궁인이 있

지 않소.  그 동안이 벌써 팔년이요.  그 사이면 저도 무던히 회과천선이 되었을 듯하니 너

그러운 처분으로 그 궁인을 다시 불러들이면 첫째 젊은 궁인의 함원(含怨)하는 것을 푸는 

일이 성덕(聖德)에 누가 되지 않을 것이요.  둘째는 이미 익히 사귀었던 궁인이니 새로이 들

어오는 것보다 숙친한 맛도 있을 게 아니요.  그러한 즉 내 생각으로는 그 장씨 궁인을 다

시 불러들이는 것이 좋을 듯하오."

 대왕대비가 이런 말을 하자, 왕대비는 임금과 왕비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대왕대비의 의향이 그러하오시면 소녀가 어찌 그 뜻을 막겠습니까.  그러면 내일이라도 

날을 가려서 곧 장씨 궁인을 불러들이도록 분부를 내리시는 일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이렇게 말했다.

  며칠 후, 명성왕대비(明聖王大妃)가 그의 사촌 오라비가 되는 김석주를 만났을 때의 일이

다.  왕대비는 김석주에게 이번 장씨 궁인을 불러들이게 된 형편을 말하고 이에 대한 의견

을 물어보았다.  김석주는 이 말을 듣더니 아연실색 어쩔 줄을 모르고 대답하였다.

  "왕대비마마, 무슨 말씀이오니까?  새삼스럽게 장씨 궁인을 다시 불러들이신다니 이게 어

찌된 일이오니까?"

  "왜 그러시오?  그렇게까지 놀라실 게 무엇이요?"

  김석주는 크게 뜬 두 눈을 더욱 크게 뜨면서

  "왕대비마마, 아직까지 자세한 말씀을 올리지 못했으니 모르고 계시겠지만, 장씨 궁인은 

그 성품이 교만방자하고 무엄무례했던 까닭에 승은하던 그 몸으로 궁중에서 추방처분을 당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랬지요."

  "그러나 팔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에도 개과천선은커녕 도리어 상감께 원망을 품으며 궁주

을 험의하고, 어쨌든지 다시 한번 들어와서 이제까지 품고 있던 그 원한을 풀으려고 여러해

째 이를 갈고 기회를 기다리는데, 그 기회가 돌아오지 않자 드디어 엉뚱한 마음을 품게까지 

되었습니다."

  "아니, 제가 엉뚱하면 어떻게 한다는 거요?"

  "참으로 기막힌 말씀입니다.  지금 세상이 모두 서인(西人)의 천지가 되어서 남인(南人)이 

항상 서인을 몰아내고 남인이 들어 서보려는 이때에, 이런 기맥을 알고서 남인 거두들을 비

밀히 연락해 가지고 어떻게 해서라도 남인을 일으켜서 그 힘으로써 서로 도움이 되어보려는 

엄청난 계교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장씨가 다시 들어와서 총애를 입고 무슨 

말이든지 그 말을 들어주시는 날이면 남인은 즉시 다시 일어나서 어느 때이고 기회있는 대

로 서인들에게 묵은 원수를 갚게 될 것입니다."

  왕대비는 이 말을 듣고 말이 없이 얼마를 앉아 있다가 난처한 빛으로

  "그러나 대왕대비께서 주장하시는 일을 어떻게 막아낼 수 있소? 혹시 상감께서 이 일을 

조정에 의논하시게 되면 그때에나 조정에서 이구동성으로 그 일은 안 됩니다 하고 간지(諫

止)해 아뢰는 도리밖에 없겠소."

  "그러나 이런 일까지 조정에 물으실 것 같지도 않사오니 여간 딱한 일이 아니옵니다.  하

지만 조정에서도 의노해서 간지할 수 있는 대로는 간지할 것이오니 궁중에서도 장씨 궁인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으셔야 될 것이옵니다."

  김석주는 이쯤 아뢰고 물러나왔다.  그러나 왕대비가 어떻게 이 일을 막아낼까 근심을 하

고 있을 때, 대왕대비는 정음(한글) 전교로써 장씨 궁인을 불러들일 뜻을 예조(禮曹)에 내리

었다.  예조에서는 당황해서 즉시 이 전교를 임금에게 올리니 임금도 이미 마음먹고 있던 

일이라 그대로 윤허를 하였다.  이때에 김석주가 이런 처분이 내리는 것을 보고 급히 예궐

하여 아뢰었다.

  "대왕대비께서 분부를 내리신 터이오니 이 일에 말을 아뢰옴도 황송합니다.  그러하오나 

지각 없는 생각에도 장씨 궁인에 득죄하고 일단 추방되어 여염으로 나간지 이미 팔년이 지

난 이때에 다시 그를 불러들이신다는 것은 도리어 성덕에 누가 될 것이오니 널리 통촉하시

와 이 분부는 곧 거두어 주시옵기 바랍니다."

  이 말을 듣던 임금은 물끄러미 김석주를 바라보다가

  "나 역시 이런 일을 하기가 불안하오마는 대왕대비께서 주장하시는 일이니 이제는 하는 

수없는 처지요.  그대로 거행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거 없겠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하오면 장씨 궁인이 다시 궁중에 들어오더라도 궁중과 조정에 아무런 영향이 없을 

것으로 통촉하시옵니까?"

  "그건 미리 알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그러면 어른을 섬기는 도리에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불러들이기는 하옵지마는 그 궁인을 

조종하시는 일은 상감 말씀 여하에 달린 일이오니, 모든 일은 오직 상감의 처분만 믿고 있

겠습니다."

  "경의 말이 모두 충의에서 나온 말임을 나도 짐작 못하는 바가 아니요.  이 일은 이쯤들 

알고 물러가시오."

  임금은 이런 분부를 내리고 그대로 편전으로 사라졌다.


   숙종 십이년 오월 십육일, 장씨 궁인은 추방 처분을 받은지 무려 팔년만에 다시 궁중으

로 들어오게 되어 대왕대비께 나아가서 뵈었다.

  장씨는 대왕대비를 뵙자 먼저 눈물이 두 눈에 핑 돌았다.  배례를 올리고 고개를 쳐드니 

대비도 두 눈에 눈물이 어리었다.

  "오래간만이로구나.  그동안 얼마나 노심초사로 지냈느냐.  이제부터는 아무쪼록 잘해라.  

지금부터라도 너만 잘 하면 네 몸의 영귀는 다 찾아올 게다."

  대왕대비는 마치 시집살이를 하다가 오래간만에 친정에 가서 할머니를 대하는 느낌을 주

었다.  그 다음으로 나아간 곳이 왕대비의 처소였다.  왕대비의 장씨를 대하는 표정은 너무

도 차디 찼다.  먼저 장씨의 위아래를 훑어보고 경멸과 증오의 표정을 지었다.

  그 다음은 왕비의 처소다.  왕비는 말하자면 정적(情敵)의 사이다.  마음이 이상스럽게 설

레이면서 우선 궁금한 것이 그 얼굴빛이었다.  그 까닭은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그 한 가

지는 왕비의 얼굴이 얼마나 어여쁜가를 보자는 것이요, 다른 한 가지는 자기에게 대한 생각

이 어느 정도로 움직여지는가를 보자는 것이다.

  장씨의 마음에는 오히려 아니꼬운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어직도 자기가 첫 번 왕비인 

셈이요, 상대는 둘째 셋째로 들어온 사람이 아니냐, 다만 신분 때문에 버젓이 비(妃) 노릇을 

못하고 이 아니꼬운 절을 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역시 예법은 지켜야 하므로 절을 

드리고 우선 그 궁금한 얼굴부터 살펴보았다.

  임금보다는 여섯해 아래이고, 장씨보다는 일곱해 아래, 이제 이십을 헤이는 왕비는 나이보

다 훨씬 노숙해 보였으나 용색에는 어여쁜 티란 조금도 없었다.  여기에서

  "저런 정도라면야..."

하는 그 어떤 자신(自信)을 속으로 뇌이면서 장씨가 그 얼굴을 살피니 왕비는 의외에도 웃

는 낯으로

  "들으니 일찍 승은했던 궁인으로 득죄 추방이 되었다기에 매우 가엾이 여겨서 여러 가지

로 애를 써 위에 아뢰고 대빗전에 사뢰어서 다시 부르시게 한 터이니 아무쪼록 다음 일을 

조심하고 궁중 매사에 화목하게 지내도록 하여라."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장씨는 의외로 자기를 대하는 폼이 너그러움을 보고

  "황공 감사하옵니다."

  조용히 대답하고 물러나와서 예전에 거처하던 응향각(凝香閣)으로 돌아갔다.

  응향각은 여덟해 만에 옛주인을 맞아들였다.  오월의 하루 해는 유난히 길었다.  지루한 

하루해를 정각에서 이러저럭 보내고 밤이 되자 응향각으로 임금이 찾아 들었다.  임금을 맞

은 장씨는 그 앞에 엎드리어

  "상감마마 황공하옵니다."

  이 말 한마디를 아뢰자마자 곧 두 눈에서 눈물이 솟구쳐 흐르고 흑흑 느껴 울었다.  상감

은 장씨의 몸을 일으키고 그 얼굴의 눈물을 씻어주며 달랬다.

  "울지마라.  모두가 운수니라."

  임금의 말은 부드러웠다.  그러나 장씨의 팔년간 쌓이고 쌓였던 야속함과 노여움은 좀체 

끊이지 않았다.

  "어서 그만 그쳐라."

  "상감마마, 어쩌면 그렇게도 야속하시단 말씀이옵니까.  아무리 미천한 몸이기로서니 사람

의 마음이야 다를 데가 있겠습니까?  한 번 내어보내시고 그처럼도 모른 척하실 줄이야 소

녀는 진정으로 생각치 못했나이다."

  장씨는 이제야 비로소 자기 흉금에 서려 있는 말을 털어 놓았다.

  "그야 낸들 생각이 없었겠느냐마는 궁중 일이라는 것은 사사집 일과는 아주 판이하게 다

르니 내 마음대로 되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울음을 그치고 좋은 낯으로 대하여 다오."

  장씨는 드디어 울음을 그치고 얼굴을 들어 임금을 바라보았다.

  "어디 좀 옛 모양을 찾아보자."

  임금은 장씨의 포동포동한 손목을 잡아보았다.  장씨는 수줍은 웃음을 지으면서 머리를 

숙여 외면했다.  임금은 그 얼굴에서 옛날의 애정이 조수같이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너는 여덟해나 지났어도 얼굴은 더 예뻐졌구나."

  "호호... 나이를 먹으니까 자연 늙어뵈는 걸 어쩝니까?"

  "아니다. 조금도 늙은 티가 없다."

  이 말을 듣는 장씨느 새 정신이 나는 듯 얼굴이 갑자기 명랑해지면서 쌩긋 웃었다.

  쩖은 임금은 장씨의 허리를 껴안았다.  이리하여 응향각은 다시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새로이어진 임금의 애정은 날이 갈수록 깊어갔다.

  그 해가 지나가고 그 다음 해도 지나갔다.  봄이 되고 여름이 시작되는데 장씨의 몸에는 

이상한 반응이 생기기 시작했다.  일년이 하루같이 건강하던 장씨 몸이 쇠약해지고 구미를 

잃어 식사를 못하고 자리에 누워서 일어나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임금은 슬그머니 여의(女醫)를 불러들여서 진찰을 시키니 바로 장씨의 몸에는 태기가 있

다는 진맥이 나왔다.  임금은 여의에게 단단히 일렀다.

  "누구에게도 이 일은 발설치 말아라.  만일 발설되면 네가 죄를 당할 줄 알아라."

  "황송하옵니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여의는 물러가고 임금은 장씨를 위로해 주었다.  장씨는 또다시 가이없이 크나 큰 환희를 

느꼈다.


  [ 女難春秋 ]   <中宮 廢出>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女 難 春 秋 

    中宮 廢出



   장씨 궁인이 태기가 있게 된 것을 안 임금은 궁중의 그 누구에게도 발설치 못하게 신칙

을 했으나 역시 숨기는 일처럼 남에게 드러나기 잘하는 것은 없었다.  어느덧 장씨 궁인이 

잉태했다는 소문은 궁중에 자자했다.

  이렇거나 저렇거나 임금의 기쁜 마음은 비할 길이 없었다.  왕비 민씨도 이 말을 듣고 우

선 임금에게 진하(進賀) 전갈을 보내고 응향각에 상궁나인을 보내서 장씨에게 고마움을 일

르는 것이었다.  왕대비도 자기의 피도 뼈도 섞이지 않은 현손이었지만, 현손을 보게 되었다

고 매우 기뻐했다. 

  온 궁중이 떠들석하는 통에 장씨가 어느덧 궁중에서 버젓하게 되자 임금은 드디어 대왕대

비의 권유로써 장씨에게 소의(昭儀)라는 직첩을 내리게 하였다.  장소의(張昭儀)는 먹지 않아

도 배가 부른 듯하고 입지 않아도 등이 더운 듯했다.

  일찍이 임금은 장소의에게 여염에 나가 있었을 때 어떻게 지내었나를 물어본 적이 있었

다.  장소의는 누구보다도 조사석(趙師錫)과 동평군(東平君)이 비호해 준 덕택으로 잔명(殘命)

을 보전해 왔다고 아뢰었다.

  임금은 그것을 고맙게 여기고 동평군에게는 혜민제조(惠民提調)를 임명하고 조사석에게는 

예조참판을 임명했다가 얼마 후에 우의정 자리가 비게 되니 정승과 판서들의 반대에도 불구

하고 일약 조사석을 우의정에 앉혔다.

  날은 가고 달이 차서 무진(戊辰) 시월 이십팔일에 장씨는 왕자를 낳았다.  임금은 오직 이 

왕자만을 위해서 사는 보람을 느끼는 듯싶었다. 

  왕자가 두달이 되는 그 해 정월 초하루, 임금은 만조백관의 조하(朝賀)를 받게 되어 영의

정 김수흥(金壽興) 이하 삼상(三相), 육경(六卿), 삼사(三司), 정부제학(正副提學)들이 모두 한 

뜰에 모이게 되었다.  임금은 신하들을 편전으로 불러들여서 술을 내렸다.  어사주(御賜酒)

가 한순배 지냈을까 할 때에 임금은 여러 신하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까지 왕자가 없어 국본이 위태하다가 새로 왕자를 낳았으니 하루 바삐 원자의 정호

(定號)를 내리려 하는데 이 일에 그 누가 반대할 자가 있겠소마는 혹시라도 반대할 사람이 

있다면 곧 이 자리에서 물러가 주오."

  너무도 돌발적인 명령이었다.  여러 재상들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에 성급하고 혈기 있기

로 유명한 이조판서 남용익(南龍翼)이 썩 나서며 아뢰었다.

  "이번 원자 정호는 아무리 생각한데도 시기가 너무 이른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왜그러냐 

하면 이제 전하 춘추 삼십 미만이온데 훗일 정궁(正宮)에서 탄생이 없으란 법도 없고, 또 탄

생할 가망이 없다하더라도 이제 생후 불과 백일의 어린 왕자로써 원자 정호한 바 전례가 없

사오니 죄송한 말씀이오나 이 분부는 거두시옵소서."

  성급한 남용익은 할 말을 다하고 나가버리고 그 다음에 영의정 이하가 차례로 아뢰는 말

이 모두 시기상조(時機尙早)라 했다.

  그러나 임금은 장소의(張昭儀)의 간절한 소청으로 지금 미리 원자를 책봉하고, 백일이 되

는 날에는 세자를 책봉하고, 한돐이 되면 동궁을 봉하고, 이리해서 혹시라도 동궁 자리를 다

른 아기에게 빼앗길까 보아 은근히 초조해하는 그 마음을 쓰다듬어 주기 위해서 이런 일을 

하는 터였다. 그런 때문에 신하들이 말리는 것으로 그 문제를 거두어 들일 임금이 아니었다.

  "국가 대사는 하루가 바쁘니 원자 정호 절차를 예조에 분부해서 거행케 하라."

  이런 전교를 내리고야 말았다.

  이리하여 생후 백일 남짓해서 장소의의 소생은 원자 책봉이 되었다.  그러나 그뿐이 아니

었다.  왕자를 탄생해서 원자 정호가 되니 그 왕자의 어머니에게는 정이품(正二品)의 희빈

(禧嬪)이란 직책이 내리고, 또 처소를 새로 정해 주니 이곳은 대조전에서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 영휘당(榮徽堂)이었다.  영휘당에 자리를 옮긴 장희빈은 낮에는 아들 재미,  밤에는 임

금의 귀염을 독차지했다.

  이만하면 세상에 더 부러운 것이 없으련만, 그러나 장희빈에게는 아직도 불만이 있었다.  

그것은 왕비 민씨를 내쫓고 자기가 그 자리에 들어앉지 않는 이상엔 사라지지 않을 불만이

었다.  

  임금의 총애가 지극해지면 지극해질수록 장희빈은 임금을 보는 대로 공연히 짜증과 암상

을 부렸다.  그리고 가지 가지로 왕비의 흉이며 잘못을 고해 바쳤다.  왕비는 까닭없이 자기

를 미워하여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다고 심복 상궁을 시켜서 왕자의 음식에 치독(置毒)하

려고 일을 했던적도 있다고 왕비를 모함했다.

  임금은 장희빈의 그런 말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이양떠는 장희빈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서인(西人)의 거두 송시열(宋時烈)은 조정의 원로요, 사림(士林)의 중진(重鎭)이었으나 숙종 

초년에 복제(服制) 문제로 상소했다가 극형에 처하게 된 것을 김석주의 힘으로 목숨을 보전

했다가 경신대옥(庚申大獄) 때에 풀려서 고향으로 내려가 숨어 살고 있었던 까닭으로, 원자 

책봉 당시에는 모르고 있었다.

  추후에야 이런 일을 알고 고향에서 상소를 올려 그 옳지 못한 이유를 들어 원자의 정호 

절차를 거두어 조십소서 하고 아뢰었다. 임금은

  "원자를 봉한 이상에는 군신의 분의가 벌써 정해졌거늘 원자 책봉에 대하여 옳지 않다고 

상소하였으니 이것은 필시 원자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 것이며, 또한 내가 하는 일을 반대한 

것이니 용서할 수 없다."

하고 진노하여 친히 빈청에 제신(諸臣)들을 불러 송시열의 상소에 대하여 하문하였다.  이때

에 남인(南人)들과 우부승지(右副承旨) 이현기(李玄紀), 교리(校理) 남치훈(南致薰)등은 그 상

소의 잘 못된 점을 상계하고 또한 전날에 송시열이 윤증(尹拯)과 분쟁하여 조야를 시끄럽게 

한 일을 책논하였다.

  임금은 송시열을 제주도로 귀양 보내는 한편 여기에 따라 그의 동조자들을 모조리 처형하

니, 영의정 김수흥은 파면이 되고 이사명(李師命), 이익(李益), 김익훈(金益勳), 이순명(李順命), 

김만중(金萬重) 등도 유배를 당했다.

  이것으로 서인파(西人波)는 완전히 실각 당하고 남인파가 점점 세력을 뻗치기 시작했다.  

우선 목래선(睦來善), 김덕원(金德遠)으로 하여금 좌우상(左右相)을 삼고 목창명(睦昌明), 권유

(權愈) 등을 승지로 삼았다.  다시 보사공신(保社功臣)이었던 광성부원군 김만기(金萬基)와 청

성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 등의 관직을 수탈하였다.

  한번 벌어진 사태는 꼬리를 물고 확대되어 갔다.  세자 책봉과 서인파의 실각은 왕비 민

씨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왕비 민씨는 본시 서인파의 거두 김석주가 천거하여 봉후(封后)

한 관계로 서인과는 운명을 같이 해야 할 입장에 있었다.  처음에는 민비가 장씨를 불러들

여 후궁을 삼았으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임금의 총애가 모조리 장희빈 한 몸으로 쏠리었다.  

아무리 점잖고 덕이 있는 민비라 하지만 자연 질투심이 안 생길 수 없었다.  마음에 항상 

거리낌이 있을 때는 그것이 아무리 숨기는 한이 있더라도 자연 나타나게 되는 것이니 민비

의 질투심을 임금이 모를 리가 없었다.

  어느날 장희빈은 임금의 무릎에 매어달리며

  "신첩을 이 궁에서 내쫓아 주세요.  이 궁에 있다가는 제 명에 죽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흑흑 느껴 울었다.

  "왜 또 그러오?"

  "중전께서 음식을 많이 보냈기에 즐겨 펴보았더니, 제절이 보통이 아니므로 개에게 시험

을 하였는데 저렇게 피를 토하고 죽었습니다."

하고 뜰에 축 늘어져서 죽어 있는 개를 가리켰다.

  임금은 불문곡직하고 민비 폐출을 결심했다.  민비가 장씨를 다시 불러들인 장본인이면서 

요새 와서는 그 시기하는 품을 보아 지금 장희빈의 한 말이 거짓되어 보이지 않았던 것이

다. 이리하여 험악하게 감돌던 공기는 드디어 폭발되고 말았으니, 그것은 기사년(己巳年= 숙

종 십오년) 사월 이십삼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날은 왕비의 탄신일이어서 예년과 같이 축연 절차가 거행되게 되었다.  이때는 장열 조

대비(莊烈趙大妃), 즉 대왕대비의 승하 후 삼년상이 채 지나지 않은 때라 궁중 축연을 여러 

해째 그치게 되었다가 오래간만에 곤순전 제조상궁의 주선으로 탄신 잔치를 올리게 된 것이

다.

  그러나 왕비 민씨는 월여 전에 사친 아버지 민유중(閔維重)이 작고하여  상중에 있는 몸

이라 굳이 사양하였지만 사가 친정 복상으로 궁중 절차를 궐하는 법이 없으므로 그대로 진

찬(進饌)을 드리게 되는 터였다.

  공사(公私) 이중(二重)의 상복을 입은 몸으로 이날을 보내게 되는 왕비의 심정은 착잡하였

다.  그러나 예년과 같이 여러 종척의 하표(賀表) 진상과 진찬단자(進饌單子)가 연속해서 들

어와야 할 터인데 어찌된 일인지 이 모든 것은 한 장도 곤순전에 들어오지 않았다.  왕비는 

각처에서 들어올 문안 단자가 한 장도 없는 일이 매우 의심스럽고 궁금하여 봉서나인(封書

內人)에게 이 일을 물어보았다.  그러나 봉서나인도 모르는 일, 궁금한 마음으로 이날 하루

를 지내고 저녁 때가 되었다. 

  사친 오라버니 민진후(閔鎭厚)가 잠깐 사후차(司候次)로 왔다가 나갔다.  이때 왕비는 민진

후를 보고

  "오늘은 문안 단자가 더러 들어올 줄 알았는데 아무 곳에서도 들어오지 않으니 이게 어찌 

된 일이요?"

하고 물었다.  민진후는 조용히 손짓을 하며, 오늘 여러 곳에서 들어온 문안단자와 진찬단자

들은 모두 정원에서 받아서 상감의 분부로 땅을 파고 묻는다, 불에 태워버린다, 야단법석을 

하고 있으니 이런 일을 아는 체도 마시라고 일르는 것이었다.  왕비는 이 말을 듣고 너무도 

섭섭하고 야속하게 생각했다.

  밤이 되자 임금은 중전의 탄신일이니 곤순전을 찾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왕비는 임금을 

맞아 대강 인사 말을 올린 후에, 낮에 들은 바 섭섭한 말을 하였다.

  "오늘은 여러 곳에서 문안단자가 들어올 줄 알았더니 한 곳도 온 데가 없으니 어찌된 일

이니 저에게 대해서는 일가 친척까지도 모두 괄세를 하는 모양이니 야속하기 그지없습니

다."

  이 말을 들은 임금은 무슨 때문인지 갑자기 변색하고 노염을 내며

  "문안단자가 몇장 들어왔었소.  중전은 서인을 끔찍이 여기는 때문에 모두가 서인 재상의

집에서 문안단자를 들여왔기에 아니꼬아서 모두 불을 놓아 태워버렸소.  나는 서인놈이라면 

그 글장도 보기 싫소."

  이런 말을 하였다.

  "그러기로 사친 족척(私親族戚)들이 자주 만나지 못하고 서면으로 안부하는 것조차 막고 

끊으실 게 무엇입니까?  너무 야속하지 않습니까?"

  임금은 더욱 노기를 띠우며 소리쳤다.

  "그렇게도 사친 족척이 못잊을 지경이면 내일이라도 사가로 나가서 지내구료.  그러면 족

척들도 마음대로 만날 수 있고 서인놈들도 마음대로 사귈 수 있을 테니까 여북 좋겠소."

  이때 왕비도 화가 발칵 아니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 말씀은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이 사람에게 서인이 무슨 아랑곳이 있다고 그 분풀

이를 저에게 펴시려 합니까?  내쫓으려면 그냥 내쫓으실 일이지 사친이 서인이라 해서 이 

사람에게도 서인 대접을 할 필요야 없지 않습니까?  희빈은 남인이 뒷배를 보아준다고 합

디마다는 이 사람은 서인과 결탁한 일이 없습니다.  이 자리를 장희빈에게 내어주시랴 한다

는 말씀은 미리부터 들은바이오니 내일이라도 나가라 하오면 분부대로 나가겠습니다."

  왕비는 눈물을 흘리며 이런 말까지 하였다.

  "그렇겠소.  나는 천고에 없는 폭군이고 중전은 세상에 드문 현비(賢妃)이니 어떻게 그대

로 궁중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겠소.  내일은 사친의 집으로 나가시오."

  임금은 이 말을 남긴 채 노기충천해서 돌아갔다.

  왕비는 이날 밤, 밤이 새도록 슬피 울고 날을 밝혔다.  날이 밝자 임금은 입직 승지에게 

분부하여 곧 전교로써

  "왕비 민씨는 연래에 너무 실덕(失德)해서 궁중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역대 종사가 욕될 것

임에 오늘 그를 폐위 서인(廢位庶人)해서 사친의 집으로 내어보내는바이니 만조백관들은 딴 

말을 말지어다."

  이런 뜻을 정원(政院)에 내리었다.  정원에서는 예조판서가 먼저 극간했다.  임금은 정원

에 모인 여러 재상을 둘러보고 이렇게 또 말을 했다.

  "소위 중전이 겉으로는 어진 체하나 속으로는 투기와 간악이 허다하여 최근에는 그 버릇

이 더욱 심해서 안으로는 가법을 어그러지게 하고, 밖으로는 왕실의 체통을 보전치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요녀(妖女)와 내시놈들을 부동해서 아직 강보에 싸인 왕자까지 없애려고 갖은 

간계를 다하고 있으니 이때에 궁중을 깨끗이 숙청하지 않으면 안 되겠으므로 마침내 왕비를 

폐위하게 이르렀으니 만조백관들은 그 누구도 이 일에 대해서 말리는 말을 내지 마오."

  이런 엄중한 분부를 내리었다.

  그러나 재상들 중에 지각이 있는 늙은이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려 간하고 그 중에도 좌승

지(左承旨) 이기만(李蓍晩), 수찬(修撰) 이만원(李萬元), 이후정(李後定), 강선(姜銑), 이상진(李

尙眞) 같은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직간하였으나 임금은 조금도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망녕한 늙은이들은 나가서 누워있게 하라."

라고 말할 뿐 그대로 편전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이날 낮에는 각조 대신들과 이품 이상의 

조관(朝官)들이 빈청에 모여 정청(庭請)하고 삼사(三司)에서는 합문(閤門)밖에 엎드리어 전교

의 환수를 청했으나 임금은 모두 물리쳐 버렸다.

  정원에서 고간(固諫)한 것을 물리치고 안으로 들어간 임금은 그날 저녁으로 왕비의 직첩

을 거두고 폐위 서인해서 소보교(素步轎)에 태워, 두어 시녀만 따르게 하여 안국동 사친의 

집으로 내보냈다.  이때 길가에서 이 소보교가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된 여러 사람들은 그 누

구나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태학(太學)의 유생들이 수십명이나 길가에 엎드려서 소보교를 우러러 통곡했다.  백성들의 

반응이 이와 같은 것을 보게 되자 남인(南人)측에서도 지각 있는 이들은 슬그머니 사직하고 

숨어 버리는 자도 생겨났다.

  한편 전직 구관 즉, 서인 측 구관들 중에 아직 사직만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차차 여론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전임 형조판서 오두인(吳斗寅)은 숙종의 매부 해창위 오태주(海昌尉吳

泰周)의 부친이요, 인조조(仁祖朝) 이후 사대를 내리섬긴 원로재상이었는데 이 소문을 듣고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가 망하리라."

하면서 동지들을 모아 이 일을 바로잡겠다고 열렬히 부르짖었다.  그는 전 참판 이세화(李

世華), 유헌(兪櫶), 전 응교(應敎) 박태보(朴泰輔) 등 팔십여명을 모아가지고 여기에 대한 일을 

주야로 의논했다.  마침내 오두인은 박태보에게 상소문을 짓게하고 두 사람의 이름으로 그 

소문을 올렸다.

  < 중궁은 일국의 국모로서 입궐하신지 구년에 갸륵한 성덕이 조야에 자자할 뿐 아무러한 

큰 허물이 없으신 터에 갑자기 그 죄상을 말씀도 않으시고 폐출하시니 신 등은 이 일로 성

상께서 성덕을 잃으실까 두려워하나이다.  바라옵건대 오늘이라도 번의(飜意)하시와 곧 국모

께 복작 처분을 내리시옵소서.  듣건대 이번에 희빈 장씨는 왕자를 탄생한 것을 내세우며, 

전날에 왕비의 대은을 입은 것을 잊어버리고 가지 가지로 왕비를 참소하고 한편으로는 서인

으로 지목 받는 재상들을 모함하여 드디어 차례로 조정과 궁중에서 내어쫓으니, 자고로 후

궁의 침석지간(枕席之間)의 참소로서 임금이 나라를 그릇치지 아니한 예가 없은 즉, 신들은 

이 일을 너무도 통한이 여기어서 주상의 마음에 하루 바삐 깨달으심이 일어나기를 천만 바

라옵니다. >

  이 상소문이 임금에게 전해지 것은 그날 저녁의 일이다.  임금은 상소문 소두(疏頭)에 적

힌 두 사람의 이름과 또 연명장에 적은 팔십여명의 성명만 보고 상소 본문은 살펴보지도 않

았다.  그런데 그날밤 임금은 장희빈 처소로 가서 저녁에 올라온 상소문 얘기를 했다.  그러

자 장희빈은 간드러진 웃음으로 조롱 비슷, 응석 비슷 이렇게 말했다.

  " 상감두 딱하시우.  오두인은 해창위의 부친으로 나라의 사돈인데, 이런 일로 팔십여명을 

동원해서 상소한 터이니 그 일이 궁금하지 않아요?  그 글발이 어떤 것인지 살펴서 상당한 

조처를 하셔야지 그렇게 내버려 두면 다음날 연산군이나 광해군처럼 강화도 교동 밖에는 가

실 곳이 없을 터이니 참 기막힌 처신이시오."

  한편으로는 그 글을 보게 하고 한편으로는 분기를 돋고워 주었다.  임금은 장희빈의 말을 

듣고야 비로소 내시를 시켜서 상소문을 가져오라하여 장희빈과 같이 내용을 살피고는 그야

말로 노기가 충천해졌다.  더욱이 장희빈의 얼굴은 푸르락붉으락했다.  임금은 그길로 정원

으로 나가

  "그 상소한 놈들을 모조리 친국할 터이니 지체 말고 즉각 인정문에 형구를 채리고 오두인 

이하 모두 잡아들이도록 하여라."

 이리하여 응교 박태보, 판서 오두인, 참판 이세화 등 팔십여명은 모두 죄를 입고 혹은 형살

(刑殺), 혹은 귀양 혹은 파직이 되었다.

  또한 전일 세자 책봉을 간하고 상소하다가 제주도에 정배 당한 송시열, 이사명, 김수흥 등

에게도 사약을 내렸다.  그리고 민씨 일족 중의 유관자도 모두 파직을 시키고, 심지어 지방 

관속까지도 민씨와 관계만 있으면 파직을 시켜버렸다.

  이처럼 민씨 일족과 그 일파가 전멸되는 반면에 장희빈은 승차하여 왕비로 책립되고 그 

부친 장현(張炫)에게는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을 봉하고, 그 모친 윤씨에게는 파평부부인(坡

平府夫人)을 봉하고, 주색 잡기와 시정 무뢰배의 출신인 그 오라비 장희재(張希載)는 척신(戚

臣)으로 되어 버젓이 어영대장(御營大將)의 인수(印綬)를 찼다.

  장비(張妃)는 이제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고 거리낄 것이 없었다.  비록 상감이라 하나 그

도 장비의 말이면 모두가 엿가래 휘어지듯 녹신녹신해졌다.  그리고 임금은 오직 헛이름만 

가지고 있는데 불과했다.  만조백관이 장비(張妃)의 심복아닌 사람이 없게 된 것이다.


  [ 女難春秋 ]   <시드는 毒草>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女 難 春 秋 

    시드는 毒草



   이제부터 궁중에는 다른 후비(後妃) 하나도 없이 오직 장비(張妃)만이 독장을 부리는 판

이다.

  이때 대궐을 무상출입하며 장비 처소에까지 드나드는 사람이 있었으니 이는 종친으로 예

전부터 장비와 친숙했던 동평군(東平君)이었다.

  동평군은 장비가 궁중에서 쫓겨나 있을 때 크게 보살펴 주었고, 또 장씨 궁인이 장비(張

妃)로 되기까지의 큰 공로자, 즉 장비의 공신(功臣)이기 때문에 특별히 궁중을 무상출입시켜 

궁중을 정찰하는 책임을 내맡겼던 것이다.  이리하여 동평군은 그전 낙척 당시와 마찬가지

로 궁중의 기밀을 아뢴다고 임금이 있건 없건 장비의 침소에까지 출입을 했다.

  이렇게 궁중의 정찰을 동평군이 하는 대신에 대궐 밖 모든 위험인물들의 정찰은 장희재가 

부랑배들을 부하고 삼아서 정찰을 했다.

  어느날 장희재가 큰 길을 지나며 듣자니까 아이들이 노래를 하는데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일세."

하는 구절이 있었다.  

  장희재가 가만히 들으니까 다른 뜻이 있는 것이었다.  그래 그 아이를 불러가지고 그 소

리를 누가 가르쳐 주더냐고 물으니 아버지가 가르쳐 준 것이라고 대답한다.  너희 집이 어

디냐고 하니까 저기 저 집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장희재는 곧 돌아와서 사령들을 불러 

그 아이의 잡을 일러주고 아이으 아버지를 잡아오라 했다.

  사령들은 그 아이의 아버지를 잡아왔다.  장희재가 아이의 아버지를 보고

  "네가 아이에게 이런 동요를 가르친 뜻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니 그 사람은

  "아이들이 지껄이는 것을 가지고 무얼 그러십니까?"

라고 대답했다.

  "이놈, 뭐라고?  너는 민씨편이 되는 서인인 까닭에 이런 동요를 만들어서 인심을 흔드는 

것이 아니냐?"

  호령과 아울러서 어떻게나 지독한 형벌을 가했던지 그 사나이는 그만 형벌을 이기지 못하

고 죽어버렸다.

  이 소문이 세상에 퍼지자, 장희재의 의세남권(依勢濫權)을 미워하고 민비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은 일부러 아이들에게 돈까지 주어가며 이 노래를 가르쳐서 온 장안에 이 동요가 퍼

지게 되었다.

  마침내 이 동요 소리는 장비의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다.  장비는 이 동요소리를 듣고 마

음이 점점 불안해져서 민비를 영원히 치워버릴 생각까지 갖기에 이르렀다.  장비는 폐비 민

씨를 또 온갖 소리로 모함하기 시작했다.  왕자가 혹 감기가 들고 머리가 더워도 

  "이건 필시 민녀(閔女)의 장난으로 이렇게 되는 일입니다."

하고 민비를 씹고 욕하기를 되풀이하면서 민녀에게 사약(賜藥)을 내리라고 졸라대었다.  

  그러나 임금은 이 말을 듣지 않았다.  비록 일시의 분기로 중전을 내어쫓긴 했으나 마음

에는 종종 불안한 생각이 들고 또 장씨의 교만방자와 요악간특함을 차차 알게 된 까닭이었

다.  임금이 차츰 자기의 말을 듣지 않게되자 장비는 젖을먹이던 왕자를 방바닥에 내던지며

  "난 모르겠소.  이 자식이 민녀의 저주하는 방예에 걸려서 죽든 살든 알 게 뭐에요.  그리

고 폐비 민녀가 그렇게도 소중하거든 오늘이라도 다시 불러들이구료."

  이렇게 포달을 부리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임금도 화가 터져 나왔다.

  "너도 인간의 양심을 가졌으면 생각을 해보아라.  왕비를 내쫓고 너를 왕비 자리에 올려 

앉힌 것은 오직 이 왕자 하나 때문에 그렇게 한 일인데 너는 무슨 그리 큰 원수가 된다고 

폐출된 사람의 목숨까지 빼앗으려고 하느냐? 에잇, 천하에 악독한 것!"

  이렇게 호령하자 그제서야 장비도 좀 겁이 나는 듯 금방 간특한 말투로

  "그러면 모든 것은 제가 잘못했으니 용서해 주시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하며 애교를 띤 웃음으로 임금의 노여움을 풀어놓는 것이었다. 


   최근에 와서 임금은 차츰 장비에게 홀렸던 정신이 다시 깨어나기 시작하는 듯했다.  이

리하여 임금의 마음에는 새로운 우울이 깃들기 시작했다.  밤에 잠이 깨면 장차 궁중 일을 

어떻게 조처할 것인가, 장비를 그대로 둘 것인가, 왕자는 어떻게 길러야 할 것인가, 이런 생

각 저런 생각에 번민을 하다가는 곧 일어나서 무감 두엇을 불러 뒤따르게 하고 민간 여염집 

들창 밑으로 또는 술파는 집으로 미행의 발길을 떼어놓는 것이 항례처럼 되어버렸다.

  북촌 어느 여염집 들창 밑에서 새오나오는 이야기으 한토막---

  "민중전은 보기 드문 어진 어른이신데 그 요악 간특한 이의 모함을 받아서 오늘날 저 지

경이 되었으니 너무나 가엾고 불쌍하다.  어느때나 상감께서 마음을 돌리시게 될지..."

  또 어느 선술집에서 들려나오는 몇몇 늙은이의 대화---

  "암, 그렇고 말고 여부가 있나.  박응교는 참으로 충신일세.  그 분 같은 이가 몇 사람만 

된다면 그래도 세상이 이 지경은 안 될 걸세.  장희재 그놈이 세도를 부리는 후부터 우리네

들의 곤란이란 참으로 말할 수 없게 되었거든."

  "그뿐인가? 장희재의 행악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천고에 듣지를 못한 일일세.  그 자는 재

물과 예쁜 계집이라면 사죽을 못 쓰는 인간이란 말일세..."

  "암, 그것도 세도를 하게 되니까 금관자 옥관자들이 쫓아다니면서도 아첨하는 꼴이란 참

으로 구역이 나서 못 보겠데.  그런 작자들이 더 더럽지.  예전에 장희재가 시정으로 돌아다

닐 때의 친구들이라면 몰라도 버젓한 양반놈들이 장희재의 밑을 씻기러 다니면서 행악을 같

이하니 그 놈들이야말로 장희재 이상으로 아니꼽고 더러운 인간이란 말일세..."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들을 듣게 된 임금은 마침내

  "백성들의 소리는 곧 하늘의 소리다."

  이렇게 깨달았다.

  "어, 이거 이래서는 안 되겠다."

  임금은 다시 밤마다 궁중을 순회하기 시작했다.

  어느날 밤 한곳을 지나가노라니 밤이 매우 깊었는데 창에 등불이 비치고 사람의 말소리가 

도란도란 들려왔다.  의심스러워서 가까이 가서 엿들으니 안으로부터는

  "폐비 민씨는 이 화살 맞은 자리마다 악창(惡瘡)이 나게 해 주십소서."

  이런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도 괴이해서 창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벽에는 민중전의 화

상을 그려 붙이고 무당들이 모여서 그 화상을 향해 활을 쏘고 있었으며 또 그 옆에서는 장

님이 앉아서 경문을 외어가며 무슨 축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임금은 곧 뒤에 따르던 무감을 불러 즉시 그 무당들과 소경들을 모조리 묶게 하고 무슨 

일들이냐고 엄하게 물었다.  그러자 그 무당과 소경들은

  "그저 죽을 죄를 저질렀습니다.  소인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오직 중전마마의 분부로 

거행만 할 뿐입니다."

  이렇게 대답했다.  그 후에도 임금은 밤이 깊어서 궁중 순회를 계속하였다.  어느날 역시 

궁벽 한 곳에서 등불이 새어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그리고 가까이 가 보았다.  불은 켜져 있

으나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궁금한 마음으로 그 창 앞으로 가까이 가서 엿보니 그 안에는 

이상한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벽에는 옷 한벌을 걸어놓고 그 앞에는 여러 가지 음식을 풍성하게 차려놓은 상을 놓고 어

떤 젊은 무수리 하나가 엎드려서 울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임금

은 드디어 기침을 한번 크게 하고 방문을 두드렸다.

  무수리는 곧 문을 열었다.  임금은 안으로 들어서서

  "네 지금 야심한데 등불을 켜놓고 또 이 음식은 누구를 위해서 이렇게 차려놓고 무슨 일

을 하고 있는 거냐?"

  조용히 물었다.  무수리는 말을 못하고 벌벌 떨기만 했다.

  "어서 대답해 보아라."

하는 분부에 그 무수리는

  "죽여 주십소서."

하고 임금 앞에 엎드렸다.

  "죽이라고 그저 그러면 알 수 없으니 바른 대로 아뢰어라."

  그제서야 무수리는 울면서 벽에 걸린 화상을 기리키며

  "네, 그저 죽여 주옵소서.  오늘이 바루 폐출 된 중전마마의 탄신이옵니다.  마마를 잊지 

못하와..."

하고는 치맛자락으로 얼굴을 싸고 흑흑 느껴 울었다.

  임금은 아무 말없이 그 화상을 바라보더니

  "그렇구나.  내가 잊고 있었다.  오늘이 중궁의 탄신 날.  국모로 있을 때 같으면 온 장안

이 즐겨할 날이어늘..."

  임금의 가슴은 이상하게도 설레였다.  얼마 전만 해도 이런 계집은 당장에 중죄에 처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그를 책망은커녕 오히려 회오의 눈물이 핑하고 도는 것이 

아닌가...

  임금은 얼맛동안 그 방에 머물러서 무수리에게 술을 따르라 하고 울적한 마음을 풀려고 

했다.  한잔, 두잔, 잔을 거듭함에 따라 임금은 어느덧 취해서 그대로 그 자리에 누워버렸다.

  무수리는 임금이 몸을 가누어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자 벌써 그 뜻을 알아차리고 자리

를 펴놓고 조심스러히 물러나려 하는데

  "그래 나더러 이곳에 혼자 있으란 말이냐?"

하고는 무수리의 손을 잡아끌었다.

  무수리는 너무나 황송하고 무서웠다.  첫째로 지존의 몸으로서, 나인도 아니오 나인의 비

복인 무수리의 신분을 가진 자기에게 이런 손길을 내주는 것이 황공했고 둘째로는 간악한 

장비가 이 일을 알면 장차 자기에게 어떤 악형이 떨어질지 모르는 때문에 공포심이 일어나

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아니될 일이옵니다."

하고 거절을 해도 듣지 않는 임금인데는 어쩌는 수가 없었다.  무수리는 그날 밤을 임금과 

같이 지냈다.  이 무수리의 성은 최씨(崔氏)로서 아직 출가하지도 않았으며 그 자색은 그래

도 열에 뛰어나는 미모를 갖추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한번 인연이 맺어진 후에는 임금은 때때로 최씨를 찾았다.  세상에서 와글와

글하도록 떠들어대는 장비와 장희재 일당들의 탐권 행악을 비난하는 소리는 임금의 귀를 아

프게 할 지경이 되었다.  임금은 항상 근심으로 지내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밤이면 근심을 잊기 위해서 상궁 나인들을 시켜 고담책을 읽게 하여 들었다.  세상에 흩

어져 있는 고대소설이란 소설을 모조리 대궐에서 모아들이게 되자,  이 기회를 타서 임금의 

마음을 한번 돌려보겠다는 결심으로써 김춘택(金春澤)이란 사람은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란 

소설을 한역해서 마치 고대 소설인양 일부러 빛이 바랜 종이에 옮겨 써가지고 궁중으로 들

여보냈다.

  김춘택은 그전 왕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의 부친 김만기(金萬基)의 아들로서 별호가 북헌(北

軒)이란 문장가였는데,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켜 보겠다고 이런 계획적인 일을 마련했던 것

이다.  

  이러던 어느남 밤의 일이다. 장비의 심복 조궁인(趙宮人)이 장비 침방으로 들어오더니 장

비에게 귓속말로 무엇이라 속삭였다. 궁인의 말을 듣고 있던 장비의 얼굴 빛은 당장 변했다.

  "그래 네가 그 일을 확실히 아느냐?"

  "아, 알고 말고가 있습니까?  어느 앞이라 사실 없는 말을 아뢰겠습니까?"

  "그래?  그러면 어서 자세히 말해 보아라."

  "그런데 그 계집은 나이도 아니요 무수리라 하오니 너무도 해괴합니다."

  "뭐? 무수리?"

  "예, 예전에 폐비 민씨 처소에서 거행하던 무수리라 하옵니다."

  "참 기막힌 일이다.  그래 일국의 지존으로 하필 비자(婢子)년 무수리를 가까이 해서 또 

그중에도 아이를 배었다니 이게 웬말이냐?  내일은 그년을 불러들여서 특별한 조처를 해야

겠다."

  장비는 노기충천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날밤 장비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여러번이나 이를 갈며 날을 밝혔다.  이년을 불러들

이면 어떻게 해서 감쪽같이 죽여 없앨 것인가, 또 뱃속에는 임금의 씨가 벌써 들어 있다니 

이것을 죽이고 보면 문제가 일어니지 않을까, 가지 가지로 독살풀이를 해볼 계교를 생각하

다가 밤을 밝혔다.

  아침 수라 절차가 지나고, 대강 다른 절차도 지난 뒤라 벌써 낮이 가까웠다.  장비는 드디

어 측근자를 시켜서 조용히 그 무수리를 불러들여 뒷뜰에 세워놓았다.  무수리는 무슨 처분

이 내릴지 몰라서 덜덜 떨고 서 있는데 장비의 무수리를 쏘아 보는 안광은 불이라도 일어날 

듯이 날카로왔다.

  "네가 예전 폐비 민씨 처소에서 거행하던 무수리라 하니 그러하냐?"

  "예, 황공하옵니다."

  "무수리의 신분으로 상감마마를 뫼셨다 하니 그렇고도 아무런 일이 없을 줄 아는가?"

  "..."

  "어째 대답이 없느냐?"

  장비의 독살스레 외치는 소리는 깁을 찢는 듯이 날카로왔다.

  "황공무지하오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런 일은 애매하다는 말이냐?  어디 네 배를 내어뵈어라.  억울하면 억울하다는 

말을 할 수 있게 해줄 게다."

  "..."

  "네, 저 계집을 잡아젖히고 옷을 풀어보아라.  벌써 만삭이 돼 있을 게다."

  장비의 호령 소리에 모시고 섰던 나인들은 당황하면서도 차마 손을 대지 못했다.

  "너희들도 그러기냐?  냉큼 벗기지 못할까?"

  그때야 여러 궁인들이 내려가서 최무수리의 웃옷을 벗기었다.  최씨는 속옷만을 입은 채 

어쩌할 바를 몰라 울고 있었다.

  "네 저 계집의 속옷까지 벗기어라."

  호령이 다시 내렸으나 나인들은 차마 손을 대지 못했다.  그러나 장비의 표독스런 호령에 

최무수리는 드디어 나체(裸體)가 되어 앉지도 서지도 못해서 쩔쩔 매며 돌아서서 울고 있었

다.

  "너는 그래도 변병할 길이 있느냐?  대관절 너는 무슨 목숨을 가졌기에 천한 몸으로서 감

히 상감을 가까이 모셔서 왕자까지 배고 살기를 바랐더냐?"

  "황공하옵니다.  제가 그러했던 것이 아니오라 상감마마께서 저의 처소로 오신 것을 피하

지 못한 죄가 있을 뿐이옵니다."

  무수리는 울음 섞인 말로 이렇게 대답했다.

  "이 천하에 앙큼한 년!  네가 가만히 있는 것을 상감께서 건드렸더냐?  무슨 뜻으로 궁중

에서 요망스럽게 폐서인된 악독한 계집 민가의 생일을 지낸다고 음식을 차려놓고 했더란 말

이냐?  네가 앙큼한 마음에 평소에 버정대던 무감놈을 꾀어 그 곳으로 상감의 미행길을 인

도하게 했던 일이 아니냐?  그러고도 모든 일을 상감께만 밀어버릴 작정이냐?"

  "그 말씀은 너무 애매하옵니다."

  "뭐 애매하다고?  네 저년을 기둥에 단단히 묶어 놓아라!"

  장비가 발을 구르고 요망을 떠는 통에 화관(花冠)이 떨어지고 첩지가 삐뚤어졌다.  암상이 

났던 판이라 장비는 그 화관을 떼어내서 방구석에 동댕이를 치고 마루 아래로 뛰어내려가서 

준비해 놓았던 싸리비를 뽑아들고

  "흥! 네가 요만치 안팎으로 절색이니 무수리 아니라 아무것이기로니 상감의 마음을 끌지 

않을 수가 있느냐?"

  이런 소리를 하다가는 싸리채를 들어서 무수리의 하복부와 넙적다리를 한데 얼러서 훔쳐 

때리며 호통을 한다.

  "너 이년, 바로 대지 못하겠느냐?  번연히 어느 무감놈과 정을 통해서 자식을 배고 못된 

꾀로써 무감놈을 시켜 미행을 해오게 해서 상감을 농락한 다음에 왕자를 잉태했다고 하는 

것이니, 이러고도 살기를 바라느냐?  그러나 항복하면 아무 일이 없을 것이다.  어느 무감놈

과 정을 통했는지 바로 일러라."

  너무도 억울한 호령이었다.  무수리는 별안간 하복부를 무수히 회초리에 얻어맞고 신음소

리를 내며

  "그 말씀은 너무나 억울합니다."

  "너 이년!  그래도 억울하다고 하느냐?  어서 바른대로 대어라.  그놈이 어느 놈이냐?"

  장비는 또 새로 싸리비를 뽑아내서 두 세 개를 합쳐가지고 있다가 말이 끝나자마자 무수

히 전신을 휘갈기니 무수리의 몸에는 손가락 굵기만한 기다란 선(線)이 시뻘겋게 일어났다.

  무수리가 악을 쓰자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무수리는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너 그래 자백하지 못할까?"

  장비는 또 다시 싸리채를 뽑아들고 전신에 잔채질을 했다.  아까 맞아서 부르텄던 자국이 

터져서 피가 흘렀다.  무수리의 몸은 어느 한곳 성한 곳이 없게 되었다. 

  "참, 고년 독물 중에도 무서운 독물이다.  이제는 낙형(烙刑)을 할 수밖에 없다.  백탄을 

피오놓은 화로와 인두를 어서 가져 오너라."

  화로와 인두는 미리 준비했던 듯이 즉시 가져왔다.

  "너 이년, 그래도 꿈쩍 않고서서 자백을 안할 모양이구나. 어디 불찜질 맛을 한번 보아라."

  장비는 새빨간 백탄 숯불 속에서 인두를 꺼내들더니 거침없이 무수리의 하체로 가져다가 

지지는 것이다.

  "이년 네가 상감을 모시던 때에도 이만치는 좋았으리라.  너 이 맛이 얼마나 좋은가 맛보

아라."

  장비는 오히려 미소까지 지어가며 이 짓을 하는데 무수리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얼굴을 

찡그리며 이를 바드득 갈았다.  누린내가 끼쳐 장비의 코로 들어가고 살이 타는 연기가 인

두 밑에서 보얗게 일어났다.  모시고 있던 나인들도 모두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리고는 

코를 막았다.

  "너, 그래도 뱃 속의 아이가 왕자라고 엉뚱한 말을 할까?  어서 그 아이의 아비놈을 자백

하여라."

  장비는 또 얼러대면서 다른 인두를 다시 빼어드는 것이었다. 이번 인두는 아주 빨갛게 달

구어져서 나무라도 당장 탈 지경이었다.  이 인두를 들고 악착스럽게 아귀같이 무수리를 바

라보는데 돌연 내전 저편으로부터 설레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비는 이 설레이는 소리에 귀가 쫑끗해서 색빨갛게 달구어진 인두를 도로 화로에 꽂고 

나인을 돌아보며 조용히 일렀다.

  "너 급히 나가 동정을 살펴 보아라."

  나인이 재빨리 뛰어나가더니 곧 되돌아 와서 황황히 아뢴다.

  "이를 어쩝니까.  상감마마께서 듭신답니다."

  이 말을 듣던 장비는 금방 눈이 휘둥그래지며 두 눈을 갈팡질팡 사면으로 돌리다가 저편 

추녀 끝에 낙숫물 받느라고 세워놓은 큰 독을 보았다.

  "얘, 이 계집을 번쩍 들어다가 저 담 밑에 앉혀놓고 이 독을 들씌워 놓아라."

  나인들은 황황히 묶은 것을 끄르며 입을 틀어 막은 것을 꺼내며 해서 옷에 피를 묻힐세라 

조심조심 사지를 드는데 잘 들지를 못하니까 장비가 겁과 암상이 일시에 일어나서 곧 달려

들어 계집을 잡아끌다가 잘못하여 옷에 피를 묻혔다.  그러나 장비는 당황 중에 그것을 알

지 못했다.

  이때 조궁인이 옆에서

  "중전마마께옵서는 화관을 쓰십소서."

  말하니까 그제서야 화관을 벗어 동댕이친 생각이 나서 얼른 방으로 들어가 화관을 들쓰며 

앞에 흐트러진 것을 치우라 하고 편전으로 나가려 하는데, 벌써 임금은 내전 툇마루까지 나

와 서서 눈을 좌우로 돌리며 무엇을 살피는 기색이었다.  

  장비는 너무나 황황망조 어쩔줄을 모르면서 그래도 가능한한 꾀을 내어서 간특한 애교의 

웃음으로 임금을 맞았다.

  "에그, 오늘은 별일이십니다그려.  웬일이십니까?"

  그러나 임금은 그 말에는 대답도 않고 여전히 담 밑으며 뜰이며 살펴보는 것이었다.  

  장비는 간이 콩알만 해졌다.  필시 어떤 년이 임금에게 고급(告急)을 해서 들어온 모양인

데 이 일이 탄로나고 보면 이 노릇을 어쩌는가 애가 바작바작 탔다.  이러면서 언뜻 보니 

퇴 앞을 치웠다는 꼴이 핏울방이 두어 곳 떨어진 채 있으므로 이것이 임금의 눈에 띄울까 

보아 얼른 임금 앞을 가리워서서 무엇이라 말을 붙이려 했다.

  이때 임금의 눈에는 장비의 옷고름에 붉은 피가 밤톨만치 묻어 있는 것이 보였다.  장비

가 뭐라고 입을 열려고 할 때 임금은 옆에 있는 무관을 돌아보고

  "네 지금 내려가서 저 담 밑에 놓인 저 독을 치워보아라."

  이런 말을 하며 장비의 낯빛을 살폈다.  아니나 다르랴, 이 말이 떨어지자 장비의 얼굴은 

순간 파랗게 질렸다.  그러나 장비는 곧 태연한 태도로 돌아가며 차디 찬 웃음을 입가에 지

으면서

  "원, 상감께서는 별 것을 다 시키십니다.  그 독은 왜 별안간 치우라 하십니까?"

  그러나 임금은 이 말은 들은 척도 아니하고 또 한번 재촉을 하였다.

  "네 머뭇거리지 말고 곧 거행하지 못할까?"

  분부가 다시 떨어지자 머뭇거리던 무감이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할 때다.

  "글쎄, 무엇 때문에 독을 옮기시려는 겁니까.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제발 그대로 두어주

십시오."

  장비의 태도는 극도로 당황해 하는 눈치가 보였다.

  "글쎄 무엇 때문에 그 독은 기어이 옮겨놓지 못하게 하오.  알 수 없는 일이구료.  제발 

그런 참견은 말아 주오."

  이렇게 대답하며 무감을 재촉해서

  "그, 머뭇거릴 게 무에냐.  냉큼 가서 치워라."

  무감은 드디어 그 담 밑으로 가서 독을 치웠다.

  "앗! 이게 웬일이냐?"

  독을 누이자 그 밑에는 한 젊은 계집이 몸에 실오리 하나 감지 아니한 채 피투성이가 되

어서 쓰러져 있지 아니한가.  그 계집은 정신을 잃고 죽은 듯이 보였다.

  "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셈이냐?"

  임금은 나인을 돌아보고 물었으나 모두 얼굴빛이 빨개져서 대답을 못하고 있다.

  무감은 나체가 된 시체가 나오자 놀라우면서도 역시 남자라 미안쩍어서 그대로 외면하며 

서있는데 임금은 무감을 보고

  "너는 그만 나가거라.  나가다가 대조전에 지밀상궁이 있을 터이니 곧 들어오라 해라."

  무감은 말없이 국궁하고 물러갔다.  이때 임금이 그 시체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의심없는 

최무수리가 분명했다.

  임금은 더욱 놀라왔다.  장비를 돌아보고 지극히 조용한 말씨로 물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요?"

  장비는 오히려 웃는 낯으로

  "저 계집이 무수리온데 어느 무감과 간통해서 자식을 배고 앙큼스럽게 상감을 모셔서 왕

자를 잉태했다 하며 상감마마를 욕되게 하였기에 그 죄를 다스렸던 것입니다."

  "..."

  임금은 대답 없이 한동안 의아와 분노의 눈초리로 장비를 쏘아보았다.

  "호호... 왜 이리 쏘아 보셔요?  만일 이 말을 내이신다면 도리어 상감 위신이 손상되십니

다.  그대로 나가주십시오."

  분명히 궁중 비자를 가까이 했다는 것을 조소하는 뜻으로 경멸의 눈초리를 던지는 것에 

틀림 없었다.  너무나 방자한 행동이었다.

  "그런 죄에는 저런 형벌을 해야 하는 법이요?"

  "호호... 왜 잘못된 일이 있습니까?"

  여전히 비웃는 말소리였다.  임금은 그만 격분했다.

  "에잇! 악독한 계집, 썩 물러가지 못할까."

  임금은 드디어 두 눈을 부릅뜨고 발을 굴렸다.  이때에야 장비는 주춤 물러섰다.  그러면

서도 할 말은 다했다.

  "아니 왜 이러세요.  저 계집이 무감과 간통했던 사실이 있고 증거가 있어도 그렇게 싸고 

도시겠어요?"

  "뭐라구?"

  "참 딱한 노릇입니다.  저 계집을 가까이 하셨대서 이다지도 저 계집을 옹하시지마는 너

무나 딱합니다.  체면을 생각하십시오.  상감의 몸으로서 그래 겨우 궁 비자 저 계집을..."

  "무슨 딴 말인가?  냉큼 물러나지 못할까?"

  임금은 또 발을 굴러 호령했다.  그러나 장비는 눈 한번 깜짝이지 않고 그대로 서서 임금

을 맞 쏘아보고 있다.  이때 지밀 상궁이 들어왔다.

  "무슨 분부이십니까?"

  "저 담 밑을 보오."

  "앗! 저게 웬일이옵니까.  누구이옵니까?"

  늙은 상궁은 임금을 바라보고 또 장비를 바라보고 눈치를 살핀다.

  "그 말은 나중에 하고 급히 나아가 옷 한벌을 들여다 입히고 누구에게 일러서 저 계집을 

급히 구하도록 하오.  우선 상궁의 처소로 데려다가 조섭을 시키게 해야겠소."

  늙은 상궁은 맨발로 뛰어내려가서 자기가 입고 있던 옷치마를 벗어 그 알몸을 덮어 주고 

곧 황황히 나가서 나인 몇 사람을 불러가지고 들어왔다. 

  임금은 상굴을 보고

  "아직 숨기가 붙었나 만져보오."

  상궁은 자세히 맥과 가슴을 짚어보고는

  "아직 따뜻한 기운이 있으니 소생할 가망이 있을 것 같습니다."

  대답하고 나인에게 업혀 가지고 자기 처소로 돌아가자 임금은 격노한 빛으로 한번 훑어보

고는 그대로 나가버렸다.

  다행히 최씨는 그 후 구호를 받아서 소생이 되었다.

  임금은 최씨에게 소원(昭媛)이라는 직첩을 내리고 그 다음에는 금위(禁衛)와 여관을 수십

명씩 교대해 가면서 최소원을 극진히 보호케 하였다.

  이런지 한달이 지난 숙종 이십년 구월 십삼일 새벽에 최소원은 드디어 옥동자를 낳으니 

이때 임금의 나이는 삼십사세였다.

  임금은 새로 태어난 왕자를 보고 전날 제일 왕자 탄생 때보다 한층 더 기뻐하였다.  이때 

최소원은 조용히 일어나서 임금에게 절하며

  "이 왕자는 전날 마마께서 탄신망례(誕辰望禮)를 드렸던 까닭에 탄생된 바이온즉 그 일을 

생각하시더라도 하루 바삐 전 중전마마를 복위시켜 주옵소서."

  이런 말을 아외었다.

  "오냐, 낸들 생각이 없겠느냐마는 아직 무슨 일을 생각하는 중이다.  네 정성이 그러하니 

곧 복위를 시키겠다."

  임금은 이렇게 대답했다.  바로 이럴즈음 장비는 임금에게 그런 지경을 당하고도 오히려 

최소원을 살해하려고 최소원의 처소에 장희재를 시켜서 독약을 들여가려다 탄로되었다.  임

금은 극도로 진노하고 그날로 왕비의 직첩을 거두고 장씨를 궐 밖으로 내쫓았다.  그와 동

시에 장희재도 즉각 의금부에 잡어가두고 그의 재산을 몰수했다.

  한때 자기의 은인인 민중전의 지위를 찬탈해서 스스로 왕비의 자리에 나아간지 무릇 육년

이오, 민비의 은혜를 입어서 재입궐한지 무릇 구년 만에 장씨는 재추방을 당하게 된 것이다.

  장씨가 이렇게 되고 민비의 복위전지(復位傳旨)가 내리게 되자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러면 그렇지.  우리 상감께서 착한 민비를 그대로 둘 리가 있나.  이제야 나라가 바로 

잡히게 될 것이다."

  이런 말들을 하였다.


  [ 女難春秋 ]   <張禧嬪의 最後>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女 難 春 秋 

    張禧嬪의 最後



   민비(閔妃=仁顯王后)가 복위해서 환궁하니 이때 민비의 나이는 이십팔세였고 임금은 삼

십사세였다.

  이때부터 양전(兩殿)의 부부애는 재출발이 된 듯 다정스러웠고 최숙빈도 이십여세의 나이

로 양전의 사랑을 받으면서 화합한 날을 보내게 되니 궁중은 저으기 안정되었다.

  이런 반면에 장비는 장희빈이란 예전 작호 그대로 초전골에 있는 조그마한 초가집에서 처

량한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장희빈은 오늘날 이 지경이 되었어도 오히려 민비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자기 죄과에 대한 부끄러움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또 민중전과 최숙

빈을 욕하고 저주하면서 어떻게 하면 그들의 원수를 갚아 볼까 악착스럽게 벼르고 있었다.

  민비가 환궁한지 어느덧 팔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민비는 무엇 때문인지 항상 신

체에 잔병이 생겨서 자리에 눕는 날이 많았다.  한번은 병세가 좀 회복되어서 기동을 하자 

구미를 돋구어 드린다고 최숙빈이 게젓을 갖다가 바친 일이 있었다.

  아직 첫가을이라 마침 쓸 만한 것이 없어서 궁중에 있던 것을 몇 개쯤 미음 반찬으로 올

렸더니 민비는 여기에 구미를 붙이고

  "여보게, 이 게장이 유난히 다니 웬일인가?  이렇게 맛좋은 게장은 처음 먹어보네."

  이런 말을 하였다.

  "아무것이라도 잡수시고 구미를 얻으셔야 하지요."

  최숙빈은 너무나 다행해서 이렇게 말했다.  이러는 한편 사람을 또 보내서 햇 게젓이 결

이 삭는 대로 들여오라 일렀다.  그런데 왕비는 이 게젓을 먹고 별안간 정신을 잃는 듯 누

워버렸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최숙빈은 그 증세가 심상치 않은 것을 깨달았다.  두어 시간 후 왕비는 서둘 새 없이 임

종을 맞이했다.

  왕비는 호흡을 모두어 쉬게 되는 마지막 시간까지 임금을 보고

  "저 세자를 생각하시더라도 아무쪼록 그 친생모를 너무 슬프게 대접치 말아 주옵소서."

  이런 말을 하고 열네살 된 세자를 앞에 불러 어루만지며

  "네 어미가 덕이 박해서 네 친생모(親生母)에게 미안한 일이 많았다.  훗일에 친생모를 보

거는 부디 내 말을 전해다오."

  이렇게 말을 한 후에 즉시 숨이 가빠지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왕비가 이렇게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승하하자 임금을 비롯하여 모든 측근들은 의심을 

잃으키게 되어서 드디어 식사 진공했던 일을 살피게 되었다.

  숙빈은 언뜻 게장밖에 의심나는 게 없어서 그 게장을 조금 맛을 보니 과연 게장의 단맛이 

좀 이상스러웠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몰라도 분명히 게장 속에 꿀을 넣었던 것이다.  숙빈

은 곧 게장이 궁중에까지 들어오게 된 그 경로를 살펴 보았다.

  이 게장을 수랏간에서 편전까지 올리기는 김나인(金內人)이다.  편전에서 최숙빈이 몸소 

미음상을 드려서 올렸던 터이다.

  최숙빈은 곧 김나인을 은밀한 곳에 가두어 놓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임금은 즉시 친국을 

시작했다.

  금부나장(禁府羅將)이 몇 번 때리지도 아니해서 자백은 순순히 나왔다.  김나인은 장희빈

의 밀계를 그대로 받아서 이번에 그런 금기(禁忌) 음식을 이용해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었

다.  

  임금은 더 물을 필요도 없다는 듯 김나인을 금부로 내보내고 그 즉석에서 장희빈에게 사

약(賜藥)을 내리었다. 

  이 전교가 내리자 열네살 된 세자는 가뜩이나 모비상(母妃喪)을 당해서 망극한 중에 이중

(二重)으로 친생모(親生母)의 극형 처분을 듣게 되니 그 애통해하는 정경은 이루 말할 수 없

었다.

  그러나 최후까지 정성을 다해 어머니를 구해보리라 결심한 어린 세자는 부왕(父王)의 처

소 앞뜰에 거적을 펴고 석고대죄하며 아뢰었다.

  "소좌를 어미와 함께 죽여 주소서."

  이렇게 아뢰면서 통곡하고, 한편으로는 입직 대신들을 보는대로

  "우리 어머니를 구해 주시오."

하고 애원했다.  그러나 임금은 처음부터 결심한 바가 있는 듯 조금도 세자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한편 장희빈은 최후의 민비 치독사건(置毒事件)이 탄로되어 사약까지 받게 되자 갑자기 

마음이 이상하게 변하며 사약을 받아놓고 나인을 궐내로 보내어

  "사약을 내리시니 먹기는 하겠사오나 생전에 모자(母子)가 마지막 영결이라도 하고자 하오

니, 세자를 잠간만 만나게 해주시면 유한이 없이 죽겠나이다."

  이런 말을 전하게 했다.

  임금은 이 말을 듣고 무엇보다도 애걸통곡하는 세자가 측은해서 우선 세자를 위로해 줄 

양으로 

  "네가 가서 마지막 네 어미를 대면하고 오너라."

  이런 말로 이르고 늙은 내시를 따르게 하여 내어보냈다.  세자는 그 친생모를 대하자 눈

물을 좌르르 흘리면서

  "어머님 이 노릇을 어떻게 한단 말씀입니까?"

하면서 어머니의 앞으로 달려들어 통곡을 했다.  그러나 장희빈은 세자를 대하자, 갑자기 정

신에 이상이 생기고 마음은 아주 악독하고도 광란적으로 변했다.  으레 눈물로 세자를 맞이

하련마는 돌연 눈빛이 싸늘해지고 얼굴에 독기가 서리었다.

  그러다가 세자가 자기를 향해서 어머님! 하고 울며 달려들 때에 장희빈은 번개같이 세자

의 하채를 부여잡고 죽어라 하고 아래로 나꾸어챘다.

  울고 있던 세자가 금시에 비병을 울리고 당장 까무라치는 바람에 옆에 있던 사람들이 달

려들어 장희빈을 떼어놓았다.  장희빈은 여전히 독기가 서린 말로

  "내가 이지경이 되어 죽게 되는 처지에 너를 남겨 두어서 이가의 혈통을 잇게 하고 민가

년의 제사를 지내게 할 내가 아니다.  너 죽이고 나 죽으면 그만이다."

  이런 소리를 하며 놓쳐버린 세자의 하초를 다시 잡으려고 세자에게 달려드는 것을 사람들

이 억지로 떼내어 밀쳐놓고 그대로 세자를 안아서 밖으로 내갔다.

  세자의 일행이 그렇게 돌아가자 장희빈은 약사발을 들어서 동댕이치고 대청마루 보꾹에 

줄을 매어 목을 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희빈은 이와같이 악독한 최후를 마쳤으나 궁중에서는 갑자기 시체로 변한 세자가 들어

오게 되자 소동을 일으키고 급히 응급치료를 가하는 한편 어의(御醫)들이 있는 대로 모여들

어서 구호를 하게 되었다.

  임금은 이 광경을 보고

  "오, 이게 무슨 실수란 말이냐? 이제 나이 사십에 이다지도 파란이 많다는 말이냐.  이럴

바에는 차라리 천인(賤人)의 집에라도 태어나서 일생을 마음 편히 살다가 죽느니만 못하다."

  이런 말을 하며 한숨만 쉬었다.

  세자는 얼마 후에 명의(名醫)와 약의 효과로 소생되고 차차 기운을 차려서 기동을 할 수

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원체 급소를 다친 상처라 끝끝내 그 결과가 좋지 못해서 세자의 

정신은 희미해지고 양쪽 어깨가 으쓱 올라가며 걸음걸이가 내시처럼 되고 말았다.  이런데

다가 한달이면 두세차례씩 누워 있게 되니 이럴 때마다 부왕의 초조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가 없었다.

  그 이듬해 구월 삼십일 인현 민비(仁顯閔妃)의 복제가 끝나자 대신들 중에서는 임금에게 

다시 왕비 간택을 고하는 자가 있게 되었다.

  임금은 신하들의 권고로 재삼 왕비 간택의 영을 내리고 왕비를 몰색하게 하였다.  이때는 

조정의 재상들이 대게 서인들이었는데 서인의 집정한지 여러 해가 되자 이들은 자기네들끼

리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의 두 파로 갈려서 서로 세력 다툼을 하고 있었다.

  임금은 이러한 당파싸움하는 집안에서는 아무리 좋은 왕비 재목이 있다 하더라도 결코 간

택하지 않을 결심을 했다.  임금은 외척과 당파싸움의 폐해를 뻐저리게 느껴왔던 것이다.

  여러 방면으로 살펴본 결과 경주 김씨인 김주신(金株臣)의 집에 십육세 된 규수가 있다는 

말을 듣고 상궁을 보내서 간선한 결과 마음에 들게 되어 즉시 김주신의 딸로 왕비를 삼으니 

이가 인원 김씨(仁元金氏)인 것이다.

  김주신은 그 친척들이 소론이므로 대개 소론으로 지목을 받기는 하나, 그 자신은 어떠한 

당색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집을 택했던 것이다.

  세자는 십육세 때에 병중인데 불구하고 청송부원군 심호(沈浩)의 따님으로 세자빈(世子嬪)

을 맞이하니 세자빈의 나이는 두해 위가 되는 십팔세요, 모비(母妃) 인원왕후(仁元王后)보다 

한 살 위가 되었다.

  이와 같은 나이로 입궐한 세자빈 심씨는 현숙한 여성이긴 하지만 남편이 병신의 몸인 까

닭에 늘 우울한 세월을 보내고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러다가 숙종 삼십일년 가을부터 동

궁의 병이 저으기 평복되는 듯하므로 임금은 동궁에게 국정을 대리시키겠다는 분부를 내리

고 스스로 물러나 앉았다.

  동궁의 존재는 뚜렷해졌다.  그러나 아직 왕위에 오르기도 전이었는데 제 일왕자를 싸고 

돌던 일당, 즉 남인 일당들은 다시 준동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동궁의 마음을 사서 저 서인들을 있는대로 전멸시켜 볼까..."

  이런 생각을 하기에 여가가 없었다.  이 눈치를 알아차린 서인들도 남인을 어떻게 하면 

억누를까 해서 여기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기에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제일왕자 연영군(延英君)과 제이왕자 연잉군(延 君) 형제 사이는 그 우애가 지극

하였다.  동궁은 여섯해 아래 되는 아우를 극진히 사랑하고 아우되는 제이왕자는 그 형을 

극진히 공경하고 따랐다.  그런 처지였지마는 큰 왕자를 옹호하는 당파(남인)들은 큰 왕자를 

해하려고 겨루어서 드디어 이 형당(兄黨)과 제당(弟黨)끼리 왕위를 다투는 큰 싸움을 또 한

번 일으키고야 말았다. 

  동궁이 대리 청정(聽政)의 어명을 받은 후에도 종종 자리에 눕게 되자 제당(弟黨)들은 동

궁의 건장이 좋지 못하니 아우로 자리를 바꾸자고 여러차례 여론을 일으켰던 것이다.

  동궁이 국정을 대리하게 되어 사년이 지나간 경자년(庚子年), 숙종은 환후가 침중해지기 

시작하더니 그해 유월 팔일 드디어 육십세란 나이로 빈천의 길을 떠나고 말았다. 

  숙종이 재위 사십육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그 뒤를 이어서 동궁이 즉위하니 이가 곧 경종

(景宗)이다.


  [ 女難春秋 ]   <暗雲 짙은 宮中>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女 難 春 秋 

    暗雲 짙은 宮中



   경종(景宗=西紀 1,720-1,724)은 사년간이나 부왕을 보좌해서 국정을 대리한 경험이 있으

므로 정사가 그다지 서툴지 않았다.  그러나 신왕은 원체 약질이어서 전날의 병이 재발하여 

자주 병석에 눕게 되니, 차츰 정신까지 흐려져서 의식이 똑똑치 못한 때가 많았다.

  며칠에 한번씩 의식이 회복되는 때를 타서 공사를 처단하게 되니 궁정이 침체되고 백반 

정령(政令)이 문란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따금 경종은 의식이 회복되면

  "내가 병들어 누워서 국정을 돌아보지 못했으니 나라 일이 오죽 문란하랴.  어서 밀린 공

사를 들여다 곧 처단해 치우리라."

  이렇게 말하다가도 산적된 공사를 대하고 보면 그만 진력이 나서

  "얘 모두 귀찮다.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나는 좀 쉬어야겠다."

  이런 말로 대소 사건의 처단을 모두 승지(承旨), 사관(史官), 주서(注書)들에게 맡겨버리는 

것이었다.  또 어느 조관이 소대(召對)를 청할때면 눈살을 찌푸리고 불러들여서 그의 아룀을 

듣다가 지루한 생각이 날 때면

  "그만 말해도 알아 듣겠다.  그대로 나가서 기다려라."

  내어보내고 하루 이틀 수일이 지나도 하등 비답이 없는 것이었다.

  측근자들이 궁중형편을 아뢰고 어찌하오리까하고 청할 때도 신왕은 그저 귀찮게만 생각하



  "너희들 생각대로 좋게 처리해서 대과 없이 거행하려무나."

  이러는 것이었다.

  이쯤되니 국정이 침체하고 혼탁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승지나 사관을 비롯하여 나

인과 환관들은 이런 것을 기회 삼아서,  무슨 중대한 주청(奏請)이나 상소가 들어오면 그대

로 끼고 있다가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또는 자기의 생색이나도록 처결해서 내어보냈다.  그

러니 나라 일은 국왕이 처리하는 것이 아니고 측근자들의 장중(掌中) 일이 되고 마는 것이

었다.

  이듬해 신축년(辛丑年)이 되었다.  이 해가 경종 원년(景宗元年)이었다.  국정이 더욱 침체

해지는 중에 신왕의 환후도 가일층 침중하게 되니 무엇보다도 국본(國本)을 내세우는 일이 

급하다는 의논이 대두하게 되었다.

  이해 팔월 이십일에는 우의정 조태구(趙泰耉) 하나만을 제외하고 모든 노론파 대신들이 

문무백관들을 거느리고 궐내에 들어와 합문(閤門)밖에 엎드리며

  "성상의 환후가 침중한 이때이오니 하루바삐 세제(世弟)를 동궁으로 책봉하시와 국본을 튼

튼케 하옵서소."

하는 상소를 올리고 비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어느 때이고 반대파는 있는 법이어서 화단

(禍端)은 다시 일어나 크나 큰 참극을 연출하게 되었다. 

  경종이 아직 동궁으로 있을 때에 그 세자빈 단의 심씨(端懿沈氏)는 아깝게도 이십육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그 이듬해에 어유구(魚有龜)의 딸을 맞이해서 계빈(繼嬪)을 삼았다.

  계빈의 아버지 어유구는 외척의 이해 득실을 밝히면서도 궁중 형편을 살펴서 자기의 진퇴

향배를 민첩하게 행동하는 인물이었다.

  이런 까닭에 노론 재상의 영수 김창집(金昌集)은 어유구의 모든 행동을 경계하고 그를 감

시 할 양으로 은밀히 그의 집으로 밀정을 들여 보냈으니 그밀정은 바로 어유구의 매부 김순

행(金純行)이었다.  김순행은 김창집의 심복이 되어 가지고 어유구의 집을 자주 드나들며 친

한 척하고 어유구의 동정을 살핀 결과 어유구가 딸 어비(魚妃)를 책동해서 경종(景宗)이 아

들을 낳을 가망이 없음을 기화로 소론들과 한패가 되어서 은근히 종친 중에서 적당한 아이

를 데려다가 세자를 책봉하려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지경이 되면 제이왕자 연잉군(延 君)을 옹호해 오던 노론 당파는 여지없이 몰락하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최근에 와서 경종이 양자(養子) 문제를 일으켜서 새 주장을 내세우는 

것은 어유구 일당의 음모라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노론파에서는 마침내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판중추부사 조태채(趙

泰采) 등이 이조판서 이의현(李宜顯), 호조판서 민진원(閔鎭遠), 병조판서 이만성(李晩成), 형

조판서 이관명(李觀命), 공조판서겸훈련대장 이홍술(李弘述), 한성판윤 이우항(李宇恒), 대사헌 

홍계적(洪啓迪), 대사간 홍석보(洪錫輔), 도승지 조영복(趙榮福) 등을 인솔하고 입궐해서 세제 

동궁 책봉을 주청했던 것이다.

  이것은 이들이 다만 자기들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일로 했던 것이 아니고 이들의 선배요 

동지가 되는 이이명(李 命)이 일찍이 선왕으로부터 간곡한 유촉(遺囑)을 받았던 때문에 그 

유촉을 받들겠다는 충의로써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면 이이명(李 命)은 숙종으로부터 어떠한 유촉을 받았던가?  이야기는 잠깐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 없다.

  때는 숙종 사십삼년 팔월 어느날.

  숙종은 환후가 침중해지자 그날은 평소부터 신임하던 우의정 이이명이 약방에 입적하게 

되었다.  원래 국가의 규칙으로 말하면 평시든지 병환중이든지 군왕이 정승과 대할 때는 반

드시 승지가 그 군신 사이의 범절을 살피고 사관(史官)이 군신 사이의 대화를 그록하는 것

이 철칙으로 되어 있는 법이다.  그런데 이때는 승지와 사관을 물리치고 소위 독대(獨對)를 

허락하였다.

  임금은 이이명을 가까이 불러세우고

  "동궁이 병이 많으니 이번 기회에 용단을 내서려 제이왕자로 동궁을 고쳐 세우고 싶소."

  이런 의사를 표시하였다.

  이이명은 임금의 분부가 지당한 의견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인정과 의리를 전혀 몰각

할수도 없어서 이이명은 임금의 표정을 살피며

  "지금 하교하신바 동궁의 자리를 바꾸겠다 하시는 것은 신등이 아무리 무식하오나 감히 

봉행치 못하겠사옵니다.  동궁이 아무리 건강치 못하오나 신 등이 힘을 합해서 보필하오면 

대리청정쯤 못하실 바 없으니, 정 몸이 괴로우시면 동궁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이라도 내리시

는 게 마땅한 줄 아룁니다."

하고 아뢰었으므로 임금도 그 말을 옳게 여기고 다음날로 세자 대리청정을 분부하게 된 것

이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우의정의 이 독대사건을 제각기 억측하며 이이명이 자기의 의견을 임

금에게 고해서 세자의 대리청정을 억지로 하게 만들었다고 떠들어댔다.  독대라는 것도 깜

짝 놀랄만한 변고인데다가 더욱이 그 독대의 자리에서 임금에게 왕위를 세자에게 전하라고 

했다는 것은 도저히 그대로 용인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안산(安山) 고을에 은퇴해 있던 원임영중추부사 윤지완(尹趾完)은 소론의 영수로서 당년 

구십 노인이었으나 이 소문을 듣고 크게 놀라와서 펄펄 뛰면서

  "이런 목을 베어 죽일 놈이 있나.  주상께서 살아 계신데 왕위를 세자에게 전하라니, 그래 

그런 역적놈을 그대로 둔단 말이냐?  내 아무리 구십 노병(老病)이지마는 이 역적놈을 죽이

고 올 것이다.  무엇보다도 정승 명색으로 군왕께 아첨해서 밀실에서 사사로이 독대해 가면

서 이와같이 할 수가 있다는 말이냐.  이놈을 그대로 두면 나라가 망할 것이다.  하루 바삐 

올라갈 터이나 노상에서 죽을지도 모르니 아주 관을 짜가지고 자비 뒤에 이끌고 가야겠다."

  이런 말을 외치고 즉시 관을 짜서 이끌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서울 올라와서 소론 

당파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으니 시골서 듣던바와는 딴판이었다.  즉 원래 이이명이 독대

하는 자리에서 임금이 자진 동궁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려는 것을 이이명은 동궁의 건강이 좋

지 못한 것을 핑계 삼아서 동궁의 자리를 제이왕자 연잉군(延 君)에게 바꾸어 연잉군으로

써 대리청정을 시키시라고 아뢰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노론 이이명을 몹쓸 곳으로 몰아넣

기 좋은 말이라 윤지완은 더욱 분기해서

  "이이명이 왕위를 제이왕자에게 옮기려는 전제(前提)의 행동이니 그대로 둘 수 없는 일이

다."

  이런 여론을 일으키고 드디어 상소를 지어서 위에 올렸다.

  < 명분이 일국의 정승으로 임금의 사신(私臣)이 되어 밀실에서 주상께 독대하고 그러는 

중에도 주상 다음으로 받들어야 할 동궁을 까닭없이 모해하고 임금의 권위를 세자에게 옮기

십시오 하는 이런 무도무엄한 말을 아뢰었다 하오니 이런 자는 곧 목을 베어서 국가의 기강

을 세워놓지 않으면 안 될 줄 압니다. >

  이런 상소가 들어오자 임금은 윤지완에게

  < 동궁에게 대리청정을 시키자는 것은 나의 병세를 염려해서 내가 말한 바이며 이이명이 

그와같이 한 것이 아니고 또 동궁에게 기위 대리청정을 시킬 바에는 병약한 동궁보다는 튼

튼한 연잉군을 동궁으로 봉하겠다고 하니까 이이명은 도리어 인정과 의리상으로 차마 큰 왕

자를 버릴 수 없다고 도리어 동궁을 두호했던 바이다.  그리고 승지와 사관만 없었지 측근

자들이 다 옆에 있었던 일인데 독대라는 말이 어디 당한 말이냐?  허무한 풍설을 듣고 구

십 노병으로 관을 끌고 올라와서 이와같이 세상의 이목을 소연케 하니 이런 경솔한 처사로 

어찌 일국의 원로 체면을 보존할 것이랴.  너무 한심하도다. >

  이렇게 비답을 내리고 그 상소를 일소에 붙였다.


   이런 주목이 있는 가운데 동궁이 대리청정을 하게 되고, 사년 후에는 동궁이 즉위하고, 

즉위한 후에 다시 임금의 환후가 치중해지니 나라의 앞길을 근심하는 대신들이 예전 숙종이 

제이왕자를 부탁하던 그 유지를 좇아서 하루바삐 왕세제(王世弟)로 동궁을 책봉하려는 것은 

조금도 그릇된 점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그 형당(兄黨) 소론파들은 이일을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도리어 

환후 중에 있는 군왕의 지위를 엿보는 행동인즉 도저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 들고 일

어났다.

  원래 영의정 김창집 이하 여러 신하들의 연좌건백(連坐建白) 때에, 대신들 중에서 오직 우

의정 조태구만이 빠져 있었다.  그 까닭은 이때 있으면 반드시 이 일을 반대해서 연좌건백

에 방해가 될 것이므로 마침 그가 향제로 내려가 있는 동안을 택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후 조태구가 서울로 돌아와서 모든 것을 알게되자 그는 본격적으로 소론들과 

손을 맞잡고 세제 동궁 책봉문제를 절대 반대하고 나섰다.  그리고 이번 연좌건백의 비답이

  < 상소한 뜻은 여러 가지로 더 생각해 본 후에 신중히 처단할 터이니 아직 기다리라. >

  이런 뜻으로 보낸 것을 필시 불윤(不允)에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부원군이 유구와 함

께 왕비 어씨(魚氏)를 움직여서 임금에게 양자를 들여 동궁을 세우라고 권했다.  그러나 임

금은 이런 말에는 도무지 대답을 안하고 더욱이 왕대비 인원 김씨(仁元金氏)가 이 말을 듣

고서

  < 효종, 태종 이래로 그 혈통이 계승되는 왕실이요.  또 임금의 춘추가 아직도 젊거늘 그 

누구가 양자를 의논하며, 만일 무슨 변고가 있다 하더라도 선왕의 혈통이 또 한분 있어 아

주 혈통이 끊이지 않을 터인데 그누가 망녕된 짓을 한다는 말이냐? >

 이러한 엄교(嚴敎)가 내리게 되어서 드디어 형당(兄黨)들은 목을 움찔하고 물러나고, 왕대비

의 주장대로 왕세자가 동궁에 책봉이 되었던 것이다.

  그 해 십월 십이일에 조성복(趙聖復)이 또 상소를 올리었다.

  < 상감께서 나날이 환후 침중하시고 나라의 일이 허다히 지체되고 있는 이때에 왕세제께

서 이미 동궁에 책봉되었은즉 이대로 환후 평복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동궁에게 국정을 대

리청정케 하시는 일이 당연한 줄 아뢰는 바입니다.  바라옵건대 널리 통촉하여 처분하시옵

소서. >

  이 상소가 한번 오르자 세상은 또다시 소란하게 되었다.  조성복은 상소가 오르던 때는  

한창 경종(景宗)의 환세가 침중하게 된 때라 무슨 일이든지 그저 귀찮게만 생각하던 무렵이

다.  이런 때에 이런 상소를 받으니 임금은 매우 반가와 하였다.  더욱이 앞서 말한 바와 같

이 경종은 그 아우를 극진히 사랑하고 믿는 처지이므로 상소를 받은 즉시로 어떤 굳은 결심

을 하고 다음날 정원에 전지(傳旨)를 내리었다.

  < 나의 병세가 한결같이 침중하여 회복될 가망이 없고, 나라의 일이 침체되어 하루가 바

쁘니 왕세자에게 국정을 대리케 하여 만기(萬機)를 처단케 하노라. >

  이 전교가 한번 내리자 조정은 갑자기 슬렁거렸고, 더욱이 소론 재상들은 큰 변이나 일어

난 듯이 청황망조했다.  이번 처분에 대해서는 노론 일당들도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임금의 병세가 침중하여 국정을 세제(世弟)에게 맡긴다는 것이지만, 그러나 지금까지 그 임

금을 섬겨오던 처지로서 너무나 섭섭하고 송구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먼저 삼사(三司)에서 간지(諫止)했으나 듣지 않았고, 다음에 사대신(김창섭, 조태채, 이건명, 

이이명)이 연좌 합계로서

  "연전에 선대왕 생존시에 동궁으로 계셔서 청정하던 그 정도로 보필만 시키실 뿐이지 만

기(萬機)를 다 맡기신다 함은 너무도 황공 불안하옵니다."

하고 아뢰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불윤하였을 뿐이다.

  좌참찬 최석항(崔錫恒)은 

  "이번 전교는 만만부당하오니 곧 거두어 주옵소서."

하고 끝까지 역설했으나  다만

  "그만 물러 가거라."

  한 마디로 물리쳐 버리고 왕세제 대리청정을 고집하였다.  이 쯤 되고 보니 소론파의 양

자 책립계획은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노론파에서 옹호하던 세제 추대계획은 거의 이루어진 

셈이 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소론들은 장차 노론의 압박을 받을 생각을 하니 참으로 기가 막혔다.  조태구는 

밤중에 갑자기 내전으로 들어가서 정원을 통해 소대(召對)를 청했다.  이때 입직승지는 밤중

에 정승의 소대는 정원에서 아뢰어 올릴 수 없다고 거절했다.  조태구는 너무도 괘씸했다.  

입직승지가 괘씸한 것이 아니라 노론파 정승은 마음대로 소대를 허락하고 소론 정승에게는 

이와같이 미리 방어진을 쳐둔 노론파의 행패가 괘씸했던 것이다.

  그는 분기를 참다 못해 무감을 시켜서 이 뜻을 곧 곤순전에 아뢰었다.

  "시급한 국사로 밤을 가리지 않고 알현을 청했던 바인데, 정원의 입직승지가 알현을 허락

치 않으오니 곧 전하를 뵙게 주선해 주십소서."

하고 간청했다.

  조태구라 하면 왕비 어씨도 그가 부친의 동지인 것을 알고 있는 터라, 곧 어비는 임금의 

침전으로 가서 임금에게

  "지금 좌의정 조태구가 시급한 일로 야반인데도 불구하고 입궐을 했는데 건방진 입직승지

가 들이지 않는다 하오니 군신지간을 이와같이 막는 자를 치워버리시고 곧 좌의정을 인견하

옵소서."

  이렇게 아뢰었다.

  요즘 병세가 더욱 침중해짐에 따라 정신이 시시각각으로 변태를 일으키는 임금은 이말을 

듣고 노기를 띄우며

  "저런 죽일 놈이 있느냐.  어째서 대신의 고급(告急)하는 길을 막는단 말이냐.  곧 입직승

지라는 놈을 불러들여라."

하고 내관에게 분부를 내렸다.

  조금 후에 조태구가 들어왔다.  조태구는 밤이 깊도록 이번 왕세제 대리청정이 만만부당

할 뿐 아니라 이렇게 하면 민심이 동요되고 불길한 일까지 일어날 기미가 있다, 하고 역설

을 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이러한 조태구의 말까지도 물리치고 듣지 않았다.

  김일경(金一鏡)은 광성부원군 김만기(金萬基)의 족질(族侄)로서 김만기가 부귀할 때에 그 

집을 출입했다.  그는 문장과 변론이 뛰어나고 지략이 있는 인물로서 김만기의 후대를 받아 

엄연히 노론과 선비로서 한 몫을 볼만하였다.  그런데 김만기가 얼맛동안 지내면서 살펴보

니 그의 본심이 흉악무도하므로 괄세를 하고 배척을 했다.  그러자 그는 김만기에게 감정을 

품고 소론의 거두 이사상(李師尙), 유봉휘(柳鳳輝) 등을 찾아가서 아첨을 했다.

  김일경이 영변부사(寧邊府使)로 있을 때 궁중 장번내시(長番內侍)로 있는 박상검(朴尙儉)이

가 영변 출신으로 그 세력이 등등한 것을 알고 박상검의 일족을 잘 보살펴 주었다.  한번은 

박상검이 고향에 왔다가 김일경이 자기 일족에게 고맙게 구는 것을 알고 손수 찾아가서 치

사하며 이 은혜는 언제든지 꼭 갚겠노라고 말하며 돌아갔다.  그 후 김일경이 서울로 돌아

와서 박상검의 집을 드나들게 되니 두 사람은 창자를 서로 맞대는 친한 사이가 되었다.

  박상검은 장희빈 득세 당시에 그의 신임을 받아서 남인과 소론들에게 충성을 바치며 지내

온자였다.  이사상, 유봉휘를 사사(師事)하던 김일경은 그들을 통해서 소론들과 친했기 때문

에 이 무렵에는 조태구와도 친한 교분을 갖고 있었다.

  소론 일파는 드디어 김일경을 통해 박상검을 움직이고, 박상검은 그의 심복 내시 문유도

(文有道)를 통해 나인 석렬(石烈), 필정(必貞) 등을 시켜 궁중 연락을 했다. 이러한 기구(機構)

를 짜놓은 다음에 김일경은 이진유(李眞儒) 등 여섯 사람의 동지와 함께 상소문을 올렸다.

  <이번 사대신(四大臣)이 왕세제 대리청정을 간지(諫止)하지 않는 까닭은 그들이 그 일을 

일찍부터 권주(權契)하려 했던 일인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런 권주를 하려는 뜻은 틀림 없이 

왕세제를 추대해서 왕위를 엿보려는 흉계이오니 그 흉계를 사전에 밝혀서 다스리옵소서.>

  이런 상소를 올린 후에 김일경은 다시 목호롱(睦虎龍) 같은 늙은 원로를 시켜 또 한번 사

대신을 성토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 사대신(四大臣)이 이번에 군왕에게 강박으로써 대리청정을 시켰다 하오니 이것은 역죄

의 죄로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지금 노론 재상들은 갖은 음모로써 병중에 계신 상감의 신

변을 살피면서 불칙한 흉계를 꾸미고 있습니다.  당장 처벌을 내려 주십시오. >

  이런 묵호룡의 상소는 이진유의 상소를 더욱 힘있게 밀어 주는 것이 되었다.

  이때 임금의 병세가 더욱 위중하여지자 박상검은 이 상소문을 나인 석렬을 시켜 왕비께 

올리게 하였다.  왕비는 이 글을 보고 너무나 놀랍고 기가 막혀서 곧 신임하는 박상검을 불

러 그 처리 방법을 물었다.  여기서 박상검은 왕비에게 자기의 의견을 낱낱이 다 아뢰었다.

  왕비는 즉시 왕명을 칭탁하고 병석에 누운 임금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사대신의 관직을 

삭탈하고 하옥시키라는 전교를 내렸다.

  그날로 최석항(崔錫恒)이 위관(委官)이 되고 남인 심단(沈檀)이 금부당상이 되고 소론 이삼

(李森)이 포도대장이 되어서 마음대로 혹독한 형벌로 사대신을 형살(刑殺)시키고 거기에 연

결시켜서 노론과 한편이 되었던 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내쫓고 하니, 그 수효가 실로 수백명

에 달했다.  이 일이 경종 원년 신축년(辛丑年)서부터 그 이듬해 임인년(壬寅年)까지에 걸쳐

서 일이난 사건인 때문에 신임무옥(辛壬誣獄) 또는 사화(士禍)라 한다.

  이렇게 노론 조정이 쓰러진 후에는 조태구가 영의정이 되고 최규서(崔奎瑞)가 좌의정이 

되고 최석항이 우의정이 되고 이하 육조판서가 차례로 소론으로 돌아가니 세상은 갑자기 갑

술년(甲戌年) 장비(張妃) 폐출 이전의 소론 시대로 돌아간 듯이 보였다.  이제 소론은 부귀영

화를 마음대로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소론들이 오직 두려워하는 것은 왕세제의 

존재였다.

  언제든지 왕세제가 즉위하는 날이면 반드시 노론이 다시 일어날 것이므로 이번 기회에 아

주 그 뿌리를 뽑아버리자고 덤비는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목호룡과 김일경이었다.  목호

룡과 김일경은 조태구와 최규서, 최석항의 주구(走狗)가 되어서 다시 새로운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우선 임금 가까이 거행하고 있는 석렬과 필정을 시켜서 임금과 왕세제 사이를 이간시키게 

하고 세제를 동궁 처소에 구금시킨 채 사후조차 드리지 못하게 했다.

  왕세제는 너무도 갑갑하고 우울해서 하루는 미친 듯이 처소를 뛰쳐나와 형왕(兄王) 침전

으로 가서 친히 형왕에게

  "내가 무슨 잘못이 있기에 이렇게 구금하신단 말이요?"

하고 그 내막을 알아볼 양으로 침전 복도까지 갔을 때에 궁인 석렬이 깜짝 놀라면서

  "지금 위독하신 때라 아무도 뵙지 못할 처지인데 더구나 처분을 기다리고 계신 동궁께서 

어쩌자고 이렇게 야반에 뛰어들어 오십니까?  어서 돌아 가십시오."

  앞을 막고 더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세제는

  "내가 내 형을 뵈우러 왔는데 네가 무슨 참견이냐?  냉큼 길을 열어 놓아라."

하고 호령을 하였다.  허나 석렬은 무엇을 믿고 그러는지 악착같이 그대로 버티고 서서

  "이러시지 않더라도 동궁이 임금이 되실 터인데 왜 이리 벌써부터 왕이에 오르지 못해 야

단이십니까?"

하고 사뭇 깔보는 말투로 말하는 것이었다.  이때 입직승지 김일경이 들어오고 별입시 환관 

박상검이 나오더니 세제의 팔을 잡아끌면서 저마다 두눈을 크게 부라리고

  "이게 무슨 거조이십니까?  지금 야반에 처분을 기다리시는 세제의 몸으로서 될뻔이나 하

신 일입니까?  어서 곧 처소로 돌아가십시오."

  꾸짖듯 타이르듯 하는 것이었다.

  이제 삼십이 가까운 세제였다.  분한 생각으로 한다면 당장 그놈 그년들을 한 주먹으로 

죽여버리고도 싶었으나 왕실의 규례 법칙이니 어쩌는 수가 없었다.  왕세제는 환관이 되쫓

는 감시를 받아가며 동궁 처소로 다시 돌아와서 그 분하고 야속함을 견디지 못해 단식으로 

목숨을 끊고 이 더러운 세상을 잊으려고 했다.

  "너무나 야속하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처분을 내리시나."

  이렇게 형왕을 원망해 보다가도 그자들이 임금의 침전 뿐 아니라 대비전에도 못가게 하는 

것을 생각하고는 필시 그들이 사사로이 감금하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에잇! 무도한 놈들, 이놈들을 어떻게 하면 한 칼에 다 죽여 버린단 말이냐."

  세제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때 동궁 가까이 모시고 있던 설서(說書) 송인명(宋寅明)이 충심으로 세제를 위로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가다가는 세제가 아사(餓死)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간신들의 

모해로 화를 입든지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날 송인명은 세제에게 여러 가지 말로 분

발을 일으키게 하고 저녁식사를 든든히 들게 하고 밤 되기를 기다려서 몰래 동궁 처소를 빠

져나가게 했다.

  "아무쪼록 정신을 차리셔서 대비 처소에만 가시면 살아나실 게고 살아나시면 훗날에 반드

시 왕위에 오르게 될 것이오니 그때에는 이 한심한 세상을 바로 잡아 주십시오."

  이런 말로 격려해 가면서 세제를 목마에 태워 담을 넘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세제는 대

비 처소로 갈 수가 있었다.  대비라야 왕세제보다 일곱해 위밖에 안 되지만 제이왕자를 사

랑하는 품은 퍽 지극한바가 있었다.  세제는 대비를 대하자 눈물을 쏟으며 소리쳐 울었다.  

대비도 역시 목이 메어 울었다.  대비는 세제를 보고

  "왕실과 국가가 아무리 망했기로니 이럴 수가 있느냐?  너무나 한심하고 참담하다.  그러

나 아무쪼록 동궁이나 건강하게 있다가 때를 기다려서 국정을 쇄신시켜야 대대로 내려오는 

왕가 혈통이 끊어지지 않고 국가 대세가 바로 잡힐 터이니, 마음을 활달하게 가지고 내 옆

에 가까이 있어 몸을 보전하고 다음 기회를 기다려라."

  이런 말로 달랬다.

  세제는 이 말을 듣다 너무나 고맙고 황공해서 마음을 새로이 굳게 가지고 다음날의 국가

를 위해 힘쓸 바를 생각하면서 대비를 모시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일을 알게 된 김일경과 

그 일당들은 별별 구실을 다 내세워가며 세자가 빨리 동궁 처소로 돌아가기를 간청했다.  

이때 대비는 들어내놓고 김일경과 박상검 등을 호령해 물리쳤다.

  "너희들이 무슨 흉계로 동궁을 유폐해 놓고 내 처소에도 상감의 처소에도 가지 못하게 했

느냐?  선대왕의 당년 일을 생각하든지 누대 혈통이 끊어지는 일을 생각하든지 너희들이 

어찌 이럴 수가 있더란 말이냐."

  이러던 중 경종의 병세는 점점 침중해져서 재위(在位) 사년 갑진(甲辰) 팔월 이십오일에 

세상을 떠나니 드디어 왕세제가 왕위에 나아갔다.  이가 바로 영조(英祖)이며, 때의 영조의 

나이는 삼십일세였다.  세상은 이렇게 해서 또 급각도로 변해지게 되었다.

  이조 이십일대의 국왕 영조는 매사에 사려(思慮)가 깊은 임금이었다.  영조가 이제까지 뼈

저리게 느껴온바는 무엇보다도 당파의 쟁탈로 인해서 왕실과 조정이 모두 이 싸움에 휩쓸려

들어서 헤어나지를 못한다는 점이었다.  우선 왕실의 일만 보더라도 최근의 일로서 자기 친

생모의 저 끔찍한 수난(受難)이 너무나 분하고 가엾게 생각되고 또 적모비(嫡母妃)되는 인경 

김비와 인원 김비 두분 왕비의 생전 사후 모든 일이 역시 황송하고 가엾게만 생각되었다. 

  최근에 자기가 동궁의 처지로서 남도 모르게 비참한 생활을 하던 일을 생각할지라도 당색

을 옹호하고 사리(私利)를 꾀하는 간신배들의 행위가 너무도 가증스러웠다.

  돌아보건대 남이장군(南怡將軍)을 모함해서 죽인 유자광(柳子光)의 작간이 있던 이후로 사

화(士禍)라는 것이 생겨나고 마침내 당파가 생겨서 서로 죽이고 넘어뜨리고 자기의 고집만

을 세우고 자기의 이익만을 도모하기 위해서 나라와 조정을 마음대로 이리 끌고 저리 끌고 

하니 이런 무엄무도하고 한심 개탄할 일이 어디 있으랴 하는 생각이 맴돌았다.

  이런 때문에 영조는 즉위초에 정사를 당쟁 조화주의(調和主義), 즉 당쟁을 조정해서 화등

시키자는 주의로써 할 생각으로 탕평론(蕩平論)을 역설한 돈유(敦諭)를 정원과 원로 대신들

에게 내렸다.

  이렇게 하는 한편, 국정에 있어서도 즉위 당시 삼상 육경(三相六卿)이 모두 소론파였던 것

을, 어느 한 당파에게 국정을 맡길 수가 없다는 뜻에서 노론의 홍교중(洪敎中)으로 영의정을 

삼고, 소론의 조문명(趙文命)으로 우의저을 삼고, 남인 가운데서 좌의정을 뽑았다.  그리고 

육경도 역시 이와 비슷 조화주의로 임명하였다.

  그런 다음에도 아무리 조그마한 일이라도 일일이  감시를 하며 혹시나 당색의 구별이 없

는가를 살펴서 엄한 처분을 내리니 이제부터는 삼상육경이 제 아무리 조심하지 않을래야 않

을 수가 없게 되었다.  한편 영조는 일생의 의혹으로 생각하던 신임무옥(辛壬誣獄) 사건을 

다시 검안(檢案)할 생각으로 과거의 기록을 모두 들여오게 하였다.  벌써 수년이 지나간 옥

사를 이제 또 새삼스럽게 바로잡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때 소론 일당들, 특히 전날 가장 추악한 것으로 수백명의 생명을 빼앗은 김일경 일당들

은 간이 콩알 만해져서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면서도 김일경은 천연스럽게

  "과거의 옥사를 다시 추궁하실 필요는 없을 듯하오니 이 일만은 그쳐 주시옵소서."

  이 거동을 유심히 살피던 영조는 즉시 김일경과 박상검, 문유도, 석렬, 필정 등을 전격적

으로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추궁한 결과 모두가 임금을 속여가며 거짓 전교로 충신과 열사

(烈士)를 애매하게 죽인 일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영조는 이 일을 다 살피고는 너무도 통분하여 몸을 떨었다.  무엇보다도 충의 있는 국가

의 주석지신(柱石之臣)을 한꺼번에 세사람이나 죽여 버리게 된 일이 애석했던 것이다.

  영조는 이 간흉간학했던 김일경 일당을 처참해 치우고 김일경의 여당이 되는 이인좌(李麟

佐)의 도당까지 깨끗이 치워버리었다.  그러나 한번 원통한 원을 품고 참혹한 형벌을 입고 

애매하게 세상을 떠나간 사대신의 모습은 다시 찾을 길이 망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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