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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1/궁중비사

조 선 편 (朝 鮮 篇) 01

by FraisGout 2020. 6. 30.

    五百年의 曙光 

    風雲의 하늘 밑 



  고려 말에 함경도의 무장으로 왕조 470년 사직(社稷)을 전복시키고 이조(李朝) 오백년의 

왕업(王業)을 대성한 이성계는 우리 동국에선 얻어 보기 어려운 개세(蓋世)의 영웅이었다.

  이 자랑함직한 영웅의 가문과 탄생에 대하여 다음에 간단히 써보고자 한다.

  태조는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다.  고려 충숙왕(忠肅王) 사년 을해(乙亥=西紀 1,335) 십월 

십일일에 함경남도 영흥군 흑석리(黑石里) 사저(私邸)에서 탄생하였다.  이름은 단(旦), 자(子)

는 군진(君晋), 최초의 이름은 성계(成桂), 자는 중결(中潔), 호(號)는 송헌(松軒)이라 불렀다.

  아버지 환조(桓祖)의 이름은 자춘(子春)이고, 어머니의 성은 최씨였다.

  이문(李門)의 시조(始祖)는 신라시대에 사공(司空=토목과 건설을 맡은 관직)이란 벼슬살이

를 하던 한(翰)이란 사람이었는데 태조는 이의 이십이대 손(孫)이다.

  그런데 시조 이하 십칠대(代)까지에는 영명(令名)을 날리는 자가 없었으므로 한 개의 평범

한 집안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십팔대 손 목조(穆祖) 곧 안사(安社)대에 이르러 전주에서 

함경남도로 이사해 살다가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게 되어 의주(宜州=오늘의 덕원)에서 벼슬

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때는 바로 고려 고종 말년이었다.

  중국의 원(元)나라(몽고족)는 오늘의 영흥 지방에 쌍성총관부(雙城摠官府)를 두고 그 이북

의 땅을 점령하고 있었다.  이때에 목조 안사는 원나라에 투신하여 멀리 북쪽 알동(斡東=간

도지방)으로 또 이사하여 남경(南京=국자가)에서 오천호(五千戶)란 직명(職名)을 가진 지방관

리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의 아들인 익조(翼祖) 행리(行里), 익조의 아들인 도조(度祖) 춘

(椿), 도조의 아들인 환조(桓祖=태조의 아버지) 등은 모두다 대대로 습직하여 원나라의 천호

(千戶)란 지방관이 되어 지냈다.

  그러나 익조는 부득이한 사정 때문에 거소(居所)를 도로 남으로 옮겨 덕원에서 와 살았다.

  그러나 환조는 다시금 영흥지방(쌍성)으로 이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영흥서 살기 시작

했다.  그런데 환조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사,오 두해에 고려조정으로 들어와 공민왕의 지

우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환조는 공민왕 오년에 고려의 장수 유인우(柳仁雨)를 도와 원나라의 쌍성총관부

를 격하파고 함주(함흥) 이북의 땅을 수복하였다.  이 때문에 환조는 고려 삭방도(朔方道=함

경도)의 만호겸병마사(萬戶兼兵馬使=외직으로 무관 벼슬)로 등용케 되었다.

  이씨의 흥륭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그러나 환조의 천수가 

길지 못하여 사십육세를 일기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는데 그의 슬하에는 세 아들이 있었다.  

장남을 원계(元桂), 차남을 성계(成桂=곧 태조), 삼남을 화(和)라 불렀다.  그러나 장남과 삼남

은 정실의 소생이 아니었으므로 이남인 성계가 망부의 직을 이어받게 되었다.

  성계는 일대(一代)의 영웅이었으므로 그 기개, 용력, 그 배포가 십인, 백인에 뛰어났다.  

특히 소년시대부터 궁술(弓術)의 묘를 터득하기 시작하여 만 사람의 칭송을 받았다.  또한 

외모가 당당한데다 신채(神彩)가 몸에 감돌고 있었으므로 그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는 자못 

켰다.  소장시대의 태조는 엄격하고 말이 적은 사람이었다.  평거(平居)에 있어서는 항상 눈

을 감고 지냈기 때문에 그에게 말을 붙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일단 사람을 접하게 되면 어느 때나 화기융융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무서운 존재

로만 보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도 보았다.  성계는 육척 장신의 소유자인데 귀가 남

달리 크고 또 기묘하게 생겼던 모양이다.  명(明)나라 사신(使臣) 왕태(汪泰)는 성계의 귀가 

남달리 크고 기묘함을 보고 그의 일행에게 대하여

  "참 묘한 귀다! 그런 귀는 생후 처음 본다."

하고 놀랐고 또 상명사(相命師) 혜등(惠등)은 어느 때 그의 친지에게

  "내가 사람의 상을 봐줌이 한두 사람이 아니었는데 이성계처럼 앞날이 환하게 티인 사람

은 처음 보았다."

하고 느낀 바를 말하자 친지의 한 사람은 이 말을 듣고

  "뭣? 어째? 제아무리 잘 된다 할지라도 총재( 宰=오늘의 내무부장관)밖에 더 되겠나?"

대답했다.  그러나 혜등은

  "총재밖에 더 안 돼? 모르는 소리 말아! 내가 본 것은 그게 아닐세."

  "어떻게?"

  "군장(君長)이 될 상을 지니고 있어. 좀 기다려 보게! 이성계가 왕씨를 대신하여 꼭 임금이 

될 터이니...."

하고 쾌히 대답하였다.

  승(僧) 무학(無學)이 안변 설악산 토굴 속에 기거하고 있을 때에 성계는 그리로 찾아가 다

음의 꿈을 해몽케 하였다.  그 꿈의 하나는 자기가 어느 파옥(破屋) 속에 들어갔다가 세 개

의 <서까래>를 가로 짊어지고 나오는 꿈을 꾼 것이었다.  성계는 이 꿈의 해몽을 청하였다.  

꿈 이야기를 들은 무학은 먼저 치하하고 해몽하기를, 등에 삼연(三椽)을 짊어진 것은 <임금

왕(王)>자(子)를 형용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이 대답을 들은 성계는 또 다른 하나의 꿈을 내놓고 이것의 해몽을 청하였다.  그것은 꿈

에 꽃이 지고 거울이 떨어지는 것을 본 것이었다.  이 꿈이야기를 들은 무학은 또 해몽하기

를 꽃이 졌으니 열매가 생겨질 것이고 거울이 떨어졌으니 반드시 무슨 소리가 났을 것이라

고 대답하였다.  성계는 이말을 듣고 기쁨에 넘쳐 그날부터 절을 창건할 계획을 세우고 이

를 창건케하여 절 이름을 석왕사(釋王寺)라 지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태조 친필의 <석

왕사> 석자는 없어지고 다만 각판(刻板) 만이 남아 있을 뿐이라 한다.

  성계가 정승 지위에 있을 때는 꿈에 하늘의 신인이 금척(金尺)을 내주면서 말하기를

  "경시중 부흥(慶侍中復興=시중은 고려시대의 정승 벼슬)은 남달리 청렴하기만 한데다 이미 

늙었고 또 최도통사(崔都統使=도통사는 고려시대의 외직으로 국방군을 거느리는 무장 영(瑩)

은 남달리 직(直)하기만 해서 나라를 바로 잡음에 있어 적재가 못된다.  그래서 이 금척을 

그대에게 주노니 이것을 지니고서 나라를 바로 잡음에 힘쓰라."

하고 사라졌다.

  위에 말한 것 이외에도 여러 가지의 전설과 꿈이야기가 전해 오지마는 그것들은 거의 다 

신화(神話) 같은 이야기들이다.

  다음으로 이성계가 사술(射術)의 기재(奇才)였음에 대하여 써보고자 한다.  성계는 유년(幼

年)시대부터 활 잘 쏘기로 유명하였다.  활을 대로 만들지 않고 싸리나무로 간(幹)을 삼고 

여기에 깃을 붙임에 학령(鶴翎)을 사용했고 또 초(哨) 만드는 데는 미각( 角)을 사용했다.  

그래서 크기가 배(梨) 만했으며 촉(鏃)이 무겁고 간(幹)이 길어서 보통 궁시(弓矢)보다 배나 

무거웠다.

  성계는 청년시대에 아버지 환조를 따라 사냥을 하게 되었다.  이때 환조는 태조가 갖고 

있는 살을 빼앗아 보면서

  "이 살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말한 후 이것을 땅에 던져버렸다.  그러나 태조는 이것을 내버리기 싫어 땅에 떨어진 

살을 줏어서 살통에 꽂고 앞에 서서 갔다.

  이때 노루 한 마리가 산록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이것을 본 성계는 노루가 나와 있는 곳

으로 달려가서 일시(一矢)를 가하였다.  노루는 맞기가 무섭게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런데 

또 한 마리가 나타났다.  성계는 이 노루에게도 일시를 가하여 죽게 하였다.  이와같이 일곱 

번이나 반복하여 일곱 마리를 잡아 아버지 환조는 이를 보고 한편으로는 놀라면서 한편으로 

기쁨에 넘쳐 크게 웃어댔다.

  이 노루사냥이 있은지 며칠 안 되어 이번에는 홍원군(洪原郡) 소포산(昭浦山)으로 가서 노

루 사냥을 하였다.  때 마침 노루 세 마리가 떼를 지어 나와 있었다.  이를 본 성계가 우선 

노루 한 마리에게 일시를 가하여 죽게 하자 나머지 두 마리는 나란히 도주하기 시작했다.

  성계는 이 두 마리를 일시로 잡을 작정을 하고 또 한 살을 쏘았다.  성계가 작정한 대로 

화살은 두 마리의 동부(胴部)를 관통하고 나아가서 여력으로 나무를 뚫었다.  성계의 종자

(從者) 이원경(李原景)은 나무에 박혀 있는 살을 뽑아 가지고 성계에게로 갔다.  이때 성계는 

원경에게

  "이제야 돌아오니 뭣 때문에 그리 늦어졌노?"

하고 입을 열었다.  원경은 이 물음에

  "살촉이 나무에 깊이 박혀서 뽑아내기에 시간이 가서 늦었습니다."

대답을 하자 성계는 얼굴에 웃음을 띠고

  "근사한 말이다. 그랬을 것이다. 나의 시력(矢力)은 노루 세 마리를 한 살로 동관(胴貫)하였

을지라도 그만한 힘이 남게 될 것이다."

  호언장담을 하였다.

  또 성계가 어느 때 임강현 화장산(臨江縣華藏山)에서 사냥을 하게 되었다.  산 속에서 사

슴이 나타나서 성계가 이를 쫓아가다 보니 높이가 수십척이나 되는 절벽에 이르게 되었다.  

이 절벽의 지세는 사람이 오르락내리락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성계는 이를 불문

에 붙이고 말을 올라 채찍을 가하면서 절벽 밑으로 내려 갔다.  말이 마침내 넘어져서 일어

나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계는 어느 사이에 사슴에게 일시를 가하여 죽게 하였다.  

이런 것들을 보면 성계의 용맹과 담력이 어떠하였슴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 번은 여조(麗祖) 삼십일대왕 신우(辛禑)를 따라 해주에서 사냥을 하게 되었다.  

이때 왕은 따라온 여러 신하에게

  "오늘의 사냥은 짐승을 잡는데 반드시 등어리를 쏘아서 잡아야 한다.  이에 위반한 것은 

헛수고가 되고 말 것이다."

하고 주의를 시켰다.

  성계는 평소에 사냥을 할 때에도 기러기의 바른편 시골(翅骨)을 목표로하여 사냥을 해왔

기 때문에 목표지정의 사냥이 그리 어렵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이날 사십여마

리나 되는 사슴을 쏘아 잡음에 있어 한 마리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등어리만을 쏘아 잡아 

일등상을 탔던 것이다.

  또한 황상(黃裳)이란 사람은 일찍부터 원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활쏘기로 이름을 천하에 날렸다.  그리하여 그는 고려 공민왕조로 들어가 찬성사(贊成事=고

려시대의 정이품 벼슬, 평장사와 같음)를 지냈는데 성계는 일찍이 그와 회동하여 사술시합

(射術試合)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백오십보밖에 관혁을 만들어 놓고 두사람으로 하여금 활

을 쏘게 하였다. 성계는 일찍부터 시합 장소로가 쏘기 시작했다.

  그는 백발백중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는데 낮쯤 되어서 황상이 나와서 쏘기 시작했다.  

그는 수백 발중 오십발만은 연발 연중하고 그 후부터는 혹 맞기도 하고 안 맞기도 했다.  

그러나 성계는 수백발을 쏨에 있어 단 한 발도 실패한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공민왕은 이, 

황 양인의 사술시합 결과를 듣고

  "이성계는 사술의 귀재(鬼才)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칭송하기를 마지 않았다.


    [五百年의 曙光]   <戰塵 속의 二十年 >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五百年의 曙光 

    戰塵 속의 二十年 



  이성계는 십대 시절에 밀직사부사(密直司副使=밀직사는 고려시대 출납, 궁중경호, 군기에 

관한 사무를 맡아 보던 마을.  밀직사부사란 마을에서 둘째 우두머리의 벼슬)인 안변 한경

민(韓景敏)의 딸에게로 장가를 갔다.  이때부터 사랑을 속삭이면서 한편으로는 아버지 환조

에게로 나아가 사술을 실지로 배우고 동시에 남다른 연구를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사술을 

청소년시대부터 완전히 터득하게 되었다.

  아버지 환조는 천수(天壽)가 길지 못하여 사십육세(공민왕 구년)를 일기로 황천개이 되고 

말았는데 이때 성계의 나이는 이십육세였다.  그는 곧 아버지 환조의 벼슬인 함경도만호겸

병마사(咸鏡道萬戶兼兵馬使)의 직을 이어 받아 가지고 공민왕을 섬기다가 동북면만호(東北面

萬戶)로 승진되었다.  그리고 동북면의 여진족(女眞族)을 토벌하여 국경을 개착하고 혹은 개

경(開京=오늘의 개성)에 주둔하여 침략하는 홍두적을 맹공하는 등 선등(先登)의 공훈을 세웠

다.  또한 운봉, 해주에 자리잡고 있는 왜구(倭寇)를 맹격하여 크게 무훈(武勳)을 세웠다.  다

음은 이성계의 무훈을 개별적으로 들은 것이다.


  때는 공민왕(恭愍王) 십년 신축(辛丑=西紀 1,361)이었다.  이때 북원(北元=몽고)의 홍두적

(紅頭賊=머리를 홍건으로 매었기 때문에)은 왕경(송도)으로 쳐들어와 고려를 못살게 굴기 시

작했다.  그리하여 왕은 남쪽으로 몽진(蒙塵)을 하고 이성계를 주장(主將)으로 내세워 반격하

도록 했다.  만만치 않은 홍두적이었지만 이성계의 용병에는 저항할 길이 없어 참패의 고배

를 마시고 철군(撤軍)하고 말았다.

  동왕(同王) 십일년 임인(壬寅=西紀 1,362)이었다.  이때 원(元)나라 승상 나하추가 쳐들어 

왔다. 왕은 이를 반격하기 위하여 태조 이성계를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았다.  반

격의 총대장으로 나선 이성계는 부하로 있게 된 여러 장수를 모아 놓은 후

  "우리 군이 여러번 패한 모양인데 그 까닭을 말해 보라."

고 묻자, 여러 장수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전투가 한창 벌어질 때면 적장 한 사람이 철갑(鐵甲)을 몸에 떨치고 붉은 쇠털로 장식한 

후 창을 휘두르면서 달려 듭니다.  그의 위풍에 용기가 저상되어 전패하곤 하였습니다."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이말을 듣고 그 사람을 십분 몰색한 후 단독으로 물리칠 작정을 했다.  그리고 

거짓 패한 듯이 북방으로 도망하는 태도를 취하자 그자는 이를 정말로 믿고 창을 사정없이 

휘두르면서 쫓아왔다.

  성계는 이때 몸을 번득여 말 배에 들러 붙었다.  적장은 창을 쓸 중심을 잃자 창과 더불

어 넘어져 버렸다.  성계는 이를 보기가 무섭게 말 등에도로 올라 앉아 그 자를 쏘아 죽였

다.  그리고 큰 소리로 

  "적장이란 자는 죽었다.  이제는 전진하라."

부르짖었다.  적장이 이렇게 쓰러져 죽고 말자 적병은 무장지졸이 되어 좌왕우왕하다가 나

하추를 따라 북주(北走)하였다.  이때 나하추의 아내는

  "여보시오! 영감,  영감의 천하 공벌(攻伐)이 한두해가 아닌데 이렇게 패주(敗走)하는 일이 

있게 되니 고려의 장수가 여간이 아닌가 보오.  공연히 헛수고만 하지 말고 빨리 돌아가는 

게 좋을 성싶소."

하며 나하추에게 진언하였다.

  그러나 나하추는 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성계가 함관령을 넘어가자 나하추는 

십여기(十餘騎)를 거느리고 진 앞에 서 있었다.

  이를 본 이성계도 십여기를 거느리고 진 앞으로 나아가 대치(對峙)하였다.  이때 나하추는 

말하기를

  "우리의 군세(軍勢)가 지극히 약하다.  원컨대 전투를 중지하자.  그리해 주면 우리는 유명

시종(唯命是從)하겠다..."

  이 말이 거짓임을 안 이성계는 싸움을 중지하지 않고 일격을 가하자 양군 사이에는 격전

이 벌이지고 말았다.

  이성계는 썩 나서서 도망하는 나하추의 뒤를 쫓았다.  이때 나하추는 이성계의 급추(急追)

에 견딜 수 없어

  "여보시오.  이장군,  우리 두 장수가 이리할 필요가 뭐요? 좀 생각해 보시오!"

어름더름하면서 슬그머니 도망하려 했다.

  이 눈치를 챈 이성계는 두말하지 않고 나하추가 타고 있는 말에 일시(一矢)를 가하여 쓰

러 뜨렸다.  이를 본 적장 하나가 말에서 내려 그 말을 나하추에게 주어 타고 도망치게 하

였다.  이 때문에 나하추는 죽음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나하추가 이렇게 도망하자 적병들도 따라서 도망을 하니 이때부터는 동북면이 평정무사하

게 되었다.

  개선 도중 이성계는 고향인 영흥군 흑석리에 들렀다.  이때 고향의 사민(士民)들은 [이성

게 만세]하며 그를 환영하였고 또 아동주졸(兒童走卒)들은 이성계의 늠름한 풍채를 보고 머

리를 숙였다.

  후년에 이르러 고려 제삼십일대 신우왕(辛禑王)은 개성 부윤 황숙경(黃淑卿)을 북원(北元)

에 보낸 일이 있었다.  이때 원 승상 나하추는

  "연소한 이장군이 나에게 덤벼들어 혼이 났소이다.  지금 이장군의 건강은 어떠합니까?  

연소한 무인으로서 그렇게 용병을 잘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소.  확실히 용병의 천재요.  고

려가 지금까지 안전히 지탱되어 가는 것은 이장군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되오."

라고 말하면서 이성계를 극구 찬양하였다.

 공민왕 십팔년 기유(己酉=西紀 1,369)에 있었던 외환(外患)에서 왕은 이성계로 하여금 동녕

부(東寧府=평양에 있었던 북원의 한 마을)를 공격하게 했다.  이때부터 북원과의 관계는 끊

어지고 말았다.

  성계는 동녕부를 격파함에 있어 기병 오천, 보병 일만을 거느리고 동북면에서 황초령(黃

草嶺)을 넘어 육백여리를 걸어서 설한령(雪寒嶺)에 이르렀다가 다시 칠백여리를 걸어서 압록

강을 건넜다.

  이때 동녕부의 동지(同知=동지중추부사의 준말-일무관) 이올로(李兀魯=이 사람은 북원에 

귀화하였다)는 항전(抗戰)하러 내달아 왔다.  그러나 이올로는 이성계 장군이 온 것을 알고 

갑옷 투구를 벗어 던지고 몇 번이나 머리를 굽히면서 

  "나의 조상은 원래 고려 사람이고 나의 이름은 이원경(李原景)이라 부르나이다. 내 마땅히 

이장군의 신복(臣僕)이 되겠습니다."

하면 삼백여호를 데리고 항복하였다.  그래서 이성계는 그의 추장(酋長)인 고안위(高安慰)란 

자만을 공격하여 내쫓았다.

  그리하여 동으로는 황성(皇城=옛날의 여진성)에 이르고 북으로는 동녕부에 이르렀으며 서

는 바다, 남은 압록강이었다.  그래서 이 여러 지역은 고려 영토가 되었다.

  이것은 공민왕 십구년 경술(庚戌=西紀 1,370)에 있었던 외우였다.  원나라 평장(平章=평장

사의 준말) 기새인(奇賽因)은 김백현(金伯顯)이란 자와 더불어 동녕부에 자리를 잡고 고려의 

북면을 침범하였다.  그리하여 왕은 이성계와 지용수(池龍壽) 두 장수로 하여금 반격, 몰아

내게 하였다.  그리하여 새인은 마침내 도망하고야 말았다.

  기새인은 원래 고려 사람이다.  그러나 원나라로 가 평장사란 벼슬을 하고 있었다.  원나

라가 멸망하자 원나라에 남아 있는 무리를 모두 모아 동녕부를 점령하고 있다가 고려의 북

변을 침략하려 했다.  그것은 자기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함이었다.  새인의 아들 처명(處

明)은 지극히 용맹스런 사람이었는데 이를 안 이성계는 이원경에게

  "처명이 하나쯤 죽이기는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를 안 죽이려 하는 것은 그를 살려 수

용(收用)하려 함이니 이를 잘 전하여 빨리 항복케 하라."

하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처명은 원경의 말에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원경은

  "그대는 우리 이장군이 천하의 용장임을 모르는가?  항복하지 않으면 그대는 그의 일시

(一矢)에 죽고 말 것이다."

고 타일렀다.  그러나 처명은 항복하기를 싫어했다.  그리하여 이성계는 시험을 겸하여 그의 

투구를 목표로 살을 쏘아 투구를 벗겼다.

  이 일이 있은 후 원경은 또 다시 항복할 것을 권하였으나 그는 여전히 듣지 않았다.  그

리하여 이성계는 이번에는 그의 다리를 목표로 일시를 쏘았다.  살은 다리를 뚫고 나갔다.  

이것을 목도한 원경은

  "그대가 이래도 듣지 않으면 이젠 그대의 얼굴을 쏘아 죽이고 말 것이다."

하며 또 항복하기를 권하였다.  만만치 않은 처명이었지만 이상 버틸 용기가 나지 않아 마

침내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항복하고 말았다.

  처명은 훗일에 이르로 이성계가 자기를 죽이지 않고 기용(起用)해 준데 대하여 감사히 생

각하고 일생 동안 이성계의 좌우를 떠나지 않고 동정북벌에 참가하여 수훈(殊勳)을 세웠다.  

특히 운봉(雲峰)에서 있던 왜구 토벌전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워 사람들을 놀래기도 했다.

  또 신우왕 삼년 정사(丁巳=西紀 1,377)이었다. 이때 왜구(倭寇)가 경상도로 쳐들어 와 그 

횡패가 막심했으나 여기를 지키는 장수들은 이를 막아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성계가 

대장이 되어 나아가 지리산(智異山)에서 싸워 왜군을 대파하였다.

  이성계가 왜구를 상대하여 지리산 밑에서 싸우려 할 때 앞으로 이백보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지점에 한 왜구가 돌아서서 자기 궁둥이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태도는 우리 

군을 모욕하는 것같이 보였다.  이성계는 이를 일소(一笑)에 붙일 수만 없어 살 한 대를 뽑

아 그 자에게 쏘았다.  그 자는 맞기가 무섭게 쓰러졌다.  이런 일이 생기자 왜구들은 좌왕

우왕 헤매기 시작했다.

  성계는 이 기회를 포착하고 왜구에게 맹격을 가하여 왜구들로 하여금 참패 도주케 하였

다.  이패잔한 장병들은 험한 산으로 올라가서 절벽 위에 자리를 잡고서는 칼과 창을 휘두

르면서 우리군을 조롱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계 휘하의 여러 장수는 대항할 용기를 내지 

못하였다.  이때 성계는 여러 장수에게

  "내가 먼저 적의 진지로 올라가겠으니 그대들은 나의 말이 올라서거든 따라오라."

  타이른 후 자기 말에 채찍을 사정없이 가하고 한편 손에는 장검을 빼들고 이를 햇빛에 번

쩍이면서 한 손으로는 말로 절벽 위에 있는 적의 진지로 뛰어오르게 하였다.

  성계가 적의 진지로 오르게 뒤자 휘하 장병들은 사력(死力)을 다하여 뒤쫓아 올라갔다.

  그리하여 거기서 격전이 벌어졌다.  드디어 왜적의 태반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었기 

때문에 우리군은 완전히 대첩을 하였다.

  그리고 또 신우왕 시절에 왜구를 만재한 배 백오십척이 함주(咸州=오늘의 함흥) 및 북청

(北靑)등지로 들어와 저희들 멋대로 살생을 하고 약탈을 하였다.

  그리하여 원수 심덕부(沈德符)가 홍원 대문령(洪原大門嶺)에서 왜구를 상대하여 싸웠으나 

참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성계가 자청하여 항전하기로 하였다.  함주에 이르러 소나무가 

칠십보밖에 있음을 발견하고 

  "내가 저 소나무의 몇째 가지 몇째 솔방울을 쏘라는 대로 쏠 테니 어떤가?"

휘하에게 말을 걸었다.

  성계는 이와같이 말한 후 유엽전(柳葉箭)으로 쏘기 시작했다.  그는 휘하의 지시대로 칠발

을 쏘아 칠중(七中)하였다.  이를 목도한 휘하 장병들은

  "우리 이 장군은 정말 신장(神將)이시다."

하고 환호(歡呼)하였다.

  성계는 환호 속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에 왜구가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 가기로 했다.  

왜구들은 멀리서부터 소라 소리가 요란히 들리기 시작하자 모두들 놀라고 

  "이 소리는 이장군이 출동하는 소라 소리인 것 같다."

하며 떠들어댔다.

  성계는 왜말을 아는 자를 불로 놓고

  "오늘의 주장(主將)은 이만호(李萬戶)이다.  너희들은 빨리 항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크게 

후회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을 해주도록 부탁했다.

  그러나 왜장들 사이에는 항복에 대하여 불찬성하는 자가 있어서 결정적인 대답을 얻지 못

했다.  그리하여 성계는

  "알았다.  어디 보자."

하고 몸소 왜적 이십여인을 목표로 활을 쏘자 그중에서 한 사람도 응현(應弦)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이성계는 단기(單騎)로 나서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무도 덤비지를 못했

다.  성계의 무서운 살은 중갑(重甲)도 뚫고야 말았다. 이를 목격하게 된 왜구들은 사면팔방

으로 궤주(潰走)하고 따라서 죽은 군사가 들에는 물론이요,  강물 속에도 쌓였다.

  "왜적의 형편이 여간하지 않은 모양이다.  죽이진 말고 생포하는 게 좋겠다."

  성계는 휘하에게 분부하였다.

  또 왜구는 서해도(西海道)에도 들어왔다.  그러나 모든 장수들이 승리를 얻지 못하고 패하

고 말았다.  그리하여 또 성계가 물리쳐 버릴 것을 장담하고 나섰다.  성계는 항전에 즈음하

여 투구를 백수십보나 떨어져 있는 곳에 놓고 살 세발을 쏘았다.  이 세발은 모두 다 투구

를 뚫었다. 이에 자신을 갖고 해주의 동정자(東亭子)에서 왜구를 상대로 싸웠다.

  싸움이 한창이었을 때에 한 길이 넘는 이렁이 앞에 가로 놓여 있었다.  성계의 말은 한 

번 뛰어이 수렁을 넘었으나 뒤따라 온 장병들은 하나도 넘지를 못하였다.  태조는 이를 불

문에 붙이고 대우전(大羽箭)으로 왜적을 쏘아 십칠명을 죽였다.  이 때문에 나머지 적은 사

방으로 궤주하여 해주는 다시 평화를 찾게 되었다.

  신우왕 오년 기미(己未=西紀 1,379)였다.  이번엔 왜구가 배 오백척에다 군사를 싣고 삼도

로 들어와 운봉 인월역(雲峰引月驛)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삼도의 물정이 자못 소

란하고 인심이 흉흉했다.

  신우왕은 이성계로서 양광(楊廣道=경기도), 전라, 경상 삼도 도순찰사(都巡察使)를 삼아 그

로 하여금 반격하도록 하고 동시에 주장 아지발도(阿只拔都)를 죽여 없애게 하였다. 아지란 

말은 어린아이를 가르켜 말하는 것이고 발도란 말을 몽고 말로 용감무쌍하다는 뜻이다.

  이 왜구들은 바다에 연(沿)해 있는 주군(州郡)을 깡그리 방화하여 죽은 시체가 산야를 덮

었고 또 미곡을 배에 싣기 위하여 쌀섬 등을 굴리기 때문에 지상에 흘려진 쌀이 척여(尺餘)

에 달하여 땅이 두꺼워졌으며 또 이, 삼세 되는 계집애를 약탈하여 머리를 깎고 나아가서는 

배를 갈라서 정결히 씻은 후 여기에 쌀과 술을 곁들여 하늘에 제을 올리기도 했다.

  이런 참혹한 일은 왜구에게서만 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배극렴 등 구원수가 분기하였으

나 모두 다 전패하였다.  그중의 두 원수는 항전중 전사해서 팔도의 인심은 한층 더 흉흉해 

졌다.

  이성계는 천리지간에 죽은 군사가 쌓여 있음을 발견하고 측은한 생각을 억제할 수 없어 

침식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는 운봉을 넘어서서 우편에 있는 험준한 지름길을 보고

  "왜적은 반드시 이길로 나와 우리를 습격할 것이다.  나는 이 길로 들어가 보고 싶다."

하고 그리로 나섰다.  성계가 그 험로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왜적은 덤벼들었다.  그는 태연

한 태도로 백우전(白羽箭) 이십대를 꺼내서 적에게 쏜 후 뒤이어 유엽전(柳葉箭) 오십여대를 

뽑아서 계속해 쏘았다.  이 화살들은 모조리 적의 얼굴을 쏘았기 때문에 적은 응하려 하지

도 못하고 쓰러져 죽었다.

  그러나 왜구들은 여전히 산지를 점령하고 있었으므로 이것을 토벌하기가 어려웠다.  이성

계는 소라를 요란히 불어 취군케 하고 결사적으로 기어오르게 하였다.  그런데 이성계가 탄 

말이 살에 맞아 쓰러졌다.  그는 곧 딴 말을 바꾸어 탔으나 유시(流矢)에 왼편 무릎을 맞았

다.  이것도 즉시로 빼어 버리기는 했으나 몇겹으로 포위도어 고전(苦戰)을 면치 못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성계는 왜적 팔명을 쏘아 죽였다.  만만치 않은 적이었지만 그의

담용에 놀라 앞으로 달려들지를 못했다.  이성계는 휘하 장병에게

  "죽을 것을 두려워하는 자는 모두 다 물러가라.  나는 적과 더불어 죽고 말겠다."

는 자기의 결의를 말했다. 휘하장병들은 이성계와 한가지 죽기로 결심하고 역전분투(力戰奮

鬪)하였다.  그러나 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왜장 중에는 나이 십오, 육세밖에 안 되어 보이는 소년이 끼어 있었다.  나이는 불과 십

오, 육세였지만 그 용기와 담력은 백전노장(百戰老將)을 능가할만했다.  이자는 백마 위에서 

창을 휘두르면서 달려들었다.  군사들은

  "저게 아지발도란 자다.  아지발도다."

하면서 피하려 했다.  성계는 이 소년의 용기와 기백을 장하게 생각하고 이두란(본성명은 

퉁두란)에게 사로잡으라고 명령하였다.  이 명령을 받고서 이두란은

  "산 채 잡아서는 안 됩니다. 잘못하면 우리에게 해가 올 것입니다."

하고 반대를 했다.  사실 아지발도는 전신에 갑주를 떨친데다 얼굴까지 투구를 쓰고 있었으

므로 화살을 댈 데가 없었다. 그러나 성계는 이를 불문에 붙이고

  "이두란 장군은 보라.  내가 지금 아지발도의 투구 정자(頂子)를 쏘아 벗겨놀 테니 그대는 

잘보라."

하고 나는 듯이 달려들어 쏘고 또 쏘니 투구는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이를 본 두란도 즉

시 활을 쏘아 소년은 결국 죽고 말았다.  이 때문에 왜적의 사기(士氣)는 마침내 땅에 떨어

져 버렸고 따라서 우리 군의 사기는 충천해져 승승대파(乘勝大破)하이 적의 시체가 산과 들

에는 물론이요, 강중에도 쌓이게 되었다.

  당초 왜적의 수는 우리 군에 비해 십배나 많았는데 무사히 도망한 자의 수는 칠십명에 불

과했다.  이것을 보면 이성계의 용병지술(用兵之術)이 얼마나 신묘하였던가를 알 수 있다.

  이성계가 운봉에서 크게 이기고 돌아오자 당시의 판삼사(判三司=고려 때의 삼사의 우두머

리.  종일품 벼슬)였던 최영(崔瑩)은 백관을 거느리고 천수사(天水寺) 앞까지 나와서 환영하

였다.  이때 최영은 친히 태조 이성계의 손을 잡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이공, 삼한(三韓)의 재조(再造)가 공에게 달렸소.  이 나라에 믿을 사람은 공밖에 없소."

하고 고개를 숙였다.  이 왜구의 침범은 이 나라와 백성을 몰살시킬 외우(外憂) 중의 외우였

으므로 이것을 도륙하였다는 것은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살린 일이므로 백성들은 모두다 이

성계를 신명과 같이 우러러보게 되었다.

  신우왕 팔년 임술(壬戌=西紀 1,382)이었다.  이때 여진인(女眞人) 호발도(胡拔都)는 대군을 

거느리고 단주(端州=오늘의 단천)로 쳐들어왔다.  이성계는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가 되어 영격대파(迎擊大破)하였다.  그리하여 발도는 간신히 홀몸으로 도망하였다.

  이 싸움이 있기 전에 이두란은 모상(母喪)으로 청주(靑州=오늘의 북경)에 있었다.  성계는 

사람을 보냈다.

  "나라 일이 급하다.  그대 집에 머물러 거상할 때가 아니다."

이 말을 듣자 두란은 상복을 벗어던지고 선봉이 되어 호발도군을 길주에서 맞아 싸웠다.  

그러나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왔다.  성계는 곧 자기가 나섰다.  호발도는 두꺼운 갑옷

을 입고 검은 말에 올라 횡진(橫陣)을 베풀고서 대기하고 있었다.  호발도는 성계가 나타남

을 보고 군사를 머물러 있게 하고 단기로 칼을 빼 휘두르면서 달려 들어왔다.

  성계도 역시 단기로 칼을 빼들고 대들었다.  그리하여 양자 사이의 싸움은 격검이나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때 성계는 재빨리 탄 말을 돌린 후 호발도의 등을 맹렬히 쏘았다.  그러

나 갑옷이 두꺼웠기 때문에 살촉이 깊이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자가 탄 

말을 쏘아 땅에 떨어지게 하였다.  호발도는 죽지는 않았으나 싸움은 크게 패하고 돌아가 

버렸다.

  끝으로 이성계의 위인에 대하여 잠깐 보고자 한다.  이성계는 일개 무인(武人) 뿐만이 아

니고, 천성이 어질고 후한 사람으로 일가 친척에 대해서는 특별히 화목했다.  그에게는 원계

(元桂)라 부르는 서형(庶兄)과 화(和)라 부르는 서제가 있었는데 동복 이상으로 친히 지내고 

거처를 어느 때나 같이 했다.  훗날 호의 생모 정빈(定嬪) 김씨가 서울에 와서 살 때에는 김

씨를 자기의 생모 이상으로 효성스럽게 섬겼으며 또 김씨를 나와 볼 때는 언제나 계하(階

下)에 꿇어앉아서 보았다.

  원계가 일찍이 고려의 장수 노릇을 할 때 일을 잘못 처리하여 사람을 죽게 한 일이 있었

다.  이 때문에 원계는 죽게 되었다.  이 소식을 안 이성계는 구명운동(救命運動)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구명운동이 수포로 돌아가자 남달리 슬퍼하면서 원계의 미망인과 유자녀 

또 원계의 손 아래 누이 강우(康佑)의 아내를 위하여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도움에 있어 

게을리 한 일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이씨 왕업이 성취되자 원계의 아들들을 중용하여 

큰 벼슬을 주었다.

  성계는 유학(儒學)을 소중히 아는 사람이었다.  일찍부터 동정북벌에 분주히 지냈지만 여

가만 있으면 진중으로 유명한 선비를 청해다가 경사(經史) 강의를 듣곤 했다.  그의 집안은 

본시 선비의 집안이 아니었으므로 아들 방원에게는 일찍이 유학(儒學)을 공부하게 하였다.

  방원이 신우왕 때 과거에 참가하여 급제함에 이르자 성계는 대궐을 향하여 절을 하고 감

격하여 눈물을 줄줄 흘렸고 또 후에 제학(提學) 벼슬을 하게 되자 기쁨에 넘쳐 매일과 같이 

이름 높은 선비들을 청해 놓고 연회를 베풀었다.  성계는 매일의 연회에서 흥이 도도해지면 

아들 방원을 보고 

  "네 덕에 이런 낙이 우리 집에 있게 되었다."

하며 기뻐하였다.  이런 것을 보면 이성계가 얼마나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나를 알 수 

있다.

    [五百年의 曙光]   <美女 發福>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五百年의 曙光 

    美女 發福 



   이성계는 아버지 환조(桓祖)가 공민왕 구년(西紀 1,360)에 세상을 뜨자 그의 뒤를 이어 군

문으로 들어가 공민왕을 섬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동북면상만호(東北面上萬戶)가 되어 둥

북면의 여진족을 토벌하여 영토를 길주(吉州), 갑산(甲山)에까지 이르게 하고 혹은 개성에 쳐

들어 온 몽고의 홍두적(紅頭賊)을 반격하여 궤주케 하였으며 혹은 운봉(雲峰), 해주 등지로 

들어와 멋대로 행악을 하던 왜구를 도륙하여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성계의 명성은 전국에 떨치고 아동주졸까지도 이성계를 이장군이라 부르면석

를 존중하였다.  전공이 귀신을 울릴 정도였으므로 벼슬이 여러번 승진되어 수문하시중(守

門下侍中= 고려의 벼슬로 최고의 정승 벼슬)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성계의 존재가 이러했으므로 일반 사람들은 그를 한 번 보려고도 했고 또 딸을 가진 부모

들은 그런 사위를 두려고도 했다. 그가 동정북벌(東征北伐)하는 사이에 세월은 흐르고 흘러 

그의 청춘은 흘러가 어느덧 나이가 들어버렸다.

  이때 황해도 해주에 강윤성(康允成)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당시 양반급에 속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서민(庶民) 중에 있어서는 학행이 있는 사람이었다.  특히 그에게

는 남달리 미(美)와 덕(德)을 겸한 과년한 딸이 하나 있어 천하 제일의 사윗감을 물색하고 

있었다.

  그는 어느 기회에 친구를 통해 이성계의 문객(門客) 홍(洪)이란 사람을 알게 되었다.  강은 

홍과 가까이 하는 사이에 이성계의 생활 사정도 알게 되고 또는 경처(京妻)로서 미처녀(美處

女)를 널리 구한다는 말도 듣게 되었다.

  강윤성은 어느날 밤에 그의 부인과 자리를 같이 하고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 받고 

하다가 딸 시집보낼 문제를 내놓고 부인과 의견을 교환하였다.

  강윤성은 새삼스럽게 부인을 자기 앞으로 가까이 불러서 

  "방실(芳實=딸)이의 나이가 지금 열아홉살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년이면 스무살이 될 테니까 지금은 열아홉이죠."

  "그러면 시집가는 것이 몹시 늦어진 모양인데... 부인도 사윗감을 좀 구해 보았소?"

  "구해 보기는 좀 했지만 방실이의 짝이 됨직한 총각은 안 보입디다.  이대로 가다간 방실

이를 늙히겠는데... 영감도 좀 구해 보셨소?"

  "나도 구해 보기는 했으나 모두 다 신통치 않군 그래."

  "그러면 어찌하면 좋겠소?"

마누라의 이 말에 윤성은 고개를 숙이고 뭣인가를 생각하고 있다가

  "내가 개성으로 가서 홍진사를 한 번 찾아 볼까?"

마누라는 이말에

  "왜요?"

하고 가볍게 반문했다.

  "내가 말 좀 들어 보오.  이성계 장군 같은 양반에게 왜 부인이 없겠소마는...  근년에 들

어서 부터는 서울에서 몸을 자주 뺄 수가 없게 되었다 합디다.  그래서 서울에도 아내를 두

고자 작년부터 미(美)와 덕(德)을 겸한 규수를 구하고 있다고 개성의 홍진사가 말한 일이 있

었소.  그래서 개성으로 가려는 것이요."

  "잘 알겠어요.  시골에는 정실부인(正室夫人)이 있겠죠?"

  "있지."

  "그러면 우리 방실이를 첩으로 주잔 말이죠?"

부인은 고개를 숙였다.

  윤성은 부인의 기색을 보고

  "나도 방실이의 신랑감을 구하다 못해 이런 생각을 한 것이요.  이를 양해하고 말을 해야 

하오."

하며 달랬다.

  "그런데 지금까지 구하지 못했을까요?  그런 양반이 구한다면 문이 메어졌을 텐데."

  "글세."

  "그 양반의 나이가 지금 얼마나 되었나요?"

  "글세,  한 사십은 됐을 걸!"

  "한 사십요?  그러면 방실이 아버지 뻘이 되는구먼...  우리 방실이가 좋아할까요?"

  "그건 한 번 부인이 방실이에게 물어보구료."

윤성은 한 마디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 이튿날 윤성은 개성을 향하여 출발했다. 그리고 홍진사를 개성에서 만나기가 무섭게 

이성계의 경처가 결정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결정되지 않았음을 알고 비로소 

안심하고 홍진사를 상대로 자기 딸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홍진사님, 미안합니다. 갑자기 폐를 끼치게 되어서..."

  강윤성은 다시금 이렇게 인사를 올렸다.  이 말에 홍진사는

  "그런 인사는 그만두고 돌연히 찾아준 곡절이나 말해 보시구료."

하며 자기 앞으로 가까이 앉혔다.

  "제 딸년 혼인 문제 때문에 별안간 오게 된 것이올시다."

  "누구와 혼인하게 되었나요?"

  "누구와가 뭣입니까?  저 이장군(이성계)에게 제 딸이 어떨까 해서요."

  홍진사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정말이요?"

  "그럼 정말이죠."

  "지금 딸의 나이가 몇 살이나 됐소?"

  "열아홉이올시다."

  "열아홉?  꼭 좋은 나이구먼!  나도 한 번 딸을 본 일이 있지만 그 동안에 더 예뻐지고 

더 맵시가 있어졌겠군!"

  "그 애가 이젠 다 자라서 만개한 모란꽃같이 보입니다.  그리고 위인도 어질고 고와서 이 

애를 한 번 본 사람들은 입의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합니다."

  "어떻게 그런 딸을 두게 되었소?  그런 딸을 두게 된 것도 큰 복이요.  내가 이장군에게 

이런 말을 하고 권할 것 같으면 장군도 싫어하지 않을 것이요."

  강은 이말에 희망을 걸었다.

  "저는 다 결정된 것으로 믿고 그날이 하루 속히 오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장군이 오랫동안 수많은 처녀를 물색해 왔지만 아직도 교양있는 미처녀가 발견되지 않은 

모양입니다.  강형의 딸은 남달리 현숙해 보이고 꽃 같으니 성공할 것 같소."

  "대단히 고맙습니다.  그런데 저의 집안은 양반이 아니올시다.  몇대를 두고 농사를 하며 

장사를 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학행만은 양반 집안 못지 않도록 힘썼습니다.  이 점을 

참고로 말씀해 주십시오."

  "잘 알겠소.  내가 중매를 잘하면 무슨 수가 나게 될까?"

  홍진사는 웃음을 섞어 이렇게 말하였다.  강윤성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잘해 주시면 큰 복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하며 몇 번이나 머리를 숙였다.

  윤성은 홍진사 집에서 술대접까지 받고 그날로 개성을 떠나서 해주로 돌아갔다.

  고향 해주로 돌아온 강윤성은 돌아온 날 밤에 자기의 부인은 말할 것도 없고 딸까지도 불

러놓고 개성으로 가서 홍진사에게 단단히 부탁한 것을 이야기하고 부인과 딸의 의견을 묻기

로 했다.

  "나는 홍진사 집에서 술대접, 밥대접까지 받으면서 저 애의 혼인문제를 내놓고 부탁하였

소.  그동안 여러 집에서 말이 있던 모양인데 아직도 결정은 되지 않은 모양입디다.  그래서 

열심히 부탁했더니 홍진사도 저애의 편이 되어 힘쓰겠다고 확언했소.  홍진사가 힘만 쓰면 

우리 애가 경처로 될 것은 틀림없을 것으로 믿어지오.  며칠 동안 기다리고 있으면 기별이 

올 것 같은데.  당신 생각은 어떤지 있으면 말해 보오."

  그리고 그는 다시 말을 이어

  "오늘의 이장군은 장군 지위에 있지만 그 명성은 천하를 울리니 반드시 고려를 대신하여 

임금이 될 것이라고 홍진사는 장담을 합디다.  이 나라 백성의 마음이 모두 다 이장군에게

로 돌고 있으니까...  그래서 청하는 자가 많아지는 것 같소."

  이 말에 대하여 부인은

  "그리된다면 방실이가 왕비가 되어 크게 호강을 하겠군요!"

하며 방실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방실이는 아무 기색도 보이지 않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

다.  이를 보고 있던 윤성은 부인에게 대하여

  "부인도 처음에 탐탁히 여기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은 어떠하오?"

하고 물었다.

  "이젠 이장군과의 결혼이 이루어지기만 바랄 뿐이고 아무 생각도 갖고 있지 않아요."

  윤성은 부인이 대답하는 것을 들은 후 다시 말을 이어 

  "애 방실아! 너는 이장군에게로 시집가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니?  이장군은 가까운 장래

에 이나라의 임금이 될 분이다.  그의 신(身), 언(言), 서(書), 판(判)이 남자다와 보인다고 홍

진사는 극구칭송 하던데.  좀 말해 보아라."

고 딸의 말을 듣고자 하였다.  방실이는 이 말을 듣고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제가 외람되게 무슨 말을 드리겠습니까?  아버님께서 옳게 생각하신 일이면 저도 옳게 

생각하고 그대로 복종하겠습니다."

대답하였다.  윤성은 시선을 방바닥에 떨어뜨리고는

  "너를 남의 부실(副室)로 주는 것을 나도 좀 섭섭히 생각한다.  그러나 너는 일개 노리개

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니 안심하여라."

  윤성의 말이 끝나자 윤성의 부인은 그 뒤를 이어서 

  "방실아! 불만을 품을 것 없다.  여자의 팔자는 남자에게 달렸다.  일생의 고(苦)와 낙(樂)

이 남자의 성공, 불성공에 달렸기 때문이다.  네가 크게 호강을 하게 되면 우리도 좀 호강을 

하게 된다.  너는 딸의 덕에 부원군(府院君)이 된다는 말을 못들었니?"

하고 웃음 섞어 말을 하자 방안의 분위기는 자못 부드러워졌다.


  윤성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홍진사의 기별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윤성이 해주로 

돌아온지 한 열흘 남짓해서 홍진사가 친히 해주로와 윤성을 찾았다.  홍진사는 윤성을 보기

가 무섭게

  "이장군을 모시고 왔는데 이찌하겠소?"

하고 물었다.  윤성은 이 말을 듣고

  "지금 어디 계신가요?"

황망히 반문하였다.

  "지금 읍내 어느 객사에 계시다오."

  "그러면 어찌해야 좋을까요?"

  "글세,  오늘은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까 나는 되돌아가 하룻밤을 객사에서 새우고 내일 

정오까지 이리로 모시고 오는 게 좋지 않을까요?  강형은 어찌 생각하오?"

  "글세, 올시다. 그러나 촐촐히 돌아가시게 될 것이 걱정됩니다."

  "그게 무슨 말이요. 읍내로 돌아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으니 곧 돌아가야 하겠소.  

내일 한잔 톡톡히 하기로 하고 나는 그만 돌아가겠소."

  홍진사는 이렇게 말을 하고 윤성의 전송을 받으면서 객사로 돌아갔다.  윤성은 홍진사를 

돌려 보내고 집으로 들아와

  "홍진사가 이장군과 함께 해주로 왔는데 진사만이 홀로 찾아왔다가 돌아갔소."

하고 부인과 딸에게 알렸다.

  윤성의 부인은 이 말을 듣고

  "그런데 왜 문전에서 보내셨수?"

물었다.

  "실은 홍진사가 이장군을 모시고 왔는데 날이 저물었기 때문에 읍내 객사에 머물러 계시

게하고 나를 찾아온 것이요.  내일 정오쯤 해서 이장군을 모시고 오겠다 하고 돌아갔소."

  "그러면 어찌하면 좋소?"

  "뭣을 어찌하면 좋아?  첫째 집안을 깨끗이 소제하고 둘째 우리 집안엔 산해진미(山海珍

味)가 상비돼 있지 않으니까 있는 대로 정결히 만들고 셋째 무명옷이나마 깨끗이 입고 대하

면 좋겠지.  알겠소?"

  윤성은 이와같이 말하고 특별히 당부를 하였다.

  "내일 자리를 건넌방으로 할테니까 특별히 잘소제해 주오.  그리고 내가 부인이나 방실이

를 들어오라 하거든 조용히 대답하고 들어와 이장군이며 홍진사에게 정중하고 겸손히 절을 

하오.  그리고 묻는 말이 있거든 조용히 대답하고 함부로 웃음을 터뜨려서는 안 되오."

라고 주의 시켰다.

  날은 밝아 정오가 되었다.  이성계는 홍진사를 따라 윤성의 집으로 왔다.

  윤성은 이성계이며 홍진사에게 절을 하고는 건넌방으로 인도하여 상좌에 앉게 한 후 다시 

절을 하고

  "천민(賤民)의 집에 오시게하여 죄송만만이올시다.  그러니 이놈의 집에 대해선 자자손손

에 이르기까지 큰 영광이 될 것입니다."

  인사를 한 후 이번엔 홍진사에게

  "크게 수고를 끼쳐서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진사님 덕분에 이장군 어른까지 만나뵙게 

되어 마음이 흐뭇합니다.  그 은혜는 길이 잊지 않겠습니다."

고 치하였다.  그러한 후 윤성은 한편에 자리 잡고 응구첩대하다가 그의 부인과 딸을 불러 

이성계며 홍진사에게 인사를 하게 하였다.

  이성계 장군은 방실이의 절을 받은 후 홍진사에게 

  "이 처녀가 본인이요?"

물었다.

  "그 처녀가 바로 본인이올시다."

  홍진사가 이렇게 대답하자 이성계는 다시금 방실이를 주의해 보면서

  "홍진사의 말이 헛말이 아니었구만... 잘못했더라면 시골에서 세상을 보내고 말 뻔했는데."

하고 방실이의 부모를 돌아보고

  "참 따님 잘 두셨습니다.  왜 지금까지 시집을 안 보냈습니까?"

  "이장군님께 보내려고 그렇게 되었나 봅니다."

  윤성은 웃음의 말로 이렇게 대답하였다.  윤성의 부인과 방실이는 윤성의 명령에 따라 점

심상을 차려다 놓고 안방으로 물러갔다.

  이때 이성계는 윤성에게 술을 권하면서

  "댁은 음식범절이 보통이 아닌 집안인가 봅니다. 저 같은 놈이 이런 집안의 규수와 혼사

를 갖는다는 것은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에게 따님을 주신다면 감사히 받아 드리겠

소이다."

라고 입을 열었다.

  윤성은 이성계가 권하는 술을 마시고 나서 

  "그 말씀이 정말이신가요?"

  "정말입니다. 저는 술을 먹어도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시다면 저의 집 산소에 꽃이 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겸사의 말씀은 마십시오.  저는 이날 이좌석에서 홍진사를 증인으로 장인되실 어른, 

장모되실 어른 앞에서 댁 따님을 경처(京妻)로 맞아드릴 것을 맹세합니다.  그리고 비용은 

홍진사에게 맡겨 전하게 할 것이고 또 준비가 다되면 길일(吉日)을 택하여 적당한 장소에서 

정식으로 식을 올리겠습니다."

  이성계는 자기의 심경을 피력하였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나라에 매인 몸이므로 내일은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객사에서 하룻밤만 더 묵

고 돌아가겠으므로 결혼 후 아니면 만나 뵈올 틈이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성계는 홍진사와 함께 윤성의 집을 하직하고 떠났다.


    [五百年의 曙光]   <사랑의 비탈길>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五百年의 曙光 

    사랑의 비탈길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성계에게는 초취(初娶)부인으로 한씨가 있었다.  이 한씨는 이성

계의 조강지처(糟糠之妻)였으므로 피차 나이도 비등하여 이성계가 오십고개에 이르렀을 때

는 한씨도 오십고개에 이르러 있었다.

  한씨 역시 청춘시절에는 남만큼 고와 남에게 밉다 소리를 듣지 않고 지냈고 또 한씨에 대

한 이성계의 사랑도 두터웠다.  그리하여 그들의 슬하에는 육남 외에 이녀까지 두게 되었다.

  그러나 한씨는 나이가 많아 여자로서의 미(美), 여자로서의 색향(色香)이 떨어지고 늙기 시

작했다.  그런데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병 저병도 생기게 되자 한씨에 대한 사랑이 좀 

식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성계는 아름다운 강처녀(康處女)를 맞아 경처(京妻)를 삼은 것

이다.

  강처녀가 경처로 들어와 이성계를 섬긴 것도 어느덧 십년이 가깝게 되어 슬하에는 이남 

일녀가 있었다.

  "대감! 함흥에 계신 어른이 요즘 병환으로 고생하신다던데 알고 계십니까?"

하고 물었다. 함흥 어른이란 물론 한씨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알고는 있지.  그대는 어떻게 알았소?"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데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 사람의 병은 지병(持病)이나깐 그러다 죽고 말 것 같애. 하여간 걱정이 되는군!"

  강씨는 이 말을 듣고

  "그러면 한 번 내려가 문병하시지요."

  "글세?  요즈음 국사가 너무 다난해서 몸을 뺄 수가 없는걸."

  "그러면 어찌하실 작정이시오?  첩도 대감을 따라가 문병하고 싶은데요..."

  이성계는 이 말을 듣고 뭣인가를 생각하고 있다가 말을 이어

  "그대와 동반하여 갈 것은 없어.  가면 나혼자 가는 게 좋을 성싶어."

  이성계는 동반해 가는 것을 거부하였다.

  "왜요?"

  "왜요가 뭐요.  깊이 생각해 보면 알 일이지."

  "그건 첩도 알아 차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문병을 안할 수야 있습니까?  첩은 저

대로의 도리는 차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말만은 옳아!  꼭 문병을 하려거든 혼자 가보시오.  나는 그대와 동반해 가기가 싫어서 

하는 말은 아니니까..."

  강씨는 이성계가 말한 것을 곰곰 생각해 보았다.  강씨는 결국 자기가 천생의 요염(妖艶)

을 지니고 이성계의 경처로 들어와 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지내는데다 나이가 젊어 장래가 

자기 것이 될 것이므로 한씨가 자기를 환영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다가 

같이 가게되면 한씨의 마음이 한층 더 산란해지겠으므로 이성계가 동반해 문병하는 것을 기

피한 것으로 생각했다.

  정실부인 한씨는 원래 현숙한 부인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늙어 이성계의 사랑이 식어지자 

질투의 싹이 트기 되었고 따라서 강씨를 사랑의 도둑, 권세의 도둑으로 보게 되었다.

  그러나 강씨는 요염만 지닌 사람이 아니었다.  부덕(婦德)도 남만 못지 않게 지닌 사람이

었으므로 정실 한씨를 형이나 어머니같이 생각하고 틈없이 지내기를 바랐다.  이런 까닭으

로 해서 강씨는 이성계와 동반해 문병할 것을 말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강씨는 문병문제

를 가지고 이성계를 괴롭히기 싫어서 

  "대감, 대감께서 첩과 동반하는 것을 싫어하시는 뜻은 대강 짐작해 알겠습니다.  첩은 동

반문병하는 것을 단념하고 기후를 보아 혼자서 문병하겠습니다.  그러나 대감만은 빨리 내

려가셔서 문병하시는 게 좋을 성싶습니다."

라고 말을 했다.

  이성계는 이말을 듣고

  "이젠 나의 심중을 안 모양이구먼!  그럼 틈을 보아서 내려가 문병하기로 하지.  지금 형

편으로는 틈을 낼 수가 없어!"

  대답하자 강씨는

  "되도록 틈을 내셔서 내려가 보세요.  그렇지 않으면 부인께서 첩에게 미쳐서 조강지처를 

돌보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실 것입니다. 이를 깊이 생각하시고 빨리 내려가 보시는 것이 좋

을 듯 합니다."

하며 안타까이 굴었다.

  "알겠어. 속히 내려가기로 하지.  우선 급한 일만 처리하고 사, 오일 후에 내려가겠소. 이

제부터 그 이야기는 치웁시다."

  "그런데 대감, 끝으로 한 말씀 여쭈어 둘 것이 있사온데 좀 들어주세요.  한씨 부인께서는 

저를 사랑이 도둑, 권세의 도둑으로 보시는 것같이 느껴지는데 첩의 나이 젊은 탓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첩은 사랑의 도둑이나 권세의 도둑이 되려고 대감을 모신 것은 아니옵

니다. 첩의 이 심중을 살피셔서 모든 사람의 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해 주시면 한이 

없겠습니다."

  강씨는 이와같이 말을 하고야 이성계를 자리에 들어 쉬게 하였다.


  한씨 부인 문병문제가 있은지 한 엿세쯤 돼서 이성계는 함흥으로 내려갔다.  그는 함흥에 

도착하여 종자(從者)를 앞세우고 고향집으로 들어섰다. 고향집 사람들은

  "아버지 오셨네!"

  "대감 오셨네!"

하며 반가이 맞이하였으나 부인만은 병으로 나오지를 못했다.

  이성계는 행장을 풀어 놓은 후 부인의 병석으로 나아가 병세를 물었다.

  부인은 사람의 부축으로 간신히 일어나

  "대감! 어떻게 내려오셨습니까?  국사에 몸을 빼실 수 없을 텐데...  정말 고마워요. 이젠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였다.  이성계는 부인의 손을 잡고는
  
  "벌써 내려오려고 하였지만 요즘의 국정이 하도 문란해서 이제야 간신히 틈을 얻어 내려

오게 된 것이요.  이를 양해하고 용서해 주오.  그런데 병세는 어떻게 돼가오?  몹시 수척해

졌구료!"

위로했다.

  한씨 부인의 병은 악성 위장병이었다.  그래서 간신히 미음이나 마시고 오늘까지 목숨을 

이어 온 것이다.  그런데 요즘에 이르러서는 병이 더욱 악화되어 미음도 먹을 수가 없어서 

사경(死境)에 빠져 있었다.

  "위장에 무서운 병이 생긴지가 오래 되었어요.  그래도 밥을 먹고 지냈는데 요즘에 이르

러서는 밥은커녕 미음도 먹을 수가 없으니 어찌합니까?  명의(名醫)란 명의는 모두 청하여 

진료에 힘써 보았으나 그들도 그저 난치의 병으로 돌리고 말더군요.  그래서 이꼴이 되어 

버렸어요."

  "그것 참 큰일났구료.  미음도 먹지를 못한다니..."

  "먹을 것을 많이 두고서도 굶어 죽게 되니 그게 원통하군요.  그리고 다음으로는 대감의 

앞날을 못보고 죽게 될 테니까 그것이 한이 됩니다. 아마 복이 그만인가 보아요.  지금 형편 

같아서는 더 살지 못할 것같이 생각되는데 어떨는지..."

  "너무 낙담할 것은 없소.  금방 죽을 병도 거뜬히 낫는 일이 있으니까... 내 서울로 돌아가

면 널리 명의를 구해 보내겠으니 좀 마음을 굳게 가지시오."

  한씨는 이 말을 듣고 눈물을 머금었다.

  "대감 고맙습니다.  그런데 첩은 대감께 청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신정(新情)도 

좋지만 구정(舊情)을 잊지 마십사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첩의 오직 하나의 원이올시다."

  한씨는 이렇게 말하고 더 앉아 있을 수 없어 자리에 눕고 말았다.

  이성계는 한씨의 병세가 자못 위독했으므로 며칠을 두고 한씨의 병석 곁에서 시간을 보냈

다.  이성계의 몸은 한가한 몸이 아니었으므로 처음 생각으로는 하루나 이틀쯤 사저(私邸)에 

묵으면서 간병도 하고 위로도 하려고 작정을 했으나 막상 와본즉 인정상 이틀쯤 있다가 돌

아갈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칠일이나 묵으면서 한씨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한씨는 

뼈만 남은 몸에 정신이 좀 돌면 이성계를 찾으면서

  "이렇게 오래 계실 수 있으세요?  첩은 얼마든지 계셔 주시면 좋지만 대감의 처지가 그렇

지 못하니 하루바삐 돌아가세요.  나라와 백성이 대감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요."

  이성계도 국사가 몹시 궁금하여 간병하는 사람들을 불러놓고

  "나도 너희들과 한가지로 병석에서 떠나지 않고 싶으나 이 나라의 정사(政事)가 그러하지 

못하니 내일 아침엔 서울(당시의 서울은 개성)로 돌아가야 하겠다.  여전히 간병(看病)에 힘

써 다오."

  한씨를 부탁한 후

  "부인, 항상 마음을 편안히 갖도록 하오.  천우(天佑)와 신조가 있어 부인을 살게 하리라."

하고 부인을 위로하였다.

  다음날 아침 이성계는 섭섭해 하는 부인에게 작별을 고하고 종자와 함께 말을 타고 함흥

을 등졌다.

  서울로 돌아온 이성계는 강씨의 마중을 받았다.  그날밤 강씨는 이성계에게 한씨 부인의 

병세여하(病勢如何)를 물었다.

  "대감! 부인의 병은 대체 무슨 병인가요?"

  "위장병인데 악성인 모양이야."

  "요즘의 증세는 어떠세요?"

  "요즘의 증세는 미음도 먹을 수 없는 형편이더군."

  "그러면 큰일났습니다. 그려"

  "먹는 병은 살 수 있지만 못 먹는 병은 죽게 되는데 참 큰일났소.  피골이 상접해 있던데.  

말은 천하의 명약, 명의를 구해 보내겠다고 했지만..."

  이때 강씨는 정색을 하고

  "대감, 잘못하면 대감께서 홀아비가 되실테니 살릴 방법을 연구해 보십시오."

  "내가 홀아비가 돼? 왜? 그대가 엄연히 내곁에 있는데 그건 농이겠지. 하여간 살려야 하

겠는데, 걱정이야."

  강씨는 이말을 듣고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다가

  "이젠 첩도 한 번 내려가 문병하여야 하겠는데 어찌 생각하시나요?"

  "문병하는 게 도의상 옳긴 옳지!  그런데 혼자서 갈 수 있겠어?"

  "왜 못가요?"

  "그러면 함흥길에 익숙한 가마잡이와 비복(婢僕)을 데리고 가도록 해보오.  언제쯤 갈 작

정이요?"

  "아직 내려갈 날짜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잘 됐소. 내가 오늘부터 열흘 안으로 명약을 구해 볼 테니까 그것을 가지고 가

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강씨는 이와같이 대답하고 이성계가 약을 구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성계

가 서울로 돌아온지 열흘이 채 안 돼서 한씨 부인 사망의 기별이 왔다.

  이성계는 서울집 사람들을 모아놓고

  "한씨 부인은 오랫동안 숙환(宿患)으로 고생하다가 공양왕(恭讓王) 삼년 신미(辛未=西紀 

1,391) 구월 이십삼일에 오십오세를 일기로 사저에서 서거하였다."

고 알려 준 후 분상(奔喪)할 준비를 분부했다.

  분상 준비가 대강 끝나자 이성계는 시각을 다투어 강씨와 같이 종자를 데리고 함흥으로 

내려가서 장례(葬禮)를 치르고 돌아왔다.

  이때부터 강씨는 이성계의 부실(副室)로 만족하러 들지 않았다.  어느날 강씨는 이성계의 

기색을 유심히 살피면서

  "이젠 또 장가를 가셔야 하겠죠?  사대부집 규수에게..."

  "뭐, 나는 장가만 가나? 그대가 있지 않소?"

  "저 같은게 어떻게 정실이 될 수 있어요?  다시 장가를 가셔야 합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것이요.  무슨 생각으로..."

  "생각은 무슨 별 생각일라구요. 순서가 그래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나 나는 여생을 그대와 살다 죽을 테니까 더 말할 것 없소.  그만하면 내 속을 알겠

지?"

  강씨는 그 말을 듣고 싶어서 한 말이었으므로 성계의 말이 이렇게 나오자 더 말을 걸지 

않았다.

  이때부터는 강씨는 정말 정실부인으로,  이성계의 본부인으로 행세하게 되었다.

    [五百年의 曙光]   <落華지는 王朝>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五百年의 曙光 

    落華지는 王朝 



   고려 말년에 편조(遍照)란 승(僧)이 있었는데 이는 원래 옥천사(玉川寺) 여종의 아들이었

다.  그 어미가 천예(賤隸)에 속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멸시 하였다.

  그런데 공민왕이 어느날 밤에 어떤 사람이 칼을 빼들고 자기를 찌르려 할 때 승 하나가 

나타나 자기를 구해준 꿈을 꾸었다.  왕이 이 꿈을 명심하고 지낼 때 김원명(金元命)이란 사

람의 소개로 승 하나를 만났는데 생김생김이 꿈에 보던 승과 다름 없었으므로 이를 이상히 

생각하고 말을 교환해 보았더니 그 말이 무슨 득도(得道)나 한 듯이 들렸다.  그리하여 왕은 

크게 기뻐하면서 이자를 궁중으로 자주 불러들였다.  이 중이 자주 궁중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 이승경(李承慶)이란 사람은

  "나라를 어지럽게 만들 자는 반드시 이놈일 것이다."

하며 탄식했고 또 정지운(鄭之雲)은 

  "그놈은 요물(妖物)일 것이다."

고 죽여 없애려 하였다.

  그리하여 왕은 몰래 명령을 내려 편조로 하여금 몸을 피하게 하였다.  위에 말한 두 사람

이 죽어 궁중에 없게 되자 편조는 머리를 길게 길러 두타(頭陀=행각승)로 행세함과 동시에 

이름을 신돈(辛旽)이라 고치고 또 궁중으로 들어와 왕에게 배알하였다.

  왕은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고 이자를 사부(師傅)로 섬기면서 국정 고문으로 있게 하였다.  

그리하여 당시의 간신배는 거의 다 이자에게 붙어 지내고 또 사대부의 아내나 첩은 이자를 

신승(神僧)으로 앙시하여 구복(求福)하러 몰려 들었다.  따라서 사대부의 처첩치고서 이자의 

콧김을 쏘이지 않은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신돈에 대한 왕의 신임은 날이 갈수록 더욱 두터워지기만 했다.  왕은 이따금 신

돈에게 대하여

  "어찌하면 국리민복(國利民福)의 도를 열 수 있는가?"

물으면 신돈은

  "왕께선 참소하는 말을 잘 들으시고 잘 믿는다 하는데 이 참간에 귀를 기울이지 마시면 

세상이 반드시 복리를 받게 될 것이올시다."

  그럴 듯하게 대답하였다.  왕은 손수 맹서(盟書)를 써 놓고서 천지신명에게 맹세하였다.

  신돈이 궁중에 들어와 있은지 몇 달 지나지 않아 궁중의 노신들은 모두 내쫓기고 말았다.  

그러나 왕은 이를 불문에 붙이고 신돈에게 수정론도 보세공신(守正論道, 保世功臣)호를 내림

과 동시에 영도첨의(領都僉議)란 벼슬을 주었고 또 나아가서는 신돈을 취성부원군(鷲城府院

君)이란 작호까지 내렸다.

  다음에 신돈의 탐음성(貪淫性)을 하나하나 들어서 써보고자 한다.

 [가]  신돈의 탐은 행위는 날이 거듭될수록 더욱 심해졌다.  집에 있어선 으레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것이며 또 풍악도 계집도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와같이 하고 지내다가 왕

의 눈에 걸릴 듯하면 이 행위를 은폐하고 청담(淸談)으로 바꾸어 대하며 채과(菜果)를 내놓

아 알랑거렸다.  어느날 고려 중신의 한 사람인 이달충(李達衷)이 연회석에 참석하였다가 신

돈을 보고

  "사람들이 말하기를 공(公)은 지나치게 술과 계집을 좋아한다고 별의 별 말을 다하는 모양

인데 공은 이 말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우."

  말을 걸었다.  신돈은 이 말을 듣고 얼굴에 노기를 띠우며 연석을 등지고 어디론지 가고 

말았다.

  [나]  역시 중신의 한 사람인 경부흥(慶復興) 등은 신돈 배격회의를 하고 있다가 도선기(道

詵記)를 본 이야기를 하였다.


  도선기의 소위 <비승비속 난정망국(非僧費俗, 亂政亡國)>이란 문구는 딴 말이 아니라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자가 국정을 어지럽게하여 나라를 멸망케 한다는 말인데 이 자가 바로 

신돈으로 생각된다.  하루 바삐 이자의 탐음 무도한 행위를 왕께 아뢰어 처단케 하여야 하

겠다는 의논을 했다.

  [다]  신돈은 개도 싫어하고 사냥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때나 집안에 

오계(烏鷄)의 고기, 백마(白馬)의 고기만은 충분히 준비해 두고 지냈는데 이는 다름이 아니고 

이 두가지 고기는 양기(陽氣)를 도웁기 때문이었다.
  
  [라]  그리고 우정언(右正言=이것은 사간원의 한 벼슬) 이존오(李存吾)는 말하기를

  "신돈은 요물이라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다.  반드시 쫓아내야 한다."

하고 신돈의 존재를 배격하였다.  존오는 이와같이 배격함과 동시에 왕에게 상소하였다.  글 

상소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 신돈은 어느 때나 말을 타고 궁중을 드나들고 또 전하와 더불어 자리를 같이 할 뿐만 

아니라 그가 집에 있을 때에 재상이 뜰 아래서 절을하면 그대로 앉아서 대할 따름이옵니다.  

저, 최항(崔沆), 김인준(金仁俊)도 그런 태도는 취하지 못하였나이다. >

  그러나 왕은 이를 옳게 보지 않고 시신으로 하여금 상소문을 태워 버리게 함과 동시에 존

오를 불러 면책하였다.  이때 신돈은 왕과 더불어 대좌(對坐)하고 있었다.  이를 보고 존오

는 소리를 높여서

  "노승은 대체 무엇인데 그리 무례한가?"

  꾸짖었다.  신돈은 이 말을 듣고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없어 상하로 자를 잡고 말았다.  일

이 이렇게 벌어지자 왕은 더욱 얼굴에 노기를 띠고 순군옥(巡軍獄)에 하옥시켜 국문케 한 

후 장사감무(長沙監務)로 내쫓았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왕이 신돈에게 알마나 홀렸던가를 

알 수 있다.
  
  [마]  공민왕 이십년 신해(辛亥= 1,371)였다.  신돈은 이 때에 들어 마침내 살해를 당하고 

말았다.  신돈이 처음 행각승으로 왕의 신임을 받게 되자 벌써부터 금난(金蘭)이란 여인과 

또 첩으로 많은 여자를 곁에 두기 시작했다.  왕의 덕에 자기의 위복(威福)이 커지자 기현

(奇顯)이며 최사원(崔思遠)을 자기의 심복으로 삼았다.  따라 신돈의 도당이 조정에 수두룩해

지자 왕도 불안히 생각하여 무슨 대책을 생각하고 있었다.  신돈도 이를 눈치 채고 왕은 내

쫓으려는 음모를 계획하였다.

  신돈의 문객 시랑(侍郞=고려 때의 문관 벼슬로 우두머리 벼슬) 이인(李 )은 이 흉모를 자

세히 알자 자기의 성명을 감추고 한갓 한림거사(閒林居士)라 자칭하였다.  그리고는 글을 만

들어 어느날 밤에 이를 재상 김속명(金續命) 집에 투입한 후 미복(微服)을 몸에 떨치고 어디

론지 도망하였다.  김속명이 이 글을 왕에게 올리자 왕은 신돈의 도당 현(顯)과 사원(思遠) 

등을 체포하여 국문하하고 분부를 내렸다.

  이들을 체포하여 국문한 결과 역모를 계획한 것이 사실임이 판명되어 이 두 사람은 즉석

에서 참살되고 신돈은 수원으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대간(臺諫=사간원, 사헌부의 벼

슬의 총칭)들이 교대적으로 상소하여 신돈을 죽일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왕은 이 상소

에 의하여 임박(林樸)을 수원으로 보내 신돈을 죽여 없애게 하고 또 신돈의 이세까지 죽이

게 하였다.


   공민왕 이십삼년 갑인(甲寅=西紀 1,374)이었다.  이 해에 홍윤(洪倫)과 최만생(崔萬生)이란 

자가 침전(寢殿)으로 들어가 왕을 시해(弑害)했다.

  당초에 왕은 자제위(子弟衛)란 것을 설치하고 연소미모(年少美貌)의 소년을 선발하여 여기

에 두게 한 후 대언(代言=왕명을 받아 전하던 벼슬) 김경흥(金慶興)으로 하여금 이를 거니르

게 했다.  그리하여 홍윤, 한안(韓安), 권진(權瑨), 홍관(洪寬), 노선(盧瑄) 등의 소년들이 왕의 

귀염을 받게 되었다.  이들 소년은 어느 때나 왕의 좌우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왕은 워낙 색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노국공주(魯國公主)가 죽은 후로 맞아들인 여러 비

(妃)들을 별궁에 두고 밤낮으로 죽은 노국공주만 생각하고 찾지도 않았다.  그리고 어느 때

나 여자처럼 몸치장을 하고 김경흥이며 홍윤 등을 끌어다 놓고 마음대로 음난한 짓을 하였

다.  왕은 자기의 뒤를 이을 후사(後嗣)가 없음을 걱정하고 윤(倫)과 한안 등으로 하여금 여

러 비(妃)을 강간하여 아들을 낳도록 했다.

  그러나 여러 비중 정비(定妃) 안씨(安氏), 혜비(惠妃) 이씨(李氏), 신비(愼妃) 염씨(廉氏)는 죽

기로 작정하고 강간에 불응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왕은 익비(益妃) 왕씨의 궁으로 가서 

윤 등으로 하여금 간통케 하려 했다.  그러나 익비도 죽을 결심을 하고 이에 응하지 않았다.  

왕은 대노하여 칼을 빼들고 익비를 찌르려 하자 익비는 죽을 것이 두려워서 윤 소년에게 몸

을 허락하고 말았다.

  당초에 왕은 윤 등으로 하여금 궁중의 여인을 간통케 한 것은 아들이 있기를 바라서였는

데 때마침 익비 왕씨가 잉태를 했다.  내시(內侍) 최만생은 왕이 변소로 가는 것을 보고 따

라가 아뢰었다.

  "신이 익비의 내전으로 갔사옵는데 비께서 홀몸이 아닌지가 벌써 다섯달이나 됐다고 말씀

하시었습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기쁨에 넘쳐 물었다.

  "이젠 걱정이 없구나.  그런데 비가 누구와 정을 통해 그리된 것인지 너는 아느냐?"

  만생은

  "비의 말씀에 의하면 홍윤인 것 같사옵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중얼댔다.

  "과인은 내일 창릉(昌陵)을 참배하고 주연을 베푸는 체하고 윤을 없애련다.  그런데 네가 

이 계획을 알게 되니 너까지도 죽일 테다.  그리 알고 있어라."

  그러자 만생은 이 말에 겁이 나서 윤과 함께 그 대책을 생각한 끝에 이날 밤에 왕의 침전

으로 침입하였다.  때마침 왕은 대취하여 잠들어 있었다.  만생은 이 기회를 타서 단검으로 

왕을 찔러 죽이고 또 윤은 김경흥 등을 난격한 후

  "악도가 바깥에서 들어왔다."

  소리질렀다.  그러나 위사(衛士)들은 못 들은 체하고 있었고 내시 이강달(李剛達)만이 먼저 

침전에 들어갔다.  들어가 보니 선혈이 방바닥에 흐르고 있었다.  강달은 왕이 병중에 계시

가고 거짓 알리고 침대에 쇠를 채웠다.  새벽쯤 돼서 태후(太后)도 왕의 침전으로 와서 이를 

보았으나 비밀에 붙이고 발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경부흥, 이인임(李仁任) 등에게 대책을 강구하도록 하였다.  인임은 만생의 옷에 

피 흔적이 있음을 보고 곧 순위부(巡衛府)에 잡아넣어 국문케 하였다.  국문한 결과 이 자의 

범행이 확인되었다.  또 홍윤도 국문을 받았는데 그의 대답도 만생과 다름 없었다.  그리하

여 조정의 백관은 시중(市中)으로 몰려들어 만생과 윤 등을 찢어 죽이게 하였다.

  공민왕이 돌아간지 삼일 되는 날에 우(禑)는 중신들과 함께 발상을 하였다.  다음날 태후

와 경부흥은 종친으로,  이인임은 우로 공민왕의 뒤를 잇게 하려고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

고 있었다.

  이때에 판삼사(判三司) 이수산(李壽山)은

  "오늘의 의논은 마땅히 종실로 돌아가야 한다.  영녕군(永寧君) 유(瑜)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고 말하였다.

  이 말에 밀직(密直) 왕안덕(王安德)은 소리를 높여

  "그건 안 될 말씀이요.  돌아가신 왕께서는 대군을 세우기로 하셨는데 내놓고 딴 데서 구

하려는 것은 부당한 일로 생각하오."

하며 대들었다.  인임은 마침내 백관을 거느리고 우를 세워 공민왕의 뒤를 잇게 하였다.

  공민왕은 후사가 없음을 근심하고 지내던 어느날 미행으로 신돈의 집으로 간 일이 있었

다.  이때 신돈은 자기 앞에 있는 아이를 가리키면서

  "상감마마, 이 애를 좀 보시옵소서. 이 애를 양자로 삼으시었다가 상감마마의 뒤를 잇게 

하시면 어떨까요?"

하고 진언했다.  이 때 왕은 이 말을 듣고 그저 웃기만 하고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의 속마음은 그렇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신돈은 비밀리에 명령을 내려 자기 도

당으로 하여금 무니노(牟尼奴=우의 처음 이름)를 위하여 복을 빌게 하였다.

  그런데 왕은 신돈을 수원으로 귀양을 보내고 근신들에게

  "과인이 일찍이 신돈의 집에 갔다가 반야(般若)란 계집을 가까이 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아들 하나를 얻게 되었다.  제신은 놀라지 말고 이 무니노를 잘 두호(斗護) 해 주길 바란다."

고 부탁했다.  왕은 신돈을 죽여 없앤 후 무니노를 불러서 이를 태후전에 맡겨 한씨 소생으

로 하고 나아가서는 이인임에게

  "이제는 원자(元子)가 생겨 후사 걱정은 없게 되었다.  신돈의 집에 한 미녀가 있어 그녀

를 상관했더니 아들이 있게 되었다.  바로 반야의 소생이다."

고 말했다.  그리고는 왕은 또 시신 이미충(李美沖)에게 물었다.

  "너는 <아기> 일을 잘 알고 있겠지?"

  "예, 잘 알고 있습니다."

  미충이 대답했다.

  임박은 이상히 여겨 바깥으로 나와 미충에게 은근히 물었다.

  미충은 이 물음에

  "왕께서는 일찍이 금으로 뭣인가 만들어 나로 하여금 신돈의 집으로 가서 아기에게 전하

라 하신 일이 있었소.  신돈은 나에게 왕께서 자주 우리 집으로 오신 것은 나(신돈)를 위해 

오신 것은 아니라고 말합디다.  그래서 나도 들은 대로 왕께 고했더니 오늘날 그런 말씀을 

하시게 된 것 같소."

  대답하였다.

  신돈이 죽은 후 박은 당시의 사관(史官) 이지(李至)를 보고

  "신돈을 죽여 없앤 것도 나라의 큰 경사였지만 이외에 또 큰 경사가 있음을 그대는 알고 

있는가?  그것은 왕께서 자주 신돈의 종녀를 가까이 하셔서 아드님을 얻게 된 것이다.  지

금 나이가 일곱 살이나 된다 하는데 신돈은 이 애를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몰래 기른 모

양이다.  사관된 그대는 마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반야는 어느날 밤에 몰래 태후궁(太后宮)으로 들어가 울부짖으며

  "오늘의 상감을 낳은 계집이 바로 저인데 한씨란 무슨 말이오니까?"

하고 대들었다.  태후는 이 말을 듣자 두말도 하지 않고 순위부(巡衛府)로 하여금 엄격히 다

스리게 하였다.  이때 삼사(三司)의 우사(右使) 김속명이 이를 보고

  "천하에 아들로서 생부(生父)를 분명히 분간하지 못하는 자는 혹간 있었지만 생모(生母)를 

분간하지 못한 자는 내 들은 일이 없다."

고 탄식하였다.  그리하여 반야는 결국 이인임 등에 의하여 임진강(臨津江) 중의 원귀가 되

고 말았던 것이다.

  때는 신우왕(辛禑王)시절이었다.  이 시절에 최영은 이성계와 더불어 당시의 권신(權臣) 임

견미(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 등에게 참형(斬刑)을 가하였다.  이성계가 최영과 함께 정당

(正當)에 자리 잡고 있을 때 최영은 임, 염이 기용한 사람을 깡그리 내쫓기 시작했다.  이를 

알게 된 이성계는 최영에게

  "임, 염이 권신으로 오래 있었으니 궁중(宮中) 부중(府中)의 사람이 거의 다 그들의 사람이

었을 것이요.  그러니 그 사람들의 재덕(才德) 여하를 조사하여 여전히 두 사람은 두는 게 

좋지 않겠소?"

하는 뜻을 비쳤다.  그러나 영은 이 말에 응하지 않았다.

  말년의 고려는 염흥방, 임견미, 지대연(池大淵), 이인임 등에 의하여 국정이 좌우되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전권을 갖고 용사(用事)하기 때문에 그 해독이 백성을 못 살게 하고 나

아가서는 나라를 좀먹게 되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그들을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와 

같이 간주하고 미워하였다.

  최영은 이를 좌시할 수 없어 혁폐도감(革弊都監)을 설치하고 죽일 자는 죽여 없애고 내쫓

을 자는 내쫓았다.  그리하여 한 집에서 주출(註黜)을 당한 자가 천여인에 이르기도 했다.

  최영이 이성계와 더불어 혁폐를 했기 때문에 상하는 통쾌히 생각하고 조야(朝野)는 경사

로이 지내게 되었으나 그 대신 왕실이 점차로 고적해지고 우익(羽翼)이 없어져 다시 일어난

다는 것은 쉬운 일이 못되었다.

  이때에 있어서 목은(牧隱), 포은(圃隱)과 더불어 일한 사람은 이숭인(李崇仁), 김진양(金震

陽) 이외에 약간명 초야(草野)의 백면서생(白面書生) 뿐이었다.  국사가 제대로 진전되지 못

한 것은 이런 이유도 있다.

  이성계와 최영은 의좋게 그날 그날을 지냈다.  이성계의 위엄과 덕망이 나날이 높아져 가

자 이를 시기하는 무리들은 항상 신우왕에게 무고하고 물리치려 하였다.  이런 일이 있게 

되면 최영은 얼굴에 노기를 띠고

  "이성계는 나라의 주석(柱石)이다.  이 나라가 망하게 될 큰 변이 생기면 이를 뉘에게 맡

기겠는가? 깊이 생각하고 경솔히 굴지 말라."

고 경고(警告)하였다.

  신우왕 십사년 무진(戊辰=西紀 1,388년 명나라 홍무(洪武) 21년)이었다.  이때 왕은 이성계

와 조민수(曺敏修)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遼東)을 토벌케 하였다.  당초 명나라 홍

무 기유(己酉=西紀 1,368년)에 명태조는 부부랑(符寶郞) 설사( 斯)를 고려에 보내 새서(璽書)

를 주게 하고 동시에 공민왕을 봉하여 고려 국왕으로 삼고 금인(金印)까지 만들어 보냈다.  

그리하여 왕은 그때까지 쓰던 전원(前元) 연호를 정지함과 동시에 사은사(謝恩使) 강서찬(姜

師贊)으로 하여금 전원에서 주었던 금인을 반납(返納)케 하고 의관문물을 모두 화제(華制)에 

의하여 시행하기로 했다.

  그런데 공민왕이 시해(弑害)를 받자 김의(金義)란 자가 명나라에 진상할 마필(馬匹)을 팔아 

치운 후 명나라 사신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게 되면서부터 마음이 변해서 중도에 부사(副使)

인 채빈((蔡斌)을 살해하고 몰래 북원(北元)으로 도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신우왕 3년 정사(丁巳=西紀 1,377년)에는 북원으로 사신을 보내 2월부터 북원 연호 

선광(宣光)을 사용할 것을 알리게 했다.  그런데 다음 해 무오(武午)에 이르러서는 선광 연호

를 내던지고 9월부터 다시 홍무 연호를 사용하기로 했다.  명태조는 철령(鐵嶺) 이북이 원래 

전원에 속한 것이라하여 요동으로 돌리게 하고 또 철령위(鐵嶺衛)란 것을 세워 요동에 백호

(百戶)를 주게 하였다.  왕 신우가 이를 알고 4월에 들어서부터는 다시 홍무 연호를 중지하

고 조민수로 하여금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를 삼고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요동을 정

벌케 하였다.

  고려는 원종(元宗)시대부터 원(元)나라를 종주국(宗主國)으로 섬겨왔다.  그 햇수가 한 백년 

정도가 아니었다. 따라서 충선왕(忠宣王) 이하가 모두 원나라의 외손(外孫)이었다.  그런데 

명(明)나라가 흥하기 시작한 후부터 공민왕이 명나라를 의주(義主)로 섬겨 한때 말썽이 많았

다.  다시 말하면 전원의 뒤를 이어 생긴 북원과 강경히 관계를 끊을 수 없다는 말썽이었다.  

정도전(鄭道傳), 박상충(朴尙衷) 등 여러 사람은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삼자고 주장하고 이인

임, 지대연 등 여러 사람은 북원을 종주국으로 삼자고 주장하여 피차간 대립이 되었는데 여

기에만 그치지 않고, 이 때문에 죄를 입은 사람까지도 있게 되었다.

  최영이 집권하고 있을 때 명나라는 마침 철령에다 철령위를 세우고자 하였다.  이를 알게 

된 여러 사람들은 모두다 북원을 섬길 것을 주장하고 요동을 치기를 결의하였다.  최영은 

이성계의 명망이 날로 높아질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이성계가 임금이 되리라는 말까지 떠

돌았으므로 이 말을 낭설로만 믿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성계의 일거일동을 감시하다 못

해 요동토벌에 참가하도록 하였다.  무슨 잘못이 있게 되면 이것을 증거로 명나라에 득죄

(得罪)케하여 처치하려는 흉계를 품은 것이다.

  최영이 요동토벌할 것을 신우왕에게 권할 때에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 이자송(李子松)은 

영의 집으로 가서 

  "요동토벌은 무익한 일이다.  도리어 나라에 해가 될 일이다.  그만두는 것이 득책(得策)일 

것이다."

고 만유하였다.

  그러나 최영은 이 말에 귀도 기울이지 않고 그에게 임, 염의 도당이라는 이름을 붙여 하

옥시키고 장형(長刑)을 가하여 멀리 정배를 보냈다가 죽이고 말았다.

  이런 일이 있자 신우왕은 최영만 상대하여 요동토벌을 결의한 후 봉주(鳳州)에 이르러 최

영과 이성계를 불러 놓고

  "과인이 요동을 토벌함에 있어 경들은 최대의 힘을 아까지 말라."

  부탁하자 이성계는

  "오늘의 형편으로는 출사(出師)하는게 불리할 것으로 생각하나이다.  첫째 약소한 자가 강

대한 자를 치려 하니 불리할 것이요.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내놓으려 하니 불리하고,  셋째 

나라의 전군을 내놓아 원정(遠征)을 하면 왜구가 이 틈을 타서 침입할 것이니 크게 불리할 

것이며,  넷째  벌써부터 더위와 비가 심해 궁노(弓弩)는 풀리고 군사는 악역(惡疫)에 걸릴 

태니 역시 불리할 것이옵니다."

고 아뢰었다.  신우왕은 이 말에 굴하지 않고

  "글세? 그러나 이미 출사를 했는데 어찌 중단한단 말이요?"

고집을 부렸다.  이성계는 여러번 출사중지를 권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경도 이자송의 뒤를 밟고 싶은가?"

힐책하는 듯 반문하였다.

  이성계는

  "이자송은 비록 죽었지만 그의 아름다운 이름은 천추에 전해질 것이 아니오니까?"

  그래도 왕은 여전히 듣지 않자 이성계는 물러나와 울면서

  "생민의 불안이 이제부터 시작케 되었다."

크게 탄식하였다.

  신우왕은 평양으로 와 영에게 팔도 도통사(八道都統使)의 직을 맡기고 조민수에게는 좌도 

도통사(左道都統使)의 직을 맡겨 심덕부(沈德符) 등으로 하여금 그의 절제를 받게 하고 또 

이성계에게는 우도 도통사(右道都統使)의 직을 맡겨 이두란(李豆蘭) 등으로 하여금 그의 절

제를 받게 하였다.  그리하여 좌우군의 총 수가 38,600에 달했는데 이것을 10만이라 가칭하

고 진군케 하였다.  이때에 신우왕과 최영은 대원수격이 되어 평양에 머물러 있으면서 좌우

군을 절제하고 있었다.

  때는 바로 5월이었다.  이때에 좌우군은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威化島)로 들어서려 할 때

였다. 이성계는 의분을 참을 수 없어 회군(回軍)하기로 결심했다.

  좌우군 도통사는 신우왕에게 아뢰기를

  "신등이 압록강을 지낸즉 앞에 큰 내가 있었사옵니다.  이것이 빗물로 창일되어 있어 개

울에 벌써 수백명이 빠져 죽었삽는데 개울은 더욱 깊어져 한층 더 위험을 느끼게 합니다.  

이대로 강중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양곡만 허비하는 일이 되고 말 것이옵니다.  적은 놈이 

큰놈을 섬기는 것은 나라를 보전하는데 경대법일 것이올시다.  <철령위>를 세운다는 말을 

들의셨으면 박의중(朴宜中) 같은 사람으로 하여금 글을 올려 품하는 게 좋을 것 같사온데 

지금 별안간 대국을 정벌한다는 것은 나라와 생민을 위하는 일이 못될 것으로 생각되나이

다.  바라컨대 전하!  회군하도록 분부를 내리소서."

  그들은 이런 내용의 글을 올렸으나 왕은 역시 본체 만체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성계는 

휘하 제장에게

  "우리가 지금 명나라 국경을 침범하면 당장에 나라와 생민에 위해가 닥쳐올 것이다."

경고하였다.  성계는 또 말을 이어

  "그런데도 상감은 묵연히 계시고 또 최영도 이미 늙어서 그런지 모른 체만 하고 있으니 

큰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여러 장수와 더불어 왕을 뵈옵고 몸소 왕의 측근에 있는 악

도를 삼제(芟除)하고 싶으나 왕께 그런 아량이 없으니 어찌한단 말이요?  이 생민의 화(禍)

를 누가 물리쳐 준단 말이요?"

하고 탄식하매 여러 장수는 이구동성(異口同聲)이로

  "우리나라 사직의 안위(安危)는 이장군 일신에 달려 있습니다.  저희는 이장군의 분부라면 

무슨 분부든지 받들겠소이다."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압록강으로 회군하자 이성계는 백마에 올라 붉은 활에 백우전(白

羽箭)을 곁들어 가지고 강변에 서 있었는데 군중의 여러 장수는 그를 바라보고

  "백세내세(百世來世)에도 저런 장수가 또 있을까?"

  칭송했다.

  그러나 위화도에서 회군하기 전 이성계의 고향 동리에는 다음과 같은 동요(童謠)가 떠돌

도 있었다.

  서경(西京) 밖에는 불빛이 충천해지고

  안주성(安州城) 밖에는 불연기 자욱하네

  이 새를 오가는 이원수님은 보시는가? 살벌장을

  팔도의 생령 원수님을 신명처럼 바라고 있네

  이와같은 동요가 있은지 얼마 안 돼서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하기 시작햐여 국내 인심을 

안정케 하였다.

  성계의 둘째 아들은 그의 형 방우(芳雨) 및 이두란의 아들 화상(和尙) 등과 함께 신우왕의 

행재소(行在所)에 나와 군전(軍前)으로 왔다.  이때 신우왕이 말을 달려 서울에 돌아오자 여

러 군사는 근교(近郊)로 몰려와 글로써 최영의 죄를 열거하여 문죄하였다.

  그러나 신우왕은 본척 만척 그 요구에 응하지 않고 설장수( 長壽)를 보내 여러 장수를 

개유하고 파병케 하였다.  그러나 여러 군사는 도성 문 밖으로 나아가 주둔할 따름이었다.

  신우왕은 최영과 함께 병사를 소집하여 4대문을 지키게 하고 동시에 조민수 등 여러 장수

의 직함을 삭탈하고 항전하려 하였다.

  좌군은 선의문(宣義門)으로 이성계는 숭인문(崇仁門)을 거쳐 침입하였다.  좌우군이 이렇게 

다투어 가면서 들어서자 성을 지키는 군사들도 별 대책이 없어 침입하는 것을 방관만 했고 

또 성내의 사녀(士女)들은 주육을 가지고 달려와 군사들의 수고에 사례하였으며 늙은이와 

아이들은 성상(城上)으로 올라가 내려다보면서 환호용약(歡呼勇躍)하였다.

  이때 민수는 검은빛 대기(大旗)를 내세우고 영의교(永義橋)에 이르렀으나 최영의 군사 때

문에 후퇴하게 되었다.  그러자 뒤를 이어 이성계가 황룡을 그린 대기를 내들고 선죽교(善

竹橋)를 거쳐 남산(男山)으로 올랐다.  이때 홍진은 일어나 하늘을 가리고 북소리는 울려 성

중이 떠나갈 것 같았다.  최영의 휘하들도 씩씩했지만 모두다 이성계의 군기만 보고도 궤주

(潰走)하였다.

  최영은 항전할 도리가 없어 화원(花園=신우왕의 소재지)으로 돌아오려고 창으로 수문자(守

門者)를 찔러 물리친 후 원내로 들어섰다.  이때 이성계는 암방사(岩房寺) 북령으로 올라가 

휘하 군사로 하여금 대라(大螺)를 한 번 불게 함과 동시에 화원을 수백겹으로 포위케 하였

다.  이와같이 만들어 놓고 소리를 높여 최영 내놓기를 청했다.  이때 신우왕은 영비(寧妃=

최영의 딸)와 최영을 데리고 팔각전(八角殿)에 있었으나 나오기를 싫어하였다.  그래서 여러 

군사는 화원을 훼철(毁撤)하고 난입하여 곽충보(郭忠補)가 앞장서서 최영을 수색하였다.

  신우왕이 최영의 손을 잡고 울면서 작별하자 최영은 왕에게 재배한 후 충보를 따라 나섰

다.  이때 이성계는 최영을 보고

  "이와같은 사변이 나의 본심에서 생긴 것은 아니요.  그러나 요동을 토벌한다는 것은 대

의에 벗어나는 일일 뿐만 아니라 나라를 불안케 하는 일이므로 부득이 이런 수단을 취한 것

이니 이를 양찰하고 잘 가 계시오."

하며 서로 울고 최영은 고봉현(高峰顯=오늘의 고양)으로 추방되어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두 도통사와 36원수는 대궐로 들어가 사례하고 제각각 군으로 돌아갔다.

  최영은 조인옥(趙仁沃) 등이 솔선하여 죄를 들어 참(斬)할 것을 청하자 마침내 참형을 당

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73세였다.  그러나 그는 형에 으르러도 사색(辭色)이 변해지지 않

았으며 또 도성 안의 모든 사람은 문들을 닫아 걸고 그를 조상하였다.  그리고 원근에 사는 

남녀 노소며 아동주졸 등은 모두 눈물을 흘리고 그의 최후를 조상했다.

  이인임이 일찍이 

  "이판삼사(李判三司=이성계)는 이 나라의 주인이 되고 말 것이다."

고 한 적이 있었다.  최영은 이 말을 듣고 처음엔 크게 노하였으나 나중엔

  "인임의 말이 틀림없을 것 같다."

하며 탄식하였다.

  그해 6월에 요동정벌군(遼東征伐軍)은 모두 돌아왔다.  신우왕을 폐하여 강화로 추방하고 

신우왕의 아들 창(昌)을 왕위에 오르게 함과 동시에 동월 초 3일부터 홍무 연호(洪武年號)를 

다시 쓰기로 했다.

  신우왕은 쫓겨나가는 날 밤에 내시 등 80여명과 더불어 갑옷을 입고 이성계 및 조민수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모두 군문외(軍門外)에 주둔해 있고 집에는 없었기 때문에 소기의 

목적을 달하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리고는 폐왕 창 1년 기사(己巳=西紀 1,389년)에 창(昌)을 폐하여 강화로 추방하고 정창군

요(定昌君瑤)를 맞아 왕위에 오르게 하였는데 이가 바로 고려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恭讓王)

이다.

  김저(金佇)란 사람은 최영의 생질이었다.  그는 정득후(鄭得厚)란 사람과 더불어 몰래 여흥

(麗興)으로 가 폐왕 우(禑)를 찾았다.  우는 그들을 보고 울면서

  "아무리 추방된 몸이지만 울화증이 나서 못 견디겠소.  이젠 꼼짝도 못하고 죽게 됐소! 내

가 지금 장사(力士) 한 사람만 얻게 되면 이시중(李侍中=이성계)을 없앨 수 있겠는데.  이시

중을 그대로 두고 죽는다는 것이 크게 한이 되오.  지하에서도 눈을 감지 못하겠소."

  칼 하나를 정득후에게 전하게 하고 이것으로 거사할 것을 당부하였다.  득후는 정말 그리

할 것같이 대답하고 그길로 이성계에게로 가 이 음모가 있음을 바른 대로 고했다.

  그리하여 이성계는 김저를 순군옥에 가두어 국문케 하고 심덕부, 지용기, 정몽주, 설장수, 

성석린, 조준, 박위, 정도전 등과 더불어 의논하였다.

  "우(禑)와 창(昌)은 당초부터 왕씨(王氏)가 아니다.  종사를 받들 자격이 없다.  폐가입진(廢

假立眞)해야 한다."

  그리하여 정비(定妃)의 교지에 의하여 우를 강릉으로, 창을 강화로 옮긴 다음날 이성계는 

여러 중신과 의논한 후 정창군을 맞아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이다.

  이때 윤회종(尹繪宗)은 글을 올려 우와 창을 죽여 없앨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우는 강

릉에서 창은 강화에서 참형을 받고서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이때 우의 비(妃)였던 영비

는 소리를 내어 통곡하면서

  "내가 오늘날 이렇게 된 것은 아버지(최영)의 잘못으로 생겨진 것이다."

부르짖었다.

  그리고 간관(諫官)등은 이색(李穡)의 입창영우(立昌迎禑)한 죄를 논하고 이색에게 극형을 

가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이색을 장단에서 국문하였는데 색의 말은 이러했다.

  "지난 해 명나라의 예부상서(禮部尙書=우리의 외무부장관에 해당) 이원명(李原明)이 말하

기를 <너희 나라는 아비를 쫓아내고 아들을 세우니 천하에 이런 법도 있는가?  또 왕과 최

영이 모두 붙잡혀 옥에 있다니 이럴 수도 있는 것인가?> 하고 힐문한 일이 있었다.  내가 

환국한 후 이시중에게 한 말이 있다.  원명의 말은 귀로는 들을 수 있었지만 입으론 말할  

수 없다.  여흥은 머니 가까운 데에 두는 게 좋을 것이다.  그리하면 임금을 추방했다는 소

리가 잠잠해질 것이라고..."

  이 말이 있은 후 색을 함창으로 옮기고 색의 아들 종학(種學) 등은 먼 곳으로 귀양을 보

냈다.  그리하여 종학 등은 결국 이씨 혁명이 있을 때 죽고 말았다.

      [五百年의 曙光]   <善竹橋에 흘린 피>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五百年의 曙光 

    善竹橋에 흘린 피 



   공양왕의 세자 석(奭)이 명나라에 가 있다가 돌아오자 이성계는 황해도 황주에까지 나아

가 마중을 한 후 해주에서 사냥을 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노루가 있어 이를 쏘아 잡게 되

었는데 채 말고삐를 잡지 못하여 마상에서 떨어져 몸을 몹시 상해 견여(肩輿)를 타고 돌아

오게 되었다.

  시중(侍中=정승 벼슬) 정몽주(鄭夢周)는 이성계의 위덕(威德)이 날로 성해 가는 것을 걱정

스럽게 생각하여 자기 파와 동모하고 성계를 제거하려는 결의를 품고 있었다.  성계가 때마

침 말에서 떨어져 고생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당시의 대간(臺諫)에게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대단히 고생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먼저 그의 우익(羽翼)으로 

있는 조준(趙浚) 등을 도륙하고 나중에 성계를 처치하는 게 좋겠다."

  제언하였다.

  그리하여 대간은 이를 삼사(三司)에 고하였다.  삼사는 조준,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도전, 

밀직사(密直使) 남은(南誾), 예조판서(禮曺判書) 윤소종(尹紹宗), 청주목사(淸州牧使), 조박(趙

璞) 등의 죄를 들어서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이를 도당(都堂)에게 내주어 처리하게 했다.  이때 몽주는 도당 속으로 들어가 그들

의 조에 부채질을하여 여섯 사람이 먼 곳으로 귀양을 가게 하였다.  또 나아가서는 자기 당

파의 사람인 순군천호(巡軍千戶) 김구련(金龜聯)과 형조정랑(刑曺正郞) 이번(李幡) 등으로 하

여금 구금해 놓은 장소로 나아가 국문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때 방원은 제릉(齊陵=태종 모후 한씨의 묘소) 곁에서 여막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말에서 떨어져 돌아왔다는 소문과 또 몽주는 아버지가 입경하는 날에 난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말을 타고 달려왔다.  방원은 벽란도(碧瀾渡)에 이르러 부친에게

  "정몽주가 저의 집을 구렁에 넣을 음모를 하고있습니다.  속히 돌아가셔야 합니다.  여기

에 유숙하시다간 큰 봉변을 당하시게 됩니다."

  진언하였다.

  그러나 성계는 이 말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도 방원은 재삼 재사 간하여 마지 않

았다.  성계는 부득불 응하지 않을 수 없어 억지로 고통을 참아가면서 밤새도록 걸어 서울

로 돌아왔다.

  그런데 몽주는 대간을 시켜 교대적으로 글을 올리게하여 조준, 정도전 등을 죽이고자 하

였다.  그리하여 방원은 몰래 성계에게로 나아가 

  "아버님, 정몽주를 죽여야 합니다.  몽주를 죽이는 것은 저희 집을 살리는 것이올시다.  

속히 처치하소서."

  간청하였다.  그러나 성계는 이 말을 듣고

  "그게 다 무슨 말이냐?  사생(死生)은 유명(有命)한 것이다.  나는 그리하고 싶지 않다."

  대답할 따름이었다.  방원은 그래도 

  "몽주를 죽여야 합니다."

고 고집하였다.  그러나 성계는 여전히 불을하면서 

  "다 듣기 싫다.  그만 말하고 빨리 돌아가 너하는 일이나 완수하라."

  아들을 돌려보냈다.

  방원(芳遠=성계의 다섯째 아들 후에 태종)은 숭교리 구저(崇敎里舊邸)에 있으면서 성계의 

응낙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와같이 방안만 지키고 있을 때에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방원은 나는 듯이 나가 보았다.  대문을 두드린 사람은 광흥창(廣興倉) 사자(使者) 정

탁(鄭擢)이란 사람이었다.  정탁은 방원을 보기가 무섭게

  "오늘 생민은 이장군님을 신명과 같이 보고 있소이다.  바로 신명으로 나서실 때올시다.  

왕후장상이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충고 하였다.

  그리하여 방원은 방과(芳果=성계의 둘째 아들) 및 제(濟=성계의 사위)와 더불어 의논한 후

  "몽주를 볼가불 없애야 하겠소.  내가 천인(天人)이 공노(共怒)할 죄를 지게 될지라도..."

  그리고는 이두란으로 하여금 정몽주를 격살할 것을 부탁했다. 이때 두란은

  "글세? 이성계공(公)이 모르시는 일을 내가 어찌 감행한단 말이오?"

  달게 응낙하지 않으매 방원은 조영규(趙英珪) 등을 불러

  "우리 이씨가 왕실에 충성을 다해 온 것은 이 나라 백성이 다 아는 바이다.  그런데 정몽

주의 모함으로 이제 악명을 듣게 되었다.  나의 휘하에 있는 사람들은 무엇에 필요한 사람

인가?  이씨를 위하여 나서는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단 말인가?"

  부르짖었다.

  이때 조영규는

  "제가 이씨를 위하여 최대의 힘을 바치고자 합니다."

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방원은 조영규, 조영무(趙英茂), 고려(高呂), 이부(李敷) 등으로 하여금 도평의사사

(都評議使司)로 들어가 몽주를 없애게 하였다.

  그런데 별안간

  "예라 물러있거라."

  "예라 물러있거라."

하는 벽제성( 除聲)이 들려왔다.  그래서 나가보니 정몽주가 문전에 당도해 있었다.

  성계의 서형(庶兄) 원계(元桂)의 사위 변중량(卞仲良)은 무슨 음모가 있는 것을 몽주에게알

렸다.

  몽주는 이말을 듣고도

  "무엇? 그러면 한 번 봐야 하겠다.  문병을 온체하고.."

  이어 문을 두드렸다.

  이때 이성계는 몽주를 여전히 친절히 대하였다.  성계의 서제(庶弟) 화(和)도 있었는데 그

는 방원에게

  "몽주를 처치할 때는 바로 이때다.  그러나 아버님께서 진노하실까 걱정된다."

말했다.

  "그러나 기회란 뒤를 이어 오는 것은 아니올시다.  이 기회를 잃으면 다시는 얻어지지 않

을 것입니다."

  방원은 이와같이 대답하고 조영규로 하여금 칼을 차고 몽주가 지나는 길에서 대기하도록 

했다.  때마침 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유원(柳源)이 사망하였다.

  몽주는 유원의 집으로 가 조상을 하고 거기에서 한참 동안 머물렀다.  영규등은 모든 것

을 준비해 놓고 몽주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몽주가 나타났다.

  영규는 나는 듯이 달려가 몽주에게 일격을 가하였으나 빗나가서 헛수고로 돌아갔다.  몽

주는 말을 빨리 달리게 하면서 피신하기 시작했다.  영규는 또 달려들어 말목에 일격을 가

했다. 말이 쓰러지자 몽주는 말에서 떨어져서 다시 도망하기 시작했다.

  이때 영규의 일당인 고려(高呂) 등이 달려들어 몽주를 격살하고 말았다.

  몽주를 격살한 후 방원은 아버지 성계에게로와 몽주를 격살한 것을 보고하였다.

  이성계는 이 말을 듣기가 무섭게 대경실색하면서

  "무엇? 어째? 우리 집은 대대로 충효(忠孝)로 유명한 집인데 너희들이 맘대로 일국의 대신

을 죽였단 말이냐? 국인이 나를 무엇으로 보겠느냐?"

고 소리를 내 꾸짖었다.

  그러나 방원은 엄연한 태도로 말했다.

  "아버님, 몽주와 몽주의 일당은 우리 집을 멸망의 구렁으로 쓸어 넣으려 노리고 있은지 

오래였습니다.  이러한 몽주를 어찌 그대로 내버려 둔단 말씀이오니까?"

  그러나 성계의 노기는 사라지지 않고 더욱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이때 강씨 부인은 성

계의 기색을 두루 살피고는

  "대감께서는 평소에 대장군으로 자임하시고 모든 일을 잘 처단하시더니 지금 와서는 왜 

그리 비겁해지셨습니까? 용기와 담력을 내서 행하십시오."

  격려했다.

  그리하여 성계는 다음 날에 사람을 보내 이와같이 아뢰게 했다.

  "몽주는 남몰래 대간(臺諫)과 손을 잡고 충량한 사람을 모함했기 때문에 마침내 죽고 말았

사옵니다. 바라건대 준(조준) 등을 조치하시와 대간과 더불어 이를 변명케 하소서."

  그리하여 왕은 부득이 대간인 사람들을 순군옥(巡軍獄)에 구금시키고 배극렴, 김사형(金士

衡)으로 하여금 그들을 국문하도록 했다.  이때 좌상시(左常侍) 김진양은

  "몽주 및 이색 또는 우현보(禹賢寶)가 이숭인과 이종학, 조호(趙瑚) 등을 보내 신 등으로 

하여금 탄핵하도록 시켰나이다."

라는 말을 했다.

  그리하여 숭인 등 세 사람을 순군옥에 구금하였다가 얼마 안 돼서 김진양, 이확(李擴), 이

뢰(李 ), 이돈(李敦), 권홍(權弘), 정희(鄭熙), 김묘(金畝), 서진(徐甄), 이작(李作), 이신(李申) 및 

숭인, 종학 등을 먼 곳으로 귀양을 보내게 하였다.  당시의 유사(有司)인 사람은 말하기를

  "진양 등의 죄는 참형을 받아야 한다."

고 주장했지먄 성계는

  "그러나 김진양이란 탄핵한 것은 몽주의 사주(使嗾)에서 생긴 일이다.  어찌 극형을 진양

에게 가한단 말이냐?"

하며 진양을 용서하였고 이색은 한주(韓州=韓山)로 추방하였다.


  정몽주와 이성계는 당초부터 나라의 중신으로 유명하였다.  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回軍)

한 후부터는 성계도 몽주와 같이 정승의 열(列)에 들어가 함께 나라에 몸을 바치고 지냈다.

  그런데 이성계의 공훈이 날로 높아져 민심이 성계에게 쏠렸다.  이러했기 때문에 정몽주

는 이성계가 고려조에 대신하여 왕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남모르게 성계를 없애려는  꿈을 

꾸었다.

  방원은 일찍이 아버지 성계에게

  "정몽주는 어째서 저희 집을 멸망의 구렁으로 쓸어넣으려 하는 것인가요?"

물었다.  성계는 그렇다고 해서 몽주에게 무슨 앙심을 품고 있지 않았다.

  몽주의 음모가 청천백일하에 드러나기 시작하자 방원은 어느 때 집에다 잔치를 베풀고 몽

주를 청하였다.  이 좌석에서 방원은 시조로 몽주를 종용(慫慂)하였다.  그 시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러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하여 백년까지 누리리라.

  방원이 이와같이 먼저 부르자 몽주는 이에 화답하는 노래를 불러 자기의 심경을 피력하였

다.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몽주가 이와같이 화답하자 방원은 몽주가 변심하지 않을 것을 짐작하고 마침내 부하로 하

여금 격살케 한 것이다.

  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 남은(南誾)은 조인옥(趙仁沃)과 더불어 성계를 임금으로 추

대할 것을 남몰래 의논하고 이를 방원에게 알렸다.

  비밀히 방원은 이 말을 듣고

  "알겠소.  그러나 이 일은 대사이므로 가볍게 말해서는 안 되오."

  대답하였다.  당시의 민심은 모두 성계에게로 돌아 조인광좌(稠人廣坐) 중에서도

  "천명과 인심이 벌써부터 이시중에게 돌아갔는데 왜 급히 서두르지 않는고?"

하고 떠들어대는 사람까지 생겼다.

  그리하여 공양왕 임신 유월(壬申六月)에 이르러 방원은 남은과 더불어 추대 계획을 세우

고 비밀히 조인옥, 조준, 정도전, 조박 등 52인과 협력하여 추대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성계가 이에 불응하고 노발대발할까봐 방원도 보고할 용기를 내지 못하다가 부득이 강씨 

부인에게로 나아가 추대 계획의 전부를 알림과 동시에 이를 성계에게 알리게 하였다.

  그리하여 강씨 부인은 기회를 엿보고 지내다가 어느날 밤에 이를 이성계에게 알렸다.  강

씨에 대한 성계의 태도는 방원에 대한 태도보다 지극히 부드러웠다.

  그리하여 7월 12일에 시중 배극렴 등은 정비(定妃=공민왕비)에게로 나아가

  "오늘의 상감은 명철하시지 못하여 임금으로서의 위망(威望)을 잃어 민심이 벌써부터 이반

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상감으로서는 이 사직과 이 백성을 부지하지 못하실 것으로 믿사오

니 바라컨대 오늘의 임금을 폐하소서."

하고 아뢰었다.

  그리하여 정비는 왕을 원주(原州)로 내쫓고, 13일에 이성계로 하여금 국사를 맡게 하였다.  

그리고 15일에 이르러서는 배극렴 등이 국보(國寶)를 성계에게 전하고자 성계의 잠저(潛邸)

를 향하여 나섰다.

  그런데 이때 대사헌(大司憲) 민개(閔開)만이 불찬성하고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남은만

은 민개를 죽이려 하였다.  이때 방원은

  "도의상 그리할 수는 없다.  멈추라!"

  재삼 만류하였다.  그리하여 민개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성계는 대문을 굳게 닫고는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게 하고 혼자 앉아 있었다.  이를 안 

배극렴은 대문 짝을 떼 던지고 들어가 옥새를 청상에 놓고 대배(大排)를 하며 동시에 북을 

울리면서 <천세(千歲) 천세>하고 성계를 찬송하였다.

  그러나 성계는 이를 굳이 사양하면서

  "옛날부터 임금이 되려면 천명이 앞서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천명도 못 받은

데다 덕이 부족해서 임금 노릇을 못하겠다."

  여전히 거부하였다.

  그러나 대소신료(大小臣僚)는 말할 것도 없으며 여항의 장로(長老)들도 그냥은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임신 7월 16일 병신(丙申) 즉 西紀 1,392년 음력 7월 16일이었다. 이날 백관은 반

(班)을 지어 수창궁(壽昌宮) 서편에서 성계를 맞이하였다. 이 환영의 의식이 끝나자 이성계는 

말에서 내린 후 걸어서 정전(正殿)으로 들어가 즉위한 후 옥좌에서 물러나 백관의 하례(賀

禮)를 받고 육조판서 이상의 관직을 가진 사람을 전각 위로 모이게 하고

  "과인이 이 나라의 우두머리 정승이 된 것만해도 분수에 넘치는 일인데 오늘 또 이런 일

이 있게 되니 참 의외가 아닐 수 없소.  병중에 있지 않고 몸이 건강했더라면 필마로 이 불

의의 일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요.  그런데 병에 걸려 수족을 맘대로 쓰게 되지 못하여 이

런 일을 받게 되었소.  경등은 여전히 마음과 힘을 다하여 과인을 도웁고 나아가서는 전조

의 중의대소료로 하여금 여전히 국사에 힘쓰게 하오."

  간곡히 부탁했다.

  임신 7월 16일! 이날은 이성계가 여조 5백년 사직을 전복시키고 조선국 태조로 출발한 첫

날이었다.  그때 나이 58세였다.

  그런데 나라를 들어 이성계에게 공손히 바치고 만 고려 32대 임금 공양왕은 어떠한 임금

이었던가를 다음에 잠깐 써 보고자 한다.

  공양왕은 한갓 유하고 잔약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그랬던지 울기 잘하기로 유명

하였다. 그런데다 국정에는 마음이 없고 불도(佛道)에만 쏠려서 국사가 어려워지기만 했다.  

그리하여 고려의 우국대신(憂國代臣) 정몽주는 어느날 경연(經筵)이 벌어졌을 때 왕에게

  "선비의 도는 일상 유용한 일을 함에 있고 요순堯舜)의 도도 또한 이에 있사옵니다.  기거

동작에 있어 그 옳은 바를 얻게 되면 그것이 바로 요순의 도가 되는 것이올시다.  그런데 

저 불가(佛家)의 도는 이와 정반대가 아니오니까? 친척을 멀리하고 남녀와의 관계를 끊고 

홀로 암굴 속에 앉아서 초의(草衣)를 몸에 떨치고 목식(木食)을 하니 이는 관공적멸(觀空寂

滅)을 본 받는 생활이 아니고 뭣이겠습니까?"

  사불(事佛)의 폐를 말해 올렸다.

  그러나 왕은 이를 들은 척 만 척할 뿐이었다.  정몽주는 온갖 방법으로 고려를 구하려 하

였으나 임금이 그런 정도였으므로 몽주의 우국열성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되고 고려는 마침내 

이성계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고려의 멸망과 함께 죽고 만 정몽주는 어떠한 사람이었가?  그의 약전(略傳)은 대략 다음

과 같다.


   정몽주의 자(子)는 달가(達可), 호(號)는 포은(圃隱)인데 지주사(知奏事) 습명(襲明)의 후예

다.  그의 어머니 이씨는 그를 잉태할 때 난초분을 안고 있는 꿈을 꾸었으므로 이름을 몽란

(夢蘭)이라 지었다.  천생 사람됨이 수려하고 또 어깨에 사마귀가 일곱이나 있는데 그 벌려

져 있는 모양이 북두(北斗)와 같았다.  그의 나이 아홉 살 때 그의 어머니가 낮에 흑룡(黑龍)

이 후원 배나무에 올라가는 꿈을 꾸고 깨어 보니 그것은 바로 몽난이었다.  그래서 이름을 

고쳐 몽룡(夢龍)이라 지었다.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있다가 태조(이성

계)를 따라 삼선삼개(三善三介)를 물리쳤다.

  그는 부모상(父母喪)에 반드시 묘측에 여막을 세우고 여기서 종상(終喪)하였기 때문에 나

라에서는 효자문(孝子門)을 세워 그를 표창하였다.  그리고 주자학(朱子學)에도 밝아서 모든 

선비들은 스승처럼 앙시했다.  이색은 일찍이 말하기를

  "몽주의 논리가 횡성수설같이 들리지만 어느 하나라도 이론에 안 맞는 것이 없다."

고 칭찬했다.  이 때문에 후인들은 그를 이학의 조(祖)로 추대하였다.

  몽주는 인격적으로 보아 첫째 기백(氣魄)의 인(人)이었다.  그가 일찍이 홍사범(洪師範)을 

따라 서장관(書將官)이 되어 명나라로 가게 되었는데 해중에서 사나운 풍랑을 만나 배가 뒤

집혀 일행이 다 죽게 되었을 때에 일개 암도(岩島)에 표착하여 13일 동안을 천명만 기다리

고 초조히 굴지 않았다 한다.  이런 것을 보면 그의 기백을 알 수 있고 또 하나는 명나라가 

원나라를 전복시키고 일어났을 때 그는 당시의 조정에 대하여  명나라와 가까이 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권신(權臣) 이인임은 또다시 원나라를 섬기고자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

나 몽주는 한사코 문신 10여인과 더불어 왕에게 그 불가함을 역설하여 사명(事明)할 것을 

글로 아뢰었다.  이 때문에 권신 이인임은 몽주를 미워하여 언양(彦陽)으로 귀양보냈다.

  이런 점은 몽주가 수정불굴(守正不屈)의 대장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몽주는 대담한 변설(辯舌)의 인(人)이었다.  어느 때 왜구(倭寇)가 해주로 쳐들어

와 전군이 텅 비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일본으로 가 문책하려 하지 않았다.  이때 이인

임은 정몽주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몽주를 일본에 보내고자 왕에게 창하였다.  몽주는 이

인임의 심사를 알면서도 가기로 하였다.

  수월치 않은 일본이었지마는 일본은 몽주의 청산유수와 같은 변론을 듣고 칙사와 같이 대

접했다. 그리고 그의 시문을 구하는 자가 떼를 지어 모여 들었기 때문에 몽주는 단 하루를 

한가히 보내지 못했다.

  한편 명나라에서는 국내에 말썽이 생겨 고려에 군사를 보낼 결심을 하고 있었다.

  고려는 적당히 사절을 보내 성절(聖節)을 치하하려 했다.  그러나 조정의 사람들은 무슨 

호령이나 받을까봐 아무도 가려 하지 않았다.

  이때 권신 임견미가 신우왕에게 몽주를 추천했다.  그리하여 몽주는 사명을 완수할 것을 

장담하고 주야배도(晝夜倍道)하여 성절일(聖節日)에 하표(賀表)를 내 놓았다.  명나라 황제는 

하표를 보고

  "너희 나라는 무슨 핑계를 하고 오지 않으려다 할 수 없으니까 박두해서 온 것이지?"

  힐책하듯이 묻는 것이었다.  몽주는 지난날에 있었던 해상에서의 조난사실을 들어 여전히 

현하(縣河) 변(辯)으로 대답하였다.

  명제(明帝)도 이 말에 감동하여 몽주를 특대하였다.  그리고 신우왕 12년에도 몽주가 명나

라로 가 관복(冠服)을 청하고 또 세공(歲貢)의 면제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5년간 미납(未納)

한 공물이 면제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신우왕으로부터 두터운 상사(賞賜)를 받았다.

  몽주는 위에 말한 바와 같은 인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내(內)에 있어서도 외(外)에 있어

서와 같이 큰 일이며 큰 문제를 처리함에 놀랄 정도로 시원하고 통쾌하였다.

  그리하여 이성계가 공양을 임금으로 세움에 있어서도 도움이 커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로 승진됨과 동시에 순충론도 좌명공신(純忠論道 佐命功臣)으로 등장하게 되었고 또 이조는 

그에게 영의정(領議政)이란 벼슬을 증(贈)하고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諡號)를 내려 문묘(文

廟)에 모시게 하였다.

  그가 조영규 도배에게 격살을 당한 때의 향년은 56세였다.

    [五百年의 曙光]   <榮華의 지름길>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五百年의 曙光 

    榮華의 지름길 



   이성계는 왕씨 천하의 고려를 완전히 차지하긴 했지만 그래도 민심의 격동을 피하기 위

하여 나라 이름을 여전히 고려 그대로 두고 송도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고려 태조의 

묘(廟)를 경기도 마전(麻田)에 건설함과 동시에 왕씨 후예를 우대할 것을 천명(闡明)하였다.  

그래서 국내는 전일과 같이 안온해졌다.

  그러나 등극한지 2년되는 해 곧 태조 2년 계유(癸酉=西紀 1,393년) 2월에 이르러 국호(國

號)를 조선(朝鮮)이라 개칭하고 서울을 공주 계룡산(公州鷄龍山)으로 정하려다 하윤(河崙)의 

말을 듣고 동년 3월에 한양(漢陽=오늘의 서울)으로 결정하고 여기에 묘사(廟社)와 궁궐(宮闕=

경북궁과 청덕궁)을 건조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씨 신왕조의 기업이 완전히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한 공으로 개국공신의 한사람이 된 정도전(鄭道傳)은 어느날 대낮에 

역시 공신의 한 사람인 남은(南誾)의 첩의 집으로 갔다.  남은은 정도전에게 있어서 없지 못

할 동지였다.  남은은 대낮부터 술상을 차리게 하고 피차 세상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삼봉(三奉=정도전의 호)! 오늘은 퍽 심심하시었던 모양이시군요!"

  "왜요?"

  "이렇게 대낮에 찾아주시니..."

  "그런 것이 아니요.  한참 동안 의성군(宜城君) 대감을 보지 못해서..."

  "잘 오셨소.  나도 낮잠이나 잘까 하고 있었는데 의관도 다 벗고 술이나 마시면서 얘기나 

합시다."

  두사람은 남은의 사랑으로 들어가 멋대로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하고 있는 사이에 술상이 나왔다.

  "삼봉,  어젯밤엔 안 주무셨소?  웬 잠을 눕기가 무섭게 주무시오?  일어나시오.  술상이 

나왔소"

  남은이 이렇게 말하자 정도전은 몹시 곤한 듯이 기지개를 키면서 

  "사실 어젯밤은 잠도 잘 자지 못한데다 아침 일찍 일어나게 되어서 잠이 온 것 같소."

  도전은 새삼스레 양치를 하고 술상 앞으로 다가 앉았다.

  "오늘 안주는 골고루 잘 차렸는데 안어사(남의 첩을 존칭하여 부르는 말) 음식솜씨가 보통

이 아닌 것 같어!"

  "오늘은 웬 칭찬을 이리 하시오! 그만하고 술이나 먹읍시다.  이 술은 보통 술이 아니고 

천일주(千日酒)란 술이요.  삼봉을 위하여 벌써부터 준비해 두었던 것이요."

  남은이 대답했다.  도전은

  "그러면 오늘은 술도 좋고 안주도 좋으니 양껏 먹겠소.  대단히 고맙소.  대단히 고마워..."

하면서 자기가 먼저 한잔을 비웠다.

  "술맛이 어떻소?  내 말이 틀림없지 않소?"

  "참 좋은데... 그런데 대감!  안어사께서도 술 자실 줄 알지?"

  "좀 먹는 체하지만..."

  "그러면 안어사도 참석케 합시다.  생각이 어떠하시우?"

  "상관없소.  참석케 하리라."

  그리하여 남은의 제2부인도 술자리에 참석하였다.  이때 정도전은 잔에 술을 가득히 부어 

가지고 남은의 첩에게 

  "내 술 한잔 들어보십시오."

  권했다.  그러나 남은의 애첩은

  "제가 이 좌석에 참가한 것은 술을 먹으려는 것이 아니옵고,  정정승 대감께 약주를 쳐 

올리고자 함입니다.  이를 살피시고 술은 권하지 마십시오."

  술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도전은 이말 저말로 대꾸를 하면서 권하였기 때문에 첫잔 한잔

만 마시었다.  그러나 물러나지 않고 술을 치면서 권했다.

  "그런데 안어사,  상감(이성계)의 정실부인이었던 한씨 부인을 생전에 본 일이 있었소?"

  정도전은 이와 같은 말로 입을 열었다.

  "저같은 것이 어떻게 그런 어른을 뵙는단 말씀입니까? 그 어른을 뵈온 일은 한 번도 없습

니다."

  정도전은 잔 둘에다 각각 술을 가득히 부어 가지고 한잔은 남은에게 다른 한잔은 남은의 

애첩 박씨에게 권하였다.  박씨는 여전히 거절하려 하였지만 도전의 강권에 못 견디어 또 

한잔을 비웠다.  도전은 이와같이 술을 권한 후 다시 말을 이어

  "그러면 한씨 부인이 어떠한 부인이란 말도 들어본 일이 없었습니까?"

  "항간에 도는 말은 들었고 또 우리 대감으로부터도 들은 일이 있었지요."

  "그래 어떠한 여인이라고 말들을 합디까?"

  "아주 현숙하시고 씩씩한 부인이었다고 말들을 하더군요."

  "그리고 한시 부인이 상감이 왕업을 성취하기전 55세를 일기로 조사(早死)하신 것도 알고 

있소?"

  "그 어른이 별세하신 것은 알고 있지만 그 어른이 몇 살에 돌아가신 것은 모릅니다."

  도전과 박씨 사이에 이와 같은 문답이 있게 되자 남은은 술만 마시고 있다가

  "이젠 돌아간 한씨 부인에 대해선 그만 말하고 삼봉을 친정 오라버니처럼 믿고 있는 오늘

의 왕비(王妃)마마에 대하여 한 번 물어 보시우?"

  말문을 열었다.

  그리하여 도전은 더 이상 묻지를 않고 남은과 함께 박씨가 쳐주는 술을 받아 먹고 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안어사께서는,  왕비마마에 대해서도 들은 일이 있나요?"

  "들은 일은 있어요."

  "오늘의 왕비께서 상감의 후취였다고 알고 있나요?"

  "아마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요."

  "그러면요?"

  "부실(副室)로 들어오셨던 어른이 아닌가요?"

  "그런 모양이요.  그런데 그 어른의 성씨(姓氏)를 아오?"

  "성씨는 강씨(康氏)라 하더군요."

  "집안은 어떠한 집안이랍디까?"

  "해주 사람으로 서민(庶民)의 딸이었다고 말하던데요."

  "그리고 사람은?"

  "아주 꽃같이 예쁘고 달같이 시원한데다가 여자로서의 숙덕(淑德)을 겸전한 여인이라고 

전합디다."

  "그리고 왕비마마계서 상감을 몇 살 때에 만나게 된 것도 아오?"

  "그건 분명히 모릅니다.  그러나 20전후였던 모양이어요."

  "또 상감의 나이는 몇 살 때였던가요?"

  "글세요?  나이 40에 귀가 달렸던 때인 것 같아요."

  "그때의 상감은 어떠한 지위에 있었던가요?"

  "대신 지위에 계시면서 대장군에 계셨죠."

  도전은 박씨를 상대로 이렇게 문답을 하고 남은을 상대로 술을 계속해서 먹다가 다시 말

을 이었다.

  "그러면 안어사,  돌아간 한씨 부인의 소생이 몇분이나 되는 줄 아오?"

  "그것도 들어서 알지요. 아드님이 여섯 분이고 따님이 두 분이죠."

  "잘 대답했소이다.  그리고 오늘의 왕비 강씨의 소생은?"

  "강씨의 소생은 아드님이 두 분 따님이 한 분이지요."

  "참 잘도 아십니다."

  "...."

  "그런데 한씨 부인이 살아 계시었더라면 누가 왕비가 되었을까요?"

  "그러야 한씨 부인이 되셨겠지요."

  "그러면 오늘의 왕비는 무엇이 되었을까요?"

  "오늘의 강씨를 운수가 티인 유복한 분으로 보시오?"

  "그렇구 말구요.  아무리 천하일색으로 태어났을지라도 일개 서민의 딸로서 왕비까지 되

시었으니 대복지인(大福之人)으로 볼 수 있지요.  강씨는 도무지 한이 없을 것입니다."

  박씨가 이와같이 대답하자 도전은 박씨의 총명에 감동하여 술 한잔을 다시 들어 그녀에게 

권하였다.  박씨는 역시 강권에 못 이겨 그 술 한잔도 마시고 말았다.

  "삼봉! 이젠 취하셨소?"

  "좀 취한 것 같애."

  "그러면 우리 얘기는 집어 취우고 한 잠 자기로 할까?"

  "무슨 술을 많이 먹었다고 자고 말고 한단 말요?  또 얘기나 계속시켜 봅시다.  이번엔 

대감이 얘기를 해보시오. 응수할 테니..."

  도전이 이렇게 말하자 남은은

  "그런데 삼봉! 강씨에 대한 상감의 태도를 어떻다 보시오."

  "매우 좋다고 보오."

  "상감은 왕비를 정말 미(美)의 여왕, 색향(色香)의 여왕으로 보는 것 같습디다."

  "그러면 상감이 강씨를 천하에 없는 미인중의 미인으로 보고 강씨의 미(美)와 색향에 반했

다는 말씀인가요?"

  "그렇게 해석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삼봉은 왕비 강씨에게서 무슨 기색을 못 보셨소?"

  "내 눈에는 아무것도 뜨이지 않습디다."

  "세자책봉(世子冊封)에 대하여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 듯한 눈치를 보이지 않던가 말이

요."

  "그러면 왕비가 세자책봉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말이군."

  "글쎄,  그런 것도 같애."

  "왕비가 자기 소생의 왕자를 세자로 세워 보려는 야심을 갖고 있는 모양인가?"

  "글쎄,  왕비의 맘대로 자기 소생의 왕자가 세워질 수 있을는지?"

  "세워질 수도 있을 것이요. 상감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강씨의 청치고 안 들어 준 게 없다

니깐..."

  "그러나 자기 소생의 왕자를 세자로 봉해 달라는 청만은 들어 주지 않을 것같이 생각되는

데 어떻소?"

  "그러나 나는 들어 줄 것으로 생각되오."

  "어디 두고 봅시다."

  "두고 볼 것도 없어.  강씨의 소원이 성취될 테니깐...  오늘의 상감이 누구를 믿고 사는 

줄 모르오?"

  "..."

  "강씨 하나야.  강씨가 세상을 떠나면 상감도 아마 세상을 떠나려 하리다."

  남은은 도전의 말을 듣고 새삼스러이 고개를 끄떡이면서

  "나는 지금까지도 태조가 강씨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런 정도에까지 이른 줄은 모르고 있

었습니다 그려..."

  대답하였다.

  "그러나 대감! 보시오 내 말이 틀림없이 들어맞을 테니까."

  "나도 그렇게 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요.  한씨 부인의 소생이 엄연히 있는데다 제

5왕자 방원(芳遠)이 노리고 있으니까 말이요."

  "그러나 자기 아버지의 하는 일을 어찌하겠소?"

  "아무리 무서운 아버지일지라도 방원 왕자의 협조한 공이 켰음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요."

  "어디 두고 봅시다.  상감이 왕비 강씨의 미와 색향에만 사로잡히지 않으면 세자책봉이 

올바르게 낙찰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왕비의 소원이 성취될 것 같소.  남자란 아무리 잘

난 체해도 여자의 미와 교태에는 투구를 벗는 것 같습디다.  대감,  형은 자신을 어떻게 생

각하시오?  좀 말해 보시오"

  "나 역시 남자니깐 별 수 없겠지요. 그런데 삼봉은 방원 왕자를 얼마만한 남자로 보시오."

  "자기 아버지를 닮아서 수월치 않은 남자로 보고 있지요."

  "나는 어느 점으로 보아서는 부친 이상의 결단력을 가진 의지(意志)의 인(人)으로 보고 있

소이다."

  도전은 이 말을 듣고 한참 동안 무엇을 생각하고 있다가

  "글쎄? 그런 경향도 있어?"

  "삼봉, 잘 들어보시우. 상감도 왕업을 이룩하려는 꿈을 단단히 품고 있었지만 방원 왕자는 

꿈만 꾸지 않고 때에 따라서는 힘으로 또는 행동으로 이것의 실현을 위하여 달려들었소. 삼

봉도 이를 아실 게요.  오늘의 방원 왕자는 자기가 바로 부친의 뒤를 이을 왕자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요.  그런데 강씨의 소생 왕자가 세자로 책봉된다면 맘 편히 방관만 하고 있을 것

입니까?"

  "나도 대감의 생각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지만...  그러나 상감도 이젠 늙어서 마음도 좀 

약해지고 마음이 강씨에게로만 더욱 쏠리는데다 또 막내 왕자가 더욱 귀여워 보일 것이요.  

따라서 상감의 마음이 정실 소생의 왕자나 또는 방원 왕자에게로는 잘 가지 않을 것이요.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세자 책봉이 강씨의 소원대로 성취될 것 같소.  조정의 모든 사람은 

대감이나 나를 왕비 강씨편으로 보고 있으니까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왕비를 도와야 하겠

소.  그렇게 하는 수밖엔 별 도리가 없으니까 말이요..."

  어느덧 바깥은 해가 서산에 걸려 있었다.  이때 도전은

  "형이 고단하시겠소.  이 얘기 저 얘기가 하도 길어저서...  이젠 그만 돌아가겠소."

  일어서려 하였다.

  "가시는게 뭐요. 아직도 해가 좀 남은 것 같은데...  우리 세잔갱작(洗盞更酌)을 해봅시다."

  남은이 이와같은 말로 도전을 만류하였다.  그리하여 도전은 또다시 주저앉아서 지금까지 

해오던 세자책봉 문제를 놓고 얘기를 계속시켰다.  

  "대감!  왕비 강씨를 어떠한 여인으로 보시오?"

  "매우 총명하고 입이 무거운 분으로 봅니다."

  "나도 동감이요."

  "또 무슨...?"

  "그리고 눈치도 빠르고 경하지도 않은 분이니까 세자책봉 문제도 자기가 먼저 내놓지는 

않으리다."

  "글쎄 그럴 것 같애.  그래야만 안 될 일도 될 수 있지!"

  "이런 문제를 자기가 먼저 내놓고 달려들면 도리어 동정을 잃을 테니까...  나도 그만치 

현명한 분임을 알고 있소." 

  "그러니까 우리가 협조자로 되기에도 좋지 않겠소?"

  "물론이지요.  하여간 왕비 강씨는 아름답고 유덕하고 현명한 품이 왕업을 성취한 임금의 

아내됨직한 분이야.  두 분이 잘 만난 셈이지!."

  남은은 이와같이 말하고 또 박씨를 불러 술을 권하게 하였다.  도전은 박씨가 주는 잔을 

받아 들고

  "이젠 서산에 걸렸던 해도 떨어진 것 같소.  그만 먹고 그만 지껄이고 돌아가야 하겠소.  

너무 오랫동안 폐를 끼쳐서 할 말이 없소이다."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감, 마음껏 마시고 마음껏 먹고 마음껏 놀다 돌아가오.  일간 우리 집에서 한잔 나누기

로 합시다.  그러나 우리집엔 천일주가 없어서 걱정되는데...  하여간 일간 만납시다."

  도전은 이와같은 말을 남겨 놓고 남은의 집을 등졌다.

  남은은 도전을 보낸 후 새삼스럽게 술기가 돌아 자기 사랑에서 쓰러져 자고 말았다.  한 

밤중쯤 되어서 잠을 깬 그는 냉수를 찾으면서 내실로 들어왔다.

  제2부인 박씨는 벌써부터 준비해 놓은 냉수를 내놓으면서

  "어서 들어오세요.  여기 냉수가 있어요."

하며 반겼다.

  남은은 냉수를 두어 대접 들이킨 후 정신을 차리고 아랫목으로 자리를 잡고 또 누웠다.  

박씨는 그의 앞으로 바짝 다가 앉으며

  "저녁진지는..."

하고 물었다.

  "저녁 생각이 없소."

  "그러면 굶고 주무시겠어요?"

  "글세 있다가 봐서..."

  "그런데 대감! 아까 정대감께서 한씨 부인, 강씨부인에 대하여 알알 샅샅이 물으시니 웬 

까닭이예요?'

  "웬 까닭은 뭣이 웬 까닭이야.  우리 남자의 생각과 여자의 생각이 어떠한가 해서 물어본 

것이지."

  "무슨 딴 의미가 있어서 물은 것이 아니란 말씀이죠?"

  "그럼."

 "첩은 너무도 이것 저것 별 것을 다 물으시기 때문에 겁이 났어요."

  박씨는 이렇게 말한 후 다시 말을 이어

  "대감, 피곤하신데 미안합니다만 첩하고도 얘기를 좀 해보세요."

  "무슨 얘기를?"

  "낮에 정대감과 주고 받고 하시던 얘기 말씀예요."

  "응?  세자책봉 얘기?"

  "그래요. 그 얘기 말예요."

  "그건 뭣에 소용되어서?"

  "그저 알고 싶어서요."

  남은은 이 말을 듣고 또 냉수 한 대접을 들이킨 후

  "그러면 물어 가면서 얘기를 할 테니 잘 들어 보오."

하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세자(世子)란 뭣을 말하는 것인줄 아오?"

  "세자란 임금의 아들로서 부왕의 뒤를 이을 왕자가 아네요?"

  "그래 맞았소.  그러나 왕자라고 다 아버지 임금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될 수 있는 것은 아

니야.  정실 부인 소생의 아들로서 여럿이 있게 되면 그 중에서 장자를 세자로 결정하는 법

이야.  그런데 본궁(본비)에게는 아드님이 없고 후궁에게 아드님이 있으면 그 중에서 역시 

장자를 세자로 세우는 거야.  알겠어?"

  "그런데 우리 상감께서는 아드님이 없나요?"

  "웬걸.  돌아간 본부인 한씨가 낳으신 아드님으로 지금 살아계신 분이 넷이나 있고 또 왕

비이신 강씨의 소생도 두 분이나 있는데..."

  "그런데 왜 세자책봉 문제를 내놓고 이말 저말들을 하세요?"

  남은은 이 질문을 받고 잠깐 뭣인가를 생각하고 있다가

  "그대는 한씨 강씨 두 부인의 소생중 어느 부인의 아드님이 세자로 결정되는 게 좋을 것

으로 생각하오?"

  남은의 물음에 대하여 박씨는 잠깐 대답을 멈추고 있다가

  "한씨 부인이 정실 부인이었죠?"

  "그래 한씨가 정실 부인이었어!"

  "그러면 한씨 소생의 아드님중에서 세자가 결정되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상감은 왕비 강씨와 강씨의 소생인 왕자만을 귀엽게 보고 마음이 이리 저리 흔들

리는 모양이야."

  "그러면 말썽이 날 것 같은데요.  오늘의 상감은 이 나라에선 다시 얻오보기 어려운 대영

길이시라고 말들을 하는데, 그런 어른이 일을 어찌 그렇게 처리하시려 할까요?"

  "글쎄, 여자의 요염과 교태에는 왕후장상(王侯將相)도 별 수 없는 모양이지."

  "글쎄요? 천하를 정벌하시던 상감께서 일개 여자에게 정벌을 받고 투구를 벗으려 하시니 

딱한 일이올시다.  이젠 두 분이 주고 받고 하시던 얘기 내용을 잘 알겠어요.  저녁 진지나 

잡수세요."

  박씨는 이와같이 말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남은은 저녁밥을 밤중에야 먹은 후 다시 박씨를 자기 앞으로 불러 앉히고 

  "좀 더 얘기할 말이 있는데 들어 보겠소?"

말을 걸었다.

  "무슨 말씀이신데요?"

  "아까 얘기에 계속되는 것이야."

  "그러면 또 들어 보겠어요."

  "잘 들어봐.  아까도 얘기한바와 같이 세자를 책봉하는데는 첫째 적자(嫡子)중에서 발탁하

는 것이 원칙이지만 적자가 아닐지라도 발탁할 수가 있단 말이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들어 봐!"

  "..."

  "이제 말한 것은 평상시의 경우를 말한 것에 불과한 것이야. 난시(亂時)에 있어서는 달라!"

  "어떻게 달라요?"

  "난시에 있어서는 평시에 있어서와 같이 적서(嫡庶)를 가리지 않고공(功)이 있는 왕자를 택

하여 그로 하여금 세자가 되게 한단 말야."

  "그러면 우리 왕자님 중 난시에 공을 세운 분이 계신가요?"

  "계시고 말고!"

  "어느 왕자세요?"

  "한씨 부인의 소생 중 제5왕자로 계신 방원(芳遠)왕자란 말야."

  박씨는 이 말을 듣고 저으기 놀라서 

  "제5왕자이신 분이 무슨 일을 하고 무슨 공을 세웠던가요?"

  이때 남은은 새삼스레 박씨를 주시하면서 

  "상감이 왕업을 성취한 것이 모두 다 제5왕자이신 방원왕자의 공이야.  이 왕자가 선두에 

서서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상감은 오늘의 성공이 있을 수가 없었을 거야. 알겠어?"

  "그러면 상감은 제5왕자 덕에 소원이 성취된 셈이군요."

  "그럼, 그러니깐 제5왕장는 당당한 적자인데다 건국(建國)에 공을 많이 세웠으므로 상감도 

제5왕자의 존재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 아냐?  그런데 상감의 태도가 선명치 못해서 모든 

사람은 세자책봉에 대하여 이말 저말을 해가면서 의심음 품고 있는 것 같애!  이런 점에서 

생각하면 왕비 강씨 소생의 왕자는 세자로 책봉 받을 권리가 없을 게 아냐?  그런데 그대

의 생각은?"

  "글쎄요.  제 생각 같아서는 강씨의 소생을 상감이 세자로 봉하려 하실지라도 강씨가 받

아들이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신다면 한씨 부인 소생의 여러 적자들도 왕비 

강씨를 성스런 어른으로 우러러 볼 것이고 또 나라도 안온해질 것으로 생각되는군요."

  박씨는 이와같이 대답한 후 잠자리를 펴기 시작하였다.  밤은 이미 깊어져 삼경(三更)에  

이르렀다.

    [五百年의 曙光]   <때를 기다리며>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五百年의 曙光 

    때를 기다리며 



   태조는 왕비 강씨에 못지 않게 어느 때나 강씨 소생 두 왕자 중 제8왕자인 방석을 몹시 

사랑했다.  어느날 태조는 강씨의 내전으로 왔다가 이날 밤을 거기서 보내게 되었다.  태조

는 이때

  "나의 뜻을 받아 내 뒤를 이음직한 왕자가 누구일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방석밖엔 없

는 것 같다."

하고 천장을 바로 보고 있었다.

  왕비 강씨는 이 말을 듣고

  (왕위의 계승자가 방석으로 낙착될 것도 같다는 말씀을 저렇게 하시니.)

  은근히 혼자서 기뻐하였다.

  때는 마침 강씨 소생 경순공주(慶順公主)가 개국공신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에게로 시

집가려 하는 때였다.  이때 태조는 대신 배극렴(裵克廉) 및 조준(趙浚) 등을 내전으로 불러 

놓고

  "오늘은 두 대신을 보고도 싶고 또 의논도 하고 싶어서 청한 것이요.  하물하지 마오."

  배, 조 양대신을 둘러 보았다.

  "황공하고 또 황공할 따름이옵나이다.'

  "배정승, 의논하고 싶다는 것은 딴 것이 아니요.  이제는 과인의 뒤를 이을 세자를 책봉하

여야 하겠는데 좀 아는 바를 들려주오."

  태조가 이와같은 말로 대답을 구하자 배극렴은

  "때가 태평무사하면 적자를 세워 세자를 삼고 때가 어지러우면 유공한 왕자를 먼저 세워 

세자를 삼는 게 현명한 처사인 줄 아옵나이다."

하고 쾌히 아뢰었다.  이때 한데 붙어 있는 전각에 혼자 있었던 강씨는 배극렴의 입에서 이

런 대답이 나오는 것을 듣고 실망한 나머지 부지중 소리를 내어 울었다. 이 울음소리는 바

깥 내전안 할 것 없이 들렸다.

  이때 배, 조 양대신은 말할 것도 없고 태조까지도 그 울음소리를 강씨의 울음소리로 인정

했다.  내전을 물러나려던 두 대신을 좀 더 머무르게 하고 태조는

  "배정승의 세자책봉에 대한 의견을 잘 기억하고 있소.  며칠 후 또 청해서 물을 테니..."

하며 배, 조 양대신을 돌려보냈다.

  배극렴과 조준이 가자 왕비 강씨는 다시 내전으로 돌아왔다.  태조는 강씨가 돌아와 자리

를 잡자 강씨의 얼굴을 유난히 두루 살피면서

  "곤전(坤殿),  배정승과 조정승을 상대로 얘기하는 동안 어디 있었소?"

물었다.

  "상감마마 황공하오.  이웃 전각에 있었나이다."

  "그런데 눈이 분 것 같으니 웬일이요?"

  "눈이 왜 부어요?"

  "글쎄요. 왜 그랬을까요?"

  "곤전이 모르는 것을 과인이 어찌 알겠소? 바른대로 말을 해보오."

  "..."

  "곤전! 울었지?"

  "뭣 때문에 울겠어요?"

  "분명히 운 것을 과인도 아오."

  "무엇으로 운 것을 아시었나요?"

  "곤전의 목소리를 듣고서 알았소.  울게 된 이유를 감춤없이 말해 보오."

  태조가 이와같이 줄기차게 묻자 강씨도 더 이상 감출 길이 없어

  "상감마마께서 세자책봉에 대하여 방석왕자를 들어 말씀하신 것을 들은 법하온데 배정승

이 평시에는 적자를, 난시에는 유공한 왕자를 세우는 법이라고 아뢰는 것을 듣고 그만 실망

한 끝에 울음이 터진 것입니다.  상감마마 이를 굽어 살피시와 용서하여 주심을 바라고 또 

비옵나이다."

  태조는 이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한참 동안 침목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과인이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겠다는 말을 곤전에게 말한 일은 없지 않소?"

  "그렇습니다.  신첩에게 직접 언명하신 일은 없었나이다."

  "그런데 어떻게.."

  "상감마마께서 내전으로 듭시와 <나의 뒤를 이을 자는 방석밖엔 없을 것이다.> 하시고 말

씀한 일이 있어서인가 합니다."

하고 대답해 아뢰었다.

  태조는 이때부터 강씨가 자기 소생의 왕자에게 세자로서의 자리가 돌려지기를 은근히 바

라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강씨의 소원이라면 일각 지체 없이 시행해 온 태조는 세자책봉

에 있어서도 강씨의 소원을 무시할 수 없어 배극렴, 조준을 더 한 번 불러 그들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틀쯤 지나서 태조는 또 배극렴, 조준의 참내(參內)를 명하였다.  배, 조 두 대

신은 태조의 소명(召命)이 세자책봉 문제 때문에 환반된 것으로 믿고 조준은 먼저 배극렴의 

집으로 갔다.

  "대감, 태조의 소명이 세자책봉 문제 때문에 내려진 것이 아닐까요?"

  조준이 이와 같은 말로 묻자

  "그런 것 같소.  그런데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걱정이 되오."

  "글쎄올시다. 우리가 제일차로 아뢰고 돌아오려 할 때에 무슨 소리를 듣게 되지 않았소?  

그 소리가 왕비 강씨의 울음소리였음을 아시겠소?"

  "알고 있소.  왜 소리를 내어 울었을까?"

  "그것은 자기 소생의 왕자는 세자책봉에 참가도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섭섭한 생각이 나

서 운 것 같소이다."

  "나도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가 참내해선 또 무엇이라고 아뢰어야 할까요?"

  "별 말 있겠습니까?  제일차에 아뢰었던 것을 더 한 번 아뢸 수밖엔..."

  "그러나 그 말이 통해질 것 같이 생각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그와 같이 말하면 

왕비 강씨는 이번엔 대성통곡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글쎄 그럴 것도 같애! 어찌하면 좋을까?"

  "강씨가 비록 자기 소생 왕자의 책봉문제에 대하여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실상은 상감의 

마음을 사고자 은근히 전심을 기울이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상감의 심중, 

강씨의 심중을 잘 살펴가면서 어느 정도 타협으로 나가야 할 것 같소이다."

  "타협적으로 나가자고?  어떻게 타협적으로 나가오?"

  "실상은 타협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지요. 말하자면 우리가 강씨에게로 기울어지는 것을 

말함이요."

  이 말에 배극렴은 한참 동안 무엇을 생각하고 있다가

  "어떻게 강씨에게로 기울어진단 말씀이요?"

하고 반문하였다.

  "대감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강씨 소생 두 아드님 중에 큰아드님 방번(芳番)님은 난폭하

고 다음 아드님 방석(芳碩)님은 태조를 닮아서 영특한데가 있소이다.  배대감, 이 방석 왕자

를 추천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참내하여 상감의 뜻을 받들기로 합시다.  그리하

는 수밖엔 별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조준이 이렇게 말하자 배극렴도 이에 동감하고 조준과 함께 참내하여

  "왕비마마의 소생 왕자중 방석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시는 게 좋을 줄로 아뢰오."

  태조에게 아뢰었다.

  태조는 이를 반가이 받아들였다.  강씨의 마음이 흐뭇해졌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강

씨는 기쁨에 넘쳐 새삼스레 태조 앞으로 나아가 큰 절을 하면서 

  "상감마마! 황감하오이다.  신첩은 상감마마의 하해 같으신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소원이 

성취되었나이다.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사옵니다.  이 감격은 죽는 순간까지 간직하고 있겠

습니다."

  감격의 눈물을 머금었다.

  태조는 이 말을 듣고

  "모든 것이 다 곤전의 분복에서 생겨진 것이요.  과인에게 그렇게 감사할 것은 없소.  과

인도 방석이 세자로 추천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오."

하며 한동안 왕비 강씨를 주시하다가 다시 말을 이어

  "요즘 곤전의 얼굴은 좀 여위어진 것같이 보이니 웬 까닭이요?  세자책봉 문제로 걱정이 

되어 그렇소? 이젠 문제가 낙착되었으니 마음을 편안히 갖고 계시오."

  강씨는 이 말에 더욱 감격해서 

  "상감마마의 거룩하신 뜻을 받들어 마음을 편안히 갖겠나이다.  일개 서민의 딸로서 장상

(將相)의 총희(寵姬)가 되었다가 이제 와서는 임금의 왕비가 되고 또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세자의 모비(母妃)가 되게 되었삽는데 무엇이 부족해서 마음이 불편하겠나이까?  이젠 기뻐

서 매일 춤이라도 추고 싶나이다."

  정말 춤을 출 듯한 시늉을 하였다.  그러나 이 소문은 한씨 부인 소생의 네 왕자(여섯 왕

자 중 두 왕자가 일찍 돌아갔음.)의 귀에 들어갔다.  이 때문에 네 왕자의 마음엔 불평이 자

리를 잡게 되어 태조에 대한 태도, 왕비 강씨에 대한 태도가 순평하지 못하였다.  특히 한씨 

소생의 제5왕자 방원의 심사는 말할 수 없이 뒤틀렸다.


  태조 2년 8월이었다.  강씨 소생의 왕자인 제 8왕자 방석의 세자 책봉식(世子冊封式)이 거

행 되었다.

  이 세자 책봉식은 고 정실부인(故 正室夫人) 한씨 소생의 네 왕자도 참가하였는데 그들을 

들어 말하면 영안대군(永安大君) 방과(芳果), 익안대군(益安大君) 방의(芳毅), 회안대군(懷安大

君) 방간(芳幹), 정안대군(靖安大君) 방원(芳遠) 등 넷이었다.

  이 네 왕자는 의식이 끝난 후 모두 다 정안대군 저(邸)에 모여 한방에 자리를 잡았다.  네 

왕자 중 정안대군 방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날 방석이 세자로 책봉됨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지 않소. 그러나 부왕(父王)께서 그리

하신 것을 어찌할 도리가 없어 그대로 인종(忍從)하고 만 것이올시다.  그런데 여러 형님들

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네 왕자 중 가장 나이 많은 영안대군은 정안대군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그렇다. 방석이 세자로 책봉됨에 대해선 불만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를 반대하고 나서는 

것은 부왕께 대하여 순종하지 않는 불효자가 될 것이므로 나도 역시 순종하고 만 것이다.  


우리가 여기 모인 것을 아시면 우리들을 의심하실 것이다.  이를 생각하고 말 한 마디라도 

조심스럽게 해야 하겠다."

  대꾸를 했다.  익안대군 방의가 입을 열었다.

  "부왕은 무슨 일이나 엄정하게 처리하시는 어른이신데 어째서 이런 엄정치 못한 처사가 

있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알고 싶은데..."

  익안대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안대군은 다시 입을 열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부왕께서 우리의 존재를 무시하신 처사를 하시게 된 것은 강씨 때문이 아닐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됩니다."

  "글쎄다. 그러나 부왕께서 그렇게 현명치 못하신 어른이 아니신데... 우리의 사람됨이 방석 

왕자만 못해서 이런 일이 생겨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영안대군은 이와 같이 대꾸를 하면서 정안대군에게 자중과 자애를 권하였다.

  "점잖은 말씀이올시다.  자중하고 자애하겠습니다. 그러나 부왕께서 강씨의 요염과 교태에 

이성을 상실하심에서 오늘의 일이 생겨진 것으로밖에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어찌 입밖에 낸단 말이냐? 우리가 차라리 못난 사람되는 게 옳지 않을

까.  잘못하면 부왕의 위신을 땅에 떨어지게 한다.  그래서 자중하라고 권하는 것이다.  알

겠니?"

  영안대군의 말은 역시 점잖았다.  괄괄한 정안대군이었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침묵

을 지키고 말았다.

  잠시 후 안으로부터 술상이 나왔다.  네 왕자는 모두 술상 앞에 마주 앉았다.  주인인 정

안대군은 맨 먼저 잔에 술을 가득히 부어 가지고

  "큰 형님 먼저 한잔..."

  권하였다. 이와 같이 술잔이 차례차례로 한번 두번 세번이나 돈 후 제각기 자작도 하고 

권하기도 하면서 마실 만큼 마셨다.  비로소 실내는 술바람에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어질

고도 착해 보인던 영안대군의 말씨도 힘차게 들렸고 또 패기(覇氣)와 담력(膽力)이 사람을 

억누르던 정안대군의 힘도 좀 더 굳세게 보였다.  시간이 흘러 갈수록 실내는 영안대군과 

정안대군의 천지가 되고 말았다.

  영안대군은 정안대군을 자기 앞에 앉힌 후 술을 잔에 가득히 부어가지고 이를 권하면서 

말했다.

  "우리 전주 이씨가 왕업을 성취케 된 것은 원래 부왕(父王)의 위덕(威德)에서 생겨진 일이

지만 부왕을 도와 이를 대성한 사람은 정안대군으로 생각한다.  정안대군의 절대적인 도움

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왕업이 성취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씨조선의 정말 건국공

신은 정안대군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석이 세자로 책봉된데 대해서는 나도 불만

을 품고 있다.  그러나 방석도 역시 부왕의 아드님인데 어찌하나?  정안대군이 부왕을 도와 

왕업을 대성케 함과 같이 오늘의 방석을 도와 나라를 빛나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정안대군은 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형님의 말씀은 정말 현인 군자의 말씀이십니다.  그러나 이 방원은 형님과는 다릅니다. 

저는 기회가 오면 방관만 하고 있지는 않겠습니다.  그래야만 국법이 바로 잡혀질 것입니

다."

  힘차게 대답하였다. 이 말에 익안대군도 회안대군도 찬동하는 뜻을 표하였다.

  정안대군은 이와 같이 대답한 후 다시

  "형님(영안대군),  또 좀 들어 주십시오.  형님께서는 정도전, 남은 도배를 어떠한 인물로 

보십니까?"

  "글쎄?"

  "글쎄가 뭣이오니까?  정도전과 남은은 왕비의 사람이며 동시에 방석의 사람입니다.  왕

비는 이자들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자들은 매일과 같이 참내하여 첩자

(諜者)노릇도 하고 또는 고문 노릇도 합니다.  방석이 세자로 책봉됨에 있어 정도전 도배와 

왕비 사이에 알쏭달쏭한 얘기가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나는 지금부터 이 자들도 감시하

겠습니다.  형님, 이런 것은 부왕의 존재를 무시 하려는 것이 아니며 또 저의 욕심을 채우려

는 것도 아닙니다."

  "알겠다.  그러나 자중해야 한다."

  영안대군은 이렇게 대답하고 대취하여 눕고 말았다.  그러나 술에 강한 왕자들은 여전히 

정안대군을 상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정안대군의 부인 민씨는 친정 오라버

니들이 왔으므로 사람을 시켜 정안대군의 입래(入來)를 청하였다.  정안대군은 입래하라는 

말을 듣고 

  "세분 대군이 계신 동안은 들어가지 못하겟다.  두 장군에게 크게 바쁜 일이 없거든 좀 

기다리게 하여라."

하고 돌려 보냈다.

  영안대군이 취면(醉眠)에서 일어나자 두 왕자도 정신을 차리고 귀저준비(歸邸準備)를 하였

다.  그리하여 정안대군은 세 형님 대군을 문 밖까지 나가 공손히 전송한 후 그 길로 내실

에 들어갔다.  내실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부인의 오라버니인 민무구(閔無咎), 민무질(閔無疾) 

형제였다.  다시 말하면 정안대군의 처남들이었다.

  "어떻게 이렇게들 왔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이!"

  "저희 때문에 세 분 대군이 속히 돌아 가시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런 것이 아니야.  돌아가실 때도 됐어."

  "그러면 안심하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모이셨던가요?"

  "무슨 일은 무슨 일이야!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어서 그 일로 한 번 모였지."

  "무슨 좋은 대책이 세워졌습니까?"

  "대책은 무슨 대책이야.  그저 앞날을 정관하기로 했지."

  "알겠습니다.  그리하는 수 밖엔 별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민무구 형제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안대군은 다시 말을 이었다.

  "두 처남은 방석 왕자가 세자로 책봉된데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오?"

  "글쎄요, 태조께서 그리 결정하신 것을 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끼리 말하는 것일세.  무슨 상관있나?  어디 말해 보게!"

  이 말에 장군 민무구는

  "방석 왕자를 세자로 봉한 것은 정도에서 벗어난 일로 생각합니다."

  쾌히 대답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 게 좋을까?"

  "그저 되어 가는 것을 정관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상서롭지 못한 일이 생겨질 것도 같

습디다.  부왕의 감정을 격화시켜서는 안됩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어찌하란 말이요?"

  "그저 때를 기다리고 계시란 말씀이지요."

  "알겠소.  그러면 때만 기다리고 있지."

  곁에서 설왕설래하는 것을 듣고 있던 정안대군의 부인 민씨는

  "저하(低下)께서 혼자만이 나서시다간 크게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아무리 오늘날 부왕 

어른의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좀 가만히 계시는 것이 득책일 것입니다."

  정안대군의 심사를 가라앉히고자 애를 썼다.  정안대군은 부인의 말을 듣고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다가

  "그런데 두 장군은 오늘의 왕비를 어떻게 보오?"

  또 물었다.

  두 장군 중 민무구 장군은

  "그 분은 미인 왕비, 유덕한 왕비, 현숙한 왕비라고 칭송을 받고 지냈지요."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장군도 그와 같이 생각하고 있겠군!"

  "글쎄요? 왕비 그 어른에게서 무슨 특별한 단점(短點)을 발견하지 못한 이상 무던하신 어

른으로 볼 수밖엔 없지요."

  "알겠소.  그런데 이번의 세자책봉은 누구의 잘못에서 생겨진 것으로 생각하오?  부왕(父

王)의 잘못에서 생겨진 일로 보오? 그렇지 않으면 왕비의 간청에서 생겨진 일로 보오?"

  무구 장군은 이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그 잘못이 부왕께 더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대의 영걸이신 태조를 위하여 탄식하

지 않을 수 없소이다."

  "그러면 전 책임을 부왕께 돌리는 말이구료."

  "그렇게 생각하셔도 할 수 없지요.  남정북벌 싸움에서 그토록 영명하시던 태조께서 그렇

게 마음이 약하신 줄은 몰랐습니다.  이 어른의 유약하신 마음이 오늘의 일을 만들어 냈다

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태조와 같은 천하의 대영걸도 여자의 요염, 여자의 색향, 여자

의 교태 앞에서는 별 도리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글쎄? 이젠 부왕과 왕비에 대한 얘기는 그만 두기로 합시다.  그러나 나는 때가 오면 방

관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은즉 이를 살피고 좀 도와주기를 바라오."

  정안대군이 이와 같이 말하자 민무구, 민무질은 정안대군과 그의 부인 민씨에게 작별을 

고하고 돌아갔다.


    [五百年의 曙光]   <病든 牧丹>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五百年의 曙光 

    病든 牧丹 



   왕비 강씨 소생 방석 왕자가 세자로 등장하기 전까지는 정실 부인 소생의 네 왕자가 강

씨를 대하는 태도는 지극히 온순하였고 동시에 방석 왕자에 대한 태도도 매우 우애적(友愛

的)이었다.  그러나 방석 왕자가 세자로 책봉된 후부터 네 왕자가 강씨 및 방석 왕자에게 

대하는 태도가 일변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기 전까지는 네 왕자

가 강씨를 친어머니(나이는 젊었지만)처럼 공경하였고 또 방번(芳番), 방석 두 왕자를 동복의 

친동생처럼 사랑하였다.  그런데 방석이 책봉된 후부턴 왕비 강씨 및 세자 방석을 불공대천

의 원수와 같이 저주하고 지냈다.

  이때부터 강씨는 불안과 공포(恐怖)를 느끼기 시작했고 따라서 소화불량증, 불면증, 공포

증 등의 병들이 연달아 생겨 하루 사는 것이 고역이었다.  이러한 증세들은 강씨의 살을 갉

아내는 듯했고 마음을 초조하게 하였다.  이 증세는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더욱 심해질 뿐 

조금도 차가 없었다.

  그리하여 강씨는 방안에서 그날 그날을 보내고 밤낮을 자리에 누워서 지냈다.  강씨의 소

화 불량은 식음을 전폐하게 만들고 불면증은 하루에 단 한시간도 편안히 못자게 하였으며 

또 공포증은 강씨로 하여금 벌벌 떨게 하였다.

  왕비의 신변을 심상치 않게 생각하고 있던 태조는 어느날 대낮에 왕비를 내전으로 찾아왔

다.

  "그 곱던 얼굴이 뼈만 남아 가니 대체 웬 까닭이요?  못 먹어서 그렇소? 그렇지 않으면 

무슨 딴 병 때문에 그리 되었소? 병은 감추면 안 되오."

  태조는 왕비의 등과 손을 어루만졌다.

  "소화불량으로 그런지 아무리 좋은 음식을 보아도 먹고 싶지 않으며 설사 먹는다 하여도 

전일에 비하여 10분지 1도 먹혀지지 않으니 뼈만 남을 수밖에 없겠지요. 또 그리고 밤이면 

잠을 못 자고 뜬 눈으로 새우니 어찌 살수 있겠습니까? 이 두 가지 병만이 아니올시다. 정

충증( 沖症)까지 생겨서 정말 죽고 말 것 같아요."

  강씨는 간신히 태조에게 말했다.

  태조는 이 말을 듣고 곰곰이 무엇을 생각하다가 물었다.

  "언제부터 그런 증세가 생기기 시작했소?"

  "한 서너 달 전부터인 것 같습니다.  다시 말씀 올리면 방석 왕자가 세자로  책봉된 후부

터인 것 같아요."

  "그러면 알겠소. 심화로 생겨진 병 같소. 정신만 가다듬고 마음만 굳세게 가지면 세 가지 

병이 차츰 사라질 것이요. 우선 과인의 말대로 오늘부터라도 실행해 보오.  과인은 과인대로 

내의원(內醫院)의 모든 의원(醫員)들을 총 동원시켜 곤전 치료에 힘쓰게 할 테니..."

  태조는 왕비를 안심시켰다.  사실 방석 왕자가 세자로 책봉된 것은 왕비 강씨의 강요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태조 자신이 발설해 가지고 이렇게 만든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왕

비 강씨는 한씨 부인 소생의 네 왕자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중에는 건국에 유공한 왕자도 

끼어 있었으므로 정관하는 태도만 취하려 했다.  그런데 태조가 방석을 지명하면서 방석을 

세자로 삼고자 하는 눈치를 보였기 때문에 강씨는 그야말로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

所願)이란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강씨가 당초부터 이 세자의 자리를 네 왕자에게로 돌렸

더라면 네 왕자들로부터 미움을 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왕비 강씨의 생각이 여기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강씨가 마침내 국법을 어지럽

게 만든 여인으로 전락됨과 동시에 아들 방석도 미움의 제 1인자가 되고 만 것은 이에 연유

하는 것이다.

  강씨는 세자책봉 문제로 인하여 네 왕자로부터는 말할 것도 없고 궁중, 부중의 사람들로

보터도 미움과 저주를 받고 지내게 되었고, 마침내는 우수사려(憂愁思慮)에 잠겨 불면증과 

공포증에 걸려 밤낮으로 앍게 된 것이다.  결국 왕비 강씨는 철저하게 악에 강할 수 있는 

여인이 못 되었다.

  어느날 오후였다.  봉화백(奉化伯) 정도전은 의성군(宜城君) 남은과 함께 왕비 강씨의 내전

으로 들어갔다.

  왕비 강씨는 시녀의 부축을 받고 간신히 일어나 앉아 정, 남 양 중신의 인사를 받고 나서

  "한참 동안 못 만났소. 나는 두 대신에게도 버림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몹시 슬퍼햐였

소."

하고 정, 남을 앞으로 앉게 했다.

  "그런데 중전마마의 병환이 언제부터 더 위중해지셨습니까?"

  정도전이 물었다.  강씨는

  "정, 남 두 대신을 나는 친 오라버니같이 보고 이몸을 의탁해 왔는데 요즘에 이르러서 보

니까 나를 기피하는 것 같습디다.  역시 남임이 분명하더군요.  두 대신이 나를 보고 돌아간

지가 한 20일 되는데 그 이후부터 병세가 더욱 나빠져서 이렇게 누워 있기만 하오."

  원망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남은이 말을 듣기가 무섭게

  "황송한 말씀을 듣잡게 되어 아뢰올 말씀 없소이다.  저희들의 중전마마께 대한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20일 전에 만나뵈올 때는 중전마마의 병환이 그리 심하시지 않은 줄 알

았사옵고 또 별안간 고향에 갈 일이 생겨서 그만 부실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널리 살펴주

시고 용서하옵소서."

  재삼 재사 머리를 숙였다.

  "잘 알겠소. 더 말하지 않으리라."

  "그런데 중전마마의 병환은 역시 그 병환이시죠?  그 병환이 오늘에 와서 어떻게 위중해

지셨는지..."

  "이젠 아주 절곡을 하게 되고,  밤은 아주 뜬 눈으로 새우기가 일쑤고...  이제는 벌벌 떨

고만 살게 되었소.  오늘 같은 이 모양으로 나는 며칠 못 살고 죽을 것 같소."

  정도전은 이 말을 듣고

  "중전마마, 지금부터라도 마음만 굳세게 가지시면 세 가지 증세가 일소(一掃)될 것이 올시

다.  세자책봉이란 임금의 맘대로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적자 왕자만이 세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 올시다.  중전마마가 너무 양심적이시기 때문에 불면증도 생기게 되고 공포증도 

생긴 것으로 생각됩니다.  네 왕자가 무서울 것 없습니다.  궁주, 부중의 공론도 두려울 것 

없습니다. 중전마마의 오늘의 병환은 마음에서 생긴 것이므로 천하 명의도 소용없고 천하명

약도 소용없을 것이오니 신(臣)의 말대로 마음만 굳세게 가지십시오.  그리하시면 다시 건강

한 몸으로 돌아가실 것입니다."

  왕비 강씨는 도전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들은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두 대신의 말은 잊지 않고 그대로 실행하겠소이다.  그런데 네 왕자는 나보다도 세자 방

석 왕자를 노리고 있는 것 같소.  오늘의 상태로서는 세자 방석을 도와줄 사람이 없는 것 

같으니 내가 내일이라도 죽어 없어지면 세자 방석도 살아 남지 못할 것 같군요.  세자 방석

을 친조카와 같이 아시고 끝까지 도와주시면 나는 지하에서라도 그 은혜를 갚아드리겠소이

다."

  강씨는 애원하여 마지 않았다.

  도전과 남은은 이 부탁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걱정은 마시옵소서.  신등은 세자 방석 왕자를 위하여 최후의 날까지 몸을 바치겠

사오니...  신등은 중전마마께서 마음을 굳세게 가지시기만 기원하고 있나이다."

  거듭 다짐을 하고 왕비의 내전을 물러나왔다.  양 대신이 물러간 후 이번엔 방석 왕자가 

강씨의 내전으로 들어왔다.

  "어마마마,  오늘의 병환이 어떠하시오니까, 저는 어마마마의 병환으로하여 밤이 돼도 잠

을 이루지 못하고 있나이다."

  "이제부턴 쾌복되겠지, 나 때문에 잠을 못 자면 안 돼!"

  "그런데 사람들은 어마마마의 마음이 남달리 약해서 그런 병에 걸리신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어마마마, 마음을 굳세게 가지십시오.  그러면 지금부터라도 쾌복되기 시작할 

것으로 믿습니다."

  "잘 알겠다.  이제부터 마음을 굳세게 가지마.  내 몸도 내 몸이려니와 세자를 위하여 마

음을 굳세게 가지려 한다."

  "어마마마, 제 걱정은 그만 두세요.  어마마마의 병환이 위중해진 것은 제 걱정 때문인 것 

같사옵니다.  어마마마, 제 배후에는 부왕(父王) 태조가 엄연히 계시지 않습니까?  제 걱정

은 이제 그만 하시고 마음을 안정하십시오.  그리 하시기만 하면 불면증도 공포증도 다 물

러나고 말 것이오니..."

  방석 세자가 모비(母妃) 강씨를 상대로 이와 같이 진언(進言)하고 있을 때에 태조가 내전

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다 곤전을 중심으로 살고 있소.  세자 방석도 곤전을 중심으로 살고 있고 과인도 

곤전을 의지하여 살고 있는 것임을 모르시오?  무엇 때문에 그리 잡념이 많아져 불면증에 

걸리게 되고 뭐가 두려워서 공포증에 걸려 초조히 그날 그날을 보내고 있소? 과인이 죽지 

않고 엄연히 있는 이상 두려울 게 뭣이요? 곤전의 생병으로 보지 않을 수 없소. 곤전의 배

후에 과인이 있음을 생각하고 마음을 강하게 가지시오!"

  태조는 이와 같이 말하고 강씨의 얼굴을 주시하며

  "곤전, 거울을 가져다 얼굴을 좀 보오.  만개한 모란꽃 같던 얼굴이 어떻게 됐는지를."

  시녀에게 거울을 가져오게 하였다.  강씨는 거울 속에 비추어진 자기의 얼굴을 보았다.

  태조는 다시 말을 이었다.

  "보고 난 감상이 어떠하오?"

  "아주 뼈만 남았군요. 상감마마, 제 얼굴을 쳐다보지 마세요."

  강씨는 울 듯이 고개를 숙였다.

  "곤전! 이제부턴 마음을 굳세게 갖고 보(補)할 음식이며 보할 약을 자시기로 하오. 곤전의 

병은 마음병이니까 마음만 굳세게 가지면 그만이요. 곤전! 과인의 말을 바람소리같이 들어서

는 안 되오. 곤전의 병이 어디서 생겨진 것임을 알게 돼서 하는 말이요."

  "잘 알았습니다. 상감마마의 분부대로 실행하겠사오니 안심하옵소서."

  강씨는 이와 같이 대답하고 수척한 얼굴에 웃음을 띠우며 누웠다.


  왕비 강씨의 병은 태조 3년 이래 긴 병이 되고 말았다.  마음을 굳세게 갖고서 모든 병을 

물리치려 노력했지만 병세는 어느 때나 일진일퇴(一進一退)를 할 뿐이고 근치될 희망은 좀

처럼 보이지를 않았다.

  그런데 강씨의 병이 태조 4년에 이르러서부터는 더욱 악화되었고 또 5년에 접어들면서부

터는 몸이 철골이 되어 기동을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강씨의 이어소(移御所)는 간병하는 

사람, 문병하는 사람으로 들끓고 있었다.  그들 중에서 강씨의 병을 내 병같이 알고 슬퍼하

는 사람은 태조와 세자 방석 그리고 왕자 방번 정도였다. 그중에서 가장 슬퍼하는 사람은 

역시 부군(夫君)인 태조였다.

  부군 태조는 곁에 사람이 있건 없건 전후에 문병객이 있건 없건 이를 염두에 두지 않고 

강씨의 병석에 가까이 앉아서 

  "곤전! 무슨 회춘(回春)할 도리가 있을 것 같거든 뭣이든 말해 보오. 하늘에 올라가 별이라

도 따오라면 따오리라. 약 못 써서 죽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니... 그런데 곤전, 죽는 

줄로만 알아서는 안 되오. 곤전! 이 노부(老夫)를 두고서는 못 갈 것이요. 곤전! 빨리 회춘해 

주오. 그래야 이 노부가 좀 더 살게 되리라. 곤전이 정말 이 세상을 등지려거든 이 노부를 

먼저 죽여 주오. 그러지 않고서는 못가리다."

하며 강씨의 병석을 떠나지 않고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강씨의 병 증세는 날이 갈수록 더해지기만 하고 좀처럼 차도는 보이지 않았다.  

태조는 폐조(廢朝)를 해가면서까지 강씨 간병에 전심과 전력을 기울였다.  태조의 불같은 사

랑도 강씨의 병엔 소용이 없었다.  천하의 명의도 강씨의 병을 고치지 못했고 천하의 명약

도 강씨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때는 태조 5년 8월이었다.  그 달에 들어서부터는 강씨의 병이 더욱 악화되기 시작했다.  

강씨는 자기가 회생하지 못할 것을 짐작했던지 자기 소생의 두 왕자와 정도전, 남은 등을 

병석으로 불러 놓았다.

  "첫째 방번, 방석은 들어 보아라.  나의 병은 이제는 골수의 골수에까지 들어가 명의도 소

용 없게 되고 명약도 소용없게 됐다.  이젠 죽는 일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죽는 일이 

당장에 있을는지 오늘 밤에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죽은 후라도 형제가 의좋게 살아주

기를 바란다.  방석 세자의 장래를 생각하면 내가 죽지 말아야겠지만 천명을 어찌하니?  부

왕 태조가 계시니까 크게 걱정되진 않지만 그래도 부왕의 말씀을 잘 듣고 신변을 조심하여

야 한다.  너 때문에 병든 나는 죽은 후에도 눈이 감겨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강씨는 두 왕자에게 이렇게 말한 후 대령하고 있던 정도전, 남은을 불러 들였다.

  "두 대감에게 소명(召命)을 내려 미안스럽소이다.  나는 오늘밤을 넘길 것 같지 않소. 그래

서 두 대감을 청한 것이요."

  강씨가 이런 말로 입을 열자 정도전, 남은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부군(夫君) 태조와 두 왕자를 어찌하시고.."

  "이제는 아무리 기운을 차리고 마음을 굳세게 가지려 해도 별수 없을 것이요..  나의 천수 

길지 못하여 오늘의 병에 걸린 것 같소.  정대감, 남대감, 나의 평소의 부탁을 잊지 않고 계

신지 듣고 싶소이다."

  "잘 명심하고 있나이다.  세자 방석왕자에 대한 일은 저희가 담당할 것을 다시 한 번 맹

세합니다."

  이때 강씨는 뼈만 남은 얼굴을 들어 정, 남을 주시하면서

  "고맙소이다.  정말 고맙소이다.  나는 이제 죽어 눈을 감겠소."

  눈물을 흘렸다.  이런 말이 있은 후 정도전, 남은은 강씨의 병석에서 물러났다.

  정, 남이 돌아간 후 태조는 넋 잃은 사람처럼 부축을 받으면서 간신히 강씨의 병실에 발 

을 들여 놓았다.

  태조는 강씨의 병실에 발을 들여 놓기가 무섭게 병석으로 바짝 대들면서

  "왜 죽으려 하오?  아직도 앞날이 호호양양(浩浩洋洋)한데... 무엇이 부족해서 그러는 거

요? 나를 내 버려두고는 못 가리다.  곤전!  내가 왔소.  정신 차리시오!"

하고 목이 메었다.  그제서야 태조가 듭신 것을 알고 강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태조

의 가슴 속에 파묻고

  "신첩의 명(命)이 그만인 것 같습니다.  신첩이 일개 서민의 딸로 태어나 왕비가 되고 또 

세자의 모비까지 되었으니 이런 영화(榮華), 이런 호강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건 모두 상

감마마의 뜨거운 사랑에서 생겨진 것으로 믿고 감사 감격하나이다.  신첩에게는 이생에서 

사는 동안 아무 부족도 없었고 아무 불만도 없었습니다.  그저 고맙기만 하였습니다.  신첩

의 복이 그만이어서 이제 죽으려 하는 것이올시다.  신첩의 가는 곳이 이생보다 더 좋은 곳

이라면 상감마마를 모시고 가겠지마는."

  가느다란 파동을 지으며 강씨는 흐느껴 울었다.  그리고 고개는 여전히 태조의 가슴에 파 

묻혀 있었다.

  "곤전! 저 세자 방석을 어이 두고 가려하오.  세자 방석이 내 뒤를 이을 때까지 살다 가는

게 좋지 않겠소? 기운을 내보오.  기운을 내보오!"

  태조가 이렇게 애원하자 강씨는 고개를 들고

  "상감마마, 세자 방석을 부탁합니다.  신첩은 세자 방석이 상감마마의 뒤를 잇게 되면 지

하에서 눈을 감겠나이다."

  태조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강씨는 말을 마치자 태조의 무릎에서 내려와 조용히 

자리에 들어가 누웠다.

    [五百年의 曙光]   <王子의 亂>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五百年의 曙光 

    王子의 亂 



  때는 태조 5년 병자(丙子=西紀 1,396년) 음 8월 13일이었다.  강씨는 자리에 누워서 한동

안 눈을 크게 뜨고 내실를 두루 살펴 보다 허망하게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강씨의 임종을 

지켜보다가 강씨의 시체 앞으로 나아가 목을 놓고운 사람은 부군(夫君)인 태조 뿐이었다.

  태조는 슬픔을 사민(士民)과 더불어 나누고자 10일간 정무를 중지시킴과 동시에 일반 서

민에 대해서는 철시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전국 8도의 사민은 애도(哀悼) 속에 잠

겨 있게 되었다.  그리고 또 능지(陵地)를 택하기 위하여 15일이란 시일을 소비하였다.  그

결과 능지로 택해진 곳이 안암동(安岩洞), 행주(幸州), 서부 황화방(皇華坊)이었다.

  이 서부 황화방이란 오늘날의 정동(貞洞)을 말함이다.  당시 물망에 오른 땅은 위에 말한 

세 개소인데 그중의 안암동 땅은 습해서 버림을 받았고 또 행주 땅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버려졌다.  그래서 황화방이 능지로 결정되었는데 이 땅이 쉽사리 결정된 것은 대궐 측근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강씨의 능지가 대궐 측근으로 확정되자 태조는 그해 9월 9일부터 친히 정능(貞陵) 축조에 

정성을 기울였고 또 그해 10월 10일에는 좌정승 조준(左政丞趙浚)과 판중추원사 이근(判中樞

院事李懃) 등을 시켜 강씨의 시책(諡冊)을 받들어 신덕왕후(神德王后)란 묘호(廟號)를 올리게 

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 정월 초사흘에는 황화방 북원(皇華坊北原)에다 안장하고 능호를 정

능(貞陵)이라 했다.  정능동(貞陵洞)이란 동명이 여기에서 생겼고 이를 약하여 정동이라 부르

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사대부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도성 안에 능묘(陵墓)를 두는 것은 옛법을 무시함에서 생겨진 일이다."

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태조는 강씨의 백골이나마 자기 측근에 두고자 해서 한 

일이므로 아무도 이를 탄하지는 못하고 지냈다.  그리고 또 태조는 죽은 강씨의 혼령을 오

래도록 위안해 주려고 정능 안 동쪽 지대에 흥천사(興天寺)라는 원당(願堂)을 지어 주었다.

  이 흥천사는 태조 6년 3월 19일에 착공하여 태조가 몸소 공사를 독려하였는데 이것이 준

공되기는 그해 10월 28일이었다.  원당이 준공되자 태조는 이 흥천사에다 밭 천결(千結=結

은 조세를 계산하기 위한 토지면적의 단위)을 하사하여 절의 유지재산으로 쓰게 하였고 대

선사(大禪師) 상총(尙聰)을 두어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당시 이 흥천사는 조계종(曹溪宗)의 

본산이 되어 있었다.


  제3대 태종(太宗) 8년 5월 24일 태조가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태종은 태조가 돌아간지 

아홉달쯤 되어 당시의 정능을 동소문(東小門)밖에 있는 사을한리(沙乙閑里)에다 옮겼는데 이 

사을한리란 곳은 오늘의 정능동을 말한다.

  정동의 정능을 사을한리로 옮긴 것은 능묘를 도성 안에 두지 않으려고 한 처사일 것이다.

  그런데 제10대 연산군(燕山君) 10년쯤부터는 흥천사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황폐해졌다.  

다만 남아 있는 것은 황폐한 건물 사리각(舍利閣)뿐이었다.  그리고 제11대 임금 중종(中宗) 

5년 3월 26일에 이르러서는 유생(儒生)들이 작당하여 방화하였기 때문에 황폐된 건물은 말

할 것도 없고 사리각 오층탑까지고 재로 변하고 말았다.

  부군(夫君)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정능은 돌보는 사람없는 쓸쓸한 능묘로 황폐를 면치 못

했고 강씨의 원당이며 태조의 원당으로 지어졌던 흥천사도 한줌의 재로 변하고 만 것이다.


  때는 태조 7년 무인(戊寅=西紀 1,398년) 가을이었다.  어느날 정도전은 남은과 만나 네 왕

자와 세자 방석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감! 이제는 세자 방석이 고단한 몸이 되었구료..."
  
  "글쎄 말이요. 부왕이 계시기는 하지만 곤전이 계실 때보다는 신변이 고단하실 밖에..."

  "그런데 우리는 고 강비(故康妃)의 긴탁을 받고 있으니 세자 방석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소?"

  "그럼 최선을 다해야지."

  "무슨 좋은 생각 좀 해 보셨소?"

  "내 두뇌는 삼봉의 두뇌처럼 융통성(融通性) 있는 게 못돼서 특별히 좋은 생각이 나질 않

소. 어디 삼봉의 얘기나 좀 들어봅시다."

  "낸들 별 수 있겠소? 그저 당하는대로 당해 보는 것이지. 그런데 요즘 태조께서 몸이 불

편하시와 자주 누워 계신 모양인데 이 기회를 이용하여 무슨 장난을 하고 싶소."

  "무슨 장난을?"

  "그 장난은 대감의 힘을 꼭 빌려야 할 것이요. 그리고 태조의 병세가 좀 더 악화해야만 

힐 수 있는 장난이니깐 좀 기다려 보아야 하겠소."

  "지금 당장에 방법을 말할 수 없소?"

  "방법만은 말할 수 있죠."

  "어디 들어 봅시다."

  "지금 태조가 누워 계신 모양인데 좀 더 악화되면 나는 대감과 참내하여 피접(避接)요양의 

필요를 역설하면서 모든 왕자를 불러들이게 하려오.  나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네 왕자를 

도륙할 생각을 갖고 있소.  대감은 나의 이 의견을 어떻게 생각하오?"

  "글세요. 될 것도 같군요. 그러나 이 소문이 사전에 바깥으로 나가게 되면 우리만 죽고 말 

것 같으니 이 일을 절대 비밀에 붙이고 추진 시켜야겠소이다.  그런데 우리편 사람도 이 일

을 알고 있습니까?"

  "몇 사람은 알고 있소."

  이 음모가 있은지 단 열흘도 안 돼서 태조의 병세는 심히 위중해져서 정말 피접해서 요양

할 정도에 이르렀다.  정도전과 남은은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몇 번이나 참내하

여 문병하고 피접의 필요를 진언 하였다.  태조도 이 말에 귀가 솔깃해서 도전의 진언을 받

아들이기로 하였다.

  이때부터 도전과 남은은 힘을 얻게 되어 태조 측근의 중관(내시)에게

  "태조의 병환은 피접요양(避接療養)을 해야만 쾌복될 것으로 믿어지니 여러 왕자가 참내하

여 이어(移御)하시는 것을 보는 게 도리일 것인즉 중관들은 곧 모든 왕자로 하여금 참내케

하라."

하는 분부를 내렸다.

  전 참찬(前參贊) 이무(李茂)란 사람도 역시 정도전의 한파였으나 이무는 정도전의 음모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리 정안대군 방원에게 전부 고자질해 버렸다.  방원은 어느 때고 형

님왕자들과 함께 근정문(勤政門) 밖에서 밤을 세우곤 했다.  그의 부인 민씨(후일의 원경황

후)는 자기의 오라버니 민무질(閔無疾)과 의논하고 하인 김소근(金小斤)으로 하여금

  "마님께서 별안간 흉통(胸痛), 북통으로 안절부절을 못하십니다."

  알리게 하였다.

  방원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면서 자저(自邸)로 돌아왔다.  방원은 돌아와 보고서야 자

기를 부른 이유가 다른 데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방원은 부인 민씨와 민무질을 상대로 한

참 동안 밀담(密談)을 주고 받다가 벌떡 일어섰다.  민씨는 눈물을 흘리면서

  "어디를 가시려 하십니까? 지금 대궐로 가시는 것은 죽으러 가시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옷자락을 잡고 놓지 않았다.  방원은 정색을 하고

  "놓으시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오.  어서 놓으시오.  더구나 형님들이 

이미 대궐 안에 계신데 내가 어찌 안 가겠소?  첫째 정도전의 흉계를 형님들게 빨리 알려

야 하겠소."

하며 옷자락을 뿌리치고 나왔다.  그러나 민씨는 대문 밖에까지 쫓아나와

  "신변을 조심하세요! 신변을 제발 조심하세요."

하고 신신 부탁하였다.

  아내의 부탁을 뒤로 하고 집을 나온 정안대군 방원은 나는 듯이 말을 달려 대궐로 들어섰

다.  소관(小官) 하나가 궁중에서 나오면서 말했다.

  "상감마마의 병환이 몹시 위중하시와 지금 피접을 하시려 하오.  여러 왕자께서는 모두 

입시하시라는 분부입니다."

  그런데 전날까지도 궁문에 등불을 매어달아 앞을 밝혔는데 이날밤에는 궁문에 등불이 없

어 어둡기 칠흑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게 웬일일까?"

  의심을 품게 되었다.  이때 정안대군은 변소로 가려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본 익안

대군 방의, 회안대군 방간, 싱당군(上黨君) 이백경(李伯卿)은 정안대군의 뒤를 쫓아오면서

  "정안대군! 정안대군! 어찌할 작정이야!"

  큰 소리로 외쳤다.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지를 말아요. 이런 경우에 별 묘책이 없어서 크게 걱정이요."

  대답할 뿐이었다.

  정안대군은 방의, 방간, 백경과 함께 영추문(迎秋門)으로 나왔다.

  "우리 형제들은 말을 광화문(光化門)밖에 세워놓고 천명(天命)을 기다립시다.  그러는 편이 

득책일 것 같소이다."

  정원대군이 이같이 말하고 곧 사람을 시켜 정승 조준, 정승 김사형(金士衡) 등을 불러오게 

하였다.  공교롭게도 마침 조준은 점장이를 상대하여 길흉을 점치고 있었다.

  그러나 정안대군의 성화 같은 독촉에 하는 수 없이 조준은 갑옷 차림의 병졸들을 이끌고 

정안대군 앞으로 나왔다.  이때 정안대군은 예빈사(禮賓寺) 앞 돌다리를 막게 하고 다만 두

어 사람만 거느리고 오도록 명령한 후 조준에게 호령했다.  

  "공(公)들은 이씨 왕국의 사직을 이대로 버려두고 있을 참이요?"

  추상같은 목소리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조신(趙臣)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들 중에서 조

준, 김사형 등은 정당으로 들어가 자기를 잡으려 했다. 이것을 본 정안대군은

  (만약 궁중에서 군사를 내놓았을 때 우리 군사가 좀 후퇴하면 저 군사들이 궁중으로 들어

오리라.)

  생각하고 다시

  "우리 형제들도 말을 타고 노상에 서 있는데 대감들은 어찌 정당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으

려 하시오?"

하며 앞을 가로막아 버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운종가(雲從街)에 주저 앉았다.  

그들을 운종가에 앉힌 후 정안은 백관을 불러들이게 하자, 찬성(贊成) 유만수(柳曼殊)가 그의 

아들을 데리고 왔다.  정안대군은 유만수에게 갑옷을 내주어 입게 하고 자기 뒤에 서 있게 

하였다.  이를 본 이무는

  "안 됩니다.  만수는 방석의 일당입니다."

  귀띔을 했다.  눈치를 챈 만수는 말에서 내려 정안대군의 말굴레를 잡고

  "정안대군 저하! 신이 솔직히 아뢰겠사오니 들어주옵소서."

  애걸복걸했으나 정안대군이 못들은 체 해 버리자 김소근은 칼을 번쩍 들어 만수와 그의 

아들을 찔러 죽여 버렸다.

  정안대군은 친히 무사를 거느리고 정도전 등의 동정을 염탐한 결과 도전은 이직(李 )과 

함께 남은의 작은집에서 불을 밝히고 모의에 열중하고 있음을 알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

들의 부하는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정안대군이 이숙번(李叔蕃)을 시켜서 불화살 한 

발을 쏘아 그 집 지붕 위에 떨어뜨리게 하자 불길은 삽시간에 확 피어올랐다.  이를 본 도

전은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급히 뛰어나와 이웃에 있는 판봉상(判奉常) 민부(閔富)의 집으

로 들어가 은신하려 하였다.  그러나 민부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우리 집에 배불띠기 하나가 들어와 숨었소."

  이 말에 대군의 부하들은 떼를 지어 민부의 집으로 들어가 도전을 끌어 내었다.  도전은 

피할 도리가 없어 칼을 옆에 끼고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군사들은 기어 나온 도전을 끌어

다 대군 앞에 꿇어 앉혔다.  도전은 고개를 들어 대군을 바라보면서

  "정안대군 저하!  죽을 죄를 범하였소이다.  저하께서 저를 살려 주신면 전심과 전력을 다

하여 저하를 도웁겠습니다."

  살려 주기를 애걸하였다.  이 말에 대군은 목소리를 높여 호령했다.

  "네놈은 이미 왕(王)씨를 배반한 놈인데 이젠 또 이씨를 배반하여 하느냐?"

  흥분한 정안은 당장에 칼을 빼어 도전을 죽이고 또 나아가서는 그의 아들 유영(遊泳)까지

도 참형(斬刑)하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후 남은은 몰래 미륵원(彌勒院) 포막(圃幕)으로 피

해 은신하려 했으나 추병(追兵)에게 결국 붙잡혀 죽었고 이직이란 자는 아무 내용도 모르고 

도전에게 끌려 왔다가 의외의 봉변을 당하게 되었다고 애걸을 했기 때문에 참형은 받지 않

고 살아 남았다.

  그런데 불은 남은의 집에만 그치지 않고 이웃집에까지 퍼져서 남은의 집 일대가 불바다가 

되어 화광이 충천하였다.  궁중에서는 이를 바라보고 소란히 굴면서 활을 쏘았다.  방석 세

자의 파당은 이때를 기회로 군사를 내놓으려고 군사로 하여금 세자를 받들고 성상으로 올라

가 형세를 살피게 하였다.  그 결과 광화문에서부터 남산에 이르기까지 철기(鐵騎)가 자기를 

잡고 있어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안대군은 휘하 군사에게 보다 이상의 피

를 흘리게 하지 않고 세자 방석을 배경으로 하고 일어났던 정도전 난을 평정하였다.

  그런데 태조의 병세는 날로 위중해지기만 해서 결국 청량전(淸凉殿)으로 피접하고 말았다.  

태조가 청량전으로 이어(移御)한지 며칠이 못돼서 좌정승 조준은 여러 중신과 함께 백관을 

거느리고 태조 앞으로 나와 정도전, 남은 등이 범한 죄를 상세히 보고함과 동시에 세자를 

딴 왕자로 개봉(改封)할 것을 간청하였다.

  이때 세자 방석은 태조의 곁에 있었다.  태조는 조준의 간청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

다가

  "경등은 방석을 세자로 봉한데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지 않소? 오늘날 왕자 사이가 불화

해진 것이 방석을 세자로 책봉함에서 생긴 것같이 사람들은 말하는 모양인데 경들도 그리 

생각하오? 어디 대답 좀 해보오?"

  그러나 이 하문에 대하여 아무도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왜들 대답을 하지 않소?  내가 신덕왕후(강씨)를 위해 후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은 아니요.  방석이 막내인데다 사람됨이 될성 부르고 또 늙은 내 눈에는 방석이가 귀여

워 보이기만 해서 세자로 책봉하였던 것이요.  부왕(父王)으로서 아무나 됨직하고 맘에 드는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는 게 뭣이 잘못이요?"

  태조는 이와 같이 말한 후 곁에 있던 세자 방석을 불러 말했다.

  "너는 세자의 자리를 내놓고 싶으냐?"

  "아바마마의 분부대로 하겠나이다."

  "알았다.  그러면 너 좋을 대로 해라."

  "저는 세자의 자리를 내놓고 싶습니다."

  "그래서 맘이 편해질 것 같으면 그리하는 것이 득책일 것이다."

  태조가 이렇게 말하자 방석은

  "저는 아바마마의 마음을 편안히 해드리고 또는 제 마음을 편안케 하기 위하여 깨끗이 세

자의 자리를 내놓고 말겠습니다."

하고 태조의 곁을 물러났다.

  방석은 형 방번과 함께 대궐의 서문으로 나와 어디론지 가려 했다.  이때 방원은 방번에

게 말했다.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아서 일이 이렇게 된 것이다.  두 말 할 것 없다.  가고 싶은 데

가 있거든 빨리 가거라."

  방번이 어디론지 가자 도당(都堂=홍문관의 교리 이하 벼슬아치의 총칭)은 그들의 뒤를 쫓

아가 중도에서 살해했다.  태조는 방번, 방석이 이렇게 죽은 것을 알고

  "이게 누구의 잘못에서 생겨진 것이냐?  이게 아비의 잘못에서 생겨진 것이라면 나도 죽

여 달라고 하겠다.  이 원통한 일을 어찌 참고 산단 말이냐?  저 두 애가 불쌍해 어찌 하

나?  하늘도 무심하구나!"

하고 목을 놓고 통곡하였다.

  그후 태조는 틈만 있으면 흥천사(興天寺=강씨의 원당)로 거동하여 부처님께 참회를 하고 

두 아들의 명복(冥福)을 빌고 지냈다.  그리고 경순공주(慶順公主)는 방번, 방석과 한 가지로 

신덕왕후(강씨의 묘호)가 낳은 오직 하나의 따님이었는데 정도전 난에 부군(夫君)인 흥안군

(興安君)이 피살되어 소년과부가 되고 말았다.  어느날 태조는 경순공주를 찾아가 대성통곡

하면서

  "방원이란 놈을 살려 둔단 말이냐?  그놈은 포악한 놈이다.  네어머니는 그놈 때문에 병

들어 죽었고 너의 두 오라비는 그놈에게 참살을 당했다.  그리고 네 신랑마저 그놈 때문에 

죽어 네가 소년과부가 되었구나!  이런 절통한 일이 또 어디 있겠니?  너는 이젠 중(僧)이나 

되어 네몸이나 지키면서 네 남편, 어머니, 두 오라비의 명복이나 빌어다오."

  가위를 들어 공주의 머리를 사정없이 베어 버렸다.  일세의 대영웅도 인생의 무상함을 크

게 느꼈던 모양이다.

  정안대군 방원이 정도전 난을 평정하자 중외(中外)의 사민은 모두 태조께 정안대군을 세

자로 봉해 달라고 간청을 하였다.  그러나 대군은 한사코 세자 자리를 둘째형 영안대군에게 

돌리려 하였다.  그러나 영안대군은 응하지 않았다.

  "당초부터 개국(開國)을 건의한 사람도 방원이고 또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난리를 평정한 

사람도 방원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나는 세자됨에 족한 공이 없다."

  그래도 방원이 듣지 않고 여전히 고집을 부리자 영안대군은 정안대군에게 다음과 같이 언

질을 준 후에 세자의 자리에 임했다.

  "그러면 내가 어느 시기까지 세자의 자리를 맡아 가지고 있기로 하자.  시기가 오면 너에

게 전하겠다."

  동년 9월, 태조는 임금의 자리를 세자 영안대군에게 전하였으니 이분이 바로 정종(定宗)이

었다.

    [五百年의 曙光]   <咸興差使>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五百年의 曙光 

    咸興差使 



   정종(定宗)이 임금의 자리에 나아가자 방원은 동궁으로 책립되었다.

  정종의 비(妃) 김씨는 왕자의 난을 생각해서 항상 정종에게 간청했다.

  "상감마마,  동궁의 눈을  조심해 보시옵소서.  입궐할 때마다 그 기색이 무엇을 구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하루 바삐 임금의 자리를 내주시와 그 마음을 편케 하소서."

  그리하여 정종은 마침내 임금의 자리를 방원에게 내주고 말았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 방

원의 야심이 어떠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방원은 결국 경북궁에서 왕위(王位)에 오르게 되니 

이가 바로 이조 제 3대 임금 태종(太宗)이다.

  태종은 임금으로 있었음이 2년에 불과한 정종을 추존(追尊)하여 상왕(上王)으로 태조를 추

존하여 태상왕(太上王)으로 모시었다.  그러나 태조는 태종의 소행을 생각하고 내주어야 할 

대보(大寶=옥새)를 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신하들은 모두 다 이를 걱정하고 있었다.

  태조는 사실 두 왕자를 잃은 후부터 마음에 상처가 생겨 태종을 사갈(蛇蝎)과 같이 미워

하였다.  이와 같이 미워한 나머지 태상왕의 자리를 헌신짝같이 내버리고 함흥으로 가 버렸

다.  태종은 부왕 태조가 함흥으로 물러간 후부터 이것, 저것이 걱정되어 자주 중사(中使)를 

보내어 문안을 하곤 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문안사를 보기만 하면 태종이 더욱 미워졌다.  따라서 문안사를 화살의 세

례만 받고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말았다.  태종의 문안사는 가기만 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였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나가서 안 돌아오는 사람이 있게 되면 함흥차사(咸興差使)

가 됐나보다 하고 농담을 하였는데 오늘에도 이 말이 전해지고 있다.

  당시 사람으로 성석린(成石璘)은 태조의 옛날 친구였다.  그는 태종에게 나아가

  "신이 태조의 행재소(行在所)로 가 인륜의 도를 역설하여 태조의 마음을 돌리도록 하겠나

이다."

하고 가기를  자청하였다.  그리하여 석린은 나그네처럼 몸차림을 한 후 백마를 타고 나섰

다.  그는 거의 목적지에 도달하자 말에서 내린 후 불을 피우면서 밥짓는 시늉을 하고 있었

다.  때마침 태조는 이를 바로보고 중관(中官=내시)으로 하여금 가보게 하였다.

  중관이 석린을 찾아보고 말을 걸었다.

  "뭣을 하시는 것이요?"

  "나는 무슨 볼일이 생겨 여행을 하는 도중인데 날이 저물어 말에게 먹이를 주고 여기서 

하룻밤을 세우려 하는 것이요."

  석린의 대답을 듣자 중관은 더 이상 묻지를 않고 돌아와 그대로 태조께 고하였다.

  태조는 이 말을 듣고 만면에 희색을 띠우고

  "알겠도다. 그 사람을 불러오라."

  또 중관을 보냈다.

  그리하여 석린은 중관의 인도를 받고 태조를 만나게 되었다.  태조를 만나게 된 석린은 

인륜의 도를 들어가며 태조께 간하였다.  태조는 이 말을 듣기 무섭게 얼굴빛을 고치고 고

함을 쳤다.

  "그대는 누구를 위해서 하는 말인가?  그대의 임금을 위해 하는 말은 듣기도 싫다.  물러

가라!"

  석린이 여전히 말을 이어

  "신이 참말로 지금의 주상(主上)을 위해서만 하는 말일 것 같으면 신의 자손이 꼭 실명하

여 장님이 될 것이올시다."

  맹세까지 하였지만 태조는 결국 석린의 말도 듣지 않았다.

  태조가 서울을 떠나 울화를 소산(消散)시키고 있던 곳은 태조의 구저(舊邸)로 여기서 몇 

해를 보내자 태종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신하들도 황송한 생각을 억제할 수 없었다.

  "상감마마! 무학상인(無學上人)은 부왕 태조와 친교가 있던 사람입니다.  태조께서는 일찍

이 무학상인을 스승으로 모신 일도 있었으니 이 무학상인을 문안사로 보내셔서 선처케 하시

면 태조께서도 응하실 것 같습니다."

  한 신하가 간곡히 태종에게 간하자 태종은 특사(特使)를 보내 무학상인을 불렀다.  무학은 

태종 앞으로 나와 태조에 대한 얘기를 들은 다음 태종에게 말했다.

  "상감마마,  부자 사이에 어디 이런 일이 또 있겠습니까?  저 같은 몸이 무슨 능력이 있

어 태조로 하여금 회가(回駕)하시게 한단 말입니까?  그런 말씀은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태종의 태도가 더욱 친절하고 더욱 공손해지자 수월치 않은 무학이었지만 불응으

로만 고집할 수 없어 마침내 태종의 청을 받아가지고 함흥으로 갔다.  함흥에 도착한 무학

은 태조에게로 나아가 내함(來咸)의 인사를 올렸다.  무학의 인사를 받은 후

  "무학상인이 여기까지 찾아왔느니 웬일일까?  상인도 누구를 위해 온 것이 아닐까?"

  태조가 이렇게 묻자 상인은 파안일소(破顔一笑)하면서 그럴 듯이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소승이 상감마마와 친교를 맺은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닙니

다.  소승이 지금 온 것은 옛날을 회상하고 하루만이라도 더 마마의 얘기벗이 되고 싶어서 

온 것이올시다."

  태조는 이 말을 듣고야 안심을 하고 자기방에서 자도록 하였다.  무학은 태조 방에서 유

숙하는 동안 한 번도 태조의 잘못을 들어 말한 일이 없이 태연스럽게 수십일을 지냈다.  태

조는 무학과 태종과의 사이에 무슨 일이 없다고 생각하자 무학을 더욱 신뢰하고 지냈다.  

그러자 무학은 어느날 밤중에 기회를 타서 태조에게 간곡히 진언 하였다.

  "마마께서는 왜 여기에 와서 계십니까?  태종은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태종도 마마의 귀여운 아드님이 아닙니까?  매우 어려운 말씀이오나 보위(寶位)를 

맡길 만한 아드님이 이 아드님밖엔 없지 않습니까?  만약 이 아드님을 그렇게 대접하신다

면 마마의 일평생 고심해 이룬 대업을 누구에게 맡기려 하십니까?  딴 사람에 이를 맡기시

는것보다 마마의 혈육에게 맡기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오늘날 천하가 좀 안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안에 있어서는 건국의 중신이 없어지고 밖에 있어서는 실의(失意)한 자들이 

칼을 갈고 있지 않습니까? 마마! 십분 생각하시어 행하십시오."

  그제서야 태조는 이 말을 그럴듯하게 듣고 대답했다.

  "말인즉 옳소! 옳아.  어디 생각 좀 더해보고."

 "그러시면 심사숙려하시고 하루 바삐 환궁하시기로 하십시오."

  무학은 때를 놓치지 않고 권고를 거듭했다.  태조가 함흥에서 환궁하기로 되자 태종은 성

밖으로 나아가 맞이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궁중은 장악을 준비하기에 바빴다.  이때 하륜(河崙) 등 여러 사람은 태종께 간곡히 

권고했다.

  "태상왕의 노여움이 아직도 풀리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을 처리하는데는 어느 

때나 원려(遠慮)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차일(遮日)의 고주(高住)는 꼭 아름드리 대목을 

쓰셔야 합니다."

  태종도 이 말을 듣고 열 아름이나 되는 대목을 써서 고주를 세웠다.

  태조는 차일이 쳐진 곳을 바라보기가 무섭게 숨어있던 분노가 얼굴에 나타나기 시작하더

니 지니고 있던 강궁 백우전(强弓白羽箭)을 꺼내어 태종을 목표로 한 대를 쏘았다.  이때 태

종은 당황하여 얼떨결에 고주 뒤로 은신하자 화살은 고주에 박혀버렸다.  이를 본 태조는 

어이가 없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할 수 없다.  하늘이 이렇게 만드는 것 같다."

  태조는 가지고 있던 국보(國寶=옥새)를 태종에게 던져 주었다.

  "네가 원하는 것이 이것이 아니냐?  당장 이것을 가지고 가거라."

  태종은 눈물을 머금고 나와 옥새를 받은 후 뒤를 이어 대연(大宴)을 베풀었다.  잔치 도중 

태종이 태조의 만수무강(萬壽無疆)을 비는 뜻에서 잔을 올리려 할 때 하륜은 역시 태종에게

로 나아가 진언했다.

  "상감마마! 상감께서는 술통이 있는 곳으로 가셔서 잔에 술만 따뤄 놓으시고 이를 중관에

게 주어서 올리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서 태종은 그의 말대로 중관으로 하여금 술잔을 들어 태조에게 권하게 하였다.

  태조는 그 술을 받아서 다 마신 후 웃음을 띠우고 소매 속에서 철여의(鐵如意)를 꺼내 놓



  "할 수 없다.  하늘이 시키는 모양이다."

  탄식만 연발하고 말았다.

  그런데 무엇이 일대의 영걸 태조로 하여금 서복(庶腹)의 말자(末子)를 세자로 책봉케 했으

며 또 유공한 왕자였던 태종을 백우전으로 또는 철여의로 죽여 없애려 하였던가?  이는 다

름이 아니었다.  애처(후일의 신덕왕후)에 대한 편애(偏愛),  말자 방석에 댄한 편애가 태조

로 하여금 현명치 못한 행위를 감행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태종에게 개죽음을 하고만 정도전과 남은의 약전(略傳)을 간단히 써서 그 인물됨을 알아 

보기로 하자.


   鄭道傳의 略傳

  정도전은 봉화(奉化)사람으로 고려 공민왕 때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일찍이 목은(牧隱) 문

하에서 수업하여 문학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신우왕(辛禑王) 때에 설화(舌禍)에 걸려 

회령(會寧)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특사를 받고 돌아와 삼각산 밑에 집을 짓도 살며 이때 

호를 삼봉(三峰)이라 자칭했다.

  임신(壬申)에 이르러 이조 개국에 큰 공을 세웠으므로 봉화백(奉化伯)이란 작호를 받았고 

동시에 한양(서울)으로 자택을 옮겼다.

  태조는 어느 때 도전에게

  "과인에게 오늘이 있게 된 것은 모두 경(卿)의 공이요."

하며 도전을 찬하였다.  그러다가 방석, 방번의 난이 있을 때에 도전은 선두에서 일했으므로 

정안대군 방원에게 붙잡혀 자기는 물론 아들 유영(遊泳)도 참살을 당하였다.

  도전의 저서(著書)로 삼봉집(三峰集)이란 책이 전해지는데 이것은 심(心), 리(理), 기(氣)에 

대하여 연구한 것 3편이었다.  이외에 경제문감(經濟文鑑), 경국전(經國典) 등이 세상에 전해

졌다.

  그의 슬하에는 네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 진(津)은 판사(判事)로 있었고 그의 아들 문형

(文炯)은 문과에 급제하여 연산주 시절에 우의정(右議政)이 되었고 중종(中宗)이 반정하자 벼

슬이 영부사(領府事)가 되었는데 시호(諡號)를 양경(良敬)이라 불렀다.


   南誾의 略傳

  남은(南誾)은 영의정(領議政) 남재(南在)의 아우로 사람됨이 호매(豪邁)하고 기계(奇計)를 좋

아하였다.  신우왕 때에 왜구가 삼척(三陟)을 쳐들어오자 남은은 자진하여 삼척으로 가서 군

사를 모집하여 왜적을 도륙하였다.  그리고 태조를 따라 위화도(威化島)로 갔다가 회군책(回

軍策)을 올렸다.

  이 공으로 밀직부사(密直副使=고려때의 밀직부사란 마을의 두 번째 어른)가 되었으며 태

조가 개국함에 이르러 일등공신으로 뽑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한때 태조는 여러 신하에게 대하여

  "과인에게 남은과 조인옥(趙仁沃)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대없이 성취되지 못했을 것이다."

고 말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 무인년(戊寅年) 곧 태조 7년에 도전과 함께 세자 방석을 도우

려 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방원에게 참살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후에 세종이

  "남은에게 죄가 없지는 않으나 그래도 큰 공이 있는 사람이다."

하여 그에게 강무(剛武)란 시호를 내리고 또 태조묘(太祖廟)에 배식(配食)케 하였다.



  태조는 고려조에 대신하여 왕위에 오른 후부터는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그 걱정이란 고

려 태조 왕건(王建)의 후예가 무슨 일을 일으켜 다시 고려를 세우려 할 것 같아서였다.  그

리하여 태조는 즉위한지 3년쯤 되어서 고려 태조의 후예로 거물급(巨物級)에 속하는 사람들

을 아무 죄없이 무인도로 추방하려 했다.

  이때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은 그 거물급 왕씨 ---왕강(王康), 왕승보(王承寶), 왕

승귀(王承貴), 왕융(王 )---들을 섬으로 추방하는 것에 대하여

  "주상전하(主上殿下)! 상감께서 이 사람들을 지나치게 사랑하시고 지나치게 후히 대접하시

지만 저들은 상감의 애호와 후대를 은혜로 생각하고 있지 않음을 살피셔야 하겠습니다.  그

중의 강은 지모(智謀)가 백 사람 천 사람에 뛰어나는 인물이옵고,  또 그 중에 승보, 승귀는 

용기와 담력이 만인에 뛰어나는 인물입니다.  이들이 서울에 있게 되면 반드시 무슨 일을 

저질러서 나라를 위태롭게 할 것입니다."

하고 진언하였다.

  "오늘날 왕조의 여족(餘族)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반드시 후환이 있게 될 것이다.  이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는 다 죽여 없애는 것이 득책일 것이다."

  이런 결과로 나라에서는 사람을 마음대로 죽일 수 없으므로 헤엄에도 익숙하고 또 배도 

잘 다루는 사람들을 뽑아서 그들에게 왕씨들을 꼬여내게 하였다.  그래서 이자들은 여러 왕

씨에게 

  "상감마마께서 왕성(王姓)을 가진 어른을 모두 섬으로 옮겨가 사시게 하기 위하여 저희들

을 출동시켰습니다.  별 생각 마시고 배를 타 주시면 적당한 섬으로 모시겠습니다."

  이런 권고에 왕씨들은 살 곳이 생긴 것으로 생각하고 기쁨에 넘쳐 앞을 다투어서 배를 탔

다.  그러나 배가 중양(中洋)에도 채 못 이르러 선주에 있던 선인(船人)들은 배 밑을 뚫어 놓

은 후 슬그머니 해저(海底)로 들어갔다.  그러자 해수가 배 안으로 들어와 당장 바닷속으로 

침몰하게 되었다.  이때 왕씨와 사귐이 있던 어느 승(僧)이 해안(海岸)에서 바라보고 있다가 

큰 소리를 내어 안타까이 부르짖었다.

  "여러 왕씨 어른들!  배가 당장 바닷속으로 침몰하게 되었소.  당장 어복(漁服)에 장시지내

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왕씨들은 당초부터 헤엄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으므로 그저 죽는 시간만 기다리면서 

승의 부르집음에 답하여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一聲柔櫓滄波外
                         어느덧 놋소리 나더니 배 창파 밖으로 왔네
  縱有山僧奈爾阿
                         산승이 있은들 어찌하리!

  승은 그들이 불쌍해 통곡을 하며 돌아 갔다.

  그런데 왕씨가 바다에 침몰되었을 때 태조는 꿈을 꾸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칠장지복

(七章之服=王侯의 禮服)을 입고 나타나

  "네가 삼한(三韓)을 통합하였는데 그 공은 이 백성들에게 있다.  네가 만약 나의 자손을 

도륙할 것 같으면 오래지 않아서 그 앙화를 받고야 말 것이니 너는 이를 명심해 두어라."

  노호(怒號)하였다.  태조는 이 말에 놀라 왕씨 처치의 생각을 고쳐 갖기로 하였다.  그리

고 태종조(太宗朝)에 이르러서도 왕건의 후예로 민간에 숨어 있는 자가 있었다.  이때 이조

의 대간(臺諫=사헌부, 사간원)은 태종께

  "이자를 죽여 없애야 합니다."

하고 극간하였지만 태종은 다음과 같은 교지(敎旨)를 내렸다.

  "제왕으로 나서게 되는 것은 오로지 천명에 의한 것이다.  왕씨의 후예를 도륙한다는 것

은 태조의 본의가 아니었다.  이 뜻을 받들어 왕씨의 후예로 생존해 있는 자를 안심하고 생

업에 힘쓰게 하라."

  고려의 종실(宗室)인 왕휴(王 )의 서자(庶子)는 민간에 살고 있었다.  이를 듣게 된 지신사

(知申事) 김여지(金汝知)는 사실을 밝히려고 문초하였는데 항간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그

러나 태종은

  "부왕(父王) 태조께서 개국하실 때에 왕씨가 살게 되지 못할 것이란 말은 태조께서 말씀한 

것이 아니다.  실상은 한두 대신들이 만들어낸 말이다.  옛날부터 역성수명(易姓受命)한 제

왕중에는 전조의 후예를 봉하여 작호를 주기도 하고 혹은 고관을 주어 그의 어진 점을 길이 

전하게 하였다.  다시 말하면 역성수명자로서 전조의 후예를 전부 도륙한 일이란 일찍이 업

었다.  대간이 죽여 없애라는데 대해서 과인은 다시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옛날부터 제왕

이 일성(一姓)으로 천지와 더불어 종시한 일은 없다.  오늘의 이씨(李氏)가 인정(仁政)으로서 

백성에 임하면 백 왕씨(百王氏)가 있을지라도 걱정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악정으로서 임하면 

왕씨가 아닐지라도 따로이 수명자가 생겨 나라가 위태해질 것이 아니냐?"

하고 다음과 같은 하교(下敎)를 내렸다.

  "금후 왕씨의 후예로서 자수를 하거나 또는 사람의 고발에 의해서 알려진 자가 있으면 그

들의 말을 듣고 살기 편한 데에 거주케 하며 동시에 생업에 전념케 하라."

  그리고 태종은 또 다시 말을 이어

  "자고로 처음 왕업을 이룩한 자는 전조의 후예가 무슨 일을 저지를까 걱정하고 여러 가지

로 의심을 품고 전조의 후예를 모두다 전제(剪除)하려 하였다.  그러나 과인은 그런 생각은 

갖지 않고 있다.  천명에 의하여 한 나라의 임금이 된 과인은 이 강토 안에 있는 자를 모두 

다 과인의 적자(適子)로 보며 동시에 일시동인(一視同仁)하여 천의에 보답하려 한다.  이미 

공양왕(恭讓王)으로 하여금 자기 마음대로 편안한 데서 살게하여 처자와 비복(婢僕)이 여전

히 한군데에 모여 단란하게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다만 그 족속이 섬으로 들어가 고

생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이를 불문에 붙일 수 없다.  저 거제도(巨濟島)에 있는 자

들을 육지로 나오게하여 각군 각주에서 살게 하고 또 재간이 있는 자는 잘 선발하여 이를 

나라에 알리라."

  그리하여 왕씨로서 거제도에 있던 자는 완산(完山)으로 상주(尙州)로 또는 영주(寧州)로 가 

살게 되었고 또 왕강, 왕승보가 불려 오게 되었다.  이런 것으로 생각하면 태조의 왕업이 정

안대군 방원, 즉 태종에 의하여 대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忠臣列傳]   <杜門洞 사람들 1-40>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忠臣列傳 

    杜門洞 사람들 1-40 



   고려의 멸망과 더불어 이성계가 왕위에 나아가 천하가 이성계에게로 돌아가고 말자 우국

지정(憂國之情)에 잠겨 지내던 고려 유신(高麗 遺臣)들은 이성계의 신하가 되는 것을 욕스러

이 생각하고 산중으로 벽강궁촌으로 두문동(杜門洞)으로 혹은 섬으로 들어가 고절(孤節)을 

지키다가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여기에 언급된 사람들은 여조말의 수절한 충신임을 말하여 둔다.


1. 李 穡 (號는 牧隱)

  이색(李穡)의 자(字)는 영숙(潁叔)으로 한산(韓山)사람이다.  찬성사(贊成事) 곡(穀)의 아들로 

사람됨이 총명한데다 범인과 다른 점이 있어 글만 읽으면 그대로 낭송(朗誦)하였다.  원(元)

나라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으로 다섯 해나 보내다가 어머니의 노환으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고려 공민왕 계사(癸巳)년에 대과(大科)에 등제하여 벼슬이 삼중대광 시중한산백(三重大匡 

侍中韓山伯)에 이르렀다.  공민왕 기사(己巳)에 장단으로 가 귀양살이를 했고 경오(庚午)년 5

월에는 청주옥(淸州獄)으로 들어갔으며 임신(壬申)년에는 금양(衿陽)으로 끌려갔다가 여흥(驪

興)으로 옮겨졌고 또 이조 개국 후에는 장흥벽사(長興碧沙)로 끌려갔다가 그해 겨울에 나왔

다.  이와 같이 귀양살이와 옥중생활로 세월을 보내다가 풀린지 얼마 못되어 병자(丙子)에 

이르러 청심루(淸心樓) 아래의 연자탄(燕子灘)에서 서거하고 말았다.

  색이 불귀의 객이 되자 이조에서도 그에게 한산군이란 작호와 문정공(文靖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어느 때 길재(吉再)는 색에게

  "어떻게 거취(去就)를 취하는 게 좋겠느냐?"

고 물은 일이 있었다.  이때 색은

  "그것은 제각기 자기들의 뜻대로 할 것이다.  우리들은 대신의 지위에 있으니 나라와 한

가지로 흥하든 망하든 할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뜻대로 할 수 있으니까 그대의 자유에 맡

긴다."

라고 대답하였다 한다.

  공양왕 때에 색은 소명(召命)에 의하여 적소(適所)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환경(還京)한 그

가 이성계를 잠저(潛邸=임금 되기 전에 살던 집)에서 만나자 성계는 기쁨에 넘쳐 상좌에 그

를 앉히고 꿇어앉아 권주(勸酒)를 하였다.

  색은 한잔도 사양하지 않고 양껏 마시고 돌아갔다.  색은 가끔 성계와 만나고 성계는 언

제나 중문까지 배웅하곤 했다.  그는 종학(種學)이란 아들과 종덕이란 두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다 문과에 급제하고 높은 벼슬을 지냈다.  그러나 나라가 성계에게로 돌아가자 그들은 

여전히 한 마음을 갖고 버티다가 마침내 장독(杖毒)으로 죽고 말았다.

  색은 한때는 여주 농막으로 내려가 한운(閑雲)과 야학(野鶴)을 벗삼고 지냈다.  어느 날 문

생(門生)이 찾아오자 그는 문생을 데리고 심산궁곡으로 끌고 들어갔다.  곡절을 모르는 문생

은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색은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곳에 이르자 문생이 곁에 있는 것을 

문제삼지 않고 온 종일 계속하여 방성통곡(放聲痛哭)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실컷 울고 나더



  "인제야 막혔던 가슴 속이 뚫어진 것 같구나.  좀 살 것 같다."

하고 문생과 함께 다시 돌아왔다.  색이 이렇게 방성통곡하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니고 두 아

들이 이조에 항복하지 않고 죽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일이 있은 후 곧 임신(壬申)년부터 을해년에 이르기까지 색은 한산(韓山)으로 

여주(驪州)로, 오대산(五臺山)으로 드나들면서 여생을 보냈다.  태조는 그를 옛날 친구로 또

는 옛날의 스승으로 대접하고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하였다.  병자년(丙子年) 5월 색은 여주

로 내려가 피서(避暑)할 것을 간청하고 배에 오른지 얼마안 되어 돌연 폭사(暴死)하고 말았

다.  나중에 태조가 이 소식을 듣자 놀래고 의심한 끝에 당시의 안찰사(按察使)를 죽여 없애

고 분을 풀었다.


  <<附記=고려 말년의 수절 제신 가운데 제일인자로 손꼽는 포은 정몽주(圃隱鄭夢周)는 이

  미 기술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2. 吉 再 (號는 冶隱)

  길재(吉再)의 자(字)는 재부(再父), 해평 사람이다.  아버지 원진(元進)이 지금주사(知錦州事)

로 있다가 보성대판(寶城大判)이 되자 어머니 김씨가 따라가게 되었는데 수입이 적은 탓으

로 길재를 데리고 가지 못했다.  그때 나이는 8세, 어머니를 생각하고 어느 때나 울고 지내

던 중 남계(南溪)란 곳에서 놀게 된 일이 있었다.  이때 그는 석별(石鱉)을 발견하고

  "자라야! 자라야! 너는 어머니와 헤어졌니.  나도 역시 어머니와 헤어졌단다.  내 너를 삶

아 먹고 싶지만 네 신세가 나와 다름 없어 너를 놓아 준다."

  노래를 지어 부르며 자라를 도로 물 속에 놓어 주었다.  이 노래가 이웃에 전해지자 이웃 

사람들은 그를 안고 눈물을 머금었다 한다.

  계해년(癸亥年)에 이르러 사마(司馬=진사)가 되고 병인년(丙寅年)에는 대과(大科)에 급제하

였으며 기사년(己巳年)에 문하주서(門下注書=의정부 주서로 정7품 벼슬)가 되었다가 공양왕

이 임금이 되자 벼슬을 내놓고 선주(善州=선산)로 돌아와 그 어머니 봉양에 힘을 기울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를 출천의 효자로 칭송하였다.  

  이조 태종이 잠저(潛邸)에 기거하면서 서당에 들어와 독서할 때에 길재는 서당 근처에 살

고 있었으므로 서로 상종하게 되어 그 교의가 남달리 두터웠다.  방원이 세자로 있을 때 서

연관(書筵官)을 상대로 이름이 드러나 있지 않은 선비들을 들어 말하게 되자 세자는

  "길재는 강직한 사람이다.  내가 일찍이 길재와 동학하였는데 못 본지가 오래다."

하고 말했다.  길재와 동관인(同寬人) 정자(正字=정9품벼슬) 전가식(田可植)은 길재의 효행에 

대하여 상세하게 얘기하니 방원은 가식의 말을 듣고 감격해 마지 않았다.

  어느땐가 그의 아버지 원진이 서울로 가 벼슬살이를 할 때 노(盧)란 성을 가진 여인 하나

를 얻어 제2부인을 삼고 지냈다.  이를 알게 된 길재의 생모(生母)는 어느 때나 원진을 보기

만 하면 그 일에 대해 큰 소리를 내므로 집안이 불안했다.  길재는 이를 방관만 할 수 없어

  "어머님! 아내로서 남편에 대한 도의, 아들로서 어버이에 대한 도의에 설사 불의한 일이 

있을 지라도 불의한 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인륜의 변은 성인이라는 사람에게도 있는 

것이오니 이를 살피시고 어머님은 어머님으로서의 도의만 지키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의 어머니도 이 말을 듣고 감동하여 다시 입을 연 일이 없었다.  그리고 또 어느때 자

기 어머니에게

  "어머님! 아버님을 좀 가 뵈야 하겠습니다. 아버님이 계신데도 불구하고 안가 뵈옵는 것은 

자식된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하고 서울(당시의 서울은 개성)로 올라갔다.  그는 서울 서모(庶母) 집에 있을 동안 무슨 거

친 말을 듣게 되면 어느 때나 더욱 공손히 더욱 아들다웁게 대하였다.  노씨 부인은 친어머

니가 아니었지만 그의 마음씨에 감동하여 그를 친아들같이 사랑하였다.

  길재가 선산으로 돌아와 있는 동안에도 세월은 여전히 흐르고 흘러 그의 어머니 나이 육

십에 귀가 달리게 되었다.  그는 아침 저녁으로 문안하는 것을 궐한 일이 없었을 뿐 아니라 

어머니의 이부자리를 친히 펴고 걷고 하며 지냈다.  아내나 혹은 딸 자식이 자기 어머니의 

이부자리에 손을 대려 하면 만류하면서

  "너희들은 손댈 것 없다.  어머님이 이젠 아주 늙으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내가 하겠다."

하고 타일렀다.

  그가 이와 같은 효자였으므로 그의 아내 신씨(申氏)도 그를 배워 늙은 시어머니를 알뜰하

게 공경했다.  방원이 그의 효행에 감동하여 정종께 이를 알려 봉상박사(奉常博士)를 제수케 

하였다.  길재는 대궐로 나아가지 않고 사은(謝恩)한 후 다시 방원에게 다음과 같은 요령의 

글을 올려 징소(徵召)엔 불응하였다.

  <일찌기 저하(邸下)를 모시고 반궁(伴宮=성균관 혹은 문묘)에서 두 번이나 글을 읽은 일이 

있사온바 이것이 인연이 되어 오늘날 부르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감사하고 황공하오이다.  

그러하오나 등과 후 두 번이나 신조(辛朝)로 나아가 벼슬살이를 하다가 왕씨가 복위(復位)하

자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옛날을 생각하시고 불러 주시니 감사함을 형언할 수 없습

니다.  그러하오나 올라가 배알(拜謁)은 하겠지만 벼슬살이만은 신의 원하는바 아니 오니 이

를 살펴주옵소서.>

  이글에 대하여 방원은

  <그대의 말은 강상불역지도(綱常不易之道)로 생각하오.  따라서 그대의 뜻을 뺏을 수는 없

지만 그대를 부른 사람은 나이고 그대에게 벼슬을 내릴 사람은 상감마마인즉 상감마마께 이

를 아뢰는 것이 좋은 것 같소.>

하는 내용의 대답을 보냈다.

  이 대답에 접한 길재는 정종께 다음과 같은 내용의 상소(上疏)를 하였다.

  <신은 본래 한미(寒微)한 가문의 소생으로 신조(辛朝)에서 벼슬살이를 하게 되어 문하주서

(門下注書)로 있었습니다.  신은 듣건대 계집은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고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합니다.  그리하여 신은 향리로 돌아와 늙은 어미나 잘 봉양하면서 여년(餘

年)을 보내려 하는 것이올시다.  상감마마께서는 이를 굽어 살피시고 신으로 하여금 여생을 

향리에서 보내게 하소서.>

  정종은 이 말을 듣고 그의 절의에 감동하여 특별히 우대를 하고 그 가문의 명예를 보전케 

하였다.

  그 후 태종임금이 자리를 세종(世宗)에게 내주고 자신은 상왕(上王)이 되었을 때 세종에게
]
  "길재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의사이다.  듣건대 길재에게 아들이 있다 하니 마땅히 불

러서 적당한 직에 있게 하고 동시에 그 집에 충신문(忠臣門)을 세워 주게 하라."

는 하교(下敎)를 내렸다.

  그리하여 그의 아들 사순(師舜)이 불려 들어가 종묘부승(宗廟副丞)이 되었다.  또 질재가 

육십칠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는 미두(米豆)와 장군(葬軍)을 내렸고 나아가서는 

그에게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란 명예직을 주었다.  그리고 구정 남재(龜亭南在)는 다음과 

같은 시를 바쳐서 그의 절의를 찬하였다.

  高麗五百獨先生
                        (고려 오백년에 사람은 선생 뿐이니,)
  一代功名豈足榮
                        (일대의 공명도 그에겐 영화롭지 못하다.)
  凜凜淸風吹六合
                        (맑은 바람은 늠름히 상하사방에 불고,)
  朝鮮億載永嘉聲
                        (그의 높은 이름은 억만년에 이르도록 전해지리.)


3. 徐 甄 (號는 未詳)

  서진(徐甄)은 이천(利川) 사람으로 초명(初名)은 분이었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경인(庚寅)

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장령(掌令)에 이르렀으나 김진양(金震陽)당에 연좌되어 금천(衿

川)으로 물러와 살았다.  그는 이때 다음과 같은 시를 읊어 자기의 심경을 피력하였다.

  千載神都隔渺茫
                        (천년이나 되는 성스런 도읍지 바랄볼 수도 없네.)
  忠良濟濟佐明王
                        (이름 높은 충량들이 임금을 보좌했건만)
  統三爲一功安在
                        (삼국을 통합하여 하나로 만든 그 공이 어디 있노)
  却恨前朝業不長
                        (오히려, 한만 되네, 전조의 왕업 길지 못해서...)

  이런 내용의 시가 항간에 떠돌게 되자 당시의 대신이며 대간은 태종께 나아가서 진을 국

문하고 치죄할 것을 청하였다.  이때 태종은 이 말을 듣고 새삼스레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게 다 무슨 말이요?  고려의 신하였던 사람이 그 임금을 잊지 않고 시를 읊어 생각하

는 것은 바로 인정인 것이요.  우리 이씨의 운이 천지와 더불어 무궁할 것을 누가 장담하겠

소?  그것쯤은 불문에 붙이는 것이 현명할 것이요.  이젠 이 문제를 입밖에 내지 마시오."

  그러나 대신과 대간은 또다시 입을 열어 간청하였다.  허나 태종은 여전히 불응하면서

  "진이 고려의 신하이므로 북면(北面)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 임금을 그렇게 추모(追慕)

하니 진은 정말 이제(夷齊)에 비할 사람이다.  상을 주면 주지 벌은 못 주겠다."

  대신이며 대간의 입을 다물게 하였다.

  선조조(宣祖朝)에 이르러 선조는 허균(許筠)의 보고를 듣고는 진의 무덤에 제를 지내게 하

고 동시에 대사간(大司諫)이란 직을 내렸고 또 윤근수(尹根壽)의 말에 의하여 그의 묘를 충

신묘(忠臣墓)라 봉하였으며 나아가서는 진을 금천 충현서원(衿川忠賢書院)에 합사(合祀)케 하

였다.


4. 元 天 錫 (號는 耘谷)

  원천석(元天錫)은 원주 사람으로 자(字)를 자정(子正)이라 불렀다.  문장이 섬부(贍富)하고 

식견이 해박했다.  고려 말년에 이르러 나라꼴이 말 못할 정도에 놓여지자 이를 차마 볼 수 

없어 치악산(雉岳山)으로 들어가 숨어 살면서 친히 농사에 종사하고 어버이 봉양에 힘을 기

울였다.

  그러는 도중 어느 유서에서 과거에 참가해야 할 기록을 발견하고 부득이 참가하게 되었는

데 일거에 진사가 되었다.  그러나 벼슬은 하기 싫어 도로 향리로 돌아와 이색과 가까이 하

면서 시주(詩酒)로 세상을 보내기로 하였다.

  태종은 미시(微時)에 그의 문하에서 학을 구하였던 관계로 천석의 위인을 잘 알아 몇번이

나 그를 불렀으나 한 번도 태종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어느 때 태종이 강원 지방을 순

유(巡遊)하게 되자 천석의 기거하는 집을 찾아갔으나 천석은 피신하고서 태종을 맞이하러 

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태종은 부득이 계석상(溪石上)으로 내려와 옛날의 종을 불러 먹을 것을 주고 돌

아 올 때 천석의 아들 동(洞)에게 기천 감무(基川監務)란 직을 내렸다.  그리하여 후인들은 

그 계석을 이름지어 태종대(太宗臺)라 불렀는데 이대는 치악산 각림사(覺林寺) 근방에 있다.

  태종이 상왕(上王)으로 있을 때 천석을 부르자 그는 보통 출입하는 옷을 입고 배알하러 

들어갔다.  그가 궁중으로 들어가자 태종은 여러 왕자 왕손을 불러냈다.  이때 태종은

  "이 애가 나의 손자인데 어떠하오?"

하고 하문하였다.  천석은 바로 세조를 가리키면서

  "그러나 형제간에 우애가 있도록 잘 지도하셔야겠나이다."

  천석은 일찍이 야사(野史)를 저술하여 나무상자 속에 넣고 이에 자물쇠까지 채워서 깊이 

감추어 두었는데 죽을 암시하여 집안 사람들을 불러 놓고 타일렀다.

  "저 책상자를 가묘(家廟) 안에 꼭 비장(秘藏)하되 어느 때나 잘 지켜야 한다."

  이 상자 표면에는 다음과 같은 문귀가 쓰여져 있었다.

  我子孫, 不如我則, 不可開見

  <내 자손이 나만 못하면 열어보지 말아야 한다.>

  그 후 그의 증손댕 이르러 시제(時祭)가 있을 때 종족이 일당에 모이게 되었다.  이때 모

인 종족들은

  "아무리 선조의 유언이 있을지라도 세월이 가고 또 가서 이젠 오래 되었으니 열어보아도 

무방한 것 같다."

하고 결국 책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 속에 있는 야사의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다.

  <거의 모두가 은휘하지 않고 사실대로 쓰여진 고려 말년의 사실이다.  따라서 내용이 국

사와는 다른 점이 많을 것이다.>

  이를 보게 된 종족들은

  "이것은 우리를 원씨 종족을 멸족함에 알맞는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볼 것은 다 

보았으니 이제 불에 태워버리자."

  불 속에 넣고 말았다.

  천석은 고려 말년에 있어서 곧은말 하기로 가장 유명했고,  또는 우국(憂國)하는 사람으로

도 가장 유명했다.  그의 분묘는 오늘의 원주 치동서 십리가 떨어진 석경촌(石鏡村)에 있어 

행인 과객으로 하여금 고개를 숙이게 한다.


5. 李 崇 仁 (號는 陶隱)

  이숭인(李崇仁)의 자(字)는 자안(子安)으로 경산부(京山府) 사람이다.  고려 공민왕조에 과거

에 급제하여 벼슬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예문관제학(藝文館

提學)에 이르렀다.  일찍이 정도전이 숭인과 함께 이색에게로 나아가 학문을 배웠는데 재주

는 비등하였으나 그 인격에 있어서는 다른 점이 있었다.

  이성계가 왕업을 성취함에 있어 도전은 성계의 중신이 되었다.  이때 도전은 자기의 사람

인 황거정(黃居正)을 숭인이 귀양가 있는 적소로 보내 숭인을 곤장으로 때려 죽이게 하였다.

  숭인은 당초부터 정몽주 당의 한 사람이었는데 무슨 일로 영남으로 추방되어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거정은 도전의 명령을 받고 영남으로 가서는 하룻동안에 숭인에

게 곤장을 수백대나 가하고도 그를 결박하여 말에 태우고 수백리나 떨어져 있는 곳으로 달

리게 하였다.  이 때문에 전신이 상처투성이가 되고 마침내 처참히 죽고 말았다.


6. 金 震 陽  (號는 草屋子)

  김진양(金震陽)의 자(字)는 자정(子靜)이다.  공민왕조에 이르러 벼슬이 산기상시(散騎常時)

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는 당시의 간관(諫官)과 더불어 조준 및 정도전을 규탄한 일이 있었

다.  포은 정몽주가 살해되자 그는 곤장을 백도나 얻어 맞고 먼 곳으로 귀양가 있다가 적소

에서 죽고 말았다.


7. 趙    (號는 松山)

  조견(趙 )은 평양 사람으로 자(字)는 종견(從犬)이다.  조준(趙浚)의 아우로 고려시대에 지

신 안렴사(知申按廉使)로 있었다.  그는 형 준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한다는 말을 듣고 형

에게 다음과 같이 진언했다.

  "형님,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임을 모르십니까?  우리 집안은 마땅히 나라와 존망을 함께 

할 집안이올시다."

  이 말을 들은 준은 견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알고 견을 영남으로 파견하여 안찰에 종

사케 하였다.

  그러나 견이 돌아오기도 전에 고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이 소문을 듣고 견은 돌아올 생

각이 나지 않아 소리를 높여 통곡하면서 두류산(頭流山)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때 상감은 

견에게 호조전서(戶曺典書)란 벼슬을 내리고 그를 불렀다.

  그러나 견은

  "나는 서산(西山)의 고사리를 먹고 살지언정 성인(聖人)의 백성은 되고 싶지 않소."

  대답한 후 뒤이어 이름을 견( =본래의 이름은 윤(胤))이라 고치고 자를 종견(從犬)이라 개

칭했다.  나라가 망했는데 죽지 않았기 때문에 개에 비해 이렇게 지은 것이다.

  이와 같이 이름을 고친 후 견은 두류산에서 청계산(淸溪山)으로 들어갔다.  매일같이 최고

봉으로 올라가 고려 서울을 내려다보면서 통곡하곤 했다.  그리하여 당시의 사람들은 그 산

의 최고봉을 망경(望京)이라 불렀다.  당시의 임금 이태조는 절의에 감동하여 그를 만나보기

를 원하였다.

  태조의 원이 간절했으므로 조견은 나와 태조를 만났으나 태조에게 고개만 숙이고 대배(大

拜)는 하지 않았으며 또 말도 입에서 나오는 대로 했다.  태조는 그의 언동을 문제삼지 않

고 용서하였다.  왕은 이와 같은 일이 있은 후 어디서나 살기 좋은 곳을 택하여 거주할 것

을 특별히 허락할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집도 지어 줄 것을 명했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 나라에서 지어준 집에는 들어가 살지 않고 양주 송산(楊州松山)

으로 들어가 여기서 여생을 보냈다.  그가 아호(雅號)를 송산(松山)이라 지은 것은 송산에서 

살게 된 때부터였다.

  견이 청계산으로 들어가 은신하고 있을 때 당시 형 준은 태조의 좌명공신이 되어 있었으

므로 자기 아우에게 무슨 재앙이 미칠까 걱정하고 개국공신권(開國功臣券)에 아우의 성명을 

기입하고 이것을 가지고 있게 하였다.  그러나 견은 한사코 이를 받지 않고 이름을 고치고 

만 것이다.  그리고 태조가 어느때 친히 청계산으로 거동하여 그에게 큰 벼슬을 준 일이 있

었으나 굳이 사퇴하고 말았다.  그는 죽을 임시에 아들과 손자를 불러

  "나는 이제 죽을 것이다.  나의 묘표(墓表)에는 고려시대의 관직만 쓰고 이조의 것은 절대

로 쓰지 말라.  그리고 너희들은 신조(新朝)인 이조로 나아가 벼슬을 하지 말아라."

이르고 절명하였다.


8. 金 濟 兄弟

  김제(金濟)의 호는 백암(白巖)으로 선산 사람이다.  고려 말년에 김제는 평해(平海) 군수로 

있었는데 고려가 망하자 배를 타고 외로운 섬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조 정종(定宗) 때에 해

상에 단을 만들어 놓고 초혼제(招魂祭)를 거행하는데 그의 아우 주(做)와 함께 일원(一院)에

다 수용(收容)하고 제를 올렸으며 나라에서는 고죽(孤竹)이라 쓴 액(額)을 하사하였다.

  그의 아우 주(做)의 자는 택부(澤夫)이고 호는 농암(籠巖)이었다.  고려 공민왕조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공양왕 사년에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서 고려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복(朝服)이며 쌍화(雙靴)를 벗어서 종에게 주어 자기 아내에게 전하게 하고 동시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보냈다.

  <총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이라오.  내가 귀국할지라도 몸 둘 곳이 없겠으므로 이

것들만 대신 보내는 것이요.>


9. 禹 玄 寶 (號는 養浩堂)

  우현보(禹玄寶)의 자(字)는 원공(原功)으로 단양(丹陽)사람이다.  공민왕조에 급제하여 벼슬

이 시중(侍中)에 이르렀고 신우왕 십이년에는 조민수(曺敏修), 장바온(張子溫), 하윤(河崙)과 

함께 원(元)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창(昌) 이년에 김행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신우왕을 여흥에서 맞고 비밀히 정몽주와 더

불어 음모를 하였다.  이때 여러 사람이 현보를 체포하여 형에 붙일 것을 청하였으나 창(昌)

이 듣지 않아 면관만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지 얼마 안 되어 다시 판삼사사(判

三司事)란 벼슬을 하였다.  그런데 공양왕조에 이르러서 또 무슨 일에 관련되어 붙잡히게 

되었다.  그랬다가 특사로 석방되자 당시의 대간들은

  "그건 안 됩니다.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하고 왕에게 글을 올렸다.  그러나 왕은 현보의 손자 성범(成範)이 부마(駙馬)였으므로 철원

으로 추방하고만 말았고 또 그의 아들 홍수(洪壽)와 홍부(洪富)는 멀리 귀양을 보냈다.  그래

도 얼마 후 쉽사리 용서를 받고 다시 복관(復官)되었다.

  정몽주가 죽음을 당할 즈음에 그는 또 계림(鷄林)으로 귀양을 갔고 다음 해에 고려 왕조

는 끝나고 말았다.  정몽주가 살해를 당하자 당시의 사람들은 모두 다 겁을 집어먹고 그의 

피살 장소에 가지를 못하였다.  이때 현보만이 천마산(天摩山)중 하나와 같이 수의와 관곽을 

만들어 가지고 가서 길지(吉地)를 택하여 안장케 하였다.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현보를 

<장한 사람>이라고 칭송하였다.

  그가 죽자 이조에서는 그에게 단양백(丹陽伯)이란 작호 이외에 의정부 영의정이란 벼슬과 

충정공이란 시호를 내림과 동시에 숭양서원(崇陽書院=정몽주를 모신 곳)에 배향케 하였다.


10. 曺 信 忠 (號는 未詳)

  조신충(曺信忠)은 창녕(昌寧) 사람이다.  신우왕 구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하윤, 이숭인, 

이색과 더불어 의좋게 지냈다.  우(禑)와 창(昌)이 서로 전후하여 폐립케 되자 그는 모든 것

을 내버리고 영천군(永川郡) 창수면(滄水面)으로 가 살기 시작했다.  고려가 멸망한 후 하윤

이 영의정으로 있게 되자 하윤은 신충을 장재(將才)가 있는 사람으라고 나라에 추천하였다.

  그리하여 태조는 즉위 후 오년되는 해에 그에게 강계도 병마사겸판희천군사(江界道兵馬使

兼判熙川郡事)란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한 번 서울에 왔다가 얼마 안 되어 시골로 

물러가 버렸다.  이것은 이색과 더불어 거취를 함께 하기 위함이었다.  신충의 아들 상치(尙

治)는 재사였다.  그가 정시(庭試)에 장원급제를 하자 이를 안 태종은 상치를 보고

  "네가 왕씨의 충신 조신충의 아들이지?"

하고는 당석에서 상치에게 정언(正言=사간원의 한 벼슬)이란 벼슬을 내렸다.


11. 李 皐 (號는 忘川)

  이고(李皐)는 여흥 사람이다.  공민왕 갑인(甲寅)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한림학사(翰林

學士)에 이르렀다가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으로 승진되었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지

자 그는 수원 광교남탑산(水原光敎南塔山)으로 물러가 호를 망천(忘川)이라 자호하였다.  이

는 세상의 근심을 잊어버리겠다는 뜻에서 지어진 것이었다.

  어느 때 공양왕은 그에게 사람을 보내

  "무엇에 재미를 붙이고 지내는가?"

고 묻게 하였다.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산수(山水)에 맘을 붙이고 사통팔달(四通八達)한 곳에서 그날 그날을 보냅니다."

  이것을 보면 그가 활달한 성격의 소요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이러한 사람이었으므로 태조는 즉위와 동시에 그를 경기도 안렴사(京畿道按廉使)로 

기용하려고 몇 번 소명(召命)을 내렸으나 한 번도 소명에 응한 일이 없었다.




12. 李 集 (號는 遁村)

  이집(李集)의 자(字)는 호연(浩然)으로 광주(廣州)사람이다.  고려 충숙왕조에 문과에 급제하

여 벼슬이 판전교사사(判典校寺事=고려시대의 벼슬이름)에 이르렀다.  그는 학문 뿐만 아니

라 지절(志節)도 남에 뛰어나 포은, 목은, 도은 등 세선배는 그를 특별히 사랑하고 높이 보

았다.

  신돈(辛旽) 문객에게 미움을 받아서 불의의 화(禍)를 입게 되자 그는 아버지를 업고 남방

으로 도망해 와 영천 최사간원도(永川崔司諫元道) 집에 은신하고 지냈다.  그러다가 신돈이 

피살되어 조정에서 없어지자 그는 다시 여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여주로 돌아온 후부터는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말았다.  그가 죽자 광주 구암서원(廣州龜岩書院)에 배향하였다.


13. 南 乙 珍 (號는 未詳)

  남을진(南乙珍)은 의령 사람이다.  공민왕 시절에 벼슬이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에까

지 이르렀다.  성질이 강직하고 정몽주, 길재와 친교를 맺고 지냈다.  고려 말년에 이르러 

정치가 문란해짐을 보고 사천(沙川)이란 곳으로 물러가 은신하고 말았다.

  태조는 등극하게 되자 남을진을 잠저(潛邸) 시대부터의 고인이었다 하면서 친히 편지를 

써서는 을진의 친조카인 재(在)를 시켜서 전하게 하였다.

  재는 태조의 편지를 가지고 을진에게로 가 전하고 출려(出廬)하기를 권하였다. 이때 을진

은 

  "나는 이미 늙었다.  나는 암혈(岩穴) 속에서 죽을 작정이다."

할 뿐 한사코 출려를 응하지 않았다.  을진에게서 이런 대답이 나오자 재는 울면서 부탁했

다.

  "아저씨! 좀 더 생각해 보시고 마음을 돌리십시오."

  그러나 여전히 을진은

  "두 말할 것 없다.  나는 백이(伯夷)를 본받아 서산에서 고사리를 씹으면서 죽고자 한다."

  완강히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재는 더 권할 용기가 나지 않아 돌아와 그대로 보고하였다. 

  이때 영의정 조준은

  "남을진은 지절이 높은 사람이올시다.  굴하고 들어오지 않을 것이오니 이를 살피시고 제 

뜻대로 살게 하시는 것이 좋을 것으로 아뢰오."

  태조에게 진언하였다.  이 말에 태조는 한숨을 짓고는

  "나는 그런 높은 선비와 더불어 나라를 다스려 보고 싶었는데 출려하기를 싫어하니 별 도

리가 없구나!"

하고 을진이 거주하는 땅 이름 사천을 따라 사천백(沙川伯)이란 작호를 내렸다.  이런 일이 

있게 되자 을진은 탄식했다.

  "내가 좀 더 깊이 들어갔으면 이런 일이 안 생겼을 텐데 잘못했다.  참 잘못했다."

  그리고 머리를 풀어 산발을 하고는 감악산(紺岳山)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가 죽자 산

중에 사는 사람들은 그가 숨어 살던 굴을 남선굴(南仙窟)이라 명명(命名)한 후 굴 속에다 돌

을 세워 전면에 을진의 소상(小像)을 조각하고 전면 상에

  入山而效伯夷之節,  披髮而慕箕子之狂

  <산으로 들어와선 백이의 높은 절개를 본 받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기자의 광태를 흠모

하였다.>

이라 글을 새겼다.

  이때부터 그는 사천서원(沙川書院)에서 제사를 받게 되었다.


14. 許 棹 (號는 擎庵)

  허도(許棹)는 고려 시절에 진사(進士)로 있던 사람이다.  고려가 망하자 환로(宦路)에서 물

러나 여조 진사로 늙어 죽고 말았다.



15. 宋 愉 (號는 雙淸堂)

  송유(宋愉)의 자(字)는 이숙(怡叔)인데 은진 사람이다.  사복정(司僕正)으로 있다가 고려가 

망하자 회덕으로 물러가 은거 하였다.


16. 許 錦 (號는  堂)

  허금(許錦)의 자는 재중(在中)으로 양천(陽川) 사람이다. 고려 첨의중찬(僉議中贊) 문경공(文

敬公) 공(珙)의 현손이고 평장사(平章事) 백(伯)의 손자며 지신사(知申事) 강(綱)의 아들이다.

  공민왕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전리판사(典理判事)에 이르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체약하여 병 속에서 살게 되자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고려가 멸망하자 그는 시골로 돌

아가 일생을 보냈다.


17. 許 徵 (號는 未詳)

  허징은 양천 사람이다.  현령(縣令)으로 있다가 고려가 멸망하자 길주로 들어가 야인이 되

어 여생을 보냈다.


18. 許 麒 (號는 湖隱)

  허기(許麒)는 김해 사람으로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까지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고 말자 

자취를 감추고 두문동(杜門洞) 현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 李 養 中 (號는 石灘)

  이양중의 자(字)는 자정(子精)으로 광주廣州) 사람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형부(刑部

=오늘의 사법부) 좌참의(左參議)로 있었다.  나라가 이성계에게로 돌아가자 지조를 굳게 지

키고 소명에 응하지 않기 때문에 귀양살이도 하였다.

  그와 태종은 고우(故友)였으므로 특별히 그에게 한성판윤(漢城判尹=오늘의 서울시장)이란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이를 굳이 사퇴하고 받지 않았다.  그가 죽자 나라에서는 그를 

광주 구암서원에 합사케 하였다.


20. 李 養 蒙 (號는 岩灘)

  이양몽(李養蒙)은 석탄(石灘) 이양중의 아우이다.  고려조에 벼슬이 대광판도판서(大匡版圖

判書)에 이르렀다.  이성계의 즉위 후부터 그의 형 석탄과 더불어 광주 취리(廣州鷲里)로 물

러갔다.  

  태종은 광주로 가 옛날의 도우(道友)를 찾아보려 했지만 양몽은 원적산(元積山)이란 곳으

로 도피하고 말았다.  그는 이에만 그치지 않고 자손을 보기만 하면

  "너희들은 과거에 참가해서는 안 된다.  너희들이 과거에 참가하는 것은 나의 지절을 짓

밟는 행위가 될 것이니 이를 명심하고 과거에 나서지 말아야 한다."

고 준절히 타일렀다.

  이조 세조(世祖)조에 여러 신하를 모아 놓고 서연(書筵)을 베풀었을 때 절의(節義) 문제를 

내걸고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이때 세조가 물었다.

  "이양몽에게 아들, 손자가 있느냐?"

  재신중의 한 사람이

  "이양몽의 현손(玄孫)되는 명인(明仁)이 신의 이웃에 살고 있습니다."

  대답하였다.  세조는 이 말을 듣고 당석에서 명인으로 하여금 정릉참봉(貞陵參奉)의 직을 

갖게 하였다.  이 소식이 명인에게 전달되자 명인은

  "조상의 유교(遺敎)를 지키기 위해서는 하명(下命)에 응할 수 없다."

하고 일가 권속을 거느리고 두역(斗驛)이란 곳으로 도피하고 말았다.


21. 朴 愈 (號는 未詳)

  박유(朴愈)는 울산 사람이다.  고려조의 한림(翰林)으로 남평감무(南平監務)로 봉직하였다.  

고려가 멸망되자 벼슬을 내 버리고 임존(任存=오늘의 대흥)에 은신하고 말았는데 그의 자손

은 이대에 이르도록 이조에 들어와 벼슬을 하지 않았다.


22. 尹 忠 輔 (號는 自號)

  윤충보(尹忠輔)는 무송(茂松) 사람이다.  그가 안성군수로 있을 때에 나라가 망하자 가지고 

있던 군수의 직을 던져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두문하고 말았다.  나라에서는 그를 몇 번이

고 불렀으나 한사코 이에 응하지 않고 고려처사로 자호 하였다.  날마다 높은 고개 위로 올

라가 송경(松京)을 내려다보면서 분향(焚香)하고 절을 하였는데 이렇게 함을 단 하루도 궐한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사람들은 그 고개를 가르켜 왕망현(王望峴)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가 여

기에서 은신하려 할 때에 백학 한 떼가 그를 에워싸고 있었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은 한곡선

생( 谷先生)이라 불렀다.  그는 죽음이 가까워지자 가인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부탁했다.

  "나 죽은 후 비갈(碑碣)을 세워 주지 말고 또 무덤은 만들되 꼭 고려식으로 하라."


23. 李 倚 (號는 未詳)

  이의(李倚)는 부평 사람이다.  그는 고려의 세신(世臣)으로 유명하던 집안의 후예이다.  고

려가 망하자마자 이성계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하여 이조는 그를 역신(逆臣)으로 간주하고 부평군 자연도(紫烟島)란 섬에 추방하고 

동시에 재산까지 몰수했다.


24. 崔 文 漢 (號는 忠齊)

  최문한(崔文漢)은 강릉 사람이다.  고려 충숙왕의 부마(駙馬)였는데 고려가 망하자 강릉으

로 돌아가 세상을 보냈다.


25. 曺 義 生 (號는 未詳)

  조의생(曺義生)의 자는 경숙(敬叔)으로 가흥(嘉興) 사람이다.  그는 개성윤(開城尹) 인(仁)의 

아들로 글 읽기를 좋아했고 또는 기절(寄節)로, 언론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리하여 약관시

대(弱冠時代)부터 정몽주, 길재의 문하에서 놀게 되었는데 그들은 어느 때나 조의생을 우리

의 외우(畏友)라 부르면서 사랑하였다.

  고려가 망하고 말자 그는 임선미(林先味)와 더불어 산중으로 들어가 죽고 말았다.  후에 

임선미와 함께 표절사(表節祠)에 합사되었다.


26. 金 士 廉 (號는 未詳)

  김사렴(金士廉)은 안동 사람이다.  평장사(平章事) 방경(方慶)의 후예였다.  소년시대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문사(文詞)가 남달리 섬부했다.  공민왕 초기에 급제하여 벼슬이 안렴사

(按廉使=오늘의 감찰원장)에 이르렀고 정몽주, 이색과 가까이 지냈다.  그는 직간자(直諫者)

로도 이름을 떨쳤는데 일찍이 신돈(辛旽)이 용사하기 시작하자 상소를 올렸다.

  "신돈은 옳은 사람이 아니올시다.  반드시 후일에 국사가 어지러워지고 고려의 사직이 위

태해질 것이올시다."

  그런데 여조가 망하고 이성계가 왕위에 나아가자 사렴은 청주로 가서 은신하고 말았다.  

그는 은둔생활을 하는 동안 한 번도 대궐을 향해 앉은 일이 없었다.  어느 때나 

  <열녀는 불경이부요, 충신은 불사이군이라.>

낭송(朗誦)하면서 그날 그날을 지냈다.

  태조는 사렴으로 하여금 좌사간(左司諫)의 직에 있게 하기 위해 몇 번이나 그를 불렀다.  

그러나 이에 불응하고 도산(陶山)으로 들어가 두문함에만 그치지 않고 빈객의 내방도 거절

하고 지냈다.  그는 임종에 자식들에게 간곡한 유언을 남겼다.

  "나는 고려의 구신(舊臣)이다.  그러나 나라가 있을 때엔 임금을 옳게 보필하지 못했고 또

는 나라가 망함에 이르러는 몸을 바치지 못했으니 천하의 죄인이다.  무슨 면목으로 지하로 

돌아가서 왕이며 선인(先人)들을 뵙는단 말이냐?  내가 죽거든 심산궁곡속에 묻되 봉토(封

土)도 하지 말고 비갈도 세우지 말 것이며 또 내 자손 중에 이미 이조에 들어가 벼슬을 하

는자가 있으면 계속하지 못하도록 하라."

  향리의 사부(士夫)들은 그의 지절에 감동하여 송천(松泉)이란 곳에 사당을 짓고 그에게 춘

추로 제향(祭享)을 하였다.


27. 林 先 味 (號는 休庵)

  임선미(林先味)는 평택 사람으로 태학생(太學生)이었다.  영조조 신미(英祖朝辛未)에 서필로 

비를 세워 줌과 동시에 제사를 올렸다. 

  또 정조(正祖)조에 이르러서는 사당을 짓고 사액(賜額)을 해 그의 고절을 표창하였다.  그

는 두문동 절신(杜門洞節臣)의 한 사람이다.


28. 曺 希 直 (號는 未詳)

  조희직(曺希直)은 가흥(嘉興) 사람으로 벼슬은 사간원의 정언(正言)이었다.  이존오(李存吾)

와 함께 신돈 배척상소를 하다가 도리어 미움을 받아 진도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고려가 

망함에 가흥 몰가에다 압구정(押鷗亭)을 짓고 여기서 여생을 보냈다.


29. 高 天 祐 (號는 未詳)

  고천우(高天祐)는 개성 사람으로 벼슬이 총제(總制)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부조현(不

朝峴)에다 관(冠)을 벗어 던지고 물러나 두문동 절신(杜門洞節臣)이 되었다.


30. 田 祿 生 三兄弟 

  전녹생(田祿生)은 담양 사람으로 자는 맹경(孟耕) 호는 야은(野隱)이다.  신우왕 을묘(乙卯)

에 각관 이첨(李詹)과 함께 간신 이인임(李仁任)을 죽여 없애고자 나라에 소청(疏請)하였다.  

이때 정몽주도 이 소청에 참가하였다.  그러다가 박상충이 주모자로 지명되어 전녹생은 함

께 장류(杖流)로 치죄되어 귀양을 가다가 중도에서 죽고 말았다.  고려는 그를 찬화보리공신

(贊化輔理功臣)으로 봉함과 동시에 그에게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란 벼슬과 문명(文

明)이란 작호까지 내렸다.

  전귀생((田貴生)은 녹생의 첫째 아우이다.  자는 중경(仲耕), 호는 뇌은( 隱), 벼슬이 삼사

좌윤(三司左尹)에 이르렀다.  저서로 언지록(言志錄)이 있다.

  고려가 망하자 조천관(朝天冠)을 벗어던지고 평양립(平陽笠)으로 바꾸어 쓰고서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면 농번이를 뉘 알아주리!"

하고 섬으로 도망해 버렸다.  그의 생사를 아는 이란 하늘 뿐이었다.

  전조생(田祖生)은 녹생의 둘째 아우이다.  자는 계경(季耕), 호는 경은(耕隱)이로 벼슬이 찬

성(贊成)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원(문元)이라 불렀으며 문장과 도덕이 정몽주에 못지 않았다.


31. 高 天 祥 (號는 未詳)

  고천상(高天祥)도 개성 사람인데 고천우와 형제간이었다.  고려가 망하자 조천관을 부조현

에 벗어던지고 말했다.

  "나는 고려의 신하였다.  나는 누가 뭐라거나 상관없이 신하로 있던 절의만 지키겠다."


32. 李 行 (號는 騎牛子)

  이행(李行)은 여주 사람으로 자는 도주(道周), 태사(太師) 인덕(仁德)의 후예요, 목사(牧使) 

천백(天白)의 아들이다.

  공민왕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제학(大提學)에까지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절(文節)이라 불

리웠다.  고려가 망하고 말자 그는 은둔하여 이태조의 내방(來訪)도 거절하였다.


33. 李 嶠 (號는 桃村)

  이교(李嶠)는 철성(鐵城) 사람으로 자는 모지(慕之), 철성군 우(瑀)의 아들이요, 철성 부원군 

암( )의 아우이다.  고려 충숙왕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부상서(吏部尙書=고려시대의 벼슬이름.  이조의 이조판서에 해당하는 것)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는 당시의 권신(權臣)

을 탄핵했기 때문에 화가 신상에 미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병고를 청탁하고 시골로 돌아갔

다.

  태조가 친히 찾아와 그를 보려 하였으나 태조와 만나지 않고 깊은 산속으로 도피하고 말

았다.  그 후 그가 죽자 고성 갈천서원(固城葛川書院)에 배향케 하였다.


34. 李 釋 之 (號는 南谷)

  이석지(李釋之)는 영천(永川) 사람으로 판도판서(版圖判書) 흡(洽)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

하여 대제학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오직 산수에다 마음을 붙이고 살다가 세상을 등지고 말았는데 나라에서는 그를 광주 

대치서원(光州大峙書院)에 모시게 하였다.


35. 金 子 進 (號는 首山亭)

  김자진(金子進)은 광주(光州) 사람으로 문숙공(文肅公) 주정(周鼎)의 후예이다.  고려 말년에 

벼슬이 금위사정(禁衛司正)이었고 이성계가 임금이 되자 나주로 물러가 살았다.

  태조는 의정부 우의정으로 임명하기 위하여 세 번이나 불렀으나 한 번도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정산(牛井山) 아래에다 정자를 짓고 정자 이름을 수산정(首山亭)이라 명명(命名)한 

후 정자이름으로서 호를 삼고 천일(天日)을 보지 않으며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36. 李 致 (號는 未詳)

  이치(李致)는 합천(陜川) 사람으로 자를 가일(可一)이라 불렀다.  제학(提學) 원경(元慶)의 

손자로 처음 이름은 감(敢)이었는데 고려가 망하자 치(致)로 고쳤다.  이는 고려의 멸망을 치

명사(致命事)로 보고 고친 것이다.

  신우왕조에 문과 급제하여 간관(諫官)으로 있게 되었으며 사람됨이 지극히 강직하여 감언

지사(敢言之士)로 유명하였다.  이러했기 때문에 현무(縣務)로 좌천이 된 일도 있지만 다시 

등용되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란 벼슬을 했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자 만수산 두문동

(萬壽山杜門洞)으로 들어가 버리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시(詩)를 지어 자기의 심중을 피력하

였다.

  生爲王氏臣
                    (살아선 왕씨의 신하이고,)
  死爲王氏鬼
                    (죽어선 왕씨의 귀신되겠다.)

  태조가 몇 번이나 그를 불러 찬성사(贊成事)란 벼슬을 주려 하였으나 한사코 이를 받지 

않고 합천군 이상곡(陜川郡二上谷)의 향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곳의 산을 송여현(松如

峴), 그 동리를 두암동(杜 洞)이라 이름 짓고 낚시에 낙을 붙이고 살다가 세상을 등지고 말

았는데 옛집에는 충신문(忠臣門)이 세워져 있다.


37. 車 原 부  (號는 雲巖居士) <<한자가 없다니..부(兆+頁)>>

  차원부(車原부)는 연안 사람이다.  일찍이 나라에서 요동(遼東)을 정벌하려 하자 원부는 그 

불가능함을 역설하였다.  태조가 이 때문에 거의회군(擧義回軍)하였고 따라서 나라에서는 그

를 공신으로 봉하였다.  그 후 태조가 등극함에 이르러 조준 등은 원부를 참공권(參功券)에 

기입하려 하였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였다.  또 태조가 등극한 후 몇 번이나 불렀으나 이에

도 역시 불응하고 송원(松原)이란 곳으로 돌아가다가 정도전, 하윤 등의 철퇴를 피하지 못하

고 죽었다.  원부가 죽자 그의 내외 친족 팔십여인도 연좌되어 살해되고 말았다.

  또 인부는 원부의 족제(族弟)인데 고려가 망하자 두문불출하고 지냈으나 원부가 죽게 되

자 그도 역시 연좌되어 선산으로 귀양살이를 가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생사를 알 수 없

었다.


38. 金 自 粹 (號는 桑村)

  김자수(金自粹)의 자는 순중(純仲)으로 경주 사람이다.  고려시대에 도관찰사(都觀察使)로 

있었고 또 그의 마을에는 효자비(孝子碑)까지 세워져 있었다.  태조가 등극한지 얼마 안 되

어 태조는 옛날 친구인 그를 등용하고자 맨 처음에 불렀다.  그러나 그는 두문하고 응하지 

않았다.  후에 태종은 쓸만한 인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엔 형조판서(刑曺判書)

의 직을 주며 불렀다.

  그는 이 소명을 받자 즉시로 가묘(家廟)에 고별한 후 아들에게 수의며 관곽을 준비해 가

지고 따라오게 하고는 그날로 출발하여 광주(廣州) 추령(秋嶺)에 이르렀다.  그리고 아들에게 

일렀다.

  "이 땅은 곧 나의 죽을 땅이다.  여자도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데 하물며 남의 신하가 

되어서 이성(二姓)의 임금을 섬긴단 말이냐.  나는 벌써부터 두 임금을 안 섬기기로 결심했

다.  너는 마땅히 나를 이 추령 곁에 묻되 비석 같은 것은 세우지 말아라.  나는 그저 초목

과 함께 썩어 없어지련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절명시(絶命詩)를 남겨 놓고 정포은(몽주)의 의대(衣帶)를 감추어 

둔 추령에서 음독자결을 하고 말았다.

  平生忠孝意
                    (평생에 충효를 다하려던 마음)
  今日有誰知
                    (오늘에 와서 아는 이 그 누구리)


39. 李 元 桂 (號는 未詳)

  이원계(李元桂)는 태조 이성계의 서형(庶兄)인데 자도 역시 원계였다.  공민왕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이르렀고 또 명나라에 가서 문과에 참

가하여 역시 급제하였다.

  공민왕조에 이르러 국사는 나날이 그릇되어 갔다.  정도전, 조준 등은 이성계를 임금으로 

추대하려 하자 원계는 온갖 말로 불가함을 주장하였으나 이미 결정되었으므로 마침내 목숨

을 부지할 수 없게 되었는데 때는 태조 이성계 즉위 전 이십일이었다.  원계의 유언에 의하

여 고려시대의 관직 -- 곧 고려시중휘원계자원계(高麗侍中諱元桂字元桂)라 써서 비를 세웠

고 이조로부터의 증직(贈職)은 써 넣지 않았다.  그러나 나라에서는 훗일에 이르러 완산백

(完山伯)이란 작호를 내렸다.


40. 元 庠 (號는 未詳)

  원상(元庠)은 원주 사람으로 정당문학(政堂文學) 송수(松壽)의 아들이었다.  공민왕조에 이

색과 함께 무서운 국문(鞫問)을 받게 되었지만 그는 혹형(酷刑)에도 굴하지 않았다.  정몽주

의 소구(疏救)에 의하여 극형만은 면하고 귀양살이를 갔다가 임신(壬申)에 대사(大赦)가 있자 

풀려 장단으로 돌아와 대덕산 밑에서 그날 그날을 보냈다.

  태조는 일찍부터 그의 덕망에 감동하여 몇 번이나 소명(召命)을 내렸으나 몸에 병이 있음

을 빙자하고 소명에 응하지 않고 지내다가 천수가 길지 못하여 죽고 말았다.  태조는 그의 

지조에 감동하여 그가 죽자 희정(僖靖)이란 시호를 내렸다.


    [忠臣列傳]   <杜門洞 사람들 41-93>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忠臣列傳 

    杜門洞 사람들 41-93 


41. 都 膺 (號는 魯隱)

  도응(都膺)은 성주(星州) 사람으로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까지 이르렀다.  기사(己巳)에 화

변이 있는 이후 산간에 은신하고 당시의 세상과는 절연을 하고 지냈다.  태조는 옛친구였던 

그를 다섯번이나 불렀으나 한번도 응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태조는 그의 절의를 대단히 

보고 청송당(靑松堂)이라 쓴 액(額)을 하사하였고 또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내렸다.

  愛看靑松節
                    (청송의 절개 사랑스러이 보아)
  貞幹手以摩
                    (곧은 줄기를 손으로 어루만지다)
  寒岡千 上
                    (천길이나 되는 추운 뫼 위에 있건만)
  霜雪不會磨
                    (눈 서리에 상함이 없도다)


42. 韓 哲   (號는 夢溪)

  한철충(韓哲 )은 청주 사람으로 고려 시절에 전법판서(典法判書)에까지 이르렀다.  고려가

멸망하게 되자 그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굳은 결심을 가지고 상주 수염산(尙州首厭

山)으로 들어가 은둔하고 말았다.  학문이 섬부하고 식견이 고매하였으므로 일찍부터 이초

은(李樵隱)과 가까이하고 지냈다.  그는 산 속으로 들어간 후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자기의 

심중을 피력하였다.

  落日淸溪上
                    (해저문 청계상에)
  閑臥夢前朝
                    (한가이 누워 지난날의 고려만을 꿈꾸고 있네)


43. 朴 剛 生 (號는 蘿山耕隱)

  박강생(朴剛生)은 밀양 사람으로 자를 일컬어 유지(柔之)라 했다.  공민왕조에 문과에 급제

하여 벼슬이 참찬정부사(參贊政府事), 또는 집현전 제학에 이르렀다.  그는 문장으로도 저명

하였고 또는 배불론자(背佛論者)로도 유명하였다.  

  태조는 재주를 아껴 그에게 호조전서(戶曺典書)란 벼슬을 내림과 동시에 그의 공훈을 기

록하게 했다.  그러나 모두 다 받지 않고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44. 許 邕 (號는 迂軒)

  허옹(許邕)은 고려 충숙왕조에 등과하여 벼슬이 전리판서(典理判書), 예문관제학(藝文館提

學)에 이르렀던 사람인데 강직(剛直)으로 이름났다.  그는 정국이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간

파하고 벼슬을 내놓고 단성(丹城)으로 돌아가 낚시에 마음을 붙이고 지냈다.

  그러던 중 태조가 임금이 되자 소명(召命)에 응하지 않고 두문하고 지내다가 마침내 세상

을 떠났다.


45. 金 若 時 (號는 未詳)

  김약시(金若時)는 광주(光州) 사람이다.  그는 태조와 동년생으로 문과에 등제하여 벼슬이 

진현관 직제학(進賢館直提學)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자 약시는 그의 부인과 함께 

도보로 광주(廣州) 산 속으로 들어가 움막 같은 집을 지어 놓고 여기서 기거하였다.  촌사람

이며 야로(野老)들은 의관과 거동이 이상해 보여 가끔 그 집으로 가 이것 저것 물었으나 그

는 듣기만 할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때로 촌사람들이 음식을 준비하고 그를 대접하려 하

였지만 이 대접도 받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다가 눈물을 흘렸다.  그의 행동이 이러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이상스럽게 생각했다.

  태조는 사람을 시켜 그의 거처를 찾게 하였다.  소재가 알려지자 태조는 그에게 특별히 

성명방(誠明坊) 집을 하사하고 또는 송헌(松軒)이란 호를 친히 보냈다.  뿐만 아니라 태조는 

그를 원관(原官)으로 기용하기 위하여 또 부르자 눈이 어두어졌다 빙자하고 그것도 받지 않

았다.  어느날 가인에게

  "나는 망국대부(亡國大夫)이다.  죽어야 할 사람인데 죽지 못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조

상의 분묘가 여기 있기 때문이다.  내가 죽으면 여기에 묻되 봉토(封土)도 할 것 없고 비도 

세울 것 없다."

고 당부했다.  그가 죽자 유언에 의하여 안장을 하였으나 이조 순조 십구년에 이르러 광주 

유생 유의주(兪 柱) 등의 발기로 증직사시(贈職賜諡) 운동이 전개되어 마침내 이조판서란 

증직과 충정(忠貞)이란 시호를 내렸다.


46. 李 芳 雨 (號는 未詳)

  이방우(李芳雨)는 태조 이성계의 제 일남이다.  태조가 신우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웠는

데 이때 방우는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어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에 이르러 태

조가 고려조에 군림하려는 뜻을 단단히 품고 있음을 알고 서울(開城)로 돌아오지 않고 해주

로 들어가 여기서 일생을 보내고 말았다.

  태조는 그를 진안대군(鎭安大君)으로 추봉(追封)하며

  "진안은 우리 집의 백이(伯夷)요, 숙제(叔齊)다."

라고 칭찬하였다.  후에 나라에서는 청성사(淸聖祠)를 건조하여 매년 춘추에 제사를 올리게 

했다.


47. 李 午 (號는 茅隱)

  이오(李午)는 재령 사람으로 진사(進士) 급제를 하였다.  고려가 망하려던 어느날 밤에 판

서 성용(成庸), 평리사 변윤(卞贇), 박사 정몽주, 전서(典書) 김성목(金成牧), 대사성 이색 등을 

우연히 만났다.  이중에서 한 사람이 말했다.

  "은(殷)나라에 세 어진 사람이 있었는데 첫째 비간(比干)은 죽었고 미자(微子)는 어디론가 

없어지고 기자(箕子)는 노예가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우리의 거취는 우리 마음대로 결정 

할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모든 사람은

  "그 말이 옳다.  자결하기로 하자."

하고 찬동하였다.  이오는 고향으로 가고 이 말을 전해 들은 단구(丹邱) 김후(金厚)는 상산

(商山)으로 전서 조열(趙悅)은 함안함안(咸安)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다가 소리없이 세상을 

떠났다.


48. 李 陽 昭 (號는 琴隱)

  이양소(李陽昭)는 순천(順天) 사람으로 대언(代言) 사고(師古)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  그는 태조의 옛날 친구며 또 동방(同榜=똑같이 과거에 합격하였

다는 말)의 친구였다.  고려가 망하자 은둔하여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태조는 사람을 시켜 

백방으로 찾아 그가 사는 집을 알게 되자 친히 그를 찾아가 부탁했다.

  "나하고 손잡고 일 좀 해보지 않겠소?"

  그러나 굳이 사양하므로 태조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고우(故友)

였으므로 그에게 살고 있는 산을 하사함과 동시에 산명을 청화(淸華)라 지어 주었다.  훗

일에 그가 죽자 이 산명을 따라 청화공(淸華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49. 權 定 (號는 思復 )

  권정(權定)의 자는 안지(安之)이며 안동 사람이다.  태사(太師) 행(幸)의 후예로 고려 말년에 

대사간(大司諫)으로 있다가 구국의 도리가 없어 보이므로 안동 옥산(玉山)으로 돌아가 지명

(地名)을 기사리(棄仕里)라 개칭하고 거기서 여생을 보냈다.

  태조가 등극한 후 몇 번이나 불렀으나 한사코 불응하였다.  그는 학식이 남달리 뛰어났으

므로 사우(師友)로 존경을 받았고 또 그의 청풍고절(淸風孤節)은 야은(冶隱)에 못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가 죽자 영천(榮川=영주) 구호서원(鷗湖書院)에 합사케 하였다.


50. 崔 安 雨 (號는 竹溪)

  최안우(崔安雨)는 낭주(朗州)사람으로 민휴공지몽(敏休公知夢)의 후예이다.  고려 말년 문과

에 급제하여 벼슬이 소감(少監)에 이르렀으나 신돈이 국정에 참가하여 흔들기 시작하자 벼

슬을 내던지고 돌아가 있다가 신돈이 주륙을 당하고 없어지자 다시 벼슬을 하였다.

  이성계가 임금이 된 후 그를 직제학(直提學)으로 등용하려고 몇 번이나 불렀으나 최후까

지 이에 응하지 않고 영평도 성산(永平道成山)으로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


51. 金 七 陽 (號는 康隱)

  김칠양(金七陽)은 안동 사람으로 충숙공 승용(忠肅公承用)의 손자요, 가정(稼亭)의 문인이

다.  고려 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참(吏參=이조참판)에 이르렀다.

  고려 멸망 후엔 금릉산중(金陵山中)으로 들어가 숨어 살았는데 이조로 들어와서도 이조의 

벼슬은 하지 않았다.


52. 李 思 敬 (號는 送月堂)

  이사경(李思敬)은 성주(星州) 사람으로 고려 말년에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로 있었다.

  그런데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아들 다섯을 데리고 개령(開寧)으로 들어가 은둔하자 목은 

이색이 작당기(作黨記)를 지어 써 붙여 주었다.


53. 李 邕 (號는 釣隱)

  이옹(李邕)은 아산 사람으로 아산백(牙山伯) 주좌(周佐)의 후예이다.  고려 시절에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이조에서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으로 등용하기 위하여 불렀으나 최후까지 응하지 

않고 여생을 아산에서 보내면서 낚시에 낙을 붙이고 외로이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54. 朴 門 壽 (號는 未詳)

  박문수(朴門壽)는 고려 시절에 벼슬이 정승에까지 이르렀던 사람이다.

  고려가 망하자 처음엔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갔다가 나중에 남원으로 들어가 여생을 끝

마쳤다.


55. 具 鴻 (號는 松隱)

  구홍(具鴻)은 능성 사람으로 벼슬이 좌시중(左侍中)이었는데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짐을 보



  "불의의 부와 귀는 나에게 뜬구름과 다름없을 것이다."

하고 부조현(不朝峴)에 올라가

  "백이가 별 사람이냐?  나도 그만한 사람은 되겠다."

하며 관을 벗어던지고 폐양자(蔽陽子)로 바꾸어 쓴 후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태조는 그를 좌의정(左議政)으로 등용하고자 몇 번이나 청했으나 그는 최후까지 응하지 

않았다.  그는 임종에

  "나는 이제 죽는다.  내가 죽은 후 관직으로 신조(이조)의 관직은 쓰지 말라.  이것이 나의 

부탁이다."

  가인에게 일렀다.  그가 숨을 거두고 말자 그의 유족은 신조의 명령에 불복할 수 없어 명

정에다 신조의 관직을 기입하였는데 별안간 바람이 불어 정백(旌帛)이 세조각으로 찢어졌다.  

그래서 다시 정백을 준비해 놓고 여기에다 고려좌시중(高麗左侍中)이라 개서하니 정백에 바

람이 불어 들지 않았다 한다.  후에 태종조에 이르러 그에게 좌정승(左政丞)이란 중직(重職)

을 내리고 또 문절공(文節公)이란 시호를 내림과 동시에 장지(葬地)까지 하였다.


56. 金   漢 (號는 樹隱)

  김충한(金 漢)은 경주 사람으로 고려 시절에 벼슬이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이르렀으나 고

려가 망하자

  "백이(伯夷)를 쫓아 서산의 고사리를 씹고 싶다."

하고 자기의 심정을 피력하였다.  처음엔 두문동으로 들어갔다가 나중에 영남으로 가 숨어

서 여생을 보냈다.


57. 閔 普 文 (號는 未詳)

  민보문(閔普文)은 고려 시절에 군사(郡事)로 있었다.

  고려가 망하자 처음엔 두문동으로 들어갔다가 후에 적성(積城)으로 도피하여 거기서 일생

을 보냈다.


58. 蔡 貴 河 (號는 未詳)

  채귀하(蔡貴河)의 벼슬은 전서(典書)였다.  고려가 망하자 그는 그의 심중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東瞻開城
                  (동으로 개성을 바라보니)
  非復我土
                  (다시는 우리땅이 못될 것이고)
  西望首陽
                  (서으로 수양산을 바라보매)
  忍忘一心
                  (이 한마음 잊어지지 않을 것 같다)

  이와같이 심중을 피력하고 처음에는 두문동으로 갔다가 평산으로 피하여 여생을 보냈다.


59. 朴 湛 (號는 未詳)

  박담(朴湛)의 벼슬은 전서(典書)였다.

  처음엔 두문동으로 들어갔다가 나중에 해주로 도피하여 여생을 보내다 죽고 말았다.


60. 李 孟 藝 (號는 未詳)

  이맹예(李孟藝)의 벼슬도 진서였다.

  고려가 망하자 담과 마찬가지로 두문동으로 들어갔다가 나중엔 두문동에서 나와 해주로 

도피하여 거기서 일생을 보냈다.


61. 閔 安 富 (號는 未詳)

  민안부(閔安富)의 벼슬은 예의판서(禮儀判書)였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으로 들어갔다가 호남(湖南)으로 도피하였다.


62. 金 先 致 (號는 未詳)

  김선치(金先致)는 상산(商山) 사람으로 공민왕조에 호부랑(戶部郞) 벼슬을 했는데 홍두적(紅

頭賊)을 토벌한 공으로 녹일등공 봉상산군(錄一等功封商山君)이 되었다가 낙성군(洛城君)으로 

개칭되었다.  형 상낙군(上洛君) 득배(得培), 상산군(商山君) 득제(得齊) 등이 함께 원수가 되

어 왜구를 도륙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삼원수(三元帥)라 불렀다.

  왕조가 멸망되자 상산의 산양현(山陽縣)으로 물러나 채미(採薇)와 조어(釣魚)에 마음을 붙

이고 여생을 보냈다.  그의 청풍고절(淸風高節)은 길야은(吉冶隱)에 비할 만하다.


63. 尹 璜 (號는 後松)

  윤황(尹璜)은 남원 사람으로 벽성거사(碧城居士) 위(威)의 5세손인데 벼슬은 공조전서(工曹

典書)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불출하고서 세월을 보냈다.


64. 趙 承 肅 (號는 德谷)

  조승숙(趙承肅)의 자는 경부(敬夫)로 함안 사람이다.

  고려시절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감무(監務)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함에 이르자 벼슬

을 버리고 함안 덕곡(咸安德谷)으로 돌아가 후진(後進)을 훈도하는 것을 그의 의무로 삼고 

지냈다.  이 때문에 명유(名儒) 석사(碩士)가 많이 배출 되었다.

65. 趙 仁 壁 (號는 未詳)

  조인벽(趙仁壁)은 한양 사람으로 고려 시절에 여러번 전공(戰功)을 세운데다 등주(登州)의 

여러 성을 극복하고 또 사방의 봉강(封彊)을 회수하였기 때문에 한산백(漢山伯)이란 영작(榮

爵)까지 받게 되었다.

  그는 국명(國命)에 의하여 귀국하였다가 양양으로 들어가 고려 신하로서의 절개를 굳이 

지키고 늙으려 했는데 환조(桓祖=태조 이성계의 아버지)의 사위가 되었다.


66. 朴 暹 (號는 未詳)

  박섬(朴暹)은 울산 사람이다.  고려 시절에 한림(翰林)으로 있다가 여조가 망하자 두문동 

72인과 거취를 같이 했다.

  그러나 나중에 임성(任城)으로 물러나와 여기서 일생을 소리없이 살았다.


67. 申 德 隣 (號는 醇隱)

  신덕린(申德隣)의 자는 불고(不孤)로 고령 사람이다.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보

문각제학(寶文閣提學)에 이르렀다.  포은 정몽주 등 여러 석학들과 지기로 지냈는데 특히 명

필로 이름을 날렸다.

  고려가 망하자 피신하여 광주(光州)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의 아들 포시(包翅)의 호는 호

촌(壺村)으로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이조 태종과 동

방진사(同榜進士)였으나 남원으로 돌아와 이조와 인연을 끓고 말았다.  그 역시 아버지와 같

이 명필로 유명하였다.


68. 申 祐 (號는 退 )

  신우(申祐)는 출천의 효자였다.  그의 아버지 판서(判書) 윤유(允濡)가 세상을 떠나자 무덤 

곁에 여묘를 짓고 3년간 하루도 궐하지 않고 시묘하였다.  그의 효성에 천지신명도 감명했

던지 무덤 앞에 한쌍의 청죽(靑竹)이 나 있어 당시의 사람들은 이를 효감(孝感)에서 생겨진 

일이라고 칭송하였다.

  고려가 망한 후 태조는 그와 옛날 친구였으므로 고려조의 벼슬이 안렴사(按廉使)였던 그

를 형조판서(刑曹判書)로 등용하기 위하여 몇 번이나 불렀으나 고사불응(固辭不應)하고 말았

다.


69. 洪 魯 (號는 敬齊)

  홍노(洪魯)는 부계(缶溪) 사람으로 죽계(竹溪) 민구(敏求)의 아들이다.  고려 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인(舍人)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전조 고려를 위하여 지조를 굽히지 않고 일생을 보내고 말았는데 그의 저

작으로 문집(文集)이 있어 후세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70. 徐 光 俊 (號는 箕隱)

  서광준(徐光俊)은 이천(利川) 사람으로 상서(尙書) 인(麟)의 손자다.  고려가 망한 후 기산

(箕山)에 숨어서 이제(夷齊)의 절개를 흠모하고 여기서 일생을 보냈다.

  이조에서 감정(監正)을 제수하고자 불렀으나 고사불응하였다.


71. 徐 仲 輔 (號는 積岩)

  서중보(徐仲輔)는 장성 사람으로 소년시대부터 글을 좋아하였고 또 지조도 남달리 높았다.  

고려의 국운이 완전히 기울어지자 그는 신조와 인연을 완전히 끊고 두문동으로 들어가 나오

자 않았다.

  이조에서 봉정대부(奉正大夫)로 우대 하고서 불렀으나 이에 불응하면서

  "나라가 무너지고 임금이 없어졌는데 나의 갈곳이 어디란 말이냐?"

  몸에 불을 질러 죽고 말았다.  두문동 72인의 제 1인자다.


72. 白 莊 (號는 靜愼 )

  백장(白莊)의 자는 명윤(明允)으로 수원 사람이다.  일찍이 포은 문하에서 수업을 했으며 

나이 16세에 진사급제를 했고 20에 원(元)조 과거에 등제하여 한림학사가 되었으며 고려 공

민왕조에 이르러 벼슬이 광정대부 이부전서 보문각 대제학(匡靖大夫吏部典書寶文閣大提學)

에 이르렀다.

  때마침 국정이 여지없이 문란해지자 처자를 데리고 치악산 속으로 들어가 폐문불출(閉門

不出)하고 말았다.

  태조가 이를 알고 몇 번이나 불렀으나 응하지 않으므로 해미(海美)로 추방하여 귀양살이

를 하게 하였다.  그러나 태종조에 이르러 특사가 있자 또 그를 이조판서로 등용하고자 불

렀으나 역시 불응하였다.  태종은 그에게 충숙공(忠肅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73. 崔 七 夕 (號는 未詳)

  최칠석(崔七夕)은 전주 사람이다.  칠석일(七夕日)에 일본 대마도전(對馬島戰)에 전공을 세

웠으므로 나라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이름을 칠석이라 부르게 하였고 또 나아가서는 

대장군이란 직명을 갖게 하였다.  고려가 망하고 말자 종손(從孫) 양(瀁)과 함께 상향(桑鄕)이

란 곳으로 들어가 숨어 살았다.

  태조가 거동하게 되었을 때 칠석과 양에게 소명(召命)이 내렸으나 칠석은 이미 죽어 없었

던 때였으므로 태조는 그에게 부원군(府院君)이란 작호와 위정공(威靖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의 종손 양의 호는 만육당(晩六堂)으로 고려 시절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제학(大

提學)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전주 대승동(大勝洞)으로 물러가 여기서 여생을 보내는 중 태종이 몇 번이

나 불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으며 또 하사한 전록(田祿) 등도 받은 일이 없었다.


74. 金 振 門 (號는 未詳)

  김진문(金振門)의 자는 여집(汝執)이다.  김해 사람으로 수로왕(首露王)의 후예인 감무익경

(監務益卿)의 손자다.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보문각 대제학 예의판서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그는 목은 이색, 박학사 자검(自儉)과 함께 벼슬에서 물러나 여생을 두문하고 보냈다.


75. 吳 憲 (號는 松庵)

  오헌(吳憲)은 함평 사람이다.

  고려 공민왕조에 벼슬이 낭장(郎將)에 이르렀으나 나라가 망하자 고려 신하로서의 절의를 

끝까지 지키다가 죽고 말았다.


76. 李 元 發 (號는 隱峰)

  이원발(李元發)은 연안 사람으로 상호군(上護軍) 정공(靖恭)의 아들이며 고려 시절에 벼슬

이 전공판서(典工判書)에 이르렀다.

  이조는 그에게 정승 벼슬을 주고자 불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77. 林 貴 緣 (號는 未詳)

  임귀연은 여주 사람으로 고려 시절에 벼슬이 소윤(少尹)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이조로 나가지 않고 끝까지 수절하다가 죽고 말았다.


78. 蘆 俊 恭 (號는 未詳)

  노준공(蘆俊恭)은 광주(光州) 사람으로 절행(節行)이 남달리 특이하여 일찍부터 성리학(性理

學)에 뜻을 두었다.

  고려 말년에 예의가 땅에 떨어져 부모상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는데 이 중에서 3년상을 지

킨 사람은 오직 노준공 뿐이었다.

  그는 이성계가 임금이 된 후부터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이조에서 몇 번이나 불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태조는 감탄하며

  "노준공은 시속 사람이 아니다.  대경대법에서 벗어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참 포상함직

한 사람이다."

하고 특별히 절효공(節孝公)이란 시호를 내려 표창함과 동시에 효자문을 세우게 했다.


79. 邊 肅 (號는 未詳)

  변숙(邊肅)은 고려 시절에 벼슬이 공조판서에 이르렀던 사람이다.

  고려가 망하고 말자 두문으로 들어가 여생을 외로이 보냈다.


80. 全 五 倫 (號는 採薇軒)

  전오륜(全五倫)은 정선 사람으로 고려시절에 벼슬이 보문각 대제학에 이르렀다.  목은 이

색, 포은 정몽주, 또는 조송산(趙松山)과 더불어 지기지우(知己之友)가 되어 지냈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 부조현(不朝峴)으로 들어가 수양산 채미(採薇)를 본받아 채

미헌이라 자호하였으며, 나중에 정선군 서운산(瑞雲山)으로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81. 全 信 (號는 栢軒)

  전신(全信)의 자는 이립(而立)으로 성산 사람이다.  일찍부터 국제 권부(菊齊權溥)의 문하에

서 학을 구하다가 고려 공민왕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진현관(進賢館) 대제학에 이르

렀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자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굳은 절의를 지키면서 두문동으로 들어

가 백헌(栢軒)이라 자호하였다.  태종이 친히 그의 사는 동리로 찾아갔으므로 동리의 이름을 

왕방리(王訪里)라 개칭했다.  태종은 이 동리의 산을 하사함과 동시에 산 이름을 국사봉(國

賜峰)이라 명명했으며 또 그가 죽자 문효공(文孝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82. 全 淑 (號는 未詳)

  전숙(全淑)은 옥천(沃川) 사람으로 고려 시절에 벼슬이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이르렀다. 그

는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져감을 보고 옥천으로 도피하여 여기서 여생을 보내고 말았는데 그

가 살던 고을을 가리켜 기사천(棄仕川)이라 불렀다.


83. 孟 裕 (號는 未詳)

  맹유(孟裕)는 신창 사람으로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상서(尙書)에 이르렀다.  고

려가 망하자 그는 두문하여 여생을 보냈다.


84. 程 廣 (號는 巾川)

  정광(程廣)은 고려 시절에 벼슬이 전중판시사(殿中判寺事)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여생을 숨어서 보냈다.


85. 裵 尙 志 (號는 栢竹堂)

  배상지(裵尙志)는 평리 흥해군(評理興海君) 전(詮)의 아들이다.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에 이르렀으며 고려가 망함에 이르자 벼슬을 버리고 안동 금

계촌(安東金鷄村)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


86. 宣 允 祉 (號는 退休堂)

  선윤지(宣允祉)는 선성(宣城) 사람이다.  명(明)조의 학사로 명나라 홍무(洪武) 년간에 고려

로 와 공민왕조에 벼슬살이를 하였는데 그 벼슬은 안렴사(按廉使)에까지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보성으로 가 살기 시작했으며 태종이 몇 번이나 그를 불렀으나 최후까지 

불응하고 말았는데 그가 죽자 태종은 이조판서란 중직을 내렸다.


87. 范 世 衷 (號는 休厓)

  범세충(范世衷)의 자는 여명(汝明)으로 금성(錦城) 사람이다.  고려조에 벼슬이 덕녕부윤(德

寧府尹)에 이르렀다.

  성리학 연구에 전심을 기울였고 또 풍교(風敎)를 부식함에 전력을 다했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지자 만수산 아래로 물러가 백이(白夷)를 본받아 지조를 지키다가 여생을 마쳤다.


88. 陶 東 明 (號는 雙栢堂)

  도동명(陶東明)은 고려 시절에 남대장령(南臺掌令)으로 있었다.

  고려가 망하자 그는 신조(新朝)와 인연을 끊고 여생을 보냈다.


89. 鞠播와 鞠  (號는 )

  국파(鞠播)는 담양 사람으로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있다가 고려가 멸망되자 여생을 두문하

고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으며 또 국유(鞠 )는 고려조에서 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과 인연을 

끊고 의로이 세상을 보냈다.


90. 金 仁 奇 (號는 梅隱)

  김인기(金仁奇)는 파평 사람으로 고려 말년에 벼슬이 보승중낭장(保勝中郎將)에 이르렀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지자 두문동으로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


91. 沈 元 符 (號는 岳隱)

  심원부(沈元符)는 청송 사람으로 고려 시절에 벼슬이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이르렀다.  고

려가 망하자 두문동으로 들어가 버렸고 또 부조현(不朝峴)에 이르러서는

  "나는 왕촉(王 )을 사모한다.  나는 고려의 왕촉이 되어야 하겠다."

  자기의 심중을 피력하였다.


92. 宋 柱 (號는 未詳)

  송주(宋柱)는 홍주(洪州) 사람으로 고려조에 벼슬이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태조가 등극하자 두 임금을 안 섬기겠다는 곧은 지조를 지키면서 홍양(洪陽=오늘의 홍주)

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


93. 姜 淮 仲 (號는 通溪)

  강회중(姜淮仲)은 진주 사람으로 자를 중부(仲父)라 불렀다.  명나라 홍무(洪武) 십오년 임

술(壬戌)에 전농시승(典農寺丞)으로 있다가 유량방(柳亮榜)에 합격되어 벼슬이 보문각 대제학

이 되었다.

  태조가 등극하자 처음에는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둘째 번에는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그다음은 병조판서(兵曹判書)로, 넷째 번 세종 신축(辛丑)에는 총제(摠制)로 불렀다.  그러나 

모두 다 사퇴 불응하고 어버이를 업고서 두문동으로 들어가 일생을 보냈다.  그가 죽자 상

주 경덕사(尙州景德祠)에다 안치했다.



   이 외에도 태학생(太學生) 육십구인이 두문동에서 집단적으로 굶어 죽었으며 또 무신 사

십팔인도 보봉산(寶鳳山) 속으로 들어가 수절을 하다가 모두 다 죽고 말았다.  오늘에 남아 

있는 세시정(洗身井)이란 것도, 회맹대(會盟臺)란 것도 그 당시에 있었던 것인데 이것들이 모

두 두문동 안에 있었다.  그리고 두문동과 한 오리쯤 떨어져 있는 곳에 궁녀동(宮女洞)이란 

것이 있었는데 여기는 궁녀가 모여들어 순국한 곳이다.  그리고 이 외에도 판시사(判寺事)로 

있던 사람 여덟이 고려가 망하자 함께 성거산(聖居山)으로 들어가 먼저 처자를 자결케 하고 

나중에 적시(積柴)에 불을 질러 놓고 그 속으로 들어가 죽고 말았다.

  그런데 위에 말한 사람들의 꽃다운 이름이 하나도 알려지지 않고 있어 여기에 쓰지 못함

은 가석한 일이다.


    [忠臣列傳]   <지나친 虛慾>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忠臣列傳 

    지나친 虛慾 


   정종(定宗)은 전비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의 소생으로 태조의 둘째 아들이다.  휘

(諱)는 경( )이고 자(字)는 광원(光遠)이며 초휘(初諱)는 방과(芳果)였다.

  고려 공민왕 육년(西紀 1,357년) 칠월 삭일(朔日)에 함흥군 귀주동(咸興君歸州洞) 사저에서 

출생하였다.  고려 시절에 벼슬이 장상(將相)에까지 이르렀고 태조 즉위와 동시에 영안군(永

安君)으로 봉해졌다.  태조 칠년 무인(戊寅=西紀 1,398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동년 구

월 오일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태조로부터 선양(禪讓)을 받았다.  정종 이년 경진(庚辰=西紀 

1,400년) 십일월 십삼일에는 왕위를 태종에게 전했고 세종 원년 기해(己亥=西紀 1,419년) 구

월 이십육일에 육십삼세를 일기로 인덕궁(仁德宮)에서 세상을 떠났다.  재위(在位) 이년이었

고 재상왕위(在上王位) 십구년이었다.  슬하에는 십오남, 팔녀가 있었다.

  때는 이조 제이대 임금 정종(定宗) 이년 경진(庚辰)이었다.  방원의 넷째 형 되는 방간은 

평소에 이런 생각을 일쑤 했다.

  (정종에게는 적사(嫡嗣)가 없다.  익안군 방의가 왕세자로 됨직하지마는 용하기만 해서 물

망에 오를 것 같지 않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왕세자 자리가 나에게 올 것 같다.  그러나 

좀 배움이 적어서 걱정이다.  저 방원이는 사람됨이 영특해서 사람이 모두 방원에게로 모여

든다.  그러나 어디 보자.)

  방간은 이와 같은 생각을 처질(妻姪) 이래(李來)에게 들려 주었다.  이래란 사람은 우현보

의 문하생이었으므로 들은 대로 곧 우현보에게 얘기 했다.

  "선생님! 방간이 이달 그믐에는 방원을 상대로 크게 거사하겠다 합니다.  이것을 내버려 

두는 게 좋을까요?"

  우현보는 이 말을 듣기가 무섭게 아들 홍부(洪富)로 하여금 방원에게 알리게 하였다.

  방원은 이 말을 듣자 하윤 이무 등과 함께 대비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때 방간은 자기 

휘하의 오용권(吳用權)을 시켜서

  "정안군(靖安君=芳遠)이 나에게 해를 가하려 하기 때문에 부득이 군사를 내놓아 응전하려 

합니다."

  정종에게 고하게 하였다.  정종은 이 말을 듣자 노발대발하면서

  "무엇 어째?  그게 무슨 망녕된 말이냐?"

하고 지신사(知申事) 이문화(李文和)에게 다음과 같은 명을 가지고 방간저로 가게 하였다.

  <당장 군사를 해산시키고 대궐로 들어오지 않으면 너에게 큰 해가 미칠 것이다.>

  그러나 문화가 채 도달하기 전에 인척인 민원공(閔原功) 등의 망동으로 방간의 아들 맹종

(孟宗)이며 그의 휘하 수백명이 갑옷 투구를 하고 나덤비기 시작하였다.  문화는 정종의 교

지를 전하였으나 방간은 이에 불응하였다.

  그리하여 방원도 별 도리가 없어 이숙번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항전하였다.  

항전의 결과 방원군의 승리로 끝나 방간까지도 포로가 되었다.  방원은 이숙번으로 하여금 

방간이 난을 일으키게 된 연유를 묻게 하였다.  이에 방간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박포(朴苞)가 나에게 <공에 대한 정안군의 태도가 이상야릇하니 반드시 무슨 변란이 생

길 것이다.  그러니까 공이 변란을 당하기 전에 먼저 변란을 가하는 것이 득책일 것이다.>

하고 말했기 때문에 내가 난을 일으키게 된 것이요."

  

   무인정사(戊寅定社)가 있은 후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는데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박포

는 남보다 공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남의 아래에 있게 되었다.

  이 때문에 항상 불평과 불만을 품고 사람을 헐며 저주하는 언동을 삼가지 않고 지냈다.  

그리하여 방원은 정종에게 이를 알려 죽주(竹州)로 귀양을 보냈으나 특사를 입어 죽주에서 

돌아 온 후에도 여전히 그 마음을 버리지 않고 무슨 변을 일으켜보려고 방간저에 드나들었

다.  박포는 어느날 방간을 상대로 세상 얘기를 하다가 끝으로 방간에게 물었다.

  "공에게 무슨 뾰죽한 수가 생기지 않는 한 정안군을 해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다시 말

하면 정안군의 군사는 남달리 강한데다가 사람이 많이 따르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못당하고 

말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방법을 써서 정안군을 일격(一擊)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공은 이에 대하여 어찌 생각하십니까?"

  방간은 이 말에 귀가 솔깃해서 어느날 방원을 격살하기로 하고 사람을 보내 방원을 자기 

집으로 청하였다.  정안군 방원은 청한 날에 방간의 집으로 가려하였으나 별안간 병이 생겨 

갈 수가 없게 되었다.  이때 판교서감사(判校書監事) 이래(李來)는 방간에게 따져 물었다.

  "공은 소인(小人)의 말만 듣고서 골육(骨肉)에게 해를 가하려 하시우?  좀 더 생각해 보시

오.  정안군은 이 나라에 있는 오직 하나의 대공신이요.  오늘에 있어 개국(開國)하고 정사

(定社)한 사람이 누군줄 모르시우?'

  그러나 방간은 이 말에 귀도 기울이지 않고 도리어 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이 때 

내시 강인부는 몰래 정안군저를 찾아갔다.

  "비옵건대 저하(低下)께서는 오시지 마십시오."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저하!  회안군(방간)은 사리를 모르시는 분이 올시다.  그러나 방임해서는 안 될 것이오니 

마땅히 대비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방간이 정말 거병(擧兵)함에 이르자 의안군(義安君) 화(和)와 완산군(完山君) 천우(天祐) 등

은 방원의 집으로 가서 권하였다.

  "방간이 결국 거병하였소.  바라건대 이에 대비해야 하지 않겠소?"

  이때 방원은 눈물을 흘리면서

  "내 무슨 면목으로 외인을 본단 말이요?"

하고 나서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의안군 화는

  "방간의 태도가 흉험하기 짝이 없는데 어떻게 내버려 둡니까?  소절(小節)을 지키다간 종

사(宗社)의 대계를 그르치게 될 것이오니 이를 살피십시오."

하며 외청으로 나와 주기를 굳이 청하였다.  그리하여 천우는 방원을 붙들고 나왔고 또 화

는 갑옷을 입혀서 마상에 오르게 하였다.

  그런데 신하들 중에는 박포와 화산군(花山君) 장사길(張思吉)이 있어 방간을 도왔을 뿐 다

른 사람들은 모두 다 방원을 도웁고자 나섰다.  이중에서 승선(承宣) 이숙번이 맨 먼저 뛰어

나가 역전분투하였다.  방간 측에도 백발백중 활의 명수인 방간의 아들 맹종(孟宗)이 있었지

만 병으로 인하여 살 한 발도 쏘지 못하였다.  모든 항전 조건이 방간군에게는 불리했으므

로 방간은 결국 참패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이 때 방원은 싸움에서 방간이 살해를 당할 것 같아 친히 나서서 소리 질렀다.

  "방간 왕자는 나의 형님이시다.  그 왕자께는 손도 대지 말라."

 이 소리가 방간의 귀에도 들어갔는지 방간은 타고 있던 말을 달려서 성균관 뒷골목으로 가 

활과 살을 다 내버리고 누워 있었다.  추병(追兵)이 그를 생포하자 방간은 이렇게 소리를 질

렀다.

  "나를 이렇게 꾀인 자는 박포이다."

  태조는 이 때 상왕으로 송도에 머물러 있었는데 방간이 거병하였다는 말을 듣고 탄식했

다.

  "그 소 같은 인간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

  이 싸움이 끝나자 박포에게는 참형(斬刑)이 내려졌고 재산은 적몰당했으며 자손은 금고(禁

錮)의 형을 당하고 말았다.  또 방간에게는 유형(流刑)이 내려 토산(兎山)에서 귀양살이를 하

게 되었다.  그런데 태종이 등극하자 여러 신하는 다투어 가면서 간청했다.

  "방간에게 참형을 가하라."

  그러나 방원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방간은 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아들 맹종은 세종조에 이르러 사헌부 및 

사간원의 진언에 의하여 약을 마시고 죽데 되었던 것이다.



   정종의 비(妃) 정안왕후(定安王后) 김씨는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 천서(天瑞)의 딸로 고려 공민왕 사년 을미(乙未=西紀 1,355년) 정월 

구일에 탄생하였다.  태조 칠년 무인(戊寅)에 덕빈(德嬪)으로 책봉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덕

비(德妃)로 다시 책봉되었다.  태종 십이년 임인(壬寅) 육월 이십오일 무인(戊寅)에 인덕궁(仁

德宮)에서 별세하였는데 당시의 춘추는 오십팔세였다.  슬하에는 아들도 딸도 없었다.

  그러나 그 대신 후궁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아들이 열다섯 옹주가 여덟으로 도합 스물세남

매에 이르렀다.


  제 一남 의평군(義平君)

  제 二남 순평군(順平君

  제 三남 금평군(錦平君)

  제 四남 선성군(宣城君)

  제 五남 종의군(從義君)

  제 六남 진남군(鎭南君)

  제 七남 수도군(守道君)

  제 八남 임언군(林堰君)

  제 九남 석보군(石保君)

  제 十남 덕천군(德泉君)

  제 十一남 임성군(任城君)

  제 十二남 도평군(桃平君)

  제 十三남 장천군(長川君)

  제 十四남 정석군(貞石君)

  제 十五남 무림군(茂林君)


  제 一녀 함양옹주(咸陽翁主)

  제 二녀 숙신옹주(淑愼翁主)

  제 三녀 덕천옹주(德川翁主)

  제 四녀 고성옹주(高城翁主)

  제 五녀 상원옹주(祥原翁主)

  제 六녀 전산옹주(全山翁主)

  제 七녀 인천옹주(仁川翁主)

  제 八녀 함안옹주(咸安翁主)

  그러나 이십삼인의 아들 딸들은 후궁 한 사람에 의하여 출생된 것은 아니다.  정종조에 

있어서 후궁으로 뚜렷한 존재가 되었던 궁녀는 다음과 같다.


  一, 숙의 지씨(淑儀池氏)

  二, 숙의 기씨(淑儀奇氏)

  三, 숙의 문씨(淑儀文氏)

  四, 숙의 이씨(淑儀李氏)

  五, 숙의 윤씨(淑儀尹氏)

  그런데 내명부(궁녀)로서 숙의(淑儀)가 되면 옛날에는 정이품(正二品)의 품계를 받았다.  이

는 임금으로부터 상당한 총애를 받지 않고서는 일어지지 않았다.

  위에 말한 다섯 숙의 중 제일 정종의 사랑을 받고 지내던 숙의는 지씨였고 다음으로는 기

씨, 또는 윤씨였다.

  그렇지만 이와 같이 특별한 품(品)을 갖지 않은 궁녀라도 임금과 가까이 할 수는 있었다.  

이것이 증거로 위에 말한 덕천옹주, 고성옹주, 상원옹주, 함안옹주 등의 생모(生母)가 명시

(明示)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옛날 암흑시대 곧 전제군주 시대에는 대궐 안에 수많은 궁녀를 두었다.  정말 삼

천이나 되는 궁녀를 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궁녀를 많이 두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많은 궁녀를 두었을까?  군주의 위안을 위하여 두게 된 것이 아니었을

까?

  하여간 정종의 경우를 보면 이것이 다행한 점도 없지 않다.  왕비 김씨는 오십팔 재세(在

歲)중 아들은 말할 것도 없고 딸 하나도 출산하지 못하였으나 다행히 대궐 안에 궁녀들이 

있었기 때문에 후궁의 소생이었지만 열다섯의 아들과 여덟의 딸을 슬하에 둘 수 있었던 것

이다.  그런데도 정종 시절에 여난이 없었다는 것은 특기하여 둘 만한 일이다.

    [忠臣列傳]   <굳어지는 터전>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忠臣列傳 

    굳어지는 터전



   태종은 태조의 전비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으로 태조의 다섯째 아들이다.  휘는 방원(芳

遠)이라 불렀다.  고려 공민왕 십육년 정미(丁未=西紀 1,367년) 오월 십육일에 함흥 귀주동

(咸興歸州洞) 사저에서 탄생하였다.

 임술(壬戌)에는 고려의 진사(進士)로 발탁되었다가 계해(癸亥)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밀직사(密直司) 대언(代言)에 이르렀고 태조가 즉위하자 정안군(靖安君)으로 봉해졌으며 정종 

일년 경진(庚辰)에는 왕세세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동년 십이월 십삼일에는 송경(松京) 수창

궁(壽昌宮)에서 선양(禪讓)을 받았고 무술 팔월 팔일에는 세종에게 왕위를 전해 주고는 세종 

사년 임인(壬寅) 오월 십일에는 천달방(泉達坊) 신궁에서 오십육세를 일기로 승하(昇遐)하였

다.

  태종은 이씨조선의 제 삼대 임금이다.  아버지인 태조가 의주에서 돌아오신 뒤 부터는 태

조를 도와 이씨 와조를 세움에 최선을 다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태종은 개국공신 중의 공

신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태종은 창업에 있어서만 공로자가 아니다.  나라를 잘 다스리고 잘 수성(守成)하는데 있서

서도 큰 공이 있었다.  예를 들어 말하면 태종은 세아들 중 장자 차자를 젖혀놓고 셋째 아

들 세종을 임금으로 세워 나라를 다시리게 하였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태종이 얼마나 수성

에 전심전력을 기울였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요약해 말하면 태종은 이씨 조선을 창

업함에 있어서나 수성함에 있어서 여러 임금 중 가장 훌륭한 임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영주 태종을 위하여 가석한 임금이 되기 전에 신덕왕후 소생의 두 왕자 방번, 방

석을 처참히 죽인 것이었고, 나아가서는 임금이 된 후에도 가끔 옥사(獄事)를 일으켜 사람을 

많이 죽게 한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태종으로 하여금 그런 끔찍한 일을 하게 하였을까?

  
   태종의 비(妃) 원경왕후(元敬王后) 민(閔)씨는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 여흥부원군(驪興府

院君) 문도공(文度公) 제(霽)의 딸이다.  고려 공민왕 십사년 을사(乙巳=西紀 1,365년) 칠월 십

일일에 송경(松京) 철동(鐵洞) 사제(私第)에서 출생하였다.

  태조 원년 임신(壬申=西紀 1,392년)에 정녕옹주(靖寧翁主)라 봉했고, 정종 이년 경진(庚辰)

에 정빈(貞嬪)이라 책봉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정비(靜妃)로 봉했다.  세종 이년 경자(庚子) 

칠월 십사일에 수강궁 별전(壽康宮別殿)에서 오십육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는데 슬하

에는 사남사녀가 있다.


  閔妃所生의 王子와 公主

  一남 양녕대군(讓寧大君)

  二남 효녕대군(孝寧大君)

  三남 충녕대군(忠寧大君)

  四남 성녕대군(誠寧大君)


  一녀 정순공주(貞順公主)

  二녀 경정공주(慶貞公主)

  三녀 경안공주(慶安公主)

  四녀 정선공주(貞善公主)


  後宮所生의 王子와 翁主

  一남  경녕군(敬寧君)

  二남  성녕군(誠寧君)

  三남  온녕군(溫寧君)

  四남  근녕군(謹寧君)

  五남  혜녕군(惠寧君)

  六남  희녕군(熙寧君)

  七남  후녕군(厚寧君)

  八남  익녕군(益寧君)


  一녀  정혜옹주(貞惠翁主)

  二녀  정신옹주(貞信翁主)

  三녀  정정옹주(貞靜翁主)

  四녀  숙정옹주(淑貞翁主)

  五녀  소선옹주(昭善翁主)

  六녀  숙혜옹주(淑惠翁主)

  七녀  숙녕옹주(淑寧翁主)

  八녀  소숙옹주(昭淑翁主)

  九녀  숙경옹주(淑慶翁主)

  十녀  경신옹주(敬愼翁主)

  十一녀  숙안옹주(淑安翁主)

  十二녀  숙근옹주(淑謹翁主)

  十三녀  숙순옹주(淑順翁主)


  모두 이십구명에 달한다.  이중에서 민비의 소생 팔남매를 제하면 후궁에서만 출생한 아

들 딸들이 이십일명에 달하는 셈이다.  이 후궁 중에서 소생이 가장 많은 사람이 신빈(信嬪) 

신씨(辛氏)였고 그 다음으로는 안씨(安氏) 및 효빈(孝嬪) 김씨 그리고 숙빈(淑嬪) 최씨였다.  

그리고 태종의 후궁으로 어느 때나 대령하고 있던 미인들은


  一, 신빈(信嬪) 신씨(辛氏)

  二, 숙빈(淑嬪) 최씨(崔氏)

  三, 효빈(孝嬪) 김씨(金氏)

  四, 의빈(懿嬪) 권씨(權氏)

  五, 소빈(昭嬪) 노씨(盧氏)

  그리고 이외에 안씨(安氏)와 이씨(李氏)가 있어 태종의 총애를 받고 지냈다.  그런데 빈(嬪)

이란 것도 내명부의 품계를 말하는 것인데 빈(嬪)이 되면 정일품(正一品) 대우를 받게 된다.  

이것은 무슨 특별한 공로가 있지 않으면 얻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忠臣列傳]   <文化의 黃金時代>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忠臣列傳 

    文化의 黃金時代


   세종은 이조 제 삼대 임금 태종의 셋째 아들로 휘를 도( ), 자를 원정(元正)이라 불렀다.  

태조 육년 정축(丁丑=西紀 1,397년) 사월 십일에 한양(漢陽) 잠저에서 출생하였다.  태종 팔

년 무자(戊子)에 처음으로 충녕군(忠寧君)으로 봉했고 임신(壬辰)에 대군(大君)으로 봉했으며 

무술(戊戌)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동년 팔월 팔일에 경북궁 근정전에서 선양(禪讓)을 받았

다.  그리고 경오(庚午) 이월 십칠일에 별궁에서 오십사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슬하에

는 십팔남 사녀가 있었다. 

  세종은 이씨조선의 성군(聖君)이며 동시에 문화의 대은인이었다.  세종이 삼십이년에 결쳐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에 문화의 꽃이 만발했으므로 세종시절을 가르쳐 이조문화의 황금시대

(黃金時代)라 한다.

  그 시대의 문화는 모두가 세종의 손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또는 발명되었는데 이러한 임금

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틀어 놓고 보더라도 얻을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세종은 분

명히 창조자였고 발명가였다.

  세종 치세중(治世中)의 업적을 들어보면 첫째 과학, 둘째 예술, 셋째 어학이다.

  그 당시에 있어 강우량(降雨量)을 측량할 수 있는 측우기(測雨器)는 동서 어느 나라에도 

없었다.  그런데 세종은 이를 만들었다.  과학을 자랑하는 서양 사람보다도 이백년이나 앞선 

것이다.  그리고 예술면에 있어서는 음악에 유의하여 아악(雅樂)의 소리를 바로잡아 예로부

터 전해 오던 동양의 고전음악(古典音樂)을 다시 일으켰다.

  또 특기할 것은 세종이 우리 나라 문자가 없음을 개탄하고 한글 이십팔자를 만들어 훈민

정음(訓民正音)이란 우리 글을 발명한 것이다.  이때부터 다시 말하면 세종 이십팔년부터 우

리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자를 가진 민족이 된 것이다.  세종은 사람으로서 <생각이 없는 

사람>을 싫어하였고 <능력없는 사람>을 싫어하였다.  세종은 <능력있는 분>이었고 <생각이 

있는 분>이었다.  그리하여 두만강 가에 육진이 개척되었고 또 동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대

마도(對馬島)와 서쪽으로는 파저강(婆猪江)가 만주인의 출몰을 막아 내게 되었다.  이런 점으

로 미루어 보면 세종은 일대(一代)의 영주(英主)였고 성군(聖君)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의 비(妃)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는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청천부원군(靑川府

院君) 안효공(安孝公) 심온(沈溫)의 딸로 태조 사년 을해(乙亥=西紀 1,395년) 구월 이십팔일에 

양주 사제(私第)에서 출생하였다.  태종 팔년 무자(戊子)에 가례(嘉禮)를 거행하고 경숙옹주

(敬淑翁主)로, 정유(丁酉)에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무술(戊戌)에는 경빈(敬嬪)으로 

책봉했다가 다시 공비(恭妃)로 임자(壬子)에는 다시 고쳐 왕비로 봉했다.  그후 세종 이십팔

년 병인(丙寅) 삼월 이십사일에 별궁에서 오십이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왕비의 소

생으로 슬하에 팔남 이녀가 있었다.


  王妃所生의 王子와 公主

  一남, 문종대왕(文宗大王)

  二남, 세조대왕(世祖大王)

  三남, 안평대군(安平大君)

  四남, 임영대군(臨瀛大君)

  五남, 광평대군(廣平大君)

  六남, 금성대군(錦城大君)

  七남, 평원대군(平原大君)

  八남, 영응대군(永膺大君)


  一녀, 정소공주(貞昭公主)

  二녀, 정의공주(貞懿公主)


  后宮所生의 王子와 翁主

  一남, 화의군(和義君)

  二남, 계양군(桂陽君)

  三남, 의창군(義昌君)

  四남, 한남군(漢南君)

  五남, 밀성군(密城君)

  六남, 수춘군(壽春君)

  七남, 익현군(翼峴君)

  八남, 영풍군(永豊君)

  九남, 영해군(寧海君)

  十남, 담양군(潭陽君)


  一녀, 정현옹주(貞顯翁主)

  二녀, 정안옹주(貞安翁主)

  성군(聖君) 세종에게도 일정한 후궁이 다섯 사람 있었다.  첫째 정일품(正一品) 대우를 받

는 영빈(令嬪) 강씨(姜氏), 신빈(愼嬪) 김씨, 혜빈(惠嬪) 양씨(楊氏)가 있었고 다음으론 정삼품

(正三品) 대우를 받는 숙원(淑媛) 이씨(李氏)와 정육품(正六品) 대우를 받는 상침(尙寢) 송씨

(宋氏)가 있었다.

  위에 기록한 십왕자 이옹주는 다섯 후궁이 낳았다.  그중에서 신빈 김씨가 여섯 아들을 

낳았고 혜빈 양씨가 세 아들을 낳았다.  이런 점에서 생각하면 세종의 정력도 남만 못지 않

았던 모양이다.

    [忠臣列傳]   <集賢殿 學士들>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忠臣列傳 

    集賢殿 學士들



   문종은 이조 제 사대 임금 세종의 맏아들로 휘는 향(珦)이요, 자는 휘지(輝之), 태종 십사

년 갑오(甲午=西紀 1,414)년 십월 삼일에 한양 사저에서 출생하였다.  세종 삼년 신축(辛丑)

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을축(乙丑)에 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대리했고 경오(庚午) 이월 이

십이일에 별궁에서 즉위했으며 임신(壬申) 오월 십사일에 경북궁 천추전(千秋殿)에서 삼십구

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는데 재위 이년에 불과하였다.  슬하에는 일남 일녀가 있었다.

  
  문종은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어느 때나 몸에서 병이 떠나지 않았다.  임

금의 자리에 오른 후에도 역시 몸이 시원치 않아서 늘 누워 지냈다.  그러나 문종은 자기의 

몸보다도 아들 걱정에 신경을 쓰게 되어 몸이 더 나빠지게 되었다.

  "세자는 불쌍하게 자랐다.  이제 나이가 열살이 넘어 크게 걱정은 되지 않는다만 내가 이

꼴이니... 내가 병이 없어지지 않는 한 세자에 대한 걱정은 더욱 심해질 것 같구나.  나를 살

리는 것은 결국 세자를 힘차게 또는 영광스러이 살리는 일이 될 텐데..."

  문종은 어느날 침전(寢殿)에 누워서 이렇게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어둠의 장막이 내리는 것을 보자 문종은 중관을 시켜 집현전(集賢殿)에 나와 있는 여러 

학사(學士)들을 불러오게 했다.  그리고 용촉(龍燭)으로 상하 사방을 밝히게 한 후 술상을 준

비하도록 이르고 슬하에 있는 세자 단종(端宗)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간곡히 학사들에게 부

탁했다.

  "과인은 세자를 경 등에게 맡기고 싶소.  이 애는 낳은지 아흐레만에 모비(母妃)를 잃은 

불쌍한 애요.  이 애가 오늘날 왕세자가 되었지만 과인이 죽어서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그 자리를 잘 지니게 될는지가 의심되오.  내몸이 튼튼해져 좀 더 살게 되면 이 애도 더 장

성해서 안심되겠지만..."

 문종은 침상에서 내려와 여러 학사들과 똑같이 평좌(平座)를 한 후 친히 잔을 들어 여러 

학사들에게 술을 권하였다.  이때의 술자리는 임금과 학사와의 좌석 같이 보이지 않았다.  

평등무차 별함이 지기(知己)와 지기(知己)와의 술좌석 같은 화기애애하였다.

  사람은 나를 알아 주며 나를 믿어 주는 사람을 위하여 죽기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의기(意氣)에 감동하는 동물이다.  공명(功名)고 부귀도 의기 앞에서는 위세(威勢)를 

못 부리는 것이다.  이날 술좌석에 모여진 집현전의 학사는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등 여러 학사였는데 그들은 문종의 지우(知遇)에 감격하여 감읍(感泣)하면서

  "신 등이 일개 심장적구(尋章摘句)하는 학구(學究)에 불과하오나 신 등을 알아 주옵시는 수

우(殊遇)에 보답하옵고자 왕세자 저하(低下)의 현재 및 장래를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칠 것

을 감히 맹세하나이다."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아뢰었다.  문종은 이말을 듣고서 웃으며

  "이젠 과인은 좀 안심하겠소.  세자를 어린 동생이나 조카로 다르고 수호해 주오.  과인은 

세자로 하여금 여러 학사를 나이 많은 형이나 아저씨로 섬기게 하겠으니..."

하고 부탁했다.

  그럭저럭 밤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문종의 몸은 오랫동안 앉아서 말을 주고 받고 할 만

한 건강의 소유자가 못되었으나 강잉히 괴로움을 참아가면서

  "오늘의 세자가 열살이 넘도록 튼튼히 자란 것은 혜빈 양씨(세종의 후궁)의 공덕이요.  혜

빈 양씨로 말하면 과인의 어마마마뻘이 되는 분인데 혜빈의 말씀에 의하면 재덕을 겸비한 

튼튼한 애다 합디다.  과인이 틈만 있으면 시험해 보았는데 혜빈의 말이 옳은 것 같소.  여

러 학사들이 잘 지도하고 보호만 해 주면 임금으로서 한 몫 일을 할 것이요."

하고 재삼 부탁했다.  그러나 학사들은 문종이 괴로워하는 것을 살피고 어전을 떠났다.


  문종 시대의 의정부 三정승은 다음 세 사람이었다.

  영의정(領議政) 황보인(皇甫仁)

  좌의정(左議政) 남 지 (南 智)

  우의정(右議政) 김종서(金宗瑞)

  이중에서 영의정보다도 뚜렷한 존재가 되어 있는 사람은 우의정 김종서였다.  그는 세종

의 유위주의(有爲主義)에 찬동함과 동시에 이를 받들고 육진(六鎭)을 개척하였기 때문이고 

또 용력과 담력이 열 사람 백 사람에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들 삼정승도 어느날 문종의 소

명을 받고 함께 참내하였다.  문종은 이날도 침전에 누워있었다.

  "공들을 청함에 있어서도 누워 청하게 되니 미안함을 금할 수 없소이다.  사십평생을 병

고에서 떠나지 못하니 이런 불행한 사람도 더러 있을까?"

  문종은 이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세정승의 인사를 받았다.  문종은 다시 말을 이



  "과인이 공들을 청한 것은 나를 보라고 청한 것이 아니요.  짐의 병이 심상치 않아가니 

세자 걱정이 더욱 심해 가는 까닭에 그 걱정을 좀 나누어 볼까 해서 청한 것이요."

  그리고는 왕세자를 불러 오게 하였다.  이때 세자의 나이 십이세에 불과하였지만 매우 숙

성해 보였다.  그러나 워낙 나이가 어렸으므로 얼굴에 치기(稚氣)가 가득해 보였다.  이때 

영의정 황보인은 세자에게로 가까이 가서 

  "저하의 나이 지금 몇이십니까?"

  입을 열었다.

  "열두살이오."

  "제가 무엇하는 누구인 줄 아십니까?"

  "영의정 황보인이요."

  황보인은 다시 좌의정 남지를 가리키면서

  "이 사람은 누구인 줄 아십니까?"

  "그 사람은 좌의정 남지요."

  황보인은 세자의 총명에 놀라면서 또 우의정 김종서를 가리키고

  "이 사람도 아시겠습니까?"

  "그 사람은 우의정 김종서요."

  황보인등 세 사람은 세자의 마음 가짐이 범인에 지나는 것에 감동하여 이번엔 좌의정 남

지가 문제를 만들어 물었다.

  "육조란 것은 무엇을 일컬어 말하는 것일까요?"

  "육조? 육조란 것은 이조(吏曹), 예조(禮曹), 형조(刑曹), 병조(兵曹), 공조(工曹), 호조(戶曹)

를 말하는 것이요."

  "그리고 각 조의 우두머리 자리에 있는 사람을 무엇이라 부르나요?"

  "판서(判書)라 부르오."

  "삼공 육경이란 무엇을 일컬어 말하나요?"

  "삼공 육경이요?  삼공이란 의정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자리에 있는 사람 셋을 말하는 

것이고,  육경이란 육조의 판서 자리에 있는 사람을 여섯을 말하는 것이요."

  세자가 대답하는 것을 듣고만 있던 우의정 김종서는

  "참 세자 저하는 좀 더 장성하면 훌륭한 임금이 되시겠소.  참 총명도 하십니다."

  세자를 칭송하였다.  세자와 삼공 사이의 문답으로 인하여 한때 중단 되었던 문종과 삼공

과의 이야기는 다시 계속되었다.

  "그런데 세자 저하의 건강은 어떠한가요?"

  "건강도 좋은 편이요."

  "글도 많이 읽고 계신가요?"

  "나이로 보아서는 많이 읽고 있는 것 같소."

  "오늘의 문답으로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총명도 남만 못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한번 본 것, 한번 들은 것을 잊지 않으니 총명하다 할 수 있소.  그런데다 사람됨이 단아

(端雅)해서 과인의 마음엔 꼭 드는구료."

  "부왕(父王)을 닮아서 그러신 것 같소이다.  그러즉 마음씨도 어질실 것이올시다."

  문종은 이 말을 들은 후 한참 동안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다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좀 들어보오.  세자에게는 삼촌이 너무 많아서 걱정되오.  과인이 

병신(病身)일지라도 왕위에 있으니까 궁내가 안온한 것같이 보이지만 과인이 죽어 없어진다

면 궁중이 편안해질 것같지 않소.  과인이 지금 죽으면 세자가 곧 내 뒤를 계승하여 임금이 

될 것이요.  이 어린애가 아무리 총명해도 궁중의 이구석 저구석에서 일어나는 폭풍우를 어

찌 제지 하겠소?"

하고 가장 중대한 걱정거리를 내놓았다.  문종이 이러한 말로 입을 열자 삼공은 모두 꿀 먹

은 벙어리인 양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문종은 또 입을 열었다.

  "과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며칠 못 가서 저 어린것에게 왕위를 내주어야 할 것 같소.  과

인은 저 어린 것이 장성하여 어른이 될 때까지 살고 싶지만 천수(天壽)가 이만인데 어찌하

겠소?  과인이 오늘 죽을는지 내일 죽을는지 알수 없지만 하여간 세자가 어린 임금으로 즉

위하면 저 집현전의 여러 학사와 손을 잡고 보좌해 주고 수호해 주오.  그리해 주면 과인은 

지하에서라도 그 은혜에 보답하겠소이다.  삼공의 생각은 어떠하오?"

  문종의 이 말에 세사람은

  "신 등은 전하의 심경을 잘 살피고 있습니다.  신 등은 전하의 지우(知遇)에 감격하여 목

숨을 돌보지 않고 세자를 보필하고 또 수호하겠사오니 신 등을 믿어주소서."

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문종은 여윈 얼굴에 일말의 광명을 띠우고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감사하오.  오늘부터 세자를 삼공의 아들로 맡기겠소.  이제 해도 

저물었으니 어떻게 그대로 돌아가겠소.  술상이 준비되어 있으니..."

  술상을 내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세 정승은 황송히 받아 마시고 어전을 물러나 각각 집으로 돌아갔다.



  문종의 비(妃)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는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증영의정(贈領義政)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경혜공(景惠公) 권전(權專)의 딸로 태종 십팔년 무술(戊戌=西紀 1,418

년) 삼월 이십일 홍주 합덕현(洪州合德縣) 사제에서 출생하였다.

  세종 십삼년 신해(辛亥)에 동궁(東宮嬪)으로 뽑혀 들어와 처음엔 승휘(承徽)로 책봉되고 좀

지나서 양원(良媛)으로 진봉(進封)되었으며 정사(丁巳)에 이르러서는 순빈(純嬪) 봉씨(奉氏)가 

폐립(廢立)되자 이어 세자빈(世子嬪)으로 책봉되었다.

  문종이 왕위에 나아가자 종전까지 빈으로 있던 권씨는 왕후(王后)로 책봉되었다가 신유(辛

酉)을 하직하였는데 당시의 춘추는 이십사세였다.

  슬하에는 일남 일녀가 있었다.


  王妃所生의 王子와 公主

  一남, 단종대왕(端宗大王)

  一녀, 경혜공주(敬惠公主)


  后宮所生의 翁主

  一녀, 경숙옹주(敬淑翁主)

  이 옹주는 사칙(司則)이란 직함을 가진 양씨(楊氏)의 소생이다.

  문종은 천생 약질이었으므로 삼십구년간 궁중 꽃밭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애정생활

은 쓸쓸할이만큼 별 일이 없었다.


    [淸凉浦의 어린 넋]   <癸酉靖亂>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淸凉浦의 어린 넋 

    癸酉靖亂



   단종은 이조 제 오대 임금 문종(文宗)의 오직 하나의 아들로 휘를 홍위(弘暐)라 불렀다.  

세종 이십삼년 신유(辛酉=西紀 1,441년) 칠월 이십삼일에 동궁의 자선당(資善堂)에서 출생하

여 무진(戊辰)에 왕세손(王世孫)으로 경오(庚午) 칠월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임신(壬申) 오월 십육일에 경북궁 근정전에서 즉위하였으며 을해(乙亥) 육월 십일일에는 

왕위를 세조에게 선양(禪讓)하고 상왕(上王)이 되었다가 정축(丁丑) 육월에 노산군(魯山君)으

로 강봉되고 십월 이십사일에 영월(寧越)에서 십칠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재위(在位) 삼년 

재상왕위(在上王位) 이년이었는데 슬하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조 제 사대 임금 세종에게는 왕자가 십팔명이나 있었는데 모두 다 기승스런 인물이었

고 그중에서도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왕비 소생의 둘째 아들로서 야망과 수완이 비범한 인

물이었다.  그 외의 모든 형제들은 문객을 맞아 세력의 확대를 꾀하고 있었는데 수양대군에

게는 유달리 무사(武士)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

  이는 수양대군의 책사(策士)로 권남(權擥)이 있게 되자 한명회(韓明澮)가 드나들게 되었고, 

여기에 따라 홍달손(洪達孫), 양정(楊汀) 등 무인다운 무인 삼십여명이 또 드나들게 된 것이

다.

  그런데 수양대군은 문종의 친아우였고 단종의 둘째 삼촌이었다.  처음엔 진평대군(晋平大

君)이라 불리웠는데 훗일에 이르러 수양대군이라 부르게 되었다.

  문종이 돌아가자 단종은 그 뒤를 이어 임금의 자리로 나아갔는데 당시의 나이 십이세였

다.  그리하여 수양대군은 신왕(新王)을 젖먹이로 멸시하고 비밀히 이지(異志)를 품고 신왕의 

자리를 찬탈(簒奪)할 음모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권남이란 책사가 필요하게 되고 한명회란 장사가 또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수양대군에게 있어서 하루도 없지 못할 존재였다.  권남도 한명회도 밤낮으로 수

양대군저로 나아가 대군에게 진언도 하고 헌책(獻策)도 하였다.

  한명회는 흔히 종부시정(宗簿寺正)이라 가칭하고 출입했지만 심야(深夜)의 출입은 장원밖

에   늘어져 있는 밧줄을 이용하였다.  단종 왕위의 찬탈계획은 한명회가 거의 다 생각해 

낸 것이었으므로 수양대군은 사람을 보기만 하면

  "한명회는 나의 장자방(張子房)이다."

하며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때는 단종 원년(元年) 西紀 1,483년(癸酉) 십월 십일이었다.  이날을 기하여 수양은 단종을 

수호해 오는 세 정승을 모조리 죽여 없애려 하였는데 수양의 음모가 사전에 누설되었으므로 

수양대군 일파는 이를 크게 걱정하였다.  이를 알게 된 수양은

  "무엇! 누설되었다고? 정말 누설되었으면 먼저 우의정 김종서(右議政 金宗瑞)를 없애기로 

하지.  김종서(삼정승 중 김종서는 담력과 지략이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호랑

이라고 불렀다.)만 없애면 그 외의 영의정 좌의정쯤은 문제도 되지 않아."

라고 말한 후 홍달순, 양정 등 유능한 무사 칠, 팔인을 자저(自邸)로 불렀다.  그리고 후원에

서 술잔치를 베풀고 거사할 것을 비밀히 의논했다.

  그러나 의논이 백출될 뿐 별 해결이 없었다.  이때

  "집을 길 가에 짓는데 삼년이 경과되어도 준공되지 않았다는 말이 있소이다.  대군께서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한명회가 입을 열자 홍달손이 뒤를 이어

  "좋은 말씀이올시다.  용병(用兵)에 유예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고 덧붙여 말을 했다.

  수양은 한명회와 홍달손의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나려 할 때 누군가 옷자락을 끄는 사람이 

있었다.  노기를 얼굴에 띄고

  "옷자락을 왜 끄는 것이냐?  너희들은 내가 무슨 음모를 하고 있다고 알릴 수 있는 대로 

알리고 고해 바칠 수 있는 대로 고해 바쳐라.  나는 계획한 대로 단행하고야 말겠다."

  만류하는 자에게 화살을 쏘려하다가 이를 멈추고

  "나는 너 같은 자는 환영하지 않는다.  가고 싶은 자는 가고 있고 싶은 자는 있어라.  나

는 대장부다.  나는 국가 사직을 위하여 죽고 말련다.  나 혼자만이라도 가겠다.  만약 우유

부단(優柔不斷)하며 기회를 그리치게 하는 자가 있게 되면 용서하지 않고 참하겠다."

하며 중문으로 나섰다.  이때 수양의 뒤를 따라 중문에까지 나온 사람은 가노(家奴) 임운(林

芸) 뿐이었다.

  한명회는 이를 보고

  "대군께서 혼자 가신다.  혼자 가시게 해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모시고 가야 한다."

  부르짖었다.  그리하여 무사 몇 사람이 두패로 나뉘어 한패는 돈의문(敦義門) 성상에 매복

하고 또 다른 한패인 양정, 홍순손, 유수(柳洙) 등은 미복(微服)으로 대군을 따랐다.

  수양이 성문을 나서자 말탄 장사 십여명이 길가에 서 있었다.  그러자 이들 말탄 장사들

은 수양이 눈에 띄자 어디론지 흩어져 버렸다.  이런점으로 보면 수양대군의 위망(威望)이 

여간 아니었던 모양이다.  수양이 김종서의 집에 이르자 김승규(金承珪=김종서의 아들)는 신

사면, 윤광은이란 사람과 문전에서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다.  수양은 승규에게

  "춘부 대감 계신가?  내가 좀 뵈오려 왔다고 알리라."

는 말을 했다.  김종서는 수양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뛰어나가 수양을 보기가 무섭게 절

을 했다.  그리고는

  "좀 들어오십시오."

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고맙소. 그러나 날도 이미 저물어 사대문(四大門)이 닫혀지겠는데 들어가면 뭘하오."

하며 들어가기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승규는 자기 아버지의 좌우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수양대군은 준비했던 각(角) 떨어진 사모(紗帽)를 벗어가지고

  "여보 대감!  청할 것이 하나 있소."
  
  말을 걸었다.

  "무슨 청이온데?"

  "사모의 각이 떨어져 없어진 모양인데 대감의 각을 좀 빌려 주셔야 하겠소이다."

  "그거 안 되었습니다."

  종서는 이와같이 대답하고 아들 승규에게 안으로 들어가 사모의 각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때 수양대군의 가노(家奴) 임운(林芸)은 이 틈을 타서 종서에게 철퇴로 일격을 가하여 쓰

러뜨렸다.

  승규는 이 기척을 알고 나는 듯이 수난 장소로 달려들어 아버지의 시체를 감쌌다.  그러

나 옆에서 보고 있던 무사 양정은 칼을 빼어 승규에게 일격을 가하였다.  이때 수양대군은 

이를 보고 돌아가도록 하였다.

  수양대군이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한명회는 얼마만큼 마중을 나와 있었다.  대군은 명회

를 보고

  "일이 이젠 계획대로 추진되어 간다."

하며 만족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수양은 명회로 하여금 무사를 거느리고 행재소(行在所) 문전에 배열시켰다.  무사

들을 배열해 놓은 후 명회는 생살부(生殺簿)를 가지고 문안에 앉아 있었다.  수양은 왕명을 

빌어 여러 중신(重臣)을 참내케 하고 사부(死簿)에 등록된 대신이며 중신들을 홍윤성(洪允成), 

유수(柳洙), 구치관(具致寬) 등 여러 무사에게 철여의(鐵如意)를 가지고 격살케 하였다.

  이 때에 격살된 중신은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이조판서(吏曹判書) 조극관(趙克寬), 찬성(찬

성(贊成) 이양(李 ) 등이었다.  이 반대파 중신들은 궐문에서 살해되고,  좌의정(左議政) 정

분(鄭 ), 조극과의 아우 조수량(趙遂良) 등은 처음엔 귀양을 보냈다가 곧 죽여 없앴다.  안

평대군은 김종서와 내통하였다는 것을 이유로 강화에 귀양 보냈다가 나중에 약사발을 내려 

죽게 하였다.

  그런데 임운의 철퇴를 맞고 쓰러졌던 김종서는 다시 회생하였다.  종서는 대궐로 들어가

려고 몸에 여복(女服)을 떨치고 가마에 몸을 담은 후 숭례문(崇禮門=남대문) 앞에 이르렀으

나 문이 굳게 닫혀져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종서는 부득이 아들 승규의 처가에 숨

어 있게 되었다.  종서가 회생하여 아들의 처가에 숨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수양은 재빨리 

사람을 내놓아 그 집을 습격하여 종서를 끌어내게 하였다.  끌려 나온 종서는

  "나는 어디든지 걸어서는 못 가겠다.  초헌( 軒)을 가져 오너라."

하고 실랑이를 하고 있을 때에 칼이 번쩍이면서 그의 상체에 이르고 말았다.  이로써 인간

대호(人間大虎)라는 종서도 다시는 회생하지 못하고 말았다.

  수양은 김종서를 이렇게 죽인 후 단종에게로 나아가

  "김종서가 음험하게 모반함으로 살해하였습니다.  일이 너무나 절박해서 사전에 아뢰지 

못 하였습니다."

하고 상주(上奏)하였다.

  이 정변으로 말미암아 국가의 실권(實權)을 얻게 된 수양대군은 바로 영의정부사(領議政府

事)란 최고의 벼슬을 갖고 그 일파는 이조판서(吏曹判書), 형조판서(刑曹判書) 그리고 내외병

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란 군부 최고의 벼슬까지 차지하였다.  그리하여 일국의 정권도 일

국의 병권도 그의 장중(掌中)에 있게 된 것이다.

  이 때에 있어서 단종(端宗)의 존재란 정말 '바지 저고리'에 불과 하였다.

  천하의 권력을 독차지한 영의정부사 수양은 일찍부터 동지적(同志的) 관계를 맺고 지내 

오던 정인지(鄭麟趾)를 좌의정(左議政)으로 한확(韓確)을 시켜 집현전(集賢殿)으로 하여금 수

양대군을 찬양하는 교서(敎書)를 짓게 하고 이것을 왕의 이름으로 받았다.

  수양대군의 위세(威勢)와 권위(權威)가 여간하지 않으므로 그대로 임금의 자리만 지키고 

있어야 무슨 묘책이 생길 것 같지 않고 권남, 정인지의 주청에 못견디어 단종은 단종 삼년

(열네살 때)곧 서기 1,455년 을해(乙亥) 육월 십일일에 눈물을 머금고 왕위(王位)를 수양대군

에게 내주었다.  말은 선양(禪讓)이었지만 실상은 강탈(强奪)이었다.  이렇게 강탈하여 단종

의 뒤를 이은이가 곧 세조(世祖)이다.

  수양대군이 임금이 되자 전왕 단종은 상왕(上王)이 되어 '골방 마누라' 격이 되고 말았다.  

집권욕(執權慾)은 인륜대의(人倫大義)를 모르는 살인욕(殺人慾)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淸凉浦의 어린 넋]   <死六臣>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淸凉浦의 어린 넋 

    死六臣



   단종이 임금의 자리를 세조에게 내주었을 때 좌우에 있던 신하중에서 입을 열고 단종을 

위하여 시(是)와 비(非)를 가려 말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예방승지(禮房承旨)로 있던 성삼문(成三問)은 국새(國璽)를 안고서 크게 소리를 내

어 통곡하였고 또 박팽년(朴彭年)은 경회루에 이르러 자살하려 하였다.  이때 삼문은 이를 

발견하고 굳이 만류하면서

  "지금 왕위가 옮겨가고 국새가 전해졌지만 전왕이 아직 상왕으로 계시니 죽지 말고 좀 때

를 기다려 봅시다."

하고 박팽년을 달랬다.  박팽년도 보다 이상 고집하지 않고 삼문의 말에 응하였다.

  한편 단종 상왕은 수강궁(壽康宮)에 칩거하여 우울히 그날 그날을 보낼 뿐이었다.  이때 

집현전 학사 성삼문은 박팽년,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成源) 또 전절제사(前節

制使) 유응부(兪應孚) 및 삼문의 아버지,  단종 상왕의 장인 등과 손을 잡고 단종을 복위(復

位)시킬 계획을 비밀히 세웠다.  그런데 때마침 명나라 사절(使節)이 와서 태평관(太平館)에

서 여장(旅裝)을 풀었다.

  그리하여 세조는 일정한 시일을 정하여 상왕 단종과 함께 명나라 사절을 위하여 대연(大

宴)을 베풀기로 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성삼문, 박팽년은

  "좋은 기회는 왔다!"

고 좋아하였다.  그들은 연회일을 이용하여 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과 응부를 운검(雲劒)으

로 삼으려 하였다.  이는 다름이 아니었다.  연회에 이르러 거사할 때 세조의 우익(羽翼)을 

모두 삼제(芟除)하기 위함이었다.

  이때 한명회는 세조에게로 나아가 진언했다.

  "연회장으로는 창덕궁이 좁고 또 더웁소이다.  그리고 세자(世子)의 참석도 운검의 입장도 

필요치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세조는 이 말을 이의 없이 받아 들였다.  성승(成勝)이 운검(雲劒=의장에 사용하는 큰 칼)

을 허리에 차고 연회장으로 들어가려하자 이를 본 한명회는

  "운검을 차고서는 못 들어오기로 되어 있소.  공도 패검(佩劒)하고선 못 들어옵니다."

  이 말을 듣고 분개한 승이 물러나 한명회를 격살하려 하자 삼문이

  "세자도 참석하지 않았는데 한명회쯤을 죽인들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하고 명회 격살을 말렸다.  그러나 응부는 이 말에 찬동하지 않고 기어히 명회를 격살하려 

하였다.  그러나 팽년과 삼문은 응부에게 차근히 말했다.

  "지금 세자가 본궁에 있고 출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다 운검의 입장도 불허하니 

어찌한단 말이요?  만약 억지로 일을 일으키면 세자는 경북궁을 중심으로 대항할 것 같소.  

우리에게 해는 있을지언정 이는 없을 것이요.  딴 날 수양과 세자가 같이 있을 때를 엿보아 

거사를 하면 쉽사리 목적이 달성될 것이로 생각되는데..."

  그러나 응부는 여전히 우겼다.

  "이런 일은 신속히 끝을 내야 하는 것이요.  만약 딴 날로 연기하면 사전에 일이 누설되

고 맙니다.  지금 세자가 본궁에 있다 하지만 모신적자(謨臣賊子)가 모두 수양에게 붙어 있

지 않소!  오늘 이 무리들을 깡그리 도륙하고 상왕을 복위케 하며 호령을 내려 무사로하여

금 일대(一隊)의 군사를 거느리고 경북궁에 들어가게 하면 세자의 도망갈 데가 어디란 말인

가?  때는 왔소.  천재일우(千載一遇)의 때는 왔습니다."

  그래도 팽년과 삼문은 여전히 호기가 아니라고만 고집하였다.  이때 삼문, 팽년의 동모자

의 한 사람인 김질(金 )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재빨리 장인 정창손(鄭昌孫)을 

찾아가 의견을 물었다.

  "우리가 계획한 상왕 복위운동이 뜻대로 될 것 같지 않사온데 태도를 어떻게 갖는 게 좋

을까요?  사전에 밀고를 하면 그 공으로 부귀는 차지할 수 있을 것 같사온데..."

  창손도 사전 밀고에 대하여 반대의 태도를 취하지 않고 동조하였다.  그리하여 창손은 즉

일로 사위 김질과 함께 대궐로 들어가 김질이 상왕복위 계획에 관여했음을 고하였다.

  세조는 처음엔 창손과 질에게 형(刑)을 가하려하였으나 밀고한 것을 기특히 생각하고 공

신(功臣)으로 대우하였다.

  이 밀고에 의하여 복위운동 배후의 인물이 일일이 알려지고 성삼문, 박팽년 등은 체포되

어 국문(鞠問)을 받게 되었다.  세조는 평소에 팽년의 재주를 높이 평가하고 지냈음을 사람

을 시켜 팽년에게

  "네가 나에게 잘못을 깨닫고 계획한 것을 솔직히 고백하면 살려 주겠다."

는 말을 전하게 하였다.  팽년은 이 전하는 말을 듣고 어이가 없어 웃음만 지우고 아무 대

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세조를 칭함에 '상감'이라 부른 일도 없고 '전하'라 부른 일도 없었

다.  어느 때나 세조를 칭하여 '나으리'라 불렀다.  '나으리'란 나라 종친(宗親)을 부름에 있어

서 경어(敬語)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하여 세조는 대노하여 무사로 하여금 팽년의 입을 난격(亂擊)케 하면서

  "너는 벌써부터 신(臣)이라 칭하면서 내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있지 않으냐?  네가 지금에 

이르러 '신'이라 칭하지 않는다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그러나 팽년은 여전히 웃으면서 대답했다.

  "상왕의 '신'이 되어 충정감사로 있을 때 '신'이라 써서 장계(狀啓)한 일은 있으나 '나으리'

에게는 한 번도 '신'이라 하고 장계한 일이 없소.  찾아보면 아실 것이요."

  세조는 팽년의 장계를 모두 검사해 보았다.  과연 팽년의 말과 같이 신(臣)이란 글자는 한 

자도 들어 있지 않았다.

  다음으로 세조는 승지(承旨) 벼슬을 하고 있던 삼문을 무사에게 명하여 끌어내게 하였다.  

세조는 김질이 밀고한 내용대로 국문하기 시작했다.  삼문은 얼굴에 웃음을 띠고

  "김질이 밀고한 것이 모두 옳소이다."

  대답하면서 김질을 돌아다보았다.

  "네가 밀고한 것이 좀 덜 분명하고 좀 덜 철저하다."

  삼문은 김질을 비웃었다.  세조가 다시

  "너희들이 무엇 때문에 나를 배반하려 하는가?"
  
라고 묻자 삼문은

  "일편단심(一片丹心) 전왕(단종)을 다시 모시기 위함이요.  우리의 마음은 모든 백성이 다 

알고 있소.  나으리는 우리가 어째서 이런 맘을 갖게 된 것을 모르시오?  나으리는 남의 나

라를 강탈한 사람이요.  인신(人臣)이 되어서 임금이 망하는 것을 어찌 좌시한단 말이요?  

그래서 우리가 일어난 것이요.  그런데 나으리는 평소에 주공(周公)을 들어 이말 저말 하십

디다.  주공도 이런 일을 감행하였나요?"

  거침없는 대답이었다.  이 대답에 세조는 발을 구르면서 소리쳤다.

  "왕위를 나에게 선양할 때에 받지 말도록 할것이 아니냐?  지금 와서 이말 저말 별 말을 

다하면서 배반하려 하니 그게 무슨 심사냐?"

  삼문은 이 말에 새삼스레 세조를 바라보면서 냉소를 했다.

  "나으리 야심이 전부가 왕위 찬탈에 있었는데 우리가 말린다고 들어 주시겠소?  그런 말

씀은 어린애게나 하십시오."

  "그런데 너도 신(臣)이라 칭하지 않고 나를 '나으리'라 부르는 모양이다.  도대체 그러면 

너희가 먹고 사는 것이 어디서 나오는 것이니 모르느냐?  나의 녹(祿)을 받고 살면서 나를 

배반할 수 있느냐?  너는 반복한(反覆漢)이 아닐 수 없다."

  세조가 이렇게 말하자 삼문은

  "그게 무슨 말씀이요?  상왕이 계신데 나으리는 무엇을 가지고 나를 신(臣)으로 부리고자 

하시오?  또 나는 나으리의 녹(祿)을 받아 먹지 않았소.  나의 말이 정말로 믿어지지 않으면 

사람을 보내 우리 집을 털어 보면 알 것이요."

  역시 거침없이 대답하자 세조의 노기(怒氣)는 한층 더 만면(滿面)해졌다.  세조는 무사를 

불러 세우고 철봉(鐵棒)을 불 속에 넣어 달군 후에 그것으로 삼문의 다리와 팔꿈치를 사정

없이 지지게 하였다.  그러나 삼문은 태연한 태도로 말했다.

  "나으리 너무 심하지 않소?  나으리의 형(刑)은 참혹하구료."

  그런데 때마침 신숙주(申叔舟)가 세조의 곁에 있었다.  삼문은 숙주가 눈에 띄자 크게 소

리를 높여 꾸짖었다.

  "지난날에 너도 집현전의 한 사람으로 있었지?  그때 영묘(英廟=세종)께서는 원손(元孫=단

종)을 안으시고 정중(庭中)을 거니시다가 우리들에게 부탁하시기를 <과인이 세상을 떠난 후

라도 경 등은 모름지기 이 애를 염두에 두고 잘 수호해 달라>고 천탁(千托), 만탁(萬托)하시

지 않았나?  그때의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한데 너는 하루 아침에 그 어른의 부탁을 잊

고 말았구나?  네놈의 마음이 그렇게 더럽게 변할 줄 뉘 알았겠느냐?"

  삼문의 말씨가 이러하자 세조는 무슨 일이 날 것 같아 신숙주를 전각(殿閣) 뒤로 피신케 

하였다.

  이때 제학(提學) 강희안(姜希顔)도 국문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강희안도 굴복하지 않았

다.  세조는 삼문에게 물었다.

  "희안은 너희의 음모에 가담한 일이 없느냐?  숨김없이 말을 해라."

  삼문은 이 물음에

  "희안은 당초부터 우리와 가까이 한 일이 없소이다.  나으리는 전조(前朝)의 명신이라면 

모두 다 참살하시지 않았습니까?  지금 남은 사람은 강희안 뿐인 것 같습니다.  좀 남겨 두

어서 등용하시는 것도 유리할 것입니다.  강희안은 정말 현자(賢者)올시다."

하고 증언하였다.  그리하여 강희안은 세조의 손에 죽지 않게 되었다.

  다음으로 세조의 국문은 유응부에게로 옮겨졌다.  세조는 응부를 불러 세우고

  "너는 연회석에 왜 참가하려 하였노?"

  묻기 시작했다.  유응부는

  "연회일에 참가하려 한 것은 다름이 아니요.  첫째, 일척검(一隻劒)으로 족하(足下)를 몰아

내고 전왕 단종을 모시려 함이었소.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 동지 중에 간물이 있어 그 자의 

밀고로 일이 망쳐지게 되었소.  족하! 더 물을 것 없소.  한시 바삐 나를 죽여 주오."

  세조는 이 말에 격노하여

  "너는 상왕의 이름을 빌어 일을 하려 하는 것이 아니냐?  너의 심사를 알겠다."

  그리고는 무사로 하여금 몸의 가죽을 벗기고서 고문케 하였다.  이때 응부는 삼문을 돌아

다보며

  "사람들이 말하기를 학자님들과는 일을 꾀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더니 그들의 말이 옳은 

것 같소.  지난날 연회일에 내가 칼로 세조의 도배를 도륙할 할 때에 당신들의 만류로 부득

이 멈추고 말았는데 이 때문에 오늘날 이런 치욕을 당하게 됐소.  당신들은 책략이란 것을 

모르니 짐승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요?  더 말하고 싶지 않구료."

하고서 다시 세조에게

  "딴 무슨 물을 것이 있으면 저 학자님들에게 물어보시오!"

  세조는 이 말에 격노하여 무사로 하여금 빨갛게 달군 철봉을 배 아래 두 다리가 회합(會

合)하는 곳에 놓은 후 거기에다 기름을 부어 지지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곳의 피육(皮肉)은 

익어 문드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응부는 비명도 울리지 않고 철봉이 냉랭해지기를 기다

리고 있다가

  "철봉이 이제 다 식었다.  다시 불에 달구어 가져 오너라."

하고 철봉을 땅에 내던졌다.  철봉은 다시 달구어져서 그의 사타구니를 지졌다.  그러나 응

부는 최후의 일각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이개(李塏)가 작형(灼刑)을 받게 되었다.  이개는 그때

  "이런 형벌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 있나요?"

  세조에게 물었으나 세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 작형은 다음으로 하위지(河緯地)에게로 옮겨졌다.  하위지는

  "우리들의 행위가 반역(叛逆) 행위라면 참(斬)하는 게 국가의 정법(正法)인데 무엇을 묻고 

또 국문한단 말이요?"

하고 점잖게 입을 열었다.  그리하니 세조도 그말에 감동했던지 하위지에는 작형을 가하지 

않고 말았다.

  국문을 다 받은 성삼문은 궁문(宮門)에서 나오려할 때 좌우신료(左右臣僚)들에게

  "너희들은 어진 임금을 도와 태평을 누려라.  삼문 나는 지하로 돌아가 고주(故主=세종)를 

뵈옵겠다."

하는 말 한마디를 남겨 놓은 후 수레에 실려 참형장(斬刑場=새남터)으로 끌려갔다.  때는 가

을해가 뉘엿뉘엿 저물려하고 있었다.  삼문은 형을 받기 전에 다음과 같은 절명시(絶命詩)와 

시조를 남겼다.

  擊鼓催人命, 西風日欲斜.

  (가을 바람 소슬하고 해는 저물려하는데, 북을 치며 죽이라 재촉하네)

  黃泉無客店, 今夜宿誰家

  (저승엔 객주집이 없다는데, 오늘 이 밤을 뉘집에서 새울고?)

  
< 이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제 독야청청하리라. >


  삼문이 죽은 후 그의 집을 검색하였더니 과연 을해(乙亥) 이후 곧 세조가 즉위한 후부터 

받은 녹봉(祿俸)을 모두 다 별실에 넣고 월일(月日)까지 기입해 두었다 한다.  이것을 보면 

세조가 준 녹봉에는 손하나 건드리지 않은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이개(李塏)도 역시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끌려갔는데 그의 절명시(絶命詩)는 다음과 같다.

  禹鼎重時生亦大

  (목숨이 우정처럼 무거워진 때엔 사는 게 명예롭지만)

  鴻毛輕處死猶榮

  (목숨이 홍모처럼 가벼워진 때면 죽는게 오히려 영광스러우리)


< 창안에 혓는 촛불 눌과 이별하였관데

  겉으로 눈물지고 속타는 줄 모르는고

  저 촛불 날과 같아야 속타는 줄 모르더라. >


  이밖에 몇 사람의 절명시와 시조 같은 것은 입수(入手)되지 않아서 여기에 기록하지 못했

다.

  끝으로 유성원(柳誠源)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써보기로 하자.  성원은 사예(司藝)란 벼슬

을 가지고 성균관에 있었다.  성삼문 등이 국문을 받던 날 성균관의 여러 유생이 성원에게

로 와

  "선생님!  세조의 국문이 참혹한 모양입니다.  국장으로 끌려가시면 선생님도 작형(灼刑)하

에서 국문을 받으실 것입니다."

하고 알렸다.  그러자 성원은 당장에 수레 몸을 담고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돌아오기

가 무섭게 자기 아내에게 술상을 차리게 한 후 그 아내를 상대로 술을 마셨다.  이와같이 

부부가 대작한 후 성원은 가묘(家廟)로 들어갔다.  그러나 들어간지가 오래 되었는데도 나오

지를 않아 이를 의심스러이 생각한 부인이 가묘로 들어가보니 성원은 관대도 벗지 않고 패

도(佩刀)로 목을 찔러 자살한 것이었다.

  부인은 물론 가인들도 왜 자살했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좀 경과되자 포교

(捕校)가 와 죽은 시체를 가져갔다.  세조는 성원의 시체가 국문장에 이르자 형리를 시켜 다

시금 육시를 하게 했다.


    [淸凉浦의 어린 넋]   <端宗의 最後>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淸凉浦의 어린 넋 

    端宗의 最後



   전왕 단종은 상왕(上王)이 된 후부터 별궁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삼문 등의 상왕 

복위운동이 사전에 발각되어 성공하지 못하고 끝나자 정인지는 세조에게 글을 올렸다.

  < 상왕께서는 성삼문의 음모를 벌써부터 아시고 계셨을 것으로 믿어집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모르는 체하시고 비밀에 붙이신 것은 이 나라에 죄를 범하신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겠

습니다.  그 어른에게 여전히 상왕의 위호(位號)를 갖게 하는 것은 생각할 일이올시다. >

하는 글을 올렸다.

  세조는 이 소문(疏文)을 보고 정인지 등 여러 궁신들을 불러놓고 상왕 폐립에 대하여 문

의하기 시작하자 모든 중신의 의견은 상왕 폐립으로 귀일(歸一)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세조

는 상왕(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하고 강원도 영월(江原道 寧越)로 추방하여 거

기서 귀양살이를 하게 했다.

  다음으로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를 순흥부(順興府)로 추방하여 귀양살이를 하게 하였다.  

금성대군은 매일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만나 비분강개(悲憤慷慨)의 눈물을 흘려가면서 

비밀히 노산군 복위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동지를 모집하였다.  어느날 금성대군은 이보흠을 

자기 처소로 불렀다.  보흠이 오자 좌우에 있던 사람들을 물러나게 한 후 단둘이 앉아서 시

국이 되어가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가 땅이 꺼지게 긴 한숨을 지으면서

  "이부사는 이 시국을 어떻게 보오?  내버려 두는게 옳겠소?  좀 의견을 들어봅시다."

하고 말을 걸었다.  이부사도 마음이 단종에게 기울어져 있었으므로 금성대군과 동조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글쎄올시다.  마음이 옳게 박힌 사람은 수수방관(袖手傍觀)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슨 좋

은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반문하는 것이었다.

  "무슨 좋은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요.  하지만 네멋대로 하라고 내버려두기는 싫소.  나는 

이런 내용의 간단한 격문을 하나 만들고 싶은데 하나 좀 만들어 주겠소?"

  "글은 부족합니다마는 만들어 보겠소이다.  그런데 내용은요?"

  "세조는 인륜대도를 짓밟으면서까지 왕위를 약탈한 천하의 대죄인임을 천명하고 다음으로 

단종을 복위(復位)케 하는 것은 나라를 올바로 살리며 동시에 백성을 살리는 첩경이라고 역

설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잘 생각해서 만들어 보오."

  대군의 지시대로 이부사는 격문을 만들어 금성대군에게 올렸다.  대군은 이것을 순흥병영

(順興兵營) 및 남중(南中)의 동우자(同憂者)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그런데 순흥의 관노(官奴) 하나(성명미상)는 벽과 벽 사이에 몰래 숨어서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목적으로 격문을 만들어 각지에 뿌리게 한 사실을 엿들은 후 대군의 측근에서 시종

하는 시녀(侍女)의 손을 빌어 격문 몇장을 얻어 가지고 분주히 서울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때 기천(基川=지금의 풍기) 현감(縣監)은 이 기밀을 알아내자 말을 달려 관노를 쫓아가서 

증거물인 격문을 빼앗아 가지고 상경하여 격문을 증거로 고변하였다.  세조는 고변한 현감

에게 특상을 줌과 동시에 훗일에 중용(重用)할 것을 약속하여 돌려 보냈다.

  금성대군의 복위 음모를 알게 된 세조는 대군과 동조한 사민이라면 한 사람도 남겨 놓지 

않고서 모두 참살하여 죽계(竹溪)란 시냇물에 쓸어넣게 하였다.  그리하여 죽계수가 핏물로 

한때는 홍하(紅河)가 되었고 또 금성대군은 순흥에서 안동으로 끌려가 안동옥에서 그날 그

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날 대군은 혼자서 어디로인가 없어졌다.  이 때문에 금부

도사(禁府都事=죄인을 맡아 보는 관직)는 말할 것도 없고 부사도 책임상 사면팔방으로 사람

을 내놓아 대군을 수색하게 했다.  그러나 종적은 묘연하였다.  그일이 있은지 며칠쯤 되어 

대군은 설렁설렁 돌아 왔다.  그는 돌아오기가 무섭게 파안대소(破顔大笑)하면서

  "너희들은 수만 많지 쓸데없는 존재구나.  나 하나를 못 잡으니 말이다.  내가 도망하려면 

얼마든지 하겠다만...  그런데 내가 돌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나 하나 때문에 여러 사람이 

죽을 것 같아서..."

하고 여전히 웃음섞인 말을 했다.

  대군은 죽음에 이르자 의관을 다시금 정제하고 호상(胡床)에 자리잡고 앉아 있었다.  이때 

금부도사는 금성대군에게 일어나 서향(西向)을 하라고 하면서

  "대군전하!  여기 모신 전패(殿牌=세조의 위패)에 절을 하셔야 합니다."

고 절을 하도록 강요하였다.  대군은 이 말에 대경실색(大驚失色)하면서

  "절을 하라고?  나의 임금은 영월에 계시다.  그런 말은 두번 다시 입밖에   내지 말라."

하고는 북으로 향하여 서서 통곡사배(痛哭四拜) 한 후 약사발을 마시었다.  그러나 마신 약

으로 절명되지 않아서 목을 졸라 죽이고 말았다.  이를 본 사람들은 남녀노소(男女老少) 누

구나 다 대군이 불쌍해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하고 소리를 내어 울었다.

  금성대군은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었고 세조의 다섯째 아우였다.  집권욕(執權慾)에 눈이 

어두어진 세조의 눈은 아우도 조카도 분간하지 못하였던 모양이다.

  금성대군을 죽인 세조는 뒤이어 노산군(魯山君=단종)을 죽일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이

번에는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사약(賜藥)을 받들어 가지고 영월로 갔다.  그러나 당도해

서부터는 단종이 계신곳으로 들어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주저하고 있으려니 나

장(邏將)이 주의를 시켰다.

  "그렇게 주저하시다간 시간에 지오(遲誤)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도사는 여전히 용기가 나지 않아 간신히 뜰 안으로 들어가 엎드렸다.  이때 노산

군은 당중(堂中)에서

  "나를 부르는 것 같은데 무엇 때문에 나를 부르는 것이냐?"

고 부르는 연유를 물었다.  도사는 이 물음에 대하여 쾌히 대답할 용기도 내지 못하고 그저 

어름어름하고만 있었다.  그러자 노산군이 입산한 이래 측근에서 시종을 하고 있던 젊은이

가 노산군을 교살(絞殺)할 것을 자청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그는 한 줄 궁현(弓弦=시위)으로 

단종의 목을 졸라 질식을 시켰다.  그러나 절명(絶命)하지 않았으므로 부득이 허리띠를 이어

서 조르고 또 졸라 절명케 하였다.  때의 단종의 나이는 십칠세에 불과하였다.

  이때 노산군은 교살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관이며 염구가 하나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연소한 승 하나가 와서 며칠간을 애절히 통곡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그 젊

은 승은 단종의 시체를 짊어지고 어디론지 가버렸다.

  그후 이러한 두 가지 말이 떠돌게 되었다.  그 하나는 시체를 산 속으로 가져다 태우려 

한다는 말과,  또 다른 하나는 시체를 강중에 던져 없애려는 것인가보라다는 말, 이 두가지 

말이 떠돌았다.  이 두가지 말 중 점필재( 畢齋=金宗直의 호)가 쓴 글, 즉 투강설(投江說)이 

가장 옳은 것 같다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었다.

  우리도 이 말을 쫓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이 젊은 승이란 기실은 간시도배의 개노릇을 

하는 자였던 모양이다.  단종의 넋은 지금도 여전히 강중에 표탕(漂蕩)하고 있을 것이다.


端宗 在越時의 斷 詩

  一自寃禽出帝宮,   孤身隻影碧山中

[ 한번 대궐에서 쫓겨난 이 몸,  벽산중에 외톨의 몸 되었네. ]

  假眠夜夜眠無假,   窮恨年年恨不窮

[ 밤마다 가면(의관을 입은 채 자는 것)을 하건만 잠만은 거짓이 없고,

  끝없는 한은 해마다 더욱 궁진해지질 않네. ]

  聲斷曉岑殘月白,   血流春谷落花紅

[ 두견소리 새벽 언덕에 끊어지고 새벽달이 밝은데,

  피는 봄 골짜기에 흘러 낙화가 붉어졌네. ]

  天聾?未聞哀訴,   胡乃愁人耳獨聰

[ 하늘은 귀먹어 아직도 애소(哀訴)를 못 듣고 있는데,

  어째서 수인(愁人)의 귀만이 밝은고. ]

  위에 기혹한 한시는 단종이 십오세 때 강원도 영월로 쫓겨나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자

기의 심중을 피력하여 쓸쓸히 읊은 것이다.  이 시를 보면 단종이 얼마나 재인(才人)이었음

을 알 수 있다.  무도한 세조의 집권욕(執權慾)은 이런 재주 있고 착한 조카를 내쫓아 죽이

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이조 제육대 임금인 단종의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는 영돈녕부사 여양부원

군(領敦寧府事礪良府院君) 현수(玹壽)의 딸이다.

  세종 이십이년 경신(庚申=西紀 1,440년)에 탄생하여 갑술(甲戌) 정월 이십이일에 왕비로 택

봉되었다.  을해(乙亥) 칠월에 세조가 수선(受禪)하자 세조는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로 존칭

하였다가 정축 육월에는 부인으로 봉했다.  부인은 중종(中宗) 십육년 신사(辛巳=西紀 1,512

년) 육월 사일에 팔십이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다시 말하면 송씨는 단종이 십

칠세에 처참히 시해(弑害)되자 소년 과부(당시의 나이 십팔세)로 팔십이세까지 외로이 지내

다가 세상을 등지고 만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결혼생활은 자녀를 가질 수 있는 결혼생활이 못 된데다 수난생활이 그들을 

별거시켰기 때문에 슬하에는 자녀가 있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송씨는 정말 쓸쓸히 외톨의 

몸이 되어 팔십 평생을 보내고 말았다.  송씨의 한(恨)은 정말 끝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단종의 부인 송씨의 무덤은 단종의 생질 해평부원군 정미수(海平府院君 鄭眉壽)의 묘산(墓

山) 속에 들어있다.  그 곳이 바로 지금의 경기도 양주군 건천면(乾川面)이다.  

  부인은 재세중(在世中) 서울 안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부인은 동교(東

郊)에다 집을 짖고 죽을 때까지 영월을 바라보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시의 조

정도 이 원만은 들어 주었다.

  그리하여 부인은 왕가에서 지어준 집에서 잠시 기거하다가 따로 수간 초옥을 짓고 나아가 

여기서 소의소식(素衣素食)을 하면서 최후의 날까지 단종의 명복을 빌다 세상을 등졌다.


  이조 제칠대 임금 세조는 이조 제사대 임금 세종의 둘째 아들이었다.  휘(諱)는 유( ), 자

(字)는 수지(粹之)다.

  태종 십칠년 정유(丁酉=西紀 1,417년) 구월 이십구일에 본궁에서 출생하였고 세종 십년 무

신(戊申)에 처음으로 진평대군(晋平大君)에 책봉되었다가 나중에 함평대군(咸平大君), 진양대

군(晋陽大君) 또는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고쳤다.  을해(乙亥) 윤 유월(閏六月) 십일일에 경

복궁 근정전에서 선양(禪讓)을 받았으며 무자(戊子) 구월 칠일에 예종(睿宗)에게 전위한 후 

다음날 - 곧 팔일에 수강궁(壽康宮) 정원에서 별세하였다.  재위 십삼년이었고,  춘추는 오

십이세였는데 슬하에는 삼남 일녀가 있었다.

  위에서도 이미 말한바와 같이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이었고 문종의 둘째 아우인 동시에 

문종의 아들인 단종의 친 삼촌이었다.  그러나 그의 왕위 찬탈의 야욕은 이것들을 다 생각

하지 않고 빼든 칼을 함부로 휘둘렀다.  그리하여 그는 형님인 문종시대의 모든 유신은 말

할 것도 없고 자기 조카인 단종에게 충성을 하려는 신하며 사민들을 모조리 살해하고 천하

를 수중에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인이 공노(共怒)할 살육행위를 감행한 것이다.

  그 하나는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 산골에서 잔명을 이어가는 단종을 교살해 그 시체를 강

중에 던져 어복(魚腹)에 장사지내게 한 것이다.

  또 하나는 양씨에 관한 처리이다.  혜빈 양씨(惠嬪楊氏)는 일찍이 세종의 후궁으로 뽑혀 

들어와 혜빈이란 정일품(正一品) 품계까지 갖게 된 숙녀였다.  이 양빈은 세종의 다섯 후궁 

중 가장 부덕이 완비된 여인이었었기 때문에 세종 재세시에는 가장 위함을 받고 지냈다.  

그러다가 세종 신유(世宗辛酉)에 세종의 큰 아들 문종(文宗)의 비 현덕왕후가 단종을 낳은지 

아흐레쯤 도어 돌아가자 세종은 단종의 양육을 양씨가 맡도록 하였다.

  양씨는 세종의 분부를 받들고 단종을 양육함에 전심 전력을 다하였다.  덕택으로 단종은 

열두살이 되도록 병없이 자라 문종의 뒤를 잇게까지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의 공은 더

욱 뚜렷해져 세종의 사랑과 신임이 더욱 두터워졌다.  어느날 세종은 양씨에게

  "왕자가 많기도 하지만 너무 기승해서 안심이 안 되는데 이 국새(國璽)를 맡길 일이 걱정

된다.  이를 특별히 그대에게 맡기노니 소용 될 때마다 상감께 주었다가 도로 그대가 맡고 

있으라."

하고 신신부탁하였다.  그런데 세종, 문종이 다 돌아간 후 을해(乙亥)에 이르러 세조가 단종

의 왕위를 찬탈하고

  "옥새를 가져오라."

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양씨는 한사코 이에 응하지 않고

  "옥새만은 죽어도 바치지 못하겠나이다.  대군의 부왕마마께서 생존해 계실 때에 소녀에

게 이를 맡기시며 <세자, 세손이 아닌 자로서 옥새를 내놓으라 하면 단연히 거절하라.>고 

부탁 하시었나이다.  소녀는 부왕 세종의 부탁을 받들고자 하나이다."

  대답할 뿐이었다.

  양씨에게는 소생이 한남군(漢南軍) 어(王+於:한자폰트가 없음), 수춘군(壽春君) 현(玹), 또 

영풍군(永豊君) 전( ) 등 세 왕자가 있었다.  양씨는 세조에게 생모는 아니었지만 명분상으

로는 훌륭한 어머니였다.  그러나 양씨가 자기의 명령에 불응하자 그는 서슴치 않고 당장에 

죽이고 말았다.  그 뿐만이 아니라 동생뻘인 양씨 소생의 세 왕자까지도 세상을 등지게 하

였다.


  세조는 단종의 임금 자리를 찬탈함에 앞서 첫째로 모사(謨士)를 몰색하였는데 이 물망에 

오른 것이 권남(權擥)이란 사람이었다.  권남은 경상도 안동 사람으로 기지(奇智)가 대단하기

로 이름났고 또 하나의 모사는 권남이 천거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권남의 동지로서 기계

(奇計) 그것보다도 힘으로 한몫을 단단히 보는 한명회(韓明澮)란 인물이었다.

  전자(前者) 권남은 유위(有爲)의 인재였지만 나이 서른다섯이 넘도록 알아 주는 사람이 없

어 출세를 못했고 또 후자(後者) 한명회도 권남만 못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나이 사십에 겨

우 경덕궁(景德宮=송도에 있음)지기로 출세를 했다.  이 두사람은 그들의 처지가 이러했으므

로 자연히 서로 지기가 된 것이다.

  권남이 세조의 책사(策士)로 뽑혀 들어가자 한은 권의 추천으로 행동파의 제일인자로 되

어 세조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다.  세조의 찬탈 계획은 거의 다 권남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었고 이 계획이 순순히 실행으로 옮겨진 것은 한명회의 공이었다.  이 두 사람은 세조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 되었던 존재였다.  다시 말하면 권남과 한명회는 세조에게 있어서 대공신

인 것이다.  따라서 권은 좌익 일등공신(佐翼一等功臣)이 되어 좌의정(左議政)에까지 이르러 

부귀와 공명이 하늘을 흔들었으며 또 그가 죽자 나라에서는 익평공(翼平公)이란 시호(諡號)

를 내림과 동시에 세조묘에 배식(配食)케 하였다.

  한은 좌리일등공신(佐理一等功臣)이 되어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으로 봉작되었고 벼슬은 

영의정(領議政)에까지 이르렀으며 그가 죽자 나라에서는 충성공(忠成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도 권남과 다름없이 여생을 부귀 속에서,  영달 속에서 살다 세상을 등졌다.  그러나 그 

영광이 후세에 전하지 않음은 권, 한의 부귀와 영달이 불의(不義)와 동조(同調)하였음에서 생

겨진 것이 아닐까?


  세조의 비(妃)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파평부원군(坡平府

院君) 정정공(貞靖公) 윤번(尹 )의 딸이다.  태종 십팔년 무술(戊戌=西紀 1,418년) 십일월 십

일일에 홍천 공아(洪川公衙)에서 출생하였고 세종 십년 무신(戊申)에 가례(嘉禮)를 거행하여 

낙랑부대부인(樂浪府大夫人)으로 봉했으며, 을해(乙亥)에 이르러 세조가 선양을 받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성종(成宗) 십사년 계묘(癸卯) 삼월 삼십일에 온양행궁(溫陽行宮)에서 육십육세

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슬하에는 이남 일녀가 있었다.

王妃 所生의 王子와 公主

  일남 덕종대왕(德種大王)

  이남 예종대왕(睿宗大王)

  일녀 의숙공주(懿淑公主)


後宮 所生의 王子

  일남 덕원군(德源君=이름은 曙)

  이남 창원군(昌原군=이름은 晟)

위에 기록한 두 왕자는 후궁 박씨의 소생이고 딴 후궁에게서는 소생이 없었던 모양이다.


    [淸凉浦의 어린 넋]   <生六臣의 節介 1-4>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淸凉浦의 어린 넋 

    生六臣의 節介 1 - 3



   단종(端宗)이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를 찬탈하고 이름만의 상왕(上王)이 되어 수강

궁(壽康宮)에서 비탄에 잠긴 세월을 보내는 때였다.  당시의 집현전(集賢殿) 학사들은 단종의 

복위를 위해서 은밀한 중에 계획을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모자(同謨者)의 한 사람인 김질(金 )이라는 사람은 아무래도 대세가 그른 것을 

일찍이 점치고 이 음모를 밀고하기에 이르렀고 이로 인해서 사전에 발각되어 형을 당한 집

현전 학사들이 후세(後世)에 일컫는 사육신(死六臣)이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아는 얘기이다.

  세조(世祖)는 이들을 친히 국문하고 온갖 악형과 감언이설로 자기에게 돌아오기를 권하였

으니 끝내 그들은 지조를 굽히지 않고 장렬한 죽음을 택하여 세조와 그를 따르는 인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이와는 달리 단종 복위를 위해서 직접적인 가담은 하지 않았으나 마음으로 단종을 보필한 

사람들을 일컬어 단종 생육신(端宗 生六臣)이라고 한다.  어린 단종을 보필한다는 미명 아래 

왕위를 빼앗은 세조(世祖)에게 국록(國祿)을 받는 것은 일대치욕(一大恥辱)이라고 생각한 그

들 생육신은 김시습(金時習), 남효온(南孝溫), 이맹전(李孟專), 조여(趙旅), 성담수(成聃壽), 원

호(元昊) 등으로 단종의 신하였던 것을 잊지 않고 두문(杜門하여 세상을 등진 채 늙어 죽었

다.  

  여기에는 생육신 이외에 두 사람이 더 소개되어 있다.  즉 권절(權節), 조상치(曺尙治) 두 

사람인데 그들도 생육신에 못지 않은 절신(節臣)이었으므로 여기 넣어서 생팔신(生八臣)의 

얘기를 쓰기로 한다.


1 . 梅月堂 金時習

  김시습(金時習)은 강릉(江陵) 사람으로 자(子)는 열경(悅卿) 호(號)는 매월당)梅月堂)이라고 

했다.  고고의 소리를 내며 세상에 나오는 시간부터 마치 글을 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 같이 

천부(天賦)의 글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세살 때 글을 읽을 수 있었고 다섯 살에는 시문(詩

文)을 지을 수 있었다 하니 그의 재간이 어떠했는가 가를 넉넉히 알 수 있다.

  중용(中庸), 대학(大學)을 다섯살 때 통해 당시에는 신동(神童)이란 이름으로 불리웠다.

  그때 집현전 학사의 한 사람이었던 최치운(崔致雲)이 어린 그를 보고 천하의 기재(奇才)라

고 칭찬하면서 지어 준 이름이 시습이라는 이름이다.

  이조의 성군인 세종(世宗)은 시습의 소문을 듣고는 어린 그를 승정원(承政院)으로 불렀다.

세종은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에게 하명하여 시습의 재주를 시험하게 하였다.  거의 

땅에 닿을 정도의 작은 키에 작은 몸매를 본 박이창은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네가 시습이라는 얘냐?"

  "예! 그러하옵니다."

  체구에 비해서 또렷하고 낭랑한 목소리에 이창은 다시 한번 어린 시습을 자세히 보았다.

  "너는 오늘 황공하옵게도 상감마마께오서 직접 네 재주를 시험하시려고 하시었으나 사정

상 내가 대신 시험하니 그리 알고 잘 듣고 대꾸하여라.  알았느냐?"

  "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좌중의 모든 사람은 그의 대답에 다시금 놀랬다.  이창은 웃음 띠운 얼굴로 시습을 향해

서 한마디 읊었다.

  童子之學 白鶴舞 靑空之末

( 어린 아이의 배움은 흰 학이 푸른 하늘가를 날아서 춤추는 듯하다. )

  눈을 반짝이며 박이창의 첫 마디를 듣던 시습의 댓귀(對句)는

  聖主之德 黃龍飜 碧空之中

( 어진 임금의 은총은 누른 용이 푸른 하늘 한가운데서 번득임과 같도다. )

  시습의 화답이 너무나 엄청나서 박이창은 몰론 거기 앉아 있던 모든 사람은 놀라고 과연 

들은 대로 신동이라고 칭송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박이창은 눈만 반짝이고 앉아 있는 시습을 얼른 안아 무릎에 앉혔다.  몇 번이나 시(詩)로

서 어린 시습을 시험했으나 회수가 거듭될수록 그의 글재주에는 아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종은 이창의 보고를 듣고 곧 시습을 내전에 들도록 하라고 분부하였다.  아직도 어머니 

품에서 젖이나 빨게 생긴 어린애였으므로 세종은 

  "시습이가 바로 너냐? 가까이 오너라."

  "예!"

  그는 머리를 조아리며 두 손을 앞에 모으고 조용히 상감 앞으로 가까이 나갔다.

  "많은 글을 배워서 성취하면 장래에 과인이 좋은 인재로 쓰리라.  알았느냐? 시습아!"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세종의 용안에 희색이 만면해졌다.  시습의 천재에 감탄한 세종은 그에게 상으로 비단 오

십필을 하사하면서

  "비단을 하사하겠으니 네가 직접 가지고 가거라."

하였다.

  시습은 머리를 조아린 채 곰곰 생각하는 것같더니 비단 필을 모두 풀어 끝과 끝을 서로 

이었다.  이렇게 오십필을 이어가더니 상감께 공손히 하례(賀禮)를 하고는 비단 한 끝을 잡

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때 아닌 비단 사태(沙汰)가 대궐 문 밖까지 펼쳐져서 보는 사람들

이 감탄하여 마지 않았다.

  "어쩌면 저리도 어린 것이 머리를 씀이 기발한가?"

  이 소문이 퍼져 하루 사이에 온 장안이 어린 김시습은 신동인 게 분명하다는 얘기가 자자

하게 되었다.

  시습의 나이 열세살이 되었을 때는 당시의 대석학(大碩學)인 김반(金泮), 윤상(尹祥)에게 학

문을 구하고 있었다.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文宗)이 병약하여 계속해서 승하하니 뒤를 이어 나이 열두살에 왕

위에 오른 것이 단종이었다.  시습은 그때 스물 한살의 청년으로 삼각산(三角山)으로 들어가

서 독서를 일삼고 있었다.  어린 단종의 자리를 탐낸 수양대군이 마침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문이 그의 귀에 들어가자 그는 땅을 치며 무심한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 성군이신 세종이 승하하고 인자하신 문종이 잇달아 승하셨다.  그런데 대도(大道)가 아

닌 왕위 찬탈이 웬말이냐?  이런 나라 꼬락서니 속에서 글을 배워 어디다 쓰고 시는 지어 

무엇하겠느냐? )

  그는 신변에 있던 서적을 모조리 불살라 버렸다. 주저함이란 없었다.  정도(正道)를 살아

가려고 배운 글이므로 정도가 무너진 세상에서는 소용이 없어진 때문이다.  그리고 머리를 

깎고 출가를 결심했다.  그는 스스로 승호(僧號)를 설잠(雪岑), 청한자(淸寒子), 췌세옹(贅世翁) 

등으로 불렀다.

  남달리 작은 키에 몸매도 작아 어디 한 군데도 위엄이 있어 보이는 데라고는 없었다.  그

러나 그는 누구도 무섭지 않고 두렵지가 않았다.  뛰어나게 영민한 두뇌에 지나칠 정도로 

마음이 곧아서 누구도 용납이 안 되었다.  지나치게 영민한 그의 머리는 화도 되었다.

  삭발한 머리로 어느 한 절간에서만 수양을 하지 않고 온나라 산천을 메주 밟듯 쏘다녔다.  

혹시 어느 사람이 그에게 학문을 구하려고 하면 마치 미친 사람 모양 돌을 던지고 활을 쏘

면서 고함을 쳤다.

  "이런 세상에서 학문은 닦아서 무얼 하느냐?  논밭이나 갈아서 배나 부르게 살면 된다.  

그것이 제일이다."

  일리가 있는 말에 수긍을 하면서도 그의 언행을 이상히 보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  어쩌

다가 벼슬아치들이 그의 눈에 띄게 되면 또 시비감이었다.

  "이 백성이 무슨 죄가 있어 너희 놈들은 백성만 들들 볶아 대느냐?"

  말을 마치고는 대성통곡(大聲痛哭)하니 당시의 벼슬아치들도 그를 미친 사람으로 대접하

고 마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달밝은 고요한 밤이면 냇가에 나가 앉아 글을 쓸 백지가 넉넉히 있을 리 없으므로 

종이 한 장을 잘게 썰어 놓고는 시를 읊으며 붓을 들어 작은 글씨로 써 내려갔다.  이렇게 

해서 종이가 까매 없어질 때까지 계속하곤 했다.  이미 붓을 버리고 시를 아니 짓기로 맹서

한 그였지만 섬광처럼 지나가는 시심(詩心)을 그냥 두기에는 안타까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손재주도 남달리 뛰어났다.  벼슬아치들을 저주하고 미워하는 그는 자연히 순박하게 

땅을 파고 세상을 살아가는 농부를 좋아해서 그들의 모습을 나무로 다듬어 만들었다. 이렇

게 형형색색의 농부 인형들을 늘어 놓고 하루 종일 보고만 앉아 있다가 끝내는 시를 적은 

종이 조각과 함께 나무인형을 불살라 버리고 한숨을 몰아쉬며 울분을 삭였다.

  목청이 남달리 좋은 그는 달밤을 즐겨하였다.  고요한 산중은 정적 뿐 아무도 없고 오직 

달만이 벗이었다.  그러면 그는 그의 낭랑하고도 우렁찬 음성으로 굴원(屈原)의 이소경(離騷

經)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읽노라면 너무나 지금의 자기하고 닮은 굴원의 심중

을 절절이 알 수 있었다.  세상이 모두 탁하고 더러운데 유독 혼자만 깨끗하려니 미친 척이

라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시습은 세종이 내전으로 불러서 하던 옥음이 아직도 귀에 울리는 것 같았다.

  "글을 성취하면 훗날 크게 쓰리라."

하던 음성이다.  그는 묵묵히 무릎을 꿇었다.  세상 인심은 그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옷깃이 젖어와도 그는 영릉(英陵=세종대왕의 묘소)을 멀리 바라보며 흐

르는 눈물을 씻으려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당시의 현관(顯官)인 서거정(徐居正)을 시중에서 만났다.  그의 신랄한 입이 가만

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다 떨어진 옷에 허리를 새끼로 두르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강중(剛中)은 그동안 살아 있었소? 불의(不義)의 부귀란 부운(浮雲)과 같은 것! 그것을 아

직도 깨닫지 못하였다니 답답하구료."

  서거정은 언제나 시습을 국사(國士)로 존중할 줄 아는 너그러운 인품을 지닌 사람이었으

므로 그저 묵묵부답(默默不答)으로 입가에 미소를 띠고 듣고만 있었다.  이러한 얘기들이 세

조의 귀에 아니 들어갈 리가 없었다.  어느 날 세조는 내전에서 열리는 법회(法會)에 시습을 

불렀다.

  임금의 명을 차마 거역하지 못하는 것이 신하 된 몸이다.  직접 벼슬에 참례하지는 않았

어도 만 백성은 임금의 신하임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는 싫어하면서도 법회에 참례할 수

밖에 없었다.  법회는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더 앉아 있기가 이제는 진정으로 지루하고 먼

동이 터오자 몸이 비틀리는 듯 했다.

  아까부터 빠져 나갈 구멍만 찾고 있던 시습은 모두들 밤을 세운 새벽이라 피곤하여 눈이 

몽롱해져 있음을 틈타서 슬그머니 일어서서는 쏜살같이 뛰어나갔다.  어느 누가 감히 상감

이 친히 연 법회 자리를 도중에서 뛰어 나갈 수 있단 말인가?  모두들 정신이 번쩍 들고 

아연해져서 곧 세조에게 품하자 상감은 진노해서 곧 잡아들이라고 추상 같은 하명을 내렸

다.  사령(使令)은 뒤쫓아 나갔다.

  그러나 쫓아가던 사령은 기가 막혔다.  똥과 오줌과 가진 오물(汚物)이 범벅이 되어 있는 

구덩이 속에 으젓이 얼굴만 내어 놓고 있지 않은가?  마구 휘저어 놓아서 냄새는 천지를 

진동했다.  사령은 고함을 쳤다.

  "어서 나오지 못하겠는가?"

  "안 나가겠다.  어서 데려가고 싶으면 이리로 들어와서 안고 나가거라 하하...."

  시습은 가가대소를 하며 사령을 골려 주고 있었다.

  "고얀놈! 감히 누구의 명령이라고 네가 어기느냐?"

  "이 똥만도 못한 더러운 앞잡이 놈아! 똥과 오줌이 무서워서 앞에도 못 오느냐?"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일 것이다.  사령은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한

참이나 망설이다가

  "별 미친 놈 다 보겠군!"

하고 투덜거리면서 돌아가 버렸다.  그야말로 욕해도 통하질 않고 미친 척하니 속수무책(束

手無策)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살다가 나이 마흔일곱이 되는 해에 무슨 생각에선지 머리를 기르고 부인을 

맞아 들였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이제야 자기 정신으로 돌아간 줄 알고 이제는 세조에 나가 벼슬도 하

고 부인과 부귀도 함께 누리라고 제가끔 그에게 권해 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전과 마찬

가지로 생활하면서 이 세상에서는 이대로 초토에 묻혀 사는 것이 훨씬 좋다고 대답하곤 했

다.

  그는 또 죄없고 명리(名利)를 모르는 순진한 애들과 놀기를 즐겨했다.  하루는 거리에서 

애들과 놀고 있는데 영의정(領議政) 정창손(鄭昌孫)이 그 앞을 지나갔다.  그의 험구(險口)가 

또 시작되었다.

  "여봐라! 정창손아!"

  당대의 세도가인 정창손을 함부로 이름을 불러대는 사람이 어디 있던가? 상감도 영의정

이나 기타 대감(大監) 청호를 받는 사람들에게는 하대를 못하는 법이었다.  오로지 시습만 

할 수 있는 행동과 언행이었다.  시종들도 정창손도 발을 멈추었다.  이 꼴을 보던 사람들도 

가슴을 떨며 그 귀추를 겁 반 호기심 반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욕을 해대었다.

  "정창손아! 네놈이 영의정 자리에 올라 섰구나.  그래 그 자리가 그다지도 연연하더냐? 십

년세도가 없다는 진리를 모르고 살지는 않을 텐데...  지금이라도 늦지는 않다.  전비(前非)

를 뉘우치고 깨끗이 물러서거라!  어떠하냐?  내 말이..."

  미친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듯이 정창손은 탓하지도 않고 초헌( 軒)을 

재촉해서 자리를 피했다.

  시습은 그 뒷모양에다 대고 가가대소를 퍼부었다.  필시 후환(後患)이 무서울 거라고 거기 

모여선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고 생각했다.

  시습의 언행이 이렇게 두려운 것이 없이 거칠었기 때문에 그와 친분이 있던 사람들은 하

나하나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와 가깝게 지내면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 지

목당하고 자기 몸에 화가 미칠 듯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종실 중의 한 사람인 수천부정(秀川副正) 정은(貞恩)을 비롯하여 남효온(南孝溫), 안

응세(安應世), 홍유손(洪裕孫) 등은 여전히 그를 비호하고 친교를 끊지 않았다.  세상사란 버

리는 사람이 있으면 줍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 진리이다.  그들은 시습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 수있었다.  그리고 천재는 기인(奇人)이라고 하는 말은 곧 이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라고 믿었다.  또 어린 상감이 왕위에 있는 것을 기화로 대군의 신분으로 왕위를 찬탈한 세

조를 미워하는 그의 기백이 가상하기도 해서 그들은 시습을 높이 생각했다.

  세월이 흐르고 부인 복도 못 타고난 모양인지 시습은 늦게나마 얻은 부인을 잃었다.  그

러나 그는 흔연했다.  별로 크게 괴로워하지도 않았다.  세상과 벗하고 살 팔자가 못 된다고 

일찍이 체념을 하였기 때문일까?

  그는 다시 머리를 깎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전처럼 강릉, 양양간을 왕래하면서 산천과 

더불어 살아갔다.  그때에 양양 원으로 있던 유자한(柳自漢)은 그를 대할 때마다 특별한 예

로서 대했다.  그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유자한은 항상 자기를 찾는 그에게 극진한 예로서 충고를 잊지 않았다.

  "다시 가업을 이으시고 안온한 생활을 하십시오."

  "아니요.  세상 꼴이 하두 뒤승숭하니 산이나 물이나 벗하고 사는 편이 훨씬 마음에 편안

하오."

  시습은 언제나 이렇게 대답하면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것이었다.

  시습은 탁월한 손재간으로 산에서 나무를 잘라 잘 다듬어서 자화상(自畵像)을 두 가지로 

만들었다.  하나는 젊었을 때의 자기의 얼굴이요, 또 하나는 늙었은 자기였다.  그는 한적할 

때면 두 화상을 꺼내 놓고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네 얼굴이 지극히 못났고 네 말이 망언(妄言)으로만 일관하니 이렇게 초토에 묻혀서 고생

함이 마땅하다."

  이 말이야 말로 자신을 한탄해 마지 않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랴!  일찍이 세 살에 글을 

이해하고 다섯 살에 중용, 대학을 통독하여 작시를 일삼은 천재도 이군(二君)을 섬길 수 없

는 지조로 인해 초토 속에 묻혀 사라지고 말았으니 후세에 뜻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배울 점

과 아울러 생각할 점을 남기고 있다.

  그는 쉰아홉 천명(天命)을 다하는 날까지 산천을 소요하면서 지냈다.  그를 아는 사람은 

그가 가진 천부의 재간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를 모르고 이해

할 수 없는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미친놈>이라고 가벼이 부르며 천대했다.  그가 나이 쉰

아홉에 세상을 뜬 후 숙종(肅宗)조에 와서 그에게 집의(執義)의 벼슬을 내렸다가 다시 정조

(正祖) 때에는 이조판서(吏曹判書)를 내리고 청간공(淸簡公)이라는 시호까지 하사하였다.

  그가 죽은 후에 자손이 없었으므로 홍산(鴻山)에 있는 무량사(無量寺) 곁에 빈소(殯所)가 

마련되고 삼년을 지냈다.  삼년의 춘풍 추우가 지난 후에 그를 장사지내려 개관(開棺)한 사

람들은 다시 한 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시습의 시체는 살아 있을 때의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절에 있던 중들은 혀를 내두르며 모두들 탄성을 올렸다.

  "과연 부처님이 되신 게 틀림없다."

  그들은 시습이 생전에 있을 때도 안하던 일을 서슴지 않고 했다.

  합장을 하고 그를 가리켜 <부처님>이라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제

가끔 고개를 숙이며 염불을 했다.

  그들은 두렵기까지 했다.  시습이 생존했을 때 미친놈 취급을 하던 자기들 스스로가 큰 

죄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2 . 秋江 南孝溫

  남효온(南孝溫)은 의령(宜寧) 사람으로 호(號)를 추강(秋江)이라고도 하고 행우(杏雨)라고도 

불렀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글 보기를 좋아하고 글 짓기를 천적인 양 글 속에 묻혀서 지냈

다.

  일찍이 대학자인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글을 닦고 인격을 기르기를 게을리하지 않았

다.  일취월장(日就月將)하여 가는 제자의 학문에 김종직도 항상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

는 효온을 대할 때마다 이름을 부르지 않고

  "우리 추강! 우리 추강!"

하면서 그를 경칭(敬稱)해 마지 않았다.

  당시 석학으로 유명한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김시습(金時習), 안응세(安應世) 같은 

대선배들도 효온을 형제와 같이 애지중지 아끼고 사랑했다.

  성종(成宗)시대, 그의 나이 이십칠세 때였다.  그는 임금께 소릉(昭陵=문종의 왕후의 능)을 

복구(復舊)시켜 달라는 상소(上疏)를 올렸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상소문이 무시당한 것을 알게 되자 이때부터 세상을 등지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명승지와 명산을 벗삼고 세월을 보내자는 심산이었다.  울적한 마음을 풀길 없는 생활이 

계속 진행되었다.  높은 산에나 올라가자! 그리고 마음껏 이 마음을 달래어 보자! 그래도 시

원치 않으면 소리를 높여 통곡이나 해보자!

  얼마 후 그는 다시 마음을 고쳐 부중(府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부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조정의 일이나 부중의 일이 그의 마음을 편안케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참고 있을 수가 없도록 모든 것이 눈에 거슬리고 귀를 시끄럽게 했다.  

그가 사건 하나 하나를 예리하게 비평하며 비난을 일삼자 사람들은 모두

  "저 사람이 저런 말을 함부로 해도 괜찮단 말인가?"

하고 마치 자기 일 모양 걱정을 해 주었다.  친형제처럼 지내고 있는 김굉필, 정여창은 항상 

그의 말을 위험하게 느껴서 충언을 잊지 않았다.

  "여보게 추강! 옛부터 입은 화의 문이라고 해왔네. 제발 아무리 비위에 안 맞는 일이 있어

도 참고 함부로 떠들지 말게."

  그러나 그의 귀는 선배들의 충언이 들리지를 않는 듯 여전히 위언(危言)과 격론(激論)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대했다.

  어느날 매월당 김시습은 효온을 찾았다.

  "여보게 추강! 그대는 무엇 때문에 부귀를 등지고 백면서생을 일삼으려 하나?"

  "형은 왜 그렇게 석학의 머리를 썩히고만 있소?"

  효온의 재빠른 반문에 시습은 서슴지 않고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야 일찍이 세종대왕의 지우(知遇)를 얻어 성은에 보답하려고 학문을 닦았으나...  그대

는 무엇 때문에 고생을 사서 하느냐 말일세!"

  "모르시는 말씀이요. 매월당은 소릉사(小陵事)를 천지의 변으로 아시우? 그렇지 않으면... 

나는 소릉이 복구되지 않는 한 부귀도 영화도 안중에 없소이다."

  "과연 추강의 말이 옳소.  나 역시 오늘날의 고생이 낙으로만 여겨지는 터이니."

  과연 열사의 기풍이 역연했다.  세상꼴이 보기 싫으면 효온은 표연히 산 속으로 들어가 

가슴을 달랜 후에 다시 부중으로 들어오곤 했다.  이러한 생활이 계속되는 도중 그는 문득 

<사육신>의 유지(遺志)를 후세의 사람들에게 전해서 충의의 본보기로 만들고 싶었다.

  그는 드디어 만난을 무릅쓰고 이들 학자들의 충성심을 청사에 남기기로 결심하고 붓을 들

었다.  성삼문 등의 갸륵한 얘기들 즉, <사육신전>을 기록하려는 결의였다.

  효온의 아들이며 부인은 걱정이 되어 말렸으나 누구도 그의 뜻을 꺾을 사람은 없었다.

  어느날이었다.  사랑에서 붓을 들고 목숨과 바꾸는 대사업에 착수하고 있는 효온은 많은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선생님! 그 일만은 제발 고만두십시오!"

  <사육신전>이라는 말까지도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처럼 제자들은 <그일>이라는 말로 대신

하였다.  그러나 효온은 시치미를 딱 떼었다.

  "아니! <그일>이라니 무슨 소리냐?"

  "아니올시다.  지금 집필중에 있으신 것 말씀입니다."

  "너희들 하고는 말하고 싶지도 않다.  어서들 물러가라."

  "선생님! 저희들은 어디까지나 선생님 신변을 염려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제발 삼가주

십시오."

  "듣기도 싫다.  너희들은 학문이란 무엇 때문에 연마하고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는 위

인들이다."

  "그러나 군자는 위험한 곳에 가깝게 가지 않는다는 말과 같이 지금 이런 세상에서는 근신

하는 길만이 잘하는 거라고 저희들은 생각됩니다."

  "그러면 너희들 잘 들어라.  모두들 글을 쓸만한 문인(文人)들이 조정의 행패가 두려워 현

인들의 충의를 기록해서 남기지 못한다면 길이길이 한이 될 것이 아닌가?  자네들은 어떻

게 생각하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만...  세상이 하두 뒤숭숭해서 말씀을 여쭙는 것입니다."

  "자네들 심중을 헤아리지 못하는 나도 아니지만 현세에 내가 아니 쓰면 감히 이 대사업을 

해낼 용기 있는 학자가 없을 걸세. 그러니 나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 <사육신전>만은 완성

해서 세상에 널리 알리고 후세에 전하도록 하겠네."

  그의 뜻이 너무나 거룩하고 간절하였으므로 그 다음 말을 누구도 잇지를 못하고 숙연히 

앉아만 있었다.

  붓을 다시 잡은 그는 문장의 진행과 더불어 같이 울고 같이 한숨지으며 끝내 힘찬 기백으

로 <사육신전>을 탈고하기에 이르렀다.  당시에 남효온이 없었던들 아무도 사육신의 원통한 

혼을 위로할 사람이 없었고, 사육신의 충성스런 면모를 들어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술을 굉장히 좋아했다.  울적해서 한잔, 세상꼴이 답답하다고 한잔, 위언격론을 일삼

기 위해서 한잔, 거의 사시 장취(長醉) 속에서 지냈다.  언제나 취중에서 사는 아들을 둔 어

머니의 심정은 말할 수 없이 답답했다.  그래서 효온의 어머니는 기어코 그에게 충고를 하

기로 결심하고 어느날 그를 불러 앉혔다.

  "얘야! 술은 과하면 광약(狂藥)이 되는 법. 네가 그것을 모르고 마시는 건 아니겠지만 어미 

마음이 너무나 답답만 하구나."

  그의 몽롱한 정신에서도 어머니의 이 말은 귓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예. 소자가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나 취하지 않고 맑은 정신으로는 못 사는 자식이오니 

어머님께서는 양해하시고 너무 허물하지 마십시오."

  "아니다.  네 어미가 너를 허물하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네 몸을 위해서나 집안을 위

해서나 아주 술을 입에다 대지 않고 지내도록 힘써다오."

  어머니의 눈이 빛나고 있음은 가슴이 저려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앞으로 얼마 더 사시지도 못하실 어머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고는 싶지 않았다.  그는 

단주(斷酒)를 순간적으로 결심하고 머리를 들고 어머니 앞에서 맹서를 했다.

  "어머님! 심려를 끼쳐 드려서 죄송하기 그지 없습니다.  단연코 오늘부터 술을 끊어 어머

님 말씀에 부응(副應)하겠사오니 소자를 용서하시고 걱정을 놓으십시오."

  어머니는 기뻤다.  그러면서도 잘난 아들이 세상을 잘못 만나 괴로워하며 술로 잊어버리

려는 것을 슬퍼하였다...

  그는 그렇게도 좋아하는 술을 한 모금도 안마시고 지주부(止酒賦)라는 글을 지어 어머니

에게 드렸다.  모든 세상사를 잊을 수 있는 단 한 가지 길은 술의 힘을 빌리는 일이었으나 

어머니와의 약속대로 십년이라는 긴 세월을 단음(斷飮)하고 지켜 나갔다.  그는 울적할 때는 

더욱 학문을 닦았고 글을 썼다.

  세조 치하에서는 과거를 아니 하려고 결심한 그였지만 울적한 마음의 분출구는 글과 벗하

는 것뿐이었다.

  세상을 탄하면서 글 속에서만 묻혀 사는 아들을 보는 어머니는 그 일도 답답하게 보였다.

  "얘야, 넌 학문만 닦아서 무얼 하겠다는 거냐?  남과 같이 과거도 해서 세상에 그 재주를 

알려야지.  그대로 머리 속에만 쌓아 두어서는 소용이 없지 않으냐?"

  어머니 걱정은 보통이 아니었다.  늙은 어머니의 말에 가슴이 저려온 그는 어머니를 즐겁

게 해주기 위해서는 무엇이나 하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그는 생각했다.

  (옳지! 장원급제를 해서 어머니를 또 한 번 기쁘게 해드리자.  그러나 벼슬은 하지 말자.)

  "그럼 이번에 진사과거(進士科擧)를 응시하겠습니다.  어머님의 소원이시라면..."

  "오냐! 과연 효자로다.  그렇듯 싫어하면서도 이 에미를 위해서 과거에 응하겠다니...  과

연 내 아들이다."

  어머니의 기쁨은 상상 외로 컸다.

  그는 약속대로 과거에 응시하였고 무난히 급제할 수가 있었다.  온 집안의 기쁨은 형용할 

수 없이 컸고 그 뿐만 아니라 가까이 있는 그의 제자들도 이제는 선생님이 정신을 차리시고 

출세를 꿈꾸시나보다고 자기 일처럼 기뻐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예상은 하나도 맞지 않았다.  누가 권해도 그는 결코 벼슬은 하려 하지 않았

다.  그렇게도 효성스런 아들이었지만 벼슬하기를 권하는 어머니의 말은 한사코 듣지 않았

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양해를 구했다.

  "어머니, 제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항상 입버릇처럼 말씀 드린바와 같이 소자는 절대적으

로 이 세조치하에서만은 국녹을 아니 받겠습니다.  누가 뭐래도 이 소자의 결심은 동요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너 혼자만 버티어서 무얼 하겠다는 거냐?  신숙주 같으신 대학자님도 지금의 상

감을 받들어 많은 일들을 해 오시고 있다는데..."

  "그런 역적의 얘기는 어머님 입에 올리지도 마십시오.  어머님 입이 더러워질까 소자 저

으기 걱정이 됩니다."

  "아니다.  세상은 그런 것만은 아니다.  너 혼자만 유독 그렇게 곧은 척해보아야 세상이 

알아 주는 법이 아닌데.  네 생각이 이 에미로선 여간 답답하고 안타까운 게 아니구나?"

  "어머님! 어떤 말씀으로 저를 나무라시고 권하셔도 그 결심만은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불효막심한 소자를 용서하십시오."

  말을 마치고 두 모자는 함께 울음을 삼켰다.  아들은 아들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의 슬

픔을 동시에 터뜨린 것이다.

  그는 길지 않은 생애를 마쳤다.  천수가 삼십구세였다니 너무나 그의 글이 아깝고 또 충

성이 아깝다. 

  세월이 흘러 이조 정조(正祖) 갑진(甲辰)에 조정에서는 이조판서란 높은 벼슬로 고인의 충

혼의백(忠魂義魄)을 위로하고 시호를 문정공(文貞公)이라고 내렸다.


3 . 耕隱 李孟專

   이맹전(李孟專)은 벽진(璧珍) 사람으로 호(號)를 경은(耕隱)이라 일컬었다.

  세종(世宗) 정미(丁未)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출세하였다.  그러나 

집안 사정으로 상왕초(上王初)에 지방관으로 내려가 거창 현감으로 있었다.

  청백리(淸白吏)로서 그 이름이 청사에 빛나는 너무나 유명한 그는,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소문이 자자한 세조의 횡포를 귀 가지고 들을 수없고 눈 뜨고는 볼 수 없었다.  그는 감연

히 벼슬자리를 내 놓기로 결심했다.

  벼슬을 사는 동안에도 청백리로 이름이 떨쳤으므로 현감을 내놓고 선산(善山)으로 물러나

온 후의 생활은 이루 형용하기 난감할 정도였다.

  세조는 그의 뛰어난 문장을 아깝게 여겨 사람을 시켜 몇 번이나 재고를 권고해 왔다.  그

러나 그는 굳이 고집하고 응하지를 않았다.  삼십여년 두문불출(杜門不出) 사랑방만 지키고 

산 그는 단 한 번도 북향(北向)해서 자리를 앉은 일이 없기로도 유명했다.

  당시의 선비가 벼슬을 아니 하면 궁색하기란 불을 보는 것과 같이 환한 얘기였다.  날이 

갈수록 집안 살림이 궁핍하다 못해 끼니가 간데 없이 되고 방은 뚫어지다 못해 흙이 꾸역꾸

역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막을 만한 자리하나 마련할 형편이 못되었고 어쩌다 

지어낸 밥상에는 똑똑한 수저 한 벌이 없었다.

  진정 적빈(赤貧)이란 씻은 듯하다더니 이 경우를 두고 한 말이 틀림없었다.

  그는 항시 세상을 귀찮게 여기고 그를 긴히 만나고자 찾는 사람도 만나기를 꺼려 하였다.  

그의 자제들은 이 일을 걱정하다 못해 가장인 맹전에게 물었다.

  "왜 모처럼 찾아오는 친지들도 아니 만나시고 사절하십니까?"

  "그런 것은 너희들이 걱정할 문제가 못된다.  나는 몸이 불편해서 수양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서이다."

  밥도 제대로 못 끓이는 이 집 형편에 약을 구할 도리가 없으므로 그의 부인이나 자제들은 

근심은 여간 큰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외부 사람을 늘 사절하는 그였지만 매달 초하룻날이 되면 새벽같이 자리를 걷고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는 동천에 떠오르는 해를 향하여 재배 삼배를 공손히 마쳤다.  그의 

이런 행동은 식구들의 의구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넉넉했다.  궁금한 식구들은 그에게 또 물

었다.

  "매월 초하룻날이면 동천을 향해서 해에다 배례를 하시니 그건 무슨 뜻입니까?"

  "너희들은 몰라도 좋으니라.  그저 내 몸에 병이 들어서 하느님께 완쾌를 기도 드리는 것

이다."

  "그러면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하늘에 기도를 하시지 왜 동배(東拜)를 하시는지 참말로 이

상하군요?"

  "그런 것은 모두 몰라도 좋은 일.  아예 걱정들은 할 필요가 없느니라."

  맹전의 대답이 이러하니 가인(家人)들도 더 이상 물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느날 김종직(金宗直)이 맹전을 찾아왔다.  맹전이 아무도 만나지 않고 두문불출을 일삼

는다는 얘기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찾는 것이 옳은 일인지 주저되었지만 위문도 할겸 만나

자는 청을 들여보냈다.

  가인이 이 말을 맹전에게 전하자 그는 거의 뛰다시피 나가서 종직의 손을 마주잡고 맞아

들였다.  집안 모든 사람들은 그의 행동에 납득이 가지 않아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김종직

은 들은바와 달라 그의 병이 완쾌되었나 싶어 물어보었다.

  "선생의 병환이 좀 쾌복(快復)되신 것 같사온대 어떠십니까?"

  "병이 하룻동안에 완쾌될 리야 있겠습니까?  하오나 선생과 같은 대인군자를 만나 뵙고 

흉금을 털어 놓고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오늘 얻은 것 같아서 이렇게 기운이 나는 것 같습

니다."

  그 말을 듣고야 김종직도 그의 흉중을 살필 수 있는 것 같아 흐뭇했다.

  "이선생, 그 심중과 뜻을 얼마쯤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 더욱 서로 자

중자애(自重自愛)하여 세상을 큰 눈으로 바라보며 살아나가십시다."

  "예! 김선생도 부디 오래오래 사셔서 나라가 되어가는 꼴을 지켜보십시오."

  그들은 이와같이 뜻 깊은 약속을 교환하고 재회를 얘기하며 헤어졌다.

  김종직은 그제서야 맹전의 병은 신체의 병이 아님을 깨닫고 은근히 기쁨을 감추지 못했

다.

  맹전의 부인이 들어왔다.

  "영감, 이러다간 모두들 굶어 죽겠소이다.  어떻게 조치를 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글쎄, 난들 어떻게 하오?"

  "그러니 걱정입니다. 애들까지도 영감 때문에 길이 꽉 막혀버려서 과거도 할 수 없고 그

렇다고 땅 한뙤기 없으니 농사를 짓는다고도 할 수 없고...  기가 막히기가 이를데 없군요."

  "그럼 당신을 날 보고 어떻게 하라는 얘기요?  얘기나 시원히 해보시구료."

  "생각컨대 그전까지는 몸에 병환이 심하셔서 그런 줄만 알고 약을 대접 못하는게 죄스럽

더니 이제는 그렇지도 않으신 것 같고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니 그렇지 않다니, 내 병이 그럼 하루 아침에 이슬 사라지듯 사라졌단 말이요?  무슨 

말이요?"

  "그게 아니라 김종직 선생이 오시던 날은 몇 시간이나 일어나 앉으셔서 아무 병환도 없으

신 것같이 오랜 시간 얘기도 나누시고 얼굴빛도 참으로 좋으시던데요."

  "그야 지지지우를 만나니 어찌 반갑지 아니했겠소."

  "그러시겠지만 옆에서 뵙기에도 조금도 병환이 있으신 분 같지도 않더군요."

  "그렇게 알면 되지 않소."

  "그러지 않아도 한 걱정 덜어서 요사이는 집안이 한결 명랑해진 듯해서 드리는 말씀이예

요."

  "아뭏든 잘 된 일이요."

  "여보, 영감! 제발 못 이기는 척하시고 조정에 좀 참례해 보시구료.  이렇게 더 가다간 영

감은 물론 식구들 전부가 굶어 죽기 알맞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할 수 없는 일!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라는 옛 성현의 말씀이 있지 않소.  그 더

러운 나라 안에 들어가 국록을 받아먹고 생을 계속하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고 죽어 없어지

는 게 얼마나 장한 일이라는 걸 언제나 나는 주장하고 있으니 다시는 내게 그런 말로 괴롭

히지 마시오."

  부인은 어지간히 답답했다.  진정으로 모진 목숨을 억지로 끊을 수도 없고 살아 나가자니 

조석으로 먹을 양식을 걱정해야 하므로 절로 한숨이 나왔다.  남편의 청백한 성격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아는 부인은 더 권해 보아야 영감만을 괴롭히고 아무 소득도 없다는 것을 너

무나 잘 알고 있었다.

  집안에 재산이 있어서 생활을 걱정하지 않고 지내는 터라도 이렇게 벼슬을 고사(固事)하

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조반석죽도 못 이어가는 이러한 처지에 벼슬을 사양하는 것은 그가 

아니면 감히 아무도 흉내도 못낼 일이었다.

  상인(商人)이 아닌 양반의 자제들이 과거에 응하지 않고 벼슬을 못하여 생기는 궁상이란 

지금의 우리들은 상상도 못할 만큼 비참한 일이었다.  혹 뜻있는 사람이 있어 그를 동정하

여 얼만큼은 보태어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번이지 사시사철을 그렇게 지낼 수는 없었다.  또 나라와 등지고 공공

연히 임금을 반대하는 역적과 비슷한 이들 선비와 식구들을 도와줄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

았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는 구십을 살았다고 한다.  그 동안에 그의 굶주림과 헐벗음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

음이 있다.

  그가 세상을 뜬 후 정조(正祖) 신축(辛丑)에 이조판서(吏曺判書)의 벼슬을 증(贈)하고 동시

에 정간공(靖簡公)이라는 시호를 내려 그의 한결같은 충혼(忠魂)을 위로하였다.


    [淸凉浦의 어린 넋]   <生六臣의 節介 4-8>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淸凉浦의 어린 넋 

    生六臣의 節介 4 - 8



4 . 漁溪 趙旅

  조여(趙旅)는 함안(咸安) 사람으로 호(號)를 어계(漁溪)라 했다.

  단종 계유(癸酉)에 진사문과에 무난히 등제(登第)하여 출세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의 문장은 탁월해서 사림(士林)으로부터 많은 신망을 얻었다.  그러던 어느날 조여는 돌

연히 유생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였다.

  무슨 일인가 의아한 눈으로 보는 동문들에게 자기 고향으로 돌아갈 뜻을 밝혔다.

  그는 고향으로 내려온 이래 을해(乙亥)년 들어서부터는 대과에도 참가하지 않고 두문불출

을하고 지냈다.

  을해년은 단종이 수야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바로 그해다.

  조여는 수양대군 곧 세조의 신하가 되기 싫었고 그의 정도(正道)가 아닌 찬탈이 밉기 그

지 없었다.  어린 왕을 보필해서 선정을 해야 하거늘 어린 상감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많은 

충신을 죽이고 일가를 몰살하는 그 야망이 미웠다.  그의 시문(詩文)에는 항상 고사리를 채

식(採食)하면서 세상을 등지고 살고 싶어 하는 뜻이 실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대도가 짖밟히는 세상꼴이며 나라 사직이 근심되었다.  이런 면에서 

조여는 김시습과 뜻을 같이 했고 서로의 학문을 존경했다.

  그 무렵 상왕이던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산골 영월(寧越)로 귀양살

이를 떠났다.

  청량포(淸凉浦) 근처에 자리잡은 노산군의 우거(寓居)를 가려면 나룻배가 그 강을 건너다

주어야 했다.

  그러나 나라에서는 억울한 노산군을 찾을 충신들과 뜻있는 사람들의 왕래를 막기 위해 교

통을 두절시켰다.  따라서 청량포에 있는 모든 나룻배는 누구도 움직일 수 없도록 엄명이 

전달되어 있었다.

  조여는 고향으로 내려가서 초옥에서 글만 읽고 지냈으나 어린 상감의 생각이 떠날 때가 

없었다.  멀리 상감이 계신 곳은 오백리나 상거한 곳이다.  지금은 무얼 하시고 계실지, 중

전까지 헤어지시고 홀로 산골 두메에서 무엇을 잡숫고 어떠한 지경에 놓여 계신지가 자못 

궁금하고 염려 스러웠다.

  그렇게도 총명하신 중전께서는 또 얼마나 지아비를 생이별한 슬픔을 안고 지내시는지 모

두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상감이 계신 곳에 가서 한 번 뵙고 싶었다.

  그러나 왕래를 끊고 배를 금지했다니 그 일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여간 그는 아침 일찍 

단종이 있는 강원도 영월 땅으로 향해 떠나기로 결심했다.  오백리 길이니 하루에 칠, 팔십

리씩 걸어가도 칠일은 걸린다.  직접 용안을 못 뵈어도 상관없고 그저 옥체가 만강하신 것

만 듣고 오면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그 이튿날 새벽녘에 일어나 길을 떠났다.

  첫날은 거의 백리길을 걸을 수 있었으나 다음날은 조금 피로했으므로 걸음이 느려지고 그 

다음날, 또 다음날은 점점 걷는 거리가 짧아졌다.  그러나 상감의 옥체를 염려하는 그의 마

음은 몸의 피로를 잊을 수 있게 하였다.

  일주일안에 그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몸은 정말 솜같이 피로해 있었다.  그는 멀리 상감

의 동헌이 바라보이는 청량포 앞에 와 닿았다.  바로 강 건너 있을 상감의 용안을 우러러뵙

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눈물이 마냥 흘렀다.

  "상감마마! 소신 조여가 멀리 용안을 우러러 뵈오려 오백리 길을 멀다 않고 왔사옵니다. 

굽어 살피옵소서."

  그는 상감이 계실 동헌을 향해 마치 앞에서 듣고 있는 것처럼 이렇게 말하면서 국궁배례

를 하였다.  그리고 곧 근처에 있는 친구인 원관란(元觀瀾)의 집을 찾았다.  원관란의 집에

서 유숙하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상감의 근황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유관란은 놀라는 얼굴을 감추지 못하면서 조여를 반겼다.

  "이것이 웬일이시오?  오백여리 먼 길을...  과연 그 충심이 하늘에 닿겠소이다."

  "무슨 말씀을.  자나 깨나 귀양 오신 상감 옥체만이 나의 관심의 전부인 것을...  수일 폐

를 끼치게 될 것이 걱정이요."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푹 쉬시고 몸이 다풀리신 다음에 떠나시도록 하십시오."

  "고맙소이다.  항상 친구같이 좋은 것은 없는가 여겨집니다.  그건 그렇거니와 상감께서는 

옥체만강하옵신지 궁금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예, 바로 상감께서 유합시는 근처에 사는 촌부를 한 사람 알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의

하면 늘 동안에 홀로 나가 앉아 계신답니다.  예전대로 곤룡포를 입으시고 으젓이 앉아 계

신 용안을 뵈올 때마다 그 고을 모든 사람이 눈물로 옷깃을 적신다 하더군요."

  "오호! 과연 상감마마는 위풍당당하시군요.  어떻게 하면 한 번 가뵐 수 있을지..."

  그는 혼자서 상감을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잡숫고 지내시는 일을 어떠 하시온지 알고 계십니까?"

  "예, 그 얘기도 촌부에게서 들은 얘기인데 근처에서 잡히는 좋은 생선은 모조리 제일 먼

저 상감께 진상하는 사람이 많이 있고 또 수라를 받드는 하인도 충성을 다하고 있다고 들었

습니다."

  "과연 하늘의 비호입니다.  제발 성수무강하시어서 다시 햇빛을 보시고 억울함을 씻으실 

날이 있어야 하겠는데..."

  두 사람은 한숨만 쉬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는 밤마다 어두어진 청량포 강가에 나와 앉아 건너편에 보이는 상감의 동헌을 향해 만

수무강을 빌고는 큰 소리로 성수만세(聖壽萬歲)를 호창(呼唱)하였다.

  그저 오래 오래 살아주어야만 일이 다 성취될 듯 싶은 마음이 이런 행동을 낳게 한 것이

었다.  

  며칠을 유숙하고 그는 고향으로 되돌아 왔다.  그러나 고향에 돌아온 날부터 그는 또 상

감의 소식이 알고 싶어졌다.  솜같이 피곤해진 몸을 쉴 말미도 아니 주고 그는 다시 영월로 

떠났다.  

  이렇게 그는 영월과 고향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한달에도 날짜가 허락하는 한 상감 곁 영

월 땅에서 살기를 즐겨했다.

  세월은 흘러 상감이 영월로 정배를 가고 삼년째 되는 정축년(丁丑年) 정월 초열흘.

  바로 하늘도 땅도 같이 호곡해 마지 않은 단종의 마지막 날이었다.

  조여는 마침 고향에 와 있었다.  영월을 등지고 온지 열흘도 채 안 된 날이었던 것이다.  

그는 가슴이 메어지듯 아파 오는 것을 가눌 길이 없었다.  땅을 쳐도 보았다.  가슴을 쥐어

뜯어도 보았다.  그러나 원통함은 풀리지 않았고 이제는 이미 가신 님에게 대한 단심만이 

영월 땅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는 곧 길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상감의 눈감으신 용안이라도 뵙고 쓸쓸한 정배지에서  

상감의 옥체나마 수렴하고 싶어서였다.  주야를 가리지 않고 발길을 재촉하여 청량포 강가

에 이르렀다.

  때는 한밤중이었다.  배는 그림자조차 없었다.  강을 건너야만 단종의 빈소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는 우왕좌왕 어쩔 바를 몰랐다.  하늘을 우러러도 보았다.  눈물이 한 방울 흘러 두 뺨

을 적시자 참았던 눈물이 쏟아지며 통곡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얼마를 통곡하다 자기 정신

으로 돌아간 그는 결심을 새롭게 했다.

  (이렇게 지체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강을 건너가자.)

  그는 훌훌 의관(衣冠)을 벗어 꽁꽁 묶어 등에 짊어졌다.  그냥 알몸으로 강을 건너가기 위

해서였다.

  막 한 발을 강 속에 집어 넣으려는 순간 무엇인가 뒤에서 잡아 당기는 것이 있었다.  그

가 깜짝 놀래 멈칫하자 뒤에서 짊어진 옷을 또 한 번 잡아 당겼다.  머리칼이 하늘로 솟았

다. 그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본 그는  <흑!> 하고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옷을 잡아당긴 장본인은 사람도 아니고 더욱 귀신도 아니었다.  그것은 두 눈이 화

등잔만하게 빛나는 대호(大虎)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마음을 도사렸다.

  무서운 생각을 누르고 산중의 왕인 호랑이에게 자기의 마음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그는 

목소리를 굳건히 가다듬었다.

  "너 호랑이야! 내 옷을 왜 잡아당기느냐?  나는 불원천리 영월적소에서 한을 품고 처참히 

세상을 떠나신 상감을 뵙고자 온 것이다.  그런데 청량포가 길을 막고 있으니 이를 어찌하

면 좋단 말이냐?  하늘이 나를 도와서 이 나루를 건너거게만 되면 상감의 빈소로 가서 왕

의 옥체를 수렴(收斂)도 하겠지만...  만일 이 강을 못 건너간다면 나는 이대로 강속으로 걸

어갈 작정이다.  가다가 가다가 못 가면 이대로 창파의 귀신이 될 각오도 되어 있다.  그런

데 어찌하여 너는 내 갈 길을 방해하며 끌어 잡아당긴단 말이냐?  너는 만가지 동물중의 

명물이라고 들었는데 네게 어떤 꾀라도 있단 말이냐?  그렇다면 내게 지시를 해주렴!"

  아무리 동물 중에도 영물이라고 한들 그의 말이 들릴 리 없고 그의 뜻을 알 까닭이 없지

만 하도 다급한 끝이라 그는 이렇게 사설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가끔 세상에는 상식과 지

식으로는 이해 안 되는 일이 생기는데 바로 이때 그런 일이 생겼다.

  조여의 말을 듣고 눈만 번쩍이고 있던 호랑이는 마치 말을 알아듣기나 한 것처럼 고개를 

크게 두어번 끄떡끄떡하더니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가서더니 넓죽이 

엎디었다.

  조여는 급한 김에 말을 했지만 이렇게 되자 과연 호랑이가 영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라.  네가 나를 업어다 준다는 것이 틀림없으렷다.  이것이 천우신조가 아니면 무엇이

랴.  과연 불쌍하신 상감을 위한 하늘의 뜻이로다."

  그는 급히 호랑이 등으로 뛰어 올라탔다.  분초가 급했다.

  "어서 가자.  네 덕이 이만저만이 아니구나.  어서 강으로 내려서라!"

  그는 마치 말을 몰 듯 대호 등에 업혀서 명령하였다.  호랑이는 주저없이 강물로 뛰어 들

어 단숨에 청량포 대안에 와 닿았다.  마치 그의 명령을 알아듣기나 한 것처럼 섬광같이 빠

른 동작이었다.  호랑이 덕에 강을 건너간 조여는 호랑이 등을 어루만지며 인사를 했다.

  "과연 영물이로다.  네 은혜는 길이 잊지 않으마."

  호랑이도 조여의 말을 알아듣고 기쁜 듯이 고개를 끄떡이더니 그 큰 몸집을 서서히 산 속

으로 숨겼다.

  그는 상감의 빈소를 찾아 들어갔다.

  빈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단종의 시체를 지키는 수직자(守直者) 두 사람이 어이없이 

앉아 있었다.  일국의 국왕이었던 사람의 빈소가 이럴 수가 있을 것인가 생각하며 그는 통

곡하였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땅을 치고 인지상정을 탄해 보았다.

  그러나 이렇게 하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는 곧 눈물을 거두고 일어섰다.  그리고 사

배(四拜)를 올렸다.  그의 눈에서는 또 새로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렸다.

  그는 시체 앞으로 다가갔다.  수의(壽衣)도 따로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입고 있는 옷 그

대로에다가 공들이고 정성을 다해 수렴을 마쳤다.  그리고 또 손모아 명복을 빌고 사배를 

드린 후 빈소를 나와 캄캄한 강가로 나와 섰다. 이제는 이 강을 걸어 건너야만 할 지경에 

놓여 있었다.  그는 이제 죽어도 한이 없었다.  시체나마 상감의 용안을 오로지 자기 혼자만 

뵐 수 있었다.  게다가 수렴도 정성을 모아 해드렸다.  이제는 죽어서 님을 따라 가는 길도 

헛되지 않게 생각되었다.  그의 눈에서는 또다시 끝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바로 그때 아까 산속으로 들어갔던 호랑이가 다시 그의 앞에 오더니 넓죽이 엎드렸다.  

어서 타라는 듯했다.

  "오! 넌 아까 그 호랑이가 아니냐! 불쌍하신 상감의 용안도 돌아가신 후나마 뵈옵고 또 직

접 내 손으로 소원이던 수렴도 해올렸다.  그러나 어찌 이다지도 세상 인심은 냉랭하더란 

말이냐!  촌부 한 사람도 빈소에 참배 온 사람이 없으니!  너희 동물의 세계가 오히려 부럽

고 또 부끄럽기도 하구나!"

  그는 말이 통하는 인간에게 지껄이듯 이렇게 자기의 심회를 털어놓고는 다시 호랑이 등에 

업혔다.  조금 전과 똑같이 그는 호랑이 덕으로 청량포를 단숨에 넘을 수 있었다.

  "이것은 하늘이 나를 도와주신 것.  그러나 네 은혜는 내가 세상에서 생명을 다하는 날까

지 잊지 못하겠다."

  여전히 호랑이는 그의 말을 알아들은 양 서서히 산중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고향에 돌아온 조여의 얘기를 전해 들은 사람은 누구나 감동하여 그의 충의심을 찬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추강 남효온이 이 말을 듣고 감격해서 읊은 시 한수를 여기 소개 한다.

  虎渡淸凉浦

( 호랑이가 조여를 업어 청량포를 건너 주니)

  趙翁 魯山

( 조여는 노산군의 시체를 염하고 돌아오도다.)


5 . 文斗 成聃壽

  성담수(成聃壽)는 창녕(昌寧) 사람으로 호(號)를 문두(文斗)라 일컬었다.  세종 경오(庚午)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敎理)로 출세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는 유명한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과 한 집안 사람이었다.  성담수는 항상 성삼문과 

만나기만 하면 사직(社稷)에 관한 걱정만을 얘기했다.

  "자네와 나는 어디까지나 왕실을 위해 이 목숨 다하기까지 어떠한 난관이 닥쳐와도 뚫고 

나가야 하네!"

  대하기만 하면 성삼문은 이 말로 인사를 대신 하다시피 했다.

  그도 성삼문에게 못지 않은 충심을 그에게 맹서했다.

  "저도 생명이 진하도록 어리신 상감을 위해서 바치겠습니다."

  그러나 일은 끝나고 말았다.  상왕으로 수강궁에서 비탄에 젖어 있는 어린 상감을 받들어

서 다시 왕위에 모셔야 되겠다는 집현전 학사들의 모의가 사전에 탄로되어 버렸기 때문이었

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세조가 조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얘기다.

  성삼문을 죽여 없애자 담수도 성삼문의 친척이기 때문에 국문을 받기에 이르렀다.

  "네 이놈! 성삼문과 모의한 사실을 낱낱이 얘기하면 살려둘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너도 

죽음을 면치 못할 줄 알아라."

  추상 같은 호령과 무서운 매틀이 눈에 보였다.  그러나 담수는 끝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너희들 맘대로 죽이겠으면 죽이고 살리겠으면 살려라."

  그의 태도는 태연자약했다.  그는 어떠한 형이 가해져도 끄떡 안하고 냉소만 띠우고 있을 

뿐이었다.

  이리하여 그는 김해(金海)로 추방되어 삼년이라는 세월을 귀양살이 하게 되었다.  그는 삼

년후에 대사(大赦)가 내려 공주(公州)로 갔다.

  담수는 박학다식(博學多識)한 사부(士夫)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향리에서 일개 농

부와 똑같은 옷과 음식을 취하면서 지내기가 일쑤였다.

  향리 사람들이 일개 전부(田夫)로만 알 뿐 어떤 사람인가를 알지 못할 정도로 그는 자기

를 숨기고 소박하게 살았다.

  담수에게 육촌(六寸) 형의 아들이 한 사람 있었는데 이름을 몽정(夢井)이라 하고 경기감사

(京畿監司)로 있었다.

  몽정은 경기감사가 된 후 담수를 친히 찾아보았다.  그러나 문 앞에 당도한 몽정은 담수

의 집 대문이 일개 춘부에 집만도 못한 것을 보고 놀랐다.  더구나 집만도 안내된 몽정은 

집 속이 어찌나 퇴락하였는지 비바람도 막지 못하게 된 형편인데다 방이란 방은 모두가 흙

방이고 깔자리 한 닢 변변한 게 안 보이는데는 더욱 놀래버렸다.

  담수의 성품을 잘 아는 몽정은 인사만 치르고 그대로 하직을 하고 돌아왔다.  돌아온 그

는 곧 돗자리 몇 닢을 담수의 집으로 보냈다.  아무리 강직한 그일지라도 돗자리마저 아니 

받을 리야 없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가인이 이 일을 담수에게 알리자 그는 곧

  "이 돗자리는 흙방에 깔기에 지나치게 좋은 자리다.  우리 집 방에는 가당한 돗자리가 아

니지 않느냐?  어서 빨리 돌려 보내라."

하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흉하기 그지없는 방안에다 이 돗자리를 깔면 흙이 나오는 것을 

막는다 생각한 가인들은 그것을 돌려 보내가기 아까왔다.  그래도 담수는 재삼 재사 돌려보

내야 된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가인들은 입을 모아

  "그건 너무 하시는 처사십니다.  이 돗자리가 무슨 뇌물로 들어온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보낸 사람의 성의를 무시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담수는 가인의 말을 다 들은 후

  "너희들은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되는 거야!  이 돗자리는 우리 집에 가당치도 않은 

물건이란 말이다.  어서 두말하지 말고 곧 돌려 보내라!"

  역정을 내는 가장의 말을 듣지 않을 수는 없었다.

  세조 치하의 어느해였다.  죄인의 자제를 등용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것은 세조가 인심수습을 위한 한 수단으로 벌인 일이었다.  이 벼슬은 벼슬중의 말단직

인 참봉(參奉=종구품)의 자리였다.

  죄인의 자제들은 호기도래(好機到來)라 생각하고 누구나 머리를 싸매고 이 자리를 차지하

려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담수만은 이 권내에서 벗어나 참봉 벼슬을 헌신짝같이 여겼다.  

가인들은 그에게 나가기를 종용해 마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런 강요로 그의 마음이 움직일 

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었다.

  그는 유유자적 낚시질을 일삼았다.  나물죽을 한 술 떠 먹고는 낚싯대를 걸머메고 낚시터

로 향하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고 그리고 보고 싶지 않아서 가는 

낚시는 세상 도피행이라고 볼 수 있다.

  집에서는 시를 읊어 우울한 심사를 풀곤 했다.  그의 조어시(釣魚詩) 한 수를 보면 뛰어난 

시재(詩才)를 알 수 있다.

  把竿終日 江邊

( 하루 종일 낚싯대를 드리우고 강변에서 머물러 있다가 )

  垂足滄浪團一眠

( 푸른 물결 속에 발을 넣고 졸기도 하는도다. )

  夢與白鷗飛萬里

( 꿈속에서 백구와 짝이 되어 만리창공을 날다가 )

覺來身在夕陽天

( 문득 꿈에서 깨어나니 몸은 석양이 비낀 하늘 아래 있구나. )

  죄인의 족질(族姪)로 아니 직접 주목 받아서 국문을 받고 귀양살이를 삼년이나 하고 지낸 

그에게 어찌 그런 여유가 있었는지?  오리혀 지금의 우리들 심경으로는 이해가 안 가는 얘

기다.

  그는 죄인들의 자제를 붙들고 그런 치욕적인 벼슬은 단념하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그러

나 그들의 대답은 이구동성(異口同聲)이었다.

  "아 이기회에 우리들이 나라 혜택을 못 받으면 언제나 다시 햇빛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세상 일이란 그런 것만은 아닐세.  자네들은 역사를 무엇 때문에 배우고 학문을 무엇하

려고 배웠나?  지금 이런 나라에서 자신의 영달만을 위해서 국록을 받아 벼슬을 한다는 것

은 아버지나 할아버지께 면목이 없고 집안 선조들에게 욕보이게 하는 결과밖에는 아니되는 

것일세!"

  그의 이런 충언이 벼슬에 급급한 그들의 귀에 옳게 들어갈 수는 없었다.  오히려 뒤돌아 

세워 놓고 욕하기가 상례였다.

  그는 그들이 자기 말을 듣거나 아니 듣거나 개의하지 않고 벼슬을 탐내어 법석대는 사람

들에게 향하여 일일이 충언을 잊지 않았다.

  그는 늙는 날까지 이 어지러운 세태를 목도할 수가 없었다.  우선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

는 세도의 태도가 미웠다.

  세종, 문종, 단종 대대로 충의를 맹세한 중신들의 손바닥을 뒤집는 듯한 배반도 증오스러

웠다.  이래가지고 어찌 나라가 제대로 잘되어 나갈 것인지 저으기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그는 비분강개(悲憤慷慨)하는 나날의 삶이 역겨워지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호소할 수 

없고 흉중을 털어놀 동조자도 그에게는 없었다.

  그는 채 몸이 늙기도 전에 충분(忠憤)에 못이겨 죽고 말았다.

  정조(正祖) 신축(辛丑)년에 이르러 상감은 그의 고절(高節)에 감동하여 이조판서의 벼슬을 

증하고 다시 그에게 정숙공(靖肅公)이라는 시호를 내려 그의 충혼과 의백을 위로해 주었다.


6 . 觀瀾齊 元昊

  원호(元昊)는 원주(原州) 사람으로 호(號)를 관란제(觀瀾齊)라 불렀다.  세종(世宗) 계묘(癸

卯)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의 직제학(直提學)까지 올라선 사람이다.

  단종(端宗)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자 그는 결연히 이 자리를 내놓고 초야에 묻

히고 말았다.  그리고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寧越)땅으로 정배를 떠나게 되자 그

는 조석으로 호곡하면서 지냈다.  그리고는 하루 빨리 천우신조가 있어 어린 임금의 왕위복

구가 이루어 지기를 하늘에 기원하며 나날을 지냈다.  그러나 하늘도 강자에게 가담하는 모

양인지 이 모든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의 생활은 죽기가 원이었다.  그래도 단종이 아직 살아 있었으므로 그의 소망과 희망은 

한가닥 없어지기 않고 있었다.  상감이 살아 있는 동안은 자기도 살아야 할 의무가 있기 때

문이었다.  드디어 금성대군(錦城大君)의 왕위복구 모이도 탄로되고 말았다.

  하늘이 도와 주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너무나 힘이 모자랐고 세조는 국가와 

온 백성을 소유하고 있었다.  지방 벼슬아치들의 의분과 거사는 세조의 눈에는 오합지졸에 

불과하였다.

  세조는 이렇게 역도가 도량(跳梁)하는 것은 노산군이 살아 있는 연유라고 생각하게 되었

다.  그는 곧 영월의 노산군을 세상에 살려 둘 수 없다고 결정지었다.  물론 거기에는 세종 

때부터 많은 은총을 받아오던 변심한 중신들이 시사한 바가 컸던 것이다.

  영월 적소에서 아무 소식도 모르고 한적한 시간을 무료히 보내고 있던 단종이 열일곱의 

어린 나이로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은 금성대군의 모의 탄로가 약간의 책임을 가질 

수도 있다.

  단종의 죽음은 온 백성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번져갔다.

  온 백성은 소리없이 울었다.  세조 치하의 벼슬아치들의 눈이 무서운 착한 백성들은 서로 

서로 몰래 가슴을 태우고 쥐어뜯으며 오열을 금치 못했다.

  벼슬을 살아서 세조의 국록을 먹는 인간들도 몰래 눈물을 감추고 가슴으로 울었다.  죄없

이 사사(賜死)당한 어린 임금의 기구한 운명이 뼈가 저리도록 슬펐다.

  원호는 예기 못한바는 아니었지만 실신할 정도로 비탄에 잠기고 말았다.  이제는 진정 세

상을 살아나갈 아무 의의도 보람도 없었다.

  그는 하룻밤을 그대로 영월 땅을 향해 배례하고 앉아 묵상하고 울며 지냈다.  동이 텄다.  

그는 홀연히 영월 땅으로 향해 집을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가인에게 이 뜻을 전했다.

  "무엇 때문에 그 먼 데를 가려고 하십니까?"

  모두들 이와같이 말하며 말렸다.  그러나 그의 결심은 요지부동(搖之不動)이었다.

  "나는 삼년 동안을 집에는 아니 돌아오겠소.  상감의 복상(服喪)을 삼년간 할 예정이요."

  "아니 어디서 무얼 먹고 지내면서 삼년 동안이나 지나겠습니까?"

  당연한 물음이었다.  그는 조금도 당황한 빛을 나타내지 않고 태연히 대답했다.

  "천상 천하에 오로지 한분이신 귀하신 옥체가 죽음을 당하셨는데 내 한 몸쯤은 어디서 무

얼 먹으면 어떻단 말이요.  살다 살다 못 살면 우리 님을 따를 뿐이요."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결의를 막을 힘은 아무에게도 없었다.  가인들의 만류를 무릎쓰

고 그는 입은 채로 곧 길을 떠났다.

  영월 땅은 원주에서 그리 멀지 않았으므로 그는 곧 영월 땅에 가 닿았다.

  잠잘 곳이 있을 리가 없었고 더구나 그를 반겨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월은 산골 두메였다.  그런데다 그는 상복(喪服)을 입고 있었다.  정월달이니 춥기가 말

할 수 없었다.  하루 이틀은 어떻게 구걸해서라도 잠은 잘 수 있을 것이고 밥도 얻어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왕 삼년이라는 세월을 복상하기로 작정하였으므로 하루 이틀만 편안히 자기를 

원치 않았다.  며칠이라도 따뜻한 잠자리가 그에게는 가당치 않은 일이라고 다시금 생각했

다.  그는 한 발 한 발 산중으로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토굴을 하나 발견해서 삼년간의 거

주지로 삼을 작정으로...

 그는 드디어 비바람을 막을 만한 토굴을 하나 발견했다.  삭풍이 휘몰아 쳐오는 겨울도 여

기서 나야 할 것이고 숨이 탁탁 막힐 정도로 뜨거운 여름도 이 토굴에서 지내야 했다.

  단종을 위한 복상의 토굴생활은 이만저만 비참한 게 아니었다.  비바람은 막아 준다고 해

도 눈보라쳐오는 겨울밤을 몇 밤이나 뜬눈으로 보냈는지 헤아릴 수도 없었다.  짐승이 무서

워 찌는 듯한 여름밤도 토굴 속으로 기어 들어가야만 했다.  따로이 먹을 음식이 있을 리도 

없었다.  그저 연명만 되도록 온갖 초근목피(草根木皮)를 다 뜯어다 먹었다.  잡아 먹을 수 

있는 작은 짐승들은 닥치는 대로 잡아 먹었다.

  삼년이란 긴 세월은 그에게 눈물과 한숨의 연속이었다.  드디어 삼년의 복상이 끝났다.  

남아 있는 목숨을 달래면서 그는 자기 고향으로 몸을 움직였다.

  많은 날이 새삼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몇 번이나 죽기보다도 어려운 삶을 저주하

고 죽으려고 기도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도 살아 있는 육체를 지탱하려면 또 그의 

가족들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가야만 하는 것이다.

  마침내 삼년상을 마친 그는 원주로 돌아왔다.  모든 고향 사람들은 어디서 죽었던 사람이 

살아 온 듯 반기며 인사를 하였다.

  그는 돌아오는 날부터 자기 방 속에서 두문불출을 일삼았다.  으레 앉는 자리는 동쪽을 

향하고 어린 임금의 참사를 추모하며 지냈다.  가인들이 그를 보고 그의 좌와(坐臥)를 이상

히 여겨 물었다.

  "어찌해서 꼭 그 자리에만 계십니까?"

  "상감이 돌아가신 곳이 영월 땅! 나는 항상 그 분을 추모하는 의미로 이렇게 자리를 하고 

앉아 있소."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의 삶은 오로지 단종의 추모를 위한 것이고 단종을 생각하는 

일념 뿐이었다.

  정조(正祖) 신축년(辛丑年)에 상감은 그의 고고(孤高)한 단심을 높이 평하여 이조판서의 벼

슬을 내렸다.  정간(貞簡)이란 시호는 그의 곧은 절개를 뜻함이다.


7 . 栗亭 權節

  권절(權節)은 안동(安東) 사람으로 호(號)를 율정(栗亭)이라 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비범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힘이 장사였던 그를 사람들은 

남이(南怡) 장군에 비해서 말했다.

  또 문장에도 통달하여 그 재주가 월등하였다.  세종 정묘(丁卯)에는 문과에 급제하고 마침

내 문무를 겸전한 사람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무(武)로는 사복시(司僕侍) 직장(直長)으

로도 있었고 문(文)으로는 집현전 교리로도 있었다.

  수양대군으로 있던 세조가 그런 인재를 놓칠리가 없었다.  더욱이 대사를 성취하려면 기

어이 이러한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수양대군이 친히 그의 집을 찾아갔다.

  "난 권공을 꼭 동지로 맞고 싶으니 미의(微意)를 살펴 주시면 무상의 영광이겠소이다."

  그가 수양의 야망을 모를 리 없었다.

  "저어 뭘!  많은 좋은 인재들이 대감의 주위에는 많사온데..."

  그는 어쨌던지간에 자리를 회피할 생각만이 앞섰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끈질기게 몇 번

이나 그의 대답을 들으려고 찾아왔다.  그는 난처했다.  죽어도 그의 야망에 야합하기는 싫

었다.  그러나 그의 세력은...  종친이라는 것보다 상감을 능가하는 세력으로 육박해 가는 때

였다.  

  자신의 생명이 중하기는 하지만 수양대군과 같이 자리를 하고 음모를 얘기하기란 죽는 일

보다도 더 싫었다.  수양은 지치지 않고 문무를 겸한 그를 얻으려고 백방으로 손을 써왔으

나 그는 수양대군을 피해서 은신을 일삼았다.  그러나 은신도 하루 이틀이면 몰라도 어렵기 

짝이 없었다.  친척 집에 숨어 있는 권절을 찾아낸 수양대군은 단신 또 그를 찾아왔다.

  "권공! 내 말을 들어 주시오.  권공 같으신 분을 얻게 되면 귀신에게 쇠몽둥이와 같은 역

할이 되고도 남을 줄 익히 알고 이렇게 재삼재사 권공을 괴롭히는 겁니다."

  "대감! 벌써 여러 차례 사양의 말씀을 올립니다마는 저로서는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아 국

록을 먹고 지낸 몸이라 그 전통을 무시하고 어리신 왕을 보필은 못할망정 그 자리를 찬탈하

려는 음모에는 하늘에 머리를 두고는 감히 가담할 수 없사옵니다."

  "권공의 말씀은 지극히 곡해(曲解)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절대로 단종의 자리가 탐나서 

음모를 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시다면 무엇 때문에 이 나라에 있는 병력을 무시하고 사병(私兵)을 기르시기에 골몰

하십니까?"

  그의 음성은 노해서 약간 떨렸다.

  "그것은 권공이 진정 모르는 말씀입니다.  나로서는 어디까지나 어리신 상감을 위해서 충

성을 다해서 보필할 작정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주 근래 들어온 극비에 속하는 소식인데 

좌의정 김종서가 상감을 없애려고 갖은 흉계를 다 꾸미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내가 어리신 상감을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을 수 있으며 사직을 지켜 주는 사병을 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권절은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아니 구토증이 나도록 속이 들어다보이는 그의 권모술수

(權謀術數)가 미웁고 비겁해 보였다.  그러나 그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김종서같이 오

로지 사직과 상감만을 위하고 생각하는 일념으로 일생을 살아온 사람을 모독하다니...  그는 

어쩔 줄을 몰랐다.  

  이제 곧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 연속적으로 야기될 것을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졌다.  이다

지도 정권욕이라는 것이 크고 대단한 것이란 말인가? 

  그는 더욱 더 근신하고 한 발자국도 밖에는 나가지를 않았다.  거처도 다시 옮겼다.  가인

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수양대군도 이제는 단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수양의 음모는 착착 진행되어 김종서 등 눈에 가시 같은 존재를 다 처분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다시 일년 후 단종을 허울좋은 상왕(上王)으로 만들고 단종 스스로 양위(讓位)한다는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세워서 세조 원년으로 호를 바꾸게 하였다.

  세조는 왕위에 오른 후 곧 권절을 내버려 둘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권절 같은 준재(俊

才)를 초야에 묻혀 놓기가 아깝게 생각되어서였다.  과연 세조는 인재를 알아볼 수 있는 혜

안(慧眼)을 가진 영매(英邁)한 인물이었다.

  세조는 권절에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란 벼슬을 내렸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금병

(禁兵)에 종사하게 하였다.

  그러나 권절이 이 벼슬을 받을 리가 없었다.  그는 임금이 내린 벼슬을 고사하기가 무엇

보다도 어려웠다.  이 땅에서 생명을 향유하고 사는 한 상감의 하명을 거절하는 길은 단 한

길밖에는 없었다.  미친 척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 올바른 정신으로는 조정을 잡고 휘

두르는 세조의 엄명을 거역하기란 정말 난감했다.

  그는 미쳐버렸다.  그편이 훨씬 편안했다.  주변 사람들의 근심은 여간 큰 것이 아니었고 

가인들의 걱정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정말 미친 모양이다.  저렇게 훌륭하신 분이 어떻게 저런 모양으로 되어버렸을까?"

  이것은 그를 아는 친지들의 걱정스런 화제였다.

  "어떻게 하면 좋담.  벼슬은 마다 하시고 이제는 저런 꼴이 되셨으니..."

  이것은 집안 식구들이 맹랑한 그의 모양을 근심하다 못해 토한 얘기였다.

  이제는 미쳤으니 미친 척해야만 했다.  그는 거리로 나섰다.  미친놈이 되려면 본격적으로 

미친놈이 되어야 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미쳐 있었다.  세조 치하에서 국록을 먹는 높은 벼슬자리의 대감을 

만나도 그랬다.  말단 벼슬을 천직으로 알고 지내는 미관(微官)인 사람들에게도 그러했다.  

그는 입가에 정말 미친 사람에게만 있는 헤픈 웃음까지 흘리며 입버릇처럼 만나는 사람마다 

잡고 이렇게 지껄였다.

  "나라가 태평해져 잘 사시리라.  나라가 태평해져 성주(聖主)의 덕이 크시리다!"

  그의 야유였다.  이제는 길가는 애들까지도 미친 권절을 만나면 그의 말을 흉내내기가 보

통이었다.

  "나라가 태평해져 잘 사시리다!  나라가 태평해져 성주의 덕이 크시리다!"

  동심이 그의 뜻을 알 수는 더욱 없었다.  그의 옆을 따르면서 또 한 번 외우고는 꺄르르 

웃고 흩어지면 권절은 쓸쓸했다.  진정으로 미친 사람이 되어버린 자신이 가증스러웠다.  이

렇게 하면서도 사는 것이 과연 잘 하는 것인지도 분간이 안갔다.  그는 결국 이와같이 일생

을 마쳤다.

  이조 숙종(肅宗)조에 와서 숙종은 그의 충의를 높이 평하여 이조판서란 벼슬과 충숙공(忠

肅公)이라는 시호를 내려 그를 찬하였다.


8. 靜齊 曺尙治

  조상치(曺尙治)는 창녕(昌寧) 사람으로 호를 정제(靜齊)라 부르기도 하고 단고(丹 )라고 부

르기도 했다.  세종 기해(己亥)에 생원 문과(生員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부제학(副提學)으

로 출세하기 시작했다.

  수양대군이 단종으로부터 선양(禪讓)을 받자 높은 지위에 있는 벼슬아치들이나 낮은 자리

에 급급하는 미관말직들까지 앞을 다투어 세조에게 나아가 아부를 겸한 하사(賀辭)를 올리

기에 혈안이 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조상치만은 신병을 핑계삼아 입하(入賀)를 하지 않았고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세조에게 올리고 벼슬을 사퇴하고 말았다.

  < 군자(君子)의 도에는 여러 길이 있사옵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길도 군자가 취할 태도입

니다.  그러나 적당한 시기에 뒤로 물러설 줄 아는 것도 군자의 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원컨대 소신은 말직을 이 시기에 물러나고 싶사오니 부디 청허(聽許)하여 주시기 비옵니다.>

  이 글을 받아 쥔 세조는 이렇게 뛰어난 사람을 놓쳐서는 안 되겠다 결심하고 그를 중용

(重用)해서 그 마음을 잡아 두기 위해 그의 사퇴 글을 반려(返戾)하였다.  그리고 그에게는 

오히려 과할 정도의 예조참판 벼슬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상치에게 예조참판이 

눈에 들어 올 리가 없었다.

  그의 눈에는 도대체 벼슬이 우습게만 보였다.

  그는 서울에 머물러 있다가는 세조의 성화 같은 참정(參政) 권고가 시끄럽고 나중에는 뜻

하지 않은 화로 발전될 것을 염려하여 곧장 동대문으로 나와 고향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만인이 바라는 좋은 벼슬자리를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서 초야에 묻히기로 하고 시골로 내려

가는 조상치를 본 우국지사(憂國之士)의 한 사람인 박팽년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분은 우리 사림(士林)의 스승이시다.  그 높으신 절개를 감히 누가 따를 수 있으리오!"

  다시 성삼문은

  "그분은 영주(永州=영천)의 청풍(淸風)이시다.  우리들은 그분에 비하면 죄인에 불과한 몸

이다."

하고 그를 칭송하였다.

  마침내 그는 고향인 영천으로 내려 와서 세상을 잊고 지냈다.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향촌

의 촌부들 뿐이었다.  아무 야망도 야심도 없는 소박한 인심이 그를 끌었다.  그의 머리 속

을 오락가락하는 것은 어린 상감이 누구의 비호도 없이 산골 두메 영월 적소에 있을 것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자기가 일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초야에 묻히겠다는 

뜻을 밝히자 그를 높히고 칭송해 마지 않았던 박팽년, 성삼문을 생각하였다.

  그들은 뜻이 맞는 동조자들과 왕위 복구를 도모하다 사전에 세조의 귀에 들어가서 모진 

고문 끝에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목숨이 붙어 있을뿐이지 살아 있다는 심정이 아니었다.  

아니 이땅에서 살고 싶지도 않았다.  많은 우국지사들이 참변을 당한 이때에 게다가 수없는 

종친들이 귀양살이를 떠나고 박해를 받고 있는 이때에 혼자만이 알뜰하게 목숨이라고 보존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직도 단종이 살아 있다니...  끝내 멀리서나마 바라 뵙고 살고 싶었다.

  (열다섯 되던 해에 영월 적소로 떠나셨으니 금년은 열여섯이 되셨으리라!  부디 사육신들

의 사무친 원한이어!  눈감고 나라를 지켜 보아주오!)

  하루종일 감회는 이러한 우수 속에서만 교차되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어린 상감의 소식

이 그의 가슴을 적시는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단종은 일찍이 문장에 뛰어났다.  할아버지 되는 세종이 그렇게 탁월하게 글에 치중하던 

사람이요,  또 아버지 되는 문종이 병약해서 일찍 승하는 하였을망정 뛰어난 글재주를 지녔

던 사람이라 그 혈통에서 나온 단종도 문장력은 타인이 감탄할 정도였다.

  단종은 영월 적소에서 홀로 지내면서 많은 피눈물 나는 시문(詩文)을 엮었다는 얘기가 전

해진다.  그중에 단종이 열여섯 되던 해에 지은 시가 바로 앞에 소개된 자규사(子規詞)이다.

  단종은 즉위한 이래 하루도 마음 편안한 날이 없었다.  수양대군은 좌의정 김종서가 상가

이 어림을 기화로 단종을 폐위하려는 음모를 한다고 죽여 없앴다.  수양대군이 왕위 찬탈을 

하기 위해서는 가장 두렵고 못마땅한 존재가 김종서였기 때문이었다.

  총명한 단종은 비록 어렸을망정 그의 무서운 야망을 몰랐을 리는 없었다.  그는 전전긍긍 

속에서의 나날이 역겨워 수양대군에게 <양위>라는 미명하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더 피

비린내 나는 일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칠 줄 모르는 충신들의 단종 왕위복구를 위한 모의는 단종을 사고무친하고 두메 

산골인 영월 땅으로 몰라 넣게 하고 말았다.  겨우 나이 열다섯살 되던 해였다.

  단종의 적소 근처에 있는 향촌 사람들은 어린 임금의 도도하고 으젓한 풍모와 태도에 놀

라고 감복했다.  그러나 단종은 항상 우수에 잠긴 생활이었다.

  결국 그의 이 쓸쓸한 심중이 <자규사>로 나타난 셈이다.

  조상치는 이 시를 전해 들은 후부터는 거의 매일 이 <자규사>를 외우면서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그는 영천으로 돌아온 후 단 한 번도 세조가 있는 서향(西向)을 해서 자리를 한 일

이 없었다.

  그리고 조상치는 <자규사>에 화답해서 이렇게 노래 불렀다.

  子規啼子規啼

( 두견이 우는구나!  두견이 울어! )

  夜月空山何所訴

( 달밝은 밤에 하늘에 호소하는 것인가!  산에 호소하는 소린가! )

  看也衆鳥摠安巢

( 뭇새들은 모두 보금자리에 들어 편히 자고 있는데, )

  獨向花技血 吐

( 너 혼자만이 외로이 꽃가지에 앉아서 피를 토하고 있구나! )

  形單影孤貌憔래悴

( 외로운 그 모양도 애닯어라! )

  不肯尊崇誰爾顧

( 그러나 누구도 네 소리가 아름답다고 들어주고 돌보아 줄 사람이 없구나! )

  嗚呼人間寃恨豈獨爾

( 오호라! 인간 원한도 많은데 너만이 울어 예면 무얼 하는가! )

  義士忠臣激不平, 屈指難盡數

( 나라일을 걱정하는 의사 충신의 수는 손꼽아 헤아릴 수도 없건만. )

  조상치는 두견이, 즉 상감이 피를 토하듯이 울며 사는 세월을 생각하고 이렇게 슬픈 시를 

읊었던 것이다.

  단종은 마침내 큰 한을 안고 그의 나이 열일곱되던 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조상치

는 통곡을 그칠 줄 몰랐다.  찾아오는 사람도 일체 맞지 않았다.

  외부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집안 사람들까지도 만나기를 싫어하였다.
 
  이제는 진정으로 목숨을 부지할 힘을 잃어버렸다.  그보다도 살아나가야 할 아무 의의가 

없었다.  성군이신 세종치하에서 많은 성은을 입고 살아온 그였다.  어린 단종을 보필해서 

더욱 견고한 사직을 이룩하려고 결심을 굳게 한 그였다.  그러나 단종은 이미 가고 없는 사

람이었다.

 그는 표표히 집을 나섰다.  우울한 가슴을 달래기는 강가가 좋았다.  늘 이럴 때면 즐겨 가

는 장소다.  낚시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은어(銀魚)가 노니는 잔잔한 맑은 물 속을 무심히 

들여다보며 앉아 있었다.

  번거러운 생각을 없애려면 걷는 일이 그로서는 제일 쉬웠기 때문이다.  얼마를 걷다가 보

니 저 멀리 길고도 넓적한 돌이 눈에 띠었다.

  그는 그 돌을 자세히 보고 싶어 걸음을 빨리했다.

  그것은 길고도 적당한 넓이의 완석(頑石=탁마(琢磨)를 가하지 않은 돌)이었다.  문뜩 생각

되는 것이 있었다.  이 돌로 그가 죽은 후에 세워 놓을 비석을 만들자는 생각이었다.

  그는 그 돌을 집으로 운반케 하였다.

  자기가 죽는 날을 예기나 하고 있던 양 강변에서 발견하여 운반해다 놓은 돌의 표면에다 

다음과 같은 문귀를 써 놓고 이를 조각시켰다.

< 魯山祖副提學逋人曺尙治之墓 >

라는 비문이었다.

  즉 노산군 시대에 부제학을 지낸 조상치의 무덤이라는 뜻이었다.

  세조시대에 지낸 부제학은 아니라는 뜻이다.  

  단종조에서 지낸 벼슬이 부제학이지 세조조에 지낸 벼슬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후세의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그의 곧은 성품의 일면이 나타나 있다.

  이렇게 비문을 만들어서 세워 놓지 않으면 세월이 흘러간 후 후세의 사람들은 자기를 이

군(二君)을 섬긴 사람으로 간주할지도 몰랐기 때문에 손수 만들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여기 죽음으로 뜻을 바친 사육신과 똑같은 서열에 올려 놓고 싶은 생팔신의 행상을 낱낱

히 기록했다.

  그대로 천수를 다할 때까지 세상에 살면서 빈한과 싸우고 혹은 세조의 횡포에 무언의 항

거를 일삼은 사람들이었다.


    [虛空속에 그린 日月]   <宋府事 집 慶事>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虛空에 그린 日月 

    宋府事 집 慶事



  "아버님 부르셨습니까?"

  "오냐! 게 앉거라."

  여기는 판돈영부사(判敦寧府事) 송현수(宋玹壽)가 거처하는 사랑방이다.  옆에는 송부사의 

부인이 입가에 보일락말락한 미소를 담고 출중하게 뛰어난 딸의 용태를 지켜보고 앉아 있었

다.

  "어머님도 계셨군요."

  "오냐, 너를 보는 날도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 실컷 보아 두려고..."

  송부사는 부인의 이 말을 점잖게 한 마디로 나무랐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이제 곧 동궁빈(東宮嬪)이 될 막중한 몸인데...  우리가 보고 

못 보고가 무슨 상관이오?  이제는 난 선조(先祖)에 대해서나 가문을 위해서나 할 일을 다

한 것 같아 마음이 오히려 편안하오."

  송부사의 딸은 다소곳이 머리를 숙인 채 얼굴도 들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치렁치렁 땋은 새까맣고 윤이 나는 머리 끝이 갑장 장판에 닿아 아른히 비쳐지고 있다.  

송부사는 숙성히 자란 딸의 여름옷에 싸인 몸매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얘, 이제 앞으로 열흘 남짓하면 궁으로 들어가는 몸이라는 걸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되느

니라."

  "예!  소년 두분 양친님께 배운 교훈과 가훈을 힘삼아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왕비가 되려 

합니다."

  혹단 같은 머리와 희고 반듯한 이마는 그의 총명을 말해 주고 야리야리한 살결은 고운 마

음씨를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송소저는 올해 열세살이다.  정숙한 어머니의 가르침은 실로 

그녀를 성숙하고 으젓한 육체와 정신을 가진 숙녀로 키워놓은 것이다.

 "얘, 아가야.  이제부터는 수놓는 일이나 책읽는 일은 고만 두고 몸과 맘을 푹 쉬도록 해

라."

  "야유 어머님도...  언제는 제가 별일을 하고 지내는 줄 아십니까?"

하면서 얼굴을 드는 그녀의 눈까풀은 얇은 은행껍질 같았다.

  "아니다.  네 어머님 말씀이 옳다.  네 나이에 너만한 처녀도 아마 없을 것이니라."

  "아버님도!  제가 뭘..."

  아직도 애티가 벗어지지 않은 포동포동한 두볼이 홍조를 머금고 몸둘 곳을 몰라 한다.

  "오냐,  일찍 네 처소에 나가서 쉬어라.  네 몸은 너 한 사람의 몸이 아니라는 걸 명심해

야 하느니라!"

  "녜! 아버님 안녕히 주무십시오.  어머님 안녕히 주무십시오."

하고는 사뿐히 일어서서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나 영창문을 열고 나가는 소저의 모양이 송부

사부처의 눈에는 으젓하게만 보였다.

  "여보! 부인 저아이가 누구를 닮아서 저리도 으젓하고 출중하오?"

  "대감께서는 무슨 말씀을 그렇게...  저를 보고는 예전에 그런 말씀 안하셨어요?"

  "하하...  부인 말씀이 옳소!  내가 처음 장가 들었을 때는 저 아이만큼이나 부인도 좋긴 

좋았소만..."

  송부사 부부는 기뻤다.  이 경사를 송부사는 모두 부인의 공으로 돌려 주고 싶었고 부인

은 부사인 자기 남편에게 돌리고 싶었다.

  사랑채에서 몰러나온 송소저는 무더위가 가신 후원으로 발을 옮겼다.  약간 기운 달이 중

천에 맑다.  열흘만 있으면 십삼년을 자란 이 집을 뒤로하고 궁중의 사람이 된다.  궁중의 

사람으로도 보통 궁인(宮人)이 아니라 일국의 국모인 왕후가 된다.  말하자면 여성으로서는 

제일인자의 신분으로 되는 것이다.  기쁜지 슬픈지 분간할 수 없이 그저 가슴이 마구 뛰는 

듯했다.  아버지의 인자한 교훈과 어머니의 알뜰한 보살핌으로 그녀는 잔뼈가 굵었다.

  송소저가 후원 별당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자기 처소 마루로 올라서자 주인 아가씨의 기

척을 들은 몸종이 쪼르르 뛰어 나왔다.

 "아가씨!  대감마님께서 왜 부르셨어요?"

  "응 그저 보시고 싶으셔서들 그러시지 별일이 있으시냐."

  "아가씨!  일찌감치 자리에 드세요.  아까 낮에도 대방마님께 불려가서 쇤네가 말씀을 많

이 듣고 왔습니다."

  "뭐라고 어머님이 말씀하시더냐?"

  "아주 잘 모셔야지 조금이라도 소홀함이 있으면 쇤네를 아가씨 따라서 궁궐에 들여 보내

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겠어요?"

  "얘!  월선아!  너는 꼭 날 따라와야 한다.  구중궁궐 깊은 속에 너 아니면 내가 누구를 

의지하겠니?"

  "아이구 아가씨도...  나중엔 별 말씀을 다 하시네요.  대방마님께서 낮에 저희 쇤네들을 

모두 불러 놓으시고 뭐라고 말씀하신지 아세요?"

  "그래?  어머님께서 너희들을 불러 놓으시고 뭐라고 하시더냐?"

  "글쎄요.  열밤만 주무시면 궁중에 들어가셔서 지금 동궁마마와 나라잔치가 있으시다고 

하시면서...  그 후부터는 너희들 같은 것은 뵐래야 뵐 수도 없는 높은 분이 되신다고 하시

지 않아요."

  "그런 소리 말아 얘!  난 언제까지나 이 집을,  그리고 너희들을 잊을래야 잊을 수 없을 

터인데..."

  "그리고 또 대방마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신 줄 아셔요.  너희들 뿐 아니라 나도 궁에 아가

씨께서 들어가신 뒤에는 뵐 수도 없다고 하시면서 글쎄 눈물을 글썽글썽하시던데요."

  송소저는 가슴이 뭉클했다.  온화하신 어머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살아야 할 궁중생활이 

걱정이 되다 못해 두려워지기까지 하였다.

  주인 아가씨가 며칠만 있으면 동궁빈이 되고 월선이는 동궁빈을 모시는 시녀가 된다.

  아가씨도 열세살,  월선이도 열세살 동갑이었다.  벌써 오년 전부터 아가씨의 몸종이다.  

아니 몸종이라니 보다는 소꼽친구로 주종관계를 떠나 진정한 친구였다.  둘이는 못할 일이 

없었고 못할 말이 없이 다정했고 눈을 뜨면서부터 자리에 들어 눈을 감는 시간까지 둘이는 

붙어 살았다.

  좋은 일도 궂은 일도 서로 감싸 주고 칭찬하며 서로를 아꼈다.  친형제지간도 이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송부사도 부인도 늘 그들의 귀여운 모습을 흐뭇한 눈으로 보았다.

  송부사의 부인은 오늘이 있기를 점친 것은 아니라도 딸 하나를 글로나 예절로나 침사(針

事)로나 빠짐없이 키웠다.  어디를 내세워도 그 나이로는 볼 수 없는 훌륭한 처자로 자라 

있었다.

  "아가씨,  어서 침소에 드셔요.  또 대방마님 나오시면 쇤네가 꾸중 듣습니다."

  같은 나이의 몸종 월선이도 주인 아가씨에게 별로 손색이 없다.

  주인 아가씨가 뛰어난 데가 있다면 반짝반짝하고 윤기있는 살결과 새까만 눈빛이 총명하

게 빛나는데 있을까?

  "얘! 월선아! 네 생각은 어떠냐?  내가 동궁마마를 잘 섬길 수 있는 왕비의 자격이 있을

까?"

  "참 아가씨께서는 벌써 그 말씀을 오늘도 몇 번째 물어 보시는지 모르겠네요.  저희들은 

모두 모이면 아무래도 우리 아가씨께서 월등히 세자마마보다 훌륭하실 것이라고 수군댄답니

다."

  "얜,  또 그런 소리.  동궁마마께서 늠름하시고 훌륭하시다는 소리 너도 들었다면서?"

  "어마 또 물어보시네!  아까 쇤네가 말씀드렸지 않아요.  사랑에서 대감마님께서 대방마님

과 말씀하시는 걸 청지기가 들었다는 얘기 말씀예요."

  "그래!  그럼 난 어떻게 할까?  얘!  넌 꼭 거짓없이 내게 일러 주렴.  안동 김대감댁 둘

째 따님을 너도 알고 있지?"

  "알고 말고요.  두 번이나 아가씨 모시고 갔다 오지 않았어요?"

  "그 아가씨하고 나하고 동갑네라는 것도 넌 알지?"

  "그럼요!"

  "그 아가씨하고 나하고 외모와 다른 여러 가지가 네 눈으로 누가 낫다고 보느냐?"

  "아유 아가씨도...  그걸 말씀이라고 하셔요?  첫째 아가씨는 그 아가씨보다 몸매가 얼마

나 아름다우세요?  둘째로는 아가씨의 그 고운 목소리,  마치 꾀꼬리 노래를 듣는 것 같은

데요.  셋째로는 모두들 붓글씨나 침소 배운신게 아예 비할 데다 못된다고 그러시던데요."

  "넌 우리 집 사람이나까 그렇지만 남들이 보는 눈도 그래야지.  우리 식구들이 하는 소릴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니."

  "또 그 말씀이시네!  마님 모시고 있는 순례 언니 말을 제가 어제 아가씨에게 말씀 드렸

지 않아요?"

  "정말 그럴까?"

  "그렇구 말구요.  전 어떤 댁 아가씨를 뵈도 우리 아가씨를 따를 분은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래.  어서 자자! 어머님 또 내려 오시면 안잔다고 걱정하실라."

  자주빛 누비 이불을 목까지 덮고 송소저는 눈을 감았다.

  드리운 발 사이로 스며드는 교교한 달빛이 송소저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고 있다.  송소

저는 한번도 뵙지 못한 동궁마마의 훌륭한 자태를 상상해 보았다.  이런 짓은 점잖은 집 규

수가 할 것은 아니라고 한편 꾸짖어도 보지만 자꾸 눈 속에서,  아니 가슴 속 깊이에서 아

롱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월선이도 제방인 옆방으로 물러갔고 집 안팎이 모두 고요했다.  안채 어머니도 잠이 들고 

사랑채에서도 아버지가 깊은 꿈나라로 들어간 모양이다.  아무리 숙성하고 으젓이 자란 처

녀였지만 열세살의 어린 아가씨는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잠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송소저는 꿈속에 있었다.  궁중이라고 생각되는데 역시 달이 밝고 후원 같은 곳이었다.  

연못도 있고 아름드리 나무들이 무수히 달빛을 받아 흔들리고 있었다.

  자기 집 후원 같지는 않고 분명히 궁중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조그만 문

을 열고 머리를 숙인 채 들어서는 도령이 있었다.

  (아! 저분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동궁마마이신 게 틀림없다.)

  이렇게 생각하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도령은 어느덧 옆에 와서 있었다.  송소저는 자

기 가슴이 터지거나 않을까 두려웠다.  가슴에서 방망이질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소저가 송부사의 따님이시오?"

  (어쩌면 이렇게 부드럽고 사람을 끌어 잡아당기는 것 같은 옥음을 지니고 계실까?)

  "예!"

  간신히 대답을 올렸다.

  "소저! 이제부터는 그대와 내가 한 사람 노릇을 한다고 들었소.  그렇게 부끄러워하지만 

말고 고개를 드시오."

  너무 부끄러워만 하는 것도 동궁빈이 취할 태도는 아니라고 늘 어머님께 들었던 것을 생

각하고 조용히 얼굴을 들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일까?  옆에 서 계시던 동궁이 그림자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랐다.  놀란 가슴이 뛰면서 동시에 잠겼던 눈이 떠

졌다.  꿈이었다.


    [虛空속에 그린 日月]   <不安한 少年王>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虛空에 그린 日月 

    不安한 少年王



   무더위에 있었던 잔치는 빈을 괴롭게 했다.  그러나 이제는 무슨 일이 있으나 동궁을 위

해서 참아야 했다.

  상감은 전달부터 조회도 참례 못하고 침상에서 일어나지를 못하게 되어 동궁이 시탕(施

湯)을 드는지가 벌써 이십여일이 넘는다.  젊은 빈이 동궁을 못 본지도 벌써 십여일이 넘었

다.  선대왕 세종이 승하하고 겨우 이년을 제위에 있다가 상감은 병환으로 눕고 만 셈이다.  

친정에서 데리고 온 시녀 월선이가 어제 저녁 때 하던 말이 귀에 쟁쟁했다.

  "동궁마마,  상감마마께서 아무래도 기력이 점점 쇠잔해 가신다고 의원에서 걱정이 분분

하답디다."

  그렇다면 동궁이 상감이 된다.  이제 겨우 열두살이 되는 동궁이 그 막중하기 이를데 없

는 지존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동궁빈인 자기도 중전의 몸이 된다.

  무언지 맑지 않은 것이 요즈음 궁중 공기다.  확실히는 모르겠으나 모두들 쑤군쑤군거린

다. 그러나 빈은 그것이 나이 어린 동궁이 상감자리에 오르게 되면 어떻게 되겠느냐가 그들

의 관심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상감의 용태는 차도가 없는 대로 그날 그날이 지나갔다.

  찬바람이 불어오는 가을로 접어 들었다.  상감의 용태가 이제는 심상치 않다고 궁중 안팎

이 술렁거렸다.  젊은 빈은 걱정스런 마음을 달래려고 책을 들고 앉았으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때 월선이가 불렀다.

  "빈마마,  잠깐 들어가도 괜찮겠사오니까?"

  월선이의 목소리에서 그녀는 무언지 급을 고하는 일이 생겼음을 판단했다.

  "오냐!  어서 들어오너라!"

  "빈마마,  상감께서 곧 승하하실 것 같다고 야단들이옵니다."

  "그러냐?  세상에 너무도 망극하신 일이로구나.  근 반년이 넘도록 병상에서 싸우시기만 

하셨으니 오죽이나 기진맥진하셨을까."

  "예! 그러하옵고 빈마마께서는 상감 승하하실 것을 생각하옵고 모든 준비를 하셔야 되겠

다고 김상궁께서 말씀하셨사옵니다."

  가을도 깊은 어느날 선정과 어진 마음으로 신하를 사랑하던 문종은 외아들인 동궁을 두고 

서른아홉의 장년으로 승하하고 말았다.  동궁은 열두살이었고 동궁빈은 한 살 위인 열세살

이었다.  문종은 승하하려는 순간 동궁을 불러 세우고 앞에 늘어서 있는 중신들에게 몇 번

이나 떨리는 옥음으로 세자를 보필함에 부족이 없도록 해달라고 당부하였다.

  "부디 경들은 나이 어린 동궁을 도와서 사직을 든든히 해주기 바라오."

  당시의 중신들은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집현전 

학사들로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이었다.  모두들 엎드려 통곡하며 세자를 받들어 보좌해

서 선정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리하여 어린 왕자가 문종의 뒤를 이어 용상에 앉게 되었으

니 그이가 단종이었다.

  아무리 늠름하고 훌륭히 자란 임금일망정 너무나 어렸다.  중전이 된 동궁빈도 뵙기 너무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상감이 된 단종은 아버지 문종의 승하를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내려쪼이는 폭양이 중복을 가리키는 여름 저녁 바람 한 오리 없고 숨이 탁탁 막혔다.

  바로 오늘이 지금의 상감과 중전이 성혼을 한 일년째 되는 날이었다. 두 사람은 방안의 

문마다 가는 발을 드리고 앉아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이다. 먼저 입을 연 것이 상감이었다.

  "중전!  작년 이맘 때가 생각 나시오?"

  중전이 되고 이제는 궁에 들어와서 지내는지도 일년이 되었건만,  그리고 상감을 모신지

도 일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건만, 언제나 처음 만나는 순간마냥 수줍기만 했다.  왜 그런지는 

중전인 자신도 몰랐다.

  "예! 신첩 상감의 은총을 받아온지 일년이 되었사옵니다."

  "그런데 중전, 궁중생활이 어떠시오?  민가인 친가에 있을 때 생각하던 것보다 어떻게 다

르오?"

  "신첩 그저 상감의 나래 아래서 무엇을 알겠사옵니까!"

  "중전, 나를 왜 그렇게 두렵게만 여기시오?  오늘은 우리 가슴을 탁 터놓고 얘기 좀 나눕

시다.  조정에서 체면 차리기만도 급급할 지경인데 중전 앞에서나 편안해야지.  그리고 나와 

중전 사이에 못할 말이 어디 있겠소."

  "상감마마,  황공하옵니다.  신첩도 무언지 이 가슴이 시원하도록 드리고 싶은 말이 한두

가지가 아니옵니다."

  "더욱 그렇다면 우리 좌우 사람을 물리치고 밤이 새도록 얘기나 해봅시다."

  단종은 주위 사람들을 멀리 물리쳤다.

  "상감마마, 신첩에게는 요사이 상감 용안이 부드럽지 않으신 것만 같이 보여집니다. 아녀

자의 몸인 신첩이 무얼 알겠습니까마는 신첩에게나 시원스러이 상감의 흉중을 말씀해 주시

면 신첩 자신의 불평과 불안은 일조에 사라져 없어지겠사옵니다."

  이것은 중전의 진정한 마음이었다.  가끔 우러러보는 용안이지만 보는 회수가 거듭될수록 

어떤 짙은 그림자 같은 것이 따라 다니는 듯한 모습이라고 느껴졌다.

  "중전, 그렇게 보이오?  아무래도 나에게는 벅찬 자리인 게 분명하오."

  상감자리에 오른지 얼마 안 되기는 했지만 믿음이 가는 중전 앞이라 그런지 말이 고르지

가 않았다.  자기를 말할 때 누구 앞에서나 <과인>이라든지 <짐>이라야 옳을 일인데 중전 

앞에서는 <나>라는 소리가 자주 나왔다.  아마 중전 앞에서야 괜찮겠지 하는 마음인 듯하였

다.

  "상감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오니까?"

  "중전인 그대도 공기로나 도는 말로 귀 있어서 들었겠소만 삼촌인 수양대군이..."

  상감은 거기까지 말을 하고는 좌우를 한 번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무릎으로 더욱 중전 

옆으로 바짝 다가 앉았다.

  "중전!"

  다시 한 번 나직한 목소리로 부르고는 중전의 손을 잡았다.

  "중전의 손은 어찌 이리도 고우시오!  손 뿐이 아니지만..."

  "상감께서는..."

  중전은 말을 못하고 왈칵 수줍어졌다.  그러나 상감께서 이런 말을 할 때 싫지 않은 기분

만은 감출 수가 없었다.

  "중전!  이제 겨우 즉위한지 일년밖에 안 됐는데 나는 그 자리가 역겹기만 하니 웬일일

까?  이것이 법도가 아니라면 하고 싶어 하는 놈한테 냉큼 내놓아 주고 싶소.  그리고 중전

하고 둘이서 어디 향촌에나 내려가서 이 시끄럽고 무서운 궁중을 꿈에도 보지 않고 살다 가

고 싶소!"

  "상감마마, 신첩의 심경도 마마의 심중과 손톱만치의 차이가 없사옵니다.  하오나 그 전에 

저의 친가 모친이 말씀하시기를 만인지상의 지존한 자리는 춘풍 모양 부드럽고 따뜻한 것만

은 아니라고 하더이다."

  "중전, 고맙소.  중전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슬기가 있다고 생각하니 나도 절로 힘이 

나는 것 같구료!"

  "상감마마, 모든 사람이 다 적일지라도 지금의 중신들이 상감 앞에서 보필하는 데야 무슨 

일이 있겠사옵니까!  그리고 신첩 미약한 여자의 몸일지언정 상감을 모시는데 이 목숨 다할 

작정이오니 심려를 놓으시옵소서."

  "부디 힘이 되어 주시오.  중전을 믿는 이 마음이 얼마 만큼 큰지 중전은 아마도 모를 것

이요."

  어린 상감과, 중전 둘은 마치 완전히 성장한 남자와 여자가 말하듯 했다.

  지존한 상감의 마음도, 그의 배필인 유일한 존재 중전의 눈물도, 아랑곳 없다는 듯이 세월

은 흘렀다.

  왕위에 오르고 이년이 되는 오늘!  궁중은 잔치가 며칠째 계속되었다.  종친인 상감의 삼

촌들, 수양대군을 비롯하여 많은 친척들이 모이고 영의정 황보인을 비롯하여 많은 문무백관

들이 참례하였다.  특별히 마련한 용상에는 어린 임금이 양측에 시녀들을 거느리고 으젓이 

앉아 있었고 따로 마련한 자리에 역시 좌우에 많은 시녀를 거느리고 앉아 있는 중전은 오늘

따라 더욱 아름다왔다.

  그러나 중전은 춤도 노래도 악기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고 상감의 용안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린 용안이 오늘 따라 더욱 위엄이 서리어 있었으나 그 위엄 위에 이름 모를 우수가 깃

들어 있었다.  근래 더욱 심해가는 종친간의 반목과 수양대군의 횡포는 어느 누구도 막을 

사람이 없었다.  초미(焦眉)의 일이라고 통탄하면서도 아무도 어떻게 수습의 손을 뻗치지 못

했다.

  이 사실을 너무나 잘아는 상감으로서는 기쁜일이라고는 별로 없었다.  중전은 눈시울이 

슴벅거려 왔다.  그러나 그걸 나타낼 수도 없고,  나타내서는 안 되는 위치가 바로 이 영광

의 자리라는 중전의 자리였다.

  기어코 상감께서는 자리를 일어섰다.  더 지탱하고 앉아 있기가 역겨웠던 모양이었다.  중

전도 상감이 안 계신 자리가 제아무리 흥겨웁고 호화로운 자리로서니 앉아 있기는 싫어 눈

짓으로 일어서자는 뜻을 전하자 지밀상궁인 김상궁이 먼저 앞에와서 읍했다.


  온갖 소음 속에서 세월은 끊임없이 흘렀다.  중전 처소에서 오늘도 책읽기에 여념이 없는 

여심(女心)은 항상 상감이 계신 처소로만 달렸다.

  (억지 정무(政務)에 시달리시나?  그렇지 않으면 책이라도 읽고 계실까?  아니면 임금 앞

에서 아부만 일삼는 내시들이 예쁜 궁녀라도 데려다 바쳐서 그와 희롱하고 계실까?)

  별로 여색은 즐기지 않는 편인 상감이었지만 못된 내시들의 장난이 임금의 마음을 사로 

잡기도 했다.  언제나 귀찮고 시끄러운 정사(政事)와 수양대군의 횡포를 미워하는 상감은 가

끔 어린 궁녀들과 희롱하기를 즐겨하는 것이다.

  중전은 책에서 눈을 떼고 멀리 아롱거리는 아지랑이를 바라보았다.

  (상감도 열네살이 되셨지!  이제는 여자의 미를 아실 나이기도 하시니!)

  여기까지 생각의 날개를 펼치던 중전은 충신들을 잃고 슬퍼하신 상감의 작년 가을을 또다

시 생각하였다.  이제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세도가가 된 수양대군이다.  말이 영의정부사

(領議政府事), 이조형판서,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事)의 겸직을 갖고 있다 뿐 그 실제 

세력은 단종인 상감을 억누르고 휘두르는 판국이었다.

  그리고 집현전을 시켜서 수양대군을 찬양하는 교서(敎書)를 만들어 이것을 상감이 하명한 

것이라고 펼쳐 민중의 귀에 들어가게 하였다는 것이다.  중전은 날이 가고 달이 지날수록 

궁중의 생활은 즐거움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꼈다.  중전은 어리고 아녀자의 몸인 자기가 이

리도 몸서리가 쳐지는데야 상감의 그 흉중은 어떠할까 생각했다.  이런 자기의 마음이 지아

비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울어나온 것임을 자기도 모르는 중전이었다.  그중에도 상감을 모

시는 중전의 몸으로 상감을 생각하는 마음이 지나서 다른 궁녀들과 희롱하리라 상상만 하는 

것도 부덕에 어긋난 일이라고 마음을 고쳐도 보았다.

  (오늘은 내 처소에 발을 옮겨 주실까?  그러면 용안을 우러러 뵙고 그 심중도 헤아려 볼 

텐데...)

  중전은 이래도 답답했고 저래도 허전했다.  며칠째 상감이 들어오지 않아도 허전했지만 

어쩌다가 침소에 들어도 답답하기만 했다.  상감의 용안이 부드럽게 개인 날은 거의 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과연 상감의 자리도 중전의 자리도 호화를 극한 자리건만 즐겁지가 않

았다.

  세월을 흘러 단종 삼년째로 들어섰다.  중전이 거처하는 정원에도 매화가 그 풍취있는 자

태를 자랑하고 피어 있었다.  밤눈에도 아련히 떠올라 오는 애련하고 작은 꽃들은 중전을 

매혹시켰다.

  "상감마마 납시오."

  상감의 지밀상궁이 먼저 와서 품했다.  중전은 가슴이 뛰었다.  거울을 한 번 보고 옷매무

새를 잠깐 만진 후 상감을 마지하러 나갔다.

  "중전, 참으로 오래간만이구료!  어디 얼굴 좀 드시오."

  열다섯의 상감은 이제 옥음마저 어른다웁게 우렁찼다.  아랫목에 깔린 보료에 앉은 상감

은 중전을 눈으로 불렀다.

  "중전은 무엇이 그리 부끄럽소?  이제는 삼년이나 지난 중전과 내 사이가 아니요.  지아

비를 보고 그리도 수줍어하는 지어미는 책에도 못본 얘기구료.  어서 내 곁으로 와 앉으시

오."

  "예! 신첩 용안 우러러뵈온지 너무나 오래 된 것 같사옵니다."

  "참 나무나 격조했나 보오.  언제나 중전 신상을 생각 안하는 날은 하루도 없었다는 것만

은 잊지 마시오."

  "신첩은 상감의 용체가 나날이 훌륭해지시는 것을 뵈옵고 불경하옵게도 눈시울이 뜨거워

옵니다."

  "중전! 더 가깝게 오시오.  그리고 손 좀...  그 부드러운 손 좀 쥐어 봅시다."

  이 말을 마치고 상감은 천장으로 머리를 쳐들었다.  중전은 왠지 가슴이 뻐근해 왔다.  상

감이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고 천장을 올려다보려니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중전, 나는 요즈음 아무래도 수양대군에게 양위를 하는 게 편안할 것같이만 생각이 드오.  

이런 얘기 중전에게 해서 걱정 끼치고 싶지는 않지만 더 견디어 나갈 것 같지가 않구료."

  그녀는 무어라고 대답을 드려서 상감의 마음을 위로할지 잠깐 깊은 생각에 잠겼다.  측은

했다.  너무나 불쌍한 상감이었다.  열두살에 즉위하여 오늘까지 하루도 마음 평안한 날이 

없었을 것이다.  단종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째서 나는 국왕이 되었을까?"

  그 말 한 마디를 하고는 그대로 방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중전은 괴로왔다.  따라 울 수

도 또 복받치는 울음을 참기만 하기도 어려웠다.  중전은 어쩔 수가 없지만 가만히 마음을 

도사렸다.  지금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상감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슬픔을 덜어 주는 일

이라고 단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상감마마, 신첩은 일찍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글을 읽었사옵니다.  마마께

서는 대세를 역행하시지 말고 천시와 지리와 인화를 얻으셔서 양위를 하셔도 하시옵고 수위

(守位)도 하셔야 될 줄 신첩은 미련한 생각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오, 중전, 고맙소.  어찌 그런 생각이 중전의 머리에서 나오시오.  나는 어느 때나 중전에

게 힘입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소.  그렇지! 옳은 얘기요.  진인사대천명해야지!  역행은 우

자(愚者)들이나 범하는 것일 테니까."


    [虛空속에 그린 日月]   <寧越로 가는 길>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虛空에 그린 日月 

    寧越로 가는 길



   수양대군에게는 모사(謨士) 권남(權擥), 무사(武士) 한명회(韓明澮) 양인을 비롯하여 문종 

선왕 때부터 중용(重用)을 받았던 정인지사가 있었다.  때는 단종 삼년 육월 임금은 끝내 야

위라는 허울 좋은 이름을 빌린 그들의 탈권에 아무 힘없이 대보를 물려 주고 말았다.

  그가 곧 세조(世祖)이다.  단종과 단종비는 수강궁(壽康宮)으로 거처를 옮기고 이름 좋은 

상왕이라는 존칭을 받았다.  수강궁을 드나드는 종친 혹은 야인들에게 듣는 소식이 중전에

게는 하나도 마음에 걸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세조의 탈권이 어긋나는 일이라고 보는 몇몇 구신(舊臣)들이 있었다.  이들은 특히 

집현전 학자로서 세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성삼문, 형조참판 박팽년, 직제학 이개, 예조참판 

하위지, 사예(司藝) 유성원 등이었다.  거기다가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 전절제사(前節

制使) 유응부의 일곱 사람이었다.

  상왕의 내종(內從) 권자신(權自愼)이 가담한 이 왕위 복구의 대사는 착착 진행되고 있다는 

소문이 중전 귀에도 들어왔다.  중전에게는 보통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그 무서운 세조가 

알게 되면 일가멸족은 물론일뿐더러 상감의 신상에도 절대로 이롭지 않으리라는 것은 작은 

가슴으로도 추측을 하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가슴은 설레이다 못해 답답해지

고 미어지는 듯 했다.  상감은 무엇을 하는지,  이런 것을 아는지, 궁금이 지나쳐 초조해졌

다.  이 일을 상감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렇다고 자기 발로 상감 처소로 쭈르르 갈 수는 더욱 없었다.  금해진 법은 아니지만 언

제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어머님 말씀이 생각나서였다.  잠깐이라도 자기 처소로 거

동을 해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간절한 염원은 상대쪽에도 통하게 되는 법인 듯했

다.  

  한나절이 지나서 고요하기 이를데 없는 중전 처소로 단신 상왕이 들어온 것이다.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아무 예고없이 대낮에 이렇게 자기 처소로 용체를 옮기는 일이라는 건 별

로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중전!  무엇을 하시오.  하두 무료하기에 중전은 무엇을 하나 엿보러 왔소..."

  상왕은 기색이 혼연하여 농담을 던졌다.

  "신첩 낮이나 밤이나 상감 용체만을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어디 그럼 얘기해 보시오.  중전,  아니 이제는 중전도 아니고 나도 실은 상감도 아니지

만..."

  "상감께서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옵니까?  신첩에게는 언제나 어디서나  상감임에 틀

림없사옵니다."

  "하하...  그럴까?  모르겠소.  우리들만의 세상에서는 상감인들 어떻고 그저 지아비라고 

부르면 어떻겠소.  그렇지 않소?  중전!"

  "예, 황공하옵니다."

  지당한 말이지만 그녀는 듣기에 황공하였다.  상왕이 되고 이궁으로 옮겨 온 후로는 더욱 

상감과 가까워진 것 같은 나날이었으므로 그녀로서는 다시 없이 흐뭇하고 즐거운 일의 하나

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만난 어린 부부는 말없이 앉아 있다가 먼저 중전이 입을 열었다.

  "상감마마,  듣자옵건대 성삼문이하 많은 중신들이 상감의 왕위 복구를 위해서 모의하고 

있다고 들었사옵는데.  더구나 신첩의 아비도 연관이..."

  "응,  그것이 걱정이요.  또 그동안에 겪은 피비린내도 지긋지긋한데  그들이 무엇을 어떻

게 하려는지 하루도 마음 편안할 날이 없구료!"

  "상감께서는 일을 아신지 오래 되셨습니까?"

  "오래 되었나 보오. 종친들이 자주 드나들면서 한 소리지. 또 드나드는 사람도 일일이 뒤

따르고 한다는데 가지가지가 마음 안 쓰이는 일이라곤 없구료. 상왕이고 궁이고 뭐고 다 집

어치우고 언젠가 중전에게 말한 것같이 우리 둘이 초토에나 묻혀서 자연과 벗하고 살고 싶

구료. 진정이요. 그러나 그것도 맘대로 못하는 신세가 바로 나와 비의 신세가 아니겠소?"

  그녀는 가슴을 치고 대성통곡이나 하면 조금은 시원해질까 생각했다.

  "상감마마,  하오나 마음을 굳건히 하시고 또 인간이 할 수 있는 진인사대천명을 잊지 말

아 주시옵소서."

  "옳소.  비의 말이!"

  "그리고 상감께서는 그 일을 막도록 할 생각을 하신 일은 없사옵니까?"

  "내게는 아무 힘도 없소.  빼앗겨도 어쩔 수없고 찾아 준다 해도 어쩔 수는 없는 몸!  그

렇지 않소?  중전."

  (그렇다!  지존이신 상감의 자리가 힘없고 나이 어린 상감이시니 이렇게 불우해야 되는 

것이구나!)

  중전은 어디 눈에 안 보이는 그 무엇에라도 호소하고 싶었다.  이 어리고 착하기만 한 임

금에게 힘이 되어 줍시사 합공하고 빌고 싶었다.

  삼종지의(三從之義)를 배운 그녀가 의지하고 바랐던 존재는 하늘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었

다.  다만 이 나이 어린 상감 하나 뿐이었다.

  그녀는 다시 상감을 조용히 불렀다.  이시간! 지금! 그녀의 취할 태도는 오직 한 가지밖에  

없었다.

  "상감마마! 힘을 내시어요.  신첩 아녀자의 몸으로 아무것도 모르옵니다마는 어디까지나 

상감을 따라 죽거나 살거나 할 작정이옵니다."

  "중전!"

  "상감마마!"

  두 사람은 두 손을 마주 쥔 채 바라보았다.

  단종의 수강궁 생활은 하루도 즐거울 날이 없었다.  따라서 중전의 아리따운 자태도 발랄

할 수는 도저히 없었다.  지금 이순간이 그들에겐 좀처럼 찾기 힘든 시간이었다.

  김상궁이 기쁜 얼굴로 밖에서 읍했다.

  "김상궁! 무엇 좋은 일이라도 생겼소?"

  오십이 가까운 김상궁은 대대로 동궁빈을 모시던 지밀상궁이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중전

의 눈에 들어 중전 지밀상궁으로 올라선 여인이다.  언제나 변함없는 충성심과 과묵한 태도

가 누가 보아도 믿음이 가는 노년으로 접어든 상궁이었다.

  "예!  황공하옵니다.  이번에 명(明)나라 대사가 오셨사온데 내일은 창덕궁에서 연희가 베

풀어 진다 하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이 그리 기뻐서 상궁 얼굴에 희색이 만면하오?"

  "그런게 아니오라 상감마마께옵서 수강궁으로 듭시옵고는 한 번도 거동을 아니 하시지 않

았사옵니까?"

  "그야 유폐되시다시피 하신 용체가 어찌 상감 마음대로..."

  여기까지 말하고는 중전은 가슴이 메어온다.

  "중전마마!  그렀사온데 내일 연회에 상감마마께서 참례를 하신다 하옵니다."

  "김상궁! 상감마마께서 그 일을 허락하셨소?"

  "예! 그렇게 들었사옵니다."

  (오래간만에 거동이시니 기쁘실까?)

  다른 사람들은 다 어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나 중전인 자기만은 결코 상감이 진정으로 

기뻐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졌다.

  이튿날은 명나라 사신의 환영을 위한 연회가 창덕궁에서 벌어졌다.  한편 성삼문, 박팽년 

등은 호기(好機)가 왔다고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그들은 성승과 유응부로 하여금 운검(雲

劒)을 잡기로 결정하고 대사를 성취시키려고 모의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모(智謀)의 사람으로 세조의 한 팔인 한명회가 이 기미를 알아차렸다.  몇 달만

의 거동으로 상쾌해 하던 상왕의 모습이 흐려졌다.  상왕의 연회거동을 중지하라는 세조 명

이 온 것이다.  성삼문 등도 상왕이 참례 안하는 자리에서의 혁명은 허사라고 깨달았다.

  운검을 가지고 들어가려던 무인 유응부는 한명회가 연회석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태도

가 괘씸하기 이를데 없었다.

  "생각컨대 연회장소가 좁아서 운검을 잡을 필요가 없다고 여기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응부는 한명회를 치려고 했다.

  성삼문 등은 굳이 만류했다.

  "상왕이 안 계신 이 자리!  무엇 때문에 만용을 내시오?  제발 참으시오."

  응부는 이를 갈고 참아야만 했다.  무릇 무사와 문사의 다른 점은 이런 것이리라.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이미 일이 틀린 것을 눈치 챈 김질(金 )과 그의 장인 정창손(鄭昌孫)의 고발이 기어코 일

을 벌여 놓고 말았다.  유여가 있을 리 없었다.  성삼문, 박팽년 등 여섯 사람이 입은 화(禍)

는 여기서 길게 부연하지 않아도 너무도 잘 알려진 일이다.  수강궁의 봄은 봄을 외면한 듯

싶었다.  상하가 수심에 싸인 가운데 어디를 들어서나 찬바람이 불었다.

  중전의 처소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어제 와서 모든 경위를 비분강개(悲憤慷慨)하며 얘기하던 금성대군(錦城大君)의 말이 소름

이 끼치면서 되살아 왔다.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은 언제나 단종의 편에 서 있었

다.  호탕하고 뛰어난 무예로 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그였지만 이미 정권을 장악해서 상감자

리에 오른 형 세조와 겨루기에는 너무도 적은 힘이었다.

  그는 문자 그대로 호읍(號泣)했다.  땅을 치며 하늘을 쳐다보며 나라 형편을 비탄했다.  

상왕인 단종도 상왕비도 같이 소리 없이 울었다.  더구나 비의 슬픔은 말할 수 없었다.  삼

족을 멸할 일!  즉 모의를 했으니 그 형이 극심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었다.  걱

정을 얼굴에서 감추지 못하는 상왕비의 연연하 모습이 금성대군으로서는 차마 볼 수가 없었

다.

  "상왕비마마,  심려를 놓으십시오.  설마 강도 같은 그들이기로서니 상왕비마마의 친가를 

건드리기야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중전은 더 길게 친가 걱정만 하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니라고 깨달았다.  언제 어느 때 상

왕인 단종에게 화가 올는지 예상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음을 태연

히 가져야 한다고 다짐했다.

  어떤 불행한 소식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지니려면 굳은 마음 가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중전의 마음이었다.

  상왕비 처소에서 느끼는 계절은 앞마당에 피었다 졌다 하는 초목들에게 있었다.  모란이 

피었다.  그녀의 마음을 알 까닭이 없다는 듯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상왕비는 아침부터 이름 모를 불안감에 사로 잡혀 좌정을 할 수가 없었다.  책을 펴놓고 

앉아 있어도 눈이나 머리로 새겨 들어가지가 않았다.  꽃을 둘러보아도 마음의 평화는 찾을 

수가 없었다.  어떤 불길한 예감이 가슴 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혹시 친가에 무슨 변이라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아니면 상감에게 좋지 못한 일이라도 

생길 징조인가?)

  맑은 예지(銳志)를 지닌 여자의 가슴은 예민하다.  드디어 일이 난 것이다.  상왕도 그녀

도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예기했던 일이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성삼문 등이 역적모의한 일을 상왕이 몰랐을 리 없다고 핑계삼아 그의 허울 

좋은 상왕의 존칭마저 빼앗아 버린 것이었다.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이 되었다.  자연 상

왕비인 그녀는 노산군 부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사자의 전서(傳書)는 추상 같기만 했다.  노산군 

부인이 된 그녀는 다리에 힘을 주어야 했다.  다음 말이 더욱 무서운 것이라고 예측하기 과

히 어렵지 않기 때문이었다.  노산군으로 강등된 상감의 용안은 별로 흔들림이 없었다.  사

자는 계속해서

  "군사 오십명의 호송하에 강원도 영월(寧越)로 내일 안으로 떠나십시오."

  노산군 부인의 가슴은 오히려 담담했다.  여필종부(女必從夫)라는 진리를 배운 이상,  그

것을 아는 이상,  당황할 일이 없었다.  자기는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상감을 따라 나서기만 

하면 되리라고 마음 먹으니 별로 초조할 것도 없었다.

  사자도 물러가고 노산군 부인은 짙어오는 황혼을 받고 앉아 있었다.  노산군이 올 것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어서 보고,  위로도 해드리고,  앞으로의 삶의 계획에 대한 말도 나누

고 싶었다.  그러나 황혼이 짙어오는데도 노산군은 오지를 않았다.

  그녀는 참기가 어려웠다.  오늘밤이 수강궁에서의 마지막 밤인데 어찌하여 상감은 이렇게

도 무정하신지 원망스러웠다.  술시경(戌時頃)이나 돼서야 노산군의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왔

다.

  "상감마마!  신첩 많이 기다렸사옵니다."

  "응"

  침통 그대로의 용안이었다.

  "비는 어째 아직도 침소에 안 드셨소?"

  "수강궁에의 밤이 오늘 뿐이온데 어찌 신첩 안온히 자리에 들겠사옵니까?"

  "이제는 중전도 비도 아닌 노산군부인이요.  지금부터는 부인이라고 부르리라.  부인!  얼

마나 친근하고 좋소.  부인! 어디 그 얼굴 잊지 않게 눈 속에 새겨 둡시다."

  "상감께서는 무슨 말씀을...  죽는 날까지 상감을 따라야 하는 이몸!  새겨 두시지 않아면 

설마하니..."

  "부인!  참을 답답하구료."

  노산군은 그 말을 한숨과 함께 내뱉다시피 하고는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상감마마 신첩이 아뢴 말에 어디 잘못이라도 있사옵니까?"

  "아니요!  그게 아니라 부인이 너무나..."

  노산군은 또 말끝을 맺지 못하고 부인의 얼굴만 뚫어지라고 바라 보았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어떤 걱정이 상감 위에 생긴 것이라고 부인은 생각 하였다.

  "상감마마!  신첩에게 못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시오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신첩의 몸이 

오나 언젠가도 말씀한신 것같이 신첩의 몸과 말이 힘이 된다고 하시지 않았사옵니까?"

  노산군도 이제는 할 말은 해야 되겠다는 듯 말을 시작했다.

  "부인! 나를 똑똑히 보시오.  그리고 언제나 부인의 마음은 여전하리라고 믿고 있소마는 

조금도 흔들림 없는 태도로 들어 주시오."

  노산군 부인인 그녀에게 번개같이 머리 속을 스쳐간 것이 있었다.  예상하기 어렵지 않던 

친가의 불행을 말하는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부인, 내가 가는 길이 무슨 길인지 아시오?  노산군이라는 것도 급작스레 상왕이라는 칭

호를 빼앗기 어려워 그렇게 붙여 준 것 뿐이요.  나는 임금으로서 아니 왕자의 몸으로서 강

원도 두메 산골 영월로 정배를 당하는 몸이요."

  "그러나 상감, 신첩은 오히려 이 궁을 벗어나 상감마마와 둘이서만 지낼 수 있는 그 길이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겨지는데 아녀자의 미련스런 마음이오니까?"

  열다섯의 어린 노산군은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서 부인 얼굴을 정시하지 못했다.

  (어서 빨리 정확하게 이 처지를 알려 주고 납득시켜야만 할 텐데.  착하고 순박하기만 한

부인의 마음을 어떻게 달래야 할까?)

  그녀도 상감의 용안이 말 못할 무슨 괴로움을 지니고 있음을 헤아렸다.

  "상감마마!  신첩은 어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사와도 마음 흔들리지 않을 각오가 되

어 있사오니 심려를 놓으시고 시원하게 이 몸에게 들려 주시옵소서!"

  "오! 중전!"

  노산군은 그녀를 덥석 껴안았다.  이런 일은 일찍이 한 번도 없던 일이었으므로 상감 가

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중전은 뛰는 가슴을 진정할 길이 없었다.

  "부인!"

  노산군은 드디어 가슴에 안았던 부인의 머리를 가만히 풀고는 조용히 부인을 불렀다.

  "예, 상감마마."

  "내일 아침 동이 트자 나는 영월로 떠나야 하오!"

  그녀는 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것을 느꼈다.

  (아니 그럼 혼자서만 가신단 말인가?)

  온 신경을 모은 채 상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부인은 친가에 가서 계셔야 하오!"

  "예? 상감,  무슨 말씀이오니까?"

  "나는 정배를 당하는 몸!  부인도 그만한 것쯤은 알고 있을 터인데...  정배를 당하는 사람

이 어디 부인을 동반하는 법이 있겠소!"

  상감은 너무 하는 소리인가 싶었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럼 신첩은..."

  부인은 기어코 자제를 잃고 그대로 몸이 내동댕이쳐지듯 방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

대로 큰 소리로 무정한 나라법을 욕하고 울고 항거하고 싶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어머니

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떠한 불행한 처지가 닥쳐와도 국모의 체모를 잊어서는 안 되느니라!  언제나 목숨과 

바꾼다고 생각하면 못하고 안 되는 일이 없느니라!>

  전에는 서릿발 같은 교훈이라고 생각했으나 바로 지금이 그경우라고 어린 가슴에도 무언

가 생각되는 것이 있었다.

  "부인,  일어나 앉으시오!"

  그녀는 엎드려서 눈물을 닦고 조용히 일어났다.  그리고 허트러진 옷과 머리를 매만졌다.

  "상감마마!  신첩 상감에게 잠시라도 심려를 끼쳐 드려 황공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것은 안 되는 일.  부질없는 아녀자들이나 일삼는 일.  나는 중전이다.  나는 나라의 왕

비였다.  어머니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중전은 다소곳이 머리를 숙였다.

  "부인!  친가는 아무 화가 없다고 들었소.  모의에는 직접 가담도 아니 했을뿐더러 그럴수

는 없다고 해서 그 화는 면했다고 합디다.  그러니 내일 내가 떠난 후 부인은 친가에 나가

서 몸과 마음을 수양하다가 하늘의 뜻이 있어 다시 만나게 되는 날까지 부디 평강히 지내시

오."

  세상에 이런 일도 있는 것일까?  하늘도 무정하였다.  분명 궁중은 낙토가 아니었다.


    [虛空속에 그린 日月]   <斷腸의 曲>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虛空에 그린 日月 

    斷腸의 曲



  중전은 초라한 가마를 타고 친정으로 떠났다.  시종도 없이 친가에서 궁으로 들어갈 때 

같이갔던 몸종 월선만이 따랐다.

  궁으로 가는 길과 민가로 나오는 길은 판이했다.  가마 속의 노산군 부인은 이제 얼굴에 

눈물자국마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가마를 따르는 월선이가 눈물을 흘러 길이 보이지가 

않았다.  길을 지나가던 행인들이 중전의 가마라고 앉아서 절들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

는 월선의 마음은 더욱 안타까왔다.  군사 오십명이 호위하는 가운데 따나던 상감과 중전의 

이별 장면이 지금도 월선의 눈에 아롱거렸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서러운 이별이었다.  호송대장인 금부도사도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친가에서는 노산군 부인인 딸의 후원 별당을 깨끗하게 치워 놓았다.  온 세상이 다 변했

는데도 친가의 후원 별당만은 변하지 않았다.  나무나 꽃도 돌도 이끼도 여전했다.  어머니

의 깊은 배려는 딸을 위해서 새로이 장판, 도배, 창호지를 깨끗하게 해놓았다.

  그녀는 진정으로 방성통곡(放聲痛哭)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조금은 가슴이 후련해지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순간으로 지나가는 여심(女心)에 지나지 않았다.  

늙으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불쌍해서 울 수도 없었다.

  처녀의 몸으로 온갖 궁중의 양상(樣相)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 한 여인에게 매어서

산 월선이도 불쌍했다.  울음도 맘대로 울 수 없는 몸이 양반의 몸이란 말인가?  지아비를 

맘대로 지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하늘같이 우러러보며 지낸 짧다면 짧은 사년 동안의 생활, 

그것은 왕후가 된 죄이던가?

  "중전마마 자리를 보았습니다.  어서 침소에 드셔야 됩니다.  마마의 양안(兩眼)이 뵐 수 

없도록 피가 서려 있사옵니다."

  "오냐!  월선이 네 고생이 말이 아니구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니까?  대방마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시옵니다.  진지를 

안 드셨다고 깨죽을 쑤어 올리라고 하시어 지금 또 부엌에서는 깨죽을 쑤고 있사옵니다."

  "제발 날 좀 내버려 두어라.  나야 이렇게 편안한 친가에서 양친님 비호 아래 무슨 걱정

이 있느냐?  상감께서는 무딘 두메에서 어떻게 소일하시는지..."

  입만 벌리면 상감 얘기였다.  상감의 옥체가 걱정이 되었다.

  "얘, 월선아.  깨죽은 고만두라고 하고 잠이나 들고 꿈이나 꾸자.  꿈 속에서 뵈옵는 상감

은 어떻게 그렇게도 어지신지..."

  그녀의 입가에 가느다란 경련이 일었다.  너무나 순간적이었기 때문에 월선이 눈에도 띄

지 않았다.  그것은 노산군을 그리는 부인의 즐거움 같은 표정이었다.

  친가에 온지도 한달이 지났다.  꿈을 꿀 만큼 잠을 이룬 날이면 상감과 회포를 풀었다.  

생시와 똑같았다.  오히려 생시에는 그렇게 정다운 눈길과 부드러운 음성을 들은 일이 없었

다.  잠이 안 온다.  눈을 감고 꿈길을 더듬어야 그리운 상감을 만나볼 수 있으련만...

  청량포(淸凉浦)의 한 객사,  거기가 노산군이 지내는 우거(寓居)였다.  그녀는 청량포인지 

무언지 그 강의 이름도 알 까닭이 없었다.  그녀는 민가에서 입던 옷 위에 중전의 예복을 

덧입고 머리에는 중전의 족두리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대로 뛰어 상감이 계실 동헌으로 가고 싶었으나 왕후의 몸임을 생각하고 마구 행동할 

수 없었다.

 이윽고 상감이 보였다.  용상(龍床)이 아닌데 용상에 올랐던 그 자태와 조금도 다름없이 위

엄이 서린 용태로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있었다.  황송스런 걸음으로 그녀는 상감 앞으로 

조용히 한발 한발 다가갔다.

  왜 멀리 이 곳을 자주 찾아오느냐고 역정을 낼까 두려웠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상감을 

불렀다.

  "상감마마, 신첩 우러러 뵙고 싶어 다시 왔사옵니다."

  단정히 앉아서 무엇엔가  골몰하던 상감은 무척 반색을 했다.

  "아, 부인!  어서 올라 오시오!  하루종일 기다렸소이다."

  그녀는 다시 없이 기뻤다.  그 한마디를 위해서 며칠을 지냈던가?

  "상감마마, 수라는 무엇을 드셨사옵니까?"

  "응! 나야 여기서 갖가지 생선이 좋아 많이 먹고 지내오.  부인은 오늘도 식음을 전폐한거

야 아니겠지?  거듭하는 부탁이오마는 많이 자시고 푹 쉬어야 몸과 마음이 더불어 평안해

서 오래 사는 법이요.  또 오래 살아야 하늘의 도움을 얻어 그대와 내가 다시 가깝게 만나 

평생을 지낼 게 아니요?"

  중전은 가슴이 뛰도록 기뻤다.

  "예, 상감!  신첩도 상감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정진하겠사옵니다."

  오래 오래 상감과 정다운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아니 말없이 그대로 곁에 앉아만 있어

도 좋았다.

  그러나 벌써 동창이 밝아지고 있었다.  

  덧없는 꿈이었으나 꿈 속에서 만나는 상감이 그녀에게는 사는 힘을 공급하는 근본이 되었

다.  소세를 마치고 머리를 빗었다.  분단장은 아니 했다.  소세를 하는 거나 머리를 빗는 

것도 그리운 님을 꿈길에서나마 만나기 위해서였다.

  사랑에서 대감마님께서 올라오시라는 분부를 월선이가 전했다.  왠지 불안한 예감이 그녀

를 엄습해 왔다.

  "아버님 부르셨습니까?"

  "어서 들어오오!"

  그녀는 늙은 아버지에게 사뿐이 절을 하였다.

  "거기 앉게나.  그래 요사이는 음식을 좀 드오?"

  "예, 아버님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많이 먹고 많이 자고 하옵니다."

  "암 그래야 하오.  세상 일이란 그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것,  언제 다시 햇빛이 비칠 날

이 올지 알겠소.  그러니 오래 몸을 보중하는 게 제일이요."

  "예!  저도 그렇게 알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벌써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있었지만 식음을 전폐하고 잠도 안 잔다고 해서 말을 

못 드리고 있었소.  다행히 요사이는 마음을 고쳐 음식도 하고 잠도 이룬다고 해서 드리는 

말이니 마음 든든히 먹고 들어 주오.  알겠소?"

  "예!"

  그녀의 가슴은 많은 슬픔과 겹친 불행으로 이제는 거의 무감각의 상태가 된 것을 아버지

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다름 아니라 현덕왕후(顯德王后)께도 화가 돌아가서 서인으로 추폐(追廢)가 내렸다는 것이

요.  그리고 금성대군도 순흥(順興)으로 귀양을 가고..."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상감의 생모인 돌아간 양반에게까지 화를 입힌 것을 생각하고 또 

아침 저녁으로 문안을 드리면서 조정 소식을 알려 주고 왕위 복구를 위해서 애쓰던 금성대

군을 생각해서 흐르는 눈물이었다.

  "아버님!  내려가겠습니다."

  "그렇게 하오.  너무 심려를 하지 마시고 몸 조심에나 힘을 쓰오."

  송부사의 얼굴도 그림자가 자욱했다.  그는 그대로 여러 가지 고민이 많았다.

  한편 경상북도 순흥으로 귀양을 간 금성대군은 며칠을 번민 속에서 지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좌시할 수 없는 일이 형인 세조의 탈권이었다.  탈권에만 그치면 

그대로 참을 수 있었다.  어린 상왕을 왕위복구에 가담했다는 구실로 정배를 보낸 일에 대

해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며칠 몇 밤을 울어 새웠다.  기어코 그는 동지 규합

에 나섰다.

  원래가 호탕하고 잘난 대군의 모습은 많은 사람의 공명을 일으키게 했다.  그 중에 부사

(府使) 이보흠(李甫欽)과는 흉금이 맞고 뜻이 맞았다.  그리하여 노산군 복위를 위한 모의는 

착착 진행되었다.  여기에 집합되는 우국지사와 순흥병사(順興兵士)는 굉장한 숫자였다.

  그러나 이 또한 천시를 못 얻었으니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금성대군에게 가깝게 있던 시

녀와 순흥 한 관노(官奴)는 이 일을 사전에 고발하기에 이르렀다는 얘기였다.

  금성대군의 하옥(下獄)은 물론 영남 인사들의 주살은 고을의 냇물을 붉게 물들였다.  한편 

세종의 아들 한남군(漢南君), 영풍군(永豊君) 등도 이때 연루자로 귀양을 가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금성대군은 사사(賜死)를 받게 되었다.  그는 단정히 꿇어 앉아 영월땅을 향해 서배

(西拜)하고 통곡하면서 죽음에 이르렀다.  이 참혹한 소식이 노산군 부인의 귀에 아니 들어

갈 리가 없었다.

  그녀는 안절부절했다.  이 일을 상감께서 모를 리 없고 이 일을 알 상감의 흉중이 얼마나 

아플까를 생각했다.  물론 금성대군의 참사를 안 순간 가슴이 덜컥 떨어져 없어지는 것 같

은 것을 감출 수는 없었으나 그보다 으레 뒤에 상감에게 닥쳐올 후환이 더욱 더 몸서리가 

쳐지면서 두려웠다.

  (설마 하니 그럴 리야 없겠지!  설마 일국의 왕자를 제아무리 잔혹무도한 세조일망정 삼

촌인 지금의 상감이 화를 주지야 않겠지!  그러나 정배까지 보낸 후의 화라는 것은 너무나 

뻔한 것이 아닌가!  세조의 친 동생인 금성대군도 사사했다는데.  조카쯤이야...)

  자욱한 혼란이 그녀 머리를 휩싸 왔다.

  (오냐!  내게는 수강궁에서 친가로 나오던 날, 아니 생이별을 고해야만 했던 날 지녔던 비

상(砒霜)이 있다.  나는 목숨이 아깝지 않다.  만일 상감인 지아비에게 어떤 일이 생기면 나

도 같이 따라가서 저 세상에 가서나 영원히 지아비라고 부르면서 섬기자.)

  그녀는 서릿발 같은 마음으로 이런 생각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 그 소식을 들은 날부

터 도저히 목에 물 한 모금 넘길 수가 없었다.  이것을 보는 아버지 어머니의 근심은 이루 

말하기 어려웠다.  월선이도 대방마님의 어떤 명령을 받았는지 잠시도 그녀 곁을 떠나지 않

았다.

  "중전마마, 오늘은 아니 주무십니까?"

  "오냐, 너 먼저 자거라.  난 조금 있다가 자마."

  "아니올시다.  어서 침소에 드셔야 상감을 만나 뵈오려 떠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

서 쇤네가 말씀 올리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렇게 잠이 아니 오니 그 아니 딱하냐?  네말이 옳긴 옳다마는..."

  큰 한숨이 저도 모르게 뿜어 나왔다.  걱정하다 못해 꽉 차 있다가 몰려 나오는 호흡이다.  

이미 각오는 서 있건만 설레이는 가슴을 달래기가 어려웠다.

  "월선아, 어머님 자리에 드셨나 가서 보고 오너라."

  "예"

  월선이가 안채로 사라졌다.  근래 어머니는 딸 걱정하느라 부쩍 백발이 늘었다.

  "중전마마,  아니 듭시고 불이 켜진 채 기침소리만 들립니다."

  "오냐, 그럼 나 좀 안에 들었다 나오리라."

  대청에 올라선 그녀는 아직도 불이 켜 있는 어머니 안방을 열었다.

  "어머님, 어째 아직껏 침소에 안 드시고 앉아 계십니까?"

  "오, 중전이요?  왜 아니 자고 밤중에 나왔소.  하긴 사랑채 아버님도 주무시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어머님, 불효자식 때문에 받으시는 아버님 어머님의 심려를 어떻게 하면 저의 힘으로 덜

어드릴 수 있사옵니까?"

  "우리들의 걱정은 중전의 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요.  중전은 숨기지 말고 속 마

음을 이 어미한테 얘기할 수 없겠소?"

  "예, 그러지 않아도 어머님께나 이 심회를 밝혀서 마음의 안정을 얻어 볼까 하옵니다."

  "오, 그렇게 하오.  어서 말해 보구료."

  "중전 몸이 아닌 이 몸이 요사이 그래도 위로를 받사옵는 것은 어머님의 인자하신 그 음

성속에서인가 합니다."

  "다행이요.  중전을 위해서도 난 좀 더 오래 살면서 세상 되어 가는 꼴을 봐야겠소."

  "어머님. 금성대군 참변이 그걸로만 그칠 것으로 보십니까?  아니면..."

  다음 말은 하지 않아도 오래 조정과 국사를 보아온 어머니는 익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아유! 내가 무슨 말을 하겠소.  그저 신명이 도와 주시기나 빌고 지내야지.  아버님께서

는 벌써 며칠 전부터 앉아 계신 대로 눕지도 않고 아무도 만나시지 않고 계시니 그저 딱하

기만 하구료."

  "전 이미 각오를 가졌습니다.  아버님께도 어머님께서 여쭈어 주십시오.  저의 결심은 이

미 되어 있다고 말씀입니다."

  어머니가 딸의 하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아니, 중전은 이상한 생각을 품고 있는 게 아니요.  언제나 부모 슬하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되오."

  그녀는 어머니의 혜안(慧眼)이 두렵게까지 느껴졌다.

  "그러하오나 어머님,  저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무얼 어쩐단 말이요!  목숨은 하늘이 점지하시는 것,  함부로 다루었다가는 그 화도 적지 

않을 것이라는 걸 명심해야 되오."

  언제나 인자하면서도 추상 같은 말을 주는 어머니였다.

  "그러나...  어머님,  상감의 용체에 무슨 일이 있으시면..."

  그녀도 어머니도 할 말을 찾을 수가 없다.

  "그 말 잘했소.  상감마마께옵서 천수를 다 못하시고 무슨 일이 생기신다면 중전은 더욱 

이 세상에 남아서 상감의 억울하신 넋을 진혼(鎭魂)해 올릴 의무가 있지 않소?"

  "어머님, 어찌 저 혼자만 남아서 천수 다하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중전은 어찌 이 에미 말을 못 알아 듣소?  억울한 일은 언제나 백일하에 나타나는 법, 

그것이 내 생전에 나타날지 어쩔지는 모르지만 중전만은 오래 살아서 그 억울함을 설욕해야 

되지 않겠소?"

  "예, 어머님 말씀 가슴에 명심하고 받들겠습니다."

  "그래, 그래야 일국의 국모될 자격이 있소."

  어머니는 진정으로 딸을 우러러보고 싶도록 갸륵하게 생각했다.

  "어서 내려가 자도록 하오.  월선아!  게 있느냐?"

  "예, 대방마님 여기 있사옵니다."

  "너 각별히 마마님 잘 모시고 받드시는 거 잊어서는 절대로 아니 된다."

  "예, 대방마님, 조금도 염려 마시어요.  쇤네 몸이 없어질 때까지 중전마마를 모시고 받들

겠사옵니다."

  노산군 부인은 월선이를 앞세우고 친정 어머니의 방을 물러나와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

  한편 멀리 영월 산골에도 금성대군의 참변소식은 날라왔다.  왕자의 기품을 잃지 않고 지

내는 노산군의 태도는 누구나 경의를 표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오늘도 동헌에 앉아서 

책 읽기에 여념이 없는 그의 심회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금성대군의 복위운동이 사전에 탄로되어 사사 받은 일과 영남 인사들이 피가 내를 이루었

다는 소식을 들은지 수일이 지났다.  이제 다가올 일은 자신의 차례라는 것을 짐작했다.

  그 화가 오늘 올지 내일 올지 모르는 일이다.  그때 황급히 뛰어와서 알리는 소리가 있었

다.

  "아뢰옵니다.  금부도사가 저기서 온다고 하옵니다."

  "오냐, 시끄럽게 하지 마라.  이미 각오하고 있는 몸!  걱정할 일이 못된다."

  나이 어린 왕자가 이토록 죽음에 이를 때 태연한 것은 이왕 죽을 몸이니 하루 빨리 죽는 

길만이 이 무섭고 몸서리쳐지는 골육상쟁(骨肉相爭)을 안 보는 첩경이라고 알고 지내 왔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사약을 받들고 동헌으로 들어온 도사는 감히 노산군 앞에 이것을 바칠 수가 없었다.  나

장(邏將)의 재촉에도 그는 왕년의 상감이었던 당년 열일곱의 왕자 앞에 약사발을 드리기에 

하늘이 무서웠다.  이것을 보고 섰던 노산군을 모시던 한 서생이 말했다.

  "제가 상감을..."

  그는 몸에 지녔던 활 시위를 가지고 달려들어 노산군의 목을 졸랐다.

  하늘도 땅도 울고 산골 두메의 초목도 같이 통곡하였다.  전하는 말은 상감 시체마저 강

물에 띄어서 어복(魚腹)에 장사지냈다 한다.


    [虛空속에 그린 日月]   <잃어버린 歲月>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虛空에 그린 日月 

    잃어버린 歲月



   노산군 부인의 친가에서는 사랑채 송현수도 일체 두무불출을 하고 찾는 사람도 없는 방

속에서 사형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앉아만 있었다.  

  마치 실신한 사람 같았다.  안채에 있는 송현수 부인도 보기에 너무나 애절하였다.  거의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고 딸과 함께 자리 보존하고 누운지 며칠인지 헤아릴 길이 없었다.  

집안 어른들이 이러하니 아랫사람인 비복들도 기력이 없고 우울해졌다.

  왕년의 중전이던 노산군 부인이 거처하는 후원 별당의 모습은 너무나 처량하였다.

  그러나 자연은 어김이 없었다.  화사하기만 하던 함박꽃이 지고 흰 나리꽃이 별당에 거처

하는 노산군 부인의 마음은 아랑곳도 없이 그 은은한 향기를 자랑하고 있는 황혼 짙은 시간

에 월선이만이 우왕좌왕 어쩔 줄을 몰랐다.  오늘도 진종일 물 한 모금 안마시고 누웠다 앉

았다 하는 노산군 부인이 너무나 딱해 보였다.  눈물이 말랐는지,  아니면 중전의 체모를 생

각함에서인지 그녀는 아예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월선이는 도대체 이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자기가 어떻게 처신해야 좋을지 어리둥절하기

만 했다.

  안으로 들어서면 백발이 성성한 대감 내외분을 보기가 송구스럽고 후원 자기 거처로 오면 

중전마마의 침통과 세상을 외면한 듯한 모습을 차마 같은 여자로서 무심히 볼 수가 없었다.  

아까 들여온 잣죽은 식어서 엉켜버린 채다.  몇 번이나 잡수시라고 종용은 했건만 노산군 

부인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허공을 올려다본 채 눈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월선은 또 한 번 안채 부엌에 나가 다시 죽을 데워서 갖다 달라고 이르고 곧 들어왔다.  

대방마님이 잠시라도 마마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내리기 때문

이다.  잣죽이 다시 따끈하게 데워져 들어왔다.

  "중전마마! 기력을 차리시고 한 수저라도 드셔야 안채 마님들도 진지를 잡숫지 않으시겠

사옵니까?  쇤네는 너무나 답답해요.  안으로들면 대방마님께서 자리 보존하신 채 식음을 

전폐하시고 사랑에서는 대감마님께서 아예 출입도 안하시고 하루종일 앉아만 계신다 하오

니..."

  "오냐, 내가 참으로 불효자식이구나.  이 몸은 죽는 길도 맘대로 할 수 없는 몸, 어쩌면 

좋단 말이냐."

  몰아 쉬는 한숨에 너무나 큰 한이 맺혀 있었다.

  "중전마마,  쇤네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사람에 지나지 않는 몸입니다마는 들은 풍월로는 

양친님 앞에서는 그런 생각을 품는 것조차 불효가 된다고 들었사옵니다."

  "네 말이 옳다.  너에게 배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구나.  월선아,  너는 누구보다도 내

게 힘이 된다.  네 은혜를 한시라도 잊지 못하겠구나."

  "마마께서는 늘 그런 말씀만 하시네요.  쇤네는 마마님이 웃으시면 따라 웃고 마마님께서 

찡그리시면 저도 찡그리는 거울 같은, 그림자 같은 존재가 아니겠사와요?"

  "넌 곧잘 문장 속에 있는 말을 다 할 줄 아는구나.  아무튼 기특도 하다."

  "중전마마, 어서 한 수저만이라도 드시어요.  그리고 기력을 차리시고 안방 대방마님께 납

시어서 음식도 권하시고 위로도 하시어야 중전마마의 체모가 서지 않을까 소녀는 생각되옵

니다."

  "그래 이리 가지고 오너라.  억지로라도 눈을 감고 마시자.  네 말이 과연 옳다."

  중전은 반 사발이나 되게 마시고는 풀린 머리를 얹은 후 월선이를 앞장 세우고 나섰다.  

몇날 잠을 못 자고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으므로 어지러웠다.

  "어머님, 들어가도 좋습니까?"

  "중전이요, 어서 오오!"

  이제는 말할 기력도 없는 어머니는 딸을 반겼다.

  "어머님, 소녀는 지금 잣죽도 먹고 이렇게 소세도 하고 머리도 빗고 정신차리고 나왔습니

다."

  "오, 어디 보오.  암! 그래야 하오.  그래야하구 말구요.  그래야 상감의 억울하신 영혼을 

위로해 올리고 나라 꼴이 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볼 게 아니오!  나도 오래오래 살아

서 반역한 사람의 마지막을 보고 싶구료."

  "어머님, 부디 소저와 같이 오래 사셔서 어머님 말씀같이 세상 돼가는 것을 보셔야 하지 

않아요?"

  "중전의 말이 과연 옳소.  월선아, 게 있느냐?  가서 무어 먹을 것 좀 가지고 오너라.  마

마께서 이렇게 기력을 차리시고 듭시었는데 난들 이렇게 있을 수야 있겠니?"

  송부사 부인은 지금 이 시간이 진정으로 기뻤다.  효심이 극진한 딸이 어머니를 생각하여 

그 사무치는 슬픔을 지탱하고 올라와서 앉아 있는 것을 보니 더욱 그랬다.

  "중전, 사랑 아버님께 가 뵈야겠소.  나도 한술뜨고 같이 나갑시다."

  송부사 부인은 언제 알아도 알게 될 노산군 참변을 딸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예, 그러세요.  저도 아버님 뵙고 싶습니다."

  아직은 노산군의 최후를 모르고 있는 부인은 어머니가 사랑으로 가자는 애기를 단순히 들

었다.  비틀거리는 대방마님을 몸종이 붙들고 월선이는 노산군 부인 뒤를 따라 사랑으로 갔

다.

  "아버님, 아직 침소에 안 드셨어요?"

  "웬일이요. 어서 들어오오."

  쉰 목소리는 가라앉은 눈으로 사물을 보고 있는 그의 마음을 말하는 듯했다.

  "부인도 같이.  무엇 드셨소?  중전도..."

  "예, 대감께서는?"

  "나야 먹었지.  암, 먹어야지!  안 먹으면 죽는 법."

  그것은 남에게보다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는 소리였다.

  "중전도 정신을 처리오.  이보다 더 무서운 박해가 와도 정신을 차려야 사는 법이요.  그

리고 오래 살아야 마지막을 보는 것,  알겠소?"

  "예, 아버님, 저는 오래 살아서 상감의 진혼도 뫼시고 아버님 어머님에게 효도도 실컷 하

고 싶사옵니다."

  "오, 과연 내 딸이로고!"

  "아버님,  이미 각오하고 있사옵니다.  조금도 구애 마시고 제게 얘기해 주십시오."

  그녀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누가 말해 주어서 안 것이 아니라 궁중생활의 경험에서 느

껴지는 것이다.  지아비되는 노산군이 이 세상에 생존해 있다면 오히려 거짓이라고 규정짓

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전의 입에서 먼저, 그 말이 나오기를 우리 두 늙은이는 기다린 셈이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들어주오."

  송부사는 서두를 이렇게 시작하고 한 미미한 서생놈에게 화살의 시위로 목을 졸리워 마지

막을 고한 상감의 참변을 띠엄띠엄 얘기했다.  노산군 부인은 아무 표정도 없이 얘기를 들

었다.  차돌같이 차고 굳은 표정이었다.  아니 오히려 새파랗게 맺힌 얼굴이었다.

  말을 마친 늙은 아버지는 차마 딸의 얼굴을 정시하지 못했다.  어머니 역시 그러했고...

장지 밖에서 엿듣고 있던 월선이는 치마끈으로 끝없이 흐르는 눈물을 자꾸만 자꾸만 닦았

다.  노산군 부인은 이제는 아버지 처소를 일어서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가 발에다 못을 박아 놓은 것처럼 일어서지지를 않았고 입도 꿰매 놓은 것같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녀는 가만히 손을 자기 넓적다리에 가져다가 꽉 꼬집어 보았다.  분명히 따끔하게 아픔

이 왔다.

  (정신을 차리자.  이래서는 안 되는 몸, 너무나 할 일이 많구나.)

  중전은 다시 한 번 마음을 도사렸다.

  "아버님,  물러가겠습니다.  아버님과 어머님의 심려가 안 되도록 굳건히 살면서 이 눈으

로 똑똑히 세상 되어가는 형편을 보겠습니다."

  "갸륵도 하오.  중전이 그런 훌륭한 태도를 갖게 되니 우리 두 늙은이의 마음 한결 놓이

는 것 같소."

  노산군 부인은 극한에 오른 슬픔과 억울함으로 마치 신경이 마비된 듯한 무감각의 상태로 

세월을 보냈다.  옆에 직접 모시고 있는 월선이만이 가장 뻐저리도록 슬픈 심정을 느꼈다.

  소복을 아무렇게나 걸친 노산군 부인의 자태는 청초를 지나 애절하게까지 보였다.  풀어

버린 머리는 더욱 윤기를 입어 머리카락까지 젖어 있는 듯 싶었다.  옆에 모시는 월선도 소

복으로 어질던 상감을 추모했다.

  상감의 참변을 아버지에게 들은 그 시간부터 노산군 부인은 얼음처럼 동작과 표정이 차게 

바뀌었다.  분명 얼음이었다.  찬바람이 휙휙 돌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전에 없던 일, 즉 아침 저녁으로 양친에게 문안 드리는 일을 빼놓지 않

았다.  잣죽이나 깨죽을 물리친 노산군 부인은 새로 명하여 조미음을 쑤어 오라고 일렀다.  

그리고 자기는 조미음을 먹으면서 부모의 조석을 꼭 직접 참견하고 권하는 것이 일과였다.

  상감의 시체를 뫼시지 못한 것은 노산군 부인이 품은 한 중의 한이었다.  그녀는 신위(神

位)를 소박하게 자기 방 바로 옆에 붙은 마루방에 모셨다.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삼배를 

올렸다.

  살림은 하루 하루 영락해 갔다.  많은 종들도 다 내보내고 밥짓는 사람 하나와 청지기 그

리고 월선이 셋만 남았다.  조석 삭망에 올릴 음식을 따로 차리기도 힘겨웠다.  그리하여 점

심도 없이 아침 저녁 들여오는 조미음을 정성껏 바치기로 그녀는 각오했다.

  상감도 굽어 살펴 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오늘 저녁에도 조미음이 나무 쟁반에 올려지자 

그녀는 손수 받아 곧 상청이 있는 마루방으로 갔다.  조용히 쟁반에서 미음 그릇을 꺼내 올

리고 삼배를 하였다.  아무도 옆에는 없었다.  월선이 참례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옆방에서 월선이는 두 손을 마주 잡고 조용히 삼배를 하고 있었다.  매일 하루에 두 번씩 

정해 놓고 하는 일이다.  노산군 부인은 두 손을 합장하고 부처가 되신 상감을 조용히 눈 

앞에 그려보며 명복을 빌었다.

  "상감마마,  신첩 여기 사바세계에 살아 있사옵니다.  억울하신 영혼을 위로 드릴 수 있는 

몸은 단지 이몸밖에 없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첩이 상감을 따라가지 못하는 심중을 

상감만은 헤아려 주실 줄로 믿사옵니다. 상감이 무서운 세상에서 어느 안식하는 처소로 옮

기셨는지 이몸 알길이 없사오나 아직도 늙으신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몸, 이 이상의 불효가 

없도록 보살펴 주시옵기 비옵니다.  상감마마 오늘도 낙원에 계시면서 이 사바세계를 잊으

시고 영원한 복락만이 깃드시기를 바라옵니다."

  늘 외우는 정해진 기원(祈願)이었다.  그녀는 잠시 눈을 붙이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그 머

리속에, 그 가슴 속에 상감을 그리지 않는 시간이 없었다.  조석으로 드리는 배례(拜禮)만이 

그녀로 하여금 사는 보람을 느끼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살아 있는 상감 앞에서 하던 그대로 뒷걸음을 세 걸음 걷고 조용히 물러나 옆에 

있는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월선이는 기도하는 동안 다 식어버린 조미음을 가져다가 주인 

아씨에게 주었다.  그러면 단순히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서 부인은 그 조미음을 입에 갖다 

대고 마서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안채로 발걸음을 옮긴다.  어머니가 무엇을 잡수셨는지 안녕하신지 문안 

드리고 아버지가 여전하신지 알고 싶어서였다.  잠시 안채하고 드나들다가는 다시 자기 처

소로 들어오면 이제부터는 그녀 시간이었다.  중전은 뜰로 내려가 후원 큰 매화나무가 서 

있는 앞으로 갔다.  그리고는 영월 쪽인 동쪽을 바라보고 상감을 그리는 것이다.  상감의 생

존시 꿈 속에서 보던 그 강물이 가까운 동헌으로 마음은 달렸다.  요즈음은 꿈도 없다.  아

니 꿈에 뵈도 먼 먼 피안의 사람으로 보일 뿐 닿을락말락하게 상감은 보였다.  말 한마디로 

건네지 못하고 곧 따라 뛰어 쫓아가면 그 자리에는 없고 또 저 멀리 가서 있다.  따라가면 

또 그 모양이다.  중전은 기진맥진해서 식은 땀을 흘리고 잠을 깨고는 했다.

  상감이 세상에 있을 때는 멀리 떨어진 영월땅이지만 밤마다 꿈 속에서 즐겁기만했다.  그

러나 세상을 무참히 떠난 후에는 꿈 속에서라도 즐거울 수가 없었다.

  (죽은 사람은 여기 세상 사람과는 인연이 먼것인가?  아직 따라가지 못한 이몸이 죄라면 

죄겠지...)

  그녀가 그 자리에서 서 있는 시각이 얼마인지는 월선이 이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중전마마, 안으로 듭시어요.  밤 바람이 아니 좋사옵니다."

  번번이 월선의 이 소리에 자기 정신으로 돌아가는 중전은

  "그래, 들어가자. 네게 미안하기 이를데 없구나.  제발 너도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 먼저 

쉬고 하래두 말을 안 듣는구나!"

하고 거의 짜증 섞인 말투로 하였으나 그 소리도 월선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마마께서 안 듭시는데 제가 어떻게..."

  "얘! 그리고 제발 너 그 중전마마 소리 좀 빼놓고 말할 수 없을까?  아씨라고 불러다오.  

소원이다.  이 나라에 중전이 엄연히 계신데 외람되게끔..."

  "쇤네에게는 하늘 밑 땅 위에서는 마마 한분만이 중전이십니다.  누가 뭐래도 제게는..."

  그녀는 입을 채로 자리가 깔린 옆으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다시 합장하고 입 속으로 기

원하는 것이다.

  "말을 못해 봐도 좋사옵고 옆에 뫼시지 않아도 좋사옵니다.  이 시간부터 상감이 계신 곳

으로 더듬어 갈 수 있게하여 주십시오."

  천지신명과 부처님에게 드리는 소원이었다.  눈에는 안 보이는 어떤 힘에게 비는 마음이

었다.  그녀는 서서히 자리속으로 몸을 묻었다.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마음가짐을 간직하

고서.  지존한 사람을 생각하고 그리는 가슴은 한 오리의 흐름도 있어서는 아니 된다고 채

찍질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쉽사리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이리저리 돌아 눕다가 보면 날이 밝

는다.  아침 삭망을 마친 그녀는 안으로 어머니를 보로 올라간다.

  세조의 왕조가 이 쇠락해 하는 송부사 집을 염두에도 두지 않는 것은 다행이라면 다행한 

일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조차 눈여겨 보지 않는 집.  뜻있는 사람이 있어도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그 집을 찾는 사람이 없다시피 했다.  종친들이나 벼슬아치들이 마음을 써서 노산군 부인에

게 문안도 드릴겸 송부사를 위로할 생각으로 드나들었지만 그들에게 어느덧 화가 미쳐 귀양

을 갔고 혹은 행방이 묘연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물 같은 세월은 덧없이 흘러갔다.  후원에 있는 여러 가지 수목과 꽃들이 피고 지는 속에

서 계절을 느낄 따름이었다.  송씨는 치자꽃이 향기롭게 피어나는 마당으로 내려섰다.

  이렇게 외로운 때에 너그럽고 인자한 양친이 안 계셨다면.  그리고 진정으로 세심한 위로

를 해주는 월선이의 존재가 없었다면 아마도 이 세상에 살아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중전마마,  사랑에 부원군 대감께서 오셨사옵니다."

  "오 그래, 언제나 변함없는 후의구나."

  "대방마님께서도 고마우신 양반이라고 오늘도 몇번 말씀하시던데요.  그리고 또 쌀도 보

내오시고 필육도 보내셨다고 하시더군요."

  "그 신세를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그리고 마마님 잡수시라고 녹용 든 보약도 가지고 오셨다 하옵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보약을 먹겠니?  아버님이나 어머님이나 달여 드려야지."

  "아니어요.  대방마님께서 마마님 옥체 걱정을 얼마나 하시는지 아셔요?  그래서 당장 내

일부터라도 달여 올리라고 아까 말씀하시던걸요."

  "아니다.  내가 나가서 어머님께 여쭈어야 하겠구나.  나야 젊은 몸!  아무것을 먹으면 어

떻겠느냐."

  그것은 조금도 숨김 없는 진심이었다.  잠시 후에 청지기다 들어와서 아뢰었다.

  "부원군 대감께서 이리로 들어오신다고 하십니다."

  부원군 대감이라는 사람은 단종의 생질 해평 부원군(海平府院君) 정미수(鄭眉壽)를 말함이

다.  그도 야인으로 지내고 있지만 조정의 일에 관심을 보이지 않은 덕으로 큰 화는 면하고 

있었다.  가지 재산으로 그럭저럭 지내는 사람중의 한사람이었다.  그의 태도는 중전을 알현

하는 예의를 조금도 결한 데가 없었다.

  "중전마마!  정미수 문안 아뢰러 왔사옵니다.  옥체균안하시온지..."

  "그 동안도 별고 없으셨소?  댁내도 모두 안녕하시고요?"

  "예, 덕분에...  중전마마 기체 여전 하시온걸 뵈오니 마음 든든하옵니다."

  "부디 오래 사셔서 서로 의지하고 나라 되는 꼴 구경도 하고...  그리고 항상 베풀어 주시

는 후의를 무엇으로 사례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구료."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는데 어찌하여 심려를 하시오니까?"

  "고맙소, 진심으로 고개를 숙여서 사례를 드리오."

  "황공하신 말씀 어찌 이 마음 다해서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중전은 감격에 넘쳐 얼굴도 들지 못하고 말을 잃은 채 앉아 있었다.

  "중전마마, 보약을 좀 가지고 왔사오니 잡수시고 기력을 차리셔서 만수무강하셔야 되겠사

옵니다."

  "너무나 고맙구료.  온 집안 살림을 보살펴 주시고 내 약까지 걱정을 해주시니 어떻게 하

면 좋겠소."

  "아무 심려 마시고 꼭 잡수시어 이 다음에 와 뵈올 때는 좋으신 얼굴을 보게 해주십시오."

  "그 정성 잊지 않고 먹으리다."

  그들의 대면은 처음부터 끝까지 중전과 신하의 알현이었으며 감정이 서로 통하는 인간과 

인간의 대면이었다.


    [虛空속에 그린 日月]   <荊棘을 넘어서>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虛空에 그린 日月 

    荊棘을 넘어서



   왕년의 여양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는 일찍이 아들이 없어 딸 하나를 예절과 절도를 

다해 기를 보람이 있어 부원군이 되었으나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린 꿈에 지나지 않았

다.

  단종인 노산군을 영월 정배지에서 참살하고 난 세조는 얼마 안 되어 송현수를 귀양 보냈

다.  괴로운 세파 속에서도 노산군 부인이 기력을 잃지 않고 살아나간 것은 너그러운 아버

지를 가진 힘이었다.  그러나 어버지가 귀양을 가고 난 이제, 유일한 사랑은 어머니 하나 뿐

이었다.

  넓고 퇴락한 집 속에 식구라고는 안방에 어머니 하나와 밥짓는 종이 하나 있고 후원 별당

에 두 여인이 침식을 같이 하고 있을 뿐이었다.  먹을 것과 땔감을 죽지 않을 만큼 보내주

는 단종의 생질 정미수는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

  그들이 사는 까닭이나 힘은 오로지 한길이었다.  죽지 못해 사는 것이 아니었다.  목숨이 

아까와서 버티는 것도 아니었다.  서로가 견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딸을 견

제하고 딸은 어머니를 견제하면서 그어가는 평행선의 생명이었다.

  삶이라기보다 고문 같은 세월이었다.  노산군 부인은 아버지마저 없는 절간같이 고요한 

별당에서 오늘도 과거를 추억해 보고 있었다.

  그녀가 철이 들었을 때는 어머니 품을 떠나서 후원 별당에 옮겨와 있었다.  동갑짜리 월

선이가

  "아기씨!  대방마님께서 급히 올라 오시래요."

로 시작하는 일과는 어머니가 가르치는 양반집 규수로서 필요한 모든 법도를 배우는 것이었

다.  여덟살짜리에게는 지나친 요구가 허다했지만 바탕이 총명한 그녀는 하나를 배우면 둘

을 아는 혜지(慧智)를 갖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독선생을 놓고 배우는 글도 주위의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로 진도가 빠르고 이해를 쉽게 해서 송부사의 기쁨을 부풀게 만들기

도 했다.

  바느질을 배우는 솜씨도 놀랍도록 날렵해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했다.

  어머니의 가르침과 어버지의 훈육은 각기 예절과 바느질, 글과 글씨 쓰는 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녀는 어느 일에나 성의를 갖지 않고 대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아침부터 저녁까

지 그녀의 일과는 양친을 즐거움으로 이끌어 넣었다.

  그러나 아무리 으젓하고 조숙한 그녀였지만 어른 눈에서 벗어나면 본연의 진정한 아기씨

로 돌아가는 경우도 허다했다.

  "얘! 월선아.  아까 어머니께서 약과와 다식 이리 가지고 온!"

  "예, 아기씨 우리 또 소꼽장난 해요?"

  "그래,  어디서 할까?  그냥 방에서 놀까!  마당에 자리 펴고 할까?"

  "아기씨!  얼마나 꽃이 예쁘고 새소리가 고운데요. 뭣 때문에 방구석에서 해요."

  이건 월선이의 제의였다.  아기씨도 재미있고 월선이는 다시 없이 즐거웠다.  월선이는 아

기씨와 더불어 소꼽장난하는 시간이 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아기씨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규수로 하루 하루 자라났다.

  그녀를 먼발치라도 보고 간 양반집 어른들 아니 부인들은 한 번씩 침을 안 흘리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내 며느리 소리 내 손주며느리감으로 생각해 보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열세살 되던 봄에는 궁중에서 간택설이 떠돌았다.  양반집 규수 중에서 동궁빈을 

고르는 일이었다.  숱한 규수들의 열에 끼어 그녀가 간택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날부터 그녀의 주변은 온통 세자빈마마 대접이었다.  양친을 비롯하여 드나드는 일가 

친척 종들까지 배풀던 그 융숭한 대접은 지금도 그녀가 잊을 수 없는 일의 하나였다.  모두

들 이런 경사가 어디 있느냐고 기뻐했다.  그리고 아침 저녁 온갖 사람들의 출입으로 송부

사 집의 대문이 메이다시피 했다.

  정작 그녀는 멍멍한 속에서 이제부터는 궁중예법, 아니 앞으로 중전이 될 몸으로서의 법

도를 배우는데 전심을 다해야 했다.

  선생이 많이 있었다.  간택 받기 전에 양반집 아가씨로서 배운 예절과는 또다른 예법을 

많이 배워야 했다.  몸가짐, 옷입는 법, 언어 등 세밀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전같이 자유

의 시간이라는 것은 거의 없었다.  하다 못해 식사를 하거나 걸음걸이의 예절까지 달리 배

워야 했다.  그녀는 이렇게도 세자빈의 자리가 무섭고 어려운 것인가를 어린 가슴이나마 막

연히 느끼면서 지냈다.

  그래도 친가에서 있을 때는 자유로왔다.

  어머니에게 의논도 드릴 수 있었고 얼마간 짜증 비슷한 말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과거를 회상하며 가슴 속에 젖어오는 추억이 있다면 친가의 마지막 날인 궁으로 

들어가던 날이었다.

  그날도 꼭 지금같이 눈에서는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그녀는 며칠 전부터 어머니께 들은 교훈을 마음 속으로 되씹고 있었다.

  양반집 딸은 한 번 양반끼리 한 결혼에도 친가 출입을 못하는 법이어늘...

  항차 궁으로 들어가 장차 중전이 될 그녀가 가는 길은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길

이라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새벽부터 집안은 잔치집인지 난가인지 모를 정도로 복잡하고 들떠 있어 그녀의 가슴은 진

정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잠시라도 더 어머니 곁에서 어머니 얼굴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조그마한 

소원도 허락되지 않았다.

  양친의 얼굴은 도시 볼 수가 없었다.

  차려입고 앉아 있는 그녀를 수모가 양쪽에서 부축해서 일으켰다.

  시간이 되었는가?  지금 이렇게 걸어서 앞마당으로 나가면 궁으로 들어가는 가마를 타야

만 하는가?

  착잡한 가슴이었다.

  그대로 동궁빈은 친가 아버지 어머니에게 인사도 못 드리고 떠나는 것인가?

  그녀는 끄느 대로 끌려서 신켜 주는 신을 신고 후원으로 나섰다.

  수모들은 그녀를 사랑채 아버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면 그렇지!  아버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가는 길이구나!)

  지각없이 가슴이 젖어 들어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란히 앉아 있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머리

를 바로 잡았다.  며칠을 두고 하던 어머니 말이 귓속을 울리고 지나갔다.

  "궁으로 들어가는 날, 궁 뿐이 아니라 누구든지 규수들이 시집을 가는 날 눈물을 흘리는 

일을 기(忌)하는 일중에서도 제일로 기하는 일이니라."

  아버지의 표정도 굳어 보였다.

  어머니의 얼굴은 처절할 정도로 엄숙한 빛을 띠고 있었다.

  수모가 시키는 대로 아버니와 어머니에게 절을 올렸다.

  중후한 아버지 음성이 들렸다.

  "지금은 나라의 세자비!  앞으로는 중전이 될 막중한 몸이다.  항상 네 몸은 송아무개의 

훌륭한 집에서 태어난 여인이라는 걸 잊지 않으면 되느니라."

  간단한 한 마디의 말이었다.

  궁중에서의 잔치도 그녀로서는 잊지 못할 일이었다.  당시 상감이던 시아버지 문종의 기

쁨과 문종왕후의 즐거움은 형용할 수가 없었다.

  항상 병약하던 문종은 하루 빨리 양위를 하도록 서둘렀다.  얼마 후 침소에 눕게 된 선왕

은 기어코 양위의 뜻을 밝히었다.

  여러 날 있던 잔치, 동궁과의 초야를 치루던 일들,  그녀는 한 가지도 빠치지 않고 머리 

속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또 평생을 두고 잊히지 않는 일이 있다면 온화한 가을로 접어든 어느날 베풀어졌던 상감

의 즉위식이었다.

  상감은 단종이라고 호명(號命)되고 그녀는 정순왕후(定順王后)로 불리워졌다.

  이제는 중전이 되었다.  열세살의 어린 왕후였다.  그러나 어느 누구에게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국모의 자격을 지녔다.

  옆에 뫼시는 시녀는 여전히 월선이었다.

  "중전마마!  참으로 훌륭하시옵니다.  대방마님께 한 번 그 자태 뵈어드리고 싶사옵니다."

  이것은 월선이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근 한달을 부왕 승하로 상감이 슬퍼하는 모습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날이 가고 달이 감에 따라 이제는 명실공히 상감으로서의 모든 정무를 손수 보게 되었다.  

물론 옆에는 세종 때부터 충신인 김종서, 황보인, 정인지, 신숙주들이 있었다.

  그러나 태평연월은 단종에게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삼감의 삼촌인 수양대군의 야망이 날로 깊고 두터워져 가는데 그 원인이 있었다.

  왕비는 처음에 어린 단종을 도웁고 보필하는 체하는 수양대군이 참으로 호탕하고 훌륭한 

종친이라고 생각했다.  진정으로 충성스럽게 상감을 받드는 종친이라고만 여기고 반기던 터

였다.

  수양대군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면서 동지규합에 주야를 가리지 않았다.

  이들의 모의는 착착 진행되었다.  그들은 먼저 눈의 가시 같은 우의정 김종서를 죽이기로 

의논이 되었다.

  드디어 수양은 김종서 부자를 먼저 처치하고 단종에게 충성을 바치는 어진 신하들을 모조

리 도륙했다.

  단종은 이제 왕위가 역겹기만 했다.  더 앉아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단종은 

마침내 양위를 결심했다.  침통한 얼굴로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물려 주겠노라고 상감의 말

은 충성 된 신하들을 슬프게 했다.

  수양은 세조라 이름하고 왕위에 오르니 이조 제 칠대 임금이었다.  그녀의 상념은 끝이 

없었다.  친가에 있던 생활은 빼고도 궁에 들어갔던 열세살부터 단종의 참사까지 육년이라

는 세월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다.

  육년간의 역사였다.

  자신은 한 여인에 지나지 않았다.  자기 몸이지만,  자신의 마음이지만 어떻게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분명히 친가에서의 십삼년은 어머니의 표정대로,  어머니의 말씀대로 움직

였다.

  궁에 들어간 날부터는 상감의 용안의 움직임이 바로 자신이었다.  상감이 웃으면 따라 웃

었다.  상감이 찌푸리면 같이 찌푸렸다.  임금이 울면 같이 소리없이 울었다.

  궁 속의 온갖 골육상쟁, 권모술수들을 직접 듣고 보지는 못했다.  단지 공기로 알았고 전

해 듣는 얘기로 짐작했다.  여하간 지아비의 원수는 삼촌인 지금의 세조가 틀림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없는 원망은 지금의 상감에게 쏠렸다.  그렇게도 귀중한 아버지마저 멀리 

산골로 귀양을 보냈다.

  언제 또 무슨 나쁜 소식을 가져다 줄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슬픔에, 그리고 갖은 악랄한 

조정의 생태에 숙련되어 버린 몸이었다.

  이제는 어떤 소리, 어떤 사건도 그녀에게 놀라거나 감격 같은 것으로 안겨 오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어머니를 위로하는 길이 자신을 위로하는 길이라고 확신하며 살았다.

  어머니는 이미 임종할 날만 기다리는 반송장 같은 모양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지

가 한 달이 넘었다.

  아버지가 사사된 것이 귀양가던 바로 이듬해 봄이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런 소식은 어머니에게서 모든 감정을 빼앗아가 버렸다.  단지 딸을 위해서 딸을 지키기 

위해서 살아 나가는 삶이라고 보였다.  왕비는 이제 겨우 스무살이 넘었다.  옆을 지키고 있

는 월선이는 노처녀가 되어 있었다.

  "중전마마, 아무래도 대방마님께서 미음도 잘 못 잡수시니 큰일났사옵니다."
  
  "그러지 않아도 걱정이 여간 되는 것이 아니구나."

  그녀의 얼굴은 이십세 젊은 여인의 얼굴이 아니었다.  소복을 입고 있는 그녀의 얼굴빛은 

창백하다 못해 누른빛이 베어나오는 것 같았다.

  "오늘도 부원군 대감께서 들르실 거예요."

  "어찌 아니, 네가?"

  "어제 돌아가시면서 아무래도 마님의 용태가 심상치 않으니 내일부터는 내가 하루에 한 

번씩은 들려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었습니다."

  "그 분은 아무래도 우리들을 위해서 세상에 태어나신 분만 같구나!"

  "정말 그렇사와요."

  "월선아! 난 무엇보다 네 걱정이 태산이다.  이십이 넘은 노처녀가 여지껏 나 때문에 시집

도 못 가고...  나야 태어나길 양반집에 태어나고 뫼신 지아비가 상감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

지만 네 일이 여간 걱정스럽지 않구나.  늙은 처녀가 돼서 제대로 시집 가기 어려우면 하다 

못해 착한 홀아비 자리라도 가야 할 텐데."

  그녀의 진정한 근심거리는 월선이었다.

  "마마께서는 입만 벌리시면 그 말씀이셔요.  저는 중전마마에게 시집 왔다고 생각하고 사

는걸요!  쇤네에게는 이것이 제일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다."

  "너 같은 충비를 가진 나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여인인지도 모르겠구나."

  "마마, 쇤네 역시 마마님같이 훌륭한 분을 뫼셔서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라고 여겨집

니다."

  그 후는 둘이 다 말이 없다.

  그들은 말이 없어도 가슴 가득히 각기 상대를 생각하고 근심하는 일이 차 있어 언어라는 

것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주인인 그녀는 월선이가 처녀로 늙어가며 자기만을 섬기며 옆에 있는 일이 눈물 겨웁도록 

고마왔다.

  시녀인 월선이는 하루 하루가 질식할 것 같은 중전마마의 생활이 불쌍하고 딱하다 못해 

자기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살이라도 깎고 뼈라도 갈아서 섬기고 싶었다.

  "월선아,  안으로 들어가 보자.  어머니께서 정신 좀 차리셨는가..."

  "예."

  그들은 대청으로 올라섰다.  밥도 짓고 어머니 옆에서 시중을 드는 여인이 재빨리 일어서

서 그녀를 맞았다.

  "중전마마, 어젯밤부터 이렇게 한 번도 눈을 안 뜨시고 주무시기만 하옵니다."

  "그래?  어젯밤에 내가 물러간 후부터 쭉 이런 용태시냐?"

  "예, 눈을 뜨셔야 미음이라도 올릴 것이온데 걱정이옵니다."

  그녀도 걱정이 되었다.  이 경우를 걱정이라는 말로만 표현을 다할 수 있을까?

  그녀는 무릎걸음으로 어머니 머리맡에 가서 앉았다.

  조용한 호흡으로 어머니는 잠들어 있었다.  성성한 백발과 깊은 얼굴의 주름들이 지난 날

을 얘기해 주는 듯싶었다.

  그녀는 가만히 어머니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어머니."

  조용하게 불러 보았다.

  대꾸도 표정의 변화도 없다.  다시 불렀다.

  "어머니!"

  약간의 경련 같은 것이 이는 것 같았다.

  다시 초조해지는 마음을 가다듬고 조금 큰 소리로 불렀다.

  "어머님, 제가 왔습니다."

  어머니는 놀라는 표정으로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아버렸다.

  그러더니 딸의 손을 찾는 듯이 야위고 흰 손을 저으며 무어라고 입을 벌리려 한다.

  "저 여기 있습니다.  어머님 이것이 제 손이옵니다."

  어머니는 딸의 손을 잡는다.  눈을 감은 채다.  노부인의 눈에서 눈물이 소리없이 흘렀다.

  그녀는 일찍이 어머니의 눈물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그녀가 철이 들면서부터 오늘

날까지 어머니의 표정은 한결같았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없었다.  항상 입언저리에 띠운 인자스런 미소로 딸을 사랑하고 대

견히 여기는 마음을 읽었고 서릿발 같이 차고 굳은 표정에서 집안의 근심을 눈치 챌 수 있

었을 뿐이다.

  그러한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니 그녀의 가슴이 뿌듯해졌다.

  "어머님, 어디가 많이 편찮으시오니까?  말씀 좀 해보셔요."

  딸의 말을 알아 들었는지 어머니는 고개를 두어번 가로 젓는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다.  월선이 너 가서 부원군 대감께 곧 좀 듭시라고 여쭙고 

오너라."

  "예 곧 다녀오겠습니다."

  월선이는 뛰어 나갔다.

  "어머님, 돌아가시면 안 되어요.  이몸은 혼자서 어떻게 하라고..."

  그녀의 꽁꽁 묶어 놓았던 마음의 방파제는 확 무너져 버렸다.  그녀는 그대로 쓰러졌다.  

앞 뒤 경위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펑펑 쏟아지는 눈물은 몇 해 쌓였던 단장(斷腸)의 피눈물이었다.

  소리는 낼 수가 없었다.  어깨만 물결쳤다.  참아야지, 이래서는 안 된다.  그러나 참을 수

가 없었다.

  방바닥에는 눈물이 흥건했다.  누가 혹시 보면 어떻게 하나 걱정으로 울음을 그쳤다.

  "아..  가..  야!"

  어머니가 어렸을 때 부르던 대로 띠엄띠엄 불렀다.

  "예, 소녀 여기 있사옵니다."

  그녀도 어느덧 소녀라는 대답을 하고 있었다.  부엌 여인이 미음을 가지고 들어왔다.

  노부인은 부엌 여인이 주는 미음을 반 사발이나 거의 받아 넘겼다.  그녀는 조금 안심이 

됐다.

  대청마루에서 정미수의 소리가 들려왔다.

  "중전마마, 제가 왔습니다."

  그녀는 반가왔다.  시누이의 아들이니 조카지만 마치 오라버니나 웃어른같이만 느껴졌다.

  "어서 안으로 드시오.  어머니께서 위중하시어서..."

  그는 곧 들어왔다.  여전히 그녀에게 큰절을 하는 예의를 잊지 않았다.

  노부인은 임종에 가까웠는지 약간 호흡이 거칠었다.

  정미수가 방에 들어온지 얼마 만에 노부인은 말 한마디도 못하고 운명을 했다.

  그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밥짓는 여인가 월선이가 구슬프게 통곡하였다.  정미수도 눈물을 닦았다.  그녀는 

홀홀 단신이 되었다.

  정미수는 재빨리 모든 장사(葬事)에 부족함이 없도록 준비를 서둘렀다.

  장례가 끝나는 사흘낮 사흘밤을 눈 한 번 붙여보지 못하고 미음으로 연명하는 그녀를 월

선이는 딱해서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대청에 어머니 상청을 모셨다.

  그녀는 온 젊은 긴날을 상청에서 살려고 이승에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삼년을 하루같이 

상감의 상청을 모셨다.  아버지 상청 나간지도 얼마 안 되었다.

  이제 또 그 자리에 어머니 상청을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배례를 잊지 않았다.  오히려 그

녀는 그 시간이 가장 뜻있고 보람 있는 생활이라고 느끼는 것 같았다.

  부엌 여인도 내보냈다.  후원 별당은 닫아두고 안채로 월선이와 둘이서 옮겼다.

  "중전마마, 어제 저 행낭채 엄서방이 그러던데요."

  "뭐라고 하더냐?"

  월선이는 두 무릎으로 가만히 다가와서 귀에다 입을 갖다댔다.

  "글쎄, 지금 상감께서 온 몸에 부스럼이 나셔서 아무리 영하다는 의원을 다 불러다가 갖

은 선약을 다 쓰고 대국에까지 가서 약재를 구해다가 쓰셔도 효험이 없어서 궁이 발칵 뒤집

히다시피 하고 있다고 그러던데요."

  그녀는 아무 말도 나오지를 않았다.

  눈빛만 약간 불 같은 것이 지났을 뿐이다.  인간이 직접 못 갚아도 신명은 어떤 형태로든

지 갚아 주는 것이라고 믿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봄을 보내고 겨울도 보냈다.

  일년이면 나가는 마지막 제사도 끝냈다.

  정미수는 이제 이 넓은 집에 있어 무얼 하겠느냐면서 월선이와 같이 자기집으로 거처를 

옮겨서 지내자고 몇 번이나 권해 왔다.

  그러나 쉽게 결심이 서지가 않았다.  지아비를 그리는 후원, 매화고목 앞을 떠날 수가 없

어서 그랬고, 아버지의 불쌍한 혼을 생각해서도 그랬고, 어머니가 시종일관 양반집 부인답게 

맞은 죽음을 애도하는 마음에서도 그랬다.

  "월선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부원군 댁으로 옮기는 것 말이다."

  "예, 제가 뭘 알겠습니까마는 마마께서는 이 친가를 따나기 싫어하시는 게 아니옵니까?"

  "그렇다. 나는 잠시도 이 집을 떠나기가 싫다."

  "그럼 나리께 분명히 그 뜻을 말씀하시고 좀 더 지내신 다음에 대감께 의지도 하실겸 가

시는 것이 옳을 줄로 생각되옵니다."

  "오냐! 네 말대로 그렇게 하도록 하자."

  그들은 서로 바라보고 미소지었다.


   마음은 아랑곳없이 세월이 흘렀다.  수년을 정미수의 눈물겨운 비호 밑에서 그녀들은 목

숨을 지탱해 나갔다.

  그녀가 하는 일은 상감의 생신날과 돌아간 날을 소찬이나마 차려서 추모하는 일이었다.  

또한 아버지의 억울함과 어머니의 갸륵한 생애를 애처롭게 여기며 제삿날을 잊지 않고 제사 

지내는 일이었다.

  그녀의 나이 스물다섯이 되었다.  동갑인 월선의 나이도 스물다섯, 그들은 고난의 세월을 

조용히 견디어 나갔다.

  이제는 주종이 진정 아니었다.  친구였다.  아니 혈연 같았다.

  뜻있는 사람이며 주위의 사람들, 동리 사람들도 정순왕후를 얘기하려면 꼭같이 월선이를 

칭찬하고 찬미했다.


    [虛空속에 그린 日月]   <찾아온 幸福>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虛空에 그린 日月 

    찾아온 幸福



   세조는 천수를 오십이세로 흉악한 피부병으로 고생하다가 승하했다.

  아들이 둘 있었으나 장자는 세자로 책립된 후 나이 이십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다.  

둘째 아들 또한 즉위하고 이년 만에 이십세의 나이로 세상을 버렸다.

  정순왕후는 삼십 안에 이 모든 것을 보았다.  그녀에게 이제는 이 퇴락하고 넓은 구옥이 

싫어졌다.  아니 서울 문안이 지긋지긋하도록 싫었다.

  어디 조용한 문 밖으로 옮겨서 살고 싶었다.  상감이 계시던 영월을 향한 동문 밖으로 나

가서 상감을 바라보며 늙어가고 싶은 것이었다.

  그녀는 이 뜻을 정미수에게 의논했다.

  정미수는 홀로 있고 싶어하는 뜻을 헤아려 조용한 집 한 채를 동문 밖에다 주선해 주었

다.  그들은 간단히 짐을 꾸려 문 밖으로 거처를 옮겼다.

  유일한 방문객은 정미수가 있을 뿐 일과는 단조 그것이었다.

  아침 저녁으로 영월땅을 향해서 삼배를 드리고 무엇이든지 소식을 올렸다.

  "상감마마, 피부병으로 고생하다가 수양대군은 세상을 떴다고 하옵니다.  하늘은 무심치 

않은 법입니다.  신첩은 오래 이땅에 살아 있으면서 그의 최후를 목격했습니다.  그의 두 아

들중에서 큰 아들은 세자로 책봉되자 죽고 작은 아들은 재위 이년 만에 또 세상을 버렸사옵

니다.  이제는 이몸도 하루 빨리 천명을 마치고 상감 곁으로 가고 싶사옵니다."

  그녀의 삶은 문자 그대로 미망인(未亡人)이었다.  아직 죽어지지 않는 몸이니 목숨을 부여 

잡고 있는 것 뿐이었다.

  월선이도 서른살이 되었다.

  "중전마마, 대감께서 보내 오신 약식 좀 잡수시겠사옵니까?"

  "아니다.  이따가 점심때나 먹자.  그럼 한끼 그걸로 메꾸지 않겠니?"

  "마마께오서는 쌀이 많사온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아끼십니까?"

  "그런 소리 아예 말아라.  부원군께서 우리 양식을 대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되는 줄 모르

느냐?"

  "잘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엇그제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가끔 떡도 해서 봉양하고 식

혜도 해 올리라고 말씀하셨사옵니다."

  "고맙기도 하신 양반!  벌써 근 십여년을 여일하구나."

  정미수의 정성은 지극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더욱 그의 정성이 뚜렸했다.

  얌전히 꾸며진 앞마당의 일년초가 피어난 여름날이었다.  분꽃이 피어나기 시작했으니 저

녁지을 때가 됐나보다고 월선이가 분주해 했다.  이때 밖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리 오너라."

  월선이가 뛰어나가 맞았다.  정미수였다.  회색이 만면한 걸 보니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

겼나 싶어지면서 그녀도 같이 미소를 지었다.

  "중전마마, 문안드리옵니다."

  "어서 오시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시오?  그러히 회색이 만면하니..."

  "예, 마마! 이제는 마마께오서도 한숨 푹 쉬시고 사실 수 있게 되시옵고 저희들도 뜻을 얻

었는가 하옵니다."

  월선이는 부엌에 있다가 그 말을 듣고 뛰어 나왔다.

  "다름 아니오라 지금의 상감(成宗)께오서 중전마마의 정경을 인편에 들으시옵고 그런 분을 

여지껏 초토에 묻혀 놓고 있었다니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고 진노하셨다 하옵니다."

  "그 소식은 어디서 들으셨소?"

  "예! 저의 집을 드나드는 참판의 조카가 한 사람 있사온데 그 사람이 어저께 집으로 와서 

하고 간 말입니다."

  월선이는 참견을 아니 할 수 없도록 기쁨이 넘쳐왔다.

  "대감마님! 정말이오니까?  상감마마, 감사하옵니다."

  그녀는 그대로 동향하여 삼배를 올렸다.

  "중전마마, 아마 무슨 소식이 분명 일간 궁에서 나올 겁니다.  아제부터는 안심하시고 여

생을 제게 의탁하셔서 오래 오래 사십시오."

  "무슨 소리를 하오. 이제 조금은 억울한 상처를 닦아 드렸으니 지금 죽어도 한이 없소!"

  "아니옵니다. 마마께서는 천세 만세하셔야 되십니다.  만일 일찍 돌아가셨다면 이 일을 어

떻게 아셨겠습니까? 그저 인간은 오래 살아야 싫은 일도 좋은 일도 보는 것이옵니다."

  정미수는 다시 오겠다면서 부디 귀하신 몸 보존하시라고 이르고 돌아갔다.

  정미수는 보낸 정순왕후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며 곧장 앞마당에 있는 늙은 향나무 앞으

로 가서 조용히 섰다.  그리고는 동향하고 삼배를 드렸다.  언제나 어떤 기원을 드리려고 할 

때 하는 자세였다.

  "상감마마! 신첩 지금 죽어도 진정으로 한이 없사옵니다.  상감의 생질인 해평부원군의 소

식이 제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었습니다.  신첩 이제라도 곧 상감 곁으로 달려가고 싶사옵니

다.  지금의 상감인 성종(成宗)께오서 신첩이 이렇게 살아서 초토에 묻혀 있는 소식을 들으

시옵고 그럴 수가 있느냐고 진노하시더라는 소식이었사옵니다.  세상은 항상 옳은 일은 옳

게 평가 받게 되는 것이라고 신첩은 굳게 믿게 되었사옵니다.  상감께오서도 이제는 더욱 

평안히 명목(瞑目)하시고 낙원에서 기뻐해 주시기를 신첩은 삼가 비옵니다."

  마치 옆에 살아 있는 사람에게 하는 말같이 중얼거렸다.

  그 후 며칠이 지났다.

  동문 밖 여기 박명한 여인들이 사는 집에 볕이 들었다.

  성종의 칙사(勅使)가 초옥삼간 그녀의 집을 심방한 것이다.  그녀는 마루 한가운데 그대로 

앉은 채로 칙서(勅書)를 받아 보았다.

  오늘부터 곧 궁중으로 들어와서 살 것과 영빈(英嬪)의 호를 하사한다는 황공한 내용이었

다.

  칙사는 곧 가마를 보내겠으니 듭시라고 말하고 즉시 궁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얼굴에 감정을 나타내지 않았다.  오히려 월선이가 기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에게도 상감의 칙서가 고맙고 황감하지 않을 리 없었으나 궁으로는 다시 들어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궁이라면 시기와 음모의 화신으로만 여겨졌다.  도시 지긋지긋했다.

  "중전마마, 지금 곧 가마가 온다고 했사옵니다.  준비를  서두를까요?"

  월선의 물음에 영빈으로 봉해진 그녀는 얼굴에 노여운 빛마저 띠우며

  "너는 아직도 궁 안에 미련이 남았느냐?  나는 결코 아니 들어 가겠다.  금상의 하명을 

거역하는 듯하여 황공하온 얘기지만 나는 들어가지 않겠다."

  단호한 태도였다.

  궁으로는 들어가지 않겠다는 그녀의 결의에 성종의 마음도 움직여

  "그러면 영빈은 자유대로 아무데서나 살아도 좋다!"

는 고마은 분부를 내렸다.

  그녀는 가마를 돌려보내고 다시 영월땅을 향해 오늘의 일을 보고 했다.

  "상감마마, 안심하시옵소서.  살아 남은 신첩만이 영광을 입는 듯하여 황공무지로소이다.  

금상께서 신첩에게 영빈이라는 호를 봉하여 주시고 곧 궁중으로 들어와 여생을 안심하고 지

내라는 분부시었습니다.  지금의 상감은 성종이시고 세조의 큰아드님의 차자라고 들었사옵

니다.  그러하오나 신첩은 굳이 궁중에 들어가는 것은 사양하였사옵고 이 우거에서 상감을 

동향해서 추모하는 재미로 여생을 바칠까 하옵니다.  지금 신첩에게는 이 초가삼간이 어느 

훌륭한 궁보다도 귀하고 기꺼운 곳이라는 것을 상감께오서만은 굽어 살펴 주시리라 믿사옵

니다."

  그녀는 기쁘다기보다 후련했다.

  이제는 월선에게도 적당한 짝을 지어주어서 부부의 낙을 알게 해주고 싶었다.  그녀는 그 

일을 위해서 해평부원군 정미수를 청했다.

  상감의 은총이 내린 소식을 들은 정미수는 단숨에 달려왔다.

  "중전마마, 축하 드리옵니다.  무슨 말씀으로 경하 올려야 하올는지 모르겠사옵니다."

  "고맙소! 그러고 더욱 고마운 것은 이제부터는 부원군에게 큰 걱정을 끼치지 않아도 연명

을 할 수 있는 일이요?"

  "그건 무슨 말씀이오니까?"

  "아까 칙사에게서 받은 칙서 속에 쌀과 피륙과 또 무엇이 적혀 있었는데 우리 두 식구는 

살아 나갈 것이라고 생각하오."

  "그러하오나 제가 할 일은 제가 할 일, 그런 말씀은 아예 거두어 주십시오."

  "그리고 영빈이라는 호를 받은 것도 아시겠지요?"

  "예, 이미 다 알고 왔사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빈마마로 고쳐 불러 뫼시겠습니다."

  "예, 그렇게 하시오.  그래야 나도 떳떳하게 들을 수 있는 칭호가 아니겠소?  오늘은 내가 

부원군과 긴히 의논할 일이 있소."

  "무엇이오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다름 아니고 월선이 저 사람 말이요.  이제 나이가 서른이니 된 늙은 처녀! 아무래도 처

녀는 면해 주어야 하지 않겠소?  부원군 의견은 어떻소?"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저도 벌써부터 그 생각을 하고 있었사온데...  혹시 홀아비라도 

괜찮겠사옵니까?"

  "그야 이를 말이요! 저 사람 나이가 몇 살인데 지금 고르고 있겠소.  착실하고 아내 아껴

주는 사람 어디 있으면 꼭 좀 주선해 보시오."

  "예! 곧 주선해서 다시 오겠사옵니다."

  정미수는 기쁜 얼굴로 돌아갔다.

  이튿날은 대궐에서 백미 열 가마, 비단 두 필, 인삼 두 상자가 하사 되었다.

  그녀는 정미수의 신세를 아니 져도 먹고 입고 지내게 되었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기뻤다.

  며칠 후에 월선이의 혼처를 물색해 가지고 정미수가 찾아왔다.  사십이 넘고 슬하에 아들 

하나를 거느린 홀아비라고 했다.

  월선이가 죽어도 마마 곁은 떠나기 싫다고 해서 행낭방을 하나 말끔히 치우고 신랑되는 

홀아비를 맞아들이기고 했다.  영빈으로서는 더욱 잘된 일이었다.  집 안팎 일을 모조리 그

들 내외에게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때문이었다.  정미수도 잘된 일이라고 같이 기뻐했다.

  그녀의 생활은 안온했다.  일과도 여전했다.  많은 음식을 해먹을 수 있고 좋은 비단옷을 

차려 입을 수 있는 처지가 된 지금에 와서도 소의소식(素衣素食)으로 만족했다.

  다만 인삼만은 월선이가 달여서 바치는 대로 받아 마셨다.

  이제는 마음이 가라앉았다.  어느 때보다도 안정된 마음이었다.

  그러나 슬픔이 엄습해옴을 막을 길이 없었다.  인삼차를 마셔도, 대궐에서 나오는 진귀한 

음식을 먹어도 목에 걸려 넘어가지를 않았다.

  "마마! 조금 더 드셔요."

  "아니다, 네 아이나 갖다 주고 애 아범이나 내다주어라."

  "마마께서는 이러히 좋은 음식도 구경만 하셔요?  몇 해를 두고 맛도 못 보신 좋은 대궐

음식 좀 많이 잡수시지 않고..."

  영빈과 월선의 대화는 판에 박은 듯 같은 말이었다.

  월선이는 시집간 이듬해 가을 딸을 낳았다.

  본인의 기쁨도 기쁨이려니와 영빈의 즐거움은 이를데 없었다.  손수 저고리를 하나를 명

주로 꿰매서 주고 두렁이도 만들어서 입혔다.

  월선이 내외는 전보다 한결 더 알뜰하게 영빈을 받들었다.

  정미수도  변함없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리 좋은 음식을 대해도, 좋은 비단 피

륙을 보아도 마음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언제나 가슴 속은 회한으로 홍건히 젖어 있었다.  상감의 참사정경을 생가해서도 그랬고, 

아버지가 귀양지에서 받은 사약을 생각해 보아도 그랬고, 더구나 임종할 때 

  "아..기..야.."

하고 뜸뜸히 부르다가 숨져간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보아도 그랬다.

  세월은 흐르고...  영빈의 쓰라린 추억은 흐르는 세월따라 가시지를 못했다.

  이제는 사십 고개로 접어든 영빈, 달라진 일이 있다면 조석으로 문안 오는 객이 많아졌다

는 것 뿐이었다.

  정미수는 장성한 아들을 동반해서 곧잘 문안을 왔다.  성종도 성의를 다해 영빈을 돌보았

다.  이제는 미운 사람도 원망스러운 사람도 없어졌다.  찾아오는 사람은 반겼다.  가는 사

람은 다시 만나자고 기약했다.

  어떤 사람은 마치 마마께오서는 살아 계신 부처 같다고 했다.  사심(邪心)이 없는 그녀는 

진정 부처 같기도 했다.

  월선이는 후에 아들 하나를 더 낳았다.  그들 내외는 금실도 좋았고 애들도 잘 키웠다.

  영빈은 억울하게 세상을 따난 상감의 제사와 양친의 제사를 한 번도 빠짐없이 지내는 일

과 월선의 두 아이들 재롱을 보는 일을 생활의 낙으로 삼았다.

  밖은 소복히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방은 군불을 많이 지펴 따뜻하고 아늑했다.

  언젠가 이런 날, 대궐에서 며칠이나 상감이 중전인 자기 처소로 들지를 않아 초조한 가슴

으로 기다리던 기억이 되살아 왔다.

  갑자기 단신으로 찾아온 상감이 더 이상 왕위를 지킬 수 없게 되어 양위해야 되겠다는 말

을 하던 때의 모습이 너무나 똑똑히 떠오른다.  그 음성이며 표정까지가 모두 새삼스러워졌

다.

  영매(英邁)하기만 한 상감의 용안이 흐려지다 못해 찡그려져 뵙기 너무나 민망했다.

  바로 이런 눈오는 밤, 궁전의 화려한 중전 처소는 지금 이 방과 같이 더웁고 훈훈했었다.

  영빈은 회상 속에서 깨어나 조용히 일어났다.  방문을 열었다.  대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나 초라하고 좁은 단 두간짜리 마루였다.

  영빈은 뜰로 내려섰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것이 오히려 시원했다.

  그 자리로 내려가 섰다.

 그리고 영월땅을 향해 삼배를 드렸다.

  "상감마마, 신첩 오늘은 잠을 못 이루겠사옵니다.  양위를 결심하시던 날 신첩에게 오셔서 

심중을 말씀하시던 그날이 바로 오늘 같은 날이 아니었사옵니까?  상감! 빨리 이 몸도 상감

이 계신 곳으로 가고 싶습니다.  이제는 진정 이 이상 이승에 머물러 있을 까닭을 못 찾겠

습니다.  어서 데려가 주십시오."

  그녀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아니 하고 그대로 쏟아지는 눈을 함빡 맞았

다.


   세월은 흘러갔다.  정미수는 자꾸만 영빈에게 자기 집에 기거하도록 청했다.  그러지 않

아도 어떤 결정이 있어야 될 때라고 영빈은 요즈음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의 머리에 백발

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월선이 내외에게도 자유를 주고 마음대로 살

게 두고 싶어서였다.  마침내 영빈은 하루를 잡아 정미수 집으로 거처를 옮기게 하였다.

  지금 이 집은 월선 내외와 아이들에게 주기로 했다.

  새로 얌전하고 조용한 몸종이 하나 영빈을 시중하게 되었다.

  영빈의 거처는 후원에 자리잡은 별당이었다.  역시 영월 하늘을 쉽게 바라볼 수 있고 초

목과 화초가 우거진 넓은 뜰이어서 좋았다.  영빈의 나날은 어디 가서나 어느때나 조용하면

서 기품에 넘쳐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이 절로 머리가 숙어지게 하는 일과였다.


    [虛空속에 그린 日月]   <꿈길에서>에 계속 ----

궁 중 비 사 (宮中秘史)
조 선 편 (朝 鮮 篇)
    虛空에 그린 日月 

    꿈길에서 



   정미수 집으로 영빈이 옮긴 지도 어언 반년, 댓돌 밑에서 울어예는 귀뚜라미 소리가 날

로 길어 가더니 벌써 겨울도 지났다.

  어김없이 봄은 찾아왔다.  후원에는 매화가 피고 철쭉도 피었다.

  후원 별당의 늙은 여주인 영빈은 오늘도 조용히 마당을 거닐었다.  뒤에는 정란이라는 몸

종이 따른다.

  "얘, 저기 철쭉이 피었구나!"

  "예, 어제까지도 봉오리로 있었사온데 아침에 일찍 나와보니 피어 있었사옵니다."

  "정란아!  초목은 이러히 다시 살아나는데 어찌하여 인간만은 그것이 안 된단 말이냐."

  정란이는 영빈마마의 심중이 짐작갔다.  월선이같이 영빈의 일거수일투족에서 그 마음을 

헤아리고 점치지는 못하나 벌써 반년이나 모시고 보니 영빈의 심중을 어언 짐작하게 되었

다.

  "너만은 봄 같은 나이를 나 때문에 버리게 하지 말고 빨리 시집을 보내야 하겠다."

  조금도 거짓없는 걱정거리였다.  월선이를 삼십이 되도록 그냥 두었다가 남의 헌 신랑한

테 보낸 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미안스러운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정란이는 영빈의 말에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귀밑까지 빨개졌다.

  "아니다, 분명히 때가 있는 법!  그 순이 엄마 보아라.  나 때문에 삼십이나 돼서 시집을 

가지 않았겠니?  그 사람에게 무슨 힘이 있었겠느냐!  말이 상인(常人)이고 태어나기 그렇

지...  그 사람한테 부족한 데가 무엇이 있겠느냐?  행동거지하며 바느질, 음식솜씨, 게다가 

어깨 너머로 얻어 배운 글도 웬만한 문자는 다 알아 볼 정도이고...  단지 시집갈 나이가 넘

어서 늙은 처녀라고 홀아비한테 가지 않았겠느냐.  그것이 말이 없고 점잖아서 그렇지 남의 

자식 기르니라고 얼마나 속을 썩였겠느냐!  그걸 생각하면 오로지 내 죄인 것만 같아서...  

그래서 너는 올 가을이나 늦어도 내년 봄에는 시집 보내야겠다고 생각한다."

  "마마께서는 그저 저만 보시면 그 말씀만 하시네요."

  "얘, 넌 지금 열여섯이라고 했지?"

  "네."

  "그럼 어서 서둘러야지!  늦었다 늦었어.  난 열세살에 궁중으로 들어가서 으젓이 중전 노

릇을 했는데..."

  "마마께서야 어찌 저희들 같은 상것에 감히 비할 수 있겠습니까?"

  양반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자기들하고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

다.

  "마마! 쇤네는 말이예요, 순이 어머니 같이 오래오래 마마님 모시고 이대로 살고 싶사옵니

다."

  "아니다.  그건 죄스러운 일! 다시는 난 그런 죄는 안 저지르겠다."

  "뭐이 그리 죄이오니까?  순이 어머니는 마마님 오래 정성껏 뫼신 덕택으로 시집을 잘 가

서 그렇지...  그렇지 못한 저희들 같은 사람들은 그 시집간 후에 고생이 말이 아니온데요."

  "그런 소릴 어찌 하느냐?  잘 살고 못 사는 건 누구나 제가 지닌 팔자!  그것만은 억지로 

할 수 없느니라."

  영빈은 마치 자신에게 타이르기라도 하듯이 말을 마치고 항상 마당에 나서면 한 번씩 바

라보던 먼 영월 하늘을 바로보는 것이었다.

  지아비가 참사를 당하는 마당도 가지 못했던 팔자는 무슨 팔자일까?  상인으로 태어났다

면 그녀는 분명 밤을 도와서라도 남편의 시체를 뫼시러 갔을 것이다.

  영빈은 근래 더욱 흰 머리카락이 눈에 띄게 늘었다.

  정란이는 언제나 보는 마마의 뒷모습이었지만 오늘따라 더욱 쓸쓸해 보였다.

  언제까지나 마마님을 모시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롭고 쓸쓸하게 늙어가는 영

빈을 위로할 사람은 자기 뿐이라는 마음이었다.

  정란은 월선이 못지 않게 영빈을 알뜰하게 모셨다.

  영빈에게는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쩌면 영빈의 은은한 체취와 너그러운 

기품이 사람을 감화시키는 때문인지도 몰랐다.

  영빈은 얼마 전부터 무언지 눈에 안 보이는 어떤 큰 힘이 온 우주와 인간을 보살피고 키

우고하는 것 같은 막연한 신심(信心)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그것은 낙원에 있으리라고 믿는 상감에 대한 추모와 자기 몸을 낳아주고 길러준 양친 두

분에게 대한 회상과 함께 더욱 절실해지고 있었다.

  "영빈마마! 제가 왔사옵니다."

  한가한 한나절, 매화고목에서 우짖는 새소리만이 낭랑히 들려오는 영빈의 별당 앞에 정미

수가 와서 문안을 드렸다.

  "어서 안으로 드시오.  웬일이시오? 대낮에"

  "예! 대궐에서 사람이 나와 내일 경북궁에서 중전마마가 베푸시는 꽃놀이가 있사온데 재

백사(際百事)하시고 빈마마께서 듭셔서 같이 하루를 즐기시자는 중전마마의 직접 분부를 가

지고 왔습니다."

  "고마운신 중전마마의 은총이오만 어찌 내가 그런 호화로운 지리에 나가겠소?"

  "마마! 그러지 마시옵고 꼭 듭셔서 꽃놀이를 즐기고 나오십시오."

  "무슨 말을 하시오.!"

  그녀의 얼굴빛은 누구도 감히 더 권유할 수 없을 정도로 매섭고 찼다.

  아무리 좋은 놀이라도, 아무리 호화스런 모임이라도, 영빈에게는 즐거운 일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정미수는 황공한 태도로 묵묵히 앉았다가 자리를 물러났다.

  정란이는 어떤 위로의 말이라도 생각해 내려고 애를 쓰다가 마마의 얼굴빛을 살피며 마마

를 불렀다.

  "마마! 쇤네 대궐 구경 좀 하고 싶사와요.  내일 꽃놀이를 가셔야 쇤네도 마마님 뒤를 따

라 가보지 않겠사와요?"

  응석 섞인 목소리로 조르듯이 영빈 얼굴을 올려보며 하는 소리였다.

  "오냐, 네 마음 어찌 내가 모르겠느냐!  그러나 너도 무슨 인연으로 이런 늙은 나를 주인

으로 섬기게 되었는지 민망하구나."

  "마마! 쇤네 공연히 한 말을 드려 본 것이옵니다.  쇤네는 이대로 마마님 뫼시고 곁에 가

깝게 있는 것만으로도 어떤 누구부다 행복하게 여겨오고 있사옵니다."

  "내 일찍 양반집 규수로 태어나 지아비를 일국의 왕으로 모신 것을 가장 불행한 일이라고 

알고 지낸 날이 얼마인지 헤아릴 길이 없구나.  그러나 내가 철들 때부터 충성스런 월선이

가 곁에 있어 나이 오십이 되도록 수족처럼 따르더니 이제 또 너 같이 영리하고 예쁜 애가 

나를 도웁고 충비가 되어 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영빈의 노안(老眼)에 빛이 보였다.  이슬이 눈에 맺혔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기 전에 언제나 하던 버릇대로 뜰로 내려가 영월땅을 향해 재배를 잊지 않고 안

으로 들어왔다.

  "마마! 이제는 고만 침소로 듭셔야 할 시간이옵니다."

  "오냐"

  요사이는 그렇게도 보고 싶은 상감이 꿈길에서나마 안 나타나 주었다.

  이것도 한(恨)스러운 일이었으나 이제는 그대로 체념을 한 채 나날을 지냈다.

  영빈은 명주로 만든 누비 잠옷을 입고 궁에서 보내온 비단과 솜으로 새로 마련한 푹신한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수강궁을 나온 후에는 처음 입는 명주옷이요, 비단 이불이라 굳이 사양했으나 정미수와 

그의 며느리가 권하고 정란이가 소복을 벗게 하고 입힌 것이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원컨대 상감을 한 번 그전같이 꿈길에서나마 만나게 해줍시사 하고 

무언의 기원을 하면서...

  가시밭길이었다.  영빈은 당황했다.  꼭 이길을 빠져나가야 상감을 뵈옵게 된다고 자꾸 생

각이 들어서였다.

  도저히 늙은 자기 혼자서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이 험난한, 가시가 솟아 있

는 좁은 길이었다.

  영빈은 무의식중에 그 자리에 꿇어앉았다.  늘하던 대로 무조건 빌어 보자는 심산에서였

다.

  "저는 꼭 이길을 빠져나가야 되겠습니다.  이 가시밭길을 뚫고 나가야 상감을 뵈올 수 있

겠기 때문입니다.  전 이제 더 이승에서 살 아무 희망도 없어졌습니다.  모든 것을 이 눈으

로 똑똑히 보고 듣고 했습니다.  이제는 지아비되시는 상감곁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습니다.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이 험한 길을 걸어나갈 힘을 주시옵소서."

  간절한 기원이었다.

  그때 기적이 나타났다.

  형체는  아무것도 안보였다.  음성만이 낭랑히 들려올 뿐이었다.  뚜렷하게 들려왔다.

  "네 정성은 하늘에 사무쳤다.  그대로 안심하고 가시를 밟고 걸어가라!  그러나 그곳에 오

래 머물면 안 되느니라.  너는 아직 갈 때가 안되었으니...  이말을 명심하고 너의 지아비를 

만나고 곧 돌아서야 되느니라."

  고개를 숙이고 숙연(肅然)히 듣고 있던 영빈은 음성이 끝나자 소리 있던 곳을 보았다.  그

러나 역시 아무것도 안 보였다.

  과연 신은 눈에는 안 보이는 것인가 보다.

  영빈은 매무새를 다시 했다.  그리고 용기를 냈다.

  한 발자국을 내놓았다.  마치 발이 공중에 떠있듯 절로 걸어졌다.  얼마를 갔다.  마치 구

름에 뜬 기분이 바로 이런 것인가 했다.

  앞에 꽉 막힌 게 보였다.  살펴 보니 큰 대문이었다.  대문도 붉은 칠을 한 홍대문이었다.  

그문은 절로 양쪽으로 열렸다.

  그대로 들어섰다.  굉장히 넓은 마당이었다.  마당이라지만 오히려 대궐 안 정원보다 더 

넓고 훌륭했다.  갖가지 수목이 우거져 있는데 백화(白花)가 만발해 있었다.  경회루 같은 

못도 있었다.

  경회루의 물은 그렇게 푸르고 맑지 못했다.

  그런데 이 못의 물은 마치 가을 하늘의 짙푸른, 그 고운 빛이었다.  어찌도 맑은지 감히 

들여다 보 수도 없었다.

  저쪽 끝에 남향한 정자(亭子)가 보였다.  왠지 그리로 가면 상감이 계실 것만 같았다.  소

녀처럼 가슴이 떨렸다.

  (만일 상감마마는 아니 늙으시고 영월땅에서의 열일곱이던 그때대로 계신다면 나를 몰라 

보시겠지!  그렇다면 나는 어쩐단 말인가! <과인은 너같이 늙은 여인은 모른다.  썩 물러 가

라!>하고 역정을 내시면 어떻게 하나?)

  영빈은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다시 기시밭 앞에서 하던 대로 꿇어앉았다.

  "저를 한 번만 더 굽어 살피셔서 그전에 상감을 뫼셨던 때 그대로의 젊은 여인으로 만들

어 주시옵소서.  이런 말을 올리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우둔한 일이라는 것을 저 역시 잘 

아옵니다는...  여기까지 와서 상감을 진노케해드리고 가는 슬픔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사옵

니다."

  영빈은 또 아까 그 음성을 들었다.

  "안심하고 일어서라!  너는 바로 그 수강궁에서의 모습 그대로니라."

  영빈은 떨리는 다리를 버티어가면서 일어섰다.  홍차마에 연두 반호장 저고리를 입고 머

리에는 족두리를 얹은 중전 평상복(平常服)이 눈에 들어왔다.  발에도 비단신을 신고 있었

다.  

  영빈은 힘이 절로 났다.  너무나 기뻐서 그대로 <상감마마!>하고 그 정자를 향해서 뛰어

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중전의 몸!  희로애락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없는 막중한 중전의 몸! 이렇게 

입 속으로 외우면서 사뿐히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거울이 없어 얼굴을 볼 수는 없는 영빈은 손 등을 가만히 살펴 보았다.  분명 그때, 그 중

전마마이던 그때의 희고 부드럽고 포동포동한 손이었다.

  이제는 안심이 되었다.

  손은 얼굴과 같이 늙어가는 것이라고 알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었다.  상감이 

그 곳에 계신가 알고 싶어서였다.

  아! 저기 계시다.  시동(侍童)들을 거느린 상감이 곤룡포를 입고 담소하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그 앞에서 읍했다.

  "상감마마!  신첩이 왔사옵니다."

  "오! 중전, 얼마나 기다렸었는지!"

  상감의 감격은 그녀를 능가했다.

  "상감마마! 신첩 멀리 가시밭길을 넘어서 뫼시고 싶어 이러히 왔사옵니다."

  "어서 올라오시오.  그리고 내 옆에 앉으시오."

  이렇게 말한 상감은 좌우 시동을 물리쳤다.

  "중전,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얘기 좀 해 보시오."

  "예! 신첩 그저 이러히 우러러뵈온 기쁨에 아무 말도 드릴 수가 없사옵니다."

  "오, 중전!~"

  상감도 말을 못했다.  영빈은 할 얘기가 너무나 많았다.  무슨 얘기부터 먼저 해서 상감을 

기쁘게 해줄지를 몰랐다.

  "중전, 어서 얘기 좀 해주오!  속세에서는 어떻게 지내셨나 못내 궁금하구료."

  "상감마마!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사옵니다.  모든 것이 저희들 중생(衆生)들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규칙으로 끝이 난 것이옵니다."

  "그것이 무슨 말이요. 어서 차근차근히 말 좀 하구료."

  "예, 상감마마! 신첩의 지난 생활은 이 좋은 곳에서 이제는 말을 드릴 필요가 없사옵니다.  

그러나 금상께옵서 영빈이라는 호를 하사 하시고 먹고 입고 지내기 넉넉하게 성은을 베푸신 

것과 상감의 생질 해평부원군 정미수가 신첩에게 바쳐온 충심은 이루 둔한 입으로 말씀 드

리기가 난감하옵니다."

  "오, 갸륵한 일이로다!  지금의 상감이 누구시란 말이요?"

  "예! 세조는 탈위 이후 겨우 십삼년을 있으면서 못된 피부병으로 갖은 고생을 다하였습니

다.  그리고 슬하에 이자(二子)를 두었으나 장자는 세자로 책봉한 직후 나이 스물에 세상을 

떴고 둘째는 즉위한 후 재위 이년 만인 스무살에 또한 세상을 떠났사옵니다."
  
  "오! 하늘이 무심치 않으셨구나!"

  "그 후에 즉위하신 분이 바로 지금의 상감인 성종이옵니다.  그 망극한 성은을 신첩 혼자

만 분에 넘치도록 받자오니 황공하기 그지 없사옵니다."

  "무슨 소리를 하시오?  당연하고 또 지당한 처사! 무엇이 황공하단 말이요?"

  "그리고 지금은 아무 걱정없이 정미수에게 이 몸을 맡겨놓고 있사오니 모두가 하늘이 하

시는 차사인 줄 아옵니다."

  "중전의 고생은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일, 그리고 여양부원군의 화도 짐작이 가긴 

가오마는..."

  "예, 상감께오서 참사를 당하시고 곧 후에 귀양갔다가 사사당하셨사옵니다."

  "오, 고얀지고!  부친도 안 계신 민가에서 얼마나 그 고생이 지대하였겠소?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 같소!"

  "상감, 이제는 그런 슬픈 얘기는 필요없는 때...  어서 빨리 신첩도 여기 와서 친히 이러히 

뫼시고 나날을 즐기고 싶사옵니다."

 "아무렴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 말고!  얼마나 많이 중전을 기다리고 있는 내 마음인데..."

  "그러나 전 아직 여기에 올 때가 못됐다고 하더이다."

  "아니 그 말을 누가 했단 말이요?"

  그녀는 아까 본 기적을 빼놓지 않고 얘기 했다.

  "그렇다면 할 수 없는 일.  이곳의 시간이라는 것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데라오.  세상에 나가서 머물러 좀 더 세상되는 구경을 좀 하다가 천수를 마치는 날 내 곁

으로 오시오."

  "그러나 신첩은 저 세상에 나가면 다시 육십을 바라보는 늙은 몸이옵니다.  이러히 젊어

질 수가 없사옵니다.  세상에 가서는 늙으면 늙은대로 더 대견해지지만... 하나 상감 계신 이

곳으로 올 때 그렇게 늙은 몸이 되어서 오면 상감께서 보기 싫은 늙은 여인이라고 거들떠도 

아니 보실 것.  신첩은 그 일만이 슬프기 짝이 없사옵니다."

  "그렇지는 않을 거요.  나와 그대에게 지금 여기 올 때에 기적이 있었듯이 그런 기적은 

우리들을 영원히 즐겁게 해줄 것이요."

  "상감마마!  그럼 약속 드린,  눈에 안 보이는 그분에게 나무램을 당하지 않도록 이 몸 고

만 물러가겠사옵니다."

  "그렇게 하시오.  그러나 언제까지나 기다려야 할까!"

  침통한 표정의 상감 용안은 차마 올려다볼 수가 없었다.

  "상감마마!  옥체균안하시옵소서!"

  섭섭했다.  불급(不及)하게도 눈물이 나올것만 같았다.  발길을 옮겼다.  몇 발자국 옮기다 

발밑의 돌에 걸려 쓰러졌다.  순간 잠이 깼다.

  분명히 꿈이었다.

  그러나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한 꿈이냐?  영빈은 꿈에 취한 듯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제는 상감 곁에 가는 날까지 후사는 전부 정미수와 그의 자제에게 맡

기고 조용히 늙음을 맞이할 작정이었다.


   영빈은 천수를 팔십에서 두 살을 더했다고 전한다.

  영빈의 위폐와 단종의 신위(神位) 양위는 정씨 문중에서 모시고 그들이 오래오래 제사 지

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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