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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3/정신분석

프로이트의 삶과 생각

by FraisGout 2020. 6. 28.

      프로이트의 삶과 생각
    -제임스 스트라치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1856년 5월 6일, 그 당시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였던 모
라비아의 소도시 프라이베르크에서  출생했다. 83년에 걸친 그의 생애는 겉으로  보기엔 대체
로 평온 무사했고, 따라서 장황한 서술을 요하지 않는다.
  그는 중산층유대인 가정에서 두 번째 부인의 맏아들로 때어  났지만, 집안에서 그의 위치는 
좀 이상했다. 그 위로 첫 번째 부인 소생의 다 자란 두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프로
이트보다 스무 살 이상 나이가  많았고, 그 중 하나는 이미 결혼해서 어린 아들을  주고 있었
다. 적어도 그의 유년  시정에는 조카가 프로이트 밑으로 태어난 일곱 명의 남동생과  여동생
들 못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아버지는 모피 상인이었는데, 프로이트가 태어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업이 어려워
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프로이트가 겨우 세살이었을 때 그는 프라이베르트를  떠나기로 결심
했고, 그 1년  뒤에는 온 가족이 빈으로 이주했다. 이주하지  않은 사람은 영국의 맨체스터에 
정착한 두 이복 형과 그들의 아이들뿐이었다. 프로이트는 몇 번인가  영국으로 건너가서 그들
과 합류해 볼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 생각은 거의 80년 동란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프로이트가 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는 동안 그의 집안은  몹시 궁핍한 상태였지만,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는 언제나 셋째 아들의 교육비를 최우선으로  꼽았다. 프로이
트가 매우 총명했을 뿐 아니라  공부도 아주 열심히 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그는  아홉 살
이라는 나이에 김나지움에  입학했고, 그 학교에서 수석을 놓친적이  없었다. 그는 열일곱 살 
때 아직 어떤 진로를 택할 것인지 결정하지 못한 채 김나지움을 졸업했다.  그때까지 그가 받
았던 교육은 지극히 일반적인 것이어서 어떤 경우에도 대학에 진학할 길이 그에게 열려 있었
다.
  프로이트는 수차에  걸쳐 자기는 평생동안 단  한번도 <의사라는 직업에 선입관을  가지고 
특별히 선호한 적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보다 오히려  일종의 호기심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계의  물체들보다는 인간
의 관심사에 쏠린 것이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는 이렇게 적었다.
  어린시절에 나는 고통받는 인간을  도우려는 어떤 강한 열망도 가졌던 기억이  없다... 그러
나 젊은이가 되어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수수께끼들 가운데 몇 가지를 이해하고,  가
능하다면 그 해결책에 뭔가 기여까지도 이렇게 적기도 했다.
  나의 관심은 평생에 걸쳐 자연과학과 의학과 심리 요봅을 두루 거친 뒤에  오래 전, 그러니
까 내가 숙고를 할수 만큼 충분히  나이가 들지 않았던 젊은 시절에 나를 매혹적인 문제들로 
돌아왔다.
  프로이트가 자연과학을 직업으로 택하는 데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사건은- 그의 말대로
라면- 김나지움을 졸업할  무렵 괴테에게 바쳐진 (아마도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자연>에 
관한 매우 화려한 문체의  에세이를 낭독하는 독회에 참석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선
택이 자연과학이긴 했지만,  실제적인 고려는 의학으로 좁혀졌다.  그리고 프로이트가 열일곱 
살 때인 1873년 가을, 대학에 등록을 했던 것도 의과대 학생으로서 였다. 하지만 그는 서둘러 
의사 자격을 얻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한두 해 동안 그가 다양한 과목의  강의에 출석했던 것
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차츰차츰 관심을 기울여 처음엔 생물학에, 다음에는 생리학
에 노력을 집중했다. 그가 맨 처음 연구논문을 썼을 때는 대학 3학년 때였다. 당시 그는 비교
해부학과 교수로부터 뱀장어를 해부해서 세부사항을 조사하라는 위임을  받았는데, 그 일에는  
약 4백 마리의 표본을  해부하는 일이 포함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브뤼
케휘하의 생리학 실험실로 들어가 그 곳에서 6년 동안 근무했다.  그가 자연과학 전반에 대해 
보이는 태도의 주요한  윤곽들이 브뤼케에게서 습득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
다. 그 기간 동안 프로이트는 주로 중추신경계의 해부에 대해서 연구 했고, 이미 책들을 출판
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험실 연구자로서 벌어들이는 수입은 대가족인  집안을 부양
하기에 충분한 생계수단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1881년 그는 의사  자격을 따기로 결
정했고, 그로부터 1년 뒤에는 많은 아쉬움을 남긴 채 브뤼케의  실험실을 떠나 빈 종합병원에
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삶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다 준 계기가 있었다면 그것은 가족에 대한 
고려보다도 더 절박한 것이었다. 1882년에 그는 약혼을 했고, 그 이후로 결혼을 성사시키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약혼녀 마르타베르네이스는  함부르크의 이름있는 유대인  집안 
출신으로, 한동안 빈에서 지내고 있었지만 얼마 안 가서 곧 머나먼 북부  독일에 있는 그녀의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 뒤로 4년 동안 두 사람이 서로를 만나 볼 수  있었던 것은 짧은 방
문이 있을 뿐이었고, 두 연인은 거의 매일같이 주고 받는 서신 교환으로만 만족해야 했다. 그 
무렵 프로이트는 의학계에서 위치와 명성을 확립해 가고 있었다. 그는  병원의 여러 부서에서 
근무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신경해부학과 신경병리학에 노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또 
그 기간 중에 코카인을 의학적으로 유용하게 이용하는 첫번째  연구서를 출간했고, 그렇게 해
서 콜러에게 그 약물을 국부 마취제로 사용하도록 제안하기도 했다. 바로 뒤이어  그는 두 가
지의 즉각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그 하나는  객원교수 자리에 지면을 받는 것이었고, 다른 하
나는 장학금을 얻어서 얼마 동안 파리로 옮겨가 있으려는 것이었다.  그곳에서는 위대한 샤르
코가 의학계를 주도하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그 두 가지 목적이  실현된다면 자기에게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열심히 노력한  끝에 1885년 두 가지 모두를 얻어냈다. 프로이
트가 파리 살페뜨리에르 병원(신경질환  치료로 유명한 병원)의 샤르코 밑에서 보냈던 몇  달 
동안 그의 삶에는 또 다른 변화가  있었다. 이번에는 실로 혁명적인 변화였다. 그때까지 그의 
일은 전적으로 자연과학에만 관련되었고, 파리에 있을 동안에도 그는  여전히 뇌에 관한 병역
학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 당시 샤르코의 관심은 주로 히스테리와 최면술에 쏠려  있었
는데, 빈에서는 그런 주제들이 거의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그 일에 모두 하게 되었다. 비록 샤르코조차도 그것들을 순전히  신경병리학의 지엽적인 부문
들로 보았지만 프로이트에게는 그것이 정신의 탐구를 향한 첫걸음인 셈이었다.
  1886년 봄, 빈으로  돌아온 뒤 프로이트는 신경질환 상담자로서  개인 병원을 열고, 뒤이어 
오랫동안 미루어 왔던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당장에 자기의 모든  신
경병리학 업무를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몇 년 더 어린아이들의 뇌성마비에 관한  연구
를 계속했고, 그 분야에서 주도적인 권위자가  되었다. 또 그 시기에 실어증에 관해서 중요한 
연구 논문을 내기도 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신경증의 치료에 더욱 노력을 집중했다. 전기 충격 
요법 실험이 허사로 돌아간  뒤 그는 최면 암시로 방향을 돌려서, 1888년에 낭시를  방문하여 
리에볼트와 베른하임이 그곳에서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는 데 이용한  기법을 배웠다. 하지
만 그 기법 역시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밝혀지자, 또 다른 접근 방법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
었다. 그는 빈의 상담자이자  상당히 손위 연배인 요셉 브로이어박사가 10년 전쯤 아주  새로
운 치료법으로 어떤 젊은  여자의 히스테리 증세를 치료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브
로이어에게 그 방법을 한 번 더 써 보도록 설득하는 한편, 그 스스로도 새로운  사례에 그 방
법을 몇 차례 적용해서  가망성 있는 결과를 얻었다. 그 방법은 히스테리가 환자에게  잊혀진 
어떤 육체적 충격의  결과라는 가정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그리고 치료법은 잊혀진  충격을 
떠올리기 위해 적절한 감정을 수반하여  환자를 최면 상태로 유도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었
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로이트는 그 과정과 저변에 깔린 이론 모두에게  변화를 일으키기 시
작했고, 마침내는 그 일로 브로이어와 갈라설  정도까지 되었지만, 자기가 이루어 낸 모든 사
상체계ㅡ이 궁극적인 발전에 곧 정신분석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때부터-아마도 1895년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프로니트의  모든 지성적인 삶은 정신분
석학의 발전과 그 광범위한  언외의 의미, 그리고 그 학문의 이론적이고 실제적인 영향을  탐
구하는 데 바쳐졌다. 프로이트의  발견과 사상에 대해서 몇 마디 말로 일관된 언급을  하기란 
물론 불가능하겠지만, 그가 우리의 사고 습관에 불러일으킨 몇  가지 주요한 변화들을 단절된 
양상으로나마 지적하기 위한 시도는  얼마 안 가서 곧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그가 살아온 삶의 외면적인 과정을 계속 좇을 수 있을 것이다.
  빈에서 그가  영위했던 가정 생활에는 본질적으로  에피소드가 결여되어 있다.  1891년부터 
47년 뒤 그가 영국으로 떠날 때까지 그의 집과 면담실이 같은 건물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복한 결혼 생활과 불어나는 가족-세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은 그가 겪는 어려움
들, 적어도 그의 직업적 경력을 둘러  싼 어려움들에 견실한 평형추가 되어 주었다. 의학계에
서 프로이트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는 그가 발견한  것들의 본질 때문만이 아니
라, 어쩌면 그에 못지않게, 빈의 관료계를  지배하고 있던 강한 반유대인 감정의 영향 때문이
기도 했을 것이다. 그가  대학 교수로 취임하는 일고 정치적 영향력 탓으로 끊임없이  철회되
었다.
  그러한 초기 시절의  특별한 일화 한 가지는 그  결과 때문에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프로이트와, 명석하되 정서가 불안정한 베를린의  의사 비헬름 플리스의 우정에 관한 것인데, 
플리스는 이비인후과를 전공했지만 그의 광범위한 관심은 인간 생태학과 생명 과정에서 일어
나는 주기적 현상의  영향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1887년부터 1902년까지 15년  동안 프로이트
는 그와 정기적으로 편지를  교환하면서 자기의 발전된 생각을 알렸고, 자기가 앞으로 쓸  책
들의 윤곽을 개술한 긴 원고를 그에게 미리 보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과학
적 심리학을 위한 구상'이라는 제목이 붙은  약 4만 단어짜리 논문을 보낸 것이었다. 이 논문
은 프로이트의 경력에서 분수령이라고도 할 수 있는, 즉 그가 어쩔 수  없이 생리학에서 심리
학으로 옮겨 가고 있던 1895년에 작성된 것으로, 심리학의  사실들을 순전히 신경학적 용어들
로 서술하려는 시도였다.  다행스럽게도 이 논문과 프로이트가 플리스에게 보낸  다른 편지들
도 모두 보존되어  있는데, 그것들은 프로이트의 사상이 어떻게 발전되었는가에  대해 매혹적
인 빛을 던질 뿐 아니라,  정신분석학에서 나중에 발견된 것들 중 얼마나 많은 것이  초기 시
절부터 이미 그의 마음속에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플리스와의 관계를 제외한다면  프로이트는 처음엔 외부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했다. 빈에
서 점차 프로이트 주위로 몇몇 문하생들이 모여들었지만, 그것은 대략 10년쯤 후인 1906년경, 
즉 다수의 스위스  정신의학자들이 그의 견해에 동조함으로써  분명한 변화가 이루어진 뒤의 
일이었다. 그들 가운데서  중요한 인물로는 쮜리히 정신병원장인 블로일러와 그의  조수인 융
이 있었는데, 그것으로 우리는 정신분석학이 처음으로 확산되기 시작했음을 아 수 있다. 1908
년에 잘쯔부르크에서 정신분석학자들의 국제적인 학회가 열린 데  이어, 1909년에는 미국에서 
프로이트와 융을 초청해 여러 차례의 강연회를 열어 주었다. 프로이트의  저서들이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기 시작했고, 정신분석을 실행하는  그룹들이 세계 각지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정
신분석학의 발전에 장애가 없지는 않았다. 그 학문의 내용이 정신에  불러일으킨 조류가 받아
들이기 쉽다는 점  때문에 너무 깊이 흐른것이었다.  1911년 빈의 저명한 프로이트  지지자들 
중의 하나인 알프레드 아들러가 그에게서  떨어져나갔고, 2,3년 뒤에는 융도 프로이트와의 견
해 차이로 결별했다. 그 일에  바로 뒤이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정신분석의 국제적인 
확산은 중단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곧  가장 중대한 개인적 비극이 닥쳤다. 한 딸과 사
랑하는 손자의 죽음, 그리고 삶의 마지막 16년 동안 그는 가차없이 쫓아다닌  악성 질환의 발
병이었다. 그러나 어떤 질병도 프로이트의 관찰과  추론의 발전을 박을 수는 없었다. 그의 사
상체계는 계속 확장되었고,  특히 사회학 분야에서 더욱더 넓은  적용 범위를 찾았다. 그때쯤 
그는 세계적인 명사로서 인정받는  인물이 되어 있었는데, 1936년 그가 여든 번째 생일을  맞
던 해에  영국 학술원의 객원  회원으로 선출된  명예보다 더 그를  기쁘게 한 일은  없었다.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했을  때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가차없는 박해로부터 그를 
보호해 주었던 것도-비록 그들이 프로이트의 저서들을  몰수해서 없애 버리기는 했지만-들리
는 말로는 루즈벨트 대통령까지 포함된, 영향력 있는 찬양자들의  노력으로 뒷받침된 그의 명
성 때문이었다. 그렇더라도 프로이트는  어쩔 수 없이 빈을 떠나 그해 6월 몇몇  가족들과 함
께 영국으로 건너갔고, 그로부터 1년 뒤인 1939년 9월 23일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프로이트를 현대 사상의 혁명적인 창립자들 중의 하나로 일컬으며 그의 이름을 아인슈타인
에 결부시켜 생각하는 것은 신문 잡지에나 실릴 법한 판에 박힌 이야기가  되었다. 그러나 대
부분의 사람들은 그나 아인슈타인에 의해 도입된 변화들을 간략하게 설명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프로이트의 발견들은 물론 서로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세 가지로 묶을 수 있다.  연구의 
수단, 그 수단에 의해 생겨난 발견들, 그리고 그 발견들에서 추론할 수 있는 이론적 가설들이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프로이트가 수행했던 모든 연구 이면에  결정론 법칙의 보편
적인 타당성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자연과학  현상과 근무한 경험에
서 생겨났을 것이고, 궁극적으로 헬름홀쯔학파로부터 생겨났을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단
호히 그 믿음을 정신 현상의 분야로 확장시켰는데, 그러는  데는 자기의 스승이다 정신의학자
인 마이네르트에게서,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헤르바르트의 철학에서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을  과학적으로 탐구하기 위한 첫 번째 도구를 찾
아낸 사람이었다. 천재적이고 창조적인 작가들은  단편적으로 정신 과정을 통찰해 왔지만, 프
로이트 이전에는 어떤 체계적인  탐구 방법도 없었다. 그는 이 방법을 단지 점차적으로  완성
시켰을 뿐인데, 그것은  그러한 탐구에서 장애가 되는 어려움들이 점차적으로  분명해졌기 때
문이었다. 브로이어가 히스테리에서  설명한 잊혀진 충격은 가장  최초의 문제점을 제기했고, 
어쩌면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을 제기했고, 어쩌면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을 제기했을 수도 있
다. 관찰자나 환자  본인 모드에 의해서 검사에 즉각적으로  개방되지 않는, 정신의 활동적인 
부분들이 있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정신의 그러한  부분들을 프로이트
는 현상학적인 면이나  용어학상의 논쟁을 고려하지 않고 <무의식>이라고  기술했다. 무의식
의 존재는 최면 후의 암시라는  사실로도 증명이 되는데, 이 경우 환자는 암시 그  자체를 잊
었다 하더라도 충분히 깨어  있는 상태에서 조금 전 그에게 암시되었던 행동을 수행한다.  그
러므로 어떠한 정신의 탐구도 그 범위에 이 무의식적인 부분이 포함되지 않고는 완전한 것으
로 여겨질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완전해질 수 있었을까? 명백한 해답은  최면 
암시라는 수단에 의해서인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 방법은 처음엔 브로이어에 의해, 다음에
는 프로아트에 의해 이용된 수단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곧 그  방법은 불규칙하거나 불
명확하게 작용하고  때로는 전혀 작용하지 않는 불완전한 것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프로이트
는 차츰차츰 암시의 이용을 그만두고 나중에 <자유 연상>이라고 알려진 완전히 새로운 방법
을 도입하였다. 즉  정신을 탐구하려는 상대방에게 단순히 무엇이든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말하라고 요구하는, 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계획을 채택하였다. 이 중대한 결정 덕분에 곧바로 
놀라운 결과가 도출되었다. 프로이트가 채택한  수단이 곧바로 놀라운 결과가 도출되었다. 프
로이트가 채택한 수단이 초보적인 형태였음에도 새로운 통찰력을  제시했던 것이다. 한동안은 
이런저런 연상들이 물 흐르듯 이어진다 하더라도 조만간 그  흐름은 고갈되기 마련이고, 환자
는 더 말할 것을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거나 또는 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해서  저항의 진
상, 즉 환자의 의식적인 의지와 분리되어 탐구에 협조하기를 거부하는 힘의 진상이 드러난다. 
여기에 아주 근본적인 이론의 근거, 즉  정신을 뭔가 역동적인 것으로, 일부는 의식적이며 일
부는 무의식적이고, 때로는  조화롭게 작용하고 때로는 서로 상반되는 다수의  정신적인 힘들
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할 근거가 있었다.
  그러한 현상들은 결국 보편적으로  생겨난다는 것이 밝혀지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신경증환
자들에서만 관찰 연구되었고, 처음 몇 년 동안 프로이트의 연구는 주로 그러한 환자들의 <저
항>을 극복하여 그 이면에 있는 것을  밝혀 낼 수단을 발견하는 일과 관련되었다. 그 해결책
을 오로지 프로이트 편에서 극히 이례적인 자기 관찰-지금에 와서는 자기 분석이라고 기술되
어야 할-을 함으로써만 가능해졌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앞에서 얘기한, 그가 플리수에게 보
냈던 편지로 그 당시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다. 즉, 그는 분석 덕분에 정신에서 작용
하는 무의식이 의식으로  바뀔 때 그처럼 강한 저항이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또  그의 
환자들에게서 저항을 극복하거나 피해갈 기법을 고안 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더 중요하게
는 그러한 무의식적인  과정의 기능 방식과 익히 알려진 의식적인  과정의 기능 방식 사이에 
아주 큰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다음 세 가지 점은 그  하나하나에 대해서 
언급이 좀 있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사실 그것들은 정신에 관한  우리의 지식에 프로이트
가 끼친 공적들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의 무의식적인 내용들은 대체적으로 원초적인 육체적 본능에서 직접 그 에너지를 끌어
내는 능동적인 경향의 활동-욕망이나  소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무의식은 
즉각적인 만족을 얻는 것  이외에는 전혀 아무 것도 고려하지 않고 기능하며, 따라서  현실에 
적응하고 외부적인 위험을  피하는 것과 관련된, 정신에서 더욱더 의식적인  요소들과 동떨어
져 있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이러한 원초적인 경향은  훨씬 더 성적이거나 파괴적인  경향을 
지니며, 좀더 사회적이고 개화된 정신적인 힘드로가 상충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계속 탐구함
으로써 프로이트는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어린아들의 성적인 삶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비
밀을 알아낼 수 있었다.
  두 번째로, 그는 자기 분석을 함으로써  꿈의 본질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 꿈들은 신경증 
증상들과 마찬가지로 원초적인 무의식적 충동과 2차적인 의식적 충동사이에서 생겨나는 갈등
과 타협의 산물임이  밝혀졌다. 그것들을 구성 요소별로 나누어 분석함으로써  프로이트는 숨
어 있는 무의식적인 내용들에게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공통된 현상인  만큼, 꿈의 해석이 신경
증 환자의 저항을 간파하기 위한 기술적 도구들 중의 하나임을 밝혀냈다.
  마지막으로, 꿈에 대해 면밀한  고찰을 함으로써 프로이트는 그가 생각의 제  1차적 과정과 
제2차적 과정이라고 명명한 것,  즉 정신의 무의식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과  의식적 영역에
서 일어나는 일 사이의 엄청난 차이점들을 분류할 수 있었다.  무의식에서는 조직이나 조화는 
전혀 발견되지 않고, 하나하나의 독립적인 충동이 다른 모든  충동과 상관없이 만족을 추구한
다. 그 충동들은 서로 영향을 받지 않고 진행되며, 모순은 전혀 작용하지 않고 가장 대립되는 
충동들이 아무런 갈등  없이 병존한다. 그러므로 무의식에서는 또한 생각들의  연상이 논리와
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노선들을 따라  진행하며, 유사한 것들은 동일한 것으로, 반대되는 것
들은 긍정적으로  동등하게 다루어진다. 또 무의식에서는  능동적인 경향을 수반한  대상들이 
아주 이례적으로 가변적이어서,  하나의무의식이 아무런 합리적 근거도 없는 온갖  연상의 사
슬을 따라 다른 무의식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 프로이트는 원래  제1차적 과정에 속하는 심리
기제가 의식적인 생각으로 침투하는 것이 꿈만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정상적 또는 정신병리
학적인 정신적 사건의 기이한 점을 설명해 준자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냈다.
  프로이트가 했던 연구의 후반부는 모두 이러한 초기의 사상들을 무한히 학장하고 정교하게 
다듬는 데 바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한 사상들은  정신신경증과 정신이사의 
심리기제뿐 아니라 말이  헛 나온다거나 농담을 한다거나  예술적 창조 행위라든가 정치제도 
같은 정상적인 과정의 심리기제를 설명하는 데도  적용되었고, 여러 가지 응용 과학- 고고학, 
인류학, 범죄학, 교육학-에  새로운 빛을 던지는 데도  일익을 담당했다. 또 정신분석  요법의 
효과를 설명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프로이트는 또한 이러한 근본적인 관찰들
을 근거로 해서 그가 <초심리학>이라고 명명한 좀더 일반적인 개념의 이론적인 구조를 세우
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일반적인 개념을 맹혹적이라고 생각할지라고, 프로이트
는 언제나  그것이 잠정적인 가설의 속성을  띈다고 주장했다. 만년에 그는  <무의식>이라는 
용어의 다의성과 그것의  여러 가지 모순되는 용법에 많은 영향을  받아 정신에 대한 새로운 
구조적 설명-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해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분명한 새로운  설명-을  
제시했는데, 거기에서는 조화되지 않은  본능적인 경향은 <이드>로, 조직된 현실적인 부분은 
<자아>로, 비판적이고 도덕적인 기능은 <초자아>로 불렀다.
  지금까지 훑어본 내용으로 독자들은 프로이트의 삶에 있었던 외면적인 사건들의 윤곽과 그
가 발견한 것의 조망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했을 것이다. 그런데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
이, 좀더 깊이  파고 들어가 프로이트가 어떤  부류의 사람이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적절할
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위인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은 만족할 줄 모르며, 
그 호기심이 진실된  설명으로 충족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꾸며 낸 이야기라도 붙잡으려고 
할 것이다. 프로이트는 초기에 낸 두 권의 책('꿈의 해석'과 '일상 생활의 정신병리학')에서 그
가 제기한 논제로 인해  개인적인 사항들을 예외적으로 많이 제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또는 바로  그런 이유로 그는 자기의 사생활이 침해당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
했으며, 따라서 여러 가지 근거 없는  얘깃거리의 소재가 되었다. 일례로 처음에 떠돌았던 아
주 단순한 소문에 따르자면, 그는 공공도덕을 타락시키는데 온  힘을 쏟는 방탕한 난봉꾼이라
는 것이었다. 또 이와는 정반대 되는  터무니없는 평가도 없지 않았다. 그는 엄격한 도덕주의
자, 가차없는  원칙주의자, 독선자, 자기 중심적이고  웃지도 않는 본질적으로 불행한  남자로 
묘사되었다. 그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위의 두 가지 모습은  똑 
같이 얼토당토 않은 것으로  보일 것이다. 두 번째 모습은 분명히 부분적으로는 그가  만년에 
육체적으로 고통 받았다는 것을  아는 데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가장  널리 
퍼진 그의  몇몇 사진들이 불러일으킨  불행해 보이는 인상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그는  
적어도 직업적인 사진사들에게는 사진 찍히기를 싫어 했으며, 그의  모습은 때때로 그런 사실
을 드러냈다. 화가들  역시 언제나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를 어떻게든 사납고  무서운 모습으로 
표현할 필요를 느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행히도  좀더 다정하고 진실한 모습을  보여 
주는 다른  증거 물들도 있다. 예를 들자면  그의 장남이 쓴 아버지에 대한 회고록(마틴 프로
이트, '명예로운 회상',1957)에 실려 있는 ,휴일에  손자들과 함께 찍은 스냅 사진 같은 것들이
다. 이 매혹적이고 흥미로운 책은 실로 여러 자지 면에서 좀더 형식적인 전기들-그것들도 매
우 귀중하기는 하지만-의 내용에서 균형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는 한편, 일상 생활을  하
는 프로이트의 모습도 얼마간 드러내 준다. 이러한 사진들 가운데 몇 점은  그가 젊은 시절에 
매우 잘 생긴  용모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지만 나중에  가서는, 그러니까 제1차 세계대전 
뒤 병이 그를  덮치기 얼마 전부터는 더 이상  그렇지가 못했고, 그의 용모는 물론  전체적인 
모습(대략 중간 키 정도인)도 주로 긴장된 힘과 빈틈없는 관찰력을 풍기는 인상으로  널리 알
려졌다. 그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진지하되  다정하고 사려 깊었지만, 사사로운 속에서는 유
쾌하게 역설적인 유머 감각을 지닌 재미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가족에게 헌신적인 애정
을 기울인 사랑받을 만한  남자였다는 것을 알아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는  다방
면으로 여러 가지 취미가 있었고-그는 외국 여행과 시골에서 보내는 휴일, 그리고 등산을 좋
아했다-미술, 고고학, 문학  등 좀더 전념을 해야  하는 주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프로이트는 
독일어 외에 여러  외국어에도 정통해서 영어와 프랑스  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을 뿐  아니라, 
스페인 어와 이탈리아 어에도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또 그가 후기에  받은 교육은 주로 
과학이었지만(대학에서 그가 잠시 철학을  공부했던 것은 사실이다), 김나지움에서 배웠던 고
전들에 대한 애정 또한 잃지  않았다. 우리는 그가 열일곱 살 때 한 급우에게  보냈던 편지를 
가지고 있는데, 그 편지에 그는 졸업  시험의 각기 다른 과목에서 거둔 성과들, 즉 로마의 시
인 베르길리우스에게서 인용한 라틴 어 구절,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이디푸스 왕'에서 인용한 
30행의 그리스 어구절을 적고 있다.
  프로이트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그의 견해도 자유롭고 개방적일지언정 프로이트 이후 세대
에 속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에게서 두드러지는 특징들은 완전한 정직과 솔직성, 그리고 아무
리 새롭거나 예외적이라도 자기에게 제시된  사실을 어떤 것이든 기꺼이 받아들여 숙고할 준
비가 되어 있는 지성이다. 그가 이처럼 놀라운 면을 지니게 된 것은 아마도, 표면적으로 사람
들을 싫어하는 태도가  숨기지 못한 전반적 너그러움을  그러한 특징들과 결합하여 확장시킨 
필연적 결과일 것이다.  미묘한 정신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본질적으로  순박했으며 때
로는 비판 능력에서 예기치  않은 착오를 일으키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이집트 학이라든가  철
학 같은 자기  분야가 아닌 주제에서 신빙성이  없는 전거를 받아들이는 실수라든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상한 것은  그 정도의 인식력을 지닌 사람으로 믿기  어려울 만큼 때로는 그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결점을 보지 못한 것 등이 그런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고 단언함으로써 허영심을 만족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만족감은 쉽사리 도를 넘
어설 수 있다. 이제까지는 정상적인 의식에서 제외되었던 정신적 실체의  모든 영역을 처음으
로 알아볼 수  있었던 사람, 처음으로 꿈을 해석하고,  유아기의 성욕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하고, 사고의 제 1차적 과정과 제2차적 과정을 처음으로 구분한  사람-무의식을 처음으로 
우리에게 현실로 제시한 사람-에게는 사실상 매우 비범한 면들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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