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tudy 3/정신분석

제1부 실수 행위들 (1916[1915])

by FraisGout 2020. 6. 28.

첫 번째 강의

서론

신사 숙녀 여러분, 여러분들 각자가 강의를 듣거나 책에서 읽은 것 등을 통해

서 정신분석학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고 계시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러나 내 강의의 제목을 <정신분석학 입문>이라고 정함으로써 여러분들

을 정신분석학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식이 없는, 그러므로 가장 기초적인 강의부

터 필요로 하는 사람들로 대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여러분들이 정신분석이라는 것은 신경증이 있는 환자들을 의학

적으로 다투는 하나의 치료법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으리라고 전제하고, 이 분야

에서는 많은 것들이 의학 분야에서의 치료법과는 몹시 다르게, 심지어는 거꾸로

진행되기도 한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예를 들어 보여 드리고자 합니다. 환자에

게 어떤 새로운 기법을 적용해 보려고 할 때, 다른 때 같으면 그 사람의 고통을

대폭 경감시키고 치료의 성공과 관련해서 매우 희망적인 약속들을 하곤 했던 것

이 일반적입니다. 그것은 퍽 좋은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방법을 통해서 성공의 확률을 높일 수 있기에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경

증 환자에게 정신분석적인 치료 방법을 도입할 때는 그와는 다른 벙법을 취합니

. 우리는 이 치료 방법의 여러 난점들과 그것에 걸리는 오랜 시간, 그에 따른

노력들과 희생들에 관해서 이야기해 줍니다. 성공과 관련해서는, 확실하게 그것

을 보장할 수는 없으며 그것은 오히려 환자 자신의 태도와 이해력, 치료 방식에

대한 그의 유연성과 적응력, 지구력 등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곤 합니다.

이처럼 완전히 거꾸로인 것처럼 보이는 행동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물론 충분합니

. 여러분도 나중에 언젠가는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일단 내가 여러분들을 이와 같은 신경증 환자들처럼 취급한다고 해도 화를 내

지 마십시오. 그이고 나의 강의를 또 한번 듣겠다고 이곳에 다시 나타나는 따위

의 일은 하지 마십시오. 이와 같은 의도에서 나는 정신분석 강의라는 것이 얼마

나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그리고 자신만의 판단을 얻기까지 얼마나 많

은 난제들이 가로놓여 있는지를 강조하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제까지 받아

온 교육의 모든 경향이나 여러분들의 모든 사고 방식들은 불가피하게 여러분들

을 정신분석학에 대한 반대자로 만들어 갈 것이며 이러한 본능적인 적대감을 극

복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 마음속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이겨 내야만 하는 것인

가를 여러분들에게 주지시켜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의 강의를 듣고 여러

분들이 정신분석학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인가에 관해서는 나는

물론 확실하게 단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정신분석학 강의를 듣는 것만으로는 정신분석 연구에 착수하거

나 그러한 정신분석적 치료를 직접 수행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중에 누군가가 정신분석학에 대한 이와 같은 피상적인 지식에 만족하

지 못하고 정신분석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자 원하는 사람이 있을 때, 나는 그

에게 그렇게 하지 말도록 충고하고 싶을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경고까지도 하

려고 합니다. 현재의 상태로 보아서는 그는 그러한 직업 선택을 통해 대학교에

자리를 얻게 될 가능성도 없고, 숙련된 의사로서 살아가고자 할 때 그의 노력을

이해하지 못하고 미심쩍은, 적대적인 눈초리를 보내면서 자기들 속에서 웅크리

고 앉아서 기회를 엿보고 있던 모든 나쁜 악령들을 그에게 쏟아 부을 그런 사람

들 속에 자신이 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유럽을 뒤흔들고

있는 전쟁의 여러 가지 상황들에서 여러분들은 그런 사람들의 수가 얼마나 많을

지를 가히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여러 가지 난관들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 가운데에는 새로운

것을 지식으로 받아들이고 또 그에 대한 흥미를 지속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그러한 사람들이 있어서 나의 경고를 무시하고

다음 번에도 이 강의에 들어온다면 그 사람들은 환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내가 언급했던 정신분석의 어려움들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를 알아볼

권리가 있습니다.

우선적으로 정신분석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교수법과 강의법의 어려움이 문제

입니다. 여러분들은 의학 강의에서 보는 데에만 익숙해져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해부학 표본을 보거나 화학 반응에서 나타나는 침전물, 신경을 자극했을 때의

근육 수축 등과 같은 것을 관찰해 왔습니다. 또 조금 지나게 되면 여러분들에게

환자들을 보여주기도 하며 그의 고통의 증상들이나 병적 과정의 산물들, 또는

고립된 상태에 있는 병원균들을 보여 주는 경우도 수없이 많습니다. 또 외과학

분야에서는 여러분들은 수술의 참관인이 되기도 하며 그 수술을 직접 시도해 보

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정신의학 분야에서도 실연 수업이 행해져서, 환자의

변화된 표정의 움직임이나 말하는 태도, 또 행동들을 관찰할 수 있게 되는데 그

것들은 여러분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의학 분야에서

의 선생의 역할이란 주로, 박물관에 동행해서 여러분들이 사물들과 직접적인 관

계를 맺으면서 여러분 자신의 감각을 통해서 새로운 사실들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는 동안 안내를 맡고 있는 안내자나 해설자의 역할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정이 정신분석학에서는 전혀 다릅니다. 정신분석적인 치료

에서는 피분석자와 의사 간에 대화의 교환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

습니다. 환자는 지나간 경험이나 현재의 인상들에 대해 의사에게 이야기하고,

신의 고통을 호소하기도 하며 자신의 소망이나 감정 충동gefuhlsregung들을 고

백합니다. 의사는 그 말을 경청하고 환자의 사고 과정들을 유도하거나 어떤 일

을 회상하게 하고 그의 주의력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려고 노력합니다. 그에게

설명을 해주거나 또 의사로서 환자에게 불러일으켰던 이해나 거부와 같은 반응

들을 관찰합니다. 우리 환자의 가족들 중에서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만이 깊은 인상을 주며, 그들은 감동

시키는 최상의 방법은 극장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직접적인 행동을 보여 주

는 것입니다)<말하는 것만을 가지고 어떻게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라고 의혹을 표시하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근시안적이

고 일관성 없는 생각에 불과합니다. 그들이야말로 환자들이 자신들의 증세를

<그저 상상해 내고 있을 뿐이다>라고 확실하게 믿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

니다. 언어란 원래 마술이었으며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오래된 마술의 힘

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언어를 통해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행복하

게 만들 수도 있고 저주로 내몰 수도 있는 것이며, 언어를 통해서 선생은 자신

의 지식을 학생들에게 전수할 수 있는 것이며 또 강연자는 모여든 청중들의 마

음을 사로잡을 수도 있고 그들의 판단과 결정을 좌우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사람들 사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수

단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리 치료에 있어서의 언어 사용을 평가 절

하해서는 안 되고 분석가와 그의 환자 사이에 오고 가는 말들을 들을 수 있는

청취자가 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정신분석적인 치료 과정에 존재하는

대화들은 단 한 사람의 방청자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 사람들에게

공개할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정신의학 강의에서도 배우는 학생

들에게 신경쇠약증neurasthenie 환자나 히스테리hysterie 환자를 직접 소개할 수

도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고통과 증상들에 관해 호소하기는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은 말하지 않습니다. 분석 치료에 필요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오로지 그가 의

사와 특별한 감정적 유대를 맺고 난 이후에나 가능합니다. 환자가 어떤 다른 사

, 그와는 전혀 무관한 다른 사람을 발견하게 되는 즉시 그는 말을 멈추고 맙

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야기들이란 환자의 정신 생활의 가장 내밀한 부분과

관련되기 때문이며, 그가 사회적으로 독립적인 개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남

들 앞에 감추어야만 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고 나아가서는 통일적이고 조화

로운 인격체로서 자기 자신에게조차 고백하고 싶지 않은 그런 내용들과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정신분석 치료에서 행해지는 이야기들은 함께 들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그저 그러한 사례들에 관해 들을 수 있을 뿐이며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정신분석학은 남의 말을 들음으로써만 배울 수 있습니다. 이차

적인 중개에 의해 행해지는 이러한 수업을 통해서 여러분은 자신만의 판단을 내

리기에 별로 익숙하지 않은 조건 속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문제의 관

건은 상당 부분 여러분에게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그 증인에게 여러분들이 얼마

만큼의 신뢰를 보내는가의 여부에 좌우됩니다.

여러분들이 정신의학 강의를 들으러 온 것이 아니라 역사학 강의를 들으러 왔

다고 한 번 가정해 보십시오. 교수는 여러분들에게 알렉산더 대왕의 생애와 전

쟁중의 위대한 행동들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대체 어떠한 동기로 그가 이야기하는 내용의 진실성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

니까? 처음 보기에는 그런 일을 설명해서 이해시킨다는 것은 정신분석학의 경우

에서보다 더 힘든 일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 역사학 교수라는 사람도 여러

분들처럼 알렉산더 대왕의 전쟁에 참가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정신

분석가는 적어도 그 스스로가 참가해서 하나의 역할을 했던 그런 사태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곧 역사가의 말을 증명해 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고개를 쳐듭니다. 그는 여러분들에게 옛날 저술가

들의 보고를 환기시킬 것입니다. 그 저술가들이란 스스로가 알렉산더 대왕과 동

시대인 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 문제되는 사건에 시간적으로 아주 가까운 시대

에 살았던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디오도르diodor나 플루타르크

plutarch, 아리안arrian과 같은 이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역사학 교수는 또 발굴

되어 현재까지 보존되어 내려오는 동전이나 대왕의 조상 따위의 복사품을 제시

해 보일 수도 있고 잇소스 전쟁을 묘사하고 있는 폼페이 모자이크 사진을 여러

분들에게 회람시킬 수도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이러한 모든 기록들은 옛

시대의 사람들이 알렉산더 대왕의 실제와 그의 행동의 사실성 등을 믿어 왔다는

것만을 증명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비판은 여기서 새로이 전개될 수

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알렉산더 대왕에 관한 모든 보고가 반드시 믿을 만한

것은 아니며 그 세세한 사실들 하나 하나는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알렉산더 대왕의 실재 자체를 의심하

면서 그 강의실을 떠나게 될 것이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판단은 주로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고려하고 나서 내려질 것입니다. 첫 번째로, 역사학을 강

의하는 그 교수가 그 자신도 사실로 믿지 않고 있는 것을 실제로 있었던 일처럼

여러분들 앞에 꾸밀 이유가 거의 없으리라는 것이고, 두 번째로, 구해 볼 수 있

는 모든 역사학 문헌들이 그 사건을 대략 비슷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

. 여러분이 또 오래된 문헌들을 검증해 보려고 할 때도, 그렇게 증언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을 만한 그럴듯한 동기와 그러한 증거들이 서로 일치하고

있는가 하는 두 가지 요소를 고려해 볼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경우에는 그

검증의 결과가 아마도 믿을 만한 것이 되겠지만 모세나 님로드(바빌로니아 군신.

아시리아의 최초의 왕으로 알려져 있다.)와 같은 인물일 경우에는 매우 다른 결

과가 나올 것입니다. 정신분석을 강의하는 사람의 신뢰성에 대해 여러분들이 어

떤 의심을 품게 될 것인가는 나중에 적당한 계기에 가서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

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권리가 있습니다. <정신분석학

에 대한 객관적인 확인이라는 것도 없고 그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가능성도

없는 것이라면 정신분석학을 도대체 어떻게 배울 수 있으며 그 주장의 진실성을

어떻게 납득할 수 있습니까?> 그것을 배운다는 것은 실제로도 쉬운 일이 아닙

니다. 또한 정신분석학을 제대로 배운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리로 갈 수 있는 통로는 존재합니다. 처음에는 자기 자신, 즉 자신의 인격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 정신분석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보통 자기

관찰selbstbeobachtung이라고 부르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당한 표현이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부른다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신적인 현상 중에는 매우 평범하고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현상들이 매우 많습니

. 자기 자신에 대한 기술을 몇 가지 습득하고 나면 그 현상들을 분석의 대상

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들은 정신분석이 묘사하고 있는 그 과정

의 실제성과 그것이 표방하고 있는 견해가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필요한 확

신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러한 방법으로 달성하는 발전에는 한계

가 있습니다. 숙련된 분석가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대한 분석의 효과를 스스로

체험하고 다른 사람이 정신분석 요법의 정교한 기술을 사용하여 다루는 것을 보

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단히 훌륭한 방법은 말할

것도 없이 소수의 개개인들에게만 가능하고 전체의 사람 모두에게 일시에 가능

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이 정신분석학과 맺고 있는 관계에서 생기는 또 두 번째의 어려움은 더

이상 정신분석에만 돌릴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여러분이 적어도 의학 공부를

해왔다는 한에서 여러분 자신에게 그 책임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제까지 받아 온 교육은 여러분의 사고 활동을 정신분석과는 거리가 먼 반향

으로 돌려 놓았습니다. 여러분은 신체 기능과 장애들을 해부학적으로 근거지우

고 화학적, 물리학적으로 설명하고 생물학적으로 파악하는 교육을 받아 왔습니

. 그러나 여러분의 관심 중에서 어느 한 부분도 이처럼 놀랍도록 복잡한 신체

기능 발달의 정점에 놓여 있는 인간의 심리 활동으로 돌려진 적이 없습니다.

러므로 여러분에게는 심리학적 사고법은 낯설기만 하고 또 여러분은 그런 것을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나 사고 방식에

학문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을 거부하며 그것들을 문외한들이나 시인들, 자연 철

학자들(19세기 초반에는 쉘링의 범신론적 <자연 철학>의 추종자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 신비주의자들에게 내맡겨 버린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한계는 여러분의

의료적 활동의 관점에서 볼 때 확실히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 관계가 다 그러하듯이 환자는 여러분에게 처음에는 자신의 정신 과정

의 정면만을 내보이게 되며,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진 한계의 대가로 여러분이

이룩하고자 노력하는 치료적 영향의 일부를 여러분이 그렇게도 경멸해 마지않는

엉터리 의사나 자연 요법가, 또는 신비주의자들에게 내맡겨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받아 왔던 교육의 이러한 결함에 대해서 어떤 변명을 늘어놓을지 나

는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의학적 목적에 사용될 수 있

는 철학적 보조 학문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사변 철학도 기술 심리학도 또 감각

생리학과 연결된 이른바 실험 심리학이라는 것도 학교에서 교수되는 형태 그대

로는 여러분에게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해 유용한 어떤 지식

을 제공하거나 심리적 기능의 있을 수 있는 장애들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를 주

지 못합니다. 의학 분야 애에서도 정신의학은 관찰된 정신 장애들을 기술하고

임상적인 질병 증상으로 종합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정신의학자 자신도 기술적

인 나열 그 자체만을 가지고 과학이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는지 의심하기도

합니다. 질병 증상들을 이루고 있는 징후들의 유래나 메커니즘, 그 안에서의 적

대적인 관련성 등에 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한 징후들은 또 정신

이 존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해부학적 기관의 증명 가능한 변화와도 일치하

지 않고 또 그러한 해부학적 변화를 가지고 그 징후들을 설명하는 것 역시 불가

능합니다. 이러한 정신적 장애들이 심리 치료적인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은 그 밖

의 어떤 신체적인 질환의 부작용으로서 밖으로 드러나게 될 때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신분석학이 메우려고 노력하고 있는 허점입니다. 정신분석은

정신의학이 결여하고 있는 심리학적 토대를 제공하려고 하며 육체적인 장애가

정신적인 장애와 함께 나타나는 이유를 밝힐 수 있는 공통의 근거를 발견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목적으로 정신분석은 정신분석과는 친숙하지 않은

모든 해부학적 화학적 생리학적 성격을 띠고 있는 전체들에서 해방되어 순수한

심리학적인 보조 개념만을 가지고 작업을 진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여러분에게 처음에는 정신분석이 생소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음에 설명할 어려움과 관련해서는 여러분이나 여러분이 지금까지 받은 교

, 또는 여러분의 태도에 책임이 있다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정신분석은 그것이

표방하고 있는 두 가지의 원칙 때문에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모욕감을 주었고

그로 인해 그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세상 사람들의 지적인

편견과 충돌하고 또 다른 하나는 심미적, 도덕적 편견과 어긋나는 것입니다.

러한 편견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그것들은 위력적인

것들로서 인간에게 유익하고도 필연적인 인류 발전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것들은 정서적인 힘들에 의해서 고착되어진 것이고 그러므로 그것과의 싸움은

아주 힘든 싸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신분석이 내세우고 있는 이러한 반갑잖은 주장 중에서 가장 첫 번째로 제기

되는 것은 정신적 과정들은 그 자체가 무의식적이며, 의식bewubtsein적인 것은

정신 활동 전체 중에서 단지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와는 달리 심리적인 것과 의식적인 것을 하나로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는

것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의식이라는 것은 우리에게는 바로 그 심리적인 것을

결정하는 특성으로 여겨져 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두 개를 동일한 것으로

여겼던 이와 같은 입장은 너무도 자명한 것으로 보였고 그러므로 그것에 반대한

다는 것은 명명백백한 망상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은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정신분석은 의식과

정신의 동일성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무의식에 관하여'<프로이트 전집 13, 열린

책들>에서 프로이트는 이 문제에 관하여 길게 논하고 있다.)정신분석은 정신을

감정, 사고, 의지와 같은 과정으로 정의하며 무의식적인 사고나 무의식적인 의지

가 있다는 입장입니다. 이러한 입장 때문에 냉정한 과학성을 추구하는 모든 사

람들의 호감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정신분석은 어둠 속에서 집을 짓고 흐린 물

속에서 낚시를 하려 하는 공상적인 신비론일 뿐이라는 의심을 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러나 내가 무슨 권리를 갖고 <정신적인 것은 의식적인 것이다>라는

추상적인 성격을 가진 명제를 편견으로 단정하는지 아직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

. 또한 무의식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어떤 발달 과정을 통해서 이러

한 무의식이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는지, 또 이렇게 무의식을 부정함으로써 어떠

한 이익이 발생하게 되는가에 대해서 여러분은 아무런 추측도 하지 못할 것입니

. 정신적인 것을 의식과 동일시할 것인가, 아니면 의식은 그 너머까지로 확정

되는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을 벌이는 것은 어쩌면 공허한 말장난처럼 들

릴 것입니다. 그러나 무의식적인 정신과정을 설정함으로써 이 세상과 학문의 세

계에 결정적으로 새로운 방향 정립이 확립되었다는 것을 나는 여러분에게 확실

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정신분석의 이러한 첫 번째의 대담성이 지금 언급하려고 하는 두 번째의 것과

얼마나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지 여러분은 역시 짐작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분석이 자기의 연구 결과의 하나로 공표하고 있는 또 하나의 명제는 좁은 의

미에서나 넓은 의미에서 성적인 것으로 지칭할 수 있는 본능 충동triebregung

신경증이나 정신질환을 불러일으키는 데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역할을 하

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이와 같은 성적인 충동은 또 인간

정신의 최고의 문화, 예술, 사회적인 창작 활동에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지대한

공헌을 해왔습니다.(성적 충동에 대해서는 스무 번째 강의에서 구체적으로 논의

된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정신분석 연구의 이러한 결과에 대한 혐오감 이야말로 정

신분석이 부딪치고 있는 저항감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리가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알고 싶으십니까? 문화란 생존을 위한 역

경이라는 추진력 밑에서 본능 충동을 희생함으로 해서 창조된 것이라고 믿습니

. 그리고 그것은 인간 사회 속에 새로이 등장하게 되는 개개인들이 사회 전체

의 이익을 위해 본능 충족triebbefriedigung에 대한 희생을 되풀이함으로써 항상

새롭게 다시 창조되곤 합니다. 이렇게 문화의 창달을 위해 사용된 본능적 힘들

가운데에서 성충동sexualtrieb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성적 욕망

들은 그 과정 속에서 승화됩니다. 다시 말하면 본래의 성적인 목표에서 다른 방

향으로 돌려져서 더 이상 성적인 특성을 갖고 있지 않은, 사회적으로 더욱 고상

한 측면으로 항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너무나도 불안정하고 성충동

은 그저 약하게 통제될 뿐입니다. 문화적인 활동에 참가하려고 하는 모든 개개

인들에게는 본능 충동을 이렇게 사용하기를 거부하려는 위험이 항상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회는 성적 충동이 해방되고 그것이 원래의 목표로 회귀하려는 경향

성이 강화될 때 빚어지는 위험을 자신의 문화에 대한 가장 무서운 위협으로 간

주합니다.(문명과 본능적 힘의 대립에 관해서는 프로이트의 '문명 속의 불만'<

로이트 전집 15, 열린책들>을 참조하라.) 사회는 그러므로 사회의 근거를 이루고

있는 이러한 가장 예민한 부분이 건드려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사회는 또 이

러한 성충동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를 인정하고 개개인들에게 있어서의 성생활

sexualleben의 의미가 분명하게 정립되는 데 대해 조금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

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교육적인 목적에서 이 부분에 대한 주의를 딴 곳으로

돌려 버리는 방법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회는 정신분석학의 연구 결과

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것을 심미적 관점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으로, 도덕적으

로는 비난받아 마땅한 것으로, 더 나아가 위험한 것으로 낙인찍어 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반론은 학문적 작업의 객관적인 결과를 결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정신분석학에 대한 반론이 더 확대되려면 지적인 용어로 번역되어야

만 합니다. 어떤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질 때는 그것을 옳지 않은 것으로 간주해

버리려 하는 것이 인간적 본성인 것 같습니다. 또 그것에 대해 반대하는 논거는

곧 찾을 수 있기 마련입니다. 사회는 그러므로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옳지

않은 것으로 공표하고 정신분석의 진실을 논리적이고 구체적인 논점으로 반박하

지만, 그것은 정서적인 근원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그것을 논박하려는 모든 시도

에 맞서 편견에 불과한 이러한 이의를 고수하게 됩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편견에 대항하는 이러한 명제들을

주장함에 있어서 어떠한 경향성도 좇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수고스러운 작업을 거쳐서 확인했다고 믿고 있는 그러한 사실을 단지 이

세상에 공표하려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현실적인 측면을 고려하도록

요구하는 그와 같은 경계심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를 직접 조사해 볼 필요를 느

끼지 않으며, 학문적으로 작업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배려

하려는 모든 시도를 단호하게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려고 합니다.

이것들이 아마도 여러분이 정신분석을 연구할 때 마주치게 되는 어려움들 중

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시작으로서는 너무 과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그러한 인상을 극복할 수만 있다면 강의를 계속해 나가겠

습니다.

두 번째 강의

실수 행위들

신사 숙녀 여러분, 이제는 전제들에서 출발할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연구를

해봄으로써 시작하겠습니다. 우리 연구의 대상으로, 매우 흔히 일어나며 잘 알려

져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간과되어 왔고, 건강한 모든 사람에게서도 관찰될 수

있기 때문에 질병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러한 현상을 택하기로 합시다.

것은 이른바 인간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실수 행위fehlleistungen(<잘못된 행

>, <잘못된 기능> 등을 말한다. 프로이트 이전에는 일반적인 개념이 없었다.

프로이트는 '일상 생활의 정신병리학'<프로이트 전집 7, 열린책들>에서 이러한

실수 행위를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라 일컬어지는 것들로서, 어떤 사람이 무

엇인가를 말하려고 했는데 그 대신에 다른 말이 튀어나오는 잘못 말하기

versprechen 같은 것이라든가, 그가 그것을 눈치챘든 채지 못했든 간에 그러한

일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 혹은 어떤 사람이 인쇄물로 된 것이나

문서에 씌어진 것을 읽을 때 거기에 쓰인 것과는 다르게 읽으면서 일어나는 잘

못 읽기verlesen 같은 것, 또는 그의 청각 기관에 어떤 기능적인 장애가 없음에

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이 말한 것을 틀리게 들을 때, 즉 잘못 듣기verhoren

은 행위들을 말합니다. 그러한 현상들의 또 다른 종류에는 망각vergessenheit

그 근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지속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그가 확실히 알고 있고 언제나 다시 알아보곤 했던 어떤

이름을 생각해 낼 수 없을 때나, 나중에는 기억해 낼 수 있었으나 어떤 계획을

실행했다가 잊어버릴 때, 즉 일정 시간 동안만 잊어버리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

. 세 번째의 현상에는 <일시적으로만>이라는 조건이 빠져 버립니다. 예를 들

어 어떤 사람이 어떤 물건을 어딘가에 놓아 두었다가 찾지 못하는 경우인 잘못

놓기verlegen나 그와 유사한 경우인 잃어버리기verlieren가 여기에 속하는 사례

들입니다. 이러한 행위의 근저에는 망각이 가로놓여 있는데 이 경우에 사람들은

다른 망각의 경우에서처럼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행위로 간주하지 않고 스스로

그것에 대해 놀라거나 분개하는 등의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그 밖에도 <일시

>이라는 요인이 전면에 나타나는 일련의 다른 착각irrtumer들이 있는데 그 경

우에 사람들은 그 전이나 그 후에는 달리 이해하고 있던 어떤 것을 잠시 동안

믿어 버리는 따위의 행동을 합니다. 이 밖에도 다른 여러 가지 이름들을 가진

비슷한 경우가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모두 <ver->(우리말에서는 <잘못>이라는 뜻으로 옮길 수

있다.)라는 전철이 앞에 놓이면서 그것들 사이의 내적인 유사성이 표현되는 그러

한 경우들입니다. 그것들은 거의 모두 대단한 중요성이 있는 것들은 아니고 대

부분은 매우 피상적인 성격을 띠며 인간들의 생활에서 그다지 큰 의미를 갖고

있지 않은 것들입니다. 어쩌다 매우 드문 경우, 어떤 물건을 잃어버린다든지 하

는 몇 가지 경우에만 실제적인 중요성을 갖게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

도 그다지 큰 관심을 느끼지 못하고 있고 아주 미약한 감정적 동요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이러한 현상에 대해 여러분들의 주의를 끌고자 합니다.

러나 여러분들은 나에게 불만스럽게 다음과 같이 항의할 지도 모릅니다. <정신

생활의 좁은 영역에 수많은 수수께끼들의 숨어 있는 것처럼 이 세상에는 대단히

엄청난 불가사의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정신 장애의 영역에도 해명을 요구하고

있고 또 그렇게 할 가치가 있는 수없이 많은 경이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그

렇게 사소한 것들에다 우리의 정력과 관심을 바친다는 것은 정말 어이없는 일처

럼 생각됩니다. 건강한 눈과 귀를 가진 사람이 어찌해서 실제로 있지도 않은 것

들을 백주에 보거나 듣게 되는 것인지, 또 왜 어떤 사람은 이제까지 가장 사랑

하던 사람에게서 갑자기 추적을 받고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인지, 어떻게 해서 어

린아이들에게조차 말도 안 되는 일로 생각되는 망상이 가장 예리하고도 논리적

인 이유로 무장한 채 주장되는 것인지를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납득할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우리도 정신분석을 높게 평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분석이,

축하 파티를 하는 자리에서 축사를 하는 사람이 왜 자기가 의도하지 않았던 말

을 잘못 말하는 것인지, 가정 주부는 왜 자신의 열쇠를 잘못 놓아두고 찾지 못

하는지 등의 하찮은 것들만을 다루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우리도

우리의 시간과 관심을 더욱 중요한 다른 것에 바치고자 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신사 숙녀 여러분, 기다리십시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

습니다. 내 생각은, 여러분들의 비판은 요점에서 빗나갔다는 것입니다. 정신분석

은 이와같이 사소한 문제들에 집착해 본 적이 없노라고 자신 있게 자랑할 수 없

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반대로, 그것의 관찰 재료를 이루는 것들은 일반적으로

눈에 띄지 않는 사건들, 다른 학문들에서 너무 사소한 문제로 치부되어 무시되

는 것들, 이른바 현상 세계의 쓰레기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이와

같은 비판을 하면서 문제가 방대하게 보인다는 것과 어떤 징조가 눈에 확 띈다

는 것 등을 혼동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떤 조건과 상황에서는 아주 미약한 징

조만으로도 드러나게 되는 중요한 것들이 있는데도 여러분들은 그러한 가능성을

전혀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나는 여러분들에게 그 같은 상황들을 줄줄

이 제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젊은 청년들을 대상으로 생각해 보더

라도, 여러분들은 대단히 작은 징조만을 가지고도 자신이 한 숙녀의 호감을 사

고 있다고 믿어 버리곤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사실을 확인하는데 질풍

과도 같은 포옹처럼 분명한 어떤 표현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십니까? 다른 사

람은 눈치채지도 못할 시선 하나, 스쳐 지나가는 듯한 몸짓하나, 혹은 단 1초 정

도 더 긴 듯한 악수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또 여러분들이 범죄 수사관이

되어 어떤 살인 사건의 조사에 관여하고 있는 중이라고 가정할 때, 여러분들은

그 범인이 자기의 사진과 함께 주소 같은 것을 모두 그 현장에 남겨 놓기를 기

대하고 있지는 않으시겠지요? 아니면 어쩔 수 없이, 그 범인에 관한 아주 미약

하고 분명치 않은 흔적만으로도 만족하시는지요? 그러므로 그것에서 더 큰 단서

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나도 여러분들처럼 이 세상과 학문의 세계가 가

지고 있는 중대한 문제들이 우리의 일차적 관심을 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대단히 중요하게 보이는 이 문제, 혹은 저 문제

를 연구하겠다고 거창하게 계획을 세운다고 해도 별로 도움은 되지 않습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학문적

인 작업에서는 이미 연구할 어떤 방법이 마련되어 있는 자신의 바로 앞에 놓인

문제부터 붙잡고 보는 것이 훨씬 전망이 밝습니다. 아무런 기대도 가지지 않은

, 아무런 전제도 없이 어떤 문제를 근본부터 철저히 연구할 때, 또 다행스럽게

도 운이 따라 준다면, 작은 것들이나 큰 것들이나 모든 것들이 서로 연관지어져

있는 관련성에 따라 전혀 전망이 없을 것처럼 보였던 연구에도 더 큰 문제를 연

구할 수 있는 접근로가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들에게는 얼핏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건강한 사

람들의 실수 행위를 연구하는 일에 여러분들의 관심을 고정시켜 버리라고 권유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제 정신분석이 뭔지도 모르는 어떤 사람을 붙들고 그

러한 실수 행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인가고 물어 보고자 합니다.

그 사람은 틀림없이 처음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 그런 것은

대답할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작은 실수에 불과한 것입니다>

. 무슨 생각에서 이 사람은 그런 말을 했을까요? 그는,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

련의 서로 연결된 사건들에서 떨어져 나와 그것들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사소한

일들이 존재하며, 이런 사소한 사건들은 현재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존재하

지 않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까? 그런 방식으로 어떤 사람이 자연의 어

느 한 부분에서 만이라도 인과율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다면, 그는 모

든 과학적 세계관을 팽개쳐 버린 것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에게, 신의

특별한 의지가 작용하지 않는 한 한 마리의 참새도 지붕에서 떨어질 수 없다고

확신에 차서 주장하는 종교적 세계관weltanschauung이 훨씬 더 일관성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따져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가, 자신이 제시한 첫 번째 답

변에서 그 어떤 수미 일관한 결론을 이끌어 내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는 생각을 바꾸어서, 만약 자신이 이 사안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이를

설명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즉 여기서 문제의 관건

은 기능상의 일탈적 현상들이나, 심리적 능력상의 부정확성들, 그리고 이런 현상

의 조건들을 제시하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평소에는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도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실수할 수 있습니다. (1) 쉽게 기분이 나빠지거나

피로해지는 경우, (2) 흥분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경우, (3) 주의력이 다른 일들에

지나치게 쏠려 있는 경우 등입니다. 여기서 제시한 내용들을 입증하는 것은 용

이합니다. 실제로 사람이 몹시 피곤할 때나 두통에 시달리거나 편두통이 다가오

고 있음을 인지하기도 합니다.(이것은 프로이트의 개인적인 경험이다.)

사람들은 흥분하고 있을 때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거나, 사물들에 대한

분별력도 없어집니다. 사람들은 <엉뚱한 물건을 집거나>, 무슨 일을 자신이 하

려고 했는지도 잊어버립시다. 또 주의가 산만해 있을 때, 즉 원래 다른 것에 대

해서 주의를 집중하고 있을 때에도 일련의 의도하지 않았던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이 눈에 띕니다. 주의가 산만한 경우의 전형적 사례로는 '플리겐데 블래터

fligende blatter'(풍자 만화)잡지에 나오는 한 교수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다음에 쓸 책에서 다룰 문제들에 골몰했기 때문에 우산을 잊어버리거나

자기 모자를 바꾸어 쓰기도 합니다. 무슨 일을 하려고 계획을 세우거나 약속을

했을 때도, 매우 신경을 써야 하는 다른 일이 그 사이에 끼여들게 되면 곧잘 이

전의 계획이나 약속을 잊어버리는 경우는 우리 모두가 직접 체험해서 알고 있습

니다.

위에 언급한 내용들은 너무나도 합리적이어서 어떤 반론을 들이댄다 해도 끄

떡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기대했던 것만큼은 재미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실수 행위에 대한 이러한 설명 방식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기

로 합시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으로 지적되는 조건들은 그 종류

에 있어서 다 같은 것들은 아닙니다. 불쾌감이나 순환기 계통 장애들은 정상적

인 기능이 작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생리적인 근거를 제공합니다. 그 반면 흥분,

피로, 방심은 또 다른 종류의 계기들로서 정신생리적인 것으로 부를 수 있습니

. 여기서 후자의 것들은 이론으로 쉽게 번역 될 수 있습니다. 피로함과 방심,

혹은 또 일반적인 흥분 상태는 주의력의 분산을 가져옵니다. 그 결과 마땅히 해

야 할 일을 하는 과정에서 정작 주의를 집중하기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이 기능

은 그런 경우에 특히나 쉽게 방해를 받게 되며 매우 부정확하게 수행될 뿐입니

. 경미한 병, 중앙 신경 중추의 혈류량의 변화 등도 가장 결정적인 계기인 주

의력의 분산에 비숫한 영향을 미침으로써 같은 작용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러므로 모든 경우에 문제되는 것은 신체적인 원인에 의한 것이든 심리적인 원인

에 의한 것이든 주의력 장애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정신분석학의 관심을 끌기에는 모자란 것 같습니다. 이런

주제라면 그냥 내동댕이쳐 버리고 싶다는 유혹까지 느낄 정도입니다. 그러나 우

리가 조금 더 깊이 연구해 들어가게 되면 실수 행위가 모두 주의력 이론으로 설

명되지는 않는다는 것, 또 적어도 그것에서 자연스럽게 이끌어 낼 수는 없다는

것 등을 알게 됩니다. 그러한 실수 행위들이나 망각 등은 또, 피로하지도 않고

방심한 상태도 아니며 흥분되어 있지도 않은 사람들에게서도 일어나며 오히려

어느 면으로 보더라도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서도 일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런 실수를 한 사람

에게 나중에 가서 억지로 흥분 상태였다는 사실을 갖다 붙이려고 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더욱이 그 사람은 자신이 흥분된 상태였다고 인정하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주의력을 높이면 어떤 능력이 확실히 보장되고 또 주의력을 낮추면

그 능력이 저하되는 것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는 없습니다. 순전히 기계적으로,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도 처리할 수 있고 그러면서도 매우 확실하게 수행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 자신도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잘 알

고 있지 못하는 채로 산책하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옳은 길로 찾아들고 지

나치는 법 없이 자신의 목적지에 제대로 멈추어 섭니다. 적어도 이런 일들은 늘

상 그렇게 이루어지곤 하는 일들입니다. 숙련된 피아니스트는 굳이 생각하지 않

고도 정확하게 건반을 두드립니다. 물론 그가 실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동적인 연주가 잘못 칠 수 있는 위험을 증가시키는 것이라면 엄청난 연습을

통해서 연주하는 것이 거의 자동화되다시피 한 거장들은 이러한 위험에 가장 많

이 노출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특별

히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만 하는 경우에는 오히려 필요한 주의력을 집중하지 못

하며, 그럴 때에 실수가 더 잘 일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흥분aufregung>의 영향이라고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왜 흥분 상태가 특별한 관심을 갖고 목표로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주의력을 높여 주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중요한 연설이

나 토의에서 말이 헛나와 자신이 의도했던 것과 정반대의 말을 하게 된다고 해

도 이것은 정신생리학psycho-physiolosie 이론이나 주의력 이론으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실수에는 또 여러 가지 작은 부수적 현상들이 있는데 그것은 잘 이해되지도

않거니와 이제까지의 많은 이론들로도 설명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어떤 이름을 순간적으로 잊어버리게 되면 그에 대해서 몹시 분노를 느

끼게 되며 그것을 어떻게는 기억해 내려 애쓰고, 그것 때문에 그 일에서 놓여

나지 못하게 되곤 합니다. 화가 난 사람에게는 그가 원하는 바대로 자신의 주의

를 그 어휘에 쏠리게끔 하는 것이 왜 그렇게도 힘든 일일까요? 그가 표현하듯이

그것은 마치도 <입 안에 맴돌고 있는 것> 같아서 누군가에 의해 그것이 언급되

기만 하명 그 즉시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인데 말입니다. 또 어떤 때에는 실수들

이 복합적이 되고 서로 얽혀 들고 서로를 대신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처음에

는 약속 자체를 잊어버리기도 하고 그 다음에는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잔잔히 마

음먹었는데도 실수로 다를 시간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합

니다. 잊어버린 것을 생각해 내기 위해 우회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번에는 또 첫

번째 이름을 떠올리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그 두 번째의 이름마저도 생각이 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또 그 두 번째의 이름을 기억해 내려 하지만 그때

에는 또 세 번째의 이름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와 똑같은 현상이 식자공의 실

수로 간주되는 인쇄상의 실수에도 곧잘 발생합니다. 그와 같은 지독한 인쇄 실

수가 한 번은 사회민주당 기관지에 발생했다고 합니다. 어떤 축제 행사에 관한

기사 중에 <참석자 중에는 kornprinz(황태자 전하)(이것은 kronprinz의 오기임.)

께서도 계셨습니다>라는 내용이 실렸던 것입니다. 다음 날짜의 신문에는 그에

대한 정정문이 실렸습니다. 신문은 정중하게 사과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었

습니다. <당연하게도 그것은 knorprinz로 읽혀져야 합니다.>(그러나 여기서도 다

시 오식이 발생함.)(<korn>은 옥수수, <knorr><돌출>이라는 뜻이다.) 이럴

때 사람들은 흔히 오식 마귀에 씌였다거나 활자 상자의 요괴, 혹은 그와 비슷한

것의 장난이라고 말을 하는데 어쨌거나 그것은 인쇄 실수에 대한 정신생리학적

인 이론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잘못 말하기versprechen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이른바 어떤 암시suggestion

를 줌으로써 그것은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도 알고 계시는지 모

르겠습니다. 이에 대한 일화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언젠가 신출내기

연기자가 연극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오를레앙의 처녀'라는 연

극에서 왕에게 <connetable(꼬네따블. 프랑스 군의 원수를 지칭함.)이 그의 검을

도로 보내 왔습니다>라고 말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연 배우는 리허설

도중에 대본에 있는 대사 대신에 되풀이해서 <komfortabel(콩포르따블. 마차의

마부.)>이 자기의 말을 도로 보내 왔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장난을 쳤고 그는 자

기의 의도한 바를 그대로 이루어 냈습니다.(약간의 혼동이 있었던 것 같다. 여기

에서는 프랑스 군 원수의 변절을 알리는 것은 왕 자신이다.)실제 상연에서 이 불

쌍한 연기자는 그에 대해 수없이 주의를 들었음에도, 혹은 바로 그 때문에 정말

로 이렇게 바뀌어진 대사를 말하는 실수를 저지르면서 첫 연극에 데뷔했던 것입

니다.

실수의 이러한 모든 작은 특징들은 주의력 박탈이라는 이론을 가지고는 설명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을 가지고 이 이론이 틀렸다고 말하기는 아직 이

릅니다. 거기에는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는 듯 합니다. 그 이론을 아주 조금만 보

완해 주면 충분히 만족할 만한 것이 되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실수들 중의 많은

것들은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측면에서 관찰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의도에 가장 적당한 것으로서 여러 가지의 실수들 중 <잘못 말하기>

의 경우를 추적해 봅시다. 그러나 잘못 쓰기나 잘못 앍기를 선택하더라도 상관

이 없습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브릴 a. a. brill'정신분석 : 그 이론과 실제

적 적용 psychoaanalysis : its theories and practical application'(1912)과 존스

e. jones'일상 생활의 정신병리학 the psychopathology of everyday

life'(1911)을 참조할 것. 우리는 지금까지는 언제, 어떤 조건에서 사람들이 잘못

말하게 되는가에 대한 문제에만 집착해 왔고 오직 그에 대한 해답만을 얻는 데

그쳤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방향으로도 관심을

기울이고, 사람들이 다른 식으로도 잘못 말할 수 있었을텐데도 왜 꼭 그러한 식

으로만 잘못 말하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잘못 말할 때 어떠한 일

이 일어나는지를 관찰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잘못 말하기의 작용을 설명하지 못하는 한은, 설사 그 생리적인 측면에서 그 현

상은 여전히 단지 하나의 우연적 현상으로만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가령 내가 어떤 말 실수를 했다고 했을 때 나는 또 수도 없이

다른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잘못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단 하나의 바른 단

어에 대해서 수천 가지 다른 것들 중의 하나를 말하는 것이고 하나의 옳은 단어

에 대해 셀 수 없이 많은 왜곡entstellung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경우에 나에게 여러 가지 잘못 말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방법 가

운데서 어떤 하나의 형태로만 그 현상이 일어난다고 할 때, 거기에는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것은 단순한 우연이며 임의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으로

서 이 문제에는 어떠한 이상적인 해명도 불가능한 것일까요?

1895년에 메링어r. meringer와 마이어c. mayer(한 사람은 언어학자이고 또 한

사람은 정신의학자)라는 두 명의 학자가 잘못 말하기의 문제를 바로 이러한 측

면에서 다루어 보려는 시도를 한 바 있습니다.(메링어와 마이어의 '잘못 말하기

와 잘못 읽기, 심리학적-언어학적 연구versprechen und verlesen, eine

psychologisch-linguistische studie'(1985)참조.) 그들은 여러 가지 사례들을 수집

에서 처음에는 순전히 기술적인 관점에서 그것들을 기록했습니다. 그것으로서

아직 어떤 해명에 도달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적어도 하나의 해명으로

통하는 길을 찾게 하는 데에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의도했던 말이

잘못 나오게 됨으로 빚어지는 왜곡 현상을 구별했는데, 그것은 혼동

vertauschungen, 선발음vorklange, 후발음nachklange, 혼합vermengungen

(kontaminationen), 대치ersetzungen(substitution) 등입니다. 이제 이 두 학자들

이 분류한 이러한 주요 요목들에 대해 사례들을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

>은 다음 경우에 발생합니다. 어떤 사람이 밀로의 비너스라고 말하는 대신에

<비너스><밀로>(단어 배열의 혼동)라고 하는 경우입니다. 선발음의 예는

<es war mir auf der brust so schwer(나에게는 대단히 힘든 일이었습니다)>

고 말할 것을 <es war mir 'auf der schwest'>라고 말하는 경우입니다. (원래

<brust>라고 발음해야 함에도 뒤에 따라올 말인 <schwer>의 영향을 받아

<schwe><brust><bru>대신에 미리 발음됨. 이 경우 <schwer(무거운,

)>라는 감정이 앞섰기 때문으로 풀이됨.) 후발음의 경우는 저 유명한, 빗나간

축배사의 예가 있습니다. <ich fordere sie 'auf, auf' das wohl unseres chefs

'auf zustoben'.> (<여러분, 우리 선생님의 행복을 위해 축배를 듭시다

anzustoben>라고 할 것을 <트림을 합시다aufzustoben>라고 잘못 발음한 것이

. 이때 aufzustoben이라고 발음하게 된 것은 그 전에 <auf>라는 발음이 두 번

나왔기 때문에 이 발음이 뒤의 단어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

에 잘못 말하기의 예로 든 세 가지 형태의 잘못 말하기는 그렇게 흔하지는 않습

니다. 축약이나 혼합의 형태로 나타나는 잘못 말하기가 훨씬 더 빈번하다는 것

을 여러분들은 알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서 거리에서 어떤 신사가 한 숙녀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걸 때 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동행해도 될까요?>라고

말하려는 것을 <wenn sie gestatten, mein fraulein, mochte ich sie gerne

'begleit-digen'?>라고 발음하는 경우입니다. 이렇게 혼합된 말('begleit-digen'

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속에는 begleiten(동행, 수행하다)이라는 단어 외에도

beleidigen(모욕하다)라는 단어가 숨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때, 젊은 남자는 그 여자에게 결코 성공적으로 접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대치의 경우, 메링어와 마이어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

<부란 상자에 표본을 넣어 두겠습니다ich gebe die praparate in den

<brut>kasten>라고 말하는 대신에 <우편함에in den

<brut>kasten>라고 말하는 경우입니다.

이 두 명의 학자가 이와 같은 사례 수집에 근거해서 시도하고 있는 설명 방식

은 매우 불충분한 것입니다. 그들은 한 단어의 소리와 음절이 여러 가지 다른

가치를 갖고 있으며 더욱 높은 가치를 지닌 요소의 신경 자극이 그보다 낮은 가

치를 지닌 요소의 신경 자극을 교란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분명

히 그들의 주장은 그다지 흔하게 일어나지 않는 현상인 선발음이나 후발음의 경

우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잘못 말하기의 다른 현상들에서는 이러한 발음

선호 현상이 설사 그것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전혀 고려되지 않는 것입니다.

제일 흔한 현상은 사람들이 어떤 말 대신에 그것과 아주 흡사한 다른 말을 하게

되는 말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며, 이러한 유사성이야말로 많은 사람들이 잘못

말하기의 현상에 대한 설명으로서 충분하다고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

어 어떤 교수가 자신의 취임 인사에서 <본인은 존경해 마지않는 전임자의 공적

을 치하하는데 적당한 자격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nicht geeignet>라고

말할 것을 <공적을 치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nicht 'geignet'>라고 말

하는 경우입니다. 혹은 또 다른 교수가 <여성의 성기에는 수많은 유혹

versuchungen에도 불구하고......, 죄송합니다. 실험 versuche에도 불구하고>

라고 말했을 경우입니다.

잘못 말하기의 형태 중에서 가장 일반적인고 또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자신

이 말하려고 의도했던 것과 정반대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물론 음운

관계나 유사성 효과는 전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 대신에 그 반대 어구가 훨

씬 강한 개념적 유사성을 띠면서 심리적인 연상 작용 속에서 서로 특별히 가깝

게 놓여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등장합니다. 이런 종류로서는 다음과 같은 역

사적 사례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국회의장이 언젠가 개회사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두를 꺼냈습니다. <여러분, 나는 의원 여러분들의 출석을 확인하면서......

이 회의가 '폐회 geschlossen'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이러한 반대 관계만큼이나 똑같이 함정에 빠지기 쉽게 만드는 것은 자연스러

운 어떤 다른 연상이 떠오를 때입니다. 그러나 이는 경우에 따라서 매우 부적절

하게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헬름홀츠h.

helmholtz 집안과 유명한 발명가이며 산업 재벌인 지멘스w. simens 집안의 자녀

가 결혼하는 자리에서 축사를 하게 된 유명한 생리학자인 듀 보아 레이몬드du

bois-reymond, 말할 나위 없이 훌륭한 자신의 축사를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

었습니다. <, 이 새로운 회사의 탄생을 축하하며 건배합시다. '지멘스-할스

'(<지멘스-헬름홀츠>라고 말했어야 했다. 지멘스와 할스케는 1847년 독일 최

초로 설립된 전기 공업 회사이다.) 만세!> 할스케란 말할 것도 없이 역사가 오래

된 유명한 회사의 이름이었습니다. 베를린 사람들에게는 이 두 개의 이름을 같

이 부르는 것은 빈 사람들에게 <리델-보이텔>(<리델-보이텔>은 빈의 유명한

여행용품 회사이다.) 회사의 이름이 떠오르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매우 자연스러

운 현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음운 관계와 언어 유사성에 언어 연상wortassoziation이라는

또 하나의 작용을 첨가해야만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

. 바로 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 혹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함께 고려하기 전

에는 지금까지 관찰된 잘못 말하기 현상을 제대로 해명할 수 없을 것 같은 여러

가지 경우들이 있습니다. 비록 매우 밀접한 관계라고는 볼 수 없지만 그것은 메

링어가 그처럼 강조한 후발음의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백하자면 우리는

잘못 말하기라는 실수를 전보다 더 이해할 수 없게 된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됩

니다.

어쨌든 우리 모두는 방금 행한 연구 도중에 잘못 말하기의 사례들에 대한 하

나의 새로운 인상을 받게 되었다고 말한다고 해도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조금 더 머물러 보는 것 또한 가치가 있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잘못 말하기가 일어나게 되는 일반적인 조건을 연구하고 잘못

말하기에서 이러한 왜곡 형태를 결정해 주는 영향력들을 조사했습니다. 그러나

그 발생과는 관계 없이 잘못 말하기의 영향 그 자체에 대해서는 아직 주의해 보

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렇게 하고자 결심을 한다면 드디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만 하겠습니다. , 몇 가지 사례에서는 잘못 말하기의 형태

로 불쑥 튀어나오게 된 현상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미가 있

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잘못 말하기의 작용도 어쩌면 자기 자

신의 고유한 목표를 추구하는, 그 자체로서 완전히 유효한 심리적 행위로서 내

용과 의미를 지닌 행동 표현으로 파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인지도 모릅니

. 우리는 이제까지 계속 실수들에 관하여 논의해 왔는데 이제는 그 실수들도

때로는 완전히 정상적인 행위인 것같이 생각됩니다. 그것들은 기대되거나 의도

했던 행위들을 대신해서 그 자리에 들어섰을 뿐입니다.

실수에 담겨 있는 이러한 고유한 의미는 어떤 경우 이해하기 쉽고 오인의 여

지없이 명백할 때도 있습니다. 국회의장이 국회를 개회한다고 선언하는 대신 폐

회한다고 선언했을 때, 우리는 이러한 잘못이 일어나게 된 그 상황을 알고 있으

므로 이 실수를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는 이 사회에서 그 어

떤 좋은 결과도 예상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회의를 즉시 그만둘 수 있었으면 하

고 바랐던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의 해명, 즉 이렇게 말 실수를 해석하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 문제도 안 됩니다. 어떤 여인이 상대방을 매우 높이 평가하는 듯

한 어조로 <diesen reizenden neuen hut haben sie sich wohl selbst

<aufgepatzt>(이 멋있는 새 모자는 당신이 직접 뒤집어쓴 것입니까?>(사실은

이때 <직접 선택해서 쓴 것입니까selbst aufgeputzt>라고 말하려고 했다.)라고

물을 때 이러한 말의 실수에서 <이 모자는 아주 어울리지 않는군요>라는 의미

를 끄집어 낸다고 해도 이 세상의 어떤 과학도 반박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하

나의 예는 다음과 같이 얘기할 때입니다. <우리 남편이 의사에게 자기가 어떤

식이 요법을 해야 하는지 물어 보았는데, 아무런 식이 요법도 할 필요가 없고

남편이 <>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먹고 마셔도 좋다고 하더라지 뭐예요.>

그러므로 이 말의 실수는 다른 한편으로는 일관된 자기 생각의 명백한 표현인

것입니다.

신사 수녀 여러분, 잘못 말하기나 실수들 중의 단지 몇몇 경우들만이 어떤 의

미를 갖는 것이 아니고 대다수의 많은 경우들도 역시 그러하다면, 이제까지 다

루어 오지 않았던 실수의 이러한 의미는 불가피하게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될 것이며 다른 모든 관점들은 당연히 뒤편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모든 생리학적인, 혹은 정신생리학적인 요소들을 제거할 수 있게 되고

실수의 의미에 대한, 다시 말해 실수의 뜻, 즉 실수의 의도에 대한 순전히 심리

학적인 연구에 몰두 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기대에 맞춰서 대단히

많은 관찰 자료에 대한 검토를 게을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계획을 수행하기 전에 나와 함께 다른 단서를 추적해

나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시인들이 시적 표현의 방법으로 잘못 말하거나 또 그

밖의 실수들을 사용해 온 것은 매우 흔한 일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 자체만으

로도 그들이 그 실수들과 잘못 말하기를 무언가 의미 심장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어쩌다가 잘못 쓴 것을 작품

속의 인물이 그대로 잘못 말하게 놔두었을 리는 없습니다. 잘못 말하기를 통해

서 작가는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를 알게 하려한 것이며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 그가 혹시 우리들에게 그 관련 인물이 정신이 없는 상태라거나 매우 피곤해

있다거나 혹은 그에게 편두통이 일어나려 한다는 것을 암시하려고 했던 것은 아

닌지 후에 가서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잘못 말하기가 작가에 의해서

의미 심장한 것으로 사용됐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물론 그것을 과대 평가할 생각

은 없습니다. 그것은 실제로는 의미 없는 것일 수도 있으며 심리적 우연에 지나

지 않거나 아니면 아주 드문 경우에만 함축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신의 목적에 사용하기 위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권리

는 시인이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못 말하기에 대해서는 언어학자나 정신

의학자들에게서보다는 시인들에게서 배울 것이 더 많다고 해도 놀랄 일이 못 되

는 것입니다.

잘못 말하기의 그러한 예는 '발렌슈타인wallenstein'(쉴러f. schiller3부작 비

. <피콜로미니>는 제2.)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피콜로미니> 1막 제

5). 막스 피콜로미니는 앞선 장면에서 열성적으로 공작 편을 들었고 그러면서

그가 발렌슈타인 공작의 딸을 진지로 데려가는 여행중에 이루어진 평화의 은총

에 대해 열광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와 조정의 사신인 쿠베스텐베르크 공을

몹시 놀라게 해놓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제5장은 이렇게 계속됩니다.

쿠베스텐베르크 어쩌면 좋으냐! 어떻게 이렇게 되어 버렸지?

친구여, 우리는 그를 광기에 사로잡힌 채 가버리도록

내버려두었구려. 그를 다시 불러와야 할텐데,

당장에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어야 하는데.

옥타비오 (깊은 생각에서 깨어나며) 그가 이제 내 눈을 뜨게 해주었소.

나는 나를 기쁘게 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되었소.

쿠베스텐베르크 무엇이라고, 친구?

옥타비오 이 여행은 정말 지긋지긋해!

쿠베스텐베르크 왜? 무슨 일이야?

옥타비오 보시오(나는 즉시 그 불행한 징조를 추적하지 않으면 안되겠어.

눈으로 똑똑히 보아야겠어) 이리 오시오(그를 데리고 가려고 한다).

쿠베스텐베르크 뭔데? 어디로 가는 거야?

옥타비오 (밀면서) 그녀에게로!

쿠베스텐베르크 누구에게로?

옥타비오 (말을 고치면서) 공작한테로. , 갑시다.

옥타비오는 쿠베스텐베르크에게 <그에게>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그녀에게>

라고 말을 실수하는 바람에 적어도 우리에게, 그 젊은 전쟁 영웅이 무엇 때문에

평화에 대해서 그렇게도 열광하는지스스로 매우 명확하게 통찰하고 있음을 엿보

게 해 주었습니다.

오토 랑크o. rank는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이보다 더 인상 깊은 예를 발견했습

니다. 그것은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행운의 연인이 세 개의 상자 중의 하나

를 선택해야만 하는 그 유명한 장면을 읽어 주는 편이 가장 적절한 듯합니다.

프로이트가 '발렌슈타인 공'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시적으로 가장 섬세하게 의

도되고 기술적으로도 빛나게 사용되는 <잘못 말하기>는 작가가 이러한 잘못의

메커니즘과 의미를 잘 알고 있으며 청중들도 그것을 이해하리라는 것을 전제하

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32

)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의 신랑을 제비뽑기로 결정

할 수밖에 없었던 포샤는 지금까지는 우연이 가져다 주는 행운 덕분에 맘에 안

드는 모든 구혼자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진정으로 마음에

두고 있던 바싸니오가 드디어 구혼자 중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그도 다

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뽑기를 잘못하게 될까 봐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녀는 그에게 만약 그렇게 되더라도 그에 대한 그녀의 사랑에 대해서는 안심해도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맹세 때문에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내면의

갈등을 안고 있는 그녀로 하여금 작가는 사랑하는 구혼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

게 하고 있다.

<제발, 당신이 그것을 감행하기 전에

하루 이틀만 더 기다려 보세요. 당신이 뽑기를 잘못하는 날엔

당신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니까 용서하세요.

무엇인가 내게 말하고 있어요(<그렇지만 그것은 사랑은 아니에요>).

나는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바르게 뽑을 수 있도록 제가 가르쳐 드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나는 나의 맹세를 저버리는 것이 되지요.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가만 있으면

당신은 나를 얻지 못하실테지요.

만일 그렇게 되면 차라리 내가 죄를 범할 것을 하고 바라게 될 거예요.

맹세쯤 깨트릴 것을 하고 말이에요. , 그 눈.

나를 내려다보고, 아를 반으로 갈라놓는!

<반은 당신의 것, 다른 반쪽도 당신의 것

내 것이라고 말하려 했는데,> 내 것이라면 그것은 또 당신의 것이니까,

그러므로 모두 당신의 것이랍니다.>

그녀가 그저 작은 소리로 그에게 암시하려고 했던 것, 그러나 그에게는 결코

말해서는 안 되었던 것, 말하자면 뽑기를 하기 전에 이미 자신은 그의 것이라는

, 또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을 작가는 놀랄 만한 심리적 미묘함

으로, 잘못 말하기라는 형식을 통해서 밖으로 튀어나오게 하면서 이러한 기교로

선택의 결과에 대한 사랑하는 사람들의 참을 수 없는 불안감과 그에 따른 청중

들의 거의 비슷한 긴장감을 가라앉힐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이다.

포샤가 잘못 말하기에 들어 있었던 그 두 개의 문장을 마지막에 얼마나 교묘

하게 연결시키는지를, 그들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모순점을 어떻게 제거하고 결

국에 가서 잘못 말한 그 내용을 정당화시키는 지를 주목해 주십시오.

내것이라면 그것은 또 당신의 것이니까

그러므로 모두 장신의 것이랍니다.

의학 분야와는 거리가 먼 사상가 한 사람이 때때로 잘못에 담겨진 의미를 발

견해 내고 그것을 밝혀 내려는 우리의 노력을 선점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은 모두 기지가 넘치는 풍자 작가인 리히텐베르크g. c. lichtenberg(14721799)

를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에 대해서 괴테j. w. von goethe는 이렇게 말한 적

이 있습니다. <그가 농담을 할 때는 그 속에 문제가 항상 감추어져 있습니다.>

실제로 농담을 통해서 문제의 해결이 이루어질 때가 종종 있는 것입니다. 리히

텐베르크는 '유머러스하고도 풍자적인 메모witzige und satirische einfalle' 속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angenommen(만일)>이라고 읽는

대신에 agamemnon(아가멤논)이라고 읽곤 했다. 그만큼 그는 호머의 책을 많이

읽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정말로 잘못 읽기의 이론인 것입니다.(프로

이트는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프로이트 전집 8, 열린책들)에서 리히덴베르크의

풍자시들을 다룬다.)

다음 번에는 잘못에 대한 시인들의 이러한 견해와 우리의 견해가 정말 일치하

는지 검토해 보기로 합시다.

세 번째 강의

실수 행위들(계속)

신사 숙녀 여러분, 지난 번의 강의에서 우리는 실수란 그것으로 인해 방해받

았으나, 원래 의도했던 일과 관련해서 볼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서 바라보아

야 한다는 통찰에 도달했습니다. 또 그것들은 개개의 사례들에서 그 자체의 고

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실수가

어떤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이 좀더 넓은 범주에서 확인된다면 실수가 발생하게

되는 그 상황에 대한 연구보다는 이러한 의미 자체가 더욱 흥미진진한 것이 되

리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의미sinn>라는 개념을 우리가 어떠한 심리적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정의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것은 그것이 쓰여지는 의도와 함께,

리적인 맥락 속에서 차지하는 위상 이외의 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습니다. 우리

의 연구들 중의 많은 부분에서 <의미>라는 단어를 <의도absicht><경향

tendenz>으로 바꾸어 써도 상관이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실수> 속에서 어

떤 의도를 발견해 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거나 실수를

시적으로 미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요?

<잘못 말하기>라는 현상에만 충실하게 머물러서 그러한 종류의 매우 많은 관

찰 사례들을 조망해 보도록 합시다. 그러면 그 의도, 즉 잘못 말하기의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나 있는 그러한 경우들의 전체 범주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엇

보다도 정반대의 말이 의도한 말의 자리를 대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국회의장

이 개회사를 하면서 <국회가 폐회되었음을 선언합니다>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

니다. 그것의 의미는 너무도 또렷합니다. 그의 말 실수의 의미나 그가 그렇게 잘

못 말하게 된 의도는 그가 그 회의를 폐회시켜 버리고 싶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 경우 ,그는 스스로에게만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er sagt es ja selbst>라고 사

람들은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한 말 그 자체로만 판단할 뿐입

니다. 이런 일은 가능하지 않다, 그가 회의를 개회하려 했지 폐회하려 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지 않느냐, 그가 회의를 열려고 했다는 사실은 자기

자신의 의도를 가장 잘 판단할 수 있는 그 자신이 증명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라는 이의로 나를 곤란스럽게 만들지 말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실수를 우선 그 자체로서만 판단하는 데에 동의했던 사실을 망각하는 행위입니

. 실수 때문에 방해받은 의도와 실수의 관계는 추후에 다시 또 연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논리적인 오류를 범하게 되며 그것은 영어

에서 <begging the question>(논점을 처음부터 옳은 것으로 가정해 놓고 교묘히

그 자체를 입증하지 않고 회피하는 행위.)이라고 일컫는 것처럼 논의되고 있는

문제를 요술처럼 사라져 버리게 만들 것입니다.

바로 정확하게 정반대의 말이 잘못 튀어나오지 않은 때에라도 그러한 말 실수

로 말미암아 반대되는 의미가 표출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전임자의 공적

을 치하하고 싶지 않습니다nicht geneigt>에서 <.....하고 싶다geneigt>라는 말은

<......하는 데 적당하다geeignet>라는 단어의 반대어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연설자가 연설해야만 하는 그 상황에 첨예하게 반대되는 그 마음의 공개적이

고도 심적인 고백인 것입니다.

또 다른 경우들에서는 잘못 말하기가 그 의도하는 의미에 단순히 두 번째의

의미를 덧붙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 그 문장은 마치도 여러 개의 문장들의 연결

이나 축약, 함축처럼 들립니다. 그러므로 그 활동적인 여인의 경우에서 <내 남

편은 <>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먹거나 마실 ltn 있대요>라는 말은 마치

<그는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먹고 마실 수 있지요. 그런데 그가 도대체

무엇을 원하겠어요? 그 대신에 내가 그렇게 하면 되지요>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잘 못 말하기는 이와 같이 그러한 축약의 인상을 줍니다. 예를 들어 어떤 해부

학 교수가 자신의 강의가 끝난 후 학생들에게 그들이 자신이 강의한 콧구멍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수백만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도시에서도 겨우 한 손

가락...... 미안합니다.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이니까요>라고 말했을 때 이와

같은 응축된 말은 그것 자체가 또 하나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

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단 한사람이 있을 뿐이다>라는 것입니다.

실수가 그 의미를 스스로 드러내는 이와 같은 경우들과는 반대로 잘못 말하기

가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도 제공하지 않는, 즉 우리의 기대와는 모순되는

그런 경우들도 있습니다. 누군가가 말을 잘못하여 어떤 고유 명사를 뒤바꾸어

버린다든가 또는 사용되지 않는 음절 연결을 만들어 냈을 때, 모든 실수들이 어

떤 함축적인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질문은 방금 언급한 이와 같은 매우 빈번한

현상들로 말미암아 이미 부정되는 쪽으로 결판이 난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런 경우들을 좀더 자세히 연구해 보면 왜곡 현상이 일어난 까닭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렇게 모호한 경우들과 앞서 얘기했던 명확한 경우들

과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말의 건강 상태에 대해 질문을 받은 어떤 신사가 <ja,

das draut...... das dauert vuelleicht noch einenmonat(, 그것은 <계슬......>

니 아직 한 달 정도는 더 계속될 것 같은데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원래

하려고 했던 말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을 받은 그는 <das sei eine <traurige>

geschichte(그것은 정말 슬픈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dauert(계속되다)>

<traurig(슬픈)>라는 두 단어가 결합되어 그와 같은 <draut>라는 이상스러운 단

어를 만들어 냈다고 해명했다고 합니다.(메링어와 마이어의 '잘못 말하기와 잘못

읽기, 심리학적, 언어학적 연구' 참조, 원주.)

어떤 사람이 자기가 불평하고 있었던 어떤 사건에 대해 얘기하면서 말을 계속

하기를 <dann aber sind tatsachen zum <vorschwein> gekommen(그러자 그

일은 <전잡한 일>로 드러나고 말았지요)>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 일을 추잡한 일(글자 그대로는 돼지 같은 짓)로 규정

하려 했다고 대답했습니다. <vorschein(전조)><schweinerei(추잡한 일)>라는

말들이 합쳐져서 그렇게도 이상스러운 <vorschwein>이라는 말이 생겨났던 것입

니다.(메링어와 마이어의 '잘못 말하기와 잘못 읽기, 심리학적, 언어학적 연구'

, 원주.)

잘 모르는 여자를 begleitdigen하려고 했던 젊은 청년의 경우를 다시 기억해

봅시다. 우리는 마음대로 이 단어 합성을 begeitenbeleidigen으로 쪼개었고 그

에 대한 확인을 요구한 적도 없이 이러한 해석을 당연한 것으로 확신한 바 있습

니다. 여러분들은 이 경우들을 통해 잘못 말하기의 이러한 불명확한 경우들도

충돌zusammentreffen, 즉 두 개의 다른 의도의 간섭interferenz으로 설명할 수

있음을 알게 되셨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잘못 말할 때 정반대의 말을 하는 경우

와 같이 한 번은 어느 하나의 의도가 다른 의도를 완전히 대리(대치)하지만 또

다른 한 번은 이를 단지 왜곡시키거나 수정하는 데 그쳐 그 자체로서 다소 의미

있게 보이는 뒤섞임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 이외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잘못 말하기의 비밀을 많이 파악하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인식을 굳건히 지켜 나갈 경우 이제까지 수수께끼처럼 보였던 다른 사례

들도 이해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름의 왜곡 현상이 일어날 때,

거기에는 항상 두 개의 서로 비슷하긴 하지만 상이한 이름의 경합이 문제되는

것이라고 상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름의 왜곡은 잘못 말하기라는 범주 밖에서도

매우 자주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어떤 이름이 좋지 않게 들리도록 하거나 어떤

하찮은 것을 연상시키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 등은 매우 잘 알려진 경멸의 표현

입니다. 교육받은 사람들은 곧 그렇게 하는 것을 포기하는 법을 배우기는 하지

만 그것은 그래도 어쨌거나 쉽게 포기되지는 않는 법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

>로 말했다고는 하지만 고상하지 못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이름 왜곡

namensentstellung의 매우 거칠고 역겨운 경우를 하나 예를 들어 보자면 공화국

시대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poincar(포엥카레)><schweinskarre(슈베인카

)>(<돼지 갈비>라는 뜻이다.)로 바꾸어 불렀던 사례를 언급할 수 있겠습니다.

이와 같이 잘못 말하기의 경우에서도 이름 왜곡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어떤 욕

설의 의도를 상정해 볼 수 있습니다. 우스꽝스럽거나 괴상망측한 효과를 가져오

는 잘못 말하기의 경우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피력하는 데도 비슷한 해명이 떠

오르는 것입니다. <우리 선생님의 행복을 위하여 트림할 것을 제안 합니다.>

기서 식욕을 망가뜨리는 어떤 표상vorstellung을 떠오르게 하는 한마디의 말이

불쑥 튀어 나옴으로써 그 축제 분위기가 예기치 않게 엉망진창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욕설적이고 방어적인 언사의 전형으로, 추측하건데 이

말에는 표면적인 존경심을 정열적으로 거부하고 <이것이 나의 진심이 아니라는

것쯤은 여러분도 잘 아시겠죠. 저자는 정말 웃기는 작자가 아니겠소?>라거나 또

는 그와 비슷한 것을 말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밖에는 달리 어떻게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apropos(첨언)라고 말하려다가 apopos(a<popos(엉덩이)>

합성된 말이라고 볼 수 있다.)라고 발음할 때, 또는 eiweibscheivchen(달걀 흰자

조각)eischeibweibchen(ei+scheib()+weibchen(여자)으로 이루어진 단어.)

로 잘못 말할 때와 같이 어떤 죄없는 단어를 점잖지 못하거나 외설스러운 단어

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에도 이와 똑같은 의도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메링어

와 마이어의 '잘못 말하기와 잘못 읽기, 심리학적, 언어학적 연구'참조, 원주)

농담을 하기 위하여 평범한 단어를 의도적으로 외설스러운 것으로 왜곡시켜

보려는 경향이 많은 사람들에게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재미

있게 들립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우리는 그러한 말을 한 그 사람에게 그가

그것을 <위트>로 의도적으로 그렇게 말한 것인지, 아니면 말이 잘못 나와 그렇

게 되어 버렸을 뿐인지를 물어 보아야만 비로소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 이제 우리는 비교적 별로 힘들이지 않고 실수의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우연적인 현상이 아니고 진지한 정신적 행위라는 것

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자신만의 의미를 갖고 있고 합동 작용(더 적절히 말하자

)두 개의 서로 다른 의도의 길항 작용을 통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 작업의

이러한 첫 번째 결과에 대해 기뻐하기 전에 여러분들은 대답하고 해결되어야 할

수많은 질문들과 의문점들을 나에게 들이밀고 있고, 나 또한 그러한 여러분의

기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을 너무 이른 결론으로 몰아가지는

않겠습니다. 차근차근,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냉정하게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들은 내게 무슨 질문을 하려는 겁니까? 내 주장은 이러한 설명이 잘못

말하기의 모든 경우에 들어맞는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것은 그저 어떤 일부의

사례들에만 적용될 뿐이라고 말한 것일까요? 이러한 견해를 다른 모든 종류의

실수들, 이를 테면 잘못 읽기 , 잘못 쓰기, 잊어버리기, 잘못 잡기, 혹은 잘못 놓

기 등에도 확대시킬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피로나 흥분, 방심, 주의력 분산과

같은 요소들은 실수 행위의 심리적 성격과 관련하여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

? 더 나아가서 두 개의 경합하는 실수의 경향 중 어떤 하나는 언제나 잘 알

수 있는데 다른 하나는 항상 그렇지는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

면 이 후자를 알아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 그것을 알아냈다고 믿는

다면 그것이 그저 그러할 것이다 정도가 아니고 단 하나의 유일하게 옳은 것이

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그 밖에 더 물어 볼 것이 있습니까?

다면, 제가 다시 계속하겠습니다. 우리가 원래 실수에 그렇게 많은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린 것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다만 그것

의 연구를 퉁해 정신분석학에 유용한 어떤 것을 배울 수 있기를 기대했을 따름

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질문을 해 봅시다. 그런 식으로 다른 것을 방해할 수

있는 의도나 경향은 도대체 어떠한 관계가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이 그것입니

. 그러므로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이 나오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의 작업은 또다

시 새로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모든 종류의 실수에 대한 해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나는

그렇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잘못 말하기의 어떤 경우를 연구하더

라도 그러한 해명이 찾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메커니즘을 갖지 않는

잘못 말하기는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은 증명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쩌

면 우리에게는 이론적으로는 상관없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정신분석 입

문하는 범위 정도에서 필요로 하는 그 해명은 잘못 말하기의 극히 적은 사례들

에만 우리의 견해가 적용되는 경우에라도(절대로 그럴 리는 없지만) 여전히 유

효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의 질문, 즉 잘못 말하기에서 얻은 결과를 다른 종류의

실수들에도 확대 적용시킬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나는 미리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여러분들이 잘못 쓰기나 잘못 잡기 등과 같은 사례들

을 조사해 보면 곧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나는 기술적인 이유에서 잘

못 말하기라는 현상 그 자체를 더욱 철저하게 연구한 이후로 이 작업을 연기하

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서술된 잘못 말하기의 메커니즘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순환기

적 장애나 피로흥분, 방심 상태처럼 학자들에 의해서 전면에 강조된 요소들

과 강조된 요소들과 주의력 장애 이론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물음

은 좀더 자세한 대답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요소들을 부정하지 않는

다는 사실은 여러분들도 잘 인지하고 계실 것입니다. 정신분석학이 다른 쪽에서

주장하고 있는 이론들을 반박하는 일은 좀처럼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일반

적으로 단지 새로운 무언가를 추가할 뿐이며 지금까지는 이렇게 간과되었지만

이제 새로이 추가된 것이 본질적으로 중요한 바로 그것일 경우가 간혹 있는 것

입니다. 가벼운 불쾌감이나 순환기적 장애, 기력 탈진 상태 같은 것으로 나타나

는 생리적 소인의 영향은 잘못 말하기가 발생하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인정됩니다. 매일 매일의, 개인적인 경험들로 인해 여러분들은 그것을 충분히 알

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란 얼마나 적은지요! 무엇

보다도 그것은 실수의 필수적인 조건은 아닙니다. 또한 완전히 건강한 상태나

정상적인 상태에서도 말이 잘못 나올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육체적인 요소는,

래 정신적 메커니즘인 잘못 말하기를 완화시키거나 조장하는 역할만을 담당할

뿐입니다. 나는 이러한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예전에 한 비유를 사용했는데,

제 그것을 다시 반복해 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더 좋

은 비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음과 같은 경우를 가정해 보십시오. 나는

어두운 한밤중에 어느 외딴 곳을 가고 있습니다. 거기서 어떤 부랑자의 습격을

받아서 시계와 지갑을 강탈당하고, 그 강도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으므로

가까운 경찰서에서 <외로움einsamkeit과 어두움dunkelheit이 바로 전에 나의 귀

중품을 빼앗아 갔습니다>라고 진술합니다. 그러면 경찰서의 형사는 내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당신은 부당하게도 지극히 기계적인 생각을 신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사건을 차라리 이렇게 표현해 보는 게 어떨까요? <어둠dunkelheit

의 보호 아래에서 아무도 없는 상황einsamkeit을 틈타 어떤 낯선 강도가 귀중품

을 강탈했다>라고 말이죠. 이와 같은 당신의 경우에서 가장 본질적인 일은 우리

가 그 강도를 잡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 강도로부터 빼앗긴 물건을 다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니까요.>

흥분이나 방심, 주의력 장애와 같은 정신생리학적인 요소들은 확실히 설명의

목적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저 상투어일 뿐이며 이상한 칸

막이 같은 것으로서 우리는 그 뒤에서 바라보는 것을 단념할 수가 없는 것입니

. 그런데 여기서 오히려 문제되는 것은, 무엇이 그와 같은 흥분과 특별한 주의

력 분산을 일으켰느냐 하는 물음입니다. 소리의 영향과 어휘의 유사성, 또 어떤

단어에서 생겨나는 관습적인 연상들도 또한 의미 있는 것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들은 의미의 변화가 가능한 길을 가르쳐 줌으로 잘못 말하기를 부추기는 작

용을 합니다. 그러나 어떤 길이 내 앞에 놓여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내가 그 길

을 가리라는 것이 자명하게 결정됩니까? 내가 그 길을 가도록 결정하게 하는 데

는 어떤 동기가 필요합니다. 그 외에도 이 길을 갈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이 필요

합니다. 이와 같이 소리와 어휘 관계도 육체적인 소인들과 마찬가지로 잘못 말

하기가 쉽게 이루어지도록 도와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을 근본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셀 수 없이 많은 대다수의 다른 경우에 나의 말은 내가 사용하고 있

는 말이 소리의 유사성으로 인해 다른 것을 기억나게 한다든가, 그것의 반대말

과 내적으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든가, 또는 습관적인 연상이 그로부터 생겨

나기 쉽다든가 하는 상황으로 인해 방해받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

니다. 철학자 분트w. wundt의 설명에 따르면 육체적인 피로간의 결과로 연상 작

용을 일으키는 경향이 그 밖의 다른 정상적인 언어 의도에 대해 우위를 점할 때

잘못 말하기가 생겨난다고 한 말을 참고할 수 있겠습니다. 많은 경우에서는 육

체적인 요인이, 또 다른 경우에서는 잘못 말하기를 조장하는 연상 작용이란 요

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경험적 증거만 아니라면, 즉 경험이 이 이론에 모순되

지 않는 한에서만 그 같은 설명이 매우 그럴듯하게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특별히 재미있는 것은 여러분들의 다음 질문으로, 서로 함께

간섭 작용을 불러일으키며 나타나는 두 개의 경향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여러분들은 아마 짐작

조차 못하실 것입니다. 그 두개의 경향 중에서 하나의 경향, 즉 방해받는 것은

언제나 의심의 여지가 없이 확실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실수를 범하는 사람

은 그것을 알고 있고 그것을 인정합니다. 의심과 궁금증의 실마리를 주는 것은

다른 경향, 원래의 의도를 방해하는 그것뿐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경우들에서

는 이 다른 경향도 방해받는 경향만큼이나 분명하다는 이야기를 이미 들은 바

있고 그 사실을 아직 잊지 않으셨을 줄 압니다. 그것은 잘못 말하기의 효과를

통해 암시되는데, 우리가 이러한 효과를 인정할 용기를 가지기만 하면 됩니다.

하려고 했던 말과 정반대의 말을 잘못 말하게 된 그 의장은, 그가 그 회의를 개

회하려고 했던 것은 확실합니다만 그에 못지 않게 회의를 끝내버리고 싶었던 것

이 확실합니다. 그렇지만 방해하려는 경향이 원래의 것을 그저 왜곡시키기만 했

을 뿐이고 자기 자신을 표출시키지 않는 다른 경우에는 그러한 왜곡 현상에서

방해하는 경향을 어떻게 알아낼 수 있습니까?

첫 번째의 경우들에서 그것은 매우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말하자면 방해

받은 경향을 확인하는 앞의 경우와 같은 방법으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

은 말한 사람에게서 직접 확인됩니다. 실수한 후 그는 원래 의도했던 발음을 즉

시 그대로 발음할 수 있습니다. <das <draut>....., nein, das dauert vielleicht

noch einen monat.> 왜곡하려는 경향은 곧바로 말한 사람에 의해 발음될 수 있

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처음에

<draut>라고 발음했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그는 <나는 <그것은 참 슬

traurige 일이에요>라고 말할 참이었지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vorschwein>이라고 잘못 말한 경우에도 그는 여러분에게 <그것은 추잡한 일

schweinerei이지요>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곧 누그러뜨리고는 다른 말로 바꾸어

버렸노라고 확인해 줄 것입니다. 왜곡하려고 하는 경향을 확인하는 것은 이때

왜곡된 경향만큼이나 확실하게 성공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나나 혹은 나의 다른

추종자들이 제시하고 해명하지 않은 그러한 사례들만을 내가 여기서 선택하고

있는 것은 아무런 의도 없이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

의 경우에 해답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모두 어떤 개입이 필요합니다. 말한 사람

에게 왜 그가 그렇게 잘못 말하게 되었는지, 잘못 말한 그것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 줄 수 있는지 등을 물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그것을 해명해 주려고도 하지 않고 잘못을 그냥 지나쳐 갈 것입니다. 질문을 받

은 그는 자기에게 만 처음 떠오르는 생각을 가지고 그 설명을 해줄 것입니다.

, 이제 이러한 작은 개입과 그것의 성공을 보십시오. 그것은 이미 정신분석입

니다. 그것은 우리가 계속해서 다루려고 하는 모든 정신분석적인 연구의 전형이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신분석이 여러분들 앞에 이렇게 처음 떠오른 바로 그 순간에 그에 대한 저

항감이 여러분들에게서 머리를 쳐들고 있다고 추측한다면 내가 너무 의심이 지

나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들은 이에게, 잘못 말한 그 사람에게서

나온 그 정보라는 것이 완전한 증거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항의를 할 생각

은 없습니까? 그는 물론 그 요구를 들어주고 잘못 말한 것을 설명하려는 노력을

했을 것이라고 여러분은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에게 맨 처음 떠오른 생

각이 그러한 해명으로서 쓸모 있다고 생각했을 때 그 생각을 말해 주는 것이지

만 잘못 말하기가 정말로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고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니지 않

느냐, 그리고 물론 그 생각이 옳은 것일 수도 있지만 마찬가지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며, 그 사람에게는 맨 처음에 떠오른 것만큼이나 그럴듯하게 생

각되고 어쩌면 더 잘 들어맞을 수도 있는 다른 생각이 떠오를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근본적으로 심리적 사실에 대하여 이처럼 보잘것없는 존경심을 가

지고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누군가가 어떤 물질을 화학적으로 분

석을 해서 그것의 어떤 성분이 몇 밀리그램이 나가는지 확인했다고 생각해 봅시

. 사람들은 이러한 중량을 통해서 어떤 특별한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런데 어떤 화학자가 이렇게 분리된 물질은 처음과 다른 중량을 가지

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의를 제기하면서 이 결론을 부정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모든 사람이 그것은 바로 이만큼의 중량이 나가며 다른

어떤 결과도 나올 수 없으리라는 사실 앞에 굴복하면서 그 토대 위에 자신들의

다른 결론을 확신을 갖고 구축해 나갈 것입니다. 사람들은 유독, 모종의 질문을

받은 사람에게 어떠한 생각이 떠올랐다는 심리적 사실이 문제가 될 때는, 그것

을 부정하면서 그에게 또다른 생각이 떠올랐을 수도 있다고 말을 합니다. 여러

분들은 아마도 심리적 자유라는 환상에 매달려 있으면서 그것을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문제에서 내가 여러분과 첨예하게 대립하

고 있다는 사실이 있다는 유감입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항의를 멈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곳에서 다른

이의를 제기하기 위한 것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은 또 다음과 같이 계속 반론을

제기할 것입니다. <분석받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문제의 해답을 스스로 이끌어

내게 하는 것이 정신분석만의 특별한 치료법이라는 것은 이해합니다. 다른 예를

한 번 선택해 봅시다. 은사의 안녕을 위해서 <트림aufstoben>을 하자고 모인 사

람들에게 제안을 했던 그 축사자의 경우, 선생님께서는 그 사람의 방해하려는

의도를 존경심의 표현에 반대되는 조롱하고자 하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

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생님의 입장에서 본 단순한 해석에 지나지 않으

며 잘못 말하기의 범위 밖에aufberhalb있는 순전히 관찰에 의한 것입니다. 만일

선생님께서 잘못 말한 그 사람에게 직접 물어 보신다면 그는 자기에게 모욕의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해 주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격렬하

게 부정할지도 모릅니다. 선생님께서는 어째서 이러한 분명한 이의에 대하여 선

생님의 해석을 철회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 이번에 여러분은 아주 강력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

는 그 축사자를 이렇게 상상해 봅니다. 그는 아마도 축하를 받는 그 선생님의

조수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벌써 전임 강사로서 앞길이 매우 창창한 젊은 사

람일 것입니다.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내도록 하는것에 대해 반하는 어떤

감정을 정말 느끼지 못했느냐고 내가 그에게 압박하듯 물어 보았다고 합시다.

나는 매우 집요하게 물어 봅니다. 그러면 그는 참지 못하고 나에게 화를 버럭

낼 것입니다. <제발 그 끈덕지게 물어 보는 짓 좀 그만 둘 수 없습니까? 매우

기분나쁜데요. 당신이 그렇게 의심을 하면 내 전체 경력이 망가져 버릴지도 모

릅니다. 나는 단순히 그 말이 나온 문장에서 그 전에 벌써 두 번이나 auf라는 발

음을 했기 때문에 anstoben이라고 말할 것을 aufstoben이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메링어가 지적한 후발음의 현상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고 더 이상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습니다. 제 말 이해하시겠어요? 이제 그만하세요.> , 이것은

정말 놀라운 반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단히 격렬한 부정입니다. 그 젊은이에

게 어떻게 달리 해볼 방법이 없군요. 그러나 나는 자신의 실수에는 어떤 뜻도

담겨 있지 않다고 하는 것에 그가 매우 강한 개인적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순수한 이론적인 연구에 그가 그토록 거칠게 반응을 하는 것은

이상하다고 여러분도 생각하시겠지요. 그래도 여러분들은 그 자신이 무엇을 말

하려고 했는지, 또 무엇은 말하려고 하지 않았는지 확실히 알고 있었으리라고

짐작할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것은 여전히 의문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나를 송 안에 넣었다고 생각하시겠지요. <그것이 선생님의 기

술이로군요.> 여러분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잘못 말한 그 삶이 선생

님의 생각에 들어맞는 것을 말하면 선생님은 그것을 마지막의 궁극적인 권위로

인정해 버리십니다. <그가 직접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가 말한 것이 선생님의 구도에 들어맞지 않으면 선생님은 갑자기 그것

은 틀렸다. 그것은 믿을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여러분이 하는 말은 어쨌든 맞는 말이긴 합니다. 나는 그러나 여러분들에게

그처럼 터무니없는 비슷한 경우를 또 하나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만일 어떤 피

의자가 판사 앞에서 자신의 범죄 행위를 인정하면 판사는 그의 고백을 믿습니

. 그러나 그가 그것을 부정하면 판사는 그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만약 상황이

달리 전개된다면, 사법 제도는 존속될 수 없습니다. 때때로 사법 제도는 과실을

범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은 이 제도가 그대로 존속되어야

할 정당성이 있다고 인정할 것입니다.

<아니, 선생님이 그렇다면 재판관이십니까? 그리고 잘못 말한 그 사람은 선생

님 앞에 선 피의자입니까? 잘못 말하기가 무슨 죄라도 된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러나 이 비교를 애써 부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겉보기에는 별로 문

제도 되지 않는 이러한 사소한 실수의 문제를 조금만 깊이 파들어가면 이렇게

심각한 차이점에 도달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았을 것입니다.

음에는 이 차이점들을 어떻게 비교를 근거로 잠정적인 타협책을 권하고 싶습니

. 피분석자가 스스로 그렇게 인정했을 경우 실수의 의미에 대하여 어떠한 의

심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와 더불어 내가 여

러분들에게 고백하고 싶은 점은 피분석자가 그것을 거부할 경우 추측되는 의미

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피분석자가 우리에게 어떠한 정보도 제공해 줄 수 없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사법제도의 경우에서와 같이 간접 증거에 의존하게 되는데,

그 간접 증거는 어떤 때는 그 결정이 거의 맞는 듯이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떤 때

는 잘 들어맞지 않는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법정에서는 현실적인 이유에서 간

접 증거에 의거해 유죄라고 판결할 수밖에 없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강

제로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간접 증거를 사용하지 말

아야 할 이유 또한 없습니다. 학문이란 엄정하게 입증된 명제들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오류이며 또 그렇게 요구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이러한

요구는 자신의 종교적인 교리를 다른 것으로 보충하려는(그것이 과학적인 것이

라 해도) 욕구를 가진 권위 편집증적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학은

그 자체의 교의 속에 단지 아주 적은 양의 명징한 정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것들은 일정한 정도까지의 확률로 뒷받침된 주장들일 뿐입니다. 확실성에

대한 이러한 근사치만으로도 만족하고 마지막 확증의 결여에도 불구하고 건설적

인 작업을 계속해 나간다면 그것이야말로 과학적 사고 방식의 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피분석자의 언명이 실수 행위의 의리를 스스로 밝혀 내지 못할 경

, 우리는 우리 해석의 근거, 즉 우리 논증의 간접 증거를 어디서 찾아내야 합

니까?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예를 들어 실수로 이름

을 왜곡해서 부르는 경우는 고의적으로 이름을 곡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똑같

은 욕설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주장할 때, 실수 행위를 제외한 현상들과의 유

추에 의해서 그 증거를 찾아내는 것이 가능합니다. , 그 밖의 다른 단서들은

실수가 일어나는 심리적 상황에서 얻어지거나, 실수를 저지르는 그 사람의 성격

과 실수를 하기 전에 당사자가 받은 인상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에서

얻어지는데, 아마도 그는 자신이 받은 인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반

응했을 것입니다. 진행되는 방법은 대체로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인 기

본 원칙에 따라서 실수에 대한 해석을 위한 하나의 제안일 따름인데, 그리고나

서는 심리적 상황을 조사해서 그에 대해 확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

리는 다가올 사건을 기다려야만 할 때도 있는데, 그것은 실수를 통해서 방금 예

고된 것으로서 우리의 추측을 유효한 것으로 만들어 주게 됩니다.

여기에도 몇몇 개의 좋은 예들이 있긴 하지만 내가 잘못 말하기의 영역으로만

문제를 국한시킬 경우 나는 여러분들에게 이에 대한 증거들을 쉽게 보여 드릴

수가 없습니다. 숙녀를 begleitdigen하려고 했던 그 젊은 청년은 틀림없이 수줍

은 성격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 자신의 남편이 그녀sie가 원하는 것은 무엇

이든지 먹거나 마셔도 된다는 그 여인은, 내가 보기에는 집안에서 모든 것을 자

기 마음대로 이끌어 가는 괄괄한 부인들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다음과 같은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콘코르디아>(빈의 언론인 협회.)

한 총회에서 어떤 젊은 회원이 매우 격렬한 반대 의견을 내세우고 있었는데 그

는 그의 연설 도중에 협회의 지휘부를

<<vorschub>mitglieder>(aussvhubmitglieder라고 했어야 한다. 여기서는 <위원

여러분>이라는 뜻임.)라고 지칭했습니다. 그 단어는 <vor>stand(의장)라는 단어

aus<schu>(위원회)라는 단어가 합쳐진 말인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반대 의

견을 말하는 그의 마음속에 그것을 방해하는 어떤 경향이 작용을 한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vorschub(선불금)와 관계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습

니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의 증인에게서 그가 항상 돈 문제로 쪼들리고 있었다

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방해하는 의지를 실제로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반대 의견을 말하는 것도 좀 적당히 하는

게 좋겠어. 저 사람들은 네가 바라는 선불금의 지불을 승인하게 될 바로 그 사

람들이야.>

다른 형태의 실수들을 포괄하는 광대한 영역으로까지 논의의 범위를 넓히면

이러한 간접 증거가 드러나는 수많은 사례들을 여러분들에게 제시해 보일 수 있

습니다.

어떤 사람이 원래는 자기에게 매우 친숙한 고유 명사를 잊어버릴 때, 혹은 아

무리 애를 써도 그것을 아주 힘들게만 기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가 이 이름

을 갖고 있는 그것에 대해서 어떤 거부감을 느끼고 있어서 그것을 기꺼이 기억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라고 가정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실수가 드러나 있는

다음의 심리 상황을 관찰해 보십시오.

어떤 y라는 남자가 어느 여자에게 정신 없이 반해 있었는데 결국 그 여자와

관계를 맺는 데 성공하지 못하고 말았다. 바로 그 후에 그 여자는 x라는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yx를 오랫동안 알고 있었고 심지어 그와 사업상으로 거

래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그의 이름을 잊어버리고는 x와 연락을 취

해야 할 때는 몇 번이고 그의 이름을 다른 사람에게 물어 보곤 했다.(c. g.

jung의 저술에서 인용한 것이다, 원주. 융의 '조발성 치매증의 심리학에 대하여

uber die psychologie der dementia praecox'(1907) 참조.)

y는 틀림없이 자신보다 행복한 라이벌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고 싶어하지 않았

던 것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해서는 안 돼.>

또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여자가 의사에게 서로가 잘 알고 있는 어

떤 사람의 이름을 물어 보면서 그녀의 결혼하기 전의 성을 대는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결혼하면서 갖게 된 성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녀가

고백하기를, 자기는 이 결혼에 대해 매우 반대했으며 이 여자 친구의 남편을 참

을 수 없이 싫어했다는 것이었습니다.>(브릴의 글에서 인용, 원주.)

이러한 이름 망각에 관해서는 다른 관점에서 더 많은 것을 얘기할 수 있지만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주로 그러한 망각이 일어나게 되는 심리 상

황입니다.

어떤 일을 하기로 했던 계획을 잊어버리는 것은 일반적으로 그 계획을 실행하

지 못하게 하려는 그와 반대되는 어떤 생각의 흐름 때문으로 그 원인을 돌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정신분석을 하고 있는 우리들만의 생각이 아니라 일상 생활

속에서는 모두 그것을 지지하고 있으면서도 처음에 이론적으로는 그것을 거부하

는 많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견해이기도 합니다. 피후견인의 부탁을 잊고 나서

자신의 피후견인에게 사과하는 후견인의 말은 통하지 않습니다. 피후견인은 즉

시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는 그런 부탁 따위는 아예 안중에도 없었어.

가 그렇게 약속하기는 했지만 그는 처음부터 그것을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던 거

.> 어떤 관계에서는 이처럼 약속을 잊어버리는 행위는 일상 생활 속에서 금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실수 행위에 대해서 일반인들이 지니고 있는 생각과 정신

분석학 쪽 견해와 차이는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면서 손님

을 맞는 한 주부를 상상해 보십시오. <어머나, 오늘 오기로 하셨던가요? 오늘

오시라고 초대한 사실을 그만 깜박 잊었군요.> 아니면 지난번에 했던 약속을 지

키는 것을 완전히 잊었다고 애인에게 고백해야만 하는 젊은이의 경우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사실을 고백하기보다는 그 당시에 약속 장소에 가지 못하게 하

고 그에 대한 기별을 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든 가장 있을 법하지 않은 사건

을 머릿속에서 즉흥적으로 생각해 낼 것입니다. 군사적인 직무에서는 무언가를

잊어버렸다는 변명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고 처벌을 피할 수 있도록 막아 주지

도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으며 그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생각합니

. 어떤 실수는 매우 깊은 의미를 갖고 있으며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

지에 대해서 우리 모두는 처음으로 여기에서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이러한 통

찰을 다른 종류의 실수도 확대 적용시키고 그것에 완전히 동조하는 데 대해서

사람들은 왜 끝까지 일관적이지 못한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물론 하나의

대답이 있습니다.

어떤 계획을 잊어버리는 것의 의미가 이렇게 일반인들에게도 자명하다면 작가

들이 이러한 실수를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놀랄 일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버나드 쇼b. show'시저와 클레오

파트라'라는 희곡을 보거나 읽은 사람은 마지막의 시저가 떠나가는 장면에서 무

언가를 하려고 했는데 잊어버렸다는 생각에 줄기차게 괴롭힘을 당하는 시저의

모습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결국 밝혀지는데, 다름 아니

라 클레오파트라와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이

작은 사건의 의미는 위대한 시저가 갖고 있지 않았고 또 그것을 가지려고 노력

하지도 않았던 어떤 우월감을 그에게 부여하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

은 역사적인 문헌들에서 시저가 암살 당했을 때 그녀는 어린 세자리온과 함께

거기에 살고 있었다는 것, 또 시저가 암살당한 후 그녀는 도망치듯 그 도시를

빠져 나갔다는 것 등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계획을 잊어버리는 경우는 일반적으로 이처럼 자명해서 실수의 의미를 찾아내

기 위해 심리적 상황에서 간접 증거를 이끌어 내려는 우리의 의도에 별다를 도

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애매하고 불투명한 실수 행위

라고 볼 수 있는 잃어버리기와 잘못 놓기의 경우에 관심을 돌려 봅시다. 당사자

에게 그토록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사건인 잃어버리기에는 우리 자신이 어떤 의

도를 자기고 그것에 관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틀림없이 믿을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이 가능한 관찰 사례들이 엄청

나게 많이 있습니다. 어떤 젊은 청년이 자기에게 매우 소중했던 크레용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일이 있기 바로 며칠 전에 자신의 처남에게서 한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그 편지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고 있었습니다. <

는 얼마동안 너의 경박성과 게으름을 도와 줄 기분도 나지 않고 또 그럴 시간도

없다.>(다트너b. dattner의 글에서 인용, 원주.) 그 크레용는 사실은 바로 이 처

남의 선물이었습니다. 이러한 관련성이 없다면 물론 우리도 이 분실 행위에는

그 물건을 없애 버리고 싶은 의도가 작용했다고 주장할 수 없을 것입이다. 이와

비슷한 수없이 많은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 물건을 준 사람과 적대적이 되어서

그를 더 이상 마음에 아 들 때, 다른 더 좋은 것으로 대체하기 위해 그것에 대

한 어떤 구실을 만들고 싶을 때, 우리는 그 물건을 잃어버리곤 하는 것입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그와 같은 의도가 빠뜨리거나 깨뜨리기, 떨어뜨려 부수기 등

의 행위에 작용합니다. 어떤 초등학교 아동이 바로 자기의 생일 전날에 자기가

쓰던 물건 , 예를 들어 자기의 책가방이나 주머니 시계를 잃어버리거나 망가뜨

리거나 깨뜨릴 때 그것을 단순히 우연으로 돌릴 수 있겠습니까?

자기 스스로 물건을 어디에 놔두고는 그것을 찾을 수 없었던 고통을 자주 느

꼈던 사람들은 잘못 놓기의 의도에 대해서 믿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어떤 물건

을 잘못 놓게 된 주변 상황을 보면 그 물건을 잠시 동안이나마, 혹은 오랫동안

없애 버리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그러한 경우가 드물지 않게 있

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가장 적절한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어떤 젊은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결혼 생활을 하던 중 몇

년 전에 어떤 오해가 있었습니다. 나는 아내의 탁월한 품성을 인정하고 있었지

만 그럼에도 나의 아내가 너무 냉정하다고 느꼈습니다. 우리는 부드러운 애정

표현이 없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는 산책에서 돌아오면서

내게 틀림없이 흥미있는 책이 될 것이라면서 그녀가 산 책 하나를 내밀었습니

. 아는 그녀의 이러한 관심의 표시에 고마워하면서 그것을 꼭 읽겠노라고 약

속을 하고 어디에 잘 두었는데 나중에 그것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는 때때로 그렇게 사라져 버린 책을 기억해 내고는 그것을 찾아보려고 애를 썼

지만 번번히 허사로 끝났고 그러는 사이에 몇 달이 흘렀습니다. 약 반 년 후에

우리와 떨어져서 살고 계시던 저의 어머니께서 병환이 나셨습니다. 나의 아내는

시어머니를 보살펴 드리기 위하여 그리로 갔습니다. 환자의 상태는 매우 심각해

져 갔고 그것은 나의 아내에게는 그녀의 가장 은 면을 보여 줄 수 있는 기회

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그녀가 한 일에 대하여 감동을 받고 그녀에

게 고마운 마음을 느끼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나는 책상에 다가가서 특별한

의도도 없이 마치 무슨 몽유병자처럼 확신을 가지고 그 중의 어느 서랍을 열었

는데, 거기 바로 맨 위에 그렇게도 오랫동안 찾아내려고 했던 그 잃어버렸던 책

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대상에 대한 동기가 사라져 버림과 동시에 그 대상의 잘못 놓여진 상태

도 끝나게 된 것입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와 비슷한 예를 들라면 나는 끝도 없이 그렇게 할 수 있

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나의 '일상 생활의

정신병리학'에 실수의 연구에 관한 대단히 많은 해설적 예증들이 나와 있습니

.(그 외에도 매더(프랑스), 브릴(영국), 존스(영국), 슈테르케(네덜란드)등이 수

집한 예들도 참조하라, 원주. 매더a. maeder'일상 생활의 정신병리학에 대한

기고contributions a la psychopathologie de la vie quotidienne'(1906), '일상 생

활의 정신병리학에 대한 새로운 기고nouvelles contributions a la

psychopathologie de la vie quotidienne'(1908), 브릴의 '정신분석:그 이론과 실제

적 적용', 존스의 '일상 생활의 정신병리학', 슈테르케j. starcke'일상 생활에

대하여aus dem alltagsleben'(1916) 참조.) 이 모든 예증들은 한결같이 같은 사실

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즉 이 책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실수들은 모두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개연성 있는 사실로 받아들이도록 하고, 그 주변 상황들에서

실수의 의미를 어떻게 알아내고 확인할 수 있을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

. 오늘은 짧게 간추려서 말하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현상의 연구에서

정신분석을 준비하는 데 유익한 내용을 끌어내는 것으로 우리 목표를 한정시키

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기서 단지 두 가지 종류의 문제, 즉 반복적이고

결합된 실수 행위와 나중에 나타나는 사건을 통해서 우리 해석의 타당성을 검증

할 수 있는 문제만을 자세하게 다룰 예정입니다.(그 외에도 매더(프랑스), 브릴

(영국), 존스(영국), 슈테르케(네덜란드)등이 수집한 예들도 참조하라, 원주. 매더

a. maeder'일상 생활의 정신병리학에 대한 기고contributions a la

psychopathologie de la vie quotidienne'(1906), '일상 생활의 정신병리학에 대한

새로운 기고nouvelles contributions a la psychopathologie de la vie

quotidienne'(1908), 브릴의 '정신분석:그 이론과 실제적 적용', 존스의 '일상 생활

의 정신병리학', 슈테르케j. starcke'일상 생활에 대하여aus dem

alltagsleben'(1916) 참조.)

반복적이고 복합적인 실수 행위는 확실히 실수의 종류들 중에서 가장 찬란한

꽃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실수 행위들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증명

하는 것만이 문제였다고 한다면 우리는 처음부터 그것에만 우리의 노력을 한정

시켰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실수에서는 아무리 둔한 사람일지라도 그 의

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수 행위의 반복은 어떤 집요함을 드

러내 주는 것으로서 그 집요함이란 우연적인 일에는 결코 수반되는 법이 없으나

의도에는 잘 어울리는 것입니다. 개별적인 여러 개의 실수들이 차례차례 이어지

고 나서야 드디어 실수에서 무엇이 중요한 것이고 본질적인 것인가를 알게 됩니

. 실수에 이용되는 그 형식이나 수단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 스스로

가 이용하는, 또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도달되어야만 하는 그 의도가 문제인 것입

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반복된 망각의 한 예를 설명해 보려 합니다.

스가 보고하기를 그는 언젠가 자신도 알 수 없는 어떤 동기에서 편지 한 통을

며칠 동안이나 책상 위에 놓아두었다고 합니다. 드디어 그는 그 편지를 부치기

로 작정을 했는데 얼마 후 <수취인 불명>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주소를 쓰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겉봉에 주소를 쓰고 나서 우체

국으로 가져갔으나 이번에는 우표를 붙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 편지를

보내는 데 대한 거부감을 스스로에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경우에서는 착각이라는 실수가 잘못 놓기라는 실수와 결합됩니다.

느 부인이 매우 유명한 예술가인 자기 여동생의 남편과 로마로 여행을 떠났습니

. 그 방문객들은 로마에 살고 있는 독일인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고대

의 오래된 금메달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 부인은 여동생 남편이 그 아름다운

물건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는 것을 알고 몹시 마음이 언짢았습니다. 여동생

이 도착했으므로 그녀와 헤어져서 자신의 집에 도착해 짐을 풀었을 때 그녀는

그 메달을(어떻게 그리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함께 가져온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녀는 그 즉시 편지를 써서 바로 그 다음날에 그 메달을 로마로 다시 부쳐 주

겠노라고 통지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이 되자 그 메달은 감쪽같이 사라져서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고 결구 부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부인은 자

신의 <부주의>가 무엇을 뜻하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말하자면

그것을 자신이 소유하고자 했던 것입니다.(라이틀러r. reitler가 보고한 내용이다,

원주)

나는 이전에도 한번 망각과 착오가 결합된 예를 들어 여러분들께 보고 드린

바 있습니다. , 어떤 사람이 처음에는 약속 그 자체를 잊어버리고 그 다음에는

결단코 잊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음에도 약속한 시감과는 다른 시간에 약속 장소

에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내 친구 중 한 사람이 자기가 겪은 이와 아주 유사한

경우를 직접 얘기해 주었습니다. 그 친구는 과학적인 관심 이외에도 문학적인

데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몇 년전에 어떤 문학 단체

위원회의 위원으로 위촉된 적이 있었네. 나는 그 학회가 언젠가는 나의 희곡을

공연하는 문제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어 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그다지 큰

관심은 없었지만 매주 금요일마다 열리는 그 위원회의 회의에 꼬박꼬박 참석을

했네. 그런데 바로 몇 달 전에 나는 f.시의 극장에서 그 희곡을 공연하게 되리라

는 확답을 받게 되었지. 그 뒤부터 나는 그 위원회의 회의를 매번 <잊어버리

> 말았네. 내가 그런데 이러한 문제에 대한 자네의 글을 읽고 나니 나의 망각

에 대해서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네. 내가 이 사람들을 더 이상 필요

로 하지 않게 되자 이제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 더 뻔뻔스러운

일이라고 다짐을 했지. 나는 이 계획을 계속적으로 기억해 내고 드디어는 실행

에 옮겨서 그 회의실 문 앞에 섰지.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문은 굳게

잠겨 있었네. 회의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었다네. 나는 말하자면 날짜를 잘못

알고 있었는데, 그 날은 토요일이었다네!>

이와 비슷한 예들을 계속 수집해 본다면 아주 재미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

는 계속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우리 해석의 타당성을 확인 받기 위해서는 다가

올 미래를 기다려야만 하는 그러한 경우들이 있음을 여러분들이 주목해 주기 바

랍니다.

이러한 경우들의 주요 조건들은 잘 알다시피 현재의 심리적 상황이 우리에게

는 미지의 것이거나 또는 우리의 조사가 미칠 수 없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때

우리의 해석은 단지 추측으로서의 가치만을 지니게 되므로 우리 자신도 거기에

그다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그 당시의 우리 해

석이 이미 얼마나 정당한 것이었는지를 보여 주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나는 언젠가 갓 결혼한 신혼 부부의 집에 손님으로 초대된 적이 있었는데,

젊은 부인이 웃으면서 자신의 최근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신혼 여행에서 돌아온 그 다음날 남편이 일하러 간 사이에 이전에 늘 그러곤 했

던 것처럼 쇼핑을 가기 위해 결혼하지 않은 자신의 여동생을 불러냈습니다.

을 걷던 중 갑자기 그녀에게는 맞은편 길을 걸어가는 어떤 신사의 모습이 눈에

띄었고 그녀는 여동생을 쿡 찌르면서 <저기 봐, 저기 그 l씨가 가고 있어>라고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녀는 이 신사가 몇 주 전부터 자신의 남편이 되었다는

사실을 깜박 잊었던 것었습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전율을 느꼈지만

감히 거기에 대해 추론해 볼 용기는 나지 않았습니다. 몇 년 후에 이 결혼이 불

행하게 끝났다는 사실을 듣고서야 비로소 그 때 들었던 이 작은 이야기가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매더는 결혼식 바로 전날에 신부 드레스를 가봉하는 것을 깜박 잊어서 늦은

밤이 되어서야 재봉사에게 가는 바람에 재봉사를 당황케 했던 어떤 부인의 이야

기를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부인이 바로 얼마 후에 그녀의 남편과 이혼했

다는 사실과 이 망각 행위를 하나의 연관성 속에 넣고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또 실제로 이혼에 이르기 몇 년 전부터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는 서류에 빈

번하게 결혼하기 전의 처녀 때 성으로 서명을 했던, 지금은 작 남편과 이혼을

한 상태인 어떤 부인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또 신혼 여행 도중에 결혼 반

지를 잃어버린 한 부인을 알고 있는데, 그 결혼이 후에 전개된 모습은 이 우연

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좀더 좋은 결과로 끝난

또 하나의 극명한 예도 있습니다. 결혼식 시간을 잊어버리고 교회로 가는 대신

에 실험실로 가버림으로써 자신의 결혼을 성사시키지 못한 어떤 유명한 독일의

화학자에 대한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그는 매우 영리했기 때문에 결혼을 다만

시도로서 그치게 하였고 그렇게 해서 고령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들에서 여러분들에서 여러분들은 어쩌면 실수 행위가 옛날 사람들

이 말하는 어떤 전조나 징조 대신에 나타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전조의 어떤 부분들은 실수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발이 걸려 뒤뚱거리거나 넘어지는 따위

가 그것입니다. 그 외의 전조의 다른 부분들은 어쨌거나 주관적인 행위의 성격

이 아닌 객관적인 사건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한 사건의 경우에

그것이 이쪽에 속하는지 아니면 다른 쪽에 속하는지를 결정한다는 것이 때때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여러분들은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행위는 종종 수

동적인 체험의 형태로 변장하고 나타나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중 지나온 긴 인생 경험을 돌이켜 볼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들

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작은 실수들을 전조로 해석하고 실수들을 그 속에 숨겨

져 있는 의도의 징조로 평가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력만 갖고 있었더라면, 많은

실망들과 고통스러운 경악들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할 것입

니다. 사람들은 그러나 대개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런 태도는 과학을

옆으로 우회해서 미신적인 생각을 품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전조들이 다 들어맞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우리의 이

론을 통해 이해해야 할 것은, 모든 내용들이 그렇게 다 들어맞을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강의

실수 행위들(결론)

신사 숙녀 여러분, 이제 실수들이 나름대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지금까지 연구한 결과로 평가하고 또 우리가 다음에 연구 할 작업의 토대로 받

아들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또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사실 우리의 목표를 달

성하기 위해 주장 같은 것을 내세울 필요는 없지만) 모든 개개의 실수들에 의미

가 있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습니다. 나 자신은 비록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의미를 실수의 여러 가지 형태들에서

비교적 빈번하게 증명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의미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여러 가지 형태의 실수들은 무엇보다도 아주 다양한 관계를 보여 줍

니다. 잘못 말하기나 잘못 쓰기 등에서는 순전히 생리적인 이유를 갖는 실수들

도 자주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망각에 근거를 두고 있는 종류들(이름이나

계획을 잊어버리기, 잘못 놓아두기 같은 것들)은 그러한 원인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전혀 의도가 없는 듯이 보이는 그러한 분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오류들은 그러나 극히 일부분만이 우

리들의 관찰 대상에 포함됩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실수들이란 심리적인 행위이

며 두 개의 다른 의도들 사이의 간섭을 통해서 발생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정신분석학의 최초의 결과입니다. 그러한 간섭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

과 그에 따라 실수와 같은 현상들이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

심리학은 이제까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심리적 현상계의 영역을

현저하게 넓게 확장시켰고 이전에는 심리학에 포함되지 않았던 현상들까지도 심

리학에 끌어들인 것입니다.

실수들이란 <실리적 행위들psychische akte>이라고 하는 주장에 잠시만 더

머물러 봅시다. 그것은 실수가 의미를 갖는다고 하는 우리의 그 전 언명보다 더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

려 더욱 불확실하고 애매모호해졌을 뿐입니다. 인간의 정신 활동에서 관찰할 수

있는 모든 문제되는 것은 개개의 정신적 현상이 직접적으로 육체적이고 유기체

적이며, 또 물질적인 작용에서 출발하는가 하는 점이고 어떤 경우에 그 연구가

심리학에 해당되지 않는가 입니다. 혹은 그것이 일단은 다른 정신적 과정들에서

비롯하지만, 사실 그 배후에 모종의 장소에서 일련의 유기체적인 작용들이 촉발

되는 것이 아닌가의 여부입니다. 마지막의 사태와 관련해서 우리가 잘 알고 있

는 어떤 현상을 정신적인 과정으로 지칭한다면 우리의 언명을 다음과 같은 형태

로 표현하는 것이 더욱 유익할 듯합니다. , <그 현상은 의미 있는 것이다.

미를 갖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의미>라고 하는 단어를 우리는 뜻,

, 경향, 그리고 심적인 관련성 속에서 그 현상이 차지하는 어떤 위치 등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실수와 매우 비슷하게 보이지만 그러나 실수라는 이름에는 전혀 들어맞지 않

는 다른 현상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우연 행위zufallshandlung>

또는 <증상 행위symptomhandlung>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실수 행위와 똑같이

그것들은 <무동기>, <무의미>, <중요치 않음>의 특성들을 갖고 있지만 그 외

에도 <불필요>라는 특성을 한결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들

이 실수와 구별되는 것은 그 행위와 충돌을 일으키고 그로 인해서 방해를 받는

2의 의도가 그것에는 없다는 점입니다. 그것들은 또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정

서적 운동의 표현으로 분류하는 몸짓들과 운동들을 아무런 장애 없이 넘나듭니

. 이러한 우연적 행위들에는 언뜻 보기에 아무런 목표도 없어 보이는 행동들,

마치도 놀면서 하는 듯한 행동이나 옷을 입을 때의 행위들, 우리 몸의 부분들이

서로 닿거나 우리 손에 미치는 물건들을 만지작거리는 행동들, 또는 그러한 행

동을 중단하는 행위, 나아가서는 우리가 흥얼거리는 멜로디 등 그 모든 것들이

속합니다. 나는 여러분들 앞에서 이러한 모든 현상들이 의미 있는 것이며 실수

행위들과 마찬가지 방법으로 연구해 보면 해석이 가능한 것이고, 더욱 중요한

다른 정신적 과정들의 아주 작은 징조이며 또한 완전히 유효한 심리적 행위라는

주장을 하려 합니다. 그러나 나는 정신적 현상들의 영역이 이렇게 새롭게 확장

되고 있는 문제에 오래 머무르고 싶은 생각은 없고 실수들의 문제에 다시 되돌

아가려 하는데, 바로 그것에서부터 정신분석에서 훨씬 더 중요한 문제를 매우

분명하게 풀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우연적 행위와 증상 행위에 대해서는 '일상

생활의 정신병리학'을 참조하라.)

실수에 있어서 우리가 제기하기만 해 놓고 아직까지도 대답하지 않은 가장 흥

미로운 문제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사실일 것입니다. 우리는 실수들이란 두 개

의 의도들, 그 중 하나는 방해받는 의도이고 다른 하나는 방해하는 의도로 불릴

수 있는 서로 다른 의도들의 간섭의 결과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방해받는 의도

는 계속되는 질문에 어떠한 단초도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다른 또

하나의 의도에 대해서 우리는 첫째로 다른 것에 대한 방해물로 나타나는 이러한

의도에 대해서 우리는 첫째로 다른 것에 대한 방해물로 나타나는 이러한 의도란

도대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 연구하려고 하며, 두 번째로 이렇게 방해하는 의

도는 방해받는 의도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알아내려고 합니다.

잘못 말하기를 다시금 이러한 종류의 모든 실수들의 대표격으로 취급하는 것

과 첫 번째 것보다는 두 번째 문제에 대해서 먼저 대답하는 것을 허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잘못 말하기에 있어서 방해하려는 의도는 방해받는 의도와 내용적인 관계에

놓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것은 방해받는 의도에 대한 모순이며 그것에

대한 교정 혹은 보완의 성격을 띱니다. 혹은, 더욱 모호하고 흥미로운 경우는 방

해하는 의도가 방해받는 의도와 내용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을 때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관계 중에서 첫 번째 것에 대한 증거는 우리에게 이미 잘 알

려져 있는 비슷한 경우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정반대의 말이 튀어

나오는 잘못 말하기의 거의 모든 경우에 방해하는 의도는 방해받는 의도의 반대

의향을 표출시키며 실수는 두 개의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의도들 사이의 갈등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로써 회의의 개회를 선포하지만 차라리 그

것이 끝나 버렸으면 하고 바란다>라는 것이 의장이 발언한 잘못 말하기의 의미

인 것입니다. 뇌물 사건으로 고발된 정치적 신문은 <우리가 항상 최대한 공정

하게in uneigennutzigster weise 일반 대중의 안녕을 대변해 왔다는 것은 우리의

독자들이 증명해 줄 것입니다>라고 쓴 기사를 내보냄으로써 스스로를 변호하고

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론을 작성할 것을 위임받은 편집장은 <매우 이기

적으로in eigennutzigster weise>라고 쓰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비록 그

렇게 써야 하기는 하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것과 달라>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황제에게 무조건ruckhaltlos 진실을 말할 것을 요구하려던 국

회의원은 자신의 용감성이 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자기 내부의 목소리를 듣고는

ruckhaltlos(주저하지 않고)ruckgratlos(줏대없이)로 잘못 말하고 말았습니

.(1908년 독일 제국 의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원주)

결합과 축약의 인상을 주며 여러분들에게도 잘 알려진 경우들에서는 그것으로

2의 경향이 첫 번째의 경향과 함께 부각되는 정당화와 보충적 언급, 그리고

앞의 얘기를 계속하려는 동기들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드러

나고 말았다. 그렇지만 내친김에 차라리 그것은 <추잡한 일>이었다고 말해 버

리지 뭐.> 그럼으로 해서 <모든 것이 vorschwein으로 밝혀졌습니다>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다섯 손가락> 안에 셀 수 있

을 정도입니다. 아니지,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오로지 <한 사람>밖에 없어.

러니까 <한 손가락>으로 셀 수 있습니다.>

혹은, <내 남편은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먹고 마실 수 있어요. 그렇지

만 당신도 아시다시피 그가 무언가를 원하는 것을 <>가 도대체 어떻게 참아

줄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그는 <>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먹거나 마실

수 있지요.>

이러한 모든 경우들에서 그러므로 잘못 말하기는 방해받는 의도의 내용에서

발생하는 것이거나 그것에 연계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종류의 두 개의 간섭적인 의도간의 관계는 조금 낯설게 느껴집니다.

방해하는 의도가 방해받는 그것의 내용과 아무런 관계가 없을 때, 그렇다면 그

것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이며 바로 그 자리에 방해물로 나타나게 만드는 그

것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답할 수 있는 관찰의 결과는,

방해 작용이 해당되는 사람이 바로 그 전에 몰두했던 사고 과정에서 연유하며

이는 이미 그의 발언 중에 표현되었든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그런 식으로 작용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그것에는 그러므로 실제로 후속발음

nachklang이라는 명칭을 붙여 줄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꼭 튀어나온 말

의 후발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에도 방해받는 것과 방해하는 것 사이의

연상적 관련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내용에서 주어지는 것은 아니고 오

히려 인위적으로 때때로 몹시 강요된 연결 방법에서 연유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내가 실제로 관찰한 바 있는 아주 간단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나는 언젠가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돌로미텐 지방을 여행하다가 관광객의 옷차림

을 한 빈에서 온 두 명의 부인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간 동행하면

서 여행자로서 생활하는 데 있어서의 즐거움에 대해서 이야기했으며 또한 여행

중의 불편함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중 한 부인은 하루를 보내는

이러한 방식에 여러 가지로 안락하지 못한 점이 꽤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사실

이에요. 햇볕 속에서 하루 종일 걷는다는 것은 정말 유쾌하지 못해요. 블라우스

와 속옷이 땀에 흠뻑 젖는다니까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하면서 그녀는 잠

시 동안 말이 막혀 버린 듯 뜸을 들였습니다. 그리고나서 말을 잇기를 <그렇지

만 바지hose(이때 haus라고 발하려던 것이 잘못 발음된 것이다. , <집에 돌아

가서>라고 말하려고 한 것이다.)에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을 수 있게 되면......>.

우리는 이러한 말 실수를 분석해 보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여러분들은 그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부인은 옷가지를 계속해

서 열거하려고 했던 것이며 <블라우스, 속옷, 그리고 팬티>라고 말하려던 참이

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점잖지 못하다는 인상을 줄까 봐 팬티라는 말을

빼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말에서, 내용적으로는 전혀 관련이 없는 문장

에서 밖으로 나오지 못한 그 단어가 <집에nach hause>라는 단어와의 연관성 속

에서 비슷한 발음의 변형으로 튀어나와 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지금까지 오랫동안 아껴 두었던 중요한 질문을 할 차례입니다. 그렇듯

이상한 방법으로 다른 것을 방해하면서 표출되어 나오는 이러한 의도란 도대체

어떠한 의도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거기에는 매우 여러 가지의 의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중에서 공통점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잘못 말하기에

대한 수많은 경우들을 연구해 보면 그것들은 곧 세 개의 군으로 분류될 수 있습

니다. 1군에 속하는 경우들은 말하는 사람에게 방해하려는 경향이 인지될 뿐

만 아니라 그 밖에도 잘못 말하기에 앞서서 그 의도가 본인에 인지되는 경우입

니다. 그러므로 <vorschwein>이라는 잘못 말하기의 경우에 말하는 사람은 그

해당 사건에 대해 <추잡한 일>이라는 판단을 스스로 내렸을 뿐 아니라 그가 후

에 철회하기는 했지만 그 사건에 대해 분명히 언어적인 표현을 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2군의 경우, 말하는 사람은 방해하려는 경

향이 자신에 의해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 말하

기에 바로 앞서서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 자신이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는 그의 잘못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받아들이지만 그럼에도 어느

정도는 그에 대해서 자기 자신도 놀라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의 경

우들은 잘못 말하기의 예에서보다는 다른 실수들 중에서 훨씬 더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3군은 방해하려는 의도에 대한 해석이 화자에 의해서 격렬하게

부정되는 경우들이 해당됩니다. 그는 그러한 것이 잘못 말하기에 앞서서 자신의

내부에서 움직였다는 사실을 반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의도는 그에게

는 완전히 생소하기만 한 것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앞에 예를 들었던 <트림을

하자aufstoben>의 경우를 상기해 보십시오. 내가 그 방해하려는 의도를 밝혀 내

었을 때 그 사람에게서 받게 되었던 그 불손한 항의를 여러분들은 기억하고 계

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경우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 합의를 보지 못했던 것을

여러분을 또 알고 계실 것입니다. 나는 그 축사한 사람의 반론에도 불구하고 내

의견을 바꾸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굳게 나의 해석을 고수할 것이지만 여러분들

은 아마도 그의 거친 항의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나머지 차라리 그러한 해석을

포기하고 그것을 분석적 방법에 선행하는 순전히 생리적인 행위로 놔두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나는 무엇이 여러분들을 움츠러들

게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나의 해석은, 화자 자신은 전혀 알고 있지 못하지

만 간접 증거를 통해 추론해 낼 수 있는 어떤 의도가 화자에게서 표현되어 나올

수 있다는 가정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경스럽기 그지없고 중대한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를 가정 앞에서 여러분은 멈칫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으며 또 어느 정도까지는 여러분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해둡시다. 그렇듯 여러 가지의 경우들에서 확인된

실수에 대한 견해를 일관되게 유지하려면 앞서 거론된 좀 생소한 듯한 가정에

대해서도 여러분은 결단을 내려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좀

처럼 얻기 힘들었던, 실수들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려는 생각을 다시금 포기해야

만 합니다.

이러한 세 가지 그룹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것, 잘못 말하기의 세 개의 메커니

즘에서 공통적인 것은 무엇인가를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합시다. 그것은 다행스럽

게도 오인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1, 2군에서는 화자에 의해서 그 방해하

려는 경향이 인정됩니다. 이러한 경향이 인지되는 것 이외에도 맨 첫 번째에서

는 그것이 잘못 말하기 바로 전의 시점에서 의식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개의 경우들에서 <이 방해하는 경향은 억압됩니다. 화자는 그것을 말로 나타내

지 않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그때 그에게 잘못 말하기라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즉 그의 의지에 반하여 억압된 그 경향은 표현되어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이

화자에 의해 허용된 의도의 표현을 수정하면서, 다시 말하면 그것이 그와 결합

되어 버리거나 아니면 바로 그 자리를 대신하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잘못 말하기의 메커니즘입니다.>

나는 내 입장에서 또, 실수의 제3군의 과정도 바로 지금 묘사된 메커니즘에

잘 들어맞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개의 유형들은 하나의 의도가 여러 가

지 다른 편차를 보이면서 얼마나 깊숙이 억압되었느냐에 따라 구별된다고 가정

하기만 하면 됩니다. 첫 번째에서는 그 의도가 분명히 전재하고 있고 화자가 발

언하기 전에 그에게 의식됩니다.

그리고 나서 의도는 억압되지만 대신에 잘못 말하기란 방식을 통해서 보상을

받습니다. 2군에서는 그 거부는 더 멀리까지 도달합니다. 그 의도는 말하기 전

에 이미 더 이상 의식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해도 결

코 퇴치되지 못하고 잘못 말하기의 발생에 관여한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행위로 인해서 제3군의 과정을 해명하는 것은 조

금 더 쉬워졌습니다. 실수 행위에서는 오래 전에, 어쩌면 매우 오래 전부터 억압

되어서 더 이상 의식되지 않는, 그 때문에 화자에 의해 즉각적으로 거부될 가능

성이 있는 어떤 경향이 표출될 수 있다는 것은 나는 용감하게 가정해 보려고 합

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제3군의 문제를 아예 제쳐 놓으십시오. 여러분들은 다

른 경우들을 관찰한 것만을 가지고도 그것을 토대로,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하

, 분명히 전재하는 의도를 억압하는 과정이 잘못 말하기를 촉발시키는 필수

불가결의 조건>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실수 행위의 이해와 관련해서 많은 진전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해도 좋

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의미와 의도를 가진 정신적인 행위라는 것과 두 개

의 서로 다른 의도들의 간섭을 통해서 발생된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이 중 하나

의 의도는 다른 의도를 방해함으로써 자신을 표현하기 위하여 어느 정도 억압된

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방해하는 의도가

되기 전에 그보다 먼저 방해받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수라고 부르는

그러한 현상을 이로서 와전하게 설명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계속되는 질문들

이 떠오르고 있는 것을 봅니다. , 더욱 깊은 이해에 도달하면 할수록 새로운

질문의 단초들이 그만큼 더 많이 생겨나리라는 것도 예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왜 사태가 좀더 단순하게 진행될 수는 없는지 반문할 수도 있습니

. 어떤 경향을 표출시켜 주는 대신에 억압해야 하는 어떤 의도가 있다고 한다

면 이 억압이 완전히 성공해서 그것의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해야 할 것

입니다. 또 그것은 실패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억압된 경향이 완전히 표출

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실수들이란 그러나 타협의 산물입니다. 그것은 그

두 개의 의도에 있어서 모두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를 의미합니다. 위험스

러운 의도는 완전히 억압된 것도 아니고 또 (개별적인 경우는 예외로 하고)

전히 자신을 관철시키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간섭 혹은 타협적 결과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대단히 특별한 조건들이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

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도대체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우리는 예감해 볼 수조차

없습니다. 나는 또 우리가 실수에 관한 더욱 깊은 연구를 통해서 이러한 잘 알

려지지 않은 관계를 밝혀 낼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

전에 인간의 정신 활동의 더욱 어두운 다른 영역을 깊이 연구하는 것이 더 필요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거기에서 만나게 되는 유추 관계들이야말로 비로소,

수들을 더욱 확실하게 밝혀 내기 위하여 요청되는 그러한 가정들을 세우는 데

필요한 용기를 우리에게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영역에서 끊임 없

이 씨름하게 되는 아주 작은 징조들을 이해하는 작업도 그 자체의 위험을 항상

갖고 있습니다. 정신 질환에는 그러한 작은 징조들의 평가가 무제한적으로 추구

되고 있는 복합적 편집증die kombinatorische paranoia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는 물론 이러한 토대 위에서 구축된 결론들이 대체로 옳다고 주장하지는 않겠습

니다. 그러한 위험에서 우리를 지켜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우리들의 관찰을

더욱 넓은 부분까지 확대해 나가는 것입니다. 정신 활동의 여러 가지 다양한 영

역에서 비슷한 인상들을 계속적으로 확보해 나가는 것, 그것이 관건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실수들의 분석은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합시다. 한 가지 점만은 여러분들에게

확실하게 강조해 두고 싶은데,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이러한 현상들을 다루어

왔던 그 방법을 모범적인 것으로 머릿속에 간직해 두시라는 것입니다. 우리 심

리학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여러분들은 이러한 예에서 간파할 수 있었을 것입니

. 현상들을 단순히 묘사하거나 분류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들을 영혼 속에

서 힘이 상호 작용하는 징조로 해석하고, 함께 혹은 서로 대립하는 방향으로 움

직이면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경향들의 표현으로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우리

는 정신적 현상들의 <역동적인 해석>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견해

에 의하면, 이러한 경향성은 단지 우리가 가정하고 있을 뿐이기는 하지만 인지

되는 현상들에 비해 더욱 중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수 행위

의 문제들에 더욱 깊이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역의

넓은 부분들을 잠시 한 번 일별하고 거기에서 잘 알려진 것들을 재발견하고 몇

몇 새로운 것들을 추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이미 처음에 작성했던

잘못 말하기의 세 개의 군으로의 분류에 따라 잘못 쓰기와 잘못 읽기, 잘못 듣

, 또 잊어버린 대상에 따른 소분류(고유 병사, 외래어, 계획, 인상들)가 포함된

잊기, 착각, 잘못 놓기, 분실 등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우리의 관찰 영역에 들어

오는 오류들은 부분적으로는 잊어버리기와, 부분적으로는 착각과 연관이 있습니

.

잘못 말하기에 대해서는 이미 매우 상세하게 다루어 왔지만 몇몇 개의 사항을

덧붙여야 하겠습니다. 전혀 흥미를 끌지 못한다고는 단정할 수 없는 작은 감정

적 현상들이 잘못 말하기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자청해서 기꺼이 잘못 말하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자기 자신이 잘못 말한 것은 흘려 듣지만

다른 사람의 그것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잘못 말하기도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 말한 것을 들었을 때, 그것을 넘

어서서 스스로도 잘못 말하기라는 현상에 빠지지 않고 말을 계속 이어 나간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잘못 말하기의 아주 사소한 경우들, 즉 그 속

에 숨겨진 정신적 과정에 대해서 별다른 특별한 해명을 제공할 수 없는 것들과

관련해서 그것의 동기를 들여다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이유에서인가 그 단어에 생겨난 방해로 인해서 어떤 사람이 장모음을 짧게

발음했을 때, 그는 그 뒤에 따라오는 단모음을 길게 늘여 발음하는 경우가 생기

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 이전의 것을 보상하려 하면서 새로운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같은 예로, 그가 어떤 복합 모음을 이상하게 분명치 않게 발음했을 경

, 즉 예를 들어 eu(오이), 혹은 oi(오이)ei(아이)로 발음했을 때 그는 뒤따라

오는 ei(아이)eu(오이)oi(오이)로 변환시킴으로써 처음의 잘못을 복구하려

고 시도할 것입니다. 그때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 연사가 자신의 모국어

를 제멋대로 취급하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청중

에 대한 고려인 것 같습니다. 두 번째의, 보상적인 의미의 왜곡 현상은 청중들에

게 첫 번째의 것에 대해 주의를 돌리게 하고 그 자신에게도 또한 그러한 지신의

잘못이 간과되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에게 확인시키고자 하는 바로 그러한 의도

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 말하기의 가장 흔하고 단순하며 사소한 경우들은

별로 눈에 떼지 않는 내용에 나타나는 단축과 선발음들입니다. 사람들은 예를

들어 좀 긴 듯한 문장에서, 의도하고 있는 말의 마지막 단어를 미리 발음함으로

써 말 실수를 하고는 합니다. 그것은 그 말을 성급히 마치고자 하는 듯한, 어느

정도 인내심이 결여된 듯한 인상을 주는데, 일반적으로 그 문장이 담고 있는 뜻

에 반대하는 어느 정도의 거부감이나 혹은 그 말 전체에 대한 거부감이 있음을

확인시켜 줍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잘못 말하기에 대한 정신분석학의 견해와

천박한 생리학의 견해 사이의 차이점들이 뒤섞여 버리는 경계상에 서 있는 경우

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경우들에서 말의 의도를 방해하는 경향이

존재한다고 가정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의 존재만이 암시될 뿐, 그 스스로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는 가리켜 주지 못합니다. 그것이 일으키는 방해는 그

어떤 음운 현상이나 연상 작용에 뒤따른 것이며 무엇을 말하려는 의도에서 주의

력이 약간 빗나간 것으로 파악될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주의력 장애도, 연상

경향도 그 과정의 본질을 정확히 설명해 주고 있지는 못합니다. 이것은 다시금

말하려는 의도를 방해하는 어떤 의도의 존재에 대한 암시가 될 수 있을 뿐입니

. 좀더 특징적인 다른 모든 잘못 말하기의 예에서는 그것의 본질을 추측해 내

는 것이 가능했지만 이번에는 그 작용에서 그것의 본질을 추측해 내는 것이 쉽

지가 않습니다.

이제 내가 다루려고 하는 잘못 쓰기veschreiben는 잘못 말하기와 너무도 일치

하기 때문에 어떠한 새로운 관점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의 작은 후

기 정도로만 파악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매우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뒤에

오는 단어, 특히나 마지막 단어 쓰기에서의 작은 잘못, 단축, 생략 등은 다시금

글쓰기를 싫어하는 일반적인 경향성이나 그 일을 어서 끝내 버리고 싶은 인내심

의 부족 등을 나타낸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잘못 쓰기의 더 특징적인 효과들

을 살펴보면 방해하려는 경향성의 본질과 의도를 간파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

로 어떤 편지 글에서 잘못 쓴 것이 발견되었을 때는 그것을 쓴 사람의 상태가

완전히 정상은 아니었다고 짐작이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그를 움직인 것이 무

엇이었는지 항상 확인되지는 않습니다. 잘못 쓰기는 잘못 말하기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쓴 그 사람에게는 잘 인식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음의 관찰은 매우 눈

에 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쓴 모든 편지를 발송하기 전에 한 번

더 죽 읽어보는 습관을 가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전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예외적으로 어쩌다 한 번 그렇게 하게

되면 그때마다 항상 눈에 띄는 잘못을 발견하고 고치게 되는 일이 빈번합니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마치도 이 사람들이 편지를 작성

할 때 자기가 잘못 쓴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라도 한 것처럼 보입니

. 우리는 정말 그렇다고 믿어도 될까요?

잘못 쓰기의 실제적인 의미에는 매우 흥미로운 문제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은 아마도 h. 라는 살인자의 예를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는 박테리아 연구

자로 자처했는데 과학 실험실에서 매우 위험한 병원균의 배양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배양균을 자기와 가까운 사람

들을 그와 같은 최신식 방법으로 제거해 버리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언젠가 한 번 그 연구소의 소장에게 자기가 얻은 그 배양액이 효과가 별로 없다

고 불평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문장을 <생쥐와 마르모트에 대한 나의 실험

에 의하면bei meinen versuchenan mausen oder meerschweinchen>이라고 써야

할 것을 <사람들에 대한 나의 실험에 의하면 bei meinen versuchen an

menschen>이라고 분명하게 잘 못 썼던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 쓰기는 그 연구

소의 의사들에게도 눈에 띄었지만 내가 알기로 그들은 그것에 대해 아무런 조치

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 여러분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의사

들이 그 잘못 쓰기를 차라리 자백으로 받아들이고 수사를 하도록 조처를 취해서

그 살인자의 lgoddnl를 때맞추어 저지하도록 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이 경우에

는 실수에 대한 우리들의 학설을 몰랐던 것이 결국 실제적으로 중요한 실책의

원인이 된 것은 아닐까요? 그러한 잘못 쓰기가 나의 눈에 띄었다면 나는 그것은

틀림없이 매우 수상쩍은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자백으로 받아

들이고 이용하는 것에는 매우 중대한 문제가 가로놓여 있습니다. 잘못 쓰기는

틀림없이 하나의 간접 증거입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로서는 수사를 하게 하는

데 있어서 충분치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사람들에게 그 약을 주사하겠다는 생

각에 몰두했다는 것을 그 잘못 쓰기는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

각이 명확하게 남을 해치려는 의도로서의 의미를 가진 것인지 아니면 실제적으

로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은 몽상에 불과한 것인지는 판단하기가 어렵습니

. 그렇게 잘못 쓴 그 삶이 최상의 주관적인 정당성을 가지고 이러한 몽상을

부정하면서 그것을 자기와는 전혀 생소한 어떤 것으로 간주하고 부인해 버리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우리가 추후에 심리적인 실재와 물리적인 실재의 차

이점을 파악하게 되면 여러분들은 이 가능성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한 번, 어떤 실수에 그 후에 생각지도 못했던 의미가 첨

가되는 또 하나의 예가 되는 것입니다.

잘못 읽기에서는 잘못 말하거나 잘못 쓰기의 심리적 상황과는 뚜렷이 구별되

는 다른 상황과 만나게 됩니다. 두 개의 서로 경쟁하고 있는 경향성 중의 하나

가 여기서는 감각적인 자극으로 대체되고 아마도 그래서 덜 저항적이 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읽어야만 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쓰려고 계획했던

것과 같은 그러한 자기 자신의 정신활동의 산물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대다수의

경우에서 잘못 읽기는 완전히 대체 작용substitution만으로 끝나 버릴 때가 많습

니다. 사람들은 읽어야 할 단어를 다른 것으로 대체시키는데, 이때 원래의 문장

과 잘못 읽기로 인해서 생겨난 효과와는 내용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일반적으로 발음 유사성 때문에 그런 일이 발생합니다. 리히텐베르

크의 경우처럼 angenommen(가정하면) 대신에 agamemnon으로 읽는 것이 이

잘못 읽기의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잘못 읽기를 생성케 한 경

향성, 그 방해하는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잘못 읽혀진 텍스트를 완전히 무

시하고 다음 두 개의 질문을 통해서 분석적 연구를 도출하는 것이 바람직합니

. , 잘못 읽기의 효과로 바로 그때 어떤 연상이 떠오르느냐 하는 것과 어떠

한 상황에서 그러한 잘못 읽기가 생겨났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후자에 대한 지

식 자체만으로도 잘못 읽기를 충분히 규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용변을 보

고 싶다고 느낀 어떤 사람이 낯선 도시를 헤매다가 1층에 붙어 있는 커다란 간

판에서 <klosetthaus(세면소)>라는 단어를 읽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는 그 간

판이 왜 그렇게 높이 걸려 있는지 잠시 동안 의아해 하다가, 문득 거기에는 엄

밀하게 말해서 <korsetthaus(코르셋 전문점)>라는 명패가 씌어 있는 것을 발견

하게 됩니다. 원문과 상관없는 내용을 잘못 읽게 되는 다른 경우들에서는 매우

상세한 분석이 요구되는데, 그것은 정신분석학적인 기술의 훈련이나 그것에 대

한 신뢰감이 없이는 실행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잘못 읽기를 해명하는 것은 그

러나 대개의 경우보다 쉽습니다. <agamemnon>의 경우에 그렇게 대체된 단어는

그 방해가 어떠한 사고 속에서 연유된 것인지를 즉각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습니

. 지금과 같은 전쟁시에는 예를 들어 도시의 이름이나 장군들의 이름, 사람들

주위에서 끊임없이 어디에서나 떠도는 군사적인 용어들을 도처에서 읽게 되는

것이 매우 흔한 일인데 그러므로 그와 비슷한 단어 영상이 마음속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낯설거나 조금 흥미없는 것 대신에 어떤 사람이 관심을 두고 있고 관여

하고 있는 내용이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사고의 잔영들이 새로운 지각을

흐려 놓는 것입니다.

잘못 읽기에서는 또 다른 종류의 경우들도 빠지지 않는데, 그때는 방금 읽은

원문 자체가 방해하려는 경향을 환기시켜서 그 경향으로 인해 그것은 대부분 반

대어로 변질됩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원치 않는 것을 읽어야 할 때가 있는데 분

석을 해보면 그렇게 읽어야 할 것을 거부하는 강렬한 소원이 그것을 변형시키는

데 한몫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맨 처음에 언급했던 가장 흔한 잘못 읽기의 경우에는 실수의 메커니즘에서 중

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우리가 지목했던 두 가지 요소, 즉 두 개의 경향성들

이 서로 갈등하고 그 중 하나가 억압 (그것은 다음에 실수의 효과를 통해 이렇

게 억압당한 것을 보충하는데) 되는 현상이 제대로 부각되지 못했습니다. 잘못

읽기에서는 이와 반대되는 어떤 것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고, 이러한 잘

못을 초래하는 사고 내용의 긴급성이 그 사고 내용이 이미 경험했을 억압보다

훨씬 눈에 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두 가지의 요소는 망각에 의한 실

수의 여러 가지 상황에서 가장 알기 쉽게 나타납니다.

계획했던 것을 잊어버리는 것은 (우리가 들은 바에 의하면) 문외한들에 의해서

도 논란거리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 해석이 명백합니다. 계획을 방해하는 경향

성은 매번 그에 반대되는 의도로서 그렇게 하지 않고 싶어하는 의지이며, 그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단지, 그것이 왜 꼭 그렇게 은폐된 채로 표출되

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반대 의지gegenwille의 존재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때때로 이렇게 자신을 은폐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반

대 의지의 동기를 알아내는 데 성공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것은

실수를 통해서 숨겨진 자신의 의도를 달성하는데, 만일 그것이 공개적인 반박으

로 나타났을 경우 부인됐을 것은 뻔한 이치입니다. 어떤 계획과 그것의 실행 사

이에 중요한 심적 상황의 변화가 발생했을 경우에는 자연적으로 계획의 실행은

문제조차 되지 않으며 그럴 때 그 계획을 망각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실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서 더 이상 의아해 하지 않으며 그 계획

을 기억해 내는 것은 불필요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깨닫습니다.

렇게 되면 그것은 계속적으로 혹은 잠정적으로 소멸되어 버립니다. 계획의 망각

은 그 같은 단절이 있었으리라고 믿을 수 없는 경우에만 실수 행위로 불릴 수

있습니다.

계획을 잊어버리는 따위의 이 같은 경우들은 일반적으로 너무도 단순하고 투

명하기 때문에 우리의 연구를 자극할 만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수의 연구를 통해서 두 가지 점에서 새로운 것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망각,

그러니까 어떤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않는 것은 그에 적대적인 어떤 반대 의지

를 시사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언명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 의지는 우리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두 가지 종류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직접적인 반대 의지이고 다른 하나는 간접적인 반대 의지입니

. 후자, 즉 간접적 반대 의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한두 개의 예를 통해서도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후원자가 자기의 피후원자를 위한 추천서를 제 3

자에게 전달하는 것을 잊었다면, 이것은 그가 그 피후원자에 대해서 원래 아무

런 흥미를 못 느끼고 있었고 그러므로 그를 추천하는 일에 대해 별다른 의욕이

없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일 것입니다. 피후원자는 어쨌든 후원자의 망각을 그러

한 의미로 해석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러나 더 복잡한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획을 수행하는 데 대한 반대 의지가 다른 쪽 방향에서 올 수도 있고 또 다른 지

점에서 그 일이 시작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피후원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이 추천서를 건네 받아야 할 제3자에게로 향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의 해석을 실제적인 용도에 사용하는 데에 어떠한 문제가 수반될 수

있는지, 여러분들은 깨달았을 것입니다. 피후원자는 망각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미심쩍어 한 나머지 자신의 후원자에게 무례하게

굴 수도 있습니다. 다른 경우에, 어떤 사람이 자기가 지키겠다고 약속하고 또 사

실 지키려고 굳게 마음먹었던 만남을 잊어버렸다면 가장 개연성이 큰 이유로서

그 사람과의 만남을 싫어하는 감정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 대

한 분석을 한 결과, 방해하려는 경향은 그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고 그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그 장소를 향한 것이고 그 장소와 관련되어 있는 고통스

러운 기억으로 인해 그 장소를 피하려 했음이 입증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경우에 어떤 사람이 편지를 부치는 것을 잊었다면 그에 대한 반대 경향은

편지의 내용에서 연유한 것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또 다음과 같은 경우도 절대

로 배제할 수 없습니다. , 그 편지 자체는 전혀 해롭지 않으나 그 편지의 내용

중의 어떤 것이 그 전에 언젠가 쓴 다른 편지를 상기시켰고, 바로 그것이 그 반

대 의지 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을 가능성 말입니다. 그럴 경우 사람들은,

대 의지는 예전의 편지에 의한 것이고 원래는 아무것도 이상할 것이 없던 지금

의 편지로 전이 ubertragung된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우리의 정당한 해석을 평가함에 있어서 어느 정도는 망설임과 신중함이 요구된

다는 것을 통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는 동등한 가치를 지닌 것도

실제적 현실에서는 매우 애매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들은 여러분들에게는 매우 이상하게 생각될 것입니다. 여러분

들은 어쩌면 <간접적> 반대 의지가 그 과정을 이미 어떤 병리적인 것으로 특징

짓는다고 가정하고 싶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확실하게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그러한 반대 의지가 규범적이고 건강한 현상 속에서도 나타난

다는 것입니다. 나의 말을 어쨌던 오해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우리의 분석적인

해석이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스스로 고백하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계획

의 망각이라는 문제에서 논의된 모호성은, 그 경우를 분석적으로 연구해 보지

않고 단지 우리의 일반적인 전제들에 근거해서 해석했을 때만 발생합니다.

당사자를 분석해 보면 그때마다 언제나 그것이 직접적인 반대 의지인지, 아니면

어딘가 다른 곳에서 연유하는 것인지 충분한 확신을 갖고 알아낼 수 있었던 것

입니다.

두 번째의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어떤 계획을 잊어버리는 것은 반대

의지 때문이라는 사실을 대다수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다면, 우리가 추론해

낸 반대 의지를 피분석자가 인정하지 않고 부인해 버리는 그러한 경우들에까지

이러한 해석을 적용시켜 보겠다는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

로서는 빌린 책을 돌려주는 일 따위 등과 같은 아주 빈번하게 발생하는 사례들

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당사자가 책을 아주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고자 했다거

나 돈을 갚지 않으려고 했다는 의심을 하며 그를 용감하게 비난할 수 있을 것입

니다. 당사자는 그러한 의도를 부정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행동에 대해 어떤 다

른 해명을 내놓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가 그러한 의도를 갖

고 있었지만 단지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을 뿐이고, 그 의도가 망각이라는 효

과를 통해 나타났으므로 그것으로 충분하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는 그러나

계속해서 자신은 단지 잊어버렸을 뿐이라고 항의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기

, 우리가 이미 그 전에 한 번 겪은 적이 있었던 그 상황이 다시 나타났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도 여러 상황에 걸쳐 정당한 것으로 증명됐던 실수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일관되게 밀고 나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사람들에게

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에게 작용되는 어떤 경향이 있다는 것을 가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삶과 심리학을 지배하는 모든

견해들에 대하여 모순된 위치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고유 명사나 외래 명사, 그 밖의 외래어 단어들을 잊어버리는 것은 마찬가지

로 그에 대한 반대 의지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경향은 직접 혹은 간

접적으로 해당되는 이름에 대한 반감 때문입니다. 그러한 직접적인 거부감의 감

정에 대해서는 전에 이미 여러분들에게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한 바 있습니

. 그러나 이 경우에는 망각 현상이 간접적인 원인에 의해 특히 더 빈번하게

발생하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대개는 매우 조심스러운 분석이 요구됩니

. 예를 들어 현재와 같은 전쟁시에는 우리의 이전의 기호들을 포기해야만 하

는 강요된 상황이 전개되고 있고, 고유 명사를 기억하는 일도 기묘한 연상으로

인해 몹시 손상을 받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나는 모라비아 지방의 도시 비센츠

의 이름을 아무리해도 기억해 낼 수 없었는데, 분석해 본 결과, 그것은 그에 대

한 어떠한 직접적인 적개심 탓도 아니었고 단지 그 이름이 내가 그 전에 몇 번

이나 기분좋게 지냈던 적이 있는 오르비에토orviento의 비센지bisenzi 궁전과 발

음이 비슷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게 만드는 경향의

동기로서 여기에서 처음으로 하나의 원칙이 대치되어 나타나는데, 그것은 후에

신경증적인 증후의 원인으로서 매우 중대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밝혀질 것입니

. 그것은 어떤 것을 떠올리는 기억에 대한 거부감으로서 유쾌하지 못한 느낌

과 관련되어 있어서 그것을 재생할 경우 이러한 불쾌감이 다시 되살아날 우려가

있는 것입니다. 기억에서, 혹은 다른 심리적 행위에서 발생하는 불쾌감을 피하려

는 이러한 의도는 불쾌감에서의 심리적 도피로서 이름 망각뿐 아니라 다른 많은

실수 행위, 즉 하던 일의 중단, 오류, 그 밖의 다른 것들에 작용하는 결정적인

동기로 인정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름 망각은 정신생리적으로 특별히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래

서 불쾌한 동기가 작용한 것으로 확인되지 않는 그러한 경우들에까지 나타납니

. 어떤 사람이 일단 한번 이름 망각의 경향성을 보일 때 그를 분석적으로 연

구해 보면 그가 그 이름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혹은 그것이 그에게 어떤 좋

지 않은 것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말고도 그와 같은 이름이 그와 어

떤 내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 다른 연상들의 집단에 속하기 때문에 그 이름이 그

에게 기억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 이름은 거기에 꼼짝 없이 묶

여서 그 순간에 활동하고 있는 다른 연상에 막혀서 거부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들이 기억법(기억력을 향상시키는 기술적인 방법의 하나.)이라는 기교를 생각해

보시면 다른 때에는 사람들이 망각에서 보호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

는 똑같은 연관들에 의해서 망각 현상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놀라움과 한께 확

인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가장 극명한 예는 사람의 이름을 잊어버리는 경

우에서 나타나는데, 한 사람의 이름이 여러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여러 가

지의 심리적 가치를 갖고 있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테오도르라는 이름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들 중의 어떤 사람에게는 이

이름은 특별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이름은 자기 아버지나 남자 형제나, 남자 친구 혹은 자신의 이름이 될 수가

있습니다. 어떤 낯선 사람이 이 이름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전자의 사람들에게

는 그 이름이 잊혀질 위험이 별로 없지만,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자신과 내

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름을 낯선 사람 앞에서 밝히지 않으려는 경향을 끊임

없이 보인다는 사실을 분석적인 경험이 여러분들에게 가르쳐 줄 것입니다. 이처

럼 연상에 의해서 기억하기를 꺼려하는 경향들이 불쾌 원칙unlustprinzip('꿈의

해석'(프로이트 전집 5, 6, 열린책들) 참조. 이후에 쾌락 원칙lustprinzip으로 일컬

어진다.)의 작용이나, 그 외에도 간접적인 메커니즘과 일치할 수도 있다고 가정

해 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비로소 일시적으로 이름을 망각하는 원인의 복합적인

요인에 대해서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안에 따른 치밀한 분석은

여러분들에게 이 모든 복합성을 남김 없이 밝혀 줄 것입니다.

어떤 것에 대한 인상이나 체험을 망각하는 따위의 현상은 불편한 것을 기억에

서 멀리하려는 경향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이름 망각보다 더욱 극명하고도 온

전하게 보여 줍니다. 인상이나 체험한 내용을 이처럼 망각하는 현상은, 물론 그

모두가 다 실수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고 우리의 습관적인 경험의 척도에 비추

어서 메우 이상하고 부당하게 보일 때만 실수의 범주에 넣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너무나도 선명하고 중요한 인상과 관련되어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전체적

인 연관성 속에서 무리 없이 기억되는 것들 사이에서 그것이 빠짐으로 해서 기

억상의 괴리가 발생할 때, 이를 실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매우 확실

하게 깊은 인상을 남긴 체험들, 이를테면 우리의 첫 유년 시절의 사건들을 왜,

그리고 어째서 잊어버릴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완전히 또 다른 문제로서 그때에

도 불쾌감을 자극하는 것에 대한 방어가 어떤 역할을 했으리라고는 짐작되나 그

것으로 모든 것이 해명되지는 않습니다.(유년기의 기억 상실에 대해서는 이후에

논의된다.) 편안치 않은 인상들은 쉽게 잊혀진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

실입니다. 여러 심리학자들은 그 사실에 주목했고 저 위대한 다윈c. darwin도 이

사실에서 커다란 인상을 받은 나머지 자신의 이론과 배치되는 듯한 관찰 사례들

을 아주 세심하게 기록해 놓는 것을 <황금률>로 삼기까지 했습니다.(다윈의 자

서전을 참조하라. '찰스 다윈의 자서전18091882the autobiography of charles

darwin 18091882'(1958)) 왜냐하면 바로 이러한 관찰 결과들이야말로 그의 기

억 속에 머물러 있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망각을 수단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을 방어한다는 원칙에 대해서 처음 듣

게 되는 사람은 거의 예외 없이, 자신은 오히려 고통스러운 기억이야말로 얼마

나 잊기 어려운 것인지 절실하게 체험한 적이 있노라고 말하면서, 이의를 제기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상처를 받은 기억이나 굴욕을 느꼈던 기억은 자신을 괴

롭히기 위해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끊임 없이 회상된다는 것입니다.

러한 사실도 맞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

니다. 정신 활동은 서로 적대하는 경향들이 서로 갈등하고 어루어지는 장소라는

것이며 (동력학적인 표현을 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모순들과 서로 적대적인 여

러 개의 쌍들도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적시에 고려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중요

합니다. 어떤 특정한 경향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이 곧 그것과는 적대적인 다

른 것을 배제시킬 수 있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 두 가지 경향성들은 공존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문제되는 것은 단지, 이러한 대립들이 어떤 관계에 놓

여 있는가 하는 것과 어떤 작용이 어느 관계에서 촉발되며, 또 다른 작용은 또

어떤 다른 괸계에서 나오는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분실과 잘못 놓기는 그것의 다의성, 다시 말해서 이러한 실수들을 일으키는

그 경향들의 복잡성으로 인해 우리에게 특히 흥미롭습니다. 이 모든 경우들에

공통적인 것은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싶어한다는 의지인데, 무슨 이유로, 무슨 목

적으로 그러한 것인지는 각각 다릅니다. 어떤 물건이 못 쓰게 되었을 때나 그것

을 좀더 나은 다른 것으로 바꾸고 싶을 때 사람들은 물건을 잃어버립니다.

그것이 더 이상 마음에 들지 않게 되어 버렸거나 지금은 관계가 나빠져 버린 어

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일 때, 또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상황에서 갖게 된

물건일 때도 그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물건을 떨어뜨린다거나 못 쓰게 만들기,

깨뜨리기 등도 같은 목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억지로 낳게 된 아이나 사생아

들은 정상적으로 부모에게 받아들여진 아이들보다 훨씬 허약하다는 사실을 사회

생활의 경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양육을 떠맡

은 보모가 그들을 충분히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는 사실조차도 필요치 않습니다.

양육하는 데 조심성이 약간만 부족해도 얼마든지 그런 결과가 나옵니다. 물건을

간수하는 것도 아이들을 다루는 것과 같아서 조금만 관심을 덜 쏟아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물건이 그 가치에는 손상을 입지 않았음에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다른

송상을 막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를 의도가 있을 때, 그 물건은 분실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게 됩니다. 운명에 마법을 거는 것과 같은 그런 행위는 분석 작

업의 결과에 따르면 우리들 가운데에 매우 빈번하게 나타나며, 우리가 물건을

분실하게 되는 것과 같은 그러한 행위는 결국 자발적인 희생이라고 할 수 있습

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분실 역시 반항과 자기 징벌selbstbestrafung의 목적에

쓰일 수도 있습니다. 짧게 말해서 분실을 통해서 어떤 물건을 자기에게 없애 버

리는 것이 좀더 멀리서 작용하는 동기임은 간과될 수 없습니다.

착각도 다른 잘못들과 마찬가지로 거부당한 소원을 충족시키기 위해 종종 쓰

여집니다. 그 의도는 그때 행복한 우연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납니다. 내 친구

들 중의 한 사람이 경험했던 일로서,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하기 싫은 기분을

명확하게 느끼면서 도시 근교로 기차를 타고 가서 누군가를 방문해야 했을 때

기차를 잘못 바꿔 타게 되어 다시금 그 도시로 되돌아왔던 경우라든지, 혹은 어

떤 사람이 여행 도중에 중간 정거장에서 좀 오랫동안 머물고 싶었음에도 불구하

고 해야 할 어떤 일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으나 자신이 타야 할 기차를 잘못

보거나 놓친 나머지 할 수 없이 자기가 원했던 체류를 하게 될 경우 그것은 모

두 행복한 우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내 환자 중의 한 사람은 내가 그에게

애인과 전화 통화하는 것을 금지했음에도 <실수로>, <다른 것을 생각하다가>

틀린 번호를 말했기 때문에, 실은 나에게 전화를 하려 한 것이었지만 갑자기 자

기 애인과 연결되었던 일도 있었습니다. 직접적 실수의 매우 재미있고 실질적인

의미가 있는 사례는 어떤 엔지니어의 경험이 제공해 주고 있는데, 그것은 물건

의 파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에 나는 몇 명의 동료들과 대학의 실험실에서 복잡한 탄성 실험의

한 과정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그 연구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떠맡은 것이었지만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끌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내가 나의 동료인

f와 다시 실험실에 갔을 때 그는, 이렇게 많은 시간을 낭비한다는 것이 오늘따라

어쩌나 성가시게 생각되는지 모르겠다는 심정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는 집에서

해야 할 다른 일들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하는 것 이외에

달리 할 말이 없었고 지난 주에 일어났던 사건을 빗대어서 반은 농담조로 <

계가 다시 고장나서 작업을 중단하고 집에 일찍 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했습니다.

작업 분류에 따라 f는 압축기의 밸브를 조종하는 일을 떠맡았습니다. 그것은

집적기에서 밸브를 조심스럽게 열고는 압축기의 실린더에 천천히 압축 용액을

흘려 넣는 일이었습니다. 실험 지도인은 압력계 옆에 서서 지켜보고 있다가 일

정한 압력에 도달하게 되자 큰소리로 <그만>하고 외쳤습니다. 이 명령에 따라 f

는 밸브를 붙잡고 있는 힘을 다해 그것을 왼쪽으로 돌렸습니다(모든 밸브는 그

러나 예외 없이 오른쪽으로 잠겨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그러자 갑자기 집적기

의 전 압력이 압축기에 작용하게 되었고 연결 장치는 그만한 압력에 견딜 수 있

을 만큼 만들어지지 않았음으로 그 즉시 파이프 관이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것은 아주 사소한 기계 고장에 지나지 않았지만 어찌됐든 우리는 그날 일을 중

단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무엇보다 특이한 일은, 얼마 후에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서로 얘기

할 기회가 있었는데, 나는 그 일을 그렇게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음에도 f

그때 내가 한 말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들의 집에서 하인들의 손이

집주인인 여러분들이 가장 아끼는 물건들을 손상시키는 경우, 그런 일들이 항상

그렇게 악의 없는 우연만은 아닐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다치게 하거나 자기 자신의 모든 존재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 매번 우

연일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여기서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때

때로 관찰한 것을 분석하는 일을 통해서 그 가치를 검증해 볼 수 있는 좋은 자

극을 제공해 줍니다.

나의 친애하는 청중 여러분들, 이것들이 실수 행위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전

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탐구하고 논의해야 할 것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우리

가 지금까지 탐구한 성과를 통해서 여태까지 여러분들이 취하고 있던 입장에서

어느 만큼의 충격을 경험하게 되었거나 새로운 것에 대한 가설을 받아들일 준비

를 갖추게 되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 외에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은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실수 행위에 대한 연구만을 가지고 우리의 모든 명제

들을 증명해 보일 수도 없으며 이 자료에 대한 증명에만 의존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연구 목적에 따른 실수 행위의 가장 큰 가치는 그것이 매우 흔한 것으로

서 우리 자신에게서도 쉽게 발견될 수 있는 현상이며, 그것이 발생하는 데에 어

떠한 신체적인 질병이 꼭 전제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아직까지 대답되지 않은, 여러분들이 제기해 올 단 하나의 질문에 대해서만 한

마디 덧붙이겠습니다. 우리가 수많은 사례에서 보아 왔듯이 사람들이 실수를 좀

더 자세히 이해하게 되고 그것의 의미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

하면서도 그들이 같은 현상을 놓고 우연이다, 의미가 있다, 혹은 의미가 없다라

고 판단하면서 실수 행위에 대한 정신분석학적인 해명에 대해서 어떻게 그다지

도 격렬하게 반대할 수 있는지요?

여러분들 말이 맞습니다. 그것은 정말 신기한 일이고 꼭 해명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그 해명을 직접 손에 쥐어 주지는 않겠습니다.

대신에 여러분들이 천천히 전체적인 관련성을 파악할 수 있게 하고 그러한 관련

성을 통해서 내가 개입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이 그에 관한 해명을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