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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세계사 공부

by Frais Study 2020. 5. 12.

왜 연대가 중요한가?
  1. 역사 시험 문제의 30% 정도는 연도를 알면 해답을 쉽게 구할 수 있다.
  역사 시험 문제의 30% 정도는 시대 배경, 시대 상황 등과 같이 연도와 관련된 것이 
출제됩니다. 그러므로 사건의 정확한 연도를 알고 있으면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2. 어렵고 복잡한 세계 각국의 비교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요즘의 역사 문제 추세를 보면, 세계 각국의 비교 문제가 많이 출제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각 나라의 역사가 독립되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간의 상호 작용 속에서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역사 학습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한다.
  <연대 암기법> 을 사용하여 중요한 사건의 연대를 300여 개 정도만 알고 있으면 역사에 
자신감을 갖게 되어, 시대 뿐만 아니라 그 외에 어떤 문제가 나와도 유추하여 그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구할 수 있습니다.
  4. 논술 시험 또는 상식 수준에서 역사 연대를 알면 많은 도움이 된다.
  우리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글을 쓸 때나 대화 속에서 역사적인 사건의 
예를 들 경우가 많은데, 이럴 때 연대를 정확히 알고 있으면 많은 도움이 됩니다.

      연대 암기법
    방법) 숫자를 단어를 바꾸어 연대를 암기합니다. 즉, 연대의 숫자를 아래와 같이 한글의 
자음으로 바꿔서 단어를 만듭니다.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
  예) 612  ㅂㄱㄴ: 불가능과 같이 자음이 ㅂ,ㄱ,ㄴ 순으로 시작하는 단어면 됩니다.
  1098  ㄱㅊㅈㅇ: 경치좋아, 경찰중요, 기차지연 등은 모두 1098년을 나타냅니다.
  1446  ㄱㄹㄹㅂ:고릴라 배 등 자음이 ㄱ,ㄹ,ㄹ,ㅂ 순으로 시작하는 단어면 모두 가능합니다.
  ㅎㄹㅂ: 하룻밤도 1446년을 나타냅니다.
    보기1) 동로마 제국이 건설된 395(ㄷㅈㅁ) 년을 암기할 때
  1. 동로마 제국에서 연상되는 단어를 찾습니다.
  동로마 -> 동료
  2.연상된 '동료' 라는 단어를 ㄷㅈㅁ(395) 의 단어에 연결 동료(동로마제국) 라고  동정 
마(395)
    보기2)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1917(ㄱㅈㄱㅅ) 년을 암기할 때
  1. 러시아 혁명에서 연상되는 단어를 찾습니다.
  러시아 -> 러시아워
  2. 연상된 '러시아워' 라는 단어를 ㄱㅈㄱㅅ(1917) 의 단어에 연결합니다.
  러시아워(러시아 혁명) 때  가장 고생(1917)

 

        제1부 동양 사회의 변천

     중국 왕조의 변천
    춘추 전국 시대(B.C.770--B.C.221)
  봄, 가을(춘추, 전국시대) 로: 살살 춥다(B.C.770)
    진(B.C.221)
  짐(진): 나눌 것(B.C.221)
    한(B.C.202--A.D.8)
  한(한) 많은: 노처녀(B.C.202)
    시(8--23)
  신(신): 인(8)
    후한(25--220)
  후한(후한): 뇌물(25)
    삼국시대(220--265)
  삼국(삼국시대)으로: 날 납치(220)
    #1 위(220--265)
  위(위) 족으로: 날 납치(220)
    #2 촉(221--263)
  촉(촉) 박하지 않고: 늘 느긋(221)
    #3 오(222--280)
  오(오): 니나노(222)
    서진(265--316)
  부서진(서진): 내 보물(265)
    5호16국(316--439)
  16개국(5호16국): 다 개방(316)
    동진(317--420)
  동지(동진) 들: 다 고생(317)
    남북조 시대(438--589)
  남북(남북조 시대) 축구: 라디오로(438)
    수(589--618)
  수(수) 가: 매우 적다(589)
    당(618--907)
  당(당) 에: 보고용(618)
    5대10국(907--960)
  오대산(5대10국): 절 청소(907)
    북송(960--1127)
  북송선(북송): 제법 찼네(960)
    남송(1127--1279)
  남성(남송)은: 기계농사(1127)
    원제국(1271--1368)
  원죄(원제국): 그냥 생김(1271)
    명(1368--1644)
  밝은(명) 날: 꼭 달밤에(1368)
    청(1636--1911)
  청(청) 해봐: 그 복덕방에(1636)

    춘추 전국시대(B.C.770--B.C.221)
  춘추 전국 시대는 B.C.770년 주의 동천으로부터 진에 의하여 중국이 통일된 B.C.221년까지를 
말한다. 이 기간을 다시 한, 위, 조 3국이 독립한 B.C.403년을 경계로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로 나눈다.
  이러한 명칭이 나온 것은, 전자는 공자가 편찬했다고 전하는 '춘추' 에서 비롯되며, 후자는 
'전국책' 이라는 서책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암기법) 봄 가을(춘추, 전국시대) 로: 살살 춥다(B.C.770)

    진(B.C.221--B.C.206)
  전국 7웅 가운데 가장 문명이 뒤떨어진 나라였던 진은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사회 제도를 
개혁함으로써, B.C.221년 춘추 전국 시대의 오랜 혼란을 수습하고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을 
건설하였다. 진의 왕 정은 센양에 도읍한 후 스스로를 시황제라고 칭하였다.
  (암기법) 짐(진): 나눌 것(B.C.221)

    한(B.C.202--A.D.8)
  천하를 통일한 진은 불과 15년 만에 멸망하고, 진에 반대하던 평민 출신의 유방과 귀족 
출신의 항우가 7년간에 걸쳐 자웅을 겨루다가, 유방이 항우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하여 한을 
건국하였다.
  (암기법) 한(한) 많은: 노처녀(B.C.202)

    신(8--23)
  중국의 전한 말기 외척과 환관의 세력 다툼을 틈타 외척인 왕망이 세운 나라.
  토지의 국유화, 노비 매매 금지 등의 개혁과 주대의 부활을 꾀하는 복고 정책을 폈으나, 
호족이 반발을 일으켜 곧 망하였다.
  (암기법) 신(신): 인(8)

    후한(25--220)
  왕망의 찬탈 이후, 각처의 귀족, 호족의 반항이 극심해졌으며, 특히 산뚱의 적미적의 난으로 
사회는 더욱 혼란해졌다.
  이 때 하남에서 일어난 유수의 호족 집단이 호족 계급의 여망과 민중의 한실 부흥의 세론을 
업고 신을 멸한 후 뤄양에 도읍하여 나라를 세우니, 이가 곧 후한의 광무제이다.
  그 후 1세기 후반은 후한의 전성기로, 흉노를 치고 서역 경영에 힘쓰는 등 중흥기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암기법) 후한(후한): 뇌물(25)

    삼국시대(220--265)
  후한이 망한 뒤, 중국은 지방 군사 정권이 할거하여 군벌이 집권하였으나, 마침내 천하는 
조비의 위(216--265), 유비의 촉(221--263), 손권의 오(222--280)로 삼분되었다.
  위는 화북 지방을 통일하고 만주 지방으로 진출, 고구려까지 침입하였고, 촉은 성도에서 
도읍하여 서남 중국을 활발히 개척하였다. 오는 강남을 차지하고 촉한과 연합하여 위나라의 
남하를 견제하는 한편, 호남, 복건 등을 개발하였다.
  (암기법) 삼국(삼국시대) 으로: 날 납치(220)

    위(220--265)
  건국자는 조비.
  조비의 아버지 조조는 후한 때에 정치적 실권을 독차지하였고, 위왕에 봉하여져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죽자 뒤를 이은 조비는 후한의 헌제를 강박하여 왕위를 빼앗고 위를 
세워 뤄양에 도읍하였다.
  위는 3국 중에서 가장 강력하였으나, 265년 사마염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암기법) 위(위) 쪽으로: 날 납치(220)

    촉(221--263)
  촉한이라고도 한다.
  유비가 제갈양 등 명신의 도움을 받아 쓰촨 지방에 세운 나라인데, 도읍을 성도에 두었다. 
촉은 3국 중 가장 약하였으나, 위, 오와 더불어 천하 3분에 성공하였다.
  한의 정통을 이어받았다고 자부하며 명신 제강양의 보좌로 국력을 배양한 촉은 오장원 
전투에서 제갈양이 병으로 죽은 뒤 세력이 기울었다.
  (암기법) 촉(촉) 박하지 않고: 늘 느긋(221)

    오(222--280)
  건국자는 손권.
  강남에 자리 잡은 손권은 촉의 유비와 합세, 적벽 싸움에서 조조의 군대를 격파하여 3국의 
정립을 확립시켰다.
  220년 위나라가 흥하자 처음에는 이에 따랐으나, 222년 스스로 제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오라 하고 건업(지금의 남경) 에 도읍하였다.
  (암기법) 오(오) !: 니나노(222)

    서진(265--316)
  3국 가운데 가장 강했던 위가 촉을 병합한 다음, 위의 권신인 사마염이 왕위를 빼앗아 진을 
세워 다시 중국을 통일하였다. 시황제로 잘 알려진 진이나 남조의 진과 구별해야 한다. 5호의 
침입으로 강남으로 이동한 동진에 대하여 서진이라고도 한다. 선비족이 세운 서진과도 
구별해야 한다.
  (암기법) 부서진(서진): 내 보물(265)

    5호 16국(316--439)
  중국을 통일한 진은 얼마 못 가서 왕족간의 세력 다툼과 5호의 침입을 받아 수도 뤄양이 
함락되고 멸망하였다.
  5호는 진나라 8왕의 난을 틈타 중원으로 밀려 들어온 선비, 흉노, 강, 갈, 저의 다섯 유목 
민족을 말한다. 그 후, 화북은 5호의 활동 무대가 되면서 16국이 번갈아 흥망하는 이른바 5호 
16국 시대가 되었다.
  (암기법) 16개국(5호 16국): 다 개방(316)

    동진(317--420)
  진이 5호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자(316), 진의 왕족인 사마예와 그 일족이 양쯔강 이남으로 
이동, 건강(지금의 난징) 에 도읍을 정하고 동진을 세웠다.
  이 때까지 경시되었던 강남은 5호의 침입을 피해 화북 지방의 부호와 지식층이 대거 
남하함으로써 동진 이래 급속히 개발되어 중국의 문화와 경제가 강남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암기법) 동지(동진) 들: 다 고생(317)

    남북조 시대(438--589)
  화북의 혼란(5호 16국 시대) 은  선비족의 탁발규가 북위(또는 후위: 386--534) 를 세워 
수습되었고, 강남에서도 이 무렵 동진이 무너지고 송이 섰다.
  이때로부터 수의 통일까지 민족이 다른 왕조가 남북으로 나뉘어 대립하던 시기를 남북조 
시대라 부른다.
  (암기법) 남북(남북조 시대) 축구 중계: 라디오로(438)

    수(589--618)
  후한의 멸망 이래 370년간 분열되었던 중국 대륙을 통일한 사람은 수의 양견이었다. 북주의 
외척인 양견은 문제로서 제위에 올라 장안에 도읍하여 국호를 수라 하고, 589년에는 남조의 
진을 쳐서 중국을 재통일하였다.
  수는 국내를 정비하는 한편, 밖으로는 동돌궐을 누르고 비단길을 통한 동서의 교역으로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도 드물게 보는 풍요를 누리다가 30년 만에 멸망하였다(618).
  (암기법) 수(수) 가: 매우 적다(589)

    당(618--907)
  수 말기의 정치적 혼란과 농민의 반란은 이연, 이세민 부자에 의해 당이 건국되면서 
수습되었다.
  산서의 호족으로 북주와 수의 장군이었던 이연은 수 말의 혼란기를 이용하여 장안을 
점령하고 있다가, 자신이 옹립한 수의 공제로부터 선양 형식으로 제위를 이어받아 스스로 당 
고조가 되었다.
  당은 안사의 난(755--763) 을 계기로 국력이 급속히 쇠퇴하였다. 안사의 난 이후 기본 
제도의 붕괴, 절도사의 횡포로 인한 재정의 곤궁, 환관의 전횡과 당쟁, 외적의 침입 등으로 
시달리던 중 대규모 농민 반란인 황소의 난(875--884) 이 일어났고, 이 난을 평정한 주전충이 
후량을 건국(907) 함으로써 당나라는 289년 만에 멸망하였다.
  (암기법) 당(당) 에: 보고용(618)

    5대 10국(907--960)
  5대란 주전충이 907년 당을 멸망시킨 후, 960년 송이 일어날 때까지 54년간 화북 지방에서 
흥기한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를 일컫는데, 가장 강성하여 정세를 좌우하는 
나라들이었다. 10국은 쓰촨과 강남 등지에 나누어 건국했던 남당, 오월, 오, 민, 초, 형남, 
남한, 전촉, 후촉, 북한 등을 말한다.
  이 시기를 5대 10국 시대라 하는데, 당 말기의 절도사들의 대립 투쟁의 결과로 나타난 
정치적 혼란기였다.
  (암기법) 오대산(5대 10국): 절 청소(907)

    북송(960--1127)
  5대10국의 혼란이 약 60여 년간 지속된 뒤, 960년 후주의 절도사 조광윤이 5대의 혼란기를 
수습, 통일하여, 변경을 도읍으로 정하고 제위(송 태조) 에 올라 송나라(북송) 를 건국하였다.
  태조는 황제의 독재권을 수립하기 위해 문치주의와 과거제를 통한 중앙 집권적 관료 제도를 
수립하였다.
  1115년 건국된 여진족의 금이 송과 동맹하여 거란의 요를 멸망시킨 후(1125), 송의 무력함을 
알게 되자 금은 송의 화북 지방을 침입하여 점령하고 흠종을 납치해 가니, 이 사건을 '정강의 
변' 이라 한다(1127).
  이로써 북송은 멸망하고 금이 화북을 차지하였다.
  (암기법) 북송(북송) 선: 제법찼네(960)

    남송(1127--1279)
  정강의 변이 있은 수, 휘종의 아들이 고종이 되어 강남의 임안에 도읍하여 송을 재건하니, 
이로부터 송나라를 남송 시대라 한다.
  남송은 회수를 국경으로 하여 금과 화친하고, 강남을 개발하면서 사회의 안정을 이루었으나, 
13세기 후반 신흥 몽고 제국에 의해 멸망되었다.
  (암기법) 남성(남송) 은: 기계 농사(1127)

    원제국(1271--1368)
  헌종이 죽고 난 뒤, 칸위를 둘러싸고 아리크부가와 쿠빌라이가 대립하였으나, 헌종의 아우 
쿠빌라이는 반대당을 제압하고 자신의 근거지였던 개평에서 즉위(5대 세조) 하였다.
  수도를 지금의 북경인 대도로 옮기고, 국호도 중국식으로 원이라 하였다.
  한민족에 대한 학대로 일관해 온 원나라는 계속되는 제위 분쟁과 군사비의 과다 책정, 
라마교에 대한 광신 등에 따른 낭비와 재정 파탄으로 민중 생활이 도탄에 빠져, 드디어 
백련교도들의 봉기인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신생 한민족인 명나라의 주원장에 의해 멸망되고 
말았다.
  (암기법) 원죄(원제국): 그냥 생김(1271)

    명(1368--1644)
  원나라의 경제 정책 실패와 칸위 계승 분쟁 등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한민족의 
외민족에 대한 저항 의식이 높아지자, 이를 틈타 백련교도들의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다.
  홍건적의 지휘자의 한 사람이었던 주원장이 1368년 금릉에 도읍하여 대명을 세우고, 스스로 
태조 홍무제에 즉위하였다.
  제3대 성조가 베이징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산시성 출신의 이자성에게 베이징을 함락당하여 
17대 의종이 목을 매어 죽음으로써 17대 277년 만에 멸망하였다.
  (암기법) 밝은(명) 날: 꼭 달밤에(1368)

    청(1636--1911)
  명의 세력이 후퇴하자, 만주의 여진족 추장인 누르하치는 세력을 모아 제부족을 통일하고 
만주 흥경 지방을 중심으로 나라를 건국, 1616년 국호를 후금이라 하였다.
  누르하치의 아들 태종은 조선, 내몽고를 정복하고 1636년 국호를 청이라 고쳤다.
  중국 최후의 왕조로, 강희, 건륭 시대에 전성하여 중국 사상 최대의 판도를 누리다가, 신해 
혁명으로 12대로 멸망하였다(1911).
  (암기법) 청(청) 해봐: 그 복덕방에(1636)

     진, 한, 신, 후한
    진(B.C.221--B.C.206)
  짐(진): 나눌것(B.C.221)
    군현제도(B.C.221) 
  현재(군현제도): 난 누구(B.C.221)
    만리장성(B.C.215)
  만리(만리장성) 라도 마중: 나가마(B.C.215)
    한(B.C.202--A.D.8)
  한(한) 많은: 노처녀(B.C.202)
    군국제도(B.C.202)
  국군(군국제도) 애인: 노처녀(B.C.202)
    비단길 개척(B.C.139)
  비단(비단길 개척) 이: 곱다지(B.C.139) ?
    균수법(B.C.115)
  수법(균수법): 공개 마(115)
    종이의 발명(B.C.105)
  종이(종이의 발명) 로: 공책 맴(B.C.105)
    사마천의 (사기)(B.C.91)
  사기(사기) 범: 접근(B.C.91)
    신(8--23)
  신(신): 인(8)
    적미적의 난(18)
  미적미적(적미적의 난): 골인(18)
    후한(25--220)
  후한(후한의 성립): 뇌물(25)
    황건적의 난(184)
  흥건(황건적의 난) 했던: 그 여름(184)

    진(B.C.221--B.C.206)
  전국 7웅 가운데 가장 문명이 뒤떨어진 나라였던 진은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사회 제도를 
개혁함으로써, B.C.221년 춘추 전국 시대의 오랜 혼란을 수습하고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을 
건설하였다. 진의 왕 정은 센양에 도읍한 후 스스로를 시황제라고 칭하였다.
  (암기법) 짐(진): 나눌 것(B.C.221)


    군현제도(B.C.221)
  주시대의 봉건 제도를 폐지하고 전국을 군현으로 나누어 중앙 정부에서 임명한 관료가 
통치하게 하는 중앙 집권적 지방 행정제도.
  전국을 36군으로 나누고 군 아래는 몇 개의 현을 설치하여 황제가 임명한 관리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군에는 군수, 현에는 현령, 현위를 두었다.
  (암기법) 현재(군현제도): 난 누구(B.C.221)?

    만리장성(B.C.215)
  임조에서 요동에 이르기까지 2700Km에 달하는 흉노 방어 성책.
  춘추 시대 이래의 각 제후들이 쌓은 토성을 진시황이 연결하여 완성한 것으로, 현존하는 
명대 장성보다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암기법) 만리(만리장성)라도 마중: 나가마(B.C.215)

    한(B.C.202--A.D.8)
  천하를 통일한 진은 불과 15년 만에 멸망하고, 진에 반대하던 평민 출신의 유방과 귀족 
출신의 항우가 7년간에 걸쳐 자웅을 겨루다가, 유방이 항우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하여 한을 
건국하였다.
  (암기법) 한(한) 많은: 노처녀(B.C.202)

    군국제도(B.C.202)
  한 고조가 실시한 지방 행정 제도로서, 주의 봉건 제도와 진의 군현제를 절충한 것이다.
  고조는 진의 성급한 통일 정책의 실패를 거울 삼아, 창안 부근에만 군헌을 두어 직접 
통치하고 나머지 지역은 친척이나 공신을 제후로 봉하여 통치하였다.
  (암기법) 국군(군국제도) 애인: 노처녀(B.C.202)

    비단길 (B.C.139)
  B.C.139년--B.C.126년에 걸쳐 한 무제의 명을 받아 장건이 개척한 길.
  무제는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장건을 서역에 파견하여 대월지국과 손을 잡으려 하였다. 이에 
따라 동서간에 교통로가 열렸으니, 이를 비단길이라 하였다.
  (암기법) 비단(비단길 개척) 이: 곱다지(B.C.139)?

    균수법(B.C.115)
  균수법은 정부가 각 지방에서 많이 생산되는 물자를 세로 거둬들여 부족한 지방에 
판매함으로써 물자의 원활한 유통과 국가의 이익을 꾀하는 지방간의 가격차 조절법이다.
  (암기법) 수법(균수법):공개 마(B.C.115)

    종이의 발명(B.C.105)
  제지법이 발명된 것은 후한 때의 일로, 목종때, 환관 채륜이 동물의 가죽, 마, 포 등을 
재료로 제조하였다. 이전에는 목간이나 비단에 글씨를 써서 그 부피와 비용에 불편이 
많았으나, 종이의 발명으로 손쉽게 서적을 공급하여 지식 보급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제지법은 8세기 이후 이슬람을 거쳐 유럽에 전해져 유럽 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이러한 제지술은 화약, 나침반, 인쇄술의 발명과 함께 중국의 4대 발명 중의 하나이다.
  (암기법) 종이(종이의 발명) 로: 공책 맴(B.C.105)

    사마천의(사기)(B.C.91)
  전한의 사마천이 중국의 전설 시대로부터 한무제 때까지의 사실을 기록한 것. 황제의 업적을 
중심으로 하는 본기와 개인의 전기인 열전으로 나눈 기전체로 쓰였는데, 이 형식이 그 후 중국 
정사의 형식으로 굳어졌다.
  (암기법) 사기(사마천의 (사기)??)범: 접근(B.C.91)

    신(8--23)
  중국의 전한 말기 외척과 환관의 세력 다툼을 틈타 외척인 왕망이 세운 나라.
  토지의 국유화, 노비 매매 금지 등의 개혁과 주대의 부활을 꾀하는 복고 정책을 폈으나, 
호족이 반발을 일으켜 곧 망하였다.
  (암기법) 신(신): 인(8)

    적미적의 난(18)
  산뚱 반도에서 번숭이라는 사람이 농민을 이끌고 일으킨 난으로, 반도가 눈썹을 붉게 
염색하여 표시로 삼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들은 창안을 점령하여 10년간에 걸쳐 화북 
각지를 약탈하다가, 후한의 광무제에 의해 평정되었다.
  (암기법) 미적미적(적미적의 난): 골인(18)

    후 한(25--220)
  왕망의 찬탈 이후, 각처의 귀족, 호족의 반항이 극심해졌으며, 특히 산뚱의 적미적의 난으로 
사회는 더욱 혼란해졌다.
  이 때 하남에서 일어난 유수의 호족 집단이 호족 계급의 여망과 민중의 한실 부흥의 세론을 
업고 신을 멸한 후 뤄양에 도읍하여 나라를 세우니, 이가 곧 후한의 광무제이다.
  그 후 1세기 후반은 후한의 전성기로, 흉노를 치고 서역 경영에 힘쓰는 등 중흥기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암기법) 후한(후한): 뇌물(25)


    황건적의 난(184)
  후한 말, 내정의 문란과 생활고에 시달린 민중은 혁명 사상을 주장하며 장래의 생활에 
희망을 주는 신흥 종교인 태평도에 가입하는 자가 많았는데, 교주 장각은 교세가 확장되자 
이러한 형세를 이용하여 황건을 표시로 해서 난을 일으켰다. 황건적이란 태평도를 중심으로 한 
비밀 신앙 단체인데, 이들이 일으킨 난이 후한 멸망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황건적은 머리에 누런 수건을 둘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암기법) 흥건(황건적의 난)했던: 그 여름(184)

     위, 진, 남북조 시대
    위(220--265)
  위(위) 쪽으로: 날 납치(220)
    촉(221--263)
  촉(촉)박하지 않고: 늘 느긋(221)
    오(222--280)
  오(오)!: 니나노(222)
    구품 중정법(220)
  증정품(구품 중정법): 늘 넘침(220)
    청담사상(265)
  첨단(청담사상) 기술: 늘 비밀(265)
    서진(265--316)
  부서진(서진): 내 보물(265)
    점전법(280)
  점점(점전법): 뉘우침(280)
    5호16국(316--439)
  16개국(5호16국): 다 개방(316)
    동진(317--420)
  동지(동진)들: 다 고생(317)
    도교 성립(431)
  도교(도교 성립): 로 단결(431)
    남북조 시대(438--589)
  남북(남북조 시대)축구: 라디오로(438)
    균전제(485)
  세균전(균전제) 이긴: 루이 만세(485)
    삼장제(486)
  삼장(삼장제)법사: 라이벌(486)
    문선(521)
  무서워(문선): 못 나감(521)
    서위의 부병제(550)
  서부(서위의 부병제): 말마차(550)

    위(220--265)
  건국자는 조비.
  조비의 아버지 조조는 후한 때에 정치적 실권을 독차지하였고, 위왕에 봉하여져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죽자 뒤를 이은 조비는 후한의 헌제를 강박하여 왕위를 빼앗고 위를 
세워 뤄양에 도읍하였다.
  위는 3국 중에서 가장 강력하였으나, 265년 사마염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암기법) 위(위) 쪽으로: 날 납치(220)

    촉(221--263)
    촉(221--263)
  촉한이라고도 한다.
  유비가 제갈양 등 명신의 도움을 받아 쓰촨 지방에 세운 나라인데, 도읍을 성도에 두었다. 
촉은 3국 중 가장 약하였으나, 위, 오와 더불어 천하 3분에 성공하였다.
  한의 정통을 이어받았다고 자부하며 명신 제강양의 보좌로 국력을 배양한 촉은 오장원 
전투에서 제갈양이 병으로 죽은 뒤 세력이 기울었다.
  (암기법) 촉(촉) 박하지 않고: 늘 느긋(221)

    오(222--280)
  건국자는 손권.
  강남에 자리 잡은 손권은 촉의 유비와 합세, 적벽 싸움에서 조조의 군대를 격파하여 3국의 
정립을 확립시켰다.
  220년 위나라가 흥하자 처음에는 이에 따랐으나, 222년 스스로 제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오라 하고 건업(지금의 남경) 에 도읍하였다.
  (암기법) 오(오) !: 니나노(

    구 품 중정법(220)
  3국 시대의 위에서부터 남북조 시대까지 시행된 관리 추천 임명제로서, 위나라의 대신 
진군이 창안하였다.
  이는 북위의 효문제 때 크게 발달하였는데, 중정관이 관할 지역내의 재능있고 우수한 인물을 
선발하여 중앙에 천거하면, 중앙에서는 그의 향품에 해당하는 관품을 주는 제도이다.
  후에 중정관이 부패하고 타락한 호족들을 추천하는 모순이 생겨 특권적 문벌 귀족을 
산출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암기법) 증정픔(구품 중정법): 늘 넘치(220)

    청담사상
  원래 후한말의 정치 도덕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였다. 노장 사상의 영향으로 철학적 
담론으로 발전하였다.
  죽림 7현 유명하며, 그들은 속세를 떠나 개인주의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노장 사상에 
심취하여, 권력에 결탁한 위선적 사회 풍조를 풍자, 비판하였다.
  (암기법) 첨단(청담사상) 기술: 늘 비밀(265)

    서진(265--316)
  3국 가운데 가장 강했던 위가 촉을 병합한 다음, 위의 권신인 사마염이 왕위를 빼앗아 진을 
세워 다시 중국을 통일하였다. 시황제로 잘 알려진 진이나 남조의 진과 구별해야 한다. 5호의 
침입으로 강남으로 이동한 동진에 대하여 서진이라고도 한다. 선비족이 세운 서진과도 
구별해야 한다.
  (암기법) 부서진(서진): 내 보물(265)

    점전법(280)
  서진의 무제에 의하여 시작된 토지 제도로서, 점전이란 한전의 뜻으로 토지 소유의 최대 
한도를 의미하며, 대토지 소유자의 토지 겸병을 제한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 제도는 농민에게 과중한 세와 부역만을 부과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암기법) 점점(점전법): 뉘우침(280)

    5호 16국(316--439)
  중국을 통일한 진은 얼마 못 가서 왕족간의 세력 다툼과 5호의 침입을 받아 수도 뤄양이 
함락되고 멸망하였다.
  5호는 진나라 8왕의 난을 틈타 중원으로 밀려 들어온 선비, 흉노, 강, 갈, 저의 다섯 유목 
민족을 말한다. 그 후, 화북은 5호의 활동 무대가 되면서 16국이 번갈아 흥망하는 이른바 5호 
16국 시대가 되었다.
  (암기법) 16개국(5호 16국): 다 개방(316)

    동진(317--420)
  진이 5호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자(316), 진의 왕족인 사마예와 그 일족이 양쯔강 이남으로 
이동, 건강(지금의 난징) 에 도읍을 정하고 동진을 세웠다.
  이 때까지 경시되었던 강남은 5호의 침입을 피해 화북 지방의 부호와 지식층이 대거 
남하함으로써 동진 이래 급속히 개발되어 중국의 문화와 경제가 강남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암기법) 동지(동진) 들: 다 고생(317)

    도교성립(431)
  후한말에 장능의 오두미도와 장각의 태평도 등의 통속 종교가 신선술과 결부되어 점차 
종교적인 형식을 갖추어 가다가, 구겸지에 의하여 이들 종교가 정돈되어 불교에 견줄 수 있는 
도교가 성립되었다.
  도교는 노장 사상을 바탕으로 불교의 교리와 경문에 영향을 받았고,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고 
재난에서 벗어나려는 현세 구복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심미적 안목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암기법) 도교(도표 성립): 로 단결(431)

    남북조 시대(438--589)
  화북의 혼란(5호 16국 시대) 은  선비족의 탁발규가 북위(또는 후위: 386--534) 를 세워 
수습되었고, 강남에서도 이 무렵 동진이 무너지고 송이 섰다.
  이때로부터 수의 통일까지 민족이 다른 왕조가 남북으로 나뉘어 대립하던 시기를 남북조 
시대라 부른다.
  (암기법) 남북(남북조 시대) 축구 중계: 라디오로(438)

    균전제(485)
  북위의 효문제가 토지를 일정한 기준에 따라 농민에게 나누어 주어 호족들의 대토지 소유를 
억제하고, 자작농을 길러 황폐한 농업 생산력을 회복시키며, 조세의 징수를 확보하기 위하여 
실시한 제도.
  정남에게 일정한 토지를 나누어 주되, 일부는 상속할 수 있게 하였고, 대부분은 노전이라 
하여 받은 자가 죽으면 다시 국가에 반납하도록 하였다.
  이 제도의 목적은 토지를 균등하게 나누어 줌으로써 백성을 직접 지배하는 데 있었다.
  (암기법) 세균전(균전제) 이긴: 루이 만세(485)

    삼장제(486)
  486년부터 589년까지 북위에서 행하여지던 촌락 통제 기구인 인보 제도.
  이 제도는 촌락의 조직을 인, 리, 당 3계층으로 편성, 조직하고 각 계층마다 장을 두었던 
데서 삼장제라 한다. 통치자는 이 제도를 통하여 호적 조사, 조세 징수 등을 손쉽게 행할 수 
있었다.
  (암기법) 삼장(삼장제)법사: 라이벌(486)

    문선(521)
  남북조 시대에 양나라의 소명태자가 편수한 시문선집.
  춘추 시대 말부터 양에 이르기까지의 명문장을 모은 것으로 전체 30권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문학 작품으로서도 중요할 뿐 아니라, 역사학의 자료로서도 가치있는 글이 많이 들어 
있어 남북조 문화를 대표한다.
  (암기법) 무서워(문선): 못 나감(521)

    서위의 부병제(550)
  서위에서 처음 시작되어 북주, 수를 거쳐 당에 이르러 완성된 병제로서, 정남 3인 중 1인을 
부병으로 하여 농번기에는 농사를 짓도록 하고, 농한기에는 군사 훈련을 받게 하며, 
비상시에는 징발하는 병농 일치를 꾀한 제도이다.
  (암기법) 서부(서위의 부병제): 말마차(550)

     수의 사회, 문화
    수의 건국(589)
  수(수의 건국가): 매우 적다(589)
    선거제 실시(6C)
  선거(선거제): 붐(6C)
    대운하 건설(605)
  은하(대운하 건설) 수에: 별 충만(605)
    수의 멸망(618)
  수가 적다(수의 멸망): 보강을(618)

    수의 건국(589)
  후한의 멸망 이래 370년간 분열되었던 중국 대륙을 통일한 사람은 수의 양견이었다. 북주의 
외척인 양견은 문제로서 제위에 올라 장안에 도읍하여 국호를 수라 하고, 589년에는 남조의 
진을 쳐서 중국을 재통일하였다.
  수는 국내를 정비하는 한편, 밖으로는 동돌궐을 누르고 비단길을 통한 동서의 교역으로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도 드물게 보는 풍요를 누리다가 30년 만에 멸망하였다(618).
  (암기법) 수(수) 가: 매우 적다(589)

    선거제 실시(6C)
  수 문제는 종래의 추천제였던 9품 중정법을 페지하고 선거 제도(송대에 와서 과거제라 부름) 
를 실시, 청말에 이르기까지 약 1300년간 시행되었다. 실력에 의해 관계에 진출할 기회가 
넓어져 계층간의 이동의 폭이 넓어졌고, 또한 황제권을 강화하여 중앙 집권적 관료 체제 
강화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암기법) 선거(선거제): 붐(6C)

    대운하 건설(605)
  수의 양제 때 베이징과 항저우를 연결하는 대운하를 건설하였다.
  양제는 정치, 군사적 중심지인 화북 지방과 경제력이 풍부한 강남 지방과의 연결을 위해 
대운하를 건설하였는데, 이 대운하는 물자의 교류, 남북 교통로의 발달, 산업 개발의 촉진에 
이바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앙 집권의 강화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암기법) 은하(대운하 건설) 수에: 별 충만(605)

    수의 멸망(618)

     당의 사회, 문화
    당의 건국(618)
  당(당의 건국) 에: 보고용(618)
    3성6부(618)
  삼성(3성6부) 전자: 반가워(618)
    조, 용, 조(624)
  조용히(조, 용, 조): 비 내림(624)
    정관의 치(626)
  정치(정관의 치) 꾼: 밥 낭비(626)
    당의 율령(637)
  울렁(당의 율령) 대는: 베드 신(637)
    절도사(710)
  절도범(절도사): 사고 침(710)
    개원의 치(712)
  개원(개원의 치): 상가내(712)
    탈라스 전투(751)
  탈 나서(탈라스 전투): 속만 고생(751)
    안사의 난(755)
  안사(안사의 난)고: 소 밀매(755)
    양세법(780)
  세법(양세법): 새 원칙(780)
    황소의 난(875)
  황소(황소의 난) 는: 음식물(875)
    당의 멸망(907)
  당의 해산(당의 멸망): 정치술(907)

    당의 건국(618)
    당(618--907)
  수 말기의 정치적 혼란과 농민의 반란은 이연, 이세민 부자에 의해 당이 건국되면서 
수습되었다.
  산서의 호족으로 북주와 수의 장군이었던 이연은 수 말의 혼란기를 이용하여 장안을 
점령하고 있다가, 자신이 옹립한 수의 공제로부터 선양 형식으로 제위를 이어받아 스스로 당 
고조가 되었다.
  당은 안사의 난(755--763) 을 계기로 국력이 급속히 쇠퇴하였다. 안사의 난 이후 기본 
제도의 붕괴, 절도사의 횡포로 인한 재정의 곤궁, 환관의 전횡과 당쟁, 외적의 침입 등으로 
시달리던 중 대규모 농민 반란인 황소의 난(875--884) 이 일어났고, 이 난을 평정한 주전충이 
후량을 건국(907) 함으로써 당나라는 289년 만에 멸망하였다.
  (암기법) 당(당) 에: 보고용(618)

    3성6부(618)
  당의 중앙 통치 제도.
  왕의 조칙을 초안하는 중서성, 조칙을 심의하는 문하성, 심의 결정된 정책을 시행하는 
상서성이 있고, 상서성 산하에 정사를 분담하는 이, 호, 예, 병, 형, 공의 6부가 있었다.
  이 제도는 중국 주변 여러 나라 정치 제도의 기본을 이루었으나, 그 후 중국에서는 황제의 
독재권의 강화에 따라 3성의 기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암기법) 삼성(3성6부) 전자: 반가워(618)

    조, 용, 조(624)
  624년부터 실시된 당의 세제로, 정남 1인에게 조로 곡식 2섬, 용으로 연 20일의 의무 노동, 
조로 삼베, 비단 등 지방 특산물을 징수하였다.
  그러나 이 제도는 안사의 난 이후에 재산의 액수에 따른 금납화를 규정한 양세법으로 
바뀌었다.
  (암기법) 조용히(조, 용, 조): 비 내림(624)

    정관의 치(626)
  당 태종의 치세를 정관의 치 한다.
  제2대 태종 이세민은 연호를 정관이라 하고, 명신 방현령, 두여회, 이적 등의 보좌를 받아 
내정 안정, 통치 체제의 중앙 집권화를 위한 제도적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의 치세는 후세에까지 정치의 귀감이 되었다. 여러 신하와 더불어 정치를 의논한 내용을 
모은 정관정요는 중국 뿐 아니라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도 시정의 좋은 참고가 되기도 한다.
  (암기법) 정치(정관의 치) 꾼: 밥 낭비(626)

    당의 율령(637)
  당의 통치 조직과 작용에 관한 기존 법령으로, 우선 최상의 형법인 율, 행정 법규인 령, 
법의 개정 및 보충적 내용인 격, 그리고 최하의 시행 세칙인 식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당률은 이후 중국을 포함하여 동 아시아 여러 나라의 기본적인 통치 이념으로 자리를 
잡았다.
  (암기법) 울렁(당의 율령) 대는: 베드 신(637)

    절도사(710)
  당과 5대의 군직으로, 번진이라고도 한다.
  8세기초 부병제가 이완되자,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국경의 요지가 배치한 모병 군단의 
사령관을 말한다.
  710년 하서 절도사가 설치된 이래 10개 절도사가 설치되었으며, 절도사는 민정, 군정, 
재정의 3권을 장악하여 강대한 권력을 발휘하였다. 평로, 범양, 하동의 3절도사를 겸한 
안록산도 이러한 강대한 권력을 배경으로 당에 반항할 수 있었고, 이러한 절도사의 발호와 
절도사간의 대립 항쟁은 당의 멸망 원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암기법) 저도범(절도사): 사고 침(710)

    개원의 치(712)
  당 현종의 치세를 말한다.
  제위에 오른 현종은 불필요한 관리들을 정리하는 등 내정을 정비하는 한편, 병제, 세제 등을 
개혁하여 중앙의 정치를 바로잡고, 변경 요지에 절도사를 증가시켜 북방 민족의 침입에 
대처하였으며, 학문과 예술도 크게 장려하였다. 그 결과, 개원의 치라는 귀족 정치의 극성기를 
이룩하였다.
  (암기법) 개원(개원의 치): 상가내(712)

    탈라스 전투(751)
  751년에 당과 이슬람 사이에 일어난 전쟁
  당나라 장군 고선지는 이슬람 제국군과 중앙 아시아의 탈라스 하반에서 충돌하였으나, 
당군의 대패로 끝나니, 당의 서방에 대한 세력이 현저히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암기법) 탈 나서(탈라스 전투): 속만 고생(751)

    안사의 난(755)
  안사의 난은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을 합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안록산은 이란계 출신으로, 현종 때에 평로, 범양, 하동의 3절도사를 겸하였던 직업 
군인이었다.
  당시 현종의 애첩 양귀비의 일족인 양국충이 전횡하므로, 안록산은 거란군을 이끌고 날리를 
일으켜 뤄양, 창안을 점령한 후, 대연이라 국호를 바꾸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난이 9년간 
계속되는 동안, 당의 기본 틀이 무너지게 되었다.
  (암기법) 안 사(안사의 난): 소 밀매(755)

    양세법(780)
  8세기말 덕종 때 양염의 건의에 따라 시행한 세법으로, 조, 용, 조 대신에 토지 면적에 따라 
지세를, 재산의 다과에 따라 호세를 징수하였다. 여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징수하였으므로 
양세법이라 하였다. 이로써 여러 종목의 세제가 통합되었으며, 조세의 금납화가 시작되었고, 
과세율이 재산에 따라 정해지게 되었다.
  양세법은 명대에 일조편법이 제정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암기법) 세법(양세법): 새 원칙(780)

    황소의 난(875)
  당 힁종 초년(875) 에 산뚱성에서 일어난 대규모 농민 반란.
  정부의 전매 제도 강화에 저항하여 소금 밀매상인 왕선지와 황소가 난을 일으켜 뤄양과 
창안을 점령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라 국호를 대제라 하였다.
  궁한 농민과 하남, 하북의 돌궐이 참여하여 기세를 떨쳤으나, 884년 평정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당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반란 진압에 활약했던 번진 세력이 강화되어 
5대 10국의 혼란 시대가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다.
  (암기법) 황소(황소의 난): 음식물(875)

    당의 멸망(907)

     송의 사회, 문화
    송의 건국(북송) (906)
  북송선(북송의 건국): 제법 찼네(960)
    사대부(960)
  사부(사대부) 에게: 절 바침(960)
    전연의 맹(1004)
  연이(전연의 맹): 격침 추락(1004)
    왕안석의 변법(1069)
  응석(왕안석의 변법): 고쳐보자(1069)
    정강의 변(1127)
  정강(정강의 변) 이: 길고 날씬(1127)
    성리학(1160)
  성악(성리학) 회: 가끔 방청(1160)
    북송의 멸망(1127)
  북송선 침몰(북송의 멸망): 결국 눈속임(1127)
    남송(1127--1279)
  남성(남송) 은: 기계 농사(1127)

    송의 건국(북송) (960)
    사대부(960)
  당대의 문벌 중심 사회가 문치주의에 입각한 관료 사회로 전환되면서 사대부라는 새로운 
계층이 형성되었다.
  송 이전의 귀족 사회에 있어서는 출세의 조건으로 문벌이 중요시 되었으나, 송대 이후의 
사대부 사회에서는 신분보다 관료로서의 능력이 중요시되었다.
  송대의 사대부는 지주(대상인), 관료, 독서인이라는 3위 일체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데, 
사대부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지식인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형세호의 자제로서 부유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시문과 유교적 교양을 갖춘 독서인으로 과거에 합격하여 관료가 되었다.
  (암기법) 사부(사대부) 에게: 절 바침(960)

    전연의 맹(1004)
  중국의 송나라가 거란의 무력 앞에 굴복한 맹약으로, 그 결과 송은 거란으로부터 호형의 
의례적 대접을 받았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거란에게 매년 비단 20만 필, 은 10만 량을 바쳐야 
되는 관계였으며, 이것이 100여 년 지속되었다.
  (암기법) 연이(전연의 맹): 격침 추락(1004)

    왕안석의 변법(1069)
  왕안석은 중국 송대의 정치가로서, 신종이 즉위하자 기용되어 여러 가지 획기적인 변법을 
실시하였다.
  개혁의 목적은 농민과 중소 상인의 육성을 통해 민생 안정을 이룩하여 국가 재정의 재건과 
경제 안정, 국방력 강화를 도모하려는 것이었다.
  변법의 내용으로는 청묘법, 시역법, 균수법, 묘역법, 보갑법, 보마법 등이 있다.
  (암기법) 응석(왕안석의 변법): 고쳐보자(1069)

    정강의 변(1127)
  북송이 금나라에 의해 멸망된 사건.
  요를 멸망시킨 금은 송의 카이펑을 함락시키고(1126), 이듬해 휘종, 흠종 이하 3천 여명을 
포로로 하여 많은 재물을 약탈해서 만주로 가지고 가니, 송 왕조는 일단 멸망하였다.
  그 때가 정강 원년(1127)이었으므로, 이 사건을 정강의 변 혹은 정강의 난이라 한다.
  (암기법) 정강(정강의 변) 이: 길고 날씬(1127)

    성리학(1160)
  성리학은 주자학, 정주학, 송학, 이학 등으로 일컬어지는데. 북송의 주돈이, 정호, 정이를 
거쳐 남송의 주희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이는 이(원리)와 기(물질) 에 대한 이원 철학이다. 이기론은 우주를 설명하고, 인간의 윤리, 
도덕을 논하며, 학문 수양을 통한 정도를 설명하는 기초가 된다. 특히 성리학에서는 
대의명분을 강조하여 화이의 구별과 왕조의 정통을 명백히 하고, 군신, 부자, 장유, 부부의 
적절한 도덕을 강조하여 사대부의 환영을 받았다.
  (암기법) 성악(성리학) 회: 가끔 방청(1160)

    북송의 멸망(1127)

    남송(1127--1279)

     금, 몽고, 원
    금의 건국(1115)
  금(금의 건국) 은: 거기 가면(1115)
    맹안모극 제도(1115)
  맹인(맹안 모극 제도): 공격 금물(1115)
    교초(1154)
  고초(교초) 당해: 결국 몰락(1154)
    몽고 제국(1206)
  몽고(몽고 제국) 간장: 국내 추방(1206)
    오고타이 한국(1224)
  오토바이(오고타이 한국): 터널로(1224)
    일 한국(1258)
  일(일 한국): 끝내면 와(1258)
    원 제국(1271)
  원죄(왼제국): 그냥 생김(1271)
    홍건적의 난(1351)
  홍건(홍건적) 한: 계단 물기(1351)
    원의 멸망(1368)
  원망(원의 멸망) 많은: 건달 부인(1368)
    티무르 제국(1370)
  무르(티무르 제국) 익은: 피서철(1370)

    금의 건국(1115)
  여전은 본래 동부 만주 지방에서 반농 반목을 하던 퉁구스 계의 민족이었다. 처음에는 
거란과 고려에 복속되어 있었는데, 11세기말부터 강성해지면서 완옌부의 아구타(금의 태조) 가 
제위에 올라 금을 건국하였다.
  (암기법) 금(금의 건국) 은: 거기 가면(1115)

    맹안모극 제도(1115)
  아구타가 고유의 부족 조직을 기초로 하여 만든 행정, 군사 조직.
  약 300호를 1모극, 10모극을 1맹안으로 편성하고, 1모극에서 약 100명을 징집하여 군대를 
조직하였다. 평상시에는 수렵, 농경에 종사하고, 전시에는 전 장정을 군대에 종군시켰다. 
이로써 여진족 고유의 기풍이 유지되었다.
  (암기법) 맹인(맹안 모극 제도): 공격 금물(1115)

    교초(1154)
  중국의 금과 원 두 왕조의 지폐를 교초라고 부렀다. 
  중국의 지폐는 북송 시대에 발생한 것인데, 금은 화북 지방을 점거(1154) 한 후, 송의 예에 
따라 지폐를 발행하여 교초라 부렀다.
  원도 금의 전례에 따라 교초를 발행하였다. 원의 교초 가운데 중통원보와 지원통행보초가 
가장 유명하며, 장기간에 걸쳐 발행 유통되었다.
  (암기법) 고초(교초) 당해: 결국 몰락(1154)

    몽고제국(1206)
  몽고 고원 동부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고의 여러 부족은 12세기 중엽까지는 요와 금의 
지배하에 이었다.
  12세기말 테무친이 초원 지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강력한 정치, 군사 조직으로 국가를 
세우고(1206), 쿠릴타이(부족장들의 대집회) 에서 칸(군주) 의 지위에 올라 칭기즈칸(태조)의 
칭호를 받았다.
  (암기법) 몽고(몽고 제국) 간장: 국내 추방(1206)

    오고타이 한국(1224)
  서북 몽고 지역에 세워진 4한국 중의 하나로, 가장 먼저 세워졌다.
  가장 전형적인 몽고의 법통과 특색을 지닌 오고타이 한국은 서북 몽고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여 전 몽고 제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원나라와 갈등을 빚다가, 13010년 차카타이 
한국에 의해 합병되었다.
  (암기법) 오토바이(오고타이 한국): 터널로(1224)

    일한국(1258)
  서아시아 지역에 세운 4한국 중의 하나.
  몽케 칸(헌종) 의 동생 홀라구는 아빠스 왕조를 정복하고 서아시아 일대를 일 한국을 
건설하였다(1258).
  이슬람 문화의 옹호자로서 몽고, 페르시아 문화의 황금기를 장식하여 수학, 지리학, 역사학 
등 제방면의 학문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티무르 제국에 의해 ㅁ아 당하였다.
  (암기법) 일(일 한국): 끝내면 와(1258)

    원 제국(1271)

    홍건적의 난(1351)
  14세기 중엽 사회 불안이 점점 심해지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니, 이 가운데 미륵 신앙을 
믿던 백련교도들이 홍건적의 난을 일으켰다. 백련교란 남송 초에 민간 사이에서 일어난 
미륵불을 믿던 불교적 종교 결사이다.
  원말에 한산동이 미륵불의 환생을 자처하여 많은 신도를 모았는데, 1351년 황하 수리를 위한 
역부 징발 문제로 민심이 동요한 틈을 타서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붉은 두건을 두르고 
있었으므로 원으로부터 홍건적이라고 불리었고, 원군의 추격을 받아 그 일부가 고려에 침입해 
오기도 하였다.
  (암기법) 홍건(홍건적의 난) 한: 계단 물기(1351)

    원의 멸망(1368)
 
    티무르 제국(1370)
  몽고 차카타이 한국의 티무르가 사마르칸트를 서울로 정하고 서아시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제국을 세웠다. 몽고제국의 재건을 목료로 하였으며, 번영기에는 동서 무역을 주도하였고, 
이슬람 문화 보호자로 자처하면서 찬란한 궁정 문화를 이룩하였다.
  (암기법) 무르(티무르 제국) 익은: 피서철(1370)

     명의 사회, 문화
    명의 건국(1368)
  밝은(명) 날: 꼭 달밤에(1368)
    이갑제(1381)
  이젠(이갑제): 감독인기(1381)
    부역황책(1381)
  부역(부역황책): 감독엄격(1381)
    어린도책(1388)
  어린이(어린도책) 는: 포옹을(1388)
    신사(1389)
  신사(신사) 라면: 품위좀(1389)
    정난의 변(1399)
  장난(정난의 변) 으로: 편지질(1399)
    정화의 남해원정(1405--1433)
  정화(정화의 만해원정) 된: 하천물(1405)
    토목의 변(1449)
  토목(토목의 변) 과: 훈련중(1449)
    일조편법(1513)
  편법(일조편법): 그만 기대(1513)
    곤여 만국전도(1602)
  피곤한(곤여 만국전도): 감방 첫날(1602)
    명의 멸망(1644)
  명망(명의 멸망) 있어: 기분럴럴(1644)

    명의 건국(1368)

    이갑제(1381)
  명대의 향촌 조직.
  부역의 의무가 있는 110호를 1리로 하되, 그 중 부유한 10호를 이장호, 나머지 100호를 
갑수호라 하여 10갑으로 나누었으며, 1갑을 10호로 편성하였다. 이장 1명과 갑수 10명이 1년을 
교대로 이갑의 일을 맡아 보았는데, 이 제도 목적은 조세 징수, 치안 유지 및 주민 통제를 
위한 교화의 철저에 이었다.
  명나라 중기 이후에는 부역 부담의 증가, 토지 소유의 집중화 드으로 이갑제의 실시 효과가 
점차 떨어지게 되었다.
  (암기법) 이젠(이갑제): 감독인기(1381)

    부역황첵(1381)
  명대에 시행된 일종의 호적.
  1381년 처음으로 작성되어 종전의 호첩과 바뀌었다. 또 호적임과 동시에 저부, 요역을 
할당하는 원부가 되므로 부역황책이라고 한다.
  명 1대 사이에 27회 작성되었고, 청도 이를 이어 받았다.
  (암기법) 부역(부역황책): 감독엄격(1381)

    어린도책(1388)
  명대부터 조세 징수의 기초 자료로 만들어진 초지 대사으로서, 책머리의 총도에서 토지를 
세분한 모양이 물고기의 비늘 같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여기에는 각 토지의 자호 또는 위치, 지목, 면적, 소유자 및 전호의 성명 등을 기입하였다.
  (암기법) 어린이(어린도책) 는: 포옹을(1388)

    신사(1389)
  명, 청 시대의 새로운 지배층.
  명대에 과거제가 부활되고 과거 준비를 위한 학교 제도가 부활되면서, 학교의 학생인 생원, 
국자감의 학생인 감생, 향시에 통과한 거인 및 벼슬을 하지 않은 사인이 사회 신분화되어, 
현직 또는 은퇴한 관료와 같이 지방 저치에 큰 발언권을 갖게 되었다. 관인층(향신) 및 생원, 
감생, 거인, 사인을 일괄해서 신사라 한다.
  이들은 일반 평민과 엄격히 구분되어 의례상, 조례상의 특권을 가졌으며, 향리의 이해를 
대변하여 지방관과 싸우기도 하고, 반대로 지방관과 결탁하여 평민을 억압하기도 하였다.
  암기법 신사(신사) 하면:  품위좀(1389)

    정난의 변(1399)
  태조는 통일 사업을 완성한 후 금릉은 그대로 두고 제2자를 진완, 제4자를 연왕을 정하여 
북방을 지키게 하였다.
  그 후 태조가 죽고 장손인 혜제가 자신의 지위를 강화시키려다 도리어 연왕에게 
피살되었으니, 이것이 정난의 변이며, 이로써 연왕이 성조 영락제가 되었다.
  (암기법) 장난(정난의 변) 으로: 편지질(1399)

    정화의 남해원정(1405--1433)
  인도양은 물론 이슬람 세계에까지 관심을 갖고 있던 영락제는 정화로 하여금 7번에 걸쳐 
동남 아시아로부터 인도와 아프리카의 동해안에까지 원정케 하였다.
  남해 원정의 결과, 명의 위용에 압도된 남해의 30여국이 명에 조공사절을 보내게 되었고, 
남방에 대한 중국인들의 지식이 늘어나 화교 진출의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성조(영락제) 
의 대외 정복은 폐쇄적이고 중국 본위였던 쇄국주의적 대외 관계를 크게 수정식킴으로써 
중국인의 해외 진출을 자극하였다.
  약 30년에 걸친 정화의 해상 원정은 포르투갈인보다 반 세기나 앞선 해상로의 개척이었고, 
중국인의 세계적 발전 터전이 되었다.
  (암기법) 정화(정화의 남해원정) 된: 하천물(1405)

    토목의 변(1449)
  토목보를 중심으로 벌어졌던 명국과 몽고 오이라트와의 싸움.
  명의 정통제 영종이 몽고의 오이라트부의 에센이 침입을 받고 환관 왕진의 무모한 강경책에 
이끌려 친정군을 이끌고 나섰다가, 토목보에서 오이라트 군에게 거의 전멸당하고 영종은 
포로가 되어 북바을 납치되었다.
  (암기법) 토목(토목의 변)과: 훈련중(1449)

    일조편법(1513)
  명나라 신종 때의 재상 장거정의 개혁에 따라 여러 가지 세목을 지세와 정세(인두세)의 둘로 
나누어 은으로 납부케 한 제도이다.
  세리의 중간 착취를 배제하고 수취 사무를 간소화하기 위해 조세와 부역을 통합하여 
납세자가 직접 은으로 납부하게 하였다.(1513년 세종 10년).
  이것은 복잡한 세제를 간소화하여 당시의 사회적, 경제적 조건의 변화에 대응하고, 국가의 
조세 수입을 확보하려 한 것이었다. 강남 지방에 먼저 시시하고, 차츰 화북 지방으로 
확대했다.
  (암기법) 편법(일조편법) 은: 그만 기대(1513)

    곤여 만국전도(1602)
  명대인 1602년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교단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베이징에서 간행한 세계 
지도.
  이 지도는 한자로 기입된 최초의 과학적인 세계 지도이다. 전 세게를 타원형 지도로 
나타냈고, 중국을 도면의 중앙에 놓았다.
  (암기법) 피곤한(곤여 만국전도): 감방 첫날(1602)

    명의 멸망(1644)


     청의 사회, 문화
    팔기제도(1614)
  팔게(팔기제도): 견본 골라(1614)
    청의 건국(1636)
  청(청의 건국)해봐: 그 복덕방에(1636)
    이자성의 난(1644)
  이 자식(이자성의 난) 에게: 꽁보리를(1644)
    변발령(1645)
  발령(변발령) 이: 극비라명(1645)
    삼번의 난(1673) 
  세번(삼번의 난) 만에: 기본숙달(1673)
    지정은제(1713)
  지적(지정은제) 된: 국산품(1713)
    사고전서(1772)
  사고자(사고전서): 구속수난(1772)
    베이징 조약(1860)
  베이비(베이징 조약): 고아 비참(1860)
    청, 프 전쟁(1884)
  청포도(청, 프 전쟁): 가을이래(1884)
    청, 일 전쟁(1894)
  심청이(청, 일 전쟁): 겨우 자람(1894)
    삼국간섭(1895)
  간섭(삼국간섭) 마라: 끽연재미(1895)
    청의 멸망(1911)
  청해 봤지만(청의 멸망): 거절 급급(1911)

    팔기제도(1614)
  팔기는 여진의 부족 시회를 군사 조직화한 일종의 국민 개병 제도로, 청조 정권으 
뒷받침하는 군사,행정 및 사회 조직이다.
  팔기는 기의 색깔에 따라 8개의 군단으로 나뉘었는데, 각 기는 황, 백, 홍 남의 깃발로 
테두리가 있느 것과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 편성된 사람을 기인이라 하였는데, 이들은 
각 기지에 소속된 예농들의 노동에 의해서 생활하며, 단지 군무에만 종사하는 지배계급이었다.
  (암기법) 팔게(팔기제도): 견본 골라(1614)

    청의 건국(1636)

    이자성의 난(1644)
  명말 산서 지방에서 일어난 농민 반란.
  당시의 대기근과 관리들의 가혹한 착취로 인해 일어나 지배자에 대한 반란으로 발전되었다.
  반란의 지도자인 이자성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1644년에는 시안을 도읍으로 하여 국호를 
정하고, 베이징으로 쳐들어갔다. 이에 의종이 자살하고 명 왕조가 몰락되었으나, 이자성의 
반란은 여진족이 세운 청에 의해 진압되었다.
  (암기법) 이 자식(이장성의 난)에게: 꽁보리를 (1644)

    변발령(1645)
  변발이란 남자가 머리의 주위를 깎고 중앙의 머리만을 따서 등뒬 길게 내려뜨리는 것으로, 
동북 아시아 여러 민족간에 널리 행하여졌다. 청은 베이징을 점령한 다음날 변발령을 내렸다. 
변발을 청에 대한 복종의 표시로 보았기 때문에, 중국을 통일한 뒤 다시 변발령을 내려, 
거역하는 자는 사형에 처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심한 반항을 하던 한족도 이 ㅍ습에 따르게 
되었다.
  신해 혁명 후 이 변발은 폐지되었다.
  (암기법) 발령(변발열): 극비라면(1645)

    삼번의 난(1673)
  청 초기의 반란. 삼번이란 윈난의 평서와 오삼계, 광둥의 평남왕 상가희, 푸젠의 정남왕 
경계무를 말한다.
  청은 중국 본토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청에 항복하여 협력한 오삼계, 상가희, 경계무에서 
각각 윈난, 광둥, 푸젠을 통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청이 권한을 빼앗으려 하자, 오삼계가 군사를 일으키고 다른 번들도 호응하여 한때 
그 세력이 컸으나, 오삼계가 죽자 쇠퇴해 진압되고 말았다.
  (암기법) 세 번(삼번의 난) 만에: 기본숙달(1673)

    지정은제(1713)
  청대에 실시된 세제.
  명말에 일조편법이 시행되면서부터 토지세와 부역세는 모두 은으로 내게 되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의 증가는 부역세의 징수를 어렵게 하였고, 호적면에서도 탈세를 목적으로 하는 
부실 기재 행위가 많아졌다. 이렇게 되자, 강희제 말년부터 옹정제 연간에 걸쳐 부역세를 
토지세 속에 포함시켜 받게 되었다.
  이 세법에 따라 징수되는 세금이 지정은인데, 청대 조세 수입의 중심이다.
  (암기법) 지적(지정은제) 된: 국산품(1713)

    사고전서(1772)
  중국 청나라 때 건륭제 38년에 47년에 이르는 10년 동안에 걸쳐 한인 학자 300여 명을 
동원하여 이룩한 것으로, 모두 3458부 79224군의 방대한 총서이다. 
  4고란 중국 고대의 도서 분류 방법으로, 경(유교경전), 사(역사), 자(제자백가), 집(문집) 
을 말한다.
  (암기법) 사고자(사고전서): 구속수난(1772)

    베이징 조약(1860)
  1860년 청과 러시아 사이에 맺은 조약.
  1856년 애로호 사건으로 청나라와 영국, 프랑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자, 영국, 프랑스 
양국과 청을 중재해 준 대가로 러시아는 청과 베이징 조약을 체결하여 우수리 강 동쪽의 
연해주를 얻었다.
  연해주 남단에 건설된 블라디보스톡 항은 극동 침략의 군사 기지로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암기법) 베이비(베이징 조약): 고아비참(1860)

    청, 프 전쟁(1844)
  베트남을 둘러싸고 청과 프랑스간에 일어난 전쟁.
  청은 번속국인 베트남이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자, 누차 프랑스에 항의하다가, 군대를 파견해 
프랑스 군과 ndehf하였다. 그리하여 전면 전쟁이 벌어졌는데, 프랑스가 유리하였다. 그 결과 
텐진조약이 체결되어, 베트남은 청의 번속국에서 벗어나 프랑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암기법) 청포도(청, 프 전쟁): 가을이래(1884)

    청, 일 전쟁(1894)
  조선을 둘러싸고 청과 일본간에 일어난 전쟁.
  조선에서 동학 혁명이 일어나자 덩, 일이 모두 출병하였는데, 혁명이 지압된 후에도 일본은 
철수하지 않고 조선의 내정 간섭, 지배권 확립을 꾀하고 도리어 청에 선전 포고를 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결국 일본이 승리하고, 미국의 중재로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여 매듭이 지어졌다.
  (암기법) 심청이(청, 일 전쟁): 겨우 자람(1894)

    삼국간섭(1895)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청, 일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어, 조선에서 청의 종주군을 종식시키고 중국으로부터 랴오둥 반도와 타이ㅘ을 
할양받았다.
  만주 방면으로 남하하는 러시아가 프랑스, 독일과 함께 일본의 침략 행위에 항의하자(삼국 
간섭, 1895), 일본은 삼국의 항의에 굴복하고, 랴오둥 반도를 청국에 반환하였다.
  3국 간섭으로 중국에 혜택을 준 3국은 중국으로부터 세력군을 확보하는 등 이권을 
획득하였다.
  (암기법) 간섭(삼국간섭) 마라: 끽연재미(1895)

    청의 멸망(1911)


     중국의 근대화
    아편전쟁(1840)
  아편(아편전쟁): 그 안락침으로(1840)
    태평천국운동(1850--1864)
  천국(태평천국 운동)에서: 공연 마침(1850)
    애로호 사건(1856)
  애로사항(애로호 사건): 경여마비(1865)
    양무운동(1862--1874)
  양 무리(양무운동): 과연 부농(1862)
    무술 변법(1898)
  무술(무술 변법) 영화: 군인 주연(1898)
    의화단 사건(1899)
  화단(의화단 사건) 에: 꽃이 줄줄(1899)
    신해혁명(1911.10)
  시내(신해혁명): 극장구경(1911)
    중화민국 수립(1912)
  중국집(중화민국 수립): 곧 잘 가네(1912)
    문학혁명(1915)
  문학(문학혁명) 작품: 교지 공모(1915)
    5, 4운동(1919)
  어사(5, 4운동) 옷이: 구질구질(1919)

    아편전쟁(1840)
  청과 영국 사이에 아편 금수 문제로 일어난 전쟁.
  영국의 동인도 회사는 중국과의 무역에 은을 지불하지 않기 위하여 인도산 아편을 중국에 
팔고 중국의 차를 사 가는 3각 무역을 하는데, 이로 인해 중국의 은이 유출되고 아편 흡연자가 
증가하였다. 이에 1839년 선종(도광제) 은 아편 무역에 대한 강력한 금지책을 결정하고 
임칙서를 광저우에 파견했다. 임칙서는 2만 상자의 아편을 몰수, 소각하고 영국인의 통상을 
금하는 등 강력한 조치를 취했는데, 영국은 이를 트집 자바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청은 영국의 무력에 굴복하여 난징 조약을 맺어 홍콩을 할양하고, 상하이 등 
5개 항구를 개항함으로써 개국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호혜 평등을 주장하는 열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어 중국의 반식민지화가 촉진되었다.
  (암기법) 아편(아편 전쟁): 그 안락침으로(1840)

    태평천국 운동(1850--1864)
  청나라 말기에 일어난 대규모 농민 운동.
  아편 전쟁의 패배와 청조의 부패로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홍수전은 상제회라는 비밀 결사를 
만들어, 청조 타도를 부르짖고 광서성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그는 변발, 호복을 폐지하고 
중국의 고유한 풍습에 따라 장발을 장려하였으며, 남녀의 평등을 부프짖는 한편으로, 빈부의 
차를 없애고 토지의 균등한 분배를 이상으로 하는 태평천국을 건설하였다.
  지주, 고리대의 착취에 시달린 빈농들과 청에 불만을 품은 많은 지식층이 이에 
가담하였으나, 토지 분배 정책에 놀란 향신층의 반발과 영국의 고든??이 이끄는 상승군 등의 
공격으로 태평천국 운동은 15년 만인 1864년에 평정되었다.
  (암기법) 천국(태평천국 운동)에서: 공연 마침(1850)

    애로호 사건(1856)
  1856년 청국 관헌이 영국기를 게양한애로호의 중국인 선원을 체포하고 국기를 모욕한 사건이 
원인이 되어 청국과 영국, 프랑스 간에 일어난 전쟁.
  1856년 프랑스인 선교사 살해 사건까지 곁들여 영국, 프랑스가 공동 출병하여 텐진에 육박, 
1858년 텐진 조약을 체결하고 휴전했으나, 1859년 영국, 프랑스 함대의 피격 사건을 계기로 
전투가 전개되어 베이징이 공략당하자 청이 굴복, 1860년 베이징 조약을 체결하고 종식되었다.
  (암기법) 애로사항(애로호 사건): 경영마비(1856)

    양무운동(1862--1874)
  아편 전쟁과 태평 천국의 난에 의해 청의 봉건적 지배층이 동요하게 되자, 이를 
부분적으로개혁해 가면서 유지하려던 운동.
  이홍장, 증국번 등 지주, 관료층이 주동이 되어 실리적인 서양의 공업, 병법, 과학, 통신, 
법제 등을 이식하엿으나, 주목적은 군사력의 근대화로 지주의 세력을 재무장하여 봉건 체제를 
유지하려는데 있었다.
  (암기법) 양 무리(양무운동):rhkdus 부농(1862)

    무술변법(1898)
  캉 유웨이 등 일부 지식인들에 의하여 추진된 청말의 개혁 운동.
  덕종 광서제(재위 1874--1908) 는 캉 유웨이등 개혁파를 등용하여 입헌 군주제를 도입하고, 
과거제의 P지 및 신교육 제도의 실시, 농, 공, 상업의 진흥, 언론의 자유 보장, 예산으 공포, 
신문사와 학교의 설립 등 폭넓은 개혁을 단행하였다.
  (암기법) 무술(무술 변법) 영화: 군인 주연(1898)

    의화단 사건(1899)
  청조말 화북 지방에서 일어난 배외적 농민 투쟁.
  청, 일 전쟁 이후 중국운 열강의 침략으로 국토가 분할될 위기에 몰렸으며, 값싼 외국 
상품의 유입으로 농촌 경제는 파괴되어 갔다. 특히 크리스트교의 포교는 중국인의 배외 감정을 
크게 자극하여, 이에 바뇌세, 반크리스트교 운동인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들은 부청 멸양의 기치로 외국 선교자의 살해, 크리스트 교회의 파괴, 서양인 축출 등 
제국주의 열강에 대한 최초의 대규모 저항 운동을 전개하였다.
  (암기법) 화단(의화단 사건) 에: 꽃이 줄줄(1899)

    신해혁명(1911.10)
  중국에서 청을 뒤엎고 중화민국을 수립한 혁명.
  러, 일 전쟁 이후 중국 민중의 민족 의식이 고조되어 가는 가운데, 청 정부가 철도 국유령을 
바료하여 철도를 담보로 서구 열강으로부터 차관을 얻어 재정난을 타개하려고 하자, 광등, 
후난, 쓰촨의 민중들이 맹렬한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청 정부가 쓰촨 폭동을 진압하려 하자, 1911년 10월 10일 우창에서 혁명이 일어나 1개월 
이내에 전국의 거의 모든 성으로 파급되었으며, 마침내 난징을 수도로 중화민국이 수립되었다.
  현재, 혁명이 일어난 10월 10일은 쌍십절로서 중화민국의 건국 기념일이다.
  (암기법) 시내(신해혁명): 극장 구경(1911)

    중화민국 성립(1912)
  우장에서의 근대 혁명이 승리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적으로 혁명이 파급되어 15개 
성이 차례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에 혁명단은 1912년 1월 1일 난징에서 중화민국을 
수립하고, 쑨운을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 근대적인 민주 공화정이 성립되었다.
  이로써 중국에서 2천여 년 동안 지속되어 온 전제 군주제가 청조의 12대 황제인 선통제를 
마지막으로 무너지고, 아시아 최초의 민주 공화 정부가 수립되었다.
  (암기법) 중국집(중화민국 성입): 곧잘 가네(1912)

    문학혁명(신문화 운동) (1915)
  근대 서양 사상을 도입하여 국민을 계몽하려는 지식층의 운동이었다. 신문화 운동은 베이징 
대학의 첸 투슈,후 tm 등의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저내한 계몽 운도으로, 1919년에 일어난 
5, 4운동의 사상적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고문과 고어 대신(구어) 즉 (백화)를 쓸 것을 주장하였으며, 유교, 학술, 제도 등을 
비판하고 서양의 과학과 민주주의를 채용할 것으 주장하였다.
  (암기법) 문학(문학혁명) 작품: 교지 공모(1915)

    5, 4 운동(1919)
  5, 4 운동은 베이징의 대학생을 중심으로 일어난 민족 운동이다.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운동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오늘날 중국 현대사의 출발을 여는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1919년 5월 4일, 베이징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많은 민중이 배일(일본 배척) 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대규모의 데모를 벌여 친일파의 집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이 운동은 전국으로 
번져 나가 각지에서 대학생의 데모와 노동자의 스트라이크가 잇달아 일어났으며, 일본 상품 
배척 운동까지 일어났다.
  이것은 또한 제국주의와 군벌 정치를 쓰러뜨리려는 국민 운동으로서의 큰 뜻이 담긴 
운동이기도 하였다.
  (암기법) 어사(5,4 운동) 옷이: 구질구질(1919)

     중국 혁명의 변천
    신해혁명(1911.10)
  시내(신해혁명): 극장구경(1911)
    중화민국 성립(1912.1)
  중국집(중화민국 성립): 곧잘 가네(1912)
    문학혁명(1915)
  문학(문학혁명) 작품: 교지 공모(1915)
    5, 4운동(1919)
  어사(5, 4 운동) 옷이: 구질구질(1919)
    제 1차 국공합작(1924)
  1차 합석(제1차 국공합작): 경주 노래방(1924)
    북벌개시(1926)
  벌(북벌개시) 과: 가짜 나비(1926)
    마주사변(1931)
  주사(만주사변): 가죽 따끔(1931)
    시안사건(1936)
  근시안(시안사건): 교정 당부(1936)
    제 2차 국공합작(1936)
  2차 합석(제2차 국공합작): 경주 다방(1936)
    노구교 사건(1937)
  노구(노구교 사건) 를 이끌고: 가자 다시(1937)
    중, 일전쟁(1937)
  중이(중, 일전쟁): 금주단식(1937)
    문화 대혁명(1966)
  문화(문화 대혁명) 방송: 가자비방(1966)

    신해혁명(1911.10)

    중화민국 성립(1912.1)

    문학혁명(신문화 운동)(1915)

    5, 4운동(1919)

    제 1차 국공합작(1924)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간에 맺어진 협력 관계로서, 국민 혁명의 결정적인 기초가 
되었다.
  제1차 국, 공 합작은 1924년 군벌 타도와 반제국주의를 목표로 쑨 원을 중심으로 
추진되었으나, 쑨 원 사망 후 장 제스의 반공 정책으로 결렬되었다.
  (암기법) 1차 합석(제1차 국공합작): 경주노래방(1924)

    북벌개시(1926)
  쑨 원 등이 북방의 군벌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 특히 쑨 원의 사후, 
1926--1928년 장 제스에 의하여 실행된 토벌이 가장 유명하다.
  국민당의 세력이 확대되자. 장 제스는 총사령관이 되어 관둥 정부의 국민 혁명군을 거느리고 
북벌을 시작하였다. 1927년에는 국민당 정부를 수립하고, 1928년에는 장쭤린을 타도, 북경을 
점령함으로써 중국을 통일하였다.
  (암기법) 벌(북벌개시) 과: 가짜 나비(1926)

    만주사변(1931)
  1931년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여 만주를 점령한 사건.
  1930년대의 세계 공황이 일본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자, 일본은 이의 타개를 위해 1931년 9월 
18일 만철 포가 사건을 조작하여 중국을 침략하고 만주를 점령했다.
  1932년 1월에는 만주사변의 연장으로서 상하이 사변을 유발하고, 3월에 괴뢰 국가인 
만주국을 건설함으로써 일본은 중국 침략의 근거로 삼았다.
  (암기법) 주사(만주사변): 가죽 따끔(1931)

    시안사건(1936)
  1936년 내전의 정지와 항일 통일 전선을 제창한 공산당의 주장에 공감한 장 쉐량이 정부군의 
공산당 토벌 독전차 시안에 온 장 제스를 감금하고 내전의 정지를 호소한 사건.
  이에 장 제스는 공산당과 내전 정지에 합의하였다.
  (암기법) 근시안(시안사건): 교정 당부(1936)

    제 2차 국공합작(1936)
  일본의 만주 점령 이후 계속된 침략에 직면하자, 국민 정부와 공산당은 여론의 압력을 받게 
되었다. 1936년 장 쉐량이 공산국 토벌을 위해 시안으로 갔던 장 제스를 감금하고 내전의 
중지와 항일 투쟁을 호소하였는데, 이 사건(시안사건)을 계길로 제2차 국, 공 합작을 이루고 
항일 민족 통일 전선이 성립되었다.
  (암기법) 2차 합석(제2차 국공합작): 경주 다방(1936)

    노구교 사건91937)
  중, 일 전쟁의 원인이 된 사건.
  노구교는 베이징 남서 교외에 있는 다리 좌측에 있는 소도시인데, 일본 병사 한 명이 훈련 
중 실종되자 일본은 중국군과 합동 수색을 하자고 제의하였다. 이를 중국측이 거절하자. 
중국군이 사격을 가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중, 일 전쟁을 일으켰다.(1937년 7월 7일), 즉 
전쟁의 구실을 만든 것이다.
  (암기법) 노구(노국교 사건)를 이끌고: 가자 다시(1937)

    중, 일 전쟁(1937)
  만주 사변 이후 태평양 전쟁 종결까지의 중국과 일본의 전쟁.
  1937년 7월 7일 노구교 사건을 계기로 일본군이 주로 도시, 철도를 중점적으로 공격하여 
일시에 중국 전토를 석권하려 하였으나, 중경으로 천도한 중국은 영국, 미국의 원조하에 
집요한 항전으로 장기전화하여 1941년 12월 8일 태평양 전쟁으로 발전 하였다.
  (암기법) 중이(중, 일 전쟁): 금주단식(1937)

    문화 대혁명(1966)
  중국은 댕약진 운동 실패 후 류 사오치 등이 자본주의적 경제 정책으로 난국을 회복하려 
하였으나, 마오 쩌둥은 공산주의의 순수성을 잃었다 하여 반대하였다. 마오 쩌둥, 린퍄오 등은 
홍위병을 조직, 류 사오치, 덩 샤오핑 등을 숙청하고 대대적인 당의 정풍 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은 공산중의 사상의 이념적 순수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혁명 기간 중 정상적인 
경제, 교육 활동을 소홀히 하여 근대화에 큰 차질을 초래하였다.
  (암기법) 문화(문화 대혁명) 방송: 기자비방(1966)

     일본의 역사 개관
    야마토 정권(358)
  토마토(야마토 정권): 더 먹어(358)
    아스카 문화(593--645)
  스카이(아스카 문화): 멋지다(593)
    다이카 개신(645)
  마이카(다이카 개신): 부르면 옴(645)
    나라 시대(710--794)
  나라(나라 시대) 안이: 시궁창(710)
    헤이안 시대(794--1185)
  헤이!(헤이안 시대): 술자리(794)
    가마쿠라 막부(1192--1333)
  가마니를(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1338--1573)
  무료로(무로마치 막부): 구두대여(1338)
    에도 막부(1603--1867)
  에도(에도 막부) 하여: 꽃 바치다(1603)
    메이지 유신(1868)
  10월 유신(메이지 유신): 군 안보용(1868)

    야마토 정권(358)
  일본 최초의 정권(4세기 중엽 성립).
  규슈의 정치 세력이 차츰 커져 4세기경 동쪽으로 진출, 일본 열도의 중앙부에 야마토 정권을 
수립하였다. 야마토 조정은 우리 나라에서 이주민과 문화를 적극 받아들여 고대 국가적 행정 
체제를 갖춰 나갔다. 특히 유교, 불교와 각종 기술 등 백제 문화를 흡수하여 성장의 길잡이가 
되었다.
  (암기법) 토마토(야마토 정권): 더 먹어(358)

    아스카 문화(593--645)
  일본의 스이코텐노오의 치세(593--628)를 중심으로 한 그 전후의 문화.
  일반적으로 불교 전래로부터 다이카 개신(645) 까지의 문화가 이에 속한다. 이 때 야마토 
조정의 황걱가 아스카 지방(지금의 나라 부근) 에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이 시대는 
율령제 국가의 형성을 준비해 나가는 격동기에 해당되며, 문화사적으로는 불교 문화가 비로소 
개화한 시대이다. 백제 문화의 영향이 가장 강하였다.
  (암기법) 스카이(아스카 문화): 멋지다(593)

    다이카 개신(645)
  쇼토쿠 태자가 죽은 후 한때 소가씨가 정권을 잡더니, 나카노오에 왕자가 후지와라씨와 함께 
이를 타도하였다.
  그는 '다이카' 라는 연호를 세우고, 수, 당에 사신과 유학생을 보내 중국 문화를 적극 
수용하였으며, 이를 바탕로 대대적인 개혁을 시도하였는데(645), 이를 다이카 개신이라 한다. 
당의 여러 제도를 모방하여 국왕의 절대적 권위를 확립한 위에 중앙 집권 국가를 건설하는데 
목표를 두었다.
  (암기법) 마이카(다이카 개신): 부르면 옴(645)

    나라시대(710--794)
  야마토 조정이 새 수도를 나라에 건설한(710) 이후의 70여 년간을 말한다. 일본이라는 
국화가 처음 사용되었으며, 불교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그리고 당과 신라 문화를 수용하여 
텐표 문화가 꽃을 피웠다.
  (암기법) 나라(나라 시대) 안이: 시궁창(710)

    헤이안 시대(794--1185)
  나라 시대는 율령 체제를 갖춘 왕조로서 처음으로 항구적인 수도를 잡았다는데에 그 의미가 
있으나, 큰 사찰들을 배경으로 한 불교 세력의 간섭이 있어 이를 피하여 지금의 교토로 자리를 
옮기니(794), 이때부터가 곧 헤이안 시대이다.
  도읍을 헤이안(평안; 지금의 교토) 으로 옮긴 이후 처음에는 국왕의 권력이 컸으나 9세기 
중엽부터 약화되어, 귀족 후지와라 집안의 섭관 정치와 상황의 원정이 교대로 이어지는 귀족 
사회가 전개되었다.
  (암기법) 헤이!(헤이안 시대): 술자리(794)

    가마쿠라 막부(1192--1333)
  가마쿠라 시대는 일본 무사 계급을 대표하는 세력인 미나모토가 지금의 도쿄 부근인 
가마쿠라에 무사 정권을 세운 1192년부터 가마쿠라 막부가 쓰러져 다시 한때 국왕에게 정권이 
넘어가게 된 1333년까지 약 150년간을 가리킨다.
  가마쿠라 막부는 일본 최초의 무인 정권으로, 이후 약 700년간 근래에 이르기까지 
장군(쇼군) 이 실권자로 막부를 통해 통치하게 되었다.
  (암기법) 가마니를(가마쿠라 막부): 깔고 자니?(1192)

    무로마치 막부(1338--1573)
  일본 중세를 쇼군 아시카가에 의해 교토를 본거로 삼아 15대 약 230년 동안 존속한 무가 
정권.
  일본의 미나모토 집안의 아시카가가 무인 정권을 계승함으로써 성립하였는데, 점차 막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지방의 무사들이 서로 다투는 등 전국 시대가 계속되었다.
  무로마치 막부는 명과 감합 무역을 행하고 견명사를 파견하여 신문물을 도입, 히가시야마 
문화를 꽃피웠다.
  (암기법) 무료로(무로마치 막부): 구두대여(1338)

    에도막부(1603--1867)
  일본 근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에 수립한 무사 정건.
  전국을 200여 명의 영주에게 나누어 주었지만, 실제로는 중앙 집권적 통제를 하는 한편, 
주자학을 관학화하면서도 양명학을 받아들이는 융통성도 보였다. 쇄국령을 내리고 나가사키 
항망 열어 네덜란드와의 대외 창구로 하였다.
  (암기법) 애도(에도 막부) 하여: 꽃 바치다.(1603)

    메이지 유신(1868)
  메이지 유신은 1853년에서 1877년 사이에 진행된 일본의 근대적 변혁으로, 이 기간 중에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국왕 중심의 신정부를 수립하여 근대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그러나 급속한 근대 국가로의 발전을 위해서는 부국 강병을 실현할 수 있는 군국주의적 국가 
체제가 필요하였으며, 사상적으로는 신도를 국교화하고, 국왕의 신성 불가침을 강조하는 
국수주의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그러므로 메이지 유신은 국수주의적이고, 군국주의적인 
요소가 강한 위로부터의 개혁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암기법) 10월 유신(메이지 유신): 군 안보용(1868)

     인도의 역사 개관
    마우리아 왕조(B.C.317--180)
  마리아(마우리아 왕조) 님: 돕겠소(B.C.317)
    쿠샨 왕조(45--388)
  쿠션(쿠샨 왕조) 좋은: 르망(45)
    굽타 왕조(320--520)
  굽다(굽타 왕조): 도너츠(320)
    바르다나 왕조(606--647)
  바르면 나아(바르다나 왕조): 불치병(606)
    노예 왕조(1206--1290)
  노예(노예 왕조): 탈출방지(1206)
    무굴제국(1526)
  우글우글(무굴제국): 골목 누빔(1526)
    아우랑제브(1658--1707)
  아우랑(아우랑제브): 갈비 먹어(1658)
    플라시 전투(1757)
  플래시(플랏시 전투): 계속 말썽(1757)
    프라모 사마지 운동(1828)
  브라보! 마사지(브라모 사마지 운동): 기운 나요(1828)
    세이포 항쟁(1857)
  세포(세포이 항쟁) 에: 감염 말썽(1857)
    인도 국민회의(1885)
  인도 국민(인도 국민회의): 교육 엉망(1885)
    벵골 분할령(1905)
  뱅글뱅글(벵골 분할령): 가짜 최면(1905)
    스와라지, 스와데시 운동(1906)
  쓰와쓰와(스와라지, 스와데시 운동): 계절 찬바람(1906)

    마우리아 왕조(B.C.317--180)
  인도 d역사상 최초의 고대 통일 국가를 형성한 왕조.
  B.C. 317년경부터 B.C.180년경까지 지속되었다. 찬드라 굽타가 나타나서 마가다국에 
군림하여 왕조를 창건하고, 갠지스 강을 중심으로 벵골 지방에서 아라비아 해에 이르는 통일 
제국의 기초를 세웠다.
  (암기법) 마리아(마우리아 왕조) 님: 돕겠소(B.C.317)

    쿠샨와조(45--388)
  마우리아 왕조가 쇠퇴한 다음, 북인도는 분열과 혼란에 빠진 반면, 남인도는 안드라 왕조가 
크게 번영하였다. 인도의 서북 지방에는 그리스인이 세운 박트리아, 중국 변방에서 이동해 온 
대월지국 등 소국이 분립하더니, 이란계의 쿠샨 왕조가 북인도를 다시 통일하였다.
  그 후 쿠샨 왕조는 3세기초 사산조 페르시아가 중앙 아시아를 점평하면서 쇠망하였다.
  (암기법) 쿠샨(쿠샨왕조) 좋은: 르망(45)

    굽타왕조(320--520)
  마우리아 왕조 멸망 후 인도는 여러 소국으로 분열되다가, 4세기초 찬드라 굽타 1세가 
갠지스강 중류 마가다 지방의 파탈리푸트라에 굽타 왕조(320--520)를 세워 마우리아 왕조의 
부흥을 이상으로 삼고 북부 인도의 대부분을 통일하였다.
  힌두교가 보급되고 산스크리트어를 공용어로 하여 인도의 민족 문화를 창달하였으며, 
이슬람계의 과학을 받아들여 발전시켰다. 한편, 아잔타석굴에 조각된 불상과 벽화는 굽타 
양식을 대표하는 것이다.
  (암기법) 굽타(굽타 왕조): 도너츠(320)

    바르다나 왕조(606--647)
  굽타 왕조는 중앙 아시아에서 남하한 유목 민족인 에프탈에게 망한 뒤, 양 200여 년간 분열 
시대를 거쳐, 7세기경 굽타 왕조 계통을 이은 바르다나 왕조의 하르샤 바르다나 왕이 북인도를 
통일하였다. 그는 봉건제도를 시행하고, 불교, 학문, 예술을 보호하며, 당, 
페르시아(사산조)등과도 사절을 교환하는 선정을 해하였다.
  (암기법) 바르면 나아(바르다나 왕조): 불치병(606)

    노예왕조(1206--1290)
  인도에 이슬람 세력이 들어가 델리에 세운 최초의 투르크계 이슬람 왕조이다. 이로부터 
인도의 이슬람 지배의 기초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노예 왕조라 부르는 이유는 창립자 아이바크가 고르 왕조의 노예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궁중 
노예를 측근에 중용하여 이들이 중앙과 지방의 조사, 정치에 큰 역할을 말았다.
  (암기법) 노예(노예왕조): 탈출방지(1206)

    무굴제국(1526)
  1526년에 아프가니스탄에 왕국을 세웠던 바베르(Baber) 가 인도의 쇠약을 틈타 뉴우델리를 
점령하고 무굴 왕조(1526--1857) 를 세웠다.
  그는 티무르의 후손이며 칭기즈칸의 후손도 되기 때문에 몽고라는 뜻인 무굴을 국호로 
정하였다. 3대 악바르 시대에서 5대 샤 자한 시대까지 번영을 계속하였고, 6대 아우랑제브 
시대에는 영토가 인도 남단까지 달하였다.
  아우랑제브의 이슬람 중심의 정책은 힌두 세력의 반항을 격화시켰고, 페르시아의 침입까지 
받게 되어 쇠퇴해 졌으며, 열강도 침투하였다.
  (암기법) 우글우글(무굴제국): 골목 누빔(1525)

    아우랑제브(1658-1707)
  무굴 제국 전성기의 황제이다.
  그러나 그는 엄격한 정통과 이슬람 교도로서 이교도를 이슬람 교도로 개종시키려고 힘썼다. 
악바르 대제가 폐지시켰던 인두세를 부활시켜 힌두교도와 시크교도에 대한 차별을 강화하였다. 
이에 각지에서 반란이 자주 일어나 무굴 제국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또 그는 마라타 
동맹을 복종시키기 위하여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원정에 나섰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원정 
도중에 사망하였다.
  결국, 그의 치세 기간은 무굴 제국의 전성기임과 동시에 몰락의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였다.
  (암기법) 아우랑(아우랑제브): 갈비 먹어(1658)

    플랏시 전투(1757)
  인도에서 영국 프랑스가 식민지 쟁탈의 패권을 다툰 전쟁.
  벵골의 시라우두다울라가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캘커타의 영국 요새를 점령하자, 영국 
동인도 회사의 클라이브가 프랑스 지원군과 시라우두다울라의 군대를 격파하여 벵골 지방의 
지배권을 확보해서 조세 징수권을 얻고, 프랑스를 축출하여 경제적으로 독접 지배하였다.
  (암시법) 프래시(플랏시 전투): 계속 말썽(1757)

    브라모 사마지 운동(1828)
  19세기 전반에 서구식 교육을 받은 인도의 지식인들에 의하여 주도된 힌두교의 혁신 
운동이다.
  라모혼 로잉 등이 주동이 된 이 운동은 크리스트 교리를 부정하고, 힌두교의 잉ㄹ신교로서의 
성격을 역설하며, 종래의 과부 순사(Sati) 나 계급 차별을 비난하였다. 또 이들은 인도의 고전 
보급에도 힘썼다.
  (암기법) 브라보! 마사지(브라모 사마지 운동): 기운 나요(1828)

    세이포 항쟁(1857)
  19세기 중엽에 일어난 인도 병사 및 농민의 반영 항쟁.
  세포이란 페르시아어로 군대라는 뜻이며, 여기서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k편성한 인도인 
용병을 말한다.
  영국의 식민지 정책은 인도인의 반영 감정을 일으켜, 1857년초 인도의 종교와 습관을 
무시하고 탄약통에 소, 돼지 기름을 하용한다는 소문이 나자, 반란이 일어났다. 세포이 중의 
이슬람 교도에게 돼지는 금기였고, 힌두 교도에게는 소가 신성한 것이었다. 이 반영 운동은 
벵골, 봄베이의 세포이에게도 파급되고, 각지에서 농민 반란도 일어나, 4개월 후에는 전 
인도의 3분의 2나되는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영국은 다수의 정부군을 파견하고, 네팔 왕에게 
글루카병의 파견을 의뢰하여, 1859년 이 운동을 진압하였다.
  이 운동은 인도 역사상 최초의 민족적 반영 운동이었다.
  (암기법) 세포(세포이 항쟁) 에: 감염 말썽(1857)

    인도 국민회의(1885)
  세포이 항쟁 이후 영국 정부의 직접 지배에 의한 적극적인 식민지화 정책에 직면하게 되자, 
인도의 지식인들은 1885년에 봄베이에서 인도 국민회의를 창설하고, 이를 구심점으로 하여 
독립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인도 국민 회의는 원래 영국측에서 인도 지도급 인사들의 협력을 받고자 추진한 합법적인 
민족 운동 단체였다. 초기에는 인도 각지의 지식인, 관리, 교육자, 상인, 지주 등 중간 계층을 
주체로 하여 1년에 한 번씩 대회를 열었다. 힌두교도, 이슬람 교도 및 크리스트 교도까지 
포함되어, 영국 정부와의 긴밀한 협조를 유지하며, 인도의 점진적 개혁을 도모하는 것을 
확립과 민족 의식의 성장으로 정당적 색채를 띠었고, 영국의 분리통치로 인해 저항 기관으로 
변하였다.
  (암기법) 인도 국민9인도 국민 회의): 교육엉망(1885)

    벵골 분할렬(1905)
  영국은 인도를 통치함에 있어 인도 사회의 종교적 분열을 이용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1905년 민족 운동이 빈번히 일어나는 벵골 주를 힌두 교도가 많이 거주하는 지역과 이슬람 
교도가 많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분할하려는 벵골 분할령을 발표하였다. 이는 양쪽의 분열과 
대립을 이용하여 민족 운동을 약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에 인도 국민 회의는 이를 반대하는 민족 운동을 격렬히 벌여 이를 취소시켰다.(1911).
  (암기법) 뱅글뱅글(벵골 분할령): 가짜 최면(1905)

    스와라지 스와데시 운동(1906)
  1906년 인도에서 일어난 반영 운동의 하나.
  스와라지는 힌두어로 '자치' 를 뜻하는 말로, 영국의 지배를 벗어나서 인도의 독립을 
획득하여는 목적으로 일으킨 운동이다. 스와데시는 힌두어로 '모국' 을 뜻하는 말로, 국산품 
애용 운동을 의미한다.
  1905년에 인도 총독 커즌이 벵골 분할령을 선포하자, 다음해에 인도 국민 회의 캘커타 
대회에서 영국 상품의 불매 운동, 민족 교육 등과 함께 4대 목표로 지도하에 반영 민족 
운동으로서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암기법) 쓰와쓰와(스와라지, 스와데시 운동): 계절 찬바람(1906)

     이슬람 세계
    사산조 페르시아(226--642)
  사산(사산조 페르시아)한: 노년부인(226)
    이슬람교 창시(610)
  이슬(이슬람교 창시)이: 불규칙(610)
    헤지라(622)
  해지면(헤지라): 방뇨나(622)
    옴미아드 왕조(661--750)
  미아(옴미아드 왕조) 발생: 부부가(661) 술 만취(750)
    아빠스 왕조(750--1258)
  아빠(아빠스 왕조): 술 만취(750)
    후 옴미아드 왕조(756--1031)
  후미진(후 옴미아드 왕조): 식모방(756)
    파티마 왕조(909)
  파티(파티마 왕조) 연: 잔치집(909)
    가즈니 왕조(962--1186)
  가재니(가즈니 왕조): 제비니?(962)
    셀주크 투르크 제국(1037--1243)
  크크(셀주크 투르크 제국): 군침 돈 술(1037) 꽤 널리다(1243)
    오스만 투르크 제국(1299--1922)
  이수만(오스만 투르크 제국): 그 남자지(1299) 그 중 났네(1922)
    팔레스타인 해방기구(1964)
  팔레(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에게: 공 줘봐라(1964)

    사산조 페르시아(226--642)
  조로아스터교의 제주 사산의 소자 아르다시르가 파르티아의 쇠퇴를 틈타 이란 고원의 서남부 
크테시폰을 수도로 건국.
  사산 왕조 페르시아(226--642) 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부흥을 내걸고 일어나, 동쪽으로 쿠샨 
왕조의 영토를 빼앗고, 서쪽으로 로마를 물리쳐, 동서 교통로를 차지하는 대국이 되었다.
  (암기법) 사산(사산조 페르시아) 한: 노년부인(226)

    이슬람교 창시(610)
  이슬람교의 교주인 마호메트는 대상 활동을 하면서 유태교,기독교 등에 대한 체험을 얻고 
지식을 습득하여 610년 아라비아의 전통적인 신 알라(??) 시능 f대상으로 하는 이슬람교를 
창시 하였다. 코란을 주요 경전으로 하는 이슬람교는 그 신도를 모슬렘이라 하고, 이들에 
의해서 세워진 제국을 사라센 제국이라 한다.
  이슬람교ㅡ 알라신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하여 민중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암기법) 이슬(이슬람교 창시) 이: 불규칙(610)

    헤지라(622)
  아라비아어로 이주, 도망이라는 뜻이다.
  마호메트가 처음으로 이슬람교를 포교한 곳은 메카였으나, 메카의 상업 귀족으 박해를 받아 
메디나로 쫓겨낫는데, 이를 헤지라(성스러운 옮김) 라 하여 이 해를 이슬람교의 기원 원년으로 
하였다(622). 그는 여기서 전투적인 전도자, 정치적인 지도자로서 이슬라교 국가를 세웠으며, 
630년에는 메카를 정복하고 여기를 이슬람교의 성지로 하였다.
  (암기법) 해지면(헤지라): 방뇨나(622)

    옴미아드 왕조(661--750)
  7세기 중엽 무아위야가 칼리프의 지위를 찬탈하여 세습제로 만든 이슬람 제국의 왕조. 
수도를 다마스쿠스로 하였으나, 결국 아빠스 왕조와 후옴미아드 왕조로 분열되었다.
  옴미아드 왕조가 성립되면서 이슬람교에는 swjd통 칼리프인 알리를 정통으로 인정하고 
페르시아로 도망하였던 시아파와 옴미아드 왕조를 정통으로 보는 수니파 사이에 분열이 
생겻다.
  (암기법) 미아(옴미아드 왕조) 발생 부부가(661) 술 만취(750)

    아빠스 왕조(750--1258)
  칼리프 경쟁에서 실패한 아빠스(Abbas)가 다시 일어나 옴미아드 왕조를 무너뜨리고, 수도를 
다마스쿠스에서 바그다드로 옮겨 아빠스 왕조를 세웠다.
  이란족과 제휴하여 이슬람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13세기에 몽고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암기법) 아빠(아빠스 왕조) 술만취(750)

    후 옴미아드 왕조(746--1031)
  옴미아드의 일족인 압둘 라만이 이베리아 반도로 망명하여 건국하였다. 수도는 코르도바로, 
이 곳은 상업과 학예의 중심지였으며, 유럽에 사라센 문화를 전파하는데 공헌하였다.
  (암기법) 후미진(후 옴미아드 왕조): 식모방(756)

    파티마 왕조(909)
  북아프리카에 건설한 이슬람의 왕조.
  이집트에서는 시아파(마초메트의 딸 파티마와 4대 칼리프 알리 사이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산과 후세인이었다. 이 중 후세인계 계열을 교주로 추대하는 파가 사이파이다.) 에 의해 
파티마 왕조가 성립되었다. 이 왕조는 북부 아프리카를 지배하였는데, 정통의 수나파인 아빠스 
왕조를 한때 압도할 정도였다.
  (암기법) 파티(파티마 왕조) 연: 잔치집(909)

    가즈니 왕조(962--1186)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 있던 왕조로, 10세기 사만 오아조의 총독으로 남하하는 투르크족을 
막아내는 데에 공적을 세운 장군 알프티간은 왕으로부터 의심을 받자 가즈니를 점령, 독립된 
왕국을 세웠다.
  그리고 비옥한 편잡 지방으로 침입하여 인도의 열 jdhkd국의 연합군을 물리치고 세력을 
폈다.
  (암기법) 가제니(가즈니 왕조): 제비니?(962)

    세주크 투르크 제국(1037--1243)
  투르크의 일파인 셀주크족이 세운 왕조.
  중앙 아시아 북부에서 유목 생활을 하며 슬람교를 딛고 있었는데, 11세기부터 활약하기 
시작하여 아시아로부터 소 아시아에 걸친 지역을 정복하고, 이어서 바그다드를 점령하여 
아빠스 왕조로부터 술탄의 칭호를 받은 후 사라센을 대신하여 서남 아시아의 이슬람 세계를 
지배하였다.
  11세기 후반에는 전성기를 이루어 십자군 운동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으나, 12세기부터 
급속히 쇠퇴하여 분열되었다.
  (암기법) 크크(셀주크 투르크 제국): 군침 돈 술(1037) 꽤 널리다(1243)

    오스만 투르코 제국(1299--1922)
  오스만족은 투르크족의 일파로, 몽고족이 발전함에 따라 그 압박을 피하여 소 아시아로 
이주하였다. 1299년에는 족장 오스만이 셀주크 술탄의 지배에서 벗어나 오스만 
제국(1299--1922)을 건국하였다.
  오스만 투르크가 성공하게 된 가장 큰 정치적 이유는, 그 근거지가 반도 서북쪽의 비잔틴 
제국과 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전성기는 술레이만 1세 때로, 프레베지해전에서 
승리하여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1517년 레판토 해전에서 에스파냐에게 패하고 지중해의 지배권을 상실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암기법) 이수만(오스만 투르크): 그 남자지(1299) ? 그 중 났네(1922)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1964)
  이스라엘에게 생활권을 빼앗긴 아랍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그들의 생활권 수복을 위한 
기구로 P.L.O를 조직하여(1964) 레바논에 거점을 두고 주변 아랍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대 
이스라엘 투쟁을 계속하였다.
  최근 팔레스타인 민족 평의회(PNC) 가 팔레스타인 국가의 독립을 선언하고(1988년 11월), 
P.L.O의장 아라파트가 이스라엘을 인정함으로써, 2차 대전 후 계속 중동 평화를 위협해 오던 
팔레스타인 문제에 평화적 해결의 실마리가 잡히게 되었다.
  (암기법) 펠레(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에게; 공 줘봐라(1964)

     아랍 문화
    간다라 미술(100)
  간다(간다라 미술): 경찰청(100)
    대승불교(153)
  대승(대승불교) 거두고: 금메달(153)
    조로아스터교 창시(238)
  조루(조로아스터교 창시): 녹다운(238)
    마니교 창시(245)
  머니로(마니교 창시): 노름만(245)
    굽타 양식(320)
  굽다(굽타 양식): 도너츠(320)
    아잔타 석굴(350)
  아, 잔다(아잔타 석굴): 다 맞춰(350)
    힌두교 발생(500)
  흰 구두(힌두교): 맞춘 척(500)
    이슬람교 창시(610)
  이슬(이스람교) 이: 불규칙(610)
    아라비안 나이트(10C)
  아, 나이트 클럽(아라비안 나이트): 골치(10C)
    타지마할 묘(1632)
  타지 말(타지마할) 라니까: 금방 단념(1632)

    간다라 미술(100)
  서북 인도를 중심으로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 아래 성행한 인도 불교 미술의 한 파.
  간다라 지방에서는 그리스 문화가 인도 문화와 융합하여 간다라 미술이라는 독특한 불교 
미술이 발달하였다. 간다라 미술은 대승 불교와 함께 '비단길' 로 불리우는 중앙 아시아의 
사막길을 거쳐 중국, 한국, 일본, 등에 들어가 그 지방 불교 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암기법) 간다(간다라 미술 창시): 경찰청(100)

    대승불교(153)
  대승 불교는 자신의 해탈보다도 중생의 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이른바 불교의 민중화 
현상이다.
  2세기경 카니슈카 왕은 불전의 편찬과 포교에 힘써 불교가 크게 융성하였다. 이 때에 불교의 
대중화 현상이 나타나 중생의 구제를 강조하는 대승 불교가 일어났으며, 중국, 한국, 일본 
등으로 전파되었다.
  (암기법) 대승(대승불교) 거두고: 금메달(153)

    조로아스터 교창시(배화교) (238)
  페르시아의 대표적 종교인 배화교는 예언자 조로아스터(Zoroaster) 에 의해서 창시되었다.
  그에 의하면 세계는 광명, 정의, 진리, 행복 건강 등을 상징하는 선신(Ahura Mazda)과 부정, 
허위, 암흑 질병, 불행 등을 상징하는 악신 (Alriman) 과의 대립 투쟁이라는 이원론으로 
설명한다. 최후에는 불을 상징하는 선신이 승리한다고 믿기 때문에 배화교라 부른다.
  (암기법) 조루(조로아스터교 창시): 녹다운(238)

    마니교 창시(245)
  3세기경 페르시아인 마니에 의하여 창시된 종교, 조로아스터교, 크리스터교, 불교의 사상적 
영향을 받음, 사산조 문화의 특징을 나타내는 종합적인 종교이다.
  시조인 마니는 3세기 초엽의 사람으로, 선, 악의 본질적인 대립은 영원히 계속된다는 
윤리관을 설교하였다. 후에 조로아스터교로부터 사교라는 비난을 받고 처형되었다.
  당대에는 중국에도 전해졌다.
  (암기법) 머니로(마니교): 노름만(245)

    굽타양식 (320)
  간다라 미술에서 보이는 그리스적 기법을 극복하여, 조각에서는 인도 특유의 곡선미를 
나타내고, 그림에서는 독특한 음영법을 사용하는 미술 양식을 말한다.
  불상과 여러 힌두 신상에 조화, 균제, 우미의 특색을 보여 주는 굽타 양식은 중국과 우리 
나라의 불교 미술에도 영향을 끼쳤다.
  (암기법) 굽다(굽타 양식): 도너츠(320)

    아잔타 석굴(350)
  인도 봄베이 신주에 있는 석굴 사원.
  중국의 운강 석굴, 동황 석굴과 더불어 세계 3대 불교 미술의 동굴 중 하나로, 여기에 남아 
있는 작품들은 인도화의 특색인 음영법을 나타내고 있어 유명하다.
  이 석굴은 인도 건축 미술 사상 가장 중요한 유적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불교 미술 
전파사에서도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암기법) 아, 잔다(아잔타 석굴): 다 마취(350)

    힌두교 발생(500)
  힌두교는 브라만교, 불교에다 재래 인도 신아을 결합한 민족 종교이며 민중 신앙이다.
  인도 민족 신앙의 신인 사바(Siva), 비시누(Vishnu) 중심으로 발전시킨 것이며, 제 1계급인 
승족을 위한 브라만교나 제 2계급인 왕족을 위한 불교와는 달리, 대중을 상대로 하는 종교여서 
오늘날까지 인도의 민족 종교로 발전되고 있다.
  현재 파키스탄의 회교, 스리랑카의 불교, 인도의 힌두교는 그 나라으 정치와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암기법) 흰 구두(힌두교 발생): 맞춘 척(500)

    이슬람교 창시(610)

    아라비안 나이트(10C)
  '천일 야화' 라고도 하는 세게적으로 잘 알려진 이슬람 민중 문화.
  10세기 경의 인도, 이란 고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아라비아어의 설화집인데, 전 
이슬람권을 배경으로 전개된 갖가지의 설화를 집성한 것이다. 그 원형은 이란 고래의 <천가지 
이야기> 이며, 이를 수집, 정리한 쟈흐시야리는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 뒤 작자, 설화사들이 이슬람교 신앙을 중심으로 아라비아의 역사상의 일화, 자유 분방한 
공상에 의한 가공의 이야기 등을 자유로이 가미하여, 변형, 각색하였다.
  (암기법) 아, 나이트 클럽(아라바안 나이트): 골치(10C)

    타지마할 묘(1632)
  인도의 아그라 시 동남 교외 자무나 강 우안에 있는 묘.
  타지 마할이란 '궁정의 왕관' 이란 뜻으로, 샤자한이 39세로 사망한 사랑하던 왕비 뭄타즈 
마할을 위하여 건립한 묘이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장려한 외관과 섬세한 내부 장식이 매우 
뛰어나다. 한편, 샤 자한을 고비로 대 건축물의 조성은 극히 드물어졌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물의 하나로, 1632--1643년에 만든 인도, 이란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암기법) 타지 말(타지마할 묘) 라니까: 금방 단념(1632)

        제2부 서양 사회의 변천

     그리스 세계
    폴리스 형성(B.C.900년경)
  경찰(폴리스 형성) 이: 정치참여(B.C.900)
    솔론의 개혁(B.C.594)
  혼자(솔론의 개혁) 로는: 모자라(B.B.594)
    도편추방법(B.C.508)
  추방(도편추방법) 해라: 미친 애(B.C.508)
    페르시아 전쟁(B.C.492--499)
  페르시아 전쟁이: 레저냐?(B.C.492)
    델로스 동맹(B.C.477)
  로스(델로스 동맹) 구이: 를 시식(B.C.477)
    펠로폰네소스 전쟁(B.C.431--404)
  소스(펠로폰네소스 전쟁): 를 뜨겁게(B.C.431)
    마케도니아의 침입(B.C.338)
  돈이(마케도니아의 침입): 돈대요(B.C.338)
    알렉산더의 동방원정(B.C.334--324)
  동방(동방원정) 에: 다다름(B.C.334)
    헬레니즘 시대(B.C.334--30)
  헐레벌떡(헬레니즘 시대): 다다름(B.C.334)

    폴리스 형성(Polis) (B.C.900년경)
  '폴리스'라는 말은 원래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주민들이 의거하여 싸우던 산채를 
뜻하였는데, 이 곳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살고 도시 국가를 형성하게 되어 점차 국가 
전체를 뜻하게 되었다.
  도시의 중심에는 신전을 모신 아크로폴리스라는 성채가 있었고, 그 아래에는 아고라라는 
광장이 있어, 행정, 민회, 상거래의 장소로 이용되었다.
  (암기법) 경찰(폴리스 형성) 이: 정치참여(B.C.900)

    솔론의 개혁(B.C.594)
  기원 전 594년에 솔론이 실시한 개혁이다.
  솔론은  부채 증서를 말소하고, 인신을 저당으로 하는 금전 대부를 금지했으며, 시민을 
재산에 따라 4등급으로 나누어 참정권의 범위와 병역의 종류를 정했다. 그러나 이 개혁은 
기득권을 상실하게 된 귀족과 토지의 재분배를 기대했던 민중의 불만으로 실패하였다.
  (암기법) 혼자(솔론의 개혁) 로는: 모자라(B.C.594)

    도편추방법(B.C.508)
  클레이스테네스가 참주의 출현을 막기 위해 창안한 제도이다.
  이 제도는 질그릇(오스트라콘) 의 조각이나 조개 껍질에 참주를 꿈꾸는 야심가의 이름을 
적어 6000표 이상을 얻은 자는 10년간 국외로 추방하였다. 그러나 시민권과 재산권은 빼앗지 
않았다.
  (암기법) 추방(도편 추방법) 해라: 미친 애(B.C.608)

    페르시아 전쟁(B.C.492--449)
  오리엔트를 통일한 페르시아가 지중해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그리스와 
충돌하여 일어난 전쟁.
  이 전쟁은 약 10년 동안 3차례에 걸쳐 진행되었으나, 그리스의 일치 단결로 인해 페르시아의 
패배로 끝났다. 역사상 최초의 동, 서 대결이었던 이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황금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암기법) 페르시아 전쟁이: 레저냐?(B.C.492)

    델로스 동맹(B.C.477)
  에게 해와 소 아시아 연안의 200여 개 폴리스가 아테네를 중심으로 결성한 동맹이다.
  가가 동맹국들은 군선이나 지금을 델로스 성의 아폴로 신전에 제공하여 기금을 마련했고, 
이를 아테네가 관리하였다.
  (암기법0 로스(델로스 동맹) 구이: 를 시식(B.C.477)

    펠로폰네소스 전쟁(B.C.431--404)
  페르시아 전쟁 후 그리스의 패권이 아테네로 기울자, 이에 불만을 품은 스파르타가 아테네에 
대하여 일으킨 전쟁.
  그리스이 모든 도시 국가들은 두 편으로 나뉘어 오랫 동안 싸웠다. 처음에는 아테네가 
우세하였으나, 결국 페르시아와 결탁한 스파르타가 승리하였다.
  (암기법) 소스(펠로폰네소스 전쟁): 를 뜨겁게(B.C.431)

    마케도니아의 침입(B.C.338)
  그리스 북쪽에 자리잡고 있던 마케도니아는 필리포스 2세가 즉위하면서 급격히 세력을 
팽창시켜, 케로네아 전투에서 아테네와 테베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헬라스 연맹을 결성하여 
그리스를 통합하였다.
  (암기법) 돈이(마케도니아의 침입): 돈대요(B.C.338)

    알렉산더의 동방원정(B.C.334--324)
  필리포스 2세의 뒤를 이은 알렉산던 대왕은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멀리 중앙 아시아와 인도의 
인더스 강까지 진격,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3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는 오리엔트의 전제 군주 제도를 받아들이는 한편, 각지에 도시를 세워 그리스인들을 
이주시키고, 이들과 페르시아인의 혼인을 장려하는 등, 동, 서양 세계의 융합을 꾀하였다.
  (암기법) 동방(동방원정) 에: 다다름(B.C.334)

    헬레니즘 시대(B.C.334--30)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으로부터 마케도니아, 이집트, 시리아 등 3국이 로마에 정복되기까지의 
300여 년간(B.C.334--30) 을 헬레니즘 시대라고 한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뒤, 그의 제국은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로 분열되었지만, 
알렉산더 대왕의 웅대한 계획은 세 지역에서 착실히 진행되어, 마침내 동서 문화의 융합인 
헬레니즘 문화가 성장하였다.
  (암기법) 헐레벌떡(헬레니즘 시대): 다다름(B.C.334)

     로마 제국
    로마의 건국(B.C.753)
  로마 세운(로마의 건국): 시민들(B.C.753)
    12표법(B.C.451)
  표범(12표법) 은: 라면광(B.C.451)
    포에니 전쟁(B.C.264--B.C.146)
  포니(포에니 전쟁) 타고: 날 보러(B.C.264)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B.C.133)
  그 형제(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꼭 닮다(B.C.133)
    삼두 정치(B.C.60--45)
  삼두(삼두정치) 마차: 발차(B.C.60--45)
    악티움 해전(B.C.31)
  악(악티움 해전) 은: 독기(B.C.31)
    로마의 평화 시대(B.C.27----180)
  로마 평화(로마의 평화 시대): 날샘(B.C.27)
    5현제 시대(96--180)
  현재(5현제 시대): 주부(96)
    군인 황제 시대(235--285)
  군인(군인 황제 시대): 냉대 마(235)
    로마 제국 동서분열(395)
  동서 분열(로마 제국 동서분열): 단절만(395)
    동로마 제국(395--1453)
  동료(동로마 제국) 라고: 동정 마(395)
    서로마 제국 멸망(476)
  서로 멸망(서로마 제국 멸망): 레스비언(476)
    동로마 제국 멸망(1453)
  동료 멸망(동로마 제국 멸방): 헤매다(1453)

    로마의 건국(B.C.753)
  이탈리아 반도의 북부 포(PO) 강과 티베르 강 유역의 평원을 중심으로 기원 전 9세기에 
인도, 유럽 계통의 민족이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지중해 동부에는 그리스인이 도시 국가를 건설하였고, 지중해 서부에서는 라틴족이 이탈리아 
바도 중부의 티베르 강 유역에 도시 국가 로마를 세웠다.
  (암기법) 로마 세운(로마의 건국): 시민들(B.C.753)

    12표법(B.C.451)
  12표법은 기원 전 451년에 만들어진 로마 최초의 성문법으로서, 12개의 동판에 새겨 
광장이나 시장에 세웠다.
  이 법은 오로지 로마 시민에게만 적용되는 시민법으로, 법률과 차벌 사항을 열거함으로써, 
함부로 사람을 처벌하는 것으로부터 모든 시민을 보호하였다.
  (암기법) 표범(12표법) 은: 라면광(B.C.451)

    포에니 전쟁(B.C.264--146)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후 지중해로 진출하게 되자, 당시 지중해의 해상권을 잡고 
있던 카르타고와 충동하여 싸움이 벌어졌으니, 이를 포에니 전쟁이라 한다.
  로마는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의 공격을 받아 한때 위기에 빠졌으나, 스키피오 장군의 
활약으로 승리를 거둔 뒤, 동맹국의 협력을 얻어 카르타고를 멸망시켰다.
  (암기법) 포니9포에니 전쟁) 타고: 날 보러(B.C.264)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B.C.133)
  기원 전 2세기 후반에 호민관이 된 그라쿠스 형제는 귀족들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고 
빈민에게 그 토지를 분배하여 자영 농민을 육성함으로써 국가 기반을 바로 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라쿠스 형제의 노력은 귀족들의 바대로 실패하였다.
  (암기법) 그 형제(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꼭 닮다(B.C.133)

    삼두 정치(B.C.60--45)
  로마 공화정의 위기를 맞아 사병화된 군대를 배경으로 하는 강력한 군인 정치가들이 
등장하였고, 그 중 가장 강한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가 로마를 3분하여 다스리게 
되었는데, 이를 가르켜 삼두 정치라고 한다.
  (암기법) 삼두(삼두정치) 마차: 발차(B.C.60)

    악티움 해전(B.C.31)
  기원 전 31년에 동방 헬레니즘을 대표하는 안토니우스의 서방 로마의 전통을 대표하는 
옥타비우누스 사이에 벌어진 해전.
  기원 전 31년 9월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로마의 장군 안토니우스의 
연합군을 악티움 해전에서 격파하고, 로마의 지배권을 장학하였다.
  (암기법) 악(악티움 해전) 은: 독기(B.C.31)

    로마의 평화시대(PaxRomana)(B.C.27--180)
  로마의 평화시대는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5현제 시대까지 약 200년간의 번영기를 뜻한다.
  이 200년 동안은 지중해를 통한 동방 무역이 번성하고 로마를 비롯한 도시 문화가 크게 꽃핀 
시기였다.
  (암기법) 로마 평화(로마의 평화 시대): 날샘(B.C.27)

    5현제 시대(96--180)
  로마의 네르바(Nerva), 트라야누스(Triajanus), 하드리아 누스(Hadrianus), 
안토니우스(Antonius),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등 5명의 황제가 집권했었던 
'로마의 평화' 시대.
  이 시대는 국경도 굳게 지켜지고 내정도 안정되어, 각 속주에는 많은 도시가 건설되고, 시민 
생활과 경제가 번영하는 등 제정 시대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암기법) 현재(5현제 시대): 주부(96)

    군인황제 시대(235--285)
  로마 제정 말기, 제국 각지에서 군대가 황제를 마음대로 옹립, 폐위시킨 내란 시대.
  3세기 전반, 문약한 황제 세베루스가 235년 라인 강 유역의 게르만인을 토벌하던 중 그의 
병사의 손에 살해된 후, 28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의해 강력한 전제 군주정이 수립될 때까지, 
각지의 군대는 그 사령관을 황제로 옹립하여 상호 항쟁하였다.
  이 기간에 18명의 황제가 통치하여 내란이 잇따랐다.
  (암기법) 군인(군인 황제 시대): 냉대 마(235)

    로마 제국 동서 분열(395)
  395년 테오도시우스(Theodosius)가 죽은 후 로마 제국은 그의 두 아들에 의해서 본래의 
로마시를 수도로 하는 서로마 제국과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 를 수도로 하는 동로마 
제국으로 분리되었다.
  서로마 제국은 476년 게르만 출신의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Odoacer) 에게  멸망당하였고 
동로마 제국은 1453년 오스만 투르크의 침입에 의해서 멸망당하였다.
  (암기법) 동서분열(로마 제국 동서분열): 단절만(395)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395--1453)
  동로마 제국은 그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옛 이름에 따라 비잔틴 제국이라고도 하며, 
395년에서 1453까지 존속하면서 그리스 정교회를 기초로 그리스적, 동방적인 동유럽 세계를 
형성하였다.
  비잔틴 제국, 즉 동로마 제국은 오리엔트적인 전제 군주 통치 체제를 확립하고, 동서 문화 
교류의 중요한 위치를 이용하여 경제적으로 번영하였다.
  그리고 투르크족과 이슬람 세력의 침략을 저지하여 서유럽의 방파제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비잔틴 문화는 특색있는 동유럽 문화권을 형성하는데 기여하였다.
  (암기법) 동료(동로마 제국) 하고, 동정 마(395)

    서로마 제국 멸망(476)
  게르만족이 이동하면서 각지에 왕국을 건설하고 있을 때, 서로마 제국은 여전히 군대를 
장악한 장군들이 실권을 잡아 황제는 유명무실해졌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실권은 게르만족 
출신의 용병 대장들에게 돌아가고, 황제는 그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하였다.
  476년에는 게르만 출신의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가 로마 제국의 황제 로물루스를 퇴위시키고 
스스로 이탈리아 왕이 됨으로써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암기법) 서로 멸망(동로마 제국 멸망): 헤매다(1453)

    동로마 제국 멸망(1453)
  전성을 누리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사후 오랫동안 이민족의 침략에 시달리게 되어 
북쪽에서는 마자르 족과 아바르 인이 남하하여 왔고, 동부에서는 페르시아의 위협도 그치지 
않았다. 11세기에 셀주크 투르크의 침략을 받고, 13세기에는 십자군의 약탈을 당하여 
쇠퇴하다가, 1453년 오스만 투르크의 침략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암기법) 동료 멸망(동로마 제국 멸망): 헤매다(1453)

     유럽 사회 개관
    게르만의 대이동(374년경)
  개 이동(게르만의 대이동): 도시로(374)
    로마 제국 동서분열(395)
  동서분열(로마 제국  동서분열): 단절만(395)
    봉건제도(9C)
  봉제(봉건제도): 직(직:9C)
    십자군 전쟁(1096)
  십자군(십자군 전쟁): 권총 준비(1096)
    백년전쟁(1338)
  백년(백년전쟁) 동안: 가둬 둬요(1338)
    흑사병(1348)
  흑사병: 꽤 두려워(1348)
    르네상스(14C)
  르네상스: 거리(14C)
    가격혁명(1469)
  가격(가격혁명): 할부제(1469)
    인클로저 운동(15C)
  크로즈업(인클로저 운동): 그만(15C)
    아메리카 대륙 발견(1492)
  아메리카(아메리카 대륙 발견): 그리 좋니?(1492)
    루터의 종교개혁(1517)
  종교(루터의 종교개혁) 에: 국민관심(1517)
    지동설(1543)
  지구가 도는 걸(지동설): 갠 몰랐대(1543)
    절대주의(1556)
  절대, 주의(절대주의) 해: 꼬마 말버릇(1556)
    청교도 혁명(1642)
  교도소(청교도 혁명) 에: 가버렸네(1642)
    명예혁명(1688)
  명예(명예혁명) 로운: 거부유언(1688)
    산업혁명(1760)
  산업(산업혁명): 계속 번창(1760)
    프랑스 대혁명(1789)
  푸대(프랑스 대혁명) 속에: 곡식 있지(1789)
    제국주의(1870)
  제국주의: 군인수출(1870)
    제1차 세계대전(1914)
  1세(제1차 세계대전) 들은: 곧장 가라(1914)
    러시아 혁명(1917)
  러시아워(러시아 혁명): 가장 고생(1917)
    제2차 세계대전(1939)
  2세(제2차 세계대전) 들이: 곧장 등장(1939)

    게르만의 대이동(374년경)
  게르만족은 원래 발트 해 연안 지방 즉, 오늘의 독일 지역과 스칸디나비아 반도 등 북부 
유럽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그런데 게르만족의 인구 증가로 경작지가 부족하고 식량이 모자라게 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로마 제국의 영토로 침입하게 되었고, 4세기 후반에는 흑해 연안까지 침입해 온 
아시아의 유목민인 훈족이 게르만족에게 압력을 가하자, 이 지방의 게르만족이 서쪽으로 대거 
이동하기 시작 하였다.
  (암기법) 개 이동(게르만의 대이동): 도시로(374)

    로마제국 동서분열(395)

    봉건제도(9C)
  봉건 제도(feudalism) 는 로마의 은대지 제도와 게르만의 종사 제도가 합해진 것으로, 
9세기경 프랑크 왕국에서 시작되어 12--13세기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
  유럽 봉건 제도의 주요 특징은 대체로 다음 세가지 측면에서 이야기될 수 있다. 첫째, 
군사적인 측면에서 그것은 봉토를 매개로 하여 쌍무적 계약 관계를 바탕으로 성립하는 전사들 
사이의 주종 관계이며, 둘째, 경제적 측면에서 그것은 농도제에 의해 경영되는 장원 제도이고, 
셋째, 정치적 측면에서 그것은 봉건 영주들의 불입권(immunity: 영지 안에서의 행정권이나 
사법권에 국왕이 간여하지 못하는 권한) 에 입각한 지방 분권제이다.
  (암기법) 봉제(봉건제도): 직(직:9C)

    십자군 전쟁(1096)
  11세기 말부터 200년 간에 걸쳐 서유럽의 크리스도 교도가 성지탈환이라는 이름 아래 행한 
원정을 말한다.
  셀주크 투르크의 압박을 받은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로마 교황에게 구원을 호소하자, 
클레르몽 종교 회의를 열어 십자군 원정을 결의하였다.
  제 1회 십자군은 성지를 탈환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세웠으나(1099), 다시 이슬람 교도에 
빼앗겼으며, 계속된 원정에서도 성지 회복에 실패하였다.
  (암기법) 십자군(십자군 전쟁): 권총 준비(1096)

    백년전쟁(1338)
  영국 왕의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와 플랑드르 지방을 둘러싼 경제적 이해의 대립에서 비롯된 
영국과 프랑스간의 100여 년에 걸친 싸움.
  처음에는 프랑스가 불리하여 많은 영토를 잃고, 농민의 반란마저 일어나 큰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프랑스는 애국 소녀 잔 다르크의 출현을 계기로 영국군을 대륙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하였다.
  (암기법) 백년(백년전쟁) 동안: 가둬 둬요(1338)

    흑사병(1348)
  14세기 중엽 전유럽에 만연했던 페스트 전염병.
  중국에서 비롯되어 대상의 교역로를 따라 러시아와 흑해를 거쳐 1348년에 이탈리아 전역을 
휩쓸고, 이듬해에는 마르세유에 상륙하여 프랑스 전역에 퍼졌으며, 가을 무렵 영국으로 건너가 
1350년에는 아이슬랜드를 비롯한 북유럽 전체를 휩쓸었다.
  이 병으로 유럽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잃어 농촌 인구가 격감되자, 장원 영주들은 농민들이 
영지에서 이탈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농민의 부담을 경감하고 신분적 속박도 완화하는 등 
농민의 처우를 개선하였고, 화폐 지대가 보급되어 농노는 지대만 무는 자영 농민이 되었다.
  (암기법) 흑사병: 꽤 두려워(1348)

    르네상스(14C)
  프랑스의 역사가 미슐레가 1840년경 처음으로 사용한 말로, 이는 특정한 사건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14세기--16세기에 걸쳐 서양에서 일어난 새로운 문화 운동을 말하는 것이다.
  르네상스는 '다시 살아난다' 즉 재생, 부활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를 부흥시킴으로써 그 속에 담겨 있는 인간 중심의 사고 방식과 생활 태도 
등을 찾아내어 세계와 인간을 재발견하는 운동이며, 독창적인 생명력으로 가득 찬 문화 
운동이다.
  (암기법) 르네상스: 거리(14C)

    가격 혁명(1469)
  15세기말 신대륙, 신항로의 발견으로 일어난 유럽의 상업 체계, 나아가서는 그 경제 
구조상의 일대 변혁을 말한다.
  신대륙으로부터 다량의 금, 은이 유럽으로 유입되자, 유럽의 물가가 오르고 돈의 가치가 
하락하는 인플레이션 현상이 발생하였다. 16세기초를 기준으로 약 1세기 동안 2--3벼의 물가 
상승이 있었다.
  물가가 오르자 상인고 생산업자들은 유리하였고, 고정된 수입으로 살아가는 봉건 
특권층에게는 불리하였다. 그리하여 신흥 상공업자들은 물가 상승을 기회로 재력을 
축적하였고, 봉건 특권층(주로 대지주) 은 고정 수입이 하락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암기법) 가격(가격혁명): 할부제(1469)

    인클로저 운동(15C)
  '인클로저' 라 함은 종래 개방되어 있고 분산되어 있던 경작지를 집결시켜 울타리를 치거나, 
공유지에 울타리를 치는 것을 말한다.
  1차 인클로저 운동은 15세기말에 시작되어 16세기에 크게 전개되었는데, 주로 목장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젠트리와 요우먼이 주축이 되었고, 이로써 빈농이 농촌을 떠나게 되어 중세 
촌락의 공동체적 성격이 해체되었다.
  (암기법) 클로즈업(인클로저 운동): 그만(15C)

    아메리카 대륙발견(1492)
  제노바 출신의 이탈리아 사람인 콜럽부스는 토스칼넬리의 지구 구체설을 믿고 에스파냐 여왕 
이사벨라의 후원을 얻어 1492년 팔로스 항을 출항하였다. 60여 일간 대서양을 횡단한 끝에, 
오늘날 서인도 제도의 산살바도르 섬에 도달하였다. 그 후 3회에 걸쳐 더 항해하였으나, 
끝까지 이곳이 인도라 믿었다.
  그 후 피렌체의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신대륙임을 확인(아메리고의 이름에서 '아메리카' 가 
유래) 하였다.
  (암기법) 아메리카(아메리카 대륙 발견): 그리 좋니?(1492)

    루터의 종교개혁
  종교 개혁은 1517년에 독일인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여 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면서 시작되었따. 루터는 면죄부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성서와 믿음에 의해서만 
인간이 구제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로마 교황청은 루터에게 반박문의 철회를 요구하였으나, 루터가 거절하자 1521년 루터를 
파문 시켰다.
  작센 선제후(선제후) 의 보호하에 비텐베르크(Wittenberg) 성에 피신한 루터는 여기에서 
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다.
  이 종교 개혁 운동은 점차 전유럽에 퍼져 큰 세력을 형성하여, 미침내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리는 신교의 성립을 보았다.
  (암기법) 종교(종교개혁) 에: 국민관심(1517)

    지동설(1543)
  그리스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우스에 의해 체계화된 천동설은 크리스트교 교리에 일치하는 
것으로 중세의 우주관이 되었다.
  이러한 천동설에 처음 반기를 들었던 사람은 성직자였던 코페르니쿠스였다. 그는 유명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를 발표하여, 종래의 프톨레마이우스의 천동설을 뒤엎고 지동설을 
제창하였다.
  이는 당시 교황 중심의 중세적 질서를 뿌리째 뒤흔드는 학설이었으므로 교회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그 후 지동설은 케플러, 갈릴레이를 거쳐 진리로 굳어졌는데, 갈릴레이가 법정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 라고 한 말은 너무나 유명하다.
  (암기법) 지구가 도는 걸(지동설): 갠 몰랐대(1543)

    절대주의(1556)
  절대주의란 왕권 신수설에 의한 강력한 왕권을 배경으로 한 중앙 집권적인 전제 정치 체제를 
말한다.
  국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관료와 상비군을 두었다. 이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경비가 필요하였으므로, 국가가 모든 경제 활동을 간섭, 통제하는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유럽에서 가장 먼저 절대주의를 확립한 나라는 에스파냐였다.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는 무적 
함대의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해상권을 장악하여 절대 왕정을 수립하였다.
  (암기법) 절대, 주의(절대주의) 해: 꼬마 말버릇(1556)

    청교도 혁명(1642)
  1642부터 1660년까지 청교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영국의 시민 혁명.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찰스 1세가 전제 정치를 강화하자, 청교도가 중심이 되어 
있던 의회와 충돌하여 내란이 발생하였다.
  지주, 상공업자들이 중심이 된 의회군은 크롬웰의 지휘하에 귀족, 성직자들이 중심이 된 
왕당파를 물리쳐 왕정을 무너뜨리고, 영국 최초로 공화정을 수립하였다.
  청교도 혁명으로 영국은 봉건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되는 결정적 계기가 
마련되었다.
  (암기법) 교도소(청교도 혁명) 에: 가버렸네(1642)

    명예혁명(1688)
  영국의 시민 혁명.
  왕정 복고 후 제임스 2세가 전제 정치를 강화하자, 토리당과 휘그당이 합세하여 제임스 
2세를 폐위시키고, 그의 딸 메리와 남평니 네덜란드 총독 윌리엄을 새로이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러한 왕위 교체가 피를 흘리지 않고 이루어졌다 하여 명예 혁명이라 한다.
  (암기법) 명예(명예혁명) 로운: 기부유언(1688)

    산업혁명(1760)
  18세기 중엽부터 영국을 효시로 일어난 산업상의 대변혁.
  기계의 발명과 기술 혁신에 의해 생산 방식에 큰 변화를 일으킨 것으로, 수공업에서 공장제 
기계 공업으로 바뀌게 된 변혁을 말한다.
  더 나아가 경제, 사회 구조의 큰 변혁을 일으켰는데, 이는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시작되어 
프랑스, 벨기에 등 여러 나라에 영향을 주어 공업화를 진행시켰다.
  (암기법) 산업(산업혁명): 계속 번창(1760)

    프랑스 대혁명(1789)
  절대 왕정인 부르봉 왕조의 억압 정치와 신분 구조의 모순, 재정 파탄 등의 원인으로, 당시 
성장해 있던 시민들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혁명.
  혁명은 자유, 평등, 우애를 이념으로 하였으며, 인권 선언을 공포하고, 새로운 헌법을 
정하여 공화제가 성립되었다.
  국민 의회, 입법 회의, 국민 공회를 거쳐 나폴레옹의 권력이 몰락하기까지 이 혁명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각지에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사상을 보급시켰다.
  (암기법) 푸대(프랑스 대혁명) 속에: 곡식 있지(1789)?

    제국주의(1870)
  제국주의는 독점 자본주의가 변질된 민족주의와 결합되어 강대국이 무력이나 경제력 등을 
이용해서 후진국을 침략, 식민지로 지배하는 것을 말한다.
  이미 지리상의 발견 이후 서양 열강에 의한 식민지 지배가 있었지만, 이 때 식민지는 상품 
시장과 원료 공급지로서의 의미가 컸었다.
  그러나 제국주의 시대에 서양 열강들은 상품 수출보다는 식민지에 잉여 자본을 투자하여 
초과 이윤을 얻어려 하였따. 이에 따라 19세기 후반부터 서양 열강은 자본의 투자 시장을 
확보하기 위한 식민지 획득 경쟁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암기법) 제국주의: 군인수출(1870)

    제1차 세계대전(1914)
  1914년 6월, 사라예보 사건을 원인으로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삼국 동맹국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삼국 협상국으로 나뉘어 전개된 세계대전.
  독일과 영국의 제국주의적 대립, 알사스, 로렌 문제를 둘러싼 독일과 프랑스의 대립, 
발칸에서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민족주의적 항쟁 등이 1914년 6월 보스니아주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처를 세르비아인이 사살한 사건을 계기로 발화되어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가 전쟁에 들어가고, 삼국 동맹과 협상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 대전으로 
발전하였다.
  (암기법) 1세(제1차 세계대전) 들은: 곧장 가라(1914)

    러시아 혁명(1917)
  러시아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거듭되는 패전과 물자 결핍 등을 군기가 문란해지고, 국민 
생활도 어려워져 불만이 높아갔다.
  1917년 3월 페트로그라드(현 레닌그라도) 의 노동자 폭동이 군대의 함류로 혁명으로 
발전하여, 로마노프 왕조는 멸망하고 케렌스키를 지도자로 하는 연립 정부가 
세워졌다(3월혁명).
  그러나 임시 정부의 자유주의적인 개혁이 잘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국민들의 불만이 
해소되지 못하자, 레닌을 중심으로 한 급진 사회주의자들이 볼셰비키 당을 중심으로 혁명을 
진행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라는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였다(11월 혁명).
  (암기법) 러시아워(러시아 혁명): 가장 고생(1917)

    제 2차 세계대전(1939)
  독일, 이탈리아,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전체주의 국가들로 구성된 추축국의 침략에 의해,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의 연합국과 추축국 사이에 일어났던 전쟁.
  전쟁의 도화선이 된 것은 독일의 단찌히 및 폴란드 회랑에 대한 요구였다.
  이 전쟁은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종결되었다.
  (암기법) 2세(제2차 세계대전) 들이: 곧장 등장(1939)

     유럽 문화 개관
    크리스트교 공인(313)
  공인(크리스트교 공인): 당구대(313)
    교부철학(4C 후반)
  원서 교부(교부철학): 를(4C)
    로마법 대전(528)
  법대(로마법 대전): 문 높아(528)
    베네딕트 수도원(529)
  네트(베네딕트 수도원) 에: 매니저(529)
    성 소피아 성당(537)
  소피(성소피아 성당) 보고: 문단속(537)
    스콜라 철학(9C)
  콜라(소콜라 철학): 줘(9C)
    볼로냐 대학(1170)
  불렀냐(볼로냐 대학) ?: 관광사 차를(1170)
    동방견문록(1299)
  동방(동방견문록) 불패: 국내제작(1299)
    단테의 '신곡'(1300)
  신곡(단테 신곡) 발표: 팬 초청(1300)
    보카치오의 '데카메론'(1353)
  카메라(데카메론): 판매됨(1353)
    금속활자(1445)
  금속(금속활자) 성분: 함량미달(1445)
    우신예찬(1509)
  신예(우신예찬): 그만 출전(1509)
    바로크 양식(16C)
  바로크(바로크 양식): 가봐(16C)
    갈릴레이 망원경(1609)
  망원경으로: 경비 철저(1609)
    만유인력의 법칙(1687)
  만유인력 때문에: 기분 이상(1687)
    계몽사상(18C)
  계몽사 책(계몽사상): 구입(18C)
    베르사유 궁전(1710)
  배를 사서 궁전(베르사유 공전) 에: 금새 감춤(1710)
    로코코 미술(1723)
  코코(로코코 미술): 가슴 넓다(1723)
    와트의 증기기관(1769)
  증기기관(와트의 증기기관): 가슴 부족(1769)
    낭만주의(19C 전반)
  낭만(낭만주의) 찾아서: 가자(19C)
    사실주의(19C 후반)
    사실, 주의(사실주의) 해도: 걱정(19C 후반)

    크리스트교 공인(313)
  역대의 로마 황제들에 의한 박해가 1세기 후반부터 4세기초까지 계속되었으나, 크리스트 
교도들은 투옥, 고문, 사형 등에도 굴하지 않고 용기있게 대항하였다.
  따라서 로마의 지배자들은 크리스트교를 관용하지 않을 수 없어서, 311년 갈레리우스가 관용 
정책을 취하게 된 후, 곧 이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밀라노 칙령을 통해 크리스트교를 
공식적으로 하나의 종교로서 인정하였다.
  (암기법) 공인(크리스트교 공인) 됨: 당구대(313)

    교부철학(4C 후반)
  교부 철학은 크리스트 교회에서 교리를 합리적, 철학적으로 조직하려고 한 철학으로서, 
4세기 후반 로마 교회를 지도한 교부(신부)들에 의해 성립되었고, 5세기초 신국론을 저술한 
아우구스티누스에 이르러 최성기에 달했다.
  그 내용은 그리스 철학을 도입하여 크리스트교의 정통 교리를 다듬고 확립하는데 주력했던 
신학적인 철학이다.
  (암기법) 원서 교부(교부철학): 를(4C)

    로마법 대전(528)
  유스티나아누스 황제의 칙명으로 편찬된 로마법의 집대성.
  로마의 법률은 과습번에서 시민법으로 이어져 만민법으로 발전하였는데,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수스 황제는 528년 트리보니아누스에게 법전 편찬을 명하였다. 그를 비롯한 16병의 
편찬 위원들은 그때까지 흩어져 있던 법전들을 모아 하나의 체계를 이루었다.
  로마법은 근대 국가에 받아들여져 근대 사회의 기반이 되었다.
  (암기법) 법대(로마법 대전): 문 높아(528)

    베네딕트 수도원(529)
  수도원의 기원은 동방 세계에 있으나, 기독교 세계에 있어서의 수도원은 6세기초 
베네딕투스(St, Benedictus) 가 몬테카시노에 수도원을 세운데서 비롯된다.
  이 수도원에서는 승려들이 청빈(poverty: 자신의 것은 아무 것도 갖지 아니함), 
순결(chastity: 결혼을 하지 아니함), 복종(obedience: 수도원장에 대한 절대 복종) 을 계율로 
삼아 서약하고, 명상과 노동을 일상 생활로 하며 수도 생활을 행하였다.
  (암기법) 네트(베네딕트 수도원) 에: 매니저(529)

    성 소피아 성당(537)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콘스탄티노플에 재건한 성당으로, 가장 뛰어난 비잔틴 양식 
건축물이다. 직경 31m, 높이 55m의 돔을 중심으로 내부는 모자이크 장식이 되어 있으며, 
대사원의 치장을 위해 로마와 아테네, 그리고 고대 도시의 신전에서 대리석 기둥을 운반해 
왔다.
  이 사원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었다.
  (암기법) 소피(성소피아 성당) 보고: 문단속(537)

    스콜라 철학(9C)
  중세에는 교회의 교리가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여졌으나, 점차 이를 학술적으로 입증하려는 
노력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9세기에는 교부 철학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 기반을 둔 스콜라 철학이 
성립되었다.
  그 내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통하여 크리스트교의 교리를 체계화하려는 것으로,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목표로 했다.
  (암기법) 콜리(스콜라 철학): 줘(9C)

    볼로냐 대학(1170)
  중세 대학은 교권: 속권과 함께 학권으로서 중세 시대 권위중의 하나였다. 초기의 유명한 
대학으로는 볼로냐 대학과 파리 대학을 들 수 있는데, 모두 12세기에 창립되었다.
  볼로냐 대학은 학생이 중심이 되었던 대학으로, 학생들은 국적에 따라 여러 동향단을 
만들고, 그 중에서 학생감과 학장을 선출하여 학사 행정을 맡게 하였다. 이 대학은 로마법의 
부활 운동이 일어난 곳에 있었기 때문에 법학이 유명하였다.
  (암기법) 불렀냐(볼로냐 대학) ?: 관광사 차를(1170)

    동방 견문록(1299)
  동방 견문록은 1299년 마르코 폴로가 17년간의 몽고 생활을 바탕으로 지은 여행기이다.
  그는 베네치아의 보석 상인인 아버지 니콜로 폴로(Nicolo Polo) 와 숙부 마테오 폴로(Matteo 
Polo) 가 1265년에 쿠빌라이 몽고 황제 궁전에 도착하여 긴 여행을 한 후 돌아온 신비스런 
경험을 토대로, 다시 그들과 함께 몽고를 여행하였다. 그 동방 여행중의 여러 가지 견문을 
귀국한 뒤에 '세계의 불가사의' 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것이 동방 견문록이다.
  이 견문기는 신비스런 동방의 베일을 벗겨 동방에 대한 서방인의 관심을 촉발시켰고, 동, 서 
양의 교류에 커다란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또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암기법) 동방(동방견문록) 불패: 국내 제작(1299)

    단테의 '신곡'(1300)
  이탈리아의 시성 단테가 지은 웅장한 서사시.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의 3부로 된, 세계 고전 문학의 금자탑이다. 1300년부터 1321년까지 
제작되었다. 광대한 규모와 건축적인 균형, 조화의 아름다움을 지닌 일대 시편이다. 내용은 
삼위 일체를 상징하고 있어 중세 철학의 정수를 보영 준다.
  (암기법) 신곡(단체의 신곡) 발표: 팬 초청(1300)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이탈리아의 작가 보카치오의 대표작으로, '10일 이야기' 라고 번역된다.
  전염병이 페스트를 피하여 피렌체 교외의 별장으로 남녀 10명이 모여 한 사람이 한 가지씩 
하루에 열 가지의 이야기를 하였데, 설화가 모두 100가지에 달한다. 성직자의 이면과 부패에 
대한 조소, 구지배 계급에 대한 서민의 평등 감정, 인가의 욕망 등을 대답하고 자유롭게 
표현하였다.
  (암기법) 카메라(데카메론): 판매됨(1353)

    금속활자(1445)
  15세기 중엽에 독일의 구텐베르크에 의해 발명된 활판 인쇄술은 제지술의 보급과 더불어 
새로운 지식과 사상의 전파에 이바지하였으며,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우리 나라는 13세기(1234) 에 <상정고금예문> 을 인쇄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14세기91377) 
에 금속 활자로 인쇄된 <직지심경> 이 현존하고 있다.
  (암기법) 금속(금속활자) 성분: 함량미달(1445)

    우신예찬(1509)
  네덜란드 출신의 북유럽 최대의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 쓴 종교 비판서.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을 통해 카톨릭의 광신, 교회의 폐단, 성직자의 부패를 비판하고, 
신앙심의 부활, 자연스럽고 자유스러운 인간상의 회복을 꾀하였다.
  우신예찬은 종교개혁에 영향을 끼쳤고, 르네상스 정신의 선구가 되었으며, 영국의 토머스 
모어에게도 감화를 주었다.
  (암기법) 신예(우신예찬): 그만 출전(1509)

    바로크 양식(16C)
  16세기 말엽부터 18세기 전반까지 유럽,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에 유행한 회화, 건축, 
조각 등의 미술 양식.
  감각적 효과를 노린 동적이고 격정적인 경향을 띠었다. 바로크란 부조리하고 부정형한 것을 
뜻한다.
  건축에 있어서는 거대한 양식과 곡선의 활용, 조각에 있어서는 비상하는 동적인 자태와 
다양성있는 의복의 표현 등을 특징으로 한다. 또한 그림에 있어서는 대각선 구도, 원근법, 
단축법 등이 특색이다.
  로코코 양식으로 발전하였다.
  (암기법) 바로(바로크 양식): 가봐(16C)

    칼릴레이의 망원경(1609)
  르네상스 후기 이탈리아의 과학자 갈릴레이는 1609년부터 스스로 만든 굴절 망원경으로 
목성(목성) 의 위성, 금성의 공전, 지구의 자전 등 지동설에 유리한 사실들을 발견함으로써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옹호하였다.
  (암기법) 망원경으로: 경비 철저(1609)

    만유인력의 법칙(1687)
  우주에 있는 질량을 가진 모든 물체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는 법칙.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튼은 1687년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 라는 책을 통해서 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세상에 발표하여 천문학상의 원리를 
하나로 종합하였으며, 근대 물리학의 토대를 확립하였다.
  (암기법) 만유인력 때문에: 기분 이상(1687)

    계몽사상(18C)
  계몽 사상은 르네상스 이래의 근대 사상의 소산으로서 과학의 발달, 데카르트이 합리주의, 
로크의 정치 사상, 시민 계급의 성장 등을 배경으로 성립되었으며, 인간의 이성을 높이 
평가하고 무지와 미신, 이성에 반대되는 전통이나 제도를 타파하여 인류 사회의 진보를 
꾀하려는 혁식 사상이었다.
  계몽 사상은 18세기를 대표하는 사상으로서 프랑스를 중심으로 널리 퍼져 절대 군주에 
영향을 끼쳐 계몽 전제 군주를 낳기도 하였으며, 시민 혁명 특히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원동력이 되었다.
  (암기법) 계몽사 책(계몽사상): 구입(18C)
    베르사유 궁전(1710)
  루이 14세가 태양왕으로서 자기의 절대적 권위를 과시하기 위하여 당대의 일류 건축가, 
예술가를 총동원해서 24년 만에 완성한 세계 최대의 궁전이다. 약 1만 명의 궁정인을 
거느렸으며, 왕의 식사는 물론 산책에까지 많은 궁정 귀족이 참여하는 궁정 의식이 
이루어졌다.
  몰리에르, 라신 등 당대 최고의 문인들과 망자르, 푸셍 등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파리는 유럽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프랑스의 예의 범절, 프랑스어, 프랑스 의상, 프랑스 요리가 
전유럽에 유행하게 되었다.
  (암기법) 배를 사서 궁전(베르사유 궁전) 에: 금새 감춤(1710)

    로코코 미술(1723)
  1723--1760년경에 유행한 미술 양식, 루이 16세 양식이라고도 하는데, 프랑스에서 발생하여 
전유럽에 전파되었다.
  로코코 양식이란 본디 실내장식 양식을 가리키는 말이며, 우아한 곡선과 꽃무늬의 
아라베스크를 특색으로 하고 있었다. 곡선을 너무 많이 사용하여 말기적 귀족 취미를 풍긴다. 
궁중의 장중성에서 해방된 인간의 즐거움의 추구, 관능적 황홀, 사랑의 공감을 표현하였다.
  (암기법) 코코(로코코 미술): 가슴 넓다(1723)

    와트의 증기기관(1769)
  증기 기관의 연구는 17세기초부터 있었고, 18세기초에 뉴커먼이 발명한 증기 기관은 
광산에서 물을 퍼내는 데 이용되었으나, 연료가 많이 들고 힘이 약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와트는 13년이나 연구한 끝에 적은 연료로 강한 힘을 낼 수 있는 증기 기관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와트의 증기 기관이 공장에 보급되자, 공장제 기계 공업이 급속히 발달했다. 또 증기 기관은 
제철, 기계 금속 공업의 혁신을 가져왔으며, 나아가 기관차, 기선의 발명을 통해 교통 기관의 
혁신을 가져왔다. 그러므로 증기기관은 산업 혁명을 촉진시킨 최대의 발명이라 할 수 있다.
  (암기법) 증기기관(와트의 증기기관): 가스 부족(1769)

    낭만주의(19C)
  19세기 전반기의 지배적인 문예 사조로서, 고전주의와 이성의 시대에 대한 반동이었다.
  낭만주의는 이성을 존중하던 계몽 사상과 규격과 형식에 치우쳤던 고전주의에 반발하여 
감정과 자유로운 상상력을 강조하며, 민족의 과거에 큰관심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노발리스, 하이네, 위고, 워즈워스 등이 있다.
  (암기법) 낭만(낭만주의) 찾아서: 가자(19C 전반)

    진화론(1859)
  진화론이란 모든 살아 있는 유기체는 단순한 형태로부터 복잡한 형태로 발달해 가며 동시에 
어떠한 종이라 하더라도 고정되어 있을 수 없다는 이론이다.
  다윈은 1859년 그의 저서 <종의 기원> 에서 생존 경쟁, 자연 도태, 적자 생존의 원리를 
제시하여 크리스트교의 창조론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사회적 진화론을 유행시켰으며, 
스펜서는 사회를 살아 있는 유기체를 보고 적자 생존에 입각하여 무제한의 자유 경쟁을 
합리화시켰다.
  (암기법) 진화(진화론) 되어: 거인 멸종(1859)

    사실주의(19C 후반)
  19세기 후반기의 지배적인 문예 사조로, 한편으로는 자연 과학의 발전과 과학적 합리주의 
경향에 호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감상주의로 타락한 낭만주의에 반발하였다.
  사실주의 작가들은 실제로 본 것을 충실하게 묘사하며, 사실을 미화함이 없이 인간이 경험을 
완전히 정직하게 표현하려 노력하였으며, 또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발생된 사회 문제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비참한 사회상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려 노력하였다.
  (암기법)사실, 주의(사실주의) 해도: 걱정(19C 후반)

     크리스트교의 역사
    밀라노 칙령(313)
  밀리는(밀라노 칙령): 당구대(313)
    크리스트교 공인(313)
  공인(크리스트교 공인) 된: 당구대(313)
    니케아 종교회의(325)
  니꺼야(니케아 종교회의): 돈 내면(325)
    성상숭배 금지령(726)
  숭배 금지령(성상숭배 금지령): 샜나봐(726)
    클뤄니 수도원(910)
  끌리니(클뤼니 수도원)?: 중고차(910)
    동서 교회의 분열(1054)
  교회분열(동서 교회의 분열): 경찰모략(1054)
    카놋사의 굴욕(1077)
  노사 굴욕(카놋사의 굴욕) 은: 곧 처세술(1077)
    클레르몽 종교회의(1095)
  크레용(클레르몽 종교회의) 과: 공책 장만(1095)
    십자군 전쟁(1096)
  십자군(십자군 전쟁): 권총준비(1096)
    보름스 협약(1122)
  보름(보름스 협약) 엔: 고기 넉넉(1122)
    교황의 아비뇽 유수(1309)
  고향의 아비는(교황의 아비뇽 유수): 풍채 좋아(1309)
    콘스탄츠 종교회의(1414)
  큰 스턴트맨(콘스탄츠 종교회의): 굴러굴러(1414)
    예수회 창설(1534)
  예수(예수회) 님께: 가면 되리(1534)
    루터의 종교개혁(1517)
  종교(루터의 종교개혁) 에: 국민관심(1517)
    트리엔트 종교회의(1545)
  오리엔트(트리엔트 종교회의) 엔: 금모래만(1545)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1555)
  아우 커서(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 건물 매매(1555)
    낭트 칙령(1598)
  낭떠러지 칙(낭트칙령) 은: 끝맛 좋아(1598)

     밀라노 칙령(313)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에 로마를 공동으로 다스리고 있던 리키니우스와 밀라노에서 
회견한 뒤에 발표한 칙령이다. 속주의 총독들에게 보내는 서한의 형식으로 발표된 이 칙령은 
신앙 자유의 원칙에 의하여 신교의 자유를 허락하고 크리스트교를 공인하였다.
  (암기법) 밀리는(밀라노 칙령): 당구대(313)

    크리스트교 공인(313)

    니케아 종교회의(325)
  삼위 일체에 관한 교회 내부의 논쟁을 해결하고, 겸하여 교회의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소아시아의 니케아에서 개최한 크리스트 교회 최초의 종교 회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아타나시오스의 삼위 일체설을 정통 교리로 
삼고, 크리스트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암기법) 니꺼야(니케아 종교회의): 돈 내면(325)

    성상숭배 금지령(726)
  성상이란 크리스트상, 성모상, 기타 성직 순교 자상 등을 말한다.
  본래 크리스트교는 우상을 숭배하지 않았으나, 게르만족을 교화하고 개종시키는 데 있어서 
성상 숭배가 매우 큰 힘을 발휘하였기 때문에, 로마 교회에서는  성상 숭배를 교리로 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로마에서는 성상 숭배가 신성 모독이라 하여 이를 반대하였다. 726년 
비잔틴(동로마) 황제 레오 3세가 성상 파괴 명령을 내린 이후, 정치적, 종교적으로 분쟁이 
발생하였다.
  (암기법) 숭배 금지령(성상숭배 금지령): 샜나봐(726)

    클뤼니 수도원(910)
  910년에 세워진 이 수도원은 세속적 권력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우며 베네딕트의 계율을 
준수하는 것이 그 목표였다. 엄격한 수도 생활을 계속하여 전 유럽에 그 명성이 퍼지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클뤼니에 모여들어 재물을 기증하며 개혁을 촉진시킨 결과, 낡고 썩은 
세속적 교회에 청신한 기풍을 불어 넣었다. 이후, 클뤼니 수도원은 교황 다음 가는 유럽 
정신계의 지도자가 되었다.
  (암기법) 끌리니(클뤼니 수도원)?: 중고차(910)

    동서 교회의 분열(1054)
  기독교는 원래 우상을 만들 수 없게 되어 있었는데, 로마 교회는 게르만족에 대한 포교의 
필요 때문에 성상 숭배의 풍습을 인정하였다.
  이에 대하여 동로마 교회에서는 황제 레오 3세가 우상 숭배 금지령을 반포하고 이를 
준수하도록 서로마 교회에 요구하였는데, 서로마 교황 레오 9세는 이를 거부하였다.
  이를 계기로 1054년 기독교는 로마 교황을 중심으로 한 카톨릭 교회와 동로마 황제를 
수장으로 하는 그리스 정교회로 분리되었다.
  (암기법) 교회분열(동서 교회의 분열): 경찰모략(1054)

    카놋사의 굴욕(1077)
  성직 임명권(서임권) 의 문제로 클뤼니 수도원 출신의 교황 크레고리우스 7세(Gregorius) 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Heinrich) 가 충돌한 사건이다.
  수도원 개혁자 출신인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직자의 결혼과 성직 매매를 금지시키고, 
성직 임명권을 세속 지배자(황제) 의 손에서 빼앗아 교황의 수중에 넣으려 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독일 안에서 많은 교회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와 정면 충돌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황과 황제는 서로 파문과 파면의 벌을 내리면서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제후들의 반항으로 세력을 잃게 된 하인리히는 카놋사 성 밖에 맨발로 
꿇어 앉아 사흘을 빌어 겨우 교황의 용서를 받았다.
  카놋사의 굴욕이라 불리우는 이 사건은 중세 크리스트교의 전성과 승리의 상징으로서, 이를 
배경으로 2세기에 걸친 십자군 운동이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암기법) 노사 굴욕(카놋사의 굴욕) 은: 곧 처세술(1077)

    클레르몽 종교회의(1095)
  프랑스 중부의 클레르몽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성지횡복을 위하여 십자군의 결성을 
주장했던 종교회의.
  셀주크 투르크가 시리아를 점령하고 이어서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1071) 순례자를 
박해하고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자, 동로마 황제가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동, 서 교회의 통합, 교황권 신장의 기회로 간주한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us, 재위 
1088--1099) 는 각지의 대주교, 주교, 수도원장 등 600여 명을 남프랑스 클레르몽(Clermont) 
에 모아놓고, 소아시아의 참상과 크리스트의 유적에 대한 투르크 인의 침략상을 묘사하여 성지 
탈환 운동을 설교하였다.
  (암기법) 크레용(클레르몽 종교회의) 과: 공책 장만(1095)

    십자군 전쟁(1906)

    보름스 협약(1122)
  신성 로마 황제인 하인리히 5세와 교황 칼리스투스 2세간에 맺어진 협정, 이로써 1076년 
이래의 성직 서임권 투쟁은 일단 타결되었다.
  그 협정에서는 규정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제국내의 주교와 수도원장의 선립은 황제의 입회 아래 행하여지며, 황제의 의한 임명이 
교황에 의한 성별에 앞서나, 이탈리아와 부르군드에서는 교황에 의한 선립과 성별이 앞선다.
  2) 영지를 가진 성직자는 봉건적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암기법) 보름(보름스 협약) 엔: 고기 넉넉(1122)

    교황의 아비뇽 유수(1309)
  14세기초에 프랑스내의 성직자에 대한 과세 문제로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와 프랑스 왕 필립 
4세가 대립하였는데, 보니파티우스 8세가 패배하였다.
  그 결과 프랑스 왕 필립 4세는 교황청을 남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기고, 교황을 약 70년간 
프랑스 왕의 세력 밑에 있게 하였는데, 이 사건을 교황의 아비뇽 유수라고 한다.
  (암기법) 고향의 아비는(교황의 아비뇽 유수) 풍채 좋아(1309)

    콘스탄츠 종교회의(1414)
  교황 요한네스 23세가 독일과 스위스 국경에 있는 콘스탄츠에서 소집한 중세 최대의 종교 
횡의, 이 회의에서 후스를 이단으로 규정하여 화형에 처하고, 로마 교황청을 정통으로 하여 
교회의 대분열을 해결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부패는 여전하였고, 그 후에도 혁신 운동은 그치지 않아 마침내 근대초의 
종교 개혁 운동으로 연결되었다.
  (암기법) 큰 스턴트맨(콘스탄츠 종교회의): 굴러굴러(1414)

    예수회 창설(1534)
  로마 카톨릭 교회에 속한 교단으로, 종교 개혁을 계기로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에 대항하기 
위해 에스파냐의 로욜라가 1534년 창설하였다.
  교황과 상위자에 절대 복종하며, 군대식 규율 아래 교육과 선교 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들의 
활동으로 유럽에서의 신교 확산이 저지되었으며, 예수회의 해외 포교는 에스파냐, 포르투갈의 
식민 활동과 더불어 신대륙, 아시아에까지 마쳤다.
  (암기법) 예수9예수회 창설) 님께: 가면 되리(1534)

    루터의 종교개혁(1517)

    트리엔트 종교회의(1545)
  1545--1563년간 전후 3회에 걸쳐 북이탈리아의 트리엔트 시에서 개최되었던 종교 회의
  종교 개혁의 확대를 막기 위하여 트리엔트 공의회를 열어 카톨릭 자체의 폐단을 시정하고 
기본적인 교리를 재확인하는 한편, 종교 재판소를 설치하고 금서 목록을 작성하였다. 또한 
교황의 지상권을 확립하는 등 스스로의 개혁에 노력하면서 교세의 확대에 전력하였다.

    아우크스 부르크 종교화의(1555)
  독일에 있어서의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파의 대립을 조정하기 위해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소집된 제국 의회에서 맺어진 화약.
  그 내용은 독일의 제후와 자유 도시에게 루터파를 선택할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는 
개인에게 신앙의 자유를 준 것은 아니지만, 교황의 지배를 받지 않는 새로운 교파를 인정한 
것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암기법) 아우 커서(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 건물 매매(1555)

    낭트 칙령(1598)
  프랑스 국왕 앙리 4세가 국내의 프로테스탄트(위그노) 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칙령.
  국내의 종교적 분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본래 프로테스탄트였던 앙리 4세는 카톨릭으로 
개종함과 동시에 이 칙령으로써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이 칙령으로 일단 분쟁은 정치적으로 해결되었으나, 종교적 대립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결국 
루이 14세 때 칙령이 폐지되기에 이른다.
  (암기법) 낭떠러지 칙(낭트칙령) 은: 끝맛 좋아(1598)

     프랑크 왕국
    게르만의 대이동(374년경)
  개 이동(게르만의 대이동): 도시로(374)
    프랑크 왕국(481--843)
  프랑크(프랑크 왕국) 에: 라인강(481)
    메로빙 왕조(481--751)
  메로나 (메로빙 왕조) 를: 라인강(481) 에서
    투르, 프와티에 전투(732)
  두루(투르, 프와티에 전투): 쏘다님(732)
    카롤링 왕조(751--843)
  카(car) 로(카롤링 왕조): 성묘 감(751)
    베르덩 조약(843)
  벼르던(베르덩 조약): 일류대(843)
    메르센 조약(870)
  메로나(메르센 조약) 먹으며: 아싸춤(870)

    게르만의 대이동(374년경)

    프랑크 왕국(481--843)
  게르만 부족의 일파인 프랑크족이 5세기말에 갈리아 지방에 건설한 국가.
  로마 카톨릭 교회와 제휴함으로써 급속히 팽창하여 오늘날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태반을 포함하는 대제국이 되어 유럽 문화의 역사적 형성의 출발점이 되었다.
  (암기법) 프랑크(프랑크 왕족) 에: 라인강(481)

    메로빙 왕조(481--751)
  프랑크 왕족 최초의 왕가(481--751).
  라인 강 너머에서 북갈리아로 진출한 프랑크족은 처음 여러 소왕국으로 갈라져 있었으나, 
5세기말에 메로빙의 클로비스가 이들을 통합하고 영토를 갈리아 중부까지 넓혀서 파리에 
도읍하였다. 그리고 그는 카톨릭교로 개종함으로써 교회의 지지를 얻은 것은 몰론이거니와, 
갈리아의 로마인과 융화하는 길을 닦았다.
  (암기법) 메로나(메로빙 왕조) 를: 라인강(481) 에서

    투르, 프와티에 전투(732)
  프랑크 왕국의 재상 샤를 마르텔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침입한 이슬람군을 남프랑스의 
르와르강 유역인 루트와 프와티에 사이에서 격퇴한 싸움.
  이슬람이 침입이 이로써 완전히 정지된 것은 아니지만, 이슬람교의 서구 침입을 
저지시킴으로써 프랑크 왕구과 크리스트교를 이슬람 교도로부터 수호하였다.
  (암기법) 두루(투르, 프와티에 전투): 쏘다님(732)

    카롤링 왕조(751--843)
  751년 이래 메로빙 왕조의 뒤를 이어 프랑크 왕국을 지배한 왕가.
  메로빙 왕조의 궁내 대신인 카알 마르텔의 아들 피핀은 751년 교황의 지지를 얻고 메로빙 
왕조를 폐하여 왕위에 오르고 카롤링 왕조를 시작하였다.
  이로써 프랑크 왕국과 카톨릭 교회와의 제휴가 이루어졌으며, 새로운 유럽 건설의 계기가 
시작 되었다.
  (암기법) 카(car) 로(카롤링왕조): 성묘 감(751)

    베르덩 조약(843)
  843년에 루드비히 1세의 세 아들이 프랑크 왕국을 셋으로 분할한 상속 조약이다.
  루드비히 1세는 만년(838) 에 세 아들에게 왕국을 분할해 주었으나 840년에 그가 죽자, 
형제들간의 대립이 심해져 베르덩에서 왕국을 3분하기로 약정하였다. 이 조약에 의해 루드비히 
2세의 동프랑크 왕국, 칼의 서프랑크 왕국, 로타르의 이탈리아로 나누어졌으며, 후일 
동프랑크는 독일 왕국으로, 서프랑크 프랑스 왕국이 되었다.
  (암기법) 벼르던(베르덩 조약): 일류대(843)

    메르센 조약(870)
  프랑크 왕국의 분열 후 로타르가 죽자 남은 영토를 가지고 루드비히, 카알 2세, 그리고 
로타르의 아들 루이 2세 사이에 맺어진 조약이다.
  이 조약은 870년에 메르센에서 이루어졌는데, 대체로 모젤 강과 마스 강 하류의 선을 따라 
동쪽은 동프랑크가, 서쪽은 서프랑크가 차지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양국간의 분쟁은 
계속되어, 880년에 리베몬 조약으로 동프랑크 왕 루드비히 3세가 로트링겐의 서쪽 절반까지 
차지해 버렸다.
  오늘날 독일과 프랑스 국경의 기초가 되었다.
  (암기법) 메로나(메르센 조약) 먹으며: 아싸춤(870)

     프랑스
    카페 왕조(987--1328)
  카페(카페 왕조) 에: 주안상(987)
    삼부회(1302)
  삼부(삼부회) 이자: 거듭 체납(1302)
    백년 전쟁(1338--1453)
  백년(백년전쟁) 동안: 가둬 둬요(1338)
    자크리의 난(1358)
  자리는(자크리의 난): 계단 밑에(1358)
    부르봉 왕조(1589--1883)
  부르릉(부르봉 왕조): 고물 엔진(1589)
    프랑스 대혁명(1789)
  푸대(프랑스 대혁명) 속에: 곡식 있지?(1789)
    인권선언(1789)
  인권(인권선언): 계속 유지(1789)
    공포정치(1793)
  공포(공포정치): 귀신 졸도(1793)
    레르미도르의 반동(1794)
  테러범(레르미도르의 반동): 구속 정리(1794)
    나폴레옹 쿠데타(1799)
  나폴레옹(나폴레옹 쿠데타) 꼬냑 먹고: 꼭 술주정(1799)
    대륙 봉쇄령(1806)
  봉쇄(대륙 봉쇄령) 해라: 고을 침범(1806)
    워털루 싸움(1815)
  워터(워털루 싸움): 구입 갈망(1815)
    7월 혁명(1830)
  7월(7월 혁명) 7일: 견우 도착(1830)
    2월 혁명(1848)
  이월(2월 혁명) 된 것: 꼭 온라인:(1848)
    파리 코뮌(1871.3)
  코밑(파리 코뮌) 에: 깨알 생김(1871)

    카페 왕조(987--1328)
  프랑스 중세의 왕조.
  위그 카페가 987년 창업, 1328년 샤를 4세가 죽기까지 계속되었다. 12세기초 루이 6세에 
이르러 왕권의 강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고, 필립 2세에 이르러 영국의 존 왕을 
격파함으로써 빼앗겼던 영토의 대부분을 찾는데 성공하였다.
  샤를 4세의 죽음으로 단절되었다.
  (암기법) 카페(카페왕조) 에: 주안상(987)

    삼부회(1302)
  중세 후기에 프랑스 국왕이 창설한 신분제 의회, 1302년 필립 4세가 소집한 성직자, 귀족, 
시민 대표(제3신분) 로 구성된 모임을 말한다.
  이 삼부회의 소집 배경에는 도시와 시민 계급의 경제적, 정치적 성장이 있었다. 1302년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와 항쟁 중이던 필립 4세가 국민의 지지와 과세원의 확대를 위하여 소집한 
것이 처음이다. 그 후 삼부회의 권위가 높아져서 1357년에는 대칙령을 승인시키는 일도 
했지만, 왕권에 눌려서 1614년 이후의 170년간은 전혀 소집되지 않았다가, 1789년에 재차 
소집되었을 때는 오히려 혁명의 원인을 조성하였다.
  (암기법) 삼부(삼부회) 이자: 거듭 체납(1302)

    백년전쟁(1338--1453)
  영국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와 플랑드르 지방을 둘러싼 경제적 이해의 대립에서 비롯된 
영국과 프랑스 간의 100여 년에 걸친 싸움.
  처음에는 프랑스가 불리하여 많은 영토를 잃고, 농민의 반란마져 일어나 큰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오클레앙 성에서 애국 소녀 잔 다르크의 출현을 계기로 프랑스는 영국군을 대륙에서 
몰아내어 100여 년간의 전쟁을 승리로 끝냈다.
  (암기법) 백년(백년전쟁) 동안: 가둬 둬요(1338)

    자크리의 난(1358)
  1358년 북프랑스의 보베이지에서 대규모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이 난은 백년 전쟁의 전화로 
농토가 황폐해지고 농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귀족들에 대한 불만이 커진데다, 귀족의 지휘하에 
있는 기사들은 농촌을 약탈, 주구하였으며, 또 귀족이 포로가 되면 그 대속금을 농민이 져야 
하는 실정에서 귀족에 대한 농민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암기법) 자리는(자크리의 난): 계단 밑에(1358)

    부르봉 왕조(1589--1883)
  프랑스 및 에스파니아의 왕가.
  본래는 부르봉 공가였으나 1589년 앙리 4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프랑스의 왕가가 되었다. 
부르봉 왕조의 왕들은 앙리 4세->루이 13세->루이 14세->루이 15세->루이 16세로 이어졌다.
  프랑스 혁명으로 중단되었다가 다시 복고되었으나 곧 몰락하였다.
  (암기법) 부르릉(부르봉 왕조): 고물 엔진(1589)

    프랑스 대혁명(1789)
  절대주의적인 부르봉 왕정의 억압 정치와 신분 구조의 모순, 재정 파탄 등의 원인으로, 당시 
성장해 있던 시민들이 주축이 되어 구제도를 타파하고 근대 시민 사회를 이룩한 전형적인 시민 
혁명.
  혁명은 자유, 평등, 우애를 이념으로 하였으며, 도중에 인권 선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국민 의회 입법 의회, 국민 공회를 거쳐 나폴레옹의 권력이 몰락하기까지 이 혁명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각지에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사상을 보급시켰다.
  (암기법) 푸대(프랑스 대혁명) 속에: 곡식 있지?(1789)

    인권선언(1789)
  1789년 8월 26일 헌법 제정 의회가 결의, 공포한 선언으로, 정식 명칭은 '인간 및 시민의 
권리 선언' 이다. 라파에트가 미국의 독립 선언의 본을 따서 기초하였다.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모든 정부의 목적은 인간의 자연적이고 침해할 수 
없는 권리를 보장하는데 있다고 하였다. 보편적인 인간의 권리와 자유를 규정한 것으로, 가장 
진보된 인권 선언이었다. 이러한 인권 선언은 근대 자연법 사상과 계몽 사상을 바탕으로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명문으로 천명한 것이다.

    공포정치(1793)
  프랑스 혁명 중에 실시된 자코뱅 당의 독재 정치.
  로베스피에르를 수령으로 한 자코뱅 당 정부는 징병제를 실시하고, 봉건적 특권을 
폐지하였으며, 망명자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고, 여자에게도 남자와 
동등한 소유권을 인정하여 주었다.
  한편, 혁명 재판소를 두어 왕당파는 물론, 모든 반혁명의 용의자를 연달아 단두대에 보내어 
처형함으로써 철저한 공포 정치를 실시하였다.
  (암기법) 공포(공포정치): 귀신 졸도(1793)

    테르미도르 반동(1794)
  내란이 진정되고 혁명전의 상황도 호전되었으므로 공포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높아져, 1794년 7월 반대파들에 의해 로베스피에르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사건은 
테르미도르의 반동이라 하는데, 로베스피에르파의몰락과 더불어 공포 정치는 끝났으나, 혁명에 
대한 국민의 열의도 식어갔다.
  (암기법) 테러범(테르미도르 반동): 구속 정리(1794)

    나폴레옹 쿠데타(1799)
  코르시카 출신의 나폴레옹은 총재 정부에 등용되어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탈리아 
원정과 이집트 원정(1798) 으로 국민에게 널리 신망을 얻었다.
  1799년 제2차 대프 동맹이 결성되고 프랑스 국내가 혼란하자,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총재 정부를 타도하고, 통령 정부를 수립하여 정권을 정악하였다. 이 
사건은 11월 9일이 무월(무월, Brumaire : 브뤄메르는 프랑스          ) 18일에 해당되므로, 
브뤼메르 쿠데타라고도 한다.
  (암기법) 나폴레옹(나폴레옹 쿠데타) 꼬냑 먹고: 꼭 술주정(1799)

    대륙 봉쇄령(1806)
  나폴레옹의 영국에 대한 경제 작전.
  나폴레옹이 거의 전대륙을 지배하게 되었으나, 다만 영국만이 해상권을 장악하고 프랑스에 
대항하였다. 이에 1806년 나폴레옹은 베를린에서 대륙봉쇄령(베를린 칙령) 을 발표하여 영국에 
대한 경제적 봉쇄를 단향하였으며, 이에 영국도 나포령을 내려 대항하였다. 대륙과 영국과의 
통상을 금지하여 영국에 타격을 주려던 것이었으나, 오히려 대륙 여러 나라에 타격을 주어, 
반나폴레옹 기운이 높아 갔다.
  (암기법) 봉쇄(대륙 봉쇄령) 해라: 고을 침범(1806)

    워털루 싸움(1815)
  나폴레옹과 프랑스에 반대하는 동맹군과의 싸움.
  나폴레옹의 엘바 섬 탈출과 그 재기에 놀란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4개국은 
빈회의에서 대립을 즉각 그만두고, 동맹군을 프랑스로 진격시켰다. 여기서 나폴레옹은 영국의 
웰링턴 장군에게 패하여 다시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었다.
  (암기법) 워터(워터루 싸움): 구입 갈망(1815)

    7월 혁명(1830)
  프랑스의 복고 왕정을 타도한 혁명.
  빈 회의의 결정으로 프랑스로 돌아온 부르봉 왕실의 왕과 귀족들은 프랑스 사회를 혁명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려고 애썼다. 특히 루이 18세를 이어 즉위한 샤를 10세는 노골적인 반동 
정치로 기울어졌다.
  이에 분개한 파리 시민들은 다시 혁명을 일으켜 샤를 10세를 몰아내고, 대혁명에 동조한 
루이 필립을 '시민의 왕' 으로 추대하였다.
  (암기법) 7월(7월혁명) 7일: 견우 도착(1830)

    2월 혁명(1848)
  7월 혁명의 상층 시민 계급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혁명이었다면, 2월 혁명은 중소 시민과 
노동자 계급이 연합하여 일으킨 혁명이었다.
  당시 루이 필립의 7월 왕정은 초기에는 민주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차차 전제화하여 부유한 
시민층이 권력을 독점하는 금권 정치로 변화되어 갔으며, 선거권도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이에 왕정 타도를 외치는 파리 시민의 무장 봉기가 일어나, 새로운 공화정(제2공화국) 을 
수립하고, 선거권을 확대하여 보통 선거를 실시하게 되었다.
  (암기법) 이월(2월 혁명) 된 것: 곡 온라인(1848)

    파리 코뮌(1871.3)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 후 파리에 성립된 소시민, 노동자의 혁명정권.
  티에르 정부가 프로이센과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맺자, 파리의 노동자와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노동자 중심의 자치 정부(파리 코뮌) 를  수립하여 사회주의 정책을 한동안 
실시하였으나, 정부군에게 곧 진압되었다.
  이것은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라는데 의의가 있다.
  (암기법) 코밑(파리코뮌) 에: 깨알 생김(1871)

     독일
    신성 로마 제국(962--1806)
  신성일(신성 로마 제국) 이: 제비냐?(962)
    대공위 시대(1254--1273)
  대공원(대공위 시대): 금년 무료(1254)
    금인칙서(1356)
  금연(금익칙서) 하니: 팔 마비(1356)
    독일 농민전쟁(1524)
  독일 농민(독일 농민전쟁): 근면노력(1524)
    프리드리히 대왕(1740--1786)
  프리 드로(프리드리히 대왕) 던질 땐: 꼭 소리 쳐(1740)
    관세 동맹(1834)
  관세(관세동맹)는: 꼭 양대로(1834)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1862)
  혈혈(철혈정책) 단신: 교육 받네(1862)
    독일통일(독일제국) (1871)
  도통한(독일통일): 그 역술가(1871)
    3B 정책(1890)
  삐삐삐(3B정책): 구입 지참(1890)
    바이마르 공화국(1918--1933)
  이마(바이마르 공화국) 에: 갑자기 열(1918)
    히틀러 집권(1933)
  히틀러(히틀러 집권): 고집 대단(1933)

    신성로마 제국(962--1806)
  962년 프랑크 왕국의 오토 1세가 카롤루스 대제에 이은 로마 제국 재건의 이상을 품고 
북이탈리아에 진출하여 교황 요하네스 12세로부터 신성로마 황제의 제관을 받으면서부터, 로마 
제국은 이제 완전히 크리스트교의 정신에 입각하여 이를 보호, 육성하고 널리 전파함을 
사명으로 한다는 뜻에서 신성 로마 제국이라 일컬어지게 되었다. 명목상으로는 옛날 로마 
제국을 계승하는 통일 제국이었으나, 실제로는 독일 제국이나 다름이나 없었다.
  (암기법) 신성일(신성 로마 제국) 이: 제비냐?(962)

    대공위 시대(1254--1273)
  중세 후기 독일 황제의 무력화와 유력한 제후들의 발호로 인해 19년 동안 황제를 선출하지 
못하여 황제가 없었던 시대를 대공휘 시대라 한다.
  독일은 대공위 시대와 14세기 황금 문서(금인칙서) 등을 거치면서 유력한 제후들이 영방 
단위로 집권화를 추진하여 독립적 경향을 강화하였다.
  (암기법) 대공원(대공위 시대): 금년 무료(1254)

    금인칙서(황금문서)(1356)
  1356년 신성 로마 황제 칼 4세가 뉘른베르크 및 메츠의 제국 의회에서 발표한 31장으로 된 
제국법이며, 황금의 어새를 사용한 데서 황금 문서 또는 금인 칙서라고 불리게 되었다.
  대공위 시대 이후의 독일의 정치적 혼란을 해결하고, 특히 국왕 선거의 절차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선제후를 비롯한 거의 모든 제후의 독립적 지위를 보장하고 영방 국가 체제 
발전의 획기적 단계를 보여 준 문서라고 할 수 있다.
  (암기법) 금연(금인칙서) 하니: 팔 마비(1356)

    독일 농민전쟁(1524)
  루터의 종교 개혁이 독일 전국에 파급되자, 1524년에는 중부 및 서남부의 농민들이 
토마스뮌처의 지도 아래 농노제와 교회세의 폐지 등을 내걸고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
  루터는 신자의 내면적 자유는 인정하되 현세의 군주에게는 복종해야 한다는 보수적 입장을 
취해 이 반란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농민들은 루터 지지를 철회하게 되었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 개혁은 제후와 자유 도시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암기법) 독일 농민(독일 농민전쟁): 근면노력(1524)

    프리드리히 대왕(1740--1786)
  프로이센의 와(제위 1740--1786), 프리드리히 2세.
  전형적인 계몽 전제 군주로서, 산업의 육성과 교육의 보급 등 국내 근대화에 노력하는 한편, 
영토 확장을 기도하여 오스트리아의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으로 실레지아(Silesia)를 
획득하였고, 폴란드 분할에 참여하여 더욱 영토를 넓혀 유럽에서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였다. 스스로 계몽 철학자들과 친하고, '짐은 국가 제일의 공복' 이라 한 말은 
유명하다.
  (암기법) 프리 드로(프리드리히 대왕) 던질 땐: 꼭 소리 쳐(1740)

    관세 동맹(1834)
  프로이센의 주도로 18개 연방이 참가하여 관세 제도의 통일을 목적으로 맺은 동맹.
  동맹국은 상호의 관세를 폐지하여 자유 통상을 추진하고, 타국과의 통상에 있어서는 
공통으로 협정된 세액을 지킬 것을 약속하였다.
  이것은 독일을 경제적으로 통일시켜 정치적 기운을 진작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하여 
프로이센은 독일 통일에 있어서 오스트리아에 대한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암기법) 관세(관세동맹) 는: 꼭 양대로(1834)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1862)
  동부 독일 융커 출신으로 보수적 반혁명파인 비스마르크가 제창한 독일으 l통일 정책.
  그는 당시의 무산 대중과 자본가와의 대립을 역이용하여 사회주의 지도자 라살레와 
접근하면서 통일 과업을 수행하였다. 1862년 의회에서 군제 개혁안이 부결되자, 독일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는 결코 해결되지 못하며 오직 철(무기), 혈(전쟁) 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고 주장하여 의회의 의결 없이 군비 확장을 실시하였다.
  (암기법) 혈혈(철혈정책) 단신: 교육 받네(1862)

    독일통일(독일제국) (1871)
  프로이센은 남독일에 세력을 펴고 있는 프랑스의 간섭을 제거함으로써 독일의 통일을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때 일어난 것이 에스파냐 왕위 계승 문제였다. 비스마르크는 
교묘한 외교 공작의 수완을 부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를 유인, 전쟁을 일으켜 파리를 
함락시켰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로부터 항복을 받은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는 파리로 입성하여 황제로 
취임하고, 비스마르크를 재상으로 임명함으로써 독일 제국을 선포하였다.
  (암기법) 도통(독일통일) 한: 그 역술가(1871)

    3B 정책(1890)
  1890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 전까지의 독일의 제국주의적 근동 정책이다.
  베를린,  비잔티움, 바그다드의 3B를 연결해서 철도를 부설하여 발칸에서 소아시아를 거쳐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지역을 경제적, 군사적으로 이용하려 하였다.
  영국의 3C 정책과 충돌하여 제1차 세계 대전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암기법) 삐삐삐(3B 정책): 구입 지참(1890)

    바이마르 공화국(1918--1933)
  1918년 11월 혁명 후 성립되어 1933년 나치스가 정권을 획득하기까지의 독일 공화국의 통칭.
  1918년의 혁명으로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도망하고, 사회 민주당의 영수인 에베르트에게 
재상직이 이양되었다.
  1919년 제헌 의회가 바이마르에서 모여 헌법을 제정하였고, 연합국에 의해 만들어진 강화 
조약을 승인하고 독일 정부를 조직하였다.
  (암기법) 이마(바이마르 공화국) 에: 갑자기 열(1918)

    히틀러 집권(1933)
  나치 당은 1932년 총선거에서 제1당이 되어 히틀러는 수상이 되었으며, 1933년 의회는 
바이마르 헌법을 정지시키고 수권법을 통과시켜 히틀러에게 전권을 위임하였다.
  그리고 1934년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히틀러는 대통령제를 페지하고 이른바 
'제3제국' 의 총통이 되어 독재권을 장악하였다(제1제국은 신성 로마 제국, 제2제국은 
비스마르크가 창건한 제국이다).
  (암기법) 히틀러(히틀러 집권): 고집 대단(1933)

     영국
    플랜태저넷 왕조(1154--1399)
  플랜 넷(플랜태저넷 왕조): 그건 무리(1154)
    대헌장(1215)
  대장(대헌장) 님: 그날 근무(1215)
    시몽드 몽포르 의회(1265)
  포르노(시몽드 몽포르 의회): 국내불매(1265)
    모범 의회(1295)
  모범(모법 의회) 적인: 강남주민(1295)
    와트 타일러의 난(1381)
  타일러(와트 타일러의 난) 라: 폭음가(1381)
    수장령(1534)
  수장(수장령) 하게: 강물 대라(1534)
    엘리자베스 1세(1558--1603)
  엘리베이터(엘리자베스 1세) 타면: 꼭 멀미약(1558)
    통일령(1559)
  통일(통일령) 되어: 국민 만족(1559)
    동인도 회사(1600)
  동인도 회사: 간부 초청(1600)
    스튜어트 왕조(1603--1714)
  스튜디오(스튜어트 왕조) 에: 귀빈초대(1603)
    권리 청원(1628)
  청원(권리청원) 내용: 극비내용(1628)
    청교도 혁명(1642--1660)
  교도(청교도 혁명) 소에: 가버렸네(1642)
    크롬웰의 항해조례(1651)
  항해(항해조례): 기분 만끽(1651)
    심사율(1673)
  심상(심사율) 해: 각본상도(1673)
    명예혁명(1688)
  명예(명예혁명) 로운: 기부유언(1688)
    권리장전(1689)
  권장(권리장전) 해라: 기본예절(1689)
    하노버 왕조(1714--1901)
  한오백(하노버 왕조) 년: 꼭 살구려(1714)
    인지조례(인지세법)(1765)
  인지(인지조례): 계속 발매(1765)
    차티스트 운동(1839)
  차 테스트(차티스트 운동) 는: 꼭 운동장에서(1839)

    플랜태저넷 왕조(1154--1399)
  영국 중세의 한 왕가(1154--1399). 프랑스의 앙주 왕가의 별칭으로, 시조 헨리 2세의 부친 
제프리 백이 항상 투구에 '금작화의 가지' 를 꽂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노르만 왕조의 단절 후, 프랑스의 대제후 앙주백이 헨리 2세로 영국 왕위를 잇고 플랜태저넷 
왕조를 열었다. 그는 프랑스의 서반부를 영유하여 영, 프에 걸친 제국을 형성하였으며, 중앙 
집권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후 백년 전쟁 등으로 왕권을 상실하고 리처드 2세 때 
멸망하였다.
  (암기법) 플랜 넷(플랜태저넷 왕조): 그건 무리(1154)

    대헌장(1215)
  1215년 영국의 귀족과 성직자들이 존 왕에게 강제로 서명케 한 문서로, 이는 그들의 권리를 
확인시키고 왕권을 견제하였다.
  존 왕의 실정과 과중한 군비 부담에 불만을 품어 오던 제후들이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돌아온 존 왕에게 충성의 서약을 파기하고 63개의 요구 사항을 작성하여 왕에게 
승인할 것을 요구하자, 사태의 불리함을 깨달은 왕은 러니미드에서 제후들과 회견하였다. 이 
자리에서 제후들은 왕에게 그 요구 조항의 문서에 서약할 것을 강요하여 왕이 서명하였다.
  (암기법) 대장(대헌장) 님: 그날 근무(1215)

    시몽드몽포르 의회(1265)
  존 왕의 아들 헨리 3세가 대헌장의 원리를 무시하고 실정을 하자, 시몽드 몽포르가 귀족, 
성직자, 도시 대표를 포함한 대의회를 소집하여 국정의 새로운 기초를 확립했다.
  1265년의 시몽드 몽포르 의회는 헌정사상 하원 창시의 길을 연 것으로 중시된다.
  (암기법) 포르노(시몽드 몽포르 의회): 국내불매(1265)

    모범의회(1295)
  영국 최초의 중세적 신분제 의회.
  에드워드 1세는 1265년의 시몽드 몽포르 의회에 기초를 두고 의회 구성 멤버의 불규칙제를 
시정하여, 대주교, 주교, 수도원장의 대귀족 외에 각 주에서 두 사람의 기사와 각 자치시에서 
2명의 시민 대표를 의회에 참가시켰다.
  그들은 대체로 영국 사회를 대표하는 사람들로, 그 후 귀족은 상원, 기사, 시민은 하원을 
각각 구성하게 되었다.
  후에 영국 의회의 모범이 된다 하여 이 이름을 붙였다.
  (암기법) 모범(모범 의회) 적인: 강남주민(1295)

    와트 타일러의 난(1381)
  영국의 농노제가 무너질 시기에 일어난 농민의 반란.
  1381년 토지에 대한 예속과 무거운 부담을 강요하는 입법 조치에 불만을 품은 영국 남부 
여러 지역의 농민들이 복음주의에 입각한 존 볼의 설교에 영향을 받아 난을 일으켰다. 후에 
와트 타일러를 지도자로 삼고 런던까지 진격하여 농노제의 폐지를 요구하였다.
  국왕 리처드 2세는 한때 이를 받아들이는 듯 하였으나, 타일러는 살해되고 폭동은 
진압되었다.
  그  후 농노제는 실질적으로 폐지되었다.
  (암기법) 타일러(와트 타일러의 난) 라: 폭음가(1381)

    수장령(1534)
  영국 왕을 영국 국교회의 최고의 수장으로 하는 법령.
  헨리 8세는 로마 교황이 캐서린 왕비와의 이혼을 승인하지 않자, 의회로 하여금 수장령을 
통과 시켜 영국 교회를 교황으로부터 독립시키고, 국왕이 수장이 되도록 하였다.
  이는 영국 국왕이 영국 교회의 우두머리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 수장령에 의해 헨리 8세는 
성직 임명권을 장악했으며, 이어 수도원을 해산하여 그 재산을 몰수하였다.
  메리 1세 때 폐지되었다가, 1559년 엘리자베스 여왕에 의해 다시 제정되었다.
  (암기법) 수장(수장령) 하게: 강물대라(1534)

    엘리자베스 1세(1558--1603)
  헨리 8세의 딸.
  엘리자베스 여왕은 통일령을 반포하여 영국 국교를 수립하고, 그레샴(Gresham) 의 건의에 
따른 통화의 개혁을 실시하였으며, 국내 산업, 특히 양모업의 육성을 주력하였다. 밖으로는 
무적 함대의 격파로 에스파냐를 타도하여 제해권을 장악하고(1588), 동인도 회사(1600) 의 
건설과 세계 무역 등으로 식민지 개척에 앞장 서서 버지니아(Virginia) 식민지를 이룩하였다.
  더욱이 셰익스피어를 중심으로 하는 국민 문예의 황금기를 이루어, 근대 영국 문화의 성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암기법) 엘리베이터(엘리자베스 1세) 타면: 꼭 멀미약(1558)

    통일령(1559)
  영국의 종교개혁 때 영국 국교회의 의식 및 기도를 통일시킨 법령.
  메리 여왕이 카톨릭을 부흥시킨 후,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국 국교회의 기틀을 확고히 하기 
위해 1559년 수장령의 통일령을 발포했는데, 왕정 복고 때도 의회는 장로파와 독립파를 
억압하는 한편, 아직 잔존하고 있던 카톨릭파에 대처하기 위해 통일령을 부활시켰다.
  (암기법) 통일(통일령) 되어: 국민 만족(1559)

    동인도 회사(1600)
  17세기에서 19세기에 걸친 인도나 동남 아시아, 중국, 일본 등지와의 원거리 무역을 위해 
유럽 여러 나라에서 세운 식민 기업, 합자 화사 또는 주식 회사의 형태로 세워졌고, 때로는 
국가 권력을 대행하기도 하였다.
  영국은 1600년 인도에, 프랑스는 1604년 인도에, 네덜란드 1602년 자바의 바타비아에 각각 
설립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동인도 회사는 인도 경영, 중국 무역의 독점 등을 수행한 후 
1858년 해체되었고, 네덜란드는 1799년에, 프랑스는 인도에서 영국과의 쟁탈에 실패한 뒤 
해산되었다.
  (암기법) 동인도 회사: 간부 초청(1600)

    슈투어트 왕조(1603--1714)
  17세기의 영국의 왕조.
  튜더 왕조의 엘리자베스 1세는 일생을 독신으로 살아 후사가 없었다.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죽자, 그녀의 조카뻘인 스코틀랜드 제임스 6세가 영국 왕 제임스 
1세로 즉위하였다.
  이 시대는 근대 영국의 내분 시대이지만, 민권 확립이 촉진되고, 해외 진출 기운이 
높아졌다.
  (암기법) 스튜디오(스튜어트 왕조) 에: 귀빈초대(1603)

    권리 청원(1628)
  권리 청원은 찰스 1세가 위그노 전쟁에 실패하고 경비 조달의 협찬을 위해 소집된 의회에서 
국왕에게 의회가 제출하여 승인된 청원서이다.
  그 주요 내용은 1의회의 동의 없이 인민에 과세하지 못한다. 2개인 주택에 강제로 군대를 
숙박시키지 못한다. 3국법에 의하지 않고는 인신 금고를 하지 못한다. 4평시에 계엄령을 
실시하지 못한다 등 인민과 의회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으로서, 대헌장(1215), 권리 장전(1689) 
과 함께 영국 헌정 사상 3대 성전이라 불린다.
  (암기법) 청원(권리청원) 내용: 극비내용(1628)

    청교도 혁명(1642--1660)

    크롬웰의 항해 조례(1651)
  1651년 크롬웰이 발표한 것으로, 영국에 들어오는 상품의 수송은 영국의 배나 혹은 생산지의 
배에 의하도록 규정하였다.
  이 조례는 중개 무역으로 번영하던 네덜란드에 타격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에는 두 차례의 전쟁이 일어났고, 영국이 승리함으로써 네덜란드는 큰 
타격을 받았다.
  (암기법) 항해(항해조례): 기분만끽(1651)

    심사율(1673)
  찰스 2세 때 영국 의회가 제정한 종교 관계의 법령.
  영국 의회는 찰스 2세의 칙령(비국교도 관용에 대한)을 철회할 것을 요구함과 동시에 
심사령을 제정하였다(왕권에 대한 의회의 우위). 이 법률은 모든 공직자가 반드시 
국교도이어야 함을 규정한 것이다. 사실상 카톨릭 교도 및 그 밖의 비국교도는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암기법) 심사(심사율) 해: 각본상도(1673)

    명예혁명(1688)

    권리장전(1689)
  1689년 피를 흘리지 않고 이룩한 영국의 명예 혁명에 의해 왕위에 추대된 윌리암 3세에 
의하여 의회의 요구가 승인된 문서.
  영국의 의회 정치, 입헌 정치의 확립과 내각 책임제의 출발이 된 중요한 문서이다. 왕이 
의회의 승인 없이 법을 제정하거나 과세할 수 없음을 규정하고, 의회에서 자유로운 토론을 
보장한 것으로, 의회 정치의 출발을 의미하는 문서이다.
  (암기법) 권장(권리장전) 해라: 기본예절(1689)

    하노버 왕조(1714--1901)
  영국 왕조의 하나, 존속 기간 1714--1901년.
  앤 여왕이 죽은 후 후사가 없어 스튜어트 왕계가 끊어지게 되자, 제임스 1세의 외손 뻘 되는 
조지 1세가 독일의 하노버가에서 돌아와 영국의 왕위를 이었다. 즉, 1917년 7월 제1차 대전 
중에 윈저조라고 개칭하였다.
  현재까지 영국은 하노버 왕조가 계속되고 있다.
  (암기법) 한오백(하노버 왕조) 년: 꼭 살구려(1714)

    인지조례(인지세법)(1765)
    7년 전쟁 후의 영국의 대(대) 식민지 입법.
  1765년 각종 상업 문서 뿐 아니라 신문, 달력 심지어 학위 증서에까지 인지를 붙이게 한 
규정이다. 이는 관세 통제와는 달리 국고 세입을 위한 대책이었다는 점에 특색이 있다.
  1765년 2--3월에 양원을 통과하여 10월에 실시되었으나, 반 년 후에 철폐되었다. 이는 
식민지 전체에 영국에 대한 반발을 불러일으킨 중요한 입법이었다.
  (암기법) 인지(인지조례): 계속 발매(1765)

    차티스트 운동(1839)
  노동 운동이 정치적 성격을 띤 것으로, 선거권 획득을 위한 운동이다.
  제1차 선거법 개정은 신흥 노동자에게는 아무런 혜택이 없었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은 노동 
조건의 개선, 성년 남자의 보통 선거권 등을 요구하였다. 이 운동에 참가한 사람을 
차티스트(Chartist) 라 하며, 그 강령으로서 인민 헌장(People`s Charter) 을 선언하였다.
  이 운동은 정부의 탄압, 영국의 경제적 번영, 지도자의 분열로 실패하였으나, 19세기부터 
점차로 성취되어 갔다.
  (암기법) 차 테스트(차티스트 운동) 는: 꼭 운동장에서(1839)

     에스파냐, 포르투칼
    에스파냐 왕국설립(1479)
  스파이 왕(에스파냐 왕국): 경력소중(1479)
    희망봉 발견(1488)
  희망(희망봉 발견) 있다: 그래 웃어(1488)
    아메리카 대륙 발견(1492)
  아메리카가: 그리 좋니(1492)?
    바스코 다가마의 이도항로 발견(1498)
  다 가면(바스코 다가마 인도항로 발견): 혼자야(1498)
    마젤란의 세계일주(1522)
  세계일주: 꼭 마나님과(1522)
    무적함대 격파(1588)
  국민 영웅(1588)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1868)
  스파이 계속(에스파냐 계승 전쟁): 교육 보완(1868)

    에스파냐 왕국설립(1479)
  이슬람으로부터의 국토 회복 전쟁 중에 12세기경 성립한 아라곤 왕국과 카스틸랴 왕국이 
합동하여 성립한 것이 에스파니아 왕국이다(1479).
  1469년 아라곤 왕자 페르디난드와 카스틸랴 왕녀 이사벨이 결혼하고 1479년 페르디난드의 
아라곤 왕위 즉위와 동시에 양국은 합병하였으며 에스파니아 왕국이 성립했다.
  (암기법) 스파이 왕(에스파냐 왕국): 경력소중(1479)

    희망봉 발견(1488)
  항해 왕 엔리케가 아프리카 서해안을 남하하여 인도에 이르는 항로를 탐험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이끄는  포르투갈 상항대는 1488년 아프리카의 최남단에 
도달하였다.
  디아스는 그 근방에서 심한 폭풍우에 시달려서 그 갑을 '폭풍의 갑' 이라 불렀는데, 후에 
국왕이 희망봉이라 이름 붙였다. 디아스는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우회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공포에 떠는 선원들 때문에 되돌아서야만 했다.
  (암기법) 희망(희망봉 발견) 있다.: 그래 웃어(1488)

    아메리카 대륙발견(1492)


    바스코 다가마의 인도항로 발견(1498)
  포르투갈의 항해자인 바스코다가마는 1497년 8월 왕의 명령으로 3척의 배로 리스본을 
출발하여, 11월 희망봉에 도달하였다. 그 뒤 폭풍과 반란을 이겨 내며 인도양을 횡단하여, 
1498년 5월 인도의 캘리컷에 닿았다.
  그러나 캘리컷 지배자의 적대적인 태도와 이슬람 상인의 박해로 위기에 빠졌다가 간신히 
벗어나 리스본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인도로 가는 직접 항로가 열리게 되었다.
  (암기법) 다 가면(바스코다가마의 인도항로 발견): 혼자야(1498)

    마젤란의 세계일주(1522)
  에스파냐는 콜롬부스의 신대륙 발견이후 새로 발견되는 모든 땅을 자국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더욱 활발하게 항해를 장려하였다. 그 뒤, 포르투갈 출신의 마젤란이 5척의 배와 250명의 
선원을 데리고 새로운 땅을 개척하기 위해 항해를 떠났다(1519).
  그들은 어려운 항해 끝에 필리핀에 도착했으나, 마젤란은 원주민과의 전투에서 쓰러지고, 
나머지 일행은 1522년 에스파냐로 돌아왔다.
  떠날 때는 5척의 배에 선원이 243명이었으나, 살아 돌아온 자는 겨우 빅토리아호 1척 
18명뿐이었다.
  (암기법) 세계일주(마젤란의 세계일주) 는: 꼭 마나님과(1522)

    무적함대 격파(1588)
  무적 함대는 펠리페 2세 때 천하무적을 자랑하던 에스파냐의 함대이다.
  펠리페 2세는 레판토 해전에서 투르크를 격파하고(1517), 포르투갈까지 병합하여 유럽의 
최대 강국이 되었다. 그러던 중 네덜란드에서 독립 전쟁이 일어나고, 영국이 이를 지원하였다. 
그러자 영국 상륙 작전을 결의하고 130여 척의 대함대로 원정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80척에 불과한 영국 함대에게 영국 연안에서 격파당하고 말아, 에스파냐의 해상권은 
상실되고, 그 대신 영국이 해외 발전의 계기를 맞게 되었다.
  (암기법) 무적함대 격파: 국민 영웅(1588)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1868)
  1868년 에스파냐에 혁명이 일어나 이사벨라 2세를 몰아내고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의 
친척인 레오폴드(Leopold) 를 추대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당시 가장 세력이 컸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유럽 세력의 균형 파괴라며 이를 
반대하여 결국 실현되지 못하였고, 이에 반발하는 프로이센에게 장래의 보장을 요구하자 
프로이센은 이를 거부하였다. 프로이센의 강대화에 불안을 느낀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에 
선전하였다.
  (암기법) 스파이 계속(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 교육 보완(1868)

     미국
    보스톤 차 사건(1773)
  보스 차(보스톤 차 사건): 국산 샀대(1773)
    독립 전쟁(1775)
  독립전쟁: 굳센 사명(1775)
    아메리카 합중국 성립(1789)
  아메리카(아메리카 합중국 성립) 로: 고속 운전(1789)
    먼로주의(1823)
  먼길 가려면(먼로주의): 길 안내도(1823)
    남북전쟁(1861)
  남북한(남북전쟁): 공업비교(1861)
    링컨의 노예해방(1863)
  컨닝(링컨) 은: 꼭 안볼때(1863)
    존 헤이 선언(1899)
  헤이(존 헤이) ! : 가요 주점(1899)
    윌슨의 14개조 평화원칙(1918)
  위스키(윌슨의 14개조 평화원칙): 공주 과음(1918)
    뉴딜 정책(1933)
  뉴스(뉴딜 정책): 기자 담당(1933)

    보스턴 차사건(1773)
  1773년 차 조례에 반대하는 보스턴의 급진파가 영국의 차 운반선을 습격한 사건.
  영국이 차 조례에 의해 동인도 회사에 차의 독점 판매권을 인정한데 대항하여, 보스턴에서 
일부 식민지인이 인디언으로 가장하고 영국 동인도 회사 선박을 습격하여 차 1500파운드를  
바다속에 집어 던졌다.
  이를 계기로 미국의 독립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암기법) 보스 차(보스턴 차 사건): 국산 샀대(1773)

    미국의 독립전쟁(1775)
  1775년 4월 보스턴 근교 렉싱턴, 콩코드에서 영국 본국군과 식민지 민병과의 사이에 무력 
충돌이 생겨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워싱턴을 총사령관으로 추대한 독립군이 고전하였으나, 사라토가 싸움에서 
승리하였으며, 프랑스가 아메리카의 독립을 승인하고 독립군에 가담하여 독립군의 승리가 
엿보였다. 드디어 독립군은 요크타운 전투에서 영국군의 주력을 격파하여 항복을 받아 승리를 
거두었다.
  (암기법) 독립전쟁: 굳센 사명(1775)

    아메리카 합중국 성립(1789)
  독립 후 연방주의파와 분리주의파의 대립이 있었으나, 필라델피아의 헌법 제정 회의를 통해 
연방주의, 삼권분립, 주권재민, 사상에 바탕을 둔 합중국 헌법을 제정하였다. 새 헌법에 따라 
1789년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아메리카 합중국이라는 새 나라가 탄생되었다.
  (암기법) 아메리카(아메리카 합중국 성립): 로: 고속운전(1789)

    먼로주의(1823)
  '유럽의 여러 나라는 아메리카 대륙의 내정에 간섭할 수 없다' 는 원칙을 천명한 미국의 
불간섭, 고립주의 외교 정책.
  남아메리카 식민지들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유럽이 어수선한 틈을 타서 독립하였다. 이 때 
빈(Wien) 체제를 확립한 오스트리아의 수상 메테르니히는 혁명 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하려고 
간섭하려 하였다. 이에 미국의 제5대 대통령 먼로는 1823년 의회에 보낸 교서에서 이를 
배격하는 미국의 태도를 명백히 하였다.
  이러한 먼로주의는 유럽에 대한 미국의 불간섭과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유럽 열강의 간섭 
배제를 골자로 하는 것으로, 미국의 고립주의 외교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암기법) 먼길 가려면(먼로주의): 길 안내도(1823)

    남북전쟁(1861--1865)
  노예 제도의 존속을 주장하는 남부와 그 폐지를 주장하는 북부와의 사이에 일어난 미국의 
내전.
  상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북부와 노예 중심의 대농장을 경영하는 남부의 대립이 주원인이 
되어 일어난 전쟁이다.
  초기에는 남부가 우세했으나,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을 선언한 이후 전세가 북부에 
유리해져, 마침내 그랜트 장군에 의해 남부의 수도 리치먼드가 함락됨으로써 5년간의 전쟁이 
끝났다.
  북부의 승리로 합중국의 통일이 유지되고 노예 해방도 달성되었다.
  (암기법) 남북한(남북전쟁): 공업비교(1861)

    링컨의 노예해방(1863)
   1862년 9월 22일 링컨이 최고 사령관의 자격으로 1863년 1월 1일을 기해 여러 반란 
주(주)의 노예를 모두 해방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 선언은 남부 여러 주(주)에 있어서의 
내부적 혼란과 동시에 북부 급진파와의 결속을 강화하며, 영국을 비롯한 세계의 여론을 북부에 
유리하게 하기 위한 정치적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암기법) 컨닝(링컨의 노예 해방): 꼭 안볼때(1863)

    존 헤이 선언(1899)
  미국의 국무 장관 존 헤이(John Hay) 는 중국의 영토를 보존하고 세력 범위내 항구도 
제3국에게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하는, 기회 균등과 이권 균점을 주장하는 문호 개방을 
선언하였다(1899).
  미국은 먼로주의를 수정하고 에스파냐와의 전쟁으로 필리핀을 얻은 다음, 국무 장관 존 
헤이(John Hay) 가 중국의 문호 개방, 기회 균등, 영토 보존의 3원칙을 열강에 제의하였다. 
이로써 중국의 영토 분할의 경향은 막아졌고, 이후 미국도 경제적으로 중국에 진출할 수 
있었다.
  (암기법) 헤이(존 헤이 선언) !: 가요주점(1899)

    윌슨의 14개조 평화원칙(1918)
  제1차 세계 대전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미 의회에 보낸 교서에서 발표한 전후 
평화안.
  그 구체적 내용은 1비밀 외교의 폐지, 2해양의 자유, 3경제 장벽의 철폐, 4군비 축소, 
5식민지 요구의 조정, 6--13민족 자결에 입각한 각국 주권의 존중, 14전후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국제 기구로서 국제 연맹의 창설 등이다.
  윌슨의 민족 자결 원칙은 중국이나 우리 나라의 민족 운동에 큰 자극을 주었다.
  (암기법) 위스키(윌슨의 14개조 평화원칙): 공주 과음(1918)

    뉴딜 정책(1933)
  경제 공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1933년에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추진된 경제 정책을 
뉴딜정책이라 하며, 국가 산업 부흥법, 농업 조정법, 테네시 계곡 공사 등을 그 내용을 하고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자유 방임주의적 요소를 버리고, 국가가 경제 활동에 적극 개입하여 
생산을 조정하고, 공공 투자 사업을 이르켜 국민 대중의 구매력을 향상시키려 한 정책으로서, 
경제학자 케인스의 수정 자본주의 이론을 채택한 일종의 통제 경제 정책이었다.
  (암기법) 뉴스(뉴딜정책): 기자담당(1933)

     러시아
    표트르 대제(1682--1725)
  표류된지(표트르 대제): 꼬박 일년(1682)
    데카브리스트의 난(1825)
  리스트(데카브리스트의 난): 기억 나면(1825)
    크림 전쟁(1854)
  크림빵(크림전쟁): 금일 무료(1854)
    러시아 농노해방(1861)
  농토(러시아 농노해방) 에서: 금을 발견(1861)
    나로드니키 운동(1870)
  나이키(나로드니키 운동): 금일 수출(1870)
    러, 일 전쟁(1904--1905)
  너의 일(러, 일전쟁): 공정 처리(1904)
    피의 일요일 사건(1905)
  일요일(피의 일요일 사건): 극장 초만원(1905)
    소비에트 조직(1905)
  소비(소비에트 조직) 는: 귀족 취미(1905)
    러시아 혁명(1917)
  러시아워(러시아 혁명): 가장 고생(1917)
    코민테른(1919)
  코밑(코민테른) 이: 구질구질(1919)
    카라한 선언(1920)
  카라얀(카라한 선언) 공연: 관중 넘침(1920)
    레닌의 신경제 정책(1921)
  신경제(레닌의 신경제 정책): 경제 난국(1921)
    스탈린 집권(1924--1953)
  스타(스탈린 집권) 의: 노래(1924 마당(1953)

    표트르 대제(1682--1725)
  러시아의 황제(재위1682--1725)
  1697년 사절단과 함께 네덜란드, 영국, 독일 등지를 순회하며 각국의 풍속, 제도 등을 
연구하고, 귀국 후 귀족에게 이를 강요하였다. 1700년 발트해 진출을 꾀하여 스웨덴과 전쟁을 
벌였고, 페르시아에 원정하여 카스피해 서안을 병합.
  관료 제도를 정비하고, 농노의 신분을 고정화 시켰다. 농노제 위에 강력한 절대주의 국가를 
확립했으며, 교육, 문화에도 힘써 러시아의 근대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암기법) 표류된지(표트르 대제): 꼬박 일년(1682)

    데카브리스트의 난(1825)
  나폴레옹 전쟁을 통하여 프랑스 혁명의 자유 사상에 접하게 된 러시아의 일부 지식층, 특히 
청년 장교들이 중심이 되어 1825년 12월 니콜라이 1세의 즉위를 계기로 농노제 폐지와 입헌 
정치를 요구하며 일으킨 반란, 곧 진압되고, 니콜라이 1세는 철저한 전제 정치와 탄압 정치를 
실시함으로써 러시아의 근대화를 지연시켰다.
  (암기법) 리스트(데카브리스트의 난): 기억 나면(1825)

    크림 전쟁(1854)
  러시아의 남하 정책이 원인이 되어 1854--1845년에 걸쳐 러시아를 상대로 영국, 프랑스, 
사르데냐 등의 연합군이 행한 국제 전쟁으로, 동방 전쟁이라고도 한다.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가 투르크 영내의 그리스정교도의 보호를 요구하자 투르크가 거절하여 
전쟁이 일어났다. 프랑스와 영국이 투르크를 원조하여 러시아가 패하였고, 이로써 러시아의 
남하가 주춤하였으며 흑해를 중립화하였다.
  (암기법) 크림빵(크림전쟁): 금일 무료(1854)

    러시아 농노해방(1861)
  1861년 알레산드르 2세가 크림 전쟁의 패배에 의한 전제주의의 몰락과 근대화의 필요성에서 
농노 해방령을 발포하였다. 그러나 이 해방은 지주 본위여서 농민에게 실질적인 혜택은 
없었다. 즉, 농민은 신분상의 자유는 얻었으나, 미르에 소속되어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고, 
할당받은 토지의 배상금도 농민의 부담이었다. 결국 농노 해방은 철저하지 못하여 불만만 
높아졌다.
  (암기법) 농토(러시아 농노해방) 에서: 금을 발견(1861)

    나로드니키 운동(1870)
  나로드니키는 러시아의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혁명적인 정치, 문학 운동에 참여한 급진적 
지식 계급을 말한다.
  나로드니키 운동은 인민 속에 들어가서 계몽운동을 일으켜 농민의 힘으로 짜리즘을 타도하고 
인민 정부를 수립하려는 운동으로서 농노 해방 후 소시민, 지식인을 중심으로 나로드니키 
운동을 일으켜 농민들을 사회주의 사상을 계몽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 운동이 실패한 
후 무정부주의, 허무주의가 나타났고, 결국 무정부 주의자에 의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되었다.
  (암기법) 나이키(나로드니키 운동): 금일 수출(1870)

    러, 일 전쟁(1904--1905)
  청, 일 전쟁 이후 조선과 만주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이 폭발하여 일어난 전쟁.
  전쟁은 일본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전쟁을 오래 계속할 국력이 없었고, 
러시아에서도 국내에서 혁명이 일어나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다. 두 나라는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의 권고와 조정을 받아들여 포트머스에서 강화 조약을 맺었다.
  (암기법) 너의 일(러, 일 전쟁): 공정 처리(1904)

    피의 일요일 사건(1905)
  러, 일 전쟁이 러시아에 불리해지자, 국민의 불만이 폭발하여 페트로그라드(옛 
페테르스부르크) 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는데, 군대의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피의 
일요일 사건).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니콜라이 2(1894--1917) 는 의회 설치 등 개혁을 약속했으나 개혁은 
부진하였고, 세계대전이 일어나 참전하게 되었다.
  제1차 러시아 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암기법) 일요일(피의 일요일 사건): 극장 초만원(1905)

    소비에트 조직(1905)
  러시아의 노동자, 농민, 병사의 민주적 자치기관으로서 '평의회' 라는 뜻이다.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 때 조직되어 1917년 3월 혁명 때 혁명의 실권을 잡았다. 11월 
혁명으로 볼셰비키 정권이 수립된 후 소비에트는 소련의 정치 조직의 기본 단위가 되었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이라는 공화국 국호가 나오게 되었다.
  (암기법) 소비(소비에트 조직) 는: 귀족 취미(1905)

    러시아 혁명(1917)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거듭되는 패전, 물자 결핍 등로 군기는 문란해지고 국민 생활도 
어려워져 불만이 높아갔다.
  1917년 3월 페트로그라드(현 레닌그라드) 의 노동자 폭동이 군대의 합류로 혁명으로 
발전하여, 로마노프 왕조는 멸망하고 케렌스키를 지도자로 하는 연립 정부가 세워졌다.(3월 
혁명).
  그러나 임시 정부의 자유주의적인 개혁이 잘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국민들의 불만이 
해소되지 못하자, 레닌을 중심으로 한 급진 사회주의자들이 볼셰비키당을 중심으로 혁명을 
진행하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라는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였다(11월 혁명).
  (암기법) 러시아워(러시아 혁명): 가장 고생(1917)

    코민테른(1919)
  레닌은 세계 각 지역의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 1919년 3월 각국 공산당의 지도 기관으로서 
코민테른(Comintern 1919--1943): 제2 인터내셔널) 을 결성하였다.
  코민테른은 헝가리의 공산 혁명을 지도하고, 투르크나 중국의 민족 운동을 후원하였다.
  (암기법) 코밑(코민테른) 이: 구질구질(1919)

    카라한 선언(1920)
  볼셰비키 혁명에 성공한 소련 정부는 1920년 종전의 제정 러시아가 중국으로부터 탈취하였던 
제반 이권을 포기하고 중국을 동맹국으로 원조해 줄 것을 전포하였다.
  이 선언은 중국인의 친소 감정을 유발시켰고, 사회주의의 확산을 가져오는 효과를 얻었다.
  (암기법) 카라얀(카라한 선언) 공연: 과중 넘침(1920)

    레닌의 신경제 정책(1921)
  소련에서 전시 공산주의에 이어, 5개년 계획이 시작되기 전까지 실시한 과도기적 경제 
정책을 말한다. 전시 공산 체제 결과 생산의 격감과 실업자 격증 현상이 일어났으므로, 일단 
국내의 반혁명 세력을 축출한 후 새로운 경제 정책에 착수하였다. 즉, 1921년 레닌은 무역, 
금융, 대공업을 제외한 개인 기업과 사유 재산을 인정하여 생산 증대를 가져오게 하였는데, 
이는 사회주의로의 2보 전진을 위한 자본주의로의 1보 후퇴를 뜻한다. 이 결과 1927년에는 
전전의 수준이 확보되었고, 외교 정책은 자본주의 국가와의 공존과 통상을 재개하였으므로, 
소련 사회주의 발전의 기초가 이룩되었다.
  (암기법) 신경제(레닌의 신경제 정책): 경제난국(1921)

    스탈린 집권(1924--1953)
  소련의 정치가자 공산주의의 이론적 지도자인 스탈린은 1917년 2월 혁명 후 정치국원으로 
군사 혁명 위원회를 지도하여 10월 혁명을 수행했고, 혁명 후에는 민족 인민 위원으로서 
사회주의에 있어서 민족 문제에 대한 정책에 공헌하였다.
  1922년 공산당 서기장, 1924년 레닌의 사후 일국 사회주의 이론을 발전시켜 5개년 
계획으로써 공업화와 농업 집단화를 추진시켰으며 스탈린 헌법을 제정했다.
  (암기법) 스타(스탈린 집권) 의: 노래(1924) 마당(1953)

     제1차 세계대전 전의 국제관계
    삼제동맹(1873)
  제동(삼제동맹) 걸어: 겨우 서다(1873)
    삼국동맹(1882)
  삼국지 동났네(삼국동맹): 구입안내 좀(1882)
    러, 프 동맹(1894)
  너플(러, 프 동맹) 거리는: 그 옷자락(1894)
    영. 프 협상(1904)
  영, 프 협상은: 거짓이래(1904)
    모로코 사건(1차: 1905, 2차:1911)
  코(모로코) 에: 치명(1905) 적인 감기(1911)
    영, 러 협상(1907)
  영을 넣었으나(영, 러협상): 거짓충성(1907)
    삼국협상(1907)
  삼국이 협력(삼국협상) 하여: 국제친선(1907)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합병(1908)
  보스(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합병)? 극장취업(1908)
    발칸 전쟁(1차: 1912, 2차: 1913)
  1발(제1차 발칸 전쟁): 공중 겨냥(1912)
  2발(제2차 발칸 전쟁): 공중 격돌(1913)

    삼제동맹(1873)
  보, 불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독일에 경계심과 적대 감정을 가지고 독일에 대한 강경 
외교를 구사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독일의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를 견제하는 외교 정책을 펴서, 1873년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황제들과 삼제 동맹을 체결함으로써, 유럽에 있어서의 현 국경선 유지, 발칸 
문제의 평화적 해결, 혁명 운동의 공동 방지 등을 결의하였다.
  (암기법) 제동(삼제동맹) 걸어: 겨우 서다(1873)

    삼국동맹(1882)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독, 오, 러의 삼제 동맹을 맺었는데, 러시아가 발칸 
반도로 지출하려는 적극적인 의용을 보여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대립, 삼제 동맹이 일시 
소멸되자,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의 튀니지 병합에 대항하고 있던 
이탈리아를 끌어들여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삼국 동맹을 결성하였다.
  프랑스의 고립화를 목적으로 한 이 동맹은 1915년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폐기되었다.
  (암기법) 삼국지 동났네(삼국동맹): 구입안내 좀(1882)

    러, 프 동맹(1894)
  1890년 빌헬름 2세(재위 1859--1918) 가 비스마르크를 해임하고 적극적인 세계 정책을 
추진하게 되고 독일로부터 러, 독 재보장 조약의  갱신을 거부당한 러시아는 고립화를 
우려하여 프랑스에 접근, 정치 협정(1891) 고 krns사 협정(1892) 을 맺고 러, 프 동맹을 
완성시켰다.
  (암기법) 너플(러, 프 동맹) 거리는: 그 옷자락(1894)

    영, 프 협상(1904)
  1904년, 영국, 프랑스, 양국이 공동의 적 독일의 진출을 방지하기 위해 식민지에 관해서 
맺은 협상.
  빌헬름 2세가 투르크로부터 베를린, 비잔티움, 바그다드를 연결하는 철도 부설권을 얻고 
3B정책을 추진하게 되자, 이곳의 이해 관계를 가지고 있던 영국과 러시아를 자극하게 되었고, 
영국은 독일의 진출을 우려하여 프랑스와의 대립 관계를 해소하고, 영, 프 협상을 맺게 
되었다.
  (암기법) 영, 프 협상은: 거짓이래(1904)

    모로코 사건(1차: 1905, 2차:1911)
  프랑스가 영국과의 협상으로(영, 프 협상) 모로코를 보호국으로 삼자, 독일의 빌렘름 2세는 
프랑스의 모로코 지배에 반대하였고(1905), 다시 모로코에 군함을 파견하여(1911) 독일과 
프랑스는 전쟁 직전의 위기 상태에 이르렀다. 프랑스의 저항과 영국의 간섭으로 독일이 
후퇴하여 위기를 면하였으나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모로코 사건의 결과, 독일은 콩고의 북부 지역을 할양받는 대신, 모로코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권을 인정하였다. 이에 따라 1912년에 프랑스는 모로코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암기법) 코(모로코) 에: 치명(1905) 적인 감기(1911)

    영, 러 협상(1907)
  1907년 영국, 러시아 양국이 티벳, 아프가니스탄 페르시아에 관해서 맺은 협상.
  영국은 러, 일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여 극동의 불안이 사라지자 영, 러 협상을 맺어, 영, 
프, 러 삼국 협상이 성립되었다. 이는 삼국 동맹과 정면으로 대립하였다.
  주요 내용은,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세력 범위로 하고, 페르시아에 관해서는 북부와 중부는 
러시아의 세력 범위, 그리고 동남부는 영국의 세력 범위로 하며, 그 사이에 완충 지대를 
설치하는 것 등이다.
  (암기법) 영을 넣었으나(영, 러협상): 거짓충성(1907)

    삼국협상(1907)
  영국은 유럽의 세력 균형이 유지되도록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해 오고 있었으나, 독일의 
경제적, 군사적 발전이 현격해짐에 따라 프랑스와의 오랜 대립을 버리고 1904년 영, 프 협상을 
맺었으며,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와도 협상이 이루어지자(1907), 영, 프, 러 
3국간에 협상이 이루어졌다.
  (암기법) 삼국이 협력(삼국협상) 하여: 국제친선(1907)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합병(1908)
  러, 일 전쟁 후 러시아의 범 슬라브주의가 남하를 재개함으로써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범 게르만주의와 충돌하기에 이르렀다.
  1908년 청년 투르크 당의 혁명에 편승하여 불가리아가 독립하고, 오스트리아는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였다. 이 두 주는 슬라브인 다수가 살고 있었으므로, 이 지역을 원했던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에 대하여 강한 적대 감정을 품게 되었다.
  이에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나고, 곧 제1차 세계 대전의 발화점이 되었다.
  (암기법) 보스(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합병): 극장취업(1908)

    발칸 전쟁(1차: 1912, 2차: 1913)
  일찍부터 발칸 반도로 진출하여 영토를 확장하려던 불가리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그리스등은 동맹을 맺고, 이 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오스만 투르크와 전쟁을 일으켰다(1912). 
그 결과, 전쟁에 진 오스만 투르크는 많은 지역을동맹국들에게 떼어 주었다. 이것이 제1차 
발칸 전쟁이었다.
  그러나 불가리아는 그 지역을 독점할 야심을 가졌기 때문에 러시아가 후원하는 다른 세 
나라와 충돌하여 다시 전쟁이 벌어졌다. 여기에 오스만 투르크와 루마니아가 가담하여 제2차 
발칸 전쟁이 시작되었고 불가리아가 패하여 부쿠레슈티 조약이 맺어졌다. 그리하여 불가리아가 
야심을 품었던 마케도니아 지방은 여러 나라에게 할양되었다.
  (암기법) 1발(제1차 발칸 전쟁): 공중 겨냥(1912)
  2발(제2차 발칸 전쟁): 공중 격돌(1913)

     제1차 세계대전
    사라예보 사건(1914)
  서리 예보(사라예보 사건): 가장 곤란(1914)
    제1차 세계대전(1914)
  1세(제1차 세계대전) 는: 곧장 가라(1914)
    마른 전투(1914)
  마른(마른 전투) 것만: 가져가라(1914)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공격(1917)
  무지무지한 잠수함(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공격): 고장검사(1917)
    러시아 혁명(1917)
  러시아워(러시아 혁명): 가장 고생(1917)
    브레스토 리토프스크 조약(1918)
  프레스토(브레스토 리토프스크 조약): 공장 가요(1918)
    독일의 항복(1918)
  독일의 항복: 기적 같아(1918)
    베르사유 조약(1919)
  배를 사유(베르사유 조약): 공짜공짜(1919)
    국제연맹(1920)
  연(국제연맹): 공중납치(1920)

    사라예보 사건(1914)
  범 슬라브주의와 범 게르만주의의 감정이 무르익은 상황에서,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드(Franz Ferdinand) 황태자 부부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의 비밀 
결사에 소속된 한 청년에 의하여 살해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병합이 슬라브 민족의 적개심을 자극시킨 
결과였으며, 제1차 세계 대전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암기법) 서리 예보(사라예보 사건): 가장 곤란(1914)

    제1차 세계대전(1914)
  1914년 6월, 사라예보 사건을 원인으로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삼국동맹국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삼국 협상국으로 나뉘어 전개된 세계대전.
  독일과 영국의 제국주의적 대립, 알사스, 로렌 문제를 둘러싼 독일과 프랑스의 대립, 
발칸에서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민족주의적 항쟁 등의 갈등과 분쟁이 진행되던 터에, 
1914년 6월의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가 전쟁에 들어가고, 삼국 동맹과 
삼국 협상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 대전으로 발전하였다.
  (암기법) 1세(제1차 세계대전) 들은: 곧장 가라(1914)

    마른 전투(1914)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군이 처음으로 승리한 프랑스 전투.
  1차(1914.9) 는 연합군이 승리하여 독일이 파리 점령을 포기해야 했다. 이후 프랑스 국내에 
대참호선이 구축되어 장기전에 돌입하였다.
  2차(1918.7) 는 마른 강 부근에서 파리에 접근한 독일군이 최후의 대공격에 실패한 후 
프랑스는 마른에서 반격으로 나와, 이를 계기로 독일의 패배는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암기법) 마른(마른 전투) 것만: 가져가라(1914)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공격(1917)
  1915년 영국의 호화 여객선 루시타니아호가 독일 자수함의 공격을 받고 격침당하여 100여 
명의 미국인이 희생당하자, 미국에서는 독일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었다. 이어서 독일은 1917년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선포하여 중립국의 상선까지 공격하니, 마침내 미국은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미국의 참전은 연합국의 경제적, 군사적 힘을 크게 강화시켜 전쟁 승리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으며, 연합국에 막대한 원조를 제공한 미국은 전후에는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탈바꿈하면서 국제적 지위기 크게 높아졌다.
  (암기법) 무지무지한 잠수함(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공격): 고장검사(1917)

    러시아 혁명(1917)

    브레스토, 리토프스크 조약
  제1차 세계 대전 때 러시아와 독일 사이에 체결한 단독 강화 조약.
  1918년 3월 러시아는 폴란드의 브레스토, 리토프스크에서 독일과 휴전 조약을 맺어, 많은 
영토와 인구를 빼앗긴 채 전쟁에서 물러났다.
  이 강화 조약의 결과, 독일은 동부 전선에서 병력을 전용하여 전력을 서부 전선에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조약은 1919년의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파기되었다.
  (암기법) 프레스토(브레스토, 리토프스크 조약): 공장 가요(1918)

    독일의 항복(1918)
  미국의 참전(1917.4) 으로 연합군은 200만 명이 넘는 병력을 갖게 되고 막대한 군수품을 
지원받아 전세는 연합군에게 유리하였다. 그리하여 1918년에는 불가리아, 터키가 항복하고 
오스트리아도 굴복하였다.
  독일에서도 킬 군항에서의 반란을 계기로 혁명이 일어나, 빌헬름 2세는 퇴위하고 새로 
수립된 공화국 정부가 1918년 11월 11일에 연합국에 항복하였다.
  (암기법) 독일의 항복: 기적 같아(1918)

    베르사유 조약(1919)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19년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과 연합국 사이에 체결된 
강화 조약.
  독일의 영토와 배상 문제 및 군비 문제, 국제 연맹, 노동협정 등에 관한 규약이 규정되어 
있다. 이 결과 독일은 해외 식민지를 잃었으며, 알사스, 로렌 지방을 프랑스에 반환한 외에도 
많은 영토를 삭감당하였고, 전쟁에 대한 책임의 일단으로 배상금이 부과되었으며, 군비에 
대해서도 엄격히 제한당하였다.
  (암기법) 배를 사유(베르사유 조약) 공짜 공짜(1919)

    국제 연맹(192--1946)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 분쟁을 해결하고 영구적인 세계 평화를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설치된 최초의 국제 연합기구.
  총회, 이사회 및 사무국의 3기관을 중심으로 하며, 다수의 보조 기관과, 따로 상설 국제 
사법 재판소, 국제 노동 기구의 외부 기관이 있었다.
  그러나 제안국인 미국의 불참, 독일과 소련의 가입 지연으로 기능이 저하되었고, 분쟁 
해결의 무력적 수단이 결여되어 있음으로 해서 오래 유지되지 못하고 1946년에 정식으로 
해체되었다.
  (암기법) 연(국제연맹): 공중납치(1920)

     제2차 세계대전
    세계 경제공황(1929)
  공항(세계 경제공황) 에서: 공중 날자(1929)
    독일의 재군비 선언(1935)
  독일 제비(독일의 재군비 선언): 가장 단명(1935)
    독일의 라인라트 진주(1936)
  라일락이(독일의 라인란트 진주): 꽃 중 돋보임(1936)
    삼국 추축 완성(1937)
  상추(삼국 추축 완성) 로: 김장다시(1937)
    수데텐 합병(1938)
  수다 떠는(수데텐 합병): 그 주둥이(1938)
    독, 소 불가침 조약(1939.8)
  불침번(독, 소 불가침 조약): 꽤 잘도 잠(1939)
    제2차 세계대전(1939.9)
  2세(제2차 세계대전) 는: 곧장 등장(1939)
    태평양 전쟁(1941.12)
  태평양(태평양 전쟁) 이: 곧 지름길(1941)
    스탈린그라드 전투(1942)
  스타는 그래두(스탈린그라드 전투): 건재라네(1942)
    카이로 회담(1943.11)
  가위로(카이로 회담): 김 자르다(1943)
    노르망디 상륙작전(1944.6)
  르망(노르망디 상륙작전) 속도: 꼭 제로로(1944)
    얄타 회담(1945.2)
  야타(얄타 회담) 족: 개지랄 마(1945)
    포츠담 선언(1945.7)
  스포츠(포츠담 선언): 기자라면(1945)
    일본의 항복(1945.8)
  일본의 항복은: 가짜라며?(1945)

    세계 경제공황(1929)
  1929년 10월 24일 뉴욕 증권 거래소에서 주식 값이 떨어진 것을 계기로 경제 공황이 
발생하였다. 경제 공황이란, 경제가 갑자기 혼란 상태에 빠져서 산업 활동이 마비되고 
실업자가 쏟아져 나오는 현상을 말한다.
  미국에서 이러한 공황이 발생한 것은 1920년대의 경제적 번영에 도취된 기업들이 수요는 
생각하지 않고 무턱대고 상품을 많이 만들어 내어 생산 과잉 현상을 빚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실업자 수도 급격하게 늘어나서, 1929년에 150만 명이던 실업자가 
1932년에 가서는 1,200만--1,500만 명이 되었다.
  (암기법) 공항(세계 경제공황) 에서: 공중 날자(1929)

    독일의 재군비 선언(1935)
  히틀러는 통제 경제 체제를 확립하여 독점 자본주의를 후원하였고, 또 4개년 계획 경제를 
실시하여 군수 산업과 토목 사업을 추진함으로써 실업자를 구제하는 등 공황 극복에 
주력하였다.
  한편으로 국제 연맹을 탈퇴하고, 재군비에 전력을 기울여 단시일내에 기계화된 정예 부대와 
강력한 공군을 가지게 되었으며, 라인란트에 진주하여 로카르노 조약을 폐기하고 베르사유 
체제를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암기법) 독일 제비(독일의 제군비 선언): 가장 단명(1935)

    독일의 라인란트 진주(1936)
  제1차 세계대전 후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독일은 라인강의 오른쪽 50Km 지대에 무장을 
금지당하였고, 왼쪽 지대는 조약의 이행을 위해 연합군에 점령되었다.
  독일의 재무장으로 프랑스가 소련과, 프, 소 상호 원조조약을 체결하자(1935), 히틀러는 
이를 구실로 비무장 지대인 라인란트에 진주하였다.
  (암기법) 라일락이(독일의 라인란트 진주): 꽃 중 돋보임(1936)

    삼국추축 완성(1937)
  에디오피아 전쟁부터 가까워진 독일과 이탈리아는 에스파냐 내란을 계기로 급속히 접근하여 
1936년 10월 베를린, 로마 추축을 이룬 뒤, 1936년 11월 독, 일 방공 협정이 체결되고, 1937년 
이탈리아가 가입, 독, 이, 일의 3국 추축이 완성.
  (암기법) 상추(삼국 추축 완성) 로: 김장 다시(1937)

    수데텐 합병(1938)
  히틀러는 1938년 독일인 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란트의 할양을 
요구하자, 체코, 프랑스, 소련과 상호 원조 조약을 맺고 있던 관계로, 체코는 이를 배경으로 
거부하였다.
  이에 히틀러는 1938년 9월 영국의 체임벌린, 프랑스의 달라디어,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를 
뮌헨 회담에 불러들여 수덴테 합병을 성사시켰다.
  (암기법) 수다 떠는(수데텐 합병): 그 주둥이(1938)

    독, 소 불가침 조약(1939.8)
  히틀러는 영, 프와의 교전시 동부 전선에서의 안정을위해 소련의 스탈린을 꾀어 폴란드 및 
발트 3국의 분할을 비밀 조항으로 하는 독, 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협정은 
전세계에 비상한 충격을 주었다. 이 조약에 의해 동방에서의 위험을 제거한 히틀러는 폴란드 
진격을 개시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암기법) 불침번(독, 소 불가침 조약): 꽤 잘도 잠(1939)

    제2차 세계대전(1939.9)
  독일, 이탈리아,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전체주의 국가들로 구성된 추축국의 침략에 의해 
민주주의 국가인 연합국과의 사이에 일어난 전쟁. 전쟁의 도화선이 된 것은 독일의 단찌히 및 
폴란드 회랑에 대한 요구였다. 이 전쟁은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종결되었다.
  (암기법) 2세(제2차 세계대전) 는: 곧장 등장(1939)

    태평양 전쟁
  제2차 세계 대전의 일환으로, 태평양 지역에서 일본과 미국, 영국, 네덜란드, 중국 등과의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
  일본이 인도차이나에 진출하자, 미국은 영국, 중국, 네덜란드와 ABCD포위진을 형성하고 대일 
석유 수출을 금지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은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하고(1941. 12. 8). 미, 영 
양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암기법) 태평양(태평양 전쟁) 이: 곧 지름길(1941)

    스탈린 그라드 전투(1942)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독, 소 전쟁의 귀추를 결정하고, 대전 전체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친 
전투.
  1941년 겨울 독일군의 모스크바 공격에 실패하여 전쟁은 장기화하였다.. 1942년 여름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시를 돌파하여 배후에서 모스크바를 포위하려고 33만의 대군으로 
공격을 개시, 소련군과의 사이에 격렬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11월 소련군은 남북에서 포위를 
돌파하고 독일군을 역포위하여, 마침내 1943년 2월 독일군은 9만의 포로를 남기고 패퇴하였다.
  이 승리를 계기로 하여 소련군은 대반격전으로 전환, 독일을 패배로 몰아넣었다.
  (암기법) 스타는 그래두(스탈린그라드 전투): 건재라네(1942)

    카이로 회담(1943.11)
  1943년 11월에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중국의 장 제스 등 세 거두가 이집트의 
카이로에 모여 한국의 독립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 회담에서 연합국의 세 거두는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킬 것을 결의한다.' 고 선언하여 독립을 고대하던 한국인들에게 커다란 
기쁨과 희망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독립의 시기가 문제였다. 카이로 회담의 약속은 즉각적인 
독립이 아닌 '적당한 시기' 의 독립이었다는 점이, 결국 냉전의 도래와 함께 분단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이 카이로 선언은 포츠담 선언의 기초가 되었다.
  (암기법) 가위로(카이로 회담): 김 자르다(1943)
    노르망디 상륙작전(1944.6)
  제2차 세계대전말에 연합군의 유럽 대륙 반격 작전의 계기를 만든 대 상륙작전.
  미국 아이젠하워 휘하 25만의 연합군은 600여 척의 함정과 1만 1000대의 항공기 지원을 
받아, 1944년 6월 6일 미명을 기해 영국 해협쪽의 프랑스령 노르망디에 상륙, 독일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6월 22일에는 128Km의 해안에 32Km 폭의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8월에는 
파리가 함락되고, 이듬해 5월 독일은 항복했다.
  (암기법) 르망(노르망디 상륙 작전) 속도: 꼭 제로로(1944)

    얄타회담(1945.2)
  제2차 세계대전 때, 크림 반도에 있는 얄타에서 1945년 2월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이 모여 회담을 하고 맺은 협정.
  미, 영, 소의 세 거두는 대독 최후 작전과 독일 항복 후의 점령지 처리 문제를 논의하고, 
소련의 대일전 참전도 결의하였으며, 국제 연합에서의 5개국의 거부권에도 합의하였다.
  (암기법) 야타(얄타 회담) 족: 개지랄 마(1945)

    포츠담 선언(1945.7)
  미국의 트루먼,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 세 거두가 독일의 포츠담에서 회담하여 유럽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는 한편,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으며, 그 항복 조건을 명시한 
포츠담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에서 우리 나라의 해방과 독립이 약속 되었다.
  (암기법) 스포츠(포츠담 선언): 기자라면(1945)

    일본의 항복(1945.8)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미군에 의해서 사이판, 필리핀, 유황도, 오키나와 등을 
점령당하면서도 최후까지 버텨 오던 일본은 미국이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하고, 
1945년 8월 8일 소련이 중립 조약을 무시한 채 대일 선전을 포고 하고 남하해 오자. 1945년 
8월 15일 포츠담 선언의 조건을 수락하여 무조건 항복하였다.
  (암기법) 일본의 항복은: 가짜라며?(1945)

     전후의 세계
    국제 연합(1945.10)
  연합군(국제 연합) 아: 길 점령 마(1945)
    트루먼 독트린(1946)
  루머(트루머 독트린) 로: 국제 로비(1946)
    철의 장막(1946)
  철장(철의 장막) 에서: 굶주려봐(1946)
    마샬 플랜(1947)
  마셔라(마셜플랜): 공짜로 술(1947)
    코민포름(1947)
  코 밑에(코민포름): 긴 주름살(1947)
    나토 성립(1949)
  나토(나토 성립) 할 것 같으니: 굶주리자(1949)
    중국 공산당 정부 수립(1949)
  중국 공산당 정부: 길 점령중(1949)
    반둥 회의(1955)
  반동(반둥 회의): 거짓 망명(1955)
    바르샤바 조약기구(1955)
  바르셔봐(바르샤바 조약기구): 가짜 맹물(1955)
    인공위성 발사(1957)
  인공위성 발사: 관중 만세(1957)
    유럽 공동체(1967)
  공동으로(유럽 공동체): 개집 보수(1967)
    닉슨 독트린(1969)
  니스(닉슨 독트린) 칠로: 까짐 방지(1969)
    동서 데탕트(1970)
  데이트(동서 데탕트): 강제 신청(1970)

    국제연합(1945.10)
  냉전이라는 긴장 상태 속에서 평화를 위한 중요한 임무를 지니고 주목할 만한 역할을 수행한 
것이 국제 연합, 즉 유엔이다.
  유엔은 대서양 헌장을 기저로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구상되었으나, 1945년 10월 24일 
51개국이 참가한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정식으로 발족하게 되었다.
  유엔은 국제 연맹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지만, 처음부터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중요한 
국가들이 참가하고, 집단 안전 보장을 위한 강력한 권한과 유엔군과 같은 효율적인 수단을 
가지게 되어, 평화 유지를 위해 국제 연맹보다 훨씬 더 효과적인 활동을 할 수가 있었다.
  (암기법) 연합군(국제 연합) 아: 길 점령 마(1945)

    트루먼 독트린(1946)
  1946년에 그리스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이 일어나고, 터키에서는 소련의 압력으로 위기가 
초래되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공산주의 세력의 확대를 저지한다는 방침을 설정하고, 
그리스를 원조하여 공산 반란을 진압시킴과 동시에, 터기에도 원조를 제공하였다. 미국의 
이러한 공산세력 팽창저지정책을 트루먼 독트린이라고 한다.
  이는 약 120억 달러에 달하는 방대한 경제 원조를 유럽에 제공한 마셜 플랜과 함께, 
공산주의 침략의 위험이 있는 자유국가의 정치 제도와 주권의 유지를 위한 원조 방침으로서, 
미국의 공공 연한 반소, 반공의 세계 정책을 선언한 것이었다.
  (암기법) 루머(드루먼 독트린) 로: 국제 로비(1946)

    철의 장막(1946)
  공산주의인 동유럽 제국과 자본주의인 서유럽사이의 장벽의 뜻.
  1946년 미국을 방문한 영국의 처칠 수상은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참석한 연설에서 "소련은 
철의 장막으로 유럽을 갈라 놓으려 한다." 고 예언 하였다.
  동서간의 냉전의 장벽을 의미하는 '철의 장막' 이라는 말은 이렇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 후 처칠의 예언대로 소련은 1946년 루마니아로부터 시작하여 1948년에 체코슬로바키아에 
이르기까지 동유럽 5개국(루마니아, 폴란드, 불가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을 3년 
사이에 친소 위성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암기법) 철장(철의 장막) 에서: 굶주려봐(1946)

    마셜 플랜(1947)
  1947년 6월초 미국의 국무 장관 마셜이 제안하여 실시된 미국의 유럽경제 부흥원조계획.
  그 목적은 2차 세계 대전 후 유럽 여러 나라가 직면한 경제적 곤란을 극복하고 유럽 경제를 
부흥시킴으로써 정치적 안정과 평화의 안정을 얻으려는 데 있었으나, 그 배경은 경제적 불안을 
틈타 공산주의 확대를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국가별 원조를 지양하고 지역적인 원조로 한 것이 특색이다. 이후 동서 냉전의 격화로 차차 
북대서양 조약에 의한 군사 원조로 변모하였다.
  (암기법) 마셔라(마셜 플랜): 공짜로 술(1947)

    코민포름(1947)
  공산당 정복국이라고 불리는 이 단체는 유럽각국 공산당의 제휴와 정보 교환을 강화할 
목적에서 1947년 10월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창립되어, 소련, 프랑스, 이탈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폴란드, 유고슬라비아의 공산당이 참가하였다.
  스탈린 사망 후, 각국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통제가 완화되고 평화 공존이 제창되기에 
이르자, 1956년에 해체되었다.
  코민테른과 같은 지도 기관은 아니다.
  (암기법) 코 밑에(코민포름): 긴 주름살(1947)

    나토 (NATO) 는 1949년 워싱턴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서독,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이탈리아, 노르웨이, 포르투갈, 아이슬란드, 덴마아크, 캐나다, 그리스, 터키 등 14개국이 
북대서양 조약에 따라 맺은 집단 군사 동맹이다.
  공산 진영이 베를린을 봉쇄하자, 자유 진영은 베를린에 물자를 공수하는 한편, 서유럽 5개 
동맹에 미국과 캐나다 등을 참가시킨 2개국으로 북대서양 조약 기구(North Atalantic Treaty 
Organization) 를 창설하여 대응하였다.
  (암기법) 나 토(나토 성립) 할 것 같으니: 굶주리자(1949)

    중국공산당 정부수립(1949)
  일본과 싸우기 위하여 합작했던 국민당과 공산당은 1947년부터 다시 대립하여 치열한 내전을 
벌였다. 초기에는 국민당이 우세하였으나, 농촌지역을 장악한 공산당이 점차 유리해져, 
국민당군이 공산당에 투항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결국 국민당은 국, 공 내전에서 패배하여 1949년에 타이완으로 물러났고, 같은 해 10월 
중국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1971년에는 타이완을 대신해서 정식 중국 정부로 국제 연합에서 
인정받게 되었다.
  (암기법) 중국 공상당 정부: 길 점령중(1949)

    반둥 회의(1955)
  1954년 실론(스리랑카)의 콜롬보에서 인도, 미얀마,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실론의 대표들이 
모인 콜롬보 회의가 있은 후, 1955년 콜롬보 회의의 5개국이 주최국이 되어 분단국이 아닌 
아시아, 아프리카의 29개국 대표들이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개최한 회의.
  자유, 공산 양 진영의 대립에서 오는 압력이 표면화되기도 하였으나, 영토와 주권의 존중, 
상호 불가침, 내정 불간섭, 호혜 평등, 평화적 공존 등의 평화 5원칙에 기초한 반식민지주의, 
민족 주권, 상호 협력 등의 평화 10원칙을 결의하였다.
  제2차 대전 후 강대국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아시아, 아프리카 신생 국가들의 정치적인 
성장을 과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암기법) 반동(반둥 회의): 거짓 망명(1955)

    바르샤바 조약기구(1955)
  바르샤바 조약 기구는 소련, 폴란드, 헝가리, 불가이라, 루마니아, 알바니아, 동독 등 
7개국이 나토에 대한 대항과 공산주의 팽창을 목적으로 1955년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조인되었다. 당시 서유럽의 독일에 대한 재군비가 승인된 상태에서, 이에 위협을 느낀 소련 및 
기타 공산 국가가 그에 대한 대항 조치로서 결성하였다.
  이로써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지역적 집단 안전 보장 기구가 세계적인 규모로 펼쳐지게 
되었다.
  (암기법) 바르셔봐(바르샤바): 가짜 맹물(1955)

    인공위성 발사(1957)
  소련은 유도탄의 원리를 우주 항공에 이용하여, 1957년 최초의 인공 위성 
스푸트니크(Sputnik) 1호를 쏘아 올렸으며, 1961년에는 유인 우주선의 지구 귀환을 
성공시켰다.
  1969년에는 미국의 유인 우주선 아폴로 11호가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하는 
데 상공하였다.
  (암기법) 인공위성 발사: 광중 만세(1957)

    유럽 공동체(E.C)(1967)
  유럽경제공동체(EEC),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S|),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 의 3개 
공동체로 구성되어 있는 유럽의 지역협력기구이다. 이 3개 기구는 1967년 6월 브뤼셀 조약에 
의하여 통합되었다.
  본래 유럽 공동체의 가입국은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베릭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 
6개국이었으나, 영국, 아일랜드, 덴마크가 1973년에 가입하여 9개국이 되었고, 그리스, 터키는 
준 가맹국이다.
  (암기법) 공동으로(유럽 공동체): 개집 보수(1967)

    닉슨 독트린(1969)
  1969년 미국 대통령 닉슨은 자유 세계의 방위를 자유 진영 국가가 분담하고, 국지 분쟁에 
미국이 직접 개입하지 않으며, 공산 국가에 대해선느 융통성있게 대처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여 세계를 평화 공존의 흐름으로 이끌었다.
  (암기법) 니스(닉슨 독트린) 칠로: 까짐 방지(1969)

    동서 데탕트(1970)
  동서간의 냉전이 완화되고 세계 정세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 것은 대략 1970년대 
초부터의 일이다. 1960년대 초에 소련 흐루시초프와 미국의 케네디 두 수뇌가 크레믈린과 
백악관 사이에 '핫 라인(HOT LINE)' 이라는 긴급 직통 전화를 건설하여 동서 관계의 새 장을 
열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동서 화해의 시작은, 1972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전략 무기 제한 협정(SALT)' 이라고 하는 군축 협상이 이루어지면서부터였다.
  (암기법) 데이트(동서 데탕트): 강제 신청(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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