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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코뮨주의와 이행의 문제

by Frais Study 2020. 8. 16.

1.가치법칙과 이행

 

자본주의 내지 근대 사회에서 변혁과 전복을 꿈꾸는 한, 결국은 당면하게 되는 가장 직접적인문제가 바로 이행의 문제다. 그런데 이행이라는 말은 두 가지 상이한 맥락으로 인해 상이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 이행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음 사회로의 이행을 뜻하는 것이고, 따라서 기존의 지배적인 생산양식의 전복이요, 그것을 직접생산자가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생산양식의 사회로 대체하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이행은 자본주의와 코뮨주의 사이의 과도기에, 코뮨주의의 물질적 기초를 마련하는 문제다. 즉 자본주의에서 코뮨주의로 직접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사이에 이행의 과정이 진행되는 과도기 내지 이행기가 필요하며, 이 이행기를 통해 코뮨주의의 기초를 마련해가는 별도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맑스주의에서 이론적으로 다루는 이행의 문제는 대부분 후자에 관한 것이다. 전자의 경우 이행은 혁명에 대한 정의와 외연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혁명이라는 개념처럼 외연이 넓고 포괄적이어서 그것을 따로 다루기보다는 그 하위적인 주제들을 통해 세부적으로 다룬다. 반면 후자의 경우 이행의 문제는 이행기의 정치?경제적 문제가 되는데, 러시아 혁명이나 기타 다수의 성공한혁명에서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문제로 제기되었다. 여기서도 일단 후자를 통해 이행의 문제에 접근할 것이다.

이 문제를 다루는데 이론적 단서가 되는 것은 알다시피 맑스의 ?고타 강령 비판?에 나오는 유명한 언급이다. 거기서 맑스는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로부터 코뮨주의로 바로 넘어갈 수 없고 말한다. 왜냐하면 혁명을 통해서 성립된 이 사회는 모든 면에서, 즉 경제적, 도덕적, 정신적인 면에서 그 모체였던 낡은 사회의 흔적을 아직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K. Marx, "Kritik des Gothaer Programms," 김재기 편역, ?맑스 엥겔스 저작선?, 거름, 172--강조는 인용자.

그리고 바로 이런 점에서 그는 그 자체의 토대 위에서 발전하는 코뮨주의자본주의 사회로부터 방금 생겨난 코뮨주의를 구별한다. 후자는 낡은 사회의 흔적을 아직 지니고 있는 사회인 것이다. 이를 흔히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은 다 아는 바와 같다.

그런데 맑스가 말하는 저 낡은 사회의 흔적이란 대체 무엇인가? 일단 경제적 측면에서 낡은 사회의 흔적에 대해선 맑스 자신이 분명하게 지적한 바 있다. 첫째 단계인 사회주의에서는 생산력의 제약으로 인해 분배 능력이 제약되고, 그에 따라 인민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필요한 충분한 양의 재화를 분배할 수 없다. 여기서 생산자 개개인은 정확히 그가 사회에 주는 것만큼--공제할 것을 공제한 후에--을 사회로부터 돌려받게 된다.” 따라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일하고 [자신이 수행한] 노동[]에 따라 분배받는다.”같은 책, 172.

 

따라서 각자가 제공하는 노동력과, 그 대가로 분배받는 것 사이에는 가치대로의 교환이라는 가치법칙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에서 상품교환을 규제하던 것과 동일한 규칙이 노동과 분배 간의 관계를 지배한다. 결국 가치법칙이 유통 및 분배 원리로서 존재하며, 그것이 작용하는 상품-화폐 경제 및 시장이 존재한다.N. A. Zagolow et. al., Kurs politischeskoi ekonomii, 윤소영 편/해설, ?정치경제학 교과서?, II-1, 새길, 1990, 313쪽 이하; G. A. Kozlov et. al., Political Economy: Socialism, 편집부 편역, ?정치경제학 원론?, II, 녹두, 1989, 99쪽 이하 등 참조.

부르주아 사회의 유물 내지 흔적으로서 가치법칙.

다음으로 정치적 측면에서 방금 태어난 코뮨주의를 특징짓는 것은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독재다. 자본주의의 지배 권력을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으로 대체했다고 해서, 자본가계급이 즉시 사라지거나 소멸하는 것은 아니며, 더구나 소부르주아지나 기타 다양한 계급들이 단시일 내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가치법칙과 상품-화폐 경제는 그러한 계급의 새로운 형성이 가능한 기초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계급투쟁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 전반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지배를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불가피하다는 것이다.V. I. Lenin, State and Revolution, 한민 역, ?현대 국가와 혁명?, 한민출판사, 연도미상; E. Balibar, Sur la dictature du proletariat, 최인락 역, ?민주주의와 독재?, 연구사, 1988

물론 그것은 반드시 폭력적인 형태를 위하는 계급투쟁 내지 독재의 양상으로 진행되지는 않지만.

마지막으로 도덕적?정신적인 면에서 낡은 사회의 흔적은 무엇인가? 그거야 한마디로 부르주아적 도덕과 규범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대체 어떤 것을 지칭하는 것일까?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여기서 우리는 실제로 갓 태어난 코뮨주의로서 사회주의를 처음으로 건설했던 레닌의 경험을 참조할 수 있다. 레닌은 이를 무엇보다도 우선 활동의 표준적인 척도로서 부르주아적 권리라고 말한다.V. I. Lenin, 앞의 책, 107.

그렇지만 이는, 전혀 무관하다고 말할 수야 없겠지만, ‘권리라는 단어가 표상하는 법적인 어떤 것을 지시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남보다 한 시간 더 일했다거나 남보다 적게 대가를 받았다거나 하는 식의 샤일록같은 냉혹한 계산심리를 강요하는 편협한 부르주아적 권리의 지평이다.같은 책, 109.

 

다시 말해 그것은 사람 간의 관계를 가치에 따른 등가교환으로 재고 계산하는 심성이나 심리요, 그러한 심성과 심리를 낳는 습속이다. 알다시피 이는 가치관계를 통해서 노동과 모든 활동이 계산되고 규제되던 자본주의의 습속이다. 사람들의 모든 노동과 활동, 나아가 신체에 새겨진 습속의 도덕으로서 가치법칙. 그것은 단지 경제적 교환관계를 규제하는 법칙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모든 일상적인 관계 속에서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취하는 태도를 규정하는 습속이다.

여기서 레닌은 가치법칙의 문제가 단지 교환의 비율을 정하는 경제적 규칙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행동과 활동을 일상적으로 규제하고, 그들의 의지를 방향짓는 습속의 문제요 도덕의 문제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첫째는 경제적 측면에 관한 것이다. 가치법칙이 사회주의라는 이행기의 경제를 규제하는 규칙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코뮨주의로 나아갈 이행의 계기를 포함하고 있는가? 가치대로 교환하고, 가치로 분배가 이루어지는 한, 그것은 가치에 의해 규제되는 관계를 오히려 확장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거기서 이행의 계기를 찾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를 이행기내지 과도기로 규정하는 그 이행의 계기는 어디서 발견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명료한 답이 제시되어 있다. 생산력이 발전하고, 그에 따라 재화의 물량이 풍부해지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알다시피 자본주의의 흔적인 가치법칙은, 자신의 필요하지 않은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남아도는 것, 따라서 남에게 주어도 좋은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언젠가 다른 것과 교환하거나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할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필요없고 욕구되지 않는 것도 집적하고 축적하는 것이 가치법칙이 만들어내는 경제적 태도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생산력이 발전한다고 해서 남는 물자를 아무런 계산이나 대가없이 남에게 기꺼이 넘겨주게 되리라는 예상은 적어도 경제학적 논리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반대로 생산력 발전에 따라 능력에 따른 집적과 축적의 격차가 만들어지리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생산력이 충분히 발전하면 가치법칙을 넘어서 필요에 따른 분배가 이루어지리라는 것은 너무도 순진한 생각이 아닐까? 차라리 반대로 말해야 한다. 가치법칙에서 이미벗어나지 못하는 한, 생산력 발전은 코뮨주의로 이행할 계기를 마련해 주지 못한다고. 여기서 이 질문은 둘째 질문으로 회귀한다.

둘째 질문. ‘도덕적 측면에 관한 것으로, 사회주의에서 가치법칙이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활동방식을 샤일록 식의 계산으로 묶어두리란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거기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냉혹한 계산의 습속에서 벗어나 코뮨적인 습속 내지 도덕을 형성할 계기--그게 곧 이행의 계기일텐데--를 찾을 순 없지 않을까? 가치법칙이 서로에 대해 가치와 등가의 잣대로 재는 생활방식을 내포한다고 할 때, 그것은 진행되면 될 수록 사람들을 냉혹한 계산의 수렁으로 끌고가는 무의식적 습속을 강화하는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행의 계기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레닌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타도함으로써 인민이 일시에 그 어떤 권리 기준도 없이 사회를 위해 일하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V. I. Lenin, ?국가와 혁명?, 107(강조는 레닌). 이처럼 사람들의 일상적인 활동방식이나 생활양식을 규정하는 습속의 문제는 사실상 우리가 앞서 사용한 개념을 빌어 다시 말하자면 개개인을 특정한 형태의 주체로 생산하는 주체생산양식에 관한 문제다. 결국 레닌의 말은 자본주의에서 형성된 무의식적인 활동방식내지 주체생산방식을 변이시키고 넘어서지 않는다면 코뮨주의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권리 기준을 또 다시 공장의 규율에서 찾는다. 즉 공장 노동의 규율을 전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함으로써, 냉혹한 계산의 습속을 넘어서는 이행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고 본다.혹은 국가적 소유에 기초한 전국적인 수준의 회계와 통제의 달성이 유사한 맥락에서 제시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서울사회과학연구소, ?사회주의의 이론?역사?현실?, 민맥, 1991 78쪽 이하 참조.

마치 이전에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 조직의 경계를, 노동자들을 일상적으로 훈련시키는 공장의 규율을 통해 구획하려고 했던 것처럼. 이러한 공동체의 단순하면서도 기초적인 규율을 준수하는 것은 아주 빠른 시일 안에 습성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같은 책, 115.

 

이러한 규율을 통해 사회 전체는 노동과 임금의 평등을 이룬 하나의 단일한 사무실이나 단일한 공장으로 되어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장’(에서의 훈련을 통한) 규율, 즉 자본가들을 축출하고 착취자들을 타도한 후에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전체로 확장시킬 이러한 규율은 우리의 이상이나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이 사회에서 자본주의의 착취라는 온갖 파렴치한 행위들과 만행을 성실하게 세척해내고 더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필연적인 단계일 뿐이다.”같은 책, 114. 강조는 레닌.

 

그리하여 인민들이 사회적 상호교통의 기본 규칙들을 준수하는 것에 익숙해질 때, 그리고 그들의 노동이 자신들의 능력에 따라서 자발적으로 노동할만큼 아주 생산적으로 되었을 때, 국가는 완전히 소멸하게 될 것이다.같은 책, 109. 강조는 레닌의 것.

 

그러나 거기에는 또 다시 중요한 질문이 이어진다. 이미 레닌에 대한 로자의 비판에서 충분히 본 것이지만, 공장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의 규율과 그것을 통한 노동자의 훈련은, 복종에 길든 노동과 활동을 만들어낸다. 더구나 실업화 압력과 경쟁은, 불가피한 결합노동을 통해, 길들이는 규율을 횡단하려는 노동자들을 다시 개별화하려 하고, 복종이나 충성은 성공의 꿈과 뒤섞여 노동자 자신의 욕망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공장의 규율을 확장함으로써 가치법칙이 생산하는 저 샤일록 식의 냉혹한 계산의 습속을 극복할 수 있으리란 것은 너무도 소박한 생각이 아닐까? 차라리 여기서도 우리는 반대로 말해야 하는 게 아닐까? 가치법칙을 통해 형성되는 저 샤일록 식의 계산에서 이미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리하여 노동자들조차 서로 계산에 의해 행동하는 습속에서 이미벗어나지 못한다면, 저 공장의 규율에 길든 노동은 이행의 계기를 마련해주지 못한다고.

우리는 이제 이 문제를 상반되는 두 가지 항목을 통해서 좀더 검토할 것이다. 하나는 소비에트 테일러주의, 다른 하나는 코뮨주의적 토요일’--수보트닉스(subbotniks)--이다. 전자가 사회주의에서 근대적 노동과 관계되어 있다면, 후자는 코뮨주의적 노동과 관련되어 있다.

 

 

2.소비에트 테일러주의와 근대적 노동

 

테일러주의에 대한 레닌의 입장은 시기와 상황에 따라 적지 않은 강조점의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일관된다. 테일러주의에 대하여 가장 먼저 쓰여진 글은 19133월에 <프라브다>(Pravda)에 발표한 것으로, 테일러주의를 제목 그대로 노동자를 억압하는 과학적 체계로 비판하고 있다.V. I. Lenin, "A 'Scientific' System of Sweating,", Collected Works, vol.18, Progress Publishers, 594-595.

하지만 이듬해 3월에 <풋 푸라브디>(Put Pravdy)에 발표한 글에서 비판의 지점은 달라진다. 여기서 테일러주의는 한편으로는 마치 기계가 그랬듯이, 필요없는 노동을 제거하고 효율성을 증대시켜 노동생산력을 거대하게 증대시키지만, 자본주의 아래서 그것은 더욱더 심한 억압과 착취로 이끈다고 비판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의 사용이 단위 공장으로 제한되기 때문에 사회적 무정부성에 기인하는 시간과 생산물의 낭비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V. I. Lenin, "The Taylor System--Man's Enslavement by the Machine,", Collected Works, vol.20, 152. 여기서 그는 아마도 길브레스의 책에서 본 것으로 보이는 조명과 사진을 이용한 동작관리의 기술과 영화를 이용한 교육?훈련 방법을 언급하고 있다. 즉 그가 말하는 테일러주의는 테일러의 발상에 기초한 노동의 통제 기술 전반을 지시하는 포괄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테일러주의는, 그 고안자들이 알지도 못했고 바라지도 않았지만,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적 생산을 장악하고 자신의 노동자 위원회로 하여금 모든 사회적 노동을 적절하게 분배하고 합리화하도록 하는 그런 시기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대규모 생산, 기계, 철도, 전화--이 모두는 조직된 노동자의 작업시간을 3/4로 줄이고 그들이 오늘날 하는 것보다 4배는 더 낫게 해 줄 수 많은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그리고 노동조합에 의해 지지되는 노동자 위원회는, 노동이 자본에 의한 노예화에서 벗어나는 그 때, 사회적 노동을 합리적으로 분배하는 이 원리들을 적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같은 책, 154.

테일러주의는 ?제국주의론?을 쓰면서도 지속적인 관심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거기서 그는 독점자본주의 시대에 사회주의를 예비하는 이행적 형태로서 테일러와 기술적 합리화를 이해하는 한편, 테일러 체계 안에서 지휘와 실행의 새로운 분할을 노동귀족에 대한 관심사 속에서 포착하려 한다. 그는 ?제국주의론?을 위한 자신의 노트에 테일러주의에 대한 조이베르트(Seubert)의 책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것을 노동귀족의 발전과 연결시킨다.

반면 길브레스 책(?국민적 부의 증가 관점에서 본 운동의 연구?, 1915)에 대한 코멘트에서는 공장과 학교가 근접하게 되었음을 지적하면서, 테일러주의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첫째, 육체노동을 측정가능하고 자본에 의해 통제가능한 형태로 규범화’(normaliser)했다. 둘째, 사회주의를 향한 중요한 진전으로서, 육체노동을 표준화’(standardisation)했다. 셋째, 노동생산성이 급격히 증가했다(R. Linhart, Lenine, les paysans, Taylor, Seuil, 1976, 87-92쪽 참조). 물론 이런 특성은 레닌이 보기에 사회주의를 위해 긍정적이고 진보적인 것이었다.

 

 

혁명 이후 테일러주의의 문제는 단지 공장에서 노동의 조직화만이 아니라 전국적인 수준에서 규율과 통제를 확립해야 한다는 과제 속에서 다시 제기된다. 레닌은 혁명 직후 씌여진 ?소비에트 정부의 당면 과제?에 대한 소책자에서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로 전국적인 행정의 조직화라는 과제를 제시한다.“The Immediate Tasks of the Soviet Government," Collected Works, vol.29, 242.

전국적 수준의 계산(회계)과 통제의 조직, 노동생산성의 향상이 과제인 것이고, 이에 대해 부르주아 전문가들의 수동적 저항과 사보타쥬를 분쇄하는 한편, 노동자들은 화폐의 정확하고 정직한 계산, 경제적 경영, 게으름과 절도의 추방, 엄격한 노동규율의 준수와 같은 문제를 즉각적인 슬로건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같은 책, 243-251쪽에서 요약.

이를 위해 노동자들의 직접적인 참여와 노동규율의 준수와 복종이라는, 매우 상반된 두 가지 요구를 제시하고 있다.리나르는 이를 경제적 민주주의기술적 독재라는 말로 대비시킨다. 그의 지적처럼 레닌의 ?소비에트 정부의 당면 과제?라는 텍스트는 이런 상반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R. Linhart, 앞의 책, 106-108).

그리고 후자와 연관해 테일러주의의 적극적 이용을 주창하고 있다.

 

좀더 계급의식화된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는 이미 노동규율을 고양시키는 과제를 스스로 제기해 왔다...이러한 작업은 지지되어야 하며, 최대한의 속도로 추진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과급의 문제를 제기하고 적용하며 실천 속에서 검토해야 한다. 우리는 테일러 체계에서 과학적이고 진보적인 많은 것을 적용하는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우리는 러시아에서 테일러 체계에 대한 연구와 가르침을 조직해야 하며, 그것을 체계적으로 수행하고 우리의 목적에 맞도록 변형시켜야 한다.”"The Immediate Tasks of the Soviet Government," 258-259.

 

 

물론 이에 대한 부분적인 반대와 비판이 있었지만, 끝이 불투명한 내전과 경제적 사정의 악화, 통제불가능한 상태로 나아가는 무정부주의적 공장위원회들 등으로 인해 이러한 제안은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무정부주의를 종식시키려는 의도와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생산을 회복시키려는 열망, 그리고 노동 규율을 확립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강조는 점차 더 가혹한 강제수단을 채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M. Liebman, Leninism under Lenin, 안택원 역, ?레닌주의 연구?, 미래사, 1985, 358. 리브만에 따르면, 이후 서구에서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복종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하던 근무일지노동수첩이 이제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다시 등장하였고, 노동규율을 어긴 자를 처벌하기 위한 법정이 열렸다. 공장을 떠난 노동자들은 직무유기로 처벌받았고, 노동수용소에 억류되었다고 한다(같은 책, 359-360).

여기서 레닌은 강철같은 규율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연적인 특성이며, 심지어 프롤레타리아들은 규율을 추구하고 질서를 갈망한다고까지 생각했다.V. I. Lenin, "Session of the All-Russia C. E. C, April 29, 1918," Collected Works, vol. 27, 313.

 

더불어 테일러 체계의 연구와 도입 역시 마찬가지로 받아들여지게 되는데, 이는 신경제정책(NEP)의 도입과 더불어 본격화된다. 금속노조의 가스테프(A. Gastev) 등은 산업노동강령을 작성, 제출하였고, 또한 이들의 주창으로 19184월까지 엄격한 노동규율, 생산표준, 성과급과 상여금 등의 도입이 채택되었다.Steve Smith, "Taylorism Rules OK?: Bolshevism, Taylorism and the Technical Intelligentsia in the Soviet Union, 1917-1941,“ Radical Science Journal, 1983, No.13. 13-15.

이를 둘러싼 논란은 19185월에 개최된 제1차 경제협의회에서 재개되었는데, 예를 들어 로조프스키(Rosovsky)는 상여금을 통한 고소득 노동자의 창출이 노동자 내부에 일종의 금권정치를 만들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가스테프는 테일러주의에 대한 반대는 기계에 반대하는 투쟁’(기계파괴운동)과 다를 바 없다고 반박하지만, 그 문제에 대한 공식적인 결의안이 채택되지는 않았다.

내전기간 동안에도 노동운동 내부에서는 테일러주의를 둘러싼 논쟁이 지속되는데, 테일러주의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지지자는 엔지니어층이었다. 테일러주의는 과학적 단위로 조직된 기업을 근간으로 하기에 보다 높은 차원의 집단주의를 전제하며, 프롤레타리아 정부의 존재는 테일러주의의 성과를 노동시간의 감소로 귀착시킬 것이기에 노동자들의 건강에 유해하지 않면서 노동자경영이나 일인경영제 대신 전문가들의 지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1920년 과학적 노동조직(NOT)을 연구하고 대중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중앙노동연구원(CIL)이 창립되었다. 그 책임자 중 하나는, 이전에는 프롤레트쿨트(Proletkult)의 성원이었던, 그리고 소비에트 테일러주의의 지속적 주창자 가스테프였다.Ch. Bettelheim, Les Lutte de classe en URSS: 1923-1930, B. Pearce (tr), Class Struggle in the USSR: 1923-1930, MRP, 1978, 239.

그는 과학적 노동 조직은 테일러주의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사회주의에서 테일러주의가 갖는 착취적 기능을 전복할 수 있는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한 바 있다. 첫째, 노동자에 의한 테일러적 지식의 집합적 영유로서, 노동과학에 대한 대중적 확산이, 기술의 습득에서 적극적 역할을 하리라는 생각이다. 즉 테일러주의가 기술의 독점을 분쇄하고 대중이 그에 접근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리란 것이고, 이런 점에서 프롤레타리아적 테일러주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R. Linhart, 앞의 책, 112.

둘째, 테일러주의의 이용을 통해 노동시간을 단축시키고, 이로써 노동자의 정치활동을 발전시킬 수 있으리란 것이다.같은 책, 113-114.

 

이러한 관점의 연장선 상에서 가스테프는 소비에트 테일러주의는 이미 수립된 소비에트 권력에 의해 착취 기능이 제거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과학적 노동 조직(NOT)은 단지 기술적인 것이며, 그것의 관심사는 오직 생산성의 증대고, 나아가 그러한 합리적 생산체계는 오히려 사회주의 하에서만 그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한다. 이를 전제로 가스테프는 NOT정확하고 계산된 방식으로 노동을 조직하는 과정으로 정의한다. 그의 NOT 개념의 중심에는 하부 작업장에서의 합리적 노동조직과 작업방식의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노동자들의 부정확성과 게으름 등을 대상으로 한다. 이를 제거하기 위해 그는 테일러나 길브레스처럼 대장장이와 금속노동자의 작업동작을 연구함으로써 개인의 작업을 합리적으로 계산된 것으로 바꾸려 한다.Zenovia & Sochor, "Soviet Taylorism", Soviet Studies, XXXIII, 1981 No.2.

 

가스테프 NOT 개념의 요체는 소수의 정예 '숙련' 노동자를 양성함으로써 새로운 노동조직과 노동형태를 확산시키려는 것이었다.Bettelheim, 앞의 책, 240.

다른 한편 성과급과 상여금과 같은 물질적 유인책을 사용함으로써 작업의 개인적인 추동력을 만들어내는 방법도 적극 채택한다. 반면 작업장에서, 혹은 작업하는 생산자들 간에 회의나 토론은 불필요하며 행정적 명령으로 모든 것이 수행되고 검토된다. 즉 대중운동 방식으로는 과학적 노동조직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프롤레트쿨트의 일원이던 케르젠체프(Kerzhentsev)는 가스테프와 달리 테일러주의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으며, CIL이 모든 노동자들을 압박하는 수단을 고안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는 인민들의 생활방식이나 노동방식, 노동규율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대중운동적 접근방식을 제안하며, 노동 및 생활방식을 합리화하기 위해 합리적인 시간 이용의 기치 아래 시간동맹’(Time League) 운동을 전개한다.

케르젠체프는 NOT를 게으름이나 부정확성 같은 어떤 결함을 제거하는 문제라기보다는 새로운 노동의 습속과 생활 규범을 수립하는 문제로 본다. 따라서 그것은 단지 생산을 합리화하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전 사회적인 문제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그는 오히려 생산합리화에서 도출된 원리를 기업은 물론 학교, 국가기구, 군대 등에 이르기까지 확산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 과학적 노동조직이란 문화운동이요 문화혁명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그는 NOT를 대중운동으로서 사고하고 대중운동으로서 진행시킨 것이다.Zenovia & Sochor, 앞의 글 참조.

 

그에게 NOT는 코뮨주의 사회의 특징이자, 미래 사회의 싹을 담고 있는 요소며, 그것을 준비해가는 과정이다. 그것은 단지 기술적인 문제로 환원되지 않으며, 생산과 기술의 관점에서 노동을 통제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생산과 노동이 조화되도록 하는 것이다. 노동강화가 아니라 노동보호가 NOT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한편 물질적 유인책에 대해서도 거리를 두며, 그보다는 노동자들에 대한 규범적 자극과 호소가 중요하다고 보는 점에서도 가스테프와는 대비된다.

이러한 두 입장 가운데 결국은 가스테프의 CIL이 승리한다. 그것은 아마도 공업화를 급속히 추진해야 한다는 압력이, 특히 제15개년 계획의 수립과 진행과정에서 매우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합리화의 효과를 빠르게, 그리고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기술적 방법이,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고 안정적인 보장을 마련하기도 힘든 대중운동적 방식 보다는 훨씬 더 분명한 결과를 보장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Bettelheim, 앞의 책, 241.

다른 한편 케르젠체프의 시간동맹 조직은 당과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대중운동조직이고, 그로 인해 위로부터의 통제가 잘 먹히지 않으며, 자율성을 획득하려 하던 조직이었기에, 당이 이를 국가구조 안에 흡수함으로써 그 성격을 희석시킨 측면도 있었다.Kossler & Muchie, "American Dreams & Soviet Realities: Socialism & Taylorism", Capital & Class, 1983, No.40.

 

앞서 가스테프의 소비에트 테일러주의는, 그것이 자본의 이윤으로 직접 전환되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그 질적인 내용에서 자본주의적 테일러주의와 근본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그것은 효율성과 생산성, 과학성 등의 기치 아래 노동 조직을 효율적으로 통제가능한 형태로 바꾸었고, 또 그에 적절한 노동의 형태를 수립했으며, 이를 통해 근대적인 노동자의 신체를 만들어내려고 했다. 그는 두드리기, 누르기 등과 같은 부분동작들을 동작의 경로와 시간 경과를 축으로 정밀하게 조사했고, 개별적인 작업에서 관찰되는 신체의 동작과 신체의 작업리듬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였으며, 그것을 쉽게 해주는 작업대나 기계 등을 연구했다. 일서 그가 이끌던 CIL은 대부분은 농촌 출신인 미숙련 노동자를 2주일에서 3개월에 걸쳐 마련된 교육을 통해 훈련시켰다.H. Schneider et. al., Geschichte der Arbeit: vom alten Agypten bis zur Gegenwart, 한정숙 역, ?노동의 역사: 고대 이집트에서 현대 산업사회까지?, 한길사, 1982, 483-484.

 

그것은 작업을 단순한 요소 동작으로 분해하고, 이를 시간-관리, 동작-관리라는 기술을 이용해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것으로, 앞서 살펴본 근대적 노동의 체제를 사회주의 노동과정에 적극 도입한 것이며, 이로써 노동자의 신체에 작용하는 근대적 생체권력을 형성한 것이다.

예컨대 정해진 시간에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는 주어진 공간적 위치에서 주어진 동작을 반복해야 하는 작업을 결코 견뎌내지 못했던, 농촌에서 갓 올라온 수 많은 노동자들은, 근대적 노동의 체제에 익숙한 근대인으로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되었던 셈이다. 그것은 근대화라는, 당시 소련의 가장 중심적인 과제에 필요한 것이기도 했고, 적절하게 부합하는것이기도 했다. 더불어 물질적 유인책을 적극 활용하고, 성과급을 확장시킴으로써, 노동을 더욱더 가치로 포섭했다.“혁명 조기 이래로, 주로 레닌의 주장에 따라, 그리고 많은 노동조합주의자들의 편견에 반대하여 성과급을 도입한다는 원칙이--그러한 임금지불 형태가 어떤 조건에서 유리한가와 상관없이--전 산업에서 관철되었다...1931년 이후 성과급의 영역이 더욱 확대되어 1930년대 후반경까지는 전 노동자의 3/4에 달하는 인구가 이 체계의 변형된 제도에 따라 급료를 지불받았다.”(M. Dobb, Soviet Economic Development Since 1917, 임휘철 역, ?소련 경제사?, 형성사, 1989, 514-515). 여기에 산출이 어떤 비율을 넘으면 수입도 크게 오르는 누진성과급이 사용되기도 했다(같은 책, 516).

이 역시 노동에 대한 가치화되고 근대화된 태도를 갖게 하는데 유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1935년 이후 스타하노프(Stakhanov) 운동에서 유사하게 반복된다. 우크라이나의 이르미노 광산에서 시작된 이 운동의 원리는 채탄과 버팀목 설치를 분리함으로써 다른 동작으로 옮겨갈 필요성을 없애고, 채굴기와 기계를 이동하면서 계속하여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M. Dobb, 앞의 책, 520.

당시 중공업 위원회 위원이었던 오르조니키제(Orzhonikidze)는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것에는 낯선 것도, 당혹하게 하는 것도 전혀 없었다. 정확한 노동의 분할, 작업장의 정확한 조직, 기술적 과정의 정확한 배치--바로 거기에 스타하노프 운동의 비밀이 있었다.”같은 책, 519쪽에서 재인용.

돕은 이러한 방법을 이용한 개선의 사례를 인용하고 있다. 기관차 공장 대장공인 노실코프의 말: “전에 나는 고로에서 철봉을 직접 꺼내어 그것을 해머 아래 놓곤 했다. 지금은 내가 내내 해머를 들고 서 있고, 다른 사람이 철봉을 꺼내어 준다. 내가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닐 때는 해머의 이용이 비생산적이었다.”--작업의 분할과 공간적 고정. 신발 공장의 스메타닌: “일을 잘 하기 위해서는 기계를 잘 알아야 한다...나는 육체적 노고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리듬을 유지함으로서, 그리고 각각의 기계작동을 세밀히 연구함으로써 1,400켤레를 만들었다.--노동의 기계화. 섬유공장의 키리아노바: ”나는 불필요한 운동을 제거함으로써 우수한 결과에 도달했으며, 그것이 내 작업 비밀의 전부다.“--동작관리. 이상은 M. Dobb, 522-523쪽에서 재인용.

동시에 그것을 수행한 사람들은 노동에서 시간적 요소를 인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초까지도 계산하는 것을 배운, 문화와 기술적 지식을 지닌 사람들이었다.J. Stalin, "Adress on the First Congress of Stahanovist," M. Dobb, 앞의 책, 526쪽에서 재인용.

더불어 스타하노프 운동은 성과급와 상여금이라는 물질적 유인책을 명시적으로 동반하고 있었고, 그 결과 수 많은 스타하노프운동가들은 몇 개월 지나지 않아 그들 소득을 3배 내지 4배까지 증가시켰다.. Dobb, 앞의 책, 532.

이는 노동자들 사이에 소득격차를 매우 크게 벌여놓았고, 임금의 표준이 되는 작업 기준을 높임으로써 낮은 소득은 더욱 더 낮게 만들어 노동자 간에 갈등을 만들었다.

이처럼 가스테프 식의 소비에트 테일러주의나 스타하노프 운동은 테일러나 길브레스 등이 연구하고 추구했던 통제기술을, 유용성과 효율성이라는 동일한 기준 아래서 동일하게 연구하고 추구했으며, 국가의 지원 아래 대대적으로 확장해갔다. 그러한 통제기술은 스스로 명시적으로 밝히듯이 근대적 노동과 근대적 신체를 만들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했고, 결과는 그에 정확하게 부합했다. 하지만 그것이 야기하는 근대적 주체 효과는 전혀 주목되지 못했다. 물질적 유인으로 성과급을 매우 강한 형태로 지극히 폭넓은 영역에서 사용했던 것은 노동자 간의 갈등과 대립을 만들어냄으로써, 가치법칙이 상이한 집단의 분화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소비에트 테일러주의나 스타하노프 운동은 국가적 지원 아래 성공했고, 확산되었으며, 공식화되었지만, 그 결과 코뮨적인 성격의 새로운 주체를 형성했다는 징후나 계기는 전혀 보여주지 못했고, 정반대의 징후만을 보여주었다. 이는 아마도 사회주의 인민 없는 사회주의 사회라는 역설을 만들어냈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었을까?

여기서 무엇보다도 우선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우선 그러한 소비에트 테일러주의가 작동시키는 저 근대적인 노동의 체제와 성과급으로 대변되는 가치법칙에서는성과급에 대해, 앞서 인용한 레닌의 글에 붙인, 맑스-레닌주의 연구소의 편집자는 그것이 능력에 따라 일하고, 노동에 따라 분배받는사회주의 원칙에 충실한 것이라고 주를 달아두고 있다. 더불어 그런 성과급이 소련 전체에 매우 넓게 확산되었고 일반화되었다는 주석도 잊지 않고 있다(Collected Work, vol.27, 583).

코뮨주의로의 이행의 계기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사회주의가 이행기가 되기 위해 필수적인 그 이행의 계기가 어떤 식으로든 만들어지고 자라나지 않는다면, 이행은 불가능한 것이 되고, 이행기라는 규정은 공허한 것이 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케르젠체프의 시도는 어떤가? 앞서 말했듯이 케르젠체프에서 과학적 노동조직은 코뮨주의의 특징이며, 시간동맹 운동은 대중 스스로 자신의 주도로 코뮨주의의 싹을 만들어가는 문화혁명이고, 그것을 통해 미래에 속하는 생활양식과 노동의 습속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만큼 그것은 운동의 주도권을 가진 대중 자신을 새로운 형태의 주체로 만들어가는 운동이며, 시간적인 규율 등조차도 밖에서 주어지며 복종을 요구하는 규율이 아니라, 자신이 자발적으로 만들어가고 자기 스스로 통제하는 자기-규율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그것이 겨냥하는 초점은 단지 가스테프처럼 노동 생산성이나 효율성이 아니라 생산과 노동의 조화를 통한 노동의 보호였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방향성을 갖는다. 따라서 그것이 노동에 시간적 형식을 부여하고 노동의 효율성을 증가시키려고 할 때조차, 그것은 노동의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결과보다는 차라리 노동의 생산적인 능력의 향상을 도모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물질적 유인책이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방법이었음은 이런 점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이행의 계기가 되는 새로운 습속을 대중 스스로 형성해가려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은 성공을 가로 막는 이중의 장애에 부닥쳤던 것같다. 하나는 그러한 운동이, ‘과학적 노동조직이 전제하고 있는 테일러주의 자체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이다. NOT 자체는 앞서 본 것처럼 사회주의의 건설과 근대화를 위한 노동의 과학화 및 생산성 증가를 직접적인 목표로 하고 있었으며, 노동에 대한 통제와 효율성 등의 테일러적 목표로 하고 있었다. 케르젠체프는 이를 변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근본적으로 부정할 순 없었다. 그 결과 자신의 의도가 무엇이든 테일러주의를 대중운동에 의해 보급하고 추진한다는 딜레마에 빠지고 만다.

더불어 그는 물질적 유인책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사회적 제도로서 포괄적으로 시행되는 그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것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 내지 방어의 지대(地帶) 없이 그대로 방치한다면, 마치 자발적으로 시작한 사회주의적 경쟁이 물질적 유인책에 포섭되면서 자신의 소득을 올리기 위한 경쟁으로 변형되고, 그 결과 대중적 자발성이 소멸하거나 전이되었던 것처럼,Bettelheim, 앞의 책, 241-257.

가치관계에 의한 포섭과 전이는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다른 하나의 장애는 NOT 자체가 대중에 대한 효율적 통제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지만, 대중의 주도에 의한 대중운동이라는 방식은 그러한 목적에 부합하기 힘들었다는 점이다. 대중의 자발성은 종종 통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국가나 당의 공포를 유발한다.A. Negri, L'anomali sauvage, 윤수종 역, ?야만적 별종?, 푸른숲, 1997; E. Balibar, “Spinoza, the Anti-Owell: The Fear of the Mass," 김석민 편역, ?마키아벨리의 고독?, 새길, 1992 참조.

이러한 공포는 많은 경우 그것을 포섭하거나 분쇄하는 방식으로 개입한다. 국가나 당이 시간동맹 운동의 취지에 공감하면서도, 사실상은 결코 동의하고 지지하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공산당과 프롤레타리아트의 국가지만, 그 역시 이제는 행정을 확립하고 대중을 통치해야 하는 위상에 서 있는 한, 결코 택하기 쉬운 선택지는 아니었던 셈이다.

결국 이 이중의 장애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케르젠체프가 만들어내고자 시도했던 코뮨주의적 이행의 계기는 근대적 노동의 체제나 가치법칙(가치화) 내부에서 발생하지 않으며, 이행의 단서마저 그 내부에 머문다면 가치에 포섭되거나 파괴 내지 무력화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행의 계기는 그 근대적 노동의 체제나 가치법칙에 대해 외부적이라는 명제를 다시 반복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소비에트 테일러주의가 거기에 이행의 계기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그것을 발생시킬 계기로 내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면, 케르젠체프의 시간동맹 운동은 이행의 계기가 새로운 습속을 통한 새로운 주체의 생산이라는 지점에 있다는 것을, 그것이 근대적 노동에 대해 외부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양자가 적대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3.수보트닉스와 코뮨주의적 노동

 

소련에서 내전은 상당한 정도로 철도전쟁이었다. 즉 전쟁이 간선철도를 따라 발생했다. 이는 장거리로 군대, 병기, 군수물자를 이동하는데 철도가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수송 부담의 가중과, 수리의 곤란, 더불어 점령자의 수시 변경 등으로 인해 수송망의 해체와 물리적 파괴 현상이 나타났다.M. Dobb, 앞의 책, 119.

나아가 혁명 직후였던 1918년에는 철도 조직이 극단적으로 해체되기에 이른다. 이는 철도 노동자 조직인 전러시아 철도노동자 집행위원회(Vikjel)의 태업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공장위원회처럼 이 조직 역시 무정부주의 운동의 강력한 지지와 지도 아래 있었는데,M. Liebman, 앞의 책, 352-3.

이들은 무정부주의와 조합주의가 결합된 태도를 갖고 있었고, 이로 인해 각각의 역 독립적인 공화국이 되기에 이르렀다.R. Linhart, 앞의 책, 119. 여기서 우리는 노동에 새겨진 자본의 흔적을 매우 뚜렷한 형태로 발견하게 된다. 수 많은 공장위원회들이 보여준 이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는 그 자체로 페쇄적이며 스스로의 조합적 이익에 안주하려 한 셈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자본의 지배가 이루어지는 선들을 횡단하면서 새로운 생산적 접속의 시도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볼셰비키와 무정부주의 간의 정치적 대립을 생각한다고 해도, 열악한 물자 보급 상황와 내전이라는, 혁명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지극히 이기적인 것이었고, 사실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선분성 속에 갖힌 것이었다. 리브만은 이런 이유로 인해 로조프스키처럼 권력의 독점을 반대했던 노조지도자도 각 기업의 노동자들은 기업이 자기들의 소유물이라는 인식을 가져선 안된다고 비판했고, 리아자노프같은 비판적 민주주의자조차 공장위원회가 사회주의적 기반에 근거하여 경제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에서 벗어나 훼방을 놓고 있다고 비난했다고 말한다(M. Liebman, 앞의 책, 353). 정말로 광범위한 인간 변혁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도 새로운 사회를 위한 새로운 주체성의 생산과, 그것을 위한 새로운 생활양식과 활동방식이라는, 요컨대 새로운 주체생산양식이라는 주제와 다시 대면하게 된다.

이는 단지 군수 물자의 이동 뿐만 아니라 내전과 기근으로 인해 중요한 문제였던 물자 공급의 곤란을 훨씬 더 가중시켰다. 1918년 봄, 이런 상황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레닌은 우리는 철도 없이 전쟁을 치를 순 없다고 선언하게 된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볼셰비키는 자신을 지지하는 하부 철도노동자를 중심으로 새로운 경쟁적 조직인 빅제도르(Vikjedor)를 창설했으며, 인민위원회는 교통위원에게 철도에 관한 독재적 전권을 부여했다. 한편 철도노동자의 태업과 빈둥거림을 분쇄하고 통일적 지도로 노동과정 전체를 포섭하기 위해 효율적인 노동의 규범과 계산의 정착 및 보상금 도입 등이 시도된다.R. Linhart, 121. 리나르는 철도를 기능하게 하기 위한 이 전투에서 소비에트 테일러주의의 특질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다고 본다.

또한 의무적인 노동과 강제적인 규율이 강조된다.V. I. Lenin, "Left-wing Communism, An Infantile Disorder," Collected Works, vol.31.

 

다른 한편 19191, 기존 노동의 한계에 국한되지 않고 반대로 그것을 넘어섬으로써 수송의 재활성화를 이룰 수 있는 혁명적 노동을 호소하는 레닌의 제안에 부응하여, 그해 5월 모스크바와 카잔 구간의 철도에서 처음으로 수보트닉스(코뮨주의적 토요일)가 출현한다. 이는 매일 한 시간 씩을 절약하여 두었다가 토요일에 6시간의 추가노동을 임금 지불없이 하는 것으로, 이후 많은 지역으로 확산되어갔으며, 지역 간 노동자의 경쟁을 야기하기도 했다.1918517일의 <프라브다> 기사, V. I. Lenin, "A Great Beginning: Heroism of the Workers in the Rear, 'Communist Subbotniks'," Collected Works, vol.29, 412쪽에서 재인용.

 

이는 보급은 물론 노동조건이 매우 열악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노동자들의 열정과 팀 정신으로 인해 이전보다 250-300%를 상회하는 예상치 못했던 높은 생산성의 증가를 보여주었고, 작업은 기쁨으로 가득찬 채 이루어졌으며, 작업이 끝난 뒤에는 자연스럽게 <인터내셔널>이나 기쁨에 넘치는 노래를 불렀다고 전한다. 레닌은 이러한 기사를 7쪽에 걸쳐 매우 소상하게 인용하면서 이 새로운 노동의 형태에 대해 분석하는 소책자를V. I. Lenin, "A Great Beginning," 앞의 책.

시작하고 있다.

이 책자에서 그는 혁명의 승리를 위해, 그리고 사회주의를 공고히 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는 이중의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첫째,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에 반하는 혁명적 투쟁으로 노동 대중 및 피착취 인민을 획득해야 한다.같은 책, 423.

자본과 부르주아지에 대한 투쟁에서의 승리. 이는 파괴와 해체의 형태로 진행되는, 혁명의 부정적 과제다. “둘째 과제는 첫째 과제보다 더욱 어려운 것인데, 이는 그것이 단번의 영웅적 열화로 충족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작업에서 가장 지구적이고 가장 지속적이며 가장 어려운 대중의 영웅주의를 요구한다. 하지만 이것은 첫째 것보다 훨씬 본질적이다.”같은 책, 423.

 

말할 것도 없이 전자는 자본 혹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전복을 뜻하는 것이다. 반면 후자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작업/노동에서 낡은 노동의 방식, 활동방식, 생활방식을 전복하고 변환시키는 지구적이고 곤란한 투쟁을 요구한다. 수보트닉스는 이러한 과제의 단서를 사고할 계기를 제공했다.

이는 앞서 우리가 제안한 개념으로 다시 표현하면 새로운 생산양식 및 주체생산양식의 형성이다. 새로운 혁명적 정신으로 새로운 철학적 혁명을 밀고 나가던 책에서 보았던 이중의 역사유물론,’ ‘이중의 혁명이라는 맑스의 주제를, 사회주의 혁명이 들끓으며 진행되던 와중에 진정 혁명적인 노동이 시작되던 지점에서 레닌은 다시 발견한 것이다.

 

노동자 대중 자신의 창발에 의해 조직된 코뮨주의적 토요일은 정말로 거대한 중요성을 갖는다. 분명히 그것은 출발일 뿐이지만, 실로 거대한 중요성을 지니는 출발이다. 그것은 부르주아지의 분쇄보다도 훨씬 어렵고 훨씬 생생하며 훨씬 근본적이고 훨씬 결정적인 혁명의 출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보수주의와 무규율, 소부르주아적 이기주의에 대한 승리요, 지긋지긋한 자본주의에 의해 노동자와 농민에게 유산처럼 남겨진 습관에 대한 승리기 때문이다.”같은 책, 411. 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일상적으로, 그리고 장기간 지속되어야 하는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두 번째 과제란 보다시피 근대인의 특징을 이루는 습관이요 습속과 싸우는 것이고 그것에 대해 승리하는 것이다. 이 낡은 습속은 바로 자본주의 아래서 대중들의 노동방식, 활동방식에 새겨진 채 남겨진 자본의 흔적이다. 개인화된 자신을 중심으로 행동하며 결코 가족의 경계를 넘지 않는 이기주의, 그리고 주어진 일을 주어진 요구와 명령에 의해 수행하는 보수적인 노동/행동의 습관......

이를 넘어서는 것은 오히려 자본주의적 관계를 혁파하는 것보다도 어렵고 끈질기며 근본적이고 결정적이다. 그것은 코뮨주의를 향한 혁명의 출발이고, 긍정적 건설이다. “위대한 출발.” 이제 혁명은 부정이 아니라 긍정이다. “오로지 이러한 승리가 공고화될 때만 새로운 사회적 규율, 사회주의적 규율은 창조될 수 있으며, 그리하여 자본주의로의 회귀는 불가능하게 될 것이며 코뮨주의가 진정 굴복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같은 책, 411-412. 이탤릭은 레닌의 강조고, 고딕은 인용자의 강조다.

 

이 새로운 규율, 사회주의적 규율--정확하게는 코뮨주의적 규율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지금까지 레닌이 강조해 온, 프롤레타리아가 일상적으로 익숙해져 있는 공장에서의 규율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명령과 의무에 의해 움직이는 낡은 노동과 무관하며, 그러한 낡은 활동의 습속을 만들고 유지하는 규율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어떠한 보상이나 대가가 예견되지 않아도 공동의 좋음을 위해 움직이는 노동의 방식을 창출하고, 그것을 통해 서로가 하나의 코뮨적 연대를 확보할 수 있는 활동의 규율이다. 자본의 구속에서 벗어나고 가치법칙의 굴레를 벗어 던진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인 연합.’

레닌은 수보트닉스의 노동에서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인 연합의 기초를 발견한다. 그것은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전체 근로 인민의 이익을 위해 보수없이 노동하는 것이다.같은 책, 431.

여기서 그는 코뮨주의적 노동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얻는다.

 

협의의 엄격한 의미에서 코뮨주의적 노동은 사회의 이익을 위한 무보수 노동이고, 정해진 의무에 의한 노동이 아니라 특정한 생산물을 얻기 위한 노동이며, 사전에 만들어지고 법적으로 고정된 할당량에 따른 노동이 아니라 그런 할당량에 무관한 자발적 노동이다. 그것은 보상을 예견하지 않으며 보상을 조건으로 하지 않고 수행되는 노동이다. 이제 노동이 행해지는 것은 공동의 좋음(common good)을 위해 작업하는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고, 공동의 좋음을 위해 일할 필요성을 의식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이것이 습관이 된다).”V. I. Lenin, “From Destruction of the Old Social System to the Creation of the New," Collected Works, vol.30, 517. 강조는 인용자.

 

 

수보트닉스의 사례를 통해 추출된 코뮨주의적 노동 개념에 대해 세 가지 방향에서 다시 서술할 수 있다. 첫째로, 수보트닉스는 이러한 코뮨주의적 노동이 갖는 고유한 힘이 자발성에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었다.

레닌도 강조하듯이 코뮨주의적 수보트닉스는 그들이 어떤 특별히 좋은 조건에 있는 노동자에 의한 것이 결코 아니었으며, 다양한 전문가 만큼이나, 전혀 숙련되어 있지 못한, 통상적인, 즉 극도로 열악한 조건에 처해 있는 노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으로 인해 더욱더 중요하다.”V. I. Lenin, "A Great Beginning," 앞의 책, 426.

앞서 말했듯이 당시의 사정은 (스타하노프 운동처럼) 훌륭한 모델을 만들기 위해 좋은 노동조건을 마련해줄 상황이 아니었고, 실제로 레닌이 인용하는 신문에 따르면, 작업은 작업수단이 매우 황폐한 상황에서 시작되었고, 준비도 조직도 부족했으며, 이로 인해 어떤 작업 팀은 30-40분을 일하지 못하고 멈출 수밖에 없는 경우가 흔했으며, 매우 주먹구구 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이에 대해서는 같은 책, 414-416쪽에 인용된 신문을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성과는 매우 좋아서, 모스크바-카잔 철도에서 수보트닉스 노동은 통상적인 노동생산성의 270%를 달성했고, 그 뒤 다른 곳에서도 널리 행해지면서 평균 생산성은 통상 노동생산성의 200-300% 정도 였다고 한다. 신문은 이전의 통상적 작업으로는 옮기지 못했던 보일러를 이 비조직적작업을 통해 성공적으로 옮겨놓은 사례를 전해준다.

결국 이러한 노동의 생산성은 시간이나 공간, ‘기계등을 통한 노동의 합리화와는 전혀 다른 지점에서 발생한 것이다(노동의 기계화는커녕 작업에 필요한 기계도 부족했고, 공간의 분할이나 시간적 통제도 거의 없었다). 그것은 대중 자신의 열정에 가득찬 자발성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수보트닉스의 노동은 근대적 노동의 체제 외부에 있는 어떤 힘을 보여준 것이며,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노동의 잠재성을 보여준 것이다.

둘째로, 그것은 양화된 어떤 의무나 가치로부터 벗어나 그 질적인 성격을 회복한 노동이고, 그런 만큼 자신의 의지와 욕망에 의해 다양하게 방향지워지는 노동이다. 나아가 사회의 이익, 공동의 좋음을 위해 자발적으로 수행하는 노동이란 점에서 코뮨적인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노동이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를 코뮨적인 주체로 만들어가는 노동이다. 이러한 노동이 낡은 노동의 습속을 대체하는 새로운 습속이 된다.--새로운 노동방식, 새로운 삶의 방식의 생성.이는 레닌으로 하여금 당의 정화’(purge)라는 문제를 다시 사고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공산주의적 토요일이라는 위대한 출발은 또 다른 목적을 위하여, 즉 당의 정화를 위해 이용되어야 한다...그것이 없다면 어떠한 혁명도 없으며, 어떠한 혁명도 있을 수 없다. 요체는 지배하는 당은, [수보트닉스의 공산주의적 노동자와 같은] 건강하고 강력한 선진 계급에 의해 그 대열을 정화할 수 있어야 한다.”(같은 책, 432)

이러한 정화는 당 자체를 수보트닉스와 같은 공산주의적 주체생산방식이 일상적으로 작동하는 장으로, 그리하여 활동 그 자체를 통해 끊임없이 공산주의적 정화가 이루어지는 주체생산의 장으로 변환시켜야 함을 뜻한다. 반면 이는 실제로 많은 경우 신원(출신성분)으로 계급성을 환원하는 일종의 경제주의로 대체되었고, 이는 또한 대개 혁신적인 시도를 낡은(자본의 흔적으로 가득찬!) 노동자의 이름으로 가로 막는 것이었다. 또한 그것이 조잡한 인민주의 내지 노동자주의의 형태를 빌어, 지도자의 목적과 판단에 따라 당원들을 제거하는 정치적 숙청이었다는 점은 굳이 덧붙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와 연관해 레닌은 코뮨이라는 말의 통상적인 용법에서 그 말을 구해낼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것은 진정한 코뮨주의적 발전을 향한 지속적이고 끊임없는 노력과 실천적 성취에 의해 획득되어야 하는 더 없이 명예로운 이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코뮨이라는 이름을 진정 코뮨주의적인 방식으로 작업을 조직하는 경우에 한정해서 사용하자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의 이익을 위해, 노동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보상 없이 일할 수 있는지, 혁명적 방식으로 작업할 수 있는지 등을 조건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같은 책, 431.

요컨대 코뮨은 코뮨주의에 의해 정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사회주의 정부의 수반으로서, 실제로 그런 호칭의 이용을 제한하는 문제에 대한 언급이어서, 맥락의 변용 없이 그대로 이용할 수는 없는 말이다. 하지만 맑스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자신의 문제의식을 추동했던 출발점을 상기한다면, 그리고 파리 코뮨의 실패에서도 열광적으로 배우려 한 것이 있다면, 그리고 1905년의 러시아 혁명이 다수의 맑스주의자들을 감동시킨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대중의 자발적인 행동과 투쟁에 의해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 연합으로서 코뮨적 공동체를 건설했다는 사실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가치법칙에 대해 투쟁 내지 방어하면서, 대중 자신의 자발적인 힘으로 새로운 노동방식과 새로운 규율을 창조해가고, 그를 통해 스스로를 새로운 형태의 주체로 생산해가는 이러한 운동을, 레닌처럼 코뮨이라는 말을 강한 의미로 사용해서 코뮨주의라고 다시 불러도 좋지 않을까? 노동에 새겨진 자본의 흔적에 대해, 자신의 신체에 새겨진 낡은 습속에 대해 투쟁하면서, 스스로를 새로운 주체로 생산해가는 이 운동을, 자본의 지배를 전복하려는 투쟁과 구별해 코뮨주의라는 별도의 이름을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새로운 주체생산양식으로서 코뮨주의.

셋째로, 수보트닉스나 그로부터 끌어낸 레닌의 정의는 코뮨주의적 노동이 가치법칙에 대해 외부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반복하자면, 그것은 개인적인 보상을 조건으로 하는 노동이 아니며, 사회적으로 배분된 할당량에 무관한 노동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적인 가치법칙은 물론 사회주의에서 가치법칙에서 벗어난 노동이다. 그것은 가치법칙에 따른 노동이 아니며, 반대로 가치법칙의 외부에 있는 노동이고, 가치법칙에 반하는 노동이다. 바로 이것이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의 계기다.--다시 추가하자면, 이 이행의 계기는 가치법칙에 대해 외부적이다. 따라서 그 이행의 계기는 가치법칙의 외부에서, 가치법칙과 독립적으로, 아니 가치법칙에 반하여 만들어져야 한다.

하지만 레닌은 이전에 자신이 갖고 있던 규율이나 이행의 관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이러한 노동의 정의를 다시 자본주의로부터 성장하는 것, 자본주의에 내부적인 것으로 환원하고 있다.

 

사회주의를 향한 첫걸음인 사회적 노동의 코뮨주의적 조직은 지주와 자본가의 속박을 벗어던진 근로 인민 자신의 자유롭고 의식적인 규율에 의거하며,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그렇게 될 것이다. 이 새로운 규율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으며, 경건한 소망에서 탄생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대규모 자본주의적 생산이라는 물질적 조건에서, 오직 그것으로부터만 성장한다.”같은 책, 420.

 

 

코뮨주의적 노동 내지 그에 상응하는 규율이 성립하는데 대규모 생산이 필요하다는 말을 받아들이는 경우에도, 그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이란 조건에서만 성장하리란 테제는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코뮨주의적 노동은 가치법칙에 대해 외부적이고, 가치법칙에서 연원하지 않으며, 종종 그것과의 길항관계 속에서 그것을 침범하기도 하고 그것에 의해 침윤당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회에 필요한 새로운 규율과 노동의 습속, 그것은 가치법칙에서 벗어난 새로운 방식의 활동과 조직을 형성함으로써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전체 사회를 위한무보수 노동이라는 레닌의 코뮨주의적 노동의 정의가 갖는 약간 미묘한문제를 짚고 넘어 가자. 그것은 생산과 노동의 직접적 통일이라는 맑스가 제시한 코뮨주의의 조건과 달리 전체 사회라는 매개를 통해 정의되고 있다. 여기서 흔히 그러하듯이 전체 사회가 강조되는 경우, 이는 자기-생산, 자기-조직을 통해 가치법칙을 통해 작용하는 자본주의적 영역을 침범하고 해체하는 문제, 혹은 자기-노동과 자기-규율을 통해 새로운 주체를 생산해가는 문제라기보다는, 자본주의와 대비되는 전체 사회로서 코뮨주의의 이미지를 상정하고, 가치화되지 않은 노동이나 활동을 전체 사회의 이익이란 관점에서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이 가치법칙과 공존하면서, 아니 그것을 침범하고 해체하지 않으면서 그것에 대해 승리할 수 있을까? 아마도 반대로 가치법칙과 공존하면서 가치법칙의 침투에 대해 무력하게 패배할 위험이 훨씬 더 큰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이 가치법칙에 대해 이행의 계기를 확보할 수 있을까? 반대로 자기-생산, 자기-관리, 자기-노동 및 자기-증식이라는 원칙에 의해, 다시 말해 직접적인 생산과 노동의 장에 의해 코뮨주의적 영역이 설정될 수 있을 때, 그리하여 가치법칙과 투쟁하고 그것을 능가하는 생산과 활동의 장을 확보할 수 있을 때 코뮨주의적 노동은 가치법칙을 침범하고 그것을 가로지르면서 그것에 대해 승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바로 이처럼 코뮨주의적 노동이 직접성을 통해 정의될 때 자본주의 안에서조차 그것은 이행의 계기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4.코뮨주의와 이행

 

앞서 본 것처럼 코뮨주의적 노동이란 대중 자신의 자발성에 의해서 행해지며, 그런 만큼 그것은 로자가 이미 말했듯이 대중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의식적이고 필연적인힘과 능력에 기초한다. 그것은, 무의식적인 그 능력의 나타남을, 현재적인 질서의 홈을 통해서 유인할 수 있는 한에서만, 자발적인 그 힘을 현존하는 질서의 망으로 포섭할 수 있는 한에서만 수용할 수 있는 현재적 질서와 언제나 부딪치고 충돌한다. 그것을 돌파하지 못할 때, 그것은 그 질서의 일부로 흡수되거나 아니면 그 힘을 잃고 좌절되며 무력화된다. 마치 시간동맹 운동이 소비에트 테일러주의의 틀 안에서 그것을 돌파하지 못하고 무력화되고 좌절되듯이. 하지만 그 무의식적인 힘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때로는 터지듯이, 때로는 은근 슬쩍 난데없이 출현한다. 파리 코뮨이 그랬고, 1905년 혁명이 그랬으며, 또한 소비에트라는 조직이 그랬고, 수보트닉스가 그랬듯이. 그리고 우리의 주변에서도 종종 발견되는 코뮨적인 관계들이 그렇듯이.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떤 체제(regime)나 어떤 질서도 그러한 자발성을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며, 그것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자신의 질서에 따라 거세하고 재배열한다. 그것은 자본주의는 물론 사회주의 체제 역시 마찬가지였고, 이후 탄생할 지도 모를 어떤 체제도 근본적으로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그 경우에도 대중의 자발성이라는 힘과 능력은 또 다시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져나올 것이며, 그로써 기존의 체제화된 질서에 변용을 가하며 재배열하는 계기를 만들 것이다. 그리고 또 그 재배열된 체제는... 이 무한히 반복되는 힘 간의 이 내재적인 변용과 운동을 니체는 영원회귀라고 불렀다. 자발성은, 자발성으로서 코뮨주의적 노동은 이 무한한 변용을 야기하는 능동적인(active) 힘이다. 맑스는 이를 역사의 동력이라고 불렀다.

다음으로 코뮨주의적 노동은 가치화된 노동에 대한 거부고, 가치화하려는 자본의 계열에서 벗어난 노동이다. 그것은 가치화의 계열 안에 생산 자체를 포섭하려는 힘에 대한 거부요, 가치화를 통해 노동의 의지 자체를 가치화하려는 자본의 의지에 대한 거부다. 네그리(A. Negri)가 말하는 노동 거부A. Negri, Marx au-dela de Marx, 윤수종 역, ?맑스를 넘어선 맑스?, 새길, 1994; A. Negri/ M. Hardt, Labour of Dionysus: A Critique of the State-Form, 이원영 역, ?디오니소스의 노동?, 갈무리, 1996; S. Bologna et. al., 이원영 편역, ?이딸리아 자율주의 정치철학?, 갈무리, 1997 참조.

이처럼 가치화된 노동의 거부며, ‘노동에서 해방된 노동A. Negri, ?맑스를 넘어선 맑스?, 291.

가치화된 노동에서 해방된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힘으로서 노동이다. “코뮨주의 혁명은 지금까지의 활동 방식에 반대하며, 노동을 제거하고 모든 계급들의 지배를 계급들 자체와 함께 지양한다.”K. Marx, Die Deutsche Ideologie, 최인호 외 역,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 박종철 출판사, 1990, 219.

이런 점에서 이는 가치화하려는 의지에 대한 부정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사실은 반대다. 노동이 가치화된 것은 맑스가 훌륭하게 보여주었듯이, 역사적으로 특정한 조건 아래서며, 노동이라는 생산적인 능력으로부터, 그것이 실현되기 위한 조건을 탈취함으로써 가능해졌고, 그 자체로 존재하는 노동의 생산적 능력을 거세하고 무력화시킴으로써 가능해졌다. 여기서 힘을 무력화하는 방식으로 방향짓는 의지, 니체의 정의 그대로 부정적인 권력의지이러한 부정의 권력의지는 힘을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끊임없이 분리시킨다. 그러한 권력의지는 끊임없이 차이를 생산하고자 하는 그 내용을 힘에서 박탈한다.”(고병권, ?니체 사상의 정치사회학적 함의에 관한 연구?, 서울대 사회학과 석사학위논문, 1997, 82) “모든 차이들을 소멸시키고 생성의 능력을 박탈하고자 하는 부정의 권력의지와 그것에 계속해서 균열을 내고 끊임없이 새로운 차이, 새로운 생성을 만들어내는 긍정의 권력의지의 대비.”(같은 책, 83); G. Deleuze, Nietzsche et la philosophie, 신범순/ 조용복 역, ?니체, 철학의 주사위?, 인간사랑, 1993, 95-99쪽 참조.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가치화에 대한 거부는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자본의 권력, 자본의 의지에 대한 거부다. 그것은 긍정적인 의지가 새로운 생성의 지대를 형성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취하는 부정의 형식이다. 이런 점에서 코뮨주의는 부정자로서 프롤레타리아트를 포함한다. 마치 긍정자로서 디오니소스가 부정자로서 짜라투스투라를 자기 아래 두듯이.“짜라투스투라의 첫권은 [부정자로 나타나는] 사자로 펼쳐지며, 마지막 권은 사자로 끝난다. 그러나 이 사자는 정확히 창조적이고 긍정적으로 되는 성스런 긍정이며, 이것은 오직 긍정을 말하는 법을 아는 부정이다...짜라투스투라는 변이가 영원회귀에 관계되듯이 디오니소스와 복잡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어떤 면에서 짜라투스투라는 영원회귀의 원인이며 초인이 아버지다. 죽기를 원하는 인간, 극복되기를 원하는 인간은 초인의 조상이자 아버지다. 모든 알려진 가치들의 파괴자, 성스러운 부정의 사자는 그의 최종적 변용을 준비한다. 그것은 [절대적 긍정으로서] 아이가 되는 것이다.”((G. Deleuze, ?니체, 철학의 주사위?, 319)

 

가치화를 벗어난, 혹은 가치화를 부정하고 거부하는 노동, 그것은 가치화의 계열 외부에서 발생하며, 가치화의 계열들 외부에, 그와 상반되는 성격의 계열들을 생성시킨다. 이행이란 대립되는 이 두 종류의 상이한 계열들이 경쟁하고 교차하며 부딪치는 과정이다.

나아가 코뮨주의적 노동은 (교환)가치라는 양적 계열에서 벗어나 사용가치라는 질적 성격을 회복한 노동이고, 의무나 강제로부터 벗어나 자기가 하고자 하는 바를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하는 노동이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자신의 욕망에 의한 노동이고, 따라서 욕망의 풍부한 세계를 형성하는 노동이다.같은 책, 286.

그것은 더 이상 자본의 욕망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활동에 대한 욕망이고, 자본으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인정 욕망J. Lacan, "Subversion du sujet et la dialectique du desir dans l'inconscient freudienne," A. Sheridan (ed./tr.), Ecrits: A Selection, W. W. Norton, 1977.

아니라 스스로 창조하고 생성하는 것으로 충분한 자기-욕망이다. 코뮨주의는 욕망과 생산의 통일이다.그것은 벗어날 수 없는 배타적 영역에 매이지 않는것이고, ‘활동이 자유의지[욕망!]에 의해 분할되는것이며, 그리하여 자신이 원하는[욕망하는] 분야에서 자신을 [욕망과 생산의 새로운 주체로] 도양할 수 있는 사회를 형성하는 것이다(K. Marx, Die Deutsche Ideologie, 앞의 책, 214). 이를 맑스는 좀더 환상적인 상상의 형식으로 서술했다. “내가 하고 싶은 그대로 오늘은 이 일, 내일은 저일을 하는 것,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치며 저녁 식사 후에는 비판하면서도 사냥꾼으로도 어부로도 목동으로도 비판가로도 되지 않는 일이 가능하게되는 사회(같은 책, 214).

 

그것은 더 이상 자본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지 않으며, 규범화된 감시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자신의 시선으로, 즉 자신이 형성하는 코뮨의 시선으로 자신을 본다. 따라서 그것은 자기-결정을 특징으로 하며, 자기-규율이라는 새로운 규율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노동이고, 자기 스스로를 새로운 관계의 주체로 생산해가는 활동이다. 이런 점에서 코뮨주의적 노동은 새로운 주체성의 생산과 직접적으로 결부되어 있으며, “코뮨주의는 주체성의 형태로 나타난다.”A. Negri, ?맑스를 넘어선 맑스?, 295.

다시 말하면, “현 사회의 개별 조건들에 반대해서만이 아니라 현재의 생활 생산자체, 즉 기존의 사회가 기초하고 있는 전체활동에 반대하여 혁명을 일으키는 혁명적 대중의 형성이 현존하지 않는다면 혁명의 이념이 수백 번 외쳐지든 말든 그것은...실제적인 발전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K. Marx, Die deutsche Ideologie, 앞의 책, 221.

 

그렇지만 지금까지 본 것처럼 이러한 코뮨주의적 노동 내지 그것을 통해 정의되는 코뮨주의는, 사회주의가 가치법칙을 일반화하며 그것을 전 사회적으로 확장하는 한, 사회주의에 대해 외부적이다. 즉 사회주의가 가치법칙을 내적인 법칙으로 하는 한, 코뮨주의는 사회주의에 대해 외부적이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또한 갓 태어난 코뮨주의 사회, ‘코뮨주의의 제1단계인 한, 다시 말해 코뮨주의로 이행기인 한, 이행의 계기로서 코뮨주의를 포함하며, 포함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코뮨주의는 사회주의에 내재적이며 필수적인 계기다. 따라서 코뮨주의는 사회주의에 대해 내재적인 외부다.

사회주의가 코뮨주의의 한 단계라면, 그래서 그것을 내재적인 계기로 포함해야 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이행 운동의 독자성을 인정하고 수용하며, 그것이 잘 자랄 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 주어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코뮨주의의 외부성은, 그것이 사회주의의 내부적인 법칙이나 논리를 따라서 발생하지 않으며, 나아가 사회주의가 발전할수록 발전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반대로 그것은 사회주의의 발전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그것이 발생하고 형성되는 지대가 점점 축소하고 만다는 것을 뜻한다. 코뮨주의적 노동과 코뮨주의적 운동, 그것은 사회주의에서도 마찬가지로 체제화된 권력의 수로를 범람하고 횡단하면서 이행의 계기를 확보하고 확장하는 운동이다. 사회주의 체제의 뜻하지 않은 곳에서, 예상치 못한 시간에 갑자기 발생하는 이행 운동, 그래서 많은 경우 사회주의적 권력에 의해 질서의 이름으로 비난받고 핍박받을 수도 있는 이행운동, 그것 없이는 이행은 불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제 자본주의의 이율배반과 경계에 대한 앞서의 논의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잉여가치는 가치의 공리계로 환원되지 않는, 그러나 그것이 필수적으로 요구한다는 점에서 가치의 공리계에 내재적인 외부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리고 잉여가치의 외부성이란, 가치의 공리계 혹은 가치법칙으로 환원되지 않는 외부로서 계급투쟁이라는 영역이 자본주의에 처음부터 내재함을 뜻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계급투쟁은 자본주의의 내재하는 외부며, 자본주의의 경계란 그처럼 내재적인 외부를 통해서 구획되는 내적 경계임을 밝힌 바 있다. 알다시피 그 외부로서 계급투쟁이란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관계,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의 계기기도 하다. 계급투쟁이 코뮨주의의 형태를 취할 때, 그것은 이제 이행의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 역시 코뮨주의라는 이행의 계기를 내재하는 외부로서 자신 안에 포함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이율배반이라는 내적인 경계--내재하는 외부--를 통해 포착함으로써,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이행의 문제를 다시 사고함으로써, 그리하여 외적 경계의 개념과 결부된 이행기의 관념을 벗어남으로써, 우리는 코뮨적인 공동체를 형성하는 새로운 노동방식과 생활방식을, 동시에 코뮨적인 주체를 생산하는 새로운 주체생산양식을 다시 사유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이행의 문제를 이행기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에 대해 다시 질문할 수 있다: ‘이행의 문제는 이행기의 문제와 과연 동일한 문제인가?

사회주의가 레닌 말처럼 가치법칙이나 가치에 따른 생산과 계산(회계)’, 그리고 통제를 위한 공장의 규율을 그 중심적인 원리로 한다면, 그리하여 그에 외부적인 이행의 계기를 포함해야 한다면, 혹은 그 이행의 계기를 창출하기 위한 고유한 운동의 영역이 존재해야 한다면, 우리는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즉 자본주의 역시 가치법칙과 가치에 따른 생산과 계산(회계), 통제를 위한 규율을 그 중심적인 원리로 포함하고 있으며, 그에 대해 외부적인 이행의 계기를 자기 내부에 포함하고 있다고. 그리하여 계급투쟁을 그 이행의 계기로 전환시키는 고유한 운동의 영역이 존재해야 한다고. 따라서 이행기인 사회주의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서도 이행의 문제는 동형적인 양상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행의 문제는 자본주의와 코뮨주의 사이에 있는, 이행이 유독 문제가 되는 어떤 시기에만 특권적인 어떤 문제가 아니며, 그 특별한 시기와 결부되어 있는 어떤 문제가 아니라, 차라리 자본주의, 사회주의 모두에서 진행되어야 하는, 이행 운동 그 자체를 조직하는 문제다. 이를 자본주의와 코뮨주의 사이에 이행이 이루어지는 어떤 시기를 설정하는 문제로 보는 것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코뮨주의를 외적인 경계를 통해 구분하는 통념에 이행의 문제설정을 다시 가두는 것이다. “코뮨주의란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 현실이 이에 의하여 배열되는 하나의 이상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을 코뮨주의라고 부른다.”같은 책, 215.

 

더 이상 코뮨주의에 의해 이행을 정의해선 안된다. 반대로 이행에 의해, 이행운동 그 자체에 의해 코뮨주의를 정의해야 한다. 이럼으로써 우리는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코뮨주의, 그것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발전을 통해 도달하게 될 역사의 목적이나 종착지가 아니다. 그것은 또한 부재하는 이상향으로서 유토피아도 아니다. 혹은 과학이나 철학 등의 주변에서 미끄러지듯 형성되는 이데올로기도 아니다. 그것은 맑스 말대로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이행운동 그 자체, 가치법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것의 지배에 반하여, 그것과 투쟁하고 그것을 무시하며 그것을 침범하기도 하는 코뮨적인 운동에 의해 이루어지는 이행운동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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