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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 연합

by Frais Study 2020. 8. 16.

1)근대 비판의 문제설정: 
-맑스의 근대 철학 비판: 근대 철학의 근본적 지반 자체의 전복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정치경제학의 근대적 지반으로서 노동가치론의 비판과 전복
--이는 모두 근대 사회, 대개는 자본주의로 파악되는 근대 사회의 전복이라는 혁명적 의지와 지향성에서 연유하며, 동시에 그러한 혁명을 사유할 수 있는 문제설정을 정립하게 한다. 혁명의 철학, 혁명의 이론을 가능하게 하는 맑스의 철학혁명과 ‘경제학 혁명’은 이런 점에서 근대/자본주의를 전복하려는 혁명운동을 통해 생성된 것이다.

2)생산양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주체생산방식의 영역.
--역사유물론은 생산양식과 주체생산양식이라는 이중의 대상을 가지며, 동시에 혁명은 전복해야 할 이중의 대상을 갖는다.
-특히 맑스 자신이 공백으로 남겨둔 이론적 공간으로서 주체생산양식의 전복 내지 변환을 사유하는 것: 
기존의 지배적 형태의 맑스주의의 공백, 맑스주의를 떠날 수 없지만 머물 수도 없게 하는 저 공백 속으로 치고들어가는 것. 그리하여 맑스주의자로선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맑스주의의 역사를, 새로운 운동과 사유의 모태로 삼는 것, 그것을 통해 지배적인 형태의 맑스주의를, 아니 기존의 얼어붙은 맑스 자신을 불사르고 새로운 양상으로 변이시키는 것이 문제다.

3)자본주의의 이율배반
-가치론의 공리계에 대한 잉여가치 개념의 외부성: 자본주의의 이율배반
-->내재하는 경계로서 이율배반 혹은 적대: 자본에 새겨진 노동의 흔적(?자본?)과 노동에 새겨진 자본의 흔적

4)잉여가치의 외부성
-가치법칙에 대한 잉여가치의 외부성
-->잉여가치 생산의 외부성: 노동시간, 노동강도, 노동조직방식--내재하는 외부로서 계급투쟁
-->축적의 외부성: 과잉인구화함으로서 자본축적의 법칙--산노동의 비율을 축소시킴으로써만 작동하는 자본의 축적이라는 이율배반(이윤율의 저하 경향)
-자본(의 증식)에 대한 노동의 외부성!: 자본없는 노동의 가능성(노동의 자기가치화, 노동의 자기-생산)
-->자본축적의 역사적 경향(수탈자가 수탈당한다)
--자본에 새겨진 노동의 흔적

5)자본주의와 근대적 주체
-잉여가치의 외부성, 혹은 자본에 대한 노동의 외부성
-->노동을 가치화하기 위한 체제의 구성
i)감금과 강제, 근대적 규율; 시간, 공간, 기계를 통해 구성되는 근대적 노동의 체제; 그리하여 근대적 주체를 생산해내는 시선의 체제-->노동(자)의 근대화
ii)생산수단과 노동의 분리-->가치법칙에 의한 포획, 실업화 압력, 자본에 의한 초점화와 거리화 메카니즘-->노동(력)의 가치화, 노동(자)의 자본화.
--노동에 새겨진 자본의 흔적: 자본 내지 자본주의의 주체효과

6)이행의 문제
사회주의: 가치법칙은 이행의 계기를 포함하지 않는다. 가치법칙에 대한 이행의 계기의 외부성.
-->결국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의 주체효과/가치법칙에 대한 외부로서 자기-생산, 자기-가치화와 코뮨적 관계를 생성하는 것: “노동에서 해방된 노동, 자기결정으로서 자기-가치화”(네그리);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 연합(맑스) 내지 새로운 주체생산방식으로서 코뮨주의.
--이는 사회주의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서도 마찬가지.
--이행기의 문제가 아니라 이행의 문제: 이 때 공산주의는 역사의 목적지나 종착지가 아니라 이행운동 그 자체. 자본주의 내지 사회주의에 대한 ‘내재하는 외부’로서 공산주의

7)‘희망의 원리’와 공산주의
-‘공산주의’: 이행운동에서 유토피아로
eg)
i)12세기 이단운동의 주류로서 왈도 파; 그리스도 삶의 모방, 복음서 연구와 청빈한 생활. 세속적인 성직자들의 생활과 대비되는 소박하고 경건한 생활은 교회에 대한 위협이 되었고, 이에 교황은 허가없는 설교를 금지하지만 거절당하자 이단으로 정죄했다. 그러자 왈도 파는 사제에 의한 성사가 없어도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cf.알비주아 파; 물질과 육신의 철저한 억제에 대한 동방적 이원론?)
--이노켄티우스 3세: 종교재판 권장하고 재판에서 고문 허용(1252), 처형방법으로서 화형의 일반화. 교회 주관의 성사가 구원의 필수요건이라고 하며 성체와 고해 강조.
ii)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1182-1226): 반란자 내지 이단자로서 프란체스코. 부랑자와 빈민 속에서, 예수의 생애를 본받는 생활. 교리, 형식, 의례에 무관심. 종교적 무정부주의?--이노켄티우스 3세의 포섭과 지원: 철두철미한 복종의 서약을 대가로 인정. 생동하는 새로운 세력으로 하여금 교회 내에서 종교적 열정을 유지하려는 전략. (cf.도미니크 교단)
iii)보헤미아의 얀 후스(1373-1415)와 후스파의 봉기
iv)프리 메이슨 비밀결사: 그 목적은 자유 선택에 기초한, 국가의 통제가 없는 사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프리메이슨은 나이나 가족, 교구, 조합, 명령같은 바꿀 수 없는 연대에 기초한 규율을 거부했다. 그들의 목적은 신앙과 도덕의 일종이었다는 점에서고, 프리메이슨단은 혁신이었지만, 과거와의 근본적 단절은 아니었다. 그들은 사적인 이해의 수단이라기보다는 감수성의 [공동]장소였다.--18세기에 그 숫자의 폭증. 그 영향력에 대한 논란.
--->결국 어떤 시대든 지배적인 체제에서 벗어나 그를 비판하고 그 체제의 질서를 횡단하면서 이루어지는 접속과 연대가 있었으며, 그 대부분은 ‘공산주의적’(블로흐) 관계의 형성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 이념적 형태는 더욱 빈번하다. 
블로흐의 예: 모세와 예수(cf.바울과 어우구스티누스), 요아힘 드 피오레와 토마스 뮈쩌;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와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 오웬, 푸리에, 캬베, 생시몽 등의 공산주의;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 등(추상적 유토피아와 구체적 유토피아, 혹은 질서와 자유)
-두 가지 유토피아: 
i)비참하고 고통스런 이 세계의 피안으로서 유토피아(부정적 유토피아):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 모어, 캄파넬라...
ii)그 고통스런 세계의 직접적 변이와 전복으로서 유토피아(긍정적 유토피아): 프란체스코(?), 프리 메이슨, 오웬, 푸리에, 맑스...
-->결국 공산주의란 자본주의로부터 내적으로/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역사의 어떤 종착점이 아니며, 어떤 부재하는 유토피아의 또 하나의 이름인 것만도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그 다양한 형태에도 불구하고 비참하고 고통스런 세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과 좀더 나은 세계, 좀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의 환유였다. 그렇다면 그것은 좀더 나은 세계와 삶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과 희망이 소멸될 수 없는 한 결코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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