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tudy 2/고전

한국사 반란기

by FraisGout 2020. 6. 30.

 

      제1부 신라,통일신라 시대
    대공의 난(768년)
  대공의 난은 768년(혜공왕 4년)에 대공이 대렴과 함께 일으킨 난이다.  
  
  흉년에도 나 몰라라 방탕한 왕 타도하자!  
  경덕왕의 맏아들인 혜공왕(신라 36대왕)은 8세때인 756년에 즉위하여 한때 태후가 섭정을 
맡았다. 재위 중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났으며 흉년이 심하여 민심이 흉흉하였다. 이런  와중
에 여러 모반이 일어났다. 그런데도 왕은 사치와 방탕에 빠진  채 선정을 베풀지 못해 백성
들로부터 많은 원성을 들었다. 자연히 정치는 문란해졌고 나라의 기강도 흐트러지게 되었다.
  이때, 일길찬이라는 벼슬직에 있던 문신 대공이  768년 (해공왕 4년)에 그의 동생인  아찬 
대렴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그는 봉기군을 이끌고 쳐들어가, 왕궁을 겹겹이 포위하고서  왕
의 항복을 받아내려 하였다. 그러나 왕군의 만만치 않은 반격을 받았다. 봉기군과 왕군은 계
속 대치하며 신경전을 펼쳤다. 봉기 군은 왕궁은 이를 잘 막아냈다. 그러다가 결국 봉기  군
은 왕군은 이를 잘 막아냈다.  
  그러다가 결국 봉기 군을 황군에게 패하여 구족과 함께 대공은 주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는 그 후 일어나는 일련의 난들,  즉 김은거,  염상, 정문 등의 모반에  기폭제 역할을 해 
주었다. 가령, 775년에 이찬 김은거가 모반을 일으켰다가 붙잡혀 사형되었으며, 같은 해 8월
에 이찬 염상과 시중정문이 모반하다 역시 체포되어  사형된 바 있다. (참고로 신라의 17관
등은 이벌찬을 첫 번째 위계로 해  이찬, 잡찬, 파진찬, 대아찬, 아찬, 일길찬,  사찬, 급벌찬, 
대나마, 나마, 대사, 사기, 길사, 대오, 소오, 조의 등이다)  
  
    김지정의 난(780년)
  김지정의 난은 780년(혜공왕 16년)에 김지정이 일으킨 난이다.
  
  혜공왕은 처형했으나 집권에는 실패
  780년(혜공왕 16년)에 왕족으로서 이찬 벼슬 자리에 있던 김지정이 난을 일으켰다.  
  그는 봉기 군들로 하여금 궁궐을 철통같이 에워싸게 한 후 맹렬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
리하여 봉기 군은 마침내 혜공왕(신라  36대왕)과 왕비를 사로잡아 처형을  시키는 등 한때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는 상대등(귀족 대표로서 수상의 직책) 김양상과 이찬 김경신등
의 반격으로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는 곧 체포되어 주살되고 말았다.  
  김양상은 내물왕의 후손이요 효방의 아들로서 764년에 아찬을 거쳐, 774년에 상대등이 되
었는데, 780년에 그는 왕과 왕비가 살해되자,  아찬 김경신과 함께 김지정을 비롯한  모반의 
무리를 소탕하였다. 그리고 혜공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가 바로 신라 하대
의 첫 왕인 선덕왕(신라37대왕)이다. 신라의 역대를 3분하여 시조 박혁거세로부터 28대 진덕
왕까지의 성골 계통인 28왕을 상대, 제29대 무열왕으로부터 36대 혜공왕까지의 무열왕 직계
인 8왕을 중대, 그리고 37대 선덕왕으로부터 56대 경순왕까지의 방계 왕족인 20왕을 하대라 
한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난을 진압하는데 함께 공을  세운 김경신을 상대등으로 삼았
으며, 자기 아버지를 개성대왕에, 자기 어머니를 정의태후에 각각 추존하였으며, 재위5년 동
안(780-785년)동안 선정을 베풀고자 애를 썼다. 그런데  그가 죽으면서 남긴 유언장에는 이
렇게 적혀 있었다.  
  "내가 죽으면 화장하여, 그 유골을 동해에 뿌려달라."
  당시에 화장은 불법이었지만, 그의 유언은 그대로 집행되었다.  
  
    김언승의 난(809년)
  김언승의 난은 809년(애장왕 10년)7월에 김언승이 김제옹과 함께 일으킨 난이다. 
  
  애장왕을 살해하고 외삼촌이 즉위
  통일신라 때 김경신(원성왕, 신라 38대왕)이 왕위에 올라 재위 4년째인 788년(원성왕 4년)
에 독서삼품과(과거제의 효시)를 두어 과거법을 제정하였으며, 이외에도 790년에는 벽골제를 
증축하고 전읍서에 향2인을 두는 등 많은 치적을 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위 중 791년
에는 이찬 제공(791년에 붙잡혀 사형됨)이 모반을 일으키는 등  몇몇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
다. 게다가 왕은 태자를 두 번이나 세웠으나 이들(김인겸, 김의영)이 모두 일찍 세상을 뜨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셋째 아들  김예영이 있었으나, 왕은 장손  김준옹(소성왕)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했다, 그러나 소성왕(신라 39대왕)은  재위 1년도 채 되지 못하여 승하해  버렸
다. 그러자 태자인 애장왕이 13세로 신라 40대 왕위에 올랐다. 그러자 왕의 외삼촌 되는  김
언승이 병부령이라는 벼슬 자리에 올라 정사를 모두 관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언승과 그
의 동생 김제옹은 조카인 애장왕이 장성하여 친정을 하게 될 경우 자기들이 거세될까 봐 두
려워 내심 초조하고 불안했다. 이런 염려와 불안은 그들로 하여금 왕에게 칼을 들이밀게 했
다. 마침내 김언승(당시 병부령).김제옹(당시 이찬) 형제는 애장왕 10년(809년)7월에 난을 일
으켰다. 그 해에는 한발이 심하여 백성들의 생활은 매우 곤궁했고 민심이 흉흉했다. 이런 혼
란스러운 틈을 이용하여 김언승.김제옹 형제는 궁중으로 쳐들어갔던 것이다. 삽시간에  궁중
안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애장왕은 동생 김체명과 더불어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결국 
숙부인 김언승의 칼에 맞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김언승은 왕을 살해한 후, 궁중 안에다  크
게 잔치를 벌여 신하들에게 춤까지 추게 하는 등 호탕하고 현란한 유흥을 벌인 다음 헌덕왕
(신라41대왕)에 즉위하였다.
  
    김헌창의 난(822년)
  김헌창의 난은 김헌창이 자기지지 세력을 규합하여 옛백제 땅인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를 
거점으로 하여 822년 3월에 일으킨 난이다. 
  
  폭우 때문에 즉위 못한 부친의 한 풀어보자!
  선덕왕(신라37대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김지정의 난을 함께 수습한 공신 김경신을 중용
하여 상대등으로 삼았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왕은 왕족인 김주원을 등용하였다.  그러자 
김경신이 꿈을 꾸었다. 사모를 벗고 갓을 쓴 채 12줄  거문고를 끌어안고 천관사 우물로 들
어가는 꿈이었다. 우물로 들어가는 꿈이어서 그는 옥에 갇히게 되지나 않을까 하고 심히 걱
정했다. 그런데 여삼이라는 자가 찾아와 이렇게 해몽을 해주었다. 
  "사모를 벗은 것은 더 이상 높은 자가 없다는 것이고,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이
며, 12줄 거문고를 않은 것은 12대 손까지 대를 이을 징조이고, 천관사 우물로 들어간  것은 
대궐로 들어갈 징조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자 김경신은 이렇게 말했다. 
  "나보다 한 등급 위에 김주원이 있는데, 그가 왕위에 오를 것일세."
  그런데 이 꿈을 꾼 지 얼마 되지 않아 선덕왕이 세상을 떠났다(785년). 왕의 아들이 없었
으므로, 궁궐에서는 무열왕계 왕족중에서 가장 가까운 친척인 김주원을 맞아들여 왕으로 세
우고자하였다. 가장 가까운 친척인 김주원을 맞아들여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김주
원의 집이 북천의 북쪽에 위치해 있었고, 때마침 소나기가 내려 물이 불어나는 바람에, 김주
원이 북천을 건너지 못하게 되었다.  이 틈을 이용하여 김경신이 먼저  궁궐에 들어가 왕위
(원성왕, 신라 38대왕)에 오르게 되었다. 이 때문에 김주원은 세력 다틈에서 밀려나 명주(강
릉)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 김헌창은 계속 중앙 관직에 남아 활동하였으며, 807년에 이찬으로서 시
종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당대 실세요, 실력자인 김언승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급성장 하
였다. 그런데 김언승이 난을 일으켜 애장왕을 죽이고 자신이 헌덕왕(신라 41대왕)으로 즉위
하는 바람에, 이찬 김헌창은 자연히 중심 세력에서 밀려나  813년 1월에 무진주의 도독으로 
좌천되고 말았다.
  817년 가을에는 흉년으로 굶어죽은 자들이 속출하였다. 이래저래 살아가기 힘든 백성들이 
819년에 전국 각지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821년에도 봄 기근이  심하여 백성들 중에는 자손
을 팔아 생계를 꾸려가는 자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틈을 타서 평소  자기 부친 김주원이 
귀족들의 반대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과 자신이 좌천된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김헌창(당
시 옹청주 도독;821년에 발령을 받음)이지지 세력을 규합하여  옛 백제 땅인 충청도와 전라
도 일대를 거점으로 하여 822년 3월에 난을 일으켰다. 그는 국호를 장안이라 하고 경운이라 
건원하고서, 무진주(광주), 완산주(전주), 사벌주(상주), 청주(진주)의 4주 도독과 국원(충주),
서원(청주), 금관(김해)의 사신들과 여러 군현의 수령들을 위협하여 자기 부하로 삼았다. 
  이때 청주 도독 향영은 불복하고 추화군으로  도망쳐 버렸다. 게다가 한산(경주), 우두(춘
천), 삽량(양산), 패강, 북원등에 있는 군사들을 동원하여 대항하는  중앙 귀족들의 연합세력
에 의해 반란군의 기세가 한풀  꺾이게 되었다. 헌덕왕은 우선8명의  장군으로 하여금 왕도 
팔방을 수비하게 한 다음, 일길찬 장웅을 먼저 출동시키고, 이어 잡찬 위공과 파진한 제릉을 
보냈으며, 그 다음에 이찬 균정과 잡찬 웅원 및 대아찬 우징 등에게 군사를 주어 적을 막아 
치게 하였다. 또한 각간 충공과 잡찬 융응에게는 문화 관문을 수비하게 하였다. 이때 김헌창
도 반란군을 정비한 다음 요소요소에 장수들을 파견해 왕군에 대비 시켰다.
  그러나 반란군은 일반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으며, 잘 훈련된 중앙 군대의 정규군을 이
길 만한 군사력을 지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병졸로 동원된 양민들이 적극적으로  싸움에 
임해 주지 아니 했기 때문에, 왕군과의  싸움에서 계속 밀리게 되었다. 왕군은 먼저  장웅이 
도동현에서 반란군과 접전하여 격파시킨 것을 필두로, 위공과 제릉이 장웅과 합세해 삼년산
성(보은)을 공격해 역시 승리를 장식한 다음, 속리산으로 군사를 돌려 그곳의 적도 격멸시켜 
버렸다. 왕군의 균정 등도 성산에서 싸워 반란군을 격멸시킨 다음, 3군을 웅진으로 모아  반
란군과 대접전을 벌인 끝에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써 반란군의 주력 부대는 격파되었다. 
  이때 김헌창은 가까스로 목숨을 구하여 성으로 도망쳐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마지막 저항
을 했다. 왕군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그로부터 열흘 만에 성이  함락
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김헌창은 사태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며 자기는 사형에 처
해질 수밖에 없는 처지임을 감지하고 자살하고 말았다. 성을  함락한 왕군은 김헌창의 시신
을 찾아내어 주형을 가했으며, 그 친족과 남은 무리 2백39명을 모두 처형했다. 이때가 822년
이었다. 
  그러나 김헌창의 반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김헌창이 죽은지 3년이 지난 825년(헌덕
왕 17년) 1월에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이 고달산적(여주), 수신 등에서  모은 농민군 1백여명
과 함께 난을 일으켜, 평양(양주) 도읍을 세우기 위해 우선 북한산주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한산주 도독 총명은 반란군을 대파하고 김범문 부자 2대에 걸쳐 일어난 모반은 허
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김명의 난(838-839)
  김명의 난은 838년(희강왕 3년) 1월에 김명이 이홍과 함께 일으킨 난이다. 

  왕을 자결케 하고 임금 되어 1년 천하
  헌덕왕의 뒤를 이은 흥덕왕(신라 42대왕)이 재위11년만에 승하하자, 한동안 잠잠하던 왕의 
쟁탈전이 다시 벌어졌다. 흥덕왕이 아들이 없어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고 죽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왕의 아우인 균정과 조카 제륭이 왕위 다툼을 벌이게  되었다. 이때 시중 김명과 아찬 
이홍과 배훤백 등은 제륭을, 균정의 아들 아찬 김우징과 조카 김예징과 무주도독 김양 등은 
균정을 각각 받아들었다. 처음에는 균정의  무리가 기선을 잡아 궁궐을 호위하였으나,  이어 
제륭의 무리가 군사를 이끌고 와서 공격을 가했다. 이때 김양이 소리쳤다. 
  "새 임금이 여기 계시는데, 너희들은 어찌 감히 이와 같은 역적질을 하느냐?"
  그러면서 활을 쏘아 제륭의 군사10여명을 쓰러뜨렸다. 그러자 제륭의 부하인 배훤백이 활
을 쏘아 김양의 다리를 맞혔다. 이어 벌어진 싸움에서 균정 쪽이 불리하게 되었다. 이때  균
정은 김양과 김우징에게 일단 피신해  훗날을 도모하라고 권했다. 김양과  김우징은 간신히 
뭄을 피해 달아났으나, 균정은 이때 목숨을 잃었다. 
  균정의 무리를 제압한 제륭은 836년에 신라 43대 왕위(희강왕)에 올랐다. 그러나 희강왕은 
왕위에 오른지 3년만인 838년 1월에 생애 최대 위기를  맞았다. 그가 신임했던 상대등 김명
과 시중 이홍이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김명은 반란군으로 하여금 왕의 측근을 모두 죽이
고 왕을 위협해 스스로 자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김명은  838년에 당당히 신라 44대 왕위
(민애왕)에 올랐다.
  한편 김우징과 김양은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배려로 군사 5천명을 얻어 무주를 습격했다. 
민애왕(김명)은 왕군을 급파하여 대항케 했으나, 왕군은 격파되고 말았다. 그러나 너무 오랫
동안 출정해 있었던 터라 피로에 찌든 김우징의 군사들이 일단 청해진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838년 12월에 김우징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왕군을 공격해 왔다. 김우징이 김양을 
평동장군으로 삼고, 엽장, 장변, 정연, 낙금, 장건영, 이순행 등 6명의 장수를  포진하고서 맹
공격을 가해 오자, 김명은 왕군을 증파하여 이에 맞섰다. 그러나 김양순이 무주군을  이끌고 
김우징 군에 투항해 버리는 바람에 큰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김양의 군대가 무주 혈
야현 북주에 이르자 대감 김민주는 왕군을  이끌고 가서 이에 대적했다. 김양군은 장군,  낙
금, 이순행이 기병 3천명으로  김민주가 이끄는 왕군을  대파하였으며, 그리고 계속  진군해 
839년1월 19일에는 달구벌에 이르렀다. 이에 김명은 이찬대흔, 대아찬 윤린, 의훈 등을 보내 
김양의 군을 막았으나 역부족이었다. 이때(839년 윤1월) 김명은 서교의 나무 아래 있다가 자
기를 호위하고 있던 군사들이 흩어지는 바람에 홀로 월유택에 숨어 있다가 김양의 군사들에
게 발각되어 시해당하고 말았다. 김양의 군대는 궁궐까지 수복한  다음 839년 4월 김우징을 
맞아들여 즉위시켰다. 그가 바로 신라 45대왕 신무왕이다. 그러나 신무왕은 즉위한 지  불과 
석달 만인 839년 7월 2일에 등창으로 인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장보고의 난(846년)
  장보고의 난은 장보고가 846년(문성왕 8년)봄에 청해진을 거점으로 일으킨 난이다.
  
  천민신분 때문에 내 딸을 왕비로 못 받아들인다고?
  "활을 잘 쏜다"고 하여 별명이 궁복, 궁파였던 장보고(?-846)는 일찍이 친우 정연과  함께 
당나라 서주로 건너가 무령군에 입대한 후 무술장교가 되었다.  그런데 이 무렵황해에는 중
국인 해적이 횡행하여 신라의 해안과 상선을 습격하여 재물은 물론 사람들까지 약탈해 와서 
이들을 중원지방의 노비로 팔아 넘기는 등 갖은 횡포를 일삼았다. 이에 장보고는 의분에 못 
이겨828년(흥덕왕 3년)당의 관직을 과감히 내던져 버리고 돌연 귀국하였다. 그리고 그는 해
적들의 인신 매매 행각을 근절시키고, 해상권을 통괄하여 신라인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남해
와 동지나 해상의 교통요충지인 완도에 해군기지, 즉 진을  건설하여 서해 무역로를 감시해
야 한다고 흥덕왕에게 강력히 충언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왕의  윤허를 얻어내어 군사를 이
끌고 해로의 요충지인 청해진(바다를 깨끗이 한다는 뜻)에 진을 설치하고 완도 가리포에 성
채를 쌓고 항만 시설을 보수하여, 해군의 전략적 거점을 마련하였다. 
  장보고는 왕에 의해 청해진 대사에 임명된 후 수하의 수병을 훈련시키고 인근 지방민들을 
모았다. 그리고 제 스스로 찾아오는  빈민들과 유민들을 모아 민병 대를  조직하여 얼마 안 
가 1만 여명의 병사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는 이 군대를 훈련시켜 본격적인 해적 소탕 작전
에 들어갔다. 그는 뛰어난 전략을 구사하여 해적을 완전  소탕하여 동지나해 일대의 해상권
을 모두 장악하였다. 
  장보고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군사적 세력을 키우면서 선박을 많이 만들어서 그것으로 청
해진을 중심으로 일종의 거대한 해상왕국을  건설하고, 중국, 일본양국 사이에 개입해  동방 
무역과 해상권을 주도해 나가고자 했다.  이때 무역상들의 수출품들은 주로  구리거울 등과 
같은 금속제품류, 모직물류, 도자기류,  피혁제류, 문방구류, 그리고 향료,  염료, 안료, 풀솜, 
비단 등과 같은 동남아시아 및 서아시아의 지역 특산품이었다. 
  837년(희강왕2년)에 왕위 계승다툼에서 밀려난 김우징이 청해진으로 피신해 오자, 이를 맞
아들여 보호해 주었다. 이때 정권욕에  사로잡혀 있던 김우징은 온갖  감언이설로 장보고를 
설득하여 군사 지원 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중앙 정치에 관여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
던 장보고는 침묵을 지킬 뿐 동요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희강왕의 시해 소식을 접하게 되
었다. 김양으로부터 희강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말을 전해들은 김우징이 다시 한 
번 간곡히 장보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장보고는 숙고 끝에 이에 동조했다.
  "옛 사람의 말에 의를 보고 실행하지 않으면 용맹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내 비록 용렬하
지만, 오직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그리하여 김우징은 장보고가 내어준 5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838년 3월에 김양, 정양과 
함께 무주와 남원을 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군사들이  오랜 출정으로 피로해 하였
으므로 일단 청해진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이 해 12월에 군사를 일으켜 대흔, 윤린, 의훈 등
이 이끄는 왕군을 격파하고 김명(민애왕)을 사로잡아 처형하였다. 그리고 김우징은  839년에 
신라 45대왕(신무왕)에 올랐다. 그가 등극하게 된 것은 장보고의 공이 컸던만큼, 왕은 곧 장
보고에게 감의군사라는 작호와 식읍 2천호를  상급으로 내렸다. 그 뒤  신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성왕도 장보고의 공을 기려 그에게 진해장군이라는 작호를 내렸다. 그리하여 
장보고는 공식적으로 해군력을 장악하여 중앙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당나라, 일본과
의 국제 교역도 더욱 넓혀 나갔다. 840년(문성왕2년)에는 무역선과 함께 회역사를 일본에 파
견하여 서신과 공물을 보내어 교섭을 시도해 보는 등 사무역을 통한 정치적 외교를 시도해 
보기도 했다. 
  845년(문성왕7년)3월에 문성왕은 군사력이 탄탄한 장보고의 세력을 감안하여 장보고의 딸
을 두 번째 왕비로 맞아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왕족과  귀족들이 일시에 들고일어나 강력하
게 항의하였다. 그들은 장보고의 출신이 천한 해도인 이라는 이유를 들어 극구 반대했다. 물
론 장보고의 출신이 벌족이나 골품이 아니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강성해진 장보고
의 세력이 중앙에까지 미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와 불안이 그들의 더 큰 반대 이유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장보고는 분개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은 신라인의  기상을 해외에 
떨쳤고, 더욱이 중국 적산 촌에 법화원이라는 대사찰을  건립하여 '신라정신'을 국내외에 발
양하여 국위를 선양시켰으며, 김우징의 피난 시절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그때 자기 딸의 차
비영입을 김우징이 굳게 언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분 하나 때문에  자기 딸이 문성왕의 차
비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청해진의 사병을 이용하여 정변
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서 846년 봄에 청해진에서 반기를 들었다.
  이때 부패한 왕실에 혐오감을 느끼고 있던 민중들은 대부분 민족적인 지도자 장보고에 동
조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당장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대책 마련에 부심할 뿐 우왕
좌왕하고 있었다. 이때 무주 사람 염장이 선뜻 나서서 이렇게 아뢰었다.
  "조정에서 만일 저의 말을 들어준다면, 저는 단 한 사람의 군사도 번거롭지 않게, 맨 주먹
으로 궁복의 목을 잘라 바치겠습니다."
  이에 왕은 자객 염장으로 하여금  거짓 투항하게 하여 청해진으로  투입시켰다. 장보고는 
원래 염장을 아끼던 터라, 아무 의심 없이 그를 상객으로  앉히고 함께 술을 마시며 시국에 
대해 의논했다. 장보고가 술이 거나하게 취할 무렵, 염장은 장보고의 칼을 빼앗아 그의 목을 
단칼에 베어 버렸다. 그리고는 반란군의 무리를 설득시켜 그들도 굴복시켰다.
  그 후, 장보고 휘하에 있던 부장 이창진 등이 난을 일으켜 왕군에 대항했으나, 이들  역시 
무주의 별장 염문이 이끄는 부대와 귀족들의  사병 등으로 구성된 연합군에 의해  평정되고 
말았다.
  
    애노의 난(889년)
  애노의 난은 889년(진성여왕 3년)에 애노가 원종과 함께 사벌주(상주)를 중심으로 일으킨 
난이다. 
  
  풍기문란한 여왕이 흉년 세금 독촉 웬 말이냐!
  신라 51대왕 진성여왕은 887년에 재위에 올랐다. 그녀는  경문왕의 딸이자 정강왕의 누이
동생이었는데, 정강왕이 후사 없이 죽자  그의 유조로 즉위하였다. 재위초기에 그녀는  각간 
위홍과 대구 화상에게 명하여 향가집 "삼대목"을 편찬케 하는 등 문화  사업에 힘쓰면서 선
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여왕은 원래 소행이 좋지 못하였다. 그녀는 즉위하기 이전부터  관계
를 맺어온 각간 위홍을 떳떳하게 궁내로 불러들여 사통했으며,  위홍이 죽은 후에는 궁중에 
미모의 소년들을 남몰래 불러들여 음행을 일삼았다. 또한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국정을 맡
김으로써 신하들의 불만을 샀으며, 뇌물을 받아 챙기는 등 왕실의 풍기를 문란케 하는 주역
을 담당하였다. 이로써 궁궐에서는 뇌물 주고받기가 공공연히 이루어졌고, 상벌과 관리 임명
이 공정하지 못하여 기강이 헤이 해질 대로 해이해지고 말았다. 
  이와 같이 부패는 곧 지방으로까지 급속도로 파급되어 갔다. 여기에 흉년까지 겹쳐 주, 군
에서 공부를 바치지 않아 부고가 비고 국가 재정이 바닥나는 사태가 빚어졌다. 이에 관리들
은 세금 독촉을 심하게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지방의 민심은 심히 동요를 일
으키게 되었다. 이 틈을  타서, 애노는 889년(진성여왕  3년)에 원종과 함께 사벌주(상주)를 
중심으로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조정은 이를 초기에 토벌하지  못함으로써 난은 점점 크게 
확대되고 말았다. 반란군은 내마 영기의 군대를 물리쳤으며 성주우운을  전사케 하는 등 한
때 세력을 크게 떨쳤으나, 우련이 이끄는 왕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그러나 891년에 지방에서는 조세가 걷히지 않고 병세가 퇴폐하여 각지에서 군웅이 할거하
게 되었다. 즉, 북원(원주)의 양길과 궁예, 죽주(죽산)의 기훤, 완산의 견훤 등이 봉기하였는
데, 왕군이 이를 토평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신라 왕조는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렇듯, 신라 왕권에 대한 도전은 신무왕 이후에도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러나 진성여왕이 
즉위하고 나서부터는 그 양상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잇다. 즉, 진성여왕이 즉위 이전까지는 모
반이 주로 귀족들에 의해 저질러졌던 데 비해, 진성여왕 즉위 이후부터는 일반 백성들에 의
해 모반이 일어났던 것이다. 
  신무왕 이후의 모반사건을 간략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841년(문성왕3년) 일길찬 홍
필이 모반하려 했다가 발각되자 해도로 도망쳐 버렸으며, 846년(문성왕8년)에는 장보고 모반
사건이 일어났다. 847년 5월에 양순, 흥종등이 모반하다 복주되었으며, 849년(문성왕11년)  9
월에는 이찬 김식일, 대흔 등이 모반하다가 발각되어 복주되었고, 대아찬 흔린이 이에  연좌
되어 처벌을 받았다. 866년 (경문왕6년) 10월에는 이찬 윤흥이 그의 아우인 숙흥, 계흥과 함
께 모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대산군으로 도망쳤으나  곧 붙잡혀 처형되었다. 868년(경문
왕 8년)1월에는 이찬 김예, 김현 등이 모반하다가 역시 사형되었다.  그리고 874년에는 이찬 
근종이 모반을 일으켜 궁궐까지 쳐들어갔으나 금군에게 격파되자 잔당을 이끌고 밤에  성을 
빠져 달아나다가 붙잡혀 거열형(죄인의 다리를 두 수레에 각각 묶어  반대 방향으로 달리게 
하여 찢어 죽이는 형벌)에 처해졌다. 879년(헌강왕 5년)에는 일길찬 신홍이 모반하다가 복주
되었으며, 887년(정강왕 2년)에는 한주에는 이찬 김요가 모반하다가 평정된 바 있다.
  
    견훤의 난(892년)
  견훤의 난은 견훤이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 892년(진성여왕 6년)에  반기를 들어 일으킨 
난이다.
  
  후백제 세우고 양위 문제로 맏아들에 쫓겨나
  상주 가은현(문경) 농민의  아들(아자개의 아들)이라고  하여 진훤이라고도  부르는 견훤
(867-936년)은 20세에 군인이 되었다.  그는 수도 경주로 가서  신라 서남해 방위에 용맹을 
떨쳤다. 그 공이 인정되어 비장이 된 그는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 892년(진성여왕 6년)에 반
기를 들어 난을 일으켰다. 그는 정변, 살해극, 가렴주구, 시기, 모함, 질병, 흉년, 기근 등으로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정치사회현실을 이용하여  반란군 5천명을 이끌고 여러 성을  공격한 
다음 무진주를 점령하여 독자적인 기반을 닦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896년에는 서남 지방에 적고적(붉은 바지를 입고, 스스로 남달리 행동했으므로 그
렇게 불렀다.)이라는 도적이 일어나, 국도의 서부 모량리까지 쳐들어와  닥치는 대로 재물을 
약탈해 갔으며, 각지에 할거하는 호족세력들이 발호하여 기승을 부렸다. 그러자  진성여왕은 
스스로 국정을 바로잡기가 힘듦을 통감하고서, 897년(진성여왕 11년) 6월에  태자인 김요(정
강왕의 서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 이가 바로 신라 52대왕 효공왕이다.  그러나 이 무
렵에는 왕군과 반란군의 싸움이 아니라, 군웅끼리 싸움과 접전이 벌어지는 양상을 띠었다.
  견훤은 900년(효공왕 4년)에는 양길을 회유하여 그에게 비장이라는 관직을 주고 서북지방
을 공략케 하여 점령하였다. 그는 완산주(전주)에 입성하여 그곳에 도읍을 정하고 스스로 후
백제(후백제라고 하는 것은 백제와 구별하기 위해 편의상 부르는 호칭일 뿐이었다.) 왕이라
고 하고 관제를 정비하는 한편 중국의 오월국과도 국교를 맺으면서, 궁예 및 왕건과도 자주 
충돌하며 세력 확장에 힘썼다. 그러자 905년에 효공왕은 반란군들과 싸우는 것을 스스로 포
기하고 모든 성주들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나가서 마주 싸우는 것을 삼가고 굳게 성을 지키라."
  이리하여 결국 한반도는 신라왕조와 궁예의 태봉국, 견훤의 백제국으로 3분되었다. 궁예는 
고구려의 부흥을 꾀하여 철원을 중심으로 강원, 경기, 황해, 평안, 충청 일부  등지를 영유하
였고, 견훤은 백제의 부흥을 꾀하여 전주를 중심으로 금강 유역의 충청도 일부와 전라도 전
체를 차지했으며, 신라 왕조는 경상도 일대를 통치했다.
  927년(경순왕 1년)에 견훤은 신라의 국도를 기습하여 경주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어 유
흥을 즐기고 있던 경애왕을 사로잡아 자살하게 만들었고, 경애왕의 친족 중 아우뻘 되는 김
부를 왕위(경순왕:신라 56대왕)에 앉혔다.(그러나 경순왕은  전왕인 경애왕처럼 고려와의 화
친을 도모 했으며, 935년 11월에는 고려 태조에게 귀부함으로써  신라 1천년의 역사에 종지
부를 찍었다.)
  이로써 견훤은 후삼국 중에서 한때 가장 강대한 국가로서  그위세를 크게 떨쳤다. 그러나 
929년 고창에서, 930년 안동 전투에서  왕건에게 참패한 후부터 형세가 기울어졌다.  게다가 
유능한 신하들이 왕건에게 투항했으며, 934년 웅진(공주) 이북의 30여 성이 고려에 귀순하고 
말아 그의 위기의식은 한층 고조되었다.  고희를 앞둔 견훤은 나약해져  935년에 10여 명의 
아들 가운데서 넷째 아들인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다. 그러자 맏아들 신검이 935
년에 반기를 들고일어나, 아버지 견훤을 김제 금산사 미륵전에 가둬 버리고, 동생 금강을 살
해해 버렸다. 금산사에 유폐되어 있던 견훤은 갇힌 지  3개월만인 935년 6월에 측근을 대동
하고 몰래 탈출하여 나주로 갔다가 수로로 도망하여 고려에  귀순하였다. 이때 그는 고개를 
떨군 채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통곡하였다.
  "내가 자식들을 잘못 둔 죄로 대낮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되었도다!"
  
    궁예의 난(894년)
  궁예의 난은 894년(진성여왕 8년)에 명주(강릉)와 철원을 함락시킨후, 그의 추종자들에 의
해 장군으로 추대된 궁예가 895년에 양길과 정식으로 결별선언을 한후 새나라를 세우기 위
해 일으킨 난이다.
  
  후고구려 세운 미륵불 폭군
  궁예(성은 김씨:?-918년)는 신라 헌안왕(신라 47대왕)과 궁녀  사이에서 서자(일설에는 신
라 48대왕인 경문왕 김응렴의 후궁  소생)로 어느 따스한 단오날에  태어났다. 갓난 아이는 
날 때부터 이가 나고 얼굴에 이상한 빛까지  발해 장차 국가에 해를 끼칠 인물이라고 여긴 
신하들이 이를 왕에게 고하였다. 그러자 왕은 이 갓난 아이를 당장에 죽여 버리라고 명했다. 
그러자 사자는 강보에 싸인 아이를 다락 밑으로 내던져 버렸다.  이때 유모가 다락 밑에 있
다가 아이를 받았는데, 유머의 손가락이 아이의 눈을 찔러 이후부터 아이는 애꾸가 되고 말
았다. 
  요행히 궁예는 왕가에서 도망하여 한동안 외가에 숨어살다가, 10여 세 때 세달사(후에 흥
교사:강원도 영월군 대화산 소재)로 들어가 중(법명:선종)이 되었다. 당시의 신라  형편은 국
정이 문란하여 각지에서는 도적과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 왕명이 잘 지켜지지 않던  때였
다. 그러던 어느날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가다가 왕자가  새겨진 부적을 떨어뜨리고 날아갔
다. 이를 보고 소년 궁예는 큰 야망을 품게 되었다.
  얼마 후 청년으로 성장한 그는 승려 생활을 청산하고 891년(진성여왕 5년)에 기훤의 부하
로 들어갔다. 그러나 기훤의 사람됨이 거칠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냉대하자 궁예는 그의 
휘하를 떠나 양길의 막하로 들어갔다. 이때 양길은궁예가 왕자의 신분인데다 용맹과 지략이 
뛰어남을 알고는 그를 매우 신임하여 그에게 자기 군대의 일부까지 내어주는 등 후한 대접
을 해주었다. 그리하여 궁예는 양길의  군사 3천5백여 명을 이끌고  원주, 치악산, 석남사를 
거처 동쪽으로 진출하여 주천(예천), 내성(영월), 울오(평창)등의 여러  현과 성을 차례로 정
복하였다. 그는 전투에서 승리하여 빼앗은 물건들을 자기 추종자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어 그
들로부터 신망을 얻었다. 
  이후 궁예 휘하의 군졸 수가 점점 늘어났고, 싸우기만 하면 어김없이 승전고를 울렸다. 그
러던 중, 894년(진성여왕 8년)에 명주(강릉)를 함락한 후 군사들을 14대로 나누어 자기 세력
기반을 삼았다. 그리고 이어 철원을 함락하였다. 이때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장군으로  추대
하였다. 장군이 된 그는 895년에는 저족(인제), 생천(계구)의 2군을 함락시키고서, 양길과 정
식으로 결별 선언을 한 후 한주 관내의 부약(춘천), 철원  등 10여 군.현을 석권하여 강원도 
일대를 자기 세력권 아래 두어 제법 나라의 규모를  갖추었다. 896년에 그는 임진강 연암을 
공략하여 송악(개성)에 있던 왕건 부자의 투항을 받았다. 이때 그는 왕건을 태수로 임명하였
다.  이후 승령(토산), 임강(장단), 풍덕 등의 여러 현을 차례로 점령하였으며, 897년에는 공
암(양평), 금포(김포), 형구(강화)등도 점령하였다. 898년에는  평안도와 한산주의 30여 성을 
공략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자 궁예의 세력권 남쪽인 국원(충주)등 30여개 성을 점령한 
북원의 양길이 옛날의 자기 부하가 크게 성공한 것을 시기하여 궁예의 땅을 먼저 침범했다. 
궁예는 899년(효공왕 3년)에 왕건을 보내어 양길 군대의 공격에 반격을 가하여 격파하였다. 
그 여세를 몰아 그  이듬해에는 양길의 주요  점령지인 국원(충주), 청주(온양), 당성(남양), 
괴양(괴선)등을 함락했다.
  이리하여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 유역전역을 지배하게 된 궁예는 901년에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옛 고구려를 회복할 목적으로 국호를 후고구려라 칭했다. 이는 당시 파탄에 빠져 있던 
민중들과 중앙에서 밀려나 반정부 대열에 서 있던 지방 호족들의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는 
자신이 고구려의 진정한 계승자임을 부각시키면서, 틈만 나면 공공연하게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해야 한다고 반복하여 강조하곤 하였다. 
  901년 어느날 그가 부석사에 들렀을 때 그곳 한쪽 벽에 걸린 신라왕 초상화를 우연히  보
게 되었다. 평소 신라에 대한 강한반감을 지니고 있던 그는  칼을 빼어 들더니 그 초상화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904년(효공왕8년)에는 "동방을 전부 무마하여 편안히 한다."는 뜻에서 국호를 마진으로 개
정하고, 연호를 무태로 제정하였다. 그리고 정식으로 광평성을  두어 정사를 토의 하였으며, 
각 지방에 관청을 두어 나라의 기초를 탄탄히 다져 나갔다.
  904년 7월에 그는 1천호를 철원으로 옮겨 그곳을 수도로 정한 후 견훤의 군대와 여러  번 
싸워 이겨 상주 등 30여 현을 차지하였다. 천우 2년인  905년에는 철원에 궁궐과 각종 누대
등을 호화롭게 꾸미고, 궁궐 신축을 기념하는 뜻에서 연호를 성책이라 하였다. 그리고  대동
강까지 쳐들어가 평양을 함락하여 신라의  북부 영토를 모두 점령하였다.  이때부터 궁예는 
신라마저 아예 전몰시켜 병합해 버리고자 하는 야망에 불타,  신라를 멸도라 부르케 하였으
며, 신라에서 도망해 온 장군들이나 문인들이 자기 마음에  조금이라도 거슬리기만 하면 모
두 죽여 버리는 등 포악하고 잔악한 행위를 일삼았다.
  911년에는 국호를 태봉으로 고치고 연호를 수덕만세라 했다. 이 해에 그는 왕건으로 하여
금 해로를 타고 내려가 나주를 공략하여 견훤의 해외 교통을 차단시키는 데 성공했다.(일설
에는 성격이 포악하고 의심이 많고 성급한 궁예가 충신인 왕건까지도 의심하기에 이르자 왕
건 일파는 일단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원정하여 금성을 정벌하였다고 한다.)
  이쯤 되자, 후삼국 중에서 가장 세력이  크다고 자만한 그는 연호를 다시 정개라  고치고, 
자칭 미륵불이라고 하여 머리에 금관을  쓰고 방포를 걸치고 다녔으며, 맏아들을  청광보살, 
막내아들을 신광보살이라고 칭하였다. 성밖으로 행차할 때에는  그가 마치 부처님이나 교주
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비단으로 말머리와 말꼬리를 장식한 백마를 항상 타고 다녔다. 어
린 소년소녀들로 하여금 깃발과 꽃을 들고 앞장서 걷게  하였고, 비구승 2백여 명으로 하여
금 범패를 부르고 염불하면서 그의  뒤를 따르게 하였다. 이때 그는  자신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살아 있는 부처님이다. 너희들의 악한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노라."
  애꾸눈인데 따른 자기 마음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참다운 불제자가 되고 싶어 했던 그는 
친히 불경 20권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이를 석총 스님에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석총  스님이 
이를 사설괴담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하자, 화가난 궁예는 단칼에 죽여 버렸다. 이때부터  성
질이 더욱 포악해진 궁예는 왕후마저 의심하여 손에 쥔  쇠몽둥이로 내리쳤다. 이때 왕후가 
몸을 빼내서 도망치자, 그녀를 붙잡아 몸을 지지고 국소까지 파열하는 등 잔인한 짓을 서슴
지 않았다. 이에 왕자들(맏왕자, 막내왕자)이 말리자, "네 놈들도 누구의 자식인지 모르겠다" 
하면서 모두 때려죽이고 말았다. 
  이후 궁예는 걷잡을 수 없이 난폭해져 갔다. 혹독한 폭정으로 부하와 민중을 다스렸고, 온
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민중을 수탈하여 왕궁을 호사스럽게 장식하였다. 그리하여, 부하
와 백성의 신망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918년(정개 5년)에 장군신숭겸, 홍유,  복지겸, 배현경 등의 군신들이 
모의하여 덕망 높은 왕건을 추대하였다. 이를 마지못해 수락한 왕건은 1만의 군사를 거느리
고 왕궁을 포위하였다. 그러자 사태가 매우 불리한 것을 깨달은 궁예는 변장을 하고서 몰래 
성에서 빠져 달아났다, 하지만 그는 부양(평강)에 이르렀을 때 그를 발견한 민중에 의해 살
해되고 말았다.
  
      제 2부 고려시대
    왕규의 난(945년)
  왕규의 난은 고려 초기인 945년 9월에 왕실의 외척 왕규가 일으킨 난이다.
  
  외손자 왕위계승 위해왕자들 이간질
  고려 태조는 왕규의 두 딸을 맞아 제15비와 제16비로 삼았다. 이 중 제16비와의 사이에서 
광주원군이 태어났다. 943년에 태조가 승하하자, 대광  왕규는 다시 자기의 딸들 중  하나를 
고려 2대왕으로 등극한 혜종(태조의 맏아들, 이름은 식, 어머니는 장화왕후 오씨, 비는 임희
의 딸 의화왕후)에게 바치는  한편, 광주원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하기 위해 혜종과 
왕위 동생들 간의 중상 모략을 일삼았다.  즉, 왕의 동생인 요(정종)와 소(광종)를 무고하여 
왕의 형제들 사이에서 이간질을 해댔으며, 그들을 여러 차례 살해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다
가 마침내 혜종까지도 해치려고 했다. 혜종은 이러한 왕규의 끔찍한 음모를 알고도 그 권세
에 눌려 그를 제거하지 못하고 지내야 했다. 그래서 왕은 항상갑사를 곁에 배치하여 신변보
호에 애쓰면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던 혜종은 재위한지 불과 2년 만인 945년 
9월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혜종의 뒤를 이를 정종이 945년에  왕위에 오르자, 왕규는 충신  박술희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대승 박득의의 아들인 박술희는 18세때 궁예의 호위병이 되었으며, 후에 태조를 섬기면서 
전공을 세워 대광이 되었다. 그는 혜종을 태자로 봉하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936년
(태조19년)에 후백제를 칠 때에도 보병과 기병1만을 이끌고 큰공을  세우는 등 고려 창업에 
큰 업적을 세웠다. 943년(태조26년)에 태조가 죽을 때 내전에서 그는 태조로부터 군국대사를 
부탁 받았으며 동시에"훈요십조"를 전수 받았다. 그러나  혜종이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게 
되자 왕규가 자꾸 역모를 도모했기 때문에 왕규에게 위협을 느낀 그는 왕과 자시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1백여 명의 호위병을 늘 거느리고 다녔다.  이 때문에 그는 왕규의 눈엣가시
였으며, 이복형 혜종의 뒤를 이어 새로 즉위한 정종(태조의 둘째 아들, 어머니는 증태사내사
령 유등달의 딸 신명왕후, 비는 문공왕후 박씨)으로부터도 이지를 품었다는 의심을 받게 되
었다
  945년 9월에 난을 일으킨 왕규는 제일 먼저 박술희를 갑곶(강화)으로 유배 보낸 뒤, 어명
이라 사칭하여 그를 살해해 버렸다.
  그러나 일찍부터 왕규의 동태를 주의깊게 살피고 있던 정종은 서경의 수비대장인  왕식렴
으로 하여금 왕을 호위케 한다음,  왕규를 체포하여 일단 그를 귀양을  보낸 뒤 유배지에서 
처단해 버렸다.
  
    이자겸의 난(1126년)
  이자겸의 난은 1126년(인종 5년)5월에 이자겸이 인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일으킨 난이다.
  
  막강 권세 누리며 왕위 찬탈하려다 측근에 당해
  고려 인종때의 척신인 이자겸의 본관은 인주(인천)이다.  그는 중서령 이자연의 손자이며, 
경원백 이호의 아들이다. 그는 음보로  합문지후에 이르렀으나, 그의 누이동생인 순종  비가 
왕이 승하한 뒤 궁노와 간통한 사실이 드러나, 이 사건으로 그도 연루되어 면직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1108년(예종 3년) 그의 둘째 딸이 16대 예종의  비(문경황후)로 책봉되자, 일약 익
성공신이 되었으며, 소성군 개국백에 봉해졌다. 1122년 예종이 재위 17년 만에 서서하자, 왕
위를 탐내고 있던 그는 왕의 동생들과 다른 왕자들을  모두 물리치고,1115년에 태자로 책봉
되었던 15살의 외손자인 해를 옹립하는데 성공했다. 이 외손자가  바로 고려 17대왕인 인종
이다.
  이렇게 하여 권세를 한손에 넣게 된 이자겸은 양절익명공신이 되었으며, 동시에 중서령.소
성후 등 주요관직을 겸하고 정권을 한손에 쥐고 흔들었다. 
  1122년 12월 인종의 작은아버지인 대방공이 신진  관료들, 즉 한안인. 문공인. 이영.  정극
영. 임존 등 10여 명과 함께 왕위 찬탈하고 이자겸 일파를 제거하고자 모의를 하였다.  그런
데 이 거서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는 바람에, 대방공을 비롯한 주모자들 외에도 이에 연루된 
수백 명의 인재들이 이자겸 일파에 의해 체포, 살해, 유배당하게 되었다. 
  이로써 명실공히 권력의 핵심인물이 된 이자겸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인종에게  강요하여 
자기 셋째 딸과 넷째 딸을 비로 삼게 함으로써 권세와 총애를 혼자서 독차지하였을 뿐만 아
니라 왕권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으며, 자기는 태자와 동등한 대우를 받도록 조치하였다. 그
리고 그는 개경 인근 지방과 개성  주위의 대토지를 몽땅 소유하고서 농민들을  착위하였으
며, 심지어 노복들을 풀어 닥치는 대로  남의 수레와 말을 빼앗기도 하는 등  권력 남용 및 
횡포를 일삼았다. 또한 그는 자기 생일을 인수절이라 하여 이 날 큰 잔치를 베풀었다.
  한편 자기 족속과 심복들을 내외 요직에 두루 포진시키고, 대권을 잡아 드높은 권세를 누
리면서, 매관 매직을 하여 전국에서 바치는 뇌물로 거부가 되었다. 이때 이자겸의 집에는 늘 
썩은 고기가 수만 근이나 될 정도였다. 또한 그는 당시 군사력을 쥐고있던 판병부사 척준경
(이자겸의 아들 이지원의 장인:원래 집이 가난하여  학문을 닦지 못하고 어려서부터 무뢰배
들과 교우하였던 척준경은 동여진 정벌에 나가 공을 세운후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과의 유
대를 한층 강화하고 그의 아들 이지미를 판추말원사직에 심어 놓아 군사력까지도 장악해 버
렸다.
  이자겸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1126년(인종 4년)에 송나라에 자기의 권세를  확인시키려고 
표를 올리고, 특산물을 보내면서, 자기가 왕과 동등한 위치에 있음을 뜻하는 "지군국사"라는 
칭호를 임의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칭호 사용은 인종의 비위를  크게 상하게 하였으며 분노
까지 사게 했다. 이에 왕의 불편한 심기를 읽은 신하들, 즉 내시지후 김찬, 내시녹사 안보린, 
동지추밀원사 지녹연 등은 1126년 2월 25일 이자겸 일파를 제거하겠다는 뜻을 왕에게 은밀
히 바쳤다. 
  이에 왕은 거사를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며 김찬으로 하여금 평장사 이
수(이자겸의 제종형)와 전평장사 김인존과 더불어 세부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
나 이수와 김인존 역시 신중론을  주장했다. 다시 김찬은 왕을 찾아가  즉시 거사를 실천에 
옮길 것을 간청하였다. 한참 망설이던 인종은 마침내 김찬이 말에 동조해 주었다. 이에 왕의 
뜻을 받든(지녹연에게 포섭된) 상장군 최탁과 오탁, 대장군 권수등은 군사를 이끌고 이자겸, 
척준경을 제거하기 위해 1126년 2월에 거사하였다. 그들은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쳐들어가
서 이자겸의 일파인 병부상서 척준신(척준경의 아우)  및 내시 척순(척준경의 아들)등을 잡
아 죽인 다음 그 시체를 궁성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이 소식을 접한 이자겸과 척준경은 격분하였다. 그는 자기세력에 속한 관료들과 무신들을 
집으로 불러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척준경은 사태가 시급하다고  안달하며 더 이상 기
다리고만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혼자서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향해 쳐들어가 왕의 친위 세
력과 대치하였다. 척준경은 척준신의 시체를  확인하고서는 더욱 격분하여 이지보(이자겸의 
아들)와 함께 군기고에 들어가 갑옷과 병기로 재무장한 다음 승평문을 포위하였다. 이때 궁
궐 안에 있던 왕의 친위세력은 척준경 군대의 위세에 눌려 궁궐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활
을 쏘는 소심한 경계 및 전투 태세를 취한 채 관망했다. 
  왕은 성밖으로 이중과 호종단을 보내 척준경의  군사들에게 무기를 버리라고 회유하였다. 
척준경은 오히려 왕이 보낸 신하들을 쫓아 보내 버렸을 뿐만 아니라 왕을 겨냥하여 화살까
지 퍼부어 대며 노골적으로 모욕을 주었다. 이자겸도 최학란과 소억을 궁 안으로 들여 보내 
"반란 주모자"를 내놓으라고 협박하였다. 이런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척준경은 동화문 
행랑에 불을 질러 태워 버렸다.
  사태가 점점 불리하게 전개되자, 인종은 근신 임경청 등을 비롯한 10여 명과 함께 산호정
으로 일단 피신하였다. 그러다가 더 이상 저항할 여력이 없을 간파한 왕은 이자겸에게 사람
을 보내어 왕위를 내놓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자겸은 대신들의 거센 반발을 우려하여 
이를 수락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때  이수가 재빠르게 중재에 나서서  인종이 왕위에서 
물러나는 것만은 막을 수 있게 되었다. 기선을  제압산 이자겸 일파는 오탁, 최탁, 권수,  고
석, 안보린 및 대장군 윤성, 장군 박영 등을 체포하여  무참히 살해해 버렸다. 이 외에도 지
녹연, 김찬을 비롯한 왕의 친위파들이 모두 유배를 당했다. 이 중 지녹연은 유배 도중  살해
되었다. 이런 와중에 산호정, 상춘정, 상화정, 내제석원을 제외한 모든 궁들이 불타 버렸다.
  그래서 1126년 3월 이자겸은 인종을 아예자기 소유인 중흥택 서원으로 연금하다시피 해놓
고 자기 심복들을 그 주위에 옮아 살게 하여 사실상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이자겸은 아예 국사를 한손에 쥐고 왕이나 다름 없는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렸다. 
  이때 최사전이 왕권을 범하고 권세를 함부로 부리는 이자겸을 제거하지 않으면 왕위가 위
태롭다고 왕에게 간곡히 충언하였다. 그러자 인종은 그와 협의하여 이자겸과 척준경을 갈라 
놓은 뒤 척준경을 왕실 편으로 끌어들이는 전략을 구사하기로 하였다. 왕의 밀지를 받은 최
사전은 이자겸과 척준경 두사람 사이를 갈라 놓는 이간 공작에 돌입하였다. 그는 은밀히 척
준경에게 접근하여 이자겸에 대한 위기의식을 갖도록 부추겼다. 
  "이자겸은 언젠가 당신을 버릴 것입니다. 그는  전혀 믿을 사람이 못 됩니다.  지금이라도 
왕에게 충성한다면 당신은 부귀 권세를 오래도록 누릴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이자겸에게 제거 당하고 말 것입니다."
  이무렵, 이자겸의 아들 이지언의 한 노비가 척준경의 노비에게  비난의 말을 퍼부은 사건
이 터졌다. 척준경이 왕궁에 활을 쏘고 궁을 태운 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심한 배신감을 느낀 척준경은 매우 격분했다. 이때 이자겸은  아들을 보내어 사죄하고 화해
를 요청했으나, 척준경은 이미 마음이 흔들린 뒤여서 좀처럼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이 기회
를 놓치지 않고, 인종은 지추밀원사 김부일과 최사전을 차례로 보내 "이자겸이 공격하기 전
에 선수를 치라"고 거사하기를 재촉했다.
  1126년 5월 1일에 인종이 이자겸의 감시망을 벗어나 연경궁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자, 초
조하고 불안해진 이자겸은 마침내 왕위 찬탈 결심을 굳혔다. 그는 연경궁 남쪽으로 가서 담
을 뚫은 다음 그 안에 있는 군기고에서 갑옷과 무기를 훔쳐 집안에 미리 감추어 두었다. 그
리고 그는 떡에 독약을 넣어 왕비(이자겸의 넷째 딸)를 시켜 수차 인종을 독살하려 했지만, 
왕비가 매번 이를 거절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이자겸은 무력으로 왕위를 찬
탈하기로 작정하고 1126년 5월 20일에 거시하여 숭덕부군(이자겸이  세운 군대)으로 하여금 
연경궁 북쪽의 침문을 통해 침범하게 했다.
  이때 인종이 손수 쓴 밀지를 받은 척준경은, 서리  출신으로서 학식은 없었으나 청렴하고 
통솔력이 뛰어났던 병부상서 김향과 함께 장교7명에 심복 20여 명을 거느리고 급히 연경궁
으로 향했다. 순검도령 정유황도 1백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궁으로 들어갔다. 척준경은 천복
전 문에 나와 기다리고 있던 왕을 호위하고서 우선 군기감으로 왕을 급히 피신시켰다. 그런
다음, 승선 강후현을 시켜 기습 작전을 펼치게 하여 이자겸과 그의 처자들을 생포하여 팔관
보에 가뒀다. 또한 이자겸의 심복인 장군 강호와 고진수와 싸워 그들을 살해하였으며,  그밖
의 무리들도 모두 체포하였다.
  그후 이자겸과 그의 처, 이지윤을 비롯한 다른 아들들은 영광으로 유배당했으며, 그 외 이
자겸의 측근들도 모두 유배 조치를 받게 되었다.  이자겸의 딸인 두 왕비(이자겸의 셋째 딸 
폐비 이씨, 넷째 딸 폐비 이씨)도 폐위되고 말았다. 이후 인종은 중서령 임원후의 딸(공예왕
후)과 병부 상서 김예의 딸(선평왕후)을 왕비로 맞아 들였다. 이자겸은  1126년 12월에 유배
지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이후 척준경은 이자겸 일파를 물리친 일등공신이라는 배경을 맏고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
다가 정지상의 탄핵을 받아, 1127년 3월에 암타도로 유배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1128년에는 
다시 그의 고향인 곡주로 이배되었다. 그러나 인종은 그의  지난날 공로를 참작하여 1144년
(인종22년)에 다시 그를 조봉대부 검교호부상서에  등용하려 했으나, 그해 등창으로  인하여 
유배지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묘청의 난(1135년)
  묘청의 난은 서경천도가 불가능해지자 묘청이 1135년(인종14년) 정월에 마침내 서경을 기
반으로 하여, 서경의 분사시랑 조광과 동병부상서 유담등과 함께 일으킨 난이다.
  
  음양도참서을 바탕으로 서경(평양)인 중흥정치 펴자!
  민족 자주정신 입각해서 지은 "칭제건원론" 및 "금국정벌론"의  저자이기도 한 승려 묘청
(?-1135년)은 서경(평양) 출신이다. 묘청은 백수한을 통해 근신들과 접촉한 후 풍수지리설에 
의거한 도참설로 중앙 정계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1127년(인종 5년)에는 왕실의  최고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그는 왕의 서경행차를 주청하여, 당시 내외 정세의 혼란을  이용
하고, 또 개경출신 구신들의 세력(개경파)을 꺾기 위해 서경천도를 획책했다.
  당시 국내외 정세는 매우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국외로는 요(거란족)를 멸명시킨 후 새로 
일어난 금(여진족)나라가 고려를 호시탐탐 넘보기 시작했으며, 국내로는 이자겸의 난 등으로 
궁궐이 불타 버리고 정치 기강마저 무너져 개경의 분위기와 민심이 흉흉해지고 불안해졌다. 
그러자 음양도참설이 기승을 부렸다. 이런 기류를 이용하여, 묘청 일파(서경파)는 역대 고려 
사회의 인심을 지배해 온 도참설에 의거하여, 국수주의적 배타주의를 표방하고, 개경파의 유
교주의와 사대주의 세력에 대항하고 이를 제압하기 위해 서경천도 운동을 추진했던 것이다.
  음양대가이자 술승이었던 묘청은 서경 출신의 재상 정지상과 자기 제자인 백수한을  통하
여 "개경은 이미 지덕이 쇄하여으며, 고 왕의 측근들과 대신들을 끈질기게 설득하였다. 이에 
대신들은 묘청을 성현으로 추천하여 모든 정사에 대해 조언하는 최고 고문 자리에 앉힐 것
을 왕에게 건의 하였다. 이때 김부식 등을 비롯한 개경파  4-5명의 대신들만이 이에 반대했
으나, 대신들의 중론에 못 이겨 왕도 그 제안을 결국 수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데  성공한 묘청은 1127년에 인종에게 서경  행차를 
주청하여 실현시킨 후 그 해  3월에 15조항의 유신지교를 선포하도록  하였다. 이어 1128년
(인종6년)에는 서경 임원역(평남 대동군 부산면  산궁동)에 음양가에서 말하는 대화세가 있
다고 하여, 그곳에 신궁을 창건할 것을 왕에게 강력히 건의 하였다.
  "임원역에 신궁을 세우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으며, 금나라도 저절로 와서 항복할 것이고, 
그밖의 다수 국가들도 와서 조공을 바칠 것이옵니다."
  왕은 묘청의 조언에 따라 1129년에  궁을 완공하여 이를 대화궁이라  명명하였다. 사실상 
당시 이자겸, 척준경의 난과 여러 반란의 와중에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궁궐들이 서의 소실
되어 버린터라, 왕도 그의 말에 순순히 따르기도 했던 것이다.
  이외에도 묘청 일파는 여러 기발한 문제 등을 들고 나와 왕에게 주청을 드리기도 하여 당
시 여러 사람들로부터 조소를 받기도 하였다. 한 번은 묘청이 왕에게 칭제건원과 금나라 공
격을 요청하였다(1129년). 그러나 이는 김부식을 비롯한  사대주의자들(유교 세력)의 적극적
인 반대로 좌절되고 말았다.
  하루는 묘청 일파가 남몰래 큰 떡을 만들어 그 속에 기름을 넣은 후 그것을 대동강에  가
라앉게 했다. 이들은 거기서 기름이 수면으로 떠올라 그 빛이 오색영롱하게 보이도록 한 다
음, 이는 신룡이 그 속에 있어 침을 뱉는 것이라고  거짓 선전하여 서경 천도를 재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얕은 속임수는 곧 탄로나고 말았다.  게다가, 1132년에 서경 행차 도중 
갑자기 폭풍우를 만나 많은 인마의 사상자들을 낸 일 등 여러 불길한 일들이 겹치는 바람에 
묘청의 위신은 형편없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1132년에는 임원애가 상서하여 묘청 등을 죽일 것을 요청하였고, 1133년 12월에는 문공유 
등이 상소하여 묘청 일파를 멀리 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1134년에는 임완 등이 묘청을 죽일 
것을 상소하였다. 그런데도 묘청은 건재를 과시하듯  1134년에 삼중대통 지누각원사에 올랐
으며, 그 뒤에도 계속하여 왕에게 서경  천도를 주청하였다. 그러나 1134년 9월에  유신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인종은 서경 천도를 단념하겠
다는 뜻을 공식적으로 내비쳤다. 이렇게 되자, 서경파와 개경파와의 관계는 파탄이 나고  말
았다.
  서경 천도가 불가능해지자, 묘청은 1135년  정월에 마침내 서경을 기반으로 하여,  서경의 
분사시랑 조광과 동병부상서 유담 등과 더불어 난을 일으켰다. 그는, 개경의 타성적이며  부
패한 귀족사회의 상태를 결코 좌시할 수  없다는 명분과 음양도참설에 바탕을 두고  서경인 
중심의 중흥정치를 베풀겠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그러자  서북농민들이 이에 호응하여 일제
히 봉기하였다. 그는 반란군을 이끌고 부유수 이하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관리들을 비롯하여 
개경인으로서 서경에 와 있던 사람들을 모두 잡아가두고, 자비령 이북의 길을 차단하였으며, 
서북면 안에 있는 여러 고을의 군대를 전부 서경으로 집결시켰다.
  그런 다음, 국호를 대위라 하였고 연호를 천개라 하였으며, 자기가 이끄는 부대를  천견충
의군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모든 관청의 관리들을 서북인으로 채운 다음,개경으로 진격할 태
세를 갖추었다.
  한편, 개경에서는 김부식이 평서원수로 임명되어, 출정에 앞서  먼저 서경파인 백수한, 정
지상, 김안 등을 처형한 다음,  좌,우,중 3군을 직접 지휘하여  평산역, 관산역(신계), 사암역
(수안)을 거쳐 성천으로 진격하였다. 성천에 잠시 머물러 있으면서 김부식은 서경 주위의 여
러 성에 '반역자를 처단하자'는 내용의 격문을 보내어 설득하여 그의 휘하에 병사들을  끌어
들였다. 그런 다음, 연주를 거쳐 안주로 나아갔다.
  김부식은 반란군에 대한 포위망을 좁혀  가면서도 계속하여 7~8회에 걸쳐 사람을  보내어 
반란군들에게 항복하라고 권유하였다. 그러자 반란의 주모자 중 장수 조광이 형세가 불리해
져 감을 깨닫고서 묘청, 유담, 유담의 아들 유호의 목을 베어 분사대부경 윤첨 일행으로  하
여금 개경으로 가지고 가서 죄를 사해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개경의 조정에서는 오히려 
사면 대신에 윤첨일행을 옥에 가두어 버렸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조광은 자기도 결코 화
를 면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단정하고는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켜 관군에 완강하게 저항했
다. 그는 인종이 보낸 김부, 내시 황문상을 죽여 버렸으며, 김부식이 보낸 녹사 이덕경도 죽
여 버렸다. 그리고 정부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선요문에서 다경루까지 강을 따라 6문이 있는 
1천7백30칸의 성을 쌓고서 앞으로 닥쳐올 전투에 철저히 대비하였다.
  그러나 좌,중,우,전,후의 5군으로 나누어진 관군들에  의해 성이 겹겹이 포위된 데다가  성 
안의 식량이 바닥나 버려 극도로 사기가 저하된 반란군은 항전을 벌인 지 1년만인 1136년 2
월에 관군의 총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묘청의 시신은 개경으
로 보내져 효시(시체를 관중에게 구경시킴)를 당하였으며, 1136년 4월에 서경의 관료들이 모
두 처형당했다.
  이로써 묘청의 난은 발발한 지 1년 만에 진압되었으며,  이후 개경파가 다시 정권을 장악
하였다. 서경의 분사제도는 폐지되었으며, 서경의 권력 구조상의 지위가 크게 격하되고 상대
적으로 개경의 문신귀족 세력이 팽창, 독주하게  되어, 고려 권력 구조의 양대 균형이  깨져 
버렸다. 이때부터 무인을 경멸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이는 훗날 무신정변이 일어나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정중부의 난(1170년)
  정중부의 난은 왕의 방탕, 왕권의 실추, 문벌귀족들의 타락과 횡포, 무신들의 지위 격하와 
이에 따른 불평불만, 그리고 정치적 모순과 지배층의 모순 등이 원인이 되어 1170년에 일어
난 무신의 난이다.
  
  문관들은 배터지게 먹고 놀 때 무관들은 끼니 굶고 보초서?
  천민 출신인 정중부(1106-1179년)는 처음에 주의 군적에 올랐다가, 기골이 장대하고 용맹
스러워서 인종 때 견룡대정으로 발탁되었다. 어느 날 그가 왕 앞에서 무예시범을 보이고 있
을 때였다. 그때 나이 어린 내시 김돈중(김부식의 아들)이 촛불로 정중부의 수염을 태워 버
렸다. 느닷없이 이런 수모를 당한 정중부는 분을 참지 못하여 김돈중의 멱살을 잡아 때려눕
혀 버렸다. 이 때문에 그는 김부식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의종(고려 18대왕)이 간곡히 만류
하였으나, 김부식은 고집을 꺽지 않고 정중부를 매로 엄히 다스리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
에 왕은 이 사실을 정중부에게 미리 알려주어, 그가 화를 면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인종의 뒤를 이어 1146년에 19세의 나이로  고려 18대 왕위에 오른 의종은  문벌귀족들의 
견제와 위협, 횡포에 대한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 원래 나약하고 섬세한 성품의  소유자였던 
의종은 그들에게서 신변의 위협마져 느꼈으며, 이 때문에 신경쇠약까지 걸려 있었다. 그래서 
그는 틈만 나면 궁궐 밖으로 나가 세상 바람을 쐬기를  좋아했다. 그는 1154년에 서경에 중
흥사를 창건하였으며, 1158년에는 백주에다 별궁을 지어 놓았다. 그러나 그는 되도록 선정을 
베풀려고 애를 썼다. 그는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하곤 했다.
  "민은 나라의 근본이니라!"
  이를 통해 은근히 문벌귀족들의  착취행각을 비난하며, 왕권의 회복을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지만 그의 소망은 개경 출신 문벌귀족들의 견제와  훼방 때문에 무위로 끝나
고 말았다. 그래서 왕은 시간 나는 대로 사찰을 돌아다니거나  유흥을 즐기는 일 외에는 별
로 할 일이 없었다. 의종은 말년에 이르러 거의 방탕과 사치 향락에 젖어 지냈다.
  의종 초에 정중부는 교위가 되었으며,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상장군에 이르렀다. 그런데 
당시 숭문억무정책으로 왕이 주연을 베풀 때마다 문신들은 연회석에 참석하여 같이  즐겼지
만, 무신들은 연회석에서 소외되고 그 주변 경비만을 맡아야 했다. 또 때로는 보초를 서느라 
끼니조차 제대로 때우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무신들 사이에 불평불만이 팽배하였
다.
  1164년(의종 18년)에 왕이 인지재에서 문신들과 유흥을 즐길  때에도 정중부는 하루 종일 
끼니를 굶고 경비를 서야 했다. 이때 그는 김돈중에게 품었던 원한까지 곁들여 반역을 꾀하
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1170년 왕이 화평재에서 연회를 베풀 때에도, 무신들에게는 끼니조차 제공하지 않자, 견룡
행수 산원(정8품) 이의방과 이고등이 소변을  보러 나간 견룡대의 인솔  책임자인 정중부를 
뒤따라 와서는 이와 같은 차별 대우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털어놓았다. 하급장교의 위
치에 있었던 이들은 이전에도 대장군 우학유를 찾아가 반란을 꾀하자고 권유했으나, 현실에 
안주하고자 했던 우학유는 이를 거절한 바 있었다.
  "문관들은 배가 터지도록 먹고 마시고 취하여  즐기는데, 우리 무관들은 굶주려 끼니조차 
때우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이대로 참고만 있으란 말입니까?"
  이리하여, 정중부는 서로 뜻이 맞은 이의방, 이고와 함께 반란을 도모하고자 모의하게  되
었다.
  "아직은 시기가 좋지 않아. 좀더 기다려  보기로 하세. 왕이 연복정에서 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보현원으로 옮겨 계속 연회를 베풀거든 우리 함께 거사하기로 하세."
  다행히 그들이 바라던 대로 왕은 궁궐로 돌아가지 않고, 그 이튿날인 8월30일에 보현원으
로 향했다. 왕은 보현원으로 향하던중 오문에 이르렀을 때 술잔치를 베풀더니, 취기가  오르
자 무신들에게 오병수박희(일종의 무술 시범)를  하도록 명하였다. 그러자 무신들을 비롯한 
군졸들이 서로 권법을 자랑하며 무술 시범을 보였다. 그런데 무술 시범을 보이고 있던 도중 
환갑에 가까운 대장군 이소응이 젊은 군졸과 겨루다가 힘이 부쳐 잠시 뒤로 물러나 쉬게 되
었다. 이때 문신 한뢰가 다가와 이소응의 뺨을 보기 좋게 한 대 후려갈기며 조소했다.
  "이 늙은 놈아! 그래 대장군으로서 어찌 군졸 놈한테 밀린단 말이냐. 네 놈은 할 일  없이 
녹만 받아먹는 도적놈이로구나!"
  이에 호응하여 이복기, 임종식 등의 문신들이 나서서 이소응을 조롱했다.
  "태평성대가 계속되니, 무신놈들은 놀고 먹어 비계살만 쪄 힘도 못 쓰는구나!"
 그러면서 그들은 손뼉을 치며 크게 웃어댔다. 이때 정중부, 김광미, 양숙, 진준 등 무신들의 
낯빛이 일시에 변하였다. 정중부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문신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쏘았다.
  "이소응 장군이 비록 시세 없는 무관이지만, 품계로 보아 3품대장인데, 어찌 이럴 수 있는 
거요?"
  무신들의 낯빛이 심상치 않자, 의종이  나서서 정중부의 손을 잡으며 제지하였다.  그리하
여, 일단 한 고비를 넘겼다.
  해질 무렵 왕의 일행은 보현원에 이르러 각자 침실에 들었다. 정중부가 무신들 중 이의방, 
이고, 김광미, 양숙, 진준 등을 불러모아 놓고 그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편과 문신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오른쪽 소매를 빼고 복두를 벗도록 하자. 
그렇지 않은 자는 모조리 죽여라."
  이어 이의방과 이고가 왕명이라면서 왕의 호위군대(순검 군사)를  조용히 한 곳에 불러모
았다. 그런 다음, 낮에 그들에게 모욕을 주었던 임종식과 이복기를 제일 먼저 붙잡아 살해해 
버렸다. 이를 목격한 한뢰가 왕의 침실로 잽싸게 뛰어 들어가 왕의 옷자락에 매달려 살려달
라고 애걸했지만 그도 이고의 칼에 맞아 숨을 거뒀다. 그날 밤, 무신들은 왕을 수행했던  문
신들 대부분을 죽여 버렸다.
  왕이 환관을 불러 살상행위를 즉시 중지하라고 명령을 내렸으나,  왕명을 따르는 자는 없
었다. 정중부와 이의방의 지휘를 받은 무신들은 문신들을 모두 죽인 후 시체들을 확인해 보
았다. 그때서야 그들은 문신 김돈중이 달아난 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 그들은 위기의식을 느
꼈다.
  "그 놈이 궁성으로 들어가 태자를 옹립하고 우리를 역적으로 몰면 형세가  어찌될지 모른
다. 즉시 김돈중을 찾아 없애지 않으면 우리가 당하고 만다. 쳐들어가자, 궁궐로!"
  반란군들은 그날 밤 왕을 데리고  개경의 궁궐로 돌아가서 조정에 남아  있던 문신들, 즉 
최보칭, 허홍재, 서순, 최온 등을 비롯한 50여 명을 모두 살해해 버렸다. 정중부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핏발 선 눈빛으로 외쳐댔다.
  "문관을 쓴 자는 서리라 할지라도 씨도 남기지 마라."
  일반 군졸들도 가세한 반란군들은 개경  거리를 활보하며 문관들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그들은 눈에 띄는 대로 문관들을 잡아 죽여 버렸다. 이리하여, 문관들 1백여 명이  정중부의 
난으로 목숨을 잃었다. 당시 중앙 문관의 정원은 총 5백32명이었고, 그이속의 정원은 총 1천
1백65명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왕은 정중부에게 살인행위를 그만 중단하라고 회유하였다. 그러나 이
미 사태는 정중부 혼자만의 힘으로 진정시키기에는 확대되어 버린 뒤였다.
  그러나 정중부는 이 정도쯤 해서 사태를 수습하고 싶었다. 그는 문신 몇 사람에 대해서만 
불만이 있었을 뿐 그 외 다른 문신들과 왕에 대해서는  별 불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서 그는 반란군들을 진정시키고자 애를  썼다. 대장군 진준도 반란군을  진정시키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이 미워하는 것은 문신  4~5명뿐인데, 지금 무고한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데 하필 이때 환관 왕광취가 반격을 가해왔다. 그러자 정중부는 어쩔 수 없이 반란군
을 이끌고 왕을 수행하고 있던 내시등 20여 명의 목을  잘라 버렸다. 왕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반란군의 핵심 인물들을 주요 요직에 두루 임명하고 무신들을 모두 한 계급씩 승진시
켰다. 그러나 왕이 궁궐에 머물러 있는 한 계속적인 반격이 있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반란군
들을 자극시켜, 결국에는 왕을 유배시키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의종은 처음에는  군기감에 
갇혀 있다가 다음에는 영은관으로, 이어 다시 거제도로 유배당하게 되었다. 이때 태자는  진
도로 유배당했다.
  반란군은 의종을 폐위시키고 난 뒤, 의종의 동생인 익양공 호(명종,고려 19대왕)를 즉위시
켰다.
  이때부터 무신정치가 시작되어 향후 약 1백여 년 동안  고려에 있어서 정치적, 문화적 암
흑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정중부는 광정동택, 관북택, 천동택 등 전왕의 사저와 거기에 축적해 놓은 재물을 이의방, 
이고, 이의민 등의 반란군 핵심들과 함께  나눠 가진 후, 자기 스스로 참지정사가  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이의방, 이고 등과 함께 벽상공신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서해도의 군과 현들을 
그의 출신지인 해주에 예속시켰다. 이어 중서시랑평장사, 문하평장사, 서북면 판사, 행영병마 
겸 중군병마 판사를 두루 역임하였다. 그리고 반란군의 주모자인 이고와 이의방은 대장군의 
서열에 올라, 집주의 직책을 겸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반란에  참여했던 하급 장교들, 즉 조
원정, 석린, 이영진 등은 정6품에  해당하는 낭장(2백여 명의 군졸을  통솔하는 하급장교)에 
임명되는 정도에 불과했다.
  사태가 수습된 후인 1171년 1월이었다.  이고는 이의방이 자기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이 불만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의방을 제거하고 자기 혼자서  정권을 독점할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는 우선 자기 심복을 많이 만들어 동조 세력을 규합하고, 개경 내의 불량소년들을 
끌어모으는 한편, 법운사의 승려  수혜와 개국사의 승려 현소등을  자기편으로 가담시킨 후 
함께 모역을 도모했다. 그들은 태자의 관례식때 거사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고의 심복인  김
대용의 아들이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알렸다. 그러자 김대용은  자기 친구인 내시 채원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채원은 이를 직접 이의방에게 알렸다.
  이것도 모르고 이고는 여정궁에서 태자의 관례식을 마치고 천천히 문을 나서다 미리 대기
하고 있던 이의방의 칼에 맞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같은 해 4월에는 채원등이 조신을 죽이
려다 오히려 이의방 일파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이후 세력이  커진 이의방에게 두려움을 느
낀 정중부는 한때 집안에만 틀어박혀 두문불출했다. 그러자 이의방은  그의 형 이준의와 함
께 손에 술을 들고 찾아와서 정중부에게 뜻밖의 제의를 했다.
  "우리가 부자의 인연을 맺도록 합시다."
  사실은 이의방도 정중부가 혹시나 자기를 해치지 않을까 내심  초조해 왔던 터였다. 정중
부는 이 제의를 혼쾌히 받아들였다.
  1173년 8월에 동북면 병마사 간의대부 김보당이 무신들이 공모하여 왕을 몰아냈다고 분개
하여 장순석, 유인준 등을 비롯한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반기의 깃발을 들었다. 그들은 전왕 
의종을 경주로 모셔온 후 남북에서 서로 호응하여 궁궐을  치기로 하였다. 그러자 정중부는 
관군을 이끌고 이를 토벌한  후 김보당을 사로잡았으며, 김보당의  잔당 장순석과 유인준을 
따라 경주로 간 의종을 사로잡기 위해 이의민을 급파하였다.  이의민은 군사를 이끌고 경주
로 내려가 전왕인 의종을 사로잡았다.  그는 전왕을 곤원사로 끌고가 연못  앞에 앉힌 다음 
술을 한 잔 따라올렸다. 이때 이의민의 부하 박존위가 큰 이불로 왕을 감싸 버렸다.  이의민
은 큰 가마솥 두 개를 가져오게 하여 왕을 한 솥 안에 집어넣고 두 솥을 합한 다음 묶어 그
대로 연못 속에 던져 버렸다. 이렇게 하여 그는 의종을 죽인 후  그 등뼈를 추려 연못 속에 
던져 버렸다.
  한편, 생포된 김보당은 문초를 당할 때 엉뚱하게도 물귀신 작전을 썼다.
  "문신들 가운데 나와 공모하지 않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
  이 거짓 진술을 그대로 믿어 버린 정중부는 문신들을 모조리 처형하려 했다. 그러자 이준
의와 진준이 적극 만류하였다. 그리하여 더 이상의 살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1173년 10월에는 3경 4도호  8목 이하 군,현,관,역에 이르기까지  문신들을 축출해 버리고 
무신들을 기용하였다.
  1174년에 또다시 서경유수 조위총이 난을 일으키자 이에 대한 토벌 책임을 맡은 이의방의 
군대가 의외로 패하고 말았다. 같은 해에 증흥사의 승려  2천여 명이 횡포를 일삼는 이의방
을 죽이려고 거사하였으나 이들 또한 곧 진압되고 말았다.
  이 무렵 이의방은 정권욕에 사로잡혀 자기 딸을 새 태자비로 삼으려고 하였다. 명종의 태
자(후일 강종)에게는 이미 태자비가 있었으나, 이의방은 자기 권력을 남용하여 태자비를 내
쫓고 자기 딸을 새 태자비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다른 무신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나
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의방은 고집스럽게 자기 뜻을 관철시켰다.
  이 무렵 북쪽에서 조위총이 난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의방은 조위총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집결한 토벌군을 선의문 앞에 집결시켜 놓고 사열하였다.  그의 뒤에는 정균과 종참이 
뒤따랐다. 사열 도중 정균이 이의방에게 말을 걸었다.
  "상장군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자 이의방이 고개를 돌리며 대꾸했다.
  "무슨 일인데?"
  바로 그때였다. 종참이 칼을 빼어 이의방을 한 칼로 베어 버렸다. 정균 일파는 이때  이의
방의 형 이준의와 그의 심복 고득원등도 함께 죽여 버렸다. 이어 새 태자비도 궁 밖으로 내
쫓김을 당하고 말았다.
  무신 정권은 윤인첨과 두경승이 이끄는 토벌군을 증파하여 1176년 6월에 거의 22개월이나 
끌어오던 조위총의 난을 평정하고 반란 주모자들을 체포하여 모두 처형해 버렸다.
  1174년 12월에 문하시중이 된 정중부는 일대  개혁을 바라는 일반 무신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지 못해 하급무관들과 많은 갈등을  겪어야 했다. 게다가 의종을  복위시키고자 하는 
무리들의 잇따른 반란 때문에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그러다가 1175년에 왕으로부
터 궤장을 하사받은 후 치사(나이가 많아  관직을 사양하고 물러남)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70세였다. 그러자 정균(정중부의 아들)과 송유인(정중부의 사위)등이 정중부의 뒤를 이어 권
세를 누리며 부귀의 극치를 이루었다. 승선이라는 벼슬에 오른  정균은 본처가 너무 신분이 
낮고 미색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내쫓아 버리고, 대신 상서 김이영의 딸을 유혹하여 아내
로 삼았다.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궁궐 내의 궁녀들과 음란한 행동을 일삼았으며, 나아가 
공주까지도 차지하고 싶어 안달을 하였다.
  이 즈음, 경대승(1154-1183년)과 그의 심복 견룡대의 허승과 대정 몇 사람은 정균과 송유
인 일파의 발호와 세도에 불만을 품고서 그들을 쓸어 버릴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
다. 자기 아버지 경진이 불법으로 모은 재산을 모두 군부에  바쳐 버리고 청렴한 생활을 하
고 있던 젊은 청년 장군 경대승은 무인 집권 이후 갖은 횡포를 일삼아 온 무인  집권자들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겨왔었다. 그러던  중 그는 결국  허승, 김광립 등과 함께  1179년(명종9
년)9월16일에 거사하기로 맘을 먹었다.
  궁중에서 열리는 장경회가 끝난 날인 9월16일 저녁에 모두들 술에 취해 잠들어 있는 틈을 
타서 경대승은 궁 안으로 침투하였다. 그런 다음 궁녀를 품에 안고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정
균을 단칼에 처단해 버렸다. 그리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경대승의 복병들이 일시에  궁
성 담을 뛰어넘어 들어와 숙직대장 이경백과 지유 문공려 등을  죽여 버렸다. 그런 다음 경
대승은 왕의 침전 밖에 이르러 아뢰었다.
  "신 등이 사직을 보전키 위해 정균을 죽였으며, 곧이어  역적의 무리를 모두 없애 버리겠
나이다. 폐하는 아무 염려 마시옵소서."
  그러자 왕은 궁문까지 나와 경대승에게 술까지 하사하며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경대승은 
그 즉시 어명을 받고 금군을 이끌고 출동하여 송유인과 그의 아들을 살해했다. 이때 정중부
는 미리 낌새를 알아차리고 도망하여 어느 민가로 뛰어들었으나, 민간인들의 고발로 붙잡혀 
처형되고 말았다. 경대승은 다음 날, 정중부와 정균의 일가족과 송유인의 머리를 거리에  매
달게 하여 사람들에게 구경시켰다.
  왕은 경대승을 불러 치하의 말을 하며 그에게 승선의  직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경대승은 
사양했다.
  "신은 문자를 모르옵니다. 그러니, 승선의 직을 거두어 주옵소서."
  그러자 왕이 이부시랑 오광척이 어떻겠느냐고 하면서 경대승의 의향을 물었다. 그러자 경
대승은 오광척이 벌써 승선의 자리를 탐내고 왕에게 미리 아뢴 것이 틀림없다고 여겨, 그를 
잡아 죽여 버렸다. 이외에도 김광영, 석화, 습련, 송득수,  기세정 등 정중부 일파를 모두 잡
아 죽여 버렸다. 그러자 무신들의 불평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위협을 느낀  경대승
은 자기자신의 호신을 위해 자기 집에 결사대 1백여 명을 배치해 놓고 그 자들이 자는 방을 
도방이라 칭하였다.
  경대승과 함께 공을 세운 허승은 장군으로 승격되었으며, 김광립은 어견룡의 행수가 되었
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 세력을 키우면서, 동궁의 궁녀들과 함께 태자의 방 근처에
서 술을 마시고 노래 부르며 방자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자 경대승은 그 둘을 잡아다
가 문초한 후 처단해 버렸다. 이리하여, 경대승은 명실공히 정권을 독점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183년 봄에 경대승은 병을 앓아 몸져 눕게 되었다. 그 후 자꾸만 야위어 가던 
그는 그 해 7월 땡볕이 쨍쨍 내리쬐던 어느날 낮잠을 자다가  가위 눌리는 꿈을 꾸었다. 그
로부터 며칠 후 그는 30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러자 도방의 결사대는 경
대승이 그 동안 축적해 둔 물건들을 제멋대로 집어들고서 모두 달아나 버렸다.
  
    조위총의 난(1174-1176년)
  조위총의 난은 1174년9월에 황해도와 평안도 일부지역을 중심으로 조위총 등이 이끄는 봉
기군이 정중부 일파의 부패한 무신정권을 치기 위해 일으킨 난이다.
  
  무신정권의 전횡을 눈뜨고 못 보겠다
  조위총(?-1176년)은 병부상서로 서경 유수를 겸직하고 있던 중,  1170년(의종24년)에 정중
부, 이의방 등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손에 넣고  전횡을 일삼자, 1174년(명종4년)9월에 격
문을 돌려 정중부 일당을 치겠다고 선언하였다.
  "듣자 하니, 개경의 중방에서 의논하기를, 우리 북경의 여러 성이 사납고 난폭해져서 마땅
히 토벌해야 한다고 하면서, 대군을 보내 우리를 공격한다고 하니, 우리가 어찌 가만히 앉아
서 죽기만을 바라겠는가."
  이러한 조위총의 거짓 격문을  읽은 재령 이북(서흥에서 봉산일대까지의  지역)40여 성의 
수령 대부분이 이에 동조하여 반기의 깃발을 들었다. 그들은  모두 몇몇 무신들이 독차지하
다시피하여 휘두르는 무신정권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그 동안 지방 관
리들의 수탈에 견디지 못하던 농민들 상당수도 조위총의 봉기군에 가담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문신 출신인 평장사 윤인첨을 원수로 삼아 3군을 거느리게 하여 반란
군을 진압케 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내시예부낭중 최균을 여러  성에 보내어 반란군에 합세
하지 못하도록 회유책을 썼다.
  진압군은 재령 근처의 절령에 이르러 반란군을 만나 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세찬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앞을 제대로 내다볼 수 없었다. 게다가  진압군은 
그곳 지리에 익숙지 못한 터라 함부로 진격할 수조차 없었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조위총
은 선봉장으로 용감히 돌진하여 진압군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진압군은 혼비백산하며 도주
해 버렸다. 이때 윤인첨도 포위당했으나, 도지병마사인  정균(정중부의 아들)의 도움으로 봉
기군의 포위망을 뚫고 간신히 탈출에 성공하였다.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봉기군은 그 여
세를 몰아, 동계 방면의 화주영을 점령하고  있던 김박승, 조관 등과 합세하여 개경의  교외 
지역까지 진격해 나갔다.
  이때 개경에서는 화가 난 이의방이 서경  출신의 장수들, 즉 대장군 김덕신, 장군  김석재 
등을 모두 잡아 처형해 버렸다.  그런다음, 이의방은 군대를 끌어  모아 봉기군과 대처했다. 
그는 최숙에게 정예기병 수십 명을 보내 봉기군의 취약한  곳을 기습하게 했다. 기병부대에 
의해 허를 찔린 봉기군은 놀라서 일시 후퇴했다. 이를 기점으로 하여 이의방이 이끄는 관군
은 봉기군을 대동강 유역까지 몰아붙였다. 그러자 봉기군은 서경 성문을 굳게 닫아 걸고 토
벌군에 강력히 저항하였다. 토벌군은 추위 때문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일단 후퇴하여 전
열을 가다듬었다. 그런 다음 같은 해 11월에 이의방은  토벌군을 5군으로 재편성한 뒤 윤인
첨을 원수로 임명하고 두경승을 후군총관사로 삼아 총공격을 개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때 어이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의방이 자기 딸을 무리하게 태자비로 세
우고자 하여 무신들의 반감을 샀던 탓에 정균(정중부의 아들)과 종참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
던 것이다. 이에 정중부 일파는 조정 내의 대신들을 무마하고  시간을 벌기 위해 조위 총에
게 협상 안을 제시하였다.
  그러자 조위총은 사신을 보내 `이의방을 처단한 것을 축하한다`는 상표를 조정에 보냈다. 
그러나 정중부 일파는 화해는커녕 그 사신을 옥에 가둬 버리고 말았다. 정중부 일파의 얄팍
한 기만책을 간파한 조위총은 다시 봉기하였다.
  1175년 1월에 재편성된 토벌군이 서경을 향해 진격하였다.  두경승은 토벌군을 이끌고 함
남의 남쪽을 거쳐 서북 지방에 있는 연주(개천)를 먼저 공략하였다. 그러나 연주 전투는 수
개월이나 걸렸다. 조위총은 모든 가능한 지원 병력을 연주로 보내 끝까지 저항하였지만,  두
경승의 집요한 공격에 밀려 끝내 연주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봉기군 수백 명이 
포로로 잡혔다. 그러자 이북 지역의 여러 성들이 하나둘씩 토벌군에게 투항해 왔다. 이제 유
일하게 남은 것은 조위총이 지키고 있는 서경뿐이었다. 두경승은  서경의 성을 완전히 포위
하고 동북쪽에 흙을 쌓아 올려 그 위에서 성안을 집중 공격하였다. 사면초가에 빠진 조위총
은 김존심과 조규를 금으로 보내 지원부대를 요청했다.
  "이의방이 왕을 살해하고 모반하였으니, 이를 물리칠 지워 군대를 보내 달라."
  그런데 금나라에 사신으로 가던 도중에 김존심이 조규를 죽여버리고 토벌군에 투항해  버
렸다. 조위총은 다시 서언을 사신으로 보내 금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금은 조위
총의 제의를 거절해 버리고, 오히려 사신을 붙잡아 고려 정부에 넘겨줘 버렸다.
  금의 군사 지원에 대한 소망이 좌절되자, 조위총의 기세는 현저히 꺽이게 되었지만, 그 후
로도 그는 근 1년 여 동안  성을 굳게 지킨채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그러던  중 1176년 6월 
토벌군의 윤인첨이 이끄는 부대는 서경의 통양문을, 두경승이 이끄는 부대는 서경의 대동문
을 동시에 공격하였다. 이러한 토벌군의 대대적인 총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서경성은 
함락되고 말았으며, 이때 수령 조위총은 붙잡혀 처형당했다. 간신히 성을 빠져 나간  봉기군
의 잔당들은 깊숙한 산으로 들어가 투쟁을 계속했지만, 그다지 위협적인 것은 못 되었다.
  
    망이의 난(1176-1177년)
  망이의 난은 1176년(명종 6년) 1월과 1177년  2월 두 차례에 걸쳐 공주를 중심으로  충청, 
전라 각지에서 사회질서, 신분질서가 문란해진 틈을 타서 일어난 민란이다. 당시 특수  행정
구역이었던 소를 배경으로 하여 일어난 난이기 때문에 명학소민의 난이라고도 하며, 조위총
의 난과 아울러 고려조의 최대 농민전쟁이다.
  
  사회질서 문란으로 민란 끊이지 않아
  망이, 망소이 등과 같은 농민 출신들이 주동이 되어  1176년 1월에 공주 명학소를 중심으
로 난을 일으켰다. 망이, 망소이 두 형제는 수탈을 일삼는 무신정권의 권세가들과 지방 관리
에 대한 불평불만자들을 끌어모아 스스로 `산행병마사`라고 칭하고서 봉기하자고 외쳤다. 그
들은 농민 대중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1천여 명을 이끌고 일시에 공주를 기습 공격하여  함
락시켰다. 이에 정부는 채원부와 박상수를 보내 회유책을 썼으나  그들은 이를 물리치고 완
강한 저항을 계속하였다. 이 무렵 남부 지방에서도 민란이 일어났다. 예산의 농민반란이  그
것이다.(고려 시대의 민란은 1162년부터 향후 40여 년 동안 전국 각지에서 끊임없이 일어났
다. 1162년 이천, 동주, 선주 등에서  대규모의 민란이 일어났으며, 1172년 창주, 성주,  철주 
등지의 서북지방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1174년에는 서경에서 조위총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서북방의 40여 성에서 동시에 민란이 일어났었다)
  봉기군의 세력은 날이 갈수록 커져서, 나중에는 공주  일대뿐만 아니라, 덕산, 여주, 진천, 
청주, 아산 등지까지도 차지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장정을 선발하여 정황재와  장박인에
게 장사(용병)3천명을 주어 봉기군을 공격토록 했다. 그러나 토벌군은 한 달도 못 되어 봉기
군에게 격퇴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조정은 다시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키고 이곳에 현
령과 현위를 보내어 위무케 하는 등 파격적인 행정 조치를 취하여 봉기군을 무마하고자 하
였다. 그러나 이 조치는 오히려 이 지역의 농민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어 명학소민들이 너
도나도 봉기군에 대거 동조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말았다. 봉기군은  예산현을 공격하여 
감무(조세 및 민호 징발을 직접 관장하던 책임자)를 생포하여 죽여 버렸으며, 그 여세를 몰
아 곡창지대인 충주까지 쳐들어가 점령하여 버렸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조정은 대장군 정세유와 이부를 남적처치병마사에 임명한 후  관군
을 증파하여 남적(중부이남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군을 남적, 그 이북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
군을 북적이라 했다)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벌인 결과 1176년 9월에 예산의 농민 봉
기군을 평정하였다. 이를 계기로, 관군의 집중 공격이 한층 심하여져서 다수의 농민  봉기군 
지도자들이 싸울 기력을 잃어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 이 때문에 상황이 불리해지자, 수령 망
이는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하여 1177년  1월에 토벌군과의 화해를 요청했다. 
그는 귀향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 식량을 지급해 줄 것 등을 화해 조건으로 내세웠다. 그러
자 조정은 농민의 지속적인 항쟁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 화해 조건을 받아들여, 망이  등과 
같은 반란 주모자들을 처형하지 않고 오히려 곡식을 주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도와주었다.
  그런데 조정은 망이가 귀향하는 동안에 명학소에 거주하고 있던 망이의 아내와  어머니를 
인질로 가두었을 뿐만 아니라 명학소에 토벌군을 보내 반란의  주모자들을 감시케 했다. 고
향에 돌아온 망이는 그때서야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격분한 망이는 1177
년 2월에 농민들을 끌어모아 다시  반기의 깃발을 들었다. 망이는  봉기군을 지휘하여 우선 
인근에 있는 가야사(덕산)라는  절을 공격하여 점령하였으며,  이어 황려현(여주)과 진주(진
천)를 함락하였다. 그러자 이에 힘입어 예산에서 손청도 다시 봉기하여 충청남도 북부 지역
을 공략했다. 망이가 이끄는 봉기군은 불과 열흘도 안  되어 충청북도 진천까지 점령하였으
며, 3월에는 홍경원이라는 사찰까지도 점령하여 불을 지르고  당대 권세가들과 결탁하여 특
혜를 누리면서 노비를 거느리고 호사스럽게 지내고 있던 승려 10여 명을 처형한 다음 주지
승을 협박하여 조정에 편지를 쓰게 하였다.
  "이미 우리 고향을 현으로 승격시키고 또 수령을 두어 무마하고서 곧 그 길로  군사를 보
내어 우리를 토벌하고 나의 모친과 처를 잡아 가두니, 그 뜻이 어디 있는가? 우리는 싸우다
가 죽을지언정 결단코 항복하여 포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반드시  개경으로 쳐들어가서 
이 분풀이를 하고야 말리라."
  이로써 조정에 대한 사실상의 선전포고를  한 망이는 봉기군을 지휘하여  공주와 아주(아
산)를 점령하는 등 청주를 제외한 충청남북도 전 지역과 경기도  일부까지도 파죽지세로 점
령해 버렸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조정은 강경책으로 선회하여, 1177년  5월에 충순현을 다시 명학소로 
강등한 후, 토벌군을 독려하기 위하여 선지사용별감을 파견하였으며, 토벌군을 3군으로 편성
한다음 주력부대로 하여금 먼저 손청(예산을 중심으로 일어난 봉기군  수령), 이광(미륵산을 
중심으로 일어난 봉기군 수령)등이 이끄는  봉기군을 공격하게 하여 주모자들을  잡아 죽였
다.
  갑자기 양 날개를 잃어 버린 망이의 봉기군은 그 기세가  한풀 꺽이게 되었다. 게다가 계
속되는 전투로 식량과 병기의 부족이 심했을 뿐만 아니라 농번기를 당하여 도망가는 농민들
의 수가 증가했기 때문에 사태가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봉기군은 정세유가 지휘하
는 토벌군이 삼면에서 동시에 쳐들어오는 바람에 도저히 이를 당해 낼 도리가 없어 항복하
고 말았다. 결국 망이와 망소이 두 형제는 생포되어 청주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
다.
  그러나 망이, 손청, 이광의 난은 이후 고려 시대에 수없이 일어난 민란의 주요 밑거름이요 
기폭제가 되어 주었다.
  1177년 5월에는 서경에서도 다시 민란이 일어나 서경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1178년 1월에 
이의민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서경의 봉기군은 다시 진압되고  말았다. 그리고 나머지 봉기
군도 같은 해 10월에 박제검이 이끄는 진압군에 의해  토벌되고 말았다. 그러나 1179년 1월
에 다시 서경 지방에서 민란이 재발하였다. 이때 이부가 서경 봉기군의 지도자인 견종을 꾀
어 살해해 버림으로써 무산되고  말았다. 1180년 1월에  다시 경성에서 폭동이  일어났으며, 
1182년 3월에 전주에서 기두, 죽동 등이 주동이 되어 관노들과 농민들을 이끌고 봉기하였으
나,한 달 만에 관군에 의해 평정되고 말았다. 그러나  같은 해 9월에 관성(옥천)에서 또다시 
민란이 일어났으나 곧 진압되었다. 1187년 9월에는 서북면  순주에 있는 귀화소에 안치되어 
있던 도적 수백 명이 탈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190년  1월에는 경주 지방에 민란이 일어
나자 관군이 출동하여 진압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같은 해 12월
에 강순의를 남로착적사로 임명하여 남적을 공격하여 난을 평정하였다.
  1193년 7월에는 경상도 운문에서 김사미가, 그리고 초전(위산)에서는 효심이 주동이  되어 
대규모의 민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곧바로 대장군 전존걸 등이  이끄는 토벌군을 보내 
민란을 진압토록 했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남로착적병마사인 최인이  이끄는 관군을 더 증
파하여 봉기군을 공격토록 했다. 그러자 1194년 2월에  경상도 농민봉기군의 지도자인 김사
미가 항복을 청해 왔다. 그러나 진압군은 김사미를 목을 베어 죽여 버렸으며, 그 해  12월에 
남로병마사로 하여금 봉기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결국 봉기군은 밀성(밀양)에서 격파당하고 말았으며, 봉기군의 지도자인 효심은  체포당했
다. 1198년 5월에는 개경에서 만적 등이 노비 폭동을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199년 2월에는 명주  및 동경(경주)에서 민란이 일어나  주군을 장악하였으며, 
1200년 5월에는 진주리 정방의 등이 민란을 일으켰고, 밀성(밀양)에서 관노 50여 명이 집단
으로 도망하여 운문적에 들어갔으며,같은 해 8월에는 전주의 잡족인들이 민란을 일으켰으나, 
1201년 1월에 진주의 민란은 정방의가 관군에 잡혀  처형됨으로써 평정되고 말았다. 1202년 
10월에는 탐라(제주)에서 민란이 일어났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경주 별초군이 폭동을 일으
켰다. 그 해 12월에 탐라 민란은 진압되었지만, 같은 달에 경주, 운문, 울진 등에서 봉기군들
이 연합하여 대규모  민란을 일으키고서  주군을 일시에  장악해 버렸다.  그러나 이듬해인 
1203년 4월에 경주 민란의 주모자인 도령이 잡혔으며, 7월에는  운문산 봉기군의 효좌도 잡
혔고, 8월에는 태백산 봉기군의 주모자인 아지마저 붙잡혀 마침내 민란은 평정되고  말았다. 
1203년 9월에는 부석사, 부인사의 승려들이 난을 꾀하다 모두 붙잡혀 섬으로 유배당하고 말
았다. 1217년 서경에서 최광수 등이  고구려의 부흥을 내걸고, 그리고 1237년에는  담양에서 
이언년 등이 백제 부흥을 각각 표방하고 난을 일으켰으나 평정되고 말았다. 이렇듯, 고려 시
대에는 크고 작은 민란들이 수없이 발생했다. 문벌귀족들의 횡포, 그뒤를 이은 무신들의  유
혈 정권 투쟁, 중앙집권 통치력의 약화, 지방관들의 탐욕, 중앙 권세가들의 토지겸병과 농민 
수탈, 무정부 상태나 다름 없는 중앙정부의 무능력, 그리고 그 동안 누적되어온 사회적 모순 
등이 이러한 민란들을 발발하게 하는 주요 요인을 제공했던 것이다.
  
    김사미의 난(1193-1194년)
  김사미의 난은 1193년(명종 23년)에 김사미 등이 경상도  운문산을 중심으로 농민들을 끌
어모아 일으킨 난이
  
  승천 꿈 꾸고는 신라 부흥 도모
  김사미(?-1194년)는 인접 지역인 초전(위산, 울산)에서 난을 일으킨 효심 등과 손잡고, 당
시 지방 관리들에 불만을 가진 농민들과  군소집단으로 흩어져 있는 반란 세력을  끌어모아 
경상도 청도에 있는 운문산을 본거지로 하여 봉기하였다. 그는 신라 부흥을 표방하며,  신라
의 유민들을 불러모아 각 지방에서 기세를 올렸다. 이에  조정에서는 대장군 전존걸을 책임
자로 하고 이지순, 김척후, 김경부, 노식 등이 이끄는 토벌군을 보내 반란군을 진압케  했다. 
그런데 전존걸의 휘하에 있던  이지순이 반란군과 밀통함으로써, 그를  통해 토벌군의 군사 
기밀을 미리 탐지할 수 있게 된 봉기군은 그 해 8월에 벌어진 토벌군과의 전면전과 그 후에 
벌어진 여러 전투에서 매번 승리할 수 있었다.
  이지순은 당시 집권 세력의 중심에 있었던 이의민의 아들이었다. 이의민은 경주에서 천민 
출신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소금장수였고, 그의 어머니는  절의 노비였다. 성년이 되
었을 때 그는 이미 키가 8척이나 되고 기운이 장사였다. 그의 형제는 셋이었는데, 그는 형제
들과 함께 경주에서 부랑자 생활을 했다. 한번은 김자양에게 붙잡혀 고문을 받았는데,  이때 
그의 두형은 고문을 견디지 못해 죽고 말았다. 혹독한 고문에도 살아남은 그의 기운을 칭찬
하며 김자양은 그를 경군으로 보내주었다.
  개경에 올라와 경군에 편입된 이의민은 씨름에 출중한 솜씨를 보여주었는데, 우연히 왕의 
눈에 띄게 되어 대정의 직책에 오르게 되었고, 이어 별장으로 승격하였다. 그러다가  보현사
에서의 정중부의 난 때 문신들을 제일 많이 죽인 공로가 인정되어 장군으로 승격되었고, 이
어 명종 3년에는 경주에서 전왕 의종을 죽인 공로로 대장군에 올랐고, 조위총의 난 때 세운 
공로로 상장군이 되었다. 그러나 1179년(명종 9년)에 경대승이  정중부를 죽이자, 겁에 질린 
그는 집안에만 틀어박혀 숨어 지냈다.  그러다가 경대승이 허승과 김광립까지  죽이자 아예 
벼슬까지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은거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경대승이 병으로 죽었다. 이때 왕은 이의민을 중용하지 않으면 그가 난을 일으
킬까 염려하여 그를 상경케 한 후 수사공 좌복야의 직에 임명하였다가, 다시 판병부사로 승
격시켰다. 이로써 병권을 장악하게 된 이의민은 이후부터 권세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
던 어느날 그는 양쪽 날개 밑에 일곱 빛깔의 무지개가 올라오더니 날개가 돋쳐 승천하는 꿈
을 꾸게 되었다. 그는 이 꿈이 자기가 장차 임금이 될 것을  예시해 준 것이라고 여겨 매우 
기뻐하였다. 그래서 그는 경주 출신인 자기가 나서서 신라의  부흥을 꾀하여야 하겠다고 결
심하고서 세 아들 중 제일 영악한 이지순과  함께 세심히 거사 전략을 세우고 이를 실천헤 
나갔다. 되도록 자기 심복을 요소요소에 등용하여 지지 기반과  세력을 차츰차츰 넓혀 나갔
다. 그러던 중 자기 연고지에서 김사미와 효심이 수천 명의 민중을 거느리고 난을 일으키자, 
그는 그들과 은밀히 내통하면서, 많은 재물을 보내는 등 측면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반면에, 그의 아들인 이지순은 겉으로는 신라 부흥을 표방하면서도 속으로는 봉기군이 포
획한 재물을 얻어 보려는 속셈으로 몰래 적과 내통하였다.  이지순은 도적의 무리가 물건을 
바치면 그것으로 자기 세력 확장에 사용했던 것이다. 물론  김사미와 효심도 이러한 이의민
과 이지순의 속셈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일단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어가기  위해 두 사람을 
최대한 이용하기로 하고 그들과 손을 잡았던 것이다.
  군사 기밀이 새어나가 봉기군에게 번번이 패하기만 하자, 토벌군의  지휘 책임을 맡고 있
던 전존걸은 갈등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는 이지순이 반란군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진작
부터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에, 속으로 이렇게 한탄하였다.
  "원칙대로 한다면, 이지순은 명백히 사형감이야. 내가 이  자를 법으로 다스린다면, 그 아
비가 나를 해할 것이고, 내 목숨이 두려워 그대로 놔둔다면, 우리는 적에게 계속 패할  것이
니,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인고?"
  이 때문에 몹시 괴로워하던 전존걸은 토벌군의 주력부대가 기양현에 이르렀을 때, 독약을 
먹고 자살해 버렸다. 지휘자를 잃어버린 토벌군은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1193년 11월에 다시 상장군 최인을 남로착적병마사로 삼고, 장군 고용
지를 도지병마사로 임명한 후 그들에게 보다 한층 보강된 토벌군을 주어 반란군을 본격적으
로 토벌케 했다. 최인은 대부대를 이끌고 효과적인 작전을 펼쳐  그 해 연말에 봉기군의 기
세를 상당히 꺽어 놓았다. 결국 김사미가 이끄는 봉기군은 1194년 2월에 토벌군에게 포위당
한 채 목졸리는 형세가 되었다. 그러자 봉기군들은 모두 토벌군에 투항하지 않을 수 없었으
며, 김사미도 이때 자수하지 않을수 없었다. 체포된 김사미는 그 즉시 참형을 당하였다.
  김사미가 처형당하자, 효심이 이끄는 봉기군의 사기도 크게 꺽이고 말았다. 그러나 효심은 
봉기군을 최대한 격려하고 수습하여 토벌군에 완강히 저항하였다.  그는 7천여 명에 달하는 
봉기군을 이끌고 1194년 4월에 밀양에서  대전투(저전촌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이때  그는 
상당한 군사력을 잃고 말았다. 그 후 그는 대전투를 피하고 토벌군을 피해 다니며전열을 가
다듬었다. 그러다가 그 해 8월 다시 봉기군은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조정에서 반란군의  가
족들에게 혹독한 처분을 내리는 등 전세가 점점 불리해져  갔기 때문이었다. 반란군이 다시 
전투 태세를 갖추자, 조정은 한편으로는 투항하는 자들에게 상을 내리는 등 회유책을  쓰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해 9월에 경주 일대에 계엄령을 내리는 등 강경책을 병행해 나갔다. 이 
때문에 봉기군 중에서 하나 둘씩 빠져 나가 토벌군에 투항하는 자들의 수가 늘어만 갔다.
  그러다가 1194년 12월에 수령인 효심마져 토벌군의  고용지장군에게 체포당하게 되자, 봉
기군은 완전히 와해되고 말았다. 이로써 한때는 수만의 봉기군을 거느리고 토벌군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며 경주  일대를 누비고 다니면서 신라의 부흥을  꿈꾸던 
김사미, 효심의 난은 2년 만에 평정되고 말았다. 앞서 김사미, 효심과 내통했던 이의민은 명
종 26년인 1196년 4월 8일에 왕이 보제사에 행차했을 때 병을 핑계삼아 미타산 별장에서 묶
고 있다가 최충헌, 최충수 형제와 그의 생질 박진재, 노석승 등의 칼에 맞아 죽었다.
  
    만적의 난(1198년)
  만적의 난은 1198년(신종 1년) 5월에 공사의 노비들을 모아 난을 일으키려다가 사전에 발
각되어 미수에 그치고 만 천민의 모반 사건이다
  
  언제까지나 노비로 고생만 하란 법 있나?
  만적(?-1198년)은 최충헌의 사노비였다. 그는 1198년 5월 초에 다른 사노비들, 즉 맛장.연
복.성복.소삼.효삼 등과 함께 개경  북산(송악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공사의 
노비들을 모아 놓고 난을 일으킬 것을 제의했다. 그는 이때 이렇게 선동했다.
  "정중부의 난 이후, 그러니까 경인년 이래 천민이나 노비 출신으로 고관대작이 된 사람이 
한둘이 아니외다. 우리라고 언제까지나 상전의 채찍 밑에서  고생만 하라는 법이 있습니까? 
이제 그만 권세가들의 도구 노릇에서 벗어납시다. 우리 모두 똘똘 뭉쳐 궐기합시다."
  만적이 이렇게 의분에 가득찬 목소리로 외치자, 그 주위에  모여 있던 노비들이 흥분하여 
외치면서 찬동의 뜻을 표했다. 이에  노비들은 머리를 맞대고 구체적으로  반란을 모의하게 
되었다. 언제 어떻게 봉기할 것인가를 숙고한 끝에 그들은 다음과 같은 치밀한 봉기 계획을 
세웠다.
  "우선 개경 내에 있는 노비들을 모두 결집시킵시다. 궁  밖의 노비들뿐만 아니라 궁 내의 
환관들, 궁노들과 손을 잡읍시다. 그런 다음 우리들은 흥국사 보랑에서 구정에 이르는  사이
에 일시 집결하여 북을 칩시다. 그러면, 궁내의 환관들이  이에 응할 것이고, 이때 궁노들은 
숙청할 자를 골라 죽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먼저 최충헌을 죽이고, 이어 각자 자기  주
인을 죽인 다음, 노비 문적을  불태워 버립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후 어떤 벼슬도 할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거사일은 이 달 5월 17일로 잡기로 합시다."
  만적은 미리 준비해 가지고 간 황지 수천 장을 오려 정자 모양으로 만들어 그것으로 거사 
동지라는 표식으로 삼았다. 
  드디어 거사일이 되었다. 이 날 공사의 노비들이 약속 장소로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런데 다 모이고 보니, 불과 수백명에 지나지 않았다. 개경에 있는 노비의 수가 이렇듯  적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만적 등 주모자들은 신중히 거사 대책을 논의했다. 결국 그들은 날짜를 
연기하여 보다 많은 인원을 결집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고는 다시 거사일을  잡기
로 하였다. 
  "오늘 모인 수로는 없을 것 같소. 그러니, 5월 21일 보제사에 우리 다시  모여 거사하기로 
합시다. 다음 거사일에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단단한 각오를 하고 나와 주기 바라오. 다음
에는 절대 연기하는 일이 없을 것이오.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일의 비밀이 보장되지 않으면, 
우리 모두 무사하지 못할 것이니, 이를 누설치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시오."
  그리고는, 각자 흩어져 돌아갔다. 그런데 노비 중 율학 박사 한충유의 노비인  순정이라는 
자가 배신을 하고 말았다. 그는 귀가하면서 불안에 떨었다. 거사일이 연기된 것이 어쩐지 꺼
림칙했다. 거사가 도저히 성사될 것 같지 않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더욱이 각자 자기  주
인을 죽인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의 주인 한충유는 매우 후덕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엇갈려 고민하다가 그날 저녁에  그는 주인의 처소로 찾아가 무릎을  꿇고 
모든 걸 사실대로 다 털어놓고 말았다. 그러자 한충유는 그에게 이렇게 일렀다.
  "이것 큰일이로구나! 너는 아예 밖으로 나갈 생각을 말고 집에 틀어박혀 있거라."
  한충유는 즉각 최충헌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자기 동생  최충수의 세력까지 제거한 최충
헌은 당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뭐라구? 종놈들이 난리를 일으키려고 해? 세상 망조로구나!  이놈들을 당장 체포하여 요
절을 내놓고야 말리라."
  최충헌은 병력을 출동하여 만적을 비롯한 노비  1백여 명을 대거 체포하였다. 그런  다음, 
그들을 모두 꽁꽁 묶어 임진강 물 속에 빠뜨려 생매장시켜 버렸다. 그 대신 봉기 계획을 미
리 발설시킨 순정에게는 은80냥을  주고 노비 신분에서 양민  신분으로 승격시켜 주었으며, 
한충유에게는 합문지후라는 벼슬을 상급으로 내려주었다.
  이렇게 하여, 만적의 난은 봉기도 채 못해 보고 끝나 버렸다. 이 난이 비록 미수 사건으로 
끝나 버렸지만, 이는 이후 일어난 천민들의 봉기에 밑거름이  되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막대
한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면, 1200년 5월에 진주에서 공사 노비들이 반란을 일으켜 고을 아
전들의 집 50여 채를 태우고 관리들을 잡아죽이는 사건, 같은  해에 밀양에서 관노 50여 명
이 운문 적에 합류한 사건,  1203년에는 개경의 노비들이 나무하러 가는  길에 전투 연습을 
하다가 발각되어 50여 명이 한꺼번에 처형되는 사건 등이 그것이다. 
  
    정방의 난(1200-1201년)
  정방의의 난은 1200년(신종 3년)에 주리의 부패와 학대에 불만을  품은 노비들이 난을 일
으키자 이에 충격을 받은 정방의가 무리를 모아 일으킨 난이다.
  
  노비반란을 기화로 손볼 사람 혼내 줘
  정방의(?-1201년)의 본관은 진주이다. 1200년(신종 3년)에 그는 진주의 창정으로서 평범한 
생활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 해에 공사의 노비들이 평소에 주리들의 부패와 학
대에 불평을 품고 있다가, 때마침 각 곳에서 일어나는 민란에 자극을 받아 1200년 4월에 드
디어 난을 일으켜, 인근주리의 집 50여 채를 불살라 버렸다. 이때 정방의의 집도 불타  버렸
다. 
  이에 충격을 받은 정방의는 난이 평정된 뒤인 어느 날 사록 전수룡에게 시위하러 등에 활
을 메고가다가 붙잡히게 되었다. 태수 이순중은 그를 문초한 후에 반란 혐의자로 몰아 읍아
의 감옥에다 가둬 버렸다. 그러자 정방의의 동생 정창대가 몰래 감옥까지 들어가 그를 극적
으로 구출해 주었다. 
  이후, 정방의는 앙심을 품고 동생 정창대와 함께 무리를 모아 난을 일으켰다. 그는 폭도들
을 이끌고 각 주리로 휘젓고 다니며, 평소에 원한을 품은 자들을 모조리 잡아 살해했다.  이
리하여 그의 손에 목숨을 잃은 자들이 무려 6천4백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자 조정에서 조통과 이당적등을  보내어 안무케 하였으나, 도리어  정방의 가 이끄는 
폭도들의 거센 세력에 위압당하여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그대로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
러나 관군에 잡히면 처형당할 것이 두려운 정방의는 읍 내의 은병을 많이 거두어 권신들에
게 뇌물로 갖다 바치며 훗날 자기 죄를 면하고자 고심하였다. 
  이 무렵 조정에서는 안찰부사 손공례를 보내어 보다 자세히 사태의 진상을 조사해 보도록 
하였다. 그러나 안찰부사가 조사할 때 정방의와 그 일당들의 보복과 행패가 두려운 조사 대
상자, 조사 결과 자연히 정방의 형제에게는 무죄가 선고되었고, 그대신 태수 이순중만  죄인
으로 몰려 유배당하고 말았다. 그렇게되자, 정방의, 정창대 형제의 기세는 더욱 올라갔다. 
  이렇게 되자, 폭도들에게 갖은 피해를 입게 된 주민들의 사주를 받은 합주의 도적 광명과 
계발 등이 진주로 쳐들어왔다. 그러자 정방의, 정창대 형제는 무리를 이끌고 도적들과  맞서 
싸워 그들을 전멸시켜 버렸다. 이후, 정방의의 횡포는 더 한층 기승을 부렸다. 
  살육으로 가득한 한 해가 그렇게 피비린내 속에서 더디게  넘어가고 새해가 되었다. 그러
던 어느 날이었다. 정방의 일당들의 극심한 횡포와 살육 행위를 더 이상 묵과 하 수 없다고 
판단한 진주 주민들이 일제히 의거하여 정방의가 이끄는 폭도들을 치열한 공방전 끝에 모두 
패몰시켜 버렸다. 궁지에 몰린 정창대는 성으로 올라가 한동안 반항하다가 주민들이 방심한 
틈을 타서 어디론지 도망가 버렸다.
  
    삼별초의 난(1270-1273년)
  삼별초의 난은 1270년(원종11년)부터 1273년까지 몽고 세력에 반대하여 강화도에 있던 삼
별초가 일으킨 항몽투쟁이다.
  
  끝까지 몽고군에 대항해 이 나라를 구하리라.
  1206년 칭기스칸(재위1206-1227년)은 몽고제국을  창건한 후  서로는 동유럽을, 동으로는 
금을 정복하고서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몽고는 1219년 거란족을 칠 때 협공에 동참해 준 고
려와 형제맹약을 맺었다. 그러나 남송을 정벌하기 위해 남송과 우호 관계를 맺고 있던 고려
를 견제할 속셈으로 1221년에 사신 저고여를 보내 고려에게 조공을 요구해 왔다. 이에 최우 
정권은 1225년에 공물을 받아 가지고 돌아가던 몽고의 사신 저고여가 압록강 연안에서 살해
당하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이 때문에 고려와 몽고는 적대관계가 되고 말았다. 몽고의 왕
오고타이(재위 1229-1241)는 자기 나라의 정세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1231년(고종 18년)
에 살리타이를 원수로 삼고 대군을 보내 고려를 침범케 했다. 이에 맞서 고려 군은 구성, 자
산, 광주, 충주 등지에서 완강하게 저항하며 전투를 벌였다.
  그러자 몽고군은 침입 4개월 만에 고려와 강화를 맺고  철수했다. 그 후에도 몽고는 여전
히 고려에게 무리한 조공을 계속 요구해 왔다. 사태가 점점 험악해지자, 고려 조정에서는 제 
2차 침공을 염려하여 1232년 6월에 강화도로 천도하였으며, 백성들을 산성이나 해도로 피난
가도록 했다. 이는 사실상의 항몽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분개한 몽고는 1232년 12월에 대군을 이끌고 제2차 침공을 감행하였다. 이때 정권 유지에 
급급한 최우 정권은 적극적인 항전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후퇴를 거듭했지만, 김윤
후가 이끄는 부곡민(천민)들은 살리타이의 주력부대와 맞싸워 살리타이를 죽이고 승리를 거
두었다. 그렇지만 이후 여러 차례 지속된 몽고 침입으로 고려의 땅은 초토화되어 버렸다. 백
성들은 몽고군에게 의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살육 당했으며, 마을은  거의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희생된 수는 제외하고라도, 몽고로 잡혀간 백성의 숫자만도 20만 여명이 넘었다.
  그런데도, 정권 유지에 급급했던 최씨 정권은 강화도에 틀어박힌  채 지속적인 대몽 항전 
및 강경책을 주장하는 등 대의명분에만 매달려  있었다. 1258년 3월에 별장 김준과  유사성, 
유경이 최의를 암살한 후 와에게 정권을 돌려 주었다. 1264년 5월에 몽고 사신이 와서 고려 
왕의 친조를  요구하자,  왕은 그   해 10월에  연경으로 가서  몽고의  세조(쿠빌라이:재위 
1260-1294)를 만난 후 12월에 귀국하였다.
  그러나 1268년(원종9년)에는 임연이 김준을 살해하고 정권을 잡았다. 그는 집권한 후 삼별
초의 군대와 무신들의 지지를 얻어 원종을  폐위시키고 왕의 동생인 안경공 왕온을  왕으로 
내세웠다. 그리고는 갑옷을 입고 삼별초  육번도방을 인솔하고 안경공의 집으로  가서 그를 
즉위시켰다. 그러자 몽고는 사신을 보내 원종과 임연 둘 다 함께 입조하라고 명하였다. 임연
은 몽고의 강압적인 태도에 그만 굴복하여 할 수 없이 5개월 만에 다시 원종을 복위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임연은 분을 참지 못하고 끙끙 앓다가 죽고 말았다.
  원종은 1270년(원종 11년)에 다시 몽고의 세조를 만나 사대를 할  것을 굳게 약속하고 귀
국하였다. 왕은 귀국하기에 앞서 전령을  강화도로 보내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 무렵, 교정별감으로 있던 임연의 아들 임유무가 부친의 뒤를 이어 삼별초를 이끌고자 하
였으나, 몽고의 조정과 원종의 밀명을 받든 홍문계, 송송례  등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이
로써 1백여년에 걸친 무신정권이 그 막을  내리게 되었으며 삼별초도 그 총 지휘자를  잃게 
되었던 것이다.
  원래 삼별초는 최우가 도적을 막기 위해 특별히 만든 군대였다. 그들은 도적떼를 잡기 위
해 저녁마다 순찰을 돌았다. 그런데 그 수가 점차 늘어나자 이를 야별초라 하였다. 그러다가 
이를 다시 좌별초와 우별초로 2분하였다. 그후 몽고에 잡혀  갔다가 돌아온 사람 중에서 선
발한 군대를 신의별초라 명명했다. 이러한 좌별초, 우별초, 신의 별초를 합하여 삼별초라 했
다 그러나 이 삼별초는 점차 무신 집권을 사병이나 다름없이 운용되었다.
  그 후 강화도의 고려 조정에서는 개경 환도 문제를 에워싸고 본격적인 대립을 벌였다. 그
때 원종을 중심으로 한 문신들은 대부분 개경 환도를 희망하였다. 그들은 대국인 몽고와 항
전을 벌이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고 상조하면서 개경으로 환도하여 몽고와 화친을 맺어 피해
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삼별초의 무신들은  그것이 몽고에 대한 굴
복이라 하여 완강히 반대하였다. 그러자  왕권 복위를 노리는 문신들은  무신들의 강경책을 
비난하였다.
  "육지에서 피해를 보는 것은 백성들뿐이오.  지금 백성들의 생존자는 열  명 가운데 두세 
명 정도에 불과하고, 농토는 갈수록 황폐화되어 가니 강화도  하나만을 지킨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오?"
  결국 강화도의 조정은 중신회의를 열고 마침내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결의하고 이를 공고
하였다. 이러한 굴욕적인 처사에 삼별초가 흥분하자, 원종은 이들을 무마하려 했지만 실패한
채 1270년(원종 11년) 5월 27일에 환도를 강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개경환도에 불응한 삼별
초군의 해체를 장군 김지저를 통해 통고했다.
  그와 동시에 삼별초의 명부를 압수해 갔다. 이에 삼별초군은 혹시 그 명부를 몽고군에 넘
겨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냐고 의심하였다. 그리하여 배중손은 야별초의 노영희와 함께 1270
년 6월1일에 난을 일으켰다. 배중손은 삼별초를 인솔하고 강화  궁정 안에서 왕실의 친척인 
승화후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무기고에서 무기를  군졸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관부를 설
치하고 관리를 임명하는 한편 연안 경비를 한층 강화하였다. 그러나 섬 내의 인심이 흉흉하
여 반란군에 호응하지 않을 뿐 아니라 관리들도 섬을 탈출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이 때문에 
약 3일간 강화도 성내에서는 무고한 사람들이 많이 참살되었다. 
  그러자 배중손은 개경 정부가 몽고와 결탁한 이상 강화에서 항전을 계속하는 것은 무리라
고 판단하고, 1270년 8월에 선함 1천여  척에 군량과 무기와 섬 주민과 섬  내에 남아 있던 
귀족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모두 인질로 잡아 싣고서 상당수의 노비들이 합류한 삼별초를 이
끌고 구포를 떠나 진도로 남하하였다. 이때 배중손은 진두지휘하면서 상기된 얼굴로 이렇게 
외쳤다.
  "어디를 가든 우리는 끝까지 몽고군에 대항해서 이 나라와 민족을 구해낼 것이다. 그리하
여 저 침략군의 근성을 뿌리째 뽑아 버리리라."
  진도에 도착한 삼별초는 그곳에 용장산성을 쌓고 궁궐을 짓고 군사시설을 갖춘 다음 그곳
을 근거지로 하여 남해 일대에서 눈부신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심지어 내륙의 나주
나 전주 등지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각 지방에 격문을 보내 항몽전에 참
여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렇듯 남부의 거의 전지역이 삼벌초에 의해 위협 당하자,  조정에서
는 1270년 9월에 김방경을 전라도 추토사로 임명하고 그가 이끄는 관군과 몽고 원수 아해가 
이끄는 몽고군과 연합 작전을 펼치게하여 진도의 삼별초를 토벌케 했다. 그리하여, 연합군과 
삼별초는 그해 11월에 여러 차례 격돌하였지만, 3개월에 걸친 겨울의 전투에서 삼별초는 당
당히 승리를 거두었다. 삼별초는 그 여세를 몰아 제주도와 동래, 김해와 거제도까지  점령하
여 버렸다.
  이 무렵 밀성군(밀양)에서도 방보, 계년, 박평, 박공, 박경순, 경기 등이 이끄는 농민  봉기
가 일어나 부사 이이를 죽이고 난을 일으켰다. 관노인 승겸과  공덕도 그 도당을 모아 다로
하치와 궁중의 관료들을 죽이고 진도로  가서 삼별초에 투항하고자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였
고, 남해 일대에서 유존혁이 이끄는 항쟁군이 봉기하는 등 일련의 봉기가 일어났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몽고군은 회유책 일환으로 몇 차례 사신을 지도로 보냈으나, 삼별초는  화
친은커녕 몽고의 사신을 억류시켜 버리는 등 항거를 계속했다.  이에 연합군은 다시 강공책
을 펼쳐 재차 진도를 공략하였다. 그리하여 1271년 5월  15일에 김방경이 이끄는 관군과 몽
고 사령관 홍다구가 이끄는 몽고군은 1백여 척에 대군을 싣고 기습 작전을 펼쳤다. 이 연합
군의 총공세로 인하여 삼별초의 군대는  순식간에 와해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배중손은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하고 말았고, 승화후 온은 홍다구의 손에 살해 당했다.
  그러나 연합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에 성공한 삼별초의  잔여 세력은 탐라(제주)로 거점
을 옮겨 전열을 가다듬은 후 항쟁을 지속했다. 제주의  삼별초는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내성과 외성을 쌓고 해변에 방어벽도 구축하였다. 그런 다음 11월  경에 배를 몰고 나가 남
해안의 여러 굿을 공격하여 몇몇 요충지에 큰 타격을 가하고 철수하였다. 다시 그 이듬해인 
1272년 초에는 추자도, 거제도, 흑산도 등  주요 섬들을 공략하여 그곳에 전진 기지를  세웠
다. 또 3월에는 장흥 일대를 공격하였으며, 5월에는 대포, 남진 등으로 진격하였다. 삼별초는 
조운선을 탈취하여 군량미로 충당하였으며, 전함을 집중  공략하여 연합군의 기동력을 마비
시켰고, 관리들을 납치하거나 살해하는 등 갖은 만행을 일삼았다.
  그러자 1272년 8월에 몽고의 세조는  사신을 보내 삼별초의 진압에 주력하라고  촉구하였
다. 이 해11월에 삼별초는 안남도 호부(경기도 부천)까지 공격하여 부사와 그의 처를 납치해 
가는 전과를 세웠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러자 몽고의 세조는  제주초유
사를 보내 다시 회유책을 썼으나 허사였다. 1273년 4월에 김방경, 홍다구가 이끄는 1만여 명
의 연합군은 1백 60여 척의 배로 제주도를 기습  공격하였다. 이때 김통정은 삼별초를 선두 
지휘하며 끝까지 용감히 싸웠다. 그러나 수적으로나 장비 면에서  열세하여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되자, 그는 70여명의 잔여 병사를 이끌고 한라산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그는 비관하여 그만 목을 매고 자살하고 말았다. 이때 삼별초의 포로는 1천3
백여 명에 이르렀다. 이로써 치열한 항몽 대전을 치르며 4년간을 끈질기게 끌어왔던 삼별초
의 난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조적의 난(1339년)
  조적의 난은 1339년(충숙왕 복위 8년)에 조적 등이 무리를  이끌고 충혜왕의 궁을 공격하
다가 실패한 난이다.
  
  원나라로 도망가 왕을 헐뜯다 반란
  조적(?-1339년)은 본래 의흥군의 역리 출신이었는데, 충렬왕(고려 25대왕)때  환관들과 결
탁하여 권세를 떨쳤다. 1313년(충숙왕 5년)에 우상시로서 원나라에 내시를 바치기 위해 사신
으로 갔다. 그뒤 그는 밀직사를 거쳐, 1320년에는  선부전서가 되었으며, 1323년에는 만호의 
직분으로 사신이 되어 원나라에 공물을 바치러 다녀왔다.
  그런데 그는 장인인 염승익의 외손 정안군  허경과 재산다툼을 하다가 왕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이후 여러 정황이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원나라로  도망가 
버렸다.
  원나라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심양왕 왕고에게 아부하면서 갖은 모략 중상으로  충숙왕을 
헐뜯었으며, 여기저기 근거 없는 소문을 원나라 조정에 퍼뜨려 충숙왕을 불신하도록 만들었
다. 그뿐 아니라, 1322년에는  심양왕과 함께 원나라 영종(시디발라  재위 1320-1323년)에게 
충숙왕이 황제의 조서를 찢어 버렸다고 무고하였다. 게다가 토번에 유배되어 있던 충선왕을 
귀양에서 풀어줄 것을 충숙왕이 탄원했다고 속여 백관들의 서명을 받아 그 진정서로써 심양
왕의 즉위를 원나라에 정식으로 요청했다.  이는 거절당하고 말았으나 그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1324년에 원나라에 거주하는 고려인  2천여 명의 서명을 받아  와서 원나라 한림원과 
중서성에다 충숙왕을 헐뜯는 글을 바쳤다.
  그리하여 1327년(충숙왕 14년)에 원의 황제인 태정제(예셴테무르 재위 1323-1328년)의 승
인을 받아 고려왕위를 심양왕에게  선위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으나,  곧 이조년의 적극적인 
반대로 취소되고 말았다. 그 뒤에도 고려왕이 귀와 눈이 멀어 정사를 잘 처리하지 못한다고 
무고했다가, 사실을 밝히고 그 증거를 대라는 태정제의 명으로 원나라 사신 매려와 함께 본
국에 들어왔으나, 그 모든 게 거짓임이 드러나고 말았다. 다시 원나라로 돌아간 그는 1332년
에 선왕 충숙왕이 복위하자, 심양왕과 함께 귀국하여 지밀직사의 직에 올랐으며, 그  이듬해
에 찬성사를 거쳐 1338년에 첨의좌정승에 올랐다.
  1339년에 충숙왕이 죽고 충혜왕이 왕위에 오르자, 심양왕과 함께 원나라로 돌아가고자 길
을 떠났다. 그런데 그의 일행이  평양에 이르렀을 때, 왕에게 욕을  당한 경화공주(충숙왕의 
비)의 폭로로 왕의 음란한 행위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에 크게 격분한 그는 충혜왕을 폐
위시킬 것을 공언하고 개경으로 되돌아와 국인을 영안궁에 감춰 놓은 뒤, 무리를 이끌고 충
혜왕의 궁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때 그는 관군에게 생포되어 처형되고 말았다.
  
    최유의 난(1364년)
  최유의 난은 1364년(공민왕 13년)에 최유가 원나라의 병사 1만을 인솔하고 원나라에 의해 
임의로 고려왕에 임명된 덕흥군을 받들고 압록강을 넘어와 일으킨 난이다.
  
  원나라 황제 폐하! 고려를 정벌해 주세요
  최유(?-1364년)의 몽고명은 티무르부카이다. 그는 동지밀직 최안도의 아들로 태어났다. 군
부판서의 직에 있던 그는 1339년(충숙왕 복위 8년)에 일어난 조적의  난 때 왕을 모시고 따
라가는 직분을 잘 수행하여 그 공을 인정받아 1342년에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그 후 부지
런히 재물을 끌어모아 부호가 되었으며, 권세를 이용하여 온갖 불법을 자행하였다. 1349년에 
그는 경창부원군(충정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으며, 나중에  충정왕(고려 30대왕)이 즉위하자 
취성군에 봉해졌고, 성근익대협찬보정공신의 호를 받고 귀국, 그 이듬해에 참리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왕의 옹립에 크게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마땅한 벼슬 자리를 주
지 않음에 대해 심한 불만을 품고 있던 중, 역시  왕을 원망하다가 체포령이 내려진 동생인 
판도판서 최원과 함께 원나라로 도망을 쳤다. 얼마 후 그는  고려에 소란을 일으켜 그 복수
를 하고자, 1352년(공민왕 1년)에 김원지티무르와 함께 정남의 군사 10만을 고려에서 징집하
도록 해달라고 원의 황제인 순제(토곤 테무르 재위 1332-1370년)에게 청원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승낙을 얻어낸 그는 고려에 파견되어 징병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이때 원나라에 있
던 모든 고려인들이 그 불가함을 강력히 주장함으로써 징집은 중지되었으며, 그는 원나라에 
소환되고 말았다.
  1354년에 그는 고우 장사성의 정벌을  위해 중상감승에 봉해져 다시  고려에 파견되었다. 
그때 그는 징병을 독려했으며, 이때 본국에서 삼사사에 봉해졌다.
 그 후 그는 원나라에 돌아가 승상 태스첸과  환관 박티무르부카에게 아첨하여, 특좌동지추
밀원사 직에 올랐다.
  이 무렵 그는, 당시 기씨 일파를 숙청한 공민왕에게 원한을  품고서 그에 대해 복수를 꾀
하는 기황후를 설득하여 공민왕을 폐하고 대신 덕흥군 왕혜를 세울 것을 모의했다.
  1364년(공민왕 13년)에 승상이 된 그는 그 해 1월에 원나라의 병사 1만여 명을 인솔하고, 
원의 황제에 의해 고려왕에 임명된 덕흥군을 대동하고 압록강을 건넜다. 그는 제일 먼저 의
주를 포위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며, 이어 선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이성계등이 
이끄는 고려군의 강력한 저지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그러다, 결국  반란군
은 수주 달천에서 이성계의 군대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최유는 반란군의 잔여 병사 
17명과 함께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원나라로 도망쳤다.
  뒷날 그는 다시 대군으로 고려를 정벌하도록 해달라고 원의 황제에게 청원했다가  거절당
했으며, 감찰어사 유련 등의 탄핵을 받아, 고려에 압송되어 참형당하고 말았다.
  
    목호의 난(1374년)
  목호의 난은 고려말기인 1372년(공민왕 21년)과 1374년 두 차례에 걸쳐 제주도의 목호(몽
고)들이 일으킨 반란이다.
  
  원나라 말을 어찌 명나라에 보내란 말인가?
  탐라의 삼별초 난이 평정된 뒤 원나라에서는 군민총관부를 두고  동서에 아막을 세워 소, 
말, 약대, 나귀, 양을 방목하게 하고 다루가치로 하여금 이를 감독케 하였다.
  그 뒤 충렬왕(고려 25대왕)때 탐라가 고려에 부속되어 이름을 제주로 고치고, 목사와 판관
을 두어 다스렸다. 그러나 공민왕(고려 31대왕)때에 이르러, 목호의 세력이 매우 강하여,  중
앙정부에서 보낸 관리들을 자주 죽이는 등 횡포를 일삼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372년에 명나라와 우호관계를 맺은 고려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말들을 조공으로  보내기 
위해 제주의 말을 징발할 관리들을  보냈다. 이때 목호인 석질리 등이  난을 일으켜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이 분개하여 외쳤다.
  "세조 황제가 방축한 말을 어찌 원나라의 적인 명나라에 보낼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는 중앙 정부에서 보낸 간선어마사 유경원과 목사 겸 만호인 이용장을 붙잡아 죽여 
버렸다.
  이 난은 곧 자체적으로 해결책을 강구하여 간신히 마무리는 되었으나, 그 뒤로도 그 세력
은 여전히 상존했다.
  1374년(공민왕 23년)에 다시 명나라에서 말 2천필을 조공으로 바치라고 요구해 왔다. 그러
자 고려 조정에서는 이번에도 제주로 관리를 보내 다시 말을 징발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목
호 석질 리가 필사초고와 함께 다시 난을 일으켰다. 이에 조정에서는 최영 장군을 양광,  전
라, 경상 도통사에, 그리고 도병마사에는  염흥방을 각각 임명하여 목호의 반란군을  토벌케 
했다. 최영과 염흥방은 그 해 8월에 전함 3백14척에 2만5천6백5명의 군사를 싣고 기습 공격
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석질리, 필사초고 등을 비롯한 난의 주모자들을 모두 처형하고 난
을 평정하였다.
  
      제 3부 조선시대
    이성계의 난(1388년)
  이성계의 난은 이성계가 명의 전초 기지인 요동을 정벌하러 군대를 이끌고 가다가 조민수
를 비롯하여 심덕부, 이무, 왕안덕 등의 지휘관들을 설득하여 마침내 1388년 5월 22일에  회
군을 단행하여 최영과 우왕을 밀어내고 정권을 찬탈한 사건이다. 
  
  요동 정벌은 4가지 이유로 불가...위화도에서 회군
  이성계(1335-1408년)의 호는 송헌, 본관은 전주이다. 그는 이자춘의 아들로 영흥에서 태어
났다. 그의 아내는 밀직부사 한경민의 딸 신의왕후이며, 계비는 판삼사사 강윤성의 딸  신덕
왕후이다. 그는 1356년(공민왕 5년)에 아버지와 함께 고려에 내부한 뒤 주로 명산대찰을 두
루 다니며 무술을 연마하였다. 어느 날 무술 연마 도중  피곤하여 길가에서 잠시 쉬다가 꿈
을 꾸었다. 꿈에 우연히 어느 쓰러진  집에 들어갔다가, 서까래 셋을 등에 짊어지고  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안변에 명승(무학대사)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에 찾아가 해몽을 부탁하
였다. 그때 무학대사는 이렇게 해몽했다.
  "세 서까래를 짊어졌으니, 왕 자가 분명하오이다. 후일  왕가와 인연이 있을 꿈이외다. 자
중하시오."
  이에 크게 기뻐하고 송도로  올라온 이성계는, 1357년 유인우가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참여하여 원나라 세력을 추방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는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동북면 
상만호가 되었다. 1361년 9월에 독로강만호 박의가 모반을 일으키자 이성계는 그 해 10월에 
그를 잡아 처형하고 봉기군을 토벌했다. 1359년(공민왕 8년)에 홍건적 모거경이 군사 4만을 
이끌고 몰래 압록강을 넘어와 의주성을 함락시켰으나, 부원수  안유, 도지휘사 김득배, 서경
유수 이춘부, 서북안무사 이인재 등이 이끄는 군대가 평양성 아래에서 적군을 격파한 바 있
었다. 그러자 패주한 홍건적은 2년 후인 1361년 10월에 다시  주원수 등이 홍건적 5만을 이
끌고 쳐들어 왔다. 이때 평안도 일대의 각 읍들이 점령당했다. 그러자 공민왕은 이성계를 금
오상장군 겸 서북방면 병마사로 삼아 적과 대치케 했다.  이성계는 이지란을 선봉으로 삼아 
친병 2천명을 거느리고 평안도로 가서 창성과 삭주의 싸움에서 적장 왕원수를 비롯하여 그 
수하 장수 10여 명을 사살하였으며 적병 1천여 명을  도살하였다. 그러자 적장 주원수는 이
성계의 군대와 정면 충돌하지 않고 피하여 몰래 개경으로 진격하였다.
  그러자 조정의 신하들은 공민왕을 복주로 급히 피난시켰다. 기습작전을 성공리에 마친 홍
건족들은 도성 안으로 쳐들어가 국고의 재물을 마구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닥치는 대로 농락
했다. 이때 황주, 평양, 안주 등지에서 진을 치고 있던 장수 안유, 김득배, 정세운, 이방실 등
이 군사를 거느리고 개경으로 올라와 도성 주변 수십 리밖에 진을 쳤다. 이 무렵 평안도 일
대에서 적군을 격파한 이성계의 군대는 주야로 군사를 몰아 10여 일 만에 도성에 도착하였
다. 그러자 먼저 와 있던 장수들은 금오상장군인 이성계를 정중히 영접하였다. 그러나  그들
은 모두 적세가 워낙 강대하여 쉽사리 격파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이에 분개하여 이성계
가 소리쳤다.
  "지금 군왕께서 피난하고 계신 이때, 어찌하여 주저하고만 있을 것인가. 무서워 싸우지 않
음은 도적에게 약함을 보이는 것이니 이 어찌 부끄럽지 않으리오."
  그리고는 기습 공격 작전을 면밀히 수립한 후, 적군들이  동문 안에서 잔치하느라 허술한 
틈을 타서, 장수들로 하여금 남문과 북문을  나누어 치게 한 다음, 이성계는 전군을  이끌고 
물밀 듯이 성안으로 쳐들어갔다. 이후 처절한 살육전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이성계는  적
장 주원수, 부장 사류 등을 화살로 쏘아 죽였으며, 수만의 적을 도륙하였다.
 홍건족이 격퇴된 뒤, 개경으로 돌아온 공민왕은 간신 김용의 거짓 상소를 믿고, 개경  탈환
에 공을 세운 정세운, 김득배, 안유, 이방실 등에게 상을  주는 대신 징계한 후 이들을 처형
시켜 버렸다. 그러나 이성계만은 용케도 이 화를 면하고 간신히 살아 남았다.
  1362년 2월에 원의 유신인 나하추가  여진족을 거느리고 삼살(북청)과 홀면(홍원)으로 다
시 쳐들어오자 동북면도지위사 정휘가 나가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이
성계를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하여 나하추의 군대를 막게 했다.  같은 해 7월에 나하추는 선
봉부대 1천여 명을 보내 이성계의 군대와 맞서 싸우게 했으나 덕산동 원평 전투에서 이성계
의 군대에게 거의 섬멸되고 말았다.  그러자 이에 격분한 나하추는  덕산동으로 주력부대를 
이동시켰다. 이때 이성계는 야음을 틈타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자 나하추는 할 수  없
이 달단동으로 후퇴하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집요하게 그들 뒤를 추적하여 달단동에서 나하
추의 주력부대를 격퇴시켰으며, 도망치는 잔병들을 함흥  벌방지대에서 거의 섬멸시켜 버렸
다. 이때 나하추는 간신히 목숨만  건져 심양으로 도망하였다.(나하추는 그 후  자기 세력이 
약해지자 결국 명나라에 투항하고 말았다)
  1364년에는 죄를 짓고 원나라에 도망가 있던 최유가 고려의 간신 김용과 비밀리에 내통하
면서, 동시에 일찍이 중이 되어 원나라에 도망와 있던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추대하고서 군
사 1만여 명으로 평안도로 침입했다. 이 때 고려  조정에서는 안우경, 이구수, 이수, 이인임, 
정찬 등을 보내어 적과 대치케 했다. 그러나 첫 전투에서 안우경은 패하고 안주로 도망가고 
말았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최영을 급파하여 전열을 가다듬게 했다. 그와 동시에 이성계에게 
정예 군사 1천여 명을 주어 최영을 돕도록 했다.  고려의 연합군과 덕흥군의 군대는 달천에
서 맞붙게 되었다. 이때 이성계는  적장 네 명을 연달아 화살로  쏘아 죽이면서 정면돌파를 
시도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덕흥군의 부대는 거의 섬멸되고 말았다. 원의  황제
는 후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최유를 잡아 고려 조정에 보내면서 화해를 청하였다. 그러자 
왕은 간신 김용과 함께 최유의 목을 베어 길거리에 내다 걸고 구경시켰다. 
  1376년 왜구가 삼남지방에 다시금 침범하자 조정에서는 원수 박인계를 출전시켰으나 패전
하자, 고령의 최영은 이성계와 함께 출전하여 홍산전투에서  적을 크게 격퇴시켰다. 그리고, 
1377년(우왕 3년)에 경상도 일대와 지리산 일대에 창궐하는 왜구를 토벌하였다. 1378년 그는  
지리산에서 왜구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번에 모두 적의 왼쪽 눈을 쏘았노라."
  그의 말을 듣고 나서 병사들이 왜구의 시신들을 살펴보니 모두 왼쪽 눈에 화살이 꽂혀 있
었다. 이에 병사들이 크게 놀랐다.
  1380년 양광 전라경상도 도순찰사가 되어, 운봉에서  벌어진 황산전투에서 아기바투가 거
느린 왜구를 섬멸했다. 아기바투는 16세 되는 미소년이었는데도, 철갑옷에 철창을 들고 아주 
민첩하게 싸우는 용맹스런 왜장이었다. 고려군의 여러  장수들뿐만 아니라 선봉장 이지란까
지도 그의 철창 솜씨를 도저히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그러자 이성계는 꽹과리를 쳐서 일단 
군사를 불러들여 진문을 굳게 닫은 다음 다른 작전을 세웠다. 다음날 동이 트자, 아기바투는 
또다시 선봉에 서서 고려군을 공격해  왔다. 이때 고려군의 사수 수십  명이 일시에 왜장을 
향해 활을 쏘았다. 아기바투가 화살을 창으로 막느라 골몰한 틈을 타서, 이지란이 그의 투구
를 화살로 쏘아 맞췄다. 그러자 "딱!" 하는 소리에 놀라 아기바투의 입이 잠시 쩍 벌어졌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이성계는 화살을  쏘아 그의 목구멍 속으로 쌩  날려 보냈다. 그리하여 
아기바투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1382년에 이성계는 동북면 도지휘사가 되었다. 이때 9년간이나 유랑 생활을 하고 있던 정
도전이 이성계를 찾아와 시국 전반에 대해 오랜 시간 동안  서로 얘기를 나눴다. 그들은 이
때 토지제도를 비롯한 사회 및 정계의 여러 구조적 모순에 대해 급진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는 데 동의했다. 1383년에 이성계는 동북면일대에서 노략질을 일삼고 있던 호바투의 군대를 
이지란과 함께 길주에서 대파하였으며, 1384년 동북면 도원수, 문하찬성사가 되어 이듬해 함
주로 쳐들어온 왜구를 격파하였다.
  이 무렵, 신진세력의 중심 인물로서 구세력의 대표인 최영과  맞먹는 군벌을 이루어 확고
한 세력 기반을 다진 그는 1388년 수문하시중에 올랐다. 그런데  이 무렵 신돈이 제거된 후 
다시 보수세력인 친원파, 즉 이인임, 염흥방, 임견미 등이 자신들의 개인적인 야욕을 채우고 
세력 확장을 기하기 위해 친원 정책을 주장하고 나섰다. 특히 문하시중 직에 있던 임견미가 
이인임, 지윤, 염흥방 등과 함께 전횡을 일삼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염흥방의 가신인  이광이 
조반의 땅을 강제로 빼앗자 이에 격분한 조반이  이광을 죽이고 그 집에 불을 지른 사건이 
터졌다. 이를 빌미로하여 우왕은 최영와 협의하여 친원파를 숙청하도록 명하였다. 왕의 밀령
을 받은 최영은 앞장서서 이인임을 비롯한 친원파 일파를 생포하여 살해하였다. 이후  최영, 
이성계, 정도전, 정몽주 등이 세력을 잡게 되었다.
  1388년(우왕 14년) 2월에 명나라가 중원을 어느 정도 정비한  다음 철령 이북, 이동, 이서
의 땅은 본래 원나라에 속했던 땅이므로 이를 요동의 관할 아래 두겠노라는 뜻을 고려 정부
에 전해오자, 당시 국상으로 있던 최영이 대노하며 반발했다.
  "명나라의 요구가 이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거병하여 싸움으로 맞설 수밖에 없는 것 아닌
가? 명의 전초 기지인 요동을 정벌해 버리자."
  그러자 이성계는 다음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요동정벌 계획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첫째,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치는 것이 불가하다. 둘째, 여름철에, 특히 농번기에 군사
를 징집하는 것이 불가하다. 셋째, 원정하고 있는 틈을 타서 남쪽에서는 왜구가 침범할 것이
니 불가하다. 넷째,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이므로 활의 아교가 녹아 풀어져  무기로 
쓸 수 없으며 질병이 잦아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이니 불가하다." 
  이런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여러 차례 출정을 반대하였으나, 결국  그의 주장은 묵살되고 
말았다. 왕은 계획대로 각 도에서 6만여 명의 군사를 징집한 다음, 1388년 3월에 최영을  팔
도도통사로, 조민수를 좌군도통사로, 그리고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임명한 후 정벌군을  출
정시켰다. 이에 이성계는 할 수 없이 조민수와 함께 정벌군을 이끌고  요동을 향해 그 해 5
월에 출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의주의 압록강  하류에 있는 섬인 위화도에 이
르렀을 때 장마로 인하여 압록강이 엄청나게 불어나자, 정벌군은  거기서 일단 휴식을 취하
며 주둔하고 있었다. 이때, 우왕과 최영은 평양에까지 가서 총지휘를 하며 정벌군을  독려하
였다. 이성계는 다시 한 번 우왕에게 네 가지 불가론을 상소하였다. 그러나 이는 또다시  묵
살되고 말았다. 오히려 최영은 어명을 받들어 팔도도통사의 자격으로  다음과 같은 엄한 작
전명령을 하달하였다.
  "정벌군의 선봉부대로 하여금 즉시 압록강을 건너 진격하도록 하라."
  사실상 당시 요동 주둔군은 명나라 군대 정벌에 나가 있는  상태에 있었고, 또한 환성 원
수 홍인규와 강계 원수 이의가 이미 요동에 먼저 진격하여 일전을 벌이고 있는 상태였으며, 
요동민들도 고려군 환영 준비까지 마친 상태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있는 최영으로서는  아주 
당연한 작전명령이었다. 그러나, 정도전, 조준, 윤소중 등과 같은 신진관료들처럼  국운 회복
운동보다는 유교적 이상국가 건설 및 실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이성계에게는 무
리한 요동 정벌이 무의미하게만 여겨졌다.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변혁의 주도권을 쟁취
하고자 마음을 먹었다. 때마침 도망 가는 군사와 병들어 가는 군사들이 속출하고 있음을 핑
계삼아, 그리고 압록강 물이 자꾸 불어나 섬을 온통 삼켜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
잡혀 있었다. 또한 앞으로 벌어질 전투에서의 죽음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던 병사들의 위축
되 심리를 역이용하여, 그는 회군하자는 쪽으로 의견 수렴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
휘관들 사이에서는 실랑이가 벌어졌다. 한쪽은 진격하여 요동을 정벌하자고 하였고,  한쪽은 
개죽음을 당하지 말고 회군하자고 하였다. 이때, 이성계는 조민수를 비롯하여  심덕부, 이무, 
왕안덕 등의 지휘관들을 설득하여 마침내 회군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그리하여 그는 최영을 
비롯한 고려 조정의 오랜 민족적 염원인 요동 정벌의 소망을 저버리고 그 해 5월 22일에 회
군을 단행하였다.
  왕과 최영은 이 뜻하지 않은 소식을 듣고 즉시 평양을 떠나 서경으로 돌아와 이에 대처하
고자 하였으나, 이성계가 이끄는 군대의 회군 속도가 너무 빨라 도저히 수습할 시간적 여유
를 갖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당초에 평양을 떠날 때 거느리고 나갔던 수명의 군사들과  수
십 명의 신하들마저 이성계의 군대를 두려워하여 중도에서 거의 모두 뿔뿔이 달아나거나 이
성계 군에 투항해 버리는 바람에 난감한 처지에 처하고 말았다.
  최영은 겨우 50여 명의 휘하 군졸로 왕을 호위하고 개경의 화원으로 급히 들어갔다. 그런 
다음 개경에 남아 있는 군사를 모두 끌어모았다. 이렇게 하여 급조한 1천여 명의 군사로 그
는 반란군과 첫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사태는 불리하게 전개되어 갔다. 그
러다가 결국 화원 팔각정 안에는 왕, 영비(최영의 딸), 첩  쌍비, 최영, 그리고 몇 명의 병사
만이 덜렁 남게 되었다. 이때 화원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왕의 총명을 가리고 우리를  죽음의 땅으로 몰아넣으려던 최영은  즉시 나와 칼을  받으
라."
  이때 최영은 왕 앞에 나아가 마지막 하직인사를 올렸다.
  "전하, 신이 나가 죽겠나이다. 부디 종묘사직을 잘 보전하옵소서."
  그러나 왕은 최영을 차마 내보내지 못하고 덜덜 떨며 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짐만 남겨두고 가버리면. 앞으로 종묘사직은 어떡하란 말씀이오?"
  이때였다. 이성계의 심복 곽충보가 이끄는 반란군들이 담장을 뛰어넘어 들어와 최영 앞으
로 우르르 몰려왔다. 그렇지만 아무도 감히 최영을 체포하지 못하고 서 있을 뿐이었다. 한참 
후에 모습을 드러낸 이성계가 이렇게 변명의 말을 늘어놓았다.
  "이번 거사는 내 진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소이다. 요동 정벌은  대의를 저버렸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소. 또한 백성이 바라는 바도 아니었소. 나로선  부득이
한 일이었소이다."
  그러자 최영은 신음하듯 이렇게 내뱉었다.
  "쓸 데 없는 소리! 옛날 이인임의 말만 들었어도...이런 일은 없었을 것을!"
  결국, 그 해 여름에 최영은 역적이라는 죄목으로 고봉현에 귀양을 가게 되었으며,  우왕은 
처음에는 강화도로, 나중에는 강릉으로 유배당하였다. 이성계는 이렇게 최영을 밀어내고  우
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하였다.  그런 다음 이성계는 우시중으로  도총중외제군사가 되어 
인사권과 군사권을 모두 장악하였으며, 조민수를 좌시중의 직에 앉혔다.(그러나 조민수는 나
중에 이씨 일파인 대사헌 조준에게 탄핵되어 멀리 전리로 방출되고 말았다)
  최영은 처음에는 고봉(고양)에, 그리고 다음에는 합포(수원부)에 유배되었다가, 그 해 12월
에 공료죄로 개경에 압송되어 참형을 당하였다. 그는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나라를 위하여 큰 일을 도모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으니 실로 원통하기 그지 
없도다. 내가 만일 내 일신의  영달을 꾀했다면 모르거니와, 추호도  그런 마음이 없었노라. 
오직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했을 뿐이다. 이는 내가 죽은 후에 역력히 알게 될 것이다."
  1389년 11월에 이성계는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추대한 후, 수문하시중이 되었으며, 
그 이듬해인 1390년(공양왕 2년)11월에 영삼사사가 되었다. 그리고 1391년 1월에 그는 삼군
도총제사가 되어 조준과 함께 전제 개혁을 단행하여 구세력의 경제적인 기반을 박탈했다.
  1392년 7월에 그의 심복인 배극렴  등에 의해 공양왕은 원주로 추방되었으며,  그 해 7월 
17일에 그는 새 왕조의 태조로 개경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그는 국호를 조선이라 칭하
고, 면모와 분위기를 일신하고 정치, 경제, 문화 발전의 새로운 가능성을 염원하며 1394년에 
도읍을 한강 유역의 한양으로 옮겼다.
  그러나 그는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에 의한 1,2차 왕자의 난으로 인하여 크게  낙심하고서, 
왕위를 버리고 만년을 처사로 보내다가  1408년(태종 8년)정월에 병석에 누운  후 일어나지 
못한채 그 해 5월 별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방원의 난(1398년)
  이방원의 난은 1398년에 이방원이 태조가 병석에 눕게 된 틈을 타서 왕위를 찬탈하기 위
해 일으킨 난이다.
  
  세자 자리가 왜 계비의 아들에게 넘어가야 하나!
  이방원(1367-1422년)은 태조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조에게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
었다. 그 중 여섯 아들, 즉 이방우(진안대군),  이방과(영안대군, 정종), 이방의(익안대군), 이
방간(희안대군), 이방원(태종), 이방연(덕안대군)은 신의왕후  한씨에게서 얻었고, 나머지 두 
아들,즉 이방번(무안대군), 이방석(의안대군)은 계비 신덕왕후 강씨에게서 얻었다.
  이방원의 비는 여흥부원군 민문도의 딸 원경왕후이다. 그는 1382년(우왕 8년)에 문과에 급
제하여, 일직사 대연이 되었으며, 이후 아버지 이성계의 휘하에 들어가 신진 정객들을  포섭
하여 구세력의 제거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1388년(우왕 14년)에 정조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392년(공양왕 4년)에 구
파 세력의 거두인 정몽주를 살해하고, 그 일당을 숙청함으로써  신진 세력의 기반을 공고히 
했다.
  1388년에 조선이 개국되자, 정안군에 봉해졌으나, 태조의 총애가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이
방번, 이방석에게 기울자 불안해졌다. 게다가 태조와 계비 신덕왕후의 심복인 개국공신 정도
전이 계비의 아들 이방번을 태자로 책봉하는데 편을 들었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심란했다. 
이성계의 정실인 신의왕후 한씨는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도 전에 운명을 달리 했기  때문
에, 이후 왕비가 된 신덕왕후 강씨가 궁중 안의 모든 권력을 손에 넣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
자 한씨 소생인 맏왕자 이방우가 한 통의 편지를 남겨놓은 채 어디론지 행방을 감춰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세자 책봉 문제는 궁중 안에서 초미의 관심거리가 되고 말았다. 이때 개국공
신 배극렴이 이방원을 편들고 나섰다.
  "평시 같으면 장자를 세자로 정해야 하겠지만,지금은 국가창업의 비상시이다. 그러므로 개
국에 공이 많은 제 5왕자 방원을 세자로 정함이 마땅하다."
  이에 신덕왕후와 정도전 일파가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신덕왕후의 속뜻은 이러했다.
  "어차피 장유 적서를 따지지 않을 바에야 내가 낳은 왕자 중에서 세자로 세우리라."
  신덕왕후의 은밀한 부탁을 받은 정도전이  앞장서서 태조에게 제 2왕자인 이방과  대신에 
제 7왕자인 이방번을 세자로 책봉해야한다고 강력히 건의하였다.  그러자 배극렴 등은 절충
안을 내놓았다.
  "반드시 강후 소생을 세자로 정해야 한다면, 차라리 제 8왕자인 이방석 쪽이 더 낫다."
  태조는 결국 대세에 밀려 제 8왕자인 이방석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그러자 이방원은 매우 
불쾌했다. 그는 세자의 자리는 마땅히 자기 형이 아니면 그  동안 개국에 크게 기여한 자기 
자신이 차지하게 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방원의  심기를 읽은 하륜은 이방원의 
장인 소개로 이방원을 찾아가 모의하게  되었다. 정도전은 이방원의 낌새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태조에게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각 지방으로 내보내라고 주청하였다.  공교롭게도 
이 무렵 하륜이 충청도 관찰사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이방원은 하륜을 환송하기 위해 찾아
가 술자리에서 마주 앉아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주고 받았다. 그러던 중 하륜이 일부러 이
방원의 옷자락에 술을 엎질러 버렸다. 이에 화가 난 이방원이  아무 말도 없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에 하륜은 즉시 그 뒤를 따라가 사과하는 자리에서 
내밀한 모의를 다시 하게 되었다.
  "한시가 급하오. 나는 왕명을 받았으니 즉시 한양을 떠나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해야 하오. 
나 대신 안산군수 이숙번을  추천하니, 그와 함께 먼저  거사하시오. 그러면 내가  합세하겠
소."
  당시 이숙번은 중앙 행사 참석차 지방관군인 이안군과 호위병력을 거느리고 한양에  올라
와 있었다. 두 사람의 면밀한 작전은 곧바로 실행에  옮겨졌다. 이방원은 좌정승 조준, 우정
승 김사형 등에게 먼저 거사를 통고한 다음. 이숙번의 병력을 빌려서, 정도전, 남은 등이 한
씨 소생의 왕자를 죽이려고 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남은의 소실 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봉화백 정도전, 의성군 남은, 부성군 심효생 등을 습격하여  모두 목을 베어 죽여버렸다. 이
방석은 뒤늦게 이를 알로 자기의 사병을 출동시켜 반격을 시도해 보았으나 이미 대세는 기
울어진 뒤였다. 그러자 그는 마지막 수단으로 경순공주의 남편인  부마 이제와 함께 태조가 
앓아 누워 있는 청량전으로 나아가 엎드려 애걸하였다.
  "아바마마, 세자 자리도 싫고 왕자  이름도 다 싫습니다. 빈과  아기, 형님과 매부 내외를 
그저 살려만 주옵소서. 그리하면 궁궐을 떠나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살겠나이다."
  이때서야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태조는 조정 중신들을 불러 들여 대책을 논의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하륜에 의해 하나둘씩 포섭된 조준, 김사형을 비롯한 조
정 중신들이 세자 경질을 빗발치듯 요구하고 나서는 바람에 태조도 어쩔수 없이 밀려 세자 
이방원을 태자로 추대하였으나, 이방원은 이를 극구 사양하고 동복형인 영안대군 이방과(정
종)를 세자로 책봉하여 즉위케 하였으며, 자신은 정사공신 1등이 되었다.  이때 만약 자신이 
세자로 정해진다면, 자기가 세자가 되기 위해 개국 공신들을  죽였다고 의심받을 게 뻔하였
고, 또 권력이 별로 야심이 없는 이방과가 세자가 된다고 해도 어느 시기에 가서 그를 물리
치고 자기가 대신 왕위에 오를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세자 자리를 사양했던 것이다. 
  이후, 이방원은 이방석, 이방번을 귀양 보내기로 결정하고  이를 시행토록 지시했다. 그리
하여, 결국 이방번, 이방석, 이제가 같은 날 귀양길에 올랐다. 그런데 이방원의 아내인  민씨
의 계책을 받든 이숙번이 부하들을 시켜 경복궁의 서문 영추문 밖을 지나는 그들을 모두 노
상에서 때려 죽여 버렸다.
  
    이방간의 난(1400년)
  이방간의 난은 1400년(정종 2년) 1월에 이방간이 이래를 비롯하여 강인부, 이맹종, 민유공, 
이성기 등과 함께 이방원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난이다.
  
  방원이가 나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다고?
  이방간은 이성계의 넷째 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신의왕후이다. 그는 조선 건국후 회안대
군에 봉해졌다. 왕위 계승에 대한 야심을 가슴에 품고 지냈던 그는 야심만만한 동생 이방원
을 늘 질시하였다. 그러던 중, 제1차 왕자의 난(이방원의 난)이 일어났고, 그 후 이방원이 정
사공신들로 추대된 하륜, 이숙번, 조준, 김사형, 조영무, 이저, 익안대군 등과 함께 정권을 독
점하다시피 하자, 그들의 전횡에 큰 불만을 품었다. 이러한 그의 심기를 읽은 지중추부사 박
포가 어느날 이방간을 찾아와 이방원을 모략했다.
  "정안군(이방원)이 당신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박포는 이방원의 난 때 적지 않은 공을 세웠으나, 자기에 대한 보직이 높지 못한 데 불만
을 품고 자주 불평을 터뜨려 이방원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한때 죽구(영동)로 
유배당하기도 했다. 이런 일들 때문에 그는 이방원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는 
이방간과 이방원 모두가 권력에 야심을 품고 있음을 간파하고서 이방간을 찾아와 그렇게 충
동질 했던 것이다. 이 거짓 밀고를 곧이곧대로 믿어 버린  이방간은 거사할 결심을 굳게 굳
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조정의 공신들 중 거의 대부분은 이방원에게  붙어 버린 뒤였고, 자기에게는 
박포, 장시길 정도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처질 되는  이래, 처의 양부인 강인부와 의논한 
끝에 좀더 세력을 키운 후인 1400년(정종 2년) 1월 30일에 거사하기로 날짜를 잡았다. 그러
자 이래는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해 평소 이방원 일파에 반감을  지니고 있던 우현보(이래의 
스승)를 찾아가 상의하였다. 그러자 우현보는 일이 성사되지 못했을 경우 자신의 신변이 위
태롭다고 판단하고는 아들 우홍부를 이방원에게  보내어 그 사실을 그만  고자질해 버렸다. 
이방원은 즉시 군사를 이끌고 출동하여 이방간을 체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방간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그의 아들 이맹종(의령군)과 함께 사병 수백 명을 이끌고 출동하여 맞섰다.
  이때 왕(정종)은 이문화를 보내어 이방간에게 병력 출동을 철회하라고 달랬으나, 그는 듣
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방간과 이방원 간의 형제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들의 싸움은  선죽교 
근처에서부터 시작되어 가조가에 이르기까지 치열하게  벌어졌다. 이방간은 민유공, 이성기, 
이맹종 등과 함께 수백명의 사병들을 직접 진두 지휘하여 용감히 맞서 싸웠다. 이방원도 이
숙번이 이끄는 부대를 선봉으로 내세워 싸웠으며, 때로는 선두에서 군대를 직접 지휘하면서 
공격해 나갔다. 두 형제는 이렇듯 한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방간 쪽이 점점 불리하게 되어갔다. 그러다가 백금반가에서 이방간은 그의 주력
부대를 거의 대부분 잃어 버렸다. 그런데도, 이방간은 적경원터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며 최대
한 버텼다.
  그러다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서동으로 도주하였다. 그러나 추격대는  그를 끈질기게 
뒤쫓아갔다. 더 이상 도망갈 수 없게 되자, 지칠 대로 지쳐 버린 이방간은 말에 내려 갑옷을 
벗고 활까지 내던진 후 길바닥에 픽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이방원의 군사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어 그를 에워싼 채 창을 겨눴다. 이때 그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하소연했다.
  "남의 거짓 밀고를 믿고 이 지경이 되었다. 목숨만 살려준다면, 여생이나마 시골에서 보내
고 싶다."
  차마 형(다섯째 형)을 죽일 수 없었던 이방원은 그 처분을 왕에게 떠넘겼다. 그러자 왕은 
승지 이숙을 보내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대낮에 한양거리에서 난을 일으킨 죄 엄벌에  처해야 마땅하나, 형제지간의 정으로 네가 
원하는 대로 목숨만을 살려주어 귀양에 처하노라."
  이방간은 그 길로 곧장 토산현으로 유배를 당하였으며, 박포는 붙잡혀 청해로 유배당했다
가 얼마 후 그곳에서 처형당했다. 이방간은 유배지에서 병들어서 1421년에 숨을 거뒀다.
  이방간의 난 이후, 정종은 참찬 문하부사 하륜의 권유를  받아들여 이방원을 세자로 봉하
였으며, 대사헌 권근, 문하부 좌산기 김약채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 동안 문제점으로  제기
되어온 사병 제도의 폐지를 단행하였다.
  
    이유의 난(1453년)
  이유의 난은 1453년(단종 1년)에 이유(수양대군)가  권남, 한명회 등과 함께, 단종  보필의 
중신이었던 황보인, 김종서 등을 죽인 후, 안평대군까지 제거하고 군국대권을 장악하기 위해 
일으킨 난이다.
  
  조카를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
  이유(수양대군:1417-1468년)는 세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소헌왕후이
며, 그의 형은 문종이고, 그의 비는 윤번의 딸  정희황후이다. 그는 젊어서부터 무예에 능하
였고, 병서에도 아주 밝았다. 그는 1428년(세종 10년)에 진양대군으로 책봉되었다가,  1445년
(세종27년)에 다시 수양대군으로 고쳐 봉해졌으며, 세종의 명을 받들어 김수온 등과 함께 불
서를 번역 감독하였고 향악 악보 정리도 관장하였다. 1452년에는 관습도감이라는 직책을 맡
아 수행했고, 같은 해에 단종이 즉위하자 고명사은사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세종대왕은 위해한 위업과 18명의 왕자, 4명의 공주와 옹주를 남기고 1450년(세종32년) 2
월에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30년간이나 세자로 있으면서 선왕을 도와 많은 일을 했
던 이향이 왕위(조선왕조 5대왕,문종)에 올랐다. 문종은 관료들을 두루 중용하고, 민의를  널
리 수렴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그는 군사제도도 대폭 정비한 다으 병력을 증강시켜 국
방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러던 그가 1452년 5월 재위 2년 3개월 만에 아깝게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러자 유일한 어린왕자 이홍위(단종)가 조선왕조 6대  왕위에 올랐다. 선왕인 문종
은 죽기 전에 자신이 단며할 것을 미리 예측하고 당시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그리고 집현전 학사들에게 누누이 어린 왕자 이홍위를 잘 보필해 줄 것을 신신당부
해 두었다. 그러나 어린 단종 주위에는 7명의 숙부, 즉 수양대군 이유, 안평대군 이용,  임영
대군 이구, 광평대군 이여, 금성대군 이유, 평안대군 이임, 영응대군 이염이 떡  버치고 있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제일 부담 되었다.
  이들은 저마다 빈객들을 다투어 포섭하였는데, 수양대군측에는 권남, 한명회, 홍달손, 양정 
등과 같은 무인들이, 안평대군측에는 황보인 등과 같은 문인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안평대군
은 수양대군보다 한 살 아래의 동생이었지만, 그는 당대 제일의 서예가로 알려질 만큼 서예
는 물론 그림과 가야금 등에도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다. 이들은  각자 자기 일파를 한 명이
라도 더 많이 등용시키려고 서로 경쟁하다시피 했다. 수양대군은  자기 주변에 무사들과 모
사꾼들을 모아 심복 세력을키워 갔으며, 안평대군으 권신 황보인과 김종서와 제휴하여 조카
인 단종의 왕위 보존을 위해 인사 행정기관의 하나인 황표정사를 장악하여, 자기 측근 문신
들을 요직에 앉혔다.
  그러던 중 수양대군은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여온 뒤 안평대군의 세력권인 황표정사를  폐
지해 버린 후, 1453년 10월 10일에 난을 일으켰다. 그는 휘하의 무사들을 이끌고 "심야에 급
한 서류가 있어 왔다."고 속여 김종서의 집을 급습했다. 그리하여 김종서와 드의  두 아들까
지 철퇴로 내리쳐 살해해 버렸다. 그런 다음 단종에게 다음과 같이 거짓 보고를 올렸다. 
  "김종서 일당이 모반하려 하므로 죽여 없앴습니다. 시급을  다투는 일이온지라 미리 못하
였나이다."
  뒤이어 수양대군은 왕명이라고 속여서  대신들로 하여금 즉시 입궐하라고  한 다음, 대궐 
문에 미리 배치해 놓은 그의 부하들로  하여금 영의정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 찬성  이양 
등의 반대파 중신들을 모두 때려 죽이도록 지시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평소 자기 세
력과 반대 입장을 갖고 있다고 판단되는 인물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거나, 모반죄를 뒤집어 
씌워 귀양 보내 버렸다. 김종서의 시체를 거리에 매달아 놓게 하여 구경시켰으며,그의  자손
들까지도 목을 베어 죽여 버렸고, 좌의정 정분, 평안도 관찰사 조수량등은 일단 귀양 보냈가
가 죽여 버렸다. 안평대군까지 적대시하여 강화도로 귀양 보냈다가  교동으로 옮긴 후 역시 
죽여 버렸다. 그는 심지어 변방에 나가 있는 김종서와  친근한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까지
도 파면시켜 버렸다.
  그런 다음, 수양대군은 혼자서 영의정부사,  이조판서, 병조판서, 내외 병마도통사를  모두 
독차지하여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정인지, 한확, 이사철, 박종우, 이계전, 박중손,  김효성, 권
남, 홍달손, 최항, 한명회 등을 비롯한 37명을 정난공신으로 책봉하고 정인지를 좌의정에, 한
확을 우의정에 임명했다. 그리고 그는 집현전에 강요하여 자신을  찬양하는 교서를 지어 단
종의 이름으로 발표하게 하였다. 
  1455년 6월 2일에 단종은 삼촌인 수양대군의 압력과 핍박을  견디지 못하여, 옥새를 가져
오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은 선뜻 나서지 않았다. 그러자 단종은 동부승지 성삼문으
로 하여금 상서원에서 옥새를 내와 환관  전균에게 주어 경회루로 가지고 나오라고  명하였
다. 어명을 받든 성삼문은 할 수 없이 옥새를 가져와 전균에게 건네 주자, 전균은 그것을 경
회루로 가지고 갔다. 이때 단종은 수양대군을 불러, 그에게  옥새를 넘겨 주고자 하였다. 그
러자 수양대군으 엎드려 거짓 눈물을 흘리면서 몇 번이나  사양하였다. 그러나 결국 옥새는 
수양대군에게 넘겨졌다. 그 후 수양대군은 모든 문무백관이 지켜 보는 가운데, 익선관을  쓰
고 곤룡포를 입고 즉위(조선왕조 7대왕)하였다. 
  그 뒤 성삼문 등의 집현전 학사들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  하자, 이들을 모두 사형에 처
한 후 집현전을 아예 폐지해 버렸다. 그는 재위 14년 동안 국방, 외교, 토지제도,  관제 등의 
개혁, 개편 등 수 많은 치적을 올렸으며, 조선 초기의 왕권 확립에 크게 공헌하였으나, 만년
에는 왕위 찬탈로 인한 인간적 고뇌에 싸여 괴로워하다가 문둥병에 걸려 1468년에 죽었다.
  
    이징옥의 난(1453년)
  이징옥의 난은 1453년(단종 1년)에 계유정난에  의한 중앙 정변에 크게  분개한 이징옥이 
군사를 이끌고 반기들든 난이다.
  
  김종서의 심복이란 이유로 나를 처형하겠다고?
  이징옥(?-1453년)은 지중추원사 이전생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양산이며, 그의 
형은 판중추부사 이징석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무예와 용맹이 남달리 뛰어나 사람들의 주목
을 받았으며, 청소년 때는 어머니를 위해 멧돼지를 산채로  잡아오는가 하면 어떤때는 산에
서 만난 호랑이를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두 눈을 부릅뜨고 노려 보았는데 호랑이가 겁을 집
어먹고 고개를 떨구자 화살로 쏘아 죽일 정도로 담력이 컸으며 힘이 장사였다.
  1416년 8월에 그는 무과 별시에 응하여 장원으로 급제한  뒤 관직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
다가 세종 초에 김종서를 따라  북변에 종군하여으며, 1424년(세종 6년)에 황상의  추천으로 
경원진 첨절제사가 되어 아산에 침입한  야인(여진족)을 격퇴했으며, 이어 영북진  절제사가 
되었다.
  1436년에 판회령 도호부사가 되어 오랑캐의 추장을 살해하는등 큰 업적을 쌓았으며, 같은 
해 판경홍도호부사로 전직했다.
  1438년 모친상을 당해 한때 사직했다가, 다시 3달 후에 북방의 경비를 담당했으며, 이후 2
년 동안 당시 함길도 도절제사로 있던 김종서를 도와 서북  4군(지성, 무예, 여연, 무창), 동
북6진(경흥, 경원, 온성, 종성, 회령, 부령)개척에  큰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여진족은  다음 
네 명의 조선 장수를 크게 두려워하게 되었다. 
  "김종서, 이징옥, 전시귀, 하경복!"
  북방 개척의 공을 인정받아, 이징옥은 마침내 김종서의 후임으로 함길도 도절제사에 올랐
다. 1449년에 그는 그 동안 20여년에 걸친 북방 경비를 담당한 공으로 지중추원사에 승진하
였으며, 그 이듬해에 다시 함경도  절제사로 부임했다. 김종서는 그와 작별하고  돌아서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징옥과 그의 형 이징석은 모두 다 명장이나, 징석은  욕심을 내어 재물을 모으기에 급
급한 반면에, 징옥은 청렴으로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로다!"
  함길도 도절제사로 있으면서, 그는 함부로 여진족을 죽이거나 약탈하지  않고 그 지역 백
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높은 지지와 신망을 받았으며, 조정으로부터는 뛰어난 지략가요 담
력 큰 장수라는 평을 받게 되었다. 그는 가산을 돌보지 않고 오직 변방 경계와 개척에만 모
든 정열을 다 바쳤다. 또한 그의 처가 죽은 지  오래되어 그를 돌볼 사람이 없었으나 "청백
은 무복인의 별호이니라"는 김종서의 조언에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고자  애를 썼다. 이를 
알게 된 문종은 옷 세벌을  짓도록 하여 그에게 하사하기도 하였다.  하루는 여진족이 그를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재물과  여자를 보내 유혹을 해온 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추상 같은 호령을 하여 그들을 당장 내쫓아 버렸다.
  1453년(단종 1년) 10월에 계유정난이 일어났다. 수양대군은 김종서, 황보인 등을 쳐죽이고 
안평대군 부자를 강화도에 압송한 뒤 정권을 장악하여 국가의 주요 업무를 통괄하여 장악하
였다. 그런후, 그는 이어 김종서 일파를 모두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 대상에는 김종서의 천
거로 함길도 도절제사에 오른 이징옥도 포함되었다. 수양대군은 이징옥을 파면시키고, 그 자
리에 박호문을 대신 앉혔다. 수양대군은 자기 일파인 박호문을 은밀히 보내 군사 반란과 외
침을 미리 대비하고자 했던 것이다. 박호문은 근무지로 가서 후임자로서 전임자인 이징옥에
게 전입신고를 하면서, 이징옥에게 한양으로 올라오라는 소환장을 보여주었다. 이에  이징옥
은 멋도 모르고 자기 직을 박호문에게 내어준 다음 호위 병력 약간만 거느리고 한양을 향하
여 길을 떠났다. 그런데 도중에 그는 우연히 계유정난에 관해서 얻어듣게 되었다.  그때서야 
그는 중앙에 정변이 일어났으며  김종서가 사살되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자기를 파면시킨 이유가 김종서의 심복이라는 오해 때문이며, 자기를 한양으로 불러들인 것
이 자기를 처형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도 모두 눈치채게 되었다.
  이에 크게 분개한 이징옥은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수양대군 일파에게 반기를  들기로 
작정하고 곧장 발길을 돌려 예전의 근무지로 돌아갔다. 그는 먼저 선수를 쳐서 박호문을 포
박하여 당장에 목을 베어 죽여버린 다음, 자기의 부하들을 이끌고 반기를 들어 난을 일으켰
다. 그는 병마를 이끌고 두만강 상류쪽으로 북진하여 종성으로  가서 그곳을 본거지로 삼고 
주둔하면서 스스로 대금황제라고 칭하고, 군병력을 정비했다. 그런 다음 근방의  여진족들에
게 격문을 보내 후원을 요청하였다. 장차 그는 두만강  건너편의 오국성을 도읍으로 정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근처의 여진족 및 한민족을 통합하여 "대금제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웅대
한 포부를 세웠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징옥의 적은 외부가 아니라 그 내부에  있었다. 이징옥이 대병력을 이
끌고 오국성으로 향해서 북상하는 도중이었다. 어느날  두만강 상류에서 하룻밤을 쉬어가게 
되었는데 그때 그는 불안한 마음에 잠이 들지  못한 채 마루에서 방어태세를 취한 채 앉아 
있었다. 이때 그의 아들 하나가 졸다 말고 눈을 번쩍 뜨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버님이 피투성이가 된 불길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자 이징옥은 아들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안심시켰다.
  "거사를 앞두고, 무슨 그런 잡념을 하느냐? 염려 말거라."
  바로 이때였다. 종성판관 정종, 호군 이행검등이 이끄는 부하들이 이징옥 부자에게 덤벼들
었다. 위기에 처한 이징옥은 얼떨결에 마당으로 뛰쳐나온 다음  담을 뛰어넘어 이웃 민가로 
도망쳐 숨었지만, 곧 들키고 말았다. 이때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해 처절한 혈투극을  벌였으
나, 그만 외팔을 잘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고 오른팔 하나로 끝까지  싸웠
다. 그러다가 결국 체포되어 그의 아들 셋과 함께 처형되고 말았다.
  이로써 이징옥의 난은 의외로 너무 싱겁게 평정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난은 조선인으로
서 황제를 자칭한 것과 또 이씨 왕조의 중앙정권에 대해 처음으로 지방적 반란을 일으켜 지
방의 민심을 자극하고 이로 인하여 후일 이시애의 난의 선구가 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성삼문의 난(1456년)
  성삼문의 난(사육신의 난)은 성삼문이 성승을 비롯하여, 이개,  하위지, 유성원, 김질 등의 
문인들과 무인 유응부를 비롯한 단종의 외숙 권자신 등과 함께 1456년 4월에 명나라 사신의 
송별 연회석상에서 수양대군과 세자를 암살하고자 모의했던 사건이다.
  
  하늘에 태양 하나, 백성에게도 두 임금 없다.
  1453년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집현전 학사들에게 정난공신의 호를 내렸
다. 그러자 집현전 학사들은 모두들 순번으로 축하연을 베풀었다. 그러나 동부승지 성삼문만
은 이를 수치로 여겨 혼자 축하연을 열지 않았다. 성삼문이 허탈한 마음으로 경회루를 배회
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연못에 빠져 죽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가 달려가 그 팔을  붙
잡고 보니 박팽년이었다. 성삼문은 그를 달래며 말했다.
  "아직 상왕이 살아 계시지 않소이까. 일을  도모하다가 그때 죽는다 해도 늦지  않습니다. 
우리 힘을 합쳐 수양대군을 제거하도록 합시다."
  이때부터 성삼문은 자기 아버지 성승을 비롯하여, 이개, 하위지, 유성원, 김질 등의 문인들
과 무인 유응부를 비롯한 단종의 외숙 권자신 등과 함께 수양대군 암살 계획을 은밀히 모의
하였다. 그들은 1456년 4월에 명나라 사신의  송별 연회 석상에서 운검을 들고  서 있게 될 
자로 성승과 유응부가 결정되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거사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그들은  연
회가 한참 진행 중일 때 도총관 유응부가 검을 휘둘러  수양대군과 그의 아들을 죽인 다음, 
성문을 닫아 걸고 형조정랑 윤영손이 신숙주를 죽이는 것을 필두로 하여 권남, 한명회를 비
롯한 수양대군의 측근들을 모두 없애 버린 후 단종을 복위시킨다는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 송별 연회가 시작될 무렵,  한명회가 수양대군을 찾아와, `창덕궁 광연전은  비좁고 또 
더우니, 세자를 입시하게 하지 말고, 또 운검도 들여 보내지 못하게 하자`고 건의했다. 이에 
수양대군이 동의했다. 이로써 성삼문 일행의 거사 계획은 차질을 빚고 말았다. 화가 난 성승
이 아들인 성삼문에게 연회장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한명회를 죽이고 계획대로  거사하자고 
제안했다. 유응부도 이에 합세했다. 그러나 성삼문은 세자가 참석하지 않는 자리인지라 한명
회를 죽인다고 해도 경복궁에 있는 세자가 군사를 몰고 온다면 승산이 없다고 하면서 거사 
일정을 연기하자고 성승과 유응부를 설득했다. 이때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문신들도 성삼문 
편을 들었다. 이 때문에 한참이나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성승과 유응부는 자기
들 뜻을 굽히고 성삼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거사 일정이 연기되자, 모의에 가담했던 자들은 불안하기 그지 없게 되었다. 그 중
에서도 특히 김질은 안절부절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궁을  빠져 나와 그 길로 곧바로 
그의 장인인 정창손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모든 거사 기밀을 발설해 버렸다. 그러자  정창손
은 사위 김질과 함께 궁으로 곧장 들어가 수양대군을 만나 모든 걸 자세히 꼬아 바쳤다. 이
에 수양대군은 명나라 사신이 떠나자마자 그 즉시 성삼문을 체포하여 데려와서 직접 문초하
였다. 이때 성삼문은 김질과 대질을 원한다고 요구하였다. 수양대군이 김질을 불러 대질시키
자, 그 자리에서 김질의 말을 듣고 난 성삼문은 껄껄걸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네가 꼬아 바친 것이 오히려  말을 돌린 감이 있구나. 우리들의  뜻은 역모를 품고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상왕을 다시 복위하는데 있노라."
  그러자 수양대군이 대노하여 소리쳤다.
  "왜 나를 배반했느냐?"
  이때 성삼문은 수양대군을 똑바로 쳐다보며 단호히 말했다.
  "우리는 원래의 임금을 복위시키려고 했을 뿐이오. 천하에 임금을 받들지 않는 신하가 어
디 있겠소? 내 마음은 세상 사람들도 다 알고 있소이다.  이를 어째서 배반이라 하는 거요? 
나으리는 평소에 주공임을 자처했는데, 주공이  언제 이런 짓을 했소이까?  이번 일을 꾸민 
것은, 하늘에 두 태양이 있을 수 없듯이,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외다."
  "선위 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어찌 이제 와서 나를 배반하려 한단 말이냐?"
  "그때는 단지 때가 아니었을  뿐이었소이다. 애당초 적극적으로  막지 못했으니 물러나서 
죽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냥 죽을 수는 없다고 판단하여, 우리는 이렇게 뒷날을 도
모하게 된 것이오."
  "너는 내가 주는 녹을 먹고도 어찌 나를 나으리라 부르느냐?"
  "상왕이 계시는 데 내가 어떻게 나으리의 신하란 말이오? 그리고, 난 나으리의 녹을 먹은 
적이 없소이다. 만일 의심스럽거든 내 집을 뒤져 보시오. 나으리가 준 녹봉은 여태 건드리지
조차 않았소이다."
  이에 격분한 수양대군은 성삼문에게 달군  쇠로 지지는 형벌을 내렸다.  그래도 성삼문은 
태연한 표정으로 조용히 한마디 했다.
  "나으리의 형벌이 너무 참혹하오 그려."
  그러고 나서, 세조 옆에 서 있는 신숙주를 호되게 꾸짖었다.
  "너와 내가 집현전에 있을 때,  세종대왕께서 하루는 왕손을 안고  산보하여 하신 말씀이 
생각나지 않느냐?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 그대들은  부디 세자를 보호하라.` 그 말씀이 지
금도 내귀에는 쟁쟁하건만, 너 혼자서 잊어 버렸단 말이냐? 네가 이렇게 못된 놈인 줄은 미
처 몰랐구나."
  성삼문에 이어 박팽년, 유응부, 이개, 하위지 등도 체포되어 수양대군에 의해 직접 심문당
한 뒤 군기감 앞에서 거열형에 처해졌다. 유성원은 자기 집에서  아내와 술 한 잔을 조용히 
나눈 뒤 조상의 사당 앞에서 자살해 버렸다. 이어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도 주모자로 체포되
어 극형에 처해졌으며, 성삼문의 세 동생(성삼빙, 성삼고,  성삼성)과 네 아들(성맹첨,성맹년,
성맹종, 그리고 갓난아기)등도 모두 살해되었다. 이외에도 반역의 혐의를 받은 권자신, 김문
기 등 70여 명도 모두 살해되었다. 그 이듬해인  1457년에, 수양대군은 상왕(단종)을 노산군
으로 강봉시켜 50여 명의 군사의 감시 아래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보내버렸으며, 이미 죽은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를 추폐시켜 서인으로 만들었고, 금성대군(수양대군의 넷째  아우)도 
단종을 가까이 한 일이 있다 하여 경상도 순흥으로 귀양을 보내 버렸다. 그 해 금성대군 이
유는 유배지 순흥에서 그곳 부사 이보흠과 모의하여 노산군을 다시 왕위에 복위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1456년 9월 유배지의 군사와 향리를 결집시켜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고 영남
의 지방 토호들에게 격문을 띄웠다. 그런데 관노가 그 격문을 세조에게 갖다 바치며 밀고해 
버리는 바람에, 거사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영의정 정인지, 좌의정 정창손, 이조판서 한
명회, 좌찬성 신숙주 등이  나서서 금성대군과 노산군을 처형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다. 이로써 금성대군과 이보흠은 곧 체포되어 안동 감옥에 갇혔다가 처형되었으며, 왕자 
한남군과 영풍군도 변방으로 귀양가게  되었고, 노산군(단종)은 다시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그런지 얼마 안 되어, 노산군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그렇지만 영월에 내려간 금부도사는  사
약을 차마 노산군에게 내밀지 못하고 어물어물하다가 장사 한 사람을 방 안으로 들여 보내 
노산군을 뒤로부터 끌어안고 목을 졸라 죽여 버리도록 했다.
  
   이시애의 난(1467년)
  이시애의 난은 판회령부사를 역임한 지방 호족 출신 이시애가 지방적 세력을 배경으로 북
도의 수령을 남도 인사로써 삼는 것이  부당하다고 북도인을 선동하여 그의 아우  이시합과 
더불어 1467년(세조 12년) 5월에 일으킨 난이다.
  
  북도의 수령 자리에 부도 사람은 왜 못 앉나?
  이시에(?-1467년)는 검교 문하부사 이원경의 손자요 함경도 첨절제사 이인화의 아들로 길
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함경도 지방 호족 출신이었다. 당시 그 집안이 함길도
의 각 읍에서 모두 잘 살고 있었다. 그는 조선 초 조정의 북방인 회유정책에 의해 중용되어 
1451년(문종 1년)에 호군이 되었고, 1458년(세조 4년)에 경흥진 병마절제사가 되었으며, 이어 
첨지중추부사, 판회령부사의 직을 각각 역임했다.
  세조는 왕권을 확립한 후, 차츰 북방민의 등용을 억제하고  지방관을 중앙에서 직접 파견
하여 임명하고 북도 출신의 수령을  점차적으로 줄여가는 등 중앙접권  정책을 강화하였다. 
그러자 북도인들은 이에 심한 불만을 품게 되었다. 더욱이  조정에서는 1458년에 호적을 개
정하고, 그 이듬해 2월부터 새로 호패법을 시행하여 지방 실력자들이 거느리고 있던 인력이 
군대로 편입되어 버리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던 지방 토호들은 
중앙의 일련의 행정조치를 매우 못마땅히 여겼다. 또한 중앙에서 임명되어 파견된 수령들은 
대부분 무인 출신들이어서 행정적인 차원에서의 통치보다는 무력을 통한 독재적인 방법으로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농민들에 대한 착취  수탈을 자행하여 북도인들의 원성을 크게  사게 
되었다.
  이 무렵(1467년 봄) 이시애는 모친상을 당하여 판회령부사의  직을 사퇴하고 집에 들어앉
아 있었다. 그런데 이시애의 아우  이시합과 매부 이명효 등이 조정의  일련의 행정 조치에 
대해 불평불만을 터뜨리면서 이시애의 심기를 자꾸 자극하였다. 자연스레 그들은 마음을 합
하여 머리를 맞대고 모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그들은 1467년(세조가  죽기 1년 전) 5
월에 드디어 반란을 일으켰다. 이시애는 반란을 일으킴과 동시에 유언비어를 널리 유포시켰
다. 그는 자기 족당들을 북방 각 지에 보내 처음에는 다음과 같은 소문을 퍼뜨렸다. 
  "충청, 전라, 경상 하삼도의 군사들이 바다와 육지 양면으로 쳐들어와 북도의 군민들을 죽
이려 한다. 조정에서 평안도와 황해도 병사를 보내 설한령을 통해 북도로 들어오게 하여 장
차 이곳 사람들을 모두 죽이려 한다."
  그런 다음, 이번에는 함길도 병마절도사 강효문을 다음과 같이 모함하면서 민중을 선동했
다.
  "함길도의 절도사란 자가 모든 진장들과 함께 반역을 음모하고 있다."
  이 즈음 강효문은 각 진을  순찰하던 중에 이시애의 고향인 길주에  와 있었다. 이시애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밤중에 숙소를 급습하여, 병마절도사 강효문, 길주목사 설징신, 부
령부사 김익수, 판관 박순달, 군관 성이건, 김수동 등 중앙 출신 관리들을 붙잡아 모두 칼로 
베어 죽여 버렸다. 이 암살 사건은 1467년 5월 10일에 일어났다.
  한편 이시애는 조정에는 자기 측근인 이극기를 보내 다음과 같은 거짓 상소를 올리며 자
신이 강효문을 죽인 것은 반란이 아니라 의거라는 뜻을 전달하였다.
  "병마절도사 강효문 등이 중앙의 한명회, 신숙주  일파와 결탁하여 함길도 군대를 이끌고 
올라가서 모반하려 했사옵니다."
  이와 동시에 이시애는 `지금 함길도에서는 각 읍의 백성들이 화를  입을까 봐 두려워하며 
별별 소문을 다 퍼뜨리고 있으며, 북도의  민심이 대단히 동요되고 있는 중이니, 속히  북도 
출신 인사를 함길도 내의 각 읍 수령으로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이
후에도 이시애는 몇 번 더 상소를 올려 중앙 정부가 혼란에 빠지도록 고도의 심리전을 구사
하였다.
  이시애는 이런 식으로 교묘히 유언비어를 퍼뜨려, 당시 지방의 각 유향소(지방 군현의 수
령을 보좌하는 자문기관)의 불평불만 및  농민들의 관리에 대한 증오심에  호소하여 스스로 
반란에 동조 또는 직접 참여하게 만들었다. 스스로 함길도 절도사라 자처하고, 지방  세력가
들의 근거지인 각 읍 유향소를 중심으로 총궐기하여 타도 출신 수령들을 습격하고 살해하는 
등 함길도 일대가 삽시에  혼란에 빠뜨리도록 유도하였는데, 이  작전은 예상대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이 반란에 야인들(여진족)까지 끌어들이는 등 치밀한 전략을 펼
쳐나갔다. 이시애의 반란군은 점점 확대되어 한때 북방 곳곳을  휩쓸고 다니며 조정에서 파
견한 북도 수령 및 관리를 모두 살해해 버리는 등 그 기세를 크게 떨쳤다. 이시애의 반란군 
속에는 각 진영의 정규군도 포함되어 있는 데다 여진족이 보낸 증원군도 합세해 있어, 토벌
군이 쉽사리 제압하지 못했다.
  이시애는, 세조에게 반란군의 동향을 알리면서 먼저 마운령을 점령할  것을 건의한 바 있
는 신면(신숙주의 아들)을 살해하고 나서 태연히 세조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신면은 역적 신숙주의 아들로서 모반하여 남도의 군사를 이끌고 북도의 백성들을 살육한 
후 다시 대군을 이끌고 상경하여 반역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죽이고 또 그에게 동조
한 체찰사 윤자운도 잡아 가두었나이다."
  한편, 세조는 처음에 멋 모르고 이시애의 말을 성급히 믿어 버리고 신숙주를 잡아들여 투
옥시키는 등 일시 실수를 저질렀으나, 곧 사태를 직시하고서, 즉시 남도에서 징병하여  토벌
군을 편성한 다음, 조카인 귀성군 이준을  함길, 평안, 강원, 황해 4도 병마도총사로  임명하
고, 호조판서 조석문을 부총사로, 허종을 함길도 병마절도사로, 그리고 강순, 어유소, 남이를 
대장으로 각각 임명하여 토벌군 3만여 명을 1467년 5월 18일에 출동시켰다. 그 중 조석문이 
이끄는 토벌군이 먼저 영흥으로 북상하며 진격하였으나, 그 뒤를 따르던 구성군은 토벌군의 
주력부대를 거느리고도 철원에서 한동안 늑장을 부렸다. 그것은 최윤손 때문이었다.  토벌군
이 출동하기 앞서 조정에서는  단천 사람인 최윤손을 이시애에게  보내 회유하도록 했으나, 
그가 이시애 쪽에 붙어서 오히려 `조정은 부패할 대로 부패해 있다. 이러한 기세로 밀고 들
어가면, 넉넉히 승리할 수 있다.  중앙의 한명회, 권남, 신숙주 등도  이시애의 편이다. 라고 
거짓 선전을 해댔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섣불리 반란군을  대적했다가는 어떤 망측한 일
을 당할지 몰라 겁을 집어먹고 그처럼 고의로 토벌군 주력부대의 진군을 늦추고 있었던 것
이었다.
  이 무렵 이시애는 길주에서 단천, 북청, 흥원으로 남하하면서, 중앙 출신 관리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거나 사로잡아 그 기세를  더 한층 올리고 있었다. 전세와  상황이 이처럼 여의치 
않자, 세조는 각 도에서 군사를 더 징발하여 도총관 강순을 진북대장으로 임명한 뒤 평안도
병 3천명을 주어 평안도 경계 지역에 위치한 영흥으로  진격하게 함과 동시에, 병조참판 박
중선을 평로장관으로 삼아 황해도병 5백명을 주어 문천으로  쳐들어가게 하였다. 장군 어유
소에게는 경군 1천명을 주어 도총사 이준을 돕도록 하는 등 반란군에 대한 다각적인 공격을 
시도하면서, 동시에 반란군 일당을  체포할 경우 후한 상금을  주겠다고 선언하여 토벌군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북방 지역의 각 유향소와 육진에도  밀사들을 보내 반란에 동요하지 
말고 반역자를 체포하는 데 최선을 다하라고 격려하였다.
  병마도총사 이준은 토벌군을 이끌고 함길도 경계지역에  도달해서 주둔하면서, 허종을 선
봉장으로 내보내 반란군을 공격하도록 했다. 그러자 허종은 선봉부대를 이끌고 안변에 도착
하여 머물면서 함길도 출신 병사를 보내 포섭 작전을 펼쳤다. 그러자 반란군에 억지로 참여
한 차운혁이 포섭되어, 토벌군을 도와 홍원의 파탄동부근에서 이시합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이시합은 교묘히 속임수를 써서 미꾸라지처럼 빠져 달아나고 말았다. 그러자 이준이 이끄는 
토벌군의 주력부대는 철령을 넘어 안변으로 전진하여 반란군에 대한 포위망을 점점 좁혀 나
갔으며, 허종의 선봉부대는 함흥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이 무렵 세조는 신숙주를 옥에서  풀
어줌과 동시에 반란군을 회유하는 식의 온건책을 철회하고 직접 토벌에 나서겠다는  의사를 
밝힌 뒤 강경책으로 선회하였다. 그러자 이시애는 겁을 집어먹고 반란군을 후퇴시켜 본거지
를 함흥에서 북청으로 옮겼다. 그 해 6월 19일에 토벌군의 주력부대는 함흥을 점령한 뒤 홍
원까지 진격하였다. 이준은 강순으로 하여금 종개, 산개에,  어유소와 허종과 박중선으로 하
여금 북청 근처의 평포에 각각 진을 치게 하고 대처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2만여 명의 반란
군은 이미 북청을 빠져 나간 뒤였다. 이시합은 북청 근처인 여주을현에 진을 치고, 이시애는 
북청 어소에 각각 진을 치고서 토벌군과의 전투 태세에  들어갔다. 드디어 6월 24일에 반란
군이 먼저 야음을 틈타 토벌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포위당한 토벌군은 성문을 굳게 닫아 걸
고 일체 대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반란군은 일단 후퇴를 하였다가 다시 새벽에  쳐들어왔다. 
그리하여 마침내 10차례의 치열한 공방전이 치뤄지게 되었다. 이때  남이 장군은 몸에 서너 
발의 화살을 맞고서도 용감히 전투에 임하여 토벌군들의 사기를 한껏 올려 주었다. 그날 반
란군은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이후 이명효는 홍원과 북청 사이에,  이시합
은 마어령 근교에, 그리고 이시애는 대문령을 넘어 열여문평에  각각 반란군의 방어선을 구
축하였다. 이때 강순은 홍원으로, 이준은 함흥으로 토벌군의  주둔지를 각각 옮겼다. 토벌군
의 1진은 강순, 남이, 박중선이, 2진은 허종, 어유소가, 그리고 3진은 이준, 오장경이 각각 이
끌고 있었다. 7월 22일에 김말손이 이끄는 반란군  2백여 명이 석장현(북청과 함흥 경계 지
역)을 점령한 것을 필두로 다시 토벌군과 반란군은 대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7월 25일 야밤
을 이용하여 강순은 토벌군1진을  이끌고 산개령을 넘어, 어유소는  2진을 이끌고 종개령을 
넘어 각각 진격해 들어갔다. 그 결과 남이의 부대는 종개령의 반란군을, 이숙기의 부대는 산
개령의 반란군을 각각 물리치는 등  이명효가 이끄는 반란군 대부분을  격파하였다. 그러자 
이시애는 1만여 명의 반란군을 이끌고 북청에서 동쪽으로 68리쯤 떨어져 있는 만령에다 15
리에 걸친 진을 쳐서 토벌군의 진격에 철저히 대비했다. 그 해 초가을에 토벌군은 1천8백여 
명으로 구성된 총포 부대를 앞세워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준은 토벌군을 4개 편대로 나누
어, 1군은 허종에게 맡겨 서쪽으로, 2군은 박중선, 김교에게 맡겨 우회하여  북방에서, 3군은 
어유소에게 맡겨 배를 타고 만령 뒤로 돌아가 후위에서, 그리고 4군을 맡은 자신은 강순, 남
이와 함께 정면에서 각각 진격해  들어갔다. 이에 이시애는 중봉을  거점으로 하여 3중으로 
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토벌군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8월 4일에  어유소의 군대에 의해 좌측 
허리가 공격당한 후 열세에 몰린 반란군은 이성 쪽으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8월 5일에 이성
마저 점령당하자, 북으로 도망치던 이시애는 잔류 반란군을 모아  단천에다 진을 치고 일시 
저항하다가 다시 길주로 달아났다. 이시애는 자기 집 창고에  있던 곡식을 인근 농민들에게 
나눠 주고, 이명효로 하여금 의복을 경성으로 옮기게 한 후, 의복 및 재물을 여진족에게  주
어 환심을 사서 여진족을 규합하고, 그와  동시에 6진의 군사 및 잔류  반란군을 끌어 모아 
전열을 가다듬으려고 경성으로 향했다. 이때 이시애는 만약 이것도  저것도 뜻대로 되지 않
으면 배를 구하여 재화를 싣고 멀리 여진족의 마을로 도망치려는 계획까지 세워 놓았다. 이 
무렵 길주 출신으로 사옹별좌에 있던 허유례(이시애의 처조카)가 세조에게 간청하여 이시애 
일파를 회유하러 나섰다. 당시 허종의 휘하에 있던 그는  위장하고서 이시애의 진중에 들어
갔다. 당시 자기 아버지가 이시애의 수하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거짓 항복하는 척하
며 적의 진중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먼저 이시애의 부하들 중 
이주, 황생, 이운로 등을 설득하여 마음을 돌려 놓은 다음 그들과 함께 8월 12일에 천막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이시애, 이시합 형제를 사로잡아, 영동역에 주둔하고 있던 토벌군에  넘겨 
주었다. 도총사 이준은 반란군 수괴인 두 형제를 문초한 뒤 목을 베어 죽인 다음, 그들의 목
을 한양으로 올려 보냈다. 세조는 그들의 머리를 확인한 후 3일 동안 거리에 내걸어 사람들
에게 구경시키도록 명했다. 이로써 약  4개월간에 걸친 이시애의 난은  마침내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후, 조정에서는 길주를 길성현으로 강등시켰으며, 북도 유향소를 폐지하고 함길도
를 좌도와 우도로 나누어 통치책을 한층 더 강화했다. 그리고, 이 난에 관련된 자들을  모두 
원변으로 귀양 보내 버렸다.
  
    박원종의 난(1506년)
  박원종의 난(중종반정)은 1506년에 박원종이 유순정, 성희안, 신윤무, 박영문, 장정, 홍경주 
등과 함께 연산군의 실정과 학정에 반기를 들어 일으킨 난이다.
  
  얘들아! 폭군 연산을 끌어내라
  박원종(1467-1510년)은 판중추부사 박중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순천, 자는 백
윤이다. 그는 특히 무술에 뛰어나 음보로 무관직에 기용되었으며, 1486년(성종 17년)에 선전
관으로 있을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내승이 되었다. 이후 그는 오랫동안 왕을 측근에서 모
시게 되었다.
  1492년 성종의 특지로 동부승지에 발탁된 후 공조 참의, 병조 참의를 거쳐 연산군 때에는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한때, 그는 재정  문제에 대해 연산군에게 직언을 하다가  1500년에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좌천되기도 했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1506년에 경기도 관찰
사가 되었으나, 연산군의 눈 밖에 나서 다시 실직당하고 말았다. 그랬다가 다시 함경북도 병
마절도사가 되었으며, 이어 평성군에 봉해져 도총부 도총관의 직에 올랐다.
  성종의 뒤를 이어 왕위(조선왕조 10대왕)에 오른 연산군은 즉위 초에는 왜구 및 여진, 야
인들의 침입이 잦은 것을 염려하여  백성을 변경에 이주시켜 채우는  조치를 취했으며(1499
년), 비융사를 두어 병기를 제조하게 하는(1500년) 등 다소의 업적을 쌓았다. 그러나 어머니 
윤씨가 사사된 후 세자 시절을 불우하게 보낸 탓으로 이상 성격이 형성된 탓인지 점차 향략
과 횡포를 일삼아 많은 실정을 저질렀다.  무오사화(1498년)와 갑자사화(1504년)가 거듭되는 
동안에 그의 실정과 학정은 한층 더 심화되었다. 1498년에  학문을 싫어하는 연산군의 성격
을 교묘히 이용한 훈구파의 유자광, 이극돈 등의 사주를 받은 연산군은 김종직이 지은(조의
제문)을 구실 삼아 무오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대량으로 숙청해 버렸으며, 1504년에는 친
어머니 윤씨 사사 사건의 전말을 듣고 갑자사화를 일으켜 그와 관련된 후궁들을 살해한 뒤 
김굉필 등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을 학살하는 등 비극적 상황을  연출했다. 그 후 왕을 비방
하는 한글로 된 투서를 빌미로 삼아 한글 사용을 금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글 관계 서적을 
닥치는 대로 불태워 버렸다. 또한 그는 충언하는 신하를 처형시켜 버리거나, 관직 박탈 또는 
유배를 보내 버렸으며, 경연과 대제학 제도도 폐지해 버렸고, 사간원의 기능도 중지시켜  버
렸다. 또한 그는 성균관에서 유생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유흥터로 삼았으며, 원각사에 장학원
을 두어 기녀들을 양성시켰고, 전국에 채청녀사, 채홍준사를 파견하여 미녀와 양마를 징발해 
오도록 하였다. 일반 사대부이 집 안에서 뛰어난 미녀들을  모조리 적발하여 궁중에 끌어들
여 이를 속홍이라 하였고, 아직 시집 가지 않은 여자들을  궁중에 불러들여 이를 청녀라 하
였다. 그 중에서 뽑힌 기녀  3백명을 궁중에 상주시키면서 자신의  정욕과 쾌락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궁궐 내외를 수시로 잠행하면서 연일 향락과 음행을 일삼았다. 심지어 그는  궁중 
연회에 초대된 사대부의 부녀자들을 겁탈하는 등  방탕과 육욕에 가득찬 생활에 젖어  지냈
다.
  이렇듯 이미 비정상적인 인간이 되어 버린 연산군은 온갖  횡포를 자행했고, 국고를 탕진
하였으며,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다. 그러자 자연히  정치는 그의 손에서 떠나, 숙원  장녹수, 
내시 김자원, 외척 신수근, 간신 임사홍 등에게 맡겨져 그들 마음대로 주물러지게 되는 지경
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중신들은 오히려 왕의 외도를 방관 또는 조정했다.
  이에 박원종은 크게 분개하였다. 그는 한 동네에 살고 있는 부사용 성희안(성희안은 이조
참판으로 있었을 때 양화도 놀이터에서 연산군의 횡포와 방탕적인 생활에 대한 풍자시를 지
어 올렸다가 연산군의 미움을 사서 무관의 말단직인 종 9품에 해당되는 부사용 직으로 좌천
되고 말았다)과 함께 모반을 모의 했다. 때마침  이때 군자부정의 직에 있던 신윤무가 찾아
와 들려준 다음 말은 그들을 크게 고무시시켰다.
  "지금 중외에 원한을 품은 이가 많소이다. 좌우의 친신하는 사람들도 거의 다 왕 곁을 떠
나가 버렸습니다. 곧 무슨 일이 있을  듯합니다. 또 용맹과 지략을 겸비한 이장곤이란  자가 
이미 도망쳐 버린 상태입니다. 그가 골짜기에 떨어져 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무리를 
모아 군, 현에 격문을 보내 군사를  일으켜 한양으로 한양으로 쳐들어오면, 조정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고 말 것입니다."
  이리하여, 박원종과 성희안은 당시 인망이 높던 이조판서 유순정을 설득하여 호응을 얻은 
다음, 장정 등과 모의하여 난을 일으키기로 했다. 김종직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유순정은 활
도 잘 쏘아 문무를 겸비한 강직한 인물로서 당시 여러  문신, 무신들에게 두루 존경을 받고 
있었고, 장정은 창성부사로 있다가 장녹수가 부당한 방법으로 빼앗은 토지를 원래의 소유자
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가 그 일로  인하여 파직당했다. 거사일은 연산군이  장단의 석벽으로 
유람하는 때에 맞춰 1506년 9월 1일 저녁으로 정했다.  박원종은 신윤무를 비롯하여 수원부
사 장정, 군기시 첨정 박영문, 사복시 첨정 홍경주등과 함께 무사를 모아 거사일에 훈련원에 
모두 모이기로 했다. 여기에 성희안뿐만 아니라 김수동, 김감, 유자광, 등도 가세하기로 하였
다. 그런데 돌연 연산군이 석벽으로의 유람 행차를 취소해 버렸다. 그러자 박원종은 다시 무
의하여 거사일을 연기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때 뜻밖의 격문 한 장이 한양으로  날아들었다. 
그것은 전라도에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유빈(형조참판의 직에 있을 때  갑자사화로 인하여 
모함에 걸려 전라도로 유배당했다)과 이과(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을 때 연산군에게 후원에서 
활을 쏘며 노는 것을 자제해 달라고 충언하다가 전라도로 귀양가게 되었다)가 보낸 거사 격
문이었다. "전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유빈, 이과,  김준손 등이 군사를 일으켜 거사
를 일으키려 한다"는 격문 내용은 박원종 일파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이 때문에 박원종
일행은 거사 연기 계획을 백지화하고 무사들을 긴급히 훈련원에 집결시켰다. 그들은 진성대
군에게 먼저 거사 계획을 알린 다음, 신윤무, 박영문, 홍경주, 장정 등과 함께 무사들을 이끌
고 난을 일으켰다. 박원종은 장정으로  하여금 진성대군의 사저를 경비하도록 지시한  다음, 
신윤무를 보내 신수근, 신수영,  임사홍을 먼저 살해하라고  지시했으며, 개성에도 무사들을 
보내 신수근의 아우인 개경유수 신수겸을 베어 죽이도록 지시했다.  신윤무는 그 즉시 무사
들을 데리고 가서 수각교에서 신수근의 목을 베어 버렸으며,  이어 신수영과 임사홍도 차례
로 사로잡아 때려 죽여 버렸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사람들이 박원종의 무리 쪽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그러자 박원종은 부서를 정하여, 용구의 말을 끌어내어 나눠 주어 각각  군사를 
이끌고 궁궐을 에워싸도록 지시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주어 
함께 종군하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윤형로를 진성대군에게로 보내서 이번  거사의 이유를 
설명하도록 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운산군 이계에게 무사 수십  명을 딸려 보내어 진성대군
을 호위하도록 하였다. 그 이튿날인  9월 2일 새벽에 성희안 등의  봉기군이 포위하고 있는 
돈화문 쪽으로, 궁궐 안에서 거사  소식을 듣게 된 장사들과 시종들이  서로 다투어 추항해 
와서 봉기군에 대거 가담하였다. 그러자 궁궐 안은 텅 비다시피 되었다. 이때 입직승지 윤장
이 조계형, 이우 등과 함께 급히  입궐하여 변란 소식을 연산군에게 알렸다. 이때  연산군은 
너무 놀라서 맨발로 달려나와 윤장의  손을 잡고서 부들부들 떨며 어쩔  줄 몰라했다. 이때 
윤장 일행은 궁궐 바깥 정황을 살펴 봐야 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연산군의 손을 뿌리쳐 버리
고 수채 구멍으로 도망쳐버렸다. 
  날이 밝자 박원종 일행은 궁궐 안으로 힘이  센 2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광화문을 거쳐 
침전으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연산군에게 아뢰었다.
  "전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천명에 따라 순순히 옥새를 내 놓으십시오."
  그러나 연산군은 벌벌 떨면서도 끝내 옥새를 내놓지 않고  버텼다. 그러자 박원종의 호려
이 떨어졌다.
  "얘들아, 폭군 연산군을 끌어내라."
  칼을 뽑은 군사들이 침전 안으로 들어가 연산군을 끌어냈다.  이때 박원종이 이렇게 꾸짖
었다.
  "12년 동안의 행적을 돌아보시오. 포악무도한 지난 닐의 학정을 생각하면, 무딘 킬로 난도
질을 하여도 한이 다 풀리지 않을 것이오."
  모든 것을 자포자기한 연산군은 숙옹전에 사람을 보내어 옥새함을 가져오게 하여  상서원
의 낭관에게 옥세를 내어 주었다. 
  이날, 박원종은 연산군으로 하여금 동궁으로 옮겨갈 것을  청한 다음, 전동, 심금손, 강응, 
김효손 등을 잡아 죽인 후, 경복궁으로 찾아가서 성종의  계비이며 진성대군의 모친인 대비
에게 " 연산군을 폐하고 대신 진성대군을 왕위(중종, 조선왕조 11대왕)에 앉힐 것"을 간청했
다.
  "주상(연산군)이 크게 군도를 잃어  버려 천명과 인심이다  진성대군에게로 돌아갔으므로 
신하들이 뜻을 받들어서 진성대군을 옹립하여 하옵니다."
  이윽고, 윤대비의 윤허가 떨어졌다. 그러자  유순정이 곧바로 진성대군의 사제로 가서  그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진성대군은 세 번이나 이를 거절했다. 그러다가 유순정의 간청에  못 
이겨, 진성대군은 할수없이 그 청을 받아들여 군사들의 호위를 받아가며 경복궁으로 들어갔
다. 이때 길가에는 많은 백성들이 나와 기뻐하였다. 이 날 오후 4시에 진성대군은  근정전에 
나아가 조선왕조 11대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진성대군(중종)은 문무백관의 하례를 받
는 자리에서 선정을 베풀 것을 선언하였다.
  9월 3일에 연산군은 군으로 강봉되어 강화 교동의 초가  깁에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그 
해 11월 6일에 병 들어(일설에는 독살되어) 죽었다. 또한 폐비 신씨는 정청궁으로 옮겨갔으
며, 그리고 폐세자 이황은 정선에 창녕대군 이인은 수완에, 양평대군 이성은 제천에 각각 유
배당했다. 그밖에 횡포를 일삼던 나인, 흥청 및 그 족친과  노비, 수령등 1백여 명은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를 당하였다. 9월4일에는 지방에 파견 나가 있던 채청녀사와 채홍준사를 모두 
소환 하였다. 9월 8일에는 함께 난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반정을 이룩하는 데 주동
적 역할을 담당한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신윤무,  박영문, 장정, 홍경주, 유자광 등을 비롯
한 1백여명이 정국공신으로 책봉되었다. 그와 동시에 박원종은 좌의정(영의정에는  유순, 우
의정에는 김수동)이 됨과 동시에 평원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성희안은 창산부원군에 봉해짐
과 동시에 형조판서(이후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신윤무는 영천군에 봉해짐과 동
시에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이후 공조판서, 좌잠찬, 우참찬 병조판서)가 되었고, 유순정은  정
천부원군에 봉해짐과 동시에 우의정이 되었다. 장정(그는 중종반정 직후에 함경북도 병마절
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해 버렸다.)은  하원군에 봉해졌다. 박원종은 이후  좌의정을 거쳐 
1507년 유순정과 함께 이과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정난공신 1등이 되었고 그 이듬해 사은
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06년 영의정에 오르고 이듬해 평성부원군에 봉해졌으나,  1510년
에 44세로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과의 난(1507년)
  이과의 난은 1507년(중종 2년)에 이과가  중종반정 후 전산군에 봉해졌으나  관직이 높지 
않음에 불만을 품고 이찬, 윤귀수, 김잠 등과 함께 모의하여 일으킨 난이다.
  
  공신을 푸대접해도 되는 거야?
  이과는 이창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자는 과지, 본관은  전의이다. 그는 1491년(성종 
22년)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관직의 길로 들어선 후, 저작, 부교리, 시독관, 수찬 등
을 역임하였다. 1495(연산군1년)에는 기주관이 되어(성종실록)을  편찬하는 일에 참여하였으
며, 1504년(연산군 10년)에는 호조 참의, 예조 참의를 거쳐 대사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예저
에 홍문관에 있을 때 연산군의 후원관사에 대해 논한 것이  문제가 되고 말았다. 그가 홍문
관 부제학으로 있을 때 연산군에게 후원에서 활을 쏘며 노는 것은 옳지 않으니 자제해 달라
고 충언한 적이 있었는데, 이게 화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갑자사화(1504년)
때 전라도로 유배당하고 말았다. 
  1506년 그는 전라도 유배지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같은 처지의 유빈, 김준손 등과 함
께 거병하여 진성대군을 추대하려 하였으나, 박원종,  유순정, 강희안, 신윤무, 장정, 박영문, 
홍경주, 유자광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그만 중지하고 말았
다. 
  중종반정 직후 유배지에서 풀려난 그는 주문사의 이문을 글로 지어 제작하는 등 다시 관
직의 일선에 나섰다. 
  1507년(중종 2년)에 그는 정국원종공신으로 전산군으로  봉해졌으나, 관직이 높지 않음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게다가 전 대사성  이과는 그 해 6월에 정국공신 4등에  책록되었으나, 
곧 대간에서 반대하여 원종 1등으로 강등되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크게 분개하였다.  그는 
1507년 8월에 이찬, 윤귀수, 김잠, 손유 등과 모의하여 견성군  이돈(성종의 아들, 숙의 홍씨
의 소생)을 추대하여 왕위에 앉히고, 박원종, 유순정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거사하기로 하였
다. 그들은 1507년 8월 26일 밤 중종이 선능에 친히 제사를  올리러 가는 틈을 타서 거사하
기로 날짜까지 잡아 놓았다. 그런데 왕이 제사를 지내러 막  떠나려는날 밤 전 우림위 노영
손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전 대사성 이과가 공신이 되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겨서, 하원수 이찬, 병조정랑 윤귀수, 
내금위 김잠, 손유 등과 함께 모의하여, 장차 공신이 되기 위해서 내금위 등을 규합하고  왕
이 밖에 나갈 때 거새해서 진성군 이돈을 추대하고 박원종,  유순정 등을 죽여 없애려고 하
고 있나이다."
  이에 중종은 선릉으로 행차를 중단하고 즉시 죄인들을 잡아 들이게 하여, 엄히  문추했다. 
그러자 이찬은 곧 되를 고백했으나, 이과, 윤귀수, 김잠, 손유는 한사코 죄를 부인하였다. 그 
이튿날 아침에야 자신이 역적 모의에 관련된 것을 알게 된 진성군은 궁궐 뜰로 나가 무릎을 
꿇고 처벌을 받을 것을 자청했다. 이날 다시 심문이 이뤄졌지만, 김잠과 손유는 이찬에게 이
과의 음모를 전해 듣긴 하였으나 그 모의에 가담하지는  않았다고 강력히 주장했으며, 이과
와 윤귀수는 여러 차례의 혹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죄를 지었다고 끝내 자백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28일에 이찬은 마침내 죄를 고백하면서 공모자가  더 있다고 발설해 버렸
다. 이리하여, 28일에는 신희철, 유의정,  유영, 유흥조, 금릉수 등이  붙잡혀 왔고, 29일에는 
구전, 한형윤, 윤천령, 김준손, 김석철, 이성종 등이 붙잡혀 문초를 당하게  되었으나, 그들은 
자신들이 역모에 가담하지 않은 신희철, 유흥조, 유영,  윤철령, 등은 유배당했으며, 그 나머
지는 방면되었다. 그리고 9월 1일에 견성군 이돈은 강원도의  간성으로 유배당한 후 사사당
했다. 그러나 그 이듬해 그가  역모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져 신원(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줌)되었다. 한편, 중종은 정승 등의 반대를 무릅써 가며 노영손 등 이과의 난을 미
리 막게 하는데 공을 세운 자 21명을 정난공신으로 정하고 여러사람을 승진시켰다. 이 조치
는 한때 대간의 빗발치는 반대에 부딪쳤다. 그러자 중종은 승진을 취소했다. 그러나  공신의 
책봉만은 그대로 놔 두었다.
  
    신윤무의 난(1513년)
  신윤무의 난은 1513년(중종 8년)에 신윤무가 박영문과 함께 영산군 이전을 왕위에 앉히고 
무신정권을 수립하고자 일으키려고 한 난이다. 
  
  문신들이 나를 모함해 파직시키다니!
  신윤무의 본관으 영월이다. 그는 무신으로서 연산군 때에 선전관을  거쳐 의주 판관을 역
임하였다. 그 후 군자감 부정이 되어 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연산군의 폭정이 날로 심해지자 실망을 느낀 그는 1506년에 박원종 등에게 궁궐의 
내외 정세를 세세히 알려주어 중종반종을 성공시키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거사 당일 그는 무사들을 모아 이끌고 신수근, 임사홍, 신수영 등을 살해하는 등 거사의  핵
심적 일을 담당하여 거사를 성공리에 이끄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정국공신1등으로 책록되어 영천군에  봉해졌다. 그리고, 그는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1508년(중종 3년)에 공조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좌참찬, 우참찬을  지낸 후 병조판사가 되었
으나, 불행히도 문신들의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고 말았다.
  1513년(중종 8년)에 그는 역시 파직되어 문신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박영문과 함께 조
정을 비방했다. 박영문은 1506년 중종반정때  박원종을 도와 가사를 도운  공로를 인정받아 
정국공신 4등으로 책록되어 함양군에 봉해진 후 1510년에  경상도 도순찰사가 되었으며, 유
순정을 따라 부원수로서 삼포왜란으 평정한 공으로  공조판서가 되었으나, 간관들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자 그 후부터 문신들을 증오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영산군 이전을 왕위
에 앉히고 좌의정과 우의정을 죽인 후, 홍경주를 영의정으로 하고 자신들이 좌의정,  우의정
에 앉음으로써 무신정권을 수립하자고 모의한  후 이를 굳게 결의하였다.  그러나 의정부의 
관노 정막개가 이를 엿듣고서 반역을 모의하였다고 고발하여 그만  탄로가 나고 말았다. 그
리하여, 신윤무와 박영문은 대역죄인으로 체포되어 목베임을 당해 죽었으며, 그 아들들도 모
두 교살당하고 말았다.
  
    임꺽정의 난(1559-1562년)
  임꺽정의 난은 임꺽정이 당시 유랑민들과 도적들 및 불평분자들을  규합하여 1559년(명종 
14년)부터 1562년(명종 17년)까지 무려  3년 동안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일대를 중심으로 
일으킨 난이다. 
  
  탐관오리 재산 털어 양민들에게 돌려주자!
  연산군 이후, 중앙의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지방에서 관리들의 횡포가 극심해지자,,  차츰 
민심이 악화되어 갔다.  그러다가 명종 조에  들어와 명화적(강도단)이  날로 창궐하였으며, 
1541년(중종 36년)부터는 대규모로 횡행하게 되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각 리에 내금위, 겸
사복, 한량을 모두 무관 출신인 포도대장으로 충당하게 하는 등 일련의 조치를 취하였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1546년에 명화적은 다시 충청, 전라, 경상도에서 출몰하여  극성을 부렸다. 
그렇지만 조정에서는 윤원로(윤원형의 형)등을 몰아내는 일에  몰두하느라 명화적은 중앙에
까지 횡행하여 장안이 모두 공포에 떨게 되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적을 잡지 못한 포도대
장과 부장 및 군관들을 잡아들여 처벌했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조용하지 않았다.  1551년
에도 여전히 도적들에 의한 살인, 약탈 등이 난무하였으며, 심지어 대낮에도 도적들이  설치
고 다닐 정도로 민생치안이 엉망이었다. 조정에서는 다시 무관들을  보내는 등 사태를 수습
하고자 하였으나, 전국 각지의 도적들을 도저히 잠재울 수 없었다. 게다가 1553년에는  윤대
비가 승려 보우 등을 비호하자, 각처의 승려들 중 상당수가 살인, 약탈을 자행하는 등  혼란
이 가중되었다. 게다가 1555년에는 황해도 일대에 오연석등이 이끄는  도적 떼가 무리 지어 
다니며 관군을 공격하고 살인, 약탈을  일삼았다. 이때 신계현령 이흠례가 주민들의  협조를 
얻어 도적의 괴수 오연석을 생포하여  처형했지만, 도적들의 횡포는 여전했다. 특히  경상도 
예천을 본거지로 활약하는 50여 명의 무뢰배들은 다른 지역의 도둑 떼들과도 내통하여 크게 
세력을 떨쳤다. 
  이 무렵, 임꺽정의 이름이 서서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임꺽정은 양주의  백
정으로 정치의 혼란과 관리의 부패로 민심이 혼란해지자, 기존의  유랑민들과 도적들 및 불
평분자들을 규합하여, 1559년(명종 14년)봄에 황해도, 경기도  일대를 중심으로 난을 일으켰
다. 그는 특이하게도 관군과의 전면전보다는 게릴라전을 펼쳐 그  동안 백성들의 지탄의 대
상이 되어온 권문세가들이나 부패한 관리들의 재산을 털어 양민들에게 나눠주는 식의  일종
의 의적 행위를 펼쳐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냈다. 그는 무리를 이끌고 주로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곡식을 빈민에게 나누어주었다. 게다가 대낮에도 관문을 포위하여 부
패한 수령 및 나졸들을 쳐죽이고, 옥문을 부숴 자기 일당들뿐만 아니라 억울하게 갇힌 일반 
죄수들까지도 탈출시키고, 대낮에도 공물을 싣고 가는 수레를 털어 내는 등 과감한 짓도 불
사하였다. 뿐만 아니라, 만약 그의 종적을 관가에 밀고하는 자가 있을 시에는 반드시 그  배
신자들을 잡아 죽여 버리는 보복 행위를 철저히 시행하였다.  그러자 아전과 백성들은 한편
으로는 그 의적 행위를 지지하여, 한편으로 그의 보복이 두려워, 임꺽정의 무리에 편들지 않
을 수 없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1559년 3월에 황해도 일대의  관리를 대부분 무관으로 바꾸고 그들로  하여금 
임꺽정의 무리를 토벌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 해 4월 21일에 임꺽정은, 관군 20여 명을 데리
고 추격하던 개성부 포도관 이억근을 오히려 역습하여 살해해 버린 후 바람처럼 자취를 감
춰 버렸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1560년(명종15년) 8월 20일에, 예전에(5년 전에)전라 좌도 방어 사로서 
왜구를 토벌한 적이 있는 포도대장 남치근을 이몽린과 함께 파견하여 임꺽정의 무리를 토벌
케 하였다. 개성부 유수와 수령들에게도 도둑잡기를 게을리 하면 엄벌에 처하겠다는 전교를 
내렸다. 그러나 남치근은 경성의 장통방에  와서 모야 놀고 있는 임꺽정의  일당을 거의 다 
포위해 놓고도, 임꺽정이 활을 쏘며 달아나는 바람에 놓쳐 버리고 말았다. 관군은 이때 겨우 
임꺽정이 첩 3명과 졸개 몇  명만을 포로로 잡았을 뿐이었다.  조정에서는 임꺽정의 첩들을 
모두 형조 소속의 종으로 삼게 하였다. 이 때문에 남치근은 포도대장이라는 감투를 잃고 말
았다. 
  1560년 9월초에 임꺽정은 자기 첩들을 구출하려고 무리를 이끌고서 대담하게도 경성의 전
옥서의 옥문을 부수고 쳐들어 왔다. 그러나 그의 첩들이 모두 형조전복에 있었기 때문에 구
출하지 못하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봉산에 소굴을 두고, 성천, 양덕, 맹산 
이천 등지에 수시로 그의 무리를 출몰시켜 관군을 줄기차게 괴롭혔다.
  그 해 11월 하순 경에 임꺽정의 심복인 서림이 엄가이라는  가명으로 경성의 숭례문(남대
문) 밖에까지 가서 술을 먹고 놀다가 포도대장  김순고에 의해 붙잡히고 말았다. 포로가 된 
서림은 임꺽정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어 임꺽정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다. 이때 임꺽
정의 무리가 11월 26일에 봉산군수로 새로 부임한 이흠례를 살해할 계획이라는 것도 조정에
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평산부사 장효범, 금교 찰방 강려 등으로  하여금 
봉산군수 이흠례와 합세하여 임꺽정의 무리를 본격적으로  토벌하도록 명했다. 그러자 장효
범, 이흠례, 강려는 군사를 이끌고 임꺽정 일당을 추격했으나,  오히려 부장 연청령 및 군사 
수십 명만 잃어 버렸을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게다가 서흥부사 신상보가 도둑의 
무리의 처자 몇 명을 잡아 서흥 감옥에 가두어 두었는데, 이들마저 감옥을 습격한 임꺽정의 
무장단에게 내어주고 마는 수모까지 당했다. 이때부터 임꺽정의 무리는  그 여세를 몰아 황
해도, 경기도 외에 강원도 지방까지 그 활동 무대를 넓혀 더욱 더 극성을 부렸다. 그러자 조
정에서는 이번에는 이사증을 황해도 순경사로, 김세간을 강원도 순경사로 각각 임명하여 파
견하였다. 이 중 이사증은 그 해 12월 28일에 마침내 임꺽정을 사로잡았다고 조정에 보고를 
올렸다. 그러나 조정에 올려보낸 포로를 의금부에서 취조해 본 결과 그는 진짜 임꺽정이 아
니라 그의 형 가도치였다. 이 때문에 이사증은 파직되고, 추관 장려는 하옥되고 말았다. 
  서림과 가도치를 잃어 버린 뒤에도 임꺽정은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등지로 무리를  이끌
고 종횡무진 휘젖고 다니며 여전히 관가 및 민가에 대한 약탈을 일삼았다. 1561년 9월에 또 
한번 임꺽정이 잡혔다는 보고가 조정으로 올라갔다. 평안도 관찰사 이량의 보고는 이러했다. 
  "의주목사 이수철이 임꺽정과 한온을 잡았나이다."
  그러나 의금부에서 이들을 조사해 보니,  이번에도 사실이 아니었다. 그들은 해주  출신의 
군사 윤희정과 윤세공이었다. 이들은 의주목사의  꾐에 빠져 거짓 자백했던 것인데,  서림에 
의해 그만 들통이 나 버렸던 것이다. 의주목사 이수철은 그로 인해 파직당하고 말았다. 
  1561년 10월 초에 임꺽정의 무리는 대낮에 평산의 민가 30여 채를 불태우고, 사람들을 닥
치는 대로 죽이고, 또한 재물을 약탈한 다음 종적을 감춰 버렸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전  포
도대장 남치근을 황해도 토포사로, 전 첨사 백유검을 강원도  순검사로 각각 임명하여 파견
했다. 그러나 이 무렵 임꺽정은 경성에  잠입하여 머물고 있었다. 이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관군들은 도성의 문들을 모두 닫아 걸고 철저히 수색해  보았으나, 임꺽정은 끝내 붙잡히지 
않았다. 게다가, 백성들의 원성의 목소리가 드높아 조정의  중신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백
성들은 오히려 도둑 떼들보다는 토벌군들에게 의한 폐해가 더  크다고 원망했던 것이다. 그
래서 조정에서는 그 해 12월에 황해도 토포사 남치근을  다시 한양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임꺽정의 무리를 황해, 강원 2도의 감병사로 하여금 잡도록 하였다. 그런데 남치근이 한양으
로 돌아가던 중인 1562년(명종 17년) 1월 초에 뜻밖에도 임꺽정의 무리를 만나게 되었다. 남
치근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군관 곽순수, 홍언성,  윤림등과 함께 임꺽정을 끝까지 추격
하였다. 그러자 임꺽정은 구월산으로 피신하여 끝까지 항전했으나, 줄기차게 조여오는  관군
의 포위망에 걸려 마침내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로부터 15일 후에 임꺽정은 처형당했다.
  이로써 3년간에 걸쳐 기승을 부리던 임꺽정의 난은 평정되고 말았다. 그러나 임꺽정을 생
포하는 데 공을 세운 남치근은 아무런 상도 타지 못하고,  오히려 포도대장 및 토포사로 있
을 때 민원을 샀다 하여 탄핵을 받았다. 반면에, 관군에게 정보를 주어 임꺽정의 난을  평정
하는 데 크게 기여한 임꺽정의 옛 심복 서림은 포도청에 속한 관리가 되는 등 후한  대접을 
받았다. 
  
    정여립의 난(1589년)
  정여립의 난은 정여립이 정옥남, 변사,  박연령, 박춘룡 등과 함께  왕위 찬탈을 목적으로 
1589년에 일으킨 난이다.
  
  전주 동문 밖에 왕기 있고 내 아들 등에 `왕`자 찍혀
  정여립(1546-1589년)은 정희중의 아들로 전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자는 인백이고, 본관은 
동래이다. 그의 성격은 사납고 잔인했으나 통솔력이 있었고 두뇌가 명석하여 경사와 제자백
가에 통달하였다. 그의 선조들은 대대로 전주남문 근교에 살았다. 그는 청소년 시절에  간혹 
익산군수였던 아버지의 일을 대신하여 일을 처리할  정도로 영특하고도 조숙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아전들은 군수보다는 그의 아들 정여립을 더 어려워했다. 
  1567년(명종 22년)에 그는 진사가 되었으며, 1570년(선조 3년)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한 뒤,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으며,  스승의 총애를 받았다. 박순도 그의 
재능을 아껴 친자식처럼 돌봐주었다. 
  1583년(선조 16년)에 그는 예조좌랑이 되었다. 
  이이는 그가 죽기 4개월 전인 1583년 9월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10월 상경하여 전날 자
기를 쫓아낸 이들을 포용하면서 다음 3인재를 천거하였다. 
  `허봉의 재주, 정여립의 박학과 다재, 정구의 유능.`
  그러나 동인과 서인 사이에서 조정과 화합에 힘쓰던 이이가 1584년 1월에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자 원래 서인이었던 정여립은 스승 이이를 배반하고, 당시  집권
세력인 동인에 빌붙어 아부하여 1584년 3월에 수찬이 되었다.  그런데 1585년 5월에 의주목
사 서익이 상소해서, 박순, 정철, 이산보, 박점 등을 변호함과 동시에,  정여립을 탄핵하였다. 
서익은 또한 노수신,유성룡의 과오도 지적하면서, 송응개, 허봉, 박근원을 석방시킬  것과 외
방에 내보낸 사람들을 다시 조정에 불러 올릴 것 등을  주청하였다. 이를 간략히 정리해 보
자면, 그 동안 서인에 밀려 외방에 나가 있던 심의겸  등을 비롯한 서인을 입각시키고 노수
신, 유성룡, 정여립 등의 동인들을 몰아내자는 것이었다. 그러자 동인들이 들고 일어나 일제
히 서익을 모함하였다. 이때 정여립도 박순, 성혼 등을  비판하였다. 이에 대해 선조는 매우 
괘씸하게 여겼다. 아무튼 이 소란 통에 유성룡은 예조 판서의 직에서, 정여립은 수찬의 직에
서 각각 물러나게 되었다. 이때 정여립은 고향인 전주로 내려가 버렸다. 그러나 1585년  6월
에 영의정 노수신의 비호 아래 박근원, 송응개, 허봉  등의 동인들이 석방되고, 반면에 서인 
심의겸이 8월에 파직당하자, 동인의 기세가 다시 높아졌다. 1587년(선조 20년) 9월에 심의겸
이 죽은 뒤에도 동인과 서인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지만, 노수신이 영의정에, 이산해가  좌
의정에, 유성룡이 병조판서에, 그리고 이발이 대사간에 각각 오르는 등 조정의 주요  요직을 
동인들이 두루 차지해 여전히 그 건재함을 과시했다.
  1589년 10월에 황해도 관찰사 한준, 재령군수 박충간, 안악군수 이축, 신천군수 한응인 등
이 상소하여, 전에 수찬이었던 정여립의  모반을 밀고하여 탄핵하였다. 그러자 선조는  조정 
대신들을 모두 불러 앉힌 다음 정여립의 사람됨됨이가 어떠하냐고  의견을 물었다. 이때 영
의정 유전, 좌의정 이산해는 잘 모르겠다고 답변했으며, 우의정  정언신은 `독서하는 사람이
라는 것은 알지만 그밖의 일은 잘 모르겠다`고  답변했다. 그리하여, 선조는 선전관, 의금부 
도사 등을 현지에 보내 정여립을 감시하도록 했으며, 정여립의 조카 이진길을 잡아 옥에 가
두는 정도로 사건을 마무리하였다. 그 뒤로도 동인측에서 정여립을 등용시키자는 의견을 여
러 번 제시했으나, 그때마다 선조는 그 제의를 물리쳐 버렸다. 
  한편, 전주에 내려간 정여립은 많은 선비들과 접촉하였다. 점차 그의 명망이 높아지자  전
주 감사나 수령들이 앞다투어 그를  찾아와 인사를 하였다. 이에 욕심이  생긴 그는 정권을 
잡기 위해 여러 모사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는 임꺽정의 활약 무대였던 황해도에도 손을 뻗쳐 안악의  변숭복, 박연령 등과도 손을 
잡아 황해도인 수백 명을 동지로 확보하였다. 그리고 죄를 지은 뒤 이름을 바꾸고 호서,  호
남으로 떠돌아 다니다가 정여립을 스승으로 섬기겠다고 하면서 황해도 사람들을 많이  소개
시켜 준 해주 사람 지함두와도 손잡고, 그 외 송익필, 운봉의 요승인 의연 등과 같은 기인들 
및 모사들을 휘하에 넣은 다음  변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해  나갔다. 그와 동시에 
그는 (정감록)의 참설을 이용하는 한편, 이적 등을 조작하여,  이씨가 망하고 정씨가 흥한다
는 말을 퍼뜨리며 민심을 교묘히 선동하였다. 요승  의연은 정여립과 미리 짜고 `목자망 전
읍흥`이라는 참설의 여섯 글자를 옥판에 새겨 지리산 석굴 속에 숨겨 놓은 다음, 그의 동료
인 도잠, 설청 등으로 하여금 그 옥판을 찾아내도록 하여  참설을 더욱 신빙성 있도록 하였
다. 그러면서 각지의 이름난 산을 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요동에 있을 때 동쪽 나라에 왕기가 있어 와  보니, 그게 바로 전라도 전주의 동문 
바깥에 있었다."
  정여립도 아들의 이름을 들먹이며 이렇게 떠들어댔다. 
  "내 아들 옥남의 등에 본래 왕이란 글자가 찍혀 있었다."
  때로는 성리학의 이념에 배치되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임금 한 분만을 하늘처럼 섬겨야 한다는 말은 옳지 않다.  두 임금을 섬기면 어떤가? 누
구를 임금으로 섬기든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하다는 말인가."
  하루는 의연과 함께 자기 집의 뽕나무 밭으로 들어가 그는 나무껍질을 긁어 흠집을 내고 
그 틈바구니마다 말갈기털을 채워 놓았다. 이는 다음과 같은 맹랑한 전래 동요 때문이었다.
  "뽕나무에 말갈기털이 생기는 집의 주인이면 임금이란다."
  며칠 후 그는 이웃집 몇 사람만을 따로 불러 그것을 비밀리에 보여준 다음에 절대로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누설하지 말라고 신신 당부하였다. 그런 후 그 문제의 나무껍질을 벗겨 없
애 버렸다. 
  그는 진안의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신분에 제한 없이 반정부적인 선
비, 불평객, 무뢰한, 승려, 천민, 무사들을 불러 모아 그들 중 힘깨나 쓴 자들을 선발하여 보
름마다 한번씩 활쏘기 등 무술 훈련을 시킨 후 함께 술과 고기를 나눠 먹으며 동지적인  연
대감을 결집시켜 나갔다. 그러던 중, 1587년(선조 20년)에 왜구들이 전라도 손죽도에 침범해 
오자 놀란 전주부윤 남언경이 정여립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그는 대동계의 무사들을 
동원하여 이끌고 출동하여 관군을 도와 왜구를 격퇴시키는 데 크게 공헌을 했다. 이후 그는 
대동계를 더욱 조직적으로 만들어, 안악에는 변숭복과 박연령을, 해주에는 지함두와  송익필
을, 운봉에는 의련을 각각 책임자로 두었다.
  이후 더욱 자신감을 가진 정여립은 민중을 더욱 선동하는 말을 퍼뜨렸다. 천안의 사노 길
삼봉이 도적이 되어 관군에게 쫓기는 몸이 되자, 정여립은  지함두를 황해도에 보내 다음과 
같은 낭설들을 퍼뜨리게 하였다. 
  "길삼봉, 길삼산 형제는 신병을 이끌고 지리산에  들어갔다는 말도 있고 계룡산에 들어갔
다는 말도 있다."
   "정팔룡(팔룡은 정여립의 환호)은 용감무쌍하기 이를데  없는 사람인데, 그는 왕이  되어 
계룡산에 도읍하려고, 멀지 않아 군사를 일으킬 것이다."
  "호남 전주 땅에 성인이 나서 우리 백성들을 구해 주시려고 한다. 그에 의해 백성은 모두 
부역을 면하게 되고, 공사천 노예나 서얼이나  죄인은 모두 천대를 면하게 되고, 그에  따라 
국가는 태평 무사할 것이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이를 보다 못한 장성 선비 정윤룡은 장성현감 이계와 의논하여 
조정에 보고하자고 했다. 그러나 이계는 아직 이렇다 할 뚜렷한 단서가 잡히지 않는 상태이
므로 좀더 관망해 보기로 했다. 이 무렵, 의연의 동료  승려인 도잡, 설청 등은 모반을 두려
워 하여 도망가 버렸다. 이 무렵, 고부에 살고 있던 정여립의 사위인 김경일은 항간에  떠도
는 이상한 소문을 전해 듣고, 그 소문의 진실 여부를 묻는 편지를 정여립에게 띄웠다.  그러
자 정여립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짤막한 답서가 도착했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그런 소문을 꾸며낸 것이다. 함부로 말하지 마라."
  1589(선조 22년)에 갖가지 해괴한 소문이 점차로 퍼져 궁궐에까지 새어 들어갈 정도가 되
었다. 이렇게 되자, 정여립은 더 이상 꾸물거리다가는 자신이 체포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래서 그는 거사를 앞당기기로 결심하고서 그의 일당들을  불러 모아 함께 구체
적인 거사 모의를 하였다.
  "1589년 겨울에 한강이 얼게 되면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한양으로 쳐들어가  맨먼저 
무기고를 불사르고, 다음에는 강창을 빼앗고, 심복들을 도성 안에 배치한 다음 자객을  보내 
대장 신입과 병조판서를 살해한 후, 왕명이라고 속여서 각처의 병사, 수사 및 방백들을 죽이
고, 대간을 시켜 전라 감사 및 전주부윤을 파직시킨 다음 왕위를 찬탈하자."
  그런데 이때 구월산의 승려 의엄이 그 거사 계획을  재령군수 박충간에게 밀고해 버렸다. 
그러나 박충간은 그 밀고를 의심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때 안악군수 이축이 항간에 
떠도는 정여립의 역모설을 얻어 듣고 진사 남절더러 좀더 자세히 그 내막을 알아보라고 지
시했다. 남절은 다시 교정 조구란 자가 정여립의 제자임을  자랑하면서 무리를 모으는 것을 
수상쩍게 여겨 이를 이축에게 보고하였다. 그러자 이축은 그  즉시 조구를 잡아들여 문초하
였다. 그러자 조구는 모든 내막을 순순히 자백하였다. 이에  이축은 박충간, 조구와 함께 신
천군수 한응인에게로 가서 의논한 다음 연명으로 황해 감사 한준에게 보고하였다. 근무지로 
돌아온 박충간은 정여립의 일당 중 하나인 이수란 자를 체포하여 문초했다. 그 결과 조구의 
말이 모두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의엄, 조구, 이수의 말들을 종합하여 비밀 장
계(임금에게만 올리는 보고서)에다 자세히 적은 다음 그것을  자기 아들에게 주어 한양으로 
올려보냈다. 이리하여 선조는 황해 감사 이준의 비밀 장계와  박충간의 비밀 장계를 동시에 
받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선조는 크게 놀라 한밤중에 대신들을 즉시 입궐하게 한 다
음 대책을 강구하였다. 다음날(1589년 10월 초) 선조는 의금부에 명령하여 선전관 및 의금부 
도사를 전주로 내려 보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의금부 군졸들이  정여립의 집에 도착했을 때
는 이미 정여립은 도망가 버린 뒤였다. 조구가 모든 걸  발설해 버린 사실을 변숭복을 통해 
알게 된 정여립은 금구의 별장을 떠나 정옥남(정여립의 아들),  변사(안악 사람), 박연령, 박
춘룡(박연령의 아들), 그리고 변숭복 등과 함께 진안의 죽도로  달아나 숨어 버렸다. 그러나 
갑자기 피신한 탓에 먹을 것을  준비해오지 못한 터라, 산 속에  은거하면서 마을로 내려가 
동냥으로 밥을 빌어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수상히 여긴 마을  주민들이 관가에 신고해 
버렸다. 그러자 그 해 10월 14일에 선전관 이용준, 내관 김양보, 진안현감 민인백 등이 군사
를 이끌고 가서 죽도의 산을 포위하였다. 점점 관군들이 포위한 채 압박해 들어오자, 더  이
상 버틸 수 없다고 여긴 정여립은 먼저 변사를 죽인 후 뒤이어 정옥남, 박춘룡을 죽이려 하
였다. 그러나 정옥남과 박춘룡이 몸을 피해 달아나 버리자, 그들을 죽이지 못한 채 정여립은 
혼자서 그만 자살하고 말았다. 선전관 이용준은 정여립과 변사의 시체와 생포된 정옥남,  박
춘룡 등을 한양으로 압송하였다. 이후부터, 정여립 일파와 동인에  대한 가혹한 박해(기축옥
사)가 시작되었다. 10월 15일에는 황해도에서 잡혀온 이기와 이광수를,  10월 17일에는 안악 
수군 황언륜과 방의신 등을, 10월 20일에는 박연령을, 그리고 10월 27일에는 정여립의 시체, 
이진길(정여립의 조카), 정여립의 처첩을 각각 처형했다. 그리고, 11월 초에는 정여립과 평소 
교분이 두터웠던 병조참지 백유양, 우의정 정언신, 이조판서  이양원, 이조참판 정언지 등이 
한꺼번에 모두 사직당했다. 11월 12일에는 정언지는 강계로,  홍종록은 구성으로, 이발은 종
성으로, 백유양은 부령으로, 이길은 희천으로,  정언신은 중도로, 그리고 김우옹은  회령으로 
각각 유배당했다. 그리고 11월 25일에는 동지 정윤복, 부교리 송언신 등도 역시 정여립과 교
분이 두터웠다는 이유로 파직당하고 말았다. 12월 3일에는  참봉 한백겸이 정여립의 시체를 
몰래 싸들고 가서 잘 묻어 주었다는 죄로 유배당했다.
  
    이귀의 난(1623년)
  이귀의 난(인조반정)은 1623년 3월에 이귀가 김자점, 김류, 이괄, 신경진 등과 함께 모의하
여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인조)을 즉위시키고자 일으킨 난이다.
  
  살제폐모의 패륜아 광해군을 몰아내자!
  이귀(1557-1633년)는 이정화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자는 옥여이며 호는 묵제이고, 본관
은 연안이다. 그는 이이, 성혼 등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으며, 1582년(선조 15년)에 생
원이 되었고, 강릉 참봉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 때 삼도 소모관, 삼도 선유관으로 임명받아 
소와 말, 군졸, 대두 등을 징발하여 도체찰사 유성룡에게 이를 수송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1593년에는 장성 현감을 거쳐 군기시 판관, 김제 군수를 역임했으며, 1603년(선조 36년)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형조 좌랑이 되었으며, 이어 안산 군수, 양재도 찰방, 배천 군
수 등을 역임했다. 
  1606년 계비 인목왕후에게서 영창대군이 탄생하자 서자이며 둘째 아들이라는 결함이 있는 
광해군의 즉위를 앞에 놓고, 소북은 영창대군을 옹립하고자 했고, 대북은 광해군을 지지하여 
그를 옹립하고자 하여, 이는 급기야 당쟁으로 확대되었다. 1607년 10월 선조는 자기 병이 매
우 위중하다는 것을 깨닫고서 영의정 유영경, 좌의정 허욱, 우의정 한응인 등을 불러 전위의 
뜻을 밝혔다. 
  "지금 전위가 안 된다면, 세자에게 섭정이라도 시켜야겠노라."
  그러나 세 정승은 이를 극구 만류하고 물러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은 왕비에게  전위
의 말을 언문으로 받아쓰게 하여 유영경에게 전하였다. 그런데  소북파인 유영경은 이 중대
한 전지를 받고도 광해군과 어울리는 대북파가 득세할까 봐 두려워 왕의 뜻을 거스르면서까
지 그 전지를 묵살해 버렸다. 그러자 1608년 1월에  정인홍 등의 대북파가 유영경의 불충에 
대해 집중 공략했다.
  "전하께서 세자에게 섭정을 시키거나 전위하려 해도 영상 유영경이 원로 대신들을 시기하
여 전하의 뜻을 어기고, 중전마마의 언문 하교도 전하지 않고 있소. 무슨 무서운 흉계로  이
런 짓을 하는 것이요. 유영경은 광해군과 종사를 위태롭게 하고, 전하를 고립시키려 하고 있
소."
  이렇게 정인홍의 탄핵으로 유영경의 음모가 들통나 버려 위기 의식을 느낀 소북파는 일대 
반격에 나섰다. 그들 중 대사간 이효원, 정언 구헌 등이 선조에게 나아가 아뢰었다.
  "군부의 지친을 이간하려는 정인홍의 흉모는 이이첨, 이경전 등이 짜낸 것이옵니다."
  왕위를 광해군 쪽보다는 영창대군 쪽에 넘겨 주고자 하는 마음이 더 강했던 선조는 소북
파의 주장이 옳다고 여겨, 대북파의 거두 정인홍을 영해로, 이이첨을 갑산으로, 그리고 이경
전을 강계로 각각 유배시켜 버렸다. 그런데 이 일이 있은 지  며칠 후인 1608년 2월에 아무
런 유고도 내리지 못한 채 선조는 갑작스레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러자 당시 34세의 세자 
광해군이 조선왕조 15대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그러자 대북파인 정인홍, 이이첨 등이 잇달
아 상소를 올렸다. 그래서 광해군은 할 수 없이 임해군을 유배시키고 유영경을 사약을 내려 
죽었으며, 원로대신 이원익을 영의정에 임명하고 정인홍, 이이첨,  이경전 등의 대북파를 대
거 중용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후 초당파적인 정책을 구현하여 당쟁을 종식시키고자 애
를 썼다. 그러나 정인홍, 이이첨 등의 대북파의 반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1611
년 정인홍이 이언적, 이황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다가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 유적에서 삭제당
하자 유생들을 모조리 퇴관시켜 버렸으며, 그 이듬해 김직재의  무옥이 일어나자 이에 관련
된 많은 학자, 문신들을 추방해 버렸다. 1613년 대북파가  박응서, 서양갑 등의 강도 사건을 
악이용하여 영창대군을 추대하려고 했다고  무고하자 김제남을 사사하고,  이어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강화에 귀양 보내 버렸다. 같은 해 인목대비 폐모론이 대두되자, 일단 덮
어두고, 이듬해 영창대군을 죽여 버렸다. 1615년에는 이원익을 파직시켰으며, 대북의 음모로 
능창군 이전의 추대 사건이 일어나자 또  다시 많은 학자, 문신들을 추방해 버렸다.  1617년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파가 폐모론을  재차 건의하자, 이듬해 계모인 인목대비를  삭호하여 
서궁에 유폐시켜 버렸다.
  1609년(광해군 1년)에 이귀는 함흥 판관을 거쳐 1616년에 숙천 부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
때 무고로 수감되어 있던 해주 목사 최기를 만나 본 것이 죄가 되어 그는 이천으로  유배당
하고 말았다. 그 후 복직되어 평산 부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개탄하여 그는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특히 광해군의 `살제폐모(살제폐모의  패륜`(그의 형 임해군과 
그의 아우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킨  사건)과 `편혹 정책`(친족이나 
대북파에 지나치게 치우쳐 다른 당파 및 백성을 학대한 정책)은 그 동안  대북파에 눌려 지
내고 있던 다른 당파, 즉 서인들을 매우 분개시켰다. 
  사실상 이귀는 그가 함흥 판관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때부터  무력 정변을 꿈꾸었다. 그는 
같은 서인이며 이이와 성혼의 제자인  유생 김자점(이귀의 딸이 김자점의  아우인 김자겸의 
부인이었다)과 사귀면서 함께 모의하여 광해군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대신  능양군을 옹립한
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이러한  모의 기밀에 대해 낌새를 챈  대북파에서 들고 일어나 
이를 크게 문제 삼았다. 그러자  김자점은 이귀의 딸(김자점의 제수)을  궁중에 들여보내서, 
광해군이 가장 총애하는 상궁 김씨를 뇌물로 포섭했다. 그  후, 예상대로 한유상, 정언 등이 
후원에 가 있던 광해군에게로 가서 아뢰었다. 
  "이귀, 김자점 등이 오래 전부터 서궁과 내통하며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합니다.  장차 무
슨 화근이 될지 알 수 없으니, 미리 단속하도록 해야 하옵니다."
  그러자 김자점으로부터 이미 뇌물을 받은 바 있는  김상궁이 왕 곁에서 대뜸 한 마디 했
다.
  "김자점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오."
  이에 광해군은 김상궁의 말이 옳다고 여겨,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버렸다. 그런데 얼마 
후 이귀, 김자점 등의 음모설이  또 누설되자, 대사헌 남근, 대사간  유대건 등이 이를 다시 
문제삼아 왕에게 나아가서 그 두 사람을 당장 잡아들여야  한다고 간곡히 아뢰었다. 이때도 
왕은 김상궁의 말에 넘어가 또 다시 그 음모설을 덮어 버리고 말았다.
  1622년 평산부사에 오른 이귀는 효성령 별장으로  있는 신경진과 함께 거사 모의를  하였
다. 때마침 평산 일대에 호랑이의 폐해가 많았다. 그래서 이귀는 함정을 파서 호랑이를 잡아 
왕에게 바치며 이렇게 건의하였다.
  "호랑이들이 황해도와 경기도의 경계를 제멋대로  왕래하며 폐해를 끼치고 있으니,  평산, 
장단, 송도 등지에서 힘을 합쳐 호랑이를 잡게 해주십시오."
  이에 대한 왕의 윤허가 떨어지자, 이귀의 군사는 평산뿐만 아니라 장단, 송도 일대까지 도
경계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대로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보다 용이하게 군사를 이끌
고 한양으로 밀고 들어가 거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판단한  이귀, 김자점 등은 장단부사 이
서도 끌어들여 함께 거사 모의를 했다. 그런 후 당시 인망이 높던 전 부사 김류도 끌어들여 
거사를 모의하였다. 그 중에서 특히  김류에게는 봉기군의 총지휘 책임을 맡기기로  하였다. 
이 무렵 문신 최명길, 장유, 심기원 등도 설득하여 반란군에 가담시켰다.
  이 즈음, 이귀가 정변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자 조정의  대신들
은 다시 들고 일어나 이귀에 대한 탄핵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에 광해군은 할 수 없이 이귀
를 파직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뒤이어 조정에서 이귀를 잡아가려 한다는 말이 전해졌다. 이
에 당황한 이귀는 그의 거사 동지들에게 신속히 연락을 취하여 거사 날짜를 정하고, 선조의 
후궁 인빈이 낳은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  이종을 옹립하기로 하였다. 거사일은 1623년(광해
군 15년) 3월 13일 밤으로  잡혀졌다. 이귀는 그 시각에  동지들과 군사들을 모두 홍제원에 
모이게 했다. 그런데 이귀가 심기원, 최명길,  김자점, 장유 등과 함께 시중의 불량배  1백여 
명을 데리고 홍제원에 도착해서 보니, 반란군의 주력부대인 장단부사 이서의 부대와 반란군 
대장을 맡기로 한 김류도 아직 도착해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반란군의 수도 이괄의 부
하 20여 명까지 몽땅 합쳐도 도합 6백여 명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장유가 헐레벌떡 뛰어
와, 이미 조정에서 반란군에 대비하여 창의문에 군사를 집결시키고 있으며 모반자들에 대한 
일제 검거령이 내려졌다고 알려주었다. 반란군의 거사를 뒤늦게야 알게 된 광해군은 도승지 
이덕형, 병조판서 권진 등을 불러 밤새워 침전을 지키게 했으며, 도감대장 이흥립으로  하여
금 궁궐을 수비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이흥립은 이때 이미  그와 사돈간인 장유에게 설득
을 당해 이귀의 봉기군을 돕기로 밀약되어  있었다. 이때 이귀는 매우 암담했다. 이와  같이 
적은 수의 반란군으로 거사하자니 실패할 것이 뻔했고, 그대로  해산하자니 모두 붙잡혀 처
형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고심 끝에 이귀는 반란군의  대장직을 이괄에게 맡기고 반란
군을 출동시키기로 결심을 굳혔다. 뜻밖에 반란군 대장을 맡게  된 이괄은 우선 반란군들에
게 `의`자를 쓴 표지 수백 개를 나눠 주어 각자 군복 뒤에다 붙이게 했다. 이는 관군과 반란
군을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이괄은 반란군의 전열을 수습한 뒤, 각 지휘 군관들에게 수십 명
씩 군사를 주어 궁궐을 향해 진격  명령을 내리려고 말에 올라탔다. 바로 그때였다.  김류가 
보낸 전령이 급히 뛰어와 `김류가 부하들을 이끌고 와서 합류하겠다`는 내용을 전했다. 이때 
이괄은 화가나서 소리쳤다.
  "그런 배신자와는 합류할 수 없다."
  그러자 이귀가 나서서 간곡히 말렸다.
  "김류를 받아들이자. 그의 부대와 연합하여 공격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승산이 없다."
  김류는 거사에 출정하기 위해 나오다가 거사  모의가 조정에 이미 알려졌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그만 맥이 빠져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 주저앉아  버렸었다. 그러나 그의 측근들이 간
곡히 설득하는 바람에 다시 마음을 바꿔 먹고 출정을 서둘렀던 것이다.
  이괄이 화를 풀고 양보하게 되어, 김류가 반란군에 합세하게 되었다. 때마침 이서가  반란
군의 7백여 명을 이끌고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김류의 총지휘하에 이괄, 이서, 이귀 등이 이
끄는 반란군은 창의문을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이윽고 반란군의 선봉부대가  관군이 굳게 
닫아 걸고 지키고 있는 창의문을 부수고 돌격해 들어가자 그 뒤로 반란군의 주력부대가 북
을 앞세워 둥둥치며 물밀 듯이 쳐들어갔다. 게다가 창의문 근처에 배치되어 있는 이확이 이
끄는 관군들은 봉기군에게 싸움을 걸지 않았으며, 궁궐 외곽 수비를 맡고 있던 이흥립의 관
군도 봉기군과 맞서 싸우기는커녕 길 양 옆으로 비켜 서서 오히려 봉기군의 진격을 도와주
었다. 이렇게 되자, 봉기군은 별 어려움 없이 인정전을 지나 창덕궁 금호문까지 순조롭게 진
격할 수 있었다. 봉기군이 금호문에 이르자, 관군의 수문장 박효립이 사전 약속이 되어 있던
대로 문을 활짝 열고 봉기군을  맞아 들였다. 그러자 김류는 돈화문에  쌓아둔 나무에 불을 
질러 궁궐 안이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 놓은 다음, 무사들을 거느리고 광해군이 머물러 있는 
침전 쪽을 돌격해 들어갔다. 이때 광해군은 사태가 위급하다는 것을 감지하고는 내시 몇 명
만을 거느리고 북문으로 빠져나가 의관  안국신의 집으로 도망가서 숨어 버렸다.  이리하여, 
봉기군의 거사는 성공리에 끝났다.
  이튿날, 이귀, 김류 등의 봉기군 지휘부는 경운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 김씨에게  찾
아가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인목대비는 크게 
기뻐하고 윤허하였다. 
  그러자 봉기군의 지휘부는 이튿날인 3월 14일 아침에  능양군을 궁궐로 모셔왔다. 능양군
은 돈화문 안으로 들어 서서 백관들의 하례를 받았다. 그런데 도승지 이덕형만은 좀처럼 능
양군에게 하례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자 이귀가 나서서 변명하듯 말했다. 
  "인목대비의 명령으로 우리는 반정을 했던 거요."
  그제서야 이덕형은 고개를 숙여 능양군에게 하례를 하며 한마디했다.
  "옛 임금을 죽이는 일은 하지 마십시오."
  이후, 이귀는 군사를 풀어 광해군을  찾아 사로잡은 후, 연금을 시켰다.  그리고 3월 17일 
밤에 대비로부터 옥새를 받아 능양군을 즉위시켰다. 이로써 능양군은 29세의 나이로 조선왕
조 16대 왕위에 올랐다.
  이 인조반정으로 대북 일파는 소멸의  길로 치달았다. 영의정 밀양부원군  박승종은 그의 
아들 박자흥과 함께 과천 삼막사로 피해 내려가서 자살하고 말았다. (박승종은 전날 이이첨
과는 달리 인목대비의 폐위나 시해 등에 적극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제되지 못했다.) 세
도가였던 유희분, 이이첨, 정인홍, 유인몽 등 수십 명은 붙잡혀 처형되었고, 그밖에 2백여 명
의 대북파가 유배당했으며, 그들과 그 가족들의 재산이 모두 몰수되었다.
  인조는 즉위하자 여주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이원익을 불러들여 영의정에 임명하고자 
했다. 이때 이원익은 영의정의 직을 수락하는 조건으로 광해군의 사형을 면해 줄 것을 간청
하였다. 광해군 밑에서 영의정을 했기 때문에 광해군을 죽인다면 자기도 조정에 나갈 수 없
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의 말에 감복한 인조는 봉기군 지휘부를 설득하여, 광해군을 죽이
지 않고 귀양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도, 이귀 및 인목대비 등은 계속하여 광해군을  처
형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이덕형, 이원익 등의 간곡한 만류로 광해군은 사형을 면하고  군
으로 강봉되어 강화에 유배되었다. 또한 왕비 유씨, 폐세자,  폐세자비 박씨 등도 강화로 유
배당했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폐세자는 유배지에서 탈주하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광해
군은 그 후 태안, 교동 등의 유배지로 전전하다가, 제주에서 1641년(인조  19년에 67세로 세
상을 떠났다.
  

    이괄의 난(1624년)
  이괄의 난은 1624년에 인조반정 때의 공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관직이 높지 않은 데 대한 
불만과 무능하고 의심증 많은 공신들에 대한 적개심을 평소 품고 있던 이괄이 자기 외아들 
이전이 반역자로 몰리자 아들과 가족을 구하기 위해 일으킨 난이다.
  
  내 외아들을 처형한다는데 어찌 가만 있나?
  이괄(1587-1624년)은 참판 이육의 후손으로서 그의 자는 백규, 본관은  고성이다. 그는 무
과에 급제하여, 선조 때 형조좌랑, 태안 군수를 역임했다.
  1622년(광해군 14년)그는 함경북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부임하기 직전에 난에 가담하여 거
사 당일에 작전 지휘를 맡아  인조반정을 성공으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정사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판윤이라는 관직이 내려졌다. 반면에 
도감대장 이수일에게는 공조판서의 관직이 내려졌으며, 기회주의자인  김류가 정사공신 1등
에 책록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가 그에게는 몹시 못마땅하였다. 그러나 그는 도원수  장
만의 추천으로 부원수가 되자 이에 다소 위로를 받았다. 1623년 후금과의 마찰로 북쪽 변방
의 분쟁이 잦자, 5월에 도원수인 장만이 먼저 평양으로 출발하였고, 이괄은 8월 17일에 평안
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로서 근무지인 영변을 향해 떠났다. 떠나기 전에 그는 인조에게 이
렇게 하직 인사를 올렸다. 
  "전하께서 소신의 재주 없음을 아시면서도 분에 넘치는 중차 대한 북방 경계 임무를 맡겨
주시니, 성은이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그후, 그는 평안도 영변에 부임한 뒤, 변방에 성책을  쌓거나 보수하여, 또한 철저히 군사 
훈련을 시키고, 국경의 경비를 강화하는 등 부원수로서의 직책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런데 1624년(인조2년)그의 아들 이전이 당시의 일부 지식층과 교유하며 횡포로 인한 시
정의 문란을 개탄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과장되어 그가 반역을 꾀하였다는 무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1624년(인조2년) 1월 17일에 전교수 문회, 허통, 이우,  전 첨사 권진 등이 다음과 
같은 상소하였다. 
  "이괄과 그의 아들 이전 및 순변사 한명련, 안주  목사 정충신등이 결탁하여 군사를 일으
키고, 인성군 이공이 그들과 내통하고 있사옵니다."
  상소자들은 겉으로는 이괄과 이전의 모반을 겉에 내세우고는 있었지만 내심으로는 과거에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던 문신들과 무신들을 모두 한꺼번 제거하고자 이러한 엉뚱한  누명을 
씌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괄, 이전, 한명련,  정충신에 그치지 않고 이외에도 정인영, 
정찬, 성백구, 성철, 한준철, 한창국, 한흥국  등 총 40여 명을 무더기로 무고하였다.  더욱이 
정찬이 "이괄이 이달 1월 그믐께 군사를 일으키려 한다"고 보다  구체적으로 고변하는 바람
에,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이내 상당수가 붙잡혀와 갖은 문초와 고문을 당하였고, 이 중 정
인영, 한창국, 한흥국 등은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여  숨을 거두고 말았다. 불상사는 이
에 그치지 않고, 이괄과 내응할 혐의가 있다고 판단되는 전 우의정 기자헌도 잡아들여 옥에 
가둬 버렸다. 그리고 1월 21일에는  단지 모반의 사실 유무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이괄의 
아들 이전을 한양으로 압송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선전관 심지수와  의금부 도사 고덕상과 
심대림이 영변의 진영으로 급파되었다. 
  의금부 도사와 선전관의 갑작스런 방문을 받은 이괄은 배우  당황하였다. 더욱이 자기 외
아들이 모반 혐의를 받고 있으며, 그 때문에 그를 압송하기  위해 그들이 왔다는 사실을 알
고 난 이괄은 솟아오르는 분노를 도저히 삭힐 수 없었다. 더군다나, 평소 자신이 인조반정의 
공신인데도 관직이 높지 않는 데 대한 불만과 무능하고 의심증 많은 공신들에 대한 적개심
이 일시에 폭발하여 견딜 수 없었다. 안절부절하던 이괄은 마침내 칼을 빼어들고서 그의 부
하인 이수백과 기익헌 앞에서 이렇게 외쳤다. 
  "내게는 아들이 하나밖에 없는데, 그가  잡혀 들어가서 곧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사태가 
매우 급하게 되었다. 사내가 어찌 앉아서 죽음만을 기다릴 것이냐?"
  그러자 이괄의 부하 기익헌이 침착하게 말했다.
  "만약 거사하고 싶으시면, 한양에서 내려온 저 자들을 죽인 다음 군사들을 위협하여 모두 
군솔리 없이 따르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괄은 기익헌의 말에 따르기로  하고, 기회를 포착하여 한양에서  파견된 의금부 도사와 
선전관의 목을 모두 베어 버렸다.  그리고 그 머리를 들어 보여  부하들에게 자신의 확고한 
결심을 보였다.
  그는 부패한 공신들을 제거해 버리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마침내  난을 일으켰다. 그는 때
마침 반역 음모에 관련된 혐의를 받고 한양으로 압송되고 있던 구성 부사 한명련을 날쌘 항
왜병(임진왜란 때 항복한 왜병)을 보내 기습 구출하여 그와 함께 군사 1만 2천여 명을 거느
리고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이때가 1624년 1월 24일이었다. 그는 항왜병 1백 30여 명을 앞세
우고, 막강한 군대를 탁월한 작전으로 이끌며 곧장 한양을 향하여 진군해 나갔다. 그는 가능
한 한 빨리 궁궐을 점령하기 위해 쓸데없이 전투력을 소모하는 작전을 피하며 신속히 남하
하였다. 
  이때 도원수 장만은 평양에서 이괄의 반란군이 진격해 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자신의 휘
하 병력이 얼마 되지 않아 크게 당황하면서도, 조정에 사람을 보내어 증원 병력을 요청하는 
한편 근처의 각 읍에 통보하여 군사들을 급히 모았다.  그러나 갑작스레 군사를 모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괄은 반란군을 이끌고  곧바로 개천으로 해서 한양으로 
진격할 태세여서 사태는 더욱 암담하였다.
  한편, 조정에서는 이괄이 이끄는 반란군이  빠른 속도로 진격해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영의정 이원익을 도체찰사로, 형조판서 이시발과 대사간 정엽을 부사로, 그리고 최현과 김시
양을 종사관으로 각각 임명하고 사태를  수습토록 했다. 그리고 그  이튿날인 1월 25일에는 
이괄과 내통할 혐의가 있다고 판단되는 성철, 성준길, 이시언, 성백구, 한준철,  신영남, 현즙 
등 35명을 미리 체포하여 죽여 버린 후, 왕은 강화로 피신을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장유의 간곡한 만류로 그냥 한양에 눌러 앉은 왕은 1월 28일에는 이괄의 처족 및 친척과 그
밖에 이괄과 친근한자들까지 모조리 잡아들였다.
  그 사이 도원수 장민은 이괄의 진영에서 도망쳐 나와 투항하는 자들에게 벌 대신에 "이괄
의 목을 베어오는 자에게 후한 상을 주겠다."고 하며 오히려 그들을 격려하였다. 1월 28일에
는 이괄의 부하 유순무, 이윤서 드이 장만의 회유를 쫓아  반란군 진영에서 도망쳐 나ㅘ 관
군에 투항하는 사건이 생겼다. 그 통에 이괄의 반란군 중 4천여 명이 별안간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그러나 이괄은 이 사태를 속히 스습하고서 나머지  8천여 명의 반란군을 이끌고 강
동(평남)을 거쳐 빠르게 남하하였다. 이때 장만은 이괄의 반란군이 평양을 칠 것으로 내다보
고, 안주목사 정충신을 전부대장으로, 박영서를 전봉장으로, 유호걸과 장돈을 좌우 협장으로, 
그리고 남이홍을 계원장으로 삼아 이들에게 군사 1,800명을 주어  1월 29일 이른 새벽에 대
동강을 넘게 하여 평양으로 들어가 그곳을 사수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괄은 평양을 치지 않
고, 그곳을 우회하여 곧바로 황해도로 내려가 2월 1일에 수안에 이르렀다. 여기서 이괄은 새
장을 넘어 남하하려 하였으나, 황해 감사 임서의 병력이 그곳을 지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
하고는, 그곳을 피해 산산으로 일단 물러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평양의 관군이 뒤쫓아  내려
오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황주로 급히 군사를 이끌고 갔다.  그러다가 2월 2일에 황주 근교
의 신교에서 정충신, 남이홍 등이 이끄는 관군과 맞붙어 첫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때  이
괄은 관군을 정면 돌파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여기고, 그의 부하 허전과 송입을 거짓 항복시
켜 관군의 동태를 살피기로 작전을 바꿨다. 허전과 송입이 말을  타고 관군 쪽으로 향햐 달
려 갔다. 그런데 이드을 본 관군은 오해하여 "적이 쳐들어온다."면서 모두 겁을 집어먹고 와
르르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괄은 반란군을 재빨리 돌진시켜 관군
의 방어망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관군의 전봉장 박영서를 사로잡아 죽이고, 별장 안늑,  척
후장 오섬 등을 사로잡았다. 이괄은 그 여세를 몰아 삼등을  거쳐 상원으로 군사를 몰아 계
속 남하하였다. 그러자 도원수 장만은 별장 박상에게 군사 약간을 주어 상원으로 보낸 다음, 
그는 관군의 주력부대를 이끌고 황주로 가서 평안감사 이상길의 군사 1천여 명과 곽산군수 
민여검과 삭주부사 민인걸 등의 군사 6백여 명까지 모두 끌어모아 황주에 집결시켰다. 그런
다음, 2월 5일에 황해 병사 변흡과 방어사 김완 등에게  군사를 주어 반란군을 추격하게 하
였다. 
  한편, 조정에서는 이 무렵 이괄의 처와 이괄의 아우 이돈, 그리고 이전의 처 계이, 이괄의 
장인 이방좌 등을 처형시켰으며, 2월 5일에는 좌의정 윤방을 유도대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리
고 2월 6일에는 어영사 이귀가 임진강의 여울에 병력을 배치해 놓은 다음 자랑 삼아 왕으로 
하여금 친히 사열토록 했다. 
  2월 7일에는 체찰부사 이시발, 종사관 김시양, 독전어사 최현,  황해 감사 임서 등이 평산
에서 군사를 이끌고 마탄으로 가서 그곳에서 있던 정충신의 부대와 합류하여 공동작전을 펼
쳤으며, 장만은 부원수 이수일과 함께 병력을 이끌고 평산으로 향했다. 이즈음, 이괄은 전탄
을 건너 샛길을 이용하여 기린으로 내려오다가 포도대장 이중로와 연안 부사 이인경과 평산 
부사 이곽 등이 이끄는 관군이 마탄에 진을 치고 잇는 것을 보고 낮은 여울을 건너  급습하
여 격퇴시켜 버렸다. 이때 이괄은 관군의 장수들의 목을 베어 매달아 정충신(이괄의 친구)이 
이끄는 관군의 부대로 보냈다. 이를 본 관군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고 말았다. 이때 이곽민은 
시쳇더미에 파묻혀 간신히 목숨을 건질수 있었다. 이후, 이괄은 반란군을 이끌고, 경기 감사 
이서가 지키고 있는 송도의 청석골로 향했다. 송도에 거의 이르렀을 때 이괄은 밤중에 항왜
병들을 미리 보내서 청석골의 관군을 놀라 흩어지게 한 다음, 반란군을 이끌고 송도를 거쳐, 
수원부사 이홍립과 파주목사 박효립이 지키고 있는 임지강 여울  쪽으로 곧장 내려갔다. 그
러자 임진강 여울을 지키고 있던 관군들이 반란군의 당당한 위세에 기가 질려 제대로 한번 
싸워 보지도 않고 앞다투어 달아나 버렸다. 
  이처럼 관군의 최후 방어선이 무너지고, 반란군이 임진강을 건너 벽제에 이르렀다는 보고
를 접한 왕은 2월 8일 해질녘에말을 타고 궁궐을 빠져  나가려 했으나, 숭례문이 닫혀 있었
다. 그래서 돌로 자물쇠를 부수고 나갔으나, 한강에 닿았을 때는 배가 한 척도 눈에 띄지 않
았다. 강 건너편에는 배가 몇 척 있었지만, 사공들이 배를 숨겨둔 채 이무리 불러도  건너와
주지 않았다. 그러자 무사 우상중이 칼을 빼어들고 강을 헤엄쳐 건너가 사공들중 하나를 죽
여 위협하여 배들을 끌어 왔다. 이리하여 왕의 일행은 배를 타고 간신히 한강을 건널 수 있
게 되었으며, 과천을 거쳐 수원으로 내려갔다. 가는 도중 왕은 신경진, 윤숙 등에게 나가 싸
워 반란군을 격퇴하라고 지시했으나, 이들은  "관군들이 투지가 없어서 불가능하다"고 변명
하며 왕명을 따르지 않았다. 
  이괄은 반란군을 이끌고 별 저항 없이 한양 근교에 이르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왕이 궁
궐을 빠져 나간 뒤였다. 이 사실을 한양의 주민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괄은 기병 30여 명
을 미리 한양으로 들여 보냈다. 그들은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이렇게 외쳐댔다. 
  "도성 안의 사람들은 동요하지 마시오. 이제 곧 새 임금이 즉위하게 될 것입니다."
  이윽고, 2월 10일 아침 이괄과  한명련이 이끄는 반란군의 주력부대가  주민들과 각 관청 
관리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한양을  무혈 점령하게 되었다. 이괄은  반란군을 경복궁 
옛 터에 주둔시킨 후, 부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단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선조의 열째 
아들 흥안군 이제(온빈 한씨의 소생)를 왕으로 추대하고 전권을 장악했다. 흥안군은 원래 성
품이 호협하여 평소 엉뚱한 짓을 잘하기로 소문 나 있었다.  그는 한때 이괄과 내통하고 있
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했으나, 인조가 선처하여 한양을 떠나  피신할 때 그와 함께 동
행하여 길을 떠났다. 그런데 흥안군은 중간에 도망하여 기어이  이괄과 합류하게 되었던 것
이다. 왕위에 오른 흥안군은 제법 임금 행세를 하며  반란군의 지휘자들에게 벼슬을 내려주
고, 군사들에게는 술과 고기를 배불리 먹게 하였다. 그런 후 각 처에 방을 붙여 백성들이 각
자 생업에 충실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런데 반란군이 궁궐로 입성한 다음 날인 2월 11일에 도원수 장만은 그의 휘하의 관군을 
총동원하여 이끌고 한양 근교인 파주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는  즉시 피난길에 있는 왕에
게 종사관을 보내 문안 인사를  올린 다음, 부하 장수들과 의논하여  한양의 북쪽에 위치한 
길마재에 정부군의 진을 쳤다. 그것은 정충신의 의견에 따른  것이었다. 그 이튿날, 이 사실
을 알게 된 이괄은 "적을 쳐부수고 밥을 먹자"하면서 성문을 열고  한명련의 부대를 선봉으
로 내세우고 그 뒤를 반란군의 주력부대가 따르게 하여  길마재로 나가 전면전에 돌입했다. 
그런데 이때 돌연 풍향이 바뀌는 바람에 반란군은 바람과 먼지를 안고 싸우는 꼴이 되고 말
았다. 그리하여 반란군은 활과 총을 제대로  쏘지 못해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었다.  사태가 
이처럼 불리하게 전개되자, 이괄은 전투 진영을  바꾸기 위해 몸을 뒤로 움직였다. 그에  따
라, 대장기도 함께 움직였다. 그때 이를 본 정부군의 남이홍이 "이괄이 패했다"고 크게 외쳤
다. 그러자 반란군의 병사들은 그말이 사실인 줄 알고 앞다투어 우르르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에 사기가 오른 정부군이 반란군의 주력부대를 일시에 공겨해 들어갔다. 그리하여 순식간
에 반란군은 오합지졸이 되어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이괄은 겨우 수백의 패잔병을 이끌고 수하 참모들과 함께 수구문(광희문)을 빠져 나가 삼
전도를 거쳐 광주 방면으로 달아났다. 이때 일일천하의 새임금  흥안군도 곤룡포를 벗어 던
져 버리고 줄행랑을 쳐 버렸다. 한편, 이괄은 2월 12일에  광주에서 목사 임회를 쳐죽인 후, 
그날 밤 이천으로 도망을 쳤다가 2월15일 밤에 다시  묵방리로 은둔처를 옮겼다. 그런데 이
때 이괄의 부하 장수 기익헌, 이수백 등이 더 이상 도망해 봐야 소용 없다고 판단하고서 함
께 모의를 했다. 
  "기회를 보아 방심한 틈을 타서 이괄과 한명련의 목을  베어 조정에 바칩시다. 그게 우리
가 사는 유일한 길이오."
  그리하여, 결국 이괄 및 한명련을 포함한 9명의 장수가 배신자들에 의해 목베임을 당했다. 
그러자 나머지 반란군들은 모두 관군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이윽고 이괄의 목은 정부군에게 
넘겨졌으며, 광주 소천으로 도망간 흥안군도 그곳 현감인 안사성에게 붙잡혀 도원수 장만에
게 인계되었다가 곧 처형당했다. 
  이로써 이괄의 난은 일어난 지 22일 만에 평정되고 말았다. 2월 15일에 이괄과 한명련 등
의 반란군 괴수들의 머리는 공주에 있는 왕에게 보내졌다.  2월 22일에 인조는 궁궐을 떠난 
지 보름만에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다.
  
    이인좌의 난(1728년)
  이인좌의 난은 소론파의 김일경, 목호룡이 노론파의 무고로 죽은 데 대해 불만을 품은(정
권에서 배제된) 이인좌, 김영해, 정희량  등의 소론파의 일부세력이 주동이 되어  남인들 및 
불평분자들을 규합하여 1728년(영조 4년) 3월에 일으킨 난이다.
  
  영조와 노론파에 대한 소론파의 반발
  18세기 초 당시 조선은 왜란 및 호란 이후로 국내외 정세가 매우 불안정하였으며, 대기근
과 질병 등의 천재지변, 그리고 관료들의 부패, 부정이 만연하였다. 이 때문에 삶의 터를 잃
고 떠돌아다니는 유랑민들이 많이 늘어났다. 이들 유랑민들 중에는 노비나 수공업자가 되는 
이들도 있었지만 개중에는 화전민이 되거나 도적 또는 거지로  전락되는 경우도 많았다. 게
다가 조정의 치열한 당쟁으로 인하여 정치가 불안하여 국민생활의 안정은 뒷전에 밀려나 있
었다. 1670년대에는 남인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는데, 1680년대부터는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
이 집권하게 되었고, 1689년부터는 다시 남인이, 1694년부터는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각각 
집권하게 되었으며, 이후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어  1716년부터는 노론이 집권하여 소론을 
박해하기 시작했고, 1721년 8월에 노론의 4대신인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
사 이이명, 판주추부사 조태채가 중심이 되어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자 소론이 들고 일
어나 그 부당함을 상소하여 저지하였고 나아가 노론의  4대신을 축출해 버렸으며, 1722년에
는 노론파 173명 가량이 처벌되었고, 1724년에 연잉군(영조)이 즉위한 후에는 노론의 반격으
로 김일경, 목호룡 등 소론의 핵심인물들이 처벌당했다. 이리하여 사회에는 불평객들이 자꾸
만 늘어갔다.
  이런 혼탁한 시기에, 이인좌는 명종 때의 영의정 이준경의  후손이자 관찰사와 감사를 역
임한 이운징의 손자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광주이다. 그는 소론의 영수였던 윤휴의  손녀
를 아내로 맞이했다.
  영조는 1724년에 조선왕조 21대 왕위에  오르면서 당쟁의 병폐를 최소화하고자  송인명의 
의견을 받아들여 탕평책을 펴나가면서, 노론과 소론의 인물들을 고루 등용하여 정계개편(정
미환국)을 하였다.
  이럴 즈음에, 정권에서 배제될 위기에 처한 소론의 과격파들(박필헌, 이유인, 심유현 등)은 
같은 처지에 있는 남인들을 포섭하고, 나아가 향임층, 사노비, 지방 군인, 유랑민, 농민, 명화
적까지 포섭하여 영조와 노론의 정권에 대한 반기를 들 계획을 세워나갔다. 그들은,  경종의 
죽음에는 많은 의문점이 있으며,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을 왕으로 추대해야 한다는 명분을 겉으로 내세워(실제로는 영조와  노론파를 제거하
고자)난을 일으키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1725년부터  본격적으로 전국에 걸쳐 세력 확장에 
들어갔다. 이 무렵 경종의 비였던 심씨의 동생인 심유현이 경종의 죽음에 강한 의혹을 제기
하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전국 곳곳에서 흉서와 괘서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
게 되었다.
  1727년 7월에 영의정 이광좌가 영조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호남의 유민이 무리지어 변산과 월출산에 출몰하고 있다고 하지만, 관군이 손을 못 댄다
고 하옵니다."
  그리고 이어 같은 해 12월에 전주에서 2차에 걸쳐 흉서의  변이, 그 이듬해인 1728년 1월
에는 경성 서소문에 괘서의 변이 있었으며, 3월 12일에는  좌포도 대장 이삼한테서 다시 전
주의 불온한 격문 및 호남의 불온한 상황이 보고되었고,  3월 14일에는 소론의 원로 대신으
로 용인에 은퇴해 있던 봉조하 최규서가 상변하였다. 그러자 영의정 이광좌, 좌의정  조태억 
등이 다시 왕에게 간곡히 아뢰었다. 
  "소요의 주도인물인 용인 지리학 교수인 안호와 그의 노비 막실을 잡아 가두었나이다. 그
런데 며칠 전 양반들이 진도에 모였길래 이를 이상히 여겼는데, 알고 보니 장흥이라는 자가 
안호와 그의 형 안박과 함께 역모하여 13일에 군사를 모아  14일에 소사(이산)로 갔다가 15
일에 거사하려 했다고 하옵니다."
  그러자 영조는 도성의 각 궐문과 성문 및 각 나룻터에 군사를 배치하여 경비를 강화하라
고 지시했다. 그 이튿날 수원 부사 송진명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보고가 올라왔다. 
  "적은 경외에서 서로 호응하고 남북에서 합세하여 곧 수원을 칠 것이라 하옵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3월 15일 아침까지도 반란군의 규모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동요하
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이인좌, 권서룡  등이 난을 일으킨 상태였다. 신임사화로  실각당했던 
노론이 영조의 즉위 때 재집권하여 4대신을 무고한 소론파의 김일경과 목호룡을 죽인데 대
해, 그리고 경종 시해의 음모 등에 불평을 품은 소론파 이인좌는, 김일경의 아들 김영해, 목
호룡의 형 목시룡 등과 연락을 취하여, 정희랑, 권서룡 등과 공모하여 그들과 함께 소론  및 
남인의 불평분자들과 동지들을 규합하여 1728년 3월 15일에 무력에 의한 정권 쟁탈을 꾀하
는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당시 남쪽에서는 이미 권서룡이 용인, 안성, 과천, 평양, 괴산 등지의 불평객 3백  명을 끌
어모아 놓고, 청주의 이인좌의 반란군과 수시로 연락을 취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권서
룡은 3월 13일에 청주 근방에 이르러서, 상여 안에 무기를  싣고 가서 청주성 앞에 숲 속에
다 숨겨 놓고는 성 안에 들어가 태연히 술을 빚고  있었다. 이때 충청도 병마절도사 이봉상
(이순신의 손자)은 적이 왔다는 말을 전해 들었으나 이를 곧이듣지  않고 아무런 대책도 세
우지 않고 방심하였다. 이인좌는 성  안의 장리들과 내통하여 청주의 성  안의 상황을 대충 
파악한 다음에 권서봉과 함께 밤중에 봉기군을 이끌고 성  안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이때 
아무 걱정도 하지 않고 깊이 잠들어 있던 절도사 이봉상은 미처 칼을 빼들기도 전에 침실에
서 봉기군에게 붙들려 끌려 나오게 되고 말았다. 이때 그는 빈 손으로 항거해 보았으나,  이
미 때는 늦은 뒤였다. 그는 마당으로 끌려나와 즉결 처형되고 말았다. 이때 군과 홍림, 영장 
남연년도 함께 생포되어 살해되었다. 그러나 목사 박당은 요행히  성을 빠져나가 산 속으로 
달아나 목숨만은 건졌다.
  이렇게 청주성을 손쉽게 점령한 이인좌는 스스로 대원수라 칭하고, 권서봉을 목사에, 신천
영을 병사에, 그리고 박종원을 영장에 각각 앉혔다. 그런 후에 각 읍에 격문을 띄웠다.
  "경종의 죽음을 에도 하고, 왕대비 어씨(경종계비선의 왕후)의 밀조를 받들어서 이제 총궐
기하여 흉얼(영조:숙종의 숙빈 최씨의 소생)을 내쫓고, 소현의 적파인 밀풍군 이탄을 임금으
로 추대하였다."
  뒤이어 그는 경종의 위패를 받들고서 그 좌우에 흰 빛깔의 비단으로 장식한 장졸들을 세
워 놓고, 자신들의 거사는 선왕(숙종)의 친자가 아닌 영조를 내쫓고 밀풍군 이탄을 추대하려
는 반정이라고 내외에 널리 알렸다. 그런 후 그는 각읍에 명하여 병마를 소집하는 한편,  봉
기군들이 상복을 입고 상여를 가장, 무기를 운반하여 진천을 거쳐 죽산과 안성을 향하여 진
격의 깃발을 높이 올렸다. 이와 동시에 권서봉은 봉기군을 이끌고 안성으로 진출하였다.  신
천영은 청주성에 그대로 남아 성을 지켰다.
  조정에서는 3월 16일에 김영해와 목시룡을 잡아들여 목을 메어  죽여 버린 후, 순토사 김
중기 등에 군사를 주어 출정을 명했다. 그러나 김중기는 겁을 집어먹고 출정하지 않았다. 그
러자 조정에서는 3월 17일에 병조판서 오명항을 도순무사로, 박찬신을 중군으로, 그리고  박
문수와 조현명을 종사관으로 각각 임명하여 출정시켰다. 그러나 이때  민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흉흉하였다. 왜냐하면, 이 무렵 평안 병마절도사 이사성,  금군 별장 남태징이 이미 반
란군과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한강 남쪽에서는 적이 수원까지 점령했으며,  또 
호남에서 변산 및 월출산의 반란군이 전주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이었
다. 그래서 도성 안의 주민들은  불안과 공포에 짓눌려 피난 소동까지  일으킬 정도로 사회 
분위기가 온통 어수선하고 혼란 스러웠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급히 금군  별장인 남태징을 
잡아들여 목을 베어 죽이고, 전주 괘서의 죄인 이세룡  등도 붙잡아 처행시킴으로서 민심의 
동요를 막고자 애를 썼다.
  이 무렵 반란군의 주력부대는 이미 청주를 출발하여 진천을  거쳐 죽산에 이르러 있었다. 
이에 맞서 오명항은 관군을 이끌고 내려가 진위현 남쪽의 들판에 진을 쳤다. 그러나 관군은 
밤중에 반란군의 기습을 받아 급히 직산 쪽으로 퇴각해 갔다. 그런데 퇴각하던 오명항은 도
중에 갑자기 진로를 바꿔 안성 쪽으로 향했다. 이 무렵, 반란군은 오명항의 관군이 모두  직
신으로 퇴각한 줄로만 알고, 밤중에 횃불을 들고 방심한 채 행군해 나아갔다. 이때 오명항은 
관군으로 하여금 길 양쪽에 매복하게 한 다음 반란군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이것도 모
르고 적진 깊숙이 들어온 반란군은 관군의 갑작스런 기습 공격을 받고 수많은 사상자를 내
고는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이때 이인좌, 박종원 등은 겨우 2백여 명의 패잔병을 이
끌고 청룡산으로 급히 도망쳤다. 오명항은 관군으로 하여금 그들을 끈질기게 추적하게 하여 
박종원과 반란군 병사 1백여 명을  죽였으나, 이인좌를 끝내 사로잡지  못하고 놓쳐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오명항은 포기하지않고 죽산까지 추격하여 이인좌를 포위해 들어갔다.  그런 
중에, 반란군의 장수 정세윤과 그의 아우 정계윤을 비롯한 수십 명의 반란군을 목베어 죽이
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자 이인좌는 청룡산에 있는 절에 들어가 숨었다. 그러나 그는 절  근
처의 부락민들과 절의 승려들에게 붙잡혀서  관군의 진영에 인계되어 3월 26일에  대역죄로 
참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청주성에 남아 있던 신천영은 창의사 박민웅이 이끄는 토벌군
의 공격을 받아 저항했으나 상황이 불리하게 되자 청주성을 빠져 나와 달아났다. 근는 상당
성에서 마지막 전투를 치렀으나 패하고  말았다. 이후, 반란군에 협조한  청주 목사 권서봉, 
진천현감 이지경, 장군 목함경, 박상, 곽장 등도 처형되었으며, 평안 병마절도사 이사성도 역
시 처형당했다. 그러나 태인현감 박필현은 유민집단을 이끌고 전주 삼천까지 쳐들어가 관군
과 싸웠으나 전주 가영 군사에게 패하여 그의 아들과 함께 경상도 상주로 도망쳤으나 거기
서 붙잡혀 참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때 박필현과 합류하려고  했던 발필몽도 상주에서 체포
되어 한양으로 압송된 후 처형당했다. 그리고 영남의 정희량(저온의 4대손)은 이웅좌(이인좌
의 동생)와 함께 반란군을 이끌고 안음, 거창, 합천, 함양 등지에서 일시 승전고를 울렸으나, 
경상 감사 황선, 성주 목사 이보혁, 초계 군수 정양빈 등이 이끄는 관군에게 제지당하여  거
창에 머물고 있다가, 도순무사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이 추풍령을  넘어와 기존의 관군과 연
합하여 공격해 오는 바람에 패하고 말았다. 이때 정희량, 이웅좌는 선산 부사 박필건과 곤양 
군수 우하형 등에게 붙잡혀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후, 밀풍군 이탄은 감옥에 갇혔다가  이듬
해인 1729년 3월에 감옥에서 굶어 죽었다. 이로써 이인좌의 난은 발발한 지 한 달만에 완전
히 그 막을 내리고 말았으며, 토벌군은 4월 19일에 한양으로 당당히 개선하였다. 이때  영조
는 친히 숭례문루에까지 나와 회군하는 토벌군을 맞이하였다. 이후  정권은 노론 세력의 손
으로 완전히 넘어가게 되었다. 
  
    홍경래의 난(1811-1812년)
  홍경래의 난은 1811년(순조 11년)  12월에 홍경래가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인하여 
극도로 부패한 조선 말기의 생활 불안과 서북인에 대한 차별대우, 그 억울함에서 오는 위정
자들에 대한 민중의 반항을 대변하여 평안도 서해안 일대에서 일으킨 난(조선왕조에 일어난 
민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난)이다.
  
  평안도 출신이라고 차별대우 하지 말라!
  홍경래(1780-1812년)는 평남 용강군 다미면에서 진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남
양이다. 그는 외숙인 유학권에게 글을 배워 과거에 여러  번 도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1798년(정조 22년)에 사마시에 또 낙방하자 그는 조정에서의 평안도 출신
에 대한 배척, 제도적모순, 안동 김씨 세도정치, 그들의 심한 횡포와 매관매직, 그로 인한 암
담한 시국을 개탄하고서 과거를 통해 출세하겠다는 뜻을 아예  단념해 버렸다. 당시 사마시
에 합격된 자들은 모두 귀족의  자제들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화가 난  그는 산에 들어가 
한동안 독서를 하면서 지냈다. 그러면서, 그는 정권 쟁탈의 꿈을 키워갔다. 그 후, 그는 풍수 
지사로 자처하면서 각지를 유랑하며 뜻을 같이 하고자 하는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그는 각
지의 부호, 명사들을 찾아 다니며 인재들을 찾았다. 그는  1800년(순조 즉위년)에 평안도 가
산군에 있는 청룡사라는 절에서 재략이 풍부하고 풍수지리에 밝은 서자 출신 우군칙(홍경래 
보다 5살 아래, 당시 16살)을 만나 시국을 논하던  중 서로 의기 투합하여 반란을 일으키기
로 약속했다. 그런 후, 평안도 내의 향무층중에서도 부농층을 주요 포섭 대상으로 삼았으며, 
그 외 장사들도 포섭해 나갔다. 그러던 중에 만주의 마적단 두목인 정시수와 가산의 부호로
서 무과에 급제한 뒤 가산역의 관리로 있던 이희저, 문재가 뛰어난 곽산의 진사 김창시등도 
포섭되었다. 이희저의 경우 우군칙의 아내가 이희저의 처에게 먼저 접근하여 손금을 봐주면
서 대길할 운이라고 귀뜀을 해준 다음, 지사인 척하는 우군칙이 이희저를 찾아가 부친의 묘
자리가 명당이라고 침이 마르게 칭찬해 주었다. 이 때문에 기분이 좋아 있던 이희저에게 도
사복을 입은 홍경래가 야밤에 몰래 찾아가, 거사 계획을 확신 있는 목소리로 밝혔다. 그러자 
이희저가 혼쾌히 거사 동지가 되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이어 그들은 태천의 김사용(우군
칙의 제자), 개천의 이제초, 곽산의 홍총각 등도 거사 동지로 합류시켰으며, 한양에 있는 전 
좌의정 김재찬(그는 1805년 우의정 임명을 거절했다가 황해도에 유배된 적이 있었다)에게도 
접근하여 거사 준비금 2천냥을 빌렸다. 이외에도 정주의 부호 김약하, 의주의 인삼상인 임상
옥을 비롯한 여러 상인들도 동지로 끌어들였다. 그런 후 그들은 가산의 다복동(청천강 이북 
지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임과 동시에 평양과 의주로도 통하는 교통 요충지)에 있는 이희저의 
집을 비밀 아지트로 삼고, 거사하기 전부터 이곳에 옮겨와 운산 촛대봉의 금광 채굴을 구실
로 각지(곽산, 정주, 선천, 안주, 철산, 개천, 태천, 박천, 영변)의 유랑민, 기인, 도사, 술사 모
사 및 문인들을 꾀어 장정을 끌어 모은 다음 이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일정 수준을 넘으면 
이들에게 돈과 의류를 나눠주고 이들을 10명 1조로 만들어  각 마을로 잠입케 했다. 그리고 
거사일에 일제히 봉기하도록 서로 굳게 밀약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천문을 살피고 도창,  조
총, 연환 및 각색 기치를 준비하고, 곽산 출신 김창시로 하여금 각 읍에 요언을 퍼뜨리게 하
여 민심을 선동하도록 하였다. 이런 식으로 거사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해가면서 기회를 노
리던 중 1811년(순조 11년)에 종래에 만나볼 수 없는 큰 흉년이 들게 되었다. 민심이 흉흉해
진 틈을 타서 궁민들까지 끌어들인 다음 12월 15일에 무리를 이끌고 평양으로 들이닥쳐 대
동관에 불을 지르고 그때의 혼란한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차질이 생겨 연기
하고 말았다.
  홍경래는 다시 12월 20일에 거사하기로 작정하고, 각처의 동료들에게  무기 및 깃발을 보
내주었다. 그러나 거사 소문이 너무 빨리 퍼져 나가, 선천 부사 김익순(김삿갓의 조부)이 이
희저의 일가족을 체포하려 하자, 홍경래는 거사 예정일을 이틀  앞당긴 1811년 12월 18일에 
2천여 명의 반란군으로 드디어 난을 일으켰다. 그는 스스로 평서대원수라 칭하고,  김사용을 
부원수, 우군칙을 선생, 이희저를 도총, 김창시를 모사, 홍총각과 이제초를 선봉장으로, 김희
연과 이성항을 참모로, 그리고  박성간을 병참장으로 삼았다. 홍경래는  봉기군을 크게 2군, 
즉 북진군과 남진군으로  나눠, 남진군은  자신(총지휘권자)과 홍총각(선봉장),  윤후겸(후군
장),이희저(도총) 등이 맡고, 북진군은 김사용(대장), 이제초(선봉장), 김창시(모사), 김희연과 
이성항(참모) 등이 맡게 하였다. 그런 다음, 출병에 앞서 김창시로 하여금 격문을 써서 봉기
군 앞에서 읽게 한 다음 이를 각 관서에 보냈다. 그 격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무릇 관서 지방에서는 오래 전부터 특출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곳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나라를 다시  세웠으며, 정묘의 변에는 양무공 정봉수(정묘호란 
때 철산의 의봉장)와 같은 충신이 있었다. 그리고 둔암 선우협(성리학자), 월포 홍경우(성리
학자)와 같은 재사가 이곳에서 났는데도 조정에서  이를 돌보지 않고, 심지어는 권문세가의 
노비까지도 서북인을 평안도놈이라고 멸시하니 어찌 분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막상 국가
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우리 서북인의 힘을 빌리면서도 4백 년 동안 우리가 조정에서  혜택
을 입은 것이 과연 무엇이 있단 말인가. 지금 조정에서는 어린 왕 주위에 있는 김조순, 박종
경 같은 간신배들이 권력을 쥐고 흔들고 있기 때문에 하늘도 재앙을 내려 이처럼 흉년이 들
게 하였도다. 그러나 다행히 세상을 다스릴 이가 청북 홍의도에서 나셨으니, 우리는  총궐기
하여 부정 부패를 척결하자. 그러나 이곳 관서 땅은 성인께서 나신 고향이어서 차마 다치게 
할 수 없어서, 먼저 관서의 호걸들에게 기병할 것을 명하여  도탄에 빠져 있는 백성들을 구
하도록 하였노니, 의로운 뜻이 일어난 곳이 바로 참 임금을 기다린 명소가 아니겠는가. 이에 
격문을 띄워 각 지역에 알리노니, 절대로 요동하지 말고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
으라. 만약 반항하면 용서치 않겠다."
  홍경래는 이희저와 홍총각에게 병력 50여 명을 주어 12월 18일 밤에 가산 군청을 제일 먼
저 습격하도록 했다. 그들은 그곳 이속들의 도움을 받아 쉽게 군청을 점령할 수 있었다.  이
때 군수 정저와 그의 부친 정노는 홍총각에게 사로 잡혀 끌려나와 봉기군들에게 맞아 죽었
다. 그리고 김사용, 김창시 등이 이끄는 북진군을 곽산으로  보내 그곳을 치도록 했다. 그러
자 곽산 군수 이영식은 겁을 집어먹고 벽장 속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었으며, 군수의 아우는 
반항하다가 칼에 맞아 죽었다. 김사용은 북진군을 이끌고 능한산성으로 진격하여 점령한 뒤 
임해진을 거쳐 정주성으로 향했다. 김사용은 12월 19일에는 집사 이침, 좌수 김이대와  김이
천, 중군 이정환, 칙고도감 홍하진과 이미 내통하여 어느 정도 그곳 사정을 간파한 후  그날 
정오에 최이륜, 정진교 등으로 하여금 정주를 치도록 하였다. 이때 목사 이근주는  당황하여 
향교로 도망쳐 버렸다. 그러나 이침 등이 끝까지 뒤쫓아가 목사를 붙잡아 인부를 빼앗은 뒤 
개 쫓듯 내쫓아 버렸다. 그리하여 김사용이 이끄는 북진군은  정주성을 무혈 점령하게 되었
다.
  한편 홍경래는 20일 새벽에 홍총각을 선봉장으로 내세운 남진군 3백여 명을 직접 이끌고 
박천읍으로 쳐들어갔다. 그러자 그곳 군수인 임성고는 어디론지 줄행랑을 쳐버렸다.  홍경래
는 군수의 노모를 일부러 감금하고서 겁을 주자 서운사에 숨어 있는 군수가 스스로 항복하
여 왔다. 이런 식으로, 홍경래는 봉기군을 남북 2대로 나눠 본거지인 다복동을 중심으로  각 
군읍을 하나둘씩 차례차례 공략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김사용, 이제초, 김창시, 김희
연, 이성항 등이 이끄는 1대(북진군)는 곽산, 정주, 선천, 이서의 여러 고을을 차례로 점령하
였으며, 홍경래, 우군칙, 홍총각, 윤후겸, 이희저 등이 이끄는 2대(남진군)는 박천 등지를  점
령하였다. 홍경래는 점령지마다 곡창을 풀어 궁민들에게 나눠 주어 인심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김사용도 정주성을 점령하고 나서 그곳의  지식층들, 즉 좌수, 풍헌, 별감, 
별장, 천총 등을 설득하여  봉기군에 편입시키는 노력을 기울여  봉기군의 탄탄한 교두보를 
확보해 나갔다. 남진군도 박천을 점령한 뒤 기수를 남쪽으로 돌렸다. 남하하기 위해서는  제
일 관문인 안주를 공략해야 했다. 그러나 안주에는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해우와 목사 조종
영이 이끄는 1천여 명의 관군이 버티고 있었다. 게다가  곽산 군수 이영식이 이끄는 관군이 
측면 지원해 주고 있었다. 그래서 안주 침공에 대한  의견이 봉기군의 지도자들간에 엇갈리
게 되었다. 우군칙 등은 영변을 치자고 한 반면에 김대련과 이인배는 영변보다는 안주를 먼
저 치자고 주장했다. 결국에는 영변을 먼저  치자는 쪽으로 결정이 났다. 이 때문에  절망한 
김대린과 이인배는 봉기에 동참한 것 자체를 후회하더니, 급기야는  홍경래의 목을 베어 버
리고 자수하자는 쪽으로 결심을 굳혔다. 그들은 야밤에 몰래  홍경래의 숙소로 숨어 들어가 
칼을 휘둘렀다. 이때 홍경래는 잽싸게 몸을 피하고서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자 곧바로  우군
칙과 부하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이에 김대련은 암살 계획이  실패했음을 알고 자결하고 말
았으며, 이인배는 부하들의 칼에 맞아 죽었다.  이때 홍경래는 이마를 다쳐 피를 많이  흘렸
다. 그래서 그는 진격일정을 바꿔 상처를 치료할 겸하여 12월 21일에 다복동으로 일단 후퇴
하였다. 그러자 북진군도 의주성에 대한 공격 시기를 며칠 늦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2
월 24일 밤 홍총각의 선봉부대가 먼저 송림리로 진격하였고, 되이어 홍경래, 우군칙의  부대
가 12월 26일에 송림리로 가서 합세하였다. 이와 발맞춰 김사용의 북진군도 12월 24일 정주
를 떠나 선천으로 향했다. 
  한편, 이 무렵 안주 목사 조종영은 헤이된 군대 기강을 바로잡고자 명령을 위반한 군졸 3
명을 즉결 처형한 후, 성문을 굳게 닫아 걸고 봉기군의 공격에 철저히 대비하였다. 영변에서
도 부사 오연상이 전열을 가다듬으면서 봉기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춰 나갔
다. 12월 22일에 운산 군수 한상묵과 개천군 염백관이 증원군을 이끌고 영변으로 와서 합류
했다. 이때 한상묵과 염백관은 오연상에게 성 내에 첩자들이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그러자 
오연상은 가산과 박천에서 온 피난민들을 모두 성밖으로 내쫓아  버렸으며, 첩자 색출 작업
을 벌여 19명이나 체포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리하여, 첩자를 모두 잃어 버린 봉기군은 영변
의 점령을 포기한 채 안주 쪽으로 기수를 돌려 곧바로 남진 할 수밖에 없었다.
  평안 감사 이만수는 12월 22일에 순영중군 이정희를 안주로 출동시키고 영변  약산산정과 
자산 자모산성 등지에 병력을 배치하여 반란군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
만수가 반란군 토벌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그를 파면시켜 버리고, 대신 병조참판 정만석을 
관서위무사 겸 감진사로 임명하여 내려보내 반란군의 투항을 권고토록 하였다. 그리고 12월 
24일에는 금위영에 순무부를 설치하고, 이요헌을  양서순무사로, 박기풍을 순무사 중군으로. 
그리고 서능보와 김계온을 종사관으로 삼았다. 그러나 12월 26일에 자산부사에 임명된 김처
한이 겁을 먹고 출정을 거부하므로 그를 소환하여 처형시켜 버린 후. 그를 대신하여 순무사 
중군 박기풍을 내세워 12월 27일에 토벌군 선봉대를 파견하였다.
  홍경래가 이끄는 남진군은 첩자인 좌수 김윤해와 변대익의 도움을 얻어 12월 25일 밤 남
창읍 안으로 들어가 점령했으며, 김사용이  이끄는 북진군은 12월 24일 선천으로  진격하여, 
첩자 최봉관과 유문제의 도움을 얻어 쉽사리 선천을 점령하였다. 이때 선천 부사 김익순(김
삿갓 김병연의 조부)은 측근과 군졸  몇 명만 데리고 검산산성으로  도망가 버렸다. 그러자 
김사용은 아장을 그곳으로 보내 회유 또는 협박하여 김익순으로부터 기어코 항복을  받아냈
다. (이 항복 사건으로 인해 김익순은 나중에 죄인으로 몰려 죽었으며,  그의 자손은 대대로 
벼슬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벼슬길이 막힌 김익순의 손자 김삿갓은 젊어서부터 세
상을 풍자하는 시를 지으며 전국을 방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 다음 김사용은 북
진군을 2군으로 재편성하여, 1군은 신덕관에게 맡겨 구성 쪽으로, 2군은 김사용 자신이 맡아 
철산 쪽으로 각각 진격해 들어갔다. 그리고 철산의 첩자인  좌수정대성의 도움을 받아 철산 
역시 힘 안들이고 점령해 버렸다.  이처럼, 봉기군은 봉기한 지  5-6일 만에 청천강 이북의 
가산, 박천, 곽산, 정주, 선천, 태천, 철산, 용천 등 8읍을 비롯한 평안도 서해안 일대를 완전
히 장악해 버렸다.
  이 무렵 황해도 황주 사람 노인담, 곽성집 등이 수백명의 난민을 모아 폭동을 일으켰으나 
12월 28일에 황해도 병마절도사 조계에게 잡혀 처형되고 말았다. 한편, 홍경래는 박천의  송
림동에 8백여 명의 봉기군을 집결시켜 평양을 치러 떠날  채비를 서눌렀다. 12월 29일 아침 
홍경래는 봉기군을 3군으로 나누어 관군을 공격해 들어갔다. 관군도  역시 3군으로 나눠 봉
기군의 공격에 맞섰다. 이 날 박기풍이 이끄는 순무영의 중앙 군도 개성에 도착하여 토벌군
을 지원했다. 전투 초기에는 토벌군이 봉기군에게 밀렸다. 그러나 평안병사 이해우가 병력 1
천여명으로 하여금 봉기군의 후방을 치게 한 이후로는 전세가  역전되고 말았다. 한때 홍총
각이 후방을 지원하면서 봉기군 쪽의 전세가 다시 호전되는가  싶더니, 평안도 병마우후 이
해승, 함종부사 윤욱렬, 순천 군수 오치수 등이 거느린 토벌군이 3면에서 총공격해 오는  바
람에 다시 봉기군 쪽이 불리하게 되고 말았다. 그러자  봉기군은 중과부적으로 퇴각하지 않
을 수 없었다. 그러자 승기를 잡은 토벌군은 도망가는 봉기군을 쫓아가 닥치는 대로 무찔렀
다. 그리하여, 송림전투에서 홍경래는 1백 30여명의 봉기군을 잃어 버리고 정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퇴각중에 4백여 명에 이르는 봉기군이 흩어져 버려, 홍경래는 2백여 
명의 잔여 봉기군만을 이끌고 정주성으로 되돌아가 그곳을 거점으로 하여 장기전을  벌이며 
북으로 진격한 북진군의 지원을 기다렸다. 이 무렵 황주에서는 김덕춘, 김사옥 등이 마장리, 
용암리 등 12포구를 습격하여 민가 300여 채를 불태우는 등 폭동을 일으켰다. 
  경기, 황해, 평안 3도에서 징집된 관군 및 의병으로 결성된 토벌군의 주력부대가 1812년 1
월 3일에 정주성 아래에까지 도착하였다.  그 사이에 곽산읍에서의 싸움에서  관군은 또 한 
차례 이겨 박천과 가산이 회복되었다. 그리하여, 평안도 여러  읍 중 정주, 태천, 곽산, 용천 
등을 제외하고는 모두 회복되었다. 그래서 토벌군은 태천,  곽산, 용천 등지에서 봉기군들과 
전투를 벌임과 동시에 주력부대는 정주성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그러나 홍경래는 이에 굴하
지 않고 항전을 계속하였다. 1월 5일에 토벌군은 봉기군을 맞아 전투를 벌였으나, 전사 3명, 
부상 17명을 냈을뿐 별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 무렵 김사용은 북진군을 이끌고 용골산성을 점령한 후 이어 곧바로 용천읍을 점령하였
다. 그런 후에 향반층과 각별히 신경을 쓰면서 군사를 모았다. 1월 8일 토벌군은 정주의  남
진군과 용천의 북진군이 서로 합류하는 것을 막기 위해 후원장 이영식과 우영장 오치수에게 
병력 2천여 명을 주어 곽산을 치게 하였다. 곽산의  북진군은 토벌군의 갑작스런 공격을 받
고 혼비백산하여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선천으로 도망간 북진군의 박성신은 급히 김사용에
게 패전 소식을 알렸다. 그러자 김사용은 이제초에게 기병과  군사 1천여 명을 주어 곽산의 
토벌군을 공격하도록 했다.그리하여 곽산을 재탈환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윤욱렬이 이끄는 
토벌군이 다시 곽산을 공격해 왔다. 이번 전투에서는 곽산이  토벌되어 북진군의 장수 이제
초를 비롯한 6명의 장수와50여 명의 북진군 병사들이 사로잡혀 모두 효수당했고, 태천도 토
벌군에게 진압되어 북진군의 장수 변대익이 처형당했으며, 이윽고 용천. 용골산성, 서림성에
서도 연달아 봉기군이 패배당했다. 서림성이 토벌군에게  점령당했을 당시 동림성에 머물고 
있던 김사용은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중대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그는 야밤을 이용하여 정주성으로 들어가 홍경래를 도왔다. 그렇게 되자, 1월 10일
경에 이르러서는 홍경래는 정주성안에 갇힌 채 완전히 고립된 꼴이 되고 말았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봉기군 중에는 관군에게 투항하는 자들이 자꾸만 늘어갔다. 게다가 양서순무
사 중군 박기풍이 지원군을 이끌고 와서  정주의 토벌대와 함류하는 바람에 전세는  봉기군 
쪽이 더욱 불리하게 되었다. 그런데다가 1월 15일에 북진군의 장수 김창시가 선천, 철산  등
지에서 관군과 싸우다가 패주하여 용천 동림섬과 서림성으로 쫓겨 갔다가 그 이튿날 붙잡혀 
효수당하고 말았다. 이렇듯 사태는 점점 봉기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어갔다. 더욱이 성 안에
서는 병력, 무기, 식량난에 대한  걱정이 나날이 증가되어 가는  반면, 토벌군은 날이갈수록 
장비. 군사, 식량 면에서 더욱 우세해져만 갔다. 그러자 홍경래는 "싸우다 죽느냐, 아니면 항
복하느냐" 를 놓고 한동안 갈등했지만, 결국에는 끝까지 싸우다 죽는 쪽으로 결심을 굳혔다. 
1월 19일에 토벌군의 총공격이 다시 한번 가해졌으나, 그들은 완강한 봉기군의 저항에 부딪
쳐 사상자 36명만 내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2월 초까지 토벌군의 4-5차례의 총
공격이 시도되었으나 번번이 실패만 하고  물러났다. 2월 12일 밤에는  성 안의 북장대에서 
불이 났다. 이 틈을 타서  토벌대의 의병장 김견신이 성을 향해  진격해 들어갔으나 오히려 
봉기군의 역습을 당해 실패하고 말았다.  이처럼, 봉기군의 저항이 의외로 거세고  끈질기게 
이어지자, 조정에서는 2월 18일에 순무사 중군인 박기풍을 사직시켜 버리고, 대신 그 자리에 
유효원을 앉혔으며, 신홍주를 병마절도사로 삼아 파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월 19일과 
2월 23일 2차에 걸쳐 반란군은 오히려 토벌군을 역습하여 위협을 주며 포위망을 뚫고자 시
도하는 등 몇 번의 역습을 감행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새로 부임한 유효원은 경향군 8
천여 명을 이끌고 내려가 기존의 토벌군과 합세하여 2월 29일에 정주성을 향하여 총공세를 
펼쳤으나,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3월 9일에 홍경래는 우군칙과 홍총각에게 장정 5백여 명을 
주어 토벌군에 대한 역습을 과감히 시도해 보았으나 실패했다.  이때 봉기군은 46명이 죽고 
4명이 포로가 된 데 비해. 토벌군은 70명이 죽고 1백37명이 부상당했다. 반란군은 3월  15일
과 20일에도 성에서 나와 재차 토벌군을 공격하여 토벌군의 의병장 허항을 비롯하여 22명을 
죽였으나, 이때 장수 김사용을 비롯하여 50여 명의 병력을 잃고 퇴각하였다.
  3월 22일에도 봉기군은 또 한 차례 역습을 감행하여  토벌군의 병사 17명을 죽였으나, 자
기 편은 69명이나 죽고 1백여 명이 포로로 잡혀  대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자꾸 식량이 부족해져 가기 때문에 봉기군은 어떻게  해서라도 토벌군의 포위망을 뚫고
자 여러 시도를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즈음 홍경래는 그를 배반한 집사 이침이 쏜 총
에 맞아 죽을 뻔했으나,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때 암살미수 사건에 연루된자들은  모
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이런 일로  충격을 받아서인지, 홍경래는 관군의 복병장  정의진과 
협상을 시도하여싱 내의 여자 60여 명, 남자 병약자 및 어린애 7명을, 그리고 3월  26일에는 
남녀 1백61명을 각각 성 밖으로 내보냈다.이 무렵 성 안에는 먹을 것이 없어, 사람들은 소나 
돼지뿐만 아니라 전투에 쓸 말까지도 거의 다 잡아 먹어 버린 상태였다. 심지어 소나 무 껍
질까지 벗겨 먹어야 했기 때문에 성 안의 소나무들은 모두다  하얗게 될 정도였다. 뿐만 아
니라 버드나무 잎사귀, 풀잎까지도 뜯어 먹을 정도로  식량난이 극심하였다. 그런데도, 홍경
래는 항복하지 않고 항거를 지속하였다. 이에 유효원은 그 동안  4월 3일부터 보름 동안 정
주성 북장대 밑까지 파들어간 땅굴에다 4월 18일 밤에 화약 1천8백근을 묻어 놓고 4월 19일 
새벽에 이를 폭파시켜 북장대 쪽 성벽 10여 칸을 파괴해 버렸다. 그런 다음 토벌군 중 의병
들을 먼저 돌진시키고 그 뒤를  따라 관군 수천명으로 하여금 쳐들어가게  했다. 이에 맞서 
홍경래는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결국 토벌군의 총과 칼에 맞아 죽고 말았으며, 봉기군의 장
수 홍총각, 김이대 등은 포로로 붙잡혔다. (홍총각,  김이대는 한양으로 곧바로 압송되어 그
로부터 4일 뒤인 4월 23일에 처형당했다.) 그  외 포로로 붙잡힌 봉기군 1천9백17명도 모두 
효수되었으며, 여자 8백42명과 남자 아이 2백24명만이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우군칙과 이희
저는 성에서 일단 도망치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그로부터 사흘 뒤인 4월 22일에 붙잡힌 후 
대역죄로 처형당했다. 결국. 총 2천여 명의  봉기군들이 죄인으로 몰려 목베임을 당해  죽었
다. 그리고 봉기군에 항복했던 지방 수령들은 파직 또는 처형을 당했다. 이로써 홍경래의 난
은 정주성 안에서 항거한 지 1백여 일 만에(거사한 지 4개월 만에) 마침내 평정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토벌군은 4월 24일에 본래의 근무지로 각각 귀환하였다.
  이후로도, 1813년(순조 13년) 11월에 제주도에서 양제해가 반란을 도모하다가 잡혀 죽었으
며, 1814년과 1815년에 걸쳐 전국적으로 도둑떼가 횡행하여 민심을 혼란스럽게 하였고, 1815
년 10월에는 용인의 이응길이 송지팽, 최한갑(뿔&매) 등과 함께 모의하여 병력을 모아 반란
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발각되어 처형당했다.그리고 1816년 10월에는 성천의 승려 학상이 자
칭 "홍경래 일파 라고 하며 민중을 선동하고  다니다가 붙잡혀 효수당했으며, 1817년 1월에
는 유칠재가 홍찬모 등과 함께 조정의 중신들을 모함하려다가 유배당했고, 같은 해 3월에는 
채수영등이 "홍경래가 살아 있다" 고 민심을 동요시키며 전라, 충청 2도에서 무기와 병력을 
모아 상경하여 박종경, 김조순, 심상규 등을 죽이고 강화에 유배되어 있던 은언군 이인의 아
들 이철득을 옹립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목숨을 잃었다.
  
    채수영의 난(1817년)
  
  채수영의 난은 1817님(순조 17년)에 채수영이 김계호, 안유겸, 신성문, 김맹억 등과 공모하
여 전라, 충청의 두 감영을  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당대  권세도가들에 대해 반기를 
든 난이다.
  
  정권을 쥐고 흔드는 세도가들을 쳐없애자!
  채수영(?-1817년)은 1817년(순조 17년)에 김맹억의 집에 모여, 김계호, 안유겸, 박충준, 신
성문, 김맹억 등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모반을 모의하였다. 그들은 모두 왕의 외척 및  몇몇 
권세도가들이 정권을 쥐고 흔드는 것에 매우 분개하며 그들을 제거하고자 반기를 들기로 했
다. 그들은 매약상 또는 행상으로 가장하여 다니면서 다음과  같은 유언비어를 널리 퍼뜨렸
다.
  "외국군의 배가 들어오고 있다,"
  "홍경래가 아직 살아 있다."
  "이희선도 아직 살아 있다."  
  이런 유언비어를 퍼뜨려 민심을 선동한 뒤,  그들은 군사를 모아 전라, 충청의 두  감영을 
습격하여 관군을 바짝 긴장시켰다.
  이후, 채수영은 동지들과 함께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거사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에 옮
기고자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에 옮기고자 하였다.
  "앞으로 군사를 더 끌어모은 다음 상경하여 부원군 김조순(김조순은  1802년에 자기 딸이 
순조의 비로 봉해지자 영돈령 부사가 됨과 동시에 영안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철종 때는 안
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틀을 마련한 장본인), 판서 박종경(박종경은 1800년 순조가 즉위하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이듬해 부수찬으로 기용되었고, 1809년 병조판서, 그 이듬해 이
조판서와 훈련대장을 거쳐, 1812년 호조판서가 되었는데, 이때 대사헌 조득영으로부터  왕의 
인척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음탕과 뇌물만을 탐낼 뿐 아니라 사사로운 감정으로  살인을 
저지르는등 행패가 많다는 탄핵을 받아 양주 목사로 일시  좌천되었다가 다시 어영대장, 판
의금부사를 거쳐 좌참찬에 이르렀으며, 순조와 순정왕후의  총애를 받아 군국기무로부터 공
부까지도 장악하고 권세를 부렸던 당대 세도가), 판서 심상규(심상규는 1800년에 정조가 죽
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어 벽파가 득세하자 시파로서  유배를 
당했다가, 1802년에 풀려나와 이조참의,  대사간, 비변사 제조, 호조판서,  양관 대제학 등을 
거쳐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두루 역임한 세도가)등등의 비판 대상인 당대 세도가들을 쳐죽
이고, 강화도로 귀양 가 있는 은언군 이인(사도세자의 서자요 영조의 손자인 은언군 1771년
상인들에게 진 부채가 영조에게 알려져  직산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대정현에  안치되었으
며, 1774년에 풀려났으나, 그의 아들 상계군 이담이 홍국영에 의해 모반죄로 몰려  자살하자 
왕명에 의해 다시 강화에 유배당했다. 그는 1797년에 강화에서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
으며, 1801년 신유박해 때 그의 처 송씨와 며느리 신씨가 청나라 신부 주문모에게 영세받은 
천주교인으로 순교하자 함께 유배소인 강화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는 1849년 그의 손
자 이원범(철종)이 즉위한 뒤 신원되었다.)의 아들 이철득을 왕으로 추대하자." 
  그러나 이 거사 계획은 한때 같은 동지로 활약한 바 있는 박충준의 고발로 실행에 옮기기
도 전에 발각되어 채수영을 비롯하여  김맹억. 김계호, 안유겸, 심성문  등 모의에 가담했던 
동지들 모두 참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고발자 박충준은  상을 받는 대신에 감 1등되어 
유배당하고 말았다.
  
    진주민란(1862년)
  진주민란은 오랜 동안 문제되어온 전정, 군정,  환곡의 세 가지 납징에 대한 불만을  가진 
농민들이 1862년(철종 13년) 2월에 진주를 중심으로 일으킨 난이다.
  
  양민착취 일삼는 탐관오리 처단하자!
  1861년 9월에 환곡의 가산징수 때문에 민소가 자주 일어나자, 철종은 이를 크게 걱정하여, 
각 도의 감사 및 수령 가운데 비위, 불법이 있어 민소를 당한 자들은 엄중히 문책하여 파면
시키도록 조치하였다. 그러나 당시 영의정 정원용은 이를 의도적으로 회피하였다.
  "민소가 많다 해도 일일이 준신(무엇을 준거로 삼아 쫓고 믿음)할 수는  없으므로, 실정을 
밝히기 전에 문책하기 곤란하옵니다."
  이렇듯 민소에 대한 진상 규명과 대책을 강구하지 않고 버려둔 까닭에 1862년(철종 13년) 
2월 중순부터 경상도 진주 등지에서 민란이 터지고 말았다. 민란의 직접적인 원인은 병마절
도사 백낙신의 과도한 탐욕과 착취, 그리고 가혹한 탄압과 박해 때문이었다. 그는 1861년(철
종 12년)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진주에 부임한 후, 국고금을 횡령하고 갖은 수단과 방법, 
즉 온갖 협박과 공갈을 동원하여 백성을 착취, 약탈을 자행하여 재산을 모으는 한편, 쌀 1만
5천석(6만여 냥이나 되는 거액)을 호별로 징수하는 등 민폐를 끼쳐 농민들로부터 많은 원성
을 사게 되었다. 여기에 각종 부당한 조세, 수령들의 탐학, 이서들의 농간, 토호의 토색질 등
이 농민들을 파탄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이에 진주의 서남쪽 유곡동에 사는 유계춘는 비변사에 소장을 내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세의 부당성과 관리들의 착취에 대해 항의하였다. 그러나 이는 매번 묵살되고 말았다.  그
러자 그는 고심 끝에 무력 항쟁을 계획하기로 했다. 그는 홍문관 교리를 지낸 적이 있는 이
계열(이명윤의 6촌), 장교 출신인 김수만, 유랑  농민인 이귀재 등과 함께 모의하였다.  그런 
다음 그들은 박수익의 외방객실, 사노 검동의 집, 그리고 박숙연의 집 등을 전전하면서 모의
를 계속해 나갔다. 1862년 1월 30일에도 그들은 산기촌에  사는 검동의 집에 모여 앞으로의 
항쟁 및 집회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고자 할 때 진주 사람들에게 신망이 두터운 이명윤도 
참석하였다. 2월 2일에도 박숙연의 집에 모두 모여 그날  새벽에 유계춘이 소상인이나 농민
들에게 보낸 한글 통문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이때 이명윤은 통문을 불태워 버리고 가급적
이면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을 택하자고 주장했으나,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유계춘의 뜻
에 따라 한글 통문을 읍내 곳곳에 추가로 붙이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러자 이명윤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그러나 그들은 2월 4일에 단성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이에 힘입어 이계
열을 두령으로 내세우고 나무꾼, 목동,  농민 등을 규합하였다. 그리고  격문과 선전문을 각 
고을에 나눠 주고 한글 노래도 만들어 보급함으로써 그들의 사기를 고무시켰다.
  그러자 병영에서는 주동자인 유계춘을 2월 7일에 붙잡아 진무청에다 연금시켜 버렸다. 그
러나 병영에서는 농민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그에게 고문을 가하거나 죄인 취급을 하지는 
않았다. 2월 13일에 집안의 제사를 핑계대고 집으로 돌아온 유계춘은 2월 14일을 기해 마침
내 무력 봉기를 일으켰다. 유계춘은 이계열과 함께, 마동과 원동의 농민들로 하여금  수곡시
장을 습격하게 하고, 백곡, 삼장, 시천 등지의 농민들을 규합한 후, 이들을 한데 모아 이끌고 
가서 덕산시장을 일시에 점령하여 버렸다. 이때 훈장 이윤서의 집을 불태워 버렸다.  그러자 
농민들이 거리로 나와 식사를 제공하는 등 시위대를 환영해  주었다. 이어 시위대는 덕천강
을 따라 진주읍으로 진격하여 2월  18일 오전에 진주읍 근교에  이르렀다. 시위대는 그곳에 
진을 치고서 한동안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진주 목사 홍병원은 이명윤을 보내 그들을 설득 
는 회유시켜 보고자 했다. 그러나 이 기회에 착취와  토색질을 일삼는 관리들을 혼내주어야 
한다고 시위대 군중들이 제각기 목소리를 높히는 바람에 협상은 무산되고 말았다. 시위대는 
유계춘이 지은 노래를 한 목소리로 합창하며 환주읍으로 일제히 진격해 들어갔다.
  흰 수건을 머리에 쓰고 몽둥이로 무장한 나무꾼들이 앞장서고, 그 뒤를 수천 명의 농민들
이 바짝 뒤따랐다. 읍 내로 진입하는 데 성공한 시위대는  맨먼저 관가를 습격하여 평소 착
취와 색질을 일삼던 이방, 호방, 토호, 이서,  또는 부당한 방법으로 재물과 욕심을 챙긴  상
인, 고리대금업자 등의 집 수십 채에 불을 질러 버리고 재물을 닥치는 대로 빼앗았다.  이러
한 방화와 약탈은 그 이튿날인 2월 19일까지도 계속되었다. 사태가 이처럼 악화되자, 병마절
도사 백낙신이 자진하여 시위대 앞으로 나서서 가급적 회유하며 시위대를 해산시키려고  하
였다. 그러나 시위대는 그에게 관부의 문란 및 비행 등을 열거하며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시위대는 그를 겹겹이 에워싼 채  위압적인 자세로 그와 관리들의 비행을  추궁하였
다. 그러자 위기를 느낀 백낙신은 당황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시위대의 분노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고자 임시 응급처방으로 그 동안 횡령과  착취를 일삼아 지탄 대상이 되고  있던 
이방 권준범과 포리 김희순을 군중  앞에 엎드리게 해놓고 곤장 수심  대를 가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권준범과 김희순을 묶어 불에  태워 죽여 버렸으며, 아버지를 
구하려고 달려든 권준범의 아들 권만두까지 짓밟아 죽여 버렸다.  시위대는 이에 그치지 않
고 병마절도사 백낙신을 밤새워 길가에 세워  두었다가 이튿날 아침에 잡아 가두어  버리고 
나서, 진주 목사 홍병원이 있는  본부로 몰려가 목사를 끌어내 삼정  문란과 관리틀의 죄를 
추궁한 다음 병마절도사 백낙신과 함께 풀어 주었다. 그런 후에, 그 사이에 도망간 진주  이
방 김윤구를 추격 끝에 붙잡아 때려 죽여 버렸다. 그리고는 시위대를 재편성하여 다른 공격 
목표를 정한 뒤 다시 진주성으로 회군할 것을 결정하고는 읍  인근 각 처로 진출하였다. 그
러는 중에, 시위대는 관아를 불태우고, 관문서를 불태워 없애  버렸다. 또한 그들은 읍 근처
에 있는 부호 정영장, 성부인,  최진사 등의 집으로 몰려가 그  집들도 모두 불태워 버렸다. 
그 외 착취를 일삼아온 토호, 양반, 관리 등의 죄를 추궁하면서 그 동안 누적된 원성을 마음
껏 풀었다. 이런 식의 격렬한 시위와 폭동은 2월 22일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탄
핵 대상들을 처벌하는 데 성과를 올렸다고 판단한 시위대는 2월 23일 오후에 모두 진주성에
모인 다음 자진 해산하였다.
  이 민란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비상대책회의를 열어 2월 29일에 탄핵 대상인 경상
감사 김세균(김세균은 1834년에 진사가 되었고, 1841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 검열, 
홍문관 제학을 거쳐 경상 감사가 되었다), 병마절도사 백낙신, 진주목사 홍병원 등을 파직시
키고 그 죄를 물어 처벌하였으며,  그 대신 부호군 박규수(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는 
1848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정언, 병조좌랑을 거쳐  1860년 열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1862년 진주  민란이 일어나자  안핵사로 임명받아 사태  수습에 힘썼다.  그후 
1864년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미국 상선 셔맨 호가 대동강에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자 군
사를 동원하여 그 배를 불살라 버렸으며, 1875년에는 운양호  사건으로 일본이 수교를 요구
해 오자 최익현 등의 반대를 물리치고 수교를 주장하여 강화도 조약을 맺는데 주도적인 역
할을 해냈으며 이후 신문물 수입과 문호 개방에 앞장섰다)를 진주 안핵사로 파견하였다. 그
는 진주에 내려와 사태 수습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민란의 소요 원인이 관리들의 탐학과 
착취라고 보고 이를 조정에 그대로 보고하는 한편, 처벌자를 최소한으로 줄여 유계춘,  김수
만, 이귀재 3명만을 처형시키고,  나머지는 가벼운 형벌을 내려  사건을 종결지으려 하였다. 
그러자 비변사나 신임 진주 목사 등의 반대파들이 들고 일어나 처형 대상을 2급까지 확대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처벌자를 최소화하자는 자기 입장을  좀처럼 꺾으려 하지 않
았다. (결국 박규수는 이 때문에 나중에 한양으로  돌아갔을 매 반대파의 모함에 걸려 파직
당하고 말았다.) 결국 처벌 대상은 반대파들의 주장대로 주모자  13명이 처형되었으며, 19명
은 유배당했고, 42명은 징방되고 말았다. 이  중 이명윤은 민란의 주동자 유계춘 등과  같은 
고향인 진주 출신인데다가 고향사람들에게 신망이 두터웠기 때문에 평소 그를 미워하던  지
방 이서들의 무고를 받아 민란의 주모자로  몰려 강진의 고금도로 억울하게 유배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곧 진상이 밝혀져 철종의 특사령이 내려졌으나  사서가 당도하기도 전에 그
는 유배지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무렵 진주 민란의 여파는 다른 지역으로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크게 확산되
어, 단성, 함양, 거창, 성주, 선산, 상주, 개령, 울산, 군위, 비안,  인동 등 경상좌도, 경상우도
의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3월부터 5월까지  약 3개월 동안에 전라도 부
안, 금구, 순천, 장흥 등지에서, 그리고 충청도 회덕, 연산, 공주, 은진 등지에서도 연달아 민
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해 8월부터 12월 사이에도, 제주, 함흥, 광주, 창원, 남해, 황주 등
지에서도 민란이 일어나 일대 소동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1862년 한 해는 그야말로 "민란의 
해" 가 되고 말았다.
  조정에서는 개령에 안동부사 윤태경, 제주도에 부호군 이건필,  익산에 부호군 이정현, 그
리고 함흥에 행호군 이삼현 등을 파견하여 주동자들을 색출함과 동시에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해 여러 모로 조치를 취하는  한편, 이삼현을 영남선무사로, 조구하를 호남선무사로  각각 
임명하여 현지에 내려보내 안핵사와 함께 사태 수습에 총력을  기울이도록 했다. 나아가 관
료들의 개혁안이나 건의안들을 참작하여 근본  대책올 마련하는 한편, "삼정이정절목" 41개 
조를 제정하여 이를 반포 시행토록 함으로써  민폐의 최소화를 위한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
다.
  민란 외에도, 1863년 2월에는 경성에서 금위영 군졸들이  녹미의 질이 나쁘다고하면서 해
묵은 울분을 떠뜨리며 소동을 일으켰다. 이런 저런 일, 즉  70여 차례에 걸친 잦은 민란, 궁
궐의 당쟁과 분규, 척신들의 횡포 등등이 압박감을주어, 그나마도 병약한 철종은 재위  14년
만인 1863년 12월 8일에 33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고 말았다. 이후, 김씨 일족은  몰락하고 
민씨 일족이 득세하게 되었다.
  
    이필제의 난(1871년)
  이필제의 난은 1871년(고종 8년) 3월에 이필제가 최시형  등과 함께 동학 교조시원운동과 
반봉건 투쟁 및 중국땅 정벌 등을 목표로 내세우고 동학교도와 농민들을 모아 영해에서 일
으킨 봉기이다.
  
  동학교도들이여! 봉건제 타도, 중국 땅 정벌!
  문경의 향반 출신인 이필제(이필제의 본명은  이필)는 1863년에 동학에 입교하였다. 그는 
충청도 진천에 거주하면서 여러 민란을 통해 드러난 봉건적 모순 및 사회의 구조적 모순 등
을 직시하고 동학의 조직력과 무력 봉기를 통하여  반봉건 투쟁 운동을 벌여 갈 것을 결심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동학에 입교한 직후부터 동학 교도들을  아주 열정적으로 규합해 나
갔다. 조정에서는 최제우를 붙잡아 처형하고 이필제와 같은 강경론자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
렸다. 그러자 그는 1869년 말에 진천을 떠나 영월 지방에서 한동안 유랑생활을 했다. 이  무
렵, 그는 최시형을 만나기 위해 교도 이인언, 권일원 등을 보내서 다섯 차례나 면담 요청을
하였다. 그는 이인언을 통해 이렇게 자기 소개를 했다.
  "나는 계해년에 용담 장석에서 도를 얻고 돌아와 포교에 종사하였소이다."
  그러나 최시형은 용담 문도 속에 그런 인물이 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그
를 경계했다.
  이필제는 유랑 생활 끝에 결국 경상도 진주로 피신하였다. 그는 주성칠(이외에 그의 가명
으로는 이홍, 주지, 이근수 등이 있다)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그곳에 거주하면서, 다시 동
학을 포교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해 나갔다. 그는 또한 제  2대 교주인 최시형의 동의도 구하
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교조 최제우의 설원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영덕, 상주, 문경, 영해 
등지의 교도들을 선동하였다. 그러다가 1870년 7월에 정만식, 장경로등과 항께 농민들과  동
학교도들을 규합하여 거사한 다음, 진무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금병도라는 섬
을 거점으로하여 세력을 커운 뒤 중국으로 건너가 새 왕조를 세우겠다는 거창한 거사 계획
을 세웠다. 그러나 이는 어떤 이의 밀고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경상도 영해로  급
히 피신하여 몸을 숨겼다.
  그 이듬해인 1871년 2월에 최시형(본명, 최경상)이 박사헌과  함께 이필제를 찾아와, 시국
과 동학에 대해 진지하게 토의하였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이필제는 이렇게  단호
하게 말했다.
  "나는 최제우 선생의 수치를 씻고 창생의 재앙을 구하고,  이어 중국을 차지할 뜻을 갖고 
있소이다. 3월 10일이 선생께서 돌아가신 순교 기념일이 아니요? 그날에 거사합시다."
  이에 최시형은 '아직 동학의 교세가 확장되기도 전에 그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 버린다면 
더 이상 동학이 설 자리가 없다"고 판단하여 선뜻 동의하지 못하고 한참이나 주저하다가 이
렇게 말했다.
  "큰 일을 경륜하는 데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외다. 아직은 그런 시기가 아닌 것  같소. 경
망히 의거했다가 실패하면, 오히려 교세의 기초도 바로 세우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필제는 성급하게 자기 뜻을 고집하였다. 결국, 이필제는 최시형의 뜻을 거역하고 
동지들과 함께 대충 거사 계획을 수립한 뒤, 3월 10일에  읍의 동학교도 5백여 명을 이끌고 
난을 일으켰다. 그는 봉기군을 이끌고 게릴라 전법을 구사하여 야밤에 영해관부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였다. 그런 다음 부사 이정을  문책한 뒤 처단해 버렸으며, 곧바로 성  안으로 
진격하여 성 전체를 완전히 점령해 버렸다. 그는 성의 경계를 강화하면서도 동시에 소를 잡
아 봉기군을 배부르게 먹인 후, 탈취한 돈과 곡식을 풀어 농민들에게 골고루 분배해 주었다. 
그런 다음, 성을 썰물같이 빠져 나가 영양의 일월산으로 빠른 속도로 퇴각해 버렸다. 그러자 
영해 주변의 수령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언제 어디서 이들이  게릴라 전법을 구사하여 갑
자기 들이닥쳐 관가를 습격하고는 다시  종적을 감춰 버릴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수령들과 관리들 중에서는 미리 겁먹고 도망쳐 버리는 자들이 속출하였다. 이러한 현상
들은 바로 이필제가 노렸던 것들이었다.
  이필제는 봉기군의 거점을 문경조령초곡에다 두고서 활약하다가,  그 해 여름에, (정감록)
을 믿어 "정씨 천하" 가 가능하다고하는 망령된 꿈을 꾸고 있던 정기현과 함께 공모하여 다
시 봉기하고자 동지들을 불러 모았다. 그런데 당초에는 수백, 수천 명이 모여들 것이라고 예
상했으나, 실제로 모인 봉기군은 6O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빈
약한 수의 봉기군으로나마 8월 2일에 문경읍을 급습한다는 거사  계획을 세워 놓았다. 그러
나 지방 관헌에게 미리 기밀이 누설되어 버리는 바람에, 거사 예정일에 이필제와 정기현 등 
44명이 관군들의 뜻밖의 역습을 받아 일망 타진되고 말았다.
  이로써 동학에 뿌리를 두고 반봉건 투쟁 및 중국 북벌론을 펼치고자 하는 이필제의 꿈은 
일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후 동학교도들은 정부의 가혹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  그
들에 대한 관헌의 추적은 경상도뿐만 아니라 강원도, 충청도, 나아가 경기도까지 뻗치게  되
었다.
  
    임오군란(1882년)
  임오군란은 1882년(고종 19년)6월에 구식 군대인 조위영과 장어영의 군졸들이 군료지급에 
대한 불만을 품고 일으킨 병란이다.
  
  정승댁 당나귀는 약식 먹고, 군졸들은 모래섞인 쌀 받아라?
  대원군의 실각 이래 1876년(고종 13년) 한일 수호조약(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고, 1882년 4
월에는 한미(빤높), 한영의 수호조약이, 그리고 5월에는 한독  수호조약이 체결되어 구미 제
국에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종래의 대원군의 쇄국주의 정책이 완전히 붕괴되어 버리고  국왕
을 비롯한 민씨 세력이 개국, 개화에로 매진하게 되었다. 그러자 배외사상을 가진  유림들과 
수구파(보수세력)는 국왕과 척족에게 불평불만을  품고, 대원군을 앙모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 무렵 민비의 국고 낭비는 극에  달했다. 민비는 정권을 손에 넣은 후  세자 책봉을 위해 
많은 경비를 썼다. 세자 책봉 문제가  해결된 뒤에도 유공자들에 대한 포상금, 청국  정부에 
보내는 예물, 그리고 축하 사절의 왕복 비용으로 수백만금의 국고 낭비를 아끼지 않았다. 그
밖에도 어린 세자가 조금이라도 탈이 나거나 왕실에 어떤 변이 나기라도 하면, 전국의 명산, 
대천을 찾아다니며 기도 드린다거나 궁중으로 무당, 복술, 맹인 등의 잡배들을 끌어들여 굿, 
불공, 치성을 를이는 데 엄청난 비용을 함부로 지출했다. 한번은, 금강산 1만2천봉의 봉우리
마다 돈1천냥과 쌀 1석, 베 1필씩 바쳐 세자의 장수를 빌기도 했다. 하루는 당시 창우로  유
명했던 김몽룡이 민비를 위해 춤을 추어주자 그에게 선뜻  3천금을 주기도 했다. 또한 점장
이로유명한 이유인이 점 한번 치는 데 비단 1백필과 금  1만냥을 상으로 내리기도 했다. 이
렇듯, 민비는 대원군이 집권 10여 년  동안 모아놓은 국고를 불과 몇 년  만에 모두 탕진해 
버렸다. 이렇게 하여 국고가 바닥나 버리자, 그녀는 가혹하게 세금을 징수하거나 매관매직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자 때를 만난 듯 그녀의 척족들은 그  과정에서 중간 이익을 톡톡히 챙
겨 재미를 보았다. 그 중에서도 영의정 이최응은 특히  뇌물을 좋아하여 곳간10개에 봉물을 
가득 채워두었는데, 미처 손을 대지 못해 이것들이 그대로 썩어나가곤 했다. 그리하여  이렇
듯 산더미처럼 많이 쌓여 처치 곤란한 산해진미를 가축에게 줄 정도였다. 그래서 당시 항간
에는 이런 말들이 널리 유포되었다.
  "홍인군 댁의 뀜과 생선 썩은 냄새에 이웃집 사람들이 코를들 수가 없다."
  "혜당 댁 당나귀는 약식을 잘 먹는다."
  "호판댁 큰 말은 약과를 싫어한다."
  게다가 당시 간리배들마저 경성으로 운송되는 각지의 세납을 중간에서 얼마씩 횡령해  먹
었다. 이렇게 되자, 백관들의 봉급을 5-6년 동안이나, 군인들의 급료도 13개월씩이나 지불하
지 못하는 형편에 이르고 말았다. 그러나 관료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배를 채울 
수 있었으나, 군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배만  곯았다. 게다가, 1881년(고종 
18년)4월에 일어난 군제 개혁은 구 6영과 훈련도감 소속의 군졸들 사이에 큰 불만을 자아냈
다. 얼마 전 정부는 강화도 조약체결 당시의 일본의 근대적 군대에 자극되어 1881년 4월 일
본의 후원으로 별기군이라 칭하는 신식 군대를  조직하고 그 이듬해 1월에 6영을  개편하여 
무위, 장어의 2영을 두기로 하였으므로, 2영의 군관과 군졸은 대우가 후한 별기군을 시기 또
는 미워하게 되었으며, 특히 훈련도감 소속 군졸간에는 심상치  않은 불온한 기운마저 감돌
았다. 그런데다가, 날마다 궁궐 안에서 들려오는 난잡한 굿소리와 웃음소리는 군졸들의 심기
를 더욱 자극하였다.
  1882년 6월 5일 아침에 선혜청 도봉소 앞에 무위영에 소속된 군졸들이 속속 모여 들었다. 
그 전날, 군졸들의 불평을  살펴 한달치 군료만이라도 지불하겠다는  조정의 포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3달 만에 1달치 군료밖에  안 준단 말이야?" 라고  불평하면서도, 그것이나마 
타가기 위해 그들은 줄을 섰다. 그런데 선혜당상 민겸호 집 하인으로 있는 창리가 곳간문을 
열고 정작 배포한 쌀은 대부분  물어젖어 썩은 것이었고, 게다가 그것은  겨와 모래가 절반 
이상이나 섞여 있는 것이었으며 양도 턱없이 모자랐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분개한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포수 김춘영이 먼저 큰 목소리로 항의했다.
  "아니, 이런 것을 사람더러 먹으라는 것이냐?"
  그러자 유복만, 정의길, 강명준도 덩달아 한마디씩했다.
  "누굴 놀 리느냐?"
  "나쁜 자식 들!"
  "어떤 놈들의 농간이냐?"
  그러자 창리가 권문세도가인 주인의 후광을  등에 업고 깔보는 말투로  그들을 나무랐다. 
이에 군졸틀의 분노가 일시에 폭발하고야 말았다.
  "저놈부터 때려 죽여라."
  이런 외침 소리와 함께, 군졸들의 주먹질과 발길질이 한꺼번에 창리에게로 쏟아졌다. 그리
하여 도봉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 소식은 이내 궐내로 전달되었다.  선혜당상 민겸호는 노발대발하여 즉시  포교를 풀어 
주모자를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이윽고 김춘영 둥 주모자 4-5명이 붙잡혀 들어가 혹독한 고
문을 당했다. 그런데 그 중 2명은  가까운 시일 안에 사형에 처해지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장안에 확 퍼졌다. 이에 무위영의 군졸들은  한편으로는 당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언젠가는 
자신들도 주모자들과 똑같은 운명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강박관념 때문에 동지의식
을 갖고 서로 뭉치게 되었다. 
  6월 9일에. 김춘영의 부친 김장손과 유복만의 동생 유춘만 등이 서로 상의하여, 투옥된 군
졸들의 구명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들은 먼저 통문을  돌려 무위영 소속 구훈
련 도감 군졸을 소집한 다음, 그들과 함께 당시 직속상관인 무위대장 이경하(이경하는 대원
군에게 발탁된 무장이었다)의 집으로 대거 몰려가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였다. 그러자 이경
하는 자신은 급여에 관한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고 변명한 뒤석방을 호소하는 간략한 편지 
한 장을 써주면서, 민겸호 대감을 직접 찾아가 보라고 하였다. 이에 군졸들은 이경하의 편지
를 들고서 안국동에 있는 민겸호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렇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민겸
호는 집에 없었고(그때 그는 경복궁에 있었다), 그 집  문지기에게 모욕만 당했을 뿐이었다. 
이에. 화가 난 군졸들은 대문을 강제로 밀고 들어가 집안의 사치한 집기들을 모조리 때려부
쉽 버렸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군졸들은 이왕 감옥에 끌려가 죽을 바에야  차라리 
군민의 원한 대상인 척족이나마 쳐죽이고 죽자는 각오 아래 우선 대원군을 찾아가 진정이나 
해보기 위해 운현궁으로 몰려갔다. 찾아온 군졸들의 호소와 사정을  듣고 난 대원군은 겉으
로는 군졸들을 달래는 척하면서도, 주동자인 김장손, 유춘만 등에게는 은밀히 모종의 방책을 
일러주기까지 하면서 격려해 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그의 심복 허욱으로 하여금  군복으로 
갈아입게 하여 군졸을 지휘하도록 했다. 이에 사기가 크게  앙양된 군졸들은 운현궁을 나오
는 길로 동별영으로 몰려가서 무기고를 부수고 병기를 탈취하였다. 그때서야 황급히 달려온 
이경하가 이들을 무마하려고 애를 썼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총검을 손에 넣은 군졸들
은 시위를 벌이면서 종로 대로를 지나  포도청으로 쳐들어가. 갇혀 있던 동료 김춘영,  유복
만, 정의길, 강명준 등을 석방시킨 다음 다시 의금부를 습격하여 백낙관 등과 같은 정치범들
을 풀어주었다. 이후부터 난군들은 군졸을 2대로 나누어, 제1대는 서대문 밖의 경기  감영을 
향하여, 제 2대는 척신들의 저택을 향하여  각각 돌격해 갔다. 제1대가 경기 감영에  도착해 
보니 경기도 관찰사 김보현이 자리에 없었다. 그러자 그들은  무기고를 파괴하여 총기를 탈
취한 다음, 일본인 3명을 죽여 버리고, 천연정의 일본  공사관 쪽으로 진격해 갔으며, 제2대
는 강화 유수 민태호를 비롯한 척신들의 집들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는가 하면, 하도감의 왜
별기를 습격하였다. 그러자 별기군 소속 군인들이 난군에 호응하여 가담해 버렸다. 이때  일
본인 교관 공병 소위 호리모또가 도망쳤으나 이내 붙잡혀 다른 일본인들과 함께 끌려와 처
단당했다. 그날하루는 이렇게 저물어갔다. 그런데 해질녘부터 먹구름이 하늘을 덮는가  싶더
니, 그날 밤 오랜 가뭄 끝에 한바탕 단비가 쏟아졌다. 그러자 난군들과 주민들온 "하늘도 우
리를 돕는다" 고 크게 기뻐했다. 더욱 더 사기가  오른 난군들은 척족들과 대신들의 저택뿐
만 아니라, 한양 주변의 사찰, 치성터, 놀이터 등도  모조리 파괴해 버렸다. 그런 후, 난군들
은 난민들과 합류하여 서대문 밖에 있는 일본 공사관 쪽을 우르르 몰려갔다.
  일본 공사관 하나부사는 이미 낮에 폭동 소식을 전해 듣고서 공관원들로 하여금 공관 안
팎을 엄중히 경계하도록 지시했다. 이윽고 난군들이 무리지어 공사관 주위에 몰려들어 일본 
침략 행위를 규탄하면서 처음에는 공관에다 기왓장, 돌멩이 등을 날려 보냈다가, 이윽고  활
과 총을 쏘아댔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불을 질러라" 하고 외치자, 몇 명이 달려가 공사관 
옆에 위치해 있는 민가에 불을 질렀다. 곧이어 그 불길은 반접관 출장소와 차비관의 숙사까
지 널름 삼켜 버렸다. 사태가 이처럼 점점 긴박해져가자, 하나부사는 공관원 전부를  본관으
로 집합시킨 후, 조선 정부의 구원병을 기다리며 잠시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이 불리하게 전개 되어가자, 하나부사는  공관을 버리고 피난하기로 결정하고
서, 스스로 공사관에 불을 지른 다음에 무장한 28명의 공관원들과 함께 신속히 정문을 뚫고 
탈출하였다. 난민들은 순식간에 일어난 이들의 결사적인 탈출을 막지 못하고 말았다.
  한편, 난군들은 불타는 일본 공사관을 보며 환호성을 올린 후, 발길을 돌려 여러 척신들의 
집들을 차례차례 파괴하고 불태워 버렸다. 영돈녕 부사 홍인군  이최응의 집을 습격하여 그
를 죽여 버렸으며, 호군 민창식을 길바닥에서  때려 눕혀 살해했다. 그리고 민치상,  민영주, 
민영준, 민영소, 민영익 등 민씨 척신의 저택과  김홍집, 윤웅렬, 한성근, 윤자덕, 홍완, 이민
하 등의 세도가의 저택 등 40여 채를 모조리 파괴하거나 불태워 버렸다.
  그러자 고종은 무위대장 이경하를 동별영으로 급파하여 사태를, 수습토록 했으나,  수행원 
1명의 목만 날아갔을 뿐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자 왕은 도봉소 당상 심순택과 
선혜당상 민겸호, 그리고 무위대장 이경하를 파면시켜 버리고, 무위대장 후임 자리에 이재면
을 대신 앉혔다.
  난군들은 한밤중부터는 왕궁을 포위하기 시작했다.(이 무렵, 고종은 대원군에게 청하여 즉
시 입궐하라고 했다. 대원군은 그즉시 입궐하였다)  난군들은 이태원과 왕십리 일대의 주민
들까지 선동시켜 입성시킴과 통시에 장어령과 별기군의 군졸들까지 합류시켜 6월 10일 새벽
에는 창덕궁 돈화문을 일시에 공략하였다. 그러자 수문장과 문지기틀은 기겁을 하여 도망가 
버렸다. 돈화문이 열리자, 난군들과 수천의 난민들이 물밀듯이  쳐들어갔다. 그때 그들은 입
궐해 있던 민겸호와 김보현 등을 끌어내어 뜰에다 내동댕이친 다음 난도질을 하여 죽여 버
렸다. 난군들은 이들의 시체를 금천교 밑에다 갖다 버렸다. 그런 후, 난군들은 중전 민씨(명
성왕후)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들은 그녀를  없애 버려야만 후환을 없앨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악착같이 그녀를 찾아 헤맸다. 이때 중전 민씨는 재빨리 궁녀의 모습으로 변
장하고서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대원군과 함께 궁궐로 입궐한 부대부인 민씨
가 그녀를 발견하고는 자기가 방금 타고 온 4인교 속에다 재빨리 그녀를 숨겨 주었다. 그러
나 난군의 정의길에게 그만 발각되고 말았다. 정의길은 민비의  얼굴을 모르고 있던 터라 4
인교에서 그녀를 끌어내면서 대뜸 물었다.
  "너는 누구냐?"
  이때였다. 그 곁에 서 있던 무예별감 홍재희가 기지를 발휘하여 이렇게 말했다.
  "내 누이 동생 홍상궁이다!"
  이렇게 하여 간신히 위기를 넘긴 중전 민씨는 무사히 궁궐을 빠져 나갈 수 있었다. (그녀
는 그 길로 화개동의 윤태준의 집으로 가서 은신해 있다가,  거기서 민영위 등과 연락을 취
하여, 그들의 도움을 받아 여주의 민영위의  깁으로 일단 갔다가, 다시 충주 장호원에  있는 
충주 목사 민응식의 집으로 가서 몸을 숨겼다.)
  6월 10일 아침에 고종은 다음과 같은 자책하는 교서를 발표 하였다.
  "오늘의 사변을 어찌 상서로운 일이라 하겠는가,  생각하건대 짐이 덕이 없음에도 왕업을 
계승하고자 탐하였으나, 이미 백성을  편안하게 따르게 할 능력이  모자라는 탓으로 이처럼 
전례 없는 변란에까지 이르렀으니, 이 모두를 누구의 탓으로 돌리리요. 첫째도 나의  허물이
요, 둘째도 나의 허물이로다,"
  그리고는 사태 수습의 책임과 대소 정권을 모두 대원군에게 맡겼다.
  "이후부터는 적고 큰 공무 일체를 대원군 앞으로 품결하라."
  이에, 수습책에 나선 대원군은 스스로 정면에 나서 난군들과  난민들을 달래며 이제 그만 
해산하라고 분부했다. 그러나 그들은 대원군을 열렬히 지지하면서도 즉각 해산하는 데는 거
부 의사를 밝혔다. 그것은 민비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부르짖었다.
  "민 중전을 기어코 잡아 없애버려야 후환이 없다. 중전이 살아 있는 한, 우리 목숨이 위태
롭다. 중전을 잡을 때까지 해산해서는 안 된다."
  그러자 대원군은 임시방편으로 다음과 같은 교지를 내렸다. 
  "왕비께서는 오늘 정오에 이미 승하하셨다. 다만  그 시신만은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였으
니 그리 알고 물러가라."
  그리고 도승지 조병호에게 명하여 왕비의 국상을  반포하라고 했다. 그러나 조병호는 "중
전이 승하하신 것을 확인해 보지도 않고 국상을 반포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중대한 일을 결
코 소흘히 거행할 수 없다"고 하면서 거절했다. 이에  대원군은 다른 승지로 하여금 왕비의 
국상을 반포하게 하였다.그런 다음, 정부 기구를 개편함과  동시에 인사를 단행하였다. 무위
영을 훈련도감이라 부르게 하고,  통리기무 아문을 폐지하고 3군부와  5영군문 전부를 옛과 
같이 복귀시켰다. 그리고 신응조를 우의정에, 이재면(대원군의  큰아들)을 훈련대장 겸 호조
판서 겸 선혜당상에, 신정희를 어영대장에, 조희순을 금위대장에, 임상준을 총융사에, 이회정
을 예조판서에, 조경호를 내의제조에 각각 앉히고, 영의정  홍순목은 그대로 유임시켰다. 이
외에, 각 부서 및 지방관에도 새로운 인물들을 대거 기용하였다. 그리고 금부와 형조의 죄수
들 및 정치범들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그런  다음, 당시유배 중이던 이휘림, 정현덕,  조채
하, 이만손, 이원진, 김평묵, 강진규 등을 모두 석방하였다. 이리하여 총 1천여 명이나 되는
정치범들이 풀려나게 되었다.
  그러자 난군들과 난민들은 난을 일으킨  지 이틀만인 6월 11일에  자신 해산했다. 이로써 
살륙과 방화와 파괴로 점철된 임오군란은  막을 내렸으며, 대원군과 보수세력(수구파)은  힘 
안 들이고 개화세력 (개화파)을 몰아내고 재집권하게 되었다.
  그러나 민씨 일파는 매우 기민하게 움직여, 천진에 가있는 김윤식 등에게 통지하여,  청나
라의 원조를 요청했다. 그러자 김윤식은 청나라에 조선왕조에서 있어서의 대원군 존재의 위
험성을 강조하면서 속히 파병하여 국왕을 돕고 난당을 소탕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청
나라는 그렇지 않아도 조선에 파병하여 일본을 견제할 필요를  느끼고 있던 터라, 김윤식의 
청원을 기꺼이 받아들여 파병하기로 하였다. (일설에는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주일본 청국공
사 여서창의 전보를 받은 서리 북양대신 장수성이 즉각  이 사실을 총리아문에 보고하였고, 
통령수사제독 정여창에게 군함과 군사를 즉각 출동준비토록 명한 다음 보다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김윤식을 만났다고  한다.) 어쨌든, 오장경,  정여창, 마건충, 오조유, 황사림, 
원세계 등은 쾌선 2척과 군함 1척과 육해군 수천 명을 이끌고 와서 조선에 주둔하면서 조선
의 제반 사태를 감시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오장경은 한양근교에 주둔하면서 조선의 정치에 
일일이 간섭하고, 임오군란의 선동 책임을 대원군에게 돌리고, 조선을 청나라의  속방이라고 
선언하여 정치적 물의를 일으키기까지 하였다.
  한편, 인천으로 갔다가 제물포를 거쳐 ,영국 선박 편으로 6월 15일에 일본 나가사키에  도
착한 일본공사 하나부사는 조선 군인들의 폭동으로 8명,의  일본인이 희생되었으며 일본 공
사관이 불타버렸다고 외무경 이노우에에게 즉각 보고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부산과 원산에 
있는 일본 거주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군함을 파견해야 한다고 간청하였다. 그러자 일본 
정부에서는 긴급회의를 열어 신중히 검토한 후 군함 4척과 보병 1개 대대를 급파하였다. 하
나부사는 군함을 이끌고 7월 3일 조선으로 돌아와, 7월 7일 고종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강경
하게 난의 책임을 물어 9개 사항을 들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문서에 의해 사죄할 것, 위자료를 지급할 것, 범인을 체포하여 처형할 것, 정부 당국자가 
교사한 경우에는 강제 배상할 것, 조선 정부의 책임이 중대할 경우에는 거제도 또는 울릉도
를 할양 할 것, 일본 공사관의 병력을 보호해 줄  것, 함흥, 대구, 양화진을 개시할 것, 일본 
공사 및 영사관원의 대륙 여행 자유를 보장해 줄 것."
  이후 3차에 걸친 회담 결과 제물포 조약 6조가 마침내 조인되었다.
  "20일 이내에 수괴를 체포하여 중벌로 다스릴 것, 피해  입은 일본인을 융숭한 예로 장사
지내 줄 것, 일본인 피해자 유족들에게 5만원을 지급할 것, 폭거로 입은 손해 배상금 50만원
을 5년거치로 1년에 10만원씩 청산할 것, 일본 공사관에 군사를 두어 경비하게 하고, 그  경
비를 부담할 것, 조선은 대관을 특파하고 국서를 보내어 일본에 사죄할 것."
  이 굴욕적인 조약 체결과 청군의 간섭으로 임오군란에 참여했던 군민 1백70명이 체포되었
고, 그 중 손순길, 공치원, 최봉규 등 11명이 참수되었다. 그리고 이어 대원군은 납치되었다. 
7월 12일 막강한 육해군을 거느리고 입성한 청군의 장군들은 그 이튿날 운현궁을 방문하여 
대원군에 경의를 표한 다음, 마건충이 정중히 이렇게 말했다.
  "군무에 대해 상의할 것이 있으니, 청진까지 왕림하여 주십시오."
  그러자 대원군은 7월 13일 오후 4시경 이용숙, 이조연 등 관료 몇 명과 호위기병 수십 명
만 데리고 황사림의 청진으로 찾아갔다. 처음에는 약속대로 오장경, 마건충 등과 더불어  군
무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눠다. 그런데 얘기 도중 마건충이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
다.
  "조선의 국왕은 청의 황제가 책봉한 것이 아니오?"
  이에 대원군은 다소 당황했으나 태연스레 대답했다.
  "그렇소!"
  "그렇다면, 모든 정령은 황제가 책봉한 국왕으로부터 나와야 하거늘, 당신은 어찌 변을 틈
타 당신 마음대로 정권을 장악하고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불한당을 끌어들
인 거요?"
  "아니, 그건..."
  "태공은 외교가 서투른 듯싶소이다. 오늘밤 남양만에서  배를 타고 천진으로 가서 청나라 
황제의 유지를 받음이 어떠하시오?"
  오장경이 막사에서 나가는 것을 신호로, 마건충과 그 부하들 이 미리 준비하여 놓은 보교
에 대원군을 강제로 태워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들은  대원군을 남양만으로 곧장 데려가 
배에 태워 청국으로 납치해 갔다. 대원군은 7월 20일에 천진에 도착하였다. 그 달 29일에 이
홍장은 대원군을 죄인 다루듯 심문하면서 임오군란에 대한 모든 책임을 물었다. 그런 후 대
원군은 8월 16일에 보정부로 호송되어 연금되고 말았다.  이로써 재집권한 홍선대원권의 통
치는 불과 33일 만에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충주 장호원에 그때까지 숨어 있던 민비(명성왕후)가  한양으로 돌아와 다시 정권
을 잡은 후 대원군파를 대거 숙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후 청군 3천명, 일본군 1개  대대
가 조선에 상주하면서, 본격적인 내정 간섭을 시작하는 바람에  조선은 그들의 속국이나 다
름 없는 위치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후 대원군은 4년간 유폐되어 있다가, 1885년에 풀려나  귀국하여 운현궁에 칩거하던 중 
1887년 원세개와 협력하여고종을 폐위시키고 이재황을 옹립하려다 실패하였다. 1895년 재집
권을 위해 일본공사 미우라와 결탁하여  을미사변을 일으켜 일시정권을 잡았으나  1898년에 
79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그와 사이가 악화된 그의 아들  고종은 끝내 그의 장례식에 얼
굴을 내밀지 않았다.
  
    갑신정변(1884년)
  1884년 12월에 박영효, 김옥균, 서재필, 서광범, 홍영식 등을 중심으로 한 혁신파인 개화당
이 수구당의 여섯 거두 윤태준, 이조연, 한규직, 민영목,  조영하, 민태호를 제거한 뒤 그 일
파를 몰아내고 혁신정책을 위해 일으킨 정변이다.
  
  일본을 등에 업고 수구파 축출 및 개혁 시도...3일 천하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이 크게 대립되자, 이를 반영하여 조선
의 정계도 두 갈래로 갈라져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일찍이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반대하던 민비는 이제는 청국에 기대는 보수세력이 되었다. 보수세력의 대표적 인물로는 척
족의 민영익과 민승호 등과 정계의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이었다.  이들 일파를 일컬어 
사대당이라고 하였다. 한편 이와는 달리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본받아 개혁을 단행하려는 사
람들을 개화당 또는 독립당이라 하였는데, 그 대표적 인물로는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홍영
식등 소장파였다.
  1884년 11월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일본 정부의 훈련을 받고  다시 내한했다. 그는 입경한 
첫날부터 청국을 비난 또는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는 김홍집을 만나 이렇게 공박하였다.
  "귀국 외아문에 청국의 노예 노릇을 하는 자가 몇 사람 있다. 고 들었소. 나로서는  그 따
위 인물과 상대하여 주선하기를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있소."
  또한 그는 김윤식에게 노골적으로 다음과 같이 면박을 주었다.
  "그대가 한학(없쫓)에 능할 뿐 아니라 청국에 내부할 의사까지 가지고 있다던데,  아예 청
국으로 가서 벼슬살이를 하지 그러시오?"
  일본공사의 이러한 거만하고 무뢰한 일련의 언행에 대해서 홍영식은 매우 염려하였다. 그
러자 김옥균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것이 도리어 복이 될지 어찌 알 것인가? 우리는 좌우를 돌아볼 것 없이 오로지 변혁을 
도모할 뿐이다."
  이때부터 독립당의 거사 계획은 한층 더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김옥균은 11월 14일에 미
국공사와 만난 뒤 독립당의 계획에대해 양해를 구한 뒤, 그 이튿날 다시 다케조에를 찾아가 
상의하였다. 그런 다음 입궐하여 고종에게 시국이 불안한 책임이 청국군대와 사대당에게 있
다고 아뢰었다. 이에 고종은 김옥균의 말을 믿고, 그 뒤부터는 청국 군대와 사대당측에 대해 
오히려 불만을 품게 되었으며, 반면에 개화 독립당의 개혁안을 신임하게 되었다. 그러자  개
화당 요인들은 오래 전부터 계획해 온 국정 개혁을하루 속히 행동에 옮기기로 하였다.
  11월 25일에 김옥균은 다시 다케조에 공사를 단독으로 방문하여 재정적 문제뿐만  아니라 
군사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지원을 해 줄 것을 확약받았다. 그런 뒤, 11월 29일에는 고종
을 알현하여 현정세와 국가의 위기에 대해 상주하면서, 간신들이  청국의 세력을 빌어 왕권
을 농락하는 것은 통타할 일이라고 고변하였다. 이에 고종은  "국가 대계가 위급한 때의 임
기 조처는 경의 생각과 계획에 맡기겠다."는 "친수 밀칙"을 그에게 내렸다. 국왕에게 신임을 
받고 있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 그는 그 이튿날 동지들과 만나 대략 거사 계획을 세운  다
음, 12월 1일 밤에 박영효의 집에서 만나 우정국 개설 축하 피로연이 열리는 날을 이용하여 
사대당의 거물급 요인들을 암살하고 국정 개혁의 대과업을 일거에 단행하자는 최종  합의를 
보았다. 
  "맨먼저 연료를 가득 채운 포대 수십 개를 준비해 놓았다가 피로연이 열리는 초저녁에 별
궁 북문을 넘어 들어가 별궁 정전안에 쌓아 놓고 불을 지르자. 이 일은 이인종의 지휘 아래 
이규완, 임은영, 윤경순, 최은동 등이 맡기로 하자. 그 불길이 퍼질때를 기다려 미리  장치해 
두었던 동서 행랑의 폭발물에도 불을  질러 화세를 돕도록 하자. 이  혼란스러운 때를 틈타 
윤경순과 이 은종은 민영익을,  박삼룡과 황용택은 윤태준을,  최은동과 신중모는 이조연을, 
이규완과 임은명은 한규칙을 각각 맡아 살해할 것, 그리고  만일의 실수에 대비하여 한복으
로 변장한 일본인 1명씩을 추가 배치해 두자. 이때 모든 지휘 임무는 연장자인 이인종과 이
희정 두 사람이 맡도록 하고, 신호는  방포로 하여, 통신연락과 정찰은 유혁로와 고영석  두 
사람이 맡기로 한다. 궐내는 전영 소대장인 윤번이 맡기로 한다. 고대수라는 궁녀로  하여금 
포발약을 준비하게 하였다가 궐 밖의 불길을 신호 삼아  통명전에서 이를 폭발시키게 한다. 
일본인 4명을 궐내 으슥한 곳에 매복시켰다가 독립당 장사들이 실수할 경우에 그들의 임무
를 대행하게 한다. 일본인 30명으로 하여금 금호문과 경우궁 사이의 왕래를 막아 뜻밖의 사
고에 대비한다."
  1884년 12월 4일 저녁 여섯시에  예정대로 전동 우정국에서 성대한  파티가 열렸다. 연회 
시간이 되자, 귀빈들이 속속 도착했다. 미국공사와  서기관, 영국 총영사, 청국 영사와  서기
관, 일본 공사와 서기관, 홍영식, 박영효, 김홍집, 한규직, 민영익, 이조연, 서광범, 민병석, 윤
치호, 신낙균, 김옥균 등 20여 명이 연회에 참석하여 대화를 나누며 술과 음식을 들었다. 
  그런데 별궁에 방화하기로 한 계획이 사대당측의 경계 철저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김옥균은 그러면 이웃집이라도 방화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그것도  불가능하
다는 통보가 왔다. 이에 당황한 김옥균은 "그러면 포졸들의  경계가 미치지 않는 곳을 택하
여 방화하게 하라"고 하였다.  바로 이때였다. 우정국 북창에서  돌연 "불이야!"하는 소리가 
났다. 김옥균이 자리에서 일어나 북창을 열어젖히자, 맹렬한 불꽃이 하늘을 찌를 듯 피워 올
랐다. 이와 동시에 우정국 안 연회석은 일대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이 무렵, 연회도중 개화
당의 이상한 기미를 미리 눈치채고 재빨리 도피하려던 우영사 민영익이 누군가의 칼에 맞아 
피를 흘리며 연회석으로 되돌아와 픽 쓰러졌다.  (그는 묄렌도르프의 주선으로 미국인 의사 
알렌의 치료를 받아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이때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은 북창 밖으로 뛰
어 나와 일본 공사관에 가서 일본 공사관측의 태도가 변함없음을 확인한 다음, 김봉균 등을 
인정전 밑 화약을 묻어 놓은 곳으로 보내어 30분 이내에 폭발시키도록 지시한 다음 왕의 침
전으로 향하였다. 그들은 합문 밖에 윤경완이 이미 50명의 병졸을 거느리고 대기 중인 것을 
확인한 다음, 침전으로 올라섰다. 김옥균이 사태에 대한 설명을  막 하려고 할 때. 동북쪽에
서 굉장한 폭음이 하늘을 울릴 듯 진동하였다. 이에 몹시  놀란 국왕은 후문으로 급히 피난
하였다. 이때 윤경완이 거느린 군졸들이 국왕을 호위하였다. 대피하는 중에 김옥균은 사태가 
위급하니 일본군의 보호를 요청하자고 국왕에게 두세 번 주청하였다.  그러자 왕이 이를 윤
허하면서 "일본공사는 와서 짐을 보호하라"는 친수 칙서를  내려 주었다. 박영효는 이 칙서
를 가지고 즉시 일본 공사관으로 급파되었다. 그리고 국왕  일행은 경우궁 뒷문에 도착하여 
굳게 잠긴 자물쇠를 깨뜨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경우궁  정전에 이르렀을 때 다케조
에 공사와 함께 일본군 2백명이 벌써 도착해 있었다.  이윽고 독립당 요인들은 국왕과 비빈
을 경우궁 정전에 모시고, 궁문 안팎의 경계를 강화하였다. 전정 안팎은 윤경완이  지휘하는 
전영 병졸들이 맡았고, 전상에는 서재필이 지휘하는 정난교, 박응학, 정행징, 임은명. 신중모, 
윤영관, 이규완, 하응선, 이병호, 신응희, 이건영, 정종진,  백낙운 등의 소장 정예 사관 생도 
13명이 지켰다. 그리고 전문 밖에는 이인종, 이창규, 이규정 등이 이은종, 황용택, 김봉균, 유
경순, 최은동, 고영석, 차홍식 등의 장사패들을 거느리고 삼엄한 경비를 섰다. 김옥균이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무감10여 명을 선발하여 궁문을 지키게 한 다음, 입시하려던 후영사 윤
태준, 좌영사 이조연, 전영사 한규칙을 먼저 살해해 버렸다. 윤태준은 자객의 칼날이 내리치
려 할 때 이렇게 애걸했다.
  "나를 살려두고는 왜 일을 치르지 못하는가."
  그와는 대조적으로, 이조연은 김옥균 일파를 심히 매도하면서 죽어갔다.
  이때를 전후하여 김옥균 등은 어명을 빌어 민영목, 조영하, 민태호 등 사대당 거두들도 급
거 입궐하라고 하였다. 이들도 경우궁  안으로 들어서다가 모두 저격당하고 말았다.  이로써 
사대당의 거두 6대신을 모두 제거한 독립당 요인들은 보국 이재원을 어명으로 불러들여, 그
에게 이번 거사의 취지를 설명하고는 같이 함을 합하여  국사를 처리하자고 요청하였다. 이
재원이 이에 동의하자, 그들은 신내각의 인물 배정을 꾀하는 한편, 각국 공사관에 사신을 파
견하여 우정국의 사태와 소란에 대해서 변명하고 양해를 구하였다.
  12월 5일에 독립당의 기밀을 눈치 챈 민비가 서둘러  환궁할 것을 요구하자, 일시 분위기
가 뒤숭숭해졌다. 그러자 독립당 요원들은 분위기를 일소하기 위하여, 환관 유재현을 결박하
여 정전앞에 꿇어 앉히고 죄목을 따져가며 난도질을 하여  죽여 버렸다. 그러자 소란스러움
이 가라앉고 분위기가 다시 숙연해졌다. 이때 독립당 요인들은  환관들과 궁녀들을 전부 밖
으로 내쫓아버렸다. 그런 후에, 이재원을 수반에, 홍영식을 부수반에 각각 앉힌 다음 신내각
을 조직하여 12월 5일 아침에 반포하였다. 
  "영의정에 이재원, 좌의정에 이재선, 우의정에  홍영식, 전후 영사에 박영효,  외무독판 겸 
좌우영사에 서광범, 좌찬성에 이재면, 이조판서에 신기선. 예조판서에 김윤식, 병조판서에 이
재완, 형조판서에 윤웅렬, 공조판서에 홍순형, 호조참판에  김옥균, 병조참판에 서재필, 도승
지에 박영교..."
  이리하여, 군사, 경찰, 내무, 재무의 실권을  모두 휘어잡게 된 독립당은 14개  혁신정책을 
국민에게 반포하였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평등을 확립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한다. 대원군의 송환을 요구하고 
청국에 대한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내시부, 규장각 등 불펼요한 관제를 없애고 세법을 개
선하여 재정을 호조에서 총괄한다. 4영을 1영으로 통합하고 근위대를 설치 한다."
  그러나 이같은 개혁 조치는 청병의 무력 간섭으로 이내  저지되고 말았다. 12월 6일 오후 
3시경 원세개는 청군 8백명을 이끌고 선인문 방면으로, 오조유는 청군 5백명을 동원하여 북
문 방면으로 우회하여, 그리고 나머지 청군 2백명은 후위를 담당한채 궁궐로 쳐들어와 창덕
궁과 창경궁을 호위하고 있던 전후영 조선군사들을 공략하였다. 이때 신복모가 이끄는 군대
가 날이 저물도록 저항하였을 뿐 나머지 군대가 지키는 1차 방어선은 힘없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전투가 한창일 때 민비는 대왕대비와 세자를 데리고 청군 진영으로 도망쳐  버렸다. 
1차 방어선을 무너뜨린 청군은 이어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그러나 일본군이 전투도 제대
로 해보지 않고 철수해 버리는  바람에 중간 방어선도 의외로 쉽게  무너져 버렸다. 이제는 
충의계 50명의 장사와 사관생도로 편성된 3차 방어선만이 남았으나, 이 수로는 막강한 청군
을 도저히 막아낼 수는 없었다. 그러자 김옥균 등은  고종을 모시고 연경당으로 피신하였다
가, 다시 후원 태극정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그곳도 안전한 곳은 못 되었다. 사태가 이 지
경에 이르자, 김옥균은 후일을 도모하기로 하고, 홍영식, 박영교 등에게 고종을 맡기고는 서
광범, 서재필 등과 함께 궁궐을 탈출하여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한편, 홍영식,  박영
교, 신복모 형제이하 사관생도 7명은 고종을 호위하고 북묘까지 갔으나, 그곳에서 그들을 기
다리고 있던 사대당과 청군 병사들에계 생포되어 모두 참살당하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 일본 공사관은 조선병과 난민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김옥균 등은 다
케조에와 협의하여 중요 서류를 소각한 뒤 관원 전원을 인솔하여 휘하 군대와 토목공인들의 
호위아래 공사관을 탈출하였다. 그리하여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서재필, 신응희, 이규완, 
정난교, 유혁로, 변수 이하 독립당 요원들은 마포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그 이튿날  아
침 인천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인천에서 그들은 일본 기선 천세환에 탑승하여, 일본으
로 망명하였다. 이로써 갑신정변은 기껏 "3일 천하" 로 끝나 버리고 말았다.
  이후 독립당을 일소하고 다시 집권한 사대당은 더욱 보수적인 인사개편을 단행하여, 영의
정에 심순택, 좌의정 겸 외무독관에 김홍집, 우의정에 김병시, 이조판서에  이재원, 호조판서
에 김영수, 예조판서에 김만식, 병조판서에 김윤식,  형조판서에 홍철주, 공조판서에 김유연. 
호조참판에 남정철 등을 앉혔다. 그리하여 조선은 더욱 외세의  자주권 침해에 시달리게 되
었고, 정치 체제개편 및 혁신정책은 다시 답보 상태에 빠져들고 말았다.
  
    동학혁명(1894년)
  동학혁명은 전봉준, 최시형, 손병희 등과 같은 동학당의 지도자들과 동학 교도들이 주동이 
되어 농민들과 함께 1894년에 일으킨 농민 전쟁이다.
  
  봉건제를 타파하고 외세침략 막아내자!
  민중의 자각과 정치에 대한 불신이 뒤엉킨 전환기에 서학을 능가하는 동학이  1860년도에 
창도되었는데, 이 동학은 토속 신앙을 그 바탕에 두고 그 위에 유교, 불교, 도교, 천주교 4교
를 통합하여, 전통적인 신분제도의 철폐, 인간 평등주의 실천, 보국안민과  제폭구민, 인내천
등 평등사상과 사회개혁운동을 그 목표로  내걸었다. 이 동학의 교조는 최제우였다.  동학의 
목표는 당시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불안, 즉 관리의 매관매직, 문란한 세제, 경제 악화에 따
른 농민 생활 곤궁, 서리들의 횡포에 찌들려 있던 농민의  요구와 아주 잘 부합되었기 때문
에 그 교세가 날로 확장되어 갔다. 그러던  중, 최제우는 1864년 3월 10일에 처형되고  말았
다.
  최제우는 일찍부터 경사를 익혀 학문 탐구에  전심하다가 1844년부터 10여 년 동안  전국 
각지를 유람하며 구도의 길을 걸었다. 그러다가 울산 유곡에 은거하여 도를 닦았다.  그러던
중 1855년 금강산 유점사에 있던 승려에게서 얻은 (을묘천서)로 도를 터득한 후, 천성산 내
원암에 들어가 49일간의 기도를 한 후 술수를 터득하였다. 그는 다시 1857년에 천성산 적멸
굴에 들어가 또한번 49일간의 기도를 하고 나온 뒤, 1859년 경주 용담정에서 보국안민의 대
도를 깨우치기 위해 다시 수도를 시작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유불선 동양 3교와 천주교 및 
기독교를 토착 민간신앙 위에 융합하여, 시천주의 사상을 핵심으로  한 인내천의 교리를 완
성하여 마침내 동학을 창시하였다. 그 후, 그는 천, 인을 대도의 근원으로 하고, 성. 경. 신을 
도의 본체로 하며, 수심정기를 수도의 비결로 삼았으며, 도를 천도라 하였다. 1862년 남원을 
거쳐 보국사로 들어가 (수도사), (권학가)를 짓고, (동학론)를 집필한 다음 마침내 포교를 시
작하였다. 차츰 교세가 확장되자, 각 지방에 접소를 설치하고 접주를 두어 관내의 동학 교도
를 관장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리하여 1863년에는 동학교도 3천여 명, 접소 14개소를  확보하
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그는 이 해 7월에는 수제자인 최경상(경주 동촌 황오려 태생, 35세에 
동학에 입문)을 북접대도주로 삼고 8월 14일에 그의 도통을 최경상에게 전수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그가 포교하는 동학 교리가 요사스러운 것이라 여겨  그를 체포하라고 명하였다. 그
러자 선전관 정운귀가 각 접소를 순회 중이던 최제우를 1864년 봄에 체포하여 감옥에 가둔 
다음, 그 해 3월 10일에 대구장대에서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그를 처형해 버렸다.  이후부터 
동학은 정부의 주요 탄압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대 교주 최경상은 최제우의 뒤를 이어, 포,장,접이라는 특수한 조직
망을 설치하는 데 성공하여, 커다란 사회적 조직으로 키워나갔다. 최제우보다 세 살  아래인 
최경상은 강수, 박춘서 등과 함께 갖은 위험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영양 일월산에서 강원도 
양양까지 왕래하며 교세의 재건을 위해  몸을 다 바쳤다. 특히 그가  비밀히 포교한 지역은 
대체로 태백산맥 일대, 즉 경상, 강원, 충청 3도였다. 그런데 1871년 이필제가 영해의 동학교
들을 이끌고 거사하여 실패하는 바람에, 관헌의 탄압과 추적이 심해지자, 소백산 암굴로  일
단 피신하여 여러 날을 숨어 살아야 했다. 그 뒤 영월군 직곡리의 교인 박용걸의 집에 피신
해 있다가, 1873년 10월부터는 태백산 갈래산 적조암에서 49일 동안 기도 수련을 했다. 그런 
후 1875년에는 단양 도솔봉 송현동에 가서 숨어 살았다. 이때부터 그는 자기의 본명인 최경
상을 최시형으로 바꾸었다. 그 뒤 1880년 4월에 인제  갑둔리의 교인 김현수의 집으로 가서 
그곳을 경전 간행소로 삼아 (동경대전)을 대서시켜 간행했다. 1882년 6월에는 다시 단양으로 
가서 여규덕의 교인집에서 머물면서 (용담유사) 8편을 대서시켜 간행했으며, 1883년 2월에는 
충청도 목천의 김은경 교인집에 머물면서 (동경대전) 1천여 부를 간행하여 배포하였다. 1884
년 10월에는 손병희를 데리고 익산  사자암으로 가서 함께 49일간 기도  수련을 했다. 이때 
교장, 교수, 도집, 집강,  대정, 중정을 근간으로  하는 교단 조직을 체계적으로  정비하였다. 
1885년 본거지를 충정도 보은으로 옮긴 후 그는 정국 혼란의 틈을 타서 좀더 적극적인 교세
확장 운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충청도  관찰사인 심상훈이 끈질지게 그를 추척하는  바람에, 
다시 보은을 떠나 공주를 거쳐 영천 화계동에 이르러 초막을  짓고 한동안 숨어 살았다. 그
러나 그곳도 위험하여 다시 상주 화령면 전촌으로 옮겨 가 은거하였다. 1887년에는  서인주. 
손천민 등을 대동하고서 정선을 거쳐 갈래사로 가서 49일 동안  기도 수련을 했다. 그런 다
음 다시 보은으로 가서 몸소 밭을 갈며 수도하면서 교인들을 양성하였다. 1888년에는  전주, 
삼례 등지로 가서 포교에 힘썼으며, 1889년에는 관헌의 끈질긴  추적을 피해 괴산 신양동을 
거쳐 인제, 간성등지로 피신하였으며, 끄월에는 다시 경상도로 내려가서 금상 복호동의 김창
준의 교인집에 머물면서 6개 조항으로 된 (내수도문)을 작성하여 배포하였다.
  "첫째, 집안의 모든 사람을 한울님같이 공경하라. 며느리를 사랑하라. 노예를 자식같이 사
랑하라. 우마육축을 학대하지 말라. 만일 그렇지 못하면 한울님이 노하실 것이다. 둘째, 하루 
세끼의 식사 때 한울님께 심고하라. 청결한 물을 길어 음식을 청결하게 하라. 셋째. 묵은 밥
을 새 밥에 섞지 말라, 흐린 물을 함부로 버리지 말라. 가래침이나 콧물을 아무 데에나 토하
지 말라. 만일 길이거든 반드시 묻어라. 그렇게 하면 한울님이 감응하실 것이다. 넷째,  모든 
사람을 한울님으로 인정하라. 손님이 오거든 한울님이 오셨다  하라. 어린이를 때리지 말라. 
이는 한울님을 치는 것이다. 다섯째, 잉태하면 몸을 더욱 조심하고, 아무것이나 함부로 먹지 
말라. 태아를 위하여 모든 일에 조심하라.
여섯째, 다른 사람을 시비하지 말라. 이는 한울님을 시비하는 것이다. 무엇이건 탐내지 말라. 
다만 근면해야 할 것이다."
  이후, 그는 1890년부터 두 해 동안 손병희, 손병흠 형제를 비롯하여 여러 우수한 제자들을 
거느리고 충주, 공주를 거쳐 양구, 간성, 인제까지 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서 태인, 부
안, 전주 등지를 돌며 포교에 힘썼다. 이에 충청, 강원, 전라 3도에서 동학의 교세가 날로 확
장되어갔다. 이렇게 되자, 그들의 조직력과  역량이 중앙 정부를 상대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교조 최제우에 대한 신원 운동이 중앙 정부를 상대로 당당
히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1892년 10월  서인주, 서병학, 손천민, 손병희 등이 교조의  신원 
운동을 전개해야만 교세를 더욱 확장시킬 수 있다고 강력히  주장하자, 그때까지 신중을 기
하기만 하던 최시형이 마침내 결심을 굳혀 교조의 신원 운동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각 지방
의 교인들을 격려하는 입의문을 배포하고, 서인주 등의 간부들로  하여금 각 지방 접주들에
게 통문을 발송하여 그들의 대표자와  교도들을 전주 삼례에 소집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그 해 11월 1일에 전라도 삼례역에는 수천의 동학교도들이  모이게 되었다. 이들은 교조 최
제우에 대한 신원은 물론 신앙과 교단의 자유를 요구 하였으며, 관리와 군졸들의 탄압에 대
해서도 거센 항의를 하였다. 그들은 손천민을 대표로 뽑아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과 전라도 
관찰사 이경직에게 "교조 최제우는 무죄이며, 또한 동학이 결코 서학의 일파가 아니며, 그리
고 공자의 유교 외에 다른 종교들에게  대해서는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면서 오직  동학만을 
이단으로 몰아 탄압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리고 이서들과 군졸들이 함부로 양민인 교인들을 
침학 또는 살상하지 못하게 해 달라" 는 내용이  담긴 청원서를 보냈다. 그래도 2도 관찰사
의 태도가 미온적이자, 11월 7일에 다시 모여서, 또 한번  더 청원하였다. 그러자 관찰사 이
경직은 "교조의 신원 문제는 중앙에서  해결할 문제이니 자신이 언급할  수 없으나, 지방의 
이서와 군졸들의 횡포 등은 자기 권한으로 즉시 금지하겠다" 라고 했다. 이에 동학 교도들
은 지방 관헌을 상대로 한 시위는 더 계속할 필요가 없다고 보고, 일단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서와 군졸들의 행패는 여전했다. 그러자 박광호, 손천민, 남홍원, 임규호 등이 중심이 되어 
상소문을 작성하여, 박광호를 비롯한 40여 명의 동학 대표자들이  1893년 2월 8일에 한양으
로 올라가, 이틀 후인 2월.10일부터 광화문 앞에 봉소하고 엎드려 사흘 동안을 밤낮으로  호
곡하며 상소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자 2월 13일 정오에 칙령이 내려졌다.
  "너희들은 각각 집에 돌아가서 생업에 종사하라. 그렇게 하면 곧 너희들 소원대로 해주겠
노라,"
  이에 동학 지도자들은 지방으로 내려와 해산하였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동학 교도들의 소원을 들어주기는 커녕 2월 26일에 동학의 포교를 금
지하라는 명령을 내려서 동학 지도자들을 체포하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이서들과  군졸들에 
의한 동학 교도 박해는 전보다 더욱 심해졌다. 이렇게 되자, 동학당은 매우 분개하면서 새로
운 대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최시형은 곧 손병희, 손천민 등의 간부들과 상의한 후, 3월 
10일에 보은에서 모임을 갖는다는 통문을 전국 교인들에게 돌렸다. 이날 모인 교인 수는 대
략 2만5천여 명 정도에 이르렀다. 그틀은 최시형, 손병희, 손천민, 서병학, 임규호 등의 지휘
를 받으며 평화적으로 시위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보은 군수 이중익등을 보내, 회유하며 
해산할 것을 한사코 종용하였다. 그러나 시위대는 해산을 거부하였다. 사태가 이처럼 악화하
자, 3월 17일에 어윤중을 양호도어사로 임명하여 보내 회유케 했으며, 충청도 관찰사에 조병
호를, 전라 감사에 김문현을 각각 임명하였다. 어윤중은  3월 26일에 공주영장 이승원, 보은 
군수 이중익, 순영군관 이주덕 등을 데리고 직접 보은으로  내려가 시위대의 대표자들과 만
나 해산을 권하였다. 4월 1일에도 그는 청주영장 백남석과 보은 군수 이중익을 데리고 시위
대를 방문하고 무조건 해산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때, 시위대는 척왜, 척양의 취지를 역설하
고, 지방 관리들의 불법 탐학을 호소하면서, 앞으로 5일 이내에 모두 해산하겠다고 제안하였
다. 그러자 어윤중이 3일로 단축시키자고 하여 시위대측에서 이를 수락하였다. 그런데  그날 
밤, 충청 병영의 군사 1백명이 선무사를 호위한다는 구실로 장내에 도착하고, 경병  1천명이 
대포를 끌고 출동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최시형을 비롯한 간부들이  그 이튿날 밤 보은을 
떠나 행방을 감추어 버렸다. 그러자 시위대도 하나둘씩 흩어지기  시작하여 4월 3일에는 장
내가 텅 비게 되었다.
  이 무렵,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은 자기 부친의  비각을 세우겠다는 명목으로 농민들에
게서 1천냥을 불법으로 거둬들였다. 그리고 그는 면세해  주겠다고 약속하고서 진황지를 개
간케 한 다음 수확기에는 강제로 징세하였으며, 또한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군내에 만
석보(관개용 저수지)를 수축케 하여 7백석의 수리세를 징수하여 사리사욕을 채웠다. 이에 분
개한 농민들은 수차에 걸쳐 군수와  관찰사에게 진정하였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이에 
고부 지방의 동학교 접주 전봉준(전봉준: 1854-1895년, 본명은 전명숙, 별명은  녹두장군, 전
창혁의 아들, 전부 태인 출신, 부친이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된 뒤부터 사회개혁에 대한 뜻을 
품게 되었으며, 30세경에 동학에 입문하여 고부 접주가 되었다)은 탐학 불법을 일삼는 조병
갑에게 힘으로써 응징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정익서, 김도삼 등의  동지들과 
상의하여 고부군의 아문을 습격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1894년(고종 31년) 1월 10일  새벽에 
그는 1천여 명의 농민들을 이끌고 마항 시장터에서 봉기하였다. 봉기군은 흰 수건으로 머리
를 동이고 길이가 대여섯 자쯤 되는 죽창들을 손에 들고서 "탐학 군수를 응징하러 가자" 라
는 전봉준의 독려를 받자마자. 도도한 기세로 나아가고 부관아를 습격 점령하였다. 그런  다
음 그들은 관가의 무기를 탈취한 다음, 이서나 관속배들을 모조리 붙잡아 문초하고,  그들이 
부당하게 강탈하여 거두어 들인 수세와 세곡을 원주인인 농민들에게  다시 나누어 준 다음. 
문제 많은 만석보를 파괴해 버렸다. 이때  군수 조병갑은 재빨리 담을 넘어 도망가  버렸다. 
봉기군들이 그를 추격하였으나 그 행방을  찾지 못하고 돌아오고 말았다.  조병갑은 변장을 
하고 정읍을 거쳐서 1월 15일에 전주 감영에 도착하였다.  그는 감사 김문현에게 온갖 변명
을 늘어놓으면서 1천명의 병력을 지원해 주면 고부로 돌아가 소요를 진압하겠다고 간청하였
다. 그러나 감사는 그의 요청을 거부하고 중앙의 지시를 기다리자고 했다. 그러면서  감사는 
병방 비장에게 병력 50명을 주어 급히 고부로 출동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변장을 하고 봉기
군들 속에 숨어 들어가 전봉준을 체포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봉기군들에게 들켜 모조리 체
포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조정에서는 조병갑 군수를 구속하여 처벌했으며 , 감사 김문현
을 감봉에 처하고, 장흥 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임명하여 내려 보냈다. 그러나 봉기군은 전
봉준의 지시에 따라 1월 하순에 자진 해산해 버렸다.
  그런데 안핵사 이용태는 부임 때 8백여 명이나 되는 역졸을 데리고 위세당당하게 나타나
더니, 선정으로 뒷수습을 하기는 커녕 모든 책임과 죄를 동학 교도들과 농민들에게 덮어 씌
워 가혹한 탄압과 횡포를 일삼는 등 광태를 연출했다. 그는  새로 임명된 군수 박원명을 공
갈 협박하여 민란의 주모자들을  수색하게 하고, 동학 교도의  명단을 만들어 나누어주면서 
그들을 체포하라고 역졸들을 사방에 풀어 놓았다. 이들 역졸들은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무고
한 농민들을 함부로 구타, 포박, 약탈을 일삼았으며,  심지어 부녀자들을 겁탈하기까지 하였
다. 그런데도 이용태는 나 몰라라하며 전주 한벽당에 가서 밤낮없이 기생들을 품에 끼고 술
을 마셔대며 놀아났다.
  전봉준은 이러한 이용태와 역졸들을 응징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서, 정익서, 김
도삼 등과 상의한 다음, 이웃 군과 현의 다른 접주들에게  함께 궐기할 것을 요청하는 통문
을 발송하였다. 그리하여, 태인, 고부 등지의 수천명의 동학교도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그러
자 전봉준은 3월 21일에 "동조대장"이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다시 봉기하였다. 전봉준
은 봉기군을 이끌고 먼저 고부군 내의 백산면  백산을 점령한 뒤 그곳에서 진용의 정비 및 
대오를 편성하여 지휘자를 임명하였다. 그는 우선 병력을 손화중포, 김개남포, 김덕명포의 3
개 부대로 나누고, 손화중포 중 1대(1천5백명)는 고창  두령 오하영, 오시영. 임형로, 임천서 
등이, 2대(1천3백명)는 무장 두령 송경찬, 강경중 등이, 3대(7백명)는 흥덕두령 고영숙이, 4대
(1천2백명)는 정읍 두령 손여옥, 차치구 등이 각각 지휘  책임을 맡도록 하였으며, 김개남포
(1천3백명)는 태인 두령 김낙삼, 김문행이, 그리고 김덕명포(2천명)는  태인 두령 김경선, 김
제 두령 김봉년, 금구 두령 김사엽, 김봉득, 유한필등이 각각 지휘 책임을 맡도록 하였다. 그
런 다음, 3월 25일에 다음과 같은 4대 강령을 내걸었다.
  "하나,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말고 짐승도 죽이지 말  것. 둘, 충효를 다하고 세상을 안정
시키며 백성을 편하게 할 것. 셋, 왜이를 다  몰아내고 성도를 맑게 할 것. 넷, 군사를  몰아 
한양으로 가서 권귀를 다 쳐 없앨 것."
  이들 봉기 소식은 순식간에 주위에 퍼져 나가, 태인, 금구, 부안, 정읍 등지에서 동학 교인
들 외에 농민들도 백산으로 몰려왔다.
  이 무렵, 전남의 고부뿐만 아니라, 금산, 장성, 무장, 그리고 영남의 김해 등지에서도 민란
이 일어났다.(이 무렵 동학 교주 최시형은 전봉준이  봉기하자 이에 호응하여 북접 산하 동
학도들을 궐기시켜 청산에 집결시킨 다음 희덕의 관아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전라 병사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여 장위영 병정 8백명과 야포 
2문, 기관포 2문을 주어 출동케 했으며,  안핵사 이용태. 균전관 김창석, 전운사  조필영등은 
문책하여 파직시켰다. 그러나 관군은 남하하는 도중에 3백여 명 이상이나 탈영해 버려 전주
에 도착했을 때는 4백70여 명의 관군밖에 남지 않았다.
  4월 3일 동학군은 금구, 부안 두 곳으로 몰려가서 부안현 아문을 습격하여, 부안현감 이철
화를 구속하고 그곳 관속들을 모두 결박한 다음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후 봉기군은 전주에
서 출동한 관군과 황토현에서 맞붙어 4월  6일 밤부터 7일 새벽까지 통쾌히  쳐부순 후, 그 
여세를 몰아 정읍, 흥덕, 고창, 무장, 영광,  함평 등 10여 군, 현을 무력으로 점령하여  버렸
다. 이어, 장성 황룡촌에서 경군까지 격파한 봉기군은 4월 24일 노령을 넘어 다시  정읍으로 
진입하였다. 그런 다음 태인을 거쳐 전주성 밖 삼천까지 진격해 갔다. 그러자 관군들이 봉기
군의 기세에 놀라 겁을 집어먹고 달아나 버리는 바람에 전주성을 별로 힘 들이지 않고  4월 
28일 아침에 함락해 버렸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조정에서는 동학군을 회유함과 동시에 휴전을 제의하였다. 이때 
봉기군은 "탐관오리와 지방관과 양반부호들의 횡포 및 토색질 근절, 노비 문서의 소각, 신분 
차별의 개선, 과부 재가의 허용, 토지 균분제의 실시, 외국상인, 특히 일본상인들에  의한 상
권 침해 근절" 등을 골자로 하는 12개 폐정개혁을  내세웠다. 이를 정부가 모두 들어주기로 
하고 또한 동학군의 생명 및 생업의 안전을 약속하자, 동학군은 5월 7일과 8일 양일에 걸쳐 
자진 해산하였다. (사실상, 전봉준은 민란을  구실로 청군이 개입하고 천진조약을  빙자하여 
일본군도 입국하여 국가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더 이상  외국군이 나라를 침범하게 해서
는 안 된다고 판단하고는 한 걸음 물러서기로  했던 것이다.) 휴전 협정대로 정부는 전라도 
53개 군에 집강소(민정기관)를 두어 이를 지방행정 보조기관으로 삼아, 동학교도들에게 이를 
관장케 하여 구체적으로 폐정 개혁에 착수하였다. 이후 전봉준은  20여 명의 간부를 인솔하
고 각지를 돌아다니며 교도를 격려하고 집강소를  전국에 설치하는 등 조직 강화에  힘쓰는 
한편 정부 관헌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시정을 감시하고 신임 관찰사 김학진과도 만나 도정을 
상의하는 등 부패한 지배계급의 근절과 근본적인 시정계혁에 혼심의 힘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1894년 6월에 일본군이 갑자기 궁궐로 쳐들어가 민씨 정권을 제거하고 대원군
을 옹립한 후 새 정부를 수립하자, 이를 예의 주시하고 있던 전봉준은 "척왜"를 부르짖으며, 
그 해 9월에 삼례에서 남도접주로서 동학군을 다시 집결시킨 다음, 북도접주 손병희와 연합
하여, 교주 최시형의 총지휘하에 항일구국의 기치를 내걸고 9월에 재봉기하여 대일전을 시
작하였다. (교주 최시형도 전봉준이 재봉기하자 북접 각지의 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령하여 
대병력의 봉기군을 이끌고 논산에서서 남접군과 합세했다)  그리하여 한때 중부, 남부의 전
역과 함남, 평남까지 항쟁의 불길이 확장되어 갔으며, 특히 이천, 목천, 공주  등지에서 혈전
을 벌여 그 위세를 크계 떨쳤으며, 그 해 11월 중순에는 논산까지 진출하였다. 그러자  일본
군은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공주 쪽으로 병력을 급파하였다. 이리하여, 동학군과 일본군은 
공주의 우금고개에서 6-7일간 치열한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군은 우수한 근대
식 무기와 조직적인 훈련을 받은  정예부대인 일본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패하고 말았다. 
이후 후퇴를 거듭하여 전주. 태인을 거쳐 전라도 남단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전봉준은 
일단 남쪽으로 후퇴하여 머물면서 동학군의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 재봉기를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전봉준이 수명의 동지들과 함께 순창으로 피신하여 있을 때, 현상금을  탐낸 
한신현 등 지방민의 급습으로 12월 28일에 피로리에서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된 후 이듬해인 
1895년 3월에 사형당하고 말았다. (교주 최시형은 공주에서 일본군의 혼성군과 싸워 참패한 
뒤 논산을 거쳐 장수 등지에서도 패하고 영동, 청주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송경인
에게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된 후 사형당 했다)
  이리하여, 안으로는 양반 중심의 봉건 체제에 대항하고, 밖으로는 외국 자본주의의 침략에 
대항하여 싸운 동학혁명은 결국  그양자의 연합세력에 의해 실패하고  말았지만, 이 결과로 
대내적으로는 1896년의 갑오개혁이라는 내정  개혁을, 대외적으로는 청.일 전쟁을  유발시킨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의의깊은 농민전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제4부 대한민국
    4.19 혁명(1960년)
  4.19혁명은 1960년 4월 학생을 비롯한 국민들이 이승만 자유당 정부의 독재와 부정  부패,
부정 선거에 항의하여 벌인 일련의 민주 항쟁이다. 4월 19일 절정에 달했으며, 4월 26일  마
침내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함으로써 자유당 정권은 붕괴되었다. 이후  허정 과도 정부가 수
립되었다.
  
  부정선거 독재정권, 이승만은 물러가라!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을 당시에는, 민주적 가치와 실행에 대한 믿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있지 못했다. 그러나 정부의 실제 행동이 더욱 비민주적으로 되어 가
고 대규모의 부정 선거가 자행됨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규탄하고 자
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국민  의식의 민주화는 대체로 광범위한 
민주적 교육과 6.25 이후에 나타난, 급속한 도시화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1945년 이래로 민주주의 교육이 초등학교와 중등학교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졌고, 도시 또
는 준도시 사람들이 대중 매체를 널리 접촉할 수 있게 된 것은 한국인에게 민주주의의 가치
를 인식시키는 구실을 하였다. 이러한 민주주의 정치 교육의 긍정적 결과는 많은 조사 결과, 
젊은 층들이 기성 세대들보다 좀더 민주적으로 전향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도시화는 일반 국민의 민주적 사회화와토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52년에는  남한 인구의 
17.7%만이 인구 5만 이상의  도시에 살고 있었으나, 1955년에는  24.5%, 1960년에는 28%로 
늘어났다. 이처럼 금속한 도시화는 확장된 교육과 6.25 동란에 따른 지역적 인구 분포의  붕
괴, 그리고 사회의 일반적 상업화 등에 기인한다. 그런데 정치 세력이 여당인 자유당과 야당
인 민주당으로 양극화됨에 따라 유권자들은 각자의 정치 의식  수준에 따라, 누구를 반대하
고 누구에게 투표하여야 할 것인가를 쉽사리 알 수 있게 되었다.
  비교적 유동적인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새로이 얻은 민주적 가치를 확인하는 방법은 
비민주적으로 행동하는 여당과 그후보자들에 대해서 반대 투표를 하는 것이었고, 정부에 반
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지지표를 던지는  것이었다. 1958년의 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출신 
의원은 인구 5만 이상의 도시에서 오직 13명만  당선되었지만, 민주당은 43명이나 선출되었
다. 반면에 나라 전체를 볼 때, 민주당의 79석에 비하여 자유당은 총 1백26석을 얻었다.
  1956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나라 전체로 볼  때 56%의 지지를 받았지만, 서울에
서는 38%밖에 지지를 받지 못했다.  도시 지역에서 나타난 자유당의  약세는, 대도시에서는 
비교적 부정 선거를 쉽게  저지를 수 없었다는  데 그 이유가 있었다.  이른바 "준봉 투표" 
(conformity votes)는 비도시 지역에서 팽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회화와 도시화의 증대에 따라 이러한  "준봉 투표" 는 급속히 감퇴하여 갔으며, 
이러한 현상이 자유당으로 하여금 더욱  "비민주적인" 수단을 강구하도록 부추겼던 것이다. 
하지만 자유당이 강압적인 수단을 동원하면 할수록 공정한 선거에서 대중의 지지를 얻을 기
회는 그만큼 더 줄어들었다. 1950년부터  1960년 사이에 이승만의 추종자들은  이승만과 그 
정권에 대한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대중 시위를 조작해 냈다. 국토를 양분시
킨 공산주의자틀과의 휴전 협정을  반대하는 대중 시위와 행진,  1952년에서 1956년 사이에 
이승만을 재선에 나서도록 부추겼던 대중 시위, 일본 당국의 재일 교포 북송 결정에 항의하
는 대중 집회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러한 관제 대중 동원은 1950년대 초반기 동안, 어느정도까지는 이승만의 인기를 회복시
키고 유지시켜 줄 수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국민들 사이에서 이승만
의 개인적 인기는 사라졌으며, 그의 권력은 오로지 경찰의  강제력에 의하여 유지되지 않으
면 안되었다.
  1960년, 많은 국민들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의 죽음으로 다시금 실망에  빠졌다. 
조병옥은 선거에서 이승만의 강력한 대적자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다른 강력한 
대적자가 없는 마당에 이승만의 재선은 확고한 것이었다.
  이승만의 노령으로 인해 부통령의 경합이  보다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였다. 이렇듯,  실제 
싸움은 현직 부통령인 장면과 이승만이 밀어주는 이기붕 사이에 벌어졌다. 선거전에서 야당 
선거원들은 계속해서 체포되고 탄압을 받았다. 반공청년단의 폭력 단원들이 선거 당일, 시민
들이 투표권을 어떻게 행사하는가를 감시하기 위하여 각 투표장에 나타났다. 
  농촌 지역에서는 3인조, 9인조 등의 "조" 가 형성되었고, 자유당에  대한 충성심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자가 각 조의 "조장" 이되어 "조원" 들이 자유당 후보자에 대한 투표를 책임졌
다. 경찰은 공개적으로 자유당 후보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
었다. 왜냐하면 선거 결과가 경찰 지휘부와 내무부에 의해 안전하게 날조되었기 때문이다.
  선거 결과, 이승만은 총투표 수에서 당선에 필요한 3분의 1보다 두 배 이상 많은 표를 얻
었고, 이기붕은 1백80만 표를 얻은 장면을 제치고 8백40만 표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
자 국회에서는 민주당이 선거가  "불법적인 것이고 무효" 라고  주장하였다. 반정부 시위가 
선거 전후, 전국에 걸쳐 대도시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부정 선거와 불법 선거를  규탄하고 
나섰던 것이다. 민심은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으로부터 거의 완전히 이반되어 있었으므로, 대
규모 봉기에 필요한 것은 도덕적 분개라는 공통된 감정을 점화시켜 줄 수 있는 사건만 있으
면 되었다.
  4월 초, 전국에서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을 때, 항구 도시인 마산 시민
들은, 총에 맞아 만신창이가 된 채 해변가에 버려진 16세 소년의 시체를 발견하였다. 그  소
년은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가담했다가 마산 경찰에 의해 체포당했던 것이 틀림없었
다. 시민들과 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시위 도중에 경찰의 총에 맞아 여기저기 쓰러
졌다.
  4.19 이전 수주일 동안, 주로 지방 도시에서 고등학교 학생들이 불법 선거 및 자유당과 경
찰의 반민주적이고 억압적인 행위에 항의하는 시위를  산발적으로 행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은 상황의 급박성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고, 또 그럴 수 있는 능력도 없었다. 마산의  시위에 
대하여 이승만은 4월 15일. 그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고무되고 조종된 것"이라는 내
용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비극적 사태에 책임이 있는 "무분별한 사람들" 의 죄는 간
과될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이승만은 "젊은 청년들" 을 폭동으로 유도하고 선동하는 "정치
적 야심가" 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 활동에 대해 경고했다.
  이승만의 이러한 견해는 협박과 강제력 행사를  그만두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으
로, 학생들을 더욱 격분케 하였다. 1월 18일에는 서울에서 시위하고 있던 고려대학교 학생들
이 경찰의 비호를 받고 있는  반공청년단의 폭력배들로부터 습격을 받았다.  아무리 이승만 
정권이 합법적인 권위를 지녔다고 주장하더라도, 이제는 시민과 학생들의 지지를 완전히 잃
어가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이 유지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강력하고 적나라한 폭력을 사용
하는 것뿐이었다. 
  4월 19일에는 약 3만 명의 대학생들과 고등학교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그 가운데 
수천 명이 경무대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경찰이 데모대에 대해 발포하기 시작했으므로 학생
들의 시위는 폭동으로 변하였다. 전국적으로  부산, 광주, 인천, 목포, 청주  등과 같은 주요 
도시에서 수천 명의 학생들이 가세하였다. 서울에 서만도 자정까지 약 1백30명이 죽었고,  1
천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기 시작한 직후, 전국 주요  도시
에 계엄령이 반포되었고,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송요찬 중장이 서울  지구 계엄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4월 19일 이후부터 데모와 폭동이  연일 계속되었으며, 이제 학생이  아닌 일반 시민들도 
가담하였다. 그러나 군대는 유혈 사태를 경계하고 재산의 파괴를  방지하는 데 신경을 쓰면
서 방관하는 태도를 견지하였고, 이승만은 반정부  시위에 관하여 더 이상 "공산주의자들의 
선동" 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4월 21일에 내각이  전국의 혁명적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
고 물러났으며, 다음날 이승만은 당시 정부 내에서 어떤  직위도 가지지 않은 정치인 2명을 
불러들였다. 한 사람은 전 국무총리였던 변영태였고, 다른 한 사람은 전 서울시장이었던  허
정이었다. 이승만은 이들에게 위기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도움을 간청하였다. 두 사람은 이
승만과 가까이 에서 일한 적이 있었고, 또 이승만은 이들에게 신뢰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승
만과 만난 자리에서 두 사람은 상황이 이미 자기들의  통솔 능력을 뛰어넘었다고 말하면서, 
이승만의 각료로 틀어가기를 거절하였다. 이승만은 이기붕으로  하여금 모든 정치 활동으로
부터 물러나도록 설득하는 데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시위대들은 이승만의 즉각적인 사퇴를 
요구하였다. 이승만은 자기가 자유당을 비롯한 모든  사회 단체와 결별하겠다고 말함으로써 
시위 군중들을 진정시키려고 하였고, 아울러 앞으로는 경찰을 포함한 정부 관리들이 정치적 
간섭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이승만은 정부의 모든  권력을 이양 받으리라는 약
속과 함께, 허정으로 하여금 외무부 장관직을 수락하도록 설득할 수 있었다. 외무부  장관으
로서 허정이 지명되었던 것과 결부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승만이 사임을 결심할 경우에 
부통력이 없는 상황에서 허정이 대통령직을 맡게 된다는 데  었었다. 시위 군중들은 이승만
의 양보를 경험하고 그의 약점을 알아차리게 되자 더 다그쳤다. 그들은 점점 더 광포해지기 
시작하여 , 반공청년단과 자유당 간부의 집을 파괴하고 방화하면서 거리로 휩쓸려 다녔다.
  4월 25일이 되자 시위의 새로운 물결이 일어났다. 각 대학의 교수들 3백여 명이 이승만의 
사임을 요구하는 제자들을 지지하면서 서울 시내를 행진하고 나섰던 것이다. 결국, 4월 26일
에새로 지명된 허정 외무부 장관과 송요찬 계엄 사령관, 그리고 주한 미국 대사였던 맥카나
기(Macanaghy D.P.)의 충고를 받아 들여,  이승만은 정부통령 선거가 새로  실시될 것이며, 
헌법도 대통령 중심제에서 의원 내각제로 바꾸어질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이승만 정권의 붕
괴는 경찰력에 의해 유지되었던 정치 권력이, 학생들이 선봉에 선 대중들에게 굴복하였음을 
의미했다. 경찰력이 자유당의 주요 골격을 이루어  왔다는 것은 4.19 이후 경찰력의  마비로 
인하여 자유당이 하룻밤 사이에 붕괴됨으로써 명백하게  드러났다. 교수들의 시위로 시작된 
시위의 새로운 물결, 미국으로부터의 압력, 경찰력의 붕괴, 그리고 무엇보다도 군으로부터의 
지지 결여 등에 직면하여, 이승만은 1960년 4월 26일에  이르러 사임을 발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틀 전에 이승만으로부터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허정은  과도 정부의 수반이 되
었다. 
  이승만 사임 후, 정부 내에서의 허정의 권력 기반은 크게 위태로웠다. 허정은 한국 사회의 
어떤 부문에서도 적극적 지원을 확보할 수 없었다. 학생과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 볼 때,  허
정은 이승만 정권의 지속을 의미하였다.  그는 또한 배후에 민주당이나  민족청년단과 같은 
조직화된 정치 세력을 갖지 못했다.  송요찬은 허정이 당시의 혁명적  상황에 대처하기에는 
너무 미숙하고 준비가 없었던 것으로 믿었다. 그리고 군부의  어떤 지도자도 허정이 이끄는 
정부에 대하여 전격적인 지원을 해줄 수 없었고, 또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허정에게 유일한 
힘의 기반은 관료 기구와 경찰 조직을 포함한, 이승만 정권의 정부 기구뿐이었다. 사실상 허
정에게 있어서 단 하나의 권력 기반인, 바로 그 정치  구조를 깨뜨려야 한다는 모순된 과업
이 주어졌다.
  허정은 과거에 어떠한 정치  조직체에도 가담하지 않았고, 정치  권력에 대해서도 그다지 
큰 욕심이 없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민주당이나 자유당이 그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자유
당은 허정이 과거에 이승만과 그의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지녔었기 때문에, 사회 정치적 구
조에 급격한 변화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만일 허정이 과도 정부를 이끌어 가기를 거절한
다면, 모든 자유당원의 안전을 위협하는 보다 심각한 정치적 혼란이 들이닥칠 것이  뻔했다. 
그래서 자유당 인사들은 허정을 군부를 포함하여 사회 내 어떤 단체나 개인보다도 무리 없
는 인물로 여겨 수용했다. 민주당 또한 당내의 응집력과 일체감이 결여되어 있었으므로,  정
권을 인수할 채비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장면이 이미 부통령직을 사임하였기 때문에, 
민주당이 정권을 인수할 수 있는. 어떠한 합법적인 절차도 없었다. 당내의 신구 양파 중  어
떤 세력도 정권 획득을 위하여 변칙적 수단에 의존하려  하지는 않았다. 민주당은 선거에서
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만 많이 만들고 우군은 점점 잃어 버리는, "혁명적 과
업" 을 수행할 짐을 떠맡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국회 내의 양당 지도자들은 허정 자
신이 어려운 과제를 떠맡기에  주저하였음에도, 허정이 과도 정부의  수반에 앉아야 한다고 
촉구하였던 것이다. 허정은 내각에 민주당 의원을 참여시키려 하였지만, 그들은 직접 참여하
지는 않고 허정 정부에 대하여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결국, 허정이 구성한 내
각은 정권에는 욕심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일반 국민들이
나, 조직된 정치 세력에 대해 신경을 써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제각
기의 분야에서 남다르게 훌륭한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다른 사람들로부
터 존경을 받던 시민들이었다. 이들에게는 사전의 정치 경험이 없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정
치에 관한 한 조직적인 기반이 없었고,  또한 어떠한 진보적 견해나 혁명적 성향도  없었다. 
널리 알려진 그들의 슬로건인 "비혁명적 수단에 의한 혁명" 이라는 말은  실로 허정 정부의 
성격을 잘 나타내 주고 있었다.
  5월 3일, 발표문을 통해 허정 정부는 정책 기조의 방향을 광범위하게 밝혔다. 내정에 있어
서는 일상 생활과 법, 사회 조직의  근본 구조에 비치는 4월 봉기의  여파를 극소화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과제에는 반공 투쟁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
었고, 대외 관계에 있어서는 강한 반공 노선과 미국과의 긴밀한 유대 관계를 지속하려는 뜻
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이 초래했던 국제적인 고립, 특히 아시아 또는 중동의 
중립국들과 일본에 대한 폐쇄적 관계를 지양하는 정책의 길을  터놓았다. 허정 과도 정부는 
일련의 모순된 목표를 추구해야만 했다. 과도 정부에 대해서 국민들은 군대 내의 부패를 일
소하고 선거 부정을 저질렀던 자들을 처벌할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과도 정부는 군대 고
위 장성들의 비위를 건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욱이  그들로 하여금 정치에 개입하는 
구실이나 자극을 주고 싶지 않았다. 과도 정부는 학생과  언론으로부터 전직 자유당 관리들
이나 부정 축재자들에 대해 즉각적이고도 혹독한 처벌을 내리라는 요구에 직면하고  있었지
만, 이러한 조처가 취해진다면 그것은  경찰력의 효율성을 마비시키는 것이며, 경제  구조의 
근본을 파괴하는 것이라 여겨 주저하였다. 
  한편, 정치 문제에 있어서는 양당 제도의 확립을 위한 조처가 기대되었으나, 과도  정부로
서는 자유당의 부활이나 혹은 좌익 정당의 등장을 용인할 수 없었다. 이렇게 상충되는 과제
에 부딪힌 과도 정부는 문제들을 극히 신중하고 무난한 방법으로 해결하려 들었다.
  허정이 스스로 술회했듯이, 그는 군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에 대해 몹시 골몰하였다.  그
는 자유당 정권과 손잡고 부정 선거를 저지른 고위 장성이나 여러 부정 사건에 관련된 부패
한 장성들을 숙청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였다. 군부에 대한 허정의 첫번째 조처는 이
종찬을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하는 것이었다. 일본  국방대학을 졸업하고 1951년부터 1952년
까지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바 있는 이종찬은 이승만의 미움을 샀는데, 그 이유는 1952년의 
부산 정치 파동 때 이승만이 군을 동원하는 것에 대하여  그가 반대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
리하여 그는 이승만 정권에 가까이  동화되지 않은 소수의 몇몇 장성들  중 한 사람으로서, 
많은 장교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오고 있었다.  국방부 장관으로서의 이종찬이 우선  해야 할 
일은 군의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 시키는 것이었다. 이종찬은 임명  후에 가진 첫 기자 회견
에서, 군의 정치적 중립의 필요성에 최대 역점을 두었다.
  허정 정부의 막바지 무렵, 각군의  참모총장들은 전 각료 앞에서  "한국군 참모총장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정치에 있어 엄격한 중립을 지킬 것이며 , 조국을 적으로부터 보호하는 신
성한 의무에만 진력할 것을 엄숙히 맹세합니다" 라고 명시된 서약문을 읽고  서명하도록 요
구받았다. 
  허정은 군부를 개혁하려 하거나 주요 장성들을 추방하려는 조처를 취하였을 때에 생길 수
도 있는, 군으로부터의 적대적 반응을 내심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그는 고급 장교들의  지난 
실수에 관해서는 지극히 관대한 정책을  추구했다. 장교들을 섣불리 숙청하려  한다면 한국 
내의 미국 대사와 미국 사령관이 같이 쥐고 있는, 한국군의  전투 능력을 상실하게 될 수도 
있다는 나름의 계산도 있었다.
  허정은 과도 정부의 수반으로 재임한 3개월 동안, 때때로 혹은 정기적으로 미국 관리들과 
회동하였다. 미 제8군 사령관인 매그루더(Magruder  C.B.) 장군은, 한국군의 재편은 현존하
는 불안정과 혼란이 종식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고 허정에게  말했다. 결국 과도 정부는 
약간명의 장성을 전역시켰을 뿐  근본적인 숙군을 단행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군부  내의 
"정군 문제"는 숙제로 남게 되고 말았다.
  허정 내각의 4.19 뒷마무리 중 중요한 과제는, 선거 부정 행위의 주요 음모자와 이승만 밑
에서 불법적이고 강압적인 행동을 자행한 경찰들에 대한 처벌  문제였다. 이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정부의 기본 입장은, 기존의 법에 따라 공판을 받게 하는 것 이었으며, 경찰에 대
해서는 정상적인 인사 정책을 통해서 경찰을 정화하는 것이었다.  허정 정부에 의해 체포된 
자들은 9명의 전직 각료와 15명의 자유당 간부였는데, 이들은  3월 15일에 있었던 정부통령 
선거 때 불법 활동을 자행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여러 은행장들도 자유당에 거액의 선거 자
금을 불법적으로 제공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승만의 경호실장이었던 곽영주와 수많은 
고위 경찰 관리들은 4월 봉기 때 시위 군중에게 발포한 혐의로 연루되었으며, 하급 경찰 요
원들은 4월 19일 이전에 시위 학생들에게 잔악한 고문을 가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또
한, 전 서울 시장이었던 임흥순과 내무부 장관이었던 이근직은 1956년의 부통령 선거 때 장
면을 암살하려던 음모에 관련되었다. 그리고 자유당 정권과  공모하여 재계, 문화계, 정치계 
인사들에 대한 테러를 자행하였던 정치 깡패의 두목들도 체포되었다. 이들에 대한 공판은 7
월 29일로 예정된 국회의원 선거보다 몇 주일 앞선 7월  5일에 열렸다. 공판 과정에서 허정 
정부는 법원과 검찰청의 현직 관리들에게 크게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들 역시 이승
만 정권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자들이었다.  그들 역시 자유당 
정권의 효과적인 정치 도구로 작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유당 정권으로부터 거리가 
있었던 것처럼 다른 분야에서 활동했던 동료들을 기소해야 하는 임무를 떠맡아야만 했다. 
  허정 정부로서는 기존의 정치적, 이념적, 법적 기본 구조를 파괴할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모순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따라서 공판은 "혁명적" 방식으로 진행되지 못하거나 끝
맺어지지 못하였으며, 주어진 법의 테두리 내에서보다 더욱 혹독하게 처벌하기를 바랐던 학
생들과 시민들을 만족시킬 수도 없었다. 공판은 장면이 이끈 다음 정부로 넘겨졌으며,  이것
은 장면 정권에게는 심각한 고민거리가 되었다.
  부정 축재자에 대한 처리도 국민들의 기대에 어긋났다. 과도정부는 부정 축재자를 처벌하
겠다는 방침을 반복해서 밝혔지만, 실제로는 몇 사람에 대하여  과거의 부정을 자신 신고하
게 하고, 부정 축재분을 사회에 환원시키게 만드는 데 그쳤다. 7월에 가서야 이승만 정권 밑
에서 부정 축재한 18명의 개인과 기업가 65명의 명단을  공개하고, 이들을 조사하겠다고 선
언하였다. 그러나 문제 자체의 복합적 성격으로 인하여 장면  정부가 출범한 이후까지도 그
들에 대한 실제적인 조처는 취해지지 못했다. 물론, 부정 축재자들에 대한 조사 처리를 늦추
었던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들의 불법적 기업 활동은 이승만 정권과 광범위하고도 뿌
리 깊게 결탁되어 있었고, 완벽하게 조사하는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했으며 , 설사 그것이 가
능했다 하더라도 이러한 조처는 나라의 경제 구조뿐만 아니라 정부의 기본 구조를 유지하는 
것마저 와해시킬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분명히 허정 정부는  그러한 모험을 받아들일 준비
가 되어 있지 않았다. 국립  경찰의 정치적 중립화와 민주화 문제에  있어서도 허정 정부는 
선거 부정이나 정치 테러에 책임을 자고 있는 경찰의 최고 간부들만을 해임시켰을 뿐 근본
적인 문제해결에는 다가서지 못하였다.
  기본적으로 허정 정부의 보수적이고 온건한 문제 접근 방법으로는 일반 국민들을  만족시
켜 줄 수 없었을 뿐더러 경찰의 권위주의적 성격도_변화시킬 수 없었다. 짧은 과도 정권 기
간 중, 허정 정부는 줄곧 "비혁명적" 방법으로 과제를 해결하려는 입장을 견지한 결과, 후계 
정권에게 제한된 행동의 자유를 가지고  "혁명" 을 수행하여야 한다는 어려운  숙제를 남겨 
주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4.19 혁명에 대한 역사적 판단을 어떻게 내려야 할 것인가? 4월 봉
기의 성과를 따지기에 앞서서, 우리는 먼저 당시의  상황을 "혁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물어 보아야만 할 것이다. 혁명에 대한 개념은 여러 가지로 이해되어 왔다. 대다수의 
사회 과학자들은 혁명이라는 말을  보다 넓은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엑스타인
(Eckstein H.)은 "혁명은 국가 정책과 지배자, 또는 제도 등을  기존의 사회규범에서 벗어난 
방법으로 변경하려는 모든 시도로서  폭력적인 성격을 지니며, 정착된  기존 제도적 패턴의 
심각한 붕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브린턴(Brinton c.)과 페테
(Pette G.) 같은 역사학자들에게 있어서의 혁명이란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나 1917년에 일
어난 볼셰비키 혁명에서처럼, 대규모의 사회적, 정치적 재편성을 내포'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 이 다. 
  또한, 정치 철학자인 아렌트(Arendt H.)는 좀더 특색 있는 해석을 내리고 있다. 그녀에 의
하면, "혁명은 사회적, 정치적 변동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 변동의 결과, 정치 과정에 대한 
시민참여라는 의미의 정치적 자유를 갖추는 헌법적 구조가 창조되는 것이어야 한다"  는 것
이다. 한편, 존슨(Johnson c.)은 제도화된 권력 구조와  사회 가치 구조 사이의 조화라는 관
점에서 사회적 안정을 정의하고 있는데, 그는 잠재적 혁명 상황이라는 것은 이런 조화가 깨
질 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렇듯, 서로 다르게 해석되고 있는 혁명의 공통된 현상은, "사
회의 가치 체계 변동에 기인되었거나 또는 그러한 변동을  야기시키는 과격한 사회적, 정치
적 변동" 이라고 하겠다.
  1960년 당시의 한국 상황은 이승만 정권의 권력 구조와 정치의식 계층, 특히 그 중에서도 
학생들의 가치관 사이에 크고 명백한 균열이 있었다는 의미에서 혁명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4월 봉기는 이승만과 그의 지지 세력에  대항하는 반정부 세력에 의한 혁명적 
시도였다. 그러나 시위 학생과 군중은 그들 스스로의 조직화된 지도력을 갖지 못했다.  민주
당 지도층에서는 자기네들이 시위  운동을 일으키는 데 앞장을  섰다고 주장하였지만, 시위 
대중 사이에서 그들의~실제적인 지도력은 나타나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이와 같은 
명백한 지도력의 부재가 이승만의 조속한 사임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승만 정
권의 붕괴 후에 '혁명' 을 완성시키지 못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5.16 군사 정변(1961년)
  5.16 군사 정변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일단의  청년 장교들이 4.19 
의거 이후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분 아래 일으킨 군사 쿠데타다. 이로써 민
주당의 장면 정권이 무너지고 혁명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2년 동안의 군정이 실시되었다.
  
  현 정권과 기성징치인에게 더이상 국가의 운명을 맡길 수 없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육군  소장을 비롯한 일단의 정치 군인들이  제2 공화국의 장면 
정부를 쓰러뜨리려고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여 거사 당일에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하고, 3
일 만에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출범시키면서, 이후로 한국은  오래도록 군사 독재라는 암울한 
역사의 한 뒤안길을 걸어야 했다. 박정희와 김종필에 의해 주도된 5.16 군사 쿠데타의  발생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 배경은, 4.19 혁명 이후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상을 들  수 있다. 4.19 혁명으로 이
승만 정권이 붕괴되고 허정  과도정부가 수립되었지만, 정파간의 이해  관계 대립으로 각종 
개혁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지 못했다. 허정 과도 정부의 성격은 민주 정부 수립을 위한 각
종 선거를 관리하는 데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에 선거를 통하여 민주당 정권이 
수립되었지만, 그들은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 부정 선거의 뒷수습을 말끔히 처리하지 
못했다.4.19 혁명 주체 세력은 특히 구정권과 결탁하여 치부한 부정 축재자들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그들을 법에 따라  엄격히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민주당 정권이 미온적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불만이 높았다. 여기에다 자유당 정권하에서 탄압받았던 각 사회 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 통제력이 떨어진 민주당  정부에 자신들의 권익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나섰다. 이와 같은 4 · 19 주체 세력의 정치적 요구와 각 사회 단체의 집단적 권익 투쟁으
로 민주당 정부는 몸살을 앓아야 했다. 민주당 정부 당시에 각종 시위가 얼마나 성행하였는
가는, 4.19 혁명 이후부터 5.16 군사 정변까지, 학생 시위  7백47회, 노동 관계 시위 6백75회 
등 무려 2천여 회의 각종 시위가 발생하였다는 사실에 잘 나타나 있다.
  두번째 배경으로는, 민주당 신파와 구파의 파벌 싸움이 격화된 것과 그 와중에 휩쓸린 장
면 정권의 무능을 들 수가 있다. 1960년 "7.29 총선"에서 민주당은 의석 수  2백33석 중 1백 
75석을 확보, 의석률 74.6%라는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장면이  이끄는 신파와 김도연을 
대표자로 한 구파 사이에 국무  총리 선출을 둘러싸고 치열한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선거 
결과, 1백17표 대 1백15표로 장면이 국무 총리가 되었지만, 구파는 그 해 9월 22일에 민주당
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얼마 뒤에는 신민당을 창당하여 극심한 권력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러나 장면 정부는 당 내외의 반발에 못 이겨 두 달이 멀다 하고 개각에 개각을 거듭해야 하
는 정치적 불안정을 드러냈다.
  한편, 같은 해 10월 11일에 4.19 부상 학생들이 국회 의사당에 난입하여 의장석을  점거하
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러한 사태의 억제를 위하여 장면 정부는 "반공법" 의 제정을 시
도하였다. 이 시도에 대하여 신민당, 신풍회, 청조회등에서는  적극적인 반대 투쟁에 들어가 
"국가 보안법" 개정을 주장하는가 하면, 혁신 세력은 "2대 악법 반대 경연대회"를 열고
장면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기도 했다.
  세번째 배경은, 혁신 세력의 대두와 공산주의의 위협이 증대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승만의 
하야와 자유당 정권의 붕괴는 적어도 혁신계에서는 반공 정권의 와해로 받아들여졌다.  4.19 
혁명이후, 7월 29일에 실시된 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는  혁신계에서 1백48명의 후보가 출마
했다. 정부 수립 이후 처음 보는 혁신계의 대거 출마였다. 이들 중 비록 5명밖에는 의회  진
출을 하지 못 했지만, 혁신계 나름의 정치적 전망은 국민의  신망을 잃고 있는 민주당의 대
체 정치 세력이 자기들뿐이라는 것이었다. 혁신계가 남북한 관계와  통일 방안에 대해 국민 
대중의 지지와 호응을 얻을 것으로 판단한 때인 같은 해  8월 14일, 북한의 김일성이 이 기
회를 놓치지 않고 남북연방제안을 내놓았다. 또한, 10월 21일에는 미국 상원의원이며 외교분
과위원회 위원장인 맨스필드(Mansfild M.)가 오스트리아식 중립화 통일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혁신계 세력에게 유리한 활동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1961년 2월 21일에
는 통일사회당 등 혁신계가 모여서 중립화통일연맹을  만들었고, 이것을 주축으로 민족자주
통일 중앙협의회를 결성하여 적극적인 활동에 틀어갔다. 그리고 같은 해5월 5일에는 민족통
일 전국학생연맹이 5월중에 판문점에서 회담할 것을  결의하였으며,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
회는 5월 13일에 "남북 학생 회담 환영 및 통일 촉진 대궐기 대회"를 열었다. 이와 같은 혁
신계의 움직임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네번째 배경은, 군부 내 혁신 세력의 성장과 혁명 기도였다. 군사 쿠데타 세력의 움직임은 
4.19 혁명 이후에 정군 운동이란 이름으로  처음 포착되었다. 사회 전반에서 혁명적  변화가 
일어남에 따라 군부 안에서도 정군의 필요성이 부각되었던 것이다.  표면화된 그 첫 계기는 
1960년 5월 2일, 당시 군수기지 사령관이었던 박정희 소장이  송요찬 참모총장을 찾아가 군
부에서의 3.15 부정 선거와 각종 비리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물러날 것을 권고한  일이었다. 
한편, 같은 해 5월 8일에는 육군정보참모부를 중심으로  김종필, 김형욱, 길재호, 옥창호, 신
윤창, 최준명, 석창희, 오상균 등 육사 8기생 8명이  정군을 위한 연판장을 작성하였다가 국
가 반란 음모라는 죄목으로 사직 당국의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이들은 뒤에 연합참모부 부
장인 최영희중장과 미 국방성 군원국장인 팔머(Palmer W.B.) 대장의 성명을 성토하여, 세칭 
하극상 사건으로 피소되기도 했다. 이들 정군 장교들은 허정  과도 정부에 정군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정군을 위한 구체적인 시안을 마련하도록  건의서를 제출하려 하였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장면 정권이 들어서서도 박정희 소장 등의 정군 요구는 외면 당하였다. 그래서 영관
급 정군파 장교들은 1960년 9월 10일 방문이나 건의 등의 평화적 방법으로는 정군을 추진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른바 "충무장 결의"를 통하여 투쟁 방향을 정군 운동에서 군사 
혁명으로 급선회하였다.
  박정희 소장이 육군본부 작전 참모부장으로 전임되고,  김종필이 예편되어 자유로운 몸이 
되자, 그들은 정군과 구국을 목표로 하는  혁명 조직의 규합과 확대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 
결과, 육군 206 관구 사령부, 육군 제33사단, 육군 제34사단, 육군 제12야전공병대, 육군 제1
공수전단과 육군본부. 국방부의 중견 장교들을 혁명 조직의 일원으로 포섭할 수 있었다.  이
와는 별도로 해병 제1 여단장인 김윤근준장이 중심이 되어 1961년 4월 15일에 해병대 단독
으로 군사 혁명을 일으키려 한  계획이 있었지만, 육군 계획과 횡적  제휴가 이루어져 단독 
계획은 보류되었다.
  5.16 군사 정변의 주체 세력은 박정희 소장의 지휘 아래 전후 4차에 걸쳐 혁명 계획을 다
음과 같이 세웠다.
  
  첫번째, 5.8 계획: 제1차 계획은 송요찬 참모총장이 미국에 가서 부재중인 1960년 5월 8일
을 거사일로 택하여, 해병 제1상륙사단을 주력으로 7개 지역  부대가 진군할 계획을 세웠지
만, 4.19 혁명으로 거사의 의의가 소멸되어 중지되었다.
  두번째, 4.19 계획 : 제2차 계획은 1961년에 파다하게 퍼졌던 "3, 4월 위기설" 에 대비하여 
장면 정권이 군부대에 의한 폭동  진압을 할 경우, 이를  역이용하는 이른바 "역혁명 계획" 
이었다. 그래서 폭동 진압 부대로 지정된 제6관구사령부에서  혁명조직에 가담한 김재춘 참
모가 움직여 혁명 추진이 시각을 다투었지만, 4.19 혁명 1주년의 위기설이 무사히  넘어감으
로써 군의 출동 명분이 없어져 버려, 거사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세번째, 5.12 계획: 제2차 계획이 무산된 직후, 박정희 소장이 보다 적극적인 혁명  전력을 
재정립하여 그 해 5월 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혁명  조직을 "작전 수행반"과 
"행정반" 으로 재편성하여 거사일을 기다리던 중, 조직의  이종태 대령이 동지 포섭을 하다
가 기밀이 누설되어 거사를 일단 중지하였다.
  네번째, 5.16 계획 : 기밀을 알아차린 육군 방첩대가 육군 참모총장의 지휘하에 수사를 전
개할 것에 대처하기 위해 거사의 조기 집행에 들어갔다. 그  동안 이러한 혁명 기도에 대한 
정보가 여러 차례에 걸쳐 정보 기관에 알려졌고, 그 때문에 장면 총리와 현석호 국방장관이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을 불러 물었으나.  장 총장은 "박정희 소장은  그런 위인이 못 된다" 
는 답변으로 수뇌부를 안심시켰다.
  
  위기를 느낀 박정희 군부 세력은 1961년 5월 16일 새벽,  해병 제1 여단장 김윤근 준장의 
지휘로 해병대가 출동한 것을 기점으로, 공수단은  박치옥 대령이, 제 6군단 포병대는  군단 
참모인 홍종철 대령과 문재준 대령의 인솔하에 각각 출동하였다.  그리고 구자춘 대령이 제
933대대, 백태하 중령이 제822대대, 김인화 중령이  제911대대를 각각 지휘하였다. 한강대교
에 도달한 해병대와 공수 부대는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의 지시로 출동한 헌법 제7중대 병력
과 약간의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지만, 무난히 돌파하여 서울  시내로 진입하는 데 성공하였
다. 이들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육군 본부를 접수한  제6군단 4개 포병대와 합류한 뒤
에, 주력 부대는 서울 시청으로 진주하고, 해병대는 치안국과 서울시 경찰국을, 공수단은 중
앙방송국을 이날 새벽 4시 30분경에 각각  접수하였다. 또한, 공수단은 장면 총리의  숙소인 
반도 호텔을 급습하였지만, 이미 총리는 도피하고 난 뒤였다. 혁명군은 서울 전역을  장악하
였을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주요 도시인 대구,  부산, 광주, 대전 등지를 장악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혁명군은 이날 상오 5시에 서울  중앙방송국의 첫 방송을 통하여 "우리군
부가 궐기한 것은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에게 더 이상 국가의 운명을 맡겨 둘 수 없다고 판
단하고,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방황하는 국가의 운명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라고 혁명 목
적을 전하고, 다음과 같이 "혁명 공약 6개항" 을 밝혔다. 
  
  첫째, 반공을 국시의 제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쳤던 반공 체제를  재
정비, 강화한다.
  둘째,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 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
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 도의와 민족 정기를 바
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한다.
  넷째, 절망과 기아 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 경제 재건에 
총력을 기울인다.
  다섯째, 민족적 숙원인 국토 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 할 수  있는 실력의 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
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혁명 주체 세력은 그날 방송을 통하여 "군사혁명위원회" 가 조직되어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을 통합 장악한다고 발표하였다. 이 위원회는 임시 육군본부 상황실에 설치되었다.  장도
영 참모총장은 그날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직을 수락하였다. 그리고  장면 총리가 5월 18
일에 은신처에서 나와 중앙청에서 제69차 임시 각의를 주재하고, 내각 총사퇴를 결의함으로
써 군사혁명위원회에 정부를 이양하였다. 이로써 민주당의 장면 정권은 집권 9개월 만에 단
명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이날 육군 사관학교 생도들이 군사  혁명을 지지하는 시가 행진이 
있었고, 미  국무성은 한국의  군사 정부를   인정한다고 밝혔다. 또한  매그루더(Magruder 
C.B.) 주한 유엔군 사령관은 김종필과 회담을  가진 뒤, 군사 혁명을 인정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때 평소 민심이 장면 정권으로부터 이탈하고 있다고  여겨 오던 윤보선은 박
정희, 유원식의 방문을  받은 자리에서 "올  것이 왔다" 는  긍정적인 논평을 했다.  이로써 
5.16 군사 정변은 명실공히 성공을 거두었으며, 같은 날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
의"로 명칭을 바꾸고 의장에 장도영, 부의장에 박정희. 그리고 혁명위원을  30명으로 구성하
고, 고문에 김홍일, 김동하를 추대하였다. 그 뒤에 국가재건최고 회의는 혁명 내각을 조직하
고, 내각 수반에 장도영 의장을 겸임시켰다. 장도영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인 동시에 내각 
수반으로 임명되었음에도, 실권은 부의장인 박정희 소장과  중앙 정보부장으로 임명된 김종
필에게 있었다. 이에 불만을 느끼고 있던 장도영이 반혁명 사건으로 체포되자, 혁명  주도자
였던 박정희 소장이 명실상부한 군사 혁명 정부의 실권자로 국민 앞에 부상하였다.
  5.16 군사 혁명 정부의 통치 방향은 그들의 혁명 공약 속에 잘 나타나 있는데, 혁명  정부
의 우선적인 목표는 국내외의 신망과 지지를 얻는 일이었다.  그들은 민주당의 장면 정권이 
해내지 못했던 4.19의 뒷마무리들, 곧 부정 선거 관련자 척결, 정치 깡패들의 처단, 부정  축
재자 처벌 등을 속결하고, 사회 질서와 행정 기능을 회복하여, 민주당 정권의 우유부단과 정
치 파벌 싸움에  식상한 국민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구정치인들의 활동을  묶기 위하여 
1962년 3월 16일에 "정치 활동 정화법" 을  제정하는 한편, 민정 이양에 앞서 민주공화당의 
사전 조직에 착수하였다. 외교적으로는 미국과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치중하였는데,  미국은 
처음에 혁명 정부의  정치적 성격에 의구심을  까졌다. 이  의심을 풀기 위해  혁명 정부는 
1961년 5월 18일 밤을 기하여혁신계와 용공 세력 및 중립화 통일론 자들을 검거하고, 7월 4
일에는 "반공법"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11월 11일과 12일에는 박정희  등 최고회의 의장단 
일행이 미국을 방문하여 케네디 대통령과 회담을 함으로써 미국 정부와의 신뢰를  구축하였
다. 또한, 일본과는 10월 20일에  한일 회담을 재개하였으며,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은 11월 
22일에 도쿄에 들러 이케다 수상과 회담을 가졌다.
  그리고 군사 혁명 정부는 그 동안 시급하였던 민생 문제와 안정을 위하여 농어촌 고리채
를 정리하여 서민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화폐 개혁을 단행하여 통화 유통의 일신을 꾀
하려 하였다. 또한, 한국 경제에 자력 갱생의 길을 연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다. 
경제 개발을 위해 그들은 증산,  수출, 건설을 경제의 3대 지표로  설정하였고, 다음과 같은 
주요 시책을 발표, 추진하였다.
  첫째, 공업화의 기반 구축을 위한 기간 산업, 에너지, 농수산업의 중점 개발.
  둘째, 기간 종목인 화학 비료, 시멘트, 제철, 정유 공장 등의 건설.
  셋째, 금융 제도의 정비와 국공영 기업의 경영 합리화 추진.
  
  또한 병역 기피자, 밀수범, 조직 폭력배  등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사회악"  일소를 위해 
강력한 단속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리고  혁명 직후부터 언론에 대한 검열을  실시하였으며, 
언론 정화를 위해 6월 22일에는 공보부를 신설하였다. 사회  생활 전반에 대한 안정을 목적
으로 "중앙 정보부법" 을 제정,  공표하였는데, 김종필을 초대 정보부장에  임명하여 군정의 
기반을 튼튼히 하였으며, 사회 기강의 확립과 국민 정신의 재무장을 위하여 "재
건 국민 운동" 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상과 같이, 5.16 군사 정변은 장면 정권의 무질서 정치에 대한 또 하나의 무질서 정치의 
대응이었다. 이는 정치 참여의 폭발로 인한 무정부주의에 대처하는, 정치 참여 제한의  전체 
정치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학자 헌팅턴이 말하는 무정형 정치의  연장선상에
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민족사적 견지에서 볼 때, 5.16 군사 정변은 그렇게 간단히 단순
화할 수 없는 면이 있다. 
  5.16은 결과적으로 민족사적 일대 전환의 계기를 마련한 역사적 사건이며, 우리 민족의 자
립적 근대화의 시발점으로 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박정희는 스스로 "5.16은 
우리로 하여금 민족의 자아를 되찾고  자기 자신을 알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민족 중흥을 
위한 르네상스였다"고 토로했던 것 같다. 이를 5.16 주역들의 자기 정당화라고만  단정할 수 
없는 것은, 5.16을 기점으로 한국 경제 성장과  근대화가 급속히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다. 그
런 반면에, 5.16은 군사의 정치  개입이라는 나쁜 선례를 남겼고, 관료  위주의 체제를 뿌리 
내리게 하였으며, 인권 탄압, 빈부의 격차 등등 새로운 사회 문제점들을 노출시켰다는  점에
서는 여전히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Study 2 > 고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한집 (破閑集)  (0) 2020.06.30
퇴계 선생 문집 (退溪先生文集)  (0) 2020.06.30
창덕궁  (0) 2020.06.30
육전조례 (六典條例 )  (0) 2020.06.30
육도 (六韜)  (0) 2020.06.3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