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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2/고전

창덕궁

by FraisGout 2020. 6. 30.

宮闕 槪觀

1. '宮', '殿', '闕'

'宮'이라는 글자는 상형문자로 사각형 마당에 주위로 4개의 방을 배치한 건축평면도의 모습을 나타내는데, 이 글자는 집안에 방이 많다는 것을 나타내고 규모가 비교적 큰 건물임을 표시한다.
漢代(BC 206-220) 이전의 宮室은 일반 가옥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한대 이후로 황제가 자신의 집을 '宮'으로 부른 이래로 皇宮이 아닌 건물에 대해서는 더 이상 궁이라 부르지 않았다. 이렇듯 황제가 사용하는 건물만을 '궁'이라고 부른 뒤부터 '궁'과 '전', 두 글자는 항상 연결되어 쓰였다.
일반적으로 예의를 거행하고 사무를 처리하는 중심건물을 전이라 하고 생활하고 기거하는 부분을 궁이라 하였다.
'闕'은 원래 부락 시대의 주거지 입구 양옆에 설치한 방위용 강루(崗樓)에서 비롯된 것으로 오늘날 군사기지 입구에 세우는 초소같은 것이다. 이 궐을 궁에 사용한 시대에는 문을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궁의 문 밖에는 2개의 대를 만들고 위에 누관(樓觀)을 지었으며, 가운데에는 문을 만들지 않고 양옆에 문을 두어서 중앙이 뚫려 자연스레 길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형식은 나중에 문제로 대치되었으나 궐의 의미는 淸代까지 지속되었다. 우리나라의 宮闕에서도 이런 자취를 찾아볼 수 있는데, 창경궁 정문 홍화문 좌우에도 각루가 있고, 더욱 형식화되기는 하였지만 景福宮의 궁성 남쪽 양 끝에 둔 동,서십자각도 궐이 변형된 것이다.

2. 宮闕짓기

宮闕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도읍을 정하고 그것을 건설해야 할 것이다. [周禮考工記]에는 國都의 구성원리를 밝히고 있는데, '前朝後市'와 '左廟右社'가 그것이다. 前朝後市란 宮闕을 중심으로 앞쪽에는 정치를 행하는 관청을 놓고 뒤쪽에는 시가지를 형성한다는 것이고, 左廟右社란 宮闕을 중심으로 그 왼쪽에는 왕실 조상의 사당인 종묘를 놓고 오른쪽에는 社稷壇을 배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적 규정은 周代 이후 줄곧 중국의 도성 기본 구성 원리로 사용되었는데, 실제로는 조금씩의 변형이 있기 마련이었다. 조선의 경우에도 景福宮은 도성의 한복판에 있지 않고 북서쪽에 치우쳐 있으며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궁성 남쪽의 큰 길 좌우에는 議政府, 6曺, 漢城府, 司憲府, 삼군부 등 주요 관청을 배치하였고, 그 남쪽 동서로 뚫린 큰 길(동대문과 서대문을 잇는 길, 곧 지금의 종로)에 시장을 열어 시가지를 형성하였다. 종묘와 사직은 각각 景福宮의 왼쪽과 오른쪽에 놓았으나 等間隔으로 대칭이 되도록 배치하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보면 주제를 의식하였으되 漢城의 지형과 풍수적 명당터를 더 존중하여 도성을 계획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도성의 구성원리와 같이 宮闕에도 구성원리가 있는데, '前朝後寢'과 '三門三朝'가 그것이다. 前朝後寢은 앞쪽에 정치를 하는 장소인 조정을 두고 뒤쪽에 임금을 비롯한 왕실의 거처인 침전을 배치한다는 것이고 三門三朝는 宮闕 전체를 3개의 독립된 구역으로 분할하여 각 구역을 울타리로 둘러막고 각 구역사이에는 문을 두어 연결한다는 것이다.
이 세 구역은 燕朝, 治朝, 外朝라고 하는데, 燕朝는 왕과 왕비 및 왕실 일족이 생활하는 사사로운 구역이며, 治朝는 임금이 신하들과 더불어 정치를 행하는 공공적인 구역으로 正殿과 便殿이 여기에 해당되며 외조는 조정의 관료들이 집무하는 관청이 배치되는 구역이다.

3. 조선의 宮闕

한성은 통일신라시대까지는 한양군에 불과하였으나 고려시대에는 개성에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수도를 보좌하는 곳으로서 특별히 남경으로 승격되었다. 더구나 지리도참설의 영향 때문에 숙종(1095-1105) 때에는 남경과 도성과 宮闕을 지었으며 뒤이어 공민왕(1351-1374) 때에도 남경으로 천도할 계획 아래 새롭게 宮闕을 짓기도 하였는데, 끝내 천도를 실행하지는 못하였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한성은 드디어 새로운 도읍지로 채택되었는데, 조선 개국에 공이 컸던 鄭道傳(?-1398)이 도성 건설의 총책임자로 도성의 계획, 景福宮이라는 이름과 景福宮 안 여러 건물의 이름 짓기, 종묘와 사직의 위치 결정, 景福宮 설계 등에 깊이 관여했다.
조선의 宮闕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다 불타고 새로 지어졌기 때문에 보통 이 때를 중심으로 시기를 나누어서 파악한다.


昌德宮의 배치와 특징

昌德宮은 正宮이 아니라 離宮이라는 성격상의 차이도 있고 삼국시대 이래로 궁실의 조영에서 적용되는 지형에 따라 적절히 대응하여 시설하는 기법을 활용함으로써 한국적인 궁궐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궁이라는 점이 큰 특징이다.
주변의 배치를 살피면 昌德宮의 동쪽에는 昌慶宮이 있고 북쪽으로는 昌德宮과 昌慶宮에서 공동으로 사용된 후원이 있다. 남동쪽으로는 왕실에서 매우 중요시했던 종묘가 있으며 서쪽으로는 정궁인 景福宮이 있어 거리가 가까워 궁궐의 위치로서는 더할 수 없이 좋은 곳이 昌德宮임을 알 수 있다.
전체적인 배치의 구분을 하면 仁政殿의 동쪽에 외청과 璿源殿이 있고 중앙부는 仁政殿 일곽의 외전이 되며, 동쪽에는 大造殿 일곽의 내전이 배치되고 북쪽으로는 後苑의 경관이 펼쳐진다. 昌德宮은 그 지형이 넓게 탁 트인 곳이 아니고 후면에 낮은 언덕이 있고 좌우로 평지가 펼쳐지는 곳이다. 따라서 건물의 구성은 이 지형을 이용하여 이와 같이 배치한 것이다.
궁의 정문인 敦化門이 동남쪽 모서리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지형적인 이유가 있겠으나 예부터 대문에서 내당이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게 일맥 배치하는 기법과 일맥 상통하는 배치법이라 할 수 있다. 이 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꺾여 錦川橋를 건너게 되는데 이런 다리는 어느 궁에나 있는 것이지만, 이 錦川橋는 문에서 주진행방향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직각으로 꺾여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錦川橋를 지나면 지금은 없는 건물인 進善門이 있고, 이 문을 들어서야 仁政門 앞뜰이 된다. 이 뜰의 동쪽에는 내전으로 들어가는 肅章門이 있고 남쪽은 행각으로 둘러 있는데, 이 뜰은 방형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고 肅章門 쪽의 폭이 좁아져 사다리꼴로 부정형이다. 進善門과 肅章門, 행각은 현재 복원중이다.(98년 10월 현재) 
仁政殿 동쪽에 仁政殿보다는 뒤로 물러서서 宣政殿이 배치되었고 그 동쪽에는 내전인 熙政堂과 大造殿 일곽이 있다. 특히 大造殿은 엄격히 통제되는 궁궐의 중심부에 해당되는데, 궁밖에서 大造殿까지 가려면 여러 갈래의 길이 있지만 어느 경우라도 5개 이상의 문을 더 통과해야 닿을 수 있다고 하니 九重宮闕이란 말 그대로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겹겹이 둘러싸인 내전 일곽은 남향인 외전과는 달리 건물의 중심축이 서남향이 되는데 大造殿 북쪽에서의 지형이 서남쪽으로 낮아지기 때문이다. 외전과 내전의 축이 어긋나 교차하므로 인접하는 부분이 옹색하게 되는 것을 바로잡기 위해 건물의 축을 동쪽으로 이동시키는 평행축 기법을 사용하였으며 외전과 내전이 접속되는 부분은 건물과 담장, 그리고 통로와 마당을 부정형적으로 천연덕스럽게 연결시키고 있다. 억지로 감추려는 기색이 아니고 당연히 그렇게 처리해야 한다는 당당한 기세이다. 땅이 그런 모습이니 마땅히 사람도 그에 따라야 한다는 진솔한 건축기법을 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오히려 일제시대에 변형된 현재의 모습이 정형화시키고 감추려고 애쓴 흔적이 엿보인다.
仁政殿의 서쪽으로는 임금님의 초상화를 모시는 璿源殿 일곽이 있고 그 남쪽으로 奎章閣, 奉謨堂, 冊庫 등 외전에 속한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이상과 같은 昌德宮의 배치는 경복궁과는 매우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즉, 경복궁은 외전과 내전이 앞뒤에 놓이고 정문과 정전은 남북직선축상에 나란히 놓여 질서정연한 대칭적 구성을 하고 있는데, 이에 반하여 昌德宮은 대칭적 구성이나 직선축상에 건물배치를 하지 않고 지형 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하고 있다.

1. 태종(太宗)의 신궁(新宮) 영건(營建)

태조 4년(1395년) 9월에 새 궁궐 경복궁이 완성된 후, 얼마되지 않아 태조 7년 8월에 '왕자의 난'이 일어나 세자 방석이 죽자 태조는 왕위를 정종(定宗)에게 양위한다. 그러나 정종은 개성으로 돌아가고 다음 해에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정종은 방원에게 양위하니 그가 바로 조선 3대 임금인 태종이다.
태종이 즉위하여 한양(서울)으로 재천도하게 되는데 이 무렵 이궁(離宮 ; 태자궁, 세자궁의 총칭)으로 지은 것이 창덕궁이다.
창덕궁 조성공사는 태종 4년(1404년) 10월에 시작, 다음 해 10월에 일단 끝난 단기간의 공사이므로 태종은 재위중 계속하여 궁안의 문이나 누각들을 세웠으니 돈화문(敦化門)이 완성되는 태종 12년에 가서야 거의 궁궐 면모가 갖추어지게 된다.
창덕궁은 크게 인정전(仁政殿) 일곽(一廓)인 외전과 대조전(大造殿) 일곽인 내전으로 나누어 진다. 정문인 돈화문에는 큰 종을 달아 새벽과 밤늦게 쳐서 시간을 알리고 치안질서를 유지하는데 이바지 했는데, 특히 이 종은 전국 각도의 무쇠 1만5천근을 모아 만들었으며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종명을 지어 새기게 하였다.

2. 창건후 임진난(任辰亂)까지

창건후 임진난이 일어날 때가지 약 180여년간 큰 재난 없이 존속되었다. 연산군 대에 이르러 무리한 공사를 벌였으나 모두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이 왕명에 반대하는 신하는 모두 처형하는 폭정을 하였는데 이 때 많은 전각들이 개조되었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란이 일어나 한양이 함락될 때 이 궁도 화재를 당했다. 이 때의 사실을 선조 수정실록 25년 4월초는 이렇게 기록한다.
"제일 먼저 장예원과 형조가 탔으며 이 이국은 공사노비문적이 있는 곳이다. 삼궁이 모두 탔으며 임해군가가 타고 병조판서 홍여순가가 많은 축재를 하였다하여 난민들이 불태웠다." 
이 기록으로 보아 왜군들이 한양에 입성하기 직전 왕이 도성을 버리고 피난을 떠나자 곧 난민들에 의하여 소실되었고 화재를 당한 후 15년이 경과하여 선조 40년경부터 광해군 원년 사이에 제1차 공사로써 주요 전각을 비롯하여 대개 복구가 되었고 다시 광해군 5년에 제2차 공사로서 완전한 재건 복구가 되었던 것이다. 창건 후 제2의 건설이었다.

3. 광해군 이후 순조까지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 창덕궁은 광해군의 소어처였으므로 반정군이 횃불을 들고 왕을 수색하다가 실화되어 여러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인정전은 화를 면하였다. 이것이 창덕궁의 두 번째 큰 화재사건이었다.
그 동안 정묘호란과 인수대비의 상사 등으로 늦어지다가 인조 25년에야 비로소 인경궁을 헐어서 여러 전각들을 복건하였으니 이것을 제3차 건설이라할 만 했다. 그후 정조 년간까지 부분적인 화재와 수리가 있었으나 큰 영건은 별로 없었는데 순조 33년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거의 다 탔으니 제3차 대화가 되는 셈이다. 그후 1년만에 복구하였다.

4. 일제시대의 창덕궁

1908년경 일본인들에 의하여 궁전일부가 변형되어 인정전은 서양식 가구와 실내장식이 들어서기 시작, 일제 독점 이후 정권이 일본인들의 손에 넘어간 후로 조선왕조 마지막 왕인 순종이 실의 속에 창덕궁에서 지낼 때인 1917년에 화재가 일어나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며 복구시에는 한국식을 위주로 하고 양식의 건물도 짓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도중에 고종의 승하와 인산, 3·1독립운동 등의 큰 일이 있었던 때문인지 1920년에 가서야 준공을 보았다. 이때 경복궁의 일부 건물을 철거하여 구재를 쓰도록 하였으니 우리 나라 왕궁 중 정궁의 얼을 뿌리채 없애려는 일본인들의 간계에서 나온 것이다.
이와 같은 창덕궁에서 순종은 이완용에게 합병하기로 하고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한국의 통치권을 일본에게 양위한다는 데에 조인하게 되어 오백년 왕궁의 창덕궁은 순종이 "창덕궁 전하"라는 칭호로 여년을 보낸 비운의 궁궐이 되고 만 것이다.
그후 이 궁은 내외국인에게 관람을 허가하였으며 이에 다른 각종 시설의 개수가 있었고 전각의 태반이 철거되어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된 것이다.
이에 따라 1976년부터 1978년까지 약 2년간에 걸친 건물 및 주변의 정비가 이루어지고 일반인의 관람을 제한하여 더 이상의 훼손과 변모를 막고 현상을 유지, 보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궁궐의 건물들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우리 나라 전통 목조건물에 대한 몇 가지 기본적인 점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목조건축은 크게 나누어 기단부와 몸체부, 그리고 지붕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⑴ 기단부
기단부는 땅 위에 흙을 돋우어 높은 단을 세우고 주변에 돌을 쌓아 올린 것을 가리킨다. 요즈음 우리들이 이용하거나 사는 건물에서는 이런 기단을 만들지 않지만 옛날 궁궐 건축에서는 반드시 기단을 먼저 만든 다음에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이렇게 기단을 반드시 세우는 이유는 건물을 지면보다 높게 세워서 사람들이 집을 우러러 보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지금의 건물은 단지 사람들이 이용하기에 편리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많이 있지만 옛날에는 집을 지을 때 그 집에 사는 사람이나 또는 그 집에 모시는 대상을 특별히 강조하는 생각이 있었다. 집을 단순히 사람이 잠자고 먹고 쉬는 곳으로 생각하지 않고 건물이 집 주인이나 집에 모시는 대상과 마찬가지로 존중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집을 우러러 바라보도록 기단을 높이 세웠다. 기단에는 사람이 오를 수 있도록 계단이 설치되게 마련인데 때로는 계단의 옆에 구름무늬를 장식하거나 짐승을 장식하기도 하였다. 구름무늬를 장식할 경우는 집에 모시는 대상이 하늘 위에 있는 신령과 같은 높은 분이라는 의미가 있고 짐승을 장식하는 경우는 나쁜 귀신이 집 주인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기단은 재료에 따라 흙이나 돌, 전돌, 그리고 기와 등으로 쌓기도 하는데 재료의 여부를 막론하고 건물의 규모나 용도에 상관없이 초가삼간에서부터 궁궐의 정전에 이르기까지 모두 축조된다. 이러한 기단으로는 돌로 쌓은 석축기단이 가장 많이 사용되며 쌓는 방식에 따라 자연석 기단과 가구식 기단으로 대별된다.
① 자연석 기단 : 비슷한 크기의 자연석을 가공하지 않은 채 외부에 돌출된 면만 대충 다듬어서 쌓은 것을 말한다. 쌓는 방식에 따라 각 단의 층이 구분이 되도록 쌓는 바른층 쌓기(고른층 쌓기)와 성벽의 석축과 같이 층의 구분이 없이 쌓는 허튼층 쌓기(난층 쌓기)로 분류된다.
② 가구식 기단 : 쌓는 돌을 모두 정교하게 다듬어 맞추어 올리는 기단으로 지면에 놓는 지대석과 지대석 위에 수직으로 세워놓은 면석, 그리고 면석을 덮어 기단의 바닥면을 이루는 갑석으로 이루어져서 목조의 가구를 쌓는 것처럼 구성한 기단을 말한다.

⑵ 몸체부
{{}}기단을 세우고 나면 그 위에 몸체를 세우게 된다. 몸체는 기본적으로 나무기둥을 세우고 기둥 위에 대들보를 걸어 지붕의 힘을 받도록 한다. 이 기둥과 보는 목조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뼈대가 된다. 그래서 기둥이나 대들보는 일상생활에서도 꼭 필요한 가장 중요한 것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대들보에는 다시 종보라는 작은 보를 하나 더 얹어 놓고 그 위에 대공이라는 받침재를 올려서 지붕의 제일 높은 부분인 종도리를 받도록 꾸민다. 지붕을 꾸미기 위해서는 경사지고 가는 서까래를 지붕 위에 고루 깔아야 하는데 이 서까래를 경사지게 걸칠 수 있게 서까래와 반대 방향으로 걸쳐 놓는 것이 도리이다. 도리 중에는 바깥 기둥 위에 놓이는 제일 낮은 것에서부터 대공 위에 높이는 제일 높은 도리인 종도리까지 건물에 따라 여러 개가 놓인다.

⑶ 지붕
서까래를 깔고나면 그 위에 흙을 고루 바르고 나서 기와를 덮는다. 기와에는 밑바닥에 까는 암키와와 위에 올려 놓는 수키와가 있는데 암키와와 수키와를 서로 번갈아서 올려 놓기 때문에 우리나라 건물에는 기와에 의해 생기는 아름다운 지붕의 선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된다. 지붕은 멀리서도 가장 잘 보이는 곳일 뿐 아니라 집을 상징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지붕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꾸미고 또 건물의 격식에 따라 서로 다른 형식의 지붕을 만들었다.
우선 제일 모양이 간단한 지붕은 서로 경사진 두 개 지붕면이 맞닿아 있는 맞배지붕이다. 이것은 규모가 작거나 부속건물로 쓰이는 집에 자주 사용되는 모습이다.
그 다음에 쓰이는 지붕은 모임지붕이라는 것인데 이곳은 앞뒤는 물론 좌우 방향 네 면으로 지붕이 각각 경사지도록 하여 지붕면이 모두 가운데를 향해 모아지도록 한 것이다. 모임지붕에서 앞뒤면이 길고 좌우가 짧을 경우에는 지붕이 한 가운데서 모아지지 않고 앞뒤가 길게 경사진 지붕이 된다. 이럴 경우의 지붕은 따로 우진각지붕이라고 부른다.
근정전 처럼 격식이 있는 중요한 건물에는 팔작지붕이라는 것을 만든다. 팔작지붕은 위에는 맞배지붕이 되고 그 아래는 우진각지붕처럼 사방으로 경사진 지붕면이 생기는 지붕을 가리킨다.

지붕의 장식

지붕에는 또 여러 가지 상징적인 모양을 장식하기도 한다. 우선 지붕 제일 꼭대기는 용마루라고 불러서 집의 가장 높은 곳을 가리키는데 이 용마루 양쪽 끝에는 보통 치미 또는 취두라는 짐승을 장식한다. 이 짐승은 건물에 불이 나거나 또는 나쁜 귀신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하는 뜻을 지녔다고 한다. 또 양쪽 경사진 지붕면에는 내림마루라는 경사진 돌출선이 생기는데 그 아래 끝에 용 얼굴을 장식한 용두라는 기와를 두어 역시 건물을 보호하도록 한다. 또 팔작지붕의 네모서리에는 잡상을 올려 놓는다. 잡상은 말그대로 여러 잡동사니나 조각을 가리키는데 보통 서유기에 나오는 손오공이나 삼장법사, 저팔계를 올려놓기도 하고 아니면 무사의 모습이나 신선을 조각해서 올려 놓기도 한다.

공포

이 밖에 우리나라 목조건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공포라는 것이 있다. 공포는 기둥위에 짜여지는 독특한 모양을 한 여러 나무토막이 짜임으로, 주로 밖으로 길게 뻗은 처마 서까래를 받치는 역할을 한다. 목조건물은 비에 약하기 때문에 비가 건물에 직접 닿지 않도록 될 수 있는대로 처마를 길게 내밀게 되는데 이 때 기둥 위에 처마 서까래를 받칠 수 있는 공포를 설치하는 것이다.
공포는 본래 중국 건축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우리 풍토나 취미에 알맞게 모양을 가다듬어 중국과 다른 독특한 형태의 공포를 만들어 내었다. 조선시대 궁궐에서 공포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널리 쓰였다. 하나는 곡선장식이 많고 작고 정교하게 다음은 많은 나무토막이 촘촘히 열을 지어 처마를 받치도록 한 다포식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조금 단순하고 기둥이 있는 곳에만 약간 밖으로 내밀은 익공식이라는 것이다. 이 가운데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사정전같이 격식이 높은 건물에 쓰이는 것은 다포식이고 내전의 침전이나 그밖에 부속건물에 널리 쓰인 것은 익공식이다.

⑴ 주심포식 구조 - 부석사 조사당
기둥의 위에만 공포가 짜이는 것으로서 위쪽의 무게가 공포와 기둥을 통하여 지면으로 전달되는 구조체계를 가진다. 기둥 사이에는 창방이라는 횡부재가 기둥머리를 파고 놓여지며 창방의 중앙에는 화반이나 포벽이 구성된다.
⑵ 다포식 구조 - 신륵사 조사당
기둥의 위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놓아 입면상 하나의 공포대를 횡으로 구성하여 매우 화려한 모습을 가지는 형식이다. 위쪽의 무게가 기둥 뿐만 아니라 벽을 통하여도 전달되므로 기둥머리를 연결하는 횡부재인 창방만으로는 상부의 하중을 지탱하기 어려워 창방 위에 평방이라는 횡부재를 하나 더 올려 놓아 공포를 구성한다.
⑶ 익공 형식 : 기둥 위의 밖으로는 쇠서의 형태로, 그리고 안으로는 보아지의 역할을 하는 하나의 부재를 기둥머리에 맞물리게 끼우고 그 위에 주두 두공과 쇠서를 짜서 공포를 꾸미는 형식이다. 따라서 외관상으로는 주심포 형식과 유사하게 보이나 주심포에서 보이는 헛첨차의 위치에 놓이는 쇠서 보아지가 하나의 판의 형태로 기둥과 주두를 함께 감싸고 있어 그 위로 주두 위에 놓이는 쇠서의 하단부와 서로 맞닿게 되는 형태를 가진다. 익공은 놓여지는 쇠서의 수에 따라 초익공과 이익공으로 대별되며 이익공은 그 상단에 주두와 같은 형태의 납작한 재주두를 놓아 대둘보 머리를 받치기도 한다. 익공 형식은 외관이 다포계의 건물처럼 화려하지 않으나 부재의 양이 훨씬 줄어들며 또한, 치목과 결구의 합리적인 방법 때문에 사찰의 부속건물이나 궁궐의 편전과 침전, 문루, 그리고 향고나 서원, 상류주택 등 조선시대의 각종 건물에 폭넓게 사용되었다.
창덕궁은 누가 언제 왜 지었는가?

조선 왕조의 첫왕 태조는 1392년 고려의 서울이었던 개성에서 즉위하였다. 태조는 왕이 되자 개성을 벗어나 새 수도를 짓고 옮겨가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 1394년 10월 28일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로부터 첫 궁궐 경복궁을 짓기 시작하여 1년 2개월쯤이 지난 태조 4년(1395년) 12월에 그곳으로 들어갔다. 그 당시에는 경복궁이 한양의 유일한 궁궐이었다. 그러나 궁궐이 하나만 있어서는 곤란하였다. 만약 궁궐에 큰불이 난다든가, 또는 전염병이 돈다든가 또는 왕이 다른 어떤 이유로 그 궁궐에 살기가 싫어졌다든가 하는 이유가 발생하면 옮겨 갈 다른 궁궐이 더 필요하였다. 그래서 조선왕조에서는 서울 한양에 늘 둘 이상의 궁궐이 있었다. 왕이 정규적으로 살면서 활동하는 제일 궁궐을 법궁(法宮)이라 하고, 필요한 경우 옮겨가서 살면서 활동하는 궁궐을 이궁(離宮)이라고 불렀다. 이궁도 법궁과 마찬 가지로 궁궐로서 규모와 체제를 갖춘 정식 궁궐이었다. 조선왕조의 궁궐을 경영하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법궁-이궁 양궐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
경복궁에 살고 있던 태조 7년(1398) '제일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태조는 정종에게 왕을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정종은 왕이 되자 한양을 떠나 다시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그리고 왕위에 오른지 2년만인 1400년 동생인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제3대 왕으로 즉위한 태종은 다시 한양으로 재천도를 강력하게 추진하여 태종 4년(1404) 스스로 나서서 한양의 지금 창덕궁 자리에 새 궁궐을 짓기로 결정하였다. 그 때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이듬해 10월 19일 새 궁궐이 완공되어 10월 25일 창덕궁으로 이름을 지었다. 이에 따라 이후 왕들은 필요에 따라 경복궁과 창덕궁을 오가며 생활하였다. 처음 완공되었을 때 규모는 195간으로 775간이었던 경복궁에 비하면 약 3분의 1정도였다. (홍순민의 창덕궁 참조) 

창덕궁의 주요건물 살피기

1. 전체 모습

창덕궁은 서울의 5대 고궁 가운데 가장 넓다. 창덕궁의 전각 배치는 동궐도(東闕圖)에 소상히 나와 있다. 고려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동궐도는 순조 연간에 도화서(圖畵暑) 화원들이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각과 전경을 조감도식으로 그린 그림이다. 현재 창덕궁에는 인정전을 비롯한 41동의 전각들과 후원이 남아 있다. 전각 배치를 보면 경복궁이 직선적이고 남성적인 데 비해 창덕궁은 곡선적이고 여성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이는 창덕궁 앉은자리가 응봉(鷹峯) 자락의 자연 지세를 이용하다 보니 전각들을 바둑판처럼 질서정연하게 배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유분방한 창덕궁의 전각과 후원의 배치에서 우리는 옛 조상들의 자연관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자연 생태적인 전각배치는 은밀하고 긴장된 분위기를 연출한다.
현재 남아 있는 전각들은 위치상으로 보면 크게 세 구역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즉 인정전을 중심으로 한 외전, 희정당과 대조전을 중심으로 한 내전이 있는 구역과 마지막 황후 윤비와 영친왕후 이방자 여사 등 비운의 주인공들이 한 많은 삶은 마감했던 곳인 낙선재 구역, 부용정과 주합루가 있는 후원 구역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남아있는 전각들은 동궐도가 그려질 당시와는 큰 차이가 있다. 신하들이 업무를 보던 많은 궐내각사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고 그 자리엔 잔디와 나무로 채워져 있는 것이다.

2. 중요 건물 살피기

◈돈화문(敦化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보물 383호)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궁궐의 정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태종 때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때(1608) 다시 복원했으니 숭례문(남대문)과 더불어 약 400년이 된 것으로 조선시대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흔치 않는 문화유산이다. 우진각 지붕으로 덮은 돈화문은 2층 다락구조로 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 문에 시각을 알리는 종이 달려 있어 시각을 알려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당시 돈화문은 모든 도로의 기준점이었으나 대한제국 시절부터는 광화문 네거리에 도로 원표를 세우고 기준점으로 삼았다. 창덕궁의 정문이긴 하지만 임금이나 외국사신이 드나들 때만 열렸으며, 신하들은 동쪽에 있는 단봉문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금천교(錦川橋)
돈화문에서 몇 십미터를 북쪽으로 진행하면 오른쪽, 동쪽으로 돌아 창덕궁 내부로 들어가게 되어 있고, 그 앞에 북쪽에서 남쪽으로 개울이 흐르고 있다. 이 개울을 금천(禁川)이라 하는데 궁궐의 안과 밖을 구별하는 의미와 배산임수의 뜻을 살리기 위한 명당수(明堂水)의 의미가 있다. 금천에는 당연히 다리가 놓여 있게 마련인데 창덕궁의 다리를 금천교(錦川橋)라 한다. 금천교는 창덕궁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건조물이다. 나무로 만든 다른 건물들은 임진왜란 때, 또 이후 화재나 변란 등에 모두 불타 버리고 새로 지은 것들이나, 금천교는 태종 11년 창덕궁을 처음 지을 당시 지은 것이다. 금천교에는 잡것들의 접근을 막는 상서로운 짐승들이 조각되어 있는데 홍예의 교각 위에 앞다리를 쭉 뻗고 익살을 부리며 앉아 있고, 밑 쪽에도 남쪽에는 해치, 북쪽에는 현무가 있다.

◈진선문(進善門)
금천교를 건너면 바로 나타나는 문인데, 현재 복원 중인 문이다. 궁에는 정전(법전)으로 가기 위해서는 삼문을 지나야 하는데, 돈화문-진선문-인정문이 삼문이 되므로 중간에 위치한 문이라 하겠다. 이 문 주위에는 각종 궐내각사들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아무 것도 없다.

◈인정문(仁政門)
진선문 지점을 지나서 가다가 다시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인정문이 있다. 인정문은 이 궁의 정전인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정문이다. 이 인정문 앞에는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들이 와서 치도록 북이 있었다고 한다. 태종대에는 이를 신문고(申聞鼓), 영조 대에는 등문고(登聞鼓)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궁궐 안에까지 들어와 이 북을 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인정전(仁政殿)
창덕궁의 정전이다. 이 곳에서는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 접견 등 국가의 중요행사가 거행되었던 곳이다.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과 같이 왕의 권위를 상징하듯 지붕은 2층으로 하고, 그에 걸맞은 다포계식 공포로 치장을 하고 있다. 겉은 2층이지만 내부는 위아래가 트여 있다. 안을 들여다보면 왕이 앉은 용상이 있고. 용상 뒤에는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라고 불리는 해와 달이 떠 있고 다섯 봉우리가 솟아 있으며, 바위와 소나무, 거북 등 상서러운 짐승들이 그려진 병풍이 있다. 왕이 있는 곳에는 일월오악도가 있었다. 그 위에는 화려한 장식을 한 닫집-보개(寶蓋)가 설치되어 있고, 그 위 천장에는 목각으로 만든 두 마리의 봉황새가 날고 있다. 모두 왕을 상징하는 것들이다. 내부의 바닥은 원래 전돌 바닥이었으나 1908년 서양식 쪽마루를 깔고 전등을 설치하였다.
이제 앞마당을 보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정전 앞마당에는 잔디가 깔려 있었다. 일본이 저지른 만행이었다. 이제 본 모습인 박석을 깔아 자연미를 되찾았다. 다른 궁의 정전과 마찬가지로 품계석이 보인다. 정1품에서 종9품까지 18개의 품계석이 동서 쪽으로 나뉘어져 있다. 동쪽은 문관의 자리요, 서쪽은 무관의 자리다. 그러나 만조백관들이 이곳에 나와 왕을 알현하는 경우에는 신년하례(新年賀禮) 등 1년에 고작해야 몇 차례뿐이다. 생각해보면 품계가 높은 사람이야 이 자리에 나오는 것이 당연지사였겠지만 품계가 낮은 사람들은 각 부처에서 차출되어 나왔을 것이다. 그 사람들은 그 때 어찌 생각했었을까? 아무나 볼 수 없었던 용안을 보게 되어 기쁘게 생각했을까, 아니면 차출 당한 것에 대한 불만에 입이 튀어 나왔을까? 종9품의 품계석에 서서 생각해 보면 재미가 있다.
인정전과 인정문 지붕의 용마루를 보자. 구리로 된 꽃 문양이 각각 다섯 개, 세 개씩 박혀 있다. 1907년 일본의 입김으로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오면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홍순민) 우리 옛 건물 어디에도 용마루에 이런 식의 꽃 문양을 단 것이 없는데 이 곳에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李)씨, 곧 조선이 일본과 대등한 자주국가가 아닌 이(李)왕가에 불과하다는 의미로 오얏꽃 문양을 박았다는 이야기다. 용마루 양쪽 끝에는 망새가 있다. 경복궁 근정전에는 취두(머리가 독수리 모양으로 생긴 상상의 동물)인데 인정전의 망새는 용두(龍頭)다. 망새는 화마로부터 전각을 보호하기 위해 벽사( 邪)의 의미로 세운다.

◈어차고(御車庫)
인정전을 되돌아 나와 내부로 진행하다 보면 회랑이 끝나는 지점 왼편에 지점에 어차고라고 안내판이 설치된 건물이 있다. 그 안에는 순종이 타던 포드 자동차, 마차, 사인교, 초헌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곳을 이렇게 차고, 전시장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대에 들어와서부터이다. 원래 이 건물의 이름은 비궁청(匪躬廳)으로서 대신들이 왕을 만나러 궁궐에 들어왔을 때 머무는 빈청이었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고위 관료들이 머물던 곳이 어차고가 되었다.

◈선정전(宣政殿)
빈청에서 북쪽으로 보면 왼편에 지붕이 파란 기와로 덮인 집이 있다. 이곳이 편전(왕의 집무실)인 선정전이다. 궁궐 전각 가운데서는 유일하게 청기와다. 천장은 우물마루를 하고, 그 가운데 봉황을 띄웠다. 지금은 뜰을 손질하느라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아직도 우리는 정치의 구역인 외전에 있다. 우리 궁궐의 기본적인 전각 배치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이었다. 즉 앞에는 정치와 관련된 전각을 배치하고 그 뒤에 왕실의 생활 공간을 마련하는 전각 배치다. 인정전과 선정전은 전조의 중심 건물이고, 희정당과 대조전은 후침의 중심 전각이다.
빈청에서 선정전으로 가는 길은 휑한 모래밭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관청들이 있었다. 임금의 비서실인 승정원, 왕실 학문 연구 기관인 홍문관, 정승과 판서들이 궁에 들어 왔을 때 일을 하던 곳인 정청·대청, 그리고 환관들의 관서인 내반원 등이 있었지만 일제시대 때 헐리고 말았다.

◈희정당(熙政堂)
왕의 연거지소(燕居之所), 왕이 일상적으로 늘 기거하면서 생활하는 건물, 궁궐 가운데서도 왕의 집이다. 순조 이후로는 편전처럼 사용하였다. 이 곳에서 왕은 주요한 인물들을 만나서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등 실질적으로 중요한 결정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정치적으로는 궁궐 가운데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그런 인상을 받을 수 없이 썰렁하고 어색하다.
1917년(순종)에 창덕궁에 큰불이 났었는데 이 때 불탄 것을 경복궁의 강녕전을 이전하여 1920년에 재건한 것이다. 큰 건물을 좁은 터에 옮겨다 놓으니 무턱대고 크기만 클 뿐 주위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새로 세우는 과정에서 대청에 전등과 유리문과 커튼을 설치하여 양식구조로 만들었다. 건물 남쪽에는 돌출된 지붕이 있는데, 이는 자동차가 드나들기 쉽도록 개조한 것이다. 전통 궁궐 건축과 많은 차이가 있어 아무래도 어색하다.

◈대조전(大造殿)
희정당 북쪽으로 이동하면 구중궁궐인 대조전이 있다. 왕비의 침전이다. 대조전의 문은 선평문이다. 선평문에서 바라보면 높은 월대 위로 대조전이 보이는데 옛날에는 대조전 중심의 툇마루가 바로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다른 가리막이 있었을 것이다. 이 건물도 역시 1917년 화재 때 불탄 것을 경복궁 교태전을 옮겨다 놓았다. 그래서 공간 크기에 맞지 않게 정면이 9간으로 되어 있다. 가운데 3간은 넓은 마루방(대청)으로 되어 있고, 양쪽으로 3간씩은 온돌방이다. 대청의 서쪽에는 왕비가 쓰던 침대가 놓여 있는 온돌방이 있고, 동쪽에는 임금과 왕비가 잠을 자던 방을 둘러싼 8개의 작은 방에는 궁녀들이 대기하면서 임금과 왕비의 시중을 들었다. 대조전도 역시 다른 궁의 왕후의 침전처럼 용마루가 없다.
눈을 조금 동쪽으로 돌려보자. 대조전과 복도로 연결된 작은 건물인 흥복헌(興福軒)이 있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던 곳이다. 1910년 8월 22일 오후2시 일본 경찰의 삼엄한 경비 속에서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것이다. 가슴이 답답하다.
대조전 뒤쪽에 있는 건물이 경훈각(景薰閣)이다. 대조전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지금은 일층 건물이지만 원래는 이층 건물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층 건물일 경우 이층은 누(樓), 일층은 각(閣)으로 이름을 별도로 붙였다. 이 건물도 일층은 경훈각이요, 이층은 징광루(澄光樓)였다. 1917년 화재로 타버린 이후 다시 지으면서 일층으로 되었다. 경훈각 뒤쪽에는 계단식 화단(화계)이 꾸며져 있다. 여자들의 공간 뒤에는 이렇듯 화계가 있다. 대나무 숲과 각종 꽃들이 돌 받침대 위에 올려놓은 괴석(怪石)과 어루어져 있다.

◈성정각(誠正閣)
희정당을 나와 동쪽에 있는 집이 성정각이다. 안내판에는 내의원으로 소개하고 있다. 순종이 이 일대에 살던 일제시기에는 내의원으로 쓰였기 때문에 이렇게 소개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건물의 제 이름은 성정각이다. 이 건물은 왕세자가 선생님들과 공부하는 것, 곧 서연(書筵)을 하거나 왕이 학자들과 책을 공부하며 정책을 토론하는 것, 곧 경연(經筵)을 하던 곳이다.

◈중희당(重熙堂)
이제 낙선재 구역으로 발길을 옮겨보자. 그 구역으로 넘아가는 길 왼편으로 즉 성정각 동편으로 시멘트로 포장된 넓은 길이 있고, 소나무 밭이 있다. 이 곳은 동궁의 공간인 중희당(重熙堂)이 있던 장소이다. 그리고 창경궁 쪽으로 이층 누각으로 되어 있는 승화루(承華樓), 육모지붕의 정자 같은 건물이 삼삼와(三三窩), 복도 같은 건물이 칠분서(七分序)인데 모두가 동궁의 터에 속한 건물들이다.

◈낙선재(樂善齋)
창덕궁 남동쪽과 창경궁으로 연결되는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 창경궁 영역에 속하는 건물이었으나, 후에 와서 창덕궁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낙선재 영역으로 접어 들어가다 보면 멀리서도 낙선재 영역이 참으로 단아하고 소박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낙선재 담장안에는 여러채의 건물들이 들어앉아 있다. 구조도 다르고 창건 연대도 각기 다른 낙선재(樂善齋), 석복헌(錫福軒), 수강재(壽康齋)와 그 부속 건물이 있다.
낙선재는 세자와 세자빈, 세자가 없을 때는 왕에게 총애받는 후궁이나 혹은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 등이 기거하던 곳이다. 그래서 낙선재는 여성취향의 건물이다. 문창호를 비롯하여 난간의 조각과 담장의 장식이 모두 그렇다. 특히 25가지나 된다는 낙선재의 문창호는 여성 취향으로 화려하고 섬세하다. 다른 건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것들도 많다. 작은 돌을 불규칙하게 붙인 아궁이벽을 꼭 한번 눈여겨 볼만하다. 참 아름답다는 것을 느낀다. 1917년 대조전이 불탔을 때는 순종이 기거하기도 하였고, 그 이후에는 한(恨) 많은 왕실가족,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근까지 영친왕비 이방자(李方子)여사가 살다간 곳이다.
낙선재 후원은 아름다운 꽃들로 여성의 처소답게 화려하다. 다른 궁의 후원처럼 이 곳에도 괴석이 배치되어 있다. 후원의 둥근 월광문 위쪽 언덕위로 육모정인 상량정이 자리잡고 있는데 그 아름다움은 경복궁의 향원정에 버금가는 정자다. 그 앞에 두껍고 넓은 돌판이 하나 있는데 그 곳에서면 남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 곳에 상량정이란 정자가 들어설 만한 적소의 위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반인들의 출입금지 구역이다.

◈ 후원(後苑)-비원(?)
이제 오던 길로 다시 나가 시멘트로 포장된 길로 올라 나즈막한 언덕을 넘으면 창덕궁과 창경궁 두 궁궐의 공동의 후원(後苑)이 나온다. 후원은 1405년 창덕궁 창건당시 조성된 것으로 북원(北苑), 금원(禁苑)으로도 불렀다. 그러다가 대한 제국 말기에 창덕궁 후원을 관장하는 기구로서 비원(秘苑)을 증설하였다. 이 때부터 비원이라는 명칭이 쓰이기 시작했다. 본래의 이름으로 불러야 마땅하다 하겠다. 이 곳은 크게 부용정과 주합루를 중심으로 한 지역, 애련지와 연경당을 중심으로 한 지역, 그리고 반도지 및 옥류천 지역으로 이루어져 넓은 구역을 이루고 있다. 지형에 어울리게 누각을 짓고 꽃과 나무를 심고 못을 파서 아름답고 조화롭게 꾸며져 있다.

◈부용지(芙蓉池)
네모꼴에 둥근섬으로 이루어진 연못이다. 옛 사람들은 이런 연못에도 깊은 사상을 담았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관념을 표현한 것이다. 그 가운데 사는 사람은 이런 하늘과 땅의 운행원리를 받아 구현하고 있는 소우주라는 사상이다. 이에 비하면 중국과 일본은 타원형이거나 굴곡이 많은 형이다. 부용지 석축 한쪽에는 잉어 한 마리가 돋을새김으로 조각되어 있다. 바로 이 주변이 과거시험장이었기 때문이다. 물 속에서 살아야 할 잉어가 하늘을 향해 뛰어오르는 것은 모든 고난을 이기고 드디어 입신양명(立身揚名)을 했다는 뜻이 된다. 많은 젊은 인재들이 이 튀어 오르는 잉어를 보면서 입신양명의 의지를 다졌을 것이다.

◈부용정(芙蓉亭)
부용지 연못에 세워져 있는 부용정은 열십(十)자 모양의 지붕에 북쪽 두 돌기둥은 물속에 박아 주춧돌로 삼았다. 그래서 부용정에 앉아 창문을 열면 물위에 떠있는 셈이다. 부용정의 겹겹이 이루어진 처마는 한옥의 흔치 않는 예술미를 화려하게 보여주고 있다. 짓기 어려운 구조지만 잘 지어진 집이란다.

◈주합루(宙合樓)
부용정 맞은 편 높은 둔덕에 2층 건물인 주합루가 있다. 이층이 주합루이고 그 일층이 규장각이었다. 지금 그곳에 붙어 있는 '宙合樓' 편액은 정조의 친필이다. 정조는 자리 좋은 이곳에 규장각을 짓고 인재를 양성하고 이들을 움직여서 자신의 뜻을 펴고자 했다. 그것이 바로 탕평정치이다. 정조는 이 일대에서 당쟁만을 일삼는 늙은 대신을 멀리 하고, 서얼·중인계급에 까지 두루 젊은 인재들을 뽑았다. 이 곳에서 정조는 직접 이들에게 10일 마다 시험을 냈으며 젊은 학자들은 학문에 매달렸다. 이들을 각신(閣臣)이라 불렀는데 다산 정약용도 총애를 받는 각신 중의 한사람이었다. 주합루에 오르기 위해서는 어수문(魚水門)을 지난다. 규모는 작지만 문틀 위에는 청룡 황룡이 어우러져 있는 등 화려한 치장을 하고 있다. 어수문은 신하(魚)와 임금(水)이 만나는 상징의 문이다. 즉, 부용지의 고기가 어룡(魚龍)이 되어 오르는 인재등용의 등용문인 셈이다.

◈영화당(暎花堂)
주합루 앞 연못 동편에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건물이 영화당이다. 영화당은 꾸밈없는 소박한 건물로 문무 과거 시험장의 고사 본부로 쓰였던 곳이다. 지금은 창경궁과 구획을 나눠 담으로 가려져 있고 창경궁 영역이 되어 버린 춘당지 일대가 과거 시험장이었던 것이다.

◈기오헌(寄傲軒)
영화당 앞마당을 지나 후원으로 더 깊이 들어가다 보면 왼편으로 금마문(金馬門)과 불로문(不老門)이 나온다. 금마문을 들어서면 왼쪽 언덕자락에 기오헌과 의두각이라는 이름의 독서당이 있다. 기오헌은 다른 궁궐 건물과는 달리 민가 형식이다. 또 그 방향도 특이하게 북향이다. 금마(金馬)란 왕세자를 가리키는 말이며 집의 주인은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孝明世子-훗날 그 아들 헌종이 왕이 되면서 익종(翼宗)으로 추존됨)이다. 당시는 왕의 힘은 미약하고 몇몇 가문(안동 김씨)에서 실권을 쥐고 행사하는 세도정치기였다. 효명세자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그 할아버지 정조처럼 왕이 중심이 되어 정치를 해보려 시도하였다. 그러기에 그는 규장각의 뒤편 언덕자락에 독서처로서 이 기오헌을 지은 것이다. 그러나 효명세자는 부왕 순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한 지 3년만에 갑자기 죽고 말았다.

◈존덕정(尊德亭)
기오헌에서 더 북쪽으로 난 호젓한 길을 오르면 한반도 모양을 한 연못, 이른바 반도지(半島池)가 나온다. 반도지가 있는 지역은 정자 지역이다. 동궐도(동궐-창덕궁, 창경궁, 후원을 1828년 여름∼1830년 8월에 그린 그림)에는 이 반도지 부분이 두 개의 네모난 연못과 가운데 섬이 있는 동그란 연못이 하나가 나란히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므로 다소 그 모습이 변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붕이 부채꼴인 관람정도 관심을 끄나 건너다 보이는 존덕정에 눈낄이 멎게 된다. 흔치 않은 2층 겹지붕 정자다. 규모는 크지 않으나 육모지붕에 내부치장이 화려한 가운데 천장에는 청룡 황룡이 어루어져 있다.


◆ 창덕궁

창덕궁은 태종이 한양으로 재천도하면서 창건한 궁으로 태종 12년에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이라 하며 당시(1810년경) 전각의 규모와 구성은 동궐도에 잘 나타나 있다. 지금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비원'이란 창덕궁과 창경궁의 후원이 아름답고 신비스런 면을 부각시켜 지칭하는 말로 흔히들 창덕궁을 가리켜 종종(방송매체에서 조차) '비원'이란 말을 쓰는데 이것은 크게 잘못된 말이다.
1970년대까지는 창경궁과 서로 연결되어 있어 그쪽에서도 들어갈 수 있었고 개방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돈화문을 통해서 입장할 수 있다. 또한 매시간별로 정해진 시간에 맞춰 입장해야 하고 안내원을 따라서 관람을 할 수 있는데 관람할 수 있는 전각과 공간이 제한되어 있어 창덕궁의 참맛을 느끼기에는 무척 힘든 실정이다.
동궐의 후원(비원)을 편의상 창덕궁 자료에 포함시키나 창경궁과 창덕궁 공통의 후원임을 알아주었으면 하고 지금은 창덕궁에 속해 관람하고 있지만 '낙선재'는 창경궁 전각임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창덕궁의 왼편(동쪽)으로는 창경궁이 자리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종묘가 자리하고 있다. 또한 멀리 오른편으로는 경복궁이 자리하게 된다.

< 창덕궁 연혁 >
-태종 4년10월(1404) 한성에 다시 정도(定都)하기로 하고 향교동에 이궁(離宮)을 만들 것을 명함
-태종 5년10월(1405) 이궁이 조성됨. 이궁을 창덕궁이라 명명함 
-태종11년 3월(1411) 진선문 외 석교(금천교)를 건축함 
-태종12년 5월(1412) 돈화문을 건립함
-태종13년 1월(1413) 돈화문에 종을 담
-세종원년 9월(1419) 인정전이 이룩됨
-세조 7년12월(1461) 전각에 이름을 붙임(선정전, 소덕당, 보경당, 양의전, 여일전, 정월전, 징광루, 응복정, 옥화당, 광세전, 광연루, 구현전)
-세조 9년 2월(1463) 궁장의 동쪽과 북쪽을 넓힘
-성종 6년 8월(1475) 지금까지 없었던 이름을 정함(선인문, 경양문, 건양문, 단봉문, 숙장문, 금호문, 요금문, 광지문)
-연산 2년12월(1496) 숭문당을 희정당이라 함
-연산11년    (1506) 인정, 선정전 지붕을 청와(靑瓦)로 고쳐 이음 
-선조25년 4월(1592) 임진란으로 창덕궁이 전소됨
-선조40년    (1607) 창덕궁 재건이 시작됨
-광해원년10월(1609) 창덕궁 재건이 대략 완료됨
-인조원년 3월(1623) 인조반정으로 인정전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전소됨
-인조25년11월(1647) 인조반정 때 소실된 건물 재건공사를 완료 
-숙종30년12월(1704) 대보단이 조성됨
-영조20년10월(1744) 인정문이 불에탐
-영조21년 3월(1745) 인정문이 중건됨
-영조52년 9월(1776) 금원 북쪽에 규장각을 새로 건설함 
-정조원년      주합루(규장각)준공, 창덕궁 수리시작 
-정조 6년    인정전 앞뜰에 품계석 설치 
-순조 2년    선원전을 보수
-순조 3년       인정전에 불이 남
-순조 4년       인정전을 재건함
-순조33년      대조전 중심 일곽에 큰 불 
-순조34년      내전 중건 공사 완료
-고종14년      창덕궁 수리
-1917년        희정당 등 내전 일곽에 큰 불이 남 
-1920년        경복궁 내전 건물 헐어 불탄 내전을 복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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