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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푸코의 권력개념

by Frais Study 2020. 8. 16.

 푸코는 반-프로이트적이고 반-마르크스적입니다. 반-프로이트적 성향은 정신의학이 우리의 일상생활 전체를 간섭하며, 유전학이나 우생학을 통해 국가 인종주의로 이어진다는 비판에서 드러납니다. 반-마르크스주의는 권력 개념에서 비롯됩니다. 그가 1970년대초 과열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당시의 젊은 마오이스트들, 프롤레타리아 좌파들과 함께 수감자나 이민 노동자들의 인권 운동을 주도했던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인습을 조롱하기 위해 젊은이들에게 말끔한 옷차림과 깔끔한 치장을 벗어던지고 머리나 수염을 길게 기르고, 남녀의 성차별을 무시하는 옷차림을 하라고 말하면서 "우리 체제의 실체를 폭로하고, 변화시켜 그것을 완전히 뒤엎어 버려야 한다"는 과격한 말을 한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가 전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체제는 좌파건 우파건 모든 전체주의 체제이고, 보이지 않게 사람들의 자유를 옥죄는 현대적 권력체계입니다. 우리의 좌파 지식인들이 생각하듯 친 마르크스적 정치 체제 옹호에 동원될수 있는 철학자는 아닙니다. 

          권력의 전통적 개념

 우선 그는 권력의 전통적 개념을 거부합니다. 전통적 개념에서 권력은 견고한 물질성이고, 위계적이며, 가시적입니다. 법으로 체화되어 있고, 문자로 쓰여졌으며, 네가티브한 기능을 갖고 있어서 금지와 터부를 형성합니다. '배제', '억압', '탄압' '검열' 같은 단어들이 우리가 흔히 갖고 있는 권력의 이미지입니다.  
 권력을 재화와 동일시하는 관념도 있습니다. 이때 권력은 마치 재산처럼 누군가가 소유할수 있고, 따라서 양도, 계약의 형식으로 타인에게 전체 혹은 부분을 이양할수 있는 권리로 간주됩니다. 이것은 또 상품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권력은 소유되고, 획득되며, 힘과 계약에 의해 인도되고, 양도되었다가 회수되기도 하고, 다시 유통되기도 한다는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적 권력의 개념도 있습니다. 생산력의 점유 양식과 그 발달에 의해 탄생한 한 계급의 지배를 연장시키는 수단이 바로 권력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권력의 경제주의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교환과 재화 유통의 경제 속에서 그 형식적 모델을 취하고 있고, 또 생산관계의 연장, 유지, 공고화를 그 소임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푸코는 권력이 주어지거나, 교환되거나, 재소유되는것이 아니라 그저 행사되며, 오로지 행위 안에서만 존재한다고 확신합니다. 따라서 그는 권력의 억압 가설을 부인합니다. 
 억압 가설에 의하면 권력은 부의 선취, 전환의 수단이고, 한 계급에게 노동의 과실을 독점하게 함으로써 사회의 지속적인 권력 관계를 유지하고, 따라서 일부 사회 계급에게만 혜택을 주는 지속적 폭력이라는것입니다. 다름 아닌 마르크스의 권력 개념입니다. 이 가설은 상부구조, 하부구조로 억압의 심급을 나누고, 생산관계를 유지하거나 재생산하는 기능을 정치권력의 특징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가설은 역사적으로 구식이된 노예 사회나 봉건사회를 모델로 한것이어서 근대 이래 오늘날의 사회를 설명하는데는 적합하지 않다고 푸코는 말합니다. "그들은 18세기 혹은 고전주의 시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몰랐다."라고 푸코는 말합니다. 17-18세기에 서구에서는 우리가 <광기의 역사>에서 본 대감금 현상이 있었고, <성의 역사>에서 보듯 성 문제의 꼼꼼한 조사를 통해 개인의 몸으로까지 확산되는 권력이 있습니다. 이 권력은 감시와 처벌을 통한 규격화 권력입니다.

           권력 분석에 있어서의 중요한 두 모델. 나병과 페스트

 1) 나병의 모델 
 근대 이후의 권력은 역사적인 두 질병이 그 모델입니다. 중세말에, 혹은 중세 내내 나환자들의 추방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영화 <벤허>에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격리 생활을 하고 있는 나환자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나환자의 추방은 우선 가혹한 분할, 거리 두기, 한 개인과 다른 개인 사이의 비-접촉의 규칙등을 포함하는 사회적 관행이었습니다. 두번째로는 나환자들을 한데 섞어 외부 세계로, 즉 성벽 밖이나 공동체의 경계 밖으로 쫒아내는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서로 이질적인 두 집단이 형성되었습니다. 상징적인 표현을 써보자면 추방된 집단은 환한 중심에서부터 외부의 어둠 속으로 밀려났습니다. 세번째로 나환자의 추방은 배제되고 쫒겨난 사람들의 자격박탈을 의미했습니다. 물론 이 자격박탈은 도덕적이라기 보다는 법률적이고 정치적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하튼 현실 세계에서 그들은 죽은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나환자가 추방될때면 반드시 일종의 장례식이 곁들여 졌습니다. 나환자로 판정받아 외부의 낯선 세계로 떠나게 될 사람들은 이 장례식에서 사망을 선고 받았습니다. 나환자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관 속에 누워 신부가 집전하는 장례 미사를 치르고 멀리 떠났습니다. 그는 현실 세계에서 완전히 죽은 사람이므로 재산도 양도되었습니다. 요컨대 그것은 추방과 거부의 관행이며, 요즘 말로 하면 《주변부로 밀어내기》의 관행이었습니다. 
 그런데 14세기에 갑자기 나병이 사라졌습니다. 나환자들을 가두던 넓은 장소가 텅 비게 되었고, 문둥이들을 주변부로 밀어내던 사람들의 의식 속에도 잠시 빈 공간이 있었지요. 그러나 곧 15세기에 바보들의 배가 나타났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광인들에게 관심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광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감금이 시작되었습니다. 
 17세기 중반에 광인과 함께 거지, 부랑자, 게르름뱅이, 방탕아등 유동적인 부랑 인구를 도시 밖으로 쫒거나 아니면 구빈원에 가두면서 대대적인 추방을 시작했을때, 왕실 행정부에 의해 정치적으로 채택된것은 바로 이 나환자 추방의 모델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행사된 권력의 메카니즘은 추방, 자격상실, 유배, 거부, 박탈이었습니다. 요컨대 모든 추방의 부정적 메카니즘과 개념들을 다 모아놓은 것이지요. 나환자 추방의 모델과 관행은 단지 역사 속의 사실만이 아니라 현재 우리 사회에도 한 부분에서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2) 페스트의 모델 
 그러나 기본적인 권력행사 방식에서 이 모델은 대략 17세기말에서 18세기초에 거의 사라지고 전혀 다른 모델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새로운 모델이 구 모델을 완전히 대체했다기 보다는 어느 정도 중첩되면서 새 모델이 새롭게 활성화된것입니다. 그것은 나환자 추방의 모델만큼이나 역사가 긴 페스트의 모델이었습니다. 
 페스트라는 병명은 원래 치사율이 높은 전염병에 희랍인들이 붙인 이름입니다. 기원전 4세기의 '아테네의 페스트'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서구 역사에서 흑사병(peste noire)이라고 불리던 본격적인 페스트는 14세기, 그러니까 1337년에서 1339년 사이에 중국에서 발생하여 인도를 거쳐 유럽에 전파된것입니다. 1347년에 유럽에 다다른 이 전염병은 제노아를 포위하고 있던 황금군단을 완전히 궤멸시켰고, 시실리, 이탈리아 반도, 프랑스, 스페인등을 강타했으며, 이어서 독일과 중부 유럽, 영국에까지 퍼졌습니다. 이 흑사병의 열풍으로 유럽 인구 중 2천5백만명이 희생되었으며, 아시아에서도 비슷한 수의 희생자가 있었을것으로 추정됩니다. 그후 15세기, 18세기, 19세기, 그리고 20세기까지도 간헐적으로 페스트가 발생했지만 서구인들의 무의식 속에 강렬한 공포를 심어놓은 대 흑사병은 바로 이 14세기의 페스트입니다. 
 페스트는 수많은 문학작품의 영감의 원천일뿐만 아니라(카뮈의 <페스트>는 그 가장 최근의 예입니다) 서구의 행정 체계 확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공중 보건같은 의학의 발달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푸코에 의해 아주 중요한 권력의 모델로 등장한것입니다. 나환자의 추방 대신 페스트 환자의 끌어안기를 통제의 모델로 채택한것이야말로 18세기의 중요한 현상중의 하나라고 푸코는 생각합니다. 
 페스트의 모델이란 다름 아닌 지역분할 방식입니다. 불어로 quadriller는 바둑판무늬처럼 줄을 긋는다는 뜻입니다. 도시를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짓는 방식이 페스트 발생 도시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후 이 단어(동사는 quadriller, 명사는 quadrillage)는 분할통치 방식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전염병이나 사고 지역의 관할과 치안확보를 위해 도시를 바둑판처럼 나누고 거기에 군대나 경찰 병력을 분할 주둔시키는 방식이지요. 페스트에 관련된 관행과 나병에 관련된 관행의 차이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나환자의 격리 지역과 달리 페스트 선포 지역은 격리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을 한데 마구 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각자는 자기 집에 들어 앉아 이웃들과도 철저하게 고립된채 당국의 세심한 분석과 꼼꼼한 경계의 대상이 됩니다.
 중세말에서 18세기초까지의 자료에 의거해 보면 페스트 상태의 도시들은 모두 아주 비슷한 일련의 규칙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도시 전체는 몇 개의 구(區)(district)로 나뉘었고, 구(區)는 다시 가(街)(quartier)로 나뉘었으며, 이 가(街) 안에 로(路)(rue)들을 분리시켰습니다. 각 로 안에는 감시인(surveillant)이 있었고, 가(街) 안에는 감독관(inspecteur)이 있었으며, 각 구(區) 안에는 구 담당관이, 그리고 도시 전체 안에는 총독(gouverneur) 혹은 페스트에 임하여 임시로 권한이 추가된 행정관( chevin)이 있었다. 그러므로 지역의 가장 세밀한 분석, 그렇게 분석된 지역에 대한 지속적인 조직이 가능했습니다. 현대의 행정 체계가 이미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지속적이라는것은 두 개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우선 그것은 지역 분할의 피라미드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길 끄트머리에서 모든 집의 대문 앞을 망 보는 보초에서부터 가(街)의 책임자, 구(區)의 책임자, 도시의 책임자에 이르기까지 거기에는 일종의 거대한 권력 피라미드가 형성되어 있는것입니다. 이 피라미드 안에는 그 어떤 침입도 허용될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위계적 피라미드일뿐만 아니라 그 수행에 있어서도 지속적인 권력이었습니다. 감시는 아무런 침입이 없어야만 수행될수 있는것이기 때문에 보초들은 거리의 끝에 항상 서있어야 했습니다. 구와 가의 감독관들은 하루에 두 번 순시를 했으므로 그 도시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결코 놓칠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관찰된 것은 모두 지속적으로 기록되고, 이 모든 정보들이 다시 커다란 장부 속에 재기입되었습니다. 
 전염병의 격리 기간이 시작되면 도시의 모든 시민들은 그들의 이름을 고지(告知)해야 합니다. 그들의 이름은 장부 속에 기입됩니다. 그 장부들의 몇 권은 구역 감독관의 수중에 있고, 다른 것들은 도시의 중앙 행정부에 보내집니다. 감독관들은 매일 모든 집 앞을 지나쳐야 하고, 각각의 집 앞에서 잠시 머물러 호명을 합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모습을 보여야 할 창문을 할당 받고, 감독관이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 창문 앞에 나서야 합니다. 
 만일 그가 창문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그는 침대 안에 있는것이고, 그가 침대 안에 있다는것은 아프다는 의미이고, 아프다는것은 그가 위험한 인물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혹은 이미 죽어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당국이 개입해야만 합니다. 아픈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등으로 개인들의 분류가 이루어지는것은 바로 이 시점에서입니다. 하루에 두 번씩의 방문에 의해 형성된 이 모든 정보, 다시 말해서 감독관이 수행하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에 대한 이같은 사열과 조사는 장부에 기입되고, 이어서 도시 중앙 행정부에 있는 중앙 장부와 대조됩니다.
 이와같은 조직은 나환자에 관련된 모든 관행들과 완벽하게 대구(對句)를 이루고 있습니다.  나병에 대해서 추방이었던 것이 페스트에 대해서는 검역이 되었습니다. 쫒아내는것이 아니라 각자가 있을 장소를 마련하고, 확정하고, 고정시키며, 자리를 배정해 주고, 개인이 있어야 할 장소, 즉 바둑판으로 구획된 공간 안에서의 개인의 자리를 한정해 줍니다. 위험한 인물을 내치는것이 아니라 안으로 끌어 안는것입니다. 더 이상 주민의 두 타입, 두 그룹 사이, 다시 말해서 순수한 그룹과 불순한 그룹, 나환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두 덩어리로 분할하는 것이 아니라, 아픈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관찰하여 일련의 미세한 차이들을 가려내는것입니다. 
 결국 개인의 미세한 결에까지 이르는 권력의 세분화이며 개인화입니다. 그러므로 나환자 추방에서 볼수 있는 집단 분할과는 거리가 멉니다. 여기서는 더 이상 거리 두기, 접촉 끊기, 주변부로 밀어내기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꼼꼼한 근접 관찰이 중요합니다. 나병의 모델이 거리 두기라면 페스트의 모델은 개인들에 대한 권력의 점진적인 접근이며, 더욱 집요해지는 지속적인 관찰입니다. 규칙적으로 분할된 장에 대한 지속적인 조사를 통해 권력은 한 개인이 규칙을 잘 지키는가, 규정된 보건 수칙을 잘 지키는가를 알기 위해 끊임없이 개인들을 평가합니다. 

 3) 페스트의 문학적 꿈과 정치적 꿈 
 페스트에 대한 문학 작품이 많이 있다고 좀 전에 얘기했지만, 근대 이전의 페스트 문학은 무시무시한 고딕풍의 분위기를 갖고 있습니다. 그 작품들 안에서 페스트는 극도로 혼란스러운 공포의 순간으로 그려집니다. 페스트로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흔히 죽음이 임박한 사람들이 그러하듯, 모든 체면을 포기하고, 이때까지의 도덕적 가면을 집어 던진채 무질서한 방탕에 몸을 내맡깁니다. 페스트 문학은 개인성의 해체의 문학이고, 절대적 자유를 구가하는 문학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통음난무(痛飮亂舞)의 꿈이고, 그 안에서 개인성은 해체되며 법은 무시됩니다. 페스트가 퍼지기 시작하는 순간은 도시 전체의 규칙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페스트는  인간의 육체를 유린하는 동시에 법을 유린합니다. 적어도 페스트 문학의 꿈은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페스트에는 문학적인 꿈이 아닌 전혀 다른 또 하나의 꿈이 있습니다. 즉 정치적 꿈입니다. 정치적 측면에서 페스트는 정치 권력이 완벽하게 행사되는 멋진 순간입니다. 철저한 주민 분할지배가 가능하고, 사람들 사이의 위험한 소통이나 접촉 혹은 뒤섞임은 더 이상 일어날 수 없습니다. 페스트의 순간은 정치권력에 의한 주민의 분할지배가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순간이고, 권력의 미세한 분기(分岐)들이 끊임없이 개인과 맥이 닿아, 그들의 시간, 공간, 환경, 그리고 육체에까지 침투해 들어가는 순간입니다. 페스트는 통음난무의 연극적, 문학적 꿈인 동시에, 아무런 장애물이 없이 대상을 완전히 투명하게 감시할수 있고, 한 점 손실 없이 권력이 완벽하게 집행되는 철저한 정치적 꿈입니다. 실제로 17-18세기초부터 이 페스트의 모델이 정치적으로 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4) 권력의 포지티브한 테크닉 
 페스트의 모델이 나병의 모델을 대체한것은 아주 중요한 역사적 과정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푸코는 이것을 포지티브한 권력 테크닉의 발명이라고 부릅니다. 나병에 대한 대응은 네가티브한 대응이었습니다. 그것은 거부하고, 추방하고, 상대방을 알려하지 않는 무지의 대응이었습니다. 그러나 페스트에 대한 대응은 모든 사람을 끌어 안고, 관찰하고, 그들에 대한 철저한 앎을 형성하여, 이 관찰과 앎에서부터 권력의 효과를 증식시키는 포지티브한 대응입니다. 이제 우리는 내쫒고, 제외시키고, 금지하고, 주변부로 몰아내고, 억압하는 권력 기술로부터 포지티브한 권력으로, 다시 말하면 무언가 만들고 관찰하는 권력, 모든것을 아는 권력, 스스로의 효과에서부터 자신의 힘을 증식시키는 그런 권력으로 넘어갔습니다. 
 추방이 아니라 구성원들을 가까이 끌어안아 분석하는 권력, 불분명하게 혼합된 몇개의 큰 덩어리로 분리하는 권력이 아니라 차별화된 개인들을 분배 배치하는 권력, 무지와 연관된 권력이 아니라 앎의 형성, 투입, 축적, 증식을 가능하게 하는 일련의 메카니즘과 연결된 권력입니다. 

          규격화 사회의 탄생 

 고전주의 시대(불문학사의 시대구분과는 달리 푸코는 1650년에서 1880년까지, 그러니까 17세기 후반부에서 18세기 전체를 고전주의 시대로 구분합니다)는 국가기구, 공공 기관, 가정등 모든 상이한  기관의 토대로 사용될수 있는 권력 기술을 창안하고, 그것을 정교하게 다듬었습니다. 다름아닌 《관리 기술》(art de gouverner)입니다. 《관리(管理)》(gouvernement)라는 말은 그 시대에 통용되던 어린이 《관리》, 광인 《관리》, 빈민층 《관리》, 노동자 《관리》등의 의미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인간을 관리하는 이 기술은 《규격화》에 의해서 완성됩니다. 
 18세기 내내 어린이, 군대, 생산의 영역에서 규격화의 효과가 배가되는것을 우리는 확인할수 있습니다. 규격화란 규범에 맞게 교정한다는 의미인데, 이때 규범은 권력에의 요구를 담고 있습니다. 규범은 단순히 추상적인 원칙이 아니고 권력의 근거와 합법성을 마련해주는 거점이며, 자격부여와 교정의 원칙을 동시에 품고 있습니다. 규범에는 배제와 거부의 기능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언제나 개입과 변모라는 포지티브한 기술, 즉 비정상적인 것을 정상적으로 만드는 기획과 연관이 있습니다. 규격화(normalisation)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노멀하게 만들다, 즉 '정상화하다'라는 뜻입니다. 푸코가 역사 속에서 되살리고자 하는것이 바로 이 개념들이었습니다.
 그가 마르크스의 권력개념을 시대착오적으로 보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18세기가 《규격화의 효과를 내는 규율》에 의해, 그리고 《규율-규격화》의 체제에 의해 새롭게 마련한 것은 마르크스가 말하는 억압적인 권력이 아니라 생산적인 권력입니다. 비록 거기에 억압이 얼마간 들어있다고 해도 그것은 뭔가 만들어내고, 창조하고, 생산하는 중심 메카니즘들에 비하면 측면적, 부차적인 효과만 있을뿐입니다. 
 그리고 권력이 근본적으로 무지의 효과에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 또한 오류라고 푸코는 말합니다. 권력은 무식한 것이 아니라 지식에서, 앎에서 나옵니다. 18세기는 무지(無知)를 이용하는 권력이 아니라 앎의 형성에 의해서만 기능하는 권력 유형을 만들어 냈는데, 이것 역시 규율과 규격화를 통해서였습니다. 이때 앎은 권력의 결과이며 동시에 권력행사의 조건입니다. 앎 없는 권력이 없으며, 권력 없는 앎 또한 없습니다. 권력과 앎은 하나의 쌍을 이루고 있으며, 따라서 권력에 물들지 않은 순결한 앎이란 없습니다. 푸코가 우리에게 보여준 성과 광기의 역사는 모든 것을 세세하게 알려는 권력의 집요한 앎에의 의지였습니다. 알려고 하는 과정이 권력을 형성했고, 또 그 결과물로 인간에 대한 거대한 앎이 형성되었습니다. 
  
          왕조 시대의 네가티브한 권력

 근대 권력은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습니다. 떠들석하고 과시적인 힘의 행사는 전근대적 권력입니다.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아 겸손하고 세련된것 같지만 그러나 그것은 과시적 권력보다 한층 더 무시무시한 권력입니다. 그러면 네가티브한 권력이 어떻게 근대의 포지티브한 권력으로 넘어 갔을까요? 그것은 왕조시대 권력행사의 전형인 공개처형을 살펴 봅시다.

 1) 공개처형 
 고전주의의 법체계 안에서 범죄의 정의는 타인에게 가해진 의도적 손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단순히 사회 전체의 이해(利害)에 가해진 피해나 물질적인 손해만도 아니었습니다. 범죄는, 그것이 군주를 다치는 한에 있어서만 범죄였습니다. 왜냐하면 범죄는 법을 침해하는데, 그것은 법 안에 구현된 군주의 의지를 침해하는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범죄는 군주의 힘과 육체, 특히 물리적 육체를 침해하는것입니다. 
 모든 범죄는 그러니까 군주의 힘에 대한 대항이고, 군주에 대한 저항이며, 반란이었습니다. 가장 사소한 범죄에도 왕의 시해의 조그만 단편이 들어있고, 따라서 형벌권의 기본개념은 손해의 복원이나, 사회의 기본적 이해(利害)와 권리에 대한 요구가 아니었습니다. 처벌은 언제나 덤으로 행해지는 것이고, 그것의 진짜 목적은 군주의 복수, 앙갚음, 힘의 반격입니다. 처벌은 언제나 군주의 개인적 제재였습니다. 군주가 범죄자를 대면하는것은 자기 힘을 과시하는 의식(儀式) 안에서, 즉 단두대 위에서였습니다. 그것은 범인이 저지른 범죄를 되살려 내는 의식(儀式)입니다. 범죄자의 처벌을 통해 권력은 온전하게 다시 복원됩니다. 
 잔인한 범죄에는 잔인한 형벌로 대응해야 했습니다. 잔인한 징벌은 그 자체로 잔인한 범죄를 되풀이하는것이었는데, 다만 여기에는 범죄를 무찔러 없애기 위한 것이라는 정당화가 가능했습니다. 형벌의 잔인함은 범죄의 잔인함을 타도하기 위한것이었습니다. 처벌 쪽이 조금 더 무거웠습니다. 이 '조금 더'라는 것이 공포였고, 처벌의 공포적 성격이었습니다. 
 범죄에 대한 공포가 거기, 단두대 위에 있어야 합니다. 이 공포 안에는 폭발하는 군주의 복수가 근본적인 요소로 깔려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공포 안에는 모든 미래의 범죄에 대한 위협이 들어있어야만 합니다. 이 체계의 주요한 부분은 척도의 법칙이 아니라 과시의 원칙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원칙은 그 필연적 귀결로서 잔혹함을 갖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와같은 처벌의 불균형의 체계안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것이 고문입니다. 왕조시대의 역사적 고문 장면은 그렇게 해서 펼쳐졌습니다. 
 오렌지 공(公) 기욤(16세기 오렌지 공국의 태수)의 시해범에 대한 잔인한 고문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기욤이 살해되었을 때 권력은 그에 맞먹는 잔인한 고문으로 대응했습니다. 그것은 1584년에 일어난 일입니다.  시해범은 18일간 고문 당했습니다. 《첫날에는 끓는 물솥이 있는 광장에 끌려가 자신이 칼질한 팔뚝을 물속에 담갔다. 다음날에는 팔이 잘려나갔고, 발 아래 떨어진 팔을 그는 처형대의 위에서 아래로 끊임없이 발로 찼다. 셋째날에는 가슴과 팔이 불로 지져졌다. 넷째날에는 뒤로 엉덩이와 팔이 불로 지져졌다. 이렇게 연달아 그는 18일간 고문당했고, 마지막 날에 꽉 조이는 죄수복을 입고 차형에 처해졌다. 6시간 후에 그는 아직도 목숨이 남아 물을 청했으나 사람들은 그에게 물을 주지 않았다. 마침내 그의 영혼이 절망하지 않도록 목졸라 생명을 끊어줄것을 요청받은 형사-대리관이 그렇게 했다.》
 17세기말에도 권력의 이런 과잉 의식(儀式)의 예가 있습니다. 이 예는 아비뇽의 판례에서 찾아낸것입니다. 당시 교황청은 프랑스의 아비뇽에 있었습니다. 사형수는 눈이 붕대로 가려진채 기둥에 매어졌습니다. 처형대 주위에는 쇠갈고리가 달린 말뚝들이 세워졌고, 참회신부는 속죄자의 귀에 대고 속삭였습니다. 신부가 은총을 내린후 형리는 도살한 가축을 뜨거운 물에 담글 때 쓰는 거대한 쇳덩이를 온 힘을 다하여 사형수의 관자노리에 찔러 넣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쓰러져 죽었습니다. 그런데 고문이 시작된 것은 바로 이 죽음 직후부터였습니다. 왜냐하면 고문자가 원하는 것은 죄인의 처벌 그 자체나, 범죄의 속죄가 아니고, 영원한 형벌권의 과시적 의식(儀式)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력은 대상이 죽어 없어진 그 순간에 시체에 가혹행위를 하는 의식(儀式)을 행하는것입니다. 기록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죄수가 쓰러져 죽은후 바로 그 순간에 형리는 커다란 칼을 들고 그의 목을 내리쳤다. 그는 온 몸이 피로 뒤덮였고, 그것은 보기에도 끔찍한 장면이었다. 두 발뒤꿈치에서부터 신경줄을 쪼개고, 이어서 배를 가르고 심장, 간, 비장, 허파를 꺼집어내어 그것을 쇠 갈고리에 낀후 마치 짐승의 그것을 손질하듯 잘게 잘랐다. 볼수 있는자는 볼지어다."
 세 번째 예는 1757년 파리 성당 정문 앞에서 벌어진 대역죄인 다미앵의 고문장면입니다. 루이 15세의 시종이었던 다미앵은 왕의 의무를 일깨우기 위해 칼끝으로 왕의 어깨를 살짝 친 죄로 공개 사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속옷만 입은채 2파운드의 밀랍 횃불을 들고 사형수 호송차에 실려 그레브 광장에 도착한 그는 처형대 위에서 가슴, 팔, 넙적다리, 종아리등이 벌겋게 달궈진 집게로 지져졌고, 왕을 내리쳤을 때 사용했던 칼이 들려진 오른 손은 유황불에 태워졌으며, 살점이 찢겨나간 그 신체 부위들에는 끓는 기름, 타는 송진, 그리고 유황과 밀랍의 혼합물이 뿌려졌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의 몸은 네 마리 말에 사지가 묶이는 차열형에 처해져 사방으로 찢겨졌으며, 이어서 그 조각난 사지와 몸이 불에 태워 재가 되었고, 그 재는 바람에 뿌려졌습니다. 목격자들의 이야기는 더욱 더 잔혹합니다. 벌겋게 달구어진 집게로도 몸의 살점을 떼어내기가 쉽지 않았고, 그의 몸을 사방으로 끌고 가 사지를 절단하게 되어 있는 말들도 전혀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서 사형 집행자들이 그의 몸을 칼로 잘라내어야만 했다는것입니다. 사지가 절단된 다미앵의 몸은 불에 던져질때까지도 아직 살아 있었다고 합니다.  

 2) 민중의 참여 
 광장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죄수를 공개적으로 고문하고 이어서 잔인하게 죽인 후 그 시체를 공시하는 죄수 공시의 관행은 진실을 널리 알리고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것이었습니다. 
처형자의 몸 자체가 주권자의 처벌이 적용되는 장소이며, 힘의 비대칭, 권력의 불균형을 확인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문 의식의 또하나의 주인공은 민중입니다. 공개 처형의 목적은 무시무시한 권력의 과시가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어 비슷한 범죄의 재발을 막는데 있었으므로 민중의 동원이 필연적이었습니다. 
 죄수의 공개 처형이 있는 날이면 사람들은 생업을 중단하고 광장에 몰려들어 죄수에게 고문이 가해질 때마다 환호성을 지르고 범죄에 대한 분노를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공개 처형은 사람들이 앞으로 저지를수 있는 모든 범죄에 대한 예방이면서 동시에 주민들의 축제였습니다. 아마도 잔인한 장면을 즐기는 현대 공포 영화 애호가들의 뿌리가 거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들은 우선 목격자의 역할을 합니다. 죄인의 공시(公示)와 범죄사실 인정에 대한 증인으로 초대된 것이지요. 증인이 된다는것은 그들의 권리이기도 했습니다. 민중은 고문을 확인하고, 고문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인할 권리를 요구했습니다. 공시된 죄인은 오랫동안 주위를 돌면서 구경꾼들의 욕설을 들으며, 가끔은 구경꾼들의 공격을 받기도 합니다. 이렇게 민중은 '왕의 복수'에 적극적으로 참여 했습니다.  

 3) 공개 처형의 종식 
 이 떠들석한 형벌의 관행이 1830년대경부터는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감춰져 은밀한 장소로 옮겨졌습니다. 종래의 학자들은 이것을, 근대 사회로 이행하면서 인간의 기본 권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푸코는 여기서도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 가설을 제시합니다. 죄수를 인간적으로 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끔찍한 처형 장면이 죄수에 대한 사람들의 동정심을 유발시켜 오히려 권력에 대한 반감이 생겨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과정은 이러했습니다. 공포의 장면을 구경하러 광장에 나온 사람들은 차츰 형벌권의 행사에 대한 반감과 저항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처형 자체를 막으려 했고, 형리에게서 죄수를 탈취하기도 하고, 강제로 사면을 끌어내기도 하며, 형리를 둘러싸거나 재판관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선고를 야유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주먹을 휘두르며 잔인한 살인자에게 고함을 질렀지만 형리로부터 끔찍한 고문을 받는 죄수의 모습을 보면 불쌍한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위험한것은 죄수의 거침없는 말입니다. 군중이 처형대 주변에 가까이 모여드는것은 단순히 죄수의 고통을 바라보거나 형리의 분노를 자극하기 위한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잃어버릴것이 없는 죄수가 재판관에게 퍼붓는 저주, 법에 대한 조롱, 권력과 종교에 대한 야유를 즐겼습니다. 임박한 죽음 앞에서 이제 더 이상 금지된것이 없고, 더 이상 처벌의 두려움이 없는 죄수는 거리낌 없이 아무 말이나 했습니다. 자신을 범죄로 인도한 가난에 대해 하늘을 저주했고, 재판관들의 야만성을 비난했으며, 마지막 성사를 행하는 사제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신을 모독했습니다. 
 그리고 구경꾼들은 환호로써 그것에 응답했습니다. 원래 처형장은 군주의 공포스러운 권력만을 과시하는 일종의 카니발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역할이 전도되어, 권력은 조롱되고 범죄자는 영웅이 되었습니다. 치욕의 자리가 뒤바뀌어 용기, 눈물, 고함소리는 오로지 법을 향해 있었습니다. 필딩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죄수가 몸을 떨면 사람들은 더 이상 그것을 수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태도가 의연할때면 더욱 더 그러하다." 이처럼 살인에 대한 분노는 그 범죄를 유발시킨 사회적 모순이나 권력의 압제 같은 것으로 돌려지게 됩니다. 이것은 권력에게 있어서 매우 위험한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감시의 사회

 이때부터 권력은 떠들석한 과시에서부터 은밀한 영역으로 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죄인에 대한 처벌은 범죄의 종류에 관계 없이 감옥에 가두는 것으로 통일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고 낯익은 투옥의 제도가 근대 이전의 사람들에게는 새롭고 이상하게만 보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감옥은 죄수가 재판을 기다릴 때까지, 혹은 빚쟁이가 빚을 갚을 동안 잠시 머무는 장소였을뿐, 그 자체가 형벌이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죄수를 가만히 감옥에 가둬 놓기만 하는 것이 무슨 벌이 되며, 또 단순히 한 번 감옥에 갔다 오는 것만으로 어떻게 착한 사람이 될수 있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을 푸코는 규율(discipline)에서 찾습니다.

 1) 권력 효과의 극대화로서의 규율
 근대는 봉건시대 혹은 절대왕정의 시대 처럼 권력이 의식(儀式)이나 예식에 의해 불연속적으로 행사되는 대신 그것을 지속적인 것으로 만들어주는 몇가지의 수단, 혹은 원칙을 발견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권력은 더 이상 의식(儀式)을 통해 행사되는게 아니라 감시와 통제라는 지속적 메카니즘에 의해 행사됩니다. 봉건시대나 절대왕정 시대의 권력 메카니즘들이 가졌던 느슨한 성격이 사라졌습니다. 어떤 지점이나 특정의 구역, 혹은 몇몇 개인들이나 자의적으로 한정된 그룹에 영향을 미치는 대신 18세기는 한 점의 구멍도 없이 사회체 전체에 침투하여 행사되는 촘촘한 권력장치를 발견했습니다. 권력 효과의 극대화이고, 권력 비용의 삭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18세기는 이 일련의 메카니즘을 정비했고, 이 메카니즘 덕분에 이제 권력은 절대왕정 시대보다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행사될수 있었습니다. 이 장치는 또한 왕권이 야기시킬수 있었던 저항, 불만, 반란의 가능성을 감소시킨다는 점에서도 권력의 비용을 낮추는 것이었습니다.

 2) 규율의 중요 요소인 일과표 
 1830년대에 파리의 한 감옥은 죄수들의 일과를 꼼꼼하게 규정해 놓았습니다. 여름에는 아침 5시, 겨울에는 6시에 일과가 시작됩니다. 하루에 9시간 일하고, 2시간은 학습에 바쳐집니다... 기상 북이 울리면 조용히 일어나고, 두 번째 북이 울리면 옷을 입고 침상을 정리합니다. 세 번째 북소리에 맞춰 줄을 서서 예배당으로 향합니다... 이것이 규율입니다. 
 이제 권력은 야단스럽게 자신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규범을 정해놓고 조용히 일과표만 챙기면 됩니다. 그런데 누가 규범을 어겼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감시를 통해서입니다. 감시는 권력의 가장 핵심적인 기제이며, 그것은 규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감시를 통해 사람들의 행동을 정상으로 만드는것, 그것이 바로 규율적 권력입니다. 규율은 보고 보이는 가시성의 불균형, 비대칭에 의해 효력을 발생하며, 시선의 불균형은 개인들의 공간 배치로 작동됩니다. 

 3) 규율의 중요 요소로서의 공간 배치 
 공간배치의 첫번째 원칙은 울타리 치기입니다. 외부 사람들에게는 이질적인, 한 폐쇠된 집단을 울타리 안에 모아 놓는것이지요. 여기에는 단조로운 규율만이 적용됩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부랑자들을 수용했던 대감금 시대의 구빈원이 바로 이것입니다. 좀 더 온건한 예는 수도원입니다. 18세기의 병영 배치도 철저한 울타리의 예를 보여줍니다. 유랑적 집단을 정착시켜, 약탈과 폭력을 방지하고, 근처 주민들의 불만을 진정시키고, 민간 권력과의 마찰을 피하며, 탈영을 막고, 낭비를 통제하기 위해 엄격한 수용이 필요했습니다. 
 작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18세기의 공장은 수도원, 성채, 혹은 폐쇠적 도시와 비슷합니다. 감독관은 노동자들이 다 들어오면 문을 열고, 점심 후에도 작업 재개의 종 소리가 울린 후에야 문을 엽니다. 15분만 지나면 아무도 거기에 들어갈수가 없습니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작업반장들이 수위에게 열쇠를 반납합니다. 생산력을 집중하고, 최대의 이윤을 끌어내기 위해, 그리고 도난, 소요, 작업방해같은 불상사를 막고, 기물 보호와 노동력 통제를 위해 이같은 배치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울타리의 원칙은 항구적이지 않고, 필수불가결하지도 않으며, 충분하지도 않습니다. 규율 장치는 훨씬 더 유연하고 섬세하게 공간을 배치합니다. 우선 그것은 바둑판 분할(quadrillage)의 원칙을 따릅니다. 다시 말하면 각자에게 고유의 자리가 지정되고, 집단의 뒤섞임은 피합니다. 규율적 공간은 사람 수 만큼의 칸이 나누어집니다. 혼합의 효과를 없애고, 통제불능의 개인들이 마구 뒤섞여 쓸데없이 위험하게 서로 왕래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출석과 결석의 점호를 확립하고,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파악하고 있으며, 개인들간의 유용한 소통은 권장하되 그렇지 않는 소통은 막고, 매순간 모든 사람의 행동을 감시하고, 평가하고, 제재하고, 그 장점과 기능을 측정합니다. 그러니까 인력을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해 사람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갖고, 그들을 통제하는 것이지요. 

 4) 판옵티콘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규율 권력이 가장 이상적으로 표출된것은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1748-1832)의 판옵티콘에서입니다. 책 제목이기도 한 <판옵티콘>은 한 지점에서 내부가 전체적으로 다 보이는 건물을 뜻합니다. 그는 <판옵티콘>의 서문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윤리가 다시 세워지고, 건강이 보존되고, 산업은 활기를 띄고, 교육이 보급되고, 공공의 부담은 경감되며, 경제는 반석 위에 세워지며, 구빈원의 풀기 어려운 매듭은 손쉽게 짤려지는것이 아니라 다시 정성스레 엮어지는 이 모든것이 새로운 건물의 아이디어 하나로 실현된다." 
 그 아이디어는 이렇습니다. 우선 반지를 반으로 짜른것같은 반원형의 건물을 짓고, 그 한 가운데에 망루를 세웁니다. 망루에는 건물쪽을 향해 커다란 창이 나있습니다. 반원형의 건물은 작은 독방들로 나뉘어 있고, 그 방들의 두께는 반원형 건물의 두께와 같습니다. 이 독방들에는 두 개의 창문이 있는데, 하나는 안쪽, 그러니까 망루를 향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외부로 나 있습니다. 따라서 빛이 독방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중앙의 망루에는 한 사람의 감시인이 있고, 각각의 독방에는 광인, 환자, 기결수, 노동자, 혹은 학생을 한 명씩 배치합니다.   
 역광때문에 독방의 사람 그림자는 중앙 망루의 감시인에게 선명하게 보입니다. 독방 수 만큼 많은 소규모의 모노 드라마들이 펼쳐지겠지요. 판옵틱의 장치는 끊임없이 바라볼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줍니다. 옛날 지하 감옥의 원칙을 뒤집은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사람을 가두고, 빛을 차단하고, 숨기는 옛 지하감옥의 세가지 기능 중에서 첫번째만 보존하고, 두번째, 세번째것을 없앴다고 할수도 있습니다. 밝은 빛과 감시자의 시선은 지하감옥의 어둠보다 더 잘 죄수들을 파악할수 있습니다. 어둠은 드러내기 보다는 차라리 보호해 주니까요. 가시성이란 그렇게 무서운 함정입니다.
 가시성은 고야의 그림에 나오는것같은, 수용 시설에서 빽빽하게 밀집하여 소란을 피우고 있는 군중의 우글거림을 막아줍니다. 각자는 자기 독방에 얌전히 갇혀 있고 그 모습은 정면으로 감시자에게 보이지만 독방은 측면 벽으로 나뉘어 있어서 동료들간의 접촉은 불가능합니다. 그는 타인에게 보이지만 자기는 타인을 볼수 없습니다. 정보의 대상이지 결코 커뮤니케이션의 주체가 아닙니다. 중앙의 망루를 향했으므로 축(軸)의 가시성은 확보했으나 옆으로 칸칸이 나뉘었으므로 측면의 가시성은 없습니다. 
 이것은 아주 효율적인 공간 배치입니다. 만일 갇힌 사람들이 기결수라면 함께 모여 음모나 새로운 범죄를 꾸미는 일을 막아주고, 집단도주를 계획하거나, 상호간에 나쁜 영향을 미칠 위험이 없습니다. 만일 환자들이라면 병이 전염될 염려가 없고, 광인들이라면 자기들끼리 폭력적 행동을 벌일 위험이 없으며, 어린이들이라면 커닝, 소란, 떠들기, 장난의 위험이 없게 됩니다. 만일 노동자들이라면 주먹다짐, 도둑질, 결탁의 위험이 없고, 작업을 지연시키거나 사고를 유발하는 태만도 없습니다. 개인들을 한 데 모아 놓음으로써 수많은 해악이 교환되던 집단 효과가 사라졌습니다. 감시자에게는 통제 가능한 다수성이요, 갇힌 사람에게는 오로지 보여지기만 하는 유폐된 고독입니다. 
 여기서 판옵틱의 주요 효과가 생겨납니다. 그것은 수감자에게 자신이 항상 누군가에게 보여지고 있다는 의식을 심어 주는것으로 족합니다. 이 항구적인 가시성이 권력의 자동적 기능을 확보해줍니다. 감시의 효과를 지속적으로 만들어주는 이 항구적 가시성은 실제에 있어서 지속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감시인은 항상 자리에 앉아 수감자들을 감시하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수감자는 감시인을 볼수 없으므로 그가 자리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하튼 감시인이 존재한다는것은 알고 있으므로 그는 항상 감시받고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이 감시받고 있다는 의식만 있으면 됩니다. 감시의 행동이 실제로 없어도 권력의 효과는 자동기계처럼 작동됩니다. 따라서 이 건축 장치는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과 독립적으로 권력관계를 만들어내고 유지시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수감자는 너무 많이 관찰되거나 아니면 너무 적게 관찰됩니다. 너무 적게,라는것은 자신이 항상 감시받고 있다고 의식하지만 실제로 감시는 불연속적이기 때문이며, 너무 많이,라는것은 자신이 항상 감시받고 있다고 생각하므로 감시인을 상근시킬 필요가 없는데도 감시인이 많은 시간 감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벤담은 권력이란 가시적이어야 하나 확인될 필요는 없다는 원칙을 제시합니다. 가시적이라는것은 수감자의 눈 앞에 높이 솟은 망루에서 어른거리는 사람의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확인될 필요가 없다는것은 그 안에서 실제적으로 사람이 자기를 엿보고 있는지를 수감자가 결코 알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감시자의 현존 혹은 부재를 애매하게 만들고, 수감자들이 자기 감방에서 망루의 사람 그림자 혹은 역광의 실루엣을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벤담은 중앙 감시홀의 창문에 덧창을 설치하는것은 물론 그 내부를 직각의 칸막이들로 나누어 감시자가 이 칸에서 저 칸으로 갈때는 지그재그의 장애물을 통과해 가도록 고안했습니다. 그 칸들에 문을 설치하지 않은것은 문소리, 혹은 문틈으로 들어오는 빛이 감시자의 모습을 드러내 주기 때문입니다. 
 판옵틱은 보고-보이는 한 쌍의 지각 행위를 해체하는 기계장치입니다. 반원형의 반지 안에 있는 사람들은 완전하게 보이지만 스스로 타인을 볼수는 없고, 중앙 망루의 사람은 모든것을 바라보지만 자신은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습니다. 시선의 불균형이요, 비대칭성입니다.
 벤담은 <판옵티콘>의 초안에서 청각적 감시까지를 상상했습니다. 감방과 망루를 잇는 관(管)을 통해 수감자들의 소리를 듣겠다는것이지요. 그러나 소리의 비대칭성을 확보할수 없었기 때문에 이 아이디어는 포기했습니다. 감방의 소리가 망루에 들리지만 망루의 소리 또한 관을 통해 감방으로 전해지는것을 막을 기술이 아직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몸은 숨긴채 상대방의 모든것을 보고 듣겠다는 벤담의 꿈이 현대의 감시 카메라 혹은 도청 장치로 완전히 실현되었음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5) 권력의 자동화와 비개인화 
 판옵티콘은 권력을 자동화하고, 비개인화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장치입니다. 권력은 하나의 개인을 상대하는것이 아니라 인체, 공간, 빛, 시선등의 분배로 작동됩니다. 이 내적 메카니즘 안에 개인들을 집어 넣습니다. 의식(儀式), 예식같은 호사스럽고 거창한 권력의 과시 대신 이제 조용히 이 비대칭의 기계를 작동시키기만 하면 됩니다. 이 비대칭, 불균형, 차이의 기계를 누가 조작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연히 그 자리에 들어간 사람이 그 역할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계의 작동이 조작자의 동기와는 무관하므로, 그것은 호기심 많은  경솔한 사람, 장난이 심한 악동, 인간성을 탐구하고자 하는, 앎에의 욕구가 강한 철학자, 아니면 그저 단지 남을 엿보고 벌주는것에서 재미를 느끼는 악한 사람등 누구라도 기계를 돌릴수 있습니다. 판옵틱은 비록 각기 다른 욕망에서 출발했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동질적인 권력 효과를 만들어내는 놀라운 기계입니다.  
 이 허구적인 관계에서 실질적인 예속이 생겨납니다. 이제는 기결수에게 얌전한 행동을 하도록, 광인에게 침묵을 지키도록, 노동자에게 부지런히 일하도록, 학생에게 열심히 공부하도록, 환자에게 치료의 수칙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 강제적 수단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벤담은 판옵틱의 제도가 아주 단출하다는데 경탄했습니다. 거기에는 쇠창살도 없고, 쇠사슬도 없으며, 무거운 자물쇠도 없습니다. 공간의 분할이 정확하고, 입구가 잘 배치되어 있기만 하면 됩니다. 요새처럼 두터운 성벽으로 둘러 싸인 옛 감옥의 건축술은 이제 단순하고 경제적인 기하학으로 대치되었습니다. 권력의 물리적 몸집이 가벼워졌으므로 그것은 비물질적 무형의 것이 됩니다. 권력이 비물질적이고 무형의 것이 되면 될수록 권력의 효과는 더욱 더 지속적이고, 더욱 더 깊어지며, 결정적이 됩니다. 일체의 물리적 대립이 배제된 영원한 승리이며, 아예 처음부터 이기고 들어가는 게임입니다. 가시성의 영역에 들어간 사람은 누구나, 만일 그가 자신이 감시받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기만 하면, 언제나 권력의 강제 앞에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6) 페스트의 모델과 규율 권력 
 근대 권력이 페스트의 모델을 따왔다고는 하지만 페스트가 창궐하는 도시와 판옵틱의 장치는 매우 다릅니다. 1세기 반을 사이에 두고 규율 프로그램은 엄청나게 변화했습니다. 예외적 질병에 대항하여 권력이 몸을 일으키고 모든 곳에서 자기 모습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물론 이 권력은 새로운 톱니 장치를 고안해 내었지요. 도시를 바둑판 처럼 분할하여, 칸을 막고, 그 안에 사람들을 집어 넣어 꼼짝 못하게 했습니다. 그것은 완벽한 사회였고, 이상적인 기능이었습니다. 그러나 페스트의 도시는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상황입니다. 이 권력은 그것이 대항하고자 했던 질병과 함께 결국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판옵티콘은 널리 일반에게 적용시킬수 있는 기능의 모델입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겪는 권력 관계가 바로 이것입니다. 판옵티콘은 단순히 몽환적 건축술이 아니라 극도의 이상적 형태에 이른 권력 메카니즘의 가시적 도표입니다. 일체의 장애물과 저항 혹은 마찰이 배제된 이 기능은 시각적인 건축 체계일뿐만 아니라 실제로 모든 특정의 분야에서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정치적 기술입니다. 판옵티콘은 약간의 수정만 가하면 모든 기관에 다 적용할수 있는 기술입니다. 물자를 절약하게 해주고, 사람을 절약하게 해주며, 시간도 절약 해주고, 권력의 지속적 기능과 자동장치를 확보해줍니다. 판옵티즘의 목표와 목적은 군주와 신하의 주권 관계가 아니라 규율의 관계입니다. 고전주의 시대에 병영, 학교, 작업장등의 비교적 폐쇠적이고 한정된 장소에서 개발되었던 규율은 벤담에 의해 사회체 전체를 뒤덮는 촘촘한 그물망의 장치가 되었습니다.        
 이 권력은 모든것을 가시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지속적이고 철저하며 편재적(遍在的)인 감시기구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모습은 철저하게 가려져 있어야 합니다. 마치 사회 전체를 지각의 장으로 만드는 얼굴없는 시선입니다. 도처에 수천개의 눈이 있어야 하고, 항상 깨어있고 움직이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규율은 하나의 기관, 하나의 장치와 동일시될수 없고, 모든 도구, 기술, 과정, 목표, 적용수준을 포함하는 권력의 양식이며 그 행사 방식입니다. 그것은 권력의 물리학, 또는 권력의 해부학이며 하나의 테크놀로지입니다.

  7) 스펙타클과 시선의 관계 
 벤담의 판옵티콘을 해설하며 영국의 줄리어스(1831)는 희랍 로마시대를 스펙타클의 시대라고 규정했습니다. 시선의 관점에서 한 사회를 규정하는 그의 가설이 재미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희랍 로마 시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소수의 대상을 보여주는 사회입니다. 콜로세움에서의 인간과 짐승의 싸움이라든가 수많은 구경꾼들 앞에서 벌어지는 두 사람의 기마창 시합같은것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이런 스펙타클과 함께 공공의 삶, 강렬한 축제, 그리고 감각적 친화성이 그 사회를 지배했습니다. 피가 흐르는 이 의식들 안에서 사회는 활력을 찾았고, 한 순간 거대한 통일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근대는 정반대의 양상입니다. 소수의 사람, 혹은 단 한 사람에게 거대한 다수를 순간적으로 보여주는것입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공공생활의 공동체가 없이, 한쪽에는 사적 개인, 다른 한쪽에는 국가가 있습니다. 그 둘 사이의 관계는 전혀 스펙타클의 관계가 아닙니다.  
 푸코는 우리 사회가 스펙타클의 사회가 아니라 감시의 사회라고 정의합니다. 우리는 무대 위에도, 객석 위에도 있지 않고, 판옵틱한 기계 장치 안에, 그것의 한 톱니바퀴의 형태로 있다는 것입니다. 

          앎-권력

 미세권력은 계몽주의의 소산입니다. 계몽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발견했지만 인간을 다스리는 규율 또한 만들어냈습니다. 규율은 도저히 극복할수 없는 비대칭성을 도입하고, 상호성을 배제합니다. 규율 사회의 특징은 앎의 형성과 권력의 극대화가 순환적으로 서로를  강화시킨다는 점입니다. 이제 더 이상 규율이 문제가 아니라 앎이 문제입니다. 병원이 처음에 그랬고, 이어서 학교, 그리고 더 나중에 작업장은 단순히 규율에 의해서만 정착된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기관들이 앎의 장치가 됨으로써 가능했습니다. 
 반대로 권력의 증대가 앎을 증식시키기도 했습니다. 임상의학, 정신의학, 아동심리학, 교육심리학등은 이렇게 해서 생겨났습니다. 이것은 권력관계의 세련화를 통해 인식론의 걸쇠를 풀고, 또 이렇게 해서 축적된 새로운 지식 덕분에 권력의 효과가 더욱 증대되는 이중의 과정이었습니다. 중세가 사법적 심문을 발명했듯이 18세기는 규율과 시험을 발명했습니다. 

          아는것이 힘이다.

 "아는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라는 말은 문맹퇴치를 위한 우리의 30년대 계몽주의가 내걸었던 구호입니다. 모든 학교에서 학생들의 학습 의욕을 부추기는 유용한 구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격언이야말로 푸코의 권력 개념을 가장 잘 드러내는 키워드입니다. 자식 교육에 인생을 거는 한국 부모들은 푸코의 권력 개념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공부를 해서 얻는 지식은 자식을 출세하게 만들어 신분 상승을 이루게 해줍니다. 출세란 무엇일까요? 남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위를 얻는것입니다. 곧 힘, 즉 권력을 갖는것입니다. 
 과거의 권력 개념은 총칼로 무지막지하게 누르는 물리적 폭력이었습니다. 그러나 근대 이후의 권력은 무식하지 않습니다. 무식한 권력은 지속될수 없습니다. 무력으로 권력을 얻었다 하더라도 권력자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주변에 온갖 학자들을 불러 모읍니다. 논리적 설득이 없는 물리적 폭력은 상대방의 진정한 복종을 얻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은 단순히 공산주의 이론을 넘어서서 현대의 권력 개념에 폭넓게 적용될수 있습니다. 그는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하려면 단순히 경제적 물리적 힘에만 의존해서는 안되고, 지배계급의 신념 체계와 사회적, 문화적, 도덕적 가치를 피지배계급에 전파시키고 그것을 공유하도록 설득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설득하는 힘, 신념체계, 사회적, 문화적, 도덕적 가치 같은것들은 모두 지식과 추론의 힘이 있어야 가능한것입니다. 
 물론 앎은 학문적 지식만이 아닙니다.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는것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이래저래 "아는것"은 엄청난 힘입니다. 앎은 권력에 있어서 동전의 앞뒷면과 같습니다. 서구에서 하나의 미미한 장삿군 계급이었던 부르주아지가 지배계급으로 등장한것도 앎의 덕분입니다. 서구의 근대 역사는 그러므로 앎-권력의 이론을 증명해주는 역사입니다. 

          앎-권력 가설을 증명해주는 부르주아 계급의 역사

 앎-권력 가설을 증명해주는 최초의 역사적 단초는 17세기에 루이 14세의 손자이며 그의 후계자가 될 부르고뉴공을 교육하기 위해 행정감독관이 작성한 보고서였습니다. 이 보고서는 부피가 너무 방대했으므로 그것을 줄여서 부르고뉴공에게 설명하고 해석하라고 왕은 귀족 학자인 불렝빌리에에게 맡겼습니다. 불렝빌리에는 루이 14세의 체제를 심하게 비판하는 반체제 귀족들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행정감독관이라는 직위는 주로 부르주아 출신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우리 조선 시대의 역사가 왕권과 신권(臣權)의 대립의 역사이듯이 프랑스의 왕조사는 왕권과 귀족의 대립의 역사입니다. 왕권은 귀족을 견제하기 위해 그 중간 계급인 부르주아지를 키웠습니다.  
 불렝빌리에는 비판적 성찰을 곁들여 해설서를 작성했습니다. 프랑스의 현 상태를 밝히기 위해 위그 카페에 이르기까지의 프랑스의 옛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 이 텍스트에서 그는 귀족들에게 유리한 가설들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가난한 귀족에게 불리한 매관제도를 비난하고, 귀족들로부터 사법권을 박탈한것에 항의하며, 왕의 참사원에 귀족도 한 자리 차지할 권리를 달라고 요구했고, 지방 행정부에서 행정감독관들이 수행하는 역할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1) 부르주아의 국가경영 참여
 특히 이 텍스트는 왕과 왕자에게 주어지는 정보가 바로 그 행정 조직에 의해 만들어지는 정보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행정조직은 부르주아가 장악하고 있으므로 군주에게 주어지는 정보는 다름 아닌 부르주아가 작성하는 정보입니다. 행정군주제의 기능에 반드시 필요한 관료적, 재정적, 경제적, 사법적 지식들은 부르주아에 의해 군주에게 주어지고, 그것이 나중에 그가 통치할때 유용하게 쓰였습니다. 
 왕의 거대한 행정조직은 물론 자의적이고 무제한적인 그의 의지와 접합되어 있고, 군주와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신하는 그를 거역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군주는 자발적이건 강제적이건간에 이 행정부가 그에게 다시 전달해주는, 그러니까 이번에는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정보에 의해 자신의 행정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행정부는 왕이 무제한적인 의지로 온 국민을 지배하는것을 허용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행정부는 자신들이 왕에게 제시하는 정보의 성격과 질에 의해  왕을 지배합니다. 결국 부르주아지는 이미 17세기 부터 왕을 매개로 하여 국가를 경영했습니다. 
 불렝빌리에와 그 당시 그를 둘러싼 귀족들의 공격 목표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귀족 계급 역사학자들의 진정한 공격 목표는 17세기 이래 국가 절대주의와 행정 조직을 연결하는 이 앎-권력의 메카니즘이었습니다. 이미 17세기부터 귀족 계급은 재산을 탕진하고 부분적으로 권력 행사에서도 밀려나 있었습니다. 불렝빌리에의 텍스트는 이런 귀족들의 반격이고 아픈 자기 인식입니다. 

 2) 앎이 권력의 도구임을 깨달은 귀족 
 흥미로운것은 이들의 목표가 권력의 즉각적이고도 직접적인 재탈환이나 읾어버린 부(富)의 회수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 계급이 권력의 정상에 있을때 조차 소홀히 했던 권력 체계의 한 중요한 고리를 챙기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습니다. 귀족 계급에 의해 무시되었던 이 전략적 부분은 옛날부터 교회, 성직자들, 법관들, 부르주아지, 행정가들, 그리고 재정가들에 의해 차례로 소유되었던 것입니다. 다름 아닌 앎이었습니다.
 불렝빌리에가 귀족들에게 정해주려는 전략적 목표와 우선 다시 차지해야 할 지위, 그리고 모든 앙갚음의 조건은 소위 궁정 용어로 《군주의 시혜》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다시 얻고 다시 차지해야 할것은 우선 왕의 앎이었습니다. 왕의 앎을 형성해주는 부르주아지의 앎을 차단해야겠다는것이 그의 목표였습니다. 그는 부르주아의 앎에 대항하여 새로운 앎의 형태를 제시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새로운 역사 연구였습니다. 

 3) 귀족의 대항적인 앎, 새로운 역사 연구 
 대항적인 앎(contre-savoir)이라고 말할수 있는것은 부르주아들이 행사하던 법과 행정과 재정에 대한 앎에 대항하기 위해 역사를 들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우선 그들의 타도 대상은 법률적 앎, 즉 재판관, 검사, 법률가, 재판소 서기들의 앎이었습니다. 이해할수 없는 궤변으로 그들의 소유권을 박탈하고 그들을 함정에 몰아넣은 앎이며, 그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의 사법권과 재산 마저도 앗아간 앎이기 때문에 이것은 귀족들에게 있어서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앎이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왕과 부르주아지의 상호적인 관계를 강화해주는 순환적인 앎이어서 더욱 가증스러웠습니다. 왕이 자신의 권리를 알아보기 위해 서기와 법률가에게 자문을 구할때, 판사와 검사는 왕 자신이 만들어낸 직위이므로 그들이 왕의 권력에 찬사를 늘어놓는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부르주아가 제시하는 이 담론 안에서 왕은 자신의 절대권력의 이미지만을 발견했습니다. 
 이 재판서기들의 앎에 대항하여 귀족들은 전혀 다른 형태의 앎, 즉 역사를 내세웠습니다. 이 역사는 이때까지 그랬듯이 단순히 공법을 극화(劇化)하여 그것을 이미지로 보여주는 그런 역사가 아니라 역사의 외부, 역사의 뒤, 역사의 틈새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왕이 자신의 절대권력에 대한 찬사만을 만나게 되는 재판서기들의 앎이 아니라 역사적 공정성의 근거를 부각시키는것입니다. 왕을 위해 뿌려진 귀족의 피를 상기시켜고, 잊혀진 가설들을 되살려내며, 법관들에 의해 자행된 일련의 불공정, 부당, 남용, 박탈, 배신, 불성실등을 보여주는것입 니다. 재판관들의 앎과는 그 형태부터 완전히 다른 이 역사는 배신당하고 모욕받은 귀족들의 무기가 될것입니다. 
 또다른 커다란 적수, 그것은 재판관이나 재판서기의 앎이 아니라 행정감독관의 앎이었습니다. 이것 역시 가증스러운 앎이었습니다. 그 이유도 비슷했습니다. 행정감독관들의 앎 또한 귀족의 권한과 부를 좀먹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 앎 역시 왕을 현혹시키고 그에게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왜냐하면 왕이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고 사람들의 복종을 획득하며 재정을 확보할수 있었던것은 바로 이 앎 덕분이었기 때문입니다. 행정적인, 특히 경제적, 수량적인 이 앎은 현재적 혹은 잠정적 부의 앎이었고, 부담 가능한 조세 또는 유용한 세금에 대한 앎이었습니다. 
 행정감독관과 관료의 이런 앎에 대항하여 귀족들은 다른 형태의 인식, 즉 역사를 부각시키고자 했습니다. 이번에는 경제의 역사가 아니라 부의 역사, 다시 말해서 부의 이동, 수탈, 도적질, 속임수, 빼돌리기, 빈곤화, 파산등의 역사입니다. 결국 실제적인 부는 왕과 부르주아지에 의해 자행된 부도덕한 행위들의 혼합이라는것을 보여주기 위한 역사입니다. 끝없는 전쟁에서 귀족들이 파산하는 과정의 역사이며, 교회가 교묘한 계략으로 토지와 소득을 차지하는 과정의 역사이고, 부르주아지가 귀족을 빚지게 하는 과정의 역사입니다. 한 마디로 국왕의 금고가 귀족들의 소득을 삭감해 가는 과정의 역사입니다. 

 4) 프랑스 왕조 성립의 역사 
 이 대항-역사에서 불렝빌리에는 프랑스 왕조가 설립된 아득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여기서 잠시 프랑스의 역사를 일별해 봅시다. 현재 프랑스의 영토는 옛날에 골 지방이었고, 거기에는 켈트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서기 1세기에 줄리어스 시저에게 정복되어 로마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소위 갈로-로멩 시절입니다. 이후 5백년간 로마의 속주로 있던 골 지방은 5세기에 라인강을 넘어온 게르만인(혹은 프랑크인)에 의해 정복되었습니다. 프랑크 왕조의 시작입니다.  
 불렝빌리에는 프랑크족에 관해서 우선 문제를 제기합니다. 골에 들어온 프랑크인은 과연 누구인가? 즉 비교적 적은 숫자로 골에 침입하여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했던 로마제국을 격파할수 있었던 그 야만스럽고 무지한 사람들의 힘은 어디서 나왔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는 로마인들의 허약성과 비교되는 프랑크인들의 강건함을 보여주었습니다. 프랑크인들의 힘은 우선 로마인들이 소홀히 했던 군사력, 다시 말해서 그들이 없어도 좋다고 생각했던 무사적 귀족의 존재에서 나왔습니다.  
 둘째로 그는 이 무인들 즉 무사 귀족들이 너무나 자유롭고 자존심이 강하여 왕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왕은 있었지만 그 왕의 기능은 평화 시절에 분쟁을 해결하고 사법적 문제를 다루는것 뿐이었습니다. 왕은 민간의 법관일뿐 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왕들은 레우드 그룹, 즉 무인 그룹들의 공동의 동의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들이 수장(首長)을 뽑는것은 강력한 조직과 유일한 권한이 필요한 전쟁 기간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수장도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는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공동이 원칙에 복종해야 했습니다. 수장은 전쟁의 수장이고, 반드시 민간 사회의 왕일 필요는 없었지만 가끔은 일치하기도 했습니다. 프랑크 왕조의 시조인 클로비스 같은 사람은 분쟁 해결을 위해 뽑힌 민간의 법관이면서 또한 전쟁의 수장이었습니다. 여하튼 프랑크 사회는 평화시에 최소한의 권력이 있는 사회, 그러니까 최대한의 자유가 있는 사회였습니다. 

 5) 봉건시대의 시작 
 그런데 이렇게 골에 정착한 귀족들, 다시 말해서 무사적 귀족들이 마침내 권력과 부의 핵심을 잃고, 결국 왕권의 굴레에 속박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처음에 거의 동등하던 왕이 절대적인 힘을 갖고 그 외의 모든 무사들이 변방의 영주가 되어 그에게 복종하는 봉건사회가 된것이지요. 그 과정은 이러했습니다. 
 프랑크의 왕은 그가 전쟁 동안에만 지명된 전쟁의 수장이라는 점에서 처음에는 이중적인 상황의 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권력의 절대적 성격은 전쟁이 지속되는 기간 동안에만 효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중적 상황의 왕은 조금씩 항구적인 세습왕이 되어  마침내 유럽 대부분의 왕국들 - 특히 프랑스의 왕국들 - 이 나중에 경험하게될  절대권력의 왕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우선 군사적 성공에 의한 정복으로 소수의 군대가 거대한 나라에 정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방금 점령한 골 지방에서 프랑크의 군대가 전쟁 태세로 있었다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지요. 전쟁 기간 동안만 전쟁의 수장이었던 사람은 점령이 장기화함에 따라 전쟁의 수장 겸 민간의 수장이 되었겠지요. 점령상태이므로 군사적인 체제를 유지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6) 왕과 골 민족의 결합 
 그러나 특히 중요한 것은 왕권과 골의 구 귀족들 사이의 연합이었습니다. 프랑크 군대가 들어왔을때 골인들 중에서 가장 고통을 느낀것은 게르만의 무사들에게 땅을 몰수당한 귀족들이었습니다. 실질적으로 소유가 박탈된 골의 구 귀족들은 교회로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교회 체제를 발전시켰을뿐만 아니라 신앙 체계에 의해 자신의 영향력을 민중들에게 뿌리박고 확산시켰습니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라틴어 실력을 연마했으며, 로마 법을 갈고 다듬었습니다. 이것이 왕과 골 민족의 역사적 연대입니다. 군주가 절대왕권을 형성하려는 바로 그 순간에 이 새로운 군주들의 자연스러운 동지는 당연히 교회에 피신했던 골의 귀족들이었습니다. 게르만의 귀족에 대항하여 로마 방식의 국가를 건설해야만 했던 프랑크의 군주들은 민중에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고, 또 라틴어 실력과 함께 로마법을 잘 알고 있었던 이들과 연대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라틴어와 로마법 지식과 함께 절대왕권의 커다란 연합세력이 되었습니다. 

 7) 앎을 소홀히 하여 권력을 잃은 게르만의 무사계급 
 한편 처음에 왕과 동등한 권한을 갖고 있던 게르만의 무사들은 자유롭게 지배와 정복을 탐하여 각자 개인적인 자격으로 골의 땅을 차지했습니다. 전사들 각자가 직접 승리와 정복의 과실을 향유한것이지요. 이것이 아득히 먼 봉건제의 시작입니다. 왕도 자기 몫의 땅을 가졌습니다. 따라서 골 영토 전체에 대한 로마식의 주권은 없었습니다. 무사들은 싸우는것 외에는 다른 일을 할줄 몰랐으므로 골의 농민들을 군사적으로 보호해주고 그 대가로 지대(地代)를 받았습니다. 안보와 생산의 행복한 분업이었던 셈이지요. 현물 지대를 납부하는 농민과 그 지대에 의해 유지되는 무사계급, 이것이 봉건제 사회의 중요한 두 축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귀족들을 왕권과 유리시키고, 중앙 권력으로부터 멀리 소외시킨 원인이 되었습니다. 물론 지리적인 거리가 큰 이유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것은 그들이 앎을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원래 싸우는것만 좋아했던 무사 계급이었으므로 그들은 공부를 하지 않았고 자식들에게도 공부를 시키지 않았습니다. 중세까지 귀족은 모두 문맹이었습니다. 
왕권이 민중과 연합하고, 라틴어와 로마법을 통해 권력을 강화하는 동안 게르만의 무사 귀족들은 권력과 완전히 단절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라틴어는 공식 언어가 되었고, 학문 언어, 법률 언어가 되었습니다. 
 귀족이 그들의 권한을 잃게 된것은 그들이 다른 언어 체계에 속하게 되었을때 부터입니다. 귀족은 게르만어를 말했고, 라틴어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모든 새로운 법체계가 라틴어 칙령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을때 그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닥쳤는지 조차 몰랐습니다. 교회와 왕은 그들을 계속 무지하게 내버려두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8) 귀족에게 앎의 재탈환을 호소한 불렝빌리에 
 여기서부터 불렝빌리에의 호소가 시작됩니다. 그것은 권한을 박탈당한 귀족들에게 반란을 선동하는것이 아닙니다. 그가 귀족에게 권유한것은 단지 앎을 가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자기들 고유의 기억의 되살림, 의식의 각성, 인식과 지식의 회복등입니다. 불렝빌리에가 우선 귀족들에게 권고한것은 《그대들이 박탈당한 - 아니 어쩌면 그대들이 한 번도 소유하려 하지 않았던 - 앎의 지위를 회복하지 않는한 그대들은 결코 권리를 되찾지 못할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들은 어느 일정 시기부터, 적어도 사회 내부에서, 진정한 전투는 더 이상 무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앎에 의해서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채 언제나 싸움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정체성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 무지하고 변덕스러운 허영, 그리고 바보스러운 자신감에서 유래하는 영원한 망각증을 불렝빌리에는 질타하고 있는것입니다. 귀족들의 자의식을 되찾고, 앎과 기억의 근원을 밝혀내기 위해, 그리고 귀족을 교육시키기 위해 그는 새로이 역사에 눈길을 돌린것입니다. 앎의 직조(織造) 안에 다시 편입됨으로써만 귀족은 다시 세력을 되찾고, 역사의 주체로 떠오를수 있다는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9) 지배계급과 민중은 다른 계급 
 역사상 서구 사회는 지배 계급과 민중이 서로 다른 민족입니다. 유럽의 끄트머리에 있는 스페인의 왕정이 합스부르그에서 부르봉으로 넘어 갔다는 식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역사에서도 왕가와 귀족은 그 옛날의 정복자인 게르만 민족이고, 민중인 부르주아지는 토착의 켈트족입니다. 골 지방에 널리 흩어져 땅을 차지한 게르만 무사의 후예가 바로 17세기 당시의 귀족들입니다. 귀족을 견제하기 위해 왕권이 꾸준히 키운 계급은 다름 아닌 부르주아 계급입니다. 왕권은 이 새로운 계급의 생생한 활력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저항도 충분히 이용했습니다. 영주들에 대한 도시의 저항, 지주들에 대한 농민반란등의 뒤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왕의 손이 있습니다. 과거에 귀족이 가지고 있던 모든 정치권력이 왕권으로 이전되어 봉건제가 무너지고 절대왕정이 된것은 이처럼 왕권의 도움을 받은 저항들 덕분이라는것이 귀족 역사학자들의 주장입니다. 

 10) 앎으로 지배계급이 된 부르주아 
 역사의 초창기에 아무런 지분도 없던 이 계급이 서서히 부상하여 마침내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것은 순전히 앎, 그것에 의해서였습니다. 18세기말에 상업, 수공업, 자유업등의 여러 직업은 오로지 제3신분, 즉 부르주아지가 맡고 있었습니다. 군대나 교회, 행정부, 사법부의  중요한 직책은 물론 귀족이 차지하고 있었으나 이 기구들의 10분의 9는 제3신분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789년의 대혁명으로 마침내 부르주아지는 지배계급으로 부상했습니다.

          맺는 말

 푸코의 미시 권력 이론이 권력에 대한 저항을 약화시킬수 있다는 비판자들의 우려는 사실입니다. 권력은 온 사회에 널리 퍼져있고, 세 사람만 모여도 거기에는 권력이 있으므로, 그리고 모든 인간관계는 곧 권력의 관계이므로, 권력에 저항해 보았자 소용없다는 비관주의로 귀결될수 있습니다. 앎이 곧 권력이라는 그의 앎-권력 이론도 이미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출세지상주의나 신분상승의 열풍을 잠재우기는 커녕 그것을 정당화해주는 이론적 근거가 될수도 있습니다. 
 철학에서 삶의 지표를 찾기 원하는 정통적 철학주의자들은 "그래, 대안이 무엇이냐?"고 다그치며,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바람직한 방향 제시가 없다고 불평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구체적 일상 생활에서 매순간 행해지는 섬세한 권력의 양상이 사회 전체를 지배, 피지배의 거대한 두 덩어리로 나누는 마르크시즘의 둔탁한 이분법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현실에 대한 명석한 분석은 일단의 진실을 덮어둔채 도덕군자의 삶만을 제시하는 철학보다 훨씬 더 우리에게 위안을 줍니다. 
이데올로기에 침윤되지 않은, 혹은 권력에 물들지 않은 앎이란 없다고 푸코는 말하지만, 그러한 앎의 모습을 확인하는 우리의 앎은 우리를 좀 더 자유롭게 할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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