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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3/문화경제론

정부는 왜 예술을 지원해야 하는가?

by Frais Study 2020. 7. 11.

역사를 통해서 메디치가의 왕자들, 오스트리아의 황제들, 러시아의 짜르들, 영국의 의회들, 그리고 프랑스의 공화파들이 예술을 지원해 왔음이 잘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예술을 지원해야 하는지 여부에 대한 질문은 아직도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서양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는 기존의 경쟁적인 시장구조가 대체로 소비자의 선호를 만족시킴에 있어서 아직은 신뢰성이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정부지원금이나 그 밖의 개입형식을 정당화해 주는 기본적인 근거로 두 가지가 존재한다.

첫째는 시장이 비경쟁적이거나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경우일 수 있다. 여기에서는 효율성(efficiency)이 문제되겠는데, 말하자면, ‘시장 실패의 어떤 형태는 자원의 비효율적인 배당을 낳게 되고, 이에 따라서 이를 수정하는 것이 개입의 과제가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경제학자들은 어떠한 불완전성 조건하에서 어떤 종류의 정부 개입이 정당화되는지에 대해 기본적으로 합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논쟁의 초점은 개입에 대한 이론적 논의가 아니라, 예술과 문화산업이 사실상 그와 같은 정당화 조건 아래 전개되고 있는지 여부에 관한 것이다.

개입에 대한 두번째 정당화는 현존하는 소득의 배분형태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신념일 수 있다. 소득의 배분에 관한 판단들이란 사실상 과학적일 수 없고, 오히려 윤리적 확신에 기초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우리는 신념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다. 이것은 소위 공정성(equity)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시장이 비효율적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일부의 참여자들이 최저공정배분(minimum fair share)에 상당하는 소득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 때문에 지원금을 요청하는 것이다.

완벽한 시장경쟁 조건만이 최적의 자원배분을 이끌어낸다는 것은 수요공급분석이 수단으로 제시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주어진 상품에 대한 수요는 소비자들이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획득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유용성에 기초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기에 시장이 효율적으로 작동할 경우, 스스로 굴러가도록 내버려두면 된다. 정부가 시장에 끼어들 필요성은 전혀 없다. 그런데 예술의 경우는 하나의 예외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소리가 날로 높아진다. 왜 그런가? 텔레비전 세트, 테니스 라켓, 그리고 운동화의 산출과 마찬가지로 예술 산출도 시장에서 결정되도록 내버려두면 왜 안되는가? 앞에서 말한 대로 시장이 항상 효율적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인데, 시장 실패의 주요한 원인들은 독점, 외부효과(externalities), 공공재, 비용체감산업(cost declining industries), 그리고 정보의 결핍 등을 들 수 있다. 이것들을 하나하나 좀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한다.

 

시장 실패의 원인들

 

(1) 독점

독점은 독점상인이 산출을 제약하고 경쟁에서 우세하게 될 한계비용 이상으로 가격을 올림으로써 가외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시장 실패의 원인이 된다. 예술기관들은 지역 시장구조 안에서 종종 독점상인들처럼 작동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예술기관들은 비영리성을 기초로 하여 조직되어 있기 때문에, 이는 보통 시장 실패의 원인으로 취급받지 않는다. 만일 그것들이 한계비용 이상으로 가격을 올린다면, 이는 이윤을 최대화하기 위해서라기 보다 체감하는 비용조건 하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한계비용은 항상 평균 총제작비용보다 낮게 마련이다.

 

(2)외부성(externalities) 또는 집합적 이익

한 회사 또는 개인의 활동들이 아무런 보상조건 없이 다른 회사들 또는 개인들에게 영향을 끼칠 때 외부성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예컨대 만일 어떤 발전플랜트가 공기오염을 산출해낸다면, 그것은 인근 회사와 주민들에게 아무런 보상도 지불하지 않으면서 손해비용을 강요하는 것이 된다. 공해는 외부비용의 고전적 사례이다. 그러나 외부성은 또한 이익으로 작용될 수 있다. 어떤 교외 주택 소유주가 아주 멋진 화원을 소유하고 있을 경우, 이웃들과 나그네들은 돈 한 푼 내지 않고 외부적 편익(external benefit)을 얻게 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외부성은 시장을 통해 매개되지 않으며, 그것의 생산에 사용된 자원들은 가격 체계를 합리화하는 데 영향받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시장실패의 주요 원인이 된다.

예술이 교육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편익을 베풀어준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편익은 즐거움, 활력, 그리고 개인들이 현장에서 공연되는 예술을 참관하거나 박물관 또는 화랑을 방문할 때, 또는 그 밖의 방법으로 예술작품과 인연을 맺게 될 때, 얻게 되는 계몽 등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인 즐거움이 아무리 풍부하고 자극적이라 할지라도, 그 밖에 외부성 또는 집합적 이익이라고 분류되어야 할 부가적인 것이 존재하는가? 이 질문은 다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이러한 논쟁은 예술과 문화의 외부적 편익들은 분산되었고 관찰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불가피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을 연구하는 경제학자들이 인정하는 다음의 외부적 편익들은 참고할 만하다.

. 미래세대를 위한 유산

유능한 경제학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술과 문화를 미래세대들을 위한 유산으로서 보존하는 것이 집합적 이익에 해당한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이는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가 그 문화와 예술이 오늘 여기에 있지 않아 자신들의 선호를 통제할 수 없는 미래세대들의 이익을 위해 보존할 만하다고 생각하며 일정한 비용을 기꺼이 지불할 것이라는 점을 논증의 기초로 삼는다. 우리들 중 누구도 우리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보다 빈약한 문화를 후손들에게 넘겨주려는 위험한 짓을 원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 전통의 전승이 순수한 외부적 이익이라 할지라도, 그 한계가치가 너무나 낮아서 보조를 받을 수 없는 유산이 얼마든지 많다고 말할 사람도 있다.

. 국가적 정체성과 위신

많은 사람들은 예술가들 덕택에 자국이 국제적인 인정을 받는 데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그것은 분명히 집합적 이익에 속한다. 그러나 국가적 자부심을 이 시대의 죄악 중에 하나로 보는 사람도 없지 않다. 또한 만일 국가적 위신이 지원받을 만한 것이라 할지라도, 예술을 지원하는 것과 재능있는 스포츠팀의 외국 원정여행을 지원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좀더 효과적인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좀더 일반화하자면, 그것이 타당한 목표에 도달하는 가능한 방법임을 증명하는 데 멈추지 않고 가장 비용효율적임을 또한 증명한다.

. 지역경제에 미치는 이익

예술활동은 지역경제에서 다른 생산자들에게 파급효과를 제공할 수도 있다. 이는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로 가능해진다. 첫째, 예술은 타지방 소비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 이들은 그 지역의 공연을 위한 입장권을 사거나 박물관을 방문하는 것에 덧붙여서 지역 상점들, 음식점들, 그리고 호텔 등에서 돈을 지출한다. 이러한 지출은 무역수출과 마찬가지로 지역경제를 자극한다. 둘째, 문화적 쾌적성(cultural amenities)의 존재가 한 도시로 하여금 새로운 회사들을 다른 곳에서 그곳으로 끌어들일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이러한 명제들은 둘 다 옳다. 그러나 지역적 경제이익이 중앙정부에 의한 지불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다른 도시가 아니라 바로 이 도시에 관광객이나 회사를 끌어들이기 위해 중앙정부가 지역예술활동을 보조해야 한다는 이유를 찾기란 쉽지 않다. 국가 전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예술은 관광객이나 회사를 외국으로부터 끌어들이는 정도에서만 경제적인 자극을 제공하는 셈이 된다. 지역성의 관점에서 본다 할지라도, 우리는 예술을 보조하는 것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지역경제를 자극하는 방법이 존재한다는 단서를 명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 인문교육(liberal education)에의 기여

교육으로부터 얻는 집합적 이익들의 중요성은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예술이 인문교육의 필수적인 요소라는 점에서, 이와 같은 주장은 강력한 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예술참여자들의 사회적 개선

예술에의 참여가 우리의 감성을 훈련하거나 동료 인간의 최고 최선의 성취에 자신을 노출시킴으로써 우리 자신을 좀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어준다는 말은 거의 상식화되어 있다. 만일 그렇다면, 개인 일반이 예술참여를 통해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만족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외부적 이익이 될 수 있다. 개인의 행동이 어쨌든 그 과정에서 개선된다면, 참가자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만족스러운 일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개인의 인격 또는 행동에 미치는 예술의 유익한 효과를 지지해주는 과학적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나아가 예술의 교화적 성격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예술에 대한 전체주의적 사고를 조장할 수도 있다.

예술이 인문교육에 기여함으로써 집합적 이익을 마련한다는 견해와 연관시켜 종합적으로 고찰한다면, 시민들이 인문교육을 받음으로써 예술과 문화의 집합적 전통을 이해하는 것은 권장할 만하다. 그러나 예술과 문화의 이해가 폭력, 질투, 탐욕, 또는 그 밖의 불괘한 심리적 무질서들에 휘말릴 가능성을 감소시킨다는 의미에서 좀더 나은 개인들을 만들어낸다는 과학적인 증거가 아직 충분하지 못한 상태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 예술적 혁신의 격려

혁신, 또는 좀더 광범하게 과학적, 기술적, 그리고 경영적 혁신이 경제적 진보의 주요 원천이 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또한 만일 혁신의 주도자들이 자신들의 위험과 노력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주장할 수 없을 경우 혁신은 억제된다는 이해도 보편적이다. 예술적 혁신은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지만, 저작권이 적용되는 범위는 아직 상당히 제약되어 있다. 예술에 종사하는 개인 또는 비영리조직은 모든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고, 예술적 혁신이 성공을 거둔 경우에도 다른 사람이 그 새로운 기법을 무료로 사용하는 것을 막을 방도가 없다. 이렇게 해서,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실험의 위축을 시장 실패의 한 형식으로 간주하면서, 예술지원을 정당화하는 견해가 제기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특히 정치적인 관점에서 실험을 기피하는 경향이 오히려 강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이와 같은 견해들을 대강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예술로부터 얻을 수 있는 외부적 이익들의 실제적 가치가 어떻게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인지를 검토해 볼 단계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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